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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5 개각­신임장관 프로필

    ◎조해령 내무장관/행시출신으로 총무처장관 역임 71년 제10회 행정고시에 합격,경북도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에 첫 발을 내디딘 뒤 내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내무관료 출신. 논리가 정연하고 업무에 밝아 신망이 두덥다.상사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는 일면도 있다.6공시절 청와대 내무행정비서관을 지냈으며 내무부 지방자치기획단장으로 지자제 실무작업을 지휘했다. 지난 2월부터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장으로 일해왔다.새마을운동을 맡은 뒤 외채 위기가 가중되자 ‘신국채 보상운동’을 전개,5개월만에 약정고 5조원을 돌파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부인 김옥희씨(54)와 1남 1녀.등록재산 3억4천여만원. ◎김종구 법무장관/엄청난 독서량 “아이디어 뱅크” 검찰국장과 서울지검장 등 법무부와 검찰내 정통 엘리트 코스를 빠짐없이 거쳤다.사시 3회 출신의 선두 주자.서울고검장에서 파격적으로 장관으로 영전했다. 깔끔한 외모와 온화한 성품으로 검찰내 신망이 두텁다.유연한 사고방식으로 언론계 등 각계에 지인이 많다. 서울지검장 시절 민원검찰제·전결검사제 등을 도입,검찰제도 개혁에 이바지하는 등 참신한 기획력이 돋보인다.‘아이디어 뱅크’로 불린다. 대전지검장 시절에는 한준수 연기군수의 관권개입 폭로사건을 무난히 처리하기도 했다.단신이지만 두주불사형. 다방면에 걸쳐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며 난초 재배에 일가견이 있는 등 취미가 다양하다.부인 박종희씨(50)와 사이에 2남1녀. ◎이명현 교육장관/문민정부 출범후 교역개혁주도 문민정부 출범후 교육개혁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내며 교육개혁을 이끈 주역.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후보의 씽크탱크인 ‘동숭동팀’의 일원으로 활약,일찍부터 입각이 점쳐졌다. 서울대 철학과 인맥의 핵심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저서 ‘김영삼 2000 신한국’을 정리하는 등 신한국론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상대방을 다양한 논리로 차분히 설득하는 장점을 지녔으나 고집스런 면도 있다.지난 94년 대학 본고사 폐지를 전격 발표했다가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반나절만에 백지화하기도 했다.서울대 교수시절에는 민주화운동으로 곤욕을 치렀다. 43세때 동료인 기악과김귀현 교수와 만혼.초등학교 4년생인 외아들의 초등학교에서 교육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효계 농림장관/일·영어에 능통한 정통내무관료 내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내무관료.업무처리가 신중하고 치밀해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스타일이다. 고시 13회로 내무부에서 공직을 시작,기획관리실장 차관보 전주시장 차관 등 내무부 요직을 두루 거쳤다.광주시장과 전남지사 재직 때에는 농어업정책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바쁜 생활속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학구파로 알려져 있다.미국유학시절 어학연구에 몰두,영어와 일어는 외국인과 막힘없이 대화를 나눌 정도다.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소망교회 장로도 맡고 있다.대인관계가 특히 부드럽다.부인 유신자 여사(57)와의 사이에 1남3녀. ◎윤여준 환경장관/언론계 출신 상하서 신임 두터워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업무에 적극적이어서 상하로부터 신임이 두텁다.그동안 개각설이 있을 때마다 청와대 수석으로서 내각진출 0순위로 꼽혔다.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기자생활 10년을 거쳐 주일공보관으로 관계에 투신한 이래 국회의장 공보비서관 청와대 공보 의전 정무비서관에 이어 공보수석으로 20년간 공직생활. 선친인 윤석오씨가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내 ‘2대에 걸친 대통령 비서관’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경기고교시절 병마로 자퇴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단국대에 진학.부인 우선희씨(56)와의 사이에 2남. ◎최광 복지장관/손꼽는 조세전문가… 미서 경박 손 꼽히는 조세전문가다.정부가 조세정책에 자문을 구하는 몇안되는 학자다.미국 메릴랜드 대학에서 재정학으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보건복지부 장관 기용에 의아해 하는 이들도 있지만 조세전문가답게 꼼꼼하게 보건복지행정을 처리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지난해 정부가 저축증대를 위해 비과세 저축상품을 신설할때 이를 정면으로 비판한 소신파이기도 하다.온건한 합리론자라는 평도 듣는다.술은 잘 하지 않는 편.85년 한국조세연구원이 출범할 당시 연구부장을 거쳐 95년 원장에 선임됐다.부인은 조순희 여사(48).취미는 등산과 수영. ◎이기호 노동장관/추진력강한 행시출신 경제통 업무에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면서도 부하들을 꼼꼼하게 챙기는 스타일.정연한 논리에 지나칠 정도로 꼼꼼한 일처리가 장점이자 단점이라는 평. 지난 69년 행정고시에 합격한뒤 20년여년 동안 주로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해온 경제통. 보건복지부 차관으로 있던 지난 3월6일 차관급 인사때 장관승진 ‘0순위’인 총리행정조정실장에 발탁된뒤 5개월만에 장관자리에 올랐다. 지난 68년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땄으며 취미는 등산과 바둑·테니스. 부인 양인순여사(46)와 1남1녀. ◎조정제 해양장관/폭넓은 경제지식… 글솜씨 탁월 해양·수산 양대분야의 정책현안과 업계 사정에 고루 정통하다. 옛 경제기획원에서 자금계획과장을 지냈다.국토개발연구원과 한국개발연구원에서도 일해 경제전반에 대한 지식이 깊고 글솜씨가 뛰어나다.해운항만 분야의 ‘2020년 장기비전’을 마련하는데 주역을 했고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설립 때도 설립추진단장을 맡았다. 일본의 일방적 직선기선설정에 대한 대응 등 수산업육성방안 마련에 능력을발휘할 것으로 기대된다.섬세한 성격이며 일을 맡으면 끝까지 파고들기로 유명하다.부인 배경희 여사(52)와 2남을 두었다. ◎심우영 총무처장관/소탈한 성격의 보스형 인기높아 자타가 공인하는 ‘오뚝이형’.7급 공무원 재직중 행정고시에 합격한 뚝심의 정통 총무처관료로 이번에 금의환향하게 됐다. 일처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꼼꼼하지만 소탈한 성격으로 아래위로 두루 신망이 두터운 편.‘보스기질’로 특히 부하직원들로 부터 인기가 높다. 총무처 시절에는 인사·민원·후생 등 행정관리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민자당 시절 7개월 동안 행정전문위원으로 정책입안능력을 인정받은 것이 잇따른 요직발탁의 이유가 됐다는 것이 주위는 분석.컴퓨터에도 일가견이 있다.부인 정신자씨(53)와 1남2녀. ◎홍사덕 정무1장관/언변 뛰어난 언론계출신 정치인 논리정연한 화술과 준수한 외모로 젊은층에 인기있는 차세대 정치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현재 여야 정치인들과 교분이 두텁고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재사형.한때 양김퇴진론을 주장한 야당의명대변인 출신.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정계에 입문,11대에 원내에 진출했으나 13대에는 무소속으로 서울 강남 을구에서 고배를 든뒤 MBC라디오 칼럼을 맡아 명 정치평론가로도 활약했다.14대에 다시 무소속으로 도전,안기부의 흑색유인물 사건 파동속에 당선돼 설욕하는 저력을 보였다. 부인 임경미씨(54)와의 사이에 1남2녀. ◎이연숙 정무2장관/여성계서 맹활약… 말솜씨 뛰어나 영어교사 출신으로 23년동안 주한 미 공보원에서 한미 문화교류에 힘쓰다 지난 93년 상임고문 자리에서 그만 뒀다.그뒤 여성계와 소비자단체 등에서 주로 활약해 지난 94년부터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직을 맡아왔다.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온화해 주위 사람들을 편하게 해준다는 평을 들으며 끊임없이 자기계발에 나서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다. 특히 사회 각부문에 관한 지식이 깊은데다 말솜씨가 뛰어나 지난 93년 KBS­TV ‘심야토론’프로의 사회자를 맡는 등 사회자·패널리스트로 자주 등장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부군 이중섭씨(69)와의 사이에 출가한 두딸이 있다.
  • 기아 4전5기 가능할까/부도방지협약 적용으로 4번째 시련

    ◎53년동안 6·25 등 세차례 위기 극복/또한번 ‘오뚝이 역사’창조 이목집중 기아자동차가 4전5기 할 수 있을까.기아는 44년 창업한 뒤 6.25로 인한 공장파괴와 60년대 부도사태,80년대 산업합리화 조치 등 세차례나 위기상황에 몰렸다가 재기한 경험이 있다. 해방 직전 자전거 제조업체인 경성정공으로 출발한 기아그룹은 당시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으나 6·25로 영등포공장이 대파됐다.그러나 김철호 창업주가 3개월간 지하에서 숨어지내다 1.4후퇴때 폐허가 된 공장에서 생산시설을 뜯어 열차에 싣고 부산으로 가 공장을 재건했다.부산에서 기아산업으로 사명을 바꾼 기아는 국산자전거 1호인 ‘삼천리호’ 자전거를 생산하며 부흥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엄청난 시련이 닥쳤다.55년부터 시작된 과중한 투자로 56년부터 4년 연속 대규모 누적적자를 기록했다.59년에는 메가톤급 태풍 사라호가 부산공장을 강타,생산시설이 대파돼 회사의 반쪽을 잃고 말았다.61년 11월 기아는 김철호사장의 비장한 경영대책에도 불구하고 부도를냈다.은행측 요구로 종업원 450여명중 200명이 회사를 떠났다.김사장이 강력 반대했으나 반수의 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썼다. 난국을 타개한 것은 오토바이와 삼륜자동차 제조업 진출.기아는 첫 4륜 화물차 타이탄의 생산,소하리공장 준공,국민차 브리사 생산을 거치면서 중흥기를 맞아 흑자행진을 했다.하지만 세번째 위기가 기다렸다.80년 8월2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경기침체 타개책으로 자동차산업을 재편,승용차는 현대자동차가,트럭과 버스는 기아가 전문 생산하도록 강제했다.위기가 닥치자 종업원들이 자발적으로 일어섰다.82년 3월 종업원들은 급여인상분과 상여금을 전액 반납했고 오너인 김상문 전 회장도 재산을 헌납,회사살리기에 나섰다.전 사원이 경비절감과 봉고승합차 판매에 주력한 결과 82년 순이익 1위 기업에 오르는 ‘봉고신화’가 탄생됐다. 기아그룹은 ‘오똑이 역사’를 종업원들에게 상기시키며 이번에도 회사재건에 힘을 모아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계열사 노조들도 화답하듯 임금동결과 모금운동으로 회사살리기에 나섰다.기아가 이번에도 일어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 150㎝ 단구로 버틴 「개혁세월」 73년/등소평이 걸어온 길

    ◎20세 파리유학때 중 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혁명 1세대”/33년 첫 좌절후 3전4기… 78년 개방기치로 전권장악/사회주의 몰락 국제풍파속 말년엔 체제독려 지방순회 신장 150㎝정도의 땅딸막한 등소평은 외무부터가 오뚝이 같았다.부도옹이라는 그이 별명은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쓰러졌다가도 매번 다시 오뚝 일어섰울 뿐 아니라 마침내는 모택동 사후의 중국을 한손에 틀어쥔 탁월한 정치력에 대한 경탄을 담고 있다. 실용주의노선으로 12억 중국인민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키고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최고직책을 가져보지 않은채 중국을 15년 넘게 통치해온 등소평.하지만 그 역시 같은 세대의 거의모든 중국지도층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서사시적 삶을 살아왔다. ○맏아들로 본명 등희현 1904년8월22일 사천성 광안현에서 비교적 부유한 불교도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본명은 등희현.광안중학시절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성격은 온순 참착했다.겉으로는 매우 산박했으나 「마음은 겨자처럼 맵다」는 평을 들을 만큼 결단력에 냉혹성까지 갖추며 자라났다.16세 되던 20년 10월 은등 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간후 24년에는 주은래·이입삼·조세염 등과 파리에서 주국공산단 유럽지부를 창설함으로써 일찍부터 혁명에 가담했다.이 시절 르노자동차회사의 조립공으로부터 기차화부,식당보이 등 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스런 시절을 보냈다.뒷날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이때 길러졌다고 한다.그는 당면에 따라 26년초 파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여기서 중국인만을 대상으로 공산주의학습을 시키던 중산대학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공산주의이론을 학습하고 군사훈련까지 받은뒤 그해 연말 귀국했다. 귀국후 그는 곧바로 서안의 중산군사학교에 배치돼 이 곳에서 정치처장을 맡으면서부터 본격적인 중국혁명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듬해인 27년 국공합작이 실패로 돌아간뒤 그는 중국공상당본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름을 등소평으로 개명했다.그해 겨울 중공중앙이 상해로 옮겨가자 함게 따라가 당비서장과 비슷한 역할을 맡으면서 최초의 부인 장서원과 결혼한다.하지만이장씨부인은 멀지않아 난산으로 사망하게 된다.등은 28년 당대회에서 당중앙부비서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부턴 광서지역에 들어가 본격적인 게릴라활동을 벌였다. 31년에 들어서자 주덕이 이끄는 홍군제1군단에서 정치부주임을 맡게 되고 동시에 홍군총정치부부주임을 맡아 활동하던중 두번째 부인 김유영과 결혼한다.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큰 좌절은 33년에 찾아온다.강서성 위원회 서기로 취임하지만 그가 모택동파라는 이유만으로 곧 해임되고 「엄중경고」처분을 받는다.당시까지만해도 모가 전권을 잡지 못하던 시절이다.이것이 그이 첫번째 실각으로 기록되고 있다.설상가상으로 그의 처 김유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그녀는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던 이유한과 재혼해서 현재의 경제체제개혁위주임인 이철영을 낳았다. 34년10월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끈질긴 소탕전에 견디다 못해 대장정에 나섰다.물론 등은 참여했다.이 장정도중 모는 준의회의에서 중공당 최고지도자로 부상하게 되고 당시 홍군기관지 「홍성보」 편집장 자격으로이 회의에 참석했던 은등 당중앙비서장(당사무총장격)이라는 중책을 맡게 돼 모파의 유력한 간부지위에 올랐다. 약 1년간의 대장정이후 계속된 붉은 공산혁명과 항일운동을 거치면서 등은 계속 모의 신임을 쌓아 가다가 38년8월에는 팔로군의 제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사단장인 류백승과 함께 유등대군(제2야전군)의 기반을 닦아간다.그후 45년에는 군부내에서 주덕·팽덕회 다음으로 3번째의 지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군부내 기반과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그는 이에 앞서 39년9월 세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인 탁림과 결혼,지금까지 2남3녀를 둔채 반백년도 넘게 해로해왔다. 50년대말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가뭄등으로 수백만명이 굻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론」(흑묘백묘론)을 내놓았다.『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사상이야 어떻든)쥐만 잘 잡으면(생산만 많이 하면)좋은 고양이(인민)다』는 의미의 이 주장으로 그는 자본주의 추종자라는 이른바 주자파로 주목받게 된다. 60년대 중반부터문화대혁명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그의 주변에도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홍위병들로부터 주자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그는 류소기 국가주석과 함께 67년8월 모든 공직에서 해임,강서성 신건현에 유배돼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다.2차 실각이었다. 그로부터 7년뒤인 73년3월 그는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됨으로써 화려하게 복권,오뚝이의 면모를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남쪽 언덕이든 북쪽 언덕이든 꼭대기에만 오르면 된다』는 의미의 「남파북파논」을 내놓아 골수 공산주의자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76년4월 주은래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난동사건(일명 4·5사건)때 사인방(모택동을 등에 업은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등 강경파)으로부터 「난동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또다시 실각했다.3차 실각이었다.주추모집회에서 은등 추도사를 읽었었다. 이윽고 모사망과 사인방 실각 이듬해인 77년 그는 다시 부활,실각 당시의 모든 직책을 회복했다.이때 그의 재기용여부를 놓고 중앙공작회의는 격렬한 찬반논쟁을 벌였다.그런데등이 스스로의 과오를 시인,이미 당주석과 중앙군사위주석이었던 화국봉의 지위를 인정하는 편지를 씀으로써 부활하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때 화는 의등 부활에 반대했었다. ○강경책 내며 위기극복 이렇게 되살아난 등은 78년12월 당11기3차중앙위전체회의에서 향후 20년간에 걸친 「4개(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현대화계획」선포를 주도함으로써 당의 최고 실권자임을 과시했다.이때부터 중국이 야심찬 개혁개방시대로 들어선 것이다.이는 곧 실사구시를 중심으로한 실용주의 「등시대」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이 최고실권자였음에도 당주석이나 국가주석과 같은 최고 자리에 오르지 않는채 호요방(당)과 조자양(정부)을 앞세워 화에 대한 문책과 강등에 착수,마침내 82년9월 화를 당중앙 위원이외의 일체의 요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권력투쟁에서의 기나긴 「장정」을 매듭지었다. 89년4월 전총서기 호요방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 민주화시위는 그에게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다.그러나 그는 이 시험문제를 시위대군중에 대한무자비한 발포와 함께 시위대의 추앙을 받던 총서기 조자양을 「폭란의 배후책임자」로 몰아 제거하는 방법으로 풀었다.13년전의 천안문폭동때 자신이 당했던 방법을 이번에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조에게 그대로 되풀이한 셈이다.어쨌든 이로써 사회주의체제를 전복시켰을지도 모를 자유화물결을 일단 잠재울 수 있었다. 등은 그동안 자신의 후계자로 호요방과 조자양을 잇따라 내세워 봤지만 「홀로세우기」에 실패했다.그 뒤 가장 적절한 후계자라고 꼽은 인물이 강택민.강은 천안문사태 이후 상해시에서 혼란을 신속히 수습했고 그동안 의등 개혁개방노선을 가장 능숙하게 실천해온 것으로 평가되었다. ○강택민 지목한 뒤 은퇴 강을 후계자로 내세운 그는 89년 11월9일 당중앙위의 허락을 받아 당중앙군사위주석직에서 퇴임함에 따라 공직에서 은퇴,평민으로 돌아왔다.그러나 그가 은퇴한 뒤에도 배후에서 한동안 강체제를 지원하고 후견인역할을 해와서 최근까지도 「최고지도자」또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칭호를 들어왔다. 특히 그는 동구공산체제가붕괴된데 이어 소련마저 무너져 중국이 망당망국의 위기의식에 휩싸이자 심천 주해 등 남부 개혁개방지역을 돌며 이른바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을 보다 적극화할 것으로 주창함으로써 사회주이체제붕괴의 도미노현상이 중국대륙에 밀어닥치지 못하게 했을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방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당노선으로 채택케함으로써 중국이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끌어갈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와 힘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중국경제가 이같은 시장경제체제 도입에 힘입어 연10%가 넘는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전진을 계속하자 그는 『기회를 잃지 말고 성장을 계속하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등소평 연보 ▲1904.8.22=사천성 광안현에서 3남매중 맏아들로 출생 ▲1918=중경에서 프랑스유학을 위한 예비학교 입교 ▲1920=프랑스 유학 떠남 ▲1924=파리에서 주은래와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1926=모스크바의 중산대학으로 옮겨 수학한뒤 연말에 귀국 ▲1927=광서성에서 공산당 게릴라 조직.첫부인 장서원과 결혼 ▲1931=홍군제1군단 정치부주임.두번째부인 김유영과 결혼 ▲1933=강서성위서기로 취임직후 모택동파라는 이유로 해임.1차실각 ▲1934∼35=대장정 참가,준의회의에서 당중앙 비서장으로 선임 ▲1938=국공합작으로 홍군이 팔노군으로 개편될때 129사정치위원이 됨 ▲1939=세번째부인 탁림과 결혼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 ▲1952.8=국무원 부총리에 임명 ▲1954=당중앙위원회 비서장,국무원 부총리,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선출 ▲1956=정치국상무위원겸 당총서기 선임 ▲1966=문화대혁염 시기 홍위병으로 부르주아 반동파로 비판받음 ▲1967.7=모든 당·정 직무에서 해임.2차 실각.남창으로 하양 막노동 ▲1973.3=주은래 천거로 국무원 부총리에 복직 ▲1974=당정치국원 승진.유엔총회 특별회의에 중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1975.1=당중앙 부주석,정치국 상무위원,국무원 제1부총리,중공군 총참모장 등에 선임 ▲1976.4=천안문사건이 발생하자 4인방에 의해 배후조종자로 지목,모택동의 제의로 모든 직무에서 물러남.3차실각 ▲1977.7=중공당 10기3중전회에서 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당중앙부주석,군총참모자 등으로 복직 ▲1978.12=당11기3중전회에서 당최고영도자 지위 획득,향후 20년간 4개 현대화 추진계획 선포 ▲1979=핑퐁외교로 미국과 국교수립후 공식 방미,개혁·개방정책을 당지도노선으로 정식 출범시킴 ▲1980=경제특구제 시행 결정,호요방·조자양체제 출범토록 지원 ▲1981.6=당중앙군사위우너회 주석으로 권권장악 ▲1987.10=당정치국원,정치국상무위원직 사임 ▲1989.6=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지시 ▲1989.11=당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내놓고 정치일선에서 은퇴 ▲1992.1=남부개방지역 순시중 담화(남순강화)로 개혁·개방 가속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도입 역설 ▲1992.10=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원로들을 은퇴시키고 강택민체제 구축토록 지원 ▲1993.8=막내딸 용등,「나의 아버지 등소평」전기 출간 ▲1993.11=「등소평문선 제3집」 발간 ▲1993.12=북경시 순시중 「기회를 잃지말고 계속 성장추진」역설 ▲1997=92세를 일기로 영면
  • 등소평 사망/어젯밤 향년 92세

    ◎중,공식 발표… “당·군·인민의 큰 슬픔” 애도 중국 최고지도자 등소평이 19일 밤 사망했다고 중국신화통신이 20일 밝혔다.향년 92세. 신화통신은 이날 중국공산당과 정부가 함께 발표한 성명을 인용,올해 92세 고령인 등은 19일 하오 9시8분 북경에 있는 중국공산당 최고위간부들이 사용하는 공관지역인 중남해부근의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등은 상당히 전이된 파킨슨씨병과 폐질환등의 합병증 증세를 보여 왔으며 사망직전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호흡과 혈액순환기 계통의 기능이 마비되면서 사망한것으로 확인됐다. 등의 위독설은 이번주들어 다시 나돌기 시작했으며 그는 건강악화로 3년전부터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성명에서 중국 공산당과 당국은 『등을 잃은 것은 우리 당과 우리 군,그리고 모든 인민의 큰 슬픔』이라고 말했다. 등은 중국혁명 1세대로 그동안 3차례나 숙청당했다 복권돼 오뚝이라는 별명을 지녔으며 모택동 사망후 78년부터 정권을 장악,90년대초 정계에서 은퇴할때까지 전권을 휘둘러 왔었다.
  • 조각가 김영중(이세기의 인물탐구:100)

    ◎선과 면의 결합으로 「인간주의」 실현/구상서 추상까지 고루 섭렵… 작품마다 실험정신/대형건물 미술품설치 의무화 등 미술발전 앞장/광주 비엔날레 「경계를 넘어」·세종문화회관 「비천상」 등 대표작 연대 정문에서 명지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연희조형관.건물 베란다를 둘러싼 청청한 송죽과 추상조각으로 이뤄진 하얀 돌기둥이 눈에 띈다.이 건물은 해방후 조각 1세대로서 이 시대 대가의 한사람인 우호 김영중의 미술관이다. ○해방이후 1세대 조각인 화단경력 40년에서 그가 쌓은 업적과 작업량은 엄청나다.우선 세종문화회관 외벽부조인 「비천상」,독립기념관의 상징조형물인 「강인한 한국인」군상,서울신문 외벽부조인 「질서」가 그의 작품이다.서울 어린이대공원내 소파 방정환을 비롯해 인촌 김성수,의제 허백련,고하 송진우,일민 김상만,가인 김병로,용인 호암미술관의 이병철,명창 임방울초상등 등 시비·화비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동안 홍대·이대·중앙대 교수를 거쳐 한국미술가협회이사장,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심사위원장을 지냈고 63년 원형조각회를 창립한 이래 한국현대조각연합 상파울로비엔날레 한국현대미술전과 도시의 환경조각,음악과 무용미술전 등 대대적인 그룹전·기념전에 그는 빠짐없이 작품을 출품해왔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개인전을 연 적이 없고 자전적인 화집 한권도 갖지 못했다고 하면 아무도 곧이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지난해 고희기념으로 후배들이 화집발간을 권유했을때도 그는 『내 화집을 내손으로 만드는 것은 쑥스럽다』면서 후학들에게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차원에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미술도서,미술전문잡지,팸플릿과 각종 슬라이드·비디오테이프등 2만5천여점을 내놓아 그의 조형관에 미술자료실을 먼저 만들었다. 실제로 80년대 그는 재능있으나 가난하여 전시회를 갖지 못하는 35세미만의 젊은이들에게 작품발표의 장을 열어주었고 대형건물에 미술품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문화예술진흥법을 제정하는데 앞장서는등 누군가 해내지 않으면 안될 행정적인 측면에서도 미술을 발전시킨 역력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호라고하면 그의 작품들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몇가지 특징이 두드러진다.이른바 한국성을 강조하면서도 국경을 초월한 「생명주의 추구」가 그것이다. 첫째 그는 면과 면의 만남이 선을 형성하고 선과 면의 결합에서 한국적인 형상을 발현한다는 확신이 투철하다.여인의 버선목에 나타나는 유연하고 완만한 곡선미는 예리하고 차가운 석질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만져질듯 부드러운 감촉을 만들면서 빛의 농도와 조사 각도를 통해 조각에다 발색과 채도 조명기법을 도입하고 있다.또 모뉴망 하나라도 그것이 사면팔방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광선과 환경과 상황에 따라 작품으로서 완벽할뿐만 아니라 면은 물론 표현의 성격도 달라진다는 것을 면밀하게 계산해낸다.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을 성취하기 위해 구상에서 추상,반추상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헤프닝과 실험과 조형양식을 고루 섭렵해왔다.그리고 어려움이 닥칠때마다 피하지 않고 「홀로 선다」는 각오로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오기를 멈추지 않았다. 예를 들어 초기에는 중고차 한대를 사서 해머로 두들겨 부수고 구겨서 이를 새로운 조형물로 재생한 적이 있고 널빤지에다 새끼줄을 이용한 입체적인 콜라주기법을 부조에 응용하는가 하면 풍경과 종을 환조에 달아 바람이 불면 종소리를 내는 「소리나는 조각」을 시도하기도 했다. 미술이란 무엇인가,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천착하는 중에도 부르델과 마이욜의 지중해적 고요와 격정,슬픔의 상황고조를 극복해냈고 부랑쿠시와 아르프의 현대추상작품에서 보이는 유기적 생성표현에 집착하면서 미지의 어떤 것,보이지 않는 진실에 독해가능성을 부여하는 작업에 치중해 왔다. ○경력 40년… 개인전 연적 없어 먼저 그의 릴리프들은 우아하면서도 모던한 회화성이 새롭다.흰 벽면 전체를 캔버스 삼아 양각과 음각으로 터치된 세종문화회관의 거대한 「비천상」은 그 것이 돌조각인데도 승천하는 천사의 움직임을 율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거대한 빌딩의 외부 혹은 내부벽면 부조 역시 밤의 조명속에서 마치 백색 유화물감만으로 마감한 싱그러운 마티에르와 볼륨을 살린다.초상작품도 마찬가지다.각 인물의 명철과 청념,정한과 인자,고매한 인품과 꿋꿋한 지조를 형형한 눈빛와 미소에 담아 그들의 지나온 역정을 고백성사처럼 들려준다. 기념조형물중에는 광주비엔날레 상징물인 「경계를 넘어」가 김영중 모더니즘의 압권으로 손꼽힌다.원형으로 휘어진 붉은 무지개다리는 하늘의 푸른 색과 조화를 이루면서 우주를 향한 교량답게 극적인 긴장감과 지성미를 품고 눈부신 창공에 고고하게 걸쳐져 있다. 「단순히 조각을 위한 조각은 예술로서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주의 실현이며 인간의 행복에 보조를 맞출 수 있을때 비로소 예술가의 긍지가 빛난다」고 그는 말한다. 우호는 광주농림고시절 학교에서 전교생에게 점토로 작품을 만들게 하고 그중에서 우수작품에 선발되자 그때부터 그림과 조각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조선조 중엽의 성리학의 태두인 하서 김인후의 13대 직계손이며 부친 김요흠씨는 전남 장성의 대지주로 그는 한서와 서예와 시조의 풍류가 있는 지적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실수 용납않는 완벽주의자 해방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6·25로 학업을 중단했다가 홍익대 조각과로 옮겨 대학을 졸업,58년 제7회 국전에서 「장갑낀 여인」이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을 때도 국전출품을 계속하지 않고 있다가 75년 국전의 재야영입 케이스로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나이와는 상관없이 10살에서 30살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후배들과 격의없이 어울리고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는 만년 미래지향형이다.요즘은 오는 11월4일로 잡힌 동아일보초대 첫번째 개인전을 앞두고 그의 조형관 지하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꼬박 하루를 보내고 있다.가족은 디자이너출신의 부인 임원순씨와의 사이에 8남매,위로 딸 7형제중 3녀 명수씨가 현대무용가이고 외아들 경수씨는 올봄 예일대 졸업후 귀국해 있다. 우호의 성격은 대체로 예의가 바르고 겉으로 부드러우나 일을 앞세우면 사적 애정을 떠나 조그만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다.속물적인 타협이나 시세에 편승하는 법도 없다.다만 정이 많고 친구를 좋아하는 다감한 일면이 그의 예술가적 기질이다. 미술평론가 김남수씨는 『조각가,교수.미술행정가로서 화단에서 쌓은 수많은 업적중에도 지난해 60일간에 걸쳐 무려 1백90만명의 관광객을 동원한 광주비엔날레의 성공은 당연히 우호의 몫』이라고 평가한다.조각가 조성묵씨는 『생명이 있는한 그 삶의 정의로움과 사랑을 어찌나 중요시하시는지 거기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나만은 아닐 것』이라고 그의 후배사랑을 주변에 전한다. 대문호 괴테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한 것처럼 이제 그의 형태는 「견고하고 명확하고 한정된 볼륨과 외부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균형잡힌 고요」를 성취한 가운데 절대를 향한 내면에 깊숙이 접근되고 있다.그리고 현대적인 균제미와 구상주의를 절충한 그의 상황조각은 최상의 배경인 자연의 풍광속에서 언제 어느 면에서 보든지간에 낯의 빛과 별들의 빛을 수용하면서 살아숨쉬는 생명주의를 실천해 내었고 결국 예술의 끝인 「휴먼」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연보 ▲1926년 전남 장성 출생 ▲46년 서울대 미대 입학 ▲56년 홍대 미대 졸업 ▲58년 제7회 국전 「장갑낀 여인」으로 문교부 장관상 수상 ▲62∼63년 홍대,서라벌대 출강 ▲63년 원형조각회 창립기념전 ▲73∼78년 이대 및 중앙대출강 ▲75년 국전추천작가 ▲77∼현재 동아미술제운영위원회 의장 및 심사위원 ▲80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86∼현재 서울신문사주최 서울현대조각공모전 운영위원장 및 심사위원 ▲92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 및 심사위원장 ▲93∼현재 서울특별시예술위원 ▲94년 광주비엔날레조직위부위원장 ▲95년 「미술의 해」조직위원 〈작품출품〉한국현대연합조각전 서울미술대전 현대미술초대전 원로조각초대전 상파울루비엔날레 구상조각전 한국현대미술 어제와 오늘전 등 1백여회 출품 〈대표작〉독립기념관 「강인한 한국인상」,세종문화회관외벽 「비천상」,13도 창의군탑,서울시시설관리공단 「일하는 사람들」,광주어린이대공원 어린이탑 「희망」,마산종합운동장 상징탑,해남 명량대첩기념탑,서울신문사 내벽부조 「질서」,중앙일보사외부조각 「배달소년상」,동아일보 충정로사옥앞 「기수」,광주비엔날레상징 무지개다리 흉상및 동상등 수점 〈현재〉한국조각공원연구회장·한국미술협회고문·홍익조각회회장·한국성미술연구회 고문 〈수상〉대통령 표창(82년) 서울특별시문화상(88년) 예총 예술문화상(91년) 청곡문화상(93년) 옥관문화훈장(94년) 호암예술상(95년)
  • 옐친 재선/1억 유권자 「개혁·안정」 선택

    ◎개혁 부작용 보완… 수정 노선 채택할듯/옐친 건강·연정·민족주의 강세 변수로 3일의 러시아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의 가장 큰 의미는 러시아 1억8백만 유권자들이 그들의 미래가 공산주의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는 것이다.이번 선거로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개혁과 안정」이라는 옐친의 프로그램이 지속되게 됐으며 공산주의가 부활,냉전체제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국제적인 의혹도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이번 선거가 옐친 개인의 승리는 아니었다.지난 5년간의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는 국민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안겨주었다.수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부패의 고리에 놀아났고 국민들은 범죄와 부패의 소굴속에서 허리띠를 죄어갔다.그런데도 국민들이 옐친을 선택한 것은 그가 러시아의 미래,러시아의 희망에 대한 최선의 선택일 수 밖에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유권자들에게는 억압정치,공포정치로 상징되는 옛 공산주의가 뇌리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며 공산주의에 미래를 맡기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옐친후보는 캠페인 기간중 자신의 개혁추진이 많은 부작용을 낳은 것은 사실이라며 솔직이 시인했다.따라서 집권2기 옐친정부는 개혁프로그램을 지속시켜나가면서도 그 노선은 다소 수정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민족주의 색채가 가미된 정책도 적지않게 나올 것으로 분석된다.보수·민족주의화되고 있는 국민들의 의식은 옐친의 대외정책에도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옐친은 캠페인 내내 「국가안보와 국익의 극대화」를 천명해왔으며 이는 40%에 달하는 공산주의 지지자들의 마음을 달래는데도 유용할 것이다.이같은 변화는 나토확장,독립국가연합(CIS)정책 등을 둘러싸고 서방과의 마찰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더욱이 민족주의자로 대변되는 레베드의 가세로 이같은 물결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레베드의 등장은 사회내부적으로 범죄의 퇴치,부정부패 추방운동을 강화,헌법질서를 잡으며 옐친의 집권초반을 도울 것이다.경제적으로는 기업의 민영화,토지의 사유화,조세체제의 확립등에 박차를 가하면서 동시에 국가관리강화라는 계획경제의 모델들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엿보이고 있다.이같은 정책들은 새로 구성될 내각의 면면에서 드러날 것이다.이와 관련,옐친진영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이해가 같으면 내각에 포용하겠다』면서 공산당 일부 간부의 등용을 시사하고 있다.공산주의자의 입각은 다수지지를 받고 있는 공산당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데다 민족주의화되고 있는 국내분위기를 감안한 전략적 선택으로 파악된다. 가장 염려되는 것은 옐친의 건강상태다.그는 결선투표 직전 다시 한번 건강상의 문제점을 드러냈다.레베드의 부통령직위요구는 이와 관련해 여러가지 시사하는 점이 많다.많은 분석가들은 옐친후보가 직무수행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상의 문제가 다시 드러날 경우 새 권력투쟁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적한다.권력투쟁 가능성은 어렵게 쌓아올린 러시아 민주주의 미래를 위협하는 또 하나의 불안요인이다.〈모스크바=유민 특파원〉 ◎옐친이 걸어온 길/87년 정치국 축출·91년 보수파 쿠데타…/고비마다 투혼·재기 “오뚝이”/음주벽·심장발작·「체첸 희생」 등 흠집도 옐친 대통령의 일생을 관통하는 가장 뚜렷한 족적은 한마디로 불같은 투지이다.조국 러시아와 자신의 정치생명이 위기에 처한 고비마다 그는 초인같은 의지로 이를 돌파해 나갔다. 그의 최초의 정치적 위기는 모스크바당 제1서기로 있던 때.당시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하던 고르바초프 대통령도 그의 눈에는 적당주의자로 밖에 비치지 않았다.사사건건 고르비와 맞서다 마침내 87년 그 자리에서 쫓겨났고 이어서 정치국에서도 축출됐다.그때 그의 정치생명은 끝나는 것 같이 보였다.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일대 도박에 나섰다.소연방이 종말을 향해가던 91년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출마,당당히 당선된 것이다.그해 8월 연방와해에 두려움을 느낀 보수파들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또한번 불같은 투사의 기질을 발휘했다.국방·내무·KGB 등 모든 권력부서들이 쿠데타세력 밑에 모일때 그는 단신으로 탱크위에 올라가 쿠데타 분쇄를 외쳤다.이 감동적인 장면은 민주투사로서의 그의 명성을 확고히 다져주었다.그해말 소연방이 해체되면서 그는 명실상부한 대러시아의 대통령이 됐다. 「권력의 아편」에중독돼가는 징조인가.그후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너무 쉽게 무력에 의존하려하고 음주벽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3만여명의 희생자를 낸 체첸전쟁은 민주지도자로서의 그의 명성에 결정적인 흠집을 냈다.건강이상설이 밑도끝도 없이 나돌기 시작했다.지난해에는 두차례의 심장발작을 겪으며 모두 4개월의 휴가를 가야했다.그의 병세가 정확히 어떤지는 누구도 발설치 않았다.이런 가운데 그는 또다시 초인적인 투혼을 발휘했다.5개월여에 걸친 대통령선거운동 유세를 거뜬히 치러낸 것이다. 나이 65세.선거일을 며칠 앞두고 다시 한번 건강이상설이 흘러나왔다.공개석상에서 사라진 그는 투표도 모스크바 교외 별장지역에서 해야했다.세계는 지금 그가 과연 2000년까지 임기를 제대로 마칠수 있을는 지에 대해 회의하고 있다.인간의 가장 무서운 적,나이와 건강앞에 그가 다시 한번 마지막 투혼을 발휘할수 있을는지 주목되고 있다.〈이기동 기자〉 ◎레베드 역할 “눈길”/킹 메이커 대가 안보·군사 등 장악/독자정책 발표… 「포스트 옐친」 암시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건강이 크게 악화된 것으로 보이는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과연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있는 가에 관한 의구심이 제기되면서 레베드(46) 대통령 안보보좌관 겸 국가안보회의 서기가 주목을 받고있다. 그는 옐친 진영에 합류할 때 옐친으로부터 차기대통령 후보 지명을 약속받은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전직 장성출신인 그는 지난 6월의 대선 1차투표때 15%라는 적지않은 득표로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있는 유리한 위치에서 옐친지지를 전격 선언하면서 그 대가로 안보,군사,치안,정보분야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게 됐다. 레베드는 최근 경제문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증대시키고 방위산업및 농업에서의 개혁정책을 재정립하는 것등을 골자로하는 22페이지짜리 정책프로그램을 발표하기도 했다.그는 또한 그가 필요로 하는 권한을 옐친이 자신에게 주기로 동의했다고 밝히고 있다. 만약 옐친이 재임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오랜 지병인 심장병 등으로 사망할 경우 레베드는 체르노미르딘 총리와 치열한 파워게임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러시아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직이 공석이 될 경우 총리가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되며 3개월 이내에 새로운 선거를 치르도록 되어있다.서방의 분석가들은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할 경우 대통령후보로 주목할 인물이 레베드라고 예측하는 이들도 있지만 러시아의 민주주의 및 개혁지지자들이 레베드를 불신하는 측면이 많아 그의 경쟁상대인 체르노미르딘이 대선후보로 부상하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유상덕 기자〉 ◆미·일 등 해외 반응 ◎역사 전환에 또 하나의 공적­미·일/21세기 「전략적 동반자」 희망­중국 ▷미국◁ 보름전 1차선거 때와 달리 옐친 대통령의 재선 뉴스를 의외일 정도로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모든 방송들이 옐친의 당선이 확정적인 순간에도 일반국내 뉴스에 이어 4∼5번째 순서로 별 논평없이 보도하는데 그쳤다. 앞서 클린턴 대통령은 개표 초기에 이번 러시아 대통령선거가 「민주주의의 승리」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옐친의 초기 승세가 알려지자 보브 돌 공화당 대통령후보가 『옐친 대통령이 또다시 러시아의 민주주의 전환에 역사적 공을 세웠다』고 치켜세웠 듯이 미국내에선 클린턴 대통령이나 야당을 가릴 것 없이 모두 옐친의 재선성공에 안도하는 모습.〈워싱턴=김재영 특파원〉 ▷일본◁ 일본정부는 4일 러시아 대선에서 옐친 대통령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한 것으로 나타나자 『러시아 민주주의의 진전에 분수령을 이룬 기념비적 사건』이라며 환영을 표하면서도 앞으로 러시아 개혁의 성패 여부는 옐친 대통령의 건강에 달려 있다며 그의 건강에 대한 우려를 보였다.〈도쿄=강석진 특파원〉 ▷중국◁ 중국은 러시아 대선과 관련,『러시아 국민들의 선택을 존중할것』이라고 밝혔다. 외교부의 대변인은 4일 정례 기자설명회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21세기의 전략적 동반과 관계의 발전을 바라보고 있다』고 밝히면서 두 나라는 상대방을 존중한다고 덧붙였다. 대변인은 또 러시아는 중국의 최대 인접국이라면서 중국은 러시아 대선결과를 줄곧 관심을 갖고 주시해 왔다고 말했다. ◎러 공산당의 장래/40% 지분… 건실한 견제세력 변신/강경파 입지 약화… 정책대안 찾기 이번 대선에서의 패배로 공산당은 내부 체제정비는 물론 노선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은 4일 성명을 통해 『선거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일 것』이라면서 한편으로 『옐친은 40%라는 공산당 지지유권자들의 여망에 부응하도록 노력하라』고 촉구했다.동시에 선거후 긴장이 야기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당원들에게도 『거리시위에 나서지 말 것』도 당부했다.공산당의 이같은 대응은 변신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분석가들은 이번 패배로 공산당이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며 대신 건실한 견제세력으로의 변신을 시도할 것으로 보고 있다.실제로 러시아의 국회인 두마의 제1당을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 공산당이다.또 선거에는 졌지만 국민가운데 2천8백만명이 공산당에 표를 던졌다.현실정치에서는 앞으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계속 남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그들 내부의 정비는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우선 강경파의 목소리가 다소 강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그렇지만 이들도 「선동과 대중집회」라는 그들 특유의 방식을 벗고 정책적 대안제시 혹은 과학화된 대중에의 접근방식으로의 변신이 예상된다. 일부 분석가들은 이번 대선으로 공산당이 현대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모스크바=유민 특파원〉
  • 부도뒤 재기땀방울 「오뚝이 중기」 화제

    ◎유니온 전지 노사 “구사합심”… 파산위기 막아내/1년만에 경영 호전… 올들어 월100만달러 수출 회사 한번 살려보자­.지난해 부도를 내고 쓰러졌던 산업용 축전지 전문업체 「유니온전지」가 요즘 재기의 땀방울을 흘리고 있다. 회사측은 사무소 축소와 생산직 보강을 통해 비용지출을 줄이고 중소기업진흥공단과 전문 컨설팅회사에 경영진단을 의뢰,부도의 원인을 분석하는 등 회생의 몸부림을 치고 있다. 노상국 전 사장(현 경영고문·56)은 『유니온전지는 비록 쓰러졌지만 노사가 단결,채권단과 협력업체를 설득시키고 있고 채권단과 협의를 거쳐 전문경영인을 영입한 상태여서 꼭 되살아 날 것으로 믿는다』며 재활의지를 다졌다. 유니온전지는 지난 해 6월 부도 나기전까지만해도 산업용 축전지 전문업체로 부동의 위치에 있었다.전원이 끊어졌을때 전력을 공급하는 산업용 축전지를 수출해 일본,독일기업과 어깨를 겨뤘고 비록 국내에선 인지도와 시장점유율에서 세방전지나 경원산업,델코전지 등 타기업에 뒤졌지만 품질만은 결코 못하지 않다는 평을받았다는게 회사측 설명이다.특히 84년 국내최초로 생산,85년부터 수출한 밀폐형 축전지는 회사의 간판상품으로 생산품의 90%를 차지했을 정도다. 80여종의 제품을 생산할 만큼 기술력을 축적해 10년만인 94년 수출 5백만달러,매출액 1백20만달러를 기록하는 성장가도를 달려왔다.그 사이 의정부 가내공장을 자동화 설비가 갖춰진 원주 1·2공장으로 옮겼다.10명 내외였던 종업원도 1백60여명으로 늘었다. 부도의 된서리는 2공장에서 왔다.은행 융자 1백억원을 투자,1만여평의 부지에 증설한 2공장이 애물단지가 됐다.자동화설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은데다 수요가 생산량을 따르지 못하고 운전자금마저 달려 「삼각파도」에 휘말리게 됐다.15년간 가꿔온 회사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좌절할 수만은 없었다.노 전 사장은 법원에 법정관리 신청을 내 회사의 공중분해를 막았다.직원들도 몇개월치 월급을 못받으면서도 회사를 지켰다.다행히 지난 연말부터 수출이 살아나기 시작했다.12월 한달간 1백20만달러어치가 수출된 데 이어 올들어 월 80만∼1백만달러의 수출이 이뤄지고 있다.이 추세라면 올해 1백20억원의 매출이 가능하다고 회사측은 보고 있다. 직원들은 하루빨리 법원의 재산보전관리결정이 나오길 고대하고 있다.노 전 사장은 『회사가 살아날수만 있다만 뭐든 하겠다』며 『앞으로 부도의 시련을 겪는 중소기업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박희준 기자〉
  • LA폭동 그후 4년/임춘웅 논설위원(서울칼럼)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로스앤젤레스시가는 마치 화덕을 엎어놓은 것 같았다.실제로는 불타지 않은 건물이 훨씬 더 많을 터지만 치솟는 불길의 위세와 검은 연기의 위장성으로 해서 그 광활한 도시가 마치 모두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LA 인종폭동이후 1년동안 LA 사람들,특히 이곳에 사는 우리교포들이 얼마나 큰 고통속에 살아왔는가를 외부사람들이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점점 나빠지는 경제,치유되기 보다는 깊어만가는 인종간의 갈등,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것들이 빚어놓은 좌절의 골이 의외로 깊다』 기자는 LA폭동이 터졌을때도,「LA 폭동1년」을 취재를 했었다.폭동으로 불타고 빼앗긴 폭동의 현장보다 폭동1년의 LA를 취재했을 때의 아픔이 더했던 기억이 생생하다.폭동의 현장에는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어도 그날 이후의 비극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그후 1년이 지난 LA에는 비록 살기는 없었어도 꿈을 잃은 좌절감으로 해서 모두가 주저앉아 있었다. 폭동의 여파가 1∼2년내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뼈아픈 인식이 교포들을 극도의 허탈감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당시 남가주대학이 실시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조사에 응한 한국교민 폭동피해자 1천5백39명중 29%만이 재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을뿐 무려 49%가 더이상 장래가 없다고 믿고 있었다. 지난해말 LA에 사는 교포부부가 서울에 왔다.세탁업을 하는 이들부부는 지금 그곳에 사는 교포들이 얼마나 어렵게 사는가 하는 얘기들을 들려주고 나서,답답하기도해서 모처럼 서울에 왔더니 안오느니만 못하게 됐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왜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옛날에 함께살던 또래들의 성장한 모습과 흥청대는 서울생활이 자기들의 세계와 대조돼 박탈감만 더하게 됐다는 것이었다.부인은 이어 『서울은 돈과 시간이 넘치는 도시같다』는 촌평을 덧붙였다.LA에서의 어려움이 서울에와서 오히려 덧나는 아픔을 안고 그들은 떠나갔다. 지난 4월29일은 LA폭동 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때맞춰 신문들은 LA 교포상가들이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는 뉴스를 전하고 있다.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코리아 타운이 서서히기지개를 펴고있다는 뉴스를 자세히 살펴보면 오뚝이처럼 일어선 사람의 이야기,각고의 노력끝에 재기에 성공한 예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봐서 교포경기의 전반적인 회복이라기 보다는 열심히 일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의 부분적인 성공사례일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미국경제가 전반적으로 성장세로 돌아섰고 교포들의 입지전적 성공사례들이 교포경기를 이끌어 갈 수도 있어서 다시 희망을 가질 여건은 조성돼가고 있는 것 같다.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특히 폭동의 진원지로 우리 한인들이 집중적인 피해를 입었던 사우스센트럴 지역의 한인들이 폭동후 그곳을 떠나지않고 흑인들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 가며 재기에 성공해가고 있다는 얘기는 자못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지난 65년 이 지역에서 거의 비슷한 흑인폭동이 일어났을때 당시 장사를 하던 유태인들은 모두 이곳을 버리고 떠나고 말았었다.유태인들이 버리고간 자리를 우리 교포들이 차고들어가 장사를 하다 92년 그런 재난을 당했던 것이다.떠날만큼 재산형성이 안돼있었던 측면도 있고 떠날곳이 없어 가지 못했던 일면도 없지않으나,그 처절한 폭동의 현장에 다시 동아리를 트는 한국인의 집념도 적지아니 힘이 됐을 것이다. 해외에 나가 사는 교포들도 여전히 한국인이다.우리가 그들의 희소식에 웃고 그들의 슬픈소식에 가슴을 저미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폭동 4년후의 LA소식은 참으로 우리를 기쁘게한다.
  • 군출신 16명… 재야 6명…/당선자 출신별 분류

    ◎군출신­45명 출전해 35%가 “금배지”/자민련 6·신한국 5·무소속 3명 제15대 총선에는 45명의 영관장교 이상 군 출신 인사가 후보로 나서 35%인 16명이 지역구와 전국구를 통해 금배지를 달게 됐다.36명이었던 지난 14대때보다 군 출신 국회의원이 20명이나 줄었다. 정당별 군출신 당선자는 자민련이 6명으로 가장 많고 신한국당 5명,국민회의 2명,무소속 3명의 순이다. 신한국당에서는 4선을 기록한 경남 산청·함양의 권익현(육사11기·예비역육군대령),인천 중동·옹진의 서정화(육사 19기·예비역 육군중령)씨 등 4명이 지역국에서,박세환 예비역 육군대장(ROTC 1기)이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했다. 자민련에서는 충남 부여 김종필 총재(육사 8기·예비역 육군준장)가 7기 후배로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이진삼씨(육사15기)의 도전을 가볍게 물리쳐 8선을 기록했다.대국 동구갑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의 처남인 김부동씨(육사 11기·예비역 육군중장) 등 군출신 12명이 출전,절반이 넘게 당선됐다. 국민회의는 광주 남구 림복진씨(육사 7기·예비역 육군소장)는지역구로,천용댁씨(육사16기·예비역 육군중장)는 전국구로 국회에 진출했다. 무소속으로는 신한국당에서 탈당한 허화평 의원(육사17기·예비역 육군준장·구속중)이 경북 포항갑에서,권정달씨(육사15기·예비역 육군준장)는 경북 안동을에서 당선됐다.그러나 12·12와 5·18의 주역으로 옥중출마한 정호용(육사 11기·예비역 육군대장),허삼수(육사17기·예비역 육군준장)씨는 낙선하는 등 신한국당과 등을 진 인사들도 희비가 엇갈렸다.〈황성기 기자〉 ◎가신­부산·호남출마자 전원 당선/서초을 김덕용 의원 3선 기록/한화갑씨 압승… 박지원씨 고배 이번 총선에서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국민회의총재,김종필 자민련총재를 측근에서 보좌해 왔던 이른바 「가신」들의 희비도 엇갈렸다. ▷신한국당◁ 김영삼 대통령의 비서출신들 가운데 부산지역에 출마한 후보들은 전원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서석재 전 총무처장관(사하갑)과 박관용전청와대비서실장은 각각 5선의 고지를 점령했다.박종웅 의원(사하을)은 재선에 성공했고 홍인길 전 총무수석(서구),김무성 전 내무차관도 첫배지를 달았다. 서울에서는 김덕용 의원(서초을)이 3선을 기록했다 경기 가평·양평의 김길환 전 청와대비서관은 치열한 접전끝에 여의도 입성에 성공했다. 상도동 출신은 아니지만 한승수 전 청와대비서실장(춘천갑)이 재선에,윤원중 전 청와대비서관이 전국구로 배지를 달았다.〈김경홍 기자〉 ▷국민회의◁ 동교동캠프 역시 텃밭격인 호남에 출마한 가신들은 전원 당선됐다.정동채 총재비서실장이 광주서구에서 승전보를 올렸으며 공천과정에서 이영권·유인학 의원 등 현역의원을 따돌린 김옥두 의원은 영암 장흥에서,한화갑후보도 김대중 총재의 출신지인 신안에서 압승했다.전북에서 김총재 비서출신인 최재승 의원이 익산갑에서 재선고지에 올랐고,민주당 김원기 공동대표에 맞서 정읍에 표적공천했던 윤철상 사무부총장도 금배지를 달았다. 반면 수도권 동교동 가신들의 성적표는 반타작 수준이었다.서울의 도봉을의 설훈후보와 광명갑의 남궁진 의원이 어렵게 당선됐다.하지만 부천 원미을의 배기선후보와 부천 소사의 박지원 대변인은 분루를 삼켰다. ▷자민련◁ 광의의 가신그룹인 이긍규 총재비서실장이 충남서천에서 당선됐으나 광운대 학생회장 출신으로 JP비서였던 장일후보는 도봉을에서 낙선했다.〈오일만 기자〉 ◎여성계­추미애·임진출씨 지역구 점령/추씨­남성후보 5명 따돌리고 “승전”/임씨­보수성 강한 고부서 “4전5기” 맹렬여성 2명이 지역구에서 금배지를 획득했다. 현직 판사로 정치에 입문,화제를 모았던 서울 광진을의 추미애 당선자(37·국민회의)와 경주을의 임진출 당선자(54·무소속). 85년 12대 총선때 서울 성북갑에 출마했던 김정례전의원이후 11년만에 여성지역구의 맥을 잇는 주인공들이다. 추씨는 경북출신으로 국민회의에 입당,지역성 타파의 계기를 제공했고 림씨는 보수성이 강한 고도에서 4전5기의 신화를 창조하는 우먼파워를 과시했다. 정치초년생인 추당선자는 중견 언론인출신,재선 현역의원등 5명의 남성후보을 여유있게 따돌렸다.전통적으로 야세인 지역특성과 당지도부의 각별한 배려등도 승리의 요인이 됐다.세탁소집 딸이라는 서민출신의배경을 대처전 영국수상과 같은 이미지로 연결시킨 홍보전략도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막판까지 신한국당의 백상승후보와 접전을 벌였던 림당선자는 12대때부터 「한우물」을 팠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94년 민자당 서수종의원의 갑작스런 사망에 따른 보궐선거때는 여당 간판으로 출진했으나 민주당바람에 휩쓸려 또다시 좌절을 겪었다. 신한국당 공천탈락에도 굴하지 않고 무소속으로 또다시 도전,마침내 「오뚝이」신화를 일궈냈다. 림씨는 『이번 승리는 모든 여성과 딸을 둔 부모의 승리』라며 소감을 밝혔다. 한편 이번에 전국구로 원내에 진출하는 여성은 신한국당의 권영자·오양순·김영선씨와 국민회의 정희경·신낙균·한영애씨,민주당 이미경씨등 7명이다.〈전경하 기자〉 ◎언론·방송인­맹형규씨 등 앵커출신 돌풍/박성범·이윤성·정동영씨 등 승리/심재철씨등 기자출신들은 고배 「앵커 출신 돌풍,기자출신 참패」 이번 총선의 결과다. KBS 9시뉴스 앵커였던 박성범씨(서울 중구·신한국당),역시 KBS 9시뉴스 앵커 출신 이윤성씨(인천 남동갑·신한국당),SBS 8시 뉴스 메인 앵커 맹형규씨(서울 송파 을·신한국당),MBC 뉴스 앵커 정동영씨(전주 덕진·국민회의) 등 TV 3사 「4인방」이 모두 여의도 입성에 성공했다. 정씨는 9만7천8백58표를 얻으며 전국 최다득표의 영광도 안았다.박씨는 4선 관록의 국민회의 정대철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MBC 아나운서를 지낸 변웅전씨도 충남 서산·태안에서 자민련 후보로 출마,「금배지」를 달게 됐다. 반면 기자출신 「정치 초년생」들은 고배를 들었다.극명한 대조였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경기 군포에서 출마한 심량섭씨(자민련)는 3등으로 낙선했고 경기 하남·광주에서 나온 전 한겨레신문 기자 문학진씨(국민회의)는 신한국당의 정영훈후보에게 밀려 분루를 삼켰다. 전 동아일보 북경특파원으로 서울 광진 을에 출마한 신한국당의 김충근씨도 국민회의 「추미애 돌풍」에 휘말려 좌초했고 경북 고령·성주의 송인식 전 세계일보 편집부국장(자민련)도 낙선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전 MBC기자 심재철씨(신한국당·경기 안양동안 갑)는 가수 최희준씨(59·국민회의)에게 밀렸고 인천 연수에 출마한 정구운 전 국민일보 편집국장(51·국민회의)도 고교동창인 서한샘 후보(52·신한국당)에게 6천여표차로 쓴맛을 봤다. 이밖에 국민회의가 영입한 송파 갑 김희완 후보(40·전 중앙일보기자),인천 부평 을 신용석 후보(55·전 조선일보 논설위원),마포 갑 김용술후보(56·전 경향신문 편집국장)도 모두 낙선했다. 대구 달성의 전 연합통신 부국장 김정훈씨(자민련)와 강원 홍천·횡성의 전 동아일보 기자 원용강씨(무소속)도 고배를 마셨다.〈김성수 기자〉 ◎재야­이우재씨 등 대거 여의도 입성/「색깔론」 주장 유권자들에 안먹혀 이번 총선에서는 무엇보다 재야출신 인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특히 문민정부 출범 이후 여당에 영입된 민중·노동운동가 출신 인사 가운데 상당수가 기성 정치인의 높은 벽을 허물어 주목됐다. 70년대 학생운동의 상징격인 국민회의 김근태씨는 서울 도봉갑에서 재선 경력의 신한국당 양경자후보를 물리쳤다.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중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된 이래 20여년 동안 수배·투옥을 겪었던 학생운동 수난사의 주인공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전국학생연합」(전학련)의장 등을 맡아 학생운동을 주도하다 2년8개월의 옥고를 치렀던 서울 영등포 을의 국민회의 김민석씨는 최연소 당선의 영예도 거머쥐었다. 경기 부천 소사에서 전 국민회의 대변인 박지원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김문수씨도 5공 때 인천 5·3사태를 주도하는 등 20여년을 노동투쟁에 몸바쳐왔다.94년 신한국당에 입당했을 때 「색깔논쟁」이 일기도 했지만 이번 당선으로 잡음을 완전히 잠재웠다.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 금천과 서울 은평을 야당 중진의원을 물리치고 당선된 이우재씨와 이재오씨는 옛 민중당의 대표와 사무총장을 지낸 민중운동가 출신. 지난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던 학생운동권 출신 설훈씨(서울 도봉을)도 운동권 선배인 민주당 유인태후보를 물리쳤다. 김근태씨와 함께 재야운동의 양축을 이뤘던 서울 동작갑의 장기표씨(민주당)도 14대에 이어 낙선했다.〈김태균 기자〉
  • 어떻게 살것인가/김동익새문안교회목사(일요일 아침에)

    「첫단추를 잘못 끼우면 마지막 단추를 끼울 구멍이 없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격언이 있다.그만큼 첫시작이 중요하다.우리는 지금 1996년이라는 새로운 한해의 첫발을 내디디고 있다.누구나 새해를 맞이하면 마음을 새롭게 하면서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새해를 어떻게 살 것인가,새해 첫순간부터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시작해야 하겠다. 첫째,목표가 분명해야 한다.인생살이에 목표가 없다면 망망대해를 나침판 없이 항해하는 배와 같다.목표 없는 사람은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죽은 고기와 다를 바 없다.목표가 있어야 삶에 의욕도,열심도 있다. 지금부터 14년전,1982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석유재벌 훼릭스 채패렛부부가 권총자살을 해서 미국사회에 충격을 준 적이 있었다.그들이 남긴 유서의 끝부분에 「따라갈 것이 없다.더 이상 꿈이 없다」고 적고 있었다.그들은 돈을 버는 것이 꿈이었는데 막상 돈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벌고 보니 인생살이에 싫증나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자살했다고 하는 것이다.사람이 추구할 목표가 없으면 그만큼 허무해지게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회고해볼 때 뚜렷이 기억에 남는 해가 있는 반면 그해 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해도 있다.1996년이 후세에 뚜렷이 기억에 남고 보람을 느끼게 하는 한해가 되기 위해서는 한해의 목표를 두고,그 목표를 향해 사는 해가 되어야 한다. 둘째,성공에 대한 가치관이 분명해야 한다.무엇이 성공이냐고 물으면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대답을 하게 될 것이다.미국의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그의 「소유냐 삶이냐」라는 책에서 성공의식을 두가지 측면에서 설명했다.하나는 소유의 욕구가 충족될 때,즉 재산이나 높은 직위나 명예등 좋은 것을 많이 소유할 때다.다른 하나는 소유는 못해도 기여나 창조의 욕구가 충족될 때 성공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지금부터 5백년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어도 땅 한평 차지하지 못했다.오늘날 아메리카에 세계최대의 나라가 세워졌다.또한 세계적인 재벌이 있는 부자땅이 되어 있다.그러나 콜럼버스는 말년에 빈털터리가 되어 수도원에 들어가 걸식하면서 10년을 보내다 세상을 떠났다.그렇다고 해서 콜럼버스를 실패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그는 새 역사의 장을 펼친 자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고 역사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그렇지만 구속된 우리의 전직 두 대통령은 나라의 최고권력자로 성공했고,수천억원씩 모은 재력가로서 성공했다.그들을 평가하는 오늘의 시각은 냉정하다.한때의 성공이 결코 인생승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독일의 시사잡지 슈테른은 올해의 대사기꾼 10명을 선정,보도했는데 1위가 나이제리아대통령 아바차이고,2∼3위가 불행하게도 우리의 전직 두 대통령이었다.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처럼 인생의 참성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기여에 있다.올 한햇동안 얼마나 돈을 많이 버느냐 또는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 보다는 얼마나 기여하고 사느냐에 가치와 보람을 두고 살아야 하겠다.그러할 때 역사에 남는 성공자가 될 수 있다. 셋째,실패를 두렵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역사에 기여한 사람을 보면 실패를 두렵게 여기거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난 사람이었다.실패했을 때 남을 원망하거나 분노를 품지 말아야 한다.그렇다고 낙심하거나 체념하지 말아야 한다.한때의 실패가 인생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한때 실패했다고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다만 무엇인가 새로 배웠다고 생각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져야 한다.한때 실패했다고 경쟁에서 뒤떨어졌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인생은 중간결산보다 마지막 결산이 중요하다.누구든지 목표를 분명히 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실패를 두렵게 여기지 말고 열심을 품고 살면 인생승리자가 될 수 있다. 1996년이 우리 모두에게 가치있는 한해가 되어야 하겠다.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잘 사느냐」보다는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를 생각하면서 사는 용기를 가져야 하겠고 이런 용기가 변치 않을 때 올 한해가 매우 흐믓해지리라 본다.
  • 성악가 김자경(인물탐구:86)

    ◎오페라와 결혼한 “영원한 프리마 돈나”/“독특한 릴릭 소프라노” 50년 미 카네기홀 진출/68년 자비로 「오페라단」 창단… 정기공연 49차례/지난 10월 국내 첫 야외오페라 무대… 최근 국악에 입문 「앵두나무 가지에 앉아 재잘거리던 파랑새가 방안으로 날아드는 꿈을 꾸고 김자경을 낳았다」는 그 어머니는 「새소리가 어찌나 맑고 투명하던지 나의 딸 자경은 노래하는 사람이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딸은 지금도 독창회 무대에 서서 「불굴의 오뚝이」「작은 거인」 「분투의 또순」을 과시하면서 자신의 할바와 의무에 최선을 다하는 의지의 원로다.얼핏듣기엔 드세고 거센 여장부의 이미지지만 실제로 그를 만나본 사람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해맑은 미소와 화사한 「이팔청춘」의 마음씨에서 우리의 「영원한 프리마 돈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지난해만해도 희수기념 독창회를 비롯,올해도 불우이웃들을 돕는 호스피스 건립기금을 위한 독창회를 열었고 연말에도 자선음악회 스케줄이 잡혀있다.벌써 19번째다.지난 75년당시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손수운전을 하고 돋보기 없이 글씨를 읽고 쓸수 있는 눈과 귀를 주신 신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그는 맹인들의 개안수술을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개안수술 사람은 50여명이 넘는다.「두손을 모으고 마치 기도하듯,신을 찬미하듯 혼신을 다하는 그의 노래는 진심으로 그들이 눈뜨게 되기를 비는 순수함과 열정이 담겨있다」는 게 작곡가 김동진씨의 말이다. ○맹인 50명에 개안수술 만년의 그의 독창회중 가장 감명깊은 것은 4년전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결혼 50주년 기념」독창회라고 할 수 있다.수많은 자선음악회중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위해 노래한 이 무대는 그의 부군이자 서양화 일세대였던 심형구화백을 추모하는 자리로 「그리움」「못잊어」「그대있음에」「청산에 살리라」등 「부군에 대한 사모」의 정이 절절히 넘쳐 청중에게 찡한 감동을 안겨주었다.「나의 일생을 맡긴지 21년,2남1녀와 함께 나의 수많은 연주를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더니 청천벽력과도 같이 그는 예고도 없이 떠나가버렸고 29년이란세월을 혼자서 살면서 그 파란만장한 사연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그날 음악회 팸플릿에 쓴 글이다.그러나 『68년 성은 「오」씨이고 이름은 「페라」인 오페라와 결혼했고 이제는 김자경이가 오페라인지 오페라가 김자경인지 분별할 수 없이 일체가 되었다』고 일가를 이룬 예술가다운 의연함을 보이기도 했다. 김자경은 경기도 개성에서 약방을 경영하던 김영환씨와 백열소여사의 외동딸로 태어났다.3살되던해 서울에서 감리교 신학교에 다니게 된 부친을 따라 이사,이화유치원과 이화보통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원산에서 루씨여학교를 나왔다.그는 노래 뿐만 아니라 운동에서 미술 수학 물리 화학등 못하는게 없었고 언제나 전교수석,어릴 때부터 오페라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아들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도쿄여의전 진학을 결심하게 된다.그러나 도쿄로 떠나기 전날밤 그는 어머니를 붙들고 「어머니가 동생하나만 더 낳았어도 나는 성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한탄한 것이 부모의 마음을 움직여 부친은 당장 「성악을할것」을 권해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성악공부는 이화여전을 졸업하던해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신인음악회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했고 도미유학길에 오르기전까지 이화여고에 임시음악교사로 취직한 것이 심형구씨를 만난 계기가 된다.도쿄미술학교출신의 「멋쟁이화가」 심형구와 「만인의 애인」이자 「한국 최고의 소프라노」 김자경의 러브로맨스는 숱한 화제를 장안에 뿌리면서 41년 12월 드디어 결혼,「가정과 예술을 병행시키는 멋진 가정을 이루자」는 다짐과 함께 부군의 주선으로 김자경은 31세 되던해 오랜 숙원이던 줄리어드음악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그러나 의욕적인 출발과는 달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무대에서 세기적인 소프라노 릴리폰즈의 노래를 듣고는 자신의 음악적 자질과 소양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그는 한동안 심한 좌절감에 빠지고 말았다.단한번도 의심해 본적 없던 자신의 기량이 거대한 오페라가수 앞에서 무색해진 순간이었다.「메트로폴리탄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를 자책하며 밤새도록 흐느끼고 있을 때 어디선가 비몽사몽간에 「너는 왜 세계적인 성악가만을 고집하는가.열심히 노력하여 많은 사람을 가르치고 그들을 세계무대에 세우라」라는 신의 계시가 있었다.때마침 미국에 다니러 왔던 김활란박사도 「나는 릴리폰즈보다 네 목소리가 백배 더좋다」고 격려해주었다. ○31세때 줄리어드 입학 『그래,나두 해내고야 말겠다』 그는 굳게 결심하고 그 길로 지도교수를 찾아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무대에 서겠으며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교수는 놀라서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하려면 먼저 학교측이 주최하는 오디션에서 통과해야 한다고 상기시켰다.그는 7명의 심사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벨리니의 「노르마」중 「카스타티바」를 열정적으로 불렀고 「독특한 음질의 아름다운 릴릭 소프라노」로 인정되어 1950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카네기홀 무대에 서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메트로폴리탄 가수들과 오페라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체」「카르멘」에 출연,남부 60개 도시에서 80회연주를 비롯,한번 투어에 나서면 3개월이상 걸리는 전미순회공연에도 빠지지 않게되었다.그러나 좋은 일에는 흔히 마장이 생긴다고 한 것처럼 그가 「종달새처럼 푸른 창공을 마음껏 비상하며 노래부르고 있을 때」 그해 62년 여름,방학을 맞아 속초로 스케치여행을 떠났던 부군의 익사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때의 충격으로 전신마비 증세를 일으키는 등 긴 슬픔에서 헤어나기까지 실로 오랜시간이 걸렸다.그러다가 65년 봄,호화여객선 빅토리아호를 타고 세계일주 여행길에 오르면서 48세의 나이로 「퀸 오브 빅토리아」에 선발되자 당선 사례로 아르디티의 「일바치오」와 「오솔레미오」를 부르는 동안 그의 내부 깊숙이 움츠려있던 프리마 돈나의 기백과 보석 같은 기량이 서서히 되살아났다. ○“불굴의 투지” 여장부 유럽여행에서 돌아오자 그는 계획했던 대로 김자경 오페라단을 창단했다.그리고 그해 5월 창단기념공연으로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를 준비하면서 티켓을 들고 각기업체와 동창 후배들을 찾아다녔다.그러나 그들의 호의와 적극적인 협조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더이상 버틸 수 없이 창단 3년만에 문을 닫는 위기를 맞는다. 그는 자살을 생각했으나 「죽을 결심으로 뛰어들면 안될 일이없다」고 다시한번 자신을 일깨웠다.그때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진 고초와 수난과 시련」을 거치면서 후원회와 고정관객 확보로 그의 오페단은 서서히 기반을 잡아나갔다.오페라단창단 만27년에 정기공연 49회,4년전부터 이사장직에 머물면서 지난 10월에는 1만2천명을 수용하는 잠실올림픽공원 잔디마당에서 레하르의 3막 오페라 「메리 위도우(즐거운 과부)」로 국내 처음 야외오페라를 해냈고 내년도 제50회 「카르멘」 캐스팅을 위해 최근에는 뉴욕에 다녀왔다. 호는 심설,「정신을 집중하여 노력하면 어떤 어려운 일도 이루어진다(정신일도 김석가투)」는 그의 신조는 여전히 손수 차를 몰고 지난봄에는 한양대대학원 국악과에 입학,새로 우리「민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줄기찬 한 흐름속에서 그는 불굴의 의지로 우뚝선채 음악성취 뿐 아니라 그늘지고 병든 이들에게 「이세상의 빛」을 실천하는 「천사」이며 그들을 위한 그의 목소리는 시들줄 모르는 「영원한프리마 돈나」로서 우리시대에 찬연한 빛을 발한다. ◇연보 ▲1917년 경기도 개성 출생 ▲40년 이화여전 졸업 ▲41년 제1회 독창회 ▲48∼50년 미 줄리어드음악학교 성악전공,「라 트라비아타」주역,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51∼58년 미남부 60개 도시순회공연,귀국독창회 ▲58∼83년 이대성악과 교수 ▲60년 오페라 「오델로」주역 ▲62년 국립오페라단 부단장 ▲65년 유럽지역 성악교육시찰 ▲68년 김자경오페라단창단,단장.베르디 「춘희」이후 49회 공연 ▲75년 제1회 「김자경 가곡의 밤」,국제음악인대회(IMC) 참가 ▲79년 김자경 오페라 관현악단창단 ▲81년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 ▲82년 한·미수교1백주년 기념독창회(워싱턴 케네디센터) ▲86년 김자경 오페라단 소극장 청소년부 창설기념 「노처녀와 도둑」 공연 ▲87년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88년 뉴욕 카네기홀 독창회 ▲91년 결혼 50주년기념 독창회 ▲93년 홍난파선생 추모독창회 ▲94년 희수 독창회 ▲95년 호스피스 건립기금마련 독창회(19회),한양대대학원 재학중,김자경 오페라단 이사장 대한민국 예술원상·대한민국 문화훈장은관(74년)·중앙일보문화대상(76년)·국민훈장 석류장(83년)·세종문상(87년)·프랑스 문화예술훈장(92년)·문화공로패(93년)
  • 중상위권 감소… 「오뚝이형」 분포/수능성적 표본조사와 지원전망

    ◎1백35∼1백38점대에 23% 집중/서울대 상위과 경쟁률 크게 오를듯 올 대학입시는 수험생들의 성적이 중하위권에 많이 몰림에 따라 중하위권 대학을 대상으로 한 입시눈치작전이 어느 해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능시험 이튿날인 23일 서울신문이 서울시내 5개 고교의 수험생 1백80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한 결과 성적분포는 상위권은 지난해와 별 차이가 없지만 중상위권이 대폭 줄어들고 중하위권은 크게 증가한 「오뚝이」모양을 나타냈다. 표본조사에 따르면 올해에는 지난해보다 총점이 작게는 8∼10점,크게는 11∼12점까지 낮아질 것으로 예상됐다. 수능이 끝난 직후 입시전문기관들이 분석한 「평균 7∼8점 하락」보다 2∼3점 더 떨어진 수치다. 특히 학생들의 성적은 상위권 1백67∼1백68점,중상위권 1백51∼1백55점,중위권 1백43∼1백48점,중하위권 1백35∼1백38점 등으로 분석됐다. 5개교중 특수교를 제외한 4개교 표본학생들의 성적대별 분포를 보면 상위권의 경우 지난해보다 약간 줄어들면서 전체수험생을 1백%으로 보았을때 4%,중상위권은 6%를 각각 차지했다. 또 중위권은 12%였으며 중하위권은 23%로 나타나 이들을 합했을때 35%나 된다. 나머지 57%의 학생은 1백20점미만의 점수였다. 따라서 표본분석과 복수지원 등을 감안할때 서울대 인문계의 법학,정치,외교,영어영문,신문,경제학부와 자연계의 의예,컴퓨터공학,전기공학부 등 상위권학과의 경쟁률은 지난해보다 크게 높아질 전망이다. 연세대·고려대의 표면적인 경쟁률도 상대적으로 지난해보다 크게 높아지지만 실제경쟁률은 복수지원 기회확대와 안정지향 심리등을 감안할때 낮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중하위권 학생들은 「도토리 키재기」형식의 치열한 경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내신등급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한편 지난해보다 대폭 늘어난 특차모집의 경우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다는게 입시전문기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상위권 인기학과에 많은 학생들이 몰리는 반면 일부 대학의 기초과목 등 비인기학과는 미달사태도 예상된다. ◎막바지 대입 전략/“내신등급 올리기…” 기말고사에 최선을/본고사 대비 독서·글쓰기 연습 꾸준히/학교별 모집요강 세심히 살핀뒤 선택 평균점수의 큰 폭 하락이 점쳐지는 가운데 수능시험이 막을 내리고 이제부터는 내신등급 올리기등 막바지 입시작전을 펼쳐야 한다. 일선 지도교사들은 대다수 수험생들의 수능성적이 기대에 못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수험생들은 수능시험의 미련을 떨쳐버리고 마지막 기말고사에 최선을 다할 것을 충고한다.모든 대학이 내신성적을 40%이상 반영하므로 내신등급을 조금이라도 올리는게 절대 유리하다. 특히 본고사를 치르는 대학을 지망하는 학생들은 대학과 학과를 빨리 정하고 비중이 커진 논술고사에 대비,독서및 글쓰기에 심혈을 기울이라고 조언한다. 우선 본고사를 보는 대학은 서울대·연세대·고려대·포항공대등 27개대다. 이중에서 논술고사를 실시하는 대학은 18개대이고 서울대는 논술Ⅰ(문학작품의 이해와 감상)과 논술Ⅱ(논리적인 글의 이해와 서술)로 구분,가장 까다롭다.따라서 본고사 준비생들은 지망대학의 논술과목 출제경향에 맞춰 독서와 글쓰기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지망대학의 국어·교양과목 교과서를 구입해 공부하는 것이나 신문이나 잡지등의 사설및 해설기사를 정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 본고사 성적반영비율은 포항공대가 50%로 가장 높고 서울대와 고려대등 4개대가 30%,연세대·서강대등 13개대가 20%,중앙대등 9개대가 15%이하이나 전반적으로 지난해보다 대체로 낮다. 특히 올 입시에서는 서울대와 고려대가 수능시험의 수리탐구◎영역(사회·과학)에 가중치를 둬 수능의 2백점 만점중 60점인 이 과목의 점수를 각각 1백60점과 1백40점으로 환산하는 만큼 가중치를 두는 대학의 모집전형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반면 본고사를 보지 않는 대학(전기대중 1백13개)을 지망하는 학생들은 수능성적과 내신이 결정적 변수이므로 일단 내신등급을 높이는데 주력해야 한다.본고사 준비생들에 비해 여유가 있으므로 진학지도교사와 상의,지망대학과 학과의 전형요강및 내신반영비율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각 대학들이 우수학생유치를 위한 특차모집을 선호하면서 올해는 69개대가 정원의 40% 범위안에서 모두 3만6천8백24명을 뽑는데 강원대등 55개대가 내신 40·수능 60의 비율로,포항공대등 4개대가 내신 50·수능 50의 비율로 선발한다.이는 상위권 수험생들의 대학및 학과 선택폭이 넓어졌음을 뜻한다.그러나 지난해 특차모집 합격선이 일반전형보다 평균 10점이상 높았다는 점은 주목할 대목이다.일부에서는 복수지원기회 확대로 특차경쟁률이 낮아질 것으로 보지만 전반적으로는 97년학도 대입제도가 바뀌고 안정합격 심리등으로 지난해와 비슷할 것이라는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 성 불구 남성의 꿈·스트레스…/장준씨 10년공백 깨고 무대복귀

    ◎70년대 화제의 모노극 「롤러스케이트…」 재공연 70년대 화제작의 하나였던 모노드라마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뚝이」가 3일부터 12월3일까지 북촌창우극장에서 재공연된다. 지난70년대 김동훈씨 출연으로 명동 카페 테아트르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그후 장준씨에 의해 무려 10여년간 공연되었으며 93년 송영창씨에 의해 다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특히 이번 공연은 초연때 연출을 맡았던 허규씨와 10년 넘게 장기공연했던 배우 장준씨가 오랜공백을 깨고 연출자와 배우로 다시 만났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은다. 중견극작가 오태석씨가 쓴 「롤러스케이트…」는 세상에 주눅들고 아내에게 구박받다 끝내는 성적 불구에 빠진 한 남성의 스트레스와 꿈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스스로 성적 콤플렉스를 느끼며 살아가는 현대 남성들의 모습을 마임과 표정,그리고 재치있는 대사를 통해 그려 나간다. 74년 「태」(오태석 작,안민수 연출)로 연극무대에 데뷔한 장준씨(43)는 당시 장희용이라는 이름으로 70∼80년대 「초분」「한 여름밤의 꿈」「내 이름은 하비」등 90여편의 작품에 출연했던 베테랑 배우.그가 구현해낼 인물은 하반신 불수의 아내를 가진 퇴역배우.아내가 목욕하러 들어간 사이 아내의 휠체어를 타고 자신이 하반신 불수라고 가정하는 데서 시작,50분을 혼자 끌고가는 고난도역이다. 『이 극은 현대남성의 불구적 의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일종의 「해체드라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현대인의 고뇌를 상징하는 17명에 이르는 등장인물의 역할을 혼자 해내야합니다』 이윤택씨(우리극연구소 소장)의 권유로 다시 무대에 서는 장씨는 이름까지 바꾸면서 연극배우로서의 재기를 노리고 있다. 또 허규씨(61)는 60년대 실험극장 창단멤버로 출발해 70년대 극단 민예극장을 창단,민족극의 정립작업을 펼쳤으며 81년부터 89년까지 국립극장장을 지내기도 한 중견연극인이다. 한편 작가 오태석씨와 연출가 허규씨는 72∼73년 장씨가 서울연극학교 재학시절 담임교수로 장씨를 지도했던 인연을 갖고 있어 눈길을 끈다.수∼금 하오7시30분 토·일 하오3시 공연(월·화 공연없음) 763­1268
  • 6공 비자금 파문­동아투금 어떤 회사

    ◎부실채권 없는 단자업계 「작은 거인」/이북·PK출신 설립… 소유구조 베일속/82년 출범후 급성장… 실명제 위반 1호 노태우 전대통령의 비자금 2백68억원이 추가로 확인된 동아투자금융은 「2금융권의 신한은행」으로 불릴만큼 잘나가는 투금사다. 82년 설립 이후 부실채권 하나없는 놀라운 경영과 완벽한 기업분석으로 단자업계의 「작은 거인」으로 고속성장을 해왔다.93년 2백18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고 지난 결산기에는 1백62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그러나 초고속 성장의 이면에는 금융실명제위반 1호라는 불명예가 각인돼있다.93년 8월 17일 고객 이모씨의 부탁을 받고 실명제 실시후 가명으로 개설됐던 8억5천만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 종합통장을 실명제 실시전에 실명으로 전환한 것처럼 전산조작한 사실이 적발돼 장한규 당시 사장과 배진성 전무 등 임직원 7명이 검찰에 고발됐었다.이 사건으로 동아투금의 급성장에 의문이 강하게 제기됐었다. 82년 12월 금융통화운영위원인 추인석씨가 이북출신과 부산경남 지역 실업인의 자금을 모아 세운동아투금은 대주주가 없는 소액다주주라는 소유구조로 처음부터 관심을 끌었다.공화당 원내 총무와 IOC위원을 지낸 고 김택수씨 유족과 서울마포가든호텔 이정구회장을 대주주로,이준용 대림그룹 회장,고정택 동아서적 회장,김승호 보령제약 회장이 창립멤버로 참여했지만 최근에야 한일은행이 실질 대주주로 밝혀졌을만큼 철저히 비밀에 가려있었다. 한편 동아투금의 비자금에 못지않게 비운의 금융인 장한규 아세아종합금융 사장 내정자(58)에게도 관심이 쏠린다.그의 「오뚝이 인생」은 80년 한일은행 광교지점장 당시 부하직원이 사채업자와 말다툼끝에 때려 숨지게 한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시작됐다. 이후 81년 대한항공 이사로 옮겼다가 동아투금이 생기면서 82년 부사장으로 금융계에 복귀했고 89년 사장으로 승진했다가 93년 실명제 위반사건으로 물러났다. 지난해 5월 대림그룹 계열의 서울증권 사장으로 내정됐으나 실명제위반 전력시비로 고배를 마셨다.사장 선임 3일만이었다.현재 아세아종금 사장으로 내정돼 23일부터 출근하고 있으나이번 비자금 사건으로 물러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돌고 있다. ◎어음관리계좌란/만기되면 예치기간 자동연장/「검은 돈」 숨기기엔 최적 상품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2백68억원이 예치됐던 어음관리계좌(CMA)는 투자금융사 상품 중 「검은 돈」이 잘 숨어들 수 있는 상품이다. 만기가 돼 별도 연락을 않더라도 예치기간이 자동으로 연장되는 데다 수익률도 높아 비자금 예치장소로 적격이다. CMA는 투금사가 고객으로부터 자금을 수탁받아 이를 기업어음(CP)과 단기 국·공채 등에 운용해 얻은 수익을 돌려주는 고유상품이다. 최저 거래단외가 4백만원 이상(지방 투금사는 2백만원)으로 하루만 예치해도 실적배당이 있으며 최장 만기일은 1백80일로 짧다. 1백80일 가입했을 경우 세후 수익률이 연 11%쯤 된다. 은행의 저축예그처럼 입·출금이 자유롭고 만기일이 돼서 자동연장할 경우 복리식으로 이자를 계산해주는 장점이 있다. 노 전대통령의 비자금은 91년 5월부터 실명제 전인 93년 2월까지 수십차례에 걸쳐 입금됐는 데 이는 CMA를 잘아는 동아투금의 임직원이 자신들의 이름을 빌려주고 1∼5억원씩 쪼개 입금했가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20일 현재 CMA의 수신액은 잔고기준으로 투금사 전체에 총8조5천9백99억원이다.
  • 세번째 대권 도전끝 엘리제궁 입성/시라크 불 대통령 당선자의 역정

    ◎7선의원­총리 2회 “경력 화려”/35세 정계 입문… 친화력 돋보여 자크 시라크 대통령당선자(65)는 7전8기한 오뚝이였다.미테랑 대통령에게 두번씩이나 내리 맛본 좌절을 딛고 일어나 세번만에 대통령궁인 엘리제궁을 차지했다. 그는 영재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프랑스에서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영재만이 입학하는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했을 정도로 똑똑하면서도 결코 영특함을 내세운 적이 없다.항상 쾌활하고 소탈한 성격으로 솔직한 대화를 함으로써 누구든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갖고 있다. 바로 그 힘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원동력인 것으로 정계에서는 평가한다.친근감의 이면에는 1백87㎝의 훤칠한 키와 당당한 풍모에서 풍기는 「만만치 않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지도자로서의 자질도 갖추고 있다. 그의 정치경력은 어느 정치인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ENA출신 가운데서도 극소수 상위성적자만이 갈 수 있는 감사원에 들어간 뒤 35살때 정계에 입문해 파리에서 내리 7선을 했다. 74년 농업장관으로입각한 지 얼마되지 않아 퐁피두 대통령이 사망하자 지스카르 대통령때부터 76년까지 2년동안 총리직을 지냈다.86년 미테랑 대통령때 총리직을 지낸 경력을 포함하면 총리직만 두번을 지냈다. 78년부터 18년째 파리시장직을 맡고 있고 74년부터 우파정당인 공화당연합(RPR)을 만들어 지난해 당수직을 알렝 쥐페 외무장관에게 넘겨줄 때까지 21년동안 당을 지켜왔다. 시라크 당선자는 하루 4∼5시간 수면을 취하면서 모자라는 잠은 승용차로 이동하는 도중 20분정도씩 보충할 정도로 하루 24시간을 쪼개 사용하는 부지런함을 가지고 있다.골프는 전혀 하지 않고 파리시청내에서 조깅을 하거나 체육관 운동을 하는 것이 유일한 건강유지방법이다. 재산은 부모의 고향인 코레즈지방과 파리시내에 주택 한채씩을 소유하고 있는등 7백만프랑(한화 약10억원)이 넘는 것으로 등록돼 있다.취미로는 프랑스인답게 목수일을 비롯해 집안의 자질구레한 수리등을 좋아하고 요리를 잘한다.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으며 맏딸 로랑스는 출가해 평범한 가정주부이고 둘째딸 클로드는 시라크 개인사무실에서 아버지의 홍보업무를 맡고 있다. ◎현역 지방의회 의장… 대학때 시라크 만나/엘리제궁 새안주인 베르나데트는 누구 엘리제궁의 새 안주인 베르나데트 시라크 여사(62) 역시 여성정치인.시라크 당선자의 고향 남부 코레즈지방의 지방의원으로 지방의회의장과 부시장직을 맡고 있다. 묵묵히 집안일을 챙기면서도 시라크 당선자의 정치를 도와 1차투표 때는 코레즈에서 시라크의 지지표가 65%나 나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내성적이고 신중한 성격이라고 밝히면서 『퍼스트 레이디로서 상징적 역할만을 할 것』이라고 강조.파리의 명문집안 출신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한 그녀는 영재코스인 파리정치대학을 다녔으며 한 도서관에서 시라크 당선자와 처음 만났다. 파리시 병원재단회장·파리시청예술진흥협회장 등을 맡아 사회활동을 해왔다.고고학에 조예가 깊으며 취미는 모형동물수집.
  • 「오뚝이 산악회」/수요일마다 명산찾아 정화활동(산하 파수꾼)

    ◎외출할때 쓰레기봉지 지참 생활화 “신바람”/수거 오물 처리할곳 없어 집에 가져올때 많아 『산의 푸르름을 좋아하기에 오뚝이(69)산악회라는 모임을 가졌습니다.상쾌한 맑은 공기에 땀을 흘리고 나면 솟아나는 호연지기를 그 무엇에 비하리요…』 69산악회(회장 김경흠)회원들은 위와 같은 글귀를 넣은 명함을 모두가 지참하고 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산과 계곡을 깨끗하게 지키자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이들은 서울신문사 깨끗한 산하지키기 운동 환경감시단체로 가입하면서 매주 수요일 유명산을 찾아 열성적인 환경정화활동과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지난 2월 서울 관악산을 찾았을 때는 관악산행이란 장문의 한시를 지어 「서울신문사가 벌이는 산하지키기 운동의 환경감시위원으로 위촉받은 우리 회원들은 더욱더 자연보호에 열중하고 있다」고 읊조렸다. 『깨끗한 산하지키기 운동의 취지를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친구들의 권유로 전회원이 참여해 활동하면서 더 없는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김회장은 그뒤로 외출 때는 쓰레기 봉지를 필수품으로갖고 다닌다며 신이나 있다. 69산악회가 처음 발족한 것은 93년6월9일,6명의 친구들이 모여 건강을 위해 산행을 시작한 이들은 회원이 남녀 33명으로 늘어 났으나 단순히 등산만을 해왔다. 그러다 지난 1월10일 서울신문사 깨끗한 산하지키기 운동 환경감시위원단체로 동참하면서 환경운동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산과 계곡을 찾아 환경캠페인을 벌인 것이 모두 12회,아예 월별 사업계획을 세워 매주 수요일은 서울근교,한달에 한번은 전국의 유명산과 관광지를 택해 현장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월30일 30명의 회원이 충북 윌악산의 정상까지 청소하는등 계룡산·속리산·설악산 대청봉·지리산 천왕봉을 찾아 캠페인을 벌였고 서울근교로 북한산·도봉산·관악산·수락산을 말끔히 청소했다.지난달 25일 여수 오동도로 떠난 이들은 부산 범어사 일대까지 돌며 남해안 관광지 환경정화활동에 나섰다. 『주운 쓰레기를 처리할 곳이 없어 집으로 가져오고 있습니다.최소한 유명 등산로입구에는 쓰레기 집하장 정도는 만들어 줬으면 합니다』이들은 쓰레기 종량제가 단순한 행정편익에만 치우치고 있다며 실질적인 실천위주의 시정을 촉구했다.
  • 부도옹(외언내언)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소평만큼 사망설이 많이 나돈 인사도 이 세상에 없을 듯싶다.그는 지난 90년 이후 지금까지 어림잡아 4백번이상 홍콩등지의 매스컴에 의해 죽었다가 살아났다.일시적인 중병 또는 와병설까지 합치면 그 횟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가장 최근의 사망설은 지난 24일자 홍콩영자지 이스턴 익스프레스와 경제일보에 「식물인간상태로 사망임박」이라고 전해진 것. 다음날 국내 신문에도 대문짝만하게 보도됐다.그러나 바로 3일뒤 등은 건강한 상태이며 그 부인의 입원사실이 와전된 것으로 북경·홍콩언론들이 일제히 정정성격의 보도를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등의 사망설이나 건강상태에 관한 언론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의 나이가 만91세로 중국 원로정치인 가운데 최고령인데다 자본주의식 경제발전을 지향하는 개방·개혁의 총설계사로 13억 인구인 대륙역사의 흐름을 그만큼 크게 바꿔놓은 인물도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또 카리스마적 영향력이 막강한 만큼 중국의 앞날과 등사망을 연결시켜 온세계가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인 것 같다. 오척 단구의 등은 문화혁명기간을 비롯,몇차례나 치명적인 정치적 위기에 빠졌었지만 불굴의 집념으로 되살아났다고 해서 별명이 오뚝이로 풀이되는 부도옹이다.그는 모택동처럼 어려서부터 수영으로 건강을 다져서 몇해전만 해도 중국 지도층 휴양지 북대하에서 장거리 수영을 즐겼고 만80세가 되던 해에는 고향인 사천성의 험준한 아미산 정상에 올라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한것으로도 유명하다. 등은 또 몸이 불편하면 기공 고수들을 불러 치료를 받거나 건강법을 익혔던 것으로 알려진다.등소평이 부도옹이란 그의 애칭처럼 앞으로 몇번이나 더 사망설을 뒤집고 살아있음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인지.하늘만이 알 일이다.
  • 합천 희복양돈장 안희복씨부부의 을해년 소망

    ◎“경쟁시대 으뜸가는 양돈농 될래요”/시설 곧 자동화… 올 3천5백두로 늘려/값폭락 좌절 딛고 부창부수 오뚝이 삶 『일년내내 돼지꿈을 꾸며 돼지처럼 풍만하게 양돈업을 살찌우고 싶습니다』 새해 아침 불혹의 나이를 맞은 동갑내기 안희복·유윤분씨 부부는 삶의 터전인 경남 합천군 초계면 각곡리 714 희복양돈장에서 이제 막 태어난 아기돼지들과 함께 새해 아침을 맞았다. 8백평 규모의 돈사에 꽉 들어찬 1천5백마리의 돼지들은 낯익은 주인에게 세배를 하듯 고개를 끄덕인다.을해년 돼지띠해에 이들과 함께 시작하는 안씨부부의 새해 소망은 옹골차다. 1백여마리로 양돈을 시작한지 24년만에 안씨는 대규모 자동화시설을 갖춘 부농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자신감에 부풀어 있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71년 양돈을 시작했던 안씨의 「돼지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2남8녀의 장남으로 72년 정미소에서 다리를 다친 부친을 대신해 가장역할을 해야했던 안씨는 79년 제대한뒤 대구·부산등에서 야채행상도 하고 각 부락에 돼지사료도 팔았다. 3년만에안씨는 5백마리의 돼지로 다시 양돈업을 시작할 수 있었으나 84년 돼지값 폭락으로 7천여만원의 부채를 안고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에 양돈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습니다』 안씨는 그러나 『자식들에게 가난을 대물림해서는 안된다』는 부인의 끈질긴 설득으로 86년 다시 돈사를 세웠으나 2천5백여마리가 원인모를 병으로 쓰러져 여러차례 폐사위기를 맞았다. 잇따른 역경속에서도 안씨부부는 꿋꿋이 4전5기의 오뚝이신화를 연출해냈다.안씨는 우선 선진 양돈기법을 배우기 위해 88년과 92년 정부 지원으로 독일의 양돈 박람회장과 일본·네덜란드·덴마크·영국의 농촌을 둘러봤다. 안씨는 밤잠을 설치며 하루 20시간씩 시설 자동화와 기술개발에 힘을 쏟았고 그 결과 지난해 갓 태어난 새끼가 어미에게 깔리는 것을 막기위해 쇠파이프로 어미와 새끼의 방을 따로 만든 분만틀을 개발했다. 양돈기술 영문 책자를 읽기 위해 91년 초계종합고에 입학한 안씨는 지난해 3월 아들또래의 동창생들과 나란히 졸업장을 받기도했다. 『과감한 투자없이는 우루과이 라운드 파고를 헤치고 부농의 꿈을 이룰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안씨는 저축과 정부지원금 등을 포함해 3억5천만원을 투자,올해말 완공예정으로 돈사 3개동 8백여평을 7개동 1천8백여평으로 늘리고 시설도 완전자동화하는 작업에 한시도 눈돌릴 틈이 없다. 이미 자동화된 3개동은 바닥이 철망으로 돼있어 분뇨가 저절로 지하에 묻힌 관을 통해 1백m 떨어진 정화조로 흘러가고 이 과정에서 자동산화된 분뇨는 울타리로 심은 2천여그루의 단감나무에 뿌려진다.환경오염과 비료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셈이다. 푸념 한마디 없이 때묻고 냄새밴 안씨의 작업복을 하루에 두세차례씩 세탁해온 부인 유씨는 『시설자동화가 마무리되는 올해말 돼지수를 현재 1천5백마리에서 3천5백두로 늘릴 것』이라며 활짝 웃는다. 안씨부부는 올해 수입을 3억원까지 끌어올려 수입개방시대를 당당히 이겨나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가운 한겨울의 계곡바람도 잊고 있다.
  • 서울시장 문책 경질/후임에 우명규씨… 이 총리도 사표

    ◎경북지사엔 심우영씨 임명 김영삼대통령은 21일 성수대교 붕괴사건의 책임을 돌려 이원종 서울시장을 경질,후임에 우명규경북지사를 임명했다. 경북지사는 심우영총무처차관이 임명됐다. 한편 이영덕 국무총리는 이날 하오 김대통령과 특별면담을 갖고 이번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고 주돈식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김대통령은 그러나 사표수리여부에 대해 구체적 의사표명이 없었다고 주대변인이 덧붙여 귀추가 주목된다. 이와 관련,청와대의 고위당국자는 『총리사표가 반려될지,아니면 수리되고 전면개각으로 이어질지를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우명규 서울시장/기술직 첫 시장… “지하철 박사” 지난 62년 경북도에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서울시부시장·경북지사를 거쳐 기술직으로는 처음으로 서울시장에 올랐다. 72년 서울지하철 1호선의 실무책임자로 참여한 뒤 89년 지하철건설본부장에 오르기까지 지하철설계 및 건설의 진두지휘를 해 「지하철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업무에 있어서는 한번 세운 계획은 결말을 내야 직성이 풀리는 저돌형이면서도 일과후에는 직원들과 소주잔을 맞대고 어울리는 소탈한 성격이어서 부하직원들로부터 신망이 두텁다. 부인 배귀숙여사(52)와의 사이에 1남2녀. ▲경북 의성(57) ▲동아대 토목공학 ▲중앙대 대학원 공학박사 ▲서울시 하수국장 ▲〃 지하철건설본부장 ▲〃 부시장 ▲경북지사 ◎심우영경북지사/뚝심강한 「오뚝이」… 성품 소탈 7급공무원으로 재직하면서 행정고시에 합격,차관까지 오른 정통 총무처관료.매사에 뚝심이 대단한 「오뚝이형」이다. 일처리에는 누구보다 꼼꼼하지만 소탈한 성격으로 아래위 두루 신망이 높은편. 인사·민원·후생 등 행정관리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3당합당 직후 민자당행정전문위원으로 일하면서 정책입안능력을 평가받아 총무처차관에 임명됐다.컴퓨터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부인 정신자씨(50)와의 사이에 1남2녀. ▲경북 안동(54)▲서울법대 ▲행정고시 10회 ▲총무처 정부전자계산소장 ▲총무처 후생국장·행정관리국장 ▲민자당전문위원 ▲총무처 기획관리실장 ▲총무처차관
  • 김자경 만세(외언내언)

    지난 5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이화 21세기 재도약선언 대축연」에서 사회자는 그를 「이팔청춘의 영원한 소녀」로 소개했다.이날 「자랑스러운 이화인」으로 소개된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많은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받은 그는 올해 희수(77세)를 맞은 원로성악가 김자경씨. 빨간 구두와 무릎길이의 타이트 스커트 차림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팔청춘」은 너무한것 같아 「방년 28세」로 고쳤다』며 소녀처럼 수줍게 미소짓던 그가 희수기념 독창회를 9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갖는다.다른 사람이라면 놀라운 일이겠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난 75년부터 해마다 한국가곡 독창회를 가져와 올해로 18회째 한국가곡 독창회를 갖는 것이다. 『진짜 성악가라면 우리 노래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선친의 말씀을 뒤늦게나마 따르기 위해 91년엔 한양대 대학원 국악과에 입학했다.그동안 배운 민요들로 프로그램을 짠 졸업독창회도 올 겨울이나 내년 봄에 가질 계획. 『공부에는 나이가 없고 생을 마치는 그 순간까지 닦고 배우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그는 말한다.지난 62년 사별한 남편 심형구화백과의 결혼50주년 기념독창회도 91년 가진 바 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 홀에서 독창회(50년)를 가진 이 「영원한 소녀」에겐 「오뚝이」라는 별명이 또 있다.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48년)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로 화려하게 오페라 무대에 데뷔한 그가 한국의 첫 민간오페라단인 김자경오페라단을 창단(68년)하고 지금까지 40여편의 작품을 공연하면서 얻은 인고의 훈장인 것이다. 오페라 제작을 지휘하는 한편 『오페라가 무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직접 표를 팔러 다니기도 한 그는 살아있는 한국의 오페라사이자 오페라의 전도사인 셈.이화여대 음대에 38년동안 재직한 그의 제자사랑은 유별난데 이번에도 함께 출연할 제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연습하는지…』자랑을 잊지 않는다.영원한 소녀 김자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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