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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삐비꽃’ 필 무렵 소금꽃이 활짝

    ‘삐비꽃’ 필 무렵 소금꽃이 활짝

    지난 3월28일 염(鹽)관리법 개정안이 발효되기 전까지 45년 동안 천일염(天日鹽)은 ‘식품’이 아닌 ‘광물’이었다. 천일염에 함유된 칼슘·마그네슘 등 염화나트륨 이외의 미네랄 성분들이 광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제대로 식탁에 오르지 못하는 등 변변찮은 대접을 받아 온 게 사실. 이제 각종 미네랄을 듬뿍 머금고 있는 천일염은 참살이 ‘식품’으로 각광받을 전망이다. 천일염은 유월에 만든 것이 으뜸. 한창 소금이 익어가는 마을, 전남 신안군 증도를 다녀왔다. #여의도 두 배 면적 염전에 60여 소금창고 장관 증도 선착장에 내려 긴 방파제를 지나자 시간이 멈춰선 듯한 아련한 풍경에 시선이 고정된다. 끝간 데 없이 길게 펼쳐진 소금창고 행렬이다. 숯검댕이를 바른 듯 검은빛 일색의 건물들이 약 3㎞에 걸쳐 60여채가 도열해 있다. 위성사진에도 선명하게 나타난다고 하는데, 건물마다 전신주를 하나씩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 여간 장관이 아니다. 소금창고 좌우로는 태평염전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단일염전으로는 국내 최대. 약 463만㎡(140만평)로 여의도의 두 배 크기다. 태평염전은 1953년 한국전쟁 후 피난민 구제와 국내 소금생산 증대를 목적으로 조성됐다. 전증도와 후증도 사이의 갯벌을 막아 형성된 까닭에 증도를 하나의 섬으로 이어주는 역할까지 담당한다. 옛 정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석조 소금창고를 개조한 소금박물관과 더불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무채색이 지배하고 있는 염전에 색채감을 더해주는 것이 ‘삐비꽃’(삘기의 사투리)이다. 이맘때면 허름한 소금창고 주변에 무시로 피어나는 꽃. 바람에 하늘거리는 하얀꽃송이들이 갯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닮았다. 삐비꽃이 만개할 무렵 염전에서는 소금꽃이 활짝 핀다. 염도가 오른 물이 증발하면서 물 위에 하얀 소금 결정을 피워 올리는데, 염부(鹽夫)들은 이를 소금꽃이라 부른다. 흔히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에 생산된 소금이 맛도 좋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현지에서는 6월에 생산된 것을 최고로 친다. 거기엔 까닭이 있다. 소금이 만들어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과 햇볕이다. 태평염전 정구술 과장은 “오뉴월 치맛자락이 살랑살랑 휘날릴 정도의 미풍이 염전 옆자락을 스치고 지나갈 때 가장 맛있게 소금이 익는다.”고 설명했다. # 바람과 햇볕, 그리고 바닷물…25일간의 사랑 소금은 저수지와 증발지, 결정지 등 세 단계를 거쳐 만들어 진다. 소요기간은 25일 정도. 먼저 염전 아래쪽 저수지에 바닷물을 받는다. 저수지에서 이물질이 걸러진 바닷물은 염도를 높이기 위해 증발지로 옮겨진다.1차 증발지를 ‘난치’,2차 증발지를 ‘누테’라고도 한다. 염도가 1∼2도 정도였던 바닷물은 증발지를 거치며 하루에 1도가량 수치를 높여가다 결정지에 공급될 때쯤 27도 언저리까지 치솟는다. 이렇게 염도는 올리고 수분은 증발시키는 과정을 염부들은 “물을 깎는다.”고 표현한다. 물을 깎아 소금이란 조각작품을 탄생시킨다는 뜻일 게다. 증발지에서 한껏 염도를 높인 소금물은 ‘자고’라 불리는 물길을 따라 ‘소금밭’, 즉 결정지로 이동한다. 아침 6시쯤 소금물이 결정지로 공급되고 난 후 3∼4시간 뒤면 소금꽃이 피기 시작한다. 하얀 소금꽃들이 ‘깡지게’ 엉켜 ‘살을 찌운’ 후에야 비로소 소금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금은 소금창고로 옮겨져 1년 가까이 간수를 뺀 다음 출하된다. # 땀 한 바가지에 소금 한 바가지 요즘엔 소금물을 이동시킬 때 수차 대신 모터를 이용한다. 소금을 옮기던 대바구니 자리도 배터리를 이용한 전동 수레가 차지했다. 예전보다 수월해졌다고는 하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소금을 만드는 작업은 여전히 힘들고 고되다.‘염부의 땀 한 됫박에 소금 한 됫박’이란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게다. 염부들의 애면글면한 수고 덕에 천일염은 칼슘, 마그네슘 등 바다에 녹아 있는 미네랄을 균형 있게 품었다. 그 숫자가 무려 88종에 달한다.‘소금은 바람과 햇볕으로 잉태한 보석’이란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대목이다. 하지만 천일염은 식품으로 인정받지 못한 탓에 제대로 식탁에 오를 수 없었다. 용도도 배추를 절이거나 생선을 보존하는 등으로 제한됐다. 밥상에는 순수 소금에 가깝게 만든 정제염이 주로 올라갔다. 하지만 이제 식용으로 쓰이는 데 장애가 없어졌다. 소금박물관의 박미선 학예연구사는 “자연이 선물한 천일염에 비해 그 많은 미네랄들을 모두 잃어버린 채 인공적으로 나트륨과 염소만을 분리·합성시킨 염화나트륨 덩어리가 정제염”이라고 설명했다. 소금의 질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고 그것이 식생활 안전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이다. 현재 국내 천일염 시장규모는 1000억원 정도. 소금산업 관계자들은 5년 뒤에는 1조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때쯤이면 염부들의 옷자락에 달라붙은 ‘소금꽃’이 비로소 ‘웃음꽃’으로 변하게 될까. # 소금은 왕도 만들었다 박 연구사의 설명을 듣자니 소금의 용도가 상상 이상으로 다양하다. 음식으로서는 물론 도자기에 광택을 내거나 의류를 염색하는 데도 곧잘 쓰였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 장경각의 지반을 조성할 때는 해충을 막고 물빠짐을 돕기 위해 숯과 함께 넣기도 했고, 신기전(神機箭) 등 무기에 장착된 폭약 제조에도 필수적으로 이용됐다. 소금은 왕도 만들었다. 박 연구사에 따르면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은 한나라의 소금통제로 부여 백성들이 어려움에 빠지자 소금을 구하러 떠난다. 많은 양의 소금을 구해온 주몽은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게 됐고 이는 훗날 고구려 건국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 또 최초의 소금장수로 전해지는 고구려 왕자 을불은 왕권다툼을 피해 소금을 지고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민심도 헤아리고 경제력도 얻게 되니, 그가 바로 고구려 15대 미천왕이다. 멀리는 인도의 간디가 소금세를 신설하려는 영국 정부에 맞서 360㎞ 소금행진을 벌여 비폭력불복종 운동의 불을 지폈다.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였던 것도 민중들에게 증오의 대상이었던 염세(소금에 부과된 세금)였다. 소금에서 파생된 단어들도 있다.‘샐러리맨’에게 지급되는 ‘샐러리’(salary)는 로마시대 병사들에게 소금으로 지급됐던 급료를 이르는 말이고,‘솔저’(soldier)는 그 급료를 받는 병사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태평염전에서는 대파질로 소금 긁어 모으기, 수차로 소금물 돌리기 등 다양한 염전 체험을 할 수 있다. 체험료 3000원. 이틀 전 홈페이지(www.sumdleche.com)에서 예약해야 한다. 소금박물관 입장료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 화요일 오후, 수요일은 휴관. 소금박물관 뒤쪽 산자락에 태평염전 전망대가 조성돼 있다.(061)275-0829. 글 사진 신안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히스토리 ‘위대한 폭군 진시황’

    진시황의 일대기를 집중 조명한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케이블·위성TV 히스토리채널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의 일대기를 다룬 ‘위대한 폭군 진시황’을 16일과 23일 오후 11시부터 4회에 걸쳐 소개한다. 미·중 합작인 이 프로그램은 박진감 넘치는 화면과 빠른 줄거리 전개가 특징.16일 방송분에서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진왕(秦王)이 황제를 꿈꾸게 된 동기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제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그린다.
  • 나폴레옹 평전/ 조르주 보르도노브 지음

    역사를 넘어 신화로 남은 나폴레옹. 그가 죽은 지 2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를 다룬 출판물은 자그마치 8만권이 넘는다. 이 책들은 나폴레옹의 영웅적 행적에 초점을 맞춰 사실과 허구를 적당히 버무린 신화와 전설류의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과학과 실증주의를 중시하는 현대인들은 이제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민족 신화나 영웅 전설에는 식상해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역사와 신화 속에 가려진 나폴레옹의 참모습을 살펴 보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레 일어나고 있다.‘나폴레옹 평전’(조르주 보르도노브 지음, 나은주 옮김, 열대림 펴냄)은 그런 관점에서 나폴레옹의 삶과 업적을 다룬 책이다. 프랑스의 역사가인 저자는 당대인들의 회고록과 추모글, 반대파의 비방문까지 샅샅이 뒤져 찾아낸 자료들을 토대로 ‘인간 나폴레옹’의 진면목을 복원해 낸다. 저자는 나폴레옹에 대한 역사적 사실 뒤에는 복잡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는 만큼 하나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진실은 항상 정중앙의 선을 통해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폴레옹을 단지 왕권을 차지한 자코뱅이라거나 정복자, 독재자라는 식의 한가지 실체로 규정하는 것은 무리다. 나폴레옹은 늘 의지에 따라 활동하는 인간, 사건을 지배하면서 또한 사건에 예속됐던 인간, 여론에 민감한 인간이었다. 이 책은 “우리는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삶을 쓰는 것”이라는 고대 역사가 플루타르코스의 말에 퍽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2만 90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4) 외환(外患) 속의 내우(內憂)

    [병자호란 다시 읽기] (64) 외환(外患) 속의 내우(內憂)

    재원 문제 때문에 청북(淸北) 지역의 성곽 수리와 군량 공급마저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서 노유녕에게 십만 냥 가까운 은화를 뜯겼던 것은 너무나 큰 손실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노유녕이 다녀간 뒤 상당히 고무되었다. 명 조정이 왕세자를 책봉해 주었으니 이제 자신의 생부 정원군(定遠君,元宗으로 추숭)의 신주를 종묘(宗廟)에 모실 수 있다고 여겼다. 신료들이 인조의 의도에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조정에는 다시 소용돌이가 일었다. ●너무 비싼 책봉의 대가 왕세자 책봉례를 주관하려고 왔던 노유녕을 접대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노유녕에게 줄 은과 인삼을 마련하기 위해 조정은 전라도 수군들에게서 포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부역(赴役, 군역을 지기 위해 지정된 근무지로 나아가는 것)을 잠시 면제해 주는 조처까지 취했다. 비록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라도 수군을 스스로 무장 해제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에 일본이 침략이라도 해 올 경우 과연 어떻게 막을 것인가. 당시 일본과의 사이에 이렇다 할 사단이 없었기 망정이지 참으로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유녕을 접대하는 문제 때문에 생긴 피해는 고스란히 하층민들에게 전가되었다. 특히 시전(市廛) 상인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노유녕이 데려온 수행원 가운데는 중국 상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조선 측에 교역을 요구했는데, 문제는 공정한 거래를 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조선 상인들이 선호하는 비단과 명주를 내놓기도 했지만, 쓸데없는 잡물들을 내놓고 조선 상인들에게 은과 인삼을 요구했다. 상인들은 말도 안 되는 늑매(勒賣)에 몸서리를 쳤지만, 조정의 강요로 이 정치적인 거래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1634년 7월, 노유녕 일행이 숙소로 돌아가는 것을 목도했던 시전 상인들은 그의 행렬을 바라보며 일제히 통곡했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서 비롯된 소극적인 저항의 몸짓이었다. 이 ‘중원의 대도(大盜)’는 통곡 소리에 짜증이 났는지 조선 측 역관과 수행원들에게 짜증을 냈다. 보고를 접한 인조는 시전 상인들 가운데 주동자를 색출하여 하옥시키고 그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평시서(平市署) 관원들을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칙사의 심기를 어지럽게 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탐욕스러운 노유녕을 접대하는 과정은 몹시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인조에게는 참으로 중요했다. 명 조정이 세자까지 책봉해 준 이상, 자신의 왕통은 이제 확실해졌다고 여겼다. 그러니 자신의 아버지 원종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인조 “원종은 선조의 아들” 배향 지시 노유녕이 귀국한 직후인 1634년 7월22일, 인조는 신료들에게 원종의 신주를 속히 종묘에 모시라고 지시했다. 부묘(廟,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것) 업무를 주관하는 예조의 관원들은 곤혹스러웠다. 그들은 ‘별도의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셔도 전하의 효성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이어 막중한 전례(典禮) 문제를 함부로 처리할 수 없다며 대신들과 상의하라고 권유했다. 삼사의 관원들도 들고일어났다. 대사헌 강석기(姜碩期) 등은, 임금 자리에 즉위한 적도 없는 원종의 신주를 종묘에 들이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또 원종의 신주를 종묘에 들이면, 대신 다른 임금의 신주를 옮겨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조는 격노했다. 명 조정에서 이미 승인한 이상, 원종은 ‘선조(宣祖)의 아들’이 되었다며 종묘에 들이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신료들이 동의하지 않자 인조는 강석기 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으라고 지시했다. 인조는 승지들이, 강석기 등을 쫓아내라는 자신의 명을 즉각 거행하지 않자 ‘승지 또한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며 격한 비난을 쏟아냈다. 인조는 원종의 부묘를 관철시키기 위해 ‘오버’하고 있었다. ●예조·삼사 “전례없고 불경한 일” 반발 사실 인조로서는 그럴 만도 했다. 자신의 생부를 추숭하고, 그의 신주를 종묘에 들이는 것은 인조반정 이후 11년 동안의 숙원 사업이었다.‘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그로서는 왕권의 확립을 위해 절실한 사업이었다. 보다 못한 영의정 윤방(尹昉)이 한마디 거들었다.‘삼사의 논의는 곧 온 나라의 여론인데, 삼사 관원들을 쫓아내면 조정이 붕괴될 수도 있다.’며 반대하는 신료들에게 관용을 베풀라고 요청했다. 윤방의 완곡한 간언(諫言)에 대한 인조의 대답은 한껏 날이 서 있었다.‘옛말에 꼬리가 커지면 움직이기 어렵다고 했는데, 서인(西人)들이 오래 정권을 잡다보니 움직이기가 어렵게 되었다.’며 쏘아붙였다. 인조가 이렇게 서인들을 대놓고 비난한 것은 유례가 없었다. 그들은, 한낱 왕손(王孫)에 불과했던 자신을 지존(至尊)의 자리로 추대한 은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제 분위기가 달라졌다. 인조는 자신이 왕이 되는데 서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왕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걸림돌이 된 것도 서인이라고 여겼다. 윤방에게 쏘아붙인 말은 ‘추대된 임금’으로서 인조가 지녔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인조의 ‘강공(强攻)’은 멈추지 않았다. 원종을 부묘하는 것에 반대하는 신료들을 변방으로 유배하라고 계속 지시했다. 인조반정의 원훈(元勳)인 김류(金 )마저 부묘에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호위대장(護衛大將) 직에서 해임했다. 또 김류가 거느리고 있던 군관(軍官)들도 전부 빼앗아 다른 장수들의 휘하로 편제했다. 인조는 서인에 대한 견제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정온(鄭蘊)을 도승지로, 이성구(李聖求)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정온은 광해군 시절 북인(北人) 출신으로 서인 반정공신들의 행태를 노골적으로 비난해 온 인물이었다. 이성구는 부묘에 대해 찬성하는 인물이었다. ●姜鶴年, 인조에게 직격탄을 날리다 부묘에 대한 인조의 집착은 정치판에 파란을 몰고 왔다.1634년 8월에는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서 인조를 비난했다. 전 군수 홍무적(洪茂績)은 상소를 통해 ‘전하의 독단 때문에 멸망의 조짐과 광해군 시절의 혼란이 닥쳐오고 있다.’고 성토했다. 인조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서인들이 자신의 당파만 감싸고 모든 잘못을 임금에게만 전가하여 백성들의 삶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반박했다.1634년 윤 8월, 인조는 결국 원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을 관철시켰다. 인조는 자신의 왕통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생각했지만,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부묘 논의 과정에서 반대하는 신료들과 감정의 골이 몹시 깊어졌다. 조야의 사대부들로부터 ‘공론을 무시하는 임금’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1634년 11월, 강학년(姜鶴年)은 인조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인조가 자신을 장령(掌令)으로 임명하자 서울로 올라오는 대신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에서 인조의 실정(失政)을 조목조목 거론했다. 특히 광해군의 아들을 죽인 것, 숙부 인성군(仁城君)을 죽인 것, 생부 정원군을 추숭하여 부묘한 것 등을 통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곧이어 ‘반정을 일으킨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반정 이후 전하가 보여준 행태를 보면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고 통박했다.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以暴易暴).’라는 표현은 충격적이었다. 인조반정의 정당성, 나아가 인조정권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상소 내용이 알려진 직후, 조정은 그야말로 뒤집어졌다. 강학년을 죽이고 강화도에 있는 광해군까지 죽여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타났다. 강학년의 발언은 충격적이었지만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을 보면 ‘발언’ 때문에 흥분할 여유가 없었다. 이미 가도를 무력화시킨 후금의 마수가 야금야금 조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또 다른 ‘내우’에 휘말려 ‘외환’의 실체를 직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태릉·강릉에 왕릉 전시관 들어선다

    조선 제11대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와 13대 명종, 그의 비인 인순왕후의 능이 있는 노원구 공릉동 태릉·강릉(사적 제201호)에 ‘왕릉 전시관’이 만들어진다. 노원구와 문화재청은 12일 공릉동 산 223의19에 지상 1층,1013㎡ 규모로 조선왕조 600년의 역사와 문화, 왕실의 국장의례를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왕릉 전시관’을 내년 7월까지 조성한다고 밝혔다. 왕릉 전시관은 크게 태릉·강릉 전시관과 조선 왕릉전시관 등으로 이뤄진다. 태릉·강릉 전시관은 왕릉의 역사와 왕릉의 인물, 왕릉 구조를 알 수 있도록 꾸며진다. 조선 왕릉전시관은 왕권의 상징 및 조선왕조 국장의례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전시관의 관람 동선은 길이 143m, 관람 소요시간은 80분 정도 걸린다. 태릉·강릉 입장료 외에 별도의 전시관 관람료는 없다.구 관계자는 “태릉·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록과 함께 인근 육사박물관, 초기 한글의 형태를 알 수 있는 하계동 한글영비(보물1524호),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 경춘선 폐선 부지의 테마파크 등과 연계해 문화 관광벨트로 묶을 계획”이라고 말했다.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8) 전주 경기전 태조 어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8) 전주 경기전 태조 어진

    흔히 조선 초상화의 핵심 정신으로 영조가 선왕인 숙종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언급했다는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곧 다른 사람(一毫不似 便是他人·일호불사 변시타인)’이라는 극도의 사실성을 들곤하지요. 일호불사론(論)은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중국 북송의 사상가 정이의 어록에 먼저 나온다고 합니다. 한오라기 수염이라도 더 많으면 다른 사람이니 영정이 아니라 신주로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제의론이었다는 것이지요. 선조 이후 현종까지 250년 남짓한 기간동안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의 제작이 활발치 않았던 이유를 여기서 찾기도 합니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대부들의 신권(臣權)이 왕권을 능가할 만큼 강한 시절에는 어진조차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럼에도 어진을 비롯한 초상화는 조선시대 내내 끊이지 않고 그려졌지요. 어진을 더 많은 장소에 봉안하여 권위의 상징으로 삼으려는 왕과 성리학적 명문을 앞세우며 이를 견제하려는 사대부 사이의 갈등이 잠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진은 ‘일호불사’라는 글자 그대로 최대한 ‘모델’의 실제 모습에 가깝게 그려야 했을 것입니다. ●태조 초상화는 모두 26축 그려져 태조 이성계(1335∼1408년)의 초상화는 전신상과 반신상은 물론 승마상까지 모두 26축이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주 경기전 것이 유일하지요. 이 어진이 처음 그려지고,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임금의 초상이 갖고 있는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 왕조는 국초에 태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진전(眞殿)을 6곳에 세웠습니다.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 이자춘의 옛집으로 이성계가 태어난 함경도 영흥에는 준원전, 이씨의 본향인 전주에는 경기전, 왕위에 오르기 전 태조가 머물던 개성의 집터에는 목청전을 지었습니다. 고구려와 신라의 고도인 평양과 경주에도 각각 영숭전과 집경전을 두었지요. 경복궁에는 역대 왕과 왕비의 초상을 가리키는 쉬용(容)을 한데 모아 봉안하는 선원전을 세웠습니다. 영흥과 경주의 어진은 태조 재위 당시 그려졌습니다. 경기전 어진은 태조가 승하한 이듬해인 1409년 경주 것을 모사하여 1410년 봉안했지요. ●도성의 어진 6·25때 대부분 소실 경기전 어진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바닷길로 선조가 머물던 의주를 거쳐 묘향산에 보관됩니다. 어진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탄 경기전이 광해군 6년(1614년) 중건된 뒤에야 돌아왔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경기전과 영흥전 것을 제외한 태조 어진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경기전 어진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무주 적산산성으로 다시 한번 피란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에도 이 어진은 영조 43년(1767년) 전주성에 불이 나서 2300호가 잿더미가 되는 상황에서 향교로 한동안 옮겨졌고,1894년 동학농민혁명군이 전주를 점령했을 때도 위봉산성으로 피란하는 곡절을 겪었습니다. 그 사이 경기전 어진은 숙종 14년(1688년) 서울 나들이를 합니다. 조선왕실은 이 초상화를 모사하여 남별전에 봉안함으로써 임진왜란 때 선원전이 불타는 바람에 태조의 어진이 도성에서 사라졌던 공백을 마감했지요. 도성의 어진은 1921년 새로 지은 선원전에 한데 모아졌는데,6·25전쟁 당시 피란지 부산에서 그만 대부분이 불에 타버리고 맙니다. 영흥의 태조 어진도 광복 이후까지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행방을 알 길이 없습니다. 현재의 경기전 어진은 고종 9년(1872년)에 다시 모사한 것입니다. 모사 과정은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자세히 전하고 있지요. 어진을 모사한 것은 초상화가 낡으면 새로 그리고 이전 것은 파기하던 관행 때문입니다. 최근 전주시는 ‘낡고 오래된 어진을 태운 뒤 백자 항아리에 담아 경기전 북편에 묻었다.’는 의궤의 기록에 따라 이 흔적을 찾아나서기로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어진은 살아있는 임금과 다르지 않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경기전의 태조 어진도 격동의 세월을 살아간 역대 왕만큼이나 풍상을 겪었지요. 한 점의 그림에 이 정도의 역사가 담겨 있는 사례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dcsuh@seoul.co.kr
  • 3·1절특집 일제 문화잔재 조명

    89회 3·1절을 맞아 케이블·위성TV Q채널은 새달 1일 오전 10시 일제 잔재를 밝히는 ‘일제문화잔재 60년-조선에 황국을 세우다’를 방송한다. 일제 강점기 35년을 거치며 우리 땅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는 셀 수 없을 정도다. 왕권에 흠집을 내기 위해 자행된 궁궐 훼손부터, 각 지방의 수많은 건축물들까지. 일제 흔적들을 찾아보고 바람직한 청산에 대한 해결책을 살펴본다.
  • [新 인디아 리포트] (8) 인도 대표 아이콘들

    [新 인디아 리포트] (8) 인도 대표 아이콘들

    |뭄바이·아그라(인도) 최종찬특파원| 인도가 관광 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세계4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로 볼거리가 많은 인도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며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인크레더블 인디아(Incredible India)’를 만드는 대표 아이콘들을 돌아봤다. ●타지마할 뉴델리에서 엉덩이에 불이 날 정도로 덜커덩거리는 버스를 타고 4시간을 가면 아그라 남쪽에서 만난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이슬람 건축물이다.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5대 황제 샤자한이 14번째 아이를 낳다 죽은 왕비 뭄타즈 마할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무덤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며 샤자한도 나중에 이곳에 묻혔다. 샤자한은 왕비에 어울리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무덤을 지었다. 돈을 쏟아붓다 보니 나라 살림이 거덜나는 줄도 몰랐다. 루비 등 보석과 최고급 대리석을 사들였고 지구촌 유명 조각가들을 초빙했다. 인부도 2만여명을 동원했다.1655년 타지마할이 완공된 후 샤자한은 타지마할과 닮은꼴 건물을 지을 수 없게 장인들의 손목을 잘랐다고 한다. 비극적인 역사가 숨어 있는 이곳에는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로 매일 넘친다. 인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거의 다 만날 정도로 인기가 높다.500루피(약 1만 2000원)를 내고 관광지 가운데 가장 철저한 검색대를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무장한 보안군들이 관리하는 타지마할의 모습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햇살의 각도에 따라 밝고 어두우며 꿈꾸는 듯한 모습으로 변한다. 샤자한 부부의 가묘가 있는 중앙사원은 내부 촬영과 날카로운 물건의 반입이 금지된다. 내부를 장식하는 보석을 파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중앙사원 옆에 4개의 기둥은 붕괴될 경우 사원 쪽으로 쓰러지지 않게 바깥쪽으로 기울게 설계되었다. 인도 유적지 가운데 명성과 가장 걸맞은 건축물이다. 사랑 때문에 국가를 말아먹은 샤자한의 그릇된 용기가 부럽기도 했다. ●아그라성 샤자한의 애틋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타지마할에서 버스로 10분을 타고 가면 만난다. 높이 20m, 둘레 2.5㎞에 이르는 성벽과 성문이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이 성은 샤자한 황제가 궁전으로 만들었다.200루피를 내면 바깥 모습과는 한 차원 다른 성 안을 구경할 수 있다. 성벽 중요 지점에는 둥근 성루를 만들어 놓았고, 궁전 벽면엔 흰 대리암 상감을 입혔다. 중앙에는 안뜰을 마련했고 남북의 홀은 기둥들보 구조로 돼 있다. 돌로 만든 차양을 받치는 까치발에는 조각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한마디로 정교하고 아름답고 세련된 모습이다. 유일하게 대리석으로 만든 포로의 탑에는 서러운 역사가 갇혀 있다. 셋째아들 아우랑제브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유폐된 샤자한이 인생의 마지막 8년을 보낸 곳이다. 야무르 강 건너편에 있는 타지마할을 쳐다보며 죽은 왕비를 그리워하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날개를 접은 곳이다. 성루에 서면 강 너머로 타지마할이 보인다. 하지만 극심한 공해 때문에 한낮에도 희뿌옇게 보일 뿐이다. 강은 더럽고 수량도 적어 개울처럼 보였다. 아그라성에서 역사 가이드를 52년째 해온 B N 아가브왈(70)은 “성 안에는 궁녀들의 예배당과 황제의 개인 예배실, 시장, 주택지구가 있었다.”며 무굴 제국이 번성했던 시절 성 안의 규모에 대해 설명했다. 오늘밤 세상이 모두 잠들면 샤자한의 영혼이 포로의 탑에서 나와 생전에 그렇게 그리워했던 왕비와 380년만에 극적인 재회를 하길 빌었다.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 영국왕 조지 5세의 인도 방문을 기념하는 건축물로 1924년 완성됐다. 과거엔 인도의 관문의 역할을 하다 지금은 엘리폰타섬까지만 운항하는 배의 선착장으로 사용된다. 뭄바이의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는 유명관광지이지만 잡상인이 들끓고 제대로 된 안내 표지판이 없을 정도로 관리가 소홀했다. 무장군인이 지키는 뉴델리의 ‘게이트 오브 인디아(전쟁터에서 숨진 10만명의 군인 이름이 새겨져 있음)’에 비하면 이곳은 거의 방치된 셈이다. 파헤쳐진 구멍이 있어 사진 찍다가 다칠 우려도 있다. 가까이에 있는 럭셔리한 타지마할 호텔과 함께 앵글에 담으면 추억의 급수가 높아질 것 같다. ●엘리폰타섬 게이트웨이 오브 인디아에서 통통배(왕복요금 120루피)를 타고 1시간을 가면 작은 섬이 인사한다. 선착장에 내려서 꼬마기차의 인도를 받고 120개 계단을 다 올라가면 섬의 대표 관광지인 힌두신전이 나온다. 입장료가 200루피인 이 신전은 큰 바위산을 깎아 만든 것으로 5∼8세기에 걸쳐 조성된 석굴사원이다. 창조의 신 ‘브라흐마’, 수호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 등 인도 대표 신들을 조각해 놓았다. 이곳도 관리가 부실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조각도 있다. 현지 가이드인 아비나슈(19)는 “하루 방문객이 400∼500명 정도”라고 말했다. 네덜란드 관광객 레닉(35)은 “인도인들이 외국인 관광객의 돈만 노리는 것 같아 씁쓸하다.”며 “유적 관리가 제대로 안 돼 망가져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siinjc@seoul.co.kr ■인도인과 결혼한 교포 박정희씨 |델리(인도) 최종찬특파원| “조상이 유적을 많이 물려줘 관광지가 많습니다. 달라이라마의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 북서부 히말라야 산맥지대에 있는 다람살라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뭉게구름, 잉크빛 하늘, 돌산과 설산의 조화, 한마디로 천국입니다.” 일본 유학 도중 만난 인도 청년과 결혼해 시부모를 모시고 21년째 인도에서 살면서 패키지투어 전문 여행사를 운영하는 여행 코디네이터 박정희(45)씨는 인도사람이 다 됐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시골여성들은 남자를 받들며 살아가지만 도시여성들은 그렇지 않다. 정부나 방송국, 은행 등의 고위직에 많이 진출해 있다. 델리 주 총리, 펩시콜라 본사 CEO, 인도 바이오 테크 CEO도 여성이다. 결혼하면 시부모를 모시기 때문에 한국처럼 고부갈등이 있다. 연속극에서도 이 주제를 많이 다루며 기혼 여성이 2명 이상 모이면 시어머니 얘기가 화제가 된다. ▶인도에서 세 가지 조심할 사항은. -하나는 길조심, 영연방국가로 차량이 우측통행을 하니 조심해야 한다. 둘째 물조심. 수돗물은 절대 먹으면 안 된다. 생수를 돈 주고 사먹어야 배탈을 방지할 수 있다. 셋째는 돈조심. 찢어진 돈을 받으면 다시 쓸 수 없으니 번호가 찢어져 있거나 중간이 뜯겨져 나간 것은 받지 말아야 한다. ▶인도 생활 21년을 결산하면. -처음엔 음식 적응이 가장 힘들었다. 인도어를 읽고 쓰지 못해 불편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아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인도사람들은 양면성이 있다. 순박하고 애정이 많은 반면에 이기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다. ▶한국 관광객에게 아쉬운 점은. -인도에서 한국식에 맞추려고 하는 것이 문제다. 로마에 오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음을 열고 인도사람들을 대했으면 좋겠다. ▶사용 가능한 언어는 몇 개나 되나. -한국어, 일본어, 영어는 읽고 쓸 수 있다. 힌디어, 구자라티어, 마라티어는 쓰고 읽을 수는 없어도 말할 수는 있다. 집에선 구자라티어로 얘기한다. 편지 쓸 때는 남편에게는 일본어로, 아들에게는 영어로 쓴다. 외출하면 영어, 힌디어, 구자라티어, 마라티어를 만나는 사람에 맞춰 쓴다. ▶인도에도 사교육 열풍이 부는지. -부모가 아이를 가지면 그때부터 아이를 사립 영어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한다. 입학을 예약하기 위해 브로커에 돈을 주기도 한다. 유명 사립영어학교 입학은 하늘의 별따기다. 고액과외도 있고 족집게 선생님도 있다. siinjc@seoul.co.kr
  • 1969년 이후 가장 작은 정부

    우리 국민은 이제 반세기만에 가장 작은 몸집의 정부를 보게 됐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현행 18부4처18청10위원회인 중앙 행정조직을 13부2처17청5위원회로 대폭 축소하는 내용의 정부 조직개편안을 16일 발표한 것이다.대(大)조직인 부·처만 해도 무려 7곳이 줄어드는 셈이다. 부·처 수로는 2원12부1처4청3위원회2실이었던 1960년 이후 48년만의 최소 규모다.더 거슬로 올라가 11부4처3위원회로 출발했던 1948년 정부수립 당시와 비슷한 수준으로 작아졌다.건국 당시 우리나라의 수준이 세계 최빈국이었고 지금은 세계 12위권의 경제강국이란 점을 감안하면,새 정부가 몸집을 얼마나 과감하게 줄였는지를 알 수 있다.적어도 외형적 틀에 있어서는 ‘작지만 강한 청와대’‘작지만 효율적인 실용정부’의 발판을 갖춘 셈이다. 이같은 대수술은 실용과 효율을 중시하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소신에 따른 것이다. 오는 21일 국회에 제출,이달말 통과를 목표로 입법절차에 들어갈 예정인 새 정부 조직개편안의 특징은 우선 부처간 장벽을 무너뜨리고 기능 중심으로 재편한 데 있다. 재정경제부의 경제정책·국고·세제·국제금융 정책 기능을 기획예산처와 통합해 ‘기획재정부’로 재편하고,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국가청소년위원회,기획예산처의 양극화 민생대책본부를 합쳐 ‘보건복지여성부’로 탈바꿈시킨 것을 말한다.해양수산부의 항만·물류정책과 농림부 소속 산림청,행자부의 지적·부동산관리 기능을 건설교통부로 이관해 ‘국토해양부’로 탈바꿈시킨 것은 기능 중심 재편의 백미라 할 만하다.외교통상부와 통일부를 묶어 ‘외교통일부’를 만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두번째 특징은 업무 중첩과 옥상옥(屋上屋) 기구에 따른 비효율성에 메스를 댄 것이다. 대통령 비서실과 경호실을 ‘대통령실’로 통합하고 기존의 경호실은 비서실내 ‘경호처’로 사실상 강등시키는 등 군살을 뺐다.이로써 기존의 ‘4실10수석’ 체제의 청와대 조직은 ‘1실1처7수석’ 체제로 축소됐다.국무총리실의 비서실과 국무조정실 2실 체제를 국무총리실(장관급) 1실 체제로 바꾼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 기능을 민간에 대폭 이양하면서 자율성을 확대한 것도 특징이다.교육부의 학생선발권과 교원 임용·인사,교육과정 편성,학사운영 등 핵심 규제기능을 지방과 민간에 넘기고,나머지 기능을 과기부의 과학기술인력·기초과학정책,산자부의 산업인력 양성기능과 합쳐 ‘인재과학부’로 재탄생시킨 것이 대표적이다.정부 자문위원회 416개 가운데 51%인 215개를 폐지키로 한 데서도,‘다이어트’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같은 ‘작은 정부 지향’은 세계적인 추세라는 게 인수위의 설명이다.지난 2001년 일본은 1부22성ㆍ청을 12성ㆍ청으로,영국은 2001년 26부ㆍ성을 18부ㆍ성으로 줄였다.미국과 독일은 현재 15부,프랑스ㆍ싱가포르는 14부 체제다. 한편에서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이명박 당선인이 정부조직을 아예 기업형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는 진단도 있다.CEO가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담당 이사나 부장을 상대하는 식의 기업식 마인드가 녹아있다는 것이다.2명의 무임소 특임장관을 신설,‘리베로 역할’을 맡긴 데서도 다분히 기업적 냄새가 난다.이 당선인은 이미 지난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신임 총리의 역할을 ‘자원외교 등 세일즈 형’으로 규정한 바 있다. 역사학적인 견지에서는 이 당선인이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계몽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한 성격의 정부조직이라는 평가도 있다.총리실 축소 방안 등을 말한다.조선시대에도 왕권이 강할 때는 왕이 육조를 직접 관할하는 대신 3정승의 권한이 약해졌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새로 개편되는 부처의 명칭은 대부분 ‘인재’‘지식’‘특임’‘안전’‘국토’ 등의 표현으로 ‘이명박 정부’를 상징하는 모양새로 바뀐다.부처명이 유지되는 곳은 법무·국방·문화·환경·노동부 등 5개에 불과하다. 우선 지식경제부는 융합과 지식정보화의 실물경제를 추구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인재과학부는 공급자(교육기관) 중심에서 수요자(학생) 중심으로 교육시스템을 개선하려는 의지다.김형오 인수위 부위원장은 “획기적”이라고 평가했다. 국토해양부와 행정안전부는 새 정부의 국정운영 방침과 가치를 드러내는 이름이라고 한다.줄여쓰는 이름은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기획재정부는 ‘기재부’,지식경제부는 ‘지경부’,인재과학부는 ‘인과부’,국토해양부는 ‘국해부’,행정안전부는 ‘행안부’ 등으로 줄이면 다소 귀에 낯설게 들린다. 이날 발표된 정부조직 개편안을 놓고 우려도 제기된다.몸집이 커져 힘이 세진 대부처들 사이에 권한 조정이 예전보다 어려울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또 축소에 치중하다 보니 이 당선인의 비전을 대표할 만한 부처가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는 평가도 나온다. 글 /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영상 /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씨줄날줄] 사르코지와 두 여인/육철수 논설위원

    중국의 당사열전(唐史列傳)에는 제왕이 거느릴 수 있는 부인의 수에 대한 규범이 나온다. 황제는 황후 1명, 비(妃) 4명, 빈(嬪) 9명, 세부(世婦) 27명, 어처(御妻) 81명 등 122명의 부인을 공식적으로 거느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여복(女福)이 철철 넘쳤을 테고, 어지간한 정력 갖고는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 깊은 궁궐에서 황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인들의 사랑싸움이 유난히 많을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하다. 왕권이 하늘같은 시대였기에 망정이지, 통치자의 사생활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파파라치가 옛날에도 있었다면 중국 조정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통치자와 그 주변 여인들의 염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초들의 지대한 관심사다. 프랑스 엘리제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인열전’이 연일 볼 만하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새 연인 브뤼니는 지난 연말 이집트 룩소르 휴양지에 당당하게 함께 갔다. 사르코지의 사우디아라비아 방문길엔 동행하려다 무산됐다. 결혼하지 않았거나 혈족이 아닌 남녀는 같은 방을 쓸 수 없다는 이슬람 율법 때문이란다. 사르코지는 지난 연말 교황청 방문 때도 브뤼니를 데려가려다 의전이 여의치 않자 혼자 갔다. 반면 오는 24일 사르코지가 방문할 인도는 브뤼니의 동행문제로 끙끙 앓고 있다고 한다. 결혼을 한달여 앞두고 브뤼니는 벌써 엘리제궁의 안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보도다. 사르코지-브뤼니 커플의 파격행보는 이래저래 세계의 시선을 끌고 다닌다. 사르코지의 전처 세실리아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지난해 이혼 후 은인자중하던 그녀는 사르코지와 브뤼니 사이가 급속히 달아오르자 “브뤼니는 니콜라가 나를 금방 잊게 할 만한 여성이 못 된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사르코지가 두 여인에게 준 반지도 똑같아 입방아에 올랐다. 묘한 일이다. 사르코지와 여인들의 화제는 여기서 멈출 것 같지 않다. 일국의 대통령으로서 세인의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는 배짱이 놀랍다. 퍼스트 레이디를 서슴없이 버린 세실리아와 대통령의 마음을 순식간에 낚아챈 브뤼니의 삼각 애정스토리는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병자호란 다시 읽기] (52) 인조의 생부 정원군 추승 논란

    명 조정이 후금의 반간계에 넘어가 원숭환을 처형하는 등 자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무렵, 조선에서는 인조의 생부(生父) 정원군(定遠君)을 국왕으로 추숭(追崇:돌아가신 분의 지위를 뒤 시기에 올려 주는 것)하는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뜨거웠다. 반정이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즉위했던 인조는 자신을 낳아준 부친을 국왕으로 추숭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높이고 싶어했지만, 명분과 종통(宗統)의 의리를 강조하던 신료들은 인조의 그 같은 시도에 격렬히 반발했다. ●계운궁(啓運宮) 상례(喪禮) 논란 병자호란을 겪을 때까지 인조 정권은 안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 주된 까닭은 인조가 정상적인 방식으로 등극하지 않은 데 있었다. 인조는 반정이라는 정변을 통해, 신료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즉위했다. 그 때문에 인조는 늘 국왕으로서 정통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고, 그 과정에서 신료들과 갈등을 빚었다. 정통성 확보와 관련된 첫 현안은 인조의 생부모(生父母)를 왕실의 종통 속에서 어떻게 대우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인조는 숙부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에 왕실의 법통상 조부인 선조를 계승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따라서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1580∼1619)과 생모인 계운궁(啓運宮) 구씨(具氏,1578∼1626)를 사친(私親)으로 대접할 것인지, 아니면 인조의 왕통 속으로 끌어들여 ‘왕’과 ‘왕비’로 대접할 것인지가 쟁점이 되었다. 인조는 당연히 후자를 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료들은 정원군과 구씨를 사친의 예에 따라 대접해야 한다고 맞섰다. 논란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1626년 1월, 인조의 생모 계운궁이 경덕궁 회상전(會祥殿)에서 세상을 떠났다. 인조가 계운궁을 위해 몇 년 상을 치러야 하는지가 당장 논란이 되었다. 인조는 당연히 어머니를 위해 3년 상을 치르겠다고 나섰다. 대신들과 예조판서는 ‘인조가 선조를 계승한 이상 멸사봉공의 입장에서 사적인 예는 축소해야 한다.’며 3년 상에 반대했다. 그들은 1년 상을 치르되 ‘상주가 지팡이를 짚지 않는(不杖期)’ 상례를 적용하라고 요구했다. 이귀를 비롯한 일부 신료들은 ‘인조의 생부 정원군이 선조의 대통을 계승할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내세워 3년 상을 치러도 무방하다며 인조에게 영합했다. 대신들과 예조는 인조가 상주(喪主)가 되는 것에도 반대했다. 그들은 ‘인조는 왕통으로 볼 때 이미 선조에게 출계(出系)했기 때문’에 생모를 위해 상주가 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인조는 자신이 상주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고 신료들의 공론을 무시했다. 예조판서를 비롯한 반대하는 신료들은 사직을 요청했다. 영의정 이원익은 ‘상주가 되려 하고 사친을 위해 국상(國喪)을 고집하는 것은 참월할 뿐 아니라 나라의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인조는 결국 신료들의 반발에 밀려 상주 역할을 동생 능원군(綾原君)에게 넘겼다. ●신료들 “인조 아버지는 선조” 인조가 상기(喪期)와 상주 문제를 놓고 신료들과 논란을 빚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계운궁의 상례를 ‘왕비’의 예로써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실제로 5일 만에 빈소를 차리고(成殯),6일 만에 상복을 입고자(成服)했는데 예조는 그것이 ‘왕비의 예’라며 반대했다. 신료들은 3일에 ‘성빈’하고 4일에 ‘성복’하라고 촉구했다. 인조는, 자신의 명을 듣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신료들을 위협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시간을 끌면 어차피 자신의 의도대로 5일 ‘성빈’,6일 ‘성복’을 관철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운궁의 상례와 관련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대목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계운궁의 관을 궁궐 안에 두는 문제, 반혼(返魂) 의식을 궁궐에서 하는 문제, 인조가 산소까지 따라가는 문제 등도 논란이 되었다. 인조는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계운궁을 모신 김포의 산소 이름도 육경원(毓慶園)이라고 명명했다.‘사친을 왕비의 예로 대접하면 안 된다.’는 신료들의 반발과 공론을 무시하면서까지 ‘추대된 왕’으로서 자신이 지닌 정통성의 약점을 만회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인조는 더 나아가 작고한 생부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고자 했다. 신료들은 훨씬 더 격렬하게 반발했고 당연히 그것을 둘러싼 논란은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추숭을 둘러싼 논란은 정원군과 인조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예학(禮學)의 권위자였던 김장생(金長生)은 ‘인조가 선조를 계승한 이상 왕통으로 볼 때 인조의 아버지(考)는 선조’라고 못박았다. 왕통은 사적인 혈연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내세워 정원군을 ‘아버지’로 대접하려는 인조의 의도를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는 ‘선조와 인조를 부자 관계로 하면 정원군과 인조는 형제가 되는’ 문제점이 있다고 김장생의 의견에 반대했다. 대다수 신료들이 ‘왕통은 사적 혈연보다 우선한다.’는 김장생의 의견에 동조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이귀와 박지계(朴知誡) 등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들은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아들’이라고 거리낌 없이 주장하여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놓았다. 인조에게 철저히 영합했던 것이다.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는 논의는 1624년경에 제기되었다가 정묘호란 때문에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630년(인조 8) 8월, 음성(陰城) 현감 정대붕(鄭大鵬)이 다시 제기했다. 그는 ‘계운궁의 상례를 국상으로 치르고도 정원군을 추숭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인조는 그의 의견이 반가웠지만 대다수 신료들은 반발했다. 정대붕의 상소를 계기로 이귀는 정원군을 추숭하고, 그를 모시는 묘(廟)를 세우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이귀는 무리를 동원하여 추숭을 요청하는 상소를 연달아 올리게 하는 등 ‘여론 조작’까지 시도했다. 이원익, 김류, 오윤겸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대신들은 모든 대소 신료들을 이끌고 인조를 압박했고, 성균관 생도들까지 나서 인조에게 ‘공론을 따르고, 비례(非禮)’에 집착하지 말라.’고 외쳐댔다. 정치판은 바야흐로 인조, 이귀, 박지계, 최명길 등 소수의 ‘추숭 찬성론자’들과 대다수의 ‘반대론자’들로 나뉘어졌다. ●1632년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숭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려는 인조의 시도는 무리한 것이었다. 집권 이후, 과거 광해군이 생모 공빈(恭嬪)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하고 무덤을 성릉(成陵)이라 했던 것을 비판하고 성릉의 석물 가운데 참월한 것을 없애라고 지시한 것을 고려하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인조는 반대하는 신료들을 ‘시정잡배’로, 성균관 유생들을 ‘괴물’이라고 매도하면서 추숭을 강행하려 했다. 이귀는 그 과정에서 솔선해서 ‘총대를 멨다.’그는 경연(經筵) 자리에서 추숭을 주장하다가, 반대하는 신료가 있으면 소리를 지르고 주먹으로 바닥을 치면서 성토하고 모욕을 주었다. 인조의 존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추숭 문제를 놓고 신료들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결국 1632년(인조 10) 2월, 추숭도감(追崇都監)을 만들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켰다. 이어 5월에는 정원군을 ‘왕’으로 추숭하여 원종(元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렸다. 원종과 계운궁을 모신 산소는 장릉(章陵)으로 승격되고,1635년에는 그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데도 성공했다. 신료들의 반대와 조야의 공론을 모조리 무시하고 밀어붙여 얻어낸 ‘성과’였다. 당시 조선은 가도의 유흥치(劉興治)를 토벌하려 시도했고, 유흥치는 곧 심세괴(沈世魁)에게 피살되는 등 서북 변경 상황이 몹시 심각했다. 후금 또한 조선에 대해 이런 저런 경제적 요구를 멈추지 않았다. 남방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우려 역시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다. 인조는 원종 추숭을 통해 왕권을 어느 정도 높일 수 있었지만 물경 10년 가까이 계속된 ‘추숭 논란’은 신료들 사이에 불신의 벽을 높이고 국력을 갉아먹었다. 그 와중에 민생을 추스르고 국방력을 제고해야 하는 긴급한 과제는 아무래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3·끝) 수원~과천 남태령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3·끝) 수원~과천 남태령

    경기 수원으로 들어온 옛길은 이내 정조대왕의 능행로와 만난다. 능행로는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모신 화산(화성) 현륭원에 행차하기 위해 다녔던 길로, 수원과 화성 경계에 있는 대황교에서 그동안 걸어온 옛길과 합쳐진다. 여기에서부터 과천 남태령까지 정조의 능행로와 거의 일치한다. ●팔달문~장안문 사이 유적 즐비 군 비행장 옆을 지난 옛길은 구획 정리된 주택가를 통과하면서 생겼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수원천 매교다리까지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 옛 1번 국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정조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화성의 품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수원 화성은 정조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신도시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성곽은 정약용이 설계했다. 화성의 4대문 중 남쪽에 위치한 보물 제402호 팔달문이 첫눈에 들어온다. 충청·전라·경상도 사람들이 이 문을 통과해 들어오기에 사통팔달로 통한다는 의미로 지었다. 서울의 남대문이나 동대문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문루의 네귀에 높은 기둥이 없는 것이 다르다. 또 성문 바깥쪽에 벽돌로 옹성을 쌓았다. 팔달문에서 장안문으로 이어지는 옛길 주변에는 화성의 유적이 즐비하다. 길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화성행궁이 있고 반대편에는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화성에 행차할 때 머물던 처소로, 무려 576칸에 달해 조선시대 최대 행궁으로 꼽힌다. 수원시는 당시 제작된 ‘화성성역의궤’란 보고서를 토대로 화성행궁 등 화성의 대부분을 복원했다. 장안문은 화성 북쪽 대문으로 사실상 정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국보 1호인 서울 숭례문보다도 크다. 옛길은 화성을 뒤로한 채 옛 국도를 따라 가다 수원종합운동장 앞에서 왼쪽으로 꺾이며 이목동 노송지대에 다다른다. ●인덕원 소공원엔 ‘옛길터’ 표석이… 노송지대 길 오른편에는 ‘만석거’라고 불리던 일왕저수지가 있다. 정조의 지시에 따라 1795년에 만들어졌다. 주변의 곡식들이 가뭄 피해를 입지 않도록 평상시에 물을 저장해 두었다. 약 5㎞에 이르는 노송지대도 정조가 현릉원 관리에게 내탕금 1000냥을 하사, 소나무 500그루와 능수버들 40그루를 심게 해 조성됐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대부분 죽고 일부만 남아 있다. 게다가 주변에는 갈비집 등 음식점과 상가 등이 들어서 노송지대의 경관을 해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옛길은 1번국도와 다시 만나면서 ‘지지대고개’에 오른다. 정조는 현륭원 행차를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갈때 지지대 고개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먼발치에서나마 현륭원이 있는 화산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한다. ●남태령 원래 이름은 ‘여우고개’ 수원을 벗어난 옛길은 10차로로 뚫린 1번 국도를 타고 의왕으로 진입한다. 고천사거리를 통과한 뒤 고촌초등학교 앞길로 들어선다. 학교옆 고천동 사무소에는 정조가 쉬어 가던 사근행궁이 있었다. 옛길은 상가들이 촘촘히 들어선 거리를 지나 1번 국도와 합쳐졌다 오전초등학교 지점에서 아파트와 가구점들이 뒤섞여 있는 의왕가구단지로 진입한다. 전남 나주에서부터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하며 의왕까지 온 1번 국도는 여기서부터 이별을 고한다. 정조대왕의 능행로도 이곳에서부터 시흥(1번국도)쪽길과 남태령(47번)쪽 길로 나뉜다. 그동안 걸어온 옛길(호남대로 또는 삼남대로)은 다시 남태령으로 이어진다. 가구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효성중학교 앞길을 지나면 안양교도소 뒷길이 나타난다. 승용차 1대가 통과할 수 있는 한적한 옛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길은 바로 47번 국도로 진입한다. 국도 왼쪽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바로 평촌신도시이다. 2㎞쯤 달리면 옛길은 서울외곽순환도로 고가차도 밑을 통과한 뒤 신도시가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약간 비껴서 인덕원에 당도한다. 궁중의 내시들이 모여 살았던 곳으로, 왕이 덕을 베풀어 인덕(仁德)이라 했고 또 이곳에 여행자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원(院)이 있어 인덕원이라 불렸다. 주택들이 들어서 길은 사라졌지만 인덕원 소공원에는 ‘인덕원 옛길터’라는 표석이 설치돼 있고 서쪽으로 60m 떨어진 곳에 100m도 채 안 되는 옛길 소로가 남아 있다. 또 표석에는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 현륭원으로 옮긴 뒤 12번 능행차를 했는데 이중 6번을 인덕원 옛길을 이용했다.”고 적혀 있다. 길은 인덕원 사거리에서 47번 국도를 따라 정부청사가 있는 과천으로 들어간다. 여기에서도 아파트와 관공서, 크고 작은 상가 건물들이 들어차 있어 옛길은 흔적조차 없다. 과천현 관아가 과천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문헌에 기록돼 있다. 또 학교 바로 옆에는 ‘온온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정조가 현륭원에 내려갈 때 쉬었던 객사였다고 전한다. ●서울 진입 옛길 일부 과천시서 복원 옛길은 다시 47번 국도를 만나 서울에 들어가는 관문인 ‘남태령로’와 합쳐진다. 원래 남태령의 이름은 여우고개였다. 정조가 행차할 때 이 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이름을 묻자 과천현 이방 변씨가 왕에게 상스러운 말을 할 수 없어 남태령(남쪽으로 내려갈 때 첫번째로 맞이하는 고개)으로 답했다고 전한다. 옛길은 과천 관문사거리에서 남태령 고개로 향한다. 일제 강점기 때 길을 넓히면서 모두 사라졌지만 과천쪽 길은 일부 남아 있다. 남태령 지하차도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옛길은 정상 부근까지 900여m쯤 이어진다. 과천시가 복원했다. 땅끝마을 해남에서 출발해 1000리를 달려온 옛길은 전라도·충청도·경기도 등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채 남태령을 넘어 한양에 당도한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옛길이 지나가는 수원은 정조대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정조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수원에 계획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수원시 학예연구사 김준혁(41)씨는 “정조는 위민(爲民)정치 실현 및 왕권 강화를 위해 서울을 벗어난 곳에 도시를 조성해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 싶어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수도 한성부는 정조의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노론세력들이 정치·경제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에 따라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 자리인 수원 관아로 이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원에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수원의 읍치(邑治·고을)를 화산(화성)에서 수원 팔달산 기슭으로 옮긴 뒤 4년 후인 1793년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유수부는 지금의 광역자치단체에 해당된다. 도시와 백성을 보호해 줄 성곽도 쌓았다.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를 이용해 10년 예상했던 공사를 단 2년9개월 만에 끝냈다. 정조는 수원으로 이주하는 백성들에게 이주 비용과 함께 10년간 세금을, 남자들에게는 군대 면제 혜택을 주었다. 성 안팎에 시장을 개설해 서울·개성·평양의 상인들을 유치하고 성곽 밖에는 저수지와 둔전을 설치했다. 화성에서 매년 1차례씩 특별과거시험을 실시하는 등 교육 활성화 정책도 폈다. 자연스럽게 백성들이 몰려들어 수원은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로 성장했다. 김씨는 “도시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메트로시티를 넘어 인구 1000만명의 ‘메가시티’가 돼야 한다는 게 요즘의 세계적인 추세”라며 “정조는 18세기 상황에서도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다양한 정치·문화·경제·교육이 발전하는 메트로시티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전국 인구가 760만명에 불과했는데, 정조는 수원을 인구 50만의 신도시로 만들고, 이같은 도시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구상을 그리고 있었다. 김씨는 “정조는 그 당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혜안을 갖고 있었다.”며 “따라서 수원은 우리 역사뿐 아니라 아시아 일대에서 계획적으로 조성된 최초의 신도시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수원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씨줄날줄] 폐족(廢族)/육철수 논설위원

    왕조시대의 연좌제는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반역을 하거나, 왕권에 잘못 대들었다간 3족(부모·형제·처자 또는 친가·외가·처가),9족(9대에 걸친 직계친족 또는 부계 4친족+모계 3친족+처가 2친족)이 참혹한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여기에다 10족이라 해서 죄인의 스승이나 문하생을 포함하기도 했다. 죄가 다소 가벼우면 폐족형(廢族刑)을 내려 목숨만은 살려주고, 대신 후손이 대대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흔했다. 10족을 멸한 사례로는 중국 명대의 대학자 방효유(方孝儒)에 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명태조 주원장은 태자가 일찍 죽자 손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는데, 태조의 넷째아들인 연왕(후에 영락제)이 황위를 찬탈했다. 당시 즉위의 조서를 쓰도록 명을 받은 방효유는 붓을 집어던지며 이를 거부했다. 방효유는 즉시 극형을 당했고, 그의 9족에다 친구·제자 등 847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씨를 말리는 형벌이었던 것이다. 고려·조선시대에도 이런 형벌이 있었으나 실제로 시행됐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조정에서 웬만한 벼슬을 차지한 가문이면 좁은 땅덩어리에 친인척 관계가 워낙 복잡해 인재를 다 죽일 판인데, 집행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 폐족은 잦았다. 조선 후기 방랑시인 김병연의 가문이 대표적이다.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반란군에 항복한 죄로 그 후손은 벼슬길이 막혔다. 연좌제가 박물관으로 간 게 언젠데, 뜬금없이 폐족론이 터져나와 화제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동업자’인 안희정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글에서 친노(親盧) 세력을 폐족이라 칭했다. 자신들은 “죄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5년전 정권을 창출하고 기세등등했던 언동은 찾을 수 없다. 국민의 신망을 잃은 권력 실세의 뒤늦은 석고대죄가 그저 애처롭기만 하다. 하지만 요해가 안 되는 것은, 폐족이라면서 총선 출마설이 나도는 것은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안씨의 처연한 몸부림을 보면서 권력을 안겼다가 어느 순간 거두어 가는 국민의 힘에 두려움을 느낀다. 새 정부의 떠오르는 실세들은 안씨의 회한을 꼭 반면교사로 삼길 바란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씨줄날줄] 언론의 후보지지/이목희 논설위원

    서구 신문들은 왕권, 종교권력, 식민본국 등과 투쟁하면서 커왔다. 초기에는 강력한 권력에 대항할 만큼 대중적인 신문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신문이 손잡은 대상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각 정파들이었다. 정파적인 언론자유가 만개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대중신문 시대가 열리면서 정파신문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지금은 특정 정당지로서의 성격은 약화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남아 있는 관행이 신문의 대권후보 지지표명이다. 미국에서는 주요 정당의 대선후보 경선전이 임박하자 언론사들의 지지 표명이 시작되었다. 공화당의 존 매케인이 일단 기선을 제압해 희색이라고 한다.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은 여론조사 지지율에 걸맞은 언론지원 분위기가 아니어서 실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신문이 아직 지지표명을 않고 있어 힐러리가 의기소침할 일도 아니다. 이들 양대 신문은 논설위원, 편집국 간부들의 토론을 거쳐 지지후보를 결정하지만 색깔이 이미 드러나 있다. 진보적인 논조를 가진 이들은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곤 했다. 또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존 케리를 지지한 언론사가 122개로 공화당 조지 부시 지지 69개보다 훨씬 많았지만 선거결과는 부시의 승리였다. 신문에 글을 쓰는 처지에서 미국 언론이 부러울 때가 있다.‘불편부당(不偏不黨)’을 내세운 글이 얼마나 재미없는지 독자들이 알 것이다. 다른 쪽에서 욕을 먹더라도 한쪽 편을 확 들어야 시원하고 반응이 있다. 사설과 칼럼은 정파성을 띠고, 일반 보도는 공평하게 쓰면 안 될까. 사설에서 나타난 정파성이 대선 후 후속보도나 언론사 위상과 아무 관계가 없었으면…. 이런 희망이 이뤄지기 어렵다고 보고 우리는 법으로 언론의 특정후보 지지표명을 금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법에 의한 금지는 유례가 없고, 심했다. 지지표명 여부를 언론사 자율에 맡겨야 한다. 일부 한국 언론은 공정보도라는 가면 아래 미국 언론보다 더 정파적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런 사례가 오히려 줄 수도 있다. 서구 언론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발전해야지, 미리 법으로 틀어막으니 부작용이 큰 듯싶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프리미어리그] 16일밤 174번째 ‘장미의 전쟁’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영국 왕권이 크게 약화되자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이 1455년부터 왕위를 놓고 30여년 피비린내나는 내전을 벌였다.각각 붉은장미 문장과 흰장미 문장을 사용했다 하여 ‘장미의 전쟁’으로 불렸다.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48㎞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요크가의 피가 흐르는 리버풀 축구팬들과 랭카스터가의 후손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은 지금도 보기만 해도 으르렁댄다. 맨유가 16일 밤 10시30분 적지인 앤필드 스타디움에서 리버풀과 174번째 ‘장미의 전쟁’을 치른다. 리버풀이 18차례 프리미어리그를 우승한 반면, 맨유는 16차례 제패하면서 100년이 넘도록 자존심을 다퉈왔다. 우승 횟수가 많은 리버풀 팬들이 고개를 빳빳이 들면 맨유 팬들은 1999년 전 구단에 유일한 트레블(프리미어리그·FA컵·챔피언스리그 석권)을 들먹인다. 지금까지 173차례 맞서 맨유가 66승50무57패로 앞섰다. 리버풀은 리그컵에서만 3승1패로 우세했다. 이번시즌 맨유는 11승3무2패(승점 36)로 2위, 리버풀은 8승6무1패(승점 30)로 4위를 달리고 있어 선두 아스널을 추격하기 위해 승점 3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 박지성(26·맨유)이 깜짝 투입될 수도 있어 국내 팬들로선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날 새벽 1시엔 아스널(11승4무1패 승점 37)이 3위 첼시(10승4무2패 승점 34)를 안방인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불러들인다. 선두권 다툼에 분수령이 될 수도 있다.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李 “세종대왕 리더십”

    李 “세종대왕 리더십”

    최근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연설문 등에 ‘세종대왕’이라는 고유명사가 자주 들어가 주목되고 있다. 이 후보는 지난 13일 SBS 미래한국리포트 행사에서 “세종대왕께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국민을 배부르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했다. 그 이틀 전 기자회견에서는 “세종대왕은 정치란 백성을 먹여 살리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했다.”라고 했다. 이 후보는 14일 중앙선대위 산하 경제살리기특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차기정부에서 추진할 ‘민생경제살리기 10대 과제’를 발표하는 등 ‘세종대왕 노선’에 박차를 가했다.▲일자리 창출과 청년실업 해소 ▲중소·벤처기업 육성 ▲소상공인, 자영업자, 재래상인 지원 ▲물가안정과 서민생활비 줄이기 ▲서민주거 안정 ▲여성경제활동 활성화 ▲농어촌 살리기 ▲비정규직 문제 등 고용안정 ▲서민금융 활성화 ▲서민 기초생활 보장 및 사회적 약자 보호 등이다. 이 후보가 세종대왕의 리더십을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였다. 그는 “모두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는 생생지락(生生之樂)의 편안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서 세종의 어록을 차용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리더십을 세종대왕의 ‘전임자’인 태종에 빗댄 적이 있어 흥미롭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1월 “태종이 세종 시대의 기반을 닦는 역할을 했다. 구태를 깨끗하게 청산해 다음 정권이 다시는 흙탕물 길을 걷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혈육과 개국 공신들에 대한 피의 숙청을 통해 세종에게 왕권의 기반을 닦아준 태종의 가시밭길을 걷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한편 한나라당은 최근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제2금융권으로부터 거액을 차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 관계자는 “중앙당 후원금 모금액이 10억원 정도에 그치고 있다.”면서 “이 후보의 ‘돈 안쓰는 선거’ 방침에 따라 재정만으로는 도저히 선거를 치를 수가 없어 결국 280억원을 빌렸다.”고 말했다. 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정조의 개혁의지와 권력욕 재조명

    정조의 개혁의지와 권력욕 재조명

    ‘왕과 나’,‘태왕사신기’ 등 사극이 뒤덮은 안방극장에 케이블TV가 가세했다. 영화전문 케이블 채널 CGV는 17일부터 자체 제작한 퓨전사극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을 방송한다. 오세영의 소설 ‘원행’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정조가 자신의 개혁 의지를 알리려고 떠난 8일 동안의 화성원행(왕이 궁궐 밖으로 길을 떠나는 것)기간에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정조 역엔 중견탤런트 김상중, 정약용으로 박정철, 혜경궁 홍씨로 정애리가 출연하며,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박종원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5일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김상중은 “이 작품은 정조의 일대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8일 동안 일어나는 사건으로 정조의 모습을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다.”면서 “왕권강화와 군제개편 등 군왕의 모습은 물론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싼 혜경궁 홍씨와의 갈등을 통해 카리스마 넘치는 정조의 모습을 밀도 있게 보여줄 것”이라고 밝혔다. 정애리는 “그동안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 등에서 어질고 참한 여인으로 그려졌는데, 또다른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사극에 도전하는 박정철은 “이 작품을 준비하며 정약용에 대해 살펴 보니 정조와는 불가분의 존재일 뿐 아니라 인간적인 부분을 포함해 여러가지 면에서 완벽한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고, 여기에 역점을 두어 연기했다.”고 말했다. 정조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영원한 제국´을 연출하기도 했던 박종원 감독은 “이번에는 왕가의 비극 속에 복수심과 한을 갖고 있는 정조의 감춰진 욕망에 초점을 맞췄다.”면서 “아무래도 케이블 TV가 지상파보다 표현이 자유로운 만큼 인물들이 갖고 있는 이중성을 이끌어 내고자 애썼다.”고 설명했다. 최근 MBC 수목드라마 ‘이산’,KBS 퓨전사극 ‘한성별곡-정’을 비롯해 소설, 뮤지컬 등 정조의 리더십과 인간적인 면모를 다룬 작품이 쏟아지는 가운데 이 드라마가 얼마나 차별화에 성공할지 주목된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최재천 인간견문록] 언론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최재천 인간견문록] 언론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지난 3월27일 정부가 각 부처에 있는 기자실을 개방형 브리핑실로 바꾸고 기자들의 사무실 방문취재를 금지하는 ‘기자실 개선 및 정례 브리핑제 도입 방안’을 발표한 지 6개월여 만에 드디어 취재기자들이 복도로 쫓겨났다. 벌써 몇 년째 선진국 대열에 끼어들고 싶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 이 나라에 지금 이 순간 이런 일이 일어나도 되는 것인가. 세상 물정에 어두운 탓인지 나는 사실 얼마 전 국립국어원의 신조어 사전에 실리기 전까지는 ‘놈현스럽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논쟁하기를 즐겨 하고 당신 스스로 논객처럼 행동하던 임기 초기의 노무현 대통령을 보며 나는 그가 임기 내내 적어도 언론과는 신명 나게 놀 줄 알았다. 그런 나의 기대를 저버리고 끝내 기자들을 몰아내는 그를 보며 참으로 ‘놈현스런’ 그의 언론 정책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나는 조선왕조실록을 우리 역사가 남긴 유물 중 으뜸으로 친다. 세계 어느 곳에 그런 기록을 남긴 민족이 또 있단 말인가? 그런 엄청난 역사의 기록을 있게 한 주인공은 바로 붓 한 자루에 목숨을 걸었던 올곧은 사관들이었다. 사관의 궁극적인 임무는 역사를 편찬하는 일이었지만 그에 앞서 보고 들은 그대로 사초를 작성함으로써 왕권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일 역시 그들의 중요한 임무였다. 나는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 ‘왕권 견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언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론에 귀를 대고 있는 국민 모두가 사관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지금 정부 부처들과 언론의 관계는 조선시대 항상 임금의 지근거리에 머물며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지와 그들의 시정활동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사관의 관계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역사학자 박홍갑 박사의 저서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에 따르면 이들의 불편한 관계는 사관제도가 미처 뿌리를 내리지 못했던 조선 초기는 물론이고 그 후에도 임금에 따라 종종 불거졌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성군일수록 사관의 입시에 관대했고 태종, 세조, 연산군 등 떳떳하지 못했던 임금들일수록 사관의 접근을 꺼려했다. 박홍갑 박사는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초기 사관 민인생(閔麟生)과 태종이 벌인 설전을 상세하게 전한다. 그 일화를 간략하게 옮기면 다음과 같다. 태종이 편전에서 정사를 보고 있는데 도승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밀고 들어온 민인생에게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민인생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고 또 경연의 강론을 하는데, 신과 같은 사관이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이에 태종은 민인생을 달랠 심산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내가 편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비록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그러자 민인생은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이에 박홍갑 박사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유교를 이념으로 창건된 조선에서는 하늘이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 하늘이 곧 백성이었다. 사관은 하늘과 백성을 ‘빽’으로 두었으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유교 시대가 이럴진대 민주시대인 지금 하늘은 훨씬 더 무서운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하늘은 곧 언론이자 국민이다. 청와대 경내에는 ‘춘추관’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건물이 있다고 들었다. 춘추관 또는 춘추예문관이란 본래 사관들이 역사를 기록하고 편찬하던 기구가 아니던가. 대못질을 하려면 그곳부터 해야 할 것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 열하광인/김탁환 지음

    “혁신이라는 기치를 반성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 수구와 혁신에서의 양자택일은 이미 낡은 도덕적 틀이다. 이제는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를 더 깊이 따져 보아야 한다.” 팩션 역사추리소설 ‘열하광인’(민음사)을 펴낸 김탁환은 이런 말로 이 소설의 지향하는 바를 설명한다. 문단 안팎에서 역사소설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다. 작품은 1792년 정조의 문체반정을 배경에 깔고 있다. 문체반정이란 정조 연간에 유행하기 시작한 패관기서류와 소품문 등을 멀리 하고, 전통적인 고문(古文)을 전범으로 삼도록 정조가 명한 일이다. 이같은 문체반정은 당시 중국의 신문물을 기행 형식으로 소개해 젊은 지식인들의 추앙을 받았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도 철퇴가 됐다. 열하일기가 조선의 문풍(文風)을 어지럽힌다며 금서로 분류해 아예 읽지를 못하게 한 것. 이 일로 맹아기를 맞은 조선 후기 문예부흥의 열기는 싸늘하게 식어들었고, 그 동안 개혁적 성향을 견지해 온 정조의 통치 성향도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몰래 모여 열하일기를 읽던 독회인 ‘열하광’의 회원들이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연쇄적으로 피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왕권의 강화를 꾀하려는 정조의 의도인지, 아니면 개혁을 지향하는 백탑파를 눈엣가시로 보고 사사건건 딴죽을 걸던 노론의 소행인지가 초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배후가 누구이든 정치적 암투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지만, 사안의 성격은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노론의 소행이라면 그 자체가 ‘득세의 칼부림’이게 되고, 정조의 소행이라면 이의 배후로 노론을 지목해 아예 노론의 싹을 잘라 버리거나, 차제에 젊은 지식인층의 준동을 막아 왕권을 보수적으로 더욱 공고하게 다지려는 의도가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조선 후기, 개혁파와 수구세력 간의 치열한 암투를 그린 ‘방각본 살인사건’과 ‘열녀문의 비밀’ 등 이른바 ‘백탑파 시리즈’ 세번째 작품이다. 이전의 작품에서와 같이 실학을 작품의 중심에 놓은 까닭에 대해 작가는 “박지원 등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개혁의 방식과 지식을 사회를 위해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지식인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작가가 언급한 ‘수구와 혁신에서의 양자택일은 이미 낡은 도덕적 틀’이라는 대목에 독자들이 동의할지는 의문이다. 역사, 특히 모든 정치의 역사는 항상 수구와 혁신의 대결에 대한 기록이어서 어떤 선택이든 새로울 게 없고, 또 새롭지 않은 게 없기 때문이다. 전2권 각권 9500원.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책꽂이]

    ●시장의 탄생(존 맥밀런 지음, 이진수 옮김. 민음사 펴냄)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존 맥밀런 미국 스탠퍼드대학 경영대학원 전 교수가 ‘왜 시장경제가 최적의 경제 시스템인가?’를 사례를 들어 논증했다. 그는 시장경제야말로 유일한 자연경제라고 강조하고, 시장의 자기조절능력은 악한 자들이 끼칠 수 있는 해악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만 8000원.●왕을 낳은 후궁들(최선경 지음, 김영사 펴냄) 조선왕조사에 비극을 남긴 단종, 연산군, 광해군, 경종, 영조, 사도세자는 모두 후궁의 자식이었다. 정통성 논란에 휩싸여 왕권을 위협당하기도 했고, 논란을 불식시키고자 생모추존에 열을 올려 또 다른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여성문화유산해설사인 지은이가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삶을 새롭게 조명했다.9900원.●시크릿 패밀리(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정은영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 어려운 과학을 현실세계와 접목시켜 재미있게 풀어 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지은이가 아빠와 엄마,2남1녀로 이루어진 평범한 가족의 일상생활에서 펼쳐지는 과학적 현상에 고배율 현미경을 들이댔다. 시트콤처럼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과학지식이 쌓인다.1만 4000원.●세계의 명산 위대한 등정(스티븐 베너블스 지음, 호경필 옮김, 예담 펴냄) 무산소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등반가이자 작가인 지은이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34곳의 산에서 이루어진 흥미진진한 등반의 기록을 한데 모았다.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 라인홀트 메스너 등 전설적인 등반가들의 사선을 넘나드는 기록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4만 8000원.●성학집요(율곡 이이 지음, 김태완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 한국적 리더십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조선왕조 제왕학의 교본이다. 선조 8년(1575년) 홍문관 부제학이던 율곡이 고전에 담긴 성현의 가르침 가운데 학문과 정사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대목을 뽑아 임금에게 바쳤다. 성학(聖學)이란 제왕을 성인(聖人)으로 만드는 학문을 뜻한다.3만 2000원.●디자인 컴퍼니 바이블(마르첼로 미날리 지음, 전승규 옮김, 나비장책 펴냄) 영국 디자인의 부흥을 이끈 주역이자 굴지의 디자인회사 미날리 태터스필드의 창업주인 지은이가 40년 경험으로 축적된 노하우를 들려 준다. 그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다가가 가장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 낸 뒤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충고한다.1만 5000원.●글로벌 시티즌을 위한 에티켓(원융희 지음, 자작나무 펴냄) 개인적인 만남은 물론 비즈니스로 만난 외국인에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 주고 형편을 이해하면서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는 배려인가를 알려 준다. 일상생활 속에서 피부로 느끼는 세계 여러 나라의 기본 에티켓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꾸몄다.1만 1000원.●CEO의 조건(피터 드러커 지음, 남상진·조광현 옮김, 지평 펴냄) 피터 드러커의 미공개 강연록으로 젊은 경영자들과 나눈 대화와 강연내용, 강의노트를 토대로 경영자가 갖춰야 요건을 정리했다. 그는 일의 우선순위를 파악할 것과 기대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할 것, 유일한 자원은 시간임을 인식할 것 등을 유능한 CEO의 조건으로 꼽는다.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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