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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 출간/제호변경·뿌리찾기 배경

    ◎항일의 역사 등 정리 서울신문이 11일자로 제호를 ‘대한매일’,사명(社名)을 ‘대한매일신보사’로 바꾸면서 새로운 비상의 날개를 편다. 이에 때를 맞춰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항일언론사를 정리한 책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가 출간됐다. 엮은이는 현 서울신문 金三雄주필.251쪽,가격 8,000원.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는 한말 국난기에 태어나 국권수호를 외치다 일제의 강압으로 중절(中絶)된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과 일제하 ‘매일신보(每日新報)’로 개제된 이후의 오욕의 역사도 담았다. 또 해방 후 미군정청에 의해 ‘서울신문’으로 재창간된 과정과 최근 ‘뿌리찾기’ 일환으로 ‘대한매일’로 다시 제호를 바꾸는 배경 등도 담고 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제1장에서 ‘대한매일신보’연구의 권위자인 외대 鄭晋錫 교수(언론학)의 기고를 싣고 있는데 鄭교수는 이 글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민족 언론의 정신사적 원류’라고 강조하고 있다. 제2장은 대한매일신보를 빛낸 4명의 논객(梁起鐸·朴殷植·申采浩·張道斌)의 일제하 항일구국운동과 약력을 정리한 것. ‘부록’으로는 이들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논설기자)로 활동하면서 본지에 게재한 대표적 항일논설 몇편을 원문대로 싣고 있다. 제3장은 지난 93년 서울신문사가 ‘뿌리찾기’ 작업을 벌이면서 서울신문에 연재한 내용을 전재한 것. 이 연재는 초창기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과정,‘한일병합’ 이전까지의 항일 언론활동,영국인 사장 베델(한국명 裵說)의 행적 등을 보도했다. 제4장은 11월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한매일의 역사성과 새 좌표’란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의 전문을 수록한 것이다.
  • 서울신문 뿌리찾기 운동/‘대한매일 새좌표’ 세미나

    ◎언론계 거듭나는 계기로 오는 11일부터 대한매일로 제호를 바꾸고 거듭 태어나는 서울신문은 3일 300여명의 일반 독자들과 언론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한매일의 역사성과 새 좌표’ 학술세미나를 국제회의장에서 가졌다. 이날 세미나에서 주제발표자로 나선 愼鏞厦 서울대 교수는 서울신문이 뿌리로서 되찾아 계승하려는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에 맞서 과감한 언론 구국투쟁을 주도한 민족언론의 주축이었다고 강조하면서 이같은 정신을 서울신문이 제호계승과 함께 연면히 이어줄 것을 당부했다. 한편 金三雄 서울신문 주필은 서울신문의 제호변경과 뿌리찾기는 한 언론사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굴종과 오욕의 역사로 점철된 한국 언론계가 거듭나는 기회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 「대한매일」로 다시 태어나면서(사설)

    ○선도적 공익언론 재도약 서울신문이 ‘대한매일’로 다시 태어난다.새로운 천년을 여는 21세기의 문턱에서 대변신의 힘찬 날갯짓으로 선도적 공익언론의 역할을 다 할 것임을 독자여러분께 굳게 다짐한다. 서울신문은 15일 주주총회를 열어 제호를 ‘대한매일’로,회사명은 ‘대한매일신보’로 각각 바꿔 오는 11월11일을 기해 새모습의 신문으로 선보인다. 우리가 제호와 회사명을 바꾸는 것은 서울신문의 전신으로 국권수호 기치를 드높였던 국내최초의 민족정론지 대한매일신보의 구국정신과 민족혼을 이어 받아 국난극복에 앞장서고 새 민주시대 선진조국을 이끄는 공익언론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한 시대적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그어느때보다 대변혁의 용단(勇斷)을 필요로 한다.끊임없는 변화와 개혁만이 살 길임은 국제통화기금(IMF)사태가 주는 산 교훈이기도 하다.앞으로 ‘대한매일’은 냉전종식이후 전개되고 있는 급속한 세계질서 개편의 시대 상황에 적응해서 국가 민족의 이익과 발전을 뒷받침하는 정론지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것이다. ○구국자주 정신 계승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있듯이 한말인 1904년 7월18일 애국지사 粱起鐸 선생과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첫 구국항일(救國抗日)민족지로 암울했던 시기에 한 줄기 찬란한 민족자존의 빛을 비춰 주었다.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고 의병활동을 집중보도하는 등 한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데 용기있게 앞장섰던 순수민족지가 바로 대한매일신보였다.일제의 강탈로 국호 ‘대한’두 글자가 삭제된채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총독부기관지가 되는 비운을 겪기까지 민족정기를 고양시켜온 불굴의 투혼과 신념은 언론사(言論史)는 물론 전체민족사의 한 페이지를 찬연하게 장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서울신문의 뿌리와 창간정신을 되찾아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꿔 다시 태어남으로써 정체성을 뚜렷이 확립하고 민족과 함께 새 민주시대를 호흡하는 정론지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서울신문은 지난 반세기동안 독재정권을 찬양·미화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탈취한 군사정권의 체제합리화에 굴종했던 부끄러운 사력(社歷)도 갖고 있다.우리가 비통한 마음으로 반성·회개하고 거듭 나려는 이유의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개혁으로 새역사 개척 따라서 우리는 변화와 개혁의 활기찬몸부림으로 구각(舊殼)을 깨는 아픔을 견디면서 확고한 자기 실현의지와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자세로 앞날을 개척해 나갈 것이다.아울러 냉철한 자기비판과 반성을 통해 지난날 오욕의 역사를 자기 혁신과 계발(啓發)의 계기로 삼는 채찍질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제호와 회사이름만을 바꿨다고 좋은 신문이 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제호등의 변경에 따른 대외적 회사 이미지쇄신과 함께 신문에 실리는 기사의 내용과 질(質)을 향상시키는 내실화 노력에도 온힘을 다 할 것이다. 창간 94년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면서 우리의 나라이름인 ‘대한’과 날마다 새소식을 전한다는 ‘매일’의 뜻풀이가 더욱 빛날 수 있게끔 모든 사우(社友)가 한 뜻으로 바람직한 언론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 할 것임을 굳게 다짐하는 바이다.‘우물물은 결코 넓은 강물을 범하지 못한다(井水不犯河水)’는 옛 경구(警句)의 의미를 되새겨 무한경쟁의 국경없는 지구촌시대에서 보다 넓고 보편적이며 합리적인 시각으로 우리와 주변을 돌아볼 것이다. ○새 천년 중심국 도약 기여 거듭 밝히거니와 이제 서울신문은 공익우선과 국난극복의 정신에서 끊임없는 개혁의지와 창의성,새로운 세계질서형성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인식과 비판의 시각이 담긴 새 ‘대한매일’로 다시 태어난다.그리하여 우리나라가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천년의 중심국가로도약할 수 있도록 선도적 공익언론의 역할을 다 할 것임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
  • 건군 50년을 기린다(사설)

    오늘은 국군의 날이다. 예년처럼 단순한 국군의 날이 아니라 건군 50주년과 함께하는 날이라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르다. 우리 군은 지금까지 대남 적화야욕의 기본노선에 변함이 없는 북한집단을 상대로 일초 일각을 다투며 국가안보의 최일선에서,그리고 국익수호의 최후 보루로서 사명과 역할을 다해왔다. 건군 50주년의 슬로건대로 ‘조국과 함께,국민과 함께’해온 우리 군에 대해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건군 50년을 돌아볼 때 우리 군은 무엇보다 이 나라 민주화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지렛대 역할을 했다. 군이 튼튼하게 나라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다원화사회라는 민주주의의 꽃을 피워냈으며,50년만의 정권교체라는 민주주의의 역사적 정치이벤트를 창출하면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다. 우리 군에게는 영광의 길이 있었던 반면 오욕의 역사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부끄러운 역사를 들추기에는 갈 길이 멀다. 우리 군의 가장 큰 현안인 21세기를 지향하는 개혁과 장비 현대화,조직의 효율적 운영,정신전력(精神戰力) 강화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이다. 최근 발표된 ‘98국방백서’를 통해서도 드러났지만 북한은 가공할만한 무기와 병력을 보유하고,이들의 대부분을 전방기지에 전진 배치하고 있다. 지난 28일에는 북한 외무성 부상 최수헌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제2의 한국전쟁 발발 위험이 임박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북한의 무력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때, 우리는 하루속히 첨단 과학장비를 갖추어 철저 대응해야 한다. 그것이 21세기를 지향하는 미래 강군으로서의 선결요건이다. 햇볕정책이나 금강산 관광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도 강군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추진하고 있는 개혁에 군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군의 특성상 보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동안 개선하지 못한 낡은 제도와 관행을 과감히 뜯어고치고,장병의 정신전력을 강화하는 프로그램 개발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가야 할 것이다. 군대는 조국의 방패로서만이 아니라 그동안 사회나 학교가 젊은이들에게 미치지 못했던 교육을 맡는 또 다른 교육기관 몫까지 담당하고 있다는 것도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방과 경제는 나라의 두 축이다. 경제가 살얼음판을 딛고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어렵사리 넘어가고 있는 이때,군 역시 우리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경제군대로서의 몫을 다해야 한다. 마른 걸레를 또 쥐어짜듯 주변에 절약요인이 없나를 살펴보면서 창군 이래 처음으로 국방예산 삭감이라는 나라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아울러 시대도 바뀐만큼 국민의 정부와 함께 민주군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군 내부에 권위적이며 비효율적인 행정체계나 제도가 있다면 과감히 고쳐나가기를 거듭 바란다.
  • 英 씻지못할 ‘오욕의 역사’/고아 등 불우어린이 15만명

    ◎2차대전후 濠 등 강제 송출/대부분 값싼 노동력 전락/피해자들 집단소송 준비 【멜버른 AFP 연합】 영국이 20세기중 15만명 이상의 고아 및 저소득층 어린이들을 호주 등 외국으로 강제이주시키는 용서받을 수 없는 권력남용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호주의 멜버른을 방문중인 영국 의회대표단의 오드리 로즈 의원은 피해 어린이들이 운명에 대한 선택권과 통제권을 빼앗긴 채 고아원과 가정에서 분리됐다고 주장했다. 로즈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영국 정부와 관계기관들이 고아원과 빈곤가정의 어린이들을 ‘구제한다’는 미명 아래 이들을 호주에 강제로 이민시켰다”고 폭로했다. 그녀는 “이는 영국 역사의 매우 유감된 부분이며 진실로 용서할 수 없는 권력남용”이라고 못박고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짐짝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로즈 의원은 어린이들의 강제이주를 인권침해의 폭거로 규정하고 “가난, 결혼파탄, 혼외출생, 유기 등으로 희생된 어린이들을 진정으로 도우려 했다면 강제이주보다는 다른 해결책을 강구했어야 옳다”고강조했다. 또 외국으로 내쫓긴 어린이들 상당수가 ‘값싼 노동력’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로즈 의원을 비롯한 의회의 7인 대표단은 영국 어린이들의 강제 호주이민에 관한 증언을 수집하기 위해 호주의 멜버른, 퍼스, 캔버라 등을 방문하고 있고 7월중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포함한 건의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한편 영국 정부는 이에 대해 공식 사과할 것인지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다.
  • 서울 예원학교 부지 역사공원 조성을/張基元(발언대)

    덕수궁에서 구대법원 앞까지 보도공원이 만들어진데 이어 얼마전 신문로까지 그 연장공사가 시작돼 이 지역의 역사공원화가 한 발 앞당겨지게 됐다. 신문로에 복원중인 경희궁 앞으로 연결되는 이 보도공원에는 유서깊은 정동교회를 비롯 유관순기념관이 있는 이화학당,미 대사관저 등이 있고 현대적문화시설로 정동극장도 있다.특히 중간에 있는 예원학교 뒷편으로 위치한 구(舊)러시아공관은 구한말 격동기 고종황제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현장이어서 이 지역의 역사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아관파천 오욕의 현장 인접 6·25 직후 정동의 국토관리청에서 근무했던 본인은 전쟁으로 폐허화 돼있던 구러시아공관을 보고는 뜻한 바 있어 이 역사현장을 지키고 보존하는데 평생을 바쳐왔다. 왜냐하면 어떻게 한 나라의 황제가 타국도 아닌 자국에서 그것도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여의 시간을 보냈어야 했는가를 생각할때 너무도 한탄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오욕의 역사현장을 보존하여 국민 모두를 각성케하는 교육의 현장으로남겨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당국은 본인의 25년간의 탄원을 받아들여 1977년 이곳을 지방문화재에서 사적 제253호로 승격시키고 일대를 소공원으로 조성해 오늘날 버젓한 모습으로 가꿔놓았다. ○고종황제 동상도 세워야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사적 바로 아래에 위치한 예원학교(이사장 최원영) 부지에 지상 10층의 빌딩을 짓는다는 소식이다. 내년 3월 평창동으로 이전하는 이 학교터 2,700평은 덕수궁과 경희궁을 연결짓는 중앙부분으로 구러시아공관 소공원과 연계시켜 역사공원으로 꾸미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 역사공원에는 수천년을 이어온 우리 왕조전통의 상징으로 고종황제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 그 치욕의 현장이 바로 옆이어서 더욱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러시아공관’이라는 사적의 명칭도 ‘아관파천의 현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국민의 정부가 해야할 일은 IMF극복 말고도 참으로 많다.
  • 양안관계(홍콩 차이나:4)

    ◎홍콩선례 대만적용 싸고 냉기류/중국­“일국양안방식 통일” 고립 가속화/대만­군사력 증강 등 현상유지 안간힘 홍콩 반환을 맞는 북경은 축제 분위기 일색이었다.북경은 “패전으로 빼앗긴 영토를 되돌려받아 중화민족의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역량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며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반면 대북은 “홍콩이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조국의 품에 귀속돼 기쁘지만,사회주의체제로 편입된다는 점이 매우 걱정스럽다”며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봤다.홍콩의 주권반환식 장면을 지켜보는 북경과 대북의 모습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이처럼 극명한 대조를 보였다. 북경과 대북의 상반된 표정은 홍콩이 지금까지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온 덕분에 ‘얻음’과 ‘잃음’이 서로 교차되고 있기 때문이다.양안이 정치적인 노선은 달리하고 있지만,제3국으로서의 홍콩은 지난 80년대 후반 이후 민간 차원의 다양한 교류를 발전시켜 오는 등 어느 나라도 대신할 수 없는 특수한 정치·경제적 교류의 채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중국과 대만주민들의 상호방문을 위한 중간 경유지,교역 중개지,정치·경제상황 변화에 따른 정보수집지로서의 역할… 등등.따라서 주권반환에 따른 홍콩의 정치적 입장변화는 중국과 대만관계를 유지하는 완충지대가 없어지는 탓에 양안관계 유지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수 있는 것이다. 중국정부는 그동안 홍콩의 주권회복이 대만과의 통일문제 해결의 선례가 된다는 인식 아래,홍콩문제를 처리할 때 매우 신중한 자세를 견지했다.대만정부도 자신들의 정치적 장래와 관련된 문제여서 홍콩의 정치·경제적 변화추이와 중국의 통일정책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홍콩의 주권회복에 자신감을 얻은 강택민 국가주석은 이날밤 북경에서 열린 ‘홍콩회귀 경축대회’에서 “홍콩방식의 ‘일국양제(일국양제)’방침에 따라 대만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천명했다.이에 대해 연전 대만 행정원장은 CNN방송과의 회견에서 “모든 사람들은 자유·민주체제 내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우리는 믿는다”며 누구도 자발적으로 사회주의의 통치를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이라고 즉각 중국의 일국양제식 원칙을 거부하고 나섰다.홍콩 반환 벽두부터 양안관계에 냉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양안의 냉기류는 오래 가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홍콩을 중개지로 한 양안관계가 현실적인 이익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만큼 긴박한 상황으로까지 치닫을 가능성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홍콩 반환을 계기로 일국양제의 원칙을 대만과의 통일에도 적용하기 위해 온힘을 모으는 전략을 구사할 방침이다.중국은 ▲홍콩에 대해 일국양제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대만과의 통일 명분을 높이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교류를 강화,홍콩의 중개지 역할도 견지 또는 제고하며 ▲군사력의 현대화와 대만의 고립을 가속화시켜 대만내의 독립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대만은 현상을 최대한 유지한다는 현실노선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열세에 놓여 있는 대만은 섣부른 ‘공격’보다는 중국정부가 일국양제의 원칙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유도,홍콩내의 이익을 지켜간다는 계산인 것이다.따라서 대만은 ▲자체적인 방어력 확보를 위해 우세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 증강에 힘쓰고 ▲홍콩내에서 실시되는 일국양제에 대한 감시 및 비판작업을 강화하는데 노력을 경주할 것으로 예상된다.
  • 홍콩특구/일국양제… 사법권 포함 고도의 자치권

    ◎행정장관이 수장… 중 중앙정부서 임명 156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아온 홍콩이 오욕의 역사를 씻고 1일 0시(한국시간 상오 1시)를 기해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HKSAR·홍콩특구)」라는 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중국대륙에는 없는 이 특별행정구라는 명칭은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되돌려받기 위해 생겨난 것.SAR라는 단어에 「특별하다(Special)」는 뜻이 포함돼 있듯 홍콩특구는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직접 지시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지난 90년4월 중국 제7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3차회의에서 통과된 홍콩특구기본법에 따르면 홍콩특구는 중국의 일부이며 독립적인 사법권을 포함하는 고도의 자치권을 누린다고 규정돼 있다.사회주의 중국으로 귀속됐지만,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받는 덕분에 홍콩특구는 한나라 두체제,즉 일국양제를 유지하게 된다는 얘기다. 홍콩특구의 수장은 행정기관을 총괄하는 행정장관이며 초대 행정장관에는 친중국계 해운재벌 출신인 동건화가 당선됐다.행정장관은 주요 공직자를 중앙정부에 추천하는 것은 물론 각급 법원의 임면권,입법회의 법안 거부권 등을 갖는다.제2기 행정장관부터는 선거위원이 선출한 행정장관을 중국 중앙정부가 임명할 예정이다.
  • 세종탄신 600돌(외언내언)

    지금으로부터 꼭 600년전 오늘,한성부의 북부 준수방에서 정안군 방원의 세째 아들이 태어났다.사가의 이름으로는 이도인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정안군의 집이 자리잡은 준수방이 지금 어디쯤인지 정확히 전하지는 않지만 영추문(경복궁 서쪽문)길 맞은 쪽 의통방 뒤를 흐르는 개천 건너편 일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청운동을 흘러 내리는 한줄기 맑은 물과 옥인동으로 내려오는 인왕산 골짜기의 물줄기가 만나는 삼각지대 근처쯤인 것이다. 세종이 태어났을때 그의 할아버지 태조는 63세였고 뒷날의 태종인 아버지 정안군은 31세였다.4년후 국권을 잡은 아버지를 따라 왕자(충녕군)로 경복궁에 입궐한 세종은 그 18년후 태종의 양위로 왕위에 오른다.이후 32년의 재위기간 동안 한글 창제를 비롯 빛나는 치적하여 조선왕조를 반석위에 올려 놓는다. 세종이 50년을 머물다 간 경복궁에서 그의 탄생 600돌을 기념하는 성대한 경축행사가 15일 펼쳐진다.못난 후손에 의한 오욕의 역사를 거치면서 찢기고 뒤틀린 경복궁이 제 모습을 찾은후 처음으로 대왕의 탄신하례가 옛모습대로 재현되는 것이다.감축할 일이다. 세종은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다.「스승의 날」이 5월15일로 정해진것도 겨레의 스승으로서 세종을 기억한다는 뜻에서 였다. 세종의 위대함을 가능케 한것은 그의 인간적 성실성과 근면함이었다.생애의거의 절반을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흰머리가 날만큼 노심초사하며 나라일을 돌보았다. 깊은 학문적 성취는 물론 시대적으로 앞선 통찰력과 결단력을 갖추었고 중국문화에 경도하지 않은 주체성을 지녔으며 노비까지 아끼는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용을 자처하는 대선주자들의 난립을 보며 세종의 위대함을 반추해본다.
  • “공권력 도전 처벌 강화 절실”/오석홍 서울대교수 국정신문 기고

    ◎경찰인력 증원·장비확충도 시급한 과제 파출소에서 경관이 살해되고 순찰차가 탈취된데 이어 일부 학생들의 과격 폭력시위가 시민들을 근심에 휩싸이게 하는 등 나라 전체가 연일 「공권력 부재」현상에 노출되고 있다.이같은 상황에서 오석홍 서울대 교수(행정학)가 우리사회의 공권력 부재의 원인을 진단하고 공권력 선진화 방안을 제시한 글을 19일자 국정신문에 기고했다.다음은 오교수의 기고문 요약이다. 근자에 경찰을 업수이 여기는 작태가 늘어나고 경찰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까지 증가해 정부 내외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특히 경찰을 공격하는 강력범죄는 우리 사회에 심각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파출소 안에서 경찰관이 살해되는가 하면 일개 술주정꾼에 의해 경찰차가 파손·탈취되기도 했다. 왜 경찰에 대한 공격이 예사로이 자행되는가.경찰은 왜 스스로조차 범죄로 부터 적절히 방어하지 못하는가.오늘날 경찰의 어려운 처지는 무엇으로 부터 기인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세 갈래로 찾아 볼 수 있다. 첫째로,가장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은 우선 경찰의 인력이 부족하고 예산이 부족하다.장비가 적절치 않다. 인력배치 계획과 업무수행 계획이 부적절하거나 허술하다.열악한 처우와 근무조건 하에서 격무에 시달리는 경찰관들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다. 두번째 원인은 부정적인 유산에서 찾을 수 있다.지금까지 나라를 지켜온 경찰의 업적,그리고 진충보국의 많은 희생을 결코 잊을 수 없다.그러나 경찰이 멍에로 물려받은 오욕의 역사를 또한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오욕은 피동적인 것도 있고 자업자득인 것도 있다.피동적인 오욕은 과거 정당성 없는 독재정권,부패·타락한 정권의 지휘하에 놓여 있었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비난대상인 정권이 시키는대로 하지않을 수 없었던 경찰은 정치간여,민주화세력 탄압 등등에 빠져들었다. 또 지난날 정치·행정의 체질화된 부패속에서 경찰만이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직권남용,인권유린,무사안일,그리고 군림적 대민자세도 비난대상이었다.이런 요인들이 경찰의 신망을 손상시켜왔다.경찰의 신망이 입은 과거의 상처는 경찰을 얕보는 작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 수 있다. 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민의식의 결여와 시민의 탈선이나 민주화의 과정에서는 문화지체에 빠진 자들과 일탈자들이 나오게 됐다는 것이다.주권재민의 뜻을 잘못 헤아리고 방종하는 자들은 공권력에 대한 공격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이런 방종과 일탈에 대해 처벌구조는 너무 느슨하다.경관에 대한 어지간한 공격은 사과하고 연줄을 동원하면 그럭저럭 풀려나는 관행이 병폐이다.과거정권에 대한 공격은 가혹하게 다스렸지만 법집행자에 대한 개인적 공격에는 너무나도 관대했다. 경찰의 범죄에 대한 대항력을 강화하고 공권력을 선진화하는 방안은 총기장전 휴대 등 물리적 대응력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경찰의 인력보강,사기진작,훈련강화 등 내부관리시책들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경찰이 과거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미지개선 사업,신망제고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 끝으로 우리 국민은 민주시민의식을 함양하고 공익을 위한 자율규제정신을 길러야 한다.정당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관을 공격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은 엄정하고 강력해야 한다.
  • 역사청산과 나라 세우기/김석준 이대교수·정치행정학(서울광장)

    전두환·노태우씨의 구속기소로 잘못된 과거역사의 청산작업은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지난 한세기동안 오욕의 역사는 일제식민통치와 더불어 시작되고 일제잔제의 청산이 없는 위에 분단국가수립과 동족상쟁,5·16,10·17,12·12,5·17 등 일련의 군사쿠데타로 이어졌다.이처럼 외세와 정치군인에 의해 오염된 역사를 바로잡고자 온 국민들의 여망을 바탕으로 문민정부는 과거청산작업을 추진해왔다.하나회 등 군사조직해체와 안가철거,안기부등 국가정보기관의 문민화,공직자 재산공개와 율곡비리등 부정부패 척결,전 조선총독부건물 철거,관권·금권·행정·흑색선거추방,지방자치 전면 실시,정치관계법·금융실명제·부동산실명제 등 제도개혁의 추진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이러한 정지작업위에 12·12군사반란과 5·18내란사건에 대한 청산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이는 김영삼정부가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한국병 치유」와 「신한국 창조」의 약속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청산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권위주의 질서가 형성되고 기득권세력이 지배세력으로 형성되지 않고는 아무리 잘못된 역사라도 유지될 수 없고 그것이 불법적·폭력적일수록 더욱 광범위하게 물리적·인적 통치구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진민주국가들이 시민혁명이나 전쟁을 통해서 과거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특히 우리처럼 여러차례의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왔던 권위주의체제는 그만큼 청산하기가 쉽지 않고 청산과정에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어쩌면 지금 겪고 있는 일부 정치·경제의 혼란과 불안은 너무 가벼운 것일 수도 있다. 역사청산의 핵심적인 과제는 인적·물적·제도적·문화적 청산작업이다.일제식민통치나 군사쿠데타의 핵심세력들이 정치·경제·사회 등 역사의 중심적인 위치에서 물러나는 인적 청산이 가장 현실적인 과제이다.전·노씨의 구속기소뿐만이 아니라 5·16이후 12·12와 5·17군사쿠데타에 참여하고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청산이 엄중히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으로 물적·제도적 청산작업이다.정경유착의 구조적·제도적 관계를 와해시키고 통치자의 도구로 전락한 법과 검찰·경찰등 국가기구의 자율성을 회복하는 일이다.야당과 사회일부에서 특별검사제를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그리고 문화적 청산은 모든 국민의 의식·정신및 문화생활과 관련되기 때문에 가장 장기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조선총독부 건물과 쇠막대기 철거,일제지명 개칭 등이 일제 청산이라면 정치군인들이 심어온 잘못된 「군사문화」의 청산은 쿠데타역사의 문화청산문제이다. 이처럼 역사청산은 인적·물적·제도적·문화적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각각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때 역사 바로세우기와 나라세우기가 성공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국민과 각계가 나서야 한다.먼저 구세대의 정치인들이 물러나고 새롭고 능력있는 정치집단이 시민과 함께 정치를 주도하는 세대교체가 나라세우기의 우선 과제이다.여야를 불문하고 과거 잘못된 역사의 직·간접적인 책임을 정치지도자들이 지고 스스로 물러나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지역주의를더이상 정권장악의 볼모로 악용하는 죄악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새로 출범한 이수성내각과 김광일 청와대팀은 역사청산과 나라세우기라는 중요한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았다.96년 총선과 97년 대선이라는 목전의 이해관계를 떠나 역사적 관점에서 나라 바로세우기작업을 기획하고 추진해야 한다.구질서와 기득권세력의 조직적인 저항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국민과 역사를 위한 국가운영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과거청산의 소극적인 기능을 넘어 세계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 창조」라는 적극적인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무기력하기만 했던 여당도 이제 신한국당으로 거듭나서 나라세우기의 주체로 서야 한다.당내의 인적 청산과 신진대사를 통해 현시국의 주체적·능동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나아가 정부여당은 협력하여 역사청산과정에서 침체한 경제와 불안해하는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생활개혁작업을 본격적으로 과감히 추진하면서 역사 바로세우기작업을 실천해야 하겠다. 야당과 사회단체도 더욱 적극적으로 역사적인 과업에 주체로 나서야한다.정략적·수단적인 문제보다도 역사적·목적가치문제를 우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국민과 언론도 보다 이성적·역사적 판단과 행동을 필요로 한다.가식과 위선,잘못된 의리나 단식행위와 같은 감성에의 호소,궤변과 사술을 통한 보혁갈등구도로의 왜곡,개혁작업의 폄하와 당리당략적인 비판,막무가내적인 증언거부와 진실호도,일부언론의 재벌기업 비호 등 역사 바로세우기의 장애물은 도처에 있다. 마지막으로 불편을 끼치는 입원환자와 국민에 봉사한다는 심정으로 전두환씨는 단식을 중단하고 떳떳이 병원이 아닌 교도소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최규하·노태우씨는 국민에게 진실을 밝혀 진실이 폭력보다 강하고 영원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역사를 세워야 한다.국민이 스스로 청치와 선거에 참여하고 감시·감독할 때만이 진정한 민주주의가 자리잡을 수 있다.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인류보편의 가치와 질서를 실현하는 나라세우기작업에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될때 정치인,경제인,언론인,검찰등 국가기구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쿠데타 기소(사설)

    「12·12」와 「5·18」기소 전두환 전대통령이 군형법상 반란수괴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되고 노태우 전대통령도 추가기소됨으로써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법적 절차가 시작되었다.우리는 재판과정에서 신군부측이 조직적으로 군사반란을 일으켜 국권을 찬탈한 행위가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엄정한 심판이 내려지기를 기대한다. 사상 유례가 없는 두 전직대통령의 기소는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법과 정의야말로 불법과 불의를 단죄하는 최후의 수단임을 입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이 사건의 단죄는 국가 최고권력자라 하더라도 법을 어겼을 경우 처벌을 받게 된다는 법치주의의 엄존을 확인하는 한편 다시는 그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는 상징적인 경고이기도 하다. 전씨의 기소에 따른 재판의 핵심은 12·12사건으로 국권을 찬탈한 신군부가 5·18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 전개를 통해 5공 정권을 창출해가는 과정이 과연 내란죄에 해당하는 것인지의 법률적인 검증이다.잘못된 역사의 청산을 요구하는국민의 목소리는 5·18특별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고 이 법에 따른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의 수순이 전씨의 기소로 첫 발을 내디뎠다고 하겠다. 광주학살을 규명하기 위해 마련된 특별법에 따라 전씨는 앞으로 내란혐의에 대해서도 추가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겠지만 그 과정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예견된다.우선 장기 단식으로 인한 전씨의 건강악화에 따른 재판 지연,나머지 공범에 대한 수사와 사법처리 수준,특별법과 관련된 공소시효의 위헌심판제청 신청등이 이 사건의 재판 절차상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우리는 이같은 난제를 극복하며 오욕의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오늘의 과제이며 법치주의 원칙에 따라 시시비비가 가려져야 함을 강조한다.전씨는 단식으로 5공의 정통성을 강변할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또 정치권도 재판에 영향을 주는 언행을 삼가 정의로운 법의 판결이 나도록 협조해야 할 것이다.
  • 정국대처「비타협」으로 돌아선 여권/“법대로”거듭 천명하는 속사정

    ◎「역사 바로세우기」 안팎의 도전 적극 차단/“적당주의 흐를 우려” 조기수습론에 쐐기/“총선까지 냉기류 이어질라” 정치권 긴장감 신한국당 손학규 대변인은 14일 최근의 정국대처 원칙에 대해 「법대로」를 거듭 천명했다.전날 강삼재 사무총장도,청와대 고위관계자도 강조한 사안이다. 여권이 새삼스러울 만치 이를 되풀이한 속사정은 다름이 아니다.최근 여권 내부에서는 상반된 시각이 존재하는 듯 했다.하나는 「법대로」원칙이고,다른 하나는 조기수습론이다.상반된 정국해법이 혼재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다.이때문에 즉각 「다른 목소리」차단에 나선 것이다. 조기수습론은 전두환·노태우씨 사건등을 조속히 매듭짓고 여야 대화를 통해 「청산정국」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 요체다.이로 인해 연내 정국해빙,여야 3역회담및 대표회담과 함께 여야 영수회담 등의 성사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다.5·18특별법 및 선거법·정치자금법 개정 등을 둘러싼 정치협상도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조기수습론은 정국을 엉뚱한 곳으로 몰고갔다는 게 여권의 판단이다.먼저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수습 운운하다 보니 「적당주의」내지 「정치적 거래」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전·노씨 등의 구속 정도로 대충 넘어가고,이에 따라 정치권 사정은 물 건너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의구심도 들게 했다.이러한 가지 때문에 「역사 바로잡기」의 뿌리가 손상될 우려가 있다는 절박감이 여권으로 하여금 다시 「옥죄기」에 나서도록 한 것이다. 손대변인은 이날 『사법처리 전에는 정치대화는 없다』고 거듭 확인했다.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나 자민련 김종필총재의 5자회동 등 일련의 대화제의를 일축한 것이다.물론 사법처리가 끝난 뒤의 대화여지는 남아 있지만 연내 가능성은 물 건너갔다는게 대체적인 분석이다.신한국당의 고위당직자도 『검찰의 수사가 연내에 마무리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전망해 이를 뒷받침 했다. 손대변인은 이어 『부정부패와 군사쿠데타라고 하는 오욕의 역사를 바로 잡는 작업은 정치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12·12 및 5·18진상과 노씨의 비자금 내역을 규명한 뒤에야 정치대화가 가능하다』고 부연설명도 했다.그동안 「한다」「안한다」등 말이 많던 정치권 사정이 눈앞에 와있음을 확인해준 대목이다. 이로써 여권의 정국운영 기조는 강성기류로 다시 굳혀지게 됐다.여야를 막론해 「유혈사태」가 점차 현실로 다가오는 셈이다.다만 그 유혈의 농도와 양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권은 긴장하고 있다. 자칫 내년 총선정국까지 냉각된 「청산정국」이 이어질 가능성 마저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 「한국정치 이상과 현실」 동아시아연 세미나

    신한국당의 최형우 의원과 국민회의 정대철 의원이 12일 「한국정치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동아시아연구원(이사장 이명박)주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이날 세미나는 12·12 및 5·18등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대한 특별법제정등 최근 복잡한 정치권의 움직임과 관련해 눈길을 끌었다.다음은 두 의원의 주제발표 요지다. ◎최형우 의원­신한국당/“굴절된 역사 청산… 도덕정치 시대로”/건강 보수·온건 개혁·신세대가 주역 맡을때 한국정치는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5·18특별법 제정과 노태우씨 부정축재 사건을 계기로 정치는 새로 태어나야 한다.역사와 국민이 용서못할 일을 한 사람을 정의와 법이 심판하지 않고서는 결코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없다.이번의 역사청산을 계기로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정기를 살리는 것이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기본 방향이다. 위기는 동시에 기회다.노씨의 천문학적인 부정축재 사건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정치권은 오욕의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도덕정치를확립해가는 새시대를 열어야 한다. 2류정치,3류정치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선진정치를 막고 있는 대표적인 병폐는 「지역할거주의 정치구도」라고 하겠다.국민 정서를 산산조각내고 있는 정치구도는 청산되어야 한다. 해방후 50년동안 총재 한사람에 의해 운영되어 온 「보스정치」로는 정치의 생산성이 높아질 수 없다.정당은 정책정당화하여 고부가가치를 생산해내는 정치를 해가야 한다.마땅히 물러가야 할 양금씨가 여전히 지역주의와 보스정치로 우리의 선진정치를 가로막고 있다. 정당은 민생안전과 민생향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종전의 권력추구에서 민생지향으로 정치가 이행되어야 한다.이제는 작은 목소리도 크게 들어 정책에 반영해가는 정밀주의 정치시대가 시작됐다. 21세기를 담당할 우리 정치의 주역은 바뀌어야 한다.건강한 보수세력과 합리적이고 온건한 개혁세력,신세대 젊은 층이 3두를 이뤄 개혁과 변화라는 마차를 이끌어야 한다. 과거청산은 미래창조를 위한 것이다.과거나 오늘의 문제점을 그대로 지키려고만 하는 것은 수구일뿐 보수가 아니다.진정한 보수주의는 개혁주의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정채철 의원­국민회의/“정국우나영에 야당 협력 이끌어내야”/「5·18」 진상 규명 명확히… 피해자 명예 회복해야 「비자금」과 「5·18정국」으로 대변된 작금의 상황은 크게 네가지의 문제점을 던져주었다.첫째 정경유착이라는 정치문화의 뿌리깊은 부패구조를 드러냈다.둘째 대통령이 퇴임이후를 보장받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비축해야 한다는 방식의 그릇된 정치풍토를 드러냈다.셋째 문민정부라고 불리는 현정권 마저도 권위주의적 비민주적 통치관행에 젖어있음을 드러냈다.넷째 천문학적 선거비용이 소요되는 후진적 정치환경 문제를 드러냈다. 5·18특별법 제정에 반대의사를 천명했던 현정권이 어느날 갑자기 수용한 것은 노태우 정권이 6·29선언으로 국면을 전환했던 방안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5·18특별법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특별검사제를 도입하고,내란 외환 군사반란 이적죄 등 반국가적 범죄행위와 국제인권법상의 집단학살 등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해야 하며,명확한 진상규명을 통해 피해자들의 명예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 검찰은 이원조 금진호씨 등 현정권 정치자금 조달의 핵심자들은 물론 자의 타의로 자금을 지원했던 재벌기업도 불기소 처분했다.이탈리아 정계와 재계의 부정부패를 추방하는 운동,즉 마니 플레테(깨끗한 손)를 주도했던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검사의 『검찰의 철저한 독립과 언론의 성역없는 보도로 수사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수평적 정권교체야 말로 정치혁명이며,정치개혁의 출발이자 완결이다.따라서 김대통령은 후계구도에 연연하지 말고 수평적 정권교체의 토대를 마련할 때 비로소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김대통령은 이제부터라도 국정운영에 제1야당의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한다.국민들은 협력의 시대를 기대하고 있다.
  • “5·6공 완전한 청산을 여야 정치인 정쟁 중단도”

    ◎각계원로 30명 성명 서영훈 전KBS사장,이세중 전대한변협회장,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등 각계각층 원로 30명은 12일 「현시국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고 『각 정치세력은 당리당략을 떠나 5·6공의 완전한 청산과 진정한 민주개혁의 길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발표한 시국성명에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은 민주주의를 염원해온 모든 국민의 승리이며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국민을 무시해온 집권자들에 대한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심판의 시작』이라고 전제,『이들 두 독재자의 구속을 계기로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고 있으나 이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데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그 책임은 무엇보다도 현 정치권에 있다고 지적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5·6공 수구세력과 단절해 12·12 및 5·18 사건 주모자를 단죄할 것 ▲여·야 정치인들은 무책임한 상호비방과 정쟁을 중단할 것 등을 아울러 요구했다.
  • 노씨 구속­육사서 구치소까지

    ◎「2인자 처신」 성공후 「탐욕의 추락」/9사단장때 「12·12」 가담… 권력 전면에/올림픽 조직위장→민정대표→대통령으로 팔공산 기슭.꿈많던 피리부는 소년 노태우는 마침내 대통령의 꿈을 이뤘다.그러나 그가 평생 이루었던 꿈은 이제 한낫 물거품이 됐다. 현재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차디찬 감방.만인지상으로 일국을 호령했던 그는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헌정사상 최초로 구속되는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또 온 국민들의 가슴속에 참담한 상처를 남기게 됐다. 꿈많던 소년시절,명예를 존중했던 육사시절,화려했던 군생활,세계에 올림픽개막을 선언하던 당당한 대통령의 모습은 이제 과거사가 됐다.가난한 시골 면서기의 아들에서 대통령으로,또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죄인으로까지 그는 전락했다.노씨가 예순넷 평생을 걸어온 길은 한 인간이 얼마만큼 화려하게 변신할수 있는가,또 얼마만큼 비참해 질수 있는까 하는 점을 극한적으로 보여준다. ○51년 육사11기 입학 그는 1932년12월4일 팔공산 기슭인 경북 달성군 공산면 신룡리(현재 대구시 동구 신룡동)에서 태어났다.7살때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여읜 뒤 삼촌의 도움으로 공산국민학교를 거쳐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대구공업중학교 4학년때 경북중학에 편입해 졸업한뒤인 51년 육사 11기로 입학하면서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육사는 그의 인생항로를 크게 뒤바꿔놓았다.노씨는 육사에서 동기생인 전두환전대통령,김복동자민련부총재 등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전전대통령과는 군요직과 대통령직을 주고받는 동지로,후계자로 인연을 맺게 된다.김씨와는 59년 김씨의 여동생 옥숙씨와 결혼해 처남 매부지간이 됐다. 노씨는 대위로 서울대사대 ROTC교관으로 지내던 중 5·16을 맞았으며 전두환대위와 함께 하나회를 이끌며 박정희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계기를 마련한다.이후 67년에 중령으로 진급했으며 68년에는 대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했고 70년에는 대령진급을 했다.74년 장군에 진급해서는 전씨의 뒤를 이어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냈다.78년 소장으로 진급해 9사단장을 맡았다.그는 9사단장 시절 자신의 병력을 12·12군사쿠데타에 동원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이미 그때부터 그의 영광과 오욕의 운명이 예고되었을지도 모른다. 노씨는 12·12거사의 주모자였던 전두환보안사령관과 함께 하극상에 성공함으로써 권력의 길을 걷는다.12·12 다음 날인 79년 12월13일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옮겼고 다음해 국보위 상임위원으로 기용되면서 중장으로 진급했다.또 그해 8월 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하는등 권력의 핵심인 신군부의 2인자로 부상했다.마침내 81년 7월 대장계급을 달고 29년 6개월의 군생활을 마감했다. ○전국구로 국회 진출 그는 정무장관,초대 체육부장관,내무부장관을 거쳐 올림픽조직위원장 겸 대한체육회장을 맡는 등 권력의 전면에 등장했다.85년 2·12총선에서는 민정당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했다.초선이며 전국구인 그는 전대통령의 후광으로 민정당대표위원에 올라 본격적인 차기대권수업에 나섰다.이때 그는 최고권력자에게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는 2인자의 처신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써 전전대통령으로부터 신임을 잃지 않았다.친구였던 전씨에게 사석에서도 반말은 커녕 다리를 꼬고 앉지도 않았다.마침내 그는 87년 6월10일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전씨로부터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았다. 그는 87년 12월 대선에서 「보통사람의 시대」를 내세우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와 대결해 유신이후 16년만에 직선제에 의해 뽑힌 대통령이 됐다.이에 앞서 그는 재집권 시나리오의 하나인 직선제 개헌수용등을 「6·29선언」으로 묶어 자신의 것으로 발표함으로써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았고 이는 대통령에 당선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평가된다. 그는 집권에는 성공했지만 88년 4월26일 13대총선은 여소야대로 나타나 정국운영에는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됐다.과거청산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급기야는 자신을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려준 전씨를 국회증언대에 세우고 백담사에 유배시키는 등 평생동지의 관계가 돌이킬수 없는 원한관계로 돌아섰다.전씨의 형과 동생,처남 등 친인척과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됐다.전씨측 사람들은 이를두고 노씨를 배은망덕하다느니,배신자라는 소리가 나왔으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비난에 묻혀버렸다. ○외교치적 긍정 평가 노씨는 재임시 「물태우」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다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과도기에 무난한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특히 북방외교를 통해 소련과 중국등 구사회주의국가들과 수교를 하면서 우리의 외교적 지평을 넓혔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또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여세를 몰아 모두 8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을 열어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이나 남북유엔동시가입을 성취해 내는등 외교적인 치적에는 상당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93년 2월 퇴임후 밝은 얼굴로 연희동 사저로 돌아갔다.그는 한때 보통사람으로 돌아가 이웃의 환영을 받은 전직대통령이었다.전씨와 화해를 한 것도 사저로 돌아간 뒤였다.그러나 퇴임후 불과 얼마 안돼 과거정권의 비리설이 끊임없이 나돌았고 측근들의 비리가 속속 드러나 6공시절 장관들이 수뢰혐의로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그에게도 거액의 정치자금 은닉설이 공공연히 떠돌았고 급기야 금융실명제의 위세는 그를 더 이상 보통사람으로 남겨놓지 않았다. ○「역사적 책임」 망각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역사적 책임을 망각했다.국책사업과 관련한 이권개입,수천억원대에 이르는 비자금 착복은 그가 역사를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그의 불행은 대한민국 역사의 불행이라는 점을 그는 몰랐던 것일까. 그는 지금 무얼 생각할까.그는 대통령후보가 됐을 때 『정상적인 사람이 사는 길이라면 목표를 정해놓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 나가는 것이다.그런 면에서 나는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났다.나는 대장이 되고자하는 목표를 세운 적이 없었지만 우연히 대장이 됐고,장관을 꿈꾸지 않았는 데도 3부장관을 지냈고,민자당대표나 대권후보를 목표로 하지 않았는데도 오늘에 이른 것을 보면 내 운명은 기구하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그러나 그도 「영광은 사라지고 오욕만 남은」지금의 처지에 까지 이를 정도로 기구한 운명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 “일제청산… 이젠 통일에 나서자”/옛 총독부 첨탑 철거 각계 반응

    ◎「식민통치」 응어리 뽑아 가슴후련/민족의 자존·긍지 높이는 계기로/“오욕의 역사 다시는 없어야” 새다짐 일제 식민지 36년,오욕의 역사는 절단되었다.광복50주년을 맞은 15일 식민통치의 상징이었던 구 총독부청사의 첨탑이 철거된 것이다. 이날 상오 「왜의 상투」가 잘려나가던 장면을 지켜본 각계 인사,시민,학생들은 가슴속 깊이 응어리진 분통을 이제야 삭이게 됐다며 감격해 했다. 이들은 그러면서도 첨탑제거의 진정한 의미는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는 것은 물론 다가올 「광복1백년」을 향해 「통일로 미래로」로 온 국민이 함께 전진할때 승화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온도표(68·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부회장)씨=이제야 일제잔재에서 벗어나 완전한 대한민국이 탄생했다는 감명을 받았다.앞으로 우리 민족은 힘을 길러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나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지혜를 기대한다. ▲이태동(서강대 문과대학장)씨=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씻고 민족의 자존심과 긍지를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잘한 일이다.민족정신과 문화는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손기정(84)옹=어서 통일이 되어 고향인 신의주에 가고 싶다.우리의 국력이 세계무대에서 신화를 이룩해 한민족의 기상을 만천하에 알리길 바란다. ▲박한(고려대 농구감독)씨=해방동이로서 너무 늦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일제의 망령처럼만 느껴졌던 구 총독부건물의 철거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진정한 광복인 통일을 향한 첫 걸음이 되기를 기대한다. ▲김기도(민자당 국회의원)씨=광복 반세기만에 참된 광복과 통일의 길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로 받아들인다.첨탑철거를 계기로 심기일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그러나 과거를 무시해서는 안되며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아픈 역사의 교훈도 가르쳐야 한다. ▲박이도(시인·경희대교수)씨=통일된 조국의 세종로광장에서 광복 50주년 축하행사가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기쁠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남과 북의 대결구도를 허물기 위해서는 우리의 국력을 신장해야 한다. ▲신명호(재정경제원 제2차관보)씨=과거 한많은 시대를 마감하고 미래를 향해 재도약할 시기가 왔음을 절감했다.이제는 과거의 반일감정을 청산하고 평화통일을 이루어 자랑스런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양호철(동서증권 부사장)씨=일제의 상징을 없앤 것은 당연한 일로 환영한다.이를 계기로 경제의 질적인 면과 사회복지,군사,외교 등에서도 앞서가는 나라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백승우(백승우·14·성재중1년)군=학교와 어른들로부터 일제가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배웠는데 왜 지금까지 총독부건물을 남겨두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공부를 열심히 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순애(유순애·57·주부·강북구 미아2동 791의1142)씨=늦은 감은 있지만 잘한 일이다.이번 철거작업이 단순히 광복50주년을 기념하는 일회성 행사로 그쳐서는 안된다.우리 생활속에 알게 모르게 남아 있는 일제잔재를 없애기 위해 앞으로도 국민 개개인의 의식개혁과 더불어 체계적이고도 구체적인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우철(21·한민족축전 참가학생·수리남공화국)군=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6살때 이민을 갔지만 아버지에게서 우리역사에 대해 종종 들어왔다.수리남에 살고 있는 7가구의 한국이민 가족들에게 오늘 보고 느낀 것을 빠짐없이 전하겠다. ▲반제만(24·육군사관학교 4년)군=군의 젊은 간성으로서 다시는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는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
  • “이제야 바로 선 민족 정기”… 온국민 환호/총독부 첨탑 철거현장

    ◎“일제오욕 청산” 역사적 드라마에 숙연/경복궁 복원·새 문화거리 조성 선포 그것은 한편의 거족적인 민족드라마였다.일제식민통치의 상징인 구조선총독부 첨탑이 철거되던 날인 광복절 아침 전국은 기쁨을 넘어서 엄숙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이날 광복절 경축식 본행사가 시작되기 1시간 전인 상오9시.경축식 본행사장에 초청인사들이 입장하는 가운데 멜북꾼·횃불수·바라꾼들의 합주와 행진이 시작되면서 구조선총독부 첨탑주변과 국립중앙박물관 주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우리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말살하고 겨레의 생존까지도 박탈했던 식민정책의 본산 조선총독부건물을 철거하여 암울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 통일과 밝은 미래를 지향하는 정궁복원작업과 새 문화거리건설을 오늘부터 시작함을 엄숙히 고합니다』 주돈식 문화체육부 장관의 고유문낭독이 끝날 무렵인 9시21분.국립중앙박물관 중앙입구 좌측에 묵묵히 자리잡고 있던 3백30t급 대형 하이드로 크레인이 「웅∼」소리와 함께 육중한 몸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동시에 첨탑주변에 붉은 조명등이 커지고 국립중앙박물관 옥상 다섯곳에서 폭죽이 터지면서 마침내 4.5m높이의 첨탑 상층부가 들어올려지기 시작했다. ○14분간의 드라마 하이드로 크레인에 연결된 8개의 철줄끝에 두 동강나 있던 첨탑의 윗부분이 대롱대롱 매달린 채 허공으로 솟아오르자 경축식장의 초청인사와 광화문일대에 몰려 있던 시민,그리고 TV생중계를 지켜보던 전국의 국민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68m의 크레인 팔에 매달린 첨탑이 구조선총독부 우측상공을 포물선을 그리며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하자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기 시작했다.경축식장에 입장해 있던 광복회 회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박수와 함께 만세를 외쳤다. 박물관광장 좌측에 마련된 가로·세로 5m의 받침대까지 첨탑이 이동한 거리는 약 1백m.첨탑 꼭대기부터 박물관광장 받침대까지 대각선거리는 70m,수직높이는 58m. ○청산 비로소 실감 웅장한 폭죽과 불꽃놀이가 장관을 연출하면서 첨탑이 중앙박물관광장 받침대에 놓여진 것은 9시35분.원래의 위치에서 박물관광장까지 들어내리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정작 8분이면 족하지만 이날 역사적인 순간을 부각시키기 위해 1백m를 우회해 14분간의 드라마를 연출한 것이다. 정양모 국립박물관장은 『첨탑이 허공에 떠오르는 순간 순국선열들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말로만 듣던 일제청산을 부분적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립기념관 보관 첨탑의 나머지 부분도 하오7시 같은 방식에 의해 박물관광장에 내려졌다.첨탑 철거로 시작된 총독부 철거는 내년 상반기부터 압쇄기를 사용한 기계식 철거방식에 의해 본격화된다.철거된 첨탑은 8월말까지 박물관광장에 전시되며 9월에는 독립기념관으로 옮겨져 후세에 오욕의 역사를 일깨우는 산 교육자료로 소장된다.
  • “반민족청산”…「친일사전」만든다/반민족연구소 97년완간목표 대작업

    ◎오욕 역사 8백쪽짜리 25권에 담아/인명 2만5천명·단체 수백곳 망라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지 어느새 50년. 아직도 우리 생활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한 씁쓸한 현실 탓에 광복 50주년을 맞는 새해 벽두부터 민간차원의 반민족문제연구소는 어느 단체보다도 바쁘게 한해를 열고 있다. 『일제잔재의 명쾌한 정리 없이는 선진화도,세계화도 불가능합니다』 을해년을 맞은 반민족문제연구소의 김봉우(45)소장은 새해인사도 다닐 겨를이 없이 책상위에 수북이 쌓인 친일파관계자료와 친일논문들을 정리하느라 눈코뜰 새가 없다. 적어도 올해안에 숙원사업인 「친일사전」의 골격을 잡아야 한다는 조바심과 사명감 때문이다. 『친일사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민족의 불행이요,수치이지만 해방이후 반세기동안 지속돼온 역사의 치부를 더 이상 덮어둘 수만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김소장의 반문처럼 반민족연구소 연구원들이 민간차원에서 오욕의 친일역사를 정리해 역사의 물꼬를 바로잡겠다는 당찬 포부을 갖고 연구소문을 연 것은 91년. 처음엔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뜻을 같이 하는 대학교수 10여명이 참여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곧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주택가 20평남짓한 공간에 정식으로 연구소간판을 달았다. 또 「친일파99인」「청산하지 못한 역사」등의 관계서적등을 출간해 세간에 친일역사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밑거름을 다지기도 했다. 친일사전 발간은 그중에서도 이 연구소의 설립기반이라 할 만큼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다. 사전은 친일인사와 단체,친일을 부추긴 그릇된 이론및 역사적 평가등을 모두 담아 권마다 8백여쪽짜리 25권의 전집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15권은 인명편으로 구한말 우리의 국권을 일본에 넘겨준 을사오적에서부터 친일관료·경찰·군인등에 이르기까지 친일인사 2만5천명을 망라할 예정이다.또 다른 5권은 일진회·조선임전보국단등 수백여개의 친일단체및 식민사관등 친일이념을 따로 모은 「단체·이념편」으로 인명과 함께 이 사전의 기본골격을 이루게 된다. 나머지 5권은 조선총독부 공식문서와 반민족재판기록,친일인사의 일기·논설등 저작물,프랑스등 외국의 반민족자처벌사례등 1,2차사료만을 따로 모은 참고자료의 성격을 띤다. 현재 자료정리가 한창인 이 작업은 그야말로 우리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침투한 「친일」과 그 이후 반세기동안 이어져온 「친일잔재」에 대한 총정리인 셈이다. 오는 광복절안으로 자료수집과 정리작업을 마치고 그뒤 1천여 필자를 동원해 집필작업에 착수,97년 완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4년동안 친일파와 관련된 자료및 정보수집을 위해 일본정부 문서보관실과 박물관은 물론 국내 산간오지등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한길만을 걸어온 김소장은 『지금 청산에 나서지 않으면 일제잔재청산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는 상투어구 속에 묻혀버리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 지맥잇기(외언내언)

    임진왜란때 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와서 놀란 것은 조그마한 나라에 인물이 많다는 점이었다.그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조선의 풍수가 좋아서 그렇다는 해석이었다.이 많은 영웅호걸들이 뒤에 명을 위협할까 두려운 나머지 이여송은 풍수지리에 밝은 두사충(뒤에 조선에 망명)을 시켜서 명산의 요소요소에 쇳물을 부어 지맥을 끊었다고 한다.사실여부야 알수 없지만 이러한 전설은 전국 여러지방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민족은 일찍부터 땅에 지맥과 혈맥이 있음을 굳게 믿어왔다.고려말이후 성행한 풍수지이의 영향일 것이다. 그래서 지맥을 끊는다는 것은 우리조상들에게 상상할수도 없는 커다란 변고였다. 일제가 이땅에 철도를 부설할때 지맥이나 혈맥을 끊는다해서 도처에서 주민들의 결사반대에 부딪쳤던 기록도 보인다. 해체키로 최종결정된 구총독부건물만 해도 그렇다.식민지 통치의 상징으로 일제가 10년이나 걸려 완공한 이 건물은 조선왕조 5백년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면에,그것도 4백여칸의 전각을 헐어내고 세운 것이다.왕궁의 정기를 끊고 또 국민들의 시야에서 경복궁을 차단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경복궁터는 고려때부터 명당지로 지목되던 곳.일제는 경복궁 경내에 흐르던 명당수의 수로까지 바꿔놓았다. 지난 일요일 보은 속리산 문장대에서는 바위속에 박힌 쇠말뚝을 뽑아내는 작업이 벌어졌다.해발 1천m의 정상 바위틈새에 박혀 있던 쇠말뚝은 일제가 우리나라의 지맥을 끊기 위해 박은 것이라 한다. 몇년전에는 서울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서도 16개의 쇠말뚝을 뽑아 독립기념관에 기증한 일이 있다.당시에도 『나라의 기운을 끊는 풍수적 주술행위』로 판명됐었다.과학적 근거가 없는 「지맥끊기」를 서슴지 않았던 일제였으니 식민지 영구지배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했을 것인가.오욕의 역사,그 편린을 우리는 녹슨 쇠말뚝에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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