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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산로 예약제 도입”/嚴大羽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인터뷰

    ◎‘자연 그대로’ 환경지키기에 최선/인력교류 등 對北사업 계속 추진 “생태계의 보고(寶庫)인 국립공원은 어떤 일이 있어도 보호돼야 합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嚴大羽 이사장(51)은 “등산로 예약제등을 통해 국립공원을 지키겠다”고 환경보전을 위한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공원훼손 공사 등 취소 嚴이사장은 “국립공원은 면적이 전 국토의 3.9%에 불과하지만 동·식물종류는 75%나 된다”고 국립공원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앞으로 사전에 예약하지 않은 등산객은 2부능선 이상 오를 수 없도록 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嚴이사장은 “지금까지 공단 운영이 입장객 유치 위주로 흘러 공원이 많이 훼손됐다”면서 “공원을 되살리기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실시중인 국립공원 입구의 도로 개설 등을 중단시키고,치악산 등 36곳은 허가를 취소시켰다”고 밝혔다. ○야생동물서식지 지정 그는 “지난 7월부터 지리산 뱀사골과 북한산 송추계곡에서 계곡휴식년제를 실시하고,공원마다 야생동물 서식처를 지정해 노루 멧돼지 오소리 산천어 등을 풀어놓고 있다”고 밝혔다. 또 “그 결과 뱀사골 주민들이 산 위에 있는 집수정을 이용하지 않고 계곡물을 식수로 이용할 정도가 됐을 뿐 아니라,계곡휴식년제에 준하는 관리를 하고 있는 서울 구기동과 정릉계곡도 주민들이 마음놓고 마실 수 있는 물로 회복됐다”고 말했다. 뱀사골은 여름이면 사람들이 발에 밟힐 정도로 많아 야영객을 ‘대인지뢰’라고 부르고 주민들이 뱀사골이 아닌 ‘똥사골’이라 부를 만큼 오염이 심했었지만 이제는 눈에 띄게 깨끗해졌다는 것. 嚴이사장은 “이제는 뱀사골은 물론 공원내 220개 계곡이 거의 살아났다”고 말했다. ○계곡휴식년제 큰 효과 嚴이사장은 얼마 전 폭우가 쏟아졌을 때 공단측이 야영객들을 제때 대피시키지 않아 인명피해가 컸다는 지적에 대해 “계곡휴식년제를 실시해 입산을 막은 탓에 5,000∼6,000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장사를 망쳤다’며 거세게 항의하던 주민들도 ‘계곡휴식년제 덕분에 살았다’면서 오히려 고마워하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嚴이사장은 북한과의 교류·협력과 관련,“북한 금강산,송악산의 솔잎혹파리 방제는 산림청 소관인데다 통일부에서 보류를 요청해와 손을 뗐다”면서 “신포 경수로 원전 건설처럼 교류의 폭을 획기적으로 넓힐 수 있는 사업이 무산돼 참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력 교류,공동 모니터링,공원기반시설 지원 등 북한과 교환한 의향서에 합의된 사업은 계속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6개월간 옥고 치르기도 嚴이사장은 국민회의 당료출신으로 취임 전 사무부총장을 지냈다. 그러나 82년 군산환경운동연합 초대의장,90년 환경정보연구소 소장을 지내는 등 오래전부터 환경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89년에는 대규모 화학공장이 군산에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다 구속돼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 “국회운영 잘해 봅시다”/상임위·특위위원장 프로필

    15대 국회 하반기 원구성이 17일 마무리됐다.지난 5월 말 상반기 국회가 끝난 뒤 세달 가까이 공전을 거듭하다가 정상화된 것이다.여야는 16개 상임위를 반반씩 나눠 가졌다.정당별로는 국민회의 5(1개는 국민신당에 할애),자민련 3,한나라당 8로 배분했다.각 당은 상반기 국회 때 당직·국회직·각료를 맡지 않은 의원을 중심으로 ‘다선(多選)원칙’에 따라 인물을 골랐다.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선출된 상임위원장과 특위위원장의 면면을 소개한다. □상임위·특위위원장 명단 ●한화갑 운영·59·국민회의 ­전남 신안,서울대 외교학과,김대중 선생 비서·특보,13∼15대 의원 ●목요상 법사·63·한나라당 ­경기 동두천,서울 법대,통일민주당 인권옹호 위원장,11·12·15대 의원 ●김중위 정무·59·한나라당 ­서울,고대 정경대,민정당 대변인,환경부장관,국회예결위원장,12∼15대 의원 ●김동욱 재정경제·60·한나라당 ­경남 충무,연대 정외과,한국관광공사 이사장,10·12·15대 의원 ●유흥수 통일외교통상·61·한나라당 ­부산,서울 법대,치안본부장,충남도지사,12·14·15대 의원 ●이원범 행정자치·59·자민련 ­대전,동국대 정법대,6·3동지회장,자민련 수석부총무,11·15대 의원 ●한영수 국방·64·자민련 ­충남 태안,고대 정외과,신민당 대변인,자민련 부총재,9·10·11·14·15대 의원 ●함종한 교육·54·한나라당 ­강원 원주,서울대,상지대 교수,강원도 지사,12·13·15대 의원 ●이협 문화관광·57·국민회의 ­전북 익산,서울 법대,민추협 대변인,국민회의 수석부총무,13∼15대 의원 ●김영진 농림해양수산·51·국민회의 ­전남 강진,전남대 행정대학원,국회 5·18광주특위위원,농어민특별위원장,13∼15대 의원 ●서석재 산업자원·63·국민신당 ­부산,동아대,통일민주당 사무총장,11∼15대 의원 ●박우병 과학기술 정보통신·65·한나라당 ­경북 상주,서울 공대,삼척탄좌 소장,폐광특별입법소위원장,13∼15대 의원 ●김범명 환경노동·55·자민련 ­충남 논산,고려대 정외과,자민련 충남도지부 위원장,14·15대 의원 ●김찬우 보건복지·65·한나라당 ­경북 영덕,경북대 의대,신한국당 경북도지부 위원장,11·14·15대 의원 ●김일윤 건설교통·60·한나라당 ­경북 경주,연대 교육대학원,경주대학교 이사장,민정당 문공분과위원장,12·13·15대 의원 ●김인영 정보·59·국민회의 ­경기 수원,중대 경제과,경기일보 창간 위원장,13∼15대 의원 ●김충조 윤리·56·국민회의 ­전암 여수,고대 법대,국민회의 사무총장,13∼15대 의원 ●김정숙 여성·52·한나라당 ­전북 김제,고대 교육학과,정무2장관보좌관,14·15대 의원 ●김진재 예결(내정)·55·한나라당 ­부산,한양대,민자당 총재비서실장,11·13·14·15대 의원 ◎李協 문화관광위원장/소탈·청렴한 언론인 출신 언론인 출신의 3선의원.조용하고 나서지 않는 성품 때문에 항상 주요 당직등에서 손해를 봤다는 것이 주변의 평.이번 국회직 진출로 뒤늦게 빛을 본 케이스.비서진들과 국회 주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포장마차에서 술자리를 할 정도로 소탈·청렴하다.민추협 초대 대변인 등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金大中 대통령과 인연을맺었다.부인 禹泰慶씨(51)와 2남. ◎金泳鎭 농림해양수산위원장/UR협상때 삭발·단식 전남 당진 출신의 3선의원.지난 10년 동안 줄곧 농림해양수산위를 지켜온 농수산전문가.내정설이 나돌던 국민신당 徐錫宰 의원을 막판에 제치고 ‘전공’을 찾았다는 후문.지난 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 반발,제네바에서 삭발·단식농성을 벌여 농·어민에게 인기가 높다.올해 한국유권자운동연합이 실시한 의정활동 평가에서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될 정도로 부지런하다.부인 尹順南씨(47)와 1남2녀. ◎睦堯相 법사위원장/소신판결 유명… 외유내강 소신 판결로 이름을 떨친 판사 출신이다.원칙에 타협하지 않는 외유내강형으로 통한다.통일민주당과 국민당,신한국당을 거치면서 인권위원장을 도맡았다.이번 상임위원장 인선 과정에서 전문성을 감안,일찌감치 법사위원장 후보로 내정됐다.지난해 당내 대선후보 경선 때부터 李會昌 명예총재 진영에 가담했다.두주불사로 취미는 골프와 바둑.부인 張文榮씨(55)와 1남3녀. ◎함종한 교육위원장/교육개혁 토론회 단골 손님 꼼꼼한성격으로 업무 추진력이 뛰어나다.특히 상지대 교수 출신으로 교권(敎權)확립과 청소년 교육문제에 관심이 많다.교육개혁 토론회의 단골손님.저서도 8권이나 펴냈다.독실한 불교신자로 현재 한나라당 불교신도회 회장.당내에서는 허주(虛舟·金潤煥 부총재의 아호)계로 분류된다.술 담배는 일절하지 않으며 바둑이 취미다.부인 孫源喬씨(54)와 2남. ◎金重緯 정무위원장/뜻 꺽지않는 소신주의자 60년대 말 사상계 편집장을 거쳐 兪鎭午 신민당 당수 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풍부한 아이디어가 번뜩이면서도 일단 방향을 정하면 굽히지 않는 소신주의자로 정평나 있다.10여권의 책을 펴낼 정도로 탐구력도 왕성.기자실에 들를 때마다 칠판에 커다란 글씨로 ‘물망초(勿忘草)다녀갑니다’라고 적어서 얻은 별명이 ‘물망초’.부인 李宣熙씨(57)와 1남1녀. ◎韓和甲 운영위원장/리틀 DJ… 동교동계 핵심 金大中 대통령과 30여년간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교동계 1세대.67년 7대 총선 당시 운동원으로 金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세 번의 옥고를 치르면서 정권교체의 주역으로 성장.화법과 억양,제스처까지 金대통령을 빼닮아 ‘리틀 DJ’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바른말을 잘해 동교동에서도 한때 변방으로 밀릴 정도의 원칙주의자.鄭順愛씨(50)씨 2남. ◎朴佑炳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장/노력파… 탄광소장출신 3선 탄광회사인 삼척탄좌의 소장 출신으로 3선에 오른 대표적인 노력파.13대 민정당 공천으로 정치에 입문했다.차분하고 매사에 꼼꼼한 성격으로 성실한 의정활동이 트레이드 마크.모나지 않은 성격에 원만한 인간관계를 자랑하지만 추진력과 돌파력은 미지수다. 특히 지역구 활동에 열심이다.지난 96년 15대 총선 직전 부인과 사별,1녀를 두고 있다. ◎金仁泳 정보위원장/정무 묵묵히 추진 ‘실천가’ 국민회의 입당파 의원 중 일찌감치 상임위원장 후보에 오르내렸다.외향적이기 보다는 묵묵히 일을 완성해내는 실천가형이라는 평 때문에 정보위원장에 발탁됐다는 후문.의원입법으로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꾼 주역이기도 하다.이북에서 단신 월남,고학 등 역경을 거쳐 사업가로 성공,실물경제에도 밝다.약사인 부인 金炳玉씨(57)와 교수·의사인 두 아들이 있다. ◎徐錫宰 산업자원위원장/YS계 1세대… 조직의 귀재 ‘조직의 귀재’로 알려진 상도동계 1세대.61년 동아고 교사 시절 金泳三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고,89년 4월 동해 보궐선거 당시 후보 매수사건으로 구속되는 등 정치적 부침을 함께했다.상도동계 맏형격으로 조직을 관리했지만 지난 대선 당시 국민신당에 합류,본류에서 이탈.넓은 대인관계가 강점이지만 추진력은 다소 미흡하다는 평.부인 全順達씨(58)와 2남3녀. ◎金範明 환경노동위원장/실물 경제통… 마당발 정평 한때 섬유업체를 경영한 실물경제통 출신의 재선의원.13대 총선에서 민정당 후보로 고배를 마신 뒤 14대 때 국민당 간판으로 첫 등원.마당발로 통할 만큼 폭넓은 추진력이 돋보인다는 평.지난 6·4지방선거 때 지역구인 논산군수 후보로부터 금품수수 혐의로 구설수에 오르기도.朴泰俊 총재를 집중 설득해 환경노동위원장을 따냈다.부인 李榮淑씨(49)와 1남1녀. ◎李元範 행정자치위원장/몸 사리지 않는 행동파 당을 위해서라면 몸을 사리지 않는행동파.다소 거친 듯 하면서도 번뜩이는 기지를 갖춘 독설가라는 평.지난 95년 6·27지방선거 때 민자당 金潤煥 의원의 ‘핫바지론’을 맹공한 지원 유세로 맹활약.이를 계기로 이듬해 총선에서 대전지역 공천을 얻기도.기회가 닿을 때마다 총리인준 주장을 꺼낼 만큼 金鍾泌 명예총재에 대한 충성심이 두텁다.부인 李相淑씨(52)와 3남. ◎韓英洙 국방위원장/논리정연한 차세대 주자 4전5기(4顚5起)끝에 등원해 5선(選)에 이른 중진의원.고려대 4년 재학 중 4·19 직후의 제5대 총선을 통해 정치권에 입문.JP를 제외하고 유일한 자민련내 계보 보스.추종하는 원내외 위원장이 50명 안팎에 이른다. 지난해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JP에 도전할 만큼 차세대를 넘보는 주자.논리정연한 언변이 돋보인다.부인 朴仁淑씨(53)와 1남2녀. ◎金一潤 건설교통위원장/2개 대학 설립… 성격 꼼꼼 성격이 꼼꼼하다.육영사업에 관심이 많아 서라벌대학교,신라고등학교,경주대학교를 차례로 설립,운영하고 있다.15대 상반기 국회에서 건설교통위원회에 소속돼 상임위원장으로서 역할이 기대된다.사회봉사 단체인 라이온스클럽 활동에도 열성적이다.한나라당 내에서 金潤煥 의원 계보로 분류된다.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신앙심이 두텁다.부인 李順子씨(50)와 3남3녀. ◎金燦于 보건복지위원장/의사출신의 인본주의자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로 탤런트 최불암과 닮았다.정치인이기에 앞서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실업문제와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앞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에서 의원입법을 추진하는 것이 꿈이다.의사 출신으로 줄곧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활동,보건복지 분야에 정통하다.부인 鄭成順씨(61)와 2남. ◎金東旭 재경위원장/온화한 성격… 집념 강해 온화하고 모나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그러나 골수 야당 길을 걸어와 집념이 강하다는 평.10대 때 원내 진입에 성공했으나 정치규제에 묶여 11대 때는 출마 자체를 못했다.농림해양수산위,교통체신위원회에서 활약했다.재정·경제 분야는 처음이어서 어느 정도 능력 발휘를 할지는 미지수다.한나라당 내 범 민주계로 金德龍 의원과 가깝다.부인 李英子씨(54)와 1남. ◎柳興洙 통일외교통상위원장/영·일어 능통한 관료 출신 매사에 합리적이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정통 내무관료 출신이다.영어와 일어에 능통하고 아시아 태평양의회 포럼 한국총회의장 및 한일의원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등 외교통상위원장에 적격이라는 평이다.4년 동안 외무통상위에서 활동,해당 분야에 정통하다.한나라당 내 비당권파인 李會昌계로 분류되며 취미는 독서와 골프.부인 朴惠子씨(58)와 2남1녀. ◎金貞淑 여성특위위원장/여성지위 향상에 전력 활달한 성격에 리더십을 겸비하고 있는 맹렬 여성.여성들의 정치참여 확대 없이는 여성지위 향상이 어렵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정무2장관실 보좌관 등 정·관계를 두루 거쳐 위원장으로서 역할이 기대된다.전국구로 한보사건에 연루된 鄭在哲 의원의 의원직을 승계했다.88년 안양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정계에 입문했다.남편 趙光列씨(57)와 1남. ◎金鎭載 예결특위위원장 내정자/합리적… 경제사정 밝아 합리적이며 치밀한 성격으로 여야 관계가 매끄럽고 실물경제에 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여권 의원으로서는 드물게 의정활동이 활발한 ‘의원 베스트 10’에 뽑히기도.원구성 때마다 상임위원장 하마평에 올랐으나 당내 입지가 약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돈이 많아 ‘돈진재’로 불리며 한나라당 내 비당권파로 분류되고 있다.부인 成孝仁씨(52)와 1남. ◎金忠兆 윤리특위위원장/청렴·성실한 원칙주의자 스스로를 ‘법도와 순리’로 채찍질해 나간다는 성실·원칙주의자.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전남공동의장을 거쳐 13대 때 평민당 공천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당 사무총장을 맡으며 50년 만에 여야 정권교체를 이뤄 DJ의 신임이 두텁다.재산공개를 할 때마다 하위권을 맴돈다.동양화를 즐겨 그리고 노래도 잘불러 별명은 ‘김삿갓’.부인 李順玉씨(53)와 1남2녀.
  • 故 金始顯 선생 외아들 峰年씨의 착잡한 ‘8·15’

    ◎3代 걸쳐 항일투쟁/훈장없는 독립투사/金九 암살배후 李承晩 지목… 저격 미수/‘나라 위한 외길’ 불구 유공자 지정 못받아 □金始顯 선생 공적 독립군 군자금 조성 5차례 16년간 투옥 상해서 의열단 조직 비밀군관학교 설립 “3대가 독립운동을 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부친의 단호한 음성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8·15 광복절 쉰세돌을 맞는 金峰年씨(76·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감회는 착잡하기만 하다. 독립운동가 집안인 金씨의 일가족 가운데 모친 權愛羅씨(작고)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자신과 부친 金始顯선생(1883∼1966)은 아직까지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金씨 일가의 이력은 조부인 金澤東 선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한말 고향인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맹렬하게 활동했다. 金始顯 선생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데는 이처럼 부친의 영향이 컸다. 1917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대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운동에 가담,체포되면서부터 가시밭길을 걸었다. 1920년에는 군자금을 조성하려다 붙잡히는 등 일제 치하에서 모두 5차례에 걸쳐 16년동안 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어떠한 탄압도 선생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부인 權씨는 1921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을 조직해 무장항쟁을 주도하다 만났다. 이어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전 세계 약소민족대표자대회’에 임시정부 대표의 일원으로 참석하면서 독립운동의 평생 반려자로 같은 길을 걷게 됐다. 선생은 1923년에는 폭탄 밀반입사건(일명 黃鈺 사건),1925년에는 난징(南京)에서 비밀군관학교를 설립,독립군을 양성한 혐의 등으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외아들 金씨는 1942년 상하이에서 독립군에 편성돼 무장항쟁에 참여했다. 金씨는 “만주에서 모친과 함께 비밀 감옥소에 수용됐을 때 ‘봉년아 잘 있느냐. 어미도 잘 있다’는 모친의 친필을 화장실 기둥에서 발견하고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새롭다”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부친 金始顯 선생은 그러나 2대 민의원(안동)을 지낼 때 金九 선생의 암살배후자로 李承晩 대통령을 지목,6·25 발발 얼마 후 李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1952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4·19혁명으로 석방되면서 복권돼 5대 민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金씨는 “저격 미수 전력 때문에 부친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金九 선생의 암살로부터 나라의 비극이 시작됐다는 게 부친의 확고한 신념이었다”고 말했다.
  • 민주열사 열전:2/全泰壹(정직한 역사 되찾기)

    ◎개발독재 분신 항거… 노동운동 물꼬 터/피복공장 근로자로 허울뿐인 노동법에 분노/인간 부품화 거부… 사용자·독재와 죽음의 투쟁/‘YH사건’ 등 70·80년대 노동운동 정신적 지주로 개발독재가 한창 무르익던 70년 11월 13일 하오 1시30분.동대문 평화시장 건물에서 시뻘건 불덩이 하나가 뛰쳐나오며 피끓는 절규를 뱉어냈다.“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불길에 휩싸여 쓰러져 있으면서도 그는 외쳤다.“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 옆에는 ‘근로기준법’ 책이 불타고 있었다.허울좋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이었다. 21살의 청년 全泰壹은 그렇게 젊은 생을 마감했다.그는 이름없는 한 노동자였다.동대문시장 일대 재단사들의 모임인 삼동회 회장일 뿐이었다.그러나 그의 분신은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그 이후 ‘노동자’ ‘노동운동’이란 말들이 입에 올려지기 시작하고 크고 작은 노동운동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그때까지 입에 재갈이 물린 것 같던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그해 11월청주에서 여공 50명이 상경,체불노임 청산 등을 요구하며 노동청 앞에서 ‘감히’ 농성을 벌였다.의정부 외기노조원 21명은 노조운동 방해에 항의해 전원 분신자살을 기도,사용자와 경찰을 떨게 만들었다.수많은 지식인도 위험을 무릅쓰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모두 전례가 없던 일들이었다.사건 당시 삼동회 회원이던 崔鍾寅씨(51·청우회 회장)는 “태일의 분신은 우리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함께 용기로 다가왔습니다.우리는 곧 그의 외침을 혈서로 써들고 거리로 나섰죠.경찰들에게 머리가 깨지며 끌려가면서도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쳤습니다”라고 회고했다. 全泰壹의 노동운동은 ‘全泰壹 사상’으로 승화되며 70,80년대 군사독재시절 노동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원풍모방사건’이나 ‘YH사건’,인천의 ‘동일방직사건’등 굵직굵직한 노동운동은 바로 全泰壹 열사가 지펴놓은 노동운동의 불이 꺼지는 것을 막기 위한 노동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그것은 어떤 저명한 노동학자의 ‘노동운동론’보다도 위대한 ‘全泰壹 정신’의 실천이었다. 全泰壹 정신의 핵심은 ‘인간선언’과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다. 그의 분신은 불의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인간은 노예일 수 없다는 진실의 증언이었다.다리 한번 제대로 못펴고 한 평에 4명이 끼어 앉아 하루 15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한다고 생각해보라.그렇게 일하고도 항상 배고픈 사람들이 바로 평화시장 일대 피복공장 노동자들이었다. 全泰壹 열사는 그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찾아주려고 했다.업주들에게 끊임없이 개선을 요구했고,시청 근로감독관실과 노동청을 수십차례 드나들며 싸움을 벌여나갔다.그러나 사용주와 권력은 결국 한편이라는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써 그 거대한 억압의 틀을 깨려고 했다.그는 죽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 생애 못굴린 덩이를,덩이를/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굴리는데,굴리는데,도울 수만 있다면/이룰 수만 있다면….” 거의 30년이 지난 오늘,全泰壹 열사는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새겨지고 있는가.대답은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IMF시대에 全泰壹은 분명 살아 있어야 한다.경제제일주의에 의한 인간의 부품화,노동자들의 희생을 거름으로 한 경제회생 논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그리고 IMF체제의 극복을 위해서 그는 반드시 우뚝 서 있어야 한다. ◎일기에 나타난 전태일 정신/“연소자를 부자들 기름으로 쓰는 세상”/시대모순 한탄·뜨거운 민중 사랑 절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全泰壹 열사지만 그는 일기와 낙서,소설 초고 등의 기록을 남겼다.여기에는 시대적 모순과 그의 민중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보는 세상은… 인간의 본질을 해치는 비평화적·비인간적 행위이다.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1969년 12월 어느날의 일기) “선생님,여기 본능을 모르는 인간이 있습니다.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생명체가 있습니다.그리고 죽어가고 있습니다.그것도 미생물이 아닌,짐승도 아닌,인간이 있습니다.인간,부(富)한 환경에서 거부당하고,사회라는 기구는 그들 연소자를 사회의 거름으로 쓰고 있습니다.부한자의 더 비대해지기 위한 거름으로.”(1970년의 소설 초고) ◎전태일씨 가족들/꺾이지 않는 투쟁 의지 모친 통해 부활/이소선 여사 수차례 구속 민주투사로 70년 11월 13일 全泰壹 열사는 몸을 불살라 죽었다.그러나 그순간 그는 부활했다.그것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69)를 통해서였다. “어머니,담대해지세요….어머니,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십시오.” 아들이 죽어가며 손을 붙들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그 순간부터 李여사는 ‘이소선’이 아닌 ‘전태일’이 되어 있었다.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그녀는 시신 인수도 거부한 채 아들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8개조항(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시키려는 내용)의 이행만을 요구했다.파장을 우려한 당국이 3천만원(지금 돈으로 약 5억여원)이라는 거액으로 회유하려 했으나 어머니의,아니 부활한 전태일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여론이 진정되고 당국이 설립된 노조에 탄압을 가해오자 그녀는 청계노조 간부들과 석유통을 쌓아놓고 분신위협으로 맞섰다.그렇게 노조를 지켜냈다. 또 시국재판에서 판사에게 욕을 했다는 이유로 법정모독죄로 1년간 복역하고 여러차례에 걸쳐 구속을 당하는 등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 “태일이는 비록 죽었지만,태일이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땅의 억압받는 노동자를 위하는 것이 태일이를 위하는 길이요,태일이를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장남인 전태일 열사 밑으로 남동생 태삼씨(48·봉제업)와 여동생 순옥(45·영국 유학)·순덕씨(38·주부)가 있다.어릴적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실직, 사망 등으로 모두 학교문턱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했다.순옥씨만이 늦게나마 몇몇 뜻있는 단체의 후원을 받아 영국 워릭대학에서 못이룬 형제들의 학업의 꿈을 대신하고 있다. ◎전태일 열사 연보 ▲1948=경북 대구시남산동에서 전상수·이소선씨의 장남으로 태어남. ▲1963=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입학. ▲1965=평화시장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 ▲1967=한미사 재단사가 됨. ▲1969.6=평화시장내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조직. ▲1970.9=왕성사 재단사로 취직.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회장이 됨. ▲1970.10=평화시장 노동자 근로개선 진정서를 노동청에 제출.삼동회 대표들이 평화시장주식회사 사무실에 찾아가 다락방 철폐,노조결성 지원 등 8개항 요구. ▲1970.10.24=근로조건 개선 시위 기도했으나 실패. ▲1970.11.13=‘근로기준법 화형식’ 거행하며 분신.성모병원에서 숨짐. ◎인터뷰/분신 당시 집회 참가 李承喆씨/“내 죽음울 헛되이 말라” 목소리 쟁쟁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자던 태일의 결의에 찬 눈빛이 눈에 선합니다” 全泰壹 열사의 분신 당시 삼동회 회원으로 집회에 참가해 모든 것을 지켜보았던 李承喆씨(49·자영업).그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쿵쿵 뛴다”고 했다. “태일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키겠다고 했을때 우리들은 순간 긴장했지요.그러나 설마 분신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李씨는 全泰壹 열사가 온몸에 화기가 올라 숨이 콱콱 막히는 지경에서도 모여든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다고 했다.죽기전 병상에서도 “내가 이루지 못한 일을 꼭 이루어 달라”고 했고,대답이 없자 “왜 대답하지 않는가”라고 소리치며 일어나려고 했다고.그러자 친구들은 그를 붙잡고 “네 말대로 하겠다.맹세한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했다. 李씨를 비롯한 동료들은 결국 달포뒤 노조를 결성해 全泰壹 열사와의 약속지키기에 나섰다.그리고 노동자 교육을 위한 ‘노동교실’ 설립,근로시간 단축,다락방 철거 등 많은 것을 쟁취했다.많은 동료들이 감옥을 들락거리며 싸워 얻어낸 성과였다. 李씨는 최근 일부 언론에서 개발독재의 상징인 朴正熙 전대통령이 우리 경제성장의 일등공신처럼 비쳐지는 것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그는 “우리 경제는 60,70년대 노동자들의 뼈빠진 희생 위에 이루어졌다”고 강조했다.
  • 민주열사 열전:1­2/張俊河 선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유신체제 맞서 ‘불굴의 투쟁’/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탈출 항일운동/해방후 ‘사상계’ 창간 반독재투쟁 선도/朴正熙정권 끝내 부정… 의문의 추락사 “오늘의 헌법(유신헌법)하에서는 살 수가 없다….이에 우리 국민은 우리들의 천부의 권리를 제시하는 방법으로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하는 바이다…” 1973년 12월23일 상오 10시 서울 YMCA회관 회의실.통일당 張俊河 최고위원이 준비된 성명서를 읽어내려가는 순간 수십명의 보도진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咸錫憲·白樂濬·金壽煥·白基玩·桂勳梯·兪鎭午씨 등 각계 지도급 인사 30여명이 함께한 가운데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순간이었던 것이다.이 일로 張俊河 선생은 白基玩씨와 더불어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다. 일제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광복군으로 항일투쟁에 나섰던 張俊河 선생.그는 정부수립 이후 경기도 포천의 약사봉 골짜기에서 불귀의 객이 될때까지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있었다.5·16쿠데타 때까지는 월간잡지 ‘사상계’를 무기로,그 이후에는 직접 몸을 던져 독재와 싸웠다.金俊燁 사회과학원 이사장(78)은 張俊河 선생을 ‘애국자·혁명가·인격자이며 권모술수와 배금주의를 배척한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고 그의 죽음을 서러워했다. ‘사상계’를 빼놓고는 그의 반독재투쟁사를 말하기 어렵다.그의 손아래 동서로 사상계에서 편집부장을 지낸 劉庚煥씨(61·전 문화일보 논설실장)는 “張俊河 선생은 자신이 발행하던 사상계에 신앙에 가까운 애착을 보였다”고 했다.사상계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자 오히려 반독재 정론지로써의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59년 2월호에는 ‘무엇을 말하랴,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란 제목으로 언론사상 초유의 ‘백지 권두언’을 냈다.58년 12월 자유당 정권이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을 개악시켜 통과시킨 것에 대한 저항이었다. 쿠데타 이후에도 張俊河 선생은 61년 7월호에 실린 咸錫憲 선생의 ‘5·16을 어떻게 볼까’란 제목의 글로 중앙정보부장 앞에 불려가 문책을 받았다. 그러나 오히려 빨리 민정이양할 것을 촉구했다고 한다.또 각종 집회연설을 통해 朴正熙 대통령에게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밀수왕초’,‘매혈자’등으로 몰아부치고 국가원수모독죄 등으로 구속된다.이러한 투쟁은 69년 3선개헌 반대투쟁과 반유신 개헌 백만인 청원운동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의 반독재투쟁에 대해 白基玩 통일문제연구소장(65)은 “단순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분단체제로 몰아가려는 반통일세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석했다.劉庚煥씨는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면서 반공주의자였다.일본군 장교로 독립군에 총부리를 들이댔던 朴正熙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또 어떤 명분을 내세우더라도 쿠데타는 후세에 좋지 않다는 신념으로 朴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했다”고 회고했다. 張俊河 선생의 일생을 지배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그가 광복군 대위 시절 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겨레의 가슴마다 피빛으로/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조국의 역사 속에 피빛으로.◎張俊河와 朴正熙/광복군대위­일본군중위 출신부터 달라/남로당관련 등 박정희 약점 과감히 들춰 5·16 쿠데타 이후 張俊河 선생이 숨질 때까지 ‘張俊河는 朴正熙의 천적’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그만큼 앞뒤 안가리고 朴대통령에게 모멸감을 주는 극언을 서슴지 않고,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1966년 삼성계열의 한국비료가 대량의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이 발생하자 재벌밀수규탄대회에 초청된 그는 朴대통령에게 ‘밀수왕초’란 이름을 선물했고,3개월간 옥고를 겪는다.67년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그해 4월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朴대통령에게 ‘매혈자’란 또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베트남전 참전을 두고 한 말이었다.이로 인해 국가원수모독죄로 3개월간 옥살이를 하게 되나 오히려 6월 총선에서 옥중출마해 당선됐다. 그는 또 “朴正熙는 과거 남로당 조직책으로 조직원 동료를 팔아 목숨을 부지한 사람”,“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로 광복군에게 총부리를 겨눈 인물” 등 朴대통령의 최대 약점들을 과감하게 들추어냈다. 張俊河 선생의 이런 행태에 대해 평전 ‘재야의 빛 장준하’를 썼던 朴敬洙씨(68)는 “張俊河 선생의 朴正熙관은 애초부터 멸시와 경멸이었던 것 같다. 상대가 일본군 중위일때 그는 우국충정의 광복군 대위였다는 자부심을 항상 갖고 있었고,朴正熙의 갖은 폭력을 겪으면서도 분노에 앞서 그 인격 자체를 대단치 않게 본 것처럼 보인다.”고 분석했다. 개헌을 위한 백만인 청원운동으로 긴급조치의 첫 희생자가 됐던 張俊河 선생은 출감하자 75년 1월 朴대통령에게 ‘박정희씨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전격적으로 공표하고 민주헌정의 회복을 촉구한다. ◎유족들의 생활/결벽중에 가까운 청빈으로 가족들 큰 고통/문상객도 자기먹을 쌀 가져올 정도로 궁핍 “월급 봉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요” 17살때 시집왔다는 張俊河 선생의 미망인 金熙淑 여사(71)의 말이다.사상계 사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張俊河 선생이 생을 마감했을 때 남은 것은 20만원짜리 월세방과 쌀 한 됫박뿐이었다고 전해진다.한 문상객이 미망인의 손을 붙들고 “자식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거냐”며울자 망연자실해 있던 金여사는 “언제 저 양반이 생활비 가져온 적 있나요”라고 남의 얘기 하듯 했다고 한다. 白基玩씨는 “문상올 사람들에게 자기 먹을 쌀을 가져오라고 연락을 했었다”며 “당시 부의금에 약간의 돈을 보태 전셋집을 구해주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이렇게 지나칠 만큼의 청빈에 대한 그의 결벽증은 가족들에게는 커다란 고통일 수 밖에 없었다.사상계에 대한 탄압으로 항상 빚에 쪼들렸던 것도 이유가 됐다. 3남2녀중 장·차남인 호권·호성씨는 대학 문턱도 못 밟아봤으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세 아들중 호준씨는 아버지의 모교인 한신대를 나와 목사로 있다.딸들은 이대를 졸업했으며 미국과 제주도에 각각 살고 있다. ◎비극의 수수께끼/추락사한 유해 겨드랑이 피멍자국/17m 벼랑에서 떨어진 안경은 말짱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민족의 자주·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張俊河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개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張俊河 선생이 숨져 누워있던약사봉 골짜기의 이 표석문의 ‘멋 훗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당시 검찰의 ‘추락사’발표는 실로 의혹투성이였다.그때 徐燉洋 의정부지청 당직검사는,張俊河 선생은 벼랑에서 떨어져 귀밑 부분이 함몰돼 뇌진탕으로 숨졌다고 발표했다.그는 등산 도중 일행과 떨어져 金龍煥씨(중학강사)와 같이 하산하는 도중 경사가 급해 소나무를 잡고 발을 딛는 순간 나무가 휘어지면서 미끄러져 떨어졌다는 것이다. 徐검사는 사고 다음날 새벽 1시경 현장에 도착,캄캄한 상태에서 현장조사를 마쳤다.그리고 그날 낮 金龍煥씨를 검찰로 불러 조사기록을 작성했을 뿐이었다.이때문에 당시 ‘재야대통령’이라고 불리던 張선생의 사인을 서둘러 추락사로 발표한 의혹을 샀다. “집에 도착한 고인의 유해를 보니 겨드랑이 밑 양쪽 팔에 피멍이 있었어요. 엉덩이와 팔 두군데 주사기로 찔린 듯한 자국도 있었고요.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사체가 너무 깨끗했습니다.순간 양쪽 팔을 붙들린 채 끌려갔다고 직감했지요” 서울 상봉동 셋집에서 장례 대소사를 떠맡았던 劉庚煥씨의 증언이다.또 金龍煥씨가 말한 하산코스가 등산장비 없이는 도저히 내려오기 어려운 벼랑이어서 정신 멀쩡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 코스로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張俊河 선생이 갖고 있던 커피보온병과 끼고 있던 안경이 17m 높이의 벼랑에서 돌밭으로 떨어져 말짱했다는 불가사의한 의혹 등도 나왔다. 劉庚煥씨는 또“소나무가 휘어진 자국이라며 金龍煥이 말한 부분에 동그랗게 껍질이 벗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칼로 벗겨낸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張俊河 선생 연보 ▲1918 평북 의주에서 아버지 張錫仁 목사와 어머니 金京文 여사의 4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남 ▲1932년 평양 숭실중 입학 ▲1940년 일본신학교 입학 ▲1944년 1월 金熙淑 여사와 결혼,20일 후 학도병으로 입대 ▲1944년 7월 일본군 탈출,중국군 가담 ▲1945년 1월 중국 중경의 광복군에 편입 ▲1945년 11월 金九 선생과 함께 입국,비서로 활동 ▲1948년 한신대 졸업 ▲1953년 월간 ‘사상계’ 발행 ▲1962년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 상 수상 ▲1971년 일본군 탈출과 광복군 시절을 담은 저서 ‘돌베개’ 출간 ▲1972년 7·4 공동성명 지지 ▲1973년 민주통일당 최고위원 ▲1975년 경기 포천 약사봉에서 수많은 의혹을 남긴채 숨짐
  • 연극배우 원영애/정부수립 50주년기념 연극 ‘아! 정정화’ 주연

    ◎“항일독립운동의 ‘숨은 꽃’ 역사무대위 조명” “항일운동사에 이름을 올린 여성은 유관순 정도지요. 많은 여성들의 숨은 희생,뒷바라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요. 정정화는 그런 ‘숨은 꽃’의 표본 같은 인물입니다” 극단민예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8월13∼25일 서울 연강홀에서 공연하는 민예극장의 ‘아! 정정화’(744­0686)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원영애씨(36). 단순한 주연배우가 아니라 소외돼 있던 역사속 인물을 무대위로 끌어올리는데 발벗고 나선 공신이다. 정정화는 한국 근대사의 풍랑에 몸으로 맞서 나라와 가족사랑을 실천했던 인물. 판서를 지낸 양반가에서 태어난 정씨는 열한살에 친정 못잖은 명문가로 시집간다. 하지만 임시정부에 참여한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스물한살 꽃다운 나이에 기득권을 다 버리고 상해로 건너온다.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수차례 국내와 중국간을 내왕하다 옥고도 치르며 젊음을 다 바쳐 얻은 해방. 하지만 6·25통에 남편이 납북된 뒤 꿈에 그리던 남측 해방조국은 정씨를 부역자로 투옥한다. 40년간 통일을 염원하다 서울 변두리에서 쓸쓸히 눈을 감는 정씨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과 상처를 집약해 보여주고 있다. “정씨를 알게 된건 지난해초 우연히 정씨 자서전 ‘장강일기’(당시 제목 ‘녹두꽃’)를 읽으면서였어요. 크게 공감한 나머지 책을 펴낸 학민출판사 대표와 며칠간 술을 마시며 연극으로 만들게 해달라고 졸랐지요. 자금이 모자라서 문공위 국회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호소도 했어요” 정씨 삶을 더욱 밀도 있게 그려내고 싶어 임시정부 궤적을 좇아 상해,중경까지 답사하고 온 원씨. 이 열정적인 배우는 지금이야말로 정씨의 용기에서 배워야 할때라고 힘주어 말한다. “IMF 한파로 온 나라가 아우성 일수록 조국의 어려움 앞에 자기 삶을 불사른 정정화의 정신을 되새겨야 하는것 아닐까요”
  • 韓 총무 “院구성 거래 안한다”/국회정상화 협상 본격화

    ◎“총리인준 협상 대상 아니다” 쐐기/오늘 총무회담… 의장단 배분 등 험로 15대 후반기 국회 원구성 협상이 본격화될 전망이다.29일 국민회의는 韓和甲 총무대행을 원내 사령탑으로 선출했다.30일부터 3당 총무협상에 돌입한다. 그러나 국회의장단 배분과 국무총리·감사원장 인준처리 등 난제들이 얽혀 있어 쉽지 않은 험로를 예고하고 있다. 韓신임총무도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국무총리 인준문제는 결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박았다.원구성 협상과 관련,“쉽지 않지만 인내를 갖고 풀어가겠다”며 ‘거래’가 아닌,‘원칙있는 협상’을 거듭 강조했다. 이에 앞서 ‘韓대행­李允洙 의원’의 총무경선 대결은 ‘무투표 당선’으로 싱겁게 막을 내렸다.‘반(反) 동교동 정서’를 결집하겠다던 李의원이 정견발표 도중 돌연 ‘경선 포기’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李의원은 연단에 올라 동교동계의 독주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연설 말미에 “그러나 지금은 당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선배 동료들의 충고를 수용,경선을 포기한다”고 기습 선언했다. 安東善 의원은 즉각 “청첩장까지 돌린 뒤 식장에서 결혼을 포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경선 출마를 자신의 정치적 선전에 이용하는,매명(賣名) 행위와 다름없다”고 격렬히 비난했다.일부의원들은 “李의원이 현격한 세 불리를 의식해 선수를 친 것”이라며 ‘韓총무 대세론’의 기류를 전했다. 韓의원은 총무 선출 뒤,당내 일각에서 일고있는 ‘동교동 독주론’을 강한 톤으로 반박했다.“고통은 우리가 분담하고 영광은 주위사람에게 돌린다는 각오로 지금껏 일해왔다”고 섭섭함을 전한 뒤,“누가 자리를 차지하느냐가 아니라,누가 일을 잘하느냐를 놓고 심판해야 한다”며 당내화합을 역설했다. ▷한화갑 총무는 누구인가◁ 韓총무는 지난 30여년간 金大中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해 온 동교동 1세대 가신그룹의 선두주자.지난 67년 총선 당시 金의원의 선거 운동원으로 인연을 맺었고 ‘金大中 내란음모사건’등에 연루,수차례나 옥고를 치르는 등 金대통령과 정치적 부침(浮沈)을 함께 했다. 외모와 말투,제스처까지 金대통령과 흡사,‘리틀 DJ’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소탈한 성격에 오랜 야당시절 체득한 치밀성이 돋보인다는 평.부인 鄭順愛 여사(50)와 2남.▲전남 신안(60) ▲목포고·서울대 외교학과 ▲평민당 총재특보 ▲14·15대 의원
  • 白凡 재조명:4·끝(정직한 역사 되찾기)

    ◎“위대한 白凡사상 새정부서 법통 계승”/통일염원 안고 넘었던 38선 반세기 만에 다시 열려/京橋莊 반드시 복원… 문화재로 지정 영구보존 해야 서울신문은 ‘정직한 역사 되찾기’ 일환으로 백범 金九 선생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는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이면서도 잘못된 평가를 받아온 金九 선생을 역사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백범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통해 일그러진 현대사와 가치관의 혼돈을 바로잡고 사회정의를 확립하지 않으면 안된다. 金九 선생의 업적·사상·통일론 등과 이들을 오늘의 현실에 어떻게 승화시킬 수 있는가를 백범 재조명을 마무리하는 좌담회를 통해 알아본다. 서울신문 金三雄 주필의 사회로 열린 좌담회에는 金九 선생 아들 金信 장군,저명한 백범연구가인 金祐銓 전 광복회부회장과 李萬烈 숙대교수(한국사 전공)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 金信(金九 선생 아들) 金祐銓(전 광복회부회장) 李萬烈(숙명여대 교수) 金三雄(사회·주필) ▲金三雄 주필=金九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은지 50년만에 鄭周永현대명예회장이 판문점을 통해 북한땅을 밟았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정황은 물론 다릅니다. 하지만 백범이 갔던 길을 반세기만에 鄭명예회장이 다시 간것은 중요한 역사의 발전입니다. 백범이 서거한지 거의 50년만에 백범노선과 같은 金大中 대통령 정부가 들어서며 정경분리·상호주의 원칙을 바탕으로 남북관계에 물꼬가 트이고 있습니다. 金대통령의 워싱턴 방문중 미국도 대북 제재중 일부를 해제할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국제환경과 남북관계의 이러한 변화로 백범노선을 실천할 수 있는 단계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늘의 상황에 접목시킬 수 있는 백범사상과 통일론 등에 대해 우선 논의해 보죠. ○좌·우파 모두 포용… 문화국가 건설 ▲李萬烈 교수=백범은 동학·유학·불교·기독교 등을 섭렵하며 그들을 민족주의라는 큰 틀 안에서 완전히 용해시켰습니다. 다원적 종교가 있는 사회에서 여러 종교를 민족주의로 수렴시킨 것은 큰 의미가 있죠. 백범은 또 좌파세력과 민족주의 우파의 통합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한 포용력을 배경으로 독립과 통일,더 나아가 문화국가 건설을 지향했습니다. 통일이 안되면 완전한 자주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한차원 더 높은 문화국가는 더욱 어렵다고 인식했죠. 민족의 미래를 위해 통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金주필=백범은 임시정부를 27년간이나 이끌었습니다. 그러한 예는 세계사에도 없는 일이죠. 독립운동사에서 백범의 역할과 위치는 어떻습니까. ▲金祐銓 부회장=임시정부에서 백범의 역할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화신이었죠. ▲金주필=그러나 백범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李교수=백범 반대세력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죠. 통일지향 세력이 아니라 남북분단 세력이 정권을 잡은 후 기득권 유지를 위해 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론을 묵살했습니다. 집권세력은 백범의 업적도 평가절하했죠. 백범에 대한 잘못된 평가의 긴 그림자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金주필=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귀국후에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죠. 해방공간에서 백범이 왜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고 생각합니까. ▲金부회장=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주도권은 잡았으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미국과 갈등을 빚었죠. 5·10선거 후에도 국회에서 金九 선생 지지가 많았어요. 남북협상 때도 108명의 문화인이 지지성명을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金九 선생이 돌아가신 후 반대파가 정권을 잡아 빛을 보지 못한것 뿐입니다. 특히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이 미국의 입장에서 백범을 본 오류의 결과입니다. ▲金信 장군=주도권 문제와 관련,金부회장의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주도권을 잡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어요.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미국의 강요로 개인 신분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는데다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반발로 어려운 상황에 빠졌죠. 친일세력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이 위험하다는 판단아래 똘똘 뭉쳤습니다. 일본에 아부했듯이 그들은 미군정에 아부했고 李承晩에게도 아부했습니다. 李박사정권에서 권력의 핵심을 차지했죠. 현대사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것입니다. 가족에게 고통을주고 개인과 조상을 희생하면서 싸워온 독립투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 때 친일파 형사들에게 잡혀갔던 독립투사들이 해방후에 다시 그들에게 잡혀가는 기막힌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친일세력들은 해방후 당연히 벌을 받고 독립투사들은 보상을 받았어야 했는데 거꾸로 됐죠. 그때 잘못된 역사 청산작업 때문에 현대사가 일그러진 것입니다. ▲金주필=백범은 분단을 거부하고 평화통일을 위해 남북협상을 추진했습니다. 남북협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남북지도자 공동성명 발표 큰 의미 ▲金부회장=남북협상에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잘못된 평가입니다. 대표자 연석회의는 북측의 각본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성과가 없었지만 백범이 관심을 가진 것은 남북지도자 회담이었어요. 金九 선생,金奎植 박사,金枓奉,金日成 등 4명의 지도자들은 4월30일 회담후 공동성명까지 발표했죠. 공동성명은 전문과 4개항으로 구성돼 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명시하고 있어요. 남북지도자가 만나 공동성명까지 발표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북한 단독정부 수립도 적극 반대 ▲金장군=평양에서 아버님이 연설하실 때 남쪽만의 단독정부는 절대 반대한다고 말씀하시자 열렬한 공산당식 박수가 터져나왔죠. 그러나 북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한다고 하시자 장내는 조용했습니다. 북쪽만의 단독정부 수립도 반대한다는 것은 언론에도 일체 보도되지 않았어요. 북측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내용만을 발표했습니다. ▲金주필=백범의 자주적 평화통일 정신을 오늘의 상황과 어떻게 연계시킬수 있을까요. ▲金장군=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기에는 민족주의자 뿐만 아니라 좌파와 무정부 인사도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어려워지자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충칭(重慶)으로 옮겨왔을 때도 연합정부였죠. 연합정부였던 임시정부의 법통과 아버님의 통일론을 이어받아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독립운동 때도 독립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 싸우는 일은 비현실적이라는 비관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독립을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통일도 지금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金주필=임시정부는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전승국으로 대접받고 전후 처리문제에서도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죠. 그러나 연합국은 그러한 대접을 해주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李교수=프랑스는 소극적이나마 임시정부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영국 등은 인정하지 않았죠. 미국은 임시정부가 분열돼 있기 때문에 어느 정부를 인정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핑계에 지나지 않았어요. 사실은 독립운동때 임시정부가 중국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중국과 가까워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 때문이었죠. ▲金주필=시해되던 날은 일요일이었는 데도 金信 장군은 그날 옹진에 가셨죠. 암살음해 세력이 金장군을 떼어놓기 위한 음모는 아니었나요. ▲金장군=유엔대표단과 함께 갔었습니다. 그러나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어요.어떤 음모가있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평양에서 돌아온 후 암살에 관한 여러가지 풍문이 많았고 그것들을 여러차례 아버님께 말씀드렸죠. 돌아가시기 이틀전에는 박동엽씨 등 2명이 경교장으로 찾아와 보다 안전한 병원에 입원시키라는 말도 했어요. 그말을 아버님께 전했으나 나는 떳떳하며 겁낼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기념관 건립·학술상 제정 등 절실 ▲金주필=새정부의 탄생을 계기로 임시정부의 법통계승과 백범사상을 이어받을 사업을 추진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백범 기념관 건립,전집 출판,학술상 제정,백범과 3열사의 묘가 있는 효창공원 성역화 작업 등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기념관 건립과 관련,李교수께서 말씀해 주시죠. ▲李교수=백범 기념관은 꼭 필요합니다. 서거 50주년(1999년)이나 2000년의 새 세기가 시작되기전 기념관이 지어져야 합니다. 건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요. 기념관을 지을 때는 국민의 이름으로 지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장소는 서대문형무소 자리일 것입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고 그곳은 통일로의 출발점입니다. 백범의 독립과 통일정신이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죠. 효창공원도 국립묘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광주의 망월동 묘지는 이미 국립묘지 수준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효창공원이 국립묘지 수준이 안된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金주필=백범이 머물렀던 경교장(京橋莊)의 복원문제는 어떻습니까. ▲金부회장=영구 보존을 위해 우선 문화재로 지정해야 합니다. ▲金주필=백범을 기념하는 독립상과 통일상 등을 만들면 어떨까요. ▲李교수=좋은 생각입니다.그러나 셋방살이도 꾸려가기 힘든 백범기념협회에서 그런 것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죠. 상을 만들려면 백범의 이상인 독립국가·통일국가·문화국가를 상징하는 독립·통일·문화상을 만들고 차차 확대하는 것이 어떨까요. ▲金주필=金九 선생에 대한 여러가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민족의 큰 스승인 백범의 사상과 통일론 등이 명실상부한 민주정부로 제2건국이라 할 수 있는 金大中 대통령 정부에 의해 이땅에서 완벽하게 구현되고 남북의 화해와통일로 이어지도록 모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더욱 강렬해집니다.
  • ‘천안문 9돌’ 주역들 지금 어디에

    ◎王丹 등 학생지도자 대부분 美서 활동/시위대 동조 趙紫陽 실각후 ‘연금 족쇄’/진압 선봉장 李鵬 상무위원장에 취임 89년 천안문(天安門)사태의 주역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지도자들과 강경진압으로 유혈참사를 일으켰던 국가지도자들.9년이 지난 지금 학생지도자들은 대부분 미국으로 빠져나와 평범하게 살고 있고 국가지도자들은 권력투쟁속에 영(榮)과 욕(辱)을 달리했다. 계엄령 선포를 강행하며 강경진압에 압장섰던 리펑(李鵬·71)은 올 3월 총리연임을 마치고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전인대 상무위원장에 취임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군개입을 반대하던 군지도자들을 설득해 유혈진압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군원로 양상쿤(楊尙昆·92) 전 국가주석은 유혈참사 다음해에 鄧小平의 견제로 공직에서 밀려난뒤 국가원로로 말년을 보내고 있다.천안문광장에서 시위학생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해산을 호소했던 자오즈양(趙紫陽·79) 당시 총서기는 ‘당을 분열시켰다’는 이유로 유혈진압직전 실각된 뒤 감시속에서 골프와제한된 외부 접촉만을 유지하고 있다.7년동안 수감생활을 한 바오퉁(66) 정치국 비서처럼 趙의 측근들은 정치적으로 거세되거나 옥고를 겪었다. 미국서 생활하고 있는 학생지도자들은 대중국 반체제활동에 가입해 있으나 의외로 활동은 활발치 않다.‘수배 1호’였던 북경대 사학과생 왕단(王丹·33)은 올 9월 하바드대에 입학할 예정이며 학업재개와 함께 자유아시아방송(RFA)에서 평론가로도 일할 계획이다.6년5개월동안 감옥에 갇혀있던 王은 지난달 중국과 미국의 막후 협상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미국에 왔다. 96년 5월 홍콩으로 탈출한 뒤 미국으로 망명해 중·미 관계를 불편하게 했던 북경대 대학원생 리우캉(劉剛·36)은 뉴욕에서 머물고 있다.수배 2호였던 시위대대표 우얼카이시(吾爾開希·30)는 미국의 한 중국어방송서 일하며 대만여자와 결혼해 대만과 미국을 오가고 있다. 시들한 학생지도자들의 반체제운동과는 달리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팡리즈(方勵之·62) 전 합비(合肥)과기대 교수와 엔지아치(嚴家其·56) 전 사회과학원 정치연구소부소장은 미국대사관과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무력진압직후 국외로 탈출,파리와 미국에서 ‘민주중국’ 등 잡지발간과 民聯 등 단체를 이끌며 강연과 집회로 활발한 민주화운동을 벌이고 있다.
  • 李義翊·文憙甲·兪成煥/여·야 대구시장 후보 비교

    ◎자민련 李義翊/대구 경제 살릴수 있는 여 후보 부각 【대구=黃暻根 기자】 자민련 李義翊후보는 말단 서기보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대구시장까지 지낸 직업관료 출신 정치인. 李후보는 여당후보를 당선시켜야만 대구경제를 살릴 수 있다며 힘있는 여당 후보론을 부각시키고 있다. 중앙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낼 자신만이 위기에 빠진 대구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주장이다. 9개월간(93년 3월∼12월)의 짧은 대구시장 재임시절에도 삼성자동차 대구유치,대구선 이설계획 확정 등 굵직굵직한 숙원사업을 해결,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국회 건교위 시절에는 경부고속철도 문제점을 끈질기게 파헤치기도 했다. 30년간의 공직경험은 그가 내세우는 강점으로 개발행정 분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이다. 마산시장 재직시 국제무역항 개발을 위한 대규모 매립사업을 착공하는등 李후보가 가는 곳마다 개발의 망치소리가 높았다. 대선을 앞둔 지난해 11월 한나라당으로 옮겼다가 다시 자민련으로 복귀하는 등 ‘철새시비’와 지역정서를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한나라 文熹甲/지역정서 편승 선두… TV토론 기대 한나라당 文熹甲후보는 대선 당시 72·6%의 지지를 보냈던 지역정서를 바탕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대구지하철 1호선 개통과 대구공항 국제화사업,해외시장 개척활동,중소기업 자금난 해소를 위한 대구신용보증조합 설립 등은 文후보가 내세우는 성과. 그러나 최대 공약사업이었던 3억달러 외자유치가 IMF사태로 인한 중도상환으로 환차손 시비를 불러 일으키는 등 상처를 받았다. 버스출퇴근과 함께 관용차를 대형에서 중형으로 교체하고 딸의 결혼식을 비서실 직원조차 모르게 치르는 등 공직자로서의 깔끔한 처신이 돋보인다는 평이다. 文후보는 예산확보를 위해 최근 중앙부처를 방문,로비활동을 벌이는등 李후보의 힘있는 여당후보론을 경계하는 눈치. 논리정연한 말솜씨는 文후보가 내세우는 또 다른 강점으로 TV토론에 큰 기대를 걸고있다. 늘 독선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지만 일욕심 때문이라며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이다.이 때문에 지역언론과 한때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고 일부 경제계 인사들과 마찰을 빚는 등 화합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국민신당 兪成煥/국시파동 주역… ‘티코행정’ 공약 국민신당 兪成煥후보는 30여년간 정치판에서 잔뼈가 굵은 야당정치인. 12대 의원시절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는 국회발언으로 옥고를 치러 화제를 모았던 주인공이다. ‘서민들의 눈물을 딱아 줄 수 있는 정치가 출신의 시장론’이 그의 출마의 변. 행정관료보다 결단력등 정치력이 뛰어난 정치인출신 시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YS를 따라 3당합당 때 여권에 몸담아 14대 전국구 의원을 지냈고 대선때 李仁濟후보를 지지,국민신당으로 말을 바꿔탔다. 최근 티코승용차를 구입한 兪후보는 ‘거품없는 티코행정’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당선되면 시장관용차를 티코로 바꾸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행정경험이 전무한 데다 조직력이 취약하고 개혁에 걸맞지 않는 구시대 정치인이라는 지적이 최대 약점. 이번 시장선거보다 차기 국회의원 선거를 의식,출마했다는 관측도 있다. □여·야 대구시장 후보 비교 ◇이의익(자민련) 나이:58 출생지:경북 안동 학력:영천고,국학대 경제학과 주요경력:경기도 기획관리실장(82∼83년) 창원·마산시장(83∼86년) 경기,경남부지사(88∼92년) 대구시장(93년) 15대 국회의원(96∼98년) 가족:부인 곽정애씨와 1남1녀 별칭:황소 재산:16억4천만원 병역:육군 의무병 하사제대 ◇문희갑(한나라) 나이:61 출생지:대구 달성 학력:경북고,국민대 법학과 주요경력:경제기획원 예산실장(82년) 경제기획원 차관(85∼93년) 12·13대 국회의원(85∼93년) 남북경제회담 수석대표(86년) 청와대 경제수석(88∼90년) 대구시장(95년∼현재) 가족:부인 정송자씨와 3녀 별칭:문핏대 재산:7억6천만원 병역:공군 중위예편 ◇유성환(국민신당) 나이:67 출생지:경북 성주 학력:성주농고,영남대 법학과 주요경력:경북도의원(60년) 민주당 청년위원장(87년) 12대 국회의원(85∼88년) 14대 국회의원(93∼96년) 국민신당 최고의원(98년) 가족:부인 남영자씨와 1남1녀 별명:등소평 재산:4억원 병역:6·25 당시 학도병
  • 梁起鐸 선생 유해 60년만에 환국

    ◎대한매일신보 창간·臨政 참여 독립운동/어제 中서 봉환… 14일 국립묘지에 안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대표적인 애국계몽 언론인이자 무장독립운동가인 우강(雩岡) 梁起鐸 선생의 유해가 8일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1938년 중국 상소성 율량 고당암에서 서거해 현지에 안장된 지 꼭 60년만이다. 선생의 유해는 이날 하오 3시30분 아시아나항공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손자 梁俊一씨와 손녀사위 朴維徹(독립기념관장)에 의해 봉환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영현봉안관에 임시 안치됐다. 이로써 李相龍 선생(90년),朴殷植 선생(93년) 등 국외에 안장돼 있던 8명의 임시정부 수반급 요인이 모두 국내로 봉환됐다.雩岡 선생은 민족독립을 위해 몸소 가시밭길을 걸어온 참 민족주의자였다. 평양 소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25세때인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면서 민족운동의 길로 들어섰다.수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는 수난의 시작이었다. 선생은 1904년 영국인 베델과 합작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으며 외국인에게 사장을 맡기면일제의 검열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십분 활용,본격적인 항일운동을 펼쳤다. 특히 1905년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격렬한 필봉을 휘두르며 을사조약을 규탄하고 즉각적인 파기를 요구했다.이와 함께 전국의 의병운동을 상세히 보도,항일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이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애국계몽운동 뿐아니라 의병운동의 대변지로 인식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의 중심적 언론기관으로 인정받았다. 일제에 맞설 때마다 중심축이 됐던 선생은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대한매일신보사내에 국채보상지원금 총합소를 설치해 직접 총무를 맡으며 전국적 국민운동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후 安昌浩·李東輝 선생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창립해 활동하다 ‘105인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933년 여러 차례에 걸친 추대에 겸양으로 거절하다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으며 이후 조선혁명당 한국광복전선을 조직하는 등 항일공동전선을 구축하고 민족화합을 위해 온몸을 던져 일하다 과로로 1938년 이역만리에서 서거했다.유해는 일반인이 참배할 수 있도록 오는 14일 정오까지 영현봉안관에 안치되며 14일 하오 2시 안장식이 거행된다.
  • 8순 교포 10억땅 장학기금으로

    ◎LA거주 李周永 할머니 서울 구세군에 헌납/LA거리 깡통모아 한인학생에 장학금도 “머리는 좋지만 돈이 없어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는 학생들을 돕는 것이 평생의 바람이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80대 할머니가 10억원대의 땅을 청소년 장학기금으로 내놨다. 22일 하오 3시 서울 광화문 구세군 대한본영 사령관실에서는 ‘만영장학기금’ 기증식이 열렸다.이 자리에서 李周永 할머니(87·미국 LA거주)는 고국에 남아있는 유일한 재산인 충남 아산시 배방면 공수리와 북수리의 임야 과수원 등 2천8백여평을 구세군에 헌납했다. 李 할머니와 남편 鄭씨는 1남5녀를 키우면서도 평생 장학사업을 해왔다.鄭씨는 일제 때 충남 천안시에서 이발업을 하면서 “민족정기를 잃어서는 안된다”며 청소년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치다 적발돼 3년여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한국전쟁이 끝난뒤에는 서울로 올라와 중앙대와 고려대 구내에 이발소를 차려 생활하면서 틈틈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왔다. 李할머니 부부는 지난 80년 장녀 부부가 사는 미국 LA로 건너간 뒤에도 길거리에 버려진 깡통을 주워 모은 돈으로 매년 한인학생 2명에게 1천달러씩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LA 교민들은 10평 남짓한 노인아파트에 세들어 살면서도 깡통을 줍고 매달 나오는 정부보조금 610달러를 아껴 장학금에 보태는 李 할머니를 ‘깡통 할머니’로 부른다.
  • 국민회의 총장 鄭均桓 의원/대변인엔 辛基南 의원/당직 개편

    국민회의 총재인 金大中 대통령은 25일 당사무총장에 鄭均桓 의원을 임명하는 등 당8역등 주요 당직에 대한 개편을 단행했다. 당 8역중 지방자치위원장에는 金玉斗 의원,홍보위원장에는 林采正 의원,연수원장에는 金珍培 의원,대변인에는 辛基南 의원이 각각 임명됐으며 韓和甲 총무대행,金元吉 정책위의장,柳在乾 총재비서실장은 유임됐다. 金대통령은 사무총장 산하의 기획조정위원장에 薛勳 의원,조직위원장에 尹鐵相 의원,직능위원장에 趙誠俊 의원,정세분석위원장에 金榮煥 의원,인권위원장에 韓基贊 변호사를 각각 기용했다. 정책위 확대개편으로 신설된 정책위 제1정조위원장에는 南宮鎭 의원,제2정조위원장에는 張永達 의원,제3정조위원장에는 李錫玄 의원이 각각 임명됐다. 나머지 인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여성특위위원장=金希宣 서울동대문갑지구당위원장 ▲청년특위위원장=鄭漢溶 의원 ▲국가경영전략위위원장=金泳鎭 의원 ▲경제대책위위원장=金明圭〃 ▲국제협력위위원장=梁性喆〃 ▲윤리위위원장=李沅衡 전 의원 ▲제1정조부위원장=秋美愛 의원 ▲제2정조부위원장=鄭鎬宣〃 ▲제3정조부위원장=李聖宰〃 ▲총재비서실 수석부실장=千正培〃 ◎鄭均桓 총장/치밀한 성격… 협상고비마다 뚝심 발휘 성실하고 치밀해 무슨 일을 맡기든지 차질없이 해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남의 일도 자기 일처럼 해주는 ‘정치권의 의리파’. 국회 내무위에서 주로 의정생활을 해온 3선.13대때부터 여야 정치관계법특위에 참여,협상의 결정적인 고비때마다 뚝심을 발휘해 인정을 받았다. 최근 경선총무 정지작업을 해오던 중,성실성과 전북출신 배려를 엎고 사무총장에 발탁됐다.부인 李玉子 여사(46)와 1녀. ▲전북 고창·55세 ▲성균관대 정외과졸 ▲13·14·15대의원 ▲민주연합청년동지회중앙회장 ◎金玉斗 지방자치위장/옥고 겪으면서도 33년간 DJ보좌 金大中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신앙에 가깝다.털털한 외모처럼 사람이 좋다는 평. 지난 65년 金대통령의 수행비서로 정계에 입문한뒤 33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두 차례의 옥고와 8차례의 연행 등 시련을 겪었다.부인尹永子씨(51)와 1남1녀. ▲전남 장흥·60세 ▲고려대 정책과학대학원 수료 ▲민주당 사무부총장·원내부총무 ▲14·15대 의원 ◎林采正 홍보위장/언론계 출신… 승부욕 강한 원칙주의자 원칙에 충실하고 논리적이며 승부욕이 강하다는 평. 언론인 출신의 재선의원으로 75년 동아투위 사건으로 언론계를 떠난뒤 재야에서 활동하다 지난 87년 대선때 金大中 후보를 지원한 것이 인연이 돼 정계에 입문했다. 부인 奇永男씨(56)와 1남1녀. ▲전남 나주·57세 ▲고려대 법대졸 ▲동아일보 기자 ▲민통련 상임위원장 ▲14·15대 의원 ◎金珍培 연수원장/75년 해직언론인… ‘인동초의 새벽’ 저술 소신과 논리를 지닌 원칙주의자.지난 75년 동아일보 언론자유투쟁으로 해직됐으며 68년에는 정치자금의 내막을 파헤친 글을 월간지에 기고했다가 수난을 겪기도했다.정계에 입문한뒤 ‘인동초의 새벽’이라는 金大中 대통령에 관한 책을 저술.부인 張貞淑 여사(51)와 2남1녀. ▲전북 부안·64세 ▲고대 법대졸 ▲동아일보·경향신문기자 ▲11·15대의원 ◎辛基南 대변인/변호사시절 방송활동 경력… 언론에 밝아 차분하고 논리적이다.변호사 활동 당시 방송활동을 많이 해 언론에 익숙하고,국회 문체공위에서 활약한 점이 발탁 배경이라는 후문. 국민회의 초선의원들의 모임인 ‘푸른정치모임’의 간사,총재특보단 대변인 등을 맡는 등 모든 일에 의욕적이다.부인 金恩珠 여사(41)와 2남1녀. ▲전북 남원·47세 ▲서울 법대 ▲해사 교수 ▲서울변호사회 인권위원
  • 새정부 각료 17명의 프로필

    ◎이정무 건설­실물경제 해박… 여야 교류폭 넓어 원만하고 합리적 성품으로 여야를 초월,교류폭이 넓다.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13대 민정당 공천을 받아 정계에 첫 진출했으며 14대때 낙선,절치부심끝에 재기에 성공했다. 대구백화점 사장을 지내는 등 실물 경제에도 밝으며 자민련내 역학구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T·K(대구·경북)출신이면서도 특정계파에 치우치지 않는 중립적 태도로 당지도부의 신임을 받고 있다.지난 15대 대선때 상당수 T·K의원들이 동요할때 좌고우면하지 않고 당을 고수,김종필 명예총재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는 후문.부인 구순모 여사(53)와 2남 1녀. ◎주양자 보건­보스기질 강한 의료계 여성대부 추진력이 강하며 솔직한 성품으로 대외관계도 원만하다는 평.구민자당 시절 여성으로서 제3사무부총장을 지낼정도로 보스기질도 강하다. 지난 92년 14대 총선때 구민자당 전국구 공천을 받아 원내 진입에 성공했으나 15대 총선에서는 공천을 받지못해 원외에 머물다 지난 96년 10월 자민련에 입당한 홍일점 여성 부총재. 지난 56년 서울시립병원 의사를 시작으로 의료계에 발을 들여놓은뒤 서울시의사회 고문 등을 역임하는 등 의료계의 여성대부로 불린다.남편 이태헌씨(75)와 1남 3녀. ◎최재욱 환경­언론인 출신 TJ측근… 소신·의리파 의리파로 불리우며 조용하면서도 맡은 일은 철저하게 챙기는 스타일.5·18특별법 제정때 구민자당 당론에 반대,국회에서 홀로 부표를 던지고 탈당한 소신파이기도 하다.언론인 출신으로 구민자당 시절부터 자민련 박태준 총재의 측근으로 활동해 왔으며,이번 조각에 박탈되는데도 박총재의 천거가 크게 작용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는 환경부를 소관부처로 두고 있던 사회문화분과위 간사를 맡아 원만한 일처리 솜씨를 보임으로써 김대중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는 후문이다.부인 박해경 여사(58)와 사이에 1남 1녀. ◎신낙균 문화­방송·문화계 인연 깊은 여권운동가 매사에 꼼꼼하고 빈틈없는 자세로 주위 사람들을 긴장시키지만,원만한 대인관계로 사람들을 모으는 처신 또한 뛰어나다.방송위원회 심의위원을 지내는 등 방송계와의 인연도많은 편.한국여성유권자연맹 회장시절 모금운동을 주로 음악회를 통해 벌여 문화계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한국여성유권자연맹 청년부장부터 시작,지난 95년 국민회의 부총재로 정치입문할 때까지 줄곧 여성운동에 몸담아 왔다.국회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여성의 정치참여를 주장하면서 실천적인 정책추진에 앞장서 왔다.남편 김훈섭씨(63)와 1남2녀. ◎박태영 산업­보험사서 잔뼈 굵은 ‘에너지 박사’ 치밀한 성격과 추진력을 겸비한 전문경영인 출신. 지난 86년 어느 기업인모임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처음 만난뒤 동교동을 찾아가 정치입문 의사를 밝히고 14대때 원내에 진출했다. 14대 재경위의 국세청 국정감사에서 한화그룹 계열사인 경인에너지의 외화도피 및 탈세의혹을 폭로하는 등 ‘에너지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발탁배경이라는 후문.대한교육보험 과장 시절 ‘종업원퇴직적립보험’을 최초로 입안,회사 자산을 매년 3백20억원씩 늘려 입사 2년만에 이사로 승진하는 진기록을 세웠다.부인 이숙희 여사(52)와 1남1녀. ◎김선길 해양­미서교수생활… 관·금융계 마당발 관료출신 답지않게 성격이 원만하고 대인관계가 부드럽다는 평을 듣고 있다.고향인 충북 충주에서 세번 출마끝에 지난 15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다는 등 끈질긴 면도 있다. 상공차관과 기업은행장을 지내는 등 관계와 금융계에서 오랫동안 재직한 경험이 발탁 배경이 됐다는 후문. 미 아메리칸대학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은뒤 교수생활을 하다 해외두뇌 유치책에 따라 지난 71년 귀국,과학기술처 진흥국장으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부인 윤병수 여사(63)와 사이에 2남 1녀. ◎강창희 과기­원만·합리적… 민정당 창당작업 참여 육사 출신이나 부친이 충남대총장을 지낸 학자집안 출신답게 원만하고 합리적 성품이라는 평을 듣는 4선의원. 육군대 교수로 재직하다 지난 80년 신군부 실세였던 허화평씨의 권유로 민정당 창당작업에 참여한뒤 11대에 전국구 예비후보 1번으로 의원직을 승계,정계에 첫 발을 내디뎠다. 5공시절에는 39세에 진의종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에 발탁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했다. 13대때 낙선과3당합당으로 지구당위원장도 뺏기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으나 14대에 무소속으로 재기했다.부인 이재숙 여사(49)와 1남1녀. ◎이기호 노동­양노총서 신뢰… 행정능력 인정받아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에 뚝심도 갖추고 있으며 소재가 무궁무진할 정도로 달변이다. 경제기획원에서 잔뼈가 굵은 경제관료로 노사정 위원회의 노동관계법 개정과정에서 중재·조정 능력을 발휘,이번 조각에서 유일하게 재임명됐다.당초부터 기획예산위원장 물망에도 오르는 등 발탁 대상자로 꼽혔었다. 실업종합대책 수립과정에서 조직적인 행정능력을 인정받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에서도 무난하다는 평과 함께 후임 장관으로 추천했다는 후문이다.취미는 등산.부인 양인순 여사(47)와 1남1녀. ◎박정수 외통­학자출신의 매너 깨끗한 국제신사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매너가 깨끗한 ‘국제신사’.학자 출신의 5선의원으로 IPU집행위원을 맡고 있는 등 국회내 대표적 ‘외교통’. 특히 미조지타운대와 아메리칸대학원을 졸업,미국의회와 행정부에 지인이 많아 미국과의 통상외교를 주도하는데 적격이라는 점이 발탁배경.대선직후 김대중 대통령의 ASEM참가 및 미국방문 준비위원장을 맡아 일찌감치 외무장관후보 0순위에 올랐다. 지난 96년초 15대 총선전 민자당을 탈당, 국민회의 부총재로 영입됐다.유정회 의원을 지낸 이범준 여사(64)와 1남. ◎박상천 법무­다혈질 ‘법안제조기’… DJ 신임 각별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하게 임하는 열성파.다소 다혈질이라는 평가도 받고있으나 업무추진에 열성을 다한다는 것은 장점. ‘법안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국회 각종 입법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오고 있다. 20여년간 판·검사를 지낸 법조인 출신의 3선의원.13대 총선에서 평민연 케이스로 김대중 대통령과 인연을 맺어 정계에 입문했다.김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바탕으로 어려운 ‘충언’도 서슴치않는 소신파로 알려져있다. 하루 흡연량이 2갑을 넘는 애연가.부인 김금자 여사(51)와 1남2녀. ◎강인덕 통일­합리적 보수주의… 중청 대북 정보통 통일문제에 있어 보수적 색채를 보이고 있으나 사고가 유연해서 ‘합리적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성격이 활달하고 호탕한 편이지만 업무처리는 매우 치밀하다. 지난 71년부터 10년동안 중앙정보부에서 통일문제를 다룬 대북 정보통.중앙정보부 퇴직 이후 극동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공산주의 일반과 소련의 개방·개혁 정책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해 학자로서의 명성도 쌓았다. 북한전문가로서 항상 바쁜 생활을 해와 취미도 독서 및 저술.부인배정숙 여사(61)와 2남1녀. ◎천용택 국방­군사전략가… 대선때 북풍 차단 공신 결단력 있는 업무처리가 돋보이며 국방업무 전반에 능한 군사 전략가.논리적인데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스타일로 조직 장악력이 뛰어나다. 군내 핵심요직을 두루 거쳐 정책,전략,기획,군사교리 등의 분야에 밝지만출신 지역 탓에 93년 진급에서 밀려 전역한뒤 비상기획위원장을 맡았다.이후 국민회의 입당으로 정계에 입문,15대 국회에 전국구의원으로 진출했다.대선 과정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장남의 병역의혹을 제기하고 북풍을 잠재우는 등 김대중 대통령의 안보 분야 핵심참모로 맹활약했다. 부인 김아미 여사(55)와 3녀. ◎이해찬 교육­기획력 치밀… ‘민청학련’ 옥고 치러 모든 면에서 성실하며 날카로운 기획력과 업무파악 능력을 갖고 있어 각종 의정활동 여론조사에서 항상 선두를 지키는 국회의원.국회 상임위에서 정부당국자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의원중 하나다.88년 광주청문회 당시 ‘송곳질문’으로 청문회스타로 떠올랐다. 서울대 문리대 재학중인 지난 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제적,1년간 실형을 살면서부터 재야의 길을 걸어오다 13대때 평민당 공천을 받아 여의도 입성에 성공했다. 바둑과 늦게 배운 골프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부인 김정옥 여사(45)와 1녀. ◎이규성 재경­원리원칙 중시하는 정통 재무관료 원리원칙을 강조하고 공사가 분명하다.판단력이 뛰어나고 빈틈이 없어 ‘면도날’로 불리는 전형적인 재무관료.일을 많이 시키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후배 관료들을 심하게 야단친 뒤에는 소주잔을 기울이는 인간미도 있다.겉으로는 차고 깐깐하게 보이지만 잔정이 많다.충남 강경중 2학년때 월반해 대전고와 서울대 상대를거치면서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은 전형적인 수재형이다.역대 재무장관중 인기 1위에 뽑힐 정도로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그러나 재무장관 재임중인 지난 89년 12·12 증시 부양조치로 투신.증권사를 부실의 늪에 빠트린 장본인이라는 약점도 있다.부인 정수자씨와 1녀. ◎김성훈 농림­국제적 명성 높은 농업경제전문가 농업경제전문가로 개혁적 목소리를 많이 내왔다.북한의 식량난 실태를 학계에 보고,국제 농학계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95년 지방선거때는 김대중 아태재단이사장 후원으로 전남지사 후보경선에 나섰다가 허경만 현 지사에게 고배를 마셨다.동교동계 경제브레인으로 지난 대선때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자문역을 했다.‘우리 쌀지키기 범국민대책회의’ 집행위원장을 맡아 쌀시장 개방저지투쟁을 주도하기도 했다.온화하면서 리더십을 갖췄다는 평가.‘한국농업,이길로 가야 한다’‘쌀,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등의 저서가 있다.부인 박인아씨(46)와 3남1녀. ◎배순훈 정통­MIT 출신 전문경영인 ‘탱크주의’ MIT 박사 출신으로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를 거쳐 대우그룹에 영입된 전문경영인.치밀하고 합리적이어서 ‘배박사’로 통한다.다기능 첨단제품을 중시하는 쪽과 내구성을 중요시하는 세계 가전업계의 양대 흐름 가운데 후자인 ‘탱크주의’를 채택,대우전자를 국내 가전3사의 반열에 올려놓으면서 탁월한 경영능력을 평가받았다.광고에 직접 출연,호평을 받은 스타 경영인이기도 하다.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등 첨단분야의 해외진출을 적극 주장해 왔다.국내보다 프랑스 사교계에서 더 유명하며 두 아들도 MIT동문이다.부인 신수희씨와 2남1녀. ◎김정길 행정­3당통합때 YS와 결별… 명분 중시 솔직담백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거부감이 적다.언변도 뛰어나 정치적 절충이나 협상에는 제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서글서글한 인상도 친근감을 준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초등학교 선후배 사이로 대표적인 ‘YS맨’이었으나 지난 90년 3당통합시 김전대통령의 동행권유를 고사하고 야권통합에 힘을 쏟은 소신파. 96년 말 이기택 총재의 민주당에서 이탈,김원기 전 의원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를 결성한뒤 지난 대선에 임박해 김대중 대통령 지원을 선택했다.부인 이은혜 여사(43)와 2남3녀.
  • 얽히고 설킨 은원 모두 풀렸나

    ◎전 대통령 4명 한자리에… 함박웃음 악수/YS는 전·노씨와 어색… 환한 DJ와 대조 김대중 대통령이 25일 국회 취임식 단상에서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최규하 전 대통령 등 4명의 전직대통령과 자리를 함께 했다. 전·현직 대통령들간의 얽히고 설킨 은원이라는 호사가적 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무엇보다 ‘국민의 정부’에서 새 대통령과 전직대통령간의 관계설정의 단초를 보여줬다는 점에서였다. 김전대통령은 행사 시작 4분전인 상오 9시56분 손명순 여사와 함께 단상에 도착,노·전·최 전 대통령 순으로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악수를 나눴다.그러나 김전대통령을 맞는 세 전직 대통령의 눈길은 얼마간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특히 ‘문민정부’ 에서 5·18 및 비자금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렀던 전·노 전 대통령은 김전대통령의 손만 잡은 뒤 곧 다른 곳을 응시,응어리가 남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김전대통령 뒤를 따른 손여사는 그런 ‘차가운’ 세 전직대통령들에게 고개 숙여 깍듯이 인사했다. 반면 행사시작 1분전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은 최·전·노전 대통령과 환한 웃음속에 반갑게 손을 잡아 대조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김전대통령은 행사내내 다소 무거운 표정이었다.특히 김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단호한 목소리로 경제위기의 심각함을 지적하며 그 책임을 묻겠다고 강조할 때는 더 굳은 모습이었다고 참석자들이 전했다. 그럼에도 김대통령의 주변인사들은 새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과는 ‘우호적인’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한 측근은 “김대통령의 임기내내 최대 화두는 역시 경제 재도약과 함께 국민 대화합일 것”이라고 귀띔했다.이에 따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필요에 따라 자문을 구하는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나는 그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시대에 불행했고,그 역시 나를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을 면치 못했는지도 모른다” 김대통령이 저서 ‘나의 삶 나의 길’에서 밝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단상이다.10·26 직전 측근들을 통해 오랜 정적 박전대통령과 수차례 면담을 신청했으나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안타까움을 토로한 대목이다.김대통령이 대화론자임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비화임은 물론이다.
  • 한승헌 감사원장 내정자 발탁 배경

    ◎‘3·1명동사건’ 변론으로 DJ와 첫 인연/‘내란음모’ 연루 옥고까지 치른 인권변호사 신정부의 초대 감사원장으로 내정된 한승헌 변호사는 23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요청한 감사 사항에 대해 철저히 조사할 방침이며 새정부의 100대 과제를 각 부처가 제대로 수행하는지 면밀히 감사하겠다”고 밝혔다. 한변호사는 이날 내정 직후 기자들과 만나 “구정권하에서 저질러진 비리를 엄정히 감사해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청정한 사회를 이룩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겠다”며 초대 감사원장의 역할을 제시했다. ­소감은. ▲임명권자의 뜻을 받들어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국가기강과 공직사회의 정화를 위해 헌신하겠다. ­다른 공직들을 고사해 온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번에 감사원장직을 받아들인 이유는. ▲임명권자의 뜻이기 때문에 따른 것이다. ­정년때문에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데. ▲임기가 짧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정년(99년 9월) 때까지 생각했던 일을 하지 못하면 정상적인 임기 내에도 못할 것이다. 감사원장으로 내정된 한변호사는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창립이사(72년),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인권위원 등을 지낸 한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다.유료보다는 무료변론이 더 많을 정도로 소외계층 권익보호에 앞장서 왔다는 평이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의 첫 인연은 지난 76년의 ‘3·1 명동사건’.한변호사는 이 사건의 변론을 맡았고 지난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공범으로 연루,옥고를 치루면서 인연이 깊어졌다.그동안 김당선자가 두차례나 전국구 제의했으나 “법조계에 남겠다”며 고사했다는 후문이다. 외압에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원칙주의자지만 합리적 판단력도 겸비,신정부의 초반 개혁의 적임자라는 평이다.68년부터 국제펜클럽 회원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을 지낼 정도로 문학적 관심이 남다르다.부인 김송자씨(64)와 3남1녀,취미는 테니스.
  • 새 정부 입각 예상자 정당·출신별 하마평

    ◎국민회의/10명 입각 추천/안기부장 한광옥·이종찬/국방장관 천용택·나병선/외통 박정수 법무 박상천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이 지난 20일 당무보고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주체세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각료후보로 추천한 당내인사는 대략 10여명 정도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조대행 그러나 구체적인 인사를 거명하면 “그 사람 능력있는 사람이지”라는 식으로 확답을 회피,추천후보의 전체를 파악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다만 당 안팎의 얘기를 종합하면 안기부장 후보로 한광옥 노사정위원장과 이종찬 인수위원장을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조대행은 한위원장에 대해 “무슨일이든 잘 해낼 사람”이라고 말해 추천후보군에 포함되었음을 간접 시인했다.이위원장도 유력한 후보다.특히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와 박태준 총재가 안기부내 사정을 잘 알고 개혁을 추진하기에 적당한 인물이라며 김당선자에게 적극 추천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종반에 다시 힘을 얻고 있다. 경제통인 김원길 정책위의장과 장재식 의원은 재경부장관 후보로 거론된다.최근자민련 김용환 의원이 당내 잔류의사를 밝히면서 한때 무게가 실렸으나 김의원이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유력시되자 금융감독위원장 등으로 거론되는 등 우선 순위에서 밀리는 듯한 기류다. 박정수 의원은 외교통상부장관,박상천 원내총무는 법무장관 후보로 추천됐으며,최근 들어 정대철 부총재가 통일부장관으로 자주 오르내린다.천용택·임복진 의원과 나병선 전 의원은 국방장관 후보로 거론중이다.세후보 모두 김당선자와 면담한 자리에서 향후 국방개혁과 정책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보고해 높은 점수를 얻었다는 후문이다.김정길 김덕규 전 의원은 행정자치부장관 후보로 거론되고 있으며,정희경 의원은 교육부장관 후보로 추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교육부내 여론을 이유로 설훈 의원도 자주 거론된다.이해찬 의원과 최수병 특보는 기획예산위원회후보로 유력시된다. ◎자민련/사회·문화 기대/재경장관 김용환 1순위/교육 김현욱 통일 박철언/문화 이긍규 복지 주양자 자민련은 경제 및 사회·문화 분야를 중심으로 하마평이 무성하다.여기에 자민련의 배분비율을 놓고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하면서 긴장감을 더해가고 있다. 자민련 몫으로 될 가능성이 높은 재경부장관에는 김용환 부총재가 ‘0순위’후보다.그동안 고사의지를 밝혀온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그 강도가 약해지면서 주목된다.당 잔류를 전제로 허남훈 의원이 ‘대타’로 거명되고 있다. ‘원외 우선’원칙에 따라 주양자 부총재와 조부영 정치발전위원장과 최재욱 총재특보 등이 입각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다.국립의료원장 출신의 주부총재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여성각료 30%’ 약속을 업고 보건복지부장관 후보에 끼어든다. 조정치발전위원장은 행정자치부장관과 건설교통부장관 물망에 오르고 있다.최특보는 문화관광부장관 후보다. 강창희 총장과 이정무 총무,이태섭 정책위의장 등 당 3역은 당내 인물난 때문인지 꾸준히 입각설이 나돌고 있다.강총장은 정보통신부장관,이총무는 행정자치부장관,이의장은 과학기술부장관 후보로 거명되고 있다. 외교통상부 장관에는 교육부장관설이 있는 김현욱 의원이 거론되고 있다. 통일부장관에는 당내 대북통인 박철언 부총재와 이동복 명예총재비서실장이 유력한 후보로 얘기되고 있다.박부총재는 국민회의쪽에서 입각을 은근히 바라고 있다는 후문이나 김종필 명예총재측 반응은 시큰둥해 절충결과가 주목된다. 문화관광부장관에는 후보군이 많다.3선의 이긍규 국회환경노동위원장과 변웅전 지대섭 의원과 최재욱 의원 등이 후보군에 끼어들고 있다. 환경부장관에는 이긍규 의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외부인사/안기부장 조승형 급부상/산자 배순훈·한덕수 경합/국방 장성 농림 조홍래 ‘최강의 올스타팀을 구성하겠다’ 새정부 진용 구성과 관련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대선 공약이다. 전력이나 소속을 불문하고 능력위주의 인사를 펴겠다는 취지다.이에 따라 이번 조각에서도 국민회의­자민련 등 신여권 밖의 인사들이 상당수 수혈될 것으로 보인다.특히 이른바 ‘빅3’중 총리를 제외한 안기부장,감사원장에는 중량급 외부인사가 포진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감사원장에는 재야의 한승헌 변호사가 내정된 단계다.한변호사는 80년 ‘서울의 봄’ 직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당선자의 오랜 정치적 동지다.그러면서도 당선자로부터 전국구 등을 제의받았으나 고사한 적이 있는 강직하면서도 담백한 성품이 평가받고 있다는 후문이다. 조승형 헌법재판관은 안기부장 후보 1순위로 급부상하고 있다.국민회의내 후보들이 신·구주류로 견제 기미가 보이자 대안으로 떠올랐다.야당시절 김당선자의 비서실장을 지낸 조재판관은 합리적 성품으로 안기부 개혁을 무리없이 해낼 수 있는 적임자로 꼽힌다. 외교통상부에도 외부인사가 기용될 확률이 높다.전문성 강화 측면에서다.홍순영 주 독일 대사와 김철수 세계무역기구(WTO)사무차장,박수길 주 유엔대사 등이 그런 차원에도 거론된다.호남 출신인 이정빈 주 러시아 대사와 박건우 주미 대사 등도 후보군에 들어있다. 국방·법무장관은 국민회의 등 당인사와 외부인사 발탁 가능성이 현재로선 반반이다.국방장관감으론 장성 비상기획위원장이,법무엔 신건 전 법무차관과 정성진 전 대검중수부장이 설왕설래되고있다. 당면 경제난을 감안,전문경영인 출신을 산업자원부,정통부 등 경제장관에 기용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배순훈 전 대우전자 사장의 산업자원부장관설,신윤식 하나로통신 사장의 정통부장관설이 그럴싸하게 거론되고 있다.그러나 산업자원부장관으로는 한덕수 현 통산부차관의 기용설이 끈질기게 나돌고 있다. 당선자의 거국내각 성격의 조각방침에 따라 현정부 인사 일부와 야당측 인사 발탁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국민신당의 부산출신 서석재 의원이 해양수산부장관 후보로,조홍래 현청와대 정무수석이 농림수산부장관 후보로 각각 회자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 “50년만의 정권교체” 여야 중진 명암 교차

    ◎이종찬·한광옥 부총재 등 DJ맨 실세로 부상/자민련 김용환 부총재·TK 출신 의원 상한가/한나라·국민신당 소속 중진 대부분 입지 흔들 ‘50년만의 정권교체’가 말해주듯 97년은 여야 중진 정치인 간의 명암이 확연하게 갈라진 한해였다.DJT단일화를 이룬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청와대’ 접수일을 기다리며 집권당으로서 부푼 꿈을 키우고 있고 한나라당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야당으로서 새 출발을 해야하는 아픔을 겪었다. ▷국민회의·자민련◁ 국민회의에서는 이종찬 부총재가 단연 돋보인다.이번 대선에서 대선기획본부를 이끌며 자타가 공인하는 ‘일등공신’으로 떠올랐고 여세를 몰아 대통령직 인수위위원장을 움켜 쥐며 실세로 등장했다. 야권단일화를 총지휘했던 한광옥 부총재는 막판 ‘마무리 미숙’으로 역공에 시달렸지만 DJ(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전폭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내년 1월 출범하는 노·사·정 3자협의체 위원장으로 정치 전면에 등장한다.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은 당분간 DJ의 공백을 메우며 당을 이끌 전망이며 내년 지자제선거에서 서울시장 후보를 꿈꾸고 있다. 당의 안방 살림을 챙겨온 김충조 사무총장은 대임을 무리없이 소화,연임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고 박상천 원내총무는 TV선거의 총 산실인 방송선거 대책단을 이끈 공로로 앞으로 ‘여당’의 중심축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반면 DJ의 분신 권노갑 의원은 올해 초 한보비리 사건에 연루,옥고를 치렀고 결국 대법원 확정 판결로 금배지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당내 비주류를 이끌었던 김상현 의원도 ‘한보 파편’을 맞아 주춤했고,정대철 부총재는 파랑새 유세단을 이끌며 수도권 공략에 분전,재기를 노리고 있다. 자민련에서는 단연 김용환 부총재가 빛을 발하고 있다.JP(김종필 명예총재)의 대리인으로 야권단일화 협상을 주도,유리한 ‘전과’를 얻었고 대선승리 이후엔 12인 비상대책위에서 당선자측 대표를 맡아 명실상부한 실세임을 과시하고 있다. 자민련 TK(대구­경북)출신 의원들은 동서화합의 당위성과 희소가치로 인해 연일 상한가다.김부동 수석부총재와 박철언 부총재와 이정무 총무 등은 차기정권에서 비중있는 자리를맡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나라당◁ 대선패배 이후 야당으로 전락한 한나라당 중진들에게는 정치적 암운이 깃든 한해였다.정계 입문한지 2년도 안돼 대권에 도전한 이회창 명예총재는 정치 이상과 현실의 벽 사이에서 엄청난 괴리감을 느낀 한해였다.여권분열에 기인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명예총재는 여야간 정권교체를 가능케 한 장본인이라는 멍에를 안게 됐다.이명예총재는 그러나 차분한 연말을 보내면서 ‘깨끗한 정치’로 상징되는 ‘이회창식’ 정치실험의 실현을 위해 정치재기를 도모하고 있다. 당내 대통령후보 경선 이전부터 이명예총재를 지원했던 김윤환 고문도 이명예총재에 못지 않은 상흔을 입었다.‘킹 메이커’를 자처하던 김고문은 당내 최대 현안으로 떠오른 지도체제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다른 중진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하는 위기를 맞게 됐다. 조순 총재나 이한동 대표도 정치적 타격을 입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현재 당내 위상을 고려할때 이명예총재나 김고문에 비해 비교적 운신의 폭이 넓다.특히 대선패배 인책론에서 한발 비켜서있는 이대표는 거대야당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는 계기를 마련한 한해였다.조총재는 지난 1년동안 서울시장과 대통령후보,여당 총재,거대야당의 총재를 두루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엄청난 도약을 이뤘다.김덕룡 의원은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서 패하긴 했지만 경선결과에 승복해 이명예총재를 측면 지원하는 등 정치적 명분을 쌓아둔 터여서 재도약의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됐다. ▷국민신당◁ 이인제 고문은 경기지사직을 버리고 대선에 출마,3위를 했어도 4백90여만표를 득표,전국적인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반면 이만섭 총재는 신한국당에서 국민신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전국구 의원직을 상실했다. 문민정부의 주도세력이었던 민주계도 사분오열,명암이 갈렸다.대선정국에서 주도권을 잃고 전면에서 물러서야 했다.최형우 고문은 지난 3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평생의 꿈이던 대권도전이 좌절됐다.특히 국민신당을 선택한 서석재 의원은 민주계 좌장으로서의 입지마저 흔들리고 있다.
  • DJ시대 각광받는 참모진/이종찬·김원길·유종근·박지원·정동영

    ◎경제·외교·홍보분야 지근거리서 보좌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의 일산자택은 여전히 방문객들로 붐비고 있다. 선거전이나 다를 바 없다. 다만 요즈음 손님들 중에는 김당선자가 불러서 온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것 같다. 단독면담에 ‘성공’하는 경우가 드문데서도 알 수 있다. 김당선자가 야당 총재 시절처럼 주요 당직자등과 귀엣말을 나누는 풍경도 사라졌다. 당선자와 인동초의 세월을 지새운 동교동 비서출신 의원들도 일산자택에 얼씬도 않고 있다. 한보사건으로 옥고를 겪고 있는 권노갑 의원만이 아니다. 당선자의 눈빛만봐도 뜻을 알아차린다는 한화갑,남궁진,최재승,윤철상 의원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 측근들은 선거때 이미 ‘자팽’선언을 했다. 당선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청와대·정부직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공언한 것이다. 이들을 대신하듯 당선자의 지근거리로 다가선 일군의 참모진이 있다. 가신들의 2선후퇴로 생긴 빈공간을 신실세그룹이 메우고 있는 셈이다. 김대중 시대가 열리면서 가장 각광받는 인물은 역시 이종찬 대통령직인수위원장. 대선기획본부장을 맡아 탁월한 정보분석력과 기획력을 인정받은 여세를 몰아 인수위원장직을 따냈다. 내로라 하는 당료들의 ‘선망’어린 시선을 뒤로 한 채 차기 정부에서도 비중있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관측이다. 때마침 불어닥친 IMF한파 속에서 김당선자가 자주 찾는 인물은 김원길 정책위의장과 유종근 전북지사. 이들은 나란히 김당선자측과 정부가 공동으로 구성한 ‘12인 비상경제대책위원회’의 핵심멤버로 활약하며 당선자에게 수시로 조언하고 있다. 특히 유지사는 당선자의 경제외교 참모 자리를 굳히고 있다. 경제학박사에다 미국 뉴저지주의 수석경제자문관을 지낸 경력의 소유자다. 이를 바탕으로조지 소로스등 미국 재계 거물들과의 화상회의를 주선하기도 했다. 박지원 총재특보와 정동영 대변인,김한길 의원도 김당선자와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는 인물들이다. 이중 김의원은 당선자 및 차기정부 홍보를 전담하는 공보팀장과 인수위 대변인역에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다. 박특보도 언론계 등의 폭넒은 지면으로 각종 동향을 모아 당선자에게 수시 보고하고 있다. 공식 계선조직은 아니지만 소장파 보좌진인 ‘빠삐용’그룹도 주목의 대상이다. 장성민 부대변인을 중심으로 20여명의 30~40대 젊은 학계인사들의 모임으로 IMF구제금융등 등 매현안마다 당공식 보고서와는 별도의 ‘의견’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외에도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은 많다. 영남출신으로 발탁된 김중권 당선자비서실장과 엄삼탁 전 병무청장 등은 그 조짐이 보이는 인사들이다.
  • 관심끄는 권노갑 의원 거취

    ◎내일 대법 확정 판결 나면 의원직 상실/신병치료 병원서 “백의종군” 거듭 다짐 한보비리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고 있는 국민회의 권노갑 의원의 동정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26일 대법원 확정판결이 나면 의원직을 잃을 위기에 몰렸기 때문만이 아니다.그의 거취에 따라 새정부의 권력 밑그림이 상당부분 바뀔 수 있는 탓이다.그는 김대중 당선자와 오랜 정치적 격랑을 함께 헤쳐온 분신격이다. 그는 국민회의의 대선 승리 이후 한껏 몸을 낮추고 있다.신병치료차 입원중인 강북삼성병원에서 ‘백의 종군’의사를 거듭 표시했다.당선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측근들의 전언이다. 선거직전에도 “총재가 당선되면 나는 여기서 몇 년을 더 있어도 좋다”는 의사를 김후보에게 전달했다고 한다.이에 김후보가 측근들을 물리친 채 눈시울을 붉혔다는 뒷얘기도 들린다. 측근들은 24일 그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갈 것이라는 일부 보도에 낭패감을 표시했다.어쨌건 조용히 자숙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재를 뿌리고 있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면서도 현정부에서 매듭을 풀어주기를 기대하는 눈치가 역력하다.김차기정부에서는 오히려 국민적 시선 때문에 사면·복권등을 단행하기가 부담스러워 질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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