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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걸프전의 교훈과 그 이후(사설)

    다국적군의 단호하고도 신속한 지상전 전개와 그에 상대가 되지 않는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참담한 패배로 끝나가는 막바지의 걸프전을 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저돌적이고 무모하게 시작한 전쟁의 말로가 주는 교훈을 음미하게되며 그것이 우리와 세계에 시사하는바가 무엇인지를 새삼 곰곰 생각하게 된다. 우선 후세인은 쿠웨이트병합이 주는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너무 소홀히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뼈저린 반성을 해야할 것이다. 석유부국이긴 하지만 중동소국 쿠웨이트의 원상회복을 위해 미국과 세계가 그처럼 확고히,그리고 압도적인 군사행동으로 대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아랍국간의 분쟁엔 관심이 없다고한 쿠웨이트 침공직전의 이라크주재 미대사의 발언이 후세인을 오도했다는 평가도 있지만 그는 많은 것을 오판한 것이 분명하다. 역사상 오판에 의한 전쟁가능성의 무서운 교훈은 얼마든지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일본과 독일의 오판에 의한 것이라면 한국전은 김일성의오판에 의한 것이었다. 월남전의 경우 그것은 미국의 착각에서 확대된 것이었으며 결과는 오판의 무참한 패배로 끝났던 것이다. 후세인은 미국이 월남전때의 미국일 것으로 오산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걸프전에서 세계는 월남전때와는 다른 미국을 목격했다. 신속한 다국적군의 구성,전비의 분담,과감한 공격,정치·심리전의 통제와 활용,협상 등 지연작전의 불용,목표의 철저한 추구 등 과거에 볼수 없었던 미국의 변화였다. 걸프전은 미국의 새로운 모습을 세계에 인식시키는 계기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전쟁은 한반도에도 의미심장한 교훈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라크의 과감하고도 전격적인 쿠웨이트침공,병합의 초기성공을 보면서 우리는 북한이 유혹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다국적군의 반격이 실패로 끝났더라면 그 우려는 보다 현실성을 띨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 북한은 이라크의 오판이 가져오고 있는 결과를 보면서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한편 이번 전쟁이 전쟁다음에 올 새 중동질서 및 세계질서에 어떻게 투영되고 어떤 영향을 마치게 될 것인지도 비상한 관심거리다. 마지막 단계에서 나온 소련의 평화중재와 그것을 무시하다시피한 미국의 지상전 결행 등은 바람직스럽지 못한 영향을 예상케 하는 것으로 귀추가 주목된다. 전쟁은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긴 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은 후세인 없는 중동에 미국주도의 새 질서를 부여하려 하고 있으나 용이하지는 않을 것이며 큰 위험부담을 수반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아랍 민족주의의 반발이 불가피할 것이며 소련의 협력도 상당히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걸프전의 와중에서 소련은 보수화의 변신을 했고 미국을 곤경에 빠뜨린 소련의 막판 걸프전 중재도 결국은 그런 소련의 새로운 도전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걸프전이 끝나면 미국과 세계는 다시 소련에 관심을 돌릴 것이고 새로운 마찰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제2의 냉전시대를 예고하는 성급한 전망도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지방세심의 인력·기구 태부족/납세이의심판 “수박겉핥기”

    ◎작년 7백건… 내무부 직원 10명이 처리/지방화 맞아 폭주예상… “오판” 우려/일선 시·도선 담당과·계조차 없어 지방세부과에 대한 납세자의 이의신청 및 심사청구건수가 해마다 늘고 있으나 내무부를 비롯,일선 시·도와 시·군구의 심의기능이 너무 빈약하다. 더욱이 지방자치시대를 맞아 일부 국세의 지방이양,지방재정확충을 위한 새로운 세목의 설치,종합토지세제의 시행 등으로 지방세심의업무가 급증하면서 한층 복잡다양화될 전망이지만 이를 맡아 처리할 기구 및 인력이 적정규모에 턱없이 못미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방세심의가 극히 부실해지거나 많은 오류를 빚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내무부 및 지방자치단체가 운용하고 있는 「지방세 구제제도」는 지방세부과징수가 위법 또는 부당하다고 판단,불복할 경우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로 도세는 처분청인 시장·군수·구청장을 거쳐 도지사에게,기군세는 시·군·구청장에게 직접 이의신청을 하도록 돼 있다. 만일 납세자가 1단계 결정에 대해서도 불복할 때는 도세의 경우 시·도지사를 경유해 내무부장관에게,시군세는 시·군·구청장을 거쳐 시·도지사에게 심사청구를 요구하도록 하고 있다. 내무부가 각 시·도로부터 넘겨받아 처리하는 건수는 지난 85년 1백68건에서 86년 4백69건,89년 6백12건,90년 7백여건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지난해 10월 고지된 종합토지세부과에 따른 내무부의 청구심사가 시작되는 올해에는 취득세·등록세감면율 하향조정 등과 겹쳐 8백∼1천건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지방자치단체에 접수되는 이의신청건만 따지면 지난해 종토세만도 3천여건을 기록하는 등 1만건이 넘고 있다. 그런데도 이를 처리하는 내무부의 기구 및 인원은 지방세심의관실에 지방세심의관 1명(2급),과장 1명(4급),계장 3명(5급),일반직원 5명(타자직 포함) 등 겨우 10명뿐으로 갈수록 늘고 있는 심사업무를 감당해내기에는 크게 역부족인 실정이다. 게다가 지방세심의관실은 지난해 연초부터 내무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심야영업 제한조치 및 새질서 새생활운동과 관련한 학교주변 유해업소 정화대책에 따른 지도 및 단속업무까지덤으로 맡고 있어 지방세심사업무가 사실상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특히 일선 시·도의 경우 담당과는 물론 계도 없이 지방세를 집행하는 세정과에서 직원 1명이 이의신청 접수 및 심의관련업무까지 맡고 있어 객관적인 처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지방에서 접수된 이의신청 가운데 내무부까지 올라오는 경우는 10%선에 머무르고 있으며 주민수준이 비교적 높은 서울이 89년 19·4%를 기록하는 등 20%를 밑돌고 있다. 다시말해 90%가량이 적절하고 충분한 심의과정을 거치지 못한채 기각 또는 각하되고 있는 형편이다. 내무부는 올해의 지방세규모가 5조7천억원으로 심사청구 건수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보임에 따라 지방세심의기능을 보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현재 1과·2계로 돼있는 것을 도세와 시군세심의를 따로맡을 2과·6계로 기구를 확대하고 정원도 24명으로 늘리며 시·도에는 담당과를 두어 보다 전문성 및 공정성을 꾀한다는 방침아래 직제개편안을 총무처에 제출해 놓고 있다. 한편 91년의 총세액이 약 27조원에 이르는 국세의 경우 세액규모가 1조원이었던 지난 75년에 이미 정원 34명의 국세심파소를 설치했으며 현재는 정원 61명에 1실·4국·9과로 운영되고 있다.
  • 이라크,내일 비상회의 소집/케야르·후세인 「5개 평화안」 논의

    ◎베이커 미국무는 이집트·시리아등 연쇄 방문 【암만=김주혁특파원 외신종합】 페르시아만 전쟁을 막기위한 중재활동을 벌이고 있는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유엔 사무총장은 12일 하오(현재시간·이하같음) 바그다드에 도착,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회담에 들어갔다. 케야르총장은 후세인과 유엔 평화유지군의 쿠웨이트 파견 등 5개항의 평화안 등을 폭넓게 논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이라크 의회는 14일 비상의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바그다드 라디오방송이 12일 보도했다. 이 방송은 더이상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유엔의 철수시한을 하루 앞두고 의회가 개최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결정이 나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케야르총장은 이날 암만을 떠나기전 기자회견을 통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이라크의 입장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들로부터 많은 얘기를 듣게 될 것』이라고 말해 팔레스타인 문제와 연계시켜 이번 사태를 해결해 나갈 것임을 시사했었다. 한편 베이커 미 국무장관은 12일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과의 회담을 마친뒤 기자회견을 통해 『이라크는 현사태를 오판해서는 안되며 현재의 고비를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베이커장관은 『이라크가 제시한 중동 평화회의는 유익할 수 있지만 현재는 회의를 개최할 분위기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베이커는 이날 하오 다마스쿠스에 도착,아사드시리아 대통령과 페만사태를 집중 논의했으며 이어 터키와 캐나다를 방문할 예정이다. 데 미첼리스 이탈리아 외무장관은 12일 케야르 유엔 사무총장의 평화노력이 실패할 경우 EC(유럽공동체) 대표단이 바그다드를 방문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포함,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외무장관이 이라크를 방문,후세인과 회담할 수 있다고 밝혔다.
  • “비디오 판권 사주겠다”/16명에 4억대 가로채

    서울시경은 1일 이금복씨(41·성북구 정릉동 372의 40)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사기)혐의로 구속했다. 이씨는 지난해 8월중순 서초구 반포동 한신시티빌딩 721호에서 비디오 업자인 김모씨(32)에게 『영화 「마리화나」 비디오판권을 사게 해주겠다』고 속여 판권대 명목으로 2천6백여만원을 받는 것을 비롯,지금까지 모두 16차례에 걸쳐 비디오 업자들에게 시중영화관에서 상영되거나 상영 예정인 영화의 비디오 판권을 사주겠다고 속여 4억6백여만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 「범죄와의 전쟁」 이기는 길을 찾는다(질서있는 사회로:5)

    ◎전문가 대담/“행동철학이 제시된 새생활운동 펴라”/“방법론 없는 즉흥 발상”호응 못얻어/도시민의 공동체의식 형성이 과제/고립된 삶이 「범죄온상」구실… 합의정신이 바탕된 질서모델 계발을 범죄와 무질서,과소비 등을 추방하기 위해 노태우 대통령이 「새질서 새생활 실천운동」을 선언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새질서 새생활운동」이 국민운동으로 확산돼 질서있고 건전한 새로운 사회를 이룩할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운동의 방향과 방법 등을 두 교수의 대담으로 들어본다. ○통제가 무너진 사회 ▲김대환교수=이번 노태우 대통령이 선포한 새질서 새생활 실천운동은 새마을운동과 비견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 72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당시만해도 일부의 비판과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잘살아보자는 국민적 합의 아래 실천적 운동으로 발전해 큰 반향을 얻었지만 지금의 시대적 상황은 그때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왜 지금 이런 운동이 제기되었는지의 문제부터 풀어가기로 합시다. ▲송복교수=새마을운동이 시작될 당시 농촌인구와도시인구는 반반이었지만 90년대에는 2,3차산업 인구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사회구조에 대한 새로운 진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사회는 지난 10년동안 해마다 9백만명씩 모두 9천만명이 주거를 옮겨 인구의 9.7%만이 태어난 곳에서 살고 있는 등 국민의 대부분이 타향살이를 하는 부동사회(Floating society)가 됐습니다. 한곳에 머무르는 기간이 평균 3년에도 못미치다 보니 이웃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고 사회통제 메커니즘이 와해돼 공중에 떠다니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김교수=그동안 정치ㆍ사회적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경제적인 축적이 이루어져 개인의 생활이 풍요해 졌으나 양적 팽창에 상응하는 질적 변화가 이어지지 못한데 따른 정신적 빈곤이 사회악의 증가와 사회질서의 파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실성과 정직성이라는 농업사회의 생활방식이 공업사회로 바뀌면서 붕괴,내부적인 파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송교수=직업구조의 개편속도도 세계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빠릅니다. 지난 74년에는 1천5백개의 직업이 있었으나 86년에는 1만2천6백개로 늘어났습니다. 현재 한 직업에 5년이하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 44%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10년 이상 종사하는 사람은 25% 정도로 지역공동체 뿐만 아니라 직업공동체도 형성되어 있지 않은 실정입니다. ▲김교수=경제구조의 왜곡도 심각합니다. 제조업의 기반위에 3차산업이 형성돼야 하는데 80년대말까지만 해도 제조업이 성행,직업구조가 제대로 형성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지금은 서비스업이 지나치게 팽창했습니다. ▲송교수=그렇습니다. 경제구조면으로 보면 87년을 정점으로 제조업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선진국인 미국이나 일본의 제조업 비율이 전성기에 45%,지금도 36∼37%를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37%를 고비로 현재는 31∼32%를 유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제조업이 꽃을 피운 바탕위에 서비스업이 발전했다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일하기 쉽고 돈을 벌기가 쉽기 때문에 서비스업이 번창하는 경제구조 왜곡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고소득 납세자의 3위에서 5위까지가 부동산업자이고 1백위안에 든부동산업자의 수가 지난해 보다 3배나 늘어났습니다. ○경제구조 왜곡도 심화 ▲김교수=미국사회의 경우 제조업체에서 고학력자들이 일하려 들지 않고 컴퓨터ㆍ사무관리 등 고학력인력이 필요한 직종은 수요에 한계가 있어 원하는 일터는 없고 원하지 않는 일터는 많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국민소득 5천달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의식의 세계는 일본을 앞질러야 한다는 허황된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송교수=90년대 우리의 사회인식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불로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70년대에는 제조업에 고용의 기회조차 없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기피하는 실정입니다. 15∼24세의 젊은이가 제조업에 취업한 숫자는 지난 87년 37만명이었던 것이 88년에는 34만명으로 지난해에는 20만명대로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국민소득 5천달러는 세계에서 34∼35위의 수준이나 사고와 요구는 2만달러 이상입니다. 의시기의 허황됨이 큰 문제입니다. 이제 이 운동의 성공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김교수=현재의 상황과 조건,운동의 주체,방법 등을 놓고 볼 때 일단 상당히 전개가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는 이런 문제가 있으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다각적으로 검토해야만 합니다. 이번의 경우 어찌보면 즉흥주의와 편의주의의 인상이 짙습니다. 정부안에서 문제가 일단 제기되면 진지하게 토론하고 검토해 정보를 모아 운동의 성격과 방향이 도출되어야 하나 이번의 경우 총론만 나오고 각론이 나오지 않은 성급함이 보이고 있습니다. ▲송교수=국민들도 운동전개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아직까지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교수=그렇습니다. 「전쟁선언」이라는 표현부터 조금은 거부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과거의 행태로 볼 때 정부 각 부처 행정관료들의 특성상 성과위주ㆍ전시위주로 경쟁 비슷하게 해나가는 가운데 국민들은 『어디 해볼테면 해봐라』하는 방관적 심정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이념이 필요합니다. 새마을운동의 저변에는 토착적인 농민들의 민족주의 이념이라는 철학이 밑바닥에 흘렀습니다. 임기응변으로 운동을 전개하려 하면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없고 설득력도 호소력도 잃게 됩니다. ○자발적인 지도자 필요 ▲송교수=70년대의 새마을운동과 90년대의 새질서운동을 비교해 보면 운동의 주체가 되는 사람도 크게 변했지만 운동을 이끄는 사람의 문제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상 새마을운동의 이론을 제공하고새마을운동의 시작과 전개,체계화에 깊이 관계하신 김교수께서 지금과 비교해 말씀해 주십시오. ▲김교수=3공화국시절 새마을운동은 시대적 요청이 있었기에 나 스스로가 일부 지식인의 빈축을 사가며 참여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학자나 지식인이 능동적으로 운동에 참여해야 성공한다는 생각에서 운동의 시발에서부터 참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이 성공한 것은 지식인의 이론제공의 결과가 아닌 「운동의 리더」가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거에는 김준씨 같은 농촌운동의 상징적 리더가 있어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뒷받침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봅니다.또 자발적인 소단위의 리더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도시의 새마을지도자들은 「지식인은 할 일이 못된다」「정부에 빌붙는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희생적이었습니다. 결국 운동의 성패는 국민적 공감대의 형성위에 자발적인 지도자의 유무에 달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송교수=새질서운동의 이념으로 2가지를 내세우고 싶습니다. 첫째는 공동체를 재건해 도시의 이웃공동체와 직장이나 직업공동체를 확립해야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회는 국가의 힘으로 유지되고 가장 현명한 사회는 공동체의 건설로 저절로 유지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이 함께 살면서 심층적,직접적,전체적 인간관계,익명적이 아닌 거명적 인간관계를 형성해 공동체에 낯선사람,이방인이 없는 사회가 돼 서로가 서로를 의식치 못한 가운데 감시,견제하는 사회가 되면 도덕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돼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비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방인들 끼리 모여 있는 사회가 범죄의 온상이 됩니다. 공동체가 재건되면 질서의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입니다. ▲김교수=그러나 우리사회는 지금 너무 많이 파괴되어 버린 느낌입니다. ▲송교수=두번째 이념은 우리사회 특유의 질서모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역사적으로 좋은 질서모델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그것을 준거로 해서 행동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효를 바탕으로 한 가족주의 모델입니다. 효의 근본은 공경입니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자신을 수련했고 그 결과 어떤 사회적 지위를 얻는다는 것은 곧 사회의 발전이 되고 주위의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이 곧 사회통합을 이루어나갔던 것입니다. 공동체는 협동성과 정의에 기반을 두어 대립보다는 합의에 중점이 두어진 것입니다. 조선이 5백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이밖에 합가치성에 기반을 둔 선비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엘리트의 모든 행위가 이 때문에 공익적이었습니다. ▲김교수=그렇습니다. 조선시대 내내 관주도가 아닌 자발적인 구국운동이 있었습니다. ▲송교수=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가족주의가 족벌주의,이기주의,기득권주의로 모델이 거꾸로 부서져 버렸습니다. 또 공동체는 개인적인 정에 좌우되는 대립주의로 흘렀습니다. 선비주의는 목적달성에 수단방법을 안가리는,합가치성에서 합목적성으로 타락하는 등 역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교수=중종시대의 정치 사회적 내우외환과 선조때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광조와 율곡,퇴계 등에 의해 시작된 향약운동은 고종 말년까지 지속됐습니다. 이 운동은 향촌중심의 민간운동으로 북한이 천리마운동을 시작할 때 그 이념을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새마을 운동도 향약에 기초를 둔 이념이 있었습니다. ○국민운동으로 승화를 ▲송교수=새질서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정이 복원되어야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든 잘못을 사회에 두지 자기가정에 책임을 돌리지 않습니다.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부모상이 깨지고 쩔쩔매는 약한 아버지와 과잉서비스 과보호의 어머니가 있을 뿐입니다. 현재 강력범죄의 50% 이상이 10대가 저지르고 있습니다. ▲김교수=요즈음을 개인주의시대라고 하지만 과거의 규범인 수신제가도 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자기 중심의 도덕ㆍ윤리였습니다. 지금은 「개인적인 사회」가 아닌 「무정부사회」라고까지 할 수도 있겠습니다. 과거의 전통을 복원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송교수=공동체건설을 위해서는 지금 24%에 이르는 지역간 이동성을 10% 선으로 줄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택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동성이 줄어들면 마을마다 유수한 지식인들에 의해 우리마을의 질서는 우리가 지키자는 운동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김교수=이번 운동은 정권적인 차원을 떠나서 추진되어야 합니다. 민족을 위한 운동이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부터 다시 점검을 해야 할 것입니다. 원점에서 부터 다시 시작해보는 노력이 10년ㆍ20년 이어질 때 조금씩 조금씩 지금보다 좋은,인간적인 사회로 바꾸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운동의 목표를 오판해 정치적효과와 행정적업적을 겨냥하면 실패합니다. 국민전체가 참여하지 않는 부분적인 운동으로는 성과를 거둘 수 없으며 종합적ㆍ전체적인 운동으로 이어져 지도력이 발휘되면 국민들이 적극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 문교장관 승용차행패 세종대생에 집유선고

    서울지법 동부지원 형사5단독 이종오판사는 13일 세종대 분규사태를 돌아보기 위해 방문했던 문교부장관이 탔던 승용차 위에 올라가 난동을 부린 혐의로 구속기소된 세종대학생 이정호군(25ㆍ관광경영학과 4년)에 대해 징역1년에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
  • 대북협상 “양보할 일 못할 일”/박봉식 서울대교수(서울시론)

    ◎전향적 대응 좋으나 북이 오판 말게 서울에서 열린 제1차 남북 총리회담은 서울이나 평양에서 모두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서울에서는 북측이 결국 총리회담을 당국간의 회담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석하고 또 평양에서의 제2차 회담이 확실하게 되어 당국간의 접촉이 공식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고 보는 것 같다. 평양측은 서울회담에서 3가지 「긴급의제」를 내세워 그 의제의 선결을 요구하는 자세였다. 그들은 서울회담의 결과 이 세가지 선결요구가 거의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즉 「단일의석의 유엔가입」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이 유엔 단독가입을 일단 보류하고 북측의 제안을 논의하자고 했다. ○변화없는 북대표들 그리고 「밀입북관련 구속자 석방」과 관련,그들을 면회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선물은 간접적으로나마 가족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끝으로 「팀스피리트훈련 중지」에 대해 신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측에서 시사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또 미군철수문제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연형묵 북한총리는 그들의 정권수립기념 연설에서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가 가능하다고 연설하였다. 이 정도면 북측으로서는 서울회담이 성공적이었다고 판단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북한의 국가주석이 서울회담에 임한 연형묵총리등의 「서울활동」을 칭찬할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로의 해석에 문제는 없겠는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누구나 낙관론자이기를 바랄 것이다. 또 장기적으로 보면 남북한관계를 낙관할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남북한관계를 궁극적으로 낙관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서울에 온 북측 대표단의 공식 비공식 태도에는 종래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객관적인 세계정세의 흐름을 분석하고 그결과 새로운 정책을 마련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종래와 같이 김일성의 교시 등을 그대로 가져 나온 것이다. 북측 대표가 우리측 총리를 총리라고 부르기를 꺼릴 정도였고 만찬연설에서 주체사상을 강조하며 그들의 정치체제가 가장 우수한 것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국간 회담에 나온 사람들이 회담과 관계없는 일에 더 열중하려는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세가지 긴급의제라는 것도 엄격히 말하면 정상적인 경우 당국간의 의제로서는 적절치 않은 것이다. 그러한 북측의 요구가 거의 받아들여졌다는 관점을 되씹어 볼 필요가 있겠다. 그들의 기본자세에는 변화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자세도 가다듬지 않고 회담에 나온 사실이 8월까지의 태도로 보아 다소 의외의 면이 없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들이 영향받기를 거부하는 국제관계의 변화,그리고 그결과 한국의 유엔가입 가능성의 증대 등이 그들로 하여금 「긴급의제」를 들고 나오게 한 이유가 된 것으로 분석된다. 서울총리회담이 열리기 2일전에 소련의 외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하였고 한소간의 연내 국교수립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동서독관계의 변화는 소련의 대서독정책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도 소련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련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해 울브리히트 동독공산당 당수를 해임시켰으며 작년의 동서독 결합의 과정을 위해 호네커 동독국가원수를 물러나게 하였다. 이와같이 양독은 70년대이래 소련정책의 변화에 맞추어 교류를 해왔기에 오늘의 통일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북한의 정치에 동독에서와 같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북한도 소련에 군사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면이 많기 때문에 그 영향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소련도 그들의 사회주의 동맹국을 불명예스럽게 팔아넘기는 일은 하기 싫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우리가 북측의 명분을 어느 정도 만족시켜가면서 회담과 접촉을 시작하고 하나하나 축적해 나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 것 같다. 그러나 시기를 놓치지 않고 명백히해야 할 것은 함으로써 그들의 변화를 촉구해야 할 것이다. 이번 서울회담이 평양에서 성공이라고 생각케 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이냐하는 문제도 있다. 우리가 분위기를 위해 조절하는 것을 그들이 그들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는 것으로 오판케 해서는 안될 것이다. 유엔가입문제만하더라도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스스로 고칠 시간을 주자는 것이지 이로써 유엔가입을 저지할 수 있다고 오판케 해서는 안될 것이다. ○유화제스처 구분해야 주한미군만 하더라도 그것은 한미간의 문제이지 그들과 협의할 문제가 아닌 것임을 명백히해야 하지 않을까? 이와관련,미국측에서도 3자회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니 이 문제도 명백히 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회담­외교적인­이 그렇지만 특히 남북한관계는 분위기를 위한 유화적인 제스처와 기본입장의 변화를 혼돈해서는 안된다. 때로는 분위기가 다소 경색되는 일이 있더라도 북의 비현실적인 정책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백히해야 할 것이다.
  • 대신증권 명동지점 차장 오재일씨(월요 초대석)

    ◎“원금날린 증시고객 보면 죄진 기분”/고객 시위ㆍ증권맨 감원움직임등 이중고 매일 하락의 파란불만 켜대는 주식 시세판 앞에서 투자자들은 고함이라도 지르지만 증권사 직원들은 그저 유구무언이다. 그러나 그들이라 해서 하고싶은 말이 없는 것은 분명코 아니다. 대신증권 명동지점의 오재일차장(35)은 『몰인정한 시세판하고 격하기 쉬운 투자자들 사이에 꼭 낀채 찍소리도 못하는게 요즘 증권맨들의 처지』라고 하소연 한다. 오차장은 『이문을 남기기는 커녕 고객들의 아까운 투자원금이 3분의 1,2분의 1로 삭둑삭둑 잘려나가는 걸 보면 절로 죄진 듯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주가가 속락한대서 주식투자 중개업무에 종사하는 우리들을 무턱대고 죄인 취급하는 건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라고 말한다. 단정한 넥타이 차림이기는 여느 금융업과 다름이 없으나 그중 고객과 가장 피부로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증권맨들이고 게다가 3년활황과 1년반 침체가 그냥 접속되는 바람에 이들의 애환은 차라리 소용돌이에 가깝다. 창구경력 10년이 넘는 오차장도 애일색인 침체장세와 증권가 분위기에 짓눌려 바로 얼마전의 환시절이 꿈속의 일이 아닌가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3년3개월전 현 점포에 왔을 때에는 28명의 직원이 월약정고 5백억원을 쉽게 해냈으나 직원이 45명으로 늘어난 지금은 2백억원의 실적 올리기가 벅차기만 하다. 근무하는 동안 지난해 초까지 9천개가 늘어 모두 1만1천개에 달했던 고객계좌가 반으로 줄었고 그 흔하던 특별보너스는 간데 없이 사라진 대신 증권사 사장단은 최근 경영합리화를 위해 인원감축을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오차장은 『이같은 내우에다 투자자 시위ㆍ분쟁에 휘말리는 외환까지 겹쳐 영일없이 2중고에 시달린다』고 하소한다. 차장으로 진급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객장 손님들을 대상으로 하루 두번 20분씩 시황을 설명했고 자신도 흥에 겨웠지만 객장이 미어져라 하고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바로 그 장소에서 최근 어떤 아주머니가 미상환융자금 반대매매를 극력 반대한다는 유인물과 함께 자살소동을 벌였었다. 활황 당시엔시세차익에 기분이 좋아져 그에게 술을 사겠다거나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나선 손님이 과장없이 부지기수에 달했건만 지난해 12ㆍ12부양조치로 장이 살아날 것으로 오판한 오차장은 그 덕분에 3명의 의좋던 단골고객들과 분쟁을 벌여야 했었다. 그때 며칠 밤을 잠을 설쳤고 다행히 무마되긴 했으나 그 과정은 두번다시 기억하기 싫다는 것이다. 문제의 주식 종목은 이름만 들어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
  • 민자 당직 개편설 “싱거운 매듭”

    ◎청와대의 “당 3역 재신임” 표명으로 원점회귀/대야대화 돌파구 안열리면 재론가능성 상존 지난주말부터 원내총무 경질을 중심으로 간단없이 거론되어 오던 민자당 당직개편이 31일 낮 노태우 대통령이 민자당 당 3역과 김윤환 정무1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오찬을 베풀며 「재신임」을 표명함으로써 당분간 당직개편이 없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 ○“건강악화” 오판이 발단 ○…노대통령은 이날 당 3역과 김 정무1장관에게 그동안 수고했으며 앞으로도 합심해 열심히 일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 참석자가 전언. 이 참석자는 『당직개편과 관련한 구체적 거론은 없었으나 분위기로 볼 때 올 정기국회 때까지는 현 당직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면서 『연말이나 내년초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규모 당정개편때 자연스럽게 당직개편이 단행될 가능성이 크다』고 관측. 다른 참석자도 『김동영 총무 자신이 그동안 경질의 주된 이유로 거론됐던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으며 여야대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는 것은 야권통합문제 때문이지특정인사가 대화창구를 맡았기 때문은 아니란 인식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총무교체를 거론하긴 힘든 분위기』라고 피력. ○김총무 귀국후 혼선 ○…민자당내에서 당직개편 가능성이 거론된 것은 김영삼 대표가 방미중이던 김총무의 건강을 지나치게 나쁜 것으로 「오판」,이를 당내외에 걸쳐 자신에게 불리하게 조성된 상황을 돌파하는 카드로 활용하려고 하고 부터 시작됐다는 설이 유력. 김대표는 지난 25일 미국에서 귀국을 늦추고 있던 김총무로부터 국제전화를 통해 『진찰관계로 늦는다』는 연락을 받고 김총무가 도저히 총무직을 수행키 어려운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 김대표는 이에 측근인 황병태 의원등과 이 문제를 논의,김총무의 건강이 그렇게 나쁘다면 김총무 자신을 위해서라도 총무를 교체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아래 새 총무를 민정계에 양보할 수도 있다는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 김대표가 이같은 「결단」을 검토하게된 배경은 민정계 일각에서 지난 7월 임시국회 이후의 정국파행을 김대표ㆍ김총무로 이어지는 대야담당창구에 문제가 있기 때문으로 몰아치는데다 당내부적으로도 당비 과다사용 시비로 김대표의 위상이 상당히흔들리고 있는 상황들을 탈피해보자는 의도가 작용했다는 분석. 김대표는 측근들과의 논의와 함께 25일 낮 김윤환 정무1장관과 단독 오찬회동을 갖고 김총무의 건강문제를 거론하면서 김 정무1장관이 총무직을 맡을 의사가 있는지를 은근히 떠보았다는 것. 김대표의 측근의원들은 25일 저녁과 26일에 걸쳐 김대표가 총무를 교체할 의사가 있음을 흘리기 시작했고 27일 상오 김 정무1장관이 이를 확인해줌으로써 총무 경질 가능성이 커지기 시작. 그러나 27일 저녁 미국에서 귀국한 김총무가 김포공항에서 상도동 김대표 자택으로 직행,『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밝힘에 따라 당직개편 방향이 혼선. 김총무 측근들은 『김총무가 이 시점에서 혼자 물러난다면 건강에 진짜 문제가 있는 것이 되며 이는 정치인으로서 치명적』이라면서 『바꾸려면 당 3역을 전원 교체해야 한다』고 나서 문제가 확대. 이에 28ㆍ29일에 걸쳐 김종필ㆍ박태준 최고위원 등이 『최고위원도 모르는 당직개편이 있을 수 있느냐』고 당직개편 가능성을 부인했고 김대표도 없던 일로 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으며 31일 노대통령과 당직자간의 청와대 오찬회동에서 당분간 당직개편이 없는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난 셈. ○9월말 교체 가능성도 ○…그러나 민자당내에서는 민정계를 중심으로 아직도 대야교섭창구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고 민주ㆍ공화계에서도 총무교체 필요성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어서 당직개편 가능성이 전무하지는 않은 상태. 당의 한 소식통은 『김총무가 건강때문에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만 줄 수 있다면 적절한 시기에 교체가 이뤄질 수도 있다』면서 그 시기를 9월말쯤으로 관측. 다른 소식통은 『민주계 내에서도 실속없는 총무보다 다른 당직을 맡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는 만큼 여야관계가 계속 풀리지 않을때 극적 돌파구를 열기 위해 총무교체등 당직개편이 다시 거론될 수도 있다』고 전망.
  • 외언내언

    『마차를 만드는 목수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많이 출세하기를 바란다. 그에 반해 관을 만드는 목수는 세상 사람들이 얼른 죽어 주기를 바란다』 ◆「한비자」(비내편)에 쓰여 있는 말이다. 마차만드는 목수는 마음이 착하고 관을 만드는 목수는 마음이 모질어서 그런가. 그건 아니다. 사람들이 출세하지 않으면 마차를 타지 않고 사람들이 죽지 않으면 관이 안 팔리기 때문이라는 것이 「한비자」의 설명. 그렇게 사람들은 제 이익과 제 생활을 위해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세상살이의 양면성을 극명하게 지적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막신 장수와 소금장수 아들을 둔 어버이는 그래서 근심 그칠 날이 없다. 비가 오면 소금장수 아들 걱정이요,날씨가 좋으면 나막신장수 아들 걱정에. 지난 여름만 되돌이켜봐도 그렇다. 비 오고 끄물대는 초반엔 여름장수들이 울었고 쨍쨍 볕이 내려쬔 후반엔 우산 장수들이 울었다. 이런 인생의 기미를 두고 다음과 같은 우스개 수수께끼도 나온다. 『남북통일 안바라는 사람이 누구게?』 『통일원 직원과 북한문제 전문가들이지』. 밥줄이 떨어진다는 데서이다. ◆전쟁상인이라는 말도 그런 맥락이다. 전쟁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악이지만 전쟁상인에게는 이익이 돌아간다. 그 때문에 세계의 크고 작은 전쟁은 그들 전쟁상인의 농간·흉계에 연원한다는 말도 나오는 터. 전운이 내리깔린 중동사태의 뒤안길에도 어떤 음모는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지구촌의 불행한 그림자임에는 틀림없다. 당장 우리 경제에도 타격의 모랫바람은 불어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 가운데도 일부업체는 생각잖은 「특수」를 누리고 있다는 것. 방독면·방독복 등 군수품 생산업체가 그들이다. ◆세상사의 양면성이 그런 「특수」업체도 있게 했다는 것뿐,물론 전쟁은 악이다. 그런데 먹구름은 짙어만간다. 한 과대망상증 환자의 오판이 끝내 페르시아만을 피로 물들일 것인가.
  • 외언내언

    법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 보면 이번의 이창석ㆍ강민창사건 항소심 판결은 정말로 뜻밖이다. 법을 이해하는 쪽에서도 상당히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한마디로 재판의 결과가 평소 보아온 것과는 다르게 나타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씨의 법정구속이 그렇고 강씨 등의 무죄 안팎이 언뜻 예상을 벗어난 것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이씨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항소심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그 자리에서 즉시 구속됐다. 1심보다는 2심에서 형이 가벼워진다는 일반적인 관행이 깨졌다. 거의 처음이라 해도 좋을 이번의 사례를 본 문외한들로서는 의외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 『초범인 점을 감안한다 해도 원심의 형은 지나치게 가볍다』고 오판의 잘못을 지적한 이유하며 「죄질이 나쁘다」는 재판부의 시각이 엄격했다. ◆강씨 등의 경우는 어떤가. 앞으로 대법원의 최종판단을 남겨놓고 있어 지금 무엇이라 말하기가 쉽지 않고 또 논란의 시비 역시 없지 않으나 어쨌든 재판부가 증거불충분,법해석 잘못을 들어 무죄를 선고한 것은 이례적인 판결이다. 그것은 당시의 여론의 분위기로 보아 무죄를 선고하기에는 정황이 상당히 어렵고 또 우리의 현실은 이런 여론의 흐름을 많이 따르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 ◆이처럼 이번 판결은 몇가지 기록을 남겼다. 5공청산의 마무리 재판과정에서 사법부의 의지가 돋보인 것이나 2심 형량이 형편에 따라서는 1심보다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고 시국및 공안사건때마다 여론에 이끌려다니다시피하는 수사와 재판에 일침을 가했다고 하는 것 등이다. ◆그러면서 보다 중요한 것은 재판을 둘러싸고 어떤 오해의 소지는 불식되어야 한다는 것. 그동안 그같은 오해가 주변에서 없지 않았다는 데서 수사와 재판이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법해석이나 적용이 어떻든 판결결과가 일반이나 사회에 주는 영향은 크기 때문이다.
  • 이창석ㆍ강민창사건 항소심판결 안팎

    ◎여론에 쫓기던 「법감정」회복/형량 낮춰주던 관례 깨 큰충격/이/복직투쟁ㆍ보상 요구할지 주목/강/ 「5공비리」의 대표적 인물로 전경환씨와 함께 구속됐다가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던 전두환전대통령의 처남 이창석피고인이 17일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2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전격적으로 법정구속됐다. 반면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과 관련,직권남용 및 직무유기혐의로 구속기소됐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전 치안본부장 강민창피고인과 고문의 주범을 도피시킨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피고인 등 4명에게는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이창석사건◁ 재판부가 이날 이례적으로 이피고인을 법정구속한 것은 그의 범죄사실로 미루어 집행유예를 선고했던 원심의 판단을 「오판」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날 법원의 판결은 이피고인이 대통령의 인척인 점을 이용,사업체를 운영하면서 30억원에 이르는 조세를 포탈한 책임을 간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행위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함으로써 『국민의 법감정을 무시하고 법집행의 형평마저도 잃었다』는 지적을 받아온 원심을 제대로 바로 잡은 셈이다. 이번 사건에 대한 1심판결은 그동안 이피고인의 범죄사실로 미뤄볼때 피고인에게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는 비판을 받아 왔었다. 그러나 불구속으로 진행된 항소심에서 다른 사건처럼 1심의 형량을 낮추어 주기는 커녕 일반적인 관행을 깨고 피고인을 구혹한 것은 다소 의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욱이 「5공비리」와 관련해 구속된 인사들이 전경환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려난 마당에 이피고인의 재수감은 백담사측은 물론 이른바 「5공인사」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 법조계에서도 이번 결정에 대해 『재판부가 충분한 심리와 증거조사를 마친뒤 1심판결을 파기하고 이례적으로 피고인을 법정구속함으로써 법집행의 예외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살만 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날 법정 구속된 이피고인은 2심판결에 불복,곧 대법원에 상고할 예정이어서 이 사건의 최종심판은 상급심인 대법원에서 가려지게 됐다. ▷강민창 무죄선고◁ 6ㆍ29선언의 계기를 마련했던 5공화국 당시의 최대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관련 피고인들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된 것은 여러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것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직은 이들 4명의 「유ㆍ무죄」가 최종적으로 확정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당시의 분위기에 따라 이들을 구속기소했던 검찰이나 유죄선고를 했던 1심재판부 모두에 충격을 주는 판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들에 대한 구속의 부당성을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로 구속기소하거나 법리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해 기소하는 관행은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즉 강전본부장을 구속기소한 것은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죄를 광의로 해석해 기소했으므로 잘못이며 나머지 박전치안감 등을 범인도피혐의로 기소한것 역시 피고인들의 진술이 모두 엇갈리는 등 증거가 불충분한데도 기소하는 과오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박전치안감이 이날 무죄를 선고받은 뒤 『그동안 여론재판에 너무시달렸었다』고 강조했듯이,이러한 시국 및 공안사건이 있을 때마다 수사와 재판이 여론에 끌려다니다시피 한것 또한 이 시점에서 다시 돼새겨볼 대목들이다. 이날 무죄결정으로 이 사건피고인들은 자신들의 실추된 명예회복을 위해 복직투쟁과 더불어 장기간 구금에 의한 정신적 피해보상 등을 요구할 것이 틀립없다 이들이 복직을 요구해올 경우 법률심만을 다루는 대법원에서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등법원의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음에 따라 복직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이와함께 이들이 구금기간동안 입은 피해는 국가로부터 배상받을 수 있는 법적근거가 마련돼 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앞으로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과 함께 이들의 복직여부ㆍ피해보상 등에 관심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 “국제사회 「힘논리」 직시/내년 세계잼버리 청소년 올림픽으로”

    ◎노대통령,전방부대ㆍ야영장 방문 노태우대통령은 9일 상오 동부전선 ○○부대를 방문,장병들을 격려한데 이어 하오에는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제8회 한국잼버리대회가 열리는 잼버리야영장을 순시,대회관계자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노대통령은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의 김석원총재로부터 잼버리대회에 관한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내년에 개최될 제17회 세계잼버리는 세계 1백20여개국 3만2천여명의 청소년들이 서로 우의를 다지는 청소년올림픽』이라면서 『서울올림픽에 이어 다시한번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이에앞서 ○○부대장의 부대현황을 보고 받고 최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사태와 관련,『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아무리 신데탕트시대라 할지라도 국제사회에서의 힘의 논리는 불변한다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라며 『우리 군은 가일층 대비태세를 완벽히 하여 적의 오판소지를 불식시키고 부단한 훈련과 합동작전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미 클레어교수,「90년대의 전쟁」예진(해외논단)

    ◎제3세계 군사대국화 국지전 빈발 위험”/국경분쟁등 잦아 데탕트에 찬물/핵보유 늘어 대량 살상전 가능성/상호대립 심화,군비경쟁 가속 부채질 미국의 원자력과학잡지(The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는 5월호에서 햄프셔대 마이클 T 클레어 부교수(세계평화와 안보전공)의 「제3세계의 군사력증강­90년대의 전쟁」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게재했다. 다음은 클레어 부교수 논문의 요약이다. 동서간 군사경쟁이 완화됨에 따라 90년대에는 소규모 전투(low­intensity conflict)가 군사행동의 주류를 이루게 될 것이다. 프랭크 칼루치 미 국방장관(당시)도 지난 89년 연례국방보고서에서 『내전 또는 국경분쟁 등이 오늘날 세계분쟁의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상당기간 그런 추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제3세계 국가들의 화학무기 보유 및 핵무기 보유가 늘어남에 따라 대규모의 살상과 파괴를 수반하는 중간규모의 전투(mid­intensity conflict)가 발생할 위험도 점점 커지고 있으며 핵전쟁으로 비화될 우려도 있다. 이는 지난 20년간제3세계에 공급된 무기의 대부분을 불과 십수개국이 차지한 국제적 무기의 흐름이 가져온 결과로 이들 십수개의 제3세계국들은 대량살상력 및 엄청난 파괴력을 갖춘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다. 1백25만명의 인명피해를 낸 이란­이라크전이 그 좋은 예로 이 전쟁에선 화학무기가 대량으로 사용됐고 민간거주지역에 대한 미사일 공격도 서슴없이 자행됐다. 90년대엔 또한 화학무기 생산 및 핵무기 개발기술의 확산이 더욱 심화돼 2000년까지는 약 40개국이 핵무기 제조기술을 보유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 제3세계 국가들중 상당수가 정치불안에 따른 내부 분쟁의 취약점을 갖고 있으며 국내위기 발생시 오판의 소지가 크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같은 요인은 90년대 이후엔 지역분쟁의 발생이 세계안보에 대한 주요 위협요인으로 등장하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지난 수십년간 가장 두드러진 전략지정학적 현상은 선진국에 집중됐던 전쟁수행 능력이 국제 무기시장에서의 최신 전투기 및 탱크ㆍ미사일 구입 등을 통해 대거 제3세계국으로 확산됐다는 점이다. SIPRI(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 89년 보고에 따르면 84년부터 88년사이 제3세계로 유입된 주요 무기의 4분의3이 단 14개국에 집중됐다. 제3세계 국가의 국내 무기생산 통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들 제3세계국들은 모두 군사력이 국제무대에서의 지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보장해 준다고 믿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군사력을 강화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제3세계국가들이 국지전 또는 대륙간 전쟁을 치를 능력을 갖추게 됨으로써 국제군사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 보다 약한 나라들이 지역패권을 차지한 나라들과 손을 잡거나 또는 그런 나라들에 대항하기 위해,또 선진국들도 세계군사력 균형의 변화에서 이득을 얻고자 노력함에 따라 새로운 지역동맹들이 결성될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이들 제3세계의 새로운 군사강국들중 상당수가 서로 경쟁관계에 있으며 또 이같은 경쟁관계로 군사력 강화가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SIPRI는 제3세계의 새군사강국으로 앙골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중국 이집트 인도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리비아 북한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남아공 한국 시리아 대만 터키 등 18개국을 꼽고 있는데 이들중 남북한,중국과 대만,이란과 이라크,이스라엘과 시리아 등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경우가 6쌍이나 된다. 결국 미소간의 군사력경쟁이 이제 제3세계의 몇몇 지역에서 재현되고 있는 셈인데 미소의 경우에서 처럼 군비감축을 위한 새로운 메카니즘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분쟁 가능성의 증대로 걷잡을 수 없는 전쟁확산의 위험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제3세계국가들간에,또는 한 제3세계국내에서 민족간ㆍ종교간 그리고 빈부간 분열이 다양화하고 강화되고 있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고 있다. 이같은 분열의 심화는 현존의 사회긴장을 증폭시키고 새로운 무장폭력의 발생을 부르게 된다. 현재의 세계경제가 이를 치유할 여력이 없으므로 결국 사회질서의 혼란은 불가피하게 가중될 수 밖에 없다. 제3세계국들중 인도ㆍ파키스탄ㆍ남아공 등 몇개국은 내부문제에 취약점을 안고 있으며,무기를 구하는 것이 쉬워짐에 따라 반군단체들의 정부에 대한 도전도 거세지고 정부의 이에 대한 대응도 이같은 도전이 단순히 국내안보를 위협하는 차원을 넘어 국제적인 위신에 손상을 입히기 때문에 강경으로 흐르기 쉽다. 여기서 가장 위험한 것은 경쟁관계에 있는 나라들끼리 서로 상대방의 문제에 끼어들려는 시도이다. 예컨대 카슈미르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함으로써 인도의 불안을 일으키려는 파키스탄의 계획등 한나라가 상대방의 불안한 사회문제에 끼어들려는 것만큼 대규모 지역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큰 것은 없다. 미국과 소련은 이제 지역분쟁의 해결에 함께 대처하려 하고 있지만 오랜 냉전으로 제3세계에서의 미소간 경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쉽게 사라질 것 같지도 않다. 미소 두 초강대국은 오랫동안 동맹관계 유지를 위해 무기판매와 군사원조를 이용해 왔다. 그리고 두 초강대국의 영향력이 축소됨에 따라 이들은 제3세계의 새 군사강국들과 기존의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하려 들 것이다. 문제는 자신들의 중요한 이해관계를 위협하는 지역분쟁이 발생했을 때 초강대국이 어떤 대응을 보일 것이냐는 데 있다. 수수방관할 것인가,아니면 분쟁에 개입할 것인가. 미소는 모두 지역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고 있지만 자신들의 중요한 이해가 걸렸을 때 무력을 사용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초강대국이 지역분쟁에 개입한다 해도 이제 제3세계 국가들의 전투력이 크게 향상됨에 따라 초강대국들도 고도의 살상력을 지닌 최신무기들의 동원이 불가피할 것이며 결국 대규모 전투(high­intensity conflict)로 비화될 우려가 크다. 현재의 추세가 지속된다면 제3세계 국가들은 앞으로도 계속 군사력을 강화할 것이고 지역분쟁의 빈도와 강도도 이에 따라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지역분쟁의 발생은 선진국들은 물론 제3세계 자체에도 중대한 위험을 제기하게 되므로 초강대국은 그들의 해외군사활동에 극도의 신중함을 견지해야 한다. 그리고 국제기구들은 지역분쟁의 발발을 억제할 새 노력들에 착수해야만 한다.〈정리=유세진기자〉
  • 외언내언

    김일성이 언제 어떻게 북한땅에 들어왔는지,그리고 해방전 수년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에 관해 북한 공식문서는 아직도 밝히지 않고 있다. 그가 대중앞에 나타난 것은 45년 10월14일 소위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 본명 김성주,만 33살의 청년이었다. ◆소련군 장교복장의 그는 주둔소련군 당국의 완전무결한 지원아래 난마처럼 얽혀있던 평양정국을 헤치고 전면에 등장한다. 그가 손쉽게 정권을 창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 4가지로 꼽힌다. ①뛰어난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②다른 당파들은 분열돼 있었다 ③소련진주군이 그를 한가닥으로 밀었다 ④군과 정보를 장악했다. ◆6ㆍ25동족 전쟁은 김일성이 남한내 무장봉기와 미군개입 가능성을 오판한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도발했던 사실은 이제 세계적으로 검증된 진실이다. 정권을 잡은 그는 곧 2개년경제계획을 실시했으나 곧바로 실패했다. 그의 정적들과 주민들의 비난이 들끓었다.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적화통일하겠다는 집념을 가졌던 그는 이 공격과 비난을 외부로 돌려야 했다. 남한에서는 미군이 철수했다. 호기였다.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의 나이가 38살. 치기와 오만과 저돌성으로 형성된 그는 이른바 「남조선해방전쟁」에 있어 서울및 대전지역의 점령작전을 직접 지휘했다고 엊그제 그들 중앙방송은 밝혔다. 김은 서울함락 하루전인 27일 전투보고서를 받고는 「서울을 해방할 데 대한 전투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결국 또한번 남침을 시인한 셈이 됐다. ◆그의 나이 지금 78살. 고희를 넘겨도 한참이나 넘겼다. 그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으로서,그는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번도 6ㆍ25도발에 대한 시인과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도 이제 노쇠했다. 지난 4월 그 자신의 생일행사에 참석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도 경호원의 부축을 받을 정도였다. 며칠전엔 그의 아들 김정일의 6ㆍ25당시 어린시절 벌거숭이 사진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 두장의 사진이 새삼 민족의 비애를 되새기게 한다.
  • “남북한 교차승인 고려 안해”/한·소수교와 미·북한관계는 별개

    ◎그레그 미대사,관훈토론 참석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대사는 27일 한국이 소련·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다해도 미국은 이를 미­북한관계와 연계시키지 않을 것이며 현단계에서 교차승인은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레그대사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이같이 말하고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는 할 수 있지만 『북한을 승인한다고 해서 남북한통일에 어떤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고려치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협의하고 있으나 큰 이견은 없다고 밝히고 특히 『미국은 소련에 대해 북한이 핵안전협정에 서명하도록 설득해 줄 것을 계속 촉구하고 있으며 소련도 이에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소 정상회담에 대해 그레그 대사는 한국의 독자적인 외교노력의 결실로 나타난 「외교쿠데타」라고 말하고 미국은 통신지원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레그대사는 총체적인 국력은 북한에 비해 남한이 우위이지만 미국은 김일성이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의 오판을 막기 위해서 신중한 미군철수를 진행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레그대사는 『현안이 되고 있는 용산 미군기지 이전비용은 당초 한국측이 전액부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90년대 중반부터 기지이동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나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관련기사5면〉
  • “확고한 안보관이 통일의 길”/노대통령 강조

    ◎6·25 반성,방위태세 만전을 노태우대통령은 25일 『동서화해와 민주화의 전환기적 상황에서 북한의 오판을 막고 민주 번영 통일로 가는 선결조건은 우리 모두가 확고한 안보관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대통령은 이날 하오 서울신문사가 올해로 27회째 주관한 「국군 모범용사초대」에 참가한 1백30명의 모범용사및 배우자들을 청와대로 초청,다과를 베푸는 자리에서 『우리의 국력신장과 국제적 지위향상으로 불안을 느낀 북한이 이성을 잃은 마지막 선택으로 또다른 도발을 획책할 가능성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노대통령은 40년전 이날이 6·25가 발발한 날임을 상기시킨 뒤 『그 당시 북한의 실체를 똑바로 인식,사전에 철저히 대비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우리 모두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지금까지 휴전선에 수많은 군대가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음은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하고 『다시는 6·25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완벽한 방어태세 유지에 만전을 기해야 할것』이라고 당부했다. 이들 모범용사들은 청와대 방문에 이어 오는 30일까지 5박6일동안 산업시설과 고적지관광을 할 예정이다.
  • 「주한미군철수」 팽팽한 찬반공방/미 캐토연구소 「한미동맹」 세미나

    ◎경제력 북보다 우위… 자위능력 보유 철군론/군사균형 감안,2천년까진 어려워 반대론/“군사력 감축을 남북관계의 지렛대로 이용 바람직” 미국의 민간정책연구단체인 캐토연구소가 한국전 발발 40주년에 즈음하여 21일 워싱턴에서 한미 양국의 학자 및 관계자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미 동맹관계­변화의 시기」라는 주제로 가진 세미나에서 캐토연구소측의 주제발표자인 테드 카펜더(대외정책연구부장)와 둑 반도우(수석연구원) 등은 주한미군의 전면철수와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일방적인 폐기를 주장,열띤 찬반논쟁을 촉발시켰다. 카펜더와 반도우는 『미국의 위험부담을 정당화시킬 만큼 한국은 미국에게 경제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한국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전면철군과 방위조약 폐기를 제기했다. 셀리그 헤리슨(카네기국제평화재단 수석연구원)은 『주한미군이 남한에선 민주화를 방해하고 북한에선 군부중심의 강경파를 강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군사전략상으로도 이제미국은 소련을 겨냥한 군대를 한국에 둘 필요가 없다』고 부연했다. 서대숙교수(하와이대)는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는 바꿔야한다』고 말하고 『미국이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한반도 긴장완화에 기여하고 남북한에 공평한 정책을 채택해야할 최선의 시점은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이에대해 윌리엄 테일러(국제전략문제연구센터부소장)는 『한반도의 군사균형이 언젠가는 한국우위로 바뀌겠지만 문제는 그같은 분수령이 2000년 이전엔 올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고 진단하고 『따라서 미국은 이 지역의 군사력 조정에 극도의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임스 그레거(버클리대교수)도 『현재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위험한 환경을 미국이 적절히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성급한 철군론에 제동을 걸었다. 김창수(한국국방문제연구소 연구원)는 『한반도평화정착과 통일촉진을 위해선 남북한군축이 집선무』라고 강조하면서도 『주한미군감축의 규모와 시기설정은 마지막 단계에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고 철군 신중론을 폈다. 오찬 연사로 초빙된 티모시 워드상원의원(민주ㆍ콜로라도주)은 『90년대에 한반도에서 긍정적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감축을 지렛대로 삼아 남북관계 개선정책을 공동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의했다. 한편 데릴 플렁크(헤리티지재단객원연구원)는 한소 수교시기에 대해 『소련이 북한의 영공ㆍ영해를 이용하는 군사적 고려를 중시하고 있는 만큼 몇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분석하고 『북한이 서울과의 긴장완화에 의욕을 보이는 시기가 도래해야만 한소수교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주요논문 요지다. ◇둑 반도우=미국은 의미가 퇴색해 가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폐기해야 하며 주한미군의 철수를 개시해야 한다. 한국은 경제력ㆍ인구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북한을 크게 앞서고 있으며 군사력 면에서도 한국의 우위도달은 시간문제다. 소련및 동구와의 관계개선,중국과의 접근 등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더욱 확립돼 가고 있는데 비해 북한의 고립화는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젊은 세대간에는 반미감정이 확산되고 있으며 한미간의 무역마찰은 친미적 성향의 기업인들과 중산층마저도 미국에 불만을 갖게끔 만들고 있다. 기존의 한미관계는 균형을 잃고 있으며 따라서 한미 군사동맹관계도 더이상 존재이유가 없다. 미국의 자동개입이 보장돼 있는 한 한국은 방위책임의 확대를 원치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방위는 한국인 스스로가 떠맡아야 한다. 북한은 이제 위협적 존재가 아니다. 한국이 미군을 필요로 하던 과거의 상황은 변화됐으며 이제 한반도의 분쟁은 완전히 한국화 돼야 한다. ◇테드 카펜더=한국의 안보는 흔히 미국의 안보이해관계에 대단히 「결정적」인 것으로 얘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묵은 냉전식 사고의 산물이다. 미국에 대한 안보공약의 비용과 위험부담을 정당화시킬 만큼 한국은 경제적으로 전략적으로 미국에게 중요하지가 않다. 한국이 미국의 중요한 무역상대국이라지만 최악의 경우 전체교역이 갑자기 끊어진다해도 미국의 거대한 5조달러 경제에는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며 한국을 중요한 전략적 자신의 하나로 간주케 한 전진배치의 냉전 독트린개념도 중요성을 크게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군사충돌은 남북한간의 지역분쟁이지 세계적인 전략에 영향을 주는 분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받아들여져서도 안된다. 따라서 부시행정부는 주변적 이해관계를 결정적인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되며 주한미군은 모두 철수시키고 한국이 원하든 원치않든,남북한간에 긴장이 있든 없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동결시키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윌리엄 테일러=공산주의의 황혼,그리고 고르바초프의 새 사고에 영향받아 한반도가 군사력 삭감의 인기있는 한 표적이 되고 있으나 이는 기본적으로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한국군은 지난 40년 전보다는 훨씬 강해졌지만 북한은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한국에 비해 여전히 군사적 우위를 누리고 있다. 한반도의 군사균형이 언젠가는 한국우위로 바뀌겠지만 문제는 그같은 분수령이 2000년 이전에는 올 것 같지는 않다는 데 있다. 그 사이에 북한은 그들 맹방의 도움없이도 한국에 대해 기습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것이 거의 모든 정보기관들의 분석평가다. 따라서 미국은 이 지역 군사력조정에 극도의 신중을 기해야 하며 주한미군의 감축이 꼭 불가피할 경우 한국정부와 협의,북한 및 소련측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군사력 감축을 보장받는 선에서 감축이 이뤄지도록 해야한다. 억지력을 멀리서 유지하려는 전략조정은 북한의 오판을 불러올 뿐이다. ◇제임스 그리거=소련은 태평양지역에 관한한 그들의 공격력을 전혀 감소시키지 않고 있다. 그들은 이지역 군사력을 종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태평양함대를 증강시키고 있다. 최소한 단기적으로 볼 때 동북아에 있어서 소련군사력은 미국과 지역국가들의 이익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남을 것이다. 아울러 북한도 장차 모스크바정권의 장래가 어떻게 변하든 지속적인 군사력 증강및 독자적 행동으로 한반도의 불안정상태를 증가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소련의 해공군에 대해 기항권을 제공함으로써 동남아에 대한 우려까지 초래하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그리고 설사 워싱턴이 국제관계에 과격한 변화를 감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태평양지역에서 미군에 대한 대폭 감축이 있을 경우 재단의 위험성은 순식간에 커질 수 있다.
  • 전쟁의 배경과 준비(새 실록 6ㆍ25:상)

    ◎중국 공산화에 고무… 김일성,남침 서둘렀다/동서냉전 한반도 유입이 「비극의 불씨」로/김일성,스탈린 지원 업고 모의 내약받아/애치슨 발언ㆍ미군철수로 「힘의 공백」초래/여순사건등 사회혼란도 평양오판 불러/소,야크기ㆍ탱크 1백대씩 공급… 북선 통치요원 미리 임명(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지금으로부터 꼭 40년전인 50년 6월25일. 그날에 시작되어 53년 7월27일에 휴전된,37개월에 걸쳤던 한민족의 동족상잔을 흔히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우리 근ㆍ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3회에 걸쳐 다시 써보려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제1회에서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준비를,제2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개를,그리고 제3회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성립과정과 그 유산을 각각 다루기로 한다. □약력 김학준 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 □1943년생. 인천출신 □서울대 정치학과,동대학원 졸업,미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미피츠버그대서 「아시아 세력균형에 있어 한국통일」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 □서울대 정치학과교수,미국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일본도쿄대 국제관계학과 객원교수 □12대 국회의원(구 민정ㆍ전국구) □「한국전쟁 발발에 있어 중공의 비개입」등 한반도 분단,6ㆍ25동란 등에 관한 주요 논문다수. 한국전쟁이 50년 6월25일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뿌리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45년 8월15일 일제로 부터의 해방직후에 나타난 한반도의 분단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분단이 없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의 분단에서는 우선 열강의 권력정치라는 국제적 요인이 짙게 깔려 있다. 지정학적으로 볼때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이 지역의 화약고로서 주변 강대국들의 수많은 각축을 불러 일으켰던 곳이다. 한말의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이 그 대표적인 보기들인데 여기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열강은 한반도의 분할을 협상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전략적으로 탐나는 한반도의 「독식」을 위해 이전투구격으로 싸우다가 승부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분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전쟁 모두에서 일본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독식」아래 들어가고 말았다. ○세계의 열강들 “눈독”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그리하여 일본이 한반도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열강의 「식욕」은 다시 한번 자극받게 되었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중화민국도,그리고 당시는 아직 대륙을 차지하지 못한 중국 공산당조차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았으며,영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무력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은연중에 한민족의 완전한 독립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새로운 각축이 예견되는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서,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를 굳힌 미국은 미ㆍ소ㆍ영ㆍ중의 연합국이 함반도를 「공동관리」하게 되면 4강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때 4강에 의한 공동점령 및 공동분할을구상하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4강이 함께 참여하는 신탁통치로 기울어졌는데,「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한민족에게 독립을 주겠다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미국의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라는 원칙적 선언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청사진과 일정표를 연합국이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항복을 접수하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이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닥쳤던 셈인데,문제를 더욱 미묘하게 만든 것은 미군은 한반도에 진공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의 동북부로 진공해 들어오고 있는 숨가쁜 현실이었으니,여기서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절박한 판단에서 북위 38도선에서의 분할점령을 제의했고 이 제의를 소련을 비롯한 나머지 연합국들이 받아들임에 따라 비극의 분단이 이뤄진 것이다. 이 처럼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가운데서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됨에 따라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냉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으며,그것은 한국전쟁의 국제적 배경의 틀이되고 만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그리고 소련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각각 군사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겨레 사이에서 벌어진 이념적ㆍ사상적 대결이다. 즉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을 특징지었던 좌ㆍ우익 투쟁이 해방된 한반도에서 재연된 것이다. 그것은 남한에서는 좌ㆍ우익 투쟁의 형태로,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대결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반도안에서도 냉전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국내냉전」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국제냉전」과 얽히고 설키면서 48년에는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데 이바지하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이 준비되는 과정에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서 「38선분할」제의 48년 8월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곧이어 9월15일 북한에서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때 국가로서 국제적 공인을 받은 쪽은 대한민국이었다. 제3차 국제연합 총회는 48년 12월 대한민국을 국가로서 승인했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북한에 대한 승인은 소련권에 국한됐다. 이러한 국제적 조처들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반도에 국제적 힘의 공백이 형성된 상황에서 남한은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한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을 외치는 가운데 무력충돌의 위험성은 높아갔다. 이때 남한이 방어적이었음에 반해 북한은 공세적이었다. 우선 남한의 경우 미국의 군사적ㆍ경제적 지원은 많지 않았다. 트루먼 민주당행정부는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를 무시했으며,그러한 판단에 입각하여 50년 1월에는 애치슨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남한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 애치슨선언이 소련과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정확히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대한 공식자료는 없으나 대체로 그들을 고무시켰을 것으로 풀이되어 왔다. 국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48년 가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했으며,그것이 비록 진압됐다고 해도 반정부적 분위기가 차차 확산되면서 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정부적 중도세력이 승리를 거뒀다. 안팎으로 문제들을 안고 있는 남한으로서 북진통일론은 대체로 미국에 대해 군사원조를 늘려달라는 외교협박용이거나 국민적 단합을 꾀하기 위한 상징조작용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정부의 1차적 관심은 오로지 안보에 있었다는 사실,즉 『어떻게 하면 북한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남침을 막아낼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다는 사실은 북진통일론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49년 방소때 구체화 반면에 북한의 경우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이 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김일성의 두 차례의 소련 방문이다. 우선 49년 3월의 방문에서 김일성은 「조­소 경제ㆍ문화협력협정」을 얻어냈으며 이것을 계기로 남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워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중국공산당의 대륙제패 가능성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은 북한의 지도층을 크게 북돋웠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듯이 북한이 남한을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중국국민당이 쫓겨가도 미국이 아무런 구원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이 남한을 침략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북한 지도층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이무렵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의 인민해방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 장교들과 병사들을 대거 북한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으며,이 귀환은 50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는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 이미 48년 2월에 발족한 북한 정규군에 편입되면서 북한군의 병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 시점에 곧 50년 2월에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의 모택동과 더불어 모스크바에서 중ㆍ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배후의 두 공산대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지도층을 다시 한번 고무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의 2차 소련방문이 이뤄졌다. 그는 비밀리에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하나의 허점이 되어버린 남한은 크게 부풀려진 풍선과 같아서 칼로 한번 찌르기만 하면 그대로 터지고 말 것이라는 점,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잔존세력이 지하와 야산으로부터 호응봉기할 것이라는 점,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므로 짧은 시일안에 남한 전체를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점 등등을 역설했다. 스탈린은 이미 귀국한 모택동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계획 전체를 놓고 자세히 상의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한 것 같다. 당시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쳤던 내전을 겨우 끝냈기에 국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택동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전쟁계획에 대해 깊이 관여할 수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일성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아래 「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을 일으킨다는 데 반대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김일성은 모택동에 밀사를 보내 남침계획안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알리면서 군사원조 가능한가에 대해 물었다. 모는 군사원조는 어렵다고 대답하면서도 남침계획안에 대해서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동의했다. 스탈린 스스로와 김과 모 사이의 3각대화를 종합한뒤 스탈린은 김의 계획을 지지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겠다는 스탈린으로서도 이것만은 승산이 큰 계획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부흥시킴과 아울러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전승국인 소련을 배제시킨 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으려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해 미국이 개입하기 이전에 남한을 공산화 해버린다면,그것은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친소ㆍ친공의 길로 굴복하게만들 것이며,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위신은 크게 올라가고 소련의 정치적ㆍ군사적 발판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었다. ○6월22일 준비 완료 마침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도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군의 북한점령 3년동안 북한의 사실상의 지배자였고 김일성의 열성적인 후원자로서 북한주재 초대 소련대사가 된뒤 북한을 사실상 「총독」하던 정치장교 출신의 스티코프가 김의 남침계획을 뒷받침하자 스탈린은 50년 봄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급진전시켰다. 그리하여 49년부터 50년 6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공급한 무기는 정찰기 10대,야크전투기 1백대,폭격기 70대,탱크 1백대,중포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원을 받은 북한은 50년 6월 현재 13만5천명의 지상군을 확보했으며 남한과의 접경지대에 대한 정예부대의 배치를 완료했다.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5천명,해안경찰대 4천명,경찰 4만5천명이었고 장비는 불충분했다. 그만큼 남북한의 병력 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당시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비행기ㆍ탱크ㆍ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구체적인 남침준비는 50년 6월14일부터 22일 사이에 마무리된 것 같다. 이 시기에 북한은 남한에서의 토지개혁과 새로운 법령제정에 대한 준비,그리고 남한의 주요지역의 통치를 담당할 행정요원들의 임명을 완료했다. 민족보위성은 6월15일자로 각 사단에 정찰명령 제1호를,6월22일자로 역시 각 사단에 전투명령 제1호를 내려보냈다.
  • 법정증언 30대,귀가길피살/3인조,“불리한 증언했다” 찌르고 도주

    ◎대낮 서울동부지원 앞길서 13일 하오3시10분쯤 서울 성동구 구의동 243의61 서울지법 동부지원에서 법정증언을 마치고 나오던 임용식씨(33ㆍ맥주집경영ㆍ중랑구 면목동 634의44)가 법원 건너편 란다방 앞길에서 20대청년 3명에게 흉기로 온몸을 찔려 숨졌다. 사건을 지켜본 김성진씨(25ㆍ미장공)는 『법원 2호법정에서 열린 형사5단독(재판장 이종오판사) 재판을 방청하고 있는데 임씨가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자 법정 뒤편에 서있던 범인들이 「저××를 죽이겠다」며 불만을 털어놓더니 임씨가 증언을 마치자 뒤따라 나갔다』고 말했다. 범인들은 법원 앞뜰에서 임씨를 불러세워 『왜 합의내용을 어기고 그 따위로 증언했느냐』고 따지다 임씨가 이를 뿌리치고 차도를 건너 란다방 앞으로 피해가자 범인 가운데 1명이 다방앞 노점상 좌판위에 놓여있던 식칼 2개를 집어들고 박씨의 목 등 온몸을 등뒤에서 마구 찔렀다는 것이다. 범인들은 범행후 미리 대기시켜 놓은 임시번호 85821호 쥐색 로열살롱승용차를 타고 성동구 능동 어린이대공원 쪽으로 달아났다. 임씨는 지난 3월20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최종국씨(23ㆍ서대문구 북가좌동 383의1)의 공판에 고소인 및 증인자격으로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 최씨는 지난해 8월초부터 임씨가 경영하던 송파구 방이동 151 「도이치호프」에서 1백50만원어치의 술을 마시고 술값을 주지 않는 등 6차례에 걸쳐 행패를 부려 고소당했다. 임씨는 그뒤 최씨 등의 공갈ㆍ협박에 못이겨 합의서에 동의를 해주었으나 이날 법정증언에서는 『최씨가 자신을 잠실일대의 폭력조직인 「동화파」의 일원이라고 말하면서 행패를 부렸다』고 진술했다. 한편 검찰은 이날 공판에서 최씨에게 징역3년을 구형했다. 수사에 나선 경찰은 범인들이 이날 임씨가 당초 합의와는 달리 불리한 진술을 한데 앙심을 품고 보복범행한 것으로 보고 임씨와 함께 증언했던 「88스탠드바」주인 이규항씨(34ㆍ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 125의10)를 불러 조사하는 한편 「동화파」 일당의 신원을 알아내는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경찰수사결과 「동화파」는 지난 1월5일 두목 윤계남씨(35)가 송파구 방이동 일대 유흥가를 중심으로 조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또 이 일대 술집 등지에서 10여차례에 걸쳐 3백50여만원어치의 술을 마시고 돈을 내지 않는 등 행패를 부려 지난 3월8일 최씨 등 4명이 구속됐으며 이 가운데 전태수씨(22) 등 2명은 지난 4월13일 기소유예로 풀려났었다. 경찰은 이에따라 윤씨와 전씨 등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이들을 쫓고 있다. 경찰은 또 이날 범행현장에서 범인들이 임씨를 찌를때 이를 말렸다는 윤종훈씨(23)가 이 사건해결의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을 걸으로 보고 윤씨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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