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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주 나원리 석탑 발견/통일신라 유물 공개

    지난 96년 경북 경주시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제39호)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등 8세기중엽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2년간의 보존처리를 거쳐 27일 모습을 드러냈다.국립문화재연구소가 당시 석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유물중 이날 공개한 유물은 높이 4㎝ 크기의 금동제 불상을 비롯해 금동사리함·금동 작은탑 4점·목제 사리공(舍利孔) 뚜껑과 작은탑 1점.작지만 원형이 잘 살아난 금동 불상은 발견 당시 순금제로 알려졌으나 보존처리결과 두광(頭光)에 화염무늬가 새겨진 금동제로 밝혀졌다.
  • 청동여래좌상틀·다라니경 필사본등/통일신라 불교공양품 47점 공개

    지난 95년 8월 전남 구례군 화엄사 서오층석탑 보수공사중 탑신 사리공에서 발견된 청동여래좌상틀과 녹색유리사리병,다라니경 필사본,수정옥,청동제 뒤꽂이장신류 등 탑안에 넣어둔 8세기후반 통일신라시대 불교 공양품 47점이 보존처리를 거쳐 16일 공개됐다.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이날 공개한 유물가운데 불상을 떠내는 용범인 청동여래좌상틀은 발견 당시 내용을 알수 없는 금속덩어리였으나 보존을 거친 결과 청동으로 만든 완전한 모습의 용범으로 드러난 최초의 것이 됐다.가로7.1㎝,세로8.1㎝,두께 0.4㎝ 크기에 사각형 판의 이 용범은 청동위에 불상의 모습을 눌러서 음각하는 형태로 앞면에 여래좌상이 연꽃 대좌위에 결가부좌한 자세다.이와 함께 공개된 높이 4.9㎝크기의 타원형 녹색유리사리병은 뚜껑에 청동 못을 부착시킨 것으로 색채와 형태가 아주 빼어나다.또 가로 27㎝,세로 6㎝,두께 3㎝의 종이뭉치로 발견돼 보존처리된 다라니경 필사본은 지금까지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지류유물 가운데 세번째로 탑인이 찍힌 종이와 무구정광다라니경의 다라니 문구를 반복적으로 필사한 것이다.
  • 무령왕릉 출토품 유리동자상(한국인의 얼굴)

    ◎2.5㎝ 크기 마스코트/둥근 얼굴·몸통 마치 눈사람 고대사회에서 유리는 보물과 마찬가지라 진귀한 공예품의 소재가 되었다.본래 서역의 산물인 유리는 중국을 돌아서 들어왔다.대표적인 유리공예품으로는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유리잔 (보물 620호),공주 무령왕릉 출토 유리구슬 등이 있다.그리고 금령총 출토 유리잔과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병(국보 123호)도 명품의 유리공예인 것이다. 이들 유리공예는 거의 5∼6세기 쯤의 작품이다.그런데 인물상이 더러 끼어 있다.백제 두번째의 왕도 옛 웅진땅 충남 공주시 송산리 무령왕릉에서 지난 1971년에 나온 인물상 하나가 유리제품이다.어린아이 동자를 표현 했다.높이가 2.5㎝에 지나지 않는 이 동자상은 오색이 영롱한 색유리구슬 꾸러미들과 함께 출토되었다.왕릉의껴묻거리이고 보면 당시 사람들은 유리를 보물로 여긴 것이 틀림없다. 유리동자는 머리도 둥글고 몸도 둥글었다.머리통이 유별나게 큰 유리동자는 천진스러우면서도 의젓했다.깍지를 끼듯이 합장한 손이 동자를 더욱 의젓하게 만들었다.눈과코,입을 꾸미지 않고 그저 소박하게 그렸다.어린아이가 어린아이를 그린 것처럼 소박해보이는 동자상은 문자대로 나이가 들지않은 어린아이 모습이다.눈오는 겨울날 동네 아이들이 만들어놓은 눈사람이 연상되었다. 그 손톱 크기만도 못한 좁은 공간에 귀만 빼고 얼굴을 그려낸 솜씨가 그런대로 놀랍다.동자상의 용도는 분명치 않다.왕릉에 묻힌 무령왕(재위 AD501∼522년)이나 그 비에게 사랑을 받았던 마스코트였을 것이라는 짐작이 들뿐이다.어떻게 보면 아주 어린 시절에 출가한 동자승같은 인상이 우러났다.그 보배로운 껴묻거리 유물 및 역사를 증거하는 세기적 기록 매지권 등과 함께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리동자상은 유독 불교적 색깔을 드러낸 유물이 아닌가 한다. 얼굴이 보이는 유리공예 중에 영남대박물관이 소장한 구슬을 빼놓을 수 없다.경북 경주시 미추왕릉구역 고분에서 나온 이 목걸이 유리구슬에는 얼굴이 들어있다.그 당시 삼국시대 사람들은 유리를 중국에서 들여왔다.시쳇말로 하면 유리 자체가 고가수입품이었다.특히 5∼6세기 무렵의 유물이많은 것은 중국산 유리가 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사서 「후위서」를 보면 5세기 북위시대에 산서성에서 유리를 생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그러나 유리를 만든 기술자들은 서역 사람들이었다.
  • 국보1호 남대문 그대로/보물 6건 국보 승격

    ◎이름은 「숭례문」… 동대문은 「흥인지문」으로 최근 재지정문제를 놓고 논란을 빚어온 국보 제1호 「서울 남대문」이 그대로 국보 1호로 유지되는 대신 고유의 명칭인 「서울 숭례문」으로 명칭이 바뀐다.또 보물 제1호인 「서울 동대문」도 원래 명칭인 「서울 흥인지문」으로 환원된다. 문화재관리국은 올초부터 일제지정 문화재 재평가사업을 벌여 남대문과 동대문등 국보·보물·사적 7건의 명칭을 바꾸는 것을 비롯,6건의 보물을 국보로 상향조정하고 사적으로 지정된 8개산성과 보물 1건을 지방문화재로 하향조정키로 했다고 28일 밝혔다. 문화재관리국의 이번 문화재 재지정은 일제가 지난 1934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지정한 우리 문화재의 가치평가가 제대로 돼 있지않아 단행된 것으로 문화재위원과 전문위원 34명이 일제지정 문화재 503건을 14개 영역별로 평가조사해 결정했다. 명칭이 바뀌는 문화재는 남대문과 동대문을 비롯,△봉선홍경사비갈(국보7호)=봉선홍경사사적갈비 △해인사장경판고(〃52호)=해인사장경판전 △원각사비(보물3호)=대원각사비 △보광사중창비=보광사대보광선사비 △수원성곽(사적3호)=화성등 7건.또 보물에서 국보로 상향조정된 것은 △익산왕궁리오층석탑(보물44호) △통도사대웅전 및 금강계단(〃144호) △용감수경(〃130호)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140호) △금동관세음보살입상(〃195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241호) 등 6건이며 지방문화재로 하향조정된 문화재는 울산학성(사적9호) 등 일제가 축조한 산성8개와 보물5호 중초사지삼층석탑 1건이다.
  • 화엄사 서오층석탑서 발견 종이뭉치/통일신라 「다라니경」 필사본

    ◎탑도장 목판본 함께 확인 지난해 8월 전남 구례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 133호) 해체공사중 1층 탑신 사리장치에서 발견된 종이뭉치가 통일신라시대때 제작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필사본과 탑도장이 찍힌 목판본인 것으로 밝혀졌다. 문화재관리국은 발견당시 흙먼지로 덮여있던 길이 27㎝,폭 6㎝,두께 3㎝크기의 이 종이뭉치에 대한 보존처리 및 정밀 조사결과 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196호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과 같은 시기인 서기 754∼755년쯤(무구정광대다라니경 경문을 필사하고 탑 모양의 도장을 파서 찍어놓은 탑인목판본등 닥종이 3장을 서로 겹쳐서 만 뭉치인 것으로 확인했다고 29일 발표했다. 이가운데 탑인 목판본은 종이뭉치중 한가운데에서 거의 완전한 상태로 말려있었고 경문 필사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6군데를 부분적으로 발췌해 25번에 걸쳐 반복적으로 필사한 것중 부분적으로 남아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김성호 기자〉
  • 신라 금동사리함 발굴/경주 나원리 5층석탑서

    ◎탑·불상 등 장엄구 갖춰 경북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국보 제39호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에서 서기 7세기경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금동사리함이 발견됐다.이 사리함은 풍경과 영락 등 탑의 장식구가 그대로 달려있는 금동탑과 불상등 지금까지 발견됐던 사리함과는 다른 장엄구를 갖추고 있고 그 보존상태도 양호해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문화재관리국은 월성 나원리 오층석탑 보수를 위해 석탑을 해체하던 지난 15일 석탑의 3층 옥개석 부분에서 가로 세로 각각 32㎝,깊이 25㎝크기의 밀봉된 사리공을 발견,그 안에서 가로 세로 각 15.5㎝,높이 14.4㎝,두께 0.2㎝의 금동 사리함을 수습했다고 18일 발표했다. 문화재관리국에 따르면 발견당시 사리공과 사리함 사이에는 가로 세로 각 28㎝,두께 3㎝의 목판이 끼워져 있었으며 사리함은 뚜껑 윗면에 연화당초문,사방 측면에 사천왕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금빛이 찬연하고 일부에만 푸른 녹이 남아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양호했다.사리함 내부에는 금속제 탑과 나무·종이 등 부식물이 쌓여있었고벽면에는 먹을 갈아 쓴 묵서글씨의 일부가 남아있는 종이편이 붙어있어 X선 촬영결과 사리함안에 10㎝크기의 금동탑 1기,7㎝크기의 금동탑 3기,4㎝크기의 불상 1구가 봉안돼 있음이 확인됐다.
  • 곽재구씨 시집 「참 맑은 물살」 펴내

    ◎최근 3∼4년 작업모아 책으로/소리꾼 할머니의 서글픈 삶 아름답게 묘사 곽재구 시인(41)의 새 시집 「참 맑은 물살」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된다.지난 81년 신춘문예를 통해 「사평역에서」로 등단한 시인이 최근 3∼4년간의 작품들을 모아 펴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15년간의 시작생활을 통해 그는 우리 문단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는 한사람으로 꼽혀왔다.누더기같은 삶의 쓸쓸함에서 결곡한 아름다움을 길어올리는 그의 한결같은 시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않는 시인의 내면풍경을 엿보게 한다. 이번 시집은 시인의 서정성이 남도소리,설화 등 삶에 아직도 얼비치고 있는 우리것에 대한 천착과 맞물리는 모습을 보여준다.태어나면서 한번 들은 강강수월래로 그만 소리의 길에 접어들어버린 진도 할머니나 갈대꽃을 흔드는 진양조의 처연한 만가가락 등에 얽힌 한맺힌 사연이 펼쳐지는가 하면 성수대교와 백화점 붕괴의 현실이 판소리 사설 형식에 담겨 꼬집힌다. (「조공례 할머니의 찢긴 윗입술」중) (「팍큐소전」중) 구겨진 민족의 삶을 찾아 캘리포니아와 용정까지 넘나드는가 하면 시인은 동학의 현장인 전남 고부 메밀꽃밭에선 동족상잔에 순결을 앗기고에 스민을 떠올리기도 했다(「은선리 오층석탑 이야기」) 곡성땅으로 접어들어 인민군으로,국군으로약수물 받으러 온 외지 차량에 사라져버린 한 친구를 통해 우리 현대사의 그늘을 비춰본다(「물봉선 전」). 보잘것 없는 사람들의 흔한 사연을 바라보면서도 시인의 눈은 그러나 시종 따스함을 잃지 않는다. 구차한 삶의 세목에서 향기와 그리움을 읽어내는 이같은 시에는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하는 시인의 소망이 깔려있다.
  • 뛰어난 조탑술(백제를 다시본다:21)

    ◎미륵사 9층탑은 삼국최초의 석탑/무왕때 건립… 동·서 2개로 크고 웅장/정림사탑서 단아한 백제양식 완성/익산산 화강암 황등석을 재료로 사용… 석등 조형술도 발달 최근 발견된 금동용봉련래산향로는 백제의 문화가 부드럽고 온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그러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뛰어난 예술감각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특히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이후는 종래와 다른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탄생시켰고 또 백제의 것으로 완성한 시기이기도 하다. 백제의 문화는 도읍이 위치했던 지역에 따라 나름대로 특성을 가지고 발전을 거듭해 왔다.한강유역에서는 고구려로부터 지니고 온 전통을 바탕으로 독자적 문화창조 노력을 기울인 시험기를 살았다면 금강유역의 웅진(공주)도읍기는 부흥기라 할 수 있다.그 다음 사비(부여)도읍기는 이들 두 시기를 거치는 동안 축적한 문화역량 위에서 가장 백제적인 문화예술을 완성한 동시에 융성의 경지에 다다른 시기일 것이다. ○목탑건축양식 모방 사비시대는 특히 불교미술분야에 해당하는 여러 조형물이 축조되었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형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자료로 화강암이라는 돌을 채용했다는 점이다.그래서 사비시대 백제는 불교미술을 극치로 이끄는 가운데 걸작의 석탑과 석등을 후세에 남겼다.그 대표적 유물이 전북 익산 미륵사터와 충남 부여 정림사터에 있는 석탑이다. 백제인들이 석탑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종래 목탑이 지녔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다시 말하면 화재나 습기에 약한 목재 대신에 석재를 썼다.목재에 비해 다루기가 무척 힘이 드는 돌을 나무 다루듯 매만져 거대한 석탑을 조영했다.고도의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엄두도 못낼 일을 척척 해냈다.그 백제인들이야 말로 지혜로 충만한 사람들이었다. 익산 미륵사는 무왕 재위연간(AD600∼640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다.그 미륵사에 남아있는 거대한 석탑의 잔영은 불가사의한 존재이거니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으로 기록된다.조선시대 저술인 「동국여지승람」은 「유석탑고수장 동방석탑지최」라고 적어 그 규모와 높이가 대단했음을 일러준다.특히 화강암이라는 강한 재질의 석재를 목탑건립 형식에 꿰맞추었다는 사실은 백제인들의 건축기술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륵사 석탑은 목탑양식을 직모내지 번안한 것으로 보면 좋다.그 이유는 우선 낮은 단층의 기단위에 세웠다는 점이 목조건물을 짓는 수법과 같다는데 있다.그리고 초층 탑신에는 엔타시스가 뚜렷한 4개의 기둥을 배치,3칸 규모의 건물을 뚜렷이 재현했다.중앙칸은 내부로 통해 십자로 교차되게 설계했는데 내부에는 방형의 버팀기둥을 세웠다. 목조건물의 의도가 담긴 흔적은 또 있다.2층 이상의 탑신 2칸으로 규모를 축소시킨 가운데 엔타시스가 뚜렷한 동자기둥을 놓았다는 점이 그것이다.덮개돌(옥개석)의 추녀 끝이 반전한 것 역시 목조건축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했다.발굴조사 결과 9층탑이라는 과학적 확신이 나와 동탑은 최근 9층으로 복원되었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첫 작품을 9층이라는 높은 규모로 설계한 지혜가 놀랍다.그 높은 건축물을 석재를 써서 재현한 백제인들의 기술이나 수학적 능력,예술적 조형감각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천년을 하고도 수 세기가 지난 후세에 동탑을 복원하면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백제인들에게 외경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컴퓨터에 의한 설계와 모든 신장비를 동원한 동탑 복원을 통해 백제를 다시 읽었던 것이다. ○조형감각 놀라워 미륵사터 석탑 건립에서 자신감을 얻은 백제인들은 도읍지 사비도성 한복판 정림사에 오층석탑을 건립한다.이 석탑은 초층 탑신 4면에 음각된 소정방의 공적문 때문에 한때 「평제탑」이란 이름이 붙기도 했다.그러나 1942년 발굴조사 결과 「대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는 새김글씨가 든 기와가 발견되어 탑자리가 정림사 경내였음이 확인되었다.또 1979년 조사에서도 이같은 사실이 다시 확인되어 정림사 오층탑으로 탑이름이 굳혀졌다. 이 정림사 오층석탑은 미륵사터 석탑이 보여준 거대한 규모에서 우선 탈피하고 있다.그래서 안정감을 안겨준다.단아하면서도 정제된 아름다운 자태는 백제석탑의 양식적 완성을 이룬 것으로 생각된다.이는 마치 신라가 분황사 모전석탑으로부터 의성 탑리 오층석탑과 감은사터 오층석탑 및 고선사터 삼층석탑을 거쳐 불국사 삼층석탑에 이르러 석탑양식이 비로소 정착되는 것과 같은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나라 석탑양식을 보면 비교되는 측면을 지닌다.시원적 형식의 미륵사터 석탑에 이어 정림사터 오층석탑에서 양식적 완성을 이룬 백제 석탑과 신라 석탑은 사뭇 다르다.왜냐하면 신라는 몇 단계의 실험을 거친 후에 가서야 석탑의 정형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신라보다 한 수가 높은 문화창조의식을 가졌던 것이다.황용사 구층목탑을 건립하는데 백제의 아비지가 초청되었다는 사실도 결국 백제의 우수한 조탑술을 입증하는 예라 하겠다. 이같은 백제의 석탑은 국운이 다 하면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만다.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미륵사터 석탑과 정림사터 석탑 양식에 근원을 둔 백제계석탑이 백제의 옛 영토전역에 건립된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려의 백제문화부흥운동으로 보아도 무방할 석탑양식의 계승은 불과 2기밖에 남지 않은 백제석탑이 우리 석탑발전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고려에 양식 계승 사비시대의 또 다른 독창적 석조미술이 있었다면 바로 석등일 것이다.애석하게도 완형의 석등이 전해지지는 않고 있다.하지만 여러 절터에서 수습된 부재들을 통해 사비시대의 석등 모습을 어느정도 상상할 수는 있게되었다.그 대표적 유물이 익산 미륵사터에서 나온 연화대석,화사석,옥개석이다.연화대석에는 팔각형의 구멍이 뚫려있는 것으로 보아 석등의 기둥 역시 팔각으로 추정된다.따라서 사비시대 처음 건립된 석등의 평면은 팔각의 구도를 취했다는 결론이 나온다.그리고 우리나라 석등의 시원도 미륵사 석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석탑과 석등은 사원건축물,불상과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불가의 조형물이다.지금까지 우리 앞에 우뚝 버티고 있는 까닭은 그 재료가 화강암이라는데 있다.백제인들이 석조미술을 꽃피우기까지는 창의적 예술성이 밑바탕이 된 것은 물론이지만,주변의 자연을 지혜롭게 활용한 것도 큰 보탬이 되었다.지금도 그 유명한 순백의 화강암 황등석이 익산지역 일원에서 채석되고 있거니와 많은석재공장이 산재한다. 어떻든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출현은 삼국 가운데 맨 먼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백제문화로서의 석조미술까지를 되돌아 보게했다.이 기쁨이 크다 할 것이다. ◎동탑 복원/돌 2천7백t·인력 4만5천명 동원/컴퓨터 등 첨단기법 이용… 옛보습 찾아 백제문화의 불가사의는 석조미술에서 발견된다.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터에 남아있는 석탑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돌을 다듬고 맞추어 쌓기를 목수가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듯 하였으니,당시 사람들의 사고로는 경이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 미륵사 석탑을 백제 멸망의 비극처럼 허물어진 가운데 서탑 1기만이 잔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현재 6층의 일부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이 서탑은 본래 9층이었던 것으로 학술조사 결과 밝혀졌다.서탑 옆에는 동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학술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동탑의 기단부와 함께 부재들을 찾아낸 문화재관리국은 이를 근거로 지난 93년 초 본래의 자리에 동탑을 복원한 바 있다. 동탑을 새로 복원하면서미륵사 석탑에 대한 신비가 풀리기 시작했다.우선 현존하는 서탑과 헐어져 나뒹구는 부재들의 수치를 기초로 컴퓨터 처리를 했을 때 웅장하고 아름다운 9층탑의 자태가 떠올랐다.그리고 지난 90년 2월 세부설계를 마친뒤 그해 11월 복원공사에 들어갔다.공사에는 불국사 복원공사 등에서 경험을 쌓은 인간문화재급 석수장들이 모두 참여했다. 석재는 이웃 황등돌을 썼다.한국동력자원연구소가 본래의 석재를 분석,황등돌과 일치한다는 통보에 따라 황등돌을 사용한 것이다.탑이 9층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데 큰 역할을 한 노반석 1개를 비롯,면석·계단석 등 모두 18개는 옛 부재를 그대로 활용했다.이 때에 들어간 돌은 자그마치 2천7백t에 이른다.돌을 다루는 공구는 물론 갖가지 현대장비를 투입하면서도 연인원 4만5천명이 동원되었다.얼마나 큰 대역사인가를 알 수 있다. 새로 복원된 동탑의 높이는 상륜부를 포함,27.8m에 이른다.웬만한 아파트 10층에 해당하는 높이다.47·11평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탑이 건립될 무렵의 영화는 잠시이고,천년이 훨씬 넘는세월을 인고로 버틴 서탑 옆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 불교문화재 12점 보물 지정/대원사 석탑·신흥사 대광전등

    문화부는 대원사 다층석탑 등 석조물 11건과 목조건물인 양산 신흥사 대광전 등 모두 12건의 불교관련문화재를 새로 보물로 지정했다. 문화부는 이 문화재들이 민족문화유산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되어 관계전문가의 조사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난 15일자로 보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다음과 같다. ▲제11 12호 경남 산청군소재 대원사 다층석탑 ▲제11 13호 〃 내원사 삼층석탑 ▲제11 14호 〃 대포리 삼층석탑 ▲제1115호 전남 보성군 소재 봉천리 오층석탑 ▲제1116호 화순군 소재 유마사 해련부지 ▲제11 17호 〃 승주군소재 선암사 대각암부지 ▲제11 18호〃 영암군소재 성풍사지 오층석탑 ▲제11 19호 창경궁내 팔각칠층석탑 ▲제11 20호 경남 양산군소재 신흥사 대광전 ▲제11 21호 경북 상주군소재 김봉리 석조비로사나불좌상 ▲제11 22호 경북 구미시소재 황상동 마애여래립상 ▲제11 23호 전북 남원군소재 개령암지 마애불상군(9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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