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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선언] 생명이 긴 스타만들기

    올림픽이 개막되자마자 여자 스포츠 스타 한 명이 탄생했다.18살 나이에 여자 공기소총 부문에서 은메달을 거머쥔 강초현(유성여고 3년)이 바로 그녀다.도무지 인생의 세파라곤 겪어본 적이 없을 듯 보이는 그녀의 맑디 맑은 얼굴.은메달에 그친 서운함으로 눈물을 흘리는 티없이 순수한 모습.그래서 더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이 각 신문마다 몇회에 걸쳐 소개됐다. 필자 역시 그 기사를 접하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그래,역시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구나 하면서.무엇보다 인생의 어려움과 가난이 그녀에게는 좌절과 방황의 원인이 아니었다는 점도 감동적이었다.아니,고마움까지 느꼈다고 하는 게 더 솔직한 심정이리라.그런 고통이 그녀를 남들보다 더 성숙하게 만들었기에. 깜찍한 외모,월남전에서 다리를 잃고 고생하는 아버지를 업고 다닌효녀,어머니의 파출부 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가정환경,어머니가 아버지의 병간호 때문에 집을 비울 때는 군소리 없이 집안일을 떠맡았던 착한 심성,머리맡에 강초현의 만점짜리 표적지를 놓고 늘 딸의성공을 빌었던 든든한 후원자 아버지의 죽음,그로 인한 좌절,그리고올림픽에서의 은메달.줄여 말하자면 어린 나이,가난,예쁜 외모,그리고 성공 등 강초현은 분명히 만인의 사랑을 받을 만한 요소를 두루갖추고 있다. 같은 날 강초현 선수에 뒤이어 은메달을 획득한 유도의 정부경 선수가 대부분 단신으로 처리된 걸로 봐서 강초현의 스타성은 확실히 그진가를 발휘한 것 같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나는 심란하다.올림픽대회가 끝나고선수들이 귀국하면 또한번 강초현의 이야기로 떠들썩할 것이다. 방송출연과 인터뷰가 밀려들 것이고,어쩌면 광고제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 인터넷상에서는 그녀에 대한 얘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스포츠계의 신데렐라’라는 별명을 얻은 강초현 선수에게 “연예인 해도 될 만큼 예쁜”,“깜찍한” 등의 수식어도 적지 않게 따라다닌다. 그녀의 이미지와 상반돼서 더 인상적인 ‘겁없는 총잡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민들의 요란한 관심과 애정이 그녀를,또는 그녀와 같은스포츠 스타들을 몸살나게 할지도모른다.얼마나 많은 스포츠 스타들이 그런 식의 관심집중과 부담속에서 고통받거나 좌절했는지 우리는기억하고 있지 않은가.물론 요즘 같은 세상에 ‘스타 만들기 시스템’을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다.무엇보다 대중들이 ‘스타’와 ‘스캔들’을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관심과 애정이 좀더 은근하고 깊이 있었으면 좋겠다.그녀가 우리의 지지로 힘을 받아 훈련과 자기 수양에 더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여론의 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스포츠는 궁극적으로 자기와의 싸움이며,깊은 심적 수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강초현 선수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는 월남전으로 인해 고통받는 가족들의 문제를 상기해 볼 수도 있겠다.그녀가 고통을 어떻게 행운의계기로 바꾸어냈는지도 궁금하다.또 어려운 환경에 처한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스포츠의 꿈을 심어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이건 비단 스포츠 스타들만의 얘기는 아니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스타들이 존재한다.그들을 대하는 시선이 깊이있어진다는 것은 바로,나자신에 대한 내 시선이 깊이있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모쪼록 이번만은 우리의 스타 강초현이 내적으로 더 무르익을 수 있도록 그녀를 가만히 놔뒀으면 좋겠다.세인의 관심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는 나이와 연륜을 갖게 될 때까지,그래서 그녀가 아주 길게 우리 곁에 머무는 스타가 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박 미 라 페미니스트저널 if 편집위원
  • [QUEEN 3월호] 봄맞이 인테리어 센스 소개

    감각있는 여성을 위한 안목잡지 퀸 3월호가 발행됐다. 봄을 맞아 더욱 다채롭게 꾸민 이번호에는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수중분만·좌식분만·가족분만 등 이색출산법을 기획특집으로 자세히 다뤘다.또 아이디어 하나로 세상을 바꾸는 ‘벤처여왕들의 창업과 수성’을 다각적으로 살펴보고,그리움을 부르는 우리의 섬 ‘제주도’를 집중조명했다. 새봄을 맞아 집안을 재단장하려는 주부들을 위해 ‘레몬처럼 상큼한 실내꾸밈’과 ‘코디네이터 5인이 제안하는 봄맞이 인테리어 센스’도 꼼꼼하게 알아봤다.이와 함께 탤런트 윤해영의 드레스룸과 명세빈·황현정·이태란·박둘선의 화장대 등 인기 여자연예인들이 공개하는 ‘아름다움을 가꾸는 공간’도 눈길을 끈다.또 건강한 부부생활을 위한‘이재룡·유호정 부부의 러브릴랙스 마사지’와 다이어트에 관심 있는 여성들을 위한 ‘다이어트 의문 부호에 대한 자신 있는 답변’등도 놓쳐서는 안될 읽을거리.
  • [외언내언] 아인슈타인과 히틀러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20세기에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상대성 이론’을 창안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을 선정,31일자커버스토리로 소개했다.타임지는‘상대성 이론은 이론 물리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TV와 핵무기,우주여행,반도체 등 중요한 기술 분야 발전의 토대를이뤄 금세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선정 경위를 밝혔다. 수긍되는 설명이다.타임은 98년부터‘지도자 및 혁명가’를 비롯,‘예술 및연예인’, ‘건축가와 운동선수’, ‘과학자와 사상가’, ‘영웅과 아이디어맨’등 5개 분야에서 20명씩을 선정하고 최종으로 각 분야를 망라한 20세기인물로 아인슈타인을 뽑았다. 독일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로서뿐만 아니라 평화주의자로서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33년 히틀러가 민주적인 바이마르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나치정권을 세우자 미국으로 건너가 나치즘과 핵폭탄 반대운동에 앞장섰다.그가 금세기 인물로 꼽히게 된 것은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파시즘을 증오하고 평화를 사랑한 그의 생애가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아인슈탄인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심성과 순진함으로 친근감을 느끼게한다. 후광과도 같이 뒤로 흩날리는 머리카락, 자상하면서도 순수함이 깃든몽롱한 표정 등은 사악함과 전체주의가 기승을 부린 20세기 천재의 가능성과어린이의 순진함을 함께 담고 있어 친밀감을 더한다.어려웠던 한 세기 그는인류에게 희망과 가능성을 갖게 한 구원자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최종 선정 과정에서‘지도자와 혁명가’부문의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아인슈타인과 경합을 벌였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해자인 히틀러가 게르만족 지상주의라는 몽상에 사로잡혀 비(非)아리안민족인 유대인과 슬라브민족 600만명을 인종청소했다면 피해자인 아인슈타인은인류평화를 위해 평생 힘썼다. 이런 두 사람이 한때 경합을 벌였다는 사실이믿어지지 않는다. 타임사가 참고자료 활용을 위해 실시한 100여만 독자들의 E­메일 투표결과히틀러가 한때 1위에 오르자 일부 언론들은 신나치주의를 표방하는 극우단체들의 발호를 우려했다고 한다.이에 대해 타임은 20세기 인물은 사람의 됨됨이나 공헌도 또는 해악을 끼쳤는지 여부와 관계없이‘누가 큰 뉴스거리를제공했는가’가 기준이라고 설명한다.세기의 인물 후보 중 한국인이 한 사람없는 것은 섭섭한 일이다. 금세기 우리 민족은 엄청난 변화와 좌절, 도전을겪었지만 세기적 관심을 끌지는 못한 것 같다.21세기 인물은‘조용한 아침의나라’에서 나오길 기원한다. [李基伯논설위원 kbl@]
  • 요리, 그 참을수 없는 즐거움

    “오늘 저녁에는 뭘 해먹지?” 매일 식구들을 위해 반찬을 준비해야하는 주부들에게 그날 그날 메뉴를 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매번 같은 것을 내놓으려니 마음이 편치않고 색다른 것을 준비하고 싶어도 요리책을 보면 어렵고 복잡하다는 생각에 대개는익숙한 메뉴를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요즘 젊은 주부와 신세대들은 다소 다른 모습을 보인다.요리는 일이아니라 ‘취미’ 이며 자신이 직접 만든 음식을 가까운 사람들과 나눔으로써즐거움을 얻는 새로운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듯 최근 출판사들이 내놓는 요리책들을 보면 우선 조리법들이 쉽고 재미있다.그리고 다양한 테이블 세팅과 응용법도 적혀 있어주부들로 하여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 요즘 서점가에서 인기를 끌고있는 요리책은 연예인들의 이름을 내건 것과요리라고는 밥조차도 해 본 적이 없는 진짜 초보를 위한 책으로 크게 나뉜다.여기에 전문가들이 내놓은 수준급 주부들을 위한 것과 소그룹 지도·요리전문지를 통해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 내놓은 것도 있다. 중앙 M&B 무크팀 정지원씨는 “인기있는 책들의 공통점은 빨리,손쉽게,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정보가 담겨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예인 이름을 내건 책으로는 ‘김수미의 전라도 음식이야기’(중앙 M&B)와‘최유라의 즐거운 요리 & 살림이야기’(웅진출판)와 ‘맛의 달인 최화정의맛있는 책’(중앙 M&B) ‘개성집 큰 딸 전원주의 고향요리’ (주부생활)등이있으며 이밖에 국악인 신영희,가수 진미령,탤런트 하희라, 탤런트 손창민의아내 이지영,탤런트 이정섭,개그우먼 박미선,전 앵커우먼 신은경도 요리책을냈다. 이중 10만부 이상 팔린 것도 있는데 이는 요리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보문고 송수경주임은 “연예인 이름으로 발행된 책은 출간 당시 대부분베스트셀러가 된다.그러나 수준이 낮거나 내용이 평이하면 금방 뒷전으로 밀린다”며 “최근에는 나름대로 특징과 전문성을 강조한 것들이 많이 나오고있다”고 설명했다.이 책들의 특징은 집안 살림에 가족들 이야기도 속속들이담겨있어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출판사들이 연예인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출판사의 한 관계자는 “예쁘고 똑똑하고 집안 일에 요리도 잘하는 연예인들은 주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들의 이름으로 만든 책은 최소 2만부는 팔린다”고 말했다. 이밖에 교보문고 요리책 베스트셀러에 속하는 책으로는 ‘하나하나 처음부터 배우니 정말 쉬워요’(쿠켄)과 ‘워킹우먼의 스피드 쿠킹’(웅진출판)‘방배동 선생 최경숙의 우리집 요리’(동아일보사) 신라호텔 식당 주방장 8명이 내놓은 ‘집에서 만드는 호텔요리’(디자인하우스)등이 있다. ‘하나하나…’ ‘워킹우먼…’은 결혼전 요리를 배우지 못한 신혼부부와요리에 관심이 많은 신세대들을 겨냥한 것으로 쌀씻는 법,물량 조절법 등 기초는 물론 빠르게 요리하는 방법이 담겨있다. ‘방배동…’의 저자 최경숙씨는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유행하는 소그룹요리강습 1세대로 그녀에게 요리를 배운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유명해진 인물이라는 점,‘집에서…’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비싼 호텔요리를 집에서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류의 요리책이 인기가 높다는 것이출판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웅진출판 무크생활팀 김민순씨는 “IMF이후 외식비를 줄이고 귀한 손님은집에서 모신다는 가정 중심의 문화가 확산되는 추세”라며 “남녀를 불문하고 음식을 잘하는 것이 하나의 덕목으로 떠오르고 있어 요리책 시장의 규모는 당분간 계속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강선임기자 sunnyk@
  • 의류대여점 액세서리까지 빌려줘

    ◎1년에 1∼2번 입을 옷 구입 부담 덜어준다 “입을 옷은 마땅찮고 사려니 부담되고…” 집안 대소사나 모임이 있을 때 여성들이라면 한두번씩 고민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고 요즈음 처럼 어려운 때 1회용 행사를 위해 옷을 구입하는 것은 더 더욱 힘든 일.이럴 때 ‘의류대여점’을 이용하면 고민을 덜 수 있다. 최근 문을 연 클로드뱅크는 의류는 물론 핸드백 액세서리까지 빌려주는 토털대여점.회원제로 운영한다.연회비가 5만원이며 한번 이용료는 2만원.대여기간은 3박4일이다. 맞춤 전문점으로 연예인들 옷을 주로 만들어온 크로마는 회원제로 운영되며 남성복도 대여한다.연회비 20만원을 내면 1년동안 모두 24벌을 빌릴 수 있다.본인만 대여 가능하며 기간은 3박4일. 한복대여점들은 각종 행사 때 입을 수 있는 예복과 약혼복 관례복 녹의홍상 돌복 등을 갖춰놓고 있다. 대여료는 1일 기준 여자한복은 5만∼10만원,남자한복은 10만원선,아기옷은 5만원 안팎이다. □의류대여점 ▷양장◁ 업체명 전 화 특징 크로마 (02)313­6207 회원제,남성복도 대여 클로드 뱅크 (053)431­0365 핸드백·액세서리 무료대여 ▷한복◁ 업체명 전 화 특 징 동방아트 (02)518­5521 맞춤·대여 조선명주 (02)652­3000 수도권지역 방문대여 질경이우리옷 (02)774­5644 지갑·고무신 등 무료대여 황금비늘 (02)717­3131 대여전문점
  • 문하생 학력 인정/李世基 社賓 논설위원(外言內言)

    도예나 공예는 주로 그 집안의 가업을 대대로 이어받고 있다. 경북 문경의 백산(白山) 김정옥은 7대째 청화백자를 이어받고 있는 도공으로 그 방면의 유일한 무형문화재다. 그는 오로지 도자기만 빚었을 뿐이며 그의 아들에게 8대째 이를 전수하고 있다. 국악이나 전통무용도 비슷하다. 처음부터 부모에게서 기량을 이어받는 예가 흔하다. 아니면 일찍이 스승 밑에 들어가 모진 설움과 고초를 겪어야 한다. 하루종일 뜰을 쓸고 마루를 닦고 설거지를 끝내야만 스승의 춤사위 한자락을 배울 수 있었다. 스승 밑에서 강사와 조교를 거쳐 이수자 전수조교 인간문화재 후보로 지정되기까지는 보통 20년에서 30년이 걸린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려면 그 분야의 스승이 타계한 후라야 하니 더더군다나 요원한 일이다. 이처럼 피나는 과정속에서 그들은 먼저 ‘인간이 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을 수 있는 모든 자격을 허락받게 된다. 따라서 이들에겐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 교육의 수단이며 시간낭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실제로 산교육이란 어떤 스승을 만나서 무엇을 어떻게 배우느냐에 따라 기량이 확산되거나 유지되기 때문이다. 특히 예능교육의 집중교육은 빠를수록 바람직하다. 집안에서 예술을 하는 부모를 지켜보면서 자란 자녀는 대부분 부모의 영향을 받아 부모의 뒤를 따르는 예가 흔하다. 탤런트나 가수 등 연예인들중에 2세가 많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내년부터 무형문화재에게 창(唱)과 전통무용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는 문하생들에게 중고교 졸업학력이 주어진다고 한다. 무형문화재들의 교육장소를 사회교육기관으로 인정하여 학력을 부여한다니 참 다행한 일이다. 대상은 창작성이 부여되지 않은 음악 무용 연극 등 7개분야의 전통예술에 국한하고 있다. 예술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들에겐 학력이란 형식일뿐 큰 의미가 없을듯 싶다. 오로지 한군데 파고들어 그 방면의 일인자가 되는 것만이 그들의 목적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동양화의 경우에도 스승의 화숙에서 먹을 가는 것을 자랑삼은 적이 있었다. 한 시간이라도 아껴 기량을 닦는 일만이 대가에다다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 꽹쇠 李光壽(이세기의 인물탐구:167)

    ◎북 장구 징 달통한 최고의 꽹쇠/농악 사물놀이 현대음악 장르로 세계화 시킨 주역/100개국 700회 순회 공연… ‘한국의 원음’ 전파 북이 구름이고 장구가 비라면 징은 바람소리다. 사물 중에서 꽹과리는 뇌성벽력(雷聲霹靂)에 비유된다. 혼신을 다해 신바람나게 두들겨야만 산맥 하나가 태어나고 바다가 숨을 멈춘다. 이시대 최고의 깽쇠는 두말의 여지없이 굿패 ‘노름마치’ 李光壽라 할수 있다. 그의 꽹과리는 어느때는 흐르는 계류와도 같고 어느때는 성난 굽이굽이로 사납게 울부짖는다. 숨막히게 몰아가는 장단속에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만의 타법으로 인간의 고통과 환희, 고뇌와 한(恨)을 능란하게 다스린다. ○인간의 고통·恨 다스려 이광수는 김덕수 사물놀이에서는 주로 북을 쳤으나 깽쇠인 김용배 타계후 쇠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릴때부터 북에서 장구, 징과 꽹과리 등 모든 연희를 답습했다. 그중에서도 구음과 덕담으로 이어지는 ‘비나리’는 명창 박동진 옹에 의하면 ‘꽹과리 못지않은 일품의 경지’다. ‘비나리’는 인간을 끼고 도는 횡액(橫厄)을 막아주고 수명과 명복을 기원하는 노래로 지난 90년 광복 45주년 범민족음악회때는 이 ‘비나리’로 남북 공통의 정서인 민족의 통일염원을 담아내는데 성공했다. ‘비나리’를 통해 그가 독특하게 창출해내는 심오한 가락의 의미는 이미 오래전부터 ‘비장미(悲壯美)의 극치’로 평가되고 있다. 연극연출가 김우옥씨는 “그의 비나리는 모든 예술의 정수(精髓)이며 그의 꽹과리소리는 인생의 무상(無常)을 부드럽게 어르고 달랜다”고 말한다. 벌써 그 이전인 78년에 김덕수와 공간사랑소극장에서 앉은반 형태를 처음 선보인후 그들은 서양 타악기의 선두주자이자 작곡가인 박동욱씨의 추천으로 82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월드 쇼케이스 페스티벌’에 참가, 세계에서 가장 잘한다는 음악의 귀재들로부터 6차례의 커튼콜을 받았고 80년대 중반아직 이데올로기 장벽이 헐리지 않았던때 폴란드 유고 등 공산권국가에 들어가 ‘한국의 원음’을 전하는 민간외교사절의 몫을 당당히 해냈다. 그리고 세계적인 재즈축제인 뉴올리언스페스티벌에서는 사물놀이가 ‘한국의 독창적인 재즈’로 소개되기도 했다. 지난 86년 뉴욕 퀸스 페스티벌에 이어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월드 드럼 페스티벌’에서도 뉴스위크지는 “그들이 한복을 입고 상모를 돌리기 시작하자 어떤 악기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생명성으로 세계인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그의 쇠가락은 어느 자리에서나 신기와 광기를 발휘하고 살풀이 액풀이 축원 덕담 등 각종 소리에도 눈부신 솜씨를 구사한다. 판굿에서 펼치는 상쇠놀음은 부포놀음이며 상채발이, 까치놀음에서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몸짓과 흥에 합일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남인지 남이 나인지 모를 무아지경에서 객석도 미치고 그도 미친다. ○6살때 남사당패 입문 그는 충남 예산에서 9남매중 6째로 태어났다. 무성영화를 제작하다가 북만주 일대까지 전문연희패를 몰고 다니던 이름난 ‘뜬쇠’인 李點植씨가 그의 부친이다. 집안은 일찍이 내로라하는 ‘뜬쇠’들의 음악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고 그는 여섯살때부터 남사당패의 무동(舞童)이 되어 상모돌리기와 던질사위에서 탁월한 기량을 보였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깡통을 두들겨 만든 꽹과리로 리듬을 익혀나 갔고 온양 온천초등학교 졸업후 전국 방방곡곡으로 연희여행에 따라 나섰다. 그런 가운데서 연화당 스님 김대관 김복섭으로 이어지는 안택경(安宅經) 옥추경(玉樞經) 천지팔양경(天地八陽經)과 꽃만드는 법에서 부적, 꽹과리 북 상모만드는 법을 배웠고 당대 최고의 뜬쇠들에게 살판, 줄타기, 온갖 풍물굿과 남사당놀이를 두루 섭렵했다. 그의 붓가락은 대마디 대장단으로 사치가락을 쓰면서도 붙임새가 분명하고 맺음새가 깔끔한 것이 인상적이다. 10살되던 해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충남대표로 출전하여 대통령상을 수상, 66년 서울 구로동에서 열린 무역박람회에 왔다가 성장과정이 비슷한 김덕수 김용배 최종실과 의기투합하여 농악 사물놀이를 현대음악의 한 장르로 세계화시킨 주역중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지난 86년 가장 절친했던 김용배의 자살로 그는 ‘내몸의 털이 다 서는것 같은 충격’을 받고김덕수 패와도 헤어져 나왔다. ○지휘자 정명훈과 협연 91년 사물놀이패가 발전적 해산을 하기까지 100여개국에서 600회 이상을 공연했고 혼자 독립한 후에도 100회 이상을 공연, 뉴욕 타임스에 예술평론을 기고하는 제니퍼 더닝은 “꽹과리소리는 지구의 생명을 부활시키는 소리, 블랙홀이 따로 없다. 그의 가락에 무한하게 빠져든다”고 평할 정도다. 이후 ‘놀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뜬쇠중의 뜬쇠’라는 뜻으로 그만의 굿패인 ‘노름마치’를 구성하게 되었고 그가 만든 민족음악원의 바쁜 연주일정속에서 상반기만도 정명훈이 지휘한 ‘조국을 위하여’연주, 미국 내슈빌에서 열린 아프리카 아티스트 페스티벌 참가일정이 잡혀있다. 이른바 인위적으로는 결코 자아낼수 없는 음악의 감흥인 버슴새가 안정되고 광기와 신기를 안으로 다지는 기질이 그의 특징이다. 가족은 전에 여성농악단에서 장구를 치던 鄭美淑씨와의 사이에 남매. 평소의 그는 목화밭에서 갓딴 무명처럼 청수하고 일상사에 어둡지만 한번꽹과리를 두들기면 ‘잘하면 살판, 못하면 죽을 판’으로 매달려 꽹과리만의 운우(雲雨)풍뢰의 조화를 성취시킨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중에도 그 소리속에는 누주(淚珠)가 얼룩져있고 천변만화(千變萬化)의 황홀한 순간에도 우징(雨徵)을 품고 있는 것도 어쩔수 없는 그만의 운명일 것이다. 다만 한군데 머무르지 않는 타고난 광대기질은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하고 기세가 꺾이지 않아 인간이 범할수 없는 신적 영역까지 넘나들면서 그의 혼(魂)과 성(誠)은아마도 그 끝이 보이지않는 신명을 언제까지나 멈추지 못하게 될것 같다. □연보 ▲1952년 충남 예산출생 ▲1958년 남사당패 입문, 최성구 차기준 황금만 사사 ▲1962년 전국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 ▲1978년 김용배 김덕수 최종실과 ‘사물놀이’창단(공간소극장) ▲1982년 세계타악인협회 월드 쇼케이스 페스티벌참가(美플로리다·댈러스) ▲1985­88년 뉴욕 아시아소사이어티초청 미주지역 순회,영국·일본공연 ▲1987년 88 서울올림픽유치를 위한 영국순회공연, 일본 ‘라이브 언더 스카이 재즈’ 페스티벌참가 공연 ▲19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평양) ▲1993년 민족음악원 개원, 굿패 노름마치 대표 ▲1997년 예인40년 기념공연 ‘알이랑 얼이랑’ KBS국악대상 단체상 ▲1998년 ‘조국을 위하여’ 아시아필하모닉 협연(지휘 정명훈) 민족음악원장, 사단법인 국악협회 대의원, 서울예전출강 사물놀이 창단음반(83년) 일본 산토리홀 사물놀이(87년)외 ‘신명(神命)’‘난장’‘아라리오’‘이광수 예인 40년’특집음반 등 다수
  • 현대무용가 安信姬(이세기의 인물탐구:166)

    ◎섬광 폭죽인듯 폭발하는 춤사위/대한민국무용제서 대상·개인연기상 등 휩쓸어/‘지열’로 일 국제페스티벌 딛고 아시아 스타 浮上 스포트라이트속에 정지된 安信姬의 포즈는 ‘그 자체가 춤의 시(詩)’라고 할 수 있다.신체의 사선(斜線)을 축(軸)으로 삼아 아이키도 돌기며 바운징으로 그가 돌아가야할 ‘길’에서 배회하고 ‘섬과 섬사이’를 떠돌면서 고뇌하는 현대인의 이미지를 불꽃같은 감성으로 춤추어 낸다.‘춤은 춤으로 보여주고 들려준다’는 그는 공연때마다 ‘무진장의 에너지를 폭죽처럼 터뜨리고’‘내쏘듯 날카로운 섬광’을 무대중앙에 흩뿌리기도 한다.안신희란 존재는 이미 ‘춤과 사색,행위의 철학’을 빼고는 말할 수 없는 무용가이다.어느때는 ‘조롱에 갇힌 새’,어느때는 ‘이 세상의 모든 자유를 지닌 해방감’에서 단순한 극과 극이 아닌,중용의 조화를 얻기 위한 내심의 춤을 구축하기 때문이다.‘춤’은 그의 ‘숙명’이자 잠시도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천부의 인연으로 그는 언제부턴가 ‘춤의 심연’에 깊이 빠져버렸다. ○“춤은춤으로 보여준다” 그가 만든 춤중에서 특히 관객의 시선을 끈 것은 지난 83년 일본 현대무용협회와 코파나스회가 공동주최한 제1회 국제 현대무용페스티벌에서 춤춘 ‘지열(地熱)’을 들 수 있다.‘지열’은 서구적인 차별성과 한국적인 특성을강조한 작품으로 춤추고 났을 때의 무용수는 한바탕 굿판을 끝낸 신들린 무녀(巫女) 모습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긴 박수소리와 함께 그가 도취에서 깨어나자 일본 매스컴들은 그를 일약 ‘아시아의 신데렐라’로 부상시켰고 아사히신문과 주간‘아사히 저널’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신비로운 무대’제하로 ‘이번 축제에서 오늘의 춤을 보여준 것은 객석에 시종 싸늘한 긴장을던진 안신희의 지열이 단연 압권’이라는 평을 보냈다. ‘지열’을 전환점으로 그는 다시 대한민국 무용제에 ‘섬’으로 도전했고 시인 정현종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구절과 ‘그 섬에 가고 싶다’는 테마로써 ‘섬은 다른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는 섬의 이상향을 역동적으로 풀어나갔다.그리고 그는 더이상 여러그룹속의 안신희가 아닌 대한민국 무용가로 떠올랐다.무용인 최대의 영예인 대상·개인연기상·미술상을 한꺼번에 수상하는 과정에서 평론가 박용구 조동화 김영태씨는 ‘뛰어난 리듬감각과 문학적 작품성은 올해 무용계가 얻은 최대의 수확’임을 전제,‘스타성이 있는 현대무용가’로서 ‘박력과 자기춤에 몰입하는집중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며 ‘자기 욕심을 포기할줄 모르는 안무가’로평했다. ○활화산­불생의 무용 안신희는 전남 구례에서 양조장과 정미소,과수원을 경영하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어릴때는 부친 安基浩씨를 따라 풍광이 수려한 지리산에 오르거나 섬진강 지류에서 물장구를 치면서 춤의 흐름을 몸속에 싹 틔울수 있었다.초등학교 5학년때 집안이 서울로 이사,그때까지는 ‘장래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가 없었으나 배화여중때부터 춤추기 시작하여 ‘악바리’‘연습벌레’라는 별명을 들을만큼 춤에 대한 강한 집념을 불태웠다.그때도 거울속에 비친 자신의 포즈에 한치의 흔들림을 용납하지 않아 이완과 수축,스피드와지속이라는 범위속에서 반드시 명확성과 평정성 민감성을 끌어냈고 ‘완벽’이라는 해답을 얻어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첫무대는 74년 스승인 육완순교수가 안무한 ‘슈퍼스타’다.‘늘씬한 키에 쭉뻗은 몸매,아름다운 외모가 풍기는 이지적인 분위기’로 그는 다음해엔 1개월간 미국공연,83년까지 유럽순회공연에 합류했다.그는 크거나 작은 어떤무대도 겁내지 않는 무대체질이 천성이기도 하다.한때는 알렉산더 고두노프의 예술성과 테크닉,극적인 춤의 특성에 매료되었고 마사 그레이엄의 무용적 카리스마,마곳 폰테인의 지고지순한 삶을 선망하면서 직관적인 선택과 엄격한 훈련으로 불균형과 비대칭,현대생활에서의 불확실성과 다양성을 은유적으로 부합시키는 무용구조를 성립해 나갔다. 그의 무용의 길은 한동안 탄탄대로 였으나 대학 3학년때 부친의 사업실패로 대학원진학을 앞두고 고향인 구례에 칩거한 적이 있다.그러나 ‘무용의 길은 너무 멀다’는 것과 ‘예술가는 어려움을 이길줄 알아야만 거듭난다’는뼈아픈 경험끝에 무용없이는 ‘공기없이 사는 것처럼’ 무의미하다는 결론아래 한때는 밤낮없이 기도에 매달려야 했다.끝내 ‘하나님이 대로(大路)를 열어주실 것같은 강한 암시’를 받았고 그 시절에는 적선동에 방한칸을 얻어 신촌까지 걸어다니면서도 다시 ‘춤출수 있다’는 기쁨과 샘솟는 창작의지로 창작무용들을 얼마든지 만들어냈다.‘교감’‘13월의 여행’‘청동무늬’‘전설’등은 그때의 산물이다. ○미­유럽순회 공연도 원로 평론가 박용구씨는 ‘안신희는 마치 불을 보면 뛰어드는 나비처럼 그의 춤은 자신의 몸을 사르는 활화산의 무용이자 불새의 무용이며 그의 춤에접하면 고압선에 감전된듯 강한 전율을 느낀다’고 평한다.최근의 그의 춤은 무르익은 성숙을 보이면서 아무런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상 최대의 자유를 춤으로 구조화하는 시기다.객석의 애증의 그림자마저 읽게된 그는 자연과 문화와의 경계선을 추구하면서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처럼 더높이 더멀리 날기 위한 모든 과정을 뛰어넘고 있다.실제로 그의 무용언어는 연극적 대사가 느껴지는 절규와 경악과 유기적인 삶의 풍경을 흐르는 강물처럼 표현해 낸다.가족은 그의 무용적 삶을 이해하는 부군 韓基天씨와 아들 누리(12살)가 있다.오늘의 한국무용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안신희가 이룬 성좌는 누구보다 밝고 극명하다.한때는 ‘너무나 기쁘고 너무나 슬픈’ 희비애락에 침몰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몸속으로부터 솟구치는 득의의 춤을 추게 되었고 쏘는듯 날카로운 춤의 빛줄기는 관객의 가슴에 언제라도 진한 감동을 던져준다.그는 자기 세대에서 만인의 시선을 받는 춤꾼으로서 지금부터가 ‘안신희 무용’을 위한 비상(飛翔)직전의 출발선상에서 고고하게 서있다. ◇연보 ▲1957년 전남 구례출생 ▲1974년 육완순무용단 ‘슈퍼스타’출연 및 미국지역순회 공연 ▲1983년 안신희 무용발표회,육완순무용단 ‘슈퍼스타’유럽순회 공연 ▲1984년 이대 교육대학원졸업,프랑스 소르본대학 무용과수업 ▲1992년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과 레닌그라드국립발레단 합동공연 ‘만가’출연(소련 모스크바·레닌그라드) ▲1993년 대전 EXPO개막축제안무 ▲1996년 서머아트페스티벌 및 빛고을창작무용제 ‘꾼들’안무·출연 ▲1998년 5월 국제현대무용페스티벌 ‘존재’’고향에 대한 보고서’ 안무·출연 한국현대무용협회 및 한국현대무용진흥회이사,21C선교무용위원 현대무용분과위원장,한국예술종합학교강사 대한민국무용제 신인상(81년) 대한민국무용제·대상 및 개인연기상(83년) 코파나스상(84년) ‘2천년대를 달리는 한국의 예술가’(92년)선정,‘부상하는 한국의 아티스트’ 선정
  • PC통신에 쏟아진 주부들 말… 말…

    ◎옷·화장품 모른채 궁상 떨었는데…/경제파탄 파편 왜 뒤집어쓰나/좋은 국산품 추천… 애용운동 펴자 IMF 한파에 제일 가슴 졸아붙는 이는 아무래도 주부.구멍난 장바구니를 들여다 보며 어처구니가 없다.감봉입네,감축입네 떠드는 소리에 남편 어깨 움츠러드는 것도 눈에 쓰리다.아이들 학원비를 쪼개보다가 부업거리라도 찾아야 하나,잠시 한숨 짓는 이들.주부들의 불만은 10원 한장까지 알뜰하게만 살아온 자신들이 왜 경제파탄의 파편을 온통 뒤집어쓰게 됐느냐 하는 점.PC통신상의 여성 사이트 들엔 주부들 타는 속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몇달전까지만 해도 참 열심히 가게부 썼죠….근데 써놓은 걸 들여다보면 한심해지더라 이겁니다.고기반찬도,취미생활도,옷이나 화장품도 모른채 냉장고에 남은거 없나 들여다 보며 궁상을 떨어도 세달에 한번 유치원비,몇달에 한번 집안 행사비,일년에 두번 남편 등록금 나가고 나면 뻥 뚫려요! 애꿎은 가계부 집어던지고 그만뒀지요”(하이텔 ID 호머). 주부들의 원망은 경제를 이 꼴로 만든 ‘있는 자’들에게집중된다.“연예인들은 한달에 몇번 홍콩으로 쇼핑가는게 취미라더라.외제 청바지 못입었다고 부끄러워 하는,정말 창피한게 뭔지 모르는 이들” “이 와중에 세비를 30% 올리는 국회의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이래요?” 등.도둑이 부유층 주택가를 돌다 숨겨둔 외화를 엄청 훔쳤다는 뉴스엔 “부유층이 이젠 여행나갈때 환전도 못할거라며 장롱속에 몇만불씩 묵혀둔걸 다 합치면 외채갚고도 남는단다.우리 부부가 가진 20불 저금하려고 했는데 부질없다는 생각뿐”이라는 자조섞인 한탄도 나왔다. 이런 중에도 ‘풀뿌리’ 주부들은 허리띠 졸라매기에 여념이 없다.대표적인 건 하이텔의 ‘좋은 국산품 추천 운동’.“실생활에서 이것저것 다 재보고 따져가며 가장 잘 아는 주부들”이 써보고 좋은 국산품을 추천,외제와 국산을 바꿔가자는 운동.제의가 나온지 1주일도 안됐지만 “내가 써본 S사 가습기는 외제보다 훨씬 튼튼하더라” “외제가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실생활에서 편하게 입기는 남대문 옷이 최고” 등 큰 호응을 얻고 있다.이밖에도 “물건을 살 때마다 원산지를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자” “미국에 살지만 한국에 놓고온 통장에다 달러를 저축하고 있다” “한달에 한번이상 갔던 코코스,두달에 세번은 갔던 켄터키 치킨,누가 뭐래도 다시는 안간다” 등 생활속 경제살리기 실천사례들이 다양하게 올라와 있다.
  • 무악인 박병천(이세기의 인물탐구:140)

    ◎신의 소리·동작 전수하는 ‘굿판의 사자’/신들린듯한 소리·춤사위 ‘세습무의 증언자’/무형문화재 72호 ‘진도씻김굿’ 기능보유자 진도씻김굿의 전과정을 보기 위해서는 이틀에서 사흘이 걸린다.그러나 70년대 이후 진도씻김굿의 인간문화재 박병천은 망자를 불러들이는 초가망석,복덕을 비는 제석,매듭을 푸는 고풀이와 이슬털기,길닦음으로 1시간짜리 굿을 짜서 무대에 올리고 있다. 잔잔한 파도같이 밀려오는 삼현육각중에서도 대금과 쌍피리의 구성진 죽관음이 한맺힌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 흰 광목천으로 길을 닦아 혼을 승천시킨다.이때 주무는 흰 도포에 갓,단정하게 앉아 북가락과 구음으로 굿을 이끌되 신바람나게 뛰거나 번거롭게 휘도는 것이 아니라 시종 숙연하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한맺힌 망서 넋 위로 ‘누웠던 환자가 벌떡 일어난다’는 박병천의 소리와 장단은 북춤에서 굿거리 한량춤과 지전춤 살풀이춤으로 한판을 펼쳐도 그 기량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특히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쌍가락으로 치는 북춤은 양어깨를 활짝펴고 솔개가 날아가다 동작없이 머문듯한 춤사위며 천길 낭떨어지에 내려꽂히는 물줄기처럼 시원하게 휘돌고 몰아치는 전과정이 가히 ‘달인의 경지’로 호평된다. 그는 ‘춤은 바로 장단의 기화’라고 말한다.‘춤은 우리 가락에 내몸을 놓는것’이며 ‘내몸에다 장단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가락에 맞춰 내몸을 맞추는 것’이라고 했다.‘이김발(이긴발)­까치발(새발)­자진발­디딤발’로 장단에 몸을 놓는 지무네(지무)를 추되 춤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전체속을 깊이 알고 추는 ‘무검질 속’춤이 제격이다. 그가 짠 씻김굿 무악은 2분박 보통 빠르기의 흘림을 기본으로 하면서 진양에서 굿거리 중모리 덩덕궁이 자진모리로 이어지는 삼장겹장단은 흥과 화사가 넘치고 너름새가 화려하여 다른 지방에서는 볼수 없는 장단이다.소리 역시 툭 트여서 현대창작무대의 잦은 초대와 요청이 들어오고 국립무용단에서는 그의 장단과 소리와 북춤을 무용극에 삽입하고 있다. 그가 이런 장단과 연희에 달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굿속에서 굿을 보면서 자라난세습무가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진도 신청의 당장이던 박범준과 당대 제일의 무당으로 알려진 김소심의 장남.그의 조상이 진도에 온 것은 9대조부터이며 그의 종조부인 박종기씨는 대금산조의 창시자이고 당숙인 만준씨는 피리의 명인,고모인 박선래씨도 무업을 이어받고 있다.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무동을 서기 시작했고 목포상업중과 목포 상선전문학교시절에는 연극부 밴드부에서 타고난 끼를 다방면으로 발휘했다.굿에 종사하던 사람을 천시하던 시절이라 한때는 미곡상도 해보고 포구에서 객주노릇을 하기도 했으나 무슨 일을 해도 되는 것이 없어 가업을 잇기로 한 것이다. 70년대에 접어들자 그는 집안에서 배운 진도만의 ‘남도 들노래’‘강강수월래’‘거문도 뱃노래’와 ‘진도다시래기’를 가지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나가 국무총리상 대통령상을 휩쓸었고 이보형 임학재씨에게 발굴되어 77년 서울 YMCA강당에서 첫공연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평생을 무대에 서 본적이 없는 무당과 악사들을 모아 연습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데다 막상 막을올리기 직전에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창피해한다는 이유로 공연을 취소하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세습무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그는 무대에 오르면 평소의 근엄하던 자태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희색만면에다 목소리에 마저 신기가 실려 징으로 녹여내고 목으로 풀어내는 ‘비나리’는 씻김굿 명인들 중에서도 독보적 명기로 구분된다. ‘나오소사 나오소사 씻김받자고 나오소사.잔옷벗고 마른 옷입고 상탕에 목욕하고 중탕에 메를 짓고,쑥물 향물 청계수로 목욕재계하신후에 …’ ○어려서부터 굿속서 자라 엇중모리에 얹는 이 비나리는 굿에서 씻길 망자를 맞아들이는 초가망석(초혼) 첫머리 사설로서 애절한 허튼제와 일정한 장단이 없는 무장단이 특징이다.또 언제 손이 나가는지 2박자 하나라도 네개 여섯개 열두개로 끊어내고 둥둥 떠있는 혼을 능란하게 어우르는 품은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에 의하면 ‘남이 넘볼수 없는 경이의 수준’이다. 징을 칠때는 씻김굿에서만 만 9시간을 끌기도 하고 살풀이 장단하나만도 80여개로 쪼개치는 귀신같은 솜씨는 그의 손 마디마디에 박혀있는 굳은 살과 가죽처럼 두꺼운 손바닥에서 그만의 연륜을 되짚을수 있을 뿐이다.굿판을 시작하며 막을 올릴때는 ‘선부리장단’을 쓰고 중중모리로 넘어가야할 경우에도 중모리장단의 절반 다음박에서 중중모리장단을 ‘산 도리돈돈 닷 돈…’으로 절묘하게 끌어낸다.실제로 그가 굿을 진행하는 전과정에서 북가락에 구음을 넣는 그 소리는 어느때는 구슬프고 어느때는 화창하여 때묻지 않은 싱싱한 구음에 녹아들고 젖어든다. 송파구 석촌초등학교옆 살림방이 딸린 박병천문화재전수소는 에어컨 하나없는 선풍기 바람속에서 아침 8시부터 밤 9시까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그는 온신명을 쏟아낸다.단 한사람이라도 완벽하게 가르치고 길러내자 하는 일념에서다.무무를 담당하는 부인 정숙자씨(58)와의 사이에 3남 4녀가 있지만 장남(환영)만이 국립국악원 대금주자로서 국악과 관련이 있을뿐 막상 진도씻김굿을 잇는 자녀는 없다. 우리민족음악회의 노동은씨(음악평론가)는 ‘우리가 박병천을 주목하는 것은 인간문화재나 대금산조의 창시자의 집안이라는 사실때문이 아니라’ ‘인간사 음악으로 장구한 역사의 지평을 이룬 신청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그 시대 신들의 언어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전달하는 음악사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시대의 음악사자” 그의 연희는 모든 민속예술자료의 사전에다 각종 민속연희에 가닿지 않는 부분이 없을만큼 무한한 기량을 갖추고 있다.그러나 그의 대에서 어쩌면 세습무가 끊긴다는 사실은 그를 아끼는 주변에 안타까움을 던져준다.그러나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세습무의 증언자로서 일생을 가무에 젖어 살아온 그는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입신 대광에서 왕생극락을 현대에 실천한 초월의 예인이 아닐수 없다. □연보 ▲1932년 전남 진도 출생 ▲1952년 목포상선전문학교 졸업 ▲1960년부터 무무악 섭렵 ▲1971∼76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남도 들노래’(국무총리상수상 ‘강강수월래’(대통령상)‘거문도 뱃노래’(국무총리상)‘진도만가’(문공부장관상) ▲1977년 진도다시래기 발표 ▲1978년부터 서울YMCA강당,국립극장,공간사랑 ‘씻김굿’ 공연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기능보유자 ▲1981년 ‘박병천문화재전수소’개설 ▲1982년 국제민속예술제초청 유럽 6개국 순회공연,해마다 ‘명무전’ 참가 ▲1984년 LA올림픽개막축제공연,니카라과 민속음악제 금상 ▲1985년 베를린 국제민속음악제 국가대표 유럽7개국순회공연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참가 ▲1990년 LA 세계민속페스티벌 참가 ▲1994년 아시아 소사이어티 초청공연 ‘코리아 페스티벌’ 및 미국순회 ▲1997년 ‘명인명창 한마당’(호암아트홀),‘진도 바닷길’ 축제공연 ▷현재◁ 사단법인 민속놀이진흥회 이사장,재단법인 문화재보호재단(한국의 집)전문위원 및 공연단 총감독,중앙대예술대학원 및 국립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객원교수
  • 연세대,131명 「남한생활 적응 설문」

    ◎귀순자 “대인관계 가장 힘들다”/북서 가장 인기 직업은 「무역일꾼」 귀순자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대인관계와 경제적 문제이다. 연세대 통일연구원(원장 이영선 교수)이 47년부터 96년까지 북한에서 귀순한 131명을 대상으로 「남한 생활적응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12.9%는 「남한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으로 대인관계를 꼽았다.경제적 어려움은 11.1%,사회생활 적응 9.9%,취업 6.8%,문화적 차이 3.4%,향수는 2.6% 등의 순으로 집계됐다. 「북한 청소년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31.6%가 출신성분과 집안배경을 들었고 직업선택·진학 등 진로문제는 24%,경제적 어려움 14.8%,학업문제는 6.4% 등이었다. 북한 청소년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직업으로는 「무역일꾼」이 27.8%로 가장 많았으며 「상업일꾼」 14.1%,연예인·운동선수·자동차 운전수·기차 기관사 각 12.9%,교사·교수·과학자 11.4% 등의 순으로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270일간 월드컵만 생각했어요”/감회 남다른 가수 김흥국씨

    ◎남산서 기원제·봉은사서 2천2배 올려/“킥 오프” 그날까지 축구붐 조성위해 최선 『축구사랑이 곧 나라사랑이라는 일념뿐이었어요』 한국이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지로 결정되는데 누구보다 큰 공헌을 한 가수 김흥국(37)씨.「축구대사」라고까지 불리는 김씨는 지난달 31일 새벽에도 남산에 올라가 팔각정에서 월드컵유치 기원제를 올렸다.지난해 9월 한국이 월드컵 개최를 신청한 뒤 2백70여일간 월드컵만을 위해 살아온 그가 마지막 정성을 모아 올린 기원제였다. 『방송일 때문에 국제축구연맹(FIFA)의 투표가 진행되는 기간동안 스위스 취리히에 가있지 못한 것이 참 괴로웠어요.그래서 「좋다,취리히는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맡고 나는 한국을 책임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그가 벌인 이벤트는 수없이 많다.김포공항으로 가는 도로변에 「2002」깃발을 1천개이상 꽂고 부처님오신 날에는 서울 봉은사에서 월드컵유치를 위한 2천2배를 5시간 넘게 올렸다.축구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항상 달려가 응원단장을 도맡아 했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좋아한 그는 초등학교 축구선수로 활약하며 국가대표 선수가 되는 꿈을 키웠다.그러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집안형편이 어려워져 더이상 선수로 뛸 수 없게 된 것이 마음의 한이 됐다.축구 대신 음악을 선택,20대 중반 본격적인 가수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접어둔 축구에의 열정을 불살랐다.조기축구회,연예인 축구동호회 「회오리」,「축구사랑시민모임」을 잇달아 만들고 93년에는 대한축구협회 홍보위원에 위촉됐다.그의 축구사랑은 결국 「축구=김흥국」이 되게끔 만들었다. 돈벌이를 위해 밤업소에 나가는 일도 없고 집안일도 내팽개친 셈이나 다름없는 김씨.『축구는 우리나라 사람의 체형에 가장 맞는 운동이에요.그리고 다른 운동에 비해 시간과 돈이 절약되고.그런데 어느날부터 축구가 다른 스포츠에 밀려 비인기종목으로 전락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라며 축구에 헌신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앞으로 월드컵이 개최될 때까지 축구붐 조성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김씨는 『월드컵 유치가 안되면 집에 들어올 생각도 말라고 으름장을 놓은 아내에게 할 말이생겼다』며 웃음을 터뜨렸다.〈서정아 기자〉
  • 서울 광진을·경북 구미갑(표밭 현장을 가다:6)

    ◎서울 광진을/전직기자·여 변호사 등 “5인5색”/김충근씨 참신 이미지로 도전 현직 국회의원과 전직기자,여판사,영화배우,당료출신등 후보들의 다양한 면면만큼이나 불꽃튀는 접전이 예상되는 지역이다.특히 14만2천5백여명에 이르는 유권자들의 생활수준과 학력편차가 심하고 출신지역도 다양해 판세를 쉽사리 점치기 어렵다.때문에 여야4당 모두 서울의 대표적인 경합지역으로 꼽으면서도 내심 자당후보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 지난해 9월 광진갑과 분구돼 무주공산인 이곳에 출사표를 던진 인사는 기자출신의 김충근씨(45·신한국당)와 추미애 변호사(37·국민회의),재선의 박석무의원(53·민주당),영화배우 김희라씨(49·본명 김영목·자민련),민주당부대변인 출신의 권왈순씨(48·무소속)등 5명. 신한국당의 김씨는 올해초까지 동아일보 북경특파원을 지내다 지난달말에야 조직책에 인선된 후발주자로 등산로와 시장,사우나등을 돌며 얼굴알리기에 분주하다.참신한 이미지와 특파원을 지내며 쌓은 국제적 감각이 주무기. 지난해 11월부터 일찌감치 표밭을갈아온 국민회의 추변호사는 소신있는 여판사의 이미지와 대구출신이면서 국민회의를 택한 결단등을 앞세워 여성표와 젊은층을 공략하고 있다.여야4당중 첫 여성부대변인으로서 쌓은 지명도와 호남표가 유권자의 30%에 이르는 지역특성에 기대를 걸고 있다. 민주당의 박석무의원은 13,14대 국회에서의 정치기반이었던 전남 무안에서 옮겨와 새로이 착근을 시도하는 케이스.국민회의에 참여,전남에서 무난하게 당선되는 길을 버리고 민주당 사수를 선언한 소신파로 꼽힌다. 자민련 김희라씨는 은막에서 닦은 텁텁한 이미지로 서민층과 여성층,전체의 20%에 이르는 충청출신 유권자들을 파고들고 있다.「효실천운동본부」등 동료 연예인들의 지원을 앞세워 「예술정치」의 바람을 일으킨다는 전략. 무소속의 권왈순씨는 국민회의 추변호사와 조직책 경합을 벌인 당료출신으로 국민회의 조세형부총재의 측근이었으나 조직책심사에서 탈락한 뒤 탈당,이달초 출사표를 던졌다.지난해 5월 개인사무실을 차리면서 꾸준히 훑어온 바닥표에 승부를 걸고 있다.◎경북 구미갑/「박정희가바람」 다시 불까 관심/장조카 박재홍 의원 출마 변수로 『이번 총선에서 과연 박정희가에 대한 향수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요즈음 경북 구미지역 사람들이 정치 이야기를 할때 반드시 꺼내놓는 화제다. 신한국당측에서는 『지역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선거때만 되면 표를 달라고 박 전 대통령을 팔고 있다』고 자민련을 겨냥한다.한 음식점 주인은 『13대 선거때는 박 전 대통령 조카들끼리 싸우고 김종필 총재 부부까지 가세하고 어쨌든 야단났었지요』라면서 『박 전 대통령집안의 정치인들이 지역민들의 향수를 부추기지만 정작 박 전 대통령의 아들딸들과는 잘 지내거나 어려울때 돌보지 않았다면서요』라고 반문했다. 자민련측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계승하고 있는 자민련을 지원해 달라』며 구미를 교두보로 삼아 총력을 펼치고 있다.구미 세무서의 한 공무원은 『이 지역에는 박전대통령에 대한 신화가 존재하고 있다』면서 『14대 총선에는 박정희가 사람들이 출마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 구미갑에 출사표를 던진 정당후보는 신한국당의 박세직의원(63)과 자민련의 박준홍 전 대한축구협회회장(50)등 두사람이다.여기에 신한국당 공천에 탈락한 박재홍의원(56·전국구)이 거취를 고민중이다.이밖에 무소속의 한만수 변호사(39),강구휘 전 도의원(52)등이 출진채비를 갖추고 있다. 군출신으로 체육부장관 서울시장 안기부장 등을 역임한 화려한 경력의 박세직의원은 지역이 배출한 인물임을 내세워 혈연을 강조하는 「박정희가 바람」의 차단에 바쁘다. 박 전 대통령의 장조카인 박재홍 의원과 박준홍씨는 사촌형제간.13대 총선때는 민정당과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맞붙어 박의원이 2천여표차로 승리했다.준홍씨는 지난해 경북도지사선거에 출마해 낙선했으나 구미지역에서는 45%나 득표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한때 형인 박의원이 신한국당 공천을 받으면 준홍씨가 양보하겠다는 의견도 오갔으나 박의원의 공천 탈락으로 무산됐다.그러나 준홍씨측은 부인하고 있으나 박의원측에서는 준홍씨가 앞으로 대선의유세단장과 차기 도지사후보를 맡는 쪽으로 후보단일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곧 뚜껑이 열릴 것이라고 전했다.박의원은 후보단일화가 되면 말을 갈아탈 것이며 무산된다면 출마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어쨌든 전처럼 「형제 다툼」은 피하자는 것이 형제간의 합의다. 한 여론조사에서는 신한국당의 박세직,자민련의 박준홍,무소속의 박재홍 구도로 3파전이 벌어지면 신한국당이 유리하고 두사람이 단일화해 힘을 합친다면 예측불허라는 결과도 나와 지역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고 있다.
  • 민속연구가 심우성(이세기의 인물탐구:91)

    ◎남사당패 쫓아 풍물 놀고 탈 만들고…/현장 찾아 자료 채집·기록… “발로공부” 평가 받아/1인극 「쌍두아」는 인형에 혼을 담은 산무대로/「꼭두각시 놀음」·「발탈」 무형문화재 지정에 큰몫 심우성(민속연구가)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삼단같은 머리를 땋아내린 사나이/초립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들이/날라리를 부는 저녁이면/다홍치마를 두루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산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은반지를 사주고 싶은/고운 처녀도 있었건만/다음 날이면 떠남을 짓는/처녀야!/나는 집씨의 피였다./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시인 노천명은 옛유랑 예인집단의 기약없는 인생과 서글픈 족적을 이렇게 노래부르고 있다.몇년전 타계한 예용해씨는 「일수가 좋으면 공청에나 또는 주막집 기역자 판을 끼고 잘때도 있지만 인심이 사나운 마을에서는 처마끝에서 비를 피해야 할 때도 있다」고 남사당패의 일상을 그의 저서에 쓰고 있다. 그러나 누더기에 걸식행각으로 밥을 빌어먹을 망정(걸양) 그들은 「꼭두각시놀음(우희)으로 관중을 웃기고 울리는 소박한 신명에 겨워 살다가」 「어느 낯선 고장에서 길섶 아침이슬처럼」 사라져버린다고 했다. 판소리나 춤이나 연극을 하는 예인들의 대부분은 설날 명절 때 동네에 찾아든 유랑극단이나 광대패의 공연을 구경하다가 그들의 연희에 반해 길을 따라나서거나 부모의 대를 이어받는 수가 흔하다.인형극연희자인 심우성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그러나 그의 예능 기질은 누가 시킨 것도 권한 것도 아니며 집안의 내력을 이어받은 것은 더욱 아니다.단지 그의 마음속에서 끝없이 일고 있던 불가사의한 「끼」에 의해 뒤늦게 연희자로 돌아선 케이스다. ○머슴살던 노인에 영향 그는 언제부턴가 남사당패의 삶을 쫓아 풍물을 놀고 탈과 인형을 만들고 「취발이」나 「미얄할미」나 허세부리는 샌님,미소를 머금은 백정의 탈을 쓴 온갖 인형을 조종하면서 때론 분노로 때론 질타로 어느 때는 주책없고 어느 때는 넉넉하게 인간사의 천태만상을 손끝에서 펼치더니 어느 날 스스로 연희자가 되어 직접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민속연희중에서도 유독 인형극인 꼭두각시 놀음에 심취하게 된 것은 무대장치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무대밖의 공간이 연결되는 극적 공간의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그리고 그의 무대는 혼자서 극중인물이면서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해설자에다 산받이까지 도맡아 양반들의 어처구니 없는 횡포나 위선위귀를 징치하기도 하고 재난을 물리치는 홍동지의 기개를 앞세우는 등 지배층에 대한 세찬 비판을 표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른바 「광대」란 역사속에 놓여진 동시대인들의 희로애락을 세상으로 되돌리는 영혼의 울림대이기를 자처한 사람이며 그는 자신의 역할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충남 공주의 만석지기 외아들로 태어나 서울에서 휘문중에 다니다가 6·25를 만나 고향인 공주군 의당면에 머물면서 김재철의 「조선연극사」를 읽은 것과 집안의 나이든 머슴인 정광진노인으로부터 남사당패들의 내력을 들은 것이 연희자가된 동기다. 한때는 소설가 신문기자가 될뻔도 했고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로 활약하기도 했으나 아나운서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걸핏하면지방 방송국에 출장간다는 핑계로 옛 남사당패를 찾아 나섰고 거의 전국을 떠도는 뜬 광대노릇으로 서서히 잊혀져 가던 풍물놀이(농악)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인형극 꼭두각시놀음)등 남사당놀이 여섯가지를 재현해 내는데 수많은 돈과 시간과 정열을 들여왔다.가족들에겐 의논도 없이 3년만에 방송국을 집어치우고 나서도 「어디어디 답사,무슨무슨 녹음 촬영」등으로 새벽부터 집을 뒤쳐나가는가 하면 여행과 술에 지쳐 며칠씩이나 대낮에도 이불을 펴고 눕는 것이 다반사였다.오죽하면 그의 부인(권숙현여사)이 「올해도 당신 작년처럼 그렇게 지낼거예요」했다는 말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 그는 가뜩이나 쪼들리는 살림에서 부친이 마련한 집을 팔기도 하고 동해안 서해안으로 다니다가 간첩혐의를 받기도 하고 녹음기와 카메라와 어렵사리 찍은 필름을 빼앗기기도 했다.5·16직후에는 종로 YMCA강당서 남사당창단 기념으로 남사당놀이중 「덧뵈기」를 공연하려 했을 때 「남사당」이 정당이름인줄 잘못알고 종로경찰서에 연행되는 웃지못할 에피소드를 빚기도 했다.59년 8월,전국에 흩어져있는 남사당패를 모아 지금의 남산도서관 자리인 빈터에서 요즘의 약장사처럼 「꼭두각시 놀음」을 공연한 것이 본격적인 해설가의 출발이 되었고 그후 전국각지 순회공연으로 「꼭두각시 놀음」과 「발탈」을 공연한 것이 후에 이 놀이들이 중요무형문화재(3호 7호)로 지정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가 「책이 아닌 발로 공부한 사람」이란 평을 듣는 것은 자료수집에 혈안이 되어 현지에서 이를 확인보충하고 채집·기록한 공적과 실제로 수백여회에 이르는 연희를 주관하고 실연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심우성.민속예술에서 괴팍한 개성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드믈다.틀이 번듯하고 아나운서 출신답게 우아한 말씨를 쓰지만 그도 어쩔 수 없이 광대기질을 타고난 사람에 틀림없다.이제 그 시절의 남사당패는 사라지고 없으나 유일하게 그 흔적과 체취를 물씬 풍기는 무대가 있다면 심우성의 1인무언극이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뒤늦게 나마 재혼하는 과부의 설렘으로 무대에 서렵니다』 비장한 인사말과 함께 그가 지난 80년 공간사랑 소극장무대에서 선보인 첫번째 1인극 「쌍두아」는 글자그대로 머리가 둘,손은 넷에다 발이 둘인 전남 구례지방 풍장굿의 비비새놀이에 나오는 접광대를 본뜬 것으로 음악과 인형과 자신의 몸짓만으로 두동강난 조국의 분단된 역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던 그가 이렇게 무대에 나서게 된 것은 「속되고 다난한 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정리하는 전기가 되고 그리고 인형속에 혼을 불어넣는 산무대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며 이는 「연희자가 무대에 나와 인형과 함께 춤춘 최초의 시도」로서 평론가 양혜숙은 「가면극이 인형극으로 거듭나면서 우리 예술사의 흐름을 크게 바꿔놓은 계기다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지난 88년 초연이래 최근까지 공연되고 있는 「남도 들노래」도 「민족적 아픔과 통일에의 염원」을 담아 분단을 넘어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희생된 한 젊은이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민속박물관 5월 개관 「민속이란 고전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원형그대로 보존하라」는 강한 비판도 있었으나 그는 「민중의 습속이 시대따라 변하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민속극도 그 모습이 달라질 수 있고 옛 것을 재현하는 연극이 아니라 옛 것을 바탕으로 오늘의 것을 한다」는 의지다. 그는 지난해 고향인 공주에다 오랜 숙원이던 민속박물관 건립을 시작,각종 탈전시에서 모든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민속과 관련된 자료전시관및 야외공연장을 오는 5월쯤 개관할 예정이다.가족은 노부모와 부부와 아들 하용씨(27·미캘리포니아대 경제학과 졸업)가 그를 돕고 있다. 호라티우스는 일찍이 「인간은 타인의 끄나풀에 조종당하는 인형 같이 움직인다」고 했지만 그의 인형은 「하나의 굳어버린 표정속에서 눈물을 흘릴 때 웃고 있고 웃어야 할 때 울고 있는」 아이러니와 시니시즘의 묘미를 그 때마다 능란하게 연출해낸다.오늘 그의 소원은 「타고난 광대의 운명」속에서 「피가 흐르고 살아숨쉬는 진짜 인형」이 되어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관중을 웃기고 울리는 소박한 신명으로 핍진하게 이룩하려는 것이다. □연보 ▲1934년 충남 공주출생 ▲53년 서울휘문고졸업 ▲53∼56년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 ▲58년 홍익대 신문학과졸업 ▲59년 남사당놀이패공연(남산) ▲60년 남사당놀이중 「덧뵈기(탈놀음)」공연(종로 YMCA강당) ▲64년 민속극회 남사당결성 ▲66년 한국민속극연구소 창설 ▲79년부터 극단 서낭당창단,전통인형극 「꼭두각시놀음」「발탈」「만석중놀이」,창작인형극 「홍동지의 나들이」「신경림의 농무」「청개구리는 왜 날이 궂으면 우는가」「우리산 우리강」외 김명수춤판,강만홍 인도무용,이동안 전통무용,이매방 민속무용,김숙자 무속무용,우옥주 만구대탁굿등 공연 ▲80년 1인극 「쌍두아」로 무대데뷔(공간사랑소극장) ▲83년 우리문화연구소장,인형극 「만석중놀이」(문예회관소극장) ▲85년 「문」(산울림소극장) ▲86년 서강대·한양대강사 ▲90년 인도 국제인형극제에서 1인극 「남도 들노래」 참가 ▲91년 프랑스·말레이시아·일본민속극제 참가 ▲93년 「판문점 별신굿」 공연 ▲94년 제주 4·3항쟁추념 「남도 들노래」및 동학농민혁명 1백주년기념 「새야새야」(문예회관대극장)등 3백여회 공연 현재=우리문화연구소장,민학회회장 「남사당패연구」(74년)이후 「한국의 민속극」「한국의 민속놀이」「전통무용용어의 연구」「마당굿 연희본 1·2」,평론집 「민족문화와 민중의식」「꼭둑각시놀음」등 20여권 서울시문화상(인문사회과학부문·79년)
  • 심슨 유죄인가 무죄인가/「살인혐의」 8개월 공방

    ◎배심원단 내일부터 평결/증인 126명·각종 증거자료물 850건 동원/배심원 흑인 10·백인 1명… 평결불일치 가능성/유죄땐 흑인 폭동·무죄땐 백인 우월주의자 테러 우려 심슨은 무죄인가,유죄인가. 지난 8개월여에 걸쳐 지리할 만큼 오래 끌어온 불세출의 미식축구스타 OJ 심슨의 살인혐의 재판이 끝나가고 있다.「심슨재판」은 지난 1월24일 시작된 이래 92일 동안의 검찰측 증인신문과 74일간에 걸친 변호인측 증인신문을 마치고 최후논고,최종변론도 지난달 29일 마침으로써 배심원단의 평결절차만을 남겨 놓았다.재판개정과 함께 8개월여동안 격리생활을 해왔던 12명의 배심원들은 2일(한국시간 3일 상오1시)부터 하루 8시간예정의 평결작업을 시작,심슨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 랜스 이토판사는 배심원단에 대해 내린 평결지침을 통해 1급이 아닌 2급살인으로도 평결할 수 있음을 전달,심슨의 살인혐의에 대한 정황증거가 어느 정도 인정됨을 시사했다.평결은 만장일치여야 하지만 배심원들 간에 의견이 엇갈리는 헝주리(평결불일치)가 나오면 재판은 무효가 돼 심슨은 풀려난다.이때 검찰측이 처음부터 다시 재판절차를 밟을 수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새로운 배심원단을 구성해야 하는데 지난 20개월동안 심슨사건에 철저히 격리돼 있던 배심원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견해는 헝주리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배심원 12명 가운데 10명이 흑인이며 백인과 히스패닉계가 1명씩이다.지난 8개월 동안 외부와 격리된 채 지내온 배심원단이라고는 하지만 2주일에 한차례씩 허용된 가족면회를 통해 바깥의 여론을 전해 들었기 십상.특히 흑인배심원들은 흑인계층이 압도적으로 심슨의 무죄를 믿고 있다는 분위기에 흔들릴 소지가 크다. 평결작업은 대체로 유죄일 경우는 3일 이내에 결과가 나오지만 길어지면 10일이상 소요될 수도 있다.그러나 이미 장기간의 격리생활로 지칠대로 지친 배심원들이 재판의 빠른 종결을 원하고 있어 늦어도 다음주중에는 심슨의 유죄여부가 가려질 전망이다. 이번 재판은 유명운동선수출신으로서 방송의 스포츠해설가,영화배우 등으로 인기와 명성이 높던 한 흑인스타가 관련된 살인사건이라는 극적인 소재로 인해 지난해 6월중순 사건이 발생한 이래 줄곧 미국인들의 관심의 초점이 돼왔다.1백26명의 증인과 8백50여가지의 각종 증거자료물이 동원되는 한편 가뜩이나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LA카운티가 8백50만달러나 비용을 소모하는 등 갖가지 화제를 낳았다. 백만장자인 심슨이 전재산을 털어 동원한 13명의 변호인단은 치정살인의 가해자가 누구냐는 사건 본래의 초점을 분산시킴으로써 재판의 장기화에 성공,「드림팀」이라는 별칭을 실감케 했다. 가수 마이클 잭슨등 유명인사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는 달변의 흑인율사 조니 코크란이 이끄는 변호인단은 심슨이 흑인의 영웅이란 점을 부각시키면서 검찰측이 제시한 각종 증거물들이 사건을 담당한 한 LA경찰의 인종차별적 관점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끈질기게 펼쳤다. 여검사 마샤 클락이 이끄는 검찰측도 증거가 조작됐다는 변호인단에 맞서 심슨의 알리바이가 허술하다는 점과 DNA분석결과의 과학적 신빙성등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흑인스타와 살해된 백인 전처,흑인 수석변호사와 백인여검사,흑인이 압도적인 배심원단등 묘한 인종구성과 맞물려 심슨재판은 이미 흑백대결의 인종재판으로 변질돼버린 게 사실.이는 사건현장에서 맨먼저 심슨의 피가 묻은 가죽장갑 한짝을 찾아냈다는 전직 LA경찰 마크 퍼먼의 인종차별적 성향이 공개되면서 결정적인 증거물에 대한 신뢰도가 한꺼번에 불신받는 바람에 더 심화됐다. 이와 관련,만일 심슨이 유죄평결을 받을 경우 지난 92년 발생한 로드니 킹 사건 당시처럼 또 한차례 흑인폭동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우려가 LA지역을 긴장시키고 있다.심슨이 무죄가 될 경우에도 백인 우월주의자들에 의한 모종의 테러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어 백악관조차 심슨재판의 후유증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는 실정이다. 심슨재판은 거의 전과정이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됐다. 재판이 열리고 있는 LA카운티 형사법원 건물에는 14대의 중계차가 나와 있고 세계 각국에서 1천1백59명의 기자들이 몰려와 있다. ◎심슨 재판 일지 ◇94년 ▲6월12일=심슨의 전처 니콜 브라운과 그의 애인 로널드 골드먼피살. ▲6월13일=살해된 니콜의 개가 짖는 소리에 이웃 주민들이 그녀의 집 풀장에 있던 시체를 발견해 LA경찰에 신고.심슨 가택 수색영장 발부.시카고에 출장갔다 돌아온 심슨,경찰에 연행돼 조사받고 석방. ▲6월14일=경찰,심슨 집에서 찾아낸 물건들에 대한 혈흔조사 시작. ▲6월17일=심슨,살인혐의 구속. ▲11월3일=12명 배심원 선서. ◇95년 ▲1월11일=배심원 24명 격리. ▲1월24일=랜스 이토판사 주재아래 심슨사건 재판 개정. ▲9월21일=변호인측 68명의 증인신문 종결.심슨,피고인 진술 포기. ▲9월26∼29일=검찰,변호인측 최후논고 및 최후변론. ◎사건현장 혈흔서 심슨 유전자 발견­검찰/살인 증거물들은 경찰에 의해 조작­변호인 □검찰과 변호인측 주장 ◇검찰측 ▲살해동기=전처인 니콜 브라운이 94년 5월22일 심슨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직후 심슨의 애인 폴라 바비에리마저 사전에 말 한마디없이 다른 남자를 만나러 떠나 버리자 두 여자에게 홀대당한 심슨이 질투심과 분노에 사로잡힌 나머지 살인을 저질렀다.우연히 사건현장을 목격한 로널드 골드만의 경우 증인을 없애기 위해 같이 죽였다.93년 5월 심슨이 니콜을 구타,긴급신고전화 911에 녹음된 심슨의 거친 욕설로 미뤄봐도 심슨의 니콜에 대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심슨의 잔혹한 성격부각=두사람을 칼로 찌른 뒤 뛰지도 않고 편안한 걸음걸이로 태연하게 현장에서 떠났다.그는 살해한 니콜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재워두고 그 아이들의 어머니를 난자한 살인자다. ▲알리바이 조작=심슨은 살인을 저지른 직후 홍보사업을 이유로 시카고로 떠났다.공항으로 가는 대절 리무진 안에서 심슨은 덥다며 에어컨을 켜도록 하고 유리창까지 열었으나 기상자료에 따르면 사건 당일 밤은 매우 선선했다. ◇변호인측 ▲증거의 신빙성결여=검찰이 제시한 살인증거물들은 초동수사를 맡은 LA경찰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피묻은 장갑을 맨처음 발견했다는 마크 퍼먼수사관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이다.그 장갑은 심슨의 손에 맞지도 않는다. ▲살해시간 추정=검찰측은 증인들의 신문과정에서 살해시간이 밤10시30분이나 10시35분일수도 있다고 했다.심슨의 집에 묵고 있던 케이토 케일린(연예인)의 증언에 따르면 심슨은 그날밤 외출했다가 10시40분에 돌아와 집안의 에어컨을 켰다.사건현장에서 심슨의 집까지는 차로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긴 하지만 이해가 안된다.피살된 골드먼의 부검결과 반항한 흔적이 나타났는데 어떻게 단숨에 모든 일을 처리하고 돌아올 수 있는가. ▲심슨의 몸=두사람을 공격한 사람의 전신 어디에도 상처 하나가 없다.손에 약간의 상처가 있지만 사건과 무관하다. □유력한 검찰측 증거들 ▲혈흔=사건현장 뒤뜰에서 발견된 핏자국 분석결과 심슨의 유전자가 나타남.심슨은 사건발생 다음날 경찰 조사때 왼손 중지에 상처가 있었음.심슨의 브롱코승용차에서도 혈흔이 발견됨. ▲심슨의 침대밑에서 발견된 검은 색 양말=DNA분석결과 심슨의 피와 살해된 니콜 브라운의 피인 것으로 밝혀짐. ▲피묻은 장갑=심슨의 집에서 찾아낸 한짝의 피묻은 장갑에는 살해된 두사람의 피성분이 분석돼 나옴. ▲검은색 털모자=심슨의 머리카락과 흡사한 성분이 발견됨.살해된골드만의 겉옷 섬유성분도 발견됨.
  • 한국화가 산정 서세옥(이세기의 인물탐구:79)

    ◎스스럼없이 화필 휘젓는 큰 예인/작품마다 영혼이 움직이듯 팽팽한 긴장감/화려한 채색 거부… 발묵·석묵법 자재로이/77년 「한국현대회화 유럽전」때 “동양문화의 진수” 보여 산정의 성북동 무송재는 지금 녹음이 한창이다.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벌써 그 짙푸른 녹색으로 인해 집안은 유현한 산곡과도 같다.안채로 통하는 디딤돌 외에 새파란 이끼가 휘덮인 마당은 모든 것이 푸른 가운데 허공에 우러른 첨단에마저 서슬 푸른 냉기가 감돈다.「일편연홍난입문,한조각의 붉은 빛도 문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산정의 말대로 영롱산관 죽리관 수죽원하관 창하헌 등 그의 당호들은 집안에 넘치는 푸른색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화실 창앞에 쭉쭉 뻗어 있는 청청하고 곧고 차가운 대나무며 지금 막 피기 시작한 보랏빛 추국에 이르기까지 추호의 시든 빛을 보이지 않는 영롱한 환경은 서울 한복판이건만 실로 아득한 선경인 듯 감탄스럽기만하다.여기에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실과 한옥중의 한채에 온통 중국고서적이 산적해 있어 그의 방대한 독서량이 얼마만한것인가를 미루어볼 수 있다. 그는 성북동 전에는 노송으로 우거진 월곡동에 살다가 대학때의 스승인 근원 김용준을 그리워하여 지금부터 20여년전 스승의 노시산방이 있는 이곳에 한옥을 지어 이사했다. ○회화예술 변혁 앞장 산정은 널리 알려지다시피 서시문화를 두루 갖추고 상식에 안주하려는 회화예술에 변혁과 개혁의 화업을 이뤄낸 동양화 대가다.초기에는 범속과 권위와 형식에 대한 강렬한 저항정신을 앞세워 「고루협애가 없는 방종자일한 표현」으로 개혁의지의 향방을 모색하다가 차츰 「감각의 해방을 원점으 로 되돌린 절제화면」을 이룩하면서 남보다 일찍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평론가 이경성씨는 그의 첫번째 전시 팸플릿에서 그와 같은 유사성을 「명대의 서위나 청초의 석도」에 비유하고 오광수 역시 「수묵화를 감필묘법으로 구사한다는 차원에서 남송의 양해나 선화파의 목계의 화격」에 닿아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정병관씨는 「모든 진실한 작품은 침착하다」는 칸딘스키의 말을 인용하여 『산정의 작품은 무한을 생각케 하는활짝 트인 화면공간속에서 「숭고한 형이상학적인 회화」를 구축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과연 그리지 않으면서 그리는 상태,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듯하고 표현하지 않으면서 표현하려는 자기모순을 함축한 그의 작품은 「그 형식과 내용면에서 영혼이 움직이는 듯한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89년 개인전에서 선보인 「군무」「사람들」시리즈는 「붓으로 그렸다기보다는 붓을 던졌다는 표현이 더욱 옳다」는 정병관씨의 평에 많은 사람이 공감한 바 있다.즉 「붓의 전진하는 속도감과 상하로 누르고 떼는 강약의 압력은 낭만적인 금선의 무쌍한 변화」와도 같으며 「발묵과 석묵법의 자재로운 움직임」은 바로 산정 그림의 즉흥성과 필연성이기 때문이다.따라서 산정은 「스스럼없이 필력을 구사할 줄 아는 이 시대 재능이 뛰어난 예인」으로서 「흉중의 고고특절한 품성 없이는 문자향과 서권기를 지니지 못한다」는 추사의 지론을 실천시킨 화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20세때 뒤늦게 입문 그가 화단에 등단한 것은 아직 대학재학중이던 20세였으나 뒤늦게 45세되던 해 서울 첫 개인전을 열 때까지만 해도 그의 그림에는 일정한 채색과 반추상의 형태가 깃들여 있었다.그러나 산정 자신은 「분명히 말해두지만 나는 메마른 구각이나 비좁은 질곡은 싫다」고 천명했고 이후 채색이 없는 검정색의 선묘형상들은 그 기호적인 성격과 힘과 자발성을 채색의 경우보다 한층 강하게 나타내게 되었다. 그는 우리 화단에서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언제나 커다란 구심점을 긋고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오늘날 수많은 미술대전에서 동양화가 구상·비구상으로 나눠지게 된 것도 단순히 이 작가의 작용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화단에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후 산정은 유럽쪽에 눈을 돌려 수많은 해외전에서 한국회화의 독자성을 인정받았다.그중 77년 9개월에 걸친 「한국 현대회화 유럽전」에서는 현지 신문들이 「서세옥의 추상적인 묵화들은 동양화라 일컬어지는 한국 전통미술의 현대적 전모를 집약함으로써 서양인에게 동양문화의 진미를 보여주었다」(르피가로 78년6월28일자)고 쓰기도했다. ○올 11월 개인전 열어 그는 어릴 때부터 수많은 고서화가 있는 집안환경에서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며 자라났다.독립운동을 하던 부친 서장환(석련)공은 세 아들중 일총한 산정을 특히 총애하여 「성동」이란 아호를 내려주었으나 대학시절 영운(김용진) 춘곡(고희동) 소전(소전 손재형)등 그의 스승들이 「세옥」의 옥자와 관련된 「옥출곤강(금과 옥돌은 산에서 캔다)」이란 의미의 「산정」을 지어주었다. 지난해 서울대 정년퇴임후 산정은 무송재 녹음속에 파묻혀 그의 전생애가 그렇게 일관해왔듯이 자유하는 예술가로서의 절제와 생략과 탈속의 묘를 구체화하는 시기일 것이다. 그의 테마는 여전히 인간에 집착한다.세월도 서릿발 같은 그의 의지를 피해가는지 언제나 만년청년 같은 그는 「적진에 뛰어들어 호랑이나 사자를 사로잡듯」 우주의 올바른 기운을 수백호 화면속에 역동적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요즘은 오는 11월로 잡힌 개인전과 그가 발족한 한·중미술협회의 요청으로 그동안 써온 한시를 친필서예로 꾸미는 「산정문집」 출간준비에여념이 없다.그중 연전에 중국 양자강을 둘러보며 지었다는 「단현」이 눈에 띈다. 「비지양현회 농현감금심 고산류수곡 적막실지음 석현호불기 천재거무회 수주아양곡 공류일금대(이땅의 두 현인이 만나 거문고로 서로 마음을 느끼니 이는 고산곡과 유수곡이라,지음이 없으니 적막하구나.옛 현인 불러도 일어나지 않고 천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누가 고산 유수곡을 연주할 것인가,속절없이 거문고 튕기던 언덕만 남았구나)」이는 중국 춘추시대의 거문고 명인이던 백아가 그의 거문고소리를 좋아하던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현을 끊어버린 일화를 그린 시로 그들이 거문고를 타던 양자강가에 서자 이런 시를 읊게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3∼4년전까지만해도 송죽 우거진 뜰에서 산정은 가까운 이들을 모아 거문고며 가야금연주를 즐기곤 했다.그러나 명고수 김명환씨가 4년전 작고하고 단골손님이던 언론인 예용해씨마저 지난해 타계하자 화가는 혼자 남아 그때의 감흥을 한편의 시와 한점 획(화)으로 남기게 됐나보다. 이제 산정댁의 대나무가 그 놀라운 푸른빛을 뻗치고 소나무향이 온산을 뒤덮어도 이 풍치를 음미할 만한 유장한 현금은 울려지지 않는다.단지 우거진 나뭇닢이 단 한 잎도 시든 기색 없이 싱싱한 생명력을 지니는 것처럼 시들 줄 모르는 산정의 붓끝은 그 탁발한 금선의 선율로 「청청속의 노주」를 결국 성취하게 될 것이다. □연보 ▲19 29년 대구생 ▲49년 제1회 국전서 「꽃장수」로 국무총리상 수상 ▲50년 서울대 미대 졸업 ▲54년 제3회 국전서 「휘월의 장」으로 문교부장관상 수상 ▲54∼95년 서울대 미대 교수 ▲59년 묵림회 창립대표위원 ▲61∼82년 국전 심사위원·운영위원 ▲62년이후 상파울루비엔날레 칸국제회화제 이탈리아회화제 인도트리엔날레 도쿄비엔날레 파리현대미전 등 출품 ▲64년 국제조형예술(IAA) 한국위원회위원장,신인예술상 심사위원장 ▲64∼88년 한국미협이사장·회장 ▲66∼71년 유럽·남북미 34개국 여행,한국현대미술 프랑스순회전 ▲70년 국전 초대작가상,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73년 예총부회장 ▲74년 서세옥전(현대화랑초대전) ▲77∼78년 한국현대 동양화유럽순회전,스웨덴 폴란드 독일 프랑스 ▲79년 서세옥전(도쿄 우에다화랑 초대) ▲82∼85년 서울대 미대학장 ▲83년 서세옥전(뉴욕 퍼시픽아시아박물관초대),전국미대협의회회장 ▲85년 서세옥특별전(뉴욕 바로카레지미술관 초대) ▲89년 서세옥전(현대화랑 초대),뤼턴오브 마르코폴로전(프랑스 파리) ▲90년 한국작가전(중국 북경),한·중미술협회 결성 ▲91년 한·중미술대전(중국 북경)이후 서울·남경·상해 등지서 교류전시 그외 한국회화대전및 아세아현대미술전 한국미술상황전 LA87미술전 조선일보미술관개관기념 현대작가초대전 서울올림픽아트 국제현대미술전 등 다수 출품,국민훈장석류장 서울시문화상 한·중미술협회회장,미협고문
  • 창무극 1인자 공옥진(이세기의 인물탐구:76)

    ◎고독을 춤추는 이시대 마지막 광대/타고난 끼와 파격의 몸짓으로 한맺힌 삶 표현/헤살궂은 사설조에 마음을 움직이는 정감이…/부친에게 창배워 유랑극단에… 장애인 동생 조카위해 국수장사도 전라도 광주땅에서 공옥진예인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공옥진」 이름을 대면 「함평군 문장을 지나 40㎞쯤 들어간 영광에 가보라」고 일러준다.영광읍 교촌리 영광예술연구소에 들어서자 그는 찾아간 사람을 얼싸안고 눈물부터 글썽인다.눈물 많고 한 많고 정많은 모습은 예전이나 변함 없다.연구소 마루는 널찍한 20여평인데 비해 뒤꼍에 위치한 살림방은 사람이 둘만 앉아도 비좁은 골방에 불과했다.전국 방방곡곡 이름을 떨치지 않은데가 없건만 그의 생활은 여전히 궁핍을 면치 못하는 분위기다.그러나 자신이 직접 캐온 불갑사 산나물이며 법성포 바닷가에서 주워온 바지락으로 상을 차리면서도 지난해 피땀으로 절약한 1천만원을 중고생 장학금으로 내놓아 주변을 훈훈하게 했다는 얘기다.가난과 한과 고독이 점철된 그의 지나온 생애에 비춰 그는 한푼이라도 돈이생기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지금도 의탁할곳 없는 동네 노인들을 집에 데려다 함께 밥을 지어먹기도 하고 산에 가서 고사리를 캐기도 한다. ○생활은 여전히 궁핍 지금부터 17년전 중앙대 교수이자 무용평론가인 정병호씨가 「참으로 이 시대 그대로 지나쳐선 안되는 예사롭지 않은 예인」이 있다면서 서울 종로구 청진동에 데려간적이 있었다.그때 공옥진은 하얀 옥양목 치마 저고리차림의 평범한 시골 아낙에 지나지 않았으나 창과 춤뿐 아니라 일인다역으로 「흥보가」「심청가」를 혼자서 몇시간이든 두루 꿰어나간다고 했다.막상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가 「심청이 팔려가는 대목」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 번뜩이는 예살이 범상치가 않았다.「서리서리 한맺힌 구성진 가락은 한여름철 장대비와도 같고 헤살궂은 사설조마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감」이 담겨있었다.용궁막 황성 맹인잔치대목에 이르러 저고리 뒷섶을 활짝 뒤로 젖히더니 목속에 턱을 깊숙이 파묻고 눈을 사팔로 만들고는 엉거주춤 허리춤을 부여잡고 뒤뚱뒤뚱 휘돌아나갔다.엉덩이 빠진곱사춤,절름발이 곰배팔이 오리발 병신춤을 눈부시게 펼치는 가운데 인물치레 성음치레를 무시한 자재로운 몸짓은 도무지 몸을 사리거나 풍색을 개의치도 않았다.솔직하고 천연덕스러운 그의 춤은 얼핏 보기엔 즉흥적인 신명같지만 하나의 익살스러운 동작에는 반드시 그 시작과 끝을 알리는 회무가 따르고 있었다.경륜 있는 예인으로서의 여유와 능수능란이었다. 그의 성공에 대해 민속학자 심우성씨(문화재 전문위원)의 「고격의 예술에 식상한 관객들이 섬세한 아름다움이기를 거부한 그의 진솔한 인간적 표현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인 탓」이라는 평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샀다.이후 국악관련 책자나 프로그램에서 그는 「우리나라에 예술가가 있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공옥진을 꼽겠다」고 당당하게 밝혔고 「공옥진의 타고난 「끼」,철저한 광대기질,총명과 명석은 가히 천재적인 것으로 그는 한번만 힐끗 보고도 상대방의 모든 동작과 표정을 날카롭게 읽어낸다」고 찬사해 마지않았다. 예술사 연구를 하는 김철순은 『일찍이 이동백옹이 이혜구씨에게 말한 것처럼 판소리 뿐 아니라 모든 한국예술의 본질은 기존의 법칙과 양식,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류의 새로운 음악과 춤으로 자연스럽게 창조해내는 것」이라야 한다면 그가 바로 공옥진』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공옥진의 춤은 춤사위로 이어진 정제된 춤이 아닌 고통스런 삶의 한풀이이자 아무도 흉내낼수 없는 진짜 고유의 조선춤」으로 호평했고 무언극공연차 한국에 왔던 마르셀 마르소도 「나는 무언극을 하지만 공옥진의 일련의 움직임은 그것이 단순한 움직임이 아닌 독특한 파격의 예술」임을 거듭 강조한바 있다. ○한때 입산… 비구니로 공옥진의 광기랄가,신기랄가.그의 천부적 재질은 연습과 훈련으로 이루어진 격식을 갖춘 전통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사람을 사로잡는 힘과 정과 한이 일체감을 이루면서 「고통과 슬픔이라는 껍질을 과감하게 깬 살아 있는 몸짓」은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만의 독특한 창무극을 무대에 정착시켰고 그는 일약 중앙무대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7살때 단돈 천원에 일본에 팔려간 적이 있어요.당대 제일의 무용가인 도쿄의 최승희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다시 일본인집에 넘겨졌지요.5년만에 집에 돌아와보니 아버지는 방랑길을 떠났고 어머니 마저 개가해버려 동생들과 먹고 살기 위해 그때부터 장터에서 춤을 추고 창을 하게 됐답니다』 하얀 옥양목 치마끝에 찍어낸 눈물은 그의 말을 빌리면 「눈물이 고여 바다」가 됐을 정도다.그만큼 그의 지난 세월은 어느 대목을 들어도 고초와 한숨이며 통곡의 파노라마다.그런중에도 국내 구석구석 전국의 대학 캠퍼스에 초대되어 젊은이들에게 「어머니」라 불렸고 미 카네기홀 링컨센터 대공연을 갖는가 하면 일본의 저명한 사진작가 세키네는 그의 공연사진과 데생으로 도쿄 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옥진은 전남 승주군 송광면 추동리에서 태어났다.남도 인간문화재인 공대일 명창의 4남매중 둘째딸,그의 조부는 광주의 김채만을 사사,서울 협률사 초기멤버이던 공창식 명창이다.그는 일찍이 부친에게 창을 배운후 유랑극단의 소녀주역으로 활약하다가 두번의 결혼 실패끝에 한때는 지리산 천은사에 입산하여 「수진」스님으로 참선,중년에 접어들어 농아인 남동생과 곱사등이인 조카딸을 돌보기 위해 광주 지산면에서 국수장사를 했고 그곳에 공연을 왔던 김연수씨를 만나 우리국악단에 몸담으면서 다시 유랑생활에 나섰다. 파란만장하고 우여곡절로 얼룩진 그의 인생사는 그동안 여러잡지 신문 등에 소개된바 있지만 그 어느것도 그가 돗자리 하나만으로 장바닥에서 펼치는 통한의 눈물과 익살과 한숨에 미치지 못한다.또한 그의 「살풀이춤」은 장탄식과 짙푸른 한의 음영이 깃든 명무지만 「살다보니 어찌어찌하다 희극무인 병신춤 동물춤의 일인자」처럼 되었고 한때는 장애자들로부터 「무엇 할짓이 없어 장애인 흉내로 무대에 서느냐」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그때마다 그는 곱사춤은 옛날부터 각 지방에서 내려오던 사당패들의 자리판 놀음이며 더구나 그 자신이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과 내손으로 키운 조카아이까지 장애인의 가족으로서,살아있는 여러 삶의 절박한 표현은 춤일수 밖에 없음」을 그때마다 상기시키지 않으면안되었다. ○84년 서울생활 청산 그는 지난 84년 6년여의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노부를 모시고자 그가 자라난 영광읍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동생과 조카를 앞세웠고 부친마저 90년 세상을 떠난후 지금은 예술연구소에 남아 고향의 「아기」들에게 그의 춤을 전수시키고자 만모의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요즘은 수년전부터 앓아온 담석증을 세번째 수술하고 아직 건강치 못한 몸이지만 산에 가서 즉흥무를 추거나 산야에 대고 「제비 노정기」를 내지르면 「없던 힘과 신명이 절로 솟아」 아프던 몸이 거뜬히 낫는다고 말한다.지난봄부터 여수 영암공연,크고 작은 경로 효도잔치에 빠지지 않았고 7월에는 광주에 새로 생긴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공연을 앞두고 있다. 공옥진은 참으로 한이 많은 예술가다.그리고 그의 춤과 소리를 격조와 품위로 논하기란 어렵다.그러나 무대에 서면 진흙탕에 뒹굴듯 몸을 사리지 않고 인간의 「절대고독」을 춤추는 모습은 「아름다움의 극치 그 이상」이라는 한 평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누군가 말한대로 「광대가 될때만가장 인간적」이라고 한다면 꾸미지 않은 옛광대의 기질과 체취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옥진이야말로 이 시대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광대라는 예감이다. □연보 ▲1931년 전남 승주 출생 ▲38∼43년 일본 체류 ▲45∼47년 조선창극단 ▲48년 고창·정읍 명창대회1등 ▲57∼63년 임방울창극단 협률사 입단 ▲61∼63년 김연수 우리국악단 ▲64∼66년 김원술안성국악단 ▲66∼67년 박녹주국극협회 ▲67·68년 일본공연 ▲78년 공간사랑 1인창무극 ▲81년 미 케네디센터 「한국전통무용」공연,전남 영광읍장터 「공옥진놀이판」 ▲84년 일본 공연,서울 결산무대 「공옥진춤판­그의 모든 것」(문예회관대극장),동숭동 마로니에 공원서 「마당놀이 춤판」,낙향 광주서 부친 공대일명창과 「아버지와 춤을」 대공연 ▲85년 런던 국제 연극제 참가 ▲91년 1인창무극(호암아트홀) ▲92년 불우한 소년소녀가장돕기 서울공연(세종문화회관)을 필두로 인천 성남 수원 구미 대구 천안 평택 충주 제주등 15개도시 순회공연 ▲93년 뉴욕(링컨센터) 시카고 LA 하와이 중국 런던 일본등 세계순회 및 부산(KBS홀)공연,「한국의 소리와 몸짓」시리즈(예술의 전당),1인 창무극(미도파 메트로홀) ▲94년 1인창무극 「학녀의 한의 춤」(세종문화회관),그외 전국 50여 대학 초청 「공옥진 한의 춤」공연등 경로위로 잔치 수백여회 ▲95년 여수(진남체육관) 및 영암 정읍 공연,7월9일 광주 예술의 전당 개관기념공연 예정 전남 영광예술연구소 대표
  • 서울 빅3 동향(“열전” 6·27선거)

    ◎역·중심가·시장 돌며 “한표 호소” 강행군/난지도 거쳐 2곳서 잇따라 거리연설­정원식/명동·신림동서 유세… 상오엔 화랑 방문­조순/막힌 다리앞서 출근시민에 “지지” 부탁­박찬종 서울시장선거후보 가운데 「빅3」인 민자당의 정원식,민주당의 조순,무소속의 박찬종 후보는 12일 정당 또는 개인연설회를 갖고 각종 공약을 제시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등 본격적인 유세대결을 벌였다. ▷정원식 후보◁ ○…이날 상오 난지도를 방문,서울의 쓰레기실태를 파악한 뒤 마포구 서교동의 철도부지에서 처음으로 정당연설회를 가진 데 이어 지하철로 청량리역으로 옮겨 두번째 정당연설회를 가졌다. 정 후보는 1천여평의 철도부지와 청량리역전을 가득 채운 유권자를 대상으로 연설을 시작하자마자 서울시가 안고 있는 교통·오염·안전·주택문제 등을 거론하며 『지금까지 중앙정부와 서울시는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려는 성의는 물론 의지도 없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정 후보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중앙정부와 씨름을 벌여 돈을 따와야 하고 민자도 과감하게 유치해야 한다』며 이번 선거에 출마한 후보중 이러한 능력을 가진 후보는 자신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유순한 이미지를 지적하는 일부의 시각을 의식한 듯 『민선시장은 과거 상부의 눈치만 살피던 임명직시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중앙정부와 사안에 따라 협조하기도 하고 씨름도 하겠다』고 약속했다. 정 후보는 『과거에는 시행정을 몇몇이 밀실에서 결정함으로써 시민의 안위는 도외시되는 일이 허다했다』고 지적하고 자신은 시민의 중지를 모으고 시민을 시정에 참여시키는 「열린 행정」을 펼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정 후보가 입장하거나 퇴장할 때,또 연설 중간중간에 청년당원들은 「정원식」을 연호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또 정 후보의 연설이 시작되기에 앞서 탤런트 출신인 최영한 의원과 코미디언 황기순·김미화씨,탤런트 김용건씨가 찬조연사로 나서 정후보의 지지를 호소했다. 정 후보는 상대후보에 대한 비방을 극력 자제했으나 마포유세에서 이 지역출신 박명환 의원은 『허구헌날 집안식구끼리 싸움을 벌이는 후보,독불장군인 후보에게는 시정을 맡길 수 없다』고 민주당의 조순,무소속의 박찬종 후보를 겨냥했다. 박명환 의원은 박 후보를 빚대어 『말단공무원이 되는 데도 보증이 필요한데 빚이 7조원이나 되는 모후보에게는 보증을 서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며 『그러나 정 후보는 대통령부터 2백만명의 당원이 보증한다』며 차별성을 강조했다. 이날 정당연설회는 평일인 탓인지 연설회장은 대부분 중장년층의 여성유권자로 메워졌다. ▷조순 후보◁ ○…이날 하오 명동 상업은행앞과 관악구 신림극장앞에서 후보등록후 첫 유세를 갖고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낮 12시50분 명동에서 가진 연설회에서 조순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해 무능하고 오만한 집권층에게 각성을 촉구하겠다』며 5백여명의 청중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조 후보는 『현정부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방선거를 연기하려 한 집단』이라며 강력히 비난한 뒤 정부의 실정을 열거해가며 『이번 선거를 현정부 2년반에 대한 중간결산으로 삼자』고 촉구했다.이날 명동유세에는 조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인 정대철 고문과 이부영 부총재·이철 의원등이 찬조연사로 나서 청중에게 지지를 호소했으며 탤런트 정한용씨와 번효정씨등이 동행해 눈길을 모았다. 이어 서울시 각 구청장후보 20여명이 대거참석한 가운데 하오3시30분 신림동 신림극장앞에서 가진 정당연설회에서 조 후보는 『야당이 승리하지 못하면 역사는 20년 퇴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린유세」로 이름붙인 조 후보의 이날 유세에는 대학생등 5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나서서 행사장주변의 휴지를 줍는 등 「깨끗한 후보」의 모습을 부각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앞서 조 후보는 이날 상오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현대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화가 박수근 작품전시회에 참석한 뒤 인사동을 방문,경인미술관에 들러 「치원여민」이라는 휘호를 직접 붓으로 써 보였다. ▷박찬종 후보◁ ○…이날 상오7시50분부터 1시간동안 한강대교 남단에서 출근하는 시민을 상대로 「다리유세」를 벌였다.박 후보는 앞으로도 매일 아침 시내 주요교량에서교통체증을 체험하며 이를 해결해줄 「실무시장」후보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킬 계획이다. 박 후보는 이날 정체돼 있는 일부 차량이 경적을 울리거나 일부 운전자가 손을 흔들어 격려하자 『교통체증 덕을 볼 때도 있다』고 농담을 한 뒤 『내가 시장이 되면 막힌 서울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시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노량진수산시장을 돌며 상인들과 악수를 나눈 뒤 의자를 받쳐 만든 즉석연단에 올라 핸드 마이크로 「반짝유세」를 폈다.박 후보는 『시민의 눈치만 보는 청지기시장이 되겠다』면서 상인들의 출신지역분포를 의식한 듯 『지역을 떠나 우리가 사는 서울을 고향으로 느끼도록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낮 12시쯤 여의도백화점앞에서 개인연설회를 가진 박 후보는 점심식사를 끝내고 모여든 넥타이차림의 샐러리맨들을 상대로 『여러분이야말로 정치권에서 독불장군으로 질시를 받아온 이 사람을 이 자리에 세워준 주인공』이라고 젊은층과의 일체감을 강조했다.1억원의 비용을 들여 임대한 멀티큐브차량에서 울리는 효과음악과 함께 연예인자원봉사단으로 구성된 「박찬종 도우미」 10여명이 명함형 소형인쇄물을 나눠주며 박 후보를 거들었다. 박 후보는 이어 영등포 연흥극장과 영등포시장·노량진역등으로 옮겨가며 유세를 계속했다.한편 박 후보의 부인 정기호 여사는 이날 노원·상계역등 전철역등을 따로 돌며 지지를 호소한 것을 비롯,앞으로도 지하철·시장등지에서 민자·민주당의 대규모유세와 대비되는 「맨투맨식」유세의 역할을 분담하기로 했다.
  • 농악무으뜸… 아박무·접시춤 등 창작(연변조선족 1백년:14)

    ◎오늘의 삶에서 억척의 생명력을 다시본다/민속춤/사회주의 영향 마당놀이서 무대예술로 변모 중국조선족의 예술활동을 조감해 보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로 가치있는 일이다.특히 해방전의 이주민들이 펼쳐온 놀이마당을 전통과 변화라는 시각에서 검토하는 것은 한국 전통예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주 1백년을 회고해 볼 때 중국조선족의 예술활동은 조국보다 훨씬 복잡한 변화의 과정을 밟았다.우선 해방후 중국 조선족은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족」이란 위상확립을 위해 몸부림을 쳤고 문화혁명시기에는 갖은 탄압을 받아가며 예술활동의 위축을 겪어야 했다.그리고 북한의 끈질긴 교화를 받으면서 지내오다 최근에는 한국의 영향으로 예술활동의 변화라는 파도를 타야만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에 근거를 둔 전통예술성은 굴절하지 않고 맥을 이었다.특히 이주로부터 해방까지의 예술활동 중에서 춤과 노래를 조명해 보면 조선족의 의식이 가장 잘 표출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신촌마을 농악대 유명 이 시기에 연희되었던 민속춤으로는 승무·농악무·남무·한량무·살풀이·강강술래 등이 있다.이밖에 「아박무」가 있다.구전에 의하면 「아박무」는 1923년 봄,안도현 송강 송화의 한 골짜기에서 발생했다고 한다.그러나 조국으로부터 그대로 옮겨 온 전통춤 중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농악이 으뜸이다.가장 먼저 농악대가 구성되어 연희된 곳은 1928년 왕청현의 어느 마을이라고 하나 규모있고 영향력을 가진 농악대로서는 1938년 길림성 안도현의 신촌마을이다. 경남의 이주민 1백여가구가 1938년 이곳에 자리 잡았다.그들이 올 때 꽹과리·징·장구·북·소고 등 농악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도구를 휴대해 왔다.그들은 낮에는 밭을 일구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농악을 울리며 피로를 풀고 망국의 설움을 달랬다.그후 1941년 남사당패에서 농악을 추었다는 광대 이원보씨를 전라도로부터 모셔와 본격적으로 연수를 받았다.이리하여 20명 내외로 구성된 신촌농악대는 마을 마당놀이(지신밟기)·두레굿·집돌이농악의 수준을 넘어서서 무대에로 진출하기에 이르렀다.이에 자극을 받은 농민들은 자신의 마을농악대를 조직하려는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민속춤 중에서는 「쾌지나 칭칭나네」가 가장 많이 추어졌다.특히 정월보름날 줄다리기에 나가기 위한 선행놀이로서 이 춤을 추었다고 하는데 사기를 진작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해방전 동북 3성의 조선족 마을에서 주로 재인들에 의해 추어진 민속춤으로는 승무·탈춤·칼춤·학춤·사자춤·수박춤·양산도 등을 들 수 있다.물론 이것들은 전문 광대들에 의해 무대에서 추어진 것들이 태반이다. ○항일투쟁 춤도 등장 이금덕(1922·전남태생)은 이리 권번에서 노래·기악·춤을 익히고 40년대에 이주하여 「양산도춤」과 「수건춤」을 보급시켰다.김선덕은 14세 때 평양권번에 들어가 음악과 무용을 익히고 이주후 「칼춤」과 「남무」를,김재산(1890·강원도출생)은 1914년 길림성 안도현으로 이주하여 「학춤」과 「거북춤」을 퍼뜨렸다.조정숙(1928·평양출생)은 8세부터 기예를 배워 활동하다가 해방후 이주하여 「승무」 「한산춤」 「봉산탈춤」등을 추었다.이밖에 박정록과 김학천 같은 예인이 있다. 특히김학천의 「수박춤」은 유명하다.김씨네 집안에서 5백년이나 전승된 춤이라고 한다.알몸으로 허리엔 짐승가죽을 두르고 맨발로 추는 이 춤은 악기라고는 물을 담은 큰 함지안에 작은 함지박을 엎은 것인데,이를 두드리는 정도이다.이 두닥거리는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연희자가 두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 손으로 자기 몸을 치면서 추는 춤이다.도중 갖가지 새소리와 짐승소리를 낸다.사냥꾼의 모의춤이라 할 수 있는 이 춤의 끝은 맹수를 정복한 사냥꾼의 희열로 끝난다. 박정록이 전수시킨 「접시춤」은 30년대부터 훈춘지방에서 추어진 것인데 이 지역에서 자생된 춤으로 알려졌다. 해방전의 중국조선족의 춤을 말하면서 항일투쟁배경에서 자생한 몇가지 춤들을 빠뜨릴 수 없다.항일 전투가 지속되는 긴박감 속에서 여성대원들이 군복을 누벼나가는 모습을 극화시킨 여성군무인 「재봉대원의 춤」을 비롯해서 「기병대 춤」「무장춤」등이 1930년대부터 항일투쟁 집단에서 연희 되었었다. 그 유명한 무용가 최승희도 중국에서 무용활동을 했다.그로인해 조선족의콧대를 한층 높여준 결과가 되었을 뿐 아니라 춤의 예술적 경지를 한층 높이는데도 몫을 했다.최승희 편력을 살필 여유는 없지만 그녀는 1912년 서울 태생으로 14세 때 도일하여 혀대무용과 발레를 배운 세계적 무용수이다.1930년 조선경성공회당에서 처음 귀국공연을 시작으로 그의 명성은 일약 아시아로부터 유럽·미국으로 번지기 시작했다.최승희가 중국에서 활동을 개시한 것은 1940년부터이다.당시 조선족이 10만여명이 살고 있었던 흑룡강성 목단강시에서 최승희가 공연을 했다. ○최승희 무용 큰 호평 최승희의 창작춤들은 한국전통의 춤사위를 되살려 새로운 감각과 창조성을 가미시킨 것으로 크게 호평을 받았다.당시 중국 경극계에서는 『노래를 위주로 했던 재래의 경극은 최승희무용의 영향을 받아 끝내는 변혁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마당놀이에서 출발한 농악이 섬세한 기예의 독창성을 살려 무대 「농악무」가 되었고 따라서 민속춤의 대부분이 무대극으로 공연되기에 이르렀다.이를테면 「탈춤」과 같은 여러 춤들이 무대에오르게 되자,마당놀이로서의 민속춤은 차차 위축되어 「쾌지나 칭칭나네」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사회주의가 민중의 소박한 놀이를 무대예술로 자리바꿈 시켰다는 사실은 오늘의 중국 조선족 예술활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 남정 박노수(이세기의 인물탐구:63)

    ◎세속과 거리먼 대쪽기상… 한국화의 대가/노송­여인의 머리결등 한국적 비감의 정서 관조/여백­색채 절묘한 조화… 관념­실경산수 넘나들어/내년 열번째 개인전 계획… 신품의 경지 기대 남정 박노수의 간원화실은 어느 듯 스산한 초동이다. 종로구 부암동에 자리잡고 있으나 인왕산자락에 파묻혀 마치 심산유곡인 듯 산새소리 바람소리만이 유랑한다.대문에서 작업실에 이르는 긴 길목은 가으내 진 낙엽이 산처럼 쌓여있고 화사의 화숙다운 청한한 적요가 사방에 깃들 뿐이다. 봄이면 진달래 철쭉이 지천을 이루고 여름은 울창한 수목,나목한천의 백색겨울등 간원에 머무르는 사계절의 변화는 눈에 닿는 풍경마다 살아있는 명화가 아닐수 없다.간원은 그의 옥인동집에서 보면 동북방에 위치한 동산이란 뜻이다. 남정은 아침 9시반에 집에서 나와 주로 이곳에서 그림을 그린다. 하루종일 별반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따로 시중을 드는 이도 없다.쉬고 싶으면 혼자서 마당에 나가 물을 뿌리거나 수석을 돌본다. 남정의 화실은 처음은 원효로에 있었고 70년대 후반에 비원앞 가든타워, 그후 사직동의 한 아파트로 옮겼다가 이곳에 정착했다.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는 세속과 도무지 화통하는 법없이 그림에만 전념하는 화가다.대쪽같고 겨울강처럼 차가운 성격은 아무하고나 쉽게 만나지도 않을뿐더러 만나더라도 무슨 이야기든지 부담없이 나눌수 있는 친밀감을 주지도 않는다. 본인은 그런 소리가 나오면 수원시화중의 한구절을 들어 「가슴속이 탁 터지고 온화한 품격을 가진 이면 일자불식이라도 참 시인일것이요, 성미가 빽빽하고 속취가 분분한 자라면 비록 종일 글을 깨물거나 글씨를 씹고(교문작자) 쓸데없이 문장이 장황해도(연편누독) 시인이 될수없다」고 한것처럼 만약 소방하지 않다면 어찌 좋은 화가일수 있느냐고 반문한다.그러나 논리는 정연하고 음성은 따뜻할지라도 차고 냉정할 때가 오히려 그답다고 할 수 있다.그만큼 원칙을 중히 여기고 순리적인 흐름을 수용하는 주의다. ○목선이 긴 비마등 이채 옛선비의 의지가 몸에 밴 그의 기상은 지금도 내일모레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짐작되지 않는다.그림의 격에 대한 식을줄 모르는 정열과 큰 그림을 그릴 때의 현완직)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아 보는 이로 하여금 범접 할 수 없는 위엄을 준다.그의 성격의 일면은 60년대 중반 일본 중국화풍을 모방한 국적불명의 그림들이 쏟아져나오자 이를 한심하게 여긴 나머지 한 신문에 기고한 글만으로도 알수 있다.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의 나라에서 시도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이를 모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망국족자 상선자망기문화」,즉 「나라와 민족을 망치는 자는 언제나 먼저 스스로 그 문화를 망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이는 화단의 경각심을 촉구하여 지식있는 많은 층의 호응을 받았었다. 그림도 그렇다.누구라도 그의 그림을 보면 그것이 남정화인줄을 한눈에 알아본다.한국적인 노송과 강안의 야트막한 산들,청결하게 빗어넘긴 여인의 머릿결과 잔잔히 치켜올라간 눈매,소년의 외로운 등모습과 목선이 긴 비마는 한국적인 비감의 정서를 무위로 관조하고 있다. 돛단배의 돛과 선비의 취월창의,멀리 지나는 여인의 치맛자락을 바탕색인 군청 비취록과는 달리 호박색이나 산호색으로 점을 찍어 청색 비단보에 싸인 별빛같은 효과를 내는 것도 그만의 채색기교라 할수 있다. 그의 색조는 초기에는 물기가 마르기전에 발묵 채색하는 선염법을 쓰다가 피카소에 심취했던 젊은 시절을 되살려 검푸른 청남과 여명으로 영롱한 운기를 살려낸다.이른바 오채가 깃든 먹과 쪽빛 섞인 청화색은 광활한 하늘로 배분하고 준열한 한 획의 선은 산의 기개로 과시된다.이때 강을 사이에 둔 언덕은 부세의 영욕을 적멸한 피안이며 인물들의 표정에는 상락이 깃들여 정중동의 관념산수와 동중정의 실경산수의 요소를 자연스럽게 함축시키고 있다. 「여기에 무한감을 수반하지 못하면 살아있는 그림이 될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는 화면에다 우주로 통하는 공간을 설정하고 먹과 선으로 공간을 공략하여 여백과 색채가 어울린 기운생동을 성취해낸 것이다. ○28세때 대통령상 받아 이런 측면으로 추적한다면 그림속의 주인공들은 그의 소년시절의 시심을 간직한 것처럼도 보인다.혹은 언덕에 기대어 앉거나혹은 범주에 몸을 실은채 먼 강산을 우러른 소년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그 시선은 어디에 두고 있는가. 그는 충남 연기의 한학자(부친 박상래)집안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외조모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부친에게 붓글씨를 익히는 어린시절을 보냈다.청주상고에 다닐 때는 문학지망을 꿈꾸기도 했으나 부친은 그림 그리는 것을 말리진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사직동에 있는 청전 화실에 드나들면서 초기엔 인물화를 그렸고 서울대 미대에 입학하자 「근원수필」로 유명한 김용준과 심산 노수현 월전 장우성을 사사, 일찍이 청전은 고귀한 품성을 지닌 이 미소년의 범상치 않은 재질을 보고 이미 「일총한 화가탄생」을 주변에 일러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학재학 시절에는 그림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 상명여고 동흥중 성동고등에 시간강사로 출강,당시 상명여고 교감으로 있던 문학평론가 곽종원씨가 전임을 맡기려하자 그림 그리는 시간을 빼앗기게 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는 강직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 시기엔 학교 숙직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서책들을 난독하면서 인생에 대한 무상에 빠져 술로 밤을 지새는 경우가 많았다.가슴속에 이유 모를 비감이 가시지 않아 그림의 소재도 유랑극단의 곡예사나 피리불며 정처없이 떠도는 소년의 방황에 그쳤다.그러다가 인생을 극도로 비관하는 염세주의와 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한 폐인이 되고 말리라는 자책끝에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고 다시 화폭과 대좌했다. 28세때 제4회 국전에서 「선소운」이란 인물화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비로소 독자적인 채색과 여백의 미를 화면에 전개해 나갈수 있었다. 지금도 그는 골프나 바둑이나 술과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그림에 방해가 되는 일은 일체를 삼간다.그의 취미는 일요일 등산하는 것과 난과 수석뿐이다.난은 섬세하고 유연한 동양화의 선을 감춘데다가 순수한 향기로 정신을 수려하게 정화시킨다는 차원에서 각별한 애정을 지니는 듯 하다. 그외 그의 일상생활은 비교적 단조로운 편이다.국전 대통령상 수상기념으로 그에게 남정이란 아호를 지어준 소전 손재형 소설가 유주현과 교분을 나누었으나 그들은 고인이 된지 오래이고 지금은 서울대 시절의 스승인 월전과 시인 김춘수 정병욱등과 담소를 즐긴다.가족은 부인 장신애여사와 큰자녀들은 출가하고 두딸이 있다. ○“품격 높은 예술” 극찬 그의 결벽한 일면은 그의 개인전 팸플릿에 반드시 이경성의 서문만을 고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화단일각에서는 이를 섭섭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지만 이경성과는 이대교수로 함께 재직하면서 그의 제작의 내부까지를 일일이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평론가의 넘치거나 치우치지 않는 「남정화론」을 굳게 믿는 것 같다. 이경성은 남정의 작품을 「한마디로 격조의 예술」로 천명한다.「품격이 높고 예술적으로 성숙되어 정신과 기술을 아울러 갖췄을 뿐만 아니라 북화적인 큰 스타일과 남화적인 정신세계가 어울려 새로운 한국화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색채를 화면에 부여함으로써 남정은 그곳에 반드시 존재돼야할 바위나 산이나 사람을 만들어낸다.이른바 모든 사물의 전화가 그의 날카로운 붓끝에서 창조되고 그렇게 창조된 사물은 영원한예술로서 존속된다.인위와 조작이 없는 「순도높은 인품이 담긴 작품」,그리고 세련되고 치밀하게 계산된 공간처리와 평면감각을 극도로 추구하여 회화의 본질을 회복시키고 있다.이렇게하여 그는 한국 현대회화사상 우뚝한 봉우리중의 하나로 서게 되었다. 내년은 그의 열번째 개인전이 잡혀있다.그러나 변화추구보다 신운이 깃든 절제의 필치로서 그는 진실하게 화면을 지휘하는 시기다.따라서 능란한 능품이나 기교적인 묘품,뛰어난 절품을 지나 화가 최고의 영예인 신품의 화경에서 명품절색을 경이로 펼칠 것에 틀림없다. ▷연보◁ ▲1927년 충남 연기출생 ▲1949년 국전 제1회부터 81년까지 30회출품 ▲1952년 서울대미대 회화과졸업 ▲1953년 국전 특선및 국무총리상 ▲1954년 대한미협전서 공보실장상 ▲1955년 국전 대통령상,대한미협전 국무총리상 ▲1956년부터 이대미대교수 ▲1957∼79년 국전초대작가,국립현대미술관초대전 심사위원·초대작가 선정위원,국전심사위원및 심사분과위원장,국전 운영위원 ▲1958년 첫 개인전 ▲1960년 묵림회 창립회원 ▲1962년부터 서울대미대 교수 ▲1964년 청토회 창립회원 ▲1964∼81년 「19 10년이후의 한국미술」「해방이후의 한국화」「오원 장승업연구」「신벽화 연구」등 논문발표 ▲1965년 도쿄 일동화랑 개인전 교토 토교화랑 개인전 ▲1973년 세종대왕기념관 기록화(역진개척도)제작 ▲1976년 스웨덴 스톡홀름 개인전(그라피오 테케트 화랑) ▲1977년 개인전(현대화랑),중앙미술대전 심사위원 ▲1980년 개인전(현대화랑) ▲1981년 3·1문화상,서울시 문화상심사위원,유럽및 미국의 미술관 박물관 미술교육시설 시찰 ▲1982년 일본서「한·일·중 동양화3인전」(주일 한국문화원),한미수교 1백주년기념 사절단으로 도미 ▲1983년 대한민국 예술원회원 이후 해마다 예술원회원전 ▲1986년 이대대학원 교수 ▲1987년 예술원상,박노수미술전(백악미술관),하와이 동서문화협회 초청전시 ▲1989년 서울미술전 추진위원장 ▲1991년 예술원미술분과회장,이대정년퇴직,현대미술초대전추진위원 ▲1994년 5·16민족상 학예부문상,예술원 개원40주년 기념전 ▲ 대한민국 예술원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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