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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구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가요, 항일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했다.‘조선 상고사’처럼 널리 알려진 연구서가 있는가 하면,‘꿈하늘(夢天)’ 같이 소설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꿈하늘’은 일종의 팬터지 문학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작가 신채호는 천상에 올라 ‘임’을 좌우에 모신 여러 영웅호걸을 만난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있고 철학자 화담 서경덕도 보인다. 도술의 달인 전우치도 함께 자리한다. 예상 밖인 것은 오윤부(伍允孚)라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성력(星曆)의 대가라 했다. 우선 성씨부터 낯선 오윤부. 좀 더 알고 보면 그는 ‘고려사’ 열전에 소개될 정도로 완전히 무명은 아니었다. 천문예언 전문가라고 했다. 섣부른 짐작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천문예언이 무척 중시됐다. 이름난 유학자 박상충의 전기에도 “성명(星命)에 밝아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중국에서는 13세기 이후 사주명리학이 예언이나 점의 핵심이었다. 고려는 경우가 달랐다. 풍수지리와 더불어 천문예언이 늘 예언의 중심축이었다. 인간 만사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땅의 기운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고려인들의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문은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정조9년(1785)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이른바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것은, 그 성씨가 김가이고, 이름은 자세히 모릅니다만,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유가는 정미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정가는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 세 집안사람들이 장차 백 년 동안 서로 싸웁니다. 그 증거로, 객성(客星)이 남방에서 이미 서울로 들어왔습니다.”(실록, 정조 9년3월1일 경술) 조선은 장차 3국으로 분할돼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는 예언이다. 객성이 남쪽에서 출현해 서울 쪽으로 들어왔다는 천문현상이 증거로 제시됐다. 나라의 운명은 별이 결정한다는 민중의 믿음이 읽힌다. ●대대로 별점을 본 오윤부 고려 충렬왕 때 일관(日官)으로 활동한 오윤부야말로 별점의 대명사였다. 그의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 한 때 부흥(復興)으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시대의 성씨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엔 배천 오(伍)씨가 없다. 오윤부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대물림을 해가며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살았다. 배천오씨들은 자자손손 별점을 보며 태사국(太史局)을 지켰다.(오윤부의 전기는 ‘고려사’, 권 122를 참조) 고려는 귀족사회였고, 모든 신분이 세습되었다. 심지어 군졸 노릇만 하는 집안, 아전과 서리를 배출하는 집안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일관 오윤부 일가는 귀족은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이나 상인보다는 훨씬 지위가 높았다. 오윤부는 용모가 초라했고 말수가 적었다. 여간해서는 좀체 웃지도 않았다. 그는 첫눈에 호감을 살 만큼 붙임성 있고 구변 좋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문을 익혔다. 장성해서는 일관에 임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말년에는 천문도(天文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후배 일관들이 그 천문도를 모범으로 삼았다니 그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오윤부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별점이었다. 타고난 재주도 재주였지만 그는 무척 부지런했다. 밤을 새워가며 하늘을 수놓은 수 백 개의 별들을 샅샅이 살폈다. 날씨가 제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그는 늘 성실했다. 오윤부의 먼 후배 격인 조선시대 일관들은 5개 팀으로 나뉘어 하루 24시간 내내 하늘을 관측했다. 그들은 관측 대상을 23종으로 나눠 정상적인 현상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해, 달, 흰무리, 지진, 혜성, 새별(新星) 그리고 28수로 요약되는 주요 별자리를 모두 점검했다. 일관들은 특히 새별과 흰무리 등의 모양, 정도, 자리, 바뀌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성변측후단자’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서운관지’) 이 보고서에 천체 약도가 첨부돼 날마다 임금님에게 제출됐다. 조선시대 일관들이 남긴 일지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천문 보고서였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천문 강국의 역사를 입증한다. 고려시대의 일관들은 그와 비슷한 활동을 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특히 오윤부는 이상한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어떤 별이 천준(天樽)을 범하자 “이번에 올 중국사신은 술꾼이다.” 고 예언했다. 천(天)은 중국, 준(樽)은 술통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별이 여림(女林)을 범하자, 중국 사신이 와서 소녀들(童女)을 데려갈 것이라며 걱정했다.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의 해석이 현대인의 눈엔 너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늘이 꼭 중국이어야 될 이유가 없다.‘여림’을 두고 공녀(貢女)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원나라의 횡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오윤부는 그런 현실을 감안해 모든 천문현상을 풀이했다. 그의 별점은 잘 들어맞았고 소문이 원나라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 ●원형 민족주의자 오윤부 고려 후기에는 원의 수시력과 같은 중국역법이 수입되기도 했다. 오윤부는 그 방면에도 상당한 전문가였다. 그는 달력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제일(祭日)을 중국과 비교했다. 고려에서는 봄가을의 가운데 달인 음력 2월과 8월의 마지막 무일(遠戊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나, 중국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첫째 무일(近戊日)을 제삿날로 삼았음이 확인됐다. 오윤부는 조정에 건의해 중국의 예를 따르게 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중국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는 고려인이었다. 충렬왕은 즉위 직후 선왕인 원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셨다. 새 위패를 선대왕들의 신위와 합설하기 위해 원종의 시책(諡冊 시호를 아뢸 때 쓴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충렬왕후는 원나라 공주였는데, 왕비로서 그 행사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다. 마침 오윤부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공주의 참여를 가로막았다. 선대왕들의 신령이 계신 곳에 원나라 공주가 술잔을 올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원나라는 과거 수십 년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원을 미워했다. 오윤부는 이런 반원의식이 강했다. 원나라 공주는 종묘 제사에서 제외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통쾌해 했다. 알려진 대로 원종 이후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됐다. 고려국왕은 대대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 왕은 죽어서도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호에 표기해 “충○왕”이 되었다. 고려왕실에 시집온 원나라 공주의 위세는 때로 왕권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었고, 오윤부는 이 점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천문 현상을 빙자해 공주를 압박했다.“천문을 살펴 보니 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요즘은 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청컨대 궁궐을 짓거나 고치는 공사를 중지하고 덕을 닦으십시오. 그래야 재변이 멈춥니다.” 원나라 공주는 오윤부의 제지를 받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원나라 공주에 대한 오윤부의 공격은 계속됐다. 공주는 고려에 시집온 뒤에도 여러 차례 본국을 오갔다. 그 때마다 막대한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공주는 원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기가 없는 동안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언젠가 한 번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놓고 좋은 날을 택해 아예 새 궁궐을 지어 놓으라고 졸랐다. 다들 불평은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다. 이 때도 오윤부가 발 벗고 나섰다.“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님께 불리하므로, 신하인 저는 절대 택일을 못하겠습니다.” 원나라 공주는 분노에 치를 떨며 오윤부의 벼슬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매로 때리려 했으나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어느 재상이 애써 말리는 바람에 매 맞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다. 그 일로 분이 안 풀린 공주는 오윤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왕은 공주의 청을 어기지 못해 오윤부를 매질하게 했다. 그는 매를 맞으며 이렇게 변명하였다.“날을 가리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신하를 협박하여 억지로 가리게 한다면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의 뜻에 아첨할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궁궐을 짓는 공사가 겨우 시작됐는데, 화성이 달을 삼키는 변이가 일어났다. 왕은 반승(飯僧 스님들에게 밥을 공양함)을 실시해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반승은 사소한 재앙이 예측될 때마다 되풀이된 고식적인 해결책이었다. 오윤부는 동료인 문창유와 함께 왕에게 간언을 바쳤다. 화성이 달을 삼키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스님들에게 밥을 주고 부처님을 공양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런 값싼 보시를 그만 둬야 한다. 진정한 길은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왕은 반대여론을 의식해 궁궐 짓는 일을 그만뒀다. ‘고려사’에 실린 전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오윤부의 간언은 전문분야인 천문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사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한 번은 오윤부가 전법총랑(典法摠郞 법률의 집행을 담당) 박인주에게 전법사의 사무가 자꾸 지연되는 까닭을 물었다. 원나라 공주의 명령과 임금님의 명령이 한없이 쏟아져,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과 공주는 각기 소송 사건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해 일처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윤부는 이런 일이 자기 소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따졌다. 이런 식으로 일관 오윤부는 가끔씩 왕과 의견충돌을 보였다. 그러나 원나라 공주에 대해 대들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는 공주 보기를 마치 원나라 침략군을 대하듯 했던 것 같다. 오윤부는 일종의 원형(proto) 민족주의자였다. ●백성을 대변한 오윤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천문에는 변이가 많다. 그럴 때마다 오윤부는 이를 정밀하게 살펴 고려왕실의 미래 운명과 관련지었다. 그는 특히 고려백성의 편에서 국왕 내외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천문현상을 활용했다는 혐의가 있다. 천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과거의 일관들은 기도를 권하거나 굿을 하라는 권고를 주로 했다. 다분히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오윤부는 달랐다.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백성의 원망이 없다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두 곳에 파견한 왕지별감(王旨別監 왕의 특사)을 소환하고, 여러 곳에 설치된 공주식읍(公主食邑 원나라 공주에게 준 토지와 백성)을 폐지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권고를 듣자 왕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마침내는 공주에게 줬던 식읍을 폐지하였다. 거기서 거둔 세금을 나라의 창고에 배속시켜 백관의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실 원나라 공주는 왕을 졸라 각처에 농장을 마련해 호사가 극에 이르렀다.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수만 명의 백성들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오윤부는 백성들의 의사를 대변해 식읍의 혁파를 주장했다. 하늘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변동도 오윤부는 마찬가지로 이용했다. 언젠가 한번은 궁궐 연못에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산소부족이었든지 아니면 약물에 의한 중독이었을 것이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물위로 떠오른 고기떼를 두고 오윤부는 충렬왕을 몰아쳤다.“갑술년(충렬왕 즉위년 1274)에 대궐 동편 못에서 이런 괴변이 일어났고 선왕이신 원종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스스로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궁궐의 물고기가 죽든 살든 그것이 왕의 목숨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관 오윤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칫하면 국왕이나 원나라 공주의 진노를 사게 될 거였지만 개의하지 않았다. 예언가 오윤부의 성공비결은 고려사회에 만연했던 반원적인 정서를 잘 이용했다는 점이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도 원나라의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렬왕 역시 친원과 반원의 두 노선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했다. 그 틈을 비집고 오윤부는 한결 같이 자주노선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묘청과 백수한의 후예였다. 그러나 오윤부는 묘청 등을 뛰어넘었다. 그는 일관으로서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정확히 인식시켜야 될 임무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일에 왕이 자기의 ‘충언’을 듣지 않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끝까지 졸라댈 정도였다. 오윤부의 해석은 유교의 재이론(災異論)에 가까웠다. 묘청 등이 불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에 기울어 있었다면, 오윤부는 다가올 성리학 시대의 천문해석에 근접해 있었다는 말이다. 유교적인 천문예언가 오윤부의 고집불통에 충렬왕은 때로 두통을 일으켰다. ●충렬왕이 졌다! 왕은 오윤부를 골탕 먹일 생각까지도 했다. 원 나라 세조가 요동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다. 왕은 상국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까지 나가게 됐다. 우선 유청신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때 오윤부가 별점을 쳤다.“아무 날 유청신이 반드시 돌아옵니다. 임금님께서는 요동까지 가실 필요 없이 말머리를 서울로 돌리게 되십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됐는데도 유청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오윤부를 체포했다. 점괘가 틀렸으니 벌을 받으라 했다. 하지만 오윤부는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며, 좀더 기다리자고 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먼데서 먼지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유청신이 타고 있었다. 예언이며 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문현상은 그저 자연계의 변화를 알릴 뿐이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 복을 불러들일 리 만무하고 화를 초래할 수도 없다. 오윤부의 사고방식은 이런 현대적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윤부는 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천문을 살폈고, 그 때문에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신채호가 그를 가장 뛰어난 천문예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조선 정조 때 일어난 ‘정감록’ 사건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공범인 평민 지식인 주형채도 오윤부처럼 별점을 보았다. 주형채는 말했다.“작년 섣달 초7일, 초8일, 초9일에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습니다. 그 속에 붉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장군성과 태백성이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서로 1도(度) 거리로 떨어졌으며,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떠밀어 여러 번 물러가고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정조,9년3월22일 신미) 주형채는 국가의 녹을 먹는 일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윤부처럼 밤하늘의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었고 밤새워 별을 보았다. 별자리의 이동을 1도 2도로 따질 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다. 고려시대에는 오윤부 같은 특수 계층만 그런 지식을 독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평민지식인들도 서적을 통해 공유하게 됐고, 그래서 주형채와 같은 평민도 직접 별을 바라보며 민중의 희망을 찾아 나섰다. 자유로운 지식은 곧 우리들의 희망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일요영화]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사랑한 황비

    ●시시, 황비의 운명(EBS 오후 1시50분) EBS가 최근 연속해서 내보내고 있는 오스트리아 황비 시시 3부작 가운데 마지막 편이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품. 시시는 애칭으로 본명은 캐럴린 엘리자베스. 영국 사람들이 다이애나비를 좋아하듯 오스트리아 사람들도 시시 황비를 사랑한다고 한다.1836년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로맨틱한 결혼을 해서다. 가는 허리를 좋아해서 몸에 피가 배어나올 정도로 페티코트를 즐겨입었다든가, 검은 머리를 발 끝까지 길렀고, 아침에 일어나 치장을 하는데만 한나절이 걸렸다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3부에서는 못마땅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대공비(마그다 슈나이더)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시시(로미 슈나이더)는 헝가리의 왕권을 얻어내는 등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는 한편, 남편 요제프 황제(칼하인즈 뵘)와의 사랑도 굳건히 한다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영화는 해피엔딩이지만 실제로 시시는 나중에 남편에게 외면을 당하며 자식들과도 차례로 사별을 거듭하다가 1898년 스위스에서 한 무정부주의자가 휘두른 칼에 허무하게 숨을 거둔다.1957년작.108분.
  • [토요영화] 알 파치노의 ‘리처드 3세’ 제작일기

    [토요영화] 알 파치노의 ‘리처드 3세’ 제작일기

    ●리처드를 찾아서(EBS 오후 11시30분) 당혹스러운 영화다. 다큐멘터리 또는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메이킹 필름처럼 비쳐지기도 한다. 메이킹 필름은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아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최근 DVD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인터뷰 위주로 진행되는 이 영화는 당혹스럽지만 독특한 형식 파괴로 시청자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게 된다. 내용은 간단하다. 알 파치노를 비롯한 배우들이 셰익스피어의 명작 ‘리처드 3세’를 영화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리처드 3세는 영국의 왕으로, 형을 살해하고 왕권을 차지했지만 반대파 때문에 전장에서 처참하게 살해되는 인물이다. 현대인에게 보다 쉽게 다가서는 작품을 찍기 위해 다양한 계층과 인터뷰도 하고, 영화 속 영화 ‘리처드 3세’를 찍으며 장면마다 출연 배우들이 토론을 벌인다. 캐스팅과 제작회의, 연기 연습이 그대로 반영된다. 알 파치노, 케네스 브래너, 켈빈 클라인, 케빈 스페이시, 알렉 볼드윈, 위노나 라이더 등 쟁쟁한 배우들이 참여했다. 게다가 감독은 알 파치노. 연출에 눈독을 들인 연기파 배우치고는 늦깎이 데뷔지만 배우로서의 고민을 솔직 담백하게 그려 호평을 받았다. 그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을 맡아 올 가을 국내 관객들과 재회할 예정이다.1996년작.118분.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기고] 새 1만원권 배경그림 ‘일월오봉도’는 금척의 상징/최홍 작가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저자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오는 2007년 상반기에 발행되는 새 1만원권의 앞면 배경 그림을 일월오봉도와 용비어천가 제2장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금통위의 결정을 환영한다. 다만 일월오봉도에 대한 설명이 다소 피상적인 감이 있어 이해를 돕기 위해 본인의 견해를 간략하게 피력하고자 한다. 일월오봉도는 조선시대에 왕권을 상징하는 극히 중요한 그림이면서도 내막이 거의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의 그림이다. 이유는 이 그림이 왕조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명칭도 별도로 정해지지 않아 일월곤륜도, 일월오악도 등 여러 가지로 불려왔다. 그러나 일월곤륜도나 일월오악도라는 명칭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일월오봉도가 가장 적합하다. 또 이 그림이 임금의 통치권을 나타낸다는 것도 그저 평범한 해석에 불과하다. 해와 달은 왕과 왕비,5개의 봉우리는 5악(五嶽), 동심반원형 물결 무늬는 바다의 파도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만백성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5개의 봉우리는 큰 산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데다, 동심반원형 무늬도 바다를 나타내고 있지 않다. 동심반원형 무늬가 바다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 사이로 솟구치는 흰 포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일월오봉도는 천권(天權)의 상징물인 금척(金尺·금으로 된 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꿈속에서 하늘의 신인으로부터 왕조 창업의 신표로 받았다는 금척의 상징 그림인 것이다. 때문에 이 그림은 임금이 거둥하는 곳에는 언제 어디에나 동행했다. 단순히 통치권을 나타내는 그림이라면 그저 임금의 용상 뒤에 있으면 됐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또 이 그림은 전북 진안의 마이산(馬耳山)에 있는 석탑군을 형상화한 그림이라고 여겨진다. 진안의 마이산에는 조선 왕조 창업과 관련하여 이성계의 자취가 짙게 남아 있다. 여러 정황으로 봐서 마이산의 석탑들은 금척의 조형물로 쌓여진 것이다. 일월오봉도의 해와 달은 마이산의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을,5개의 봉우리는 석탑군 중 5개의 원추형 석탑들을,45개에 달하는 동심반원형 무늬는 줄줄이 서 있는 외줄탑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금척의 조형물을 거리상 임금이 가까이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림으로 형상화해 늘 곁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금척이 조선 왕조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연원은 멀리 신라를 거쳐 단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를 창업한 박혁거세도 꿈속에서 하늘로부터 금척을 받았으며, 단군도 우리 민족을 이끌고 조선을 창업할 때 금척의 이치에 따라 나라를 건설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 상고사에 대한 저서 중의 하나인 ‘부도지(符都誌)’ 중 ‘징심록 추기’편에서 김시습은 금척이 천부경(天符經)이라는 사상적 배경과, 첫 건국의 바탕이라는 역사적 유래를 갖추고 있는 신비로운 사물이라는 것을 누누이 밝히고 있다. 이성계가 꿈속에서 금척을 받고 나라 이름을 단군과 같이 조선으로 했던 것은 단군의 맥을 이어 이 땅에 천부도(天符都)를 건설하려 했던 의도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남북 교류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는 이때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새 1만원권 지폐의 배경 그림으로 일월오봉도를 결정한 것은 퍽 의미심장해 보인다. 금척은 우리 민족에게 역사적 전환기, 즉 새로운 국가 창업 시기에 종종 등장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여러 궁에 보관되고 있는 일월오봉도는 같은 형식이면서도 표현 기법이 조금씩 다른데, 덕수궁 중화전의 그림이 가장 원형에 가까운 그림일 것이다. 덕수궁은 고종이 거처하던 궁이었고, 고종은 왕조의 뿌리와 전통을 되살리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최홍 작가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저자
  • [사설] 사면권 남발 막을 장치 필요하다

    정부가 12일 발표한 광복 60주년 대사면은 국민화합을 위한 결단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판단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빛을 다시 찾은 날을 기리는 차원에서 422만명의 각종 사범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조치라고 보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단순 음주운전으로 면허 취소나 벌점 등의 행정처분을 받은 도로교통법위반 사범이나 생계형 서민범죄 일반형사범 등의 결격사유를 풀어줘 더불어 뛸 수 있도록 혜택을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2년 대선 당시 불법 선거자금의 모금에 연루된 정치인들을 대거 사면 대상에 끼워넣음에 따라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 커질 수밖에 없게 됐다. 더욱이 지난 대선 때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정대철 전 열린우리당 고문의 경우, 대선자금 사건과는 상관없이 뇌물죄가 대법원으로부터 인정됐는 데도 사면 대상에 포함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법의 형평성에 비추어 납득할 만한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 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인 홍업·홍걸씨 등에 대한 사면 역시 정치적인 계산이라는 따가운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가 헌법에 보장돼 있지만 왕권시대의 은전을 베풀 듯 마구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밝혀왔다. 법의 존엄성을 준수하는 법치 국가라는 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법의 테두리에서 성실히 생활하는 절대 다수의 국민들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이제 사면권 남발에 대한 정략적인 논쟁을 접고 법 질서를 지키기 위해 사면권을 제한하는 거름 장치를 마련하는 데 여야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할 때이다.
  • [씨줄날줄] 와하비즘/이목희 논설위원

    엊그제 치러진 파드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의 장례식은 사우디 왕가가 가진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신은 갈색 천에 둘둘 싸여 비석이나 봉분조차 없는 공공묘역에 묻혔다. 그렇다고 사우디 왕가가 서민적이라고 평가될까. 왕족들이 국가의 부를 독점, 초호화판으로 살고 있는 현실에서 이번 장례식은 표리부동하게 비칠 수 있다. 사우디는 와하비즘을 건국이념으로 1932년 세워진 왕정국가다. 서구의 침략이 본격화된 18세기, 수니파 지도자 이븐 아브드 알 와하브가 이슬람경전 코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따라 근검절약하자는 취지로 주창한 것이 와하비즘이다. 와하비즘은 극단적 배타주의로 흐를 소지를 처음부터 안고 있었다. 이집트에 무슬림형제단, 파키스탄에 디오반디즘 등 이슬람 원리주의가 존재하지만 이를 국가 차원에서 내건 곳이 바로 사우디이다. 하지만 지금 사우디는 아랍권에서 친미·온건국으로 분류된다. 왕족의 영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국가를 대표하는 미국과 친하게 지내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편으로 와하비즘을 포기하면 빈민층인 다수 국민을 다독거리기 어려워진다. 음주가무 및 우상숭배 금지와 국왕 장례절차 정도에서 와하비즘을 반영함으로써 국가질서를 잡아가려 하고 있다. 와하비즘 과격파들은 이런 사우디 왕가가 못마땅하다. 미국뿐 아니라 사우디 왕조도 이젠 타도의 대상이다.9·11테러를 저지른 빈 라덴이 와하비즘의 철저한 실천을 외치는 대표주자다. 빈 라덴은 무슬림형제단의 알 자와히리와 함께 테러조직 알 카에다를 만들어 국제사회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도 사우디를 둘러싼 딜레마가 만만치 않다. 부시 대통령의 ‘자유의 행진’ 정책에 따르면 사우디는 분명 민주화 대상이다. 그러나 사우디 왕가를 흔들면 이슬람 강경 원리주의자들이 힘을 얻는다. 또 사우디가 세계 석유시장에서 갖는 비중은 대단하다. 국제경제가 급격히 나빠질 우려가 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친미와 와하비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사우디 왕가, 석유이권을 유지하고 테러를 막으면서 사우디 왕가를 변화시키려는 미국. 아라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 정치·경제·안보 역학관계는 그야말로 고차방정식이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親美 실용주의 노선 부담 美와 일정거리 유지할 듯

    ‘중동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국왕이 1일 사망함에 따라 향후 사우디와 아랍권의 변화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새 국왕은 압둘라 왕세제, 차기는? 새 국왕으로 결정된 압둘라(82) 왕세제는 파드 국왕의 이복동생으로 95년 파드 국왕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10년 가까이 사우디를 실질적으로 통치해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압둘라 왕세제는 테러 및 부정부패와 싸워왔으며 경제를 자유화했다.”고 평가했다. 미국과 사우디 국민들도 압둘라 왕세제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왕권은 순조롭게 승계됐지만 앞으로 ‘차기’ 국왕 자리를 둘러싼 암투가 벌어질 가능성은 남아 있다. 차기 왕세제는 파드 국왕의 동생인 술탄 부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결정됐지만 파드 국왕의 다른 동생들이 자리를 넘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는 나예프 내무장관이 꼽힌다. 경찰을 장악하고 있는 나예프 왕자는 사우디 내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이끌며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파드 국왕 이후 당장 사우디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새 국왕이 등극하면 그동안 강경보수파에 눌려온 시민들이 민주화 목소리를 높일 가능성이 있고, 과격 이슬람주의자들도 왕정타도를 주장하고 나설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미국·아랍과의 관계에도 영향 있을 듯 사우디는 세계 최대 산유국이고, 영토와 인구 규모에서도 중동의 최강국이다. 그만큼 원유시장과 중동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미국도 사우디의 변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외신들은 압둘라 왕세제가 그동안 실용주의적 노선을 걸어온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수차례 미국을 방문하며 친미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2001년 9·11테러 이후 사우디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자 미국과 일정 거리를 두는 정책을 취해왔다. 이같은 그동안의 행적으로 볼 때 그가 왕위에 올라 본격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면 중동의 안정을 위해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정책을 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한편 파드 국왕의 사망소식이 전해진 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서부텍사스중질유(WTI) 선물가격은 전날보다 배럴당 53센트 오른 61.10달러에 거래가 시작돼 장중 한때 61.45달러까지 치솟았다.AP통신은 투르키 빈 알 파이잘 영국주재 사우디대사의 발언을 인용, 석유정책 등 사우디의 주요정책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파드 국왕은 누구 지난 82년 즉위한 파드 국왕은 사우디 근대화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특별한 서구식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친미 노선과 전통 이슬람 사이에서 균형잡힌 외교정책을 펼치려 노력했다. 이는 사우디가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됐다. 그러나 91년 걸프전 당시 사우디에 대규모 미군 주둔을 허용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분노를 샀고, 이후 사우디도 테러의 타깃이 됐다.95년 뇌졸중 이후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으며 지난 5월 사망설이 나돌기도 했다. 아랍권 방송들은 파드 국왕의 장례식은 3일 거행될 예정이라고 전했다.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지역플러스] 경주박물관 ‘신라의 칼’ 전시회

    국립경주박물관이 신라 왕릉에서 출토돼 왕권의 위세를 엿볼 수 있는 ‘신라의 칼’ 전시회를 갖는다.5일부터 오는 10월9일까지 개최될 이번 전시회에서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봉황장식큰칼(보물 제621호)’을 비롯해 신라 왕릉에서 나온 큰 칼 20여점이 선보인다.전시되는 칼은 모두 고리 모양이 둥근 환두대도(環頭大刀)로, 장식 문양은 모양에 따라 삼엽장식환두대도(三葉裝飾環頭大刀), 삼루장식대도(三累裝飾大刀), 용장식환두대도(龍裝飾環頭大刀), 봉황장식환두대도(鳳凰裝飾環頭大刀) 등으로 구분된다. 경주박물관 관계자는 “전시회를 통해 신라의 역동적 발전과정과 강력한 왕권의 표현 양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儒林(381)-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7)

    儒林(381)-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7)

    제4부 百花齊放 제1장 浩然之氣(7) 이러한 맹자의 행동은 그의 생애를 통해 점차로 밝혀지겠지만 맹자의 뛰어난 투장으로서의 언변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일화를 우선적으로 소개한다. 그 무렵에는 이른바 농가(農家)라는 학파도 세력을 떨치고 있었는데, 그 이름이 가리키듯 일반 농민들 사이에서 크게 번창하였던 서민사상이었다. 농가는 맹자와 동시대인물인 허행(許行)이 창설한 학파였다. 그에게는 수백명의 추종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거친 베로 짠 옷을 입고 멍석을 만들고 돗자리를 짜는 일로 생업을 삼았다. 농가의 주장은 이런 것이었다. 모든 백성들은 직접 농사를 짓고 옷을 짜 입어야 한다. 사회의 모든 갈등은 남보다 더 소유하려고 착취하고 빼앗는 데서 생겨난 것이니, 군주 역시 일반 백성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영국의 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 스스로 물레를 돌려 옷을 만들어 입고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20세기의 성자, 간디의 논리를 연상시키는 사상이었다. 기존의 왕권과 제후들의 통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농민들은 농가의 사상에 현혹되었다. 그러나 맹자의 입장은 달랐다. 즉 정신의 노동(勞心)과 육체노동(勞力)은 엄연히 분리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자는 남을 다스리고, 몸을 수고롭게 하는 자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노심자치인 노력자치어인).” 얼핏 보면 농가의 주장은 만민평등의 이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실현불가능의 공염불이라고 맹자는 보고 있었던 것이다. 맹자의 이러한 주장은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이른바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을 연상시키는 진보적 발상이었다. 맹자의 주장은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궤변을 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맡은 직능의 전문화가 보다 효율적이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분업화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혁신경제논리였던 것이다. 맹자가 등()나라에 있을 때 허행의 수제자인 진상(陳相)이 일부러 찾아와 논쟁을 벌인다. 이때 진상은 자신의 스승 허행의 농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자급자족에 대한 평등사상을 설법하자 맹자는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싸움을 먼저 걸어 기선을 제압한 사람은 진상이지만 치열한 반격을 개시한 사람은 맹자였다. “당신의 선생님 허행은 반드시 곡식농사를 지어서 먹습니까.” 이에 진상이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천을 짜서 옷을 입습니까.” “아닙니다. 저희 선생님은 갈옷을 입습니다.” “허행은 관을 씁니까.” “관을 씁니다.” “그것을 자기가 직접 짜서 씁니까.” “아닙니다. 손수 농사 지은 곡식과 바꿔서 씁니다.” “허행은 왜 자기가 직접 그것을 짜지 않습니까.” “농사 짓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허행은 솥과 시루로 취사를 하고 쇠로 만든 쟁기로 농사를 짓습니까.” “그렇습니다.” “자기가 직접 그것을 만듭니까.” “아닙니다. 역시 직접 지은 곡식과 바꾸었습니다.”
  • ‘개혁의 시대’ 실학에서 해답찾자

    조선 후기 실학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케이블·위성채널 아리랑TV는 200년 전 조선의 근대화와 개혁을 주창했던 실학자들과 그들의 학문을 다룬 3부작 다큐멘터리를 내보낸다. 10일부터 3주에 걸쳐 매주 금요일 오후 11시 ‘200년전의 메시지-실학’을 방송하는 것. 이 프로그램은 개혁과 세계화가 화두인 현 시대의 실천적 대안을 우리 실학을 통해 마련해보고자 기획됐다. 1부 ‘개혁의 거점도시-화성’에서는 조선 후기 정조 시대를 살았던 실학자들의 꿈이 담긴 땅 경기도 화성(지금의 수원)을 소개한다. 화성은 왕권 확립 차원에서 건설된 성이었으나, 한발짝 더 나아가 조선 후기 100여년의 문화가 축적된 곳이기도 하다. 모든 시설을 갖춘 자족적인 신도시였는가 하면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 한 차원 높은 도시건설 프로젝트였다. 화성을 통해 둔전제도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토지제도 개혁론과 상업진흥책, 과학기술 등 서양 문물의 주체적 수용 자세 등을 살펴본다. 2부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국가개혁 리포트-여유당전서’를 다룬다. 정약용은 조선 후기가 낳은 최고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문학가. 이익의 성호학파와 서양문물의 주체적 수용을 주장한 북학파의 영향을 받았던 그의 사상은 18세기 실학 사상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백성의 삶에 천착한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한 다산학에 대해 21세기 세계의 지성들이 주목하는 이유를 되짚어본다. 마지막 3부는 ‘실학을 넘어 세계학으로’라는 제목을 달았다. 지식인과 학문의 사회적 책임을 깨닫고, 진보적이며 독창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한 19세기 학자 혜강 최한기의 사상을 살피며, 실학이 어떻게 근대사상으로 이어지는가를 알아본다. 또 벌써 200여년 전에 전통 이데올로기를 깨고, 현실에 맞는 새로운 학문을 펼치려 했던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모습을 거울 삼아 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모색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대한제국기의 근대화’ 학술대회 김도형 연세대 사학과 교수

    ‘대한제국기의 근대화’ 학술대회 김도형 연세대 사학과 교수

    4일 연세대 연희관에서는 ‘대한제국기의 근대화’와 개혁사업을 주제로 연대 국학연구원과 UCLA간 공동학술대회가 열렸다. 사학자들에게 중요한 시기로 꼽히는 대한제국기를 되돌아보기 위한 자리다. 한국의 근대화 성격을 두고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이 갈리는 지점도 여기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서 있기도 한 이번 공동학술대회의 좌장을 맡은 연세대 사학과 김도형 교수를 학술대회 전에 만났다. 초여름 땡볕에 땀을 흘리는 기자에서 생수 한 통을 건넨 뒤 김 교수는 “학계에서 일제시대 경제발전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운을 뗐다. 그럼 무엇에서 차이가 나는가.“결국 역사변혁의 주체세력이 누구냐, 또 지금 한국 사회의 과제가 무엇이냐는 문제에 대한 기본생각 자체가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소농사회론의 맹점은 민중변혁 부정 식민지근대화론은 조선에는 서구적 근대화의 계기인 ‘경영형 부농(富農)’이 없고 자급자족적인 ‘소농(小農)’만 있었다는 ‘소농사회론’을 내세우고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소농사회는 부르주아처럼 서구적 방식의 근대화를 이끌 계층이 없어 강력한 국가권력이 개입합니다.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이 권력을 1930년대 일제 파쇼 세력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이들은 또 그 이전 갑신정변 같은 개화파의 움직임이나 광무개혁 같은 고종의 근대화 작업을 모두 부정할 뿐 아니라 동학혁명과 같은 민중적 변혁의 가능성도 부인한다. 조선의 변혁가능성 자체를 봉인한다는 점에서 일제가 내세웠던 ‘조선정체론’과도 비슷하다. 이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긍정론과도 연결되어 있다. 마침 식민지근대화론자로 꼽히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는 지난달 29일 열린 교과서포럼 심포지엄에서 박정희 시대에 따라다니는 ‘저임금에 기반해 성장했다.’는 꼬리표를 떼버리자고 주장했다. 임금률과 한계노동생산성의 증가 추이가 비슷해 결코 저임금이 아니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 교수의 논리상 그런 주장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수탈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야 자본이 축적되니까요. 수탈은 결국 저임금구조입니다. 이건 영국 등 수많은 국가에서 확인된 사례들입니다. 박정희 시대라면 저임금 대상은 노동자·농민이고, 식민시대라면 조선인이 되는 것이지요.”박정희 시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과 계급·계층간 차별을 함께 봐야 하듯, 식민시대에서도 경제성장과 동시에 일본인·한국인간 차별도 들여다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결국 식민시대를 긍정하려면 박정희 시대를 긍정할 수밖에 없고, 동시에 박정희 시대를 긍정하려면 식민시대를 긍정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서 나온다. 한·일 양국 우익 세력의 논리적 친화성에 대한 설명이다. ●식민시대 ‘삶의 질’·‘역동성’ 주목해야 무엇이 이런 차이를 낳았을까.“역사란 사실 그 자체뿐 아니라 그 사실이 당시 사람들의 ‘삶의 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따져야 합니다.” 김 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에서 ‘민족’ 같은 개념이 부정당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비판했다.“민족을 절대화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다못해 개인이 쓰는 일기에도 ‘나’라는 주인공이 있지 않습니까.”식민지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간 논쟁에 대한 대안으로 김 교수는 다양한 가능성과 그 가능성들이 빚어내는 ‘역동성’에 주목하자고 제안했다.“고종과 개화파와 농민운동 등 조선 내부에서도 근대화 움직임이 있었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개입도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현실은 힘의 관계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국면마다 이들간 역학관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다이내믹한 상황을 봐야 합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고종 보면 근대화 파악 가능 고종은 개명군주였나, 도학군주였나, 절대군주였나. 지난해 교수신문 지상을 통해 6개월여 동안 벌어진 논쟁의 주제였다. 풀어서 말하자면 고종이 근대화를 지향했느냐, 안 했다면 전통적 유교 군주에 불과했느냐 아니면 러시아의 차르와 같은 서구적 의미의 ‘왕’을 지향했느냐다. 이 논쟁은 단순히 고종 개인에 대한 평가로 끝나지 않는다. 고종 시대가 곧 한국 근대의 뿌리였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는 근대화의 싹이 한국에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 논쟁의 뿌리는 30여년 전인 1976년 광무개혁 성격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무개혁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부터 1904년 러일전쟁 때까지 고종이 추진한 근대화작업이다. 이 작업이 실체가 있었느냐를 두고 두 입장이 다퉜다. 신용하 교수 등이 주도한 쪽에서는 개화파에 무게를 뒀기에 왕권강화에 초점이 맞춰진 광무개혁에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반면 김용섭·강만길 교수쪽은 외세에 기댄 개화파보다 동학혁명에서 엿볼 수 있는 농민의 자생적 힘을 강조하는 데 무게를 뒀다. 이 관점에서 광무개혁은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 특히 김용섭 교수는 조선후기 농업경제를 분석, 이때 이미 자본주의의 싹이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이 주장은 박정희시대 국사교육 강화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신화라는 비판도 받았다. 시간이 흐른 뒤 서울대 이태진 교수는 조금 색다른 관점을 내놨다. 김용섭·강만길 교수처럼 조선 스스로 근대화하려 했다고 보되 그 힘을 농민에게서가 아니라 고종에게서 찾은 것이다. 이 교수가 고종과 광무개혁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서울대 이영훈 교수 등 최근 부상하고 있는 일군의 경제사학자들은 반대로 대한제국은 파탄 직전이었기에 굳이 살펴볼 가치를 못 느낀다는 입장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고종은 외세의 바람 앞에서도 유교 경전이나 외우던, 혹은 이미 기진맥진한 조선을 부둥켜안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도학군주일 뿐이다. 반면 고종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과대평가하는 것 역시 근거가 빈약하다는 쪽에서는 고종이 서양의 절대군주제를 지향했다고 보는 지적도 있다. 고종의 지향점을 러시아의 차르로 보고 있는 경희대 허동현 교수가 대표적 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인간시대]‘…역사와 정치를 본다’ 펴낸 조광권 서울시 교통연수원장

    [인간시대]‘…역사와 정치를 본다’ 펴낸 조광권 서울시 교통연수원장

    ‘몽유청계천도(夢遊淸溪川圖).’ 낭만적인 청계천변을 5년째 꿈꾸는 조광권(59) 서울시교통연수원장은 이른바 ‘청계천 멀티플레이어’다. 서울시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위원, 청계천포럼(www.reseoul.com) 운영자로 활동하고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청계천 강의를 한다. 최근 ‘청계천에서 역사와 정치를 본다.’는 책을 펴내면서 역할이 또 하나 늘었다. ●‘복원시민위’ 위원·인터넷 포럼 운영·대학 강의… 조 원장이 청계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1년 소설가 박경리씨 등이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다. 특히 박씨는 문학평론가인 아버지 조연현(81년 작고)씨를 통해 어린 시절부터 알아왔다. “박경리 선생님이 청계천 복원운동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서울의 환경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박태원의 소설 ‘천변풍경’에서처럼 청계천이 한때 아낙네들의 빨래터였고 아이들의 놀이터였다는 사실이 그제서야 떠오른 거죠.” 조 원장은 이듬해 토지문학관에서 청계천 복원과 관련된 심포지엄을 연다는 얘기를 듣고 방청객 자격으로 참석했다. 당시 이명박 시장의 선거캠프에서 정책팀장을 맡고 있던 조 원장은 “멋진 아이디어가 실현되려면 행정력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의견을 전달했다. 당시 고건 시장은 청계고가 보수에 1000억원의 예산을 편성하고 시에서도 청계고가를 없애면 교통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논란은 뒤로하고 일단 청계천 복원의 필요성 알리기에 나섰다. ●관련 기록·자료 남겨야 2002년 이 시장이 당선된 뒤 조 원장은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에서 부위원장으로서 서울시 실무진과 시민들 사이에 다리 역할을 했다. 동시에 일지를 쓰고 관련 자료를 모아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다. 청계천 복원 사업의 입안단계부터 일련의 과정을 담은 책을 내기로 마음 먹었다. “굵직굵직한 사업에 대한 기록·자료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공문서가 전부죠. 하지만 공문서는 공(功)에 치우치기 쉽고 사업에 대한 배경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개발시대에는 자료를 정리할 여유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 원장은 청계천 복원 과정 이외에도 조선시대 청계천을 준설했던 영조의 정치철학을 책에 담기로 했다.96년 서울시에서의 공직생활을 접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조선시대 정치인들의 정치철학에 대한 공부를 했던 것과 청계천에 대한 관심을 접목시킨 것이다. 영조가 청계천을 준천하는 과정을 담은 ‘준천사실(浚川事實)’, 준천의 절차 규정인 ‘준천사절목(浚川司節目)’, 영조가 세손인 정조를 대동하고 광통교 석축을 살펴보며 지은 ‘어제준천명병소서(御製浚川銘幷小序)’ 등을 탐독했다. “영조는 개천(開川·청계천의 옛 이름) 준설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백성들을 부려야 한다는 점을 고민했습니다. 절대왕권을 세습한 군주였는데도 백성을 생각하며 공사를 벌였던 거죠. 오늘날 민주주의에서도 백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되새겨봐야 합니다.” ●주변도 친환경적으로 개발해야 오는 10월 청계천 복원공사의 준공을 앞두고 소회를 물었더니 “청계천 복원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청계천 복원사업은 단순한 물흘리기가 아니라 주변 개발을 친환경적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개발 문제를 놓고 이해 관계자들끼리 첨예하게 대립을 할 겁니다. 그 결과 만들어지는 청계천의 모습이 시민들의 의식수준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글 사진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모나코 알베르 왕자 왕권 승계

    |파리 함혜리특파원|모나코의 알베르(47) 왕자가 병세가 위중한 레니에 3세(81)의 뒤를 이어 왕위를 제외한 왕권을 이어받았다. 모나코 왕실위원회는 31일 레니에 3세가 국왕의 병세가 위중하다고 판단해 왕권을 승계시키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lotus@seoul.co.kr
  • [국제플러스] 그레이스 켈리 아들 왕권승계

    |파리 함혜리특파원|모나코 왕실은 1일 국왕 레니에 3세(81)의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밝혔다. 이로써 레니에 3세와 미국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와의 사이에 낳은 알베르(47) 왕자가 대통을 완전히 이어받게 됐다. 레니에 3세는 지난달 7일 호흡기와 신장 및 심장 질환 등으로 입원해 치료를 받다 22일부터 병세가 악화돼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다. 주치의들은 이날 “그의 건강상태가 위험하며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앞서 모나코 왕실위원회는 3월31일 국왕의 병세가 위중해 알베르 왕자에게 왕권을 한시적으로 승계시키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 [6일 TV 하이라이트]

    ●신비한TV 서프라이즈(MBC 오전 10시50분) 1936년 소련, 스탈린의 부하인 보안부장 이바노프는 한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다. 최고 간부들과 상위 1%의 사람들만 살 수 있다는 모스크바의 강변 아파트에 입주한 이바노프는 입주 날부터 한 주민의 죽음을 보게 된다. 과연 아파트 속에 숨겨진 비밀은 무엇일까. ●인사이드 월드(YTN 오후 1시25분) 이라크, 이스라엘, 요르단과 인접한 중동국가 시리아는 그동안 주변국과의 전쟁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여름에는 45도의 무더위, 겨울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연교차를 보이는 불모의 초원지대가 국토의 절반 이상이다. 또 폭발적인 인구·가축의 증가로 국토의 사막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곳. ●특선 다큐멘터리(EBS 오후 7시10분) 이집트의 동쪽 지방에서 시리아 반군세력이 파라오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왕권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젊은 투트모세 3세는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투트모세 3세가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동시에 이집트왕국이 제국으로 거듭나게 되는 메기도 전투를 살펴본다. ●TV 동물농장(SBS 오전 9시40분) 동물농장 농장주, 신동엽이 일일 수의사에 도전한다. 수중 바다생물을 만나러 간 윤현진.‘견생역전’ 유기견은 내가 지킨다, 버림받은 개들의 수호천사가 된 정선희. 사자들의 대부,‘라이언 킹’에 도전하는 김생민. 이들이 펼치는 기상천외한 미션 도전기가 펼쳐진다. ●부모님 전상서(KBS2 오후 7시55분) 창수는 성실에게 빈 집에서 자기 싫다며 재워 달라고 말하지만 성실은 허락하지 않는다. 술 한잔하며 생모에 대한 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금주의 마음을 헤아려 고모방에 모여 술자리를 한다. 미연과 아리는 같이 상을 치우다가 문제가 생겨 서로 마음이 상하고…. ●불멸의 이순신(KBS1 오후 9시30분) 거북선 때문에 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고, 이순신 역시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모르는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기방을 전전하며 술독에 빠져 있는 나대용을 직접 잡아와 거북선과 함께 목숨을 잃은 병사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이대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고 호통친다.
  • 이충수 前청와대경호처장, 조선시대 경호제도 ‘시위’ 변천 연구

    전직 청와대 경호처장이 ‘조선시대 경호제도’를 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인공은 이충수(51) 전 청와대 경호처장으로 18일 동국대 학위수여식에서 ‘조선시대 시위(侍衛)제도 변천에 관한 연구’로 경찰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시위(侍衛)’란 조선시대 국왕호위, 궁궐 및 도성 수비를 망라하는 광범위한 개념. 논문에 따르면 조선시대 지방을 제외한 중앙군 전체가 시위군 역할을 했는데, 시위군은 다시 국왕을 근접 보위하는 친병과 외곽경비를 맡은 위병으로 구분했다.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에 해당하는 친병은 보통 ‘금군’으로 불렸다. 시대에 따라 ‘내금위’ ‘겸사복’ 등의 이름을 가졌으며, 왕권수호기능을 하는 정치보위군적 성격을 지녔다. 이씨는 논문에서 당시 시위조직과 활동을 오늘날의 경호제도와 비교 분석하고 경호제도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대통령 경호요원 신분 보장 ▲경호조직 전문성 제고 및 기능 확대 ▲정치적 중립화 ▲기법의 과학화 등을 제시했다. 이씨는 “1980년 청와대에 들어와 최규하 전 대통령부터 2003년 노무현 대통령까지 모시면서 정권 교체때마다 경호실 구성내용도 바뀌는 모습이 안타까웠다.”며 “이제 전문성과 과학성이 더욱 확고히 뿌리내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안동환기자 sunstory@seoul.co.kr
  • [부고]

    ●前대법관 정태원씨 1980년대 초 신군부 하에서 대법관을 역임한 정태원(78) 변호사가 21일 별세했다. 고인은 1980년 5월 대법관으로 재직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하는 데 반대의견을 내 이듬해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병권(에너지 21 회장)씨 등 3남. 빈소는 강남성모병원. 발인은 23일 오전 7시.(02)590-2660. ●단국대 사학과 이호영 교수 한국고대사학자인 이호영 단국대 사학과 교수가 21일 오전 2시40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62세. 충북 충주 출신인 고인은 단국대 학부를 나와 1976년 1월 같은 학교 사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고구려와 백제 패망의 원인을 연개소문 쿠데타와 의자왕에 의한 왕권 강화 일변도 정책과 같은 내부의 분열에서 찾아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유족은 부인과 2남을 두고 있다. 발인은 24일 오전 7시.(02)590-2576. ●고광열(자영업)명소(서울신문 문막지국장)광표(자영업)영남(군인)씨 모친상 21일 원주 하늘원장례식장, 발인 23일 오전 6시 (033)763-4444 ●정범식(한국마루베니 부장)현석(삼성SDS 과장)씨 모친상 21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23일 오전 10시 (02)392-3499 ●장시형(조선일보 생활미디어 이코노미플러스 기자)태형(현대캐피탈 대리)선아(씨티은행 차장)씨 부친상 21일 경남 남해병원, 발인 23일 오전 8시 (055)863-5217 ●채봉석(한국일보 편집부 차장)씨 부친상 이재훈(고려대 교수)박난기(성진ENG 대표)이강덕(조흥은행 부부장)씨 빙부상 21일 상계백병원, 발인 23일 오전 8시30분 (02)951-6699 ●안승남(한국외대 총동문회 사무국장)씨 부친상 21일 한양대 구리병원, 발인 23일 오전 6시 (031)560-2435 ●박춘규(한국관광공사 북한관광개발위원실 실장)씨 별세 20일 국립의료원, 발인 22일 오전 7시30분 (02)2262-4812 ●임무영(법무연수원 기획과장)수영(경기대 교수)씨 부친상 조수정(부패방지위원회 위원)씨 시부상 21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23일 오전 7시 (02)3410-6915
  • [이사람] 조선옥새 맥잇는 전각장 민홍규씨

    [이사람] 조선옥새 맥잇는 전각장 민홍규씨

    경기도 이천 시내를 벗어나 설성면 장천4리, 속칭 독정 마을에 이르면 가래나무가 인상적인 시골집이 하나 있다. 전통 옥새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옥새전각장 세불(世佛) 민홍규(51)씨의 집이다. 오죽(烏竹)과 어우러진 능진수원(能盡水源·생명이 다할 때까지 행한다)이라는 당호가, 집 주인이 하고 있는 일이 예사롭지 않은 것임을 일러준다. 토불(土佛) 황식에서 시불(示佛) 황소산, 석불(石佛) 정기호로 이어지는 전통 옥새의 제작기법을 계승해 오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그를 이천 집에서 만났다. ●열여섯살때 ‘석불’ 정기호 만나 인연 “서울생활을 접고 이곳에 내려온 지 10년이 됐습니다.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이곳은 용터라고 할 수 있어요. 땅의 기가 세, 아무나 살기 힘든 터라고 하지만 창작활동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이지요.” 민씨는 자신의 작업이 방해 받을까봐 동네 면사무소에서 만들어준 ‘옥새 보러가는 길’이란 집 안내 팻말도 없애 버렸다고 한다. 옥새는 왕이 사용하는 도장으로, 중국 진시황제가 옥에 새긴 도장을 쓰면서 ‘옥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옥새는 도화원 화공이나 교서관·서자관 관원 중에서 예술성과 장인정신을 인정받는 사람 한 명에게만 그 기술이 전수됐다. 위조를 막기 위해서다. 옥새의 전통을 외롭게 이어가고 있는 민씨로서는 그만큼 책임감이 클 수밖에 없다. 열 여섯 살에 석불 정기호를 만나 옥새와 인연을 맺은 민씨가 조선왕조 옥새 복원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5년 전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국새를 만든 전각예술의 대가 석불이 1989년 세상을 떠나자 옥새의 명맥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그는 밤잠을 잘 수 없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 경국대전,‘어보의궤’, 규장각 문서인 ‘보인부신총수’등 옛 문헌을 뒤지며 옥새 제작의 흔적을 찾아내는 데 더욱 몰두했다. ●옥새문화계승 우리나라밖에 없어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후 고종황제의 옥새를 찬탈하는 데 열을 올렸다. 옥새는 곧 왕권이자 국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고종이 쓰던 73개에 이르는 옥새를 모두 빼돌렸다. 그중 절반가량은 현재 복원돼 있는 상태. 민씨는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은 해인 지난 98년 일제 때 소멸된 옥새 5과를 경기도 박물관에 복원 기증한 것을 비롯,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옥새를 만들어 기증했다.“돈이나 명예에는 욕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문화를 지킨다는 자부심만이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지요. 주위에서 나의 옥새 작업을 격려해 주는 분들이 쌀이며 가전제품이며 여러가지 정성어린 도움을 주고 있어요.” “전통방식의 옥새문화를 계승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중국은 문화혁명 이후 옥새의 맥이 끊어졌고, 일본도 국보급 전각가인 고바야시 도완이 지적했듯이 전통 옥새의 주조기술이 전수되지 않아 재현이 불가능한 상태예요. 국가를 상징하는 옥새는 소중하게 보존 계승돼야 합니다.” 민씨는 먼저 옥새와 옥새전각장이라는 이름의 내력부터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조선 고종 13년(1876)에 제작된 ‘보인소의궤’를 보면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을 보인(寶印), 그것을 만드는 장인을 보장(寶匠)이라 적고 있습니다. 그런데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뀐 뒤 고종이 임금의 도장이 보인, 어보(御寶)등 옥새보다 낮은 격으로 불려왔음을 알고 칙령을 내려 옥새라고 품계를 올려 부르게 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그것을 만드는 장인의 명칭도 보인을 새기는 보장에서 옥새를 ‘전각하는’ 옥새전각장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궁중문화 꽃이자 종합예술 옥새는 궁중문화의 꽃이자 명실상부한 종합예술이다.“옥새는 서예와 조각, 회화, 전각, 연금술, 도자기술, 주조기술 등 적어도 7개 분야를 모르고선 접근할 수 없다.”는 게 민씨의 말. 그런 점에서 민씨는 가히 ‘르네상스 맨’이라 할 만하다.1990년 현대서예협회를 만들어 글씨체 현대화운동을 주도한 민씨는 추상회화와 서예가 접목된 작품들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예 작품에 나부를 그려 넣어 ‘문제작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스무살 무렵부터 시작한 목가산(木假山) 작업은 그의 예술가적 독창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두툼한 황유목(黃油木) 판에 부조 형식으로 새겨진 산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예술이다. 민씨는 최근엔 모필 대신 죽필(竹筆)를 즐겨 쓰고, 칡뿌리 끝을 두드려 만든 갈필(葛筆)작업까지 시도하고 있다.‘자연과 호흡하는 예술’을 실현한다는 의미에서다. 또 예서와 행서, 초서, 전서, 해서 등 5체를 섞어 쓴 ‘녹서(綠書)’라는 새로운 서체의 병풍을 완성했는가 하면, 옥새가 묘사된 ‘예궐반차도(詣闕班次圖)’도 그리고 있다.“그러나 중요한 건 다시 옥새입니다. 창작의 고통과 희열은 옥새에 온전히 바쳐질 때 비로소 제값을 다할 수 있지요.” 민씨는 진흙 거푸집을 사용한 전통주조법을 계승하고 있다. 진흙용주(鎔鑄) 기법으로도 불리는 이것은 고대 주조기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만드는 옥새는 인뉴(印 )에서 더욱 빛난다. 뉴( )는 도장 위에 새겨진 조각을 가리키는 말로, 고대에는 이것으로 관인(官印)의 등급을 표시하기도 했다. 민씨는 최근 삼족오(三足烏) 형상의 손잡이가 달린,4㎏이 넘는 옥새를 4년여 만에 완성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삼족오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해 속에 산다는 세발 달린 까마귀.“고구려 벽화에는 삼족오가 용이나 봉황보다도 그 위에 그려져 있어요. 격이 더 높다는 얘기이지요. 한 몸뚱이에 발이 세 개라 함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동양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요. 삼족오는 태양의 상징입니다.” ●무형문화재 지정안돼 안타까워 어느새 옥새와 동의어가 된 세불 민홍규. 그에게는 요즘도 일본으로부터 귀화 요청이 끊이지 않는다.“일본은 문화가 아니라 사람을 수입하려 합니다.” 그의 쓸쓸한 한마디에서는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지금이야말로 살벌한 문화전쟁의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도 옥새는 아직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어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민씨는 “문화상등국의 우선순위는 궁중문화의 보존과 대책에 놓여져야 한다.”는 유홍준 문화재 청장의 한 강연 내용을 들려주며 옥새문화는 결코 천민문화가 아님을 누누이 강조했다.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소돌이(小乭伊·옥새 제작용 망치)를 마치 자식인 양 대견스레 들여다보는 그에게서 장인의 체취를 느끼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요즘도 하루 두세 시간씩 자며 마당의 대왕가마를 지키고 또 옥새 관련 책들을 읽는다. 그 조그만 결실이 곧 ‘조선 옥새의 비밀-영새부(榮璽 )’(도서출판 인디북)라는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영새부!옥새여 영원하라.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역사비평 겨울호 ‘역사속의 이순신 인식’

    역사비평 겨울호 ‘역사속의 이순신 인식’

    성웅 이순신이냐, 인간 이순신이냐. 너무 도식적인 구분인가. 그렇다면 합리적인 CEO로서의 이순신,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리더십을 제시한 이순신은 어떤가. 역사적 인물로서 이순신은 한명인데 해석으로 구성되는 이순신은 여러 명이다. 일부 논란이 있었지만 KBS가 상영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영향이 크다. 이순신을 다룬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거나 개정판을 내기도 하고 ‘충무공전’같은 컴퓨터 게임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이순신에 대한 소비방식은 예전부터 쭉 있어왔던 현상이다.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노영구 연구원은 계간지 역사비평 겨울호에 실린 ‘역사속의 이순신 인식’이란 글을 통해 그 소비방식을 추적했다. 해방이후 독재정권이 이순신을 어떻게 이용했는가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승만 정권은 정권유지의 한 축이었던 극우청년단체들의 은유로써 화랑도를 선호했다. 박정희 정권 때 비로소 이순신이 민족의 영웅으로 떠올랐는데 이 기간에도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국가수호의 영웅에서 선견지명을 갖춘 탁월한 전략가로, 다시 정의·충성·용기를 갖춘 훌륭한 인격자로 다르게 정의되다 마지막으로는 ‘화랑도의 중흥’정도로 격하됐다. 이런 변화는 박정희 정권 초기의 반공주의, 중기의 성장제일주의, 말기의 체제에 대한 자신감이 반영된 결과다. 현대사의 굴곡에 따라 바뀌었던 평가가 조선·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순신은 자신의 시대에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전쟁영웅’은 외려 왕권에 대한 위협일 수 있다. 더구나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중용해 조선수군을 괴멸시킨 사람이 바로 선조였다. 임진왜란 뒤 논공행상에서 원균과 똑같이 선무공신 1등의 녹훈을 받았던 것도 이런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다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이순신은 전쟁의 영웅으로 올라선다. 그러다 숙종 때는 중국과 함께 왜구를 물리친 ‘중화문명의 수호자’로 한번 더 업그레이드된다. 이는 청나라가 중국대륙을 확실히 장악하면서 이제 중화문명의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조선중화주의에 따른 것이다. 청나라와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영·정조 때는 왕권강화와 복종을 요구하기 위해 충성의 상징으로서 이순신의 쓰임새가 바뀐다. 일제시대에는 다시 이순신이 민족의 영웅으로 올라선다. 이 시기에는 영국의 넬슨제독보다 뛰어나다거나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이런 서술은 서구열강의 압도적인 힘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우리민족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런 시각도 문화통치기간을 거치면서 다소 완화된다. 민족개조론, 실력양성론이 힘을 얻으면서 이순신의 인격과 애국하는 마음이 강조됐다. 이런 평가의 변화에 대해 순천향대 손풍삼 이순신연구소장은 “정치적 상황에 이용당한 측면이 있지만 영웅으로서의 족적은 분명하다.”고 강조한 뒤 “다만 성웅으로 ‘박제화’된 이순신이 상업적으로 이용될 위험만큼은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儒林(191)-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儒林(191)-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제2부 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이처럼 정치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펼친 공자는 마침내 오래 전부터 꿈꿔 왔던 대로 삼환씨의 세력을 제거하고 노나라의 임금인 정공을 중심으로 한 정권의 회복과 군사력의 통일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삼환씨의 도성인 세 성을 허물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세 성이란 계손씨의 도성인 비(費)와 숙손씨의 도성인 후( ),맹손씨의 도성인 성(成)을 가리키는데,이것들은 모두 삼환씨들에게는 군사상 중심을 이루는 요새로,만약 이 도성들을 허물 수가 있다면 자연적으로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먼저 공자는 정공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하된 자는 무장된 병사를 개인적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대부의 도성이라도 높이가 백치(百雉)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공은 공자의 건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삼환씨의 도성을 허물어 버릴 수만 있다면 왕권이 강화되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권신들인 삼환씨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입장이었다.그러나 의외로 삼환씨와 이해가 맞아 떨어지게 되었는데,그것은 삼환씨들도 자신들의 가신들인 양호와 공산불뉴가 이 도성들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켜 이곳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내란을 일으켰던 양호는 삼환씨들이 힘을 합쳐 제나라로 쫓아버렸지만 공산불뉴는 아직도 비의 도성을 근거지로 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공의 윤허를 받은 공자는 즉시 이를 결행하였다.정공과 삼환씨,그리고 공자 이처럼 삼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절호의 찬스는 그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였던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무예가 뛰어난 자로를 계환자의 가재(家宰)로 임명하고 가장 세력이 약했던 숙손씨의 후 고을을 먼저 점령하였다.고을을 점령하자마자 공자는 성을 허물고 사병들을 해체하였다. 두 번째로 계손씨의 도성인 비 고을을 공격하였는데,이곳에서 반란을 꿈꾸고 있던 공산불뉴는 공자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불과 같이 노하여 말하였다. “머리가 움푹 들어간 공구가 감히 내 도성을 넘보다니,이 기회에 공구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걸어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리라.” 과연 공산불뉴의 반격도 만만치가 않았다.오히려 관군을 물리치고 노나라의 왕도인 곡부를 공격하니 정공을 비롯한 공자는 임시로 계환자의 집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공산불뉴가 이끄는 반군의 기세는 등등하여 정공과 삼환씨가 피신한 계씨궁의 무자(武子)의 대(臺)에 이르렀다.‘무자의 대’는 곡부의 동문에 있는 계환자의 선조인 계무자(系武子)가 쌓은 누대였는데,공산불뉴의 반군은 이곳을 포위 공격하여 풍전등화의 위기였으나 공자는 태연하여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반란군의 공격이 뜸해지기를 기다려 공자는 신구수(申句須)와 악기(樂)라는 두 장수로 하여금 정예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반군을 급습하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한 반군은 고멸(姑蔑)이란 고장으로 물러났는데,공자는 이 기회에 아예 공산불뉴를 섬멸시켜야 한다고 결심하고는 끝까지 공격하였다. 마침내 전쟁에서 패한 공산불뉴는 제나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이로써 삼환씨의 세 도읍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떨치던 비 땅이 점령되어 공자의 오랜 숙원대로 성읍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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