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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탱고] 김현철의 ‘춘천가는 기차’

    영화 ‘생활의 발견’에서 주인공 경수(김상경)는 춘천행 기차에 올라탄다.연극계에서 제법 알려진 그는 잘 아는 감독만 믿고 영화에 출연했다가 흥행 참패라는 쓴맛을 본 뒤 글을 쓰는 선배를 찾아 무작정 춘천으로 내려간다. 춘천은 삶에 지친 도시인들에게 ‘쉼표’라는 청량제를 던져주는 곳이다. 1989년 가을 대학 2학년이던 가수 김현철이 낸 1집 앨범에는 ‘춘천 가는 기차’라는 노래가 담겨 있다.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돈도 용기도 없었던 스무 살 청춘의 방랑벽을 부채질한다.10년 뒤 후배 가수 조성모가 자신의 2.5집에서 이 곡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호반도시 춘천은 내 마음의 호수 ‘조금은 지쳐 있었나봐.쫓기는 듯한 내 생활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몸을 부대어 보며 힘들게 올라탄 기차는 어딘고 하니 춘천행.지난일이 생각나 차라리 혼자도 좋겠네.’ 조동식,최성원,하덕규 등 음악 선배들과 교류하며 세션맨으로 참가하던 김현철은 약관의 나이에 자신의 음반을 낸다.가수 유희열이 ‘천재소년의 등장’이라고 극찬했던 김현철은 춘천 가는 기차에서 가요와 재즈의 감성을 접목시켰다.이 노래는 사랑의 방정식에 나오는 찐한 연가(戀歌)라기보다는 지난날을 반추하는 회상가(回想歌)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소개됐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애창곡으로 꼽았다. ‘그리운 사람 차창 가득 뽀얗게 서린 입김을 닦아내 보니.흘러가는 한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술한잔 마시고 싶어.저녁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그리운 사람 그리운 모습.’ 지난 7일 밤 춘천행 기차에서 만난 회사원 박성준(34)씨는 “한 주일을 마치는 지친 금요일 밤이 되면 가끔 방랑벽이 도져 어디론가로 홀연히 떠나고 싶다.”면서 “옛 사랑을 떠올리며 춘천의 강바람을 쐬면 반복되는 일상에 매였다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고 말했다. ●강촌은 ‘MT 일번지’ 경춘가도와 호수,안개로 유명한 소양호,닭갈비….춘천을 떠올리면 으레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오늘도 춘천 가는 기차에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강촌으로 동아리 MT를 떠나는 대학생 김지수(24)씨는 “낭만이 스며 있는 춘천행 기차에 무작정 몸을 맡겨도 곤한 삶을 어루만져 주는 그 무언가가 있다.”면서 “북한강 강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수려한 자연 경관이나,MT 떠나는 대학생들의 잡담에 한눈 팔다 보면 지루할 겨를이 없다.”고 춘천행 예찬론을 늘어 놓았다. 경춘선 철도역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북적이는 곳은 단연 강촌.물가마을로 불리다 일제 때 지금의 이름으로 정착했다고 한다.강촌역에 내리면 각종 사연들로 가득찬 낙서가 플랫폼 곳곳을 도배한다.다소 유치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은 읽는 이에게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다른 한 편에서는 북한강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강가에서는 강바람을 맞으며 자전거 타는 연인들과 스쳐 지나가는 기차,강을 굽어 보듯 솟은 산,청명한 하늘 등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만든다.역 근처에서 빌린 자전거를 타고 20분쯤 올라가면 폭포 상층부에서 아홉 물줄기가 아홉가지 물소리를 내며 떨어진다는 ‘구곡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기차·버스·배 바꿔 타고 천년 사찰에 회사원 김식(28)씨는 “강촌역에서 춘천쪽으로 2∼3㎞를 가면 등선폭포로가 있는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양쪽 바위 사이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오묘함을 느끼게 한다.”면서 “폭포입구의 바위협곡도 상당한 볼거리”라고 조언한다.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청평사까지는 짧은 뱃놀이만으로도 즐겁다.각종 교통편을 번갈아 타는 재미 때문에 데이트코스로 인기이다.기차를 타고 춘천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소양댐까지 온 뒤 청평사행 배를 타는 것이다. 천년의 세월을 고이 간직한 청평사는 오봉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배는 30분 간격으로 운항되며 청평사에서 내려 관광을 즐긴 후 다음 배를 이용할 수 있다.춘천 시내에서 소양댐 가는 길 양옆에는 분위기 그만인 카페와 닭갈비집,막국수집 등이 즐비하다.서울로 되돌아 오는 나그네의 발걸음은 그래서인지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운 사람 차창 가득 뽀얗게 서린 입김을 닦아내 보니,흘러가는 한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고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술한잔 마시고 싶어.저녁때 돌아오는 내 취한 모습도 좋겠네.그리운 사람 그리운 모습.’ 이유종기자 bell@˝
  • [국제플러스] 日남성, 中여성 폭행 파문

    |베이징 연합|중·일 외교 갈등이 지속되고 중국인의 반일감정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 남성 두 명이 7일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시에서 중국 여성 두 명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중국인의 반일감정을 더욱 자극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일본인 남성 두 명이 지난 7일 밤 다롄 화샹웨이예나 아파트에서 옆집 중국 여성 두 명을 폭행한 혐의로 인근 구이린제 파출소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있다고 중국 인터넷 사이트 써우후(搜狐·SOHO)가 9일 보도했다.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의 장(張)모씨,리(李)모씨 등 25세 전후의 두 명의 여성은 7일 밤 아파트 옆집에서 계속 이상한 소음이 들려 잠을 이루지 못하자 벽을 두 차례 두드려 소음을 없애 달라는 뜻을 전했다.˝
  • 한국영화계 대부 유현목 감독

    “유현목은 영화다.”“아니다,유현목은 인간이다.” 오발탄(1960년),임꺽정(61년),김약국의 딸들(63년),카인의 후예(68년),나도 인간이 되련다(69년),사람의 아들(80년)….건국 이래 한국영화 최고작으로 인정받은 ‘오발탄’을 비롯,43편의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의 미학을 이끌어온 유현목(79) 영화감독.한국영화사의 산증인이자 영화계의 영원한 ‘대부’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삶은 흑백과 컬러필름으로 50년 동안 모질게도 온몸을 친친 감아왔다.까닭에 ‘유현목’하면 덜도 더도 없이 한편의 ‘영화’에 비유된다.평론가들은 현실을 바라보는 형형한 눈빛으로 한국 영화사를 관통했던 용감한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장 콕토는 ‘영화란 영상으로 쓰는 문장’이라고 했다.유 감독은 더 나아가 ‘영상으로 사고한다.’고 했다.일흔아홉의 성상은 그렇게 산전수전,공중전까지 겪으며 질그릇에 켜켜이 담아왔다.이같은 그의 ‘시네마인생’을 흐트러짐없이 끄집어낼 수 있을까. 서울 남대문 옆 명지빌딩 20층에 자리잡은 ‘태평관기영회(太平館耆英會)’에서 그를 만날 수 있었다.태평관기영회는 학교법인 명지학원(이사장 유영규)이 지난 2002년 12월 마련한 최고 원로들의 사랑방이다.명지빌딩 자리에 있던 조선시대 외교공관 ‘태평관’과 중국 송나라 때 은퇴한 현사들의 모임이었던 ‘낙양 기영회’에서 이름을 땄다.참여멤버는 유 감독을 비롯,고병익 전 서울대총장,이영덕 전 국무총리,정원식 전 국무총리,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등 내로라 하는 원로 32명이다.유 감독은 “매월 첫째주 수요일이면 빠지지 않고 이곳에 온다.같이 늙어가는 각계 원로들과 만나 서로의 경험담을 주고받는 일 또한 공부가 아니냐.”고 했다. 근황이 궁금해졌다.그는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월드메르디앙 아파트에 부인과 단둘이 살고 있다.야트막한 동산을 뒤로 한 노독일처(老獨一處)인 셈이다.뒷산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30평의 주말농장에서 땅을 일구는 일에도 새록새록 재미를 느낀다.시금치,쑥갓,마늘 등 28가지의 채소를 가꾸며 동네사람들에게도 나눠준다. 나들이할 때는 늘 부인 박근자 여사와 동행한다.부인은 서양화가로 현재 여류화가협회 고문이기도 하다.부인은 지금까지 ‘여보’ 대신 ‘감독님’이라고 부른다.그는 부인 얘기가 나오자 ‘무던한 순둥이’라며 웃는다. 그는 지독한 골초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하루도 술을 거른 적이 없다.저녁 식사후 TV 9시 뉴스를 보고나면 반드시 맥주 3∼4병은 마신다.부인이 술을 못하기 때문에 혼자 식탁에 앉아 맥주를 들이켜며 세월을 음미한다.영화 같은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는 즐거움에 푹 빠지는 시간이다. 그의 예술가적 역마살은 소학교 5학년 때부터 시작됐다.어느날 지방순회 공연차 온 유랑 신파극에 매료됐다.교회에서 성극대본도 쓰고 연출도 직접 했다.방학때면 동네 창고에 천막을 치고 성냥갑 몇개로 입장시키는 놀이도 했다.그렇게 모인 성냥갑으로 엿을 바꿔먹기도 했다. 1939년 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의 휘문중학에 입학했다.하숙생활이 시작됐다.중학때는 기계조립에 취미가 붙었다.남산의 과학관을 다니며 ‘어린이 과학’이니 ‘학생과학’이니 하는 잡지에 탐닉했다.하루는 ‘에디슨 위인전’을 읽었다.발명왕 에디슨의 학력이 겨우 소학교 4학년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그는 중학2년 때 휴학을 했다.담임 선생한테는 중이염이라고 둘러댔다. 때마침 담임선생 아들이 만성 중이염에 따른 뇌손상으로 사망했던 터여서 휴학계를 선뜻 받아주었다.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고독의 가을을 만나면서 도화지와 수채화 도구를 둘러멨다.이리저리 쏘다녔다.흙을 반죽해 조각품을 만들기도 했다.하루는 바이올린 곡 ‘트로이메라이’를 듣고 폐장을 쥐어짜는 듯한 슬픔의 아름다움에 도취했다.어머니한테 졸라서 ‘스즈키 7호’ 바이올린을 샀다.그걸 끼고 다시 복학의 길을 떠났다. 이 무렵 학교에서 단체로 ‘조택원 무용발표회’를 관람했다.그는 처음 대하는 육체의 선율에 반해 무용가가 되기로 다짐하고 무용연구소를 맴돌았다.그러나 피골이 상접한 모습 때문에 번번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인 1944년 겨울이었다.조선인징병 신체 검사에서 불합격되는 바람에 졸업장을 쥐고 고향에 내려가 세무서 임시고용원으로 취직했다.그러나 숫자놀음이 격에 맞지 않아 곧 그만두고 평양을 드나들면서 헌책방에서 건축잡지를 탐독하기 시작했다.건축미술가의 꿈을 꾸었다. “하마터면 목사가 될 뻔도 했지.어머니의 성화로 인해 서울의 감리교 신학교에 원서를 냈는데 영어시험에서 낙방했어.그런데 외가집 소개로 아펜젤러 박사를 만나 연희전문학교 백남준 교장에게 입학시켜달라는 메모까지 받게 됐지.목사가 다 된 기분이었어.그런데 그만 메모쪽지를 잃어버렸지 뭐야.하나님께서 나를 목사자격 없는 놈으로 계시하신 줄 알고 포기했지.” 1946년 소련군이 진주하자 그는 다시 서울로 왔다.거리 곳곳에는 연극포스터들이 쫙 붙어있었다.그는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연극 연습장 한구석에서 하루종일 지켜보는 것이 한없이 즐거웠다. 결국 그 이듬해,희곡공부를 위해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다.이 무렵 그는 프랑스의 피에르 슈날 감독의 영화 ‘죄와벌’을 관람했는데 너무 감동을 받아 열 네번이나 미친 듯이 봤다.강의가 끝나면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죄없는 전선’ 촬영현장을 찾아다녔다.덕분에 여러 사람들을 사귈 수 있었다.무성영화였던 임운학 감독의 ‘홍차기의 일생’에 조감독 겸 출연까지 했다.이때 영화감독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에 빠졌다.미술,음악,무용,문학,건축,연극이 합쳐진 종합예술이라는 답을 얻었다. 1948년 동국대학교 국문과 재학시절,한국대학에선 처음으로 ‘영화예술연구회’를 창설해 ‘해풍’이란 영화를 만들었다.가난한 어촌을 무대로 풍파에 아버지를 잃고 미치광이가 된 젊은 아들의 이야기이다.이는 배우로서 데뷔작이며 마지막인 셈이다. “납북된 시인 김기림 선생이 지도교수였지.당시 신문기사에는 영화과가 없는 대학에서 이같은 유성(토키)대작을 만든 것은 동양에서 처음이라고 하더군.양주동 선생은 ‘배짱 하나 컸군,내 막걸리 한 잔 사지.’라고 거들기도 했어.돌이켜 보면 선무당이 사람잡는 모험이었으나 오늘날의 길을 굳혀준 출발점이기도 하지.” 그는 50년 영화인생을 뒤돌아볼 때 가장 아끼는 작품은 ‘오발탄’이라고 했다.그도 그럴 것이 ‘오발탄’은 1984년 영화진흥공사의 ‘광복40년 베스트 10’에서 1위,98년 ‘건국50년 영화,영화인50선’에서 1위,99년 ‘21세기에 남을 한국의 명작’에 1위로 뽑힐 정도였다. “다시 영화를 만든다면 인간의 영혼과 마음을 섬세하게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백발홍안’의 노(老)감독.예나 지금이나 술이 얼큰하면 저절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베마리아’를 부른다.집앞 골목에 이르면 정지용의 시에 채동선이 작곡한 ‘고향’을 부른다.그러면 기다리던 ‘무던한 순둥이’가 마중나와 팔짱을 낀다.이렇게 영화같은 그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그가 걸어온 길 ▲1925년 황해도 사리원 출생.45년 휘문고졸.49년 동국대 문과졸.64년 동국대 강사. ▲73년 한국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장.76∼90년 동국대연극영화과 교수.80년 유네스코 문화위원. ▲81년 예술원회원(현).89년 한국영화학회장.90년 동국대예술대학장. ▲97년 부산국제영화제심사위원장,99년 춘사영화제 심사위원장.2000년 영화감독협회 고문(현). ▲주요 수상=서울시문화상,대한민국예술상,예술원상,대종상 등. ▲주요 작품=‘오발탄’‘인생차압’‘잃어버린 청춘’‘막차로 온 손님’‘카인의 후예’‘사람의 아들’‘불꽃’‘장마’ 등 43편. 김문기자 km@seoul.co.kr˝
  • 儒林(7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는 묵묵히 최수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20여년 전 함께 한훤당으로부터 들었던 옛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한훤당의 가르침은 일관된 것이었다.즉 공자가 문학에 재능 있는 자하(子夏)에게 말하였던 것처럼 ‘너는 군자로서의 유자가 되어야지,소인으로서의 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는 가르침은 즉,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이는 스승 한훤당의 핵심철학이었던 것이다. 최수성은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도 스승의 말을 잊지 못하네.내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힌 것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내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함이었네.그러나 정암 자네는 국가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벼슬길에 올랐네.나는 어느 쪽이 옳은가는 말할 수 없네.일찍이 채근담은 ‘권세에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고 말하였지만,또 이렇게도 말하였네.‘권세에 가까이 할지라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더욱 깨끗하다.’ 그뿐인가. 이렇게도 말하였네.‘권모와 술수를 모르는 사람을 높다 하나 알아도 이를 쓰지 않는 사람을 더 높다 할 것이다.’” 최수성은 말을 끊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술잔을 들고 말하였다. “어찌하여 내겐 술을 따르지 않는 건가.이보게,노천.술 한잔 가득 따르시오.” 김식이 최수성의 술잔에 술을 한가득 따라주었다.넘치도록 따른 술을 최수성은 단숨에 들이켜고 말하였다. “그런데 정암,자네는 이미 권세에 물들었네.자네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권모술수에 도통하여 있네.그러므로 진실로 볼기를 때릴 사람은 마보꾼이 아니라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그대들일세.숙청되어야 할 사람들은 정국공신들이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권세욕일세.한 잔 더 주시게나.” 최수성은 다시 빈 술잔을 김식에게 내어주었다.김식이 마지못해 다시 따라주자 이를 단숨에 비우고 말을 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술을 마시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이보게,정암.자네가 마지막으로 술잔을 채워주게.” 최수성은 빈 술잔을 조광조에게 내밀었다.조광조가 술을 따라주자 최수성은 물끄러미 조광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불쑥 수수께끼의 말을 던졌다. “나는 가라앉고 있는 배를 탔어.이제 곧 얼마 안 있어 물에 가라앉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는데,술 석잔을 거푸 마시니 이제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구나.” 순식간에 석잔을 비운 최수성은 그 길로 방을 나가버렸다.김식을 비롯한 세 사람이 어이없는 얼굴로 조광조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가라앉은 배에 탔다니요.” 기록에 의하면 이 질문에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가 가라앉는 배라고 말한 것은 바로 우리들을 비유해서 가리킨 말이 아니겠소이까.” 결과적이지만 최수성의 비유는 그대로 적중된다.정국공신을 개정하여 승리감에 도취되어 자축연을 벌였던 네 사람은 그로부터 정확히 6일후에 붕당죄의 반역죄인으로 숙청되는데,그렇다면 이들을 가라앉는 배에 비유했던 최수성의 참위는 그대로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최수성의 충고는 정치가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될 진리인 것이다.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순간부터 권력의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며,미라잡이가 미라가 되듯 수구세력들을 몰아낸 개혁세력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수구세력으로 전락함으로써 가라앉게 된다.최수성의 지적처럼 정치에 있어 최고의 선은 곧 자기 자신의 개혁이며,그 어떤 권력에도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도덕의 완성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가라앉는 배. 이 지상에서의 권력은 그 어떤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진수(進水)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물이 새어 가라앉는 난파선에 불과한 것이다.
  • 儒林(79)-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조광조는 묵묵히 최수성의 말을 듣고 있었다.20여년 전 함께 한훤당으로부터 들었던 옛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한훤당의 가르침은 일관된 것이었다.즉 공자가 문학에 재능 있는 자하(子夏)에게 말하였던 것처럼 ‘너는 군자로서의 유자가 되어야지,소인으로서의 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는 가르침은 즉,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향상시켜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이는 스승 한훤당의 핵심철학이었던 것이다. 최수성은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도 스승의 말을 잊지 못하네.내가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힌 것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내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함이었네.그러나 정암 자네는 국가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벼슬길에 올랐네.나는 어느 쪽이 옳은가는 말할 수 없네.일찍이 채근담은 ‘권세에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고 말하였지만,또 이렇게도 말하였네.‘권세에 가까이 할지라도 물들지 않는 사람은 더욱 깨끗하다.’ 그뿐인가. 이렇게도 말하였네.‘권모와 술수를 모르는 사람을 높다 하나 알아도 이를 쓰지 않는 사람을 더 높다 할 것이다.’” 최수성은 말을 끊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술잔을 들고 말하였다. “어찌하여 내겐 술을 따르지 않는 건가.이보게,노천.술 한잔 가득 따르시오.” 김식이 최수성의 술잔에 술을 한가득 따라주었다.넘치도록 따른 술을 최수성은 단숨에 들이켜고 말하였다. “그런데 정암,자네는 이미 권세에 물들었네.자네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권모술수에 도통하여 있네.그러므로 진실로 볼기를 때릴 사람은 마보꾼이 아니라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그대들일세.숙청되어야 할 사람들은 정국공신들이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권세욕일세.한 잔 더 주시게나.” 최수성은 다시 빈 술잔을 김식에게 내어주었다.김식이 마지못해 다시 따라주자 이를 단숨에 비우고 말을 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술을 마시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군.이보게,정암.자네가 마지막으로 술잔을 채워주게.” 최수성은 빈 술잔을 조광조에게 내밀었다.조광조가 술을 따라주자 최수성은 물끄러미 조광조의 얼굴을 바라보며 불쑥 수수께끼의 말을 던졌다. “나는 가라앉고 있는 배를 탔어.이제 곧 얼마 안 있어 물에 가라앉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안해서 가슴이 두근두근했는데,술 석잔을 거푸 마시니 이제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구나.” 순식간에 석잔을 비운 최수성은 그 길로 방을 나가버렸다.김식을 비롯한 세 사람이 어이없는 얼굴로 조광조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가라앉은 배에 탔다니요.” 기록에 의하면 이 질문에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가 가라앉는 배라고 말한 것은 바로 우리들을 비유해서 가리킨 말이 아니겠소이까.” 결과적이지만 최수성의 비유는 그대로 적중된다.정국공신을 개정하여 승리감에 도취되어 자축연을 벌였던 네 사람은 그로부터 정확히 6일후에 붕당죄의 반역죄인으로 숙청되는데,그렇다면 이들을 가라앉는 배에 비유했던 최수성의 참위는 그대로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최수성의 충고는 정치가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될 진리인 것이다.권력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한 순간부터 권력의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며,미라잡이가 미라가 되듯 수구세력들을 몰아낸 개혁세력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수구세력으로 전락함으로써 가라앉게 된다.최수성의 지적처럼 정치에 있어 최고의 선은 곧 자기 자신의 개혁이며,그 어떤 권력에도 물들지 않을 수 있는 도덕의 완성이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가라앉는 배. 이 지상에서의 권력은 그 어떤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진수(進水)를 시작할 때부터 이미 물이 새어 가라앉는 난파선에 불과한 것이다.˝
  • 떳다! 빠줌마

    요즘엔 10대보다 30~50대 아줌마 팬들이 스타에게 더 열광한다는데…. 속칭 ‘빠줌마’의 세계를 살짝 엿보았다. 스타의 인기는 새로운 유형의 권력이다.그런데 그 권력을 부여하는 주체인 팬층이 최근 소리없이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오빠부대’로 대변되던 10대 여학생 중심의 팬덤(fandom)문화가 30∼50대 중년여성팬들을 포섭하며 빠르게 영역확장 중이다. ‘팬덤’이란,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의 팬 의식과 현상을 아우르는 용어.팬문화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음을 한눈에 읽어낼 수 있는 곳은 다름아닌 영화촬영 현장이다.극비에 부쳐진 스타의 촬영일정을 귀신같이 알아내 찾아오는 소녀팬들의 열성이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그림’.이젠 아줌마팬들(일명 ‘빠줌마’)이 한술 더 뜬다. #누나,엄마처럼…빠줌마들이 작업(?)한다 뭘 해도 열심인 아줌마들의 ‘빠줌마 문화’는 그러나 편견을 깬다.좋아하는 스타에게 극성 제스처를 취할 것 같으나 오히려 반대다.10∼20대 팬들과는 달리 빠줌마들은 묵묵히 실질적인 후원을 해주는 것.영화사 봄의 박혜경 마케팅 팀장은 “아줌마 팬들은 스타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최대한 편안히 배려해 주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10대 팬덤문화와 다르다.”면서 “때로는 누나 같고 때로는 엄마처럼 건강을 챙겨주는 쪽으로 팬활동의 초점을 맞춘다.”고 말했다.스타를 연호하거나 선물·편지 공세로 촬영을 방해하는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다. 아줌마팬층이 두꺼운 스타의 촬영장에는 덕분에 김밥도시락,제철 과일들이 넘쳐난다.지난해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촬영때.주인공 배용준의 대구 아줌마팬들이 양수리 세트장에까지 찾아와 추어탕 100인분을 끓여 스태프들까지 다 챙겨먹이고 내려갔다. 스캔들성 기사로 스타가 언론에 노출될라치면 즉각 홈페이지에 우려의 글을 띄우는 것도 아줌마팬이다.“지난해말 배용준이 애인이 생겼다는 고백글을 홈페이지에 올리자 아줌마팬들이 ‘사생활이 언론에 이용당하지 않게 부디 잘 처신하라.’는 등의 충고글이 잇따랐다.”고 그의 측근은 귀띔했다. #빠줌마들을 몰고다니는 스타들 아줌마팬을 움직이는 배우들은 따로 있다.‘배사아모’(배용준을 사랑하는 아줌마들의 모임),‘시티 오브 용준’ 등 별도의 아줌마팬클럽 사이트를 둔 배용준이 동급 최강의 빠줌마 스타.이병헌도 빠줌마들의 ‘우산’을 쓰고 있기로 소문나 있다.차인표,차승원,권상우,조재현 등도 빠질 수 없다.차승원이 거제도에서 촬영중인 영화 ‘귀신이 산다’를 홍보하는 이노기획의 김희정 차장은 “지방촬영 일정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지역 아줌마팬들이 간식거리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온다.”고 말했다. #‘모녀(母女)팬’도 뜬다! 빠줌마에 이어 팬덤문화에 새로 명함을 내민 주인공은 ‘모녀팬’.40∼50대 엄마와 10∼20대 딸이 함께 한 스타의 열혈팬이 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영화제작사 기획시대의 오숙현 대리는 “TV드라마에서 인기를 모은 남자배우들을 중심으로 모녀팬층이 빠르게 형성되는 추세”라고 풀이했다.권상우가 단적인 사례.TV드라마 ‘천국의 계단’으로 안방극장을 평정하자,요즘 한창 찍고 있는 로맨틱코미디 ‘신부수업’의 경북 왜관 촬영장으로 30∼50대 아줌마팬들이 딸과 함께 응원을 다녀간다는 것. #마케팅에 입김 불어넣는 아줌마팬들 팬층이 다양해지면 마케팅도 그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일.경제적·시간적 여유를 고루 갖춘 중년여성팬들은 마케팅 업체 쪽에서 보면 특히 매력적인 소비자층이다.한 마케팅 관계자는 “아줌마팬들은 혼자 움직이지 않고 크고 작은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게 특징”이라면서 “그들이 움직이면 예상밖의 흥행 가속도가 붙게 마련”이라고 말했다.실제로 ‘목포는 항구다’‘맹부삼천지교’ 등으로 조재현이 한창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지난달 말,그가 주연한 연극 ‘에쿠우스’는 아줌마팬들로 번번이 만원사례였다.대중문화의 소비욕구를 부추기는 것도,그 욕구를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주체도 팬들이다.그러나 다양하게 세력화하는 팬덤문화가 긍정적인 기능만 한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팬덤이 건강한 문화운동체로 기능하려면 스타 비평자의 역할도 균형있게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들이다. 황수정기자 sjh@˝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儒林(71)-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제1부 王道 제3장 至治主義 그 유명한 한훤당의 ‘한빙계’는 이후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퇴계,이율곡 등 모든 성리학자들이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18가지의 계심(戒心)이 되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아는 스승 한훤당은 공자가 설법한 ‘선비로서의 유행’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세운 한빙계의 계율을 철저하게 지켜나간 참 선비였다. 그러나 스승 한훤당도 조광조를 제자로 삼은 지 2년 뒤 순천으로 유배되고,그로부터 4년 뒤인 연산군 10년 갑자사화로 인해 사사된다.그 후 조광조에 의해서 우의정으로 추증되었으나 문묘에는 종향(從享)치 못하였는데,제자 조광조도 마침내 스승과 똑같이 이처럼 대역죄인이 되어 유배 길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스승과 제자, 사제간에 되풀이되는 운명의 악순환이란 말인가.스승 한훤당도 신진사림파로서 유자광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숙청을 당하였듯 조광조 자신도 신진사림파로서 심정과 남곤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파에 의해서 이처럼 숙청을 당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치란 항상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는 기득권의 훈구세력과 사회를 개혁하려는 신진세력간의 신구갈등에서부터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쟁탈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조광조는 잘 알고 있었다. 선조인 연산군 때에 훈구파들은 스승 한훤당을 비롯한 신진사림파들을 야생귀족(野生貴族)으로 규정하고 그들이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어지럽힌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 역시 붕당죄로 기소되지 않았던가.중종이 직접 남곤에게 받아쓰도록 내린 전교에서 조광조에 관한 유죄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지 않았던가.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4인 등은 서로 붕당을 맺어 자기들에게 붙은 자에게는 관직에 나가게 하고 다른 자는 배척하여 성세(聲勢)로 상호 의지하여 권세가 있는 요직의 자리를 독차지하였다…(후략)…” 붕당죄.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뜻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인 죄.이는 국가를 전복하려는 대죄로 붕당죄인을 보통 대역죄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옛 중국에서는 모든 관료는 개개인이 천자에 예속되는 것이라 하여 횡적으로 결합하여 당파를 만들 때는 이를 붕당죄로 처벌하였는데,이는 사사로운 이익을 같이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결합된 정치단체였기 때문이었다.붕당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조정의 조화를 해치는 배타적인 이익집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조광조를 태운 수레는 어느덧 충청도의 공주를 지나고 있었다.그동안 어느덧 나흘 낮,나흘 밤이 흘러 가버린 것이었다.11월에 접어들어 이미 초겨울의 쌀쌀한 한풍이 조광조의 품속을 파고들고 있었고,불어오는 바람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낙엽들만 유배 길을 뒤덮고 있었다. ―선생님. 언제 날이 밝았는지, 언제 하루가 지났는지 흐르는 세월을 깨닫지 못하고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조광조는 마침내 신음소리를 내면서 스승을 불러보았다. ―한훤당 선생님,선생님도 붕당죄인이 되어 순천에서 사사되셨는데,마찬가지로 저도 붕당죄인인 대역죄인이 되어 이처럼 능주로 유배 길 떠납니다.선생님이 순천에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것처럼 저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선생님.선생님이 사화에 휘말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을 제가 잘 알고 있으니,저 역시 아무런 죄 없이 사화에 휘말려 이처럼 억울한 유배 길에 오르고 있음을 스승님께오서도 잘 알고 계실 것이나이다. 우러러 보는 하늘 저편으로 떼 지어 따뜻한 남쪽나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보이고 있었다.˝
  • 왕년 주먹 모아 봉사활동하는 ‘낙화유수’ 김태련씨

    “양로원이나 교도소 어디든 아픈 몸을 이끌고라도 달려갈 겁니다.어려운 노인들을 돕고,오갈 데 없는 불우한 건달들을 챙겨야 합니다.뒷골목 양아치의 길로 빠지면 안되죠.” ‘낙화유수’란 별명으로 유명한 김태련(72)씨.그는 현존하는 최고 서열의 ‘주먹지존’,서울대 상대를 나온 인텔리 깡패,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인 4·18 고대생 습격사건 당시의 행동대장 등의 수식어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또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이정재와 유지광의 행동대장으로 나와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지난달 이정재(1918∼1961)의 ‘동대문사단’과 유지광(1924∼1988)의 ‘화랑동지회’ 후신인 ‘대한연합상사’를 발족,또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특히 왕년의 동대문사단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43년 만에 다시 문을 열어 더욱 그렇다. 12일 오전 종로4가 시계골목의 한 허름한 건물 4층에 위치한 ‘대한연합상사’에서 그를 만났다.요즘 심한 당뇨증세와 신장병 등으로 하루걸러 피를 투석하며 지낸다고 했다.때마침 당시 동대문사단의 멤버 10여명이 모여 앉아 향후 일정을 논의하고 있었다.고 김두한씨와 종로에서 동고동락을 했던 윤봉산(88)옹도 찾아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의리의 사나이’들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4·18 고대생 습격 당시 상황을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는 “습격이 아니라 우발적 충돌이었다.”고 전제한 뒤,“이정재씨와 유지광씨는 당일 시골에 가 있어 아무런 책임이 없다.4·18 깡패 동원은 임화수씨와 신도환씨가 주도했다.”면서 “충돌장소인 광장시장 앞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1년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그것도 검찰과 재판부에 서울대 동문들이 많아 감형이 됐다.”고 술회했다. 1957년 민주당 조병옥 박사가 장충단에서 유세할 때의 방해사건과 관련,그는 “야당집회를 방해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인 줄 알았다.”면서 대가로 밀가루 15만부대를 받아 조직확장을 꾀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60년대말 이후에는 가끔 지방을 돌아다니며 후배 동지들과 만나곤 했을 뿐 거의 칩거하다시피 지내왔다.지금도 어디를 가나 ‘큰형님’ 소리를 듣는다.후계자 조병용(52)씨는 “오는 22일 ‘큰형님’이 직접 김천 소년교도소를 찾아가 수감소년들을 상대로 강의할 예정”이라면서 “해체 당시 조직원 60여명이 최근 다시 모여 마지막 ‘큰형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제 꿈은 양로원을 만들어 불우노인에게 쉴 공간도 제공하고 또 옛 동지들끼리 함께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김씨는 최근 의정부시에 위치한 양로원 ‘나눔의 샘’을 방문,성금과 음식물을 전달했다.그는 이같은 뜻을 실천하기 위해 서울 마포구 상수동 자택을 비롯한 전 재산을 내놓았다.자식들에겐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겠다고 이미 공언까지 했다. 아들은 미국에서 에이즈 백신을 연구 중인 박사이며 두 사위는 의사와 무역업을 해 아쉬울 게 없다고 그는 말했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술따라 맛따라-금산 ‘인삼주’

    인삼은 오래전부터 쓰여온 고급 약재다.그래서 인삼주도 인삼 재배와 함께 자연스럽게 빚어마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삼주 하면 소주에 인삼을 통째로 넣어 오랫동안 우려낸 술을 떠올리게 마련이다.하지만 이는 편리함 때문에 익숙해진 방법일 뿐이다.전통적인 인삼주 빚기는 발효를 이용하는 것이다. 16세기 실학자였던 서유구가 지은 ‘임원십육지’ 제5권에 보면 인삼주를 ‘찹쌀,누룩,물,인삼으로 빚은 약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이로 미루어볼 때 이미 16세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선 인삼주를 빚어 마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다만 인삼은 예나 지금이나 고급 약재이기 때문에,서민층보다는 양반층에서 즐겼을 것으로 보인다. 인삼발효주는 현재 충남 금산군 금성편 파초리에서 김창수(55)씨가 빚고 있다.충남도 무형문화재(19호)로 지정돼 있는 금산인삼주 제조기능 보유자인 그는 사육신중 한 사람인 김문기의 후손.김문기 공이 김씨의 18대조다. 김문기 공은 지금의 금산읍 상옥리 자택에서 처음 인삼주를 빚어,대대로 집안 제사와 결혼 등 잔치에 가양주로 사용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6·25때 집안 족보 등 모든 문건이 소실돼,가양주 내력이 잊혀졌던 것을 김씨가 우연한 기회에 숙모님으로부터 집안의 인삼주 이야기를 듣고 재현에 나서 성공했다고 한다. “‘18세 되던 해 김령 김씨 집안에 시집을 오니 시가에서 인삼주를 빚어 제사와 명절에 쓰고 있었다.’고 숙모님이 말씀하시더군요.이후 1972년 양조장을 사들여 막걸리를 생산하면서 인삼주 재현에 나섰지요.빈약한 문헌을 바탕으로 제조와 시험에 들어갔는데,실패를 거듭하다가 8년만에 제대로된 인삼주를 빚게 되었습니다.” 김씨는 그동안 체계화한 양조법으로 인삼주를 생산해 금산지방의 ‘칠백의총 추향제’,‘금산 인삼제’ 등 각종 행사에 주류를 제공하고 있다.지난 2000년엔 아셈 회의에서 건배주로 사용돼 주목을 끌기도 했다. 발효 인삼주와 소주에 인삼을 넣은 인삼주와의 차이는 무얼까.김씨는 “소주에 인삼을 통째로,또는 썰어서 넣어 우려내면 인삼의 향 및 좋은 성분과 함께 몸에 해로운 불순물이나 섬유질까지도 술에 섞인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조금만 과음하면 숙취 때문에 두통이 오기 마련이라고.하지만 발효 인삼주는 발효 및 여과 과정에서 불순물은 제거되고,섬유질도 걸러져 숙취가 전혀 없다고 한다. 김씨가 술을 담글 때 넣는 인삼은 4,5년근.6년근을 쓰면 더 좋지만 채산성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그러나 4,5년근도 맛과 향기면에서 6년근과 별 차이가 없다고 했다.인삼은 쌀 대비 6.5%의 비율로 쓴다.인삼의 향과 맛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채산성을 맞추기 위해 수년간의 노력끝에 얻어낸 김씨만의 ‘황금비율’이다. 인삼주는 고두밥과 누룩가루에 인삼을 넣어 발효시켜 만든다.이때 인삼은 수삼을 톱밥처럼 분쇄해 쓴다.통째로 쓰면 발효가 되기 전에 썩어버리기 때문이다.또 수삼을 써야 향이 가장 좋다고 한다.빚은 술은 실내 온도 20도 정도에서 40일 정도 발효돼야 익는다. 김씨는 이렇게 빚은 13도의 인삼 약주와 함께 43도의 인삼 증류주도 생산한다.약주는 식당 등 업소에,증류주는 주요 백화점과 면세점에 주로 나간다.대부분의 민속주가 명절 선물용으로 90% 이상 나가는 통에 평상시엔 거의 손을 놓고 있는 반면,금산인삼주는 업소용 비중이 절반을 넘어 계절을 덜 탄다고. “금산인삼주뿐만 아니라 민속주는 명절이 아닌 평상시 즐기는 술이라야 합니다.위스키나 맥주를 찾는 사람중 10분의1이라도 전통 소주나 약주를 찾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 따라 빚어 보세요 재료:밀누룩,찹쌀,인삼 1.찹쌀 1말로 고두밥을 짓는다.고두밥을 찔 때 바닥에 솔잎을 깔면 술에서 은은한 솔향이 난다. 2.고두밥을 식혀 누룩가루 3되,인삼과 함께 항아리에 넣어 섞은 뒤,물 12ℓ를 부어 잘 젓는다.누룩은 통밀을 빻아 띄운 것을 사용하고 인삼은 4,5년근을 톱밥처럼 분쇄해 쓴다. 3.20도 정도의 실내에서 약 20일간 1차 발효시킨다.이때 항아리는 삼베보자기로 덮어둔다. 4.1차 발효가 끝나면 항아리를 완전히 밀봉해 40일가량 2차 발효시킨다.다 익은 술은 항아리 안쪽으로 골이 지면서 테가 생기는데,이때 술을 떠내거나 보자기 등을 이용해 짜내야 한다.약주 10ℓ 정도가 생산된다. 5.증류 인삼주를 만들려면 증류기를 이용해 약주를 증류하면 된다.증류 초기엔 60도 이상의 술이 나오다가 마지막엔 19도 정도의 소주가 나오는데,이를 적당히 섞어 40도 정도로 맞춘다. 글 금산 임창용기자 sdragon@˝
  • ‘쌀통팔달’ 대전 인동시장

    썰렁하고 초라했다.‘대전의 발상지’로 불리는 인동시장은 요즘 이처럼 변해 있었지만 서민들이 찾기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대전역에서 1㎞ 남짓 떨어져 있는 이곳에는 대낮이지만 손님 서너명이 찾아와 가게 앞 바구니에 담아놓은 쌀을 손으로 들춰보며 주인과 흥정 하고 있다.40년간 싸전을 하고 있는 대성상회 주인 김제홍(57)씨는 “예전과 비교하면 밥 빌어 죽 끓여 먹는 꼴이지만 쌀이나 잡곡의 품질이 좋고 값도 싸 요즘도 단골이나 서민들이 자주 찾고 있다.”고 말했다. ●옛 영화를 뒤로한 채 시장 안에 자리잡은 건물은 무척 허름했다.2층짜리 대전상가 건물은 36년의 세월에 성한 데가 없다.이 건물에 있는 40여개 싸전 상인들은 도로변에 쌀과 조,녹두,겉보리 등 잡곡을 내놓고 장사를 했고 어두컴컴한 건물 속에도 쌀과 잡곡을 늘어놓은 가게들이 들어차 있다.그 속에 희미한 전등이 몇개 걸려 있을 뿐이다.장사가 안되는지 문을 닫은 가게도 눈에 띄었다.김씨는 “교통사정이 좋지 않았던 예전에는 인동시장으로 전국의 쌀이 집결된 뒤 서울과 부산 등지로 다시 팔려나가 인동시장하면 알아줬다.”며 “경부고속도로가 뚫려 전국으로 유통이 쉬워지면서 시장이 죽어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 건물이 들어선 한참 후인 70년대 말까지도 상권이 유지돼 호황을 누렸다.하루에 11t 트럭 12대 분량의 쌀을 팔았고 점포 하나를 3∼4명이 빌려 장사했다.점포 주인은 이들에게 쌀 한 가마니(당시 1만원)당 300원씩의 수수료만 받아도 먹고 살 정도였다.주변에는 돈을 좇아 들어선 술집들이 즐비했다.김씨는 “그 때는 3일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술집을 잡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작부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손님과 싸우는 악다구니가 쉴새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가씨 없는 술집만 한두 군데 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일부 집의 창문에는 ‘○○여인숙’과 같이 희미한 추억을 되살리는 글씨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가난한 사람들의 보금자리거나 삶에 지친 이들이 잠시 동안 쉬어가는 휴식처일 뿐 흥청망청댔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김씨는 “그 때는 새벽 서너시쯤 문을 열어 잠깐 장사를 한 뒤 이곳에서 물건을 떼다 파는 변두리시장에서 수금해 저녁 때면 술집으로 가기 일쑤였다.”고 들려줬다.아침 8시에 문을 열고 저녁 7시면 닫는 요즘과 많이 달랐다. ●만세운동과 가마니시장 대전에서 ‘5일장’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도 인동시장이다.장이 서면 산내와 상소동 등 인근 주민들이 가꾼 채소와 잡곡을 들고 나와 팔았다.소달구지나 지게에 나무를 지고 나온 나무장수들로 북적댔다고 한다.1919년 3월6일 장날에는 상인들이 대전 최초로 만세운동을 일으킬 정도로 중심지였다. 그러던 게 6·25를 거치면서 5일장이 사라지고 싸전과 우(소)시장 중심으로 바뀌었다.싸전이 성행하면서 가마니를 만들어 파는 상인들도 판을 쳤다.한때 이곳이 ‘가마니시장’으로 불렸던 것도 여기서 유래됐다 한다.시장을 끼고 흐르는 대전천을 건너도록 나무로 만든 서정다리(현 보문교) 밑으로는 피란민들이 모여 천막을 치고 살았고, 깨끗한 냇물에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얘기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신안상회 여주인(61)은 “돈을 받고 양잿물을 넣어 빨래를 삶아주는 장사꾼들이 서너명이 있을 정도로 대전의 돈이 모두 몰렸던 곳”이라고 귀띔했다. ●다시 영화를 꿈꾼다 판잣집과 함석집 대신 대전상가와 같은 건물이 들어선 65년 이후로 우시장이 태평동을 거쳐 오정동으로 옮겨갔다.싸전만 남고 80년대 이후로는 시장의 중심이 역전 중앙시장 등으로 옮겨가자 술집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가마니 장사를 하다가 마대가 나오면서 쌀장수로 전환했다는 박낙철(77)씨는 “농협 등이 쌀을 취급하면서 시장이 더 죽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대전역 앞에 있는 중앙시장이나 반경 500m도 채 안되는 대전 최대의 청소년거리인 은행동 ‘으능정이 청소년거리’가 있지만 인동시장 상인들은 옛 영광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김씨는 “대전의 중심축이 인동∼중앙시장∼선화동∼둔산으로 10년마다 이전했다.”며 “주변에 판암IC 등 교통이 좋아지고 대전 동남부권 개발이 이뤄지는 상태여서 다시 인동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내다봤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시론] 개성관광 ‘百年之大計’ 를/박춘규 관광公 남북관광협력단장·본사 명예논설위원

    독일 하이델베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고도(古都)다.13세기부터 유럽 최고의 대학도시였고,이런 교육도시 배경이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으로 더 알려졌다.산성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시 전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서울에서 1시간 남짓 거리의 개성관광이 곧 가능하리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개성공단이 시공되면 관광도 가능할 것이라니,한반도에 이보다 더 훈훈한 소식은 없을 듯싶다.개성은 서울 인근이어서 하이델베르크처럼 필수 관광코스로 만들 수 있다.관광자원 면에서 세계의 자랑이 될 최고(最高)가 몇개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도시라는 점이다.유럽의 근대 대학이 13세기에 시작되었던 점과 비교하면 이보다 몇 백년은 족히 앞선 교육도시였다.성균관으로 국자감을 개칭한 것은 1310년이었으나 고려 초부터 대학교육을 담당,나라의 인재를 길렀으니 교육에 대한 열의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세계를 앞서가는 것 같다. 둘째는 세계 최초 활자의 생산지다.대학교육의 발달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글의 활자화를 통한 대중 매체화가 한반도의 개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면 과장일까.확실한 것은 서양보다 이백여년 전에 금속활자를 만들어낸 본거지가 바로 개성이다.활자를 필요로 하는 문화의 높은 열기와 이를 만들어 내는 놀라운 창의력이 비등하던 곳이 바로 옛 오백년 도읍지 개성이다.이곳에서 1234년에 찍어낸 ‘상정고금예문’은 이보다 앞선 목판활자본 ‘다라니경’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우리의 보배다.앞서가는 우리의 IT 기술과 활자술과의 연관성도 설명해 볼 일이다. 셋째는 고려자기의 생산,유통,이용 중심지가 개성이었다.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도자기 사상 가장 비싼 가격에 낙찰된 철화백자가 고려자기를 빚은 후예의 손기술이나 예술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한다.그래서 은은한 비취색 고려청자를 구워내는 기술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신비로 남아있다. 넷째는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냉전 전흔과 그 삶의 현장 답사관광’이다.철책과 지뢰밭,땅굴 등 긴장을 배경으로 하는 개성관광은 세계역사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 답사’ 여행이다. 개성관광은 몇 가지 정책적인 목표를 전제로 준비되어야 한다. 첫째는 국민들의 자유로운 통일 체험장이 되어야 한다.여기를 다녀오면 서로에 대한 생각이 변하여 왜 서로 도와야 하는가를 느끼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둘째는 주최국에 고용,외화획득,생활 문화 공간의 개선 등 실익을 주도록 엮어져야 한다. 셋째는 모든 외국인의 필수 관광 코스로 발전시켜야 한다.남북 대치 현실 등 새로운 관광자원을 북으로까지 확대하는 의미를 살려서,향후 평양 중국으로 연결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는 개성 인삼 등 생산품과 축제 등을 온 관광객이 공유하는 자연스러운 생활권의 확대로 이어져야 한다. 넷째는 개성 다음 평양 관광 길의 디딤돌이 되도록 준비와 시행 방향을 함께 맞추어야 한다. 소설 ‘레미제라블’에 눈을 끈 배경 하나는 도시의 하수도가 넓었다는 점이다. 200년 전에 건설한 하수도가 시대가 변한 지금에도 거대한 도시 프랑스 파리의 기능을 말없이 받쳐가고 있다.개성 관광을 시작하는 준비가 통일 후의 한반도 관광의 청사진의 일부로 준비되어,서울을 찾는 1000만명의 외국 관광객의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원대하고 기풍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사설] 총선 공약 현실성 있나

    어제부터 정치권의 사활을 건 총선 선거전이 시작됐다.지역 일꾼을 뽑는다는 총선이 대선의 연장전처럼 달아오르고 있다.선거법의 단속 그물망이 촘촘해지면서 운신의 폭이 대폭 줄어들기는 했으나 유권자의 표심을 자극하려는 정치권의 몸부림은 예나 다름없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권자들로서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유권자들이 과거 어느 선거보다 냉철한 판단과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특히 정치권이 내걸고 있는 총선 공약은 선거 후 국민의 부담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신중한 분석과 판단이 요구된다고 본다.각 정당들로서는 고심 끝에 내놓았겠지만 현실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공약(空約)도 적지 않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다.열린우리당의 공약 가운데 주택 분양원가 공개라든가,선출직 국민소환제 도입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분양원가 공개는 정책협의 과정에서 정부측으로부터 ‘적극 검토’라는 말을 이끌어냈으나 하루만에 ‘장기적으로 신중 검토’쪽으로 선회할 만큼 시장경제에 파급 효과가 큰 정책이다.국민소환제 역시 우리의 정치 풍토를 감안할 때 시기상조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나라당의 공약은 역대 야당들과 마찬가지로 훨씬 더 현실성이 떨어진다.전 국민에게 연금 혜택을 부여하고 국방비의 40%를 증액하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재원 조달 방안이 불분명하다.국가신인도 하락을 감수하면서 재정적자를 확대하겠다는 것인지,조세부담률을 대폭 올리겠다는 것인지 부연 설명이 없다.사병 월급을 20만원으로 올리겠다든가,2006년까지 유가를 동결하겠다는 공약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유권자들의 구미에 맞는 내용만 나열하고 듣기 싫은 내용은 숨기고 있다. 유권자들이 ‘아니면 말고’식의 공약에 현혹되는 한 정치권의 구태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국민들이 선거 이후 덤터기를 쓰지 않으려면 공약(公約)에서 공약(空約)을 가려낼 수 있어야 한다.˝
  • [책꽂이]

    ●책 든 손 귀하고,읽는 눈 빛난다(김기태 지음,박이정 펴냄) 최근 몇년간 출간된 책 200여종을 골라 소개한 서평집.저자(세명대 교수)는 특히 ‘보키니’(빌리 밀스 등 지음)와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에릭 두르슈미트 지음)를 우리 사회 지도자들이 읽어야 할 책으로 꼽는다.‘보키니’는 인디언 라코다족 말로 ‘새로운 삶,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뜻하는 말.‘아집과 실패의 전쟁사’는 우연과 불확실성의 ‘전환요소(hinge factor)’가 승패를 갈랐던 10개의 역사적 전투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현한 책이다.1만 7000원. ●그리스 신화의 이해(이진성 지음,아카넷 펴냄) 그리스는 유럽의 정신적 고향이다.유럽의 문화와 예술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전통과 함께 그리스 문화와 예술의 핵심인 그리스 신화를 알아야 한다.저자(연세대 교수)는 그리스 신화를 창세신화·올림포스 신화·영웅신화로 나눠 설명한다.1870년대 트로이와 미케네를 발굴한 하인리히 슐리만,20세기 초 크레타의 크네소스 궁을 발굴한 아서 존 에반스 등이 이룩한 그리스 신화학의 성과도 소개한다.1만 8000원. ●지식인은 돼지다,고로 나는 최상의 돼지다(알랭 보스케 지음,강주헌 옮김,작가정신 펴냄)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프랑스 작가 알랭 보스케가 나눈 대담을 묶었다.달리는 1920년대부터 ‘피는 꿈보다 달콤하다’‘기억의 고집’ 등의 작품으로 초현실주의를 이끌었던 인물.부뉴엘과 함께 전위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만들어 회화 외적인 면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다.달리는 지식인은 돼지라고 주장한다.9800원. ●서양해운사(어니스트 페일 지음,김성준 옮김,혜안 펴냄)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격언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로 통한다.서양은 지중해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2000년간 치열한 각축을 벌였고 그 승자들,즉 그리스·로마·베네치아와 제노바·스페인과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은 당시 유럽은 물론 세계의 지배국으로 군림했다. 20세기 이후 세계의 바다는 미국의 지배질서 아래 놓여 있다.서구의 해상무역과 해운업의 발전과정을 다룬 해운사의 고전.2만 3000원. ●리치처럼 승부하라(팻 윌리엄스 등 지음,안종설 옮김,성공시대 펴냄) 네트워크 마케팅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암웨이’는 1959년 리치 디보스와 제이 반 안델이 공동 창업한 세계 최대의 직접 판매회사다.이 책은 ‘암웨이’ 그룹 창설자 리치 디보스의 성공비결을 다룬다.나눔과 섬김의 서번트 리더십이 그 핵심이다.1만 2000원.˝
  • [‘물의 날’ 특별기고] 이제는 물 사랑으로/곽결호 환경부장관

    고향마을을 흐르던 실개천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넉넉히 담고 있다.가난한 동심(童心)에게는 뗄 수 없는 생활의 일부이기도 했다.환경과 자연과 인간의 삶이 동격이었던 그 시절,이른 봄이면 개천가에 휘늘어진 갯버들 가지에서 솜처럼 피어난 버들강아지를 따기도 했고,여름철에는 냇가의 돌을 뒤져 뒷걸음치는 가재를 잡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에게는 환경체험학습의 프로그램처럼 여겨질 이 풍경은 놀다 지친 어린아이의 한가로운 일상이 아니라 빈곤했던 시절의 절박한 생활상이었다.먹을 것이 흔치 않던 때,통통한 버들강아지는 한입 가득 넣어 껌 삼아 씹던 좋은 군것질거리였고,가재는 별스러운 도시락 반찬이 되었으니 말이다. 문 밖을 나서면 깨끗한 자연환경이 아이를 감싸안았다.그 시절엔 지천의 물이 모두 우리 집 수도였다.즉석에서 길어 올린 우물물로 갈증을 달래고 밥을 지었으며,날이 가물어 우물이 바닥을 드러내면 계곡 물을 길어서 식수로 사용했다.그래도 건강에는 아무 탈이 없었다.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물의 위생을 걱정해야만 했다.한여름에 장마가 져서 말랐던 우물에 빗물이 가득 차면,정부에서 나누어 준 ‘클로르칼크’라는 소독약으로 우물을 소독해 써야 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물은 수질과 수량의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충족될 때 최고의 가치를 발한다.둘 다 나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최악의 경우이고,물은 넉넉한데 수질이 나쁜 것도,또 깨끗한 물은 있으되 양이 넉넉하지 못한 것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정부는 좋은 수질의 물을 넉넉하게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고 있는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될수록 물을 오염시키는 물질은 그만큼 많이 배출되고 있다.게다가 강수량이 한 여름 장마철에 집중되고 하천의 경사가 급해 물 관리에 어려움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공급할 수 있는 수량이 매우 제한적이다. 물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물이 우리 모두의 공동 재산이라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확산되어야 한다.내가 마음껏 쓰고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는 양이 그만큼 줄어들 뿐 아니라 아름다운 물길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제12회 ‘세계 물의 날’이다.모든 생명의 근원인 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잘 보전하자는 뜻에서 유엔이 정한 기념일이다.올해는 기상이변 등으로 빈번해지는 재해로부터 대처방법을 찾고자 ‘물과 재해’라는 주제를 정했다.요 근래 몇 년 동안 미국이나 인도,뉴질랜드,독일 등 지구촌 곳곳에서 홍수나 태풍과 같은 물 재해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우리도 지난 2년간 ‘루사’와 ‘매미’를 통해 물의 무서운 힘을 실감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수질과 수량,모두 안심할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그렇다고 해법의 고리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그동안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며 산업의 기본요소인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에 공급 위주의 정책을 펼쳐왔지만,이제는 물을 아끼고 재이용하는 등의 ‘물 수요관리’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매듭을 풀어 나가야 한다. 다행히 물은 본질적으로 같은 양이면서 순환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굽이굽이 돌아 언젠가는 제자리로 오는 것이 물이다.이제는 물 사랑의 마음자세로 현명하게 물을 관리할 때다.우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한정된 물도 무한하게 쓸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곽결호 환경부장관˝
  • [씨줄날줄] 가짜 혈통서/강석진 논설위원

    개(犬) 들어간 말 치고 좋은 말이 별로 없다.‘개가 개 낳지.’,‘개 귀에 방울’,‘개 따라 가면 측간 간다.’,‘궂은 날 개하고 논 것 같다.’ 등등.예나 지금이나 개가 들어간 욕은 긴장감을 팍 높여준다.한 마디 더하자면 ‘개 장수도 올가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바야흐로 애완견 인구 1000만명 시대를 맞아 이 말은 바뀌어야 할 것 같다.‘개 장수도 혈통서가 있어야 한다.’로. 경찰이 가짜 혈통서를 꾸며 잡종을 명견으로 속여 판 사람들을 붙잡았다.혐의는 160여 마리를 속여 팔아 4억여원을 챙겼다는 것인데 압수한 가짜 혈통서는 무려 6000여장에 달한다고 한다.여기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면 안 된다.사건이 터진 뒤 한 방송과 인터뷰한 애완견 판매업자는 “애완업계에선 관행입니다.새로운 일도 아닌데요.”라고 심드렁하게 말한다. 개 키우는 데 온갖 정성 쏟아 붓는 요즘이고 보면 혈통 갖고 장난칠 여지도 그만큼 커져 있는 셈이다.사단법인 한국애견협회는 “개 사랑이 빗나가고 있다.”면서 “소비자도 30여곳이 넘는 유사 사설단체의 혈통서를 주의하라.”고 당부한다.그래도 혈통서가 있는 놈과 없는 놈의 값이 10배는 벌어지는 개 거래시장에서 가짜 혈통서의 유혹은 뿌리치기 어렵겠다. 이 대목이 어렵다.슬슬 사람 혈통 이야기로 넘어가기 때문이다.목하 경제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이헌재 부총리가 16일 부친의 독립운동 이력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지금까지 호남으로 알려졌던 출신배경에 대해서도 서울이라고 밝혔다.독립운동가 자손임을 내세우지 않고 지내온 마음자리가 도드라져 보이기도 하고 출신 배경이 이제야 바로잡히는 게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 혈통으로 마음고생한 이도 있다.박관용 국회의장이다.지난 15일 열린우리당 김희선 의원이 “(박의장이) 친일파 후예로서 이중적 잣대를 고발한다.”며 탄핵 사회를 본 박 의장에 화살을 날렸다.박 의장의 해명과 친일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에 부담을 느낀 김 의원은 결국 사과의 뜻을 밝히고 물러섰다.박 의장 부친의 일제 시대 행적 규명과 이를 연좌제적 발상으로 정치공세 재료로 이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말 못하는 짐승의 혈통도 함부로 다루는 게 아니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 ’서울 탱고-소양강 처녀

    ‘해저문 소∼양강에 황혼이지면/외∼로운 갈대밭에 슬피우는 두견새야/열여덟 딸기같은 어린 내 순정/너마저 몰라주면 나는나는 어쩌나‘ 관광버스 안에서 막춤 출 때나 노래방에서 흥을 돋울 때 ‘소양강 처녀’를 모르면 간첩.40대를 넘긴 대한민국 사람치고 물안개와 호수의 도시 춘천 이미지를 고즈넉이 노랫말에 녹여 만든 ‘소양강 처녀’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노래가 워낙 유명세를 타다 보니 춘천거리에 다니는 여자들만 보면 모두 소양강 처녀로 보인다는 외지인들의 우스갯소리도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그만큼 ‘춘천=소양강 처녀’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이 노래는 60년말 여가수 김태희씨가 불렀을 당시 별 반응이 없었다.그러던 것이 10여년 뒤인 70년대말 대학가에서 응원가로 불려지기 시작하며 뒤늦게 뜨기 시작해 지금껏 애창되고 있다. 곡조가 단조롭고 배우기 쉬워 응원가로 적격이었을 것이고,가사도 애절해 유신정권말 억눌렸던 피끓는 젊은이들 사이에 ‘저항가요’쯤으로 여길 만했을 터이니 이만큼 좋은 노래가 또 어디 있었을까. 원조 가수는 경기도 어디쯤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는 후문이지만 이후 가수 한서경씨 등이 리바이벌해 부르며 꾸준히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소양강 처녀의 실존인물 여부를 둘러싸고 재밌는 얘기도 많다.작사가인 반야월 선생이 노래를 배우려고 사무실을 찾은 춘천출신 처녀 윤기순(당시 18세)씨를 모델로 했다는 설에서부터,그냥 사무실에서 문득 떠오르는 영감으로 곡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까지,노랫말을 놓고 확인할 길 없는 얘기가 무성하다. 실존인물이 있다는 얘기는 춘천출신 처녀 윤씨가 반야월 선생 일행을 춘천 소양강가 자신의 집으로 초청,강에서 조각배를 타고 지금의 중도섬으로 들어갔다가 비바람이 몰아친 뒤의 소양강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즉석에서 작사했다는 것이 사실처럼 전해지고 있다.윤씨는 지금도 살아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노랫말 가운데 당시 소양강에는 갈대가 없었고,두견새도 물새가 아닌 산새라는 점 등을 들어 반야월 선생이 현장을 보지 못하고 써내려갔던 것이 아닌가 의문을 남기고 있다. 또 소양강 처녀 노래가 나오기 1년전쯤 ‘춘천댁 사공’이라는 노래가 인기 순위 상위를 오르내렸다는 점에서 실존인물이 있는 춘천댁 사공을 듣고 영감을 얻어 썼을 것이라는 설까지 분분하다.그만큼 소양강 처녀가 수십년동안 국민들 사이에 인기를 끌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춘천댁 사공의 노랫말을 직접 썼던 강원도예총회장 배동욱(70·시인)씨는 “소양강에서 멱감으며 놀던 때가 눈에 선하다.”며 “가사 내용에 다소 흠이 있고 당시 정황과 맞아떨어지지 않더라도 소양강 처녀라는 고유명사가 수십년간 국민들 사이에 인기를 끄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노랫말에 얽힌 사연쯤이야 아는지 모르는지,지금의 소양강은 노랫말이 나올 당시와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흐르고 있다. 당시에는 의암댐이 만들어진 직후,지금처럼 의암호가 형성되지 못했던터라 중도섬을 가운데 두고 서쪽으로는 화천강을,동쪽으로는 소양강이 분리돼 흘렀던 시절이다.그뒤 소양강댐이 만들어지고 지금처럼 거대한 의암호가 조성돼 당시 분위기가 많이 퇴색했다.더구나 최근 들어 강가에는 거대한 교각이 놓여지고 우뚝한 아파트단지가 경쟁하듯 솟아 그때의 모습은 찾을 길 없다.하지만 서면 산위로 하루해가 넘어가는 황혼녘의 소양강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소양강 처녀를 추억하기 위해 뒤늦게 춘천시가 소양강변에 ‘소양강 처녀’ 노래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노래까지 감상할 수 있도록 음향시설도 설치한다니 격세지감이다.주변에 시민의 숲까지 만들어 시민공원으로 꾸며 놓겠다니 소양강 처녀가 춘천에서 다시 살아날 것만 같다. 춘천 조한종기자 bell21@˝
  • 儒林(46)-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儒林(46)-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김정의 지적은 정확하였다. 날이 새어 문초담당관이었던 대신들로부터 간밤에 술이 취해 만용을 부린 조광조의 행태를 전해들은 중종은 불과 같이 노하였다.이 분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어서 실제로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린 것과 같은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비교적 조광조에 호의적이었던 이장곤과 홍숙이 공초를 올려 ‘저들이 모두 통곡하며 성명(聖明)만을 믿고 나랏일을 위하고자 하였을 뿐이지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는데,신들도 이 말을 듣고 대단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만약에 이들을 죄로 다스리자 하신다면 만세에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변론을 하였으나 불과 같이 화가 난 중종은 전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영의정 정광필도 홀로 빈청을 지킨 채 눈물을 흘리며 거듭 탄원하였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었겠습니까.승지들은 그저 바른 의론을 따랐을 뿐이며,조광조 일파도 추호의 사심없이 다만 옛사람의 책을 읽고 지치(至治)를 주장하여 간혹 과격한 일이 있었을지언정 그렇게 큰 영향을 남긴 것도 아닙니다.태평성대에 선비를 죽이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이는 역사를 더럽힐 것입니다.또한 이자(李)는 국가에 크게 이바지할 인물이오니 아무쪼록 의금부로 하여금 죄가 있고 없음을 분명히 가려 처결토록 하소서.” 그러나 김정의 변론도 정광필의 읍소도 불과 같이 화가 난 중종의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중종은 단호하게 교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이 ‘중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가 처음부터 나랏일을 그르치지는 않았을지언정 조정에서 이같이 처리키로 하였으니 이들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중종은 최후의 교지를 내린다. “조광조·김식·김구는 각각 참형에 처하고,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은 장 일백대에 유(流:유배형) 삼천리로 정하도록 하라.” 마침내 조광조에게 참형이 확정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잠깐,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결정될지 모르고 마지막 순간에도 술에 취해 만용을 부렸던 조광조에게 ‘조광조가 역린을 건드리고 있다.’고 비평한 노대신 김정의 말을 잠깐 음미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용은 상상 속에 나오는 신령한 동물로,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기는 상서로운 짐승인데,예로부터 제왕에 비유되어 왔다.이렇듯 용은 권력의 상징인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누구나 권력을 좇아 그것을 쟁취하려 하는데,분명히 말해서 권력,즉 용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다만 군왕이 용과 같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처한 자리에서 비롯된다.무릇 권력이라 함은 사람이 가진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그가 처한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권력을 갖게 되면 그것이 자신만이 지닌 뛰어난 능력 때문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권력이 인간들에게 마(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군주,뛰어난 리더는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라도 그 권력에 취하지 아니하고,그 권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자리를 떠나면 곧 사라져 버릴 신기루임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마치 날카로운 칼끝에 발라져 있는 꿀과 같은 것이어서 함부로 핥으려다가는 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중종도 어리석어 권력의 속성을 깨닫지 못하였고,조광조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변덕을 조심하지 않았다. 변덕은 권력이 가진 속성 중의 하나이다.용이 구름과 빗속에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듯 권력 또한 그것을 가진 자의 구름과 비,즉 변덕 속에서 수많은 비극을 초래한다.따라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평상심(平常心),그리고 일관성인 것이다.
  • 儒林(46)-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제1부 王道 제2장 己卯士禍 김정의 지적은 정확하였다. 날이 새어 문초담당관이었던 대신들로부터 간밤에 술이 취해 만용을 부린 조광조의 행태를 전해들은 중종은 불과 같이 노하였다.이 분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것이어서 실제로 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을 건드린 것과 같은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비교적 조광조에 호의적이었던 이장곤과 홍숙이 공초를 올려 ‘저들이 모두 통곡하며 성명(聖明)만을 믿고 나랏일을 위하고자 하였을 뿐이지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는데,신들도 이 말을 듣고 대단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만약에 이들을 죄로 다스리자 하신다면 만세에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하고 변론을 하였으나 불과 같이 화가 난 중종은 전혀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영의정 정광필도 홀로 빈청을 지킨 채 눈물을 흘리며 거듭 탄원하였다. “이들이 무슨 죄가 있었겠습니까.승지들은 그저 바른 의론을 따랐을 뿐이며,조광조 일파도 추호의 사심없이 다만 옛사람의 책을 읽고 지치(至治)를 주장하여 간혹 과격한 일이 있었을지언정 그렇게 큰 영향을 남긴 것도 아닙니다.태평성대에 선비를 죽이는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이는 역사를 더럽힐 것입니다.또한 이자(李)는 국가에 크게 이바지할 인물이오니 아무쪼록 의금부로 하여금 죄가 있고 없음을 분명히 가려 처결토록 하소서.” 그러나 김정의 변론도 정광필의 읍소도 불과 같이 화가 난 중종의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였다. 중종은 단호하게 교지를 내렸는데 그 내용이 ‘중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광조가 처음부터 나랏일을 그르치지는 않았을지언정 조정에서 이같이 처리키로 하였으니 이들을 처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중종은 최후의 교지를 내린다. “조광조·김식·김구는 각각 참형에 처하고,윤자임·기준·박세희·박훈은 장 일백대에 유(流:유배형) 삼천리로 정하도록 하라.” 마침내 조광조에게 참형이 확정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잠깐,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결정될지 모르고 마지막 순간에도 술에 취해 만용을 부렸던 조광조에게 ‘조광조가 역린을 건드리고 있다.’고 비평한 노대신 김정의 말을 잠깐 음미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용은 상상 속에 나오는 신령한 동물로,춘분에는 하늘로 올라가고 추분에는 연못에 잠기는 상서로운 짐승인데,예로부터 제왕에 비유되어 왔다.이렇듯 용은 권력의 상징인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누구나 권력을 좇아 그것을 쟁취하려 하는데,분명히 말해서 권력,즉 용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다만 군왕이 용과 같은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처한 자리에서 비롯된다.무릇 권력이라 함은 사람이 가진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그가 처한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권력을 갖게 되면 그것이 자신만이 지닌 뛰어난 능력 때문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권력이 인간들에게 마(魔)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군주,뛰어난 리더는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라도 그 권력에 취하지 아니하고,그 권력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자리를 떠나면 곧 사라져 버릴 신기루임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마치 날카로운 칼끝에 발라져 있는 꿀과 같은 것이어서 함부로 핥으려다가는 베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중종도 어리석어 권력의 속성을 깨닫지 못하였고,조광조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변덕을 조심하지 않았다. 변덕은 권력이 가진 속성 중의 하나이다.용이 구름과 빗속에서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듯 권력 또한 그것을 가진 자의 구름과 비,즉 변덕 속에서 수많은 비극을 초래한다.따라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은 평상심(平常心),그리고 일관성인 것이다.˝
  • 3년6개월만에 공직복귀 이헌재 경제부총리

    상하이(上海) 출신으로 올해 61세.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3년여간 금융·기업구조조정을 맡으면서 ‘미스터 구조조정’이란 별칭을 얻었다. 경기고가 배출한 수재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법대 수석합격,행정고시 수석합격 등으로 학창시절이나 재무부 근무 당시 돋보이는 존재였다.69년 재무부 이재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뒤 당시 김용환 장관의 눈에 띄어 금융정책과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79년 율산사태에 연루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는 불운을 겪었으나,외환위기 직후 또다시 김 전 장관의 도움으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으로 발탁됐다.이후 금감위원장을 거쳐 재경부장관에 올랐으나 8개월여 만에 낙마했다가 이번에 다시 부총리로 돌아왔다.취임 전에는 3조원대의 ‘이헌재펀드’를 모아 우리금융 인수에 나서겠다고 밝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공직에서 물러난 뒤 재계 인사들을 많이 사귀어 ‘이헌재사단’이란 얘기를 들을 정도로 요로에 지인들이 많다. 난세의 풍운아로 불리는 이헌재.3년6개월 만에 ‘부총리’라는 직함을 더해 경제수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의 복귀는 그의 존재를 재확인시키는 계기가 됐고,시장은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다.시장은 ‘놀이터가 아닌 전쟁터’의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다. 하지만 위엄 뒤에 감춰진 늦깎이 공직자로서 이 부총리의 웃지 못할 애환도 적지 않다.취임 이후 한달 가까이 이곳저곳 다니면서 진솔하게 털어놓은 신변잡기는 ‘인간 이헌재’의 또다른 면을 읽게 해준다. ●“체력달려 폭탄주 양주양도 5부로 줄여” 이 부총리는 폭탄주 애호가로 소문 나 있다.그런 그가 최근 이런 말을 했다.“폭탄주를 제조할 때 양주의 양을 7부에서 5부로 바꿨어.5부가 맛이 더 있더라니까.” 그리고는 이내 속내를 드러냈다.“그전에는 친구들과 엄청나게 마셔댔지.아주 친한 친구인 심재륜 전 고검장과는 한번 만나면 12∼13잔씩 폭탄주를 돌리곤 했지.그런데 요즘은 서로가 자존심 때문에 전화를 잘 안해.만나면 먹어야 하고,그러면 다음날 몸이 부대껴서 힘들어.체력이 떨어진 거지.” 1주일에 한 두번 집무실에 들를 정도로 바깥 행사에 파묻혀 있는 그의 달라진 생활패턴은 이것뿐이 아니다. 공직생활을 그만둔 뒤부터 늦게 일어나는 오랜 습관이 골칫거리다. 나이 탓이 크다고 한다.전에는 느긋하게 일어나 부부가 함께 골프연습을 하거나 산책을 하곤 했는데,지금은 출근 시간이 일러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저녁형 인간에서 아침형 인간으로 바뀌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아.” 얼마 전부터 좋아하는 바둑도 끊었다.바둑에 한번 몰입하면 밥상을 물리고 밤을 새우는 체질인데,요즘은 그렇게 할 여유도 체력도 안된다는 것. “밤을 새우고 나면 눈물이 막 나고,얼굴도 퉁퉁 붓고 해서…” 골프도 특기에서 취미로 바뀌었다.‘주4파(주 4일 골프를 치는 것)’는 옛날 얘기.“골프를 너무 좋아해 한때는 주당 4일씩 연속 5∼6주를 다닌 적도 있었는데….그런데 골프는 계속 치니까 오히려 스코어가 더 안 좋아지더라고.”라며 못내 옛날(?)을 그리워하는 신세가 됐다. 그러나 주말에는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족이나 친구 등과 함께 라운드에 나서 샷의 묘미를 즐긴다.핸디는 한 자릿수를 넘기지 않는다. ●시장은 놀이터 아닌 전쟁터 시장을 향해 툭툭 던지는 애매모호한 화법도 요즘은 아낀다.직설 화법에 가깝다는 소리를 듣는다.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틈날 때마다 “경제는 심리”라고 외친다.말을 함부로 해서 시장의 혼선을 초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역력해 보인다. 요즘은 귀를 열어놓고 산다는 말도 곧잘 한다.현안에 대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듣고 있고 호흡을 같이 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그래서 그의 독특한 화법인 선문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애매모호한 언급으로 시장에 메시지를 던지는 미국의 루빈 전 재무장관이나 그린스펀 FRB(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의 선문답식 화법을 무척 좋아하고 자주 거론한다.‘한국의 그린스펀’으로 평가받기를 원하는 기대감의 일단이 아닌가 한다.지금은 아니지만,조만간 선문답식 화법을 다시 시작하려 할 것이란 관측이 그래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인사스타일에는 자신만의 원칙을 일관되게 유지하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친다.극도로 말을 자제하면서도 “나는 어디를 가나 늘 새로운 사람을 발굴해왔어.옛날 사람을 다시 쓰지 않고 새 사람을 찾지.그래서 인력풀도 많은 편이지.”라고 말한다.‘이헌재사람들’로 불리는 인맥들이 최근 이런저런 곳에 불려가기도 하고 거론되기도 하지만,정작 자신이 다시 데려다 쓴 적은 거의 없다고 했다.“지금의 재경부 내에서도 몇 명을 발굴해낼 테니 두고 보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재경부 한 간부가 “그가 취임 이전에 이미 국장급 이상 간부 등의 업무능력 등에 대해 정확히 파악한 것 같다.”고 말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로 들린다.그래서 이 부총리한테 국실별로 업무보고를 할 때 긴장하지 않는 간부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장황하게 현황 설명부터 시작하려 들면 급브레이크가 걸린다.”똥개 훈련시키지 말고 본론부터 얘기해!” 타고난 관료로 불릴 만큼 공직사회에서 성공했다는 얘기를 듣지만,그는 스스로 공직생활이 체질적으로 딱 맞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그린스펀’도 결혼안한 자식걱정 낭인 기질을 타고났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한다.학창 시절부터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어기적어기적 걸어다녔다고 자신의 기이한 행동을 자랑삼아 얘기한다. 스스로 낭인임을 은근히 즐기는 편이다.한국 서예계의 대표작가인 원로 대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이 예전에 ‘평생자상무관락’(平生自想無冠樂·평생 명예나 돈따위를 생각하지 말고 즐거움만 생각하고 살아라.)이라고 써준 글귀대로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재정금융심의관을 마지막으로 79년 재무부를 떠날 때까지 무려 사표를 여덟번이나 썼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그의 자신감 넘치는 낭인 기질의 단면이다. 하지만 천하의 ‘이헌재’도 자식 얘기가 나오면 꼬리를 내린다.“(아직 미혼인 아들·딸을 의식한 듯)짓궂게 남의 약점을 건드린다.”며 더 이상 언급을 피한다.그러면서도 강한 애착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부모님이 중경등지로 피란생활을 할 때 나를 상해에서 낳았는데,당시로서는 상당한 거금을 주고 유명한 작명가한테서 헌재라는 이름을 지어왔어.이름값을 하고 살 거라는 작명가의 덕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큰 걱정 않고 살고 있는 것 같아.부모가 나에 대한 욕심이 적지 않았던 것 같아.자기 자식에 대한 욕심이 없는 부모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주병철기자 bc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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