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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북도,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개선사업’ 후원 잇따라

    경북도,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개선사업’ 후원 잇따라

    경북도가 추진하는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개선사업’에 공공기관과 단체의 후원이 이어지고 있다. 경북도는 11일 도청 접견실에서 지텍㈜(대표 유해귀)와 함께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개선사업 후원금 2000만원 전달식을 개최했다. 지텍㈜는 기술개발 분야에서 우수한 성과를 낸 기업으로 평가돼 2020년 경상북도 중소기업대상을 수상했다. 앞서 한국수자원공사는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과 함께 후원금 5000만 원, 대한건설협회 경북도회 1000만 원, 경북도개발공사 1000만 원,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1억 5000만 원, 안동 세영종합건설이 1억 원을 각각 경북도에 전달했다.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개선사업은 지난 8월 경북도와 한국해비타트, 경북 청년봉사단이 업무협약을 맺고 추진하는 사업이다. 경북도는 안동에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 임시재(80) 씨의 노후 주택 수리를 시작으로 올해 6채의 주택 개선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 중이다. 임씨는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안동에서 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임윤익(1885~1970) 선생의 손자다. 경북에는 독립유공자 후손 515명이 살고 있다.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개선사업 후원 문의는 경북도 청년정책관(054-880-2773)이나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053-980-7800)로 하면 된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아이 업은 엄마가 “레디~ 액션!” 겨울 무대, 그 열정을 다시 보다

    아이 업은 엄마가 “레디~ 액션!” 겨울 무대, 그 열정을 다시 보다

    최초 女 영화감독 박남옥 다룬국립극장의 ‘명색이 아프레걸’일제강점기 기생들의 만세운동서울예술단·경기아트센터 ‘향화’연말연시 따뜻한 위로 건네일제강점기와 전후 격동의 역사를 뜨겁게 불태웠던 여성들의 삶이 올 연말과 내년 초 무대를 달군다. 자신의 꿈을 위해, 또는 나라를 위해 뜻을 굽히지 않고 꿋꿋이 목소리를 낸 여성들의 주체적인 생애는, 힘겨운 해를 잘 버텨 낸 관객들에게 위로를 건네기에 충분해 보인다. 국립극장은 오는 23일부터 내년 1월 2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을 선보인다. 국립극장 전속단체인 국립창극단과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2011년 이후 9년 만에 합동으로 올리는 작품으로,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아프레걸은 전후(戰後)라는 뜻의 프랑스어 ‘아프레 게르’(apres-guerre)에서 ‘게르’를 ‘걸’(girl)로 바꾼 말로 1950년대 여러 매체에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새로운 여성을 지칭할 때 쓰였다. 간혹 사치나 향락 등에 빠진 ‘악녀’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이번 공연에선 갖은 시련을 이겨 내고 당당하게 꿈을 이뤄 낸 진취적인 여성을 뜻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영화 포스터를 모을 만큼 영화를 사랑했고 갓난아기를 들쳐 업고 16㎜ 필름 카메라 한 대로 전국을 누비며 단 한 편의 작품 ‘미망인’을 강렬하게 남긴 박남옥의 열정이 무대 위에 오른다. 국립극단 단장으로 새로 부임한 김광보 연출을 비롯해 고연옥 작가, 나실인 음악감독 등 창작진도 화려하다. 고 작가는 “박 감독이 영화 한 편을 촬영하기까지 겪은 어려움은 이 시대 여성들이 겪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그의 행보는 여성이자 한 인간으로서 극복하고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지난 6~7월 명성황후의 삶을 다룬 서울예술단은 경기아트센터와 공동 제작한 신작 창작가무극 ‘향화’를 내년 1월 8~10일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처음 선보인다. 수원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권번 기생 김향화(1897~1950) 열사를 서울예술단 특유의 한국적 음악의 가무극을 통해 진중하게 재조명한다. 어릴 적 ‘순이’로 불린 김향화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18세에 이혼을 하고,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수원권번 기생이 된다. 기적(기생 명부)에 올린 이름 향화(香花)는 향기로운 꽃이라는 뜻이다. 그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기생들을 이끌고 대한문 앞에서 망곡례를 올렸고, 3·1운동 열기가 한창이던 그해 3월 29일 일제가 강요한 치욕스러운 위생검사가 있던 자혜병원(수원 화성 봉수당 자리) 일대에서 기생 33명의 선두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유관순 열사 등과 심한 옥고를 치르고 가석방된 1919년 10월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다. 서울예술단 권호성 예술감독은 “차별과 억압의 시대를 살았던 향화를 이 시대로 소환해 실종되고 굴절된 여인들의 역사를 조명하려 했다”고 밝혔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뜨거웠던 그녀들의 삶…무대도 뜨겁게 달군다

    뜨거웠던 그녀들의 삶…무대도 뜨겁게 달군다

    일제강점기와 전후 격동의 역사를 뜨겁게 불태웠던 여성들의 삶이 올 연말과 내년 초 무대를 달군다. 자신의 꿈을 위해, 또는 나라를 위해 뜻을 굽히지 않고 꿋꿋이 목소리를 낸 여성들의 주체적인 생애는, 힘겨운 해를 잘 버텨 낸 관객들에게 위로를 건네기에 충분해 보인다. 국립극장은 오는 23일부터 내년 1월 24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기획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을 선보인다. 국립극장 전속단체인 국립창극단과 국립무용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2011년 이후 9년 만에 합동으로 올리는 작품으로,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아프레걸은 전후(戰後)라는 뜻의 프랑스어 ‘아프레 게르’(apres-guerre)에서 ‘게르’를 ‘걸’(girl)로 바꾼 말로 1950년대 여러 매체에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새로운 여성을 지칭할 때 쓰였다. 간혹 사치나 향락 등에 빠진 ‘악녀’ 이미지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이번 공연에선 갖은 시련을 이겨 내고 당당하게 꿈을 이뤄 낸 진취적인 여성을 뜻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영화 포스터를 모을 만큼 영화를 사랑했고 갓난아기를 들쳐 업고 16㎜ 필름 카메라 한 대로 전국을 누비며 단 한 편의 작품 ‘미망인’을 강렬하게 남긴 박남옥의 열정이 무대 위에 오른다. 국립극단 단장으로 새로 부임한 김광보 연출을 비롯해 고연옥 작가, 나실인 음악감독 등 창작진도 화려하다. 고 작가는 “박 감독이 영화 한 편을 촬영하기까지 겪은 어려움은 이 시대 여성들이 겪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서 “그의 행보는 여성이자 한 인간으로서 극복하고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앞서 김 연출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이제서야 제 자리를 찾아가는 중이고 어느 때보다 역할이 강조되는 때”라면서 “아프레걸로 박남옥을 다루는 게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지난 6~7월 ‘잃어버린 얼굴 1895’로 명성황후의 삶을 다룬 서울예술단은 경기아트센터와 공동 제작한 신작 창작가무극 ‘향화’를 내년 1월 8~10일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처음 선보인다. 수원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권번 기생 김향화(1897~1950) 열사를 서울예술단 특유의 한국적 음악의 가무극을 통해 진중하게 재조명한다. 어릴 적 ‘순이’로 불린 김향화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18세에 이혼을 하고,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수원권번 기생이 된다. 기적(기생 명부)에 올린 이름 향화(香花)는 향기로운 꽃이라는 뜻이다.그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기생들을 이끌고 대한문 앞에서 망곡례를 올렸고, 3·1운동 열기가 한창이던 그해 3월 29일 일제가 강요한 치욕스러운 위생검사가 있던 자혜병원(수원 화성 봉수당 자리) 일대에서 기생 33명의 선두에서 만세를 외쳤다. 이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유관순 열사 등과 심한 옥고를 치르고 가석방된 1919년 10월 이후 행적이 묘연해졌다. 서울예술단 권호성 예술감독은 “차별과 억압의 시대를 살았던 향화를 이 시대로 소환해 실종되고 굴절된 여인들의 역사를 조명하려 했다”고 밝혔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무장봉기 이끈 승려… 만세운동 주도 고교생… 일제 수탈 맞선 해녀들

    무장봉기 이끈 승려… 만세운동 주도 고교생… 일제 수탈 맞선 해녀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몽골이나 왜구의 지배와 침략을 받았던 지역으로 외부 세력에 대항하며 독자적으로 존립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일제의 입장에서 제주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풍부한 어족자원을 가진 주요 약탈 지역이었다. 한일병합으로 일제의 수탈이 격심해지자 항거하는 주민들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 거세게 일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유배를 온 유학자들이나 개화파들은 제주도민들의 학문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는 항일·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제주 지역에서는 광복 때까지 크고 작은 항일운동이 잇따라 일어났는데 그중에서 3대 항일운동으로 일컬어지는 법정사 항일운동, 조천만세운동, 제주해녀 항일운동의 현장을 찾아보았다. ●1914년부터 김연일 주지 “일본인 축출” 설법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인 제주도 서귀포 옛 법정사 터는 해발 680m나 되는 한라산 중턱에 있었다. 물이 마른 계곡을 건너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니 어두컴컴한 산속에 일제가 불태워 버린 절터가 나타났다. 집 한 채 크기도 안 되는 작은 터에는 무너져 내린 벽체의 흔적인 돌무더기만 나뒹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주도에서도 항일·독립운동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3·1운동보다 다섯 달 앞서 일어난 법정사 항일운동은 승려들이 주도하고 주민 700여명이 참여한 제주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은 1914년 무렵부터 일본의 국권 침탈이 부당하며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설법을 통해 주장하고 있었다. 김연일은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거사 6개월 전부터 곤봉과 화승총을 마련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했다. 1918년 9월 말 정구용은 “면장과 이장은 장정을 모아 10월 7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고 8일에는 제주향을 습격해 일본 관리를 체포하자”는 격문을 붙였다. 총지휘자 김연일을 필두로 좌대장, 우대장, 선봉대장, 중군대장, 후군대장 등의 의병과 비슷한 군사 조직 체계를 갖추었다.김연일은 1871년 경북 영일군 동해면 도구리에서 태어나 출가한 뒤 경북 경주 기림사의 승려로 있었다. 같은 절에 있던 승려 방동화와의 인연으로 제주도로 와서 1914년쯤 법정사 주지가 됐다. 김연일은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할 목적을 갖고 제주도로 왔다고 한다. 왜 하필 제주도까지 와서 독립운동을 했느냐는 의문에 유족들은 “우리나라 모습에서 제주도가 닻이라서 거기서부터 들어 올려야 독립 바람이 육지까지 분다고 (김연일이) 말했다”고 설명한다. 김연일은 조상의 묘까지 제주도로 옮겼다. 이를 이용해 군자금과 물자를 갖고 제주도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드디어 거사 당일인 7일 새벽 법정사 마당에서 출정식이 열렸다. 김연일은 “일본인을 쫓아내어 원래의 한국 시대를 회복하자”고 선언했다. 선봉대장 강창규와 좌대장 방동화, 우대장 강민수, 모사 장임호와 박주석 등의 지휘에 따라 승려와 신도 등 34명은 깃발을 흔들며 마을로 내려갔다. 미리 참여를 독려하고 격문을 붙여 놓아 참여자는 순식간에 700여명에 이르렀다. 도순·하원·월평·영남·대포·상예리 등 서귀포의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뒤를 따르며 일제를 몰아내자고 소리 높여 외쳤다. 중문리에 도착한 군중은 전선을 자른 뒤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일본인 일행을 구타하기도 했다. 이어 현재 중문파출소 자리에 있던 경찰 주재소로 가서 몽둥이로 기물을 부수고 문서를 불태운 다음 건물을 소각했다. 오전 11시쯤 일경의 기마 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해 왔다. 함성을 지르던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경들은 법정사로 올라가 절을 불태웠다.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모두 66명이 검거됐고 김연일이 1심에서 10년형을 받는 등 46명이 형을 선고받았는데 감형과 가출옥으로 실제 수감 기간은 줄어들었다. 김연일은 3년 3개월, 강창규는 6년가량 옥살이를 했다. 박주석, 강수오, 강춘근 등 5명은 고문 후유증과 가혹한 감옥생활로 옥사했다. 특히 강춘근은 재판을 받기 전에 사망했다. 고문사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정황은 남아 있지 않다. 김연일은 출옥 후 고향 영일로 돌아가 항일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고 다시 붙잡혀 투옥되기도 했다. 정부는 법정사 항일운동 주도자 가운데 32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김연일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 강창규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日 주도자 모두 연행, 거사 계획 미리 파악한 듯 제주시의 동쪽에 있는 조천은 일제강점기에는 육지에서 사람과 물건이 활발하게 오가던 제법 큰 항구였다. 조천은 신촌·함덕·신흥 등의 인근 지역뿐만 아니라 제주시와 서귀포로 파급된 제주도 만세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제주항일기념관과 삼일독립운동기념탑 등이 들어선 조천만세동산(미밋동산)이 조성돼 있다. 평일인 지난달 17일 찾은 조천읍내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어촌 마을이었다. 마침 애국선열추모탑 앞에서는 임시정부가 1939년 법정기념일로 정한 제81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및 제18회 제주 지역 애국선열 합동추모식이 제주도 독립운동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었다. 조천만세운동은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생이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들어오며 시작됐다. 아버지 김시학은 일본 유학파로 1차 세계대전 중에 사회 각계각층 1만명의 연서를 받아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인물이다. 김장환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을 지켜보며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보름 후인 16일 조천에 내려온 김장환은 숙부 김시범과 당숙 김시은에게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들려주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이튿날 김시범, 김시은, 김장환은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어 김용찬, 김형배, 고재륜, 황진식 등 14명의 동지를 모았다. 이들은 대형 태극기 4본과 소형 태극기 300여장을 만들어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김시범 등은 거사일을 제주도에서 명망이 높았던 유학자인 맏형 김시우의 소상(小祥·첫 기일)인 3월 21일로 잡았다. 21일 아침 8시쯤. 미모치에 14인 동지를 비롯, 조천 주민들과 이웃 마을인 함덕·신촌·신흥 등지의 주민과 서당 생도 등 200여명이 모여들었다. 미모치는 오름의 이름으로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한라산 정기가 마을 동쪽 끝으로 흘러 우뚝 솟은 성소(聖所)로 전해지던 곳이었다. 대형 태극기가 미모치 정상에 꽂히고 ‘독립만세’라고 쓰인 깃발이 나부꼈다. 김시범은 독립선언서를 20여분 동안 낭독했다. 낭독을 마친 김시범은 “조선을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시키기 위해 한국독립만세를 부르고 행진하라”고 소리쳤다. 김용찬도 “일본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하도록 한국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마을 안을 행진하자”고 외쳤다. 이어 김장환이 ‘대한독립만세’라고 선창하자 군중도 따라 외쳤다. 어떤 이는 창호지에 ‘한국독립만세’라는 혈서도 썼다. 시위대는 일제의 본거지인 제주성으로 행진했다. 조천은 제주성의 동쪽 약 12㎞ 지점에 있었기 때문에 2~3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었다. 도중에 신촌·삼양·화북·건입마을을 거치면 참가자가 더 늘어날 수 있었다. 주민들이 합세하면서 500~600명이 된 시위대는 조천오일장터를 거쳐 비석거리에 도착해 ‘한국독립만세’를 크게 외치고는 계속 행진해 신촌리에 다다랐다. 일경은 급히 제주경찰서에 증원을 요청했고 오후 늦게 무장한 순사 30여명이 도착해 시위대와 맞부딪쳤다. 일경은 공포탄을 쏘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무차별로 타격하며 시위를 진압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3명이 다쳤고 김시범, 김시은, 김용찬, 김장환 등 13명이 연행됐다. 이들이 모두 주모자였음을 볼 때 일경은 거사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시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튿날 조천오일장터에서 김필원, 백응선, 박두규 등이 중심이 돼 200여명이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신촌리를 향해 2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여기서 박두규와 김필원이 체포됐다. 시위 소식은 함덕리까지 전해져 다음날에는 조천과 함덕 양쪽에서 3차 시위가 벌어졌다. 이문천·백응선·김연배 등이 계속해서 시위를 주도했다. 이문천은 조천오일장터에서 주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이다 100여명을 이끌고 오일장이 열리던 함덕리로 이동했다. 함덕리에 이르자 시위대는 8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날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참여했다. ●김장환은 월북했다는 이유로 국가 서훈 없어 시위 확산에 두려움을 느낀 일경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이문천과 백응선 등 8명을 체포했다. 또 신흥리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귀동이라는 여성이 “대한독립만세, 같이 죽자 만만세”라는 구호를 외치자 제주경찰서로 연행했다. 여성까지 무차별로 체포한 데 대해 도민들이 격앙하자 부담을 느낀 일제 경찰은 사흘 뒤 여성을 석방했다. 3월 24일 4차 만세운동은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이날은 조천오일장날이었는데 상인과 장을 보러 온 부녀자들까지 약 1500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투석전까지 벌어지는 등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경은 발포해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김연배 등 4명을 체포했다. 일경은 군 병력까지 불러들여 시위가 다른 지역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네 차례의 시위에서 주도자 14명은 모두 검거됐다. 이들을 포함해 기소된 사람은 모두 29명이었고 24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5월 김시은, 김시범, 김장환 등 주도자 14명은 징역 6개월에서 1년을 받았다. 그보다 옥고와 고문에 따른 희생이 컸다. 백응선은 고문과 옥고로 1920년 3월 순국했다. 김연배도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과 옥고로 가출옥했지만 1923년 11월 27세의 일기로 순국했다. 김시은과 김시범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장환에 대한 서훈 기록은 없다. 월북했다는 이유다. 백응선과 김연배는 대통령표창을 받았을 뿐이다.●일제 해녀 요구 들어준다고 해놓고 약속 어겨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의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 간다/ 가이없는 우리 해녀 어디로 갈까” 제주시 구좌읍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옆 해녀 노래비에 쓰인 마지막 절이다. 제주 우도 출신 독립운동가 강관순이 지은 노래다. 제주 해녀 투쟁은 연인원 1만 7000여명이 참여하고 238차례의 시위가 벌어진, 국내 최대 규모의 여성항일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제주 해녀들의 항일운동을 기념해 구좌읍 하도리에 기념탑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오후 늦은 시간에 찾은 공원에는 운동 삼아 왔다갔다하는 여성만 보일 뿐 참배객은 아무도 없었다. 일제의 수탈에 제주도 해녀들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제주에서는 해녀들의 채취 활동이 일제로서는 독보적인 수입원이었다. 1920년대 중반 일제는 해녀들의 권익 보호를 명분으로 만든 제주해녀어업조합을 어용화했고 해녀들이 힘들게 거둔 해산물을 헐값에 매입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입거 수수료와 세금도 과다 징수했다. 1931년 6월 해녀들은 공동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12월에는 관제조합 반대, 수확물에 대한 가격 재평가 등의 요구 조건과 투쟁 방침을 정하고 대표를 선출했다. 이듬해 1월 7일 세화리 장날에 해녀 300여명이 1차 시위에 나섰다. 시위대가 구좌면사무소에 이르자 면사무소 측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마침 신임 제주도사 다쿠치 데이키가 1월 12일 세화장날 시찰에 나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장날 세화리 장터에 해녀들이 모여들었다. 구좌면 하도리·세화리·종달리·연평리와 정의면의 오조리·시흥리 등 6개 마을 해녀들이었다. 손에는 호미와 비창(전복 따는 도구)을 들었다. 해녀들은 다쿠치가 탄 차량을 에워쌌고 다쿠치는 굴복한 척하며 요구 조건을 5일 안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거짓 약속이었음은 금세 드러났다. 일제는 제주 지역 청년운동가들을 배후세력으로 규정했다.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23일부터 하도리 오문규, 종달리 한향택과 한원택, 세화리 문도배와 문도후 등을 각종 죄목을 붙여 검거하기 시작했다. 24일에는 이에 격분한 해녀 1500여명이 세화주재소로 몰려들었고 일경은 무장경관을 출동시켜 해녀 34명을 포함한 50여명을 체포했다. 27일에는 종달리 해녀 100여명이 붙잡힌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진압당하고 말았다. 주동자로 찍힌 해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은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들 말고도 일제에 검거돼 고초를 겪은 해녀가 100여명에 이르렀다. 세 명의 해녀는 항일운동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다.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한국광복군 김은석 선생 가문… 병역명문가 대통령상

    병무청은 18일 정세균 국무총리 주재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제17회 병역명문가 시상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병역명문가는 1대 할아버지부터 2대 아버지·형제, 3대 본인·형제·사촌형제까지 모두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가문에게 주어진다.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주년을 맞아 올해부터 독립운동가 가문도 병역명문가에 포함됐다. 대통령표창을 받은 고 김은석 선생 가문은 7명이 총 330개월의 군 복무를 마쳤다. 김 선생은 1944년 한국광복군 비밀공작 대원으로 활동,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선친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2대 4명과 3대 2명 모두 현역으로 군에 복무했다. 15명이 총 369개월을 복무해 올해 가장 많은 병역이행자를 배출한 참전유공자 고 이상봉씨 가문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황해도 출신으로 일제 강제징용을 경험했던 이씨는 월남해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총상을 입고 전역했다.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고 박도병 선생 가문은 8명이 총 206개월을 복무했다. 박 선생은 일제강점기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항일 학생결사 ‘한글연구회’를 조직해 농민계몽 및 한글보급 투쟁을 펼쳤다. 1941년 고문을 당하고 3년 옥고를 치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손자 박효원(29)씨는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온 가족이 병역을 명예롭게 이행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병역을 이행한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해 2004년 시작된 병역명문가 제도를 통해 지금까지 6395가문, 3만 2376명이 선정됐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서울광장] 문재인 정부, 친일잔재 청산 의지 있는가/오일만 논설위원

    [서울광장] 문재인 정부, 친일잔재 청산 의지 있는가/오일만 논설위원

    독립운동가 후손이 친일파의 식민사관을 비판하는 책이 출간 금지되는 해괴한 일이 일어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항일 투쟁에 헌신한 인물의 독립운동사 편찬이나 일본 극우세력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맞선 논문 출간도 막혔다. 일제강점기나 해방 후 친일파가 포진한 이승만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바로 광복 75년을 맞는 대한민국 땅에서 벌어진 일이다.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한국학진흥사업단은 ‘일제강점기 민족지도자들의 역사관과 국가건설론 연구’라는 주제의 응모 출판사업을 2013년부터 진행했다.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식민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광복회 학술원장인 김병기 박사는 ‘이병도·신석호는 해방 후 어떻게 한국 사학계를 장악했는가’라는 주제로 3년간 집필했다. 식민사관은 한민족 역사에 타율성과 정체성의 굴레를 씌워 ‘식민지배를 받아 마땅한 민족’으로 둔갑시킨, 엄연한 역사의 날조였다. 알려진 대로 이병도·신석호 박사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 출신으로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등재될 정도로 식민사관의 거두였다. 김 박사는 두 사람이 해방 후 한국 사학계를 장악해 조선총독부의 역사관을 주류 역사관으로 둔갑시킨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일반 국민들의 입장에서 식민사관 청산을 위해 더없이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출간을 금지하고 연구비 환수 조치를 취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한중연 측은 “연구자의 관점이나 해석은 거의 없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궁색한 변명이다. 이병도·신석호의 역사관을 추종하는 그 제자들이 한국 역사학계의 기득권 세력이 된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역사학은 토론과 논쟁을 통해 발전해야 하는 학문이다. 자신과 다른 역사적 견해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주자학 이외의 해석을 사문난적으로 몰아간 조선시대로 후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책을 집필한 김 박사는 3대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국장(교육부 장관)과 만주 무장 항일조직이었던 참의부 참의장을 지낸 희산 김승학 선생의 증손이다. 희산은 임정의 2대 대통령이었던 백암 박은식 선생의 ‘민족혼을 깨워야 한다’는 권고를 받아들여 독립운동사 사료를 수집하다가 5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팔다리가 부러지는 수십 차례의 고문을 받은 이유는 이 사료의 수색 때문”이라고 자서전(망명객 행정록)에서 소상하게 밝혔다. 희산은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한 이승만 정권에서 독립 운동사를 편찬하려다 좌절됐다. 자신들의 친일 행적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친일파의 방해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1965년 ‘한국독립사’라는 이름으로 간행됐지만 정작 희산은 출간을 보지 못하고 1964년 12월 눈을 감았다. 이 사료는 2016년 한중연에 위탁 기증돼 일반인들도 보기 쉬운 한글판으로 다시 출간될 계획이었다. 하지만 2017년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중연 수장이 안병욱 원장으로 바뀐 이후 진행 중인 사업이 갑자기 중단됐다. 주체적 역사관과 건전한 가치관 정립을 위해 설립된 한중연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한중연이 국고 출간을 금지하고 연구비 환수를 끈질기게 요구하는 저서는 3권이 더 있다. ‘조선사편수회 식민사관비판-한사군은 요동에 있었다’(저자 이덕일), ‘독립운동가가 바라본 고대사’(저자 임찬경), ‘한국 실증주의 사학과 식민사관’(저자 임종권) 등이다. 한중연 측은 “주관적 견해가 강하고 기존 학설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저자들은 “1차 사료를 토대로 한국 사회에 팽배한 식민사관의 문제점을 파헤쳤다”고 반박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국내 극우세력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반박한 ‘개성상인의 탄생’이란 저작도 출간 금지된 일이다. 이 논문은 전 한국회계학회장 허성관(전 행안부 장관)이 쓴 것으로 2017년 통합경영학회 우수논문상까지 수상했다. ‘자생적 발전론을 통해 식민사관의 연장선상인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면으로 반박한 명백한 반증’이라고 호평받았지만 출간금지됐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역사 속에서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고 망발해도 반박조차 못한 것이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현주소다. 문재인 대통령이 ‘친일 잔재세력의 청산’을 강조해 왔지만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은 너무도 암울하다. “대통령 한 명만 바뀌었지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관련 국책기관의 행태는 과거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허 전 장관의 말이 귓전에 생생하다. oilman@seoul.co.kr
  • ‘슬세권’·‘킹핀’·‘그린’…포스트 코로나 시대, 명사들이 던진 키워드는

    ‘슬세권’·‘킹핀’·‘그린’…포스트 코로나 시대, 명사들이 던진 키워드는

    코로나19 이후의 미래에 대해 여러 말들이 쏟아지지만 미래의 불확실성은 높기만 하다. 한국 사회는 이런 대전환의 시대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명사들의 강연으로 유명한 ‘명견만리’가 2년 만에 돌아와 그 해답을 찾아본다. KBS는 오는 8일부터 매주 일요일 저녁 7시 5분 ‘명견만리Q100’을 총 8회 방송한다. 주제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대전환’이다. 시청자가 제안한 3000여 개의 질문 중 100개를 뽑아 각 분야 지성들이 답을 찾는다. 앞서 제작진은 ‘코로나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주제로 국민 여론조사를 실시, 코로나 대응에 대한 사회의 대응 수준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올해 ‘명견만리’는 3개 분야 9명의 연사가 무대에 오르다. 첫번째 주제 ‘대전환’ 에서는 트렌드 전문가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가 코로나가 불러온 피할 수 없는 전환에 관한 이야기로 포문을 연다. 15년째 한국의 소비 트렌드를 분석해 온 전문가인 김 교수는 “코로나19가 방향이 아니라 속도를 앞당기는 방아쇠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한다. 또한 집의 재발견에서 슬리퍼 신고 부담없이 다니는 ‘슬세권’의 경쟁력,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피보팅’ 전략을 이야기한다.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성공의 덫’을 되짚어본다. 고용과 복지, 사회안전망 등 코로나19가 소환한 우리 사회의 민낯과 위기의 본질은 무엇인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복지국가의 길은 무엇인지 묻는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짚는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 선진국 문턱에서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김 전 부총리에 따르면 그 패러다임을 바꾸는 열쇠는 ‘킹핀’(king pin)이다. 볼링에서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1번 핀 대신 뒤쪽에 숨어있는 5번 핀을 공략해야 스트라이크를 칠 수 있다. 한국 경제를 되살리는 킹핀은 공감 혁명, 경제혁신임을 강조한다. 청년들을 위한 강연도 이어진다. 재미있고 친근한 뉴스로 밀레니얼 세대를 사로잡은 당찬 20대 스타트업 대표 김소연과 국내 유일의 20대 전문 연구기관을 이끌고 있는 50대 김영훈 대학내일 대표가 청년 일자리 연사로 나선다. 청년에 초점을 맞춘 소설들을 다수 발표한 소설가 장강명은 “개천에서 용이 아닌 지렁이만 나오는 시대, 청년들을 위한 복지는 무엇일까”에 대해 묻는다. 최영준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14m²의 위로’라는 제목으로 미래 사회의 부메랑인 청년 빈곤 문제를 다룬다. 지하, 옥탑방, 고시원 즉 ‘지옥고’가 가난한 청춘의 종착지로 불리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청년 주거 빈곤이 불러올 파장과 희망은 있는지를 찾아본다. 전세계적 이슈인 기후와 도시 문제도 다룬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위기 시계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인류가 벼랑 끝에 섰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거세다. 세계 각국은 ‘그린’(Green)에서 비상구를 찾고 있다. 과연 그린이 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 정석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효율과 거대화로 치닫던 세계 도시들이 사람과 자연의 공존을 고민하는 도시로 지향을 바꾸고 있는 상황과 미래 도시의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한다. 윤순진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위기가 복합위기로 덮칠 경우 인류에게 어떤 재앙이 벌어질 것인지 내다본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켜켜이 쌓아올린 절경 속, 선비의 단심을 엿보다

    켜켜이 쌓아올린 절경 속, 선비의 단심을 엿보다

    충북 제천에 갈 때마다 의아했던 게 하나 있다. 바로 ‘용하구곡’(用夏九曲)의 존재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천 역시 대표 여행지를 묶어 10경이란 걸 정해 뒀는데 용하구곡은 그중 하나다. 한데 월악산국립공원 안에 있다는 것만 확인될 뿐, 제6경으로서의 위상을 확인할 실체를 볼 수는 없었다. 이유는 하나다. 비법정 탐방로, 쉽게 말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용하구곡은 조선 말기를 살았던 한 선비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이 새겨진 곳이다. 한일병탄으로 나라가 무너지자 절명시를 남긴 채 곡기를 끊어 스스로 생명을 거뒀던 선비는 생전에 이 계곡을 무대로 의병을 일으키고, 후대를 위해 강학을 펼쳤다. 그 흔적이 여태 남아 있다. 다른 여행지와 달리 용하구곡은 독자들과 함께 갈 수 없다. 그러니 이번 여정은 용하구곡의 실체를 확인하고 이를 전달하는 의미만 갖는다. 용하구곡은 월악산 남쪽의 만수봉(983m)과 문수봉(1162m) 사이에 있다. 충북과 경북을 가르는 대미산(1115m)에서 발원한 너부내(광천)가 흐르며 만든 계곡이다. 계곡 주변은 1000m가 넘는 준봉들이 둘러치고 있다. 월악산 주봉인 영봉(1097m)보다 높은 봉우리가 한둘이 아니다. 계곡의 전체 길이는 16㎞ 정도. 행정구역인 억수리 이름을 따 억수계곡으로도 불린다. 용하구곡을 지은 이는 의당 박세화(1834~1910)다. ‘용하’(用夏)는 ‘맹자’의 ‘등문공상’ 편에서 가져온 단어다. 하나라의 문화로 오랑캐(일제)를 변화시키자는 뜻을 담고 있다. 의당과 후학들의 초상화를 모신 병산영당의 관리자인 양승운 대유출판 대표는 “조선 말 자주성을 상실한 현실을 위정척사·존화양이 사상으로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자는 소망을 담은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용하구곡을 정한 건 의당의 나이 64세 되던 1898년이다. 그는 구곡에 대해 “주자의 무이구곡처럼 도에 나가기 위한 순서를 읊은 것”이라 했다. 학문을 통해 도를 깨우치는 과정을 이름으로 표현했다는 뜻이다. 구곡의 이름 옆엔 한문 네 글자를 각자해 의당 자신의 바람을 담았다. 의당이 글씨를 썼고 제자들이 이를 바위에 새겼다. 의당의 행장에 대해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함경도 함흥 아래 고원이란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 우리 학계에서 흔하지 않은 북한 지역의 주자학자라는 것, 여러 지역을 전전하던 그가 자신의 뜻을 본격 실행한 곳이 제천이었다는 것, 용하구곡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켰으나 악성 빈혈로 주춤한 사이 누군가의 밀고로 옥고를 치렀다는 것, 경술국치 때 제천과 이웃한 음성에서 23일 동안 곡기를 끊고 스스로 삶을 거뒀다는 것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겠다.용하구곡의 원래 들머리는 용하수마을 아래 있는 ‘용하동문’(用夏洞門)이다. 여기서 300m 정도 올라가면 관광객의 출입을 막는 철문이 나오고, 이 철문을 넘어서야 비로소 용하구곡이 시작된다. 제1곡은 청벽대(聽碧臺)로, 큰 바위 다섯 개로 이뤄져 있다. 의당이 제자들과 함께 글을 짓던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의당집’엔 홍단연쇄(虹斷烟鎖)를 각자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 홍단연쇄는 무지개가 끊어지고 연기가 자욱하다는 뜻이다. 국운이 흉흉한 연기에 갇히고 도학이 땅에 떨어졌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2곡은 선미대(仙味臺)다. 그 옆 바위에는 전산기중(前山幾重)이 각자돼 있다. 도학과 국가 장래 앞에 겹겹의 산이 가로막고 있다는 뜻이다. 선미대 앞엔 뜻밖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1980년대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내판엔 “선녀들이 목욕한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들이 목욕하는 그림이 담겨 있다. ‘선미’(仙味)는 고아한 취미를 일컫는 단어다. 설마 의당이 선녀들 목욕한 곳이란 뜻이 담긴 이름을 지었을까. 훗날 용하구곡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보일 때면 이런 오류는 수정돼야 할 것이다. 계곡은 위로 갈수록 깊어진다. 오래전 이 계곡엔 많은 의병들이 오갔을 것이다. 연기가 난다고 밥도 못 지었을 텐데, 그들은 무엇으로 허기를 채웠을까. 가족 걱정에 긴 겨울밤은 또 어떻게 지새웠을까. 허기와 두려움을 감추려 객쩍은 농담도 주고받았겠지. 그들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숲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하다.3곡은 호호대(好好臺)다. 가학정도(架壑停棹)가 새겨져 있다. 배는 서고 노 또한 멈추었다는 뜻으로, 도학과 국운의 맥이 끊어진 것을 통탄한다는 내용이다. 이어 4곡 섭운대(雲臺)엔 풍전등화 같은 국운을 표현한 암화수로(巖花垂露·벼랑에 맺힌 곱고도 아슬아슬한 이슬꽃), 5곡 수룡담(睡龍潭)엔 날로 더해 가는 외세의 횡포를 통탄한 산고운심(山高雲深), 6곡 우화굴(羽化窟)엔 태평성대가 깃들길 바라는 원조춘한(猿鳥春閒·길짐승 날짐승들이 한가로이 노는 봄), 7곡 세심폭(洗心瀑)엔 국운 상승을 염원하는 봉우비천(峯雨飛泉), 8곡 활래담(活來潭)엔 암운이 활짝 걷히길 희망한다는 풍연욕개(風烟欲開) 등의 글자를 주변 바위에 새겼다. 다만 7곡의 봉우비천 글씨는 현재 찾을 수 없고 두 봉우리가 비친다는 의미의 양봉협영(兩峯夾映)만 남아 있다.9곡은 강서대(講書臺·또는 활연대)다. 주변 바위엔 제시인간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이 각자돼 있다. ‘인간을 제하고 따로 하늘이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고 ‘여기서부터 인간세상과는 다른 별천지가 펼쳐지는 곳’이라 이해하는 이도 있다. 어느 의미가 더 와닿는지는 독자 스스로 판단하시길.의당은 9곡 가운데 7곡 세심폭의 경치를 가장 높게 쳤던 듯하다. “경치가 가장 좋아 휘파람 불며 뽐낼 만하다”고 표현했으니 말이다. 다만 자연재해와 풍화로 당대의 모습을 많이 잃은 것을 감안하면 8곡 활래담의 풍경도 그에 견줄 만하지 않을까 싶다. 낙엽 쌓인 바위에 앉아 있자면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는 근현대를 겪으며 친일 세력을 완전하게 징치하지 못했다. 그 탓에 두고두고 화근이 되기도 했다. 언제가 됐든,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한데 잊혀진 난세의 영웅들을 찾아내 기억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용하구곡은 2014년 문화재청에서 명승으로 지정예고까지 했으나 무산됐다. 현지 주민 등에 따르면 당시 외지인의 불법 송이버섯 채취, 환경훼손 등을 우려한 주민들의 반발이 주요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제 어떤 형태로든 꼿꼿했던 한 선비의 삶을 뒤돌아볼 기회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용하구곡의 정확한 위치는 월악산국립공원사무소 측의 요청으로 밝히지 않는다. 현재까지 갈 수 있는 마지막 계곡이 억수계곡이고, 그 위에 용하구곡이 있다. 글 사진 제천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재계 블로그] 광동제약 최성원號 ‘무늬만 제약사’ 오명 벗나

    [재계 블로그] 광동제약 최성원號 ‘무늬만 제약사’ 오명 벗나

    “광동제약은 ‘무늬만 제약회사’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 ‘비타500’, ‘옥수수수염차’ 등 메가 히트 상품 출시를 주도하며 광동제약을 음료회사로 키운 오너 2세 최성원(51) 부회장이 최근 본업인 제약·바이오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 재계의 관심이 쏠린다. 광동제약은 지난해 기준 국내 제약업계 매출 3위를 기록했지만, 매출의 80%를 비제약분야인 음료 및 소모성자재 구매대행 사업(MRO)이 차지해 신약 개발이라는 제약업의 본질을 버리고 유통업으로의 ‘외도’로만 사업 규모를 키운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21일 업계에 따르면 광동제약은 최근 미래 비전으로 ‘바이오 사업’을 선정하고 바이오벤처 ‘바이넥스’에 200억원을 투자했다. 바이넥스는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전문 벤처기업이다. 광동제약은 바이넥스와 협력함으로써 ‘음료회사’라는 기존 이미지를 벗고 제약·바이오 업체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이다. 고 최수부 회장이 1963년 창립한 광동제약은 경옥고·우황청심원·쌍화탕 등을 히트시키며 한방의약품으로 명성을 쌓았다. 최 부회장의 1남 3녀 중 외아들인 최 부회장은 2013년 최 전 회장이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대표이사에 오르며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최 부회장은 2001년 전무이사 당시 비타500의 출시부터 마케팅·홍보 전 과정을 주도해 성공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옥수수수염차와 헛개차 등을 연이어 내놓은 데 이어 제주 삼다수를 유통하면서 ‘매출 1조원’ 업체로 회사를 키웠다. 아버지가 한방의약품 중심으로 광동제약의 기반을 다졌다면 아들은 음료사업으로 외형성장을 이끈 셈이다. 반면 광동제약은 제약사 이미지에 기대 유통사업을 확장했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받는다. 개발 중인 파이프라인도 거의 없고 연구개발(R&D)비도 전체 매출에 1%에 불과하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국내 상위 제약사들은 광동제약을 사실상 제약회사로 분류하지 않는다”면서 “업계 평균 R&D 비용이 평균 10%에 육박하고 중소 제약 업체도 최소 5% 이상을 R&D에 쓰고 있는데 광동제약의 규모에 R&D 비용을 1%만 쓴다는 것은 사실상 본업인 신약 개발을 포기했단 뜻”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번 광동제약의 바이오 사업 투자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투자한 곳이 바이오 신약 개발 업체가 아닌 위탁생산업체라서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현재 파이프라인이 있거나 제품 상용화를 앞두고 생산라인을 구축하기 위한 투자가 아니라 요즘 ‘돈이 된다’는 바이오시밀러 위탁생산업체에 단순히 투자한 것”이라면서 “광동제약이 음료로 얻은 수익을 제약·바이오로 돌리겠다는 말은 늘 해왔지만 연구비를 대폭 늘리지 않는 한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제주지법 4·3 생존 수형인 8명 또 재심 개시 결정

    제주지법 4·3 생존 수형인 8명 또 재심 개시 결정

    제주4·3 당시 불법재판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생존 수형인들이 70여 년만에 정식재판을 받게 됐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부장판사 장찬수)는 8일 김묘생(92) 할머니 등 수형인 8명의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이번 재심은 지난해 1월 군사재판으로 옥살이한 4·3 수형인 18명이 공소기각으로 사실상 무죄 판결을 받은데 이어 두번째다. 재심이 결정된 수형인들 8명 가운데 7명은 군사재판, 김두황(92) 할아버지 1명은 일반재판으로 옥고를 치렀다. 재심 결정은 이들이 지난해 10월22일 재심 청구한지 1년만이다. 특히 이번 재심에는 지난해 불법을 인정받은 군사재판이 아닌 일반재판으로 옥살이한 김두황 할아버지가 포함됐다. 김할아버지는 수년전 확인한 판결문에서 폭도들을 지원했다는 날조된 근거로 국방경비법 위반이 적용돼 옥살이하게 된것을 알게 됐고,명예회복을 위해 재심을 청구했다. 김 할아버지는 당시 재판에서는 변론 기회도 얻지 못했고 이후 목포형무소에서 10개월간 형을 살고 1950년 2월 출소했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김경 서울시의원, 캠퍼스타운과 연계한‘공공지원형 기숙사’ 건립 제안

    김경 서울시의원, 캠퍼스타운과 연계한‘공공지원형 기숙사’ 건립 제안

    김경 서울시의회 도시계획관리위원회 의원(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은 15일 개최된 본회의 5분 자유발언을 통해 청년들의 실수요와 동떨어진 서울시 청년주택의 허점을 지적하고, 청년들의 다양한 주거수요를 반영할 수 있는 여러 형태의 청년주택을 공급해줄 것을 촉구했다. 김 의원에 따르면 청년, 신혼부부의 자립을 위해 서울시가 공급하는 ‘2030 역세권 청년주택’의 경우, 민간자본에 의존하는 사업구조로 저렴하게 공급되는 공공임대 물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실제 서교동에 위치한 역세권 청년주택인 ‘효성해링턴타워’는 지난해 11월 시행된 제2차 입주자 모집에서 청년을 대상으로 한 17㎡타입 공공임대 물량에 142.5대 1의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나머지 민간임대 물량의 경우 임대료가 주변시세 8~90% 수준으로 책정되기 때문에 부담능력이 낮은 대학생, 청년 등은 이른바 지옥고라 불리는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대학교 역시 2017년 기준 수도권 기숙사 수용률이 16% 수준으로, 이마저도 최근 민자 기숙사가 등장하면서 고가 기숙사비가 책정되는 경우가 허다한 상황이다. 실제 서울 주요 대학의 민자 기숙사들은 학생들이 60만원에서 65만원 가량의 고가 기숙사비를 부담하며 생활하고 있다. 이에 김 의원은 청년들의 부담능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향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서울시 청년주택 및 민자 기숙사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을 요구하고, 보다 많은 청년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거주할 수 있는 주거대안을 제시했다. 우선 김 의원은 캠퍼스타운과 연계한 ‘공공지원형 기숙사(가칭)’ 건립에 대한 서울시 검토를 촉구했다. 대학교 기숙사의 경우 지방에서 상경한 대학생들의 안정적인 학습여건 마련을 위해 신규 공급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주변 임대사업자 등과의 마찰로 인해 공급이 번번이 좌절되어 왔다. 이에 김 의원은 대학교 내에 있는 창업 관련 실험실, 강의동 등을 학교 밖 인근 캠퍼스타운 지역으로 확대 이전하고, 이로써 확보된 부지에 서울시와 서울주택도시공사가 기숙사를 공급할 수 있다는 복안이다. 캠퍼스타운은 대학의 우수한 인적․물적 자원을 지역사회와 연계하여 청년 창업자를 육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학 주변을 캠퍼스타운 지역으로 조성해 각종 창업 프로그램 및 인프라를 지원하는 서울시 사업이다. 따라서 교내 창업 관련 시설을 캠퍼스타운으로 확대 이전할 경우, 기존 캠퍼스타운 내 창업활동과의 시너지 창출은 물론 기숙사 건립을 위한 유휴공간 확보에도 유리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음으로 김 의원은 청년주택 공급에 민간이 보다 활발히 참여할 수 있도록 각종 인센티브 제공방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최근 공공이 아닌 개인과 민간기업이 출자한 기금으로 운용되는 민간 청년주택이 각광을 얻고 있는데, 시민 출자금으로 전세보증금을 조성하고 청년들은 보증금 부담없이 소액의 임대료만 내고 거주하기 때문에 청년들의 주거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에 김경 의원은 민간이 청년주택을 공급하는 사회적 경제주체, 재단 등에 출자할 경우 세제혜택을 부여하는 등 민간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줄 것을 요청했다. 마지막으로 김 의원은 청년들의 개별적인 경제수준과 주거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채 양적 확대에만 초점을 맞춰 일률적으로 공급되고 있는 임대주택 지원체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수요자 맞춤형 청년주택을 공급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를 위해 소득분위별, 지역별, 상황별 청년들의 주거수요를 보다 세밀하게 분석하고 2030 생애주기에 걸 맞는 청년 주거정책을 수립해줄 것을 당부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갈 곳 없는 ‘카공족’ 골목 ‘빵공족’ 됐다

    갈 곳 없는 ‘카공족’ 골목 ‘빵공족’ 됐다

    7일 오후 찾은 서울 동작구 노량진 고시촌은 을씨년스러웠다. 코로나19 확산을 막으려고 수도권에 적용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지침이 오는 13일까지 연장되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대부분 고시촌을 떠났다. 공무원 학원들은 지난달 19일 이후 문을 닫았고, 프랜차이즈 카페에 이어 이날부터 프랜차이즈 제과점까지 실내 영업이 금지되자 공시족으로 북적이던 카페, 식당가도 인적이 뚝 끊겼다.고시촌에 남은 공시생들은 개인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로 모여들었다. 이날 둘러본 노량진의 개인 카페와 빵집 4곳은 독서실처럼 고요했다. 2층에 위치한 한 개인 카페는 30석에 달하는 좌석이 꽉 찼다. 같은 건물 1층의 빵집에는 수험생으로 보이는 청년 3명이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아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테이블이 7개 남짓한 골목 작은 카페에도 마스크를 쓴 수험생 6명이 책을 펴고 앉았다. 독서실과 카페 기능을 합친 영업장인 스터디카페들은 철문을 내리거나 문을 걸어 잠갔다. ‘꼼수’ 영업을 이어 간 곳도 있었다. 서울시 일자리 카페로 등록된 한 스터디카페는 ‘동작구청에서 매일 방역한다’면서 ‘음료 1잔당 홀 5시간 무료’라는 안내 문구를 붙이고 운영했다. 좌석 약 30개 중 10여명이 이용하고 있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시가 대여해 운영하는 일자리 카페 공간은 대관 중지 조치를 내렸다”면서 “나머지 카페 공간은 음식점으로 등록해 영업 중단 조치가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 재확산 탓에 공공도서관은 문을 닫고 대학 도서관들도 운영시간을 단축하거나 일부 열람실 운영을 중단해 청년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다. 문 닫은 학원과 독서실, 카페 대신 공시족이 선택할 수 있는 장소는 집이다. 하지만 주거환경이 열악해 학습능률이 떨어진다는 불만도 나온다. 국토교통부의 ‘2019년 주거실태조사’에 따르면 청년가구 1인당 평균 주거면적은 27.9㎡(약 8.44평)이고 1인당 평균 주거면적인 32.9㎡(약 9.95평)보다 작다. 수험생·공시생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집에는 가족이 있거나 비좁아 공부할 환경이 아니다”라거나 “일주일 동안 3일치 공부밖에 하지 못했다”는 글이 잇달아 올라왔다. 글 사진 김주연 기자 justina@seoul.co.kr
  • 한옥(韓屋)의 일체화된 서비스 제공을 위한 첫걸음

    한옥(韓屋)의 일체화된 서비스 제공을 위한 첫걸음

    한옥고택관리사협동조합은 한옥수리 분야에 독보적인 서비스를 보유하고있는 한옥협동조합과 지난 20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한옥협동조합(대표 문문주)은 2013년에 설립 후 한옥 및 전통사찰의 설계 시공분야를 시작으로 문화재 수리 분야까지 활동분야를 확대하고 있으며, 서울 북촌마을에서 지역사회 주민과 일반인이 함께하는 무료 한옥교육도 정기적으로 하고 있다. 업무협약에는 체험형 한옥운영에 필요한 자문과 한옥을 활용한 문화콘텐츠 개발, 한옥단지의 마을 개발을 위한 공동사업 개발 및 진행, 전문 자격 소지자에 대한 일자리창출 협조가 포함됐다. 금번 협약으로 한옥고택 분야의 하드웨어(수리/증축/신축/보수)와 소프트웨어(운영/관리/보존)가 일체화되어, 한옥 소유자들(기관/문중/단체/개인)에게는 총체적인 One-stop 서비스가 가능하리라 예상된다. 한옥은 신축 후 유지보수를 위한 인적인 관리가 확보되어야하는 분야이며, 업무협약으로 인해 한옥의 유지 관리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있으리라는 전문가들 의견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의병 선봉장’ 임장택 선생 등 독립유공자 포상

    ‘의병 선봉장’ 임장택 선생 등 독립유공자 포상

    의병활동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임장택 선생 등 351명에게 독립유공자 포상이 수여된다. 국가보훈처는 13일 “제75주년 광복절을 맞아 임 선생 등 351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임 선생은 전남 영광 출신으로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전해산 의병부대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그는 일본인 처단과 의병투쟁을 위한 군수품 모집 등에 앞장서다가 체포돼 ‘폭동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해 부친과 함께 옥고를 치른 김희인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김 선생은 1919년 강원 화천군에서 수십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돼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부친 김창희(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에 이어 부자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게 됐다. 3·1운동 당시 비밀 지하신문 등을 만들어 배포하고 독립운동 비밀 결사 조직에 참여하다 두 차례나 형을 선고받은 주배희 선생에게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주 선생은 1919년 3월 함남 함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독려하고자 작성한 독립신문을 배포하다가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 1920년 6월 대한청년단연합회 함경도의용대 조직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또다시 체포돼 징역 1년 6개월에 처해졌다. 이번에 포상받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52명(독립장 1명, 애국장 48명, 애족장 103명), 건국포장 29명, 대통령표창 170명이며 이 가운데 여성은 11명이다. 제75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된다. 이주원 기자 starjuwon@seoul.co.kr
  • 외국 관광객을 위한 한옥고택 찾아가기 앱 개발

    외국 관광객을 위한 한옥고택 찾아가기 앱 개발

    한옥고택관리사 협동조합은 한국방문 외국인의 한옥 체험을 위해, 전국의 한옥고택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대중 교통을 이용한 모바일 앱의 개발에 착수했다. 협동조합은 지난 14일 한국데이터산업진흥원과 한옥정보 데이터 가공을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본 사업은 한국데이터사업진흥원에서 ‘데이터 활용을 통해 비즈니스 혁신 및 신규 제품·서비스 개발 등이 필요한 기업에 바우처 형식의 데이터 구매·가공서비스를 지원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중인 정보화 사업이다. 총 사업기간은 5개월로 예상하고 있으며, 11월경에는 모바일 앱이 출시될 예정이다. 모바일 앱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길찾기 서비스와 한옥숙박, 관람, 건축 및 인문학적 스토리가 포함될 계획이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주요 국가의 외국어로도 제공될 예정이다.2019년에 한국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은 1700만명이며, 개별 여행객은 80%를 점하고 있다. 대부분의 외국 관광객들은 한국의 전통가옥 체험을 위해 도시 중심의 접근성이 편리한 곳만을 방문하고 있다. 모바일 앱을 통해 대한민국 전역에 산재되어 있는 전통 한옥을 직접 찾아갈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또한 국가 민속문화재중 전통가옥(180여개)과 지방 민속문화재(450여개), 최근 조성되고 있는 한옥마을(30여개) 및 한옥체험업(1,400여개)의 정보를 한곳에서 검색하고 대중교통을 통해 찾아갈 수 있게 할 예정이다. 모바일 앱의 외국어 정보를 통해, 전국에 있는 한옥고택까지의 이동 노선 및 지방 버스정류장 검색, 최단 환승정보, 주요 지점 교통안내, 대중교통 길 찾기 등의 대중교통 정보를 활용해 다국어 서비스로 쉽게 찾아갈 수 있다. 한옥고택관리사 협동조합은 고택소유자 단체와의 협업하에 전문적인 한옥고택관리사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현장 체험교육 및 심화 과정의 개설도 준비중이다. 전통 문화와 함께하는 중장년 세대의 사회공헌을 통해, 50플러스세대의 일자리 창출의 계기도 될 수 있으리라는 전문가 의견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포의 잔다르크 ‘이경덕’ 기리는 명예도로명 생겼다

    김포의 잔다르크 ‘이경덕’ 기리는 명예도로명 생겼다

    경기 김포시가 월곶면 군하리 ‘이경덕만세로’를 명예 도로명으로 부여하고 명예 도로명판을 세웠다. 22일 김포시에 따르면 이번 명예 도로명 부여는 1919년 33세 나이로 당시 성서학교에 재학 중 학생신분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경덕(1886~1948·이살눔) 열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이경덕만세로’는 월곶면 행정복지센터 앞 군하로 일부구간으로 월곶면 군하리 168-4번지에서 월곶면 군하리 25-18번지까지 총 길이 404m에 이른다. 주민의견 수렴과 김포시 도로명주소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확정됐다. 명예 도로명 사용기간은 5년이며 연장할 수 있다. 이경덕은 김포출신으로 성서학교 학생이었다. 이살눔은 이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한 유일한 여성으로 김포의 ‘잔다르크’라 불린다. 월곶면 고양리에서 성태영·백일환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3월22일 군하리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해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 중 일경에 체포됐다. 그해 7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언도받고 공소했으나 경성복심에서 기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살눔은 옥고를 치르던 중 병을 얻어 10월27일 가출옥으로 서대문감옥에서 석방됐다. 이후 군하리에서 목회자의 삶을 살다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으며, 정부는 고인의 공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2003년 8월15일 이살눔이 전도사 몸으로 실천한 뜻을 기리기 위해 현 월곶면 푸른언덕교회 내 ‘이경덕전도사 3·1운동기념비’를 세웠다. 현재 김포시에는 기존에 부여한 ‘이회택로’와 ‘한하운시인길’, ‘양곡3·1만세로’와 함께 이번 ‘이경덕만세로’로 총 4개의 명예 도로명이 있다. 임동호 토지정보과장은 “이번 명예 도로명 부여로 당시 김포에서 일어난 항일투쟁에 희생된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시민들이 기억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명선 기자 mslee@seoul.co.kr
  • 인천상륙 지원·삯바느질로 군함 구입 앞장선 ‘6·25 영웅 부부’

    인천상륙 지원·삯바느질로 군함 구입 앞장선 ‘6·25 영웅 부부’

    부부 전쟁영웅. 아마 대한민국 전사(戰史)에 흔치 않은 사례일 겁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국방장관까지 지낸 손원일(1909~1980) 제독과 부인 홍은혜(1917~2017) 여사가 바로 주인공입니다. 손 제독은 2012년 9월, 홍 여사는 지난해 8월 각각 국가보훈처가 지정하는 ‘6·25 전쟁영웅’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부부의 일생은 ‘해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에게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16일 해군에 따르면 손 제독은 1909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2남 3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가였던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부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입니다. 1924년에 중국 남경 중앙대 항해과를 졸업한 그는 1927년 중국 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3년간 독일에서 수학했습니다. 젊은 시절 고난도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일제의 감시를 받던 그는 1930년 일시 귀국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됩니다. 상해독립단체의 비밀연락원의 임무를 띠고 입국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엄혹한 시절 그렇게 1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감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손 제독은 무역업에 종사하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하게 됩니다. ●1945년 국방경비대 두 달 앞서 해사대 결성 손 제독은 1945년 8월 ‘해군의 씨앗’으로 불리는 ‘해사대’를 결성했습니다. 해군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해 직접 발품을 팔며 어렵게 70명의 대원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11일 오전 11시 서울 관훈동 표훈전에서 70명의 해사대 대원이 모여 결단식을 가진 ‘해방병단’이 바로 우리 해군의 모태입니다. 육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보다 2개월 빨리 창설돼 창군의 핵심 조직이 됐습니다. 11월 11일이 해군 창립일이 된 것도 손 제독의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해군을 ‘바다의 신사’라고 여겨 ‘열 십’(十)과 ‘한 일’(一)을 합친 ‘선비 사’(士)를 뜻하는 11월 11일을 택했습니다. 1946년에는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세웠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된 그는 이듬해 해병대를 창설, 모든 해군 조직을 외세가 아닌 우리의 손으로 만드는 신화를 썼습니다. 1949년 손 제독은 미국으로부터 전투함을 구입하기 위해 ‘함정 건조기금 갹출위원회’를 구성하고, 장병과 국민 모금운동을 벌여 어렵게 1만 5000달러의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손 제독의 부인 홍 여사는 장병 부인들을 모아 삯바느질로 전투함 구입 자금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고 합니다. 손 제독은 정부 지원금 4만 5000달러를 합해 6·25 전쟁 직전 백두산함, 금강산함, 삼각산함, 지리산함 등 4척의 전투함을 구입, 바다를 지키게 했습니다. 그의 선견지명은 놀라운 성과로 돌아왔습니다. 백두산함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 새벽, 무장병력 600여명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하던 1000t급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켜 첫 승전보를 올렸습니다. 우리 군의 사기를 크게 높인 것은 물론 북한의 배후 위협 전략을 조기 차단한 값진 승전이었습니다. ●北병력 600명 태운 배 격침, 배후 위협 차단 심지어 그가 일군 해병대는 단독작전으로 1950년 8월 ‘통영상륙작전’을 감행, 적 469명을 사살하고 차량 12대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거뒀습니다. 당시 미국 종군기자 마거린 히긴스로부터 “귀신도 잡을 수 있겠다”는 평가를 받아 해병대에 붙여진 별명이 ‘귀신 잡는 해병대’입니다. 동시에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직전 ‘엑스 레이’ 작전을 지시,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 지역에 잠입해 한 달 동안 북한군 해안포대의 위치와 규모 등 정보를 수집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는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는 데 밑거름이 됩니다. 침투 부대의 활약상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손 제독은 정전협정 직전인 1953년 6월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뒤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국군묘지(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와 국방대학원 설립, 군목제도 및 국내외 위탁교육제도 신설 등이 그가 남긴 유산입니다. 부부는 닮는다고 합니다. 홍 여사의 나라를 위한 헌신도 지극했습니다. 홍 여사는 6·25 전쟁 중 부상당한 해군과 해병대 병사들을 돌보는 데 노력을 다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1년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공장과 탁아소, 유치원 등을 지어 전사자 가족을 도왔고 부상병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도 펼쳤습니다.●해군사관학교 교가 등 군가 다수 작곡 홍 여사가 해군에 미친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홍 여사는 늘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군가가 없어 일본 군가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독립군이나 광복군의 군가를 부르거나 찬송가를 부르는 이들도 드물게 있었지만, 당시엔 창군에 박차를 가하던 때라 이런 문제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홍 여사가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의 이화여대) 작곡과에서 수학한 경험을 살려 손 제독이 쓴 가사에 곡을 붙여 한국 최초의 군가 ‘해방 행진곡’을 탄생시켰습니다. 1946년 1월 해방병단이 미 군정청으로부터 정식 군사단체로 승인을 받던 때, 두 사람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군가 해방행진곡도 발표됩니다. 이후에도 그는 ‘바다로 가자’, ‘해군사관학교 교가‘ 등 다수의 해군 군가를 직접 작곡했습니다. 손 제독은 1980년 71세, 홍 여사는 2017년 100세로 타계했습니다. ‘전쟁영웅 부부’의 업적을 이렇게 짧은 글로 정리하는 것 자체가 버거울 정도로 그들은 군과 현대사에 굵은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해군으로, 삯바느질로…부부는 ‘전쟁영웅’이 됐다 [밀리터리 인사이드]

    해군으로, 삯바느질로…부부는 ‘전쟁영웅’이 됐다 [밀리터리 인사이드]

    귀신 잡는 해병대·인천상륙작전 등‘해군의 아버지’로 불린 손원일 제독해군 모집하고 모금으로 전투함 마련부인 홍은혜 여사는 ‘해군의 어머니’전쟁 고아 돌보고 해군 군가 작곡도부부 전쟁영웅. 아마 대한민국 전사(戰史)에 흔치 않은 사례일 겁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국방장관까지 지낸 손원일(1909~1980) 제독과 부인 홍은혜(1917~2017) 여사가 바로 주인공입니다. 손 제독은 2012년 9월, 홍 여사는 지난해 8월 각각 국가보훈처가 지정하는 ‘6·25 전쟁영웅’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부부의 일생은 ‘해군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에게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14일 해군에 따르면 손 제독은 1909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2남 3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나 독립운동가였던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부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선생입니다. 1924년에 중국 남경 중앙대 항해과를 졸업한 그는 1927년 중국해군의 국비유학생으로 3년간 독일에서 수학했습니다. 젊은 시절 고난도 있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일제의 감시를 받던 그는 1930년 일시 귀국했다가 상해독립단체의 비밀연락원의 임무를 띠고 입국했다는 혐의로 일본경찰에 붙잡히게 됩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받으며 1개월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감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손 제독은 무역업에 종사하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하게 됩니다. ●“나라를 지키려면 해군이 필요하다” 손 제독은 1945년 8월 ‘해군의 씨앗’으로 불리는 ‘해사대’를 결성했습니다. 해군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해 직접 발품을 팔며 어렵게 70명의 대원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 11월 11일 오전 11시 서울 관훈동 표훈전에서 70명의 해사대 대원이 모여 결단식을 가진 ‘해방병단’이 바로 우리 해군의 모태입니다. 11월 11일이 해군 창립일이 된 것도 손 제독의 깊은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해군을 ‘바다의 신사’라고 여겨 ‘열 십’(十)과 ‘한 일’(一)을 합친 ‘선비 사’(士)를 뜻하는 11월 11일을 택했습니다. 1946년에는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해군병학교를 세웠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된 그는 이듬해 해병대를 창설, 모든 해군 조직을 외세가 아닌 우리의 손으로 만드는 신화를 썼습니다.1949년 손 제독은 미국으로부터 전투함을 구입하기 위해 ‘함정 건조기금 갹출위원회’를 구성하고, 장병과 국민 모금운동을 벌여 어렵게 1만 5000달러의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손 제독의 부인 홍 여사는 장병 부인들을 모아 삯바느질로 전투함 구입 자금을 마련하는데 앞장 섰다고 합니다. 손 제독은 정부 지원금 4만 5000달러를 합해 6·25 전쟁 직전 백두산함, 금강산함, 삼각산함, 지리산함 등 4척의 전투함을 구입, 바다를 지키게 했습니다. 그의 선견지명은 놀라운 성과로 돌아왔습니다. 백두산함은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6일 새벽, 무장병력 600여명을 태우고 부산으로 향하던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켜 첫 승전보를 올렸습니다. 우리 군의 사기를 크게 높인 것은 물론 북한의 배후 위협 전략을 조기 차단한 값진 승전이었습니다. ●6·25 전쟁 전 전투함 마련…첫 승전보 심지어 그가 일군 해병대는 단독작전으로 1950년 8월 ‘통영상륙작전’을 감행, 적 469명을 사살하고 차량 12대를 노획하는 대전과를 거뒀습니다. 당시 미국 종군기자 마거린 히긴스로부터 “귀신도 잡을 수 있겠다”는 평가를 받아 해병대에 붙여진 별명이 ‘귀신 잡는 해병대’입니다. 동시에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직전 ‘엑스 레이’ 작전을 지시,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 지역에 잠입해 한 달 동안 북한군 해안포대의 위치와 규모 등 정보를 수집하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이는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는 데 밑거름이 됩니다. 당시 침투 부대의 활약상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정전협정 직전인 1953년 6월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뒤에도 국군묘지(현재의 국립서울현충원)와 국방대학원 설립, 군목제도 및 국내외 위탁교육제도 신설 등 특유의 수완으로 군의 핵심 정책들을 만들었습니다.부부는 닮는다고 합니다. 홍 여사의 나라를 위한 헌신도 지극했습니다. 홍 여사는 6·25 전쟁 중 부상당한 해군과 해병대 병사들을 돌보는데 노력을 다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1년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공장과 탁아소, 유치원 등을 지어 전사자 가족을 도왔고 부상병을 돕기 위한 모급활동도 펼쳤습니다. ●“대한민국 해군이 ‘일본 군가’를 부르다니…” 홍 여사가 해군에 미친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홍 여사는 늘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이 군가가 없어 일본 군가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의 이화여대) 작곡과에서 수학한 경험을 살려 손 제독이 쓴 가사에 곡을 만들어 한국 최초의 군가 ‘해방 행진곡’을 발표했습니다. 이후에도 ‘바다로 가자’, ‘해군사관학교 교가‘ 등 다수의 해군 군가를 직접 작곡했습니다. 손 제독은 1980년 71세, 홍 여사는 2017년 100세로 타계했습니다. ‘전쟁영웅 부부’의 업적을 이렇게 짧은 글로 정리하는 것 자체가 버거울 정도로 그들은 군과 현대사에 굵은 한 획을 그은 인물이었습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In&Out] 전염병을 막아 주는 주거복지/강현수 국토연구원장

    [In&Out] 전염병을 막아 주는 주거복지/강현수 국토연구원장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자 각국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외출 금지, 자택 대기, 자가격리 명령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일정한 거처가 없거나 좁고 비위생적인 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전염병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물리적 거리두기가 어렵다. 지금 같은 전염병 비상 상황에서 최소한의 위생 시설을 갖춘 독립된 주거 공간은 생명을 지키는 안전장치다. 주거에 대한 권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인 인권에 속하고 국가는 이를 보장할 의무가 있다. 우리나라는 주거복지 정책을 시행한 역사가 짧다. 그 결과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에 도달한 지금도 많은 사람이 자가격리나 재택근무를 할 수 없는 주거 환경에서 살고 있다. 최저 주거 기준에 미달하는 가구가 100만 가구가 넘으며, 이른바 ‘지옥고’(지하방, 옥탑방, 고시원)나 쪽방, 주택으로 분류되지도 못하는 판잣집, 비닐하우스, 컨테이너 같은 곳에 거주하는 가구까지 포함하면 200만 가구에 달한다.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지만 전체 가구의 3분의1 이상이 자기 집이 없는 무주택 임차 가구이며 이들 대부분이 소득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주거비를 부담하고 있다. 뒤늦기는 했지만 주거복지에 대한 정부의 관심과 투자가 확대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첫해 사각지대 없는 주거복지망 구축을 목표로 한 주거복지 로드맵을 발표했고, 주거복지를 전담하는 주거복지정책관을 국토교통부에 신설했다. 공공임대주택 건설과 주거급여 확대 등을 위한 주거복지 재정도 늘렸다. 현재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공공임대주택 투자 비율이 가장 높다. 지난 3월 코로나19 확산으로 다른 모든 이슈가 사라진 와중에도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와 주거 취약계층 주거권 보장, 청년·신혼부부·고령가구 등 생애주기별 주거 지원 내용을 담은 주거복지 로드맵2.0이 발표됐다. 선진국 수준의 주거 안전망 완성을 목표로 한 이 로드맵이 차질 없이 이행된다면 우리나라는 2025년까지 전체 주택 재고의 10%에 달하는 240만호의 장기공공임대주택이 확보된다. OECD 평균 8%보다 높은 수준이다. 전염병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할 뿐 아니라 앞으로 더 위험한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발생할 것으로 전망한다. 전염병은 취약계층에 더 큰 피해를 주지만 전염병의 속성상 부자나 중산층이라고 안심할 순 없다.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이 안전해야 나머지 국민도 안전하다. 모든 국민이 적어도 최저 주거 기준 이상의 주택에서 살 수 있어야, 주거복지와 의료복지 그리고 사회복지 전반이 촘촘히 연계돼야 앞으로 계속 나타날 전염병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코로나19 대처의 모범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앞으로 주거복지와 주거권 보장에서도 세계적 모범 국가가 되기를 기대한다.
  • 오늘을 살아내는, 그 이름 노동자

    오늘을 살아내는, 그 이름 노동자

    철도직 근무한 3대 가족 이어 굴뚝서 고공농성 증손자까지 노동으로 풀어낸 100년 현대사철도원 삼대/황석영 지음/창비/620쪽/2만원 기차를 보고 첫눈에 반했던 철도공작창 기술자는 아들의 이름을 한쇠로 지었다. 그다음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두쇠였다. 이들을 민적에 올리면서 이름은 일철이, 이철이가 되었다. 이들의 아들까지 더해 삼대는 철도 노동자가 됐고, 증손은 해고 노동자로 공장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을 한다. 한국을 넘은 세계적인 거장, 황석영 작가가 직조한 한반도 백년 역사의 단면이다.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는 이백만, 일철, 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노동자 삼대와 오늘날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백만의 증손이자 공장 노동자인 진오의 이야기가 큰 축을 이룬다. 철도공작창 기술자 아버지 뒤를 이어 형 일철은 철도종사원양성소를 거쳐 당시 드물었던 조선인 기관수가 됐다. 일철이 백만의 자랑이 되는 동안 동생 이철은 철도공작창에 다니다 해고당한 뒤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 옥고를 겪는다. 증손인 진오에 와서는 오늘날에 이른다. 아파트 16층 높이의 발전소 공장 굴뚝에 올라 고공농성 중인 해고노동자 진오는 페트병 다섯 개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각각 붙여 주고 그들에게 말을 걸며 굴뚝 위의 시간을 견딘다.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600쪽 상당 묵직한 장편소설의 등장은 오랜만이라 더욱 반갑다. “염상섭의 ‘삼대’와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를 함께 읽는 데서 한국문학의 근현대가 완성된다”(한기욱 문학평론가)는 말처럼. 그중에서도 작가는 산업노동자에게 천착해 무명씨인 그들에게 이름 붙여 주는 데 골몰한다. 애당초 소설은 “단편소설에 비해 훨씬 질과 양이 떨어지는 장편소설 부분과 그중에서도 근대 산업노동자들의 삶을 반영한 소설이 드물다는 점”(615쪽)에서 출발했다.더불어 어려운 시기를 사는 여성 인물들의 활약과 연대도 눈여겨볼 만하다. 백만의 아내 주안댁이 일찍 세상을 뜨자 백만의 누이동생 막음이 올케인 주안댁과 혼으로 소통하며 어린 일철·이철 형제를 돌본다. 일철의 아내 신금은 시동생 이철과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신여성이다. 이철과 아지트 부부였다가 실제 부부 연을 맺어 아들 장산을 낳는 한여옥, 이철의 독립운동 연락책을 맡았던 박선옥 등도 당대를 살아가는 주체적인 여성상이다. 굴뚝에 오르는 진오를 향한 어머니 윤복례의 말은 익히 이들 가족의 내력을 알게 한다. “한두 달 새 내려올 생각 아예 마라. 쩌어 예전부터 지금까정 죽은 사람이 숱하게 쌨다.”(111쪽) 소설은 1989년 작가의 방북에서 비롯됐다. 당시 작가는 북한 당국의 안내로 방문한 평양백화점에서 부지배인 노인을 만나 한참 얘기를 나눴다. 뜻밖에 옛날식 서울말을 쓰는 노인은 작가가 유년기를 보냈던 서울 영등포 출신이었고, 노인은 아버지가 영등포 철도공작창에 다니던 이야기와 그가 철도학교에 들어가던 이야기, 기관수로 대륙을 넘나들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삼십여년 세월이 흘러 그 이야기는 ‘철도원 삼대’가 됐다. “그것은 아마도 삶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지속된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은 살아낸다.”(207쪽) 이 모든 세월을 건너 고공농성에 나선 진오의 생각이자,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자명한 진실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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