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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미 가슴 찢어놓고 어데 가노”/박상열 사회부기자(현장)

    ◎장례참석 경관들 “시위없는 하늘나라로” 『에미 가슴 찢어놓고 혼자서 어데로 가노…』 16일 상오10시.고 김춘도순경(27)의 영결식이 거행된 서울 중구 신당동 서울경찰청 제1기동대 연병장. 영정을 붙들고 몸부림치는 김순경의 어머니 유차분씨(59)의 흐느낌소리가 경찰악대의 진혼곡에 뒤섞였다. 이해구내무장관등 5백여명의 관계기관인사,동료경찰들,3백여명의 시민들은 아들의 주검앞에서 오열하는 유씨와 그 곁에서 소리없이 눈물만 떨구고 있는 아버지 김학용씨(59)의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삼켰다. 오열끝에 탈진한 유씨는 제1기동대 의무실장의 팔에 기대어 마지막 보내는 아들을 위해 기도했다. 『하느님 우리 춘도의 영혼을 따뜻이 보살펴 주시고 앞으로 이 땅에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소서』 유씨는 몸을 가눌수 없는 상태에서도 한동안 기도를 계속했다. 『친구여,꽃다운 나이 그대의 소중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민주주의의 찬란한 디딤돌이 되도록 노력하려네…』 김순경의 가장 친한 친구인 고윤근순경(27)은 고별사를 읽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지여,폭력학생도 저 세상에서는 용서하고 폭력시위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도록 굽어 살펴주소서』 여관구 서울경찰청장의 조사가 끝나자 15발의 조총이 발사되고 마지막 장송행진곡이 울려퍼지며 영결식은 끝났다. 이어 경찰들의 일제 경례를 받으며 김순경의 유해는 태극기로 덮은 붉은 관에 입관되었고 김순경이 밝은 미래를 위해 온갖 어려움을 참으면서 피곤한 몸을 쉬었던 기동대숙소 앞마당을 한바퀴 돌아 대전국립묘지로 향했다. 『또 다시 김순경과 같은 불행한 경찰이 있어서는 안됩니다.젊음을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저렇게 무참하게 생명이 꺾이는 불행은 꼭 막아야 합니다』 눈물 속에 동료를 떠나보내는 제1기동대 이김수순경(25)의 한스러운 탄식이 오랫동안 기자의 귓가를 맴돌았다.
  • 연천 군부대 폭발사고 현장/“참혹”…피범벅된 포주위엔 찢긴 군화만

    ◎결혼 7개월주부,통곡끝에 실신/입소자가족,생사몰라 발만 동동 ○…이날 사고현장에서 승용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경기도 양주군 해천읍 덕계리 국군덕정병원에는 사고가 나자 내·외과등 10여개과 군의관 10여명과 간호장교·위생병 20여명등 모두 30여명이 후송돼온 환자들을 응급처치하느라 분주. 병원측은 보도진들이 몰려들자 장교·하사관등 10여명을 정문앞에 배치,취재기자들의 출입을 통제. 이들은 기자들이 사상자들의 신원을 묻자 『명찰은 물론 인식표가 없어 알수없다』며 함구. ○…이날 사고소식을 전해들은 입소자의 가족들은 국군덕정병원 앞에서 울부짖으며 『생사만이라도 확인해달라』고 애원. 박복례씨(53·여·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2리 944의4)는 하오6시30분쯤 병원에 도착,『차남이 지난 8일 이 부대에 훈련받으러 왔는데 무사한지 모르겠다』면서 발을 동동 구르기도. 박씨는 이 병원 소속 하사관들이 정문앞에서 『여기서는 희생자 명단을 확인할수 없으니 소집부대인 서울 수도군단 포병사령부로 직접 찾아가라』고 하자 발길을 되돌리기도. ○…사고 발생 4시간이 지나도록 사고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자 예비군,군관계자,보도진 사이에서 사고 원인을 놓고 엇갈린 지적이 나오는 등 억측이 구구. 군관계자는 훈련중인 예비군들이 피우다 버린 담배불이 장약에 인화되면서 폭발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훈련중인 예비군들은 포사격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는 예비군들이 포탄관리를 부실하게 하다 사고를 낸 것으로 추측. 예비군 박모씨(28)는 『훈련에 참가중인 예비군 4백여명 가운데 포를 쏠 줄 모르는 보병 출신이 나를 포함해 4분 1가량 된다』며 『포사격에 대한 기본지식이 전혀 없어 예비군들이 사격 당시 포탄을 잘못 다뤄 사고가 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 ○…사고 직후 현장에는 사망자와 부상자들이 뒤엉켜 있는 가운데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 등 아수라장을 이루었다고 현장을 목격한 임재형씨(30·철공업·연천읍 차탄4리)가 전언. 임씨에 따르면 사격장 철책 옆에서 동네 부인들과 나물을 캐던 중 귀가 멍할정도의 『꽝』하는폭음이 서너차례 들린 뒤 매캐한 화약냄새와 함께 부상자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살려달라』며 아우성을 쳤으며 사고를 면한 예비군,현역 사병들이 모포로 사상자들을 감싸기도 했다는 것. ○…동원예비군 사망자 임성택씨(26·예비역 병장·회사원)의 큰형 은식씨(45·인천시 북구 작전2동 863의18 진달래아파트 다동 103호)는 이날 하오 9시30분쯤 텔레비전에서 막내동생의 사망소식을 보고 작전2동 사무소로 몰려와 대성 통곡. 임씨는 『지난 8일 3박4일로 가까운 예비군 훈련장으로 동원훈련을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며 오열. ○…또 사망자 이덕현씨(34·진도인천공장근무·인천시 남구 선학동) 집에는 이씨의 사고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마을 부녀회장 하재길씨(53)등 마을주민 6명이 『사망한 것이 사실이냐』 『시신이 어디있느냐』며 이씨의 죽음을 크게 안타까워하며 발을 구르는 모습. 이씨의 부인 장영미씨(29)는 시댁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남편의 사망소식을 듣고 한때 기절한후 서울 수도병원에 남편의 시신을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시부모와 함께 급거상경. 이씨는 지난해 11월 장씨와 결혼한뒤 7개월만에 변을 당해 이웃주민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기도.
  • 아직도 오열하는 망월동/최치봉 전국부기자(현장)

    ◎“부디 천국서”… 눈물의 추모행렬 17일 하오 광주 망월동 5·18묘역.민주화를 외치다 숨져간 1백 63명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함초롬 젖은 묘역의 풀들은 짙푸른 얼굴로 추모객들을 맞고 있었다. 꽃송이를 들고 줄을 잇는 참배객들의 표정에는 그날의 슬픔이 되살아나듯 비장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들아,너는 정의로운 대한의 남아였다.천국에서 부디 편히 쉬거라』 아들의 영정을 붙들고 분향하던 한 어머니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5·18의 책임자들이 지금이라도 국민앞에 떳떳이 진상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추모객들의 애타는 목소리다. 망월동의 하늘을 뒤덮은 끝없는 오열,그리고 통곡. 묘역의 주변은 13년 전이나 오늘이나 별반 달라진게 없었다. 그러나 정부의 「성역화조치」를 계기로 이제는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가 서서히 싹트고 있었다. 『그동안 언론을 통해 여러차례 광주문제를 접했지만 현장에 와 민주화를 외치다 숨져간 분들의 묘 앞에 서니 광주의 아픔이 피부에 와 닿습니다』 대구에서 왔다는 한 시민의 말이다. 묘역 주변의 나무가지에 걸려있는 참혹했던 당시 현장의 사진은 추모객들의 가슴을 더욱 짓눌렀다.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오열이 복받쳐 차라리 숙연함이 감돌 즈음,「남총련」소속 대학생들의 구호소리가 침묵을 깼다. 13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흐르는 동안 망월동의 5월은 늘 이런 모습으로 거듭돼 왔다. 『가해자를 찾아내 처벌하자는 것은 아닙니다.용서를 청하고 화해를 하려면 누가 잘못을 했는지는 가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남편을 기다리다 계엄군의 총탄에 맞고 숨진 임산부.그 죄없는 24세의 여인이 왜 죽어가야 했는가는 밝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광주 사람들의 정서는 이러했다. 이 길고 긴 논쟁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광주민주화운동 13돌을 하루 앞둔 93년 5월 17일,망월동 묘역에는 숨진 영혼들의 눈물인양 봄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 안전무시 폭파공사의 뒤끝/이석우 사회부기자(현장)

    ◎지반 연약… 구조작업도 애먹어 『23년간의 사고처리반 생활가운데 이처럼 처참한 사고는 처음입니다.사망자 대부분은 탈선의 충격으로 종이를 구겨놓은듯 찌그러진 열차 철판에 끼여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부상자들도 피투성이로 찌그러진 철판틈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사고가 난지 21시간만인 29일 하오2시50분무렵,승객79명의 목숨을 앗아간 부산 북구 덕천2가의 사고지점. 7∼8세가량된 남자어린이의 신체일부를 찾아내고 발전차안에 끼인 50대 승무원의 사체를 철판을 뜯어낸뒤 간신히 끌어낸 것을 끝으로 인명구조작업을 마친 한국해양구조대 구본정대장(49)과 129인명구조요원들은 피범벅이 된 희생자들의 유품을 차에 실으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129응급구조대의 양충효씨(33)도 『웬만한 사고모습엔 이골이 나 눈하나 깜빡않는 사고처리·인명구조대원들도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철판에 짓이겨진채 떼죽음당한 모습에는 제대로 사고처리를 진행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숨짓는 이들 주위에선 초대형 기중기등 각종 중장비를 동원한 철도청직원들이 뚝 잘려 나간듯 30m나 붕괴돼 버린 철로 양끝에서 지난밤에 이어 또다시 차체가 절반 가량으로 찌그러든 객차와 활로 밑으로 곤두박질쳐 있는 기관차를 해체,이동시키는 작업을 한창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암반이라고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부분 토사로 이루어져 있는 철로의 불안정한 지반때문에 적지 않게 애를 먹고 있었다. 『갑자기 지반이 꺼지면서 열차가 전복되는 것을 목격했다』는 이 지역주민인 윤정자씨(35·여·부산시 북구 덕천2동 331의1)는 『이 부근은 상습침수지역에다가 1년이면 수차례에 걸쳐 철로보수공사를 벌일 정도로 붕괴등의 위험이 높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적절한 안전대책없이 폭파작업을 계속하며 철로의 지반을 관통하는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이 억울하고 비참한 죽음에 대한 책임소재를 꼭 가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너진 철로지반밑에 처박힌 기관차와 객차에 대한 제거작업은 이날 하오 늦게까지 진행됐고 부산시 20개병원에 분산돼 있는 사상자들을 둘러싸고 유가족과 가족들의 오열은 더 심해져만 가는것 같았다.
  • 러 보혁 「최후의 결전」 임박/헌재 「비상통치」 위헌판결 파장

    ◎옐친­의회 극한대립… 연방존폐 위기/군부·정·민 사분오열… 유혈내전 우려 옐친 러시아대통령의 비상통치 선언에 대한 23일 러시아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러시아정국은 이제 지금까지 예상됐던 여러 시나리오가운데 최악의 상태로 치닫게 됐다. 러시아헌재는 이날 위헌결정을 내리면서 이것이 탄핵사유로 충분한지 여부는 밝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따라서 이는 러시아정국의 불안을 해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가중시키는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리자마자 보수파의 수장격인 루슬란 하스불라토프 최고회의 의장은 즉각 이 결정을 대통령 탄핵의 근거로 보고 탄핵의결기구인 인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위해 이날중 최고회의 긴급회의를 소집하는 등 탄핵절차 이행에 돌입했다. 이에 반해 옐친진영은 이번 결정으로 대통령이 탄핵에서 면제됐다는 엇갈린 해석을 하고있다.이와함께 지난해 12월 옐친과 인민대표대회사이의 합의사항이 대통령의 권한을 보장한다는 내용의 헌법개정안을 담고있다는 사실을 들어 옐친으로부터 권한을 박탈하는 어떠한 조치도 불법이라고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인민대표대회는 빠르면 이번주말쯤 열릴 것으로 보인다.러시아정세 분석가들은 대의원들의 보혁성향 분포에 비춰볼때 탄핵가결을 거의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러시아정세는 옐친이 위헌결정에도 불구,비상통치를 강행하고 최고회의는 대통령을 탄핵수순을 밟을 전망이다.이 경우 서로 상대방의 정통성을 부정,통치주체임을 내세움으로써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로 빠져들 공산이 커지고 있다. 보수파가 강경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볼때 러시아의 앞날은 옐친대통령의 두 갈래 선택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옐친이 이번 위헌결정을 명분으로 삼아 비상통치를 철회,사실상 굴복하는 길이다.이 경우 그는 명목상의 대통령으로 실추되겠지만 치열한 보혁갈등은 진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써 옐친이 이 가능성을 선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오히려 보다 실현성있는 선택은 인민대표대회의 탄핵을 정면돌파,보수파를 이번 기회에 무력화하는 길이다.다만 이 경우 물리력을 동원해야 한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법률적으로는 인민대표대회의 탄핵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초점이 되고 있는 것은 군부의 동향이다.군은 아직까지는 정치권의 권력투쟁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다.하지만 앞으로 정치혼란이 가중돼 공공질서와 연방의 존속마저 위협받게 된다면 군부는 자연스럽게 정치에 개입할 것으로 러시아문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현재 정치권 못지않게 정치노선과 민족별로 분열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2백50만명에 달하는 정규군과 보안군이 옐친의 개혁정책을 지지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으로 양분돼 있다.따라서 만약 군이 개입할 경우 유혈내전과 통제불능의 혼란을 일으켜 끔찍한 상황을 야기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군부의 분열은 곧 정부의 분열,국민의 분열,각 공화국과 자치공화국사이의 분열로 이어지고 러시아 전체가 사분오열돼 걷잡을 수 없는 유혈혼란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군부의 동향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이때문에 비록 명목상 우려되는 대규모 소요사태 예방차원이기는 하지만 23일 보안부대 병력 1만여명이 모스크바 주위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군의 개입을 위한 신호탄이 아닌가 하는 의혹과 함께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와 함께 러시아사태의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군부의 역할과 개입의 가능성도 점점 커지고 있다.
  • 이인모씨 북으로/42년만에 가족과 상봉

    【판문점=김인철기자】 비전향장기수 출신 이인모노인(76)이 19일 상오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노인은 이날 상오 11시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북측에 인계돼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부인 김순임씨(66)와 딸 현옥씨(44)등과 재회,42년 7개월만에 가족의 품에 안겼다. 이날 중감위 회의실에서 부인 김씨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이노인의 손을 부여잡고 오열했으며 딸 현옥씨는 『아버지』라고 거듭 외치며 혈육의 정을 나눴다.이노인은 부인과 딸의 손을 꼭 잡으며 감격해 했으나 건강탓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이노인은 상오 9시 20분쯤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 도착,중감위회의실에서 북측 의사로부터 간단한 진찰을 받았다. 이노인에 대한 진찰에 앞서 남측 담당의사인 박순규씨는 이노인의 병상기록을 북측 의사에게 전달했다.
  • 지학순주교(외언내언)

    13세기 아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와 그 제자들의 생활에 대한 전설은 14세기 초 라틴어로 쓰인 다음 이탈리아어로 번역된다.그 책 이름이 「작은 꽃」(이 피오레티)으로서 이탈리아 문학사상 걸작의 하나로 꼽힌다.거기서부터 「작은 꽃」은 성자나 위인의 일화풍 전기를 총칭하고 있다. 지학순주교가 12일 하느님 곁으로 갔다.그는 「정의가 강물처럼」 「내가 겪은 공산주의」등의 저술을 남긴 사제이지만 이제 「작은 꽃」을 펴내 드리는 것이 어떨까 생각케 한다.그만큼 지주교는 우리시대가 안은 고뇌의 역정을 살다가 간 사람이다.그의 생애에는 이 시대의 아픔이 투영된다.오열하는 피땀의 자국이 어린다.항상 억눌린 사람의 편에 있었던 사람 지주교.오늘의 우리 사회가 민주발전을 이룩했다고 한다면 그 밑바탕에는 지주교의 외침과 눈물이 깔린다.「작은 꽃」을 펴낼 만하다는 뜻이 거기에 있다. 85년 남북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 방북했던 그는 분단후 처음으로 북한에서 미사를 봉헌한 남한쪽 첫 신부가 되었다.그때 그는 누이동생을 만난다.남매는 부둥켜안고 울었지만 누이동생은 옛날의 누이동생이 아니었다.아니,옛날의 누이동생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 입으로 나오는 마디마디는 누이동생의 말이 아닌 체제의 말이었다.『오빤 죽어 천당가겠다니 돌았구먼요』했던 누이동생.지주교는 그 천당으로 간 것이다. 북한을 다녀온 후의 지주교에게서는 온건의 비중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그는 투쟁 일변도로는 시대의 아픔을 수습할 수 없다면서 화해를 주장했다.가진자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면서 경고도 하고 있다.나만 옳다고 하는 배타주의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병폐라고 지적한 것도 결국 화해의 정신을 널리 펴나가자는 뜻이었다. 그는 영면하는 순간까지 누이동생과의 해후를 잊지 못했을 것이다.그것이 마음의 상처로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염원했던 민주발전의 결과로서 탄생한 새정부를 보고서 눈을 감았다.그 점에서는 행복한 죽음이기도 하다.
  • 고 조규영기자 회사장 엄수

    지난달 31일 순직한 스포츠서울 편집부 고 조규영기자(39)의 영결식이 2일 상오 8시 유가족과 회사임직원 조객 등 1백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신문사장(장례위원장 윤형섭사장)으로 서울 동대문구 회기1동 경희의료원에서 치러졌다. 영결식이 끝난 뒤 고인의 유해는 식장을 출발,고인이 근무하던 서울 태평로 본사사옥에 들러 사우들로부터 명복을 비는 마지막 묵념과 배웅을 받으며 장지인 충북 충주 공원묘지로 떠났다. 고인의 유해는 이날 하오 1시께 장지에 도착,유가족과 동료들의 오열속에 영원의 안식처에 묻혔다.
  • 첼리스트 전봉초씨(이세기의 인물탐구:11)

    ◎절교의 기량… 무대연륜 50년의 “악장”/「첼로의 선봉」답게 작품특성 능란하게 표현/음악에 대한 사명감으로 모든 활동 적극적/국내초연작품 즐겨 연주… 청중에 싱싱한 감동 전달 바다밑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깊고깊은 암청색 선율,원로연주가 전봉초씨의 첼로언어는 날이 갈수록 그 깊은 맛을 더해 그가 켜는 베토벤은 명철의 사색처럼 심오하고 그윽하다. 작품이 지닌 특성과 표정을 능란하게 구사하며 단순한 곡 해석만이 아닌 「낙장」의 대우로 존경받는 위치다. 무대에 선지 50년.일본 동경제국음악학교 시절 요미우리(독매신문)가 주최한 전일본 신인 선발연주회에 학교대표로 참가한 것을 첫무대로 그는 지금까지 독주회 20회,서울실내악회·실험악회·서울트리오와 그가 창단해서 이끌던 바크 합주단등 실내악연주 1백회이상,시향·KBS교향악단 협연 해외연주 등등 생생한 음악의 발자취가 산적해 있다. 돌아보면 스포트라이트에 점철된 세월,수천관중과 뜨거운 박수갈채와 꽃다발 속에서 슬픔이나 좌초없이 그는 순조로운 항로를 거쳤고 그래서 그의 인생과 예술은 탄탄한 금자탑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순조로운 예술항로 그는 음악의 연륜만큼이나 무대를 알고 청중을 안다. 악기를 얼싸안고 무대에 서는 순간 객석의 분위기로 심상을 꿰뚫어 청중의 정곡을 이미 움직인다. 그가 연주에 임하는 자세는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문학청년과도 같은 미세한 열기가 느껴진다.그러나 그 정열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아닌 안으로 감춘 진주빛 화염,진지하고 결곡하게 테마의 핵심에 파고든다. 얼핏 보기엔 첼로라는 악기가 갖는 철학성을 내보인 듯 하지만 그의 언어는 얼마든지 풍성하여 불꽃같은 테크닉이 숨막히게 전개된다.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애틋한 애정이 전편에 넘쳐 그의 연주는 언제나 젊고 싱싱한 감동을 던져준다. 그는 또 첼로의 선봉답게 한국초연의 레퍼토리를 즐겨 선택한다. 61년 당시로선 획기적인 「현대음악의 밤」을 열어 힌데미트·드뷔시·베버 첼로소나타를 초연했고 65년엔 베토벤만을,그 다음엔 랄로와 생상스,10년전 독주회에서도 데르블로아「조곡2번」,바하 「아리오소」,포레 「비가」등 짧으나 까다로운 곡으로 「첼로만이 갖는 절교의 표현력으로 아름답고 우아하게 노래한다」는 평을 듣고 있다. 바이올린 박민종,피아노 정진우,첼로 전봉초등 서울대교수들로 이루어진 서울트리오는 5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초연곡을 정기연주하면서 한때는 하이페츠와 루빈스타인,피아티고르스키의 「백만불트리오」에 비유되는 황금기를 누렸고 조로가 심한 편인 음악계에 노익장 과시로 후배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는 어떤 시점에서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음악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으로 자신의 위치에 합당한 모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다고 할 수 있다 . 87년 일본 교토회관 독주회이후 만5년만인 오는 4월29일(호암아트홀)음악생활 50주년을 기념하는 제21회 독주회를 앞둔 노대가의 심경은 요즘 착잡하기 이를데 없다. 43년 일본데뷔 이후 올해가 꼭 50년이 된다고 해서 후배·제자들이 마련해준 자리다. 그로서는 인생을 돌아보고 마무리하는 어쩌면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그래서는 아니지만 이번 연주는 여러가지 점에서 뜻깊은 의미를 지니게 될 것 같다.그는 연주때마다 앓던 심한 열병이 이번에는 전처럼 행복한 것만이 아님을 알고 있다. 「연주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갈고 닦은 음악인들의 종교의식」이며 그의 연주는 신에 대한 고백성사,청중은 그의 고백을 듣는 사제의 입장이고 그는 『솔직하고 진실하게 고통과 고뇌와 슬픔과 갈등을 샅샅이 드러내 보일 것』이라고 말한다.그리고 이번 고백성사는 어느때보다 숙연하리라는 예감이다. ○중3때 첼로 첫 연주 전봉초씨는 평남 안주에서 커다란 잡화상을 하던 전리순씨와 이해원여사의 아들 4형제중 막내로 태어났다.집안은 풍족한 환경으로 그는 맹산 북창국민교시절 형(전화황씨)의 친구이던 김동진씨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숭실중 2학년때 평양방송국 개국기념 프로에나가 마스네의 「타이즈의 명상곡」을 연주했고 3학년되던해 첼리스트 김태연씨의 첼로연주회에 갔다가 「첼로의 남성적인 깊은 소리」와 「혼의 선을 켜는 듯한 음색」에 빠져 첼로로 바꿨다.그당시 상황에선 음악을 마음껏 공부하기란 쉽지않았으나 일본화단의 거봉인 큰형 전화황씨의 도움과 격려로 그는 일본에 유학할 수 있었다. 유학시절은 찬란하고 화려했다.같은 유학생인 박민종 정희석 윤기선씨등과 한국인만의 4중주단을 조직,영친왕 저택에 드나들며 연주를 한적도 있고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NHK교향악단 전신인 일본교향악단 도쿄송죽관현악단 수석주자로 활약,스승인 오무라(대촌묘칠)교수의 도움으로 강제 학병징집을 피해 만주 신경교향악단으로 건너갔다가 해방후 월남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단 한순간도 음악과 관련되지 않는 생활은 찾아볼 수 없다.지금도 1년 3백65일중 그는 2백일쯤은 음악회에 들른다.크고작은 음악회 모두는 그의 동료·후배·제자들의 행사이기 때문에 그는 이를 빼놓지 않는다. 또 친구들을 좋아해서 여러모임을 가지고 있고 어떤자리에서나 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예술원 회원중 술마시는 사람끼리의 수요회,또 첼리스트중 60세이상인 첼로동문회 OMC(Old Musician Club)등은 한달에 한번씩모이는 친목 모임들이다. 그는 검은 베레모에 벨트를 맨 더블보턴의 바바리코트가 잘 어울리는 「영국신사」지만 그래서 사교적이고 활동적이고 실천적이나 불의를 참지못하는 까다로운 성격탓에 「면도날」이란 별명을 듣고 있다. ○사교적·활동적 성품 79년 서울대음대학장시절 문교부가 예체능계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예능계 대학교수들이 개인레슨을 함으로써 부조리를 빚고 있는 점」을 지적,「개인레슨 엄단」을 발표하자 같은해 「음락세계」4월호에 「음악의 조기교육에는 실력있고 경험이 풍부한 대학교수가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예능계 대입공동관리제 실시에 앞서 문교부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있는가」를 조목조목 물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는 연주가이자 대학교수·음협이사장·예총회장을 두루 거쳤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첼로로 활약하는 1백여명의 직계제자,훌륭하게 키운 그의 3남2녀중 장남(성일씨)콘트라베이스 차남(성환씨)바리톤·효성여대교수,장녀(미영씨)피아니스트·교원대교수 차녀(소영씨)첼리스트,그리고 3남(시문씨)만이 공대졸업후 금성연구소에 근무하는등 안팎으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인생을 승리한 것도 성취한 것도 아니며 때로 심한 비바람에 시달렸어도 음악의 열정 때문에 그것이 비바람인줄 짐작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러기전 82년 낙단4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에서 그는 이런 말을 한적도 있다. 『나이를 먹으니까 공수래 공수거,세상사 여부운,이른바 「모든 고통을 낫게하는 감미로운 죽음」이 다가올 때까지 오로지 첼로에 전념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살고싶다』고. 그리고 두주일전인 지난 12월,그는 사랑하는 장남을 그의 눈앞에서 여의었다.시카고에서 콘트라베이스로 활약하던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한동안 망연자실,슬픔을 감추려할수록 그의 눈가에 통한이 서려 보는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인생이란 왔다가 가는 것.그가 나보다 먼저 갔을 뿐」 담담히 체념하면서도 떨리는 가슴을 주체치 못하여 그의 억양에는 처연한 오열이 실려있다.한 아들의 아버지이기 전에 예술가의 의연함과 긍지로 이를 이겨내려 애쓰지만 그의 그런 허탈감은 부모로서의 아픔일수밖에 없다. 우리 음악사에서 첼로선봉으로 커다란 획을 긋는 노대가의 이번 연주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연주일수도 있다.이번 연주에서 그는 평생동안 사랑해마지 않던 베토벤의 다섯개의 첼로 소나타와 바흐 무반주의 첼로조곡,바르토크의 루마니아 포크댄스를 암보로 들려준다. 아들의 영혼을 가슴에 묻은 첼로의 선율은 좀더 짙은 암청색을 띤채 비감을 정제시킨 관조의 경지를 보일수도 있다.그리고 첼로와 피아노가 주고받는 대화는 부자간의 사연인양 그날의 객석에 장탄식으로 여울질지도 모른다. □연보 ▲1919년3월18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 ▲39년 평양 숭실중 졸업후 도일 ▲43년 일본 동경제국음락학교 졸업(Violin이인호,김동진,Cello김태연·대촌묘칠사사)재학중 일본교향락단 동경 송죽관현락단단원 ▲43∼45년 만주 신경교향락단단원(각부 수석진자로 구성된 현악4중주단 활동) ▲45년 지방순회연주중 북안에서 해방맞아 다음해 월남 ▲46년 고려교향락단 단원▲47년 서울교향락단 수석주자(서울실내악협회 창단 멤버) ▲48년 배재강단에서 제1회 첼로독주회이후 20회 ▲50∼53년 부산 피란지에서 실험락회 연주 20회 ▲52년 현제명씨 권유로 서울대 예술대 음락부 전임강사 ▲53년 서울트리오(첼로 전봉초 피아노 정진우 바이올린 박민종)창단 ▲54년 서울대 음대 학생담당 학장보 ▲58년 대한민국 문화사절단 일원으로 동남아 6개국 순회연주 ▲60년 제8차 IMC(국제음악회의)총회 한국대표로 파리UNESCO회의참석(동양에 있어서의 서양음악 주제발표) ▲65년 서울 바로크합주단창단(제21회정기연주후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에게 바통넘김) ▲67년 음악연주 25주년기념 KBS교향악단과 첼로협주곡 협연 ▲72년 서울대 4중주단 창단 ▲76∼79년 서울대 음대학장(재임시 동양음악연구소 창설) ▲79년 전봉초 교수 화갑기념 첼로오케스트라 연주회(국립극장대극장)지휘 ▲82년 낙단생활 40주년기념 전봉초첼로독주회 ▲84∼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 집행위원 ▲85∼88년 제13∼14대 한국음락협회 이사장 ▲85년 제21차IMC총회 한국대표(동독 드레스덴 기조연설) ▲87년 일본 교토 일한친선협회초청 첼로독주회(교토회관),제22차 IMC총회 한국대표(브라질) ▲88년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예총)회장 ▲91년 사단법인 아세아청소년 교향악단 한국지부장 ▲현재:사단법인 코리안심포니 이사장,사단법인 국제음락애호가협회 한국본부이사장,재단법인 안익태기념사업회 재단이사장,전쟁기념 사업회이사장,예술원 회원,이복련여사와 3남2녀. 5월 문예상 본상,대한민국예술원상,금관문화훈장,국민훈장동백장 음락의 주변,농현50년 낙수
  • YS 금의환향… 온동네 축제물결/대선후 첫 귀향·축하연 이모저모

    ◎“큰닭섬에 경사났네” 농악대 나와 환영/5백명 초청,가락동연수원서 자축연 김영삼 대통령당선자는 22일 「금의환향」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하루를 보냈다. 김당선자는 이날 대선후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인 거제도와 마산을 방문,부친과 동네어른들에게 당선인사를 했다. 이에앞서 그는 이날상오 큰 꿈을 키웠던 모교인 서울대 입시현장에 들러 대학관계자와 학부모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교육대통령론 피력 ○…김당선자는 이날 수험장주변의 혼잡을 피하기 위해 수험생들의 입실이 끝난 9시쯤 서울대에 도착,김종운총장으로부터 입시준비현황 등을 설명들은 뒤 『젊은 학생들이 마음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예의 「교육대통령논」을 피력. 김당선자는 입시경쟁률과 도서관실태 등에 관심을 표명한 뒤 『이제 「민주대 반민주」구도는 종식되고 새로운 선거문화도 정착된 만큼 국민 모두가 신한국건설을 위해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 김총장은 『서울대 동문중에서 첫 직선대통령이 나와 참으로 기쁘다』고 축하인사. 이어 김당선자는학부모 5백여명이 기다리고 있는 학생회관 식당에 들러 『1년동안 자녀들과 함께 고3병을 앓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꼭 합격하길 바란다』고 위로해 학부모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기도. ○모친묘소서 눈시울 ○…김당선자는 이날 대선후 처음으로 부인 손명순여사와 함께 고향인 경남 거제를 방문,선영에 성묘하고 귀경길에 마산에 있는 부친 김홍조옹을 찾아 인사. 김당선자는 이날 상오9시40분쯤 성남 서울공항을 출발,대통령 전용기인 공군2호기와 공군헬기를 차례로 이용,고향인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 도착,곧바로 모친과 조부모 백부 묘소를 찾아 헌화 참배. 특히 김당선자는 모친 박부연여사의 묘소에서 봉분잔디를 고르며 대통령당선통지서를 바치고 눈시울을 붉힌뒤 한동안 만감이 교차하는 듯 고향 앞바다를 내려다보며 묵상에 잠기기도. 또한 부인 손여사와 김당선자의 여동생들도 『어머니 오빠가 대통령이 돼서 지금 찾아왔습니다』며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오열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김당선자가 생가가 있는 대계마을에 이르자 주민들은 「큰 닭섬에 경사났네 김영삼대통령」「김영삼대통령당선 경축」「대도무문의 크신 뜻을 통일의 시대로」등 플래카드와 애드벌룬을 내걸었고 농악대를 동원,수기를 흔들고 「대통령 김영삼」을 연호하는가 하면 「나의 살던 고향」을 연창하는등 온통 축제분위기. 주민들의 환호속에 생가에 도착한 김후보는 지역유지및 주민대표 20여명과 오찬을 함께 하며 주민들의 숙원사업및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거제발전에 관심을 표명.이어 김당선자는 귀경길에 마산 회성동으로 부친 김홍조옹을 찾아 대통령당선통지서를 내보이며 『아버지 이것을 타기 위해 40년이 걸렸습니다』고 인사한뒤 부인 손여사와 나란히 큰절. 마산 부친댁 인근주민 3천여명이 몰려나와 꽹가리와 북을 치며 김당선자의 마산방문을 열렬히 환호하자 대문 입구로 나와 즉석 연설. ○연예인 대거 참석 ○…김당선자는 이날 하오 김종필대표 정원식선대위원장을 비롯한 소속의원·당직자·선대위관계자등 5백여명을 「정권창출의 산실」이 된 가락동 중앙정치교육원으로 초청,자축연을 베풀고 당선사례. 김당선자는 인사말을 통해 『이제 우리 앞에는 국민 모두를 화합을 통해 하나로 묶고 우리 경제를 되살리는 과제가 놓여 있다』면서 『정권창출의 주역인 우리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면서 신한국건설을 위해 함께 뛰자』고 당부. 특히 이날 행사에는 김후보의 대선유세에서 큰 역할을 했던 「큰 나래회」소속 연예인들이 대거 참석.
  • 안혁·강철환씨가 말하는 참상(요덕15호/북한정치범수용소:3)

    ◎죽어가는 사람들:나/남편 귀순한뒤 끌려온 신아주머니/오길남씨 부인,두딸과 생지옥 생활/수차례 자살기도 실패… 눈물의 나날 87년 11월말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부인과 어린 두 딸이 독신자숙소 바로 앞에 있는 가족세대숙소에 수용됐다. 남한에 귀순한뒤 뒤늦게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지난 4월 독일주재 우리 대사관을 통해 귀순한 거물간첩 오길남씨의 부인 신숙자씨(45)와 어린두 딸 혜원(11)규원(8)이었다.수용소 사람들은 그녀를 신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신아주머니는 수용 첫날밤부터 목놓아 울었다. 『어린 딸들과 이곳에서 짐승같은 생활을 하다 죽게 되다니…』 『왜 내가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하나…』 신아주머니의 구슬픈 하소연과 울음소리는 밤새 몰아치는 삭풍속에서도 또렷하게 귓전을 때렸다.그러나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속에서 온종일 작업을 하느라 녹초가 된 독신자숙소의 사람들은 아무도 울음소리에 신경쓸 처지가 못됐다.나는 울음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뒤척이다 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튿날 새벽녘 간밤의 울음소리와는 다른 여자 아이들의 날카로운 울부짖음에 놀라 눈을 떴다. 심상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나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판자출입문을 열고 뛰쳐 나왔다.울음소리는 신아주머니 집에서 들려왔다.20여m를 단숨에 달려갔다.방문을 열어 젖히자 이불보를 말아 만든 끈에 신아주머니의 목이 매달려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어린 두딸이 어머니의 다리를 붙들고 어쩔줄 몰라 울부짖고 있었다. 재빨리 끈을 풀었다.다행히 신아주머니는 아직 숨이 붙어있었다. 이불위에 눕힌뒤 팔다리를 열심히 주무르자 신아주머니는 30분쯤 지나 의식을 되찾았다.신아주머니는 자살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알아 차리곤 또 다시 발버둥치며 울었다.밤새 울어 퉁퉁부은 눈으로 독신자숙소에서 달려온 남자들을 원망스럽게 둘러보기도 했다. 자살극이 보위부원들에게 알려져 그녀는 1개월동안 특별감시대상으로 지목받아 수용소내 특별 감옥에 격리 수용되는 고초를 겪었다.그러나 그녀는 진짜로 죽기를 작정한 듯 그 후에도 몇차례 더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주위에서 『어린 딸들만 두고 혼자 죽어버리면 어쩌느냐』며 말리는 바람에 마음을 고쳐먹는듯했다.서울태생인 그녀는 서독에 간호원으로 취업했다가 한국 유학생인 오씨와 결혼,두 딸을 낳고 단란하게 살았다고 한다.그러나 남편이 간첩으로 입북,평양에서 살게되었고 또 다시 북한체제에 염증을 느낀 남편 오씨가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할 결심으로 독일근무를 원했으나 북한당국은 신씨와 두 딸을 잡아두고 오씨만 독일로 보냈고 남편이 귀순해버려 수용소로 끌려왔다는 것이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작은 체구인 신아주머니는 마음이 무척 착하고 인정이 넘쳤다.그후 신아주머니는 간호원경력을 인정받아 수용소안에서 병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간호원 일을 했으나 수용소 안에서는 약 한 톨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업도중 다친 사람들이나 병자들이 더 이상 일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일이 그녀가 주로 하는 임무였다.신아주머니는 가족세대든 독신자들이든 병들고 부상입은 사람이 있으면 밤새워 돌보는등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다.수용자들에게 정을 쏟음으로써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잊으려는 듯 열심이었다.그러나 때때로 『서울에가면 부모님과 삼촌·고모·이모·친구등 누구누구가 있는데…』라며 간호하던 환자를 붙들고 오열하기도 했다. 그녀는 또 병자나 부상자들을 위해 거짓으로 「작업불가능」판정을 내렸다가 나중에 보위원들에게 들통나 1주일씩 강냉이 배급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벌을 받고 어린딸들과 함께 굶주리기로 했다. 신아주머니가 수용소에 들어온지 석달째쯤이었다.새벽녘 『불났다』하는 외침에 잠이 깼다.신아주머니 집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판자문을 열자 방안은 연기와 불길로 가득차 있었다.불붙은 나뭇가지를 정신없이 방밖으로 꺼냈다.신아주머니는 두딸을 양쪽 겨드랑이에 꼭 껴안고 방구석에 앉아 있었다.이미 머리카락과 얼굴·손발은 연기와 불길에 그을린채 실신상태였다.뒤늦게 달려온 사람들이 방안에 물을 퍼붓고 나와함께 그들을 밖으로 끌어냈다.그녀는 발버둥치며 울부짖었다.『죽는 것이 행복한데 왜 말리느냐』며 몰부림쳤다.2월말이었지만 새벽 기온은 영하 20도를 오르내려 마치 고추가루를 마신듯 매서웠다. 그 이후 신아주머니는 실성한듯 싱글싱글 웃어가며 『여기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곳이니 할 수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되뇌는게 버릇이 되었다. 내가 「김정일지도자」의 생일특사로 수용소에서 나오던 날 『안혁이 이제 나가면 다시 들어오지 말고 잘 살아요』라며 눈물흘리던 신아주머니. 그녀와 귀엽던 두 딸은 아직도 살아 있을까.
  • 새전기「세기와 더불어」허동찬씨의 분석(신고 김일성자서전연구:11)

    ◎김형직의 사망신화:2/“아사·타사·동사 3대각오 지시” 등 꾸며/사실은 급사… 많은 재산 남긴것엔 함구 김일성은 부친 김형직이 죽기 직전에 「유언」을 받았다고 선전하고 있다.「세기와 더불어」는 이 유언을 김일성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전유산」이라 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원의 사상,3대 각오,동지획득에관한 사상,두자루의 권총,이것이 내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의 전부였다」
  • 실종 대양 하니호 침몰 추정/구명뗏목 1정·탈출용 칼 등 발견

    【부산=김정한기자】 지난 22일 하오 선원 28명을 태우고 괌도 서쪽 8백마일 태평양바다에서 항해하다 실종된 범양상선소속 화물선 대양하니호가 침몰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지난 24일부터 사고해역 인근을 수색중인 범양상선 소속 범주호는 26일 하오6시30분쯤(현지시간)대양하니호에 비치되어 있던 20인용 구명뗏목 3정중 1정을 발견해 수거했다고 범양상선측에 전문으로 알려왔다. 전문에 따르면 이 구명뗏목은 바닥이 50㎝가량 찢어져 있었으며 다른 내용물이 없고 탈출시 사용토록 돼 있는 나이프가 칼집에 그대로 들어있는 점등으로 미루어 선원들이 탈출을 위해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선체 파손후 부력으로 인해 바다에 떠오른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범주호는 이에 앞서 하오5시40분쯤 선원용 안전화 1짝,대양하니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쓰레기들과 빈병 3개등도 발견했다고 덧붙였다. 범양상선 관계자는 『이같은 정황을 종합해볼 때 대양하니호가 침몰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한편 대양상선 부산지사 강당에서 대양하니호의 구조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던 실종 선원 가족 1백여명은 구명뗏목등의 발견 소식이 전해지자 일제히 오열을 터뜨렸다.
  • “체벌 가책” 여교사의 죽음/박현갑 사회1부 기자(현장)

    ◎빈소 모인 동료 「교권침해」 우려 한목소리 『묵묵히 사도의 길을 걸어온 중년 여교사의 말로가 꼭 이렇게 끝나야 합니까』 제자에게 사랑의 매를 든 것을 고민해오다 투신자살한 서울 동작중학교 기술 담당교사 전영애씨(45·여)의 장례식이 치러진 19일 상오 8시 강남시립병원영안실. 유가족과 동료교사들은 곧 떠날 운구차 앞에서 오열을 했다. 『가르치느라고 매를 댔을 뿐인데…』 이날 며느리를 떠나보내고 홀로 빈집을 지키고 있던 시어머니 전옥선씨(72)도 며느리의 뜻하지 않은 죽음이 어이없다는듯 허탈해했다. 『시골서 재배한 고추를 갔다주려고 서울에 전화를 걸었다가 며느리가 죽은 사실을 알았다』는 시어머니 전씨는 평소 친딸 이상으로 순종하던 며느리의 옷가지를 만지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전교사는 지난17일 새벽5시 『선생님들이 뒷일을 잘 처리하여 주세요.이군 부모님께는 죽음으로써 사죄드립니다』라는 짤막한 유서 한장을 남기고 7층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숨졌다.자신의 수업시간에 카드놀이를 하며 수업에 열중하지 않던이모군(15·2년)등 학생6명에게 길이 30㎝의 지시봉으로 팔을 때려 이군의 왼쪽팔뼈에 금이 가는 불상사가 생긴지 꼭 한달만의 일이었다. 전교사는 이 일로 마음아파해오다 지난 9일 동작구 사당동에 있는 이군의 자취방에 찾아가 이군과 이군의 할머니에게 용서를 구했었다.전교사는 그러나 이날 인천에 사는 이군 부모로부터 『선생이 그럴 수가 있느냐』는 모욕적인 항의를 받았다. 『전교사는 평소 학생지도를 할때 자신의 아들(16)딸(18)에게 쏟는 정성 이상으로 열과 성을 다해 올 스승의 날에는 서울시교육감 표창까지 받은 모범교사였다』면서 이 학교 김한정교감(64·여)은 전교사의 빈소앞에서 괴로워했다. 전씨와 18년전 결혼,교사부부로서 주위사람들로부터 「잉꼬부부」라는 소리를 들어온 남편 이은태씨(51·서울북공고 교사)는 『이날도 아내와 함께 주말을 맞아 고교 3년생인 딸아이의 머리를 식혀주기 위해 등산을 갈 생각이었다』면서 슬하의 두남매 손을 꼭 잡으며 애통해 했다. 전교사의 갑작스런 죽음에 동료교사들도 하나같이 침울한 표정이었다. 이들은 『전선생님이 이군등 카드놀이를 한 학생들에게 벌을 준 것은 교육적 차원의 일』이라면서도 이번 일을 계기로 또다시 교권이 침해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런 모습이었다.
  • 북 또 적반하장/장수근 북한부장(오늘의 눈)

    14일 북한의 연형묵총리가 신임 현승종총리 앞으로 보낸 편지에 담긴 볼멘 소리는 영낙없는 「적반하장의 생떼」였다. 연총리는 다짜고짜 「남한조선로동당간첩사건」이 『남한이 꾸며낸 상투적인 모략극』이라면서 이를 시인·사과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연총리는 그러면서 「남한조선로동당간첩사건」이 『오는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자당이 각계 각층 인민들로부터 배격당하고 있고 그 내부가 사분오열돼가는 딱한 처지에서 충격요법을 써서라도 민심을 돌려 세우고 민자당정권을 또 만들어내기 위해 안전기획부가 고안해 낸 것』이라는 그럴싸한 「해석」까지 갖다 붙였다. 그는 또 팀스피리트훈련재개와 주한미군감축 백지화결정을 무조건 철회하라는 요구도 했다. 북한의 딴청 피우기와 책임 떼넘기는 수작이야 항용 있어온 터이다.그러나「남한조선로동당간첩사건」과 관련한 그들의 막무가내식 부인은 참으로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게하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명명백백한 물증과 관련자의 자백이 있는데도 안했노라 딱 잡아떼니 말이다. 그들의 「공작일꾼」황인오가 안내한 서울근교와 제주 드보크(비밀은닉장소)에서 발굴된 무성권총과 실탄,수류탄 등 총 1백84점의 간첩장비는 이선실을 정점으로 하는 그들일당의 행적이 남한요인암살과 조선로동당 지하조직구축을 목적으로 한 간첩행위였음을 분명히 적시하고 있는 터다.그런데도 연총리는 이 간첩사건을 남한당국의 모략극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자작극임을 인정하라고 적반을 하고 나선 것이다. 지난 2월 남과 북은 「기본합의서」에 함께 도장을 찍었다.그리고 화해와 공존공영을 내외에 천명했다.그뒤 우리가 『그래,그래.이젠 한핏줄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라며 경제인들을 내왕시키는 사이 북한은 적화통일이란 비수의 날을 시퍼렇게 세우고 있었음을 보여준게 바로 「남한조선로동당간첩사건」이 아니던가. 연총리는 현총리 앞으로 무례한 편지를 보내기에 앞서 정작 「기본합의서」에 대한 파괴행위가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북에 의해서 저질러지고 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연총리 스스로가 말했듯이 북한이 정말 남북관계의 개선을 원한다면 더 이상 우리의 체제전복을 노린 침투와 교란·적화기도를 포기해야 한다.그리고 그같은 냉전시대의 유산은 주저말고 남포갑문 밖으로 흘려보내야 한다.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 하원의장 거친 9선의 거물/추안 태국신임총리

    푸미폰국왕에 의해 23일 제20대 총리로 임명된 추안 리크파이 신임태국총리(54)는 앞으로의 정국수습및 민주화추진작업과 관련,긍정및 부정적 평가를 함께 받고있는 인물. 각료직 7번,의회진출 9번에 하원의장까지 역임한 화려한 경력에다 온건 실용주의 노선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5월사태이후 사분오열된 태정국을 추스리기에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고있다.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거친 태국 정치풍토를 헤쳐나가기에는 너무 우유부단하다는 지적도 받고있다.5월사태때 시위에 반대하다가 상황이 바뀌자 민주진영에 가담했던 것처럼 고비때마다 보인 애매한 태도로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듣고있다. 그는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민주당이 다수당이 됨으로써 총리자리에 올랐지만 역대 어느총리보다 버거운 짐을 안고있다.우선 실종자 문제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등 5월사태 뒷마무리가 시급하다.군부와는 비교적 원만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 한­대만 단교이후 전망(한·중수교/동북아 새 질서:6.끝)

    ◎서울­대북 경제교류 이어진다/항공분야 등 민간차원서 새 협정/「대만­미·일협력방식」 채택 가능성 한중수교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나라는 북한과 대만이다.북한은 지난해말 소련에 이어 중국과 더이상 혈맹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됐고 대만은 아시아의 유일한 수교국 한국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고립감에 휩싸이게 됐다. 북한은 자신들의 대외정책에 있어 중국으로부터 무조건적 지지를 획득할 수 없게 됐다.특히 멀지않아 중국과 러시아가 북경에서 회담을 갖고 북한에 남북상호핵사찰의 수용을 촉구할 예정이어서 북한이 입는 정치적 타격의 정도는 매우 심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대만은 오래전부터 단교한 국가들과도 이후 비공식 관계를 맺어오고 있어 한국과의 단교가 정치적 상징으로만 남을뿐 여타 부문에서의 교류는 일시적인 감정의 앙금이 가라앉으면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대만은 한중수교에 앞서 이 사실을 일본언론을 통해 흘리고 수교의 대가로 한국이 중국에 20억달러 규모의 경협차관을 제공키로 했다는등의 낭설을 퍼뜨려양국 수교의 의미를 훼손시키려 했다. 그리고 곧바로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에 착수,1백20억달러 규모의 철도사업에 한국기업의 입찰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흥분한 대만국민들은 대만주재 우리 대사관에 돌을 던지고 입법원 의원후보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한국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다음주내에 전직 총리를 지낸 고위인사가 단장이 된 한국민간사절단이 대만을 방문,비공식적이나 최고수준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한다는 우리정부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과 때를 맞춰 대만 행정원 쪽에서도 새로운 양국관계설정을 위한 교섭에 응해올 것으로 보인다. 대만 행정원은 이미 한국과 민간차원의 새로운 관계수립을 위한 실무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지강 대만 행정원 신문국장(공보처장관)은 실제 대만의 분위기가 언론에 보도된 것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곧 냉정을 되찾아 양국간 실질협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앞으로 한·대만관계는 미중,일중수교 직후 대만측이 미일의 관계정립과 유사한 방식을 택하게 되기를 한국정부관계자들은 희망하고 있다. 한국은 한중수교때 중국으로부터 대만과의 관계를 계속 가져도 무방하다는 양해를 얻어냈다.자신과 북한의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중국으로서 불가피한 결정이었을 수도 있고 넓게 보자면 대만국민은 자기 동포라는 대국적인 발상의 표출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단교로 폐기된 항공협정,해운협정,무역협정,상표권·특허권·실용신안권 보호협정,문화협정,해상및 항공 국제운수 소득에 대한 상호면세 협정 등 정부간의 협정을 민간차원에서 새롭게 맺을 수 있게 됐다. 한국은 대만의 국가건설 6개년 계획에 참여를 희망하고 있어 대만과의 관계를 빠른 시일내에 민간차원의 최상급 수준으로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김수기 대만대사는 25일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화교들의 오열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속에서도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도 민관식 전국회부의장,채문식전국회의장 등 고위인사들을 보내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와같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한·대만관계는 실질적인 면에서는 손상된 면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 보은양 공판 방청석의 오열/손성진 사회1부 기자(오늘의 눈)

    법정안은 온통 흐느낌으로 가득찼다. 24일 하오 서울고법 대법정.의붓아버지를 살해한 김보은양과 김양의 친구 김진관군의 항소심결심공판에서였다. 『딸을 성의 노리개로 만든 보은이 아버지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사랑하는 여자가 입에 담지도 못할 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이제 그는 죽었고 우리는 살인자가 되어 법정에 섰습니다.불쌍한 보은이를 밝은 세상으로 내보내 주십시오』 터져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김군은 최후진술을 했다.그리고 방청석의 흐느낌은 이내 오열로 변했다. 그것은 두사람 모두에게 무죄가 선고돼야 한다는 강렬한 외침인 듯도 싶었다. 법을 따지기에 앞서 짐승만도 못한 행위를 해온 사람을 죽인 행위는 정당한 것이라는 보통사람으로서의 생각과 그 수치스런 욕을 당해온 한 가냘픈 여성에 대해 솟구쳐오르는 동정심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의 논고는 여전히 분명했다. 『범행동기로 볼때 검사로서도 동정적 심정은 있으나 이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생명을 박탈하고 더욱이 범행을 미리 계획한데다 강도사건으로 은폐하려했던 점등에서 이들의 범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극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을 죽인 행위는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으며 정상참작은 어느정도까지 가능한가. 인간적인 동정심과 현실적인 법규범과의 괴리를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이들의 고통과 시련은 몸서리치는 것이나 살인행위 또한 함부로 지울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판결을 내려야 하는 재판부의 고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피고인이 겪었던 것과 같은 고통이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그것은 『나는 인간이 아닌 짐승을 죽였다』라는 김부남여인의 절규였다.
  • 청천백일기 내려 접으며 오열/한중수교 하던날 대만화교사회 표정

    ◎“세계는 변한다… 본토서 다시 국기 올리자”/김수기대사·간부일행 눈물 삼키며 귀국 우리나라가 중국과 역사적인 국교를 수립하던 날 우리나라와 단교를 선언하고 떠나는 중화민국(대만)대사관 주변은 참으로 착잡한 분위기여서 우리와는 명암이 엇갈렸다. 대만대사관은 이날로 청천백일만지홍기(청천백일만지홍기)를 아주 내리고 문을 굳게 닫았으며 이웃 화교학교도 침통한 분위기속에 「마지막 수업」을 가졌다. 김수기 주한 대만대사와 부인 양완옥 여사 부부가 24일 하오 10시20분 중화항공 131편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날 공항에는 대만대사관 직원과 한성화교 중고교생,화교등 1백50여명이 나와 무거운 표정으로 김대사 부부를 전송했으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김대사 부부가 여객기 탑승 직전 일일이 악수와 함께 인사를 건넬 때는 끝내 눈시울을 붉히기도. 한국측에서는 외무부 신기복 차관보와 김석우 아주국장,채문식 전국회의장,민관식 전 문교부장관 등 30여명이 나왔는데 채 전 의장등은 『미안할 따름이며 뭐라 할말이 없다』고 김대사를위로. ▷청천백일기 하강◁ 김대사와 대사관 총영사관직원및 서울거주 화교등 1천5백여명은 이날 하오4시 서울중구 명동대사관 앞뜰에 모여 청천백일기 영구하강식을 가졌다. 하강식에 참석한 화교학생들과 화교들은 모두가 손에 손에 청천백일기를 들고 나와 힘차게 흔들었으며 한성화교 중고교 브라스밴드가 「국기가」「국가」등을 연주할 때 함께 따라 부르며 온통 눈물바다를 이뤘다. 학생들은 「삼민주의 만세」「공산주의 반대」「졸속외교만년수치」등의 피켓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이들은 15분동안의 국기하강식이 끝나자 대사관 앞뜰에 있는 중국인들의 국부인 손문선생의 동상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손문선생의 동상 또한 곧 철거될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하강식에서 김대사는 『하강식은 비록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중화민국은 그동안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고 오뚝이처럼 일어서곤 했다』면서 『세계는 변화하고 있으며 공산주의는 몰락했기 때문에 중국대륙의 공산주의도 쓰러져 그날 본토에서 다시 청천백일기를 올리자』고 말했다. ▷화교들표정◁ 이날 국기하강식이 끝난뒤 화교들은 『전통우방인 한국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울분을 토하면서 앞으로의 국적문제등 법적·경제적지위 등에 대해 걱정했다. 이번 수교로 화교사회가 친대륙파와 친대만파로 나눠질 것이라는게 이들의 거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친대륙파는 중국본토에 친족등 연고자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며 친대만파는 대만에 생활기반을 갖고있는 사람들이 될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화교사회는 중국인 특유의 대륙적 기질탓인듯 현재까지는 별로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등 정중동의 모습을 보였다. ◎화교학교 마지막 반공수업/교사들 “이념교육 가장 큰 문제” 곤혹스런 표정 ▷마지막수업◁ 대사관과 이웃한 한성화교학교(국민학교)는 이날 상오9시 대만국기를 내걸고서는 마지막수업에 들어갔다.이날 교무실과 복도 등에는 학부모와 교사 등이 3∼4명씩 모여 장래를 걱정했으며 영문을 잘 모르는 어린 학생들은 이같은 어른들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 학교의 한 여교사는 『비록 국기는 내려졌으나 앞으로도 학교수업은 정상적으로 계속될 것』이라면서 『그러나 그동안 학생들에게 가르쳐온 반공교육등 이념교육이 가장 큰 문제』라고 난감해 했다. 서대문구 연희동 89의1 한국한성화교 중·고등학교(교장 손수의)는 이날하오 대사관에서 있은 국기하강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전수업만 하고 하오1시쯤 학생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손교장은 한국의 한·중수교발표에 대해서 『너무 뜻밖의 일이라 교직원과 학생등 모두가 당황하고 있다』면서 『한국과의 국교가 단절되더라도 우리 학교는 정상적으로 운영돼 후세들의 민족교육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 사고조사하다 순직 김영근경장 영결식

    지난 17일 교통사고를 조사하다 빗길에 미끄러진 트럭에 치여 순직한 서울 구로경찰서 김영근경장(39)의 영결식이 19일 상오8시30분 고려대부속 구로병원에서 동료경찰관과 가족·친지들의 오열속에 치러졌다. 고 김경장의 유해는 이날 하오 대전 국립묘지경찰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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