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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7)해양의 나라 백제

    해양활동이 뛰어난 국가인 백제는 “100가(家)가 바다를 건너와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百家濟海)”는 기록도 있다.주몽의 아들인 이 집단은 압록강하구를 출발,연근해 항로를 이용하여 남하한 다음 경기만에 정착한 것이다. 형인 비류는 인천인 미추홀(彌鄒忽)에 도읍을 정했고,동생 온조는 서울에 정착하였다. 경기만 일대는 남·북한강이 서로 만나고 임진강 예성강 등이 합쳐 서해로흘러들어가는 곳이다.일본열도와 제주도에서 북상한 항로와 요동반도에서 압록강 하구를 거쳐 남하하는 연근해 항로가 마주치는 곳이자,중국의 발해만·산동에서 황해를 횡단한 항로의 종착점이다.이른바 황해교통의 십자로였다. 경기만 입구인 한강하류는 해항(海港)도시가 건설될 만한 곳이다.역사의 초기단계에는 항구나 해변 근처에 도시가 건설되지만,점차 바다와 연결되는 내륙안쪽으로 중심이 이동한다.해양폴리스로 알려진 아테네도 사실은 피레우스라는 외항을 가진 내륙 도시이다. 백제는 해양으로 뻗어나갈 천혜의 조건을 갖춘 도시국가로서 첫 출발을 하였다.고이왕은 236년에 서해 대도인 강화도에서 사슴사냥 등을 하였다.한강하구와 경기만의 핵심을 지배하였고,해양기지화하였음을 선언한 것이다.그리고 고구려가 위(魏)낙랑(樂浪)대방(帶方)등 중국세력과 싸우고 있을 때,해로를 이용해서 낙랑을 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았다.이때 이미 백제는 전 시대부터 활용되던 황해횡단 항로를 자신의 것으로 재정비하였다. 이러한 해양활동은 4세기에 이르러 한국고대사 최고의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인 ‘백제 요서진출설’의 배경이 되었다. 중국의 정사인 송서(宋書,488년 간행)에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있다.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점령하니,백제또한 요서를 침략하여 점령하였다.백제가 다스린 지역을 진평군(晋平郡)진평현(晋平縣)이라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남제서(南濟書,6세기 전반)는 더 구체적으로 “요서·진평 양군을 점거해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고 했으며,통전(通典,801년)은 그곳이 “유성과 북평의 사이(今柳城北平之間)”라고 위치까지 밝혔다.대체로 백제가 4세기경부터 요서지방을 수백년동안 다스렸다는 내용이다.그런데 정작 삼국사기와 중국의 북조계통 사서에는 기록되지않았다.때문에 조선의 실학자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실 여부를 놓고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다.정말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령하고 오랫동안 다스렸을까?먼저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무렵 백제 근초고왕은 북진정책을 취해 평양성을 공격,남진해오는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이 결과로 경기만을 완전하게 내해(內海)화하고,그배후인 황해도 지방을 장악하였다.계속해서 전라도 해안까지 복속시키므로써 마한세력의 해양력을 흡수한 뒤 제주도와 일본열도까지 진출하였다.이렇게해서 백제는 일본열도에서 제주도,한반도 남부를 거쳐 북부까지 항로로 이어지는 물류체계를 장악하였으며,외교적으로 고구려를 압박하면서 중국의 동진(東晋)등 국제사회와 교섭하였다.황해를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중심부에자리한 것이다. 한편 대륙은 5호16국 시대로서 고구려와 북방종족,한족이 뒤엉켜 국제질서를 전면적으로 재편하고 있었다.고구려와 연(燕)나라,후조(後趙),동진,백제는유일한 네트워크인 해양력을 총동원하여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는 것이다.물론 사서의 기록처럼 요동을차지한 고구려를 견제하고 남진을 저지하기 위하여는 요서를 공략하는 일이절대적으로 필요하다.더구나 해양을 이용한 배후공격은 전략적으로 매우 우수하다.하지만 지리적으로 본국과 거리가 먼데,과연 그 당시 바다를 통해서많은 병력을 운송하고,주둔시키는 일이 가능했겠느냐 하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데 동아지중해에서는 그 이전부터도 근해항해나 황해를 횡단항해를 하면서 교역과 외교교섭을 하고,심지어는 군사행동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위만조선을 공격할 때 한무제 군에는 당시 최대의 능력을 보유한 해군이 전투에 참여하였다.후한의 광무제는 바다를 건너 낙랑을 평정하였다(44년).오나라와 위나라는 황해 북부에서 해전을 벌였으며,위가 일본열도로 가는 중간거점인 대방까지의 항로는 황해 중부를 횡단하는 항로였다.기록에 남아있는이 시기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매우 뛰어났다.그런데 해양문화의 특성으로 보아 경기만과 산동반도및 발해만의 해양 능력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가 황해를 횡단하고,발해만에 진입하는 일은 별로 어려운 것이아니다.이미 완전히 장악한 경기만(강화도 지역)을 출발하여 먼바다로 나가다가 산동반도와의 중간 못미쳐서 북상하면서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의묘도(廟島)열도 사이로 접어들었을 것이다.그러나 이 곳은 섬들이 점점이 이어진 지역이라 수로가 협소하고,물길이 복잡해서 항해에 어려움이 많다.더구나 장도(長島)대흠도(大欽島)등 큰 섬에 근거한 해상호족들의 저항도 만만찮았을 것이다.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하면서 백제가 요서지방에 식민정권을 장기간 설치하였다면,백제의 국력은 물론 해양력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대단하였을 것이다. 요서진출설은 사료에 기록이 있고,개연성이 충분하지만 아직 해결해야될 문제가 적지 않다.그런데 해양질서는 지리상의 거리나 국력,역학관계 등이 육지질서와는 다른 특성이 있다.지중해의 패권을 수백년동안장악했고,로마와80여년 동안 포에니전쟁을 벌이다가 멸망한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이 아프리카 북부에 건설한 해양식민도시였을 뿐이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4) 만주벌에서 바다로

    우리역사에 고구려란 나라가 있다.군사력이 강하고,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한반도 중부 이북에서부터 만주벌 요하 일대,연해주와 멀리 북방의 초원까지 장악한 나라.하늘과 빛을 지향하는 자의식이 강한 천손(天孫)민족으로 늘 자유를 꿈꾸고,실천하는 사람들의 나라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발전의 배경에는 철기로 무장한채 말을 타고 달리는 기마군단과 강건한 문화가 있다.하지만 또하나,중요한 힘의 원천이 있으니 그것은 하얀 돛을 단 범선으로 동아지중해를 누비던 광범위하고 활달한 해양활동과 그 문화이다.고조선을 계승한 고구려는 이미 해양활동 능력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나 초기에는 대륙의 강 위에서만 수상활동을 하였다. 인간은 처음 강에서 수상활동을 하였으며 점차 바다로,대양으로 나갔다.그래서 강은 문화의 출발점이었다.중국에는 황하와 양자강의 유장한 흐름이 수천년간 대하드라마를 연출해왔다.우리들의 배냇고향인 만주에도 큰 강이 초원과 평원 사이를 흘러가며 사람들의 삶을 이어주고 물자를 배분해줬다.백두산에서발원한 송화강은 장춘을 지나 북으로 흘러 초원지대인 대안에서 대흥안령산맥을 출발한 눈(嫩)강과 만나 동류 송화강으로 거듭난다. 북부여 천제인 해모수(解慕漱)가 따라 내려왔을지 모르는 눈강은 배가 다닐 수 있는 통항(通航)거리가 700여㎞이다.송화강은 북만주를 거쳐온 흑룡강과 만나 동해로 들어가는데 통항거리가 무려 1,890㎞에 달한다.수도인 국내성옆을 흐르던 압록강도 통항거리가 750여㎞다.그외에도 요하,혼강,두만강 등은 수로가 깊고 길며 바다로 이어져 큰 배들이 항행할 수 있다. 이러한 강에는 어느 시대,어느 지역에건 이른바 강상수군(江上水軍)이 있다. 고구려는 교역과 전쟁을 하면서 영토를 넓히기 위해 만주벌에 그물처럼 뻗은 강을 관리하는 수군이 필요했다.주몽의 아버지인 천제 해모수는 물의 신으로 불린 하백의 딸 유화부인과 결합했다.고구려는 태양숭배집단과 물에 세력기반을 둔 토착세력이 혼인동맹을 맺으면서 통합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인들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배도 띄웠던 것이다.고구려는 내륙수군에만 만족하지 않고,초기부터 동해로 진출하였다.동옥저가 동해에서 잡은 해산물들을 공급하였으며,민중왕과 서천왕때는 고래잡이도 성행한 듯 야광눈을왕에게 바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동아(東亞)의 지정학적인 구도나 본격적인 국제교역을 위해선 황금의 바다인 황해로 진출해야 했다.그렇다면 험준한 산성전투에 능하고 기마전을 장기로 하는 고구려가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배타고 활동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말을 탄 채 수천리를 행군하는 정복욕이 강한 집단은 해양에도 과감하고 신속히 진출한다.유목문화와 해양문화는 똑같이 이동성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이다.고구려는 3대 대무신왕때부터 황해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많지만 태조대왕(146년) 때에는 출해구(出海口)인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공격,대방(帶方)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하였다. 그런데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중국대륙은 위오촉(魏吳蜀) 삼국시대였고,고구려는 위나라와 대결하는 복잡한 상황이었다.이때 강남에 터전을 굳힌 오나라의 손권은 위(魏)를 배후에서 압박하면서 군마와사치품인 담비가죽을 수입하기 위해 고구려를 필요로 했다.반면에 고구려는 중계무역과 남방의 귀중품을 수입할 목적으로 원교근공책을 취했다.해양활동을 활용해 국가성장의 기틀을 마련한 고구려는 233년,동천왕시대 양자강유역의 오(吳)와 황해를 천수백km나 종단하면서 본격적인 해양외교를 펼쳤다.당시 오는 최고의 수군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해양에 관한 기술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한편,위는 대방을 일본열도까지 이르는 해상 네트워크의 중계지로 삼아 황해 횡단항로를 구축했는데 이것은 교역뿐만이 아니라 고구려를 겨냥한 광범위한 포위망을 구축하려는 의도였다.그러나 고구려는 황해 북부의 해상권을장악해가면서 남쪽에 있는 낙랑 대방 등의 한족세력을 고사시켜갔다. 그러면 고구려와 오나라 사이의 항로는 어떠했을까? 당시의 국제관계와 황해의 해양조건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갈 때는 압록강하구인 서안평을 출발,요동만을 우측으로 보면서 멀리 나가서 산동반도 근해를 통과한 다음 위의 세력권을 벗어나 양자강으로 들어갔다.그러나 곧 공손씨의 배반으로 요동반도를 거치는 연근해항로는 피해야만 했다.실제로 오의 수군함대는 산동반도에서 위나라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따라서 강남에서 출발할 경우 안전을 위해 산동권으로 진입하기 전 일단 먼바다로 나가 종단으로 북상하다가 압록강하구로 들어갔다.위험부담이 많은 원양항해에 가까운 항로이다. 양쪽을 오간 배의 크기와 규모는 정확히 알수가 없다.그런데 235년 오나라의 사굉(謝宏)이 탄 사신선이 적어 고구려가 준 수백필 가운데 80여필만 싣고 돌아갔다.수십필의 말과 군사,화물을 실고 다닐 정도이니 큰 선박임이 틀림없다.육지의 나라,기마군단의 나라였던 고구려는 바다로 나가 대륙과 해양을 동시에 경영하면서 고조선의 역사를 재현했던 것이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있는 법이다(박갑천 칼럼)

    등에 실려있는 자린고비 얘기가 떠오른다.굴비 한 마리 천장에 달아두고 끼니때마다 식구들로 하여금 그걸 쳐다보면서 반찬삼아 입맛 다시게 했더라는 사람.누군가 두번 쳐다보면 “짜다”며 나무랐다지.이건 과장된 우스개지만 일호구삼십년 고사는 현실감으로 와닿는다.제나라 재상 안평중이 여우가죽옷 하나를 30년이나 입을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더라는 얘기 말이다.( 단궁하편) 진작 이랬어야 하는건데….사회 각계에서 존절히 살기운동 펼치는 걸 보는 느낌이 그렇다.전력 아껴쓰기에 난방비 줄이기,음식쓰레기 줄이기.버린 깡통 버린 신문지따위 재활용품들의 값이 오르고 있다.물물교환 벼룩시장 인기도 높아가고.일부 학교에서는 교복·책 물려주기운동을 벌여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이같은 움직임들은 물자절약이라는 측면 못지 않게 우리의 하린 낭비습성 마음자리를 바룬다는 뜻이 더 깊다. 우리는 그동안 분수 모르고 제살을 조리복소니되게 깎아먹어온 터.숱한 1회용도 그렇지만 특히 버려지는 음식쓰레기보면서 어려운 세상 살아온 세대들은 이렇게 탄식하곤 했다.“이러다 언젠가 천벌받지” 그동안 아까운줄 모르고 버려오던 것 거두어 쓰는 현상을 보면서 의 무용지용론을 한번더 더듬어 본다.‘쓸모없는 것의 쓸모있음’이 곧 무용지용. 여기저기에 보인다.“사람들이 쓸모있는 것의 쓸모만을 알고 있을뿐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알지 못한다”(인간세편)는 개탄이다.눈길을 달리하여 사물을 볼때 쓸모없는 듯이 보이던 것의 쓸모가 팔팔결 도드라지는 것은 누구고 경험해본 일이리라.이런 경우를 혜자에게 설명하는 의 예화를 보자(소요유편).송나라 사람으로 손이 얼어터지지 않게 하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어떤 사람이 와서 백금을 주고 그 비방을 사간다.그사람은 그걸 오나라왕에게 갖고 가서 전략에 이용토록 설득한다.월나라와 싸우던 오나라는 그를 장군으로 삼았고 그해 겨울 수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오왕은 그를 제후에 봉한다.똑같은 물건인데 받은 대가는 엄청나게 달랐다.“쓰는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 의 설명이었다. 생각만 잘하면 이 세상에 버릴 것은 없는 법이다.IMF터널은 그 가르침을 더욱더 깊게 해준다.사람의 쓰임새 또한 그와 다를게 없겠건만.
  • 삼국지 혈투/장비·관우·공명의 힘으로 ‘중원통일’

    ◎‘방어’·‘공격’·‘마법’ 캐릭터 특성 살려/13개 성읍 점령하면 ‘내손안에 천하’ ‘삼국지혈투’는 둠(DOOM)스타일의 액션게임. 대만 엔진테크놀로지사가 만들었다. 국내에는 12월말 (주)소프트월드코리아(옛이름 지관·02­871­0812∼4)에서 내놓는다. 전략시뮬레이션이나 대전액션이 아닌 3D액션으로 만들어진 삼국지 시리즈.둠처럼 잔인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필살기를 구현하는 것이 특징이다.모든스테이지를 3D로 꾸며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을 맛보며 전투를 즐길수 있다. 게이머는 관우,장비,제갈공명,조운,황충을 조종하게 된다. 스테이지마다 다른 캐릭터를 선정할 수 있다.게임을 풀어나가는 요령은 저마다 갖고 있는 캐릭터의 특성을 잘 활용하는 것. 장비는 방어력이,관우는 공격력이 뛰어나다.공명은 마법력이,조운은 민첩성이,황충은 원거리 공격이 강하다.예를 들어 전쟁터에서는 공격력이 뛰어난 관우와 방어력이 강해 에너지 소비가 적은 장비를 선봉에 세운다.이때 천재 병법가 공명이 후방을 맡게 해 마법으로 적을 공격하면전투력을 높일수 있다. 기본 무기아이템은 관우의 청룡언월도,장비의 장팔사모,조자룡의 청홍검,공명의 선학익산 등.스토리 전개에 따라 새로운 무기를 추가할 수 있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다치게 되면 인삼,영지,설연,환혼단,벽혈부등 체력을 회복시키는 아이템을 제때 챙겨둬야 한다.전투를 할때는 캐릭터마다 다르게 설정되어 있는 화국술,폭열술,화혼술등의 마법도 적시적소에 사용해야 한다. 게임은 기존 삼국지에 등장하는 중국의 각 지역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게이머는 천하를 통일하기전에 오나라의 맹장 손권,난세의 간웅 조조,관도대전의 패장 원소 등 수많은 강적과 만나게 된다.이들은 각자의 세력 근거지와 점령지에 적어도 한명의 장수를 주둔시킨다.게이머가 예컨대 해주를 점령하고 싶다면 그곳을 지키는 장수를 무찌르고 점령해야 한다.모두 13개의 성읍을 점령하면 중원통일의 패권을 쥐게 된다. 인터넷이나 모뎀을 통해 동시에 4명이 플레이할 수 있다.도스,윈도 95겸용.
  • 현대시인 애청의 금화(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5)

    ◎생가어귀엔 수령 500여년 느티나무가…/절강성 중심부에 위치한 비산비야/대시인 기리는 3층높이 방려 이채 이제 발걸음을 강소성에서 훌쩍 절강성으로 옮겼다.옛날 춘추때 같으면 오나라에서 월나라로 건너온 것이다. 금화는 절강성의 중부,그 수도인 항주에서도 남쪽으로 약 170㎞.그토록 멀리 깊숙이 나래를 편 것은 거기가 매력적인 작가로 명말 청초의 희곡가요,소설가인 이어와 중국 현대시 80년사에 가장 많은 독자를 지녔던 공산당 당적을 가진 시인 애청(1910∼1996·중국발음 아이칭)을 낳았기에 말이다. 애청은 필자가 맨처음 해후했던 사회주의 시인이다.아직도 냉전시대였던 83년1월,싱가포르정부가 주최한 제1회 세계중국어작가회의에서 만난뒤,우리는 여러차례 감격의 회동이 있었음에도 막상 그의 고향을 찾은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65년간 시집 20여권 남겨 금화는 비산비야였다.금화시에서 북으로 30여㎞를 달렸을때 작은 소읍 부성을 만났다.부성에서 애청의 생가가 있는 반전장으로 좌회전할때 난데없이 하늘을 뚫을듯 커다랗게세워진 방려을 보고 나를 동행하던 아동문학가요,전 절강사대 총장이었던 장풍씨는 내 어깨를 쳤다. 과연 놀랍도록 높았다.족히 삼층 높이였다.필자가 문학기행하는 동안 처음 보는 시인을 위한 방려다.사실 애청이 이 나라 이 체제에 끼친 문학적인 지위는 이 방려의 높이에 상당했다.1932년부터 지난해까지 65년동안 벌써 스물몇권의 시집에,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이란 감투도 그러했다.그러나 그의 외형적인 간판보다는 중국이 가장 암울했던 30년대와 40년대,50년대를 겪는 동안 중국인에게 민족의 긍지와 광명의 추구를 절규함으로써 중국인의 정서를 비장하게 무장시켰던 시인이다.특히 30년대,그의 출세작인 ‘따옌허,나의 유모여!’를 비롯해 ‘북방’‘횃불’‘태양에게’‘눈은 중국의 대지에 내리고 있다’‘거지’‘나는 이땅을 사랑한다’‘나팔수’ 등 중일전쟁때의 작품들은 모든 중국인에게 눈물없이는 읽을수 없었던 민족의 감동이었다. 방려에서 서쪽으로 5리 남짓.편편한 농촌으로 차를 돌렸다.여기가 ‘반전장’이다.애청의 본명 장해징대로 여기는 장씨의 집성촌이다. 그는 여기 장씨 마을에서 대농이요,지주의 아들로 태어나서 1928년 항주의 국립미술대학에 진학하기까지 18년동안 살았다. ○대농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차가 이윽고 마을 복판에 있는 공터에 닿았다.바로 그 앞 2층집 하얀 흙벽 까만 대문위에 ‘애청고거’라는 글씨가 붙어있다.필자는 왈칵 치미는 감개에 목이 메었다.우선 생전에 깊었던 교분때문이요,다음은 최근 10년동안 그는 매년 10월마다 노벨문학상의 후보로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던 석패의 주인공이었다는 점, 거기다가 그는 지방 토호의 아들이요,전위적인 화가였고,애국적인 당원이었지만 한 평생 울분과 불우속에 살다 간 비국의 화신이었다.사실 필자는 그의 뜨거운 눈물을 여러차례 보았다.다만 그의 만년이 순풍이었지만 그것은 욕된 안일이었다. 애청은 출생과 함께 미신의 희생물이었다.그의 명줄이 짧아서 남에게 출양해야 오래 산다는 점쟁이 말대로 그는 장씨 마을에서 10리쯤 떨어진 따옌허(대언하)’라는 빈촌,거기서 빈농으로 살아가는 조(1878∼1924)씨라는 아낙네에게 4년을 입양,다섯살때에야 부모의 슬하로 돌아왔다. 또 한번의 울분,1932년,그가 상해에서 ‘중국좌익미술가연맹’에 가입,‘춘지예술사’를 조직했다가 국민당 정부에 체포,4년이나 옥살이한 것이다.그는 비록 옥중에서 그의 출세작 ‘따옌허­나의 유모’등 많은 명작을 썼지만 국민당에 대한 설원이 깊어 그의 필명을 ‘애청’으로 정했는데 바로 애자는 국민당의 수령인 장개석의 장씨 그 초두를 가위표로 부정한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4년동안 옥살이도 또 한번은 중공이 건국한 뒤,‘중국문학예술가연맹’을 발족하고 중국 대표적인 문학지인 ‘인민문학’이나 ‘시간’ 등을 창간하고 그를 편집하는 등 활동을 펴던 1957년 뜻밖에 우파로 몰려 1978년 복권되기까지 20여년 흑룡강·신강 등 변방지역에서 강제노동을 당했던 것이다. 필자는 문안으로 들어섰다.목조 2층,약 80평의 생가는 입구자 구조,작은 마당 복판에는 우물,우물가 건넌방이 애청의 공부방이란다.그때 쓰던 홍목 책상과 걸상이 당년의 부잣집 흔적임이 역연했지만 벌써 70여년전 소년 장해징의 쓸쓸한 휘파람 소리가 어디선지 들리는 듯했다. 애청의 생가를 나와 뒷 터로 나갔다.거기는 커다란 연못에 500∼600년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수호신인양 서있다.애청의 시집속에 나오는 ‘두그루 나무’나 애청의 그림속에 자주 나오는 고목이 바로 여기서부터 얻은 시상이요,화상임을 확인했다. ○무덤엔 황량한 풀더미만… 실상 필자가 애청의 생가를 찾은 것은 애청 문학의 발화점인 따옌허를 찾기 위해서였다.따옌허는 애청 유모가 살던 고을 이름이요,동시에 애청 유모의 이름이기도 했다.우리 나라도 그렇지만 시집온 아낙네를 그 친정 고을로 부르는 택호를 썼기 때문이다. 그 따옌허는 농촌 개조로 원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현지의 말때문에 그만 두고 그대신 따옌허의 무덤이 생가에서 불과 5리 떨어진 논가 작은 언덕에 있다는 것이다.귀가 번쩍 트였다.사실 말이지 따옌허같은 여인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애청은 없었을지 모른다.애청이 그녀의 젖을 먹고 그녀의 두꺼비같은 손으로 지어준 밥을 먹고 자랐기에 겨레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것이다. 그 무덤은 황량한 풀더미였다.하지만 그의 ‘대연하지묘’라는 묘표와 ‘따옌허는 나의 유모입니다.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하는 비명이 모두 당대 최고의 시인 애청의 친필로 세워졌다는 사실도 필자를 감동시켰다.
  • ‘거물’ 수감자들 마음병 앓는다고(박갑천 칼럼)

    〈삼국지〉에서 오나라 주유가 숨을 거두면서 하는 탄식­“아,하늘도 무심하시지.이미 주유를 내셨으면 그만이지 어찌 또 제갈양은 내셨나이까”.애면글면 눌러보고자 해도 제갈양의 지혜에 뒤진다는걸 느낀 주도독은 울화가 치밀어 죽었다. 병은 마음에서 생긴다.사람들은 쭝덜쭝덜 속을 끓인끝에 병을 만든다.가령 사업에 실패했다고 하자.그 과정을 생각하노라면 속좁은 쥐코조리가 아니더라도 가슴속에서 불길이 솟는다.그래서 주유같이 죽는다.암도 그렇게 울화를 삭이지 못한 사람에게서 생긴다고 했다.그같은 심화병에 빠져들면 첫째 식욕부터 떨어지니 몸이 건강할 수 없다. 김시습도 그걸 말하고 있다.“무릇 만병은 마음의 걱정으로부터 일어난다”(〈매월당집〉).그러면서 어느 손님과 악광의 관계를 예로 든다.그 얘기는 응소의 〈풍속통〉에 나오는 배중사영 고사와 내용이 같다.­벽에 걸린 활의 그림자가 술잔에 비친것을 뱀으로 착각한 두선이란 사람이 윗사람 앞이라서 그술을 마지못해 마시고는 병이 난다.좀체 낫지 않았는데 나중에 활그림자였다는걸 알자마자 병은 낫는다.세속사를 훌훌 털수 있을때 병고에서 해방된다는 말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형비리사건으로 수감돼 있는 ‘거물급인사’들의 병원행 소식이 곧잘 전해진다.그리고 이를 전해듣는 국민들은 꾀병이라 여기면서 마뜩찮아 한다.한데 관계당국자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그들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못이겨 지병이 나빠지는가 하면 없던 병까지 새로 생긴다” 그들의 병은 제나라 환공과 위이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장자〉달생편).늪지대로 사냥나간 환공이 귀신을 보고 어진혼나가 병이 났다.황자고오라는 사람이 찾아와 여러 귀신 얘기를 늘어놓은 다음 늪에는 ‘위이’라는 귀신이 있다고 하면서 덧붙인다.“한데말입니다.늪에서 그 귀신을 본 사람은 패자가 된다고 합니다”.이말을 들은 환공은 벌떡 일어난다.“맞아 맞아.내가본 귀신이 바로 그거야”.패자의 꿈이 이뤄진다니 병이 나을밖에.그들 거물급인사들에게는 출감소식만이 ‘환공의 위이’로 될 것인지. 마음만 다스리면 감방생활에서 외려 건강이 좋아진다고 한다.감방밖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인생살이에서 소중한건 ‘마음속 화평’ 아닌가 한다.〈칼럼니스트〉
  • 문인들의 ‘못자리’ 소주(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4)

    ◎‘동방의 베니스’ 사통팔달의 운하가…/시인 장적·화가 당인·소설가 섭성도 등 수십명 배출/송·원대땐 시짓고 그림그리는 화원 원림 188곳이나 1275년,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폴로가 처음으로 소주를 유람하면서부터 소주의 얼굴은 ‘동방의 베니스’로 알려졌다.사통팔달의 운하가 소주를 바둑판인양 누비고 있음을 말하리라. 그런데 마르코폴로보다 400년 일찍 소주를 유람했던 만당의 유미파 시인 두순학(846∼904)은 당시의 소주를 이렇게 노래했다. ‘군도고소견,인가진침하.군도고소견,인가진침하. 고궁한지소,수항소교다.고궁한지소,수항소교다. 야시매릉우,춘선재기라.야시매릉우,춘선재기라. 요지미면월,향사재어가.’요지미면월,향사재어가. (송인유오) (여보게,소주를 가보게나/사람들이 모두 운하를 베고 자더군./옛집마다 빈터 적고/물길마다 군데군데 작은 다리./야시엔 연근 삶아 팔고/봄배에는 그득히 명주 비단./이 잠못드는 달밤/고향 그리게 뱃노래 들린다.) ○돌다리 한때 380여개 소주는 촌락을 형성하면서부터 수향이었던 모양이다.기원전 500여년,오나라를 세우고 합려성을 쌓으면서 벌써 운하와 수문들이 종횡했다.위의 시에서 말한대로 작은 운하들이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하얗게 분칠한 벽들이 푸른 물에 잠기는 그림을 그렸다.지금은 현대화된 돌이나 시멘트 다리로 170여기를 헤아리지만 당나라때는 돌다리,나무다리 380여기를 헤아렸다고 한다.그래서 원나라때 북경의 희곡가인 마치원이 강남을 둘러보곤 그의 산곡 ‘천정사’에 저 명귀를 남기지 않았던가? ‘소교,유수,인가’ 올망졸망 다리에 졸졸 물,그리고 옹기종기 오두막.전형적인 수향이다.그런데 그 수향이 소주 성내에도 보이지만 실상 수향은 외곽의 향진 어쩌면 200여 군데나 되는 작은 수향들이 소주를 포위하고 있다. ○현재 유원 등 41곳 남아 소주 동남쪽 27㎞에는 명대 건축이 가장 많은 동리,소주 동쪽 25㎞에는 춘추때 오왕 합려의 이궁이 있었다는 늑직,다시 소주 서쪽 10㎞에는 태호와 천평산이 만나는 목독 등이 펼쳐져 있는데 이들은 모두 올망 다리,졸졸 물이다. 소주의 성내에는 옛날 관가나 부호들이 잘꾸며놓은 화원,이름하여 ‘원림’이 흥청망청이다.지금도 졸정원·유원·망사원·사자림·창랑정·환수산장 등을 비롯,41군데나 버티고 있지만 원림이 한창이던 송·원대에는 188군데나 되었다고 한다. 그 원림은 작지 않았다.큰 것은 우리나라 창덕궁의 비원 크기요,조경 또한 오밀조밀하다.가산에 정자·누각·호수에 굽이굽이 물길.늘어진 버들에 향기로운 계수.그래서인지 그 고을에는 비단 천지다.비단 따라 소수는 박물관을 챙기기에 이르렀다.옳지,환쟁이가 몰려들기 마련이다.명나라 가정 연간에는 심주·문징명·당인·구영 등 소위 ‘명4대가’가 소주에 살면서 ‘오문화파’를 형성하기에 족했다. 이토록 아름답고 축축한 수향은 많은 문인을 배출해서 문인의 못자리가 됐다.소주에서 태어난 문인으로 그 시대를 주름잡던 사람만도 수십명이다.중당에 현실파 시인인 장적(767?∼830?)을 비롯,만당때 풍자산문의 대가 육구몽(?∼881?)·북송때 ‘악양루기’로 이름을 떨친 범중엄(989∼1052)·남송때 호방사를 썼던 섭몽득(1077∼1148)·남송때 전원시를썼던 범성대(1126∼1193),명나라때는 시인 고계(1336∼1374),시인이자 화가였던 당인(당인·1470∼1523),희곡가요 소설가였던 풍몽룡(1574∼1646),명말청초의 희곡가 이옥과 소설평론가 모종강,그리고 탁월한 평론가 김성탄(1608∼1661),청대의 희곡가 우동(1618∼1704)·시인이자 시론가인 심덕잠(1673∼1769),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남사’의 발기인 류아자(1887∼1958)와 소설가 섭성도(1894∼1988)등이 있다. 이들은 대체로 반고전주의의 낭만주의나 진보적인 혁신주의라는 두가지 공통분모를 보이고 있다. 소주를 유람하고 소주를 찬미했던 문인은 헤아릴수 없다.그중에도 벼슬이나 교육을 위해 장기 체류했던 문인도 적지 않았다.당나라때 대시인이었던 위응물(737∼791?)과 백거이(772∼846)가 여기서 자사를 지냈고,북송때 시인으로 범중엄의 정치혁신집단을 따르다가 소주에 은거했던 소순흠(1008∼1048),청말의 사상가요 경학가였던 유월과 장태염이 모두 국학 강습을 위해 여기서 만년을 보냈었다. 그러나 소주에 남은 문학유적은 그 찬란했던 역사에비해 쓸쓸하리만큼 황무했다.지금 몇군데 팻말이 꽂히고 기념관이 서고,문인의 고택이 중수되었지만 모두 최근의 일이다. 그중 범중엄의 고향인 천평산 서쪽 기슭에 1989년 가을,범중엄 출생 1천년을 기념하는 비방을 세운 것이 대표적이다.그 이름을 ‘우락방’이라 함은 그의 명작 ‘악양루기’에서 ‘천하 사람들이 걱정하기전에 먼저 걱정하고,천하 사람들이 모두 즐긴뒤 내가 즐긴다(선천하지우이우,후천하지락이락)’를 따낸 것이다.뜻도 뜻이려니와 온통 단풍나무의 숲에서 태호를 굽어보는 명승절경이라 금상첨화였다. ○모두가 혁신주의자 또 소순흠이 1044년,소주에 은거할때 당시 오군 절도사의 별장이었던 것을 4만냥에 사들여 그를 ‘창랑정’으로 명명했으니 옛날 초나라 굴원이 조정에서 쫓겨나 방랑할때 썼던 ‘어부사’속에서 제목을 딴 것이다. 이밖에 소주시 복판 마의과항에는 유월이 살던 ‘곡원’이,북사탑에서 멀지 않은 쌍하화지에는 당인이 살던 유적이,소주 서쪽 화성신촌에는 당나라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시로 이름을 떨친 한산사가,소주 남쪽 소복공로옆에는 당인의 무덤이,소주 동남쪽 교외의 여리와 시내 현교항에는 유아자와 섭성도의 생가와 기념관이 각각 따로 있다.
  • 기행문학 거장 서하객의 강음(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8)

    ◎기인의 거룻배 드나들던 선착장엔 물이끼만/험산심곡 떠돌며 쓴 「서하객유기」 실록문학의 백미/황산자락 전쟁유물에 처절한 비명소리 들리는듯 세상에는 닮은 꼴도 많다.나라의 넓이나 지역의 대소를 막론하고 남북의 대치가 아니면 동서의 갈등이 있다.땅덩이가 클수록 그 예는 더욱 심각하다. 중국에는 양자강을 두고 강남과 강북의 차가 현저하다.같은 강소임에도 남북의 차별은 심했다.소남사람은 소북사람을 깔보며 소북사람은 소남사람을 매끄럽다 흉을 본다. 소남사람들은 자기들이 중국에서 제일 잘 산다고 뽐을 낸다.그도 그럴것이 최근의 소득조사에서 중국 최부의 농촌으로 강소의 강음과 무석이 올랐는데 그 모두가 강남이다.그중에도 강음의 화서촌은 그 소득이 전국 최고,「강남제일촌」으로 불리는데 세대당 1년 저축고가 인민폐로 10만원대(한화 1백만원상당)라고 한다. 무석에서 정북으로 한시간쯤 달렸을때 오랜만에 산이 보였다.강음박물관을 돌아보고 바로 뒷산을 올랐다.황산이란다.황산을 중심으로 서쪽에 서산,동쪽에 마안산,동남쪽에아산….모두가 양자강 남쪽 기슭에 물막이로 선 야산들.그러나 삼국시대부터 오나라의 강토를 지키는 요새로서 그동안 태평천국,신해혁명,국공전쟁 등 근대사에 승패를 가름하던 격전지였다.지금도 황산의 정상에는 철근 콘크리트 9층의 망강루가 우뚝 솟았고,망강루 북녘 기슭에는 일찌기 아편전쟁때 영국함대를 노리던 포대가 남아있고,남쪽 산자락에는 국공전쟁때 홍군이 전공을 올린 기념으로 「해방군도강기념비」가 오벨리스크모양의 높다란 첨탑으로 서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필자는 망강루를 올랐다.굽이치는 양자강이 망강루를 허리삼아 휘감았다.포대 서원으로 강북의 정강을 잇는 장강대교의 공사가 한창인데 휘 한바퀴 돌아보는 안막에는 누런 황금 벌.과연 옥토 낙원으로 김이 무럭무럭한 느낌이었다.불현듯 아까 강음박물관에서 보았던 대상의 하얀 이빨,그 화석이 생각났다.2만∼3만년전의 그 화석이 글쎄 여기서 멀지않은 저쪽 청양땅에서 출토되었다니 이 땅의 속살은 얼마나 까맣게 익었을까? 나그네는 서둘러 강음을 떠났다.강음에서 다시 무석으로 돌아가는 길가 마진이란 마을이 가고 싶어서였다.겨우 20분쯤 달렸을때,왼쪽 노변에 아닌게 아니라 커다란 안내판이 우람하게 서있다. 「서하객고향­마진」이라고. 또 한번 필자의 본병이 도진 것이다.그것은 좋아했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울렁거리는 그 병 말이다.그 사람,서하객(1587∼1641)은 필자보다 몇곱절 역마살을 타고난데다 여행기는 물론 암석·고산·하천·화산등의 자연관찰을 통한 지리학 연구에 세상이 놀랄만큼 공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의 본명은 굉조,호가 하객이다.바로 마진고을 침당하옆에 있는 남양지라는 작은 부락에서 태어났다. 중국문학사에서 유기의 지위는 대단했다.단순한 여행기가 아니었다.선비가 여행기를 통해 정치·사회를 관찰하는가 하면 자연지리를 기록함으로써 자기의 포부를 펴거나 우주의 섭리를 터득했다.그래서 시인 묵객치고 유기 한편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는 평생을 두고 벼슬길에 기웃거리지 않았다.스물두살때부터 시작해서 쉰다섯살,그가 죽을 때까지 꼭 34년동안,그는 단 한개의 지팡이와 한장의 이불을 메고 강소·절강·안휘·산동은 물론 멀리 섬서·호남·광동·광서·귀주,운남 등 16개성,더구나 험산심곡을 헤맨 산새요,원숭이요,물고기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는 분명,기인이었다.가만 앉아있어도 먹고 살 걱정이 없을만큼 넉넉한 살림임에도 그 따뜻한 집과 어진 아내를 마다한 채 한닢 거룻배를 타고 물길 닿는대로 강남과 영남을 떠돌더니 기암과 괴석에다 화산과 지진이 불시로 천지를 폭발하고 천지를 갈라버리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서남지역의 험산준령을 밟았다. 우리나라 김정호 비슷하게 탐험적 떠돌이였던 그는 40여만자의 「서하객유기」를 남겼는데 아깝게도 원저는 2백만자가 훨씬 넘는 대작이었다.일기체로 기록된 그 유기는 인간의 극한을 그린 실록문학으로서 최고봉임은 물론 암석학·지질학·지도학의 기초를 닦은 과학서로도 그 의의는 파격적이다.특히 그는 유기에서 석회암의 침식현상인 캐스트(cast)를 발견했고,양자강의 원류를 곤륜산 남쪽인 금사강으로 단정한 것은 모두 지리학적인 발견으로 학술사에 기록된다. 무엇보다 그의 유기는 생동한 묘사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들 수 있다.광서·운남등지에 산재한 동굴이나 동굴속의 종유석,그 핍진한 소묘는 문학가의 상상과 과학자의 투시를 융합 성공한 것이다. 그는 동굴속의 종유석을 이렇게 기록했다. 「정측홀도수일엽,평기반공,외여당문,주적대,상하빙허,각수십장,권서현철,박제선시,엽간분개공대,야안지결지(여유일기이에서) (천장에서 갑자기 커다란 잎새 한장 거꾸로 달랑거렸다.반공에 달린 시렁이 밖으로는 문과 기둥을 마주 본 채 위 아래로 각각 수십길을 서로 기대더니 엷은 매미의 날개처럼 그렇게 널찍히 매달려 있고,잎새 사이마다 커다랗게 뚫린 구멍은 마치 동그란 눈동자같았다.) 남양지는 들녘 복판에 있는 작은 부락.서하객의 고택은 물론 최근에 복구한 것이지만 기품이 당당했다.입 구자 네모꼴 가택이 200평은 족히 넘을 법한 민가.그는 여기서 낳고 여기서 성장했다.그의 34년에 걸친 탐험의 베이스 캠프도 바로 여기였다.그 탐험의 떠돌이는 갔지만 그의 손때가 묻고 그의 족적이 찍힌 두가지가 필자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하나는 그집 뜨락에 400년의 수령을 자랑하고 있는 한그루 나한송과 또 하나는 그 집 대문밖 동쪽 100여m쯤 침당하옆으로 지금도 고색 창연하게 남아있는 선착장과 진솔 단출한 공수식 돌다리였다.하객이 평생토록 타고 다녔던 거룻배,그 배가 정박하고 출항하던 곳이 지금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희한했다. 그 두가지는 그 집 대문 서쪽 100여m쯤에 대궐처럼 높은 까만 기와 담장에 에워싸인 그의 무덤,「명 고사하객서공지묘」라는 묘갈에 큼직한 봉분,계화의 향기로 전중 단아한 묘역보다 더욱 눈길을 끌었다.
  • 칼 만드는 쇠,「제몸에서 녹이 슨다」(박갑천 칼럼)

    『냉수에 이 부러진다』는 속담이 있다.이치에 전혀 맞잖는 말을 하는데 쓴다.일본이 독도를 제것이라 선소리할 때마다 떠오르는 속담이다. 『생가시아비 묶듯』이란 속담은 「동언해」에도 보인다.자기에게 너그럽다 하여 버릇없이 굶을 이른다.일본속담에도 『부처님 얼굴도 세번(불の 안も 삼도)』이라는게 있다.제아무리 굼슬거운 사람도 짬날때마다 건드리면 못견딘다는 뜻이다.그들이 독도를 제것이라 우기는 떼거지야말로 과거의 침략주의 도리깨침 꿀꺽거리며 부처님얼굴 건드리는꼴.정말 화가 난다. 옛 이스라엘왕 솔로몬은 지혜로운 사람이었다.그래서 두여인이 한아기를 서로 제것이라 하는데 명쾌하게 진짜를 가려준다.그렇긴해도 재판받게 됐을 때의 진짜어머니 심정은 어땠을까.함께 선다는건 격이 같아짐을 뜻한다.그래서 진짜어머니는 줄다리기로 뺏지 못하고 놔줌으로써 가짜와 격을 달리한다.솔로몬의 지혜 못잖은 옛지도들이 있건만 국제사회에 「동격」으로 비치게 하자는 일본의 뜨께질.맞선논의 자체를 「성공」으로 보는 것이리라.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선 「놔줘버리면」 고만일뿐 솔로몬의 지혜도 꼭뒤눌려 있다. 새해 일본 벳푸(별부)에서 한·일정상이 만날때 이걸 「화제」로 삼는다고 전해진다.그야말로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하는(지록위마)』 오만이다.그건 환관이었던 조고가 제세력 알아보고자 벌인 베거리였으니 사슴이라 바른말했던 사람들은 모조리 보복받을밖에.그결과는 조고뿐 아니라 나라까지도 망하게 하지만.지구촌 알부자가 되어 간이 부푼 그들은 지금 그 「조고」가 되어있다.온갖 먼장질로 지구촌을 노려보면서.묵은 상처까지가 욱신거린다. 「장자」(서무귀편)에 오나라 왕과 장강 건너편 산에 사는 원숭이얘기가 나온다.왕행렬을 본 원숭이들은 도망가는데 유독 한마리가 교묘한 제재주를 보인다.쏘는 화살도 잽싸게 잡아내면서.그러나 일제히 쏘아대는 수십개화살에 맞아죽는다.이 우화는 잔재주 믿는 교만의 말로가 어떤 것인가를 알린다.일본에도 『제몸에서 나는 녹』이라는 속담이 있다.쇠는 사람죽이는 무기로 되지만 마침내 제몸에서 스는 녹으로 썩는다.그게 오만의 죄과다. 일본은 더이상 제국주의망령의 그림자를 세계에 비치지 말라.「오만한 원숭이」꼴로 되지않기 위해.〈칼럼니스트〉
  • 「선물 안주고 안받기운동」을 보며(박갑천 칼럼)

    오나라는 중국남쪽의 더운지방이다.그래서 그나라 소들은 해만 뜨면 숨을 헐떡인다.해뜨는 것이 지겨운 이 지방 소들은 달뜨는 것만 보고도 헐떡인다는 것이다.오우천월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이 말을 한사람은 진나라 무제때의 만분이다.무제는 막 발명된 유리를 창문으로 이용하고 있었다.불려나가 무제와 마주앉은 만분은 사방의 유리를 보면서 창문을 열어놓은 걸로 착각했다.그는 난처해했다.몸이 약하여 바람만 쐬면 감기를 며칠씩 앓았기 때문이다.무제도 그걸 알았으므로 유리창문이라는걸 설명하고 웃었다.만분은 엎드려 사죄한다.『오나라 소가 달을 보고도 헐떡인다는 말은 신을 두고 한말 같습니다』(「세설신어」:언어편).『자라 보고 놀란 놈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하는 우리속담과 비슷하다.놀라고 신물나고 한일에 미리부터 겁을 먹는 현상을 이른다. 연말연시나 명절을 앞두고는 정부를 비롯한 일부 기업체에서 「선물 안주고 안받기 운동」이라는 것을 여러해전부터 벌여온다.이걸 보면서 생각해본 「오우천월」의 고사이다.그 뜻이야백번 헤아리고도 남는다.내키지 않는데도 「성의」를 표시해야 하는 악습이 관행화돼온 그동안의 사정 때문이다.업자들의 경우 그걸 안하면 잔판머리 털썩이잡을 수도 있다.아랫사람의 경우도 그렇다.안하고 넘기자니 뭔가 찜찜해진다.윗분한테 밉보여 실살을 잃게될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이는것 아니던가.그래서 마침내 선물이기보다는 뇌물의 성격으로 변질돼버린 측면이 짙다.따라서 이「운동」은 우선 안해도 되는 명분을 주는 「면죄부」쪽에 뜻이 있다고 할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리되면 「선물」이라는 말의 처지가 공칙스워진다.마치 「잘못된 일」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선물이란 인정의 가교 구실을 하는 인생살이의 아름다운 덕목이란건 옹춘마니도 안다.그러니 권장될일이 아니던가.한데「뇌물」이나 「강요된 성의」가 두려워 없애기로 든다면 달을 보고 헐떡이는 오나라 소의 경우와 같아진다.그걸 없앤다고 잘못된 관행이 없어지겠는가.그러므로 해와 달은 다르다는걸 알리면서 구별짓는 노력이 이치에 맞는 일의 순서라고 할것이다.흉악범이 칼로 살인을 했대서 칼을 없애자고 할수는 없다.예식장 결혼식의 폐단이 많다하여 결혼식을 없앤다 할수도 없다.어린애 유괴범이 친절을 가장했다 하여 친절이란 덕목을 낮잡아 볼수 있겠는가.그렇다고 할때 잘못된 현실의 원인을 찾아 다스리는 자세가 소망스럽다.순수한 뜻의 선물이란 주어서 보람되고 받아서 기쁜것.그런 덕목이 「잘못된 것」으로 비치게 된 현실이 서글프구나.
  • 솔잎음료 시장이 후끈 달았다는데(박갑천 칼럼)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잎지거늘/솔아 너는 어이 눈서리를 모르는다/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그로하여 아노라』.고산 윤선도의 오우가에 나오는 솔 예찬가다.솔은 윤고산만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수명이 길면서도 잎은 사시장철 푸르렀기에 옛사람들은 절조·장수·번영에 빗대면서 솔을 예찬했다. 한자 「솔송=송」은 「목」과 「공」으로 이뤄졌다.나무 가운데 지체높은 존재임이 나타난다.그에 대한 일화도 전한다.오나라의 정고란 사람이 자기 배위로 소나무가 자라는 꿈을 꾼다.꿈얘기를 들은 어떤 사람이 말했다.『당신은 18년후 삼공의 한사람이 되리다』.「송」자가 「십팔(목)」과 「공」으로 되었기 때문이다(「오록」). 우리말 「솔」은 거슬러오를때 「□」이 뿌리말로서 「살다(주)·살(육)·수리(정수리)…」따위와 핏줄을 함께한다.전국의 토박이땅이름에 보이는「살·사라·사로·사리·설·서라·서리·솔·소라·소래·소로·소리·술·수라·수리…」가 다 「□」에서 출발되어 뜻에서 「삶」과 관계를 갖는다.그러므로 나라의 산을 「철갑두르듯」 덮고있는 솔은「국토의 살­살나무­솔나무­소나무」였다 할것이다. 초근목피로 보릿고개 넘기던 시대의 그「나무껍질」은 소나무 껍질속의 흰살이었다.그리고 그땐 솔잎도 먹었다.그솔잎은 옛날 도가들의 신선식이기도.「순오지」에 쓰인 수나라장수 장손성얘기도 그를 말해준다.장손성이 여산(이산)에서 사냥하다가 털복숭이여인을 만났는데 나뭇가지로 날아오르는 품이 나는 새와 같았다.그여자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진시황 궁녀인데 항우가 함곡관 넘던날 산속으로 피해와서 지금껏 솔잎을 먹고 살았소』.말하자면 1천년도넘게 살아왔다는,『번갯불에 솜구워먹은 소리』다.어쨌거나 솔잎의 장수효과 한번 공골차구나 싶다. 건강식품으로 알려지면서 솔잎마실거리 시장이 달아올랐다 한다.이름난 회사들이 고개 내밀고자 종부돋움하고 있다는것.그걸로 지난해 66억여원어치를 판 한업체는 올해 1백50억원어치를 팔 계획이라니 그 열기를 짐작할만하다.그건 좋지만 외목장사하는 세상도 아니고 솔밭이 메숲진것도 아닌데 단거리 솔잎은 어찌 조달하는지.「새로운 인간송충이」로 되고 있지나 않는 것일까.「지봉유설」(훼목부)의 다음 글귀도 심기를 불안하게 만든다.『소나무와 잣나무는 잎으로 뿌리를 보호한다.그래서 잎을 자르면 다시 가지가 나지 않는다』.
  • 「삼국지」 역사기행/공학유 지음(화제의 책)

    ◎3년간 돌아본 삼국지 주요 무대 답사기 소설 「삼국지」의 무대가 된 주요 장소를 답사,소개함으로써 소설의 흥취를 한껏 북돋워주는 기행서·유비·관우·장비 세 사람이 도원결의한 하북성 탁주시에서 출발,삼국통일의 마지막 싸움터가 된 오나라 수도 건업(현 남경)에 이르기까지 성14곳,도시 1백여곳이 등장한다. 지은이는 역사 현장에 남은 유적들을 둘러 보며 등장인물에 얽힌 일화를 들려준다.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소설 내용을 단순히 되씹어보는 것이 아니다.지은이는 소설에서 알 수 없었던 수수께끼를 풀어주고 새로운 발견을 곁들임으로써 독자들의 흥미를 고조시킨다. 예컨대 「조조가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질까봐 두려워서 가짜 무덤 72개를 만들었다」는 기록은 사실일까.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촉.오 연합군에게 대패할때 조조군 진영에 퍼졌다는 전염병은 무엇일까… 등등이다. 언론인 출신 역사가인 지은이는 3년동안 2만㎞를 돌아 이 답사기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주영 등 옮김,이목 8천원.
  • “한국은 백인종지역 공산국가”라?(박갑천 칼럼)

    『오나라 시골에 있을때의 여몽은 아니로군』(비복오하아몽).노숙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 여몽에게 한말이다. 여몽은 관우의 형주 성을 뺏어낼만큼 뛰어난 무장이었으나 처음에는 학식이 모자랐다.그런 여몽을 장군으로 올려주면서 손권은 무인도 학문을 익혀야 한다고 타이른다.그로부터 그는 공부를 한다.그러다가 손권의 진영에서 학식이 가장 빼어난 노숙을 만난 것이다.여몽은 노숙에게 이런 말도 한다.『선비란 헤어져서 사흘만 지나면 눈을 비비고 서로 대할만큼(괄목상대)진보를 보이는 법이거든』.「괄목상대」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가끔씩 외국교과서나 소개책자등에 한국을 잘못써놓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다.그런데 이번에 교육부가 국회에 내놓은 국정감사 자료 가운데도 그런게 끼여있어 실소와 고소를 자아내게 한다.한국은 이제 오나라 시골에 있을때의 여몽이 아니다.한데 어질더분한 전란속의 50년대 한국을 오늘의 한국인양 되뜨게 소개하는 나라들이 아직도 있다니.지구촌에서 『30년간 성장률 3위,GNP·교역량 12위』(통계청 발표)라는 괄목상대해야할 나라인데 말이다. 잘못된 인식의 유형도 여러가지다.냉전시대의 논리를 이어받는 에푸수수한 표현이 그첫째다.6.25는 북침이라느니 한국은 미국의 꼭두각시라느니 하는따위.둘째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수용못한 내용이다.1인당 국민소득 2백50달러 이하라느니 서울인구 1백만이라느니 하는 따위.셋째는 처음부터 잘못 입력된 것을 바루지않은 경우이다.한국은 백인종지역이라는 등의 얄망궂은 표현들.넷째는 악의의 선전물에 속아넘어간 사례이다.공산주의 국가라는가 하면 독도는 일본영토라지 않았던가. ㄱ을 떠나 ㄹ로까지 옮겨갔는데도 계속 ㄱ으로 우편물을 부치는 기관이 있다.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한지가 언젠데 대리라 써보내는 우편물의 경우와 같다.이는 각주구검의 어리석음.배타고 가다가 칼을 강물에 빠뜨리고서 빠뜨렸을때의 뱃전에 표시를 해놓은 다음 배가 언덕에 닿자마자 칼을 찾는다며 표해놓은 자리에서 강물에 뛰어들더라는 초나라 사나이.칼빠뜨린 곳에서 지나온게 얼만데.한다한 나라들이 이 사내같이 덩둘하지 않은가.상대방의 잘못된 입력은 나에 대한 판단을 그르친다는데 문제가 있다.우선은 초나라 사내같은 나라들의 잘못이 크다치자.하지만 쫌맞게 대응못한 이쪽의 성찰도 없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 「서방 젖」맛,보통사람도 보게 되나(박갑천 칼럼)

    청파 기건이 평생 복어를 먹지 않았다.까닭을 물었더니 제주목사로 있을 때 백성들이 그것 잡는데 어려움 겪는 것을 보고 그런다는 대답이었다.이같은 「용재총화」와는 달리 표현한 것이 「필원잡기」.연안부사때 붕어 안먹은 청렴을 계속 돋보이고자 하는 고의가 있었다는것 아니던가. 『하고많은 생선에 복생선이 맛이냐』는 속담이 있다.좋은 것이 많건만 하필 같잖은걸 골라잡는 경우에 쓰인다.복어의 배불뚝이 덩저리를 두고나온 속담 아닌가 한다.기청파가 먹지 않았던 이유도 실상은 그 굴왕신 몰골에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생긴꼴 뿐인가.『복의 이 갈듯한다』면서 독기서린 말본새에 복을 빗대듯이 품고있는 독한번 대단하다.길이 30㎝ 자주복 한마리의 독이 33사람을 죽일수 있을 정도라지 않은가.요즈음은 없어졌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복어 먹다가 중독사했다는 보도가 적잖았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대부분의 복은 바다에서 일생을 보내지만 민물에도 나타나는 것이 황복이다.황복은 4∼5월에 알을 낳기 위해 강으로 올라온다.하지만 난새끼들은 바다로 내려가서 자란다.그러므로 황복이 강으로 오는 것은 고향찾는 여행길.사람들은 그걸 잡아먹는다.천하별미라면서.동파소식도 양자강 황복을 먹으면서 죽음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고 찬탄했을 정도다.요리 잘못한 것 먹다가 죽기도한 시대 얘기가 아닌가. 이 황복을 한문으로는 하돈·강돈이라 한다.못생긴 꼬락서니하며 우는소리가 돼지 같다해서 붙은 이름이라던가.서유구의 「전어지」에 의할 때 『등이 청흑색이고 노란 무늬가 있으며 배는 희고 광택이 없다.한식 때는 이미 와있고 복숭아꽃이 피면 독이있어 먹을수 없다.건드리면 화를 내어 부풀어 오른다』.여러 별명 가운데서도 재미있는 것이 서시유.경국지색이었던 서시의 이름을 갖다붙인 것은 그여자로해서 망한 오나라 사람들이었을까.살색깔이 젖색이어서라고도 하지만 미인의 젖에 맛붙여 빠져들면 나라가 망하듯이 그것 잘못먹으면 사람이 죽는다는 뜻의 비유였던 것 아닐는지. 황복값은 황금값이라는 말이 미식가들 사이에 오고간다.환경오염에 겹쳐 마구잡이로 잡아먹음으로 해서 씨가 마르다시피귀해졌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한데 대량생산할 수 있는 양식기술을 한국해양연구소가 개발했다는 소식이다.인젠 웬만한 주머니 무게로도 달착지근한 서시의 젖무덤맛 볼수 있게 될 것인지.
  • 물·물·물… 가까운 고마움 잊어서야(박갑천 칼럼)

    눈이 있다 해도 너무 큰 대상은 보지 못한다.「절대자­섭리」의 존재를 못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어김없이 주야와 사시를 운행하고 있건만 볼 수가 없다.너무 큰 것이다.땅바닥의 불개미가 과연 사람을 보는 것일까.밟으면 죽게 돼 있는 존재인데도 못보는 것과 다를 것 없다 하겠다. 보지 못하는 것은 또 있다.너무 가까우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주먹을 눈으로 바싹 갖다대보자.그게 주먹인지 돌인지 알길이 없다.눈동공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 속눈썹이건만 그게 안보인다.공기는 좀 가까운 곳에 있는가.하건만 보지 못한다.시각으로서만이 아니라 지각으로서도 그러하다.못보며 잊고들 산다. 가깝고도 소중한 존재를 그렇게 바로보지 못하는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조상이나 어버이 은혜도 그중 하나라고 하겠다.『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인지 흔히들 몽총하게 넘겨버린다.없으면 죽게 돼 있는 공기의 존재를 잊고 사는 것과 같다.그게 사람의 얄싸한 속성이란 말인지. 「장자」에 이런 우화가 보인다.­장주가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러간다.가는 도중 수레자국으로 패어 있는 곳에서 물고기가 그를 부른다.물고기는 자기는 동해에 살았는데 이꼴이 되었다면서 물을 조금만 길어다가 제목숨을 살려달라고 한다.그에 대해 장주는 오나라나 월나라왕한테 부탁해서 서강물을 끌어다가 살려주겠노라고 말한다.물고기는 섟김에 버럭 내뱉는다. 『내게는 항상 있던 것이 없어진 겁니다.나는 이제 있을 곳이 없어졌다 이 말입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물일 뿐입니다.그런데 뭐라고요? 그럴바엔 차라리 건어물 가게에 가서 나의 몰락한 모습을 찾으시지요』 이는 감하후가 세금이 들어오면 3백금을 빌려주겠노라고 시적거리자 분통터져 한 비유이긴 하다.또 여러가지 뜻으로 해석되고도 있는 터다.하지만 오늘의 인류가 어느 땐가 그 물고기의 말을 그대로 되뇌게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당연히 항상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물을 잃은 물고기의 비탄.지구촌물은 갈수록 죽어간다.마르고 넘치고 한다.지금 우리에게 닥친 가뭄도 물을 어떻게 생각하고 다룰 것인가를 깨단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겠다. 가까운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한다.「장자의 물고기」신세가 돼서의 후회는 늦은 것 아니겠는가.
  • 외언내언

    손무는 제나라 태생의 병법가. 오나라 왕 합려를 만난다. 합려가 그의 병법 13편을 다 보았다면서 군대 정돈하는 것을 한번 시험해 보여주라고 한다. 『여자들을 데리고도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러지요』. ◆궁중의 여자들을 모으니 1백80명. 손자는 그를 두 대로 나눈 다음 임금이 사랑하는 궁녀 두 사람으로 각기 대장을 삼았다. 손자가 영을 내린다. 『내가 앞! 하면 가슴을 보고 왼편하면 왼손을 보며 오른편 하면 오른손을 보고 뒤! 하면 등을 본다. 알았는가?』 『알았습니다』. 여러번 설명을 한 다음 북을 치며 『오른편!』 했다. 까르르르. 여자들은 모두 웃었다. ◆『약속이 명백하지 못하고 명령에 익숙하도록 거듭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죄다』. 그러고서 손자는 다시 되풀이 설명했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왼편!』했다. 나온 반응은 까르르르. 『이미 약속을 명백하게 알면서 영에 따르지 않은 것은 사병의 죄다』. 손자는 좌우 두 대장을 베어 죽이려 했다. 임금이 황급히 뛰어내려와 이를 말린다. 『장은 군중에 있을 때 임금의 명령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고서 참한다. 「사기」의 손자ㆍ오기열전에 나오는 얘기다. ◆그 다음 상황은 불문가지. 영이 똑바로 선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본다. 정해진 명령에 익숙해지도록 거듭 알린다는 것이 그 하나. 그것이 지켜지게 하기 위하여서는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것이 그 둘이다. 무슨 일이든 정하기는 어렵게 하되 그 시행은 서릿발 같아야 함을 가르치는 고사. 쉽게 정하고서 여자들이 웃는다 하여 영을 거둔다면 신(기강ㆍ권위)은 무너진다. 『백성에게 신이 없으면 사회가 존립 못한다』(민무신불립)고 공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한데 우리 사회에는 쉽게 정하고 쉽게 거두어버리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더러는 어렵게 정한 일까지 번복시키는 사례도 생겨나고. 공휴일 축소안 후퇴의 경우는 그 어느쪽일까. 어쨌든 신에 금이 가게 한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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