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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육대, ‘한라에서 백두까지’ 통일염원 등반

    삼육대, ‘한라에서 백두까지’ 통일염원 등반

    삼육대학교(총장 김성익)는 개교 112주년과 남북 화해 분위기를 기념해 ‘통일 청년이 간다 –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주제로 남북한 최고봉을 등반했다고 18일 밝혔다. 김성익 총장과 김용선 학생처장, 재학생 25명은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한라산과 백두산을 올라 한반도 평화 통일을 염원했다. 남북한이 평화로 다시 하나 됨을 기원하고, 한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취지다. 등반대는 한라산에 오를 때 폭우로 인해 출입이 통제돼 삼각봉 대피소에 머무르기도 했지만, 중도 탈락 없이 전원 무사히 등정에 성공했다. 백두산에서는 맑게 갠 날씨 속 천지의 장엄한 풍광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길렀다. 또한 이들은 6.25 전쟁 당시 끊어진 압록강 철교를 보고, 압록강에서 북한을 조망하며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간접경험했다.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 장군총, 오회분오호묘 등 고구려 문화유산도 답사하면서 역사관을 길렀다. 김 총장은 함께 한 학생들에게 통일의 중요성과 영향력 등을 강조하며 조국의 평화 통일을 염원하고, “한라에서 백두까지 그리고 땅 끝까지 나아가려는 포부를 가져달라”고 강조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이수경 부총학생회장(유아교육과3)은 “남북한 화해의 바람이 통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등반을 준비했다”며 “한반도의 긴장관계가 완화돼 육로로 백두산에 다시 한 번 오르고 싶다”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공양왕 3부자 교살한 태조, 삼화사서 수륙재 열어 왕생 기원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공양왕 3부자 교살한 태조, 삼화사서 수륙재 열어 왕생 기원

    삼척은 삼국시대 초기 실직국의 중심이었다. 이 나라는 102년(파사왕 23) 신라에 병합됐고 장수왕의 고구려에 함락되기도 했다. 신라는 505년(지증왕 6) 이 지역을 되찾아 실직주라 했고 757년(경덕왕 16) 삼척군으로 개칭한다. 고려시대엔 척주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 삼척은 수도권에서도 영동고속도로와 동해고속도로를 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삼척은 오지의 이미지가 강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을 폐위시켜 삼척으로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이성계 세력은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내세우면서 ‘가짜 왕을 폐위시키고 진짜 왕을 세워야 한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1389년 신종의 7대손 정창군 왕요를 즉위시켰으니 곧 공양왕이다. 하지만 공양왕도 결국 이성계 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다. 공양왕은 1392년 7월 12일 이성계의 사저에서 술자리를 갖고 있었다. 이때 배극렴이 왕대비에게 폐위를 청했고 공양왕은 왕위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공양왕은 원주로 보내졌고, 이성계는 17일 즉위한다. 사흘 뒤인 20일자 태조실록에는 ‘왕요를 공양군으로 삼아 간성군에 두고 요의 아우 우는 귀의군으로 봉해 마전군에 두어 왕씨 제사를 주관하게 하며, 전조 왕대비 안씨는 의화궁주로 삼았다’는 대목이 보인다. 공양왕을 공양군으로 격하하고 원주에서 다시 간성으로 보내기는 하지만 ‘세상이 바뀌는 마당에 관대한 은혜를 베풀고자 한다’는 즉위교서의 정신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은 듯하다. ●조정 공론 후 전국의 왕씨 후손들 대거 살육 하지만 이성계의 측근들은 공양왕을 비롯한 왕씨들을 잠재적 화근으로 보고 있었다. 그해 9월 대사헌 남재 등은 ‘만일 무뢰배들이 왕씨를 구실로 삼아 난을 일으키려 한다면…’이라는 이유를 들어 ‘원컨대 모두 강화도와 거제도에 거처토록 하여 미리 방비하소서’라고 건의한다. 그런데 1394년(태조 3) 1월 참찬문하부사 박위가 연루된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박위가 동래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을 맹인 점술가에게 보내 “전조 공양의 명운이 우리 주상 전하와 비교해 누가 낫겠는가. 또 왕씨 가운데 누가 명운이 귀한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처벌은 전조의 왕실 인사 전체로 확대됐다. 이 사건 이후 형조는 ‘공양군을 비롯한 왕씨들을 섬에 안치하는 것은 물론 대역죄에 속하는 만큼 제거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청하게 된다. 그러자 태조는 경계의 대상으로 삼았던 왕씨들을 귀양 보내는 결정을 내린다. 간성의 공양군 삼부자도 삼척으로 옮겼다. 이후 태조는 왕씨의 운명을 조정의 공론에 맡겼고, 의견은 곧바로 왕씨에 대한 ‘처분’으로 모였다. 조정은 중추원부사 정남진과 형조의랑 함전림을 삼척에 보냈다. 형조전서 윤방경과 대장군 오몽을은 강화, 형조전서 손흥종과 첨절제사 심효생은 거제로 갔다. 삼척의 공양왕과 두 아들은 4월 17일 교살됐다. 15일과 20일에는 각각 강화와 거제의 왕씨들이 바다에 던져졌다. 이어 전국의 왕씨 후손을 모두 처형토록 했다. 이후 이성계의 태도는 흥미롭다. 왕씨를 대거 살육하고 3개월이 지난 1394년 7월에는 금으로 ‘법화경’을 사경해 내전에 펼쳐 놓고 읽었다. 이어 ‘수륙의문’(水陸儀文)을 판각해 ‘법화경’과 함께 강화에서 가까운 개성 관음굴과 삼척 삼화사, 그리고 견암사에 내렸다. 견암사는 거창 우두산의 고견사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태종 때 조성된 공양왕릉 석호, 문·무신상 등 갖춰 태조는 이듬해 2월부터 세 사찰에서 수륙재를 열도록 했다. 수륙재란 원통하게 죽어 물과 육지를 헤매는 외로운 영혼을 위로하는 불교의식이다. 수륙의문은 수륙재의 의식 절차를 적어 놓은 문서를 말한다. 자신이 강화와 삼척, 거제에서 살해한 왕씨들의 명복을 빌고자 했다. 그러니 삼화사 수륙대재는 공양왕 삼부자의 왕생을 기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태조의 집안과 삼화사는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세종실록에는 ‘전 현감 김계가 효령대군을 통하여 아뢴 이야기’라면서 ‘삼척의 노인들이 서로 전하되, 삼화사에 간직된 금은자경(金銀字經)은 목조께서 손수 쓴 불경’이라는 대목이 보인다. 이안사가 삼척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 곧 이성계의 5대조 이양무와 부인 삼척 이씨가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무덤인 준경묘와 영경묘는 지금 삼척의 태백산 동쪽허리에 남아 있다. 공양왕릉은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맹방해수욕장과 대진항, 남쪽으로는 초곡항과 장호해수욕장이 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언덕에 남서향을 하고 있는데, 그 동쪽 너머는 휴양객들이 많이 찾는 궁촌해수욕장이다. 돌계단을 오르면 네 기의 무덤이 나타난다. 오른쪽의 호석을 두른 무덤이 공양왕릉이다. 나머지 두 기는 왕자의 무덤, 다른 한 기는 왕의 시녀 혹은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한다. 무덤에 오르면 남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태백준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름대로 좌청룡, 우백호를 제대로 갖춘 명당인 듯하다. 하지만 무덤에 석물(石物)은 보이지 않는다. 공양왕릉은 경기 고양시 원당동에도 있다. 공양왕과 부인 순비의 무덤으로 알려진다.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재위 16년인 1416년 공양군을 공양왕으로 봉하면서 새로 조성한 것이다. 고양의 공양왕릉은 삼척과 달리 무덤 앞에 비석과 상석, 석등, 석호, 문·무신상이 늘어서 있다. 석호, 곧 돌호랑이는 전통적인 고려 양식이면서도 조선 태조 건원릉의 그것과 닮아 있다고 미술사학자들은 설명한다.삼화사는 642년(신라 선덕여왕 11) 창건설이 전한다. 자장이 당나라에서 돌아온 뒤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黑蓮臺)를 창건했는데 이것이 삼화사의 전신이라는 것이다. 이후 화재와 중건을 이어 오다가 1907년에 일본군이 의병이 머물렀다는 이유로 불을 질러 대웅전을 비롯한 200칸 남짓한 당우가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공양왕 제향 대상에 포함돼 ‘수륙재’ 막 내려 동해 시내에서 삼화사로 들어가는 길 주변에서는 거대한 규모의 시멘트 광산과 공장이 우선 눈에 띈다. 하지만 삼화사가 있는 무릉계곡에 접어들면 그야말로 선계와 같은 경치가 펼쳐진다.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던 사찰처럼 자연스럽다. 하지만 지금의 삼화사는 시멘트 공장 부지에 있던 절을 1979년 옮긴 것이다.삼화사는 공양왕의 고혼을 위로하고자 베푼 국행수륙도량(國行水陸道場)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삼화사 수륙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 초기 삼화사에서는 공양왕의 초상을 제단에 올려놓고 수륙재를 올렸다. 고려시대부터 남아 있던 초본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화사의 공양왕 수륙재는 조선왕조가 공양왕을 복권시키고 전 왕조 제향 대상에 공양왕을 포함시키면서 자연스럽게 막을 내린 듯하다. 하지만 삼화사 수륙재는 소멸되지 않고 대상을 한정 짓지 않은 불교의식으로 오히려 확대될 수 있었다. 글 사진 사진 dcsuh@seoul.co.kr
  • [시론] 주 52시간, 문화가 있는 날의 자식 생각/이용관 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

    [시론] 주 52시간, 문화가 있는 날의 자식 생각/이용관 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

    아이들을 키워 본 아버지는 알 것이다. 빠르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늦어도 그 무섭다는 중2부터 이런저런 이유로 자식들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을. 더불어 자식들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빈도는 늘어만 가는 것을. 무언가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할 때 중요한 의논 상대가 부모가 아니라 친구이거나, 설사 부모라 해도 그게 엄마이지 아버지가 아닌 대목에서도 그렇다. 이러려고 자식을 낳아 키웠나. 낳아 키웠다는 말이 가당키는 한가.딸아이가 고1 때 심하게 다툰 적이 있다. 오랜만에 공연장에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를 본 다음이었다. 내 의도는 간만에 공연이나 공부 이야기, 혹은 아이의 고민도 들어주며 부녀 간 추억에 남을 만한 시간을 보내자는 데 있었다. 어렸을 때 원작도 봤으니까 둘을 비교하며 예술가의 상상력이란 어떤 것인지, 예술가들이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 주는지 등을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의 바람은 딴 데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가 선수를 쳤다. “아빠, 나 운동화 사 줘.” “얼만데?” “○○만원.” “무슨 그런 비싼 운동화가 다 있어?” 그때부터 대화는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거칠어졌다. ‘역대급’ 추억을 만들자던 나의 꿈도, 운동화를 ‘득템’하려던 아이의 노림수도 물거품이 돼 버렸다. 이제는 아이들이 커서 사회에 나가 있다. 그래도 서운한 순간은 여전히 있다. 대화는 엇나가기 일쑤다. 하여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주 어린 시절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공연장, 미술관, 영화관도 좀더 다녔으면.’ 아마 그랬다면 지금보다 공감대가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 어느 순간이 지나면 그게 잘 안 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새벽 출근 때도 늦은 밤 퇴근 때도 보이는 것은 언제나 아이들이 자는 모습이었으니까. 우리네 아버지들의 삶이란 그런 식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보내 버린 시간은 바로 우리 아이들의 성장기였다. 결국 아이들을 키운 것은 친구처럼 가까운 엄마이지 절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공연 관람의 장애 요인을 조사해 보면 늘 ‘경제적 부담’과 ‘시간 부족’이 가장 높게 나온다. 이런 답은 이제 줄 것으로 기대한다. 우선 주 52시간 근무가 이달 시작됐다. 기업이 어려워진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이는 시대의 흐름이다. 주당 35시간인 프랑스 같은 나라도 있다. 굳이 비싼 티켓을 사지 않아도 좋은 공연이나 전시가 사방에 널려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4년 시작된 ‘문화가 있는 날’이다. 국민이 일상에서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 다양한 문화 혜택을 제공하는 정책이다. 홈페이지(www.culture.go.kr)에 들어가 조금만 둘러보면 무수히 많은 무료 공연과 전시를 찾을 수 있다. 도서관에서는 대출 권수를 늘려 주고, 경복궁 등 4대궁과 종묘, 조선왕릉 등은 무료 개방한다. 직장인을 위해 일부 문화시설은 야간 개방한다. 집이나 일상 공간 가까이에서 문화를 즐기자는 취지로 시작된 캠페인 ‘집콘’은 네이버 TV 등을 비롯해 집에서도 수준 높은 공연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공연자들이 일터로 직접 와 공연을 펼치는 ‘직장문화배달’도 인기다. 공연·전시·영화 관람권 등을 책으로 교환할 수 있는 ‘도깨비책방’도 추진한다. 청년예술가들의 야외 발표 무대인 ´청춘 마이크´와 문화자원을 활용해 주민들과 함께 만드는 ‘지역문화 콘텐츠 특성화’ 사업도 11월까지 이어진다. 과거와 달리 전국 공연장과 미술관에서도 날마다 좋은 볼거리들이 많아진 시대다. 앞으로는 경제와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뭐가 유익한 것인지 ‘잘 몰라서’라는 답이 튀어나올지 모르겠다. 미국에선 예술을 경험한 학생들이 수능시험(SAT) 성적도 더 좋고 예술 전공자들이 직장 성취도나 만족도도 높다는 통계도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한 번이라도 더 공연장이나 미술관에서 오래도록 남을 추억을 만들어 보자. 제발 그렇게 하시라. 그래서 그들이 자라 거꾸로 부모님을 모시고 문화예술을 즐길 수 있다면 이보다 ‘잘 키운 자식’이 또 있을까 싶다.
  • 일제강점 후 100여년 만에 세상에 나온 백제 무덤

    일제강점 후 100여년 만에 세상에 나온 백제 무덤

    삼국시대 건물터 유적 3기 확인 “임시거처·제사 관련 시설 추정 백제시대 상장례 연구 도움될 것”최근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파헤쳐 조사했던 백제시대 무덤과 유적들이 발굴조사를 통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달 충남 공주 교동에서 일본인 도굴꾼 가루베 지온이 ‘미완성 무덤’이라고 규정했던 백제 교촌리 벽돌무덤의 위치를 확인하는가 하면 이달에는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 중 서쪽 고분군이 100여년 만에 이뤄진 재조사에서 백제 왕릉급 무덤의 전모를 드러냈다. 문화재청과 충남 부여군은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서쪽 고분군 4기에 대한 2년간의 발굴조사를 완료했다고 4일 밝혔다. 조사에 따르면 서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위아래로 2기씩 배치돼 있다. 고분 양식은 백제 사비도읍기의 전형적인 무덤 형태인 굴식돌방무덤으로 확인됐다. 고분의 지름은 2·3호분이 20m 내외, 1·4호분은 15m 내외다. 문화재청 측은 “2·3호분과 1·4호분이 석실의 규모, 석재의 가공 정도, 입지 등에서 차이가 나는데 무덤주인들의 위계가 달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에 있는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시대 왕릉급 무덤들이 한데 모여 있는 곳이다. 중앙의 고분 7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고분군이 있다. 이 중 서고분군 4기는 1917년 일제가 조사한 바 있으나 당시 조사단은 “능산리 왕릉군의 서쪽 소계곡 너머에 있는 능선에서 무덤 4기를 확인하고 그중 2기를 발굴했다”는 짧은 기록과 간략한 지형도만 남긴 터라 지금까지 학계는 고분의 구체적인 규모와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서고분군의 경우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석실의 형태 등을 가늠할 수 없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무덤의 구조나 형식, 규모 등을 확인했다”면서 “백제 사비기 왕릉급 무덤의 입지와 조성 과정에 대한 자료를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삼국시대 고분군에서는 드러난 적 없는 건물의 존재를 확인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조사단은 서쪽 능선에서 초석 건물지 1기를, 동쪽 능선의 1호분과 4호분 사이에서 수혈(구덩이) 주거지 2기를 확인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무덤 조성과 관련된 임시 거처나 제사 관련 시설로 보인다”면서 “삼국시대 고분군 중 고분 구역에서 건물 유적이 나타난 것은 처음이라는 점에서 백제시대 상장례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일제강점기 조사와 잦은 도굴로 인해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2호분 석실 바깥 구덩이에서 금제 장식과 목관 조각, 금동제 관못 등이 나왔다. 금제 장식은 길이가 2.3㎝ 정도로, 끝이 뾰족한 오각형을 띠고 있으며 부장품의 일부로 추정된다. 용이 몸을 틀고 있는 형상의 문양이 특징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세계문화유산 한국 산사] 수행·생활·신앙의 천년 고찰… 인정받은 ‘종합 문화 산실’

    [세계문화유산 한국 산사] 수행·생활·신앙의 천년 고찰… 인정받은 ‘종합 문화 산실’

    “韓 불교 전통 계승, 세계가 공감…자연과 동화·합일되는 구조물” 관광객 수요 증가 대응 방안 수립 7곳 통합관리단 등 기구 마련을이번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하 ‘한국의 산사’)은 1000년 넘게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어 온 종합 승원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종교적 전통을 계승한 유형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수행 공간으로서의 무형적 가치를 함께 지닌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데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려면 OUV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의 머리글자를 딴 용어로 문화유산 6개, 자연유산 4개로 나뉜다. 이 가운데 하나만 충족해도 세계유산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산사들은 이 가운데 세 번째 기준인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을 충족한다고 유네스코는 판단했다. 정병삼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한국의 산사는 일반인들에게는 신앙의 전당이자 승려에겐 수행의 장소이며 특히 수행, 생활, 신앙 기능이 모두 이루어진 종합 승원으로서 가치가 크다”면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1000년 넘게 변함없이 잘 가꾸어 온 점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한국의 산사는 산을 함부로 변형시켜서 터전을 만들지 않고 지형을 따라 자연과 동화되는 구조물로, 자연과 합일되는 장소로서의 의미도 있다”면서 “건축, 공예, 조각 등 국가지정문화재만 수백점 넘게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합 문화의 산실”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산사는 2013년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된 뒤 5년 만에 세계유산 등재라는 목표를 이뤘지만 앞으로 신경 써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산사를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하면서 네 가지 사항을 권고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산사 내 건물 등에 대한 관리 방안과 산사의 종합 정비계획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또 등재 이후 증가하는 관광객에 대한 대응 방안을 수립하고 산사 안에 새로 건물을 지을 때 세계유산센터와 사전에 협의할 것을 주문했다. 문화재청은 “세계유산위원회의 요구는 비지정 문화재까지 포함해 산사 내 모든 구성요소들에 대한 보다 강력한 보존과 보호 관리를 주문한 것으로 해석된다”며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사항을 충실히 수행해 세계문화유산적 가치가 잘 유지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앞으로 늘어날 관광객 수요에 대비해 종합적인 관리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정 교수는 “문화재청, 지자체, 대한불교조계종 등이 협력해서 현재 사찰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수 있도록 보존하는 큰 원칙을 세우되 각 사찰이 지닌 개별적인 특성도 살릴 수 있도록 종합적인 관리를 할 필요가 있다”면서 “사찰 7곳을 묶어서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세계유산관리단 등의 기구를 마련해 모니터링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 위원인 명법 스님은 “건축물의 원형을 보존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만 사찰은 지금도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리고 수행을 하는 등 다양한 불교적 활동이 일어나는 공동체 공간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면서 “증가하는 관광객 수요와 사찰의 보존을 조화롭게 이룰 수 있는 실질적인 관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산사가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한국은 2015년 ‘백제역사유적지구’ 등재 이후 3년 만에 13번째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등이 한번에 등재된 이래 창덕궁, 수원 화성(이상 1997년),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 마을: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 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 등이 등재 목록에 올랐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한국의 산사 7곳 모두 세계유산 등재된 배경은

    한국의 산사 7곳 모두 세계유산 등재된 배경은

    1000년 넘게 우리 불교문화를 계승하고 지킨 종합승원을 묶은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하 ‘한국의 산사’) 7곳이 모두 한국의 13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30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한국의 산사를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한국의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로 구성된다. 앞서 세계문화유산 후보지를 사전 심사하는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한국이 신청한 7곳 중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와 대흥사 네 곳만 ‘등재 권고’하면서 나머지 세 군데는 ‘보류’할 것을 제안했다. 이코모스는 역사적 중요성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세 곳을 등재 권고 대상에서 제외했으나, 세계유산위원회는 21개 위원국 만장일치로 “이들 7곳을 모두 합쳐야 유산의 가치가 제대로 드러난다”면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한데 합쳐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우리 정부는 이코모스 심사 결과가 알려진 뒤 7개 사찰을 한꺼번에 등재하기 위해 세계유산위원국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교섭을 벌였으며,중국을 비롯한 위원국이 모두 이에 동의하면서 막판 뒤집기에 성공했다. 한국의 산사는 7∼9세기 창건된 이후 신앙·수도·생활의 기능을 유지한 종합승원이라는 점에서 세계유산 필수 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받았다. 또 개별 유산의 진정성과 완전성, 보존관리 계획에서도 합격점을 받았다. 다만 세계유산위원회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건물 관리 방안, 종합 정비 계획, 앞으로 늘어날 관광 수요 대응 방안을 마련하고, 사찰 내 건축물을 지을 때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와 협의할 것을 권고했다.문화재청 관계자는 “중앙 정부와 대한불교조계종,지자체가 합심해 세계유산 등재라는 성과를 이뤄냈다”고 평가한 뒤 “산사가 지닌 세계유산 가치가 잘 보존될 수 있도록 관계기관과 함께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은 2016년과 작년에 각각 한국의 서원과 서울 한양도성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려 했으나 이코모스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아 자진 철회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의 산사를 등재하면서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종묘(이상 1995년), 창덕궁,수원 화성(이상 1997년),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년), 남한산성(2014년), 백제역사유적지구(2015년)를 포함해 세계유산 13건을 보유하게 됐다.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2004년), 개성역사유적지구(2013년), 그리고 중국 동북지방 일대 고구려 유적(2004년)을 합치면 한민족 관련 세계유산은 16건에 이르게 됐다. 이 가운데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만 자연유산이고, 나머지 유산은 모두 문화유산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미래유산 톡톡] 67년간 여객·화물 수송 경춘선, 폐철길 6.3㎞ 공원 조형물 즐비

    [미래유산 톡톡] 67년간 여객·화물 수송 경춘선, 폐철길 6.3㎞ 공원 조형물 즐비

    지난 23일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단이 찾은 태릉 일대에는 2개의 굵직한 미래유산이 있다. 첫째는 경춘선 숲길 공원이고, 둘째는 태릉선수촌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태릉과 강릉을 사이에 두고 서울미래유산 코스는 서로 이어진다.경춘선은 1939년 개통 당시 성동역에서 춘천역까지 달리다가, 1971년 성동역~성북역 구간이 철거됐다. 2006년부터는 경춘선 일부 구간 직선화로 청량리~성북~신공덕~화랑대~갈매역 구간이 청량리~망우~갈매역으로 변경됐다. 67년간 서울 동북부 지역과 강원도를 오가며 여객 및 화물을 수송했으며, 특히 청춘 및 문화 철도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서울시는 2013년 도시재생프로젝트의 하나로 경춘선 폐선부지 구간 중 광운대역~서울시 경계 구간 6.3㎞를 공원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기존 철길과 신호기 등 원형을 최대한 보전하였고 주민들이 즐길 수 있는 산책로, 주민 커뮤니티 공간을 확보했다. 공원 곳곳에 옛 철길을 형상화한 침목 모양의 의자, 조형물 등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또한 철길 주변에는 옛 경춘선에서 볼 수 있었던 개나리, 벌개미취 등을 심어 정취를 살렸다. 감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모과나무 등 키가 큰 유실수를 심었다. 태릉선수촌은 체육 일선 지도자 및 국가대표 선수의 강화 훈련을 위해 대한체육회가 설립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 다녀온 민관식 당시 대한체육협회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국가대표 선수 집중 훈련 시설의 필요성을 끈질기게 건의해 1966년 6월 30일 지금의 자리에 태릉선수촌이 들어섰다. 건립 이래 20여개의 기초 종목을 비롯해 구기 종목, 투기 종목 등에서 450여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을 받았다. 지난해 9월부터 빙상 종목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 진천으로 이사했다. 태릉선수촌이 진천으로 이사한 데는 이유가 있다. 태릉과 강릉이 2011년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조건으로 왕릉을 훼손한 선수촌을 옮기기로 했기 때문이다. 체육계는 엘리트 체육의 전당인 태릉선수촌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월계관, 개선관, 승리관, 6레인 트랙 운동장과 남녀 숙소 한 동씩(올림픽의 집, 영광의 집), 챔피언 하우스(선수들의 위락시설)에 대해 근대문화재 등록을 추진 중이다. <서울미래유산연구팀>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뻗었다가 휘어진 폐철길, 가난·청춘 안는 쉼터 되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뻗었다가 휘어진 폐철길, 가난·청춘 안는 쉼터 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7회 태릉(경춘선 숲길) 편이 지난 23일 노원구 공릉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서울시가 지난해 5월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되살린 경춘선 숲길 6.3㎞ 중 공릉동 동신아파트~6호선 화랑대역~육사삼거리 구간을 걸었다. 투어단은 7호선 공릉역 2번 출구 앞에서 모여 공릉동 동신아파트 앞까지 이동한 뒤 답사를 시작했다. 경춘선 구간이 직선화, 전철화, 복선화하면서 폐선이 된 철길은 공원이 되고, 자전거길이 되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고, 어른들의 장터 겸 쉼터로 변모했다. 철마가 멈춘 경춘선 폐구간은 그림 속의 한 장면처럼 정지돼 있다. 홍대 앞 경의선 숲길이 디자인 개념으로 창작된 공원 길이라면 경춘선 숲길은 자연스런 옛 기찻길 그대로다. 뻗었다가 휘어지고, 사라지는 철길 풍경이 아스라하다.우리가 지나온 가난과 청춘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해설을 맡은 전혜경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치크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를 인용해 철길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설명했다. 이 소설은 기찻길 사이 삼각형 주택에서 고양이를 키우며 사는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담았다. 또 김현철의 ‘춘천가는 기차’를 들려줘 잠자던 감성을 일깨웠다.서울 강북구,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일대를 북서울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엔 북서울을 북교(北郊)라고 불렀다. 교(郊)란 도성 밖 배후 지대이자 방어선이다. 행정적으로 한성부 동부 숭신방과 경기도 양주목에 속했다. 망우동·번동·창동·우이동·방학동·묵동 같은 유서 깊은 촌락이 자리했다. 의령 남씨, 동래 정씨, 평산 신씨 집성촌의 역사와 지리, 인물을 엮은 ‘망우동지’라는 향토지를 1760년(영조 36년)에 펴냈다. 우이동과 쌍문동 일대에는 사대부들의 별서(농장)가 많았는데 문인 홍양호가 노래한 ‘우이구곡’은 오늘까지 전해진다. 월계동 초안산 일대는 양반, 내시, 궁녀, 중인층의 묘역으로 쓰였다. 한양도성과 팔도를 잇는 여섯 가닥의 큰길 중 두 가닥이 북교를 지났다. 1770년(영조 46년) 신경준은 도로고(道路考)에서 6개 큰길을 정리했다. 제1로는 의주대로, 제2로는 경흥대로, 제3로는 평해대로, 제4로는 동래대로, 제5로는 제주대로, 제6로는 강화대로였다. 이 중 경흥대로(한양~함흥~경흥)와 평해대로(한양~강릉~평해)가 북서울을 남북으로 가로질렀다. 경흥대로는 혜화문을 나서 미아리고개를 넘어 누원(다락원)을 지나 철원으로 나아갔다. 미아리고개를 ‘되너미고개’라고 읽고, ‘돈암’이라고 쓴 이유도 이 길을 오간 여진족이나 중국과의 인연에서 나왔다. 오늘의 도봉산역인 누원은 동북 방면에서 가져온 북어와 땔감의 집산지였다.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이어지는 평해대로 변의 풍경은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 속에 담겼다. 한반도 최북단 경흥 서수라에서 남산 봉화대까지 이어지는 봉화길이기도 했다. 철도는 근대 과학기술문명을 대표하는 가장 압축적이고 상징적인 구조물이다. 북서울을 관통하는 두 갈래 길은 근대 철로가 되었다. 1914년 개통된 용산~왕십리~원산행 경원선은 옛 경흥대로 노선을 이어받았다. 금강산 가는 전기철도가 철원에서 갈라졌다. 말을 타고 닷새 걸리던 금강산 관광길이 반나절로 줄어들었다. 철도 노선에서 벗어난 누원점(누원)이 지고 창동역이 새로 떴다. 1101년(고려 숙종 6년) 남경의 후보지로 처음 거론된 곳이 노원역, 해촌(창동), 용산이었으니 800여년 만에 장소의 역사성이 되살아난 셈이다. 철도역 주변의 융성과 팽창에 힘입어 1931년 창동에 북서울 최초의 근대적 초등학교인 창동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됐다.1939년 최초로 민족자본이 투입된 사설 철도인 경춘선이 개통하면서 경원선과 경춘선이 만나는 연촌역(1963년 성북역, 2013년 광운대역으로 개칭)이 북서울의 중심역으로 부상했다.1938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서울대 공과대학)가 현재의 공릉동 서울과학기술대학교 터에 들어섰다. 총독부는 이북의 광물과 자원이 모이는 지점에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를 세웠다. 식민 약탈과 대륙 침략의 음모였지만 근대 이후 북서울 최대의 사건이자 지역 도로망과 산업 지형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때 학교 앞 묵동정류소는 1944년 신공덕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본래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였으므로 공덕역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했지만 용산선 공덕역이 이름을 선점하고 있었기에 엉뚱하게 ‘새로울 신’ 자를 앞에 넣어야 했다. 이름을 상실한 신공덕역의 비극이다. 1942년 서울~경기~강원~충청~경상도를 동서로 관통하는 청량리~경주 간 중앙선이 열리면서 북서울의 교통 중심은 망우리와 상봉동으로 또 한 번 옮겨 갔다. 1963년 행정구역 확대에 따라 경기도 12개 면, 90개 리가 서울에 편입되면서 공릉동(孔陵洞)이 등장했다. 공릉은 왕릉과 무관하다. 조선 13대 왕 명종이 묻힌 강릉(康陵)도 아니고, 모후 문정왕후가 묻힌 태릉(泰陵)도 아니다. 태·강릉 두 릉을 함께 이르는 호칭은 더더욱 아니다. 공덕동의 ‘공’자와 태릉동의 ‘릉’자를 합쳐 지은 국적 불명의 합성 지명이다. 한 글자씩 나눠 가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 동네를 태릉이라고 부른다. 태릉의 주인이 강릉 주인의 어머니라곤 하지만 왕후의 단릉을 왕과 왕후의 쌍릉 앞에 두고 호칭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래서인지 ‘공룡동’이라는 허명이 떠돌기도 했다. 왜 태릉인가? 태릉선수촌이라는 엘리트 체육의 전당이 왕릉의 존재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태릉선수촌이 떠난 뒤 어떻게 바뀔지 궁금하다. 한편 투어가 끝난 뒤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참석자들은 “문학과 역사와 대중문화가 어우러져 유익했다”, “해설자의 해박한 지식과 재미있는 설명에 감동했다”, “경춘선의 추억을 되새긴 소중한 시간이었다”,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태릉선수촌을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라는 소감을 쏟아냈다. 옛 서울공대, 태릉과 강릉을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도 설문에 들어 있었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여의도(여의도공원의 여름) ●일시:6월 30일(토) 오전 10시~낮 12시 ●집결 장소:지하철 9호선 국회의사당역 2번 출구 앞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문화재 안내판 내용, 국민 참여로 고친다

    문화재 안내판 내용, 국민 참여로 고친다

    전국의 문화재 안내판 내용이 이해하기 쉽게 바뀐다.그간 문화재 안내판은 전문용어가 많아 관람객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데다 시민들이 알고자 하는 정보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청와대 경내에 위치한 누각인 ‘침류각’의 안내판을 예로 들며 난해한 문구를 쉬운 언어로 순화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초등생도 이해 쉽게 시민자문단 운영 문화재청은 새달부터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전국에 산재한 문화재 안내판 1만여건의 문안 내용과 노후 여부를 점검하는 실태조사를 진행해 내년까지 1차 정비를 마치겠다고 27일 밝혔다. 연내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서울 소재 고궁과 조선왕릉을 비롯해 청와대 주변과 북악산·인왕산, 광화문 주변, 문화재가 밀집한 경주·부여·공주·익산 지역의 문화재 안내판을 조사, 정비한다. 이어 내년에는 조사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비 대상으로 지정된 일부 안내판을 교체할 계획이다. 초등학생들도 이해하기 쉬운 안내판 문안을 작성하기 위해 전문가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다. 지자체별로 문화재에 관심이 있는 학생과 교사, 문화유산 해설사, 문인 등이 참여하는 ‘문화재 안내판 시민 자문단’을 새롭게 구성해 운영할 예정이다. ●새달엔 조선왕릉 명칭 개선안 설문 문화재청은 안내판 문안을 손질하는 것 외에 문화재 명칭 개선 작업에도 나선다. 우선 조선왕릉을 대상으로 일반인들이 알기 쉬운 명칭을 도입한다. 예를 들면 태조 이성계 능인 ‘건원릉’은 안내판에 ‘태조 건원릉’이나 ‘건원릉(태조)’으로 바꿔서 왕릉의 주인공을 알 수 있도록 한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새달 11일부터 30일까지 문화재청 홈페이지(www.cha.go.kr)와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조선왕릉 명칭 개선안 설문조사를 진행한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과천시, 아빠와 함께하는 백제문화유적 답사 프로그램 운영

    경기 과천시가 공주와 부여로 떠나는 백제문화유적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시는 여름 방학 동안 진행되는 ‘아버지와 함께 가는 문화유적견학’ 참가자를 선착순 모집한다고 26일 밝혔다. 과천문화원이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올해로 20회를 맞는다. 우리 문화유적의 소중함을 배우고 가족 간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고 있다. 첫째 날은 공주의 공산성과 무령왕릉, 부여의 백제문화단지와 궁남지 등 문화유적지를 전문해설사와 함께한다. 이어 수영놀이와 등불날리기, 아빠와 달밤산책 등의 행사가 진행된다. ‘아빠와 아침산책’으로 시작하는 둘째 날은 부여 부소산성과 낙화암, 정림사지와 박물관을 견학한다. 1차는 8월 2일부터, 2차는 9일부터 1박 2일 동안 2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차수별로 18가족 38명을 선착순 모집한다. 참가비는 8만원으로 과천문화원으로 방문하거나 전화((02-3679-1415)로 접수하면 된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몽골 침략에 강화로 천도한 고려, 훼손 우려에 태조 왕릉도 옮기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몽골 침략에 강화로 천도한 고려, 훼손 우려에 태조 왕릉도 옮기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1232년(고종 19)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옮긴다. 하지만 천도를 주도한 최씨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몽골과 화의가 성립함에 따라 1270년(원종 11) 고려의 이른바 강화경(江華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강화를 피난 임시 수도로 삼은 38년은 제23대 왕 고종(1213∼1259)과 제24대 왕 원종(1260∼1274)의 재위 기간이다. 강화에는 궁궐과 성곽은 물론 고종을 비롯한 왕족의 무덤이 곳곳에 남아 있다.왕족급 무덤으로 보이는 석실분은 모두 7기다. 4기는 묻힌 사람(피장자)이 누구인지 알려져 있다. 고종의 홍릉을 비롯해 희종의 석릉, 강종비 원덕태후의 곤릉, 원종비 순경태후의 가릉이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고려사’에 보이는 고려 태조 왕건과 아버지 왕륭 무덤의 강화 이장(移葬) 기록이다. 강화 천도가 이루어진 고종 19년(1232) ‘이 해, 세조와 태조의 재궁(梓宮·관)을 신도(新都·새로운 도읍지)로 옮겼다’고 적었다.왕륭은 송악, 즉 송악산 주변 개성 지역의 호족으로 궁예의 휘하에 있었다. 훗날 고려의 정궁 만월대가 들어서는 송악산 아래 발어참성을 쌓고, 왕건에게 성주(城主)를 맡겨 달라고 궁예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훗날 왕건은 이런 아버지를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에 추존한다. 세조와 태조의 무덤을 강화로 옮긴 것은 몽골 점령군에 의한 훼손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시신을 인질 삼은 협박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조의 창릉과 태조의 현릉은 1243년(고종 30) 다시 한번 강화섬 내부의 개골동(盖骨洞)으로 이장한다. 풍수지리적 이유로 짐작한다. 두 무덤은 환도한 해 개경으로 돌아가 1276년(충렬왕 2) 제자리에 복장했다. 창릉 터와 현릉 터가 궁금하지만, 주인이 알려진 무덤부터 돌아보기로 한다. 먼저 무덤 주인들의 정보가 필요할 것 같다. 고려의 제21대 왕 희종(재위 1204∼1211)은 실권자 최충헌의 횡포가 심하자 제거하려다 자연도(영종도)에 유폐됐다. 제22대 왕 강종(재위 1211~1213)은 제19대 명왕(재위 1170~1197)의 아들이다. 명왕이 최충헌에 의해 폐위된 1197년 아버지와 강화도로 쫓겨났다. 다시 개경으로 소환된 강종은 역시 최충헌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2년 만에 죽어 아들 고종이 왕위를 물려받는다. 최충헌은 집권 기간 동안 4명의 왕을 갈아치웠다. 강종비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다. 원종의 제1비 순경태후(1222~1237)의 아버지는 장익공 김약선이고, 어머니는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큰딸이다. 김약선은 고종 시대 문신으로 이름을 얻은 인물이다. 순경태후는 1236년 충렬왕을 낳고, 이듬해 딸을 잇따라 출산하고는 곧 세상을 떠났다. 10대 중반에 불과했다. 고려 왕릉을 둘러보기에 앞서 강화읍내의 고려궁터를 먼저 찾으면 좋을 것이다. 지금 ‘고려궁지’라고 부르는 곳은 정궁(正宮)이 있었던 자리다. 개경의 그것을 모범으로 삼았지만, 규모는 어쩔 수 없이 작았다. 강화 궁궐의 뒷산을 송악이라 부르고, 개경 만월대처럼 정문은 승평문, 동문은 광화문이라 이름 지었다.고려궁터의 정문은 ‘승평문’이라 편액되어 있지만, 최근 복원한 조선시대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도 고려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조선시대 이곳에 강화행궁이 들어섰고, 강화유수부도 자리잡았다. 궁터 내부 한복판에는 외규장각이 외롭게 복원되어 있고, 강화유수부의 명위헌과 이방청이 보일 뿐이다. 두 왕조가 중첩되어 있는 유적의 역사성을 어떻게 정리해 나갈지 고민스러워 보인다. 고려 왕릉은 강화읍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고종의 홍릉이 유일하다. 다른 무덤은 모두 남서쪽에 몰려 있다. 홍릉은 봄이면 진달래꽃이 장관을 이루는 고려산 남동쪽 기슭에 있다. 강화읍내에서 강화산성 서문을 나선 뒤 강화역사박물관 방향으로 가다 강화고인돌체육관 못미처에서 좌회전해 들어가면 된다. 원래 홍릉은 다른 고려 왕릉처럼 3단의 축대를 쌓아 아래서부터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사람 형상을 한 조각, 왕릉을 각각 배치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정자각은 보이지 않고, 사람 형상의 돌조각 2구만 남아 있다.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홍릉이 강화섬의 중북부라면 다른 왕릉들은 중남부의 진강산 남쪽 기슭에 있다. 읍내에서 찬우물고개를 거쳐 인천가톨릭대 쪽으로 가다 보면 원덕태후의 곤릉, 희종의 석릉, 순경태후의 가릉을 알리는 푯말이 차례로 나타난다. 조선 왕릉이 평지와 맞붙은 높지 않은 산지에 의지해 들인 것과는 달리 강화의 고려 왕릉은 상당히 가파른 산 중턱에 조성했으니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고려 왕릉이라는 사실이 오랫동안 잊혀졌기 때문인지 곤릉과 석릉은 길을 찾기도 쉽지 않다. 가릉 역시 좁은 농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다르지 않지만 상대적으로 찾기가 쉽다. 주차장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왕릉급 무덤 두 기가 나타난다. 먼저 보이는 것이 가릉으로 알려진 무덤이고, 뒤에 것이 능내리 석실분이다. 강화에서 세상을 떠난 왕비는 세 사람으로, 희종비 성평왕후(?~1247)의 소릉은 존재가 확인되지 않았다. 능내리 석실분이 성평왕후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발굴조사 결과 능내리 석실분이 가릉보다 먼저 축조됐고, 위계도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가릉으로 알려진 앞의 무덤이 성평왕후의 소릉이고, 능내리 석실분이 가릉일 수 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나오는 이유다. 인산리 석실분은 북쪽 고려산과 남쪽 진강산의 중간이라고 할 수 있는 퇴미산 남서쪽에 있다. 인산저수지 서쪽의 인산삼거리에서 산길을 1.3㎞쯤 올라가야 한다. 사륜구동차라면 석실분에서 500m 남짓 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다.인산리 석실분은 강화의 다른 무덤들보다 더 가파른 곳에 자리잡았다. 다른 강화 왕릉처럼 삼단 석축으로 조성됐을 무덤은 이제 완전히 무너져 폐허를 방불케 한다. 다만 최상단의 석실이 원형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강화섬의 동쪽 해협 염하(鹽河)와 가까운 연리에도 고려시대 석실분이 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인산리 석실분과 연리 석실분이 세조와 태조의 이장지일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하다. 물론 어느 것이 세조의 무덤이었고, 어느 것이 태조의 무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강화로 이장한 왕륭과 왕건의 무덤을 다시 옮겼다는 개골동은 찬우물고개 근처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개골동 왕릉터의 확실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분단前 한반도 물류 중심’ 남북 평화시대 옛 명성 회복 꿈꾼다

    ‘분단前 한반도 물류 중심’ 남북 평화시대 옛 명성 회복 꿈꾼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는 등 남북 간에 평화 분위기가 감돌면서 낙후한 접경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가장 ´위험한 지역´에서 ´가장 주목받는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분단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서 가장 번성했던 지역 중 한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19일 경기 파주시에 따르면 그중 파주시 20개 읍·면·동 가운데 한 곳인 ‘적성면’은 104년 전인 1914년까지만 해도 5개 면을 거느린 ‘적성군’이었다. 분단 전까지 장파리(현 파평면)·장좌리·두지리 일대는 번화했다. 마포에서 출발한 배가 한강을 거쳐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새우젓을 내려놓고 배추, 무 또는 새우젓 독(항아리)을 싣고 내려가는 물류 이동의 거점이었다. 하류 5㎞ 거리 북쪽에 있는 고랑포와 더불어 부자들이 많기로 소문난 고장이었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옛 ‘적성지도’를 보면 신지포(神智浦)는 적성 읍치 북동쪽에 있었던 나루터다. 많은 건물이 그려진 가운데 부분이 지금의 적성면 구읍리 일대인 적성현 읍치다. 객사와 향청 오른쪽에 향교가 보인다. 적성향교 옆에 중성(重城)이 그려져 있다. 이 산이 중성산이고 지금은 칠중성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적성과 임진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군사 요충지다. 적성 장좌리와 마주하고 있는 고랑포는 개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3월 임진강 해빙과 함께 연천 장단 지역 4만섬에 달하는 대두(콩)가 일시에 몰려들어 그야말로 마포에 버금가는 장관을 연출했다고 전해진다. 수백 척의 배들이 정박했고 수많은 부두 일꾼 및 장사치들로 북적였다.지금의 경순왕릉 앞 초소 주위로 개성 가는 길을 따라 500호에 달하는 상점과 가정집이 줄지어 서 있었다. 번창했던 일제 강점기 때는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었고 금융기관과 우체국, 곡물검사소, 우시장, 약방, 여관, 시계포에 변전소까지 갖춘 상업도시였다. 인구도 지금의 적성면(8000여명)보다 6배 이상 많은 5만여명에 달했다. 이렇게 적성과 적성과 인접한 고랑포, 장파리 일대는 한반도 내륙 물류 이동의 중심지였다. 임진강을 거슬러 생선과 새우젓, 소금이 올라왔고 곡물과 그릇, 목재가 내려갔다. 여기에 부려진 물건들은 주변으로 팔려 나가기도 했지만 다시 작은 배에 실려 상류의 강원도 안협, 황해도 토산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이 같은 호황은 분단되면서 모두 종말을 맞이했다. 임진강에 배를 띄울 수도 없고, 넘나들 수 없게 되면서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밤이 없던 인구 5만의 고랑포는 민간인출입 통제선 안쪽에 위치하면서 인적이 완전히 끊겼다. 2004년부터 두지포~고랑포 간을 오가는 관광객용 황포 돛배만 쓸쓸히 운항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장파리, 적성, 대광리 등 접경 지역 학교에는 학생들로 넘쳐났으나 농사만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 지금은 폐교 위기를 맞고 있다. 2015년 10월 현재 적성면 인구는 3509가구에 8000여명에 불과하다. 수많은 배들이 머물고 드나들던 포구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기 위해 작은 산업단지들을 유치했지만 한번 떠난 민심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새우젓 배들이 서울로 실어 나르던 무, 배추는 군부대 장병 덕분에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그나마 장병 감축을 진행한다고 하니,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업은 못 된다는 게 농민들의 푸념이다. 남북 해빙시대를 맞아 접경 지역 주민들은 획기적 변화를 바라고 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씨줄날줄] 문화재 예산 0.18%/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문화재 예산 0.18%/서동철 논설위원

    문화재위원회는 최근 백제 대통사(大通寺) 터로 추정되는 충남 공주시 반죽동의 주택 신축부지를 보존하기로 의결했다. 발굴조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문화재위가 발빠르게 보존 결정을 내림에 따라 문화재청은 공주시와 곧 부지 매입 절차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다. 고도 조성사업에 따라 한옥을 지으려 했던 땅이다.문제는 이번 결정으로 걱정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화재위가 의결한 보존 부지는 204㎡에 불과하다. 대통사는 백제 성왕(재위 523~554)이 중국 양나라 무제를 위해 축조한 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왕도(王都)에 지은 국가적 사찰의 전체 규모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대통사 터의 유적 성격을 제대로 밝히려면 장기간에 걸친 발굴조사가 불가피하다. 나아가 발굴조사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성과가 축적되면서 대통사 터, 혹은 그에 준하는 대형 사찰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지면 사적 지정도 추진될 것이다. 사적 지정이 중요한 이유는 주변 지역 개발의 제한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대통사 터는 공주 시내 한복판이다. 일제강점기 발굴조사에서 ‘大通寺’라 새겨진 기와 조각이 이미 나왔다. 주변 제민천에 있는 네 개의 마름모꼴 초석은 절로 들어가는 다리의 하부구조로 짐작한다. 멀지 않은 곳에 반죽동 당간지주도 있다. 미술사학자들이 백제가 아닌 통일신라 조각 수법이라는 의견을 내놓는 것도 흥미롭다. 대통사 당간지주로 확인된다면 절의 역사는 다채로워질 것이다. 민가가 빼곡히 들어찬 지역이다. 보존 부지 바로 곁의 공주사대부고도 절터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웅진백제의 왕궁인 공산성과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군 말고는 백제시대 대형 유적이 없는 공주시내다. 대통사의 실체가 드러나면 전체 부지의 보존 압력은 거세질 것이다. 대통사 터를 한성백제의 왕성인 풍납토성의 내부와 비교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통사 터 역시 전체 보존 결정이 내려진다면 정부와 지자체는 최소한의 재산권을 지키려는 주민들과 풍납토성과 비슷한 갈등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다. 영남고고학회는 ‘문화재로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려면 2019년도 문화재청 예산이 정부 전체 예산의 0.5%는 되어야 한다는 성명을 냈다. 문화재 보호와 주민의 이해가 충돌하는 현상은 전국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신라권과 가야권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올해 예산은 지난해보다 오히려 1.8% 줄어든 7746억원이다. 정부 예산의 0.18% 수준이다. 수치를 나열하니 답답한 마음이다. 문화재 보호는 마음뿐 아니라 예산도 필요하다. dcsuh@seoul.co.kr
  • 서울 토박이도 몰랐던 ‘진짜 서울’

    서울 토박이도 몰랐던 ‘진짜 서울’

    서울선언/김시덕 지음/열린책들/416쪽/1만 8000원내가 서울 사대문 안, 이른바 ‘진짜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사실을 좋아한 것은 그곳이 잘 변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은 고향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기 십상인데, 그건 아마 저 변화무쌍한 땅에서 무슨 추억과 정체성을 찾느냐는 것일 것이다. 그 와중에 경복궁을 둘러싼 지역은 비교적 옛 풍경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큰 위안이 됐다. 그러나 알겠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곳이 변하지 않는 곳이 된 것은 조선시대 후기의 흔적을 보호하기 위한 편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서울은 그보다 까마득히 크다. 그리고 이 책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지금도 살아 있는 서울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진짜 서울과 그 밖을 나누려는 생각이 다섯 가지 선입견에 기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조선후기 중심주의, 사대문 안 중심주의, 왕족과 양반 중심주의, 주자학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라고. 책 제목에 걸맞게 그는 ‘선언’한다. “이제까지 서울을 말해 온 사람들이 조선 시대 궁궐과 왕릉, 양반의 저택과 정자들을 주로 거론해 온 것은 대단히 편협한 귀족주의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옛 책이 동일하게 귀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 속의 모든 공간과 사람도 동일하게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주로 살펴보고 있는 지역은 1936년과 1963년 이후 ‘서울’이라고 불리게 된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그가 살았던 지역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보통 서울을 주제로 한 책이 보여준 지역과는 크게 다르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져 왔던 것의 근본부터 뒤집고 의문을 제기하는 그의 글은 한편으로는 불편하고 또 한편으로는 통쾌하다. 문헌학자인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울’을 넘어서는 대서울의 곳곳을 ‘무수히 많은 책이 꽂힌 도서관’에 비유한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부수고 잊혀졌거나 왜곡된 것을 밝히는 그의 “서울 순례” 덕에 서울이라는 도시는 좀더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살아난다. 근사한 문화재의 위용을 자랑하는 사진이 아니라 평범한 동네를 찍은 수많은 도판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이 책 또한 “아직 제각각의 정체성이 강하고 서로 간의 관계성이 긴밀하지 않은 서울”을 바라보는 개인의 시선임을 강조하며, 현재의 서울을 사는 우리 개개인이 자신의 눈으로 서울을 바라볼 것을 권한다. 편견을 깬 너머에 “진짜 서울”이 있다.  박사 북칼럼니스트
  • ‘무령왕릉과 닮은꼴’ 백제 벽돌무덤 확인

    ‘무령왕릉과 닮은꼴’ 백제 벽돌무덤 확인

    일제강점기 발굴 조사 이후 80년 가까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던 웅진도읍기(475~538년) 백제시대 벽돌무덤의 위치가 확인됐다. 충남 공주시와 공주대박물관은 공주 교동 252-1 일원에서 1939년 일본인 사이토 다다시와 가루베 지온이 미완성 무덤이라고 규정한 백제 교촌리 벽돌무덤을 다시 찾았다고 7일 밝혔다. 벽돌을 쌓아 만든 백제 벽돌무덤으로는 교촌리 벽돌무덤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이 있다.이번에 발견된 교촌리 벽돌무덤은 무령왕릉처럼 터널형 구조를 갖춘 것으로 조사됐다. 무덤구덩이는 가로 3m, 세로 6.1m, 높이 2m다.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무덤 축조에 사용된 벽돌이 모두 무늬가 없는 네모꼴과 긴네모꼴이며 벽면은 벽돌을 가로로 쌓아서 만들었는데 이는 무령왕릉이나 6호분과는 다른 점”이라며 “이 무덤이 무령왕릉 축조를 위해 연습용으로 만든 무덤인지 무령왕릉 이전에 조성한 왕릉급 무덤인지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1530년에 편찬된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공주) 향교 서쪽에 무덤이 있는데 백제왕릉이라고 전한다”는 기록 등을 근거로 교촌리 벽돌무덤을 백제 왕릉급 무덤으로 보는 시각에 무게를 싣는 분위기다. 게다가 미완성 무덤이라고 볼 근거도 부족하다는 것이 조사단의 설명이다. 이 연구사는 “일본인 가루베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바탕으로 미완성 무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하지만 이번에 무덤의 입구 쪽에서 2개의 구멍을 발견했는데, 나무 기둥을 세우고 목재 문을 달았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돋보기] “태릉선수촌, 국민 품으로” 왕릉과 공존안 새달 결정

    반세기 국가대표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서린 태릉선수촌의 원형을 어느 정도 존속시킬지가 다음달에 결정될 전망이다. 대한체육회는 500년 조선왕릉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1966년 처음 조성돼 50년 넘게 한국 엘리트 체육의 산실 역할을 해 온 태릉선수촌을 근대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문화재청과 협의해 왔다. 대한체육회 산하 문화재자문위원회 관계자는 5일 “선수촌 안 8개 건물을 그대로 남기겠다는 기존 방안과 많이 달라졌다.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과 명종과 인순왕후가 합장된 강릉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조성된 선수촌의 원형은 보존하되 두 가지 다른 성격의 문화재를 국민들이 즐겁게 이용하는 시설로 함께 호흡하게 하자는 것이 골자”라고 설명했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점령하듯 조성한 태릉선수촌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올림픽 금메달 116개를 일군 한국체육의 심장이었다. 하지만 2009년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이곳의 훼손 능역을 원상 복구하겠다는 문화재청과 이견을 빚어 왔다. 이에 따라 체육회는 2016년 3월 문화재청의 등록 심사 보류 결정에 맞서 보완 자료를 첨부해 등록문화재 재등록을 추진해 왔다. 이듬해 문화재와 각계 전문가를 초빙해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1년여 활동 끝에 이제 최종 보고서 작성을 마무리한 상태다. 자문위원회 관계자는 “폐쇄적이었던 시설을 개방해 두 가지 성격의 문화재가 함께 호흡하며 국민들의 품으로 되돌리는 방안을 마련했다”며 “문화재청이나 전문가들에게도 선수촌이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역사로 근대문화유산 지정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많이 맞춰진 상태”라고 말했다. 문화재청 주무 부서인 근대문화재과 관계자는 “다음달 문화재위원회 합동분과위원회(근대, 사적, 세계유산)를 열어 안건으로 상정해 검토할 예정”이라며 “문화재청도 태릉선수촌의 체육사적 가치에 대해 공감하고 있으나, 다만 해당 지역이 조선왕릉 권역으로 국가 사적이자 세계유산인 관계로 공존 가능성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며 태릉선수촌의 보존, 활용계획 및 세계유산 영향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 바람직한 안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자문위원회 관계자도 “현실적으로 8개 건물을 모두 지키긴 힘들 것 같다. 그렇다고 한두 건물만 상징처럼 남겨 사진만 걸어 놓는 박물관으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자문위원회도 문화재청과 이달 중 한 번 더 접촉을 갖고 우리 뜻을 전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금요 포커스] ‘그 도시’에 가면 먼저 국립박물관을 보세요/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

    [금요 포커스] ‘그 도시’에 가면 먼저 국립박물관을 보세요/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

    ‘그 도시’로 여행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다. ‘그 도시’로 떠나는 여행에서 우리 문화의 정수를 보고 싶거나 이해하고자 한다면 꼭 가야 할 곳은 바로 각 지방 도시들에 있는 국립박물관이다. 연휴가 되면 인천국제공항은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외국으로 나가는 관광객들이 많다. 반면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 있는 국립박물관들을 연속적으로 방문하는 투어가 없는 것을 보면 우리 전통문화여행은 아직도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여행을 다니면서 풍경이나 유적들을 보기도 하고, 지방색이 배어나오는 사투리나 음식 등등을 경험하며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다양한 우리 역사문화의 본질을 생각해 보는 기회가 적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을 제외하고도 지방에는 13개의 소속국립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들은 크게 경주나 부여와 같은 역사도시, 대구나 광주와 같은 거점 도시에 건립되었다. 적어도 국립박물관의 건립 정책으로 보면 지역 전통문화 향유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해서 대단히 바람직한 기반이 형성된 세계적인 모범 사례인 셈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방의 국립박물관 활용에 대한 인식은 높지가 않다. 우리 역사도시에 건립된 국립박물관들은 각 지역의 독특한 역사문화를 전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경주박물관에 가면 세계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긴 여운의 신라 에밀레음(音)이 있다. 부여박물관에는 세계 최고의 조형미를 가진 금동대향로가 있다. 용과 봉황이 아래위로 어우러져서 시원한 균형미를 가진 향로에는 그야말로 신선들이 음악을 즐기는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 옆의 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압권이다. 왕의 무덤을 지키던 석수(石獸)도 방문객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금으로 된 왕관장식은 세계 최고의 당초문장식으로 서양에서도 애호하는 디자인이다. 김해박물관에 가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볼 수가 없을 정도의 수많은 철로 만든 무기들과 갑주들이 있다. 심지어 말도 철판으로 된 갑주를 씌운 것을 보면 고대사회 당시 전장의 처절한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우리의 역사도시들은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한 번쯤은 가 보는 것이 좋을 것이고, 만약 간다면 반드시 그곳의 국립박물관부터 방문하는 것이 우리 역사문화를 쉽게 알게 되는 지름길이다. 덧붙이자면 다른 도시에 있는 국립박물관들도 각 지역 전통에 맞는 특별한 브랜드를 가지고 있다. 대구박물관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섬유도시답게 우리의 섬유유산을 모으고 전시하는 역할을 한다. 고대 무덤에서 나온 옷이나 아름다운 직물들을 볼 수가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양반문화를 보려면 전주박물관을 가야 한다. 한국인 모두가 희구하는 이상향의 모습을 보려면 춘천박물관으로 가야 한다. 금강산을 비롯한 명산들이 우리 이상향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청주는 세계 최고 수준인 금속공예유산을 전시하고 있다. 광주는 아시아 문화의 중심도시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과 주변에 최고의 도요지들이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 도자기의 길을 보여 주는 박물관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신안선의 도자기들을 중심으로 고대 해양실크로드를 보여 주는 최고의 거점박물관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여행을 한다면 지역 도시 소재의 국립박물관을 방문하지 않고는 ‘그 곳, 그 도시’에 가 보았다고 감히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 지역문화의 최고의 정수이며 한국문화의 최고는 보지 못한 것이니까 말이다. 외국여행의 기억을 한층 더 높이기 위해서라도 여행하기 전 후에 반드시 우리 국립박물관의 보물을 하나라도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문화를 사랑하는 길이고, 외국인들이 우리를 다시 보게 만드는 길이다.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개국 시기·위치도 다른데… ‘가야=임나’로 변질시킨 일본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개국 시기·위치도 다른데… ‘가야=임나’로 변질시킨 일본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6월 1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약간 뜬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국정과제에 가야사 연구와 복원도 넣어 주세요”라고 말했다. 가야사를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 중 하나로 설정해 달라는 주문이었다. 가야사 등 고대사 전공자들이 반발했다. 이들은 “대통령이 역사의 특정 시기나 분야에 대한 연구나 복원을 지시하는 것 자체가 적절치 않고 역사를 도구화하는 발상”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옹호하는 사람들은 “어떤 연구를 수행할지 고대사연구자 자신들만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전문가의 오만”이라고 반박했다. 반발의 핵심 요인으로 현재 가야사 연구자들 다수가 가야를 임나와 같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임나는 가야의 별칭? 가야사 연구가인 홍익대 김태식 교수는 ‘미완의 문명, 700년’에서 “요컨대 대가야를 중심으로 파악되는 5~6세기의 후기 가야 연맹을, 왜에서는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任那)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가야=임나’라는 것이다. 일본 소학관(小學館)에서 간행한 ‘일본대백과전서’는 ‘임나’(任那·미마나)에 대해서 “조선의 고대 국명. 임나라고 읽는데 별명은 가야”라고 설명하고 있다. 가야가 어느 순간 임나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더욱이 ‘가야=임나’라고 보는 시기가 5~6세기라면 문제가 간단치 않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고대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에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구를 두고 지배했다는 ‘4세기 말~6세기 말’과 겹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일 고대사에 대해서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많은 300여편의 논문과 30여권의 학술저서를 낸 고(故) 최재석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가야=임나설’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그는 ‘고대한일관계사연구’에서 “일본인들은 그들의 역사 조작에 방해가 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조작으로 몰고, 가야와 임나가 동일국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제시함이 없이 말로만 가야와 임나는 동일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가야와 미마나가 전혀 별개의 나라라는 증거는 있을지언정 같은 나라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고 비판했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가야와 임나를 동일국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런 사료적 근거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가야는 임나가 아니라는 반론 김 교수는 “왜에서는 무슨 이유에선가”라고 넘어갔지만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하는지 그 근거를 밝히는 것이 역사학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도 가야를 임나라고 표현한 기사는 한 군데도 없다. 억지해석만이 난무할 뿐이다. ‘낙랑군=평양’이라는 사료적 근거가 전무한 것처럼 ‘가야=임나’라는 사료적 근거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최 교수의 비판은 기본적인 의문으로 이어진다. 최 교수는 같은 책에서 “이러한 일본인들의 주장에 어찌하여 한국 사학자들도 무조건 동조하며 가야와 임나가 동일국이라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 또 일본인들은 가야와 임나의 관계에 대하여 논할 때는 보통 가야와 임나가 동일국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일본이 가야를 지배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또 어찌하여 한국의 고대사학자들은 후자인 일본이 가야(한국)를 지배하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침묵을 지키면서 전자인 가야와 임나가 동일국이라는 대목에만 관심을 가져 이것을 받아들이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최 교수의 이 말이야말로 현재 ‘가야=임나’를 주장하는 남한 사학계의 이중적 태도를 잘 지적한 것이다. 또한 정부는 돈만 대고 연구는 자신들에게 맡기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속내를 미리 간파한 혜안이기도 하다. ●계림은 신라의 별칭 임나는 과연 가야의 별칭일까. 이 문제를 명쾌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가야사 전체의 모습이 흩어지게 되어 있다. 임나가 가야의 별칭이라는 말은 가야가 곧 임나라는 말이다. ‘가야=임나설’이 사실로 성립할 수 있을지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서 살펴보자. 가야와 깊은 관계가 있는 나라는 신라다. 그런데 “계림은 신라의 별칭이다”라는 말에는 아무도 시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탈해 이사금 9년(서기 65년)조에는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나무 사이에서 금궤짝이 나무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 금궤짝에서 한 아이가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하고 “시림을 계림(鷄林)으로 고치고 국호로 삼았다”는 것이다. 신라인들 스스로 신라를 계림으로 여겼다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의 정사(正史)인 ‘신당서’(新唐書) 고종(高宗) 상원(上元) 원년(674)조에는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林道)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정벌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당 전쟁 시기(670~676)의 기사인데, 당나라도 신라를 계림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계림이 신라의 별칭’이라는 말에는 아무도 시비하지 않는다. ‘임나가 가야의 별칭’이라는 명제도 마찬가지일까. ●가야와 임나는 모든 것이 다르다 ‘임나가 가야의 별칭’이라는 말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야’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와 같은 나라라는 뜻이다. 임나를 가야의 별칭이라고 말하려면 몇 가지 핵심적인 사실들이 일치해야 한다. 개국연대와 멸망연대가 일치해야 하고 개국시조와 망국시조가 일치해야 한다. 또한 나라가 있었던 지리적 위치도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표>에서 보는 것처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가야와 ‘일본서기’의 임나는 이 모든 것이 다 다르다. 아니 다르다기보다는 ‘일본서기’의 임나에는 개국연대, 망국연대, 개국시조, 망국시조 같은 내용이 일절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최 교수가 “가야와 임나가 동일국이라는 증거는 하나도 제시함이 없이 말로만 가야와 임나는 동일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나카 미치요의 주장 ‘가야=임나설’의 진원지가 일본 메이지(明治)시대 한국을 점령해야 한다는 논리인 정한론(征韓論)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사실 여부는 중요하다. 1882년 일본군 참모본부는 ‘임나고고’(任那稿考)와 ‘임나명고’(任那名稿)라는 책을 간행했다. 학술기관도 아닌 일본군 총사령부에서 왜 느닷없이 고대 ‘임나’에 관한 역사서를 간행했을까. 이듬해인 1883년에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의 간첩인 사코 가케노부 중위는 만주에서 광개토태왕릉비 탁본을 가져왔다. 일본군 참모본부의 간첩 손을 먼저 탔기 때문에 위조 논쟁이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는데, 특히 2면 하단과 3면 상단이 집중적으로 훼손된 가운데서도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용어는 뚜렷이 남아 있어 의혹을 던져 주고 있다. 임나가 가라와 동일국이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한 인물은 정한론자(征韓論者)였던 나카 미치요(1851~1908)였다. 나카 미치요는 일본 도쿄제국대 출신들이 주축인 사학회에서 만들던 ‘사학잡지’(史學雜誌·1896)에 가라고(加羅考)를 실어 ‘임나가 가라’라고 주장했다. 임나가 가야이므로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과거사의 복원이라는 논리다. 나카 미치요는 가라고에서 “숭신천황(崇神天皇) 말년에 가라(加羅) 왕자(王子)인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이 내조(來朝)하여 수인(垂仁)천황 시절에 본국으로 돌아갈 때 그 나라에 임나(任那)라고 하는 이름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임나(任那)는 가라(加羅)의 별호가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서기 720년에 편찬한 ‘일본서기’는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고 연대부터 속인 기이한 역사서라서 대단히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런 ‘일본서기’ 수인(垂仁)기 2년(서기전 28)조에는 일왕 수인이 의부가라(意富加羅)의 왕자에게 선왕 숭신(崇神)의 이름을 국명으로 하라고 말했고, 이에 따라 나라 이름이 미마나국(彌摩那國)이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나카 미치요는 미마나(彌摩那)라는 소리글자를 임나(任那)라는 뜻글자로 바꾼 것인데, 이때는 서기전 28년으로 가야가 생기기 70년 전의 기사이다. 따라서 이 기사는 ‘가야=임나’로 보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나를 가야로 둔갑시켜 한국 침략 논리로 사용했던 ‘가야=임나설’이 일본학계뿐만 아니라 남한학계에도 통용되어 ‘임나는 가야의 별칭’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는 기현상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 [이 좋은 봄날, 함께 걸을까] 역사의 뒤안길에서

    서울 광진구는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하는 역사문화 체험 프로그램인 ‘가족과 함께하는 토요역사기행’을 마련했다고 10일 밝혔다. 이번 프로그램은 지역 내 초등학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오는 10월까지 상·하반기로 나눠 총 8회 진행된다. 회당 40명 참여로, 비용은 1인당 7000원이다. 상반기 1회는 12일 인천 강화 지역에서 이뤄지는 선사역사체험으로, 고인돌유적지·보문사 등을 둘러본다. 2회는 19일 충남 공주에서 공산성·무령왕릉을, 3회는 6월 2일 부여에서 궁남지·정립사지5층석탑·부소산성을, 4회는 6월 16일 경기 여주에서 명성황후 생가·영릉 등을 탐방한다. 김기동 광진구청장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가족 간 소통을 증진하고 우리 역사와 문화의 우수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집 지으려 팠더니… 신라무덤 무더기 발견

    집 지으려 팠더니… 신라무덤 무더기 발견

    덧널무덤 밀집… 장신구 등 출토경북 경주 탑동 단독주택 신축 부지에서 4∼6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무덤이 다수 발굴됐다. 한국문화재재단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경주 탑동 6-1, 6-6번지 부지 2곳에서 4~6세기 신라 전성기에 만든 덧널무덤 8기, 돌무지덧널무덤 18기, 돌덧널무덤 4기, 독무덤 4기 등 총 34기가 밀집 분포된 걸 확인했다고 9일 밝혔다.이번 조사에서는 신라 무덤 외에도 조성 시기를 알 수 없는 널무덤 3기와 통일신라시대 건물터, 우물 등도 나왔다. 3호 덧널무덤의 경우 동쪽에 주곽(主槨·한 무덤 안의 여러 곽 가운데 중심이 되는 인물의 주검을 넣는 곳), 서쪽에 부곽(郭·주곽에 딸려 부장품을 넣은 곳)이 배치돼 있었다. 허리에 숫돌을 찬 피장자가 주곽에 매장돼 있었고 머리 부근에서 토기가, 발 쪽에서는 비늘 갑옷과 화살촉이 출토됐다. 2개의 부지에서는 다수의 돌무지덧널무덤과 돌덧널무덤이 2~3기씩 나란히 배치돼 있어 당시 혈연 관계가 있는 사람을 동일한 묘역에 매장한 풍속 문화가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주검 칸에서는 둥근 옥이 달린 목걸이, 은제팔찌, 고리자루 큰칼, 허리띠 장식과 토기가 쏟아져 나왔다. 노재민 한국문화재재단 조사연구1팀장은 “3호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발견된 화려하고 정교한 굵은고리 귀걸이 한 쌍은 왕릉급 유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다수의 유물과 무덤이 확인된 탑동 일대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원삼국 시대 널무덤과 4~6세기대 신라 무덤 등 총 80여기가 확인됐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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