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오한
    2026-06-03
    검색기록 지우기
  • 복지로
    2026-06-03
    검색기록 지우기
  • 외교
    2026-06-03
    검색기록 지우기
  • 종잣돈
    2026-06-03
    검색기록 지우기
  • 머플러
    2026-06-03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301
  •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평생 같이 가게 된 병” 무슨 일이 있었나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평생 같이 가게 된 병” 무슨 일이 있었나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평생 같이 가게 된 병” 무슨 일이 있었나 여성 싱어송라이터 장재인(24)이 2013년 근긴장이상증 진단을 받은 후 음악을 포기하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손이 떨리고 안면 마비 증세가 와 그해 2월 뇌 검사 등을 했고 병명을 알게 됐다. 근긴장이상증이란 지속적인 근육 수축으로 신체 일부가 꼬이고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비정상적 자세를 보이는 증상을 말한다. 그는 “평생 같이 가게 된 병”이라면서 “그 때문에 기타를 한두 곡 연주하면 몸에 무리가 와 기타를 내려놓았다. 몸이 좀 더 좋아지면 다시 기타를 치고 싶다”고 말했다. 장재인은 오는 11일 새 미니앨범 ‘리퀴드’(LIQUID) 발매를 앞두고 10일 동작구 사당동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열린 음악감상회에서 자신의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꾸준히 치료를 받았는데 더는 진전이 없었다”며 “난치병이라고 하면 좀 무거운 얘기이고 내가 계속 데리고 가야 할 나의 한 부분”이라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는 몸에 무리가 와 기타를 놓고 음악을 그만둘까도 고민했지만, 노래를 못한다는 생각에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앨범을 낸 것 자체가 큰 의미라고 강조했다. 크론병을 앓는 프로듀서 윤종신이 “병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해 음악을 다시 시작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장재인의 표정에선 3년 만의 새 앨범이자 윤종신이 이끄는 미스틱89에 둥지를 틀고 낸 첫 앨범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미스틱89와 계약한 뒤 바로 앨범을 준비하려 했지만 몸 상태 탓에 소속사에 양해를 구한 뒤 치료를 받으며 건강 회복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기력이 생기면서 음악 작업에 욕심이 났고 앨범 수록곡 전곡을 작사했다. 작곡에는 윤종신, 정석원, 조정치가 힘을 보탰다. 작곡도 하는 그지만 “곡 스타일을 바꾸고 싶고 심경 변화도 있어서 작곡을 멈춘 상태”라고 말했다. 그만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가사에는 사랑, 남녀 관계도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래서 앨범 제목도 흐르는 액체를 뜻하는 ‘리퀴드’다. 사랑은 붙잡고 싶을 때도, 보내고 싶을 때도, 찢어지게 아플 때도, 좋은 순간을 유지하고 싶은 때도 있지만 다 흘러간다는 깨달음을 자신의 경험을 반추해 녹여낸 것이다. 타이틀곡 ‘밥을 먹어요’를 비롯해 ‘나의 위성’, ‘리퀴드’, ‘클라이막스’ 등의 수록곡에선 평범한 순간의 날 선 표현들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는 ‘밥을 먹어요’에 대해 “이 곡에는 남녀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며 “경험담과 여러 주변 이야기를 참고해 썼다”고 소개했다.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가’란 물음에는 “현재 솔로지만 모든 걸 불태우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웃었다. 그는 엠넷 ‘슈퍼스타K 2’ 출연 당시 심사위원으로도 만난 윤종신에 대해 “윤종신 프로듀서는 편하고 친한 친구 같다. 심사위원일 때와 다른 점은 존중하는 부분은 확실하게 존중해주고 잡아줄 부분은 확실히 잡아준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 앨범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분들이 도와주셨다는 점에서 100점이라 말하고 싶다”며 앞으로 피오나 애플, 조니 미첼처럼 멋지고 심오한 음악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전주 메르스 “13일 만에 발병, 매우 드문 케이스” 왜?

    전주 메르스 “13일 만에 발병, 매우 드문 케이스” 왜?

    전주 메르스 전주 메르스 “13일 만에 발병, 매우 드문 케이스” 왜? 전북 전주에서도 10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첫 감염환자가 나오면서 주춤했던 ‘메르스’가 전북에서 다시 확산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전북에서는 순창의 70대와 김제의 50대에 이어 세 번째다. 전북도 방역상황실은 “전주에 사는 A씨(63)가 9일 근육통과 기침, 설사 증세를 호소해와 10일 새벽 메르스 검사를 한 결과,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이날 밝혔다. 방역당국에 따르면 A씨는 지난달 29일 아내의 병 치료차 아내를 데리고 삼성서울병원을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A씨는 삼성서울병원을 다녀온 다음 날인 지난달 30일 오한과 발열 증상이 보이자 31일 전주예수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았다. 이어 A씨는 31일 오후 삼성서울병원으로부터 6번 환자의 접촉자였다는 내용을 통보받자 자신이 보건소에 직접 신고하고 자가격리됐다. A씨는 이후 실시한 1,2차 검사에서 음성판정을 받아 지난 2일 격리 해제됐으며, A씨와 접촉 후 자가격리됐던 92명도 당시 함께 격리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잠복기가 거의 끝나가던 지난 9일 근육통과 기침, 설사 등의 증세를 보이자 A씨는 보건당국에 재신고를 했고 검사 결과 확진 판정을 받았다. A씨는 음성 판정자에 대한 보건당국의 규정이 바뀌면서 지난 7일부터 다시 자가격리에 들어갔지만, 이미 닷새간 집밖을 돌아다녔고 병원 1곳을 방문한 상태였다. 자가격리가 완벽하게 지켜졌더라도 최소 5일간은 외부에 노출된 셈이 된다. 이에 따라 보건당국은 A씨와 접촉했던 92명에 대해 다시 자가격리 조치에 들어갔고, 능동감시 기간이었던 2일부터 6일까지의 동선을 파악해 추가 접촉자에 대한 역학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박철웅 전북도 방역상황실장은 “현재로선 삼성서울병원에서 감염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만약 A씨가 삼성병원에서 감염됐다면 현지에서 접촉 후 13일 만에 증상이 나온 다소 드문 케이스”라고 말했다. 메르스의 최대 잠복기는 보통 2주로 보통 증상이 발현하는 시기는 접촉 후 6∼7일로 알려져 있다. 박 방역상황실장은 “첫 접촉 후 잠복 기간이 이렇게 긴 사례는 경기도 등 다른 지역에서도 2∼3차례 있었다. A씨의 특이 체질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고 있으며 검사에는 잘못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했다”며 “A씨는 능동감시 기간에도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고 7일 규정이 바뀌면서 즉시 다시 자가격리조치가 돼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추가 접촉자가 3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는 데 정확한 수는 역학조사를 마쳐봐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북도 방역당국은 1,2차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은 후 열흘 가까이 돼서야 확진 판정을 받은 A씨의 특이사례에 대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아울러 현재 순창과 김제지역 격리자의 증상도 A씨처럼 늦게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이들의 증상변화를 더욱 철저히 체크키로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신체가 꼬이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병” 충격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신체가 꼬이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병” 충격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신체가 꼬이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병” 충격 여성 싱어송라이터 장재인(24)이 2013년 근긴장이상증 진단을 받은 후 음악을 포기하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손이 떨리고 안면 마비 증세가 와 그해 2월 뇌 검사 등을 했고 병명을 알게 됐다. 근긴장이상증이란 지속적인 근육 수축으로 신체 일부가 꼬이고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비정상적 자세를 보이는 증상을 말한다. 그는 “평생 같이 가게 된 병”이라면서 “그 때문에 기타를 한두 곡 연주하면 몸에 무리가 와 기타를 내려놓았다. 몸이 좀 더 좋아지면 다시 기타를 치고 싶다”고 말했다. 장재인은 오는 11일 새 미니앨범 ‘리퀴드’(LIQUID) 발매를 앞두고 10일 동작구 사당동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열린 음악감상회에서 자신의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꾸준히 치료를 받았는데 더는 진전이 없었다”며 “난치병이라고 하면 좀 무거운 얘기이고 내가 계속 데리고 가야 할 나의 한 부분”이라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는 몸에 무리가 와 기타를 놓고 음악을 그만둘까도 고민했지만, 노래를 못한다는 생각에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앨범을 낸 것 자체가 큰 의미라고 강조했다. 크론병을 앓는 프로듀서 윤종신이 “병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해 음악을 다시 시작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장재인의 표정에선 3년 만의 새 앨범이자 윤종신이 이끄는 미스틱89에 둥지를 틀고 낸 첫 앨범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미스틱89와 계약한 뒤 바로 앨범을 준비하려 했지만 몸 상태 탓에 소속사에 양해를 구한 뒤 치료를 받으며 건강 회복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기력이 생기면서 음악 작업에 욕심이 났고 앨범 수록곡 전곡을 작사했다. 작곡에는 윤종신, 정석원, 조정치가 힘을 보탰다. 작곡도 하는 그지만 “곡 스타일을 바꾸고 싶고 심경 변화도 있어서 작곡을 멈춘 상태”라고 말했다. 그만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가사에는 사랑, 남녀 관계도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래서 앨범 제목도 흐르는 액체를 뜻하는 ‘리퀴드’다. 사랑은 붙잡고 싶을 때도, 보내고 싶을 때도, 찢어지게 아플 때도, 좋은 순간을 유지하고 싶은 때도 있지만 다 흘러간다는 깨달음을 자신의 경험을 반추해 녹여낸 것이다. 타이틀곡 ‘밥을 먹어요’를 비롯해 ‘나의 위성’, ‘리퀴드’, ‘클라이막스’ 등의 수록곡에선 평범한 순간의 날 선 표현들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는 ‘밥을 먹어요’에 대해 “이 곡에는 남녀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며 “경험담과 여러 주변 이야기를 참고해 썼다”고 소개했다.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가’란 물음에는 “현재 솔로지만 모든 걸 불태우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웃었다. 그는 엠넷 ‘슈퍼스타K 2’ 출연 당시 심사위원으로도 만난 윤종신에 대해 “윤종신 프로듀서는 편하고 친한 친구 같다. 심사위원일 때와 다른 점은 존중하는 부분은 확실하게 존중해주고 잡아줄 부분은 확실히 잡아준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 앨범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분들이 도와주셨다는 점에서 100점이라 말하고 싶다”며 앞으로 피오나 애플, 조니 미첼처럼 멋지고 심오한 음악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기타도 내려놨다” 얼마나 힘들었길래?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기타도 내려놨다” 얼마나 힘들었길래?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기타도 내려놨다” 얼마나 힘들었길래? 여성 싱어송라이터 장재인(24)이 2013년 근긴장이상증 진단을 받은 후 음악을 포기하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손이 떨리고 안면 마비 증세가 와 그해 2월 뇌 검사 등을 했고 병명을 알게 됐다. 근긴장이상증이란 지속적인 근육 수축으로 신체 일부가 꼬이고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비정상적 자세를 보이는 증상을 말한다. 그는 “평생 같이 가게 된 병”이라면서 “그 때문에 기타를 한두 곡 연주하면 몸에 무리가 와 기타를 내려놓았다. 몸이 좀 더 좋아지면 다시 기타를 치고 싶다”고 말했다. 장재인은 오는 11일 새 미니앨범 ‘리퀴드’(LIQUID) 발매를 앞두고 10일 동작구 사당동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열린 음악감상회에서 자신의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꾸준히 치료를 받았는데 더는 진전이 없었다”며 “난치병이라고 하면 좀 무거운 얘기이고 내가 계속 데리고 가야 할 나의 한 부분”이라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는 몸에 무리가 와 기타를 놓고 음악을 그만둘까도 고민했지만, 노래를 못한다는 생각에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앨범을 낸 것 자체가 큰 의미라고 강조했다. 크론병을 앓는 프로듀서 윤종신이 “병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해 음악을 다시 시작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장재인의 표정에선 3년 만의 새 앨범이자 윤종신이 이끄는 미스틱89에 둥지를 틀고 낸 첫 앨범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미스틱89와 계약한 뒤 바로 앨범을 준비하려 했지만 몸 상태 탓에 소속사에 양해를 구한 뒤 치료를 받으며 건강 회복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기력이 생기면서 음악 작업에 욕심이 났고 앨범 수록곡 전곡을 작사했다. 작곡에는 윤종신, 정석원, 조정치가 힘을 보탰다. 작곡도 하는 그지만 “곡 스타일을 바꾸고 싶고 심경 변화도 있어서 작곡을 멈춘 상태”라고 말했다. 그만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가사에는 사랑, 남녀 관계도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래서 앨범 제목도 흐르는 액체를 뜻하는 ‘리퀴드’다. 사랑은 붙잡고 싶을 때도, 보내고 싶을 때도, 찢어지게 아플 때도, 좋은 순간을 유지하고 싶은 때도 있지만 다 흘러간다는 깨달음을 자신의 경험을 반추해 녹여낸 것이다. 타이틀곡 ‘밥을 먹어요’를 비롯해 ‘나의 위성’, ‘리퀴드’, ‘클라이막스’ 등의 수록곡에선 평범한 순간의 날 선 표현들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는 ‘밥을 먹어요’에 대해 “이 곡에는 남녀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며 “경험담과 여러 주변 이야기를 참고해 썼다”고 소개했다.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가’란 물음에는 “현재 솔로지만 모든 걸 불태우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웃었다. 그는 엠넷 ‘슈퍼스타K 2’ 출연 당시 심사위원으로도 만난 윤종신에 대해 “윤종신 프로듀서는 편하고 친한 친구 같다. 심사위원일 때와 다른 점은 존중하는 부분은 확실하게 존중해주고 잡아줄 부분은 확실히 잡아준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 앨범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분들이 도와주셨다는 점에서 100점이라 말하고 싶다”며 앞으로 피오나 애플, 조니 미첼처럼 멋지고 심오한 음악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장재인 근긴이상증 투병 “음악 포기하려 했었다” 대체 무슨 병?

    장재인 근긴이상증 투병 “음악 포기하려 했었다” 대체 무슨 병?

    장재인 근긴이상증 투병 장재인 근긴이상증 투병 “음악 포기하려 했었다” 대체 무슨 병? 여성 싱어송라이터 장재인(24)이 2013년 근긴장이상증 진단을 받은 후 음악을 포기하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손이 떨리고 안면 마비 증세가 와 그해 2월 뇌 검사 등을 했고 병명을 알게 됐다. 근긴장이상증이란 지속적인 근육 수축으로 신체 일부가 꼬이고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비정상적 자세를 보이는 증상을 말한다. 그는 “평생 같이 가게 된 병”이라면서 “그 때문에 기타를 한두 곡 연주하면 몸에 무리가 와 기타를 내려놓았다. 몸이 좀 더 좋아지면 다시 기타를 치고 싶다”고 말했다. 장재인은 오는 11일 새 미니앨범 ‘리퀴드’(LIQUID) 발매를 앞두고 10일 동작구 사당동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열린 음악감상회에서 자신의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꾸준히 치료를 받았는데 더는 진전이 없었다”며 “난치병이라고 하면 좀 무거운 얘기이고 내가 계속 데리고 가야 할 나의 한 부분”이라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는 몸에 무리가 와 기타를 놓고 음악을 그만둘까도 고민했지만, 노래를 못한다는 생각에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앨범을 낸 것 자체가 큰 의미라고 강조했다. 크론병을 앓는 프로듀서 윤종신이 “병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해 음악을 다시 시작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장재인의 표정에선 3년 만의 새 앨범이자 윤종신이 이끄는 미스틱89에 둥지를 틀고 낸 첫 앨범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미스틱89와 계약한 뒤 바로 앨범을 준비하려 했지만 몸 상태 탓에 소속사에 양해를 구한 뒤 치료를 받으며 건강 회복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기력이 생기면서 음악 작업에 욕심이 났고 앨범 수록곡 전곡을 작사했다. 작곡에는 윤종신, 정석원, 조정치가 힘을 보탰다. 작곡도 하는 그지만 “곡 스타일을 바꾸고 싶고 심경 변화도 있어서 작곡을 멈춘 상태”라고 말했다. 그만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가사에는 사랑, 남녀 관계도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래서 앨범 제목도 흐르는 액체를 뜻하는 ‘리퀴드’다. 사랑은 붙잡고 싶을 때도, 보내고 싶을 때도, 찢어지게 아플 때도, 좋은 순간을 유지하고 싶은 때도 있지만 다 흘러간다는 깨달음을 자신의 경험을 반추해 녹여낸 것이다. 타이틀곡 ‘밥을 먹어요’를 비롯해 ‘나의 위성’, ‘리퀴드’, ‘클라이막스’ 등의 수록곡에선 평범한 순간의 날 선 표현들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는 ‘밥을 먹어요’에 대해 “이 곡에는 남녀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며 “경험담과 여러 주변 이야기를 참고해 썼다”고 소개했다.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가’란 물음에는 “현재 솔로지만 모든 걸 불태우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웃었다. 그는 엠넷 ‘슈퍼스타K 2’ 출연 당시 심사위원으로도 만난 윤종신에 대해 “윤종신 프로듀서는 편하고 친한 친구 같다. 심사위원일 때와 다른 점은 존중하는 부분은 확실하게 존중해주고 잡아줄 부분은 확실히 잡아준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 앨범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분들이 도와주셨다는 점에서 100점이라 말하고 싶다”며 앞으로 피오나 애플, 조니 미첼처럼 멋지고 심오한 음악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기타도 내려놨다” 근육수축 대체 왜?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기타도 내려놨다” 근육수축 대체 왜?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장재인 근긴장이상증 투병 “기타도 내려놨다” 근육수축 대체 왜? 여성 싱어송라이터 장재인(24)이 2013년 근긴장이상증 진단을 받은 후 음악을 포기하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손이 떨리고 안면 마비 증세가 와 그해 2월 뇌 검사 등을 했고 병명을 알게 됐다. 근긴장이상증이란 지속적인 근육 수축으로 신체 일부가 꼬이고 제멋대로 움직이거나 비정상적 자세를 보이는 증상을 말한다. 그는 “평생 같이 가게 된 병”이라면서 “그 때문에 기타를 한두 곡 연주하면 몸에 무리가 와 기타를 내려놓았다. 몸이 좀 더 좋아지면 다시 기타를 치고 싶다”고 말했다. 장재인은 오는 11일 새 미니앨범 ‘리퀴드’(LIQUID) 발매를 앞두고 10일 동작구 사당동 메가박스 아트나인에서 열린 음악감상회에서 자신의 건강 상태를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꾸준히 치료를 받았는데 더는 진전이 없었다”며 “난치병이라고 하면 좀 무거운 얘기이고 내가 계속 데리고 가야 할 나의 한 부분”이라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그는 몸에 무리가 와 기타를 놓고 음악을 그만둘까도 고민했지만, 노래를 못한다는 생각에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래서 앨범을 낸 것 자체가 큰 의미라고 강조했다. 크론병을 앓는 프로듀서 윤종신이 “병을 받아들이라”고 조언해 음악을 다시 시작하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장재인의 표정에선 3년 만의 새 앨범이자 윤종신이 이끄는 미스틱89에 둥지를 틀고 낸 첫 앨범에 대한 설렘이 가득했다. 미스틱89와 계약한 뒤 바로 앨범을 준비하려 했지만 몸 상태 탓에 소속사에 양해를 구한 뒤 치료를 받으며 건강 회복에만 집중했다고 한다. 기력이 생기면서 음악 작업에 욕심이 났고 앨범 수록곡 전곡을 작사했다. 작곡에는 윤종신, 정석원, 조정치가 힘을 보탰다. 작곡도 하는 그지만 “곡 스타일을 바꾸고 싶고 심경 변화도 있어서 작곡을 멈춘 상태”라고 말했다. 그만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가사에는 사랑, 남녀 관계도 시간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래서 앨범 제목도 흐르는 액체를 뜻하는 ‘리퀴드’다. 사랑은 붙잡고 싶을 때도, 보내고 싶을 때도, 찢어지게 아플 때도, 좋은 순간을 유지하고 싶은 때도 있지만 다 흘러간다는 깨달음을 자신의 경험을 반추해 녹여낸 것이다. 타이틀곡 ‘밥을 먹어요’를 비롯해 ‘나의 위성’, ‘리퀴드’, ‘클라이막스’ 등의 수록곡에선 평범한 순간의 날 선 표현들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그는 ‘밥을 먹어요’에 대해 “이 곡에는 남녀가 존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며 “경험담과 여러 주변 이야기를 참고해 썼다”고 소개했다.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가’란 물음에는 “현재 솔로지만 모든 걸 불태우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웃었다. 그는 엠넷 ‘슈퍼스타K 2’ 출연 당시 심사위원으로도 만난 윤종신에 대해 “윤종신 프로듀서는 편하고 친한 친구 같다. 심사위원일 때와 다른 점은 존중하는 부분은 확실하게 존중해주고 잡아줄 부분은 확실히 잡아준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번 앨범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분들이 도와주셨다는 점에서 100점이라 말하고 싶다”며 앞으로 피오나 애플, 조니 미첼처럼 멋지고 심오한 음악을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전주 메르스 “13일 만에 발병, 매우 드문 케이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전주 메르스 “13일 만에 발병, 매우 드문 케이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전주 메르스 전주 메르스 “13일 만에 발병, 매우 드문 케이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전북 전주에서도 10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첫 감염환자가 나오면서 주춤했던 ‘메르스’가 전북에서 다시 확산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전북에서는 순창의 70대와 김제의 50대에 이어 세 번째다. 전북도 방역상황실은 “전주에 사는 A씨(63)가 9일 근육통과 기침, 설사 증세를 호소해와 10일 새벽 메르스 검사를 한 결과, 확진 판정을 받았다”고 이날 밝혔다. 방역당국에 따르면 A씨는 지난달 29일 아내의 병 치료차 아내를 데리고 삼성서울병원을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 A씨는 삼성서울병원을 다녀온 다음 날인 지난달 30일 오한과 발열 증상이 보이자 31일 전주예수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았다. 이어 A씨는 31일 오후 삼성서울병원으로부터 6번 환자의 접촉자였다는 내용을 통보받자 자신이 보건소에 직접 신고하고 자가격리됐다. A씨는 이후 실시한 1,2차 검사에서 음성판정을 받아 지난 2일 격리 해제됐으며, A씨와 접촉 후 자가격리됐던 92명도 당시 함께 격리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잠복기가 거의 끝나가던 지난 9일 근육통과 기침, 설사 등의 증세를 보이자 A씨는 보건당국에 재신고를 했고 검사 결과 확진 판정을 받았다. A씨는 음성 판정자에 대한 보건당국의 규정이 바뀌면서 지난 7일부터 다시 자가격리에 들어갔지만, 이미 닷새간 집밖을 돌아다녔고 병원 1곳을 방문한 상태였다. 자가격리가 완벽하게 지켜졌더라도 최소 5일간은 외부에 노출된 셈이 된다. 이에 따라 보건당국은 A씨와 접촉했던 92명에 대해 다시 자가격리 조치에 들어갔고, 능동감시 기간이었던 2일부터 6일까지의 동선을 파악해 추가 접촉자에 대한 역학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박철웅 전북도 방역상황실장은 “현재로선 삼성서울병원에서 감염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만약 A씨가 삼성병원에서 감염됐다면 현지에서 접촉 후 13일 만에 증상이 나온 다소 드문 케이스”라고 말했다. 메르스의 최대 잠복기는 보통 2주로 보통 증상이 발현하는 시기는 접촉 후 6∼7일로 알려져 있다. 박 방역상황실장은 “첫 접촉 후 잠복 기간이 이렇게 긴 사례는 경기도 등 다른 지역에서도 2∼3차례 있었다. A씨의 특이 체질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고 있으며 검사에는 잘못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했다”며 “A씨는 능동감시 기간에도 거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고 7일 규정이 바뀌면서 즉시 다시 자가격리조치가 돼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는 추가 접촉자가 3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는 데 정확한 수는 역학조사를 마쳐봐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북도 방역당국은 1,2차 검사에서 음성 판정을 받은 후 열흘 가까이 돼서야 확진 판정을 받은 A씨의 특이사례에 대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아울러 현재 순창과 김제지역 격리자의 증상도 A씨처럼 늦게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이들의 증상변화를 더욱 철저히 체크키로 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메르스 공포-정부 총력 대응 체제로] “며칠 몇 시 몇 층에 환자 있었는지도 밝혀야”

    전문가들은 7일 정부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발병 병원 명단 공개와 별도로 메르스 확진 환자의 동선과 해당 병원 방문객들이 증상 발현 시 취해야 할 행동 조치 등 세부적인 정보 제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성일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24개 병원 실명 공개에 대해 “정부가 이제 병원 기록만으로는 메르스 감염 의심자를 추적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우려했다. 조 교수는 “정부가 병원 명단뿐 아니라 메르스 확진 환자들이 정확히 몇 시에 내원했는지 등 구체적인 시간대와 동선도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메르스 증상을 나타내는 환자들이 어느 병원을 내원한 경력이 있는지 조회할 수 있는 전산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윤 서울대 의료관리학과 교수는 “메르스 감염 증상에 해당하는 오한, 발열 등 증세를 보이는 환자가 병원에 올 경우 곧바로 어느 병원을 거쳤는지 확인 가능한 시스템이 갖춰진다면 삼성서울병원에 내원해 메르스 바이러스를 전파한 14번 환자 같은 사례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택성모병원에서 감염된 14번 환자는 감염 사실을 모른 채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병원 측은 그가 직전에 만성폐렴을 앓은 것 외에 다른 정보를 알지 못해 재빨리 격리 조치를 하지 못했다. 정부가 지금까지 나타난 환자들이 100% 병원 내 감염인 점에만 몰두, 지역사회 확산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도 문제로 제기됐다. 이날도 정부는 감염병 위기 단계를 격상하지 않고 ‘주의’ 수준으로 유지했다. 한미정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사무처장은 “정부는 계속해서 병원 내 감염만을 이야기하며 지역 감염 가능성이 낮다는 점만 강조하고 있는데, 둘을 구분해 따질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된다”며 “이젠 뒤쫓아 가는 방법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지역 감염까지 염두에 두고 조기에 선제적으로 지역사회 단위를 포괄한 방역체계를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증상 발현 시 대처법에 대한 정보 부족도 문제로 꼽혔다. 최원석 고려대 안산병원 감염내과 전문의는 “병원 정보가 공개된 시점에서는 해당 병원을 이용했거나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며 “지금은 정부가 나서서 해당 병원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증상이 생길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후속 대책을 설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일학 연세대 의료법윤리학과 교수도 “정부의 메르스 병원 명단 공개는 국민에게 알아서 대처하라는 식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아 무책임하게 보인다”며 “앞으로 메르스 예방을 위한 국민 대처 방식도 종합적이고 구체적으로 공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정부가 공개한 24곳의 병원 가운데 일부 지명과 병원 이름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확인돼 정정하는 소동이 일었다. 이에 대해 정형준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은 “병원 이름도 틀리는 정부가 과연 메르스에 대한 통제 관리를 분명하게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며 “정보를 단순 나열하는 수준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최선을 기자 csunell@seoul.co.kr
  •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행동 반경 밝힌 이유는 무엇?”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행동 반경 밝힌 이유는 무엇?”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행동 반경 밝힌 이유는 무엇?” 경기도 부천시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첫 1차 양성반응자가 나데 따른 주민 불안을 고려, 이 남성의 구체적인 동선을 공개했다. 7일 부천시에 따르면 6일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은 주민 A(36)씨는 지난달 26∼28일 서울 강남의 대형병원 응급실에 입원 중인 부친(66)을 병문안했다. 이 병실에는 메르스 14번 환자가 함께 입원해 있었으며 A씨는 자신의 외척 B(61)씨와 사흘간 부친을 돌보다가 대형병원 측으로부터 ‘부친의 임종이 임박했으니 퇴원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A씨는 부친을 부천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고 A씨의 부친은 지난달 28일 저녁 숨졌다. A씨는 부천의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나서 30일 벽제화장장에서 부친을 화장해 화성의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부천시는 A씨가 30일 저녁 처음 오한을 느꼈으며 31일 시흥에 있는 직장에 출근했고 이달 1일 동네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후 고열 등 증상이 심해진 A씨는 3일 부천 대형병원에서의 진료와 5일 보건소 가검물 채취를 거쳐 6일 새벽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았다. A씨와 함께 서울 강남의 대형병원에서 14번 환자와 접촉한 부산에 사는 B씨 역시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A씨와 한집에 사는 모친(65)과 동생(35)에 대한 검사에서는 음성 판정이 나왔다. 부천시는 우선 A씨가 거쳐 간 시내 병원 3곳과 장례식장에서 접촉한 300여명에 대해 1차 모니터링을 진행하는 한편 A씨의 동선에 대한 방역 소독을 실시했다. 이번 조사결과로 부천시는 A씨가 병원에서 14번 환자와 접촉한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첫 지역사회 감염 사례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됐다. 부천시 관계자는 “메르스 1차 양성반응자의 행동반경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시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라며 “발열과 오한 등의 증상이 발생하면 즉시 인근 보건소와 병원 진료를 서둘러야 한다”고 당부했다. 온랑니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어떤 곳으로 다녔는 지 살펴봤더니…”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어떤 곳으로 다녔는 지 살펴봤더니…”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어떤 곳으로 다녔는 지 살펴봤더니…” 경기도 부천시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첫 1차 양성반응자가 나데 따른 주민 불안을 고려, 이 남성의 구체적인 동선을 공개했다. 7일 부천시에 따르면 6일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은 주민 A(36)씨는 지난달 26∼28일 서울 강남의 대형병원 응급실에 입원 중인 부친(66)을 병문안했다. 이 병실에는 메르스 14번 환자가 함께 입원해 있었으며 A씨는 자신의 외척 B(61)씨와 사흘간 부친을 돌보다가 대형병원 측으로부터 ‘부친의 임종이 임박했으니 퇴원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A씨는 부친을 부천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고 A씨의 부친은 지난달 28일 저녁 숨졌다. A씨는 부천의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나서 30일 벽제화장장에서 부친을 화장해 화성의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부천시는 A씨가 30일 저녁 처음 오한을 느꼈으며 31일 시흥에 있는 직장에 출근했고 이달 1일 동네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후 고열 등 증상이 심해진 A씨는 3일 부천 대형병원에서의 진료와 5일 보건소 가검물 채취를 거쳐 6일 새벽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았다. A씨와 함께 서울 강남의 대형병원에서 14번 환자와 접촉한 부산에 사는 B씨 역시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A씨와 한집에 사는 모친(65)과 동생(35)에 대한 검사에서는 음성 판정이 나왔다. 부천시는 우선 A씨가 거쳐 간 시내 병원 3곳과 장례식장에서 접촉한 300여명에 대해 1차 모니터링을 진행하는 한편 A씨의 동선에 대한 방역 소독을 실시했다. 이번 조사결과로 부천시는 A씨가 병원에서 14번 환자와 접촉한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첫 지역사회 감염 사례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됐다. 부천시 관계자는 “메르스 1차 양성반응자의 행동반경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시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라며 “발열과 오한 등의 증상이 발생하면 즉시 인근 보건소와 병원 진료를 서둘러야 한다”고 당부했다. 온랑니뉴스부 iseoul@seoul.co.kr
  •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어떤 경로로 감염이 됐는 지 자세히 살펴봤더니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어떤 경로로 감염이 됐는 지 자세히 살펴봤더니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어떤 경로로 감염이 됐는 지 자세히 살펴봤더니 경기도 부천시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첫 1차 양성반응자가 나데 따른 주민 불안을 고려, 이 남성의 구체적인 동선을 공개했다. 7일 부천시에 따르면 6일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은 주민 A(36)씨는 지난달 26∼28일 서울 강남의 대형병원 응급실에 입원 중인 부친(66)을 병문안했다. 이 병실에는 메르스 14번 환자가 함께 입원해 있었으며 A씨는 자신의 외척 B(61)씨와 사흘간 부친을 돌보다가 대형병원 측으로부터 ‘부친의 임종이 임박했으니 퇴원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A씨는 부친을 부천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고 A씨의 부친은 지난달 28일 저녁 숨졌다. A씨는 부천의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나서 30일 벽제화장장에서 부친을 화장해 화성의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부천시는 A씨가 30일 저녁 처음 오한을 느꼈으며 31일 시흥에 있는 직장에 출근했고 이달 1일 동네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후 고열 등 증상이 심해진 A씨는 3일 부천 대형병원에서의 진료와 5일 보건소 가검물 채취를 거쳐 6일 새벽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았다. A씨와 함께 서울 강남의 대형병원에서 14번 환자와 접촉한 부산에 사는 B씨 역시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A씨와 한집에 사는 모친(65)과 동생(35)에 대한 검사에서는 음성 판정이 나왔다. 부천시는 우선 A씨가 거쳐 간 시내 병원 3곳과 장례식장에서 접촉한 300여명에 대해 1차 모니터링을 진행하는 한편 A씨의 동선에 대한 방역 소독을 실시했다. 이번 조사결과로 부천시는 A씨가 병원에서 14번 환자와 접촉한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첫 지역사회 감염 사례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됐다. 부천시 관계자는 “메르스 1차 양성반응자의 행동반경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시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라며 “발열과 오한 등의 증상이 발생하면 즉시 인근 보건소와 병원 진료를 서둘러야 한다”고 당부했다. 온랑니뉴스부 iseoul@seoul.co.kr
  • 작년 환자 2명 발생…美는 어떻게 막았나

    미국에서도 지난해 2명의 메르스 감염 사례가 발생했으나 의료 당국의 신속한 대처로 확산 없이 조기에 통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미 당국은 여전히 메르스 감시를 하고 있다. 4일(현지시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동안 미국에서 지난해 5월 메르스 양성 환자가 2명이 발생했다.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보건요원으로 메르스 환자가 수용된 병원에서 근무했다가 귀국한 경우다. 인디애나주 환자는 지난해 4월 18일 미열 증세가 나타난 뒤 24일 사우디를 떠나 런던·시카고를 거쳐 인디애나주로 들어왔다. 이 환자는 사흘 뒤인 27일 열이 오르고 콧물과 기침, 호흡 곤란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이튿날 이 환자는 인디애나주 한 병원 응급실에 갔고 같은 날 입원했다. 이어 5월 2일 미국에서 첫 번째로 메르스 양성 판정을 받았다. 병원은 그를 신속하게 격리한 채 집중 치료했으며, 9일 완치 판정을 내리고 퇴원시켰다. 두 번째 환자는 지난해 5월 1일 사우디를 떠나 런던으로 가던 중 아프기 시작했으며, 이어 보스턴·애틀랜타를 거쳐 플로리다주로 가는 동안 근육통과 고열, 오한과 약간의 감기 증세를 호소했다. 올랜도에 머무르는 동안 증세가 악화하자 9일 플로리다주 한 병원 응급실로 갔고 같은 날 입원했다. 병원은 메르스 확진 판정을 내리고 격리한 뒤 집중 치료했다. 그는 9일 만에 더는 감염 위험이 없는 것으로 판단돼 건강한 몸으로 귀가했다. 당시 CDC는 이들과 직간접으로 접촉한 비행기·버스 탑승객들과 연락을 취해 감염 여부를 확인하는 등 발 빠른 초동 대처를 통해 확산을 차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CDC는 “지난해 5월 단지 2명만 양성 판정을 받았고, 500명 이상은 음성으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CDC는 이어 “메르스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더 많은 감염 사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잠재력을 인식하고 메르스 감염 사례 수집 방법 향상 및 사례 감지 능력 확대, 관계자 안내 및 정보 확산 등을 이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워싱턴 김미경 특파원 chaplin7@seoul.co.kr
  •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어떻게 감염됐나 경로 추적해보니”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어떻게 감염됐나 경로 추적해보니”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부천 메르스 환자 동선 공개 “어떻게 감염됐나 경로 추적해보니” 경기도 부천시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첫 1차 양성반응자가 나데 따른 주민 불안을 고려, 이 남성의 구체적인 동선을 공개했다. 7일 부천시에 따르면 6일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은 주민 A(36)씨는 지난달 26∼28일 서울 강남의 대형병원 응급실에 입원 중인 부친(66)을 병문안했다. 이 병실에는 메르스 14번 환자가 함께 입원해 있었으며 A씨는 자신의 외척 B(61)씨와 사흘간 부친을 돌보다가 대형병원 측으로부터 ‘부친의 임종이 임박했으니 퇴원해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에 A씨는 부친을 부천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고 A씨의 부친은 지난달 28일 저녁 숨졌다. A씨는 부천의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나서 30일 벽제화장장에서 부친을 화장해 화성의 공원묘지에 안장했다. 부천시는 A씨가 30일 저녁 처음 오한을 느꼈으며 31일 시흥에 있는 직장에 출근했고 이달 1일 동네의원에서 진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후 고열 등 증상이 심해진 A씨는 3일 부천 대형병원에서의 진료와 5일 보건소 가검물 채취를 거쳐 6일 새벽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았다. A씨와 함께 서울 강남의 대형병원에서 14번 환자와 접촉한 부산에 사는 B씨 역시 메르스 1차 양성 판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A씨와 한집에 사는 모친(65)과 동생(35)에 대한 검사에서는 음성 판정이 나왔다. 부천시는 우선 A씨가 거쳐 간 시내 병원 3곳과 장례식장에서 접촉한 300여명에 대해 1차 모니터링을 진행하는 한편 A씨의 동선에 대한 방역 소독을 실시했다. 이번 조사결과로 부천시는 A씨가 병원에서 14번 환자와 접촉한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첫 지역사회 감염 사례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됐다. 부천시 관계자는 “메르스 1차 양성반응자의 행동반경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시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라며 “발열과 오한 등의 증상이 발생하면 즉시 인근 보건소와 병원 진료를 서둘러야 한다”고 당부했다. 온랑니뉴스부 iseoul@seoul.co.kr
  •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美 메이저리그 수집가·뉴욕 메츠 팬 토니 김

    [서울신문이 만난 사람] 美 메이저리그 수집가·뉴욕 메츠 팬 토니 김

    “제가 만약 이승엽의 400호 홈런볼을 주웠다면 직접 이승엽을 만나 ‘당신의 열매를 돌려드립니다’라고 말씀드리며 건네드릴 것 같습니다만….” 약간 뜻밖이었다. 지난 3일 이승엽(39·삼성)의 대기록이 터진 몇시간 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는 메이저리그 수집가 토니 김(31)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떠봤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어린 시절 LA로 이민 가 뉴욕 메츠에 꽂혀 뉴욕으로 직장을 옮겼고, 세계에서 단하나 뿐인 ‘톰 시버 노히터 카드’ 등 국내에서는 꿈도 못 꿀 희귀 컬렉션을 자랑하는 그가 아무런 대가 없이 선수 본인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단서는 붙여져 있었다. “제가 감히 이승엽 선수에게 공을 돌려주며 말할 수 있다면…”이라는.지난달 말 이승엽이 399호 홈런을 날린 뒤부터 그와 이메일로 국내 프로야구의 4배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의 수집 열풍과 국내와 다른 미국의 팬 문화에 대해 이메일 문답을 주고받았다. 다음은 일문일답. →미국에서는 이승엽의 400호 홈런볼과 같은 기념비적 물품이 나오면 어떻게 하는지. -엄청난 고가에 팔릴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구단 등에서) 기증해달라거나 하지 않는다. 시장이 확실히 형성돼 있기 때문에 한국과 다르다. 첫 번째 안타라든지 투수가 던진 공 같은 것은 돌려주는 일이 많지만 하여튼 그렇다. 그래서 데릭 지터(뉴욕 양키스 은퇴)의 3000호 안타(홈런) 공을 돌려준 팬이 엄청난 찬사를 들었다. 한국 돈으로 몇 억원 받을 수 있는데 자신보다 지터에게 의미가 있다며 돌려줬다. 나중에 시즌패스와 기념품을 받았다고 들었지만 공의 값어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양키스를 증오하고 팬들도 좋아하지 않지만 그 팬만은 존중할 수밖에 없더라. →양키스를 증오한다고? -메츠를 좋아하면 그렇게 된다. 뉴욕의 택시 기사들은 보스턴 등 다른 팀 모자를 쓴 손님이 손을 흔들면 “Wrong cap”(모자를 잘못 썼네)이라고 외치며 그냥 지나친다. 호텔 벨보이들은 엘리베이터 버튼을 조작해 원하는 층을 지나치게 한다. ‘악의 제국’이란 소리를 듣는 양키스 팬들은 푼돈밖에 쓸 줄 모른다며 메츠 팬들을 우습게 여긴다. 길 가다가도 다른 유니폼을 입었다는 이유로 시비를 붙는다. 내가 메츠의 옛 구장 이름을 따 애견 이름을 ‘Shea’(셰이)로 지었다고 하면 양키스 팬들은 “왜 애견에게 저주를 걸었느냐”며 개종(?)하라고 한다. 그럼 난 “돈으로 우승을 사는 팀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쏘아붙여준다. 반면 뉴욕에서도 워낙 소수니까 내가 메츠 경기를 보고 싶어 LA에서 이주해왔다고 소개하면 메츠 팬들은 와락 껴안아줬다. 그런 결속력이 참 대단하다. →언제 미국으로 건너간 건가. -1984년 9월 경기 과천에서 태어나 중학 1학년을 마치지 못한 채 1998년 1월 가족과 함께 건너왔다. 고교에 들어가자마자 집안 돕는다며 베이글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데브리 칼리지 다니면서 직장을 다녔다. →야구와의 인연은 어떻게. -어렸을 적 해태를 좋아했다. 투수는 공을 던지고 타자는 공을 치는 것 정도만 알았는데 선동열 선수가 이룬 업적 등을 영상으로 보는데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친척형과 야구를 하다 눈 윗부분을 맞아 피를 굉장히 많이 흘렸다. 장비를 사려고 돈을 모으는 과정에 이민을 왔다. →LA에 거주하면서 왜 다저스 팬이 되지 않았나. -아무리 좋아하는 스포츠라도 자기 팀이 없으니 보기 힘들더라. 박찬호 선수도 있었지만 다저스의 플레이 방식이 불만이었다. 너무 스몰 베이스볼을 하는 느낌이었다. 팬들도 단순히 화풀이를 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실제로 여기에서는 다저스 팬들에 대한 말들이 많다. 몇년 뒤 1969년 월드시리즈 영상을 통해 메츠를 알게 됐다. 어린 나이에도 열심히 조사하고 영어도 안 됐지만 메츠에 관한 역사책을 읽었다. 두 차례 월드시리즈를 우승하면서 객관적 전력이 떨어지는데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매료됐다. 그래서 이렇게 미국 사람들도 굉장히 낯설어하고 이상하게 여기는, LA에 거주하는 메츠의 광팬이 됐다. →뉴욕으로의 이주는 어떻게. -2012년 한 무역회사가 동부에서 근무할 사람을 찾는다고 해 무작정 달려갔다. 그런데 취업하지마자 동부로 보낼 수는 없고 1년만 오레곤주에서 근무하라고 해 참고 견뎠다. 새로운 것과 등산을 좋아해 문제 없으며 1년 뒤 다시 동부로 보내달라고 당당히 요구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당당했는지 민망할 따름이다. 2014년 3월 뉴욕에서 수십년을 산 사람처럼 비행기를 탈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메츠에 관련된 옷을 입고 비행기에 올랐다. 맨먼저 시티필드로 향해 경기장을 둘러보고 가능한 주말 경기 티켓을 샀다. 당시는 뉴욕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노후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다시 LA로 돌아왔나. -부모님이 아들 중 하나와는 함께 지내시는 것을 원해서였다. 형이 워낙 분방한 성격이라 중부에서 비행기 엔진 직장을 다닌다. 일생을 기다려온 동부 생활을 접고, 그리고 직장 동료를 통해 알게 된 여자친구와 헤어져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이만큼 키워주셨으니 이젠 효도를 할 때라고 마음 먹고 직장을 옮기기로 결정한 뒤 여친에게 결혼하자고 했는데 선선히 따라와줘 지난달 중순 결혼했다. →새색시 자랑을 한다면. -미국에서 생활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영어 공부를 해 한국에서 강사까지 하다 스스로 직장을 구해 건너왔다. 보스턴에서 1년, 뉴욕에서 1년 동안 패션 관련한 직장을 다녔다. 보스턴에서 있을 때 직장 동료들과 팬웨이파크를 다녔다고 하더라. 나만큼 광팬은 아니지만 좋은 추억과 멋진 경기장 때문에 보스턴에 매료됐다고 했다. 처음 데이트를 할 때도 내가 매일 다른 메츠 티셔츠 등을 갈아 입고 나가니까 도대체 메츠 옷이 몇벌이냐고 쏘아붙이더라. 그렇게 10개월의 동부 생활이 막을 내렸는데 아쉽기도 하지만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더 편안한 캘리포니아에서 부모님도 시간나는 대로 찾아뵙고 일도 도와드린다. 새 직장에 적응도 해야 해서 가을에 신혼여행을 가자고 했는데 뉴욕으로 메츠 경기 보러 가자고 했다가 분노의 철권을 얻어맞을 뻔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루리웹’을 통해 국내 팬들에게 콜렉션이 많이 알려졌는데 어떤 점을 느끼고 배우는지. -야구 자체를 얘기하는 게 참 재미있는 것 같다. 온라인에서 야구에 관련된 글은 거의다 읽고 댓글 달고 토론하는 편이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주니 좋다. 최근 출간된 ‘수집의 즐거움’에 제 얘기를 담아주신 박균호(상주 용운고 교사) 선생님도 그곳을 통해 만났는데 요즘도 자주 문자를 주고받는다. →켈렉션 소개를 해달라. 얼마 정도 투자한 건가. -60점 정도인 것 같고 한국 돈으로 몇천만원 이상인 것 같다. 빚을 지진 않았지만 무리한 면이 없지 않다. →1호 소장품은. -메츠의 영원한 캡틴 데이비드 라이트의 사인볼인데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다. 눈에 잘 띄는 곳에 루키카드와 함께 소장돼 있다. →수집품을 팔라고 매달리는 사람은 없나. -물론 있다. 사실 메츠와 관련 없는 희귀 아이템이 몇 개 있어서 판매를 한 적이 있다. 나름 거금을 받고 팔아 그걸로 메츠 수집품을 사들였다. 그리고 경매 사이트에서 너무 말도 안되는 가격에 낙찰돼 줄 수 없다고 버티다가 나중에 울면서 내게 넘겨준 이도 있었다. →컬렉션을 살짝 보여달라. -메츠의 레전드 투수 톰 시버는 역사상 가장 많은 표를 얻어 명예의전당에 입회했다. 그가 정작 메츠에 있을 때는 달성하지 못한 노히트노런을 신시내티로 이적해 기록했는데 신시내티 유니폼 조각과 사인이 담긴 ‘노히터 카드’가 내 손에 쥐어진 날, 도로 한복판에서 미친 사람마냥 소리를 질렀다. 전세계 단 한 장뿐이다. 또 라이트의 전세계 한 장뿐인 한정판을 여러 종류 갖고 있다. 미국에서는 소장 카드를 인증기관에 보내 등급 판정을 받는데 기관의 신뢰도와 명성에 따라 가격이 좌우된다. 인쇄 상태, 모서리의 훼손 정도, 카드 중심에 잘 인쇄됐느냐 등등을 따져 최고 10점까지 매긴다. 라이트 한정판의 경우 9점을 받은 것도 소장하고 있다. 현역 거포 중의 하나인 앨버트 푸홀스(LA에인절스)와 핸리 라미레스(보스턴)의 전세계 아홉 장 한정 친필 사인 카드, 메츠의 전설적인 해설가 개리 코언의 서명이 들어간 사진, 라이트가 직접 2004년 시즌 성적(타율 .306, 홈런 27, 타점 102)을 적어 넣은 배트 등이 자랑할 만하다. →한정판 카드를 입찰할 때 맡긴 돈은 그냥 날리는 건가. 입찰 방식을 간단히 설명해달라.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참여하기가 어려운가. -여러 스포츠 카드가 있다. 비싼 경우 고작 세 장에 30만원 정도도 된다. 문제는 어떤 카드가 들어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내게 의미 없는 카드가 나올 수도 있고 실제로 값어치가 없는 선수 카드가 나오기도 한다. 한정판도 500장, 100장, 50장, 25장, 한 장 등 여러 종류다. 선수 사인이 들어있는 카드도 있고, 유니폼 조각이나 글러브 가죽, 배트 조각이 들어있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사인을 선호하는 편이다. 값어치야 개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레전드급이라든지, 명예의전당 입회를 앞둔 선수 카드가 나오면 투자한 것 이상 벌 수 있다. 하지만 80% 이상은 쓴 돈의 절반도 못 건진다고 보면 된다. 단순한 도박이라고 보면 무방하다. 원하지 않는 선수 카드를 낙찰받으면 인터넷에서 알맞은 가격에 재판매한다. 그렇게 하면 낭비는 줄일 수 있지만 기대하지 못한 카드를 뽑았을 때 느끼는 짜릿함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카드를 공개하는 순간을 동영상에 담아 온라인에 올리는 이들이 많다. 물론 한국에 있는 분들도 얼마든지 배송 대행업체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얼마나 자주 메츠 경기를 보는지. -몇년 동안 MLB.TV 시청권을 구입해 모든 메츠 경기를 본다. 일 때문에 생중계를 놓쳤다면 집에 와서 리플레이를 꼭 본다. 메츠가 LA에 오는 날이면 평일에라도 찾아가는 편이고. 다음달 4일 메츠의 LA 경기도 4개월 전에 구입해뒀다. 다저스나 에인절스, 샌디에이고 경기는 주말에 시간이 나면 간다. 요즘 메츠 경기를 제외하고 날 가장 설레게 하는 선수가 강정호(피츠버그)다. 처음 벤치에 앉아있거나 하면 괜히 혼자 격분하곤 했다. 최근 멋진 타격을 보여주고 또 말이 많았던 수비도 잘 해주고 있어 정말 좋다. 류현진(다저스) 선수가 시즌 아웃됐지만 추신수(텍사스) 선수도 살아나고 있고, 한국 선수들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직관한 메이저리그 경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14년 4월 5일 경기인데 맨처음 시티필드를 간 날이기도 해서다. 9회에 끝내기 만루홈런이 나왔는데 아이크 데이비스가 트레이드되기 전 마지막 선물을 날렸다. 메츠 경기를 제외한다면 2011년 세인트루이스와 텍사스의 월드시리즈 6차전인데 내가 메츠 다음으로 좋아하는 세인트루이스가 이 경기를 끝내 이겨 7차전에서 우승했기 때문이다. →가장 존경하는 선수는 역시 톰 시버인가. -그는 메츠 팬에게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말할 나위가 없다. 요즘은 2루수 대니얼 머피와 1루수 루카스 두다에 꽂혀 있는데 머피는 원래 3루수라 데이비드 라이트와 포지션이 겹쳐 양보하고 피나는 노력 끝에 2루수로 전향한 노력 때문에 그가 돋보였다. →메츠 골수팬이며 희귀한 콜렉션을 갖고 있는 점은 직장 생활에도 도움이 되지 않나. -서로 다른 팀을 응원하기 때문에 동료들과의 대화는 항상 위험한 수위까지 올라간다. 하지만 모두 야구를 사랑한다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공감되는 것도 많다. 미국은 1년 내내 스포츠를 하기 때문에 어떤 스포츠든 하나만 빠져들면 누구나 쉽게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은 것 같다. →논쟁을 즐긴다고 했는데 요즘 대표적인 논쟁 주제는. -루리웹에선 수집품을 보여드리면 좋은 얘기들만 해준다. 그래서 논쟁 거리가 별로 없다. 오히려 메츠 팬사이트에서 논쟁이 많다. 요즘 가장 뜨거운 주제는 캡틴 라이트에 대한 것이다. 부상 탓에 3년 동안 제 실력을 발휘 못하다가 올해 100% 완벽한 몸으로 돌아왔는데 미친듯이 도루를 해대다 햄스트링이 나갔다. 워낙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수라 이제 퇴물이라며 트레이드를 해야 한다는 의견을 보고 분노해 키보드 워리어가 돼 캡틴을 무시하지 말라고 온갖 업적을 들이대며 반박했다. 팀을 위해 헌신하는 간판 스타를 그것도 경기 중 다친 것을 놓고 그렇게 말하는 건 잘못된 팬심이라고 생각한다. →메츠 구단과 팬들이 교감하는 방식에 만족하는지. 국내와 비교한다면. -아주 만족한다. 야구는 미국에서 단순한 스포츠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여러 행사도 많고 일반인들이 참여 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아이들과 함께 시티필드 경기장에서 캠핑을 할 수 있는 날도 있고 독립기념일에는 경기 뒤 폭죽을 터뜨린다.  국내 구단과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는 시구자 선정 기준이다. 한국에서는 연예인들 잔치인데 여기는 사연이 있는 팬이나 전쟁 영웅, 옛 선수들이 맡는 경우가 많고 전광판 영상으로 그들의 업적이 상영돼 팬들에게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한다. →경기장 분위기를 비교한다면. -한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7회 이후 술을 판매하지 않는다. 나머지 이닝을 보면서 술을 깨고 돌아가라는 의미인 것 같다. 또한 상대방을 공격할 만한 물건도 반입하면 안된다. 가끔 홈 팀이 스윕할 기회가 오면 몰래 빗자루를 가져오는 사람도 있는데 그 정도만 허용된다. 예전 다저스타디움에서 나무로 된 미니 방망이를 나눠줬는데 다저스 팬이 원정 팬을 때렸다가 드잡이로 번져 그 뒤로는 일절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을 나눠주지 않는다. →야구는 어떤 의미이고, 수집은 또 어떤 의미인가. -야구는 내 인생의 즐거움이고 수집은 그 즐거움에 관한 추억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팀이 우승을 하든 못하든 나에게 1년 동안 즐거움을 준 팀에 관한 수집품을 볼 때마다 내 팀이 최고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용의 입에서 탄생한 영기문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세계의 조형예술 龍으로 읽다] 용의 입에서 탄생한 영기문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지금까지 17회에 걸쳐 용의 조형이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되는지 알았다. 그 결과 용이 어떻게 생겼는지 섣불리 말하기 어렵게 됐다. 그런데 정면용(正面龍)은 왜 그토록 몰라보았을까. 측면의 긴 모양만이 용이며, 그 모습은 그리 변화가 없지만, 정면에서 본 모습들은 끝없이 다른 모습으로 표현한 까닭에 사람들이 모든 용의 모습을 용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귀면(鬼面), 도깨비, 도철(饕餮), 짐승얼굴(獸面), 심지어 치우(蚩尤·한족의 황제와 동이족의 치우천왕이 싸워 치우가 패함) 등 보는 사람마다 다르고 잘못된 이름으로 불러 왔다. 용을 정면에서 보아 표현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용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한다. 변화무쌍이란 말은 용을 두고 한 말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든 중생의 다른 근기(根機)에 따라 각각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으로 나타나듯 용도 무한히 다른 몸으로 나타난다. 절대적이며 고귀한 존재일수록 무한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상의 만물은 우주에 충만한 초자연적 에너지, 곧 영기의 화신이 아닌가. 종교·신화·전설 등에서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이나 동물 등의 몸으로 탄생하거나 출현하는 것은 ‘현실적인 몸으로 변화(化身)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화신에 상대하여 화생(化生)은 그 반대로 인간 석가가 ‘초인간적인 존재인 절대적 깨달음을 성취해 여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정면용 입의 좌우 대칭으로부터 ‘무엇’이 생겨나지 않는가. 측면용으로는 그런 표현이 불가하여 나오는 것이 없으니 정면용에서 생기는 것이 보일 리가 없다. 그런데 2000년 여름 귀신 얼굴이 용의 얼굴로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용의 입에서 무엇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도 못 했고 보이지도 않았다. 용의 입에서 무엇이 나온다고 본 것은 몇 년 뒤였고, 그 입에서 나오는 다양한 조형들이 바로 ‘영기문의 탄생’이라고 인식한 역사적 사건은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못했고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이름이 있을 수 없다. 마치 신(神)이 된 듯한 기분으로 수천 년 이름이 없던,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많은 막대한 양의 조형들을 명명(命名)하기 시작했다. 대우주에 충만해 있는 기운을 ‘영묘한 기운’, 혹은 ‘신령스러운 기운’의 준말인 ‘영기’(靈氣)라 이름 지었지만, 실은 그보다는 영(靈)이라는 심오한 글자와 기(氣)가 서로 통해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했다. 만물생성의 근원인 보이지 않는 영기를 시각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만든 일체의 무늬를 ‘영기문’(靈氣文)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그 영기에서 만물이 탄생하는 초현실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탄생을 ‘영기화생’(靈氣化生)이라고 했다. 갖가지 영기문이 전개해 가는 원리를 파악하고 만물생성의 근원이라는 진실을 파악하는 데 수천 점의 영기문을 채색 분석해야 했다. 우선 통일신라시대의 용면와(龍面瓦)에서 영기문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단지 용면와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연못의 파동처럼 귀면이 용면으로 바뀌는 순간부터 세계 미술사학의 전체에 파동이 일기 시작한다. 월지(月池·안압지, 동궁 터의 못)에서 출토된 녹유용면와(釉龍面瓦)들은 그 당시의 최고 걸작이다①. 우선 녹색 유약을 입혔다는 것은 불상이나 중요한 것에나 가능한데, 바로 그 사실 하나로 용의 존재가 신(神)적임을 웅변한다. 귀신은 어림도 없다. 채색 분석을 해 보면 각 부분이 모두 제1영기싹, 제2영기싹, 제3영기싹, 그것들의 변형, 보주의 여러 형태들로 표현돼 있음을 알 것이다 ②. 그런데 입에서 양쪽으로 무엇인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무엇일까. 이미 필자가 찾아 놓은 제1영기싹에서 또 하나의 제1영기싹이 전개해 나간 제2영기싹이다. 그 빨간색 영기문 끝에서 작은 영기싹(녹색으로 칠한 것)들이 몇 개씩 싹트고 있다. 말하자면 용의 입 양쪽으로 제2영기싹 영기문이 끊임없이 전개하고 발산하는 것을 상징한다. 정면상의 영기문들을 분해하면 우주에 충만한 영기를 나타내며 이들이 모여 용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③. 양측면에는 양감 있는 복잡한 영기문을 돋을새김하고 있다 ④. 채색 분석하면 복잡 화려한 영기문이 된다 ⑤,⑥. 이 영기문을 간략화해 보면 결국 제2영기싹의 단계를 거쳐 제3영기싹 영기문으로 돼 만물생성의 근원을 이룬다. 제2영기싹 영기문에서는 갈래에서 생기는 빨간색의 만물이 생략돼 있을 뿐이다. 즉 용의 입에서 양쪽으로 발산하는 영기문은 정면상에서는 공간이 비좁아 짧고 간단히 표현할 수밖에 없어서 양측면에 다시 제2영기싹 영기문을 복잡 화려한 제3영기싹 영기문으로 표현해 두는데, 양측면의 영기문이 용의 입에서 발산해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단순한 장식인 당초문이 아니다. 용의 기운이 가장 충천하면 분노하는 듯한 모습을 띠며, 입을 가능한 한 크게 벌리는 것은 만물이 그의 입에서 생겨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도 훨씬 후에 알게 됐다.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이광식의 천문학+] 우주팽창, 이렇게 발견됐다! -문제적 엄친아 ‘허블’​

    [이광식의 천문학+] 우주팽창, 이렇게 발견됐다! -문제적 엄친아 ‘허블’​

    인류의 오랜 과학사에서 최대의 과학적 발견 하나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우주팽창'을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우주팽창의 증거를 발견하여 인류에 고함으로써 20세기 천문학의 최고 영웅이 된 사람은 허블 우주망원경, 허블 법칙 등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미국의 에드윈 허블이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적 인물이었다. -허풍스러운 태도의 '20세기 천문학 최고 영웅' 1889년 미국 미주리 주의 마시필드에서 태어난 허블은 한마디로 온갖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보험 대리인이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부모로부터 높은 지능과 강건한 체질까지 물려받은데다 미남형이라 매력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철철 흘렀다. 허블은 고등학교 시절 육상대표로 7종 경기에서 우승했고, 그밖에도 여러 대회, 여러 종목에서 메달을 수두룩하게 받았다. 공부도 잘했다. 명문 시카고 대학 법학과에 어렵잖게 진학했다. 말하자면 허블은 엄친아 대표선수였다. 대학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보인 그는 로즈 장학금을 받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이 유학기간 3년이 허블에게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이때부터 허블은 늘 정장차림에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멋을 내며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풍스러운 영국식 억양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버릇은 평생 바뀌지 않았다. 천문학 하는 사람 중에 괴짜가 많긴 하지만, 허블도 그런 면에서는 전혀 꿀리지 않는 등급이었다. 아무튼 그런 허블이 어떻게 20세기 천문학계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영예를 거머쥐게 되었을까? 가끔 세상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손대는 일마다 떡 먹듯이 성공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있는 법이다. 불공평하게 보이고 배 아픈 노릇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허블이 바로 그런 인간형이었다. 1913년 귀국해서 잠시 변호사 협회에 이름을 걸어놓은 허블은 얼마 후 돌연 하던 일을 접고 시카고 대학 천문학과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훗날 허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문학은 성직과도 같다. 소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루이스빌에서 1년 동안 법률업무에 종사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소명을 받았다.” 뒤늦게 시작한 천문학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머리와 약간의 노력으로 밀린 공부를 따라잡아 1917년 천문학 박사학위를 손에 쥐었다. 졸업 후 은사인 조지 헤일의 추천으로 윌슨 산 천문대에서 일하려던 허블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일로 취소되었다. 미국이 뒤늦게 1차대전에 뛰어들었던 탓이다. 육군 장교로 지원한 허블은 전투에서 오른팔에 부상을 입은 덕으로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그 역시 허블에게는 자랑거리였다. 평생 소령 칭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니까. -무시받던 '희미한 빛뭉치'에 꽂히다 전선에서 돌아온 허블은 1919년 30살 때 짐을 꾸려서 윌슨 산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입산이었다. 해발 1,800m 산꼭대기에 있는 윌슨 산 천문대에는 당시 세계 최대인 2.5m 후커 반사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새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한나절이나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는 외진 곳이라 생활은 고행이었고, 일과는 고달팠다. 그럼에도 수십 명의 천문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추운 겨울에도 관측대 위에 앉아 온밤을 지새웠다. 거대한 반사망원경을 조그마한 손잡이를 돌려 조절하며, 렌즈의 십자선을 응시하면서 최고 12시간을 버텨야 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도, 난방기구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망원경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연구원 숙소에 여자가 머무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연구원들은 그곳을 수도원이라 불렀다. '수도원 원장'인 조지 헤일은 천체물리학은 모든 잡념을 버린 남자만이 전념할 수 있는 분야라고 일찍이 설파했다. 윌슨 산 꼭대기에서 허블은 먼 우주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성운들을 향해서 망원경의 주경을 겨누고는, 사진을 찍고 스펙트럼을 찍기 시작했다. 그것은 때로는 열흘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허블은 소년 시절에 할아버지의 망원경으로 별보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퍼시벌 로웰의 화성 이야기를 들으며 우주로의 꿈을 키워왔다. 허블의 박사논문 주제는 ‘희미한 성운’이었다. 주류 천문학자들은 밝은 별과 행성, 혜성에 연구할 주제가 얼마든지 있는데 무엇하러 그런 희미한 빛뭉치를 연구한다 말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허블의 깊은 관심은 늘 그 희미한 빛뭉치인 성운에 있었다. ‘저 가스 구름들은 과연 우리 은하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은하 바깥을 떠도는 별들의 도시인가?’ 라틴 어로 '안개'를 뜻하는 성운(nebula)은 20세기 초만 해도 정말 안개에 가려진 천체였다. 허블의 머리속에는 늘 성운에 대한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허블이 윌슨 산에 오자마자 대망원경의 주경을 성운 쪽으로 돌린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건달에 가까운 노새 몰이꾼 휴메이슨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한 사나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허블의 조수였던 그 사내 역시 천문학사에서는 전설이 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는 원래 노새 몰이꾼이었다. 이름은 밀턴 휴메이슨, 나이는 허블보다 2살 아래였다. 윌슨 산 천문대로 장비나 생필품을 운반하는 잡일꾼으로 일했던 휴메이슨은 학교는 일찌감치 중2 때 때려치우고, 당구와 도박, 여자 후리기에 한가락하는 사내로, 좋게 말하면 한량, 나쁘게 말하면 건달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영리하고 호기심도 풍부한데다, 도박으로 다져진 눈썰미와 손재주, 머리회전에 힘입어, 천문대의 각종 장비와 기계에 대해 질문하고 익히고 하는 새에 어느덧 엔지니어 비슷한 수준까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휴메이슨의 놀라운 변신이 펼쳐진다. 야간 관측 보조원이 병결했는데, 대타로 투입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귀한 망원경을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문대에서는 하룻밤 공칠 요량을 하고 휴메이슨에게 대타로 뛰어볼 용의가 없느냐고 제안했다. 그 업무는 거대한 덩치인 망원경을 다룰 뿐만 아니라 천체사진까지 찍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날 밤 휴메이슨은 임시직 관측 보조원이 되어 왕년에 트럼프 장 다루듯이 거대 망원경을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를 자랑했다. 그뿐인가, 천문대 연구원들은 휴메이슨이 찍어놓은 은하 스펙트럼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명한 화질이 일급 전문가의 솜씨였던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천문대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어 허블의 조수가 되었다. 중학 중퇴로 천문대에 정식직원이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중학 중퇴 건달과 허풍기 있는 천문학 박사는 만나자마자 악동들처럼 서로 죽이 잘 맞았다. 휴메이슨은 일을 시작하자 이내 양질의 은하 스펙트럼을 얻는 데 어떤 천문학자보다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나중엔 '휴메이슨 혜성'을 발견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겨 완벽한 천문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건달에서 천문학자로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1923년 10월 어느 날 밤, 마침내 허블은 생애 최고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2.5m 반사망원경을 이용해 안드로메다 대성운으로 알려진 M31과 삼각형자리 나선은하 M33의 사진을 찍었다. 며칠 후 안드로메다 성운 사진 건판을 분석하던 허블은 갑자기 “유레카!” 하고 크게 외쳤다. 성운 안에 찍혀 있는 변광성을 발견한 것이다. 1912년 헨리에타 리빗이 변광성의 주기와 밝기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우주를 재는 표준 촛불로 삼아,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하늘의 잣대를 제공한 바 있었다. 리빗의 발견을 잘 알고 있던 허블은 안드로메다 변광성의 주기를 측정해본 결과 31.4일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에다 리빗의 자를 들이대어 지구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보니 놀랍게도 93만 광년이란 답이 나왔다. 우리 은하 크기보다 10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단순히 나선 모양의 성운으로 알고 있었던 안드로메다는 사실 우리 은하를 까마득히 넘어선 곳에 있는 독립된 나선은하였다. 칸트의 섬우주론이 200 년 만에 완벽히 증명된 셈이었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먼 거리를 측정했던 허블은 새로운 우주공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던 것이다. 당시 천문학계는 우리은하의 크기를 놓고 '대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은하가 우주 전체다', '우리은하 외에도 많은 은하들이 있을 것이다'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뒤늦게 나타난 신출내기 천문학자가 그 판정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하나의 발견으로 허블은 일약 천문학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허블의 계산은 참값보다 큰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현재 알려진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는 그 두 배가 넘는 250만 광년이다. 밤하늘에서 빛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은하 안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 발견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우리 태양계는 조그만 웅덩이 정도로 축소되어버리고, 태양은 우주라는 드넓은 바닷가의 한 알갱이 모래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었다. 허블의 발견 이후 은하들 뒤에 다시 무수한 은하들이 늘어서 있는 무한에 가까운 우주임이 드러났다. 인류에게 이것은 근본적인 계시였다. -하늘도 불안정하다! 은하를 추적하는 허블의 망원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후 6년 동안 허블과 그의 조수 휴메이슨은 은하들의 거리에 관한 데이터들을 모으느라 춥고 긴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과학자들은 은하들이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12년, 로웰 천문대의 베스토 슬라이퍼는 은하 스펙트럼에서 적색이동을 발견하고, 은하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허블은 슬라이퍼의 연구를 기초로 삼고, 그 동안 24개의 은하를 집요하게 추적해서 얻은 자신의 관측자료를 정리하여 거리와 속도를 반비례시킨 표에다가 은하들을 집어넣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하나 드러났다.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은하는 후퇴하고 있다. 먼 은하일수록 후퇴속도는 더 빠르다. 그리고 은하의 이동속도를 거리로 나눈 값은 항상 일정하다. 이것이 허블 법칙이다.(사실 허블-휴메이슨 법칙이라 불러야 공평하다) 훗날 이 상수는 허블 상수로 불리며, 'H'로 표시된다. 허블 상수는 우주의 팽창속도를 알려주는 지표로서, 이것만 정확히 알아낸다면 우주의 크기와 나이를 구할 수 있다. 그래서 허블 상수는 우주의 로제타 석에 비유되기도 한다. 허블과 휴메이슨의 발견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여러 세기 동안 과학자들을 괴롭혀왔던 올베르스의 역설도 이로써 우주팽창이라는 정답을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허블 자신까지 포함해서 이것이 우주의 기원과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의 근본을 건드리는 심오한 문제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묘하게도 죽이 잘 맞았던 이 덤앤더머 커플이 인류를 우주 기원의 순간으로 데려갈 이론적 토대를 닦았던 것이다. 이는 20세기 천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받아들여졌다. 1929년, 이 사실이 발표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다. 이 우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이 현기증 나는 사실에 사람들은 황망해했다. 최초로 인류가 지구상을 걸어다닌 이래 우리 인간사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는 하늘조차도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대우주였다. -허블의 유해는 어디에? 허블은 죽을 때까지 열성적으로 은하를 관측했다. 1953년 허블은 팔로마 산 천문대의 지름 5m의 거대 망원경 앞에서 며칠 밤을 새워 관측할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대천문학자다운 열반이었다. 향년 64세. 코페르니쿠스 이후 천문학의 발전에 최대의 공헌을 한 허블의 업적은 노벨 상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허블은 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 물리학상이 천문학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 규정이 바뀌어 허블에게도 상을 주기로 결정했지만, 이번엔 상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허블이 죽은 지 3개월 뒤였던 것이다. 노벨 상은 고인이 된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상을 받으려면 업적 못지않게 수명도 중요한 변수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죽은 뒤에도 허블은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허블의 유언에 따른 거라는 설도 있지만, 그의 부인 그레이스는 장례식과 추도회를 모두 거부했다. 그리고 남편의 유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허블의 행방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되는 바람에 허블을 추념하려면 우주공간에 떠 있는 허블 망원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1990년 우주 공간으로 쏘아올려진 우주망원경에 허블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구 중심 궤도를 95분마다 한 바퀴씩 돌며 먼 우주를 담아 보내고 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은 지난 4월 24일로 관측 25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발사될 때까지 계속 운용될 전망이다. 마지막 허블의 말로 이 글을 접기로 하자. “오감만 잘 갖춰져 있으면 인간은 우주가 무엇인지 탐험할 수 있으며, 그걸 모험과학이라 부른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우주팽창, 이렇게 발견됐다! -문제적 엄친아 ‘허블’​ 이야기

    우주팽창, 이렇게 발견됐다! -문제적 엄친아 ‘허블’​ 이야기

    인류의 오랜 과학사에서 최대의 과학적 발견 하나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우주팽창'을 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우주팽창의 증거를 발견하여 인류에 고함으로써 20세기 천문학의 최고 영웅이 된 사람은 허블 우주망원경, 허블 법칙 등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미국의 에드윈 허블이다.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적 인물이었다. -허풍스러운 태도의 '20세기 천문학 최고 영웅' 1889년 미국 미주리 주의 마시필드에서 태어난 허블은 한마디로 온갖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보험 대리인이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부모로부터 높은 지능과 강건한 체질까지 물려받은데다 미남형이라 매력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철철 흘렀다. 허블은 고등학교 시절 육상대표로 7종 경기에서 우승했고, 그밖에도 여러 대회, 여러 종목에서 메달을 수두룩하게 받았다. 공부도 잘했다. 명문 시카고 대학 법학과에 어렵잖게 진학했다. 말하자면 허블은 엄친아 대표선수였다. 대학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보인 그는 로즈 장학금을 받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이 유학기간 3년이 허블에게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이때부터 허블은 늘 정장차림에다 파이프를 입에 물고 멋을 내며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풍스러운 영국식 억양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버릇은 평생 바뀌지 않았다. 천문학 하는 사람 중에 괴짜가 많긴 하지만, 허블도 그런 면에서는 전혀 꿀리지 않는 등급이었다. 아무튼 그런 허블이 어떻게 20세기 천문학계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영예를 거머쥐게 되었을까? 가끔 세상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손대는 일마다 떡 먹듯이 성공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들이 있는 법이다. 불공평하게 보이고 배 아픈 노릇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허블이 바로 그런 인간형이었다. 1913년 귀국해서 잠시 변호사 협회에 이름을 걸어놓은 허블은 얼마 후 돌연 하던 일을 접고 시카고 대학 천문학과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훗날 허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문학은 성직과도 같다. 소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루이스빌에서 1년 동안 법률업무에 종사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소명을 받았다.” 뒤늦게 시작한 천문학이었지만 그는 뛰어난 머리와 약간의 노력으로 밀린 공부를 따라잡아 1917년 천문학 박사학위를 손에 쥐었다. 졸업 후 은사인 조지 헤일의 추천으로 윌슨 산 천문대에서 일하려던 허블의 계획은 뜻하지 않은 일로 취소되었다. 미국이 뒤늦게 1차대전에 뛰어들었던 탓이다. 육군 장교로 지원한 허블은 전투에서 오른팔에 부상을 입은 덕으로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그 역시 허블에게는 자랑거리였다. 평생 소령 칭호를 입에 달고 살았다니까. -무시받던 '희미한 빛뭉치'에 꽂히다 전선에서 돌아온 허블은 1919년 30살 때 짐을 꾸려서 윌슨 산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 입산이었다. 해발 1,800m 산꼭대기에 있는 윌슨 산 천문대에는 당시 세계 최대인 2.5m 후커 반사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노새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한나절이나 걸려서야 도착할 수 있는 외진 곳이라 생활은 고행이었고, 일과는 고달팠다. 그럼에도 수십 명의 천문학자들이 연구를 위해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추운 겨울에도 관측대 위에 앉아 온밤을 지새웠다. 거대한 반사망원경을 조그마한 손잡이를 돌려 조절하며, 렌즈의 십자선을 응시하면서 최고 12시간을 버텨야 했다.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도, 난방기구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망원경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연구원 숙소에 여자가 머무는 것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연구원들은 그곳을 수도원이라 불렀다. '수도원 원장'인 조지 헤일은 천체물리학은 모든 잡념을 버린 남자만이 전념할 수 있는 분야라고 일찍이 설파했다. 윌슨 산 꼭대기에서 허블은 먼 우주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성운들을 향해서 망원경의 주경을 겨누고는, 사진을 찍고 스펙트럼을 찍기 시작했다. 그것은 때로는 열흘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허블은 소년 시절에 할아버지의 망원경으로 별보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좋아하던 퍼시벌 로웰의 화성 이야기를 들으며 우주로의 꿈을 키워왔다. 허블의 박사논문 주제는 ‘희미한 성운’이었다. 주류 천문학자들은 밝은 별과 행성, 혜성에 연구할 주제가 얼마든지 있는데 무엇하러 그런 희미한 빛뭉치를 연구한다 말인가 하고 의아해했다. 하지만 허블의 깊은 관심은 늘 그 희미한 빛뭉치인 성운에 있었다. ‘저 가스 구름들은 과연 우리 은하 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은하 바깥을 떠도는 별들의 도시인가?’ 라틴 어로 '안개'를 뜻하는 성운(nebula)은 20세기 초만 해도 정말 안개에 가려진 천체였다. 허블의 머리속에는 늘 성운에 대한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허블이 윌슨 산에 오자마자 대망원경의 주경을 성운 쪽으로 돌린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건달에 가까운 노새 몰이꾼 휴메이슨 이 대목에서 우리는 또 한 사나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허블의 조수였던 그 사내 역시 천문학사에서는 전설이 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는 원래 노새 몰이꾼이었다. 이름은 밀턴 휴메이슨, 나이는 허블보다 2살 아래였다. 윌슨 산 천문대로 장비나 생필품을 운반하는 잡일꾼으로 일했던 휴메이슨은 학교는 일찌감치 중2 때 때려치우고, 당구와 도박, 여자 후리기에 한가락하는 사내로, 좋게 말하면 한량, 나쁘게 말하면 건달이었다. 그런데 머리가 영리하고 호기심도 풍부한데다, 도박으로 다져진 눈썰미와 손재주, 머리회전에 힘입어, 천문대의 각종 장비와 기계에 대해 질문하고 익히고 하는 새에 어느덧 엔지니어 비슷한 수준까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휴메이슨의 놀라운 변신이 펼쳐진다. 야간 관측 보조원이 병결했는데, 대타로 투입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귀한 망원경을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문대에서는 하룻밤 공칠 요량을 하고 휴메이슨에게 대타로 뛰어볼 용의가 없느냐고 제안했다. 그 업무는 거대한 덩치인 망원경을 다룰 뿐만 아니라 천체사진까지 찍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날 밤 휴메이슨은 임시직 관측 보조원이 되어 왕년에 트럼프 장 다루듯이 거대 망원경을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를 자랑했다. 그뿐인가, 천문대 연구원들은 휴메이슨이 찍어놓은 은하 스펙트럼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명한 화질이 일급 전문가의 솜씨였던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천문대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어 허블의 조수가 되었다. 중학 중퇴로 천문대에 정식직원이 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 중학 중퇴 건달과 허풍기 있는 천문학 박사는 만나자마자 악동들처럼 서로 죽이 잘 맞았다. 휴메이슨은 일을 시작하자 이내 양질의 은하 스펙트럼을 얻는 데 어떤 천문학자보다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나중엔 '휴메이슨 혜성'을 발견하는 등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겨 완벽한 천문학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건달에서 천문학자로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1923년 10월 어느 날 밤, 마침내 허블은 생애 최고의 사진을 찍었다. 그는 2.5m 반사망원경을 이용해 안드로메다 대성운으로 알려진 M31과 삼각형자리 나선은하 M33의 사진을 찍었다. 며칠 후 안드로메다 성운 사진 건판을 분석하던 허블은 갑자기 “유레카!” 하고 크게 외쳤다. 성운 안에 찍혀 있는 변광성을 발견한 것이다. 1912년 헨리에타 리빗이 변광성의 주기와 밝기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우주를 재는 표준 촛불로 삼아,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하늘의 잣대를 제공한 바 있었다. 리빗의 발견을 잘 알고 있던 허블은 안드로메다 변광성의 주기를 측정해본 결과 31.4일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에다 리빗의 자를 들이대어 지구까지의 거리를 계산해보니 놀랍게도 93만 광년이란 답이 나왔다. 우리 은하 크기보다 10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단순히 나선 모양의 성운으로 알고 있었던 안드로메다는 사실 우리 은하를 까마득히 넘어선 곳에 있는 독립된 나선은하였다. 칸트의 섬우주론이 200 년 만에 완벽히 증명된 셈이었다. 이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먼 거리를 측정했던 허블은 새로운 우주공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던 것이다. 당시 천문학계는 우리은하의 크기를 놓고 '대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은하가 우주 전체다', '우리은하 외에도 많은 은하들이 있을 것이다'는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뒤늦게 나타난 신출내기 천문학자가 그 판정을 내려주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하나의 발견으로 허블은 일약 천문학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허블의 계산은 참값보다 큰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현재 알려진 안드로메다 은하까지의 거리는 그 두 배가 넘는 250만 광년이다. 밤하늘에서 빛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은하 안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 발견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갑자기 우리 태양계는 조그만 웅덩이 정도로 축소되어버리고, 태양은 우주라는 드넓은 바닷가의 한 알갱이 모래에 지나지 않은 것이 되었다. 허블의 발견 이후 은하들 뒤에 다시 무수한 은하들이 늘어서 있는 무한에 가까운 우주임이 드러났다. 인류에게 이것은 근본적인 계시였다. -하늘도 불안정하다! 은하를 추적하는 허블의 망원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후 6년 동안 허블과 그의 조수 휴메이슨은 은하들의 거리에 관한 데이터들을 모으느라 춥고 긴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과학자들은 은하들이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12년, 로웰 천문대의 베스토 슬라이퍼는 은하 스펙트럼에서 적색이동을 발견하고, 은하들이 엄청난 속도로 지구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허블은 슬라이퍼의 연구를 기초로 삼고, 그 동안 24개의 은하를 집요하게 추적해서 얻은 자신의 관측자료를 정리하여 거리와 속도를 반비례시킨 표에다가 은하들을 집어넣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하나 드러났다.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은하는 후퇴하고 있다. 먼 은하일수록 후퇴속도는 더 빠르다. 그리고 은하의 이동속도를 거리로 나눈 값은 항상 일정하다. 이것이 허블 법칙이다.(사실 허블-휴메이슨 법칙이라 불러야 공평하다) 훗날 이 상수는 허블 상수로 불리며, 'H'로 표시된다. 허블 상수는 우주의 팽창속도를 알려주는 지표로서, 이것만 정확히 알아낸다면 우주의 크기와 나이를 구할 수 있다. 그래서 허블 상수는 우주의 로제타 석에 비유되기도 한다. 허블과 휴메이슨의 발견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여러 세기 동안 과학자들을 괴롭혀왔던 올베르스의 역설도 이로써 우주팽창이라는 정답을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허블 자신까지 포함해서 이것이 우주의 기원과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의 근본을 건드리는 심오한 문제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묘하게도 죽이 잘 맞았던 이 덤앤더머 커플이 인류를 우주 기원의 순간으로 데려갈 이론적 토대를 닦았던 것이다. 이는 20세기 천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받아들여졌다. 1929년, 이 사실이 발표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사람들에게 던져주었다. 이 우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서운 속도로 팽창하고 있으며,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거라곤 하나도 없다는 이 현기증 나는 사실에 사람들은 황망해했다. 최초로 인류가 지구상을 걸어다닌 이래 우리 인간사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는 하늘조차도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대우주였다. -허블의 유해는 어디에? 허블은 죽을 때까지 열성적으로 은하를 관측했다. 1953년 허블은 팔로마 산 천문대의 지름 5m의 거대 망원경 앞에서 며칠 밤을 새워 관측할 준비를 하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대천문학자다운 열반이었다. 향년 64세. 코페르니쿠스 이후 천문학의 발전에 최대의 공헌을 한 허블의 업적은 노벨 상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허블은 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 물리학상이 천문학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늦게 규정이 바뀌어 허블에게도 상을 주기로 결정했지만, 이번엔 상을 받을 사람이 없었다. 허블이 죽은 지 3개월 뒤였던 것이다. 노벨 상은 고인이 된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상을 받으려면 업적 못지않게 수명도 중요한 변수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죽은 뒤에도 허블은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허블의 유언에 따른 거라는 설도 있지만, 그의 부인 그레이스는 장례식과 추도회를 모두 거부했다. 그리고 남편의 유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허블의 행방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되는 바람에 허블을 추념하려면 우주공간에 떠 있는 허블 망원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1990년 우주 공간으로 쏘아올려진 우주망원경에 허블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그의 이름이 붙여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구 중심 궤도를 95분마다 한 바퀴씩 돌며 먼 우주를 담아 보내고 있는 허블 우주망원경은 지난 4월 24일로 관측 25주년을 맞았으며, 2018년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발사될 때까지 계속 운용될 전망이다. 마지막 허블의 말로 이 글을 접기로 하자. “오감만 잘 갖춰져 있으면 인간은 우주가 무엇인지 탐험할 수 있으며, 그걸 모험과학이라 부른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쯔쯔가무시병 증상, 발열·오한·근육통 등…야외활동 진드기 조심해야

    쯔쯔가무시병 증상, 발열·오한·근육통 등…야외활동 진드기 조심해야

    ‘쯔쯔가무시병 증상’ 쯔쯔가무시병 증상이 네티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쯔쯔가무시병은 오리엔티아 쯔쯔가무시균(Orientia tsutsugamushi)에 의해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으로 진드기의 유충이 피부에 붙어 피를 빨아먹은 부위에 가피(딱지)가 동반된 궤양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쯔쯔가무시병은 발병 초기에 병원을 찾으면 쉽게 치료가 가능하지만 치료가 늦어지면 뇌수막염, 패혈성 쇼크, 호흡부전, 신부전 등의 합병증을 동반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쯔쯔가무시병은 우리나라 전국에 걸쳐서 발생하고 있으며, 농촌에서 밭일을 하거나 성묘, 벌초, 등산을 하고 난 후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이 나타난다. 쯔쯔가무시병은 1~3주의 잠복기를 거쳐 갑자기 시작되는 발열, 오한, 두통, 근육통이 특징적이며, 기침, 구토, 설사 등이 동반될 수 있다. 쯔쯔가무시병은 진드기나 진드기 유충에게 물려서 감염된다. 따라서 야외활동을 할 때는 긴 옷으로 피부를 보호하고, 진드기 기피제를 사용하면 도움이 된다. 쯔쯔가무시병 유행 시기에는 풀밭 위에 옷을 벗어 놓거나 눕지 말고, 휴식을 취할 때는 돗자리를 펴고 앉아야 한다. 야외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샤워나 목욕을 하고, 입었던 옷가지 등은 깨끗이 세탁하는 것이 좋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쯔쯔가무시병 증상, 발열·오한·근육통 등…야외활동 진드기 조심해야

    쯔쯔가무시병 증상, 발열·오한·근육통 등…야외활동 진드기 조심해야

    ‘쯔쯔가무시병 증상’ 쯔쯔가무시병 증상이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쯔쯔가무시병은 오리엔티아 쯔쯔가무시균(Orientia tsutsugamushi)에 의해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으로 진드기의 유충이 피부에 붙어 피를 빨아먹은 부위에 가피(딱지)가 동반된 궤양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쯔쯔가무시병은 발병 초기에 병원을 찾으면 쉽게 치료가 가능하지만 치료가 늦어지면 뇌수막염, 패혈성 쇼크, 호흡부전, 신부전 등의 합병증을 동반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쯔쯔가무시병은 우리나라 전국에 걸쳐서 발생하고 있으며, 농촌에서 밭일을 하거나 성묘, 벌초, 등산을 하고 난 후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가 많이 나타난다. 쯔쯔가무시병은 1~3주의 잠복기를 거쳐 갑자기 시작되는 발열, 오한, 두통, 근육통이 특징적이며, 기침, 구토, 설사 등이 동반될 수 있다. 쯔쯔가무시병은 진드기나 진드기 유충에게 물려서 감염된다. 따라서 야외활동을 할 때는 긴 옷으로 피부를 보호하고, 진드기 기피제를 사용하면 도움이 된다. 쯔쯔가무시병 유행 시기에는 풀밭 위에 옷을 벗어 놓거나 눕지 말고, 휴식을 취할 때는 돗자리를 펴고 앉아야 한다. 야외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는 샤워나 목욕을 하고, 입었던 옷가지 등은 깨끗이 세탁하는 것이 좋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정진곤의 살며 생각하며]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자

    [정진곤의 살며 생각하며] 걷기 좋은 도시를 만들자

    시청 앞 청계광장에서 한양대까지 매주 청계천을 따라 걷습니다. 월요일 수업에 맞춰 평소보다 집에서 일찍 출발합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나 싶더니, 벌써 여름이 온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느 새 무더운 날씨가 되었습니다. 산수유, 매화, 벚꽃 등의 봄꽃들이 지고, 조팝나무 꽃들이 활짝 피어 있습니다. 송사리들이 떼 지어 헤엄쳐 다닙니다. 잉어들도 유유자적 무리지어 올라가고 있습니다. 연못에서 사람들이 키우는 잉어는 보았지만, 시냇물에서 이렇게 많은 잉어들이 자연스럽게 떼 지어 다니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오리들이 물속에서 먹이를 찾아 자맥질을 합니다. 왜가리는 돌 위에 앉아 먹이를 노리고 있습니다.  한양대 근처에 오니 청계천이 중랑천을 만나 한강으로 흘러갑니다. 매화나무와 대나무들이 벌써 무성하게 잎을 피우고 있습니다. 군데군데 모래사장도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섬진강변 매화마을에 와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가의 팻말에는 “이곳의 매화들은 광양의 매화마을에서 조성한 것”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서울의 도심 한 복판에서 맑은 시냇물, 수많은 물고기, 새와 나무와 꽃들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다음 주에는 냇가의 나무와 꽃들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벌써부터 일주일 후의 청계천 모습이 궁금하고 보고 싶어집니다.    청계천을 걷기 전까지 서울 시내를 멀리까지 걸어서 다닌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습니다. 시내를 갈 때는 항상 자동차나 전철을 타고 다녔습니다. 서울 시내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곳이지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청계천을 따라 먼 길(?)을 걷고 난 후 나름대로 자신도 생겨서 서울시내 도심을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신촌에서 시청까지 걸어갔습니다. 청계천이 나무, 꽃, 새들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신촌에서 시청까지의 길은 인간 삶의 현장입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은 항상 바쁘고 무언가 화가 나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과 같이 잘 알지 못해도 ‘하이’하면서 손을 흔들거나 웃으며 인사를 하는 사람들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와 서양의 문화적 차이인지 혹은 서울 사람들의 삶이 더욱 고달프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길가에는 높다란 빌딩과 함께 작은 가게들이 많습니다. 김밥집, 돈까스집, 김치찌개와 된장찌개집 등의 작은 식당들과 가구점, 커피집, 옷집, 세탁소, 동물병원, 편의점, 미용실 등의 수많은 가게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습니다. 가게의 종류도 다르고, 외양과 인테리어들도 서로 다릅니다. 처음에는 모두 가게 안에 걸려있는 문구처럼 “비록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을 것입니다. 가족과 친지들도 찾아와 잘 되기를 바라고 축하해 주었을 것입니다. 손님들이 많은 가게도 있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주인혼자 쓸쓸히 앉아 있는 곳도 있습니다. 도심을 거닐면서 수많은 가게들의 외양과 함께 주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길을 걷노라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여러 모습과 삶의 속살을 훔쳐보는 것 같습니다.    똑같은 서울이지만 청계천의 냇가와 도심의 길거리는 너무도 다릅니다. 보이는 풍경도 다르지만, 걸으면서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다릅니다. 몸으로 부딪혀 오는 바람결도 다릅니다. 도심을 걸을 때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삶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냇가를 걸을 때는 냇물과 나무와 새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갈 때는 사고 나지 않고 안전하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할 것인가만을 생각합니다. 달리다가 사고가 나게 되면 크게 다치거나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자동차가 자기 앞으로 끼어들게 되거나 방해하게 되면 신경이 곤두섭니다. 자동차가 막혀 지체하게 되면 짜증이 납니다. 주위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곁눈으로 흘깃거리거나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운전을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차 안에서 음악을 흘려듣는 일이 고작입니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면 비로소 자동차에서 해방되어 안도의 한 숨을 내쉬게 됩니다.    자동차가 아닌 자신의 두 발로 걸어서 길을 갈 때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전신의 감각을 열어놓고 주위 풍광을 구경합니다. 길 가에 심겨져 있는 나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 흐르는 시냇물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를 들이키고, 온 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목적지에 빨리 도달할 것인가 보다는 주위의 동물, 식물 그리고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느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그 아름다움과 장엄함에 감탄을 하기도 합니다. 두 발로 자신의 몸을 땅위에 곧추세우고 발밑에 밟히는 땅의 느낌과 숨소리를 듣게 됩니다.    ‘걷기 예찬“의 저자인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와 시골 등의 삶의 현장을 두발로 걸어 다니면서 그는 비로소 인류학자처럼 사람들의 얼굴, 표정, 걸음걸이를 새롭게 관찰하고 그들의 삶의 세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제까지 스쳐지나갔던 자연의 세계를 유심히 살펴보고 이름조차 알지 못한 나무와 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겨울을 지나 봄이 되어 잎이 피고 꽃이 피며 나날이 자라나는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브르통은 “자신의 몸을 땅과 수직으로 꼿꼿하게 세우고 걷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으며, 인간과 우주의 새로운 질서가 탄생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걷기 시작하면서 네발로 기어 다닐 때 보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를 듣고, 보고, 느끼게 되었으며, 이제까지 보고 경험해 왔던 나무, 새, 동물, 하늘과 같은 자연세계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브르통의 말을 이해하거나 실감할 수 없다면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했던 대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보면 그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발로 기어 다니는 것과 두발로 서서 다니면서 보고 느끼게 되는 세계와의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걷기는 오래전부터 청소년 교육의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보이 스카우트, 반더포겔 그리고 우리나라의 국토기행 모임 등과 같은 여러 단체에서는 걷기를 통하여 청소년들에게 국토를 사랑하고, 나무, 풀, 꽃, 새들과 같은 자연에 대하여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사랑하도록 합니다. 국토기행 등을 통하여 인내심과 체력을 키우고, 동료 친구들을 아끼고 서로 도와주는 협동정신을 길러줍니다.  걷기는 또한 사색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제자들과 학내를 거닐면서(페리파테인) 인간의 본성, 윤리와 도덕, 정치학 등에 대하여 함께 토론하고, 그 내용을 정리하였습니다. 그가 제자들과의 산책을 통하여 남긴 ‘니코마코스 윤리학, 기하학, 논리학’ 등은 인류문명과 여러 학문분야에 지적인 기틀을 제공하여 주었으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학파를 ‘소요학파’라고도 부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걸으면서 대화한 내용들이 그의 사상의 핵심을 형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수많은 철학자들과 작가들이 산책을 하면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고, 많은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독일의 하이델베르그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이 길을 산책하면서 그의 철학을 정립하였고, 수많은 철학적 저서를 구상하고 아이디어를 얻었기 때문에 이 길을 ‘하이데거의 길’이라고도 부릅니다. 프랑스 혁명 사상의 기틀을 제공해준 장 자크 루소도 산책을 통하여 중요한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보행에는 내 생각들에 활력과 생기를 부여하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한자리에 머물고 있으면 거의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내 몸이 움직이고 있어야 그 곳에 내 정신이 담긴다. 들판의 모습, 이어지는 상쾌한 정경들, 대기...그런 모든 것이 내 영혼을 청소해주고 내게 보다 크게 생각할 수 있는 대담성을 부여해...준다”고 말하였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1847년 제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걸으면서 가장 풍요로운 생각들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니체는 “나는 손만 가지고 쓰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들판을 건너질러서, 때로는 종이위에서 발은 자유롭고 견실한 그의 역할을 해 낸다”고 하면서 심오한 영감은 거의 예외 없이 오랫동안 걷는 길 위해서 떠올랐다고 말하였습니다.    뉴욕, 런던, 파리 등 세계 각국의 대도시들은 걸어 다니기 좋게 되어있습니다. 인도도 넓고, 쾌적하고, 아름답고, 안전합니다. 가로수들이 봄에는 새 잎을 피우고,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을 마련해주며, 가을에는 아름답게 물듭니다. 파리의 샹드리제를 걸어본 사람들은 누구나 아름다운 그 거리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보행자들이 마음 놓고 도시를 걸어 다닐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런던은 오래된 도시라서 좁은 길들이 많습니다. 좁은 길은 아예 차들은 다닐 수 없고 사람들만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자동차로 도심을 통행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길도 좁고 주차장도 드물고 주치 비용도 매우 비쌉니다. 런던시내에서는 아예 자가용 자동차가 다닐 수 없습니다. 버스나 전철 등만 다닐 수 있습니다. 자동차보다 보행자들이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나라의 도시들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기에 위험하고 불편합니다. 오토바이들이 인도를 거침없이 휘젓고 다니며, 포장마차가 가로막고, 매우 비좁습니다. 움푹 꺼지거나 패인길도 많습니다. 상인들은 인도에 상품 내놓고 있습니다. 국도에는 아예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인도가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도시들도 사람들이 마음 놓고, 즐겁고, 편안하게 걸어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걸어서 직장에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미술관도 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거리를 걸어 다니기 좋고, 아름답고 편안하게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거리를 걸어가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를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도시와 길거리를 잘 알게 되고, 아름답고 깨끗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할 것입니다. 거리에 심어져 있는 나무와 꽃 그리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삶의 모습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루에 만보만 걸으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걷기 좋은 거리를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많이 걷게 되어 시민들의 건강증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길을 걸으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고, 정서적으로도 편안하게 되고, 여러 가지 것들을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시장과 공무원 그리고 시민들이 힘을 합쳐 ‘걷기 좋은 거리’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한양대 교육학과 교수(전 대통령실 교육과학문화수석) tiger@hanyang.ac.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