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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기꾼의 끝은 어디?´ 주수도 JU회장 옥중서 또 사기

     9만여명을 상대로 수조원대 불법 다단계 판매 사기를 쳐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은 주수도(59) 제이유(JU) 그룹 회장이 옥중에서 또 다시 벌인 사기 행각이 경찰에 적발됐다.  주씨의 사기 사건에는 변호사 2명도 연루된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옥중에서 “높은 이자를 쳐서 돌려주겠다”고 속여 수억원을 빌린 뒤 이를 갚지 않은 혐의(사기)로 주 회장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5일 밝혔다.  경찰은 주 회장의 부탁을 받고 범행을 도운 김모(45) 변호사와 또 다른 김모(35) 변호사도 사기 혐의로 함께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주 회장은 2013년께 과거 함께 사업을 한 적이 있었던 지인 최모(54·여)씨에게 “송사 때문에 변호사 비용이 급하고 회사 운영자금이 필요하다”면서 “3000만원만 빌려주면 이자를 두둑이 쳐서 6개월 뒤에 갚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주 회장은 최씨에게 자신의 변호사 2명의 통장으로 돈을 넣으라고 했고, 최씨는 주씨를 믿고 송금했다.  주 회장은 이같은 방식으로 지난해 1월부터 6월까지 최씨에게서 총 10차례에 걸쳐 3억 6000만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주 회장은 돈을 갚지 않았고,최씨는 올 7월 서울중앙지검에 주 회장을 고소했다.경찰은 검찰에서 사건을 받아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고소인 최씨에 대한 조사를 마쳤으며, 조만간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주 회장을 찾아가 조사를 벌일 예정이다.  사기 공범으로 함께 입건한 변호사 2명도 조사할 방침이다.  경찰은 수감 중이라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주 회장이 변호사 등 주변 인물들을 통해 사기 행각을 벌이는 것으로 보고 추가 범행은 없는지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앞서 주 회장은 불법 다단계 영업을 하면서 피해자 9만여명에게서 2조 1000억여원을 가로채고 회삿돈 284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돼 ‘희대의 사기꾼’으로 불렸다.  2007년 대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주 회장은 재심을 청구했지만 지난해 2월 재심에서도 원심과 같은 형을 받았고, 2억원대 사기 혐의로 지난해 3월 대법원에서 벌금 2000만원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지난해 1000억원대 사기를 친 다른 다단계 판매 회사에 변호사를 통해 수억원을 투자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경찰 수사를 받기도 했다. 경찰은 주 회장이 변호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회사 운영 등에 관한 조언을 한 사실은 확인했지만,실제로 투자하고 이익금을 받은 혐의는 결국 밝히지 못했다.  이성원 기자 lsw1469@seoul.co.kr  
  • [나우! 지구촌] 연쇄살인마와 결혼한 여성 국선변호사의 사연

    [나우! 지구촌] 연쇄살인마와 결혼한 여성 국선변호사의 사연

    연쇄살인마를 변호하던 여성 국선변호사가 남편과 자식도 버리고 감옥에 있는 사형수와 결혼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마치 할리우드의 영화 소재로나 어울릴 법한 실화가 방송으로 공개된다. 최근 미국 ABC방송은 탐사보도 프로그램 '20/20'을 통해 방송 예정인 연쇄살인마와 변호사의 기막힌 사랑을 일부 공개했다. 믿기힘든 사연의 시작은 지난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트럭 운전사 출신인 오스카 레이 볼린 주니어는 플로리다 템파에서 3명의 젊은 여성을 강간, 살해한 혐의로 체포돼 이듬해 첫 피해자 재판에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판결 이후에도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해 온 그는 10년이 지난 1995년 국선 여성 변호사인 로잘리 마르티네즈를 만나게 된다. 본격적인 사연은 여기서부터다. 운명적 만남인지 잘못된 만남인지 모를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특히 당시 마르티네즈는 남편은 물론 슬하에 네 명의 딸도 있었던 상황.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듬해 결국 마르티네즈가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언제 죽을지 모를 사형수인 볼린과 옥중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마르티네즈는 "처음 그를 봤을 때 외로움과 고독을 느꼈으며 무죄라고 확신했다" 면서 "지금까지 단 1초도 그가 3명을 살해한 살인마라고 생각한 적 없다" 고 주장했다. 이후 세간의 관심이 차츰 시들어지면서 두 사람의 사연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근 20년이 지난 최근, ABC의 취재결과 놀랍게도 두 사람은 계속 부부로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결혼 이후 마르티네즈는 변호사 생활도 작파하고 탐정 면허까지 취득해 남편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지금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다. 또한 남편 역시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쓰며 둘 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전하고 있다.   마르티네즈는 "남편이 자동차 오일을 갈아주고 쓰레기를 버려주고 함께 영화를 보러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면서 "남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자유를 주기 위해 끝까지 싸워나갈 것" 이라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월드피플+] 연쇄살인마와 결혼한 한 여성 국선변호사의 사연

    [월드피플+] 연쇄살인마와 결혼한 한 여성 국선변호사의 사연

    연쇄살인마를 변호하던 여성 국선변호사가 남편과 자식도 버리고 감옥에 있는 사형수와 결혼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마치 할리우드의 영화 소재로나 어울릴 법한 실화가 방송으로 공개된다. 최근 미국 ABC방송은 탐사보도 프로그램 '20/20'을 통해 방송 예정인 연쇄살인마와 변호사의 기막힌 사랑을 일부 공개했다. 믿기힘든 사연의 시작은 지난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트럭 운전사 출신인 오스카 레이 볼린 주니어는 플로리다 템파에서 3명의 젊은 여성을 강간, 살해한 혐의로 체포돼 이듬해 첫 피해자 재판에서부터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판결 이후에도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해 온 그는 10년이 지난 1995년 국선 여성 변호사인 로잘리 마르티네즈를 만나게 된다. 본격적인 사연은 여기서부터다. 운명적 만남인지 잘못된 만남인지 모를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특히 당시 마르티네즈는 남편은 물론 슬하에 네 명의 딸도 있었던 상황.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듬해 결국 마르티네즈가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언제 죽을지 모를 사형수인 볼린과 옥중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마르티네즈는 "처음 그를 봤을 때 외로움과 고독을 느꼈으며 무죄라고 확신했다" 면서 "지금까지 단 1초도 그가 3명을 살해한 살인마라고 생각한 적 없다" 고 주장했다. 이후 세간의 관심이 차츰 시들어지면서 두 사람의 사연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근 20년이 지난 최근, ABC의 취재결과 놀랍게도 두 사람은 계속 부부로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결혼 이후 마르티네즈는 변호사 생활도 작파하고 탐정 면허까지 취득해 남편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지금까지 고군분투하고 있다. 또한 남편 역시 매일 그녀에게 편지를 쓰며 둘 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전하고 있다.   마르티네즈는 "남편이 자동차 오일을 갈아주고 쓰레기를 버려주고 함께 영화를 보러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는 않는다" 면서 "남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자유를 주기 위해 끝까지 싸워나갈 것" 이라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연휴 잊은 최태원 회장, 경영복귀 잰걸음

    연휴 잊은 최태원 회장, 경영복귀 잰걸음

    지난 14일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출소하자마자 연일 출근하면서 경영 정상화를 위한 잰걸음에 나서고 있다. 당분간 몸을 추스른 뒤 회사에 나올 것이란 예상을 깨고 경영 복귀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SK그룹은 최 회장이 광복절인 15일에 이어 16일에도 서울 종로구 서린동 SK본사 집무실을 찾아 업무 현황을 파악했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14일 0시 경기도 의정부교도소에서 나온 직후 SK본사에서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등 그룹 경영진과 부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등 가족들을 만난 데 이어 주말이자 광복절 연휴에도 연일 출근해 업무 파악에 주력하고 있다. 최 회장은 이날 회사 로비에서 기자들과 만나 “(경영 상황을) 파악하러 나왔다”며 향후 대외 일정에 대해서는 “오늘 얘기해 보면 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SK 측은 “최 회장은 하루속히 경영 정상화를 하겠다는 의지가 강할 뿐 아니라 주변에서도 이같이 바라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면서 “조만간 본격적으로 경영을 챙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이 업무를 파악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 없다는 설명이다. 지난 2년 7개월 동안 옥중에서 생활했지만 그의 그룹 지배력은 더욱 탄탄해졌다는 평가다. 실제로 그는 옥중에서 각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로부터 서신 형식으로 경영 상황을 꼼꼼히 챙겨 왔다. 지난해 12월 단행된 SK이노베이션, SK텔레콤 등 주력 계열사 CEO 인사도 그의 의중에 따른 것이다. 한 임원의 측근은 “임원들이 업무보고 이외에 회사 상황 등을 알리는 개인 손 편지까지 최 회장에게 보냈을 정도”라고 전했다. 특히 이달 1일자로 SK C&C와 합병된 통합 지주회사인 SK주식회사가 출범하면서 최 회장의 그룹 지배력은 한층 강화됐다. 합병을 통해 ‘최 회장→SK C&C→SK㈜→자회사’로 이어지던 지배구조가 ‘최 회장→SK㈜→자회사’로 단순화되면서 최 회장의 직접 지배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그룹 전반에 대한 최 회장의 장악력이 높아진 만큼 연내 그의 일부 계열사 등기이사직 회복을 위한 임시 주총이 소집되거나 대규모 인사가 이뤄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신 특사 취지에 맞춰 정체된 그룹 성장의 동력을 마련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식으로 경제 활성화에 총력을 쏟을 것이란 설명이다. SK의 주력인 에너지·통신·반도체 사업은 모두 급변하는 환경을 헤쳐 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 회장은 이번 주에도 본사로 출근하면서 SK하이닉스 공장, 창조경제혁신센터 방문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경영 복귀를 알릴 방침이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檢 ‘종북콘서트’ 논란 황선 구속 영장

    檢 ‘종북콘서트’ 논란 황선 구속 영장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부장 김병현)는 8일 이른바 ‘종북콘서트’ 논란과 관련, 전국 순회 토크콘서트를 빙자해 북한 체제를 미화한 혐의(국가보안법상 찬양·이적 동조)로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 황선(41)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미국 시민권자인 신은미(54)씨에 대해서는 기소유예 처분과 함께 법무부에 강제 출국을 요청했다. 강제 출국되면 5년간 입국이 금지된다. 앞서 황씨와 신씨는 지난해 11월 서울 조계사 경내에서 열린 ‘신은미&황선 전국 순회 토크 문화 콘서트’에서 북한 체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등의 발언을 해 이른바 종북콘서트 논란을 야기했으며, 보수단체들은 이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황씨와 신씨는 지난해 11월 19~21일 전국 순회 토크콘서트에서 ‘북한 주민들이 김정은 정권하에 있는 것을 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는 등의 발언을 하고 김정일 찬양 영화인 ‘심장에 남는 사람’의 주제가를 부르는 등 북한을 찬양·고무한 혐의를 받고 있다. 황씨는 특히 이적단체인 실천연대 간부로서 각종 행사에서 사회를 보며 주한미군 철수, 반통일 세력 척결 등을 주장하고 실천연대 부설 인터넷 ‘주권방송’ 통일카페를 진행하면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혐의도 받고 있다. 북한에서 출간된 자신의 옥중서신과 ‘김일성 주석의 업적’ 등의 이적 표현물을 보관한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 관계자는 “옥중서신에는 ‘미제가 저지른 만행을 가슴속에 담고 있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며 “수감 중 동료들에게 쓴 편지를 모은 것인데 발간 경위 및 황씨에게 전달된 경로 등을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씨 측은 “검·경이 보수 언론에 떠밀려 수사를 시작했고 박근혜 대통령의 종북콘서트 발언으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결론을 정해 놓고 수사를 하고 있다”며 반발했다. 한편 전날 15시간에 걸친 검찰 조사에서 신씨는 “북한을 찬양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북한에 이용당했을지언정 국가보안법을 위반할 의도도 전혀 없었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진 출국 의사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또 두 사람과 함께 고발된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해외 출장을 마치는 대로 소환 조사할 방침이다.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 ‘궁금한 이야기 Y’ 성폭행범에게 150통 편지 보낸 피해자, 그 뒤에 담긴 사연은?

    ‘궁금한 이야기 Y’ 성폭행범에게 150통 편지 보낸 피해자, 그 뒤에 담긴 사연은?

    ‘궁금한 이야기 Y’ ‘궁금한 이야기 Y’에서 27일 성폭행범에게 150여통의 편지를 보낸 한 여성의 사연이 공개된다. ‘궁금한 이야기 Y’ 제작진에 따르면 지난 10일 미성년자 성폭행 혐의로 기소돼 서울고등법원에서 최후 진술을 하던 피의자가 눈물을 흘리며 진술을 했다. 피의자는 자신보다 27살 어린 여중생 피해자(당시 16세)를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피의자는 성폭행 혐의를 부인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최후 진술을 마친 뒤 피해자가 자신에게 보낸 150여통의 편지를 증거로 제출하며 자신들의 사랑 이야기가 이 편지 안에 들어있다고 주장했다. 제작진은 편지를 보낸 피해자를 만나 150여통의 편지를 쓴 사연을 듣기로 했다. 제작진에 따르면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피해자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피의자를 만났다. 연예인을 권유하며 접근한 그는 영화시사회를 가자던 네 번째 만남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이후 그는 피해자를 끊임없이 협박하고 괴롭혔다. 이와 중에 피해자는 원치 않는 임신까지 하게 됐다. 이후 피의자가 다른 폭행 사건으로 구속됐고, 옥중에서도 계속된 그의 협박으로 이 편지를 쓰게 됐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20102년 피해자의 고소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에 제작진은 범죄심리 전문가에게 피해자가 보낸 150여통의 편지를 분석 의뢰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150여통 편지 속의 진실은 27일 오후 9시 ‘궁금한 이야기 Y’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아닌 대한의군 참모총장”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아닌 대한의군 참모총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침략기 일본 지도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일본 중심의, 독점적 동아시아 평화사상을 주창하는 거죠. 한국과 중국은 따라오기만 해라, 그러면 대화하겠다는 겁니다.” ‘국사학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이태진(71) 서울대 명예교수는 요즘 부쩍 말수가 늘었다. 중국과 미국의 힘의 격차가 줄어들면서 미·중 간 갈등이 격화하고, 이 기회를 틈타 일본은 미·일 동맹을 등에 업은 채 평화헌법 개정과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이미 숨겨 온 발톱을 드러냈다. 아울러 한·일 간 역사 인식 및 독도 문제의 날 선 각은 쉽게 허물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120년 전 급변하는 시류에 적응하지 못해 식민통치라는 암흑의 터널로 빨려 들어간 우리의 과거를 되새겨야 할 이유다. 이 교수는 한반도를 둘러싼 해법으로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들고 나왔다. 지난 21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1920년 국제연맹의 탄생을 가져온 칸트철학의 ‘영구평화론’은 매우 닮았다. 1919년 기미독립선언서에도 언급된 동양평화론은 인간 존엄성의 보장은 국가의 역할이고 그 사명을 침해하는 다른 나라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영구평화론과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1909년 2월 14일 안중근은 고등법원인 뤼순일본관동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11차례 신문을 받고 6차례 재판을 거친 뒤 내려진 일제의 선고였다. 이 교수는 “공교롭게도 이날은 우리가 밸런타인데이로만 기억해 온 날”이라며 “다음 달 26일은 안 의사가 숨을 거둔 지 꼭 104주년이 되는 때”라고 강조했다. “상고는 보호조약 체제를 인정하는 꼴”이라며 상고를 포기했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뤼순·다롄 반환과 평화회의기구 설치 ▲한·중·일 공동 군단 창설 및 참가 청년의 타국어 공부 ▲3국 공용 화폐 발행 ▲수억명의 동양인이 1엔씩 모금해 자금 마련 ▲태국·인도 등으로 확대 등이다. ‘너무 추상적인 게 아닌가’란 질문에 이 교수는 “공동 군단의 청년들이 다른 두 나라의 언어를 습득해 우애를 키우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등 오히려 현실적이다. 가장 바람직한 방향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앞서 안중근을 의사가 아닌 ‘장군’으로, 의거를 ‘대첩’으로 고쳐 부를 것을 주장해 왔다. “안중근도 (폭력을 사용한) 테러리스트일 뿐”이라는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직후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총장으로 적장을 저격했으니, 내게 만국공법인 포로에 관한 법을 적용하라’고 말했어요. 실제로 고종은 1907년 강제 퇴위 직후 쌀 10만석을 보내 이듬해 대한의군을 창설했고, 이때 안중근이 우장군으로 임명됩니다. 안중근은 순국 직전 옥중에서 수신인 없는 편지 3통을 작성했는데, 그중 한 편에 ‘작은 충성 표하였으니 저의 충정 잊지 마소서’란 대목이 나와요. 고종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교수는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는 러시아 기자에 의해 영상으로 촬영됐으나 일본이 아직까지 전체 영상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최근 하얼빈 역사에 세워진 안중근 기념관은 일제 강점기 돈독했던 한·중 간 관계를 되살리는 단초가 될 것”이라며 “안중근의 평화사상이야말로 일본 우경화에 대한 가장 적합한 비판논리로 안중근 자신이 생전에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겨 왔다”고 강조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실크로드는 문명 통로… 동쪽 끝은 한반도”

    “실크로드는 문명 통로… 동쪽 끝은 한반도”

    실크로드와 문명교류에 관한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실크로드 사전’(창비)이 나왔다.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완성한 이는 정수일(79)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이다. ‘실크로드 사전’은 중국과 일본에도 있지만 정 소장이 엮고 쓴(편저) 사전은 표제어 1907개, 색인 8015개로 규모 면에서 그들을 압도할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의 3대 간선인 오아시스로, 초원로, 해로를 망라해 내용에 있어서도 세계 최대의 ‘실크로드 사전’으로 꼽을 만하다. 정 소장은 5일 기자간담회에서 “지금까지 인류가 풀지 못한 전쟁 등의 갈등과 모순은 문명이란 공통분모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면서 “인류의 미래 비전인 문명교류학 확립이 내 연구의 최종 목표이고, ‘실크로드 사전’은 문명교류학 사전의 첫 단계”라고 말했다. ‘실크로드 사전’이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15년. ‘무함마드 깐수’란 이름의 대학 교수로 활동하던 그는 간첩 혐의로 수감생활을 하던 1998년 4월부터 2000년 형 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약 2년 반 동안 편지지 앞뒷면과 도배지 등의 빈 공간에 실크로드의 기본개념을 정리했다. 자신의 구속으로 폐강된 실크로드학 강의를 옥중 편지형식으로 되살려 보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 그때 작성한 원고지 6000장 분량의 표제어 974개 항목은 출소 이후 펴낸 ‘실크로드학’과 ‘고대문명교류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됐다. 하지만 사전 출간은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빛을 보지 못하다가 경상북도의 ‘코리아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아 올 초부터 집필을 재개,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됐다. 정 소장은 “중국은 해로를 인정하지 않는 데다 80% 이상이 중국 내 이야기이며, 일본은 가장 큰 규모의 사전도 표제어가 192개에 불과해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실크로드 사전으로는 미흡한 점이 있다”며 “이번 사전에서는 ‘왕오천축국전’ ‘지봉유설’ 등 우리 고전 속에 그려진 실크로드의 모습도 재현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실크로드 육로의 동쪽 끝을 한반도로 규정한 것은 이 사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함께 출간된 도록 ‘실크로드(Silk Road)-육로편’은 경주에서 로마까지 실크로드 59개 도시를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중국 옌볜 출신으로 실크로드를 23차례나 답사한 정 소장은 “실크로드는 하나의 선으로 이뤄진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라 그물 형태의 범지구적 문명 교류 통로”라면서 “지금까지 실크로드 3대 간선의 동쪽 끝이 중국이라는 진부한 통념을 깨고, 실크로드 상의 한반도란 역사적 위상을 사전 문자로 각인했다”고 의미를 설명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무기징역으로 끝난 ‘보시라이 스캔들’

    무기징역으로 끝난 ‘보시라이 스캔들’

    중국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당서기에 대해 내려진 무기징역 원심이 확정되면서 장장 1년 10개월에 걸쳐 중국을 뒤흔든 ‘보시라이 스캔들’이 막을 내렸다. 산둥(山東)성 고급인민법원은 25일 보시라이에 대한 2심 공판을 열어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유지한다고 선고했다. 중국은 2심제를 채택하고 있어 보시라이는 더 이상 항소할 수 없다. 앞서 지난(濟南)시 중급인민법원은 지난달 22일 보시라이에 대한 1심 판결에서 뇌물수수, 공금횡령, 직권남용 등의 혐의가 대부분 인정된다며 무기징역, 정치권리 종신 박탈, 개인재산 몰수 등을 선고했다. 보시라이가 이날 선고 결과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짙은 남색 잠바 차림으로 수갑을 찬 채 시종 미소를 띠며 선고 내용을 듣는 모습이 관영인 중국중앙(CC)TV를 통해 전역에 방송됐을 뿐이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중국 형법은 수뢰액이 10만 위안(약 1800만원) 이상이면 10년 이상 혹은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고 사형도 가능하다”면서 “국가 공무원인 보시라이의 수뢰액은 2044만 위안에 달한다”며 1심 판결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또 보시라이가 제기한 항소장을 기초로 보시라이 본인과 변호인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한 뒤 판결한 것이라고 강조해 일각에서 제기되는 ‘정치 재판’ 의혹도 일축했다. 원심 판결 유지는 보시라이가 항소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어서 특별한 파장을 일으키진 않고 있다. 다만 보시라이는 끝까지 자신의 혐의를 부인해 정치적 희생양의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중국 내 좌파(이념 중시 보수세력)의 상징이 됐다. 앞서 지난달 공개된 그의 옥중 편지에는 중국 8대 혁명원로인 아버지 보이보(薄一波) 전 부총리가 여러 차례 수감됐지만 결국 재기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나도 감옥에서 천천히 기다릴 것”이라고 밝혔다. 조만간 정치범 수용소인 베이징시 인근 친청(秦城) 교도소로 옮겨져 기약 없는 종신형을 살게 되지만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태자당(당·정·군 혁명 원로의 자손)의 대표 주자였던 보시라이는 2011년 11월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가 영국인 닐 헤이우드를 독살한 사실이 드러나고 이 과정에서 아내의 범죄를 무마하려 했다는 의혹 등이 제기되면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편 이날 재판이 마무리되면서 중국 정가는 저우융캉(周永康) 전 당 정치국 상무위원도 사법처리될지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석유방(석유산업을 기반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정치세력)의 ‘거두’인 저우융캉을 처벌할 수 있다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다. 베이징 주현진 특파원 jhj@seoul.co.kr
  • 이례적 1시간 발표 지연… 이변 없었다

    이례적 1시간 발표 지연… 이변 없었다

    “올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프랑수아 앙글레르 브뤼셀 자유대 교수, 피터 힉스 에든버러대 교수.” 8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왕립 아카데미 단상에 앉은 스테판 노르마크 노벨위원회 교수의 입에서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이름이 나오는 순간, 기자들 사이에서는 예상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유력 노벨상 후보자’라는 세간의 관심을 매년 비켜 가며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한 것으로 평가되던 노벨위원회도 ‘신의 입자’ 힉스에 쏠린 전 세계의 관심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당초 오전 11시 45분으로 예정됐던 수상자 발표는 이례적으로 한 시간 미뤄져 낮 12시 45분에 시작됐다. 현장에서는 발표 직전에 문제가 발생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변은 없었다. 군나 잉겔만 노벨위원은 이들이 각각 1964년 발표한 논문을 제시하며 “이들이 자연계를 움직이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표준모형이 옳다는 최종적인 이론을 제시했고, 반세기의 기다림 끝에 이것이 사실이라는 점이 입증됐다”고 설명했다. 노벨재단 관계자는 “힉스와 앙글레르가 수상자이지만, 힉스 입자가 과학적으로 증명되기까지는 수많은 과학자들과 국제적인 노력이 힘을 발했다”고 평가했다. 노벨재단은 힉스 입자 가설과 입증에 관여한 관계자가 공동 수상 최대 범위인 3명을 넘어선다는 점에서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반적으로 노벨과학상은 가설 제시자와 입증자가 동시에 수상하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노벨위원회는 올해 수상자로 가설 제시자인 힉스와 앙글레르만을 선택했다. 지난 7일 노벨 생리의학상 발표를 시작으로 노벨상 시즌이 시작되면서 스톡홀름에는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살아 있는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노벨상은 상을 주는 스웨덴과 노르웨이(평화상) 입장에서도 1년 중 가장 큰 축제다. 12월 10일 노벨의 기일에 열리는 시상식까지 ‘노벨 주간’, ‘노벨상 수상자 강연회’, ‘노벨상 콘서트’ 등 각종 행사가 끊이지 않는다. 스톡홀름 옛 시가 중심부의 가장 오래된 스웨덴 아카데미 건물에는 ‘노벨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업적과 면면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편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 서신 등 수상자들의 물건이 빼곡히 전시돼 있다. 박물관의 메인 스폰서는 삼성전자로, 이 박물관에는 한글이 모든 전시물과 안내서에 병기돼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들이 협찬에 관심이 많고, 방문객 역시 아시아인들이 많은 편”이라며 “매년 5만~6만명이 박물관을 찾는다”고 말했다. 노벨재단 관계자들도 한국, 중국, 일본 등 3개국의 노벨상 사랑이 유별나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다. 7일(현지시간) 카롤린스카 의대 노벨포럼에서 열린 생리의학상 발표장, 8일 스웨덴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물리학상 발표장 역시 참석한 언론의 절반가량이 중국과 일본 기자들이었다. 노벨재단 관계자는 “한국의 과학적 수준이 높아진 것은 알고 있지만, 아직까지 특정 분야를 선도하는 과학자의 이름은 들어 보지 못했다”면서 “노벨상은 인류를 대표해 어떤 사람의 업적에 감사하는 의미가 강한 만큼 노벨상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과학적 업적을 이루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심스레 조언했다. 현재 스톡홀름은 더 뚜렷한 ‘노벨의 도시’로 태어나기 위한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진행 중이다. 생리의학상 심사와 발표를 맡고 있는 카롤린스카 의대에 초대형 건물을 신축하고 있고, 발틱 해변에는 ‘노벨상의 새로운 집’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거대한 노벨센터를 2018년까지 짓는다. 글 사진 스톡홀름 박건형 기자 kitsch@seoul.co.kr
  •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합죽선의 고향 전주에 가다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합죽선의 고향 전주에 가다

    ‘대나무와 종이가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니 바로 맑은 바람이라!’(紙與竹而相婚 生其子曰淸風) 합죽선을 노래한 옛시조의 한 구절이다. 풍류와 운치가 묻어나는 시구가 올여름 유난한 더위 탓에 귀에 쏙 들어온다. 올여름은 원전 가동 중단까지 겹치면서 전력난이 최악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와 지자체가 대책 마련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에너지 절약밖에 뾰족한 수가 없어 절로 땀이 흐른다. 이런 가운데 정홍원 국무총리가 지난주 장차관들에게 부채를 하나씩 돌렸다. 길거리에서 나눠 주는 홍보용 부채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요즘, 정부가 에너지 절약 실천을 위한 ‘부채 나눔 캠페인’에 앞장서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여름이 시작되는 단옷날에 부채를 선물로 주고받으며 더위를 대비했다. 하얀 백지선(白紙扇)에 그림이나 좋은 글귀를 넣어 주며 풍류를 즐겼다. 하지만 197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고 선풍기와 에어컨이 보급되면서 부채는 점차 사라져 갔다. 김동식 선자장(扇子匠·부채를 만드는 기능을 보유한 장인)은 4대째 전주의 특산품인 합죽선(合竹扇)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의 살림집 일부를 개조한 16.5㎡(약 5평) 남짓의 단칸방이 그의 작업장이다. 바닥에는 나무 도마와 대나무로 깎은 부챗살이 흩어져 있다. “합죽선은 다른 부채에 비해 손이 많이 갑니다.” 한 자루의 합죽선이 만들어지기까지 대나무를 베는 일부터 100여일이 소요된다. 손으로 직접 수십 번의 공정을 거쳐야 할 정도로 손품이 많이 든다. 댓살에 베인 그의 손은 상처 투성이다. 힘을 주로 쓰는 엄지와 검지는 늘 붕대 신세다. 그의 섬세한 손놀림과 정교한 공정은 고종황제 당시 진상품(進上品)을 만들던 외증조부로부터 140여년 동안 이어져 온 한국의 전통기술이다. 전주 합죽선은 옛날부터 감영에 선자청(扇子廳)을 두고 부채를 거둬들였을 만큼 품질이 빼어났다. 좋은 합죽선을 만들려면 역시 재료가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대나무를 빼놓을 수 없다. 전주 합죽선은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왕대만 사용한다. 쪼갠 대를 양잿물에 삶아 노랗게 색이 바래지게 한 뒤 얇게 살을 깎는다. 그다음 민어(民魚)의 부레를 끓여 쑨 풀로 댓살을 겹쳐 붙인다. ‘합죽’(合竹)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 갈퀴 모양으로 짠 부챗살에는 인두로 박쥐무늬를 꼼꼼하게 그려 넣는다. 밤에 몰래 만나는 남녀가 얼굴을 가릴 때 합죽선을 사용했다는 유래에서 박쥐가 들어간다고 한다. 종이도 전주에서 생산되는 전통 한지만 사용한다. 질긴 한지를 댓살에 붙인 뒤 서화를 그려 넣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으면 비로소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부채인 ‘전주합죽선’이 탄생한다. 합죽선의 접은 모양은 한복치마를 걸친 아름다운 여인을 닮았고, 펴면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학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한국의 합죽선은 바로 한국인의 몸이며 그 마음의 일부로 함께 살아 왔다. 사대부들은 의복을 갖춘 뒤 부채를 들어야 의관이 완성된다고 보았다. 합죽선은 판소리에서는 춘향의 애절한 옥중편지로, 심봉사의 눈을 대신해 주는 지팡이로 사용됐다. 광대의 줄타기에서부터 무희(舞姬)의 춤에 이르기까지 합죽선은 신바람의 세계를 연출해 왔다. 우리 문화 곳곳에 자리 잡은 합죽선은 선조들의 느림의 미학이자 한지의 과학이었다. 무덥고 지루한 여름,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주는 전통 부채가 선인들의 여유로운 지혜와 멋으로 다가온다. 글 사진 jongwon@seoul.co.kr
  • “아빠 수감에 우울증 빠진 딸, 만화편지로 치료”

    “아빠 수감에 우울증 빠진 딸, 만화편지로 치료”

    “제가 감옥에 갇히고서 우울증을 앓던 딸이 아내에게 그랬대요. 아빠가 우리를 배신하고 떠났다고. 가슴이 미어졌죠.” 2009년 1월 ‘용산참사’ 당시 망루에 올랐던 철거민 김재호(57)씨는 14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남일당 터 사건 현장을 찾았다. 희생자 가족, 시민단체가 진행한 ‘용산참사 4주기 범국민 추모주간’ 회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김씨의 손에는 이번 주 발간될 자신의 책이 들려 있었다. ‘꽃피는 용산, 딸에게 보내는 편지’란 제목의 책은 용산참사로 실형을 선고받고 3년 9개월간 복역하며 외동딸 혜연(13)이에게 부친 편지 400여통을 만화 형식으로 묶은 것이다. 그해 초였다. 20년 넘게 장사해 온 가게가 도시 정비사업 대상에 포함돼 철거될 처지에 놓이자 김씨는 다른 철거민들과 함께 망루에 올랐다. 망루에서 그는 ‘생존권 보장’을 외쳤다. 운명의 1월 20일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6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다. 검찰은 철거민 농성자들의 화염병 때문에 불이 났다며 김씨 등 철거민들만 기소했다. 김씨는 4년형을 선고받고 가족을 떠났다. 교도소에서 딸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딸은 온 종일 울기만 했다. 44세에 어렵게 얻은 딸은 갑작스러운 이별도, 세상의 손가락질도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의 병이 생겼다. 아들이 공안사범이 돼 교도소에 갇혔다는 소식에 김씨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청력을 잃었다. 어머니는 치매가 심해져 지난 4년간 무슨 일이 났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자신이 만든 상처라는 생각에 그는 자책했다. 펜을 들었다. 평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였다. 딸과 가족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만화와 글로 썼다. 부인을 처음 만난 이야기, 용산참사를 겪으며 괴로웠던 심정, 딸에 대한 부탁, 50대 가장의 속내를 편지지에 천천히 풀어 갔다. 편지는 가장 좋은 치료제가 됐다. “혜연이가 이제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호전됐습니다. 적어도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다는 생각은 안 하게 됐죠.” 지난해 10월 가석방된 김씨는 쌍용차 사태, 제주 강정마을 사태 등 사회 갈등 속에서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다른 가족들을 걱정했다. “우리가 스쳐 지나가듯 읽는 뉴스의 가운데에 어떤 가족은 울면서 서 있습니다. 그들의 일을 우리 사회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참사로부터 4년. 세상은 제자리걸음이다. 남일당 회견장에서 유족들은 구속자 사면과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국민대통합을 하려거든 용산참사와 쌍용차 문제부터 해결 노력을 보여 달라”고 촉구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7·끝) 이승만과 박용만

    [선택! 역사를 갈랐다] (37·끝) 이승만과 박용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1875~1965)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나 박용만(1881~1928)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두 사람은 절친한 동지로서 미국에서 유학한 후 독립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했지만, 노선의 차이로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이승만의 ‘외교론’은 조선의 힘으로는 독립이 어려우니 열강과의 외교 교섭을 통해, 그들이 조선을 독립시켜 주도록 교섭을 하자는 논리였다. 하지만, 박용만의 ‘무장투쟁론’은 체계적으로 군사력을 양성하여 일본과 무력항쟁을 벌일 준비를 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4·19 혁명의 결과 하와이로 쫓겨난 뒤, 비서에게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힘든 상대는 바로 박용만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옥중 결의형제, 미국유학을 떠나다 이승만은 몰락한 양반 출신으로서 배재학당을 다니다가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를 통해 일약 청년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그런데 박영효 세력들이 꾸민 역모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투옥되었다. 탈옥을 감행했다가 체포됨으로써 죄가 가중되어 사형선고를 받을 뻔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감형되어 감옥생활을 했다. 박용만은 관립일어학교를 다니다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1901년 귀국 후 박영효와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감옥생활을 몇 개월 하였다. 그는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다가 다시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바로 이때 이승만과 만나 옥중 의형제를 맺었다. 1904년 출옥한 지 몇 달 뒤 미국으로 떠난 이승만은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그는 이때 기자들에게, 자신은 일진회의 대표로 왔고 대한제국 국민은 고종을 지지하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보다는 일본에 더 우호적이라는 말을 하였다. 워싱턴 DC의 유력한 장로교 목사 추천으로 조지워싱턴대학에 들어간 그는 학업을 충실하게 수행하지 않았음에도 무사히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의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다. 그는 2년 만에 박사를 달라고 우겼지만, 성적 불량으로 석사를 마치지 못하게 되자, 또다시 프린스턴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2년 만에 파격적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을 무렵, 하버드대학에 석사학위를 달라고 요청하여 계절학기 수업 하나를 이수하는 조건으로 학위를 받았다.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려 취득한 그의 학위는 평생 그의 권위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는 1908년에 일어난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사건’ 통역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여 동포사회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한편, 박용만은 주로 미국 중부의 네브래스카와 콜로라도를 근거지로 삼고 미국으로 오는 조선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주선하면서 청년들을 규합하였다. 그는 네브래스카주립대학에 입학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대학이 좋은 군사훈련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ROTC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한인 소년병학교를 창립, 젊은 학생들에게 학기 중에는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여름방학에 입소하여 8주간의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 후 헤이스팅스대학에서 기숙사와 학교 시설을 제공받아 한인 소년병학교를 이전하여 규모를 확대시켰다. 이 학교는 일본의 항의로 1914년 폐교될 때까지 6년간 90여명의 생도를 훈련시켰다. ●대한인국민회와 YMCA 여러 단체로 분립되어 있던 미주 지역의 한인 조직들은 마침내 1910년 대한인국민회(이하 국민회)로 통합되었다. 박용만은 이때 ‘백성은 있으나 토지가 없어 남의 토지 위에 만든 국가’라는 의미의 무형국가(無形國家)를 조직하기 위해 1911년 신한민보 주필에 취임하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중앙총회를 설립하는 데 전력하였다. 그가 주도한 헌장은 사실상의 헌법으로 국민회 중앙총회가 해외 한인의 대표기구이면서, 대한제국을 대신한 민주주의 정부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한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공화주의 선언이었으며 이를 주도한 것이 바로 박용만이었다. 한편, 이승만은 1910년 귀국하여 신변보장을 받으며 YMCA에서 종교활동과 교육활동에만 전념했다. 그러던 중, 105인 사건이 터지자 친일 선교사의 도움으로 1912년 세계감리교대회에 조선대표로 선발되어 다시 미국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는 미국에 도착한 후 일본의 조선통치를 비판하기는커녕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사회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경제의 중심으로 변모했다.’고 오히려 찬양했다. ●하와이의 결투 당시 하와이는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으로 자신들을 지도해 줄 사람으로 박용만을 초청하였다. 박용만은 1912년 말에 성대한 환영식을 치르고 본격적으로 하와이에서 자치제도를 실현하려고 애썼다. 그는 하와이 한인지방총회를 법인으로 등록하였고 특별경찰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국민의무금제를 도입하여 재정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사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그는 1914년 앞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할 군사력를 양성하기 위한 대조선 국민군단과 장교 양성을 위한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교민들은 평소에 노동하고 틈틈이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 교관을 맡아 체계적인 훈련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편, 미국에 왔다가 귀국을 포기하여 오갈 데 없던 이승만을 하와이로 초청해 준 것은 바로 박용만이었고, 이승만이 1913년에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성대한 환영행사를 열어 주었다. 그리고 이승만이 창간한 ‘태평양잡지’를 후원했다. 그러나 파국은 곧 시작되었다. 문제는 주도권과 돈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여자 기숙사를 짓겠다며 모금을 시작했으나 여의치 않자 국민회의 부지를 자신의 이름으로 이전시켜 달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민회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다음 해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하려고 하였다. 그는 국민회를 강하게 공개 비판하면서 각 지역을 돌며 추종자들을 모아 박용만 지지파에게 테러를 자행하면서 국민회를 장악하였다. 이때 박용만은 191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치러진 국민회 중앙총회 선거에서 부회장에 당선되었다. 회장으로 당선된 안창호는 이승만을 만나 평화적으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하와이를 직접 방문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피해 넉 달간이나 잠적해 버려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그 결과 이승만의 탐욕은 국민회와 박용만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해 놓은 조직과 재정을 송두리째 파탄내 버렸다. 결국, 하와이 한인의 최고기관이자 자치정부로 자리잡아 가던 국민회는 이승만의 개인 왕국으로 전락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1916년 10월 하와이 현지 신문에 자신은 반일교육을 하고 있지 않으며 한인 사회에서 어떤 반일적 언급도 하지 않도록 통제시키고 있다는 기고문을 실었다. 그후, 1918년 회계감사에서 이승만의 부정이 드러나자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하였고 이승만은 자신에게 문제제기를 하는 인사들을 폭동죄 및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하였다. 이승만은 법정에서 그들이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어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고 일본 함선을 파괴하려는 무리’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결국 모두 모함이라는 것이 판명되고 살인미수 혐의는 기각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정행위를 감추기 위해 항일운동의 성과를 해치는 것마저 서슴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한 박용만은 1918년 이승만의 독선과 야욕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하와이 한인사회는 양분되고 말았다. ●상하이 임정과 군사통일회의 이승만은 3·1운동 이후 각지에서 임시정부 수립안이 나오자, 이를 수렴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을 자임하였고 이를 승인하도록 밀고 나갔다. 그리고 국채발행권을 고집하면서 구미위원부를 만들어 상하이에서의 집무를 거부하였다. 그가 상하이에 나타난 것은 1920년 12월부터 1921년 5월까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위임통치 건의에 대한 비판에 직면하여 갈등만 벌이고 몰래 돌아갔다. 이승만은 궁지에 몰리자 자신이 배신하였던 박용만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뻔뻔한 강심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박용만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무장투쟁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자신은 ‘군사노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취임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베이징을 거점으로 이회영, 신채호 등과 함께 1921년 군사통일회의를 개최했고, 이승만과 상하이 임시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후 군사기지 건설 자금을 모으고 중국 군벌들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1928년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가 친일행위를 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에 의한 참극이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이승만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측에 한인 군사부대 창설을 제안하였다. 박용만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1910년대부터 준비했으나 이승만에 의해 뿌리가 뽑힌 노선이었다. 이승만의 방해와 파괴공작이 없었다면 박용만이 양성했던 조선인 군사력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하여 훌륭히 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또한, 해방 이후 승전국의 대우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박용만은 이승만과의 대립, 나아가 노선이 달랐던 상하이 임정과의 갈등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설 자리를 잃고 잊히고 말았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선택! 역사를 갈랐다’ 연중 기획이 37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열독해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12월 10일에는 연재에 참여하신 역사학자들과 ‘역사의 역할과 교훈’을 주제로 한 토론 기사가 준비됩니다.
  • “폭력남편 출소뒤 보복 협박…제발 도와주세요”

    “나 하나 막판으로 몰고 싶으면 뜻대로 해. 궁지에 몰리면 나도 나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교도소에서 날아온 남편의 ‘옥중 협박편지’를 읽는 그의 손이 떨렸다. 남편 김모(46)씨는 가정폭력으로 2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됐다 오는 12월 출소한다. 신고를 도왔던 가족상담센터장도 “나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부인 조모(46·경남 양산)씨에게 남편과 함께한 지난 20년 세월은 지옥이었다. 남편은 걸핏하면 주먹에 욕설을 해댔다. 두 살, 세 살 난 아이들에게도 발길질을 했다. 아이들이 울자 죽이겠다며 흉기를 휘둘러 아이를 둘러업고 맨발로 도망친 적도 여러 차례다. 조씨가 아이들과 쉼터를 전전하는 동안 김씨는 동거녀에게 둔기를 휘둘러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됐다. 하지만 출소 뒤엔 더 잔인해졌다. 외출조차 못하게 막았다. 김씨는 2010년 12월 “내 휴대전화를 누가 만졌냐.”며 망치로 조씨를 내리쳤다. 센터장이 조씨와 아이들을 피신시키려 하자 김씨는 망치로 센터장의 차를 부수고 난동을 부리다 검거됐다. 수감 뒤에도 협박은 계속됐다. 장남이 몇 달 뒤 입대하는 데다 막내가 고 3이라 조씨는 더 불안했다. 마음이 급해진 조씨는 지난 6월 이명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부라도 가정폭력범에게는 가족 주소를 알리지 못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법적으로 조씨와 남편 김씨는 아직 부부다. 이어진 가정 폭력에 결국 이혼판결을 받았지만 김씨가 항소했기 때문이다. 조씨 가족은 기초생활수급 대상이라 남편인 김씨가 증명서를 떼어 보면 전국 어디서든 바로 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 경찰은 김씨의 편지가 현행법상 보복범죄에 해당한다고 판단, 김씨를 추가 기소하기로 했다. 이동환 양산서장은 “가정폭력범 역시 성범죄처럼 재범자가 많지만, 치료 감호나 출소 전 심사 등 법적 보완책은 미비한 상태”라면서 “이런 가운데 가족들이 다시금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경찰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가정폭력을 휘두르다 검거된 7272명 중 32.9%(2392명)는 가정폭력 등을 포함한 재범 이상의 전과자다. 백민경기자 white@seoul.co.kr
  • “공교육 통해 누구나 나비처럼 날게 할 것”

    “공교육 통해 누구나 나비처럼 날게 할 것”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교육철학을 담아 직접 띄운 트위터 글과 구치소 생활을 하면서 쓴 옥중 편지를 모은 에세이집 ‘나비’가 11일 공식 출간됐다. 곽 교육감이 직접 붙인 제목 ‘나비’는 “한 마리 나비의 탄생은 인간의 성장과 교육과정을 그대로 상징한다.”는 뜻을 담았다. 유일하게 출판을 위해 새로 쓴 서문에는 “공교육 12년을 마치면 누구나 아름다운 나비가 돼 자유롭게 날게 할 것”이라는 소망을 실었다. 곽 교육감은 2010년 7월 교육감 취임 이래 온라인상에 올린 트위터 글과 교육감 후보 매수 혐의로 지난해 9월부터 5개월간 복역할 당시 부인에게 보낸 옥중서신 30여통을 각색 없이 그대로 옮겼다. 글에는 혁신학교와 학생인권, 교육청·학교 민주주의 등 교육감으로서 역점을 뒀던 서울 교육에 대한 개인의 소회도 담았다. 서문에서는 “교육계는 민주주의와 혁신을 낯설어했다. 교육행정은 관료주의와 권위주의에 길들여져 있었고 교육정책은 비교와 경쟁을 당연시했다.”며 취임 직후의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다. 교육계 일각에서는 에세이와 관련, 다음 달 열릴 대법원 판결에 앞서 취임 이후 2년간 자신이 추진해 온 서울교육정책을 되돌아보는 차원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곽 교육감은 현재 항소심에서 징역 1년의 유죄를 선고받고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씨줄날줄] 아버지의 편지/임태순 논설위원

    “4년간 강목을 골똘히 봤다. 두루 읽었지만 책을 덮으면 모두 잊어버리는지라 부득불 착오를 초록한 책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때 어영부영 해를 보내면 노년에 어쩌려고 그러느냐.” 60에 접어든 연암 박지원이 아들 종서에게 보낸 편지다. 자신의 독서 경험을 전하면서 책읽기를 소홀히 하는 아들을 훈계하고 있다. 퇴계 이황도 편지를 통해 가족에 대한 사랑과 정, 인생의 연륜 등을 전했다. 아들, 손자는 물론 조카사위 등 100여명의 친인척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39세에 유배를 떠나 57세에 돌아온 정약용도 학연, 학유 등 두 아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자녀들이 자랄 중요한 시기에 함께 있어 주지 못한 데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욕심을 낼수록 잘 빠져 나가는 게 재물이니 재물에 애착을 갖지 말라.” “선비는 닭을 기르면서도 양계법과 실상을 글로 남겨 후세에 전한다.”면서 재물에 욕심내지 말고, 배우고 익힌 것은 책으로 남길 것을 권하고 있다. 인도 총리 네루도 옥중 편지를 통해 딸을 세계사에 눈뜨게 했다. 세계사 주요 100장면을 소개한 ‘세계사 편력’이 바로 그것이다. 영국의 작가 서머싯 몸이 쓴 ‘달과 6펜스’는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이다. 주식중개인인 가장 스트릭랜드가 어느 날 가정을 버리고 타히티 섬으로 가 화가가 된다는 내용이다. 달은 예술에 대한 열정, 6펜스는 세속적 삶을 상징한다. ‘설악산 화가’로 유명한 김종학씨도 42살의 나이에 홀연히 가정을 떨쳐버리고 설악산에 20년 넘게 파묻힌다. 그러나 그는 고갱과 달리 자녀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아버지로서 못다한 사랑과 바람을 편지와 화선지에 담아 보냈다. 편지와 그림이 딸을 키운 자양분이 되고 버팀목이 됐으니 ‘서신교육’ ‘화폭교육’이었던 셈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가가 된 딸 현주씨가 그림편지 250통을 엮어 책으로 펴낸 것이 화제가 되고 있다. 카카오톡이니, 페이스북이니 하루가 다르게 소통의 신병기가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불통병을 앓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부모와 자식들이다. 여성가족부 조사에 따르면 부모·자식 간에 대화가 안 된다는 응답이 30~40%에 이르렀다. 미국산 소고기 사태에서 보듯 소통이 되지 않으면 불통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커진다. 가정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와 아들 간의 대화가 부족하면 자녀들이 탈선하게 되고 가정 붕괴로 이어진다. 거창한 편지는 아니더라도 자녀들에게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라도 자주 날려 소통하는 것이 어떨까.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정봉주 삼국카페에 옥중사과

    정봉주 전 의원이 최근 비키니 1인 시위 논란을 계기로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던 여성 커뮤니티에 사과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작가 공지영씨는 8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이날 충남 홍성교도소에서 정 전 의원을 면회하고 왔다고 밝히면서 “정 전 의원이 ‘삼국카페’에 사과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고 전했다. ‘삼국카페’는 ‘쌍화차코코아’ ‘소울드레서’ ‘화장~발’ 등 각각 10만명 이상의 회원을 확보한 여성 인터넷 카페를 가리킨다. 앞서 6일 삼국카페는 ‘비키니 시위 논란’과 관련해 “나꼼수에 대한 애정과 믿음, 동지 의식을 내려놓는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공씨는 정 전 의원이 “F4(나꼼수 4인방을 이르는 별명)는 하나이니 내가 사과하면 모두 사과한 것”이라며 “사과란 잘못에 대한 것도 있지만 상대방의 상처를 공감하는 대인의 풍모를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훼손된 그리고 사라진 안중근 유묵 미스터리

    훼손된 그리고 사라진 안중근 유묵 미스터리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묵(遺墨)은 200점가량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숫자는 백암 박은식 선생이 1914년 중국 상하이의 대동편집국에서 ‘창해로방실’이라는 필명으로 써낸 전기 ‘안중근’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안 의사가 뤼순(旅順)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5개월간 유묵을 써 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하루에도 몇 점씩 써낸 것으로 전해진다. ●日측 확인에 “천천히 얘기하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정한 유묵은 57점. 이 가운데 소재를 파악하고 있는 유묵은 50점 정도이며, 기념관이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 유묵은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보물 제569-22호) 등 7점에 불과하다. 나머지 현존하는 유묵은 개인이나 대학교, 일본인 등이 소장하고 있으며 총 26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몇해 전 경매에 나왔던 유묵 ‘담박명지영정치원’(澹泊明志寧靜致遠·개인 소장)은 5억 2000만원에 거래된 적이 있는데, 글씨 상태가 깨끗한 유묵은 7억~8억원을 호가한다. 문제의 ‘일한교의선작소개’(日韓交誼善作紹介)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2010년 펴낸 ‘대한국인 안중근’의 유묵 현황에 실려 있다.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1986년 원소유자의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인데도 소장인은 ‘일본인’, 보관 장소는 ‘일본’으로 돼 있는데 이는 편집 과정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도록은 유묵에 대해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확인하여, 세상에 알려졌다.”고 적고 있다. 도록에 실린 사진은 윤병석(82) 인하대 명예교수가 2001년 엮어 낸 ‘대한국인 안중근-사진과 유묵’(안중근의사기념관 출간)에 있던 것을 그대로 썼다고 기념관 측은 밝혔다. 2001년판 도록을 보면 유묵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심지어 유묵 왼쪽에 써 있는 ‘경술2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 근배´(庚戌二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謹拜·경술년 2월 여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삼가 씀)란 글은 원본이 없다면 어떤 문장인지 알 수 없게 훼손돼 있다. 게다가 안 의사가 글을 써 주고 찍었던 수장인(手掌印·손바닥으로 찍은 도장)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이 도록을 엮은 윤병석 교수는 “2001년 당시 이 사진을 어떻게 입수해 도록에 넣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최 원장과는 잘 아는 사이이지만 유묵에 대해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소노키의 둘째 딸 도시코(사망)는 기증 이듬해인 1987년 유묵의 보존 여부를 확인하러 도쿄 미나토구 미타에 있는 연구원을 찾아갔으나, 연구원이 없어져 유묵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유묵의 행방을 추적해 온 일본인 작가 쓰루 게사토시(68)도 “소노키 도시코가 기증 이후 유묵의 보관 상태를 확인하러 연구원을 몇 차례 찾아갔던 상황을 도시코의 딸에게 2009년 직접 들었으며 유족은 ‘연구원 측에 속은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밝혔다. 쓰루는 ‘천주교도 안중근’(1996년 출간)이란 책을 펴낸 안중근 연구가다. 쓰루는 “3년 전 최 원장에게 전화로 유묵의 소재를 물었더니 ‘한국의 대학 도서관에 있다’고 말해 어느 대학이냐고 재차 물었더니 ‘그 얘기는 천천히 하자’고 했을 뿐 행방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듣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안 의사 유묵 공적관리 필요” 유묵의 행방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최 원장은 ‘걸어다니는 박물관’이란 별명이 있을 만큼 한·일 관계 서지 수집과 연구의 1인자로 꼽힌다. 안중근 연구에도 조예가 깊다. 최 원장은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가안위노심초사’ 등을 원소유자인 일본인을 설득해 기증받은 뒤 기념관에 넘긴 바 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최 원장 측에 유묵 등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현재도 보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고 밝혔다. 최 원장은 ‘일한교의선작소개’ 유묵의 행방을 묻는 서울신문과의 두 차례 전화통화에서 “얘기가 길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으니 나중에 얘기하자.”고 밝혔다. “유묵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최 원장이 함구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갖가지 추측이 난무한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이혜균 기념사업부장은 “유묵의 일한교의(日韓交誼)란 글이 한국보다 일본을 앞세워 일(日)자를 쓴 것에 대해 안 의사가 친일로 매도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말을 최 원장이 하고 다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전했다. 쓰루 게사토시는 “보관 실수로 유묵이 훼손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사실이 안중근 연구의 대가라는 명성에 먹칠을 할 수 있어 자세한 경위를 밝히지 못하는 것 아닌가.”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최 원장에게 몇 차례 전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 유묵에 대해 묻자 편지를 보내라고 해서 유묵을 보고 싶다는 취지로 써 보냈으나 답장이 없었다.”고 말했다. 채내희 안중근의사기념관 사무처장은 “안 의사 서거 102주년을 계기로 최 원장이 ‘일한교의선작소개’의 행방 등에 대해 밝혀 주기를 바라며, 경위야 어찌 됐든 안 의사 유묵 등 관련 자료는 공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성기·문소영기자 marry04@seoul.co.kr ■‘일한교의선작소개’(日韓交誼善作紹介)는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체포돼 처형당한 1910년 3월 26일까지 취조, 재판 등에 입회해 통역을 맡았던 소노키 스에키에게 처형 전달인 2월에 써 준 것이다. 유묵은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의거가 이토를 증오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며 이를 계기로 한·일 양국이 단결해 동양 평화 유지에 힘써야 한다는 재판 과정과 사형집행 순간의 증언과 일치하는 귀중한 유묵으로 평가된다.
  • 김근태 고문기록 ‘남영동’ 재출간

    김근태 고문기록 ‘남영동’ 재출간

    지난달 별세한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생전 고문 기록인 ‘남영동’(중원문화 펴냄)이 재출간됐다. ‘남영동’은 1985년 9월 4일부터 20일간 ‘인간도살장’ 같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겪은 끔찍한 고문의 기억을 세세하게 기록해 1987년 펴낸 책이다. 군부독재 정권의 끔찍한 고문 양상이 온 세상에 폭로됐다. 이 외에도 남영동에서 나와 교도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옥중 투쟁을 이어갔던 재판기록 등 민주화운동에 모든 것을 바쳤던 고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겼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나꼼수’ 정봉주 “나를 구출하려면…” 편지논란

    ‘나꼼수’ 정봉주 “나를 구출하려면…” 편지논란

    서울 강서을 국회의원선거 예비후보인 민주통합당 김효석(왼쪽) 의원이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 정봉주(오른쪽) 전 민주당 의원의 자필편지를 공개, 선거법 위반 논란이 일고 있다. 김 의원은 지난 7일 오후 4시 50분 자신의 홈페이지(hskim.pe.kr)에 ‘옥중에 있는 정봉주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그의 자필편지를 스캔한 사진을 올렸다. 편지에서 정 전 의원은 “강서을 지역주민 여러분, 김효석 의원님을 도와주세요. 저와는 친형제와 다름없습니다.”라며 김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또 “김효석 의원은 민주당에 꼭 필요한 분일 뿐 아니라 저 정봉주를 구출해 내기 위해서도 꼭 19대 국회의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당의 지도부가 되어 당도 살리고 정권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정 전 의원은 수감되기 전인 지난달 26일 당에 인사차 들러 김 후보에게 출판기념회 때 공개하라며 이 편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봉주 마케팅’이라는 빈축과 선거법 위반 논란이 일자 김 후보 측은 이 편지를 홈페이지에서 삭제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선거운동을 할 수는 있지만 이를 리트위트하거나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 올릴 경우 선거법 위반의 소지가 되는지 현재 단속부서를 중심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이현정기자 hj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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