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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지성·메시·부폰… 코로나 극복 힘 보탠 영웅들

    박지성·메시·부폰… 코로나 극복 힘 보탠 영웅들

    클로제·오언·모리뉴·벵거 동참 손 씻기·기침 예절 등 수칙 소개한국 축구의 ‘레전드’ 박지성(39)이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국제축구연맹(FIFA)과 세계보건기구(WHO)가 공동 제작한 캠페인 영상에 리오넬 메시 등 세계적인 스타들과 나란히 등장했다. FIFA는 코로나19 예방법 등을 담은 영상을 WHO와 함께 제작해 24일 발표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날려 버리기 위한 메시지 전달’이라는 제목이 붙은 1분 33초짜리 영상은 “사상 처음으로 우리, 전 세계가 한 팀으로 경기에 나선다. 우리의 상대는 바로 질병이다.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결단과 훈련, 팀워크가 필요하다. 세계 축구가 단합하고 함께하면 우리는 승리한다”는 말로 시작한다. 각자 셀프 촬영분을 연결한 이 영상에서 박지성을 비롯한 각국 스타들이 코로나19에 맞서 건강을 지키기 위한 5가지 핵심 수칙을 소개한다. ▲손 잘 씻기 ▲기침이나 재채기할 땐 팔꿈치로 가리기 ▲눈·코·입을 포함한 얼굴 만지지 않기 ▲다른 사람과 최소 1m 거리 두기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발열 등 관련 증상이 있으면 집에 머물며 보건당국의 지침 따르기 등이다. FIFA는 13개 언어로 배포될 이 영상에 박지성을 비롯해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 알리송 베커(브라질), 미로슬라프 클로제, 필리프 람(이상 독일), 사비 에르난데스(스페인), 게리 리네커, 마이클 오언(이상 잉글랜드), 잔루이지 부폰(이탈리아), 사무엘 에투(카메룬) 등이 힘을 보탰다고 소개했다. 아시아에서는 박지성 외에 일본 여자 대표팀의 다카쿠라 아사코 감독 등이 동참했다. 조제 모리뉴 토트넘 감독과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전 토트넘 감독, FIFA ‘글로벌 축구 개발 책임자’로 활동 중인 아르센 벵거 전 아스널 감독 등도 출연했다. 홍지민 기자 icarus@seoul.co.kr
  • [강남순의 낮꿈꾸기] 위기 시대 ‘연민-연대의 정치학’이 절실한 이유

    [강남순의 낮꿈꾸기] 위기 시대 ‘연민-연대의 정치학’이 절실한 이유

    2020년 벽두에 본격화되기 시작한 코로나19라는 이름의 병은,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 곳곳에 경계심과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에서 어떤 이들은 이것을 ‘우한 폐렴’이라고 부르면서, 우한에 거주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중국 전체를 향한 혐오와 배제를 주장한다. 이 같은 혐오언어들이 소셜미디어는 물론 다양한 언론매체들을 통해 생산과 재생산을 반복하며 확산되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 코로나19를 확산하는 데에 결정적인 매체가 된 ‘신천지’라는 이름의 종교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곳곳에서 바이러스처럼 퍼지고 있다.●생물학적 바이러스보다 혐오가 비인간적 생물학적 바이러스보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를 극대화하는 ‘혐오 바이러스’가 한국 사회를 더욱 비인간화된 황량한 곳으로 만들고 있다. 누군가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에 대해 국가가 그리고 그 사회 구성원들인 개별인들이 어떻게 반응하며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가는 그 사회의 제도적 책임성의 수준과 민주적 성숙도,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들의 인간적 성숙성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2020년 코로나19 위기를 통해 우리가 서로 일깨우고 실천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 ‘함께-살아감’이다. 현대 세계는 생태적으로, 사회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경제적으로 갖가지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21세기의 이러한 위기들은 이전과는 달리 지리적으로 분리되는 ‘국가’의 영토적 경계를 홀연히 뛰어넘는다. 나 혼자만, 내 가족만 또는 내 나라만 무사하게 잘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또한 다양한 위기를 직면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은 인간 생명만이 아니라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근원적으로 상호 의존돼 있다는 것이다. ‘나’의 생존과 행복한 삶은 무수한 ‘너’들의 삶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현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함께-살아감’을 위해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연민’이다. 연민이야말로 ‘함께 살아감’의 가장 근원적 존재 방식이다. 인간은 그 누구도 고립된 섬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은 ‘나’와 ‘타자’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연민’의 영어 단어인 compassion은 ‘함께 고통한다’는 뜻이다. 즉 연민이란 나의 존재는 타자의 존재와 분리할 수 없으며, 타자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은 나의 고통에 타자가 함께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흔히 연민을 동정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두 개념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출발점, 과정 그리고 결과에서 매우 상이하다. ‘동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인 sympathy의 문자적 의미는 ‘함께-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의 느낌에 동조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물론 고통에 처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계는, 동정하는 사람과 동정받는 사람 사이에 ‘윤리적 위계’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동정하는 사람’은 ‘동정받는 사람’보다 어쨌든 ‘우월한 존재’로, 동정을 받는 사람은 ‘열등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불쌍해서 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도 하지만, 그 동정에 ‘왜’와 ‘어떻게’라는 근원적인 물음은 부재하다. 동정의 또 다른 한계는 ‘불쌍하게 여기는 느낌’에서 끝날 뿐 다른 연대의 행위나 인식의 확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정의 감정에서는 ‘왜’ 유독 청도대남병원의 정신과 폐쇄병동에서 지내던 입원환자들, 그리고 무경력 청년들이 가장 많이 취직한다는 신도림동의 어느 콜센터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서 코로나19의 희생자가 다른 곳보다 많은 것이며, 또는 소위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이 일용양식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왜 너무나 사치스러운 것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지닌 이면의 복합적인 문제들을 보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동정은 다른 연대의 행위로 이어지지 않아 반면 연민은 동정과는 달리 공평성, 정의 그리고 상호의존성의 가치들에 근거해 있다. ‘함께 고통함’의 의미로서의 연민은 단지 고통과 아픔을 수동적으로 함께 느끼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고통과 아픔이 야기되는 ‘원인’들을 없애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을 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또한 동정과는 달리 연민의 대상자와 연민을 느끼는 사람 사이에 여타의 윤리적 위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의 존재함을 위해 서로에게 의존된 삶을 산다는 진정한 ‘상호의존성’과 ‘함께 살아감’의 과제와 책임에 대한 인식에서 작동되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함께 살아감’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방식으로서의 연민이란, 타자의 고통에 함께함으로써 정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되며 ‘연대’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효과가 있다고 본다. 연민과 연대가 분리불가능한 이유이다. 진정한 연민은 같은 가족, 같은 종교, 같은 나라 등과 같은 ‘동질성’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작동하는 것으로서, ‘동질성의 연대’를 넘어서서 ‘다름의 연대’로 이어지게 한다. 1939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페트초는 유대인 게릴라 그룹인 ‘이건’(Irgun)의 요원인데 영국 범죄수사국에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고문을 받고 감방에 쓰러진 페트초에게 감방에 함께 있던 어느 아랍인이 음식을 가져온다. 페트초가 기운이 없어 음식을 스스로 먹지 못하자 이 아랍인은 페트초에게 음식을 먹여 준다. 그리고 페트초가 몸에 통증이 심해 아파하자 담요를 들어 보라고 한다. 온몸에 여기저기 멍이 든 것을 본 뒤 영국인을 최악의 야만인이라고 비판한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아랍인과 유대인 게릴라 그룹 요원이 자신들 안의 ‘인간됨’을 서로 확인하고 있는 장면은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며, 통상적으로는 상상하기조차 불가능한 일이다. 서로 지독한 ‘원수’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진정한 연민은 타자의 고통에 연대로 연결 감옥에서의 이 장면은 데리다가 ‘함께 살아감의 가장 근원적인 방식’이라고 하는 ‘연민’이,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주 순간적이지만, 인간이 지닌 타자에 대한 ‘연민’을 통해 연대의 ‘행동’이 이어지게 되면 원수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인간됨을 나누게 되는 의미와 감동의 순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연민을 느낄 때, 동정에서처럼 감정적 반응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연대’가 작동되는 힘으로 확장된다. 연민은 아랍인과 이스라엘 유대인인 페트초의 경우에서처럼, 많은 경우 타자의 고통을 목격하게 되면서 생기기 시작한다. 여기서 우리는 ‘함께 살아감’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째, ‘누구와’ 함께인가. 둘째, 함께 살아감에서 ‘살아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것 같지만 사실상 매우 복잡한 이야기이다. ‘살아감’이란 낭만적인 모토가 아니라 ‘재난기본소득’과 같이 구체적인 제도화를 통한 연대의 정치를 통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는 매우 구체적인 것이다. ‘함께’의 범주에 자신의 가족, 친척, 친구들을 포함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 중에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 난민, 이주민 또는 이번 코로나19 사건에서 주목을 받아 온 ‘신천지 교인’들 같이 혐오와 기피 대상이 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야 한다면 ‘함께 살아감’이란 돌연히 너무나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러나 쉽게 가능한 일만을 골라서 한다면 이 세계가 지금보다 나은 상태로 변화되기는 어렵다. ‘함께 살아감’의 세계로 만드는 것은 이렇게 처음에는 ‘불가능한 것’ 같은 일들을 조금씩 해나가는 이들에 의해 가능하다.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인류가 직면하는 다층적 위기들을 넘어서서 ‘함께 살아감’이 가능해지려면 동질성을 지닌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와 ‘다름’을 지닌 사람들, 가까운 타자만이 아니라 기피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먼 타자들에게까지 연민과 연대의 손길을 확장하는 의식 및 행동과 함께 사회정치적 제도화를 이뤄야 한다. 위기의 시대 연민과 연대의 정치학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이다. 글 텍사스 크리스천대,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그림 김혜주 서양화가
  • [책꽂이]

    [책꽂이]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김영옥 외 3인 지음, 봄날의책 펴냄)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고찰. 나이듦과 죽음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의제화하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이 기획했다.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받기’, ‘보호자라는 자리’, ‘병자 클럽의 독서’, ‘젊고 아픈 사람의 시간’, ‘치매,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시간과 노니는 몸들의 이야기’ 등 6편을 담았다. 304쪽. 1만 5000원.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임헌영 지음, 소명출판 펴냄)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의 새 평론집. 최인훈, 박완서, 이병주, 남정현, 장용학, 황석영 등 문학 작가들의 작품 중 ‘정치를 질타하는 문학’을 비평했다. 조정래의 ‘아리랑’을 비롯한 민족해방투쟁 소설들과 프롤레타리아 여류작가로서 항일 여성투사의 삶을 다룬 박화성에 대한 논고 등을 실었다. 519쪽. 2만 3000원. 실리콘 제국(루시 그린 지음, 이영진 옮김, 예담아카이브 펴냄) 실리콘밸리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과 문제점을 분석한 저작. 미래학자로서 글로벌 싱크탱크를 이끄는 저자는 기업 리더와 유명 벤처캐피털리스트, 학자, 언론인을 인터뷰해 실리콘밸리의 글로벌 장악 시도, 불투명한 자선사업, 우주 등 ‘미지 영역’에의 진출 등을 파헤친다. 392쪽. 1만 8000원. 곽재식의 세균 박람회(곽재식 지음, 김영사 펴냄) SF, 과학 논픽션을 넘나드는 곽재식 작가의 신간. 세균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왔는지, 세균으로 환경문제나 범죄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는지, 우주 개발에 세균을 활용하는 방법 등을 살펴본다. 380쪽. 1만 6800원. 잠자는 미녀들 1·2(스티븐 킹·오언 킹 지음, 황금가지 펴냄) 여성만이 걸리는 수면병이 휩쓴 세계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 ‘공포 스릴러의 대가’ 스티븐 킹이 아들 오언 킹과 함께 썼다. 미국의 작은 소도시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의 갈등과 욕망, 사랑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해 벌어지는 고군분투를 그렸다. 각 612쪽, 568쪽. 세트 2만 6000원. 평양 상인 경성 탐방기(김희철 지음, 수류책방 펴냄) ‘북한개방 시 유망사업 업종별 아이템’이라는 부제가 붙은 투자 가이드북. 금융인 출신의 북한학 박사인 저자는 미래 통일시대와 그 전에 다가올 대북경제 제재 완화에 대비해 기업들의 대북 진출과 투자 러시를 파악, 기업들이 참고할 만한 업종들을 정리했다. 256쪽. 1만 4000원.
  • 점점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반딧불이…인공조명·투어관광 탓 (연구)

    점점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반딧불이…인공조명·투어관광 탓 (연구)

    전 세계에서 2000여 종의 반딧불이 서식한다고 알려진 가운데 그중 일부가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3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CNN에 따르면, 미 터프츠대의 새라 루이스 교수가 이끄는 국제연구진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반딧불이를 연구하는 전문가를 대상으로 개체 수와 위협 요인 등을 조사한 결과, 일부 종은 멸종 위기에 있으며 그 원인은 서식지 감소와 농약 사용 그리고 인공 조명 등에 의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서식지 감소에 대해 루이스 교수는 “어떤 반딧불이 종은 특정 환경 조건이 아니면 번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말레이시아 반딧불이 중 1종(학명 Pteroptyx tener)은 번식을 위해 맹그로브 등 습지가 필요하다”면서 “그렇지만 이런 습지는 팜유의 원료가 되는 기름야자 농장이나 해산물 양식장으로 바뀌고 있어 반딧불이 서식지가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딧불이에게 또 다른 위협은 야간에 사용하는 인공 조명이 있다. 가로등과 광고 조명 외에도 도시 주변의 하늘까지 확산하는 이런 빛은 때때로 보름달 만큼 밝다. 연구에 참여한 같은 대학의 애벌론 오언스 박사과정 연구원은 이런 빛 공해에 대해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생체 리듬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짝짓기 상대를 찾는 반딧불이에 있어서도 큰 방해가 된다”고 지적하면서도 “에너지 효율이 높고 광량도 많은 LED 전구의 보급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현재 지구상 지표의 23% 이상이 야간에도 어떤 인공 조명에 비춰지는 상태가 돼 있다는 추산도 있다. 이들 연구자는 또 네오니코티노이드와 같은 농약 사용이 반딧불이 멸종의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네오니코티노이드는 미국에서 옥수수와 콩을 재배하는 과정에서 사용되고 있다.이밖에도 인간과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죽는 경우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말레이시아와 대만 그리고 일본 등에서는 반딧불이가 많이 서식하는 곳으로 관광객들을 데려가는 이른바 ‘반딧불 투어’라는 형태의 관광 명소가 오랫동안 인기를 끌고 있다. 연간 20만 명이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런 명소에서는 반딧불이의 서식 환경이 파괴되거나 날 수 없는 일부 종이 관광객들에게 밟혀 죽는 사태까지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를 위해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산하 반딧불이 전문그룹에 속한 전 세계 전문가 35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해 전 세계 반딧불이가 직면한 위협을 분류했다. 이에 대해 연구진은 “현재 반딧불이 개체 수에 관한 증거 대부분이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므로 그보다 장기적인 관찰 조사를 통해 감소 실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논문에 명시했다. 자세한 연구 결과는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발행하는 생물학 학술지 ‘바이오사이언스’(Bioscience) 최신호(3일자)에 실렸다. 사진=123rf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호주 동물 돕고싶어”…美 6세 소년, ‘코알라 인형’ 만들어 기부

    “호주 동물 돕고싶어”…美 6세 소년, ‘코알라 인형’ 만들어 기부

    호주에서 대규모 산불사태로 동물들이 희생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한 소년이 다친 동물들을 돕기 위한 기부 활동을 벌이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15일(이하 현지시간) CNN에 따르면, 매사추세츠주 힝햄에 사는 만 6세 소년 오언 콜리는 호주에 있는 한 야생동물 구조단체에 모금하는 사람들을 위해 코알라 인형을 만들고 있다. 소년의 어머니 케이틀린은 아들이 2주 전 호주 산불에 대해 처음 알고 화가 났었다면서 아들이 다친 동물들이 있느냐고 질문해 그렇다고 답해줬다고 말했다.이날 소년은 조용히 방에서 나와 캥거루 한 마리와 코알라 한 마리 그리고 딩고 한 마리가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는 호주 동물들이 단비로 인해 다치질 않길 바라는 아이의 소망을 나타낸 것이라고 어머니는 설명했다. 어머니는 또 “레고가 갖고 싶다는 것과 같이 오언은 자신을 위한 소원이 아닌 다른 것을 빈 사례는 정말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우리가 아들에게 (동물들을) 돕고 싶으냐고 물었고 함께 이를 생각해냈다”고 말했다. 오언은 점토로 작은 회색 코알라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고,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사람들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야생동물 구조단체 ‘와일드라이프 레스큐 사우스 코스트’(Wildlife Rescue South Coast)에 기부하는 길을 마련했다.이들 가족은 이 단체에 50달러가 넘는 돈을 기부하는 사람들에게 각각 오언이 직접 만든 코알라 인형을 보낸다. 지금까지 아이는 코알라 인형을 55개나 만들었다. 즉 55명이 이 단체에 기부한 셈. 전날 오후 아이 어머니는 아들이 이 단체를 위해 일주일 만에 2만 달러(약 2300만원)가 넘는 돈을 모금하게 했다고 밝혔다. 처음에 이들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벤모라는 앱으로 이 단체에 직접 기부하도록 했지만, 기부금 규모가 커져 고펀드미를 통한 캠페인까지 만들었다. 호주 시드니대 생태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번 산불사태로 뉴사우스웨일스에서만 5억 마리에 달하는 동물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 중 수백만 마리가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아이 아버지 사이먼 콜리는 호주 산불사태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나 동물들을 돕는 방법에 대해 더 많은 아이들과 부모들이 생각했으면 좋겠다면서 누구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함께하면 훨씬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사진=CNN 방송 캡처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물고기 숨 못쉬는 ‘죽음의 해역’ 데드존 확산…대멸종 경계

    물고기 숨 못쉬는 ‘죽음의 해역’ 데드존 확산…대멸종 경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진행 중인 제25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5)에서 ‘해양 탈산소화’에 대한 경고가 나왔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측은 7일(현지시간) 열린 총회에 참석해 해양 탈산소화에 관한 새 보고서를 발표하고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세계자연보전연맹 사무총장 그레텔 아귀라르는 “해양 탈산소화로 생태계의 미묘한 균형이 흐트러지고 있다”면서 “기후변화의 재앙적 영향과 바다의 산소 손실을 억제하기 위해 세계 지도자들은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약속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7개국 67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보고서 ‘해양 탈산소화; 모든 사람의 문제’에 따르면, 1960년 45곳이었던 해안 인근의 ‘데드존’은 현재 700곳으로 급증했다. 파악되지 않은 숫자까지 더하면 최대 1000곳의 데드존이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데드존’은 수중 산소 농도가 낮아 바다 생물이 살 수 없는 곳으로 ‘죽음의 해역’이라 불린다. 해수면 온도 상승으로 바닷물 속에 산소가 섞여 들어가지 못해 형성된다. 1960년부터 2010년까지 50년 동안 전체 바다에서 사라진 산소는 2%, 770억 톤 이상이며 육지와 인접하지 않은 바다에는 유럽연합(EU)과 맞먹는 규모의 데드존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산소가 덜 필요한 해파리나 오징어는 늘어난 반면, 참치나 청새치, 상어 같은 물고기는 타격을 받았다. 이런 흐름은 고생대 중기인 약 4억2000만년 전 실루리아기 말기의 대멸종을 연상시킨다.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 연구팀이 과학저널 ‘지질학’(Geology)에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실루리아기 말기 바닷속 산소량이 급격히 줄면서 심해부터 해수면 방향으로 해양 생물의 23%가 차례로 멸종에 이르렀다. 논문 공동 저자인 제러미 오언스 박사는 “고대 바다의 탈산소화 시작과 대멸종의 시작이 일치한다는 증거”라면서 현재의 탈산소화를 경계한 바 있다.세계자연보전연맹 측은 탈산소화가 진행된 데드존이 계속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스웨덴 이사벨라 뢰빈 부총리 겸 기후장관은 “2100년까지 전체 바다에서 3~4%의 산소가 추가로 사라질 것”이라며 심각성을 부각시켰다. 또 데드존이 해양 동물뿐만 아니라 바다에 의존하는 전 세계 수억 명의 생계를 위협할 것이라며 전 세계 지도자의 결단을 기대했다. 한편 지난 2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시작된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5)에서는 전 세계 200여 개국 지도자들이 오는 13일까지 온실가스 감축 및 규제 방안을 논의한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테니스 여제가 ‘팽개친 라켓’ 경매가 최대 5만 달러

    테니스 여제가 ‘팽개친 라켓’ 경매가 최대 5만 달러

    수집가에 500弗 팔려… 최소 2만 5000弗결승전 도중 격분해 코트에 패대기쳤던 테니스 여제의 휘어진 라켓은 얼마일까. 21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세리나 윌리엄스의 망가진 라켓이 스포츠 경매에 등장했다. 시작가가 2000달러(약 235만원)로 책정된 라켓의 낙찰 금액이 2만 5000달러에서 최대 5만 달러로 전망돼 관심이 쏠린다. 윌리엄스는 지난해 9월 열린 일본 오사카 나오미(세계랭킹 7위)와의 US오픈 단식 결승전 도중 게임스코어 3-1로 앞서다 자신의 서브 게임을 빼앗기자 라켓을 코트 바닥에 팽개쳤다. 이때 페널티를 준 심판에게 “거짓말쟁이, 도둑”이라고 외치다 추가 경고까지 받은 윌리엄스는 결국 오사카에게 우승을 내줬다. 윌리엄스는 이 라켓을 당시 볼퍼슨이었던 저스틴 애링턴 홈스에게 선물로 줬다. 이 볼퍼슨은 500달러를 받고 한 수집가에게 팔았고, 이번에 경매에 출품된 게 그 라켓이다. 최초 판매가의 4배로 책정된 윌리엄스의 망가진 라켓에는 최소 5명이 구매 의사를 표시해 현재 낙찰 예상가도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경매업체 골딘옥션스 대표인 켄 골딘은 “다음달 초까지 열릴 경매에서 윌리엄스의 라켓 가격은 2만 5000달러에서 5만 달러까지도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이번 경매에는 미국 육상 선수 제시 오언스의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도 출품됐다. 시작가는 25만 달러(약 3억원).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광탄 산업단지, 월롱 주거지역···공여지 민간사업자 선정

    주한미군으로 부터 반환받은 경기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캠프 스탠턴과 월롱면 영태리 캠프 에드워드가 산업단지와 주거지역 등으로 각각 개발된다. 경기도 파주시는 최근 주한미군 반환공여구역 및 주변 지역 개발사업 민간사업자 공모 평가위원회를 열어 미군반환 공여지 4곳 중 캠프 에드워즈와 캠프 스탠턴에 대한 우선협상대상자 2곳을 선정했다고 5일 밝혔다. 앞서 파주시는 지난 3월 광탄면 신산리 캠프 스탠턴(97만㎡), 월롱면 영태리 캠프 에드워즈(63만㎡), 문산읍 선유리 캠프 자이언트(48만㎡)와 캠프 개리 오언(69만㎡) 등 4곳을 개발할 민간사업자를 공모했다. 지난 4월 진행한 사업설명회에는 당시 주춤대는 남북관계에도 불구하고 60여 개 업체 140여 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민간사업자들이 캠프 자이언트와 개리 오언에는 공모에 응하지 않았다. 파주시는 정부의 최근 3기 신도시 발표 때문으로 분석했다. 월롱에 있는 캠프 에드워즈는 현대엔지니어링 컨소시엄이 도시개발 사업을, 광탄면 캠프 스탠턴은 GS건설 컨소시엄이 산업단지 개발을 제안했다. 현대엔지니어링 컨소시엄은 제안서를 통해 총 4578억원을 들여 5900세대의 단독·공동주택용지 등의 도시개발 사업을 추진할 예정다. GS건설 컨소시엄은 3422억원을 들여 제조·물류시설·방송제작 시설·970세대의 단독·공동주택용지 등의 산업단지 개발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파주시 관계자는 “우선협상대상자와 협의를 거쳐 오는 10월까지 기본 협약을 마치고, 내년부터 행정절차를 본격 추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파주지역 반환 미군기지 개발사업은 지난해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에도 기업들의 관심이 그다지 표출되진 않았다. 그러나 서울∼문산 고속도로가 2021년, 지난해 12월 착공한 GTX-A노선이 2023년 각각 개통되는 등 교통인프라가 확충되면서 기업의 관심이 커진 상태다. 파주시는 공모가 이뤄지지 못한 공여지 2곳의 재공모를 진행할지 등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11년 만에 메이저 품은 우즈…33번째 ‘자유 메달’ 영예 훈장

    11년 만에 메이저 품은 우즈…33번째 ‘자유 메달’ 영예 훈장

    한때 세계 랭킹 1000위권 밖까지 밀렸다가 11년 만에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며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기’ 찬사를 받은 타이거 우즈(44)가 6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최고 영예 훈장인 ‘자유 메달’을 받았다. 미국의 국가 안보와 세계 평화 기여자, 각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미국인과 외국 정치인에게 수여되는 자유 메달을 받은 스포츠인은 우즈까지 총 33명이다. 로버트 키퍼스(수영), 제시 오언스(육상), 베이브 루스와 조 디마지오(야구) 등이 대표적이다. 골프 선수로는 2004년 아널드 파머, 2005년 잭 니클라우스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서 자유 메달을 받았다. 종목별로는 야구가 33명 중 13명으로 가장 많고, 농구 6명, 미식축구와 골프가 각각 4명이고, 테니스가 2명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베이브 루스, 로저 스타보와 앨런 페이지(풋볼)에게 자유 메달을 수여한 바 있다. 안동환 기자 ipsofacto@seoul.co.kr
  • 세계선수권 3연패와 올림픽 銀 사이클 스타 캐틀린 24세 짧은 삶 마감

    세계선수권 3연패와 올림픽 銀 사이클 스타 캐틀린 24세 짧은 삶 마감

    2016년부터 지난해까지 사이클 세계선수권 트랙 팀 추발 우승을 이룬 미국 대표팀의 일원이었으며 3년 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은메달을 차지했던 켈리 캐틀린(미국)이 불과 24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다. 롭 드마르티니 미국사이클협회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애석하게도 켈리가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리게 됐다. 우리 모두 진심으로 그녀를 그리워할 것이며 켈리는 우리에게 선수 이상이었으며 미국 사이클계의 일원으로 늘 남을 것”이라며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시기를 맞은 가족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사인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고 영국 BBC는 10일(현지시간) 전했다. 다만 스탠퍼드 데일리의 보도를 인용해 그가 재학 중이던 스탠퍼드 대학원이 학생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어떤 파울 플레이의 흔적도 없었다”고 전했다고 했다. AP통신은 고인이 캘리포니아주 자택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부친의 말을 전했다.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난 캐틀린은 지난해 미네소타 대학에서 수학과 중국어 학사 학위를 딴 뒤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계산과 수학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있었다. 2016년 세계선수권 팀 추발에 나섰을 때는 새러 해머, 2017년과 지난해 세계선수권을 우승했을 때는 클로이 디거트 오언, 제니퍼 발렌테, 킴벌리 가이스트와 팀을 이뤘고, 2016년 첫 우승 때는 가이스트 대신 새러 해머가 팀원이었다. 그는 또 2017년과 이듬해 개인 추발 동메달을 거푸 목에 걸었다. 그가 속했던 도로 사이클 전문 프로팀인 랠리 UHC 사이클링은 소셜미디어에 성명을 내고 “믿기지 않는 인물을 그렇게 젊은 나이에 잃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며 “켈리는 친구이며 팀 동료였다. 가슴에서 우러나는 조의를 가족들과 그녀의 진면목을 알 수 있을 만큼 운이 좋았던 이들에게 전한다”고 밝혔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아궤로 리그 통산 11호 해트트릭, 앨런 시어러와 최다 타이

    아궤로 리그 통산 11호 해트트릭, 앨런 시어러와 최다 타이

    세르히오 아궤로(맨체스터 시티)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최다 해트트릭 타이 기록을 세우며 6-0 대승에 앞장섰다. 상대가 명문 첼시라 기쁨은 갑절이 됐다. 영국 BBC는 마우리시오 사리 첼시의 감독을 이름을 빗대 ‘소리 축구’가 돼가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맨시티는 11일(한국시간) 맨체스터의 에티하드 스타디움으로 불러들인 첼시와의 EPL 27라운드 홈 경기에서 아궤로의 해트트릭과 라힘 스털링의 멀티 골 등을 엮어 무참한 패배를 안겼다. 아궤로는 스털링의 선제골로 1-0으로 앞선 전반 13분 환상적인 중거리 슈팅으로 첫 득점을 신고하고 6분 뒤 추가 골을 얻었다. 25분 일카이 귄도간의 득점으로 4-0으로 달아난 후반 11분 페널티킥을 마무리해 지난 4일 아스널전 3-1 완승을 혼자 이끈 지 일주일 만에 홈 두 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작성했다. 그는 리그 11번째 해트트릭을 작성해 최다 기록을 갖고 있는 앨런 시어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최다 기록 타이가 됐다. 둘 밑으로 로비 파울러(9회), 마이클 오언과 해리 케인, 티에리 앙리(이상 8회), 웨인 루니(7회), 루이스 수아레스(6회)가 있다. 아궤로는 올해 들어 8골을 넣어 리그의 어떤 다른 선수보다 곱절 이상 많은 골망을 출렁였다. 첼시의 팀 득점이 7골이었다. 첼시 등 11개 팀의 득점보다 아궤로의 골이 많았다. 스털링이 후반 35분 멀티 골을 완성하는 무자비함을 보였다. 21승2무4패(승점 65)를 기록한 맨시티는 한 경기를 덜 치른 리버풀과 동률이 됐지만 골 득실(맨시티 +54, 리버풀 +44)에서 앞서 하루만에 선두를 되찾았다. 홈 15경기 연속 한 골 이상 뽑아 1965년 12월 토트넘 이후 1부 리그 팀으로 같은 기록을 작성한 팀이 됐다. 반면 첼시는 원정에서 6점 차 참패를 당하며 6위에 머물렀다. 지난달 31일 본머스에게 0-4로 참패한 첼시가 원정 경기에서 거푸 네 골 이상 내준 것은 1990년 12월 이후 29년 만의 일이다. 올해 들어 첼시가 허용한 13골보다 더 많은 리그 실점을 허용한 팀은 풀럼(15골) 뿐이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보헤미안 랩소디’ 그 영화 뒤편의 감동

    ‘보헤미안 랩소디’ 그 영화 뒤편의 감동

    전설의 록밴드 ‘퀸’과 열렬한 사랑에 빠진 한국 독자들을 위해 때맞춰 도착했다. 국내에서만 누적 관객수 982만명(17일 기준)을 돌파하고 최근 골든글로브에서 드라마 부문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뒷이야기를 실은 ‘보헤미안 랩소디 공식 인사이드 스토리북’이다. 국내 음악영화 흥행사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이 작품의 감동을 두고두고 간직하고 싶은 팬이라면 환영할 책이다. 책에는 프로듀서 그레이엄 킹이 퀸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기까지의 준비 과정을 비롯해 퀸의 탄생 비화,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본명 파로크 불사라)의 생애, 실제 퀸 멤버와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에 얽힌 일화, 퀸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해 마련한 의상·분장·세트 등이 상세히 실렸다. 특히 머큐리를 완벽 재현한 배우 라미 말렉의 일문일답, 1985년 영국 웸블리 경기장에 모인 관중 7만 2000여명을 열광하게 했던 ‘라이브 에이드’ 공연 장면에 숨겨진 특수효과 기법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 ‘위 아 더 챔피언스’, ‘위 윌 록 유’ 등 영화에 삽입된 퀸의 명곡도 간략히 소개한다. 퀸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제작한 이십세기폭스사가 공식 승인한 책인 만큼 실제 영화 촬영장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주요 이미지가 빼곡히 수록돼 있다. 머큐리의 실제 공연 사진과 머큐리의 의상과 몸짓을 그대로 따라한 말렉의 사진을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퀸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는 책 서문에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그림이나 역사 소설처럼 상징적 진실을 담아내려 한 영화”라면서 “사람들에게는 프레디 머큐리로 알려진,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였던 파로크 불사라가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란다”고 적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슈스케5’ 출신 임순영 결혼, 동갑내기 예비 신부와 2년 열애 끝 화촉

    ‘슈스케5’ 출신 임순영 결혼, 동갑내기 예비 신부와 2년 열애 끝 화촉

    ‘슈퍼스타K’ 출신 가수 임순영이 품절남 대열에 합류한다. 오는 27일 가수 임순영이 서울 모처에서 동갑내기 일반인 연인과 결혼식을 올린다. 두 사람은 2년여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 예식은 일반인인 예비 신부를 배려해 비공개로 치러진다. 두 사람 결혼식 사회는 오언종 KBS 아나운서가, 축가는 그룹 네이브로와 컨템포디보의 소정섭이 맡는다. 임순영은 결혼을 앞두고 “기쁜 소식을 먼저 알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행복하다. 결혼을 축하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편 임순영은 Mnet ‘슈퍼스타K 시즌5’에 출연해 뛰어난 가창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기생 시인의 겨울사랑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기생 시인의 겨울사랑

    - 기생 시인 매창(梅窓)의 '겨울 사랑' 우리 옛시조 중 가장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조 중 하나가 매창의 다음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는 배꽃이다. 배꽃은 갈래꽃이다. 변덕스런 봄바람이 한바탕 불어제끼면 낱낱이 떨어진 흰 꽃잎들이 마치 빗낟처럼 난분분 허공을 비산한다. 그래서 이화우라 한다. 이처럼 이화우, 추풍낙엽 같은 동적인 소재, 그리고 봄에서 가을로 건너뛰는 장면 바뀜 등으로 위의 시조는 마치 한 편의 동영상을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는 듯한 절창이다. 그래서 예전엔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매창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직업은 기생이었다. 그 아비가 부안현의 아전이었는데, 매창은 그마나도 첩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갈데없는 천출이다. 하지만 자질이 영특했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거문고 타기를 즐겨 상당한 기량의 연주 솜씨를 지니기에 이르렀다. 시재(詩才)는 일찍 드러났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떴다. 시 잘 짓고 거문고 잘 타는 천출 처녀가 아버지마저 일찍 여의었으니 갈 길은 대강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기생이 되었다. 나이 16살 때였다. 거문고 연주가 빼어날뿐더러 시재까지 출중한 이런 조합이 그리 흔치는 않다. 명기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런 소문을 듣고 멀리서 시인묵객, 한량들이 찾아왔다. 때로는 손님 중 술이 거나해지면 집적대는 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는 여인은 아니었다. 다음 '증취객(贈醉客)' 제목의 오언절구를 보면 그녀의 시재와 마음자리까지 오롯이 드러난다. 醉客執羅衫 취하신 님 사정없이 날 끌어단 羅衫隨手裂 끝내는 비단적삼 찢어놓았지 不惜一羅衫 적삼 하날 아껴서 그러는 게 아니야 但恐恩情絶 맺힌 정 끊어질까 두려워 그러지 (신석정 역) 하지만, 험한 세파에 일찍 몸을 실었으니, 인생의 쓴 맛도 일찍 찾아왔다. 현감에게 수청을 들었으나 버림받고 말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렇게 빼어난 미색은 아니었다 한다. 이런 매창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선조 24년(1591) 18살 때였다. 그런데 그 상대는 28살이나 연상인 유부남으로, 한양에서 이미 문명을 날리는 시인인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었다. 부안에 놀러왔다가 매창을 찾아온 것이다. 매창과 마찬가지로 유희경 역시 천민 출신으로, 같은 천출 시인인 백대붕과 함께 유 · 백으로 일컬어지며 문단을 주름잡고 있었다. 매창이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한양에서 온 시객(詩客)이란 말을 듣자,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뉘신지요?' 물었다고 한다. 그만큼 촌은의 문명이 멀리 부안에까지 알려져 있었던 터이다. 두 사람은 28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같은 천민이라 더욱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유희경은 묘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상례에 아주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또한 화담 서경덕계의 문인으로 기녀를 멀리하고 반듯한 선비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지만, 이때 매창을 만나 지족선사가 되고 말았다. 평생 처음으로 ‘파계’를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통에 이들의 재회는 기약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화우' 시조는 이 무렵 첫사랑 유희경을 떠나보내고 난 후에 지은 것이다. 봄바람에 날리는 하얀 꽃잎처럼 그들의 사랑도 덧없고 아름다웠으리라.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촛불'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 하였다.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컫는 송도삼절을 본딴 모양이다. 어쨌든 유희경과의 첫사랑은 매창의 영혼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그녀는 천리 밖 정인을 모질도록 그리워했고, 그것은 나중에 서러움과 한으로 응어리지기까지 했다. 한양의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은 좀 다르지만, 다음의 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이처럼 독한 사랑이었지만, 시절은 그네들의 편이 아니었다. 7년 전쟁의 불길이 조선땅을 온통 휩쓸고 갔으며, 전후에도 세상이 어수선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구러 10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줄곧 유희경만을 그리며 살던 매창에게 두 번째 남자가 나타났다.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는 율곡의 문인으로 문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절의가 곧아 나중에 인조반정에 앞장서 공신이 된 인물이다. 이런 인물에게 매창이 마음이 끌려 그의 정인이 되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첫사랑 유희경으로 가슴앓이를 하던 매창에게 두 번째 정인으로 이귀를 만났으나, 그 만남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환해(宦海)를 떠도는 이귀의 입장에서 매창을 수습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남자마저 떠나보낸 매창은 사랑의 덧없음, 인생사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깊이 받아들였던 듯하다. 그 뒤 매창의 행로를 더터보면 그런 짐작을 아니 할 수가 없다. 매창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 유희경과의 두 번째 만남은 15년 만에 이루어졌다. 매창을 잊지 못한 유희경이 다시 부안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회는 잠깐의 만남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뒤로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짐작컨대, 15년의 세월이 이미 두 사람의 얼굴을 크게 바꿔놓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오랜 옛사랑은 다시 찾을 것이 못된다. 그냥 마음속 깊이 간직함만 못하다는 걸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이 재회 후 매창은 3년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37살의 한창 나이였다. 이승의 삶에서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음에 깊이 절망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매창은 죽어서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유언에 따라, 평생을 끌어안고 살며 고락을 같이했던 자기 거문고를 안은 채 묻혔다고 한다. 누구도 오래 머물지 않았던 매창의 옆에 거문고가 끝까지 함께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소유였던 모양이다. 그 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매창이 죽은 지 45년 만에 매창을 잊지 못하는 부안 사람들이 그녀의 무덤 앞에 빗돌 하나를 세웠다. 그로부터 다시 13년 뒤에 부안의 아전들이 중심이 되어 그녀가 남긴 시 중에서 구전되는 58편의 작품을 목판에 새겨 인근 사찰 개암사에서 <매창집>을 펴냈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많은 사람들이 시집을 찍어달라 하여 개암사의 절 살림이 어려울 지경이었다는 말도 전한다.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과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히는 매창의 시는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여성적인 정서로 섬세하게 읊으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다"는 평을 받는다. 세월이 한참 지나 매창 빗돌의 글씨들이 이지러진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그전까지는 마을 나뭇꾼들이 벌초하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할 때도 먼저 매창 무덤을 찾아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바로 곁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 사람들은 매창의 제사를 모신다. 매창이 간 지 360여 년이 지난 1974년 어느 날, 매창뜸을 찾아온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가 그녀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올렸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 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나빈상(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뜸' 전문) 한편, 매창의 첫사랑 유희경은 대시인으로 문명을 날리며 91살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의 집은 경복궁 뒷담 너머 개울 가에 있었다. 가끔 궁궐 사람들이 담 너머로 그의 모습을 보기도 했는데, 하얗게 늙은 모습이 마치 신선 같았다고 한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베델 생가 英서 첫 확인 성과… 반세기 지나 ‘영원한 한국인’ 부활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베델 생가 英서 첫 확인 성과… 반세기 지나 ‘영원한 한국인’ 부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1909년 세상을 떠난 뒤 일제의 왜곡과 날조 등으로 한국인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반세기가 지나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베델이라는 이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부 수립 뒤 국가 재정비에 정신을 쏟느라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를 챙기지 못한 우리 자신의 책임이 컸다. 대한민국이 베델을 다시 찾은 건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독립된 정부가 세워진 지 20년이 지난 뒤였다.●베델 며느리가 손주 데리고 한국대사관 찾아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학생과 근로자가 중심이 된 사회변혁운동)이 들불처럼 유럽 전역에 번지던 1968년 7월 15일. 영국의 ‘더타임스’ 16면에 조그마한 안내 광고 하나가 실렸다. 확대경을 대지 않으면 글자를 읽을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1905년 서울에서 신문을 창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라는 분께 훈장을 드리려고 합니다. 연고자는 런던의 한국대사관으로 연락 바랍니다.” 한국과 영국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대영(大英) 남자’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베델이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다 돼서였다. 하루 종일 신문만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광고의 존재조차 파악하기 힘들 만큼 작게 게재돼 아무 반향도 없었다. 사실 우리 정부는 정말로 그의 후손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영국 최고 권위지 가운데 한 곳에 광고를 내 독립운동가를 찾으려 나름 노력했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반응이 나왔다. 신문 광고의 크기가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력을 반영하는 것 같아 측은해 보였던 것일까. 더타임스가 이 광고를 근거로 이튿날 ‘한국이 한 영국인에게 감사를 표하려 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쓴 것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대통령 훈장과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과거 한국의 국민 영웅이던 영국인 후손을 기다린다. 1905년 신문을 창간해 일본의 한국 지배에 저항하다가 1907~1909년 사이에 추방당했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더타임스 기사는 오류가 많았다. 그때까지 우리가 아는 베델에 대한 정보가 이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실리자 후손에게서 연락이 왔다. 베델의 며느리인 도러시 메리 베델(당시 52세·2002년 작고) 여사가 딸 수전 제인(당시 12세)과 아들 토머스 오언(당시 9세)을 데리고 한국대사관을 찾은 것이다. 베델 사후 반세기가 넘어 그의 가족과 한국이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베델, 전 재산 한국에 쏟아 가족들 곤궁한 삶 도러시의 입을 통해 들은 베델 가족의 이야기는 한 편의 가슴 아픈 소설 같았다.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은 남편 사망 뒤 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을 데리고 결혼 전 살았던 영국 런던으로 돌아갔다. 베델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며 모은 재산 대부분을 대한매일신보 발간에 쏟아부어 영국에서의 삶은 힘들고 곤궁했다. 도러시가 한국대사관을 찾아왔을 때도 이들은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영국의 이웃들은 자신과 가족을 희생해 가며 아무 이해관계도 없던 한국을 도운 베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메리 여사는 그런 남편을 자랑스러워하며 홀로 아이를 키웠다.한국 정부가 베델의 연고자를 찾았을 때는 그와 조선에 함께 살던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1964년 아들 허버트가 63세에 사망했고 이듬해에는 베델의 부인 메리 여사도 92세로 숨을 거뒀다.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할아버지(베델)는 아버지(허버트)가 9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 역시 내가 10살도 되기 전에 떠났다. 할머니(메리 여사) 역시 말년에 치매 증세를 보여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현재 베델의 후손들은 우리 정부의 초청으로 꾸준히 한국을 방문해 그를 기린다. 베델이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달라”고 당부한 신보는 어떻게 됐을까. 베델의 비서였던 영국인 알프레드 매넘이 신보사의 2대 사장이 됐지만 1910년 영국 정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일본에 신보사를 팔고 떠났다. 이후 신보는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했다. 조선인들의 신뢰도 사라졌다. 매일신보는 해방 뒤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다가 1960년 4·19 혁명 당시 시위대가 사옥과 시설을 파괴해 희귀 자료 대부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베델 다시 살려내는 데 정진석 교수 역할 커 대한민국 역사에서 사라질 뻔한 베델의 발자취를 찾아내 ‘영원한 한국인’으로 부활시킨 이는 정진석(79)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였다. 1976년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영인 작업에 참여하면서 그의 삶에 매료된 정 교수는 영국 런던정경대(LSE)에 수학하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베델 관련 자료를 하나하나 찾아냈다. 베델이 태어난 영국 브리스톨과 1888~1904년 무역업을 했던 일본 고베 등을 돌며 베델 기록 대부분을 바로잡았다. 지금 우리가 교과서 등을 통해 배우는 베델의 생애는 그가 일생을 바쳐 찾아낸 것들이다. 서울신문 역시 ‘조선을 사랑한 英 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기획을 통해 몇 가지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우선 언론학계의 주요 과제였던 베델의 영국 브리스톨 생가를 확인했다. 그간 베델 생가를 찾으려는 노력은 관훈클럽 창립자인 최병우(1924~1958)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등에 의해 1950년대부터 수차례 시도됐지만 모두 실패했다. 정 교수는 베델의 출생지 주소(Egerton villa, Egerton Road, Horfield)를 구했지만 지금의 영국 주소체계와 달라 생가를 특정하지 못했다. 국가보훈처는 서울신문이 찾아낸 베델 생가(현주소 54 Egerton Road, Bishopston, Bristol)를 검증한 뒤 현충시설로 지정해 역사적 장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베델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베델 관련 자료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전시하기로 했다. 여기에 서울신문은 베델의 가족관계 일부를 새로 발굴해 그가 왜 일본을 통해 조선에 오게 됐는지를 좀더 명확히 밝혀냈다. 해외 기사 데이터베이스(DB)를 통해 베델이 통신원으로 조선에 와서 쓴 첫 번째 기사(전통놀이 석전)도 소개했다. 이밖에도 베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910년대 미국 작가의 역사소설 두 편(황제 납치 프로젝트·황제의 옥새)을 찾아냈다. 베델의 열정에 반해 러시아 기밀문서 등을 찾아내 독학으로 연구하는 외국인을 만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베델의 생애를 소개하며 그의 이름을 알리는 해외 네티즌도 확인했다. 베델의 발자취 찾기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200년 전 英산골 도시계획 실험… 노동자 운명 바꿨다

    [조성룡·심세중의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200년 전 英산골 도시계획 실험… 노동자 운명 바꿨다

    이모가 남긴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반세기 전 한 가족의 출발을 보게 되었다. 잘 가꾸어진 잔디밭 뒤로 드문드문 들어선 새하얀 양옥 주택, 젊은 부부와 두 어린 아이가 함빡 웃는다. 1970년대 초 울산의 대한석유공사(유공, 현 SK) 사택이다. 막내의 가슴에는 유공유치원 이름표가 달랑거린다.울산에 정유공장을 중심으로 한 석유화학단지와 조선소가 들어서면서 사택 단지나 사원 아파트가 함께 조성되었다. 서구에서 온 엔지니어들은 공장과 함께 사택과 클럽을 조성하고, 유치원과 볼링장, 실내 수영장도 운영했다. 도심의 사원 아파트에는 무료 셔틀버스가 시간마다 운행되었다. 사택이라고 하면 탄광촌이나 철도 관사 등이 쉽게 떠오르지만, 노동자들의 살림집으로 회사에서 공급하는 주택(社宅)도 있다. 앞서 소개한 옥타비아 힐의 아버지가 추종했던 200년 전 영국 사람 로버트 오언(초상화·1771~1858)은 대개 공상적 사회주의자이자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전에 산업혁명 시대에 노동자들의 주거를 기업의 주된 과제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풀어내는 최초의 실험을 한 인물이다. 스코틀랜드 클라이드 계곡 골짜기의 뉴 래나크에서 말이다. “오언은 그전에 맨체스터에 있었어요. 같은 산업혁명 상황이라고 해도, 맨체스터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후에 엥겔스(1820~1895)가 나쁜 주거 환경을 묘사해서 보고서를 낸 곳이죠. 소셜리스트라는 말로 워낙 알려졌지만, 오언은 도시를 만드는 것, 타운 플래닝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한 사람이에요. 도시 계획 자체가 오언에게는 자신의 사회적 이념을 적용한 것입니다. 오언은 한 사람의 운명을 바꾸려고 하면 그 사람이 처한 환경 문제로 들어가서 그것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오언은 웨일스 대장장이의 아들로, 9살 때 런던으로 상경해 포목점 종업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면 방적 산업이 폭발적으로 커지던 맨체스터로 옮겼고, 20대 초에는 작은 공장을 인수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맨체스터에서 철학과 문학 클럽을 드나들면서 세상을 보는 안목도 키워 나갔다. 20대 말인 1800년엔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스코틀랜드의 산골로 들어가 뉴 래나크 면 방적 공장을 인수했다. 당시 발명된 리처드 아크라이트(1732~1792)의 수방적기를 도입해 데이비드 데일(1739~1806)이라는 기업가가 차린 공장이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의 여러 공장이나 탄광이 그렇듯, 수력을 기계 동력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낙차가 큰 물 근처에 공장을 두어야 했고, 클라이드 강의 수려한 계곡이 바로 그랬다. “맨체스터에서 왜 래나크로 갔을까. 맨체스터에서 스스로 일하면서 노동자들 현실을 봤겠죠. 산업 혁명에 따른 문제를 풀지 못할 문제라고 보느냐, 아니면 풀 수 있느냐, 거기에서 두 길이 나뉘는 거예요.” 오언이 래나크로 간 것은 사랑에 빠져서였다. 데이비드 데일의 딸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출신의 격차가 컸다. 장인의 환심을 사려고 기업의 주주가 된 것이다. 공장을 인수하고 보니, 운영이 문제였다. 인근 주민들은 전통적인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공장에 출퇴근을 할 생각이 없었고, 기술자들은 먼 도시에 살았다. 공장에는 교회 구빈원에서 노동력이랍시고 보낸 수백 명의 어린 아이들과 일에 별 의욕이 없는 떠돌이 임시 노동자들뿐이었다. 돈만 생기면 술 마시고 뻗어 버리는 노동자들을 구타하거나, 적게 먹는 아이들을 초과 노동시키면서 영국은 위대한 산업화를 이루어 내는 중이었다. 몸집이 작고 손가락이 가는 아이들은 거대한 방적기 아래를 드나들며 실오라기를 줍고 실을 잇는 데 동원되었다.오언은 맨체스터 생활을 접고 뉴 래나크로 이사를 갔다. 그는 뉴 래나크에서 일하려고 먼 곳에서 온 노동자들에게 반듯한 집과 더 많은 월급을 먼저 주기로 했다. 공장 곁에 사택을 조성해 한 가족이 한집에서 살게 했다.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지지 않아도 되었고, 노동자들은 출퇴근에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동 노동을 금지하고, 일이 줄어도 월급을 주고, 하루에 8시간만 노동하게 했다. 마을 안에 매점을 조성해 생필품을 저렴하게 구입하도록 했는데, 월급은 적게 주면서 공산품은 턱없이 비싸게 팔아 두 배의 이익을 취하는 것은 식민지에서나 모국에서나 제국의 기업가들이 꾀한 기본 모델이었다. 1817년에 오언은 뉴 래나크에 노동자 자녀와 고아들을 위해서 영국 최초로 초등학교를 두었다. 오언의 경영 방식은 해마다 더 높은 수익률로 되돌아왔지만, 다른 주주들은 노동자를 위하느라 기업주의 이익을 줄인다며 투자에 훼방을 놓았다. 오언은 1813년에 반대자들의 주식을 몽땅 사 버렸다. 이후 10여 년간 이 산골 공장 마을은 유럽 곳곳의 정치가, 왕족의 방문 행차를 맞았다. 방문객들은 청결하고 쾌적한 작업 환경에 만족한 활기찬 노동자들이 사업성을 높이고 수익 목표를 달성한다는, 세 가지 목표를 한번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목도하고 대단히 놀랐다.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기록하고 소개한 글이 1817년에 발표한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의견’이다. “오언의 상상도는 뉴 래나크를 그린 그림이 아니에요. 처음에는 글로 썼는데, 나중에 그림으로 알기 쉽게 정리한 거죠.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증기 기관이 발명되고, 엄청 빠른 속도로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도시가 그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거야. 자기가 그걸 직접 해결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 아닌가. 가난한 노동자에게 베풀어야겠다는 수준을 넘어서서 달라진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구체적인 실현 방법을 찾은 거지요. 물론 이상 도시 계획은 그전에 르네상스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오언이 다른 점은 당시에 가장 중요하게 대두된 산업, 기계 시대에 먹고사는 문제하고 연결한 거죠. 그리고 권력자의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해 냈어요.” 오언은 실업의 원인을 기업주들의 잘못된 수익 목표에 두었다. 나폴레옹 전쟁(1804~1813)을 거치면서 영국의 공장은 기계화되어 엄청난 공산품을 생산했지만 전쟁이 끝나고서도 생산량을 줄이지 않아 결국 불황이 닥쳤다. 그러자 기업주들은 노동자부터 대량 해고해 버렸다. 경기에 따라 해고되고 취업되는 노동자들은 결코 기술을 쌓거나 기계를 이기지 못한다. 오언의 대안은 인구 1000명 안팎의 작은 일자리 공동체를 많이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언론에 실리면서 환영과 함께 맹렬한 비난도 받았는데, 먹고살 만한 노동자들이 아이를 더 많이 낳아서 결과적으로는 실업 빈민 수가 더 급증할 것이라는 위협이었다.아무리 수익성으로 증명해 보여도 기업주들의 욕심이 멈추지 않는 데 질린 오언은 1925년에 큰 이익을 본 뉴 래나크를 매각했다. 그 돈으로 한 건축가와 함께 만든 도면과 모형을 들고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향했다. 워싱턴 하원에서 모형을 전시하고, 마침내 인디애나주의 개신교 정착촌 뉴 하모니에서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했다.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어중이떠중이 몰려든 사기꾼과 알코올 중독자들은 월급만 받고 일하려 들지 않았다. 뉴 래나크에서 25년 동안 모은 재산을 2년 만에 날리고 고국으로 돌아온 오언에게 공상가라느니, 협동주의 운동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국 하원에서 발표한 오언의 개념도는 이렇다. 네 방향의 반듯한 도로와 텃밭에 둘러싸인 블록이 있다. 블록 한가운데에는 공공시설과 어린이집, 각급 학교, 공동 부엌, 강당, 클럽, 도서관과 종교 시설이 들어간다. 야외는 녹지로 조성되어 운동과 여가 장소로 이용된다. 블록의 세 변에는 노동자를 포함한 4인 가족마다 방 4개짜리 주택들이 계획된다. 나머지 한 변은 독신자와 고아 숙소, 먼 곳에서 놀러 온 친지나 가족들을 위한 손님방, 교사나 의사의 관사, 공동 창고가 들어선다. 한쪽 도로 건너편에는 이들이 노동할 공장이나 회사가, 반대쪽 건너편에는 입주민들에게 식량으로 공급될 논밭과 과수원이 배치된다. 공장과 주거, 곧 사택 단지 사이에는 키 큰 나무를 심어 적절히 분리한다. “그 그림이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공상적이었는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보면 현실적인 거죠. 오언은 미봉책으로 조금조금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새로 만들어서 해결해 보자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나는 이런 내용을 예전에는 구체적으로 잘 몰랐어요. 우리가 사회주의라는 말을 언제부터 쓸 수가 있었느냐고요.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서로 얘기를 못했잖아요.” 오언의 계획은 이후 여러 추종자들을 거쳐 20세기 미국과 일본, 수많은 근대 국가에서 실현되었다. 그를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가르쳤던 우리의 학교도 바로 그렇게 조성된 사택 단지나 아파트 안에 들어선 것이었다. 그러나 오언은 공상을 먼저 한 것이 아니라 뉴 래나크라는 공장에서, 동시대 현실에서 직접 마주친 문제를 해결해 보았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시도를 해 나갔을 뿐이다. “우리가 1960년대 농촌에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도시 주택 문제가 생겼다는 분석도 어떻게 보면 피상적이에요. 서구 사례에서 대응하기 쉬운 짝을 찾아서 사지선다형처럼 고르려고 한 거지 문제의 본질에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아요. 결과물로 나온 도시의 모양은 비슷한데, 근본적인 해결이 나오지는 않아요.”사택 살던 아이들이 그렇듯 이모네 가족도 이모부의 전근에 따라 몇 년 후 서울로 이사를 갔다. 그들의 주소는 사택이 아니라 강남의 아파트가 되었다. 오언의 개념도가 착실하게 실현된 200년 후 대한민국의 귀결은 협동조합이나 화폐 없는 공동체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면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사서 월급보다 더 큰 재미를 보았다. 프라이버시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고, 오언을 따른다며 사택을 짓고 특정 종교나 생활 방식을 강요하려 든 기업주도 역사상 많았다. 강점기 일제 관료의 사택은 문화재가 될지언정, 우리 노동자의 공단 사택과 클럽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고층 아파트로 재건축됐다. 주택 청약권이 아니라 노동자가 이사하지 않고 일터 가까이에 거주할 권리, 회사에서 아이를 키울 권리를 따질 수는 없었을까. 새벽 5시부터 30도를 오가는 날, 아득하게 펼쳐진 아파트 숲 사이를 매일 1시간 넘게 땀 흘리며 출근해야 하는 신도시 노동자들은 벌써 피곤하다.
  • EPL 2연패 왜 어려울까? 퍼기의 ‘2명 방출 공갈’이 반면교사

    EPL 2연패 왜 어려울까? 퍼기의 ‘2명 방출 공갈’이 반면교사

    10일 막을 올리는 2018~19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10년 만에 대회 2연패 클럽이 나올까?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끄는 맨체스터 시티는 2009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3연패에 성공한 뒤 어느 클럽도 이루지 못한 2연패에 도전한다. 2009년 이전에는 일곱 차례 2연패 기록이 작성됐지만 그 뒤 종적을 감췄다. 같은 기간 독일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은 6연패,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FC 바르셀로나는 2연패 기록을 두 차례나 남겼다. 이탈리아 세리에A 유벤투스는 7연패, 프랑스 리그앙 파리생제르망(PSG)은 4연패를 기록했는데 왜 EPL에선 2연패 클럽이 사라졌을까? 맨먼저, 결국은 돈놀이다. 라이벌 구단이 디펜딩 챔피언을 웃도는 투자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51억 4000만 파운드의 TV 중계권 계약이 유럽의 다른 리그 클럽들이 꿈꾸기 힘든 지출을 가능케 했다. 우승에 실패한 클럽이 다음해 여름 이적시장에서 챔피언 클럽보다 많은 돈을 푼 것은 일곱 차례였고, 2010~11시즌 맨유(2187만 파운드)와 2015~16시즌 레스터시티(3438만 파운드)만 예외였다.두 번째, 챔피언 클럽들의 이적 시장 실책이 이어졌다. 최근 여섯 시즌 가운데 우승 후에도 1군 팀에 남아 기대에 부응한 선수로는 페드로(첼시)와 마루아네 펠라이니(맨시티) 정도다. 마이콘(맨시티), 바르토츠 카푸스카(레스터시티), 잭 로드웰(맨시티), 바바 라흐만( 맨유) 등은 방출됐는데 두고두고 판단 착오 사례로 거론됐다. 첼시는 2015년과 2017년 많은 돈보따리를 풀었지만 돈만 낭비했다. 맨시티도 2012년 마이콘과 로드웰을 방출한 뒤 땅을 쳤고 2014~15시즌을 앞두고도 바카리 샤냐 등을 영입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데이비드 모예스가 맨유 지휘봉을 처음 잡았을 때 펠라이니와 풀백 기예르모 바렐라만 여름에 영입했는데 2009년 마이클 오언, 안토니오 발렌시아, 마메 비람 디우프와 가브리엘 오베르탕 등 우승 스쿼드를 영입했던 것과 비교됐다.세 번째, 동기 부여 때문일 수 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1992년부터 여섯 차례 리그를 제패하는 동안 우승 다음 시즌을 시작하기 전에 시즌 중 정리할 선수 둘의 이름을 적어 봉투에 넣어뒀다고 공갈을 쳤다. 퍼기는 선수들에게 “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 개리 팰리스터 코치가 리그와 FA컵 더블을 이룬 뒤 웸블리 구장을 거닐다 물어보자 퍼기는 “정말 모르겠느냐? 아무 이름도 없었다. 충성심보다 마음이 느슨해지는 것을 라커룸에서 어떻게 다루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스페인 축구 클럽의 문화를 다룬 책 ‘바르셀로나 방식(The Barcelona Way)’을 펴낸 대미안 휴즈는 성공적인 스쿼드라면 느슨해지는 것을 붙들어맬 네다섯 선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맨유와 첼시, 나아가 리버풀을 보라. 그들은 멘탈 라인을 시즌 끝까지 재정립하고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캐릭터들을 갖고 있었다. 맨유는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개리 네빌처럼 연거푸 우승을 경험한 선수들을 갖고 있어서 그들이 라커룸을 이끌었다”고 분석했다. 마찬가지로 창단 50년 만에 우승을 일군 2005년과 이듬해 2연패를 이룬 첼시에는 디디에 드로그바가 있었다. 드로그바는 디펜딩 챔피언으로 시즌을 맞으면 지난 시즌보다 훨씬 더 강력한 동기 부여를 안고 최선을 다하려고 작정한 팀들과 만나는 것이 가장 달라지는 점이라고 말했다. 네 번째, 유럽 챔피언스리그가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최근 레스터 시티와 첼시의 우승 요인에는 챔스리그 본선에 나서지 않아 그 덕을 봤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레스터시티는 2015~16시즌 43경기를 치러 우승했는데 다음 시즌 54경기로 늘어나며 12위에 그쳤다. 2016~17시즌 47경기를 치르며 우승한 첼시는 지난 시즌 59경기로 늘어나 5위에 머물렀다. 두 클럽 모두 우승 시즌에는 일관된 라인업이었지만 1년 뒤에는 선발 11명의 변동 폭이 곱절 이상이 됐다.결론, 이번 시즌은 달라진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아스널, 맨유, 특히 리버풀까지 모두 맨시티를 앞지르는 돈보따리를 풀었다. 총액은 1억 7155만 파운드로 추계된다. 하지만 맨시티도 중앙 미드필더 조르지뉴(이탈리아)를 나폴리에서 영입하는 데 실패해 첼시에게 빼앗겼지만 리야드 마레즈를 레스터에서 영입하는 등 구단 최고액을 고쳐 썼다. 과르디올라는 프로 수구 선수 출신인 마뉴엘 에스티아르테를 백룸 스태프로 영입해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혁신적인 방법을 찾도록 하는 등 멘탈 측면을 강화했다. BBC는 라이벌 구단들이 눈에 띄는 개선을 했더라도 지난 시즌 맨유에 승점 19나 앞지르며 우승한 맨시티와의 격차를 한 시즌 만에 메우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며 백투백 챔피언을 고대하는 일에 마침표를 찍을 날이 임박했다고 결론내렸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사업 실패·소송, 형제들 불화 얽힌 베델… 한국행 배에 오르다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日 사업 실패·소송, 형제들 불화 얽힌 베델… 한국행 배에 오르다

    일본에서 무역 일을 하던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한동안 성공 가도를 달리는 듯했으나 오래지 않아 악재가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일본 업체들의 담합·소송에 휘말리고 형제들과도 관계가 나빠져 결국 일본 사업을 포기했다.●9개나 되는 공장 차렸다가 못 버티고 폐업 1888년 고베에 와 아버지와 이모부 밑에서 무역 일을 배운 베델은 1899년 ‘베델 브러더스’를 세워 독자 사업에 나섰다. 일본의 골동품을 영국에 내다파는 중개업에 자신감이 붙은 베델은 한발 더 나아가 일본에서 직접 물건을 만들어 영국에 수출하기로 마음먹었다. ‘베델 브러더스’가 생산하기로 한 첫 제품은 바로 러그였다. 러그는 바닥깔개나 무릎덮개 용도로 쓰는 직물제품을 말한다. 베델은 형제들과 1901년 7월 오사카 남부 사카이 지역에 소규모 러그 제조 공장 9개를 차렸다. 당시 사카이에는 일본인들이 조합 형태로 운영하는 러그 공장이 많았다. 한때 이곳은 지역 주민의 70%가 러그 생산에 매달릴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베델 브러더스’는 이런 사카이에 공장을 차린 첫 외국인 업체였다. 이들이 만든 러그는 품질도 꽤 좋았던 것 같다. 영자지 ‘재팬 크로니클’은 기자가 사카이 공장을 직접 방문하고 쓴 르포 기사에서 “베델의 러그는 터키에서 생산된 최고급 제품과 차이가 없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조업을 처음 해 보는 베델이 한꺼번에 9개나 되는 공장을 무리하게 운영한 것이 화근이 됐다. 일본에서는 1899년 외국인에 대한 치외법권이 마무리돼 이들에 대한 소송이 급증했는데 ‘베델 브러더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품질 좋은 러그를 만들기 위해 주변 공장에서 일하던 일꾼들을 대거 스카우트한 것이 일본업체들을 자극했다. 공장을 9개나 돌리다 보니 경쟁회사에서 데려 온 장인의 수도 상당했을 것이다. 이 지역 카르텔은 ‘베델 브러더스’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영업을 방해했다. 결국 베델 형제들은 이들의 보이콧을 버티지 못하고 얼마 안 가 러그 사업을 접었다.●3억원대 러그 납품 분쟁… 日반감도 커져 베델은 이 시기 최소 3건의 소송에 휘말렸다. 사업과 관련된 것으로는 ‘수세미 사건’과 ‘러그 사건’이 대표적이다. ‘수세미 사건’은 주방용품이나 목욕용품으로 쓰는 수세미의 납품을 둘러싼 분쟁이었다. 1902년 2월 고베 상인 나리타 세이사부로는 “‘베델 브러더스’가 수세미 3만 6942개를 주문했지만 대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며 1567.31엔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1905년 7월까지 3년 반 동안 재판이 이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결론은 알려지지 않았다. ‘러그 사건’은 러그 납품 대금 관련 소송이었다. 베델이 조선에 온 뒤인 1904년 10월 러그 상인 도이 젠노스케는 베델을 상대로 대금 5026.73엔과 6%의 이자를 별도로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미국 뉴욕·샌프란시스코에서 거래된 엔화의 평균가를 고려하면 5026.73엔은 지금 가치로 27만 4870달러(약 3억 700만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베델은 이 시기 조선에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활동하고 있었다. 원고(도이)와 피고(베델)가 재판에 출석하지 않자 손해배상 청구가 자연스레 기각돼 사건이 마무리되는 듯 했지만, 도이가 이듬해 2월 베델을 상대로 또 한 번 소송을 제기했다. 손해배상 청구 금액도 처음보다 11% 늘어난 5795.73엔으로 책정했다. 고베 지역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은 이 사건의 첫 공판이 있었던 1904년 10월부터 1905년 2월까지 네 차례의 공판을 기사로 다뤘다. 이 역시도 재판 결과는 기록이 없다. 사업과 관련한 두 가지 분쟁 사이에 작은 소송 하나가 더 있었다. 1903년 초 고베에 살던 히로시마 수마라는 여성이 “1902년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과 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이 영국에 갔을 때 이들을 수행하고 96.91엔을 받기로 했지만 실제 대가는 40엔이 전부였다”며 재판을 걸었다. 비록 수세미나 러그 대금처럼 큰돈은 아니었지만 베델 입장에서는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이렇다할 합의 노력 없이 소송부터 하고 보는 일부 일본인들의 행태에 상당히 실망했던 것 같다. 영국 런던에서 만난 베델의 손자 토머스 오언 베델(59)은 “할아버지(베델)가 자신과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한국을 돕기 위해 나선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일본인들의 줄소송으로 인한 반일 감정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한다”고 전했다.●日사업하던 형제들 항일 신문 만든 베델 내쳐 베델은 매사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베델의 후손들은 그가 성질이 급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1901년 8월 베델은 고베의 인력거꾼들과 요금을 놓고 시비를 벌이다가 싸움이 나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를 두고 당시 ‘고베 크로니클’은 “외국인을 집단 폭행한 인력거꾼들의 잘못이 크지만 인력거 면허번호를 떼어 내는 등 불필요한 행동으로 이들을 자극한 베델도 생각이 모자랐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베델은 형제들과도 사이가 나빠져 결국 동업을 정리하게 된다. 아마도 이들은 일본인들과의 소송 과정에서 관계가 더욱 악화됐을 것으로 보인다. 베델이 한국에서 신보와 KDN을 발행하던 1905년 ‘고베유신일보’ 11월 27일자에는 ‘베델 브러더스’ 고베 지사에서 일하던 S E 길스가 신문사로 찾아왔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베델은 한때 ‘베델 브러더스’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술고래였고 결근도 잦았다. 급기야 회사를 내팽개치고 한국으로 건너갔다. 이제 이 회사는 베델과 아무 관계도 없다. 우리는 이 내용을 신문에 광고도 했다”고 밝혔다. 길스를 대리인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베델을 과음과 근무태만, 무책임 등의 단어로 묘사한 것을 볼 때 (사실 여부를 떠나) 그를 바라보는 남동생 허버트(1875~1939)와 아서 퍼시(1877~1947)의 감정이 부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 영자신문에 베델이 해고됐다는 사실을 광고까지 한 것을 보면 한국에서 항일신문을 발간한 큰 형(베델)을 이렇게라도 내치치 않을 경우 ‘베델 브러더스’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형제들의 복잡한 속내가 읽혀지기는 한다.앞서 ‘고베유신일보’는 11월 26일자 기사에 “베델은 1899년 ‘베델 브러더스’를 설립해 지난해(1904년)까지 도자기업을 운영하다가 (사업) 실패로 야반도주하다시피 한국으로 건너간 러시아 스파이”라고 비난했다. 베델이 러시아 스파이라는 주장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가 사업에 실패해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러그 사업이 실패한 뒤 도자기 판매로 활로를 모색했지만 이마저도 성공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베델은 사업 실패와 잇따른 소송, 형제와의 불화 등으로 16년간 살던 고베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일간지 ‘데일리 크로니클’의 조선 특파원에 지원해 언론인으로서 새 삶을 시작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그가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한 것이 조선에는 되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고베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베델 유산, 한국 정부가 관리해 주세요”

    “베델 유산, 한국 정부가 관리해 주세요”

    베델 사후 부인이 자료 챙겨 英 귀향 미공개 자료 등 관리 안 돼 분실 우려 “그저 할아버지 업적 연구해 줬으면”“할아버지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 ~1909·한국명 배설)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신문 등 자료가 해가 갈수록 빛이 바래고 부식이 심해져요. 개인이 집에서 보관하는 데 한계에 온 것 같아요. 저희 남매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베델’이란 성을 쓰는 마지막 세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나면 이 자료들은 이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요. 대한민국 정부가 할아버지의 마지막 유산을 잘 관리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1904년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한국인의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한 영국 출신 독립운동가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과 손자 토머스 오언 베델(59)은 지난달 말 영국 런던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가보훈처와 문화재청 등에 이같이 호소했다. 이 자료들은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이 1909년 남편 사망 뒤 조선에 있던 재산을 버리고 영국으로 돌아가면서도 끝까지 간직한 것들이다. 베델이 활동하던 당시 사진들과 대한매일신보 스크랩, 베델의 출생·사망기록, 결혼증명서 등이다. 게일이 사망하자 며느리 도러시(2002년 작고)가 관리하다 지금은 손녀 수전 제인이 보관 중이다. 이 가운데 일본 헌병의 접근을 막고자 베델이 살던 자택(서울 종로구 홍파동 월암근린공원 터)에 걸었던 유니언잭(영국 국기)과 베델의 관을 덮었던 태극기, 베델 사망 당시 각계에서 보내온 조문을 모은 ‘만사집’(등록문화재 482호)은 한국에 와 있다. 영국에 있는 자료들은 정렬되지 않아 마구 뒤섞여 있고 사진도 낱장으로 돼 있어 분실 우려가 크다. “베델이 하는 모든 일에 편의를 제공해주라”며 고종이 하사한 특허장도 한 언론사가 취재를 위해 빌려갔다가 분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문 스크랩도 100년이 넘어 곧 바스러져 버릴 듯 위태로운 상태란다. 베델의 손자 토머스 오언은 “1960년대부터 한국 기자들이 가끔 찾아와 할아버지 관련 자료를 촬영했지만 여전히 절반가량은 한국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것들”이라면서 “이것들은 우리보다는 한국인들이 갖고 있어야 더욱 빛을 발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이들은 한국의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 프로그램에 대해 “우리는 한국 정부에 어떠한 경제적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할아버지의 업적을 연구하고 더 많은 이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면 된다”고 전했다. 글 사진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성공과 실패 동시에 겪은 일본 생활… ‘프리메이슨’ 활동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성공과 실패 동시에 겪은 일본 생활… ‘프리메이슨’ 활동

    1888년 아버지와 이모부의 사업을 돕고자 일본으로 간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고베에서 16년간 살면서 성공과 실패를 모두 맛봤다. 그는 사업이 번창해 큰 돈을 벌었고 결혼도 했다. 지역 스포츠클럽 사무국장을 맡아 리더십을 발휘했다. 반면 비밀결사단체로 알려진 ‘프리메이슨’에도 가입하는 등 미스터리한 면도 보였다. 16세 소년 베델이 고베에 왔을 때는 일본이 고베항을 개방(1868년)한 지 정확히 20년이 되던 해였다. 고베는 개항 당시만 해도 사람이 거의 없던 허허벌판이었다. 하지만 바다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쉽게 들어오면서 외국의 자본과 기술이 빠르게 퍼졌다. 인구도 1895년 15만 3382명, 1901년 25만 9040명, 1910년 38만 7915명으로 급속히 늘었다. 20세기 초 조선의 수도 한양의 인구가 20만명 안팎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곳이 얼마나 크고 활기찬 도시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일본에서 쓰이는 “성공한 사람은 교토에서 공부하고, 오사카에서 돈을 벌어, 고베에 산다”는 말은 이 무렵부터 생겨났다. 베델은 일본 시절 초기 이모부인 퍼시 알프레드 니콜(1848~1899)의 집(고베시 73번지)에 기거하며 일을 배웠다. 현재 이곳에는 1992년 지어진 ‘신크레센토 빌딩’이 들어서 있다. 고베시 문서관의 ‘재팬 디렉터리’에 따르면 니콜은 적어도 1883년부터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업이 번창하자 1886년 동서이자 베델의 아버지인 토머스 행콕 베델(1849~1912)에게 동업을 제안했다. 토머스 행콕도 본업이 궤도에 오르자 자신은 영국쪽 일을 맡고 큰아들 베델을 일본에 보내 분업에 나섰다. 베델은 고베의 이모부와 런던의 아버지 사이에서 업무를 익히며 사업 노하우를 체득해 갔다.이들이 했던 사업은 완호물(玩好物) 매매였다. 완호물은 쉽게 구하기 어려운 외국산 물품을 말하는데, 당시 영국인에게는 일본산 도자기나 골동품, 칠기, 장신구가 그런 것들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후기 인상파 거장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일본 판화에 매료돼 그 화풍을 모방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듯 당시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예술작품이 인기를 얻었다. 이를 반영하듯 고베에는 외국인을 상대로 옛날 그림과 유기제품, 동전, 고의상, 갑옷 등을 파는 상점들이 많았다.베델이 사업을 하던 19세기 말은 영국이나 일본 모두 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때였다. 그는 두 나라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런던에 있던 아버지를 도와 상당한 부를 모을 수 있었다. 베델은 성격이 외향적이고 활달했다. 1909년 5월 7·8일자 ‘배설공의 약전’에는 그가 “각종 유희를 좋아하고 활발용장한 품성을 가졌다”고 기록돼 있다. 고베 시절 그는 여러 가지 운동과 음악을 즐겼고 체스도 잘 뒀다. 술과 담배도 좋아했다. 고베 지역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에는 그가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없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는 기사가 수차례 등장한다. 그가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베델은 1901년 고베 외국인 스포츠클럽 ‘고베 레가타 앤드 어슬래틱 클럽’(KR&AC)에서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1901년 1월 30일자 ‘고베 위클리 크로니클’에는 자신을 ‘다섯 살 난 (KR&AC) 멤버’라고 밝힌 이가 “지난해 열린 레가타(여러 명이 함께 요를 젓는 요트) 대회 선수 선발 과정이 공정하지 않았다”고 KR&AC를 비난하는 기고가 실렸다. 그러자 베델은 2월 6일자 기고를 통해 “우리 클럽에 5살짜리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고 비꼰 뒤 “나이에 비해 글을 꽤 잘 썼지만 생각은 매우 어리석다”며 그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가 논쟁을 피하지 않는 불같은 면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1899년은 베델에게 큰 전환점이 된 해였다. 아버지 토머스 행콕은 두 번째 동업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일본 사업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졌다. 여기에 이모부 니콜도 세상을 떠났다. 51세였다. 그는 사업차 고베에서 영국 런던으로 배를 타고 가다가 포르투갈 해상에서 숨을 거뒀다. 평소 지병이 있었던 것 같다. 베델에게 ‘사업 스승’ 니콜의 죽음은 적잖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현재 니콜은 고베 외국인 묘지에 안장돼 있는데, 서울신문은 취재 과정에서 니콜의 묘지를 찾는 후손과 연락이 닿아 이 사실을 전달했다. 27살이던 베델은 이 때부터 독자 사업에 나섰다. 베델은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고자 자신의 첫 회사인 ‘베델 브러더스’를 세웠다. 이 회사는 이름처럼 삼형제인 베델과 허버트(1875~1939), 아서 퍼시(1877~1947)가 함께 운영했다. 이들은 각각 고베와 요코하마, 런던에 사무실을 내고 완호물을 사고 팔았다.이때 베델은 회사 설립을 위해 잠시 영국에 들렀다가 은행원 존 게일의 둘째 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을 만났다. 이들은 이듬해인 1900년 고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베델 부부는 1901년 외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을 낳았다. 그는 ‘짐’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이름 가운데 ‘친키’는 일본어로 ‘新規’(새로운 것)라는 단어다. 그가 일본에서 얻은 아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베델 브러더스‘는 한동안 승승장구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영업처를 형제들이 잘 관리했던 것 같다. 베델은 이때 번 돈으로 1901년 오사카 남쪽 사카이 지역에 러그(깔개나 무릎덮개 용도로 쓰는 직물제품) 생산공장을 차렸다. 당시 러그는 영국인 가정의 필수 품목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제품을 중개하는 수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직접 제품을 생산하는 자본가로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훗날 베델이 일본 사업을 포기하는 원인이 된다. 한편 베델은 일본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해 활동했다. 프리메이슨은 중세 교회 건축가 집단에서 출발했다가 기독교 보수성에 반발해 조직된 비밀결사체로 알려져 있다. 프리메이슨이 ‘그림자 정부’(세계를 은밀히 지배하고 있다는 초국가적 조직)의 배후에 있다는 음모론도 있다. 정성화 명지대 사학과 교수와 한국학 자료 수집가 로버트 네프가 함께 쓴 ‘서양인의 조선살이,1882~1910’에는 베델이 조선에서 프리메이슨 설립 멤버로 활동했다고 전한다. 프리메이슨 서울 지부인 ‘한양롯지’ 홈페이지에도 베델을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영국에서 만난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할아버지(베델)는 영국 선박업자 조지 쇼어의 소개로 일본 거주 시절 프리메이슨에 가입했다”면서 “할아버지는 (비밀주의 원칙을 지키려고) 가족에게도 프리메이슨 내부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반면, 영국 출신 역사 연구가인 에이드리언 코웰(62)은 “베델은 (일본에서 프리메이슨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1908년 영국 법원 판결에 따라 중국 상하이에서 3주간 복역하고 돌아온 뒤에 서울에서 가입했다”면서 “당시 조선에서 프리메이슨이 막 생겨나던 때였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요직을 맡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안신 배재대 복지신학과 교수는 그의 논문 ‘한국 프리메이슨의 역사와 특징’에서 “프리메이슨은 신종교 성격을 띤 엘리트주의 모임”이라면서 “다만 베델이 조선에 왔던 시기 프리메이슨은 종교적 의미보다는 친목과 자선을 위한 형제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고베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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