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왕궁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괴짜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선대위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이석태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 상수도
    2026-02-21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214
  • [어! 이런 곳도 있네] 터키 이스탄불 ‘톱카프궁전’

    [어! 이런 곳도 있네] 터키 이스탄불 ‘톱카프궁전’

    비잔틴제국의 수도 비잔티움이자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도 유명한 터키의 이스탄불은 여러 제국의 영광과 번영을 상징하는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터키인들이 이스탄불에서 가장 가치 있는 곳으로 평가하는 곳은 15∼18세기 오스만제국 술탄들의 왕궁이었던 톱카프궁전.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이곳은 오스만제국의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궁전 입구인 황제의 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예전엔 궁전을 수비하는 근위대가 근무하던 곳. 지금은 나무 그늘 밑에 매점들이 진을 치고 있다. 두 번째 문을 지나자 대신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디반 건물과 도자기 전시관으로 개조된 왕실 주방 건물이 나왔다. 형형색색의 타일로 치장된 톱카프 궁전의 화려함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됐다. 특히 1만여점에 이르는 중국 청화 백자는 양과 예술적 가치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전성기에는 한번에 3000∼4000명의 식사를 준비했다고 하니 실제로 이 도자기들이 모두 쓰였을 것이다. 당시 청화 백자 한 개의 가격이 쌀 66가마를 살 수 있는 가치였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세 번째 문 안쪽은 황제의 거처. 황제 이외의 남자들은 출입할 수 없었던 왕비와 후궁들의 처소, 할렘도 이곳에 있다. 이곳에는 또 오스만제국의 황제들이 소장했던 각종 보석과 보물을 전시해 놓은 세계 최대 규모의 보석관이 있다.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했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 어부가 다이아몬드 원석을 낚아 시장에서 스푼 3개와 맞바꿨다고 해서 ‘스푼 다이아몬드’로 이름 붙여진 86캐럿짜리 다이아몬드,1000㎏이 넘는 황금으로 만든 술탄의 의자, 에메랄드로 장식된 단검 등 혼을 빼놓을 만한 보물들이 즐비했다. 톱카프 궁전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이슬람의 선지자 마호메트의 유품들이 보관돼 있다는 점이다.16세기 아라비아 원정에서 대부분의 아랍지역을 복속시킨 술탄 셀림이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이 유품들은 이슬람의 성물로 해외 전시가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알라여, 이 궁전을 지은 사람의 영광이 영원토록 하소서, 알라여, 그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소서.” 입구에 쓰여진 글귀가 화려했던 톱카프 궁전의 영광을 잘 드러내주고 있었다. 나은경 나스커뮤니케이션스 대표
  • 20일 희귀 사경 전시 김경호 회장

    전통 사경(寫經) 계승과 복원의 외길을 힘겹게 걷고 있는 김경호(45·한국사경연구회회장)씨가 그동안 작업해온 미공개 사경 역작 50여점을 세상에 내놓는다. 오는 20∼26일 서울 경운동 부남미술관에서 열리는 ‘외길 김경호 전통사경의 계승과 창조전’을 통해서다. 전시작품은 전통 양식을 철저히 지킨 묵서와 금니·은니 권자본 등의 전통사경과, 선묘로 표현된 불화·만다라 등의 응용사경, 목판본·석각유물 탁본·동종 문양 및 비천상을 복원하거나 탁본한 바탕에 사경한 작품, 출생·결혼 같은 실생활에 접목한 생활사경, 전통사경 양식을 재해석해 요즘 정서에 맞게 꾸민 창작사경이 망라되어있다. 이들 작품은 원래 프랑스 루브르박물관과 미국 뉴욕의 박물관을 비롯한 해외의 유명 박물관 전시를 염두에 두고 작업해온 것이지만 사경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우선 국내에 먼저 선보인다는 뜻에서 내놓은 것들. 모두 작품당 6개월 이상 공들인 사경들로 김씨가 분신처럼 여기는 것들이다. 여기에 익산 왕궁리 5층석탑에서 발견된 금지 ‘금강경’(국보 제123호) 재현에 앞서 미리 작업한 금지 ‘반야심경’과, 한국 전통사경의 세계화를 발원하며 손가락을 찔러 낸 피로 사경한 백지자혈 ‘보협인다라니경’도 눈에 띈다. 사경들은 모두 김씨가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자신과의 싸움 끝에 나온 역작들. 김씨는 사경에 앞서 반드시 권위 있는 목판본 5종 이상을 대교해 저본을 만들며 사슴에서 채취한 녹교와 정제된 명반을 함께 녹여 불순물을 걸러낸 접착제를 만든 뒤 순도 99.9% 이상의 순금분을 이 녹교수에 개어 금니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금니를 3회 이상 정제해 쓰며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끓인 녹교를 사흘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킨다. 물론 모두 고려시대 사경원에서 썼던 방식이다. 가장 눈길을 끄는 사경은 ‘一佛一字法華經略纂偈(일불일자법화경약찬게)’와 ‘一佛一字華嚴經略纂偈(일불일자화엄경약찬게)’ 등 두 점의 ‘一佛一字’ 사경. 일본 사경 ‘일자일불법화경’이 1행은 불경을 서사하고 다음 1행에 부처님을 그리는 데 비해 1㎝ 좁은 공간에 부처님을 모시고 그 부처님의 복장에 법신사리(사경)를 봉안한다는 의미에서 경전 한 글자씩(2∼3㎜)을 새기는 양식이다. 이 사경양식은 역대 한국, 중국, 일본에서도 시도되지 않은 것이다.1㎝의 공간 안에 많게는 50개가 넘는 가는 선을 그어 넣어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종교건축 이야기] (30) 500년만에 복원된 개성 영통사

    [종교건축 이야기] (30) 500년만에 복원된 개성 영통사

    남과 북이 공동으로 복원 불사에 나서 2005년 10월 원래의 모습을 되살려 놓은 고려 사찰 개성 영통사(개성시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 고려 태조 왕건의 조상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왕씨의 발상지이자, 대각국사 의천이 출가해 35년간 주석하며 한국 천태종을 개창한 유서깊은 고찰이다. 고려 현종 18년(1027년)에 창건되어 고려 왕실의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받아 융성했으나 16세기쯤 소실되어 이름만 전하던 사찰. 천태종 개창자인 대각국사 비와 당간지주, 그리고 세 개의 탑만 덩그맣게 남아있던 것을 남북이 힘을 모아 29개의 전각을 원 모습대로 세워놓았다.500여년간 불교계에선 그저 ‘꿈의 성지’로 남아있었던 폐사 영통사. 하지만 이젠 웅장한 제 모습을 어엿하게 되찾아 일반 신도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 중기의 기록들에 따르면 고려시대 불교가 한창 성할 무렵 개성 성내에는 300여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절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것 만도 100개가 넘는다고 한다. 태조 왕건 자신도 고려를 세운 뒤 궁궐 주변과 송악산 기슭에 25개의 절을 지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 가운데 갓을 쓴 5개의 산 봉우리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오관산(五冠山) 아래, 영통사가 자리잡은 영통골은 예로부터 절경과 길지로 이름 높았다. ‘큰 골짜기’란 뜻의 마하갑으로 통했던 영통골에서 왕건의 할아버지가 출생했다. 승려가 된 증조 할아버지도 이곳에 작은 절을 짓고 살았는데 왕건이 고려를 세운 뒤 절을 중창해 이름을 숭복원이라 고쳐지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 왕실은 숭복원을 왕의 원당으로 삼아 왕건의 아버지인 세조 왕륭과 태조 왕건, 문종, 인종, 명종 등 역대 왕의 초상을 모셔놓고 정기적으로 참배했다. 지금 영통사란 이름의 사찰은 고려 현종기인 1027년 그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왕실 사찰의 위상에 더해 영통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11세기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면서부터. 대각국사 의천은 이곳에서 35년간 주석하며 불교학설을 강의해 남북한을 통틀어 빼놓을 수 없는 명찰로 키웠다. 1530년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영통사의 온전한 모습이 등장하고 있지만 1671년 김창협의 ‘송도유람기’에 적힌 “영통사의 주요건물이 불 탔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6세기 중반 절이 소실됐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북한이 고려왕조에 눈을 돌리기 시작할 무렵인 1997년부터 북한 조선사회과학원과 일본 다이쇼(大正) 대학이 공동으로 발굴 작업을 벌였다. 이후 남한의 천태종이 50억원 상당의 기와 46만장, 단청 재료, 묘목 등을 제공해 1만 8000여평 부지에 고려양식의 원 사찰을 고스란히 되살려놓은 것이다. 형태는 옛 고려 사찰 그대로이지만 북한군이 상주하며 올려세운 전각들은 한결같이 콘크리트 건물이어서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절 앞에 서면 예사롭지 않은 대찰이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주차장에 바로 붙여 조성한 큰 마당 서편에 선 높이 4.7m, 두 돌기둥 사이 폭 72㎝의 거대한 당간지주가 당시 영통사의 사격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남한 사찰에선 흔한 일주문은 보이지 않는다. 일주문 격인 남문을 통해 절 안에 들면 거대한 회랑으로 나뉜 3개의 구역에 각각 들어앉은 전각들이 웅장하게 다가온다. 서편 끝의 종루와 동편 모서리의 경루가 회랑으로 연결된 정문인 중문에 들어서면 양 옆의 삼층석탑, 가운데에 오층석탑을 거느린 보광원이 우뚝선 채 내려다보고 있다. 전통사찰의 대웅전격 전각으로 영통사에선 중심 건물.2층 구조의 지붕 아래 닫집을 만들어 그 아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을 모셨다. 보광원 뒤편에는 중각원과 숭복원이 차례로 앉았다. 중각원은 대각국사와 제자들이 공부를 하던 곳.‘고려사’에는 이곳에서 50여차례의 대규모 강의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숭복원은 태조 왕건의 원당으로 썼던 곳으로 나중에 사찰을 찾는 왕의 숙소로도 사용되어 행궁이라 불린다. 회랑으로 사방을 막은 것을 볼 때 당시에도 사찰의 다른 공간과 경계를 철저히 했음을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을 봉안한 보조원 구역을 들어가려면 동문을 통해야 한다. 동문 앞에는 그 유명한 대각국사비가 우뚝 섰다. 거북 받침과 바닥돌을 1개의 통돌로 만들었는데 비 높이가 4.32m나 된다. 앞면엔 어린 시절부터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의 대각국사 행적을 새겼고 뒷면에는 대각국사 제자 영근화상이 해서체로 쓴 묘실과 비명 내력인 사적기와 문도들의 이름이며 직명을 적은 제자 혜소의 글이 들어 있다. 보조원 뒤편에는 영통사와 관련있는 역대 고려 왕들의 초상을 모신 영영원이 서 있다. 사찰 뒤편 산 중턱엔 대각국사의 화상을 모신 경선원이 사찰을 내려다보고 있다. 대각국사는 이 곳에서 서쪽으로 4㎞ 떨어진 총지사에서 열반했는데 대각국사의 유언을 따른 제자들이 영통사에 잠시 법구를 안장했다가 다비한 다음 사리탑인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경선원 바로 앞에는 그 때 세운 부도가 그대로 서 있다. ‘송도제일루(松都第一樓)’라 쓰인 종루에서 회랑을 통해 동쪽 끝 경루에 올라서면 옛 시인이 쓴 시구가 눈에 든다. ‘오관산하고총림(五冠山下古叢林) 풍만누대녹수음(風滿樓臺綠樹陰) 경절진훤상한적(境絶塵喧常閒寂)’ ‘오관산 아래 총림이 섰으니/바람 가득한 누대에 푸른 나무 숲이 우거졌구나/빼어난 절경에 티끌마저 사라지니 이 얼마나 한가롭고 고요한가’ 남북이 합동 공사를 진행하면서 서로 다른 입장 차로 인해 수차례나 중단될 뻔했던 영통사 복원. 처음부터 수월치 않았지만 마침내 500년 염원을 풀어낸 큰 불사를 예견한 듯해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kimus@seoul.co.kr ■ 대각국사 의천은 영통사는 고려 왕조의 위상을 다시 세우기 위한 북한의 정책에 따라 500년 만에 복원되었지만 천태종찰을 되찾기 위한 남북한 불교계의 원력으로 되살아났다는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말할 나위 없이 그 가운데에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있다. 대각국사 의천은 태조 왕건의 4세손인 고려 11대 문종왕의 넷째 아들로 만월대 왕궁에서 태어난 인물. 여러 왕자들을 불러모은 문종이 당시 왕들도 자식을 승려로 만들었던 세태를 따라 “누가 승려가 되겠느냐.”고 물었는데 의천이 서슴없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영통사로 출가했다고 한다. 10살 때 출가해 2년 뒤 승가에서 수여하는 높은 칭호인 ‘우세승통’에 올랐고 송나라의 이름난 사찰을 돌며 선지식인들과 만나 불교를 익혔다. 송나라에서 가져온 불경·경서 1000권 등을 모아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 이 곳에서 1000여종 4769권에 달하는 불경을 출판한 게 ‘고려속장경’이다. 고려속장경은 원의 침략으로 1232년 불탔다. 의천은 어머니와 선종이 죽은 뒤 남쪽으로 유람해 합천 해인사에 은거하던 중 의천의 셋째 형인 숙종의 부름을 받아 흥왕사 주지로 있다가 개성 총지사에서 입적했다. 의천이 세운 천태종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 전파되었으며 의천은 입적후 대각국사라는 시호를 받았다. 대각국사비는 17대 왕 인종의 지시에 따라 세워진 것이다.
  • “백제 초기역사 300년 수용해야”

    “백제 초기역사 300년 수용해야”

    올해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풍납토성이 백제 왕경(王京)일 가능성이 처음 제시된 역사적인 발견이 있은 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97년 1월, 이형구(왼쪽·63)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는 풍납토성 내부의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백제 유적의 흔적과 초기 백제의 토기를 찾아냈다. 3세기 후반 것으로 치부되던 풍납토성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기원전 1세기에 백제가 쌓은 도성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근거가 확인된 것이다. 이후 이 교수는 ‘목숨을 걸다시피’ 풍납토성을 보호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재산권에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토성 내부 주민들로부터 수없이 항의를 받은 것은 물론 지난해에는 몇 시간 동안 감금되는 일도 있었다. 이 교수가 이번에는 사재를 털어 ‘풍납토성 내 백제왕경 유적 발견 1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를 8일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갖는다. 이 교수는 6일 “10년 전, 학자로서 예지했던 대로 왕궁유적이 드러났을 때 마치 천상에 있는 것처럼 평안해지는 희열을 느꼈다.”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 교수는 “그동안 물러서지 않고 학문적 견지를 지켜 왔기에 오늘날처럼 풍납토성이 국가사적으로 되살아나고, 백제 초기 역사도 300년이나 복원되어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면서 “이형구가 보아도 이형구가 해낸 일이 아닌 것 같다.”면서 웃었다. 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떠들썩하지만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말살된 초기 백제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면서 “공주와 부여뿐만 아니라 서울도 백제의 옛 수도라는 인식을 서울 시민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다.”고 세미나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경이라는 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신대박물관 등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이 갖는 확신”이라면서 “풍납토성에서 나온 11개의 시료로 실시한 방사성연대측정에서도 모두 백제의 건국연대와 일치하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라는 결과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고고학적 증거에도 풍납토성이 곧 초기 백제의 왕성이라는 학설을 역사학계는 선뜻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국사 교과서에 반영되고 있지 않은 것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사들이 공동 집필한 ‘화해와 공존을 위한 첫 걸음-마주보는 한일사’에도 황해도는 물론 경기도와 충청남도까지를 백제가 아닌 ‘대방’의 강역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 교수는 “식민사관에 입각해 3∼4세기에 백제가 건국됐다고 씌어진 책을 읽고 학위를 받은 뒤 학교에서 가르쳤으니 고정관념을 타파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제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교수가 풍납토성에 쏟는 노력은 글자 그대로 ‘보존’에 모아져 있다. 그는 “풍납토성을 대대적으로 발굴하거나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도시개발에서 지켜 현상유지만 하자는 것”이라면서 “고고학도 아직은 일천한 상황인 만큼 학문의 수준이 진전되고 여러 가지 과학기술의 도움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때 능력 있는 후학들이 발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남겨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 건너에 있는 서울 구의동 유적을 예로 들었다. 구의동 유적은 발굴보고서에 백제유적으로 명시돼 있지만, 최근에는 완전히 고구려 유적으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를 지으면서 유적을 깎아 버리는 바람에 진짜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은 조선시대만 생각하는 정도 600주년이 아니라 한성백제부터 2000년을 이어 왔다는 점에서 로마 다음가는 역사를 지닌 도시”라면서 “그럼에도 세계 10대 역사도시를 선정하는 데 서울이 빠지는 것은 스스로 역사를 폄하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밤을 새워 자료집을 손수 복사하고 제본하는 어려움을 겪으며 이번 세미나를 여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고통을 겪고 있는 풍납토성 지역 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이 사적으로 지정됨에 따라 재산권 행사가 어렵고, 최근 부동산값이 널뛰기하며 바로 이웃마을은 다락같이 아파트값이 오르는데도 살기 좋은 풍납동은 개발이 안 되는 데 따른 주민들의 박탈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주민들이 폭발 일보 직전의 상태에 이른 것이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이번 세미나에서는 주민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보상할 수 있는지 의견을 나누고, 그 결과를 정부에 전달해 실질적인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글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양양~백두산·고구려 유적 관광코스 개발

    양양~백두산·고구려 유적 관광코스 개발

    |중국(창춘) 조한종특파원|강원 양양국제공항을 이용해 백두산 천지와 고구려 유적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린다. 강원도와 한국공항공사 양양지사, 중국 남방항공 전세기를 다음달 22일부터 남방항공을 이용, 양양∼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을 운행하기로 합의했다고 6일 밝혔다. 강원도는 이와 관련, 동해바다와 강원랜드, 설악산 등 기존 관광지 외에 강원지역 농촌체험, 민속문화·전통음식 체험 등 오감을 만족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김길종 강원도 관광마케팅 사업단장은 “중국 관광객이 강원도의 여름 동해바다를 만끽하고 농촌 등을 찾아 한국을 제대로 느끼고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하고 알찬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면서 “중국을 관광하는 국내 관광객들에게도 고구려와 일제시대 유적지 등을 둘러보며 역사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마련 중이다.”고 말했다. 특히 중국으로 나가는 국내 관광객들을 위해 백두산 천지로 오르는 새로운 코스를 개발하고 지린성 일대에 흩어져 있는 광개토대왕 능과 비(碑), 장수왕 능, 환도산성 등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 볼 수 있는 상품을 개발 중이다. 여기에 창춘시내에 있는 일본 옛 관동군 사령부 건물과 인근에 산재하는 위만국 왕궁, 후이난용만삼림공원, 압록강 등도 소개될 예정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국내 관광객에게 개방되는 백산시 무송현의 백두산 서파(西坡)코스는 기존의 옌지(延吉)를 통하던 북파(北坡)코스와 달리 고산화원, 원시림, 대협곡, 온천 등이 장관을 이루며 색다른 백두산의 절경을 자랑한다. 서파코스는 입구에서 백두산 정상의 백운봉(해발 2691m)까지 40㎞에 이르지만 백운봉 아래까지 셔틀버스로 이동한 뒤 1236개로 이뤄진 완만한 계단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천지를 볼 수 있다. 북한과 국경을 이루는 곳이다. 백운봉은 백두산 최고봉인 북한의 장군봉(해발 2744m)과 마주한다. 항공기는 1주일에 한차례씩 왕복 4회 또는 8회 정도 운항할 예정이다. 항공료와 운항 횟수 등은 다음달초 확정될 예정이다. 유재복 한국공항공사 양양지사장은 “공항 주차료 무료 이용과 탑승 수속 30분 이내 신속 처리, 공항내 비즈니스룸 무료개방 등 관광객들에게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저렴한 가격 경쟁을 통해 경쟁력을 키워 나가겠다.”고 말했다. bell21@seoul.co.kr
  • “히로히토 일왕 개성 없었다”

    |도쿄 박홍기특파원|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히토 일왕과 관련,“개성이 강하지 않았다.”,“일왕을 둘러싼 어드바이저(참모)가 일본의 정책을 결정해 간다.”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영국 외무부의 보고문서가 런던 공문서관에서 발견됐다고 마이니치신문이 24일 보도했다. 문에 따르면 지난 1937년 9월24일 보고문서에는 일왕의 성격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강한 개성이 요구되지만 지금의 일왕은 그것을 가지지 않았다.남동생과 같은 자유가 주어지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히로히토 일왕이 중·일 전쟁에 따른 영국과의 관계에 상당히 신경을 썼던 당시의 발언을 기록한 문서도 나왔다. 일왕은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된 1937년 7월의 노구교 사건 뒤인 같은 해 10월14일 일본을 방문한 영국 대사를 왕궁에서 만나 “중·일 사변으로 영·일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데 대해 깊은 염려를 가지고 있다.한때의 양호한 두나라 관계로 되돌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대사도 도와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시 영국 대사는 “양호한 두나라 관계를 쌓는 유일한 기반은 중국을 적이 아닌 친구로 삼는 것”이라고 답변했다.hkpark@seoul.co.kr
  • [Hi Seoul 하이라이트] “내가 대장금”

    [Hi Seoul 하이라이트] “내가 대장금”

    하이서울 페스티벌 나흘째인 1일 많은 가족 나들이객들이 왕실 문화를 재현하는 고궁을 찾았다. 궁중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경희궁 운현궁 경복궁은 아침부터 관람객으로 붐볐다. 특히 경희궁에서 열린 ‘대장금 수라경연’이 관심을 모았다. 필기시험을 통과한 20개팀이 수라간 나인처럼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30분 동안 탕평채와 죽순채를 요리했다. 대부분 한식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었다. 한국관광대 김은영씨는 “한식에 관심이 많았지만, 궁중요리를 배울 기회가 없어 책을 통해 익혔다.”면서 “궁중요리를 동료, 선배들에게 배우고 싶어 출전했다.”고 말했다. 젊은 나인들의 열정에 수라간은 금세 달아올랐다. 경연을 지켜보던 김은숙(45)씨는 “젊은 학생들이 날렵한 솜씨로 궁중요리를 하다니 놀랍다.”고 감탄했다. 국내외 취재진 20여명도 열띤 취재를 벌였다. 장원은 전주대 전통음식문화관광학과 최주선·김보라씨가 차지했다. 이들은 부상으로 궁중음식연구원에서 궁중요리를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경희궁에서는 또 ‘김홍도와 함께하는 도화서 체험행사’가 펼쳐졌다. 김홍도로 분장한 화가가 전통의장 깃발을 스케치하면 아이들이 물감으로 색칠했다. 궁중에서 먹던 떡을 전시·판매하는 ‘궁떡, 쿵떡 8일간의 궁중 떡 기행’에서는 떡메치기와 인절미 시식이 이어졌다. 아빠와 경희궁을 찾은 김동희(10)군은 “TV에서 보던 상궁과 내시를 만나 재미있다.”고 말했다. 왕실 문화 재현은 6일까지 이어진다. 왕세자 영재교육(2·3일), 왕궁근위대훈련(4일), 이웃나라 사신 맞이(6일) 특별행사로 진행된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서길수 교수 “고구려 아닌 ‘고구리’로 읽어야”

    서길수 교수 “고구려 아닌 ‘고구리’로 읽어야”

    고구려(高句麗)는 ‘고구리’, 고려(高麗)는 ‘고리’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경대 서길수 교수는 3일부터 이틀간 ‘고구려의 시원과 족원에 관한 제문제’를 주제로 경성대에서 열리는 고구려연구회 춘계학술대회에서 “高句麗를 고구려라고 읽기 시작한 것은 겨우 100년밖에 안 됐다.”며 “高句麗의 표기를 원래의 발음인 고구리로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다. 서 교수는 30일 미리 배포한 논문‘高句麗,句麗,高麗 국호의 소릿값에 관한 연구’에서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세가지를 제시했다. ●자치통감 등서 麗를 ‘리´로 읽어 우선 자치통감, 신당서 등 중국 고대사서에서 ‘麗’에 주석을 붙여 바로읽기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치통감에는 고구려, 구려, 고려에 쓰이는 ‘麗’의 소릿값에 대한 주석이 모두 69개나 등장하고, 신당서에도 7개, 책부원귀에는 1개가 있다. 자치통감 등에는 ‘麗’의 소릿값과 관련, 려(呂)·력(力)·린()자의 첫자음(ㄹ)과 지(支·知·之)자의 끝 모음(ㅣ)으로 발음해야 한다고 주석이 붙어 있다. 즉 고구려, 구려, 고려에 쓰이는 ‘麗’자를 ‘리’로 읽도록 돼 있다는 것이다. ●한·중·일 자전 등서 ‘고구리´ 강조 두번째 근거는 한·중·일 자전과 옥편의 기록이다. 청나라 시대의 ‘강희자전’, 우리나라 옥편의 시조격인 정조때의 ‘전운옥편’, 최남선의 ‘신자전’ 등에 ‘고려’를 ‘고리’로 읽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고, 광복 후 한글학회가 편찬한 ‘큰사전’에는 ‘고구리’라는 단어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과 타이완에서 출판된 자전에도 ‘麗’자를 ‘려’와 ‘리’로 읽을 수 있으나 ‘리’로 읽는 사례로 ‘고구려’와 ‘고려’를 들고 있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조선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 등에도 ‘高句麗’를 ‘고구리’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주를 달고 있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신채호, 이병도 등은 ‘高麗’의 소릿값을 ‘카우리’ 등으로 읽었는데 이때도 ‘麗’자는 ‘리’로 읽었다. ●서교수 “교과서 먼저 고쳐야” 서 교수는 “중국에서도 高句麗를 현대 중국어식으로 읽지 않고 고대 사서의 기록대로 읽고 있는데, 우리 역사에 나오는 중요한 나라 이름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면서 “학계의 깊이 있는 토론을 거쳐 교과서를 고치는 것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또한 고구려가 고려로 국호를 변경한 시기가 서기 423년쯤이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고구려의 국호 변경시기와 관련, 서기 398년(양보융)∼581년(이병도) 등으로 다양한 의견이 나와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서 교수는 장수왕11년(423년)부터는 공식적으로 高麗를 국호로 썼고, 그 뒤 한번도 高句麗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423년쯤을 고구려의 국호변경 시기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구려가 국호를 바꾼 이유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것(427년)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 무예는 기본… 남녀귀천 구분않고 가무 즐겨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벽화 등을 통해 어렴풋하게 알려진 고구려의 이미지는 ‘무(武)’를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이었다. 고구려는 과연 ‘무예’만 중시한 사회였을까.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이 최근 출간한 두권의 책 속에 그 해답이 실려 있다. 고구려 문화사를 다룬 국내 최초의 단행본인 ‘고구려의 문화와 사상’은 고구려인의 문화·사상적 특성을 심도있게 분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 강현숙 교수 등 10명의 연구진이 집필한 이 책은 1990년대 이래 고구려 고분벽화, 산성 등 고구려 유적 및 유물에 대한 접근이 부분적으로 이뤄지면서 촉발된 고구려 문화사 연구의 축적물이다. 연구진들은 고구려인의 문화적 특징을 ‘기백’ ‘웅장’ ‘낙천’ 등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우선 무예 못잖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고구려인들은 생활전반에서 활력과 기백이 넘쳤다고 한다. 걷는 것을 뛰는 것처럼 했기 때문에 반드시 허리띠를 매는 등 활동적인 옷차림을 선호했고, 격투기 연마나 사냥을 즐겼다는 것이다. 높이가 6.39m인 광개토대왕릉의 규모는 같은 시대의 비석 가운데 가장 높다. 왕릉급 적석총과 왕궁인 안학궁의 규모 또한 같은 시대 일본, 중국의 왕릉과 궁궐을 능가한다. 이처럼 고구려의 문화는 웅장하다고 연구진들은 주장하고 있다. 낙천적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남녀,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노래와 춤을 즐겼고, 장례 때도 북을 치고 춤을 추는 등 낙천적인 인생관을 지녔다고 소개하고 있다.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에서는 중국과의 교류 속에서도 독자적인 체제를 마련한 고구려의 자주적 면모가 부각돼 있다. 정치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전통적인 관습법을 시대상황에 맞게 변화시킨 율령의 반포 ▲역사서 ‘유기(留記)’ 100권 편찬 ▲독자적인 연호(‘영락’ 등)의 사용 등이 제시됐다. 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인터뷰] 황병기 가야금 명인

    [인터뷰] 황병기 가야금 명인

    전화를 걸었습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여보세요? 누굴 찾으세요?황병기 선생님 계십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여보, 전화 받으세요. 당신 전화예요. 소설가 한말숙 선생님인가 보다 생각하고 있을 때 네, 전화 바꿨습니다. 차분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떻게 오지요? 차로 오나요? 전철을 타고 가려고 합니다. 5호선을 타고 충정로역에서 내려 8번 출구로 나오세요.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오거리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경기대학을 지나서 오거리에서 내리세요…. 딴 생각은 말고 내가 알려준 대로만 따라오면 됩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처음 전화를 걸 때 느끼는 약간의 불안함과 긴장감이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편안함 때문일까요? 오는 길을 아주 상세하게 일러주시는 자상함 때문일까요?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 서대문구 북아현동 황병기 선생님 댁으로 가는 길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야금과의 첫 인연은 ‘부산 피난 때 우연히’ 고은별 | 선생님과 가야금과의 첫 인연이 어떻게 맺어졌는지 궁금합니다. 황병기 | 제가 제동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방과 후에 모든 학생이 무엇인가 특기를 배우게 되었어요. 그때 내가 합창반에서 노래를 했는데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마음속으로 악기 하나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이 일어나서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천막에서 공부를 했어요. 피난 학교 근처에 고전 무용 학원이 있었고 우연한 기회에 그곳에 세 들어 사는 김철옥(金喆玉) 할아버님께서 연주하시는 가야금 소리를 들었는데, 생전 처음 듣는 그 가야금 소리에 그만 매혹되었지요. 그래서 아무 목적 없이 그냥 그 소리가 좋아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에서 법대를 졸업했지만 가야금이 좋아서 매일 연습했습니다. 74년 내가 서른여덟이었을 때, 이화여대에서 제게 국악과 과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때 며칠 생각을 했고 내 스스로가 음악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때부터 음악만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오직 음악만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영혼을 쓰다듬는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고은별 | 그렇게 음악만 하고 살아오셨는데, 지금 행복하신가요? 황병기 |행복하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사는 것이지요. 뭣 하러 생각을 해요.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지요. 행복할 것도 없고 행복하지 않을 것도 없고….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죽을 때까지 살고 싶어요. 고은별 | 음악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황병기 |나는 그냥 좋아서 음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음악가로 이름이 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음악 자체가 좋아서 한 것입니다. 음악의 기능이 다양하지만 나는 오락으로서의 음악은 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지도 않고요. 영혼을 쓰다듬는 음악을 하고 싶고 앞으로도 사람들이 전심전력을 다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나의 첫 번째 음반이 1965년 미국, 하와이에서 나왔는데 음악 비평 잡지인 《하이파이 스테레오 리뷰(Hifi Stereo Review》에서하이 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정신을 해독시켜 주는 음악이다,라고 평했습니다. 내 인생을 걸고 싶은 음악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고은별 | 국악계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고 있지 않습니까? 황병기 | 그렇습니다. 주로 오락용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요. 그것이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오락용 음악은 하지 않습니다. 내가 전통음악 작곡과 연주를 병행하는 데 연주자로서 전통음악을 참 좋아합니다. 황병기류 가야금 산조는 한 곡이 70분입니다. 나는 그것을 작곡했다고 하지 않아요. 전통적으로 우리들은 음악이 어느 한 사람의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예술에 있어서는 누구누구 작(作)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 그냥 만들 뿐이지 내 작품이라고 해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아름다우면 되는 것이지요. 인도에서도 고대(古代) 시인들이 아무리 아름다운 시를 썼더라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냥 아름다우면 됐지 누가 만들었나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예술품이 누구의 작품이라는 개념은 서양의 사고 방식입니다. 새로 나올 앨범 5집에 들어갈 작품 중에 <낙도음(樂道吟)>이란 것이 있어요. 고려시대 이자헌이라는 사람이 음악으로 높은 자리에 있다가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청평산에 들어가서 일생 동안 거문고만 하다 죽었는데, 그 사람이 쓴 시 중에 <낙도음(樂道吟)>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거문고가 좋은 것이 있어 한 곡조 타도 무방하겠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너무 없구나 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그러니까 거문고를 타지 않겠다는 뜻이지요. 그 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입니다. 나는 제일 즐거운 것이 내 방 안에서 스스로 가야금을 타는 것입니다. 아무도 내 음악을 들어주지 않아도 좋아요. 내 스스로 음악회를 열어 관객들이 와 주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요즈음 맛있는 청량음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즐겨서 사먹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인공적으로 어떤 맛도 내지 않은 깊은 산 속의 샘물을 마시고 싶은, 청량음료가 아닌 순수한 물을 마시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거든요. 나는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순수한 물 같은 음악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있지요. 나는 그런 소수의 마니아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은별 | 은은하게 달빛이 비치는 한옥(韓屋)의 아늑한 방 안에, 촛불이 켜져 있고 동양란(東洋蘭) 꽃잎의 향이 깊고 그윽할 때, 선생님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면 모든 것이 하나 되어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황병기 |내 음악에 대해서 수필가가 글을 써서 수상(受賞)까지 한 것도 있고 시를 쓴 분도 있고 화가들도 내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2004년 미국 서부지역 산타 크루즈라는 곳에서 공연을 했을 때, 태디 빌이라는 원로 무용가가 작곡가인 남편과 함께 연주를 들으러 왔습니다. 산타 크루즈라는 곳이 봄 여름 약 6개월 간 비가 오지 않아요. 그러다가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비가 내리는데, 그 부부가 첫 비가 오는 날에, 35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내 음악을 들었다고 합니다. 65년 하와이에서 나온 LP 음반에 수록된 <가을>이라는 곡을 들었다고 해요. 그 말을 듣고 무척 감동했습니다. 고은별 | 최근에 유럽과 일본에서도 연주하셨지요? 황병기 |2006년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런던, 파리, 니스에서 독주회를 했고 6월에는 베르사이유 왕궁과 알제리 국립극장에서, 12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국립 국악 관현악단과 함께 연주를 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는 한·영 상호 방문의 해 개막식 때 연주를 했고, 프랑스 공연은 한·불 수교 120주년 기념행사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일본에서 공연한 한·일 문화 교류의 밤에서는 일본 천황의 차남 아키시노 왕자의 부인 기코 왕자비<공식 명칭-아키시노 노 미야의 비(妃) 기코(紀子)>가 9월 6일 일본 황실에서 고대하던 아들을 출산한 후 처음으로 이번 공연에 참석해 공연장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할 정도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기코 왕자비는 주요 단원들을 만나 연주자 한 명 한 명에게 질문을 하고 느낀 점을 말해 주며 우리 음악과 한국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일본 공연 가기 전에 이미 공연장 좌석이 전석 매진되었고, 웨이팅 리스트(waiting list 대기자 목록)가 100명이 넘었습니다. 홋카이도(北海島)에서도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대성황이었습니다. 우리 전통음악에 뜨겁게 환호하는 모습을 보니 기쁘고 흐뭇했습니다.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좋아서 하면 됩니다 고은별 | 선생님은 국악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입니다. 홈페이지(www.bkhwang.com)에 들어가 방문자들이 남겨 놓은 글들을 읽어보았는데 가야금을 열심히 해서 선생님같이 되고 싶다고 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꿈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황병기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좋아서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서 하면 인생도 즐겁고 진짜 내면의 힘이 나오는 것이니까요.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것이고, 좋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즐기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지요. 잘 해야겠다는 마음도 버리고 그냥 즐기면 되지요. 그러면 그 안에서 힘이 나옵니다.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4시에 찾아갔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6시가 되어갑니다. 아래 층에서 식사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와서 서둘러 인사를 드리고 나왔습니다. 현관에 화분이 놓여 있고 직경이 30㎝ 정도 되어 보이는 바위 하나가 있는데 가운데서 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옆 투명한 화병 속에서 한 아름의 화사한 진분홍 꽃들이 환하게 웃으며 안녕! 하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을>이라는 가야금 곡을 나도 한 번 꼭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글 고은별     월간 <삶과꿈> 2007.02 구독문의:02-319-3791
  • 피렌체 박물관 소장 희귀판화 113점 공개

    피렌체 박물관 소장 희귀판화 113점 공개

    세계 유명 화가들의 판화 113점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울산에서 열린다. 울산 현대예술관은 24일 새로 단장한 갤러리에서 ‘이탈리아 판화 400년 전(展)’을 다음달 2일부터 7주일 동안 개최한다고 밝혔다. 전시되는 판화는 이탈리아 피렌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희귀 작품들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비롯한 유명화가와 조각가, 건축가들의 미술품을 당시 왕궁판화가를 비롯한 군중판화가들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판화로 옮겼다. 르네상스∼신고전주의∼낭만주의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양미술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대형 판화전시회다. 현대예술관측은 “조건이 까다로운 이번 판화전시회를 유치하기 위해 전시장을 확대하는 등 한 달 동안 갤러리 개조 공사를 했다.”고 밝혔다. 권태순 현대예술관 관장은 “작품성 및 희소성에서 세계 최정상급으로 평가되는 작품들로 피렌체를 방문하더라도 113점을 동시에 관람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입장료는 어른 5000원, 청소년은 3000원이다. 울산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원자바오 中총리 “日, 역사문제 행동으로 보여달라”

    |도쿄 박홍기특파원|일본을 공식 방문 중인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12일 역사문제에 대해 “실제 행동으로 보이길 진심으로 희망한다.”며 일본의 전향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원 총리는 이날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전략적 호혜관계의 구축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역사문제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22년 만에 일본 국회에서 연설하는 중국 지도자이자 7년 만에 일본땅을 밟은 중국 총리라는 ‘상징성’으로 국제 사회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원 총리의 연설은 일본과 중국에 TV로 생중계됐다. 원 총리는 1937년의 중·일 전쟁과 관련,“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중국 인민은 중대한 재난을 당했다.”면서 “그러나 침략전쟁의 책임은 소수의 군국주의자가 져야 한다. 일본 국민도 전쟁의 피해자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측의 깊은 반성과 사과를 적극적으로 평가한다.”고 전제한 뒤 “일본은 태도 표명과 약속을 실제 행동으로 보이길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또 “역사를 귀감으로 삼는 것은 원한을 계속 안고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미래를 열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및 일본군 위안부 등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 측의 적극적인 행동 변화를 에둘러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원 총리는 국회 연설에 이어 왕궁을 방문,30분 동안 아키히토 일왕과 면담한 자리에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초청 의사를 밝혔다. hkpark@seoul.co.kr
  • [닥터 ‘이지’의 발칙한 치아 얘기] 미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법(1)

    삼국사기에 이런 재미난 얘기가 실려 있다. 남해왕(南解王)이 운명할 때가 되자 왕궁에서는 왕의 계보를 이을 후계자를 정하는 일로 분분했다. 논의 끝에 세 사람의 후보인 김씨, 박씨, 석씨까지는 결정을 했는데, 이 가운데서 누구를 왕으로 뽑아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 때 누군가 이런 제안을 했다. 세 개의 떡을 준비해 한 사람씩 그 떡을 깨물었다가 뱉게 해 떡에 찍힌 치아 자국을 통해 왕통을 이을 후계자를 정하자는 것이었다. 제안의 요지는 치아가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가지런하게 찍힌 사람을 왕으로 뽑자는 것이었다. 치아의 개수로 왕을 결정한 고대사회의 미개함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치과 의사라면 그 방법이 얼마나 과학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풀어보자면 이렇다. 즉, 건강한 치아를 가졌다는 것은 건강한 신체를 가졌다는 것과 다르지 않고, 그런 사람이라야 건강하게 장수하면서 나라의 기틀을 튼실하게 다질 것이라는 나름의 판단 기준과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고대 신라에서는 떡에 생긴 치아의 자국을 ‘닛금’이라고 했고, 그 닛금을 이두식 표현인 ‘니사금’이라고 불렀는데, 당시에 왕을 ‘이사금(尼師今)’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니 왕은 곧 이가 튼튼한 사람이라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한 대목이다. 그러면 건강한 치아를 왕이 될 자격요건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치아가 건강하면 머리가 좋다. 건강한 치아와 건강한 잇몸으로 잘 씹으면 뇌에 자극을 주어 그만큼 뇌가 발달하기 때문이다. 씹을 때 움직이는 근육을 저작근(咀嚼筋)이라고 하는데 이 근육이 움직이면서 뇌혈류량을 증가시킨다. 그만큼 뇌 속에 많은 피와 산소를 공급한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씹을 때마다 머릿속의 단기 기억을 저장하는 해마(海馬)의 세포 활동이 크게 증가한다. 그 뿐이 아니다. 건강한 치아로 쫄깃쫄깃한 음식을 씹을 때, 뇌파가 활성화되면서 알파(α)파가 나오는데, 이 알파파는 씹을 때 기분을 좋게 하고, 집중력과 암기력을 향상시킨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요약하자면 입에다 음식을 넣고 어금니로 씹어 먹는다는 것 자체가 두뇌에 엄청난 활력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 또는 머리가 멍해지면서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그냥 가만히 있는 것보다 무언가를 씹고 싶은 까닭이나 야구선수가 집중을 위해 껌을 질겅질겅 씹는 이유도 바로 이런 본능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 말고도 치아나 잇몸이 부실한 사람에 비해 치아와 잇몸이 건강한 사람이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이유는 즐비하다. 활력, 성격, 피부, 날씬한 몸매 등 열거하기도 쉽지 않은 그 이유는 다음번에 다시 짚도록 하겠다.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다 직업정신을 발휘해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다. 잇몸질환이나 충치가 없는 건강한 치아로 잘 씹는 남성이 미인을 얻을 수 있다고. 건강한 치아와 잇몸을 가진 사람은 미인을 차지하는 ‘전쟁’에서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냥 하는 말이 절대 아니다. 결혼 적령기를 조금(?) 넘긴 필자도 남편감으로 잇몸과 치아가 건강한 사람을 물색 중이니 말이다. 이지영(치의학박사·강남이지치과 원장·www.egy.co.kr)
  • [10일 TV 하이라이트]

    ●라이프n조이(YTN 오전 11시35분) 용인시 백암면에 자리한 약 8900평의 거대한 옛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위풍당당한 왕궁과 소박한 민가의 모습.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아기자기한 모형물과 다채로운 과학체험을 통해 우주와 지구의 신비를 접해 볼 수 있는 우주박물관. 시공을 초월하는 용인의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효도우미 0700(EBS 오후 4시20분) 10년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혼자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김현순(78) 할머니. 할머니를 위해 눈물겨운 사랑을 보여주는 이수철(75) 할아버지.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한 수십년의 삶. 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아내의 수발을 들며 할아버지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그것이 알고 싶다(SBS 오후 11시5분) 자살의 이유로 우울증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지만 우울증보다 2.5배 더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조울증. 우울증에 비해 훨씬 덜 알려져 있다. 조울증이란 무엇인지, 왜 어떻게 생기는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정신질환에 의한 자살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도 살펴본다.   ●하얀거탑(MBC 오후 9시40분) 준혁은 한밤중에 도영의 암센터를 찾아가 검사를 부탁한다. 모니터를 보며 신중히 검사를 하던 도영은 시선이 멎은 채 화면 한곳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홍상일 교수를 찾아간 도영은 수술은 누가 할 것이냐고 묻고, 홍교수는 막상 과장님 수술을 자신이 해야 할 생각을 하니 걱정부터 앞선다.   ●행복한 여자(KBS2 오후 7시55분) 준호는 3년간 기억해온 지연의 전화번호로 전화하지만, 지연의 번호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준호는 지연의 회사로 찾아오고, 준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지연은 은지를 서둘러 숨긴다. 늦은 시간 지연에게 전화를 건 준호는 지연을 ‘엄마’라고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걸어서 세계속으로(KBS1 오전 10시) 안데스산맥, 그 문화의 중심 칠레. 공식명칭은 칠레공화국이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을, 동쪽으로는 안데스산맥을 경계로 아르헨티나와 마주하고 있는 칠레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나라이다. 아름다운 자연유산과 고도의 문화유산이 섞인 안데스의 별, 칠레로 떠나본다.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8) 정림사터 오층석탑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8) 정림사터 오층석탑

    충남 부여에 정림사터 오층석탑이 없다면 사비시대(538∼660년) 백제의 흔적은 낙화암 전설로만 남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탑이 사비성에서 제 모습을 유지한 거의 유일한 유적일 만큼 백제 문화는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정림사터 오층석탑도 나당연합군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잘 알려진 대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반도의 오랑캐가 만리 밖에서 천상을 어지럽게 하여…일거에 평정하였다.’는 글을 1층 탑신에 새겼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오만한 낙서로 훼손되지 않았다면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라군사 쪽에서 보면 정림사는 사비성의 한복판에서 백제왕조의 안녕을 빌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겠지요. 그럼에도 정림사를 폐허로 만들었을지언정 ‘소정방 기념탑’으로 탈바꿈해 버린 오층석탑은 허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교가 융성했던 백제라지만 남아 있는 석탑은 2∼3기에 불과합니다. 정림사터 오층석탑과 요즘 해체 복원작업이 한창인 익산의 미륵사터 서탑이 그것이지요. 학자에 따라서는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도 백제시대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백제 석탑은 신라의 황룡사 구층석탑처럼 목재로 짜맞추던 탑을 석조로 번안한 것입니다. 정림사탑만 해도 부재가 149개에 이른다고 하네요. 백제 석탑의 모습을 본받은 이른바 백제계 석탑은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과 서천 비인 오층석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강진 월남사터 삼층석탑 등 10여개가 꼽힙니다. 모두 백제의 옛 땅입니다. 백제계 석탑이 한결같이 고려시대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백제 석탑의 기술이 그대로 계승되었겠지만, 이 시기에 세워진 백제계 석탑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윤용혁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신라의 옛 백제땅에 대한 지배정책이 매우 완고하여, 백제계 석탑의 건립조차 불온시되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불국토(佛國土)를 표방한 통일신라에서 석탑이 갖는 대중적 영향력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런 마당에 백제계 석탑을 세우는 것은 백제계 주민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반국가활동’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고려시대에 백제계 석탑이 여럿 세워진 배경에도 정치적 해석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천득염 전남대 건축과 교수는 “나말여초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견훤을 비롯한 백제 추종세력에 고무 자극된 지역민들의 백제문화에 대한 향수의 발로였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통일신라를 비롯한 후대 석탑에 영향을 미친 한국 석탑의 출발점입니다. 더 이상의 조형적 발전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백제 석탑의 완결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수백년 동안이나 백제 국권회복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은 정림사탑이 가진 또 하나의 가치입니다. 문화적 산물이 꼭 문화로 한정된 영향력만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벌써 1400년 전에 보여주었습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어린이책꽂이]

    ●출동! 시간구조대(류가미 지음, 삼성출판사 펴냄) 동아시아 문명 발상지인 황하에서 문명이 성립되지 않았다면? 그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않았다면? 이 책은 이같은 가정에서 출발, 역사를 뒤바꾸려는 시간테러단과 이를 지키려는 시간구조대간의 대결 형식을 빌려 인류역사를 재현해낸 역사 판타지.1권은 황하의 홍수를 막아 하나라의 첫번째 왕이 된 우임금 이야기,2권은 크레타 왕궁에 있는 미로 속에서 미노타우로스와 싸우는 테세우스 왕자를 구해내는 이야기다. 각권 9500원. ●십장생을 찾아서(최향랑 지음, 창비 펴냄) 십장생은 도교의 신선사상에 토대를 둔 것으로, 장수의 상징인 열가지 자연물을 가리킨다. 해, 소나무, 학, 사슴, 불로초(영지버섯), 바위, 물, 거북, 산, 구름. 때론 곧고 푸른 대나무와 신선의 땅에서 난다고 하는 복숭아가 포함되기도 한다. 십(十)은 상하좌우 모든 것이 갖춰진 완벽함을 나타내는 숫자이기도 하다.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쓴 십장생 이야기.1만원. ●맛있는 들풀(마루야마 나오토시 지음, 김창원 옮김, 진선아이 펴냄) 어린 잎을 따서 고명으로 쓰는 초피나무, 껍질을 벗겨 나물로 먹는 섬조릿대, 어린순을 무쳐 먹는 독활, 어린잎을 튀겨 먹는 호장근…. 봄이면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리는 들풀은 잡초로만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소중한 먹거리다.60여종의 들풀을 세밀화로 소개한 생태교육 도감.7500원. ●그림으로 보는 세계 생활사(앤 밀라드 등 지음, 홍순철 옮김, 창해 펴냄)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빵 몇조각을 약간 구운 다음, 다시 물을 섞어 체로 걸러 맥주를 만들었다. 바이킹은 어떻게 살았을까. 선원이며 전사이자 탐험가였던 바이킹은 다른 나라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해적이었지만 훗날 아이슬란드 등 유럽의 여러 지역에 정착했다.‘사가’라 불리는 서사시는 용감한 바이킹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인류의 첫 문명에서 20세기 초반까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세계사 그림책.2만 4000원. ●박쥐(팅 모리스 지음, 이충호 옮김, 베틀북 펴냄) 박쥐의 종류는 950종 이상. 얼음으로 뒤덮인 북극과 남극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산다. 보통 박쥐의 속도는 시속 10㎞. 그러나 박쥐 중에서 가장 빨리 나는 붉은박쥐는 시속 60㎞ 이상으로 날 수 있다. 박쥐는 종류마다 소리를 내는 곳이 다르다. 관박쥐는 코로, 갈색박쥐는 입으로 초음파를 낸다. 어린이 스스로 자연을 탐구하고 관찰할 수 있도록 꾸민 그림책.8500원. ●임경업전(하상만 옮김, 청솔 펴냄)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군담소설. 우리나라 고전은 작가가 누구인지 모르는 이본(異本)이 많다.‘임경업전’의 이본은 36가지나 된다. 임경업은 병자호란 당시 호국(청나라)이 가장 두려워한 조선의 장수. 볼모로 잡혀간 세자와 대군을 구하기 위해 몰래 호국에 들어간 임경업은 독보의 배신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조선으로 돌아온 임경업은 역적 김자점의 음모로 죽고 만다.8000원.
  • [이용원 칼럼] 백제를 꿈꾸며

    [이용원 칼럼] 백제를 꿈꾸며

    7세기 초 유적지인 전북 익산시 왕궁리에서 정화시설을 갖춘 공중화장실 3기가 발굴됐다고 엊그제 언론이 보도했다. 아울러 토양을 분석해 보았더니 백제인들은 육식을 거의 하지 않고 채식을 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왕궁리는,‘서동요’를 지어내 신라 선화공주를 유혹했다는 백제 무왕과 인연 깊은 땅이다. 일본의 ‘관세음응험기’ 등에는 무왕이 한때 수도를 익산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짧은 보도를 접하고는, 당시로는 첨단이었을 정화조 화장실을 갖춘 왕궁의 위용, 독실한 불교신자로 육식을 멀리했을 무왕 부부와 그 백성 등 백제인의 삶의 모습이 잇따라 떠올랐다. 그러면서 백제는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라고 상상의 날개가 펼쳐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유혹이었다. 백제의 역사는 3국(실제로는 가야를 포함한 4국) 가운데서도 오랫동안 홀대를 받아왔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꿰차고 앉아 중국과 자웅을 겨룬 고구려,3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에 이리저리 채이기만 한 것이 ‘약소국’ 백제가 주는 이미지였다. 그러다 1971년 충남 공주에서 무녕왕릉이 발굴된 것을 계기로 백제는 화려하게 부활한다.1993년에는 충남 부여에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가 출토돼 백제인의 찬란한 예술성을 만천하에 과시했고, 이어 한성백제의 왕도인 서울 풍납토성의 실체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백제는 건국 초기부터 동북아시아의 강국이었음이 밝혀졌다. 이와 함께 문헌사학계의 연구 축적에 힘입어 백제는 한반도 남쪽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소국이라는 위상에서 벗어났다. 백제가 일본 열도에 분국(分國·식민지)을 세웠다는 학설(북한의 김석형 등)은 진즉에 나왔고, 이를 뛰어넘어 일본 열도와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일대까지 진출한 해양대국이었다는 학설(이도학 전통문화학교 교수)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심지어 현재 전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가 사실은 중국에 진출했던 백제 유민의 후손이라는 주장(김성호의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까지 나와 있다. 백제가 해양대국이었다면 그 바탕에는 교역물품이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 역사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 유물이 2005년 10월에도 공개됐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가죽 직물이 그것이다. 창을 감싸는 데 사용했으리라 추측되는 이 직물은 일본 사가현 소재 유키노야마(雪野山) 고분의 출토품과 똑같다고 한다. 발굴단 교수가 “육안으로 봐도 같은 메이커 제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생활용품은 남겨진 게 드물지만, 왕실과 불교 관련 물품 중에는 쌍둥이라 해도 좋을 만큼 똑같은 유물이 한·일 양국에 전해진 예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는 선진국의 ‘메이드 인 백제’ 제품이 일본으로 수출된 예가 아닐까. ‘일본 제품이 백제에 수출되었다.’고 거꾸로 주장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측 기록으로 검증하면 된다. 우리의 ‘삼국사기’에 비견되는 ‘일본서기’에는 34대 일왕 서명(舒明)이 639년 궁궐과 절을 짓도록 지시한 결과 백제천(川) 가에 백제궁(宮)과 백제사(寺)를 지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서명은 타계 후 백제대빈(大殯)에 안치됐다. 살아서는 백제궁에 거주하다 죽은 뒤 백제대빈으로 간 일본 왕은 백제인일까, 일본인일까. 요즘 고구려·발해가 새 문화 코드로 뜨고 있다. 대륙을 호령한 선조들이 있다면 바다를 누빈 선조, 백제인도 있다. 백제가 진정 되살아나는 날을 꿈꾼다. 수석논설위원 ywyi@seoul.co.kr
  • 백제 공동화장실 발굴

    백제 공동화장실 발굴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백제 말기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공동화장실이 발굴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사적 제408호 왕궁리 유적의 서북쪽 지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대형 화장실 3기를 찾아냈다고 12일 밝혔다.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만들어진 이 화장실은 내부의 오수를 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밖으로 빼낼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구덩이가 화장실이라는 사실은 고려대 기생충학교실에 의뢰한 토양 분석에서 회충과 편충의 알이 대량으로 발견됨에 따라 확인될 수 있었다. 회충과 편충의 알은 주인공들이 농사를 지으며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고 부여문화재연구소는 설명했다. 회충과 편충알의 발견은 또 백제인들이 주로 채식을 하고, 육류의 섭취는 상대적으로 적었음을 보여준다. 회충과 편충은 채소를 섭취할 때 감염되는 대표적인 채식성 기생충이다. 고기를 먹을 때 감염되는 육식성 기생충인 조충의 알은 확인되지 않았다.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 시대에 조성된 궁성유적으로 남북 490m, 동서 240m에 이르는 장방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삼국유사는 이곳을 한때 백제 무왕이 천도했던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설 선물 특집] LG생활건강 ‘후 왕후세트’

    [설 선물 특집] LG생활건강 ‘후 왕후세트’

    LG생활건강이 올 설에 선보이는 ‘후 왕후세트(32만원)’는 왕궁을 상징하는 문양이 든 패키지 화장품 선물세트이다. 고급스러운 한방 분위기로 특별한 선물로 손색이 없다. 기초제품 4종과 견본 5종으로 구성돼 있다. 견본에는 국내 최고가 명품 림으로 알려진 ‘후 환유고’가 함께 들어 있다.‘후’는 왕실 여성들이 의학에 이용했던 독특한 궁중 처방을 화장품에 도입한 것이 특징. 한방 성분 ‘공진단(拱辰丹)’을 주 성분으로 당귀·녹용·산수유·사향초·오가피·천문동 6개 한약재가 고루 들어있다. 후스킨(150㎖), 로션(110㎖), 크림(40㎖), 에센스(45㎖)에 견본으로 환유고크림(6㎖), 아이리페어(4㎖), 주얼리파우더 (5g), 허브 선크림(6㎖), 천기단 앰플이 있다.
  • 한옥관광개발 ‘레드오션’ 되나

    한옥관광개발 ‘레드오션’ 되나

    “한옥관광개발은 블루오션인가, 아니면 레드오션인가.” 전국 자치단체들이 내용이 엇비슷한 한옥관광개발사업을 경쟁적으로 추진해 차별화한 개발 전략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7일 전북도와 전주시에 따르면 전통 한옥을 주제로 한 대형 관광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자치단체는 서울을 비롯, 경기, 경북, 전남·북 등 8개 자치단체에 이른다. 이들 자치단체는 적게는 100억원, 많게는 1조 9000억원을 투입해 한옥마을·전통민속촌·한옥체험관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형 사업 외에도 전국 자치단체별로 ‘고택 관광자원화’ 등 크고 작은 한옥관광개발에 나서고 있다. 경기도는 1999년부터 2020년까지 총사업비 1조 9000억원을 투입하는 ‘화성 복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기도 수원시 화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왕궁을 복원하는 초대형 사업이다. 성곽과 4대문 복원, 한옥마을과 전통거리, 행궁, 특화거리를 조성하는 이 사업은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옥관광개발사업’이다. 경북 경주시는 1989년부터 1000억원을 투입한 ‘신라 밀레니엄 파크’ 조성사업을 오는 3월 마무리한다.5만 4000여평의 부지에 신라의 전성기였던 8세기 무렵 신라시대 민속촌과 공방촌을 조성하는 공사가 개장을 앞두고 있다. 경북에서는 또 안동시가 ‘전통 한옥 체험관광사업’, 영주시가 한옥집단지구와 숙박촌 테마파크를 내용으로 한 ‘선비촌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충남 부여시 역시 1994년부터 ‘백제 재현촌’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10년까지 3770억원을 들여 100만평의 부지에 잃어버린 왕국의 왕궁, 전통민속촌, 공방 등을 조성해 새로운 명소로 육성한다는 복안이다. 서울시도 1993년부터 남산골과 북촌 한옥마을 조성사업을 시작했다. 전통 한옥군을 외국인을 대상으로 관광숙박촌으로 육성한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자치단체들이 추진하는 한옥관광개발사업은 대부분 차별성이 없어 자칫 세금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경기도는 조선, 충남은 백제, 경북은 신라를 주제로 내세우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한옥마을, 전통거리, 민박촌, 공방 등 비슷한 사업이 많은 탓이다. 결국 각 지역별로 특화된 한옥관광개발사업이 되지 못하고 용인 민속촌 형태의 관광지만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지적이다. 더구나 한옥 관광개발을 ‘한옥 건립’이라는 하드웨어에만 치중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전통문화, 농어촌, 민예촌 등 선조들의 삶을 재현하고 체험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 주시 문두현 관광진흥계장은 “전국의 자치단체들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한옥관광개발에 뛰어들고 있지만 상업적인 면에만 치중한 나머지 정체성과 특색 없는 사업이 산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면서 “한옥관광개발사업은 막대한 사업비를 들여 새로운 한옥을 건립하기보다는 기존 한옥 보존과 함께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전통생활문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의인 이수현! 너를 잊지 않을 거야”

    |도쿄 이춘규특파원|선로에 떨어진 일본인 취객을 구하고 숨진 고(故) 이수현(작은 사진)씨의 희생정신을 다룬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의 특별시사회가 아키히토 일왕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26일 도쿄에서 열렸다. 일본 언론들은 일왕 부부가 나란히 민간 영화 시사회장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라고 전했다. 일왕은 이씨가 숨진 이듬해께 고인의 부모를 왕궁으로 초청, 위로했으며 추후 시사회 참석을 요청받고 흔쾌히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특별시사회는 도쿄 미나토구 도라노몬에 위치한 일본소방회관 내 ‘닛쇼홀’에서 열렸다. 행사는 추모영화에서 고인의 역을 맡은 이태성씨와 아버지역 정동환씨, 어머니역의 이경진씨 등 배우들의 무대인사와 일왕 부부의 입장, 시사회, 추모회 순으로 진행됐다. 행사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부인인 아키에 여사와 모리 요시로 전 총리, 후쿠다 야스오 전 관방장관, 일본 프로야구 안타왕 장훈씨 등 유명인사들과 이수현씨가 다니던 일본어학원 학생 등 모두 600여명이 참석했다. 도쿄 외교 소식통들은 일왕이 한국관련 민간행사에 전격 참석한 것은 일 왕실이 한·일 관계의 개선을 바라는 의지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풀이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2005년 6월 사이판섬 방문시 한국평화기념탑을 첫 참배한 바 있으며 여러 차례 일제 군국주의의 한반도 지배를 사과해 왔다. 지난해에는 기자회견을 통해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세계 속의 왕실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등 ‘평화주의자’라는 것이 일반의 평가이다.이날 행사 참석은 그 연장선에 있다고 외교관계자들은 지적했다. 이수현씨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는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일본 영화관 180여곳에서 27일부터 일제히 개봉된다. 고인의 부모는 이날 시사회와 추모회에 참석한 뒤 영화 개봉 첫날에는 도쿄 신주쿠에서,28일에는 오사카에서 일본 영화관람객들에게 인사를 할 예정이다.일본의 키네마모션픽처스와 한국의 이삭필름이 합동 제작한 이 영화는 2005년 말부터 영화 제작에 들어가 지난해 부산 등지에서 촬영했다.taein@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