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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오쩌둥 비서’ 리루이 타계

    ‘마오쩌둥 비서’ 리루이 타계

    마오쩌둥(毛澤東) 전 중국 국가주석의 비서를 맡았으면서도 그의 정책을 비판했고, 시진핑(習近平) 현 국가주석의 권력 집중에도 반대 목소리를 냈던 리루이(李銳) 중국 전 중앙조직부 부부장이 16일 베이징에서 101세로 타계했다. 1937년 옌안의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1958년 수리전력부 부부장(차관) 및 마오쩌둥의 개인 비서가 됐다. 그러나 이듬해 3000만명 이상을 숨지게 한 대약진운동을 비판한 뒤 모든 지위에서 겨났다. 이후 강제노동을 하다가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혼란기에는 8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문혁 이후 복권돼 국가에너지위원회 부주임 등을 거쳤다. 그가 펴낸 마오쩌둥에 대한 책 5권은 해외에서는 출판됐지만 중국에서는 금지됐다. 그는 “마오 스스로가 자신을 진시황과 마르크스를 합친 인물로 묘사했다”고 전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2013년)에서 중국 일당 체제를 고쳐야 한다고 지적하는 등 당 지도부에 서방식 정치개혁을 촉구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최저임금 오르니 형사보상금도 늘었다

    최저임금 오르니 형사보상금도 늘었다

    억울한 옥살이에 비해 보상 낮다는 지적도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1인당 평균 형사보상금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보상금을 최저임금에 연동시킨 결과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살해 용의자로 지목돼 구속됐다가 진범이 잡히면서 풀려난 ‘우주’(찬희)처럼 억울하게 구금된 피의자도 보상을 청구할 때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0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2017년 지급된 형사보상금은 약 360억원이다. 1인당 평균 형사보상금은 약 488만원으로 2011년 155만원에서 6년 새 3배가 됐다. 형사보상이란 국가의 잘못된 재판이나 수사로 재심 등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법 피해자에게 국가가 금전적 보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재판 전에 구속됐다가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지 않거나 구속 취소로 풀려나도 넓은 의미의 형사보상(피의자보상)을 받을 수 있다. 현행법은 보상금의 기준을 최저임금으로 못박고 있다. 구금일수에 일급 최저임금액(최저시급*8시간)을 곱한 값을 최소한의 보상액으로 정한 뒤, 구금의 종류·재산상 손실 유무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최대 5배까지 준다. 보상금에 적용되는 최저임금은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해의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한다. 최근 1인당 평균 보상금이 늘어난 원인은 최저임금 인상과 일부 관련이 있다. 2017년 시간당 최저임금은 6470원으로 2011년 4320원에 비해 49.8% 올랐다. 지난해와 올해는 최저임금이 각각 7530원, 8350원으로 1인당 보상금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억울한 옥살이 기간에 대한 보상으로는 여전히 낮다는 지적도 많다. 2013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한 형사보상은 ‘완전보상’을 의미하는 재산권 침해에 따른 손실보상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라며 법무부 장관에게 개선을 권고한 바 있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실질적 보상을 위해 최저임금 대신 기준 중위소득의 5배를 하한으로 정하고 상한을 없애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에 대검 관계자는 “아직 기준 변경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최저임금 오르니 형사보상금도 늘었다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1인당 평균 형사보상금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보상금을 최저임금에 연동시킨 결과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살해 용의자로 지목돼 구속됐다가 진범이 잡히면서 풀려난 ‘우주’(찬희)처럼 억울하게 구금된 피의자도 보상을 청구할 때 최저임금 인상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0일 대검찰청에 따르면 2017년 지급된 형사보상금은 약 360억원이다. 1인당 평균 형사보상금은 약 488만원으로 2011년 155만원에서 6년 새 3배 넘게 증가했다. 형사보상이란 국가의 잘못된 재판이나 수사로 재심 등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법 피해자에게 국가가 금전적 보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재판 전에 구속됐다가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지 않거나 구속 취소로 풀려나도 넓은 의미의 형사보상(피의자보상)을 받을 수 있다. 현행법은 보상금의 기준을 최저임금으로 못박고 있다. 구금일수에 일급 최저임금액(최저시급】8시간)을 곱한 값을 최소한의 보상액으로 정한 뒤, 구금의 종류·재산상 손실 유무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최대 5배까지 준다. 보상금에 적용되는 최저임금은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해의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한다. 최근 1인당 평균 보상금이 늘어난 원인은 최저임금 인상과 일부 관련이 있다. 2017년 시간당 최저임금은 6470원으로 2011년 4320원에 비해 49.8% 올랐다. 지난해와 올해는 최저임금이 각각 7530원, 8350원으로 1인당 보상금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억울한 옥살이 기간에 대한 보상으로는 여전히 낮다는 지적도 많다. 2013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한 형사보상은 ‘완전보상’을 의미하는 재산권 침해에 따른 손실보상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라며 법무부 장관에게 개선을 권고한 바 있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실질적 보상을 위해 최저임금 대신 기준 중위소득의 5배를 하한으로 정하고 상한을 없애는 내용의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에 대검 관계자는 “아직 기준 변경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감방 다녀온 ‘SKY캐슬’ 우주는 피의자보상 받았을까

    감방 다녀온 ‘SKY캐슬’ 우주는 피의자보상 받았을까

    보상금은 최저임금 연동...8년 전보다 두 배 늘어 형사보상은 법원, 피의자보상은 검찰청에 청구 권익위, 법무부에 개선 권고 “보상 수준 낮다” 금전 보상 전부 아냐...“사건 관련자 사과해야”지난 1일 종영한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살해 용의자로 지목돼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우주(찬희)는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현행 법은 재판을 받기 전에 구속됐다가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지 않거나 구속 취소로 석방된 피의자에 대해 구제 절차를 마련하고 있다. 국가의 잘못된 수사나 재판으로 인해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사법 피해자(피고인)에 대한 보상책인 형사보상과 달리 피의자보상으로 규정한다. ●보상 얼마나 받을 수 있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수사 과정에서 용의자로 지목돼 구속됐다면 구금 일수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보상은 형사보상과 똑같이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한다. 일급 최저임금액(시간당 최저임금*8시간)에 구금 일수를 곱한 값이 기본 보상금이 된다. 올해 시간당 최저임금은 지난해보다 10.9% 오른 8350원이다. 이에 따른 일급 최저임금액은 6만 6800원이다. 만일 30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면 200만 4000원을 받게 된다. 여기에 구금 기간 재산상 손실이 크거나 검찰·경찰 수사 과정에서 고의·과실이 있었다면 보상금은 최대 5배까지 오를 수 있다. 보상금이 1000만원 넘게 나올 수도 있는 셈이다. 그나마 보상금이 이렇게 오른 것은 최저임금 인상 효과 때문이다. 8년 전인 2011년으로 돌아가면, 똑같이 30일 동안 구금됐어도 기본 보상금은 103만 6800원에 그친다. 당시 최저임금이 4320원으로 지금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됐기 때문이다. ●보상 누가 결정하나 형사보상금은 법원이 전적으로 결정한다. 보상금의 수준을 몇 배로 정할지도 법원 몫이다. 이에 따라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의 사법 피해자인 최모씨는 9년 7개월간 옥살이를 한 보상으로 8억 4000만원을 받았다.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사건’의 진범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가 17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은 3인조는 3억~4억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반면 피의자보상은 재판을 받기 전이라 법원이 개입하지 않는다. 억울하게 구속됐다가 풀려난 피의자는 검찰을 상대로 보상을 청구해야 한다. 공소를 제기하지 않은 검사가 소속된 지방검찰청의 피의자보상심의회에서 보상 심의·의결한다. 이 심의회는 위원장인 지검 차장검사와 함께 해당 검찰청 소속 공무원, 법관 자격을 가진 자, 의사 등 4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보상금을 지급할지 여부를 비롯해 보상금 수준도 모두 심의회가 결정한다. 하지만 죄 없는 사람을 엉뚱하게 피의자로 몰아 구속까지 시킨 행위에 대해 해당 검찰청이 피의자 보상을 논한다는 점에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피의자 보상과 별개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국가의 고의, 과실을 입증해야 된다는 부담이 있다. ●실질적 보상 되려면 2013년 국민권익위원회는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한 형사보상은 ‘완전보상’을 의미하는 재산권 침해에 따른 손실보상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라며 법무부 장관에 개선을 권고한 바 있다. 권익위에 따르면 독일과 프랑스는 보상 상한에 제한이 없다. 프랑스는 정신적, 물질적 손해 전부에 대해 보상을 한다. 당시 권익위 실태조사에서 한 중소기업 대표는 183일 동안 구금되면서 3억~4억원의 매출 감소와 함께 무죄 확정 이후에도 거래 중단으로 추가 매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대표는 3162만 2400원의 보상금만 받았다. 2011년 당시 1일 상한액인 17만 2800원(최저임금 4320원)이 적용되면서다. 보상 실질화를 위해 관련 개정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실질적 보상을 위해 최저임금 대신 기준 중위소득의 5배를 하한으로 정하고 상한을 없애자고 제안했다. 기준 중위소득(5만 5098원, 2017년 기준)의 5배를 하한으로 정하면 하루 최소 27만 5490원을 받는다. 최저임금 기준으로 상한액(5배)인 25만 8800원을 넘어서는 금액이다. 하지만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기준 중위소득이 2015년부터 고시되고 있기 때문에 무죄 판결이 2015년 이전에 확정된 경우 적용할 수 없다는 점 등을 이유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냈다. 윤지영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보상 기준의 하한을 무리하게 상향 조정하는 것보다 무죄 재판의 사유가 보상금액 산정에 제대로 반영될 수 있도록 상한을 없애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금전적 보상만으로 국가의 공권력 행사로 인해 고통을 겪은 피고인이나 피의자의 피해가 보상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성찰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도 과거사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의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윤 연구위원은 “조직 차원의 공식 사과를 넘어 사건 관련자들의 진정한 사과가 이뤄질 때 형사보상의 취지가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헌주 기자 dream@seoul.co.kr
  • ‘리갈하이’ 서은수, 깜찍 턱받침 애교 작전 포착 ‘진구 반응은?’

    ‘리갈하이’ 서은수, 깜찍 턱받침 애교 작전 포착 ‘진구 반응은?’

    ‘리갈하이’ 서은수가 애교 작전을 펼친다. 진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다. 지난 8일 첫 방송된 JTBC 금토드라마 ‘리갈하이’(극본 박성진, 연출 김정현, 제작 GnG프로덕션, 이매진 아시아)에서 수임료 5억만을 요구하는 괴물변태, 일명 ‘괴태’ 변호사 고태림(진구)에게 “돈벌레, 인간말종, 괴물, 변태, 사회악”이라고 소리친 서재인(서은수). 거액의 수임료도 황당한데, 의뢰인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을 ‘얼치기’ 변호사 취급하며 독설을 쏟았기 때문. 그런데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돌아섰던 서재인이 태도를 바꿨다. 오늘(9일) 2회 방송에 앞서 공개된 스틸컷에서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양손을 턱에 받친 채 귀엽게 웃고 있는 서재인. “제발 부탁드려요, 네?”라며 애교까지 선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고태림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황당한 기색부터 한심하다는 얼굴까지, 서재인의 애교작전에 넘어갈 고태림이 아니라는 점이 예측된다. 하지만 서재인에게 믿을 동아줄은 고태림뿐. 서재인은 “나를 무죄라고 믿어주는 사람이 변호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동창 김병태(유수빈)의 부탁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알바생 살인사건’의 변론을 맡았지만 결국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경찰 수사 때 겁먹고 자백한 진술서가 결정적 증거가 됐기 때문에 항소를 하더라도 판결을 뒤집기는 어려운 상황. 그 어떤 변호사도 항소심을 맡지 않겠다던 이유였다. 하지만 고태림은 달랐다. 수임료 5억만 가져온다면 무죄로 만들어준다고 자신한 것. 쓰레기를 주워 다 음식을 만들어 팔았고 여러 손님들이 식중독에 걸린 일명, ‘쓰레기 국밥’ 사건의 거액의 손해배상 판결을 뒤집은 변호사도 고태림이었다. 의문의 백발 노인(동방우)의 말대로, 고태림은 증거가 맞고 틀리는 걸 갖고 싸우는 하수가 아닌,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 무조건 이기는 괴태 변호사이기 때문. 이 가운데 공개된 2회 예고 영상(https://tv.naver.com/v/5307717)에서 고태림의 사무장이자 집사인 구세중(이순재)이 “꼭 서변호사여야만 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장면이 담겨 눈길을 끈다. 고태림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고 있는 구세중. 심지어 오만방자한 고태림을 벌벌 떨게 만든 괴한을 “제가 한때 브라질 유술계에 몸담고 있었다”며 때려 쫓아낸 사람도 그였다. 고태림의 유일한 컨트롤러인 구세중의 도움으로 서재인은 고태림의 마음을 돌려, 친구를 억울한 옥살이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 ‘리갈하이’ 제2회, 오늘(9일) 토요일 밤 11시 JTBC 방송.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여기는 중국] 친부모가 팔아버린 손자, 1년 만에 찾아온 할아버지

    아들, 며느리가 12만 위안(약 2000만원)을 받고 팔아 넘긴 ‘친손자’를 1년 넘게 찾아 헤맨 끝에 찾아낸 할아버지의 안타까운 사연이 화제다. 지난 2015년 중국 쓰촨성(四川)에서 출생한 푸 군(5)은 4세가 되던 지난 2018년 1월 친부모로부터 안면도 없는 낯선 가정에 판매된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 당시 푸 군을 팔아 넘긴 친부모는 이혼에 합의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푸 군에 대한 자녀 양육을 거부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아들 양육을 거부한 두 사람은 아동 매매 알선 중개인을 통해 친자식을 팔아 넘긴 혐의를 받고 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친자식을 판매한 대금 12만 위안에 대해 매매 직후 각각 6만(약 1000만원) 위안 씩 분할해 챙겼다. 이번 사건이 외부로 알려진 것은 푸 군의 친할아버지가 지역 공안국에 친소자의 행방 불명을 신고하면서 부터다. 푸 군의 친할아버지 푸라오한 씨(56)는 평소 마약 중독자인 아들 부부가 손자를 데리고 나간 지 사흘이 되도록 귀가하지 않는 점을 수상히 여겨 공안 파출소에 행방불명 신고를 접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당시 푸 군은 이미 그의 친부모로부터 아동 매매 중개자에게 넘겨진 후였고, 관할 공안은 이미 거주지였던 쓰촨성 일대를 벗어난 푸 군을 찾는데 실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약 1년에 걸친 수소문 끝에 푸 군의 친할아버지 푸라오한 씨는 마약 중독 및 상습 밀매 혐의로 감옥살이 중인 아들로부터 푸 군이 팔려간 가정에 대한 실마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푸 군은 아동 매매 중개자의 손에 이끌려 불임 가정으로 알려진 쑤 씨 부부의 손에 키워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푸라오한 씨는 해당 실마리를 전해들은 직후 곧장 지역 관할 공안과 함께 푸 군의 행방을 수소문, 푸젠(福建)성 진장(晉江)시 안하이(安海)에 거주하는 쑤 씨 부부에게 입양된 푸 군의 행방을 찾는데 성공했다. 이 때가 푸 군이 친부모의 손에 직접 팔려 나간 지 약 1년이 지날 무렵이다. 곧장 푸 군을 찾아 나선 지역 공안국은 쑤 씨의 집에서 거주하고 있던 푸 군을 찾아, 그의 할아버지 품에 인도하는데 성공했다. 공안국 관계자는 불과 1년 사이에 키가 많이 자란 푸 군에 대해 DNA 조사 의뢰를 문의했으나, 푸라오한 씨는 “내 손자를 내가 못 알아볼 리가 있느냐”면서 한 눈에 푸 군을 알아봤던 것으로 알려졌다. 푸라오한 씨는 “내 부도덕함으로 인해 아들이 마약 사범으로 성장했고, 그 탓에 손자까지 남의 손에 길러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며 울음을 터트렸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푸 군의 친부모는 현재 해당 지역 공안에 적발, 아동 유괴 혐의로 처벌을 앞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푸 군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입양했던 쑤 씨 부부에 대해서도 아동 유괴범으로 처벌받을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 지역 공안국 관계자는 “이번 사건의 경우 상습 마약 중독 및 밀매자인 푸 군의 친부모로부터 아들이 매매되는 천인공노할 사건”이라면서 “두 사람은 중국 형법 규정에 따라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의 경우 입양을 고려 중인 가정에서는 이번 사건을 귀감 삼아 반드시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아이를 입양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부마항쟁 때 억울한 옥살이 송두한씨 1500만원 배상판결

    부마민주항쟁 당시 불법 연행돼 억울한 옥살이를 한 60대에게 국가배상판결이 내려졌다. 부산지법 민사26단독 이상완 판사는 송두한(65) 씨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선고에서 정부가 송씨에게 1500만원을 지급하라고 22일 밝혔다. 송씨는 “부마항쟁 당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불법 감금되는 바람에 합격한 회사에 출근하지 못해 취업이 취소되는 등 불이익을 받았다”며 정부가 4687만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송씨는 부마항쟁 당시인 1979년 10월 17일 오후 9시쯤 부산 중구 남포동에서 자신의 취업을 축하해주는 저녁 모임을 마치고 일행과 귀가하던 중 경찰 불심검문을 당했다. 경찰은 정장을 입은 회사원인 송씨 선배는 풀어주고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은 송씨를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연행해 “동주여상 앞을 지나가다가 돌을 던졌다”는 날조된 혐의를 기재하고 구속영장까지 신청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피격사건 이후 구속영장은 기각됐고 송씨는 즉결심판에서 선고받은 구류 7일을 포함해 총 18일간의 불법 구금을 당한 뒤에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다. 36년 만인 2015년 송씨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로부터 항쟁 관련자로 뒤늦게 인정받았고 2017년 9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지난해 6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법원 “부마항쟁 때 불법 연행된 피해자에 국가 배상해야”

    법원 “부마항쟁 때 불법 연행된 피해자에 국가 배상해야”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독재에 반대해 일어난 부마민주항쟁(부마항쟁) 당시 집회·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불법으로 연행돼 옥살이를 한 피해자에게 정부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부산지법 민사26단독 이상완 판사는 송두한(65)씨가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사건에서 정부가 송씨에게 1500만원을 지급하라고 22일 선고했다. 송씨는 부마항쟁 당시인 1979년 10월 17일 밤 9시쯤 부산 중구 남포동에서 자신의 취업을 축하해주는 저녁 모임을 마치고 일행과 귀가하던 중 경찰로부터 불심검문을 당했다. 경찰은 정장을 입은 회사원인 송씨 선배는 풀어주고 집회·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은 송씨를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연행해 “동주여상(현 동주여고) 앞을 지나가다가 돌을 던졌다”는 날조된 혐의를 기재하고 구속영장까지 신청했다. 그런데 박정희 전 대통령 피격사건 이후 구속영장은 기각됐고, 송씨는 즉결심판에서 선고받은 구류 7일을 포함해 총 18일 간의 불법 구금을 당한 뒤에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후 2015년 송씨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로부터 항쟁 관련자로 뒤늦게 인정받았고, 2017년 9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지난해 6월 무죄를 선고받았다. 송씨는 “부마항쟁 당시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불법 감금되는 바람에 합격한 회사에 출근하지 못해 취업이 취소되는 등 인생에 큰 불이익을 받았다”면서 정부가 4687만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재판부는 이날 “부산지법 유사 사건에서 선고한 위자료를 참작해 배상금액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송씨는 “많이 억울하지만 뒤늦게나마 무죄를 받아 명예를 회복했고, 배상을 받게 된 만큼 판결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아직도 갈 길 먼 ‘제주4·3’ 진상규명

    특별법 개정안 1년 넘게 국회 계류 제주 4·3사건 당시 억울한 희생자를 낸 군법회의가 절차적으로 위법했다고 법원이 처음 판단하면서 4·3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활동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수형인 생존자들의 추가 재심 청구도 이뤄질 전망이다. 다만 4·3사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1년 넘게 진척이 없어 진상 규명을 위한 길은 이제 시작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17일 제주지법의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수형인 18명의 변호인인 임재성 변호사는 “당시 피해자들에 대한 군법회의 예심 절차, 공소장 송달 과정이 모두 이뤄지지 않았고 어떤 죄로 재판을 받는지조차 몰랐다”면서 “재판부의 공소기각 판결은 당시 군법회의의 총체적 불법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 4·3도민연대가 파악하고 있는 수형인 생존자가 32명인 만큼 이날 판결을 받은 18명 외에 나머지 수형인들도 재심 청구를 할 계획이다. 그러나 이날 판결은 어디까지나 절차상 위법을 확인했을 뿐 피해자들에 대한 배·보상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갈 길이 더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양동윤 도민연대 공동대표는 “이분들께서 짧게는 1년, 길게는 20년까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신 데 대해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면서 “올해 안에 형사보상 청구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희생자들에 대한 일괄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특별법 개정안이 2017년 12월 4·3사건 70주년을 앞두고 추진됐지만 여전히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개정안은 명예회복 및 보상 조항을 신설해 국가가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지체 없이 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4·3사건 피해자와 유족에게는 매달 10만~70만원씩 지급되는 생활보조비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지급해 왔다. 개정안에는 특히 제주 4·3 수형인에 대해 진행한 군법회의(재판) 일체를 무효로 한다는 조항을 담고 있다. 양 공동대표는 “피해자들이 불법 재판을 받았다는 선고가 내려진 뒤에도 특별법 개정안에 반대한다면 너무 옹졸한 것 아닌가”라며 정치권에 조속한 법 개정을 촉구했다. 제주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제주4·3 수형인들 ‘무죄’… 71년 恨 풀었다

    제주4·3 수형인들 ‘무죄’… 71년 恨 풀었다

    군사재판 불법 인정한 첫 사법적 판단 ‘억울한 옥살이’ 18명 재심서 명예회복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제주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 4·3사건 수형인 18명이 71년 만에 조금이나마 한을 풀게 됐다. 법원이 17일 4·3 당시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으로 이뤄진 군사재판은 불법이었다고 처음으로 판단했다. 제주지법 형사2부(부장 제갈창)는 17일 임창의(98) 할머니 등 제주 4·3 생존 수형인 18명이 청구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공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공소기각은 형사소송 절차에 문제가 있다고 법원이 판단하면 실체를 심리하지 않고 소송을 끝내는 것으로, 수형인들에게 사실상 무죄가 선고된 셈이다. 재판부는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절차를 위반해 무효”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히 “피고인들이 일관되게 ‘어떤 범죄로 재판받았는지 모른다’고 진술했고, 어떤 자료에서도 예심과 소장 자료를 찾을 수 없다”면서 “단기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군법회의에 넘겨 절차가 제대로 이뤄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제주 4·3사건은 1947년 3·1절부터 1954년 9월까지 7년 7개월간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군경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이 희생된 사건이다. 제주4·3도민연대 등에 따르면 최소 1만 4000여명, 많게는 3만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형인들은 내란죄, 국가경비법 위반죄 등의 누명을 쓰고 불법 군사재판을 받은 뒤 전국 각지 형무소로 끌려갔다.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의 명단이 기록돼 있지만 대부분 행방불명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현재 생존자는 32명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김경인(87·여)·김순화(86·여)·김평국(89·여)·박내은(88·여)·박순석(91·여)·부원휴(90)·양근방(86)·양일화(90)·오계춘(94·여)·오영종(89)·오희춘(86·여)·임창의(98·여)·정기성(97)·조병태(90)·박동수(86)·한신화(97·여)·현우룡(94)·현창용(87)씨 등 18명은 2017년 4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은 지난해 9월 5일 재심을 결정했고, 네 차례의 재판이 열렸다. 이들은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지자 재판부만 멍하니 바라보며 한 많은 세월을 곱씹었다. 글 사진 제주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불법재판으로 옥살이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 70년 만에 무죄 인정

    불법재판으로 옥살이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 70년 만에 무죄 인정

    부당한 국가폭력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 4·3 수형 생존자 18명이 70년 만에 사실상 무죄를 선고받았다. 제주지법 제2형사부(부장 제갈창)는 제주 4·3으로 군사재판에 넘겨져 징역을 지낸 제주 4·3 수형 생존자 18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불법 군사재판’ 재심 청구사건 선고공판에서 청구인에 대해 공소기각 판결을 내렸다. ‘공소기각’은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에 위반해 무효일 경우 유·무죄 판결에 앞서 소송을 그대로 끝내는 결정 또는 판결을 말한다. 결국 이번 재심 사건에서 공소기각 판결이 나왔다는 것은, 제주 4·3 당시 이뤄진 군사재판이 불법적으로 이뤄져 재판 자체가 무효임을 뜻하는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제주 4·3 수형 생존자들)에 대한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로 재심을 청구한 제주 4·3 수형 생존자들은 사실상 무죄를 인정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일관되게 ‘어떤 범죄로 재판을 받았는지 모른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 당시 제주도에 소개령이 내려진 시기 등 제반사정을 종합할 때 단기간에 그 많은 사람들을 군법회의에 넘겨 예심조사나 기소장 전달 등 절차가 제대로 이뤄졌다고 추정하기 어렵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절차를 위반해 무효일 때에 해당한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즉 제주 4·3 당시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의 규정을 위반해 무효인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공소기각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번 판결은 제주 4·3 당시 계엄령 아래 이뤄진 군사재판이 불법이며, 그로 인해 감옥에 갇힌 수형인들이 무죄임을 인정한 최초의 사법적 판단이다. 앞서 검찰도 지난달 17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청구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며 ‘공소기각 판결’을 선고할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제주 4·3’은 1947년 3월 1일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을 향해 발포한 사건을 시작으로 좌익 진영의 무장대가 1948년 4월 3일 일으킨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무장대와 군·경 토벌대 간 무력 충돌, 그리고 군·경이 토벌대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대 약 3만명의 도민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중 제주 4·3 수형인은 당시 불법 군사재판으로 영문도 모른 채 서대문형무소와 대구·전주·인천형무소 등 전국 각지로 끌려가 수감된 사람들을 말한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수형인 명부에는 2530명의 명단이 올라 있으며, 상당수가 행방불명되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재심을 청구한 수형 생존자 18명은 1948∼1949년 내란죄 등 누명을 쓰고 징역 1년에서 최대 20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이들 외에도 10여명의 수형 생존자가 더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여기는 중국] 누명쓰고 25년 간 억울한 옥살이 한 남자…보상금 얼마?

    [여기는 중국] 누명쓰고 25년 간 억울한 옥살이 한 남자…보상금 얼마?

    억울하게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무려 25년을 복역한 남성이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7일 보도에 따르면 리우중린(50)이라는 이름의 남성은 22세였던 1990년 10월, 당시 18세였던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피해여성은 지린성 둥랴오현의 한 강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으며, 리우는 이 여성을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돼 1994년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고, 2012년 지린성고등법원이 해당 사건의 재심을 허가했다. 사형수로 복역한 지 만 25년 후인 2016년 1월, 리우는 가석방 됐고, 2018년 4월에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현지시간으로 지난 7일, 그는 국가로부터 총 460만 위안(한화 약 7억 5150만원)의 피해보상금을 지급받았다. 여기에는 정신적 피해보상금 190만 위안(3억 1040만원)과 개인의 신체적 자유를 침해받은 것에 대한 보상인 250만 위안(4억 1000만원) 및 사회 적응을 위한 보상금 등이 포함돼 있다. 리우의 변호사에 따르면 그가 복역한 시간은 9217일에 달하며, 감옥에서 보낸 하루당 500위안(약 8만 1730원)의 보상금을 받은 셈이다. 다만 이번 보상금 규모는 당초 리우가 국가에 요구한 것의 4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리우의 변호사는 “현재 의뢰인은 보상금 규모에 만족하는 편이지만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들이 불우하게 낭비된 것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라면서 “보상금의 일부는 앞으로 생활할 집인 지린성 남부에 있는 랴오위안시에 있는 방2개짜리 아파트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법적 대리인인 베이징화이법률사무소의 취전훙 변호사는 “이번 결과는 중국의 국가배상 시스템에 매우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면서 “미래에 사법부가 잘못된 판결을 내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선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한편 SCMP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유죄판결 비율을 기록하는 국가다. 같은 기간 미국연방법원의 유죄 판결은 93%인데 반해, 중국은 99.9%를 기록했다. 송현서 기자 huimin0217@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진원지 서울 한복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 선포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3·1운동 진원지 서울 한복판서 ‘한성임시정부’ 수립 선포

    <1부> 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③서울 ‘한성임시정부’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지자 일제는 헌병을 동원해 주모자를 검거·학살했다. 특히 조선의 수도이자 이번 운동의 진원지인 서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은 대담하게 적지(敵地)가 된 서울 한복판에서 임시정부 설립을 선언했다. 바로 노령정부(러시아)와 상하이정부(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수립된 한성정부다. 이 정부는 인민의 뜻을 수렴하기 위해 민주적 절차를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3·1운동 당시 감리교 전도사 이규갑(1888∼1970)은 평양 대표로 시위에 참석했다가 일제의 검거령으로 친척 집에 숨어 있었다. 3월 5일 오후 9시쯤 그에게 동지 8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이번 시위로 우리나라가 독립이 될 수도 있으니 서둘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이규갑은 “정부를 세우는 건 한두 사람의 기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의 총의를 모을 지역 대표부터 뽑자”고 설득했다. 이렇게 또 하나의 임정이 만들어졌다. 임정 설립 주도자는 검사 출신 홍면희(홍진·1877~1946)와 목사 출신 이규갑 등이다. 이들은 조선 황실 인사나 독립운동가 33인 등과 관계없는 순수 민간인이었다. 17일에는 검사 한성오(생몰연대 미상)의 집에 20여명이 모여 임시정부 준비위원회를 열었다. 정부 명칭을 ‘한성임시정부’로 정하고 민주공화제에 기반한 집정관총재 제도를 택했다. 이들은 보름 뒤인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13도 대표자회의’를 열기로 했다. 각 도 대표들이 모여 민주적으로 결의하면 조선 국민 전체 의견으로 봐도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임정 준비위는 곧바로 전국 각지를 돌며 민족 대표 25명을 모집해 13도 대표자회의를 개최했다. 당시 풍경을 묘사한 이규갑의 증언이다. “당일(4월 2일) 아침 권혁채와 홍면희, 안상덕 등과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인천으로 향했다. 그때는 3·1운동 뒤 각 지역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던 때라 일경(일본 경찰)의 경계가 심했다. 인천역에 내리자 불심검문을 받았다. 홍면희는 변호사여서 무사했지만 나는 검색을 당했다. 그러자 홍면희가 ‘이 사람은 약장사로 우리와 일행’이라고 둘러대 위기를 면했다.” 이날 만국공원에 찾아온 이들은 많지 않았다. 종교계와 서울·경기 지역 대표들만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13도 대표자회의 장소를 만국공원으로 정한 것은 당시 이곳이 일본인을 중심으로 외국인이 모여 살던 곳이었기에 조선 독립 의지를 보여줄 좋은 장소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대표자회의 참석자들은 같은 달 23일 서울 종로 중식당 봉춘관에서 총회 격인 국민대회를 열어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보신각에서 민중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3·1운동의 여파가 끝나지 않은 때 한번 더 일제의 허를 찌르겠다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이날 종로 일대에는 임시정부 선포문과 국민대회 취지서 등이 뿌려졌다. 집정관총재 이승만(1875~1965)과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 내무총장 이동녕(1869∼1940) 등 각료 명단도 나왔다. 이런 내용은 미국의 UP통신(현 UPI)을 통해 전 세계에 타전됐다. 덕분에 한성정부는 국내외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임시정부가 됐다.●현실적 제약으로 ‘미완의 시도’ 평가도 다만 한성정부가 완전하게 수립된 임정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인천에서 열린 13도 대표자회의는 성원을 채우지 못했고 서울의 국민대회 역시 소수 학생들이 전단을 살포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됐다는 것이다. 노령·상하이정부와 달리 국민 전체의 뜻을 반영해 민주공화정을 탄생시키고자 했지만 일제의 압박 등 현실적 제약이 많아 ‘미완의 시도’에 그쳤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이현희(1937~2010) 전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한성정부는 13도 대표나 임시정부 준비위원회 위원들을 집행부 임명에서 배제하는 등 공평무사한 인사를 단행하려고 했다. 절차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이 덕분에 1987년 9차 개헌 당시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의 법통이 (한성정부를 계승한) 임시정부에 있음을 명확히 선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논란의 중심에 선 임정 초대 대통령 “(해방 당시) 대한민국이 갓 도입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정부와 국민 모두 낯설고 서툴렀다. 이승만 정부는 (불가피하게 권위주의 방식으로 통치했지만) 그래도 헌법을 정지시키거나 국회를 해산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훼손하지는 않았다.”(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는 (같은 진영인)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조차 좋았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독재·반공 이데올로기는 이승만 정권과 연관성이 높기에 그를 치켜세워야 (독재·반공 정치체제가) 합리화된다. 이승만의 재평가 시도는 반대편을 종북이나 용공세력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다.”(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에 추대돼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오르는 우남 이승만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독립운동의 분열과 남북 분단, 한국전쟁 당시 그릇된 대처, 부정부패, 독재정치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꼬집는다. 하지만 이승만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마음놓고 그를 비난하는 자체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한 그의 공로”라며 “과(過)보다 공(功)이 훨씬 큰 만큼 업적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1896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독립협회가 만들어졌다. 자주독립과 천부인권 존중, 한글 사용 등을 강조했는데, 배후에는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1858~1902) 등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만들어 조선인에게 영어와 민주주의를 가르쳤다. 이승만은 이 학당의 학생이었다.●“일단 비위 거슬리면 타인 이해하려 안해” 독립협회는 종종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배재학당 학생들도 대거 참여했다. 이승만은 여기서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7년간 옥살이를 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조선사회에 환멸을 느꼈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면 반드시 기독교 이념에 입각한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믿었다. 배재학당의 경험과 기독교의 이분법적 선악 개념 등이 더해져 훗날 남과 타협하지 않는 특유의 성격이 생겨난 것 같다. 이승만을 가까이서 도왔던 정치인 허정(1896∼1988)은 “평소 장난도 잘 치고 유머러스했지만 일단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조금도 자기 뜻을 굽히거나 남의 사정을 봐주려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한성정부 집정관총재를 시작으로 중국 상하이로 통합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첫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그는 임정 대통령 재임기간 5년 6개월 가운데 상하이에는 반년 정도만 머물렀다. 대부분 기간은 미국에 혼자 머물며 전보를 이용해 ‘원격 통치’를 했다. 이 때문에 이동휘(1873~1935), 안창호(1878~1938) 등과 마찰이 생겼고 훗날 임정 전체가 내분에 휩싸이는 원인이 됐다.●“정부가 단 한 사람 때문에 법을 바꾼 사례” 그는 또 한성정부 집정관총재에 임명된 때부터 스스로를 집정관이 아닌 ‘대통령’(president)으로 칭해 논란이 됐다. 교민 성금 유용 의혹과 윤봉길(1908~1932) 의거 비난 등으로 구설에 올랐다. 최근에는 1918년 10월 그가 미국에서 작성한 1차 세계대전 징집 카드에 국적을 한국이 아닌 일본으로 적은 것이 알려져 비난을 샀다. 당시 미국에서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도적 오기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원래 상하이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였다. 하지만 이승만이 끝까지 대통령 직함을 고집해 결국 임정이 1919년 9월 개헌 때 통치제도를 대통령제로 바꿨다. 정부가 한 사람 때문에 법을 바꾼 보기 드문 사례”라고 설명했다. ●루스벨트·윌슨과 인연… 지도자로 급부상 그럼에도 이승만은 1919년 4월 15일 중국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17일 평안도에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방총리로,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에 선임되는 등 거의 모든 임정에서 1, 2인자로 지목됐다. 조선 사회는 왜 이승만을 새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여겼을까. 그는 31살이던 1905년 8월 기독교계의 주선으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를 만나 한국의 독립을 청원한 경험이 있다. 또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해 약소 민족에게 희망을 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 역시 이승만이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학교 총장이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 갖기 힘든 경력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승만은 1차 세계대전 뒤 최강국이 된 미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외교 카드’였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오늘의 눈] ‘409일’… 굴뚝 위 전달된 서글픈 성탄 선물/김지예 사회부 기자

    [오늘의 눈] ‘409일’… 굴뚝 위 전달된 서글픈 성탄 선물/김지예 사회부 기자

    25일 크리스마스 아침 슬픈 선물이 전달됐다. 공장 가동 중단과 정리해고에 반발해 75m 굴뚝 위에 올라간 파인텍의 두 해고 노동자가 409일째 고공 농성을 이어가며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는 소식이었다. 두 노동자, 홍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의 건강은 매우 좋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이들의 고공 농성은 겨울의 한복판으로 향하고 있다. 한 몸 편하게 눕힐 수 없는 좁디좁은 공간에 갇힌 채 두 번째 겨울을 난다는 것은 감옥살이보다 더한 고통이다. 농성장 주변에 흐르는 크리스마스 캐럴은 두 노동자에게 회한이 되고 있다. 홍 전 지회장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에게 전화가 왔다”면서 “함께 있었다면 작은 선물이라도 했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날 고공 농성장에는 찬송가와 노동가가 울려 퍼졌다.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성탄 트리에는 ‘빨리 지상에서 만나요’, ‘노동자가 희망이다’라는 응원 메시지가 달렸다. 나승구 신부와 이동환 목사가 의료진과 함께 굴뚝 위에 올라 2시간여 두 노동자를 위로하고 기도했다. 두 사람이 버티는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시민들의 온정이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를 함께하며 알게 된 시민 4명은 지난 24일 ‘노동 악법 철폐하라’, ‘스타플렉스는 노사합의를 이행하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408일이 넘도록 굴뚝에 사람이 갇혀 있는데 힘 있는 사람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느냐”면서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김용균씨도 그런 무관심 속에 사망한 것”이라고 울먹였다. 차광호 지회장도 농성을 응원하러 찾아오는 시민들의 이름을 일일이 노트에 적으며 역사를 쓰고 있다. 시민들이 “파인텍을 잊고 산 시간이 길어 미안하다”며 위로를 건네자, 농성자들은 “저희 때문에 많은 시민이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이날 종교계 노동 관련 기구는 사 측인 김세권 스타플렉스 대표와 처음 면담했다. 김 대표는 “상황이 어렵지만 해결 방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 노동자들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김 대표가 대화의 테이블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면 가장 먼저 두 노동자를 75m 굴뚝 위에 409일이 넘도록 방치한 것부터 사과해야 한다. 특히 고공 농성이 일반적인 노사 문제를 뛰어넘어 시민사회의 연대 투쟁 문제로 커진 만큼 김 대표는 해고 노동자의 요구에 이어 시민사회의 요구에도 답해야 한다. 또 정부와 국회는 노동자의 죽음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만시지탄식’ 행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다. jiye@seoul.co.kr
  • “억울한 옥살이 만든 검사, 책임없다고?”…‘삼례나라슈퍼’ 당사자들 반발

    “억울한 옥살이 만든 검사, 책임없다고?”…‘삼례나라슈퍼’ 당사자들 반발

    1999년 전북 완주 삼례읍 나라슈퍼에서 발생한 3인조 강도 사건 범인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사건에 대해 검찰 과거사진상조사단이 당시 수사를 담당한 검사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은 당사자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조사팀을 교체하고 보강조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21일 검찰 과거사진상조사단 등에 따르면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담당한 5팀은 당시 수사검사였던 최모 변호사에게 부실수사 책임이 없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지난 17일 법무부 산하 검찰과거사위원회에 제출했다. 과거사위는 과거사진상조사단의 결론을 수용하고, 조만간 이런 내용을 공개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사진상조사단은 수사 과정에서 절차를 어기거나 내용을 조작했다고 볼 근거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은 1999년 2월 전북 완주군 삼례읍의 나라슈퍼에서 발생한 강도치사 사건이다. 경찰은 정신지체 장애를 앓던 19~20세 남성 3명을 범인으로 지목했고, 이들은 징역 3~6년형을 선고받았다. 수사 당시 부산지검은 진범을 검거한 후 사건을 수사했던 전주지검으로 넘겼으나, 담당 검사였던 최모 변호사는 무혐의 처분을 내려 부실수사 의혹이 일었다. 결국 이들 3명은 2016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건 재심이 진행되면서 1심 재판부 배석판사였던 박범계 의원이 사과를 했다.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전주지법은 총 11억여원의 형사보상 금액을 결정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3명과 재심사건을 변호한 박준영 변호사는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이날 오전 11시 대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조사팀을 교체하고 보강조사해달라고 요구했다. 최 변호사는 이미 박 변호사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박 변호사와 3명이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박 변호사는 “삼례 3인조를 기소하고 진범이 잡혀 자백을 했는데도 이들을 무혐의로 풀어준 인물이 모두 최 변호사다”라며 “진상조사단이 어떻게 최 변호사에게 책임이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고 말했다. 또한 부산지검이 진범 자백을 받았는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주지검으로 이송된 과정 등을 밝혀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도플갱어’ 때문에 17년 간 억울한 옥살이한 남자…12억 보상

    ‘도플갱어’ 때문에 17년 간 억울한 옥살이한 남자…12억 보상

    자신과 똑닮은 이른바 ‘도플갱어’ 때문에 17년 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남자가 110만 달러(약 12억 4000만원)의 보상금을 받게됐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CNN, ABC뉴스 등 현지언론은 캔자스주 당국이 리처드 존스(42)에게 110만 달러의 보상금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세계적인 토픽이 될 만큼 황당한 사건의 시작은 지난 1999년 캔자스 롤런드파크의 한 주차장에서 일어났다. 당시 한 남성이 한 여성을 폭행하고 가방을 강탈한 혐의로 체포됐다. 바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존스였다. 그는 사건 당시 여자친구 집에 있었다며 줄기차게 알리바이를 주장했으나 경찰과 법원은 이를 묵살했다. 특히 사건 현장에서 존스의 지문이나 DNA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법원은 경비원인 목격자의 증언을 유일한 증거로 인정해 그에게 징역 19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이렇게 억울한 수감생활을 하던 그에게 다시 빛이 찾아든 것은 15년이나 지나서였다. 다른 재소자가 '당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교도소에 있다'고 전해준 것. 이에 존스는 놀랍게도 자신과 똑같이 생긴 리키 아모스(41)를 찾아냈다. 실제로 아모스는 나이만 한살 차이일 뿐 신장(183㎝)과 체중(91㎏)도 같았다. 이후 존스는 자신의 무죄입증을 위해 캔자스대학 로스쿨의 무죄 입증 탐사 그룹인 ‘미드웨스트 이노센스’에 도움을 요청해 결국 억울한 혐의를 벗었다. 지난해 6월 17년이나 수감됐던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이런 날이 오길 매일 기도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두달이 지나 법무 당국에 공식적으로 무죄를 선언해 줄 것과 110만 달러를 보상하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캔자스주 법무당국자는 "잘못된 판결로 수감된 사람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오판법'(mistaken-conviction law)이 제정된 후 첫번째 소송 결과"라면서 "존스의 경우 잘못된 유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절차에 따라 법적인 혜택을 받게됐다"고 밝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恨 서린 서대문형무소, 달동네 각박한 삶… 그해 겨울은 스산했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恨 서린 서대문형무소, 달동네 각박한 삶… 그해 겨울은 스산했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3회 서대문(안산 아랫동네)편이 지난 15일 서대문구 현저동과 영천동 일대에서 진행됐다. 이날 오전 10시 서대문역 8번 출구에 집결한 참석자들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서대문 통술집~석교교회~영천시장을 차례로 둘러봤다. 이어 서대문역사공원에서 서울미래유산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김광섭의 시 ‘독방 62호실의 겨울’과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면’ 해설을 통해 엄혹했던 경성교도소(서대문형무소) 시절 행해졌던 옥살이와 옥바라지의 고통을 되새겼다. 자락길을 따라 봉수대에 올라 안산 아랫동네의 고즈넉한 겨울 풍경을 내려다봤다.서대문(돈의문)은 행정적으로 한성부 서부 반석방에 속하는 성 밖 십리지역이다. 그러나 서대문은 행정지리학적으로 사대문 안 새문안과 진배없는 특수지역이기도 했다. 서울~개성~평양~의주를 오가는 조선 제1대로인 의주대로와 영은문·모화관 그리고 경기감영의 존재가 조선 수도 한성부 서대문 도시 공간의 핵심 코드이다. 서대문은 1915년 서대문~청량리 간 전차궤도 부설로 말미암아 강제 철거될 때까지 종각~남대문 간 남북대로와 함께 동대문~서대문 간 동서대로의 종착점이었다. 의주로가 시작되는 지점에는 조선 초(1393년)부터 수원으로 옮겨간 1896년까지 경기감영이 자리잡았다. 조선시대 1번 국도는 중국 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연행로(燕行路) 혹은 사행로(使行路)라는 별칭이 따랐다. 조선 제일의 무역로이기도 했다.영천시장 앞 석교교회 앞은 말 그대로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모두 6개의 다리 중 북쪽에서 첫 번째 다리가 석교이다. 다리 아래에는 1967년 복개 이전까지 서대문~홍제동~고양~파주~장단~개성~의주를 잇는 의주로를 끼고 무악천이 철철 흘렀다. 다리의 남쪽은 교남동, 북쪽은 교북동이었다. 무악천은 일제강점기인 1915년 욱천(旭川)이라는 일본식 이름이 붙으면서 본명을 잃었고 지금은 만초천이라고 불린다. 기봉·기산·봉우재·봉화뚝·모악산·무악재 같은 다채로운 이름을 가졌던 무악산 또한 길마재의 한자표기인 안산(鞍山)으로 개명됐다. 무악은 동봉과 서봉 두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두 봉우리 사이가 움푹하므로 길마(소에 짐을 실을 때 그 등에 얹는 기구)와 같다 해 길마재라고 불렸다. 안산이란 말의 안장같이 생긴 산이란 뜻이다. 무악(毋岳)이라는 산 이름의 유래는 풍수지리상 서울의 진산(鎭山)인 삼각산(북한산) 인수봉이 어린애를 업고 나가는 모양이어서 이를 달래려고 ‘어미의 산’이란 뜻에서 모악(母岳)이라고 칭했던 데서 유래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무악이라는 신령스런 지명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내 탓도, 네 탓도 아니고 나라를 잃은 탓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돈다. 어쨌거나 안산에 오르려면 지하철 무악재역에서 내려야 하는 게 우리의 지명현실이다.무악과 인왕산은 북방으로부터 서울을 지키는 방어선이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도성에서 서쪽으로 5리를 가면 사현(무악재)이 되고, 그 고개를 넘으면 녹번현이 있다. 당(唐)나라 장수가 여기를 지나면서 ‘한 사람이 관문을 막으면 만 사람이라도 열 수 없겠다’고 했다”고 한다. 또 “서쪽으로 40리를 가면 벽제령인데 임진년 왜란 때 이여송이 패한 곳이다. 고개 두 곳과 벽제령은 모두 관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다”라면서 외침 때마다 지키지도 못한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남한산성을 쌓는다고 백성을 달달 볶는 왕조를 비판했다. 한성부 서부 반송방은 오늘의 인천처럼 서울을 드나드는 제일 관문이었다. 반송방은 고려 남경 때부터 소반처럼 생긴 반송(盤松)이 많아서 붙은 지명이다. 서지(西池)라는 학교운동장만 한 큰 연못이 지금의 금화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이를 반송지, 반송정, 천연정이라고도 지칭했다. 정조는 국도팔영(國都八詠), 서거정은 한성십경(漢城十景)에 속하는 명소로 꼽았다. 도성대지도, 경조오부도 등 옛 지도에 나타나는 서대문 밖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는 1407년 태종이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려고 세운 모화관과 영은문이다. 연못 자리에는 개화기 일본 공사관(청수관)과 죽첨공립소학교(동명여중)가 들어섰다. 하필이면 경기감영을 한성부 관할 지역인 반송방에 뒀을까. 경기감영의 설치 연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경기도를 다스리는 경기관찰사는 반송방에 본영, 영평(포천)에 신영을 두고 왕래하면서 업무를 봤다. 지금도 수원에 경기도청, 의정부에 경기 제2청(경기북부청)을 따로 두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예나 지금이나 경기도는 수도방위의 중책을 맡고 있으므로 중앙정부와의 긴밀한 관계 유지가 필요한 때문이다. 김종서 장군의 집이 서대문 밖 지금의 농업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일행이 일흔 살 노장군의 집에서 철퇴를 휘둘러 즉사시킨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죽지 않았다. 왕에게 반역을 고하려고 부인의 가마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경기감영과 사대문을 장악한 한명회의 수하들이 서대문과 남대문의 문을 열어 주지 않는 바람에 주저앉았다. 수양은 다음날 새벽 자객을 보내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이방원에 의해 척살당한 정도전의 수송동 집이 마구간으로 변한 것처럼 김종서의 서대문 집은 여행객에게 말을 대여해 주는 고마청으로 둔갑했다. 역사의 가설은 성립하지 않지만 김종서의 집이 사대문 안에 있었다면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를 노릇이다.경기감영 터는 1896년 수원으로 이전하면서 군부대로 사용되다가 1903년 한성부 청사, 죽첨공립소학교 사택, 고양군청을 거쳐 경성적십자병원(서울적십자병원)이 들어서는 독특한 장소 변화를 겪었다. 또 서부 경찰분서, 경성감옥 분감, 경성측후소(서울기상청) 등도 들어서 이후 변화상을 예감케 한다. 사대주의의 상징 모화관과 영은문을 헐어내는 대신 독립관과 독립문이 세워졌다. 일본의 자본과 부추김에 의해 세워진 독립문과 독립관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다. 현저동이란 말 그대로 고개(峴) 아래(底) 동네를 말한다. 인왕산과 무악산이 이어지는 무악재 아래에 형성된 마을이다. 1975년 대통령령에 따라 현저동 절반이 종로구로 편입돼 의주로 동쪽 인왕산 자락은 무악동으로 바뀌었다. 의주로를 중심으로 안산 쪽은 서대문구, 인왕산 쪽은 종로구로 각각 나뉜 것이다. 서대문 밖은 지배세력의 교체에 따른 공간 변화가 두드러진 곳이다. 점유주체가 바뀌면서 공간의 이력도 덩달아 달라졌다. 일제강점기 이후 적산가옥이 많았던 인왕산 아래 대로변 평동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 빈민층이 스며들었다. 염상섭은 ‘삼대’에서 “전차에서 내려서 몇 번이나 물어 홍파동에까지 와가지고 수첩을 꺼내보고, 이 골목 저 골목을 꼬불꼬불 뺑뺑 돌아야 양의 창자다. 서울서 이십여 년을 자랐건만 이런 동네에는 처음 와 보았다”고 묘사할 정도였다. 박경리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영천시장엔 한 귀퉁이에 제법 시장까지 선다고 했다. 아무리 공화국의 하늘 아래라 해도 사람 사는 세상인 이상 먹어야 사는 것 다음으로 참을 수 없는 것이 사고파는 일…”이라고 한국전쟁 와중에도 열린 영천시장을 그렸다. 현저동에서 성장기를 보낸 박완서의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도 현저동 달동네의 각박한 삶이 절절히 펼쳐진다. “여기가 서울이야?” 나의 한 섞인 물음에 엄마는 뜻밖에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여기는 서울의 문밖이란다. 느이 오래비가 이담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벌면 우리도 그때 가선 버젓이 문안에 살아 보자꾸나.”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문희일 연구위원 ●다음 일정: 삼청동(삼청공원의 겨울)●일시: 12월 22일(토) 오전 10시~낮 12시●집결장소: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신청·안내: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한밤’ 낸시랭, “왕진진 실체 정말 몰랐냐” 질문에...

    ‘한밤’ 낸시랭, “왕진진 실체 정말 몰랐냐” 질문에...

    ‘한밤’ 낸시랭이 왕진진(본명 전준주)과 이혼소송을 진행 중인 심경을 전했다. 18일 방송되는 SBS ‘본격연예 한밤’에서는 낸시랭과의 단독 인터뷰를 공개한다. 수많은 의혹과 논란의 중심에 선 낸시랭과 왕진진(본명 전준주). 떠들썩했던 결혼과 남편 왕진진에게 쏟아진 전과, 사칭, 출신 사기 등의 의혹, 그리고 리벤지 포르노 협박까지. 두 사람은 결혼 10개월 만에 이혼소송에 들어갔다. ‘본격연예 한밤’ 제작진은 낸시랭의 현재 심정은 어떤지 묻기 위해 지난 14일 역삼동의 한 호텔에서 열린 낸시랭의 개인전을 찾았다. 한동안 매체에서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낸시랭은 오랜만에 선 카메라 앞이 어색한지 긴장된 모습으로 ‘본격연예 한밤’과의 단독 인터뷰에 응했다. ‘본격연예 한밤’을 통해 처음으로 입을 연 낸시랭은 잘못된 선택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정말 왕진진의 실체를 몰랐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낸시랭은 왕진진이 자신은 파라다이스 그룹의 서자이며 상속 문제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며 눈물을 흘리며 말했고, 그 모습에 자신은 남편을 믿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당시 사람들이 왜 의혹을 제기하는지 몰랐다는 것. 낸시랭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했다. 그녀는 직접 전라도에 왕진진의 친모로 추정되는 분을 만났고, 세 가지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낸시랭이 친모를 찾아가 알게 된 첫 번째는 마카오가 아닌 전라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두 번째는 아버지는 파라다이스 그룹의 회장이 아니라 농사를 짓다가 경운기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었다.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털어놓은 낸시랭은 그의 거짓말을 알게 된 후에도 자신이 선택한 사랑이었기에 가정을 지키려 했는데, 하지만 의문이 가는 부분에 대해 묻기만 해도 왕진진은 폭행으로 반응했다고 말했다. 폭행으로 인해 죽고 싶은 마음도 생겼지만 지인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겼고 작품을 통해 슬픔을 승화시켰다고 전한다. 한편, SBS ‘본격연예 한밤’은 18일 오후 8시 55분에 방송된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독립운동 할아버지처럼… 뇌과학 연구로 조국에 이바지”

    “독립운동 할아버지처럼… 뇌과학 연구로 조국에 이바지”

    조부 최창식 선생, 임시정부 설립 멤버 부친 최영화 박사는 KIST 설립 도와세계신경과학회장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뇌과학연구소장을 지낸 데니스 최(한국명 최원규) 미국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의과대학 석좌교수는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을 찾았다. 2016년 뇌과학연구소장 임기를 마친 뒤 해마다 한국을 찾아 KIST와 신약개발업체를 대상으로 조언을 해주고 있다. 신경과학 분야 세계적인 권위자로 재미동포 2세인 최 교수는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해마다 한국을 방문하는 이유를 묻자 조부와 아버지 얘기를 먼저 꺼냈다. 최 교수의 조부 최창식(1892~1957) 선생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 멤버이자 임시의정원 초대 의원을 지낸 독립투사다. 일제강점기에 황성신문 기자와 오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역사 저술물을 발간했다는 이유로 옥살이했다. 아버지 최영화 박사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70년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만들어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데 초석을 다졌다.최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의 KIST 뇌과학연구소장직 제안을 수락하고, 이후에도 한국의 뇌과학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조언을 해주는 것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선친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할아버지·아버지에 이어 3대째 조국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특히 아버지 최 박사는 KIST 설립을 도운 주인공이다. 박정희 대통령과 미국 리든 존슨 대통령이 손잡고 한국에 국립연구소 설립을 추진할 당시 미국 바텔연구소에 근무하던 최 박사는 KIST 설립지원팀을 이끌었다. 최 교수는 “KIST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준 한국에 대한 미국의 보답 성격이었다”면서 “박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에게 부탁해 이뤄진 것으로 건축자재 등을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았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의 뜻밖 요구가 한국의 경제 성장을 앞당기는 단초가 됐다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 발표 때마다 후보로 거론되는 그는 “한국의 뇌과학 연구 수준은 이미 상위로 평가받는다”면서 “치매치료제 등은 세계 유수 제약업체들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했음에도 실패를 거듭하는데 만일 국내에서 성공한다면 블록버스터 신약을 개발하는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울러 그는 “특히 중개의학 분야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글 사진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스트라스부르 총격 용의자 정체는

    스트라스부르 총격 용의자 정체는

    “알라후 아크바르” 지난 11일(현지시간) 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총격을 저지르고 달아난 범인의 행방이 묘연한 가운데 프랑스 당국은 용의자로 지목된 셰리프 셰카트(29)가 과거 절도 혐의로 징역형을 살면서 종교적 급진주의에 노출됐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목격자들은 용의자가 범행 당시 ‘신은 위대하다’는 뜻의 아랍어인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쳤다고 전했다. 수니파 극단주의 단체인 ‘이슬람국‘(IS) 등 테러리스트들이 범행 때 자주 외치는 말이다. 12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프랑스 경찰은 총격으로 2명을 살해하고 13명을 다치게 한 뒤 택시를 타고 달아난 용의자의 행방을 군·경 600여명을 투입해 쫓고 있다. 이번 총격 사건으로 다친 13명 중 1명은 뇌사상태이며, 6명 정도는 중태에 빠졌다. 사건 직후 프랑스 정부는 안보경계등급을 최고 수준인 ‘비상 공격’으로 격상하고 국경 검문과 프랑스 전역의 다른 크리스마스 마켓에 대한 보호를 강화했다. 프랑스 내무부의 로랑 누네즈 차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범인이 프랑스 국경 밖으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용의자인 셰카트는 과거 프랑스, 독일, 스위스에서 폭력·강도 등으로 27번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독일 언론은 그가 2016년 6월 절도 혐의로 붙잡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징겐 지방법원에서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고 보도했다. 그는 징겐 법원에서 판결을 받은 뒤 8개월을 복역하고 지난해 2월 프랑스로 추방됐다. 2013년에는 스위스에서 역시 절도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에 앞서 2012년 라인란트팔츠주의 도시 마인츠에서 치과에 침입해 8300유로(약 1062만원)의 금품을 훔친 혐의로도 붙잡혔으며, 2008년에는 프랑스에서 절도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형기 일부를 이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스트라스부르 태생인 셰리프는 6남매의 가정에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별도의 직업 훈련 교육은 받지 않았다. 지방자치단체에 취업했으나 2011년 이후 실업 상태였다. 셰리프는 독일 검찰에 술과 마약을 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용의자가 프랑스로 추방된 후 스트라스부르 지방 정부는 테러 감시목록인 ‘S파일’에 그를 잠재적 극단주의자로 올려놓고 관리해왔다. 프랑스 당국은 약 2만 6000명을 자국 안보에 위협을 끼칠 인물로 분류하고 있다. 독일 사회는 2016년 12월 베를린의 한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트럭 돌진 테러가 발생해 12명이 숨졌기 때문에 이번 총격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슈테판 자이베르트 총리실 대변인은 트위터를 통해 “희생자가 발생해 슬프다. 더는 누구도 위험에 처하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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