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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생충’이 곧 내 이야기” 한국에만 있는 ‘반지하’가 상징하는 것

    “‘기생충’이 곧 내 이야기” 한국에만 있는 ‘반지하’가 상징하는 것

    4관왕 ‘기생충’의 배경 반지하에 관심 쏠려한국에만 존재하는 공간 반지하에는 분단과 도시화, 빈부격차 담겨 있어누군가에겐 영화 아닌 외면 못하는 현실“내 이야기 같아 일부러 보지 않았어요. ‘기생충’은 스크린 속에만 존재하는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에요. 반지하에 사는 저한테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라고요.” 직장인 김수혜(가명·30)씨는 지난해 7월 서울 동작구에 반지하 셋방을 얻었다. 보증금 8000만원에 월세 10만원. 반전세로 힘들게 구한 보금자리다. 도통 익숙해지지 않은 곰팡내, 창문으로 예고없이 침투하는 자동차 배기가스, 누군가 언제든 방 안을 훔쳐볼 수 있다는 불안감이 김씨를 괴롭힌다. 영화 속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 가족의 몸에서 같은 ‘냄새’가 나고, 식탁 위에 꼽등이가 기어다니는 설정은 김씨에겐 현실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지난 10일 미국 아카데미상 4관왕을 휩쓴 뒤 반지하라는 거주형태에 외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쓰지 않는 물건을 넣는 창고, 세탁실 쯤으로 인식되는 서양적 사고로 보면 주거지로서의 반지하는 생소할 수밖에 없다. 기생충의 영어 자막을 만든 번역가 달시 파켓은 반지하를 ‘세미-베이스먼트’(semi-basement)라는 흔치 않은 영어 단어로 표현했고, 영국 BBC는 반지하를 소리 나는 대로 ‘banjiha’로 옮기며 고유명사로 대접했다.반지하는 지극히 한국적인 개념이다. 분단과 급격한 도시화, 빈부격차라는 우리 현대사의 그림자가 반지하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반지하는 1970년대 전쟁에 대비해 피할 공간을 마련하라는 국가 정책으로 생긴 공간”이라면서 “주거용 장소가 아니었지만 산업화로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돼 주거비가 급격히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반지하에 살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1980년대 지하층의 요건이 완화되면서 지하 거주공간은 더욱 늘어났다. 기존 지하층은 한 층의 3분의 2 이상이 지표면 밑으로 묻혀야 했지만, 규제가 완화돼 2분의 1 이상만 묻히면 지하층으로 인정됐다. 결과적으로 지하를 덜 파도 지하층을 분양할 수 있게 돼 지하주거는 활기를 띠었다. 방을 많이 만들어 세입자를 받으려는 건물주에게 반지하는 수익 창출의 공간이었다. 윤형중 LAB2050 정책팀장은 “가난하지만 안정된 주거 환경을 갖고 싶다는 사람들의 욕망과 방을 만들면 만들수록 이익이 되는 건물주의 욕망이 맞물리며 반지하가 늘었다”고 분석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지하 거주 가구는 36만 4000가구로 전체 가구의 1.9%에 해당한다. 지하에 거주하는 36만 가구 중 약 23만 가구가 서울에 몰려 있다. 다만 반지하에 사는 사람을 점차 줄고 있다. 반지하 가구 비율은 2005년 3.69%(58만 7000가구)에서 2010년 2.98%(51만 8000가구), 2015년 1%로 낮아졌다.건물의 최하층에 있는 반지하는 가장 낮은 사회계급을 상징한다. 자금 사정이 어려운 도시 빈민의 최후 선택지가 되기 마련이다. 영화 속 반지하는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특히 박 사장(이선균)의 대저택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엄청난 폭우에 기택의 집은 침수되고 화장실이 역류해 온 가족이 이재민이 되지만 박 사장은 다음날 미세먼지가 비에 씻겨나갔다며 정원에서 여유를 즐긴다. 윤 팀장은 “건축단계부터 반지하를 거주공간으로 생각했다면 하수도를 더 깊게 설치해 폭우에도 역류와 같은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반지하를 빈곤의 상징으로 낙인찍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다. 도시사회공학을 전공한 박동욱 민주연구원 연구위원은 “반지하를 빈부격차의 상징으로 지나치게 부각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면서 “실제 그 공간에 사는 주민들이 빈자로 낙인찍어 버리는 부정적인 효과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한솔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이사장은 “반지하는 최근 수년 사이 옥탑방, 고시원과 함께 ‘지옥고’로 불리며 청년 주거문제의 상징이 됐다”며 “영화가 정부의 주거복지 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손지민 기자 sjm@seoul.co.kr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종교와 상식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종교와 상식

    일제강점기 기독교사상가인 김교신(1901~1945)은 1942년 월간지 ‘성서조선’에 쓴 ‘조와’(弔蛙ㆍ죽은 개구리를 조문하다)라는 글 때문에 일본경찰에 체포된다. 이른 봄 연못에 죽은 개구리들이 둥둥 떠다니는데, 자세히 보니 못 밑에 아직 몇 마리 개구리들이 살아 움직이더라는 이야기다. ‘조와’는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라는 탄성으로 끝을 맺는다. 이것은 단순한 개구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제하에서 혹독한 수난을 받던 우리 민족을 상징한 글이다. 그는 무서운 시련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민족의 앞날을 본 것이다. 이 글 때문에 김교신은 만 1년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다. 일본 형사의 취조 앞에서 김교신의 태도는 당당했다.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는 망국신민서사(亡國臣民誓詞)가 될 것이고,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것은 어린아이가 호랑이 탄 격으로 죽을 수밖에 없으며, 일본 천황도 하나님의 창조물에 불과하다고 분명히 대답했다. 그런데 장시간 김교신을 취조한 형사들의 반응이 뜻밖이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서는 김교신에게 물어보면 제일 잘 알 수 있다”고 하면서 “기독교가 그렇게 좋은 종교인 줄 몰랐다”고 말한다. 김교신의 타 종교에 대한 태도는 매우 상식적이고 합당하다. 그는 1936년 이렇게 썼다. “사토 도쿠지 교수로부터 ‘불교의 일본적 전개’라는 저서를 받고 그의 학구적 정력에 경탄함을 마지 못하는 동시에, 기독교도로서도 불교의 연구를 등한히 하여서는 안 될 것을 절감하다.” 기독교가 배타적이란 평을 듣는 점을 감안하면 뜻밖이다. 1937년에는 이렇게 썼다. “출판권 문제로 총독부에 들르니 장삼 입은 불교 승려들이 반열 지어 왕래하는 것이 보이다. 지상에 보도된 3대 본산의 대표자 회의가 열린 듯. 불원에 반도의 불교가 크게 부흥될 것이 기다려지다.” 타 종교에 대한 그의 태도는 지극히 온건하고 상식적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야당 정치인이 불교계에 육포를 선물하는 등 타 종교에 대한 무례로 시끄러웠다. 비(非)기독교인의 입에서 “기독교가 그렇게 좋은 종교인 줄 몰랐다”는 말을 나오게 하는 기독교인이 몇이나 있을까. 한국기독교는 계시 이전에 상식이 필요해 보인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김교신의 ‘성서조선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우석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 “5·18 진상규명 마지막 기회… 전두환 조사 검토”

    “5·18 진상규명 마지막 기회… 전두환 조사 검토”

    새달부터 최대 3년간 민간 피해 등 조사 “계엄군 협조 위해 면책 등 조치 필요해 공식보고서 통해 5·18 왜곡·폄훼 막을 것”“5·18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송선태(65)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장은 3일 “그동안 여러 차례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5·18의 진실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면서 “5·18 관련자들이 모두 고령인 만큼 하루빨리 실체적 진실을 가려 역사와 국민 앞에 소상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조사위는 여야 대립 등 우여곡절 끝에 ‘5·18진상규명특별법’ 시행 1년 3개월여 만인 지난해 12월 27일 구성됐다. 조사위는 5·18 40주년을 맞아 조만간 조직 구성을 마치고 이르면 다음달부터 최대 3년 동안 진상 규명 활동을 한다. 송 위원장은 “역대 정부는 국회 청문회, 검찰 수사, 국방부 5·18특조위 등을 통해 진실 규명에 나섰으나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조사의 한계 탓으로 발포 명령자 등 핵심 가해자는 지금껏 특정하지 못했다”면서 “이 때문에 5·18에 대한 왜곡·폄훼 세력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는 조사위의 권한에 대해 “조사 대상자나 참고인에게 출석요구서나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 있지만 자료 확보를 위해서는 지방 검사장에게 압수수색 영장 청구를 의뢰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다“고 말했다. 이어 “계엄군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면책 등의 조치가 필요한데, 조사위는 불처벌·감형 등을 건의만 할 수 있지 강제할 수는 없어 가해자들이 진실 규명을 위해 양심 증언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송 위원장은 5·18 당시 진압작전의 최종 책임자로 지목된 전두환(88)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 가능성도 열어 놓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발포 명령의 실질적인 지휘체계를 조사하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전씨를 맞닥뜨릴 것으로 본다”면서 “강제 조사권이 없는 위원회가 전씨를 어떻게 조사할지, 집단살해죄를 국내법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대해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종 목표는 공식 국가보고서를 작성해 5·18에 대한 왜곡·폄훼 논란에서 벗어나 국민통합을 이루는 데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피해자 명예회복, 가해자의 법적·정치적 화해, 재발방지 대책 등을 담는 만큼 5·18을 정사로 자리잡게 하는 데도 보탬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송 위원장은 전남대 국문과 재학 중 ‘5·18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옥고를 치렀으며, 국무총리 정무비서관,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및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해 왔다. 조사위는 다음달부터 발포 책임자와 경위, 민간인 사망·상해 경위, 행불자·암매장 여부, 북한군 개입 여부 및 계엄군 성폭력 등에 대해 면밀히 조사한다. 이를 위해 오는 12월 26일까지 5·18 피해자와 가해자, 목격자 등을 상대로 진상 규명 신청서를 접수한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길섶에서] 이육사/박록삼 논설위원

    새 교과서를 받으면 가장 먼저 국어 교과서를 펼쳐 봤다. 소설, 시, 시조, 수필 등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길지 않은 시나 시조는 미리 외워 두면 수업 시간에 으쓱거리기도 좋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지 싶다. 국어 교과서에 나온 이육사(1904~1944)의 시 ‘청포도’, ‘광야’는 가슴이 시원해짐을 넘어 서늘해지는 느낌까지 줬다. 그리고 3학년 때인가 ‘절정’도 실렸다. 시구마다 밑줄 그어 가며 주제, 숨은 뜻, 은유법, 역설법 운운하는 수업은 서늘했던 시어와 정신을 떠올리면 차라리 지루했다. 그렇게 민족 저항시인이라 외우고 시험쳤지만 실제 그의 삶과 정신을 배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시인이기 이전에 치열한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로서 구체적 행적을 고교 졸업 30년 만에, 그것도 지난 주말 TV를 통해서야 처음 알았으니 참 게을렀고 참 무지했다. 이육사는 1927년 조선은행 폭파 사건에 관여해 첫 옥고를 치른 뒤 17년 동안 17번 형무소를 들락거렸다. 낮밤 없이 감시하는 일제 순사의 눈길과 갖은 고문 속에서도 결정적 증거를 잡히지 않은 채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니 굳건한 의지를 가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1월 16일, 76년 전 오늘이 이육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옥사한 날이다. youngtan@seoul.co.kr
  • [황규관의 고동소리] 전태일의 유토피아

    [황규관의 고동소리] 전태일의 유토피아

    대구시 중구 남산동 2178-1번지. 이곳에 가면 오래된 집 한 채가 있는데, 조용했던 그 집 주위에도 어김없이 재개발 바람이 불어 몇 년 전에 이미 ‘도시환경정비’가 대문과 담장을 허물어 버리고 말았다. 대구시 중구 남산동 2178-1번지는 우리 현대사에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다.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가 최근 대구 시민들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한 이 집은 소년 전태일이 살았던 곳이다. 가족이 가난에 휘둘려 이리저리 찢기는 와중에 가출했던 전태일은 영천을 거쳐 대구로 다시 와 그 사이에 서울에서 내려와 살고 있던 가족들과 재회한다. 그 집이 대구시 중구 남산동 2178-1번지에 있는 지금의 누옥이다. 남산동 집에서 가족들과 재회한 후 전태일은 인근의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청옥고등공민학교는 그 당시 명덕국민학교 내에 있었다. 고 조영래 변호사가 ‘전태일 평전’(아름다운전태일)에 옮겨 놓은 전태일의 일기에 따르면 그 시절이 전태일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음이 분명하다. 가을 체육대회를 하며 벅차오른 감정을 적은 것이다. “맑은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 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나는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유토피아의 원형질로 남게 되는 법인데, 이것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유토피아에 가깝지만 전태일에게는 그 모두를 뛰어넘는 어떤 절대적 순간이었던 듯하다. “서로 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는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상상만으로도 영혼에서 희열이 일어나는 이런 시간을 우리는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청옥고등공민학교와 남산동 2178-1번지가 그의 ‘마지막 결단’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우연한 기회에 청옥고등공민학교 터가 있었다는 지금의 명덕초등학교 체육관을 바라보면서였다. 사실 전태일은 ‘마지막 결단’ 사흘 전에 대구에 내려와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의 친구 예옥을 만나 자신의 결단을 말하기도 했다.(‘사랑을 시작하다-전태일’ YTN 다큐멘터리) 소년 전태일의 집이 헐릴 위험을 직감하고 대구의 시민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먼저 ‘전태일시민노동문화제’를 열어 대구 시민들에게 전태일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다음 전태일이 살던 남산동 2178-1번지를 대구전태일기념관으로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실 역사적 시간을 현재화하는 일은 그 물질적 흔적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보존하고 기록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 조 변호사의 기록물 ‘전태일 평전’이 없었다면 전태일의 ‘정신’이 지금처럼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기록되지 않은 것은 역사가 될 수 없다. 내 생각으로 대구전태일기념관의 일차적 의미는 이것이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전태일을 단순한 기념비에 가둘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부활시키는 데에 있다. 우리는 대구와 경북을 언제부터인가 역사적 반동의 땅으로 낙인찍고 있지만 그 지역은 해방 이후부터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열망이 가장 뜨거운 곳 중 하나였다. 우리는 독재자 박정희가 정치적 탄압을 통해 그 변화의 열망을 꺾어버리고 지역적 인연을 악용해 개인숭배의 땅으로 만들어 버린 사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대구 시민들은 대구가 “전태일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 ‘창립선언문’)이지 단순히 군사 독재자가 태어난 고장이 아님을 선언하고 나섰다. 나는 이 언어가 부정의 땅에 긍정의 씨앗을 파종하는 가장 근원적인 정치라고 생각한다. 즉 현실 정치의 질곡을 넘어서는 ‘다른’ 정치의 시작 말이다. 따라서 현실 정치에 절망한 우리가 대구전태일기념관 건립에 힘을 보태는 것도 새로운 정치에 함께하는 방법 중 하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구 바깥의 민주주의자가 열외일 수는 없다. 대구전태일기념관 건립 시민모금의 계좌는 다음과 같다. 대구은행 504-10-351220-9 ㈔전태일의 친구들.
  • 심재철 “靑·여당과 관계 잘 풀렸으면” 강기정 “대화복원 기대”

    심재철 “靑·여당과 관계 잘 풀렸으면” 강기정 “대화복원 기대”

    DJ 내란음모로 옥고… 문희상 “감방 동지”자유한국당 심재철 신임 원내대표는 9일 취임 일성으로 ‘투쟁’과 ‘협상’을 동시에 외쳤다. 기존처럼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법안 처리 불가 입장만을 고집할 경우 ‘제1야당 패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타협 가능성도 열어 두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심 원내대표는 당선 직후 “우리 당이 잘 싸우고 이 난국을 잘 헤쳐 나가야 한다는 여러분들의 고심과 결단이 이렇게 모였다”며 “당을 위해 헌신하고 내년 총선 승리를 만들어 내겠다”고 말했다. 당초 심 원내대표는 패스트트랙 ‘강경파’로 분류됐지만 여당이 ‘4+1(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 협의체’를 통한 본회의 강행 처리 의지를 나타내자 한발 물러섰다. 만약 한국당이 빠진 채 예산안이 처리되고, 패스트트랙 법안에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를 가동해 민생법안 처리가 지연되면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심 원내대표는 이날 여야 교섭단체 3당 원내대표와 만나 10일 예산안 처리와 필리버스터 신청 철회에 잠정 합의했다. 다만 의원총회에서 반발이 나오자 예산안 합의 처리 전제를 조건으로 붙였다. 심 원내대표는 “우리는 소수다. 민주당이 다수 힘으로 밀어붙이는 현실 앞에서 협상을 외면할 수만은 없다”고 했다. 심 원내대표는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과 만나 “청와대, 여당과의 관계가 잘 풀렸으면 한다”고 했다. 강 수석도 “대통령은 늘 선거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에 대해 국회 합의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라고 했다. 광주 출신인 심 원내대표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5월 15일 서울역에 집결한 10만여명의 신군부 반대 시위대의 ‘회군’을 결정했고, 이틀 뒤 신군부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다. 서울역 회군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자서전 ‘운명’에서 “대학생들의 배신이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큰 희생을 치르도록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같은 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5개월간 수감됐다. 당시 내란음모 가담 혐의로 옥고를 치른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날 심 원내대표에게 “합동수사부(합수부) 감방 동지”라고 했다. 1983년 특별 복권된 뒤 교편을 잡았다가 MBC 기자 생활을 했다. 1992년 방송 민주화를 요구하는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지만, 복귀 후 첫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후유증으로 지금도 지팡이를 짚는다. 1995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 부대변인으로 정계 입문한 뒤 16대 총선을 통해 원내에 입성했다. 이후 당 정책위의장·최고위원,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이근홍 기자 lkh2011@seoul.co.kr
  • 국가보훈처, 김희식 선생 등 독립유공자 136명 포상

    국가보훈처는 오는 17일 제80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김희식 선생 등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13일 밝혔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김 선생은 평범한 농민으로 1919년 4월 1일 경기 안성 원곡면사무소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고초를 겪었다. 보훈처는 “만세운동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중형을 받은 사례”라고 했다. 현 정부 들어 재조명되고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도 이번에 재평가됐다.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최영보 선생은 1919년 11월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고자 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기독교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로 꼽힌다. 건국포장이 추서된 송계월 선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세 차례나 투옥됐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명(애국장 7, 애족장 24), 건국포장 9명, 대통령표창 96명 등이다.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지익표(95) 선생뿐이며, 여성 포상자는 28명이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LG하우시스, 독립유공자 후손 자택 개보수

    LG하우시스, 독립유공자 후손 자택 개보수

    LG하우시스가 순국선열의 날인 오는 17일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후손 6명의 자택을 개보수했다고 12일 밝혔다. LG하우시스는 이날 경기 성남의 독립유공자 후손 안창호씨의 자택에서 허현 광복회 부회장, 이동주 LG하우시스 상무 등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환경 개선’ 기념식을 열었다. LG하우시스는 고(故) 안도용 선생의 아들인 안씨를 비롯한 후손 6명의 자택의 개보수 공사를 지난달 말 시작해 최근 마무리했다. 안 선생은 1919년 3월 22일 경북 영일군 장터에서 군중을 모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 옥고를 치렀다. LG하우시스는 현재까지 총 9곳의 독립운동 관련 시설을 개보수했으며 독립유공자 및 국내외참전용사 26명의 주거환경 개선을 지원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산수화는 이기적 욕망의 산물이었다

    산수화는 이기적 욕망의 산물이었다

    인간 시각으로 자연을 해체한 삼원법 등 자연친화적 화풍이란 기존 인식 뒤집어 류철하 관장 “정체된 산수화 담론 전환”지금까지 미술계에서는 동양미술을 크게 작가의 개입 여부를 기준으로 서양미술과 구분 지어 왔다. 동양의 산수화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담는 자연 친화적 화풍인 반면 서양의 풍경화는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한다는 식이다. 우리 선조들은 금수강산을 즐기며 그 모습 그대로를 화폭에 옮겨 담아 왔다고 여겨 왔다. 그러나 이런 인식을 완전히 뒤집는 주장이 나왔다. 동양의 산수화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해석이며 나아가 자연을 억압하는 시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품은 한국과 중국 작가 8명이 의기투합해 지난 15일부터 대전 서구 이응노미술관에서 국제전 ‘산수-억압된 자연’을 선보이고 있다. 윤재갑 중국 상하이 하우아트뮤지움 관장과 류철하 이응노미술관장이 공동 기획한 이번 기획전은 산수화를 구성하는 3개의 시점인 ‘삼원법’(고원·심원·평원)과 동양적 자연관에 깃든 인간 중심적 시각을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윤 관장은 11세기 북송의 화가 곽희가 저서 ‘임천고치’에 서술한 ‘삼원법’을 설명하면서 “대상을 아래에서 위로, 뒤에서 아래로, 또 정면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구성하는 것은 서양의 원근법보다 더 대상을 철두철미하게 해체했다가 재조립하는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동양의 선조들이 즐긴 분재는 자연 산물의 발육을 억제해 미적 만족을 취하려는 행위로, 풍수지리사상을 자연을 인간의 부귀영화에 이용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으로 규정했다. 이런 생각은 산수화와 동양의 자연관을 넘어 현대문명에 이르러서는 잠재된 감시의 시선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된다. 윤 관장의 기획의도는 전시장소와도 연결된다.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응노(1904~1989) 화백은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으로 강제 소환돼 옥고를 치렀고, 작고하기 전까지 국내활동과 입국이 금지됐다. 이번 기획전에 전시되는 이 화백의 ‘군상’ 병풍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인물 군상이 장면에 따라 다양한 투사법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국가 권력을 향한 저항의 필치는 역설적으로 자유와 평화, 공생·공존의 메시지를 전한다. 한국 작가 김지평은 ‘자연·인간·종교’라는 문명의 조합을 여성의 관점에서 재조명했다. 불교나 유교사상이 여성이라는 인간을 지속적으로, 불공평하게 억압해 왔음을 작품을 통해 표현한다. 이 밖에 중국 작가 션샤오민은 억압받는 자연을 철제도구와 분재를 통해 표현한다. 그는 “분재는 일상에서 식물을 가꾸고 감상하는 자연친화적 행위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식물 성장을 억압하고 인간의 미의식에 맞게 재단하는 폭력성이 담긴 행위”라고 강조했다. 류 관장은 “이번 전시는 그간 미술계에서 정체된 산수화 담론 전환을 위해 마련됐다”면서 “동양 미술계가 새롭게 발전하고 생산적인 담론이 형성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12월 22일까지 이어지며,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는 무료 개방한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

    항일 무장 독립운동 3대 맹장… 연구 논문 한 편 없고 묘는 北에

    “그분을 상면하니 저런 분이 어찌 왜놈의 군인과 맞서 선두 지휘를 하시며 혈전을 하셨나 할 정도로 외모가 잘생기셨고 그 풍채가 관후 유덕하시며 인자한 풍기가 주위 사람에게 호감을 주실 뿐 아니라 인정이 철철 넘쳐 흐른다. 그분이 무기형을 받고 마포로 수감된 후 왜놈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나 불허하므로 단식투쟁을 선포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처음 15일간은 물도 한 잔 안 먹었다. 소장이 병동에다 수감하고 왜놈 간수에게 감시를 하게 하고 조선 사람은 얼씬도 못하게 하고 매일 변기를 검사하였다. 물 한 모금도 안 먹었으니 소변인들 나올 리가 없었다.” 독립운동가 이규창(이회영의 아들)은 회고록에서 서울 마포형무소(경성감옥)에서 같이 수감 생활을 한 오동진 선생에 대해 이렇게 썼다.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계의 3대 맹장으로 평가받는 오동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건국훈장 다섯 가지 가운데 1등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모두 30명인데 오동진도 그중의 한 사람이다. 독립운동사에서 김구,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에 필적할 만한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받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변변한 연구 논문 한 편 없다. 옥중에서 선생은 일제에 저항해 여러 번 단식투쟁을 했다. 마포형무소에서 한 단식 기간은 무려 48일로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악랄한 일본인 형무소장도 그런 선생에게는 예를 갖추고 인사를 했으며 ‘가미사마’(神)라고 부르기도 했다. 1889년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 659에서 태어난 선생은 생후 반년 만에 생모를 잃고 후모(後母) 백씨의 손에 자랐다. 어릴 때부터 온후하고 정의감이 남다르게 강했던 선생은 기쁨과 슬픔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19세에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선생은 고향에 일신학교를 설립해 청소년들을 가르쳤다.1919년 3월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선생의 인생 행로를 바꾸었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체포령이 내려지자 선생은 3월 18일 중국 관전현 안자구(安子溝)로 망명했다. 이때부터 평생 온몸을 내던진 선생의 무장독립투쟁이 시작됐다. 선생은 비밀결사인 광제청년단을 조직하는 한편 의용대를 편성해 군자금을 모금했다. 이듬해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에 이탁을 파견해 광복군총영을 조직했는데 선생은 총영장(總營長)이 됐다. 광복군총영은 임시정부에서 장총 240여정과 탄약을 입수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마침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 상원의원 일행이 1920년 8월 14일 서울에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총영은 결사대원을 평양·신의주·선천·서울로 보내어 미 의원단이 그 지역을 통과할 때 파괴 공작을 펴 이목을 끌기로 했다. 안경신 일행은 안주경찰서의 일제 경찰과 친일 조선인 경찰을 사살했으며 평양의 경찰서 신축 건물을 폭파했다. 신의주 철도호텔에 폭탄을 투척했고 선천경찰서도 파괴했다. 이 사건 이후 일제는 선생을 체포하느라 혈안이 됐다. 선생은 1922년 6월 양기탁의 동삼성(東三省) 독립운동단체 통합 제안으로 발족한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이 돼 독립군을 지휘하며 무장투쟁을 벌였다. 1924년에는 대한통의부 와해 후 새로 통합된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출범했는데 선생은 군사위원장과 총사령을 겸임했다. 선생이 이끌던 무장 독립군은 국내에 침투해 일제와 싸워 큰 전과를 거두었다. 독립군들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며 압록강 일대 삭주, 벽동, 후창, 초산, 무산 등의 경찰 주재소와 관공서를 습격했다. 독립군 결사대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일제 평북경찰부의 통계에 따르면 선생은 1927년까지 부하 1만 4149명을 지휘해 일제 관공서를 143회 습격하고, 일제 관리 149명과 밀정 765명을 살상했다.그러나 무장 항쟁을 이끌던 선생은 밀정의 덫에 걸려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독립군 부하들의 양식 조달을 위해 지린에 농업공사를 만들었는데 운영난으로 그와 부하들은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이를 본 옛 동지 김종원이 선생에게 “삼성(三成) 금광주인 최창학이 선생을 만나 뵙고 싶어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을 믿은 선생은 1927년 12월 16일 창춘 시내 약속 장소에 나갔는데 일제가 파 놓은 함정이었다. 일제의 앞잡이로 변신한 김에게 유인당한 선생은 잠복해 있던 신의주 경찰서 고등계 형사인 김덕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선생은 일제의 취조에 자신이 지휘한 무장 투쟁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고문을 당하면서도 부하들의 이름은 발설하지 않았다. 선생의 활동만큼 일제가 붙인 죄목은 방대했고 수사·재판 기록은 쌓아두었을 때 높이가 5m가 넘어 3·1운동 이후의 만주 독립운동사와 같았다. 선생은 광인(狂人) 행세를 하고 1929년 11월부터 33일이나 단식을 하는 등 재판에 협조하지 않았다. 또 “한번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나 개인의 집안일을 돌보고 걱정하고 그리워할 수는 없다”며 아내는 물론 어떤 면회도 거절했다. 부인과 아들은 옥 밖에서 통곡을 하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1928년 4월에는 부하 2명이 선생을 구하려고 경찰서로 잠입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재판이 열린 신의주 지방법원 법정에는 선생의 모습을 보려는 방청객들이 쇄도했다. 선생은 그들 앞에서 큰 소리로 “독립만세”라고 외치거나 노래를 불렀다. 또 “하느님의 명령”이라면서 재판을 거부했다. 선생의 광적인 행동은 일부러 미친 척함으로써 일제와 일인(日人)의 재판에 저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인 의사는 선생에게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붙였다. 하지만 선생은 정신을 차려서는 “내가 무슨 잘못한 일이 있기에 징역살이를 하며 또한 설혹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조선 사람이니까 너희 일본놈의 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1932년 3월 9일 선생은 구형대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심 선고도 무기징역이었다. 선생은 상고를 포기했으며 장기수를 수감하던 마포형무소로 이감됐다가 1944년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던 공주형무소로 다시 옮겨졌다. 한 달이 넘는 단식도 이겨냈던 선생은 17년이 넘는 세월의 모진 옥고를 견디지 못하고 광복을 1년도 채 남겨 놓지 않은 그해 12월 1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선생의 나이 55세였다. 선생을 체포하고 옥사하게 한 김덕기는 노덕술, 하판락과 함께 조선인 3대 악질 형사였다. 김은 16년 동안 일제 경찰로 일했고 평북경찰부 고등형사과장 자리에 올라 수많은 독립군과 애국지사들을 잡아들여 고문했다. 그가 검거해 송치한 독립군이 1000명이 넘었고 그중 20%가 사형 또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광복 후 김은 반민특위에 체포됐지만 대부분의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반민족 행위자로서는 처음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반민특위 해체로 감형된 뒤 6·25전쟁 중에 횡사한 것으로 전해진다.오동진이 숨을 거둔 땅 충남 공주의 공산성 주차장 한쪽에 선생의 추모비가 덩그렇게 서 있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무후선열제단에는 순국선열 중 유해를 찾지 못한 130분의 위패가 봉안돼 있는데 선생의 위패도 있다. 선생의 묘소가 없는 것은 아니고 북한 애국열사릉에 있다.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한 선생의 유해가 왜 북한으로 옮겨졌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선생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린 나이에 만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부인의 행적도 알 길이 없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이춘재 8차사건 피해자와 두집 건너 거주

    이춘재 8차사건 피해자와 두집 건너 거주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자백한 이춘재(56)가 범인이 잡힌 8차 사건도 자신이 저질렀다고 실토해서 논란인 가운데 당시 이씨도 용의의 선상에 올랐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8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당시 경찰이 이씨의 음모도 뽑아 조사했는데 현장에서 발견된 음모와 혈액형과 형태가 달라서 제외된 것 같다고 밝혔다. 경찰은 또 이춘재가 살인 14건과 강간·강간미수 성범죄 30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지만, 경찰은 이씨의 범행이 이보다 많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수사본부에 따르면 경찰은 전날까지 휴일을 빼고 모두 13차례에 걸쳐 이씨에 대한 대면조사를 했다. 화성사건들을 자백한 이씨는 이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해 조사는 다소 더디게 진행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이 씨가 자백하며 밝힌 것보다 더 많은 살인과 성범죄 범행을 저질렀을 것으로 보고 당시 화성, 수원, 청주 등의 미제사건들을 모두 살펴보고 있다. 수사본부 관계자는 “수원권, 청주권의 미제 살인사건을 모두 보고 있다”며 “용의자가 진술하지 않은 범죄가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진술한 범죄가 이씨의 소행이 아닐 수도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씨 실토한 14건의 살인 중 확인된 것이 몇건 인가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단계가 아니라고 말했다. 경찰은 또 이씨가 8차 사건마저 자신이 저질렀다고 주장함에 따라 최근 8차 사건의 범인으로 무기징역을 확정받고 20년을 복역하다가 감형받아 2009년 출소한 윤씨를 최근 만나 조사했다. 윤씨는 경찰에 “내가 하지 않았다. 억울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8차 사건은 DNA가 일치하는 7차 사건 이후 9일만인 1988년 9월 16일 당시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박모(당시 13세) 양의 집에서 박양이 성폭행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특히 이씨는 박양과 두 집 건너 이웃에 살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씨 집 뒤편 두집 건너에 박양의 집이 있었고, 범인으로 지목돼 옥고를 치른 윤씨도 이웃에 살았다. 박양의 살해 현장에선 성인 음모 8개가 발견됐다. 경찰은 당시 현장에서 수거한 음모 8개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 방사성 동위원소 감별법으로 정밀감식한 결과 용의자의 혈액형은 B형이고 중금속인 티타늄(13.7ppm)이 다량 검출됐다는 결과를 받았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티타늄을 사용하는 용접공이나 생산업체 종업원 중 B형 혈액형을 가진 수백명의 음모를 취합해 감정을 의뢰했다. 당시 수백명 음모를 채취했으나 방사성 동위원소 검사는 비용이 비싸서 모두 못하고 혈액형과 형태가 비슷한 것만을 골라서 검사했는데 이씨는 혈액형이 O형이라서 빠진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그리고 집안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야외가 아니고, 옷으로 묶는 등 기존 사건들과 범행 방법이 달라서 별개 건으로 판단한 듯 하다고 밝혔다. 한편 20년간 옥살이를 한 윤씨는 청주 집 앞에 와있는 기자들에게 “이웃들과 직장에서 알면 안된다. 다 돌아가라. 너희들이 20년전에 도와준게 뭐있냐. 언론, 경찰, 검찰 다 못믿는다”고 고성을 지르고 다시 들어갔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 학술대회 및 추모제 개최

    ‘남도의 유관순’ 윤형숙 열사 학술대회 및 추모제 개최

    ‘남도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윤형숙(1900~1950) 열사 학술대회 및 추모제가 지난 27일 여수문화홀에서 시민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고인의 항일투쟁을 기리기 위한 학술대회가 열린 것은 처음이다. ‘의혈지사 윤형숙을 기억한다’라는 주제로 열린 행사에서는 광주대 한규무 교수가 ‘의혈지사 윤형숙의 삶과 항일투쟁’을, 광주신학대 김호욱 교수가 ‘일제강점기 호남 기독교 선교와 윤형숙의 항일운동’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했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이윤옥 소장과 독립유공자발굴위원회 윤치홍 위원장이 토론자로 나섰다. 윤 열사의 모교인 광주수피아여고 고세영 교장과 김유정 총동창회장이 시 낭송을 했고 윤 열사의 생애를 담은 영상도 상영됐다. 학술대회 후에는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에 있는 윤 열사 묘소에서 추모제도 진행했다.창무리가 고향인 윤 열사는 1918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해 2학년이 됐던 1919년 3월 기미만세운동 때 교사 박애순 등과 독립선서를 미리 인쇄하는 등 시위를 주도했다. 3월 10일 오후 일본 헌병은 시위대의 맨 앞에 섰던 윤 열사의 왼팔을 군도로 내리쳤다. 윤 열사는 왼팔이 잘려 피를 흘리면서도 일어나 태극기를 다시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윤 열사는 ‘조선의 혈녀(血女)’라는 이름을 얻었다. 옥고를 치르고 고문으로 한 눈마저 잃은 열사는 전도사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50년 9월 28일 인민군에게 붙잡혀 학살당했다. 정부는 2004년 윤 열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이천 쌀·찹쌀떡으로 쫀득함·고소함 살려

    이천 쌀·찹쌀떡으로 쫀득함·고소함 살려

    SPC그룹이 운영하는 배스킨라빈스가 9월 ‘이달의 맛’으로 ‘쌀떡궁합’ 아이스크림을 새롭게 선보였다. 쌀떡궁합(더블주니어·3800원)은 고소하면서도 달콤한 인절미 아이스크림과 이천 지역 특산물인 쌀로 만든 담백한 아이스크림이 조화를 이뤘다. 현미, 백미, 흑미 3가지 곡물과 찹쌀떡 리본까지 들어가 바삭하게 씹는 식감과 쫀득한 식감을 모두 맛볼 수 있다. 이달의 케이크 ‘나이스 라이스 케이크(2만 5000원)’는 쌀떡궁합 아이스크림을 바탕으로 찹쌀떡 리본과 곡물 크런치, 콩고물 등을 올려 완성한 색다른 아이스크림 케이크다. 이달의 음료 ‘쌀떡궁합 와츄원 쉐이크(4800원)’는 쌀떡궁합 아이스크림을 우유와 블렌딩해 만든 쉐이크 음료다. 배스킨라빈스는 ‘미니 버블스 라이스 케이크 옥고밤(3900원)’도 새롭게 선보였다. 쫄깃한 찹쌀떡 안에 가을철 잘 어울리는 옥수수, 고구마, 밤의 세 가지 맛 아이스크림을 담아 세트로 구성했다. 이달말까지 쌀떡궁합 구매 시 500원을 더 내면 싱글레귤러를 두 단계 사이즈 업그레이드한 더블주니어로 살 수 있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윤이상작곡상 6년 만에 부활… 홀리거·사리아호 공동 선정

    윤이상작곡상 6년 만에 부활… 홀리거·사리아호 공동 선정

    6년 만에 부활한 윤이상국제작곡상 수상자로 스위스 작곡가 하인츠 홀리거(왼쪽·80)와 핀란드 작곡가 카이야 사리아호(오른쪽·67)가 공동 선정됐다. 홀리거는 윤이상과 깊은 음악적 교감을 나눈 작곡가 겸 오보이스트다. 윤이상은 홀리거에게 오보에 작품을 헌정했고, 홀리거는 윤이상이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당시 구명 운동을 벌였다. 수상 소식을 접한 홀리거는 “윤이상국제작곡상을 받게 돼 영광”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법으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 사리아호는 수상 소감을 묻자 “젊은 시절 윤이상의 다양한 음악과 철학이 나를 고무시켰다”고 떠올렸다. 재단은 윤이상 타계일인 11월 3일 수상자들에게 각각 상금 1만 5000달러를 전달할 예정이다. 윤이상국제작곡상은 작곡가 윤이상(19 17~1995)의 정신을 기리고 동서양 음악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2007년 제정돼 격년으로 개최됐으나 2013년 윤이상평화재단 내외부 사정으로 중단됐다. 이번에 작곡상을 재개하면서 수상자 선정 과정을 기존 콩쿠르 방식에서 음악가의 예술적 영향력과 사회적 관계를 종합 심사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상가 권리금보호신용보험 상품은 권리금 못 받아 발생하는 손해 보상”

    “상가 권리금보호신용보험 상품은 권리금 못 받아 발생하는 손해 보상”

    “지난해 말 기준 상가 임대차 계약 가운데 70%가 권리금이 존재하는데 자영업자들이 많이 창업하는 숙박, 음식 분야는 88%에 이릅니다. 전국 평균 4535만원, 서울 평균 5472만원으로 집계되는데도 권리금이 있는 상가의 20% 정도만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어 보호받지 못할 위험이 상당합니다. 해서 법령 및 제도가 정비되는 것과 발맞춰 권리금보호신용보험을 출시하게 됐습니다.” 보증업계의 선두주자 SGI서울보증이 지난 2일 상가 권리금을 보호하는 상품을 내놓는다고 해 김상택(58) 대표와 마주 앉았다. 1988년 입사해 영업 일선을 두루 경험하고 회사 설립 50년 만에 처음 내부 승진을 통해 2017년 12월 대표에 취임했다. 복잡한 사안을 설명하는 데 막힌 구석이 없다. ●임대인 방해 여부 조정되면 손해배상액 지급 김 대표는 새로 선보인 상품에 대해 “임대인이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에서 규정된 방해 행위를 해서 임차인이 권리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 보증보험이 그 손해를 보상하게 된다”면서 “생업에 매달려야 하는 임차인들이 소송이나 강제 집행을 통해 보상받으려면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법원 판결 전 상가건물임대차 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임대인의 방해 행위 여부가 조정되면 손해배상액을 산정해 지급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회사의) 보상액은 신규 임차인으로부터 받기로 했던 권리금과 임대차 계약 종료 때의 권리금 가액 가운데 낮은 쪽이 된다. 또 손해액이 결정되지 않으면 회사가 별도의 감정 평가를 통해 보상액을 결정한다. 김 대표는 또 1만원부터 많게는 10만원 정도 드는 조정 신청 수수료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함께 상가보증금보장신용보험도 출시했는데 임대인으로부터 돌려받아야 하는 임차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경우 보증금 전액을 보상하는 상품이다. 이제는 제법 알려진 전세금반환보증상품의 상가용 버전이라고 보면 된다. ●임차 보증금 전액 보상하는 상품도 출시 김 대표는 “임차인이 대항력과 우선변제권을 유지하도록 우선변제권을 회사가 승계할 수 있어야 한다”며 “서울은 보증금과 월세의 100배를 합한 금액이 9억원을 초과하지 않아야만 가입이 가능하며 과밀억제권역, 광역시 여부 등에 따라 상한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반인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회사 소개를 부탁하자 “채무자에게는 부족한 신용을 보완해 주고, 채권자에게는 담보를 제공해 신용 거래를 활성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보증보험 제도다. 국내 보증시장 규모는 70여개 업체 1200조원으로 추정되는데 SGI서울보증이 25%를 차지하며 국제신용보증보험협회(ICISA)로부터 2017년 원수보험료 기준 세계 3위로 뽑혔다. ●“베트남 지점 모델 亞시장 선도 역할 할 것” 지난 2월 창립 50주년을 맞아 고객, 파트너십 경영, 디지털, SGI 프라이드 등 4대 경영 비전을 선포한 김 대표는 “베트남 하노이 지점을 통해 8500건 5400억원을 공급했고 지금은 시장 확대를 위해 베트남 입찰법 개정에 집중하고 있다. 매년 베트남에 해비탯 자원봉사를 다닌다. 중국 기업들과 합작 회사를 설립하는데 연말 예비인가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 나라를 모델로 아시아 보증보험 시장을 선도하도록 더욱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김 대표는 인터뷰 말미에 사옥이 들어선 곳의 의미가 간단치 않다고 강조했다. 김상옥로 29번지는 정신여고 터이기도 하다. 김상옥 의사는 일제 강점기 의열단원으로 한당사령부장을 역임했으며 일본 경찰의 추적과 미행을 따돌리며 종로 일대를 누빈 활약상이 전해진다.  김마리아 선생은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 유학을 마치고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다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5개월 옥고를 치렀다. 정신여고 옛터에 자리한 SGI서울보증 야외정원에는 일경의 수색을 피해 3·1운동 관련 비밀문서와 태극기, 역사책을 숨겼던 550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오롯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창립 50주년을 맞으면서 사옥 뒤편에 김마리아 흉상을 세운 이유다. 지금도 정신여중고 학생들이 이따금 찾아와 오래 전 선배의 뜻을 기리는데 김 대표나 임직원들이 커피도 대접하고 얘기도 주고받는다고 했다. 사옥 4층에는 조그마한 사내 박물관이 꾸며져 있다. 1982년에 국민카드로 양도된 국내 최초의 신용카드 견본도 어렵사리 구해 전시하고 있고, 대한뉘우스의 영상 자료를 뒤져 찾아낸 대한보증보험 출범식 때 사진도 볼 수 있다. 김 대표는 “많은 분들이 서울보증 하면 낯설게만 느끼시는데 사실 1980년대 마이카붐이 일었을 때 전국 자동차의 80~90%는 우리 회사의 보증이 있었기에 달릴 수 있었고, 2000년대 핸드폰이 보급되는 데 단말기 할부 보증이 뒷받침했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새롭게 꾸민 컨퍼런스룸에 ‘다다름.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합의에 이른다’라고 적힌 액자를 걸어두었는데 절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독립운동가 장준하 아들이 조국 딸에 보낸 편지

    독립운동가 장준하 아들이 조국 딸에 보낸 편지

    독립운동가인 고(故) 장준하 선생의 아들이 입시 특혜 의혹을 받고 있는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딸 조모씨에게 공개 편지를 남겼다. 미국 코네티컷에 거주하며 목회 활동을 하고 있는 장호준씨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조양의 아버지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며 조양이 당하고 있을 일에 더욱 화가 나고 많이 아팠다”며 글을 시작했다. 장씨는 자신이 어린시절 겪은 일화를 꺼냈다. 그는 “어릴 때 야구하다 남의 집 물건을 깨트리면 집주인이 내 등을 두드려주며 ‘너희 아버님이 어떤 분이신데, 네가 이렇게 놀면 되겠니?’라고 했다. 다른 애들처럼 그냥 몇 대 쥐어박고 보내주면 될 것을 꼭 아버지 이름을 꺼냈다. 그게 싫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게 아버지 이름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시치미였다. 학교와 군대에서 요시찰 대상이 돼 부당한 압박을 받았던 것도 내가 아버지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면서도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내게 큰 혜택을 주기도 했다. 신학교 시절 장학금 받은 것도, 해외 후원금을 받으며 암울한 시절을 버틴 것도 내가 아버지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장씨는 조 후보자 딸에게 “물론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마음 어느 한구석에서는 ‘하필 내가 왜 조국의 딸이어서’라는 소리가 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 내 아버지가 조국이다’라는 소리가 더 크게 외쳐지리라 믿는다”고 응원했다. 또 “지금 조양의 아버지에게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있는 자들로 인해 조양이 겪고 있을 아픔의 시간들을 자랑스럽게 새겼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내 나이 환갑이 지났지만 아직도 ‘장준하 선생의 삼남’이라고 소개되는 게 자랑스럽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했다. 장씨는 “지금은 조양이 아버지를 안아 드려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만일 내가 조양의 아버지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딸아이가 나를 한 번 안아주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한다”라며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 ‘그래 내가 조국의 딸이다’를 더욱 크게 외치는 조양이 되리라 믿는다”며 글을 마무리했다.고 장준하 선생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월간 ‘사상계’를 발행한 언론인이자 국회의원, 재야운동가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중 1975년 8월 17일 포천 약사봉 등산길에서 의문사했으며 사후인 1991년 건국 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야만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셨어요. 아직 그동안 해 오신 것의 반도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은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내며 진보당을 창당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죽산 선생은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5개월이 지난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사법 살인’으로 기록된 사건이 발생한 지 52년이 지난 2011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죽산 선생의 장녀 조호정(91) 여사의 노력 덕택이었다. 지난 9일 조 여사의 외동딸 이성란(59)씨를 만났다. 조 여사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이씨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을 때 어머니께서 ‘이제야 죽어서 아버지를 뵐 낯이 있다´고 하시면서 크게 기뻐하셨다”며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은 할아버지의 완전한 명예회복”이라고 말했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 탈당… 건국 참여 -완전한 명예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난 건 간첩죄에 대한 명예회복이에요. 정치인으로서 명예회복은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원래 독립운동가였어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1932년부터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보냈으며 1945년 광복하던 날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맞으셨어요.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려했어요. 독립운동을 인정받아야 ‘죽산’이라는 이름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11년 1월 20일 조봉암 재심 사건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 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빨갱이로 헐뜯는 것 볼까 봐 기사 댓글 못 읽어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은 왜 반려된 건가요. “무죄 판결을 받은 2011년 그리고 2015년 두 차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모두 거절당했어요.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지난해 7월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서류를 검토했는데 안 되겠다는 거죠. 기분이 안 좋았어요. 저희가 신청도 안 했는데 보훈처에서 검토하고, 또 안 된다니요. ‘이제는 그만 신청하라’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더이상 서훈을 신청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일 같아서요.” “저희 가족은 아직도 할아버지 기사에 달린 댓글을 못 봐요. 여전히 무섭거든요. 나중에 언젠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다면 ‘빨갱이가 무슨 독립유공자냐’고 헐뜯는 사람들이 나타날까 봐 두렵습니다. 공산주의적인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죠. 이런 이야기를 더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요. 아직도 간첩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스럽지요.” ●‘진보당 사건’ 압수수색으로 자료 사라져 보훈처는 ‘친일 흔적’이 있다며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반려했다. 1941년 신문 기사에 죽산이 휼병금(장병 위로금)을 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이유에서다.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 가택 압수수색으로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자료가 다 사라졌어요. 보훈처에서는 입증할 자료를 더 찾아서 가져오라고 하는데, 일반인이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이씨를 만난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후원으로 ‘청년 조봉암’ 발대식이 열렸다. 이씨는 광복회,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한 이 행사에 참석했다. ‘청년 조봉암’은 죽산의 고향인 인천 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를 기념하고 발자취를 좇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보당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1심에서 간첩죄는 무죄, 국가보안법만 유죄로 징역 5년이 나왔는데 2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돼 사형이 선고됐어요.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고 재심을 청구했는데, 기각되자마자 바로 다음날 사형을 집행했죠. 이게 사법 살인이 아니면 뭘까요. 다른 말로 대체할 수가 없죠. 할아버지 싹수를 자른 거예요. 여운형, 김구 선생을 살해하듯 정적을 제거한 거죠.” -기념사업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요. “기념사업회에서는 죽산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하고 선양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학술 활동과 토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요. ‘청년 조봉암’도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청년들이 죽산 선생의 생각과 이념을 공유하고 생각해 보는 거죠. 내년에는 생가터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해요.” 재심 무죄 판결을 받던 날 조 여사는 “아버지 비석에 비문을 새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언론에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있는 죽산 묘지의 비석 뒷면은 아직도 비어 있다. ●60주기에 죽산정신 계승 청년들 참석 뜻깊어 “백비는 보존해야 될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하려고 해요.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완전한 명예회복이 되면 비를 새로 세우려고 합니다. 지난달 31일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는데 호우 경보가 떴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어요. 그 빗속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신 분들은 물론 죽산의 정신을 이으려는 청년들까지 참석해 정말 고맙고 뜻깊었어요.”-어머니 조 여사의 건강은 어떤가요. “지병은 없지만 거동이 불편하셔서 몇 년째 추모식에도 참석을 못 하세요. 어머니는 너무 고초를 겪으셔서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태연자약하시지요. 재심 무죄 판결이 나던 날도 저는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생각에 법정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게 웃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눈을 떴는데 할아버지가 사형 선고받던 날이 생각나서 너무 힘드셨다고 해요. 50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는 거죠. 아직도 서대문형무소 인근을 가면 어머니가 몸서리를 치세요. 텔레비전에서 감옥, 수의가 나오면 숨을 못 쉬고요. 옥바라지하던 시절이 생각나서요.” 고 노회찬 의원은 죽산 선생을 ‘한국 정치사 최초의 좌파 정치인’이라고 명명했다. 추모식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궁금합니다. “사회활동을 하실 때는 냉철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해요. 반면 집에서는 너그러우시고 유머가 넘치셨다고 합니다. 식구들이 식사하고 있으면 와서 보시고는 ‘왜 내 상에 있던 반찬이 없냐. 내 상에만 특별한 반찬을 놓지 말고 다른 식구들도 똑같이 놓고 먹어라’고 하셨다네요.” -죽산 선생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할아버지의 마지막 옥중 유언으로 대신할게요.” “우리의 정치적 이상은 책임 정치, 수탈 없는 경제 민주화, 그리고 평화 통일이었지. 우리는 벽에 막혀 하지 못했지만 먼 훗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 나갈 것이네. 그러면 결국 어느 땐가 평화 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야만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셨어요. 아직 그동안 해 오신 것의 반도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은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내며 진보당을 창당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죽산 선생은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5개월이 지난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사법 살인’으로 기록된 사건이 발생한 지 52년이 지난 2011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죽산 선생의 장녀 조호정(91) 여사의 노력 덕택이었다. 지난 9일 조 여사의 외동딸 이성란(59)씨를 만났다. 조 여사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이씨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을 때 어머니께서 ‘이제야 죽어서 아버지를 뵐 낯이 있다‘고 하시면서 크게 기뻐하셨다”며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은 할아버지의 완전한 명예회복”이라고 말했다.-완전한 명예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난 건 간첩죄에 대한 명예회복이에요. 정치인으로서 명예회복은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원래 독립운동가였어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1932년부터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보냈으며 1945년 광복하던 날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맞으셨어요.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려했어요. 독립운동을 인정받아야 ‘죽산’이라는 이름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11년 1월 20일 조봉암 재심 사건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 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은 왜 반려된 건가요.  “무죄 판결을 받은 2011년 그리고 2015년 두 차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모두 거절당했어요.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지난해 7월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서류를 검토했는데 안 되겠다는 거죠. 기분이 안 좋았어요. 저희가 신청도 안 했는데 보훈처에서 검토하고, 또 안 된다니요. ‘이제는 그만 신청하라’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더이상 서훈을 신청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일 같아서요.”  “저희 가족은 아직도 할아버지 기사에 달린 댓글을 못 봐요. 여전히 무섭거든요. 나중에 언젠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다면 ‘빨갱이가 무슨 독립유공자냐’고 헐뜯는 사람들이 나타날까 봐 두렵습니다. 공산주의적인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죠. 이런 이야기를 더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요. 아직도 간첩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스럽지요.”  보훈처는 ‘친일 흔적’이 있다며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반려했다. 1941년 신문 기사에 죽산이 휼병금(장병 위로금)을 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이유에서다.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 가택 압수수색으로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자료가 다 사라졌어요. 보훈처에서는 입증할 자료를 더 찾아서 가져오라고 하는데, 일반인이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이씨를 만난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후원으로 ‘청년 조봉암’ 발대식이 열렸다. 이씨는 광복회,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한 이 행사에 참석했다. ‘청년 조봉암’은 죽산의 고향인 인천 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를 기념하고 발자취를 좇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보당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1심에서 간첩죄는 무죄, 국가보안법만 유죄로 징역 5년이 나왔는데 2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돼 사형이 선고됐어요.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고 재심을 청구했는데, 기각되자마자 바로 다음날 사형을 집행했죠. 이게 사법 살인이 아니면 뭘까요. 다른 말로 대체할 수가 없죠. 할아버지 싹수를 자른 거예요. 여운형, 김구 선생을 살해하듯 정적을 제거한 거죠.” -기념사업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요.  “기념사업회에서는 죽산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하고 선양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학술 활동과 토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요. ‘청년 조봉암’도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청년들이 죽산 선생의 생각과 이념을 공유하고 생각해 보는 거죠. 내년에는 생가터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해요.”  재심 무죄 판결을 받던 날 조 여사는 “아버지 비석에 비문을 새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언론에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있는 죽산 묘지의 비석 뒷면은 아직도 비어 있다.  “백비는 보존해야 될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하려고 해요.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완전한 명예회복이 되면 비를 새로 세우려고 합니다. 지난달 31일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는데 호우 경보가 떴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어요. 그 빗속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신 분들은 물론 죽산의 정신을 이으려는 청년들까지 참석해 정말 고맙고 뜻깊었어요.” -어머니 조 여사의 건강은 어떤가요.  “지병은 없지만 거동이 불편하셔서 몇 년째 추모식에도 참석을 못 하세요. 어머니는 너무 고초를 겪으셔서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태연자약하시지요. 재심 무죄 판결이 나던 날도 저는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생각에 법정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게 웃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눈을 떴는데 할아버지가 사형 선고받던 날이 생각나서 너무 힘드셨다고 해요. 50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는 거죠. 아직도 서대문형무소 인근을 가면 어머니가 몸서리를 치세요. 텔레비전에서 감옥, 수의가 나오면 숨을 못 쉬고요. 옥바라지하던 시절이 생각나서요.”  고 노회찬 의원은 죽산 선생을 ‘한국 정치사 최초의 좌파 정치인’이라고 명명했다. 추모식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궁금합니다.  “사회활동을 하실 때는 냉철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해요. 반면 집에서는 너그러우시고 유머가 넘치셨다고 합니다. 식구들이 식사하고 있으면 와서 보시고는 ‘왜 내 상에 있던 반찬이 없냐. 내 상에만 특별한 반찬을 놓지 말고 다른 식구들도 똑같이 놓고 먹어라’고 하셨다네요.” -죽산 선생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할아버지의 마지막 옥중 유언으로 대신할게요.”  “우리의 정치적 이상은 책임 정치, 수탈 없는 경제 민주화, 그리고 평화 통일이었지. 우리는 벽에 막혀 하지 못했지만 먼 훗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 나갈 것이네. 그러면 결국 어느 땐가 평화 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한국 첫 양심적 병역거부 80년… 현재를 보다

    한국 첫 양심적 병역거부 80년… 현재를 보다

    새달 4~29일 ‘등대사 사건’ 회고전 1939년 日, 징병 거부 신자 체포·수감 당시 재판 기록 6000쪽·사진 등 전시 새달 13~15일 66개국 6만 5000명 방한 600명 침례 등 예정·대체복무 관심많아 양심적 병역거부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여호와의 증인들이 공개적으로 움직인다.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특별전시회를 마련하는 데 이어 전 세계 여호와의 증인들이 대규모 국제대회를 연다. 지난해 11월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한 대법원 무죄 선고 이후 여호와의 증인이 추진하는 이례적인 집단 행사들이어서 주목된다. 다음달 4~29일 여는 ‘변하는 역사, 변하지 않는 양심’ 특별전은 한국 최초의 양심적 병역거부인 ‘등대사 사건’ 80주년을 회고하는 자리이다. 등대사란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파수대(Watchtower)의 일본식 표현. 일본 경찰은 1939년 6월 29일 일왕 숭배와 징병을 거부하는 등대사원(여호와의 증인 신자) 33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명목으로 체포·수감했다. 당시 수감자들은 평균 4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이 가운데 6명이 옥사했다. 1932년 서울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 대회’ 참석자가 45명이었음을 볼 때 당시 여호와의 증인 대부분이 구속된 셈이다.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 1호’라는 옥계성씨는 자신을 포함해 장·차남 부부가 모두 옥고를 치렀다. 3남은 일본에서 옥사했다. 옥계성씨의 증손자인 옥규빈씨는 지난해 11월 대법원 판결 이후 대체복무를 기다리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 측이 20일 서울신문에 제공한 재판기록을 보면 옥계성씨의 차남 옥지준씨는 법정에서 이런 진술을 남긴 것으로 돼 있다. “천황(일왕)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여호와 하느님의 인간을 죽이지 말라는 가르침이 성서에 쓰여있는 이상 그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여호와의 증인은 그동안 입소문으로만 전해지던 등대사 사건의 재판 기록 6000쪽을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확인, 다음달 특별전시회에서 관련 자료들을 사진과 함께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여호와의 증인 지역 대변인 홍영일씨는 당시 여호와의 증인들이 옥고를 치렀던 시설 측과 전시 장소를 최종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다음달 13~15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리는 여호와의 증인 국제대회도 이례적인 행사다. 66개국에서 1만명의 해외 방문객을 포함해 6만 5000명 이상이 참석할 예정이어서, 교단의 최대 행사가 될 전망이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를 주제로 여는 이번 대회에선 성경에 근거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 연설과 영화 및 다큐멘터리 영상 상영들로 진행된다. 행사 도중 국내외 600명이 침례를 받는다.이 대회는 지난 5월부터 연말까지 전 세계 6대주 주요 도시에서 번갈아 가며 열리는 국제대회의 일환이다. 참석자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해 수감 등 오랜 기간 수난을 겪었던 한국 신자들을 위로하고 최근 진행 중인 대체복무와 관련해 토론을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대법원의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선고 이후 939건의 병역법 재판 중 24건이 무죄 확정됐으며 915건이 재판 진행 중이다. 라이베리아에서 선교활동 중 국제대회 참석차 최근 입국한 필립 프로사(스위스)는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양심적 병역 거부로 어려움을 겪어도 항상 충실함을 유지한 한국의 동료들로부터 큰 격려를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1912년 한국에 들어온 여호와의 증인은 전 세계 240개국에 신자는 858만명에 이른다. 이 중 한국 신자는 10만여명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가르침을 초창기 그대로 실천함을 가장 중시하며 호별 방문 전도와 엄격한 도덕적 삶 유지를 강조한다. 한국에선 집총과 수혈을 거부하는 종교로 알려져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한국인 1호 특허권자 정인호 선생의 독립운동

    한국인 1호 특허권자 정인호 선생의 독립운동

    애국지사 정인호(1869∼1945) 선생이 한국인 제1호 특허권자로 확인됐다. 특허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광복 74주년, 정인호 선생의 특허 등록 110주년을 기념해 13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추모식을 개최했다. 추모식에는 선생의 후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1호 특허권자임을 알리는 ‘상징물’을 부착했다. 경기 양주 출신인 정 선생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청도군수를 사직한 뒤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08년 초등대한역사 등 교과서를 저술해 교육을 통한 민족교육 운동에 힘쓰는 등 교육자·저술가·발명가로 활동했다. 1909년 8월 19일 통감부 특허국에 제133호 특허로 ‘말총 모자’를 등록했는데 한국인 최초 특허다. 일본에도 출원해 특허 등록했다. 말총 모자는 말갈기와 말 꼬리털로 만든 모자다. 단발령으로 착용하기 어려워진 갓을 대체한 제품으로 당시 말총 모자를 선전하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했다. 이후 말총 모자·말총 핸드백·말총 셔츠 등 다양한 제품을 일본·중국 등에 수출하며 민족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선생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독립구국단을 결성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징역(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을 못 보고 세상을 떠났지만 정부는 공훈을 인정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박원주 특허청장은 “일본제도에 의한 한국인 1호 특허가 민족기업을 성장시켜 독립운동의 숨은 자금원이 됐다”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특허가 위기 극복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는 점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대전 박승기 기자 sk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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