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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일본 영화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일본 영화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

    영화 ‘마지막 황제’ 등의 음악을 작곡한 일본 영화음악의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가 지난달 28일 세상을 떠났다고 교도통신이 2일에야 전했다. 향년 71. 그는 영화 ‘마지막 황제’(1987)의 음악을 작곡하며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상 작곡상을 받았다. 또 2017년에는 한국 영화 ‘남한산성’의 음악 감독을 맡았으며 이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4년에 중인두암 진단을 받은 바 있던 사카모토는 2020년 6월 직장암을 선고받은 후 투병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온라인 콘서트 ‘류이치 사카모토: 플레잉 더 피아노 2022(Ryuichi Sakamoto: Playing the Piano 2022)’를 공개했다. 60분 남짓의 이 온라인 공연은 실시간 스트리밍이 아니었다. 사카모토가 망설임 없이 “일본에서 가장 좋은 스튜디오”라고 장담하는 도쿄 시부야의 NHK 방송센터 509 스튜디오에서 하루에 몇 곡씩 정성들인 연주를 미리 영상으로 녹화했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편집했다. 오는 14일 이 온라인 콘서트 등의 내용이 담긴 다큐가 공개될 예정이다. 일흔한 번째 생일이던 지난 1월 17일엔 6년 만의 오리지널 앨범 ‘12’를 공개했다. 투병생활 속에서 일기를 쓰듯 제작한 음악의 스케치 중에서 12곡을 골라 한 장의 앨범으로 정리했다. 오는 6월 일본에서 개봉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새 영화 ‘괴물’ 음악이 유작이 됐다.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난 고인은 도쿄예술대학 재학 중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일렉트로닉 선두주자로 평가되는‘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출신이다. 1978년 ‘사우전드 나이브스(Thousand Knives)’를 발매하며 데뷔했고, 같은 해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결성에 참여했다. 사카모토와 호소노 하루오미(76), 다카하시 유키히로(高橋幸宏·1952~2023)가 결성한 팀인데 지난 1월 14일 다카하시가 세상을 먼저 떠났다. 사카모토는 당시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별다른 멘트 없이 회색 이미지를 올려 고인을 추모했다. 1983년 팀이 해체된 이후 오히려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음악과 함께 출연한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혁신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전향적인 자세로 전 세계 높은 평가를 받았다. 2013년 야마구치 정보예술센터(YCAM) 10주년 사업의 예술감독, 2014년 삿포로 국제예술제 2014의 객원 감독으로 활약했다. 2018년 서울의 복합문화공간 ‘피크닉(piknic)에서 여러 사운드 설치 작품을 전시한 ‘라이프, 라이프(Life, Life)’ 전(展)을 선보였다. 재작년 3월엔 중국 베이징 무무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 ‘시잉 사운드 히어링 타임(Seeing Sound Hearing Time)’ 전을 열었다. 2014년 7월 인두암에 걸린 뒤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2015년 야마다 요지 감독의 작품 ‘어머니와 살면’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작품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로 영화음악 제작에로 복귀했다. 2017년 봄에는 8년 만의 솔로 앨범 ‘async’를, 같은 해 말부터 도쿄 ICC에서 설치미술 ‘이스 유어 타임(IS YOUR TIME)’을 발표했다. 2019년엔 차이밍량 감독의 ‘유어 페이스(YOUR FACE)’로 제21회 타이베이 영화상 음악상을 수상했다.지난해 직장암으로 전이된 사실을 공개하고 수술을 받았는데 일본 문예지 ‘신초(新潮)’에 암투병 에세이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보게 될까’를 연재했다. 사카모토는 ‘신초’ 2월호에 실리는 이 에세이 최종회에서 ‘방탄소년단’ 멤버 슈가(민윤기)와 만난 일화를 적었는데 “음악에 진지한 청년”이라고 슈가를 기억했다. 재작년 6월에는 네덜란드 예술제에서 아티스트 다카타니 시로와 공동 제작한 신작 극장 작품 ‘타임(TIME)’을 발표했다. 지난해 7월엔 쉬안화(許鞍華·허안화) 감독의 작품 ‘제일로향’으로 홍콩금상장영화제 작곡상을 받았다. 평소 환경이나 평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음악은 상처를 치유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2001년 9·11 테러,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등 세계가 큰 아픔을 겪을 때마다 음악에 이를 녹이고 위로해 왔다. 2017년 정규음반 ‘ASYNC’ 수록곡인 ‘안다타(andata)’는 동일본 대지진 때 침수된 피아노로 연주해 큰 여운을 전했다. 2015년 투병 중에도 일본 전쟁법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 또 삼림 보전단체 ‘모어 트리스(more trees)’를 창설했다. 최근엔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설립해 재난 지역 어린이들의 음악활동을 지원해 왔다. 한국과도 인연이 많아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과 교류했다. 특히 1984년 공개된 ‘올스타 비디오(All Star Video)’는 영상과 음악을 결합한 멀티미디어 작품으로, 두 사람의 협업작이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으로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오른 황동혁 감독의 영화 ‘남한산성’(2017)의 음악 감독도 맡았다. 2018년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았다. 국내 애니메이션 ‘안녕, 티라노: 영원히, 함께’(2019)도 맡았다. 재일교포 이상일 감독의 영화 ‘분노’(2016) OST도 작업했다. 몇 차례 내한공연을 열었고, 슈가 외에도 정재일 음악감독, 작곡가 겸 프로듀서 유희열, 밴드 ‘못’ 멤버 겸 싱어송라이터 이이언 등 국내에서도 사카모토를 존경하는 음악인들이 많다. 지난해 6월 자신의 작품 ‘아쿠아(Aqua)’를 유희열이 표절했다는 의혹에 휩싸였을 때 유희열을 두둔한 일은 유명하다.
  • ‘마지막 황제’ 작곡 日영화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 별세

    ‘마지막 황제’ 작곡 日영화음악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 별세

    영화 ‘마지막 황제’ 등의 음악을 작곡한 일본의 유명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가 지난달 28일 별세했다고 교도통신이 2일 보도했다. 71세. 1952년 도쿄에서 태어난 사카모토는 1978년 데뷔한 3인조 그룹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YMO)’로 활동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는 선구적인 전자음악과 일렉트로 힙합에서 록 음악, 오페라를 비롯한 클래식까지 경계를 확장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음악가로 평가받았다. 사카모토는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를 계기로 영화음악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마지막 황제’(1986)로 1987년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작곡상을 받았다. ‘마지막 사랑’(1990)과 ‘리틀 붓다’(1993)로 골든글로브와 영국영화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영화음악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2014년 중인두암이라는 첫 번째 암 진단을 받았으나 복귀작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로 골든글로브상, 그래미상 후보에 선정됐다. 2017년에는 한국 영화 ‘남한산성’의 음악 감독을 맡았으며 2018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2020년 6월 직장암을 다시 선고받은 후 투병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지난해 12월 11일에는 직장암 투병의 고통을 승화한 온라인 피아노 독주회를 통해 전 세계 팬을 만나기도 했다. 사카모토는 당시 약 1시간 동안의 공연에서 ‘마지막 황제’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더 라스트 엠퍼러’ (The Last Emperor)를 비롯해 영화 ‘리틀 붓다’의 OST, ‘랙 오브 러브’(Lack of Love), ‘아쿠아’(Aqua) 등 13곡을 연주했다. 이 공연은 지난 2020년 암 선고 이후 치료를 받는 사카모토의 건강을 고려해 미리 녹화된 연주 영상을 편집해 송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공연은 한국을 포함해 일본, 미국, 영국, 독일 등 20여 개 국가로 송출됐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71세 생일인 올해 1월 17일에는 6년 만에 새 앨범 ‘12’를 발표했다. 이 앨범은 투병 중 만든 음악 스케치 가운데 12곡을 골라 정리한 작품집이다. 앨범 아트워크는 사카모토와 친분이 있는 그림 ‘점으로부터’로 유명한 이우환 화백이 그린 드로잉을 사용했다. 고인은 생전에 음악뿐 아니라 환경, 평화 문제 등 사회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예술가로도 유명했다. 지난달 별세한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와 함께 원전 재가동에 반대하며 탈원전을 주장하는 사회 운동에 참여했다. 또 삼림 보전단체 ‘모어 트리즈’(more trees)와 일본 지진 피해 지역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도호쿠 유스 오케스트라’를 설립하기도 했다. 방탄소년단(BTS) 멤버 슈가는 이날 사카모토의 별세 소식에 자신의 소셜네크워크서비스(SNS)에 “선생님 머나먼 여행 평안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추모의 메시지를 적었다.
  • ‘불멸의 아이콘’ 장궈룽…20주기에도 꺼지지 않는 추모 열기

    ‘불멸의 아이콘’ 장궈룽…20주기에도 꺼지지 않는 추모 열기

    홍콩 출신의 세계적 배우이자 가수였던 장궈룽(장국영·1956∼2003)이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난지 20년이 흘렀다. 중화권에서 그에 대한 추모 열기가 뜨겁게 달아 올랐다. 2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만우절이던 2003년 4월 1일 장궈룽이 세상을 떠난 홍콩 센트럴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앞에는 지난달 말부터 각국에서 모여든 추모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건물 주변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팬들이 놓고 간 백합과 장미로 가득하다. 지난해 말 ‘위드 코로나’ 전환으로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해진 중국 본토인들도 상당수 호텔을 찾아와 그를 애도하고 있다. 샤틴에 위치한 홍콩문화박물관에서는 ‘레슬리(장궈룽의 영어 이름), 당신이 너무 그리워’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그가 부른 음반과 애장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그의 콘서트 가운데 최고 무대로 평가받는 1997년 ‘과월97연창회’(跨越97演唱會) 때 신었던 빨간색 하이힐도 처음 공개됐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서도 그가 출연한 ‘패왕별희’(1993), ‘천녀유혼’(1987) 등 대표작이 재개봉되고 있다. 장궈룽은 양복 사업을 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영국 리즈대에서 섬유직물관리학을 공부했다. 1977년 홍콩에서 열린 ‘아시아가요제’에서 2위로 입상하며 연예계에 데뷔했고, 이듬해 영화에도 출연해 배우 활동도 시작했다. 1987년 ‘영웅본색’(1987)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같은 해 왕쭈셴(왕조현)과 함께 출연한 ‘천녀유혼’까지 히트하면서 아시아 최고 배우로 등극했다. 그의 실제 모습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듣는 ‘아비정전’(1990)의 ‘아비’, 경극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패왕별희’(1993)의 ‘데이’, 외로운 동성애자의 삶을 다룬 ‘해피투게더’(1997)의 ‘보영’ 등을 맡아 세계 영화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장궈룽이 돌연 만우절에 사망하면서 각종 음모론이 쏟아졌다. 경찰은 “평소 그가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며 자살로 결론 냈지만, 지금도 중화권에서는 “당시 홍콩 영화계를 장악한 삼합회(중화권 범죄집단)의 미움을 사 타살됐다”, “그의 유산을 노린 애인에게 살해됐다”, “외국에서 신분을 세탁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등 다양한 가설이 나오고 있다. 특이한 점은 그가 떠난지 20년이 지났음에도 ‘1020’세대 팬층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다른 배우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현상이다. 미국의 유명 배우 제임스 딘(1931~1955)처럼 장궈룽 역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요절이 역설적으로 그를 ‘영원한 젊음의 아이콘’으로 남게 했고, 전통적 남성성에 균열을 낸 인생사 또한 MZ세대 사이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재조명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11살에 27살과 키스신, 엄마도 안 도와줘” 아역 출신 성착취 폭로…美 잇단 잡음

    “11살에 27살과 키스신, 엄마도 안 도와줘” 아역 출신 성착취 폭로…美 잇단 잡음

    배우 브룩 쉴즈(57)가 데뷔작 ‘프리티 베이비’를 아동 성 학대로 규정했다. 쉴즈는 1980~90년대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와 함께 ‘세계 3대 미녀’로 불리며 할리우드를 풍미했던 배우다. 국내에서는 ‘책받침 여신’으로 통했다. 22일(현지시간) ABC뉴스는 브룩 쉴즈의 생애를 담은 다큐멘터리 ‘프리티 베이비: 브룩 쉴즈’ 예고편을 공개했다. 예고편에서 쉴즈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성 상품화에 시달렸다며 눈물을 쏟았다.쉴즈는 1978년 데뷔작인 영화 ‘프리티 베이비’에서 아동 성 노동자 역할을 맡았다. 당시 11세였던 쉴즈는 노출 연기에 동원된 것은 물론, 27세 성인배우였던 키스 캐러딘과 키스신도 촬영했다. 다큐 예고편에서 쉴즈는 그때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엄마가 키스신 촬영을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모두 가짜’라며 안심시켰다고 밝혔다. 아동 성착취의 피해자였지만 쉴즈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한동안 본인을 탓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할리우드에 만연한 성 상품화를 지적했다. 그는 다큐 예고편에서 1987년 프린스턴대학 졸업 직후 할리우드 거물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털어놨다. 저녁 식사 후 호텔방에서 피해를 봤다는 그는 “영화 캐스팅 얘기를 하는 줄 알았다. 싸우지 못했다. 그냥 얼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성폭행을 당하고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배우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았다”고 호소했다. 쉴즈는 당시를 떠올리는 것이 아직도 힘들다고 말하며 자신의 딸인 로완(19)과 그리어(16)에게는 같은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관련 내용은 오는 4월 3일 미국 OTT 훌루를 통해 공개될 ‘프리티 베이비: 브룩 쉴즈’에서 더 자세히 언급될 걸로 보인다. 다큐는 쉴즈가 두 딸에게 사건에 대해 고백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딸 로완은 어머니의 영화를 절대 보지 않을 것이라며 “이것은 아동 포르노“라고 지적했다. 쉴즈는 앞서 한 팟캐스트에 1980년작 ‘블루 라군’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크리스토퍼 앳킨스와 함께 출연해서도 노출신과 열악했던 근무 환경에 대해서 폭로한 바 있다. 촬영 당시 각각 14세, 18세로 미성년자였던 쉴즈와 앳킨스는 영화에서 상당한 노출을 감수해야 했다. 또 산호초 섬에서 감염과 궤양에 시달리면서도 촬영에 동원됐다. 쉴즈는 ”폐렴으로 아플 때 출산 장면을 촬영했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기침을 해댔더니 정말 훌륭한 연기라고 칭찬해줬다“고 토로했다. 심지어 감독과 쉴즈의 엄마는 두 사람에게 실제 연인이 되길 강요했다.앳킨스는 ”감독도 쉴즈의 엄마도 우리가 서로 사랑에 빠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쉴즈의 엄마는 영화에 출연하기 전에 며칠 간 집에서 함께 지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고 회상했다. 쉴즈의 엄마이자 매니저였던 테리 쉴즈는 남편과 이혼 후 딸 쉴즈를 돈벌이에 이용했다. 생후 11개월 때 딸을 광고 모델로 출연시켰고, 10세 때는 잡지 플레이보이에 들어갈 딸의 누드 사진 촬영을 시도했다. 쉴즈가 11세 때 프리티 베이비에 아동 성 노동자로 출연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할리우드의 성착취를 폭로한 건 쉴즈뿐만이 아니다. 지난 1월 배우 올리비아 핫세와 레너드 위팅은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68) 촬영 당시 성학대를 당했다며 제작사 파라마운트 픽처스를 상대로 5억 달러(약 6394억원)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은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아동 성범죄 공소시효를 한시적으로 없애면서 이뤄졌다. 두 배우는 故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15, 16세였던 자신들을 노출신에 동원했다고 주장했다. 감독이 피부색과 같은 속옷을 입히겠다던 애초 약속과 달리, 촬영 당일 전라(全裸)로 촬영에 투입했다고 했다. 감독은 맨몸이 노출되지 않도록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았고, 결국 완성된 영화에 핫세의 가슴과 위팅의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난 걸로 알려졌다.
  • 이재명 “조작 이미지 내부공격 멈춰달라” 개딸에 호소

    이재명 “조작 이미지 내부공격 멈춰달라” 개딸에 호소

    ‘비명계’ 이원욱, 사무실·자택 인근 집회에“악마 필요했나…개딸에 분노조차 아까워”이재명 “조작 이미지 사용은 금도 넘어…당 소속 의원에 대한 명예훼손 조치할 것”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5일 자신의 강성 지지층인 이른바 ‘개딸’(개혁의 딸)들이 ‘비명계’(비이재명계) 이원욱 의원에 대한 규탄집회를 여는 것을 두고 “조작된 이미지까지 동원한 내부공격을 멈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조작된 이미지까지 동원한 내부공격, 민주당원이라면 이재명의 동지라면 멈추고 제지해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어제 우리 당 이원욱 의원 지역사무실 앞에서 집회가 있었다고 한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1인 피켓시위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며 “설마 진짜 우리 지지자들일까, 민주당원들일까 의심이 든다. 민주당원이라면, 이재명의 지지자라면 즉시 중단하고 그 힘으로 역사부정 반민생 세력과 싸워 달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악마화’를 위해 조작된 이미지까지 사용해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은 금도를 넘는 행동”이라며 “저 역시 조작된 사실로 수많은 공격을 당해봤기에 그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일인지 저나 여러분 모두 잘 알지 않나. 생각이 다르다고 욕설과 모욕, 공격적인 행동을 하면 적대감만 쌓일 뿐이다. 이재명 지지자를 자처하며 그런 일을 벌이면 이재명의 입장이 더 난처해지는 건 상식이다”라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그러면서 “이미 허위사실을 적시해 민주당 인사들을 비방하거나 명예를 훼손한 인터넷 게시물에 대해 강력 대응을 밝힌 바 있다”며 “마찬가지로 조작된 이미지로 민주당 소속 의원의 명예를 훼손한 행위에 대해서도 당 차원에서 철저히 조사한 후 단호히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표의 이같은 호소는 개딸들이 전날 이 의원의 동탄 지역사무실과 자택 인근에서 벌인 집회를 겨낭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어제(24일) 또다시 지역사무실 앞에서 집회가 있었다. 지역사무실과 제가 살고있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1인 피켓 시위도 계속되고 있다”며 현장 사진과 자신을 비난하는 온라인 유인물 이미지 등을 올렸다. 그는 “이원욱을 향한 시위, 조롱, 욕설… 좋다. ‘심판해야 할 내부의 적’이라고 생각하시니 없애기 위해 행동하셔야죠”라며 “하지만 조작을 하지는 말아야겠죠”라고 말했다. 이어 “집회를 공지했던 앱카드에 게시된 제 사진이 악한 이미지로 조작됐다. 본래 원본사진의 입, 눈 등을 교묘히 바꿔서 이상한 얼굴로 조작했다”며 “일부 유튜버들이 악마의 편집으로 악의적 영상을 유포하더니 이제 사진까지도 조작한다. 악마가 필요했나 보다”라고 비판했다. 이 의원이 올린 유인물 이미지 속에는 원본 사진에 비해 눈꼬리와 입꼬리 등이 뾰족하게 올라간 모습으로 바뀐 사진이 담겼다. 이 이원은 원본 사진을 함께 올리며 조작 증거로 제시했다. 이 의원은 이어 “이제 개딸들에 대한 분노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밀려온다”고 직격하면서 “어제 이 대표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영화 ‘1987’에 나오는 개구진 그러나 정말 사랑스러운 딸’이니까요”라며 개딸들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 이 대표를 에둘러 비판하기도 했다.
  • “30년전 성폭행 당해…살아남은 게 기적” 고백한 톱 여배우

    “30년전 성폭행 당해…살아남은 게 기적” 고백한 톱 여배우

    세계적 유명 배우 브룩 쉴즈(57)가 성폭행 당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16일(한국시간) 미국 연예매체 페이지 식스 등 외신에 따르면 할리우드 배우 브룩 쉴즈는 곧 방송 예정인 훌루 다큐멘터리 시리즈 ‘프리티 베이비’를 통해 30년 전 할리우드의 유력한 간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성폭행 사건은 쉴즈가 1987년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일어났다. 할리우드 간부와 저녁 식사를 한 후 호텔 방에서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했다. 쉴즈는 피플과 인터뷰에서 “영화 캐스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싸우지 못했다. 그냥 얼어있었다”고심경을 밝혔다.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친한 친구에게만 털어놨다”며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겠지만 내가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다. 그 경험을 극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전했다. 한편 세기의 미모로 칭송받으며 원조 미녀스타로 일컬어졌던 브룩 쉴즈는 1980년~90년대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와 함께 ‘세계 3대 미녀’로 불렸다. 2001년 배우 크리스 헨치와 결혼해 슬하에 로완(19)와 그리어(16) 두 딸을 두고 있다.
  • 원로 연극배우 권병길씨 77세로 타계, 사회운동에도 열심이었던

    원로 연극배우 권병길씨 77세로 타계, 사회운동에도 열심이었던

    경기 문화의전당 이사장을 맡기도 했던 원로 연극배우 권병길(본명 권병근)씨가 전날 밤 늦게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유족이 12일 전했다. 향년 77. 1946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8년 차범석 작 ‘불모지’에 출연하면서 극단 신협에 입단하고, 명동예술극장에서 ‘윤지경전’ 무대에 오른 뒤 극단 자유에 입단해 지금까지 몸담아 왔다. 2020년에 경기 문화의전당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그가 출연한 연극은 ‘거꾸로 사는 세상’, ‘따라지의 향연’, ‘돈키호테’, ‘바람 부는 대로 꽃은 피고’, ‘햄릿’, ‘대머리 여가수’, ‘별의 노래’ 등 130여편에 이르렀다. 드라마 ‘무풍지대’와 ‘해피투게더’, ‘보이스’ 등에도 얼굴을 내밀었다. 영화는 장산곶매의 16㎜ 장편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 강우석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 사람들’(2005)과 ‘돈의 맛’(2012),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등 30여 편에 출연했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시골 노의사 역할이었다. 작품들을 보면 알겠지만 진보 진영에, 통일과 사회운동에 열심이었다. 대한민국연극제 신인상, 동아연극상, 서울연극제 연기상, 영희연극상, 최우수예술가상, 평론가가 뽑은 최우수 배우 등을 수상했다.일본 동경·나고야·오사카·히로시마·오키나와·삿포로·아사히카와, 프랑스 렌느 연극제·낭시 세계연극제·에피날·메츠·칼카존 세계연극제, 독일 본 샤우슈빌 극장, 스페인 시저스 연극제·바로셀로나 연극제·말라가 연극제, 튀니지 하마마트 연극제 등에서 공연했다. 1987년 전두환 정권 말기 4·13 호헌 조치에 반대하는 연극인 시국선언을 주도했다. 스크린쿼터폐지 반대운동에도 열심이었다. 박근혜 탄핵 촛불 시위와 최근 윤석열 정권 규탄 집회, 지난해 국립극단 자리에 민간자본으로 복합문화시설을 조성하는 정부 방안에 반대하는 연극인들의 시위 등에 함께 했다. 지난 1일에는 검찰독재민생파탄전쟁위기를 막기 위한 비상시국회의 추진위원회 주최로 종로 탑골공원에서 열린 대한국민 주권선언 선포식에 참여했고, 그 뒤 파주 임진각으로 향하는 ‘민족 통일을 염원하는 원탁회의’를 주창하고 걸어서 평화누리까지 향했는데, 이것이 고인의 마지막 발걸음이 되고 말았다. 고인은 지난해 ‘배우 권병길, 빛을 따라간 소년’을 펴내 격동의 시기를 건너온 연극배우의 꿈과 좌절, 기쁨, 한 극단의 집단 창조에 참여해 온 소중한 경험 등 생생한 이야기들을 글로 남겼다. 연극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인생 행로를 이렇게 분명히 정리하고 떠난 사람이 많지 않아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빈소는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발인은 14일 오전 7시, 장지는 양재동 서울추모공원이다.
  • 브루스 윌리스의 아내 “치매 남편 촬영하며 소리지르지 말라”

    브루스 윌리스의 아내 “치매 남편 촬영하며 소리지르지 말라”

    미국 연예매체들은 영화 ‘다이하드’로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 브루스 윌리스(68)가 지난 2일(현지시간) 지인들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에 커피를 마시러 나온 모습을 담은 사진을 공개했다. 지난달 치매 진단을 받은 사실이 알려진 윌리스가 처음으로 많은 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사진들이 공개된 뒤 파파라치와 유튜버 등이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려 하고 여러 질문을 쏟아내 치매 환자인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윌리스의 아내 에마 헤밍 윌리스(45)는 인스타그램에 올린 동영상에서 “남편의 외출 모습을 독점적으로 찍으려는 사람들에게 얘기한다”며 “(내 남편과) 거리를 두라”고 호소했다. “특히 동영상을 찍는 사람들은 내 남편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등을 물으면서 크게 소리 지르지 마라. 제발 그렇게 하지 말라”며 “우리 가족이나 그와 외출하는 사람 누구든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에마는 “치매 환자를 돌보는 다른 간병인이나 전문가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이 있다면 공유해 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앞서 지난달 16일 윌리스 가족은 그가 전두측두엽 치매(FTD) 진단을 받았다고 밝혔다. 지난해 3월 윌리스가 실어증에 따른 인지 능력 저하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한 뒤 거의 일년 만에 나온 발표였다. 이 치매는 뇌 전두엽과 측두엽의 신경세포 손상으로 발생하며, 환자의 행동과 성격에 영향을 미치고 언어 능력 장애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FTD협회는 이 치매 판정을 받은 환자의 남은 수명이 평균 7∼13년이라고 설명한다. 모델 출신인 에마 헤밍은 윌리스와 2009년 결혼해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다. 1987년 결혼했다가 2000년 이혼한 전 부인 데미 무어(61)도 치매 진단 소식을 알리며 많은 이들의 응원을 부탁해 이혼 후에도 좋은 친구로 지내는 모습을 연출했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1960년대 핀업 걸로 유명했던 라켈 웰치 83세에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1960년대 핀업 걸로 유명했던 라켈 웰치 83세에

    미국 여배우 겸 모델 라켈 웰치가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매니저는 1960년대 국제적인 섹스 심벌의 한 명으로 여겨졌던 고인이 15일(현지시간) 아침 잠깐의 투병 끝에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1966년 영화 ‘공룡 100만년’(One Million Years BC)에 비키니를 걸친 동굴 여인으로 연기하던 모습은 팬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다. 1974년 ‘삼총사’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할리우드의 여성 액션 영웅의 원조였다는 얘기를 듣는다. 1940년 본명 조 라퀠 테하다로 태어난 그녀는 10대 미인선발대회에서 우승했고 나중에 지역 방송 기상 캐스터로 활약하기도 했다.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단역 배우로 활동하며 이혼한 두 자녀의 엄마로서 나이먼 마커스의 의류가게에서 모델 일을 했고, 칵테일 웨이트레스 일도 했다. 1964년에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간 뒤 영화 ‘A House Is Not A Home’과 엘비스 프레슬리가 주연한 뮤지컬 ‘Roustabout’에 카메오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기회를 붙잡았다. 2년 뒤 공상과학 영화 ‘Fantastic Voyage’와 판타지 영화 ‘공룡 100만년’에 연달아 출연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영화 ‘쇼생크 탈출’ 주인공 앤디가 탈옥할 때 마지막으로 감방에 남긴 핀업 포스터가 바로 고인의 ‘공룡 100만년’ 핀업 포스터였다. 웰치의 ‘공룡 100만년’ 대사는 몇 줄 되지 않았지만 사슴 살갗을 닮은 투피스 비키니를 입은 그녀 모습을 담은 선전용 스틸 사진이 시대를 풍미하는 핀업 걸로 만들어줬다. 그녀는 오랜동안 자신의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에 늘 불만을 토로했는데 한 번은 “섹스 심벌이 될 만하지도 않았고, 내 본성으로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사실은 아마도 난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글래머답게, 또 운좋게 오해받은 인물이 됐다”고 덧붙이기도 했다.웰치는 회곡록 ‘Raquel: Beyond the Cleavage’에서 어린 시절에 대해 입을 열고, 할리우드에서 싱글 맘으로 초기 경력을 닦던 일, 자신의 나이에 대해 거짓말할 줄 몰랐던 이유 등을 털어놓았다. 반세기 영화계에 몸담았지만 30여편의 작품과 50개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을 뿐이다. 프랭크 시내트라의 1968년 영화 ‘Lady in Cement’에서 첫 사랑 역할, 1970년 ‘Myra Breckenridge’에서의 트랜스젠더 여성 역할, 1987년 TV 드라마 ‘죽을 권리(Right to Die)’에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됐던 연기 등이 손꼽힌다. 말년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가발, 보석, 스킨케어 컬렉션에댜 맥 코스메틱스 화장품 라인을 판매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데이먼 웰치와 딸 겸 여배우 라탄 태니 웰치를 남겼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 ‘강수연 추모위’ 발족… 명예위원장 임권택 감독

    ‘강수연 추모위’ 발족… 명예위원장 임권택 감독

    배우 강수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사업 추진위원회(추모위)가 발족했다. 고인의 1주기를 맞아 구성된 추모위에는 동생 강수경씨를 비롯해 임권택 명예위원장, 김동호 추진위원장, 박중훈·예지원 부위원장 등 생전에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영화인 28명이 이름을 올렸다. 추모위는 오는 4월 추모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이어 5월에는 ‘강수연, 영화롭게 오랫동안’ 상영전을 연다. 5월 6일 영상자료원, 7~9일 메가박스 성수에서 진행한다. 개막작 ‘씨받이’(19 86)를 비롯해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송어’(1999), ‘달빛 길어올리기’(2010), ‘주리’(2013), ‘정이’(2023)까지 모두 11편을 나눠 상영한다. ‘원조 월드스타’로 불린 강수연은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 치료를 받다 세상을 떠났다.
  • 강수연 추모위원회 발족...명예위원장에 임권택 감독

    강수연 추모위원회 발족...명예위원장에 임권택 감독

    한국영화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배우 고 강수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추모사업 추진위원회(추모위)가 발족했다. 고인의 1주기를 맞아 구성한 추모위에는 고인의 동생 강수경 씨를 비롯해 임권택 명예위원장, 김동호 추진위원장, 박중훈·예지원 부위원장 등 생전에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영화인 28명이 이름을 올렸다. 추모위는 오는 4월 추모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이어 5월에는 ‘강수연, 영화롭게 오랫동안’ 상연전을 연다. 5월 6일 영상자료원, 7~9일 메가박스 성수에서 진행한다. 개막작으로 ‘씨받이’(1986)와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송어’(1999), ‘달빛 길어올리기’(2010), ‘주리’(2013), ‘정이’(2023)까지 모두 11편을 나눠 상영한다. ‘원조 월드스타’로 불린 고 강수연은 지난해 5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 치료를 받다 세상을 떠났다.
  • 서귀포 남원 출신 배우 문희경, 서귀포 홍보대사로

    서귀포 남원 출신 배우 문희경, 서귀포 홍보대사로

    서귀포 남원 출신 배우 문희경이 서귀포시 홍보대사로 임명됐다. 서귀포시(시장 이종우)는 지난 9일 시청 접견실에서 서귀포 출신 문희경 배우를 서귀포시 홍보대사로 임명했다고 10일 밝혔다. 이날 문 씨는 서귀포시청 농협출장소에서 고향사랑기부금 100만 원을 기탁헀다. 문 씨는 서귀포에 대한 고향사랑을 다양한 방면에서 꾸준하게 실천해 왔다. 2011년부터 제주엔터테인먼트 모임을 통해 참여하게 된 서귀포시 청소년 대중문화 캠프에서 연기지도 재능기부를 하며 후배들의 꿈과 열정을 키워주고 있다. 제주엔터테인먼트는 제주 출신의 배우와 감독, 제작자, 음악인 등 대중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만든 모임이다. 2022년 ‘서귀포예술의전당 개관 6주년’ 기념공연, 2021년 서귀포예술단 ‘송년의 밤 행사’ 협연 무대 등 고향 서귀포에서의 공연 활동도 꾸준히 펼치고 있다. 문 씨는 1987년 MBC강변가요제 대상으로 데뷔해 현재 TV 안방극장의 스타로 자리 잡기까지, 뮤지컬, 연극, 영화, 오디션 예능 프로그램을 넘나들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드라마 아이리스(KBS, 2008), 자이언트(SBS, 2010), 신사와 아가씨(KBS, 2021), 뮤지컬 레베카(2019~2020), 미스터트롯2(2023) 등이 있다. 이날 위촉장을 받은 문 씨는 “서귀포여고 재학 시절 늘 노래 부르는 게 좋아서 연예인을 꿈꿔왔는데 꿈을 이루고 더 나아가 내 고향 서귀포의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감회가 새롭다”며 “30여 년의 활동 기간 동안 힘들고 외로울 때 늘 나를 보듬어 주었던 따뜻한 고향 서귀포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한편 서귀포시 홍보대사의 임기는 내년 6월 30일까지이며, 고향사랑기부제 홍보, 서귀포시 지역축제와 문화예술 행사 홍보, 문화콘텐츠 발굴 자문, 도립 서귀포예술단 협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칠 예정이다.
  • 해외 저작권료 받은 황동혁 감독 “한달 20만원으로 버티던 때였다면…”

    해외 저작권료 받은 황동혁 감독 “한달 20만원으로 버티던 때였다면…”

    “첫 작품이 흥행이 잘 안 돼 빚을 내거나 한 달에 20만원으로 살던 시기에 이런 제도가 있었으면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지난해 넷플릭스 공전의 히트작 ‘오징어 게임’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이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저작권법 개정안 지지 선언회에 영상으로 참여, 스페인 넷플릭스 등에서 수집된 해외 저작권료를 전달받고 “창작자가 먹고살 만해야 ‘제2의 기생충’, ‘제2의 오징어 게임’이 나올 수 있는 것”이란 소감을 밝혔다. 차기작 준비 때문에 영상으로 소감을 전한 황 감독은 국회에 발의된 저작권법 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이날 지지 선언회는 법안을 발의한 국민의힘 성일종·황보승희 의원, 더불어민주당 유정주 의원, 한국영화감독조합이 공동 주최했다. 개정안의 취지는 영화·드라마 작가와 감독 등 영상 창작자도 저작물에서 발생한 수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행법으로는 계약서에 별도의 특약이 없으면 창작자는 제작자에게 저작권 대부분을 넘긴 것으로 추정돼, 작품 상영 후 분배금을 받거나 해외에서 징수된 저작보상금을 받을 수 없다. 프랑스와 독일, 멕시코 등 영상물 저작 보상금을 징수하는 나라는 베른 협약에 따라 한국 감독들에게도 지급할 보상금을 적립해두고 있지만, 호혜 평등의 원칙에 따라 국내에서 수익이 송금되지 않기 때문에 국외에서 송금이 유입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정주 의원은 “한국 법 제도가 영상저작권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아, 매년 40여개 국가에서 보상금 수백억원이 적립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우리 저작권법 개정안을 지지하는 해외 저작권 관리단체 DAMA(스페인)와 DAC(아르헨티나)가 자국에서 수집된 금액을 먼저 한국에 보내기로 하면서 황 감독을 포함한 영화·드라마 감독 500여명이 보상금을 나눠 받게 됐다.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스페인에서 수집된 보상금은 약 2억 426만원, 2021년부터 2022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수집된 보상금은 6400여만원이다. 액수는 작지만 상징적 의미가 작지 않다. 황 감독은 “계약서를 쓸 때 보면 항상 제작사에 ‘모든 권리를 넘긴다’고 돼 있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불문율인 줄 알았다”며 “국가 차원에서 (권리 보장을) 해야 모든 해당 주체에 법령이 제대로 전달, 실행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 “어느 나라나 요즈음 창작자가 안 나오는 게 제일 문제”라며, “창작자들이 먹고살 만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좋은 인력이 몰려와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 눈앞만 보지 말고 생태계를 살린다는 마음으로 접근해 달라”고 호소했다. 함께 정산을 받은 임순례 감독은 “10, 20년 전에 할리우드 배우나 감독들은 영화가 재방, 삼방될 때마다 재방송료를 받아 평생 먹고 산다는 말을 듣고 정말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며 “빠르게 변하는 영상제작 환경에서 1987년에 만든 저작권법이 아직도 적용되고 있는 점에 대해 ‘너무 소홀하게 하고 있었구나’ 싶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의 윤제균 공동대표는 “(조합 소속) 500명 영화감독의 평균 연봉이 1800만원이고, 시나리오 작가는 평균 1000만원이다. 한 달에 1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케이 콘텐츠 강국’을 이뤄가고 있는 것”이라며 “시대 변화에 맞게 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이날 오후 저작권법 개정에 관한 공청회를 열어 각계 의견을 청취했다. 창작자 측은 ‘을’의 권리를 보호하고 창작 의지를 북돋아 케이 콘텐츠를 계속 활성화하려면 공정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반대로 플랫폼 사업자 측에서는 헌법상 ‘계약의 자유’가 침해될 소지가 있고 궁극적으로는 국내 콘텐츠 산업의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반박했다. 김병인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 대표는 “과거 드라마 작가의 경우도 방송사로부터 받는 고료는 첫 방송에 관한 것이었고, 재방·삼방·사방을 하는 경우 각각 정해진 요율에 따라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한 관행이었다”며 “그런데 재방 개념이 없는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비즈니스 관행이 완전히 파괴됐다. 시장에서 저작권을 사용한 만큼 사용료를 줘야 한다는 정신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에도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노동환 ㈜콘텐츠웨이브 정책협력팀장은 “국내 미디어 사업자들이 적자 구조로 어려운 상황인데 추가보상 청구권이 도입될 경우 국내 미디어 사업자가 해외로 (창작자들에게) 지불해야 할 비용의 수준이 높아진다”며 “글로벌 OTT는 보상제도가 없는 국가의 저작권법을 준거법으로 활용해 오히려 국내 OTT가 역차별받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해외 사례와 관련해서도 그는 “보상권 제도를 도입한 국가는 일부에 불과하다”며 “규제가 아닌 사적 계약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이어 “유럽의회의 디지털 단일시장 저작권 지침에 따라 유럽연합 소속 27개국 모두 저작권법을 개정하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보상권이 적용된다”며 “미국의 경우 작가 조합의 파업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은 지 벌써 70년이 됐고, 지난해에만 넷플릭스가 작가들에게 지급한 보상이 1000억원을 넘는다”고 반박했다.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이규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보상 주체가) 영상물의 최종 공급자라는 표현에는 복제 등의 방식이 포함되므로 심지어 항공사, 비디오숍, PC방 등도 포함될 수 있다”며 “계약 당사자가 아닌 제3자에게 받는 구조가 되기 때문에 헌법상 영업의 자유 및 재산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고 과잉금지 원칙에 반할 수 있다”고 신중론을 폈다. 반면 이해완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적 자치 원칙은 존중돼야 하지만, 임대차나 노동계약 등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계약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례는 많다”며 “열악한 위치의 창작자를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예외를 만드는 것은 충분히 합헌적”이란 의견을 제시했다.
  • ‘은막 여왕’ 윤정희 영화처럼 살다 별이 되다

    ‘은막 여왕’ 윤정희 영화처럼 살다 별이 되다

    프랑스 파리에서 79세를 일기로 작고한 영원한 은막의 스타 윤정희의 장례가 오는 30일(현지시간) 파리 근교의 한 성당에서 치러진다. 24일 영화계 인사와 유족 측에 따르면 장례식은 가까운 친인척과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진행될 예정이다. 고인의 유해는 화장돼 근처 묘지에 안치된다. 이창동 감독의 ‘시’(2010)를 촬영할 때부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으로 알려진 윤정희는 10여년간 알츠하이머병과 싸우다 지난 19일 오후 5시 눈을 감았다. 배우자인 피아니스트 백건우(77)는 20일 국내 영화계 인사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아내이자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아 온 배우 윤정희가 딸 진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생전 진희 엄마의 뜻에 따라 장례는 파리에서 가족과 함께 조용하게 치를 예정”이라면서 “한평생 영화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며 살아온 배우 윤정희를 오래도록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영화계는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한다며 국내 분향소를 차릴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유족의 뜻을 꺾지 못했다. 본명이 손미자인 고인은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나 광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조선대 영문학과 재학 중 합동영화사 신인 배우 오디션에 뽑혀 1967년 ‘청춘극장’으로 데뷔해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청룡영화제 인기여우상을 받으며 일약 스타로 발돋움했다. 활동한 작품이 280편에 이를 정도로 한국 영화에 빼놓을 수 없는 배우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신궁’(1979), ‘위기의 여자’(1987), ‘만무방’(1994) 등이 있다. 고인은 1971년 중앙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2년 뒤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연기를 하면서도 늘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배우로 유명했다. 파리에서 만난 백건우와 1976년 결혼해 외동딸 진희(46)를 뒀다. 부부가 늘 손을 꼭 잡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했다. 고인은 몬트리올영화제 심사위원(1995), 제12회 뭄바이영화제 심사위원(2010), 제17회 디나르영화제 심사위원·청룡영화상 심사위원장(2006) 등을 지냈다. 2011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셰를 수훈하는 등 유럽에서도 인정받았다. 2018년 제3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공로영화인상을 받았다. 윤정희가 별세하면서 고인의 여동생이 제기해 한국 대법원에 계류돼 있던 성년후견인 소송은 법적 판단 없이 종결될 것으로 전망된다.
  • ‘빈센조’ 출연 나철(36) 설 첫날 돌연 사망…애도 물결

    ‘빈센조’ 출연 나철(36) 설 첫날 돌연 사망…애도 물결

    드라마 ‘빈센조’, ‘D.P.’, ‘악한영웅’ 등에 출연했던 배우 나철이 21일 사망했다. 향년 36세. 나철은 건강 악화로 치료를 받던 중 이날 오전 세상을 떠났다. 2010년 연극 ‘안네의 일기’로 데뷔한 그는 다양한 단편 영화와 독립 영화에 출연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았다. 영화 ‘신과함께-죄와 벌’(2016), ‘1987’(2017), ‘극한직업’(2019)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드라마 ‘비밀의 숲2’(2020), ‘빈센조’(2021), ‘슬기로운 의사생활2’(2021), ‘지리산’(2021),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2022), ‘작은 아씨들’(2022) 등에서도 ‘명품 조연’으로 감초 역할을 해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Over the Top)에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2021)에 출연했으며, 최근에는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 클래스 원(Class 1)’에서 가출 청소년을 범죄에 이용하는 큰형 역할을 맡아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올해 개봉을 앞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나철의 유작이 됐다. 나철은 영화에서 정장남 역을 맡았으며 촬영은 이미 끝냈다. 나철 부고가 전해지자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김고은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통해 ‘최고 멋진 배우 #나철’ ‘최고 멋진 사람 아빠 남편 아들 친구 #나철’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나철의 빈소는 서울 순천향대학교병원 장례식장 5호실에 차려졌다. 발인은 23일 오전 8시 30분이다.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최고의 여배우, 그리고 알츠하이머 윤정희씨 별세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최고의 여배우, 그리고 알츠하이머 윤정희씨 별세

    1960∼80년대 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 씨가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9. 최고의 여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2017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가족끼리 후견인 다툼 등 볼썽 사나운 모습을 연출하는 등 안타까운 말년을 이제야 마치게 됐다. 고인의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77)씨는 20일 오후 공연 담당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제 아내이자 오랜 세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온 배우 윤정희가 2023년 1월 19일 오후 5시(현지시간), 딸 진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백씨는 “생전 진희 엄마의 뜻에 따라 장례는 파리에서 가족과 함께 조용하게 치를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유족들은 평소 고인과 함께 찾던 파리의 한 성당에서 삼일장을 치를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의 유해는 파리 인근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한국 내 분향소 마련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영화계의 한 관계자는 “유족들은 한국에서 고인의 분향소를 차리는 것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입장”이라면서도 “다만 국내 영화계가 고인을 기렸으면 한다는 뜻을 전달한 만큼 좀 더 이야기하며 상황을 지켜볼 예정”이라고 밝혔다.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조선대 영문학과 재학 중 합동영화사 신인배우 오디션에 뽑혀 1967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오디션 경쟁률이 1200대 1이라고 해서 화제가 됐다. 그 해 대종상영화제 신인상, 청룡영화제 인기여우상을 받으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작품 ‘안개’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상도 받았다. 배우로서 활동한 작품이 모두 280편에 이를 정도로 한국영화에 빼놓을 수 없는 여배우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신궁’(1979), ‘위기의 여자’(1987), ‘만무방’(1994) 등이 있다.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배우 활동은 중단했다. 이 작품으로 이듬해 LA비평가협회와 시네마닐라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71년 중앙대 대학원에서 ‘영화사적 측면에서 본 한국 여배우 연구: 1903~1946년을 중심으로’란 논문을 써 국내 최초의 석사 여배우가 됐다. 2년 뒤 프랑스 유학 길에 올라 파리 제3대학에서 영화학 석사학위를 받는 등 늘 연기와 학업을 병행했던 배우로도 유명하다. 유명 피아니스트 백건우(77) 씨를 유학 중에 만나 1976년 결혼하고 잠정 은퇴했다. 결혼 이듬해 딸 진희씨가 태어난 다섯 달 뒤 부부는 납북(拉北) 미수 사건에 휘말렸다. 스위스의 한 부호 연주회 초청을 받고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들어갔다가 납치 일보 직전에 극적으로 빠져 나왔다. 고인은 여러 영화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해 몬트리올영화제 심사위원(1995), 제12회 뭄바이영화제 심사위원(2010), 제17회 디나르영화제 심사위원·청룡영화상 심사위원장(2006) 등을 지냈다. 2011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수훈하는 등 유럽에서도 인정받은 배우다. 2018년 제3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공로영화인상을 받았다. 한편 윤씨의 별세로 국내 대법원에 계류 중이던 윤씨의 성년후견인 소송은 법적 판단 없이 종결될 전망이다. 성년후견이란 장애나 질병, 노령으로 인한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을 위해 법원이 후견인을 선임해 재산 관리나 신상 보호를 지원하는 제도다. 윤씨의 성년후견인은 딸인 바이올리니스트 백진희(46) 씨다. 진희씨는 프랑스 법원에 어머니의 성년후견인 지정을 신청해 승인을 받았고, 2020년에는 국내 법원에도 성년후견 개시 심판을 청구했다. 하지만 윤씨의 동생은 남편 백씨가 사실상 윤씨를 방치했다며 진희씨를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하면 안된다고 주장해 왔다. 1심 법원은 윤씨 동생의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2심까지 진희씨를 성년후견인으로 지정했다. 윤씨 동생이 상고해 대법원에 계류 중이었는데 당사자 사망으로 각하 처리될 전망이다.
  • 윤정희, 알츠하이머 투병 중 별세…향년 79세

    윤정희, 알츠하이머 투병 중 별세…향년 79세

    영화배우 윤정희(본명 손미자)가 1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별세했다. 향년 79세. 영화계에 따르면 알츠하이머병을 앓아오던 윤씨는 이날 오후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1944년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조선대 영문학과 재학 중이던 1966년 신인배우 오디션에 합격, 1967년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했다. 그는 1960년대 문희, 남정희와 함께 여자 영화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며 1960~80년대 30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표작으로는 ‘신궁’(1979), ‘위기의 여자’(1987), ‘만무방’(1994) 등이 있다. 대종상, 백상 예술 대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 유수 영화제에서 무려 7번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고인은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를 마지막으로 사실상 배우로서 활동은 중단했다. 고인은 2017년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은 뒤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 거주해 왔다. 배우자는 유명 피아니스트인 백건우(77)씨다.
  • “따봉” “아버님 댁에 보일러” 추억의 광고 만든 윤석태 감독 별세

    “따봉” “아버님 댁에 보일러” 추억의 광고 만든 윤석태 감독 별세

    “그래,이맛이야”, “따봉!”, “제비 몰러 나간다”,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제품 이름을 선뜻 떠올리지는 못해도 1980년대와 90년대를 살아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귀에 익은 광고 카피를 만든 ‘한국 CF의 신화’, ‘광고계의 산증인’ 윤석태 CF 감독이 전날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9일 전했다. 향년 84. 충북 괴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라벌예대(중앙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1962년부터 기업들의 디자인 현상 공모에 응모해 담배 ‘신탄진’ 디자인을 만들었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듬해 광고 회사인 만보사에 도안과장(크리에이티브 디렉터)으로 입사했다가 1970년 한국코카콜라 CF를 맡아 ‘오직 그것뿐 산뜻한 그 맛’이라는 카피로 알려진 해변 광고로 데뷔했다. 고인은 1976년 킨 사이다로 증언 광고를 처음 만든 것으로도 이름높다. 만보사가 합동통신 광고기획실을 거쳐 오리콤으로 변신하는 내내 줄곧 현장을 지켰다. 1977년 부국장 승진 소식을 듣고 “현장에서 뛰고 싶다”며 고사한 뒤 이듬해 퇴사했다. 1979년 프로덕션 ‘세종문화’를 차려 2000년 7월 한국투자신탁의 ‘소나기편’ 광고를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CF 663편을 제작했다. 2007년 GS칼텍스의 ‘착한 기름 이야기’로 잠깐 복귀했다가 2000∼2010년 경주대 방송언론광고학부 석좌교수로 강단에 섰다. 시청자에게 친숙한 광고는 대부분 세종문화 시절 탄생했다. 배우 김혜자와 15년 동안 제일제당 ‘고향의 맛 다시다’ 광고를 매년 4편 이상 찍었다. 제일제당 제품인지는 몰라도 “그래, 이맛이야”라는 카피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렌지주스 델몬트의 “따봉!”, 솔표 우황청심원의 “제비 몰러 나간다”, 경동보일러의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 배우 한석규가 스님과 함께 담양 대나무숲을 거닐며 읊조리는 SK텔레콤의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등이 모두 유행어가 됐다. 이 밖에 오리온 초코파이 ‘정(情)’ 시리즈, “댕∼!” 소리와 함께 종이 흔들리는 종근당 CF, “럼, 캡틴 큐!” 하면 외눈 선장의 안대가 떨어지는 광고가 고인의 손에서 탄생했다. 고양이, 황소, 닭, 개 등 동물을 출연시킨 CF를 여러 편 찍기도 했다. 인간의 감성과 한국인의 정을 화면에 따뜻하게 담아내는 데 탁월했다. 고인은 자신을 “크리에이터가 아니라 연출자”라고 규정했다. OBS ‘김혜자의 희망을 찾아서’에 출연했을 때 “크리에이터는 아이디어가 전제인데, 새로운 아이디어는 신이 아닌 이상 만들 수 없다”며 “나는 이미 주변에 있는 걸 이것저것 엮어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인 만큼 ‘연출’이라는 말이 훨씬 어울리지 않느냐”고 설명했다. 1987년 한국CF제작사협회(KCU)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맡았고, 1988년 국내 최초로 프랑스 칸 국제광고제에 출품했다. 대한민국 광고대상의 대상만 여섯 차례 수상했는데 1999년 대상과 금상을 모두 받게 되자 “쑥스럽다”며 지방으로 달아난 일도 있었다. 후배들에게 ‘불독’이나 ‘욕쟁이 감독’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스파르타 교육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길러낸 CF 감독만 강창배·김종원·김한수·임인규·조풍연 등 30여명에 이른다. ‘윤석태 TV-CF 작품집 Q-30’(2001), ‘텔레비전 광고 제작’(2012 정상수와 공저), ‘한국의 광고산업과 광고제도’(2020 김봉철 등과 공저), ‘영상광고 감독 윤석태의 Q 뮤지엄 : 보고 느끼고 행하는 이야기’(2021), ‘음메에 메에 : 논픽션 영화제작 시나리오’(2021) 등 저서를 남겼다. 유족은 부인 전치희씨와 사이에 1남 1녀.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 21일 오전 8시 40분. (02) 2258-5977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지난해에도 무대 섰던 제프 벡 갑자기 타계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지난해에도 무대 섰던 제프 벡 갑자기 타계

    지난해 6월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건재함을 과시했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제프 벡이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고인의 트위터 공식 계정에 올라온 성명은 “유족을 대신해 제프 벡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알리며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며 “갑작스럽게 세균성 수막염을 앓은 끝에 어제 평화롭게 잠들었다. 유족은 이런 엄청난 손실을 겪는 동안 사생활을 보호해줄 것을 요청드린다”고 밝혔다. 영국 서리주 월링턴에서 태어난 고인의 본명은 제프리 아놀드 벡이다. 어렸을 때부터 로큰롤 사랑에 빠져 10대 시절 기타를 손수 만들 정도였다. 전설적인 록 밴드 ‘야드버즈’에서 에릭 클랩튼이 떠나자 지미 페이지가 벡을 추천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세 사람이 세계 3대 기타리스트로 불리는 것은 물론이다. 그는 나중에 야드버즈를 떠나 로드 스튜어트 경과 함께 제프 벡 그룹을 결성해 활동했다. 그가 있어 1960년대 로큰롤 음악의 기타 톤이 정립됐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의 영향력은 록을 넘어 헤비메탈, 재즈록, 심지어 펑크 음악에까지 미친다는 평가도 있다. 2009년에 그는 생애 두 번째로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입회했는데 “가능한 한 가장 아픈 사운드를 내는 일을 허락받았기 때문에 하던 대로 연주해 왔다”며 “그것이 지금 얘기의 요점이다. 그렇지 않나? 난 규칙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실제로 모든 노래에 적어도 10번은 규칙을 깨지 않았더라면 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란 소감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스튜어트와 클랩튼, 페이지를 비롯해 그룹 키스의 베이시스트 진 시먼스와 폴 스탠리, 가수 폴 영, 말년의 그와 친해진 할리우드 톱 스타 조니 뎁, 앨리스 쿠퍼, 조 페리, 토미 헨릭센, 믹 재거, 오지 오스번, 브라이언 메이 등이 잇따라 애도의 메시지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렸다. 고인은 음악전문지 록 셀라 인터뷰를 통해 “내가 기타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1956년이었는데 엘비스가 세상을 뜬 해였고 우리가 팝음악에 대해 듣는 모든 것은 기타였다. 그 때 난 매혹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털어놓았다.윔블던 예술대학에 잠깐 몸담았다가 쇼킹록을 했던 ‘Screaming Lord Sutch’와 ‘트라이던츠’에 들어갔다. 그는 야드버즈에 합류한 뒤 ‘아임 어 맨’과 ‘셰이프스 오브 씽스’ 같은 히트곡을 내놓았는데 그의 피드백 주법은 폴 메카트니, 지미 헨드릭스 같은 음악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고인은 BBC 라디오2 인터뷰를 통해 “테크닉은 사고처럼 (우연히) 생긴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2년 가까이 야드버즈와 함께 한 뒤 첫 번째 솔로 싱글 ‘하이 호 실버 라이닝’을 발표했다. 곧바로 제프 벡 밴드로 돌아와 앨범 ‘트루스’(1968)와 ‘Beck-Ola’(1969)를 잇따라 내놓았다. 블루스를 헤비메탈에 접목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밴드 멤버들끼리 미국 투어를 하면서 관계가 나빠져 몸싸움까지 했다. 스튜어트와 베이시스트 로니 우드가 1970년 탈퇴해 ‘스몰 페이시스’(나중에 ‘페이시스’)로 새 팀을 꾸렸고, 벡은 자동차 사고로 다쳐 활동을 중단했다가 회복한 뒤 자신의 밴드 2기를 결성했는데 앨범이 흥행에 실패해 1975년 다시 솔로 활동에 나섰다. 그 해 비틀스 프로듀서 조지 마틴과 함께 작업한 앨범 ‘블로 바이 블로’를 녹음했다. 노래가 없는 연주로만 이뤄진 앨범이었는데 그 뒤로도 죽 그렇게 앨범을 만들었다. 미국 톱10에 들었고 플래티넘 디스크를 수상했다. 이듬해 마틴이 프로듀서로 참여한 ‘와이어드’를 내놓았고, 1980년 닐 로저스를 보컬로 기용해 내놓은 앨범 ‘플래시’로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1987년 믹 재거의 솔로 앨범 ‘프리머티브 쿨’에서 기타를 연주했으며 1990년대 들어선 로저 워터스와 존 본 조비 등과 함께 작업했다. 톰 크루즈 주연 영화 ‘폭풍의 질주’(Days Of Thunder) 음악을 맡은 한스 치머와 함께하기도 했다. 1997년 얀 해머 그룹과 함께 라이브 앨범을 발표했다. 벡은 은퇴를 선언하고 런던 외곽의 별장에 은거하며 3년을 조용히 살았다. 1999년 ‘유 해드 잇 커밍’을 내놓았고 2000년대 들어선 일렉트로닉, 힙합 요소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플랜 B’란 연주곡으로 생애 네 번째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2010년대에도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 등과 어울려 활발하게 순회 공연을 했다. 둘이 함께 앨범을 녹음하자고 계획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배우 뎁과 친해져 지난해 앨범 ‘18’을 발표했다. BBC는 공격성과 신축성을 조화시킨 것이 그의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페이지는 예전에 이런 회고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끊임없이 나아지려고 나아지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떠나자 그저 그런(mere mortals) 밴드가 됐다.” 한편 고인은 2010년, 2014년, 2017년 세 차례 내한 공연으로 한국 팬을 직접 만나는 등 한국 음악인들과도 교류했다. 가수 이승환은 고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며 “누구도 그렇게 연주할 수 없었다. 앞으로도 그 이외에는 그렇게 연주할 수 없을 것”이라며 “편히 영면하소서”라고 기원했다. 작곡가 윤일상도 SNS에 ”수없이 많은 영감을 준 존경하는 뮤지션 제프 벡 선배님의 명복을 빈다“는 글을 올렸다. 그는 ”‘자신의 경쟁자는 자신뿐’이라는 명제를 몸소 실천해 온 최고의 뮤지션이자 기타리스트“라고 덧붙였다. 임진모 대중음악 평론가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그는 일반적인 기타리스트의 상식을 벗어날 정도의 수준 높은 연주를 선보였다“며 ”아주 진한 색깔의 블루스와 재즈까지 폭넓게 구사했던 아티스트“라고 추모했다. 신촌블루스의 기타리스트 이정선은 2010년 벡의 내한 공연을 관람했던 기억을 연합뉴스에 들려줬다. 이정선은 ”외계인 보듯이 봤다. 인간이 아니었다“며 ”죽어라 하고 노력하면 닿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 차원이 아니었던 분“이라고 고인을 기렸다.     .
  •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재일 한국인의 신산함 적나라하게 그린 최양일 감독

    [임병선의 메멘토 모리] 재일 한국인의 신산함 적나라하게 그린 최양일 감독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 ‘피와 뼈’(2004) 등을 통해 재일 한국인들의 슬픔과 한을 그려 온 최양일 감독이 방광암으로 투병하다 73세에 스러졌다. 교도 통신과 닛칸 스포츠 등에 따르면 최 감독은 27일 오전 1시쯤 도쿄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고인이 연출한 ‘피와 뼈’에 주인공 김준평으로 열연하는 등 평소 가까웠던 배우 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도 애도의 뜻을 표했다. 최 감독은 지난 1월 암과 싸우고 있음을 공개했다. 닛칸 스포츠는 그가 2019년에 암 발병을 확인한 뒤 이듬해 4월 수술을 받고 치료를 받았으나 다시 전이됐다고 전했다. 한 때 폐렴에 걸려 치료를 중단했다가 재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작은 2020년 선보인 다큐멘터리 ‘우사쿠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두세 가지 사항’이다. 2004년부터 18년 동안 일본영화감독협회 제8대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일본 영화인으로 탄탄한 입지를 다진 점도 기억할 대목이다. 고인은 1949년 나가노현의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총련계인 조선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종합사진전문학교를 다니다 조명 조수를 구하던 선배에게 이끌려 학교를 중퇴하고 영화계에 입문했다. 거장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1967)에서 조감독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태평양전쟁 직후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주연 남녀 배우가 실제로 성관계를 하고 남자의 성기를 자르는 마지막 장면으로 국제 영화계에 충격을 안겼다.최 감독은 1983년 베니스영화제에 출품된 ‘10층의 모스키토(모기)’로 감독 데뷔했다. 그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다. 빚더미에 몰려 극한에 몰린 경찰관의 모습을 그려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 뒤 ‘언젠가 누군가 살해된’(1984),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1985), ‘검은 드레스의 여자’(1987) 등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고수했다. 1993년 기존과 다른 스타일의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를 통해 스타 감독으로 떠올랐다. 재일교포 작가 양석일의 소설 ‘택시 광조곡’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희비극이다. 재일 한국인을 비롯해 불법 이주민, 일본 노동계급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코미디로 옮겼다. 일본 유력 영화전문지 ‘키네마준보’의 작품상·감독상·각본상 등을 휩쓰는 등 각종 영화제에서 53개의 상을 휩쓸며 각광 받았다. 1998년 개봉 당시 국내에 곧바로 소개된 ‘개, 달리다’는 폭력조직에 정보를 흘리는 형사와 주변 인물들을 다뤄 호평을 받았다. 이 밖에 1960년대 말 일본 학생운동을 배경으로 집단적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 군상을 그려낸 ‘막스의 산’(1995), 코믹한 줄거리의 ‘돼지의 보답’(1999) 등도 연출했다. 2004년 일본에서 개봉한 ‘피와 뼈’는 국내에까지 그의 얼굴을 알린 대표작이다. 이듬해 국내 개봉한 이 작품은 양석일 작가의 소설이 원작이다. 제주에서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거친 세상을 살아간 괴물 같은 인물 김준평의 일대기를 다뤘는데 기타노 다케시가 그 역을 너무나 빼어나게 소화해 화제가 됐다. 짐승 같은 에너지가 꿈틀댄다는 평까지 들었다. 고인은 촬영 현장에서 폭군 스타일이라 심하면 스태프들을 때리기도 했다. 실제로 ‘피와 뼈’의 DVD 서플에도 촬영 도중에 사소한 일로 화가 치민 최 감독이 들고 있던 메가폰을 집어 던지고 조감독을 폭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김준평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억압된 욕망과 한이 주먹질로 발현되는 폭력성이 그의 몸에 내재했던 것이다. 국내에서 ‘수’를 촬영할 때도 최 감독의 전횡을 못 견딘 스태프들이 여러 번 이탈하는 바람에 영화 제작이 중단될 뻔했다.1994년 북한 국적에서 한국 국적으로 바꾸고, 1996년 연세대학교에 유학하면서 한국 근현대 영화사를 연구하고 교류활동을 했다. 이런 노력 덕에 일본영화감독협회 이사장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2006년에는 지진희와 강성연 주연의 ‘수’를 통해 처음 한국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혈육의 복수를 위해 극단으로 치닫는 해결사를 다뤘다. 2009년 닌자 액션극 ‘카무이 외전’까지 모두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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