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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계 인사와 오찬/김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은 16일 낮 청와대에서 신영균 예총회장 등 문화예술계인사 6명과 오찬을 함께 하며 문화예술 발전방안을 비롯한 새 역사 창조작업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김대통령과 문화예술계 인사의 오찬은 지난 4일부터 시작된 각계각층 지도급 인사와의 대화모임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오찬에는 신회장 외에 이두식 미협이사장,소설가 이문렬씨,무용인 최청자씨,지휘자 금난새씨,탤런트 김혜수양 등이 참석했다.
  • 서울신문 창간 50주년/“세계 초일류 신문으로 대도약”

    ◎손사장 기념사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축하연에 각계 1천5백명 참석 성황 서울신문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리셉션이 22일 하오6시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손주환 사장을 비롯한 서울신문 전·현직 임직원과 각계에서 초청한 인사 등 2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상오11시에는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서울신문 창간 50주년 기념식 및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개통식을 가졌다. 리셉션에는 황낙주 국회의장,김윤환 민자당대표,김대중 국민회의총재,김종필 자민련총재·홍영기·박일 민주당공동대표,이홍구 국무총리,홍재형 부총리,안우만법무부·박영식 교육부·최인기 농림수산부·이성호 복지부·오인환 공보처·경상현 정보통신부·진념 노동부·김중위환경부·정근모 과학기술처·주돈식 문체부·김장숙 정무제2장관,추경석 국세청장,김기석 법제처장,황인성 전국무총리,신경식 국회문체공위원장,조순 서울시장,김기수 검찰총장,박일용 경찰청장,이경식 한국은행총재,김상하 대한상공회의소회장,구평회 무역협회장,이동찬 한국경경자총협회회장,김석준 쌍용그룹·김희철 벽산그룹회장,이종덕 예술의전당사장,조경희 예술의전당고문,이대원 예술원회장,김상식 서울예술단단장,신영균 예총회장,김기춘 한국야구위원회총재,유도재 국민체육진흥공단이사장,김성집 대한체육회부회장,박용성 세계유도연맹회장,박상하 세계정구연맹회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리셉션은 1부 공식행사,2부 축하공연 등으로 이루어져 2시간동안 진행됐다. 1부 행사는 사회자의 개회선언에 이어 서울신문 창간 50주년을 기념하는 축시 낭송,50년의 역사 및 각계 인사·애독자의 축사를 담은 홍보비디오 상영,손주환 사장의 기념사,황락주 국회의장·이홍구 국무총리 등 외빈축사,국내 정상급 성악가 엄정행 교수의 축가,축하케이크자르기에 이어 건배 순으로 진행됐다. 손사장은 기념사에서 『해방대한민국의 대변지임을 자임하며 창간된 서울신문은 50년을 한결같이 국론의 대변지 역할을 다 해왔다』며 『상업주의와 선정주의가 팽배한 오늘의 언론현실에서 합리성과 전문성·책임성을 갖춘 보도와 논평으로 세계 초일류신문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창간 축하피나리로 시작된 축하공연은 임백천씨의 사회로 민혜경·유열·조영남씨 등 초대가수가 나와 히트곡을 불렀으며 영화배우 오정혜씨가 판소리를 열창했다. 이에 앞서 이날 상오11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기념식에서는 평생을 서울신문에 몸담아온 근속사원에 대한 표창과 우수판매보급소에 대한 포상이 있었다. 한편 서기원·이한수씨 등 전직사장 및 편집국장 등도 초청된 기념식에서는 이재근 통일안보연구소장·김성기 장항지국장 등 7명이 30년 근속상,백한기 인쇄제작국부국장·최창우 고덕지국장 등 30명이 25년 근속상,신경렬 출판편집부국장·이종갑 공주지국장 등 25명이 20년 근속상,김영만 편집국경제부장·조병호 광주지사장 등 28명이 15년 근속상,강일홍사업국 문화사업부장·권병찬 가락지국장 등 2백46명이 10년 근속상을 수상했다. 또 종합조정실 경영기획부 등 13개 부서 34명이 공로상,김봉섭 전남고흥지국장 등 18명이 우수지국장상을 수상했으며 장기구독자 7명이 감사장을 받았다.
  • 제11회 향토문화 대상/대상에 김정명 춘천문화원장

    ◎본상 개인 5명·단체 1곳 선정/새달 1일 시상식 서울신문사가 전통문화 계승과 지역문화의 창달에 힘써온 숨은 일꾼을 찾기 위해 제정한 제11회 향토문화대상 수상자가 22일 결정됐다. 전통문화부문과 현대문화부문으로 나누어 전국의 시·군 문화공보실과 문화원·예총·향토사학자들이 추천한 단체 및 개인을 대상으로 심사한 결과 영예의 대상에는 김정명 춘천문화원장(75)이 선정됐다. 본상중 전통문화부문에는 ▲김상곤(남원애향운동 본부장·58·전북 남원) ▲대구향토문화연구소(대표 김택규·66) ▲최종덕(양양 오색국교교사·52·강원 양양)씨등 3명이,현대문화부문에는 ▲이윤수(시인·82·대구시) ▲이은구(이천문화원장·52·경기 이천) ▲심우성(극단 서낭당 대표·62·충남 공주)씨등 3명이 뽑혔다. 대상에는 상금 3백만원,본상에는 각각 2백만원씩의 상금이 주어진다. 올해 심사는 구상(시인)·차범석(극작가)·임동권(중앙대 명예교수·민속학)·정영호(한국교원대 교수·역사학)·이중한(서울신문 논설위원)씨등 5명이 맡았다. 서울신문사 주최,LG전자 협찬,문화체육부 후원으로 열리는 이번 향토문화대상 시상식은 오늘 12월 1일 하오 4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열린다. ◎대상 수상자 김정명 춘천문화원장/「소양제」 부활·예술행사 활성화/민속자료실 만들고 삼악산성 복원 앞장 『큰 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지역에 묻혀버린 향토문화의 발굴,보존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대상 수상자로 결정된 강원도 춘천문화원장 김정명씨(75)씨는 『선인들의 얼이 담긴 향토문화를 보존하고 전승하는 작업이 너무 미흡해,후손으로서의 도리를 하려고 애썼을 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양구군수·강릉시장·도청 상공국장,중소기업 협동조합 도지부장 등을 거쳐 지난 87년 춘천문화원장으로 부임했다.그 때 문화원은 봉의동 도청 앞의 건물에 3평짜리 사무실를 임대해 쓰고 있었다.인원은 여직원 한명과 원장 뿐이었다. 문화재를 간수하는 유일한 기관인 문화원의 당시 역할과 위상을 말해주는 사례이다.『조상들의 발자취와 손때 묻은 유품들을 추스리려는 노력이나 의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때마침 시립도서관이 새 건물을 짓자,문화의 중요성을 역설해 사무실을 도서관으로 옮기고 민속자료실과 영상오디오 자료실·미니 도서실 등을 만들고 지역의 예술·문화 행사를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흐지부지됐던 춘천의 향토문화 축제인 「소양제」를 77년부터 부활하고 정월 대보름 놀이와 청소년 유적답사 등도 알차게 추진했습니다』 향토문화를 지키고 가꾸려면 주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 솔선하기 시작했다.스스로 강원도 전역을 누비며 선조들의 생활도구와 유물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은 베틀,소 구유,재래식 쥐틀 등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6백여점의 유물들을 의상,음식,생활,생활방식,습관 등으로 나뉘어 민속자료실에 전시했습니다』 대부분 지금은 볼 수 없는 물건들이다.학생들과 주민들이 문화원을 향토문화의 학습장으로 활용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요즈음은 스러져가는 산성 복원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춘천 덕두원리에 10여m 정도만 남아 있는 고대 맥국의 마지막 유적인 삼악산성의 복원 작업을 서두르고 있습니다.맥국은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 왕국으로 강원도의 뿌리입니다』 춘천,나아가 강원도의 뿌리인 맥국의 보존을 위해 3년 전 조사위원회를 만들었고,오는 연말까지는 신북읍 발산1리에 맥국터비를 세우기로 했다. 이에 앞서 몽고 침략에 맞서 결사적으로 싸웠던 항몽터전으로,허물어져 자취를 잃어가는 봉의산성을 2차례에 걸쳐 복원했다. 『국립 강원박물관을 세우고,지역 인사 17분이 모여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시를 읊던 국사봉에 망배도 세워 선조들의 참된 얼을 배우고 잇는 곳으로 활용토록 하겠습니다』 정선아리랑 등 전통문화를 12분야로 나눠 책으로 펴내기 위해 서두르는 등 제 2문화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원장은 『강원도에 제 2의 김유정과 이효석이 배출될 수 있는 문화의 터전을 만들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춘향제」를 전국규모의 축제로/김상곤 남원애향운동본부장 지난 85년 춘향문화선양회를 발족해 해마다 춘향제를 창의적으로 유치,전국적인 규모의 축제가 되도록 했다.91년 춘향제부터는 춘향문화대상(학술·예술·여성·언론분야)을 제정해 올해까지 상을 시상해오고 있다.92년 춘향제 때는 「춘향제 60년사」를 발간했으며 93년에는 「춘향전 관계사 학위논문선집」「춘향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발간했다. 투철한 향토애를 바탕으로 남원의 문화전통을 가꾸고 남원인의 품위향상을 위해 애쓰는 것은 물론 현재 춘향제를 세계적인 관광문화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남사당 놀이」 등 문화재지정 공헌/심우성 극단 서낭당 대표 59년 사라져 가던 「남사당 놀이」의 연희를 수합해 재연한 이래 특히 전통 인형극과 탈놀이의 발굴조사를 통해 무형문화재의 지정에 공헌해 왔다. 저서로 「남사당패 연구」「무형문화재 총람」「한국의 민속극」「한국의 민속놀이」「민속문화와 민중의식」「탈」등이 있으며 「조선무속의 연구」「역과 점의 과학」「연극의 역사」등 20여권의 역저가 있다. 현재는 문화체육부 문화재 전문위원,극단 서낭당 대표,한국민속연구소 소장,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69년 창립… 「향토문화」 회지 발간/대구향토문화연구소 69년 6월 향토사 및 향토문화의 조사연구에 관심있는 교수와 향토사가들이 모여 창립됐다.같은해 12월 회지인 「향토문화」를 육필사본으로 간행하는등 연구회의 발전을 꾀했으며 85년 7월부터는 대우학술재단의 지원을 받아 모임을 활성화 하고있다. 현재 회지는 제7집까지 간행됐으며 조사보고서로는 「경상감사 도임행차순력 복원」「화랑문화의 신연구」「낙동강 유역사」등을 출간할 예정이다.이밖에도 향토사 사료 윤독회,향토사적 답사 등으로 대구 경북지역의 향토문화연구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87년부터는 각 지역의 향토문화 연구단체를 결집해 우리 문화유산을 발굴·보존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76년 청파요 개설… 도예발전 헌신/이은구 이천문화원장 우리 전통도예의 맥을 이은 분청사기의 장인으로 76년 이천읍 사음리에 청파요를 개설해 도예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 왔다. 91년 1월 이천문화원장에 취임한 이래 각종 문화사업을 통해 지역문화 발전은 물론 지방문화원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공헌했다.특히 이천문화원이 해마다 10월에 개최하는 이천도자기축제를 국내외 관광객 유치를 위한 문화관광축제로 적극 육성,올해 제9회 이천도자기축제의 경우 외국인 1만5천명을 포함한 25만명의 관광객 유치에 성공했으며 4억3천만원의 도자기 판매실적과 함께 도예작품전·한국의 잔 특별전·도자기 제작실연등 각종 행사를 마련해 도예문화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농악대 구성… 전통민속 보존 힘써/최종덕 양양 오색국교 교사 63년 교육계에 투신한 이래 투철한 교육관으로 전통민속예술과 우리 뿌리찾기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해왔다. 전통민속예술의 창달 및 계승발전을 위해 사라져 가는 향토민속의 발굴에 힘써 강원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종합최우수상 3회,종합우수상 2회와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체육부장관상을 3차례 수상했다. 양양군 전통민속보존회와 어린이·청년·노인 농악대를 각각 구성해 농악보급 및 보존에 힘쓰고 있으며 청소년 어울마당 지도교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또한 여름 피서철에는 해수욕장에서 고장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전통민속을 공연함으로써 볼거리를 제공하고 향토민속을 관광자원화해 주민소득 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광복뒤 첫 월간시집 「죽순」 창간/이윤수 시인 지난 45년 「죽순시인구락부」창립 이래 현재까지 대표로 있으면서 46년 광복 최초로 월간 동인시집 「죽순」을 창간했다.48년 한국문단 최초로 「상화시비」를 대구달성공원에 건립했으며 50년에는 문총(현 예총)구국대 경북지부를 조직했다.79년 동인시집 「죽순」을 복간했으며 83년에는 「전선시첩」1·2·3 합본을 발했다. 85년 상화시인상을 제정,올해로 10회째를 맞고 있으며 90년부터는 상화시 전국백일장을 해마다 실시하고 있다.92년 2월부터 한동안 서울신문에 「향토시인 이윤수 특집」이라는 글을 게재해 필력을 과시했으며 지난해 5월에는 한·일 국교수립후 처음으로 한·일 친선합동시화전을 주일 한국총영사관 초청으로 열었다.
  • 부정축재 강조… 사법처리 가닥/노태우씨 비리­청와대 입장

    ◎“대선자금 떳떳”… 야 공세에 정면대응/“정경유착 발본”… 제도정비 역점둘듯 김영삼 대통령이 30일 국무위원 조찬과 3부요인 및 정당대표 오찬 자리에서 노태우전대통령 비자금 파문과 관련,논란의 소지가 있는 대선자금을 직접 받은 일이 없음을 시사해 여권의 이번 사태 해법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유엔방문성과등을 설명한 이날 오찬에서 김대통령은 자신의 떳떳함을 전제로 이번 파문을 정치권이 환골탈태하는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있다.취임초의 약속대로 단 한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음은 물론 군사정권의 악습인 정경유착의 관행을 반드시 뿌리뽑겠다는 것이다. 정치권 정화의 수단으로는 엄정한 검찰수사를 제시하고 있다.「법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전직대통령 혹은 여야 정당지도자등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불법이 드러나면 조사하고 사법처리할 생각임을 시사했다.제도적으로는 정치자금법과 선거법의 추가 손질을 내각에 지시하기도 했다. 이날 가장 관심을 모았던 92년 대선 자금과 관련,김대통령은 『검찰수사를 통해 다 밝혀질 것』이라고 답변했다. 김대통령은 또 노전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한 92년 10월5일 이후 14대 대선기간까지 노씨를 만난 일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그 이전에는 노씨가 민자당 총재 및 명예총재로서 민자당운영비를 지원했겠지만 그것도 당시 대표였던 자신을 거치지 않고 당에 전달됐었다고 말했다.결국 김대통령은 노씨로부터 직접 선거자금을 지원받은 일이 없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밝힌 셈이다. 청와대의 한 고위관계자는 『여야 정당의 대선채비는 선거일 훨씬 전부터 시작되므로 선거비용을 정확히 계산해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서 『그러나 노전대통령이 여야 정당에 대선자금을 지원했다면 검찰조사과정에서 드러날 것이고 그 내역은 숨김없이 공개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김대통령은 노전대통령으로부터 대선자금을 지원받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정황도 제시했다.『3당 합당후 정치적으로 나를 죽이려는 음모공작이 진행됐다』 『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탈당했다』 『총재의 탈당은 엄청난 일이었다』는 등의 언급이 그것이다. 김대통령은 비자금 파문을 대선자금 공방으로 몰아가려는 야권의 정치공세에 대해 자신은 당당하다며 일단 쐐기를 박은뒤 「모든 것이 명백히 밝혀질」 검찰조사결과를 지켜보도록 요구했다.아울러 노씨의 「부정축재」 혐의가 계속 드러나고 있는 점을 감안,그와의 「연」을 확실히 끊는 수순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결국 검찰조사를 통한 정면돌파만이 이번 사태의 유일한 해법임을 김대통령이 다시 한번 강조한 것이다. ◎김 대통령 국무위원 조찬·3부요인 오찬 발언/노 총재 자신이 직접 민자당 자금지원/대선전 노씨 탈당 충격… 홀로서기 시도 김영삼 대통령은 30일 청와대에서 이홍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전국무위원과 조찬간담회를 가진데 이어 낮에는 황낙주 국회의장 등 3부요인과 여야대표를 초청,오찬을 함께 하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파문과 관련한 소회의 일단을 피력했다.이날 오찬에는 박일민주당공동대표가 참석했으나 같이 초청된 김대중국민회의·김종필자민련총재는 불참했다. ▷국무위원 조찬◁ ▲김대통령=검찰이 성역 없이 공명정대하게 철저한 수사를 해 만인이 법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문민정부의 당당한 도덕성에 입각,머뭇거리는 일 없이 정경유착의 고리를 완전히 끊어야 합니다.정경유착을 단절하기 위해 정치자금법·선거법 개정등을 포함하는 제도개선방안을 내각이 검토해주기 바랍니다. 앞으로 여든 야든,어느 누구든 이른바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과거 3대에 걸친 군사정권시절 규모에는 차이가 있었으나 비자금을 조성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 금융실명제 때문에 감춰지지 못하고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과거에는 검은 돈이 있었지만 이제는 안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금융실명제의 위력입니다.과거의 관행이라면 모든 것이 용서받는 일이 더이상 있어서는 안됩니다.검찰은 철저히 조사,한점의 의혹도 없도록 함으로써 법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이 기회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듭시다. (직선제 개헌투쟁,총재직 가처분신청,가택연금,단식투쟁등 과거 정치역정을 설명한 뒤) 과거의 정당은 당총재가 운영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야당총재하면서 대기업사람은 만날 수조차 없으니 조그만 사업을 하는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3당합당은 소련 방문을 계기로 세계의 엄청난 변화를 실감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군정 계속을 피할 수 없겠다는 오랜 번민끝에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3당합당후 나 자신을 정치적으로 죽이려는 여러가지 음모가 있었으며 때문에 당시 노대통령과 7시간30분간이나 담판을 해야 한 일도 있었습니다.나중에 총재가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당 간부 하나가 탈당을 해도 충격인데 총재가 탈당했으니 얼마나 큰 충격이었겠습니까.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홀로서기를 했습니다. 지난 40년에 걸친 야당생활의 고초와 경험을 생각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취임후 어느 누구로부터도 단 한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것을 지켜왔으며 앞으로도 지킬 것입니다.임기중에 한국병을 치유하는 데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오찬 대화록◁ ▲김대통령=(국무위원 조찬때와 같은 언급을 한 뒤) 한국병중 가장 심한 것이 대통령이 돈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이것을 그대로 두면 국민의 정치불신 때문에 여야 할것없이 다 죽습니다.이번 기회에 정치권이 반성해야 하고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이번 일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대통령 한 것이 최고의 영예인데 도대체 부정축재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이 문제를 적당히 처리할 생각은 추호도 없고 사심없이 공명정대하게 해나가겠습니다. ▲박일 민주당 대표=우리당은 오늘 아침 의원총회에서 「이번 사건을 한점 의혹도 없이 밝혀주고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자금을 밝혀야 한다」는 결의를 채택,이를 대통령에게 전달키로 결정했습니다. ▲김대통령=지금까지 내가 한 말속에 여러가지 뜻이 다 담겨 있습니다.검찰수사를 통해 다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노총재 시절에는 민자당의 자금에 대해 내게 얘기해준 일도 없으며 또 내가 간여한 바도 없습니다.총재 자신이 당에 직접 지원했을 것으로봅니다.(노전대통령은)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민자당을 탈당한 것이고 그후에는 만난 일이 없었습니다.
  • 사진작가 임응식(이세기의 인물탐구:84)

    ◎“셔터 외곬 인생”… 한국 사진예술의 선각자/“비예술성” 홀대속 국전 사진부문 신설 앞장/“인간의 살아있는 순간을 포착… 영원을 간직”/입학 선물 카메라가 첫 인연… 8순 넘은 지금도 활동 「인간은 살아있는 모든 순간을 멈출 수 없지만 카메라는 파인더를 통한 순간포착으로 영원을 담아낸다」 불모지 한국사단의 개척자이자 사진예술의 선각자로 불리는 임응식 원로의 사진예술관이다.미술평론가 이경성씨는 그의 사진과 관련된 일관된 자세를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디에 브레송에 비유하기를 주저치 않는다.「그의 눈은 과학자가 자연을 분석하고 연구하듯이 생의 본질을 잡기 위해 인간세상의 구석구석을 경건하게 통찰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인위적으로 생산된 사진,연출된 사진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브레송의 말대로 「그들의 사진예술의 공통점은 기록성이 확대되어 역사성으로 이어지고 한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노력과 정성의 불식」임을 지적하고 있다. ○베레모·검은 안경 차림 사진가는 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숙명을 쫓아 8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베레모에 검은 안경,간단한 촬영기재를 챙겨들고 아침마다 직장에 출근하는 것처럼 명동으로 나간다.명동은 「서울의 변화」이자 「한국의 문화사적 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거울」이며 그가 지나온 흔적이고 희망찬 미래이기 때문이다.20여년전까지만해도 전봇대위에 올라가 명동거리를 찍고 있는 그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지금은 서울 한복판에 서서 살아움직이는 명동의 표리를 응시하고 사유한다. 「나의 일생은 마라토너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골인지점 하나만을 똑바로 보고 혼자서 싸우며 앞을 향해 달렸기 때문에 성취감이 특별히 남다를 수 밖에 없다」 사진계에서 이룩한 수많은 그의 업적중에서도 57년 뉴욕근대미술관 25주년기념행사였던 「인간가족전」유치를 빼놓을 수 없다.작품을 운반하는 데만 대형트럭 70대,관람객 30만명을 동원하는 가 하면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68개국의 쟁쟁한 현역들이 참가한 「인간종합 전시의 파노라마를 연출했다」는 평을 들었다. 또 「사진쟁이가어떻게 문화인이며 예술인이냐」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온갖 수모를 딛고 문총(예총전신)에 사진을 가입시킨 일이며 12년에 걸친 완강한 고투끝에 국전에 사진부문을 설치한 것은 그만의 끈질긴 고집과 자존심,강직함의 승리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국전 사진부 설치과정에서 조각가 윤효중씨와의 극도의 갈등은 한국사진사와 국전의 자취를 정리할 때마다 언제나 거론되는 사건의 하나다. 단지 사진이 한국미협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대한미협을 대표하는 윤효중씨는 국전의 사진부 신설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고 심지어는 「한국미협에서 탈퇴한다면 당장 국전 사진부문 설치는 물론 홍대에도 사진과를 신설하겠다」고 회유했다.「아무리 목적달성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자세로 이를 묵살했으나 그가 60년도 서울시문화상 수상자로 추천된 자리에서 당사자인 윤효중씨가 「감언이설 따위에 미동도 하지않는 도도한 태도는 참으로 본받을 만한 예술인의 자세」로 칭송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드디어 64년 국전에 사진부가 탄생되긴 했으나 이번에는 최고상인 대통령상 국무총리상등 최고상에서 사진을 제외시키는 바람에 굴욕을 느낀 그는 국전심사위원직을 사퇴,국전의 차별성과 부당성을 성토하는 한편 주무당국에 시정을 촉구하는 건의서와 각 신문지상에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그 때의 비참했던 심경을 그는 「렌즈에 담은 소명」이란 글에서 「우리는 비굴할 정도로 참아냈다」고 표현하고 있다. ○6·25때는 종군작가 활동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세는 원리원칙과 정의를 주장하는 비타협주의로 응집되어있다.그리고 그것은 한 작가의 명예와 성문때문이 아니라 사진의 위상을 지키려는 사단의 자존심임은 두말의 여지가 없다. 초기에는 정물과 풍경,인물과 누드를 소재로한 인상파적 표현기법에 천착하여 「사진미학의 완성자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 접근한다」는 평을 들었고 실제로 30,40년대 「침몰」같은 작품은 카메라를 쓰지 않고 인화지위에 직접 물체를 두고 빛을 쬐어 빛과 그림자만의 그라데이션으로 영상을 처리한 포토그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가 현실에 눈돌리기 시작한 것은 6·25직후 USIS가 파견한 인천상륙작전 종군작가로 일하면서부터다.그와 친밀했던 「라이프」지의 기자 핸크워커가 「시체의 행렬」을 카메라로 끝 없이 쫓는 것을 보고 그는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진실한 기록」에 눈떠갔다.전후 폐허가 된 음습한 명동의 풀빵가게앞에서 허기진 배를 달래는 슬픈 부녀와 직업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방황하는 청년의 「구직」은 인간존엄의 상실과 살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을 「사진은 사진」이라는 차원에서 그려낸 새로운 시각의 작품들이다.「인간의 몸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살점이 썩어가는 마당에 회화적 아름다움이니 관념적 자연미 추구는 한낱 한가로운 「음풍농월」이었고 그는 스스로 자책하여 싱싱한 「생활주의 리얼리즘」을 지향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그는 대학에서 최초로 사진을 강의하는가 하면 국립현대미술관에 예빙되어 사진가로선 처음으로 고희기념전을 개최,하셀블라드 같은 고급 카메라를 쓴적은 없지만 그의 작품 4백20여점은 미술관에 영구보존되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그는 제자들에게 「아무리 위대한 인물묘사도 한장의 사진이상 설득력이 없으며 사람의 눈이 미치지 못하는 미세한 부분을 가차없이 포착하는 카메라의 눈에 자부심을 가지라」고 당부해 마지않는다. ○미술관에 420점 보존 그는 부산에서 한말 관리였던 임춘화씨와 김복덕 여사의 4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소년시절엔 바이올리니스트 화가를 꿈꾸기도 했으나 도쿄 와세다중학 입학기념으로 둘째형(응구씨 재일화가)이 사다준 박스형 카메라 한대가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었다.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던 엉뚱하게도 일본 풍도체신학교 졸업후 강릉우체국에 근무한 것까지도 결국 「사진」에 도달하기 위한 한 과정에 불과했을 뿐이다.사진에만 몰두하여 집안살림은 여유가 없었으나 신교육을 받은 부인 박갑득 여사가 3남 4녀를 훌륭히 키워냈고 장남인 범택(한양대 교수)씨가 부친의 뒤를 잇고 있다. 「여야일록」.화가 석도륜씨가 카메라를 메고 명동을 도는 그의 모습을 「들판의 한마리 외로운 사슴」에 비유한 휘호다.그러나 순간을 멈추고순간을 영원히 남기려는 그의 도정은 「도심을 꿰뚫는 혁혁한 형안」이란 표현이 한층 어울릴지 모른다. 이제 그에게서 쾌심작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진이 인생의 모든 것이 돼버린 작가」만의 「삶의 지혜와 인생을 체관한 시각」은 그를 능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명동을 겨냥하는 그의 셔터소리는 시간을 정지하는 소리며 그의 카메라는 낭만과 전쟁과 역사의 비풍참우,인생의 모든 것이 충만하게 담긴,한국 제일의 보물상자에 틀림없을 것같다. □연보 ▲1912년 부산 출생 ▲31∼34년 부산사진 여광 구락부 가입,일본 와세다(조도전)중학 및 일본 풍도통신학교졸업,일본「사진살롱」지에 「초자정물」발표 ▲35∼37년 강릉우체국근무 ▲47년 부산예술사진연구회발족 ▲50년 인천상륙작전 종군,「경인전선 보도사진 개인전」 ▲52년 제1회 도쿄국제사진살롱에 「병아리」입선,한국사진가협회결성 ▲53∼73년 서울대를 필두로 이후 이대 홍대 건대 덕성여대 서울여대 숙대 서라벌예대출강 ▲55년 미국 사진연감 「포토그라피 애뉴얼」에「나목」수록 ▲57년 「인간가족사진전」유치(경복궁미술관) ▲64∼82년 국전초대작가 ▲69∼71년 월간「공간」지 주간 ▲72년 임응식회고전(서울,부산) ▲73년 한국사진협회 이사장 ▲74∼78년 국전운영위원,한국사진교육연구회창립 대표 ▲74∼90년 중앙대교수 ▲82년 국립현대미술관초대 회고전 ▲83년 미국LA한국공보원초대전 ▲89년 주불한국문화원초청「임응식 사진전」(파리) ▲95년 삼성 포토스페이스 개관 임응식회고전 서울시 문화상(60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71년) 문공부현대사진문화상(78) 은관문화훈장(89) 「한국의 고건축」(5집)「임응식 사진집」(79)「풍모」(82)「임응식 작품집」(95)외 「사진표현과 작가」「사진사상」등
  • 17일까지 「현대중국화 대조류전」(미술계)

    ◎중국 현대미술 흐름 한눈에 중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경향을 엿볼 수 있는 대형전시회가 열린다. 11일부터 17일까지 서울 현화랑·공평아트센터·백송화랑등에서 개최하는 「현대 중국화 대조류전」. 매일경제신문사가 기획한 이 전시는 중국화단의 원로에서부터 중견,신진에 이르기까지 작가 61명이 2백10점을 출품,오늘날 중국화단의 면모를 폭넓게 감상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미술의 해」를 맞아 동양문화 종주국인 중국의 현대미술을 통해 21세기 동양미술의 미래를 조망한다는 취지로마련된 이 전시회에는 북경·상해는 물론 만주에서 광동성에 이르기까지 대륙 전지역 작가들의 작품이 망라된다. 현대 중국화단의 거장 이가염을 비롯 오관중·방제중등 원로그룹과 중진급인 북경화단의 주사총·가우복·양연문·왕명명,상해화단의 리더 임희명·진가령,광주화단의 탕집상·섭녹야,몽고의 장준덕,남경의 방준,항주의 유국휘,무한예총회장 주소화,신강성 여소복등의 걸출한 작품들이 나와 중국미술의 정수를 접하게 한다. 출품작 가운데 특히 장대한 자연을 담은 이가염의 미공개작 「리강산수갑천하」,오관중·가우복의 최근작,왕소휘의 대작 「부효향친」과 함께 우리나라 속리산의 풍경을 그린 진가령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 극작가 차범석(이세기의 인물탐구:83)

    ◎리얼리즘 바탕 「정통극 파수꾼」 40년/대표작 「산불」 전쟁의 인간파괴 신랄하게 묘파/부당한 것 거부하는 「연극계 면도칼」로 한평생/최승희 무용보고 「무대 인생」 예감… 이해랑·유치진 문하서 엄격한 수련 희곡작가 차범석은 연극계의 로맨티시스트다.동숭동 마롱카페에 나가보면 젊은 연극인들에게 둘러싸여 그는 맥주를 마시며 연극과 인생을 논하고 있다.「주역만 있고 조연 없는 연극은 있을 수 없다.우리의 삶은 큰 배역만 탐내는 한편의 연극 같이 보이지만 작은 배역 없이 큰연극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파우스트보다 메피스토 텔레스가 진짜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역이듯이 무대 구석구석에 세워둔 단역조역들의 몫에서 극중 희열과 비감,완미가 성취된다.무릇 물이 얕으면 큰배를 띄울 수 없는 것과 같이 깊고 다양한 여러 경험이 크고 광활한 연기력을 키운다」고 후배들을 가르친다. 한배우가 무대에 등장했다가 맡은바 임무를 다하고 퇴장하기까지 그것은 하나의 삶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일이다.그런만큼 배우는 등장도 중요하지만 퇴장도 중요하다.막을 내리기가 무섭게 분장을 지우고 무대를 떠나는 사람을 보면 「자기포기와 무책임」이 느껴지지만 연기의 온기를 오래도록 가슴에 담는 배우의 모습에선 「비장미가 넘친다」고 찬양해 마지않는다. 그가 63년부터 20년이나 이끌던 극단산하를 해체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다.「연극을 지상목표로 삼으려는 의지는 눈비비고도 찾아볼 수 없이 연기를 가르쳐 무대에 설만하면 그들은 철새처럼 돈을 따라 텔레비전으로 가버린다」고 했다.「연극은 집단예술인만큼 인간적인 결합 없이는 아무런 작업도 가능하지 않다.그럼에도 정신적인 반항이 없는 정지된 예술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껍질을 깨는 아픔을 모르는 젊은이들이 환멸스럽다」고 그는 한 글에서 개탄하고 있다.이어서 「기대할 수 없는 것에 얽매어 질척대는 것은 자기비하이자 존재를 흩트리는 추일 수 밖에 없으며」「부나비처럼 떠도는 인간불신풍조속에서 나만이 홀로 절개와 의리를 지키는 것은 명분 없다」고 절규했다. 적자를 면치못하는 극단의 영세한 상황속에서도 「산불」「밀주」「대리인」「손탁호텔」등 알찬 창작극으로 꾸준히 「좋은 무대」를 이끌던 산하는 「연기자의 연극정신부재」「저질공연우려」등을 내세워 83년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련과 아쉬움을 남긴채 이렇게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칠순의 나이와는 상관 없이 언제나 만년청년 같은 그는 옛 예술가의 낭만과 니힐과 반항과 순수를 지금도 면면히 지니고 있다.그가 「한달이면 29일」을 술을 마시는 이유는 사람들과의 따사로운 온정에 굶주려 「정을 마시기 위해 술잔을 든다」는 것이며 인생의 어둡고 뒤틀린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긍정에의 동경이 너무 강한 때문」이라고 했다. 지난 40년간 「연극계의 면도칼」로 불리면서 그는 과연 부당한 것을 굳이 옳다고 양비론을 펼치거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할 수 있다고 과장한 적이 없다.연극상을 심사하는 과정에서도 무의미한 공연기록과 긴 연륜을 앞세우기보다 작품의 질과 연기력을 따져 날카롭게 자격여부를 가려낸다.또한 스스로의 조로를 경멸하여 연극의 모든 일에 은근히 참여하고 옳바른 소리를 주저 없이 하면서도 「번뜩이는 재기나 교변」 사물에 대한 심정의 움직임에서 세말적인 기미대신 싱그러운 미소로 만사를 감싸기 때문에,각층의 폭넓은 호감을 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단산하를 잃은후 그는 한국연극협회 이사장,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사,대한민국예술원회원과 청주대 예술대학장등 여러 역할을 전전했다.86년에는 88올림픽을 앞둔 88서울예술단 초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창단기념 시연회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관련장관이 코를 골고 잔 것에 자존심을 심하게 상한 나머지 사표를 내던진 씁쓸한 에피소드를 남기고 있다. 시간과 함께 그의 까다로운 일면은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졌고 반항과 증오와 충동에서 시작한 초기의 경험을 버리고 「삶이란 양파를 벗겨내듯 아무리 벗겨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는 서서히 깨닫게 되었나보다.그 때부터 톡쏘는 옳은 소리를 줄이고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는 계신공구의 자세로 전환했다. 그의 지나온 인생은 평온한 중에 끝 없는 파고가 잔물결처럼 파동치는 것이 남과 다르다. 목포의 개화되고 풍족한 집안에서 일본 메이지대(명치대) 법학과를 나온 차남진씨의 3남3녀중 차남. 남부러울 것 없는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면서 집안의 서고에 파묻혀 아리시마 다케오(유도무낭) 무샤노코지 사네아쓰(무자소로 실독)의 소설에 탐닉하고 일본 히메지(희로)고교에 시험을 보러갔다가 낙방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후지자와 다케오(등택)의 「신설」을 가슴에 품을 만큼 열렬한 문학지망생의 시기를 보냈다.어릴 때의 아명은 평균.광주고보시절 목포 평화극장에서 열린 최승희무용공연을 보고 「정중동의 미세한 움직임과 끊어질듯 이어지고 멈춘듯 움직이는 유현미와 고담미」에 반해 그는 훗날 「무대」와 관련을 갖게 되리라는 예감을 굳혔다. 그는 철저한 리얼리스트이기도 하다. 뒤늦게 23세에 대학에 진학해서 문자그대로 「경마장의 말처럼 정해진 코스를 필사적으로 달리면서」 엄격한 스승인 이해랑 유치진문하에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정통극」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연극계는 언제부턴가 「리얼리즘의 희곡작가」 또는 「리얼리즘의 파수꾼」으로 그를 부르게 되었다. 「나름대로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쳐왔다.나라는 인간은 일관성도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온 모순덩어리라는 생각 때문이다.그 증거로 나의 인생행로에는 투쟁이나 저항의 흔적이 없다.적극적인 동참이나 협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그렇다면 나는 뭐란 말인가」.그러나 평론가 유민영은 「그의 작품은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구시대의 붕괴와 전후의 사회변화,변천하는 사회속에 갈등하는 개인의 삶을 끈질기게 묘파」하고 있고 특히 대표작 「산불」은 「전쟁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간을 파멸시키는 가를 미사여구나 기교 없이 신랄하게 파고든 리얼리즘 희곡의 최고봉」으로 손꼽고 있다. 지난해 출판한 고희기념문집 「목포행 완행열차의 추억」에서 그는 「지금까지 나는 대과 없이 살았고 욕심부리지 않았고 하고싶은 일과 가고싶은 길을 지칠줄 모르고 살았으니 행복하다」고 고백하고 있다.영원한 동반자인 박옥순여사와의 사이엔 3남2녀.자녀는 모두 출가하고 송파구 가락극동아파트에서 부부가 노후를 함께 하고 있다. 언제나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소시민」을 자처하고 있지만 실은 서릿발 같은 차가운 이성을 정으로 융해시킨 처절한 삶의 애가와 뜨거운 인간애의 정수를 이룩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참으로 「큰배우」의 역할이 아닐 수 없다.이제 그의 퇴장은 「한편의 좋은 작품」을 남기는 일이며 연극계가 그를 두고 「이시대 마지막 휴머니스트」라고 한 말대로 그는 지금도 동숭동 마롱카페에 앉아 「배우가 되기전 먼저 인간이 될 것」을 젊은 연극인들에게 당부하며 그의 「정」을 높이 치켜들고 있다. □연보 ▲1924년 전남 목포 출생 ▲1942년 광주고보 졸업후 도일 ▲1946년 연희전문 문과 입학 ▲1949년 제1회 전국대학연극경연대회 희랍극 「오이디푸스왕」연 출 수상 ▲1951년 처녀작 「별은 밤마다」 공연(목포문화협회 주최)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 「밀주」당선,제작극회 창단 ▲1961∼71년 문화방송 제작부장·편성부국장 역임 ▲1962년 「산불」 초연(국립극단) ▲1963∼83년 극단 「산하」대표 ▲1965년 이대·연대 출강 ▲1966년 연세대 영문과졸업,국제PEN대회 뉴욕회의 참가 ▲1968∼74년 한국연극협회이사장 ▲1969년 신연극 60주년기념 「그래도 막은 오른다」 공연 ▲197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사 ▲1973년 예총부회장 ▲1975년 ITI베를린회의 참가 ▲1978년 ITI한국본부 부위원장,대한민국연극제 심사위원 ▲1981년 대한민국예술원 정회원 ▲1983년 서울극작가그룹 발족,회장 ▲1984∼86년 청주예술대학장 ▲1986년 서울88예술단장 ▲1988년 청주대 교수협의회회장 ▲1991년 「연극의 해」집행위원장 대한민국 예술원회원·한국연극협회이사·공연윤리위 심의이원 희곡집 「껍질이 째지는 아픔없이는」「대리인」「산불」「학이여 사랑일레라」「식민지의 아침」,수필집 「거부하는 몸짓으로 사랑했노라」,고희기념문집 「목포행 완행열차의 추억」,차범석문학전집(12권·융성출판)등 대한민국 문화예술상(70)·대한민국 예술원상(82)·동랑연극상(83)·대한민국 문학상(91)·이해랑연극상(93)
  • 칠순 아버지 고인된 아들/수필집 2권 함께 출간

    ◎김풍식 박사 「세월은…」·도형씨 「나는…」/부­예총 지부장 역임한 병원장의 향토애·자식사랑 그려/자­의협심 강한 의사 지망생의 현실 갈등·효심을 일기로 고희를 맞은 의학박사 아버지와,의대 재학 중 세상을 떠난 아들의 글이 각각 한권의 책으로 나란히 발간됐다. 아버지 김풍식 박사(충주 호서병원장)의 자전적 수상록은 「세월은 가고 그리움은 오고」(의계신문사 펴냄).신경외과 의사인 김박사는 서울신문 향토문화상 후보 추천위원을 비롯해 충주시 문화원장,국제라이온스 충북총재협의회장,한국예총 충주지부장 등을 지내며 다방면에서 향토사랑을 실천해 왔다.특히 우륵문화제 창설과 중원고구려비(국보 제205호)발굴에 큰 공헌을 했다. 따라서 그의 수상록에는 의사생활의 회고,문화재 사랑,자식을 잃은 슬픔 등 다양한 감정과 경험이 유려한 문장에 담겨 있다. 함께 나온 「나는 하얀 새가 되어」(영언문화사)는 지난 92년 숨진 김박사의 아들 도형군이 남긴 일기와 시,아버지에게 보낸 엽서,학술교육보고서들로 구성됐다.또 아버지가 아들을그리며 쓴 시들도 들어 있다. 도형군은 아버지를 뒤이으려고 순천향의대에서 공부하다 본과 1학년 때 22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재학 중에는 의대생의 학업 부담에도 불구하고 학생회 교육부장을 맡는 등 적극적이고 의협심 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고2 때부터 쓴 일기에는 청년기의 고뇌와 의학도로서의 각오들이 솔직하게 표현돼 있고 부모에의 효심도 잘 나타난다.이와 함께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회모순에 대한 분노·절망도 틈틈이 엿보인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산 70평생과,20여년만에 끝났지만 활기찼던 삶이 얼핏 대비되는듯 하지만 부자가 쓴 이 두권의 책은 풍성한 가을에 인생을 다시한번 되짚어 보게 만든다.
  • 일본에선…/주일 한국대사관(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19)

    ◎68만 교민 대변하는 「작은 한국정부」/통상적 외교보다 정치적 업무 비중 커/“일은 한국도움 필요” 외교가서도 중시 일본하늘에 펄럭이는 태극기.그 태극기가 휘날리는 주일 한국대사관은 일본속의 한국을 대표하고 있다.한국대사관은 대일외교의 첨병 역할과 함께 양국을 잇는 가교역을 맡아 오며 국교정상화후 한·일관계 발전에 크게 공헌해 왔다. 한국대사관은 도쿄 중심부의 외교가라 할 수 있는 미나미 아자부에 있다.한국대사관은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1965년에 설치됐으며 그전에는 1949년 1월부터 주일대표부가 있었다.일본에는 대사관 관할아래 오사카 총영사관,후쿠오카 총영사관,요코하마 총영사관등 10개의 총영사관과 가고시마 명예총영사관이 있다. ○양국발전에 공헌 주일 한국대사관과 한국외교사절을 대표하는 주일대사는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교민들을 보호·감독하며 양국간의 우호관계 증진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띠고 있다.김태지 주일대사는 『대사관의 중요한 역할은 한국정부를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교민의 이익을 보호하고양국의 우호관계를 통한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일본에는 특히 68만명의 재일동포가 살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일본을 여행하는 한국관광객과 기업이나 각 기관의 주재원들이 크게 늘어나며 영사업무도 많아졌다. 한국대사관은 그러나 그러한 통상적인 역할과 업무와는 또다른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다.일본은 지난 36년동안 한국을 식민지배했던 굴절된 역사관계가 있는 나라일 뿐 만 아니라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라진 이국땅에서의 민족분단의 비극과 이념적 대결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북의 정보도 수집 정치성이 강했던 한국대사관은 한·일간의 최대 현안인 과거청산문제 해결과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한 일본의 지원문제 등을 위한 중요한 창구역할을 해왔다.그러나 양국관계가 냉각되거나 일본정치인들의 역사문제에 대한 망언이 되풀이되면서 외교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대사관은 재일동포들의 권익보호와 법적지위향상 등을 위해 민단과 협조하며 일본정부와 계속 접촉하고 있다.대사관은 또 남북대결의 또다른 현장인 일본에서 북한에 대한 정보수집이라는 중요한 임무도 담당해 왔다.한국외교관들은 북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북한을 다녀온 조총련계 재일동포나 일본인들과 직·간접의 접촉을 시도하고 일본정부와도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주일대사관의 이러한 중요한 정치적 임무때문인지 대사도 대부분 정치적 비중이 있던 인물들이었다.초대 김동조 대사를 비롯,2대의 엄민영,3대 이후락,4대 이호,5대 김영선,6대 김정렴,7대 최경록,8대 이규호,9대 이원경등 「거물급」이었다.정치적 현안들이 많았기 때문에 「정치적 대사」가 필요했다고 한 외교관은 말한다. ○90년이후 실무형 그러나 90년대 들어 서며 과거사문제가 어느정도 마무리되고 냉전의 붕괴로 이념적 대결이 약화되며 정치적 비중보다는 양국간의 경제현안등 실무적인 문제들이 중요한 이슈가 되며 대사도 실무형의 전문외교관 출신으로 바뀌었다.그 첫시도가 10대 대사로 부임한 오재희 전외무차관이었다.그 후 11대의 공로명 현외무장관 그리고 현재의 김태지 대사로 이어진다. 주일 한국대사관은일본 외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히 크다.아시아국가중 일본이 가장 중시하는 국가는 물론 중국이지만 일본에 주재하는 외교관중 한국은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그 숫자가 많다.미국은 1백35명의 외교관을 일본에 파견하고 있으며 한국이 그 다음으로 78명,중국이 77명 그리고 러시아가 41명의 순이다. 『일본은 과거사문제때문에 한국과 껄끄러운 면도 있지만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국가로 한국을 중시하고 있다』고 대사관의 한 외교관은 말한다.그는 『일본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에서의 협력을 비롯,대외정책에서 한국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주일 한국대사관은 미국주재 한국대사관과 함께 외무부에서도 중시되고 있다.그러나 한·일간의 이슈가 많을 때는 외교관이 많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외교관 과잉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는 외교관도 있다. ◎김태지 주일 한국대사 인터뷰/국제무대서 한­일은 중요 파트너/일의 솔직한 과거 반성꼭 있어야 김태지 주일 한국대사는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일관계는 경제문제등 현실적인 현안들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으며 일본은 아시아의 협력문제등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중요한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광복 50주년 한·일국교정상화 30년이 된 오늘의 한·일관계 현주소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한·일관계의 최대 현안인 과거사문제등 그동안 산적했던 많은 정치적 문제들이 어느정도마무리되고 경제문제등 실무적인 이슈들이 중시되고 있는 느낌입니다.일본은 한국에게도 중요하지만 일본도 한국을 매우 중요한 이웃나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한·일국교정상화 당시의 양국 교역은 2억달러 정도밖에 안됐었으나 지금은 3백90억달러로 그 규모가 커졌습니다.물론 무역역조의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만….그리고 양국간의 인적 교류도 활발하여 지난 해에는 2백70만명(일본인 1백65만명,한국인 1백5만명)이 서로 상대국을 방문했습니다. ­일본은 오늘의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한국의 국력신장에 따라 국제적 위상이크게 높아졌다고 일본사람들은 말합니다.일본정부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등 국제기구와 지역협력을 위해 한국을 중요한 파트너로 생각하며 국제무대에서의 양국 협력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있다고 봅니다. ­과거사문제의 해결방법은 어떻습니까. ▲일본사회에서는 과거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등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국수주의적 사고를 가진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일본은 아시아국가들이 납득할 만한 과거청산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일본이나 다른 아시아국가들이 과거사를 보는 시각이 일치되도록 일본은 노력하여야 합니다.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일치하려면 일본의 솔직한 과거청산이 필요합니다.그러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일본이 세계로 진출하여야 좋은 외교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일본의 밝은 장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일본의 정치인·관료·지식인 등을 만날 때마다 저의 이러한 생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양국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양국간의 진정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 건전한 학술·문화의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양국간에는 또 과거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래지향적인 협력의 폭을 넓혀야 하며 그러한 접근이 과거문제를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구조적인 문제인 무역역조를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일본기업의 한국유치를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이를 위해 한국은 투자유치단을 파견하고 홍보를 강화하는 등 여러가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북한과의 국교정상화회담 전망은 어떻습니까. ▲북한의 변수가 많기 때문에 전망이 불투명합니다.그러나 일본은 북한과의 접촉과 관련,한국과 긴밀한 협조를 하고 있습니다.
  • 지방행사 현장/경기­화성 화산 독지리서 「3·1운동 봉화」 올려

    ◎제주­법정사 승려들 「항일 만세대행진」 재현/부산­마안산 정상서 3·1운동 기념탑 기공식 광복 50주년을 기념하는 문화 및 예술행사가 15일 전국 곳곳에서 다채롭게 마련됐다. 지역 주민들은 「광복 50주년 통일로 미래로」라는 주제로 행사들을 지켜보며 광복의 감격과 의미를 되새겼다.많은 주민이 자녀들과 함께 길놀이나 전시장,예술·문화공연을 관람하며 「나라 사랑」의 마음을 되새겼다. ○…제주에서는 상오8시 서귀포시 중문동에서 법정사 승려들의 항일운동 만세 대행진이 걸궁팀과 사물놀이패의 길놀이를 시작으로 6시간에 걸쳐 재현됐다.중문 청년회의소가 주관했으며,1천여명이 참가했다.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공유수면 매립지에서는 제주 해녀항쟁 만세 대행진이 펼쳐졌고 제주도 문예회관 대극장에서는 영화인협회 제주지부가 아리랑 영화제를 마련해 도민화합과 통일의지를 일깨웠다. 하오에는 제주시 탑동 제주해변 공연장에서 제주 시립교향악단과 시립합창단,끌리오합창단과 남녕고 합창단이 공동으로 광복 50주년 기념 「연합 음악제」를 마련해 광복절을 경축했다. ○…경기도 화성에서는 하오7시 우정면 화산리 봉화산과,이 곳에서 20여㎞ 떨어진 송산면 독지리 봉화산 등 두 곳에서 3·1운동을 알리는 당시의 봉화 올리기 행사를 재현했다. 가로·세로 1.5m,높이 2m의 봉화대에 불이 지펴지자 7백여명의 주민은 일제히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그날의 감격을 만끽했다. 수원의 경기도 문화술회관에서는 고 전동례 할머니의 체험을 토대로 일제에 저항한 제암리 주민의 비극적인 참상을 그린 창작 무용극 「제암리 아침」이 공연돼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명장동 마안산 정상에서는 3·1운동을 주도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3·1운동 부산 기념탑」 건립 기공식이 열렸다. 또 부산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한 백산 안희제 선생을 기리는 백산 독립기념관이 중구 대창동 옛 백산상회 자리에 문을 열었다.전시실 지하 1층에 백산선생이 사용했던 벼루·청동화로·가방·친필 서한 등 유품 12종 55점을 전시해 놓았다. ○…경남에서는 상오10시50분부터 진주시칠암동 경남도 문화예술회관에서 한국예총 경남도지회 주관으로 광복 50주년을 축하하는 종합연극 「지킴이」가 1시간40분 동안 무대에 올려졌다. 무용과 연극·민요 병창·풍물패·합창·태껸 등 여러 장르의 예술을 한데 묶어 5막12장으로 구성한 이 극은 일제의 억압과 설움을 꿋꿋한 민족정신으로 극복한다는 내용이다. 극이 끝나자 배우·풍물패·합창단 등 1백30여명의 출연진 모두가 오색 방울이 날리는 무대로 나와 관람객들과 함께 「아리랑」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대전시가 광복 50주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대전 역사 창조를 위해 지난 6일부터 시민회관에 마련한 「광복과 대전 발전 사진전」에는 마지막 날인 이날도 1천5백여명이 몰렸다. 일제 때부터 21세기 청사진까지 주제별로 시대상황을 담은 사진 2백여점이 전시됐다.
  • 음악평론가 박용구(이세기의 인물탐구:80)

    ◎「열린 시각」으로 「평론 외길」 50년/음악·무용 비롯,모든 문화분야 탁발한 이론 전개/「음악 교육론」… 일제가 말살한 우리 정서 부활 노력/저서 「교양의 음악」은 클래식 음악감상 지침서로 유명 「미를 위해서는 깨뜨릴수 없는 규칙이란 없다」.이는 베토벤의 말이다.또 입사 박용구의 좌우명이기도 하다.「미를 창조하기 위해 무엇을 파괴해도 아깝지 않을만큼」그의 의식과 사상은 줄기차게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있었고 언제나 「열린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음악계는 말한다.「그것은 예술가 특유의 삶에 대한 위기의식과 긴장 탓」이며 「긴장이 자유를 향한 끈질긴 집념이라면 그에게 있어 자유란 예술자체이자 삶자체」일 것이다. 「박용구는 해방공간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50여년동안 계속해서 활발한 평론활동을 벌여온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이는 작곡가 이건용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가 92년 「낭만음악」(여름호)특집 「작가연구」에서 밝힌 말이다. 같은 글에서 이교수는 「50년에 이르는 평론활동은 우리나라 음악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며 「잡지나 신문들이 일정한 평론가에게 그 긴기간동안 계속적으로 원고청탁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라고 짚고 있다.또 「음악과 무용정도의 범위가 아니라 그는 예술문화를 제한없이 드나들며」『논리전개도 상당히 분방하고 자유로운 필치,때로는 대담한 직관과 상상력에 따라 논조와 사안별로 관심의 소재가 변하는 「논리에 입각한 비평가라기 보다 감각에 의한 비평가」』라고 결론짓는다. ○예술계의 팔방미인 실제로 그가 우리 문화예술에서 점하고 있는 영역은 넓고 깊고 다양하다.그래서 예술에 관한 한 그를 「팔방미인」이라고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음악펜클럽 예술평론가협의회 유니세프문화예술인클럽을 비롯하여 최근의 국제적인 세계무용연맹(WDA)도 그가 주관하는 단체이고 그가 쓴 「춘향가」「줄리아」「님의 침묵」등 수많은 작품들은 교향시·오페라로 작곡되어 호평받은바 있다. 과연 그의 평문은 어느 지면에서나 탁발한 이론을 유창하게 전개하면서 도저한 주관을 꿋꿋하게 지키는 것이 특징이다.해방직후 발표한 「아동음악 교육론」은 「일제의 문화정책 말살로 불식된 우리 고유의 민족적 음악감수성을 아동음악 교육으로부터 키워야 한다」는 제언이었고 전5권으로 펴낸 「교양의 음악」의 경우는 클래식음악팬의 음악감상을 위한 지침서일 뿐만 아니라 음악지망생과 음악관계 전문가들에게 「풍부한 정보」와 「해박한 지식」을 섭취시킨 교과서이기도 했다. 「예술가란 어느 시대에서나 환경의 도전자요,권위의 파괴자로서 선구자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역설해온 그는 60년대말 12음기법의 창시자인 쉔베르크 도형악보의 존 케이지·베베른·베르크와 슈톡하우젠에 이르는 실험적인 현대음악을 우호적으로 수용하는가 하면 당시 새로운 사조에 편승한 윤이상·백병동·강석희·황병기 등의 전위작업을 「선구자적 도전 정신」으로 평가하여 작가들의 시대정신을 크게 북돋워주었다.「공간」지에 발표한 일련의 「작가론」에서 특히 백병동을 향해 「음악으로 말할줄 아는 소중한 사람」 또는 「그 노여움이 화염이 되어 역사의 밤을 밝히도록 기대한다」고 감싼 것도그런 맥락에서다. ○한약방집 네째 아들 그의 녹슬지 않는 사회정의감은 87년 6월항쟁과 88올림픽이 끝난후 「예총」에 대한 역할회의론이 일어났을때도 「예총도 뉘우쳐야 한다」는 글에서 심장한 어조를 멈추지 않는다.그는 「예총이 해야할 일은 하지 않고 정권의 시녀노릇만 하고 있다」고 감연히 지적했고 「예총은 절대로 순수하지 않고 결코 지성인의 모임도 아니며 그 체질은 다만 편견과 독선에 차있다.예총이 이념공동체라면 우선 문화예술인들의 정신적인 삶의 조건인 「자유」를 수호하는 일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집단체여야 하지 않는가」라고 안일에 빠져있던 문화예술계의 분발을 촉구했다. 그가 어릴때 소망한 것은 「독립투사」가 되는 일이었다.그러나 독립투사의 조건은 「강인한 인내력과 행동력」이었으나 그는 「불행하게도 이 두가지 강점을 하나도 지니지 못하여」 그때부터 자유롭게 예술을 논하는 사람이 되었고 「무엇이 되고자 하기보다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일본체류 기간동안은 주로 「단사들과 더불어 담예논도에 심취」하는 세월을 만들어 나갔다. 도쿄시절의 입사에 대해 건축가 김수근의 회상은 이런 흔적을 진하게 뒷받침해준다.「그는 예술순례를 주도하는가 하면 예술과 문화전반에 걸쳐 밤을 새워가며 격론을 벌이던 모임에서 항상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더구나 「누구보다 철저한 자유주의자로서 한치도 후회함이 없는 그의 사회정의감과 예술분야에 임하는 지성인의 자세는 당시 유학생들의 귀감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인생항로는 남보다 파고가 거세고 파란이 심한 편이었다. 경북 풍기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박은식씨의 7남매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보통학교 졸업후 조부의 고향이던 평양으로 가서 평양고보에 진학,5학년이 되던해 독서회를 조직한 일로 왜경에 검거되었고 농촌운동에 관심이 컸으나 부친이 부농인 것과 상반되어 이 마저 포기한채 일본에 밀항했다.일본고등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다가 이 역시 체질에 맞지않아 일본의 「음악평론」사에 입사한 것이 음악·무용가가된 계기가 된다. 광복후 조국에 돌아와 첫 평론집 「음악과현실」을 출간,초판이 보름만에 팔려나가는 이변을 보였으나 월북 음악가를 거론했다는 이유로 재판부터 판금조치를 당했고 이와 관련하여 그는 다시 50년대를 일본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될 수난의 역사를 되풀이 할 수 밖에 없었다.정처없이 떠돌던 자신의 「끝없는 파란」과 「방랑」을 「방랑시인 김삿갓」에 비유하여 스스로 삿갓 입자를 쓴 「입사」란 호를 지어 가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창작희곡 집필 몰두 창작희곡집 「흙비」 후기는 그의 솟구치는 앙양과 침정을 요연하게 드러내는 고백성사와도 같다.「나는 성깔부터가 적을 사랑하라는 박애주의자가 되지 못함을 알고 있다.사랑해야만 할 것이 있기 때문에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었다.여기의 작품들은 사랑에서 보다는 미움으로 해서 쓰여졌는지도 모른다.그만큼 내 생애는 미움에 찬 세월이었다.마음의 눈은 항상 핏발이 서 있었다」고 처연한 심정을 글귀마다 담고 있다. 그는 82세의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모든 사고방식은 활짝 열려있고 목소리는 낭랑하며 행동은 반듯하다.그가 살고있는 세검정 세이장은 20여년전 건축가 김수근씨가 설계한 트롬본처럼 말려올라간 예술주택으로 요즘은 지난해 가을 문예중앙에 발표한 「바리데기」후속으로 우리 「무가」의 원천사를 집대성한 방대한 창작희곡 집필에 들어가 있다.그만이 남길수 있는 단테의 「신곡」 못지않은 명작에의 도전이라는 각오다.가족은 남매는 모두 출가하고 부인 정덕미 여사와 둘뿐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기를 원한다.그의 주장대로 「자유롭게 생각하며 살고자하는 염원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예술미의 창조는 요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그러나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가 원한대로 언제나 「멋대로」 흘러왔으며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처럼 「우리 모두가 별이 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지금도 굳게 믿고 있는것 같다. 「예술자체이자 삶자체인 자유가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한」그는 「가장 선한 장엄미 건축을 위해」 그의 멋과 자유를 파괴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그런 순간을 위해 예술관조의 형안도 끝내 그 빛을 잃지 않을것이다. □박용구 연보 ▲1914년 경북 풍기출생 ▲33년 평양고보졸업,도일,일본대 예술과 입학 ▲37년 일본고등음악학교 졸업,일본 「음악평론」사 입사 ▲49년 첫 평론집「음악과 현실」(민교사)출간,도일 ▲50∼60년 일본 도쿄 고마키(소목)발레단 문예부장 ▲52년 일본 「배우좌」연출공부 ▲62년 서울음악평론동인회대표간사 ▲66∼68년 예그린악단단장 ▲70∼76년 공간사주간·운영위원 ▲76년∼현재 음악펜클럽 회장 ▲81년∼현재 예술평론가협의회회장 ▲83년∼현재 채동선기념사업회장 ▲86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단장 ▲88∼94년 방송문화진흥회이사장 ▲93년∼현재 세계무용연맹 발족(WDA),한국본부 회장,은관문화훈장 ▲94년 창작희곡 「바리데기」(문예중앙 가을호)발표 ▲95년 세계무용연맹 창립총회및 아시아 태평양센터주최 국제무용페스티벌(KIDE)개최 「음악의 별들」(어문각 48년) 「음악입문」(박문출판사) 「음악과 현실」(일지사 49년) 「교양의 음악」전5권(창조사 69년) 「음악의 주변」(창조사 70년) 「음악의 광장」(일지사 75년) 「불멸의 음악가들」(일지사) 「음악의 세계」(계몽사) 「음악이 만나는 자리」(일지사 77년) 「음악의 문」(청한문화사 81년) 창작집 「흙비」(해보라 기획 85년) 「오늘의 초상」(일지사 89년) 「명곡과 명인들」(세광음악출판사) 「어깨동무라야 살아남는다」(지식산업사 95년)출간외 논문 무용극본「님의 침묵」 「바리공주」 오페라극본「춘향가」 「줄리아」등 다수
  • 여권 일신… 집권후반기 새출발 의지

    ◎당정개편 수순돌입… 의미와 전망/흩어진 민심·정국 조기수습 포석/계파갈등 우려 「부총재제」 백지화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후반기 국정및 당 운영방향을 가늠할 당정개편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민자당이 21일 전국위원회를 소집함으로써 8월말 또는 9월초로 점쳐지던 당정개편시기가 김대통령의 집권 절반시점인 25일 이전으로 가닥이 잡힌 것이다.이는 김대통령이 집권후반기를 앞두고 조속히 당정의 면모를 일신,흐트러진 정국과 민심을 수습해 내년의 총선에 대비키로 결심했음을 의미한다.또한 광복 50주년을 맞는 광복절에 중요한 대북제의를 하려던 계획이 북의 쌀수송선억류등 돌출변수로 불가능해진 데 따른 국정운영일정의 조정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여권은 이번 개편을 정치권 내외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일신하는 새 진용을 갖춰 「신장개업」하는 분위기로 임기후반기를 시작한다는 대통령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때 여권에서는 당정 조기개편설과 9월 개편설이 팽팽히 맞섰었다.조기개편주장은 지방선거패배에 따른 당내 동요를조기에 수습하고 총선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여기에는 부총재제 도입등 지도체제를 개편,당의 면모를 일신해야 한다는 주장도 곁들여졌다. 이에 반해 9월 개편주장은 당내 동요움직임의 실체가 드러나고 또 야권의 신당출범 등을 지켜본 뒤 장기적인 시각에서 당체제를 구축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이춘구 대표의 거듭된 사의표명과 최근 표면화되고 있는 일부의 탈당움직임,그리고 남북한 기류등을 감안하여 동요를 조기에 수습,당의 안정을 기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한때 민자당에서 거론되던 부총재제 도입은 계파갈등을 부추기고 조기 후계경쟁으로 당의 분열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당개편은 당대표 교체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김대통령이 당대표를 교체하지 않고 당직개편만 한다면 굳이 대표의 임명동의권한을 가진 전국위원회의 소집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현재 신임대표로는 김윤환사무총장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거론되고 있다.선거패배후 동요가 심한 민정계와 「TK(대구·경북)」출신을 다독거릴 수 있는 적임이라는 것이 중론이다.김총장은 총장 취임후 「안정과 화합」을 강조해왔고 또 총선 등을 대비해 정책결정과정에서 당에 무게를 실어주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혀왔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부총재제 도입주장을 배척하고 총재→대표→사무총장의 계선조직을 유지키로 한 것은 당에 대한 총재의 장악력은 절대 누그러뜨리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풀이돼 향후 정국전개와 관련,주목된다. ◎전국 위원회란/올 2월 이대표체제 출범때 신설/전대 소집 곤란할때 그 기능 대행 21일 열리는 민자당 전국위원회는 지난 2월 7일 이춘구 대표 체제를 출범시킨 전당대회 때 처음으로 신설됐다. 최고의결기관인 전당대회 수임기구로 전당대회 소집이 곤란할 때 그 기능을 대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총재 또는 전국위 재적위원 3분의 1 이상이 요구하거나 의장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소집된다. 민자당 당헌에 따르면 전당대회를 대행할 수 있는 전국위원회의 기능은 세가지다.명예총재의 추대,총재가지명한 대표의 임명동의,기타 주요 당무사항의 의결 및 승인등이다. 그러나 전당대회의 기능 가운데 당 강령·선언 및 기본정책의 채택과 개정,당 해산과 합당사항,총재 선출,대통령 후보자 선출,당헌 채택 및 개정 등은 대행할 수 없다. 전국위원회 의장 및 부의장은 전당대회 의장 및 부의장이 겸하도록 돼 있다.위원 정수는 1천5백명 이내로 지금은 총재와 대표·고문·전당대회 의장 및 부의장·당무위원·소속 국회의원·지구당 위원장 등 모두 1천2백97명이다. 국책자문 위원회 임원·재정위원·중앙당 및 시·도지부 사무처 부국장급 이상,당소속 시·도지사 및 시·군·구의 장,당무회의 및 중앙상무위 운영위 선출 당원,지구당 선출 당원 등도 포함된다.
  • 한국화가 산정 서세옥(이세기의 인물탐구:79)

    ◎스스럼없이 화필 휘젓는 큰 예인/작품마다 영혼이 움직이듯 팽팽한 긴장감/화려한 채색 거부… 발묵·석묵법 자재로이/77년 「한국현대회화 유럽전」때 “동양문화의 진수” 보여 산정의 성북동 무송재는 지금 녹음이 한창이다.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벌써 그 짙푸른 녹색으로 인해 집안은 유현한 산곡과도 같다.안채로 통하는 디딤돌 외에 새파란 이끼가 휘덮인 마당은 모든 것이 푸른 가운데 허공에 우러른 첨단에마저 서슬 푸른 냉기가 감돈다.「일편연홍난입문,한조각의 붉은 빛도 문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산정의 말대로 영롱산관 죽리관 수죽원하관 창하헌 등 그의 당호들은 집안에 넘치는 푸른색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화실 창앞에 쭉쭉 뻗어 있는 청청하고 곧고 차가운 대나무며 지금 막 피기 시작한 보랏빛 추국에 이르기까지 추호의 시든 빛을 보이지 않는 영롱한 환경은 서울 한복판이건만 실로 아득한 선경인 듯 감탄스럽기만하다.여기에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과 한옥중의 한채에 온통 중국고서적이 산적해 있어 그의 방대한 독서량이 얼마만한것인가를 미루어볼 수 있다. 그는 성북동 전에는 노송으로 우거진 월곡동에 살다가 대학때의 스승인 근원 김용준을 그리워하여 지금부터 20여년전 스승의 노시산방이 있는 이곳에 한옥을 지어 이사했다. ○회화예술 변혁 앞장 산정은 널리 알려지다시피 서시문화를 두루 갖추고 상식에 안주하려는 회화예술에 변혁과 개혁의 화업을 이뤄낸 동양화 대가다.초기에는 범속과 권위와 형식에 대한 강렬한 저항정신을 앞세워 「고루협애가 없는 방종자일한 표현」으로 개혁의지의 향방을 모색하다가 차츰 「감각의 해방을 원점으 로 되돌린 절제화면」을 이룩하면서 남보다 일찍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평론가 이경성씨는 그의 첫번째 전시 팸플릿에서 그와 같은 유사성을 「명대의 서위나 청초의 석도」에 비유하고 오광수 역시 「수묵화를 감필묘법으로 구사한다는 차원에서 남송의 양해나 선화파의 목계의 화격」에 닿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정병관씨는 「모든 진실한 작품은 침착하다」는 칸딘스키의 말을 인용하여 『산정의 작품은 무한을 생각케 하는활짝 트인 화면공간속에서 「숭고한 형이상학적인 회화」를 구축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과연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상태,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듯하고 표현하지 않으면서 표현하려는 자기모순을 함축한 그의 작품은 「그 형식과 내용면에서 영혼이 움직이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89년 개인전에서 선보인 「군무」「사람들」시리즈는 「붓으로 그렸다기보다는 붓을 던졌다는 표현이 더욱 옳다」는 정병관씨의 평에 많은 사람이 공감한 바 있다.즉 「붓의 전진하는 속도감과 상하로 누르고 떼는 강약의 압력은 낭만적인 금선의 무쌍한 변화」와도 같으며 「발묵과 석묵법의 자재로운 움직임」은 바로 산정 그림의 즉흥성과 필연성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산정은 「스스럼없이 필력을 구사할 줄 아는 이 시대 재능이 뛰어난 예인」으로서 「흉중의 고고특절한 품성 없이는 문자향과 서권기를 지니지 못한다」는 추사의 지론을 실천시킨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20세때 뒤늦게 입문 그가 화단에 등단한 것은 아직 대학재학중이던 20세였으나 뒤늦게 45세되던 해 서울 첫 개인전을 열 때까지만 해도 그의 그림에는 일정한 채색과 반추상의 형태가 깃들여 있었다.그러나 산정 자신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메마른 구각이나 비좁은 질곡은 싫다」고 천명했고 이후 채색이 없는 검정색의 선묘형상들은 그 기호적인 성격과 힘과 자발성을 채색의 경우보다 한층 강하게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우리 화단에서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언제나 커다란 구심점을 긋고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오늘날 수많은 미술대전에서 동양화가 구상·비구상으로 나눠지게 된 것도 단순히 이 작가의 작용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화단에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 산정은 유럽쪽에 눈을 돌려 수많은 해외전에서 한국회화의 독자성을 인정받았다.그중 77년 9개월에 걸친 「한국 현대회화 유럽전」에서는 현지 신문들이 「서세옥의 추상적인 묵화들은 동양화라 일컬어지는 한국 전통미술의 현대적 전모를 집약함으로써 서양인에게 동양문화의 진미를 보여주었다」(르피가로 78년6월28일자)고 쓰기도했다. ○올 11월 개인전 열어 그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고서화가 있는 집안환경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며 자라났다.독립운동을 하던 부친 서장환(석련)공은 세 아들중 일총한 산정을 특히 총애하여 「성동」이란 아호를 내려주었으나 대학시절 영운(김용진) 춘곡(고희동) 소전(소전 손재형)등 그의 스승들이 「세옥」의 옥자와 관련된 「옥출곤강(금과 옥돌은 산에서 캔다)」이란 의미의 「산정」을 지어주었다. 지난해 서울대 정년퇴임후 산정은 무송재 녹음속에 파묻혀 그의 전생애가 그렇게 일관해왔듯이 자유하는 예술가로서의 절제와 생략과 탈속의 묘를 구체화하는 시기일 것이다. 그의 테마는 여전히 인간에 집착한다.세월도 서릿발 같은 그의 의지를 피해가는지 언제나 만년청년 같은 그는 「적진에 뛰어들어 호랑이나 사자를 사로잡듯」 우주의 올바른 기운을 수백호 화면속에 역동적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요즘은 오는 11월로 잡힌 개인전과 그가 발족한 한·중미술협회의 요청으로 그동안 써온 한시를 친필서예로 꾸미는 「산정문집」 출간준비에여념이 없다.그중 연전에 중국 양자강을 둘러보며 지었다는 「단현」이 눈에 띈다. 「비지양현회 농현감금심 고산류수곡 적막실지음 석현호불기 천재거무회 수주아양곡 공류일금대(이땅의 두 현인이 만나 거문고로 서로 마음을 느끼니 이는 고산곡과 유수곡이라,지음이 없으니 적막하구나.옛 현인 불러도 일어나지 않고 천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누가 고산 유수곡을 연주할 것인가,속절없이 거문고 튕기던 언덕만 남았구나)」이는 중국 춘추시대의 거문고 명인이던 백아가 그의 거문고소리를 좋아하던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현을 끊어버린 일화를 그린 시로 그들이 거문고를 타던 양자강가에 서자 이런 시를 읊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3∼4년전까지만해도 송죽 우거진 뜰에서 산정은 가까운 이들을 모아 거문고며 가야금연주를 즐기곤 했다.그러나 명고수 김명환씨가 4년전 작고하고 단골손님이던 언론인 예용해씨마저 지난해 타계하자 화가는 혼자 남아 그때의 감흥을 한편의 시와 한점 획(화)으로 남기게 됐나보다. 이제 산정댁의 대나무가 그 놀라운 푸른빛을 뻗치고 소나무향이 온산을 뒤덮어도 이 풍치를 음미할 만한 유장한 현금은 울려지지 않는다.단지 우거진 나뭇닢이 단 한 잎도 시든 기색 없이 싱싱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처럼 시들 줄 모르는 산정의 붓끝은 그 탁발한 금선의 선율로 「청청속의 노주」를 결국 성취하게 될 것이다. □연보 ▲19 29년 대구생 ▲49년 제1회 국전서 「꽃장수」로 국무총리상 수상 ▲50년 서울대 미대 졸업 ▲54년 제3회 국전서 「휘월의 장」으로 문교부장관상 수상 ▲54∼95년 서울대 미대 교수 ▲59년 묵림회 창립대표위원 ▲61∼82년 국전 심사위원·운영위원 ▲62년이후 상파울루비엔날레 칸국제회화제 이탈리아회화제 인도트리엔날레 도쿄비엔날레 파리현대미전 등 출품 ▲64년 국제조형예술(IAA) 한국위원회위원장,신인예술상 심사위원장 ▲64∼88년 한국미협이사장·회장 ▲66∼71년 유럽·남북미 34개국 여행,한국현대미술 프랑스순회전 ▲70년 국전 초대작가상,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73년 예총부회장 ▲74년 서세옥전(현대화랑초대전) ▲77∼78년 한국현대 동양화유럽순회전,스웨덴 폴란드 독일 프랑스 ▲79년 서세옥전(도쿄 우에다화랑 초대) ▲82∼85년 서울대 미대학장 ▲83년 서세옥전(뉴욕 퍼시픽아시아박물관초대),전국미대협의회회장 ▲85년 서세옥특별전(뉴욕 바로카레지미술관 초대) ▲89년 서세옥전(현대화랑 초대),뤼턴오브 마르코폴로전(프랑스 파리) ▲90년 한국작가전(중국 북경),한·중미술협회 결성 ▲91년 한·중미술대전(중국 북경)이후 서울·남경·상해 등지서 교류전시 그외 한국회화대전및 아세아현대미술전 한국미술상황전 LA87미술전 조선일보미술관개관기념 현대작가초대전 서울올림픽아트 국제현대미술전 등 다수 출품,국민훈장석류장 서울시문화상 한·중미술협회회장,미협고문
  • 원로 연극인 장민호(이세기의 인물탐구:78)

    ◎평생을 연극으로 살아온 연기자의 대명사/파우스트 간판배우… 별명은 “파우스트 장”/이순신서 햄릿까지 어떤 배역도 무난히 소화/칠순이 눈앞에… 식을줄 모르는 열정으로 연기생활 『배우가 해야 할 최대 문제는 관객을 계속 끌고 나가는데 있다』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수로 활약한 샬리아핀은 말한다.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연기에 대한 끝없는 욕심과 집념어린 정열을 불태우는 이가 있다면 국립극단의 원로배우 장민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그는 평생을 연극으로 일관한 연기자의 대명사다.양심적이고 본질적인 그의 연기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일시적인 경이감이나 전율만은 아니다.연기를 통한 인간정신의 승화를 그는 무대 곳곳에서 증명해 내고 있다.예의 「배우가 해야 할 최대 문제인 관객을 이끌어 나가는데」 한번의 실수나 실책이 있을 수 없다는 주의다. ○솔직하고 직선적 성격 그는 언제나 의욕적이다.성격은 명쾌하고 성급하며 솔직하고 직선적이다.항상 모범생과도 같은 이런 유의 성격이란 한가지 일에 몰두하면 끝장을 봐야만직성이 풀리게 마련이다.또한 철두철미하고 다혈질적인 기질로 인해 곧잘 흥분하거나 저항하거나 마찰을 빚기 십상일 것이다.그러나 「칼날처럼 날카롭고 정의감에 넘치건만」 막상 결단을 내려야할 순간에는 흑백을 가리거나 정면으로 대결하기보다 우회적인 유연성을 지니는 것이 남과 색다르다.이는 아마도 오랜 세월 어지러운 세파에 시달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터득한 「삶의 지혜」일지도 모른다.또는 이북에서 혼자 월남해온 그로서는 사방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당연한 견제일 수도 있다.그래선지 국립극단에서 40년이 넘게 한 솥밥을 먹은 동료들도 『그의 속마음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다만 무대에 서면 「온몸의 연기로 관객을 압도」하기 때문에 「배우가 연기를 잘한다면 모든 것은 침묵」일수밖에 없다. 그는 해방직후 황해도 신천에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가 연극배우가 된 케이스다.20세되던 해 원예술좌가 공연한 성극 「모세」에서 타이틀 롤을 맡으면서 연극에 입문,그로부터 10년후 하유상의 「딸들자유연애를 구가하다」로 「노역」을 완성시키면서 「성공적인 연기자」의 반열에 올라섰다.이후 「대수양」「세종대왕」「성웅 이순신」에서 완곡하며 기질이 장대한 성군,「오델로」「맥베스」「줄리어스 시저」의 다이내믹한 개성,「밤으로의 긴 여로」「안네 프랑크의 일기」「햄릿」에서의 차분하고 섬세한 내면 연기 등 그에게 돌아오는 모든 배역을 「생생한 극중 인물」로 부각시키는데 한치의 허술함을 보이지 않았다.그중에서도 「역을 최후로 완성시키는 것은 디테일이 아니라 전체적인 진실성」이라고 믿는 그가 평자들에게 어필된 것은 단연 괴테의 「파우스트」를 들수 있다. ○66년에 파우스트 초연 66년 서항석 역 이해랑 연출로 초연된 「파우스트」에서 그는 학문과 지식에 실망한 노박사 파우스트가 현세적 향락에 침몰되는 과정을 고뇌에 찬 연기로 그려내었고 두번째는 8년후인 74년,순결한 헬렌과의 사랑에서 미마저 구하지 못한채 이상향을 꾀하는 허탈한 파우스트,또다시 84년 한독 1백주년 기념공연에서 독일의 저명한 기싱이 연출한 세번째「파우스트」에서는 지금까지 축적된 파우스트의 진면목을 함축하여 관객은 감전된 듯 박수갈채를 멈추지 않았었다.그때 이 연극을 연출한 기싱은 『그는 인물을 스스로 움직이되 얼굴 표정이 아닌 눈빛만으로 이미 단숙을 성립하고 있다』고 했다.즉 「고정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을 붙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긴박감에서 그는 감정을 절제하거나 적절히 노출하여 역이 가리고 있던 사상의 베일을 한장 한장 벗겨내고야만 것」이다. ­이것이 수많은 배를 띄우고 그리고 끝없이 높은 탑들을 불태운 얼굴이었던가.사랑하는 헬렌이여 단 한번의 키스로 불멸케 해다오.오! 그대는 무수한 별들의 아름다움으로 치장한 밤하늘보다 더 아름답구나­ 가슴속에 박힌 사랑을 고백하는 이 장면은 「드라마틱한 다이너미즘과 명쾌한 표현적 리듬,응축된 긴장감과 생명의 맥박이 충만」하여 이를 앞서 연출했던 이해랑씨는 『중진 장민호의 연기가 폭풍같은 성공을 거둔 근본 요인은 이러한 관념을 최후까지 지킨 지치지 않은 탐구의 결과』라고 못밖았다.이는 50년대 후반국산 영화붐으로 연극계가 부진하자 전 연극인이 분발하여 만든 「대수양」(김동인 작 박진 연출)을 보고 『그곳에 군계일학이 있었다』고 한 이진순씨의 지적과 맥을 함께하는 찬사이기도 하다.이로써 그는 「파우스트」간판 배우로서 평생동안 영광스러운 「파우스트 장」의 별명을 갖게 되었다. 배우는 무대위에서 기왕에 정해진 다양한 운명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따라서 짙은 분장속에 감추어진 배우의 모습은 다시 그 자체가 그의 얼굴일수도 있다. 더구나 그의 묵직한 바리톤의 음색은 푸짐한 볼륨과 풍부한 음조의 변화,감정의 뉘앙스가 격하게 풍겨나와 어느 대목에서도 무기미를 느낄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마음속 깊이 스며드는 중후한 음의 압력은 라디오 드라마에서도 특출난 개성을 돋보여 67년부터 그가 해설자로 등장한 대하드라마 「광복20년」은 10년 장기 연속방송으로 장안의 성가를 높인바 있다. ○연출가로도 한때 활동 그는 배우일 뿐만 아니라 유치진의 「소」,체호프의 「봐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린 창조적 상상력이 풍부한 연출가이며연극적 감각과 지성을 겸비한 영화배우·TV탤런트이기도 하다.한때는 경화 프러덕션을 설립,그가 제작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60년대 초반 전례없는 흥행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인생만사 만능은 없다」는 교훈과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절감하고 그는 고향에 돌아오듯 무대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하고싶지 않은 일에 참여한 적이 없다.간혹 주변에서 자서전을 내라거나 대학에서 강의를 부탁해 오거나 방송 대담프로그램등에서 초청하면 일언에 외면한다.「배우는 무대에서 말할 뿐」,연기와 무관한 일은 그에게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가족은 산행 동반자인 부인 이영애(63)씨와 출가한 남매가 있다. 지금도 젊은 후배 연극인들 사이에서 대사를 가장 잘 빨리 외우고 「내가 만약 저 역할을 맡으면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간파하여 선명하고 강렬한 생명체를 그때마다 새롭게 탄생시킨다.또 주역에서 차츰 비켜나고 있지만 역이 크든 작든 「연기자는 계급이 없는 무관의 제왕」이라는 자부심과 열의로 자신의 위상과 예성을 의식하는 도도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양한 인생편력을 체험하면서 자기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대하려는 생의 충동은 그가 맡았던 파우스트의 일면이며 결국 「연극은 눈과 귀를 통해서 영혼까지 도달해야 된다」는 연극예술과 미와 환희를 이 세상에 가져다준,우리 연극사상 그는 투철한 한 존재에 틀림없다. 그리고 더이상 열띤 대사를 읊조리지 않아도 「오델로」의 이야고나 브루터스의 배반의 이미지를 물흐르듯 되살리는 경지에서 오늘도 그는 그만의 적광의 광채를 어두운 객석에 뿌리고 있다. 기 자 입 력 □연보 ▲1927년 황해도 신천 출생 ▲45년 월남,조선배우학교 졸업 ▲46년 서울중앙방송국 제1기 성우 ▲47년 원예술좌 입단,성극「모세」의 타이틀 롤로 데뷔 ▲50년 국립극장산하「신협」입단,유치진 작 연출「원술랑」 조우 작「뇌우」출연 ▲53년 국립극단 입단,오상원 작 「녹슬은 파편」이후 해마다 출연 ▲62년 드라마센터 개관 기념 셰익스피어 작 「햄릿」출연 ▲66년 괴테 원작 서항석 역 이해랑 연출 「파우스트」초연서주역,일본 일생극장 개관기념공연 참가 ▲67∼71년 국립극단 단장 ▲68∼89년 한국 연극협회 이사 ▲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김의경 작 이진순 연출「북벌」 ▲79∼90년 국립극단 단장 ▲88년 조우 작 이해랑 연출「뇌우」 38년만의 재공연 주역 ▲현재∼예술원 회원,국립극단 원로배우,연극협회 자문위원 제1회 방송문화상(58년) 서울시문화상(63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68·73·78년) 연극평론가 협회상(79년) 대한민국예술상(81년) 목련장(8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88년) 예총예술문화상(89년) 연극­유치진 작 「자명고」(54년)를 비롯,「박쥐」「오델로」「느릅나무 그늘의 욕망」「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인생차압」「시라노드 벨주락」「붉은 장갑」「세자매」「안네프랑크의 일기」「나의 고백은 끝나지 않았다」「뜨거운 양철지붕의 고양이」「빌헤름 텔」「죄와 벌」「결혼중매」「베니스의 상인」「이순신」(신명순 작 66년)「갈매기」「북간도」「수전노」「인종자의 손」「남한산성」「전쟁과 평화」「성웅 이순신」(이재현 작 73년)「세종대왕」「허생전」등 1백70여편과 영화 TV드라마 다수 출연.8월2일부터 「눈꽃」(11일까지 우봉규 작 김석만 연출 국립극장 대극장공연 예정).
  • 고 김동리 선생 문인장 엄수/이홍구 총리 등 각계인사 500명참석

    지난 17일 작고한 소설가 김동리씨의 영결식이 21일 상오 10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 성당에서 문인장으로 치러졌다. 상오 9시에 열린 영결미사에 이어 성당 앞마당에서 거행된 이날 영결식에는 문인들 이외에도 각계 인사 4백여명이 자리를 같이해 고인의 넋을 기렸다.이홍구 국무총리,주돈식 문화체육부장관,박찬종 서울시장 후보 등 정·관계 인사와 신영균 예총회장,문덕수 문예진흥원장,황명 문인협회 이사장,이대원 예술원회장,조경희 수필가협회장을 비롯,평론가 곽종원씨,작가 이문구·홍성유·한말숙·이호철·김이연·한승원·송영·김승옥·이문렬·김원우·김채원·김민숙·정종명·정소성·천금성씨,시인 박재삼·황동규·임영조씨,연극인 차범석씨 등이 참석했다. 영결식은 장의선언·약력보고·조사·조시·선생의 육성녹음재생·유족대표인사·헌화 순으로 한시간남짓 이어졌다. 소설가 김주영씨는 조사에서 『선생님은 제자가 찾아오면 차한잔이라도 손수 끓여 대접하시고 주머니가 비어있는 제자에게는 골목까지 나오셔서 여비를 넣어주셨다』고 선생의 제자사랑을 회고했다. 시인 이근배씨는 조시를 통해 『선생은 뛰어난 작가였을뿐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 나라사랑 겨레사랑에 앞장섰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이날 장남 재홍씨를 비롯한 가족들이 숙연한 모습으로 식을 지켜보는 가운데 세번째 부인 서영은씨는 소복차림으로 식장 셋째줄에 떨어져 앉아 내내 울먹이는 모습이었다. 식이 끝난뒤 고인의 유해는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신현리 가족묘지에 안장됐다.
  • 광복 50주년 95미술의 해/아태지역서 유일… 법시민 지원체제로

    ◎주제 「경계를 넘어」­로고·마스코드 선정/국제­특별전외 백남준 예술전 등 준비 「빛고을」광주가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다.아시아 태평양권의 유일한 비엔날레인 광주비엔날레를 시민 모두 참여하는 문화축제로 꾸미기 위한 준비작업에 한창 바쁜 것이다. 광주시는 지난 2일 「광주비엔날레 범시민 추진협의회」(회장 박정구 광주상의 회장)를 발족했다.이 지역 상공계·언론계·금융계 등 각계 대표가 참여한 추진협의회는 앞으로 격년제로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의 기금모금과 해외홍보를 담당한다. 현재 48억원을 모은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는 협의회를 중심으로 2백억원의 기금을 추가로 조성해 격년마다 열리는 광주비엔날레를 계속 지원키로 했다. 광주지역의 예총 광주시지부나 민예총 시지부 등 예술단체들도 모금에 동참하기 위해 오는 7월쯤 서울에서 대대적인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다.예총 관계자는 『비엔날레의 성공을 위해 지역 미술인들이 작품을 기증,모금에 동참키로 했다』고 전했다. 광주시와 「광주비엔날레 조직위」의 꾸준한 홍보활동으로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숙박·요식·관광 업계 및 여성단체들도 ▲꽃길조성 ▲바가지요금 안 받기 ▲내외국인에 대한 친절 베풀기 ▲민박알선 등을 추진키로 했다. 「조직위」는 최근 국제전에 참여할 국내 작가 9명을 확정한데 이어 권역별 커미셔너를 통해 오는 24일쯤 해외작가를 선정,발표할 예정이다. 광주시와 「조직위」는 지난 해 9월 「광주비엔날레 설치기획단」이 설치된 이후 ▲주제 확정(경계를 넘어) ▲전시관 신축 ▲로고·마스코트·공식표어 선정 ▲국내외 커미셔너 선정 등을 마무리했으며 앞으로 해외홍보 및 관광객 유치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 광주시는 비엔날레 기간 중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국제전·특별전·기념전 등 본행사 외에도 전야제와 개막 축제에서 백남준 예술전·민속놀이·국악·무속 등 다채로운 부대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또 다른 비엔날레와 차별화하기 위해 국제전에 곁들인 특별전으로 「증인으로서의 예술전」 「Info Art전」 「문인화와 동양정신전」 「한국 현대미술의 오늘전」「한국 근대미술 속의 한국성 전」등 5개를 확정했다. 이와 함께 5·18묘역,무등산,담양호,승주 낙안읍성,백양사,목포 유달산 등 광주 전남지역 관광지와 연계한 상품을 개발 중이다. ◎「빛고을」과 국민화합 상징/광주 비엔날레 엠블렘의 의미 빛의 고을이란 지명에 착안해 광주의 상징인 무등산과 여기서 뻗어나는 빛을 소재로 디자인했다.산의 완만한 형태는 온 국민의 화합을 상징하며,뻗어나가는 빛은 축제분위기를 한층 돋운다. 조선초기의 완판본 소설의 목판글자체를 재구성한 광주비엔날레 한글로고는 민족적·지역적 특성을 살렸으며 영자체는 한글과 조화를 이루는 스톤샌스체를 사용했다. 색채는 비옥한 땅을 상징하는 황토색과 생명력의 상징인 초록색을 사용,민족 전체의 강인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 예총간부 초청 오찬/김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은 8일 낮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신영균회장을 비롯한 회장단과 시·도지부장 28명을 청와대로 초청,오찬을 함께 했다.
  • 「해방 50년…」 민족춤제전/30대 춤꾼들의 안무작품 공연

    ◎오늘부터 문예회관서/원폭피해·통일·장기수 문제 등 형상화 우리춤의 모습을 찾으려는 움직임 가운데 한때 「운동권성향」으로 불리던 진보춤계가 주최하는 제2회 민족춤제전이 22∼24일 서울 문예회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해방 50년 겨레의 몸짓으로」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제전에는 80년대이후 민족춤운동의 실질적인 주류를 이루던 30대 춤꾼들이 직접 안무를 맡아 전면에 나선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지난 해에는 다소 추상적인 주제나 개인의 실존적 문제에 대한 작품이 많았으나 이번에는 원폭피해자 문제,통일문제,장기수문제,노동자의 사랑등 주제의식이 구체화된다는 점도 이 30대 안무자들의 등장과 관련 있다. 이번에 출품되는 작품은 「이슬털기」(춤패 배김새) 「두 사람」(춤패 불림) 「소리없는 말」(김현숙 무용단) 「창살에 햇살이 2」(청무회)등 민예총 산하단체들의 작품과 「무초3」(춤패 아홉) 「힘,마지막 한계」(광주 무용아카데미) 「새의 암장」(정혜진무용단) 등 민예총 외부단체의 작품 7편이다. 이번 춤제전의 특징은 민족춤의 전형을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 하는 무대예술로서의 예술적 정밀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기획위원으로 대본심사를 맡은 김채현 중앙대교수는 『작품내용이 추상적인 대주제를 다루던 거대담론에서 이제는 일상적 담론으로 구체화됐다』면서 『민족춤의 양식(메소드)을 정립하는 것이 이번 제전의 목표』라고 밝혔다. 이번 제전에 「무초3」을 출품하는 한상근 서울시립무용단 지도위원은 『무용은 무용다워야 하기 때문에 구체화된 주제의식을 내실있게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무대예술의 테크닉과 관중의 편안함도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 신춘 무용계 화려한 춤나래

    ◎러 키로프발레단·현대무용단 「탐」 등 국내외 단체 공연 활발/키로프… ,「백조의 호수」「신데렐라」공연/유니버설발레단은 「발란신 발레 축제」/22일부터 민예총 주최 「민족춤제전」도 봄철 화신과 함께 무용계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본격적인 활동을 편다.3월들어 줄잡아 10여차례의 각종 무용공연이 잇따라 무대에 오른다. 봄맞이 공연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오는 6∼15일에 열릴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의 내한 공연. 이번 내한공연에서 키로프 발레단은 「백조의 호수」와 「신데렐라」를 서울과 부산에서 8차례 선보인다.「백조의 호수」는 6∼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과 14∼15일 부산 문화회관에서,「신데렐라」는 10∼12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펼쳐진다.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예술감독이 안무를 맡고 세계적인 발레리나 율리아 마하리나와 알티나이 아실무라토바,올가 첸치코바 등이 출연한다. 미국의 스타스 오브 아메리칸 발레단도 내한해 16∼1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아폴로」「로미오와 줄리엣」 등 작고한 세계적인 안무가 조지 발란신작품 5개를 공연한다.세계적인 안무가 로버트 라포스가 이끄는 「스타…」는 아메리칸 발레시어터와 뉴욕 시티 발레단의 무용수 15명으로 구성된 해외공연단체이다. 국내 직업발레단인 유니버설 발레단도 오는 23∼26일 서울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48회 정기공연으로 「발란신 발레 축제」를 갖는다. 이 공연에서는 「세레나데」「라 손남불라」「테마와 바리에이션」 등 조지 발란신의 걸작 3편이 무대에 오른다.이 공연을 위해 조지 발란신의 직계 제자인 빅토리아 사이먼이 내한해 연출을 담당한다. 이화여대 무용과 대학원생들이 주축이 된 현대 무용단 「탐」도 13∼14일 서울 문예회관에서 창작 무용 「대화1」「대화2」를 공연한다. 민족예술인총연합은 22∼24일 서울 동숭동 문예회관에서 「제2회 민족춤제전」을 개최한다. 7개 무대 공연단체와 3개 야외공연단체가 꾸미며 주제는 「해방 50년,겨레의 몸짓으로」.「아홉」「배김새」「불림」 등 춤패들과 광주 무용아카데미,정혜진·김현숙 무용단,청무회 등이 참가한다.이른바 민족춤계의 성숙도를판가름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춤패 「춤세상」은 3시간짜리 대하 서사춤극 「백두산」을 11∼13일 서울 문예회관에서 공연한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항일 무장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한다.공연시간과 줄거리가 방대한만큼 완성도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수이다. 한국 무용 단체 「창덕무용단」은 9∼10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천·지·인의 소리 짓」 공연을 갖는다.12일에는 충남 홍성에서도 공연한다. 창무회에서 활동하던 김효진씨는 3∼5일 창무예술원에서 첫 개인발표로 「Independent Dance­여행」을 공연한다.한국무용에 현대무용을 접합시켜 탈장르화를 꾀한다는 의미에서 다소 실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조승미 무용단과 숙명여대 무용과출신들로 구성된 「설무리 무용단」은 지난 2월 일찌감치 봄을 맞는 기지개를 켰다.
  • 3월 문화인물/정월터 선생/하와이 이민 2세,한국체육 국제화 헌신

    ◎아시안게임·서울올림픽 유치 노력 문화체육부는 95년 3월의 문화인물로 한국체육을 국제무대에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헌신한 한국인 교포 2세 정월터(한국명 정범택) 선생을 선정했다. 정월터 선생은 한국의 IOC위원 피선과 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 유치를 성사시키는 등 국제스포츠 무대에서 한국의 위치를 정착시키는데 앞장서다 지난 83년 타계한 스포츠 외교가. 1904년 하와이 파알라섬의 사탕수수농장 이민 노동자인 정운서·이신실씨 부부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50년 조국에 돌아온 후 대한올림픽위원회(KOC)명예총무로 한국스포츠계에 투신해 타계할 때까지 줄곧 KOC위원과 부위원장,아시아경기연맹 명예총무로 있으면서 역대 한국 IOC위원의 고문으로 봉사했고 특히 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80에 가까운 고령으로 독일 바덴바덴 IOC총회 개최지에서 각국 IOC위원과 접촉하는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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