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예비군
    2025-12-20
    검색기록 지우기
  • 뉴라이트
    2025-12-20
    검색기록 지우기
  • 검찰총장
    2025-12-20
    검색기록 지우기
  • 공정위
    2025-12-20
    검색기록 지우기
  • 기부금
    2025-12-2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255
  • [인사]

    ■기획재정부 △운영지원과장 백병갑△규제개혁법무담당관 정남희 ■포항시 △남구청장 정봉영△지진피해수습단장 허성두△농업기술센터소장 김진근△맑은물사업본부장 윤영란△평생학습원장 권태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전보△방송심의1국 방송심의기획팀장(선거방송심의지원단 부단장 겸직) 정호근△방송심의1국 지상파텔레비전팀장 정상우 ■에쓰오일 ◇부사장 승진△재무본부장 방주완 ■도레이첨단소재 ◇전무 승진△수지케미칼사업본부장 오노 시게키△기술연구소장 박서진△필름사업본부장 김영섭◇전보△TID 사업부장 부사장 황우창△필름건설담당 상무 엄태수 ■한남대학교 △비서실장 김홍진△감사실장 조인성△창의혁신본부장 사희민△지방대학특성화사업 총괄사업단장 윤천석△IPP일학습사업단장 윤영선△교수학습센터장 최지영△창업지원단장 이준재(한남창업마을촌장 겸직)△국가시험지원센터장 송희석△국제IT교육센터장 김상배△한남스포츠문화센터장 윤진환△학생상담센터소장 양명숙△한국어교육원장 박진숙△외국어교육원장 허근△교육연수원장 윤교찬(한남학술연구원장 겸직)△교직부장 김성용△공학교육혁신센터장 강봉수△산업단지캠퍼스조성사업단장 김승준△창업·융합대학장 권세혁△대학원교학부장 유천성△중앙박물관장 이주현△자연사박물관장 변봉규△평생교육원장 강전의△출판부장 최성규△생활관장 변상형(중앙박물관부관장 겸직)△예비군연대장 김규열△인돈학술원장 천사무엘△산학협력단 감사 김원규 ■신성대학교 △대외부총장 장영숙△대외협력처장 김행수△인성교육관장 김선회
  • [뉴스를부탁해]평창올림픽 ‘군 면제’ 최대 수혜자는

    [뉴스를부탁해]평창올림픽 ‘군 면제’ 최대 수혜자는

    ‘합법적인 도핑’ 뜻하는 ‘면제로이드’ 신조어도메달 따도 ‘군 면제’ 아닌 ‘체육요원 편입 자격’의무복무기간 2년 10개월, 지켜야 할 사항 수두룩스켈레톤 윤성빈, 팀 추월 정재원 ‘병역 혜택’ 주목 운동선수에게 올림픽은 꿈의 무대입니다. 치열한 국가대표 선발전을 넘어야 하고, 하고 싶은 일, 놀고먹고 꾸미고 싶은 것 다 미루고 지독한 훈련을 견뎌야 비로소 올림픽 경기장에 설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선수로선 큰 영광일 겁니다. 여기에 메달까지 딴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겠지요.젊은 남자 선수들은 또 다른 기대를 품습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에만 주어지는 병역 혜택 말입니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재미있는 말로 표현되더군요. 군 면제와 스테로이드(손상 근육을 빠르게 회복시키려고 투여하는 약물)를 합친 ‘면제로이드’라는 용어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올림픽에서 메달을 땄다고 해서 병역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병역법 제 33조 7항을 보겠습니다. 병무청장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예술·체육 분야 특기를 가진 사람으로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추천한 사람을 예술·체육요원으로 편입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대통령령이 정하는 사람이란 체육 분야만 놓고 보면 올림픽 대회에서 3위(동메달) 이상으로 입상한 사람, 아시아경기대회(게임)에서 1위(금메달)로 입상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격이 있는 선수는 예술·체육요원 추천원서에 입상 확인서를 첨부해 문체부 장관에게 제출하면 병무청장에 통보됩니다. 흔히들 올림픽 메달리스트는 4주의 기초 군사훈련만 받으면 사실상 군 복무를 면제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예술·체육요원의 의무 복무기간은 2년 10개월입니다. 기초 군사훈련은 물론이거니와 복무기간이 끝나면 예비군 훈련도 받아야 합니다. 복무기간 중 지켜야 할 사항도 많고 자칫하다간 병역 특례 자격을 박탈당할 수도 있습니다.체육요원은 복무 기간 중 해당 특기 종목의 운동을 계속해야 하고 특기를 활용한 봉사활동도 수행해야 합니다. 만약 운동을 그만두면 복무를 안 한 일수의 5배 기간을 추가로 복무해야 합니다. 또한 복무 기간 중 ▲다른 사람의 근무를 방해 또는 근무 태만을 선동하거나 ▲정당 등 정치단체에 가입해 정치적 목적의 행위를 할 경우 ▲다른 예술·체육요원에 가혹행위를 할 경우 ▲복무기관장 허가 없이 다른 직무를 겸할 경우에는 경고처분을 받습니다. 한번 경고를 받을 때마다 복무기간은 5일씩 늘어납니다. 체육요원 편입이 취소될 수도 있습니다. ▲기관장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해외에 출국하거나 ▲사전 허락을 받더라도 국외 체류 후 귀국하지 않을 경우 ▲금품 수수 등 부정한 방법으로 체육요원에 편입된 경우 ▲승부조작 등 해당 분야 복무 관련 부정행위로 형을 선고 받은 경우 ▲의무복무기간 중 범죄행위로 금고 이상 실형을 받은 경우에는 남은 복무기간 동안 병역의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군대 가야 한다는 얘깁니다. ‘군 면제’는 아니지만 우수한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20대 시기에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고 자유롭게 운동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혜택입니다. 그래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남자 선수들의 메달 획득에 대중도 관심을 쏟는 것입니다.다시 평창올림픽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21일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팀 추월 결승전이 있었습니다. 이승훈(30·대한항공), 김민석(19·평촌고), 정재원(17·동북고)이 출전해 값진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이어진 시상식에서 조금 이상한 점 느끼셨을 겁니다. 금메달을 딴 노르웨이팀, 동메달을 딴 네덜란드팀은 시상대 위에 4명의 선수가 올랐습니다. 우리는 3명이었죠. 팀 추월은 3명이 뛰는 경기지만 한 명의 후보 선수가 있습니다. 예선부터 결승까지 한 번이라도 경기에 참여해야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습니다. 우리 팀의 주형준(27·동두천시청)은 평창올림픽 팀 추월에 한 번도 출전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시상식에 나오지도, 메달을 받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안타까웠습니다. 나머지 선수들은 메달과 함께 병역 혜택도 챙겨 가는데 주형준은 얻은 게 없으니까요.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주형준은 2014 소치동계올림픽 팀 추월에서 이미 은메달을 땄습니다. 지난해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팀 추월에서도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이미 병역 혜택을 받은 겁니다. 그럼 이번 평창 올림픽에서 짜릿한 병역 혜택을 받은 선수들은 누구일까요. 군 문제로 가장 화제가 된 선수는 남자 스켈레톤 금메달리스트 윤성빈(24·강원도청)입니다. 4번의 주행 기록을 합산한 성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스켈레톤 경기에서 윤성빈은 모든 주행에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습니다. 네티즌들은 1차 주행 때 이병으로 입대해, 2차(일병), 3차(상병)으로 진급한 뒤 4차 주행에서 병장 제대를 한 것이라며 윤성빈의 병역 혜택을 축하했습니다.윤성빈이 5년 전인 2013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난 꼭 군 면제 받아야지”라는 짧은 글이었습니다. 병역 혜택이 올림픽 금메달 획득에 있어 큰 동기 부여가 된 셈입니다. 쇼트트랙 선수들은 어떨까요. 이번 올림픽 남자 1500m에서 한국에 첫 번째 금메달을 안긴 임효준(22·한국체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첫 올림픽에서 임효준은 시원하게 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남자 1000m 동메달리스트 서이라(26·화성시청)는 지난해 삿포로 아시안게임에서 금 1개, 은 2개를 목에 걸어 병역 특례는 이미 확보해 둔 상태입니다.1000m 준준결승에서 불행하게도 임효준, 서이라와 한조에 속했던 황대헌(19·부흥고)은 결승선을 들어오면서 넘어졌고 비디오 판독 끝에 실격됐습니다. 하지만 22일 열린 500m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병역 혜택을 확보했습니다. 남자 쇼트트랙 맏형 곽윤기(29·고양시청)는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계주에서 은메달을 따둔 상태라 상대적으로 군대 걱정에서 자유롭습니다.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간판’ 이승훈도 밴쿠버올림픽 10000m와 5000m에서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추가해 일찌감치 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승훈은 삿포로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4개를 목에 걸었고 이번 올림픽에서도 매스스타트에서 추가로 메달을 수집할 가능성이 큽니다. 모태범(29·대한항공)은 이번 올림픽에서는 아직까지 메달을 걸지 못했지만 밴쿠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500m와 1000m에서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따두었습니다.차민규(25·동두천시청)는 평창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깜짝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1위 호바르 로렌첸(노르웨이)에 0.01초 뒤진 34초 42로 아깝게 금메달을 놓치긴 했지만 값진 결과였습니다. 차민규의 국제대회 성적은 지난해 삿포로 아시안게임 남자 500m 동메달뿐이었습니다. 병역 혜택을 받으려면 메달 색깔에 관계없이 올림픽 입상이 중요했습니다. 차민규 역시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금, 은, 동에 관계없이 3등 안에 들었으면 했다. 목표가 순위권이었다. 성공해서 정말 기쁘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스피드 스케이팅 대표팀 막내 정재원은 병역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번 올림픽 최대 수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출전한 올림픽에서 팀 추월 은메달을 목에 건 덕에 병역 혜택을 얻었습니다. 정재원은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됩니다. 앞으로 입대 걱정 없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병역 문제가 시급한 선수들도 있습니다. 김준호(23·한국체대)는 이번 대회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12위에 그쳐 올림픽을 마감했습니다. 선전했지만 스켈레톤에서 아쉽게 6위에 그친 김지수(24·강원도청)도 4년 뒤 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을 기약해야 합니다. 김태윤(24·한국체대)과 정재웅(19·동북고)은 23일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1000m에 출전합니다. 두 선수의 이 종목 세계랭킹은 각각 20위와 28위입니다. 부디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뉴스를 부탁해]궁금한 뉴스를 서울신문에 부탁하세요. 화제가 되는 이슈를 요리조리 뜯어보고 속 시원히 풀어드립니다.
  • 한달 앞으로 다가온 예비군 훈련... 확인 방법은?

    한달 앞으로 다가온 예비군 훈련... 확인 방법은?

    2018년 예비군 훈련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예비군 일정 확인 방법과 훈련시 주의사항에 대해 관심이다.예비군은 19일 오전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누리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먼저 예비군 일정은 예비군 홈페이지 내 훈련 정보에 들어간 뒤 공인인증서나 아이핀 인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또 동미참훈련(출·퇴근), 기본훈련, 작계 2차 보충훈련 대상자들은 훈련일정 자율선택을 통해 일정 조율이 가능하다. 훈련시 주의사항도 눈길을 끈다. 가장 중요한건 시간 엄수다. 예비군훈련 입소시 입소시간 이후 도착자는 입소가 불가하며, 훈련은 무단불참 처리된다. 다만 동원훈련, 간부·공군 동미참 입영훈련, 소집점검훈련은 제외된다. 특히 훈련간 핸드폰을 무단으로 사용하면 규정에 의해 퇴소 처리가 될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전사한 친구여,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 찾기를 도와다오!”

    “전사한 친구여,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 역사 찾기를 도와다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5)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실종 군인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 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아래의 글은 6·25전사(戰死) 인천학생 양순혁의 인천상업중학교 동기 동창 이경종이, 전사한 고향 친구 고(故) 양순혁을 추모(追慕)하며 서해문화 1999년 1월호에 기고했던 글이다. 양순혁은 전사하였기 때문에 아래의 글로 양순혁 참전기(參戰記)를 대신한다.인천상업중학교 같은 반 친구 양순혁과 나 양순혁은 인천 중구 경동에서 태어나서, 인천송림국민학교를 졸업하고, 6·25 사변(事變) 때 6년제 공립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이 글을 쓰고 있는 나(6·25 참전 인천학생 이경종)하고는 인천상업중학교 동기동창생이었다. 1950년 6월 25일 6·25사변이 터지고, 악몽과도 같았던 인민군(人民軍) 치하에서 지옥보다도 더한 고통을 견디고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 치하에서 벗어났다. 6·25 사변(The Korean Civil War) 사변은 국가와 비국가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국 남북전쟁(The Civil War)과 한국 6·25 사변(The Korean Civil War)이 있다. 6·25 사변은 대한민국과 북한 공산괴뢰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이기 때문에 사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UN군의 개입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너무 많은 국가가 참전하여 일반적으로 이제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이라 한다. 중공군의 참전과 인천학도의용대의 남하 1950년 11월이 되자 우리 국군과 UN군은 압록강까지 북진했으나, 만주 지역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1950년 12월에는 우리 국군과 UN군은 후퇴하였다. 인천 지역의 학생들은 인천학도의용대를 결성하고 국가 위난의 혼란한 시국에 호국(護國)활동을 하였는데, 1950년 12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단체로 남하(南下)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가 인천 병사구 사령부(현재의 병무청)에서 파견을 나온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소위를 따라서 경상남도 통영충렬국민학교에 있었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를 최종 목적지로 남하할 때, 나와 양순혁도 같이 걸어서 남하하였다. 18일간 걸어서 내려가 도착한 마산 양순혁과 나는 함께 출발하여 첫날은 안양역에서 자고 그다음 날은 수원역에서 하룻밤을 자고, 대전에 도착했을 때는 1950년 12월 24일이었다. 양순혁과 나는 계속 걸어서 같이 내려 갔는데 대구를 지나서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을 지나서 마산에 도착한 것은 인천을 떠난 지 18일만인 1951년 1월 4일이었다. 양순혁과 나는 추운 겨울 함께 걸어서 내려갔는데, 행진하면서 굶거나 얼어 죽은 국민방위군 시체를 많이 봤다. 국민방위군 사건 추운 겨울 땅이 얼어서 매장도 못 하고 논바닥에 버려진 많은 국빈방위군 시체는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국민방위군은 전시에 신속한 병력 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예비군이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소집된 50만명의 국민방위군 중에서 약 10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된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 1951년 1월 4일 마산에서 해병 6기 지원 양순혁과 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초등학교)로 가지 않고 마산에서 해병 6기 모집 광고를 보고 둘이 같이 지원했는데 양순혁은 합격하였지만 나는 탈락하였다. 같은 중학교 같은 반으로 인천에서 마산까지 18일간 함께 의지하면서 같이 걸어서 내려온 양순혁과 나는 1951년 1월 4일 해병 6기에 합격한 양순혁이 입대하는 바람에 헤어지고, 나는 부산으로 배를 타고 가서 1951년 1월 10일 육군 제2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서 자원입대하였다.47년만에야 알게 된 양순혁의 전사 1996년 7월 15일날부터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역사 발굴을 큰아들 이규원 치과 원장의 도움으로 시작했는데 1997년 9월 10일 동네 친구 민병태를 만나서 양순혁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동네 친구 민병태가 나에게 “내가 해병 장교로 1958년 10월에 해병 제1사단 근무대대 영현(英顯·죽은 사람의 영혼을 높여 이르는 말) 소대장을 하고 있을 때 경기도 장단·양곡·용주골 등 많은 전투지역의 여기저기 흩어져 가매장(假埋葬)되어 있었던 6·25 사변 당시 해병 전사자 무덤을 찾아 그 유골을 개인별로 홍제동 화장장에 모셔 화장한 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일을 지휘·감독한 일이 있었다. 그때 시신을 화장하고 이장하는 과정에서 명단을 보니 양순혁이 그 명단에 있었으며 양순혁은 우리와 같은 6년제 공립인천상업중학교 동기 동창생으로 해병대에 입대했다 전사하여 그때 국립묘지로 이장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48년만에 비석으로 만난 전사한 고향 친구들 동네 친구 민병태로부터 이러한 내용을 들은 나는 1998년 1월 2일 아침에 동작동 국립묘지를 큰아들 이규원(치과 원장)과 함께 찾아갔다. 양순혁이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 번호는 서(西)16-1091이었고, 바로 옆 서(西)16-1093에는 박명호의 묘(墓)가 있었다. 근처 서(西)16-1386에 있는 최춘국(해병6기)과 근처 서(西)16-0911에 있는 이중수(해병6기)의 무덤도 찾아보았다. 무덤이 없이 위패 봉안소에 봉안되어 있는 해병대 제6기 김윤수(육군 위패06-7-18)와 해병대 제6기 임익순(육군 위패49-5-47)의 위패(位牌)도 찾아보았다.전사한 친구여! 참전역사 찾기를 도와다오! 나는 그들 무덤 앞에 앉아서 “48년 전 인천에서 같이 중학교에 다니다가, 부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함께 자원입대하여 참전하여 너희들은 전쟁터에서 죽고, 나는 참전하고 살아 돌아와 여기서 만나게 되었구나! 채 피지도 못하고 전쟁터에서 죽어간 너희들 기록을 남기려고 48년만에 이렇게 찾아왔다”라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또한 잠들어 있는 친구들에게 나는 “넋이 있다면 부디 편안한 잠들기 바라며, 나와 큰아들 이규원(치과 원장)이 하고 있는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 역사 찾기 사업을 도와다오!”라고 말했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다음 호에 8회 계속 참전기 7회를 마치며 한때 인천에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국가의 징병 모집에 대하여 한참이나 어려서 입대할 필요가 없었던 어린 중학생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 또한 중학교 3학년 16살이어서 인민군(人民軍)에나 끌려갈 나이지, 국군에 입대할 필요는 없는 어린 나이였습니다.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 양순혁은 저의 아버지와는 동기 동창으로 같은 반이었습니다. 마산까지 저의 아버지와 같이 내려가서 16살 중학교 3학년 때 국가를 위하여 자원입대하면서 서로 헤어졌습니다. 48년만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누워있는 고향 친구 양순혁을 만나고서 아버지께서 비석을 어루만지시면서 구슬프게 우시는 모습을 저는 지켜봤습니다. 이제 고향 인천에서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이 참전기에 그 이름 양순혁을 6·25참전 전사(戰死) 인천학생으로 기록합니다. 이규원 치과 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노예 페이’주고 예비군 정예화?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노예 페이’주고 예비군 정예화?

    ‘열정페이’ 청년들의 열정 또는 수습 과정이라는 구실로 무급에 가까운 급여를 주면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비꼬는 신조어다. 이 열정페이 문제는 지난해 최저임금 인상 논란이 불거졌을 당시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지적되며 정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이른바 ‘적폐’로 끊임없이 거론되어 왔다. 새해 들어 정부는 이 같은 폐단을 바로잡겠다며 관계 법령을 정비하고 각 기업과 사업장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열정페이 근절에 앞장서야 할 정부가 열정페이보다 더 심한 이른바 ‘노예페이’에 가까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 일부 시민들이 국가의 ‘노예페이’ 문제로 지적하고 나선 것은 바로 예비군 훈련수당이다. 지난달 29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예비군 훈련수당을 현실화시켜달라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한창 일하거나 공부해야 할 시간에 무려 2박 3일이나 훈련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지급되는 훈련수당이 너무 적다는 지적이었다. 실제로 2박 3일간의 동원훈련을 마친 예비군 대원에게 훈련 보상비로 주어지는 돈은 작년까지 고작 1만원뿐이었다. 지역훈련 대상자에게 지급되는 교통비 역시 7천원에 불과해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어 훈련에 참가하는 예비군 대원들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수당과 여비는 사실상 아무 의미 없는 푼돈에 불과하다. 올해는 훈련 보상비가 대폭 인상되어 동원훈련 2박 3일을 마치면 1만 6천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돈을 일급으로 환산하면 하루 5,300원 꼴이다. 하루 8시간 훈련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5,300원을 시급으로 환산하면 시간당 662원이다. 올해 최저시급 7,530원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생색내기용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푼돈이다. 이 같은 돈을 받고 예비군 훈련에 입소한 예비군 대원들은 이미 병역의무를 마친 사람들이다. 그들은 2년간 자유를 박탈당하고 불편한 잠자리와 열악한 급식을 감내했으며, 햄버거 하나 사먹지 못할 5~6천원의 일당을 받으며 인생의 가장 꽃다운 황금기를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 그런데 국가는 그들에게 어떠한 보상을 주기는커녕 또다시 8년이라는 예비군 의무를 부과하고, 매년 소집해 예비군 훈련을 받도록 하는, 예비군 대원들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희생을 또다시 요구하고 있다. 특히 동원예비군으로 소집되어 2박 3일간 병영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제도가 더더욱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매년 단 하루만 소집되어 훈련을 다녀오는 학생예비군과 달리 동원예비군들은 20~30대이면서 학생 신분이 아닌 사람, 즉 취업준비생이나 직장인, 자영업자처럼 1분 1초가 아까운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아무 보상도 없는 2년간의 병역의무를 다한 것도 억울할 이들에게 또다시 예비군이라는 올가미를 씌워서 8년이나 묶어두고, 일당 5천원을 보상이랍시고 지급하는데 예비군 훈련이 즐거울 리 만무하다. 많은 사람들이 ‘예비군’하면 연상하는 삐딱한 모습들이 바로 이러한 불만에서 출발한다. 예비군 대원들은 훈련에 불참하면 법적 처벌을 받기 때문에 싫더라도 귀한 시간을 쪼개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 훈련 보상비는 최저시급의 1/10도 안 되는 수준이고, 급식의 질은 현저히 떨어지며, 막사는 낡고 불편하고 훈련 장비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진 것도 아니다. 불만은 높고 사기는 낮은 예비군들을 대상으로 ‘조기 퇴소’라는 당근을 내걸고 적극적인 훈련 참여를 독려해도 기껏해야 한 두 시간 일찍 나가는 것에 불과한 이런 당근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넌센스다. 지난해 7월 강원도 원주의 한 부대에서 발생한 ‘예비군 미아 사건’도 결국 이러한 문제가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다. 국방개혁에 따른 병력감축으로 인해 현역 병력 부족 문제가 심각해져 현역 교관 및 조교 1~2명이 예비군 수백 명을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나 다름없는 처우에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예비군들이 제대로 통제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근 국방부는 오는 2022년까지 군 복무기간을 18개월로 줄이고 지상군 병력을 10만 이상 감축하겠다는 국방개혁 추진 방안을 발표했다. 현역 병력의 대규모 감축에 따라 병력 부족 문제를 보완해 줄 예비전력 정예화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진 상황인데 다급한 군과 달리 정부와 정치권은 문제의 심각성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예비군 정예화와 처우 개선을 위해 예산을 대폭 늘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오히려 예산을 삭감했기 때문이다. 올해 편성된 예비전력 관련 예산은 1,325억 원으로 전체 국방예산의 0.31%다. 375만 명의 예비군을 유지하는데 1,325억 원, 1인당 4만 8천원 꼴이다. 군 당국은 예비군 처우 개선과 예비전력 정예화를 위해 예산 증액을 요청했지만, 정부와 국회는 전년도 예산보다 46억 원을 더 줄였다. 예비군 대원들이 표면적으로 직접 느낄 수 있는 훈련 보상비와 교통비는 소폭 인상해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예산들은 대거 삭감 당했다. 열악한 급식 식단 개선을 위해 약 87억 원이 요구된 예비군 급식비는 약 16억이 깎였고, 6.25 때 쓰던 수통이나 예비군 대원들의 아버지뻘 되는 연식의 탄띠 등 전투장구들을 교체하기 위해 약 112억이 요구된 전투장구 확보예산은 약 35억이 삭감됐다. 불편하기 그지없는 구식 예비군 막사 현대화 등 시설 개선을 위해 약 244억 원이 요구된 예산은 약 12억이 깎였고, 전역 후 살이 쪄 군복을 입을 수 없는 대원들을 위해 요구된 전투복 지급예산 1.8억은 전액 삭감됐다. 1인 2~3역을 하며 살인적인 근무 강도에 시달리고 있는 예비군 부대 기간요원들의 업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975명의 선발이 요구된 간부예비군 비상근 복무자 규모 역시 거의 반 토막 수준으로 삭감됐다. 이러한 ‘예산 난도질’ 덕분에 올해도 우리 예비군 대원들은 체격에 맞는 예비군복을 어렵사리 빌려 입고 예비군 훈련에 입소해 여전히 열악한 급식과 숙소를 제공받게 됐다. 박물관에 있어야 할 낡은 장비를 걸치고 페인트칠 벗겨진 낡은 훈련장에 들어선 수백 명의 예비군들은 이들을 통제해야 하는 1~2명의 현역 장병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선배님들, 제발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소리를 들으며 한국군 특유의 ‘했다 치고’ 훈련을 마친 뒤 최저 시급의 1/10에도 못 미치는 훈련 수당을 받고 퇴소하게 될 것이다. 매년 약 40여 만 명 규모인 동원훈련 대상자들에게 최저시급을 적용해 일일 8시간 훈련에 일당 약 6만원씩을 지급하는데 필요한 예산은 720억 원에 불과하다. 예비군 훈련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예비군 부대의 운영 효율성을 높여줄 약 4,000여 명의 비상근 예비역 간부를 뽑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돈은 약 60억 원이며, 훈련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먹을 만한 식사를 제공하는 데는 연간 100억 원도 채 들어가지 않는다. 올해 정부 예산 규모는 약 428조 원, 국방예산은 약 43조 원에 달한다. 매년 전체 정부 예산의 0.05%, 전체 국방 예산의 0.5% 정도만 투자해도 예비군 대원들의 희생과 헌신에 보답할 수 있는 현실적인 훈련 수당과 양질의 식사, 구색을 갖춘 시설과 제대로 된 훈련 여건을 만들어줄 수 있다. 이 문제는 “예비전력 정예화”라는 명제가 아닌 청춘의 귀한 시기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청년들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정부 예산 관계부처와 정치권에서 관심이 없다면 375만 예비군을 비롯한 국민들이 나서서라도 우리 청년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보상을 당당히 요구해야 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 전문 칼럼니스트(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finmil@nate.com
  •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6회] “우리는 인천지역 중학생들…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 해병이 됐다”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 6회] “우리는 인천지역 중학생들…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 해병이 됐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 치과원장과 함께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 치과원장)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이계백 인터뷰 일시 1997년 6월 19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사무실(이규원치과 3층) 대담 이계백(인천상업중 5학년때 자원입대)이경종(6·25 참전사 편찬위원)이규원 치과원장(6·25 편찬위원장)내가 겪은 6·25 사변(事變) 6·25 사변이 일어났을 때에 나는 인천상업중학교 5학년생이었으며, 북한 인민군의 학정으로 인천송림국민학교 정문 앞 친구 유은성 집에서 몰래 숨어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북한 인민군이 그냥 구둣발로 막 들어와 대뜸 “너, 이계백이지!” 하면서 나를 인천상업중학교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때의 인천상업중학교는 인민군 본부였고 그곳에는 좌익 빨갱이 학생들로 들끓었다. 그들은 밧줄로 묶고, 방망이로 나를 쳤다. 이유는 아버지(우익 인사)와 형님(우익 학생)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몇 번 씩 고문을 하고, 몇 일이 지났는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매일 고문을 당하고 나니까 몸은 이미 말도 못하게 망가져 갔었다. 미국 남북전쟁과 한국 6·25 사변 사변은 국가와 비국가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국 남북전쟁(The Civil War)과 한국 6·25 사변(The Korean Civil War)이 있다. 6·25 사변은 대한민국과 북한 공산괴뢰 집단 간의 무력 충돌이기 때문에 사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UN군의 개입과 중공군의 참전으로 너무 많은 국가가 참전하여 일반적으로 이제는 한국전쟁(韓國戰爭)이라 한다. 죽음보다 더 혹독했던 빨갱이들의 고문 며칠 뒤 인민군 장교가 “이놈의 반동분자 즉결처분 해야겠구먼!” 하며 권총을 빼들고 나를 겨누는 것이었다. 친구 유은성이는 그 후 친구인 내가 걱정이 되어 면회를 와서 도시락을 넣어주고 그랬었는데 그날도 또 면회 왔다가 이 권총 장면을 보고는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어 내 곁에 와서는 “친구를 살려 달라!”고 고함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인민군장교는 “저놈부터 죽여야 하겠구먼!” 하면서 권총을 내 친구 유은성한테 겨누면서 막 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나는 의자 옆에 쭈그리고 앉아 큰 소리로 엉엉 울면서 “저 친구는 사상(思想)은 모르며 학업에만 열중하는 학생인데 저 친구가 나 때문에 죽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며 애원을 했더니 인민군 장교는 조금 수그러지면서 내 친구 은성이는 풀어 주고 나 또한 그 위기를 겨우 면하고 며칠 뒤 석방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한 괴뢰군이 후퇴하여 인천에는 평화가 돌아왔다. 우익 활동을 하셨던 형님(이계송·고려대 2학년)은 인천학도의용대를 다시 조직하였다. 6·25 사변 때는 극(極)에서 극(極)으로 바뀌는 세상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사람에 대한 조사, 피란민 안내, 요소요소 경비, 학생선도 등 중요한 일을 인천학도의용대가 했다. 6·25사변 때 인천에서 그때 중·고등학생들은 큰일을 했다고 나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나는 북한 공산군 치하에서 죽음을 넘나든 경험이 있었기에 인천학도의용대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했다.1950년 12월 18일 내 생애 운명의 날 11월이 들어서자 중공군참전으로 UN군과 국군은 후퇴하게 되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仁川學徒義勇隊) 본부에서 남하할 준비를 하고 축현국민학교에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나는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또 남았다가 북한 괴뢰군(傀儡軍) 점령하에서의 그 몸서리 처지는 고통을 당하기 싫어서였다. 1950년 12월 18일날 국민방위군 소위가 선도(先導)하여 경상남도 통영의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열초등학교)를 목적지로 삼고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여 도원고개를 넘어 인천상업중학교 밴드부 행진곡에 발맞추어 구월동을 지나 계속 걸어가서 밤 늦게 안양에 도착하여 1박을 한 후에 계속 걸어가서 수원에 도착했다. 수원을 지나 대전, 대구, 청도를 거쳐서 삼랑진을 지나 마산역 에 도착한 것은 인천을 떠난 지 17일 만이었다. 나는 대구를 지나 경산, 청도, 밀양을 걸어가면서 논밭에 버려져서 들판에 나뒹구는 국민방위군의 얼거나 굶어 죽은 시체를 많이 봤다. 내 친구 유은성과 나는 다른 인천학도의용대 대원들처럼 경상남도 통영에 있는 국민방위군 제3훈련소(통영충렬국민학교)로 가는 걸 주저하고 마산역에 머물렀다.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 전시에 신속한 병력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예비군이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소집된 50만명의 국민방위군중에서 약 10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된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해병 6기 신병모집에 지원하여 입대 때마침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모집이 있었다. 친구 은성이가 해병 6기 신병모집에 같이 지원하자고 하기에 같이 지원했다. 해병 6기는 인천기수라고 불릴 정도로 인천출신 중학생(4~6학년, 현재의 고등학교 1~3학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들은 합격 후 진해해병교육대에 가게 되었다. 그날이 1951년 1월 4일이었다. 이날부터 해병(海兵)교육을 받는데 교육은 빳다를 맞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 때 빳다 맞는 것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이미 북한 공산 괴뢰군(傀儡軍)의 고문으로 악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를 맞아도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이때 20일 동안 교육을 받아야만 정식 해병이 되는 것이어서 빳다를 못 견디고 도망가기도 했다. 참기 힘들고 모진 훈련이 다 끝나고 드디어 정식 입대 날짜가 다가왔고, 1951년 1월 24일 정식해병이 되었다. 5년 2개월 간의 해병대 군복무 나는 진해해병학교로 배치되었다. 아마 신상명세서에 인천상업중학교 출신이 참고된 것 같았으며, 해병학교에서 1년 3개월을 보냈다. 그때쯤 전후방 교류가 있어 전방을 지원했다. 해병여단이 창설되어 금촌에 있는 여단본부에 전속되어 1956년 3월 22일 만기 제대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 6·25 사변이 발발하고 9·15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북한 괴뢰군의 치하에서의 시간은 나의 인생에서 지옥(地獄)이었다. ‘아마도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혹독한 시련의 긴 시간이었다. 우리들 6·25 참전 인천학생들의 발자취와 전사한 인천학생들과 전사(戰死)하신 스승님의 기록을 남겨서 후대에 전하려고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이경종·이규원 2부자(父子)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정말로 고마워하는 나의 마음을 전한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6회를 마치며 인천상업중학교 5학년(현 인천고교 2학년) 학생 이계백은 고향과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마산까지 20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에 지원입대하였다. 이계백처럼 20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학생은 2500명이고 그 중 208명이 전사하였다. 6년제 중학교 2~6학년 중학생으로 자원입대하여 전사한 208명 인천학생들을 추모하는 충혼탑(忠魂塔)은 인천 그 어디에도 없다. 먼 훗날에도 인천학생들의 애국심을 기억해주기 바라며 이 참전기를 기록한다. 이규원 치과원장(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 軍, 정치관여 지시하는 상관 엄중 처벌

    軍, 정치관여 지시하는 상관 엄중 처벌

    군대에서 하급자에게 정치관여를 지시·요청·권유하는 상관이나 외부 공직자를 강력히 처벌하고, 하급자에게 거부 의무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군인의 정치적 중립 준수 및 보장 등을 위한 특별법’(가칭)이 제정된다. 군 고위간부와 청와대 고위층이 개입한 사이버사령부 댓글 사건 등의 재발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다.군 적폐청산위원회는 14일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제6차 회의를 열고 이 같은 방안을 포함해 군의 정치개입, 군 의문사, 안보교육, 병역비리 등의 적폐청산 의제와 관련한 제도 개선 권고안을 의결했다. 국방부는 적폐청산위의 권고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추진할 계획이다. 정치개입 근절과 관련해 적폐청산위는 정치개입을 지시하지도, 따르지도 않는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새로운 법제화를 권고했다. 구체적으로 군인에게 인사·예산·행정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외부 공직자 또는 상관이 정치관여 행위를 지시·요청·권고하는 경우 강력한 처벌 규정을 마련토록 했다. 또 하급자는 정치관여 지시를 거부하도록 의무화하고 신고하면 포상토록 했다. 적폐청산위 측은 “처벌 대상을 외부 공직자까지 확대하고 하급자가 적극적으로 정치개입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정치개입 근절의 법적·제도적 기반이 정착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현행 군형법에는 군인의 정치관여 행위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으나 지시 여부 등을 따지지 않고 하급자의 거부 의무도 명시돼 있지 않은 데다 지시한 외부인 처벌 규정 등도 별도로 마련돼 있지 않다. 처벌 수위가 미약하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적폐청산위는 군 의문사 사건의 조속한 진실 규명과 억울한 죽음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도 권고했다. 군 복무 중 사망할 경우 순직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한 전원 순직자로 인정하고, 수사 초기부터 순직 결정까지 한 치의 의혹 없이 유가족에게 설명하도록 주문했다. 적폐청산위는 이념편향 논란이 제기된 장병 및 예비군 안보교육과 관련해서는 정치적 중립 의무 등을 훈령 등에 반영하도록 했다. 또한 사회복무요원 대기적체 현상 해소를 위해서는 사회복무요원 인건비를 국고로 지원해 인력을 필요로 하는 기관 등이 확대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강지원 군 적폐청산위원장은 “국방부가 이번 위원회의 권고를 충실히 이행해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되찾고, 군이 본연의 임무에 집중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박홍환 전문기자 stinger@seoul.co.kr
  • 서울시의회 정책연구위, 수방사 52사단 안보정책 현장 방문

    서울시의회 정책연구위, 수방사 52사단 안보정책 현장 방문

    서울시의회 14기 정책연구위원회 위원장 신언근(관악4·더불어민주당)은 지난 7일 수도방위사령부 52사단을 찾아 군물자와 장비 전시회를 관람하고, 수도방위에 최선을 다해 주신데 대한 노고를 치하하고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날 안보정책 현장을 방문한 신언근 위원장을 비롯한 정책연구위원회 위원들은 52사단의 작전계획 및 활동상황을 보고 받은 후, 최근 철저한 안보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에 국민의 편안한 일상을 위해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는 52사단을 격려했으며, 서울시민의 안전한 삶을 위해 가일층 노력해 주실 것을 당부했다. 이상호 52보병사단장은 “맡은바 임무와 책임을 다하여 최선을 다하겠으며, 테러징후 봉쇄, 시민 안전을 최우선으로 서울을 절대사수하는데 앞정서겠다”고 다짐했다. 아울러, 서울시의회 정책연구위원회는 한강 이남의 향토예비군들에 대한 교육훈련과 전시 적의 한강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교량을 차단하고 한강 이남의 주요 거점방어지역을 중심으로 서울을 절대사수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52사단과 향후 MOU체결을 통하여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고 장병들이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군인정신을 강화하는 데 긴밀하게 협력하는 한편 안보정책의 발전 방향을 논의하기로 합의했다. 한편, 서울시의회 정책연구위원회는 2004년 전국 지방의회 최초로 도입된 이래 입법과 정책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왔으며, 서울특별시의회 정책역량 강화를 위해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날 안보정책 현장 방문에는 신언근(위원장 관악4 더불어민주당), 이순자(부위원장 은평1 더불어민주당), 강성언(강북4 더불어민주당), 김상훈(마포1 더불어민주당), 김인호(동대문3 더불어민주당), 김창원(도봉3 더불어민주당), 문종철(광진2 더불어민주당), 문형주(서대문3 국민의당), 박기열(동작3 더불어민주당), 박마루(비례 자유한국당), 박호근(강동4 더불어민주당), 신건택(비례 자유한국당), 우창윤(비례 더불어민주당), 유청(노원6 국민의당), 최조웅(송파6 더불어민주당), 최호정(서초3 자유한국당), 황규복(구로3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참여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강인 여친 폭행 논란 “원만히 마무리?” 슈퍼주니어 PLAY에 ‘민폐’

    강인 여친 폭행 논란 “원만히 마무리?” 슈퍼주니어 PLAY에 ‘민폐’

    강인이 ‘여친 폭행’ 논란에 휘말리며 슈퍼주니어 팬들이 단단히 화났다. 17일 서울 강남경찰서에 따르면 이날 새벽 4시30분께 서울 강남구의 한 주점에서 슈퍼주니어 멤버 강인이 여자친구를 폭행한다는 신고가 112에 접수됐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 입건은 하지 않고 강인을 훈방조치 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속사 SJ 레이블 측은 “물의를 일으켜 진심으로 죄송하다. 당시 강인은 술자리에 함께 있던 친구와 다툼이 있던 중 오해를 빚어 파출소에서 현장에 오게 됐다”며 “상대방에게 사과했고 현장에서 원만히 마무리한 상황이다. 자숙 중인 상태에서 물의를 일으켜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슈퍼주니어는 이달 6일 정규 8집 ‘PLAY(플레이)’로 컴백했으나 강인은 음주운전 자숙 기간으로 이번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강인이 물의를 빚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강인은 2009년 9월 술을 마시고 행인과 싸우다 경찰에 입건됐다. “맞기만 했을 뿐 때린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CCTV 판독 결과 거짓으로 드러나 SM엔터테인먼트가 사과했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 뒤인 2009년 10월에는 음주 뺑소니 사고를 냈다. 사고 발생 후 약 6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측정된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정지 수치인 0.081%. 강인은 결국 벌금 80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2015년에는 예비군 훈련에 참석하지 않아 향토예비군설치법 위반 혐의로 입건됐고, 지난해 5월에는 또 음주운전을 하고 달아나 1심 재판에서 벌금 700만원이 선고됐다. 슈퍼주니어 팬들은 17일 팬카페와 갤러리 등에 퇴출 요구 글을 게재하고 있다. 팬들은 자숙하지 않고 연이어 논란을 만들어내는 멤버 때문에 팀을 응원할 수 없는 지경이라며 퇴출을 요구하고 있다. 올해로 데뷔 12주년을 맞은 슈퍼주니어는 현재 11명의 멤버지만 이특 은혁 신동 동해 예성 김희철 등 6명의 멤버만 8집 활동을 하고 있다. 규현과 려욱은 군 복무 중이며 성민은 팬들의 보이콧으로 인해 활동을 중단한 상태. 컴백을 코앞에 두고는 최시원이 반려견 논란으로 컴백 활동에 불참을 선언한 바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강인, 이번엔 ‘여친 폭행’ 논란...누리꾼들 “대체 몇 번째냐” 비판

    강인, 이번엔 ‘여친 폭행’ 논란...누리꾼들 “대체 몇 번째냐” 비판

    “대체 몇 번째냐.”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그룹 ‘슈퍼주니어’의 강인(32·본명 김영운)이 술에 취해 여자친구를 폭행했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는 소식이 17일 전해지면서 누리꾼들 사이에서 나온 반응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앞서 강인은 두 차례 음주운전, 그리고 폭행 문제 등으로 물의를 여러 번 일으켰다.강인은 지난 5월 24일 새벽 2시쯤 술에 취한 채 벤츠 승용차로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편의점 앞 가로등을 들이받고 도주한 혐의로 기소됐다. 사고 당시 강인의 혈중알콜농도는 0.157%로, ‘면허 취소’ 수준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강인을 벌금 700만원에 약식기소했지만, 법원은 “과거에도 같은 범행으로 벌금형을 받은 점을 고려할 때 엄히 처벌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정식재판에 넘겨 강인에게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 강인은 2009년 10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서 술에 취한 채 외제 승용차를 몰던 중 정차해있던 택시를 들이받고 도주한 혐의로 입건된 적이 있다. 당시 사고를 당한 택시 안에는 택시 기사 남모(당시 54)씨와 승객 2명이 타고 있었으나 모두 큰 부상은 입지 않았다. 사건 발생 6시간 만에 경찰에 자수한 강인의 당시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정지’에 해당하는 0.081%로 측정됐다. 이 일로 강인은 벌금 80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그가 일으킨 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09년 9월 강인은 강남의 한 술집에서 폭행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여기에 음주운전까지 겹치자 강인은 자숙의 의미로 활동을 중단하고 슈퍼주니어 멤버들 가운데 가장 먼저 군 입대를 결정했다. 하지만 제대 이후에도 논란이 빚어졌다. 강인은 2년 동안 부과된 72시간 예비군 훈련 중 단 한 차례도 훈련에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 2015년 9월 경찰 조사를 받았다. 이에 강인은 강인은 지난해 MBC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 출연한 자리에서 “제가 전역하고 바로 슈퍼주니어 활동을 하다보니 한 달에 몇 번씩 해외에 갔다”면서 “그러다보니 자동으로 예비군 훈련이 연기가 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전해진 여자친구 폭행 사건을 살펴보면, 이날 새벽 4시 30분쯤 강남구 신사동의 한 주점에서 ‘강인이 여자친구를 폭행하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돼 경찰이 출동했다. 그러나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 경찰은 정식 입건은 하지 않고 피해자와 격리한 뒤 강인을 훈방 조치했다고 밝혔다. 피해자는 여자친구라고 주장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폭행은 반의사불벌죄로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음주 상태로 저지르는 범죄와 비행이 잇따르면서 누리꾼들은 “저런 습관 안 변한다”, “쉬지 않고 잘못을 저지른다. 정말 강인하다” 등의 비판 댓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앞서 강인은 지난 8월 두 번째 음주운전 혐의로 기소돼 열린 첫 공판에서 “얼굴이 알려진 사람으로서 좀 더 조심했어야 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미군 현역 성전환수술…미 국방부, 사실상 트랜스젠더 복무 허용

    미군 현역 성전환수술…미 국방부, 사실상 트랜스젠더 복무 허용

    미국 국방부가 현역 병사의 성전환수술을 허용했다는 현지 언론 보도가 나왔다. 이번 결정은 사실상 트랜스젠더들의 군 복무를 계속 허용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뉴욕타임스(NYT)는 15일(현지시간) 국방부 관계자를 인용해 “그 병사는 이미 성전환수술을 마치고 (호르몬) 치료 단계에 들어간 상태”라며 이와 같이 보도했다. 이 병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것으로 전해졌다. 군사 병원에서는 성전환 의료진이 없는 상황이어서 민간 의료기관에서 수술이 이뤄졌다고 국방부 관계자는 설명했다. 국방부 건강보험 프로그램을 통해 수술 비용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엄청난 의학적 비용과 혼란”을 이유로 트랜스젠더(성전환자)의 미군 복무를 금지하는 지침에 서명했지만, 현역에 대해서는 제임스 매티스 국방부 장관의 재량에 맡긴 바 있다. 따라서 이번 결정은 트랜스젠더들의 군 복무를 계속 허용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해 랜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최소 2000명에서 최대 1만 1000명의 현역·예비군 병력이 트랜스젠더로 추정된다. 뉴욕타임스는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제한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침이 사실상 무력화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는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허용됐다. 이 때문에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금지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방침은 ‘오바마 지우기’의 일환으로도 해석됐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상관 모욕하고 병사에게 ‘갑질’하는 예비군 처벌 수위 높인다

    상관 모욕하고 병사에게 ‘갑질’하는 예비군 처벌 수위 높인다

    최근 법원에서 동원 훈련에 입소해 상관을 모욕하고 현역 병사들을 괴롭힌 혐의로 기소된 예비군 대원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일이 있었다. 피고인은 지난해 8월 한 예비군훈련장 내 사무실에서 해당 부대 대대장(중령)에게 삿대질을 하며 “당신이 뭔데 나에게 명령이냐. 당신이나 잘해”라고 소리치는가 하면, 이 훈련장 내 생활관에서 현역 병사(일병)에게 “큰 걸음(제식동작)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선임들을 세워놓고 뺨 때리기를 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불필요한 일을 강요했다.이렇게 예비군 훈련 과정에서 예비군 대원이 현역 지휘관 및 병사에게 ‘갑질’을 할 수 없도록 규제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지난달 29일 서영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예비군법 개정안을 보면 ‘예비군이 훈련을 받을 때 훈련보조 등의 역할을 하는 현역병에게 의무와 관련 없는 일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개정안은 또 예비군이 지휘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않을 시의 처벌 수위를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이 개정안이 통과되면 이른바 ‘불복종 예비군’은 징역 2년 이하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된다. 현행 처벌 수위는 징역 1년 이하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서 의원은 6일 “예비군 대원 중에는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거나 훈련을 지시하는 소대장이나 현역 병사에게 욕설이나 폭언을 일삼는 경우도 있다. 이는 예비군 전력을 강화해 다가오는 인구절벽 시대에 대비하려는 국방부의 기조에 어긋난다”면서 “예비군 훈련 시 지휘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않는 예비군에 대하여 그 처벌 수위를 높이고 현역 병사에게 무리한 요구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해서 예비군 기강을 확립하려는 것”이라고 입법 취지를 밝혔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와우! 과학] 베짱이를 위한 변명…게으른 곤충 아니다

    [와우! 과학] 베짱이를 위한 변명…게으른 곤충 아니다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에서 베짱이는 하는 일 없이 노래를 부르는 게으른 곤충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개미가 생각보다 게으른 곤충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실제 개미굴에는 일하지 않는 개미가 넘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단순히 게으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예비군 역할을 하는 개미이다. 반면 베짱이 역시 게을러서 노래를 부르는 건 아니다. 베짱이를 비롯한 여칫과(Tettigoniidae)의 수컷은 암컷을 부르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이렇게 보면 밤의 로맨티시스트 같지만, 사실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게 노래를 부르면 포식자의 주의를 끌기 때문이다. 사실상 수컷 여치는 목숨 걸고 노래를 부른다. 여칫과에는 6,400종이 알려져 있으며 남극을 제외한 전 세계에 널리 분포하지만, 사실 가장 다양한 종류가 서식하는 곳은 열대 우림 지역이다. 다트머스 대학의 연구팀은 파나마의 열대 우림에 존재하는 여치들의 다양성을 조사했다. 이곳의 여치 역시 목숨을 걸고 노래를 불러야 하는 점은 같은데, 이를 전문적으로 이용하는 포식자가 존재한다. 바로 박쥐다. 파나마에 서식하는 박쥐 가운데는 초음파로 먹이를 찾는 대신 여치가 만드는 소리를 듣고 더 편하게 먹이를 잡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위험을 감수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해도 여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포식자임이 틀림없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짝짓기를 못 하니 후손을 남기지 못하지만, 노래를 부르면 박쥐가 날아오니 여치 입장에서는 이중의 압력을 받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스트레스가 바로 진화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연구팀은 이 지역의 여치가 지리적으로 격리되지 않아도 매우 다양하게 분화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크기와 형태가 매우 다양했는데, (사진 참조) 당연히 노랫소리도 다르고 간격도 제각각이다. 이렇게 다양한 노랫소리가 불연속적으로 들리면 포식자 입장에서는 헷갈릴 수밖에 없다. 또 박쥐가 접근하기 힘든 가시가 많은 나뭇가지에서 더 오래 노래를 부르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개발한 여치도 존재했다. 결국, 포식자라는 압력이 다양한 종의 여치를 만든 셈이다. 물론 이것과는 관계없이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용하다. 이들은 상징적으로 의인화되어 등장하는 것이고 실제 곤충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귀에는 낭만적으로 들리는 곤충 울음소리에도 나름의 절박한 사연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진=파나마 지역에 서식하는 다양한 크기의 여치(Sharon Martinson) 고든 정 칼럼니스트 jjy0501@naver.com
  • “정태원 군, 자넨 대학생이니 중학생인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

    “정태원 군, 자넨 대학생이니 중학생인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

    6·25 한국전쟁 당시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이경종(84) 씨는 6·25 전쟁에 자원입대하기 위해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출발해 부산까지 500㎞를 매일 25㎞씩 20일간 걸어갔다. 1951년 1월 10일 부산육군 제2 훈련소(부산진국민학교)에 도착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입대가 불허됐다. 결국 탈영병의 군번을 부여받아 편법으로 입대했고 4년 동안 참전한 후 1954년 12월 5일 만기 제대했다. 1996년 7월 15일 이경종 씨는 큰아들 이규원(인천 소재 치과 원장) 씨의 도움으로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이하 6·25 편찬위)를 창립해 198명의 참전 학생과 참전 스승(신봉순 대위)의 육성을 녹음하고, 흑백 참전 사진과 참전 관련 공문 등을 수집해 인천 중구 용동에 ‘인천학생 6·25 참전관’(오른쪽 사진)을 세웠다. 6·25 편찬위(위원장 이규원)는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인천 학생 약 2500명과 참전 스승의 애국심을 기억하고, 전사한 인천 학생 208명과 스승 1명(심선택 소위·24세 전사)을 추모하기 위해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기’를 시리즈로 본지에 기고한다. 편집자 주6·25 전쟁 발발과 심선택 선생님 나(정태원)는 일제 때 인천창영국민학교를 33회로 졸업하고, 6년제 인천상업중학교를 졸업한 후 성균관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인천상업중학교에 다닐 때 야구선수였으며 6학년 때는 주장을 했었고 그때 야구부 코치는 해병 소위로 9·15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셨던 심 선택 선생님(본 참전기 3회 참고)이셨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갑자기 인천에 북한군이 쳐들어왔다. 얼마 지나 “인민의용군에 지원하라”면서 길에서 닥치는 대로 젊은이들을 잡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의용군으로 끌려가면 개죽음당한다는 걸 들었기 때문에 연수동 작은 할아버지 댁으로 도망쳐 숨었다. 그 해 지옥 같은 여름을 인민군 치하에서 보내고서 9월이 왔다.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민군이 물러나고 인천은 다시 자유를 찾았다. 우익학생들을 주축으로 인천학도의용대가 결성되었는데 대원들은 중학교 학생들이었고 간부들은 대부분 대학생으로, 연대장이 이계송(고려대 2학년)이었는데 이계송은 나하고는 인천상업중학교 동기동창이었다. 인천학도의용대 활동과 나와의 인연 나는 대학생이었고 인천상업중학교 동기동창생 이계송이 대장으로 있어서 인천학도의용대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가 단체로 남하한다는 소식이 내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인민군 치하의 지옥 같은 생활이 기억나 또다시 인민군이 들어오면 더 이상 갈 곳도 없어서 인천학도의용대가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를 향하여 남하할 때 같이 남하하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인천학도의용대 활동을 하지 않았던 중학생들도 많이 있었는데, 인천학도의용대를 따라 남하하려는 내 결심을 인천학도의용대 활동을 하지 않았던 동네 후배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형, 우리도 형하고 같이 가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축현국민학교까지 따라오신 고향 인천 신흥동의 동네 후배 부모님들은 “중학생인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라는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하셨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뵌 어머니 모습 1950년 12월 18일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약 2500명은 인천축현국민학교를 출발하였는데, 경동파출소 앞을 지나면서 보니까 어머니께서 경동파출소 정문에서 나를 보시고는 손을 흔드시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시는 것이었다. 나는 행진하는 대열 속에서 손을 흔들면서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날 뵌 어머니 모습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뵌 모습이었으며 이듬해인 1951년 4월 15일 내가 진해에서 해병대의 포병대대 창설 요원으로 훈련 중일 때 어머니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우리들은 걸어서 행군하여 수원, 대전, 대구, 경산, 청도, 밀양, 삼랑진을 지나서 17일만인 1951년 1월 3일, 최종 목적지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에 가까운 마산에 도착하였다. 인천에서 마산까지 17일간 걸어서 남하 행군하면서 우리들은 전쟁의 참상을 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중에도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남하하던 많은 국민방위군 젊은이들이 굶거나 얼어 죽은 소문만을 들은 것이 아니라 버려져서 들판에 나뒹구는 국민방위군 시체를 보기도 했다.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 사건 전시에 신속한 병력 동원을 위해 1950년 12월 제정한 국민방위군법에 의한 예비군이었으나 1951년 1·4 후퇴 때 소집된 50만명의 국민방위군 중에서 약 10만명이 굶거나 얼어서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관련된 장성 5명이 총살당했고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에 해체되었다. 내가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 15명을 데리고 마산에 무사히 도착한 날은 인천을 출발한 지 17일째 되는 1951년 1월 3일이었다. 나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보고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교)로 15명의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을 데리고 가는 걸 주저하고 마산에 머물러 있었다. 이튿날인 1951년 1월 4일, 고향 인천에서 같이 내려온 동네 후배 이의범(인천상업중 3학년)이 해병 신병 모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같이 있었던 후배들을 데리고 해병 6기 신병모집소로 가서 그 신체검사에 응하였다. 1951년 1월 6일 진해에서 해병 6기 입소 다음날 1951년 1월 5일 아침에 해병 신병 신체검사 결과를 보러 해병신병 모집소에 가니 해병 신병 모병관이 “신병 모집에 지원한 사람들은 진해까지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진해를 향하여 창원고개를 넘어 진눈깨비를 맞아가며 야간행군으로 밤늦게 자정 넘어서 진해경화국민학교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전원 합격되어 옷을 벗고 새 미군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우리들은 1951년 1월 6일부터 해병대 신병 훈련에 들어갔다. 해병 6기(인천 기수) 대표로 입대 선서 6기 입대식은 1951년 1월 24일이었다. 6기 입대식 날 나는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 앞에서 6기생 대표로 해병 입대 선서문을 읽었다. 흔히 해병 6기는 인천 기수라고도 말하는데 정말로 6기는 대부분 인천 지역 중학생들이었다. 1951년 2월 10일 해병대 6기로 신병교육을 마친 우리들은 보병과 포병으로 나뉘어 보병은 즉시 전방 전투지역으로 출동하게 되었고 포병은 그 날로 진해에 새로 생긴 제1포병대대에 배치 받았으며 당시 대대장은 고길훈(高吉勳)중령이었다. 당시 해병대에는 포병부대가 따로 없었으며 처음으로 창설된 해병대 포병대대에 인천 지역 중학생 출신 해병 6기생들이 포병대 창설 요원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해병대 제1포병대대 창설 요원으로 참전 해병대 제1포병대대가 창설된 지 얼마 후 우리 부대는 강원도 최전방으로 출동하여 펀치볼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 후 우리 해병 포병대대는 서부전선 임진강 부근 장단 고랑포 쪽에 포진하여 장단지구 전투에도 참전하였다.나는 1950년 12월 18일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을 데리고 마산까지 18일간 걸어가서 해병 6기로 자원입대하고, 사병으로 참전한 지 3년 9개월 15일이 되는 1954년 10월 20일 만기 제대하였다. 평생 잊지 못한 말… “우리 아들 부탁하네!” 1950년 12월 18일 인천을 떠날 때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의 부모님들이 나에게 하신 “정태원 군, 우리 아들 잘 부탁하네!”라는 말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형으로서 고향 동네 후배 중학생 15명을 데리고 마산까지 18일간 걸어가서 같이 자원입대하고, 함께 사병으로 군복무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자부하며 나는 살아왔다. 그러나 15명 중에서 2명은 전사하였고 그 어린 고향 동네 후배 중학생들의 전사는 지금도 나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다. “함께 참전한 후배들에게 미안하다” 2500여명 인천학생들이 20일간 마산이나 부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하였고, 그중에서 208명이 전사했다는데 오늘까지도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 기록이 없는 것을 형으로서 동네 후배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아무쪼록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 찾는 일을, 인천상업중학교 후배 이경종과 그 아들 이규원(치과 원장) 두 분 부자가 끝까지 잘 마무리하시기를 바라며, 인천학생들의 애국심과 애향심이 길이길이 후대에 전해지기를 빈다. 글 사진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참전기 4회를 마치며 숲에서 시끄러운 소리 내면서 불어 나오는 바람이 지나간 뒤에 숲은 아무 소리 없이 조용하다. 정태원 님은 대학생이었지만 장교임관도 포기하고 고향 인천의 중학생 후배들을 데리고 국민방위군을 따라 18일간 걸어서 내려갔습니다.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끌려간 50만여명의 젊은이 중 약 10만명이 얼거나 굶어 죽었습니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마산까지 무사히 이끌어 준 훌륭한 일을 했지만 누구에게도 자랑한 적이 없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섭섭해하지 않았던 형이 인천에 살았었습니다.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을 자랑스럽게 해 주신 정태원 님께 글로 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규원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장■ 정태원 ▲해병대 6기 ▲성균관대학교 2학년 1930년 3월 15일 : 인천광역시 중구 유동에서 태어남. 1943년 : 6년제 공립인천상업중학교 입학·졸업. 1950년 12월 18일 : 성균관대학교 2학년생으로 고향 인천 신흥동의 동네 후배 중학생 15명을 데리고 국민방위군 제3수용소(통영충렬국민학교)를 향하여 18일간 걸어서 내려감. 1951년 1월 4일 : 국민방위군 참상을 본 후 통영충렬국민학교(국민방위군 제3수용소)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인천에서부터 함께 내려온 동네 중학생 후배들과 마산에서 해병 6기 신병 모집에 지원함. 1951년 1월 24일 : 해병 제6기 입대식날 6기 대표로 입대 선서문을 읽음. (군번 9210161) 1954년 10월 20일 : 대학생이기 때문에 장교임관을 할 수 있었음에도 장교임관을 포기하고는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중학생들과 같이 사병으로서 3년 9개월 15일을 군 복무하고 만기 명예 제대함. ■ 정태원 인터뷰 일시 1998년 7월 28일 장소 인천학생·스승 6·25 참전사 편찬위원회 (이규원치과 3층) 대담 정태원 이경종(6·25 편찬위원) 이규원(6·25 편찬위원장·이경종 큰아들) ■ 이규원 인사말 안녕하셨습니까? 정태원 님! 저는 6·25 사변 때 인천학생 2500명이 부산이나 마산까지 걸어가서 자원입대하고 208명이나 전사한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꼭 기억해야 할 귀감이라 생각합니다. 고향 인천의 동네 후배 15명을 데리고 마산까지 18일간 걸어가서 자원입대한 정태원 님과 오늘 인터뷰는 인천학생들의 6·25 참전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1998년 7월 28일 오늘까지도 참전 기록이 전혀 없었던 6·25 참전 인천학생들의 마음속 응어리가 풀어지리라 생각합니다.
  • 철원 총기사고 유가족 “예비군 훈련도 경고방송하는데” 울분

    철원 총기사고 유가족 “예비군 훈련도 경고방송하는데” 울분

    강원 철원 육군 모 부대에서 진지 공사 작업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 중이던 병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총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났다.26일 오후 4시 10분 철원군 모 부대 소속 A(22) 일병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진 것을 인근 군 병원으로 옮겼으나 치료 중 오후 5시 22분 숨졌다. A 일병은 부대원 20여 명과 함께 진지 공사 작업을 마치고 부대로 복귀 중 갑자기 날아온 총탄에 머리를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대 관계자는 “사고 지점 인근 사격장에서 소총 사격훈련이 있었다”며 “부대원들이 이동한 통로는 평소에도 사용하던 길이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확인중”이라며 정확한 사고 경위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유족은 군의 해명에 항의했다. 이날 유튜브에는 ‘철원6사단 총기사고’라는 제목으로 유족이 장례식장은 찾은 군 관계자와 나눈 대화가 올라왔다. 유족이 “총을 쏜 사람은 잡았습니까”라고 묻자 군 관계자는 “누가 쐈는지 확인은 해 봐야 한다”고 답했다.유족은 “예비군 훈련을 가도 전방에 경고방송을 한다. 육군 부대에서 전방에 경고방송을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된다. 앞뒤가 안 맞는다”며 군 관계자의 멱살을 잡으며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뒤편으로는 A일병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유튜브와 포털사이트 SNS에서는 사격장에서 오발탄이 나와 400m 밖에서 걸어가는 사람의 머리를 맞췄다는 군의 설명이 상식적이이 않다며 철저한 진상 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화랑훈련 첫날 폭발물 탐지하는 군인들

    화랑훈련 첫날 폭발물 탐지하는 군인들

    화랑훈련 첫날인 2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역 대합실에서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군인들이 폭발물 발견 상황을 가정한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화랑훈련은 1997년 제정된 통합방위법에 따라 적의 침투, 국지 도발 등에 대비해 합동참모본부(통합방위본부) 주관으로 2년에 한 번씩 진행한다. 이번 훈련에는 서울지방경찰청, 서울시와 25개 자치구, 예비군 등 총 7만 7000여명이 참가했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메디컬 인사이드] 무심코 볼륨 높이다간…‘디지털 난청’의 습격

    [메디컬 인사이드] 무심코 볼륨 높이다간…‘디지털 난청’의 습격

    10·20대 환자 최근 급격 증가세정상 초과 난청률 中 18% 高 17%최대 볼륨의 80%로 들으면 위험1시간 청취한 뒤 10분은 휴식을 ‘난청’은 외부 소리가 뇌로 전달되는 과정에 어느 한 곳이나 여러 곳에 문제가 생겨 소리를 제대로 못 듣게 되는 증상을 말합니다. 난청은 주로 노인이 경험하는 질병으로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10·20대 젊은층의 난청도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음향 기기에 의한 소음성 난청, 바로 ‘디지털 난청’입니다.28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소음성 난청으로 내원하는 10·20대 환자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2015년 양쪽 청력이 손상된 10·20대 소음성 난청 환자수는 4173명이었는데 지난해는 4326명으로 늘었습니다. 한쪽 귀의 청력만 잃은 환자도 2015년 2316명에서 지난해 2357명으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다만 이것은 증세가 심해 병원을 찾은 환자이고 그렇지 않은 환자도 포함하면 범위는 훨씬 넓어집니다. 대한이비인후과학회가 지난해 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전국 중학교 57곳과 고등학교 53곳의 학생 3013명을 대상으로 청력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세계보건기구(WHO) 정상 청력 기준인 15dB(데시벨)을 초과하는 난청 비율은 고주파 영역까지 포함할 경우 중학교 1학년에서 17.9%, 고등학교 1학년은 16.5%나 되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이어폰을 통한 음악 청취입니다. 길을 걸을 때도,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도, 심지어 공부할 때도 스마트폰의 음악을 듣기 때문에 귀를 쉬게 할 틈이 없습니다. 귀도 전자 기기처럼 혹사시키면 기능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어폰 매일 8시간 이상 들으면 ‘위험’ 이승환 한양대구리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이어폰에서 크게 흘러나오는 음악 등을 매일 8시간 이상씩 들으면 청력이 손상될 수 있다”며 “특히 최대 볼륨의 80%로 하루 90분 이상씩 습관적으로 음악을 듣는다면 청력 손상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고 경고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소음으로 손상된 내이(內耳)는 재생되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회복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소음에 노출되면 내이 속 소리 감지 세포인 ‘유모세포’가 손상되면서 난청이 생깁니다. 시간이 지나면 유모세포뿐만 아니라 신경세포 퇴화까지 일어나면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치료보다는 예방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안철민 프라나이비인후과 원장은 “특히 등하교나 출퇴근을 위해 이동할 때 소음이 심한 지하철·버스에서 습관적으로 이어폰을 쓰는 것은 소음성 난청 발병률을 높일 수 있어 자제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만약 음악 청취를 포기할 수 없다면 귀의 피로도를 낮출 수 있는 ‘헤드셋’이 좋습니다. 외이도(外耳道)에 끼워서 착용하는 ‘커널형’은 고막에 더 가깝고 귀 안에 밀착돼 청각세포가 더 쉽게 피로해집니다. 안 원장은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시청할 때는 최대 볼륨에서 50~60%로 줄여서 듣는 습관을 갖고, 1시간가량 들은 뒤 10분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습니다. 소음이 많은 거리, 식당, 행사장에서도 이어폰 사용을 자제해야 합니다. 주변의 소음 때문에 음량을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수는 “이어폰 사용 자체가 소음성 난청을 유발한다기보다는 이어폰을 사용해 소리를 크게 들을 때가 문제”라며 “스마트폰 등의 음량을 높이면 순식간에 100dB 이상으로 소리가 커지기 때문에 가급적 옆 사람이 들릴 정도의 큰 소리로 높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순간적으로 일시적인 소음에 노출된 경우와 달리 디지털 난청은 자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치료 시기를 놓칠 때가 많습니다. 예비군 훈련을 할 때 사격장에서 총을 쏘면 귀가 갑자기 멍해졌다가 잠시 뒤 금방 해복됩니다. 그렇지만 소음성 난청은 서서히 진행되기 때문에 본인이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이 교수는 “본인이 난청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증세가 상당 기간 진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조용한 곳에서 대화하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조금만 소음이 있어도 대화가 불편한 경우는 난청이 왔다고 보는 게 좋다”고 설명했습니다. 소음성 난청 초기 증상은 남성 목소리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톤인 여성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등 높은 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1년에 한 번쯤 청력검사 받아야 일부 환자는 난청이 오기 전 전조증상으로 ‘이명’(귀울림)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때는 즉시 병원을 찾아야 합니다. 이 교수는 “이명도 처음에는 약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잠자리나 도서관같이 아주 조용한 환경에서만 인지하게 된다”며 “난청은 없지만 이명이 나타난다면 의료진과 상담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습니다. 특별한 증상이 없어도 1년에 한 번쯤은 청력 검사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안 원장은 “난청을 방치하면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발음이 불분명해지거나 목소리를 높이다 언어장애가 발생한다”고 전했습니다. 주변 환경의 소음방지도 중요합니다. 여름철 소음의 주범이 되는 말매미의 소음 평균치는 75dB로 전화벨(70dB)보다 높습니다. 수면에 거의 영향이 없는 소음은 35dB이지만 서울 지역 도로변 주거지역의 야간 소음은 66dB에 이른다고 합니다. 주변의 소음이 심하다고 생각되면 창문을 닫는 등 귀를 보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국정원, ‘오프라인 심리전’ 위해 박승춘이 만든 단체에 자금 지원

    국정원, ‘오프라인 심리전’ 위해 박승춘이 만든 단체에 자금 지원

    국가정보원이 ‘오프라인 심리전’을 위해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이 만든 단체인 ‘국가발전미래교육협의회’(국발협)에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다.22일 한겨레에 따르면 국정원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부터 사무실 임대료와 상근자 월급 등의 명목으로 약 1년간 국발협 한 지회에 5000만원 안팎을 지원했다. 자금 출처는 온라인 여론조작과 마찬가지로 국정원 특수활동비였다. 국발협은 2010년 8월 안보교육 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져 서울사무소와 대전·부산·경남 등 11개 지회를 두고 있었고, 국정원은 다른 지회에도 비슷한 수준의 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국정원 전직 직원은 국정원이 예산 지원뿐 아니라 안보강사와 일정 등 사실상 대부분의 활동을 관리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당시 국발협 안보강연은 몇 차례 ‘편향 논란’을 빚은 바 있다. 국발협 강사들은 예비군 동원훈련 등에서 “김대중·노무현 당선은 북한의 정치적 도발이 성공한 사례”, “광우병 촛불시위는 종북세력의 선동” 등의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박 전 처장은 국발협을 만든 뒤 설립 이듬해인 2011년 2월 국가보훈처장이 됐다. 그가 국가보훈처장이 된 뒤에도 국정원과의 커넥션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국가보훈처는 2012년 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을 찬양하고 민주화운동을 ‘종북’으로 헐뜯은 영상자료(DVD)를 예비군 교육 등에 배포해 야당 등의 반발을 샀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부서장회의 녹취록에는 “예비군 교육 잘해주고, 자료를 잘 못 만드니까 너희들이 신경 쓰라”고 말한 사실이 포함됐다고 한다. 한편 박 전 처장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국정원의 국발협 예산 지원 사실 등을 묻자 “답변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전화를 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씨줄날줄] 병사 월급 40만원/이동구 논설위원

    [씨줄날줄] 병사 월급 40만원/이동구 논설위원

    한국 남자들은 화젯거리가 떨어지면 군대와 축구 이야기를 꺼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특히 군대 이야기는 상대방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도 무용담인 양 쏟아내기 일쑤다. 갓 제대한 예비군이나 70세가 넘은 노인들도 틈만 나면 군대 이야기를 해댄다. 힘들었던 군 생활을 견뎌 낸 것을 자랑하고픈 마음과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군대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선임병 욕하기’일 것이다. “그렇게 모질고 야비한 인간은 처음 봤다. 반복되는 매질에 엉덩이가 성할 날이 없었다. 어느 지방 출신인데…, 그냥 갈겨 주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지만 군대니까 참을 수밖에. 지금도 군부대 방향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는다” 등등…. 대개가 힘들었던 경험담이다. 그러면서 “요즘 군대는 군대도 아니야. 군기라고는 없는 것 같다”는 아쉬움으로 무용담을 끝맺는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에 재테크가 새롭게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군 복무 중인 병사들도 적은 금액이지만 나름대로 규칙적으로 저축할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월급은 2000년 이후 급속도로 인상됐다. 2000년 1만 3700원 수준이었던 병장 월급이 올해는 21만 6000원으로 무려 20배 이상 올랐다. 내년에는 병장 월급이 40만원을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더불어민주당은 어제 이에 필요한 내년도 예산 편성을 정부에 요구했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약간의 조정은 있을 수 있지만 병사들의 월급이 또 한번 크게 인상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병사 급여를 2022년까지 최저임금의 50% 수준으로 인상한다는 게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니 병장 월급이 70만~80만원을 넘어서는 것도 5년 내에 가능할 것이다. 병사들의 주머니 사정이 좋아진다는 데 반기지 않을 사람은 없다. 세금 걱정은 뒤로 미루고, 자식을 군대에 보내 놓고 마음 편할 날 없는 부모들에게는 작은 위로는 될 것 같다. 뭐니 뭐니 해도 돈 냄새에 민감한 은행들에는 큰 고객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다. 병사들을 대상으로 한 금융상품을 이미 3년여 전에 출시해 현재는 은행마다 1000억원 이상의 적립금을 확보하고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제대 군인들 사이에서 군 복무 중의 재테크가 화제가 되는 일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군대에서 썩었다”라기보다는 “군 입대가 미래를 준비하는 기회가 됐다”는 말이 더 설득력을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무용담이 줄고 재테크가 늘어난 군대 이야기에 누가 관심이나 가져 줄지 궁금해진다.
  • 상관 모욕한 예비군 대원에게 징역형

    상관 모욕한 예비군 대원에게 징역형

    동원훈련에 입소해 상관을 모욕하고 병사들을 괴롭힌 예비군 대원에게 징역형과 함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광주지법 형사9단독 김강산 판사는 상관모욕과 강요 혐의로 기소된 A(25)씨에 대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120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고 13일 밝혔다.동원 훈련에 소집된 A씨는 지난해 8월 10일 오후 1시쯤 지역 한 예비군훈련장 내 사무실에서 해당 부대 대대장 B중령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당신이 뭔데 나에게 명령이냐. 당신이나 잘해”라고 소리치는 등 상관인 B중령의 면전에서 모욕한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B중령이 병사들에게 강요 등의 행위를 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지시한 점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이 같은 행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또 같은달 9일 오전 10시쯤 훈련장 내 생활관에서 이 부대 소속 C일병에게 “큰걸음(제식동작)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선임들을 세워놓고 뺨 때리기를 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병사들에게 불필요한 일을 하도록 강요한 혐의도 받았다. 김 판사는 “동원 예비군 대원으로서 군기를 문란하게 한 A씨의 범행은 사회적 비난가능성이 커 죄가 무겁다”면서 “그럼에도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을 하며 시종일관 범행을 부인해 징역형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