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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일본(세계의 우주로켓발사기지:4)

    ◎전용발사장 중 3곳·일 2곳 보유/70년 「장왕1호」 첫 성공… 5번째 자체발사국/중국/소형 H­1로켓 주류… 3단분리형까지 개발/일본 아시아에 있어서 두 우주개발맹주는 중국과 일본을 꼽을 수 있다.중국은 자국전용 로켓을 발사할 수 있는 3개 발사장을,일본 또한 2개의 발사장을 갖추고 있다.뿐만아니라 우주진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중국과 일본의 우주발사무대를 가본다. ▷중국◁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항공기공업을 거쳐 우주사업을 시작하는 예를 깨고 로켓개발을 먼저했다.중국의 로켓개발은 미 칼텍의 본카만교수밑에서 훈련을 받은 쳰 슈 에센등이 중심이었다.제2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미국에서 활동한 이들은 55년 중국의 로켓개발에 기여했다.초기 중국의 로켓개발은 소련의 SS­3 유도탄을 개조,설계한 것으로 일본보다 두달 늦은 1970년4월14일 인공위성을 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인공위성을 자체발사한 다섯번째 국가였다.사용된 발사체는 「장정1호」라는 3단액체추진로켓이며 쏘아올린 인공위성은 1백73㎏에 고도 4백39∼2천3백84㎞의타원지구궤도이고 1백14분에 한번씩 지구를 돈다. ○84년 통신위성 첫 발사 중국은 LM(Long March·대장정)발사체로 우주진출의 꿈을 모두 실현시키고 있다.이 LM발사체를 위해 3군데의 발사장소를 가지고 있다.시창(서창)우주발사센터(XSLC)·즈추안우주발사센터(JSLC)·타이위안(태원)우주발사센터(TSLC)등. 이 가운데 XSLC는 1984년 중국 최초의 통신위성을 발사하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이 XSLC는 사천성의 시창시의 북서쪽 64㎞에 위치한 산악지대다.이 발사장은 해발 1,800m에 있다.동경 1백2도,북위 28.2도. XSLC의 기후는 아열대기후로서 연평균기온이 섭씨 16도이고 여름에 가장 더울 때의 평균기온은 섭씨 25도를 웃돈다.겨울에 가장 추울 때의 평균기온이 섭씨 2도가량 된다.그리고 서리가 내리는 기간이 짧고 건조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이상적인 기상조건을 갖춘 곳이다.우기는 6월에서 9월까지 계속된다. XSLC는 교통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먼저 시창교외 북쪽에 있는 시창공항은 보잉 747여객기 등이 자유자재로 이·착륙할 수 있다.또한 철도와 고속도로망이 이곳을 통과하도록 설계돼 있어 덕분에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특히 철도와 고속도로분지선은 발사장소로 곧장 인도되도록 설계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철도의 최대경사각은 3도이하를 유지하고 있으며 고속도로 또한 최대경사각 5·6도이하로 시공하는 등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였다. XSLC는 발사체와 탑재물의 검사와 점검을 실시하는 기술센터를 비롯해 발사체검사빌딩·탑재물준비빌딩·위험과정검사빌딩 등으로 구성돼 있다. LM발사체는 기차편으로 발사장소에 운반된다.발사체는 발사장소인 약 2.2㎞ 북쪽으로 분해된 상태로 트럭으로 운반되기 전에 점검을 위해 발사체점검 격납고안에서 수평상태로 약 5주정도 머문다. 탑재물준비빌딩에서는 우주선의 완성과 시험조작이 진행된다.필요할 경우 상공에서의 실험도 실시한다.이 건물은 최소한 2대의 우주선을 조립할 수 있을만큼 넓고 검사홀의 청정도는 10만이내의 청결도를 유지한다.우주선조립실은 이보다 열배나 깨끗한 청정도 1만이하다. 위험과정검사빌딩에서는 우주선추진연료 및 압축고체연료 제작,전력추진장치의 설치,탑재물의 스핀균형등을 잡는 일이 이루어진다. XSLC에서 우주행 로켓등이 발사되는 동안 발사장주변 6㎦이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완전히 집을 비우고 발사장 밖으로 대피해 있어야 한다.주민들이 마음놓고 집으로 돌아가도 되는 시각은 발사완료 10분뒤.주민들에게 많은 불편을 주고 있다. 또한 JSLC는 원래 서구 자유진영에 솬 청 쥬로 알려진 중국의 유명한 발사장이다.대부분의 중국산 위성이 그곳에서 발사되었다. JSLC는 북경에서 서쪽으로 약 1천6백㎞에 위치하고 있다.고비사막의 가장자리인 만리장성의 변두리에 있다.위치는 동경 1백도,북위 40.7도. 해발 약 1,000m를 기록하는 이곳은 궤도진입을 시도할 때 몽고와 소련의 영공침범을 피하기 위해 남동쪽으로 발사하고 있다.발사폭은 56.9도에서 69.9도로 매우 좁은 편이다.JSLC에서 출발하는 우주행 화물들은 자원탐사위성과 정찰위성이 대부분이다. 이곳의 교통사정 역시 완벽하다.발사장의 남쪽에 있는 공항은 철도로 연결돼 있어 기술센터와 발사장 교통이 원활한 편이다. 그리고 TSLC는 북경 남서쪽 5백㎞지점에 위치한다.산시성의 한복판에 있는 이 발사장은 바위투성이 위에 세워져 있다.이 발사장에서는 발사체를 우주 남쪽으로 출가시켜 극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데 이용된다.1988년9월 중국 최초의 기상위성을 우주로 파견할 때 이 발사장을 이용하였다. ○다네가시마 취대규모 ▷일본◁ 최대인공위성발사장은 다네가시마(종자도) 우주센터로 섬인 다네가시마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다네가시마는 인구 4만3천명,섬길이 약 58㎞인 작은 섬으로 일본열도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는 규슈에서도 남쪽으로 약 80㎞ 더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위치는 동경 1백30도58분,북위 30도24분. 발사장에는 소형로켓을 발사할 수 있는 발사대와 H­1로켓과 H­2로켓을 발사하는 전용발사대가 있다. 이 센터안에는 마쓰다 추적및 자료수신소,노기 우쓰가오카 레이다기지,그리고 3개의 광학추적 스테이션이 있다. 이 센터의 넓이는 8.64㎦.이곳에는 고체와 액체로켓엔진의 연소실험을 할 수 있는시설도 있다.이 센터는 로켓을 조립하고 발사하며 제어와 추적을 하는 일이 주임무다.발사방향은 동쪽. 단점이라면 인근에 어장이 있다는 것.로켓발사 때마다 소음과 어장피해우려로 인해 어부들이 항의, 마찰을 빚고 있다.따라서 어부들의 강경한 항의 때문에 매년 1월15일부터 2월말까지,그리고 8월1일부터 9월15일까지로 발사기간이 극히 제한돼 있다. 또한 가고시마(녹예도)우주공간관측소(KSC)가 있다.위치는 동경 1백31도04분,북위 31도15분.다네가시마우주센터의 4분의 1에도 못미치는 2㎦로 간단한 발사장이다. 일본의 우주과학연구기관(ISAS)이 관리,운영하고 있다.1989년2월 현재 16차례의 인공위성용 로켓이 발사되었다.이 센터는 소형로켓과 바루소로켓이 발사의 주류를 이룬다. 한편 오사카지역에는 H­1발사를 돕기 위한 여러가지 시설들이 있다.여기에는 2개의 연료주입관과 연료공급탑이 있다.로켓을 발사하기 위한 발사대는 길이 6.4m,너비 12m이며 무게는 17t에 이른다.2개의 마스트에서 발사직전까지 여러개의 관을 통해 발사체에 주입한다.1번마스트의 크기는 높이 35m,너비 3.5m이고,2번마스트는 높이 49m,너비 4m다.연료공급탑은 발사체의 조립과 점검,발사준비에 사용되며 모든 발사준비가 완료되면 1백m 정도의 레일위를 이동하게 된다.연료공급탑은 높이 67m,너비 26m,무게 2백80t이다.이 센터는 추진체저장실과 공급실,지상발전소 수력시설등 비행보조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로켓조립공장에서는 H­1로켓의 1,2단계 엔진을 조립하고 점검하며 발사대에 설치하기 전에 조정하는 일을 한다.고체모터 테스트빌딩에서는 보조부스터와 3단계 고체로켓의 점검과 점화,조립등을 실시한다.스핀 테스트빌딩에서는 H­1로켓의 3단계 모터와 위성체가 조립되고 점검되며 분리장치가 제대로 결합되었나를 살핀다. 일본의 우주개발역사는 1955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이해 도쿄대 히데오 이토가와교수가 대기중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연필로켓」제작팀을 구성한 것이 그 효시다.그러나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일본정부가 이토가와교수의 로켓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1964년 도쿄올림픽을 인공위성을 통해 중계방송한 미국의 통신위성이 계기가 되었다.일본 과학기술청은 부랴부랴 우주개발에 참여하기 위해 국립우주개발센터를 발족시켰다.이 센터는 1969년 NASDA로 명칭을 바꾸었다.그리고 같은 해 일본정부는 미국정부와 델타발사체의 기술이전과 N자형 발사체의 개발을 내용으로 한 협의서를 체결했다.1977년 대형로켓연구계획이 수립돼 H형로켓개발이 시작되었다.H형시리즈는 1986년이후 줄곧 성공을 거두었다.그해 8월13일 2단 로켓발사를 수행했고 8월27일 3단 로켓발사를 끝냈다.3단 H­1로켓은 5백50㎏의 무게를 정지궤도까지 이동시킬 수 있는 저력을 지니고 있다.1992년까지 모두 9대의 H­1로켓이 발사되었다.일본은 1990년대의 주력사업으로 H­2로켓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에는 NASDA이외에 일본우주개발연구소(ISAS)등 2개의 기관에서 우주산업에 몰두하고 있다.NASDA가 통신위성 등 응용부분의 우주개발을 담당하고 있는 반면에 ISAS는 천체관측용 위성등 연구용 인공위성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 북,새미사일「노동2호」개발중/사정1,500∼2,000㎞…95년생산

    ◎미전문가,하원청문회 증언… 도쿄·타이베이도 사정권/스커드C 이란·시리아에 1백60기 판매 【워싱턴=이경형특파원】 북한은 사정거리 1천5백∼2천㎞의 새로운 스커드 미사일 노동2호를 개발중인 것으로 14일 알려졌다. 미국의 미사일전문가인 조셉 S 버뮤즈씨는 이날 하오 미하원외교위의 국제안보·국제기구및 인권소위의 청문회에 출석,중동지역에 대한 중국과 북한의 미사일및 관련기술의 확산문제에 관해 증언하면서 소식통들의 얘기를 인용,북한의 노동2호 미사일개발 사실을 전했다. 그는 북한이 스커드 X 또는 노동2호로 불리는 장거리 미사일개발을 진행중이라면 현재로서는 설계단계일 것이라고 분석하고 오는 95년이 돼야 기본형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에 따르면 지난 91년초에 개발한 스커드 D미사일인 노동1호도 최근 새로운 스커드기술체계에 따라 재설계,사정거리 1천∼1천3백㎞에 8백㎏의 탄두를 장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사정거리가 1천3백㎞일 경우 사정권은 1천㎞ 경우의 니가타와 오사카(일본),하바로스크(러시아),북경·상해(중국)외에 도쿄와 타이베이가 포함된다. 그는 또 북한이 이란에 넘겨준 사정거리 5백㎞의 스커드 C미사일은 약 1백기로 추정된다고 말하고 같은 종류의 미사일 60기와 12대의 발사대가 91년 4월부터 시리아에 운반되고있다고 말했다.
  • 복합건물(일본의 사회간접자본:하)

    ◎“한 건물에 다기능”… 효용극대화 추구/후쿠오카 돔엔 경기·오락·휴식공간 함께/동경도청사 첨단설비 갖춰 관광명소로 후쿠오카(복강)시 서부 해안 매립지에 위치한 후쿠오카 돔(DOME).언뜻 보기엔 우리나라 잠실운동장과 별반 다를 바 없다.지붕이 개·폐식이라 실내 및 야외 운동장으로 겸용하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건물은 「세계 최초의 복합기능 돔」이란 명칭에 걸맞게 단순한 야구경기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프로 야구팀인 다이에 호크스의 프랜차이즈 구장인 이 곳은 줄잡아 20여 가지가 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야구는 물론 풋볼,배구,농구 등 각종 구기 종목에 따라 운동장과 관중석의 배치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도록 설계돼 종목에 맞게 경기를 치를 수 있다.음악회나 다양한 이벤트를 위한 하이테크 시스템을 완비,각종 엔터테인먼트 행사도 가능하다.경기나 행사가 없을 때는 파티를 열 수 있어 시민의 휴식 및 놀이공간으로 활용된다.주변에는 숲이 우거져 조깅이나 산책도 즐길 수 있다. 세계 최대의 대형 스크린(35.2m×10m)과 스포츠 바(BAR),임대로 운영하는 룸과 발코니석 등을 갖춰 도시 리조트의 장으로 손색이 없다.이밖에 음악관 영화관 오락실 등이 있어 스포츠와 오락,휴식의 개념이 첨단기능과 함께 하나로 어우러져있다.미래지향적인 복합화 개념으로 설계된 것이다. 일본 SOC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같은 복합화에 있다.한 건물이 한가지 기능만으로 세워지는 일은 결코 없다.이왕에 짓는 것이라면 일석이조나 일석십조의 효과를 거두도록 효용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도쿄 신주쿠에 있는 동경도청사.48층의 고층빌딩으로 관공서라기보다는 하나의 관광명소이다.도청이란 딱딱한 이미지를 우주정거장과 같은 예술적 디자인으로 극복했고 내부는 최첨단 기기와 시스템이 설치돼 일본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인텔리전트(Intelligent)빌딩이다. 무정전 전원설비가 갖춰져 있고 카드 시스템으로 완벽한 방범 및 보안이 유지되며 화재감지기는 대형 화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도어개폐 및 소화기·배연기 등의 작동과 연계돼 있다. 후지산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어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며 관광객에겐 도쿄의 전경을 한 눈에 선사한다. 이 뿐이 아니다.바로 옆에 있는 제2 청사는 주거복합의 개념까지 가미돼 일부가 아파트로 활용된다.요코하마시의 랜드마크 빌딩이나 오사카시의 OBP지역,고베시의 하버랜드 등도 이같은 복합화 개념을 바탕으로 건립됐다. 사회복지 차원에서 우리나라 인프라 시설규모는 일본을 1백으로 할 때 평균 10% 수준이다.공원의 경우는 6·9%에 불과하다.인구에 비해 땅이 월등히 좁은 일본이 우리보다 많은 공원시설을 갖춘 것은 건물의 옥상이나 외부와의 연결통로에 다목적 공원 휴식시설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도쿄 시내에 있는 주택들의 평균 규모는 13∼15평 정도이지만 창가에는 항상 분재가 있고 좁은 방에도 붙박이식 침대가 있다는 사실은 「축소지향의 일본」이 기능의 극대화를 어느정도 추구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산을 깎아 택지를 조성하고 여기서 나온 흙으로 바다를 메워 간척지를 만드는 나라.쓰레기를 태워 벽돌을 만들고 컨베이어로 이용했던 지하 고무관을하수도로 활용하며 관공서를 관광지로 개발해 기능의 극대화를 꾀하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 도시개발(일본의 사회간접자본:중)

    ◎기업·지자체 합작…21세기 가꾼다/“기업자본·추진력 활용” 저어부서 측면지원/20년전 채택… 대판비즈니스타운 대표적 일본의 도시개발 방식은 특이하다.기업이 개발하고 지방자치단체가 경영하는 방식이 20여년 전부터 뿌리를 내렸다. 제3섹터(민관합동 개발)로 불리는 이 방식은 정부가 공익성 대형 사업을 독점해 개발하는 종전의 방식과 전혀 다르다.기업의 자본력과 추진력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공익성은 지방 정부가 책임지는 식으로 민간 기업과 기능적 조화를 이룬다. 일본의 고도 오사카(대판).오사카성에서 북쪽으로 2㎞쯤 떨어진 곳엔 21세기를 대비한 최첨단 기능의 비즈니스 타운이 형성돼 있다.마쓰시타(송하)전기공업 등 11개 민간 기업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지난 84년부터 오사카 중심지의 구공장지대 5.6㏊를 포함한 26㏊를 「공원 속의 비즈니스 타운」으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마쓰시타,쓰미토모(주우)등 11개 기업이 「오사카 비즈니스 파크(OBP) 개발협의회」를 결성,미래 지향적인 오사카 개발 아이디어를 냈다.오사카시는타당성을 인정,교통망을 서둘러 갖췄다.주변의 5개 전철 역과 별개로 OBP역을 시예산으로 설치,JR(구국철)과 사철을 연결해 신도시의 동맥을 마련했다.이렇게 개발된 도시는 지금 금융 상업 문화의 신중심지가 됐다. 수도 도쿄에 이어 인구 3백26만명이 사는 일본 제2의 도시 요코하마.이 곳에서도 기업이 주체가 된 대형 도시정비 계획(프로젝트명 미나토 미라이 21)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요코하마시 동쪽에 인접한 임해지역의 기존 토지 1백10㏊와 쓰레기로 바다를 메워 만든 매립지 76㏊ 등 총 1백86㏊에 21세기형 미래 도시를 창조하고 있다.「24시간 활동하는 국제 문화도시」,「21세기의 정보도시」,「물과 역사에 둘러싸인 인간 환경도시」라는 세가지 구상을 바탕으로 계획을 세웠다. 미쓰비시 중공업,요코하마은행 등 9개 민간 기업은 지난 84년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자본금 11억엔 규모의 (주)요코하마 미나토 미라이 21사를 설립,시와 공동 투자했다.지난 7월 미쓰비시는 기존 조선소 자리에 높이 2백96m의 일본내 최고층 빌딩인 랜드마크 타워를올렸다. 『지난 60년대부터 시작된 신간센(신간선) 건설과 해저터널 붐이 끝나면서 대형 프로젝트에는 민간 기업의 참여가 바람직하다는 교훈을 얻었다.기업의 풍부한 자본과 아이디어를 공공의 복지를 유도하는 쪽으로 활용한다는 것이 제3섹터의 도입 배경이다』요코하마시에서 파견돼 미나토 미라이 21사업을 관장하는 모리 히데오기획과장의 설명이다. 일본의 구국철인 JR가 37년간의 만성 적자에 시달리다 민영화 3년만에 흑자로 돌아선 사실은 기업의 능력을 인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요즘 일본의 대형 투자는 고무타이어 열차가 궤도 위를 달리는 세계 최초의 「신교통」 개발에서,세계 최대의 수족관을 갖춘 오사카 천보산 하버 빌리지에 이르기까지 민간 기업과 손잡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SOC 투자가 경쟁력의 척도가 되는 상황에서 우리 나라는 여전히 도로 항만 공항 등 기간시설의 건설을 중앙정부 혼자 주도하고 있다. 과거 민간 기업이 덩치 큰 사업을 수주할 경우 특혜시비가 일어나는 등 부작용이 없지 않았으나,우리도 발상을 바꿔대안을 모색할 때가 됐다. 기업의 자본과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본의 인프라 투자는 기본적으로 효율의 극대화가 초점이다.
  • 대한투자 최대장애/일본,노사분규 지적

    일본기업가들은 노사분규를 대한투자의 가장 큰 걸림돌로 생각한다.그러나 근로자의 교육수준이 높고 정치가 안정된 점은 투자매력으로 꼽는다. 정부가 지난 6일부터 15일까지 박용학무협회장을 단장으로 도쿄·나고야·오사카 등지를 돌며 가진 투자유치설명회에서 일본의 기업가들은 과거 스미다전기의 노사분규를 예로 들며 한국의 노사분규를 가장 큰 대한투자 애로사항으로 들었다.
  • 일 기시와다시/재일한인에 참정권 부여

    ◎영주외국인 권리 처음 인정/시의회/인권보장 확립도 의결 【도쿄=이창순특파원】 일본 오사카(대판)부 기시와다(안화전)시 의회는9일 재일한국인교포 등 동지역에 영주하고 있는 외국인에게 참정권과 인권보장의 확립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일본에서 영주 외국인에게 참정권을 인정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한 것은 기시와다시가 처음이다. 기시와다시가 이날 채택한 결의안은 『인권의 국제화가 제창되고 「내외인 평등」을 촉구한 국제인권규약 등 국제법의 비준에 따라 정주 외국인의 대우는 서서히 개선되고 있는 것이 추세』라고 지적하고 『정부는 정주 외국인에 대한 사회보장 제도를 비롯,지방선거에의 참정권 등 인권보장을 확립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시와다시는 『과거의 불행한 전쟁으로 인위적으로 일본에 거주하게 돼 일본 국민과 마찬가지로 납세의무는 물론 지역주민으로 선린우호를 도모하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정주 외국인에게 지방선거에 대한 참정권과 인권 보장을 확립해 달라』는 재일한국인 동포 김중근씨(안화전시 기토로정 1정목4번 22)와 김치웅씨(안화전시 기토로정 1정목6번 26호)의 청원을 받아들여 이같은 결의안을 채택하게 됐다.
  • “김대중씨 납치범은 중정요원”/당시 용금호선원 조시환씨 회견

    ◎“새벽 2∼3시경 비행기 떠 살해기도 실패/윤진원씨가 총책… 사례금 2백만원 받아” 지난 73년 8월8일 일본 도쿄에서 납치된 김대중씨가 한국까지 실려온 것으로 알려진 「용금호」의 선원이었던 조시환씨(65·부산 사하)가 9일 하오 국회 민주당 원내부총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최초로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조씨는 당시 용금호의 조리장으로 승선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부산 사하구에 살고 있다.조씨는 사건후 다른 배의 선원으로 일본에 갔을때 일본 경시청의 조사를 한차례 받았다고 밝혔다. 다음은 조씨가 밝힌 당시 상황. ▷용금호◁ 원래 미군수송선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인수한 공작선이었다.용금호 선원이 될때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지시를 받는 등 중앙정보부 선박인줄 알고 있었다.납치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석탄등 화물을 주로 날랐다.납치사건후 부산 남항조선소에서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김선생을 가둬두었던 닻 보관창고 구멍을 땜질하고 이름도 유성호로 바꿨다. ▷출항◁ 부산에서 출항했으며 출항시 선원은 11명이 탔고 정보부요원 2명이 승선했으며 이들은 김과장·정과장으로 통했다. ▷김대중씨의 용금호 승선◁ 오사카외항에 정박한뒤 정보부원 정과 김,조기장 김광식과 2기사 정순남등 4명이 상륙해 하루저녁 있다가 밤에 보트를 타고 왔다.보트가 용금호에 접선하자 사다리를 내려서 김선생을 올렸는데 선생은 결박당하고 눈을 가린 상태였고 로프로 묶어 끌어당기는 것을 배위에서 지켜보았다.처음보는 순간 김대중선생인것을 알았다. ▷감금장소◁ 선미에 있는 나다실(닻을 넣는 장소)인데 눈을 가리고 두손을 뒤로 묶어 놓았으며 한명이 걸상을 놓고 감시하고 있었다.나는 3차례 김선생을 접촉했다.처음에는 밥을 갖다주었는데 안먹겠다고 해서 다시 미숫가루를 타서 갖다 드렸더니 조금 드셨다. 식사는 아침 저녁만 제공했고 소변도 내가 받아드렸다.경비가 심해 말은 못하고 『고생되시겠습니다』라고만 했다. ▷항해 상황◁ 오사카에서 오다가 새벽 2∼3시쯤 3시간정도 정박했다.아마 그때 살해하려 한다는 것을 육감으로 느꼈다.비행기가 떠서 일을 못한것 같다.비행기가 떴다고선원들이 막 그러는데 나는 식사준비를 하느라고 배밑에 있어 소리는 듣지 못했다.그러나 다알고 있었고 갑자기 배가 요동을 치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부산항 도착◁ 부산외항의 조선소와 세관사이에 정박하여 이틀동안이나 못나가게 했다.이후 강제로 선원을 다 내려 보내고 정보부원들만 남았다. ▷사건이후 상황◁ 용금호에 타지 않았던 윤진원씨가 총책임자였는데 그사람 주관으로 사건후 두차례 회식을 했다. 나는 이후 정보부에서 알선한 배에 승선하지 않고 일본배로 해외에 나갔기 때문에 압력은 없었다.그러나 선원 김광식은 대만에 갔다가 강제로 비행기에 태워져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선원들이 사례금으로 3백만원씩 받았다고 해서 나는 귀국해 하얏트호텔 근처의 윤진원씨를 찾아갔다.윤씨는 내가 다른 선원들과는 달리 배를 탔으니 2백만원만 받고 영수증은 3백만원으로 쓰라고 요구해 그렇게 했다.당시 납치사건에 관련된 김광식·정순남은 다른 선원과 달리 엄청난 사례금을 받고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행적은 알수 없다.
  • 재일동포 「권리찾기」 청원 결실/일 시의회 한인참정권결의 안팎

    ◎실제행사엔 장애 산적… 지자체교류엔 도움 일본 인종차별 정책의 대명사였던 지문날인제도는 폐지됐지만 재일한국동포들에 대한 일본사회의 차별은 여전하다.그 대표적인게 바로 참정권문제다. 재일동포들은 납세 등 일본인과 똑같이 의무이행을 하고 있으나 참정권 등 권리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재일동포들은 이같은 차별정책의 철폐를 위해 끈질기게 투쟁을 벌여왔다.그 투쟁이 마침내 하나의 의미있는 결실을 맺었다.재일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오사카(대판)부의 기시와다시의회가 9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재일한국인등 영주 외국인의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의결한 것이다.인구 20여만명의 기시와다시에는 현재 2천여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결의안은 『정주 외국인에 대한 사회보장제도를 비롯,지방선거에의 참정권등 인권보장을 확립해줄 것을 정부에 요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그러나 이같은 결의안이 채택됐다고 해서 당장 참정권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법의 개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시와다시의 9일결의는 외국인의 참정권 획득을 위한 의미있는 출발로서 일본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정권요구 운동에 탄력을 불어넣게 될것으로보인다. 기시와다시의회가 결의안을 채택하게 된 데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활발한 교류가 배경을 이루고 있다.기시와다시는 서울의 영등포구와 자매결연을 맺고있으며 지난해 4월에는 시의회 일·한친선우호의원연맹을 만들어 교류를 해왔다.지방자치단체 차원의 폭넓은 교류가 양국간의 이해의 폭을 넓혀 마침내 이같은 결의안 채택을 이끌어 낸 것이다.정부차원이 아닌 지방자치단체나 민간차원의 교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예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기시와다시의회의 결의에도 불구,재일동포들이 실제로 참정권을 얻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일본정부가 이같은 참정권 보장 결의안 채택등을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때문에 기시와다시의회도 상급기관인 자치성에 알리지 않고 결의안을 채택했다고 결의안 청원자인 김치웅씨는 말한다.
  • “나운규의 「아리랑」 통일되면 공개”

    ◎일인 아베,소장필름 목록 확인후 밝혀 일본인이 춘사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소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거의 사실로 확인돼 영화계 안팎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일본의 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는 최근호에서 오사카부 히가시 오사키시에 살고 있는 아베 요시시게씨(안부양중·68)가 「아리랑」의 소장자라고 소개하고 아베씨의 소장품 목록가운데 「동양극영화」편 55번째에 「아리랑/9권/현대극」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마이니치는 그러나 아베씨가 『어딘가 깊숙이 있기는 있지만 산더미같이 필름이 쌓여있어 찾기가 어렵다』면서 『남북이 통일되면 내놓을까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물론 지금까지 아베씨가 「아리랑」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소문은 여러차례 나돌았었다.하지만 아베씨 본인이 직접 소장품목록을 보여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마이니치에 따르면 일제때 한국에서 군의관으로 일했던 아베씨의 아버지가 영화업을 돕다가 꿔준 돈을 받지 못하자 대신 필름등으로 받았다는 것이다.또 아베씨는 현재 25개나 되는 방에 5만본 이상의 필름과 영화관계 기재를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아리랑」이외에도 우리가 갖고있지 못한 당시 한국영화들을 상당수 소장하고 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마이니치는 이와함께 아베씨의 말을 인용,북한측이 조총련 영화제작소등을 통해 70년대초부터 「아리랑」을 되찾기 위해 갖은 선심공세를 펴왔다고 밝혔다. 그러나 남한쪽에서는 뒤늦게 소문을 전해들은 일부 영화인들이 개인 차원에서 아베씨를 만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되돌려 줄 것을 요구해왔을 뿐이라는 것이다.때문에 영화관계자들은 『이제부터라도 정부당국등이 범국가적으로 적극 나서 「아리랑」을 비롯해 우리의 민족영화를 되찾는데 힘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 여류명창 성창순씨(이세기의 인물탐구:35)

    ◎동·서편제 통달한 판소리의 달인/혼신 다한 소리인생 40년… “한 서린 득음” 정평/빼어난 성조·변화무쌍한 음색에 관객 매료/서예·국악기에도 깊은 조예… 「심청가」로 인간문화재에 성창순은 본래 강산제 「심청가」로 인간문화재가 된 여류명창의 한사람이다.음이 낮고 처절한 「심청가」는 전곡이 지나치게 구성지고 구슬퍼서 극장공연 첫날에는 소리하는 이들이 기피하는 곡이기도 하다.그러나 일명 서편제로 불리는 성창순 「심청가」는 4시간반의 완창을 변화무쌍하고도 맛갈지게 구사하여 지루감을 없앤 것이 특징이다. 부친 심봉사를 그리워하며 심황후가 기러기편에 편지쓰는 대목에서 「한자쓰고 눈물짓고 두자쓰고 한숨쉴제 눈물이 먼저 떨어져 글자마다 수묵이 되어」는 이조가곡과도 같은 우아미와 품격을 지녀 독특한 성음이 빼어난 것으로 손꼽힌다. 애절한 계면조뿐아니라 흥부가중에서 「놀부심술타령」 「제비로정기」 「왼갖비단타령」등 숨막히게 전개되는 자진몰이 휘몰이 속에다 우람지고 담대한 가락을 얹어 「달기가 승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흥·청의 심맥 고수 그는 판소리는 넘어가는 가락과 내뽑는 목청에 흥과 청을 담아 판소리의 심맥인 「흥청거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정신을 지키고 있다.그래서 그의 무대는 언제 어디서나 흥취가 넘치고 그의 연희는 유유하고 자적하다. 최근 몇년간은 남도락에 심취하여 지난봄 국악대공연에서는 느린 육자배기에다 잦은 중몰이장단,개구리타령으로 절정을 이루더니 흥타령에서 축 늘어진 후 진도아리랑으로 활기를 되찾는 신명나는 한마당을 펼쳤었다. 「사람이 살면은 몇백년을 살드란 말이냐 죽음에 들어서 남녀노소가 있느냐 살아생전에 객기로 맘대로 놀아볼거나」 가사의 끝이 「거나」나 「구나」로 끝나는 육자배기는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곡이면서도 잘 부르려면 가장 어려운 곡으로 「그의 육자배기는 늦은 진양조장단에 한이 듬뿍 배어 멋으로 일렁이는 유장한 가락이 일품」이라는 것이 황병익교수(이대)의 말이다. 지난 6월에는 KBS홀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관현악과 판소리 「춘향가」의 협연을 갖기도 했다. 이「춘향가」관현악곡은 작곡가 김희조씨가 성창순명창과의 협연을 위해 8개월간에 걸쳐 재구성하여 편곡한 것으로 생소한 관현악연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는 기색없이 마치 수만군을 거느린 여중호걸처럼 2시간30분의 완창을 당당한 풍모로 이끌어나갔다. 한복차림에 쥘부채,고수 한사람의 북장단에 의존하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판소리의 색다른 멋과 음악적 변화를 보인 역시 돋보인 무대로 지적된다. 북반주에 맞춘 판소리공연에서는 즉흥적인 「아니리」와 「발림」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지만 엄격한 제한을 받게 되는 관현악연주에도 그는 대로를 가로지르는 곧고 시원한 통큰소리,익살과 애조와 애원의 성음치레로 관객의 흥겨움을 흥청망청 당겨주었다. 타고난 재능과 기량이 번뜩이는 재인과는 달리 그는 끈질긴 노력과 집념으로 자신을 발전시키고 운명을 개척해온 입지전적인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한번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며 「죽으면 죽었지 2등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오기와 배짱이 그것이다. ○예향 광주서 출생 그의 판소리 입문부터가 말못할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지나가는 길손도 단가 한마디씩은 부른다는 전남의 예향 광주에서 태어났다.부친은 권번에서 북을 가르치던 명고수 성원목씨.어릴때부터 북장단을 즐기고 동네 굿구경에 날저무는 줄 모를만큼 예살(예살)이 거센 편이었으나 부친은 이를 극구 말려 걸핏하면 매맞기 일쑤,집안에 갇히기가 일쑤였다.그렇다고 해서 중간에 포기하거나 기죽을 그가 아니었다.오히려 부친에게 『나는 소리를 배우겠소,그렇지 않으면 집을 나가든지.어쨌든 시집이나 가서 고생하는 여자는 되지 않을 거요』하고 맞섰다.그리고 몇날을 울며불며 밥을 굶고 몸져눕자 「딸자식 하나 없는 셈치고」 부친이 져주었고 광주 북동에 있는 소리선생에게 소리를 배우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번엔 선생이 『저아이는 소리에는 소질이 없으니 잘 키워서 시집이나 보내라』고 했다.대경실색을 할 일이었으나 그는 내색없이 『소질이 없기는 왜 없어.두고보라지,내가 못해낼 줄 알고?』 이러고 학교를 때려치우고는김연수창극단에 입단해버렸다.그때 나이 15세.그러나 여기서도 소질을 인정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시절에 만난 오정숙·박옥진은 스승으로부터 장래성을 인정받고 있는 유망주로 죽어도 남에게 뒤질 수 없는 그의 심경은 못내 참담하기만 했다. 『두고보자.지금은 너희가 나보다 나은 줄 알지만 여기서 물러날 내가 아니다』 그들의 소리연습을 엿보면서 그는 한편으로는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악기라면 다소 자신이 있었다.어릴때부터 부친의 북장단이 귀에 익어 어떤 악기도 낯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가야금·거문고·칠현금을 배우는 동안에도 그는 소리한번 제대로 배우고 말겠다는 집념을 떨치지 못했다.그렇게 4년을 보내고 5·16직후 국극단이 해산해버리자 서울로 올라왔다. 단성사근처 와룡동에 정착하여 박초월씨에게 거문고를 배우다가 소문으로만 듣고 있던 만정 김소희씨의 문하에서 동편제소리인 강산풍월과 심청가 바디를 넘겨받는 과정에서 생전처음 『갈고 닦으면 좀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칭찬을 들었다.그후 김소희씨의 권유로 보성소리를 배우기 위해 전남 보성군 회천면 도강재에 있는 정응민선생을 찾아나섰다.보성소리는 판소리 서편제중 전남 보성을 중심으로 연고를 맺고 있는 소리꾼들만의 소리제로 우조·평조·덜렁제·경두름제의 다양한 음색과 감칠맛이 특색이었다. 율포해수욕장에서 인적없는 여우고개를 넘어야 하는 30리길 산골,밥상을 갖다놓으면 물이 줄줄 흘러내릴만큼 바닥이 기울어지는 누추한 단칸방에서 그는 그를 구제하는 소리의 진수에 빠져 모진 고생을 감내하는 뼈저린 과정을 거쳤다.하루 15시간에서 어느때는 18시간,삭신이 늘어지고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했으나 불에 구운 왕소금으로 부운 목을 달래면서 그는 오로지 소리에만 매달렸다. 눈속에 발이 푹푹 빠지는 혹독한 겨울,여름내내 4개월동안 긴장마가 계속되는 궂은 날씨에도 기울어진 방에 앉아 목청을 뽑던 고된 수련과 공력은 이제는 그의 일생일대 아름다운 추억일 수밖에 없다.그로 인해 박유전∼정응민∼그의 아드님인 정권진으로 이어지는 보성소리계보에 4대째로 「소리호적」을 올리게 되었고 그는 부친이 소리를 배우지 못하게 했을 때처럼 또다시 두다리를 뻗고 대성통곡 했다.이번엔 남들이 듣고 있는 명인·명창 칭호가 그에게도 무관하지 않다는 감동과 기쁨의 눈물이었다. 보성에서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대꼬챙이처럼 말라서 이번엔 하성이 나오지 않았다.숨돌릴 사이도 없이 그는 곧바로 환갑이 다된 박록주선생을 모시고 안양에 있는 삼막사로 들어갔다.쇠약해질대로 쇠약해 있었으나 몸속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오히려 힘이 되었다. 스승은 『명랑하게 불러라.소리는 미련해야만 한다.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그리고 인분을 먹어야만 낼 수 있다는 소리를 너는 네 집념과 오기로 백일만에 끌어냈다고 말했다.그는 마침내 한스럽고도 깊고 장려한 그러나 구슬처럼 청명한 소리를 얻어내고야 만 것이다.진양조 여섯박자를 능란하게 엮어낼 수 있게 되자 그는 「적벽가」에 나오는 한문의 뜻을 알기 위해 이번엔 우전 신호렬선생에게 서예와 한문을 배웠다.마음이 밝아지자 눈도 밝아지는 듯했다. ○청명한 소리 얻어 68년부터 명창대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수많은 해외공연,75년 남원 춘향제때는 우산을 쓴 관중들이 빽빽이 늘어선 마당 한가운데로 나가 심청가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소리에 자신이 취해 빗소리도 관중의 술렁거림도 들리지 않았었다.그리고 내게서 빠져나간 소리가 관객의 가슴속에 전달됐다가 다시 내몸속으로 들어오는 자유자재로운 차원을 경험할 수 있었다.이른바 「소리가 앵기면서」 솟구치는 환희가 분류처럼 가슴 한복판을 꿰뚫듯이 흘러내렸다. 이제 동편제 서편제의 갈래를 성큼 뛰어넘어 모든 난관을 딛고 일어선 초월의 경지,요즘은 소리속에 온자한 깊이가 배어들고 있는 시기다.더구나 지난해 4월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결혼한 부군 양명환씨가 모든 뒷바라지를 책임지고 있어 마음 편하게 「소리」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가 이루고 싶은대로 모든 소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듯 그는 명창 칭호에 손색이 없는 반듯한 예술가의 단행을 평생 지키고 싶은 또하나의 소원을 지니고 있다. ▷연보◁ ▲1934년 1월10일 전남 광주출생 ▲1950년 광주여고1년때 김연수 창극단입단,조선국극단등 여성국극단에서 창극 활동 ▲1955년 공기남선생에게 「심청가」2년 사사,한만갑제 거문고 김난주씨에게 사사,강태홍제 가야금 원옥화씨에게 사사,춤광대 김영철씨에게 칠현금 사사 ▲1961년 만정 김소희씨에게 「심청가」「흥보가」3년간 사사 ▲1964년 전남 보성 정응민씨에게 강산제 판소리(박유전판)「심청가」「춘향가」「수궁가」사사 ▲1965년 박록주씨에게 안양 삼막사에서 백일공부 ▲1965년부터 우전 신호렬씨에게 한문과 서예 사사 ▲1968년 신인서예전 서예부 특선,제17회 국전 서예부 입선,국악협회 주최 명창대회 「춘향가」로 세종상 ▲1969년 김소희씨와 일본 교포위문공연 ▲1975년 일본 오사카에서 판소리「흥보가」「민요」공연,유럽지역 순회공연(파리∼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1977년 「심청가」완창(4시간30분) 서울시민회관별관 ▲1979년 「춘향가」완창(5시간30분) 세종문화회관대강당 ▲1980년 일본 와세다대학서 「심청가」공연 ▲1981년 제1회 대한민국 국악제에서 「심청가」완창공연 ▲1984년 신재효100주년기념공연 「춘향가」공연(국립극장 대극장) ▲1985년 「춘향가」전판공연(국립극장대극장),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보유자 후보자 지정·국악협회 이사 ▲1988년 「심청가」 서독 쾰른음대 초청공연 ▲1990년이후 해마다 국악대공연 ▲1991년 강산제 판소리「심청가」로 인간문화재 지정,미국 카네기홀에서 「심청가」「춘향가」공연 ▲1992년 「심청가」완창(국립극장)과 예술의 전당 야외음악당 공연,일본 도쿄서「심청가」공연,대한민국 국악제 독창,사단법인 새한전통예술보존회 설립·이사장취임 ▲1993년5월 호주 브리즈번 세계음악제에 한국대표로 출연,6월 KBS국악관현악단과 「춘향가」완창공연,부산문화극장에서 판소리 5마당 큰잔치 「심청가」공연,7월 새한전통예술 보존회 설립기념 「민족예술국악대공연」 ▲1977년부터 국악고·추계예술대·단국대·전남대 출강 KBS 제1회 국악대상 수상·국악부문 방송대상 수상 「춘향가」「심청가」「흥보가」(오아시스레코드사 출반)
  • “한국기술자 일 연수 재개”/양국통상장관회담/교역 균형적확대 합의

    한·일 양국은 일본의 시장확대와 대한기술투자,한국의 경쟁력강화를 통해 교역을 확대균형적으로 늘려나가기로 합의했다. 또 연내 특허창장회의를 재개,지적재산권협상을 연내 타결하기로 합의했다.한·일 지적재산권협상은 그동안 6차례 실무회담이 있었지만 성과가 없었다. 김철수상공자원부장관과 구마가이 히로시(웅곡홍) 일본 통산상은 30일 과천청사에서 「제2차 한·일통상장관회담」을 갖고 이같은 내용이 담긴 10개항의 공동발표문에 합의,서명했다.한·일통상장관회담에서 공동발표문이 나오기는 처음이다. 회담에서 구마가이 통산상은 『한·일간 기술협력차원에서 기술연수를 전향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혀 우리 기술인력의 일본 연수가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그는 또 우리 정부가 요청한 신발 등 16개 품목의 관세인하문제는 현재 검토중이며 『오사카 등지의 수입자유지역(FAZ) 등 유통시설에의 참여와 주요백화점에서의 한국물산전에 대해서도 가능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구마가이 통산상은 한국의 투자환경개선노력을 평가하고오는 9월 방일하는 우리 측의 민·관투자유치단에 대해 전면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한편 수입선 다변화품목의 조기해제와 지적재산권의 대일 차별적 조치를 해결해줄 것을 촉구했다.
  • “3조원 넘는 생산증대 유발”/대전엑스포 파급 효과

    ◎21만명 고용창출… 소득 1조2천억 증가/세계 2천여 명사 방문… 외교성과도 지대 대전엑스포를 계기로 우리는 과연 새로운 도약의 길로 나설 수 있을까.아직 이에 대한 대답을 내린다는 것은 시기상조이다.10년쯤 지나서야 그 파급효과가 가시화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백40년의 엑스포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엑스포가 한 국가 및 인류의 발전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가까운 예로 일본은 70년 오사카박람회를 통해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으며 멀게는 1886년 미국 필라델피아박람회에서 전화기의 전시를 통해 세계 통신분야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경제적인 효과말고도 엑스포는 정치·외교·사회·문화적으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효과를 끼친다.특히 어린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주는 교육적 효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진 유산이다. 대전엑스포도 예외는 아니다.일본은 엑스포의 효과를 총투자비의 2∼3배로 분석한다.이같은 계산에 따르면 1조6천억여원을 투입한 이번 엑스포는 3조∼4조원의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엑스포조직위원회가 최근 밝힌 투자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국내산업의 생산유발 효과는 무려 3조6백43억원으로 거의 총 투자비의 2배에 맞먹는다.이에따라 1조2천억원의 국민소득 증가와 21만7천명의 고용창출 효과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산업별로는 건설 등 3차산업이 1조7천3백48억원으로 가장 크고 제조업이 1조2천49억원,1차산업이 1천2백46억원이다.고용효과 또한 3차산업이 13만3천8백명으로 가장 많고 1,2차 산업이 각각 3만9천5백명,4만3천6백여명이다. 국제수지에도 영향을 미쳐 단기적으로는 유발 수입효과가 2천7백49억원으로 관광수입 2천3백억원을 앞질러 5백억원 상당의 적자를 가져올 것으로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우리기업과 기술에 대한 국제적 이미지가 높아져 수출에는 보탬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또 엑스포의 개최지인 대전지역은 사회간접자본 시설의 확충으로 5천9백58억원의 생산 유발효과,3만6천여명의 고용증대 및 2천3백36억원의 소득증대효과를 가져온게 된다.도로망의 확충으로 지역간의 경제교류가 활발해지고 국제적으로는 박람회의 개최지로서 관광산업이 발달하게 된다. 엑스포에 참가한 기업들에 미치는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단기적으로는 2백억∼3백억원씩의 투자로 적잖은 손실을 입을 것이다.그러나 해외에서 국내상품의 인지도가 높아져 투자액의 2∼3배에 이르는 광고효과도 맛볼 수 있다.지난 85년 대전박람회와 비슷한 주제로 열린 쓰쿠바박람회를 통해 일본은 전자 및 반도체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국임을 입증했다. 특히 각종 첨단기술이 선보이는 이번 박람회를 통해 기업들은 새로운 분야에 대한 보다 폭넓은 경험을 접할 수 있다.경제개발협력기구(OECD)는 앞으로 10년을 전후해 세계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기술로 정보·신소재·우주항공·바이오테크놀로지(로봇)·핵융합 등을 꼽고 있다.이번 박람회에서도 고화질(HD)TV·신경 로봇·형상기억합금·자기부상열차 등 최첨단기술이 요구되는 분야가 부분적이지만 대부분 다뤘다. 경제외적인 파급효과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엑스포이다.먼저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높아지는 정치·외교적 효과를 들 수 있다. 지난 90년 선진국의 국민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인들 대부분은 한국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선진권밖으로 보고 있다.이에따라 우리나라는 개도국에서 처음 열리는 공인 박람회인 점을 내세워 국제사회에 「선진국 진입의 1순위국」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또 장차관급 이상의 외교사절 4백여명을 포함해 2천여명이 넘는 저명인사가 엑스포를 찾을 것으로 보여 외교적인 성과도 상당히 기대된다.특히 한국을 경제발전의 모델로 삼고 있는 개도국들에는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사회·문화적으로도 국민들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가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봄으로써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갖게 된다.세계각국의 문물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어 「우물안 개구리」식의 사고에서도 벗어나고 올림픽때처럼 해외동포의 민족적 긍지도 한층 나아지게 된다.게다가 질서·친절·화합 등의 의식이 몸에 배는 전기도 마련해 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에게 미칠 교육적인 효과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값진 것이다.88올림픽을 통해 청소년들이 국제적인 시야를 넓혔다면 이번 엑스포에서는 과학과 미래에 대한 꿈을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엑스포는 세계 선진국의 잔치 마당으로 출발했으나 지금은 인류의 공동 번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21세기의 국제무대에서 우리나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이번 엑스포가 단순한 놀이마당이나 행사치레로 끝나서는 안되겠다.
  • 엑스포 참가사주 증시주도 가능성/전문가전망을 들어보면

    ◎공급업체·상품화권자 매출신장 기대/음식료·숙박·운송업 단기적 특수 예상/“첨단관련주도 투자 유망종목으로 고려할만” 대전엑스포 개막과 함께 엑스포가 증시에 미칠 영향에 대해 투자자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 당장 엑스포가 열리는 3개월 동안 약 1천만명(외국인 2백만명 포함)의 관광객이 찾아들면서 행사장을 중심으로 대규모소비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된다.관광객을 실어나르고 먹이고 재우는 과정에서 음식료·숙박·운송업 등이 단기적으로 특수를 누리게 된다.또 전시관개설 등으로 행사에 직접참여하는 업체는 물론 공식 후원업체·공급업체·상품화권자들도 수출상담증가와 함께 장기적으로 이미지개선 등 홍보효과로 매출신장이 기대된다. 우리와 비슷한 경제상황에서 치러진 70년 일본 오사카엑스포의 예를 보면 전반적인 경기침체기였음에도 개막전 6개월 동안 관련업종의 주가는 식료업의 경우 28.18%,서비스업 27.15%,육상운송 31.2%,금융 33.73%,수산업 78.21% 등으로 올라 종합주가지수상승률 10.06%를 훨씬 웃돌았다.엑스포가 끝난뒤 약 3년 동안은 첨단관련주가 크게 상승,엑스포의 홍보효과가 중장기적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역시 올 연초대비 종합주가상승률은 3.2%였으나 내수관련업종은 최하 4.3%에서 최고 67%까지 치솟았으며,도매업종 18.68%,육상운송 14.29% 등으로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물론 새 정부의 경기활성화대책이 이들 업종의 주가를 부추기는 데 가장 큰몫을 담당하기는 했으나 엑스포의 영향도 전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공식 후원업체·공급업체·상품화권자중 롯데제과·조흥은행·대한항공·충청은행·경원세기 등만 평균주가상승률을 밑돌았을 뿐 기린(쌀과자) 1백3·9%,국제상사(신발류) 48·4%,대우전자(가전제품) 33·9%,빙그레(빙과·과자류) 31·9%,삼성항공(카메라) 22·5% 등 비교적 큰 폭의 증가세를 나타냈다. 대우증권의 김서진상무는 『두달째 계속되는 조정국면으로 엑스포관련종목이 눈길을 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전제한 뒤 『그러나 오는 9,10월경으로 예상되는 대세 상승기에는 이들 종목이 주도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으며,이번 엑스포기간중 특별히 눈길을 끄는 회사의 첨단상품도 투자유망종목으로 고려해볼만 하다』고 말했다.
  • EXIO 역사/런던엑스포 이후 140년간 43차례 열려

    ◎종합박람회는 70년 오사카서 처음 개최 근대적 의미의 엑스포는 18 51년 런던에서 처음 치러진 뒤 140여년동안 43차례나 열렸다.종합박람회는 70년 일본 오사카 박람회가 처음이며 국제박람회기구로부터 공인을 받고 치러진 엑스포는 31년 파리박람회가 처음이다.공인받지 못하면 국가 단위로 참가할 수 없다. ▲BC 5세기 페르시아 「부의 전시」=인류 최초의 엑스포로 주변 식민지를 제압하려는 의도에서 개최. ▲1851년 영국 「런던엑스포」=현대적 의미의 첫 엑스포로 산업혁명으로 꽃피운 공업화의 성과를 과시. ▲1861년 프랑스 「파리엑스포」=전시관 형태로 열린 첫 박람회. ▲1893년 미국 「시카고박람회」=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한지 4백주년을 기념한 대회로 우리나라가 세계박람회에 처음 참가. ▲19 28년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박람회기구(BIE)창설. ▲1933∼34년 미국 「시카고박람회」=처음으로 엑스포의 주제를 정한 박람회. ▲1970년 일본 「오사카박람회」=사상 처음으로 열린 종합박람회. ▲1992년 스페인 「세비야박람회」=두번째로열린 종합박람회로 110개국이 참가한 사상 최대규모의 대회.
  • 일류제품만이 기업생존의 길(최택만 경제평론)

    국내 최대기업인 삼성그룹의 최근 행보가 경제계는 물론 국민들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다.삼성그룹은 올들어 대규모 해외현지회의,조기출퇴근제 실시,삼성전자의 라인스톱제 도입,계열사단위의 경영전략 등 「제 2의 창업」을 위한 경영전략에 부심하고 있다. 삼성그룹 이건희회장이 지난 3월 창립 55주년을 맞아 「제 2창업」을 선언한면서 시작된 삼성그룹의 경영혁신 운동은 이회장의 해외현지회의로 더 많은 화제를 뿌리고 있는 것 같다.이회장은 지난 2월 LA,3월 도쿄,6월 프랑크푸르트에서 각각 해외현지회의를 연 바 있다.현재도 오사카·후쿠오카·도쿄를 돌며 회의를 열고 있다. 이회장을 비롯한 삼성전자 임원들은 해외현지회의에 그치지 않고 도시바·NEC·화낙·후지쓰 등 이른바 세계적인 초일류 전자·기계업체들의 생산현장과 유통시장을 돌며 한달동안 현지연수를 겸하고 있다.이회장이 현지회의를 열고 있는 것은 『자기가 만든 물건이 해외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대접을 받으며 어떤 가격으로 팔리는지 해당임원들이 직접 현장에서 확인하기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성그룹 임원들이 확인하고 있는 우리 상품의 위치는 과연 어떤가.엊그제 한국은행은 올해 상반기중 우리나라 총수출에서 미국·일본·EC 등 선진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사상 처음으로 50%를 믿돌았다고 발표한바 있다.우리상품이 3대 선진시장에서 일본제품에 눌리고 중국상품에 밀리며 동남아 국가에서 만든 상품에 쫓기고 있는 실정이다.88년까지만 해도 3대 선진시장에 대한 수출비중이 68.5%에 달했다. 우리의 가장 주요한 시장인 미국 도소매점을 돌아 보면 한국은행이 발표한 수치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미국 전자제품 전문할인 체인점인 WIZ를 찾아가 우리제품을 찾았으나 그곳에서는 한국제품을 취급하지 않고 있었다고 우리업계의 한 관계자는 필자에게 들려 주었다.취급하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딜러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필자가 10여년전 미국 전자제품 전문판매점에서 한국산 전자제품을 보았는데 『그럴리가 있느냐』고 반문했으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이제는 우리전자제품이 미국에서 가장 큰 백화점인 시어즈 로빅의 전자제품코너 한구석에 먼지가 쌓인 채 팔려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3∼4년전만 해도 일본 다음으로 우리 전자제품이 미국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었는 데 지금은 그 진열대가 중국·동남아국가·중남미국가 등에서 만든 제품으로 채워지고 있는 상황이다.일본제품보다는 20% 정도 값이 싼데도 고장이 잘 나고 디자인도 시원치 않아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다.몇해전까지는 값이 저렴해 그런대로 팔렸으나 이제는 다른 개도국 제품이 훨씬 더 싸 우리제품이 외면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상태로 몇년이 지나면 선진국 백화점의 어느 구석에서도 우리제품을 찾아 볼 수가 없을지도 모른다.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기업인이다.삼성그룹 이회장이 주창하고 있는 「질 우선의 경영」은 우리상품의 경쟁력회복 뿐만 아니라 우리경제의 재도약을 위한 절대절명의 과제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이회장의 표현대로 기업인 자신부터 변해야 일류품질의 상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기업이 모든 제품을 일류화시키는 참으로 어렵다.한 기업집단이 한 두개의 업종을 선택해서 자금을 집중투입하여 공정을 개선하고 기술을 개발해도 세계에서 일류가는 제품을 만들기가 힘들다.하물며 현재와 같은 백화점식 경영방식으로는 일류화는 더더구나 실현하기가 불가능하다. 무한경쟁시대에 돌입한 지금 1위외에는 큰 의미가 없다.선두업체와 후발업체간의 이익은 개발시차와 관계가 없이 최소한 10배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 하나의 정설처럼 굳어가고 있다.일류와 이류는 숫자적으로는 일등급의 차이밖에 없으나 실제 경영에서는 10배의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이회장은 『21세기를 앞두고 남은 7년은 우리가 세계 초일류기업으로 살아남을 수 있느냐,또는 주저앉고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마지막 결단의 시기라』고 회의때 마다 강조하고 있다.삼성그룹 최고 경영자의 몸부림은 특정기업인의 유별난 행동이 아니다.우리기업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자 자구적의 노력이라 하겠다.다른 기업인들도 한가지 제품이라도 일류화를지향하는 경영혁신운동을 하루빨리 전개하기를 기대하고 쉽다. 기업인의 자구적 경영혁신과 함께 근로자들도 제품 하나하나에 정성과 열의를 쏟아야 한다.기업의 주체들 뿐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우리상품의 일류화를 위해 「총체적 지혜와 슬기」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기업이 살아 남아야 나라와 국민이 살아 남을 수 있기때문이다.지금부터 우리 모두가 품질에 승부를 걸겠다는 새로운 자각과 혁신운동을 전개하자.
  • 한·대만/수출·관광 등 실질교류 활기띨듯

    ◎양국 비공식관계 합의 의미와 전망/감정대립 극복… 상호실리 선택/「하나의 중국 인정」 대중정책도 무난/한국/금수 등 4개 보복조치 조만간 해제/대만 한­대만 양측이 27일 비공식관계수립에 합의함으로써 단교된 상황에서나마 민간차원교류의 틀을 복원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중수교에 대한 보복조치로 취해졌던 자동차수출 금지및 사과와 바나나의 구상무역 중단,여객기와 선박운항금지등 대만측의 4가지 제재조치가 조만간 풀리게 됐다. 한­대만 단교이후 우리측이 입은 경제손실은 수출·운임·관광등을 포함,총 7억달러로 추정된다.대만도 4억5천만달러의 손해를 보았다.양측의 실질적 관계정상화는 이같은 손실을 끝내는 것을 의미한다.대만이 91년부터 추진중인 국가건설6개년계획에 우리 기업이 참여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그동안 양측은 짧은 기간이지만 어려운 협의를 해왔다.우리측은 대만과의 갑작스런 단교로 국민정서상 「미안함」이 상존해 있었고,나아가 중국과의 관계를 염두에 두지않을수 없는 처지였다.대만측도 한­대만 단교에따른 대국민 명예회복과 국내정치 사정상 반전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었다. 보다 협의를 서두른 측은 대만인 것으로 알려진다.우리측 홍순영외무차관이 지난 26일 2차회담이 진행중인 일본 오사카를 방문,합의문에 서명하려다 연기하는등 막판난조를 보인 것도 따지고 보면 대만측의 조급함에서 비롯됐다고 볼수있다. 이번 합의는 한­대만,그리고 중국 3자가 「서로 기분 나쁘지 않는」 최대공약수를 도출해 냈다고 할수 있다.이번 합의가 한­중수교에 따른 뒤처리 성격을 가졌다는 점에서 볼때도 사후정리를 무리없이 한 셈이다.우리의 「하나의 중국 인정」이라는 정책에 손상이 가지않으면서 대만측의 자존심도 어느정도 충족시켰다고 평가된다. 특히 「MISSION」이라는 준국가기관의 성격을 부여하고 외교재산은 중국측에 양도하며 비외교재산은 중국과 대만과의 협의에 따라 처리토록 한 점등은 대만측의 입장을 상당히 고려한 것이다.이로써 대만측은 대사관및 대사관저,부산영사관저를 제외한 명동상가,화교학교등에 대해서는 자국의 역량에 따라,즉 화교들이 대만정부 편일 경우 계속 재산권을 행사할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와관련,한 외교소식통은 『현재 국내 거주 화교들중 많은 수가 중국측으로 돌아섰다』고 밝히고 있어 재산권문제는 자칫 한국 법정투쟁으로까지 이어질 공산이 큰 것으로 관측된다. 합의를 뒤엎을 정도는 아니지만,아직 해결되지않은 실무현안이 남아있다.주로 관계재개시기와 관련된 것들이다.우선 대만측은 대표부를 외교부산하로 내보낼 예정이지만 우리는 민간 차원의 관계 수립인 만큼 일본 「교류협회」와 같은 모체를 만들거나 국제교류재단과 같은 기존단체를 활용해야 한다.이 기구를 통해 이른바 「업무약정」을 체결한다는 구상이다.즉 영사업무는 어떻게 하고,대표부직원의 지위및 통신보장,우편물 배달방법,면세여부등은 어떤 형태로 하느냐를 결정짓겠다는 것이다.외무부의 한 당국자는 『원칙은 서있으나 문서로 합의 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우리측은 대표부가 영사업무접수창구로써 대행은 할수 있어도 직접 발급은 안되고,대표부직원은 민간신분이기 때문에 업무편의는 제공할 수있어도 외교관 신분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이 부분은 대만과의 추가협상을 필요로 한다. 중국은 대만에 취항하는 항공사에 대해 중국취항을 금지시키고 있다.일본의 경우는 대만만을 취항하는 국기 없는 JAL사의 자회사를 만들어 편법으로 취항하고 있다.국내 항공사도 중국노선을 포기하지않는 한 자회사를 만들어야 된다. 대만산 바나나 수입 재개로 국내생산농가가 입을 피해에도 대비해야 할 처지다.또 합의문대로 양측간 기존 11개 협정은 주체만 바꾸면 사용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 손질이 필요하다.대부분 조약이 60년대에 조인된 것들로 현 실정에 맞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지적이다.항공·해운·관세·투자보장협정등이 정부의 후원아래 민간협약으로 대체되어야하는 것이다. 대표부설치를 둘러싼 실무현안의 조율을 마치려면 양측의 정상관계 회복은 빠르면 8월말,늦으면 10월초로 예상된다. ◎한·대만 기본합의서 요지 한­대만 양측은 92년8월 외교관계 단절이후 중단되었던 교류를 회복시키기위해 93년 7월21일부터 27일까지 일본 오사카에서 실무회담을 개최,93년7월27일 양측간의 새로운 비공식관계의 기본틀에 관해 상호간 이해에 도달하고 조속한 시일내 서울과 타이베이에 민간차원의 대표기구를 각각 설치키로 합의했다. ▲타이베이에 설치될 대표기구의 명칭은 「주타이베이 한국대표부」(Korean Mission In Taipei)로 하고,서울에 설치될 대표기구의 명칭은 「주한국 타이베이 대표부」(Taipei Mission In Korea)로 한다. ▲쌍방의 대표부는 경제·통상·문화·교민등 분야에서의 교류증진 기능을 가진다. ▲양측은 기존의 제협정을 상호 협의를 통해 「기타형식」으로 대체하며 이와같이 대체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기존협정이 계속 유효한 것으로 한다. ▲양측은 경제·통상등 제반분야에 걸친 협력·교류를 조속히 재개한다.
  • 한­대만 민간대표부 설치/기본합의서 서명/새달말∼10월초 교환개설

    한국과 대만은 지난해 8월 외교관계 단절이후 중단됐던 교류관계를 회복시키기위해 조속한 시일내에 서울과 타이페이에 민간차원의 대표기구를 교환설치키로 했다고 27일 동시발표했다. 이와 관련,우리측의 이현홍본부대사와 대만측의 김수기 전주한대사는 이날 일본 오사카에서 대표기구의 명칭·성격·기능등을 규정한 비공식관계수립 기본합의서에 정식서명했다. 이에 따라 한·대만 양측은 대표부설치에 필요한 실무협의를 거쳐 빠르면 8월말 늦어도 10월초까지는 상호 민간대표부를 설치할 것으로 예상된다. 양측이 조인한 기본합의서에 의하면 우리가 타이페이에 설치할 대표기구의 명칭은 「주타이페이 한국대표부」(KOREANMISSIONINTAIPEI)로 하며 대만은 서울에 「주한국 타이페이대표부」(TAIPEI MISSIONIN KOREA)를 두도록 했다. 기본합의서는 또 ▲대만측은 부산에 대표부지부를 설치하며 ▲쌍방의 대표부는 경제·통상·문화등 분야에서 교류증진기능을 갖도록 하고 ▲양측이 맺은 기존의 협정을 「기타 형식」으로 대체하되 그때까지잠정적으로 협정이 계속 유효한 것으로 한다고 명시했다.양측은 경제·통상·협력교류를 조속히 재개한다는데도 합의했다. 쌍방의 대표부는 상대방 국가에 있는 교민보호업무를 할수 있으나 본격적 영사업무는 할수 없다는 것이 우리 정부방침이며 대표부설치와 관련해 양측간 추가 실무협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대표부직원들도 외교관특권을 부여받지 못하나 대표부활동과 연관되어 준외교관지위는 보장될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대표부의 민간성격을 부각시키기위해 새로 그를 관장할 협회를 만들거나 기존의 한국국제교류협력단을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중이다. 양측은 자국기의 대표부 옥외게양은 않기로 했으나 옥내설치는 양해하기로 했다.재산문제와 관련해 우리 정부는 서울 명동의 구대사관건물등 외교자산은 중국측에 넘겨주되 비외교적 재산의 귀속문제에 대해서는 관여하지않고 중국과 대만,그리고 화교 개인들의 협상에 맡기기로 했다. 대만측은 대만내 한국교민들의 기존지위를 보호·존중하기로 했다. 이날 한·대만 양측간 비공식관계수립이 합의됨으로써 민항노선 재개등 후속조치들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 한­대만 비공식관계 수립/오늘 합의문 교환 가능성

    【싱가포르=양승현기자】 한·대만양측은 27일 비공식 관계설정을 위한 합의문을 교환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승주외무장관을 수행중인 외무부 당국자가 26일 밝혔다. 이 당국자는 『한·대만양측은 비공식 관계설정을 위한 오사카협상에서 타결되지 않았던 한두가지 문제가 이날 중으로 매듭될 것』이라며 『그러나 양측 차관이 서명하려했던 당초 방침을 바꿔 특사들이 교환하게 될것』이라고 말했다. 양측은 지난21일부터 일본 오사카에서 우리측에서는 이현홍본부대사가,대만측에서는 김수기 전주한대만대사가 대표로 참석,협의를 진행해왔다.
  • 일,「정신대」피해 첫 조사/내한 증언청취단,공식활동에 돌입

    일본정부의 「군대위안부 증언청취단」은 26일 상오 10시쯤부터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사무실에서 김복선씨(68)등 일제군대 위안부 생존자 3명으로부터 직접 증언을 들었다. 일본측의 이번 증언청취는 한국인 위안부에 대한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고 벌이는 첫 공식활동이다. 비공개리에 진행된 증언청취에는 기무라 마사유키(목촌정지) 일본내각 외정심의실 심의관을 비롯,일본 외무성등 정부및 관련 단체 관계자 9명이 참여했으며 양순임유족회 대표가 참관인으로 배석했다. 일본 대표단은 이날 김씨등 군대위안부들로부터 위안부의 생활상을 듣는 한편 강제성 여부를 규명하기 위해 위안부가 된 경위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했다. 첫 증언에 나선 김씨는 『18세때 전남 나주의 큰아버지집에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일본 오사카,버마등지에서 1년 6개월동안 위안부생활을 했다』며 『일본은 피해자들에게 사죄와 함께 배상을 반드시 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증언청취는 오는 28일까지 3일동안 계속되며 남양군도에서 군대위안부 생활을 했던 강순애씨(66)등 10여명이 증언하게 된다. 이번 증언청취는 군대위안부의 진상규명 차원에서 일본정부와 유족회측이 합의함에 따라 이루어졌다.
  • 한­대만,비공식관계 수립 합의/23일 초안 서명

    ◎무역사무소(대북)·대표부(서울) 교환 개설/양국,오늘 일 오사카서 협정조인 【대북 AP DPA 로이터 연합 특약】 한국과 대만은 지난해 한·중수교 이후 단절돼온 양국 관계를 실질적으로 회복하기 위한 조치로 양국간에 비공식 국교를 수립하기로 합의하고 이같은 내용을 담은 초안에 서명했다고 방금염 대만외교부 부부장이 24일 발표했다. 방부부장은 한·대만간 관계정상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김수기 전주한대만대사와 이현홍 한국순회대사의 접촉이 지난 23일 일본 오사카(대판)에서 있었다고 말하고 자신이 25일 오사카에서 홍순영 한국외무차관과 만나 협정서에 공식조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협약에 따라 한국정부는 타이베이(대북)시에 무역사무소를,대만은 서울에 대표부를 개설하게 된다. 한국과 대만은 지난해 8월 한국이 외교관계를 중국으로 전환하면서 양국이 상호 대사관을 폐쇄한 후 11개월만인 지난 14일 새로운 관계개선 수립을 위해 서울에서 협상을 시작했다. 대만은 몇차례의 협상과정에서 서울대표부 명칭에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라는 국호 사용을 고집하지 않기로 양보했으며 한국은 서울소재 구대만대사관이 사용하던 일부 건물을 비외교적 목적에 사용하는 조건으로 획득하는 것을 지원한다는데 동의했다. 한편 대만언론들은 양국이 곧 양측 항공사의 상호운항 재개를 위한 협상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세부문제만 미합의 【싱가포르=양승현기자】 싱가포르를 방문중인 한승주외무장관은 24일 대만과의 「비공식관계 설정」과 관련,『현재 우리측 홍순순차관이 일본 오사카에서 대만측 방금염외교부 부부장과 협의를 진행중』이라며 『그러나 양측간 미합의사항이 있어 비공식 관계 수립시기를 점치긴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 한장관은 그러나 『오사카 협의에서 양측이 합의한다면 금명간 비공식 관계가 설정될 것』이라고 덧붙여 민간대표부 교환이 임박했음을 시사했다. 한장관은 양측간 미합의사항에 대해 『재산·민간대표부의 성격 등 큰 줄기는 양측간 합의를 마친 상황』이라며 『주재원 신분·대만측의 옛 영사관처리문제 등이 남아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한편 홍차관은 대만측과의 합의여부를 떠나 25일중 귀국할 예정이라고 외무부의 한 당국자가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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