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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박 좌장’ 서청원 화려한 귀환

    ‘친박 좌장’ 서청원 화려한 귀환

    ‘원조 친박(친박근혜)’의 좌장이자 ‘친박 원로’인 서청원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가 30일 치러진 10·30 재·보궐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돼 국회에 복귀한다. 새누리당 당내 역학구도에 대변화가 예상되는 한편 서 의원의 현실정치 복귀가 현재의 경색된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새누리당은 재·보궐 선거가 치러진 경기 화성갑과 경북 포항남·울릉 두 곳 모두에서 낙승을 거뒀다. 서 의원은 경기 화성갑 보궐선거에서 62.7%(3만 7848표)의 득표율로 29.2%(1만 7618표)에 그친 민주당 오일용 후보를 배 이상의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포항남·울릉 재선거에서 당선된 새누리당 박명재 의원도 78.6%(5만 7309표)의 득표율을 올려 18.5%(1만 3501표)에 머무른 민주당 허대만 후보를 압도했다. 2004년과 2008년 두 차례에 걸쳐 각각 불법 정치자금, 공천헌금 수수 혐의로 옥고를 치른 서 의원의 정계 복귀는 박근혜 정부 출범과 정권재창출의 일등공신으로서 개인적인 명예회복은 물론 여권 내 역학구도의 재편을 의미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재·보선을 통해 먼저 새누리당에 복귀한 김무성 의원과는 차기 당권을 놓고 팽팽한 긴장관계를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 의원은 득표율 격차가 15% 포인트 안팎에 불과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을 깨고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돼 공천 과정에서 제기됐던 당내 일각의 반발 여론도 무마할 수 있게 됐다. 예상대로 완패한 민주당은 “선거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 재·보선 투표율은 33.5%로 집계돼 4·24 재·보선 당시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인 41.3%를 크게 밑돌았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 및 ‘대선불복·헌법불복’ 등의 정쟁이 심화되면서 민심이 외면한 결과로 풀이된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일제… 유신… 광주… 낮은 곳에서의 80년

    일제… 유신… 광주… 낮은 곳에서의 80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한국 진출 8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선교회 측은 한국 진출 80년이 되는 오는 29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의 주례로 개회미사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6개월 동안 다양한 기념행사를 갖는다고 10일 밝혔다. 이에 따라 내년 4월 27일까지 전국 순회 미사·음악회를 비롯해 6·25전쟁 골롬반선교회 순교자 영상전 등 80년사를 정리한 물품전시회 등이 잇따라 열리게 된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유일하게 평신도와 사제들로 구성된 국제 가톨릭 선교단체.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현장에서 함께 활동한다’는 설립 목적을 갖고 있다. 1933년 10월 29일 아일랜드의 선교사 10명이 부산항에 입항한 게 한국 진출의 시초. 선교사들은 대구교구 신학교에서 한국말을 배워 광주·목포·순천·제주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며, 유배지 흑산도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정치인들과 협상하지 말고, 한국어를 배우라’는 초대 감목대리 맥폴린 신부의 지침을 따라 빠르게 한국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활동 중인 사제 35명과 평신도 3명을 포함해 지난 80년 동안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회 신부는 266명에 달한다. 서울대교구 30개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131개 성당을 건축해 한국 교회에 넘겨준 것으로 집계된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거나 추방,가택 연금된 신부도 부지기수. 6·25전쟁 중에는 골롬반선교회 신부 7명이 순교했고, 박정희 정권 때에는 선교회에서 야학과 노동사목을 폈으며 지학순 주교 투옥사건을 계기로 인권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철수 지시를 받고도 “6·25전쟁 때에도 나가지 않았다”며 시민들과 함께한 일화는 유명하다. 정부는 1999년 선교회 신부 3명에게 독립유공훈장을 수여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인 아일랜드 출신 오기백(63·본명 도날 오 키프) 신부는 “사회가 변한 만큼 교회도 변했고 이에 따라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며 “지난 80년의 역사를 정리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겠다“고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서대문구 ‘오는 27·28일’ 독립민주 특구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서대문독립공원에서 독립과 민주의 참뜻을 되새기는 행사가 열린다. 아베 신조 정권 이후 급증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외면 등 일본 우경화에 대한 비난이 커지는 가운데 열리는 행사여서 더욱 뜻깊다. 서대문구는 오는 27일부터 이틀간 ‘2013 서대문 독립민주페스티벌’을 개최한다. 행사가 열리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독립운동가와 민주 인사들이 고욕을 치르고 희생을 당했던 곳이다. 또 독립협회가 자주 독립의 결의를 나타내기 위해 국민 성금으로 제작한 ‘독립문’이 있다. 27일 오후 7시부터 가수 박완규, 서문탁, 크라잉넛 등이 출연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돕기 위한 착한 콘서트’가 열린다. 콘서트 주제는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억하겠습니다’이다. 지역 케이블 방송을 통해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활동을 보여 주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추모관 건립’을 위한 성금도 모은다. 이어 28일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와 민주 인사 4명의 풋프린팅을 남기는 본 행사가 열린다. 독립운동가로는 일제강점기 학생결사체를 조직한 조성국(89) 지사, 한국광복군 제3지대 소속이었던 박찬규(85) 지사, 민주 인사로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명 서명운동과 YMCA 위장 결혼 사건을 이끈 백기완(81) 선생과 유신헌법 개헌청원서명운동에 참여했던 이규상(74) 목사가 참여한다. 풋프린팅을 기념하기 위한 ‘대학생연합 애국가 플래시몹’도 관심을 모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10월까지 한국 홍보 전문가 서경덕 교수의 특별전시회가 열린다. 이 외에도 ‘통곡의 미루나무 지키기 캠페인’, 청소년 역사길 걷기, 근현대사 탐구교실, 옥사 콘서트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홍혜정 기자 jukebox@seoul.co.kr
  • 37년만에 부친 무죄 입증한 김한길 “재판부 사과에 울컥”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시절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복역한 부친의 무죄를 37년 만에 입증했다. 김 대표는 13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고(故)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의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 재심에서 청구인 자격으로 진술했다. 김 대표는 “20대 청년으로 아버지의 재판을 지켜보던 제가 어느덧 60대가 됐다”면서 “37년이 지난 오늘 이미(1994년) 저세상으로 가신 아버지와 법정에서 민주주의를 놓고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그동안 심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은 가족들에게 사법부를 대신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김 대표는 선고 직후 “재판부의 사과에 울컥했다”면서 “유신시대를 극복하는 것은 물론 현재 맞닥뜨린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 대표의 부친은 1975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같은 당 중앙상임위원 박모씨의 공소장 사본 등을 언론에 배포했다가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옥고를 치렀다. 김 대표는 헌법재판소가 지난 3월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고, 대법원도 무효성을 확인하자 지난 6월 재심을 청구했다.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 [광복 68주년 의미 있는 행사 2題] 애국·진보운동 태두 조봉암 생가 복원한다

    [광복 68주년 의미 있는 행사 2題] 애국·진보운동 태두 조봉암 생가 복원한다

    제68주년 광복절을 맞아 독립운동가이자 ‘진보운동의 태두’로 추앙받는 죽산 조봉암(1899∼1959) 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누구보다 애국적인 삶을 살았지만 공산주의자로 몰려 정적인 이승만에 의해 ‘사법살인’된 조봉암을 되돌아보자는 움직임이 죽산의 고향인 인천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죽산 조봉암 기념사업중앙회’는 우선 생가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사업회는 죽산의 생가터를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로 확정하고 토지 매입, 생가 건립 방안을 인천시와 협의 중이다. 시는 이 사업에 10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여기에는 송영길 인천시장의 의지가 담겼다. 진보주의자인 송 시장은 “조봉암은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라며 “지금부터라도 죽산을 객관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노동운동 원조’ 지용택(76)씨가 이끄는 새얼문화재단이 주축이 돼 동상 건립운동도 추진하고 있다. 재단은 2011년부터 시민 성금으로 7억 5000만원을 모았다. 목표액 8억원이 달성되면 동상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할 계획이다. 조봉암은 30세 때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주동자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했다. 1920년 서울로 상경, YMCA 중학부에서 수학하다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준비한 혐의로 또다시 평양경찰서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제헌의원·초대 농림부 장관이 돼 농지개혁과 농업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1952년과 1956년 잇따라 제2·3대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차점으로 낙선했다. 그 후 진보당을 창당했으며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7월 형이 집행됐다. 그러나 2011년 1월 대법원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백범 김구 선생이 구한말 인천에서 감옥생활을 한 곳에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지역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힘을 얻고 있다. 인천중구의회 전경희 의원은 김구 선생이 옥고를 치렀던 중구 내동 감리서 터의 역사성을 활용,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인천 감리서는 김구 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분노로 일본인을 살해하고 수감된 곳이다. 1911년 독립운동을 하다 두 번째로 수감된 곳도 감리서다. 인천시는 중구에서 공식 요청이 오면 이를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 독립운동자금 모금 ‘여걸 4인’ 박승일 선생 등에게 건국훈장

    독립운동자금 모금 ‘여걸 4인’ 박승일 선생 등에게 건국훈장

    의학 견습생(박승일·당시 23)과 교사(이겸양·당시 24), 은행원(김용복·당시 29), 전도사(김성심·당시 26) 등 하는 일은 제각각이었지만 이들은 1910년대 말 항일 비밀결사의 동지였다. 일제의 서슬이 퍼렇던 1919년 11월, 평양을 근거로 활동하던 북장로파 애국부인회와 감리교파 애국부인회가 통합된 대한애국부인회 일원들이다. 일제 당국에 발각될 때까지 쌀 800여 가마를 살 수 있는 2400여원에 이르는 거액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1920년 10월 검거된 이들은 20대 중후반,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1~3년의 옥고를 치렀다. 대부분 1심에서는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가 2심에서 2~3년으로 형량이 늘었다. 서북 지역 3·1운동의 진원지인 평양에서 항일 비밀결사를 알아챈 일제가 이후 독립운동 발생의 싹을 자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는 제68주년 광복절을 맞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대한애국부인회 박승일 선생 등 ‘여걸 4인방’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는 것을 비롯해 207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29명(독립장 1, 애국장 34, 애족장 94), 건국포장 30명, 대통령표창 48명이다. 이 중 여성은 7명이다. 중국 지린(吉林)성 옌지(延吉)에서 ‘여자 독립군’이란 칭호를 받은 장태화 선생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 장 선생은 1924년 11월 독립운동 선전 문서를 배포하고 자금을 모집하다가 붙잡혀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형은 한강투신, 동생은 옥고 중…김종률·김종화 형제의 ‘수난시대’

    형은 한강투신, 동생은 옥고 중…김종률·김종화 형제의 ‘수난시대’

    김종률(52) 민주당 충북도당 위원장이 12일 오전 한강에 투신하면서 그의 굴고진 삶에 다시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특히 그의 동생 김종화(50) 전 한수원 부장도 현재 구속 상태인 등 형제가 수난시대를 겪어 관심을 모은다. 김종률 위원장은 벤처기업 알앤엘바이오 고문으로 활동할 때 금융감독원 연구위원에게 금품을 전달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아왔다. 금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A 연구위원은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됐으나 결백을 주장했다. 그리고 투신 전날인 11일 김 위원장은 서울남부지검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고, A연구위원에게 전달하기로 했던 수억원을 건네지 않은 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A연구위원은 무혐의 석방됐다. 김종률 위원장은 투신 직전 페이스북에 “부족하고 어리석은 탓에 많은 분에게 무거운 짐만 지우게 됐다. 과분한 사랑으로 맡겨주신 막중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심경을 밝혔다. 또 “(A연구위원에게 금품을 전달했다는) 자신의 거짓 진술로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피해를 끼쳐 미안하다”는 말을 주변에 하는 등 힘들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위원장의 동생인 김종화 전 한수원 부장도 고리원전에 근무하면서 부품 구매와 관련해 수억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고 있다. 지난달에는 수천만원을 받은 정황이 또 포착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김 위원장 역시 원전비리 수사선상에 올랐다는 설도 있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야권에서 ‘BBK 저격수’로 통했던 김 위원장의 수난시대는 지난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단국대 부지 매각에 개입해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으나 1심은 법률자문료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과 대법원에서 잇따라 유죄를 선고받아 2009년 18대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41일만에… ‘뚝딱 헌법’

    41일만에… ‘뚝딱 헌법’

    [두 얼굴의 헌법] 김진배 지음/폴리티쿠스/453쪽/2만 6000원 1948년 6월 중순, 서울 계동의 ‘계동궁’에선 헌법기초위원회의 서상일 위원장과 김준연 위원, 유진오 전문위원 등이 자리했다. 계동궁은 이승만의 이화장 등과 함께 해방정국 우익 거점의 하나인 인촌 김성수의 자택을 일컫는 말이다. 회의는 한국민주당 당수인 인촌이 주재했다. 어둡고 좁은 사랑방에선 의원내각제로 작성한 헌법초안을 대통령제로 뜯어고치는 작업이 이뤄졌다. 도쿄제대 독법(獨法)과 출신인 김준연이 등사판으로 민 초안 조문에 북북 줄을 긋고 또박또박 글씨를 써나갔다. 경성제대 법학강사 출신인 유진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가져와 뼈대를 만들고 살을 붙여 다듬었던 그는 애초 내각책임제 주창자였다. ‘유진오 헌법’이라 불리던 이 초안은 이렇게 ‘김준연 헌법’으로 바뀌었다. 인촌과 각별한 사이였던 유진오는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데는 원칙적으로 찬성할 수 없다”며 자리를 떴다. 이 같은 희한한 풍경은 이승만 당시 국회의장의 고집에서 비롯됐다. 제헌의회 임시의장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선생님’이라 불리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 “대통령제가 아니면 민주주의가 안 된다”며 의원들을 다그쳤다. “여러분이 그런 헌법을 만들겠다면 그런 정부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겁박 외에도 “지금 국회에는 어떻게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며 공산주의자의 멍에를 덧씌우려 했다. 오늘날 ‘종북주의자’ 논쟁과 같이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밀어붙이면 그만이었다.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김약수 의원은 미국식 대통령제 예찬론자인 이승만 의장에게 “대통령제에 상당한 결함이 있다”며 남미 제국의 빈번한 혁명을 예로 들었다. 그의 예언은 이후 박정희·전두환 등 장군들의 쿠데타를 겪으며 적중했다. 환갑을 넘긴 대한민국의 헌법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빛바랜 사진 속 제헌의회의 근사한 모습만 접했던 세대에게 헌법의 탄생과정은 충격적이다. 책은 당시 제헌의회의 모습을 마치 TV를 보듯이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신문기자, 재선의원 출신으로 폐암을 극복한 팔순의 저자가 취재 일선에서 만난 지인들의 증언과 국회 속기록 등의 방대한 자료를 정리해 썼다. 책은 1948년 7월 17일 토요일 오전 10시 국회의사당(옛 조선총독부) 본회의장에 공포된 제헌 헌법이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급박하게 만들어진 인스턴트 법안이라고 설명한다. 5월 30일 소집된 제헌국회가 불과 41일 만에 ‘압축심의’해 뚝딱 내놨다. 후일 진보당 사건으로 억울하게 죽은 조봉암 의원은 노사관계 조항을 명확히 넣지 못하자 속기록에 구두로 취지를 밝히기도 했다. 그해 7월 초 헌법안 독회 과정을 보면 이승만 의장이 얼마나 빨리 헌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썼는지 알 수 있다. 마치 연극 대사를 읽는 것처럼 ‘제 몇 조 무엇무엇’이라고 읽기가 바쁘게 ‘이의 없습니까?’하며 의사봉을 땅, 땅, 땅 신나게 쳐댔다. 심지어 역사적인 헌법안의 표결은 기본이어야 할 재석이 얼마인지 그 중 몇 명이 찬성했는지 기록도 없다. 어떻게든 미군정 당국과 약속한 8월 15일 광복절까지 정권을 미군정으로부터 이양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쫓기고 있어서였다. 저자는 “누가 기초하고 손을 들어 헌법을 통과시켰든 간에 대한민국 헌법의 최대 공로자와 수혜자는 이승만 자신이었다”고 말한다. 다만 제헌 헌법을 만드는 이면에는 ‘10만 선량’(당시 선거구당 유권자는 10만명 안팎)이라 불리던 제헌의원들의 고뇌도 담겨 있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헌법기초위원회의 무기명 비밀투표로 정해졌다. 청일전쟁 뒤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마관조약에서 비롯된 국호를 놓고 ‘배냇병신’이란 비하가 나왔고 고려공화국, 조선공화국은 강력한 국호 경쟁자였다. 어떤 이는 ‘태동화국’을 제의했다. 수십 종류인 태극기의 어느 도안을 채택할지와 영토조항을 넣어야 할지도 논란거리였다. 국호에 군국주의의 냄새가 나는 대(大)자를 넣을지도 의견이 맞섰다. 하지만 헌법은 시간에 쫓겨 친일파 청산과 적산기업 처리 등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민족의 생채기로 남았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권력자들의 욕심에 밀려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며 수난을 겪었다. 헌법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흉기도 되고 민주주의의 보루도 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부고] 쌍화탕·우황청심원 만든 ‘한방계의 대부 ’별세

    [부고] 쌍화탕·우황청심원 만든 ‘한방계의 대부 ’별세

    광동제약 창업주인 최수부 회장이 24일 강원 평창에서 휴가를 보내다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77세. 숨진 최 회장은 맨손으로 굴지의 제약업을 일군 입지전적 인물로 통한다. 1934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11세 때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바람에 일본에서 다닌 ‘초등학교 3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다. 해방 직후 담배·엿·찐빵 장사와 돼지 장사를 하며 재산을 모은 그는 1963년 군 제대와 함께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의 집에서 한방의약품인 ‘경옥고’를 만들어 팔았다. 이것이 오늘날 광동제약의 모태가 됐다. 제약업계에서 최 회장은 싼 한약재를 사용하지 않는 ‘최씨 고집’으로 유명했다. 직접 약재를 검수하고 확인하는 그의 모습이 광고 영상으로 텔레비전에 소개되기도 했다. 이후 ‘쌍화탕’과 ‘우황청심환’ 등을 잇따라 출시하면서 견고한 시장을 구축했으며, 최근에는 ‘옥수수 수염차’와 ‘비타500’으로 국내 음료 시장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차지했다. 경찰은 이날 낮 12시 30분쯤 평창군 대관령면의 한 골프장 사우나장에서 최 회장이 쓰러져 있는 것을 종업원이 발견해 신고했다고 밝혔다. 골프를 같이 친 일행은 경찰에서 “골프를 마치고 함께 사우나장에 있다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최 회장이 나오지 않아 종업원에게 어찌 된 일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이날 오전 일행과 부부 동반으로 골프를 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강한 체력을 타고나 최근까지도 틈나는 대로 등산을 즐겼으며, 골프 실력도 싱글에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일희(66)씨와 장남 최성원(44) 광동제약 사장 등 1남 4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28일 오전 8시 30분 경기 평택시에 있는 광동제약 식품공장에서 열린다. 심재억 전문기자 jeshim@seoul.co.kr 평창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은…초등 중퇴생의 ‘최씨 고집’ 신화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은…초등 중퇴생의 ‘최씨 고집’ 신화

    24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최수부(78) 광동제약 회장은 맨손으로 제약업계에 우뚝선 뚝심으로 유명하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 이후 귀국했지만 지독한 가난으로 초등학교를 그만두고 나무를 해 시장에다 팔며 생활하는 엄혹한 시절을 경험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가장이 돼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최수부 회장은 모래밭에서 참외를 키워 팔고 담배 장사와 엿장수 등 무수히 많은 경험을 했다. 최수부 회장은 군에 제대한 뒤 제약사 영업사원을 하다 월급을 모은 돈으로 1963년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의 집을 사서 한방의약품 ‘경옥고’를 제조했다. 이것이 광동제약의 시초다. 최수부 회장은 싼 한약재를 사용하지 않는 ‘최씨 고집’으로 유명했다. 직접 약품 재료를 검수하고 확인하는 최수부 회장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영상광고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쌍화탕과 우황청심환 등 잇따라 한방의약품으로 화제를 모았고 비타500이라는 비타민 음료로 음료 시장에서도 발군의 영역을 구축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옛 영등포 교도소 터 복합단지로 개발

    서울 구로구 고척동 100 일대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백기완(81) 통일문제연구소장, 김지하(72) 시인, 이부영(71) 전 열린우리당 의장, 김근태(1947~2011) 민주당 상임고문 등이 거쳐 갔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던 재야 인사나 대학생들은 셀 수도 없다. 격변의 시대를 살던 민주화 인사만 다녀간 것은 아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인질극을 벌였던 지강헌(1954~1988), 고문기술자 이근안(73),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71) 등도 거쳐 갔다. 1949년 문을 열었을 땐 부천형무소였다. 이후 행정구역이 경기 부천에서 서울 영등포구로 바뀌며 1968년 영등포교도소라는 친숙한 이름을 갖게 됐다. 1980년 구로구에 편입된 뒤에도 같은 이름을 유지하다가 2011년 5월 서울남부교도소로 간판을 바꾼 데 이어 10월 천왕동으로 옮겼다. 이후 고척동 부지엔 높은 담과 교정 시설 건물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10만 5000㎡ 규모의 서울남부교도소·구치소 옛 부지가 주거·문화·상업·행정·복합단지로 탈바꿈한다. 구로구는 25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와 함께 수립한 교정시설 이적지 복합 개발 지구단위 계획에 대해 다음 달 4일까지 주민 공람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 계획에는 공동주택 2300여 가구 건설, 상업시설 조성(5만 4000㎡), 구로세무소·보건지소 등 복합공공청사 건립(4950㎡), 공원(7507㎡) 및 도로(1만 4504㎡) 조성 등이 담겼다. 구는 주민의견 검토 뒤 구 도시계획위원회의 자문을 거쳐 8월쯤 서울시에 결정을 요청할 예정이다. 올해 안에 시 결정 고시가 나면 내년 상반기에 본격 개발을 시작한다. 주민들은 구 중심 주택가에 위치한 교도소·구치소에 대해 끊임없이 이전을 요구해 왔다. 이에 따라 구는 법무부, 토지주택공사와 협약을 맺고 14개 민간 출자 회사가 참여하는 프로젝트파이낸싱(PF) 방식으로 천왕동에 신축 시설을 지어 이전시켰다. 이성 구청장은 “경인로에 접한 옛 교도소 쪽은 주상복합 단지로, 주택가와 맞닿은 옛 구치소 쪽은 순수한 아파트 단지로 개발해 생활 중심 지역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위기의 한국사 교육] “학생들 친일청산·민주화 이해 못해 區에서 역사관 관할, 격에 맞지 않아”

    [위기의 한국사 교육] “학생들 친일청산·민주화 이해 못해 區에서 역사관 관할, 격에 맞지 않아”

    “서대문형무소는 친일과 반독재의 살아 있는 현장이죠. 하지만 예전과 달리 친일파 청산과 민주화의 당위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아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입구에서 ‘친일인명사전 학교보내기’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 김영수(47)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은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방문객 중 관심을 갖고 운동의 취지를 물어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장년층이어서다. 자신을 86학번이라고 소개한 김 위원은 “시위에 나서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꼈던 우리 세대와 요즘 ‘1020세대’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오는 10월이면 문을 연 지 105주년을 맞는 서대문형무소는 우리 역사 교육의 살아 있는 현장이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이 형무소는 1998년 11월부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해 관람객 수는 57만 9115명, 이 가운데 외국인도 6만 2888명으로 집계됐다. 박경목(42)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은 “주로 부모님과 함께 체험 학습을 하러 온 학생들과 단체 관광객이 많다”면서 “외부 강연을 나가다 보면 10·26이나 5·18은 물론 경술국치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누가 저격했는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휴일인 지난 9일 가족들과 함께 충북 청원군에서 상경했다는 윤종필(45)씨는 “암울한 역사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직접 찾았다”면서 “학교에서 역사교육을 등한시하기 때문 아니겠나”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서울시나 문화재청이 아닌 서대문구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관할한다는 점은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춰 격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대문형무소는 백범 김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등 독립운동가 9만여명이 투옥된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는 천안 독립기념관만큼이나 민족의 아픔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 10월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곳은 1923년 5월 ‘서대문형무소’로 바뀌었고, 1945년 8·15 해방 이후부터 1987년 10월까지 서울교도소·서울구치소로 운영됐다. 박 관장은 “개발독재시대 정부의 역사인식을 생각하면 지금은 그나마 다행”이라면서 “역사 교육을 보완하기 위한 체험장으로서 전국 학교를 대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우리 현대사의 현장을 널리 알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故 김재위 의원 38년 만에 무죄

    다방에서 지인과 정치적인 잡담을 하다가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옥고를 치른 고 김재위(1921~2009년) 전 의원이 38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 김종호)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과 유언비어 날조 등의 혐의로 1975년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받았던 김 전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고 6일 밝혔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1호는 표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 등을 심각하게 제한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 명백하다”며 “이는 위헌·무효로 이 사건 공소사실도 범죄가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당시 공소사실에 따르면 김 전 의원은 1974년 5월 서울 광화문 근처 한 다방에서 지인들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과 장시간 중대한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는 대화를 했다. 제4대 국회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민의원, 6대 국회에서 민중당 전국구 의원을 지낸 김 전 의원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후 정계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2003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김정탁(59) 전 한국언론학회 회장 등 자녀 5명은 2009년 김 전 의원이 별세한 뒤 부친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한재희 기자 jh@seoul.co.kr
  • 유관순 열사의 고독한 외침 되새긴다

    유관순 열사의 고독한 외침 되새긴다

    서울 서대문구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렀던 서대문형무소 여옥사를 원형 그대로 복원해 다음 달 1일 개관식을 갖는다고 27일 밝혔다. 여옥사는 1918년 일제가 서대문형무소에 여성 독립운동가를 별도 수감하기 위해 신축했다. 1979년 서울구치소로 운영할 당시 여옥사는 철거됐고 교도관들 사이에서 여옥사 터에 대한 내용이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왔다. 1990년 정부가 여옥사 터를 발굴해 지하공간을 확인하고 1992년 지하감옥이 복원됐다. 200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종합 보수 정비 과정에 일제 강점기 당시 여옥사 관련 설계도면이 발굴됐다. 구는 2011년 도면에 따라 문화재청과 서울시 예산을 지원받아 복원사업을 진행해 왔다. 구는 복원사업과 함께 175명의 무명 여성독립운동가를 새로 발굴하는 성과도 거뒀다. 여성 독립운동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훈을 받은 여성은 170여명으로 전체 독립운동가 1만 6000여명 가운데 1.7%에 불과했다. 구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상징하는 유관순 조각상을 설치하고 세브란스 간호사로 재직 중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노순경, 수원지역 기생 출신 독립운동가 김향화, 버스 차장으로 독립운동으로 투신했다가 모진 고문으로 순국한 고수복 등 여성 독립운동가의 사진자료도 새로 발굴해 전시한다. 구는 개관식에서 여옥사 복원 직무유공 표창, 극단 서라벌의 상황극 ‘재현 1919’, 이정희 명인의 ‘도살풀이춤’ 등 기념공연을 펼친다. 문석진 구청장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한 뒤 항거하는 수많은 애국지사를 투옥시키기 위해 지은 감옥이 서대문형무소”라면서 “여성 독립운동가의 얼을 기리고 독립·자유·평화·민주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현장으로 우뚝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부고] ‘일제 식민교육 저항’ 애국지사 이봉양 선생

    일제강점기 식민교육에 저항했던 애국지사 이봉양 선생이 18일 오전 6시 별세했다. 89세. 평안북도 용천 출생인 고인은 1938년 7월 김원구, 전약용 등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 알리기 운동을 비롯해 역사 연구에 매진했다. 1939년 9월 지우개에 태극기를 새겨 친구들에게 나눠 주는가 하면, 신의주 중학교에 다니던 1940년 9월에는 하숙집에서 일본의 황국식민교육정책에 항거하기로 뜻을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1942년 3월 이러한 활동이 일본 경찰에 적발됐고, 고인은 태극기와 역사책을 압수당한 뒤 체포됐다. 이 선생은 이듬해 4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 2남 2녀가 있다. 발인은 20일 오전 7시,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4묘역이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영안실 1호실. (02)2258-5940.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부고] 항일애국지사 김정진 선생

    항일 학생결사단체인 ‘태극단’에 가입해 항일투쟁을 벌인 애국지사 김정진 선생이 15일 별세했다. 88세. 경북 봉화 출신인 선생은 1943년 4월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항쟁을 목적으로 결성된 ‘태극단’에 가입해 전국의 학교와 지역별로 조직을 갖춘 뒤 본격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1943년 5월 밀고로 발각돼 체포된 선생은 모진 고문 끝에 1944년 1월 징역 단기 2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고 김천 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으며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옥했다. 정부는 1963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각각 수여했다. 빈소는 중앙보훈병원. 발인은 18일 오전.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02)2225-1444.
  •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명사가 걸어온 길] 6. 민주화의 사제(상) 함세웅

    맑은 얼굴 맑은 눈/ 비 온 뒤라면 무지개 걸려/ 그러나 독재나 어떤 잔재 따위에는/ 진흙탕 싸움을 사양할 수 없다/ 그 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앞에서/ 지(知)와 신앙으로 집을 지었다/ 그는 도시의 신부다(고은 시인의 ‘만인보’ 중 ‘함세웅’ 편의 일부) ‘민주화의 사제’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1970~1980년대 불끈 쥔 주먹으로 독재에 맞서면서도 늘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를 고은은 ‘도시의 신부’라고 불렀다. 서슬 퍼런 박정희 유신 정국 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1974년)을 만들어 박종철군 고문 사망(1987년), 삼성 비자금 조성(2007년) 등 묻혀 있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며 질곡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딪친 그였지만 이름 앞에 ‘명사’(名士)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 영 어색하다고 했다. 겸허함을 지켜야 할 사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거북하다고도 했다. 나이 일흔이 넘도록 흔한 회고록 한 권 내지 않은 이유다. 함 신부는 지난해 8월 사제 생활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인권의학연구소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는 매주 월요일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국미사에 참석하는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영원한 현역을 꿈꾸는 함 신부를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 인권의학연구소에서 만났다. 함 신부는 광복을 3년 앞둔 1942년 6월 서울의 용산구 원효로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 때문에 가족 중에 가톨릭 신자는 없었지만 집 근처에 천주학당(현 성심여고)이 있어 가톨릭과 서양 문화를 자연스레 접했다. 여덟 살 되던 1950년 6·25가 터졌다. 소년 함세웅은 전쟁의 참상을 바라보며 어렴풋하게나마 신앙에 눈을 떴다. “어느날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쾅 하는 굉음이 나는 거예요. 한낮인데 하늘이 시커매. 나중에 들었는데 B29 폭격기들이 한강 임시다리를 폭파하는 소리였대요. 너무 놀라 친구들과 어디로 우르르 몰려갔는데 거기가 성모병원이었어요.” 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피 칠갑을 한 환자들이 신음하고 있었고 수녀들이 그들을 간호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빚은 전쟁, 그 속에서 생사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을 지켜본 경험은 그의 첫 종교적 체험이었다. 그때부터 가톨릭 신자가 됐다. “평범한 신자였던 제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어요. 성당에서 복사(천주교 미사 때 신부를 돕는 신자)로 활동했는데 그해 11월 2일 위령의 날 신부님과 함께 서울 잠원동, 논현동 일대의 공동묘지를 찾게 됐지요. 너른 터에 빼곡히 들어선 묘지는 정말 충격이었어요. ‘아, 누구나 다 이렇게 묘소에서 끝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6·25와 공동묘지의 체험이 겹쳐 결국 사제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셈이지요.” ‘천국에 온 것 같았다’는 회고처럼 신학교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잘 맞았다. 4·19 혁명이 전국을 휩쓴 1960년 가톨릭대에 입학한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육군 일반병으로 입대했다. “훈련소에서 헌병으로 차출됐어요. 이야, 이제부터 폼나게 군대생활 좀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배치된 곳이 부산과 광주(경기)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였어요. 그곳에서 군생활을 꼬박 2년간 했지요. 군대는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체험한 첫번째 모순의 사회였어요. 불합리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낙오하지 않으려면 숨죽인 채 순종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독재를 겪으며 ‘대한민국 모든 남성이 군에서 모순의 사회를 배우고 길들여졌구나’하는 생각에 마음 아팠지요.” 신학 교수의 꿈을 품은 함 신부는 1965년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길에 오른다. 당시는 4년 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해 독재와 탄압을 본격화하던 때였다. 햇수로 9년을 로마에 머무는 동안 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나라 밖에 있다 보니 3선 개헌, 유신체제 선포, 학생과 민주인사들에 대한 투옥과 고문 등 뉴스를 외려 국내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빨리 접할 수 있었어요. 마음 아프고 부끄러웠어요.” 1973년 귀국해 마주친 조국의 첫인상은 낯설었다. 마포대교 등에는 헌병이 총을 들고 서 있었고 서울역에서는 중·고등학생을 동원한 반공 궐기대회가 수시로 열렸다. 그야말로 병영사회였다. 서울 연희동 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있던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결정적 사건이 1973년과 1974년 잇달아 터졌다. 김대중(1924~2009) 납치사건과 지학순(1921~1993) 주교의 구속이었다. 특히 1974년 7월 지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으로 15년형을 받자 성난 사제들이 성당 밖으로 뛰쳐나왔다. 함 신부는 이 과정에서 젊은 신부들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당시 사제단에 참여했던 문정현(73) 신부는 함 신부에 대해 “타고난 조율가이자 소통가”라고 평가했다. 문 신부는 “대표가 없는데도 사제단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박학하고 판단이 빠른 함 신부 덕이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지 주교의 구속에 대해 “돌이켜보니 은총의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제들이 사회 참여를 시작하면서 유신체제의 모순에 대해 눈 떴다는 얘기다. 유신독재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맞서던 그는 1976년 3·1 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구속됐다. 첫 투옥은 시련이자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 등에서 1년여 옥고를 치른 그는 “제2의 신학교 생활 같았다”고 했다. 차디찬 감옥에서 자신의 인간 본성을 엿본 웃지 못할 촌극도 있었다.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밤늦게 구치소에 갔는데 교도관이 제 방이라며 안내했어요. 근데 완전히 쓰레기통이야. 그래도 내가 살 방이니 의지를 갖고 아침에 청소를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어요. 근데 다 치워놓으니까 교도관이 ‘방 배치를 다시 해야 하니 나오라’는 거예요. 좀 억울하잖아요. 그래서 ‘싫다. 살 준비 다했으니 내 방이다’라고 하니까 교도관이 ‘교도소에 내방 네 방이 어디 있느냐’고 해요. 근데 옮겨 보니 새 방이 너무 깨끗한 거예요. 청소 좀 했다고 교도소 방 옮기기 싫어한 제 모습이 참…. 덧없는 소유욕이 드는구나 하는 생각에 혼자 웃었어요.” 함 신부는 교도소에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함께 꼬박 1년간 재판을 받으며 기도와 독서로 마음을 달랬다. 함 신부가 그 지긋지긋하고 끔찍했던 유신독재의 종말을 목격한 곳도 교도소였다. 1979년 미사를 집전하면서 농민 오원춘이 정보기관에 납치·감금당한 일에 대해 강론하다가 경찰에 연행돼 영등포 교도소로 끌려갔다. 두번째 옥살이가 시작됐다.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암살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박정희 피살 소식을 접하며 성경에 나오는 이집트 노예 해방의 기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유신독재의 핵심을 제거한 일은 높이 평가해야 해요. 그는 1979년 부마항쟁을 현장에서 지켜본 뒤 박 대통령에게 민심을 수습할 정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했어요. 그러나 박 대통령은 경호실장 차지철과 나눈 대화에서 ‘그까짓것 100만~200만명쯤 죽여도 문제 없어. 3·15 부정선거 때 경무대 경호책임자인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린 죄로 처형당했는데 내가 발포 명령을 한다면 나를 어떻게 할 거야’라고 했다지요.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10·26 의거를 결행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죠.” 그는 1970~19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기적과도 같은 민초들의 힘을 경험했다고 말했다. “제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 받을 때 피로를 못이겨 눈 감고 있었더니 혼자서 저를 감시하고 있던 중정 요원이 ‘신부님, 정신 차리세요. 소신껏 답변하셔야 해요’라며 응원하더군요. 힘이 불끈 솟았지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때 옥중에 있던 이부영 전 의원의 쪽지를 전달한 사람도 이름 없는 양심적인 교도관이었어요. 사도행전을 보면 감옥에서 천사들이 감옥 문을 열어 사도들을 내보내 줬다는 구절이 있잖아요. 그런 기적을 현실에서 체험한 거죠.” 1970년대 함 신부와 함께 군부독재 권력과 싸웠던 이들 중 지금은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적잖이 있다. 이를테면 김지하 시인이나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같은 사람들이다. “한 사람을 평가할 때는 시기별로 구별해서 봐야 해요. 인간은 원래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예컨대 김지하 시인도 1970년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청년 김지하와 1990년대 이후 현실과 야합한 장년 김지하로 나눠 볼 수 있겠죠. 윤리신학적으로 봐도 사실 선과 악, 천사성과 악마성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어느 쪽이 마음속 주도권을 잡느냐의 문제죠. 일제시대 때 최남선, 이광수 같은 분도 일면으로는 얼마나 훌륭했나요. 변절한 것은 시대적 한계를 넘지 못한 그들의 한계죠.” 함 신부는 잘못된 사회·정치 제도를 바로잡는 데 교회(종교)가 앞장서야 한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왜 하필 교회일까. 그는 “불의 없는 사회를 만들어 사람들이 양심껏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종교적 인간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에 종교가 사회 정화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꽤 오래 전의 일화 하나를 끄집어냈다. “1970년대 어느 부활절 때였어요. 자정 가까운 시간인데 국영기업에 다닌다는 한 40대 신도가 성당에 왔어요. 술에 취했는데 고해성사를 보겠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어차피 오늘 반성해도 내일 저는 똑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어요. 그냥 저와 술 한잔 하시고 용서해주세요’하는 거예요. 또 ‘신부님은 세상을 모릅니다. 부정과 타협 안 하면 살 수가 없어요. 집에 노모까지 5명이 사는데 회사 월급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뇌물받아 아래, 위와 나눠 가져야 해요’라고 하더군요. 양심적으로 살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그러면 당장 식구들이 굶어 죽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군요.” 함 신부는 당시 30대의 젊은 사제였다. 그 신자에게 ‘그래도 천주교 신자로서 양심껏 사세요’라고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도 그 사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자들이 양심껏 살도록 도우려면 결국 옳지 못한 사회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교(政敎) 분리는 사실 폭압자들의 논리예요. 종교의 이름으로 불의에 항거하면 ‘예배당, 불당에 가서 기도나 하세요’하는 식이죠. 성경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을 껴안아야 해요.” (하편에서 계속)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부고] 재선 국회의원 김한수씨

    제8대,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한수 전 의원이 지난 9일 새벽 별세했다. 78세. 고인은 1971년 신민당 후보로 충남 논산에서 출마해 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반독재·반유신 투쟁을 벌이다 이듬해부터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민락재단·경로의집·나눔의 샘 등 복지재단을 세운 고인은 1985년 공주·논산에서 다시 당선돼 신민당 사무차장과 민주당 정무위원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옥희씨와 1남이 있다. 빈소는 경기 의정부성모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은 12일 오전 9시 30분. (031)820-3468.
  • “독립운동 김창숙 계승 ‘심산償’ 부활시켜야”

    “독립운동 김창숙 계승 ‘심산償’ 부활시켜야”

    7년째 명맥이 끊어진 ‘심산상(償)’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심산상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창립자인 심산(心山) 김창숙(1879∼1962) 선생의 뜻을 기려 1986년에 제정된 상이다. 1일 성균관대 등에 따르면 이 학교 교수들의 연구 모임 ‘심산사상연구회’가 제정한 심산상 시상은 2006년 제17회를 끝으로 7년째 중단된 상태다. 심산은 조선시대 성균관을 계승, 1946년 9월 성균관대를 창립해 1956년까지 초대 학장과 총장을 지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직후 ‘을사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려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엔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항거하다 공직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성균관대 교수 20여명은 1978년 심산사상연구회를 만들었고 1986년부터는 불의에 저항하고 민족정신을 높이는 학술·실천 활동을 해 온 지식인과 단체를 선정해 심산상을 수여해 왔다. 김수환 추기경, 송건호·리영희·강만길 선생, 민족문제연구소, 박원순 서울시장, 백낙청 교수 등이 이 상을 받았다. 그러나 2006년을 끝으로 시상이 중단됐다. 사회의 무관심과 변화한 시대상 등이 이유라는 게 성균관대 관계자들의 말이다. 연구회의 명칭도 2010년 ‘사상’이란 말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일부 의견에 따라 ‘심산 김창숙 연구회’로 바뀌고 활동도 크게 축소됐다. 연구회는 최근 들어 모임을 재정비하고 심산상을 부활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한 교수는 “요즘 교수들이나 과거 정권의 눈치를 봐야 했던 재단과 학교는 심산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요즘 같은 때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그의 정신이 더욱 절실하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심산상의 중단은 학교의 수치”라면서 “학교의 지원을 통해 권위 있는 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유신 반대’ 인명진 목사 등 6명 39년만에 재심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에 반대한 혐의로 옥고를 치른 인명진(67) 목사가 39년 만에 재심을 받게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5부(부장 최동렬)는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 혐의로 실형을 받은 인 목사 등 6명에 대해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고 27일 밝혔다. 재심 대상에는 인 목사 외에 김진홍(72) 전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 이해학(68) 목사 등이 포함됐다. 재판부는 “재심 대상 판결은 위헌인 긴급조치 1호에 근거해 유죄를 선고했다”며 “헌법재판소법에 따라 피고인들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긴급조치 제1호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함으로써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이는 유신헌법에도 위배되고 현행 헌법에 비춰 봐도 위헌”이라고 덧붙여, 무죄 선고 가능성을 비쳤다.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8일 재야 민주인사들의 유신헌법 개헌청원 서명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긴급조치 1호를 선포했다. 이 조치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구속돼 비상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인 목사는 긴급조치 선포 직후 서울 종로구 기독교회관에서 긴급조치 철회 등을 위한 시국선언 기도회를 개최하고 선언문을 배포했다가 불법 구금됐다. 당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김 전 의장과 이 목사 등에게 징역 15년을, 인 목사 등에게 징역 10년을 각각 선고했다. 인 목사 등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도움을 받아 2011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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