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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일 전처오빠」 서울 산다/분단 비극 또한명의 희생자 성일기씨

    ◎“배우출신 동생 성격차로 결혼 실패”/월북한 가족 생전에 만나보는게 꿈” 김일성의 사망으로 북한의 최고 권좌에 오를 것이 확실시되는 김정일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성혜임씨(57)의 친오빠 일기씨(62)가 서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은평구 갈현 1동에 살고 있는 성씨는 10일 자택으로 찾아간 기자에게 『우리 가족의 비극적인 역사는 이제 그만 땅속에 묻혀져야 한다.가족의 비극적 역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않다』며 사진 촬영을 극구 사양했다. 그는 동생 혜임씨가 김정일의 첫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6년전 당국과 다른 경로를 통해 들었다고 소개했다.뛰어난 미모의 영화배우 출신인 그녀는 첫 결혼에 실패한 뒤 67년 당시 30세의 나이로 5살 연하였던 김정일과 결혼,71년 첫아들인 정남군을 낳았다. 그녀는 그러나 김정일과의 성격차이로 또다시 원만한 결혼생활에는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씨는 동생이 김정일과 결혼한 배경에 대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동생이 북에서 영화배우를 했기 때문에 예술분야에 관심이 많은 김정일과 연이 닿게 됐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고 말했다. 성씨 가족의 비극은 일기씨의 아버지 유경씨가 48년 일기씨만 서울에 남긴 채 어머니 김원주씨와 세 딸(혜랑,혜임,화자)을 데리고 월북하면서 시작됐다. 아버지 유경씨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3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서 남로당 고위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월북,노동당 고위직을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기씨도 가족들이 월북한 직후인 49년 북으로 가 유격대원 교육을 받은뒤 6·25에 참전,경남·북 일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3년 넘게 벌이다 53년 12월 당국에 체포됐으나 김창용 당시 특무대장의 「배려」로 옥고를 치르지 않고 풀려났다. 성씨는 『우리 가족이야말로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가장 뼈저리게 겪었다』면서 『아직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죽기전에 한번 만나보았으면 하는게 마지막 소망』이라고 밝혔다.
  • 백정기 의사/흑색공포단 결성…일밀정 제거 앞장(이달의 독립운동가)

    ◎상해서 학도병 구출 등 항일투쟁/일군 회의장 폭파하려다 체포돼 『나의 구국일념은 강도 일제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공생공사의 맹우 여러분,대륙침략의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겨레에 바치는 마지막 소원을』 독립투사 구파 백정기의사(1896년 1월19일∼1934년 6월5일)가 1933년 3월17일 중국 상해의 한요릿집에 모인 일제 군간부와 중국의 친일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비장한 결의로 떠나면서 남긴 유서다. 의사는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요리사등으로 가장해 숨어있던 일경과 일제헌병들에게 붙잡혀 1년3개월여 옥고를 치르다 끝내 조국해방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 이 거사는 비록 미수로 끝났으나 한국인과 중국인의 항일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후대에 평가되고 있다. 의사는 명성황후가 일제에게 시해되고 고종이 아관파천하던 해 전북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 농가에서 태어났다.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하면서 독학으로 글을 익힌 의사는 일찍이 소년기부터 민족의식에 눈을 떴으며 23세 인 1919년 2월 상경,독립투사의 길을 믿아 나섰다. 서울에 도착한 의사는 사람들로부터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됐으며 곧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벌였다. 의사는 그 뒤 인천등지에서 무장독립활동을 펼치기 위한 준비를 하다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되자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당시 북경에는 이회영,유자명,이을규,신채호등이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었다. 이들은 신채호가 1923년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 크게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를 행동강령으로 채택하고 이를 통해 독립을 관철할 것을 다짐하고 있었다. 이들이 표방한 무정부주의의 내용은 무지배,무권력의 민족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의사는 이들과 만나면서 자연스레 무정부주의에 심취,한때 호남성 동정호부근에서 이상적 농촌사회 건설을 위해 애썼다. 의사는 다음해인 1924년 일본 조천수력공사장을 폭파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도쿄에 잠입했다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계획을 포기하고 다시 북경으로 돌아온다. 북경에서 곧바로 상해로 옮긴 의사는 영국인이 운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힌 뒤 1925년 상해에서 5·30총파업이 실시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들과 노동조합을 결성,독립운동의 기반으로 활용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1927년 복건성 천주시에서 중국인 동료들과 함께 무정부주의자 양성소인 민단훈련소를 설립,농민 3천5백여명을 모아 농민자위대를 조직했다. 의사는 1930년 상해에서 동료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일본침략세력 저지작전과 밀정제거작전을 주임무로 삼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 조직은 나중 일제에 징용된 한인학도병 귀순작전과 포로구출작전,항일전쟁참가등 많은 공을 세웠다. 의사는 또 이 조직등을 골간으로 1931년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자유신문」을 발행,결사항일투쟁의지를 북돋우는데 힘을 기울였다. 의사는 제1차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중국동지와 함께 파괴암살을 주목적으로 하는 비밀단체 「흑색공포단」을 결성,일본기관 파괴와 침략원흉의 처단활동에 나섰다. 이 흑색공포단은 결성되자마자 일제 밀정들을 다수 처형하는등 맹활약을 펼쳐 일제를 긴장시켰다. 일제는 이처럼 비정규적인 유격전이 펼쳐지자 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상해의 고급음식점 「육삼정」에서 군간부등이 참가한 가운데 비밀회의를 개최키로 했으며 이 정보를 흑색공포단이 입수,의사가 이 음식점을 폭파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의사를 비롯한 흑색공포단원들은 이 거사를 서로 자기가 적임이라고 주장,추첨으로 의사와 동료 이강훈이 행동대원에 선정됐다. 의사등 행동대원 2명은 거사일인 1933년 3월17일 육삼정 비밀회의가 시작되기 2시간전인 하오 6시쯤 폭탄과 권총,수류탄등으로 무장을 하고 현장에 도착해 정세를 살피기 시작했다.그러나 이들은 변절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로부터 사전정보를 입수한 일제가 인력거꾼·요리사등으로 변장하고 수십여명이 현장주변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아 채지 못해 그 자리에서 체포돼 거사는 불발로 끝났다. 의사등은 바로 일본으로 압송됐으며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의사는 1년3개월여 복역하다 지병인 폐결핵으로 천추의 한을 가슴에 품고 옥중에서 순국했다. 백의사의 유해는 적지 일본에 묻혔다가 광복 1년 뒤인 1946년 7월 이봉창·윤봉길의사의 유해와 함께 조국에 봉환됐으며 국민장으로 천묘의식을 치른 뒤 효창원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을 기려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고향인 전북 영원면에는 도민의 성금을 모아 건립한 순국기념비가 서 있다.
  • DJ사주설/때늦은 쟁점화/꼬리무는 추측

    ◎민주대변인 여 핵심 비난 논평/“만델라 증후군” 입방아 피하기 민주당의 박지원대변인은 4일 정례브리핑에서 「김대중이사장 사주설」을 비난하는 논평을 이례적으로 발표,눈길을 끌었다. 박대변인은 『지난 임시국회때 우리당의 강공이 마치 김이사장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는 문총장과 하순봉민자당대변인의 비난발언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며 잘못됐다는 고위층인사들의 견해도 들을 수 있었다』면서 『특히 이런 것을 지시했다고 알려진 이정무수석은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수 있느냐」며 전면 부인했다』고 고위층의 「해명」까지 곁들였다. 「DJ사주설」은 지난달 29일 임시국회가 끝날 무렵 한때 여야간 설전을 벌였지만 지금은 쟁점이 아니어서 박대변인의 이같은 언급은 좀 엉뚱하게 비쳐진다. 그래서인지 당안팎에서는 갖가지 추측이 꼬리를 물고 있는 것 같다. 우선 남아공의 흑인최초 대통령이 유력시되는 「만델라증후군」을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만델라는 28년동안 옥살이를 하며 민주화투쟁을 벌였고 나이도 75세이다.여러 면에서 김이사장과 비슷하다.현재 68세인 김이사장은 그동안 수차례 옥고를 치렀고 15대 대선 때는 72세로 만델라보다 오히려 세살이나 적다.이 때문에 세간에는 『혹시나…』하며 김이사장의 행보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그러나 이것은 김이사장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처지에서도 결코 이로울 게 없다.따라서 이런 흐름에 쐐기를 박을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고 그것이 사주설 공박으로 분출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 5일부터 3주일동안 대선후 처음으로 미국방문에 나서는 김이사장의 해외나들이를 두고 정치적 해석이 만발할 가능성을 경계하는 뜻도 있어 보인다. 덧붙여 최근 『여기저기 다니면서 통일얘기를 지껄이는 사람이 있다』고 다분히 김이사장을 겨냥한 김종필민자당대표의 발언에 대한 불쾌감이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지적도 있다. 여하튼 김이사장은 정계은퇴를 선언했음에도 상당한 막후 영향력과 함께 정치권의 초점인물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 “흑인들 차분히 개표 기다려”/최상덕 주남아공대사 전화인터뷰

    ◎완전한 자유 아직은 실감못한듯/교민에 테러·소요 철저대비 당부 『총선거가 끝난 남아공은 놀랄만큼 평온하고 질서정연합니다』 남아공의 역사적인 총선이 마감된 29일 하오 (한국시간 30일 상오) 최상덕 주남아공대사는 전화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거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있을 것으로 우려했었지만 막상 선거가 끝난 지금 남아공은 매우 차분한 분위기』라고 전하고 『3백50년간의 소수백인 통치와 지구상의 인종차별(아파르트헤이트)종식이라는 역사적 기록인 동시에 남아공이 순탄한 선거로 「새로운 민주남아공시대」를 열었다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4일간의 투표가 끝난 현지 상황은. 『사상 첫 선거여서 선관위의 경험이 전무한 탓에 일부 유권자의 투표용지가 4∼5시간 늦게 배부되기도 했지만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남아공 국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흑인들은 질서정연하게 투표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해방됐다는 행복감에 젖어 즐거운 표정들이었다.해방감에 따른 난동등 무질서는 이상하리만큼 없었다.98세된 한 흑인 노파가 들것에 실려나와 투표를 한 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면서 감격에 겨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투표직전까지 수차례 폭탄테러등 혼란이 있었는데 막상 선거는 차분히 치러진 이유는. 『흑인들은 아직은 해방감을 완전히 느끼지 못하고 약간 얼떨떨해 하는 것같다.또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총선후 개표완료때까지 흑인들의 억압됐던 감정의 폭발을 막기위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백인 극우파들은 투표전과 같은 폭탄테러등의 위협을 하고 있으나 정부와 흑인지도자들이 대화용의를 보이면서 폭력자제를 당부하고 있다』 ­부정선거 시비는 전혀 없는가. 『흑인문맹자가 많아 어디에 어떻게 표를 찍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 일부지역 선관위 직원들이 찍을 곳을 가르쳐주기도해 부정선거 시비가 일기는 했다.그러나 이는 극히 일부지역의 일이어서 대대적 부정선거 시비는 없을 것 같다.일부 흑인밀집지역에 투표용지가 모자란 사례가 있었고 투표용지에 뒤늦게 선거에 참여한 인카타자유당(IFP)의 스티커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넬슨 만델라 ANC의장등 지도자들이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유효한 선거를 만들어 나갈 것을 호소하고 있어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개표결과 전망은.또 만델라의장이 대통령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 『ANC가 과반수 의석을 확보해 만델라의장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예상에는 변함이 없다.만델라의장을 만난 일이 있는데 76세의 고령과 27년의 옥고에도 불구하고 매우 건강하고 온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그는 반대파,극우파와도 항상 대화를 가질 용의가 있다고 했다』 ­개표결과 발표후 소요의 가능성은.또 만약의 사태에 우리 교민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대책은 마련돼 있는지. 『약간의 말썽과 소요가 일어날 수는 있을 것으로 전망되지만 사회혼란으로 이어질 것같지는 않다.흑인의 소요와 백인의 테러등 부분적인 소요가능성은 남아 있어 교민들에게 당분간 철시를 하고 조심을 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남아공이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민주주의 경험부족등 난제들을 안고 있는데. 『경제문제가 가장심각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만델라의장등도 하루아침에 모든게 해결되고 충족되지 않는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 양기탁선생/대한매일신보 창간… 항일의식 고취(이달의 독립운동가)

    ◎신민회 결성… 만주서 독립군 양성 주도/의용군 국내에 파견,일제기관 등 습격 양기탁선생은 국운이 꺼져가던 대한제국말기에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항일의식과 애국계몽의식을 고취한 언론인이자 신민회등 비밀결사를 통해 무장항일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이다. 1871년 4월2일 출생한 선생은 1938년 4월19일에 운명,이달로서 서거 56주기와 탄신 123주년을 맞게 됐다. 평양 출신인 선생은 소년 시절 영어를 배워 1895년 미국인 게일박사의 한영자전 편찬작업에 참여했다.사전인쇄를 하러 일본으로 건너간 길에 근대화된 일본을 보고 감명받은 선생은 귀국후 개화파들이 모인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친러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는 과정에서 체포돼 조사를 받고 나온 선생은 게일박사의 도움으로 도미,3년뒤인 1901년 귀국했다. 노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에는 대한제국 황실 외교담당부서인 궁내부 예식원 직원으로 임명돼 영어통역 일을 했다. 선생은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조선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등 침략을 본격화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는 신문운영이 필요하다고 판단,고종으로부터 황실판공비인 내탕금을 지원받아 신문사 시설을 마련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일본헌병대의 출판물 검열을 피하기 위해 당시 영국 데일리 뉴스 임시특파원이던 영국인 배설(Earnest Bethell·1872∼1909)을 사장으로 1904년 창간됐다. 이 신문에는 박은식선생을 비롯,신채호·최익·장도빈등이 제작진으로 참여했다.외국인 명의로 발행돼던 이 신문은 일제 통감부의 검열을 피하면서 「일인입불가」를 출입문에 써붙였을 정도로 강한 반일감정을 나타냈다. 국한문혼용인 국내용 신문과 별도로 영문판을 발행한 이 신문은 통감부의 신문지법에 다른 신문들이 얽매여 의병활동을 폭도라고 표현할 당시 의병활동을 높이 평가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의 대변지역할을 수행,1만3천여부의 부수를 자랑했다. 일제는 눈엣가시 같은 이 신문을 폐간하기 위해 우선 사장인 배설을 영국영사재판소에 치안방해죄로 고소,중국 상해로 추방했다.배설은 형을 마친뒤 서울로 돌아와 옥고 후유증으로 숨졌다. 선생은 이런 가운데 안창호선생을 비롯한 이동휘·이동령·노백린·이시영·김구선생등과 함께 신민회를 창립,해외독립기지 건설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신민회본부는 대한매일신문안에 두었으며 지방지국은 연락망으로 활용됐다. 전국 8백여명의 애국세력이 집결한 신민회는 1909년 독립군 창건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위해 선생의 집에서 전국대회를 열었다. 이날 대회는 해외에 독립군기지를 세우고 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을 펼쳐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했다. 선생은 이 계획에 따라 군관학교를 세울 적당한 장소물색을 위해 만주를 답사했으며 1910년 이동령등이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이처럼 신민회의 활동이 뚜렷해지자 일제는 1911년 양기탁보안법위반사건을 꾸며 신민회 중앙간부 16명을 모두 체포,투옥시켰다. 이어 일제총독 암살사건(일명 105인 사건)을 날조해 신민회원 8백명을 전원 체포,선생은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4년만에 석방된 선생은 평남 강남군 쌍용면 신경리에 유배됐다. 선생은 다음해인 1906년 유배지를 탈출해 만주신흥무관학교와 광복회에서 활동중 다시 일제에 체포,국내로 압송돼 전남 거금도에서 2년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유배에서 풀려난 선생은 동양을 순방중인 미국의원단이 서울역에 도착하자 독립만세운동을 펼쳐 또 투옥됐다. 모친 사망으로 일시 방면된 틈을 타 만주로 도피한 선생은 무장항일단체인 의성단을 결성,봉천의 만철병원 습격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24년에는 이청천·김동삼등과 함께 대한군정서·통의부등 만주내 무장항일단체를 통합,정의부를 결성하고 의용군을 국내에 파견해 일제기관을 공격하게 했다. 선생은 또 중국내 한국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도 추진,김규식선생등과 함께 1932년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을 구성했다. 1934년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임된 선생은 국무회의가 자신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자 이를 수락한뒤 한국독립당·대한독립단·의열단·조선혁명당·신한독립당등 여럿으로 갈라진 독립세력을 규합해 민족혁명당을 결성하는등 독립세력의 분열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미국과 중국내 독립세력의 재규합을 추진,남경에서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선생은 이 과정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1938년 68세를 일기로 숨졌다. 정부는 선생에게 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송기원작 「너에게 가마…」/20년만에 첫 장편소설(이작가 이작품)

    ◎밑바닥 인생들의 꿈·좌절 생생히/18세당시 작가체험을 진솔하게 표출/주먹패·장터똘마니의 삶 묘사 돋보여 작가 송기원씨(47)의 첫 장편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 등단 20년만의 때늦은 첫 장편이란 점 말고도 작가의 철저한 자기고백이란 측면에서 이 작품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소설을 쓰기위해 작가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서슴없이 말할 정도로 송씨는 작품속에 자신이 체험했고 또 밝혀야만 했던 밑바닥 삶을 흥건하게 쏟아붓고 있다. 『전남 보성 새재장터의 사생아로 태어난뒤 주변 장돌뱅이들의 부러움을 받으며 광주에서 고교를 다니게 됐습니다.그러나 고향 장터와 도심지 광주와의 생활차이를 견디지 못한채 중퇴,본래 삶의 터전인 새재장터로 복귀해야 했습니다』 도심지의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온 몸으로 문학을 하기위해 이 장터에 뛰어들었다』는 작가는 18세 무렵의 당시 상황을 엮은 이 소설에서 자신이 살았던 삶의 궤적을 그대로 좇는 윤호라는 주인공과 주변의 밑바닥 인생들의 부대낌을 그리면서 그들의 삶속에도 꿈과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을 진솔하게 묘파해 낸 것이다. 서울생활에 실패한채 옥살이끝에 장터로 돌아와 주먹패의 「똘만이」가 된 춘근,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다 도중하차하고 장터에서 「똘만이」들과 어울리는 윤호등 주인공격인 두사람의 의식을 대칭적으로 묘사하면서 거칠고 본능적인 삶의 이면에 숨겨진 훈훈한 인간미를 빠뜨리지 않고 있다. 여기에다 나름대로 사는 방식을 터득한 술집여인 옥희와 춘근,사회주의자의 딸 연희와 윤호,폐병환자 현숙과 약국 종업원으로 그에게 약을 대주다 들켜 죽음을 택한 선봉등 각기 다르지만 당사자들에겐 소중할 수밖에 없는 사랑을 통해 남을 이해한다는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 문학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밝히듯 체험을 중시하는 송씨는 오랜만에 내놓은 이 작품 후기에서 『아직은 문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온몸으로 문학이라는 것을 배웠던,문학의 원형질 시절』로 당시를 회상하고 이 시기가 작가적 운명의 첫 출발점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송씨는 서라벌 예술대에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쌓은뒤 지난 74년 중앙일간지 신춘문예에 시·소설 동시당선이라는 화려한 데뷔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창작활동을 펴지 못했다.유신시대에 이어 80년 봄 거듭된 옥고때문이었다.출감 이후에도 일선작가로서의 길을 잇지않고 문학사 주간으로서 민중문학쪽에만 관여해왔다.지난해 단편 「아름다운 얼굴」로 모처럼 창작 일선에 복귀한후 내놓은 이번 장편은 「문학은 외부를 향해 내부를 열어보이는 것」이라는 그의 문학적 실천과 함께 성숙된 작품에의 진입을 알리는 첫 신호임에 틀림없는것 같다.
  • 한용운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다시 새기는 그 충절)

    ◎3·1운동 주도한 저항시인/불교대표로 참여… 선언문 배포 지휘/출옥후 신간회·비밀결사 만당 결성/「님의 침묵」등 시 3백편·소설 「죽음」「흑풍」 남겨 만해 한용운선생(1879∼1944)은 토지·조세·신분문제등에 대한 불만으로 전국에서 민란의 불길이 일던 봉건왕조말기에 태어났다.선생은 청년시절 날로 기울어가는 국운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동학혁명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24세때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 끝에 출가했다. ○동학혁명에 가담 입산한 지 10년만인 1913년 선생은 자유·평등사상에 기초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부패가 만연한 당시의 불교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선생은 이 유신론에서 번잡한 각종 의식을 없애고 직접 생산에 종사하자는 혁신적 주장을 펼쳤다. 선생은 같은해 10월 친일승들이 모여 한국의 원종과 일본의 조동종을 통합하자 이를 친일매불행위로 규정한 뒤 승광사에서 전국승려궐기대회를 열고 임제종을 창립,큰 호응을 얻어냈다. 선생은 이후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현대적으로 정리,불교대전을 펴냈으며 처음으로 불교잡지 「유심」을 창간,계몽활동에 뛰어들었다.당시 지식인으로 명망이 높던 최린·최남선·현상윤등도 이 잡지발간에 적극참여,암울한 식민무단통치시대에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횃불역할을 했다.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것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추진하면서부터다. 3·1운동에 초기단계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한 선생은 당시 유림과 불교계의 포섭을 맡았다.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한 뒤 독립선언 하루전인 2월28일에는 독립선언문 3천장을 인쇄소인 보성사사장 이종일로부터 넘겨받아 중앙학림 학생들에게 전달,다음날인 3월1일 시내에 배포하도록 했다.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장에 대해서는 선생이 지은 독립선언서를 수정해 삽입했다는 설과 최남선이 작성했다는 설이 나누어 있다. ○옥중에서도 태연 1919년 3월1일 하오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해 독립운동의 서막을 열었다.선생은 이 자리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게 돼 책임이 막중하다』며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변호사를 대지 말고 사식과 보석을 요구하지 않는등 당당한 대응을 하자고 행동강령을 제시했다.민족대표들은 모임이 끝나자마자 일경에 모두 체포됐으며 선생은 옥중에서도 수도승답게 태연한 모습을 지켰다. 선생은 옥중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라는 논설을 통해 『자유·평등·평화는 민족의 자존과 세계평화로 이어지는 대강령이며 이번의 조선독립선언은 국가를 창설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때 치욕을 겪고 있는 고유의 독립국이 다시 복구되는 것임』을 설명했다. 3년여 옥고를 마치고 가출옥한 선생은 청년교육과 훈련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1924년 불교청년회회장으로 취임,대중불교건설에 앞장섰으며 「유심」등 신문잡지를 통해 『청년들에게 역경은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며 『이 땅의 젊은이들은 나라가 없다고 좌절해서는 절대 안된다』고 강조했다. 선생은 1927년 좌우합작 민족유일당운동인 신간회결성에 참가했으나 2년 뒤 이 단체가 광주학생의거 진상보고민중대회를 가지려다강제해산됨에 따라 1930년 청년불교도들이 결성한 비밀항일독립운동단체인 만당의 당수로 취임,와해되기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대학설립 수포로 이와 함께 1926년 이상재·이승훈·조만식선생등 30여명과 조선민립대학설립 기성회를 구성,대학을 세우려 했으나 일제가 이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경성제대를 설립하는 바람에 대학설립은 수포로 돌아갔다. 한국문학사에서 3·1운동세대가 낳은 최대의 저항시인으로 꼽히는 선생은 1926년 발간한 「님의 침묵」에 모두 3백여편의 시를 실었다.또 소설로는 「죽음」「흑풍」「철혈미인」「박명」등을 남겼다. 선생이 시와 소설에서 쓴 「님」은 일제치하에서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55세인 1933년 재혼한 선생은 방응모등의 후원으로 성북동에 심오장이란 택호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서 지냈다.집을 지을 때 사람들이 남향으로 터를 잡을 것을 권했으나 마주보이는 총독부건물이 보기 싫다고 끝내 북향으로 집을 틀어버리고 말았다. ○변절자 면담거부 선생은 뜻을 끝까지 같이 한 동지에 대해서는 깊은 의리를 간직했으나 변절자에게는 단호히 단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만주에서 대한통의부총장을 역임한 김동삼선생이 일경에 체포돼 마포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시고 5일장을 치르며 눈물을 아끼지 않았으나 3·1운동당시 동지이던 최린이 변절,창씨개명을 하고 믿아오자 끝내 만나지 않았다. 일제치하에서 조선 전국이 감옥이라고 여긴 선생은 추운 겨울에도 심우장 냉방에서 꼿꼿이 앉아 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민족이 배출한 위대한 시인이자 독립투사이며 여성해방론자이기도 한 선생은 44년6월 입적,망우리묘지에 안장됐다. 근대사의 여명기에 태어나 선각자적 삶을 통해 민족정신의 새벽을 연 선생에게 정부는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시인 김남주씨 별세

    시인 김남주씨(48)가 13일 상오2시45분 서울 광화문 고려병원에서 지병인 췌장암으로 숨졌다. 「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사상의 거처」등의 시집을 남긴 고금시인은 지난 79년10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사건으로 투옥돼 9년3개월 옥고를 치렀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직등을 맡아왔다. 장례식은 「민족시인 고금남주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다.발인은 16일 상오8시 고려병원영안실에서 거행되며 장지는 광주망월동 5·18묘역으로 결정됐다.연락처 313­1486(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
  • “시인이라기보다 전사” 자처/타계한 김남주시인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두차례 옥고 김남주시인은 48년 한평생을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 10년 가깝게 영어의 생활을 했다.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72년 전남대 영문과 학생이던 김시인은 전국 최초로 반유신투쟁 지하신문인 「함성」과 「고발」지를 제작,배포한 혐의로 8개월동안 투옥됐다. 그후 고향인 해남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농민문제와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기울이던 김시인은 79년 10월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사건으로 또 다시 투옥됐으며 88년형집행정지로 풀려날 때까지 9년3개월동안 교도소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시인이라기보다,글장이라기보다,군사독재와 미국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기를 갈구하는 해방전의 전사」라고 자처하며 아무런 문학적 여과 장치없이 섬뜩한 저항의 언어들을 노출시켜 왔다.또한 시의 밑바탕에는 농부,어부,석공,직공등 민중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어 큰 울림을 주었다. 89년 결혼한 부인 박광숙 여사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5)의 이름도 월,화,수,목요일은 열심히 일하되 금,토,일 3일은 쉬면서 즐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뜻에서 김토일로 지었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된지 3년만인 지난해말 췌장암이라는 불치의 병을 선고받고 병석에 누워서도 투옥 당시에 나온 「나의 칼,나의 피」와 「조국은 하나다」등의 표현이나 구성을 고쳐 다시 출간하고 최근의 담담한 심정과 일상생활에서 얻은 감정들을 시로 발표하는등 시인으로서 자신을 새롭게 추스리다가 때이른 죽음을 맞게된 것이다.
  • 임병찬(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미완의 의병조직 독립의군부 이끌어/12년 고종밀서 받고 대규모 전쟁준비/착수 2년만에 일경에 발각… 수포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돈헌 임병찬선생은 경술국치 이후 독립을 되믿기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조직돼야 한다는 생각에서 무장세력인 「독립의군부」의 결성을 추진하다 일제에 붙잡혀 유배중 숨진 애국선열이다. 선생은 44세때인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선비로서 지냈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일제 불량배들에게 시해되는 치욕스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복수하기 위해 66세를 일기로 숨질 때까지 의병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선생은 1851년 2월 전북 옥구군 서면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세살때에 천자문을 읽을 만큼 총명을 타고난 선생은 15세때 전주부 감시에 장원으로 합격,관직에 나섰으며 38세때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의 직첩을 받았다. 다음해 낙안군수에 임명됐으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힘을 쏟기로 하고 곧 관직을 청산,귀향해 회문산 북쪽 종성리에 거처를 마련했다. 그러나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일제를 물리치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일제를 물리칠 준비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집안의 남녀종복을 풀어주는등 가산을 정리한 선생은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기 1년전인 1904년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각지에 통문을 보냈으나 정부 대신들이 『시기가 이르다』고 만류하자 거사를 일단 중단하기도 했다. 1906년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고는 즉시 의기투합,서로 사제의 의를 맺고 본격적인 의병활동을 시작했다. 경기 포천에 살고 있던 면암은 같은해 정월무렵 영호남 사람들과 함께 일어설 것을 도모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문인들이 『호남의 한 선비가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하자 선생을 믿아왔던 것이다. 선생은 이에 따라 그해 6월4일 의병 80여명을 모아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에서 창의의 기치를 높게 들고 일어났다. 이 의병들은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날로 태인지방을 휩쓸어 군기와 군량을 확보한데 이어 정읍·순창을 차례로 격파,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쳤다. 거사 5일만인 6월8일에는 순창에서 마주친왜군을 단숨에 물리쳐 곡성을 점령하는등 기염을 토했으며 의병수도 9백여명으로 처음보다 10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나 면암과 선생은 6월12일 전주와 남원 진위대군사가 반격작전에 돌입하자 동포간의 살상을 피하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조직한 의병부대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전주진위대는 해산과정의 의병들을 공격,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했으며 선생과 면암등 13명이 전주진위대를 거쳐 일본군사령부에 잡혀가 7월9일 대마도 위수영에 감금됐다. 그뒤 면암이 옥중단식으로 순국하자 선생은 1907년 첫 유배에서 풀려나 귀국했다. 귀국한 이후에도 불매동맹·국채보상운동등을 전개하다가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12년 9월에는 독립의군부 전라북도 순무대장으로 임명됐다.선생이 순무대장으로 지명된 것은 1906년의 의병활동 때문이었다. 선생은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 수차례에 걸쳐 이 책임을 면해달라는 내용의 상소를 광무황제에게 올려보냈으나 황제는 다시 밀소를 내려보내 그를 신임했다. 선생은 1914년2월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했다.독립의군부의 활동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주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독립의군부의 이같은 계획은 그해 5월 일경에게 발각돼 실패로 돌아갔다. 이어 일경이 6월3일 총사령인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키자 선생은 자결을 결심하고 칼로 목을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12일 금고 1년을 선고받은뒤 거문도에 다시 유배됐다.선생은 2년뒤인 1916년 5월 유배지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 유신이후 재야 민주·통일운동 주도/타계한 문익환목사 생애

    ◎89년엔 돌연 밀입북… 6차례 옥고도 재야권 통일운동의 상징이었던 문익환목사.문민정부 출범이후 새로운 통일운동체를 구상해온 그는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18일 76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미국 프린스턴신대 출신으로 한신대와 연세대에서 구약성서를 강의한 신학자이지만 그보다는 재야운동권의 기수로 더 널리 알려졌다.지난 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투옥된뒤 지금까지 17년동안 6차례에 걸쳐 모두 11년3개월을 교도소에서 지냈기 때문이다.지난 89년 밀입북사건으로 징역7년을 선고받은 바 있는 그는 93년3월 정부의 대사면 조치로 3년3개월만에 풀려났다. 최근에는 재야의 최대 변신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에 진력하면서 요가로 심신을 단련해온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면서 통일은 준비없이 맞아서는 안된다는 소신을 가지고 정부의 전향적 통일정책에 기대를 거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가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시대에 민주화투쟁의 선봉에 나섰던 동기는 절친한 친구 장준하선생의 돌연한 죽음을 보고서부터다.유신이후 재야민주화운동 세력의 핵심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84년3월이후에는 재야조직을 통합한 민통련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특히 89년 밀입국사건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다. 분단 50년을 넘기지 않고 95년까지 통일을 보아야겠다는 그는 결국 옥중생활의 여파와 고령을 이기지 못하고 소천했다.옥중서간 「꿈이 오는 새벽녘」등으로 문명도 날린 그는 19 18년 만주 북간도에서 문재인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동생 문동환목사 역시 재야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이날 통일운동을 위해 자신이 직접 운영하던 서울 종로구 낙원동 소재 「통일맞이」사무실 부근에서 점심식사를 한후 체증이 생겨 평소보다 일찍 귀가해 집안에서 휴식을 취하던중 갑자기 졸도,병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그러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임종은 부인 박여사와 장남 호근씨 등이 지켜봤다.문목사의 시신을 검안한 한일병원 당직의는 문목사가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한편 빈소가 마련된 쌍문동 한일병원에는 백기완·임수경씨등 재야인사와 이해찬 민주당의원등 정치인·대학생들의 분향행렬이 밤늦도록 줄을 이었다.
  • TV/상업/광고/비전문모델 대거 등장

    ◎기업체 임직원·주부 등 출연 “신선한 감흥”/포맷·영상·카피 등 차별화로 인기/「이미지 시대」에 적합… 새얼굴 증가 너무 낯익어 식상함만 더하는 유명연예인들의 TV상업광고.최근들어 그 천편일률성을 밀어내고 참신한 얼굴들이 CF모델로 대거 등장,방송광고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기업체 임직원이나 실제 소비자등 비전문모델들이 TV광고의 유력한 모델군을 형성,광고계에 신풍속도를 그려가고 있는것.이들은 전문모델에 비해 연기력은 뒤지지만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감흥을 줌으로써 기업이미지 제고나 판매전략면에서 한층 폭넓은 소구력을 확보하고 있다. 기업체 임직원이 출연한 광고가운데 선두격으로 눈길을 끈 것은 (주)대우전자의 「탱크주의」광고.배순훈 사장이 직접 모델로 출연,「증언식 광고」붐을 몰고온 이 CF는 최근 주부·직장인들이 선호하는 광고베스트 3위에 드는등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화제작.이 광고촬영 당시 배사장은 모두 30여차례나 NG를 내는등 실수를 연발했지만 스스로 재촬영을 요구할 정도로 「프로기질」을발휘했다는 후문이다.또 럭키금성의 기업광고 「결재」편에는 자사 화재해상보험 이휘영사장이 출연,「고객을 위한 가치창조」라는 기업이미지 높이기에 한몫 하고있다.이와함께 상무·과장·대리등 임직원들이 총동원돼 만든 제일제당의 「컨디션」,최수부회장이 직접 출연한 광동제약의 「경옥고」드링크,최근 쌍용제지의 광고모델로 나선 김선정씨(김우중 대우그룹회장 맏딸)의 「스카티」화장지 광고등도 전문모델의 CF를 능가하는 생동감넘치는 광고로 꼽힌다.이밖에 지난해 2월에는 신정당 박찬종대표가 「다우」우유광고에 CF사상 정치인으로는 첫 출연,일반의 꾸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편 이같은 비전문모델의 광고가 꾸준한 강세를 보이는 것은 인기연예인등 소위 「빅모델」이 출연하는 광고에 비해 포맷이나 영상,카피등에서 차별화를 두어 소비자들의 신뢰감과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아울러 일부 인기스타들의 광고독점및 겹치기출연 심화도 이같은 탈빅모델 추세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지적이다.특히 편당 평균 1억원대의 모델료를 받고있는 것으로 알려진 최진실을 비롯,「93MBC방송대상」을 수상한 김희애등 톱모델들의 경우,통상 4∼5편의 광고에 중복출연하고 있는 일도 다반사여서 광고모델계의 빈익빈 부익부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 이와 관련,광고대행사인 K사의 한 간부는 『광고전문모델란속에 몇몇 인기스타들이 광고를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CF모델에 의한 광고효과성의 문제는 더욱 모호해지고 있다』고 전제,『광고실무자들이 유명연예인의 인기를 등에 업은 한탕주의식 발상에서 벗어나 장기적이고 참신한 광고기획에 바탕한 모델기용 풍토를 정착시켜나가야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요컨대 건전한 광고모델문화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기존의 안일한 빅모델의존 관행에서 탈피,소비자의 욕구를 한발앞서 파악해 「이미지 시대」에 걸맞는 보다 창조적이고 과학적인 광고전략을 수립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하겠다.
  • 육사 이원록(다시 새기는 그 충절/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하 17차례 옥고치른 저항시인/의열단 가입,조선은행 폭탄투척 등 주동/32세에 첫시 발표… 민족의식 고취 앞장/첫 수감번호 64를 호로… 40세 옥사 「어데다 무릎을 꾸려야 하나.한발 재겨 디딜 곳 조차 없다」(절정에서) 육사 이원록선생은 절정·광야등 저항시를 통해 민족혼을 일깨운 민족시인이자 항일독립운동가이다. 최초 일제에 체포됐을 당시 수감번호 64의 음을 따 아호를 지음으로써 나라 잃은 슬픔을 가슴에 간직한채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일생을 바쳤다. 육사는 1904년4월4일 5형제중 2남으로 태어나 41세인 1944년1월16일 북경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무려 17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진성 이씨로 퇴계 이황선생의 14대손인 육사는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촌리 881에서 아버지 이가호씨와 어머니 허길씨 사이에서 태어나 어려서는 한학을 배웠다. 그는 1921년 18세때 경북 영천의 안일양씨와 결혼,영천의 백학서원에서 공부하다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2년뒤 일본으로 건너 갔으며 도쿄 소재 대학에 다니다 중퇴하고 1925년 귀국했다. 선생은 이어 형 원기,동생 원유씨와 함께 항일 무장투쟁 결사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의열단은 1927년10월 조선은행 대구지점장 앞으로 벌꿀을 위장한 폭탄 상자를 보내 일경 5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사건을 일으켰다. 선생은 이 사건 발생 직후 형제와 함께 일경에 주동자로 지목돼 체포돼 쇠꼬챙이로 지지기,대꼬챙이로 손가락 사이 훑기,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춧가루 붓기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겪은 뒤 대구지방법원에 기소됐으며 수감번호는 64였다. 2년4개월 동안 옥살이를 한 선생은 출옥후 의열단원 윤세주씨가 운영하고 있던 중외일보 기자로 일하며 청년지도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중 1929년11월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또 다시 예비검속되는 등 고초를 겪었으며 1931년1월21일 동생과 대구경찰서에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는 대구에서 반제 배일 격문이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었으며 선생은 격문 작성자 또는 비밀결사 혐의를 받은 것이다. 선생은 3개월만에 출소하자 중국 북경으로 탈출,심양에서 김두봉의열단장을 만나 독립운동 방법을 논의하고 귀국했다. 육사는 1932년6월 북경으로 가 중국의 대문호 노신과 교유,나중에 노신의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선생은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항일운동에 뛰어 들기로 하고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에 입학했다. 이 훈련반은 김두봉단장이 황포군관학교 재학 당시 장개석총통에게 부탁해 한국청년의 군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남경에 설립된 군관학교이다. 선생은 이 학교 정치조에 소속돼 6개월 동안 비밀통신·선전방법·폭동공작·폭파방법등 게릴라훈련을 받고 1933년5월15일 귀국했다. 선생은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국내 민족의식 환기,혁명사상 조성과 국내정세 파악등의 비밀 임무를 띠고 상해·안동·신의주를 거쳐 입국한 것이다. 선생은 이 임무를 비밀리에 수행하던중 1934년5월22일 서울에서 경기경찰에 피체돼 한달만에 기소유예조치로 석방됐으나 이미 건강이 매우 상한 상황이었다. 선생은 그래서 당시 진로를 놓고 크게 인간적 고뇌와 갈등에 휩싸이게 됐다. 과연 의열단밀명을 계속 수행할 것인가 아니면 광복을 위한 투쟁대열에서 벗어나 은둔할 것인가. 선생은 결국 직접적인 무장투쟁은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글과 시를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쳐 주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북돋는다는 새로운 항일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이같이 결정한 선생은 바로 북경으로 가 문인으로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 이후 선생은 정치·사회분야에서 폭넓은 작품활동을 전개,1935년 개벽지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중국 청방비사 소고」등을 발표했다. 다음해인 36년에는 처음으로 「한개의 별을 노래하자」는 시를 발표,시인으로 등장했다. 또 해조사·노정기·질투의 반군성·무희의 봄을 믿아서등 산문을 내기도 했으며 꾸준히 평론과 수필을 발표했다. 이어 1939년에는 절정·남한산성·청포도등 주옥같은 시를 썼으며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시나리오 문학의 특징등의 영화 예술부문의 평론을 문장 냉광등 잡지에 선보였다. 1941년 선생은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으나 파초·독백·자야곡등의 시를 지었으며 연인기·산사기·중국현대시의 일단면등 수필도 짬짬이 썼다. 1942년에는 사실상 유고인 광야를 발표했다. 그러던 선생은 귀국한지 두달만인 1943년7월 갑자기 서울동대문경찰서에 연행돼 북경으로 이송됐다. 그가 무슨 영문으로 체포됐는지 조차 몰랐던 가족들은 돌연 1944년1월6일 「북경감옥에서 사망했으니 유해를 찾아가라」는 통보를 받고 깜짝놀라 북경으로 달려갔다. 북경주재 일제영사관은 선생의 유해를 화장하고 남은 유골을 담은 조그만 상자를 내줄 뿐이었다. 선생은 병마와 싸우며 죽는 순간까지도 많은 작품을 써내 이 민족에게 빛을 던져준 민족시인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83년 문화훈장 금관장을 추서했다.
  • 김도현 문화체육부차관(신임 차관급 프로필)

    ◎6·3세대의 주역… 분석력 돋보여 지난 65년 한일회담 반대시위의 선두에 섰던 「6·3세대」의 주역.현승일국민대총장·김중태씨등과 함께 6개월동안 옥고를 치렀다.이후에도 75년 서울대 민족주의연구회사건으로 1년10개월 동안 투옥됐었다.일찍 정치에 입문해 81년 무소속,85년 민한당,92년 민자당후보로 나섰었다.분석력이 뛰어나고 논리적 사고가 돋보인다.매사에 적극적이며 친화력도 강하다.부인 정명옥씨(44)와 2남. 등록재산 4천1백34만원. ▲경북 안동(50) ▲서울대 정치학과 ▲영남일보 논설위원 ▲민자당 성동을지구당위원장 ▲평통 사무차장
  • 서청원 정무1(신임각료 면모)

    ◎야당때 통일민주당 대변인 맡아 빠른 두뇌회전과 끈기가 돋보이는 사회부기자 출신. 중앙대 총학생회장때 6·3시위에 가담,옥고를 치르기도 한 외유내강형. 야당시절 민추협기관지 주간과 통일민주당 대변인 등을 맡아 순발력을 떨친 3선의원.3당합당 이전 통일민주당 때부터 김영삼총재비서실장으로 해외순방에 빠짐없이 수행하며 국제감각도 넓혔다.순발력과 추진력이 좋고 특히 대인관계가 무난하다는 평.3당합당뒤 대권파동때는 「탈당위협」을 하면서 YS의 전위역할을 하기도.부인 이선화씨(49)와의 사이에 1남1녀.등록재산 2억6천9백63만원.
  • “사회개혁위해 다시 뛰겠다”/내무 지휘봉 잡은 최형우장관의 새다짐

    ◎「YS의 오른팔」 별명,30여년간 동고동락/자년 입시파동에 좌절… 8개월만에 복귀 최형우의원이 「YS(김영삼대통령의 애칭)의 오른팔」로 돌아왔다. 의지와 뚝심으로 30여년 「김영삼대통령만들기」에 온몸을 바친 그가 21일 단행된 개각에서 내무행정의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함께 집권 민자당의 사무총장으로 개혁을 앞장서 주도하다가 아들의 부정입학문제에 휘말려 좌절을 맛본 지 8개월만이다.그는 사무총장 퇴임직후 스스로를 「실세」라고 했으나 이제는 다시 엄연한 「실세」로 돌아왔다. 최신임내무부장관은 이날 『김대통령이 제2의 건국을 위해 개각을 단행했다는 취지에 부응해 다시 뛰어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그러면서도 구체적인 포부는 『내무행정이 워낙 방대한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업무를 파악한 뒤 밝히겠다』고 했다. ○투옥 등 고난의 세월 최장관이 22살 새파란 청년에서 백발의 중년이 되기까지 겪은 「YS와의 동고동락」은 고난의 세월이었다. 그는 지난 2월25일 김대통령 취임식석상에서 울음을 터뜨리고말았다.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숱한 투옥과 협박을 이겨낸 끝에 평생소원을 풀었기 때문이다.『이제는 내 할일이 끝났다라고 생각하니 감격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정치생활은 지난 59년부터 시작된다.동국대 정외과 3년생이던 청년 최형우는 농촌봉사활동을 하다가 3·15부정선거현장을 보게 됐다.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민주당에 입당했다.온갖 탄압을 견뎌내며 조병옥박사의 대선운동에 나섰지만 실패로 끝났다. ○71년 총선서 금배지 5·16으로 쫓기는 몸이 되기도 했던 그가 YS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공화당의 3선개헌 때.이를 반대하던 청년조직의 사무장을 맡으면서 이 조직의 실질적인 후원자이던 YS가 됨됨이를 높이 사 중용하게 됐다.이기택현민주당대표와 서석재전의원과 함께였다.그리고 71년 총선에서 울주지역에 출마,금배지를 달게 됐다. 그는 그동안 모두 일곱번의 옥고를 겪었다.부인 원영일씨는 그 때를 돌이켜 『언젠가 고문을 당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피투성이가 된 채 옷과 살갗이 피로 엉겨붙어 알코올로 몇시간을 불린 뒤에 옷을 벗겨낼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큰딸 가출때 슬펐다 최장관은 일생에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일이 세번 있었다고 말한다.그 첫번째가 지난번 부정입학사건에 연루된 둘째아들의 백일 때다.기관에 감금돼 온갖 고문을 당하고 있는데 홍역에 걸려 불덩이같은 아기를 버려둔 채 부인 원씨마저 연행해가려 했다.『왜 정치를 하게 됐나』하며 처음으로 정치생활을 후회했다고 한다.또 한번은 80년이후 엉뚱하게 부정축재자로 몰리는 바람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쓸 때였다.마지막은 사무총장직을 물러난 뒤 큰딸(29)이 가출해버렸을 때다.아버지를 유난히 따르던 딸이 『이런 대접받으려고 그 고생을 해왔느냐』며 울음섞인 항의를 해오자 그냥 말을 잊었다.그 딸은 얼마전 집으로 되돌아왔다. 이 모든 어려움도 부인 원씨의 눈물겨운 내조가 있었기에 극복이 가능했다.최장관은 『상도동시절 3평짜리 분식집을 차린 아내가 돈벌러 나가면 나는 연탄을 갈아야 했다』고 회상하며 아내의 내조를 더없이 고마워했다.
  • 오동진선생(이달의 독립운동가/다시 새기는 그 충절)

    ◎만주 15개독립단체 규합… 대일 항전/정의부 결성 주도… 독립운동 구심체로/미의원단 내한에 맞춰 일인요인 암살/체포된뒤 재판거부 33일간 단식… 44년 옥에서 숨져 1889년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 659에서 출생한 오동진선생은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16일 고향인 광평면 시위에 참가,맹렬한 활동을 전개한 뒤 일경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3월18일 중국 관전현 안자구로 망명했다. ○평북 의주서 출생 선생은 이곳에서 윤하진 장덕진 박태렬등을 규합,비밀결사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했으며 의용대를 편성 해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같은해 5월 중국 안동(현 단동시)에 있는 이륭양행 2층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기관을 설치하고 안동교통사무국을 두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관할했다. 1919년 12월 선생은 대한의용군사의회·한족회·기원독립단·민국독립단·대한청년단연합회등을 통합,서북간도지방의 교민 통치기관으로 임시정부 내무부 직속의 광복군 참리부와 군무부 직속의 군사기관으로 광복군사령부를 조직했으며 각 지방에는 군영을 두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20년 6월6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이 탁을 중심으로 조선의 실질적 군대로 광복군총영이 조직돼 사령관에 조맹선,참모부장에 이 탁,경리부장에 조병준이 임명되고 선생은 총영장이 되었다.일제의 끊임없는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장총 2백40여정과 많은 탄약을 이륭양행을 통해 입수하고 항쟁준비를 위한 무장을 강화하고 있을 때 미국의회 동양시찰단인 모리스의원 등 상원의원 일행과 가족 70여명이 1920년 8월14일 서울에 입경 예정이라는 정보를 얻게 된다.광복군 총영에서는 이 호기를 이용,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여론에 호소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국내 일제 중요기관을 파괴하며 침략원흉과 일제관리등을 처단하기로 했다.1920년 7월 결사대원을 엄선,평양·신의주·선천·서울로 보내 미 의원단 일행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일제관청을 파괴하고 일제요인들을 암살하는 등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이 제안하는 동삼성내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적극 찬성하고 양기탁김동삼 현정경 이상용 이 탁등과 광복군총영·서로군정서·한교민단·광복단·독립단·대한청년연합회를 통합,통군부를 조직했으며 2개월후에는 다시 대한통의부로 확대 발족시켰다. ○7백여 병력 편성 이후 군사위원장이 된 선생은 이듬해 6월 신팔균사령장이 전사함에 따라 사령장을 겸직하고 소속 독립군을 총지휘,항일전을 전개한다. 1925년 1월25일경 선생은 통의부의 고문인 양기탁등과 통의부를 중심으로 길림주민회·의성단·대한독립단·광정단·노동친목회·변론자치회·고본계·대한독립군단·학우회등 지방자치단체를 총망라,통일회의를 개최하고 정의부를 조직했다.통의부와 마찬가지로 입법·행정·사법기관을 두었으며 중앙집행위원장밑에 내무·군사·학무·생계·재무·외무등 6부를 두었다.군사부에는 정의부의용군을 두고 군사위원장에 이청천(후임으로 선생이 취임),사령장에 선생이 겸무했으며 8개중대에 무장한 7백여명의 병력이 각종 군사활동을 전개,적지않은 전과를 올렸다. 1926년 3월3일 길림성내 양기탁의 집에서 각계 인사들이 연석회의를 열고 고려혁명당을 조직,좌우익이 합작으로 새롭게 통일된 독립운동을 추진하개 된다.당원수는 1천5백여명에 이르렀으며 선생은 정의부 군사위원장으로 총사령을 겸임했다. 이무렵 선생과 가까웠던 옛 동지 김종원이 선생에게 『삼성금광주인 최창학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하자 1926년 12월16일 장춘시내 구시가지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잠복중인 일경에게 잡혔다. 선생은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고 1929년 11월11일부터 33일동안 단식을 하기도 했다.1932년 3월5일 강제로 재판정에 서게 된 선생은 광기가 발작했다는 이유로 퇴장당한채 검사로부터 무기징역을 구형받았으며 3월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도 같은 형이 선고됐다. ○18년간 옥고치러 공소를 제기한 선생은 그해 6월 평양에서 1심과 똑 같은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더이상 일인의 재판이 필요없음을 깨닫고 상고를 포기했다.7월 장기수를 수용하던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선생은 1934년 6월11일부터 48일간의 제2차 단식을 벌인다. 7년간의 형무소생활로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 진선생이 2차 단식에 들어가자 모두들 선생의 정신력에 경이로움을 표시했으며 일본인 형무소장조차 선생과 면담을 할 때에는 경례하고 예를 갖추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인 의사가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이는 바람에 선생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되는 공주형무소로 이감돼 그해 5월20일경 옥중에서 순국한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 이종율 국회사무총장/신문기자 출신… 10·12대의원 역임(얼굴)

    서울대 재학중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투쟁의 주역이었으며 문리대 민비연의 초대회장으로 한때 옥고.잠시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미국 예일대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민자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처음부터 YS편에 가담하는 등 정치감각이 탁월하다는 평. 다변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지만 일에 매달리면 끝을 보고야마는 소신·집념파.10대 유정회,12대 민정당 전국구로 원내에 진출.그러나 13,14대때 서울 서초갑에서 박찬종의원에게 내리 패배.독신으로 88년 사별한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만 하나를 두고 있다.취미는 바둑과 장기.
  • “한미 정치외교 불협화 없을 것”/레이니 주한미대사 부임…정부시각

    ◎김 대통령과도 교분 두터운 친한파/통상관계에는 「미묘한 기류」 전망도 21일 부임한 제임스 레이니 주한미대사는 15대 주한대사로 지난 77년부터 지금까지 에모리대학 총장을 지냈다.예일대학 출신이며,이곳에서 신학박사학위까지 받았다.49년 결혼한 부인 베르타 존 레드포드여사와의 사이에 2남3녀를 두고있다.저서로는 「책임에 관해」등 다수가 있다.이것이 겉으로 드러난 그의 전부이다. 그러나 그는 국내에 지인이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김영삼대통령을 비롯,김대중전민주당대표와도 친하다.정부부처에도 그와 알고 지내는 인사들이 많다.특히 한완상부총리겸 통일원장관과는 20년간 우정을 나눠온 지기로 알려져있다.한부총리와의 인연은 지난 70년초 한부총리가 서울대교수로 비판적인 지식인 활동을 하던 때.당시 레이니대사는 59년 감리교 선교사로 입국,64년대 초까지 한국에서의 연세대교수,선교사활동을 마치고 한국과 미국을 오가던 시절이었다.레이니대사는 이때 한국의 정치상황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미 CIA(중앙정보국)에도 한때 관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특히 인권과 민주화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는 게 주위의 설명이다. 자연스레 민권운동을 벌였던 한부총리와 알게됐고,그후 한부총리가 옥고와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그를 꾸준히 도와왔다.한부총리가 이때 맡고있었던 것은 기독자교수협의회 총무였다.그뒤 한부총리와 레이니대사는 가족들까지 친하게 지내는 사이로 발전했고,심지어 한부총리 자녀의 교육을 맡기도 했다.이러한 과정에서 김대통령과 김전민주당대표와 교분을 맺었다. 이외에도 교계·학계에 많은 지인을 갖고있다.그래서 역대 어느 대사보다 한국을 잘 알 것이라는 얘기가 벌써부터 정부부처내에 나돌고있다.통일원·외무부 관계자들은 과거처럼 정치·외교 분야에서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다만 미국의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경제분야의 불협화음은 있지 않겠느냐고 전망한다.그는 이날 공항에서의 도착성명을 우리말로 발표했다.긴 여정인데도 밝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 흑백갈등 해소… 화해의 길 열어/노벨평화상 남아공 2인의 업적

    ◎27년간 옥고… 흑인 인권위한 한평생/만델라/백인 반발 딛고 총선·권력공유 도출/클레르크 올해 노벨평화상은 흑인과 백인이 공동수상자로 결정됨으로써 강한 상징성과 함께 다소 극적인 성격마저 띠고 있다. 영예의 주인공은 남아공의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상호협력해온 남아공 흑인인권운동가인 넬슨 만델라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장(75)과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대통령(57). 한쪽은 양심수로서 27년이란 세계 최장의 수감기록을 갖고 있고 또다른 한쪽은 그같은 현실이 지배해온 남아공의 대통령이다. 그러나 이들은 남아공의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를 폐기하고 내년 4월 이 나라 최초로 전인종이 참여하는 자유선거를 실시키로 합의,세계적인 뉴스 메이커로 떠오르면서 남아공 세번째 평화상수상자가 됐다. 6백만 백인이 3천만의 흑인위에 군림하면서 매년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온 남아공의 왜곡된 정치구조는 두사람 모두에게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그리고 방법은 다르지만 만델라의 끈질긴 투쟁과 클레르크의 용단이 조화를 이뤄 마침내 오늘의 영예를 안게 된 것이다.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은 클레르크 대통령이 92년3월 극우 백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종차별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국민투표를 실시,68.7%의 찬성을 얻어내면서 극적인 전기를 맞게 됐다. 이에 화답하듯 만델라는 곧 흑백권력공유안을 발했고 클레르크는 다시 내년 4월의 총선실시를 발표,흑백 화해의 확고한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업적이 아직 미완의 단계에 있다는 점 때문에 노벨상위원회가 이들을 수상자로 결정하는데 많은 고심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만델라도 수상자발표 직전 『우리에게 상이 주어진다면 이는 남아공 사태해결에 자극제가 될 것』이라고 말해 자신들의 업적이 아직 완성단계에 있지 못함을 시인했다. 수상에 대해 강한 욕망을 드러내온 만델라는 또 6백70만 크로나(84만5천달러)의 상금 처분권을 ANC가 가질 것이라고 말해 수상의지가 개인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도 했다. 1백20여 후보가 경합한 이번 평화상이 이들에게 돌아감으로써 노벨상위원회는 결국 근년의 선정기준을 그대로 답습한 셈이 됐다. 결과적으로 이번 평화상에는 이들의 노력에 대한 격려와 함께 오늘날 세계각지에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민족주의를 경계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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