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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집트 왕들의 계곡서 ‘女가수 무덤’ 최초 발견

    이집트 신왕국시대의 왕릉이 집중된 ‘왕가의 계곡’에서 최초로 왕족이 아닌 여성의 무덤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 등 해외언론이 16일 보도했다. 무덤은 이집트 유물관리 당국과 스위스 바젤 대학교 고고학자들이 왕가의 계곡에서 발굴 작업을 하다 우연히 발견했다. 룩소르시 유물관리국의 관계자는 “1100년 전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이 여성은 생전 가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면서 “왕족이 아닌 여성의 무덤이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이 미라의 이름은 네메스 바스테트이며, 고양이나 암사자의 머리 모습을 한 고대 이집트 여신인 ‘바스테트’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고학자들은 관에 쓰여진 흔적 등으로 미뤄, 네메스 바스테트가 22대 왕조 당시 활동한 대사제의 딸이며, 주로 카르나크 신전에서 열린 왕가의 주요 행사에서 노래를 불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 원래 네메스 바스테트의 무덤이 아니라 그녀가 사망한 지 400여 년이 흐른 후 옮겨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무덤의 진짜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집트와 스위스 고고학자들은 이번주 내에 이 여성의 얼굴을 덮고 있는 천 성분의 마스크를 벗겨내고 이를 공개할 예정이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연산군 스토리텔링 관광명소 만든다”

    “연산군 스토리텔링 관광명소 만든다”

    “도봉산 둘레길 옆으로 연산군 묘와 부인 거창 신씨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동진 도봉구청장은 조선 10대 임금이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1476~1506)의 묘를 도봉구의 관광명소로 가꿀 것이라며 28일 이렇게 말했다. 연산군은 TV드라마나 영화 등 역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드라마틱한 인물로, 역사적 교훈을 전달하는 문화역사 탐방 코스로 최고라는 이야기다. ●5000만원 들여 연산군묘 인근 정비 문제는 연산군 묘가 왕릉으로 국가지정 문화재인데도, 공장과 식당 등이 바로 인접해 주변 환경이 불량하고, 차량 진입로가 좁고 주차공간이 없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년 상반기에 5000만원을 들여 주변을 정리할 예정이다. 유적지를 정비하고 안내판을 설치한 뒤 주변 문화유적지와의 동선을 연계하기로 했다. 주차장과 화장실, 전시실 등 편의시설도 확충한다. 연산군 묘 주변에는 파평 윤씨 일가가 600년 전 정착하면서부터 이용했다는 원당샘과 서울시 보호수 1호인 830년 수령의 방학동 은행나무가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이곳에 불이 나면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긴다는 일화도 있다. 세종대왕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양효공 안맹담의 묘도 자리했다. 정의공주와 부군의 묘는 서울유형문화재 제50호다. 원당샘은 복원돼 지난 13일 준공식을 가졌다. 최근 도봉구에 있는 이들 유적지가 주목받는 것은 지난 6월 개통한 북한산 둘레길 도봉 구간 20구간(왕실묘역 길)이 바로 옆으로 펼쳐진 덕분이다. 이들 유적을 잘 관리하면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둘레길 산행을 하는 이들에게도 괜찮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도봉의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할 수 있다고 이 구청장은 판단한다. 이 구청장은 “특히 한글 창제의 숨은 공로자로서 정의공주를 재조명할 수 있는 대표적 자원”이라면서 “도봉구의 가치와 긍지를 높이는 일에 이들 자원이 활용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선배 김근태 前대표 투병 안타까워” 이 구청장은 최근 속앓이를 한다고 했다. 도봉구에서 함께 활동하던 민주화 동지이자 선배인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대표가 뇌정맥혈전증으로 투병하고 있어서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이 왔는데, 대중 정치인으로 그걸 널리 알리고 싶지 않아 병원을 피하다 보니 뇌정맥혈전증이 진행되는 것을 너무 뒤늦게 알게 됐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그나마 다행히도 얼마 전 문병을 갔더니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또 “개인 김근태가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에 이바지한 인물로서 현대사의 한 부분으로 평가하고, 그분의 삶을 존중해 주면 좋겠다.”면서 “빨리 회복돼 내년 총선에도 뛰어들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글 사진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산천단·굼둘애기물서 氣 받으세요”

    “산천단·굼둘애기물서 氣 받으세요”

    제주에서 ‘기’(氣)를 받을 수 있는 여행지로 제주시 아라동 ‘산천단’(위)과 한림읍 귀덕리 ‘굼둘애기물’(아래)이 선정됐다. 제주관광공사는 지난 9월부터 두 달 동안 실시한 파워 스폿(Power Spot) 명소 발굴 공모를 실시, 이같이 선정했다고 14일 밝혔다. 파워 스폿이란 특정한 장소에 흐르는 강한 기를 받아 스트레스를 치유하고 안식을 얻는 여행지를 말한다. 일본에선 이미 20, 30대 여성층을 중심으로 새로운 여행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는데, 도쿄 메이지신궁 내 기요마사 우물은 연간 1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제주관광공사는 일본 관광객을 겨냥해 제주의 ‘파워 스폿’ 명소 발굴에 나섰으며 적합성과 흥미성, 참신성, 여행상품 가능성, 마을 관광 연계성 등 5개 항목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이들 두 곳을 선정했다. 산천단은 한라산 산신제를 지냈을 만큼 제주의 기가 충만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로 상품 가치가 높은 곳으로 평가됐다. 귀덕리에 있는 굼둘애기물은 상처를 입은 인어가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상처가 치료됐다는 전설이 내려오면서 여름철 이 물을 몸에 적시면 잔병이 없어진다는 믿음이 강해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제주관광공사는 이번에 선정된 파워 스폿을 토대로 관광자원 개발에 나설 방침이며, 추가로 자연 속에서 웰빙과 치유가 가능한 명소를 계속 발굴하기로 했다. 한편 한국관광공사는 올해 초 일본 관광객을 위해 창덕궁, 종묘, 선릉 등 서울시내 고궁과 조선왕릉, 마이산 탑사, 마곡사, 범어사 등 한국의 주요 풍수 명당을 관광하는 파워스폿 여행상품을 본격 출시했다. 글· 사진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김문이 만난사람] 최완수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인생을 살면서 간이 안 맞으면 섬으로 간다. 그런데 향기가 그립다면 어디로 갈까. 겨울의 언덕을 넘으려는 듯 늦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그런 까닭에 쌀쌀했으나 그윽했다. 비탈길에 떨어진 나뭇잎들이 비에 젖어 고고한 사색의 향기를 뱉어냈다. 이리저리 뒹구는 그것들이 황량하게 비어 있는 마음의 곳간을 조금씩 채운다. 지난 23일 오전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간송미술관. 입구에 들어서자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간송미술관은 간송이 33세 때 자신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1966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미술관이다. 2층 콘크리트 건물로, 서화를 비롯해 자기, 불상, 전적(典籍), 와당 등 국보급 문화재 14점과 보물급 고서화 12점 등 많은 문화재가 소장돼 있다. 간송은 교육가이자 문화재 수집가로 평생 민족 문화재를 모으는 데 힘썼다. 또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지원·경영하며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 오늘날까지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그런 이곳에서 지난달 겸재의 ‘어초문답’, 신윤복의 ‘미인도’ 등 조선시대의 풍속인물 그림을 내걸어 많은 사람들에게 문화의 향기를 채워주었다.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관람객으로 전시 기간 내내 장사진을 이뤄 다시 한번 국민 미술관임을 입증했다. 이렇게 우리 문화의 지킴이로 자리매김하기까지는 뭐니 뭐니 해도 최완수(69)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의 공력이 절대적이다. 지난 45년 동안 학예연구실장으로 재직하면서 매년 두 차례 논문집 ‘간송문화’를 발간하고 이를 통해 ‘추사명품집’ ‘겸재명품집’ 등을 발표하며 미술사 연구의 산실(産室) 역할을 주도하고 있다. 연구실에는 박사급 연구원만 수명이 있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2층 연구실에서 만난 최 실장은 올해 우리 나이로 칠순인데도 10년은 더 젊어 보였다. 여기에 있으면 세월의 시계가 거꾸로 가느냐고 인사말을 먼저 건넸다. 그는 ‘부지노지 장지운이’(不知之 將至云爾)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밥 먹는 것도 잊고 즐거움으로 걱정을 잊으며 늙음에 이르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나 보다.”라며 웃는다. 청년의 미소처럼 해맑다. 전시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난 뒤여서 요즘에는 어떤 일로 바쁜지 물었다. “그제는 (연세대) 강의 나갔고 어제는 오랜만에 겸재 만나러 북악산과 인왕산에 다녀왔다.”고 했다. 겸재를 만나러? 궁금해하자 웃으면서 대답한다. “겸재는 장동팔경(壯洞八景)을 남겼습니다. 인왕산과 북악산에 걸친 장동(壯洞) 일대의 경승지 8곳, 그러니까 필운대, 대은암, 청풍계, 청송당, 자하동, 독락정, 수성동, 취미대 등을 그렸지요. 겸재 동호인 몇 명과 겸재를 생각하며 그림 속을 같이 답사했지요.” 그는 겸재 연구의 권위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동안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1993), ‘진경시대’(1998), ‘겸재의 한양진경’(2004), ‘겸재 정선’(2009) 등을 펴내 겸재 연구의 종결자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가 겸재와 인연이 된 것은 1966년 미술사학자 혜곡(兮谷) 최순우(1916~1984)의 권유로 간송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 이곳에서 겸재의 작품들과 만나면서다. 그는 숙명적으로 연구에 몰입했다.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조선 왕조를 문화적 정체기로 보는 시각이 많은데 이를 뒤집기 위해 조선 문화의 절정기인 진경시대의 가치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지요. 조선 전기에는 중국을 닮아보려고 했지만 나중에 우리 조상들은 중국의 주자 성리학을 발전시켜 조선 성리학을 만들어냈습니다. 인조반정 이후 성리학이 꽃을 피웠고 이를 토대로 진경 시문학과 진경 산수화가 나왔습니다. 겸재는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차원 높은 회화미로 표현한 최고의 화가이지요.” 겸재에 대한 찬사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84세까지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진경 산수화를 창안하고 절정에 올려놓은 뒤 추상 단계에까지 한꺼번에 통달한 말 그대로 화성(畵聖)입니다. 일부에서는 화원 출신이라는 말도 있지만 당시에는 선비가 아니면 (진경산수를) 창안할 수가 없었지요. 그는 주역 등 사서삼경을 거의 외울 정도로 7서에도 아주 능통한 지식인이었습니다. 주역의 음양조화, 중국 화가들도 감히 흉내조차 못 낸 남·북방 화법을 동시에 표현해 낸 겸재의 그림을 본 중국 사람들은 아주 환장을 합니다. 중국이 우리 문화에 미쳐버리는 이유도 바로 이런 확실한 종결편 때문이지요. 유라시아를 거쳐 우리나라에 흘러 들어온 문화들을 간단 명료하게 융합시키면서 종결 처리 하는 것이 우리 문화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림에서는 겸재, 글씨에서는 추사 김정희의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최 실장은 “조선 성리학 이념이 주도하던 진경시대(1675~1800)에는 우리의 문화가 세계 제일이라는 자존 의식이 아주 높았다.”고 강조하면서 특히 우리 민족은 ‘요점 정리’를 하는 데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최 실장은 우리만이 갖고 있는 ‘요점 정리의 문화재’를 집중적으로 모으고 있으며 간송미술관에서 이뤄지는 연구와 전시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차원이라고 거듭 설명했다. 지난달 전시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준 것도 그러한 자긍심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자부했다. 전시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자 최 실장은 “(찾아준) 많은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온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며 웃는다. “2시간 넘게 기다리면서도 어느 누구도 짜증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전시를 무려 7번이나 본 사람도 있어요. 올 때마다 간송미술관 도록을 가지고 가서 친척들에게 나눠 주면 그분들이 다시 간송미술관을 찾고 그랬습니다. 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왔는데 기다리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여긴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 문화를 확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다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고 설명하는 아름다운 광경을 보기도 했습니다. 관람객 대부분이 찬란했던 진경시대로 돌아가게 하는 즐거운 자리라고들 표현해 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은 매년 5월과 10월, 봄과 가을 딱 두 차례만 전시를 한다. 1971년 ‘겸재 정선 서화전시회’를 시작으로 그 원칙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다. 특히 이를 통해 겸재와 추사에 관한 연구는 족탈불급(足脫不及)의 독보적인 경지에 도달했다. 겸재와 추사만 연구하는 이른바 ‘간송학파’(30여명)까지 생겨났을 정도니 말이다. “우리 미술관은 연구 중심의 박물관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재를) 수집·보존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대중에게 봉사하기 위해 전시하는 것이지요. 문화의 고향에 돌아오게 하는 서비스를 하는 것입니다. 전시에 중점을 두다 보면 연구가 안 되고 산만해지고, 그러면 전시를 보러 오시는 분들은 ‘괜히 왔나’ 하면서 다리만 아파합니다. 우선 연구에 집중한 다음 일목요연하게 전시를 해야 관람객에게 좋은 느낌을 선사할 수 있지요. 그래서 1년에 두번만 전시하는 겁니다.” 이어 요즘 세상이 쾌속과 안락 위주로 가다 보니 문화의 기반인 의식주마저 우리 것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들에게 우리의 것, 우리의 고향을 찾아볼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이라고 했다. 다음 전시에 대해 묻자 그는 “연구 중”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요즘에는 어떤 것을 연구하는지 물었다. “조선 왕릉에는 석상, 호석 등 조선시대의 문화를 오롯이 표현한 모습들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간직한 것들이지요. 진경시대의 석인들이 아주 사실적으로 조각한 덕에 시대적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척됐습니다. 조선 초기의 석상은 명나라와 비슷하다가 점차 조선 스스로의 문화를 표현하고 있지요. 또 거기에는 의궤가 담겨 있습니다. 현장은 물론 자료 조사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걸 발표하면 (기존의 내용들이) 뒤집어질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웃음). 바로 새롭게 쓰는 조선통사거든요.” 최 실장은 겸재에 이어 내년에는 추사의 종결편을 발표할 예정이다. 뒤이어 ‘왕릉 종결편’도 개봉하겠다는 의욕을 내보였다. 사학자로 올곧게 살아온 그의 진지한 모습에서 다음 작품이 사뭇 기대된다. 편집위원 km@seoul.co.kr ■ 고교 때 백아 김창현 선생 만나 조선 사대부의 한문·문화 섭렵 ●최완수 실장은194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 한학과 보학(譜學)의 대가였던 백아(白牙) 김창현 선생을 만나 한학에 빠져 조선 사대부의 한문과 문화를 모두 섭렵했다.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동국대 등에서 오랫동안 강의를 해 오다 지금은 연세대 대학원 강의만 하고 있다. 1965~1966년 국립박물관을 거쳐 1966년부터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추사집(1976), 금추사연구초(1976), 그림과 글씨(1978),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1993), 명찰순례 1,2,3(1994),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1998), 조선왕조 충의열전(1998),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1999), 겸재의 한양진경(2004),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1, 2, 3(2007) 등이 있다.
  • 태극전사 새 ‘보금자리’ 진천선수촌 27일 준공식

    태극전사 새 ‘보금자리’ 진천선수촌 27일 준공식

    한국 엘리트 체육의 새 요람 진천 국가대표종합훈련장(진천선수촌)이 1단계 사업을 마치고 마침내 문을 연다. 오는 2017년 2단계 사업까지 끝나면 진천선수촌은 세계적인 종합훈련장으로 거듭난다. 대한체육회는 27일 진천선수촌의 태극광장에서 김황식 국무총리와 박용성 대한체육회(KOC) 회장,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8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갖는다. 2009년 2월 첫 삽을 뜬 이후 2년 8개월여 만이다. 체육회가 태극전사들의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은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메카’인 태릉선수촌의 훈련·숙박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고 노후화(1966년 건립)돼서다. 게다가 태릉선수촌 인근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추가시설 확충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데 따른 것이다. 진천선수촌이 들어서는 곳은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회죽리 일대이다. 총 85만 6253㎡ 부지에 1840억원이 투입, 1단계 사업을 마쳤다. 진천선수촌에는 수영센터와 다목적체육관(농구·배구 등), 실내사격장, 실내 테니스·정구장, 조정·카누 등 수상종목 훈련장, 빙상장 등의 훈련시설이 들어섰다. 또 종합육상장, 투척필드, 다목적 필드(소프트볼·럭비·야구 등), 테니스·정구장, 클레이사격장, 크로스컨트리 트랙 등 실외 훈련시설도 갖춰졌다. 이와 함께 행정동과 체력단련장, 선수교육회관, 지도자·선수 숙소 등 훈련지원시설도 마련됐다. 아직 선수촌 주위에 변변한 숙소가 없어 훈련 상대(파트너)가 필요한 종목을 위해 200명 규모의 파트너 하우스도 들어섰다. 지난해 체육회가 지원한 국가대표 선수는 46개 종목 1378명이다. 이 가운데 태릉선수촌에서는 20개 종목 450여명이 훈련할 수 있었다. 나머지 26개 종목 900여명은 선수촌 밖에서 구슬땀을 쏟아야 했다. 1단계 사업으로 진천선수촌에서는 육상·사격·수영·테니스·정구·배구·농구·야구·소프트볼·조정·카누·럭비 등 12개 종목, 350명이 최신 시설에서 훈련하게 된다. 체육회는 내년부터 2017년까지 구암리 일대 59만 4000여㎡ 부지에 3300여억원을 들여 2단계 사업을 벌인다. 2단계 사업이 완료되면 진천선수촌은 총 37개 종목 1115명의 태극전사를 수용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종합훈련장이 될 전망이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충남 ‘으뜸 관광자원’ 집중 육성

    충남 ‘으뜸 관광자원’ 집중 육성

    충남의 국내외 으뜸 관광자원이 내년부터 관광상품으로 집중 육성된다. 충남도는 최근 도내 16개 시·군으로부터 최고(最高) 8개, 최고(最古) 7개, 최대(最大) 11개, 최장(最長) 4개, 유일(唯一) 13개, 특이자원 12개 등 모두 55개의 국내외 으뜸 관광자원을 접수받았다며 25일 이같이 밝혔다. 도는 심의를 통해 5개를 ‘우선 관광상품 육성대상 자원’으로 선정한 뒤 내년에 1억원을 들여 스토리텔링 및 새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마케팅을 지원해 경쟁력 있는 관광상품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분야별 주요 관광자원] ●최고(最高) ▲서산 해미읍성:원형보존이 가장 잘된 조선시대 병영성곽 ▲부여 백제금동대향로:국내 최고의 금속공예품 ▲태안 천리포수목원:국제수목학회가 인증한 수목원 ▲당진 함상공원:퇴역함정 활용한 동양 최초의 군함 테마파크 ●최고(最古) ▲아산 온양온천:1300년의 왕실온천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가장 오래된 국내 석탑 ▲부여 궁남지:국내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인공정원 ●최장(最長) ▲천안종합휴양관광지:371m의 유수풀 ▲보령 대천해수욕장:길 3.5㎞ 폭 100m의 최장 해수욕장 ▲청양 천장호 출렁다리:길이 207m ▲태안 이원방조제 희망벽화:길이 2㎞의 세계 최장 벽화 ●최대(最大) ▲천안 태조산 각원사:국내 최대 청동좌불상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동양 최대 기와집 ▲서산 천수만 철새도래지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국내 최대 미륵불 ▲금산 군북면:국내 최대 산벚꽃 군락지 ▲청양 칠갑산 천문대:국내 최대 구경 304㎜ 굴절망원경 ▲예산 예당관광지 ●유일(唯一) ▲천안 우정박물관:국내 유일 체신박물관 ▲공주 무령왕릉:삼국시대 유일하게 주인공이 밝혀진 왕릉 ▲연기 교과서박물관 ▲청양 장곡사 ▲예산 한국고건축박물관 ▲당진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국내 유일의 줄다리기 박물관 ●특이자원 ▲보령 냉풍욕장 ▲서산 황금산 코끼리바위 ▲계룡 국제선원 무상사 ▲금산 군북면 연리목:벚나무와 참나무가 합쳐진 나무 ▲서천 조류생태전시관 ▲당진 왜목마을:한 곳에서 일출·일몰 모두 감상
  • [책꽂이]

    ●문자메시지는 언어의 재앙일까? 진화일까?(데이비드 크리스털 지음, 이주희·박선우 옮김, 알마 펴냄) 영국의 언어학자인 저자는 문자메시지가 언어를 파괴한다는 주장에 맞섰다. 단어를 단축하는 데 능숙한 아이일수록 철자 시험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1만 5000원. ●몸으로 책읽기(명로진 지음, 북바이북 펴냄)방송인 겸 작가인 저자의 서평집. 조선 왕조에 대한 책을 읽고 왕릉을 찾고, 술에 관한 책을 읽고 술을 마시는 등 ‘몸으로’ 책을 읽은 기록이 재기 넘치는 문장에 담겼다. 1만 2000원. ●정진홍의 사람공부(정진홍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지난 10년간 500여명의 스승을 만났다는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 체 게바라, 반 고흐, 이순신, 송해 등 동서고금의 수많은 인물을 통해 성찰한 내용을 풀어냈다. 1만 5000원. ●토메이토와 포테이토(강병철 지음, 작은숲 펴냄) 해직교사 출신으로 공주공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저자의 청소년 소설. 1960~70년대 서울 변두리 중학교를 배경으로 시골에서 전학 온 주인공의 성장을 그렸다. 1만 1800원. ●퇴마록-국내편(전2권)(이우혁 지음, 엘릭시르 펴냄) 1994년 3권으로 나와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판타지 소설이 2권짜리 소장판으로 새롭게 발간됐다. ‘퇴마록 해설집’에 실렸던 용어 해설을 줄이고 문장도 가다듬었다. 각 권 1만 4800원. ●미치광이화가 IN에덴(김선도 지음, 돌판 펴냄)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며칠 뒤 전쟁을 펼친다는 내용. 고대와 현대를 넘나들며 흥미진진한 상상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순수한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이 시대의 선과 악, 과연 우리는 오늘 어디에 서 있는가를 묻는다. 저자가 현직 치과의사여서 더 눈길을 끈다. 1만 1000원.
  • [책꽂이]

    ●조선 전기 도자사(김영원 지음, 일조각 펴냄) 부제가 ‘분원 설치를 전후한 조선 전기 도자의 역사’인 데서 알 수 있듯 사옹원(司饔院)이라는 관청이 경기 광주에 도자 생산센터인 분원(分院)을 설치한 시기를 전후로 조선 도자의 양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폈다. 저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장. 3만 5000원. ●생각 조종자들(엘리 프레이저 지음, 이현숙·이정태 옮김, 알키 펴냄) 온라인 정치시민단체인 무브온의 이사장이 인터넷이 상업주의에 파묻히는 상황을 파헤쳤다. 구글은 2009년 말부터 개인 맞춤형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병원 이름만 입력해도 자신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나온다. 1만 5000원. ●현대 한국정치-이론, 역사, 현실, 1945~2011(손호철 지음, 이매진 펴냄) 부피가 895쪽에 이르는 손호철 서강대 교수의 ‘한국정치 연구 종합판’. 진보적 시각에 기초해 한국 현대 정치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3만 5000원. ●무용예술코드(김말복 지음, 한길아트 펴냄) 무용에 대한 이론을 100개 코드로 설명한 해설서.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인 저자는 무용의 역사를 이끈 인물,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한 춤, 무용과 관련해 일어난 현상 등에 따라 무용이론 코드를 분류했다. 2만 5000원. ●직설(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진보지식인들이 이 시대의 지성과 사회적 약자 등 38명을 만났다. 강기갑 국회의원,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방송인 김제동, 김영희 PD 등의 목소리가 담겼다. 1만 8000원. ●아시아의 왕을 만나다-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탐방기(황릉편)(김선회 지음, 김종택 사진, 천지인 펴냄) 왕릉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당시의 역사, 조경, 장례, 민속, 풍수문화가 복합된 문화유산이다. 평소 왕릉에 비상한 관심을 둬 온 저자가 중국, 일본, 베트남의 황릉을 답사했다. 1만 6500원.
  • 문경 체험형 전통시장 개장

    전국에서 처음으로 체험형 관광시장이 경북 문경에서 문을 열었다. 문경시는 29일 가은읍 왕릉리에서 ‘가은 아자개장터’를 개장했다. 32억원을 들여 기존 가은 5일(4, 9일) 전통시장에 다양한 체험시설과 편의시설을 보탰다. 시장 이름은 가은 출신으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에서 따왔다. 이곳에는 전통 대장간을 비롯해 방앗간체험장, 도자기체험·판매장,토속음식점 등이 들어섰다. 시는 퇴락한 전통시장을 관광형 시장으로 발전시키는 한편 주변의 석탄박물관과 철로자전거, 문경새재, 봉암사 등과 연계해 관광벨트화할 계획이다. 문경 김상화기자 shkim@seoul.co.kr
  • [도심 속 허파를 찾아서] 개성 넘치는 경남 도시숲

    [도심 속 허파를 찾아서] 개성 넘치는 경남 도시숲

    숲은 어디에 있어도 돋보이고 제 역할을 다한다. 일상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됐다. 여름 무더위에는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는 쉼터로, 야간에는 아늑한 휴식과 함께 걷고 뛰고 페달을 밟을 수 있는 숲은 도시인들에게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주변 시설과 절묘한 조화를 만들어주는 마력까지 발휘한다. 기피시설의 존재를 망각게 하는 ‘정화작용’뿐 아니라 주변의 가치를 높여주는 ‘소금’과도 같다. 경남의 ‘도시숲’은 또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진주 초전공원 숲은 도시의 녹색축이자 지역민의 여가생활 거점으로 부상해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김해 봉황동 유적지 도시숲은 소중한 유적의 가치를 높이면서 생활 속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쓰레기 매립장의 ‘상전벽해’ 초전공원은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7년간 진주의 쓰레기 매립장이었다. 악취와 쓰레기 운반 차량으로 민원이 끊이질 않던 대표적인 기피지역이다. 도심 변두리였지만 1995년 진양군과 통합돼 위치상 시의 중심권이 되면서 매립장 이전이 불가피했다. 진주시는 1996년부터 2005년까지 103억원을 들여 매립된 쓰레기 133만 7000t을 전량 이전했다. 쓰레기 운반에 15t 트럭 8만 9000대가 동원됐다. 매립지 자리는 그동안 불편을 겪은 인근 주민들을 위해 공원을 조성키로 했다. 전체 면적(13.8㏊) 중 7.8㏊는 공원, 6㏊는 체육시설이다. 진주의 첫 도시숲인 초전공원은 총 62억원을 들여 4년여만인 2009년 6월 개장했다. 초전공원 도시숲은 쓰레기 매립장 환경 회복과 남강변 자전거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입지적 특성 등을 고려해 숲과 잔디밭, 호수가 어우러진 친자연적인 공간으로 설계했다. 시설물을 최소화하고 공원 관통로를 설치해 시원한 시계를 확보했다. 관통로 주변에는 폭 5.5m, 길이 500m 메타세콰이아가 심어진 시간의 숲길을 조성했고, 사계절을 대표하는 꽃과 나무를 심은 사계절 정원도 눈길을 끈다. 8000㎡의 생명의 연못은 인근 하수종말처리장에서 고도처리된 물을 사용, 수중 식물을 통해 정화한 뒤 남강으로 방류하고 있다. 하수에 질소 성분이 많아 수초가 잘 자라는 데다 바닥에 진흙을 깔아 정화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했다. 또 연못 주변은 데크로 조성하고 분수와 폭포 등을 이용, 기포를 발생시켜 정화작용을 활성화시키는 등 환경친화성을 강화했다. 도시숲 조성에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도 활발했다. 메타세콰이아는 산림청 남부산림연구소가 기증했고 개인농장을 운영하는 한 시민은 수목 21종, 150그루(5000만원 상당)을 조경수로 내놨다. 진주시 녹지공원과 구본권 주무관은 “초전공원은 매립 방식이 아닌 쓰레기를 옮긴 후 숲과 호수가 있는 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면서 “남강과 연계해 휴식·체육·문화의 거점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적지·숲의 조화 ‘보기 드문 케이스’ ‘가야 고도’ 김해의 봉황동 유적지(사적 제 2호) 도시숲은 유적지와 숲을 조화시킨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형태다. 2005년 총 60억여원을 들여 조성한 숲에는 가시나무 등 130여종, 27만 6700여그루를 심었다. 잘 자란 나무들이 녹색의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준다. 국내 유적지 대부분이 땡볕 속을 걸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것과 달리 봉황동 유적지는 숲길을 따라 걷는 이색 경험이다. 경주처럼 관광객은 많지 않은 대신 가벼운 옷차림의 시민들을 만날 수 있다. 봉황동 숲은 도시숲을 넘어 김해 시민들에게 가야 역사의 자부심을 높이는 계기도 됐다. 봉황동 유적지에는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지배층의 집단 거주지인 봉황대가 있다. 김해시는 숲 조성과 함께 무분별하게 난립된 환경을 정비하고 가야시대 해상포구로 재현했다. 고상가옥과 움막, 망루 등을 설치하는 한편 여의각과 주변 산책로를 정비해 가야역사 복원 및 시민편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봉황동 숲은 가야 해상 무역의 영화를 간직한 해반천 및 수릉원·수로왕릉 등 김해의 주요 녹지축인 가야의 거리와 연계돼 경관이 뛰어나다. 봉황동 도시숲을 중심으로 잊혀진 역사인 가야 유적을 벨트화시켜 역사·문화·관광·교육 등이 가능한 문화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됐다. 지역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가야문화탐방’ 필수 코스로 가야 문화의 우수성을 체감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김해시 공원녹지과 이완수 주무관은 “숲이 조성되면서 봉황동 유적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면서 “유적이 생활의 공간으로 편입되면서 오히려 보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학습 및 체험의 기회도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진주·김해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新 베트남 기행] (하) 끝없는 남진정책이 낳은 사회상

    [新 베트남 기행] (하) 끝없는 남진정책이 낳은 사회상

    여정의 첫 기착지인 수도 하노이의 날씨는 무덥고 습했다. 중부의 고도 후에의 햇살은 모든 것을 숨 막힐 듯한 무시간의 정적 속으로 몰아넣는 강렬한 것이었다. 그러나 옛 월남의 수도 호찌민의 밤은 예상 밖으로 서늘했다. 상하의 나라 베트남의 날씨는 이렇게 지역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안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까지 장장 1750㎞에 걸쳐 길게 뻗쳐 있는 나라이니 이와 같은 기후 차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기후 차이가 서로 다른 물리적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으로 독특한 지역 문화와 전통을 일구어 낸 중요한 변인으로 작용했다. 10세기 경, 천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을 때 베트남의 영토는 홍하(紅河) 델타를 중심으로 한 북부에 국한되어 있었다. 중부에는 문화 전통이 다른 참파 왕국이 약 천년 동안 존속해 왔고, 남부는 앙코르와트에 수도를 두었던 캄보디아에 속해 있었다. 독립 왕조를 세운 이후 베트남은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가는 남진 정책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15세기 무렵 중부를 병합하고 이어 300년 뒤인 18세기에는 마침내 남쪽 기름진 메콩 강 델타를 영토에 편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북·중·남부를 포괄하는 베트남 최초의 통일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가장 큰 과제는 지방 분권화의 줄기찬 요구를 다독거리는 것이었다. “남북은 일가”라는 명제는 호찌민의 정치적 구호이기에 앞서 19세기 응우옌 왕조가 통치 이념으로 이미 강조했던 것이다. 응우옌 왕족의 건국이 1802년이고, 왕국이 프랑스의 식민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이 1859년이니, 전통시대 베트남의 통일된 역사는 실제로 반세기에 불과했다. 정치적 통일을 이룬 오늘의 베트남을 말하면서 사회문화적 혼종성(hybridity)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적으로는 ‘일가’를 이루었지만 북·중·남부 지역은 여전히 독자적인 지역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노이에서 중부 후에와 호이안을 거쳐 남부의 호찌민까지 종주하는 이번 여정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북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교문화가, 참파 왕국과 푸난(扶南)왕국이 있었던 중남부는 인도의 영향이 짙은 불교문화가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진다. 특히 남방문화에는 힌두교의 색채도 가미되어 에로틱한 힌두교의 비슈누와 가네슈의 신상도 호찌민의 역사박물관에서는 찾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혼재하는 서로 다른 문화 전통에 식민지 시대에 유입된 프랑스 문화가 뒤섞이면서 베트남은 한층 다채로운 하이브리드 문화를 창출해 냈다. 베트남의 건축물에서도 이 점을 엿볼 수 있었다. 하노이를 비롯한 북부에서는 폭이 좁고 긴 세장형의 토지 위에 3~4층으로 쌓아올린 튜브 하우스 스타일의 집들이 많이 눈에 띄지만 중부의 후에나 남부의 호찌민에는 그런 양식의 집은 그렇게 많지 않고 오히려 주황색 오지기와를 얹은 유럽풍의 집들이 종종 눈에 띈다. 중부의 고도 후에에 자리한 응우옌 왕조의 황궁 태화전은 중국의 자금성을 모방한 것이지만, 궁성의 외곽에는 유럽의 성채를 모방한 해자가 설치되어 있다. 후에를 가로지르는 향강(香江)의 북안에 산재해 있는 왕릉에서도 토착 양식과 외래 양식이 동거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응우옌 왕조의 2대 황제였던 민망 황제의 장중한 왕릉의 경우 건물은 중국식이지만 내정의 정원은 서양식이었다. 이 기묘한 절충과 조화는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가 선황제를 기려 건설한 화려한 카이 딩 왕릉에서는 독특한 예술미로 표출된다. 묘소로 오르는 109개의 계단 양편을 장식하고 있는 거대한 용의 형상에 압도된 관람객의 눈앞에 펼쳐지는 왕릉의 내부는 서양의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형형색색의 타일, 유리 및 녹색의 옥으로 장식된 화려한 벽면, 그 사이사이를 수놓고 있는 다양한 주제의 벽화, 그리고 거대한 천장화로 한 편의 만화경을 이루고 있다. 이런 독특한 혼성 양식의 건축물이 보존되어 있는 후에는 199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후에에서 다낭을 거쳐 호이안에 이르는 해안에는 백사장이 줄곧 이어진다. 넘실대는 짙푸른 바다와 고운 모래사장과 야자수 그늘이 피곤한 여행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해안을 따라 곳곳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리조트, 콘도, 호텔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특히 다낭의 해변에 건설되고 있는 휴양단지는 엄청난 규모여서 사회주의 체제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자본주의의 거센 물결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념과 실용주의의 이와 같은 절충 또한 하이브리드 문화의 한 단면이다. 글 사진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 국가문화재 30곳 ‘水難’… 경복궁 담장 붕괴·몽촌토성 일부 유실

    국가문화재 30곳 ‘水難’… 경복궁 담장 붕괴·몽촌토성 일부 유실

    지난달 27~29일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이미 알려진 흥인지문(동대문)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저인 이화장 이외에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몽촌토성 등 문화재들이 일부 훼손된 것으로 확인됐다. 윤보선 전 대통령, 작곡가 홍난파 등 역사적 인물들의 가옥과 조선시대 왕릉 등도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서울신문이 4일 입수한 문화재청의 ‘집중호우 문화재 피해 현황’에 따르면 국가지정문화재 30건이 집중호우 탓에 손상됐다.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종묘(사적 제125호) 영령전의 서문 북쪽 담장 7m가량이 붕괴됐다. 현재 보수공사에 들어갔지만 담장 아래엔 큼지막한 돌덩이들이 흩어져 있다.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경복궁(사적 제117호) 내 자경전 북측 담장 밑 부분 1.5m 정도와 종로구 와룡동에 위치한 창덕궁(사적 제122호) 의풍각 둘레 담장과 외곽 담장도 5m 가량씩 무너졌다. 종로구 홍파동 홍난파 선생 가옥(등록문화재 제90호)에는 화장실 2곳과 계단실이 훼손되고, 근대 화단의 대표적인 한국화가인 이상범 선생 가옥(등록문화재 제171호)에는 안방 처마 밑으로 빗물이 새어 벽면이 벗겨졌다. 윤보선 전 대통령 가옥(사적 제297호)은 안채 등에 누수가 발생하거나 서까래 등에 부식이 생겼다. 사적 제11호 풍납토성과 사적 제297호 몽촌토성은 각각 토성 사면이 유실됐다. 사적 제194호 헌릉은 인릉(조선 순조와 비 순원 왕후의 능) 봉분이 20㎡가량 내려앉았다. 천연기념물 제460호인 경기 포천 직두리 부부송에는 10m에 이르는 보호 철책이 파손됐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육안으로 봐서 누수현상이 발견되면 임시로 물 막는 공사를 하는 등 대비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글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사진 류재림·도준석·손형준기자 pado@seoul.co.kr
  • [저자와 차 한 잔] “광개토 대왕? 제국의 기틀 세운 太王입니다”

    [저자와 차 한 잔] “광개토 대왕? 제국의 기틀 세운 太王입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겠지만, 우리 역사의 큰 인물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이름들이 있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김구 선생…. 광개토대왕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8세에 즉위하여 39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고구려의 역사를 크게 바꿔 놓은 왕 중의 왕. 그래서 제국을 연 왕이라는 의미의 태왕으로 불린다. 그런 인물이다 보니 관련 서적도 많을 것 같지만, 뜻밖에 광개토대왕이 어떻게 시대를 바꿔 나갔는지 제대로 서술한 책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광개토대왕릉 비문’을 중심으로 한 연구서들이나, 터무니없을 정도로 신격화한 위인전류가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용만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 낸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역사의아침 펴냄)은 연구서를 넘어 대중을 향한 교양서라는 점에서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 책에서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닌 실체적 인물로서의 광개토대왕을 그리고 싶었다는 김 소장을 만났다. ●거품 빼고 시대 바꿔나간 과정 살펴 김 소장은 먼저 단호한 어조로 광개토대왕을 ‘대왕(大王)’이 아닌 ‘태왕(太王)’으로 불러야 한다고 역설한다. “대왕은 큰 업적을 남긴 임금에 대한 후세의 습관적 호칭일 뿐입니다. 반면 태왕은 중국의 황제나 유목제국의 선우, 칸과 같이 ‘Emperor’로 번역되는 제국의 지배자를 이르는 말이지요. 여러 금석문에 나오는 실체이자 고구려시대에 통용되던 용어입니다.” 광개토대왕에 대한 그의 관점은 ‘일반적 상식’과 상당히 궤를 달리한다. “많은 사람들이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왕, 또는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룬 왕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입견은 진정한 실체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광개토태왕의 가치는 정복군주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고구려의 체질을 바꾸고 제국을 열었다는 데 있습니다.” ●만들어진 영웅 아닌 왕의 고뇌 주목 그가 강조하는 제국이란 무슨 의미일까? “여러 종족들을 포괄하고 다양한 문화를 흡수해 재창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나라를 제국이라고 합니다. 고구려 역사에서 그 틀을 만든 왕이 바로 광개토태왕입니다.” 김 소장은 고구려 역사 전문가다.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역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훨씬 전부터 고구려는 늘 그를 따라다닌 화두였다. 지금까지 쓴 논문이나 책도 대부분 고구려에 관한 것이다. 그런 그도 광개토대왕을 소재로 한 책을 집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항상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기 때문에 어떤 관점을 선택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동안 알려진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그것과 다른 내용을 기술해야 한다는 점이 큰 부담이었지요.” 고민은 대중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환상을 어떻게 깰 것인가에서부터 시작됐다. 그가 그리고 싶었던 인물은 20세기에 ‘만들어진 영웅’이 아니라 인간적 고뇌도 하고 전쟁에 패하기도 하는 고구려의 왕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신화로 만들면 안 됩니다. 한 인간에 대한 기대의 틀을 만들어 놓고 기록을 거기에 맞춰 나가는 건 해악이지요. 저는 신화 속에 있는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제국의 경영자였던 광개토태왕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왜 정복에 나서야 했을까’와 같은 문제들을 파고들 수밖에 없었지요.” ●이제 고구려사도 세계사에 편입해야 고구려 연구자로서 김 소장이 바라는 궁극적인 바람은 고구려 역사를 한 단계 격상시키는 것이다. “이젠 고구려의 역사를 세계 역사에 편입시켜야 합니다. 로마사처럼 고구려사가 세계사에서 하나의 모델로서 정립되기를 기대합니다.” 이호준 편집위원 sagang@seoul.co.kr
  • 고고미술사학계 원로들 감정싸움 어쩌나

    고고미술사학계 원로들이 날선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감정 싸움으로까지 비화되는 양상이어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강우방(70) 일향한국미술사연구소장은 지난 11일 연구소 홈페이지에 ‘김광언 선생님께 올리는 글’을 실었다. 강 소장은 이 글에서 국내 1세대 고고학자인 삼불 김원용(1922~1993)에 대해 “젊은 나이에 한국미술사와 한국고고학 개론서를 썼다. (하지만) 깊이 연구한 적이 없어 대표적 논문이 없다. 그런 상태에서 나열식 개론서를 썼다는 것은 학문적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라고 비판한 뒤 “백제미술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무령왕릉 발굴도 하룻밤에 흙과 유물을 몽땅 가마니에 쓸어 담은 뒤 끝내버렸다.”고 공격했다. “(김광언 선생님은) 민속학자라서 잘 모르시겠지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유홍준(62) 명지대 교수에 대해서는 “답사기에 오류가 많고 올바른 해설이 없다.”, “연구에 게을러 대표 논문이 없다.”, “저서는 많지만 오류가 너무 많고 위작이 많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는 김광언(72) 인하대 명예교수가 한 일간지에 실은 투고문에 대한 재반론이다. 앞서 김 명예교수는 강 소장이 이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삼불 등을 비판하자 반론을 제기했다. 김 명예교수는 지난달 23일 “이미 삼불 선생이 ‘고고학도로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내가 잘못하였다’는 참회의 고백을 여러 차례 했는데 (강 소장이) 40년 전 일을 계속 되씹는 까닭이 무엇이냐.”, “정년이 코앞에 닿은 대학교수를 이웃집 아이처럼 ‘유홍준’이라고 내붙인 것은 도를 넘어선 타박이다. 선생이라 불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명예교수와 유 교수는 ‘김원용 사단’으로 통한다. 강 소장은 신랄한 실명 비판으로 유명하다. 두 원로가 발끈하는 갈등의 핵심에 삼불 김원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속으로야 어찌됐든 공적 토론의 장에서는 학문적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감정싸움 양상에 우려를 나타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이야기] (36) 삼척 궁촌리 음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이야기] (36) 삼척 궁촌리 음나무

    나무도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생명체인 이상 생로병사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수명을 다한 뒤에 저절로 스러지는 게 모든 생명이 맞이하는 섭리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과 보호가 보태진다면 더 오래 지켜 낼 수 있는 것도 분명하다. 나무가 사람의 마을에서 오랫동안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 사람이 나무를 지켜야 한다.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터 잡고 사람살이를 지켜 준 나무를 지켜 내는 건 곧 우리 사는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땅의 나무를 돌보기 위해 길을 재촉하는 많은 사람들이 늘어나는 건 그래서 고마운 일이고 나무의사라는 생소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고려 멸망사의 흔적을 간직 “땅속의 뿌리가 숨을 쉬어야 하는데, 이 나무는 뿌리 부분에 흙이 많이 덮여 있어서 불편했을 거예요. 세월이 오래 흘러서 이제는 스스로 적응한 듯하지만, 더 불편하지 않도록 보살펴 주어야 해요. 멀리 뻗어낸 바깥 쪽 뿌리를 편하게 해서 전체적인 생명력을 북돋워 주려는 거예요.” 강원 삼척 궁촌리 음나무 곁에서 포클레인을 동원해 작업에 열중하던 나무의사 이태선(38·솔뫼나무병원) 원장이 땀을 닦으며 한창 진행 중인 작업을 설명한다. 나무 뿌리가 숨을 편하게 쉴 수 있도록 공기 구멍이 있는 굵은 관을 촘촘히 박고, 논이었던 땅의 흙을 부엽토로 교체하는 작업으로 나무가 더 오래 살 수 있는 체력을 돋우는 일이라는 이야기다.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작업 상황을 점검하며 분주히 오가던 이 원장이 작업 기사들과 이야기를 바삐 나누는 틈에 이 마을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부녀회장 이금옥(66)씨가 찾아와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려 때의 공양왕이 살던 집에 있던 나무라고 해요. 나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지만, 그 집을 본 적은 없고,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만 들었지요.”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1345~1394)이 이성계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을 때 이 음나무 곁에 숨어들어 집을 짓고 살았다는 이야기다. 살해 위협의 공포에 시달리던 중 공양왕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삼척 궁촌리로 왔다. 그가 살 집을 지은 곳이 바로 이 음나무가 있는 자리였다. 당시에도 큰 나무였다고 하니, 이 나무의 나이는 1000살쯤으로 보아야 한다. 궁촌리 음나무는 근처의 공양왕릉과 함께 고려의 멸망사를 증거하는 중요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잡귀 잡신을 막아주는 신통한 나무 공양왕은 자신에게 다가올 불행을 예감한 듯, 악귀를 막아 주는 커다란 음나무에 기대어 자신의 거처를 지었다. 그가 음나무 있는 집에서 살며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내고자 한 데에는 까닭이 있다. 음나무는 죽음의 사자를 비롯한 온갖 귀신을 막아 준다는 오래된 믿음이 있어서 집안에 심고 기른 나무다. 여의치 않으면 음나무의 가지를 꺾어 대문이나 대청 마루 위에 걸어 놓기라도 했다고 한다. 귀신들이 도포자락이나 긴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담을 넘어 들어올 때 음나무 가지에 걸려 놀라서 되돌아간다는 생각이었다. 여느 나무와 달리 귀신의 옷자락이 음나무 가지에 잘 걸리는 건 촘촘히 돋아난 가시 때문이다. 가시는 초식동물의 공격을 막으려는 생존전략이다. 채 자라기도 전에 먹히기 십상인 음나무는 가지에 여기저기 가시를 내밀어서, 짐승의 접근을 막은 것이다. 하지만 1000년 가까이 살아온 궁촌리 음나무의 가지에는 가시가 전혀 없다. 이제 이 음나무는 초식동물이 다가와도 감히 꺾어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크게 자랐다. 굳이 가시를 내밀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몸피가 됐다는 이야기다. “이 나무가 아주 무서운 나무예요. 부러진 가지를 주워다가 집에서 불이라도 때면, 그 집안에 재앙이 생겨요.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도 그렇다니까요. 누가 아프다든가, 망한다든가, 꼭 안 좋은 일이 생기지요.” 나무를 바라보며 이씨는 이 음나무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이자 상징이어서, 마을에는 음나무 한 그루씩 안 심은 집이 없다고 덧붙인다. 정월 초하루에서 사흗날 사이에 날을 잡아 치르는 정월 당산굿과 오월 단오에 벌이는 단오굿이 죄다 나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정성이 가득 담긴 행사라고 한다. 단오굿은 특히 삼척시에서도 지원하는 큰 행사이기도 하다. ●나무 돌보는 건 마음 안식처를 돌보는 일 점심 시간을 좀 넘기면서 쉬는 시간 없이 계속된 부엽토 작업이 마무리됐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 원장은 곧바로 예정된 다른 나무 치료 작업 일정을 짚어 보고 떠날 채비로 발길을 재우친다. 떠나기에 앞서 잠시 이 원장은 나무의사의 신중한 눈길로 공양왕의 최후를 지켜 준 늙은 음나무를 수굿이 바라본다. 아픈 데나, 더 치료해야 할 곳이 없나를 짚어 보는 그의 그윽한 눈길이 마냥 따뜻하다. “사람 사는 곳에 나무 없는 곳은 없지요. 크고 오래된 나무들은 시골 마을의 수호목이라든가 당산목으로 사람들을 지켜 주는 상징이에요. 그래서 나무는 마음의 안식처이자 고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고향을 생각하는 누구라도 마을 어귀의 큰 나무부터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일 겁니다.” 결국 나무를 치료하는 건 곧 사람의 안식처를 돌보는 일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이 번득 다가온다. 듬성듬성 세월에 찢긴 가지를 드러낸 나무도 금세 흐뭇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본다. 오랫동안 나무가 사람에게 큰 안식을 제공했던 것처럼 이제는 거꾸로 사람이 나무의 안식을 돌볼 차례다. 나무의사 이태선 원장의 손길이 더 없이 고마운 까닭이다 글 사진 삼척 고규홍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강원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452. 삼척 시내 남쪽에는 동해 바다열차의 종점인 삼척역이 있다. 삼척역에서 바다가 내다보이는 아름다운 국도 7호선을 이용해 15㎞ 남짓 남쪽으로 가면 궁촌교차로가 나온다. 궁촌 방면의 나들목으로 나가서 좌회전하여 500m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유턴하듯 좌회전하여 100m 간다. 우회전하여 700m 더 가면 궁촌리 마을회관이 나온다. 회관을 지나자마자 우회전하라는 천연기념물 음나무 안내판이 나온다. 개울을 타고 200m쯤 가면 마을 길가에 나무가 있다.
  • 트래비 스토리> 시안(西安)…황제의 죽음을 함께했던 사람들

    트래비 스토리> 시안(西安)…황제의 죽음을 함께했던 사람들

    시안(西安) 방문을 앞두고 체크한 일기예보는 여정 내내 흐리거나 비가 올 것이라고 알려줬다. 여행객에게 ‘날씨 흐림’은 반갑지 않은 동반자임에 분명하다. 북서부에 황토고원이 위치하고 황하가 아니었다면 건조한 이곳에 하필이면 여행 시기에 맞춰 비라니, 이번 여행 운은 나쁘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시안에 도착하고, 워낙 건조한 지역이서 손님이 비를 몰고 오면 더 귀하고 반갑게 맞이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금세 우쭐한 기분이 됐다. 또 평소 같으면 아무리 진귀한 보물이 전시돼 있어도 화창한 날씨 탓에 괜히 손해 보는 기분이 들곤 했던 박물관 방문도 흔쾌히 즐기게 됐다. 글·사진 이지혜 기자 취재협조 중국국가여유국서울사무소 02-773-0393, 산시성인민정부, 시안시인민정부, 2011시안세계국제원예박람회 www.expo2011.cn, 대한항공 www.koreanair.com ◈ 여유(旅遊)는 여행과 관광을 뜻하는 중국어다. 중국어로는 ‘뤼요우’라고 발음한다. 중국국가여유국은 중국 중앙 정부에서 직접 운영하는 여행 관련 업무 조직이며, 서울사무소를 운영 중에 있으므로 이곳에 여행 관련 정보를 문의할 수 있다. 대한항공은 인천-시안 항로를 주 4회(월·수·금·토요일) 운항하고 있다. 병마용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진시황을 지키는 병마용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기병이고, 한경제의 왕릉인 한양릉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궁정악사와 무희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왜 이것에 대해 언급하는지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진시황은 무력을 통해 전국시대를 통일했으며, 강한 군대를 기반으로 한 통치체계를 확립했다. 특히 다른 국가와 달리 우위를 가진 기량이 다름 아닌 기병이었다. 한양릉의 주인인 경제는 한나라의 네 번째 황제로 국가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특유의 문화예술이 발달하던 시기의 황제다. 이때의 힘을 바탕으로 한무제는 실크로드를 개척하고 전성기를 누리고 됐다. 힘의 역사를 수호하는 병마용 “시엔양 가세요?” “아니요, 시안 가는데요.” 병마용 유적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하기에 앞서, 시안 출장길에 공항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언급하고자 한다. 탑승카운터 직원이 위와 같이 물었을 때 동북지역 리야오닝(요녕)성의 성도인 선양(瀋陽, Shenyang)을 묻는 줄 알았다. 인천공항이나 김포공항을 이용해도 서울 간다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임을 감안하면, 그 직원은 시엔양이 시안의 국제공항임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았을 듯하다. ‘시안’은 산시(陝西, 섬서)성의 성도이자 중국 서부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 한자 발음인 ‘서안(西安)’이라는 지명을 들으면 그나마 역사 시간에 배운 ‘서안사변(1936년 동북군 총사령관 장학량이 당시 국민당 총통이었던 장개석을 화청지에서 납치하고 감금했던 쿠데타)’이 떠오르는 이곳, 중국식 발음으로 ‘시안’이다. 과거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의 수도로 나라가 오래도록 평안하길 바라는 의미를 담아 ‘장안(長安)’이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수도를 비롯한 국가 경제·문화 중심이 동부의 베이징 등으로 옮겨온 것과 더불어 서쪽이 편안하라는 의미에서 ‘시안(西安)’이 됐다. 시안은 여전히 서부의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지만, 중부의 충칭(重慶)이나 남부의 광저우(廣州) 등과 같은 고층 빌딩은 찾아볼 수 없다. 흔히 ‘시안은 어디를 파도 유적이 나온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를 함부로 개발할 수 없고, 옛 건물들은 중소지방도시의 소박한 모습인 채로 수년이 흘러도 홀로 제자리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이는 그곳에는 넓디넓은 관중평야가 2,000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펼쳐져 있다. 왕조가 바뀌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아방궁이나 대명궁과 같은 황제의 권력이 있기에 가능했던 화려한 건축물들은 사라졌지만, 친숙한 중국여행의 이모티콘인 병마용과 무용(무희 등을 형상화한 인형) 등을 만날 수 있는 유적지들이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되어 준다. 눈에 보이는 엄청난 규모와 예스런 자태 등은 두 눈을 즐겁게도 하지만, 각각의 유물과 그것이 발견된 유적은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시엔양(咸陽)’은 시안의 동북부에 위치하며 시엔양국제공항은 시안 시내에서 약 1시간 거리다. 인천은 특수한 경우지만, 이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 공항을 건설한 이유는 시안 인근에 유적지가 워낙 많아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안과 시엔양국제공항 사이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발견한 유적지가 한양릉이다. 또한 시엔양은 진시황제가 다스린 진나라의 황궁이 위치한 곳이다. 시엔양은 관중평야에서도 위하의 하류 지역으로 여산을 끼고 있는 풍수지리가 좋은 땅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방궁은 시엔양 지역에 위치한 궁들 가운데 정무를 보는 정전(正殿)의 전전(前殿 )이다. 진나라의 시조는 본래 황하 하류 동해에 거주하던 동이족의 한 분파였는데, 후에 간쑤(甘肅)성의 동부로 이주해 유목민족 생활을 한다. 한족과 외모가 다르며 신체적으로 훨씬 체격조건이 우월한 편이었다. 역사서 <사기>에는 진시황릉의 지하궁전이 묘사돼 있다. 지상의 궁전을 본떠 만들었으며, 대량의 수은을 사용해 황하와 양자강을 조성하고 매일 진시황의 관이 중국 전역을 주유할 수 있도록 설비했다. 병마용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974년에 린퉁(臨潼)의 농민들이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병마용갱의 위치를 근거해, 인근 여산 토질에 수은 함량이 많은 점 등과 연계해 진시황릉의 위치를 파악하게 됐다. 오랫동안 밀폐된 공간에 있던 지하궁전 내의 수은이 공기와 접촉할 경우 대량의 독가스가 발생하기에 발굴을 미루고 있으나, 과학적인 조사에 따르면 그 내부의 모습이나 규모가 사기에 묘사된 것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병마용갱은 진시황릉과 1.5km 거리에 위치하며, 약 7,000여 개의 사람과 말의 토우가 매장돼 있다. 실제와 같은 크기로 제작됐으며, 같은 모습이 없고 핏줄이나 근육 모양, 표정 등까지도 세밀하고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병마용은 모두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궁전과 성의 문 위치 등도 동일하다. 이에 대해 동방을 숭상하는 종교를 가졌다거나, 동쪽 나라를 평정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 한양릉 병마용만 봐도 사람들은 진시황을 떠올린다. 서양의 드라큘라와 미이라만큼 동양의 대표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반면에 한양릉에서 출품된 도용(도자기 형태로 제작된 인형)의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50~60cm의 자그마한 크기에 팔도 없이 앙상한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금성과 경복궁을 크기만으로 비교할 수 없듯이, 한양릉의 도용 역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안을 찾는 이들에게 병마용뿐 아니라 한양릉도 꼭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한다. 중국의 문화를 꽃피운 한나라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재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한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나라를 먼저 알아야 하고, 동시에 한나라와 패권을 다툰 초나라를 알 필요가 있다. 진나라는 아방궁을 비롯해 수도 시엔양에 호화로운 성을 지었을 뿐 아니라, 지상의 궁전과 유사한 규모의 지하궁전도 건설했다. 동시에 북방민족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도 축조했다. 진시황릉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진시황이 즉위한 직후부터이며, 37년 동안 72만명의 인력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대규모 공사는 황실의 위엄과 통치력을 확보하는 데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진시황 사후에 진나라는 곧바로 멸망했다. 진나라의 멸망 후 천하를 얻기 위해 겨룬 이들은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다. 항우는 초반에 우세를 띠었는데, 진나라의 궁전은 물론이고, 병마용갱 등 유산을 모두 불태웠다. 병마용갱은 화재로 인해 내부를 지탱하던 기둥이 소실되면서 함몰됐고, 병마용 역시 심하게 훼손됐다. 다만 도굴의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이다. 지금도 병마용갱 박물관에 가면 병마용을 복원하는 작업이 한 쪽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병마용은 균열된 자국이 보인다. 일부는 복원하지 못한 것도 있다. 후학자들이 유방이 승리한 이유를 분석하는 데 있어, 평민 출신의 유방이 백성의 고초를 알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때문에 한나라 왕조 역시 되도록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 주는 데 항상 주의를 기울였다. 한양릉에서 발견된 부장품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실제 크기의 3분의 1 또는 4분의 1 크기로 제작돼 있다. 이는 실물 크기로 제작할 경우 백성의 고충이 너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황후의 능과 합장하고 있으며, 다른 왕조와 비교해 소박함이 느껴진다. 또 하나 눈에 띄는 특징은 무희나 악사 등 문예와 관련된 도용이 많다는 점이다. 병마용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황궁에서 필요로 하는 요소에 예인이 많이 포함돼 있다. 특히 한나라 시대의 무용은 궁정 의전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전문 악부가 민간 무용을 비롯해 고대의 의전 무용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서역과 서남 소수민족의 무용 또한 포함돼 있었고, 감정과 예술을 결합시키는 데 대해 관심이 높았다. 사람 도용 외에 동물 도용도 다양하다. 흥미로운 것으로 개보다 작은 크기의 돼지가 있다. 이 돼지는 쓰촨(四川) 지역 등의 토종 품종으로 육질이 훨씬 쫄깃쫄깃하고 맛있다고 한다. 이렇듯 한양릉에서는 궁의 의장군대뿐 아니라 생활용구 등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부장품이 다수 발굴됐다. ◈ 2011시안세계원예박람회는? 211시안세계원예박람회 (International Horticultural Exposition 2011 Xi’an, China)가 4월28일부터 10월22일까지 178일 동안 시안시 찬바 생태구에서 진행된다. 박람회 주제는 ‘천인장안(天人長安), 창의자연(創意自然)-도시와 자연의 화합 공생’이다. 장안은 시안의 옛 명칭인 동시에 ‘국가번영과 평안의 상징’이다. 마스코트는 시안의 시화인 석류를 형상화한 ‘장안화’다. 중국은 1999년에 쿤밍, 2006년 선양에서 세계원예박람회를 개최한 바 있다. 418만 평방미터의 부지에 장안탑, 창의관, 자연관, 광운문 등 주요 건축물과 5곳의 테마경관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관은 정자와 연못으로 이뤄진 우리 정원을 조성했다. 정자의 이름은 순천정이다. 조선관은 한옥의 양식과 사뭇 다른 모습의 조선가옥을 선보이고 있다. 언뜻 한옥처럼 보이지만 용마루 끝과 처마 끝에 장식하는 십장생 동물의 형상인 ‘어처구니’가 없는 점이 눈에 띈다. 조선관 내부에는 김정일화를 전시할 예정이다. 입장료 일반표 100위안(한화 1만8,000원), 지정일표 150위안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한국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한국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증조부 고종의 갑옷·투구 6월 日에 반환소송… 반드시 찾아오겠다”

    “증조부 고종의 갑옷·투구 6월 日에 반환소송… 반드시 찾아오겠다”

    “법정 소송을 통해 일본에 있는 증조할아버지(고종)의 투구와 갑옷을 반드시 찾아올 겁니다.” 대한제국의 상징적 적통을 이은 황사손(皇嗣孫·황실의 대를 잇는 후손) 이원(49)씨는 29일 조선왕실의궤 반환 소식이 전해지자 “다음 환수 목표는 왕실의 보물이 돼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총재이기도 한 그는 유행을 좇는 케이블TV 프로듀서(피디) 출신으로 2005년 황사손이 된 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6년째 전통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옛 문화 살리기에 노력해 왔다는 이씨는 “조선왕실의궤가 일본에서 돌아오면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고종의 유품을 돌려받기 위한 소송을 이르면 오는 6월 제기하겠다.”며 의지를 나타냈다. 영국 왕실의 결혼으로 세계가 떠들썩했던 이날 창덕궁이 내려다보이는 종약원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2005년 황사손이 된 뒤 6년간 어떤 일을 하고 지냈나. -제사를 계속 지냈다. 조선왕릉 40기의 제사와 황실의 5대 제향(조경단대제·종묘대제·사직대제·건원릉기신친향례·환구대제)에서 초헌관(제사 지낼 때 첫 잔을 올리는 사람)을 맡았다. 1년에 120여회 정도 된다. 600년 넘게 한 왕조의 후손이 애초 양식을 유지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그 과정에서 (일제에 의해) 말살된 대한제국 때까지의 문화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문화를 이미지로 복원해 내고 싶다. →그동안 성과가 있었나. -대표적인 것이 2008년 환구대제를 복원한 일이다. 일본이 침략 후 지금의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환구단(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을 없애고 군 장교들이 머무는 철도호텔을 지었다. 일본이 박아 놓은 말뚝을 빼는 것처럼 우선 이 문화를 복원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고증을 거쳐 2008년 제례를 되살렸다. 그러나 원래 터에 건물이 들어선 탓에 환구단 시설을 복원할 수는 없었고, 서울광장에 환구단을 세우려고 했는데 서울시가 긍정적으로 검토하다가도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오해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그렇다. 특히 몇 해 전 언론에 ‘황실문화원’을 설립하겠다고 얘기했는데 반발이 컸다. 문화원 이상의 정치적 세력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 종약원 회원이 500만명이다 보니 마음먹고 뭉치면 (정치 세력을)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다. 하지만 혼란스러울 수 있어 안 한다. 순수한 의미로 문화를 찾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황실의 무능함 탓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이유로 후손들에게 냉소적인 국민도 많다. -대한제국은 대비를 못 해서 망한 나라가 맞다. 그럼 무엇 때문에 망했는지 정확히 역사를 밝혀서 후대가 그 사실을 토대로 50년, 100년을 만들어 가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제국 역사는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왜 지금 대한제국의 문화·역사를 복원하고 기억해야 하나. -현재 상황이 나라를 빼앗겼던 100년 전과 닮아서다. 우리는 항상 주변 국가가 부강할 때 침략당했다. 이제 문화로 당할 수 있다. 성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봐라. (대한제국의 역사가) 아픔의 역사이기 때문에 더 기억한다. 왜 나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 펼쳐놓고 알아봐야 한다. →정부도 문화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부족한 점을 느끼나. -그렇다. 예컨대 문화재청은 ‘살아 있는 궁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궁이 되려면 그 안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가 창덕궁 낙선재에서 외국인과 학생들을 직접 만나 얘기하면 얼마나 생생하겠나. “내 할아버지가 나라를 제대로 못 지켜서 아들인 영친왕이 일본에 끌려 가셨다. 그분이 사셨을 때 왕자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얘기를 직접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런 내용 등을 담은 ‘낙선재 활용 방안’을 5년 전부터 문화재청과 청와대에 계속 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문화재 위원들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황사손이 들어와서 궁을 활용하느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재산인데…” 하는 논리를 폈다. →피디 경험을 살려도 흥미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자료 속 역사를 드라마로도 직접 제작하고 다큐멘터리로도 만들 것이다. 아주 고급스러운 왕실 문화와 의복, 관습, 혼례, 제례 등 진짜 역사를 담아 만들기 위해 준비해 왔다. 이것을 해외로 수출하면 ‘대장금’처럼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 대한제국을 들여다보면 이야깃거리가 엄청나게 많다. 지난해 (고종의 고명딸의 삶을 다룬) 소설 ‘덕혜옹주’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왜 대한민국 국민은 여기에 감정이입을 할까. 우리도 자랑스러워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일본에 있던 조선왕실의궤가 국내로 돌아오게 됐는데, 문화재 반환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지난해 10월쯤 혜문 스님이 찾아와 놀라운 얘기를 했다. 증조부인 고종의 투구와 갑옷 등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누군가 황실에서 훔쳐 갔거나 도굴당한 물품이 (문화재 수집가인) 오구라 다케노스케에게 넘어갔고 이를 물려받은 오구라의 아들이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얘기였다. 사무라이 문화가 남아 있는 일본이 제후국을 침략해 전리품으로 빼앗는 대표적인 것이 (그 나라 왕의) 투구와 갑옷이다. 그런 의미로 도쿄박물관에 보관된 것이다. 치욕적인 일이다. 나에겐 할아버지 얘기였기에 너무 화가 났다(침묵). 한 개인이나 스님 한분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문화재청이 나서면 더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혜문 스님은 문화재청 관계자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고 하더라. 그러나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스님께 물었더니 문화재 반환 운동을 하라면서 “나라가 안 움직이는데 직계손이니까 소송을 해 보라.”고 권했다. 할아버지의 투구와 갑옷을 찾아와서 환구단에 놓고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게 내가 할 일이다. →소송도 할 계획인가. -물론이다. (다음 달로 예상되는) 조선왕실의궤 환수 이후 도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려고 준비 중이다. 애초 3월 중순에 일본에 가 도쿄박물관장을 만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다. 어려움을 겪는 국민에게 가서 “내 할아버지의 투구와 갑옷을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직계손이 소송을 한다면 문제화·이슈화될 것 같다. 그 이후 혜문 스님이 본인이 쌓아온 노하우를 토대로 분위기를 일으킨다면 찾아올 수 있을 듯싶다. 일본이 바로 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못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 국민이 어떻게 느낄까.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조선왕실의궤가 반환된다. -왕실의궤가 돌아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의궤 안의 그림을 밖으로 꺼내는 것이다. 자료에서 어떤 가치를 끄집어내 지금 시대에 재현해 내느냐 하는 점을 고민해야 한다. 의궤에는 모든 왕실의 행사가 기록돼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행사는 매우 화려하고 세밀한 문화적 볼거리요, 예술이다. 궁에서 이런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복원해야 한다. 문화재를 가지고 와서 다시 책장이나 박물관에만 넣어 둬서는 안 된다. 글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30일 오전 7시와 오후 7시 케이블 채널 서울신문STV의 ‘TV 쏙 서울신문’ 방영 ■ 이원씨는 누구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9남 이충길씨의 맏아들이다. 부모가 말하지 않은 탓에 어린 시절 출생에 대해 모르고 자랐다. 이름도 왕실 이름인 ‘원’ 대신 ‘상협’을 썼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기 전 아버지가 이씨를 데리고 창덕궁 낙선재를 찾아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에게 인사를 시켰고 이 자리에서 집안사에 대해 처음 들었다. 미국 뉴욕기술대(NYIT)에서 방송학을 전공한 뒤 유명 케이블방송사인 HBO에서 프로듀서(피디)로 일하다가 6년 만에 귀국했다. 광고회사인 금강기획에서 5년간 일했고, 케이블 채널인 뷰티TV 설립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케이블 채널인 현대방송 피디와 현대홈쇼핑 본부장 등을 지내며 직장인으로 나름의 꿈을 키워 갔다. 황실의 상징적 적통을 이을 수 있다고 직감한 것은 2002년부터다. 당시 한 출판 기념회에서 삼촌인 이구 황태손을 만났는데 영어에 능통하고 국제적 감각을 지닌 이씨에게 호감을 보였다고 한다. 이씨는 2005년 7월 후사가 없었던 황태손이 숨을 거두면서 자신을 양자로 들여 법통을 잇도록 부탁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삶은 이때부터 180도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1200년 만에 깨어난 ‘당나라 공주’ 얼굴 보니…

    290년 간 중국 대륙을 호령했던 당 왕조의 공주가 현대과학 기술을 통해 얼굴이 복원됐다. 618년 당나라를 건국한 제1대 고조황제(이연)의 5대손 수셴 공주(이추이)가 땅에 묻힌 지 1200여년 만에 복원돼 세상에 그 모습이 공개됐다고 중국의 신징바오가 최근 보도했다. 수셴 공주는 병으로 25세 꽃다운 나이에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것으로 전해진다. 2001년 11월부터 2년 동안 대대적으로 출토가 행해진 당나라 왕릉 180곳 가운데 수셴 공주의 능도 포함됐다. 능에서 수셴 공주는 화려한 왕관을 쓴 유골상태로 발견됐다. 금과 구리, 철 뿐 아니라 진주, 호박, 터키석, 마노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왕관은 당시 수셴 공주의 권력을 가늠케 했다. 장시사범대학 과학자들은 2002년부터 무려 7년 동안 수셴 공주 얼굴 복원에 힘써, 3D 복원기술을 이용해 두개골, 얼굴뼈, 턱뼈 등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현대기술로 깨어난 수셴 공주는 둥근턱을 가졌으며 살짝 위로 올라간 눈꼬리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통통한 입술과 넓은 이마로 복스러운 인상을 가졌을 것으로 파악된다. 수셴 공주의 사진은 지난 15일(현지시간) 열린 국제 디지털고고학 학회에서 전격 공개됐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길섶에서] 환상/이춘규 논설위원

    초등학교 고학년 때 학교에서 걸어서 1시간 이상 걸리는 야트막한 산으로 소풍을 갔다. 고향집에서도 보인다. 드넓은 들판이 시작되는 곳에 능선들이 성곽처럼 이어져 있다. 그때 산 정상과 능선에서 보았던 거대한 무덤들은 수수께끼였다. 옛 왕릉일지 모른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오랜 세월 정말 왕릉인지가 궁금했다.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드디어 며칠 전 산에 올라가 봤다. 커다란 무덤들은 그대로 있었다. 새로 세워진 비석이 많았다. 한자·한글로 비문들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무덤 주인의 생전 신분과 사회 공헌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다는 내용이 많았다. 무덤 주인은 그동안의 상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분들도 아니었다. 왕릉도 없었다. 이장·면장·기초의회 의장·지방관리 등이 주인공이었다. 조금 특별한 이웃의 무덤이었다. 40년 이상 간직했던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탓에 마음속의 환상을 스스로 깨버렸다. 환상은 깨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 좋다는데….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외규장각 도서는 국보급… 세계기록유산 등재 가능”

    “외규장각 도서는 국보급… 세계기록유산 등재 가능”

    “절반의 성공에 불과하죠. 이것조차 20년 동안 각계의 노력이 있어서 겨우 가능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더욱 지속적이고 더욱 끈질기게 반환 요구를 펼쳐야 합니다.” 지난 2월 문화재청장에서 물러난 이건무(64) 용인대 문화재대학원장은 오는 14일 한국에 들어오는 외규장각 도서를 ‘절반의 성공’으로 규정했다. 불과 두달 전까지 외규장각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그다. 미진한 부분에 대한 아쉬움, 앞으로 해야 할 과제 등이 더욱 크게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11일 서울 상도동 한 찻집에서 만난 이 원장은 “독도 문제에서 흔히 쓰이는 개념인 ‘실효적 지배’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외규장각 도서는 실질적으로 우리의 것이 명백하며, 병인양요 시기의 약탈품이라는 사실이 국제적으로도 분명한 만큼 우리가 잘 보존하고 활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외규장각 도서는 국가와 국민 모두의 문화재라는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연구자의 관점에서 학술 자료로만 접근한다면 우리가 국민적 열망 속에 이를 지켜 낼 수 있는 힘도 그만큼 약해집니다. 전문적 지식이 없더라도 누구나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무궁무진한 가치를 알리고 전시도 늘려야 합니다.” 이 원장과 함께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둘러싼 ‘쟁점’ 10가지를 짚어 봤다. ① Q. 외규장각 도서 가치는. A. 국보급 요즘으로 치자면 정부 영상기록물이나 마찬가지다. 세밀한 그림이 있고, 그에 대한 꼼꼼한 기록을 담아 놓았다. 조선 왕조의 우수한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정보 자료다. 예컨대 당시의 복식이나 왕릉 조성 과정·공법 등을 알 수 있다. 역사 속 어느 나라, 어떤 왕조에서도 볼 수 없는 소중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학문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는 물론, 그 자체가 이미 국보급 문화재이다. ② Q. 국보 지정은 가능한가. A. 어려울 듯 소유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보로 지정하는 것은 내부적으로도 법적 논란이 일 수 있다. 프랑스와 외교적 논란도 예상된다. ③ Q. 그렇다면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A. 가능 개인적으로는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은 가능할 것으로 본다. 이미 2007년 조선왕실의궤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시키지 않았나.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④ Q. 임대 조건은. A. 5년마다 갱신 우리 정부는 조건 없는 반환을 원했으나 아쉽게도 좌절됐다. 5년마다 임대 계약을 갱신하는 형식의 영구 임대다. 반환이 아닌 임대, 그것도 5년마다 프랑스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지라 자존심이 상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중요한 문화재를 일단 확보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각도로 반환 요구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 ⑤ Q. 대여를 반환으로 바꿀 가능성은. A. 끈질긴 노력 필요 독도의 영토 분쟁을 시도하는 일본에 맞서는 것은 1회적인 이벤트나, 또 다른 독도 개발 같은 것이 아니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높이는 방법은 다른 나라 국민들, 세계 지성에 독도의 역사, 현재 등을 정확히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외규장각 도서도 마찬가지다. 외규장각 도서가 어떻게 프랑스로 가게 됐는지, 대한민국에 어떤 의미를 지닌 문화재인지,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반환을 염원하는지 등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지속적이고 아주 끈질기게…. ⑥ Q. 어떻게 활용해야 하나. A. 좀 더 많은 국민이 볼 수 있게 이미 서울대 규장각 수장고에 조선왕실의궤가 많이 있다. 조선 왕실의 풍속, 행정, 건축, 미술 등 풍부한 학술적 가치를 담고 있다. 하지만 문화재는 더욱 많은 국민들이 직접 누리고, 감동하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활용이다. 이번에 돌아오는 외규장각 도서를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7월부터 중앙박물관에서 외규장각 도서 특별전이 열리는데 좀 더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전시해야 한다. ⑦ Q. 다른 문화재 ‘볼모론’ 진실은. A. 어불성설 2015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외규장각 대신 우리의 다른 문화재가 볼모로 잡힌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불성설이다. 외규장각과 비슷한 가치의 다른 문화재와 바꾼다는 등가 교환설도 낭설이다. 2015~2016년 상징적으로 외규장각 도서 일부가 프랑스로 건너가 전시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와전된 것 같다. ⑧ Q. 문화재 해외 유출 실태는. A. 주먹구구식 파악 약 12만점 정도가 해외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는데, 솔직히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진 실태 파악이다. 외국 박물관 수장고를 낱낱이 들여다보기 어려우니…. 유출 경로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난관이었다. 약탈 문화재인지, 합법적 거래를 통해 나간 것인지 확인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막혔다. 예전에는 개인들이 선물로도 많이 줬으니까…. 변명하자면 문화재보호법이 만들어진 지 50년밖에 되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⑨ Q. 앞으로 대응 전략은. A. 투 트랙으로 다음 달 문화재청에 해외문화재 환수를 전담하는 부서가 신설될 예정이다. 내가 있을 때 예산 등을 확보했다. 그동안 기존 국제교류과 1.5명 정도가 담당하던 일을 전담 부서가 생김으로 해서 더욱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진행이 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해외 문화재 환수재단’ 같은 것을 만들어 민간이 주도하되,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투 트랙(two track) 방식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10 Q. 외국은 유출 문화재 어떻게 다루나. A. 佛·伊는 돌려받아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에 빼앗긴 문화재를 모두 돌려받았다. 당시 1870년 보·불 전쟁 때 프러시아가 약탈한 것까지 소급해 반환받았다. 이율배반적이다. 이탈리아 정부는 자국이 보유한 문화재를 해당 박물관에 ‘장기 대여’ 하는 것을 조건으로 지난해 1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 미국 각지의 박물관으로부터 총 96점의 문화재를 돌려받았다. 국력의 크기에 비례하는 측면도 있지만 당장은 민·관이 함께 힘을 모아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절실하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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