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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영 양천구청장, “양천 30년 미래 설계, 새로운 미래도시 양천 만들겠다”

    김수영 양천구청장, “양천 30년 미래 설계, 새로운 미래도시 양천 만들겠다”

    “올해는 양천구가 개청한 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제 성년이 된 양천구는 다시 한 번 도약해야 합니다. 양천구를 유능하고 따뜻한 행정 조직으로 만들고 괄목할 성과를 확인한 지금 새로운 출발을 선언하려 합니다. 새로운 미래도시 양천을 만들기 위해 오는 6월 민선 7기 양천구청장에 출마하겠습니다.”김수영 서울 양천구청장이 19일 오는 6·13 지방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김 구청장은 이날 오후 3시 구청 4층 공감기획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재선 도전 포부를 밝혔다. 그는 “개청 30년을 맞아 양천은 새롭게 도약해야 한다”며 민선 7기 양천의 비전으로 ‘사람 중심 YES 양천’을 제시했다. “사람 중심 YES 양천은 사람 중심 일자리로 활력이 넘치는 젊은 도시 Young 양천, 사람과 환경이 조화롭게 공생하는 환경도시 Eco 양천, 사람을 위한 4차 산업혁명시대를 준비하는 미래도시 Smart 양천입니다.” 김 구청장은 대학 운동권 시절 겪은 고초도 들려주며 재선 의지를 다졌다. “용왕산 자락에서 대학생활을 하며 독재정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세 번의 옥고를 치루면서도 정의를 향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미래를 위한 준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제 삶으로 증명하겠습니다. 촛불혁명의 정신, 문재인 정부와 함께 완성하겠습니다.” 김 구청장은 “혼신의 힘을 다해 민선 6기를 성과 있게 이끌었고, 민선 7기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가겠다”며 “더 나은 양천을 위해 구민들께서 저의 든든한 힘이 돼 달라”고 당부했다.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 공천관리위원회는 지난 16일 6·13 지방선거 서울 25개 자치구 구청장 후보자 면접 심사에서 1차로 김 구청장과 정원오 성동구청장을 양천구와 성동구의 단수 후보로 결정했다. 김 구청장은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다. 2014년 7월 민선6기 구청장으로 취임했다. 민주당 소속 서울 구청장 중 유일한 여성 구청장이다. 다음은 일문일답. ➜민선 6기 성과는. -4년 전 ‘세월호’ 참사의 눈물을 딛고 우리 아이들을 지키는 엄마구청장이 되겠다는 포부로 이 자리에 섰다. 구청장에 당선돼 임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구민 안전을 챙겨왔다. 재난안전체험장을 설치해 현재까지 2만 5000여 구민 교육생을 배출했다. 이제 양천구는 서울시는 물론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안전 도시로 평가받고 있다. 제 자신이 자식을 키우며 일하는 엄마 입장이었기에 아이와 엄마가 함께 행복한 도시를 만들고 싶었다. 양천구 전역에 어린이집을 확충하고, 1동 1도서관 약속을 성공리에 마무리 했다. 혁신교육지구 사업으로 학부모들이 지역 사회와 소통하며 교육 주체로 나서기 시작했다. ➜복지 분야도 호평을 받는데. -4년 전 약속했던 촘촘한 그물망 복지는 마침내 ‘나비남 프로젝트’라는 새로운 복지모델을 창출해 중앙정부와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벤치마킹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 복지행정을 크게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부패와 혼란의 대명사 양천 행정을 반듯하게 바로잡았다. 공직 사회 청렴도는 서울시 최고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최하위를 맴돌던 양천구 시설관리공단의 경영평가도 전국 최상위 등급을 달성했다. ➜대외 평가는. -제안활성화 부문 대통령 표창, 현장민원처리 최우수상 등 140여회에 이르는 대외 수상과 30억원이 넘는 상금을 받았다. 제 자신도 한국 매니페스토 공약이행평가에서 3년 연속 최우수등급을 받았고, 전국공무원들이 뽑은 최고의 지방자치단체장 CEO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다. 이 모든 성과는 구민들 도움으로 성취한 것이다. 구민들 지지와 성원, 참여와 동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구청장직을 후보 등록 전까지 할 건가. -올해는 양천구 개청 30주년이 되는 해다. 5월 16일 구민의 날이 양천구 생일이다. 구청장 없이 생일잔치를 할 수는 없다. 마음은 급하지만 5월 16일 구민의 날 기념식까지는 구청장직을 유지하고 그 후 후보 등록을 하는 게 주민들에 대한 예의라 생각한다. 한 달도 채 안 남았지만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 주민 이야기에 귀 기울이겠다. ➜새로운 미래도시 양천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이나 공약이 있나. -세세한 걸 이 자리에서 발표하는 건 좀 그렇다. 후보 등록하고 순차적으로 말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선 비전만 말씀드리겠다. 민선 6기 동안 교육·복지·안전을 엄마의 마음으로 챙기겠다고 했는데, 그 기조는 민선7기에도 유효하다. 주민들이 다른 지역과 비교해 양천구는 주거도시로 사람들이 잠만 자고 가는 곳이라고 말씀을 하셔서 서부트럭터미널 개발, 목동 홈플러스 옆 넓은 부지 활용 등을 통해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오고 싶어 하는 도시로 만들겠다. ➜재선 출마 이유는. -지난 4년간 참 열심히 했다. 아직 결과를 보지 못한 게 많다. 1동 1도서관 끝은 중앙도서관 건립이다. 중앙도서관 건립은 행정적 절차는 모두 끝나고 한참 설계 중이다. 올해 말 착공 예정이다. 혁신교육지구 사업도 민선6기 시작했는데, 안정적으로 정착되려면 민선7기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주민들께서 지난 4년을 평가, 민선 7기 구청장으로 어떤 구청장이 돼야 양천의 기조를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을지 판단해 주실 거라 믿는다. 그리고 지금은 양천구 개청 30년을 맞아 30년 후를 준비해야 하는 전환점이다. 새로운 미래 도시를 구상하고, 사람·환경·일자리·스마트 도시 기반을 다져야 한다. 이를 할 수 있는 민선 7기 구청장 적임자는 저라고 본다. ➜구청장께서 가진 강점은. -주민들께서 여성 구청장이기 때문에 편하게 스스럼없이 언제든지 소통할 수 있는 게 강점이라고 한다. 오늘 한 분이 찾아와 어제 고등학교에 갔는데 한 여고생이 김 구청장은 동네 어디서나 쉽고 편하게 만나 얘기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등학생이 그런 얘기를 할 정도면 구민들은 더 크게 느끼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양김과 각별’ 6선 김상현 前의원 별세

    ‘양김과 각별’ 6선 김상현 前의원 별세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던 후농 김상현 전 국회의원이 노환으로 18일 별세했다. 83세. 김 전 의원 측 관계자는 “김 전 의원이 노환으로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작고했다”고 말했다.1935년 12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난 김 전 의원은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 등 ‘3김’이 정치를 이끌어갈 당시 이들 양김 계파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6선을 지낸 고인은 생전에 재치 있는 연설과 지략, 폭넓은 인맥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김대중이 정치인 지망생 시절 운영하던 웅변학원에서 처음으로 만나 인연을 맺었다. 두 사람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으며 김대중을 따라 정계에 입문했다. 김 전 의원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는 국회의원의 사퇴로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서울 서대문 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신군부가 꾸민 김대중 내란 음모 조작사건에 연루돼 투옥된 그는 1984년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을 대리해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창립하고 공동의장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85년 선명야당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신한민주당 창당에 앞장섰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이 분열하면서 김 전 의원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대신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를 지지했다. 김 전 의원은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참여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때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으나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는 탄핵소추에 찬성했다. 탄핵 찬성으로 인해 2004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 정계은퇴했다. 민주당 김영호 의원이 그의 아들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대표 마당발로 평가받던 김 전 의원은 타협과 절충을 잘하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희원씨, 아들 윤호(우림FMG 대표이사)·준호(우림FMG 전무)·영호씨와 딸 현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2호, 발인은 22일, 장지는 경기 파주시 나자렛묘원이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운암 김성숙선생 49주기 추모재

    운암 김성숙선생 49주기 추모재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의 49주기 추모재가 오는 12일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회장 함세웅) 주최로 오전 11시 열린다. 이번 추모재에서는 운암선생 유족, 관련단체장, 회원 등 500여명이 참석하며 개식, 국민의례, 운암 김성숙 선생 약사보고, 내빈추모사, 합창단 추모곡, 헌화 및 분향, 조총발사 및 묵념, 그리고 운암 김성숙 선생 묘소 참배 순서로 진행되며 군악대 반주에 맞춰 부천 석왕사합창단의 추도곡, 역사어린이합창단의 공연으로 진행되며 국방부의장대, 수도방위사령부 군악대가 참여한다. 운암 김성숙 선생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나 19세에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출가했으며, 1919년 ‘조선독립군 임시사무소’ 명의의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르는 등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중국으로 건너간 운암 김성숙선생은 조선의용대, 일제 주요 기관 파괴를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의열단에 가입하고 ‘반역사’(反逆社)라는 이름의 학생단체를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을 배후 조종하며 항일투쟁 선봉에 서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였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기념사업회에 전달한 추도사에서 “다툼을 그치고 서로를 존중하며 대한민국의 앞길을 여는 일이야말로 운암 선생의 고귀한 뜻을 받드는 길일 것입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는 이 봄에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의 한길을 걸으셨던 선생의 가르침이 우리와 늘 함께하길 바라는 절실함으로 삼가 분양합니다”라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강수지 증조부, 알고보니 독립운동가 강학린 목사

    강수지 증조부, 알고보니 독립운동가 강학린 목사

    강수지 증조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눈길을 끌고 있다.지난 4일 방송된 MBC 예능프로그랭 ‘할머니네 똥강아지’에서는 김국진, 강수지, 양세형, 장영란, 김영옥의 출연자들이 조부모 이름을 떠올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2016년 설문 조사에 따르면, 조부모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는 손주의 비율은 57%로 나타났다. 스튜디오 출연자들도 조부모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수지는 증조부의 이름 ‘강학린(姜鶴麟)’을 기억해냈다. 강수지가 증조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독립유공자이기 때문인 것. 강수지의 증조부는 일제 강점기 고향인 함북 성진읍에서 목회를 하던 목사로 1919년 3월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고 그로 인하여 옥고를 치렀다. 사진=MBC ‘할머니네 똥강아지’ 연예팀 seoulen@seoul.co.kr
  • [부고] 항일 학생운동 이주호 선생 별세

    [부고] 항일 학생운동 이주호 선생 별세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서 항일 학생운동을 이끈 애국지사 이주호 선생이 지난 1일 오전 별세했다. 97세.2일 광복회에 따르면 선생은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0년 교내 비밀결사인 문예부에 가입해 항일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듬해에는 동료들과 조직을 확대해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했다. 민족차별 반대운동 등을 주도하던 선생은 1941년 7월 교내 비밀결사가 일제 경찰에 적발돼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최순종씨, 아들 구섭·문섭·명섭씨, 딸 청희·정희씨가 있다. 빈소는 부산보훈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3일 오전 7시 30분,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이다.
  • 강서 허준박물관 ‘인삼, 건강장수’ 특별전

    강서 허준박물관 ‘인삼, 건강장수’ 특별전

    경옥고 청자단지 등 100점 전시 서울 강서구는 허준박물관 개관 13주년을 맞아 지난 23일 기획전시실에서 영주시 인삼박물관과 공동으로 특별전 ‘인삼, 건강장수를 염원하다’를 개최했다고 25일 밝혔다.오는 10월 5일까지 열리는 이번 특별전에선 일제강점기 황경화가 그린 ‘인삼도’를 비롯해 선조들이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인삼 문양을 넣어 만든 100여점의 생활용품과 인삼 관련 사진 자료를 관람할 수 있다. 경옥고를 담아 판매하던 청자 단지도 있다. 구 관계자는 “경옥고가 무병장수에 효과가 있다는 동의보감 속 설명을 떠올리면 선조들의 삶에 동의보감이 어떻게 녹아 있는지 알 수 있다”고 전했다. 노현송 강서구청장은 “건강과 장수에 대한 바람은 국경과 세대를 초월한 인류 공통의 소원”이라며 “선조들의 염원이 담긴 유물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윤상에 ‘종북 프레임’ 씌운 보수에 김형석이 던진 묵직한 팩트

    윤상에 ‘종북 프레임’ 씌운 보수에 김형석이 던진 묵직한 팩트

    가수 겸 작곡가 윤상이 우리 측 예술단을 이끌고 평양 공연을 지휘한다. 예술단 음악감독으로 내정된 윤상은 20일 열리는 남북실무접촉의 수석대표로 나서 북측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과도 만난다.남북 화해 무드 속에 10여년 만에 열리는 우리 예술단의 방북 공연에 보수 쪽에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일부는 윤상의 성(姓)을 구실 삼아 종북 프레임을 덧씌우고 생트집을 잡았다. 이에 대해 윤상과 절친한 작곡가 김형석은 “윤상은 가명이고 본명은 이씨”라며 통쾌한 반격을 가해 화제를 모았다. 방자경 ‘나라사랑 바른학부모 실천모임’ 대표는 18일 자신의 트위터에 “문보궐 정권은 반 대한민국 세력들과 한편을 먹는다”고 주장하며 우리 예술단의 방북 공연 음악감독에 내정된 윤상을 겨냥하는 글을 이어나갔다. 방 대표는 “윤상씨라면 김일성 찬양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간첩 윤이상, 5.18 광주폭동 핵심으로 보상금 받고 월북한 대동고 출신 윤기권, 김일성이 북한에서 만든 5.18 영화의 주인공 윤상원, 이들 중 누구와 가까운 집안입니까?”라고 주장했다.방 대표의 트윗은 오류 투성이의 ‘가짜뉴스’에 가깝다. 먼저 윤이상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하지 않았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전남도청을 점거 중에 계엄군에 사살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들불야학’을 운영하다 노동현장에서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됐다. 이 곡의 작곡가는 당시 전남대 경영학과 학생이던 김종률이다. 백기완 선생이 옥중에서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를 소설가 황석영이 일부 바꿔 노랫말을 붙였다. 작곡가 윤이상은 한국 태생이었으나 대부분 독일에서 활동했으며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 ‘심청’ 등을 작곡했고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를 기리는 ‘광주여 영원히’ 등 관현악도 발표했다. 윤이상은 1967년 북한을 방문했다가 재독 인사를 간첩단으로 조작한 이른바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다.방 대표는 또 자신이 만든 종북 프레임의 핵심 인물이 모두 윤씨라는 점을 들어 윤상을 공격하려 했지만 윤상의 본명은 이윤상이다. 작곡가 김형석은 방 대표의 트윗에 “본명은 이윤상입니다만.”이라는 답글을 남겼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묵직한 팩트 공격”이라며 김형석을 두둔했다. 한편 대중문화계에서 활동해온 인물이 남북 접촉에서 수석대표로 나서는 것은 윤상이 처음이다. 통일부는 윤상을 음악감독으로 선임한 배경에 대해 “발라드부터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에 이르기까지 7080에서 아이돌까지 두루 경험을 갖고 있어 발탁했다”고 밝혔다. 윤상의 이름과 관련해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은 “북측에 우리측 대표단 명단을 통지할 때 예명인 ‘윤상’으로 통지했다”면서 “동일인임을 확인하는 그런 절차는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이응노와 수덕여관을 넘어서 만나는 예산 수덕사(修德寺)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이응노와 수덕여관을 넘어서 만나는 예산 수덕사(修德寺)

    “모두 같은 민족 아닙니까?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동백림에 간 것은 자식의 소식을 듣고, 거기서 만날 수 있다고 해서 간 것입니다...그 아들을 만나게 해 주겠으니 오라고 했을 때, 거절합니까, 만났다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그만둡니까.” 세계적인 추상화의 거장,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1904~1989) 화백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법정 구속되기 전의 마지막 최후 진술이다. 동백림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으로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들과 교민들이 동베를린에 위치한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아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음악가 윤이상을 비롯하여 천상병 시인 등이 연루되었고, 결국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이가 한 명도 없는 ‘구름같은’ 간첩단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응노는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난다. 이후 이응노는 수덕사 앞 수덕여관에서 삶의 한 부분을 내려 놓는다. 이응노의 삶과 수덕여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충청남도 예산 수덕사로 가 보자. 충청남도 덕숭산(德崇山)에 위치한 수덕사(修德寺)는 충청도의 절답다. 겉으로는 무심한 듯 소란스럽게 이름 내지는 않았으나, 내실은 진즉부터 으뜸인 불교 도량임에는 분명하다. 왜냐하면 수덕사는 백제계 사찰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유서 깊은 절집일 뿐만 아니라, 맞배지붕 양식으로 이름 알려진 고려시대(1308년)의 대웅전이 세월에 푹 곰삭은 나무 기둥들과 함께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한 때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로 불리어 알려질만큼 훌륭한 비구 스님들을 배출하는 명문 선원인 ‘견성암’도 수덕사에 위치한다. 여기에 더해 현재 수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5대 총림 가운데 하나인 덕숭총림으로 많은 스님들이 강학과 참선정진하는 종합교육도량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충청남도 내포 일대의 36개 말사를 관장하는 제7교구본사이기도 하니 중부 지역에서는 단연 손꼽히는 사찰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수덕사를 더욱더 유명하게 만든 것이 바로 수덕사 일주문 옆에 위치한 수덕 여관이다. 수덕여관은 이응노 화백이 1945년 3월, 일본 패망을 앞두고 징용을 피해 수덕사 인근 비구니가 쓰던 절집을 손수 구입한 곳이다. 이후 이응노 화백의 처(妻) 박귀희 여사(1909~2001)가 이곳을 여관으로 운영하며 프랑스로 떠나버린 남편을 기다리면서 자식을 길러내었다. 지금도 수덕여관 주변에는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 사건의 옥고를 치른 후 이곳에 머물면서 손으로 직접 새긴 문자 추상 암각화가 곳곳에 남아 있다. 만물의 흥망성쇠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진 이 암각화는 지금도 50여년 전의 이야기를 생생히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수덕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충청도 근역에는 단연 으뜸인 사찰이다. 수덕여관의 역사를 함께 2. 누구와 함께? - 나이드신 부모님과 천천히 3. 가는 방법은?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안길 79 - 예산버스터미널 → 수덕사 (요금 1,760원/ 1시간 소요) 4. 감탄하는 점은? - 고려시대의 대웅전, 수덕여관 인근의 이응노 화백의 암각화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주말에는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수덕여관 인근의 암각화, 대웅전, 범종루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소머리국밥 ‘한일식당’, 곱창 ‘신창집’, 수제비 ‘대흥식당’, 국수 ‘쌍송국수’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sudeoksa.com/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추사고택, 한용운 생가터, 장영실 과학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수덕사는 가파른 계단이 많은 사찰이어서 천천히 올라가도록. 이응노 화백의 삶을 이해한 뒤 수덕여관을 둘러 본다면 한 예술가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술로 이해할 수 있다.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부고] 학생 독립운동 조직 ‘태극단’ 결성 서상교 선생

    [부고] 학생 독립운동 조직 ‘태극단’ 결성 서상교 선생

    일제강점기에 학생 조직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 서상교 선생이 별세했다. 95세. 광복회는 14일 서상교 선생이 전날 오후 4시 59분쯤 숙환으로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선생은 대구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2년 당시 학생조직 ‘태극단’을 결성해 동료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다. 태극단은 일제에 항거하는 유인물을 뿌리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제에 발각됐으며, 당시 선생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유가족으로는 배우자 이휘 여사와 아들 보혁(전 경북대 전자공학과 교수), 보현(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씨, 딸 명주, 보아, 보희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1호실이며 발인은 16일 오전 8시,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이다.
  • “30년 미래 내다본 ‘YES 양천’… 가족친화도시로 새 출발”

    “30년 미래 내다본 ‘YES 양천’… 가족친화도시로 새 출발”

    김수영 서울 양천구청장이 ‘양천 30년 대계(大計)’로 ‘YES 양천’과 ‘가족친화도시’를 꺼내 들었다. YES 양천과 가족친화도시 추진은 지난해 여성가족부로부터 여성친화도시 인증을 받으면서 탄력이 붙게 됐다. 김 구청장은 14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올해는 양천구가 개청한 지 30년이 되는 해이고, 앞으로 30년을 내다보고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할 새로운 변화의 출발점”이라며 “YES 양천과 가족친화도시 조성을 통해 활력 넘치고 아이도 어르신도 여성도 남성도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한 도시를 만들겠다”고 말했다.→YES 양천은 무슨 뜻인가. -Y는 영(young)으로, 잠만 자는 곳이 아니라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오고 싶어 하는 젊고 활력 있는 도시를 말한다.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업과 중소기업지원센터를 유치하려 하고 있다. 중소기업지원센터를 유치하면 중소기업이 오게 되고, 청년들이 자연스럽게 일자리를 찾아서 오게 된다. 양천구에 오고 싶어 하는 본사도 있다. 목동 중심축인 홈플러스 옆의 큰 부지를 비롯해 단순히 주차장으로만 이용되는 목동 테니스부지와 목동유수지 등을 기업 유치를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려 한다. 도시 전체에 에너지와 활력이 넘치도록 하겠다.→최근 오목교역 인근에 문을 연 ‘무중력지대 양천’도 청년 유인책 중 하나인가. -청년들이 사회의 억압적인 중력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공간이자 청년들의 모임 거점 공간이다. 무중력지대 양천 개관으로 청년들이 활기차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앞으로 오목교역 일대를 ‘청년존’으로 만들어 청년 일자리 메카가 될 수 있도록 하겠다. →E는 뭔가. -에코(eco)로, 녹지공간을 잘 활용하는 지속가능한 환경도시를 말한다. 양적 성장 위주의 무분별한 개발은 더이상 답이 아니다. 녹지를 생각하고 물·자원·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양천구에는 다른 구에 비해 공원이 많다. 공원을 생태환경 공간과 가족친화공원으로 정비, 온 가족이 먼 곳이 아니라 김밥을 싸서 집 근처 공원을 찾아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 S는 스마트(smart)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도시도 스마트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다양한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활용해 누구나 살기 좋은 똑똑한 도시를 만들겠다. →가족친화도시 추진 배경은. -사회적 이슈가 된 저출산·고령화 문제는 이미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지역 사회가 앞장서서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도시,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남성이 육아하기 편한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지난해 12월 여성친화도시 인증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아동친화도시 인증 및 출산친화도시 조성, 고령친화도시 인증을 단계적으로 실현해 가려 한다. →여성친화도시 인증은 어떻게 받게 됐나. -2016년 여성친화도시 조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고, 여성친화도시 조성에 본격 착수했다. 여성들에게 필요한 경제 교육이나 생활강좌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양천맘카페’ 개관, 정책 제안·생활 불편사항 모니터링 활동을 하는 여성 서포터스 21명 위촉, 야간 귀갓길을 동행해 주는 여성안심귀가스카우트·안심하고 택배를 받을 수 있는 여성안심택배 운영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 왔다. →아동친화도시 조성은 어떤가. -지난해 아동친화도시 조성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올 1월 아동친화도시 추진 지방정부협의회에 가입하고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앞으로 아동친화도시 전담기구, 아동친화도시 추진위원회, 아동청소년의회, 옴부즈맨(독립적 인권기구)을 구성하는 등 아동친화도시 조성을 위한 중장기 및 세부계획을 세우고 하나씩 추진하려 한다. →출산친화도시는. -일·가정 양립을 위한 가족친화적 직장문화와 육아친화적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 아이를 낳는 것뿐 아니라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책들을 집중 추진했다. 구립어린이집 30곳 확충을 비롯해 아이들의 창의력·모험심을 키워 주는 ‘창의어린이놀이터’와 아빠 육아를 위한 ‘베이비 존’, 부모의 양육부담을 덜어 주고 육아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해우리 아이맘카페’, 고가의 장난감을 저렴한 가격에 대여하는 ‘장난감 도서관’ 등을 조성했다. 민간보육시설 보육료 차액 지원을 통해 실질적인 무상보육을 실현했고, 지난해 1월엔 ‘출산친화도시조성에 관한 조례’도 제정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고령친화도시 인증도 추진하고 있다. →고령친화도시 인프라는 대부분 갖춰진 걸로 안다. -고령친화도시는 건강도시와 일맥상통한다. 건강도시는 환경·교통·지역경제·문화 등 주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게 핵심이다. 그동안 공공보건 체계에 대한 주민 접근성을 향상하고 종합적인 보건서비스 제공을 위해 목동·신월동·신정동 권역별로 보건지소를 세웠다. 개울도서관 내 건강센터, 양천 둘레길, 안양천 산책로, 18홀 규모의 안양천 파크골프장, 신정3지구 생활체육시설, 제2양천체육공원 등 주민들이 지역 사회 내에서 건강을 챙길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지난해 대외 평가는 어떤가. -서울시·자치구협력사업 전 부문 수상, 행정안전부 ‘제안 활성화 우수기관’ 최우수기관 선정 및 대통령 표창 수상, 보건복지부 ‘찾아가는 복지서비스 기반 마련 분야’ 우수구 선정, 한국공공자치연구원 주최 ‘올해의 지방자치 CEO’ 선정 등 43개 분야에서 호평을 받으며 10억 1000만원의 시상금을 받았다. 안으로는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밖으로는 주민들에게 신뢰받는 행정을 구현한 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 →정부의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 강화 발표 이후 목동 재건축에도 빨간불이 켜진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정부에서 안전진단을 강화하겠다고 하니 재건축이 아예 막힌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재건축은 추진 절차나 과정이 짧아도 7~8년, 길면 10년이 걸린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목동아파트는 주차난이 심각하다. 안전 문제도 우려된다. 정부에 주민들의 이런 입장을 전달, 안전기준 강화와 관련한 세부적인 요건을 일부 완화받기도 했다. →요즘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 운동이 핫이슈인데. -미투 본질은 민주화 저변을 확대하는 또 다른 민주화 과정이다. 사회 권력에서 소외돼 있거나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사람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또 다른 민주화 과정이기에 적극 지지한다. →올 한 해 마음가짐을 담은 사자성어가 있나. -중후표산(衆煦漂山)이다. 많은 사람이 내쉬는 따뜻한 숨결은 산도 움직인다는 뜻으로, 마음이 하나로 모여 한곳을 향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민들과 소통·공감·참여의 가치가 구현되는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주민들과 한마음이 돼 젊고 활력 있는 가족친화도시를 만들겠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김수영 구청장은 누구 양천구 개청 이래 최초의 여성구청장이다. 전국적으로 9명뿐인 여성 자치단체장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으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 3번의 옥고를 치렀다. 여성희망일터지원본부 본부장, 여성이 만드는 일과미래 이사, 새정치민주연합 여성리더십센터 부소장 등을 역임하며 여성 권익 보호에 힘을 쏟았다. 주민과의 소통을 구정 운영 제1 기조로 삼고 있다. 주민들에게 ‘엄마구청장’으로 통한다. ■양천구는 어떤 곳 근린공원 100여개 갖춰…서울서 가장 안전 인증 올해 서른 살이 됐다. ‘태양과 냇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고장’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교육특구답게 집에서 10분 이내면 도서관에 닿을 수 있다. 100여개의 근린공원과 신정산·용왕산·갈산·지양산을 잇는 13㎞의 생태순환길은 도심 속 자연을 선사한다. 동쪽으로 길게 흐르는 안양천은 자전거도로·축구장 같은 체육시설과 휴게시설, 아름다운 풍경으로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생활 속 안전습관을 몸에 익히는 양천생활안전체험관을 비롯해 다양한 안전정책으로 지난해 서울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인증받았다.
  • ‘용인 3대 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 ‘고향 안주 꿈’ 이뤘다

    ‘용인 3대 독립운동가’ 오희옥 지사 ‘고향 안주 꿈’ 이뤘다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다”는 경기 용인 출신 ‘3대 독립운동가‘ 오희옥(92·여) 지사가 꿈을 이뤘다.용인시는 3.1절인 1일 원삼면 죽능리 527-5번지에 오 지사가 거처할 1층 단독주택을 완공해 준공식을 가졌다.‘독립유공자의 집’으로 명명된 이 주택은 438㎡ 대지에 방 2개와 거실, 주방을 갖췄다. 주택 입구에는 ‘독립유공자의 집, 지사님의 고귀한 희생에 존경과 경의를 표합니다’ 라는 글이 새겨진 나무 문패가 걸렸다. 이날 준공식에는 정찬민 용인시장, 오 지사의 가족, 시민, 정해주 경기동부보훈지청장, 김중식 시의회 의장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오 지사는 “동포들이 목숨을 바쳐 독립만세운동을 한 3.1절에 아름다운 집이 완공돼 너무 감격스럽다. 집을 짓는 데 도움을 주신 용인시민과 시에 감사하다”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용인시는 준공식에서 오 지사의 고향집 건립을 위해 애쓴 14개 기업과 단체에 감사패와 표창장을 전달했다. 오 지사의 고향집은 용인시 공무원·시민의 성금, 해주오씨 종중의 땅 기부, 용인시 관내 기업들의 재능기부가 하나로 합쳐 지은 ‘용인의 집’이기도 하다. 정부가 아닌 기초지방자치단체에서 시민들과 함께 독립유공자를 위한 집을 마련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오희옥 지사 고향정착 프로젝트’는 지난해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원의 보훈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오지사가 여생을 고향인 용인에서 살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고 이를 들은 용인시민들이 집 마련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며 시작됐다. 주택 건립을 위해 오 지사의 집안인 해주오씨 종중에서 고향인 원삼면 죽능리에 집터를 무상으로 제공했다. 정시장과 용인시 공무원들도 가세해 건축비로 2133만원의 성금을 모아 전달했다.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원삼면기관단체장협의회에서도 각각 100만원, 500만원을 후원했다. 용인지역 기업들도 힘을 보태 건축설계와 골조공사, 토목설계와 시공, 조경, 붙박이장과 거실장 등을 무료로 재능 기부했다.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과 소파·식탁 등 생활물품도 들어왔다. 정 시장은 축사에서 “독립지사와 애국지사에게 감사하고 보살피는 것은 우리의 도리이자 의무”라면서 “오 지사님을 고향에 모실수 있게 도움을 준 모든 용인시민에게 감사하다. 오 지사께서 고향에서 즐겁고 편안한 여생을 보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오 지사는 용인 원삼이 고향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독립운동을 벌였다. 할아버지 오인수(1867∼1935) 의병장은 1905년 한일병탄조약 체결 이후 용인과 안성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아버지 오광선(1896∼1967) 장군은 1915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독립군단 중대장, 광복군 장군으로 활약했다. 1927년 만주에서 태어난 오 지사도 두살 터울인 언니 오희영(1925∼1970) 지사와 함께 1934년 중국 류저우(柳州)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첩보수집과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등 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오 지사는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현재까지 생존한 여성독립운동가는 오희옥, 유순희, 민영주 지사 등 3명이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탑골공원 3·1만세 시위 주도한 김원벽 선생 ‘이달의 독립운동가‘

    탑골공원 3·1만세 시위 주도한 김원벽 선생 ‘이달의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는 28일 광복회 및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3·1만세시위를 주도한 김원벽(1894∼1928) 선생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황해도 은율군 출신인 선생은 한국기독교대(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1월 경성(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대표 회동에 참석해 독립운동 참가를 결심했다. 3·1만세시위 당시 민족대표가 유혈 충돌을 우려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 선생을 비롯한 학생 대표는 탑골공원에서 자체적으로 독립선언을 하고 남대문과 대한문 양쪽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했다. 3월 5일에는 남대문역(서울역) 광장에서 2차 만세시위를 벌였고 이로 인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잡지 ‘신생활’과 일간지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했으나 일제에 의해 폐간되자 낙향한 후 1928년 별세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5·18특별법·근로시간 단축법안 본회의 통과

    김성곤 사무총장 임명안 가결 ‘지방선거 선거구 획정‘ 처리 무산 국회는 28일 본회의를 열고 광주민주화운동 강제 진압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 설치를 담은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과 근로기준법 개정안 등을 의결했다. ●진상조사위원 9명… 활동기간 최대 3년 5·18 특별법은 과거에 다 밝히지 못한 5·18 민주화운동 강제 진압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진상조사위를 설치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진상조사위는 국회의장이 1명, 여당이 4명, 야당이 4명 추천해 모두 9명의 조사위원으로 구성된다. 2년간 진상규명 활동을 하고 1년 이내의 범위에서 연장할 수 있다. 진상조사위는 조사 내용에 범죄 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면 검찰총장에게 고발하고 범죄 혐의에 대해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인정되면 수사기관에 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 국회는 또 현행 근로시간을 주 7일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의결했다. 시행 시기는 사업 규모별로 ▲300인 이상 사업장은 2018년 7월 ▲50~299인 사업장은 2020년 1월 ▲5~49인 사업장은 2021년 7월이다. 다만 30인 미만의 사업장은 2022년 말까지 노사 합의에 따라 특별 연장근로 8시간을 추가 허용한다. 이와 함께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1948년 11월 30일부터 발생한 사망 또는 사고를 조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군 사망사고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도 통과됐다. ●3000만원 뇌물 채용비리자 명단 공개 국회는 채용비리 수사 또는 감사 의뢰 대상이 된 연루 공공기관 임원의 직무 정지 근거를 신설한 공공기관 운영법 개정안도 의결했다. 개정안은 채용비리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임직원이 3000만원 이상의 뇌물을 받아 가중처벌 대상일 경우 명단을 공개하도록 했다. 채용비리에 연루된 공공기관(기타공공기관 제외)의 경영평가 등급, 성과급은 수정할 수 있다. 또 소득 수준 상위 10%를 제외한 가구의 만 5세까지 아동을 상대로 월 10만원의 수당을 주는 ‘아동수당법안’을 의결했다. 아동수당은 오는 9월부터 아동 238만명을 대상으로 지급될 예정이다. 국회는 그렇지만 오는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제주도와 세종시를 제외한 광역의원을 증원하는 내용을 담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처리할 예정이었지만 본회의 시간 안에 처리하지 못해 2월 임시국회 처리는 무산됐다. 국회는 김성곤 전 의원을 신임 국회 사무총장으로 임명하는 안도 가결했다. 신임 김 사무총장은 미국 정부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고 옥고를 치렀던 재미교포 로버트 김의 친동생으로도 유명하다. 서울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세종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황용순·유종남 선생 68년 만에 건국훈장

    식민통치하인 1943년 전북 전주의 전주사범 교직원과 학생 신분이었던 황용순(당시 21세)과 유종남(당시 18세). 엄혹한 시기에 두 청년은 민족의식 관련 서적을 서로 돌려 읽으며 의기투합했다. 일본군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밤새 논의하곤 했다. 두 사람은 결국 일제 경찰에 검거됐고,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단기 1년·장기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판결문에는 “조선의 독립을 학수고대하는 자”라고 적혀 있다. 두 청년은 해방 5년 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나라를 지키고자 동반 참전해 1950년 8월 13일 함께 전사하는 기막힌 인연을 나누기도 했다. 국가보훈처는 다음달 1일 제99주년 3·1절을 맞아 황 선생과 유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키로 했다고 27일 밝혔다. 박홍환 선임기자 stinger@seoul.co.kr
  • 국가보훈처, 황용순·유종남 선생에 건국훈장

    식민통치가 극에 달하던 1943년, 전북 전주의 전주사범 교직원과 학생 신분이었던 황용순(당시 21세)과 유종남(당시 18세). 엄혹한 시기에 두 청년은 민족의식 관련 서적을 서로 돌려 읽으며 의기투합했다. 일본군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어떻게 주변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킬지 밤새 논의하곤 했다. 전쟁 말기 일제의 전시동원체제, 즉 황국신민화의 본질을 간파해 민족의식으로 정면 대응을 시도한 것이다. 두 사람은 결국 일제 경찰에 검거됐고,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단기 1년·장기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판결문에는 두 사람에 대해 “조선의 독립을 학수고대하는 자”라고 적혀 있다.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의 기쁨도 잠깐, 이번엔 동족 간 전쟁이 두 사람을 또 시련 속으로 내몰았다. 그래도 운명은 두 사람을 또다시 하나로 묶어 줬다. 6·25전쟁에 동반 참전한 두 사람은 1950년 8월 13일 함께 전사했다. 독립운동에 이어 구국의 참전, 그리고 동시 전사까지 황용순 선생과 유종남 선생의 기막힌 이야기는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다음달 1일 제99주년 3·1절을 맞아 황 선생과 유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키로 했다고 27일 밝혔다. 두 선생과 함께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 인사 중에는 국내와 미주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한 여성 독립운동가 차인재 선생도 포함돼 있다. 차 선생은 1920년 6월 경기 수원에서 삼일학교 교사로 근무 중 비밀결사조직 구국민단 교제부장을 맡아 임시정부에서 국내로 보낸 독립신문, 대한민보 등을 배포했다. 같은 해 8월 미국으로 건너가 주로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대한인국민회, 대한여자애국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등의 단체에서 중견 간부로 활동하면서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남편 임치호 선생에게도 지난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번 3·1절 기념식에서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는 이들을 포함해 모두 50명이다. 박홍환 선임기자 stinger@seoul.co.kr
  • 화성시, 미서훈독립운동가 후손 이야기 책 ‘아버지를 말하다’ 발간

    화성시, 미서훈독립운동가 후손 이야기 책 ‘아버지를 말하다’ 발간

    경기 화성시는 미서훈 독립운동가 후손 4명의 구술자료를 책으로 엮은 ‘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를 발간했다고 12일 밝혔다.책에는 송산 지역 3·1운동 지도자로 활약한 홍면옥 선생의 후손 고(故) 홍진후씨와 오산노농학원 적화사건으로 검거돼 옥고를 치른 변기재 선생의 후손 변주현, 변순용씨의 이야기를 담았다. 또 장안,우정지역 3·1운동의 선두에서 면사무소 파괴와 가와바다 순사 처단에 앞장섰던 차경규 선생의 후손 차진모씨의 이야기도 실렸다. 책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살아온 삶에 대한 진솔하게 이야기를 담았다. 시는 ‘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 책을 전국 국공립대학 도서관과 박물관과 관련 연구소, 지역내 도서관과 초·중·고등학교에 배포하고 독립운동 인물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시는 이날 시청 접견실에서 채인석 시장을 비롯해 이번 자료집에 참여한 후손들과 안소헌 광복회 화성시지회장,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간담회를 열고 서훈 신청과정에서의 애로점과 서훈제도 개선 방향 등을 논의했다. 채 시장은 “여러 제한 때문에 당장은 독립유공자 서훈이 어렵지만 최소한 그분들의 정신과 노고가 잊히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들을 찾고 그들의 공훈을 선양하는 일에 적극 앞장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살이] 기농 정세권 선생을 생각함

    [노주석의 서울살이] 기농 정세권 선생을 생각함

    서울 한복판에 송해길이 생겼다. 종로구 육의전 빌딩에서 낙원상가 앞까지 240m이다. 아흔 살 ‘국민 오빠’ 송해를 기리는 길이라고 한다. 송해의 사무실이 있고, 즐겨 다니는 2000원짜리 해장국집이 있다. 지하철 종로3가역 5번 출입구 앞에 그의 흉상도 놓였다. 거부감은 없다. 웃자는 게 코미디고, 웃기자는 게 코미디언 아닌가. 웃으면 그만이다. 좀 찜찜하긴 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길에 붙이고, 동상을 세운 뒤 벌어진 좋지 않은 추억 때문이다. 시비 붙는 사람 없으니 다행이다. 한 사람이 생각났다. 기농 정세권(1888~1965)이다. 서울에 한옥을 남긴 분이다. 가회동·삼청동·재동·계동·안국동·사간동·소격동·수송동·견지동·관철동·관훈동·익선동·봉익동·권농동·통의동·체부동·사직동·신문로·명륜동·창신동·이화동·신설동·왕십리·행당동·휘경동·충정로에 남아 있는 한옥 대부분이 그분의 작품이다. 1920~30년대 개량 한옥을 짓고, 한옥지구를 조성한 건축가이자 부동산 개발가이다. ‘궁궐의 도시’ 서울의 사대문 안은 왕과 일족이 사는 40여개의 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농은 일제강점기 몰락한 왕족과 벌열(閥閱)들의 고대광실을 사들여 필지를 잘게 쪼갠 뒤 중산층용 개량 한옥을 지어 공급했다. 요즘 각광받는 익선동 166번지는 종친 이해승의 누동궁 한 채를 68채의 한옥으로 재개발한 것이다. 선생은 “일본인들이 종로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그의 한옥 개량과 지역 선점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서울 북촌과 서촌은 일본식 문화주택으로 덮였을 것이다. 건축가 정기용은 “북촌 한옥은 서울의 존재이며, 장소이고, 기억”이라고 말했다. 그가 남긴 도시형 한옥은 서울의 징표가 됐다. 조선은 망하고, 국왕은 폐위됐지만, 분야별 왕이 있었다. ‘백화점왕’ 박흥식, ‘광산왕’ 최창학, ‘부동산왕’ 민영휘, ‘문화재왕’ 전형필이 그들이다. 정세권은 ‘건축왕’이었다. 전형필과 정세권 두 분의 선각자가 문화재와 한옥을 지켰다. 기농은 부동산 개발로 번 돈을 신간회와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썼다. 우리말큰사전 편찬을 도우려고 조선어학회에 회관과 토지를 기증했고 자금을 댔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재산을 강탈당하고, 세 번이나 옥고를 겪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독립지사 정세권은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31세에 상경, 70대에 낙향, 78세 타계할 때까지 서울을 서울답게 만들었다. 춘원 이광수는 “그를 존경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했다. 만해 한용운도 ‘정세권씨에게 감사하라’는 이례적인 글을 기고했다. 그런 정세권이 잊혔다. 서울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서울의 기와집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전통가옥으로 잘못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양반가 한옥은 1870년에 지어진 안국동 윤보선가이다. 서울의 기와 한옥 1만 8000채 중 6000채 이상은 기농이 남긴 선물이다. 1644년 대화재로 사라진 영국 런던을 재건한 크리스토퍼 렌, 1850년대에 프랑스 파리를 오늘의 파리로 만든 E 오스만,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도쿄를 부활시킨 고토 신페이처럼 서울의 미래를 만든 사람은 기농 선생이 아닐까. 그런데 왜 정세권의 업적은 기록되지 않고, 정세권 길은 만들지 않으며, 정세권 동상은 세우지 않나. 서울을 서울답게 만드는 사람, 정세권 정신을 가진 서울사람을 기리는 정세권의 날과 정세권상은 왜 제정하지 않는가.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삼각주 내부에 쌓은 ‘평지성’…외적 물리친 민초의 기개 서려 있네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삼각주 내부에 쌓은 ‘평지성’…외적 물리친 민초의 기개 서려 있네

    홍주읍성(洪州邑城)의 입지는 볼수록 절묘하다. 성(城)이란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도록 대비하는 시설이다. 그런데 홍주읍성은 벌판이라고 해도 좋을 개활지에 지어진 평지성(平地城)이다. 그럼에도 주변 지형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 방어력을 극대화했다.읍성 곁으로는 남쪽의 홍성천과 북쪽의 월계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두 하천은 동쪽에서 합류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일종의 삼각주 내부에 읍성을 앉혔다. 동·남·북쪽은 하천이 자연 해자(垓子) 역할을 한다. 홍주읍성에 별도의 해자를 파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홍주읍성의 서쪽은 해발 40m 남짓한 언덕에 역시 방어벽 역할을 맡겼다. 홍주성역사공원이 조성된 언덕 주변은 옛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발굴조사로 읍성 남문의 흔적을 찾았는데, 2013년 복원하면서 홍화문(洪化門)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다. 홍주(洪州)는 내포(內浦)의 중심도시 홍성(洪城)의 옛 이름이다. 고려시대 이름은 운주(運州)였다. 태조 원년인 918년 ‘고려사’에는 ‘웅주, 운주 등 10개 님짓한 주현이 배반하여 견훤의 후백제에 귀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세종실록’에는 ‘백제 때의 칭호(稱號)는 알 수 없다. 김씨(金氏)의 지지(地志)에도 실리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의 지지’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의 지리지를 말한다. 고려 태조 왕건은 개국하고 17년이 지난 934년에야 이 지역을 되찾는다. 친(親)궁예 노선을 걷던 운주 호족이 30곳 남짓한 주변 성(城)을 이끌고 고려에 투항한 것이다. 고려 태조의 제12비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이 바로 운주 출신이다. 충남 서부 지역 일대를 세력권으로 두었던 운주 호족의 딸로 봐야 할 것이다. 운주 호족의 거점이었을 토성(土城)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미롭다. 읍성 서문 주변 발굴조사에서 9세기 후반 이후 쌓은 토성이 50m가량 확인된 것이다. 홍주읍성의 진산(鎭山)이라고 할 수 있는 백월산 기슭에서는 대규모 고려시대 초기의 건물터도 드러났다. 도시 범위가 시간이 흐르면서 넓어진 결과일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외적이 침입하면 바닷가나 들판을 비우고 산성으로 올라가 안전을 도모하는 청야책(淸野策)을 썼다. 그러니 평지성보다는 산성이 중요했다. 하지만 해안과 평야지대의 생산성이 크게 높아지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산으로 갈 수는 없게 됐다. 조선 세종시대가 되자 적극적인 방어전략으로 군사제도를 정비하면서 평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가까운 지역부터 산성 대신 읍성을 쌓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렇게 조선은 세종부터 문종 시대에 걸쳐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만 14개의 읍성을 새로 쌓거나 크게 보강했다. 당진, 면천, 서산, 태안, 덕산, 홍주, 대흥, 결성, 보령, 남포, 홍산, 비인, 서천, 한산 읍성이 그것이다. 홍주읍성을 고쳐 쌓는 공사는 1451년(문종 1년) 마무리됐다고 한다. ‘문종실록’은 공사가 끝난 뒤 홍주읍성의 둘레가 4856척(尺)에 높이가 11척, 여장(女墻)은 608개라고 했다. 여장은 적의 화살이나 총탄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는 동시에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성벽에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보강 이전 홍주읍성의 둘레가 533보(步) 2척이라고 했다. 1보는 3척이니 1601척에 해당한다.세종시대 축성이나 건축에 쓰던 영조척(營造尺)은 1척이 31.22㎝였다. 그러니 문종시대 홍주읍성 길이는 대략 1516m, 이전 성벽은 500m 남짓이었다. 읍성을 3배 남짓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수리를 거친 결과 한때는 성벽 길이가 1772m에 이르렀다고 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성벽은 810m 정도다. 지금 홍주읍성 주변은 사통팔달 도로가 뚫려있다. 하지만 과거 장항선 철도 홍성역에 내려 홍성읍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읍성의 흔적은 조양문(朝陽門)이었다. 조양문은 읍성의 동문이지만, 당당한 모습처럼 사실상 홍성의 관문으로 여전히 인상지워져 있다. 반면 언덕 위의 남문은 수성전(守城戰)을 지휘하는 망루(望樓)의 개념이 짙다. 홍성군은 최근 조양문 서쪽의 옛 홍주관아와 읍성 남문 주변을 홍주성역사공원으로 조성하고, 홍주성역사관도 새로 지었다. 지금 전국적으로 조선시대 읍성을 복원하는 노력이 경쟁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홍성처럼 옛 읍성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고을은 많지 않다. 굳이 주변 관광지를 묶지 않더라도 홍주읍성만을 둘러보는 여행 일정을 잡는다 해도 크게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다.이렇게 장담하는 것은 다른 지역과 달리 옛 관아(官衙)가 상당 부분 남아 있고, 분위기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홍주성역사공원이 접어들면 홍성군청과 홍성군 의회가 나타난다. 그 앞에는 홍주관아의 외삼문(外三門)이었던 홍주아문(洪州衙門)이 보인다. 군청의 정문은 바로 옆에 별도로 냈지만, 지금도 여전히 군청의 상징적인 정문 역할을 하고 있다.홍주아문만 살펴보고 바로 돌아서면 안 된다. 아문으로 들어서 고려 공민왕 때 심었다는 느티나무를 지나 군청사 사이로 가면 뒤편에 격식 있게 지은 조선시대 건물이 나타난다. 1870년(고종 7) 중건한 홍주목의 동헌(東軒) 안회당(安懷堂)이다. 안회당 뒤뜰에는 여하정(余何亭)이 있다. 1896년(고종 33) 지은 것이라고 한다. 작은 정자 주변에 파놓은 연못, 그리고 이런 물가 풍경에 격조를 더하는 늙은 버드나무 한 그루가 인상적이다. 홍성의 근세사는 항일운동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홍성은 청산리대첩을 이끈 백야 김좌진 장군과 3·1운동 당시 민족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만해 한용운 선생의 고향이다. 홍성에는 생가와 기념관을 비롯해 이들을 기리는 공간이 적지 않으니 찾아봐도 좋을 것이다. 홍주성전투도 기억해야 한다. 홍주의병은 단발령 공포 직후인 1896년과 을사늑약 체결 직후인 1906년 두 차례 거병(擧兵)했다. 특히 1906년 민종직이 충청도 서부지역에서 규합한 1000명 남짓한 의병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82명의 전사자를 내며 물러서야 했다. 조양문에는 당시 포격전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홍성천과 월계천이 합류하는 홍성읍 대교리에는 당시 산화한 의병의 유골을 모신 홍주의사총(塚)과 홍주의병기념탑이 있다. 홍주읍성 남문이 바라보이는 홍주성역사공원 언덕에는 병오항일기념비도 세워졌다. 1906년 병오년(丙午年)과 홍주성전투를 기리는 비석이다.기념비 밑에는 또 하나의 비석이 묻혀 있다고 한다. 이른바 애도지비(哀悼之碑)다. 홍주성전투 당시 의병에 사살된 일본군을 추도하는 비석이다. 국권을 빼앗겨 일본에 강제로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관군도 사망자를 냈다. 글을 지은 사람은 개화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한 김윤식, 글씨를 쓴 사람은 대표적인 친일파 이완용이라고 한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이 언덕에는 신사(神社)도 있었다. 홍성이라는 땅이름은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한 1904년 이웃한 결성과 합치면서 한 글자씩을 따와 지었다. 충남을 대표하는 두 도시인 홍주와 공주가 모두 일본어 발음으로는 ‘고슈’이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홍주가 가진 항일의 상징성을 희석시키려는 의도였다는 시각도 많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100억대 보험금 등 편취한 사무장 병원장 등 4명 구속

    100억대 보험금 등 편취한 사무장 병원장 등 4명 구속

    가짜의료기를 담보로 부정대출을 받고 환자와 짜고 의료보험사기를 벌여 100억원을 편취한 사무장 병원행정원장, 대출브로커, 한의사 등이 경찰에게 붙잡혔다. 사무장병원은 의료기관 개설·운영 자격이 없는 비의료인이 의사,의료법인 등의 명의를 빌려 운영하는 불법 형태의 병원을 말한다. 부산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27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과 의료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부산 모 한방병원 행정원장 A(59) 씨와 한의사 B(58) 씨를 구속하고 범행에 가담한 환자 91명을 보험 사기방지 특별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경찰은 또 대출 브로커 C(49) 씨와 가짜 의료기기 제작자 D(49) 씨를 같은 혐의로 구속하고 부정대출에 연루된 다른 병원 3곳의 원장 3명도 불구속 입건했다. A 씨는 의사들과 짜고 지난 2015년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입원치료를 받지 않아도 되는 환자들을 입원시키고서 허위 진료영수증을 발급하는 수법으로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7억 7000만원 상당의 요양급여비를 부정하게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A 씨는 이 과정에서 진료 차트를 조작하거나 거짓 영수증을 발행하는 수법으로 입원이 불필요한 가짜 환자 91명이 보험사로부터 보험금 53억 5000만원을 받아 챙기도록 한 혐의도 받고 있다. A 씨는 개원 때 자금난을 겪자 대출 브로커 C 씨와 가짜 의료기기 제작자 D 씨와 짜고 15억원 짜리 줄기세포 진단기를 본뜬 2억원짜리 ‘껍데기’ 의료기기를 만들어 시중은행에서 12억원을 대출받기도 했다. 이들은 공진단, 경옥고 등 보험적용이 안 되는 한약재를 판매하고서 보험처리가 되는 치료를 받은 것으로 차트를 조작하기도 했고 환자 가족에게 보약을 팔면서 환자에게 치료한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A 씨 등은 암 수술을 받았지만, 입원치료가 필요하지 않고 실손보험에 가입된 환자들만 골라 입원시켰다. 경찰 관계자는“ 실손보험은 본인 부담금이 10% 있는 것을 고려해 진료비를 10% 부풀리기도 했으며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면책 기간에 대비해 미리 거짓으로 고가의 진료를 받은 것처럼 진료기록을 조작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고은 “亞·아프리카서 미래 문학 가능성 발아” 소잉카 “한국 작가들, 비판적 사고 유지하길”

    고은 “亞·아프리카서 미래 문학 가능성 발아” 소잉카 “한국 작가들, 비판적 사고 유지하길”

    “고대와 중세에는 아시아 문학이 세계문학을 이끌다 근현대 이후 서구 문학이 앞서 왔죠. 앞으로는 아시아·아프리카 등 덜 성숙한 곳에서 문학성이 발화해 미래 세계문학의 가능성이 만들어질 거라 생각합니다.”(고은)●“창의력 말살 시대 맞서 나아가자” 문학의 종말을 함부로 예단하는 시대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두 거장이 문학의 역할과 의미를 다시 상기시켰다. 1986년 아프리카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나이지리아 시인 겸 극작가인 월레 소잉카(83)와 고은(84) 시인은 지난 4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 특별 대담에서 “창의력을 말살시키는 시대에 맞서 경계를 뚫고 나아가자”고 한목소리를 냈다. 고은 시인과 소잉카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다 옥고를 치르고 투쟁의 경험과 사유를 문학에 새겨 넣은 교집합을 지닌다. 두 사람은 이슬람의 근본주의 움직임, 미국과 유럽의 우파정권 득세, 한반도의 긴장 상태 등 현재 세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있어 문학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거침없는 사유를 펼쳤다. 소잉카는 “한국의 지리학적 위치가 전략적이기 때문에 여러 국경 간의 권력이 한국에 응집되는 것 같다”며 “이런 현실에 해답을 제안하기 위해 한국 작가들이 비판적인 사고를 유지하면서 계속 글을 쓰길 바란다.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유지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인간사에서 문학은 사라질 리 없다” 문학 무용론이 끊임없이 불려 나오는 현실에 대한 위기감을 공유하고 이를 부정하는 증거들도 함께 나눴다. “문학의 종언을 예언하는 사람이 흔하듯 시의 위상은 지금 밑바닥에 있습니다. 하지만 시는 항구적인 별처럼 존재합니다. 시는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만 일어나는 형식이 아닙니다. 우주의 움직임과 변화와 법칙에서 나온 것이죠. 시의 소재가 됐던 재료들-이를테면 사랑하는 임, 떠난 임, 물, 술 등 희로애락의 모든 것이 있는 한 시는 없어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이 자리에서 소잉카와 더불어 시를 확신합시다.”(고은) 고은 시인이 인간사의 희로애락이 있는 한 문학이 사라질 리 없다고 확신했다면, 소잉카는 절망과 환멸의 현실에서 사람들을 버티게 하는 건 문학이라고 긍정했다. “아프리카에서 반가운 발전 가운데 하나가 문학계에서 특히 젊은 여성 작가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정치적 지형이 어지러운 아프리카에서 사람들이 문학에 기대는 건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지요. 수년 전부터 종교적 근본주의 움직임이 대두되며 생겨난 보코하람(나이지리아에서 조직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의 뜻은 ‘책은 죄악’이란 뜻입니다. 이들은 글을 소비하고 쓰는 행위를 공격하는데, 이는 문학의 생산성이 증대된 데 대한 반작용이지요. 글을 쓴다는 건 이렇게 어려운 정치·경제적 상황에 내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소잉카)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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