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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색공간] 다시 맑게 흐르는 청계천의 메시지/이현주 목사

    나는 지금 왜 이 글을 쓰고 있는가? 신문사에서 청탁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를 몽땅 신문사에 넘기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우리는, 그가 처한 상황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똑같은 상황에서 여러 사람이 각양각색으로 처신하는 것을 보면,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는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이런 말이 있다.“상황은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다만 그를 드러낼 뿐이다.” 옳은 말이다. 어떤 사람이 날마다 술을 마시고 고주망태로 취한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까,“세상이 내게 술을 권한다.”고 대답한다. 정직한 대답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세상이 그에게 술을 귄했기 때문에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술을 권하니까 술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신 것이다. 세상이 술을 권하지만 나는 마시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면 마시지 않았을 것 아닌가? 서울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흐르게 됐다고 해서 며칠 동안 잔치가 건했다. 그동안 썩은 물이 흐르던 청계천에 다시 맑은 물이 흐르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사람 생각이 빚어낸 열매다. 성경에,“보이는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데서 나왔다.”는 말이 있다. 인간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이 그 뿌리를 찾아 보면, 나무뿌리가 대지에 묻혀 있듯이,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속에 묻혀 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자동차 배기가스나 공장 폐수가 아니다. 그런 것들을 내보내고서라도 일단 편하게 또는 풍요롭게 살아야겠다는 마음, 안개에 시야가 가려 코앞이나 겨우 볼 수밖에 없는 사람처럼, 당장의 손익계산밖에는 내다 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의 심각한 환경문제 앞에서 오히려 희망한다. 왜냐하면 사람 생각이 달라지고 있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청계천을 덮어서 자동차들이 더 많이 빠르게 다닐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당시로서는 꽤 신선했을 발상이 이제는 더이상 통할 수 없는 낡은 발상으로 되었다. 사람들 생각이 바뀐다는 것, 바뀔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축복(또는 재앙)의 원천이다. 바야흐로 인류는 더이상 인간중심으로 처신했다가는 환경만 죽는 게 아니라 저 자신이 먼저 죽게 된다는 절체절명의 깨달음 앞에 이르렀다. 속된 말로, 갈 데까지 간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발상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는 궁지에 몰렸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21세기에 사람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멕시코 원주민의 한 예언자는 어떻게 그런 계산을 했는지 모르겠으나,1997년(?) 어느 날 태양이 새로운 빛을 내뿜기 시작했으므로 2020년쯤에는 더이상 전쟁이 없는, 모두가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신천지가 전개된다고 했다. 요즘처럼 급속하게 변하는 추세를 보면 20년 세월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는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아무데서나 터지는 휴대전화 카메라, 웬만한 거리와 건물 구석마다 번뜩이는 감시 카메라, 이런 것들이 사람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비난도 있긴 하지만, 내 눈에는 좋은 징조로 보인다. 그만큼 사람들이 켕기는 짓을 덜하지 않겠는가? 십 년 전에 가족이 저지른 비리가 발각되어 고위 공직자가 물러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누가 이 변화를 거스르거나 막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그러니까 더이상 켕기는 짓을 하지 않겠다고, 털어서 먼지 안 날 놈 여기 있다고, 가슴 내밀고 대명천지를 떳떳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품은 사람이 다가오는 21세기의 주역으로 앞장 설 것이다. 생각만 해도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현주 목사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0)정감록의 어머니 음양오행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0)정감록의 어머니 음양오행설

    ‘정감록’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둥은 음양오행설이다. 엄밀히 말하면, 음양과 오행은 별개다. 사전에서는 대개 이런 식으로 정의한다. 삼라만상을 음과 양이 자라나고 없어지는 원리로 설명하는 것이 음양설이다. 음양설의 영향을 받아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이치로 설명하는 것이 다름 아닌 오행설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로 통합되기도 한다. 이것이 음양오행설이다. 이를 줄여서 음양설이라 부르기도 한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온갖 종류의 예언과 점에 음양설이 남긴 자취는 뚜렷하다.‘정감록’도 물론 예외는 아니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역술가들은 모든 사물을 음양과 오행으로 풀이해 상생 또는 상극관계를 찾아낸다. 달리 말하면 점치고자 하는 어떤 사물이 있을 때 이름, 빛깔, 형태 및 성질을 음양 또는 오행으로 구별해 점괘를 벌려놓는 것이다. 그 방법은 우선 사물에 각기 하나의 숫자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추수(推數)라 한다. 점을 치려면 이를 다시 5진법(오행) 또는 2진법(음양)으로 번역한다. 그런 다음 최종적으로 길흉을 판단한다. 음양설을 신봉하는 역술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5진법과 2진법으로 환산된 사물의 상생 또는 상극관계다. 그들에게는 구약 성경에 가끔 선보이는 신의 계시 같은 것이 없다. 그런 점에서 역술가들은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것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래도 한 가지 본질적인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호박의 색깔이 붉다 해서 양이요 화(火)로 치부한다면, 이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 주장할 수 있을까. ●서북의 술사들, 왕조의 운명을 추수(推數)하다 ‘정감록’을 구성하는 여러 예언서 가운데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이 있다. 무학대사가 추수했다고 하지만 그 말을 곧이듣기는 어렵다. 이 책에는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에 이어 삼한이, 그 다음은 신라가 아니라 고려가 등장한다. 맨 마지막을 장식하는 왕조는 당연히 조선이다. 신라를 우리역사의 큰 흐름에서 제외한 점으로 볼 때, 서북지방 술사들의 손끝에서 나온 예언서가 아닐까 한다. 그들은 기자조선과 고구려 또는 고려를 강조하는 경향이 유별났다. 역시 ‘정감록’에 실려 있는 ‘역대왕도본궁수’란 것도 비슷하다. 여기에는 단군조선을 빼놓고 기자조선으로 우리 역사의 처음을 삼았다. 이어 삼한이 등장할 법하지만 그 대신 어쩐 일로 신라를 등장시켰다. 신라에 이어 고구려와 고려가 연달아 나온다. 고려를 고구려의 후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고려의 뒤를 이어 조선이 추수돼 있는데, 이 점은 ‘동국역대기수본궁음양결’과 동일하다. 그러나 두 예언서가 추수한 결과는 다르다. 먼저 언급한 예언서에서는 조선왕조를 4745로 추수했다. 나중 것은 9357로 보았다. 전혀 다른 숫자가 동일한 왕조의 운을 예언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 내용을 읽어보자. 전자는 “음으로 음에 이바지하니 왕씨보다 수명이 부족하다. 양을 합하고 양을 잉태했으므로 마지막은 삼한과 경우가 같아 불(火)에 속해 물(水)을 꺼린다.”고 했다(동국역대). 이에 비해 후자는 조선의 운세를 이렇게 점쳤다.“상(象)을 보니 앞이나 뒤가 모두 금(金)이다. 숫자를 놓고 볼 때 위나 아래나 모두 불(火)이다. 공자의 도가 무력에 굴복해 마침내 번신(藩臣)이 되고 말리라. 양으로 음에 이바지하니 도둑이 궁궐을 불태울 것이고, 음을 합하고 음을 잉태하므로 덕도(德島)에 군사를 보내리라.”(역대왕도) 조선 왕조의 운명에 관한 두 예언서의 점괘는 판이했다.‘동국역대’는 음으로 음에 이바지하므로 수명이 짧다 했지만 ‘역대왕도’는 그와 정반대였다. 양으로 음에 이바지해 도둑이 궁궐을 불태운다 했다. 이뿐인가.‘동국역대’는 양을 합하고 양을 잉태한다 했으나,‘역대왕도’는 음을 합하고 음을 잉태한다고 풀이했다. 이처럼 추수하는 것, 달리 말해 사물의 이름·형태와 성질에 따라 일정한 숫자를 부여하는 행위는 그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달았다. 둘 중의 하나가 옳았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보기도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추수 행위 자체가 억지일 수도 있다. 예언의 결과를 두고 평가한다면 조선왕조의 수명이 고려보다 짧다고 했기 때문에 ‘동국역대’는 완전히 틀린 셈이다. 고려왕조는 34대 474년 동안 유지됐고, 조선의 역년은 27대 518년이었다. 그밖에도 ‘역대왕조’는 조선이 숭문(崇文)에 힘쓰다가 결국 남의 나라의 속국이 된다든가, 역적(도둑)이 궁궐에 불을 지른다는 둥 제법 그럴싸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역대왕조’의 예언이 맞았다고 단정하기는 아직 이르다. ‘동국역대’는 조선왕조가 망할 징조를 드러내기 훨씬 전에 쓰였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역대왕조’는 왕조의 패색이 짙어가던 19세기말의 저작일 수가 있다. 이런 의혹은 ‘정감록’을 연구하면서 몇 차례 제기된 문제다. 어떤 예언서의 내용 가운데 용케 사실과 일치하는 부분은 실상 지난 일을 마치 예언처럼 꾸며놓은 것으로 봐야 할 경우가 적지 않다. 그렇다고 모든 예언은 무조건 다 틀린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에 들어맞는 수도 있다. 우연히 적중하는 수가 있고, 동일한 문구라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실과 부합되어 보이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수수께끼 같은 편년체 예언서 “원계용처 수맹구(猿鷄用處 隨猛狗)”란 정감록 예언이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해 ‘칠언고결’이란 예언서의 한 구절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원숭이와 닭이 쓰이는 곳에 사나운 개가 따라간다.’는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일제시기 역술가들은 이 구절을 기발하게 해석하기도 했다. 원숭이는 신(申)년, 닭은 유(酉)년, 개는 술(戌)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 개해의 운세가 몹시 사납다고 풀이했다.1944년은 마침 갑신년이었다. 어떤 역술가들은 그 해 운세가 을유년인 1945년과 비슷하다고 보았고,1946년 병술년은 몹시 흉하다고 예언했다. 알다시피 한국은 1945년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되었다. 해방된 해를 1944년과 마찬가지라고 본 것은 누가 보아도 전혀 틀린 예언이었다. 그러나 1946년이 1945년보다 나쁘다고 예측한 것은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 어찌 보면 신빙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다. 위안과 희망을 주는 것이 예언의 존재 이유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칠언고결’의 한 대목을 예로 꺼내든 데는 다른 목적이 있다.18세기 이후 한국의 예언서가 대체로 편년체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조선 전기나 고려시대의 예언서는 한시 또는 무슨 운문체의 사부(辭賦)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것들이 대종을 이뤘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마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마냥 편년체 연대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전형적인 것으로 ‘서계이선생가장결’이 있다.‘무학비결’도 부분적으론 역시 마찬가지다.‘무학비결’의 일절을 보면,‘기사년에는 쥐처럼 훔치는 도둑을 면하기 어렵다. 경오년에는 용이 슬피 우는 것을 보리라.’고 했다. 기사년에 간신이 조정에 들어와 경오년엔 임금이 엄청난 곤경에 빠진다는 것이다. 꼭 이런 식으로 매년 일어날 정치적 사건을 간결한 문체로 요약했다. 편년체 역사를 방불케 한다. 편년체라면 얼른 떠오르는 것이 ‘자치통감강목’이다. 성리학의 대가 주자가 쓴 책이다. 기원전 403년부터 시작해 서기 960년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역사를 정통과 비정통으로 분별해놓고, 매년 중요 사건을 대요와 세목으로 등급을 엄격히 정해놓고 쓴 것이다. 본래 주자는 대요만 썼다 하며 나중에 제자 조사연(趙師淵)이 세목을 완성했다 한다.‘자치통감강목’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기보다는 의리(義理) 관계를 따지는 데 치중했다. 자연히 사실관계가 너무 단순히 처리됐고, 그 과정에서 앞뒤가 모순되거나 틀린 서술도 적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성리학자들의 도덕사관이 도처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역사서인데, 조선시대 선비들의 필수적인 교양서적이었다. 대부분 평민 지식인이던 술사들 역시 ‘자치통감강목’을 읽었다. 그 탓인지 혹은 그 책이야말로 역사책의 전형이라 믿었기 때문인지, 술사들은 “미래의 역사”를 담는 그릇으로 편년체를 선호했다. 도덕적인 평가가 담긴 간단명료한 예언이야말로 ‘정감록’을 비롯한 조선후기 예언서의 뚜렷한 특색이다. 성리학적 지배질서에 반항하던 술사들도 성리학이 이룩한 문화의 코드를 이용했다. 그러나 예언서가 ‘자치통감강목’은 아니다. 예언서는 본질적인 면에서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미래의 역사에 관한 추정인 만큼 표현방식이 무척이나 상징적이다. 앞에 예로 든 ‘원숭이와 닭이 쓰이는 곳에 사나운 개가 따라간다.’는 간단한 구절만 해도 그렇다. 술사들은 이 한 줄로 미래의 어느 시기 3년간의 운세를 점쳐 놓은 것이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음양오행설이 예언서의 상징적인 표현과 서로 어떻게 맞물려 있었는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칠언고시’에 ‘세치백룡 인하거(歲値白龍 人何去) 약탐사미 필흉잔(若探蛇尾 必凶殘)’이란 짤막한 구절이 있다. 우리말로 옮겨보면 대강 이런 뜻이다.“해가 백룡을 만나면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하나. 만일 뱀의 꼬리를 만진다면 흉도(폭도)가 반드시 잔인해질 것이다.” 번역은 되었으되 이 예언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는다.‘백룡’이니 ‘뱀의 꼬리’ 같은 상징적 표현 때문이다. 백룡은 경진년(庚辰年)이다. 그 까닭이 궁금한 사람도 있겠다 싶어 약간 설명을 보탠다. 천간(天干)을 오행으로 배열하면 경(庚)과 신(辛)은 쇠(金)이다. 쇠는 색깔로 치면 하얀(白) 것이 되고, 방향으로는 서쪽에 해당한다. 그런가 하면 진(辰)은 곧 용이다. 따라서 백룡은 경진년이다. 백룡을 만났다 함은 경진년이 된다는 뜻이고 ‘어디로 가야 하나.’고 물은 것은 그 해의 처신이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어서 나오는 ‘뱀의 꼬리’란 경진년 다음해인 신사년 말을 가리킨다.‘흉도가 반드시 잔인해질 것이다.’고 했으므로, 그 해 연말에 거사를 일으키면 승산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흉잔(凶殘)’을 흉하고 잔하다 즉, 길하지 못하고 잔약하다 또는 망한다는 뜻으로 봐도 무방하다. 후자의 경우라면 거사를 했댔자 쓸모없는 일이 된다는 뜻이다. 세 글자를 놓고 완전히 상반된 해석이 양립한다. 지금 인용한 문제의 예언을 두고 많은 역술가들은 이렇게 보았다. 경진년(1940)은 일제의 탄압이 극심할 것이며, 그 결과 한국 사람들은 설 곳이 없다고 해석했다. 과연 그 해에 일제는 한국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중국에서는 잇따른 일본군의 공격으로 중국정부가 궁지에 빠져버린 바람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충칭으로 옮기는 일대변동이 일어났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어떤 역술가들은 이듬해인 신사년(1941)에 독립운동을 했댔자 소용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한다. 하지만 ‘정감록’은 본디 조선왕조의 멸망을 염두에 두고 저술된 예언서였다. 일제 식민지 지배를 의식한 예언서는 아니었다. 신사년에 관한 해석에서 보듯 ‘정감록’은 본래의 저술의도와는 무관하게 귀에 걸면 귀고리가 될 수도 있는 신축성을 과시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의 기독교 신도들은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를 읽으며 자신들의 운명을 개탄했고,‘요한계시록’을 외며 언젠가 찾아올 해방을 염원했다. 하필 ‘정감록’만 상징적인 고무줄 예언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서 기독교의 예언서와 ‘정감록’이 동질적이란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전혀 다른 계통에 속했지만 공통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다. 신축성이야말로 예언서의 운명이다. ●자꾸만 되풀이되는 비슷한 구절 예언서 ‘정감록’엔 음양오행설로 포장된 상징이 즐비하다. 휴전선 안 비무장지대의 지뢰밭을 연상시킬 정도다. 그곳은 지뢰탐지기가 없이는 누구도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상징체계를 풀어헤칠 도구가 없이는 ‘정감록’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상징은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인용한 ‘해가 백룡을 만나면 ….’이라는 구절과 흡사한 내용이 ‘정감록’ 안에서 또 발견된다.‘오백년논사비결’엔 ‘세우백호 인하거(歲遇白虎 人何去) 약탐사미 필잔흉(若探蛇尾 必凶殘)’이라 했다.‘경인년을 만났으니 사람은 어디로 갈거나. 뱀해 말엔 반드시 흉도가 잔인성을 발휘하리라.’는 뜻이다. 뱀 꼬리라면 계사년이다. 이 대목을 두고 역술가들은 6·25의 참극을 정확히 맞혔다며 흥분하기도 했다. 경인년은 전쟁이 터진 1950년이고, 계사년은 가까스로 휴전협상이 마무리된 1953년으로 국내의 상황은 무척 불안했다. 참 신기한 노릇도 있다.‘조선왕조실록’에서 ‘정감록’ 사건을 샅샅이 조사해보면, 지금 문제로 삼고 있는 구절이 이미 순조26년(1826)에도 이미 세상의 주목을 끌었던 사실이 확인된다.‘세월이 백룡(白龍)을 만나면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歲遇白龍人何去). 해(年)가 사미(蛇尾)를 만나면 반드시 흉도가 잔인해질 것이다(年逢蛇尾必凶殘)라는 괴상망측한 시를 퍼뜨렸다.’는 혐의로 술사 정상채 등이 체포됐다. 그 때는 백룡 즉, 경진년(1820)이 지난 지도 6년이나 된 시점이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상채는 문제의 구절을 순조11년(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 난과 관련지었던 모양이다.16년 전 평안도 정주 등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홍경래가 아직 살아 있다며 정상채는 이 구절을 인용했다. 아울러 그는 홍경래 일파야말로 역적이 아니라 중국역사에 견주어 말하면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진승 등은 진시황이 세운 진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농부였다. 정상채는 결국 체제부정적인 유언비어를 살포한 죄로 사형을 받았다(실록, 순조 26년10월27일 을해). 사실 ‘백룡’이니 ‘사미’니 하는 용어가 예언서에 포함된 유래는 생각보다 깊다. 영조24년(1748)년 5월 청주에서 발생한 ‘정감록’ 사건 때도 용과 뱀 꼬리가 거론됐다. 당시 문제가 됐던 것은 ‘용두(龍頭)’와 ‘사미(蛇尾)’였다. 해석하는 방식 역시 위에서 살핀 것과 마찬가지다. 용은 곧 진(辰)해, 뱀은 곧 사(巳)해며, 두(頭)는 정월(正月), 미(尾)는 곧 연말인 12월로 보아 뱀해 초나 뱀해 말에 난리가 일어난다고 했다. 음양설에 기초한 예언의 뿌리는 이렇게 깊고 질기다. 정감록의 원본이라고 하는 ‘감결’에는 문제의 구절을 약간 변형시킨 대목이 있어 다시 눈길을 끈다.‘남도교룡 금안재(南渡蛟龍 今安在) 수종백우 주종성(須從白牛 走從城)’이라 했다. 해석해보면,‘남쪽으로 간 이무기와 용은 지금 어디로 갔나. 신축년이 되자 틀림없이 종성으로 달아났도다.’는 것인데, 기발한 풀이가 있다. 이무기와 용이란 영물인데 이것이 남쪽 즉, 남한으로 들어와 신축년(1961)부터 민족중흥에 앞장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박정희가 제3공화국을 세워 조국근대화 사업을 달성하리란 예언이 정감록에 있다는 해석이다. 해석은 자유다. 그러나 매우 위험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13일 TV 하이라이트]

    ●다큐성장 6년 후-진솔이의 선택(EBS 오후 9시30분) 2살 때 혼자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쳐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피아노 신동 정진솔. 진솔이는 그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어린 나이에 줄리어드로 유학도 다녀왔다. 하지만 유학은 길지 못했다. 엄청난 유학비를 감당하지 못한 부모가 2년 만에 진솔이를 다시 불러들였는데….   ●유쾌한 두뇌검색(SBS 오후 7시5분) 메뚜기 귀뚜라미 방아깨비 등 곤충들의 올림픽이 열린다. 제일 빨리 날 수 있는 곤충도 알아본다. 맹수의 왕 호랑이와 먹보 돼지의 동거,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소를 전담하는 매니저, 죽은 애완견을 위한 공동묘지 중에서 가짜를 찾아본다. 또 마술사 최현우의 예언 마술, 텔레파시 마술을 선보인다.   ●글로벌 코리안-미국 뉴욕, 좌판금지로 동포사회 반발(YTN 오후 1시25분) 상당수 한인 동포들이 좌판을 벌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뉴욕. 뉴욕시는 거리정비 차원에서 좌판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좌판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소수 민족이 피해자가 됐고, 좌판의 60% 이상을 운영하는 한인동포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됐다.   ●가을 소나기(MBC 오후 9시55분) 연서는 자신을 찾으러 온 윤재에게 먼 곳으로 도망가자고 말한다.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윤재와 연서는 무작정 차를 몰고 떠난다. 한편, 사무실에서는 윤재와 연서 둘 다 출근하지 않자 난리가 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느 바닷가에 집을 구한 연서와 윤재는 시장에서 살림살이를 장만하며 즐거워한다.   ●TV, 책을 말하다-가을, 문학을 만나다(KBS1 오후 10시) 다양해진 매체 영향과 인쇄 매체를 장악하고 있는 외국 소설이 물밀 듯이 들어오고 있는 악조건 속에서도 한국 소설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젊은 작가 3명이 있다.21세기 한국 소설의 유망주 정이현 김종광 박성원. 그들의 작품세계 속으로 들어가 한국소설의 미래를 이야기해 본다.   ●마법전사 미르가온(KBS2 오후 6시40분) 마패와 장미는 방해에너지를 연구한 끝에 새로운 암흑전사들을 1분 정도 약화시킬 수 있는 마법약을 완성하고, 리틀 마법전사들이 새로운 암흑전사의 몸 안에 들어가 이 마법약을 퍼뜨리기로 한다. 한편, 암흑전사들은 아라가 지배자 곁으로 돌아올 때까지 모든 인간들을 무차별 공격하겠다고 협박한다.
  • [송두율칼럼] 독일통일을 잊자

    [송두율칼럼] 독일통일을 잊자

    독일통일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주제는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신선한 주제는 아닌 것 같다. 그동안 많은 책과 연구논문, 그리고 크고 작은 학회나 토론회가 이 주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독일통일 15주년을 맞아 그러한 주제를 또 다루는 학술토론회에서 필자는 강연을 하게 되었다. 진부하게 들리는 주제지만 통일이라는 주제는 흡사 ‘영원의 철학’처럼 아직은 우리 모두에게 다가서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또 다른 장벽인 ‘휴전선’이 무너질 시간을 나름대로 자신 있게 예언했던 그 많은 주장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는 독일통일의 부정적인 후과(後果)를 강조하고 독일통일을 우리 통일의 반면교사로서 볼 것을 요구하는 주장들이 대신 들어섰다. 한편에서는 독일식 흡수통일에 대한 경고로서,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른바 ‘한탕주의’에 기초한 감상적 통일론에 대한 경고로서 그러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우리의 통일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식이든지 우리는 대개 독일통일을 먼저 떠올리며 그로부터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유추(類推)하게 된다. 물론 베트남의 통일도 한때 그러한 유추의 대상이었으나 오래 전부터 우리의 뇌리로부터 사라졌다. 우리의 사고활동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유추는 비교하는 대상간의 복잡한 내적 요소들과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이를 둘러싼 환경을 비교해야만 한다. 그러나 완전한 신과 불완전한 인간사이의 유추처럼 대칭적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비교대상들을 전체로서 유추해보는 이른바 ‘수식적 유추’가 독일과 한반도통일의 비교연구를 강하게 지배해왔다. 이로 인해 합리적인 분석에 의거한 유추보다는 대개 선언적인 내용들이 먼저 자리잡은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과학이라는 이름 밑에서 자연과학적인 엄밀성을 모범으로 한 여러 가지 사회과학적 연구방법을 동원해서 독일통일에서 한반도통일을 유추해보려는 시도도 있다. 이러한 시도들은 많은 경우 햇볕정책 그리고 이의 구체적인 결실이었던 6·15공동선언도 일종의 감상적 통일의 표현으로 보려고 한다.‘뭉치면 죽는다.’는 식의 탈현대적(脫現代的)인 역설까지 동원해서 이른바 ‘퍼주기’식의 통일정책을 비판한다. 그토록 정교하게 구성된 서독학계의 합리적 분석들도 독일통일을 예견치 못했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보여주었듯이, 그러한 ‘과학적’시도도 기본적으로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지나치고 있다. 구조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이를 혁파하려고 부단히 움직이는 인간주체의 능동적 역할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민족통일문제도 일종의 사회공학(工學)적인 문제로만 여기게 된다. 이 점에서는 당시 동독의 학계도 마찬가지였다. 계획이 곧 합리성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동독체제에 등을 돌린 이른바 1989년 가을의 ‘탈출혁명’을 예견할 수 없었다. 하나의 사건처럼 불쑥 다가온 통일은 한때 축제의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이는 곧 지루한 일상생활 속으로 녹아들었다. 물리적 장벽을 허무는 작업에는 무엇보다도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마음의 장벽이 저절로 사라지지도 않았다. 바로 이렇게 사건과 일상성이 뒤얽혀 전개되는 삶의 세계로서 통일은 우리에게 현실과 꿈, 물질과 사람, 객관과 주관으로 단순히 갈라 볼 수 없는 하나의 원초적(原初的)인 세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킨다. 이 세계는 분명 고향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였던 그 때를 기억토록 만든다. 고향은 과거를 되살리는 세계다. 그러나 이 원초적인 세계로서 통일은 더 이상 그러한 ‘과거의 고향’이 아니라, 우리 중의 어느 누구도 아직까지 밟아보지 못한 ‘미래의 고향’을 의미한다. 통일이 바로 이러한 미래의 고향이기에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항상 요구한다. 바로 이 풍부한 상상력을 훼파(毁破)시켜온 독일통일로부터 우리 스스로도 이제는 해방되어야만 한다.
  •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구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가요, 항일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했다.‘조선 상고사’처럼 널리 알려진 연구서가 있는가 하면,‘꿈하늘(夢天)’ 같이 소설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꿈하늘’은 일종의 팬터지 문학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작가 신채호는 천상에 올라 ‘임’을 좌우에 모신 여러 영웅호걸을 만난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있고 철학자 화담 서경덕도 보인다. 도술의 달인 전우치도 함께 자리한다. 예상 밖인 것은 오윤부(伍允孚)라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성력(星曆)의 대가라 했다. 우선 성씨부터 낯선 오윤부. 좀 더 알고 보면 그는 ‘고려사’ 열전에 소개될 정도로 완전히 무명은 아니었다. 천문예언 전문가라고 했다. 섣부른 짐작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천문예언이 무척 중시됐다. 이름난 유학자 박상충의 전기에도 “성명(星命)에 밝아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중국에서는 13세기 이후 사주명리학이 예언이나 점의 핵심이었다. 고려는 경우가 달랐다. 풍수지리와 더불어 천문예언이 늘 예언의 중심축이었다. 인간 만사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땅의 기운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고려인들의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문은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정조9년(1785)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이른바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것은, 그 성씨가 김가이고, 이름은 자세히 모릅니다만,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유가는 정미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정가는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 세 집안사람들이 장차 백 년 동안 서로 싸웁니다. 그 증거로, 객성(客星)이 남방에서 이미 서울로 들어왔습니다.”(실록, 정조 9년3월1일 경술) 조선은 장차 3국으로 분할돼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는 예언이다. 객성이 남쪽에서 출현해 서울 쪽으로 들어왔다는 천문현상이 증거로 제시됐다. 나라의 운명은 별이 결정한다는 민중의 믿음이 읽힌다. ●대대로 별점을 본 오윤부 고려 충렬왕 때 일관(日官)으로 활동한 오윤부야말로 별점의 대명사였다. 그의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 한 때 부흥(復興)으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시대의 성씨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엔 배천 오(伍)씨가 없다. 오윤부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대물림을 해가며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살았다. 배천오씨들은 자자손손 별점을 보며 태사국(太史局)을 지켰다.(오윤부의 전기는 ‘고려사’, 권 122를 참조) 고려는 귀족사회였고, 모든 신분이 세습되었다. 심지어 군졸 노릇만 하는 집안, 아전과 서리를 배출하는 집안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일관 오윤부 일가는 귀족은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이나 상인보다는 훨씬 지위가 높았다. 오윤부는 용모가 초라했고 말수가 적었다. 여간해서는 좀체 웃지도 않았다. 그는 첫눈에 호감을 살 만큼 붙임성 있고 구변 좋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문을 익혔다. 장성해서는 일관에 임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말년에는 천문도(天文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후배 일관들이 그 천문도를 모범으로 삼았다니 그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오윤부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별점이었다. 타고난 재주도 재주였지만 그는 무척 부지런했다. 밤을 새워가며 하늘을 수놓은 수 백 개의 별들을 샅샅이 살폈다. 날씨가 제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그는 늘 성실했다. 오윤부의 먼 후배 격인 조선시대 일관들은 5개 팀으로 나뉘어 하루 24시간 내내 하늘을 관측했다. 그들은 관측 대상을 23종으로 나눠 정상적인 현상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해, 달, 흰무리, 지진, 혜성, 새별(新星) 그리고 28수로 요약되는 주요 별자리를 모두 점검했다. 일관들은 특히 새별과 흰무리 등의 모양, 정도, 자리, 바뀌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성변측후단자’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서운관지’) 이 보고서에 천체 약도가 첨부돼 날마다 임금님에게 제출됐다. 조선시대 일관들이 남긴 일지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천문 보고서였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천문 강국의 역사를 입증한다. 고려시대의 일관들은 그와 비슷한 활동을 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특히 오윤부는 이상한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어떤 별이 천준(天樽)을 범하자 “이번에 올 중국사신은 술꾼이다.” 고 예언했다. 천(天)은 중국, 준(樽)은 술통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별이 여림(女林)을 범하자, 중국 사신이 와서 소녀들(童女)을 데려갈 것이라며 걱정했다.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의 해석이 현대인의 눈엔 너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늘이 꼭 중국이어야 될 이유가 없다.‘여림’을 두고 공녀(貢女)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원나라의 횡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오윤부는 그런 현실을 감안해 모든 천문현상을 풀이했다. 그의 별점은 잘 들어맞았고 소문이 원나라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 ●원형 민족주의자 오윤부 고려 후기에는 원의 수시력과 같은 중국역법이 수입되기도 했다. 오윤부는 그 방면에도 상당한 전문가였다. 그는 달력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제일(祭日)을 중국과 비교했다. 고려에서는 봄가을의 가운데 달인 음력 2월과 8월의 마지막 무일(遠戊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나, 중국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첫째 무일(近戊日)을 제삿날로 삼았음이 확인됐다. 오윤부는 조정에 건의해 중국의 예를 따르게 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중국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는 고려인이었다. 충렬왕은 즉위 직후 선왕인 원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셨다. 새 위패를 선대왕들의 신위와 합설하기 위해 원종의 시책(諡冊 시호를 아뢸 때 쓴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충렬왕후는 원나라 공주였는데, 왕비로서 그 행사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다. 마침 오윤부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공주의 참여를 가로막았다. 선대왕들의 신령이 계신 곳에 원나라 공주가 술잔을 올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원나라는 과거 수십 년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원을 미워했다. 오윤부는 이런 반원의식이 강했다. 원나라 공주는 종묘 제사에서 제외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통쾌해 했다. 알려진 대로 원종 이후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됐다. 고려국왕은 대대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 왕은 죽어서도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호에 표기해 “충○왕”이 되었다. 고려왕실에 시집온 원나라 공주의 위세는 때로 왕권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었고, 오윤부는 이 점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천문 현상을 빙자해 공주를 압박했다.“천문을 살펴 보니 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요즘은 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청컨대 궁궐을 짓거나 고치는 공사를 중지하고 덕을 닦으십시오. 그래야 재변이 멈춥니다.” 원나라 공주는 오윤부의 제지를 받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원나라 공주에 대한 오윤부의 공격은 계속됐다. 공주는 고려에 시집온 뒤에도 여러 차례 본국을 오갔다. 그 때마다 막대한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공주는 원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기가 없는 동안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언젠가 한 번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놓고 좋은 날을 택해 아예 새 궁궐을 지어 놓으라고 졸랐다. 다들 불평은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다. 이 때도 오윤부가 발 벗고 나섰다.“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님께 불리하므로, 신하인 저는 절대 택일을 못하겠습니다.” 원나라 공주는 분노에 치를 떨며 오윤부의 벼슬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매로 때리려 했으나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어느 재상이 애써 말리는 바람에 매 맞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다. 그 일로 분이 안 풀린 공주는 오윤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왕은 공주의 청을 어기지 못해 오윤부를 매질하게 했다. 그는 매를 맞으며 이렇게 변명하였다.“날을 가리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신하를 협박하여 억지로 가리게 한다면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의 뜻에 아첨할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궁궐을 짓는 공사가 겨우 시작됐는데, 화성이 달을 삼키는 변이가 일어났다. 왕은 반승(飯僧 스님들에게 밥을 공양함)을 실시해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반승은 사소한 재앙이 예측될 때마다 되풀이된 고식적인 해결책이었다. 오윤부는 동료인 문창유와 함께 왕에게 간언을 바쳤다. 화성이 달을 삼키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스님들에게 밥을 주고 부처님을 공양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런 값싼 보시를 그만 둬야 한다. 진정한 길은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왕은 반대여론을 의식해 궁궐 짓는 일을 그만뒀다. ‘고려사’에 실린 전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오윤부의 간언은 전문분야인 천문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사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한 번은 오윤부가 전법총랑(典法摠郞 법률의 집행을 담당) 박인주에게 전법사의 사무가 자꾸 지연되는 까닭을 물었다. 원나라 공주의 명령과 임금님의 명령이 한없이 쏟아져,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과 공주는 각기 소송 사건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해 일처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윤부는 이런 일이 자기 소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따졌다. 이런 식으로 일관 오윤부는 가끔씩 왕과 의견충돌을 보였다. 그러나 원나라 공주에 대해 대들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는 공주 보기를 마치 원나라 침략군을 대하듯 했던 것 같다. 오윤부는 일종의 원형(proto) 민족주의자였다. ●백성을 대변한 오윤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천문에는 변이가 많다. 그럴 때마다 오윤부는 이를 정밀하게 살펴 고려왕실의 미래 운명과 관련지었다. 그는 특히 고려백성의 편에서 국왕 내외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천문현상을 활용했다는 혐의가 있다. 천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과거의 일관들은 기도를 권하거나 굿을 하라는 권고를 주로 했다. 다분히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오윤부는 달랐다.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백성의 원망이 없다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두 곳에 파견한 왕지별감(王旨別監 왕의 특사)을 소환하고, 여러 곳에 설치된 공주식읍(公主食邑 원나라 공주에게 준 토지와 백성)을 폐지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권고를 듣자 왕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마침내는 공주에게 줬던 식읍을 폐지하였다. 거기서 거둔 세금을 나라의 창고에 배속시켜 백관의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실 원나라 공주는 왕을 졸라 각처에 농장을 마련해 호사가 극에 이르렀다.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수만 명의 백성들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오윤부는 백성들의 의사를 대변해 식읍의 혁파를 주장했다. 하늘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변동도 오윤부는 마찬가지로 이용했다. 언젠가 한번은 궁궐 연못에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산소부족이었든지 아니면 약물에 의한 중독이었을 것이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물위로 떠오른 고기떼를 두고 오윤부는 충렬왕을 몰아쳤다.“갑술년(충렬왕 즉위년 1274)에 대궐 동편 못에서 이런 괴변이 일어났고 선왕이신 원종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스스로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궁궐의 물고기가 죽든 살든 그것이 왕의 목숨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관 오윤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칫하면 국왕이나 원나라 공주의 진노를 사게 될 거였지만 개의하지 않았다. 예언가 오윤부의 성공비결은 고려사회에 만연했던 반원적인 정서를 잘 이용했다는 점이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도 원나라의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렬왕 역시 친원과 반원의 두 노선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했다. 그 틈을 비집고 오윤부는 한결 같이 자주노선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묘청과 백수한의 후예였다. 그러나 오윤부는 묘청 등을 뛰어넘었다. 그는 일관으로서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정확히 인식시켜야 될 임무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일에 왕이 자기의 ‘충언’을 듣지 않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끝까지 졸라댈 정도였다. 오윤부의 해석은 유교의 재이론(災異論)에 가까웠다. 묘청 등이 불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에 기울어 있었다면, 오윤부는 다가올 성리학 시대의 천문해석에 근접해 있었다는 말이다. 유교적인 천문예언가 오윤부의 고집불통에 충렬왕은 때로 두통을 일으켰다. ●충렬왕이 졌다! 왕은 오윤부를 골탕 먹일 생각까지도 했다. 원 나라 세조가 요동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다. 왕은 상국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까지 나가게 됐다. 우선 유청신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때 오윤부가 별점을 쳤다.“아무 날 유청신이 반드시 돌아옵니다. 임금님께서는 요동까지 가실 필요 없이 말머리를 서울로 돌리게 되십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됐는데도 유청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오윤부를 체포했다. 점괘가 틀렸으니 벌을 받으라 했다. 하지만 오윤부는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며, 좀더 기다리자고 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먼데서 먼지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유청신이 타고 있었다. 예언이며 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문현상은 그저 자연계의 변화를 알릴 뿐이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 복을 불러들일 리 만무하고 화를 초래할 수도 없다. 오윤부의 사고방식은 이런 현대적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윤부는 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천문을 살폈고, 그 때문에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신채호가 그를 가장 뛰어난 천문예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조선 정조 때 일어난 ‘정감록’ 사건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공범인 평민 지식인 주형채도 오윤부처럼 별점을 보았다. 주형채는 말했다.“작년 섣달 초7일, 초8일, 초9일에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습니다. 그 속에 붉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장군성과 태백성이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서로 1도(度) 거리로 떨어졌으며,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떠밀어 여러 번 물러가고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정조,9년3월22일 신미) 주형채는 국가의 녹을 먹는 일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윤부처럼 밤하늘의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었고 밤새워 별을 보았다. 별자리의 이동을 1도 2도로 따질 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다. 고려시대에는 오윤부 같은 특수 계층만 그런 지식을 독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평민지식인들도 서적을 통해 공유하게 됐고, 그래서 주형채와 같은 평민도 직접 별을 바라보며 민중의 희망을 찾아 나섰다. 자유로운 지식은 곧 우리들의 희망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160개국 성도 1200만명 복음 전파

    160개국 성도 1200만명 복음 전파

    |팔마이라·솔트레이크시티(미국) 김미경특파원|지난 1830년 4월 미국 뉴욕 시골마을의 한 농장에 교인 6명이 모여 시작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몰몬교·이하 예수그리스도교회)는 그리 길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세계 160개국에 1200만명의 성도를 거느린 대규모 교회로 발전했다. 미국에서 4번째로 큰 교회이자, 최근에도 전세계적으로 성도가 하루 900명씩 늘어날 만큼 성장속도가 가장 빠르다. 이 교회 창시자이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첫번째 예언자로 기록된 조지프 스미스의 탄생 200주년과, 한국에서의 선교 5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은 예수그리스도교회의 발상지인 미국 뉴욕주 팔마이라에서 교회 본부가 위치한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까지 사적지와 성전 등을 찾아 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알아 봤다. 그들의 성장동력은 무엇일까? ●뉴욕에서 유타까지 대장정 뉴욕주 서부에 위치한 팔마이라와 페이에트에는 첫 예배가 들여진 농장을 비롯, 조지프 스미스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거룩한 숲’과 교회 경전인 ‘몰몬경’의 바탕이 된 금판을 받은 ‘고모라 언덕’, 몰몬경이 처음 출판된 에그버트 출판사 등이 복원돼 있었다.‘고모라 방문객센터’의 러셀 호머 책임자는 “100년전 교회에서 조지프 스미스 생가를 구입한 뒤 사적지들을 복원, 교회의 근원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팔마이라에서 차로 6시간 정도 떨어진 오하이오주 커틀랜드는 이 교회 최초의 성전이 지어진 곳. 스미스 등이 외부의 박해를 피해 커틀랜드로 옮겨 살았던 집이 복원됐고, 지금도 도로와 정원 등이 복원공사 중이다. 1844년 스미스의 순교 후 성도들은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로 2000㎞의 대이동을 시작했다.1847년 교회 2대 회장인 브리검 영 등 선발대가 도착한 솔트레이크계곡의 ‘This is the place’에는 손수레와 마차, 배를 타고 이동한 성도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우뚝 서있었다. ●가족·규율·선교 최우선 20여년간 피난의 역사를 거친 만큼 가족을 중시하고 엄격한 규율을 지켜 왔다. 교회 초창기 스미스는 술과 담배를 금하는 ‘지혜의 말씀’을 내렸으며, 가족의 영원한 사랑을 강조해 왔다. 세상을 떠난 가족을 위한 대리침례를 비롯,‘가족역사도서관’을 세워 가족의 뿌리를 찾는 계보사업도 활발하다. 유타주 프로보의 브리검영대학교와 선교훈련센터는 청년 선교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으로 유명하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선교사 6만명이 활동 중이다. ●세계적으로 뻗어가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19세기인 ‘후기’에 회복돼 복음을 전하는 ‘살아있는 교회’를 강조하면서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뉴욕 교회의 아마드 코비트 책임자는 “미국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미트 롬니 매사추세츠 주지사와 메리어트호텔 회장 등 정·재계 인사들이 회원으로 활동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175차 연차대회는 전세계에서 몰려든 성도 3만여명으로 꽉 찼다. 고든 힝클리 회장은 “이제는 내부 성도들의 신앙을 갉아먹는 인터넷 포르노 등이 문제”라면서 “이들을 정화해 복음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 성도 8만명 정도로 아직 미미한 편. 한국인으로서는 최고 자리인 ‘70인 정원회’소속의 고원용 장로는 “한국 교회 헌납 50년이 된 만큼 선교가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chaplin7@seoul.co.kr
  • 환경정의硏-일선교사 중·고교 사회교과서 16종 분석

    환경정의硏-일선교사 중·고교 사회교과서 16종 분석

    “마지막 한 그루 나무가 잘려지고, 마지막 강물이 오염되고, 마지막 물고기가 잡히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깨닫게 되리라. 돈을 먹고 살 순 없다는 것을….” 캐나다 중앙부에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크리(Cree)족’의 한 예언자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오랜 세월, 자연을 수탈의 대상으로만 삼아 온 인류 문명의 어두운 결말을 내다본 불길한 경고로도, 파멸에 이르기 전에 현명하게 맞서라는 잠언으로도 읽힌다. 아마존 열대우림의 급속한 감소, 북극 빙하가 수십년내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는 전망, 그리고 초강대국 미국을 무릎 꿇린 태풍 ‘카트리나’ 등 인류는 여전히 환경에 위해를 주고 있지만 자연의 반격 또한 점점 거칠어져 가고 있다. ●“환경교육은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 인디언 예언자의 말대로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면, 그 주체는 누구일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지속가능한 지구환경을 물려 줄 책임이 있는 어른들의 당연한 몫이지만 ‘미래 세대’도 이에서 빠질 수는 없다. 환경정의연구소(소장 한면희)와 ‘환경과 생명을 지키는 전국교사모임(환생교)’은 이런 점에 천착해 지난 2001년부터 청소년들이 배우는 중·고교 교과서의 내용을 ‘환경·생태적 관점’에서 분석해 왔다. 여러 환경문제에 대해 자라나는 세대들이 어떤 안목으로, 어떻게 해결책을 찾도록 가르칠 지에 대한 의무가 현 세대에 주어져 있는데, 그 주요한 수단이 ‘교과서를 통한 환경교육’이라는 것이다. 수년 전 중·고교 선택과목인 ‘환경교과서’를 도마에 올린 데 이어, 올해엔 ‘사회교과서’를 대상으로 삼았다. 지난달 28일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과 함께 개최한 ‘중등 사회교과서의 환경 건전성 평가’ 세미나를 통해 결과를 발표했다. 사회교과서를 분석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설득력이 높다.“현대사회에서 환경문제는 단순 재해와 같은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인간가치와 욕구, 그리고 사회적 제도 속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현상(환생교 이수종 사무처장)”이라는 판단에서다. 이들 단체는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들이 배우는 16종의 사회교과서를 꼼꼼히 분석한 뒤,‘환경 지속성’ 등 관점에서 이를 평가했다. 이들은 “학교 환경교육이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다.”고 진단하면서도,“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배워도 될까?”란 회의를 불러일으키는 대목도 분석대상 교과서 대부분에서 발견됐다고 지적한다. ●핵폐기장 문제 등 ‘님비´ 탓으로 우선 환경문제의 주체와 원인 등에 대한 입체적 접근이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 디딤돌출판사에서 펴낸 고교 1년 사회교과서 ‘열대우림 파괴’(120쪽) 대목이 대표적이다. 그림설명을 통해 “열대림 축소의 주 요인은 (원주민의)화전경작 때문”이라고 썼을 뿐 다른 어떤 요인도 제시하지 않았다. 요컨대 지구의 ‘산소통’ 역할을 하는 열대림이 빠른 속도로 감소해 인류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는 원인을 전적으로 원주민 탓으로 돌린 셈이다. 조지연(서울 양재고) 교사는 “열대우림 파괴의 가장 큰 원인은 선진국의 목재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벌목과 (대부분 선진국에서 소비되는)식육용 가축을 키울 목장을 만들기 위한 벌채”라면서 “이런 사실을 누락시킨 것은 사안을 왜곡시킨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사회적 쟁점과 갈등을 불러일으킨 환경문제에 대한 편향된 시각도 노출됐다. 거의 모든 고1 사회교과서들이 핵폐기장과 화장장, 쓰레기소각장 건설과 지역주민의 반발을 언급하면서 이를 ‘님비(NIMBY·내 뒷마당엔 안된다)’ 및 지역이기주의 현상으로 부각시켰다. 직접적으로 환경권·건강권을 침해받는 주민쪽에서의 접근은 부족한데, 이럴 경우 민주사회에선 당연한 시민의 권리주장을 학생들이 부정적 안목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한다는 얘기다.‘성숙한 시민의식의 출발점’이란 시각을 제공할 순 없더라도 최소한 균형잡힌 관점을 갖추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정책에 대한 ‘일방적 편들기’에 가까운 중3 교과서의 기술은 특히 문제로 꼽혔다. 핵폐기장 등 사례에서 주민과 환경단체는 이유없는 반발의 당사자로, 정부는 ‘국가 중요사업이 갈등으로 표류하는 것을 걱정하는 산업자원부 관계자’ ‘반발하는 주민들을 일일이 방문하는 공무원’ 등으로 묘사됐다. 이수종 사무처장은 “사례로 든 대부분의 환경쟁점 사안들이 진행과정이나 근본 원인에 대한 설명을 배제한 채 그저 갈등을 겪는 일반적 사건으로만 설명돼 있다.”면서 “다양한 관점 제시없이 갈등사례를 반복 나열할 경우 환경현안을 기계적·습관적으로 바라보도록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환경교육 양·질 향상시켜야” 중·고교에 환경과목이 선택적 독립교과(중학교는 ‘환경’, 고등학교는 ‘생태와 환경’)로 신설(1995년)된 지 10년이 지났다. 환경문제가 국내·국제적으로 인간의 삶과 생태계 전반의 화두로 떠오른 추세에 맞춰 환경교육의 관심도 꾸준히 높아져 왔다. 그러나 양적 측면에서의 환경교육은 지난해 하향곡선을 그렸다.2000년대 들어 3년 연속 증가해 온 일선학교의 환경과목 선택률이 지난해 뚝 떨어진 것이다.(그래프 참조) 중학교의 경우 전국 2858개교 가운데 368개교(12.9%), 고등학교는 2071개교 중 565개교(27.3%)로 전체 평균은 18.9% 수준에 불과했다. 더욱이 전체의 절반을 웃도는 부산(78%)과 충북(55%)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도는 5∼10%대 수준에 그칠만큼 관심도가 낮았다. 이 사무처장은 “학교 환경교육의 교육적 효과가 의문시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면서 “여러 선진국처럼 모든 교과에서 분산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환경교육 내용들이 생태적 합리성을 갖추도록 수정·보완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현재 환경관련 교과의 교육과정 개정을 진행 중인데, 교육부 연구용역을 맡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다음달 개편시안을 마련해 공청회를 열 계획이다. 환경부는 “현재로선 선택과목인 환경교과를 의무화로 바꾸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이창규 민간환경협력과 사무관)”이라고 판단, 각 과목에 환경관련 교육의 양과 질을 확충·강화하는 쪽으로 추진해 나갈 방침이다. 우리의 ‘미래 세대’에게 환경과 사회, 인간의 삶과 생태계를 바라보는 올바른 안목을 키워 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은호기자 unopark@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8) 천문은 ‘정감록’의 기둥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8) 천문은 ‘정감록’의 기둥

    예언서 ‘정감록’을 한 채의 기와집에 비유하면, 정면 기둥은 풍수지리와 미륵신앙이 아닐까 한다. 얼핏 눈에 잘 띄진 않으나 집의 뒷면에도 기둥은 있는 법이다. 천문과 역법이 그에 해당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풍수와 미륵에 대해선 그동안 제법 자주 이야기를 해온 셈이다. 하지만 천문과 역법에 관해선 따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한꺼번에 많은 이야기를 다 털어놓자니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그래서 이번에는 우선 천문사상이 ‘정감록’에 남긴 흔적을 더듬어 보았으면 한다.‘정감록’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혜성이 진성(軫星) 머리에서 나타나 은하수로 들어간 뒤 다시 자미(紫微)를 범하고 두미(斗尾)로 옮았다가, 두성(斗星)을 거쳐 남두(南斗)에서 멈출 것이다. 그러면 대중화(大中華)와 소중화(小中華)가 일시에 멸망하리라.”(감결) 이것은 정감의 예언이다. 그는 여러 별자리에 괴변이 일어나면 중국(대중화)과 한국(소중화)이 동시에 망한다고 했다. 요모조모 ‘정감록’을 잘 뒤져보면 비슷한 내용이 자꾸 눈에 띈다.“진성(軫星) 머리에서 혜성이 나와 몇 달 동안 없어지지 않네. 그 뒤 별들이 남극(南極)에서 싸우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네. 하늘 길이 한번 트이니 하늘 북이 두 번 울리네.”(삼도봉시) 조선건국의 주역 정도전이 지었다는 예언시의 일절이다. 실제로는 위작이 분명한데 이 시에 등장하는 천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좀더 새겨봐야겠다. 비록 그렇다 해도,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보자.“자미(紫微)에 저녁 무지개가 떴네. 다시 들러서 동쪽으로 나뉘니, 나라에 변괴가 있고, 상사가 참혹하네.”(경주이선생가장결) 역시 천문을 살펴 자미성에 이상한 징후가 일어날 경우 나라에 변괴가 있다고 예언하였다.‘정감록’에서 이와 엇비슷한 예언을 찾아내 일일이 언급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나라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과 혜성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사람들은 28수(宿)를 중시했다. 이것은 황도(皇道)에 가까운 별자리들이었다. 황도란 지구에서 태양의 운행괘도를 일년간 연속적으로 관찰할 때 하늘에 그려지는 하나의 원이다.28수는 황도의 동서남북에 각기 7개씩 배치돼 있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관심을 표했던 별자리는 기성(箕星·궁수좌), 벽성(壁星·페가수스좌), 익성(翼星·바다뱀좌) 그리고 진성(軫星·까마귀좌)의 4개였다. 특히 진성에 대한 관심은 아주 유별났다. 이 별자리를 이른바 “청구칠성”이라 하여 청구 또는 한반도의 운명을 주관하는 것으로 보았다.‘정감록’에서도 진성의 머리에서 혜성이 나오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예언한 것은 그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 뿌리를 캐 보면 진성은 신라의 국운을 담당하는 별자리였다. 헌덕왕 7년(815)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단초를 발견한다. 그 해 서쪽 변방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그러자 도적 떼가 연달아 일어나 조정에서는 군대를 파견해 토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변고를 예언케 하는 천문 현상이 있었고 문제의 별이 등장한다.“큰 별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서 나타나 서쪽을 향해 뻗어 갔다. 그 빛의 길이가 여섯 자쯤 되고 너비가 두 치나 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큰 별은 혜성이다. 만일 아니라면 별의 길이와 너비가 그처럼 컸을 턱이 없다. 혜성이 서쪽으로 움직여 가자 천문을 담당하는 신라의 관리들은 반란의 진원지가 서쪽임을 알게 되었다. 하필 혜성이 익성과 진성 사이에서 시작된 것은 두 별자리가 28수 가운데 서로 이웃해 있기 때문이다. 익성과 진성은 이른바 남방주작(南方朱雀)에 해당한다. 황도의 남쪽에 있어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 방금 말한 두 개의 별자리 말고도 정(井), 귀(鬼), 유(柳), 성(星), 장(張)의 다섯 별자리가 더 있다. 통일신라 이후 한반도의 운명은 진성에 달린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엔 사정이 달랐다. 고구려의 운명은 서쪽 하늘의 별들이 맡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중국 측의 역사기록에 나와 있다.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4월, 필(畢)과 묘(昴) 사이에서 혜성이 관측되었다. 그러자 허경종(許敬宗)이 보고하기를,“혜성이 거기 나타난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입니다.”(‘삼국사기’, 권 22)라고 하여 당 태종을 기쁘게 하였다. 허경종은 천문에 능한 당나라 관리였다. 그 역시 ‘정감록’이나 ‘삼국사기’와 똑같은 방식을 써서 고구려의 비참한 종말을 예언했다. 필성과 묘성은 모두 황도 서쪽의 별자리들이다. 묘성(황소자리)은 누(婁) 및 위(胃)와 더불어 호랑이 새끼 3마리로 여겨졌고, 필성(오리온자리)은 호랑이의 입으로 이해되었다.‘정감록’을 전파한 조선후기의 술사들은 되도록이면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고자 했다. 그런 그들도 고구려의 별인 백호를 저버리고 주작(진성)을 국운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통일신라 이후 천년 동안 내리 지속돼 온 전통의 무게를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미, 남북두성, 그리고 남극성에 숨은 뜻 변란을 알리는 혜성은 ‘정감록’에 객성(客星) 또는 요성(妖星)으로 나온다. 혜성은 때로 자미를 침범하거나 북두칠성, 남두육성도 쳐들어간다. 심지어 남극성을 유린하기까지도 한다. 이들 별자리는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 자미는 이른바 북쪽 하늘을 셋으로 쪼갰을 때 그 가운데 하나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태미(太微), 천시(賤視) 및 자미를 삼원이라고 했다. 달리 말해, 자미는 북두칠성의 북쪽에 위치한 별로 천자 또는 임금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일찌감치 백제 기루왕 9년(85) 4월에 이미 객성이 자미를 침범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왕위를 찬탈하려는 시도가 있으리라는 예언이었다.‘정감록’은 18세기에야 등장했다고 할 때, 최소한 그보다 1600년이나 앞서 반역에 관한 천문예언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밤하늘을 수놓은 숱한 별자리 가운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다 아는 것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이다. 그 반대편인 남쪽 하늘엔 남두육성(南斗六星·궁수좌)이 있다. 이 별들은 상징하는 바가 다르다.7성은 죽음을 관장하는 별로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섬겨왔다. 그에 비해 6성은 삶의 세계를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늘날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6성은 서양식 명칭으로는 궁수좌인데,28수의 하나인 기성과 중복되기도 한다. 그 옛날 고구려 사람들은 별자리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고구려 고분벽화들을 보더라도 틀림없이 그랬다. 지금까지 모두 22개나 되는 고분에서 다양한 별자리 그림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북두칠성은 19개의 고분에 등장하고 있으며, 남두육성 역시 최소한 10군데서 확인되었다.6성이 발견된 고분벽화에는 7성이 어김없이 짝을 이뤄 나타난다. 고구려인들은 두 별자리를 함께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요컨대, 생과 사를 주관하는 별자리가 6성과 7성이었다. 그런데 혜성이 그 별들을 모두 침입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전란, 굶주림, 또는 질병으로 수많은 인명이 살상될 조짐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정감록’은 한국 고대의 천문 전통에서 이런 예언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기성(箕星)이 희어질 무렵 피가 흘러 절구공이가 떠내려가고, 천리가 한 책상이 되니 갑옷에 두 뿔이 나는구나.”(정북창비결)라는 구절이 있다. 남두육성으로 볼 수도 있는 기성은 태풍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이 별자리가 풍해를 막아준다며 받들기도 한다. 최근 미국 남부지방을 강타한 허리케인도 기성과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피가 강물을 이뤄 민가의 절구공이가 떠내려갈 지경이라면 단순히 자연재해로 간주하기 어렵다. 전란의 피해로 봐야 옳을 것도 같다. 인용문의 뒷부분에 갑옷이 등장한 점으로 볼 때 더욱 그렇다. 흉조라는 점에선 남극성(노인성이라고도 함)을 당해낼 별이 없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이던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기로 결심한 것도 남극성을 보았기 때문이라 한다. 경순왕 8년(934) 9월 그 별이 나타나자 왕은 고심했고, 이듬해 10월 마침내 항복문서를 바쳤다.(‘삼국사기’ 권 12) 때로 남극성은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풀이된다. 남극성이 빛을 발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더구나 ‘정감록’에서 보듯 혜성이 남극성을 침범하는 경우라면 기성 왕조가 완전히 붕괴되고 만다는 예언으로 풀이된다. 혜성뿐만 아니라 무지개가 별을 꿰뚫을 경우도 흉조로 해석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백홍(白虹·흰 무지개)이 해를 꿰뚫고 지나간다는 예언이다. 이것은 국왕이 바뀔 징조로 여겨졌다. 예컨대 고려 현종 5년(1013)에도 “흰 무지개가 관일(貫日)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는데,‘정감록’에도 유사한 표현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오성의 변괴 이밖에도 ‘정감록’엔 오성 즉, 목성, 화성, 금성, 수성 및 토성의 변화에 대한 언급이 제법 많다. 물론 국가의 운명이 그와 직결된다는 전제 아래 끔찍한 예언이 도처에 숨겨져 있다. 우리 역사를 잘 살펴보면 오성은 사실 고대로부터 큰 관심거리였다. 고구려 차대왕 4년(149) 5월에 이런 일이 있었다. 오성이 동쪽하늘에 모였다. 목성(세성 歲星), 화성(형혹 熒惑), 금성(태백 太白), 수성(진성 辰星) 및 토성(진성 鎭星)이 한자리에 늘어선다는 것은 정말 희귀한 일이지만, 그것은 실상 흉조였다. 그러나 담당관리인 일자(日者)는 왕이 화낼까 걱정돼 거짓말로 둘러댔다.“이는 임금님의 덕이요, 나라의 복을 뜻합니다.” 왕은 그 말에 만족하였다.(‘삼국사기’ 권 15) 고구려는 일찍부터 천문이 발달한 나라였다. 고분벽화마다 별자리를 그려놓을 정도였으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국초부터 조정에 천문을 담당하는 특수 직책이 설치돼, 별을 보고 국운을 점치는 관리가 존재했다. 오성에 관한 예화에서 보듯 가끔은 담당관리가 국왕을 속이는 일도 있었다. 예언이라면 고려나 조선시대처럼 풍수가 아니라 천문이 근간을 이뤘다. 그런데 오성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길조로 해석될 때도 있었다. 고려 인종 10년(1132) 11월 동짓날, 오성은 물론 해와 달까지, 그러니까 칠요(七曜)가 정북방향에 모여들었다. 인종은 이 같은 길조가 예언서에 이미 예고돼 있다며, 국정을 일신할 중요한 계기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고려사’ 권 16) 칠요가 한 곳에 모이는 것은 신라 때부터도 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삼국통일의 명장 김유신은 칠요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을 뜻하는 점이 있었다 한다. 영웅이 될 기상을 가진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삼국유사’) 본래 칠요란 개념은 서양 고대에 있었던 것이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별의 신들이 인간세상을 관장한다고 보았다. 성신(星辰) 신앙이라고 할 만하다. 별의 신들은 전쟁, 흉년, 지진, 가뭄과 홍수를 마음대로 하며, 모든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어졌다. 특히 행성인 오성과 해와 달을 합한 칠요는 더욱 중요시 됐다. 칠요의 신들은 시공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사를 맡아본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칠요신앙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양에도 전파된 것 같다. 김유신이 태어난 7세기에는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한국 고대에 칠요신 특히 그 가운데서도 오성의 신들이 열렬한 신앙대상이 돼 있었다는 점은 다른 역사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태봉의 발풍사란 사찰에는 석가여래상 앞쪽에 토성(塡星 또는 鎭星)의 신을 새긴 조각이 봉안돼 있었다 한다.(‘고려사’ 권 1) 궁예 왕은 토성의 신을 예언서 ‘고경참’의 저자로 믿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오성과 칠요의 신은 한국 민중의 뇌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잔영은 ‘정감록’에 여전히 남아 있다.“계축년에 세성(歲星·목성)이 바다에 잠기니 왕자가 섬으로 도망친다.”(오백론사)라고 했다. 목성은 천문학상 매우 중요한 별이다. 그 공전궤도를 12등분해 목성이 처한 위치에 따라 한 해의 이름을 다르게 불렀을 정도다. 이를 세성기년법(歲星紀年法)이라 하는데, 목성에 일어난 자그만 변화도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뒤바꾸는 징조로 이해됐다. 화성의 변화도 중요한 조짐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려 때 달이 형혹성(熒惑星·화성)을 침범하자 일관(日官)은 “귀인이 죽을 것입니다.” 라고 풀이하였다. 최근 발견된 ‘송하비결’에도 화성에 관한 예언이 실려 있다.“형혹성이 기성을 범하리니 북쪽 문에서 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누런 용이 여의주를 얻으리라.” 혹자는 화성이 목성을 침범했으므로 한반도엔 전쟁에 버금갈 만한 큰 변고가 일어난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화성은 화란 또는 전쟁의 징후를 알려주는 별이고, 목성은 가득차거나 이지러지거나 또는 변화가 멈춘 현상을 보여주는 별이라서 그렇다 한다. 목성은 나라의 명운을 예고하기에 적합한 별이라는 것이다. 이런 목성을 화성이 쳐들어갔다는 것은 나라에 병란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정감록’엔 금성과 수성에 관계되는 흉한 예언도 많은 편이다.‘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기록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역사에는 오성의 길조가 꽤 많이 언급됐다는 사실이다. ●복성이란 존재 ‘정감록’에도 천문에 관한 예언이 길조로 나타난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산의 동쪽과 삼남(三南)에 복성(福星)이 두루 비친다.”(서계이선생가장결)라고 한 대목이다. 복성은 녹성(祿星) 및 수성(壽星)과 더불어 삼성이라 일컬어진다. 보통은 북두칠성의 왕별인 무곡성을 복성으로 믿고 있다. 조선후기의 유명한 고소설인 ‘토끼전’에선 복덕성(福德星)으로 간주해 목성으로 본다. 복성에 관해 한 가지 재밌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변도탄이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그는 천문에 밝았다. 군량미를 관리하는 관원으로 일하던 중 어느 날 우연히 천기를 보았더니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역력했다. 그는 국난에 대비해야 된다고 상소했으나, 인심을 흉하게 만든다며 도리어 관직만 빼앗겼다. 변 선비는 낙향을 결심했는데 어느 날 밤 복성(福星)이 남쪽으로 밝은 빛을 내뿜는 것을 보았다. 그는 평소 저장했던 양식을 소달구지에 싣고 복성의 빛을 따라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기를 여러 날 동안 하다 전북 장수군 번암면의 한 골짜기에 도착했다. 복성의 인도를 따른 것이다. 과연 얼마 안 되어 왜적이 침입해 온 나라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변 선비가 터를 잡은 곳은 아무 일도 없었다.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미리 앞을 내다 본 변 선비의 뛰어난 지혜와 충성심에 감탄해 상을 내려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복성(福星)마을을 이루게 됐다 한다. 복성을 따라 피난처를 구했다는 전설이나 복성을 보고 길지를 찾을 수 있다 한 ‘정감록’ 예언은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연상하게 만든다. 그들 역시 별빛의 인도로 먼 길을 걸어 아기 예수에게 경배할 수 있었다 했기 때문이다. 이제 도시의 하늘에선 더 이상 별빛을 보기 어렵다. 별을 봤댔자 어느 별이 어느 별인지 구별도 못할 만큼 현대인들은 천문에서 멀어졌다. 별은 더 이상 우리의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족상보는 미모의 전직여교사

    족상보는 미모의 전직여교사

      확대경을 손에 쥔 손이 창백하리만큼 새하얗다. 곱상한 얼굴, 미인형이다. 서울 서대문구 한구석의 담뱃갑만한 골상소(骨相所) 내실. 젊은 여류역학자는 골상도 수상도 아닌, 바로 족상(足相)에 심취해 있다.『구정 원단(元旦)엔 족상을 봅시다』신종 족상소의 열띤 개점사(開店辭) - . 대학나온 젊고 예쁜 미망인이 냄새나는 발도 주무르며 『발은 나무에 있어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몸을 받치고 또 걸어다닐 수 있도록 버팀으로써 막중한 소임을 맡고 있죠. 골상(骨相)과 수상(手相)에 못지 않게 발의 형태는 그 삶의 운명을 점치는 하나의 예시적, 영감적 존재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임경산(林景山)(여·35) 족상가는 열을 올린다. 미모 - 서른 다섯의 젊은 미망인. 대학 출신에다 전직이 여학교 교사라는 좀 별난 이력서가 이 여자「관상장이」를 감싸고 있다. 전문이 골상과 수상인데 이번에 업종을 하나 더 추가, 족상업을 차렸다. 서대문에서 아현동으로 이르는 큰 길목, 옛「코리어·호텔」옆 후미진 자리에 자리잡은 임경산 골상소. 손님이 많다. 양말을 벗고 알몸뚱이(?)가 된 발을 내맡긴다. 확대경이 발의 구석구석을 답사하고 나면 미녀 족상가는 이윽고 발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발의 경도(硬度), 두께, 전체 모양 등을 샅샅이 검열하는 것이다. 『수상이나 족상은 허망한 미신이 아닙니다. 확고한 통계적 학문이에요. 파란만장한 인생항로에 있어 시기의 성쇠라든지, 직업의 적부, 또는 선천적 능력의 대소 같은 게 없을 수 없잖아요? 여기에 태국,「프랑스」, 독일, 일본 같은 데서 오히려 성행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족상을「통계적 학문」에다 얽어 맨다. 수상이 초·중·말의 유년법(流年法)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반해 족상은 영구불멸의「대활(大活)」이 제1의. 수상이「가변(可變)」이라면 족상은「불변(不變)」인데 그 기저(基底)가 있다고 했다. 임경산씨가 역학을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부터였다. 향리인 충북의 D시에 사숙하던 스님이 한 분 있었는데 자신의 운명이 스님의 예언과 너무나 일치되어 버린데 감명, 재혼 대신 역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 이제는 사주·골상·수상에다 족상까지 섭렵하여 명실공히 역학계의「명인좌(名人座)」에 올랐다고 자부할 정도. 발바닥에 털 있으면 귀인상이요 사마귀 있으면 큰 무사감 사람의 발엔 방향(芳香)이 있다. 특히 도시 남성의 그것은 말할 수없이 썩은 향내를 종횡무진 풍기고 있다. 그 냄새나는 발에 내밀히 감춰져 있는 운명과 신비의 의미를 발굴해내는 작업이 족상이란 이름의 역술(易術). 옛날 중국의 안녹산(安祿山)은 두 발바닥에 사마귀가 있었다. 얼마 전에 작고한 국군 창설의 유공자인 K장군 발바닥에도 큰 사마귀가 있었다. 족상에서 사마귀는 무장(武將)운. 발바닥에 털이 나면 대귀(大貴)상인데 중국 한문제(漢文帝)가 그랬다. 족상에서 옛 중국의 실존인물들이 예거되는 것을 보니 그것의 역사는 수상과 함께 꽤 오래된 모양. 임경산씨는 69년을「족상보는 해」로 스스로 설정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골상과 수상만이 일반에 광범히 뿌리박고 있었는데 골상은 기실 족상이 뒤따라야 진면목이라는 것. 『발금은 거짓이 없어요. 있는 그대로의 운명과 성질을 무언중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족상이야 말로 진실의 학문이지요』 족상은 보통 족형(足形)과 족문(足紋)으로 이루어진다. 수상이 생명, 두뇌, 감정, 운명, 태양, 재운, 건강, 방종, 인기, 수경(手頸), 총애, 피로, 장해, 화성(火星), 영향, 희망, 원조, 금성(金星), 자녀, 직감 등 21선의 수장(手掌)선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비하면 족상은 그「폼」이 간단한 셈. 발은 방정하게 생기고 두터우며 길고 보드라운 것이 길상(吉相)이다. 무늬가 글자 모양으로 된 것, 사마귀가 있는 것, 빛깔이 윤택한 것 등은 모두 좋은 상이며 반대로 짧고 작은 것, 얇거나 거친 것, 단단한 것, 무늬가 없는 것 등이 천상(賤相)으로 평가되고 있다. 『옛날 이태백은 발바닥에 거북무늬가 있었다고 합니다. 거북무늬나 비단무늬 같은 것은 다 길상이지요. 탐스러운 꽃무늬도 좋은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골상소 개업 10년 만에 족상소를 개설한 이「여류」의「족상관」은 자신과 신념으로 싸여 있다. 자신의 족상은 백발백중이라고 기염. 입시「시즌」과 구정을 맞아 임경산 골상소는 그야말로 초만원, 족상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금년은 천대만 받던 발이 햇빛을 보게 되는「족권신장의 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발의 두께 4치 넘으면 거부(巨富)상이요 발가락이 길면 어진 사람 ◇ 족형의 판단 ① 발의 두께가 네 치(4寸)를 넘으면 거부의 격이다. ② 발가락이 가늘고 길면 충량하고 어질다. ③ 발가락이 고르고 단정한 것은 호걸이며 현인의 상. ④ 남자가 오리다리 같으면 평생 어리석고 천하며 여자가 오리다리이면 남의 첩이나 종노릇을 한다. ⑤ 발이 커도 얇거나 발바닥이 평평한 것은 비천하다. ⑥ 귀인의 발은 작아도 두텁고 비천한 사람의 발은 커도 얇다. ⑦ 발바닥 아래로 거북이 들어갈만하면 부귀를 얻는다. ◇ 족문의 판단 ① 발바닥에 꽃무늬가 있으면 재산을 많이 모은다. ② 발바닥에 거북무늬나 비단에 수놓은 무늬 같은 것이 있으면 다 좋은 상이다. ③ 열 발가락이 모두 둥근 무늬면 성격이 야비하다. ④ 발바닥에 무늬가 많으면 크게 자손이 번창한다. 무늬가 전혀 없으면 가난하다. ⑤ 발바닥의 십자(十字)문, 금(禽)문, 인형(人形)문, 도형(刀形)문은 모두 고관대부의 격이다. ⑥ 열 발가락에 모두 무늬가 없으면 파재(破財)가 많다. ⑦ 발가락 여덟 개에 소라무늬가 있는 것은 부귀할 격이다. 그러나 열 발가락이 모두 소라무늬면 오히려 성품이 야비할 상이다. [ 선데이서울 69년 2/16 제2권 7호 통권 제21호 ]
  • [실전 논술]열린사회와 닫힌사회

    [실전 논술]열린사회와 닫힌사회

    논술시험의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2008학년도부터 입시제도가 바뀌면 논술시험의 비중이 더 커지고 통합형 출제로 지금보다 더 어려워진다.‘SEOUL IN’에서는 ‘영화속 수능잡기’와 논술 책 소개 연재를 마치고 논술 전문강사인 이석록 서울 대치메가스터디원장이 집필하는 ‘실전 논술’을 새로 연재한다. ●문제 다음 글에서는 우리가 ‘열린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가 현대 사회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열린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가정한다면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개인이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논술하시오.(1600자 내외±200자로 쓸 것.) 우리들 자신의 생활 방식은 여전히 금기들―음식에 대한 금기, 예절에 대한 금기, 그리고 다른 수많은 금기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우리 자신의 생활 방식에서, 한편으로는 국가의 법률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습관적으로 지키는 금기 사이에 문제와 책임을 수반하는 개인적인 넓은 결단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개인적 결단은 금기와 이미 금기가 아닌 정치적 법률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이런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반성의 가능성에 있다. 합리적인 반성은 어떤 점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부터 시작된다. 알크메온, 파레아스, 히포다무스, 헤로도투스, 소피스트와 함께 전개된 ‘최선 체제’에 대한 요구는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문제의 성격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새로운 입법의 필요성이나 다른 제도적 변화의 필요성에 관해 합리적인 결단을 내린다. 말하자면 가능한 결과를 평가하고, 그 결과 중 어떤 것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인의 합리적인 책임을 인정한다. 이제부터는 마술적 사회나 부족 사회, 혹은 집단적 사회는 ‘닫힌 사회’라 부르며, 개개인이 개인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는 ‘열린 사회’라 부르고자 한다. 전성기에 있는 ‘닫힌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에 그대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국가 유기체 이론이나 생물학적 이론은, 상당한 범위에까지 ‘닫힌 사회’에 적용될 수 있다.‘닫힌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반생물학적 유대―함께 살며, 공통적인 노력과 공통적인 위험, 공통적인 기쁨과 공통적인 고통을 함께 나누는 혈족 관계―에 의해 함께 묶여 반(半)유기체적 단위로 존재하는 한 집단이나 부족과 비슷하다.‘닫힌 사회’는 여전히 구체적인 개인들의 구체적인 집단으로서, 노동의 분업이나 상품의 교환과 같은 추상적인 사회 관계에 의해서 상호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만져 보고 냄새 맡고 바라보고 하는 구체적인 육체적 관계에 의해 맺어진 사회이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노예 제도에 의존하고 있을 때, 노예란 가축이 있다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측면이란 ‘열린 사회’에서는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 높아지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사실과 결부되어 있다. 예컨대, 이런 것은 계급 투쟁과 같은 중대한 사회적 현상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국가적 유기체 속에는 계급 투쟁과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유기체의 세포나 조직―종종 국가의 구성원 개개인에 대응한다.―은 영양분을 얻기 위해 경쟁할지는 모르겠으나, 다리가 머리가 되고자 한다든가, 몸의 어느 다른 부분이 배가 되고자 하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노력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기체 속에는 ‘열린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인 구성원들 간의 지위 다툼에 해당되는 것이 없으므로, 소위 국가 유기체 이론은 그릇된 유추에 근거한 것이다.‘닫힌 사회’는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을 지니고 있다. 계급을 포함한 ‘닫힌 사회’의 제도는 신성 불가침한 금기이다. 유기체 이론은 여기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다 유기체 이론을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거의 다 부족주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선전의 감추어진 형식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열린 사회’는 유기체적인 특성이 없으므로 필자가 ‘추상적 사회’라 부르고자 하는 사회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열린 사회’는 구체적이거나 실제적인 인간 집단 및 그런 실제적인 집단 체제가 갖는 특성은 상당히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 실제로 아무와도 대면하지 않는 사회―모든 일이 타이프된 편지와 전보로 의사 교환을 하고, 또 밀폐된 자동차로 돌아다니는 고립된 개인에 의해 처리되는 사회―를 생각해 볼 수 있다(유전자 조작은 인간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 변식까지도 허용할 것이다). 이런 허구적인 사회가 ‘완벽한 추상적 사회’나 ‘비인격적 사회’라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흥미 있는 점은 우리의 현대 사회가 그 양상의 여러 면에서 이런 완벽한 추상적 사회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비록 늘 혼자서 밀폐된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거리에서 우리를 지나쳐 걸어가는 수천의 얼굴과 대면하지만―결과는 우리가 그렇게 한 것과 거의 비슷하다. 즉, 우리는 같은 보행자들과는 대체로 아무런 개인적 관계를 만들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는 친밀한 인간적 접촉을 거의 갖지 않고, 익명과 고립 속에서, 그리고 그 결과 불행 속에서 사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사회는 비록 추상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추상적 사회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사회적 요구를 갖고 있다. 물론 완벽한 합리적 사회가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추상적 사회도 없을 것이며, 있을 수도 없다. 인간은 여전히 실제적인 집단을 형성하고, 모든 종류의 인간들과의 실제적인 사회 접촉을 하며, 자신의 정서적 사회적 욕구를 가능한 한 충족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운이 좋은 몇몇 가족 집단을 제외하고는) 현대 ‘열린 사회’의 사회 집단 대부분은 불쌍한 대용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동 생활을 창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 중의 대다수는 사회 생활에서 아무런 기능도 발휘하지 못한다. 논의가 여기에서 멈추고 만다면 추상화된 사회의 단점만이 부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출생과 관련된 관계를 떠나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신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인간 관계와 이울러 새로운 개인주의가 발생한다. 그와 유사하게 정신적 결속은 생물학적 결속이나 육체적 결속이 약화된 곳에서 그 주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장점들은 있지만, 어쨌든 간에 이러한 예들이 보다 구체적이거나 사실적인 사회 집단과 대치되는 보다 추상적인 사회가 의미하는 바를 명백하게 밝혀 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현대 ‘열린 사회’가 교환이나 협동과 같은 추상적인 관계에 의해 상당한 기능을 한다는 것도 분명하게 해 줄 것이다. -칼 R 포퍼,(열린 사회와 그 적들) ●지문의 배경 이해하기 역사는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의 투쟁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열린 사회는 인류가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사회이다. 열린 사회란 사회과학 방법론에서 말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사회를 말하는데, 전체주의에 대립되는 개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사회의 급진적 개혁보다는 점진적이고 부분적인 개혁을 시도하는 점진주의 사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닫힌 사회’에서는 국가가 시민 사회 전체를 규율하면서 개인의 판단이나 책임은 무시하는 데 반해,‘열린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확보된 사회이며, 개인이 그의 이성에 입각해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사회를 의미한다. 포퍼는 이러한 ‘열린 사회’의 최대의 적은 역사주의라고 규정하고, 이것을 질타한다. 그것은 첫째 역사주의가 말하는 역사 진행 법칙에 의한 예언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다. 그는, 예측은 과학적 탐구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이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가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그 어떤 필연의 법칙 혹은 운명에 인간을 가두어 놓음으로써 인간의 이성을 최소화시킬 뿐 아니라, 인간의 창의적인 이성의 활동을 시들어 버리게 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역사주의라 불리는 전체론, 역사적 법칙론, 유토피아 주의에 반대하고, 이를 ‘열린 사회’의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출제 의도 제시문에서 글쓴이는 역사를 통해 이미 존재해 온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의 특성을 비교하고 있으며, 닫힌 사회의 유지 원리에 대해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닫힌 사회에 대한 논리적 반박이 아니고 열린 사회의 특성과 그 실현 가능성, 그리고 열린 사회로 가기 위해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출제자는 우선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의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완전한 열린 사회가 아니므로, 우리 사회에서 제거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주목해야 한다. 또한 열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개인의 역할에 대해서 논하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이 문제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논제는 먼저 지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력과 분석력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고, 그것을 다른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지와 추론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다. ●생각하기 최근의 논술 문제는 대부분 고전의 일부분을 제시하는 ‘자료 제시형’인데, 제시문의 범위상 고전 작품 전체를 보여 줄 수 없기 때문에 부분 발췌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제시문에만 집착하다 보면 글쓴이의 의도와는 다른 의미로 해석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자기가 읽은 책이나 작품이라면 전체적인 내용을 음미해 보아야 하고, 그렇지 못하다면 글쓴이의 의도와 관련지어 내용을 분석해야 한다. 대개의 출제자는 어느 한 부분을 발췌하더라도 그 책이나 작품의 주제에 해당하는 부분을 선택하게 되므로, 정독하면 글쓴이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필요하다면 내용의 중심을 이루는 어휘들을 간단한 도표로 정리해 보는 것도 효과적인데, 이 글의 내용을 도표를 이용하여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떻게 쓸까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한 개요를 작성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주제는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가기 위한 개인의 역할 정도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사회가 열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개인은 타인과의 합리적인 조화를 이루기 위해 이성적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끊임없는 자기 혁신을 통해 열린 사회에 적합한 인간형으로 탈바꿈해 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글의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는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는 내용과 말하고자 하는 글의 방향이 제시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인류가 보다 나은 사회 여건 조성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를 토대로 개인의 욕망과 사회의 질서 사이에 마찰이 생긴다는 점과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본론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본론에서는 먼저 논의의 범위를 어느 정도 정리하기 위해 먼저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면서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가 추구하는 목표와 존재 방식이 무엇인지 논의하면 된다. 특히 그러한 점을 현실 사회의 특성과 연관지어 논의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들은 실제 닫힌 사회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점을 토대로 하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논의의 핵심을 제시해야 한다. 사회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제도적인 측면에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점 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하여 전제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제도적인 측면도 중요하지만 인간의 이성적 역량 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마무리하면 된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7) ‘고구려비기’ 에서 만난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7) ‘고구려비기’ 에서 만난 ‘정감록’

    ‘정감록’의 일부인 ‘감결’에는 역대 왕조의 수명을 논한 대목이 있다.“곤륜산의 내맥(來脈)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가 평양에 이르렀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천년의 운수가 지나 그것이 송악으로 옮겨졌다. 송악은 오백 년 도읍할 땅이나, 요승(妖僧)과 궁녀가 난을 꾸미는 바람에 지기(地氣)가 쇠하고 천운이 막혀 운은 다시 한양으로 옮길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읍은 평양 천년, 개성(송악) 오백년을 거쳐 한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정감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구절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아스러운 점이 있다. 한양은 조선의 수도, 개성은 고려 때 도읍지였다. 고려 이전의 도읍이라면 당연히 신라 천년의 수도 경주가 논의돼야 한다. 그러나 ‘감결’엔 경주가 빠져 있다. 그 대신 평양이 맨 먼저 언급돼 있다. 그것도 세계의 지붕으로 알려진 곤륜산의 정기가 백두산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 지기가 더욱 왕성해진 형상이라 했다. ●술사들에겐 고구려가 중요했다 범상히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조선 후기 전국에 ‘감결’따위의 ‘정감록’을 유행시킨 술사들은 왜 평양을 중시했는가? 술사들의 역사인식이 관계되는 부분이다. 나는 위에 인용한 몇 줄의 간단한 이야기를 가지고 조선 후기 술사들의 정신적 계보를 추적해보려 한다. 그들에겐 고구려가 신라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한나라 이후 역대 중국 왕조와 자웅을 겨루던 고구려의 기상을 그리워했다. 술사들은 당나라라고 하는 외세를 불러들여 갖은 술수와 모략으로 고구려를 거꾸러뜨린 신라가 도무지 비위에 맞지 않았다.‘정감록’을 퍼뜨린 술사들이 대체로 함경도, 평안도 및 황해도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그들이 고구려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가졌던 이유를 이해 못할 것은 없다. 더욱이 평양은 고조선의 수도이기도 했다. 단군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나라의 터를 잡았다는 곳, 동방에 중국의 유교문명을 도입했다는 기자가 뒤를 이었다는 곳도 역시 평양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기자가 평양에서 실시했다고 하는 정전제(井田制·토지를 아홉으로 쪼개 가운데 한 개는 공공의 목적을 위해 공동경작하고 나머지는 농부들이 공평하게 나눠 경작한다는 제도)의 유적이 발견되었단 말도 있었다. 술사들은 그런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겐 같은 고대국가라 해도 한강 이남에 세워진 삼한 같은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거기서 갈라져 나온 백제와 신라와 가야의 역사도 상관없었다. 훗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였지만 신라는 그들에게 무의미한 나라였다. 술사들이 보기에 신라란 국가는 그저 고구려와 고려의 역사를 이어주는 단순한 이음매에 불과했다. 역사상 존재 의미가 있는 나라는 고조선, 고구려, 고려 및 조선이었다. 엄밀한 의미에선 조선도 불필요한 나라였다. 조선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붙일 때만 논의 대상에 가까스로 포함되었다. ●미래는 다시 개성의 시대 ‘감결’은 조선이 망하고 들어설 미래의 왕조도 차례로 언급하였다.“금강산으로 옮겨진 내맥(來脈)의 운이 태백산·소백산에 이르러 산천의 기운이 뭉쳐져 계룡산으로 들어가니, 정씨가 팔백년 도읍할 땅이로다. 그 후 원맥(元脈)이 가야산으로 들어가니, 조씨가 천년 도읍할 땅이로다. 전주는 범씨가 육백년 도읍할 땅이요, 송악으로 말하면 왕씨가 다시 일어나는 땅인데, 나머지는 자세하지 않아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정감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대강 다 아는 이야기다. 일단 왕기가 한양으로 옮은 다음 꽤 오랫동안 남부지방이 한국역사의 주무대가 된다는 예언이다. 충청도(계룡산), 경상도(가야산) 그리고 전라도(전주)가 한 번씩 돌아가며 권력을 쥐게 돼 있다고 했다. 집권기간은 경상도가 천 년으로 최장기간이고, 다음은 충청도(800년), 전라도(600년) 순이라 했다. 집권기간에 차이는 있으나 하삼도(下三道) 지역에서 순차적으로 집권자가 배출된다는 말이 흥미롭다. 광복 후 역대 정권의 위세를 내 나름으로 어림짐작해 보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순이 들어맞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경상도에 비해 전라도 출신들의 정치적 비중은 잘해야 6할이 될까 말까 하다. 이런 해석을 근거로 ‘정감록’ 예언이 적중했다고 환호성을 지를 사람도 있겠지만, 한낱 우연이라고 생각해도 그만이다. ‘정감록’에 담긴 놀라운 이야기는 미래에 관한 예언이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이 또다시 역사의 중심지로 떠오른다고 했다. 지금 한창 개발 중인 개성공단이며 개성관광을 지렛대 삼아 한반도의 통일이 이뤄지고, 통일한국의 수도는 서울과 평양의 중간 지점인 개성으로 낙착된다는 예언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가 사실상 한국사의 정통을 잇는다고 조선 후기의 술사들이 믿었다는 점이다. 서북 출신이었던 그들은 궁극적으로 고구려의 부활을 바랐다. ●고구려의 수명은 구백년이라는 예언 위에서 보았듯,‘정감록’은 어느 왕조의 수명은 몇 백 년이라는 식으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리 역사상 이런 방식의 예언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중국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新唐書)’를 보았더니 고구려에 그런 예언이 존재했다 한다. 그렇다면 ‘정감록’은 고구려의 예언서를 본떠 왕조의 수명을 몇 백 년이라고 논했다는 이야긴가? 고구려가 망하던 해, 고구려 보장왕 27년(688)으로 이야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당나라 군대는 한창 고구려와 전쟁 중이었다. 당나라의 고종 황제는 시어사(侍御史)인 가언충(賈言忠)을 전쟁터에 보내 전황을 점검하게 했다. 가언충은 이 전쟁이 당나라에 매우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며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란 예언서를 인용해 당 고종을 안심시켰다. 예언서에 따르면, 고구려는 건국된 지 “구백 년이 못 되어 80대장이 있어 멸망하게 된다.”고 했다(‘중국정사조선전’,‘신당서’). 가언충이 인용한 예언의 내용이 무슨 뜻인가? 다행히도 ‘삼국사기’에는 이 무렵의 사정이 좀더 상세하게 서술돼 있다. 그 해 2월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이끄는 군대가 고구려의 부여성(農安 근처)을 함락시켰고, 전세는 고구려에 무척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다. 가언충은 자국의 승리를 확신한 나머지 당 고종 앞에서 문제의 예언을 이렇게 풀이했다고 전한다. “고구려는 한나라 때 건국됐으므로, 이제 약 구백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당나라의 원정군 사령관인 이적 장군의 나이가 바로 80입니다. 지금 고구려는 흉년이 연달아 드는 바람에 백성들이 서로 물건을 약탈해 팔아먹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도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더지가 성문에 구멍을 뚫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인심은 무척 사납습니다.”(‘삼국사기’, 권 22) ●‘고구려비기’는 시어사 가언충이 조작했을 것 ‘신당서’와 ‘삼국사기’를 종합해 보면,7세기 후반에 고구려의 멸망을 예언한 ‘고구려비기’란 예언서가 유행했다.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 저술됐는지는 어디에도 밝혀져 있지 않아 안타깝다. 그러나 이 예언서의 저작에 관해 검토할 만한 단서가 없지 않다. 우선 고구려의 종말을 논의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고구려의 지배세력이 조작에 직접 개입했다고 간주하기 어렵다. 예언서의 내용이 당나라에 유리하다는 점은 또 하나의 단서가 된다. 게다가 이 예언서는 최초로 중국의 역사서에 언급되었다. 더욱이 왕조의 종말에 관한 예언 방식도 자세히 따져보면 한국적이지 않았다. 예컨대 백제의 멸망에 관한 6세기 후반의 예언기록과는 전혀 딴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사항을 종합해 볼 때,‘고구려비기’는 당나라가 조작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그들은 적국인 고구려 백성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려고 예언서를 날조해 고구려에 널리 퍼뜨렸다고 짐작된다. 알다시피 당나라를 비롯한 중국의 역대 왕조에 고구려는 힘겨운 상대였다. 무엇인가 특별한 조치가 없이는 설사 백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간다 해도 승산이 없어 보이는 그야말로 막강한 적수였다. 이런 관계로 당나라의 입장에선 요샛말로 대민(對民) 심리전술까지 동원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비기’가 등장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비기에 관해 당 고종에게 자세히 보고한 시어사 가언충은 ‘고구려비기’의 조작에 가장 깊숙이 간여했다는 가정도 성립한다. 본래 시어사란 벼슬은 글을 다루는 데 능숙한 문인에게 주어졌다. 당 고종이 승부를 점치기 어려운 격렬한 싸움터에 문사인 가언충을 파견한 것은, 한낱 그날그날의 전과를 보고하란 뜻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워낙 심리전에 능통한 전문가였기 때문에 피어린 전쟁터에서 당나라 군사들의 사기를 최대한 북돋우고, 고구려의 민심이 이반될 계기를 마련하란 특명을 받은 것이 아닐까? ‘고구려비기’를 해석할 때 가언충이 장차 고구려를 멸망시킬 ‘80대장’을 당나라 군대의 수뇌인 이적으로 해석한 것이 눈길을 끈다. 하필 이적이 고령이란 점에 주목한 것이 보통 일은 아니다. 보통은 그와 같이 늙은 장수는 원거리 출정에 동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당나라는 상례를 뒤엎고 수많은 젊은 장수를 물리치고 자력으로 움직이기도 힘들었을 노인을 머나먼 전쟁터로 보냈다. 적임자를 찾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80노인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사기가 저하될 염려가 컸다. 당 고종은 이점을 가장 염려했고, 그래서 평소 머리 좋기로 소문난 가언충을 전쟁터로 함께 보낸 것이 아닐까? 가언충은 당나라 군대의 약점을 강점으로 둔갑시켜야 될 사명을 띠었을 것이다. 그는 고심 끝에 기상천외한 방법을 발견해냈다. 이적과 같은 고령의 대장이 앞장선다면 9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구려도 이젠 끝장나고 만다는 예언을 조작해 널리 퍼뜨리는 것이었다. 이로써 당나라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고구려의 민심에 어느 정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668년 고구려는 거듭된 내우외환으로 지쳐 있었다. 이를 틈타 당나라는 전쟁에서 승기를 잡았다. 자신만만해진 가언충은 서둘러 조정에 복귀한다. 그는 전황을 궁금해하는 고종에게 의기양양해하며 자신과 당나라 군대의 눈부신 전과를 알린다. 이것은 물론 논리적인 추측에 토대를 둔 일개 시나리오다. 비록 이런 짐작이 사실과 다르다 해도 ‘고구려비기’는 당나라 측이 날조했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역사적 사실은 그렇건만, 후대 조선의 술사들은 ‘고구려비기’에 나타난 예언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고구려를 우리 역사의 중심축으로 생각한 그들은 고구려에 관한 것이면 무조건 따랐다. 엄밀한 의미로, 평양 천년, 송악 오백년 하는 식의 ‘정감록’ 예언은 술사들의 착시가 빚어낸 현상이었다. ●그럼 전형적인 한국 고대의 예언방식은? 한국 고대에는 왕조의 멸망을 예언할 때 ‘고구려비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다. 일례로, 신라의 명유(名儒) 최치원은 고려 태조가 건국할 무렵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한다.“계림은 누런 이파리요, 곡령은 푸른 소나무입니다(鷄林黃葉 鵠嶺靑松).” 계림은 신라의 수도 경주, 곡령은 고려왕조의 발상지 개성을 가리킨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신라는 시든 이파리와 같아 멸망을 눈앞에 두고 있으나, 고려는 푸른 소나무라 장래가 무궁하다는 예언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왕건이 기뻐한 것은 물론이다. 뒷날 왕건의 손자로 왕위에 오른 고려 현종은 최치원이 예언을 통해 태조의 사업을 은밀하게 도왔다며 칭송했다. 왕은 그에게 내사령(內史令)이란 높은 벼슬을 추증하고 문창후란 시호도 내려주었다.(‘삼국사기’ 권 46) 최치원은 중국 당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했고, 관직에 나아가 출세가도를 달렸다. 보기 드문 수재였다. 그런 최치원이었지만 고국에 돌아와서는 골품제(骨品制·신라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희생돼 뜻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불우한 재사는 끝내 가야산으로 숨어 들어가 고목나무에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전설이 있다. 최치원은 과연 고려의 융성을 예언하는 편지를 왕건에게 보냈을까? 문자 그대로 믿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런 편지를 썼다면 그는 신라를 등진 셈이다. 신라를 대표하는 지성인 최치원에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또 한 가지, 그가 만일 신생국가인 고려를 추종할 뜻이 있었다면 왜 가야산에 머물렀을까 하는 점도 의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최치원이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예언이 깃든 편지를 왕건에게 보낸 까닭에 신라 국왕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결국 신라왕실의 박해를 피해 최치원은 가족과 함께 가야산 해인사로 숨어 지내다 거기서 불우한 일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최치원의 해인사 은거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예언에서 찾으려는 것은 상당히 무리한 일이다. 그렇게 숨어 죽기까지 할 바에야 왕건을 쫓아가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데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치원이 문제의 예언시를 썼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누런 잎과 푸른 소나무를 대조해 신라와 고려왕조의 엇갈린 미래 운명을 점쳤다는 역사적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예언방식은 “고구려 구백년”이라고 하는 ‘고구려비기’식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백제의 멸망을 알리는 예언도 비유법 알고 보면 백제가 멸망할 때도 비슷한 방식의 예언이 있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 6월의 일이었다. 귀신 하나가 궁중에 들어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며 큰 소리로 외치더니 땅속 깊이 들어가 버렸다. 왕은 몹시 놀라 그 자리를 파헤치라고 명령하였다. 삼척가량 땅을 팠을 때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다. 그 거북이 등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백제는 둥근달(月輪)과 같고 신라는 초승달과 같다.” 왕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무자(巫者)에게 물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둥근달과 같다는 것은 찼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차면 기우는 법입니다. 그런데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아직 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차지 않았으니 앞으로 점점 찰 것입니다.” 의자왕은 화가 치밀어 무자를 죽이고 말았다.(‘삼국사기’, 권 28) 귀신이 나왔다든가, 거북의 등에 예언이 적혀 있었다는 말은 사실로 간주하기 어렵다. 누군가 조작한 이야기로 짐작된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백제를 둥근달에 비유하고 신라를 초승달로 보아 양국의 운명을 대비시킨 점은 앞에서 살핀 신라와 고려의 비유와 동일하다. 대상이 되는 나라, 비교를 위한 사물이 다를 뿐 예언의 방식은 완전히 일치한다. 한국 고대에 존재한 국운에 관한 예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고구려비기’라든가 후대의 ‘정감록’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한마디로,‘고구려비기’는 서로 대비되는 사물을 비교함으로써 국운을 예언하는 한국 고대의 오랜 전통과 결별을 선언한 셈이었다.‘정감록’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고대의 예언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지만,‘고구려비기’에서 비롯된 예언의 새 전통에 맞닿아 있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술사들의 일시적인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역시 큰 의미가 있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6)미륵부처의 환생과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6)미륵부처의 환생과 ‘정감록’

    영조 19년(1743) 은진미륵불로 유명한 충남 은진의 관촉사에 세워진 사적비에 이런 구절이 있다.“은진미륵불은 국가가 태평하면 온몸에 광채가 나고 상서로운 기운이 공중에 어린다. 그러나 국가의 운수가 흉하거나 난리가 일어나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손에 든 꽃도 빛을 잃는다.” (‘조선금석문총람’ 하) 민중은 은진미륵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라의 운명을 점친다는 것이다. 도대체 미륵불이 누구이기에 한국 민중에게 미래를 보여주는 것인가. 미륵신앙에 따르면, 장차 미륵불이 지상에 강림해 수많은 사람을 일시에 구원해 준다고 한다. 이런 신앙은 석가모니부처 당대에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인데, 서기 100년쯤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서기 3세기에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미륵신앙은 북위 때 중국에 전파되어, 당나라 이후 보편 신앙이 됐다. 한국에는 불교가 처음 수용되던 4세기 이후 지속적으로 많은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중은 미륵불을 통해 손쉽게 성불할 수 있고 현세에서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정감록’ 역시 지상낙원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미륵불과 ‘정감록’ 사이엔 흥미로운 접점이 있다. 역사상 스스로를 미륵부처의 환생이라고 주장한 이들은 늘 예언을 빙자했고, 직접 예언서를 조작하기도 했다. 환생 미륵불은 ‘정감록’에 예고된 진인의 원형이었다. 이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런 견해는 ‘삼국사기’를 비롯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기록이 뒷받침해 준다.20세기에 창립된 여러 신종교의 교리를 조사해 봐도 결과는 역시 동일하다. 신종교 단체들은 자기네 교조를 미륵불로 간주한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미륵불은 바로 ‘정감록’이 말한 진인인 것이다. 예컨대 증산교의 교조는 자기 스스로를 천자 미륵이라고 했다. 미륵불인 동시에 세상을 직접 다스릴 최고의 통치권자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강증산은 제자들에게 “나는 미륵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미륵불을 보라.”(‘대순전경(大巡經典)’ 초판 13장)고 직접 설파하기도 했다. ●고려후기 이금이 약속한 이상세계 신종교는 19세기 후반부터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한 것으로 다들 알고 있다. 엄밀한 의미로는 그렇지 않았다. 미륵신앙에서 갈라져 나온 신종교는 일찌감치 고려 후기에도 존재했다. 그때의 신종교도 예언과 절대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고려 후기 신종교의 미륵불은 뒷날 ‘정감록’의 진인으로 변형된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고려 우왕 때였다. 경상도 고성 출신으로 이금(伊金)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자기를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주장했다. 이금은 몇 가지 새로운 주장을 폈다. “무릇 귀신에게 빌거나 제사하는 사람, 말고기나 소고기를 먹는 사람, 돈과 재물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이금의 종교적 입장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민간신앙에 대한 선전포고다. 당시 불교는 토착신앙에 관대했고, 그 일부는 불교 신앙에 흡수됐다. 산신이나 칠성을 모시는 민간신앙이 사찰에서도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금은 이런 민간신앙을 근원적으로 배격했다. 둘째, 육식을 철저히 금한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민간신앙의 제물로 고기가 바쳐진 것은 물론이고, 밀교의 승려들도 육식을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금은 고대 중국의 도교에서 기원한 채식주의를 강화시키려고 하였다. 셋째, 사회적인 구제활동을 신앙생활의 엄격한 규범으로 정했다. 이금의 신종교는 사회정의의 실현을 강조했고, 그런 점에서 개혁적인 성격이 뚜렷했다. 빈농을 비롯한 대다수 민중의 지지를 받기에 족한 신종교였다. “만일 내가 하려고만 하면 풀에는 파란 꽃이 피고, 나무에도 곡식이 열릴 것이다.” 이금이 말한 파란 꽃은 상상의 꽃이며, 나무에 곡식이 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전능한 미륵불이기 때문에 자연계의 법칙을 마음대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선전했다. 특히 가난한 민중을 배불리기 위해, 그는 “한 번 씨를 뿌려 두 번을 거둘 수도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금이 약속한 지상 낙원은 다분히 공상적이지만 ‘미륵하생경’에 묘사된 용화세계를 방불케 했다. 알다시피 미륵신앙은 상생(上生)신앙과 하생(下生)신앙으로 구분되는데,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생전에 공덕을 쌓아, 죽은 뒤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상생신앙이다. 그에 비해 하생신앙은 현세에서 법을 깨치고 지상낙원에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장차 석가모니불이 입적한 지 56억 7000만년이 지난 다음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세 번의 법회를 열게 되는데 그때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고려 후기의 신종교 지도자 이금이 약속한 이상세계는 20세기 초, 강증산이 말한 “조화선경”과 많이 닮아 있다. 그것은 ‘정감록’의 진인이 실현할 지상낙원이기도 하다. 강증산은 조화선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세상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고 밤과 낮이 막힘없이 환하게 통하고, 백 가지 곡식을 오래도록 거두어들이고 만 가지 과일이 굵고 크며 풍성한 음식이 저절로 생기고, 아름다운 옷이 스스로 이르고” 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천지개벽경’) 실은 강증산의 생각은 ‘미륵하생경’을 표현만 달리해 옮겨놓은 것이다. 이금은 한 발 더 나아가 왜구의 침략으로 지쳐 있던 민중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했다.“나는 산과 개울의 신을 동원해 왜적을 포획할 수도 있다.” 이 약속은 그가 사회정의와 더불어 평화로운 삶을 중시했음을 알려준다. 이것은 ‘정감록’에 진인이 나와 일본을 복속시킨다고 예언한 것과 흡사하다. 이금은 자기가 창건한 신종교를 효과적으로 전파시키려고 ‘폭력적인’ 경고도 남겼다. 위에 언급한 세 가지 계율을 어기면 목숨을 잃게 된다 했다. 뿐만 아니라,“만일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오는 삼월에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고 컴컴해지리라.”고 했다. 이금의 가르침을 무시할 경우 세상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이금의 신앙동지와 적들 이금의 예언은 섬뜩했고 효과도 컸다. 말세에 대한 ‘정감록’의 경고로 인해 수십만명의 정감록 신도가 탄생했듯, 수백·수천명이 이금의 가르침을 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말이나 소가 죽더라도 감히 고기를 먹을 생각조차 못했다. 잘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부자들 중에도 이금의 신도가 생겨, 그들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쌀과 베, 금과 은을 이금이 이끄는 신종교에 바쳤고, 활동자금이 풍부해진 이금의 신종교는 삽시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금의 신도 가운데서 이채를 띤 것은 남녀 무당들이었다. 그들은 유난히 이금을 공경하고 따랐다. 그동안 자기들이 섬겨온 성황당이며 사묘(祀廟) 등 민간신앙의 성전을 일시에 허물어 버리고, 이금을 살아 있는 미륵불처럼 정성껏 모셨다. 현세의 복과 이익을 바라는 사람들도 앞을 다투어 이금에게 몰려 왔다. 이 신종교의 신도는 대부분 가난한 민중들이었지만, 부자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고급관리들 중에도 이금의 신도가 있었다. 정확한 수를 알 수는 없지만, 수천명이 이금의 제자가 됐다. 그들은 ‘미치광이처럼’ 열광적으로 전도에 열심이었다. 사회 정의를 선포한 신종교라서 전파속도가 매우 빨랐고, 급속히 사회세력으로 대두됐다. 이금의 제자들은 전국의 여러 곳을 누볐으며,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고을 관아에서 융숭한 대접을 베풀어 주었다. 심지어 어떤 고을에서는 수령이 직접 마중을 나와 이금과 고위간부들을 관사로 초청할 정도였다. 물론 이금 일파의 등장을 경계하는 이들도 많았다. 고려 왕실과 일부 귀족들은 이금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사교(邪敎)로 선포해 탄압을 전개할 경우, 도리어 이금 쪽에서 집단적인 무력저항을 펼 가능성이 없지 않아 적극적으로 손을 쓰지는 못했다. 그만큼 이금의 신종교는 성장해 있었다. 이때 청주목사 권화는 은밀한 꾀를 써서 이금을 처치할 생각이었다. 청주는 큰 고을로 중부와 남부지방을 잇는 간선도로상에 위치한 관계로, 이금 일행이 가끔 지나가는 곳이었다. 권화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이금 일행이 다시 청주에 들르기를 기다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금은 고위 간부들을 대동해 청주에 들렀다. 청주목사 권화는 이금 일행에게 향응을 제공할 뜻을 보여 그들을 관아로 유인한 다음, 재빨리 체포해 버렸다. 그는 이 사실을 황급히 조정에 알렸다. 개경에선 매우 기뻐하며 각도에 공문을 보내 이금의 신종교에 가담한 인사들을 몽땅 잡아들여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그 바람에 고위관료 양원격 같은 이도 결국 목숨을 잃게 됐다. 과연 얼마나 많은 수의 신도들이 이때의 박해로 희생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미륵불을 자처했던 이금의 신종교가 표면상으로는 완전히 박멸됐다는 점이다.(‘고려사’ 권 107) 이금에 대한 박해는 19세기 말에 있었던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을 연상시킨다. 비록 한때였지만 이금의 신종교가 맹위를 떨친 이유는 무엇일까. 종교지도자로서 이금이 가졌던 카리스마, 부정부패한 고려의 사회 현실, 그리고 내우외환으로 민생이 피폐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당시 사회에는 미륵신앙과 각종 예언이 유행했다고 본다. 미륵신앙과 관련해 특히 향나무를 해변에 묻는 이른바 매향의 풍속이 대단했다. 장차 미륵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면 그에게 향을 바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이었다. 매향은 집단적인 차원에서 이뤄졌으며, 행사 후 그 사실을 바위에 기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매향비를 남겼던 것이다. 강원도 고성의 삼일포를 비롯해 경상남도 사천, 전라남도 영암, 목포 및 충청남도 서산 등 전국의 여러 해안 지방에서는 매향비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삼일포매향비(三日浦埋香碑)다. 그 비문에 따르면, 강원도 각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 10여명이 이 행사에 참가했다. 그밖에 남녀노소 수천명이 동해안 9군데에 모두 1500다발이나 되는 향나무를 땅속 깊이 묻었다고 했다. 위에서 살핀 이금의 신종교는 아마 이런 매향집단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고 하겠다. 매향비가 만들어진 지방마다 일종의 신종교 집단이 존재했을 법하다. 다만 그들 집단의 활동은 미륵신앙이라는 종교행위에 그쳤을 뿐, 사회 또는 정치적 운동을 자제했기 때문에 역사기록에는 언급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에 비해 이금이 이끈 집단은 예언을 내세워 사회개혁을 추진했기 때문에 조정의 탄압에 직면했던 것이다.‘정감록’을 믿은 신앙집단은 무수히 많았지만, 정작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공식적인 역사기록으로 남은 경우는 일부에 국한됐던 것과 마찬가지다. ●궁예도 미륵신앙 계통의 신종교 지도자 신종교란 관점에서 고대 한국의 역사를 좀더 바라보자. 미륵불을 자처한 교조가 국가를 직접 통치한 경우도 있었다. 태봉의 궁예 왕이다. 그는 신라 효공왕 5년(901)께 미륵불을 자칭했다. 엄청난 칭호에 걸맞게 왕은 외관을 특별한 모양으로 꾸몄다. 머리에는 금빛 모자를 쓰고 몸에는 승복을 걸쳤다. 왕은 궁성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흰 말을 탔으며, 무늬가 있는 아름다운 비단으로 말의 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게 했다. 또한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들에게 일산을 받쳐 들게 하고, 향과 꽃을 가지고 앞에서 왕의 행렬을 인도하게 하였다. 그밖에 비구 200여명에게 명하여 부처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왕의 뒤를 따르게 하였다. 왕의 화려한 행렬은 ‘미륵하생경’에 예고된 용화세계가 이미 지상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점을 상징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궁예 왕은 경문(經文) 20여권을 지었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신종교의 교리서이자 예언서였던 것 같은데, 불교의 가르침과는 어긋나는 대목이 매우 많았다. 이를 참다못해 석총(釋聰)이란 승려는 “이것은 모두 이단의 주장이며 괴이한 말이므로 가르쳐선 안 된다.”라고 반발하였다. 분노한 궁예 왕은 석총을 철퇴로 때려 죽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 50) 결국 미륵불의 화신을 자처한 궁예 왕은 실정을 거듭한 결과, 부하인 왕건 장군에게 밀려났다. 이와 더불어 그가 창립한 신종 미륵불교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한국의 역사에는 수많은 자칭 미륵불이 출현했고 그때마다 예언서가 큰 역할을 차지했다. ●조선후기의 자칭 미륵불 여환과 예언서 조선 후기에도 자칭 미륵불의 전통은 이어졌다. 숙종 14년(1688) 8월 승려 여환(呂還)이 관련된 변란사건이 주목된다. 그의 주된 활동무대는 경기도와 황해도의 몇몇 고을이었다. 여환은 양주목 청송면에 본거지를 두고 여러 곳을 오가며 신도를 포섭했다. 자기 자신을 “신령”(神靈)이라 일컫기도 하고,“수중 노인”(水中老人) 또는 “미륵 삼존”(彌勒三尊)이라고도 했다.“천불산 선인(仙人)”이라고도 하였다. 다양한 칭호에서 보듯, 여환의 신종교는 불교 특히 미륵불교에 기원을 두고 도교적인 측면도 가졌다. 본래 강원도 통천의 승려였던 여환은 “석가모니의 운수가 끝났으니 이제 미륵이 세상을 주관한다.”며 미륵세상을 선포했다. 그는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부린다고 했는데, 지관 황회, 평민 정원태 등을 동원해 많은 신도를 끌어 모았다. 여환은 “일찍이 칠성님이 강원도 김화(金化) 천불산(千佛山)에 강림하여 내게 3가지 국(麴·누룩)을 주었는데 국(麴)은 국(國)과 음(音)이 서로 같으니 짐작해 보라.”고 했다. 자기가 바로 새 왕조의 임금,‘정감록’에 기록된 진인과 다름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다만 그때는 아직 ‘정감록’이 출현하기 전이었으므로, 여환은 ‘진인’의 선구로 간주될 만하다. 자칭 미륵불인 여환은 직접 예언서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구절도 포함돼 있었다.“7월에 큰비가 퍼붓듯 쏟아지리라. 그러면 큰 산도 무너지고 서울도 재난을 입어 쑥대밭이 되리라. 그러면 그해 8월이나 10월에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 가라. 대궐 한가운데 보좌를 차지하리라.” 현재 남아 있는 ‘정감록’에 이같은 구절은 없다. 그러나 유사한 구절은 얼마든지 있다. 따지고 보면, 여환이 지은 예언서는 ‘정감록’의 가까운 조상이었다. 결정적인 해 무진년(1688) 7월15일 여환은 참모들을 비롯해 양주와 영평의 광신자들을 거느리고 서울에 잠입했다. 그러나 기다리던 큰비는 오지 않았고, 쿠데타는 불발했다. 여환을 비롯한 신도 50여명이 체포됐다. 당국의 엄한 취조를 받은 끝에 그 중 11명이 사형을 받았다.(실록·숙종 14년 8월1일 신축) 그 사건이 진압된 후에도 자칭 미륵불은 계속 등장했다. 민중과 미륵불 그리고 예언서는 여전히 불가분의 관계였다.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도 전북 고창의 선운사 동불암의 미륵불 배꼽에서 비장의 예언서가 나왔다고 한다. 고려 때의 미륵불이 정감록에 예언된 ‘진인‘의 선구였다면, 뒷날에는 진인의 별명이 되다시피 했다. 미륵불은 새 세상을 약속하는 영원한 상징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5) 고대의 비결 ‘고경참’은 ‘정감록’의 모태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5) 고대의 비결 ‘고경참’은 ‘정감록’의 모태

    서기 10세기경이 되자 천년을 버텨온 신라 왕조도 명이 다했던지 온갖 문제가 터져 나왔다. 국정은 기강을 잃었고 각지에는 호족들이 들고 일어나 국토가 분할되었다. 생산에 종사하던 대다수 민중의 마음도 신라 왕조를 저버렸다. 한반도는 수습하기 어려운 총체적 위기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이때 지방에서 봉기한 여러 영웅호걸들 가운데 두 사람이 두각을 나타냈다. 북쪽에 태봉을 세운 궁예와 남서쪽에 자리한 후백제의 견훤이었다. 시국이 어지러웠던 만큼 여러 종류의 예언이 난무했다. 당시만 해도 예언의 힘은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강했다. 특히 918년 봄, 궁예의 조정에 보고된 ‘고경참’은 태봉의 신하 왕건이 고려라는 새 왕조를 건립하는데 추동력으로 이용할 정도였다. 우리 역사에 ‘고경참’(古鏡讖)이란 예언서가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등극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하는데, 왕조교체를 예언하는 전통의 시작이었다. 이런 전통은 조선 후기에 등장한 ‘정감록’까지 죽 계속되었다. ‘고경참’은 두 권의 역사책에 실려 있다.‘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나오는데 ‘고려사’의 기록이 훨씬 더 충실하다. 이 예언서는 우선 발견된 경위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중국 당나라의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철원에 와서 상업에 종사했는데, 정명4년(918) 3월 철원 시장에서 기이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얼굴이 매우 잘 생겼고 수염이며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얗다. 승복 차림에 옛날 관을 썼으며 고대의 복장을 하였다. 노인은 왼손에 세 개의 도마를 들었는데, 오른 손에는 사방 한 자쯤 되는 낡은 거울 하나를 높이 들고 있었다.(‘삼국사기’에는 노인이 왼손에 사발을, 오른 손에는 거울을 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 이상한 노인이 중국인 왕창근에게 “내 거울을 사겠는가?”라고 물어왔다. 왕창근이 쌀 두 말을 주고 얼른 그 거울을 샀다. 그러자 노인은 쌀을 길가에 있던 거지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급히 사라졌다. 왕창근은 신비한 그 거울을 자기 가게의 벽에 걸어두었다. 잠시 후 햇빛이 거울에 비치자 거울에 쓰인 작은 글씨가 은은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왕창근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거울을 가져다 궁예 왕에게 바쳤다. 궁예로 말하면 당시 한반도의 최강자 가운데 하나였다. 궁예 왕은 담당 관리에게 명령해 왕창근을 데리고 그 노인의 행방을 찾아보게 하였다. 그들은 한 달이 넘도록 노인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 알아내지 못하였다. 이 때 동주(東州)의 발풍사란 절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절엔 여래상의 앞에 전성(塡星 또는 鎭星이라 함)의 신을 본뜬 오래된 조각이 있었다. 우연히도 그 모습이 문제의 노인과 같았다. 전성의 신 역시 왼손엔 도마를 들고 오른손으로는 거울을 들고 있었다. 영락없는 그 노인이었다. 왕창근은 기뻐하며 궁예 왕에게 이런 사실을 그대로 알렸다. 궁예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신기하게 여겼다. 기대에 들뜬 궁예는 거울속의 예언이 궁금해졌다. 왕은 휘하의 담당 관리들에게 해석을 부탁했다. 술관들이 풀어 보니 천만 뜻밖에도 ‘고경참’의 내용은 궁예 왕의 부하 왕건이 등극해 삼국을 통일한다는 예언이었다. 술관들은 만약 사실대로 왕에게 보고할 경우 살아남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이 예언서의 등장을 계기로 왕건의 추종자들은 쿠데타를 서둘렀다.“왕창근이 얻은 예언서가 그와 같은데 왜 가만히 앉아 있다 못된 궁예 왕의 손에 죽으려고 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마침내 왕건은 혁명의 칼을 뽑았다 한다. ●고경참의 내용은 영웅 일대기 같아 ‘고경참’의 내용을 좀더 정확히 알아보자.‘고려사’에 한문으로 적힌 그 내용을 우리말로 풀어 보면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한 대목이 적지 않다. 영웅의 일대기와도 같은 ‘고경참’의 내용을 주제별로 나눠보면 이렇다. 1. 영웅의 하강을 읊은 부분이 눈에 띈다.“삼수 중 사유(四維)로 내려간다.(三水中四維下) 상제가 아들을 진(辰)과 마(馬)에 내려 보내는 것이다.(上帝降子於辰馬)” 그런데 그 영웅이 누구인지를 알아보기는 어렵다고 했다.“자취를 어지럽히고 성명을 감추리라.(混跡遁名姓) 뉘라서 진(眞)과 성(聖)을 알까.(誰知眞與聖)”라고 말한 것은 그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뱀해에 두용이 나타난다.(於巳年中二龍見)”고 말해 영웅의 출현 시기는 밝혀졌다. 문제는 출현할 영웅이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란 점이다.“하나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리라.(一則藏身靑木中) 다른 하나는 검은 금(金) 동쪽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一則現形黑金東)” 그렇더라도 두 명의 영웅 가운데 마지막 승자는 한 사람이다. 그에 대해 “한 용은 성하고 다른 용은 쇠하리라.(或見盛或視衰)”라고 했다. 2. 영웅의 특별한 능력이 서술되어 있다.“밤이면 하늘에 오르고 낮이면 땅을 다스릴 것이다.(暗登天明理地)”라고 했다. 이 영웅은 “쥐해가 되면 큰일을 일으킨다.(遇子年中興大事)”고 했고,“법을 떨치고 뇌성이 진동하며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리라.(振法雷揮神電)”라고 했다. 3. 영웅은 혼란기를 극복하고 드디어 나라를 통일한다고 했다.“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잡으리라.(先操鷄後搏鴨) 이를 일컬어 셋을 하나로 만들 운수라 한다.(此謂運滿一三甲)”라고 말한 것이 그러하다. 물론 모든 일을 영웅 혼자서 다 해내는 것은 아니다.“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쏟으면서 사람들을 데리고 정벌하리라.(興雲注雨與人征)”라고 하였듯, 많은 사람을 동원하는데 영웅의 참된 능력이 있다. 마침내 영웅이 왕위에 오르면,“사유(四維)는 소의 해에 망하게 되어 있다.(此四維定滅丑)” 했고,“바다를 건너 여러 나라가 항복해 오기는 닭의 해이다.(越海來降須待酉)”라고 한다. 주변 국가들은 소해와 닭해에 정복된다고 보았다. 4. 끝으로, 영웅이 일으켜 세운 왕조는 오랫동안 지속된다고 했다.“이 용의 아들 삼사(三四)가,(此一龍子三四) 대를 바꾸어 여섯 갑자에 걸쳐 왕위를 이으리라.(遞代相承六甲子)” 얼핏 보아서는 정확히 계산이 안 되지만,6갑자라고 했으므로 나라의 수명이 360년은 된다는 것이다. ●왕창근·궁예왕은 그 뜻 파악못해 대강 이런 내용의 ‘고경참’을 처음 읽어본 왕창근이나 궁예 왕은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왕은 예언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및 허원(許原) 등에게 연구해서 풀이하라고 명령하였다. 술관들은 궁리 끝에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 삼수는 삼면이 바다란 뜻이니 한반도다. 그 가운데인 사유(四維)는 신라의 ‘라’(羅) 자를 파자한 것이다. 요컨대 영웅이 신라 땅에 태어난다는 것이 첫 구절이다. 그 다음 구절에 나오는 ‘마진’(辰馬)은 진한과 마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옥황상제가 아들을 진한과 마한에 내려 보낸다고 보았다. 신라는 바로 옛날의 진한과 마한 땅이었다. 이어서 두 명의 영웅이 한 시대에 패권을 둘러싸고 다툴 것인데, 한 명은 ‘푸른 나무’ 즉 소나무가 많은 송악산 기슭에 태어난다는 예언으로 보았다. 술관들이 검토해 보니 송악 사람으로 이름을 용(龍)자로 지은 사람이 있었다. 왕시중(王侍中) 즉 왕건 장군이었다. 왕건은 본래 임금님 될 만한 관상이라 그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 명은 ‘검은 금’이라 ‘쇠 철’ 자로 시작되는 곳, 철원 동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해석했다. 태봉의 도읍 철원에 궁예가 즉위한 것을 상징했다. 처음에는 궁예 왕이 융성했다가 나중에 가서는 위태로워져 결국 왕건 장군에게 멸망당할 것이란 예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언 가운데 “먼저 닭을 잡는다 했다. 나중에 오리를 잡으리라고 했다.”고 말한 부분은 이렇게 해석됐다. 닭은 계림을 상징하므로 신라, 오리라면 압록강을 뜻해 북부지방으로 여겨졌다. 요컨대 왕건 장군이 왕이 되면 먼저 신라를 무너뜨리고 나중에 압록강 지역을 거둔다는 뜻으로 짐작됐다. 세 사람의 술관은 ‘고경참’에 담긴 예언을 곧이곧대로 궁예 왕에게 보고할지 상의했다.“궁예 왕은 시기심이 많은데다가 걸핏 하면 아랫사람을 잡아 죽인다. 만일 사실대로 알린다면, 왕건 장군이나 우리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런 염려가 들어 술관들은 거짓말로 적당히 둘러대 왕을 속였다.(‘고려사’, 권 1) ●‘고경참’의 서술 전통은 ‘정감록’에 이어져 짧은 내용이지만 ‘고경참’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여섯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첫째, 한국에는 천신숭배(天神崇拜)의 전통이 뚜렷하다는 점이다. 옥황상제가 아들을 이 땅에 내려 보낸다고 했고, 천신의 아들이 “밤이면 하늘에 오르고 낮이면 땅을 다스린다.”고 한 것이 그 증거다. 이런 내용은 단군신화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이규보가 쓴 주몽신화와 일맥상통한다. 둘째, 불교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법을 떨치고 뇌성이 진동하며 신령한 번개가 번쩍이리라.” 했는데, 여기서의 “법”은 불법을 가리킨다. 예언서에 등장하는 신비의 동물 “용” 역시 불교에서는 호법(護法)의 상징이다. 셋째, 후삼국의 통일뿐만 아니라 새 왕조의 수명이 예언되어 있다.“이 용의 아들 삼사(三四)가 대를 바꾸어 여섯 갑자에 걸쳐 왕위를 이으리라.”라고 했다. 왕건의 자손이 12대 360년간 왕 노릇을 한다고 풀이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왕조의 수명을 예언한 것은 ‘정감록’에도 자주 발견된다. 넷째, 해외의 여러 국가들이 새 왕조에 조공을 바치게 된다고 했다.“바다를 건너 여러 나라가 항복해 오기는 닭의 해이다.”라고 한 대목이 그것인데, 고려 시대에 등장한 여러 편의 예언서에서도 외국의 조공이 논의된다. 현대의 ‘정감록’ 신앙에서도 이런 전통이 남아 있다. 다섯째, 예언서의 표현 방식이 다분히 운문적 성격을 띠고 있다. 표현 방식에는 “사유”(四維)라든가 “흑금”(黑金) 따위의 파자(破字)와 상징이 채용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고려 때 등장한 예언서들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정감록’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여섯째,‘고경참’의 원래 저자를 사찰에 안치된 전성(土星과 같음)의 조각으로 간주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불교와 습합된 성신(星神) 신앙의 일단이 드러난다. 신라 경순왕 8년(934)의 기록을 보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성신을 신앙대상으로 삼았다.‘삼국사기’의 그 해 기록에는 “노인성(老人星 즉,南極星)이 보였다.”고 했고, 그 이듬해 경순왕은 시랑(侍郞) 김봉휴에게 명령하여 국서를 가지고 가서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삼국사기’, 권 12). 중국 고대의 기록을 살펴 보면 남극성이 나타나면 기존의 왕조가 전복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점은 ‘정감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고대 고구려인들이 남긴 벽화에서도 감지되듯 한국인들은 성신이 인간의 운명을 주관한다고 믿었다.10세기만 해도 토성의 신이 ‘고경참’을 통해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것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정리하면,‘고경참’의 서사 구조와 문체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특징은 그 뒤 한국사회를 움직인 예언서에 대부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점이다.‘정감록’의 원형은 ‘고경참’에까지 소급된다. ●태조 왕건과 역대 고려왕들은 비결을 믿어 실상 ‘고경참’의 예언은 역사적 사실과 거의 일치하지 않았다. 궁예와 왕건이 등장한 시기는 뱀해가 아니었고, 닭해에 외국이 조공을 바쳐온 적도 없었다. 신라가 소해에 망하거나 고려가 12대 360년만에 멸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예언은 들어맞았다. 왕건이 등극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는 예언이 현실로 나타났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고려왕실은 대대로 ‘고경참’을 신성시했다. 역사 기록을 살펴 보면, 태조 왕건은 ‘고경참’뿐만 아니라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영향을 받아 풍수설에 입각한 예언을 무척 중시했다. 심지어 후손들을 위해 지었다는 ‘훈요십조’에 왕건은 예언설에 관한 조항을 세 개나 끼워둘 정도였다. 우선 제2조에선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따라 그가 미리 지정한 곳 이외에는 절대로 절을 짓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제5조에서는 서경(西京)의 풍수가 좋기 때문에 철마다 한 번씩 순행하여 지기(地氣)와 수덕(水德)을 지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제8조에서는 풍수지리설에 따른 예언을 믿으라고 말했다. 여기서 보듯 태조 왕건은 단순히 민심을 선동하기 위해 풍수지리를 비롯한 각종 예언설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예언을 굳게 신봉했던 것이 분명하다. 고려의 역대 왕들도 예언서를 맹종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예종 같은 이는 예언에 빠져있다시피 했다. 그는 ‘해동비록’(海東錄)이라는 종합적인 예언서를 편찬하도록 조치했고, 상당수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경에 용언궁(用堰宮)을 지어 분사(分司)제도를 확립했다. 한참 세월이 지난 뒤 고려 왕실은 ‘고경참’에서 한 가지 고약한 대목을 발견했다. 고려의 운수가 12대 360년에 그친다고 돼 있어, 여러 왕들이 불안에 떨게 되었다. 이의민과 같은 무장은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고려왕조는 12대에 끝난다. 뒤이어 이씨가 새로 일어난다(龍孫十二盡 更有十八子).”는 예언을 조작해 냈다. 이의민은 경주에서 일어난 반란군과 몰래 야합했으나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었다. ●근현대에도 위력을 떨친 비결 어느 책을 보았더니 현대 한국의 집권자들도 비결에 솔깃했던 모양으로 돼 있다. 전두환 대통령이 아직 집권하기 전에 유명한 지관 한 사람이 그에게 비기(記)를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귀의삼보(歸依三寶)나 삼이후예(三耳後裔)라. 입왕이십환(入王二十煥)이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니라.”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귀의삼보”란 불교에 귀의한다는 뜻이다.“삼이후예”란 전(全)씨란 말이다. 시조의 이름이 섭(攝) 자인데 그 글자엔 이(耳)가 세 개나 들어 있어 그렇다.“입왕이십환”은 전두환 대통령의 이름을 파자(破字) 법으로 쓴 것이다. 요컨대, 전두환 장군은 대통령이 돼 나라를 다스리게 될 것이며, 본래 불교와 인연이 깊다는 말이다. 이 예언이 적중한 바람에 그 지관은 이름을 떨치게 됐다는 말이 있다. 믿을 말인지 모르겠으나, 박정희 대통령도 간혹 예언에 귀를 기울였다고 전한다. 그런가 하면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게 됐을 때도 여러 종류의 예언이 나돌았다. 그 중에는 일제가 민심을 굴복시키기 위해 조작한 것도 있었다. 종묘 정문인 ‘창엽문(蒼葉門)’을 두고, 창(蒼)을 “이십 팔 군”(二十八君)으로, 엽(葉)을 “이십 팔 세”(二十八世)로 파자해 조선은 28임금(28대)만에 망한다고 했단다. 오늘 일도 모르거늘 하물며 내일 일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그러다 보면 예언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8)한국의 토산 명차들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8)한국의 토산 명차들

    대롱꽃나무에 붉은고추잠자리가 서성이는 것을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다. 일지암 초당앞 차밭엔 어느새 차꽃이 피었다. 하얀 소화(小花)다.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하얀 소화꽃을 보고 태맥산맥의 조정래 선생은 그 여주인공 이름을 소화라고 했다. 차꽃이 열리기 시작하면 아름다운 향기가 벙그러진 꽃들사이로 작설의 기운을 차곡 차곡 안으로 안으로 안아낼 것이다. 삶과 영혼의 기쁨이 깃든 한잔의 따뜻한 차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조선시대 시대를 반역하며 산중에 은거한 거인(巨人)이었던 설잠 김시습의 살림살이가 떠오른다. 경주 용장사에 은거해 작은 초당을 짓고 차나무를 가꾸고 차를 달여 마시던 설잠은 형편따라 살림을 사는 안분지족의 삶을 이렇게 노래했다. “무를 푹 삶고 또 오이를 구워서/형편 따라 먹는 산중의 공양 차도 달이네/배부르지도 고프지도 않아 한가로이 누웠으니/이제사 알겠네, 뜬 뗏목 같은 신세인 줄을!” 설잠은 ‘삶은 부평초 같은 것이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삶은 또한 뿌리깊은 나무같은 것이다. 머뭇거리는 구름도, 석양의 햇살을 몰고가는 바람도 그 흔적이 없지만 삶은 손님을 보내버린 주인처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우리차의 흔적도 마찬가지다. 마치 허공에 갈아 놓은 밭처럼 끊임없이 흩어졌다 모여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까지 그 황금의 차향기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명차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고려시대의 ‘뇌원차’다.(고려사 열전)에는 ‘최승로가 죽으니 문정이라 휘하였는데, 나이는 63세였다. 왕이 슬퍼하며 하교하여 그 훈덕을 보상하여 태사로 중하고, 베 천필, 면 삼백석, 경미 오백석, 유향 200량, 뇌원차 200각, 대차 10근을 부의하였다.´고 적고 있다. 왕이 국가에 큰 공덕을 세운 신하에게 ‘차’를 상으로 내리는 풍습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그 당시 차를 살펴보면 중국의 명차였던 ‘용병봉단’등 대부분 중국차 이름이 등장한다. 그 당시에도 우리 차는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가야 신라의 문헌들은 그같은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다.(삼국유사)에는 문무왕때 가야의 종묘에 제사를 지내는 음식으로 밥 떡 과일과 함께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보여진다. 또한 보천 효명태자의 헌공다례에 대한 기록, 쌍계사 진감국사비에 새겨져 있는 ‘음다유복’, 고구려무덤에서 발견된 전차(錢茶)등의 기록을 보면 가야 삼국시대에도 우리 토산차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 민심 달래려 백성들에 차 하사 그러나 불행하게도 왕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은 문화적 선진국이었던 중국 차를 매우 선호했던 것 같다. 차를 하사한 여러 가지 문헌에 우리차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고려사 열전)에 기록된 ‘뇌원차’에 대한 것은 우리명차와 관련해 귀중한 기록 중 하나인 것이다.‘뇌원차’는 덩이차였던 각차였다. 헤아렸던 단위는 각이며 주로 국가 최대의 행사였던 팔관회 공덕제등 국가행사, 국빈급 외교관의 방문에 답하는 예물이었던 ‘어용단차’(御用團茶)였던 것으로 보여진다.‘어용단차’였던 ‘뇌원차’는 그런 점에서 우리토산차의 역사를 신라를 비롯한 삼국시대까지 끌어올리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려가 후백제와 신라를 병합하기 전 차를 생산했던 전라 경상도에 영토가 없었다는 것이다. 신라의 경순왕이 그의 권좌를 넘겨준 것은 935년이다.‘뇌원차’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한 최고품질의 토산차였다는 것이다. 뇌원차, 즉 단차의 제조는 조선시대 말엽까지 이어져왔다. 찻잎을 찌거나 데쳐낸 다음 절구에 찧은 후 모양을 찍어 말렸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음다법은 우리가 보리차를 끓이듯 차를 물에 끓여서 마셨다. 그런 점에서 뇌원차는 차를 물에 넣고 오랫동안 끓여도 쓰거나 떫지 않은 발효차였을 것이다. 이 시기 또 다른 토산차에 대한 기록은 ‘대차’(大茶)에 대한 것이다. 대차가 사용된 시기는 뇌원차가 사용된 시기와 비슷하다. 그시대 토산차 중 하나였던 ‘대차’는 외교사절이나 국가행사때 하사한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일반대중들이 마시는, 등급 낮은 대중토산차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또 다른 기록이 있다.‘태조 14년(931년) 8월 계축일에 보윤과 선규등을 보내어 신라의 왕에게 안마 능라 채금을 전하고 아울러 백관들에게 채면을, 국민들에게는 차와 복두, 승려들에게는 차와 향을 각각 하사하였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국민과 승려들에게 차를 하사했다는 대목이다. 차는 당시 매우 귀한 물품이었다. 그것은 곧 차의 국내생산이 매우 적었다는 것을 뜻한다. 역설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민중들이 차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새롭게 국가를 건설한 태조왕건이 국내의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위해 하사한 선물이라면 많은 민중들의 애장품이었던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다음은 우리차의 대명사랄수 있는 ‘작설차’다.‘작설’은 고려시대의 연고차를 거쳐 조선중기에 우리가 현재 마시는 잎차로 정착했다.(동국여지승람)(동의보감)에 등재되어 있는 ‘차’ 또는 ‘작설’의 명칭이 첫 번째로 등장한 것은 바로 고려시대 문인이었던 이제현의 시에서다. 이제현은 차를 매우 잘 제다했던 송광스님에게 차를 받고 다음과 같은 답시를 보낸다. “가을 감 먼저 따서 나에게 보내주고/봄날 불쬐어 말린 작설도 여러번 나누어 주었네/맑은 향기 한식전에 딴 것인가/고운 빛깔 숲속의 이슬을 머금었는 듯/돌솥에 물 끓으니 솔바람소리/자기 잔에 따르니 빙빙돌며 젖빛 꽃이 피어난다.” 조선시대 작설차에 대한 기록은 매월당 김시습의 ‘작설’이란 시에 잘나타나 있다.“남쪽나라의 봄 바람이 일렁이는데/차 나무 숲 잎들은 뾰족한 부리 내미네/어린싹을 가려내니 신령스러움과 통하고/그 맛은 이미 육홍점의 다경에 기록되었네/기창 사이에서 자주빛 싹을 가려내어/용병봉단의 모습만 헛되이 흉내 내었네/산집에 밤 고요하여 객들은 둘러 앉았는데/한번 마신 운유차에 두 눈이 밝아진다/당시 집에서 잔일이나 하던 저 사람이/어찌 알겠나 눈으로 다린 차가 이처럼 맑다는 것을” ●참새 혀 형상 작설차 우리명차 대명사로 고려후기부터 조선까지 이어져 우리차의 대명사가 된 ‘작설차’는 아주 이른시기인 경칩을 전후해 어린 잎으로 만들어진 차라는 것이 여러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중국의 다서인 (선화북원공다록)에는 찻잎의 품격을 논할 때 가장 으뜸가는 찻잎을 작은 싹 즉 소아(小芽)라고 하면서 그 모양은 참새 혀(雀舌)와 발톱 같다고 했다. 다음은 이규보가 거론한 유차(孺茶)와 향차에 대한 것이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차 벗인 노규선사가 보내준 ‘조아차’(早芽茶)를 스스로 ‘유차’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규보는 ‘운봉에 사는 노규선사가 조아차를 내놓기에 내가 유차라 이름 짓고 스님이 시를 청하기에 읊노라’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스님은 어디서 차를 얻었을까. 받자마자 코에 밀어닥치는 향기에 먼저 놀라네. 벽돌화로에 활활 타는 불로 차를 시험삼아 달여, 꽃무늬 오지사발에 차를 일구니 그 빛깔과 맛을 자랑하네. 진한 차 입에 들어가니 연하고도 부드러운데, 어린아이의 젖내와 같은 향기가 있구나. 부귀한 가문에서도 이런 차를 볼 수 없는데, 우리 스님이 이 차를 얻은 것이 이상도 하네.” ‘유차’라는 명칭은 소동파의 (주인에게 유차를 붙이며)라는 시에서 맨 처음 등장한다. 이규보는 아주 작은 조아차를 보고 ‘유차’라고 명명한 것이다. 여기서 조아차는 당시 중국의 명차였던 몽정차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최고의 명품차였던 몽정차와 유차를 비교한 것은 유차 역시 뛰어난 명품차였다는 또다른 반증이기도 하다. 유차는 당시 화계에서 생산되었다. 이규보가 손한장에게 화계의 유차에 대해 적어보내고 있다.“우연히 유차의 시를 지었는데, 그대에게 전해질 줄 생각지도 못했네. 시를 보자 화계에서 놀던 일 문득 생각나 눈물이 나네. 운봉의 차를 맛보니 남녘에서 마시던 일이 완연하구나.”고 말하고 있다. 이규보는 또 “화계에서 차 따던 일 생각해보세. 관에서는 감독하여 아이 늙은이 모두 불러내어 험준산 산속에서 겨우 차를 따모아 머나먼 서울까지 등짐지어 날랐네. 이는 백성의 애끓는 피와 땀이니 수많은 사람의 피땀으로 서울로 오게 되었네.”라며 당시 차 공납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초의스님 ‘떡차´ 반야병다로 재현 고려시대 뇌원차에 비견할 만한 ‘향차’도 과거 우리 명품차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음선정요)와 (고려사)에서는 “흰 차 한자루, 용뇌조각 석돈, 백약전 반돈, 사향 두돈을 가늘게 갈아서 멥쌀로 쑨 죽과 섞어서 떡 모양으로 틀에 박아서 만든다. 충렬왕 임진 18년(1292)10월 을사일에 홍군상이 돌아갈 때 장군인 홍선을 보내어 홍군상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향차와 목과 등을 바치게 하였다.”며 향차가 뇌원차 만큼 귀한 차였음을 알게 한다. 신라 고려시대 등 우리나라 차인들은 중국명품차의 성분을 분석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맛과 향을 모방해내 창조적인 차들을 많이 생산했을 것이다. 과거의 기록에서 사찰이나 귀족들이 고급차를 직접 제다해 서로 ‘투다’(鬪茶)를 한 것을 보면 많은 차들이 독자적인 브랜드를 가지고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토산차로는 초의스님의 ‘떡차’를 들 수 있다. 초의스님의 제자인 범해 각안스님은 ‘초의차’란 시에서 “곡우절 맑은날 /노오란 싹은 아직 잎이 피지 않았는데/솥에서 데쳐내어 밀실에서 말리네/모나거나 둥근 차 찍어내고/죽순껍질로 안을 말아서 싸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현재에 와서 초의스님의 떡차는 일지암에서 ‘반야병다’라는 이름을 재현되어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있다. 과거 우리명차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 허전하고 빈약하다. 그런 어려움 속에도 근현대 차인들은 우리차의 명맥을 살려내고 있다.‘잭살영감’ 조병권옹, 김복순 조태연씨, 그리고 1939년 전남 강진에서 ‘백운옥판차’를 생산한 이한영씨 등이 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의재 허백련 선생의 춘설차, 효당 최범술 스님의 반야로, 화개제다의 홍소술사장, 광주 서양원사장, 보성 대한다업의 장영섭씨 등이 그뒤를 잇고 있다. 일지암 암주 ■ 차 몇통과 바꾼 1년 양식 우리차 이야기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지금은 화개골의 전설이 되어버린 ‘잭살영감’ 청파 조병곤옹의 이야기다. 그의 정확한 이력에 대해서 잘 알려진 것은 없다. 그는 중국에서 머물다 해방후 죽을 때 까지 쌍계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에 대한 일화 몇가지를 소개해보자. 해방후 한국차는 그 명맥이 거의 단절되다시피 했다. 당시 몇몇 스님들과 선비들을 제외하고 민중들의 머리엔 ‘차’라는 이름이 거의 사라졌을 때였다. 중국에서 귀국한 잭살영감은 아마도 중국에서 차에 대한 깊은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는 먼저 쌍계사 대밭숲에 자생하던 어린 차나무들을 파내어 차밭을 조성했다. 그때 조옹은 화개골 사람들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세상’이 열릴 것이라며 차밭 조성을 종용하는 예언을 했다. 그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도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봄이 되면 조옹은 손수 가꾼 차밭에서 차를 따고 덖어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경무대를 찾아가곤 했다. 그리고 차 몇통을 전달한 뒤 그가 먹을 1년치 양식값을 가져왔다고 한다. 가장 서구적인 대통령으로만 알려진 이승만 대통령은 차를 아는 차인이었던 셈이다. 조옹은 또 가장 현대적인 차 상품을 직접 만든 차인이었다. 당시 매우 귀했던 깡통을 차통으로 디자인해 수백통의 차를 만들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차를 모르던 대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낙심한 그는 그 귀한 차들을 해우소에 쏟아버렸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은 차가 외면당하자 조옹은 그만 몸져 눕고 말았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차를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참으로 슬픈 근현대사 차이야기 중 하나다. 기록되지 않는 화개차의 전설로 우리곁에 머물고 있는 ‘잭살영감’이 만든 차는 ‘작설차’와 ‘발효차’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찔레꽃같은 향편차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평가해보면 ‘잭살영감’은 대단히 선각적인 차인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화개에는 또다른 전설들도 있다. 김복순 할머니와 조태연씨가 1960년 중후반 ‘죽로차’와 ‘작설차’라는 이름을 가진 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판매했다. 조선시대를 지나 한일합병으로 우리들에게 잊혔던 우리차가 이름없는 이들에 의해 그 불씨가 되살아나는 것은 바로 차의 향기와 문화의 위대함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 나노소자 개발길 열려… “노벨물리학상감”

    나노소자 개발길 열려… “노벨물리학상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김현탁 박사팀의 연구 성과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에 전압을 가하면 금속처럼 전기가 통한다는 가설을 이론화하고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지난 197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네빌 모트가 49년에 예언한 ‘모트 금속-절연체 전이(MIT) 현상’의 베일을 56년 만에 김 박사팀이 벗긴 것이다. 무엇보다도 첨단산업을 이끌고 있는 반도체 이후 차세대 성장동력원의 기반을 찾게 된 것이 획기적인 업적이다. ‘모트-절연체 전이 이론’을 이용해 소자(素子)를 만들면 전기가 쓰이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사용될 수 있다. 특히 전자기기의 안전장치분야에 획기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컴퓨터를 예로 들면 정상 작동을 하려면 5V가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10V 이상 흐르게 되면 정전기나 스파크 등이 생겨 컴퓨터가 오작동하거나 타버리게 된다. 여기에 ‘MIT 소자’를 이용하면 이런 노이즈를 제거해 컴퓨터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또 휴대전화, 계측기, 미사일 추적기, 화재 경보기, 적외선 카메라, 차세대 휘발성 메모리 등에도 적용이 가능해 전자기기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올 전망이다. 김 박사는 “반도체는 사이즈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지만 MIT 소자는 사이즈를 줄일 수 있고, 같은 크기의 반도체보다 많은 전류를 흐르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모트-절연체의 재료는 아주 흔하다. 대표적인 재료로는 김 박사팀이 실험한 바나듐산화물(VO2)을 들 수 있다. 김 박사는 “모트-절연체는 일반인에게 생소하겠지만 자연 상태에서 100종류 이상이 있다.”면서 “바나듐산화물도 이 가운데 하나다.”라고 말했다. 일본 쓰쿠바 첨단과학기술연구소(AIST)의 야수모트 다나카(田中康資) 박사는 “한국에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 후보자 한 명을 보유하게 됐다.”고 말했다. 부산대 장민수 교수도 “세계 물리학사 및 고체 물리 교과서에 길이 남을 수 있고, 학문적 가치가 매운 큰 연구 업적”이라고 치켜세웠다. 정기홍 이기철기자 hong@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4)김위제로 소급되는 ‘정감록’의 기원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4)김위제로 소급되는 ‘정감록’의 기원

    ‘정감록’은 어디서 왔을까? 그 뿌리를 한참 파다 보면, 역사의 삽질이 고려 숙종 때에 부딪힌다. 술관 김위제(金謂 )가 문제의 인물이다. 그는 풍수지리의 대가로 예언에 능했다. 숙종 원년(1096)엔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에 임명됐고, 한참 뒤인 예종 때는 그보다 하급 직책인 주부동정(注簿同正)을 지냈다. 관직은 기껏해야 중하급에 그쳤지만 김위제는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숙종에게 글을 올려 남경(조선시대의 한양, 지금의 서울)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김위제는 새로운 예언서들을 발굴해 인용했고, 결과적으로 왕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숙종은 연이은 자연재해로 정치적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흉년과 실정이 겹치는 바람에 고려의 민심은 국가를 이반했다. 숙종은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했고, 궁지에 처한 왕을 돕기 위해 김위제는 남경천도론을 제시했다. 이런 근본적인 배경과는 무관하게 그의 천도론에는 ‘정감록’의 기원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숨어 있다. 참고로 말하면, 김위제가 한동안 몸을 담았던 위위시(衛尉寺)는 풍수지리와 직접 관계가 없는 부서였다. 이 관청은 의장(儀仗)에 사용되는 예기(禮器)와 병기(兵器)를 관장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과 유사한 기관이었다. 위위승은 이 관청의 중간 정도 벼슬이었다. 김위제는 술관이라 본래 이 관청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숙종 원년 그는 남경천도론으로 직무상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를 표창하는 뜻에서 왕은 위위승동정 벼슬을 주었던 것 같다. ●김위제의 예언서 독법은 아직도 유효 김위제는 통일신라 말기 풍수지리설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한 도선국사(道詵國師)에게 학연을 댔다. 그는 도선국사가 저술한 여러 권의 예언서를 손에 넣었다고 한다. 과연 누구를 통해 그가 그런 책들을 접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정말 도선국사가 여러 편의 예언서를 남겼는지도 실은 모를 일이다. 그야 어쨌거나 김위제는 도선국사의 저술을 통해 풍수와 예언을 배웠다고 주장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숙종에게 올린 글을 보면, 김위제는 ‘도선기’(道詵記)와 ‘도선답산가’(道詵沓山歌)를 주로 인용했다.‘도선기’는 삼경설(三京說)을 주장한 예언서였다. 그것은 고려가 건국된 지 160년 뒤에는 개경의 지기가 쇠해진다, 그 때가 되면 서경(평양)과 남경에 서울을 설치하라, 그래야만 고려의 국운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도선답산가’는 남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옳은 해결책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남경을 수도로 삼으면 천하가 고려에 조공을 바치게 된다고 예언했다. 두 권의 예언서는 남경의 풍수지리적 조건을 높이 평가한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 보면 내용상 큰 차이점도 있다.‘도선기’는 남경을 3경의 하나로 보고 있지만,‘도선답산가’는 남경이야말로 개경을 대체할 다음 번 수도로 예언했다. 여기서 확인되듯 이들 예언서는 도선국사 한 사람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 도선국사는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저술했거나, 또는 이들 예언서와는 아예 무관했다고 봐야 한다. 김위제를 비롯한 고려의 술관들은 옛 문헌에 대해 비판적인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들은 걸핏하면 도선국사를 저자로 둘러댔고 그런 주장이 잘 먹혀들었다. 인종 때 서경천도론을 폈던 묘청만 해도 도선국사의 후계자를 자청했다. 만일 그들의 견해를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도선국사는 3경설, 서경천도론, 남경천도론을 동시에 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논리상 모순투성이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약점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고려의 왕과 신하들은 예언서를 대할 때 지나칠 정도로 관대했다고 할까. 이런 전통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진다.‘정감록’ 신봉자들은 예언서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차이점에 대단히 둔감하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만 정확히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이것은 한 가지 억측에 불과하지만, 예언서의 신봉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답을 책에서 발견해 내는 데만 관심을 두기 때문인 것 같다. 비유하면 예언서란 온갖 색깔의 사탕이 섞인 사탕봉지와 같다. 노랑사탕을 먹고 싶은 사람은 그것이 손가락에 잡힐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골라낸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중간에 파랑사탕이나 빨강사탕이 몇 개나 나왔지만 그것은 그 사람에게 아무 문제도 안 된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언서를 상대하는 공통된 관점이다. ●‘삼각산명당기’는 묘청에 앞선 ‘정감록’의 기원 남경천도론을 펼 때 김위제는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란 새로운 예언서를 인용해 관심을 끌었다. 이 예언서는 모든 구절이 7자씩 돼 있어 칠언율시(七言律詩)를 연상케 하는데 배율(排律 12행)보다 더욱 길다. 엄밀한 의미에서 시는 아니지만 그 비슷한 느낌을 준다.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유달리 한시를 즐겼다. 그런 까닭에 예언서마저도 시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달리 말해,‘삼각산명당기’는 고려중기 귀족문화의 산물이다. 신라 말에 저술된 예언서로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내용상으로 보더라도, 이 예언서는 고려 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다. ‘삼각산명당기’를 이용해 김위제는 남경천도의 긍정적인 효과를 뚜렷이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는 삼각산의 지세를 검토한 결과 명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물샐틈없이 방어되고 있으므로, 이곳에 왕궁 터를 정하면 절대 반역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또한 청룡과 백호의 모양으로 점쳐 볼 때 신하들 사이에도 파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안과 바깥의 장사꾼이 각기 보배를 바쳐” 왕실의 재정도 풍부해진다고 보았다. 사방의 인재들이 조정에 가득차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이고,“재상(輔國)과 바른 임금(匡君)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국정운영이 순조롭다고 예언했다. 김위제는 남경천도의 시기도 못 박아 두었다.“임자 년에 만일 궁전 지을 공사를 시작하면, 정사 년에는 성스러운 아들을 얻으리라.”고 하여 성군(聖君)이 출현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삼각산에 의지하여 황제의 서울을 지어라. 아홉 해만에 사해가 조공을 바쳐 온다.” 했다.(‘고려사’, 권122) 지난 호에선 묘청의 서경천도론을 다루었다. 그것이 ‘정감록’에 예언된 계룡산천도론의 모태가 된다는 점을 밝혔다. 그런데 이제 알고 보니 김위제는 묘청보다 한 세대 앞서 천도론을 폈다. 물론 묘청의 주장은 좀더 새로운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사해조공설(四海朝貢說·천하가 고려에 복종한다는 뜻)을 폈던 점에서 묘청은 김위제의 남경천도론을 계승한 셈이다. 국운상승의 힘을 천도론에서 찾은 점에서 김위제는 ‘정감록’의 보다 심원한 뿌리였다. ●‘삼각산명당기’는 풍수설의 인기를 반영 김위제가 찾아냈다는 ‘삼각산명당기’의 내용을 자세히 뜯어 보면, 고려시대에 풍수지리설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돼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단편적인 기록이긴 하지만 고려초기에는 형국론(形局論·명당의 모양이 닭, 소, 말 등과 닮았다는 설)의 우세를 반영하는 사례가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삼각산명당기’는 좌향론(坐向論·용맥이나 명당의 방향을 중시하는 풍수설)에 기울어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눈을 들고 머리를 돌려서 삼각산의 모습을 보라. 북북서(壬)를 등에 지고 남남동(丙)을 향하니 이가 곧 신선의 자라(仙鼇 명당)다. 음양의 꽃이 서너 겹으로 피었구나.” 인용문에서 보듯, 명당의 위치와 주변 조건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마치 한 편의 풍수지리 교과서마냥 ‘삼각산명당기’는 명당의 성립조건을 하나씩 세부적으로 거론했다. 우선 삼각산을 에워싼 외청룡과 외백호의 형상에 대해 “친히 한쪽 옷소매를 벗고 산을 떠메면서 수호에 임하는구나.”라고 했다. 한쪽 옷소매를 벗는 것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춘 모양을 상징한다. 스님들이 가사를 입은 모양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명당의 조건에 대한 이해가 좀더 정밀해졌다는 점이다. 단순히 용맥(龍脈)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산세에 대한 종합적인 관찰이 강조되었다. 예컨대 명당 앞을 막아선 안산(案山)과 조산(朝山, 안산의 남쪽에 자리한 산), 그리고 현재의 풍수서적에서는 찾아보기도 어려운 “고모부산”까지 자세히 언급했다. “안산 앞으로 조산이 대여섯 겹이다. 고모부와 부모산이 용솟음친다. 안팎의 문을 각기 개 세 마리가 지키고 있다.” 삼각산의 본 줄기에서 갈라져 나간 여러 산들을 친족의 호칭을 써가며 세분하고, 이들 산자락이 믿음직하게 명당을 호위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삼각산명당기’는 풍수설을 구체적으로 전개한 점에서 이채를 띤다. 이것은 그 이전 시기의 역사에 보이는 여느 예언서와도 다른 점이다. 그만큼 고려시대에는 풍수설이 크게 유행했다는 증거다. 조선시대에도 풍수설은 더욱 인기를 끌어 ‘삼각산명당기’는 ‘정감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감결’에 보면,“곤륜산(崑崙山)의 내맥(來脈)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가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그러나 평양은 이미 천년(千年)의 운수가 지나 그것이 송악(松嶽)으로 옮겨졌다.”는 구절이 있다.‘삼각산명당기’만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용맥의 줄기를 마디마다 더듬은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정감록’의 일부가 되어 있는 ‘북두류노정기’(北頭流路程記) 역시 ‘삼각산명당기’를 닮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자세하다. 잠시 인용해 보겠다.“평강읍(平康邑)으로부터 우량장(右梁場)에 이르러 20리를 가면 우량(右梁)이요,(중략) 태산의 긴 골짜기를 따라 40리를 들어가면 태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곳에 두어 칸 불당(佛堂)이 있고, 천장폭(千丈瀑)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북두류’는 명당 찾아가는 길을 친절하게 일러준다. 조선 후기에 등장한 ‘북두류’에 언급된 명당은 실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고려 때의 ‘삼각산명당기’를 실제적인 목적에 맞게 변형시킨 것처럼 여겨진다. 요점을 정리하면,‘삼각산명당기’는 풍수지리의 유행을 타고 후대의 예언서인 ‘정감록’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겠다.‘감결’처럼 명당의 용맥을 더듬어 간 것이 있는가 하면, 길지의 소재를 세세하게 묘사한 ‘북두류노정기’ 도 있다. ●‘신지비사’와 국토 유기체설의 시작 ‘정감록’의 ‘십승지설’엔 국토 유기체설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묘청이 주장한 ‘대화세’(大華勢)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연원을 좀 더 깊이 추구해 보면 그 줄기가 김위제에게로 이어진다. 그가 역사상 맨 처음으로 인용한 ‘신지비사’(神誌詞)의 내용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신지비사’는 멀리 고조선 때 저술되었다 한다. “한 나라의 서울은 비유해서 말하면 저울대(枰), 저울추 및 저울머리(極器)와 같다. 저울대는 부소의 기둥이다. 저울추는 오덕(五德)을 갖춘 땅을 말하며, 저울머리란 백아(白牙) 언덕이다.”(‘고려사’, 권 122)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국토의 요충지를 저울대와 저울추 및 저울머리로 나눠서 상정한 것은 틀림없다. 이런 유기적 관계를 잘 유지하면, 달리 말해 저울의 머리와 꼬리가 수평을 이루게 되면 “70나라들이 조공을 바치고 항복해올 것이다. 땅의 덕에 힘입고 신령의 보호를 입으리라.”고 했다. 나라의 융성과 평화를 보장하는 힘은 땅의 기운에 달려 있으며, 특히 저울추, 저울대 그리고 저울머리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했다. 김위제는 이 예언에 언급된 저울추 등에 대해 좀더 알기 쉽게 풀이해 준다.“송악(개경)은 부소산이 있어 예언서에 언급된 저울대에 해당합니다. 서경(평양)은 백아 언덕이라 하겠고, 따라서 저울머리에 비유됩니다. 삼각산 남쪽에는 오덕을 갖춘 언덕이 있어, 비유하면 저울추가 됩니다. 오덕 가운데 하나는 중앙의 면악(面嶽 북악산)으로서 둥근 모양을 이루므로 토덕(土德)에 해당합니다. 북쪽에 있는 감악(紺嶽)은 구부러진 모양이라서 수덕(水德)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가 하면 남쪽에 위치한 관악(冠嶽)은 뽀족한 모양이라 화덕(火德)이 되고, 동쪽에 있는 양주 남행산(南行山 아차산)은 수직으로 서 있어 목덕(木德)에 해당됩니다. 끝으로, 서쪽에 위치한 수주(수원) 북악(北嶽)은 네모난 모형이라 금덕(金德)이라 하겠습니다.” 얼핏 보면 고려의 3경을 설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가운데서도 남경의 풍수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개경과 서경은 고려초기에 이미 알려진 명당이었으나 남경은 새롭게 부상한 길지라서 그랬을 것이다. 여기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5덕이란 개념이다. 김위제는 명당의 조건으로 그 주위에 오덕이 조화롭게 배치돼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향론과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이 역시 고려시대 풍수설의 주요 개념이었다. 그런데 ‘정감록’에서는 길지를 논할 때 5덕을 자세히 따지는 경우가 없다. 풍수설에도 시대에 따른 변천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도의 풍수를 전체 국토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살핀 것은 ‘정감록’도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김위제가 인용한 ‘70개국 조공설’ 같은 것은 묘청의 ‘36국조공설’을 거쳐 현대의 ‘정감록’ 신봉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김위제, 단군조선에 대한 관심 높아 참고로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사항이 있다.‘신지비사’의 저자에 관해서다. 예언서의 저자 신지(神誌)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단군을 도와 고조선을 함께 다스렸다는 전설적인 존재다. 두 말할 나위 없이 고조선 때는 ‘신지비사’에 보이는 풍수지리설이나 음양오행설 등이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신지비사’는 후대의 위작이 분명하다. 그것은 아마도 김위제 자신이나 그 주변 인사들이 조작한 것으로 믿어진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하필이면 김위제가 고조선의 전설적인 예언가를 빌렸다는 점이다. 그밖에 다른 역사기록이 없어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11세기 후반부터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깊어졌던 것이 아닐까? 서경이 지배자들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되면서 과거 평양성에 도읍한 고대 여러 왕조의 역사에 관해 지식인들이 주목하게 된 것 같다. 고구려, 낙랑 및 고조선의 역사를 연구하는 풍조가 일어나서 결과적으로 ‘신지비사’가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고 보면 훗날 일연(一然)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지을 때 단군의 전설을 삽입한 것도 한낱 우연은 아니었다. 김위제 등 선배 지식인들이 고조선의 역사를 연구한 덕택에 가능했던 것이다.‘정감록’은 고대사에 관해 술관 김위제가 세운 통을 이어받았다. 일례로 ‘구궁변수’를 보면, 고대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의 운수를 풀이해 놓은 대목이 따로 있다. ●‘정감록‘ 유포 반체제로 인식 국가서 통제 김위제의 생각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정감록’의 모태가 된 것 같다. 그러나 김위제의 입장은 조선후기 술사들과 견주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김위제는 국가의 보호를 받아 전문직종에 종사한 관리였다. 그의 예언서 조작 또는 예언서 해석은 고려왕조를 위한 것이었고, 왕을 비롯한 지배층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달리 말해, 고대로부터 예언은 국가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고, 김위제처럼 탁월한 술관도 국가권력에 철저히 예속돼 있었다. 그러나 조선 각지에 ‘정감록’을 유포시킨 조선후기의 술사들은 국가를 전복시킬 뜻을 품고 있었다. 한 마디로 반체제지식인들이었다. 체제수호적인 김위제의 예언 해석이 그와 정반대 입장에서 저술된 ‘정감록’에 녹아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우리가 알면 알수록 인간의 역사는 이 같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토요일 아침에] 평화를 갈망하며…/이동익 가톨릭대 교수·신부

    “우리는 그분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3) 지난 16일부터 6일간의 일정으로 독일의 쾰른에서 개최되었던 제20회 세계청년대회의 주제였던 이 문장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를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도착한 동방의 박사들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평화의 왕이신 예수가 나신 곳이 어디인지를 헤로데 왕에게 물으면서 한 말이다. 쾰른 대성당에 전설로만 알려져 있는 동방 박사들의 무덤이 실제로 있어 쾰른에서 개최되는 이 대회의 주제를 동방 박사들이 말로 선택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속에 담겨진 속뜻은 ‘평화를 향한 염원’이다. 이천년 전 동방 박사들이 평화의 왕이신 예수를 찾아 나선 것처럼 “우리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하는 마음으로 세계 각처에서 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세계청년대회의 도시인 쾰른에 모여든 것이다. 교황이 된 후 첫 해외여행으로 이 대회에 참석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행보는 당연히 ‘평화를 구하는 기도’ 그 자체였다. 유대교 회당을 방문하여 유대교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은 상상할 수 없는 범죄”라고 강하게 비난하면서 유대교와의 화해 의사를 재확인한 일이나 무슬림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잔혹 행위가 부끄럽다.”는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의 말씀 모두가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한 교황 자신의 간절한 염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교황은 또한 오늘날 만연된 테러의 현실이 “죽음과 파괴를 뿌리고 있으며 형제자매들을 슬픔과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한탄하면서 특별히 이슬람교 지도자들에게 “평화로운 삶을 건설하려는 모든 노력을 다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지금 이 순간 이 세계 인류에게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이 ‘평화’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것이다.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만이 아니요, 적대 세력간의 균형유지도 아닐 것이다. 평화는 정확히 말해서 정의의 실현이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복지가 안전하게 확보되고 사람들이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지 않고서는 이 지상에 평화는 없다. 더 나아가 타인과 타민족의 품위까지도 존중하려는 확고한 의지와 형제애의 성실한 실천이 평화 건설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런 차원에서 평화는 또한 사랑의 결실이다. 올 8월, 광복 60주년,8·15 민족대축전,6자회담 그리고 세계청년대회 등의 굵직한 일들은 유독 ‘평화’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 주었다. 핵무기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남과 북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 곧 평화에 대한 온 민족의 염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던 8월이 아니었던가. 인도에 두 수도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40년을 함께 살았어도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하루는 한 수도승이 말했다.“세상 사람들은 늘 싸운다고 하는데 우리도 한 번 싸워 봅시다.” “좋습니다. 무얼 갖고 싸울까요?” 다른 수도승이 이렇게 말하자 “이 빵 조각을 갖고 싸웁시다.” “그럽시다.”하면서 싸움은 시작되었다.“이것은 내 것이오!” 약간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하자 다른 수도승은 이렇게 말한다.“그래요? 그럼 가지세요.” 이 이야기가 뜻하는 것은 매우 단순하다. 평화란 말다툼 따위로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모든 것이 나에게 속한다는 이기적인 마음과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집과 독선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다. 예부터 평화를 가장 사랑하는 우리 민족이었으면서도 지금은 세계 그 어느 곳보다 가장 평화를 위협받고 있는 곳이 한반도라고 한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진정으로 무엇이 필요한가. 무엇보다도 우리들 마음으로부터의 무기를 제거하고, 상호 신뢰하며 서로를 건네줌으로써 참된 평화가 확립된다는 원리를 이해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이동익 가톨릭대 교수·신부
  • [열린세상] ‘땀 흘리는 비석’ 이야기/이해준 공주대 사학 교수

    경남 밀양 무안에는 땀 흘리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중에 승려의 몸으로 국난을 구한 사명대사 유정의 충절을 기리는 유물인데, 그가 생전에 나라를 위하여 노심초사하였던 것처럼 사후에도 국가의 환란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려 예언과 경계를 한다고 한다. 몇해 전 모 방송사에서는 전문가를 동원, 문제의 이 비가 흘리는 땀이 과연 영험해서인가, 아니면 과학적으로 나타난 현상인가를 밝히려 하였다. 이 프로를 통해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사명대사의 ‘나라사랑 정신’이 자연과학의 논리 앞에서 허망하게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좀 성격 급한 사람은 ‘역시 우리 조상님들이 참으로 아둔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보면 각처에 이같은 영험을 보여주는 비석이나 부처님들은 매우 많다. 남원 실상사의 철불상이 그러하고, 해남 우수영의 명량대첩비도 그런 유형이다. 그런가 하면 마을의 신앙대상인 당산나무는 재앙을 예고하기도 하고, 어느 마을의 우물은 특별한 우환의 조짐을 샘물의 색깔로써 예고하기도 한다. 대개 이는 초월적인 존재의 예시를 믿고 그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과거형 문화 모습이다. 그래서 많은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문화모습은 허황한 것이라거나, 혹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 정도의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비석이 어떻게 땀을 흘리겠는가? 부처님이 땀을 왜 흘리겠는가? 그러나 사실 그것은 땀이라는 자연현상으로 이해·설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처나 비석이 어떤 자연조건에서 농축된 수분을 머금게 된다든가, 그것을 수치나 기계로 증명하려는 순간에 이미 인간이 믿고 의지하던 그 영험한 존재는 부정되고 만다. 비석이 땀을 흘린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연의 조화이다. 과학적으로 말한다면 석질이나 주변의 기후 변화에 따라서 땀의 양이 많거나 적기도 할 것이다. 또 이들 돌비석들은 세워진 이후 수도 없이 많은 날에 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나라가 평안하다거나 걱정이 없던 시절에는 ‘저 혼자 흘리고 마는’ 것이고, 사회가 불안했던 시절에만 민중들은 아침저녁, 혹은 밤낮으로 그 비석을 찾아 자신들과 초월적인 존재의 공감을 ‘땀=눈물’로써 확인해 냈던 셈이다. 민중들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땀 흘리는 비석과 땀 흘리는 부처가 영험해지기도 하고, 민중의 염원을 대변하는 신비한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땀이 나고 안 나고가 아니라, 민중들의 불안감이 비석의 땀을 확인하였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여론수렴의 장치이자, 일종의 위정자에 대한 시위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저 유명한 계룡산의 정감록에는 우리나라를 진인(眞人)이 나타나 구해준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과연 진인이 누구일까 궁금했는데 한국전쟁 때 유엔군을 한국에 파병하도록 주선한 미국 대통령 트루(眞)+맨(人)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믿기 때문에 결과는 설명이 되는 것이고, 정감록의 위력은 당당해지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 조상들은 현실적 불안을 해소하는 다음과 같은 자기 암시와 지혜도 지니고 있었다.“이 비석이 땀을 흘리면 반드시 커다란 환란이 생기지만, 세번 연속해서 흘리면 나라에 커다란 길조가 나타나는데, 엊그제까지 두번 땀을 흘렸으므로 이제 한번만 더 흘리면 우리나라는 크게 번영할 것”이라고. 옛것과 전통문화들은 무지몽매한 조상들의 하잘것없는 유산이 결코 아니다. 참으로 경이롭기까지 한 지혜와 이러한 경험적, 정신적 바탕 위에서 형성되고 전승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정치인들이 바로 이 땀 나는 비석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민들이 비석의 땀을 확인하는 데 열중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해준 공주대 사학 교수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3)묘청은 ‘정감록’의 숨은 뿌리였다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3)묘청은 ‘정감록’의 숨은 뿌리였다

    조선 광해군 때였다. 술관 이의신이 상소하여, 경기도 교하현(현재는 파주군 교하)으로 서울을 옮기자고 주장했다. 한양의 지기가 쇠했기 때문이라 했다. 당파싸움과 청나라 세력의 등장으로 골치아파하던 광해군은 이의신의 천도론에 솔깃해 했다. 그러자 예조 판서 이정구는 이의신의 천도론을 거세게 공격했다. 풍수설은 유교 경전과 거리가 먼, 한낱 방술(方術), 아무 근거 없는 낭설이라는 거였다. 이 때 이정구는 멀리 고려 때의 일을 들먹였다.“요승 묘청(妙淸)이 음양가의 설을 빌려 임금을 현혹했습니다.‘송경은 왕업이 이미 쇠하였는데, 마침 서경에 왕기가 있으니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하여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새로 궁궐을 짓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 변란이 일어났던 것입니다.”(실록, 광해 4년 11월 15일 을사) 이정구의 이 같은 주장으로 이의신의 천도론은 무너졌다. “요망한 승려” 묘청을 연상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한국 역사상 묘청만큼 천도문제를 개혁과 맞물려 철저하게 내세운 이는 없었다. 그는 국정을 쇄신하고 종속적인 기왕의 대외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도론을 폈다. 잘 따져 보면 묘청의 천도론은 ‘정감록’과 일맥상통한다. 정감록의 주요 골자는 계룡산에 도읍해 세 세상을 열자는 것인데, 묘청의 생각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예언가 묘청의 비극 묘청은 서경(평양)의 승려다. 그는 인종 5년(1127) 검교소감(檢校少監) 백수한의 천거로 조정에 알려졌다. 서경의 천문 지리 관계 분사(分司)를 이끌던 백수한은 묘청의 제자였다. 이후 8년 동안 묘청은 인종의 신임을 받으며 국정을 좌우하다시피 했다. 그 무렵 내외정세는 무척 혼란했다. 권신이 날뛰고 북방의 금(金)나라가 압력을 가해오는 상황이었다. 인종은 수도 개경 출신의 귀족들을 억제할 생각이 없지 않았다. 혹시 금나라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그에 대한 대비책도 강구해야만 되었다. 묘청은 인종의 이런 고민을 잘 헤아렸다. 묘청이 제시한 해결책은 서경천도였다. 인종7년(1129) 묘청의 강력한 추진력에 힘입어 서경에 신궁이 낙성되었다. 이 기회를 빌려 묘청 일파는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세움)을 주장했다. 금나라에 대한 선제공략도 건의했다. 실로 국가의 명운을 건 과감한 시책이었다. 인종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비롯해 여러 도참설을 이용하였다. 신비한 이적을 조작하기도 했다. 예컨대 인종이 신축된 서경의 궁궐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는 순간 공중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고 허풍을 친 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서경 한 가운데를 흐르는 대동강에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났다고 야단이었다. 신룡(神龍)이 침을 토해 강물에 오색빛깔이 영롱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신이한 현상에 대해 묘청 측은 위로 천심에 따르고 아래로 인망을 잃지 않은 결과라며 장차 고려는 동북아 최강의 패자로 급부상하던 금나라도 제압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공중에서 풍악소리가 저절로 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환청 같은 것에 불과했다. 대동강물에 서기가 비친 것도 역시 조작된 것이었다. 묘청 등은 남몰래 큰 떡을 빚어서 속을 빼내고 볶은 기름을 채운 뒤 구멍을 뚫었다. 그런 다음 이 떡을 대동강에 가라앉힌 것이었다. 떡에서 나온 기름방울이 햇빛에 비쳐 오색을 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고려사’, 권 127) 처음에 인종은 묘청의 개혁안에 적극 찬동하였다. 그러나 왕은 결국 묘청과의 약속을 배반했다. 본래 왕의 성격이 우유부단한데다 개경의 구 귀족들이 벌인 반대공작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묘청과 대립한 개경파의 거두는 김부식이었다.‘삼국사기’의 저자로도 유명한 김부식은 문무를 겸전한 인물이었다. 그는 개경의 구 귀족 세력을 결집시켜 우선 인종과 묘청을 이간시키고, 이어서 묘청을 비롯한 서경파를 완전히 제거할 생각이었다. 인종13년(1135) 묘청은 더 이상 인종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력으로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심해 평양에 새 나라를 세웠다. 국호를 대위(大爲)라 정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묘청의 군대는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 하늘이 보낸 충의로운 군대)이라 불렀다. 그러나 김부식이 이끌던 고려군의 전술적 능란함을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묘청은 한 때 그의 충실한 부하였던 조광에게 암살되었다. 이로써 묘청의 개혁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선말까지도 유학자들은 묘청을 단죄해 왔다. 앞에 예로 든 이정구처럼 유학자들의 눈에 비친 묘청은 한갓 요망한 승려에 불과했다. 예언과 이적을 빌려 나라를 망치려 든 역적이란 것이다. 이런 악평을 처음으로 뒤집은 이는 아마도 단재 신채호(1880~1936)일 것이다. 그는 묘청과 김부식의 대결을 한국사에 있어 자주노선과 사대노선이 격돌한 일대사건으로 보았다. 신채호에 따르면, 묘청의 실패는 한 개인의 패망이 아니라 한민족의 주체성이 외세의존적인 세력에 완전히 무릎을 꿇고만 중대사건이었다. 나는 신채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묘청의 행적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다. 예언가 묘청은 개혁의 웅지를 품었던 역사상의 일대 거인이었기 때문이다. ●서경 궁궐터와 36국 조공설 ‘정감록’을 신봉하는 이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정씨가 계룡산에 도읍하면 나라의 수명은 6백 년이요,36국의 조공을 받게 된다. 사실상 세계 통일 정부가 한반도에 출현할 시운이 오는 것이다.” 지리산 청학동 골짜기에 있는 어느 신종교의 본부 건물에 부착된 주련(柱聯)에도 비슷한 구절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세계의 운이 돌고 돌아 이제 동방의 작은 나라로 들어오리라.”는 것이다. 36국이라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36이란 숫자는 자연수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전통적인 지리 관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동, 서, 남, 북의 4방으로 나뉜다.4통8달이란 말도 있지만 4방은 다시 여럿으로 세분화된다.12 간지를 모방해 지관의 나침반에서 보듯 4방은 다시 12로 나뉜다. 이것이 36으로 더욱 미세하게 갈라지기도 한다. 요컨대 36은 온 세상을 포괄하는 상징적 표현이다. 장차 한국이 36국으로부터 조공을 받게 된다는 말은, 다시 말해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로 등장한다는 뜻이다. 물론 세상 모든 나라가 한국에 굴복할 거라는 기대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알다시피 고대로부터 중국대륙에는 강대한 정치세력이 연이어 들어섰다. 그들 나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엔 독특한 세계 질서가 형성되었다. 조공체제란 것이다. 한 편엔 당연하다는 듯 조공을 받는 문명한 큰 나라가 있고, 다른 한 편엔 조공을 바칠 의무를 걸머진 여러 개의 미개한 나라들이 있다고 보는 위계적인 세계관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은 여진과 유구 등 몇몇 나라의 조공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 조공을 바쳐야만 되었던 경우가 좀더 많았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한국 사람들은 언젠가 다른 나라들에서 조공을 받는 날이 오기를 꿈꾸게 되었다. 근원을 헤아려 볼 때 ‘정감록’ 신봉자들이 36국 조공설을 주장하는 것은 민중의 오랜 갈망을 드러낸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조공 자체에 비중을 둔 것 같지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새 국가의 건설을 바랐던 염원으로 봐야 옳지 않을까 한다. 36국 조공설을 처음으로 편 사람은 다름 아닌 묘청이었다. 그것도 서경천도론을 펴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인종 6년(1128) 고려 수도 개경의 인덕궁과 남경(뒷날의 한양)에 있던 궁궐이 연이어 화재를 입었고, 이 무렵 묘청은 이렇게 주장했다.“서경에 있는 임원역의 지기를 살펴 보았습니다. 이 곳이 음양가에서 말하는 이른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만약 그곳에 궁궐을 세우고 수도를 옮기신다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습니다. 금나라가 조공을 바치게 되고 저절로 항복해올 것입니다.36국이 모두 조공을 바치게 될 것 입니다.”(‘고려사’, 권 127) 이 말에서 보듯 묘청은 한국의 지세를 하나의 유기적인 조직체로 인식했다.“대화(大華)”란 대화(大花)다. 국토를 한 그루의 나무로 볼 때 가지마다 크고 작은 꽃이 핀다. 이것이 각지의 길지 또는 명당이다. 이들 명당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명당이 큰 꽃이다. 그 자리가 평양 임원역에 있으므로, 그곳에 궁궐을 지으면 나라가 가장 융성하게(大華) 된다는 것이다. 인종은 묘청의 36국 조공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동안 개경의 귀족들에게 억눌려 지내온 자신의 처지를 일거에 개선하고, 나아가 쇠약해진 국운을 개척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왕은 묘청의 건의에 따라 서경에 궁궐을 지은 뒤, 개혁의 꿈을 이렇게 담아냈다.“해동 선현(海東先賢 옛날의 어진이들 즉, 예언가들)이 말하기를,‘대화세(大華勢)에 궁궐을 창립하여 나라의 운명을 연장할 것이다.’고 했다. 이제 이미 그 터를 잡아 새로 궁궐을 지었다. 나는 때때로 그곳을 순회하여 은혜와 덕택이 안팎에 고루 미치게 하려 한다. 이를 기념하여 죽을죄를 범한 자는 감하여 유배형에 처하고, 유배 형 이하의 죄를 지은 자는 모두 용서하겠다.”(‘고려사’, 권 16) 인종이 내린 글에서 보듯, 묘청은 ‘대화세´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앞 시대의 예언서에서 찾아 놓고 있었다.‘해동선현’이 했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런 예언이 묘청 일파에 의해 조작됐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어쨌거나 인종은 서경에서 발견된 대화세 명당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당시 조정 대신들 가운데서도 문공인과 임경청 등 일부 인사들은 묘청을 추종했다. 그들은 묘청을 “성인(聖人)”이라며 떠받들었다. 묘청의 제자 백수한 역시 그들에겐 존경의 대상이었다. 문공인 등은 왕에게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모든 국가의 일을 묘청과 백수한 두 사람에게 일일이 자문한 뒤에 시행하십시오. 그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나라가 다스려져 평안할 것입니다.”(‘고려사’, 권 127) 이 말대로 인종은 한동안 묘청의 말이라면 무조건 다 좇았다. 그러나 의심 많고 나약한 왕은 결국 묘청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왕은 신하들이 “성인”이라 추앙하는 묘청의 종교적 카리스마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훗날 조선조의 중종이 개혁파 조광조를 중용하다가 겁을 내어 처단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려 인종은 본래 자기의 적이었던 송경의 귀족들을 앞세워 묘청을 제거했다. 묘청의 죽음과 더불어 36국 조공설은 끝장났다. 하지만 그 꿈은 민중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았다. 묘청이 죽은 지 900년 가량 지난 오늘날에도 ‘정감록’ 신도들은 여전히 36국 조공설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묘청의 팔성당과 십승지 묘청이 국토를 한 그루의 나무로 인식했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말했다.‘대화세´로 집약되는 묘청의 풍수 이해 가운데서 나는 ‘정감록’에 언급된 십승지의 원형을 본다. 이런 짐작은 인종9년(1131) 묘청이 인종에게 올린 글에서 더욱 뚜렷이 확인된다. 그는 궁궐 안에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하자고 제안하였다. 국토의 수호신인 여덟 성인을 위해 사당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이들 여덟 성인은 풍수지리와 관계가 깊었다. 동시에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팔성”에 관한 묘청의 말은 이랬다. “첫째는 호국(護國) 백두악(白頭嶽 백두산) 태백선인(太白仙人)인데 실체는 문수사리보살(文殊舍利 菩薩)입니다. 둘째는 용위악(龍圍嶽 금강산으로 추정) 육통존자(六通尊者)로 실체는 석가불(釋迦佛), 셋째는 월성악(月城嶽 경주 남산으로 추정) 천선(天仙)으로 실체는 대변천신(大變天神), 넷째는 구려(駒麗) 평양선인(平壤仙人)으로 실체는 연등불(燃燈佛), 다섯째는 구려(駒麗) 목멱선인(木覓仙人 목멱은 남산)으로 실체는 비파시불(毗婆尸佛), 여섯째는 송악(松嶽) 진주거사(震主居士)로 실체는 금강색보살(金剛索菩薩), 일곱째는 증성악(甑城嶽 속리산으로 추정) 신인(神人)으로 실체는 륵차천왕(勒叉天王), 여덟째는 두악천녀(頭嶽天女 이른바 지리산 聖母)로 실체는 부동우파이(不動優婆夷)입니다.”(‘고려사’, 권 127) 묘청의 주장은 ‘정감록’의 십승지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그가 거론한 지명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백두산을 비롯해 백두대간의 주요 마디가 중시되었다. 백두산, 금강산, 속리산 및 지리산을 비롯해 송악산과 서울 및 경주의 남산 등이 언급되었다.‘정감록’에 언급된 길지들이 이들 여러 산과 관련이 있다는 점은 이미 여러 차례 말했다. 얼핏 보기에 ‘정감록’과 전혀 다른 점도 눈에 띈다. 전국 8대 명산의 실체를 도교의 신선이자, 불교의 불보살로 인식한 점이다.‘정감록’에는 이런 종교적 관점이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주 없지는 않다. 부안의 변산이나 보은 속리산처럼 미륵불교의 성지가 십승지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례로 ‘정감록’의 핵심 예언서에 해당하는 ‘감결’을 살펴보더라도 불교 최고의 성지 금강산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인들의 마음속에는 불교의 성지가 바로 최고의 명당이요, 국가의 운명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이런 믿음이 풍수지리사상과 결합해 팔성당이나 십승지라는 관념을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에는 불교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다.‘정감록’에는 불보살의 존재가 그저 간접적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더욱이 ‘정감록’을 전국에 전파시킨 술사들이 유교적 교양을 갖춘 평민 지식인들이고 보니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묘청이 팔성당의 건립을 주장했을 당시만 해도 사정은 아주 달랐다. 왕은 화공을 시켜 팔성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당대 최고의 명문장 정지상은 팔성의 덕을 이렇게 찬양했다.“오직 천명(天命)만이 만물을 제어할 수 있고 오직 땅의 덕(土德)만이 사방에 왕 노릇을 하게 돕는다. 이제 평양 한 가운데 대화(大華)의 지세를 골라서 궁궐을 새로 짓고 음양의 이치에 순응하여 팔선(八仙)을 모시노라. 백두산을 받들어 우두머리로 삼으니 밝은 빛이 어리누나.” 묘청은 한국 풍수지리의 비조(鼻祖) 도선국사의 정맥(正脈)을 이었다고 했다. 도선의 후예답게 그는 팔성당 이론을 폈고, 이는 훗날 십승지설로 다시 피어나게 될 운명이었다. ●묘청의 새 상원(上元)과 후천개벽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감록’의 이면에 간직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사상도 실은 묘청에 기원을 두었다는 점이다. 인종10년(1132) 왕이 반포한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옛 가르침(예언서)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천지가 생긴 뒤 수만 년이 지나면 반드시 동지(冬至)가 갑자일이 되리라. 그때가 되면 해와 달 그리고 수화목금토 다섯별이 모두 정북(正北,子)에 모여든다. 이 때를 상원(上元)으로 삼아 일력의 출발점을 삼으라. 천지가 열린 뒤 성인(聖人)의 도(道)가 이때부터 행해질 것이다.’(‘고려사’, 권 16) 하늘을 수놓은 일곱 개의 주된 별이 정북에 모이는 동짓날이 되면 후천이 개벽된다는 예언이었다. 이런 예언에 생명을 불어넣은 이는 묘청이었다. 그는 그해 동짓날을 기점으로 후천개벽이 시작된다며 왕에게 정치의 혁신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은 결국 묘청의 제안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그건 그랬지만 한국 민중은 묘청이 한 번 싹을 틔운 이상세계의 꿈을 끝내 접지 않을 것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알림 지난 18일자에 게재된 정감록 32회 기사중 경북 울진 ‘불영사’의 한자 표기는 ‘不影寺’가 아닌 ‘佛影寺’이기에 바로잡습니다.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2)남사고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32)남사고와 ‘정감록’

    한번은 영조 임금이 대신들에게 “도대체 남사고가 누구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살아생전 그는 미관말직에 종사한 하급관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후 200여년 뒤 조정에서 그 학식과 인품을 둘러싼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큰 인물이었다.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1509∼1571)는 선조 초기 천문 교수로 발탁됐다. 보통 천문을 비롯한 잡학(雜學)의 교수는 중인 출신이 많았다. 하지만 남사고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유학자이면서도 당대 최고의 천문지리가로 평가를 받았다.‘정감록’의 핵심개념인 이른바 십승지설(十勝地·최고의 피란지에 관한 주장)도 그 한 뿌리가 남사고에 닿아 있다. 남사고는 예언서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그가 지었다는 ‘남사고비결’이란 책이 18세기 이후 크게 유행했다. 구한말엔 ‘격암유록’이란 예언서도 추가로 발굴됐다. 남사고처럼 이름난 예언가는 역사에 드물다. 그런 비상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실상 그는 늘 곤궁했고 박복했다. 몸에 병이 많아 늘 죽음과 직면할 정도로 큰 고통을 겪었고, 한겨울엔 몸에 걸칠 외출복이 없어 친구 집에 문상조차 못 갔다. 너무도 불우했던 남사고는 굽이굽이 용틀임하며 달려가는 산줄기를 그리워했고, 밤하늘 별자리를 바라보며 외로운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남사고와 불영사 남사고는 경북 울진 출신이다. 그는 어렸을 때 자주 불영사(不影寺)를 찾아갔다. 이 절은 산자수명하여 부처를 비춘다는 불영계곡 안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소년 남사고는 절간에서 한 노승을 만났는데 그는 소년이 남다른 인물이 될 줄로 짐작해 3권의 비결을 내주었다. 천편(天編)은 별자리의 운행과 그 운세 등 천문에 관한 모든 사항을 항목별로 적어 놓았다. 지편(地編)은 산천의 지세와 명당 등 풍수를 자세히 논한 것이었다. 마지막 인편(人編)은 한번만 사람 얼굴을 쳐다보면 그 명운(命運)을 알아맞히는 방법을 기록한 비밀스러운 책이었다. 노승은 이 책들을 건네주며 신신당부했다. 아무쪼록 덕을 쌓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뒤 어느 날 노승은 남사고의 공부를 점검하러 집으로 찾아갔다. 당연히 제1권인 천편부터 차례로 공부하고 있으리라 짐작했으나, 남사고는 인편에 실린 각종 비술에 빠진 나머지 천편은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었다. 노승은 남사고가 비결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쓸까 염려한 나머지 남사고의 집에 불을 질러 책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러고는 불영사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사고의 지리 공부 졸지에 비결을 빼앗긴 남사고는 새 각오로 삼천리강산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제야 지리 공부의 요체를 파악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명당을 얻더라도 결국 덕을 많이 쌓는 사람만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깨쳤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남사고가 아버지 무덤을 아홉 차례나 이장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그는 지리를 완전히 터득한 고수였던 지라 가장 좋은 자리를 택해 아버지의 묘를 썼다. 그런데 써놓고 보면 더 좋은 자리가 문득 눈에 띄곤 해 옮겨 쓰기를 되풀이하였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비룡승천(飛龍昇天·용이 하늘로 날아가는 모양)형의 명당을 얻어 다시 이장을 하였다. 그때 지나가던 한 술사가 이런 노래를 불렀다. “구천십장(九遷十葬·아홉 번 묘를 옮겨 열번 장사를 지냄) 남사고야, 비룡승천을 좋아 마라. 고사괘수(枯蛇掛樹·말라 죽은 뱀을 나뭇가지에 걸친 모양)가 아닌가?” 남사고는 깜짝 놀라 산세를 다시 살폈다. 죽은 용이 분명했다. 그 술사를 만나 한 수 배우려 했으나 이미 자취를 감춘 다음이었다. 생각 끝에 남사고는 지각유주(地各有主)라, 명당도 저마다 임자가 따로 있어 인력으로 바꿀 도리가 없다는 깨침을 얻었다. 그는 별로 하자가 없어 보이는 평범한 묘 자리를 구해 아버지의 유해를 평안히 모셨다. 요컨대 사리사욕에 사로잡히면 눈이 멀어 명당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고, 설사 요행히 명당을 차지하더라도 발복(發福·복이 나타남)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남사고의 실패를 약간 달리 해석한다. 조상이 지은 죄가 워낙 많아 남사고가 일껏 명당을 잡더라도 쓸모없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른바 구천통곡(九遷痛哭·아홉 번 옮기고 통곡함)을 통해 남사고는 덕을 쌓는 것이 최우선이란 고승의 가르침을 확인했다 한다. 앞의 이야기는 한낱 설화에 불과하지만 지관 남사고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남사고의 명예언 지리 공부를 마친 남사고는 서울에 놀러 갔다. 그는 권판서를 비롯해 당대의 석학들과 두루 사귀었다. 그는 이미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터득했기 때문에 서울 친구들에게 몇 가지 예언을 들려주었다. 첫째, 곧 조정에 당파가 생겨날 테니 조심하란 것이었다. 둘째, 왜적이 난리를 일으키는데 만일 용(辰) 해에 전쟁이 일어나면 나라를 구할 수 있으나 뱀(巳) 해에 전란이 시작되면 나라는 영영 망하고 만다. 셋째, 지금 사직동을 둘러보니 왕기(王氣)가 서려 있어 거기서 임금이 나올 것이다. 넷째, 태릉이 들어설 곳을 가리키며 장차 태산에 봉해진다고 하였다. 첫째 예언은 선조 8년(1575)부터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일어나 사실로 입증됐다. 둘째 예언 역시 용 해인 임진년(선조 25)에 왜적이 쳐들어와 꼭 맞아떨어졌다. 셋째도 사직동에 살던 선조가 뜻밖에 대통을 이어 1567년 등극함으로써 적중했고, 넷째는 명종의 모후(母后)인 문정왕후가 죽은 뒤 태릉에 묻혀 기정사실이 됐다. 이처럼 남사고의 예언 능력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러다 보니 많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번은 그가 하늘 별자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더니 자미성(紫微星·어진 사람의 운명을 관장하는 별)이 빛을 잃어버리는 참이었다. 아마 자기가 죽을 날이 다 된 모양이라며 남사고는 서울을 떠나 귀향길을 서둘렀다. 죽어도 집에 가서 죽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남명 조식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하늘을 바라보니 자미성은 회복세에 있었다. 그제야 남사고는 자미성의 변화가 남명의 죽음을 예고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수련을 쌓았고 그 결과 자신이 죽을 날을 알아 맞힐 정도가 됐다. 천문 교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하늘에는 태사성(太史星·천문 담당 벼슬을 상징하는 별)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 현상을 목격한 남사고의 상관은 자기가 세상 떠날 날이 되었다고 지레 짐작해, 동료들을 모아놓고 작별인사를 고했다. 그러자 남사고는 크게 웃으며 “죽을 사람은 따로 있다.”고 말했다. 며칠 뒤 남사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사고와 퇴계 이황의 만남 남사고는 도술에도 능했다 하는데 흥미로운 설화가 전한다. 그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방문했을 때였다.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퇴계 집안은 검약하기 그지없어 밥상에는 보리밥과 고추장밖에 다른 반찬이 없었다. 남사고는 도술을 부려 잉어회를 만들었다. 그러자 퇴계는 손사래를 치며 남의 잉어를 빼앗아 먹을 수 없다며 한 점도 먹지 않았다. 설화 속의 퇴계는 실상 남사고보다 예언과 도술에 능통하다. 귀신에게 홀린 제자를 구해 주기도 하고,9대 자손에게 닥칠 위기를 미리 예견한다. 퇴계는 일찍이 여우의 구슬을 삼킨 적이 있어 축지법도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설화의 세계에서 보는 퇴계는 만능인간, 초월적 존재다. 이는 물론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다르다. 민중은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가 자기들의 편에 서서 따뜻한 보호자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퇴계를 만능의 인간으로 형상화했다. 남사고가 밥상에 올린 잉어회를 퇴계가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민중은 물론 남사고와 같은 예언가를 기꺼이 믿고 의지한다. 하지만 학덕이 높은 퇴계에게는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남사고가 익힌 지리와 천문이 한낱 기술이라면, 퇴계의 학문은 그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삶의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민중의 인식을 본다. ●십승지는 남사고의 작품인가 그렇다 해도 많은 사람들은 남사고의 특별한 지식과 능력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정감록’의 중심개념인 십승지설이 ‘남사고산수십승보길지지(南師古山水十勝保吉之地)’에서 발견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민중은 남사고 같은 예언가라면 당연히 훌륭한 피란지를 점지해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남사고’는 ‘정감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여러 산들 중에서 소백산(小白山)이 으뜸이요, 지리산(智異山)이 다음이다.”라고 했듯, 길지는 주로 소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큰 마디에 몰려 있다. 이를 지역별로 나눠 보면 경상도가 4개, 전라도 3개, 충청도 2개, 강원도 1개다. ‘남사고’의 이런 길지는 ‘정감록’외 다른 예언서에 나오는 한국 최고의 길지들과 대동소이하다.‘정감록’에 언급된 길지를 출현 빈도순으로 정리해보면, 경북 풍기, 충남 공주, 경남 가야산이 각 10회로 으뜸이다. 다음은 경북 안동으로 9회이며, 경북 예천과 전북 운봉은 각 7회, 태백산·소백산 및 충북 보은은 6회, 경북 개령·봉화, 강원 영월, 충청 단양, 전북 무주 및 부안이 각 5회로 각기 정상급 길지로 손꼽힐 만하다. 그밖에 충북 진천도 4회나 된다. 십승지를 비롯한 전국의 주요 길지는 해안선이나 큰길에서 떨어진 곳에 있다. 길지를 선정하게 된 이유가 전쟁, 전염병 및 흉년의 세 가지 피해(三災)를 벗어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해안지방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데다 조선후기엔 이양선의 출몰이 잦았고, 임진왜란이나 정묘호란 때 외적은 큰길을 따라 진군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로변과 해안은 길지에서 제외됐다. 하지만 흉년이 들지 않는 장소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참 어려웠다. 그런데 최고의 길지 가운데는 전북 부안처럼 해안 고을도 있었다. 부안이 십승지로 부각된 것은 물론 다른 이유에서였다. 신라 말 민중적 미륵불교를 창시한 진표 스님이 미륵보살로부터 간자(簡子)를 받은 곳이 바로 부안이었다. 그때 이후 부안은 세상을 구할 진인이 출현할 땅으로 민중의 가슴속에 길이 기억됐다. 공주는 충청감영(忠淸監營)의 소재지로 조선시대엔 가장 큰 대로변에 위치했다. 그럼에도 계룡산이란 풍수상의 일대명산을 거느리고 있어, 길지 중의 길지로 손꼽혔다.‘정감록’은 계룡산 사상 즉 진인이 계룡산에 도읍해 새 세상을 연다는 예언이 핵심이다. 따라서 공주를 빼놓은 길지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길지들, 특히 그 대표가 되는 십승지는 과연 남사고가 창안했을까? 이중환의 ‘택리지’를 보면 남사고가 전국을 유람하며 길지를 점지한 것은 사실이었다. 남사고는 전국의 지세를 하나의 유기체로 파악했다.‘산수비경’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만주 땅을 할퀴는 형상이다.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했다. 경북 포항의 영일만 동쪽에 있는 호미곶은 우리나라의 동쪽 끝 땅이다. 우리 땅을 용맹스러운 호랑이로 보고 그 꼬리라는 뜻에서 호미(虎尾)라 부른 남사고였다. 그는 전국의 여러 명당 가운데서도 유독 소백산을 중시했다.“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活人山)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남사고’를 보면, 소백산 주변에 십승지의 상당수가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런 점에서 십승지설은 남사고의 뜻을 상당부분 반영한 것으로 믿어도 좋겠다. 그런데 사실 조선시대의 지관(地官)들은 누구나 전국의 길지를 논했다. 그들에겐 공통된 의견도 있었다. 태백산 이남에 길지가 많다는 것인데, 특히 소백산, 작성상(황장산), 주흘산, 희양산, 청화산, 속리산, 황악산,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남쪽 구간에 명당이 많다 했다. 십승지를 비롯한 전국의 길지는 남사고 한 사람이 모두 찾아낸 것은 아니었다. 남사고는 선배 지관들이 앞서 제기한 논의를 일단 종합했던 것이다. 이것이 다시 후배들에게 이어지면서 길지에 관한 논의는 더욱 풍부해졌다.‘남사고’는 한 사람의 단독 저술로 간주되기 곤란하다. 그것은 18∼19세기 조선의 지관들이 선배들의 다양한 의견을 참작해 만든 공동저작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후배들은 전설적인 지관이며 명예언가인 남사고의 이름을 빌렸던 것이다. ‘남사고비결’도 여러 번 다시 쓰였다 영조 9년(1733)에 적발된 ‘정감록’ 사건엔 ‘남사고비결’이 등장한다. 무신년에는 피가 흘러 내(川)를 이룬다는 등 흉흉한 내용이 나와 있었다(실록·영조 9년8월18일 병인). 마침 영조 4년(1728) 무신년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남부지방을 휩쓸었던 터여서 조정은 이 ‘비결’의 등장에 경악했다. 이 ‘비결’과 제목이 똑같은 예언서는 현재도 남아 있다. 당연히 ‘정감록’에 포함돼 있다. 그러면 현존하는 ‘비결’은 영조 때 발각된 것과 같은 내용의 예언서일까? “무신·기유(戊申己酉)년: 제갈량(諸葛亮·제갈공명)이 이미 죽었으니 어느 성 한쪽 금성(錦城)이 피폐하도다. 경시(更始·개혁의 시작)는 자리를 긁고 범증(范增)은 등창이 나는구나.”라고 하였다. 책사(策士)로 유명한 제갈공명과 범증이 이미 죽거나 병들었다 했다. 나라에는 제대로 일을 도모할 만한 신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판국이라 개혁은 제자리를 맴돈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쟁 또는 반란을 예언했다는 영조 때의 ‘비결’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비록 예언서의 명칭은 ‘남사고비결’이라 했지만 알고 보니 그 내용은 전혀 달랐다. 세상은 날로 바뀌기 마련이다. 따라서 후배 술사들은 새로운 내용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 예언서가 이미 알려진 예언서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때로 새 술도 헌 부대에 넣으면 값비싼 명품으로 둔갑된다. 이것이 시장의 논리다. ●남사고의 ‘격암유록’과 신종교 남사고는 예언계 최고의 브랜드였고, 그래서 끊임없이 이용됐다.19세기 말엔 ‘격암유록’이란 낯선 예언서가 등장했다.‘정감록’을 상당부분 모방하고, 그 무렵에 태동하고 있던 신종교의 선교에 도움이 될 내용을 덧붙인 것이었다.‘격암유록’은 뒷날 증산교의 종교적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일부 기독교 계통의 신종교 단체는 남사고가 지었다는 ‘궁을가’를 기꺼이 인용한다. 이 역시 위작(僞作)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궁궁을을”에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궁궁”도 십자가,“을을” 역시 십자가라는 것이다. 역사상 남사고는 궁핍한 예언가였다. 하지만 후세의 사람들 중엔 그 이름을 팔아 기름진 음식과 호사를 누리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민중이 남사고에게 걸었던 희망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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