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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격속 현충일”… 황규만씨의 외길정성 결실

    ◎「그날의 전우이름」 40년 만에 찾았다/국립묘지 「김○○의 묘」 주인공은 “김수영씨”/서울신문 읽은 동기생이 명부 보내 실마리/“현대사의 비극” 기억하게 무명비는 그냥 두기로 40년을 찾아 헤맨 그 전우의 이름은 군번 117162의 육군소위 김수영이었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힌 5만여 순국영령들의 묘비 가운데 단 하나뿐인 무명용사비(서울신문 90년 6월25일자 11면 보도)의 주인공 이름이 드디어 밝혀진 것이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상오 국립묘지 동쪽 제2묘역에서는 김 소위의 아들 종태씨(40·춘천시 후평동 주공아파트 407동 308호)와 40년 전 전우인 예비역 육군준장 황규만씨(61·범양상선 부회장) 등이 오열하고 있었다. 황씨는 지난 50년 8월 경북 포항지구 전투 때 새로 전입한 지 5분 남짓 만에 전사한 김 소위를 현장에 매장하고 후퇴한 뒤 계속 군무에 쫓기다 14년 전 이름도 모르는 김 소위의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케 하고는 유족들을 찾는 데 반평생을 바쳤었다. 황씨의 이처럼 안타까운 사연이 지난해 6·25를 맞아서 서울신문에 보도되자 전국 각지에서 김 소위의 가족임을 자처하는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었다. 그때마다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조목조목 여러 정황을 캐물어 보곤했지만 하나같이 실제인물이 아니어서 실망만 거듭됐다. 그러던 지난해 11월초 김 소위와 시흥보병학교 갑종간부 1기 동기인 나보현 예비역 대령(62)이 동기생 명부를 보내왔다. 김 소위의 이름을 찾는 일을 거의 포기하다시피하고 있던 황씨는 다시 한가닥 희망을 걸고 1백46명의 명부를 뒤져가며 김 소위를 찾기 시작했다. 6·25 때 포항지구에서 전사한 4명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은 50년 8월24일 전사한 것으로 돼 있는 김수영 단 한명뿐이었다. 산천이 4번이나 바뀌도록 목메게 찾던 바로 그 김 소위가 분명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전사일과 불과 3일 차이가 날 뿐 아니라 국립묘지에 알아본 결과 어디에도 김수영 소위의 묘비는 없었다. 김 소위가 틀림없다고 확신한 황씨는 곧바로 유족을 찾아 나섰다. 보훈처에 알아보니 춘천에 김 소위의 혈육인 딸 광성씨(44)와 아들 종태씨가,서울영등포에 누이들인 수덕씨(59)와 수봉씨(56)가 살고 있었다. 구청과 동사무소를 통해 이들 가족이 해방 후 함남 원산에서 월남한 사실을 확인한 황씨는 10여 일 만인 11월13일 마침내 유족들을 만났다. 김수영 소위는 해방 후 원산에서 월남,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50년 1월 갑종 1기생으로 시흥보병학교에 입학했다. 김 소위는 전쟁이 터지기 이틀 전인 6월23일 아들 종태씨가 태어나자 다음날 휴가 나와 잠깐 아들을 본 뒤 곧바로 전쟁터로 나가 그해 8월 포항 안강지구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4살되던 해 어머니가 재혼을 해 그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고모집에서 생활해온 종태씨는 해마다 현충일이면 할머니 손을 잡고 국립묘지 산마루에 서서 묘지를 찾는 사람들을 보며 서러움을 달래왔다고 했다. 김 소위의 가족들은 사흘 뒤 40년 만에 처음으로 아버지의 묘 앞에서 제사를 지냈고 또 지난달 말에는 황씨와 함께 포항 전사지에도 다녀왔다. 황씨의 40년에 걸친 전우애는 이날 두 번째로 아버지의 묘비를 찾은 종태씨가 황씨의 만류에도 불구,본사에 전해옴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됐다. 황씨와 유족들은 「김 소위의 묘」에 이름을 새겨 넣으려다 현재 그대로 이름없는 묘비로 남겨두기로 했다. 40년 동안 이름없이 세워져 있던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전쟁의 아픈 상흔을 기억하는 하나의 유물로 길이 남기기 위해서이다. 다만 묘비 아래 상석에 「김수영」이라는 이름과 유가족을 만난 날짜 등을 새겨두기로 했다.
  • 분신자살 정상순씨/어제 5·18묘역 안장

    【광주=최치봉 기자】 전남대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분신,지난달 29일 숨진 정상순씨(26·무직·전남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 유해가 4일 하오 늦게 광주시 북구 망월동 5·18묘역에 유족,친지들의 오열 속에 안장됐다. 경찰은 이날 정씨 운구행렬의 전남도청 앞 노제를 허가했다.
  • 도청앞 노제 10만 인파/광주/분신 박양 망월동 안장

    ◎도청 철문 10여m 부수기도 【광주=최치봉 기자】 지난 19일 숨진 전남대생 박승희양(20·식품영양 2년)의 유해가 26일 0시쯤 유족과 동료학생들의 오열 속에 광주시 북구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됐다. 박양의 유해는 이날 하오 5시5분쯤 광주시 동구 광산동 전남도청 앞 광장에 도착,노제를 치렀다. 이날 노제는 10만여 명의 시민·학생들이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4가까지의 2㎞의 6차선 도로를 꽉메운 가운데 제문낭독·추모사·유족인사·헌화·분향·부활굿 순서로 3시간 남짓 진행됐다. 한편 박양의 도청 앞 노제를 마친 뒤 일부 극렬 시위대는 하오 9시50분쯤 도청 정문 왼쪽으로부터 30여 m 떨어진 보조철문 10여 m를 부수고 도청담장에 붙어 있는 새 생활실천 대형 홍보간판을 뜯어내 불태우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날 하오 10시30분쯤 민자당 광주시지부 건물 주변에서 시위를 벌이던 호남대학생 김선일군(19·법학과 1년)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안경을 맞아 오른쪽 눈에 부상을 입고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 강군 운구차 빼돌려 노제 강행

    ◎학생들이 금남로로 몰고 가… 새벽 망월동으로/광주시민등 5만명 경찰과 대치… 한때 격돌위기 【광주=최치봉 기자】 명지대 강경대군의 유해는 20일 상오 유가족·동료학생·재야인사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망월동 「5·18」묘역에 안장됐다. 강군의 시신이 묻히자 유가족들은 오열을 터뜨렸으며 학생·「범국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은 강군의 죽음을 민주화로 승화시키자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광주시내 곳곳에서는 밤늦도록 시위가 잇따랐다. 이에 앞서 유가족·학생·시민·「대책회의」 관계자 등 5만여 명은 19일 하오 10시부터 광주 금남로3가 광주은행 앞 네거리에서 「강군 노제」를 치렀다. 강군 운구행렬은 북광주인터체인지에서 전남도청 앞 노제를 막는 경찰과 대치하다 무등경기장→광주역 등을 거쳐 하오 8시30분쯤 이곳에 도착했다. 이에 앞서 하오 7시30분쯤 명지대생 등 대학생 1천여 명은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다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운구차량을 빼내 어린이대공원 쪽으로 몰고 갔다. 경찰은 당시 고속도로를 점거,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작전을 전개하던 중이어서 학생들이 운구차를 빼돌리는 것을 발견치 못했다. 강군 「대책위」는 광주인터체인지 앞에서 경찰과 13시간 남짓 대치하다 하오 3시쯤 노제를 생략키로 하고 망월동 「5·18」묘역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시내에서 몰려든 대학생들이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운구행렬은 움직이지 못했다. 한편 이날 하오 1시쯤 광주시 북구 동은동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시위를 진압하던 순천경찰서 507기동대장 김명호 경감과 전경 20여 명이 학생들에 의해 1㎞쯤 떨어진 광주 서강전문대에 끌려갔다가 6시간20분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 「금남로 국민대회」가 열린 18일 하오부터 이날까지 계속된 시위과정에서 학생·경찰 등 1백20여 명이 부상했으며 시위진압차량 2대가 화염병에 맞아 불타기도 했다.
  • 외언내언

    유고슬라비아는 국명은 「남슬라브민족의 나라」라는 뜻이다. 6세기경 발칸반도로 남하한 슬라브민족이 세운 나라임을 강조하는 이름. 그러나 현실은 복잡하다. 7개의 나라에 둘러싸인 6개 공화국연방으로 5개의 주요민족이 있고 4개의 언어 2개의 문자를 쓰며 3개의 종교를 믿는 「모자이크의 나라」다. ◆1918년까지 터키·오스트리아·헝가리 등 주변 강대국의 식민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에보의 총성」으로도 유명한 나라다. 2차대전 땐 동구에서 유일하게 소련군의 힘을 빌지 않고 빨치산 저항운동으로 나치스군을 몰아낸 자랑스런 역사도 있다. 바로 그 빨치산을 주도한 티토의 나라로도 알려져 있다. 오늘의 유고라는 모자이크국가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그 티토 대통령. ◆국가적 구심점의 역할을 하는 대통령의 선출에 실패하는 등 오늘의 유고가 겪고 있는 국가붕괴의 위기는 80년 티토의 죽음에서 이미 예상되었었다. 티토는 죽기 6년 전인 74년에 오늘의 사태를 걱정,헌법을 개정하고 자신의 사후엔 각 공화국이 동등한 대표권을갖는 집단지도체제를 하도록 하는 한편 대통령직도 각 공화국이 1년씩 돌아가며 맡도록 대비를 했던 것. 덕분에 유고는 그 동안 국가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유고의 모자이크를 뒤흔들어놓은 것이 고르바초프의 동구 해방과 민주화. 작년 4월 복수정당제의 자유선거를 실시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공화국에 비공산당정부가 수립되면서 연방을 묶어온 공산당의 구심력이 사라진 결과 각 공화국의 대립갈등이 노골화됨으로써 사분오열의 붕괴사태가 빚어지고 있는 것. ◆유고가 하나의 국가로 유지될 수 있을지 현재로선 예측불허다. 진통의 루마니아·알바니아 등과 함께 유고의 혼돈이 유혈사태로라도 발전하면 발칸반도는 또 한차례 「세계의 화약고」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고르바초프의 민주화 개혁과 동구 해방이 세계의 화해와 공존을 가져온 반면 소련 자신과 유고 등 해방된 동구에선 민족대립과 갈등을 첨예화시키고 있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란 생각이 든다.
  • 한밤까지 곳곳서 산발 공방/어제 강군 영결식

    ◎신촌·이대 앞서 화염병·최루탄 대결/운구행렬 반나절 노상대치/경찰 4만5천명,도심진입 차단/대책회의,장례 연기… 1천명 연대서 철야농성 명지대생 강경대군 장례식날인 14일 「대책회의」측의 서울시청앞 「노제」 강행과 경찰의 봉쇄로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도시에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밤늦게까지 계속됐다. 명지대에서의 영결식과 신촌로터리에서의 추모집회를 마친 강군의 운구행렬은 시청 진출이 무산되자 이날 하오 9시30분쯤 광주로 내려가는 것을 포기,연세대로 가 농성에 들어갔으며 서울과 부산 광주 등 전국 주요도시의 도심 곳곳에서는 대학생들이 밤늦게까지 가두시위에 나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저지하는 경찰과 맞서 시민들은 불안한 밤을 보내야 했다. 영결식과 추모제가 열린 신촌·연희동 주변 상가는 아침부터 미리 철시했으며 이 일대는 물론 도심 곳곳에서 교통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퇴근길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기도 했다. ▷영결식◁ 강군의 유족과 「대책회의」 관계자 조문객 등 80여 명은 이날 상오 9시 명지대 학생회관 소강당에서 발인식을 가졌으며 하오 9시45분쯤 대운동장에서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장례위원장인 문익환 목사는 조사에서 『오늘은 강군을 땅에 묻는 날이 아니라 71년 6월7일 시작됐던 생의 1막이 끝나고 새로운 생이 출발하는 날이니 강 열사의 장도를 비는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자』고 말했다. 영결식이 진행되는 동안 강군의 어머니 이덕순씨(43)는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으며 명지대 총학생 부회장 김홍석군은 조사를 읽다가 『어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공부 열심히 할께요』라는 대목에 이르자 오열하기도 했다. 또 이날 참석한 김대중 총재는 조사를 읽다가 학생들로부터 『보수야당 물러가라』는 야유를 받았으며 낮 12시15분쯤 연희동 교차로 근처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많이 마셔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기도 했다. 상오 10시30분쯤에는 이상연 내무부 장관과 이종국 치안본부장이 강군의 명복을 비는 조화를 보내왔으나 모두 접수를 거절당했다. 영결식에서는 「서울노동자 문화예술단체」 회원등 5백여 명이 부활굿·조가합창·풍물놀이 등 문화행사가 펼쳐졌고 『경대는 살아 돌아온다』 등의 구호가 적힌 만장·깃발 등 3백여 개가 운동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대학생 2천여 명이 영구차와 운구행렬을 경호했다. ▷합동추모제◁ 당초 낮 12시30분에 신촌로터리에서 가질 예정이던 합동추모제는 영결식이 예상보다 늦어진 데다 운구행렬이 명지대를 나와 신촌로터리 쪽으로 가던 길에 남가좌동 홍남교 네거리에서 경찰과 2시간 동안 대치하면서 돌과 최루탄으로 공방전을 벌이느라 예정보다 훨씬 늦은 5시50분쯤에야 치러졌다. 신촌로터리 주변에는 이날 상오부터 시위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하오에는 모두 7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노제공방◁ 재야단체 회원 및 학생들은 하오 6시35분쯤 노제를 지내기 위해 시청앞 쪽으로 가다가 이화여대 앞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중이던 경찰이 최루탄으로 저지하자 이에 맞서 화염병·돌멩이 등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또 「선봉대」 3천여 명이 이대입구 부근에서 경찰에 맞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유가족과 「대책회의」 관계자들을 포함한 3만여 명은 지하철 2호선 이대역 앞에서 신촌쪽 6차선도로를 점거하고 경찰에 길을 터줄 것을 요구하며 3시간여 동안 연좌농성을 벌였다. 하오 9시30분쯤 대책회의측은 장례를 연기,연세대에 들어가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강군의 사체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영안실에 다시 안치하려 했으나 병원측으로부터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해 학생회관 1층 로비에 옮겨놓고 밤을 보냈다. 하오 8시쯤 시위대는 이대입구에서 바리케이드용으로 세워놓은 페퍼포그차량 3대에 화염병을 던져 모두 불태우기도 했다. 「전대협」 2천여 명은 하오 8시30분쯤 종로2가와 3가로 진출해 경찰에 화염병 등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했으며 하오 6시에서 9시 사이 종로 퇴계로 명동성당 신세계백화점 앞 등에서 1만5천여 명의 시위대가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또 이날 하오 10시쯤 서울 도심으로 빠져나온 시위대 중 4천5백여 명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철야농성을 벌였다. ▷경찰경비◁ 경찰은 신촌에서의 합동추모제까지는 허용하되 시청앞 노제는 불허한다는 방침 아래 신촌에서 이화여대 앞까지 50개 중대,공덕동로터리 일대에 40개 중대 1만여 명으로 저지선을 치고 대로변 골목 입구마다 철제바리케이드나 경찰버스 등으로 도로를 봉쇄,도심 진입을 막았다.
  • 어머니와 아우를 죽이다니…/박대출 사회부기자(현장)

    ◎형의 패륜에 두 동생 망연자실 『형이 어머니와 아우를 죽이다니…』 어머니와 아우를 살해,암매장한 뒤 45일 동안 범행을 숨겨온 패륜아 이형길씨(31)의 두 동생(26·23)은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망연자실,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했다. 그 동안 여기저기 찾아다니던 어머니와 아우가 어이없게도 집안 뜰에서 사체로 발견된 지 하룻만에 그것도 큰형이 범인으로 밝혀지자 동생들은 한 핏줄이라는 사실조차 부끄러운 듯 물기어린 눈으로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범인 이씨는 지난 3월29일 집 안방에서 『용돈만 달라고 하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꾸짖는 어머니 이순애씨(54)를 목졸라 살해한 뒤 범행사실을 숨기기 위해 동생 영호씨(25)까지 죽인 뒤 집 앞마당에 파묻고는 45일 동안 도피행각을 벌여왔다. 이씨는 범행 후 집에서 40만원을 훔쳐내고도 모자라 다시 패물까지 들고 장모를 찾아가 『어머니가 주신 것이니 현금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20만원을 더 마련해 도피자금으로 탕진해왔다. 이씨는 이 돈으로 쏘나타 승용차를 빌려 부산에 있는 애인(23)을 불러내 경주·광주·목포·서울 등으로 함께 돌아다녔다. 돈이 떨어지자 서울로 올라온 그는 어머니와 아우를 파묻은 집 안방에서 태연하게 잠을 자며 지낸 날도 10여 일이나 됐다. 그는 국민학교만을 졸업,주유소종업원 운전사 노동일 등으로 떠돌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는 데다 성격이 난폭한 전과 3범이었다. 이씨가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동생들이 『혹시 형이 사고를 낸 것이 아니냐』고 의심,『실종신고를 내겠다』고 하자 오히려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는 범행에 앞서 어머니가 3년 동안 파출부 생활을 하며 어렵사리 모은 3백만원을 빼앗고 처가에서도 사업자금이란 명목으로 10여 차례 걸쳐 1천여 만 원을 뜯어내기도 했다. 끔찍한 범행을 하기 18일 전인 3월11일 첫아들을 낳아 가족들로부터 『이제는 열심히 살겠지』하는 기대가 컸었으나 이 기대감은 완전히 뭉개져버렸다. 이씨는 마침내 범행을 숨기기 위해 이사를 갔다가 오히려 이 때문에 범행이 들통났다. 이씨를 붙잡은 마포경찰서 형사계 임경규 경장(47)은 『이씨는 지금도 완전범죄로 끝날 수 있었던 자신의 범행이 동생들의 실종신고 때문에 발각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 “열사로 부르지 말아다오”/김동진 제2사회부기자(현장)

    ◎안동대 김군 아버지의 오열 『영균이를 죽게 한 노 정권을 타도하자』 『민주화를 주장하는 학생들이 가족장을 막는 것은 독재가 아니냐』 안동대생 김영균군(20·민속학과 2년)의 장례식이 치러진 4일 상오 8시30분쯤 경북대병원 영안실 입구에서는 가족장을 저지하려는 학생 2백여 명과 재야인사 50여 명이 「노 정권 타도」를 소리높여 외쳐대고 또 한편에서는 김군의 아버지 김원태씨(54·서울시 지적관리계장) 등 유족들이 이들에 둘러싸여 가족장을 한사코 고집하고 있었다. 이날의 장례식은 결국 유족들의 뜻대로 가족장으로 치러지기는 했으나 이 과정에서 아버지 김씨가 「민주국민장」을 요구하는 범시민대책회의 학생들에게 멱살을 잡혀 한때 실신,응급실로 옮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 김씨는 이동용 침대에 누워 링겔을 3개나 꽂은 상태에서 아들의 장례식을 지켜봐야 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장례식은 어머니 박옥숙씨(46)와 고모 등 유족 30여 명 만이 참석한 가운데 불과 20여 분 만에 끝났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에도 학생 등 재야인사들은 「타도 노 정권」을 외치고 노래들을 불러댔다. 이처럼 쫓기듯 장례를 마친 김군의 유해는 하오 1시50분쯤 영안실에서 영구차로 옮겨져 동구 신천동 청구고등학교 앞에서 학생들 주관으로 간단한 노제를 가진 후 수성구 고모동 시립장의관리소로 운구돼 화장됐다. 김군의 유해가 영안실에서 영구차로 운구될 때에도 김군의 아버지는 이동용 침대에 누워 「마지막 가는 아들」을 멍하니 쳐다보며 이렇게 되뇌었다. 『내 자식은 죽었지만 더 이상 나와 같은 슬픔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결코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구차 주변의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뜻을 수용하지 못해 미안하다. 영균이를 열사라 부르거나 영웅시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며 『다만 내 아들이 먼 훗날 의롭게 살다가 죽어간 한 젊은이로 남기를 바랄 뿐』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고통을 참아내려고 입술을 깨무는 그의 부정에서 「자식이 죽으면 부모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을 되새기게 했다.
  • 분신 경원대생 7시간만에 숨져/시너 뿌리고 3층서 투신

    ◎어젯밤 세브란스병원서 3일 하오 3시20분쯤 경기도 성남시 경원대학교 공대건물 3층 국기게양대 난간에서 이 학교 전자계산학과 야간부 2학년 천세용군(21)이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분신,병원으로 옮겨졌으나 7시간 만에 숨졌다. 이 학교 공과대 학생회장 황기용군(23·전자공학과 4년)은 『학생 1백50여 명이 하오 3시30분부터 공대앞 분수대광장에서 현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집회를 가지기 직전 천군이 「학우여,이제 복수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했다』고 말했다. 천군이 3층 난간에서 몸에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인 뒤 5m 아래 바닥으로 떨어지자 학생들은 소화기를 찾아 10분 만에 불을 껐다. 천군은 학교옆 성남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고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한강성심병원으로 다시 옮겨져 1시간 동안 기관지절개 수술을 받았다. 천군을 지키던 학생들은 천군이 수술을 마치자마자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갔다. 천군은 이날 하오 9시30분부터 심폐기능이 정지돼 인공호흡을 실시하다가 10시25분 끝내 숨졌다.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서천군의 치료를 맡았던 김승호(37)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하오 7시30분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약간의 의식이 있었으나 곧 심장이 멎었다』고 말하고 『90%의 전신화상 가운데 특히 기도의 화상이 직접 사인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천군이 사망할 당시 병원에는 천군의 외할머니와 남동생 세환군(19) 등이 있었으며 천군의 어머니 김계숙씨(41)는 천군의 사망 직후인 10시35분 병원으로 달려와 시신 앞에서 오열했다. 한편 학생들이 사경을 헤매던 천군을 명지대생 강경대군의 시신이 있는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긴 것은 투쟁장소를 한곳으로 모으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천군은 분신장소에서 발견된 유서에서 『학우가 쇠파이프에 맞아 쓰러져가는 상황에서 우리는 무얼 했는가』라고 묻고 『살아있는 학우들이 내몫까지 투쟁해주기 바란다』고 썼다. 천군은 지난해 2월 서울 동북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 학교에 입학해 사회과학서클인 「한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고 학우들은 전했다. 천군은 또 그림에 소질이 있어 학교신문과 교지에 「혁세둔」이라는 이름으로 만화와 삽화를 그려왔다. 천군은 이날 분신 직전 학교신문사 특집부장 전정욱양(21·도시계획과 3년)을 만나 『오늘 집회에서 분신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으로 김양이 전했다. 천군은 아버지 천영웅씨(47·상업) 어머니 김계숙씨 등 가족 3명과 떨어져 세차와 막노동 등으로 학비를 벌어 학교안 서클룸 등에서 생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 “가지마라 형호야”/이도운 사회부기자(현장)

    ◎할머니의 오열 유괴범은 아는지… 15일 상오11시 서울 강남병원 영안실에서 유괴된지 44일만에 피살체로 발견된 이형호군(9)의 영결식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의 영정앞에서 목사님은 나즈막히 성경구절을 읽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 천진스런 개구쟁이 형호군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한 가족과 친지들은 고개를 떨궜다. 영결식이 끝나고 입관을 하기 직전 60세인 할머니는 손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시신쪽으로 달려들었다. 이를 본 아버지는 할머니의 허리를 껴안고 말렸다. 가족들은 누구랄것도 없이 그렇잖아도 형호가 유괴된 뒤 46차례에 걸친 범인의 협박전화에 시달려 온갖 마음고생을 다해온 터였다. 『그저 무사하기만 해다오』 하는 심정으로 경찰이 형호를 찾아주고 범인도 잡아주기만을 고대했었다. 경찰 또한 사건이 발생한지 40여일이 지나도록 뚜렷한 단서하나 찾아내지 못하긴 했지만 이리뛰고 저리뛰고 나름대로는 무척 애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3일 형호가 숨진 모습으로 발견되자 가족들의 원통함은 극에 달했다. 「숨진 시각이 1주일쯤 지난 것 같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1차 부겸결과가 나오자 가족들의 심사는 더욱 뒤틀리고 말았다. 경찰이 지나치게 신중한 나머지 너무 소극적으로 비공개로만 수사,범인을 검거할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친것 같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분노는 경찰만을 향한 것은 물론 아니다. 돈때문이든 원한때문이든 한 가정을 이토록 슬프게 만든 범인은 물론 그 범인이 기생할 수 있는 우리 사회환경이 모두 원망스러운 것이다. 이날 아침부터 빈소를 지키다 벽제 화장터로 떠나기 위해 동생의 영정을 들고 영구차에 오른 형 형진군(11)은 입을 굳게 다문 굳은 표정이었지만 그러나 끝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동생과 범인가운데 누가 천국에 오를지를 벌써 알고 있다는 것일까?
  • 외언내언

    개인간의 싸움도 그렇지만 국가간의 싸움인 전쟁의 경우도 시작하기는 쉽고 간단해도 끝내기는 어렵고 복잡하다. 미국 등 다국적군의 압승으로 끝난 걸프전의 뒤끝을 보면서 새삼 그런 생각이 든다.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라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우선 당장 패전 이라크에 불길한 조짐이 확산되고 있다. 전국에 맹렬한 기세로 확산되고 있는 반정부·반후세인 시위는 어떤 의미에선 바람직한 것인지 모른다. 이라크인에 의한 후세인 제거를 바라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선 은근히 고무 지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후세인 제거 다음의 상황을 우려한다. 사분오열의 제2 레바논사태가 조성되는 경우 그것이 과연 중동평화에 기여할 것인가.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을 보면서 많은 중동 관측통들은 그가 열어서는 안될 「판도라의 상자」을 열고 말았다는 평가를 했었다. 그것은 결국 중동의 현상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이라크는 물론 중동의 현상에 대한 기본적인변혁을 강요하게 될것임을 예고하는 우려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 변화의 강요는 이라크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셈이다. ◆이라크에서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라크의 소리가 이라크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번 전쟁은 침체기미의 아랍민족주의에 불을 질렀고 중동 각국의 피지배계층에 민주화의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 틀림없으며 그것이 패전국인 이라크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고 있는 것. ◆쿠웨이트는 물론 사우디·요르단 등 군주국가들의 민주화 압력이 가중될 것이 틀림없다. 이집트·시리아 등 온건아랍국들도 민주화와 아랍민족주의의 강한 압력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의 반정·반후세인 시위가 예고하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앞으로의 중동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그야말로 「인샬라」(신만이 안다)일 것같다.
  • 걸프전 장기화로 아랍권 “사분오열”/중동에 미묘한 정치기류 확산

    ◎요르단·PLO선 대미비난 가열/애·시리아,후세인 야욕 비판고조/지상전 가까워질수록 균열 심화될듯 걸프전쟁이 1개월 가까이 지속됨에 따라 인접 아랍국들의 태도도 점차 미묘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은 다국적군의 거듭되는 대이라크 공습에 대해 비난하는 친이라크적 태도를 강화하고 있고 다국적군에 참가한 나라를 제외한 이란 등 다른 아랍국들은 전쟁종식을 위한 중재노력을 계속하면서 미국과 이라크의 사이에서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요르단의 경우 개전초기에 중립을 선언했던 것과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반미감정을 강하게 표출시키고 있다. 요르단에서는 11일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바그다드방송을 통해 휴전을 거부하면서 끝까지 항전을 선언한 직후 4천여명의 대학생들이 교내시위를 벌여 미국을 비난하고 아랍형제국들의 대연합을 촉구한 것을 비롯,이라크 지지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요르단의 반미감정은 최근 다국적군의 공습으로 이라크에서 원유를 싣고 돌아오던 요르단 유조차들이 고속도로상에서 수차례나피격당해 5명이 죽고 수십명이 부상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격화됐다. 아랍국이면서도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민족이기 때문에 서방세계와 이라크의 경제원조에 의존해온 줄타기외교의 명수로 알려진 후세인 요르단국왕도 팔레스타인인이 75% 이상 되는 국민들 사이에서 반미감정이 비등하자 지난 6일 전국에 TV중계된 연설을 통해 『걸프전쟁의 진정한 목적은 이라크의 파멸과 전후 중동에서의 다국적군 가담국의 주도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개편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강도 높게 미국을 비난,국민감정에 부응하는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점령치하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도 수십일째 통행금지에 묶여있기는 하지만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인티파다」(봉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물론 요르단과 팔레스타인인들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1백%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식자층들은 물론,일반국민들 사이에서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정당화 되기는 곤란하다는 인식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나마 아랍권의 대동단결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후세인 밖에 없는 상황에서 후세인과 이라크를 고립무원 상태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절박감이 일반적인 국민들간의 반미감정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이 11일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도착,후세인국왕과 2시간 동안 회담한 것도 친이라크 전선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리비아 수단 등 아프리카북부에 위치한 친아랍국들에서도 연일 반미시위가 벌어지고는 있으나 대세에 영향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사둔 하마디 이라크부총리가 이란에 이어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지를 순회하고 있는 것도 이들 국가들에서의 친이라크 여론을 확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외의 아랍국에서는 이라크를 보는 시각이 여전히 냉담하기만 하다. 각각 3만5천명과 2만명의 자국군을 다국적군에 파견시켜 놓고 있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민들은 같은 아랍형제들이 이교도들의 무자비한 공습에 의해 많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대해 인간적으로는동정을 하면서도 후세인의 개인야욕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해 놓고 뒤늦게 팔레스타인 해방명분을 들고 나온데 대해 어불성설이라는 평가를 내리면서 자국정부의 파병결정에 대부분 지지를 보내고 있다. 전통적으로 중동의 정치·문화적 리더로 자처해온 이집트나 이라크와 앙숙관계를 유지해온 시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경쟁의식도 다분히 깔려있는 듯하다. 때문에 이집트나 시리아에서는 반미나 반전시위도 거의 없이 평시와 다를 바 없는 평온한 분위기다. 그러나 이집트나 시리아가 다국적군에 가담해 있기는 하지만 대이라크 공격이나 쿠웨이트진군에 직접 가담할 지 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상황전개를 지켜봐 가면서 아랍내부의 단결과 전후 중동신질서 조성시의 발언권을 저울질한 뒤에야 양단간에 어려운 선택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이란의 라프산자니 대통령은 이란회교혁명 12주년 기념일을 맞아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과 외국군의 걸프지역 주둔을 모두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힌데서 알 수 있듯이 시종일관 중립적인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11일 시리아에 대해 아무런 전제조건 없는 회담을 제의하는 등 아랍내부의 분열을 나름대로 이용하고 있다. 아무튼 후세인이 내세운 아랍권 단결의 명분과는 달리 아랍국들은 이번 걸프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내분을 겪고 있는 셈이다. 이같은 내분은 지상전이 가까워지면서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 무참히 깨진 농촌 총각의 「결혼 꿈」/박현갑 사회부기자(현장)

    『뜻이 맞는 아내를 맞아들여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겠다더니…』 9일 상오 서울 종로구 혜화동 고려대 부속병원 영안실에서는 서울여자와 맞선을 보려고 상경했다가 승용차에 차여 숨진 농촌 노총각 두기동씨(33)의 홀어머니 박기분씨(59)가 오열하고 있었다. 두씨가 어처구니없는 변을 당한 것은 지난 7일 상오2시45분쯤. 4남2녀 가운데 셋째인 두씨는 나이 30을 넘기면서 여러차례 맞선을 보았으나 번번이 실패해 실의에 빠져있다가 지난 1일 서울에 사는 누나(39)로부터 『괜찮은 서울처녀가 있으니 맞선을 보라』는 연락을 받고는 사뭇 들뜬 마음으로 상경했다. 변을 당하기 하루전인 지난 6일 밤에도 누나 집에서 다음날 새벽까지 혼례문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새벽2시40분쯤 여관방을 잡으려고 누나집을 나왔다. 낯선 지역에서 택시를 기다리다가 그만 어처구니없게도 승용차에 치여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8시간 남짓만에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어머니에게도 효도가 극진하고 주위사람들에게도 예의범절이 깍듯해 마을 어른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었는데…』 조카가 죽었다는 소식에 전북 옥구군 수산리에서 헐레벌떡 올라온 두씨의 작은 아버지 두경돈씨(62)도 끝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농촌으로 시집오려는 처녀들이 없어 농촌총각들이 노총각으로 늙으며 결혼을 못해 자살까지 하는 현실이지만 서울까지 올라와서 선도 보지 못하고 비명에 간 두씨의 사연은 오늘날의 농촌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주위사람들을 더욱 안쓰럽게 만들었다. 두씨를 친 사고차량의 운전자는 나이어린 대학생이었고 그는 운전면허를 빨리 따겠다는 생각만으로 겁도없이 한밤중에 몰래 아버지의 승용차를 몰고나와 시내에서 주행연습을 하다가 사고를 냈다.
  • 지자제 대비,「영토확장」 안간힘/야권 재편 움직임 안팎

    ◎「지역당」 탈피,비호남권 교두보 모색/평민/양당 구조 타개 주안… 외부영입 주력/민주 평민·민주당과 재야 등 범야권의 재편작업이 물밑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특히 평민·민주당과 통추회의 등 3자통합협상이 완전결렬된 후 평민·민주당 등 두 제도권 야당은 당세 확장을 위해 「재야」라는 미개척지를 놓고 「영토확장」 게임을 벌이고 있는 양상이다. 평민당으로서는 다가오는 양대 지자제선거와 총선·대선 등에서 현재의 지역당적 성격을 탈피하지 않고는 현상유지 이상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서,민주당은 지난 정기국회에서처럼 정국이 민자·평민 양당 구도로 정착될 경우 당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각기 외부인사 영입에 당운을 걸고 있는 셈이다. 이들 양당의 당세 확장을 위한 주된 공약대상이 재야세력과 구정치인그룹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경쟁적인 양상을 띨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같은 재야에 대한 경쟁적인 영입작업은 내년 3월께 예정된 지방의회선거를 앞두고 더욱 확산될 전망이며 이과정에서 현재 평민·민주·민중당 등 3개 정당과 통추회의·전민련 등으로 사분오열된 범야권이 재편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내년 상반기중 실시되는 지방의회선거와 92년 상반기중 실시될 예정인 단체장선거 등 양대 지자제선거에서 김대중 총재의 차기 대권레이스를 앞두고 사전정지작업을 완료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고 있는 평민당은 정기국회가 폐회됨에 따라 지자제에 대비한 당체제 정비와 함께 본격적인 외부인사 영입작업에 돌입. 특히 평민당으로서는 현재의 지나친 지역당적 성격에서 연유하는 「응집력은 강하나 확산력이 없는」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다가오는 일련의 선거전에서 평민당과 김 총재의 승산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호남권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당세 확장의 초점을 맞출 전망. 이를 위해 평민당은 우선 지난 7월 전당대회 이후 공석으로 남겨둔 7석의 부총재 중 외부영입몫을 제외한 5명을 임명하고 방만한 실·국장단을 정예화하는 등 일차적으로 당체제를 정비한다는 계획. 평민당은 이같은 당체제 정비로 결속력을다진 뒤 재야세력과 비호남권,특히 영남권 구정치인들을 결집시키는 형식을 빌려 지역당 성격을 탈피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당 해체 후 신당 창당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져 주목. 이는 평민당을 간판으로 하는 외연확대작업이 사실상 한계를 갖는 데서 나온 고육지책으로 친평민 재야세력이 「범민주통합」이라는 이름으로 결사를 시도할 경우 형식적이나마 평민당이 이에 흡수되는 모양을 갖추겠다는 시나리오로 관측. 평민당의 「발전적 해체」 방법은 법적인 당 해체시에는 선관위에서 배분되는 정치자금을 받을 수 없다는 점과 「흡수통합」 후에도 어차피 현 평민세가 조직의 근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로 정치적 해체의 성격을 띨 것이라는 전망. 이같은 정치적 해체의 골격으로,현재 평민당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은 당명 개칭과 함께 김 총재 단일지도체제에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는 정도. 이 경우 참여할 수 있는 대상자들은 평민당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이창복씨 등 일부 전민련 인사,통추회의내 일부 개신교 인사들을 비롯한 친평민성향의 이른바 「종로5가파」(기독교회관)와 강문규 전 YMCA 총무·이우정 전 여성단체연합회장 등이 거명되고 있는중. 또 학계에서는 이상신(고대)·박종화(한신대)·장을병(성대) 교수 등이,구정치권에서는 유치송 전 민한당 총재,이우섭 전 국민당 총재,예춘호·박일 전 의원 등이 지역색 희석 차원에서 물망에 오르고 있는 인사. ○…민자·평민 양당 구도의 틈바구니에서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민주당은 지자제선거가 국회의원선거와 마찬가지로 소선거구제로 낙착됨에 따라 수도권에서는 민자·평민·민주의 3파전으로 수도권·영호남을 제외한 기타 중부권에서는 민자·민주의 2파전이 될 것으로 나름대로 낙관적인 정세판단을 내리고 있는 듯하다. 민주당은 우선 내년 상반기중 지방의회선거를 통해 비호남권의 잠재적 민주당 성향의 지지기반을 확인한 뒤 이를 바탕으로 민자­평민 양당 구도를 비집고 차기 총선 등에서 「3김퇴진론」으로 요약되는 세대교체론을 확산시켜 나간다는 전략. 그러나 민주당의 이같은 「희망사항」이 현실화되려면 비중있는외부인사 영입을 통한 당세 확장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 이같은 맥락에서 19일 구성을 완료한 당확대발전특위(위원장 조순형 부총재)와 지자제선거대책특위(위원장 홍사덕 부총재) 등이 어느 정도 가시적 성과를 거둘지 주목. 민주당은 「등원거부」 선언 후 지금까지 김현규 총재대행·이기택 전 총재 등이 구야권 정치인을,이철·김정길·노무현 의원 등 소장파들이 경실련·민변·민교협 등 온건재야단체와 통추회의내 민주연합파·학계·전문직 노조·전직 언론인을 대상으로 각기 영입을 모색중. 지금까지 구체적으로 거명되고 있는 인사로는 고흥문·양순직·이중재씨와 유제연 전 의원 등 전직 의원 3∼4명의 참여가 유력시된다는 관측. 내년 1월말쯤 열릴 전당대회의 그림이 「제2의 창당」 방식(외부인사 당대표 옹립)이 될지,아니면 민주당의 「확대개편」(이 전 총재 복귀) 형식이 될지는 이들 영입인사의 비중과 함수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살려줘요” 애원 5살 여아도 무참히/양평 생매장 살해

    ◎8순 할머니등 돌로 쳐 실신시킨뒤 파묻어/“노약자 탄 차 털자” 피해차 추적/강릉 친척 고희연 참석길 덮쳐/현금 20만원ㆍ차 강탈 「범죄와의 전쟁」선포에 따라 범죄예방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신혼여행중인 부부를 납치ㆍ강탈한데 이어 잔칫집으로 가던 일가족 4명을 국도에서 납치해 금품을 빼앗고 야산에다 산채로 파묻어 살해한 일당 4명 가운데 3명이 경찰에 검거됐다. 범인들은 단순히 용돈마련을 위해 갓 결혼해 여행중인 신혼부부를 털었고 이 범행으로 자신들이 쫓기게 되자 도피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선량한 일가족을 납치,돈을 빼앗은뒤 증거를 감추기 위해 살려달라는 이들의 절규도 외면한채 살아있는채로 매장하는 등 극도의 잔인성을 드러냄으로써 온국민들의 분노감을 자아내고 있다. 인명을 경시한 범인들의 잔인무도한 범행으로 단란했던 한가정의 평화가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진 이 사건은 배금사상과 도덕성상실의 사회풍조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일가족 살해◁ 범인들은 지난달 29일 강릉 신혼부부 납치사건뒤 경찰의 추적을 받자 전국을 무대로 20여차례 강ㆍ절도 행각을 벌이면서 도피생활을 하다 지난9일 하오1시20분쯤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 6번 국도에서 서울을 떠나 강릉쪽으로 가던 서울1 초9298호 자주색 소나타승용차(운전자 유증렬ㆍ55ㆍ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286의352)를 자신들의 승용차로 가로막아 세우고 운전자 유씨 등 일가족 4명을 흉기로 위협,현금 20만원과 차량을 빼앗은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살인마행각을 시작했다. 이에앞서 범인들은 전날밤 양평군 단월면 석산리에서 민박을 하면서 「한건 할것」을 모의하고 노약자들만 탄 승용차를 범행대상으로 삼기로 했다. 단월면에서 횡성쪽으로 차를 몰고가던 범인들은 청운면 갈운리 앞길에서 유씨의 승용차가 자신들의 차를 추월하자 『저 차를 털자』고 결정,다시 유씨의 차를 추월해 가로막아 세웠다. 범인들은 유씨 가족을 위협해 2대의 승용차에 나눠타고 부근 비포장도로로 들어가 텐트끈 등으로 이들의 손발을 묶어승용차트렁크에 넣어가둔뒤 다시 용문산줄기 단월면 싸리봉 비슬고개 샛길입구까지 와 차례차례 생매장했다. 하오2시30분쯤 샛길입구에 2대의 차를 세워놓은 범인들은 우선 김매옥ㆍ주옥 자매할머니를 자신들의 승용차에 태워 싸리봉 7부능선에 있는 20m 절벽으로 끌고가 밀어떨어뜨린뒤 돌로 머리를 쳐 실신시키고 도랑부근 웅덩이에 흙과 돌로 파묻고 낙엽을 덮어 흔적을 감췄다. 범인들은 2시간뒤 샛길입구로 내려와 유씨를 같은 방법으로 매장했다. 30분뒤 다시 내려온 범인들은 최서연양을 끌고가 준비해간 삽으로 구덩이를 파고 결박한채로 파묻어 버렸다. ▷사체발굴◁ 경찰은 이날 양평경찰서 소속 경찰관 70명 등 모두 2백여명을 동원,양평군 단월면 일대에 대한 수색작업을 벌여 하오1시20분쯤 산음리 싸리봉 비슬고개에서 사체 4구를 찾아냈다. 할머니 2명의 사체는 비슬고개 중턱에서,유씨는 50m쯤 떨어진 곳에서,최양은 유씨가 발견된 지점으로부터 2m쯤 떨어진 곳에서 각각 발견됐다. 발견당시 유씨는 흰장갑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고 넥타이로 목이 졸렸으며 두손과 두발은 텐트끈으로 묶여 있었다. 김주옥할머니는 러닝셔츠로 목졸려 있었고 매옥할머니는 치마끈으로 두손이 묶인 상태였다. 또 최양은 상처하나없이 두손만 뒤로 묶인채 구덩이에 쪼그려있는 모습으로 발견돼 생매장당시의 처참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수사◁ 경찰은 범인들이 타고 다니는 로열승용차가 경기도번호를 달고있다가 강릉사건 피해자 손달원씨(27)의 진술에 따라 경기ㆍ인천ㆍ서울 등지에 차량수배를 내리는 한편,손씨부부가 이들에게 빼앗긴 수표 4장을 서울 서초동 술집에서 발견,수표추적조사에 나섰다. 경찰은 범인들이 신혼부부로부터 빼앗은 엑셀승용차에 충주에서 훔친 번호판을 붙이고 다니다 지난9일 인천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도주하는 것을 검거하려하자 칼을 휘두르며 차를 버리고 달아나 신혼부부 납치사건의 범인으로 단정했다. ◎시조사 재무실장/피살 유증렬씨 ▷피해가족 주변◁ 유씨의 참변소식이 전해진 동대문구 휘경동 286의352 서울 위생병원내 시조사 사택에는 가족 친지 교인 등 50여명이 몰려넋을 잃고 오열했다. 유씨의 부인 김선희씨(52)는 비보를 듣고 한때 실신했으며 숨진 서연양의 어머니 유은주씨(33)는 『결혼한지 5년만에 얻은 딸인데 이렇게 죽다니 믿기지 않는다』면서 서연양의 사진을 붙들고 통곡했다. 숨진 유씨는 위생병원 재단에서만 35년간을 근무한뒤 지난88년 위생병원 감사실장으로 일하다 시조사 재무실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성실하게 일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 소양호에 잠긴 가장의 소망/오승호 사회부기자(현장)

    ◎“학비 번다며 트럭몰고 나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4일 발생한 강원도 인제군 군축교 버스추락사고 희생자들이 안치돼 있는 아산재단 인제병원 영안실 한편에서 이번 사고로 숨진 트럭운전사 이양우씨(45)의 부인 이복덕씨(39)가 넋이 나간채 오열하고 있었다. 졸지에 부모가 형제를 잃은 다른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에게도 날벼락이긴 마찬가지겠지만 이씨의 슬픔은 유독 더한 것 같았다. 트럭운전사 이씨는 대구에서 보증금 1백만원에 월20만원짜리 방2칸을 얻어 셋방살이를 하면서 이불공장에서 이불을 도매로 사다가 트럭에 싣고 전국의 이불시장을 찾아다니며 팔아 남는 수입으로 어렵게 살아 왔다. 고등학교,중학교에 다니는 두아들의 학비를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대구에서 이불을 싣고 강원도 산골짜기까지 일일이 돌아다녀야 했던 이씨는 한번 집을 나서면 1주일에서 열흘만에 집에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번에도 언제나 그랬듯이 지난2일 트럭에 이불을 가득싣고 대구를 떠나 천안에서 이 가운에 몇채를 판 다음 서울로 올라와3일밤을 누나집에서 묵은뒤 이날도 인제에 있는 이불시장을 찾아다니다 군축교위에서 어처구니없는 변을 당했다. 넋을 잃고 쓰려져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부인 이씨에게는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은 날벼락 말고도 대학입시를 며칠앞둔 아들 걱정과 함께 설상가상으로 사고를 낸 버스가 종합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기 때문에 피해를 보상받을 길마저 막연한 어려움까지 덮쳤다. 『애들에게 공부 잘하고 문단속 잘 하라며 집을 나서더니…』 이씨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다시 정신을 잃었다. 병원 마당에는 제철을 만난 강원도의 낙엽들이 을씨년스럽게 쌓여있었다.
  • 말도 잊은 40년만의 부자포옹/축구인 이회택씨 평양서 아버지 상봉

    ◎같은 호털방서 밤새워 “지난얘기” 두손을 만지작거리며 계속 문쪽에 눈길을 주고 있던 리용진씨(63)가 벌떡 일어났다. 『회택이 아니냐,회택이구나』 리용복씨(58)도 달려가 이회택감독(44)을 얼싸 안았다. 10일 하오9시 고려호텔2층 회의실. 아버지 용진씨,삼촌 용복씨보다 늦게 홀에 들어온 이감독은 한꺼번에 다가온 아버지와 삼촌에 안겨져 이쩔줄을 몰라했다. 기억조차 희마한 아버지얼굴이 현실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 40년만의 부자상봉은 아들을 한눈에 알아본 아버지의 오열과 아슴푸레한 기억속에서 방황하던 아들의 생경함으로 더욱 아픈 장면이 계속되었다. 감정이 복받치듯 아버지는 울음을 터뜨리며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다가 띠엄띠엄 한마디씩 말을 이었다. 『회택아,이게 40년만이구나』 『예,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야,회택아,다시한번 보자』 고려호텔2층 회의실은 이산과 상봉의 아픔이 진하게 퍼져있었다. 6.25전쟁때 의용군으로 나섰다가 북쪽으로 간 아버지와 4살때 생이별. 얼굴한번 못보고 말한번 듣지못하고 40년을 살아온 아들의 만남은 당초 하오9시께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황해북도 신계군 정봉리 집단농장에서 일찌감치 달려온 아버지와 남북통일축구경기 한국선수단을 따라와 고려호텔에 묵고있던 이감독이 예정시간보다 3분먼저와 이들의 만남은 하오8시57분에 이루어졌다. 부자는 한순간 엉겨붙어 3분간의 억센 포옹으로 40년의 한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를 알아보겠느냐』 『할아버지와 꼭 닮았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우리야 행복하게 산다. 못만날줄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할아버지는 6.25다음 다음해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실때까지 즐거울때나 슬플때나 아버지 이야기만 했습니다』 『자식걱정으로 편히 가시지도 못했겠구나』 말문을 튼 부자는 그제서야 일가친척의 안부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는 하루면 오갈 수 있는 갈이 40년만에 이어진 것을 원망하기도 했다. 이야기하면서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꼭 쥐고 어루만졌고 또 어루만졌다. 이날 40년만의 부자상봉은 전 국가대표축구팀 감독이었던 아들 이씨가 지난해 이탈리아 월드컵최종예선전때 북한의 박두익감독에게 아버지의 생사확인을 부탁,생존을 확인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이들 부자는 이날 밤10시35분까지 1시간40분동안 대화를 나눈후 일단 이감독이 묵고 있는 고려호텔22층 21호에 들어가 문을 닫고 밤새워 이야기를 계속했다. ○“형 조속상봉 기대”/이회택씨 삼촌 한편 경기도 김포읍 사우리에 살고 있는 이감독의 둘째 삼촌 이용섭씨(56)는 『TV화면을 통해 형님을 보니 기쁘기 짝이었다. 아직 63세밖에 되지 않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70세나 75세 노인으로 보여 안타깝다. 하루라도 빨리 형님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씨는 『회택이가 평양에 갈때 부친께 드린다고 한복한벌과 사슴뿔을 가지고 갔다』고 전하고 『나는 20년전 어머니 환갑때 찍은 가족사진을 보냈다』고 밝혔다. ◎상봉부자 일문일답/“1천만이산가족 우리처럼 만나야”/이회택/“분단된후 처음 아들 보니 꿈만같아”/아버지 ­(이감독에게) 아버지를분단이후 처음 만난 소감은. ▲이감독=아버지ㆍ삼촌과 만난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현재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이 남북한 합쳐 1천만명이나 되는데 이를 계기로 나혼자만이 아닌 천만이산가족이 이렇게 만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감독에게) 아버지와는 어떻게 헤어졌는가. ▲이감독=당시 4살인 나로서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6.25동란이 우리를 갈라놓게 된 것이다. 서로 이념이 다르고 사상이 달라 아버지와 나는 남과 북으로 헤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에게) 우선 40년만에 아들을 만난 소감은. ▲아버지=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수령님과 경애하는 지도자 김정일동지께서 분단이후 처음으로 아들을 만나게 해주셔서 기쁘기 그지없다. 고마운 은공에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느끼고 있으며 40년만에 내아들 회택이를 만나고 보니 꿈만 같다. ­(아버지에게) 아들을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었나. ▲아버지=어릴때 모습이 기억에 가물하다. 그러나 아버님(이감독의 할아버지)으로부터 회택이가 나를 닮았다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아들의 생존소식을 언제 알았나. ▲아버지=지난해 8월 지도원이 찾아와 살아있다고 해서 알았다. 또 그자리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감독에게) 만나는 첫 순간 아버지임을 알아보았는가. ▲이감독=어렸을때 사진으로 보아왔고 지난해 9월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월드컵아시아지역 최종예선전에서 북한의 박두익감독이 건네준 사진을 받아본 순간 아버지와 삼촌을 분명히 확인 할 수 있었다. ­(이감독에게) 이감독은 부자상봉의 큰 기쁨을 나눴는데 앞으로 이산가족간의 자유왕래에 대한 견해는. ▲이감독=이산가족의 만남은 남북 국민간의 염원이다. 북남통일ㆍ남북통일이니 하는 말이 안들리도록 좋은 여건이 마련되기를 소망한다. 북조선 사람들이나 남한사람들이 언젠가 단합되고 한나라가 될 수 있도록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감독에게 집요하게) 현재 이산가족이 남북 합쳐 1천만명이 되는데 빨리 통일해야 한다는게 남북주민들간에 일치된 바람일줄 안다. 이감독의 입장에서 통일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몫이 있다면 이에 대한 계획은. ▲이감독=통일은 정치하는 분들이 하루빨리 좋은 안을 내놓아 해결책을 찾고 이산가족도 서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자가당착에 빠진 「하나의 조선」/이기택 연세대 교수(서울시론)

    ◎유엔가입ㆍ대일 외교서 수정 불가피 오늘날 북한의 최대 관심과 문제점은 「하나의 조선」정책을 수정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도에서 보듯이 김일성이 심양을 비밀리에 방문했다면 북한이 무엇을 갖고 중국을 설득하려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북한이 「하나의 조선」정책으로부터 「두개의 조선」정책으로 이행할 수 있는 「수정」이 가해질 것인가 하는 문제다. ○김일성 권력기반과 직결 사실상 지금까지 북한에게는 「하나의 조선」정책이 거의 강력적인 원칙인 것이다. 북한의 모든 권력의 논리는 이 「하나의 조선」정책으로부터 기원하고 발원하기 때문이다. 「조선」이 「하나」이어야 한다는 논리를 포기하려 할 때에는 김일성이 해방직후부터 견지하여 온 「하나의 조선」정책이라는 기치를 내려 놓는다는 것으로 곧 권력의 기반을 잃게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김일성은 권좌에서 물러나야할 정도의 근본적인 문제고 또 딜레마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북한의 딜레마는 북한의 체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김일성의 권력의 논리인 「하나의 조선」정책의 논리가 수정될 것인가하는 문제가 우선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번 남북한 총리회담에서도 북한의 최대의 관심사는 한국이 유엔에 가입할 외교적인 조건을 사전에 봉쇄해야 한다는 것이 밑바닥에 깔린 목적이었다. 그 이외의 것은 설혹 우리 대통령이 아무리 좋은 얘기를 연형묵총리에게 했다 하여도 북한은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유효하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와 달리 북한은 확고한 원칙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하나의 조선」정책에 가장 급박한 문제점은 우리 외무부가 꾸준히 추진하여 온 한국의 유엔가입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단독가입」이나 「동시가입」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냥 한국의 유엔가입인 것이다. 「단독가입」이라는 말은 잘못된 어구인 것이다. 한국은 해방이후 유엔에 의해서 독립되었으며 안전보장면에서 북한도 인정해온 휴전협정의 당사자의 하나인 유엔에 의해서 지금도 한반도의 안전체계가 유지되고 있으며 북한도 참가하는 유엔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유엔가입은 국가체제를 수정하지 않는 이상 기본적인 문제로 내려온 것이다. 1949년에 북한이나 남한이나 모두가 각기 유엔가입을 신청하였었으나 거부권으로 가입이 중단되었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환경이 본질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9월11일자 이즈베스티야논설에서 한소관계가 외교적으로 성립될 수 있다는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유엔가입을 1949년에 거부하였던 소련이 한국을 승인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북한은 지금까지 「공작외교」를 전개해 오던 대일정책에서 이번 방문할 가네마루사절단을 계기로 정책을 전환하여 일본의 돈과 기술을 도입하고 싶으나 북한이 대일정책을 「공작외교」에서 「공식외교」로 전환하는 순간 북한은 「두개의 조선」정책으로 나가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일본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기 시작하는 순간 「하나의 조선」정책이라는 기치는 깊은 상처를 받게 되며 수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북한이 일본과의 국교를 남한이 1965년에 설정하였던 패턴을 따른다면 이는 곧 「하나의 조선」정책의 포기를 의미하며 「두개의 조선」정책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북한에게 있어서 유일한 「숨돌리기」는 천안문사건이래의 중국이었다. 사회주의 4원칙을 지키겠다는 정치적 입장과 함께 북한에게 동유럽의 개혁바람을 막아 줄 수 있는 유일한 바람막이었다. 그러나 이제 중국도 한반도정책을 수정해야 할 단계에 들어섰다는 점이다. 따라서 북한의 「하나의 조선」정책은 마지막 거점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문제점과 자유의 바람은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남한으로부터가 아니라 동유럽과 특히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오고 있다는 점에 북한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은 꾸준히 수십년동안 전개해 온 대남정책을 총점검하였으리라 추측된다. 김일성이 심양에서 강택민과 회담을 했으리라 본다. 사실상 「하나의 조선」정책은 북한의 남한에 대한 「해방」정책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한정치의 사분오열과 정치전통의 붕괴 등을 분석하면서중국을 설득하리라 예측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조선」정책은 북한을 통치해오고 또 해가고 있는 김일성의 북한의 대내통치의 권력적인 기반이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것이다. 이제 소련과 중국이 「두개의 조선」으로 이행하면서 북한의 「남조선공산화」정책이 불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릴 때에는 김일성은 북한의 대내정치를 수정해야 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것이다. 1945년이래 김일성은 남조선을 「해방」해야 한다는 이론적인 기반을 갖고서 북한을 통치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김일성권력의 논리인 「하나의 조선」정책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게 될 조건이 성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김일성의 통치이론에 대한 손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조선」정책의 전환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며 북한은 중국이라는 가느다란 선을 잡고 「숨돌리기」를 하고 있으며 그 근거가 남한이 지금도 대남정책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근거를 갖고 중국을 설득하리라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여야 정치인들이 제정신을 찾기 바랄 뿐이다.대한민국을 다 만들어 놓고 우리 스스로가 흔들지는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에 의지,숨돌리기 앞으로 북한은 스스로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할 길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확고하게 우리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길을 가면 곧 북한에게도 큰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에 적응한다고하여 북한이 대남정책을 수정하리라는 망상은 일찍 버려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에게 남한사회의 없는 허점까지 과장되게 보여주어서는 남북한 관계에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오늘의 대내정치의 모순을 역으로 우리의 대내정치를 수정하면서까지 북한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불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 「인간의 탈」을 쓴 유괴범/김동준 제2사회부기자(현장)

    10일 상오11시쯤 경기도 권선구 세류2동 주택가변 한적한 도로. 아침부터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가운데 이 동네 이상길씨(31ㆍ회사원)의 둘째아들 완희군(5)을 유괴ㆍ살해한 유괴범들에 대한 현장검증이 실시되고 있었다. 전기철씨(25ㆍ전과4범) 등 3명의 범인이 태연하게 범행을 재연하는 동안 이군의 아버지 이씨와 어머니 김홍숙씨(29)는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넋을 잃고 오열했다. 우산을 받쳐들고 나온 5백여명의 주민들은 『저놈을 죽이라』며 큰 소리로 외쳐댔다. 물욕에 눈먼 인면수심의 범인들에 대한 질타였다. 이번 사건은 최근 유괴 살해된 서울의 김희성군(9ㆍ청담국교3년) 사건과 똑같이 어린이를 유괴한 직후 살해하고 돈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종래의 유괴사건에 비해 인명경시풍조가 한층 도를 더한 느낌마저 들게하고 있다. 경찰조사결과 이번 사건의 주범인 전은 후배인 문경한씨(22ㆍ무직)와 범행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어린애를 살려보내면 언젠가는 꼬리가 잡힌다』며 『먼저 죽이고 시작하자』고 제의,끝내는 자신이 완희군의 목을 졸라 숨지게 한 것으로 드러나 범인의 잔인성을 엿보게 했다. 더구나 전은 차트렁크에서 완희군이 눈을 크게 뜨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다시 5분동안이나 목을 졸라 살해하는 인간성 말살의 잔학성을 보였다. 주범 전은 처 김은실씨(20)와 함께 카페를 운영하다 망하게 되자 『야채장사라도 하여 먹고살자』는 애원을 뿌리치고 부인마저 이번 사건에 동업자로 끌어들였다. 전씨는 경찰에서 문씨와 범행을 모의하던중 처 김씨가 이를 알게되자 『신고할 것이 두려워 범행에 적극 가담토록 했다』고 말했다. 완희군의 아버지 이씨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현재 살고 있는 다가구주택 2층을 2천만원에 전세내 살고 있으며 이것도 지난 7월초 두아들을 위해 전세 7백만원의 단칸방에서 빚을 얻어 옮겨온 것이었다. 이군의 어머니 김씨는 『남에게 원한을 산적도 없고 그저 두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 쪼들리는 살림에 학원까지 보내며 노력했는데 이같이 기막힌 일을 당할 줄은 몰랐다』며 넋을 놓고 통곡했다. 범인 전의 오른쪽 어깨에는 「삶」이라는 큰 글자가 문신돼 있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삶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 정치평론가 헬프린씨의 페만사태 진단

    ◎「몰락의 늪」속으로 빠져든 후세인/동서 데탕트무드에 찬물… 소도 등 돌려/무모한 팽창 야욕으로 「고립무원」자초 이라크의 쿠웨이트침공으로 페르시아만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지는 정치평론가이자 소설가인 마크 헬프린씨의 「후세인,몰락의 그늘속으로」란 제목의 기고를 게재했다. 헬프린씨는 미 하버드대에서 중동문제를 전공했으며 이스라엘 보병과 공군에 복무했다. 지도를 펴 보면 중동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물이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에 존재하고 있음을 지형별 색깔구분에 의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게다가 이라크의 입지,광대한 경작가능토지 및 유전 등은 사담 후세인 같은 강압적 팽창주의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나 이라크를 과거 칼리프 왕조시대에 그러했듯이 아랍세계의 맹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받게할만한 충분한 여건이 된다. 그러나 대제국 건설이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후세인은 참을성 없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역행해 운명을 내건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전철을 밟으려 하고 있다. 파멸의 그늘로 줄달음쳐 가고 있는 것이다. 국제정세가 안정돼 있다는 이유로 미국의 군사력 감축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이제 세계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자제를 요구할 것이다. 소위 실용주의자들은 후세인에 대한 과소평가를 이해하려들지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후세인이 휘두를 수 있는 카드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적대시하는 지구상의 수십억명에 비해 이라크의 인구는 1천7백만명이다. 국내 총생산(GDP)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일본의 15조달러에 비해 4백억달러에 불과하다. 후세인은 적이나 비우호적인 동맹국,통제력이 미치기 어려운 바다와 사막으로 둘러싸여 있다. 카다피와 아라파트만이 후세인을 두둔하고 있으나 후세인이 궁지에 몰릴 때 도움이 될만한 인물들은 못된다. 이라크는 베트남과는 달리 인구의 4분의 3 정도가 도시지역에 몰려있기 때문에 국내산업 혼란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다. 이라크내의 개발프로젝트는 곧 이라크의 외채를 의미하며 GDP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대외무역과 외국인 활동없이는 멀지않아 국가 전체가 마비되고 후세인의 과대망상적 야망도 자취를 감출 수 밖에 없다. 주민 소득을 비롯,주요무기와 생활필수품을 선진국에 의존할 뿐 아니라 석유시설ㆍ댐ㆍ통신회로 등도 손쉽게 파괴 또는 봉쇄될 수 있다. 이라크는 사막 한 가운데의 섬과 같아서 송유관 정유시설,외부와 연결되는 각각 6개의 주요도로와 국제철도,수력발전시설,수로,항구 등 몇 안되는 목표물만 잘 처리하면 삽시간에 마비된다. 파괴할 필요까지도 없고 단지 봉쇄만 하면 된다. 이같은 공간적 불리함 외에 시기적으로도 후세인은 미 소간의 밀월관계로 대표되는 동서화합과 협조시점을 택해 쿠웨이트를 침공했기 때문에 기댈 언덕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불이익을 자초했다. 군사적 점성술면에서 히틀러보다 몇수나 뒤떨어진 셈이다.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후세인을 보호해온 소련은 몇년전까지만 해도 서방측에 대한 위협요소였으나 이제는 신데탕트질서를 과시하기 위해 서방세계와 손잡음으로써 후세인에 대한 위협세력으로 변모했다. 후세인은 또 원유공급을 위협,전세계 국가가 단결해 대항하도록 자극했다. 유가가 상승함에 따라 이란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을 묵인하는데 대한 혜택을 잠시 보게될지는 몰라도 과도하게 팽창해가는 이라크를 공격하려는 충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랍세계의 급진파와 좌익전선은 페르시아만의 완전 정복을 바라겠지만 실세인 이집트 및 시리아와 페르시아만 연안국 자신들은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아랍권의 단결을 겉으로는 호소하면서도 이라크의 적인 서방국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후사정이 이렇게 간단한데도 사태해결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각국의 광범위한 협력이 이라크를 압도하고 있는데 후세인은 어떻게 아직까지도 사태유발책임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은 채 큰소리 칠 수 있는가. 내가 보기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인질로 삼아 전세계를 위협함으로써 쿠웨이트 점령에 대한 적절한 대응조치를 어렵게 만들려는 후세인의 전략이 어느 정도 먹혀들고 있는 것 같다. 사우디를 위혐함으로써 이라크에 대한 봉쇄를 단념시키고 쿠웨이트 정복을 무료로즐기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이라크가 당초부터 사우디를 공격할 의사를 가졌다면 쿠웨이트에서 머물러 전세계로 하여금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후세인은 이번 쿠웨이트장악 성공으로 인해 또다시 똑같은 선택을 내릴 정도로 대담해질지도 모른다. 승리감에 도취해 있는 이라크군은 기본적으로 무방비상태의 회교족장을 공격하거나 원시적인 소모전을 치르는데 적절한 수준이다. 육군은 이란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낡아바진 소련식 지상방어원칙밖에 몰랐고 자멸적인 이란의 10대소년들을 소탕했을 뿐이다. 공군력도 겉보기로는 대단한 것 같지만 실제 하늘에서는 상대방을 졸립게 만드는 수준이다. 지원병들은 전쟁이라면 넌더리가 나 있고 장군들은 사우디영토내 목표물까지의 절반 정도 거리에서조차 싸워본 일이 없다. 나무 한그루 없는 평지의 통신망은 미군기의 공습연습장 구실을 하게 된다. 사우디가 스스로 관속으로 뛰어들지 않기 위해 미군진주를 허용한 순간 이미 미군의 제공권은 보장된 셈이다. 미국과 유럽의비행편대는 페르시아만과 동지중해상의 항공모함,여러 곳으로부터의 크루즈 미사일 등과 보조를 맞춰 이라크의 사우디침공이 잘못된 결정이었음을 일깨워줄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는 자국의 정예군이 사막에 머무를 경우 그 사이에 자국영토를 호시탐탐 노리게 될 이란 시리아 이스라엘 등을 의식해서 후방에 대규모 예비대를 남겨둬야 한다. 1백만을 자랑하는 이라크의 대군중 사우디 침공에 가담할 수 있는 규모는 원정군 수준에 불과,나토 공군력에 의해 사분오열되고 괴멸할 수 밖에 없다. 아랍반도에서 전투경험이 있는 이집트도 사우디로 장갑차 사단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라크에 비해 월등한 규모의 군사ㆍ경제력을 동원해 이라크의 침공을 단념시키거나 이라크 침공군을 격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그것은 단지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이점에서 사우디는 무엇보다도 루큰 알딘의 교훈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스마일리의 부족장이었던 그는 저항능력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키지 못했기 때문에 몽고족의 정복을 막을 수 없었다. 몽고족은 결국 이집트의 말룩 바이바즈에 의한 아인 잘 루트전투에서 패배를 겪는다. 바이바즈가 강력했기 때문이 아니라 몽고가 지나치게 멀리까지 팽창을 꾀했기 때문이다. 후세인은 아마도 미국등 서방군대가 쿠웨이트의 원상복귀때까지 이라크를 봉쇄하려 할 경우 이라크의 사우디 공격이 불가피하다고 우리가 믿어주길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사우디를 충분히 지킬 수 있다. 미국과 그 우방국들은 세심한 준비를 갖춰 허풍으로 가득찬 후세인의 콧대를 꺾어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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