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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레이시아 국제학교 엡솜컬리지, 오는 15일 코엑스서 입학설명회 개최

    말레이시아 국제학교 엡솜컬리지, 오는 15일 코엑스서 입학설명회 개최

    엡솜컬리지 말레이시아 캠퍼스 입학설명회가 오는 4월 15, 16일 13시 서울 코엑스 컨퍼런스룸에서 열린다. 엡솜컬리지는 의료계 종사자 자녀들의 안정된 교육을 위해 영국 왕실의 후원으로 설립된 162년 전통의 영국식 정통 국제학교이자 최초의 해외 캠퍼스로 2014년 말레이시아에 설립된다. 엡솜컬리지 말레이시아는 아시아 지역 학생들에게 동서양의 문화가 잘 어울러진 환경 속에서 세계 최정상급 교육환경으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하여 동문이자 에어아시아 회장으로 유명한 토니 페르난데스가 설립한 남녀공학의 3세부터 18세 학생들을 위한 정규 교육기관이다. 영국식 커리큘럼을 기반으로 모든 교사진들을 본교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되었으며, 재직중인 교사는 졸업한 대학과 전공, 이전의 교육경력까지 홈페이지에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어 신뢰할만하다. 또한 설립자의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원어민 교사진들을 갖추고 있다. 또한 영국의 명문 대학생 수십명이 교생으로 학교 교육과정 보조자로 참여하고 있어, 재학생들에게 멘토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에어아시아 회장이자, 영국축구리그 구단주인 토니 페르난데스는 글로벌 높은 인지도와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영국 런던시장(현 영국 외무부장관)에서부터, 영국왕실 왕세자, 세계적인 디자이너, 전설적인 프로 스포츠 선수나 국가대표, 명문대학의 다양한 분야의 교수진들, 세계 유명기업의 CEO들을 학교로 직접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불어넣고, 롤모델로써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어 높은 만족도를 보이고 있다. 설명회에 앞서 14일에는 엡솜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가족 50여명을 초청하여 학교장과 기숙사감 - 재학생 학부모 가족 간담회를 개최하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학교의 운영 철학과 비전을 공유하고 교육 수요자들의 의견을 청취할 계획이다. 우리에게는 지난 2016년 방영된 KBS 드라마 ‘공항가는 길’에서 극중 자녀가 말레이시아 조기유학을 떠나는 에피소드에 소개돼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마틴 조지(Martin George) 교장은 “항상 학생들이 즐거워할 수 있는 학습 진로를 잡아주기 위해 밀착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며 “모든 교사들은 영국에서 엄선해서 선발된 국제교육 전문가들로 학생을 단순한 업무의 대상이 아닌 무궁무진한 꿈과 잠재력을 지닌 존재이자 배려와 존중이 필요한 소중한 인격체로 보고 있다”고 학교의 모토를 강조했다. 이번 설명회에 참여하는 한국학생에게는 입학 테스트 시 50% 할인 혜택과 1박 2일 학교 생활 무료체험 기회가 주어진다. 문의 및 참가 예약은 앱솜컬리지 한국 사무국인 말레이시아에듀에서 받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北, 아웅산 테러범 사형선고 판사 딸 살해 의혹”

    “北, 아웅산 테러범 사형선고 판사 딸 살해 의혹”

    11일 공개된 1986년도 외교문서를 보면 당시 전두환 정권은 국제사회에서 ‘독재 정권’의 이미지를 희석시키고자 상당한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국제사회의 반응은 싸늘했으며 특히 이를 둘러싸고 한·미 간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6년 4월 5~21일 영국·서독·프랑스·벨기에 등 유럽 4개국 순방에 나서며 무리하게 ‘국빈 방문’을 추진했다가 대부분 거절을 당했다. 순방 형식 중 의전 수준이 가장 높은 국빈 방문을 통해 대내외에 정권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4개 중 벨기에를 제외한 3국은 모두 “준비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순방에 앞서 유럽의회의 인권침해국 명단에서 대한민국을 빼기 위해 ‘총력전’을 벌인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우리나라는 유럽공동체(EC) 내 유럽의회가 세계인권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선정된 아시아의 인권침해국 7곳 중 한 곳이었다. 정치범에 대한 사형이 일반화된 국가라는 이유였다. 이에 외무부는 EC 관계자들을 만나 한국의 인권 상황을 설명하는 한편 순방국 대사들에게 “인권 문제는 정상회담에서 거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정부는 순방 전 교민들의 반정부 시위를 막기 위해 주요 장소에 미리 집회 신고를 내는 ‘알박기’를 하기도 했고, 순방이 끝난 뒤에는 순방국 주재 각 대사관에 ‘한국의 민주화 과정 및 전두환 대통령의 민주화 노력을 부각시키기 위해’ 대(對)언론 활동을 하라는 지침도 내렸다. 그럼에도 ‘이미지 세탁’은 쉽지 않았다. 1986년 5월 미국 조지 슐츠 국무부 장관과 함께 방한한 개스턴 시거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신한민주당 김영삼·김대중 등 야당 인사를 만나려 하자 정부는 “신민당뿐 아니라 모든 야권과 민정당 인사도 같은 형식으로 면담을 가져야 한다”며 예민하게 반응했다. 미국 측이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만 콕 집어 만나는 데 거부감을 드러낸 것이다. 또 미국은 신민당 유성환 의원이 회기 중 원내 발언을 이유로 구속되자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훗날 제42대 미국 대통령이 되는 빌 클린턴 하원의원 등이 유 의원의 석방을 탄원하는 서한을 우리 정부에 보낸 사실도 확인됐다. 아울러 ‘땡전뉴스’로 유명했던 전두환 정권이 외신을 상대로 “국가원수에 대한 보도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보도 가이드라인을 내렸다는 사실도 공개됐다. 올해 공개된 문서에서는 북한에 얽힌 새로운 사실도 다수 밝혀졌다. 북한 정권은 1957~1984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통해 재일동포 교육사업에 350억엔(약 3557억원)가량을 송금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일동포 2·3세를 조총련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은 셈이다. 외무부 영사교민국은 “공산주의 사상 주입을 위한 2세 교육자금으로 사용되는 것 외에 조총련 조직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와해 공작 등 정치자금으로 유용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반대로 조총련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을 즈음해 선물 비용을 강제로 모금해 물의를 빚은 사실도 문서에 기록됐다. 당시 조총련은 김정일 선물 구입비로 50억엔(약 512억원)을 책정해 상공인들을 대상으로 모금 활동을 벌였고, 이에 일부 회원은 항의 편지를 대량 배포하는 등 불만을 드러냈다. 아웅산 테러범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판사의 딸이 피살된 사건에 북한이 연루됐다는 의혹이 보고된 사실도 문서에 담겼다. 1986년 12월 이상옥 당시 주제네바 대사는 주제네바 미얀마대사와 만난 뒤 작성한 2급 비밀문서에서 “아웅산 테러 사건 재판에 관여했던 판사의 딸이 약 1년 반 전 일본 유학 중 변사한 사건이 있었다”면서 “현장에서 북한제 담배꽁초가 발견됐으며 자살할 만한 특별한 동기도 없어 사인 규명에 노력했으나 진상을 밝히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이후 사건의 실체가 밝혀졌는지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설명이 없다. 중국과 수교 전인 당시 정부가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 ‘모란 구상’이라는 비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군산항 채널’이라는 비밀 채널을 가동한 사실도 흥미롭다. 당시 북·소 관계가 긴밀해지자 중국은 이에 우려를 드러내며 한반도 문제에 영향력을 높이려는 태도를 보였고, 한·미는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모란 구상을 추진했다. 올해 공개된 문서에 이 구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담겨 있지 않지만 중국과의 접촉을 강화하자는 취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공식 외교채널이 없던 한·중은 이에 홍콩 주재 한국총영사관과 중국 신화통신 홍콩지사를 ‘군산항 채널’로 부르며 의사소통의 창구로 활용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양측은 1985년 3월 중국 어뢰정이 전남 신안군 앞바다에 표류한 사건을 계기로 접촉을 늘려 가며 자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한·일 관계 개선에 관심을 가졌던 전 전 대통령이 히로히토 일왕을 ‘천황폐하’라고 지칭하며 보낸 서한도 공개됐다. 유럽 순방 후 귀국하던 전 전 대통령은 비행기가 일본 상공을 지나는 시간에 맞춰 일왕에게 ‘기상(機上) 메시지’를 보내 “1984년 본인의 귀국 방문 시 폐하와의 만남을 기쁜 마음으로 회상하면서 이 기회를 빌려 폐하의 건안과 귀 왕실과 귀 국민의 무궁한 번영과 행복을 기원합니다”라고 썼다.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경과한 외교문서를 공개하고 있다. 올해 공개 분량은 1986년도 생산 문서를 중심으로 총 1474권, 23만여쪽에 달한다. 원문은 외교사료관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중랑 ‘먹골배 시조목’ 9년 만에 귀향

    중랑 ‘먹골배 시조목’ 9년 만에 귀향

    먹골배 시조목(청실배나무)이 고향으로 돌아왔다.서울 중랑구는 최근 신내동 봉수대 공원에 먹골배 시조목(청실배나무)을 옮겨 심었다고 10일 밝혔다. 이 배나무는 원래 봉화산 배나무 군락지에서 자생했지만 2008년 도시개발 과정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노원구 소재의 농장에 임시로 옮겨졌었다. 구 관계자는 “먹골배 시조목이 향토사에서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며 “지역 사찰인 법장사 주지 퇴휴 스님의 기증으로 이번에 다시 중랑구로 옮겨오게 된 것” 이라고 말했다. 중랑구는 지금도 봉화산 주변 농장 27곳(33만 5000㎡)에서 3만 3400그루의 배나무를 재배한다. 또 시민들에게 배나무를 분양해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 나진구 중랑구청장은 “먹골배는 토심이 깊고 배수가 잘되는 우리 지역 땅의 특성 덕에 맛이 뛰어나다. 조선시대 왕실에 진상됐을 정도”라면서 “구민들의 먹골배에 대한 애정이 깊은 만큼 그 역사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이주의 문화 레시피]

    [이주의 문화 레시피]

    대중음악 ●봄에 내리는 젠틀레인-피크닉 재즈 인 스프링 서덕원(드럼), 송지훈(피아노), 김호철(콘트라베이스)로 구성된 재즈 트리오의 공연. 2004년 데뷔한 젠틀레인은 서정적이고 편안한 선율로 재즈는 지루하고 어렵다는 편견을 깨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는 일본 재즈 디바 그레이스 마야와 함께 로맨틱 피크닉 무대를 꾸린다. 15일 오후 6시. 서울 마포구 대흥동 마포아트센터 아트홀 맥. 3만 3000~5만 5000원. (02)337-3103.●김완선 콘서트 ‘오늘밤’, ‘리듬 속의 그 춤을’,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의 원조 댄싱 퀸 김완선이 데뷔 30주년을 맞아 준비한 단독 공연이다. 김완선의 단독 공연은 1990년 이후 무려 27년 만이다. 콘서트에 맞춰 신곡 ‘잇츠 유’(It’s You)을 포함해 그간의 히트곡들로 꽉 채운 기념 앨범도 발표한다. 15일 오후 7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 9만 9000~11만 원. (070)7740-5344. 연극·뮤지컬●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극단 산울림의 대표 레퍼토리 작품으로 사뮈엘 베케트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했다. 시골길 나무 아래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이야기를 담았다. 공연 기간에 2층 갤러리 ‘산울림 아트 앤 크래프트’에서 의상과 소품, 임영웅 연출의 연출 노트 등 관련 기록물을 무료로 전시한다. 5월 7일까지. 서울 마포구 소극장 산울림. 3만원. (02)334-5915. ●뮤지컬 ‘판’ 19세기 말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양반가 자제인 ‘달수’가 염정소설과 정치 풍자에 능한 최고의 이야기꾼이 되는 과정을 그렸다. 신인 정은영 작가와 박윤솔 작곡가가 선보이는 작품으로, CJ문화재단 첫 제작지원 창작뮤지컬이다. 15일까지. 서울 종로구 CJ아지트 대학로. 3만~5만원. (02)3454-1401. 전시●‘이야기 있는/없는 그림’ 서사구조를 만들어 연출하고, 그 감정 상태를 화면에 재현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세 작가의 그룹전. 권순영은 상징이 부유하는 정물을, 우정수는 시공간을 박제하는 바로크 시대의 꽃을, 전현선(작품)은 격자무늬에 감정 없는 사물을 담은 개성 넘치는 작품을 선보인다. 27일까지. 서울 종로구 옥인동 갤러리 룩스. ●오정미 초대전 ‘화훼본색-오해된 시선’이라는 주제로 화사한 꽃의 형상을 빌려 길게 과장되거나 혹은 지나치게 비틀어 놓음으로써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왜곡해 받아들이는 사회현상을 짚은 작품들을 소개한다. 24일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 갤러리 아띠. (02)3445-6182. 클래식·무용●세종 파이프오르간 시리즈 Ⅹ 세종문화회관이 해마다 열고 있는 ‘악기의 제왕’ 파이프오르간 공연이다. 올해 10번째 공연은 핀란드 오르가니스트 칼레비 키비니에미가 장식한다. 시벨리우스의 ‘축제풍 안단테’, 리스트의 ‘연습곡’,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등을 연주한다. 15일 오후 5시.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3만~9만원. (02)399-1624. ●련, 다시 피는 꽃 삼국시대 설화 ‘도미부인’과 제주 서사무가 ‘이공본풀이’를 조합해 창작한 전통 무용극. 가상의 조선 왕실을 배경으로 무희 ‘서련’의 사랑과 시련, 역경 속에서 자신의 뜻을 지켜 나가는 절개를 표현한다. 제례 의식 때 공연된 의식 무용인 ‘일무’와 나라의 태평성대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한 춤 ‘태평무’ 등 한국 전통춤의 진수를 담았다. 10월 29일까지. 서울 중구 정동극장. 4만~6만원. (02)751-1500.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전란 속 父子 잃은 백제 위덕왕, 원찰 세워 넋 기리다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전란 속 父子 잃은 백제 위덕왕, 원찰 세워 넋 기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14년부터 경주 월성을 발굴 조사하고 있다. 월성은 파사이사금 22년(101)에 새로 쌓아 내부에 궁궐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신라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궁성(宮城)으로 기능했다. 발굴단 안팎에는 신라 역사를 밝히는 것 말고도 호기심 어린 기대가 하나 더 있다. ‘일본서기’ 기록이 사실이라면 월성에는 백제 성왕의 두골(頭骨)이 묻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월성으로 시작했지만 오늘 찾아가는 곳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 사비, 곧 오늘의 부여다. 부여 이야기라면 의자왕으로 시작해 낙화암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부소산에 올라 고란사에서 약수 한 모금을 마신 뒤 정림사 터와 궁남지, 그리고 국립부여박물관을 차례로 둘러보는 것으로 부여 탐방을 마무리하곤 한다. 하지만 의자왕이 아니라 위덕왕에 초점을 맞추면 부여 여행 길은 훨씬 풍성해질 것이다. 신라와 연합한 백제는 551년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하류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런데 고구려와 밀약을 맺은 신라가 553년 백제군을 밀어내고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해 버렸다. 백제는 분노했고, 훗날 위덕왕(재위 554~598)이 되는 창 왕자가 신라 정벌의 선봉에 섰다. 성왕(재위 523~554)은 창 왕자가 빼앗은 신라의 관산성에 50명 남짓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독려하러 갔다가 신라 복병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관산성은 지금의 충북 옥천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는 성왕이 전투 중 목숨을 잃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일본서기’의 서술은 다르다. 신라는 노비 출신 장수 고도로 하여금 사로잡은 성왕의 목을 베고 머리뼈를 월성 북청(北廳) 계단 아래 묻었다고 했다. 신라 관리들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백제 왕의 머리를 밟는 모욕을 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는 성왕의 두골이 묻힌 건물을 “도당(都堂)이라 이름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관산성에서 왕을 잃은 백제는 군사 2만 960명이 죽고 말은 한 마리도 돌아가지 못했다고 ‘삼국사기’는 적었다. ‘일본서기’는 포위당한 창 왕자가 빠져나오는 모습도 그렸다. 군사들이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에서 축자국조가 활을 당겨 가장 용감한 신라 장수를 쏘아 말에서 떨어뜨렸고, 이 틈에 창 왕자는 샛길로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은 처절하게 패배했다. 부왕(父王)이 죽자 창 왕자가 왕위에 오른다. ‘일본서기’에는 “돌아가신 부왕을 받들고자 출가하여 불도(佛道)를 닦고자 한다”는 창 왕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젊은 창 왕자의 무모함으로 국가적 위기를 맞은 것은 사실이지만, 조정은 왕위 계승자의 출가는 말렸던 것 같다. 전후 사정을 보면 위덕왕을 비롯한 왕실 인사들의 중심 이념은 불교였음을 짐작하게 한다.백제는 두개골을 제외한 성왕의 시신을 오늘날의 능산리 고분군에 장사 지낸 것으로 추정한다. 능산리는 부여에서 논산 가는 길을 따라 3㎞쯤 달리면 나타난다. 사비성 외곽을 두른 나성을 막 벗어난 위치다. 고분군은 무덤이 3기씩 2열을 이루고 북쪽 기슭에 하나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금 서북쪽 산록에서 2기의 또 다른 왕릉급 무덤을 발굴하고 있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주인이 밝혀진 무덤은 아직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성왕이 묻혀 있을 것으로 보는 이유는 이웃한 능사(寺)의 존재 때문이다. 능사는 1993년 국립부여박물관이 발굴 조사 도중 백제 금동대향로를 찾아낸 곳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능사는 왕릉의 원찰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다. 위덕왕도 능산리에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듯하다.금동대향로도 중요하지만 능사에서 발굴한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은 사비 시대 백제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사리감은 능사의 목탑(木塔) 터 중앙의 심초석 위에서 발견됐다. 내부에 사리장엄을 안치할 수 있도록 화강암을 다듬고 오목하게 홈을 판 모습이다. 좌우에 10글자씩을 새겼는데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누이 형(兄)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이다. 정해(丁亥)는 567년에 해당한다. 한동안 위덕왕의 즉위는 패전의 책임론으로 순탄치 않았을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었다. ‘일본서기’가 창왕의 즉위를 557년으로 기록한 것도 이런 해석에 한몫했다. 부왕의 3년상을 치르며 책임을 곱씹어 귀족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리감에 적힌 대로 정해년이 즉위 13년이라면 위덕왕은 성왕 사후 곧바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된다. 형 공주가 목탑의 사리를 공양했다고 능사 조성을 주도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다. 미륵사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수습된 사리구에도 무왕비 사택씨가 사리 공양의 주체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무왕비가 엄청난 규모의 미륵사 건립을 혼자서 주도했다고 보지 않는다. 능사 조성 역시 위덕왕이 주도한 국가적 사업이었을 것이다. 관산성 패전에 결정적 책임이 있는 위덕왕이 부왕을 추모하고자 지은 절이라고 할 수 있다.부소산성 남동쪽에 능사를 세운 위덕왕은 완전히 반대편인 북서쪽에는 왕흥사를 창건한다. 백마강을 건너야 하는 곳이다. 당연히 왕흥사 터에 서면 강 너머로 부소산과 낙화암이 바라보인다. 왕흥사 터 목탑이 있던 자리에서는 2007년 발굴 조사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됐다. 심초석에 사리공을 만들고 그 위에 5각 지붕 모양의 뚜껑돌을 올려놓은 모습이었다. 청동사리합 표면에서는 명문이 드러났다. ‘정유(丁酉)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사리 둘을 묻었는데 신의 조화로 셋이 됐다’는 내용이다. ‘삼국사기’에는 왕흥사 창건 연대가 법왕 2년(600)으로 나오니 발굴 조사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은 것이다.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됐다는 아좌태자 말고도 위덕왕에게는 왕자가 더 있었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확인됐다. 왕자의 죽음은 위덕왕 8년(561)과 24년(577) 신라를 침공했으나 각각 1000명과 3700명의 전사자를 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사비 시대 여섯 임금은 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이다. 오늘날의 공주인 웅진에서 천도한 성왕과 마지막 의자왕은 부여에 짙은 체취를 남겨 놓았다. 무왕은 전북 익산의 미륵사와 왕궁리 유적 등으로 자신의 위상을 다양하게 과시하고 있다. 능사와 왕흥사 발굴로 위덕왕의 존재 또한 뚜렷해졌다. 하지만 위덕왕의 동생인 혜왕과 혜왕의 아들인 법왕은 모두 즉위한 이듬해 세상을 등졌다. 사찰을 창건하는 등 사비에 흔적을 남기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았을까 싶다. 글 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英 메이 총리 히잡 안 쓰고 사우디 방문

    英 메이 총리 히잡 안 쓰고 사우디 방문

    대처 前총리·英왕실은 규범 지켜 메르켈·클린턴 등 머리 안 가려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중인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사우디 외교부의 조언에도 머리에 히잡(스카프)을 착용하지 않았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메이 총리는 이날 짙은 청색 계열의 바지 정장 차림으로 전용기에서 내린 뒤 현지 관리의 안내를 받았다. 여성은 헐렁한 옷을 입어야 하며 아바야(망토 모양의 의상)와 함께 머리에 히잡을 착용해야 한다고 명시된 사우디 외교부 가이드라인에 어긋나는 옷차림이었다. 메이 총리는 히잡을 쓰지는 않았지만 종아리가 노출되는 치마 대신 긴 바지를 입어 최소한의 예의를 표시했다. 사우디에선 외국인이라도 여성은 반소매나 다리가 보이는 길이의 치마를 입어서는 안 된다. 트위터에서는 “사우디 정권에 굴복하지 않아 자랑스럽다” 또는 “세속적인 여성은 자유롭고 동등하다”는 격려의 글이 올라왔다. 앞서 메이 총리는 자신의 방문이 여성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방문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메이 총리의 복장은 과거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사우디를 방문했을 때 예복과 모자를 착용했던 모습과 대조적이다. 영국 왕실도 사우디를 방문할 때는 현지 규범을 지키고 있다. 물론 사우디는 외국인 방문객에게 히잡 착용을 강요하지 않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 미셸 오바마 등도 사우디 방문 시 히잡을 쓰지 않았다. 사우디에서 여성은 운전할 수 없고 돈을 받고 일할 수 없으며 남성 보호자 없이 해외 여행도 할 수 없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씨줄날줄] 금산(禁山)과 식목/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금산(禁山)과 식목/서동철 논설위원

    “옛말에 ‘10년 계획으로 나무를 심는다’는 말이 있다. 지역에 알맞은 나무를 심으면 봄에는 꽃을 보고, 여름에는 그늘을 즐기며, 가을에는 열매를 얻는다. 그뿐 아니라 재목과 기구도 되니 모두 자산을 늘리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옛사람들도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을 중히 여겼다.”오늘은 식목일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홍만선(1643~1715)은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 이렇게 나무심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낸 허적(1610∼1680)도 거듭되는 가뭄으로 피해가 극심해지자 그 대책으로 식목을 제시했다. 산림이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 왕조는 출범 초기부터 산림의 가치에 관심을 많았는데, 태종은 즉위 7년(1407) 각도 수령에게 명하여 기존 산림을 관리하는 것은 물론 초봄에 소나무를 심게 했다. 특히 해안 지역에 소나무를 심고 기르는 것은 수령의 평가에도 반영했다. 소나무는 건축 자재이자 병선(兵船)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재료였다. 정조는 식목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특히 수원 화성을 건설하면서 대대적으로 나무를 심었다. 화성 축조 이전의 팔달산은 대머리산이라는 뜻의 독산(禿山)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헐벗었다고 한다. 정조는 행궁을 감싸고 있는 팔달산에 나무를 심는 것과 함께 녹지를 조성하고 가로수를 식재하는 데 힘썼다. 화성의 식목이 철저하게 목적을 가진 사업이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성 안팎에는 소나무, 참나무, 상수리나무를 심었는데 성곽의 보수 및 관리를 위한 장비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주거지 안팎에 뽕나무와 삼나무를 권장한 것은 소비도시에 머물지 않는 자급자족 도시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방죽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그늘을 제공하도록 했고, 방죽 내부에는 연꽃을 심어 경관을 아름답게 하면서 먹거리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조선의 산림 정책은 왕실과 조정의 주도로 벌채를 막는 금산(禁山)과 식목의 병행이었다. 여기에 조선 후기가 되면 향교나 서원은 물론 마을과 문중, 개인까지 식목 주체의 범위가 넓어졌다. 특히 마을과 문중은 공유숲과 선산을 가꾸고 지키는 송계(松契)를 조직하기도 했다. 정조 12년(1788) 공포한 송금사목(松禁事目)은 최초의 전국 단위 산림 보호 규정이라고 할 수 있다. 너비가 30리(12㎞)와 10리(4㎞)를 넘는 고을은 산지기를 각각 3명과 2명, 너비 10리 미만이면 산지기 1명을 두고, 일체의 잡역이나 군역을 면제해 주었으니 산림 관리에 적지 않은 공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데스크 시각] 산신령과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어떤’ 확신/문소영 사회2부장

    [데스크 시각] 산신령과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어떤’ 확신/문소영 사회2부장

    주말에 ‘농심마니’ 행사에 참석했다. 농심마니는 전국의 산에 산삼을 심는 모임이다. 1987년 봄 전남 화순군 모후산에서 처음으로 어린 산삼을 심고, 산삼씨를 뿌렸다. 올봄이 30주년이다. 원래 심마니는 산삼을 캐는 사람들이라 농심마니는 심마니 앞에 농사짓는다는 농(農) 자를 붙여서 차별성을 부여했다. 산삼은 북위 34~36도에서 자생하는 식물이다. 중국에서도 산삼은 자란다. 개화기에는 ‘고려인삼’의 인기를 타고 미국 산삼이 주목받았다. 중국 황실이 왜 ‘고려 산삼’을 조공하라고 했을까. 고려 산삼의 약효 덕분이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산삼의 씨가 마른 탓에 산삼을 인공으로 재배했다. 그게 고려 인삼이다. 조공품이 산삼에서 인삼으로 바뀌면서 조선 왕실은 산삼을 캐오라고 비탈진 험한 산으로 백성을 내몰지 않아도 됐다. 농번기에 시작되는 산삼 공출에 대한 백성의 원성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농심마니들은 왜 산삼을 심을까. 산악인이자 소설가인 박인식 농심마니 회장이 작사한 ‘농심마니의 아침’ 노래에 살짝 그 이유가 나온다. 산신령이 지난밤 꿈속에서 “산삼은 이 땅의 뿌리요, 배달의 정기, 조선은 산삼 밭 산삼을 심자”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시인과 소설가, 화가, 가수, 방송인들로 구성된 회원들은 “우리는 풍류도를 구현하는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산삼씨를 심는 장뇌삼과 차이가 있나? 박 회장은 “지금은 장뇌삼과 비슷하다. 하지만 어느 날인가 새가 산삼 열매를 먹고 그 씨를 배설한 자리에서 산삼이 자라면 조복삼(鳥腹蔘)이 되고, 조복삼이 스스로 개체를 늘리면 하늘이 내린 천종(天種)이라는 최상급이 되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다시 산삼밭으로 되돌리려는 것인가. 산삼은 산신령의 주식인데, 산삼이 고갈돼 산신령들이 떠났단다. 농심마니가 산마다 산삼밭을 가꾸면 산신령도 산으로 되돌아오고 나라의 정기를 되찾는 것이다. 근대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이런 도교적 상상력을 코웃음쳐야 하지만, 뭔가 그럴싸한 대목이 없지 않았다. 믿음과 인식은 ‘사실’ 관계를 뛰어넘는 것 아닌가. 광고·마케팅에 휘둘리는 소비자에게 각성을 촉구한 영화 ‘시럽’은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뇌는 ‘믿음’ 앞에서 논리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특히 현재의 인식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정보를 소비하는 ‘확증편향’의 사람은 진실을 접해도 오류를 바로잡지 않는다. ‘아무개는 빨갱이’라는 인식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아무리 증명해도 그 증명을 믿음으로 무력화한다. 인간의 뇌가 범하는 오류다. 개헌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를 해소하자고 한다. 1987년 헌법으로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을 뽑았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거론된 시점은 권위주의 정부인 노태우 정부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가 더 존재하던 김대중(DJ) 정부다. 노태우 정부보다 DJ 정부가 더 제왕적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러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대통령이 제왕은커녕 동네북 수준이었다.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제왕적 대통령제를 탓한다. 똑같은 헌법 체제에서 대통령제가 운용됐는데, 누구는 동네북이고, 누구는 제왕적이었다. 이정미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지적했듯이 “국회와 언론이 감시와 견제”를 제대로 못 한 잘못은 간과한 채 ‘87년 헌법’을 탓한다. 산신령이나 제왕적 대통령제의 공통점은 ‘부존재에 대한 믿음’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너의 믿음일 뿐이야’라는 또 다른 주장에 부서질 것이다.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교육칙어 망령의 부활/황성기 논설위원

    [씨줄날줄] 교육칙어 망령의 부활/황성기 논설위원

    일본이 1945년 8월 패망을 앞두고 태평양전쟁에서 마지막 단말마의 비명을 지를 때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는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미국의 군함을 향해 자살 공격에 나선다. 동남아 각지에서 연합군에 밀리던 일본군은 단 한 명도 적군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본영의 지침에 따라 부대원끼리 서로를 죽이고 자결하는 옥쇄(玉碎)도 결행했다. 심지어 미군의 본토 공격이 임박해 오자 일본 열도와 식민지가 결사항전할 것을 호소하는 ‘1억 옥쇄’도 외쳤다.자살 특공대와 옥쇄가 당시의 일본인에게 가능했던 것은 ‘교육 칙어’ 때문이다. 메이지 일왕이 1890년 발표한 칙어는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대의에 따라 용기를 내고 한 몸을 바쳐 왕실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는 내용이 핵심이다. 군국주의를 떠받치던 칙어는 미 군정(GHQ) 때인 1948년 일본의 중·참의원에서 “근본 이념이 주권재군(主權在君·주권이 왕에 있다)이고 신화적 국가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이유로 폐지된다. 학교에 있던 칙어 복사본도 모두 회수됐다.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를 침략, 침탈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과 피해를 남긴 군국주의의 반성으로 파묻었던 교육칙어의 망령이 되살아날 조짐이다. 아베 신조 정권에 의해서다. 일본 정부가 지난달 31일 각의에서 “헌법이나 교육기본법을 어기지 않는다면 교재로서 사용하는 것까지는 부정할 수 없다”라는 답변서를 채택했다고 아사히신문이 그제 보도했다. 1948년 봉인된 이후 금기시해 온 교육칙어는 2012년 12월 출범한 2차 아베 정권 들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상은 “칙어를 교재로 쓸 수 있다”(2014년 4월), 이나다 도모미 방위상은 “칙어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2017년 3월)는 수상쩍은 발언을 잇따라 내놓았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주장하고, 교육칙어를 찬양하는 극우단체인 일본회의를 지지하는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 소속 각료가 아베 총리를 비롯해 십수명이 내각에 포진한 점을 생각하면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교도통신의 3월 여론조사에서 이나다 방위상의 교육칙어 발언이 적절한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일본인의 71.8%는 ‘부적절하다’고 답변했다. 국민 대다수의 부정적 기류에도 교육칙어를 무덤에서 꺼낸 아베 정권의 지향은 어디일까. 이런 일들이 쌓여 과거의 군사대국, 천황제를 기반으로 한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것 아니냐는 이웃나라의 의구심을 키울 뿐이라는 점을 아베 총리는 모르고 있을까.
  • 장가가려는 왕·도망가는 양반 딸… 조선 왕비 간택 프로젝트의 전말

    장가가려는 왕·도망가는 양반 딸… 조선 왕비 간택 프로젝트의 전말

    조선 국왕 장가보내기/임민혁 지음/글항아리/336쪽/2만원부와 명예, 권력 삼박자를 갖춘 조선시대 국왕은 양반가 처녀들이 바라는 최고의 남편상이었을까. 당시 국왕은 전국에 금혼령을 내린 뒤 왕실이 제시한 규정에 맞는 처녀의 이름을 쓴 처녀단자를 제출하도록 했다. 하지만 양반들은 딸의 나이를 늘리고 줄이거나 금혼령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피해 결혼을 시키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처녀단자 제출을 피했다. 간택에 참여하는 데 상상 이상으로 많은 돈이 드는 데다가 궁궐에 평생 갇혀 지내야 하는 삶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차례에 걸친 간택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선택된 여성은 별궁 생활을 거쳐 왕과 혼례를 올렸다. 국왕의 결혼에 관한 일을 맡았던 가례도감과 내수사에서 사용한 국혼 예산은 현재 가치로 따지면 모두 6억 8000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책은 왕비 간택부터 결혼식, 조현례(왕실의 웃어른을 차례로 알현하는 의례), 후궁 가례까지 조목조목 들여다본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창경궁 숲 거닐며 왕실의 숨은 얘기 들어요

    창경궁 숲 거닐며 왕실의 숨은 얘기 들어요

    창경궁은 ‘숲의 궁궐’이다. 5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고목들, 1910년대 이후 심겨진 나무들, 후원에 뿌리를 내린 160여종의 휘귀한 수종들로 가득하다.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가 한국숲해설가협회와 함께 창경궁 숲에 깃든 왕실의 삶과 역사를 들려준다. 오는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토·일요일 오후 2시 30분에 진행하는 숲 해설 프로그램 ‘역사와 함께하는 창경궁 왕의 숲 이야기’다. 1484년 조선 9대 임금 성종이 세운 창경궁은 왕실 가족의 생활 공간으로 쓰이며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품고 있다. 19대 임금 숙종의 후궁인 장희빈이 사약을 받은 곳이기도,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비극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1911년 창경원으로 격하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궁궐 가운데 가장 많은 건물이 파괴됐다. 1983년 복원 공사로 일부는 복원됐지만 아직 복원되지 않은 많은 건물 터엔 나무들이 대신 뿌리를 내렸다. 이 때문에 호젓하게 산책하며 왕실의 자취와 전통 조경을 감상하기 맞춤한 공간이다. 숲 해설가의 해설 코스는 요일별로 다르다. 토요일은 홍화문 금천 부근의 매화, 앵두나무, 연리목, 춘당지 주변의 백송과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매주 일요일은 국보 제249호 ‘동궐도’(東闕圖)에 남아 있는 선인문 앞의 회화나무, 관천대 부근의 버드나무 등을 둘러본다. 소요 시간은 1시간 30분. 예약 없이 현장에서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고려의 검은 꽃 일상의 푸른 꽃

    고려의 검은 꽃 일상의 푸른 꽃

    고아하게 퍼져 나가는 푸른빛, 상감기법으로 새긴 정교한 무늬…. ‘고려청자’라고 하면 단박에 이런 귀족적 풍모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는 고려청자가 펼친 드넓은 미학의 일부일 뿐이다.흐드러지게 피어난 검붉은 모란, 자유분방하게 가지를 뻗어낸 버드나무가 검푸른 청자를 채웠다. 철분을 듬뿍 머금은 흙 안료로 쓱쓱 그려낸 고려의 철화청자다. 재빠르고 힘 있는 붓질 덕에 호방하고 시원한 기운이 서려 있다. 고려청자에 대한 선입관을 깨는 소탈함과 대범함이 정겹기까지 하다. 고미술품 컬렉션으로 유명한 호림박물관이 서울 강남구 신사분관에서 9월 30일까지 여는 고려 철화청자 특별전 ‘철, 검은 꽃으로 피어나다’의 풍경이다. 박물관이 철화청자전을 여는 것은 21년 만으로,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철화청자의 90%가 전시장에 나왔다. 이 가운데 절반은 처음 선보이는 작품들이다.유진현 호림박물관 학예연구팀장은 “비색 청자, 상감기법의 청자가 개경의 왕실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면 철화청자는 중류층, 일반 백성 등 다양한 계층이 사용한 것이어서 문화사적 의미가 크다. 때문에 주전자, 매병, 난간, 세숫대야, 장구, 화분, 기름병, 분첩 등 청자의 다채로운 쓰임을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전시를 관람하는 순서는 제1전시실인 4층에서 제2전시실(3층), 제3전시실(2층)로 내려가면서 보는 게 좋다. 명품 철화청자들은 제1전시실에 대거 몰려 있다. 특히 모란을 닮은 듯 연꽃을 닮은 듯한 상상의 꽃(보상화)을 꽉 차게 철사안료로 그려 백토로 무늬의 바탕을 상감한 매병이 눈길을 잡아끈다. 유약을 입히지 않아 광택 없는 질감이 외려 과감한 붓질의 장식효과를 극대화한다. 유진현 학예연구팀장은 “매병 가운데 유약을 입히지 않은 철화청자가 소개된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일 것”이라며 “13세기 후반 청자에 유약을 입히지 않던 예외적인 시기에 탄생한 드문 작품”이라고 귀띔했다.표면 전체에 산화철을 칠해 검은 바탕을 만들고 상감기법으로 학과 구름을 그려 넣은 매병도 이색적이다. 흑색의 자기에 그려진 학과 구름은 김환기의 새와 겹쳐 보일 만큼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제2전시실에서는 철화청자의 다양한 쓰임과 형태를 감상할 수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철화청자의 무늬를 음각, 양각의 다른 기법이나 비슷한 문양을 지닌 상감청자와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불화와 웹툰을 함께 엮은 재기 넘치는 전시도 함께 열리고 있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시왕도(十王圖·저승 세계를 관장하는 10대 시왕들의 재판 광경 및 지옥에서 고통받는 망자들을 묘사한 불화)를 주호민 작가의 인기 웹툰 ‘신과 함께’의 장면으로 설명하는 ‘웹툰 <신과 함께>로 만나는 지옥의 왕들’이다. 전시된 시왕도는 조선 후기인 1764년 그려진 작품으로 필선이 일정하고 탄력적이어서 실력 있는 화승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망자의 혀를 길게 뽑아 쟁기질하는 장면, 오장육부를 빼내는 장면 등 인물들의 표정이나 장면 묘사가 실감 나게 그려진 데다 웹툰과 곁들여지니 흥미진진하다. 이장훈 학예연구사는 “우리는 르네상스, 바로크 등 서양미술은 가깝게 느끼면서 정작 우리 문화의 뿌리인 불교미술은 어렵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며 “관람객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 불교 속 이승과 저승, 한국의 토속신앙을 만화로 옮겨 인기를 끈 웹툰과의 컬래버레이션을 꾸며 본 것”이라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英 왕궁 경비대원에 혼쭐나는 관광객, 도대체 왜?

    英 왕궁 경비대원에 혼쭐나는 관광객, 도대체 왜?

    왕궁 앞 춤추던 남성이 경비대원에게 혼줄나는 모습이 포착돼 화제다. 25일(현지시간) 영국 데일리메일은 최근 영국 런던 세인트제임스궁 앞에서 춤추던 한 관광객이 경비대원에게 혼나는 순간의 영상을 기사와 함께 보도했다. 영상에는 왕궁 문 앞에서 근엄함 표정으로 보초를 서는 근위병들 앞에 관광객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자리를 잡고 서서 춤을 춘다. 남성의 모습을 일행 중 한 명이 촬영한다. 이를 지켜보던 근위병 한 명이 “들어라! (여기서) 벗어나라!”며 “넌 어제도 왔다. 카메라를 꺼라!”라고 큰소리로 소리치며 명령한다. 이에 남성은 근위병의 눈치를 보며 춤을 멈추고 왕궁 문앞을 벗어난다. 영국군 소속의 왕실 근위병들은 총을 소유하긴 하지만 실질적인 위협이 있지 않은 이상 실탄을 소유하지 않으며 근위병 자신의 임무를 방해하는 사람에게는 소리칠 권한이 주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영상= lokirna md45 youtube 영상팀 seoultv@seoul.co.kr
  • [정준모의 영화속 그림 이야기] 사랑, 나의 기쁨과 너의 슬픔

    [정준모의 영화속 그림 이야기] 사랑, 나의 기쁨과 너의 슬픔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에게 관례적으로 수여하던 문화훈장을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때문에 그러잖아도 요즘 진퇴양난인 문화체육관광부에 고민이 하나 더 생겼다. 예술가에게 예술적 성과와 인간적인 흠결은 별개의 것이라고 하지만 유교적 가치관이 여전히 잠재하고 있는 우리 사회통념과 ‘사랑은 개인의 문제’라는 쿨한(?) 입장이 엇비슷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역사 속에 남의 여자와 남의 남자가 내 여자와 내 남자가 되는 일은 허다하게 많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빈번한 일 하나도 명쾌하고 분명하게 마무리 짓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섬나라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영국 여왕 빅토리아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화가로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96)를 천거하자 단박에 퇴짜를 놓았다.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여왕이 그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남의 아내를 훔친 화가’라는 딱지가 붙어 있기 때문이었다. 밀레이는 1853년 당시 가장 유력한 예술 및 사회비평가였던 존 러스킨(1819~1900) 부부의 초대로 스코틀랜드를 여행했다. 러스킨은 산업사회가 되면서 세상이 무미건조해지고 부조리와 정신적 공황이 심화돼 가는 것을 보고 목사가 되어 신앙심으로 충만한 중세의 영성과 근대인의 삶을 일체화시켜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1843년 풍경화가 J 터너의 변호를 위해 ‘근대 화가론’을 출간해서 “예술의 기초는 민족 및 개인의 성실성과 도의에 있다”는 자신의 미학을 설파했다. 그의 미학은 윌리엄 모리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예술공예운동의 원동력이 됐을 뿐만 아니라 후기 빅토리아 시대 빅토리안 고딕의 유행을 이끄는 계기가 됐다. 밀레이는 이런 청교도 같은 삶을 그려낼 수 있었던 화가이다. 19세기 영국의 라파엘전파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화단에 반기를 들고 낭만적 서정과 중세적 신비가 풍겨나는 중세 고딕과 르네상스 전기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펼쳤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혁신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아이러니한 라파엘전파는 1848년 밀레이 외에 윌리엄 홀먼 헌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등 영국 왕립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던 젊은 화가들이 만든 단체이다. 이런 젊은 화가들을 전적으로 지지했던 러스킨은 당시 혹독한 평가를 받았던 밀레이를 위해서 두 번이나 신문에 호의적인 비평문까지 발표하는 등 멘토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여행 중에 만난 젊고 아름다운 러스킨의 부인 에피 그레이는 밀레이가 한눈에 반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밀레이 또한 러스킨과는 달리 스포츠에 능하고 건장하며 유쾌해서 에피도 호감이 갔다. 부족할 것 없이 지성미 넘치는 그의 남편은 결혼한 지 6년이 지나도록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해 본 적 없는 동정이었다.영화 ‘에피 그레이’(2014)는 이렇게 불륜의 필요 충분한 조건을 갖춘 실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많고 많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 아니 세상이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드는 불륜 이야기이다. 그 둘의 사랑은 당시 보수적인 영국사회를 떠들썩하게 했고 그해 발발한 크림전쟁 뉴스를 물리칠 만큼 대단했다. 에피는 결국 교회에 혼인무효소송을 제기해 승소하고, 우정을 생각해서 결혼만은 말아 달라는 러스킨의 간청에도 둘은 만난 지 1년 만인 1855년 결혼에 골인한다. 이후 40여년간 슬하에 4남 4녀를 두고 해로했다. 하지만 당시 이 스캔들은 엄청난 파장을 낳았다. 친구의 아내를 탐한 화가와 남편에게 혼인무효소송을 제기한 담대한 여성이 치러야 할 대가는 혹독한 것이었다.빅토리아 여왕은 귀족인 에피를 모든 공식 왕실행사에서 배제했다. 세상은 두 사람의 이혼을 두고 많은 소문, 가짜뉴스를 생산해 냈다. 에피가 처녀 시절 너무 예뻐 그녀를 두고 결투를 벌여 한 남자가 죽었다는 소문부터 러스킨이 아이 갖기를 싫어했다거나 아동성애자라는 등 세상이 수상해지면 출몰하는 그럴듯한 ‘소문’이 만연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타고난 그림 재주로 삽화와 대중적인 어린아이들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고, 초상화가를 전문으로 그려 라파엘전파와 거리를 둔 밀레이는 1863년 왕립미술아카데미 정회원이 됐고, 스캔들이 터진 지 30년이 지난 1885년 지위가 세습되는 준남작 즉 귀족의 반열에 올랐다. 이렇게 그는 에피와 결혼하고 화가로서 승승장구했고, 사회적·물질적 성공을 거두었다. 1896년 세상을 떠나던 해에는 미술아카데미 회장에 선출됐다. 여왕은 밀레이에게 작위를 수여하는 등 각별하게 살폈으나 밀레이의 아내 에피는 늘 냉혹하게 대했다. 귀족인 밀레이는 사교계의 주요 인물로 많은 행사와 파티에 초대를 받았지만 그는 아내를 동반할 수 없어 늘 혼자였다. 결국 에피는 두 딸의 성년파티에도 참석할 수 없을 만큼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이렇게 그녀는 사회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밀레이는 에피가 자신과의 사랑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부당하게 따돌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 항상 미안했다. 밀레이가 늙고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게 시종을 보내 도울 일이 없는지 물었다. 이에 밀레이는 어렵게 팔을 들어 “여왕 폐하께서 아내를 만나 주시기를 간청합니다”라고 썼다. 그리하여 여왕은 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에피를 궁으로 불렀다고 한다. 40년 만에 눈마저 어두워진 늙은 에피는 사면된 셈이다. 밀레이는 이렇게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한 아내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세상을 떠났다. 밀레이의 삶은 에피와의 사랑에 성공했지만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화가는 대가족의 생계와 세간의 몰이해를 사치와 낭비로 해소하려는 아내를 위해 돈을 벌고자 밤낮없이 그림을 그려야 했다. 아내는 수입을 위해 잘 팔리는 그림을 그리라고 채근했다. 친구와 부인에게 배신당한 러스킨의 삶은? 그는 비평가로 활발한 사회 활동과 저술 활동을 통해 영국 지성사에 한 획을 그었다. 또 안타깝고 로맨틱한 사랑도 경험했다. 파혼하고 39세에 열 살짜리 아일랜드 소녀의 순진무구함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그녀가 18살이 되자 청혼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실패했다. 남을 지옥에 빠뜨리고 간 그 천국이 진정 나의 천국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영화이자 실화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랑’이란 밤의 해변에 혼자인 채로 남게 되는 것일까.
  • [고전으로 여는 아침] 사령관을 판 배신의 대가/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고전으로 여는 아침] 사령관을 판 배신의 대가/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한다’는 속담이 있다. 기원전 323년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알렉산드로스(BC 356~323) 대왕이 33세 꽃다운 나이로 서거하자 꼭 그런 형국이 됐다. 대왕이 건설한 대제국의 지배자를 노린 부하 장군들은 왕을 칭하고 치열한 내전을 벌였다. 대왕이 생전에 후계자를 지명해 놓지 않은 탓이다.마케도니아 출신 장군들은 대왕의 왕실 가문을 무시하고 자기 군대와 영토를 키우기에 골몰했다. 오히려 왕실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사람은 외국인 장군 에우메네스였다. 그는 생전의 알렉산드로스로부터 깊은 신임을 받았던 측근이었다. 그는 온유한 성격이었지만 군사 전략과 리더십이 뛰어난 장수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소아시아 지역을 차지하고 왕실을 무시하던 야심가 안티고노스와 맞섰다. 안티고노스는 왕실에 충성 서약을 한 에우메네스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죽이려 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전투마다 승리했다. 그 과정에서 존경받는 명장이자 옛 친구였던 크라테로스를 죽게 했다. 에우메네스는 진심으로 슬퍼했지만, 그 승리로 마케도니아인들이 주력인 자신의 군대와 적 모두에게서 미움을 샀다. 사령관 에우메네스를 따르는 군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동고동락하던 최고의 정예 은방패 부대였다. 그들은 60세 미만 병사가 한 명도 없었지만, 무패를 자랑하는 백전노장들이었다. 그들은 아들뻘 되는 안티고노스 보병들을 패퇴시켰다. 큰 승리였다. 그런데 적 기병의 기습을 받아 후방의 군량과 물자를 모두 빼앗겼다. 전리품이야 전투에서 이기면 다시 얻을 수 있을 터. 그러나 사나흘 배를 주린 병사들은 사령관 몰래 안티고노스에게 사절을 보내 군량과 물자를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안티고노스는 사령관을 사로잡아 넘겨주면 군량을 주겠노라고 현혹했다. 동요한 군사들은 사령관을 기습적으로 사로잡았다. 에우메네스는 사령관을 재물과 바꾸려는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비겁함을 꾸짖었다. 그리고 “적의 진영에서 죽으면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탓할 것”이라며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병사들은 사령관 에우메네스를 적장 안티고노스에게 바쳐 사형당하게 했다. 그 후 에우메네스 부대 장졸들은 약속대로 풍족한 군량을 지급받고 처자식을 만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는 그들을 자신의 사령관을 배신한 흉측한 놈들이라며 모조리 죽였다. 무적의 전사였던 그들은 식량과 물욕 때문에 스스로를 패자로 만들고 목숨마저 잃었다. “고귀하고 확고한 정신은 재난과 불운에 처했을 때에도 참고 이겨낼 때, 그 가치가 나타나는 법이다.” 플루타르코스(46?~120?)가 ‘비교열전’에서 전한 이야기와 유사한 사례를 오늘날 흔히 보면서 마음이 씁쓸하다.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씨줄날줄] 이름 선물/이동구 논설위원

    [씨줄날줄] 이름 선물/이동구 논설위원

    이름은 누구나 세상에 태어난 후 첫 번째로 받는 선물이다. 평생을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좀 더 행복하고, 바르게 살아가길 바라며 세상의 좋은 의미가 모두 담긴 아름다운 글자로 이름을 지어준다. 설령 이름값을 제대로 못하고 살지언정 이름은 생을 마친 후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다. 중국, 일본 등 동양권에서는 황제나 국왕이 이름을 하사했다. 국가나 왕실에 큰 업적을 쌓은 충신에게 성씨와 이름을 지어주고, 후손들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대대로 간직해왔다. 전쟁 등으로 새롭게 편입된 이민족들에게도 이름을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에 귀화한 김씨 중에는 여진족이 가장 많았다. 6진 개척 당시 세종은 귀화한 여진족 수백명에게 김씨 성을 줬다. 광해군 때는 여진족이 조선 어디서든 살 수가 있어서 곳곳에서 그들을 볼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여진족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하나도 없다고 한다.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족보에서 사라진 것. 임진왜란 때 조선에 투항한 일본인 김충선이나 베트남의 왕자 이용상을 시조로 하는 성씨도 있다. 몽골계와 박연, 하멜 일행 등 서양에서 온 후 이름을 선물 받은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국내 거주 외국인의 증가와 국제결혼 등으로 귀화한 사람들이 한국 식의 성씨와 이름들을 새롭게 등록한다. 토착 성씨보다 오히려 많다고 한다. 귀화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 살면서 자천타천으로 한국식 이름을 가진 외국인들도 많다. 방송인으로 잘 알려진 로버트 할리의 우리나라 이름은 하일이다. 이참 전 관광공사 사장, 김도훈 오비맥주 대표 등 한국 이름으로 명성을 쌓아 가는 외국인들이 늘고 있다.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는 서울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세준이란 이름을 선물하기도 했다. 한발 더 나아가 자치단체나 시민, 또는 각종 단체가 외국인에게 이름을 선물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를 지극히 사랑했거나, 인연이 깊은 외국인들에게 친근감과 존경의 표시로 건네는 선물이다. 34번째 민족대표로 꼽히는 스코필드 박사의 한국 이름 ‘석호필’이 대표적이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군 히딩크 감독에게는 ‘희동구’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해병대사령부는 최근 한·미 연합 훈련에 참가한 니컬슨 사령관(중장)에게 ‘이건승’(李建勝)이라는 한국 이름을 선물했다. 언제나 승리를 기원하는 뜻과 니컬슨이란 이름을 음차(音借)한 것이다. 니컬슨은 이튿날 연합작전 때부터 이건승이 적힌 해병대 명찰을 달았다고 한다. 김영란법 이후 가장 값진 선물이 아닐까.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역사속 공무원] 조선시대 실존 인물 홍길동

    [역사속 공무원] 조선시대 실존 인물 홍길동

    홍길동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 ‘역적’이 인기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홍길동(洪吉同)은 허균의 소설에 나오는 홍길동(洪吉童)이 아니라 연산군 때 실존했던 인물로 공무원 가족이다.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 6년인 1500년 10월 22일 홍길동의 체포부터 같은 해 12월 28일 범행에 가담한 지방관리들의 처벌까지 홍길동과 관련된 기록이 모두 11번 나오는데 그 어디에도 홍길동의 처벌에 관한 언급은 없다. 당시에는 일반 형사범도 사형을 집행하려면 임금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실록 10월 22일 두 번째 기사는 삼정승이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참을 수 없다는 보고이고, 28일 두 번째 기사는 조력자 엄귀손의 처벌에 관한 논의다. 남양홍씨 족보와 만성대동보(萬成大同譜)에 홍길동의 아버지로 등재된 홍상직(洪尙直)이 실록에는 한자마저 같은 동명인이 여러 명인데, 당상관을 지낸 고관대작인 것만은 확실하다. 홍길동의 어머니로 추정해 볼 수 있는 여성으로는 두 명이 등장한다. 만성대동보에는 길동이 1440년 홍상직과 사비인 춘섬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지만, 1920년대 편찬된 이 족보는 곳곳에 오류가 있어 신뢰하기 어렵다. 또 다른 여성은 세종실록 1444년 7월 22일 세 번째 기사에 나오는 옥영향이다. 이 여인은 홍상직이 경성절제사를 지낼 때 함께 살던 기녀로 이날 기사는 함길도관찰사가 옥영향이 진술한 홍상직의 수상쩍은 행동을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홍길동의 무인으로서의 기질은 아버지를, 임기응변에 강하고 호방한 성격은 형인 일동(逸童, 1412~1464년)을 많이 닮은 것 같다. 일동은 세종 24년인 1442년 과거에 급제해 돈녕부 부승(副丞·정8품)에 제수됐는데, 처음부터 순탄하지는 못했다. 세조실록 1457년 2월 7일 다섯 번째 기사는 일동이 중시(重試·당하관 이하의 관료를 대상으로 10년마다 보는 시험)에서 3등을 했으니 서울로 돌아오라는 내용이다. 이때 그는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에 가던 중 시험 소식을 듣고 되돌아와 응시한 뒤 다시 출발했다. 일동은 축하연에 참석하라는 명을 무시하고 북경으로 가는 바람에 탄핵됐으나 임금의 배려로 무마됐다. 그는 1464년 52세를 일기로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중 홍주(洪州·현 충남 홍성군)에서 과음으로 숨졌다. 세조실록 1464년 3월 13일 네 번째 기사는 홍일동에 대한 평이다. 성질이 방광(放曠·언행이 구속받지 않음)하여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고, 나쁜 옷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술을 두 말까지 마시고, 시 짓기를 좋아했다 비록 서얼이긴 하지만 홍길동도 왕실의 외척이다. 이복형 일동의 딸이 성종이 총애했던 숙용(淑容·후궁에 내리는 종3품 작호) 홍씨다. 따라서 홍길동과 공범인 엄귀손은 연산군과 중종의 외숙인 셈이다. 88년 후인 1588년 1월 5일 실록에는 예전에는 강상(綱常)의 변(삼강오륜을 저버린 반인륜적 사건)이 홍길동과 이연수뿐이어서 이 두 사람의 이름을 욕으로 썼는데, 요즘은 풍속이 피폐하고 강상의 변이 너무 잦아 욕으로 쓸 수 없게 됐다는 대목이 있다. 이처럼 먼 훗날까지 욕받이가 됐을 만큼 큰 사건이었음에도, 주범은 도주하고 공범은 옥중에서 자연사하는 것으로 흐지부지될 수 있었던 것은 얽히고설킨 임금과 대신, 종친 간의 복잡한 관계도 한몫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록에서는 홍길동이 강상의 죄인이었지만, 드라마에서는 권력과 맞서 싸워 백성들의 마음을 훔친 의로운 도적이다. 최중기 명예기자(국가기록원 홍보팀장)
  • 패션, 여행을 떠나다

    패션, 여행을 떠나다

    여행 패션이 올해 주요 패션 트렌드로 떠올랐다. 삼성패션연구소는 최근 ‘인생은 한 번뿐이니 현재를 즐기자’는 현재지향적인 ‘욜로’(You Only Live Once의 약자) 문화가 확산되면서 훌쩍 떠나는 자유로운 여행 열풍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패션업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해외여행 수요는 전년 대비 약 14% 증가했으며, 내국인 출국자도 사상 처음으로 2000만명을 돌파한 것으로 나타났다.또 2014년 이미 전체 해외여행객 중 개별 자유여행이 차지하는 비율이 40.4%로 패키지여행(37.5%)을 웃도는 등 자유여행객 비중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여행객의 ‘패키지 여행상품’ 구매 경험률도 2013년 72.8%에서 2015년 63.4%로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올해는 5월과 10월 예년보다 긴 연휴가 예고되면서 이 같은 현상이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패션업계에서는 이 같은 트렌드를 즉각 반영하고 나섰다. 그중에서도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곳은 가방 등 액세서리 시장이다. 빈폴액세서리는 최근 여행용 캐리어·백팩·메신저백·크로스백·여권가방 등으로 구성된 ‘트래블 라인’을 새롭게 내놨다. 나일론 원단에 카본 필름을 코팅해 높은 내구성과 경량성을 동시에 갖춘 ‘카본 나일론’ 소재를 사용해 성능을 높였다. 원터치로 백팩이 열리고 캐리어와 연결할 수 있는 ‘롤탑형 백팩’, 내부 무게를 자체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능이 내재된 26인치 캐리어 등 여행의 편의성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MCM도 지난해 하반기 여행용 가방과 액세서리로 구성된 ‘MCM 트래블 컬렉션’을 출시했다. 네 개의 바퀴가 달린 캐리어, 캐리어와 연결할 수 있는 스트랩이 부착된 서류가방 등 실용적인 디자인을 갖췄다. 여기에 여행용 소재로 개발된 ‘오데온 캔버스’를 사용해 가방 무게를 최소화했다. 왕실용 여행가방에서 출발한 세계적인 명품브랜드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도 18개월에 걸쳐 개발한 ‘호라이즌’ 트렁크를 지난해 새롭게 선보였다. 신소재를 사용해 가방의 무게를 50% 가까이 줄이고 짐을 넣을 수 있는 내부 공간을 15%가량 넓혀 모두 37ℓ 부피의 수납이 가능하도록 한 제품이다. 올해는 레이저로 모노그램 무늬를 새긴 ‘모노그램 티타늄 트롤리 트렁크’도 출시할 계획이다. 앞서 지난해 10월에는 여행가방 브랜드 ´리모와´를 인수하기도 했다. 남성복 브랜드들도 격식을 갖추면서 동시에 활동성을 가미한 나들이용 아이템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로가디스는 소프트 메이킹 공법으로 만들어 가벼운 ‘플라잉 재킷’과 신축성이 높은 저지 소재의 ‘이탈리아노 재킷’, 구김이 가지 않아서 관리가 편한 린넨 소재에 프린트를 더한 ‘에어 포트 수트’ 등 여행지에서도 간편하게 갖춰 입을 수 있는 아이템을 연달아 출시했다. 빨질레리와 갤럭시도 초경량 ‘에어 재킷’ 등 기능성을 높인 의류를 각각 내놨다. 또 예년에 비해 짧은 기장의 블루종 점퍼 비중이 높아진 것도 눈에 띈다. 윤재원 빨질레리 디자인실장은 “남성복 브랜드의 여행 아이템은 유행을 타지 않는 기본적인 디자인에 색깔과 소재로 다양성을 준 것이 특징”이라며 “출장이 잦은 직장인의 경우 한 가지 의상을 직장에서는 비즈니스 캐쥬얼로, 휴가지에서는 어느 정도 예의를 차린 휴양지 패션으로 상황에 따라 두루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남성복이 기능성을 더해 여행 패션 시장에 뛰어들었다면, 아웃도어 브랜드들은 반대로 야외활동에 적합한 기존의 기능성 의류에 대중적인 디자인을 가미해 여행지 패션으로 영역을 넓히는 추세다. LF몰은 오는 20일까지 아웃도어 브랜드 라푸마의 트래블룩을 제안하는 ‘라푸마 보야지 기획전’을 진행한다. 기존의 전문 아웃도어 디자인에서 벗어나 세련된 색상과 날씬해 보이는 슬림핏 라인으로 일상에서도 부담 없이 착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게 라푸마 측의 설명이다. 허은경 라푸마 CD 상무는 “최근 뉴욕 증권가에서는 정장 위에 고어텍스 소재로 된 아웃도어 점퍼를 입고 백팩을 매는 패션이 유행하고 있을 정도로 아웃도어와 시티웨어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설명했다.아웃도어 브랜드 살레와도 검정색, 진녹색 등 세련된 무채색으로 이뤄진 ‘비바체 에어 HLT 자켓’을 출시했다. 그라데이션 타공 기법을 사용해 야외활동에 적합한 통기성도 갖췄다. 김형철 살레와 의류기획팀장은 “빨간색, 노란색 등 강렬한 원색이 주를 이뤘던 과거 등산복과는 달리 이번 시즌 살레와 전체 의류 중 약 42%에 모노톤 색상을 적용했다”며 “기존의 캐주얼 의류와도 쉽게 코디할 수 있어 중장년층뿐 아니라 젊은층도 아웃도어 의류를 일상이나 나들이 복장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19세기 말 日유출 조선 투구·갑옷 돌아와

    19세기 말 日유출 조선 투구·갑옷 돌아와

    19세기 후반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의 투구와 갑옷 일체가 한국으로 돌아왔다.문화예술기업 스타앤컬쳐는 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11월 영국의 한 사설 경매에서 사들인 투구와 투구 보호개, 두정갑옷, 금관조복(관원이 경축일이나 주요 의식이 있을 때 입던 예복), 치마 허리띠, 후수(관위를 나타내는 표식), 서각 허리띠, 신발 등 10여점의 유물을 공개했다. 이 유물들은 스타앤컬쳐 회장이자 고미술품 수집가인 윤원영씨가 지난해 11월 영국의 한 사설 경매에서 사들인 것이다. 경매업체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이 유물들은 1900년 일본에서 장거라는 독일인 골동품 상인에 의해 판매됐고, 한 영국인이 1902~1905년 구입해 지난해까지 소장해 왔다. 투구 앞에는 발톱이 다섯 개인 오조룡이, 뒤쪽과 가장자리에는 봉황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마 부분에는 백옥으로 조각된 용이 투조돼 있고 투구 양쪽에는 공작과 날개 문양이 장식돼 있다. 붉은색 천으로 만들어진 갑옷의 어깨 위쪽에는 금속 재질의 용 장식이 달려 있다. 윤 회장은 “투구에 있는 오얏꽃과 오조룡, 봉황 장식으로 봤을 때 고종의 것으로 보인다”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의 투구와 갑옷이 고종의 물품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그것과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이번에 들어온 유물은 고종 황제는 물론 조선 왕실의 것이라고 볼 만한 증거가 현재로선 하나도 없다”며 “리움,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온양민속박물관 등 국내에 있는 갑옷, 투구 등도 조선 왕실 물품이라고 밝혀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이성계 조상 이안사, 170가구 이끌고 이주한 ‘군왕의 땅’

    [서동철 기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이성계 조상 이안사, 170가구 이끌고 이주한 ‘군왕의 땅’

    강원도 삼척의 준경묘(濬慶墓)와 영경묘(永慶墓)를 찾아가는 길은 그리 편안하지 않다. 두 무덤이 있는 미로면은 태백산맥 동쪽 경사면에 해당한다. 삼척에서 태백으로 이어지는 38번 국도를 타고 오르다 보면 도계읍 못미처에 두 무덤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조금만 들어가도 화전민이 나타나지 않을까 싶은 산길을 다시 10분쯤 달려야 한다. 3월 초라고는 해도 태백산록의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그런데 활기리에 접어들면 갑자기 훈훈한 기운이 느껴진다. 산골에 이런 데가 다 있을까 싶게 햇살이 거침없이 내리쬐는 개활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남도에서나 있을 법한 대밭이 태백산맥 중턱 여기저기에 보이는 것도 인상적이다. 마을 뒤편의 해발 1353m 두타산이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성계의 조상이 한때 자리잡았던 까닭을 수긍할 수 있게 된다. 준경묘와 영경묘는 태조의 5대조 이양무와 부인 삼척 이씨의 무덤이다. 활기리의 준경묘와 하사전리의 영경묘는 4㎞ 남짓 떨어져 있다. 중간쯤에 두 무덤의 공동 재실(齋室)이 있다. 제사 용구를 보관하고 제사 준비를 하는 집이다. 제구는 2015년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열린 ‘관동팔경 특별전-삼척 죽서루’에 출품되기도 했다. 자동차 길이 나기 전에는 어느 무덤으로든 가는 게 힘겨웠을 성싶다. 규모 있게 의례를 치르기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니었을 게다. 준경묘는 활기리 주차장에서 두타산 등산로를 따라 다시 1.8㎞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 고갯마루까지 800m는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있지만, 겨울에도 땀깨나 흘릴 각오를 해야 할 만큼 가파르다. 하지만 나머지 1㎞는 기분 좋은 산길이다. 준경묘 일대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밀집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의 적송(赤松)은 경복궁 복원에도 쓰였다고 한다. 줄곧 왕실의 성지(聖地)로 입에 오르내렸던 만큼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송금령(松禁令)이 철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준경묘 들머리에 접어들면 다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심심산골에 이렇듯 넓고 평탄한 땅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풍수지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죽은 사람의 안식처인 음택(陰宅)으로도 명당(明堂)이요, 산 사람의 보금자리인 양택(陽宅)으로도 길지(吉地)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왕릉보다는 조촐하게 꾸며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식 호칭인 묘(墓) 자체가 왕과 왕비의 무덤을 가리키는 릉(陵), 그 아래 왕세자와 왕세자비 등의 무덤인 원(園)보다 위계가 낮다.●태조 4~1대조 무덤은 릉으로 격상 반면 태조의 4~1대조는 목조·익조·도조·환조로 추존됐고 그 무덤도 릉으로 격상됐다. 함경도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덕릉·지릉·의릉·정릉이 그것이다. 그들의 부인인 효공왕후 이씨·정숙왕후 최씨·경순왕후 박씨·의혜왕후 최씨의 무덤 역시 안릉·숙릉·순릉·화릉으로 높여졌다. 5대조 무덤이 릉이 되지 못한 것은 성리학을 국시로 표방한 조선이었던 만큼 왕이라도 4대 봉사를 규정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이성계 집안은 본관인 전주에서 대대로 살았다. 그런데 훗날 목조로 추존된 이안사가 20세 무렵 관기(官妓)와 얽힌 문제로 지방관과 다투면서 170가구를 이끌고 삼척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주에서 불협화음이 있었던 관리가 공교롭게 강원도 안찰사로 부임하자 일행은 다시 함길도 덕원으로 옮겨간다. 이성계가 함경도 사람으로 알려진 이유다. 삼척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은 것은 이양무와 이안사의 부인이 모두 삼척 이씨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일대는 삼척 이씨의 세거지(世居地)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준경묘와 영경묘가 이양무와 삼척 이씨의 무덤으로 공인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 일가가 삼척을 오래전에 떠난 만큼 주인이 누구라는 것은 전설일 뿐이었다. 태조는 한때 제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무덤은 잊혀진 존재가 됐다. 두 무덤은 이후 성종 12년(1481)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하고 선조 13년(1580) 강원도 감사 정철이 지형도를 그려 정비를 청하면서 다시 전면에 등장한다. 정철은 풍수적으로 이양무의 무덤은 ‘만대(萬代) 군왕의 땅’, 삼척 이씨의 묘는 ‘천자(天子)를 낳을 땅’이라고 했다. 그런데 인조 18년(1640) 목조 부모의 무덤으로 삼척 대신 황지가 새로 떠오른다. 풍기에 사는 박지영이라는 사람이 꿈에서 무덤을 찾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박지영은 ‘백두산 정맥이 태백산에 결집한 길지로, 그 기운으로 조선의 왕업이 시작되었는데 간악한 백성이 그곳을 다시 묏자리로 써서 선조의 신령이 안식을 잃었다’고 했다. 양란(兩亂)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일시적으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이후에는 다시 삼척설(說)이 대세를 이루었다. 당대 사상가이자 문인이었던 미수 허목(1592~1682)은 삼척부사 시절 지역 문물을 엮은 ‘척주지’(陟州志)를 펴내면서 ‘미로리’(眉老里) 대목에서 두 무덤과 관련한 각종 기록을 정리해 싣고 목조 부모의 묘라고 주장했다. 지금의 미로면(未老面)이 당시는 미로리였음을 알 수 있다. 눈썹 미(眉)자가 아닐 미(未)자로 바뀐 것은 높여야 할 사람과 같은 이름을 쓰지 않는 피휘(避諱)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전주 이씨들은 삼척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폈다. 집안의 시조 이한을 모신 조경묘(肇慶墓)를 영조 47년(1771) 전주에 건립하는 데 성공한 이들의 다음 목표는 목조 부모의 무덤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당을 세우자는 주장은 물론 활기촌에 사적비(事蹟碑)를 세우자는 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황제에 오른 고종이 대대적 정비 삼척의 무덤은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르자 위상이 달라졌다. 이듬해 “삼척 무덤의 관리가 부실하다”는 상소에 고종은 “먼 조상을 추모하고 장구하게 잘 모시려는 정성은 필부에게도 있는데 황제의 가(家)이겠는가” 하고는 대책을 명한다. 이때 준경과 영경이라는 묘호가 주어졌고, 제향을 위한 건물과 사적비가 세워졌다. 활기동에는 재실과 함께 고종의 친필로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地)라 새긴 비석도 세웠다. 5대조의 무덤으로 공인한 데는 정철과 허목의 명망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결국 준경묘와 영경묘의 정비는 대한제국 선포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의 5대 봉사에 나설 수 있었던 데는 천자는 6대조까지, 제후는 4대조까지 제사 지낼 수 있다는 ‘예기’(禮記)의 왕제(王制)를 근거로 삼았을 것이다. 같은 차원에서 고종 황제가 환구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 지낸 것도 천자국(天子國)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고종이 황제로 스스로를 격상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준경묘와 영경묘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보는 것도 삼척 여행이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글·사진 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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