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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첩 누명쓰고 12년간 옥살이 납북어부 36년만에 무죄 판결

    납북된 피해자임에도 간첩으로 몰려 오랫동안 옥살이를 한 어부가 36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법원장은 이례적으로 법원을 대표해 사과하고 반성한다는 말까지 했다. 인천지법 형사13부(부장 송경근)는 26일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12년 넘게 복역한 정규용(70)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정씨가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돼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전까지 18일간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고 조사 도중 가혹행위가 있었음이 인정된다.”면서 “당시 경찰 신문조서 등 검찰이 제출한 자료는 증거 능력이 없거나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므로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장인 송 판사는 “과거 권위주의와 독재정권 시절의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30여년간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은 정씨에게 법원을 대표해 사과드리고 사법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점을 반성한다.”고 말했다. 선고 직후 정씨는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연발했다. 함께 법정을 찾은 부인 연모(66)씨는 “기쁜 날이다. 남편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을 살았는지 모른다.”며 울먹였다. 1968년 당시 26세였던 정씨는 인천 옹진군 소연평도 근해에서 조기를 잡다 납북된 뒤 5개월 만에 돌아왔다. 이후 8년 뒤 경찰은 정씨를 간첩 혐의로 연행해 갔다. 정씨는 고문 끝에 허위 자백을 했고 1976년 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모범수로 감형을 받아 1989년 풀려날 때까지 정씨는 12년 11개월간 옥살이를 했으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해 재심을 청구했다. 한편 이날 공판에서 정씨를 고문한 장본인으로 ‘고문기술자’ 이근안씨가 지목돼 눈길을 끌었다. 정씨는 “이씨가 오금에 몽둥이를 끼워 꿇어앉힌 뒤 80㎏이나 되는 거구로 허벅지를 밟아 고통이 말도 못할 정도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까매져 한동안 걷지도 못하고 기어다녀야 했다.”고 증언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20년만에 재심 첫 공판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20년만에 재심 첫 공판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의 재심 첫 공판이 20일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권기훈) 심리로 열렸다. 1992년 강씨에 대한 대법원 유죄 확정 판결 이후 20년 만이다. 이날 검은 양복을 입고 출석한 강씨는 법정에서 재심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강씨는 “당시 검찰의 공소장과 법원 판결문은 모략과 허구, 비상식으로 가득 찬 괴물처럼 보인다.”며 “검찰과 법원은 단지 나를 파렴치범으로만 몰려고 했다.”며 준비해 온 모두진술서를 읽어내려 갔다. 이어 “20년이라는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제가 저질렀다는 ‘자살 방조’라는 단어는 아직도 생소하다.”며 “잘못된 판결을 바로잡고 싶다. 결단코 저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무죄를 주장했다. 강씨 측 변호인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요구했다. 변호인은 “당시 검찰이 제시한 증거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김형영 실장의 필적감정서뿐이었다.”면서 “유서 대필이 언제, 어디서, 어떤 경위로 이뤄졌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검찰과 변호인 측은 공판 심리 범위와 증거물 채택 등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강씨 측 변호인은 “당시 서울중앙지검이 강씨 등으로부터 압수해 간 서적 등을 재심 증거로 제시하고 싶다.”며 검찰 측에 압수물 제출을 요구했다. 이에 검찰은 “대법원의 재심 개시 결정에 따르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할 만한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것은 아니다.”라면서 “먼저 심리 범위부터 다시 정해야 한다.”고 대응했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총무부장인 강씨가 후배 김기설(당시 전민련 사회부장)씨에게 분신할 것을 사주하고 유서를 대신 써 준 혐의로 기소돼 억울하게 옥살이한 사건이다. 홍인기기자 ikik@seoul.co.kr
  • [보고 듣고 즐기세요]

    대중음악 ●연말 콘서트 ‘환니발’ 오는 24~25일 KBS 부산홀, 30~31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 가수 이승환이 ‘공연의 신’이라는 애칭답게 국내 공연 노하우를 집대성해 카니발 형태로 보여줄 예정이다. 거의 모든 장비를 무대에 처음 선보이며 히트곡 위주의 레퍼토리를 준비해 처음 공연을 접한 사람들도 만족할 만한 공연이 될 전망. 4만 4000~16만 5000원. 1544-1555. 국악·무용 ●궁중연례악 ‘왕조의 꿈, 태평서곡’ 18일, 20~23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화성을 찾아 7박 8일 동안 잔치를 벌인다. 이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정조 19년) 중 봉수당진찬도에 적힌 궁중 무용과 복식, 음식을 그대로 재현했다. 헌선도·쌍고무·학연화대무·선유락 등의 궁중무용부터 수제천·여민락·경풍년·대취타 등의 연주곡까지 궁중 종합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 1만~3만원. (02)580-3300, 3333. ●무용 ‘아Q’ 오는 27~30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 국립현대무용단 홍승엽 예술감독이 중국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의 ‘아Q정전’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 인간의 어리석음과 비극적 인생을 꽃, 칼, 고깔 등의 다양한 소품과 클래식, 대중가요를 아우르는 음악을 활용해 풀어냈다. 1만 5000원. (02)3472-1420. 연극·뮤지컬 ●연극 ‘레 미제라블’ 오는 19~30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무대 언어로 펼쳤다. 빵 한 조각을 훔친 대가로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을 중심으로, 그를 구원하는 미리엘 대주교, 그의 보살핌을 받는 코제트, 장발장을 쫓는 자베르 등 다양한 인물이 참회와 화해, 희생의 의미를 묻는다. 3만~7만원. (02)3668-0007. ●뮤지컬 ‘막돼먹은 영애씨’ 2013년 1월 13일까지 서울 대치동 KT&G 상상아트홀. 사랑은 뜻대로 안 되고 일은 풀리지도 않고 상사에게 압박받고…. 직장 생활에서 받을 만한 스트레스를, 막돼먹기로 한 영애씨가 한방에 날려준다. 김현숙, 박성광, 박진주, 최원준 등 낯익은 얼굴이 등장한다. 6만 6000원. 1588-0688. 미술·전시 ●‘한국 근현대 미술 전시자료의 변천사’전 오는 20일부터 내년 3월 30일까지 서울 창전동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식민지기, 해방시기 미술 관련 자료 150여점을 선보인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박물관 진열품 도감’을 비롯해 해방 직후 화랑들이 찍어낸 이인성·김흥수 화백 개인전 팸플릿 등 다양한 자료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02)730-6216. ●김두진 ‘걸작’전 내년 1월 6일까지 서울 소격동 갤러리 선 컨템포러리. 다양한 매체를 실험해왔던 작가가 이번엔 3차원(3D) 그래픽을 선택해 다양한 걸작을 새롭게 표현해냈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마사초의 ‘낙원에서의 추방’ 같은 작품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02)720-5789.
  • [위기의 검찰] ④ 잘못된 수사관행

    ‘강압 수사, 인권 유린, 무리한 기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검찰의 고질적인 수사 관행이다. 이 같은 문제점이 지적돼 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검찰의 ‘묻지마 수사’는 달라지지 않았다. ‘10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죄 없는 사람을 벌하지 말라.’는 원칙이 있지만 검찰의 현주소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식이다. 일단 혐의를 두고 원하는 답을 얻어 내기 위한 강압적 수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2002년 피의자 구타 사망사건 강압 수사의 대표적인 사례는 2002년 ‘피의자 구타 사망사건’이다. 당시 검찰 수사관들은 살인 피의자 조모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자백을 얻어 내기 위해 가혹행위에 가까운 폭행을 가했다. 이로 인해 조씨가 사망하자 당시 이명재 검찰총장은 취임 첫해 사태의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국민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검찰이지만 대상이 사회적 약자일 때 강압 수사는 더 빈번했다. ‘수원 노숙 소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됐다가 지난 10월 25일 무죄를 선고받은 정신지체 장애인 정모씨의 경우 검찰의 강압과 회유로 허위 자백을 했다가 5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형기를 채우고 출소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무죄가 밝혀졌지만 검찰은 사과도 보상도 없었다. ●권력 비리는 진술에만 의존 정치인 관련 사건에서는 진술에만 의존한 수사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약자에게 강했던 검찰은 ‘민간인 불법 사찰’, ‘내곡동 사저 부지 매입 의혹’ 등 권력 비리 앞에서는 작아졌다. 검찰은 내곡동 사건 조사 당시 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명박 대통령의 아들 시형(34)씨를 소환 한 번 하지 않고 서면조사만 한 뒤 관련자 전원을 무혐의 처분했다. 이후 특검 수사 과정에서 시형씨의 검찰 진술에는 상당 부분 오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자백과 본인의 진술에만 의존한 수사가 얼마나 큰 허점들을 지니는지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수사 관행의 문제는 또 있다. 실적주의를 기반으로 한 무리한 기소다. 지난달 25일 ‘성추문 검사’에게 뇌물수수죄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검찰은 한 차례 영장이 기각된 직후 같은 혐의로 영장을 재청구했다가 다시 기각돼 오기를 부린다는 비난을 샀다. 검찰의 무리한 기소는 수치로도 명확히 드러난다. 검찰이 기소한 사건의 1심 무죄 선고율은 해마다 증가, 지난해 1심 재판 무죄 선고율이 2009년 대비 70.2%나 상승했다. 법무부의 ‘전국 지검별 1심 무죄 선고율 현황’에 따르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2009년 4587명, 2010년 5420명, 2011년 5772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올해는 지난 6월 기준 2316명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전문가 “물증 수사로 전환” 이 같은 잘못된 수사 관행에 대한 해법으로 전문가들은 ‘물증 위주 수사로의 전환’과 ‘수사권 축소’를 제시한다.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증언 위주가 아닌 물증 위주의 수사로 가야 하고 근본적으로는 검찰 수사권을 털어내야 한다.”면서 “불기소만 통제하는 일본의 ‘검찰 심사회’를 강화해 법원에 설치함으로써 수사·기소권의 남용을 견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희 경찰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기소권을 독점한 검찰 수사는 허위 진술을 받아내거나 인권을 침해할 위험이 크다.”면서 “선처를 미끼로 자백을 유도하는 후진적 행태를 개선하기 위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고 검찰의 수사 범위를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지숙기자 truth173@seoul.co.kr
  • ‘까칠한 X맨 울버린’ 그가, 손톱을 빼고 노래를 한다

    ‘까칠한 X맨 울버린’ 그가, 손톱을 빼고 노래를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슈퍼히어로 영화 ‘엑스맨’(2000)을 통해서다. 미 육군의 극비 실험 결과 탄생한 까칠한 돌연변이로 수컷의 매력을 물씬 풍긴 ‘울버린’이 그다. 워낙 인기를 끌다 보니 ‘엑스맨’ 시리즈 캐릭터 중 유일하게 스핀오프-‘엑스맨 탄생: 울버린’(2009)-까지 만들어졌다. 슈퍼히어로 영화 주인공은 대개 여성 관객의 외면을 받기 쉽지만 그는 예외였다. 잃어버린 기억과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고독한 캐릭터인 동시에 한 여인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란 점에서 끌렸을 것이다. 물론 189㎝의 훤칠한 키와 섬세한 근육질 몸매, 깊고 슬픈 눈, 중저음의 목소리를 갖춘 우월한 하드웨어 또한 빼놓을 수 없다. 2008년 피플지(誌)가 그를 ‘살아있는 가장 섹시한 남자’ 1위에 올려놓은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눈치를 챘겠다. 호주 배우 휴 잭맨(44)이다. 그가 6100만 달러짜리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 역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갸우뚱한 이들도 있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짐승남의 이미지가 각인된 탓이다. 하지만 뮤지컬은 그에게 낯선 분야가 아니다. 잭맨의 이름을 처음 호주 밖에 알린 건 고전 뮤지컬 ‘오클라호마’였다. 1998년 런던 웨스트엔드의 로열내셔널극장 무대에 오른 ‘오클라호마’로 잭맨은 올리비에상 후보에 올랐다. 흥미롭게도 당시 잭맨을 캐스팅한 인물은 영화 ‘레 미제라블’의 공동제작자인 캐머런 매킨토시였다. 2004년에는 1970년대 천재적인 싱어송라이터 피터 앨런의 생애를 다룬 뮤지컬 ‘오즈에서 온 소년’으로 토니상 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85년 10월 바비컨센터 초연 이후 런던에서 27년 동안 1만회를 훌쩍 넘는 최장기 공연 기록을 이어가는 뮤지컬 ‘레 미제라블’의 영화화 과정에서 잭맨이 가장 먼저 거론된 건 당연했다. ●“난, 준비된 뮤지컬 배우” 잭맨이 다음 달 북미와 한국 등에서 개봉을 앞둔 ‘레 미제라블’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 ‘캣츠’ ‘미스 사이공’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등을 제작한 ‘뮤지컬의 제왕’ 매킨토시와 함께 왔다. 잭맨은 26일 서울 리츠칼튼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뮤지컬 영화를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시점이 딱 맞았다. 내가 먼저 톰 후퍼 감독에게 연락해 장발장 역을 맡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엑스맨’ 같은) 슈퍼히어로 영화들이 많지만 장발장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고결한 존재로 거듭났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서 용기를 얻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킨토시는 “오래전부터 영화화하고 싶었지만 20년 전에는 잭맨이 너무 어렸다. (그가)나이를 먹어야 이 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다렸다.”며 웃었다. 이어 “(판틴 역의) 앤 해서웨이도 마찬가지다. 해서웨이의 어머니가 ‘레 미제라블’의 미국 투어 때 판틴 역을 했는데 그때 해서웨이는 꼬마였다. 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러셀 크로도 내가 시드니에서 ‘미스 사이공’ 오디션을 열었을 때 응시했다고 하더라. 20여년 전 앨런 파커 감독이 영화화하려다가 무산됐는데 운명인 것 같다. 덕분에 지금 배우들과 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러셀 크로·앤 해서웨이·어맨다 사이프리드… 호화 캐스팅 ‘레 미제라블’은 제작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다. ‘킹스스피치’로 지난해 아카데미 4개 부문을 휩쓴 톰 후퍼가 메가폰을 잡았다. 잭맨은 물론, 러셀 크로(자베르 경감), 앤 해서웨이, 어맨다 사이프리드(코제트), 에디 레드메인(마리우스) 등 호화 캐스팅을 했다. 제작방식도 독특했다. 지금껏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들은 출연배우들이 미리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녹음한 뒤 상대배우와 연기를 펼치며 립싱크를 하는 식이었다. 반면 ‘레 미제라블’은 촬영 현장에 아예 피아노를 갖다 놓았다. 카메라가 돌아가면 배우들은 무선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상대 배우의 리액션으로 고조된 감정을 실어 노래했다. 뮤지컬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라이브 녹음을 했다는 얘기다. 잭맨은 “라이브로 노래하는 건 힘들다.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배우를 직접 보면서 연주하기 때문에 박자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자신의 연기에만 몰입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때론 배우의 감정이 북받쳐 목소리가 잠기기도, 갈라지기도, 속삭이기도 했지만 후퍼 감독은 이를 고스란히 살렸다. 이와 관련, 잭맨은 “노래를 부르면서 연기를 하는 건 레이싱과 같다. 드라이버가 본능에 따라 기어를 바꾸듯이 나도 현장의 감정에 의지해 노래를 했다. 음정이나 박자가 맞는지를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떠올린다면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손꼽히는 배우들의 틈에서 가장 돋보인 건 잭맨이다. 굶어 죽어 가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다가 19년의 옥살이를 했던 장발장이 가석방된 시점부터 판틴과 코제트를 만나 새 인생을 찾고, 숨질 때까지 수십년의 세월을 분장이 아닌 목소리 높낮이와 성량, 눈빛으로 표현했다. ‘엑스맨’ 시리즈와 ‘반 헬싱’ ‘리얼스틸’ 등 액션영화가 주를 이룬 그의 커리어에 오랫동안 남을 작품임에 분명하다. 그렇다고 액션을 고대한 팬들이 섭섭해할 필요는 없다. 새해에는 공동 제작 겸 주연을 맡은 두번째 스핀오프 영화 ‘울버린’을 통해 짐승남으로 돌아온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4) 1930년대 모던 보이 vs 마르크스 보이

    [선택! 역사를 갈랐다] (34) 1930년대 모던 보이 vs 마르크스 보이

    조선시대 서울의 공식 이름은 한성부(漢城府)였다. 사람들은 한양이라 불렀다. 한양은 북한산 남녘과 한강 북쪽 사이에 자리 잡은 양지바른 터전이라는 뜻이다. 1910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바꾸고 경기도에 소속시켜 위상을 낮추었다. 서울을 일본의 오사카나 교토와 같은 지방 도시로 만든 것이었다. 1920년부터 1935년까지 경성의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 1935년에는 44만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25% 남짓이 일본인이었다. 식민지 도시 경성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청계천 이남에는 본정통(오늘날 충무로), 명치정(지금의 명동)에서 일본인 상가를 중심으로 남촌이 생겼다. 진고개 중심의 남촌 상가는 근대의 상품과 화려한 건물, ‘현대인의 신경’인 네온사인으로 덮였다. 카페, 우동집, 빙수집, 찻집이 즐비했다. 남촌은 ‘경성 속의 일본’이었다. 오늘날 명동 부근인 진고개는 본디 변두리 마을이었다.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들어와 ‘작은 도쿄’를 세우고 주인으로 들어앉았다. 백화점과 카페, 당구장, 극장 같은 근대 유흥시설이 남촌에 몰려 있었다. 청계천 이북에는 조선인 상가가 많았던 종로통을 중심으로 북촌이 되었다. 북촌 지역은 전통 한옥과 나지막한 상점들이 있었으며 밤거리는 어두컴컴했다. 식민 도시의 ‘원주민 상가’였던 종로는 중심에서 밀려났다. 종로의 밤거리에는 온갖 ‘싸구려’ 물건을 파는 야시가 열렸다. “극도의 생활난에 빠진 빈궁한 사람들이 혹시나 입에 풀칠이나 할까 하는 눈물겨운 생각”으로 야시에서 물건을 팔았다. 경성은 식민지 지배층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하이칼라 경성’과 식민지 빈곤층과 실업자가 넘쳐나는 ‘실업 경성’의 두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쾌락 추구 ‘모던 보이’ 1920년대가 되면서 양복 입은 남자와 양장한 여성이 늘어갔다. 옷과 장신구 등은 유행 바람을 탔다. 헤어스타일도 바뀌었다. 사람들은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자르고 면도를 하는 것을 ‘신식’으로 가는 길처럼 여겼다. 그럼에도 여자 단발은 아직 문제가 되었다. 단발한 여인들은 ‘단발미인’이라 하여 뭇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처음엔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몇몇 여인이 단발했지만, 1930년대 중반부터 단발이 크게 번졌다. 일부 여성은 단발에 ‘물결을 일으키는’ 파마도 했다. 겉모습만이 아니다. 생각과 취향이 남다른 사람이 생겨났다. 1920년대 중반부터 그들을 일컬어 모던 보이, 모던 걸이라고 불렀다. 모던 세대들은 사랑법도 새로웠다. 그들은 자유연애를 바랐다.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누구인지를 딱 부러지게 정의 내리기는 힘들다. 모던 세대란 도시와 서구 또는 일본문화를 즐기며 근대를 적극 받아들인 신세대로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대개 이들은 식민지 현실이나 사회모순에 관심을 두지 않고 ‘모던’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은 미디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영화가 문화 영역에서 터를 잡았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배우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축음기가 보급되면서 대중음악 시장이 커졌다. 1930년대 초반 ‘레코드의 홍수, 유성기의 천하’라는 말이 떠돌았다. 모던 보이는 근대적 유흥공간을 찾아 여가와 유흥도 즐겼다. ‘거리의 오아시스’ 다방에서 근대의 상징처럼 커피를 마시며 서양음악을 듣기도 했다. 그 무렵 다방은 하나의 문화공간이기도 하고 ‘도시인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페는 문제가 있었다. 도시의 분위기를 좇던 모던 보이를 ‘에로’의 길로 안내한 것이 바로 카페였기 때문이다. 카페란 여급이 술시중을 드는 곳에서 비싸게 술을 먹는 곳이었다. 여급에게 팁도 주어야 했다. 카페는 ‘퇴폐적 취미’를 발산하는 곳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카페를 ‘에로의 신전’ 또는 ‘향락 제작소’라고 불렀다. 모던 보이들은 백화점 가기를 좋아했다. 1930년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이 문을 연 뒤 잇달아 히라다·조지야·미나카이·화신백화점 등이 문을 열었다. 백화점의 화려한 쇼윈도는 ‘시각의 쾌락’을 맛보게 한다. 최첨단 기기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으리으리한 백화점에 들어선다. 갖가지 물건을 쓰임새에 따라 가지런하게 분류해 놓은 백화점은 ‘과학적’이다. 매장 앞에는 ‘어여쁜 숍걸’이 매우 상냥하다. 어디 그뿐인가. 백화점은 호화로운 식당과 전람회를 열 수 있는 전시공간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모던 보이들은 ‘도시의 심장’인 백화점에서 도시의 감각과 유행의 물결을 느꼈다. 모던 보이는 갑자기 닥쳐온 근대 도시의 습속을 하루라도 먼저 몸에 익혀야 했다. 그러한 모던 보이에게 경성은 근대의 훈련장이자 여가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유흥의 도시였다. 그들은 자기가 경험하는 근대가 ‘혼종의 근대’ 또는 ‘식민지 근대’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식민 도시를 거닐고 근대를 소비했다. ●이재유의 경성 1936년 12월 25일이었다. 농사꾼, 장돌뱅이, 노동자, 학생 등으로 변장한 32명의 경찰이 ‘검거 중대’를 만들어 창동 남쪽에서 시골 농민 차림인 30대 초반의 한 남자를 체포했다. 일제에 맞서 비합법 혁명운동에 몸을 던졌던 이재유였다. 이재유는 식민지 조선에서 보통 사람으로 살기에는 너무나 ‘불온’했다. 이재유는 일제 식민지 체제에서 해방되고 노동자와 농민이 새 나라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 했다. 이재유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굳게 믿었다. 이재유의 정세 판단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혁명적 낙관주의 없이 어떻게 온몸을 던질 수 있겠는가. 1930년대는 대공황이 닥쳐와 자본주의가 큰 위기에 빠졌다. 숨통을 연장하려는 자본주의는 노동자와 농민을 더욱 수탈했다. 이에 맞서 곳곳에서 노동자 투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은 아직 공장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농민투쟁도 기껏해야 군단위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툭툭 불거지는 여러 투쟁을 한데 묶어 한꺼번에 타오르는 들불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재유는 1920년대 노동조합·농민조합과는 다른 혁명적 노동조합·혁명적 농민조합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이 조직은 선진 활동가들의 비합법 모임이다. 그러나 혁명적 노동조합과 혁명적 농민조합만으로 혁명운동을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재유가 보기에 혁명운동을 앞장서 이끌 혁명가들의 조직인 ‘조선공산당’이 없으면, 혁명이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공황을 벗어나려고 제국주의자들이 전쟁에 뛰어드는 형국에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조직하려 해도 당은 꼭 있어야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이재유는 1920년대처럼 전국적인 당 조직을 먼저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역에서 시작해서 전국으로 확장하는 당 조직을 만들려 했다. 그는 운동의 근거지를 경성으로 삼았다. 이관술, 김삼룡, 이현상, 이순금, 정태식 등 수많은 동지가 그와 함께했다. 이재유 수사기록에는 “요즈음 경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거의 모든 공산주의운동의 흑막으로 이재유가 활동함으로써 수많은 청년 남녀가 해를 입었다.”고 적었다. 이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재유 조직에는 학생과 노동자, 농민도 많았다. 이재유는 피검과 고문, 옥살이, 탈옥, 재검거를 되풀이했다. 일제 탄압으로 조직이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서 굽힘 없이 혁명운동을 했다. 이재유는 1932년에서 1936년 말까지 ‘경성 트로이카’, ‘경성재건그룹’,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만들었다. 이재유에게 경성은 혁명운동의 근거지이자 그 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킬 발판이었다. ●모던 보이의 ‘핑크’ vs 이재유의 ‘적색’ 1930년대 일본에서 ‘에로’가 유행했다. 이것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다. 왜 그랬을까. 한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공황과 전쟁의 시대’를 맞이하여 일본 청년들은 일본의 긴자거리를 배회하며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핑크’가 되거나 진지하게 사회주의 혁명을 실천하는 ‘마르크스 보이’, ‘엥겔스 걸’이 되어 ‘아카(red)’가 되는 것, 둘 가운데 하나였다.” 식민지 조선도 이와 비슷했다. 식민지 조선의 모던 보이는 경성의 혼마치(지금의 충무로)부근을 서성였다. 이 ‘핑크’들은 카페와 기생집을 드나들며 향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와 상반되는 ‘마르크스 보이’, ‘엥겔스 걸’도 조선에 있었다. 1920년대 근대 교육을 받은 젊은이 사이에서 사회주의가 크게 유행하여, “입으로 사회주의를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졌다.”고 했다. 이 새 세대를 일컬어 조선에서도 ‘마르크스 보이’, ‘엥겔스 걸’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 신문과 잡지에는 거의 빠짐없이 사회주의 관련 글이 실렸고,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비롯해 주요 사회주의 글도 번역됐다. “사회주의를 믿고 안 믿는 것은 다른 문제요, 사회주의가 실현되고 안 되는 것도 다른 문제다. 다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는 알아야만 행세를 하게 된 것이 오늘의 형편이다.”는 책 광고까지 있었다. 일제 기록에 따르면, “예전의 독립운동이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초조해진 민중에게 사회주의운동은 일종의 자극과 광명을 주었다.” 1905년에 태어난 이재유도 ‘마르크스 보이’였다. 개성 송도고보에 다닐 때부터 ‘마르크스 보이’가 된 이재유는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했다. 그 뒤 그는 여러 단체에서 실천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이재유는 1932년 ‘경성트로이카’를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적색’ 혁명가가 되었다. ‘트로이카’란 “몇몇 지도부가 먼저 당의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끄는 것과 같이 회원 모두가 저마다 자유롭게 선전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이재유는 “일생을 혁명가로서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감옥에서도 조선어 사용금지 반대, ‘수감자 대우 개선’ 등의 투쟁을 했다. 이재유는 형이 다 끝나고도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주보호교도소에 갇혔다. ‘핑크’의 모던 보이가 ‘메이크업’한 경성을 누빌 때 지하에서 혁명운동을 했던 이재유, 그는 1944년 10월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비합법 혁명운동사에서 최고의 기록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했다. 최규진(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 춥고 배고픈 시대…지금, 장발장을 만날 때다

    춥고 배고픈 시대…지금, 장발장을 만날 때다

    생계형 좀도둑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장 발장’이다. 19세기 중반에 태어난 소설 속 인물인데도, 혹독한 겨울에 누이와 누이의 일곱 어린 자녀를 위해 빵 한 덩어리를 훔치다 붙잡혀 19년간 감옥살이를 한 실존인물처럼 경제가 어려워지면 불사조처럼 활활 타오른다. 달나라로 인간을 쏘아 보내는 첨단의 시대에도 처절한 빈곤과 배고픔, 법의 냉혹함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년 전 세계적으로 혹독한 경제침체가 닥칠 것이라는 경제전문가들의 암울한 진단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때 빅토르 위고(1802~1885)의 ‘레 미제라블’을 천천히 완독해 보면 어떨까 싶다.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으로 레 미제라블 5권을 내놓았다. 한 권당 500쪽이 넘으니 전 권을 다 읽으려면 2500쪽이 넘어 한 번 읽어보겠다고 마음먹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게다가 어린이용 축약본과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레 미제라블을 다양한 버전으로 읽고, 봤기 때문에 이야기 전개와 결말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책을 추진력 있게 읽어내려 갈 수도 없다. 그러나 조금만 마음을 내 맛보기를 시작하면, 프랑스의 정치인이자 대문호인 위고의 입담과 생생하게 그려놓은 인물의 성격 묘사, 인간의 구질구질하고 추악한 내면과 그런 악마적 본질 속에서 끊임없이 내면의 성스러움을 찾아가려는 인간적 몸부림 때문에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된다. 위고는 프랑스 혁명기에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낸 회기의 국민의회 의원이었으나, 그 뒤로 은둔한 늙은 혁명가 G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웅변한다. “루이 16세로 말하자면, 나는 반대했소. 나는 한 인간을 죽일 권리가 내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러나 악을 절멸시킨 의무는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폭군의 종말에 찬성했소. 다시 말해서, 여성에게는 매음의 종말, 남성에게는 노예 상태의 종말, 아동에게는 암흑의 종말이요…(중략).”(1권 77쪽) 이 발언은 위고가 책이 나오기 직전인 1862년 1월 1일 오트빌 하우스에서 쓴 메모와 거의 같다. 이 소설을 쓴 이유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는 메모의 끝에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고 했다. 생계형 매춘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서슴없이 나오는 대한민국에서 혁명가 G의 성찰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스스로 혁명가적인 뜨거운 삶을 살았던 위고는 계몽가로서 빈곤 해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위해 독자들이 머리를 맞대기를 바랐을 것이다. 소설가는 순수하게 소설만 쓰고, 시인은 순수하게 시만 써야지 정치에 참여하면 곤란하다는 식의 한국적 편견은 차라리 벗어던지는 것이 레 미제라블 앞에선 더 환영받을 일이다. 빵 하나를 훔치고 5년 형을 받은 장 발장은 복역 3년 만에 자신의 누이와 일곱 조카의 생사가 궁금해 탈옥을 거듭 감행하게 되고, 탈옥 시도로 14년을 더 감옥살이해야 했다. 그는 19년을 감옥에 있으며 “자신의 증오심으로 사회를 처벌했다. 그는 자기가 겪는 운명을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고, 아마 언젠가는 서슴지 않고 그 책임을 물으리라 생각했다. (중략) 그는 자기가 받은 징벌은 사실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불공정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고 했다.(1권 164쪽)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날카롭게 벼려 놓은 것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묻지 마 범죄’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개인의 불만과 고통이 레 미제라블에는 이처럼 숱하게 들어 있다. 이런 항변도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주장들이다. “가장 강한 자가 가장 능력있는 자요. 당신의 그 ‘서로 사랑하라.’와 같은 말은 바보 같은 소리요.”(1권 111쪽) 경쟁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존하기보다 홀로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류의 사람들이 내는 강퍅한 내면의 목소리들이다. 그러나 위고는 “진실한 가치와 성공의 허울뿐인 유사성이 사람들을 속이”고 “오늘날 거의 공인된 철학이 하인의 신분으로 성공의 집에 들어와 성공의 사환복을 입고 그 응접실에서 시중을 든다. (중략) ‘영달’은 곧 ‘능력’이라고 추측된다.”(1권 100쪽)라고 분석했다. 코제트의 불쌍한 어머니이자 창녀인 아름다운 팡틴의 몰락을 보면서 우리가 ‘시커먼 행복’을 추구하며 천박하게 웃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섬뜩해지기도 한다. 위고는 1831년 ‘파리의 노트르담’으로 소설가의 명성을 얻었고, 수많은 정치 시를 발표해 참여시인으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1845년 상원의원에 선출됐고,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당파에서 공화주의자로 변신해 나중에 황제에 오르는 나폴레옹 3세와 대립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3세가 즉위하자 1851년부터 20년 동안 프랑스를 떠나 망명을 해야 했는데, 이때 아내와 자식을 잃었다. 레 미제라블은 망명 중이던 1862년 3월 발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위고는 1870년 파리로 귀환해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레 미제라블에서 위고는 정치철학의 변화를 미리엘 주교를 통해, 정치인은 어떻게 살아야 훌륭한 삶인가에 대한 내면적 갈등을 마들렌 시장으로 변신한 장 발장을 통해 고스란히 담아 놓았다. 평범한 사람에게도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은 늘 온다. 진실을 택할 것인지, 위선을 택할 것인지 마들렌 시장의 고민을 역지사지해 볼 수 있겠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피고인 5년 옥살이 출소후 재심서 무죄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수원역 노숙소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5년간 옥살이를 하고 만기 출소한 정신지체 장애인에게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 권기훈)는 25일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정모(33)씨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의 주요 증거가 피고인과 다른 공동 피고인의 자백 취지의 진술이었는데 이는 일관되지 않아 신빙성이 없고 당시 구체적 정황과 비교하면 객관적 합리성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를 데리고 수원역에서 학교까지 한 시간 걸어가면서 폭행장소를 찾아내 학교 담을 넘어 들어갔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고, 범행장소 인근에 있는 여러 폐쇄회로(CC)TV에 피고인이 피해자를 데려가는 장면이 포착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권 부장판사는 선고를 마친 뒤 “상당히 오래전에 1심 판결이 내려졌는데 이제야 재심 판결이 이뤄져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씨를 대리한 박준영 변호사는 국가배상을 청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지숙기자 truth173@seoul.co.kr
  • ‘콩나물 전도사’ 한재섭 목사의 콩나물 희망 프로젝트

    ‘콩나물 전도사’ 한재섭 목사의 콩나물 희망 프로젝트

     왕성한 전도를 펼치고 있는 한재섭 목사가 매주 목요일 서대문 바위샘교회에서 조경 수익금으로 65세 이상 노인 1000명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직접 키운 콩나물도 나눠주고 있어 훈훈한 미담이 되고 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콩나물과 함께 해 ‘콩나물 전도사’로 불린다.  한 목사의 ‘콩나물 전도사’란 별칭에는 남다른 이면이 있다. 충남 홍성의 바닷가에서 12대 독자 집안의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때 비행 청소년들과 어울리면서 싸움만 하는 건달 생활을 했다. 365일을 술을 마시면서 방탕한 세월을 보낸 것.  그러던 중 88서울올림픽이 한창일 때 큰 사고를 쳤다. 홍성시내 가장 큰 상가에서 술을 마시면서 담배 불씨를 잘못 처리해 큰 화재가 난 것. 그는 방화죄로 감옥살이를 했다. 후회의 날이 지속되면서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후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과 만난 후의 삶은 180도 달라졌다. 이때부터 작지만 자신보다 더 어렵고 소외받는 계층을 위해 살아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한 목사는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할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면서 “이들이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고 생계를 지원하는 ‘천국의 동산’ 복지재단을 설립하는 것이 또하나의 꿈”이라고 말했다. 그는 콩나물을 선물하면서 전도한 이야기를 묶은 ‘천국을 콩나물시루로 만드는 콩나물 전도법’이란 책도 썼다. (031)719-0108.  정기홍 기자 hong@seoul.co.kr  
  • 大法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20년 만에 재심 결정

    大法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20년 만에 재심 결정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1991년에 발생한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에 대해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하고 19일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은 민주화운동 후반부였던 1991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총무부장인 강씨가 후배 김기설(당시 전민련 사회부장)씨에게 분신할 것을 사주하고 유서를 대신 써 준 혐의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사건이다. 검찰은 기소의 결정적 근거로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을 제시했다. 강씨는 자살 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94년 8월 만기 출소했다. 그러나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강씨는 김씨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며 이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고 국가에 사과와 재심 조치를 권고했다. 이에 서울고등법원은 강씨 변호인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여 2009년 9월 이 사건에 대해 무죄 취지로 재심을 개시했지만 검찰이 즉시 재항고하면서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왔다. 대법원은 이날 “재심 대상 판결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속 문서 감정인들의 증언 내용 중 일부가 허위임이 증명되었다.”면서 “재심을 개시한 원심의 조치는 결과적으로 정당하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이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하고 재심을 개시함에 따라 강씨 사건은 서울고법에서 다시 심리가 진행될 예정이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최지숙기자 truth173@seoul.co.kr
  • 다른 길 걷는 中 대표작가 2인, 불편한 심경 토로

    다른 길 걷는 中 대표작가 2인, 불편한 심경 토로

    중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모옌(莫言)과 관련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중국 반체제 인사들을 중심으로 모옌의 노벨상 수상 비난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모옌 스스로 그런 논란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모옌은 14일 밤(현지시간) 관영 중국중앙(CC)TV 뉴스 채널의 인터뷰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이에 진행자가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당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지금 매우 신나고 반드시 행복할 것으로 믿고 있다.”며 ‘행복하다’는 답변을 유도했지만 모옌은 오히려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행복이란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없이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를 말하지만 나는 현재 매우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근심 또한 많은데 어찌 행복을 논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일각에서는 ‘공산당과 친한 어용 작가’라는 비난이 쇄도해 행복감보다는 심적 고통에 시달리는 상황을 표현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그는 지난 12일 기자간담회에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에 대한 비난을 해명하는 데 할애했다. 한편 모옌에 대해 ‘국가가 필요로 할 때마다 손재주를 부리는 국가 시인’이라고 혹평한 중국의 반체제 망명작가 랴오이우(廖亦武)가 14일 중국을 맹비난했다. 랴오는 이날 세계 문화 소통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독일출판인협회가 수여하는 평화상을 받는 자리에서 “중국이란 나라는 깨부숴야 하는 거대한 쓰레기 더미”라고 규정했다. 그는 또 “중국은 손에 피를 묻히는 비인간적인 제국”이라면서 “서구는 자유무역이란 미명 아래 학살자들과 공모하고 있다.”고 중국과 서방을 싸잡아 비난했다. 톈안먼(天安門) 사태 희생자를 애도하는 ‘대학살’이라는 시를 발표해 4년 동안 옥살이를 한 랴오는 지난해 7월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베트남까지 걸어서 탈출한 뒤 독일로 망명했다. 랴오는 이날 시상식에서도 톈안먼 희생자를 추도하는 노래를 불렀다. 베이징 주현진특파원 jhj@seoul.co.kr
  • [뉴스 WHO] 40대 대법관 후보자 김소영 대전고법 부장판사

    [뉴스 WHO] 40대 대법관 후보자 김소영 대전고법 부장판사

    대법관 후보자로 임명제청된 김소영(46·사법연수원 19기) 대전고법 부장판사에게는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1990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로 임관한 김 후보자는 서울과 지방의 각급 법원에서 민사, 가정, 형사, 행정 등 다양한 재판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02년에는 여성 법관 최초로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에 임명돼 대법원 판결의 체계적 분류 작업, 종합법률정보 데이터베이스 개선 사업 등을 주도하면서 행정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2005년에는 여성 법관으로는 처음으로 지원장에 임명됐다. 대전지법 공주지원장을 맡으면서 자상함과 통솔력으로 지원 내에서는 물론 유관기관에서도 신망이 두터웠다. 또 2008년에는 여성 첫 법원행정처 정책총괄심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양형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양형기준제도를 확립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이때 뇌물죄 등 비리 관련 범죄에 대한 양형을 엄정하고 일관성 있게 정립한 공로로 현직 판사로는 처음으로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근정포장을 받았다. 윤성식 대법원 공보관은 김 후보자에 대해 “대법관에게 필요한 덕목을 고루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 보장을 위해 헌신해 온 대표적인 여성 법관”이라면서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충실하게 대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 후보자는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시절인 2011년 11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유족회를 만들어 간첩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수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김모씨 등 피해자 30명에게 국가가 모두 27억 9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연예인들의 장기 전속계약을 불공정 거래로 판시해 과징금을 물린 판결도 김 후보자의 주요 판결로 꼽힌다. 김 부장판사의 대법관 후보 제청 소식에 법조계에서는 ‘기수파괴, 관행 파괴’ 등 파격 인사라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당초 이 자리는 안대희 대법관의 후임으로,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검찰 몫이었다. 이 때문에 법무부가 추천한 한명관(53·15기) 대검찰청 형사부장과 이건리(49·16기) 공판송무부장이 유력 후보로 거론됐다. 하지만 양승태 대법원장은 연수원 19기 후보자를 제청했다. 관행보다는 대법관 다양화와 여성 대법관 임명에 대한 시대적 여론을 더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김 후보자가 임명되면 역대 여성 대법관 중 최연소 대법관이 된다. 전체 13명인 대법관 가운데 선임인 양창수(6기) 대법관과는 13기 차이가 난다. 박보영(16기) 대법관보다도 3기수 아래로 기수 파괴인 셈이다. 대한변협(회장 신영무) 측은 “여성대법관 후보가 제청된 건 환영할 만하나 재조 출신으로만 제청이 이루어진 건 유감”이라고 밝혔다. 부친이 검사였던 김 후보자는 어릴 때부터 법조인을 동경해 왔다. 김 후보자의 부친은 서울지검 1차장검사를 끝으로 개업한 김영재 변호사이고, 남편은 대검찰청 첨단수사범죄수사과장을 지낸 백승민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다. 불교 신자로 오로지 법리로만 판단해 내리는 기계적 판결과 오류를 피하려고 화두를 통한 참선을 즐겨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9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헌법재판소는 이정미 재판관이 유일한 여성이다. 이 재판관은 2003년 임명된 전효숙 전 재판관에 이어 두 번째 여성 재판관이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부산국제영화제서 만난 주목할 만한 작품] 창수-이 사나이의 순정, 짓밟힌다

    [부산국제영화제서 만난 주목할 만한 작품] 창수-이 사나이의 순정, 짓밟힌다

    창수는 다른 사람의 옥살이를 대신하고 돈을 받는 인천 차이나타운 삼류 건달이다. 서른을 훌쩍 넘긴 건달이지만, 아직 수총각이다. 어느 날 밤길을 걷던 창수 앞에 고급 승용차가 멈춰 선다. 차에서 내린 도석은 미연을 끌어내려 마구 주먹질을 한다. 창수는 말려보려 했지만, 외려 한방에 나가떨어진다. 외모만 봐선 말도 섞지 않을 법한 둘의 짧은 동거는 그렇게 시작된다. 사랑에 빠진 창수는 반지를 사서 미연에게 청혼을 하려 한다. 하지만, 집에 와보니 미연은 이미 숨진 채 침대에 누워 있다. 알고 보니 여자는 전국구 조폭 두목의 애인이면서 조직의 2인자인 도석과도 얽힌 터. 경찰과 조폭들의 추적을 동시에 받게 된 창수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만의 의지로 행동을 결심한다.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섹션에 초대된 ‘창수’는 시나리오 단계에서 많은 남자배우가 탐냈던 영화다. 평생 하류인생을 살던 삼류 건달이 사랑에 빠지고, 그 여자를 위해 전국구 조폭과 10여 년에 걸쳐 외로운 대결을 펼친다는 영화의 얼개는 구식 누아르의 느낌이지만,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 창수 역을 임창정이 차지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충무로는 반신반의했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색즉시공’ 등 수많은 영화에서 임창정은 코믹연기의 황제로 군림했다. 그러나 웬걸, 스크린 속 임창정은 영락없는 창수였다. “감히 단언컨대, 대한민국에 나보다 뛰어난 연기자는 많지만, 창수를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배우는 없다.”던 임창정의 언급은 빈말이 아니었다. 주먹솜씨는 건달치곤 수준 이하. 하지만, 친동생처럼 아끼는 동료 건달 상태(정성화)와 사랑하는 미연(손은서) 앞에서 무슨 일이든 해결할 것처럼 허풍 떠는 창수에게선 짙은 연민이 묻어난다. 표정과 목소리의 울림만으로 임창정은 창수로 다시 태어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기시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 ‘파이란’(2001)이 떠오를 것이다. 평생을 비루하게 살아온 인천의 삼류 양아치 강재(최민식)가 한 여인(장바이즈)의 사랑을 깨달은 뒤 조직 보스의 뜻을 거슬러 새로운 인생을 결심한다는 기본 얼개는 ‘창수’와 여러모로 닮은꼴이다. ‘창수’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늦깎이 신인 이덕희 감독은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을 보좌했던 조감독 출신이다. 부산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50년만에 ‘무죄’

    5·16 군사정변 당시 혁명재판소에서 ‘자주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복역한 2명이 50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수원지법 형사12부는 27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불법구금된 뒤 복역한 김정태(70), 김을수(71)씨에 대한 재심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해당 사건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이 보존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공소사실을 판단하기 위한 증거로 당시 판결문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이같이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들이 범혁신동지회를 조직해 자주통일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구체적 통일방안을 제시하지 않아 북한의 통일방향과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며 “정부와 반대되는 입장을 보인 것 등만으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을 찬양·고무했다고 볼 수 없고, 달리 이를 증명할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김씨 등은 범혁신동지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정부법안을 성토하고 남북학생 판문점 회담 관련 성명서를 배포했으며, 유력인사 월북 권유 등을 한 혐의로 1962년 1월 혁명재판소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김정태씨는 174일, 김을수씨는 181일간 불법구금된 뒤 각각 징역 8년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년 7개월, 8년간 복역했다. 김정태씨는 “당시 유죄판결을 계기로 민주화투쟁가로 살아 오며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이제라도 마음의 짐을 덜 수 있게 돼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4) 상주 용포리 느티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94) 상주 용포리 느티나무

    300년쯤 된 느티나무 한 그루의 값어치는 얼마나 될까. 조경 전문가라면 나무의 생김새나 규모를 보고 금세 값을 계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나무의 가치를 가늠하는 게 가능할까. 오래된 나무에는 필경 긴 세월의 풍진을 이겨낸 생명의 애옥살이는 물론이고, 나무를 심고 가꾸어온 조상들의 정신과 나무에 기대어 살아온 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그동안 나무로부터 얻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얻게 될 물리적 정신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당산나무, 정자나무 등으로 사람살이의 그늘이 되어,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나무라면, 그 값은 쉽게 매길 수 없다. ●15가구가 3300만원 모으기까지 “느티나무가 있다고 해서 당장에 도움 되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나무가 해마다 풍년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고, 또 나무에 치성을 드린다고 해서 당장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경북 상주시 낙동면 용포리 평오마을의 이인희(54) 이장은 나무를 통해 큰 덕을 얻을 건 없다고 단언한다. 그 점에서 마을 사람들 모두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마을 어귀에 서 있는 한 쌍의 느티나무를 지키기 위해 가구당 200만원씩이라는 결코 작지 않은 돈을 선선히 내놓으면서까지 나무를 지켜냈다. 사건은 3년 전인 2009년 여름에 시작됐다. 마을 어귀에 다정하게 서 있는 한 쌍의 느티나무가 마을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나무 수집상에게 팔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무가 서 있는 땅 주인이 나무의 값을 매겨 내놓은 것이다. 창졸간에 300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나무가 사라지게 됐다. 평오마을 사람들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마을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나무를 지나쳐야 했기에 오랫동안 할배 할매처럼 친근하게 느껴온 생명체였다. 그를 그렇게 떠나보낼 수 없었다. 수심 속에 가을걷이를 끝낸 마을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나무를 지킬 방도를 궁리했다. 오랜 궁리 끝에 먼저 각계에 탄원서부터 내기로 했다. ‘나무 이식 반대에 관한 주민 동의서’를 작성해 전체 주민의 동의를 받아 상주시청과 상주경찰서에 탄원서를 냈다. 주민들은 ‘할배 할매나무’라 부르는 한 쌍의 느티나무를 마을 역사의 산 증거이자 상징이라 했으며, 마을의 길흉화복을 같이하는 동반자이며 수호신이라 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는 나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탄원서 보내고 나무 수집상 설득하고 탄원서를 받은 상주시에서는 나무와 마을 환경을 조사했다. 나무는 이미 1997년에 보존 대상의 노거수로 지정된 바 있지만, 보다 치밀한 조사가 필요했다. 상주시는 전문가들의 조사를 거쳐 2010년 4월 27일에 나무를 보호수 10-08-01로 지정했다. 보호수 지정 절차는 마쳤으나, 그렇다고 상황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나무 수집상은 이미 땅 임자에게 나무의 값, 1100만원을 치렀고, 나무 이식을 막는 주민들을 업무방해로 고소하고 손해배상까지 청구한 상태였다. 나무 수집상은 막무가내였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 머리를 맞대고 끝까지 나무를 지켜내기 위한 묘책을 강구했다. 나무 값을 치르더라도 나무만은 지키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가 돈이 어디 있겠어요. 한푼 두푼 모은 것과 대처에 나가 사는 자식들에게 돈을 좀 달라 해서 모았지요. 저 할배 할매나무 없이 우리가 어찌 살겠어요. 나무 없는 우리 마을 풍경은 상상이 안 돼요.” 마을에서 오래 살아온 임기수(66)씨의 이야기다. 나무 수집상에게 나무를 옮겨가지 않는다는 온전한 합의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모두 3300만원이 필요했다. 모두 해야 15가구밖에 안 되는 마을에서 집집마다 200만원씩 내기로 했다. 농촌 마을에서 200만원이라면 결코 작은 돈이 아니지만, 마을의 상징이자 분신처럼 여기는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흔쾌히 내놓겠다고 모두가 동의했다. 나무를 잃는 건 자신들을 낳아 키운 조상들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수굿이 돈을 모았다. 나무 수집상과의 합의는 마침내 2010년 7월, 한참 농사 일로 바쁜 철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지난 2011년 5월에는 경상북도에서 마을에 감사패를 수여했다. 각박한 현대 생활에서 한 그루의 나무를 지키기 위해 애쓴 마을 사람들의 노고를 두고두고 치하한다는 뜻에서였다. ●마을의 역사를 담고 서 있는 큰 나무 조선시대 때는 이 마을이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마을에 관리들의 쉼터인 오리원과 마방을 세우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사라진 마을의 오랜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건 한 쌍의 느티나무뿐이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인근에서도 유명한 나무예요. 옛날에는 영남 지역에서 한양으로 가는 나그네들의 중요한 쉼터이기도 했고, 요즘은 이 근방 사람들이 만날 약속을 하는 아주 중요한 자리가 바로 우리 나무이죠.” 평오마을로 귀농한 지 8년째인 박성하(57)씨는 나무를 지켜낸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한다. 나무는 그렇게 사람들에 의해 지켜졌다. 도저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나무의 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결코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돈을 흔쾌히 내놓았다. 제 앞가림만으로도 허청대는 요즘 세상에서 평오마을 사람들이 느티나무를 지켜낸 일은 흔치 않게 기억해야 할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 쌍의 느티나무를 지켜내고자 싸웠지만 정작 사람들이 지켜낸 건, 바로 사람살이의 안녕이었고, 조상들의 삶과 철학이 담긴 마을의 역사였다. 느티나무 앞에서 가만히 머리를 숙이고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글 사진 상주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북 상주시 낙동면 용포리 31. 중부내륙고속국도의 상주나들목으로 나가서 선산 방면으로 1.4㎞ 가면 헌신교차로가 나온다. 우회전해 1㎞쯤 간 뒤 오른쪽으로 난 성동리 방면 도로로 빠져나간다. 3㎞쯤에서 나오는 삼거리에서 화산리 방면으로 우회전해 2.2㎞ 직진하면 삼거리가 나온다. 우회전해 2㎞ 남짓 가면 지방도로 916호선과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좌회전해 4㎞쯤 가면 왼편으로 낙동초등학교 용포분교가 나오고 그 옆에 낙동농협 용포지소가 있다. 나무는 농협지소 뒤편 마을 어귀에 있다.
  • 귀화 전 ‘억울한 옥살이’ 국가배상 첫 판결

    외국에 귀화했더라도 한국인이었을 때 국가로부터 피해를 당했다면 국가에 배상책임이 있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이원중 판사는 4일 간첩 누명을 쓰고 가혹행위를 당했던 일본인 허모(69)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허씨에게 30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이 판사는 “국가의 불법행위가 허씨가 대한민국 국민이었을 때 발생한 만큼, 이후 한국 국적을 상실했다고 해서 국가배상청구권을 잃는다고 볼 수 없다”고 전제한 뒤 “국가가 정신적 고통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결했다. 홍인기기자 ikik@seoul.co.kr
  • 소녀 강간 혐의로 무려 23년 옥살이한 남자 ‘무죄 석방’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무려 23년 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남자가 무죄로 석방됐다.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에서 많은 취재진에 둘러싸인 한 남자가 만세를 부르며 교도소 밖을 걸어나왔다. 이 남자의 이름은 데이비드 리 위긴스(48). 그는 지난 1989년 포트워스에 사는 14세 소녀를 강간했다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위긴스가 유죄가 된 것은 피해 소녀의 증언 때문. 소녀는 강간범으로 위긴스를 지목했으며 물적 증거가 부족함에도 법원은 소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20년 넘게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하며 억울한 옥살이를 하던 위긴스에게 희망이 찾아왔다. 지난 2007년 억울한 수감자를 지원하는 단체인 ‘이노센트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가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 결국 단체와 위긴스의 노력으로 DNA 테스트가 이루어져 사건 당시 보관된 증거와 확인결과 위긴스의 무죄가 증명됐다. 이노센트 프로젝트의 니나 모리슨 변호사는 “만약 사건 당시 위긴스가 주장한 DNA 테스트를 법원이 받아 들였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무죄로 석방됐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위긴스는 무려 23년 동안 수감돼 청춘을 감옥에서 보냈다.” 면서 “자신을 감옥으로 보낸 소녀를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편 텍사스주 측은 잘못된 판결을 한 보상으로 위긴스에게 매년 7만 7000달러(약 8700만원)를 지불할 것으로 알려졌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이승훈 두메산골] 민주화 시대의 권력체제

    [이승훈 두메산골] 민주화 시대의 권력체제

    연봉 1억원 이상, 집무실과 비서, 판공비, 그리고 운전기사 딸린 승용차가 나오는 자리이면 최고급 지위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임명권을 가진 최고급 지위는 수천개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최고의 자리를 탐내는 소위 엘리트 수만명은 대통령 주변을 돌면서 충성경쟁을 벌인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대통령은 이들이 충성하도록 권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최고위직들은 국정 운영을 현장에서 책임지고 이끌어야 하는 만큼 유능하면서도 대통령과 뜻을 함께해야 한다.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마다 그 캠프 사람들이 대거 최고위직에 진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대통령 또는 그 측근과 가까운 사람을 고위직에 임명하면 으레 전문성을 무시한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비판이 항상 적절하지는 않지만, 정권 교체기마다 낙하산 소동이 그치지 않는 것은 전문성 없이 친분만으로 고위직을 차지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모두 하나같이 권력행사의 후유증을 혹독하게 치렀다. 혁명으로 쫓겨나고, 비명에 타계하고, 직접 옥살이를 했거나, 자식이 옥살이를 했다. 한 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현 대통령도 측근들은 물론 친형까지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있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을 궁지로 몰고 간 것은 예외 없이 부패다. 유독 죽은 권력에만 강하다는 비아냥거림 속에서도 검찰은 부정한 돈을 받은 현직 대통령의 자식들을 처벌하였다. 부패 규모가 훨씬 작은데도 조사했다는 불평은 있었지만 그렇게 불평하는 사람도 사안 자체를 조작이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문제는 전임 대통령이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생생히 보았는데도 다시 같은 일들이 판박이처럼 재현된다는 점이다.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여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까닭은 대통령 권력에 대한 오판 때문이다. 대통령은 분명히 최고 권력이다. 그러나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무소불위였으나 지금은 아니다. 유효기간도 5년인데 소위 레임덕까지 고려하면 그보다도 더 짧다. 비리 행각에 동원되는 하수인들은 한껏 아부하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잽싸게 빠져나간다. 이런 무리들과 함께 벌이는 일이 감쪽같이 묻혀버릴 턱이 없다. 민주화는 권력체제를 바꾸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최고급 지위의 임기도 함께 그만큼 줄여 놓았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대부분의 고위직은 아직 임기가 남았는데도 함께 물러난다. 명분은 새 대통령의 새로운 통치 방향에 들어맞는 진용을 짜야 한다는 것이지만, 본질은 한시라도 빨리 내 사람들에게 최고급 지위를 하나라도 더 많이 배정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고위직의 숫자는 바로 대통령 권력의 지표이기도 하다. 후보시절에 약속한 공기업 민영화가 집권 후에는 흐지부지되는 것은 민영화가 대통령 권력의 위축을 뜻하기 때문이다. 중앙은행과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독립은 보통 시기상조라고들 하는데, 대통령과 그 측근이 대통령의 권력 축소를 싫어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측근의 비리는 대통령이 권력을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고 비선에 넘겼기 때문에 일어난다. 감당 못할 권력이라면 측근이 아니라 투명한 지배구조를 갖추고 제도화된 공식기구에 위임할 일이다. 중앙은행, 금융감독기구, 그리고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독립시키면 대통령의 권력은 그만큼 줄어든다. 권한 축소가 달갑지는 않겠지만, 어차피 스스로 행사하지 못할 권력을 측근 비선에 맡기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다. 그동안 겪은 일 때문에 국민은 새 대통령에게서 무엇보다 청렴성을 갈망한다. 현 5년 단임제 권력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면 권력에 대한 욕심을 통제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과중한 대통령 권한의 제도적 위임은 권력행사를 투명하게 함으로써 부패를 크게 줄인다. 이러한 선거공약은 막연한 청렴 이미지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국민에게 어필할 것이다.
  • 법원 “민청학련 제정구 前의원 유족에 8억 배상”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고(故) 제정구 전 의원의 유족에게 국가가 8억원을 배상하라고 법원이 판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3부(부장 한규현)는 제 전 의원의 부인 등 유족 8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수사관들이 제 전 의원을 체포·구속하면서 적법절차를 지키지 않았고 수사과정에서도 폭행이나 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이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는 허위사실을 언론에 공표해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이어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오히려 가해자가 돼 불법행위를 저질렀으므로 국가배상법에 따라 피해자들이 입은 정신적 고통에 따른 위자료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민청학련 사건 조사 결과가 발표된 2005년으로부터 소멸시효 3년이 지났다는 피고 측 주장에 대해서는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민영기자 min@seoul.co.kr
  • [데스크 시각] MB의 마지막 사과/김성수 정치부 차장

    [데스크 시각] MB의 마지막 사과/김성수 정치부 차장

    이명박 대통령(MB)이 곧 대(對) 국민 사과를 할 것 같다. 친형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 때문이다. 이 전 의원은 이번 주 내 구속될 가능성이 높다. 퇴출 위기에 몰린 저축은행으로부터 수억원의 돈을 받은 혐의다.이 전 의원이 대기업 사장을 지낸 6선 의원 출신으로, 지난 3월 공직자 재산등록 때 신고한 재산만 77억원에 이른다는 점을 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청와대는 이미 내부적으로 사과문 작성을 어떻게 할지 검토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이번에 사과를 하게 되면 취임 후 다섯번째다. 미국산 소고기 파문, 동남권 신공항, 세종시 백지화 문제를 놓고 이 대통령은 이미 사과를 했다. 올 1월 신년연설에서 친·인척, 측근 비리에 대해서도 이 대통령은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주변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점은 바로잡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친·인척과 측근 비리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청와대는 친·인척, 측근 비리에 대한 이 대통령의 ‘가장 뼈아픈 사과’라고 설명했다. 이번에 형님 일로 이 대통령이 다시 사과를 하게 된다면 마지막 사과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실상의 임기를 5개월여 남겨둔 상황에서 또 사과할 일이 생길 수는 있다. 하지만 그동안 MB의 사과가 진정성을 느끼기에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 많았던 만큼, 이번에는 내용이나 형식이 이전과 달라야 한다. 사과를 한다고 5년마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가 되풀이되는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사그라지지는 않겠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제대로 된 반성이 따라야 하는 것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이 대통령이 자주 얘기하던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말을 놓고, ‘도둑적으로 완벽한 정권’,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망가진 정권’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역대 대통령이 임기말이면 예외 없이 ‘친·인척 비리의 덫’에 걸려 흔들렸던 것은 우리의 부끄러운 치부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형 노건평씨 때문에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던 건평씨는 ‘봉하대군’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구설에 오르다가 결국 MB 취임 첫해인 2008년 11월 구속됐다. 이 정부 들어서도 ‘영일대군’, ‘만사형통’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 전 의원의 몰락이 임박한 것을 보면, 이 대통령이나 노 전 대통령은 모두 형님 관리에는 실패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앞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형 기환씨와 동생 경환씨가, 노태우 전 대통령은 처사촌인 박철언 전 의원이 각각 비리혐의로 감옥살이를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DJ)은 자식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했다. YS는 차남 현철씨가 감옥에 갔고, DJ는 홍일·홍업·홍걸씨 세 아들 모두가 비리에 연루돼 ‘홍삼게이트’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는 민주정권에서도 이런 비리가 끊이지 않는 것은 권력의 실세인 친·인척들을 감시할 제도나 기구가 없었고, 있었더라도 역할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대통령 친·인척 관리를 민정수석실 소속 민정1비서관실에 있는 감찰1팀에서 맡고 있다. 감찰1팀 인원은 10명에 불과하다. 감찰팀은 검찰, 경찰 등에서 들어온 각종 정보와 사설정보지(지라시)에 나온 첩보 등을 분석해 비리 사실을 확인하는데, 특별관리하는 대통령의 친·인척만 100명 안팎에 달한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민정수석은 정권의 최측근이 배치된다는 점에서 제대로 된 ‘감시’가 이뤄지기 어렵고, 때문에 정치색깔을 배제한 중도적인 인물 또는 별도의 기구로 친·인척 비리를 집중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 당장 이번 12월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이들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친·인척 관리를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말로만 “임기 중 측근 비리를 엄단하겠다.”고만 외칠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측근 비리를 막고, 비리가 생기면 ‘내가 전적으로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밝혀야 한다. ‘부끄러운 역사’는 이제 제발 끝내야 한다. ss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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