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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어촌 청소년지원재단 9월 성립/문화진흥 5개년계획 주요 내용

    ◎지방문예기금 1천억원으로 대폭 확대/연극전용 「정동극장」 내년까지 완공 추진 문화체육부가 23일 발표한 「새문화·체육·청소년진흥 5개년 계획」은 김영삼대통령 정부의 문화·예술및 체육·청소년 정책을 집약한 것이다. 문화체육부는 이번에 발표된 내용이 지난 90년의 「문화발전 10개년 계획」과 91년의 「청소년기본계획」,지난해의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중의 「문화및 체육청소년 부문」을 시대변화에 맞게 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 계획연한을 현정부의 임기에 맞춰 5년으로 잡은 이유는 실현가능한 사업만을 국민에게 제시하겠다는 의지 때문이며 그만큼 책임있게 추진할 사업들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문화체육부는 특히 문화부문 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등 재야 문화·예술단체의 의견을 수용하는등 문화·예술계의 여론을 폭넓게 수렴했다고 밝혔다. 주요사업은 다음과 같다. ▷민족정기의 확립◁ ▲경복궁 복원연도를 당초의 99년에서 97년으로 앞당긴다 ▲국립중앙박물관 이전계획을 올해안에 마무리하고 95년까지 부지선정과 설계를 마친다.총독부청사는 박물관 이전후에 철거한다 ▲전통음악의 표준음·음정을 연구하고 악기연구소를 운영해 전통음악을 표준화한다.국악교육 자료를 제작,보급하고 「국악사랑」국민운동을 펼친다▲「동학혁명 1백주년 기념관」건립을 비롯,관련 문화축전을 지원한다▲아산 현충사 안에 「임란전사 박물관」을 세운다▲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무형문화재 종합전수시설」을 짓는다. ▷지역문화 활성화◁ ▲국립박물관을 1개 시·도에 1관이상 짓는다▲지방문예기금을 현재 5백억원에서 1천억원으로 늘린다. 문화환경개선 ▲한국문화정책연구원을 설립한다 ▲연극 전용극장인 정동극장을 내년까지 완공한다 ▲문예진흥기금을 97년까지 3천억원 조성한다. ▷문화산업개발◁ ▲가칭 「종합영상산업진흥법」을 제정,영상산업을 중점 육성한다 ▲다목적 전자서적을 개발하고 전자서점을 설치한다 ▲전통놀이·우리 역사의 위인등을 소재로 한 컴퓨터게임 개발을 지원한다 ▲문화예술 정보자료를 생활정보망과 연계해 「안방자료관」을 실현한다 ▲한글 주요 서체및 컴퓨터 글꼴(폰트)을 개발한다. ▷남북문화교류 활성화◁ ▲광복50주년을 맞는 95년 광복절에 남북공동 민속잔치를 연다 ▲통일국어대사전 발간을 97년으로 앞당긴다 ▲한국문학 번역상을 연내 제정한다 ▲서울야외조형예술제·제주국제영화제를 격년제로 연다. ▷체육부문◁ ▲농어민 문화체육센터를 5년간 13곳 짓는다 ▲농구·배구 가운데 한 종목을 프로화하는 등 프로경기를 활성화한다 ▲학교운동부 육성기금을 97년까지 2백40억원 조성한다 ▲소년체전 출전경비를 전액 국민체육진흥기금에서 지원하는등 소년체전을 활성화한다 ▲체육연금제도를 개선해 일정한 나이가 돼야 연금을 받게 하며 연금지급 상한액을 예외없이 적용한다 ▲2002년 월드컵,2006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 나선다 ▲통일축구대회를 여는등 남북체육교류를 적극 추진한다 ▲세계 한민족축전행사를 청소년 위주로 바꾼다. ▷청소년부문◁ ▲기금 1백억원으로 농어촌 청소년지원재단을 설립한다 ▲농어촌 출신 학생을 위한 도시내 학사를 짓는다▲유스호스텔을 33개로 늘리고 체인화해 건전한 가족숙소로 활용한다 ▲세계청소년회의(WAY)총회를 96년 9월 서울에 유치한다 ▲학생들을 1개이상의 단체에 가입토록 권유한다 ▲학교 특별활동반과 지역예술단체간에 자매결연을 하도록 한다 ▲「남북청소년 어울놀이」행사를 방학중 1주일 열도록 북측에 제의한다.
  • “문화예술 정부통제 탈피/자생력 갖게 지원 확대 방침”/김 대통령

    김영삼대통령은 20일 『정부는 앞으로 문화예술영역에 관한한 규제와 통제를 벗어나 자생력과 창조적 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과 협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대통령은 이날 낮 청와대에서 신영균예총회장등 문화예술계 원로 69명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우리 국가발전은 두가지 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하나는 경제적으로 국제경쟁력을 향상시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예술·도덕정신을 바로세워 도덕문화국가를 세우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이같이 말했다. 김대통령은 『근대국가에서는 부국강병이 최고의 가치였으나 미래사회에서는 문화력과 도덕성이 최고의 가치가 될 것으로 믿는다』며 문화예술창달선도에 최선을 다해줄 것을 당부했다.
  • 재야단체 「민예총」 법인등록 서류제출

    재야 문화예술인단체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이 사단법인 등록을 위해 9일 문화체육부에 관련서류를 제출했다. 민예총은 지난 2월말 열린 제5차 총회에서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고 현정부의 개혁의지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재야활동을 그치고 제도권내에서 활동한다는 입장을 밝힌 뒤 사단법인화를 추진해 왔다.
  • 입지 좁아진 재야(개혁바라몌 달라지는 세상:15)

    ◎“도덕적 문민정부”… 투쟁론거 상실/「적대적」 시각서 「경쟁관계」로 전환 김영삼정부 출범후 재야가 느끼는 공통적인 정서는 「위기의식」이다.이른바 우파에 속하는 「자주·민주·통일 진영」이나 좌파로 불리는 「민중·민주계열」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문민정부의 강한 개혁의지및 실천과 도덕성,그리고 이에대한 국민의 높은 지지도 때문이다.사실 재야가 그 뿌리로 내세우고 있는 4·19의거,5·18광주민주화운동을 『현정부는 이들의 연장』이라고 규정 지은 김대통령의 태도는 재야수준과 맞먹는다.재야 스스로 설땅을 잃을만한 획기적인 역사규정인 셈이다. 도덕성은 한때 재야인사들의 전유물이었다.변절의 「멍에」처럼 이들에게 터부시 되는 영역은 없다.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럼없이 정부안에 들어가 개혁의 전위에 서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이들 「참여파」인사들에 대해 재야내에서는 단 한마디의 훼절시비 조차 없다. 많은 재야인사들도 변화를 인정한다.문익환목사는 『역대 정권들은 우리의 순수한 주권행사를 반국가적인 것으로 받아쳤다.그러나 현정부는 우리가 던지는 「공」을 잘 받아주고 있다』고 말한다.정부가 바뀌어서 그만큼 대결의 여지가 없어졌다는 얘기이다. 지난 4·13 보선때 광명에서 당선된 민자당 손학규후보의 후원회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재야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박형규목사·박용일변호사·부천 성고문사건의 권인숙씨 등등. 지난달 27일 결성된 민주당 이부영최고위원의 후원회 행사장도 마찬가지였다.한완상부총리,정성철정무제1차관등 이른바 「참여파 장·차관」들이 참석했다. 정부 쪽에는 한부총리,정정무제1차관외에 이미 김정남교문수석,이신범환경관리공단이사,윤무한통치사료담당비서관,김영준교문2비서관등의 재야출신들이 개혁을 추진하고 있으며,반체제 지식인의 대명사였던 이영희교수는 통일원의 자문기구인 통일정책평가회의 회원으로,인명진목사는 부정방지위 위원으로 활동중이다. 재야의 「지류」인 민중문화예술의 모임인 「민예총」이나 환경운동연합·전교조등도 궤도 수정을 서두르고 있는 게 역력하다.정부와 대화하고국민운동으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물론 재야의 다수그룹은 아직도 이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문익환 김근태 이창복씨는 『참여를 재야의 본류로 볼수는 없다』고 지적한다.즉 아직 재야의 큰 울타리에는 백기완씨등 독자그룹과 야당에 우호적인 이우재씨등 민중당그룹,정치적 국민운동체를 지향하는 중도그룹,전로협·전농·한총련등 대중운동조직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들 다수그룹은 『김영삼정부의 변화와 개혁을 부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특히 김근태씨는 『선택적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달리 보면 현 정부의 개혁을 「적대적」이 아닌 「경쟁관계」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한쪽에선 참여가 곧 개혁이라는 논리로 뛰고있고,다른 한쪽에선 정부와의 경쟁 대열을 갖추려는 게 새정부의 개혁바람 이후 재야의 흐름이며 위상이다.
  • 건축가 엄덕문씨(이세기의 인물탐구:29)

    ◎자연이 담긴 한국적 건축문화 선도/「최상의 기능·최고의 미」 조화이룬 공간 추구/물욕없는 양심파… “대담·화기살린 구조” 정평/모두 격찬한 세종문화회관이 대표작… 데생·서악에도 빼어나 아름다운 푸른 자연을 경관으로 그 경관을 캔버스삼아 삶의 공간을 설계하는 예술가.괴테가 말한 것처럼 「단 한번도 살아보지 못할 건물을 낳기위해」원로건축가 엄덕문씨는 그때마다 모든 영혼,모든 마음,모든 정열을 그곳에 쏟아 붓는다. 하나의 건축이 지나치게 잘 꾸며졌다는 사실은 건축의 아름다움과는 전혀 별개일지 모른다.그것이 올바른 장소에 세워졌느냐,어떻게 쓰일 건물이냐에 따라 기능적인 특징을 질서정연하게 갖춰야만 비로소 최고의 미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둥근 초가지붕과 미닫이창,쪽마루와 굴뚝과 사립짝,싱싱한 소나무 숲속에 둘러싸인 삼칸두옥은 얼마나 표정이 풍부한가.여기에 에메랄드비색같은 하늘과 햇빛·한가로운 구름의 모습,바람에 흔들리는 풍경(풍경)소리조차 건축에 포함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엄덕문 건축의 언어다.이를테면 온기와 화기,개성과 낭만,무한한 자연에의 추구가 엿보일 때만 건축은 인간의 삶을 담을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이 된다는 논리다. 그는 모름지기 우리 건축계의 원로이자 현대건축의 선두주자의 한 사람이면서도 좀처럼 자신의 치적이나 업적을 앞세우는 법이 없다.겸허하게 주변에 양보하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일요화가회서 활동 다만 음악에 심취했던 일,화가 이마동 박광진씨등과 어울려 일요화가회에서 그림그리던 일만은 자랑스러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는 어쩌면 성악가가 됐을지도 모른다.「토스카」에서의 「별은 빛나건만」,도니체티「사랑의 묘약」중에서 「남모를 눈물」의 라멘토소 탄식은 그의 많은 노래 중에서도 절창으로 손꼽히는 레퍼토리들이다. 그러나 완고한 엄친은 그를 노래부르지 못하게 했고 그림물감에 손대지 못하게 했다.생전에 서양화가 이마동씨는 그의 「대한민국에서 알아줘야 할 데생실력」을 못내 아까워했고 그는 부친이 돌아가시자 취미삼아 여기로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투시도를 그릴 때도 그는 절대로 자를 대는 법이 없다.지우개로 지우지도 않는다.자를 대면 선은 죽어버린다.그래서 그가 그려온 투시도는 한폭의 그림과도 같이 삶의 여러 모습과 잔잔한 시어를 오밀조밀 담고있다. 그는 뛰어난 예술적 감각,예술적 정서를 지닌 반면 영묘하거나 민첩한 재기가 번뜩이는 수재형과는 유형을 달리한다.언제나 넉넉하고 신중하고 건실하다.마치 큰날개로 범상하는 알바트로스처럼 천천히 크고 넓게 그리고 높고 길게 나는 편에 속한다. 그는 동경유학시절 미국의 세계적인 예술건축가 F L 라이트의 데이코쿠(제국)호텔을 보고 건축의 기능과 미의 조화에 일찍이 눈떠갔다.단순한 호텔건물이 아닌 호텔의 기능을 최상으로 살리면서 현대적 건축양식과 동양의 전통미를 절묘하게 절충한 점이 놀라웠다. ○라이트작품에 감동 더구나 「라이트작품집」에 실린 「카프만의 집」은 혼도직전의 감동과 함께 그가 걸어가야할 건축의 방향과 목적을 번개처럼 일깨워주었다. 폭포가 쏟아지는 천연바위 위에 지은 이 별장은 자연 그대로의 일부였으며 건축과 자연과의 대선율적 조화를 단적으로 성취시킨 걸작품이었기 때문이다.인간이 없는 자연,자연이 없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었고 인간이 바로 이 지구상의 주인임을 각성시킨 예였다. 건축에 관한한 더 이상의 망설임이란 있을 수 없었다.건축은 도시를 형성하는 그림이었고 교치와 아치의 거대한 조형세계였다.부친을 원망하며 못내 미련을 버릴 수 없었던 음악과 미술이 그곳에 도사려 있었다.좋아하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작업에 그는 당연하게 취할듯이 빠져들어갔다. 작품을 보면 그사람의 인간됨을 알수 있듯이 그가 이뤄논 건물들은 한결같이 스케일이 방대하고 대담하고 헌칠한다. 세종로 한복판,사방 어디서 보아도 그 위풍당당한 세종문화회관의 호쾌한 선만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궁궐의 열주를 변형시킨 8각기둥과 8m나 곡선이 뻗어나간 캔틸레버,만자창살로 처리된 벽면등은 「동양최대의 문화예술전당」이란 찬사에 걸맞게 진실하고도 견실한 구조기술과 「예술적 조형미 단연압권」으로 개관당시부터 신문방송의 대대적인 기대를 모았었다. 이른바 엄덕문의 「최상의 기능·최고의 미」를 실현시킨 「세종문화회관식 건축」의 탄생이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여유만만 작작유여하다.이기심이나 경쟁심이 없어 언제나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한다.6·25직후 불어닥칠 건설붐에 앞서 낙후된 건축기술을 향상시킨다는 차원에서 후배인 김중업씨를 프랑스에 유학시킨 일화는 건축계의 미담으로 남아있다. 모두들 가난하고 절박하게 어려웠던 부산피란시절,풍산산업 김영구사장이 그에게 「프랑스 유학」을 권유했을때 그는 「나대신 재능있는 후배」를 밀었고 김중업씨가 건축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연구소에 입문하게 된 동기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홍대에 건축과 창설 그는 하나의 프로젝트가 세워지면 의욕적인 동료들을 작업에 참가시켰고 동료중의 하나가 공금실수를 저질렀을때도 수년에 걸쳐 자신의 빚처럼 갚아나갔다.또 조각가 윤효중씨와 함께 홍대에 건축과를 창설,국전 미술부문에 「건축」을 포함시킨 공로자이기도 하다. 나이 40을 넘긴 지난 60년,그가 다닌 일본 조도전대공고는 전문대 교육수준이라면서 한양대 홍대 이대에 출강하는 교수신분으로 뒤늦게 한양대 건축과를 졸업,생생한 현장경력만으로 충분히 교수자격을 갖추고 있음에도 남들이 다밟는 절차에서 특혜자가 되긴 싫다고 굳이 대학과정을 졸업했다. 많은 건축가들,이를테면 건축원로 김희춘씨와 먼저 세상을 떠난 김수근·김중업씨 등이 그들의 집을 짓지 못한 것처럼 그도 지금까지 자신이 지은 집에서 살아본 적이라곤 없다.지금도 둔촌동의 한 빌라에서 5남매를 출가시키고 부인 고희용여사와 둘이 살면서 공용택지주변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이 취미다. 한창 부흥부의 도움으로 국민주택을 지을때도 20평규모 50가구씩 50동의 배당을 받았으나 건축가의 양식으로 형편없이 허술한 집을 지을수 없다는 신념에서 2m 도로폭을 4m로,좀더 탄탄하고 실용적인 건축자재를 써서 30가구로 줄어든 바람에 업자들과 관계자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돈과는 상관없이 양심에 어긋나는 일에는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않아 그의 결벽과 청렴은 지금도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있다.오죽하면 건축가 홍순오·송민구씨가 『엄덕문이가 화를 냈다면 그를 화나게한 사람은 틀림없이 나쁜 사람』이라고 단언할 정도다. 엄덕문씨는 서울 종로구 누하동에서 태어났다.부친 엄항주씨는 경남 충무,옛통영 나전(나전)칠기의 장인으로 이왕직의 교사였고 명공 김진갑 김봉명의 스승이기도 하다.성격이 유별나고 꼿꼿하기만 한 부친의 엄한 가정교육이 그의 인격과 성격을 형성해왔다고 할 수 있다.다만 부친의 추호도 용서함이 없는 단호함에 비해 그는 「성실·정직·효도」의 가훈아래서 부모말씀에 극진히 순종하고 반듯하게 처신하여 일제시대때는 동네에서 주는 효자상을 받기도 했다.그는 너무 단단하여 부러지기 쉬운 성격보다 만사를 부드럽게 포용하고 수용하는 편에 속한다. ○장인집안서 태어나 『해방된지 반세기를 바라보건만 우리 정서와 한국적 감각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현대 한국건축문화를 창조하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러운 그는 이제 우리의 멋과 미를 현대건축에 접목시킨 「우리의 것」을 창출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의자하나라도 인체구조에 알맞게 가장 편안한 기능을 살려야만 최고의 미라 할 수 있다.디자인만의 아름다움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아니다』 그는 최근 마포에 있는 도원빌딩에 홍역문의 이미지를 건물입구에 적용시키고 부분 부조와 떡살무늬 솥뚜껑과 만자창살을 적절하게 살린 한국적 현대건축을 시도한바 있다.그리고 미완성이긴 하지만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지로 충주호수 관광설계에 임하고 있다. 라이트가 「카프만의 집」을 지은것은 69세,뉴욕의 구겐하임미술관을 완성한 것은 그가 작고하던 해인 92세,물론 나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인생은 50부터나 60부터가 아닌,지금 무엇인가 자신의 일을 시작하고 있다면 그나이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것이 아니겠는가고 묻는다. 건축가로서 국전의 영예인 심사위원장을 거쳤고 대한민국문화예술상에서 건축으로는 처음 미술부문을 수상,오랜 파란끝에 예술성취를 이루는 모습은 체관으로 자연을 응시하는 청결과 정열,그나이 나름대로의 의미와 투철한 사명감이 담겨 보는이로 하여금 절로 경외가느껴지게 한다. ▷연보◁ ▲1919년 서울 출생 엄항주씨와 김수경여사의 3남4녀중 셋째(장남) ▲1943년 일본 조도전대학 공고건축과졸업 ▲1960년 한양대 공대 건축과졸업 ▲1946년부터 한양대 출강 ▲1954년 신건축 문화연구소 창설 ▲ 〃 대한민국 건축학회 이사 ▲1956년 홍대 건축과 창설(조각가 윤효중씨 등과) ▲1956∼69년 홍대 및 이대 미대 교수 ▲1956년 국전에 「건축」부문 참여 ▲1956∼80년 국전 추천작가·초대작가·국전 운영위원 ▲1960∼81년 국전 심사위원 ▲1964년부터 일본건축가협회 초청 한국대표참석이후 각종 국제회의 참가 ▲1970∼72년 한국 건축가협회 회장 ▲1970년 UIA(국제건축가연맹)회원 ▲ 〃 예총 상임이사 ▲1971년 서울특별시 행정 자문위원 ▲1977년 서울특별시 도시재개발 심사위원 ▲1980년 국전 심사위원장 ▲1988년 엄덕문 건축상 제정(매년 시행) ▲1990∼91년 대한민국 건축대전 운영위원장 ▲1992년 한국건축가협회 작가상 심사위원장 ▲현 재엄·이 건축연구소 회장·조도전 도문 건축회 회장·한국건축가 협회 명예이사 남서울 컨트리클럽하우스·리틀엔젤스 예술회관·세종문화회관·정부제2종합청사(과천)·롯데호텔(을지로입구)·롯데백화점·대한교육보험(교보빌딩)본사사옥및 전국 각 지사 빌딩·중소기업은행본점·단양 한국시멘트공장·남산외인주택·외인아파트·도원빌딩(마포)·충주호수일대 관광시설설계·이승만전대통령동상·민충정공·세종대왕·이율곡·다산·4·19학생의거기념탑 좌대및 구조물 일체 한국건축가협회 작품상·석탑산업훈장(세종문화회관설계공로)89 제21회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미술부문)·초평건축상 수상
  • “문화사업에 기업이 앞장서야죠”/숭민산업사장 이광남씨(인터뷰)

    ◎문예지 지원 등에 35억 회사 『미력하나마 기업이익의 사회환원과 참다운 기업문화구현을 위해 문예지지원사업을 계획하게 됐습니다』 재정난에 시달려온 월간 「문학공간」지에 올 4월부터 95년 3월까지 2년동안 월5백만원씩 총1억2천만원의 거금을 지원키로한 숭민산업 이광남사장(51)은 문화지원사업에 대한 그의 의욕은 확신에 차있다. 그는 지난 한햇동안 예총기관지 「예술세계」지원,정신대대책협의회지원사업,소년·소녀가장돕기,노인문제연구소지원등 61건에 모두 35억원을 내놓았다.이 돈은 음지에서 고생하는 이름없는 단체나 사회복지차원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다. 『권위있는 문학상을 올해안으로 제정할 생각입니다.시·소설·희곡·평론등 4개 부문에 1억원 정도의 예산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추진해 나갈 작정입니다』
  • 제12회 대한민국사진전/대상에 홍창일작 「섭리」

    ◎우수상 신근호씨의 흑백작품 「선골」/서울 전시뒤 인천·대구·대전 순회 한국사진작가협회(이사장 이명복)가 주관하는 제12회 대한민국사진전람회에서 영예의 대상은 컬러사진 「섭리」를 출품한 홍창일씨(53·강남구 압구정동 미성아파트 21동805호)에게 돌아갔다. 우수상은 흑백사진 「선골」을 출품한 신근호씨(여수)가 차지했다. 27일 심사결과가 발표된 금년도 대한민국사진전에는 역대 사진전 가운데 가장 많은 1천2점(흑백 3백15점,컬러 6백87점)이 응모돼 이가운데 대상 1점,우수상 1점,특선 10점,입선 1백24점등 총1백36점이 입상및 입선작으로 뽑혔다. 심사위원장 박규서씨는 『지난해까지는 인물과 종교사진이 대종을 이루었으나 올해는 소재가 다양해진 점이 가장 두드러졌다』고 밝혔다. 입상 및 입선작들은 30일부터 5월12일까지 문예진흥원 미술회관에서 전시된후 울산문화원(5·29∼6·3),인천시 문화회관(6·5∼9),제주문예회관전시실(6·15∼21),대구백화점전시실(7·20∼25),목포예총회관 전시실(6·24∼28),대전시민회관전시실(7·9∼13)에서 순회전시된다. ▷특선◁ 이준규 「여음」(진주),박용덕 「보리심」(마산),김기수 「덕유산의 아침」(서울),홍효숙 「불심」(경기),강명기 「야해의 환상」(김해),김도민 「내것 사세요」(군산),정원일 「황혼의 찬가」(서울),김종윤 「비경의 정」(서울),홍양원 「마지막 효」(울산),공덕화 「번뇌」(거창)
  • 국립무용단장 조흥동씨(이주일의 인물)

    ◎남성이 추는 「태평무」 50년만에 재연/발디딤 기교 다양한 경기무무/17일 국립극장서 힘찬 춤나래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5층 국립무용단연습실.연습복을 땀으로 흥건하게 적시면서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중진무용수가 뿌려대는 발길질은 텅빈 연습장공간을 매섭게 갈라내고 있다.그의 춤사위는 선이 굵고 힘이 넘쳐나면서 우아하다.발디딤은 경묘하고 가락은 흥겨우며 허공을 쏘아 보는 시선은 주위를 압도한다. 이 무용수는 오는 17일부터 22일까지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리는 국립무용단 4월정기공연 「우리 춤,우리의 맥」공연에서 전통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를 추어 보일 조흥동씨(52)이다. 조흥동.한국무용협회이사장,국립무용단장겸 예술감독,92「춤의 해」운영위원장,여성무용수가 주류를 이루는 국내무용계에 「한국남성무용단」을 창단시킨 대표적 남성무용수….그를 따라 다니는 경력명세서이다. 이제는 한 남성무용수라기보다 명안무가로 또 한국무용계를 이끌어 가는 인사로서 더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가 지난85년 전통창작무용극「도미부인」이후 다시 무대일선에 서기까지는 많은 망설임과 고민이 뒷따랐다. 매일 아침 7시부터 2시간 이상씩,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이번 「우리춤…」무대는 국립극장 장충동신축이전 20돌을 기념하는 국립무용단의 62번째 정기공연.김문숙의 「살풀이」,김백봉의 「부채춤」,김진걸의 「산조춤」,전황의 「농악」등 이 땅의 대표적 원로무용인 9명이 한자리에 모여 펼치는 우리 춤의 큰잔치이다.그러나 기실은 올초 새로 국립무용단장직을 맡게된 조흥동의 첫 인사무대란 점에 의미를 둘 수 있다. 『국립무용단장의 직책이나 안무가이기이전에 예술가 본연의 자세로 관객에게 인사 드리겠다』는 열정이 이번 무대에 그를 서게 했다.또한 「국립무용단은 단장이 직접 춤을 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조로증에 시달리는 우리 무용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가장 한국적인 춤사위를 많이 갖고 있는 그가 숱한 춤가운데 제일 까다롭고 어려운 「태평무」를 서슴지 않고 택한 것에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남성무용수가 턱없이부족한 우리 무용계의 현실에서 「가장 남성적 한국춤」인 「태평무」를 원형에 가깝게 제대로 소화해낼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나래를 펼 「태평무」는 경기도 도당굿에서 파생한 무속무용의 한갈래로 경기도 화성군 재인청에 속한 재인들에 의해 추어지던 경기지방의 무무를 근대의 명무 한성준선생(1874∼1941)이 그 무속장단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엇중모리,올림채,돌림채,터벌림채,진쇄사위등 매우 복잡한 장단이 사용된다.또 상체동작이 많은 기존의 춤과는 달리 발디딤의 기교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한선생의 수제자인 강선영전예총회장이 현재 예능보유자이며 조단장이 이수자로 지정돼 있다. 그의 이번 13분20초짜리 독무는 원래 남성춤인 「태평무」를 50여년만에 처음으로 남성무용수의 춤으로 이땅에 제대로 재연하는 셈이다.
  • 무용가 이매방씨(이세기의 인물탐구:22)

    ◎날듯한 보법·절묘한 선… “타고난 춤꾼”/안으론 한·밖으론 허공 다스려 관객심혼 울려/「살풀이 춤」은 “미학의 극치·최고무작” 평가받아/옳지않은 일 못참고 욕설잘하는 자유분방한 성품 천명이고 만명이고 관중들의 오장을 속속들이 뒤흔들어놔야만 직성이 풀리는 이매방,타고난 춤꾼 신들린 춤꾼인 그의 괴팍한 성격은 무용계에서는 알아주는 막무가나다.비위가 틀리면 어른이고 제자고 눈에 보이는것이 없다.주춤거리거나 남의 눈치를 본적도 없다.한번 입을 떼기 시작하면 몇시간이건 쉬지않고 속사포처럼 쏘아댄다.세상의 욕이란 욕은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것이 없을 것이다.그야말로 제멋대로 살아온 자유분방한 인생이다. 그러나 그가 춤추기 시작하면 온몸으로 삼라만상을 보여주고 산천초목을 움직인다.미끌어질듯 날듯말듯 비스듬히 포개고 떼는 보법이며 무겁게 들어올렸다가 날카롭게 뿌리치는 광대한 능선,긴 날개처럼 펼쳐지는 장삼자락에는 냉혹한 귀기마저 감돌아 관객은 어느순간 전률에 몸을 떤다.아름답고 눈부신 보석같은 춤만으로도 그래서 그의 허물들은 눈녹듯이 용서된다. 마치 무당이 굿을 하지않으면 신병에 걸리듯 천수북을 앞에놓고 변죽을 울리면서 연풍대로 몸을 젖혀 엎어치고 휘돌아야만 살맛이 나는 모양이다.그중에서도 그의 보념승무는 염불장단과 굿거리 사이사이에 현란하게 두들겨대는 북춤이 일품이다.인간의 고통스러운 열정과 비애를 북가락에 실어 남도특유의 흥과 멋을 종횡무진으로 엇가른다. 얼마전까지만해도 그는 아현동에있는 그의 연구소에서 한쪽 귀퉁이에 휘장을 치고 연탄불에다 냄비밥을 끓여먹었다. 결백증이 심해 돈이 오가는 풍조를 체질적으로 경멸하는데다가 재능이 없어보이면 처음부터 제자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이곳저곳 떠도는 방랑벽,훌쩍 떠나고 소리없이 머물면서 긴 정착을 꺼리는 성격탓에 마뜩한 거처하나 마련하지 못했었다.그의 부대끼는 삶의 모습을 지켜보던 둘째누이가 2년전 타계하면서 유산으로 남겨준 연구소옆 허름한 아파트가 60평생에 처음가져보는 제집일 것이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 현관에 들어서면 마루한가운데 왜정시대때나 볼수있었던 낡은 싱거미싱한대가 놓여있다. ○무용복 손수지어 입어 그는 옛날부터 꼼꼼한 바느질솜씨로도 유명하다.무용발표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춤이 훼손될것을 걱정하여 복색일체를 손수 지어입는다.화장과 도련 소매부리를 재단하고 재봉틀에 누비는 귀신같은 솜씨는 전문가들도 혀를 내두룰 정도다. 정종 3병의 술실력,4,5년전까지 만해도 주정·주사가 극심하여 눈에 거슬리는 일을 보면 욕설을 퍼붇거나 남의 멱살을 잡기가 일쑤였다. 60년대중반 발레하는 이인범씨와 국도극장 악극단 쇼에 나간것이 말썽이 되어 무용협회가 이들을 제명처분하려던 사건은 무용계의 잊지못할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징계사실을 사전에 안 그는 술을 잔뜩 퍼마시고 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예총으로 쳐들어가 기물을 부수는 등 광란의 주란을 부린 적이 있다. 「먹고 살자는 일인데 너희들이 내게 돈을 줬느냐 쌀을 줬느냐」 게다가 누군가가 그의 춤을 ‘기방춤’으로 격하시키려하자 「궁중무를 빼고 기방춤이 아닌것이 뭐가 있느냐? 너희춤은 양춤이냐발레춤이냐? 뿌리도없는 형식춤을 어디다대고 비교하느냐」고 길길이 날뛰었다. 막상 그의 신랄한 반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오히려 한말이래 변질되지않고 원형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그의 춤』을 정명호씨(중대교수)등 여러사람이 감싸주었다. 77년 서울 YMCA강당에서 열린 그의 춤을 보고 원로언론인인 홍종인씨는 이례적으로 「속절없는 슬픔과 기쁨을 아로새겨 나가는가 하면 기쁨도 슬픔도 초월한 파탈의 경지로 솟구쳐오른 황홀」이라는 찬양의 글을 써서 세인의 관심을 모았었다. 또 여성적 미학의 극치로 칭해지는 그의 「살풀이춤」은 극도의 긴장과 절제,어둠과 밝음,괴로움과 갈등을 교차하면서 정속에 폭발을 감춘 최고의 무작으로 평가되었다. 안으로는 한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하공을 다스리는 춤.자신의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어 슬피 끝난 일들을 차곡차곡 망각하려는 애절함을 눈물의 춤으로 승화시키자 객석에서는 조용한 흐느낌마저 파동쳤다. 「덩닥궁 덩다꿍,어깨들고 착착쿵…」 그가 제자들을 가르칠때 보면 숨쉴틈도두지 않는다.지시하고 지적한대로 선을 만들지 못하면 냅다 달려나가 욕설을 퍼붓고 북가락을 내던진다. 변덕스럽고 삐치기도 잘해서 사근사근 사람을 홀딱 반하게 하다가도 못마땅한 구석을 발견하면 살차게 뿌리치고 미련없이 돌아 앉는다.끝없는 줄담배,쪽쪽 뻗은 검지와 장지에 꼬나문 담배하며 낮으막하나 재빠른 말씨,아래로 착 내려깐 날카로운 눈매와 여성적인 걸음걸이 등등 그의 이야기는 글로 써서는 충분치 못하다.진한 사투리의 육두문자와 구성진 입타령 일본춤 스페인춤 흉내,바느질과 다림질 솜씨,무엇보다 사람의 애간장을 뒤흔들어 놓는 살풀이춤을 보고나서야만 그가 누구인지 비로소 알게된다. 지난해 어느 사석에선가 명창 김소희씨가 매방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자기예술에 혼신바쳐 『이매방동생은 남못하는 예술을 가진 사람으로써 젊어서는 정말 「개판」이었지요.누구라도 한번 걸렸다하면 밤샘 술을 마셔야하고 휘젓고 돌아다니고 욕설 잘하고,그러나 그 춤만은 현재로선 제가 아는한 전무후무한 명무라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그 춤만은 가히 당대의 명인이지요』 이른바 재주가 승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오만방자와 안하무인의 기색이 역력하지만 자신의 예술을 알리기 위해선 한자리에서도 몇십번씩 무태를 보이는 성의를 잊지 않는다. 한때는 그가 후계자를 키우지 않아 「그의 춤을 저승으로 가져가려나 보다」고 무용계가 빈정거린 적도 있으나 그는 몇몇제자를 모아 세밀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엄하게 그의 춤을 보존하고 전장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매방은 전라도 목포에서 태어났다.아버지 이경율씨는 목포 양동에서 싸전과 장작장사를 하는 집안으로 그는 3남2녀중 막내,부모와 형제들의 귀여움을 두루 받았으면서 어릴 때부터 여성취향이 짙어 경대앞에 앉아 춤을 추거나 화장하는 흉내를 즐겼다.『나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세살때나 또는 일곱살때,어쨌든 그 이전에 운명적으로 예감하고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집에 세들어 있던 목포 권번 기생에게 춤을 배우고 권번에서 춤을 가르치던 집안의 할아버지벌인 이대조선생,화순의 박영구선생에게 본격적으로 승무검무 법고를 배웠다. ○매란방처럼 살고자 국민학교 2학년때부터 4년간은 큰형이 사업을 벌이고 있던 만주 대연과 북경에서 살면서 중국 경극의 대가인 매란방을 만났고 평생 매란방처럼 살고 싶어 본명인 「규태」를 버리고 그때부터 매방이란 예명을 스스로 지어가졌다. 군산에서 무용연구소를 개설,간간히 서울에 올라와 무대에 서기도 했지만 역마살이 뻗친듯 광주 대구 강릉 속초 부산 동래를 전전,형제들의 간곡한 권유로 69년,42세때 부산에서 무용활동을 하는 김명자씨와 뒤늦게 결혼하여 딸(현주·20)하나를 두고 대학 무용과에 다니는 있다. 부산에 머물고 있을때 그의 춤을 귀히 여기던 무용평론가 정병호씨와 거문고 인간문화재 한갑득씨의 권유로 77년부터 서울정착을 결심하게 되었다. 말도 탈도 많았던 들끓는 듯한 지난날,한번 움직일 때마다 수천 관중을 사로잡는 그의 춤에 매료되어 54년,서울 첫 정착때는 신익희선생의 따님인 정균씨가 동대문밖 창신동에 무용연구소를 차려준 적이 있었고 삼성의 이병철회장은 특히 그의 「살풀이춤」을 사랑하여 자주 별장에 불러 춤을 추게 했다고 한다. 그는 요즘도 매일 하오4시부터 4시간씩 연습,이렇게 연습을 해두기 때문에 공연을 앞둔 총 리허설은 해본적이 없다. 해마다 명무전 명인전 전통무용의 밤과 수많은 해외고연에 참가하고 프랑스 렌느 페스티벌에 다녀와서는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럽공연은 「질색」이라고 거절한다.평생을 통해 그가 하고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마지못해 체면상 해본 일은 없을 것이다.그가 무엇을 어떻게 하던,욕쟁이로 소문이 나고 성질이 괴팍하던 말던,방약무인하고 오만불손하다 하더라도 김소희씨의 말대로 「당대의 전무후무한 명인」,절묘한 선으로 이어지는 천의무봉한 춤솜씨 하나만으로 그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이매방일 수밖에 없을 것같다. □연보 ▲1927년 5월5일 전남 목포출생(본명(이규태) ▲1935∼39년 만주 대연에 거주.전남 무안출신 이대조선생 「승무」「북춤」사사,전남 화순출신 박영구선생 「승무」「법고」사사,전남 목포출신 이창조선생 「검무」사사 ▲1943년 목포 공립공업학교 졸업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예능보유자(87년 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예능보유자(90년 지정) ▲1948년 명창 임방울선생 명인명창대회 「승무」(3고)첫 출연 ▲1953년 전북 군산 국악원주최 명인명창대회 「승무」(9고) ▲1953년 이매방 개인무용발표회(광주) ▲1954년 삼성여성국극단 창극출연 「승무」(7고) ▲1955년 개인무용발표회(문하생 발표 포함·광주) ▲1956년 개인무용발표회(부산) ▲1957년 개인무용발표회 「살풀이춤」(부산) ▲1959년 서울 을지로 원각사에서 개인무용발표회 ▲1962년 광복절 경축예술제 「살풀이춤」(국립극장)(도쿄∼오사카) ▲1968년 일본 대민단본부주최 광복절기념공연 ▲1970년 부산·시모노세키 자매결연기념공연(시모노세키·부산) ▲1975년 부산예총주최 「무용합동공연」(부산) ▲1977년 이매방 「보념승무」발표회(서울YWCA강당) ▲1979년 대한항공 민항 10주년기념공연(미 6개도시 교포위문) ▲1981년부터 제1회 대한민국 전통무용예술제참가(해마다) ▲1982년부터 국악대제전 한국 명무전 출연 ▲1984년 무용인생 50년 특별기념공연 「북소리Ⅰ」(세종문화회관) ▲1986년 미 한미문화센터주최 워싱턴 공연 「살풀이춤」 ▲1986년 아시안게임 축전공연 출연 ▲1987년 개인무용발표회 「북소리Ⅱ」(문예극장 대극장) ▲1987년부터 해마다 중요무형문화재공연 출연 ▲1990년 개인무용발표회 「북소리Ⅲ」(호암아트홀) ▲1988년 88서울올림픽문화예술축전 참가 ▲1989년 조선일보주최 국악대공연 출연 ▲1990년 중국·북경·연변 교민 순회공연 ▲1991년 한국·일본 무형문화재 합동공연(도쿄) ▲1992년 국악대제전 명무전 출연 예술문화대상·눌원 향토예술대상·목관문화훈장서훈 (승무) 송수남·김진홍·임이조·채향순·국수호·채상묵 (살풀이) 정명숙·유숙희·김정녀·이진주
  •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문예총/「유일체제」떠받들기 47년(오늘의 북한)

    ◎그산하 단체와 활동내용을 알아보면/작가·예술인 사상교육… 당노선 홍보에 활용/작가동맹/창작주제까지 할당… 혁명정통물만 30%/미술가동맹/조각작품의 80%가 김 부자의 입상·흉상/음악가동맹/최근 우상화일변도 탈피,관객동원 신경 북한의 대표적인 문학예술단체인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하 문예총)이 지난 25일로 결성 47주년을 맞았다. 문예총은 북한의 모든 직업예술인을 조직·통제하고 문학·예술을 총괄하는 단체로 해방 이듬해인 지난 46년 3월 조직된 「북조선문학예술가동맹」을 모체로 발족됐다.문예총은 북한의 여타 문화단체가 그러하듯이 공산주의적 대중선전·선동의 필요성을 느낀 김일성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북조선문학예술동맹」은 46년 10월 각 부문별 동맹을 두기 위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 개칭됐으며 이후 당적인 문학예술 창조의 길에 들어서면서 토지개혁을 비롯한 북한공산정권 초기의 정책선전활동에 적극 이용됐다.6·25전쟁 중에는 전후방에서 주민들을 전장에 동원하는 역할과 함께 북한군의「영웅적 전투」를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그러나 휴전을 전후한 시기에 불어닥친 숙청 바람을 타 53년 9월 해산됐다.그후 북한은 작가동맹,작곡가동맹,미술가동맹 등 몇몇 부문별 조직만 필요에 의해 두고 있다가 60년대 들어 김일성 유일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통일적 조직인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을 다시 결성,오늘에 이르고 있다. 초대위원장은 한설야가 맡았었으며 그뒤 이기영을 거쳐 현재는 백인준(제9기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맡고 있다. 문예총의 주요임무는 ▲당의 노선과 정책의 관철을 위한 문학예술토의 ▲작가예술인들에 대한 사상교양 ▲문학예술의 대중적 발전 등이다.문예총은 이를 위해 작가·예술인에게 당의 문예정책을 홍보,이의 관철을 위한 지도·통제사업을 하고 작가·예술인들의 창작사업을 지도하는 한편 문예계의 등용과 축출 등을 결정한다.주요연맹의 조직 및 활동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가동맹=소설·시·희곡·아동문학·평론·고전문학·외국문학 등의 분과위원회가 있으며 산하기관지발행기구로서 「문학신문사」와 「조선문학」「청년문학」「아동문학」「현대문학」「시문학」「국문학」「외국문학」「고전문학」 등의 각 잡지 편집부가 있다.북한문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소설문학은 창작내용에 있어 당이 할당해준 주제에 입각하도록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다.창작주제 할당은 혁명전통물 30%,조국통일물 20∼30%,사회주의 건설물 10∼20%이다.신문학·아동문학·고전문학 등도 소설문학과 같은 상황이다. ▲미술가동맹=회화·동양화·무대미술·조각공예·평론 등의 분과위원회가 있다.동양화는 산수 등을 그리는 고대의 동양화가 아닌 노동자·농민의 작업환경을 테마로 한 인물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조각작품의 80%가 김일성 및 김정일의 입상과 흉상이며 나머지 20%는 천리마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무용가동맹=민족무용·현대무용·평론 등의 분과위원회로 나누어져 있다.우리 고전무용의 형식에 구소련 무용의 동작을 혼합한 형태의 동작이 주류를 이룬다. ▲영화인동맹=연기분과위원회·연출분과위원회·장치분과위원회·효과(녹음)분과위원회·평론분과위원회가 있고 다른 동맹과는 달리 지방조직이 있다.조선예술촬영소·조선기록영화촬영소·2·8영화촬영소 등과 협조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사진가동맹=보도사진·예술사진·평론 등의 분과위가 있으며 영화인동맹과 같이 지방조직은 없으나 사진의 선전효과 때문에 북한의 이 부문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다른 예술분야와 마찬가지로 순수사진 예술작품의 창작은 허용되지 않는다.이 분야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사진 제작이다. ▲음악가동맹=민족음악분과위원회·현대음악분과위원회·작곡분과위원회·민족음악연구소가 있다.최근 들어 김일성우상화선전 등 정치색 일변도에서 탈피,음악·무용·곡예·단막극 등 공연종목을 다양하게 구성하는 등 관객동원에 신경을 쓰고 있는 점이 눈에 띄고 있다.
  • 극단신협/국립극단/분위기 일신 “구슬땀”

    ◎신협/「동승」공연으로 부진탈피 노려/국립/창작극 「홍동지…」 실험성 무대/“한국연극계의 산역사”… 새바람 기대 한국연극의 산 역사랄 수 있는 극단신협과 국립극단이 새로운 면모를 선보일 봄공연을 앞두고 분주하다.극단 신협은 재건기념공연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오는 4월8일부터 5월9일까지 명보아트홀극장(565­79 10)에서 함세덕의 「동승」으로 재기를 노리고 있다.국립극단도 배우들의 연륜과 제작진의 실험성이 조화를 이룬 「홍동지는 살어있다」(김광림작·이윤택연출)를 오는 26일부터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 올린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극단 가운데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극단 신협은 한동안의 부진을 씻고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환골탈태의 각오로 재기를 다짐하고 있다.올해로 창단47주년을 맞은 신협은 김성옥씨를 새 극단대표로 선출,극단운영과 무대공연예술을 접목한 전문적인 직업극단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다.극단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지난 46년 창단 당시 동인인 원로 연극인 김동원씨와 극작가 차범석 김흥우 김성우김성옥씨등 5인으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했다.또 그동안 흩어져 각자 활동해왔던 단원들 가운데 신구 김길호 손숙등과 젊은 연극인 윤석화 김영애 김미숙씨등이 재건에 동참했다.이밖에 김대중 전민주당대표,서정주·황순원·김남조씨등 문인과 김성태 김진걸 조경희 송범 김복희 김수용 윤정희등 무용·영화인,이두현교수등 문화·학계·정계등 각계인사들로 구성된 후원회가 극단운영을 뒷받침하게 된다. 극단 신협이 이처럼 재건을 구체화시킬 수 있게 된 데에는 대한교육보험 창립자인 신용호회장과 신영균 신임예총회장의 경제적 후원이 큰 몫을 했다.신회장이 극단 운영을 위해 향후 몇년간 재정적 뒷받침을 약속했고 신예총회장은 종로구 관훈동에 있는 명보아트홀을 극단 전용극장으로 내놓아 극단의 큰 걱정을 덜어준 것이다.극단측은 상·하반기로 나눠 각각 3개월씩 극장을 이용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숙원인 장기공연도 가능하게 됐다. 새로운 발판위에서 극단 신협은 재건기념공연으로 최근들어 작품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일고 있는 함세덕의 「동승」을 선택했다.극적 완성도가 높고 서정성과 토양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한편 국립극단의 올해 첫 작품 「홍동지는 살어있다」는 지난 91년 연극의 해를 맞아 국립극장이 창작극 발굴을 위해 공모한 우수창작극 공모에서 선정된 작품.90년대 한국연극을 이끌어갈 40대 중견연극인 김광림·이윤택씨가 콤비를 이룬 이번 무대는 우리 연극의 정립과 국제화에의 모색을 겸한 실험적인 무대로 관심을 모은다.또 국립극단이 그 어느 공연보다도 적극적으로 관객유치에 나선 회심의 작품이어서 이에 거는 연극계 안팎의 기대 또한 크다. 「홍동지는 살어있다」는 「홍동지 설화」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따왔다.자연과 문명,설화와 현실의 관계를 통한 인간의 원초성 회복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연출가 이윤택씨는 한국의 꼭두극 원형에서 이미지를 빌려오는 동시에 전통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한 새로운 공연양식을 시도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김명환씨가 홍동지역을 맡아 열연하며 권성덕 이승옥 이문수 손봉숙씨등이 출연한다.
  • 순천문예회관 새달 3일 개관

    ◎72억 투입,5년만에 완공… 연건평 1천5백평 규모/호남지방의 첫 시차원 문화공간/전남동부지역 새 문화중심지로/5월31일까지 다양한 개관기념무대 마련 순천시 문화예술회관이 순천등 전남지역민들의 관심속에 오는 4월3일 개관한다.지난 87년 12월7일 첫 삽을 뜬 뒤 5년4개월여만에 완공되는 순천문화예술회관은 순천시 석현동 183 1천91평의 부지에 지하1층 지상 4층 연건평 1천5백69평 규모로 여타 지역의 문화예술공간과 비교해 전혀 손색이 없는 시설이다.순천시는 오는 4월3일부터 5월31일까지 8주동안 열리는 개관기념무대에 다양한 문화행사들을 마련해놓고 있다. 순천문화예술회관은 호남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시차원에서 마련한 문화공간으로 이 지역주민들의 높은 문화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공연장다운 공연장,전시장다운 전시장 한곳 없어 불만이었던 순천시민들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나아가 인근 광양·여천등 전남 동부지역 인구 1백20만의 문화예술 중심지로서 역할을 수행해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예술회관은 7백28석의 객석과 3백평 규모의 주차시설,38평 크기의 무대와 상설전시장을 포함해 3개의 전시장을 갖추고 있다.이밖에 각종 회의및 문화강좌를 위한 문화센터와 예총지부및 시립단체들을 위한 사무실들이 자리하고 있다.70여평 규모의 향토문화전시관에서는 이지역 문화인들의 서적을 비롯한 문화유산을 전시해 학생들의 학습장으로도 활용해나갈 방침이다.또 공연장 이용객들을 위한 휴게실도 구비해놓고 있어 공연시설로서 뿐 아니라 시민휴식공간 기능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순천시는 총사업비 72억2천여만원중 58억4천여만원을 시예산에서 충당했다.이는 예산자립도가 50%밖에 안되는 점을 감안할때 문화에 대한 민·관의 높은 열의를 짐작케하는 지표로 상당히 고무적이다.시의 한 관계자는 『공단보다는 학교와 문화·체육시설을 늘려 순천을 교육·문화도시로 특성화시켜 발전시켜 나가고 싶다』며 문화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순천시는 문예회관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문화예술및 학계인사 10∼15명으로 「운영운영회」를 구성할 계획이며 이미 각계의의견을 수렴해놓은 상태이다.또 조명·음향등 무대전문인력이 중소지방도시에서 활동하기를 꺼리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자체인력에 대한 재교육을 실시,취약점을 보완해나가기로 기본방침을 정했다. 문예회관 개관기념행사는 크게 공연과 전시로 나뉘어 열린다.남제농악단의 식전행사로 시작되는 개관기념공연은 시립합창단이 창원시향과 함께 마련한 영호남의 합동공연으로 장식된다.3개 시립예술단체를 비롯해 농악단 남도국악단,다른 지역 음악인의 초청연주회와 국립예술단체들의 축하공연등으로 개관기념공연은 절정을 이루도록 짜여졌다.한편 회화,사진,한중서예 교류전등 종합전시회가 끝나면 개인전이 계속 열려 화단에 훈기를 불어넣게 된다. 개관취지를 살려 3일부터 17일까지는 시민들을 위한 무료공연을,그리고 그 이후는 유료행사로 차별화할 방침이다.
  • 「재벌정치」 좌절을 만회하려면…(최택만 경제평론)

    한 재벌 전총수의 정치참여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정주영 현대그룹 전명예총재가 창당한 국민당도 그의 「정치은퇴」선언이후 내부분란으로 와해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재벌의 정치참여는 세계적인 사례나 한국적 현실에 비추어 당초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다.세계적으로 재벌이 정치에 참여해서 성공한 사례는 없다. 일본에서는 이미 여러차례 그 실험이 있었다.일본 재계인사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대표적인 사례는 후지야마(등산진일랑)이다.대일본제당 재벌 2세인 그는 차기 총리내약까지 받고 외상에 취임했으나 실패했다.정치입문 실패뿐이 아니고 본업인 업체도 도산,패가망신했다.데이진(제인)인견사 사장인 오야(대옥진삼)가 한때 정계에 입문했다가 본업이 부도위기에 처하자 정치에서 손을 뗐다. 일본 다이쇼와(대소화)제리의 사이토(재등요영)사장도 패가망신 직전에 정치에서 빠져나왔다.현재 일본 정치인 가운데 재벌로 알려진 고모토(하본)파의 고모토(하본민부)는 정치에 손댄뒤 그가 창립한 일본 최대의 해운회사인 삼광기선이 도산했다.그는도산한 회사의 주인이라는 불명예 때문에 그 계파의 가이후(해부준수)가 총리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미국에서는 록펠러 2세가 한때 대통령을 꿈꾸었으나 실패했다.영국에서는 로드차일드가가 정치에 관심이 많으나 정치자금만대고 정치에는 직접 참여 하지 못하고 있다.독일의 경우 1차대전 직후 AEG 재벌 총수 라테나우가 정계에 들어가 외상이 되고 차기총리에 유력시 되었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좌절됐다. 한국적 현실은 어떤가.우리는 유교문화권에 있는 나라이다.유교문화권에서는 보통 권력·명예·돈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이 3가지중 어느 한가지를 갖는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있다.재벌이 정치에 참여하자 많은 국민들은 우리는 3가지 중 어느 것 하나 갖고 있지 않은데 누구는 전부를 소유하려 하느냐며 강한 불만을 나타냈었다. 국민들의 사시적 시각뿐이 아니다.경제계 내부에서도 반응이 좋지 않았다.재벌이 재벌을 지배하는 사태를 우려했다.다른 한 재벌이 대선전 정당을 창당하려했던 것도 그우려에서 기인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많은 재벌들이 재벌 정치참여이후 정·경간 갈등과 마찰의 불똥이 자기재벌에 미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경제계는 정·경간 갈등이 심화되자 관망자세로 일관했고 설비투자마저 미루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회적으로는 그렇지 않아도 문제가 되고 있는 물질만능 풍조를 확산시켰다.지난해 총선과 대선에서 금품타락선거를 조장했고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는 망국적인 풍조를 만연시켰다.이처럼 재벌의 정치참여는 정치계·경제계·국민 등 각계각층에 엄청난 폐해를 야기시켰다. 정 전대표는 그같은 위해를 초래한데 대해 깊은 자성과 통찰이 있어야 한다.정치참여를 시도했다가 여의치 않자 「은퇴」한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참으로 곤란하다.정 전대표의 최근 자세나 행동은 중소기업인이 회사를 하나 더 차렸다가 경영상태가 좋지않으니까 문을 닫아 버린 것과 흡사하다.정 전대표는 한때 한국 재계의 대표(전경련 회장)였고 정치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는 정당을 창당한 인사이다.중소기업을 문닫는 식으로 「정계은퇴」를 마무리 해서는 안된다.정 전대표는 그동안 갖가지 폐해를 일으킨데 대해 국민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여생을 국가경제의 발전을 위해 바치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국민들에게 정식으로 사과할 때 「정계은퇴」도 정식으로 선언해야 할 것이다.의원직을 갖고 있으면서 「정계은퇴」를 주장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가 않다. 정 전대표가 경제계로 돌아 가려면 먼저 우리경제인들에게 불안심리를 주고 경제에 불확실성을 야기시킨데 대해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외국에 나가 큰 공사를 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정 전대표는 시정인이 아니다.모든 것을 공식적으로 매듭짓고 경제계나 기업으로 돌아가는 게 올바른 수순이다.정 전대표가 이번만은 「책임있는 자세와 행동」을 보여주기 바란다.
  • 지역문화재/자립기반 확충 움직임 “부산”

    ◎문화중앙집중현상 심화… 전국 예총지회,「홀로서기」 안간힘/지역특성 살려 세계규모행사 등 계획/최대 난제인 재정자립 적극해결 모색/예총연서도 올 사업목표 지역발전에 두고 지원 서울및 수도권을 중심으로 지나친 중앙집중현상을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 예술문화활동이 지역문화중심으로 재편돼야 한다는 지역문화계인사들의 목소리가 높다.전국적으로 15개 지회,47개 지부를 두고 있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회장 신영균)는 이를 반영하듯 올 사업목표를 지역별 특성에 맞는 문화발전과 각 예술장르사이의 교류활성화로 집약시켜 지역문화발전에 비중을 두고 있다.그러나 이를 추진할 재정자립도의 취약은 각 지방이 예외없이 안고 있는 공통의 해결 과제이기도 하다.예총이 발행하는 월간 「예술세계」1,2월호에서는 이러한 지역문화계의 여망과 올한해 전망을 전국14개 예총지회장들의 현장목소리를 통해 특집으로 다뤘다. 예총 강원도지회는 올7월 춘천시에서 개최할 예정인 「세계아마추어연극제」준비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이에맞춰 오는 4월까지 춘천문예회관개관을 서두르고 있다.배동욱지회장은 『강원도는 경제적·지리적으로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신사임당과 율곡 허난설헌 허균을 비롯,김유정 이효석 전상국 한수산 이외수 박수근등 우리 문화계에 중요한 인재를 배출한 고장』이라면서 『이번 세계연극제는 강원예술계의 역량을 시험하는 저울대역할과 함께 지방에서도 이러한 세계규모 문화행사를 개최할 수 있다는 실력을 내보이는 무대가 될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전직할시지회(지회장 조종국)는 대전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한 문화기반조성에 사업역점을 두고 있다.개막식축제행사등 8개종목을 비롯,「학아 날아라」등 공연행사 26종목,「한국의 악기특별전」등 전시행사 13종목,「한국의 족보학 국제세미나」등 학술행사 5건등 대대적인 행사개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지방시대에 부응하는 향토예술문화의 창달」을 슬로건으로 내건 전라북도지회(지회장 이기반)는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 도내에 산재해 있던 7개 시·군지부의 운영체계를 올들어 전면 개편했다.개편의주안점은 지역특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일관성있는 예술행정 전개.또한 후원기구결성을 통해 재정난해소를 적극적으로 꾀할 계획이다. 대구직할시지회도 운영재정의 자립화를 올 활동의 주요 목표로 정했다.우선 예총후원회와 지부후원회를 결성,기획공연과 전시회를 통해 운영재정을 확보하는 한편 안정된 시예산확보,문예진흥기금지원요청등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일 계획이다.이중우지회장은 『지방문예활동의 활성화,문예활동을 위한 재정확보,문화예술인의 생활안정,예총조직과 행정의 능률화등의 과제해결에 앞장서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지난87년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 분리돼 나가면서 구심체를 잃는 어려움을 겪어온 전남지회(지회장 김암기)는 전남예술의 독자성회복이 선결문제.문화의 중앙편중현상뿐아니라 대도시중심도 문제라는 고충을 털어 놓았다. 서해안시대의 주역이자 백제문화권의 전통을 지닌 충남지회 조창희지회장은 『그동안 지방문화발전이 끊임없이 주창되어 왔지만 논의만 무성할뿐 구체적 실천은 항상 뒤로 미뤄져온 실정』이라고 자체반성을 했다.
  • 한국무용가 최현씨(이세기의 인물탐구:14)

    ◎절제된 몸짓… “여백의 미” 표현 일품/고고한 기품 넘치는 타고난 재능의 예인/김해랑문하서 승무·태평무 등 두루 이수/완벽주의적 성격… 대선배와의 불화 “천추의 한”으로 갓쓰고 도포입고 부채들고 최현이 무대에 나타나면 이도령이 광한루에 나선듯 화사하고 눈부시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헌칠하고 단정한 매무새,운신의 폭이 조용하면서도 민첩하다.삭풍이 이는 한겨울에도 그의 분위기에는 오월 단오같은 싱그러운 신록이 묻어있다. 부채끝으로 오작교(오작교)를 가리키고 부채를 펴서 얼굴을 가리면 그때마다 한양의 풍류와 선비의 기품이 동시에 엇갈린다. 무용계에서 「푸르름을 몰고다니는 예인」으로 불리는 것처럼 그는 20대 미장부의 멋과 미를 변치않는다.나이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젊고 기개에 넘쳐있다.언제 어디서나 누구앞에서나 당당하다. 우선 그의 춤솜씨부터가 그렇다.타고난 재능과 기량으로 그는 빠르고 느린 어떤 곡조에도 절묘한 춤의 경지를 보여준다. 정중동이 절제된 그의 「승무」나 「살풀이」등 그의 춤의 매력은 그 움직임마다에 여백의 미를 살리는데 있다.뿌리치고 내뻗는 손짓하나에도 선과 배경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마치 한폭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듯 하다.힘이 들어가지 않은,몸속으로부터의 흥취가 절로 살아나 어느땐 멈추고 어느땐 다시 흐른다.그리고 조각처럼 푸르고 흰 얼굴에는 한과 슬픔을 자제한 인고가 담겨있다. 그는 춤뿐아니라 춤과 관련된 영화와 연극,창극과 뮤지컬을 두루 섭력한 예술가다. ○춤관련 영화·연극 출연 완벽주의자인만큼 한가지를 알아도 끝까지 파고들어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쌓고있다.대강대강 그럭저럭은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사람을 사귀어도 한번 사귄 사람은 절대로 놓지않는다. 이렇게 흑백이 분명하기때문에 무용계에서의 그의 위치는 자칫 외롭기 십상일수가 있다.그러나 서로서로 인맥·학맥,제자 스승으로 얽히고 설킨 속에서 그가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타고난 재능,탁월한 춤솜씨 하나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춤추는 사람이 춤잘추는데야 누가 뭐라하겠는가.위로는 막강한 선배들이 기라성처럼 좌정하고 이리저리 끈이 닿는 무용풍토에서 최현자신은 그런 자부심과 오기 하나만으로 고고하게 버티어왔다 할수 있다. 그가 춤으로 무용계에 어필하기 시작한 것은 65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초라니」에서다.조택원이후 송범 김진걸 이매방으로 이어지는 남자무용수중 수려한 춤과 미모마저 갖춘 그의 출현은 무대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51년이후 한때 영화에 심취하여 조미령 김승호 허장강 등 당대 스타들과 영화 「춘향전」「시집가는날」등에서 주연,이후 그가 안무·출연한 무용극 「춘향전」「마의태자」「황진이」등은 노련미 넘치는 춤기교와 함께 영화에서 닦은 연기솜씨로 관객을 사로잡았던 작품들이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비상」은 그 자신이 끊임없이 추어왔고 지금도 무용인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의 하나다. 소매가 긴 백삼에 상투관 차림,부채 하나만으로 무대를 누비는 이 「비상」은 희로애락의 일상사를 살고있으나 저 하늘을 향한 끝없는 의지,꿈을 잃지않으려는 인간의 끈질긴 열망이 춤속에 담겨져 「마음을 비운 춤」「생의 환희와 승리를 득도의 경지로 이끈 춤」「아무도 비상을 최현만큼 출수 없다는 경계선을 확실하게 그을수 있다」고 시인이며 무용평론가인 김영태가 쓴적이 있다. 영화·연극 못지않게 그의 음악취미또한 광적이다. 76년 호암 이병철회장의 도움으로 독립문쪽에 무용연구소를 개설하고 최현무용단을 창단했을때 그의 연구소는 무용연구소라기보다는 마치 음악연구소처럼 사방벽이 온통 오리지널 디스크로 둘러싸여 있었다.그의 오디오 취미는 「마니아」급으로 오디오전문지들은 걸핏하면 드보르자크에서 수재천에 이르는 그의 음악취미·오디오기기들을 탐방취재하고 있다.이 방면에서는 특히 김영태와 의기투합하여 두사람은 충무로에서 용산전자상가를 곧잘 기웃거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악취미도 “광적” 최현은 마산에서 성장했지만 본래 부산사람이다.본명은 최윤찬,후에 영화계에 데뷔하면서 최현이란 예명을 가졌다. 16세때 전국가요경연대회에서 특상한 것을 계기로 「천재소년가수」가 되어 지평선 가극단을 쫓아 마산에 정착,마산의부호이자 한량으로 소문난 김해낭문하에 입문하여 그곳에서 궁중무에서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를 고루 이수했다. 그러나 스승이 초기엔 장작이나 패게하고 집안청소를 하게 할뿐 도무지 춤을 가르쳐주지 않아 그때도 당돌했던 그는 『왜 춤을 가르쳐주지 않느냐』고 스승에게 항의하곤 했다. 『예술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는 것이다.네가 보고 느끼고 깨달아라』그는 머리속에 꽉 찼던 안개가 걷힌 듯 스승의 이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그때부터 춤이 몸속에서 피돌기처럼 돌고 흥이 기운처럼 솟구치기를 기다렸다.스승은 그제서야 그에게 춤 한자락씩을 지도해나갔다. 예술의 겸손을 엄숙하게 익히고도 인격수양이 덜 됐거나 춤을 잘 춘다는 주변의 칭찬에 우쭐한 나머지 지금까지도 가슴에 남아 잊히지 않을 큰 「잘못」을 하나 저지른 적이 있다. 58년 서울 명동 시공관에서 스승 김해랑 안무로 「독무」를 출때였다. 당시 명고수인 지영희씨가 장단,그의 부인인 성금련씨가 가야금을 연주,진양조에서 중머리 중중머리로 넘어가는 대목에서 지영희씨가 그만 잦은몰이 장단을 잘못친 것이다. 박자와 호흡,시간조절에 의해 손의 움직임을 감을 수도 펼수도 있는 그로서는 리듬이 맞지않아 크게 당황했고 무대는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지영희씨에게 덤벼들었다. 『무대는 생명입니다.단 한번의 실수도 있어선 안돼요.관객에게 손가락질 받으면 나는 이것으로 끝납니다』 지영희씨는 『최선생 내가 정말 잘못했네.큰 실수였다』고 백배사죄했으나 그로서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망발.당대의 명인이자 대선배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자신의 방만함을 후회했다고 탄식한다. 이제 그는 참다운 예술가가 되고 싶다.밖에서 안을 들여다 보고 진지하게 나를 점검하여 「몸짓」하나 「소리」하나에도 자연의 질서가 깃든 지혜와 노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그리고 내 춤속에 관객을 끌어들여 나의 한과 정취와 풍류의 빛,내가 살아온 춤의 굽이굽이를 함께 향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최현의 많은 이야기중에서 그가 54세때 27세 연하의 신부를 맞아들인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화제중 하나다. ○54세때 27세 신부 맞아 84년 12월,일밖에 모르던 까다로운 성품의 최현이 갑자기 결혼을 발표,더구나 신부는 서울예고를 졸업,그가 지도위원으로 있던 국립무용단 단원이라고 해서 주변의 놀라움은 한층 컸다. 신부인 원필녀씨는 나이보다 깊고 의젓한 성품으로 춤추는 스승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혼자서 그를 사모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두사람의 결혼은 올해로 만 9년.제자로서 스승으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결혼초기때의 사랑과 정성과 존경을 변함없이 나누고 있다. 최현씨는 그동안 부인을 한성대와 이대대학원에 다니게 했고 지금은 한성대에 출강.『내가 아프면 밤새 내 머리맡에 앉아 나를 지켜준다』고 자랑한다. 지난해 6월엔 제1회 원필녀개인무용발표회를 주선해 주었다.그리고 그가 사랑해마지않던 그의 춤 「비상」을 부인에게 추게 했다. 그는 88올림픽 폐막식때는 10만군중과 수천명의 출연자들에게 청사초롱 「안녕!」을 추게 하여 방대한 스케일로 각계의 시선을 모았었다.지난해엔 청소년예술제에 「파란풍선」에 이은 「비단안개」를 안무,서울예고 무용단을 이끌고 일본 도쿄 무장야시민문화회관에서 「시집가는날」을 공연,올해는 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기금을 받아 그의 개인발표회를 준비중이다.작품은 정철의 「사미인곡」. 차범석극본·최종원음악의 이 작품은 그의 춤 60평생을 정리한 집대성의 일환으로 그의 특기인 「춤에서의 여백의 미」를 유장하게 전승시킨다는 집념을 담고 있다. 그는 아무리 춤을 잘추어도 훈련된 춤,숙련된 춤은 단호하게 부정한다.긴 세월 스스로 깨달아 마음속에서 몸속에서 자연스러운 율동으로 우러나오는 극미(극미)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리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기를 축적시키면서 이를 어느 한순간 우주의 무한한 공간속에 힘차게 내뿜는다.장삼자락을 낙화로 흩날리며 탄식의 숨결을 하공에 흩뜨려놓듯,그래서 그의 춤의 한끝은 결국 끝없는 비상임을 그는 알고 있다. □연보 ▲1929년12월 부산 영도 출생.최재용씨와 이말념씨의 2남5녀중 장남 ▲1946년 마산으로 이사 ▲1953년 마산상고졸업 ▲1959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 졸업 ▲1988∼1990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예술학과 수학 ▲1946∼1953년 마산 김해랑 무용연구소 입문 전통무용 유형과 기법사사 ▲1953년∼ 오광대일인자 장재봉,민속춤의 김숙자씨등에게 승무·살풀이·태평무·탈춤·기방무 등 이수 ▲1955년 최윤찬무용연구소 개설 ▲1961∼1962년 서울대 음대 무용강사 ▲1965∼1985년 서울예고 강사 ▲1967∼1974년 서울대 사대 체육과강사 ▲1976년 최현 무용단 창단 ▲1980∼1981년 중앙대 예대 무용과 강사 ▲1981∼1985년 서울예전 무용과 주임교수 ▲1982년 최현 무용연구실 개설,한국무용협회이사,한국문화예술단체 총연합회(예총)이사,문공부 문화재 전문위원,국립무용단지도위원,한국무용협 부이사장,대한민국 무용제 심사위원 문예진흥원 지원기금 심사위원역임 (영화)「삼천리의 꽃다발」 「시집가는날」 「춘향전」 「불멸의 성좌」 (무용·안무출연)무용극 「초라니」 「춘향전」 「시집가는날」 「마의태자」 「황진이」국립창극 「심청가」 「강릉매화전」 「광대가」 「변강쇠타령」 「시집가는날」 「대춘향전」 「허생전」 「심청」 「서동가」 「이춘풍전」 「놀부전」 「소태산」 「아리랑」 ▲1970년 일본 EXPO70 한국의날 안무·출연 ▲1971년 국립무용단 유럽지역 10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5년 국립무용단 일본 10개도시 순회공연 안무·출연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예술제 「녹」 「비상」안무·출연 ▲1980년 국립무용단 동남아 9개국 순회공연 안무·출연 ▲1982년 시립무용단 「한국 명무전」에 「비상」출연 ▲1985년 호암아트홀 개관 초청공연 「헌화가」안무·출연 ▲1987년 88서울예술단 창단공연 「새불」구성·안무 ▲1988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안무총괄 「안녕」 ▲1990년 국제문화협 주최 일본 지역 공연 창극 「심청전」안무 ▲〃 동아일보창간70주년기념 모스크바지역등 5개국 순회공연 창극 「아리랑」안무·출연 ▲1991년 국립극장주최 청소년예술제 「파란풍선」안무 ▲1992년 국립극장주최 「비단 안개」안무 ▲〃 서울시립무용단 무용극 「춘향전」객원안무 ▲현재 문화부 문화재 보호협회 「한국의집」예술총감독,서울예고 무용과장 서울올림픽 안무총괄 공로 대통령 표창
  • “노동당의 들러리” 북한의 「야당」(오늘의 북한)

    ◎그 위장단체의 실체를 파헤친다/통일전선전략 도구로 당지시에만 맹종/사회민주당/서구·남미 외교발판 마련 첨병역할/천도교청우당/「종교」가면 쓰고 반한·반미선전 앞장 북한관영 중앙통신은 김일성이 지난달 23일 병사한 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 이계백(87)의 빈소를 직접 찾아가 조문하고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보도했다.이같은 김주석의 조문은 다소 이례적인 것으로 북한전문가들은 북한이 사회민주당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잘 알려진대로 북한은 노동당이 지배하는 사회로 모든 권력은 노동당에 집중돼 있으며 중요한 결정 역시 노동당에 의해 내려지고 있다.이처럼 노동당 유일당체제이면서도 북한은 대내외적으로 노동당 이외에 다른 정당들도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 북한이 노동당 이외의 복수정당이라고 주장하는 정당은 사회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이다.그러나 이들 정당은 이름이 정당이지 실제에 있어선 직맹이나 문예총과 마찬가지로 「당의 충실한 방조자」역할을 할뿐 정당으로서의 기능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따라서 이들 두 정당은 「야당」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노동당의 정책과 노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집권 노동당의 외곽단체이자 통일전선전략의 기구로서만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있을 뿐이다.이들 두 정당의 실체를 벗겨본다. ▷사회민주당◁ 해방직후 공산당과 적위대 그리고 구소련군대의 행패가 빚어낸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해 복수정당제가 실현된다는 것을 세계에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난 45년11월3일 「조선민주당」이란 이름으로 창당됐다.당시 당수는 고당 조만식.이후 48년3월 제3차 전당대회에서 최용건이 위원장에 올랐으나 최는 56년 4월 노동당 제4차대회에서 노동당 부위원장을 겸직,「우당」이라는 말조차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었다.김일성은 58년 조선민주당과 청우당의 지방조직을 전면적으로 해체,「당중앙」이라는 윗 조직만 남겨 놓았다. 이후 조선민주당은 하부조직도 없이 노동당의 대내외정책을 지지 또는 추종하는 어용정당으로 전락했다.이때부터 60년대까지 조선민주당은 대남문제와 관련한 성명발표와 집회참석등 대한·대미비난활동에 역점을 둔 적극적인 활동을 보였다.그러나 70년대에는 남북대화 진행과정에서 부위원장 김성율을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참여시켰는가 하면 79년1월 「조국전선」 4개항목의 구국방안에 따라 민족통일준비위원회를 구성하기 위한 남북접촉에 대표를 파견하는등 위장활동을 전개했다. 조선민주당은 81년1월28일 제6차 당대회를 열고 당의 명칭을 현재의 조선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는 한편 민주사회주의를 당의 지도이념으로 내세우고 10개항의 당강령을 새로 채택했다.이는 북한이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는 한편 이 정당을 통해 서구및 남미 등지에 외교적 발판을 구축하려는 외교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은 80년대 이후 세계각국에서 혁신정당들의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사회민주당의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국제사회에서 반한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서방의 사회주의 정당들과 연계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오고 있다. 북한은 지난 89년4월 부주석 강양욱이 병사한 이후 6년 넘게 공석으로 남아 있던 사회민주당 위원장직에 조총련부의장을 지낸 이계백을 선출했었다. ▷천도교청우당◁ 천도교도들의 정당으로 46년2월8일 김일성의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책략의 일환으로 창당됐다.초대당수에는 김달현(18 84·함북)이 선출됐으나 김은 19 58년말 「조선전선 간첩사건」에 연루돼 숙청됐다. 천도교청우당은 사회민주당과 함께 하부조직이 없는 명목상의 정당으로서 노동당의 정책을 적극 지지해왔으며 특히 종교적 이념을 표방하면서 북한의 통일정책을 한국사회에 선전하는데 앞장서 왔다. 북한은 지난 89년3월 천도교청우당 제6기 14차전원회의에서 지난 77년 이후 천도교청우당을 대표해온 정신혁을 제1부위원장으로 강등시키고 그 자리에 최덕신을 앉혔었다.최는 한국에서 외무부장관과 서독주재대사 천도교교령 등을 지낸 경력으로 인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이 회의에서는 북한이 제시한 통일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한국의 모든 천도교도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을 촉구하는 「남조선 천도교인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한바 있다. 이와함께 북한은 천도교청우당을 ▲고려연방제 통일방안 지지 ▲팀스피리트훈련 중지및 주한미군 철수 ▲한국의 북방정책 모략·비방 등 북측 통일방안 지지 및 반한·반미선전에 적극 활용해오고 있다. 현재 천도교청우당은 최덕신의 사망(89년11월)으로 다시 정신혁이 대표를 맡고 있으며 최희준·이득렬·김철민·한일섭·한영수·임선태 등이 부위원장직에 올라 있다.
  • 북,범민련의장 교체/강경파 윤기복 해임,백인준 기용

    ◎대남노선 변화여부 주목 【내외】 북한은 26일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의장 윤기복을 백인준으로 교체했다. 북한은 이날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범민련」북측본부중앙위 총회를 개최,의장에 문예총위원장 백인준을 선출했으며 16명의 부의장과 56명의 중앙위원도 선거했다고 북한방송이 이날 보도했다. 「범민련」북측본부 의장은 그동안 당중앙위 비서 윤기복이 맡아왔는데 이번에 백인준으로 교체됨으로써 최근 윤이 대남담당에서 교육담당으로 전보됐다는 일부 보도를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보여 눈길을 끌었다.
  • 서양화가 도문희씨(이세기의 인물탐구:13)

    ◎신선한 감각으로 원색의 미 묘사/변화에의 열정으로 새 조형방법창출 온힘/「정적질서」 보다 동적 유동세계 표출 돋보여/부친 도상봉화백 그늘벗어나 독자적 예술세계 추구 그림속의 꽃들은 모든 꽃이 활짝 피어 꽃바다를 이룬다.캔바스의 한정된 공간이 아닌 드넓은 벌판에 얼마든지 펼쳐진 채 꽃들은 꽃이 파리 바람에 흩날리듯 꽃향기 퍼뜨릴 듯 꽃마다 싱싱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화가 도문희의 회화세계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유랑의 필치로 원근법과 사실적기법을 적절하게 원용하면서 큐비즘과 포비즘의 요소를 포함시킨 새로운 조형방법에 능란하게 반응하고 있다」는게 원로미술평론가 이경성씨의 말이다. 「언제나 신선한 속도감과 힘을 머금고 있는 그의 화면은 정적인 질서의 세계가 아닌 동적인 유동의 세계를 절제와 생략으로 탐구하면서 격동속에서 미의 원형을 찾아내고 있다고. 도문희씨는 과연 몸속으로부터의 열망과 열정이 끓어 넘치는 힘의 화가다. 그의 작품에서는 물론 그의 일상생활에서도 잠시도 한군데 오래 머물지 않는다.서울에 있는가하면 뉴욕에 샌프란시스코에 콜로라도나 산타모니카 라구나 비치에서 또는 괌도나 하와이의 빅아일랜드에서 화사하고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곳이 어디든지간에 그가 머물고 있는 곳에는 음악이 있고 음악의 흐름에 따른 경쾌하고 격렬한 사색적인 붓놀림이 그치지 않는다.자신의 예술의지와 방법을 위해 그는 자극적인 체험을 얻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한줄기 빛이 물체에 닿는 순간,그 빛은 물체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라고 말한 르노아르의 방법처럼 도문희는 꽃이면 꽃이라는 대상을 공간이동시키 듯이 생명감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화면속에 옮겨놓고 있다.그래서 그의 꽃은 어느때는 무복을 입고 회전동작을 하는 발레리너처럼 생기발랄한 율동적터치로 음악에서의 비오렌토와 알레그리시모의 리듬감을 팔팔하게 되살리기도 한다. ○생명감 화면에 담아 그림을 그리지 않는 일상생활에서의 그는 될수록 그림과 연관시킨 일들 속에 참여하고 있다.그래서 공식적이거나 형식적인 행사자리보다연극이나 영화 한편 아르튀르 랭보의 「갈증의 희극」을 읽는 것이 그림에 대한 감동을 유발시켜준다고 생각한다. 음악이 없는 도문희란 도무지 상상하기 힘들다.클래식뮤직에서 디스코나 록뮤직,흘러간 닐다이아몬드나 젤리리에 이르기까지 그는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신들린 감흥에 물들여지기를 원한다. 아니면 그는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그랜드캐니언의 장엄한 황혼,달빛아래 사슴과 노루들이 뛰어노는 멕시코국경,크라이드강변의 성곽과 끝없이 불어오는 북풍 속에서 어디선가 「히드크리프!」를 부르는 캐서린의 목소리… 경탄과 감탄의 탄성이 절로 질러지는 눈부신 풍광을 찾아 또하나 새로운 여행계획을 세워야 한다. 초기에는 동양화에서의 삼원법과 같은 느낌으로 색채와 형태를 극대화시키면서 인물이나 꽃의 표현에서 몰골법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 대상이 무엇이든 극도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를 승화시켜 감각화된 화면효과를 과시해 보이고 있다. 이런 심적충만을 위해 그는 시간과 정열을 아낌없이 투자해 왔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캔버스와의 오랜 대결끝에 빛이 공간속에 흐르듯 몸속에 정제돼 있던 예술에너지를 이끌어 조형언어를 구축해 나갔다. 도문희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최상의 환경에서 자랐다.나혜석의 불우하고 외로웠던 말년의 생애를 뺀다면 그의 화려함과 정열과 적극적이고도 진취적인 창조의식은 초기의 나혜석을 연상시키는 구석을 많이 지니고 있다. ○초기의 나혜석 연상 그의 부친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사에서 선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바로 도상봉화백이다. 부친의 권유로 그림을 시작했으나 화가로서의 열망·야망이 꿈틀거리는 순간 그는 그림으로 향하는 두껍고 높은 벽을 스스로 힘차게 꿰뚫었다.물론 한사람의 여성으로서의 행복이 아닌 화가로서의 대성을 목표로 정하자 시련과 고통을 감수하는데 그는 주저가 없었던 것같다.고통없는 성취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상봉화백의 그늘은 예상외로 넓고 컸다.동경미술학교 출신인 부친은 국전창설멤버에다 대한미협위원장 한국미협이사장 예총회장 문총최고위원 예술문화윤리위원 위원장 등등 화단의 중책을 두루거친 거봉으로 도문희는 언제나 「도상봉씨의 딸」로 불리워야했다.그는 부친의 이 후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화격도 특성도 다른 작품으로 이를 극복하고자 했으나 그 역시 쉽지 않았다. 혜화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발레리너를 꿈꾸면서 송범무용연구소에 넘나들다가 엄격한 부친의 반대에 부딪쳐 경기여고 때 그림을 시작했다.대학에 들어가기전에는 부친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김인승씨에게 그림을 사사,「화가지망」을 굳게 결심하고 정확한 데생,탄탄한 기본실력을 닦아 나갔다. 그때는 동아음악궁전이며 종로의 쎄시봉·르네상스음악실에서 하루종일 살다시피 했고 클래식판 수집광에다 블라맹크와 칸딘스키 루오에 심취했었다고 한다. 본래부터 화려하고 솔직한 성격이어서 그는 무슨일에든 쉽게 좌절하거나 좌절해도 실망하지않았다.결과가 안좋을땐 「좋은 경험」으로 돌릴만큼 낙천적인 편이다. 그에게 그림그리기를 권유한 부친은 막상 그에게 붓한번 바로잡아준적이 없었다.오히려 대학재학중 국전에 출품하기위해 열심히 그려논 그림위에다 가위표를 해논적이 있을 뿐이다.도문희는 국전에 출품하고 싶었다.자신의 작가적 재능과 자질을 인정받을수 있는 미술관문이었으나 부친이 심사위원·운영위원·고문등으로 연루되어있어 작품을 자유롭게 낼수없는것이 불편했다.3학년과 4학년때 부친몰래 가명으로 출품해서 연2회 입선했을때도 주변에서 「부친의 후광」으로 아는 것이 억울해서 아예 국전출품은 포기하고 말았다. 부친에게 영향을 받았다면 어릴때부터 아틀리에가 있는 분위기에서 아버니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는 것뿐.오히려 동경여자미술학교 출신인 어머니 나상윤씨가 『나는 아버지때문에 그림을 포기했지만 너만이라도 나대신 열심히 하라』는 배려의 힘이 더 컸다고 할수있다. ○예술적 분이기서 성장 대학졸업후 대한미협과 이대출신그룹의 녹미회를 중심으로 그룹활동을 펼치면서 환상과 기억속의 사물들을 거칠고 대담한 야수파적인 축제분위기로 이끌어 화단의 주목을 한데 모았다. 그러나 기왕에 주어진 화가로서의 과정을 답습하는 형식에서 벗어난다는 차원에서 69년 첫번째 개인전을 연후 그는 미련없이 모든것을 떨쳐버리고 유럽으로 떠났다. 영국과 독일을 거쳐 스코틀랜드에 정착하여 그는 북구의 바다와 하늘의 변화표현에 현혹된 시기를 보냈다. 남청·담청·군청·감청·선록 보라와 옥색에 이르기까지 서로다른 수백가지 청색으로 출렁이는 바다와 천사의 날개 같은 구름의 흐름에 홀려 그는 마치 피카소의 청색시대를 연상케하는 청색조 시기를 이곳에서 거쳤다. 「시간따라 바람따라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단 한장면도 같은 색조,같은 표정을 보인적이 없었다」는 것과 「줄이엣의 푸른얼굴,로미오의 푸른눈매」머리카락과 머리에 장식한 액세사리까지도 굵고 짙은 푸른 선묘로 보여준것이 그시기의 작품들이다. 터질듯한 원색이 분방하게 펼쳐진 그 아름다움이 독특하여 독일의 벰버그 스코틀랜드 그린옥등 지방신문들은 「푸른 잎에 매달린 빗망울처럼 투명한 기쁨이 깃든 경관등으로 크게 취급한바 있다. 그의 부친이 딸의 그림을 칭찬한것은 77년 조선화랑 초대전때다. 그때 전시오프닝에 왔던 여러 화가 평론가들이 도문희 그림의 「축제분위기」를 호평하자 단지 한마디 『마치 이 세상이 천국임을 아는것같다』고 했었다.같은해 도상봉씨는 타계했고 도문희로서는 그때 그 말이 부친에게 들은 유일한 「촌평」이 된셈이다.서울에서는 지난 30년동안 끊임없는 우정의 교분을 갖고있던 선화랑의 김창실씨(화랑협이사장)와 진화랑의 유진씨의 초대전에 응하고 있다. 누구보다 도문희의 신선한 감각과 번뜩이는 젊음의 화면을 아끼는 김창실씨는 도문희의 「장미를 곧잘 「살아있는 보석」에 비유하고 「하탄과 하화가없는 그러나 화치의 극치」의 작가라고 말한다.화단의 대선배인 천경자씨는 「그의 식을줄 모르는 정열」도 정열이지만 무엇보다 「화가의 얼굴을 하고있는 화가」라는데 호감을 갖기도한다. 그는 여전히 무엇에 구애되지도 소속되지도 않는다.자신이 한일을 후회하지않는다.서울에 오면 이제는 다자란 딸과 아들과 친구처럼 어울려다닌다. 그는 화려한 치장을 즐기고 여러층의 사람들과 다양한 교분을 트고있지만 의외로 보수적이어서 안하는것 가리는것 투성이다.자유분망과는 상관없이 「맥주 한모금」등에는 남의 눈치를 보는 면이 있다. 뉴욕에서는 소호를 중심으로 일릭 드라곤루드 그레고리비치 조각가 스티븐 래등과 작품활동을 펼치고 그중 일릭 드라곤은 오는 5월 조선화랑 초대전을 주선해주기도 했다. 그는 지금 비로소 「화가의 길」을 걷게해준 부친께 감사하고 있다. 언제나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어보이는 그에게 누군가 『무엇이 그리 행복하냐』고 물었을때 그는 오히려 『슬픔과 아픔은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축복받은듯 활짝 핀 그의 꽃들은 아마도 남이 모를 아픔과 시련을 딛고 피어난 것이기에 보는이에게 보는것만으로도 진한 감동의 빛을 전달해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이 빛의 힘은 조금도 퇴색하는 기색없이 더욱 영롱하고 선명하게 그가 좋아하는 음악과 바람의 흐름에 실려 그의 화면속에서 기쁨의 빛으로 용해되고 있는것 같다. □연보 ▲1938년 서울 종로구 명륜동출생.서양화가 도상봉씨(77년 타계)와나상윤여사(87)의 1남 2녀중 막내 ▲57년 경기녀고졸업 ▲59·60년 국전입선 ▲61년 이화녀대 미대 서양화과졸업(김인승·이준·유경채·심형구사사) ▲80년 뉴욕 그래픽 버딘스 아카데미 ▲69∼72년 유럽체류(영국·옥일·스코틀랜드) 그린옥 아트갤러리·스코틀랜드 글래스코우 아트랠러리·렌프레쉬어 아트갤러리 등 개인전시 ▲73년 서울개인전(미술회관) ▲74년 아시아 련대작가전(일본 도쿄) ▲76년 세계여류미술전(인도네시아) ▲77년 서울 조선호텔 갤러리 초대개인전 ▲79년 진화랑초대 제4회 서울개인전 ▲80∼81년 미국체류(뉴욕맨해턴·버지니아 우드빌리지) 80년 비스비(Bisbe)전참가 ▲81∼8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벰버그(Bemberg)풀다(Fulda)빌트프릭켄(Wildfricken)개인전 ▲87년 서울선화랑 초대「장미」개인전 ▲89년 〃 진화랑 초대 개인전 ▲91년 〃선화랑 초대 개인전 ▲91년 〃정화랑〃 〃 ▲92년 MBC후원 부산호텔 미술관·아천미술관초대전 ▲93년1월 LA 앤드루 셔(Andrew Shire)갤러리 초대전 ▲한국미협·녹미회 회원 ▲작업실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국립현대미술관 간 한국서양화대관(작품수록)
  • 적십자 최고훈장 받아

    노태우대통령은 25일 상오 청와대에서 강영훈대한적십자사 총재로부터 올해 대한적십자사 사업계획과 회비모금에 관한 보고를 받고 특별회비를 전달했다. 강총재는 이날 명예총재인 노대통령에게 적십자 최고훈장 무궁화장을 증정하고 재임중의 협조와 관심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 제5회 전태일문학상/시부문 맹문재씨 당선(문단소식)

    제5회 전태일문학상 시부문 수상작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 박사과정에 있는 맹문재씨(30)의 「미싯가루를 타며」가 뽑혔다. 시상식은 오는 2월20일 하오4시 민예총 강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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