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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사는 가족의 돼지저금통이 아니다”

    ‘Family-owned paper’ ‘가족소유신문’이라 번역해야 할까,‘족벌언론’이라 해야 할까. 국내 몇몇 ‘메이저 일간지’를 두고 뉴욕타임스와 같은 성공적인 ‘가족소유신문’이라는 긍정적인 시각이 있는 반면, 사주의 전횡을 문제삼아 ‘족벌언론’이라고 반박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3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신문협회(WAN) 제58차 총회 이틀째 회의에서 발표된 ‘가족 소유(Family-owned) 신문-생존 매뉴얼’은 이른바 국내의 족벌언론들과 관련해 벌어지고 있는 논란과 연결돼 큰 관심을 끌었다. 스페인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이노베이션 인터내셔널 미디어 컨설팅 그룹이 ‘2005 신문 혁신에 관한 보고’를 통해 가족소유 신문이 지켜야 할 ‘10계명’을 공개한 것이다. 이 10계명은 컨설팅 그룹이 총회장에서 배포한 ‘세계보고서 2005-신문에서의 혁신’에도 실렸다. 보고서 첫문장은 “신성한 트러스트에서 탐욕으로 분쟁을 일으키기까지(From sacred trust to greed-driven squabbles) 가족소유신문은 때로 연속성을 위협하는 세대간 변화를 헤쳐나가야 한다.”고 시작한다. 10계명은 ▲합법적이더라도 가족의 관심보다는 회사의 이익을 우선하라 ▲회사를 가족의 돼지저금통처럼 쓰지 말라 ▲회사를 가족 취업창구로 쓰지 말라 ▲사위·며느리를 회사에 들이지 말라 ▲회사 자본을 쪼개지 말라 ▲돈을 벌어라. 손실은 탐욕과 의심과 불화를 낳는다 ▲가능한 한 비즈니스는 전문화하라 ▲회사에 영향을 주지 않고 가족의 치부를 처리하기 위해 가족회의를 열어라 ▲사업에서 가족의 역할을 정의하는 가족동의서를 문서화하고 업그레이드하라 ▲가능한 한 빨리 미래 가족과 회사 지도자들을 정의하고 훈련시키라 등이다. 이 컨설팅그룹이 회의장에서 10계명에 이어 가족소유 미디어그룹의 모범으로 소개한 브라질 RBS그룹 사례는 족벌언론의 위상과 개선방향 차원에서 공감을 얻었다. 컨설팅그룹은 3대째 TV·라디오·신문 등을 운영하고 있는 이 RBS그룹을 소개하면서 “가족 사업이라는 게 서구 선진국과는 문화적으로 다르다.”고 일단 가족소유 미디어그룹을 옹호했다. 그러나 RBS그룹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강조하면서 “그것은 운영 규칙 문서로서 고용과 해고의 법칙뿐 아니라 사업 수익을 미래에 어떻게 투자해야 한다는 등 모든 규칙을 문서화했다.”고 말했다. 동시에 주주들로부터 이 문서를 승인받았다고 덧붙였다. 조태성 홍지민기자 cho1904@seoul.co.kr
  • [열린세상] 역사교과가 독립해야 할 이유/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2003년 여름, 우리는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고구려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 한 충격적인 사태에 접했다. 역사학계를 비롯해 정부·정치권·시민단체, 그리고 전 국민의 뜨거운 비판 열기에 놀라, 현재 중국은 주춤한 상태다. 우리는 고구려연구재단을 발족해 고구려 역사를 비롯한 북방사의 학술적 체계화에 주력하고 있다. 일찍이 1982년부터 시작된 일본 역사교과서의 식민지배 미화는 급기야 올 봄 극우적 ‘새로운 역사교과서’(후쇼사 판)를 탄생시키고, 이에 더하여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조례 제정으로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정부는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역사정립기획단’을 상설기구로 설치해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21세기 탈민족주의적 동아시아 평화를 추구하는 ‘동아시아 담론’을 다듬던 학계는 된통 벼락을 맞은 셈이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 동북아 공동체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잦아들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동아시아 과거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공동의 기억을 만들어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중·일 삼국의 학계와 시민단체가 수년의 공동작업 끝에 공동역사교과서 ‘미래를 여는 역사’를 간행하게 된 것은 아주 소중하다. 교육인적자원부도 역사분쟁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들끓는 여론에 대한 응급처방으로 지난해 가을, 학계와 시민단체를 모아 ‘국사발전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물론 학계의 전반적인 중론은 ‘국사’ 교육의 강화가 아니라 동아시아사·세계사를 포함하는 ‘역사’ 교육의 재구성이 시급하다는 데 모아졌다. 이를 위해서는 국사와 세계사가 ‘사회 교과’에 편입돼 있는 현 교육과정을 수정해야 한다. 미군정 때 수입된 미국식 사회과는 민주시민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데, 민주주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미국의 역사를 사회과의 일환으로 교육하는 것은 그 나라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타율적 근대화의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전통 내지 전근대와, 근·현대의 연속성은 두드러지지 못하다. 사회교과에서 우리의 역사적 연원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경제 중심의 사회과 교육과정에서, 고구려 역사에까지 소급하는 역사교육과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국사와 세계사가 사회교과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역사를 전공하지 아니한 사회과 교사가 중학교 국사의 40% 이상, 세계사의 80%를 담당하고 있는 현실은 교육의 전문성을 유린하는 처사다. 남아도는 교사의 수급조절을 위해 교련·실업·제2외국어 담당 교사가 2회에 걸친 방학 중 연수만으로 국사와 세계사를 가르칠 수 있게 한 조치는 더욱 충격적이다. 또한 현재처럼 ‘국사’ 교과서만이 ‘사회’ 교과서와 별도로 제작되는 방식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발주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사로 규정하려는 시도나 일본이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역사교육이 나만을 자랑하는 국수적 자아도취에서 벗어나지 못한 책임도 없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지난 5월6일 교육부가 ‘역사’를 사회 ‘교과’의 한 ‘과목’으로 독립시킨다고 하여 마치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것처럼 발표한 것은, 교육과정과 교사 양성은 사회과 체제로 그대로 둔 채, 현재 사회 교과 안에 독립교과서로 돼 있는 ‘국사’ 교과서에 세계사를 포함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회과로부터 역사교과는 ‘교과’로서 분리 독립돼야 한다.‘한국을 중심에 둔 동아시아’‘세계사와 비교된 한국사’ 교육을 위해 하루속히 한국사·동아시아사·세계사 통합체제로서의 ‘역사’ 교육이 독립적으로 실시돼야 한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인권을 옹호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교육이 변해야 한다. 이영호 인하대 한국사 교수
  • [Doctor & Disease] 사는 기쁨 신경정신과 김현수 원장

    [Doctor & Disease] 사는 기쁨 신경정신과 김현수 원장

    “많은 부모들이 ‘요즘 애들 인터넷게임 예사지, 뭘 그래.’라고 여기고, 애들도 예사로 ‘재밌잖아요. 그러면 됐죠.’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랬던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은 입맛으로 중독되는 패스트푸드와 같습니다.” 치유적 대안학교인 ‘성장학교 별’교장이자 인터넷중독 치료센터에서 활동하는 등 정신장애, 특히 인터넷중독의 치료와 예방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는 ‘사는 기쁨 신경정신과’ 김현수(40) 원장. 그는 요즘의 인터넷 환경을 두고 “외적 통제의 과잉과 내적 통제의 부재 속에 500만 청소년들이 정서적·정신적으로 방치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와 인터넷중독을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인터넷중독은 어떤 질환이며, 그걸 질환으로 구분해도 되나. -인터넷중독이 우울증이나 충동조절장애에 의한 질환이냐, 아니면 독립 질환이냐를 두고 아직 논란이 많아 지금 딱부러지게 규정하기는 곤란한 측면이 있다. 분명한 것은 생물학적·심리적 측면은 더 많은 논란과 연구를 거쳐야겠지만 행동적 징후는 이미 다양하고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중독은 어떻게 구분하나. -학문적으로 정형화된 것은 아니지만 사이버 게임중독과 채팅에 빠지는 사이버 관계중독, 성적 음란물을 탐닉하는 사이버 성중독으로 나눌 수 있다. 증상의 특이성은 무엇인가. -행동상 두드러진 특징은 인터넷에의 과도한 집착, 밤낮이 바뀌고 소요 시간에 관대해지는 시간감각의 왜곡, 지나친 공상이나 사이버공간에 대한 터무니없는 의미 부여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특징은 사회적 관계를 기피하는 등 대인관계 패턴의 변화와 소통의 단절 등 가족관계의 변화로 구체화된다. 인터넷중독의 원인과 발병 기전을 설명해 달라. -중독을 과거에는 약물처럼 직접 뇌에 주입되는 경우에 국한해 이해했으나 요즘에는 도박, 쇼핑중독에 이어 인터넷중독,TV중독 등 반복적이고 강박적인 행위가 뇌의 생리적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게임중독자의 뇌가 알코올 등 약물중독자의 뇌 상태와 흡사한 변화패턴을 보인다는 보고도 있다. 그는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인터넷 강국이지만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기술만 가르쳐 ‘500만 게임족,100만 채팅족’을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한 조사 결과 어린이와 청소년의 80%가 컴퓨터를 게임이나 음악, 채팅 등 흥미나 오락용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정부가 100만 주부에게 인터넷을 가르치겠다고 했을 때 어떤 용도로, 어떻게 활용하게 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됐던 거죠.” 발병 추세는 어떤가. -당연히 증가 추세다. 검사법에 논란은 있으나 일반적으로 전 국민의 5∼10%, 청소년 이하 연령대의 10∼30%는 위험사용자 집단으로 본다. 단, 스타크래프트처럼 단지 오래 한다고 중독으로 분류하는 건 아니고 인터넷이 부적응행동패턴을 유발해야 한다. 인터넷중독에 반영되는 사회상은 어떤 것인가. -대화와 소통, 어울림의 실종이다. 커뮤니케이션과 여가 및 문화생활 양상의 변화라고 압축할 수 있다. 인터넷은 전화가 초래한 커뮤니케이션 패턴의 변화보다 훨씬 크고 충격적이다. 김 박사는 인터넷을 두고 벌이는 논란의 한 양태를 이렇게 소개했다.“인터넷이 개인의 대인관계를 좁혔나, 넓혔나를 두고도 각기 주장이 다릅니다. 한쪽에서는 ‘개인을 더 외롭고 고립적인 존재로 만들었다.’고 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동호회 활동에서 보듯 확장됐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터넷에는 ‘고립’과 ‘확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물론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이긴 하지만….” 진단과 질환 판정기준을 설명해 달라. -미국의 심리학자 킴벌리 영이 제시한 설문과 면접이 중요한 진단 방법인데, 통상 다음 4가지 질문으로 판정을 합니다. 첫째 평균적으로 1일 4시간 이상 인터넷을 하는가, 둘째 인터넷을 하느라 학업이나 직장의 과제를 처리하지 못한 적이 있는가, 셋째 주로 인터넷 친구들과 어울리는가, 넷째 인터넷 사용을 두고 가족과 갈등을 겪은 적이 있는가 등이다. 여기에 모두 해당되면 심각한 상태, 한 가지만 해당되면 중독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치료는 어떻게 하나.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 조언하는 지지적 상담과 인지교정 및 행동수정을 적용하는 인지행동적 상담이며, 잠재적 위험집단에는 집단상담 방식을 적용한다. 약물로는 제한적으로 항우울제와 충동조절제 등을 병용하나 의존도는 크지 않다. 김 박사는 치료 효과를 묻자 ‘어렵다.’며 운을 뗐다.“인터넷중독도 다른 중독처럼 금단현상이 있고, 치료 동기가 약한 것도 문젭니다. 예컨대 부모나 의사는 치료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본인은 ‘컴퓨터 좋아하는 게 왜 병이냐?’고 항변합니다. 이런 문화적 세대차와 이에 따른 편견이 치료 과정에서 극명하게 노출되는데, 이걸 극복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인터넷 중독도 조기발견이 의미가 있나. -모든 중독은 예방과 조기발견이 중요하며, 일단 중독상태에 이르면 치료를 위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현행 정책상의 문제는 없나. -우리 사회가 게임문화와 관련 산업에 지나치게 관대하며, 인터넷 중독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니다. 경제·산업논리의 지나친 옹호가 청소년의 정신과 몸을 병들게 하고 있다는 점을 정부와 관련 업계가 빨리 깨우쳐야 한다. ■ 김현수 박사 ▲중앙대의대, 아주대의대 대학원(박사)▲정보통신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전문위원▲청소년보호위원회 매체물분과 자문위원▲청소년보호위원회 인터넷 피해청소년 지원센터 센터장▲정보통신부 정보문화원 자문위원▲한국중독정신의학회 이사▲대한청소년정신의학회 홍보위원▲청소년보호종합지원센터 운영위원▲저서 ‘아이들이 인터넷게임 때문에 너무 아파요’(2005)외▲현 성장학교 별 교장▲현, 사는기쁨 신경정신과의원 원장 글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사진 남상인기자 sanginn@seoul.co.kr
  • [월드이슈] 보유 vs 비보유 갈등못풀면 NPT ‘유명무실’

    [월드이슈] 보유 vs 비보유 갈등못풀면 NPT ‘유명무실’

    27일(현지시간) 폐막되는 핵확산 금지조약(NPT) 평가회의가 최종 합의문을 채택하지 못한 채 막을 내리게될 것이 확실시된다.1970년 발효 이후 35년 동안 갖가지 비판과 우려 속에서도 핵 확산을 억제하는 데 기여해온 NPT 체제가 근본부터 흔들릴 가능성이 한층 커진 셈이다. 이에 따라 ‘핵 없는 미래’를 위한 국제적인 합의 틀을 근본부터 다시 짜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될 것으로 보인다. ●회원국간 다양한 이견 조율 실패 이번 평가회의는 188개 회원국이 참가한 가운데 핵보유국의 군축, 비보유국의 확산 억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등 쟁점을 3개 위원회 별로 논의해 26일과 27일 열리는 본회의에 회부, 채택하는 일정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개막 열흘이 지난 11일에야 의제 선정을 마무리짓고 또 절차 논의에 일주일을 허비하느라 정작 각국의 다양한 이견을 좁힐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랐다. 교도통신은 소식통을 인용, 이들 3개 위원회 모두 합의문 초안 마련에 실패했다고 25일 보도했다. 이에 따라 세르지오 데 퀘이로즈 두아르테 의장 직권의 성명 채택으로 이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합의문 채택을 어렵게 만든 핵심적인 이견은 역시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문제였다. 원자력 개발을 빌미로 민감한 핵시설에 접근하는 이란을 막기 위해 미국은 IAEA에 독자 사찰권 등을 부여하자고 주장했지만 이집트 등 비동맹 국가들은 미국이 2000년 평가회의 합의부터 이행하라고 맞불을 놓았다. 북한 핵에 대해서도 합의문 초안에 6자회담 당사국들의 합의 내용을 명기하자고 미국은 종용했지만 중국은 6자회담에 북한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안된다고 버텼다.NPT를 탈퇴한 북한에 핵관련 물자를 반환하도록 요구하는 합의문 초안이 추진됐지만 이 역시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 핵 비보유국들은 보유국이 핵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조약 등으로 확약할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 등은 문서 보장을 거부하며 “NPT 의무를 준수하는 국가만이 안전보장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맞섰다. ●태생적인 한계 드러났을 뿐 그러나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NPT체제에 내재된 불평등에 있다고 많은 군축 전문가나 시민단체들은 판단한다. 미국의 카네기재단과 같은 곳도 이런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우선 보유국의 군축은 강제 조항이 아니며 사찰 의무도 없는 반면, 비보유국은 핵무기 제조와 보유를 금지당하고 사찰까지 받아야 하는 점이 꼽힌다. 또 프랑스·중국 등이 부분 핵실험을 지속하는데도 이를 제재할 마땅한 수단이 없으며 인도·파키스탄처럼 NPT 체제 밖의 핵무장에 대해선 속수무책이라는 점이 효용성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론 핵무장을 포기한 비보유국들에 대해 보유국의 핵공격 위협을 과연 막아줄 수 있느냐는 원천적인 의심도 자리하고 있다. 이런 태생적인 한계에다 미국과 러시아 등 핵 강국의 리더십 부재도 한몫 했다는 평가다.5년전 평가회의와 달리 이번엔 보유국의 공동선언이 나오지 못했다. 당시 보유국은 핵실험 금지조약 준수를 선언하고 13단계 군축 이행을 약속함으로써 비보유국들의 불만을 달랠 수 있었고 그 결과 합의문 채택이 이루어졌지만 이번에는 보유국의 입장 통일도 없었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의 외교 지도력 결핍이 작용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여기에 인도의 PTI통신이 지적한 것처럼 미국이 소형 핵폭탄이나 벙커 버스터 무기 등을 꾸준히 개발하는 한편, 이미 200여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도 이를 부인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듯한 미국의 태도가 회원국들의 불신을 부채질했다. 이와 관련, 미 국무부가 회의 참가자들에게 배포한 브로슈어에 96년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과 2000년 한해 동안의 핵 관련 논의를 통째로 누락한 것을 주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각국 대표도 많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무기감축 전문가인 조제프 시린치온은 “미국 정부가 국제적 합의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는 모습은 놀라운 것”이라고 말했다.‘있으나마나’ 한 조약으로 NPT를 전락시킨 것은 미국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시킨 셈이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독도분쟁 시발점은 미국인 시볼드”

    “독도분쟁 시발점은 미국인 시볼드”

    독도문제는 한·일간 역사적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문제라는 분석이 나왔다. 다음 주 발간될 계간지 ‘역사비평’ 여름호에 실릴 ‘독도분쟁의 시발과 윌리엄 시볼드’를 기고한 목포대 정병준 교수의 주장이다. 정 교수는 이 글에서 1952년 미·일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배후에 있는 미국의 외교관 ‘윌리엄 시볼드’를 조명했다. 알려졌다시피 이 조약은 일본의 패전처리 문제를 다룬 조약. 당연히 일본이 강점한 영토의 반환문제가 포함되어 있고 독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회담 초기에 한국령이었던 독도는 회담이 진전되면서 일본령으로 바뀐다. 여기에는 독도를 레이더기지로 쓰자는 시볼드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는 게 정 교수의 주장이다. 시볼드는 맥아더의 극우 반공주의 노선 덕분에 벼락 출세한 외교관이다. 전후 일본 처리를 두고 미국내에선 두가지 목소리가 있었다. 일본을 철저히 개혁하자는 ‘중국통’ 인사들과 그러면 빨갱이들만 이롭게 한다는 ‘일본통’ 인사들간 대립이었다. 맥아더는 ‘일본통’쪽을 채택했다. 그랬기에 ‘대위’에 불과했던 시볼드를 외교관으로 발탁했다. 미 국무부조차 적절치 않은 인사라고 지적했지만 맥아더는 굽히지 않았다. 정 교수는 ‘맥아더 장학생’ 시볼드가 큰 영향력은 없었다고 봤다. 그러나 미국에게 큰 의미가 없었던 한국 문제에는 시볼드가 개입할 여지가 많았다. 그는 일본계 여자와 결혼하고 일본에서 법률회사를 운영한 경험이 있을 만큼 지일파 인사였다. 그는 일본의 이익을 적극 옹호했다. 전범추방·재벌해체에 반대하고 공산주의자 석방을 비판하는 등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소련에 억류된 일본군 포로의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여기에는 냉전과 매카시즘 영향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할 때 정 교수는 대다수 한국인들의 생각과 달리 독도문제는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문제라고 결론지었다. 일본이 독도문제만 나오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자고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이 독도문제에 중립을 표시하는 것도 “독도문제가 한일관계뿐 아니라 한·미, 미·일관계를 폭발시킬 뇌관”임을 알게 된 결과라고 평가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황우석-美새튼교수 7월 줄기세포 정상회담

    황우석-美새튼교수 7월 줄기세포 정상회담

    배아줄기세포 연구 분야의 두 거두인 황우석 서울대 교수와 미국 피츠버그대 제럴드 섀튼 교수가 오는 6월 ‘줄기세포 정상회담’을 갖는다. 영장류(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줄기세포 효능 검사도 7월에 시작될 것으로 보여 배아줄기세포와 관련한 연구에 큰 진전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23일 황 교수팀에 따르면 미국 유전학정책연구소(GPI)는 6월11∼12일 미 휴스턴 베일러의과대학에서 ‘치료용 배아줄기세포 연구정책 옹호를 위한 줄기세포 정상회담’을 열기로 하고 황 교수와 섀튼 교수를 초청했다. GPI는 치료 목적의 배아복제를 옹호하는 미국 비정부기구(NGO)의 하나다. 이번 행사에는 줄기세포 정책 입안자와 연구자, 정치학자, 생명윤리학자, 법학자 등이 참석, 치료용 배아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이 이뤄질 것으로 알려졌다. 황 연구팀은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 의대에 원숭이 간이 사육시설을 마련, 실험용으로 쓸 원숭이를 두달 안에 국내에 들여올 예정이다. 연구팀은 원숭이가 확보되는 대로 인간배아 줄기세포를 원숭이에게 이식한 뒤 효과와 안전성을 알아보는 줄기세포 효능실험, 돼지의 췌도세포(인슐린 분비세포)를 원숭이에게 이식하는 이종(異種) 이식실험을 계획하고 있다. 실험이 성공하면 사람이 동물의 장기를 이식받는 이종이식 가능성을 한 발짝 앞당기는 계기가 될 것으로 분석된다. 전경하기자 lark3@seoul.co.kr
  • [씨줄날줄] 문희상·강금원/김경홍 논설위원

    최근 몇몇 대통령 측근들이 구설수에 올랐다. 이광재 의원이 ‘유전개발 의혹’과 관련해 수사선상에 올라 있고, 열린우리당의 문희상 의장이 출처가 불투명한 5억원의 돈으로 채무를 갚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노무현 대통령의 후원자로 알려진 강금원씨는 배임혐의 등으로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뒤 6개월 만에 특별사면을 받았다. 문 의장이나 이 의원, 강씨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 공신들이다. 대통령이 각별한 애정을 쏟는 것이나 이들이 자부심을 갖는 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당연하다. 하지만 국가운영이 개입된다면 공과 사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보여주는 의리나 측근들의 처신은 과거시절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최근 한 월간지의 보도에 따르면 문 의장은 대통령 비서실장 재임 때 2000만원을 준 한 사업가의 아들을 청와대 직원으로 취직시켰고, 비서실장에서 물러났을 때는 고급승용차까지 제공받았다고 한다. 살고 있는 집도 지인의 것으로, 무상으로 살고 있다 한다. 문 의장측은 사업가의 아들은 경력이 충분해서 데려다 쓴 것이고, 승용차도 나중에 4000만원을 주고 인수했다고 해명했다. 집도 부도가 나서 경매에 넘어가자 친구들이 모금해서 경매낙찰을 받아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지인이 많은 것은 문 의장이 살아오면서 베푼 덕이 많았거나 인간적인 매력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비서실장의 직위에 있었다면 오히려 거절했어야 할 문제였다. 강금원씨는 특별사면 후 “맹장수술한다고 배를 쨌다가 맹장이 이상하지 않으니까 여드름을 짠 격”이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문 의장도 “그 사람 입장에선 억울할 것”이라고 옹호하다가 최근에는 “강씨는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하는 사람중에서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그래도 자기네들끼리 북치고 장구친다는 지적을 받는 판에 다른 중소기업가들은 깨끗하지 않다는 얘기인지 답답한 노릇이다. 정권이 내세우는 개혁은 주도세력들의 도덕성과 엄격한 자기관리가 뒷받침돼야 성공할 수 있다.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을 고쳐 매지 말라는 말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최근 대통령 주변인사들의 구설은 “빚이 많으면 무덤덤하고, 이가 많으면 가려운 줄 모른다.”는 옛말을 떠올리게 한다. 김경홍 논설위원 honk@seoul.co.kr
  • 6회 광주인권상 수상한 印尼 빈민운동가 와르다 하피즈

    6회 광주인권상 수상한 印尼 빈민운동가 와르다 하피즈

    “빈민들을 위해 활동하는 인도네시아 모든 활동가들의 영광입니다.” 5·18 25주년을 맞아 18일 제6회 ‘광주 인권상’을 수상한 인도네시아 도시빈민협의회(UPC) 사무총장 와르다 하피즈(51·여)는 “5·18 민중항쟁 이후 광주와 한국의 인권발전은 아시아 인권활동가들이 추구하는 표본이자 목표”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날 오후 5·18문화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5·18 이후 한국은 산업화 등 경제·정치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뤘다.”며 “이제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 25년 전과 다른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통해 아시아 발전에 기여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이어 미얀마 군사독재, 인도네시아 아체지역의 정부군과 반군간 분쟁으로 인한 인권문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인권옹호를 위한 연대 구축 등에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촉구했다. 그는 또 “광주시민들이 5월 항쟁기간 동안 보여줬던 공동체의식과 민주화 열정에 감동받았다.”며 “상금 5만달러는 교육시설을 세우거나 펀드를 조성, 빈민들을 위해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1993년부터 인도네시아 모슬렘 여성운동의 지도자로서 남녀평등과 빈민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왔다.1997년 인도네시아 도시빈민협의회를 결성, 정부의 강제철거에 맞서고 빈민의 인권을 지키는 등 저항운동에 나서 수하르토 독재정권이 물러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광주인권상은 1991년 5·18유족회가 5·18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시상하던 ‘5월 시민상’과 1980년 당시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한 고 윤상원 열사를 추모해 제정한 ‘윤상원 상’을 통합해 제정한 상이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19) 1923년 일본인들의 정감록 처형

    ‘대일본제국의 애국적 지식인’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호소이 하지메란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한일합병(1910년)을 전후해 ‘동경아사히신문’과 ‘한일전보통신사’ 기자로 다년간 한국에 체류했다. 갓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편입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호소이는 흥미를 느꼈고 나름대로 많은 ‘연구’도 했다. 그런 호소이에게 1919년의 기미독립운동은 전혀 뜻밖의 사태였다. 무지렁이로 보였던 한국인들이 수백만 명씩이나 길거리로 뛰쳐나와 독립을 요구할 줄 그는 미처 몰랐다. 한낱 정치군인에 지나지 않는 조선총독이 그걸 짐작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당한 한국전문가 호소이 자신도 사태를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독립만세운동이 좌절되자 한국엔 예언서 ‘정감록’이 더욱 인기를 끌었다. 대한독립이 박두했다는 둥, 신천지가 열릴 거라는 둥 갖가지 소문과 예언이 한반도를 뒤덮을 지경이었다. 특히 1921년부터는 계룡산을 중심으로 숱한 신흥종교단체들이 등장해 위세를 떨쳤다. 겉으론 종교를 표방했지만 은연중 독립을 향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조선총독부는 정감록 비상이 걸렸다. 1922년 겨울, 호소이는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부탁을 받았다.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라는 것이었다. 동경의 자택 서재에 틀어박혀 호소이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반도는 우리 대일본제국에 무엇인가. 제국의 용맹스러운 장졸(將卒)들이 목숨 바쳐 강적 청나라도, 러시아도 연달아 무찌른 다음 어렵게 얻어낸 제국의 새 영토가 아닌가. 저 버러지 같은 한국 놈들은 천황폐하의 신민이 된 영광을 모른다. 놈들은 감히 독립을 바라고 있다. 훈련된 군대도 총칼도 없이 맨주먹으로 일어서려는 무지막지한 저들의 맨주먹을 쇠뭉치로 둔갑시키는 것은 독립에 대한 부질없는 열망이다. 거기 불 붙이는 부싯돌이 바로 정감록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든 정감록을 처단할 것이다. 나 호소이로 말하면 천황폐하의 뜻에 언제나 기꺼이 순종하고 순수한 대일본제국 신민의 고귀한 혈통에 무한한 자긍심을 느끼는 위대한 제국의 충량한 신민이 아닌가. 우리 대일본제국으로 말하면 단일하고 순수한 혈통이 천만대를 두고 이어져온 아름다운 나라. 그에 비할 때 이른바 저 한국 놈들은 어떤가. 놈들은 우선 생리학적으로 열등하다. 혈액만 하더라도 한국 놈들의 피는 ‘거무칙칙하고 더럽다.’ 그렇기 때문에 이조 500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일어나 수많은 인명이 살상됐지만 나라꼴은 늘 엉망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한국 놈들은 유전인자 자체가 불순하고 열등하다. 따라서 놈들에게 밝은 미래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천황폐하의 자애로운 품속에 있을 때만 그들은 행복을 바랄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나는 이미 두 권의 저서에서 명확히 입증했다.‘조선문화사론(朝鮮文化史論)’과 ‘조선 문제의 근본적 해결(朝鮮問題の根本的解決)’이 그것이다. 한국에 대한 나의 전문적인 연구는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바쳐질 것이다. 실용성이 없는 학문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대일본제국의 발전을 위해, 무지하고 악랄한 한국 놈들의 순화를 위해 나의 저술은 두고두고 쓰일 만한 것이다. 탁상공론으로 걸핏하면 양심을 들먹이는 비겁하고 위선적인 놈들이 있어 훗날 나 호소이를 대일본제국의 어용학자(御用學者)라고 불러도 좋다. 제국의 영예를 위한 나의 일편단심은 그럴수록 더욱 밝게 드러날 것이다. ●정감록을 죽이는 묘책 호소이는 묘안을 찾기 위해 좀더 생각했다.‘도무지 정감록이란 무슨 책이냐. 조선시대 위정자들도 몹시 두려워했던 책이 아니냐. 위정자들은 정감록을 소지하거나 퍼뜨리는 일체의 행위를 범법 행위로 간주했다. 그런데 혹독한 금압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감록은 널리 퍼져나갔다. 지금 반도의 덜떨어진 한국 놈들이 감히 독립을 바라는 것도 다 그놈의 정감록 때문이다.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공개하라. 그렇다, 금단의 예언서 정감록을 죽이는 방법은 공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감록은 신비함을 잃게 된다. 신비성을 잃어버린 정감록이라면 이미 반쯤은 죽은 거나 다름없다. 또 하나. 기왕에 공개할 바엔 정감록의 정본(正本)을 만드는 거다. 바로 이 호소이가 대일본제국의 정치적 이익에 봉사할 정감록의 정본을 결정한단 말이다. 총독부에서 수집해 놓은 정감록의 이본들을 자세히 살펴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 선동성이 별로 없는 텍스트를 골라 공개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그 텍스트에 살짝 손을 댈 수도 있다. 아주 심하게 손을 대면 조작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영악하고 의심 많은 한국 놈들을 상대로 하는 일인 만큼 더욱 주도면밀해야 한다. 나는 정감록을 순화시킬 뿐이다. 이것은 변조나 개작이 아니다. 나는 대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해, 한반도와 한국 놈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정감록을 편집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잊지 말아야 될 일이 또 있다. 이렇게 교묘한 수단을 부려 김을 빼놓더라도 한국 놈들은 순화된 나의 정감록을 다시 개악하거나 제멋대로 해석할 우려가 있다. 놈들은 워낙 피가 더럽기 때문에 제멋대로니까. 그들의 망령된 행위를 막기 위해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을까. 그래, 예방주사를 놓자! 정감록은 이래서 진짜 믿을 것이 못 된다. 이런 식으로 계몽적인 비평을 잔뜩 써 가지고 독자 놈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다. 정감록의 대가 호소이가 만든 정감록 정본의 맨 앞에 실린 비판을 읽게 하자. ●동경판 정감록에 대한 불만 대일본제국의 충량한 신민 호소이는 이미 수집된 정감록 이본들을 널따란 책상 위에 펼쳐놓고 수술을 시작했다. 일제는 이미 오래 전에 광개토대왕비문까지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변조했다. 정본이 따로 존재할 리도 없던 정감록을 개작하는 것쯤이야 호소이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그의 솜씨와 애국심은 참으로 대단해 불과 몇 달 만에 ‘정감록비결 집록’이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한국인들에겐 억압의 상징인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정감록을 죽이기 위한 음모가 결실을 맺은 날은 1923년 2월15일이었다. 이것이 사상 최초의 정감록 인쇄본이다. 도쿄판 정감록은 인기가 대단했다. 초판으로 몇 부를 찍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출간된 지 약 보름 만에 제3판을 제작할 정도였다. 도쿄판은 아마 일본에서도 상당히 팔렸겠지만 주로는 ‘식민지 조선’에서 소비됐을 것이 뻔한 이치였다. 호소이가 바란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도쿄에서 만든 정감록으로 한국의 정감록 세계를 평정한다는 목표는 어쩌면 단시일 내에 달성될 듯도 하였다. 도쿄서 들어온 정감록이 잘 팔려 나가자 한국의 출판계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정감록을 찍어내면 돈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일각에선 호소이의 민족성 비판에 강한 불만이 제기되었다. 내놓고 맞싸울 형편은 안 되었지만 정감록까지도 ‘그 잘난’ 일본인의 손으로 다듬어진 책을 봐야 되는가 하는 강력한 반발이 없지 않았다. 동경판의 뚜껑을 열어본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경악했다. 호소이는 무지한 한국 사람을 계몽한답시고 무려 50쪽이나 되는 정감록 비평을 썼다. 정감록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치고 나아가 한국 사람의 타고난 ‘야만성’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 논지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한국인들은 태초부터 불합리한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련한 한국 민족의 정신적 미성숙은 그들이 정감록과 같은 미신에 맹목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이렇게 유치하고 야만적인 성격이 한국민족의 본성이다. 국제적으로 저열한 한국의 민족성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한반도의 역사 및 지리적 조건이 빚어놓은 결과다. 당시 유행하던 지리적 결정론을 빌려 호소이는 ‘미개한’ 한국인을 질타했다. 귀신을 숭배하고 점치기를 좋아하는 풍습은 당시 일본사회에서 더욱 성행했다. 그러나 일본민족의 위대성을 맹신한 호소이의 눈에는 그런 현상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야만적’인 한국인까지도 호소이는 마음속 깊이 사랑했던 것일까. 그는 하루바삐 정감록 신앙에서 한국인을 구출하여야만 된다고 믿었다. 합리적이고 발달된 현대 일본사회의 참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한국인은 정감록 신앙을 포기해야 된다. 이것이 호소이의 변(辯)이었다. 그러나 1923년 동경판 정감록을 간행한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대일본제국의 번영을 위해 정감록이라는 정치적 폭탄에서 뇌관(雷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동경판이 제3판에 돌입한 지 보름 정도 지난 1923년 3월19일 김용주가 편찬한 정감록이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편찬에 나선 김용주는 호소이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는 정감록의 내용에 대해 아무런 비평도 보태지 않았다. 딱히 정감록을 옹호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호소이에 대한 무언의 항변이었다. 굳이 김용주가 정감록을 신앙하였다거나, 민족주의자였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정감록에 대해 아무런 비평을 가하지 않은 데는 호소이의 지나친 악평에 대한 반발심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도 김용주에게는 정감록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첫째, 당시 많은 한국인들은 정감록의 내용을 틀림없는 예언으로 믿고 있었다. 식민지의 힘없는 지식인에 불과했던 김용주로서는 대중의 그러한 열망에 굳이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없었다. 설사 그가 남다른 애국심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대한독립이 된다고 믿고 있는 동포들의 기대심리를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둘째, 단순히 책을 많이 팔기 위해서라도 잠재적인 독자들의 희망을 꺾어서는 안 됐다. 김용주의 편집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호소이에 대한 반감을 비롯해, 독립에 대한 기대와 상업적 목적이 골고루 다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김용주는 정감록의 신빙성에 대하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또 하나의 정감록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것은 한성판이라 불릴 만했다. 한성판엔 매우 흥미로운 점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동경판과 공통되는 부분도 상당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았다. 두 판본이 내용 면에서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매사를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민간에 퍼져 있던 허다한 비결 가운데 어느 것은 호소이만, 또 다른 것은 김용주만 수집해서 자연히 그렇게 됐다고 할 것이다. 실제 정감록은 수백 년 동안 필사본으로 암암리에 전파되었기 때문에 각자의 수집본이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동경판과 한성판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비결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야 물론 좀 더 널리 퍼져 있던 유명한 예언서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전국 어디에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 누구나 손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그런 대표적인 예언서 말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동경판을 편집한 호소이가 매우 국수주의적이었단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수집된 정감록을 모두 출판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 달리 말해 진인출현이나 대한독립의 메시지가 약한 ‘순화된’ 비결만을 선별적으로 알리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그는 ‘고약한’ 내용의 예언까지 인쇄에 부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김용주는 달랐다. 그는 도쿄본의 상당수를 답습하면서도 도쿄본에 실리지 못한 다른 비결들을 많이 포함시켰다. 김용주는 호소이가 정감록의 정본을 만들려고 한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도쿄판이 정감록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 진짜 정감록은 훨씬 더 위험한, 폭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정감록을 출간하지는 못했다. 총독부의 검열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결국 호소이의 뜻대로 되다 당연히 김용주의 정감록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의 의도와 배치된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김용주의 한성본이 딱히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점이 없지 않아 조만간 도태되어야만 될 책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식민지 한국의 정세는 한결 경색됐다. 이른바 전시총동원체제가 작동돼 비상시국이었다. 엄격한 사상통제와 감시가 일상화되는 가운데 정감록에 대한 통제도 한 단계 더 나갔다. 그 무렵 새로운 정감록이 나왔다. 현병주의 ‘비난정감록진본’이었다. 마침 경성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를테면 경성본이라 부를 만하다. 그런데 해명돼야 할 문제가 있는 책자였다. 우선 표면상 출간연도가 미상이란 점이 문제다. 책의 간행지를 ‘경성(京城)’이라고 표기해 놓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식민지시기 서울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 경성본이 나온 시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알아내기 위해 나는 본문의 표기법을 자세히 분석했다. 문장의 구조와 맞춤법이 현대의 격식에 가깝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경성본의 간행시기를 1930년대 중반 이후로 확신한다. 경성본은 내용면에서도 앞서 간행된 한성본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경성본은 정감록이 사실무근의 허망한 책자라는 논설을 싣고 있다. 편자 현병주는 정감록의 가치에 대해 직접적인 판단을 보류한 김용주와는 달랐다. 하지만 현병주가 단순히 일본인 국수주의자 호소이를 추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는 정감록의 허구성을 비판하였을 뿐 문제의 궁극적인 원인을 한국인의 저열한 민족성에서 찾지는 않았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점은 현병주가 비결의 내용 중에서 자신이 동의하지 못하는 대목에 대해 일일이 비판을 가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결의 본문에 길지(吉地)에 피난을 가더라도 피난 시기에 따라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부분이 있다. 현병주는 바로 그 구절의 끝에 괄호를 치고는 “생명을 건지는 땅 중에도 종종 생명을 건지지 못하는 곳이 있다.”고 비꼬는 투로 주석을 붙였다. 이와 같이 조목조목 정감록의 내용을 비판함으로써 현병주는 정감록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려 했다. 호소이의 정감록 말살 의도는 현병주에 이르러 더욱 공교해졌다. 나는 현병주가 친일파였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 다만 정감록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정감록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현병주는 호소이의 완벽한 후배다. 현병주는 좀더 중요한 점에 있어서도 호소이의 전통을 계승했다. 나는 지금 경성본에 실린 비결의 내용을 문제로 삼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호소이는 35종의 선별된 비결을 공개했다. 김용주는 그보다 16종이 더 많은 51종을 간행했다. 그런데 경성본에는 25종만 실려 있다. 현병주는 호소이의 동경본과 김용주의 한성본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비결로 한정했다. 결과적으로 말해 그는 호소이가 간행한 비결의 일부만이 정감록의 정본이라는 인식을 심는 데 기여했다. 호소이가 공개한 35개의 비결 가운데 25종은 광복 이후 간행된 여러 정감록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20세기 후반부터 한국사회에서 정감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호소이의 비결을 정본으로 대접하게 됐다. 그렇게 된 줄이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푸른역사연구소 소장)
  • 몰락하는 문명…탈출을 위한 ‘몸부림’

    몰락하는 문명…탈출을 위한 ‘몸부림’

    아시아를 대표하는 아방가르드 댄스의 향연 ‘국제현대무용제(Modafe 2005)’가 22일부터 새달 7일까지 문예진흥원 예술극장과 서강대 메리홀 등에서 열린다. 24회를 맞는 올해 무대의 주제는 ‘몰락하는 문명, 탈출하는 육체’. 예술 속에서의 ‘몸’을 새로운 시각으로 고찰하고, 무용에 대한 고정관념을 단박에 깰 수 있는 전위적 프로그램들로 가득하다. 행사에 나오는 작품은 모두 17편. 해외 초청작 6편, 국내 작품 7편, 해외 공동제작·초청작 2편, 모다페 제작 2편 등이다. 올해에는 특히 미술 영화 건축 연극 등 다양한 장르를 전방위로 넘나드는 영역파괴 작품들이 많다. 대부분 최근 1∼2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들이라 현대무용의 새로운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도 팬들의 기대를 부풀리는 대목. 맥 스튜어트, 빔 반데키부스, 제롬 벨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렐 무용가들이 줄줄이 끼어 있다. 그동안 예산문제로 미뤄져 오던 유럽의 대표적 개념예술가 제롬 벨도 이번에 프랑스 문화원의 지원을 받아 드디어 온다.‘쇼는 계속 되어야 한다’는 배우들이 귀에 익숙한 팝송 18곡을 부르며 가사 내용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내용. 어떤 노랫말에서는 바지춤을 내리고 성기를 꺼내 흔드는 등의 ‘파격적’ 컨셉트로 유명한 작품이다. 무대에 오르는 20명의 무용수들은 모두 전문댄서가 아닌, 연극배우들이란 점도 작품의 신선미를 배가시킨다. 국내 현대미술 작가 사사의 해외 초청작 ‘쑈쑈쑈:‘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를 재활용하다’도 함께 보면 좋다. 제롬 벨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의 기본 아이디어를 활용해 색다른 감상의 묘미를 선사한다. 맥 스튜어트의 ‘망가뜨리기 연구’도 무용팬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서고 앉고 걷고 눕는 등 신체 움직임을 정지, 분리, 반복함으로써 인체동작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빔 반데키부스가 이끄는 울티마 베즈 무용단과 독일 출신의 알코 렌즈가 이끄는 코발트 웍스 등 세계적 안무가들의 작품도 챙겨볼 만하다. 올 여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선보일 예정이었던 울티마 베즈의 야심작 ‘순수’는 세계 최초로 국내 공연을 하게 되는 작품이어서 일찍부터 공연계의 화제였다. 퍼포먼스, 극예술, 설치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파격적 실험무대를 보고 싶다면 일본의 종합예술그룹 덤 타입의 ‘여행’이 좋을 듯하다. 국내 작품으로는 안은미컴퍼니의 ‘렛츠 고’, 하선해의 ‘와유’, 박나훈과 최정화의 ‘처녀길’ 등이 선보인다. 주최측인 한국현대무용협회는 “혼합·혼성을 옹호하는 다문화주의 문화상품들이 만연한 현대사회에서 육체를 성찰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올해 행사의 의미를 설명했다. 공연을 본 뒤 무용가들과 대화할 수 있는 이색 프로그램도 마련된다. 제롬 벨·사사, 덤 타입은 30일과 6월7일 각각 ‘모다페 토크’에서 만나볼 수 있다.2만∼5만원.(02)738-3931.www.modafe.org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③ 호찌민의 친구들

    1931년, 호찌민은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에서 체포됐다. 베트남의 빈 지방법원이 궐석재판으로 호찌민에게 이미 사형을 선고했기에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영국 식민지 당국이 그를 프랑스에 넘기지 않고 추방조치만 취해도 호찌민은 대기 중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총독부로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일단 인도차이나 총독부 손에 넘어가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때 호찌민에게 행운의 밧줄을 던진 사람은 영국인 변호사 프랭크 로스비였다. 변론을 맡은 그는 호찌민을 빅토리아 감옥에서 빼내 보원로드 병원으로 옮겼다. 호찌민이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 영국 식민지 당국과 협상을 통해 호찌민이 싱가포르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수완을 발휘한 것도 로스비였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도착한 호찌민은 세관 관리들에 의해 체포되어 곧바로 홍콩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프랑스의 정보망을 따돌리고 호찌민을 탈출시키기 위해 이번에는 로스비의 부인까지 나섰다. 그녀는 친구인 라벤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홍콩 부총독의 부인으로 시인이기도 했던 라벤스는 지적이고 당당하며, 예의바른 식민지 청년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다. 호찌민이 영국 당국자의 호위를 받으며 몰래 상하이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스비와 라벤스 덕분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행운이 아니었다. 호찌민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강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적들조차도 그를 직접 겪었던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그의 옹호자가 되었다.1945년 베트민의 근거지 떤자오에서 호찌민과 함께 지냈던 미국 공군 필런 중위는 훗날 호찌민을 아주 ‘온화하고 착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군 정보관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일했던 장 라쿠튀는 ‘이 시대의 혁명가로서 이 정도 강한 인내로, 감히 힘의 질서에 도전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달리 있었느냐.’고 되물었다. 1955년부터 1963년까지 호찌민을 수행하며 기록영화를 찍었던 안선(An Son) 감독은 1957년 호찌민의 해외순방 시절을 잊지 못한다.11개국을 연쇄방문 중이던 호찌민이 어느 날 아침 수행하고 있던 일행들에게 어려운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모두 없다고 대답했는데 26세로 막내였던 안선이 당돌하게 손을 들었다. “아저씨가 너무 빨리 걸어서 찍기가 너무 힘듭니다.” 호찌민은 유난히 걸음이 빨랐다. 더구나 안선은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덩치가 큰 외국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뛰어야 했다. “신문 기자들은 수첩 하나, 사진 기자들은 사진기 한 대만 들고 다니지만 전 카메라에 녹음기, 배터리까지 하면 10㎏을 넘게 메고 뛰어야 합니다.” 다른 수행원들이 모두 나무라는 눈길로 안선을 흘겨보고 호찌민의 눈치를 살폈다. 안선도 아차 싶었는데 정작 호찌민은 환하게 웃으며 알았다고 했다. 그날 호찌민은 자주 안선의 위치를 확인하고 걸음을 늦추어 주었다. 그래도 쉬지 않고 매일 밤 11시까지 계속되는 일정은 안선을 녹초로 만들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죠. 그런데 잠결에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잠결에 얼핏 눈을 뜬 저는 깜짝 놀랐어요.” 벌떡 일어나려는 안선의 어깨를 호찌민은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가만히 손을 흔들며 방을 나갔다. “정작 나는 그리고 나서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나는 일행 중에서 가장 어린, 아무 배경도 없는 촬영기사, 그것도 남부에서 올라온 사람일 뿐이었어요. 밤새 생각해보았는데 친아버지도 내게 그래 준 적이 없었어요.” 안선이 결혼해 아이를 얻은 다음이었다. 라오스국왕이 베트남을 방문해서 환영 연회가 열렸다. 연회가 끝난 다음 촬영장비를 챙기고 있는데 배웅을 나갔던 호찌민이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던 사탕을 집어서 그의 주머니에 슬그머니 넣어주었다. 안선이 돌아보자 호찌민은 빙긋이 웃었다. “‘깜 험’ 가져다 줘.” 호찌민은 안선의 3살 난 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지도자가 호 아저씨였어요. 아저씨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 누구나 이런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죽기 전에는 내 심장 속에서 아저씨를 빼낼 수 없을 거예요.” 올해 일흔 넷의 백발 노인이 되었는데도 호찌민을 회상하는 안선의 상기된 얼굴은 소년처럼 해맑았다. 호찌민 주변의 인물들을 만나면서 가장 의외였던 것은 혁명 운동의 전 기간을 통해서 호찌민이 다수파였던 적이 별로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인맥과 세력을 형성해서 정치를 했던 지도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앞세워 인맥을 구축하고 명분을 내세워 다수파가 되려고 하지 않은 드문 정치가가 호찌민이었다. 그렇다고 호찌민이 카리스마가 없는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그는 아주 강력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고, 그의 곁에 포진한 매우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물들에 의해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훼손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다. 호찌민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호위하며 베트남을 이끌어온 사람들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셋 있다.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 그들이다. 쯩 찐은 1941년 호찌민이 베트남에 돌아와 주재한 제8차 당 전체회의에서 총서기장을 맡은 인물이다. 호찌민은 그 자리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정중하게 사양하고 쯩 진에게 그 자리가 돌아가도록 했다.1920년대에 혁명청년회에 가담해 일찍 감옥생활을 한 그는 사교적이지 않았지만 원칙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었다. 팜 반 동은 행정과 재정에 관한 능력이 탁월한 인물로 호찌민이 주석과 겸직하던 총리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베트남 정부를 수립하고 체계를 잡아가는 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의 ‘청렴’은 호찌민 정권의 위신을 높이고 대중의 신뢰를 얻는 데 기여했다.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진영의 가장 출중한 군사 전략가였다.1944년 12월22일,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1975년 사이공 함락작전을 성공시킬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저항 전쟁을 총지휘했다. 이 세 사람과 호찌민의 관계를 베트남 사람들은 ‘한 다리로 서 있는 학의 세 발가락’이라고 불렀다. 학이 베트남이라면 그 학을 받치고 선 한 다리는 호찌민이다. 그리고 그 다리를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세 발가락이 쯩 찐과 팜 반 동, 보 응우옌 잡이다. 그 중에서도 보 응우옌 잡은 호찌민의 가장 충실한 동지이자 제자였다.1940년 신혼이었던 잡은 호찌민의 호출을 받고 아내와 태어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첫 딸을 남겨두고 중국으로 갔다. 그가 떠난 다음 아내 우옌 티 꽝 따이는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아내의 언니인, 우옌 티 민 카이도 사이공의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을 당했다. 잡의 아버지도 훼에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이빨이 다 뽑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죽었다. 호찌민은 악명 높은 꼰다오 감옥에서 갓 출감한 팜 반 동과 함께 쿤밍으로 온 잡에게 옌안으로 가서 군사과학을 공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여행허가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1940년 6월22일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자 호찌민은 두 사람에게 베트남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군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무장투쟁의 책임자가 된 잡의 활약은 눈부신 것이었다.34명의 대원으로 베트남해방무장선전대를 창설한 그는 이틀만에 프랑스군 초소를 공격하여 완승을 거두었다. 그 공격을 통해 무장선전대는 프랑스군의 무기로 무장하고 다음 공격에 나서,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잡은 군대를 눈덩이처럼 불리며 북부 국경지대에 해방구를 확보해나갔다. 프랑스를 내쫓고 베트남을 삼킨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한 이튿날인 1945년 8월16일, 잡은 5000명으로 늘어난 해방군을 이끌고 하노이를 향해 진격했다. 하노이를 접수하고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궤멸시키면서 잡은 세계적인 전략가로 명성을 얻었다. 군사전문가도 아닌, 일개 역사교사 출신에 불과한 잡에게 군대를 맡긴 이유를 묻는 외국기자들에게 호찌민은 대답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졸업장이나 증명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재일 뿐이다.” 그래도 군단급 병력도 없는데 대장 계급은 지나치지 않으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호찌민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우리 베트남에서는 소장과 싸워 이기면 소장을 주고, 중장과 싸워 이기면 중장을 준다. 웨스트모어랜드 장군도 대장 아니었나. 이긴 잡도 당연히 대장이다.” 잡이 진정한 호찌민의 제자라는 사실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에서가 아니라 전술 변경 과정에서 확인됐다. 잡이 디엔비엔푸 전선에 간 것은 전투개시가 임박해서였다. 전선을 직접 확인한 잡은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이 중대한 오류임을 금방 발견했다. 프랑스군의 화력, 장비가 베트남을 압도하고 있었고, 포병과 공군까지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격개시는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고, 병사들은 결사항전의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작전을 연기할 경우 최고조로 끌어올려 놓은 병사들의 사기가 땅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었고 또 우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잡은 중국 군사고문이 지지하는 ‘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을 ‘완벽한 준비, 완전한 승리’ 전술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잡은 사령관이었지만 무조건 명령하지 않고 토론에 붙였다. 토론에서는 언제나 선명한 명분이 힘을 발휘한다. 잡은 인내심을 가지고 반대의견을 설득하고 공격을 연기했다. 그런 다음 병력을 대거 충원하고, 야포를 맨손으로 산꼭대기까지 끌어올렸다. 이 ‘조기공격, 신속승리’ 작전수립에 참여했던 32사단장 레쫑똔은 만약 그 때 잡이 와서 전술 변경을 결단하지 않았으면 베트남은 결코 프랑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전선의 정치위원이던 팜 응옥 목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잡이 일단 멈추고 준비하자고 말했을 때 나는 옷을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속으로 기뻤다.‘조기공격, 신속승리’ 전술에 따르면 자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로 평가받을까봐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잡이 했다.” 보 응우옌 잡은 디엔비엔푸의 전술 변경이 자신의 ‘지휘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최근에야 밝혔다. 명분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개인의 영예를 위해 인민을 희생시키지 않는 호찌민의 노선을 그는 언제나 견지했다. 호찌민이 운명한 다음 살아있는 지도자들 중에서 베트남인의 가장 큰 존경을 받는 그는 지난 4월30일에 열린 승전3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직접 연설을 하고, 전쟁 희생자들을 챙겼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스승이자 동지인 호찌민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다.1975년 4월30일, 사이공의 대통령궁을 접수하고 가장 먼저 잠든 호찌민에게 찾아가 그 사실을 보고했던 잡. 자신의 공적에 대한 질문을 받은 그의 대답은 올해도 변함이 없다. “나는 호 아저씨의 노선과 방침을 직접 적용하고 실행해온 지휘관이었을 뿐이다.” 1983년 그가 ‘국가출산계획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됐을 때 거절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과 프랑스, 미국, 중국과 싸워 베트남을 지킨 전쟁영웅에게 그 자리는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히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받아들였고, 지금도 그것에 대해 말이 없다. 베트남이 지금까지 권력의 암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잡과 같은 호찌민의 사람들이 호찌민 정신을 자신의 삶으로서 지켜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방현석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0)인천 제물포, 천년의 역사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0)인천 제물포, 천년의 역사

    중국을 겨냥하여 ‘서해안 시대’를 부르짖고 있지만 그 보다 훨씬 이전부터 인천은 서해안의 대중국 창구이자 교두보였다. 강화 고인돌과 단군의 유향(遺香)이 전해지고,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되는, 미추홀과 비류백제로 상징되는 해양세력의 거점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인천시의 남동갯벌, 도장리에서 승학천을 따라 이어지는 저지대는 바닷물이 들어오거나 습지였기에 문학산과 승학산이야말로 지리·환경적으로 초기국가 단계의 도읍지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백제시대에는 대외 창구로 기능하여 오늘날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의 능허대를 거점으로 해 중국과 넘나들었다. 한강 하류인 인천을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산둥반도 등주에 이르는 등주항로야말로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칠때 이용한 바로 그 항로이다. 오늘날 능허대는 아파트촌에 뒤덮이고 말았으나 조선 후기 읍지에 ‘백제조천시발선처(百濟朝天時發船處)라 하였듯 역사의 현장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인천이 한반도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뜬’ 것은 역시나 조선시대가 아닐까. 수도 한양에 이르는 입구, 이른바 인후지지(咽喉之地)로 온갖 역사의 영욕을 지켜보았다. 서해 뱃사람들에게 ‘행주참을 댄다.’는 말이 전해진다. 조수, 즉 밀물이 몰려들면 바닷물은 강물 위로 뜨고 바다로 내려가는 강물은 밑으로 깔리는 원리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인천쪽에서 한강을 거슬러 행주나루를 거쳐 마포까지 직행하는 뱃길 노정을 이르는 말이다. 바로 그 뱃길을 따라서 열강들이 빈번하게 침범을 강행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는 수많은 포대가 이를 웅변해준다. 대개의 개항장이 시련을 겪으며 탄생했지만 인천만큼 열강들의 침략의 손길이 가장 강력하고도 직접 뻗친 곳이 또 있으랴.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는 바로 이런 개항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는 증거물이다. 조선에 진출하려는 열강들은 인천 해역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그것으로, 선조들은 이들의 도래를 온몸으로 싸워 막았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에 조선 진출의 기선을 제압하고자 운요호(雲揚號)사건(1875)을 감행했고, 끝내 조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1876)으로 문을 열게 되었음은 교과서적 상식이다. 구미 열강과도 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니 은둔국 조선은 갑자기 봇물 터진 외압을 직접 받게 된다. 한적한 어촌에 불과하던 제물포는 하룻밤 새 개항장으로 둔갑하여 1883년에 인천해관과 감리서가 설치되고, 각국 영사관과 외국인 조계들이 설치되기에 이른다.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 일본의 전쟁을 위하여 조선땅을 내준 꼴이 됐으니, 이후 일본군의 군화발이 인천항을 자기 땅처럼 짓밟았다. 1892년,‘일본 밖에서 일본인 손에 의해 이루어진 가장 완벽한 일본책’으로 자평하는 ‘인천사정’이란 책자는 당시 ‘일본 영사관이 일장기를 아주 높게 휘날릴 수 있는 좋은 위치에서 장엄하고 수려하게 인천항을 삼킬 듯 바라보고 있다.’고 썼다. 정말 그들은 인천항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삼켜버렸다. 그 후 우체국, 경찰서, 일본거류지의회, 인천상법회의소, 무역상조합, 잡화상조합, 영어소학교, 공립소학교, 교토의 본원사(本願寺), 공립병원와 강제병원, 정미소, 제물구락부, 조선신보, 활자소, 그리고 제일국립은행, 제18국립은행, 제58국립은행, 일한무역상사, 우선주식회사의 일본지점 등이 속속 들어섰다. 대불호텔과 이태호텔, 수월루 등의 여관도 들어섰다.‘근래 불경기라는 소리가 인천항의 온 시가를 뒤덮는 데도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花紅柳綠) 흥청대기 이를 데 없으니 술집에는 어린 소녀들도 많았다.’고 한 기록도 있다. 이로써 유곽이 번창하여 도심까지 집창촌이 뻗어 나가 항구를 드나드는 뭇사내들을 유혹하였다. 교회도 빠질 수 없었으니 영국 성공회를 필두로 답동성당, 내리교회 등이 속속 들어섰다. 수출입세를 관장한 해관(海關)만큼은 조선정부 관할이었다. 물론 해관 운영에 ‘왕초보’였기에 대대로 영국, 독일, 일본인 등이 도맡아 했고 그들은 그야말로 ‘엿장사 마음대로’ 개항장을 농락하였다. 일본인들이 잘못된 협약서를 근거로 세금을 내지 않고 부를 축적했던 수탈 과정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당시 수입된 면직물은 대부분 영국제로 일본인이 수출을 독점했는데 영국도 저렴한 세금을 관철시켰다. 제국주의 경제침탈의 전형적인 모습이 인천항에서 관철되었다. 개항 당시 서울은 ‘좋지 않은 분위기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인천에 들어와 사는 사람이 적었고, 총인구 2649명 중 쓰시마, 나가사키 사람들, 그리고 시모노세키가 위치한 야마구치(山口), 규슈의 오이타(大分)사람들이 주류였다. 일제침략기를 통해 대개 한반도에서 가까운 규슈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건너왔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그쪽 방언들이 즐겨 쓰였으며, 도쿄, 오사카, 쓰시마 등 여러 곳의 언어가 섞인 것을 ‘인천어’라 부르기도 했다. 이후 인천에는 관리 세관원 은행원 회사원 무역상 중개인 운수업 하역업 여관 요리점 목욕탕 음식점 양주집 일본주점 약국 의사 사진사 이발업 재봉업 활판인쇄업 세탁소 양조장 대장간 오락실 과자점 창고업 고용직과 잡상 목수 석공 농업 등 온갖 직종 종사자들이 모여 들었다. 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장차 식민지가 될 조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청일전쟁 등이 터졌을때는 자발적으로 전선구호와 간호 등에 힘을 보탰으며 스스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즉, 개항장에 나와 있던 일본거류민들을 순수한 의미로만 볼 일이 아니다. 일본의 관민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 움직였다.‘생돈’이 생기는 만큼 화려한 의복과 음식으로 사치를 부렸다. 웅장한 반양반일(半洋半日) 가옥들이 앞다퉈 들어섰다. 개항장은 일본거류지, 각국거류지, 중국거류지로 삼분되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확연하다. 은행건물 등이 남아있는 일본인 거리, 음식점이 즐비한 중국인 거리가 그것이다. 각국 거류지라고는 해도 19세기말에는 영국인 7명, 독일인 13명, 미국인 4명, 프랑스인 3명, 이탈리아인 1명 등이 거주했을 뿐이고 대개 일본·중국인들이었다. 그런데 각국거류지 회의는 인구비례가 아니라 국적별로 참여하도록 했으며, 서양인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게다가 회의조차 영어로 진행하니 일본인들로서는 못마땅한 일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결국 일본인들은 대대적인 간척을 통해 땅을 확보, 도심을 불려나갔다. 오늘날 인천항 주변이 대부분 간척지인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그렇다면 조선인들의 대응은 전무하였던가. 인천 출신의 역사학자 임학성(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교수는 “인천객주협회를 모체로 1897년에 설립된 인천항신상협회는 민족 상인의 상권을 옹호·신장하였다.”고 지적한다. 인천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에서 역주한 ‘인천개항25년사’(1907)를 보면, 조선인들은 오늘로 치면 송월·전·복성·인현·경·신포·답·신생·사·유·신흥·선화·도원동 등에 몰려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개항 초기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의 상권 경쟁이 치열했다. 중국인들은 특유의 근면과 상업적 재기를 토대로 일본에 맞섰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결국 중국 상권도 몰락했다. 그럼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자 중국인들은 다시금 성실하게 상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천시가 중국인거리를 대대적으로 조성할 수 있는 터전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중국집이나 운영하고 살았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들은 옥양목 같은 옷감장사에 남다른 재주를 발휘하여 상권을 장악해 ‘비단장사 왕서방’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조선의 쌀을 싸게 사들여 일본에 되팔아 엄청난 돈을 거머쥔 자들이 생겨났으며, 경인철도가 부설되자 서울을 오가는 보따리장사는 물론이고 석유장사 등으로 일본인들 역시 큰 돈을 벌어들였다. 군인들이 자주 부르는 ‘인천의 성냥공장’이란 노래도 당시 이후 첨단 공장인 성냥공장이 인천에 많았음을 방증하며, 그만큼 선진적 공장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의 하나였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이제 인천은 일본인 대신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길목이 되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거니와 산둥반도 등지를 오가는 페리에서 사람과 짐을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중국인 거리에 가면 대하소설 삼국지를 연작 벽화로 그려놓아 길거리를 걸으면서 책읽기를 끝낼 수 있게 해놨다. 게다가 원조자장면집을 아예 자장면 박물관으로 개관할 예정이라니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박물관만큼은 ‘대박’이 예감된다. 하고많은 박물관 중에 자장면 박물관은 특이성도 돋보이지만 인천에 딱 어울리는 까닭이다. 김춘선 인천해양수산청장은 “거대한 대중국 서해시대의 거점이기도 하지만 대북 통일시대의 거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남포, 해주 등지를 오가는 화물선들이 끊임없이 사람과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다. 북핵문제 등으로 긴장이 조성되고 있지만 바닷길만큼은 항상 열려 있어 민족화합에도 이바지하는 셈이다. 인천항의 고민이 없는 것이 아니다.1970년대에 대대적으로 건설된 파나마식운하의 물을 가두었다 풀어 놓는 갑문이 낙후해 머잖아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야 할 형편이다. 갑문으로 가보니 5만t,10만t급의 거대한 선박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러나 인천항도 이제는 외항시대로 접어들었다.“인천항도 북항 등을 대대적으로 건설,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돌이켜 보면, 일제시대의 인천은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다. 고베와 나가사키 쓰시마 부산 원산 톈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잇는 정기연락선이 오고갔으니 지금보다도 훨씬 바다를 통한 국제간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러시아와의 교류가 근자에 이뤄졌음을 감안할 때, 바다를 통한 교류는 무려 반세기나 묶여 있다가 재개된 셈이다. 당시 인천은 ‘완연한 한국의 요코하마’로 불렸다. 국제 첨단 신도시로 개발되는 송도신도시가 완공되면 인근 인천공항과 더불어 인천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 분명하니 돌고 도는 역사의 변화가 다시 온 몸으로 느껴진다.
  • 부시 ‘북핵제재’ 푸틴 동의 얻기

    |도쿄 이춘규특파원·서울 장택동기자|북핵문제가 나날이 긴장을 더해 가고 있는 가운데 미국·러시아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다룰 것으로 예상돼 그 결과가 주목된다. 이르면 이달 말 북핵문제를 안보리에 회부하는 절차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오는 9일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2차 세계대전 승전 60주년 기념식에 참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북핵문제 등을 논의할 것이라고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4일(현지시간) 밝혔다. 해들리 보좌관은 “미ㆍ러 정상회담에서 특별히 정해진 의제는 없지만 6자회담 참석을 거부하고 있는 북한 문제가 다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부시 대통령이 북핵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기에 앞서 거부권을 갖고 있는 러시아의 동의를 구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특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태도를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의 동의를 얻어 북핵 문제를 안보리에 회부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북한이 요구하고 있는 북·미 양자회담에 대해서도 리처드 바우처 국무부 대변인은 4일 “6자회담 맥락 속에서 양자 논의를 가질 수 있다.”며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북한이 6월 핵무기 실험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라 나오면서 북핵문제의 안보리 회부 시기가 앞당겨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산케이신문은 5일 미국과 일본은 북한이 6자회담 복귀에 긍정적 자세를 보이지 않을 경우 이달 말부터 대북 경제제재를 위한 안보리 회부절차를 시작하는 방안을 조정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북한을 제외한 6자회담 참가국들이 5자협의를 개최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외무성 고위 관계자는 “영국과 프랑스도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미·러 정상회담에서 러시아가 동의한다면 중국의 태도에 따라 안보리 회부가 급진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은 북한을 지지하면서 6자회담에 복귀하라고 설득해 왔다. 장옌 중국 외교부 군비통제국장은 3일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에서 6자회담에 의한 북핵문제 해결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압박하고 있고 북한은 움직이지 않고 있어 중국도 더이상 북한을 마냥 옹호하기는 어렵다는 관측도 있다. 특히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할 경우 중국측이 북한 지지입장을 철회할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다. 7∼10일 라트비아·네덜란드·러시아·그루지야 등을 차례로 방문하는 부시 대통령은 ‘자유의 확산’을 재차 강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 대통령이 옛소련 국가를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다. 해들리 보좌관은 이번 순방의 목적에 대해 “독재를 물리치기 위한 수백만명의 미국인·유럽인 등의 희생을 기리는 것”이라면서 “동시에 유럽과 세계 전역에서 민주주의의 성장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taein@seoul.co.kr
  •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1) ‘통일 베트남’ 의 붉은 별

    [방현석교수의 테마로 읽는 호찌민] (1) ‘통일 베트남’ 의 붉은 별

    ‘Nho Co Bac Ho’, 이 노래를 부를 줄 모르는 사람은 베트남 사람이 아니다. 정확하게 30년 전 1975년 4월30일 사이공 한복판에 자리 잡은 대통령궁. 굳게 닫힌 철문을 부수고 탱크 한 대가 거침없이 돌진해 들어갔다. 거의 동시에 다른 두 대의 탱크가 대통령궁 정면의 담장을 밀어제치며 쇄도했다. 탱크 위로 펄럭이는 깃발에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의 황색별이 새겨져 있었다. 곧 이어 대통령궁 앞마당에 게양되어 있던 사이공정권의 깃발이 내려지고 NLF의 깃발이 올라갔다.30년간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고 베트남이 ‘독립’과 ‘통일’을 양손에 움켜쥐는 순간이었다. 남베트남 해방전선의 전사들과 베트남 인민군대의 병사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이 순간만을 고대하며 신화처럼 싸워온 그들이 마침내 움켜쥔 기적같은 승리였다. “Vietnam Muon Nam(베트남 만세)! HoChiMinh Muon Nam(호찌민 만세)!” 이 환호는 곧 사이공시가지를 메우고 베트남 전역을 진동시켰다. 베트남 만세, 호찌민 만세. 일본과 프랑스, 미국을 차례로 물리치고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한 감격적인 순간, 베트남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바로 호찌민이었다. 호찌민은 베트남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는 베트남의 남과 북, 전사와 인민을 결속시키는 힘이었다. 승리의 이 기쁜 날 호아저씨 같이 있는 것 같네. 호아저씨 말한 것처럼 휘황한 승리 거두었네. 산천을 되찾기 위한 우리의 30년 투쟁 민주공화국의 30년 항쟁 기어이 성공했네. 베트남 호찌민. 베트남 호찌민. 베트남 호찌민. 베트남 호찌민. - Nho co Bac Ho (박호가 있는 것처럼)가사 전문 이 노래를 부르며 베트남인들은 호찌민을 그리워하고 혁명의 승리를 기뻐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만든 것이 누구인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이 노래의 임자는 참으로 의외의 인물이었다. 팜 투인.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음악가인 그는 프랑스식민 치하에서 위세를 떨친 세도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팜 꾸인은 프랑스가 세운 식민왕조의 최고위 관직인 상서를 지냈다.1945년 8월 혁명의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 팜 꾸인은 혁명세력에 의해 사형을 언도받았다. 호찌민은 그를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고 직접 그를 만나겠다는 뜻을 하달했다. 그러나 호찌민의 명령이 도달했을 때는 이미 그의 사형이 집행된 다음이었다. 아마 호찌민의 명령이 조금 더 빨리 당도했더라면 응오 딘 지엠(사이공정권의 대통령)과 같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가 혁명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했지만 팜 투인은 혁명진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고 함께 싸웠다. 그리고 혁명세력이 승리를 거둔 날 호찌민을 기리는 노래를 만들었다.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 오늘도 바딘광장에 있는 호찌민의 영묘 앞에는 끝을 찾을 수 없는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베트남에서 모든 것이 변해도 조금도 변하지 않는 풍경이 이것이다. 시장경제 제도의 도입을 근간으로 하는 개혁정책이 본격화된 지난 10여년 동안 베트남의 모습은 엄청나게 변했다. 자전거가 물결을 이루고 있던 하노이의 거리는 이제 오토바이의 차지가 되었다. 사이공의 거리는 이미 오토바이를 밀어내며 자동차가 점령하기 시작했다. 시속 20km를 낼 수 없었던 하노이와 사이공을 잇는 1번국도 위에는 트럭과 버스들이 맹렬하게 질주하고 있다. 평균 시속 60km,80km를 넘나들며 아찔아찔하게 추월을 감행하는 차량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차량의 속도만 변할 리 없다. 베트남 사회 또한 시속 20km에서 시속 60km,80km의 사회로 급변했다. 베트남인들의 삶과 생각도 마찬가지다. 시장경제는 이제 돌이키기 어려운 속도로 베트남의 일상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고 있다. 베트남을 상대로 20여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고, 그 후로 20년 넘게 경제봉쇄를 감행했던 미국의 대사관이 하노이에 복귀했다. 미국의 동맹국으로 베트남에 총을 겨누었던 나라들은 미국보다 더 빨리 손을 내밀어 대사관계를 맺었다. 미국의 제 1동맹국으로 32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던 한국은 베트남의 주요 교역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베트남에 대한 투자규모에서도 한국은 최상위 순서를 다투고 있다. 한국의 TV드라마는 베트남의 안방을 장악하고 한국 연예인들의 동향은 베트남 잡지에서 빠지지 않는 고정 꼭지가 되어 있다. 베트남의 작가들은 한국문학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보트피플’이 되어 조국을 등졌던 미국의 협력자들도 베트남으로 돌아오고 있다. 승전 30주년을 사흘 앞둔 4월27일, 베트남 국영TV는 놀랍게도 사이공 정권의 총리를 지낸 응웬 까우 끼의 인터뷰까지 내보냈다. 그러는 한편으로 베트남의 사회주의적 정책들은 대폭 후퇴했다. 무상으로 제공되던 교육과 의료서비스 비용의 대부분을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항미전쟁의 전 기간 동안 중국 러시아와 함께 베트남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북한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400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베트남을 경유해서 한국으로 ‘기획입국’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북한은 ‘초보적인 의리도 모르는 행위’라고 베트남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종전 30주년을 맞은 베트남은 항미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통일을 이룩한 지난날의 영광을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바꾸어나가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과거를 닫고 미래로 가자.’ 당과 정부는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여전히 사회주의를 국가성격으로 하고 공산당에 의한 일당지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베트남의 모든 것은 달라졌다. 달라지지 않는 단 하나는 호찌민에 대한 베트남 인민들의 흠모와 존경이다. 베트남의 모든 것이 달라진 지금도 그의 영묘 앞에 사람들을 줄서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도이머이도 호찌민사상에서 비롯 호찌민의 동지로서 남부혁명을 지도했던 쩐 박 당은 베트남의 개혁노선, 도이머이를 일관되게 옹호해온 원로다. 호찌민 노선에 가장 정통한 이론가이기도 한 그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당과 정부, 어느 쪽의 직책도 맡지 않고 오랫동안 야인으로 살아왔지만 베트남에서 그가 행사하는 영향력은 막강하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그와 약속을 잡았는데 늦고 말았다. 여성영웅인 따 띠 끼유와의 인터뷰가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늦었는데 택시기사가 집을 곧바로 찾지 못했다. 몇 번이나 주소를 되묻는 그에게 메모한 주소를 내밀었다. 우옌 민 호앙거리의 42-65. 다시 차를 돌려 지나온 길을 되짚어가며 번지수를 확인해보지만 찾지 못했다. 기사가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헛수고였다. 쩐 박 당, 내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기사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쩐 박 당이라고 했어요?” 그렇다고 하자 택시기사는 자신 있게 창문을 내리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시 물었다. “쩐 박 당 선생의 집이 어디예요?” 새로 생긴 넓은 골목을 가리켰다. 곁에 두고 한참 동안 헤맨 것이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공동주석을 지낸 쩐 박 당은 여전히 남부베트남에서 가장 신망이 높은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1968년부터 1973년까지 사이공당서기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사이공에서 쩐 반 저우와 함께 남부혁명가를 대표하고 있는 인물이다. “1945년, 프랑스가 사이공에 돌아왔지요. 그리고 ‘남끼’정부를 세웠어요. 총리, 국회, 군대, 다 갖췄어요. 그런데 없는 것이 단 하나 있었어요. 그 나라에는 국민이 없었지요. 프랑스가 물러간 다음에는 미국이 또 하나의 정부를 세웠지요, 베트남 민주공화국. 대통령을 수없이 갈아치웠지만 미국은 늘 지고 있었어요. 그들이 패배한 가장 큰 요인은 그들에게는 국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호찌민이 없었지요.” 미국이 가지지 못한 국민을 가진 사람이 호찌민이었다. 쩐 박 당은 호찌민이 단순히 분단된 땅을 통일시킨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베트남인의 모럴과 사상을 통일시킨 사람이 호찌민이었다. 심지어 마을의 분쟁에서도 최종적인 판단의 기준은 그것이 과연 호찌민의 뜻에 부합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베트남이 앞으로 정치제도를 바꿀 수 있고, 체제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찌민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오늘날 베트남의 변화하는 현실과 호찌민노선과의 관계에 대해서 묻는 나에게 쩐 박 당은 이렇게 되물었다. “10년 전부터 베트남에 왔다니까 아시겠죠. 얼마나 많이 변했습니까?” 10년 전의 베트남과 지금의 베트남은 비교하기조차 어렵다. 빠른 속도로 변해온 한국도 베트남의 최근 10년과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10년 전이면 우리가 도이머이에 들어간 지 7년이 지난 다음이었어요. 그 전에는 더 어려웠어요. 해방 후 10년간 우리는 정말 어려웠어요. 쌀은 터무니없이 모자랐고, 굶주리며 고구마 따위로 겨우겨우 연명했지요.” “전쟁이 끝났는데도 우린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미국의 경제봉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원인이 미국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어요. 우리는 미국을 몰아냈고, 스스로 책임져야 했습니다. 우리는 호찌민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재검토에 들어갔습니다. 그 해석에 입각한 첫 번째 실천이 도이머이였던 거예요.” 호찌민은 일찍이 말했다. 혁명을 하고도 인민이 여전히 가난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혁명을 하고도 여전히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예전에 우리는 ‘평등’을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가난을 공평하게 나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똑같이 나누어야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풍요라야 합니다. 나누는 것은 가진 것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비록 맹목적인 평등에 대한 경계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쩐 박 당의 견해는 역편향으로 기우는 것은 아닐까. 질문을 던져보았다. “분배와 생산력의 향상, 현실에서 이 두 가지는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곤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것 하나를 먼저 해결하고 다른 것을 해결해야 하는 선후의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요? 두 가지의 문제는 언제나 동시에 검토되어야 할 중요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나이를 실감할 수 없게 명쾌하고 정연하게 논리를 전개하던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시 입을 연 그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은 일본 통치에서 벗어난 지 60년 되었지요? 그 중에서 3년 동안 전쟁을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정권 가진 지 60년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30년을 전쟁했습니다. 조선에 비하면 10배의 시간을 전쟁으로 보냈어요. 이 상처에서 벗어나려면 10배의 노력이 필요해요. 호찌민주석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누구나 먹고, 학교 가고, 잘 곳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호찌민 주석이 가려고 했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호 주석의 뜻에서 벗어나곤 했지만 언제나 우리는 호주석의 길에서 벗어나려는 자들을 제재해왔고, 앞으로도 제재해나갈 겁니다. 지금 우리의 원칙은 간단합니다. 자기의 노동으로 거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베트남을 움직이는 것은 호찌민노선이다. 베트남의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호찌민의 지도노선이 지금은 베트남의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뒷받침하는 지도노선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호찌민의 어록이 더욱 빈번하게 불려나오게 될 것을 예고하는 쩐 박 당에게 물었다. “호찌민이 베트남을 가두는 또 하나의 도그마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있나요?” “나와 내 친구들은 호찌민을 성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나와 내 친구들이 원하는 것은 호찌민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모럴로서 말입니다. 그는 정치가로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지만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늘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지금도 우리는 호찌민이 우리의 일상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매일매일 확인하게 되지요.”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 bang80@jowoo.co.kr ●자료 사진을 협조해주신 주한베트남대사관과 베트남통신사(VNA)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히 애써주신 베트남통신사 부 주이 흥 서울지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임해리의 色色남녀]보고서? 보고 서?

    1953년 미국에서는 ‘플레이보이’가 창간되고 20세기 성 혁명을 가져온 ‘인간여성의 성적행동’이 출판되었다. ‘플레이보이’가 도색잡지로 남성들의 성적팬터지를 충족시키는데 상업적 성공을 이룩한 잡지였다면 ‘인간여성의 성적행동’은 미국인들의 성생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연구서였다. 바로 그 유명한 ‘킨제이보고서’의 여성판이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고 한다. ‘킨제이보고서’는 앨프리드 킨제이(1864∼1956)가 인디애나 대학 동물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성교육 강좌를 위한 목적으로 미국 성인남녀의 성생활을 인터뷰한 연구서였다.10년의 연구 결과 1948년 ‘인간남성의 성적행동’을, 1953년에 ‘인간여성의 성적행동’을 발표하였다. 미국 성인남녀 1만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성생활에 대한 이 연구결과는 미국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성교 빈도 수와 전희에 사용되는 시간, 성적 파트너의 수나 1주일에 자위를 몇 번 하는가 하는 등등의 문제보다 여성들의 성생활에 대한 내용 때문이었다. 미국여성 6000명 중 50%가 결혼 전 섹스를 한 경험이 있고 25%가 혼외정사를, 그리고 28%가 동성애 관계를 한 적이 있다고 답변했던 것이다. 또한 64%의 여성이 결혼 전에 오르가슴을 느꼈다는 사실은 여성의 성욕과 성적표현을 인정하지 않았던 미국사회에 폭탄선언이었던 것이다. 종교적 보수주의가 강했던 당시에 청교도적 윤리를 중시한 도덕주의자들은 비도덕적이라 비난하며 경악하였고 급기야 미 하원 특별조사위원회가 킨제이박사의 연구를 조사하면서 록펠러재단은 연구소의 지원을 중단하였다.‘킨제이보고서’는 미국에서는 ‘플레이보이’보다 더 위험한 책이라는 낙인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팔리게 되었고 이후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었다.‘킨제이보고서’는 당대에도 미국 백인남녀에 국한된 조사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으나 성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연구라는 점과 여성의 성적 평등에 기여한 사실은 대단한 성과였던 것이다. 2004년 미국에서 ‘킨제이보고서’라는 영화가 개봉되면서 기독교 복음주의와 가톨릭 보수단체 등 부시대통령을 재선시킨 지지세력들은 이혼율 및 성병증가와 포르노물 범람에 킨제이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영화의 개봉을 반대하였다. 반면에 옹호론자들은 인간의 성적자유에 이바지했던 킨제이에 대한 영화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 문제의 영화가 5월에 개봉된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궁금하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현대인의 성생활’이 출간되었다.1999년부터 2년에 걸쳐 프랑스에 거주하는 140명의 다양한 직업과 계층, 인종을 대상으로 한 성생활 보고서였다. 국립과학원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모시 라보라는 사회학자가 노동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연구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프랑스의 인구정책, 에이즈예방, 성교육, 문화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체계적인 성교육은 받지 못한 채 근거도 없는 ‘카더라’통신과 ‘야동’과 ‘번쌕’에 감염된 성인이 많은 우리 사회에도 한국인의 성생활 실태보고서가 정책적 지원으로 나올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한국판 킨제이보고서가 발표된다면 우리 사회도 한바탕 홍역을 치르게 되리라 예상한다. 개인적으로는 그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 日정치권 우익 득세하나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국민들은 대표적 우익 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와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대리를 각각 ‘차기총리 적합 인물’ 1,2위로 꼽아 일본사회 우경화의 심각성을 보여줬다. 요미우리신문은 24일 ‘전쟁 후 60년’에 관한 전국 여론조사 결과, 차기총리 적합인물 항목에서 주변국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이시하라 지사가 31%로 1위를 차지했고, 북한 비난과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앞장서 옹호하는 아베 간사장대리가 29%로 2위를 각각 차지했다고 보도했다.3위 역시 우파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16%)였다. 2년전 조사와 비교해 이시하라 지사는 4%포인트, 아베 대리는 6%포인트 지지율이 올랐다. 4위는 다나카 마키코 전 외상,5위는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부대표,6위 간 나오토 전 민주당 대표,7위 오카다 가쓰야 현 민주당 대표였으나 4위 이하는 모두 한 자릿수 지지율에 그쳤다. 지난 9·10일 면접방식으로 실시된 조사에서는 또 전후 일본 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항목에서는 다나카 전 외상의 부친으로 ‘인간불도저’라고 불렸던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18.9%)가 1위였다.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15.9%)가 2위,3위는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8.6%)였다. 재계인물인 마쓰시타그룹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3.7%)가 4위였다. 현재 일본 정치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조직으로는 관료(38%)와 미국(26%)이 자민당과 재계를 밀어내고 각각 1,2위를 차지했다. 총리는 23%로 3위였다. 지난 1970년 실시된 조사에서는 1위는 자민당(48%),2위는 재계(27%)였고, 관료는 6%, 미국은 11%였다. 일본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는 비관적 견해가 55%로 낙관적 견해(41%)를 앞섰다. taein@seoul.co.kr
  • 볼턴 유엔대사 인준 두고 부시·파월 물밑 ‘신경전’

    |워싱턴 이도운특파원|존 볼턴 유엔대사 지명자의 인준을 둘러싼 논란이 백악관과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간의 미묘한 신경전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볼턴 지명자 인준이 점차 불투명한 상황으로 바뀌자 21일(현지시간) 볼턴을 직접 옹호하며 조속한 인준을 의회에 촉구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보험중개인 모임에 참석,“볼턴의 탁월한 경력과 국가에 대한 봉사정신으로 미뤄볼 때 유엔대사에 적임자”라며 “상원은 당쟁을 거두고 볼턴 지명자를 인준하라.”고 촉구했다. 부시 대통령이 직접 나선 것은 볼턴의 인준이 곧바로 연방법원 판사 후보 인준, 사회보장제도 입법 처리와 연결되는 등 부시 2기 행정부와 의회간의 역학관계를 가늠하는 중요한 분수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뉴욕타임스는 이날 공화당 중도파의 신망을 얻고 있는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이 볼턴을 지지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보도를 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파월 전 장관은 상원 외교위에서 볼턴 인준에 유보적 태도를 보인 링컨 차피, 척 헤이글 의원 등이 자문을 구하자 역시 유보적 입장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파월 전 장관은 볼턴 지명자가 국무부 군축 및 국제안보 담당 차관 시절 러시아와의 탄도미사일 협상 등 업무를 잘 처리하기도 했지만 부하직원을 다루는 태도 등 몇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는 의견을 밝힌 것으로 이 신문은 전했다. 앞서 공화당 출신의 전직 국무장관 5명이 볼턴을 지지하는 서명을 했을 때도 파월은 참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파월은 “집단 서명에는 가담한 적이 없으며, 의견이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사안에는 서명하지 않는다.”고 공화당 의원들에게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재임중 부시 행정부의 매파들과 맞서온 파월은 부시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이후 “장관직을 계속하겠느냐.”는 ‘의례적인’ 질문조차 하지 않은 채 콘돌리자 라이스를 후임으로 지명한 것을 서운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dawn@seoul.co.kr
  • [신연숙칼럼] ‘망언’의 자유 제한

    [신연숙칼럼] ‘망언’의 자유 제한

    한승조, 지만원 등의 일제관련 망언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함께 반박 글을 쏟아냈다. 그러나 “백범 김구는 빈라덴, 일본경찰을 이유없이 죽인 살인범” “일본 대사관에서 집회를 하는 할머니 가운데 80%는 가짜” “전쟁 중에 여성을 성적 위안물로 이용하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며, 그것도 일시적이고 예외적 현상이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일일이 반박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짜증스러운 일이다. 정말 이런 망언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수는 없을까.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가 방안을 내놓았다.‘일제찬양 행위자 처벌 특별법’을 제정하여 망언을 처벌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한나라당 원희룡의원도 ‘일제침략행위 왜곡 및 옹호방지법안’제정 구상을 밝혔다. 친일진상규명법에 따라 진상규명위가 친일범죄, 또는 친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한 행위를 옹호·찬양하는 경우 처벌할 수 있도록 별도 법률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아직까지 별다른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다. 반응을 보인 곳은 오히려 반대의사를 표명한 쪽이다. 표현의 자유 침해가 우려되고 폐기돼야 할 국가보안법의 찬양죄 조항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이런 법을 제정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전쟁범죄 청산에 철저했다고 알려져 있는 프랑스조차 게소법(Gayssot Law)을 제정해 전범 부인행위를 처벌하고 있는 것을 보면, 친일청산이 되지 못한 우리의 경우 그 필요성은 더욱 커진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망언이 되풀이된다면, 미래세대 역사의 눈은 흐려지고 말지 않겠는가. 프랑스의 게소법은 뉘른베르크 국제 전범재판이 정의한 반인도범죄를 부인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한다. 독일과 동맹국이 자행한 잔혹행위와 잔혹행위 혐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공개적 발언, 출판, 방송, 인터넷 유포, 판매자까지 처벌 대상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던 극우 정치인 르펜은 1987년 “가스실은 2차대전 역사에서 극히 사소한 부분”이라고 말했다가 120만프랑(20만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르펜은 10년후 독일에서 열린 한 출판기념회에서 ‘사소한’부분에 대한 설명을 요구받고 “1000여 페이지의 2차대전에 관한 책에서 가스실은 15줄 정도 된다는 뜻”이라고 망언을 되풀이했다가 투옥과 함께 법원 판결문의 12개 신문 게재비용 20만프랑(5만달러)을 부담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한다. 르펜은 이후 스스로 ‘망언’은 다시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이밖에 수정주의 홀로코스트 사학자 포리송, 철학자 가로디, 국제법 교수 골니시 등 많은 사람들이 “유태인 학살은 거대한 정치적 사기” “독일군은 보호자”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진짜인가”등의 발언을 했다가 처벌되었다. 게소법은 언론의 자유와 인권침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반대자들은 이 법을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소했지만 유엔인권위원회는 인권규약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스위스, 스페인 등도 게소법과 유사한 ‘홀로코스트 부인법’을 제정했다. 언론·표현의 자유는 기본권적 자유지만 무제한의 자유는 아니다. 우리 헌법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고,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했을 경우 피해자는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했다. 망언 제한법은 일제 피해자나 순국선열의 명예와 권리 구제를 현행법보다 좀더 확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프랑스처럼 국내에도 일제 식민지를 미화하는 ‘수정주의 사관’이 고개를 들고 있는 요즈음이다. 민족사관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는 이까지 생겼다. 식민 피해자들의 고통을 줄여주고 미래세대에 진실을 바로 알리기 위해 무엇을 할지를 깊이 생각할 때라고 본다. 수석논설위원 yshin@seoul.co.kr
  • [교황 베네딕토 16세 시대] ‘하느님의 충복’ 별명 보수주의자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78)는 일생 동안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해왔다.‘요한 바오로 3세’,‘하느님의 충복’이라는 별명이 그의 노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콘클라베가 시작된 뒤 그는 보수적 추기경들의 지지를 모으면서 일찌감치 강력한 교황 후보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여든에 가까운 고령인데다 지역적 지지기반이 약한 것이 약점으로 꼽힌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그는 “교황이 된다면 단기간만 재위하고 물러나겠다.”며 스스로 ‘과도기적 관리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평범한 유년기, 나치 전력으로 얼룩 베네딕토 16세는 1927년 4월16일 독일 바이에른주의 마르크트 암 인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전통적인 독일 농가의 분위기를 이어받았으며 아버지는 경찰관이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열심히 배웠던 명민한 소년이었던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나치와 2차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된다.14살이었던 1941년 히틀러 소년단(유겐트)에 가입했던 것이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소년단 가입을 거부할 수도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이어 1944년 입대, 방공포 부대 소속으로 복무하던 중 탈영했다가 붙잡혔다. 전범수용소에 갇혀있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석방됐다. ●왕성한 연구활동으로 명성얻어 이후 베네딕토 16세는 형 게오르그 라칭거와 함께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 본격적으로 신학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2년 뒤 뮌헨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프라이징과 본, 튀빙겐, 레겐스부르크 등지의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가톨릭 교리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했다.1962년 그는 35세의 나이로 쾰른대주교의 고문에 임명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1977년 2월 베네딕토 16세는 뮌헨대주교가 됐으며 석달 뒤 추기경에 봉임됐다.1981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베네딕토 16세를 교황청 신앙교리성성(聖省) 수장으로 임명, 이후 24년 동안 두 사람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1998년에는 추기경단 부단장,2002년에는 단장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베네딕토 16세가 실질적으로 교황청을 이끌어왔다는 데에 이견이 없다. ●평생 보수주의 유지 베네딕토 16세가 보수주의적 입장으로 돌아선 데에는 1968년 독일 대학가를 휩쓴 ‘68운동’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그는 동성애, 낙태, 피임, 여성 사제 서품 등에 대해 일관되게 보수적 입장을 유지해왔다. 베네딕토 16세는 종교적 자유·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 ‘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년)’에 대해 “교회의 타락 과정이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불길하고 파멸적인 것”이라며 분명하게 반대했다.2001년 6월 발표된 동성애와 자위행위 금지를 포함한 엄격한 교황청의 성윤리 지침과 지난해 7월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교회와 세계에서 남성과 여성의 협력에 관하여’라는 교황청의 문건을 작성한 사람도 바로 베네딕토 16세였다. 또 미국 주교들에게 낙태를 옹호하는 정치인에게 영성체를 베풀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고, 이슬람국가인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에 반대했다. 지난 13일에는 이혼, 동성결혼, 인간복제 등에 반대하는 교리를 담은 저서 ‘격변의 시대의 가치’를 출간했다. ●엇갈리는 평가 베네딕토 16세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나오고 있다. 지지자들은 대표적인 지적 성직자인 베네딕토 16세가 뚜렷하고 명쾌한 교리를 제시, 가톨릭 내부의 단합을 이끌 것이라며 환영한다. 베네딕토 16세는 10개 언어를 구사하며 7개 분야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베토벤 음악을 좋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그를 ‘강요자’로 부른다. 이들은 ‘해방 신학’의 주창자인 브라질의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를 징계했던 것처럼 새 교황이 진보적 성직자들을 처벌하고 가톨릭을 중세시대로 돌려놓을 것으로 우려한다. 장택동기자 taecks@seoul.co.kr
  • “역사왜곡 민간차원 대응이 효과적” 서중석 성균관대교수

    “역사왜곡 민간차원 대응이 효과적” 서중석 성균관대교수

    중국에는 일본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미국에는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통해 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시켜야 일본 역사왜곡 문제가 터지면서 안 그래도 바쁜 몸이 더 바빠진 사람이 있다.‘한국현대사 1호 박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성균관대 사학과 서중석 교수. 여기저기서 그를 모시려는 손짓도 늘었다. 연이은 모임과 회의에 지쳤는지 인터뷰 자리에 앉으면서도 “회의부터 줄여야 돼.”라면서 웃는다.‘학자는 연구논문으로 말한다.’는 지론 때문인지 인터뷰 내내 쑥스러워하면서도 역사문제를 거론할 때는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얘기는 마침 20일 출범식을 가진 ‘동북아 바른 역사기획단’에서 풀어 나갔다. 기획단은 일본 역사왜곡에 대한 민관합동 대응기구다. 먼저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 등 기존 기관과 단체를 놔두고 또 하나의 단체가 왜 필요하냐고 물었다. 이슈가 터질 때 취해지는 일종의 ‘오버액션’이 아니냐는 것이다. 서 교수도 “고구려연구재단 발기인대회 때부터 그런 주장을 했다.”며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동북아 혹은 동아시아 연구재단’하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해놔야 중국·일본측 연구자들도 끌어들일 수 있고, 또 역사문제는 무엇보다 민간 연구자들간 교류가 핵심인데 일이 생길 때마다 국가기구를 만든다면 외국에서 뭐라 할지도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대답을 묻자 “알았다.”고 고개만 끄덕였다고 한다. ●‘동북아 균형자론’ 긍정적 평가 이어서 이게 정말 역사전쟁이냐고 물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모두 껍데기는 ‘역사학’이지만 속 내용은 결국 ‘정치학’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서 교수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고 답했다. 논리에는 논리로 대응해야 하기에 “기본적으로는 역사학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21세기에도 과거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이미 역사학의 문제를 넘어서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서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균형자론을 옹호했다. 중국에는 일본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미국에는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을 통해 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중·일 ‘공동’의 역사인식은 가능할까. 알려진 대로 서 교수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시민단체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는 5월 중 한·중·일이 함께 만든 역사교과서 부교재를 출간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연세대 백영서 교수는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불충분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동아시아사로 통합됐다기보다 서로 분리된 채 한·중·일 3개국의 역사를 모아 놓은 삼국지 같았다는 지적이다. 서 교수는 이런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한·중·일 3개국 국민 모두에게 호소력과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서 교수는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이는 역사왜곡사태 와중에 얻은 가장 큰 수확물로 한·중·일 시민사회의 수준이 한 단계 올라섰다는 점을 꼽는다는 데서 잘 드러났다. ●한·중·일 시민사회 수준 한단계 올라서 서 교수는 역사교과서 사태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빈사상태에 빠져 있던 양심세력들이, 중국에서는 사회주의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제약받던 민주시민의식이 힘을 얻고 있다는 점과 한국사람들도 왜 일본 우익은 머리를 숙이지 않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일본에 강하게 대응하면 반중·반한 감정만 생긴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외려 선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강하게 대응해 일본에 일정 정도 충격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일본 자신을 위해 좋고 한국과 중국에도 좋다.”고 말했다. 얘기를 최근 사학계의 논쟁점 가운데 하나인 대중독재론으로 돌렸다. 일단은 부정적이었다. 서 교수는 “그 논리를 제대로 읽지는 못했다.”면서도 “어떤 한 사건이나 일화가 아니라 전체적인 시각으로 한국사를 들여다 본 것인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박정희 향수를 예로 들었다. 서 교수는 60년대 경제개발의 원인으로 ▲한·일수교, 베트남파병 등으로 해외차관 도입이 쉬웠고 ▲50년대 대거 배출된 한글세대로 산업예비군이 풍부했는데다 ▲50년대말부터 미국 유학파들이 귀국하면서 이들이 기술관료로 행정부에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점을 꼽았다. 이를테면 자본+노동력+테크노크라트 3박자가 완비됐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이는 박정희시대 경제개발을 박정희 개인의 지도력 덕분이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대단히 낮은 수준의 역사인식”이라는 비판이다. ●한국현대사는 功·過 양 측면 모두 봐야 그러나 최근 뉴라이트니 뭐니 해서 한국 현대사 서술에 이의를 제기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되도록 말을 아꼈다. 대신 “한국의 현대사 자체가 공이다, 과다라고 딱 잘라 나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역동적인 시간이었다.”면서 “양 측면을 모두 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역사서술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은 잊지 않았다. 올해 서 교수의 연구초점은 해방공간에서의 좌파·민족주의 그룹인 여운형·김규식·김구 등이다. 조봉암과 이승만에 이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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