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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연상의 팜므파탈’ 이미숙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연상의 팜므파탈’ 이미숙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 표지모델편 ] “아직 얼떨떨해요. 대사를 외느라 쩔쩔 매다보면 어느새 녹화가 끝나버려요” 탤런트가 된지 1년도 안돼 일일드라마 <마포나루>의 주인공역을 맡는 행운을 얻은 이미숙은 1979년 5월 선데이서울의 표지모델로 인사를 했다. ‘연기에 소질이 있으니 나가보라’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응모한 것이 덜컥 뽑혔다는 그녀는, 78년 6월 미스롯데 선발대회 인기상을 받고 TBC 탤런트가 되었다. 원래 꿈은 스튜어디스였다고 한다. 79년 영화 <불새>를 통해 화려하게 은막에 데뷔,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다. 84년 <고래사냥>에서는 윤락가에 팔려온 벙어리 처녀역을 맡아 스타 대열에 올랐다. 85년 <뽕>에서 농염한 관능적 연기를 펼치는 팜므파탈로, 86년 <겨울나그네>에선 청순가련한 대학생으로, 그리고 98년 <정사>에선 동생의 약혼자와 금지된 사랑을 나누는 주부로 변신한다. 2003년엔 <스캔들>을 통해 나이가 들수록 더욱 매력적이라는 평을 다시 한번 확인해줬다. 그녀가 오랜 세월 은막의 주인공 자리를 지켜온 것은 바로 이런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폭넓은 연기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스크린의 그녀는 섹시함과 청순함, 그리고 백치미와 지성미가 뒤엉켜 있는 카멜레온이다. <변강쇠>(1986)와 <사노>(1987)를 통해 섹시스타로 떠오른 원미경, <어우동>(1985)의 이보희와 함께 80년대 트로이카 시대를 열면서 ‘에로 여왕’의 자리를 겨루기도 했다. 85년에는 이미숙과 이보희가 <뽕>과 <어우동>으로 연기대결을 펼쳤는데, 이 영화를 통해 이미숙은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주연상을, 이보희는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원미경과는 같은 1960년 4월생으로 미스롯데 선발대회에서도 경쟁을 펼친 전력이 있다. 이미숙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87년 강남의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인 홍성호 박사와 결혼해 연예계를 떠났다. <고래사냥>, <겨울나그네>등 인기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미혼의 톱스타가 이혼남인 성형외과의사와 결혼한다는 소식은 당시 많은 청춘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결혼한 후 아이들을 낳아 기르며 전업주부 생활에 전념하던 그녀는 4년 만인 91년 안방극장에 컴백했다. 그리고 영화 <두 여자의 집> 이후 10년만인 98년 숱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영화 <정사>에 출연하여 연상녀-연하남의 ‘드메 신드롬(Deme Syndrome)’을 확산시켰다. 원숙한 면모를 보여주며 톱스타로 성공한 것과는 달리 간간이 이혼설이 흘러나오던 이미숙 부부는 결혼 20년만인 지난 3월 전격적으로 이혼을 발표해 세상을 다시 깜짝 놀라게 했다. 2001년 아이들을 미국 LA로 유학 보내면서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해 6년간 사실상 별거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 6월 KBS2 <위대한 유산>을 끝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자녀와 함께 지내던 그녀는 올 4월 귀국해 <뜨거운 것이 좋아>를 촬영하고 있다. 10대, 20대, 40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 연애를 그린 작품으로 이미숙은 15년 연하남과 달콤한 사랑을 나누는 싱글맘으로 등장한다. <뜨거운 것이 좋아>는 올 가을 개봉될 예정이다. 표지=통권 546호 (1979년 5월 13일) 박희석 전문위원 dr39306@seoul.co.kr@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20년간 의식구조 어떻게 변했나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20년간 의식구조 어떻게 변했나

    20년 전에는 맑은 공기 등 쾌적한 환경을 주거지 선택에서 가장 먼저 고려한다는 사람이 5명 중 2명꼴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요새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직장과의 거리, 교통 편리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흡연남성의 비율이 20년 새 84%에서 56%로 줄었다. 20년간의 의식구조 변화를 추적해 보기 위해 1987년 서울신문이 당시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설문을 현재의 직장인 823명(남성 526명, 여성 297명)에게 똑같이 물었다. 상당수 문항에서 뚜렷한 변화가 확인됐다. ●생활수준에 대한 만족도 20년 전보다 하락 전체적인 생활수준은 눈부시게 높아졌지만 스스로의 만족도는 87년보다 나빠졌다.‘나는 어느 계층에 속한다고 보느냐.’는 물음에 87년에는 상류 2%, 중상류 18% 등 자기 생활이 평균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이 20%였지만 올해 조사에서는 15%(상류 1%·중상류 14%)로 줄었다. 중류라는 답도 58%에서 54%로 축소됐다. 반면 중하류·하류 등 중간 수준도 안 된다는 사람은 22%에서 31%로 확대됐다. ●집은 크고 직장에서 가까운 곳으로 주거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87년 조사에서는 전체의 40%가 맑은 공기 등 쾌적한 환경을 최고로 쳤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직장과의 거리 26%, 교통편리성 23%, 투자가치와 주변시설 각각 19% 순으로 나타났다.20년 전 1위였던 맑은 공기는 6%에 그쳤다. 집의 투자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은 20년 새 6%에서 19%로 3배가 됐다. 큰 집을 선호하는 경향도 뚜렷했다.40평 이상 되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응답이 87년 5%에서 올해에는 20%로 늘었다. 서울에 대한 선호현상도 심해졌다.87년엔 44%가 서울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올해에는 69%가 이렇게 답했다. 자기 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공간으로 87년에는 거실 55%, 안방 15% 순으로 답이 나왔다. 그러나 올해에는 거실(53%)에 이어 나만의 공간이 30%를 차지했다.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자기 중심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재테크 수단으로는 주식·수익증권이 87년과 올해 각각 39%와 37%로 가장 선호됐다. 하지만 87년 26%로 3위였던 부동산이 올해 2위(35%)로 치고 올라온 반면 과거 2위였던 은행 예·적금(28%)은 24%로 비중이 축소됐다. 계(契)는 4%에서 0.4%로 줄었다. ●건강에 대한 관심 증대 건강관리 방법은 87년의 충분한 휴식 27%, 운동 26%, 건강식품 18%에서 올해에는 운동 31%, 충분한 휴식 19%, 건강식품 11%로 바뀌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11%에서 25%로 늘어난 것은 흥미로운 결과였다.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는 사람은 87년 27%에서 올해 47%로 뛰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남성의 경우 87년 84%에서 올해 56%로 크게 줄었다. 여성 중 담배를 피운다는 응답은 6%였다. 여가생활에서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87년에는 쉬는 날 집안일을 한다는 응답이 25%로 가장 많고 이어 음악·스포츠 관람 19%, 가족과 나들이 18%, 운동과 휴식 각각 14%였으나 올해에는 가족 나들이와 휴식이 각각 28%로 가장 많고 운동(14%)과 음악·스포츠 관람(13%)이 뒤를 이었다.20년 전 가장 많았던 집안일은 4%로 급감했다. 휴가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족과 함께 보낸다는 인식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87년 54%에 이어 올해에도 53%가 ‘휴가는 매년 가족과 함께’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축구·야구 등 좋아하는 스포츠의 종류는 대체로 비슷했으나 스키·스노보드가 87년 2%에서 올해 12%로, 골프가 4%에서 10%로 각각 늘어 스포츠·레저의 고급화 현상을 보여줬다. ●아침밥 안 먹거나 빵 먹는 사람 늘어 아침에 꼬박꼬박 밥을 챙겨먹는다는 사람은 87년 65%에서 올해 40%로 줄었다. 커피·우유·빵 등 서구식으로 해결하는 사람은 13%에서 23%로 늘었고 아예 아침을 거른다는 응답도 19%에서 26%로 증가했다. 옷에 대한 관점도 예쁜 옷에 가장 무게를 두는 쪽으로 변했다.87년엔 옷을 고를 때 디자인과 실용성을 가장 중시한다는 응답이 각각 38%로 공동 1위였지만 올해에는 디자인이 56%로 가장 많고 실용성은 21%로 축소됐다. 색상을 가장 중요하게 본다는 응답은 14%에서 2%로 줄었다. 브랜드를 최우선으로 본다는 응답은 87년에는 거의 없었지만 올해에는 7%를 차지했다. 김효섭 강주리기자 newworld@seoul.co.kr ■당시 사회면 장식했던 뉴스들 신문은 현재를 사는 사람에게는 정보가 되지만 후대 사람들에게는 역사가 된다.1967년 서울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던 뉴스들을 통해 당시 모습을 들여다보자. 나라 전체가 가난했던 67년, 물가에 대한 사회적 감시의 눈초리는 지금보다 매서웠다.‘악덕상혼(商魂)’에 대한 비난의 강도도 거셌다. 연말연시를 틈탄 서비스료 인상이 자주 도마 위에 올랐다.70∼80원짜리 설렁탕을 100원으로,120원짜리 불고기백반을 150원으로,30원짜리 커피를 45원으로 각각 올려받는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그해 초 당국은 업주들의 ‘기습인상’을 엄벌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며칠 뒤 서울 중구 다동 H다방 주인이 커피를 35원으로 5원 비싸게 팔았다가 즉심에 넘겨졌다는 기사가 나왔다. 명절을 맞아 고향에 가는 발길은 예나 지금이나 들뜨고 붐볐다. 그해 설 서울역은 귀성객 5만명이 몰리는 북새통을 이뤘다.13건의 소매치기가 신고됐고 암표상이 기승을 부렸다. 한 시민은 ‘귀성객이 많아 정신없다.’는 이유로 거스름돈 10원을 주지 않은 서울역 매표원을 고발하기도 했다. ‘밤손님’들이 활개치던 그때, 도둑들의 최고 인기품목은 TV였다.TV는 당시 근로자의 반년치 봉급인 10만원을 줘야 살 수 있었다. 선풍기, 미싱 등도 도둑들이 눈독 들이는 물건이었다. 졸업·입학 시즌이면 사진사들이 대목을 잡던 시절, 한 여고 졸업식장에서 좋은 목을 차지하겠다며 사진사들끼리 싸움이 벌여져 한 명이 숨지는 사고가 났다. 과속차량 감지기가 ‘레이다’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당시 경찰은 앞으로 음주운전 측정기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신동헌 감독이 만든 국내 최초의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이 대한극장에서 개봉됐다.‘7인의 여포로’와 ‘춘몽’을 만들었던 유현목 감독은 각각 반공법 위반과 음화(淫畵) 제작 혐의로 기소됐다. 반공법에선 무죄를 받았지만, 여배우를 나체로 출연시킨 데 대해서는 벌금 3만원을 선고받았다. 남북한 극한대치로 군대 생활이 말할 수 없이 살벌했던 당시, 휴가를 나왔던 사병이 목숨을 끊었다. 부대 빙상대회에 쓸 스케이트와 운동복을 자비로 마련해 오라는 지시를 받고 휴가를 나왔다가 이를 구하지 못하자 부대 인사장교에게 “앞으로 사병을 괴롭히지 말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6살 여자아이가 군에 ‘입대(?)’하는 사건도 있었다. 서울 마포의 강변 판잣집에 살던 신모씨가 군대에 간 사이 어머니가 병으로 숨졌다. 부대에선 신씨가 제대할 때까지 동생을 부대에서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신문보도 이후 이들에 대한 독지가들의 지원약속이 이어졌다. 그해 무려 6304명의 공무원이 징계를 받았다. 사유는 근무태만이 가장 많았고 뇌물죄나 공금유용 및 횡령, 직권남용, 공문서 위·변조 등도 있었다. 허위진단서 발급도 기승을 부렸다. 일부 의사들이 교통사고 피해자들에게 허위진단서를 끊어주고 있다는 고발기사가 나가자 경찰이 이에 대한 집중단속을 펴 많은 사람들을 처벌했다. 김효섭기자 newworld@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한국인 40년 변천사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한국인 40년 변천사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초고속 압축성장의 가도를 숨가쁘게 달려온 한국과 한국인. 우리는 어떠한 과정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시대에 적응하며 오늘에 이르렀을까. 그리고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잃었을까.1967년~1987년~현재로 이어지는 40년 성상의 사회와 생활상 변화를 통계, 설문, 이슈분석 등을 통해 알아본다. 지난 40년간을 20년 단위로 끊어 한국과 한국인을 구성하는 각종 통계 및 지표들을 종합, 분석했다. 통계청 등 국가기관 보유통계를 주축으로 민간기관 보유통계들도 일부 인용했다.67년~87년~현재의 통계치 비교를 원칙으로 삼았으나 통계조사가 취약했던 67년의 수치는 없는 것들이 많아 앞뒤로 가까운 시점의 통계를 취했다. 현 시점의 통계는 발표특성상 대부분 2005,2006년치가 쓰였다. ●소득과 지출 67년 도시근로자가 한 달에 버는 돈은 1만 8180원이었다. 정확히 지금의 화폐가치로 환산하기는 어렵지만 올 6월 소비자물가지수가 104.6(2005년=100)으로 67년 4.3의 24배가 됐음을 감안해 얼추 실제 구매력을 계산해 보면 지금의 45만원 수준밖에 안 된다. 87년에는 월 55만 3099원으로 20년 새 명목금액 기준으로 30.4배가 됐다. 지난해에는 344만 3399원으로 다시 20년새 6.2배가 됐다.67년에는 월평균 가계지출이 1만 8670원으로 소득보다 많았다.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많은 ‘적자인생´에 수많은 가장들이 한숨지어야 했던 이유다. 생활패턴의 변화 등으로 소비지출 구성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85년에는 식료품비와 주거비의 비중이 42.5%에 달했지만 2005년에는 29.8%로 줄었다. 대신에 교육비 비중이 7.8%에서 11.8%로, 교통비가 0.4%에서 8.1%로, 통신비가 1.9%에서 6.4%로 급상승했다. ●진학과 교육환경 초등학교 취학률은 87년 97.2%, 지난해 98.8%로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87년 고등학생 취학률은 연합고사에서 떨어지면 중학교→고등학교 진학을 못했기 때문에 65.3%에 그쳤다. 또래들 3명 중 1명은 고등학교에 다니지 못했다는 얘기다. 지난해 고등학교 취학률은 93.1%였다. 고등학교→대학교 진학률은 같은 기간 36.7%에서 82.1%로 급등했다. 학력고사를 통해 고교생 3명 중 1명 정도만 대학 문턱을 넘을 수 있었던 87년에 비해 대학 들어가기가 얼마나 쉬워졌는지 알수 있다. 하지만 ‘명문대´에 대한 집착은 여전해서 입시지옥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87년에는 초등학교 한 반에서 평균 42.6명이 수업을 받았다. 중학교는 57.1명, 고등학교는 56.8명이었다. 이는 전국 평균치로 서울 등 대도시 과밀학급 사정은 이보다 훨씬 심각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초등학교 30.9명, 중학교 35.3명, 고등학교 33.7명으로 각각 72.5%,61.8%,59.3%로 줄었다. ●인구구조와 수명 남성들 수명은 지난 40년간 무려 15년 6개월 가량이 늘었다.67년 한국 남성들은 평균적으로 환갑 정도에 생을 마감했다. 당시 평균수명이 고작 59.7세였다. 그러나 87년에는 65.8세로 20년 만에 6년이 연장됐고 2005년에는 75.1세로 다시 9년 넘게 늘었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많이 수명이 연장됐다.67년 64.1세에서 87년 74.0세로,2005년에는 다시 81.9세가 되면서 40년동안 얼추 18년이 늘었다. 남녀간 수명차이는 67년 5.6세에서 87년 8.3세로 확대됐다가 2005년에는 6.8세로 다소 좁혀졌다. 60∼65년에는 여성 한 명이 낳는 아기의 수가 평균 5.99명(합계출산율)이나 됐다. 그러나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60년대)‘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둘도 많다´(70년대) 등 가족계획 표어가 말해주는 강력한 산아제한 정책으로 87년에 이미 1.55명으로 급락한다. 지난해에는 세계 최저수준인 1.13명이었다. 가족 수도 급감해 평균 가구원이 66년 5.49명에서 2005년 2.9명으로 줄었다. 이러다 보니 생산가능인구(15∼64세) 100명이 부양해야 하는 14세 이하 인구(유소년 부양인구비)는 66년 81.8명에서 지난해에는 25.9명으로 줄었다. 국가의 미래 생산능력에 그만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는 얘기다. 역으로 생산가능인구가 부양해야 할 65세 이상 인구(노년 부양인구비)는 70년 5.7명에서 지난해 13.2명으로 증가했다. 67년에는 전체 남한인구 3013만명의 정중앙에 위치하는 나이(중위연령)가 18.3세로 고등학생 연령이었다. 이것이 87년(4162만명) 25.4세로 뛰더니 지난해(4830만명)에는 35.4세로 40년 동안 2배 수준이 됐다. 65년과 87년에는 각각 인구 1000명 중 18명(9쌍)이 한해 동안 결혼을 해 새 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2005년에는 13명(6.5쌍)에 그쳤다. 반면 1000명당 이혼은 67년 0.3건에서 2005년 2.6건으로 9배가 됐다. 재혼은 87년 1만 6845건에서 2005년 4만 6400건으로 20년 만에 3배가 됐다. 남성 초혼연령은 통계가 처음 잡힌 90년만 해도 27.8세였으나 2005년에는 30.9세로 세 살 이상 늦어졌다. 여성도 같은 기간 24.8세에서 27.7세로 역시 세 살가량이 늘었다. 평균 이혼연령은 같은 기간 남성은 36.8세에서 42.1세, 여성은 32.7세에서 38.6세로 늦어졌다. 첫 아이를 낳을 때 여성들의 평균연령도 25.3세에서 29.1세가 됐다. 85년에는 65세 이상 인구의 사망원인으로 남녀 모두 뇌혈관질환(주로 뇌졸중)이 1위였다. 그러나 2005년에는 남녀 모두 암이 1위였다. ●주거와 문화 주택 보급률은 85년 71.7%에서 지난해 107.1%로 상승했다. 하지만 투기와 선호지역 편중 등으로 부동산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자동차 등록대수는 올 5월 현재 1615만 6000대로 87년의 161만 1000대에 비해 20년 새 딱 10배가 됐다. 가구당 자가용 승용차 보유대수는 0.05대에서 지금은 0.9대로 늘었다. 상수도 보급률은 67년 24.7%에서 87년 71.0%,2005년 90.7%로 상승했다. 67년 극장에서 상영된 한국영화는 185편이고 외국영화는 85편이었으나 지난해에는 한국영화 108편, 외국영화 237편으로 역전됐다. 김태균 강주리기자 windsea@seoul.co.kr
  •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안방극장의 여왕’ 한혜숙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안방극장의 여왕’ 한혜숙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 표지모델편 ⑫] “요즘 같으면 시집이나 가버렸으면 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남자가 있어야 가죠. 일단 나타나줘야 마음을 정해보는 것 아닌가요?” 78년 12월,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슬픔은 이제 그만>의 개봉을 앞둔 스물일곱 살 한혜숙이 선데이서울의 표지를 장식한 기사에서 밝힌 말이다. 쉰여섯 살(1951년 8월 20일생)인 지금 그녀는 여전히 덕수궁 돌담길을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을 남자를 기다리는, 소녀 같은 소박한 꿈을 갖고 있는 독신이다. 한혜숙은 덕성여고를 졸업하던 70년 MBC 탤런트 2기로 김자옥, 박원숙 등과 함께 연예계에 첫 발을 디뎠다. MBC 탤런트로 연기생활을 시작했지만 71년 KBS 청소년 드라마 <꿈나무>의 주연급 탤런트 현상공모에서 여고생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면서 화려한 조명을 받게 된다. 지금은 영화감독이 된 하명중과 사랑하는 연인 역으로 출연하여 단번에 스타로 발돋움한 것이다. 이후 74년 국민홍보용 드라마인 KBS <꽃피는 팔도강산>을 통해 안방극장의 트로이카로 자리 잡았다. 1남 6녀를 둔 김희갑, 황정순 부부가 분가해서 지방에 사는 자녀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경제개발에 따라 달라진 생활모습을 간접적으로 조명하는 내용이다. 막내딸로 대한항공 스튜어디스인 한혜숙은, 인생 수업차 신분을 숨기고 속초에서 물지게를 지고 있는 재벌2세 민지환과 짝을 이뤄 출연한다. 70년대의 한혜숙은 꼬리가 아홉 달린 무시무시한 구미호로, 80년대의 그녀는 <토지>(1987)의 최서희로 사람들의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다. 77년에 시작된 한국 공포물의 고전이랄 수 있는 KBS <전설의 고향>에서 제1호 구미호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잠든 아기 옆에서 남편은 새끼를 꼬고 아내는 바느질하던 단란한 가정의 안방. 남편은 아내가 구미호인줄도 모르고, 일정기간동안 입 밖에 내지 않기로 약정했음을 잊었는지 구미호를 만났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얼굴빛이 점차 변해가는 아내, 마침내 구미호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순간 아내는 구미호로 변하고 조금만 더 있었으면 인간이 될 수 있었다며 원통해하며 남편을 죽이려 한다. 그 순간 잠자던 아기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들리고 구미호는 차마 남편을 죽이지 못하고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게 인간의 정이로구나”라고 내뱉고는 아기를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당시 TV를 봤던 시청자들은 무섭게 변해가는 구미호의 얼굴에 소름이 돋았던 이 장면을 떨쳐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한혜숙이 처음 구미호 역을 맡은 이후 여자 연기자들 사이에 구미호 배역을 따내려 경쟁이 치열했단다. 한혜숙, 김미숙, 선우은숙 등 구미호로 출연했던 연기자들이 스타덤에 올랐기 때문인데 급기야 ‘구미호 역할을 맡으면 여우혼이 붙어서 반드시 스타가 된다’는 소문까지 생겨났단다. 70년대 영화계에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가 있었다면 TV 탤런트 트로이카로는 한혜숙, 김자옥, 이효춘이라고 할 만큼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다퉜다. 한혜숙은 KBS 드라마 <노다지>로 87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 87년 KBS 대하드라마 ‘토지’로 한국방송대상 TV연기자상 등을 휩쓴 지 19년만인 지난해 <하늘이시여> (2005.9.10~2006.7.2)로 SBS 연기대상에서 드디어 대상을 수상했다. 낳은 뒤 이별해야 했던 딸과 기른 아들을 결혼시킨다는 비현실적인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40%가 넘는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갔던 까닭은 한혜숙의 가슴 절절한 母情 연기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시집은 물론 애도 낳아보지 못한 한혜숙이 어찌 그렇게 애틋한 엄마 역할을 잘 해내는지 찜질방 등 아줌마들이 모인 곳마다 온통 그 얘기뿐이었다고 한다. <하늘이시여>를 끝낸 그녀는 요즘 최인호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영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촬영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36년 전 청춘스타로 <꿈나무>에서 호흡을 맞췄던 배우 하명중이 16년만에 감독으로 다시 복귀하는 작품으로, 옛 인연 때문에 출연료도 거부하고 주연을 맡게 된 것이다. 감독과 주연으로 다시 만나 호흡을 맞춘 이 영화는 올 가을 개봉 예정이다. 5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당당하고 아름다운 그녀. 성공한 탤런트로 모든 연기자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그녀는 그러나 여자로선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다섯 공주중 맏딸로 태어나 서른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초등학생에서 대학생까지 여동생 넷을 보살피느라 연애할 틈이 없이 어느덧 독신으로 남게 됐다. 연인과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걷는 그녀를 볼 날을 기대해 본다. 물론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표지=통권 524호 (1978년 12월 3일) 박희석 전문위원 dr39306@seoul.co.kr
  • [다시 보는 선데이서울] ‘80년대 옹녀’ 원미경

    [다시 보는 선데이서울] ‘80년대 옹녀’ 원미경

    [다시보는 선데이서울 - 표지모델편 ⑪] 그녀를 TV에서만 접한 세대에겐 뜻밖이겠지만, 80년대의 원미경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대근과 함께 주연한 영화 <변강쇠>(1986)에서 ‘옹녀’이다. 한번 걸려든 남자는 죽게 되고 마는 색녀인 ‘옹녀’는 20대 중반 원미경의 농염했던 이미지를 남성들의 뇌리에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1960년 4월 24일 생으로 서울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8년 미스롯데에 뽑혔다. 이어 TBC 공채탤런트 20기로 연예계에 등장, 선데이서울의 표지에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78년은 TV드라마 <청춘의 덫>이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언론윤리위의 경고를 받고 중도에 막을 내리게 되었고, 작가 김수현은 이를 영화로 만들 계획을 짜고 있던 때였다. 원미경은 바로 이 영화 <청춘의 덫>(1979)에 캐스팅돼 데뷔했다. 남자주인공 동우(한진희)가 출세를 위해 윤희(유지인)를 버리고 선택하는 여자 영주 역을 맡아 열연한 <청춘의 덫>은 79년 8월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20만 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동원했다. 19살의 무명 신인배우에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 원미경은 그해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받고 배우와 탤런트로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변강쇠>(1986) 시리즈와 <사노>(1987)를 통해 섹시스타로 떠올라 <뽕>(1986)의 이미숙, <어우동>(1984)의 이보희와 함께 80년대 트로이카 시대를 열면서 ‘에로 여왕’의 자리를 겨루기도 했다. 특히 이미숙과 원미경은 같은 1960년 4월생으로 78년 미스롯데 선발대회에서부터 자웅을 겨룬 전력이 있다. 토속 에로물을 통한 성적 판타지로 80년대 남성들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던 이들은 이제 안방극장의 아줌마로 변신했다. 원미경은 2000년 MBC 드라마 <아줌마>로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아줌마 열풍’을 몰고 왔다. 재력과 학력을 내세우는 시댁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며 가정부 같이 사는 아줌마, 그러나 보란 듯이 바람피우며 둘러대는 시간강사 남편과 이혼하고 당당하게 홀로서는 아줌마의 모습을 보여줬다. 가부장사회를 향한 코믹 분투기를 통해 아줌마들의 속을 후련하게 풀어준 것이다. 이후 본격적으로 안방극장에 아줌마 홀로서기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가부장적인 남성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2002년 MBC 드라마 <고백>을 끝으로 연예계에서 모습을 감춘 그녀는 남편 이창순 PD와 아들, 두 딸과 함께 미국에 체류 중이다. 내년에 대학에 진학하는 큰딸의 뒷바라지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표지=통권 521호 (1978년 11월 12일) 박희석 전문위원 dr39306@seoul.co.kr
  • [동영상] 인터넷화제 오른 ‘로스웰 UFO 사건’은 무엇?

    [동영상] 인터넷화제 오른 ‘로스웰 UFO 사건’은 무엇?

    역사상 가장 유명한 UFO사건 중 하나인 ‘로스웰 사건’이 당시 공보업무를 맡았던 한 장교의 ‘외계인은 실재했다’는 유언으로 다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로스웰 사건은 1947년 미국 공군이 워싱턴주 인근 상공에서 미확인 비행물체를 목격했다는 한 조종사의 보고를 받으면서 시작됐다. 당시 비행 기술로 설명할 수 없는 비행물체를 목격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미국 공군은 “로스웰 공군 기지 인근에서 미확인 비행접시 잔해를 수거해 정밀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그러나 하루만에 미확인 비행물체의 정체가 ‘기상 관측용 풍선’이라고 정정하면서 의혹을 일으켰다. 기상 관측용 풍선의 잔해라는 것을 밝히는데 ‘정밀 조사’가 필요했겠냐는 소문이었다. 최초 발견자로 알려진 로스웰의 한 목장주인이 외계인으로 보이는 시체 4구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의혹에 불을 붙였다. 이후 1987년 6월 영국의 UFO전문가 티모시 굿이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MJ-12’라는 암호명으로 극비리에 ‘로스웰 UFO’를 조사한 뒤 은폐했다.”고 주장하며 다시 세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또 1995년 9년 8월에는 영국의 영화인 레이 산틸리가 로스웰 사건 당시 외계인 해부 장면이라며 낡은 필름을 공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로스웰 사건에 대한 의혹이 계속해서 제기되자 미군 당국은 지난 1994년 “로스웰 UFO 및 외계인 사체에 대한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라고 모든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사진 = 사건 당시 ‘로스웰 데일리 레코드’ 보도 지면 (위키피디아) 나우뉴스 뉴스팀@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홍콩 반환 10년 현장을 가다] (중) 정체성 혼란 겪는 홍콩인들

    [홍콩 반환 10년 현장을 가다] (중) 정체성 혼란 겪는 홍콩인들

    TV 카메라 앞에서 울먹이는 외국인, 그는 홍콩 디즈니월드의 총책임자이다. 중국 국민들에 대해 사과를 하는 중이었다. 그는 ‘디즈니월드는 꿈이 아닌 실망의 동산이 됐다.’는 한 부모의 편지를 읽어내려 가다 감정을 가누지 못했다. 2006년 춘제(春節·설) 때의 일이다. 전년도에 개장한 홍콩 디즈니월드는 쏟아지는 행락객 앞에 어찌할 줄 몰랐다. 철문을 굳게 잠그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줄서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울먹이는 아이들, 분통을 터뜨리는 부모, 격렬하게 항의하는 손님들…. 달리 할 말도 없었다.“우리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만 되뇌일 뿐이었다. 이를 본 홍콩인들은 만감이 교차한다. 몇년전부터 홍콩 경제를 회복세로 되돌린 주요 요인 중의 하나가 대륙의 관광객들이다. 총 관광객 수의 절반이다. 홍콩인 K씨는 “그러나 이렇게 몰려오는 걸 모두들 마뜩지 않아 한다.”고 말한다. 과도한 내륙인 관광객이 ‘혼란’일 수 있음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이율배반적이기까지 하다. 그래도 중국 정부는 이같은 홍콩인의 마음을 주시하고 있다. 이에 외국인보다 대륙인에 대해 더 엄격한 절차를 적용하며 매년 홍콩으로 들어가는 중국인 총수를 조절하고 있다. 홍콩에서 ‘대륙(大陸)’과 ‘대륙인’은 이처럼 두 얼굴이다. 과거 이 두 단어는 ‘메인랜드 차이나’를 폄하하거나 혐오하는 말로 쓰였다. 홍콩에서 중국인에게 ‘홍콩에 온 지 얼마나 됐느냐.’고 하면,‘당신 대륙인 아니냐.’는 물음이 될 수 있다.1987년 이후 7년을 거주한 뒤에야 ‘영구 거주민’이 될 수 있으므로 홍콩인으로서는 ‘지저분하고 소양이 부족한 중국인’을 분리해 내는, 우회적인 질문인 셈이다. 그러던 홍콩인들이 지금은 중국 표준어인 ‘만다린’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표준어 열풍 때문에 홍콩인의 평균 영어실력이 줄어가는 것을 걱정해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97년 금융위기와 2003년 사스 위기 때 적지 않은 홍콩인들은 대륙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예전에는 여행 가기조차 꺼려 했던 곳이다. 이제는 전대를 차고 값비싼 물건을 싹쓸이해 가는 대륙의 졸부 쇼핑족들에게 서툰 표준어로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과거와는 달리 일체감도 부쩍 늘었다. 세 아이를 키우는 50대 프랜시스 팍.“스포츠 국가 대항전을 볼 때면 아이들이 자신이 중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전한다. 주변에서도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감에 따라 중국인임을 내세우는 홍콩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한다. 1999년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 피폭사건으로 홍콩에서도 반미 시위가 일어난 일이나,2003년 중국 최초의 우주인 양리웨이(楊利偉)의 홍콩 방문 때의 열렬했던 환영식도 그 한 예다. 그렇다면 과연 ‘홍콩인’은 ‘중국 공민’으로 거듭났는가. 지금도 홍콩 특별행정구 청사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와 함께 내걸린 홍콩기는 그들의 복잡한 정체성을 잘 설명해 준다.“이것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이 이런저런 행사에서 오성홍기만 내걸면 홍콩인들은 대단히 불쾌해 한다.”고 현지의 한국인 관계자들은 전한다. 홍콩인들에게 정체성의 불분명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번영과 함께 영국인 국적과 코스모폴리탄 홍콩인에 안주하던 이들에게 홍콩 반환이 결정된 1984년 중·영 연합성명 발표는 주요한 전환점이 된다. 해외로 떠나려던 홍콩인들은 자신들이 영국인이 아님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영국에 들어가려면 이민관의 심사를 받아야 했고, 정작 중국에서는 영국 영사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한편으로 지금의 ‘조국’ 중국은,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임을 단 한차례도 인정한 적이 없다. 그래서 72년 유엔 탈식민화위원회에서 홍콩과 마카오는 식민지 명단에서 빠졌다. 홍콩인들은 국제적으로도 ‘어정쩡한’ 신분 속에서 지내왔다는 얘기다. 홍콩 기본법은 홍콩인의 다른 나라 여권을 ‘여행 통행증’ 정도로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홍콩인이 중국 공민의 정체성을 갖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중국은 반환받을 당시 ‘홍콩의 생활방식’을 50년간 보장했다. 당시 중국의 한 고위 관료는 “홍콩에서 말(경마)은 계속 뛰고 주식투자와 춤도 계속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 생활방식이 홍콩인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홍콩 경마협회가 최근 ‘축구 도박’을 정식으로 허용했어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최근 홍콩에서의 몇가지 고고학적 발견들을 근거로 고대 홍콩에 한족(漢族)이 살았다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다. 홍콩에 대해 종족적·문화적 동질성을 강화하려는 시도인 셈이다. 글 사진 홍콩 이지운특파원 jj@seoul.co.kr ■ ‘당신은 누구인가’ 설문조사 |홍콩 이지운특파원|“지금 ‘본토(本土)’라고 표현했나요.” 재차 확인을 했다. 스스로를 “차이니스 홍콩 피플”이라며 중국인임을 먼저 내세운 30대 천(陳)모씨. 그럼에도 그는 계속 홍콩을 본토라 표현했다. 홍콩인의 정체성에는 단순한 설문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그 무엇인가가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사례다. 혹자들은 “사람간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하고 공식 언어가 다르며, 화폐가 다르면 유럽연합이나 나프타(NAFTA·북미자유무역협정) 안의 나라들보다 더 이질감이 큰 것 아니냐.”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정체성 설문조사가 홍콩에서 유행한 것은, 중·영 연합성명이 발표된 이듬해인 1985년부터로 알려진다. 홍콩에서 정체성 문제는 그 역사가 길다. 홍콩 중원(中文) 대학의 2006년 조사로는 홍콩 시민들의 21.5%는 스스로를 ‘홍콩인’으로,18.6%는 ‘중국인’으로 여겼다. “홍콩인이지만 중국인이기도 하다.”는 38.1%,“중국인이지만 홍콩인이기도 하다.”는 21.2%였다. 이중적 정체성을 보인 답변은 중원대학이 1996년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홍콩대가 1996년과 2006년 사이 홍콩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정체성 조사를 한 결과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자신을 ‘홍콩인’으로 생각하는 청소년은 10년 전보다 5.2%포인트 줄어든 28.7%에 그쳤다.‘홍콩인이지만 중국인도 된다.’는 정체성이 담긴 ‘홍콩 중국인(Hong Kong Chinese)’은 39.4%,‘중국인이지만 홍콩인도 된다.’는 생각이 담긴 ‘차이니스 홍콩인(Chinese Hongkonger)’은 22.3%였다. 티모시 웡(王家英) 중원대 교수는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커질 수록 홍콩인들의 중국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그것이 감정적인 동일체 의식으로 변한 것 같지는 않다.”고 분석했다. jj@seoul.co.kr ■ 대륙인의 지위 변화는 |홍콩 이지운특파원|1980년대 중반 개봉된 저우룬파(주윤발)·왕쭈셴(왕조현) 주연의 ‘에스케이프걸’은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 홍콩으로 밀입국하는 대륙인의 모습을 다룬 영화다. 대륙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49년부터 홍콩은 홍콩 땅만 ‘터치’하면 홍콩인으로 받아 주는 터치베이스(touch-base) 정책을 실시했다.(표 참조) 불법이주민의 지위 변화는 홍콩과 대륙과의 상관 관계를 보여 준다. 오늘날 홍콩의 심장부, 홍콩섬 금융거리 한복판에 유독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만을 내걸고 있는 ‘인민해방군 주홍콩 부대 빌딩’은 변화상의 결과물이다. 과거 영국 식민정부 청사로 쓰이던 곳이다. 현지인들은 “군인들이 아주 이따금씩 연병장에서 제식훈련 하는 모습이나 보일 뿐 공개적인 모습은 드러내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대륙사람들은 예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홍콩을 왕래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외국인보다 훨씬 까다로운 입경 심사를 받기도 한다. 49년까지 대륙과 홍콩은 국경 개념이 희박했다. 대륙인의 홍콩행은 76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사망과 78년 개방 때 급증했다. 홍콩이 80년대 말 터치베이스 정책을 폐지한 것은 경제 구조개편에 따라 더이상 값싼 노동력이 필요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알려진다. jj@seoul.co.kr
  • 3편의 코믹·엽기 ‘애니’ 할리우드 대작들 잇따라 개봉 앞둬

    올 여름이 기다려지는 이유. 바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대작 3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라따뚜이’,‘서핑업’,‘심슨 가족, 더 무비’가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캐릭터, 실사(實寫)만큼 리얼한 시각적 묘사 등으로 무더위에 지친 관객들에게 생생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서핑스타를 꿈꾸는 틴에이저 펭귄의 모험기, 요리사를 꿈꾸는 생쥐의 고군분투기,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족(?)인 심슨가족의 극장판 데뷔작 등 마구마구 호기심을 부추기는 3편의 모습을 미리 살짝 엿본다.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서핑스타를 꿈꾸는 펭귄 ‘서핑업’ 썰렁개그로 더위를 식혀주던 펭귄이 오는 8월9일, 바다의 파도를 가르는 서핑스타로 돌아온다. 소니픽처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서핑업’은 한사코 ‘내 장르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깜찍한 주장을 편다.‘서핑업’은 ‘워터 CGI’기술을 통해 마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듯 서핑 장면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배경은 남극의 꽁막골.18살 펭귄 코디는 잔소리꾼 엄마와 심술쟁이 쌍둥이 형에게서 벗어나 서핑계의 전설 ‘빅Z’와 같은 서핑 스타가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다. 그런 그에게 기회가 왔다. 우연히 길거리 캐스팅돼 전세계 서퍼들의 파라다이스 ‘펭구섬’에서 열리는 서핑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부터 악명높은 챔피언 ‘탱크’와의 대결에서 완패한다. 그러던 중 실의에 빠져 있던 코디 앞에 우상 빅지가 나타나고 빅지는 코디에게 1등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충고하는데…. ●불가능은 없다! 픽사의 ‘라따뚜이’ 새달 26일 영화팬을 찾아오는 ‘라따뚜이’는 ‘니모를 찾아서’,‘인크레더블’을 만든 픽사의 야심작. 쓰레기나 주워먹고 살 운명에서 벗어나 식당 주방장의 꿈을 이뤄가는 생쥐의 이야기를 다룬다.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가슴을 울리는 스토리가 세련된 컴퓨터 기술로 무장한 화면과 어우러져 관객들을 스크린 속으로 빨아들인다. “너답게 살라.”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라는 뜻으로 해석되기 쉬운 이 말을 ‘라따뚜이’의 브래드 버드 감독은 과감히 거부한다. 감독은 “‘라따뚜이’의 주인공 레미처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며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요리가 꿈인 생쥐 레미는 자신을 퇴치대상 1호로 여기고 있는 프랑스 최고급 식당으로 숨어든다. 불청객인 그는 곧 온갖 위험 속에 처하지만,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는 식당 청소부 링귀니와 만나게 되면서 꿈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극장판으로 만나는 ‘심슨 가족, 더 무비’ 8월23일에 찾아올 이십세기 폭스의 ‘심슨 가족, 더 무비’는 1987년 탄생해 18년째 미국에서 계속 방영되고 있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심슨네 가족들’을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작품.3D 애니메이션이 장악하고 있는 극장계에 2D 애니메이션으로 도전장을 내민 ‘심슨 가족, 더 무비’는 심슨가족의 엽기적인 상상초월 스토리로 승부수를 던진다. ‘심슨가족, 더 무비’의 줄거리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공식 사이트(www.simpsonsmovie.com)에서 호머 심슨이 재난으로부터 세상을 구해야만 하는 상황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공개된 예고편을 통해 ‘심슨가족, 더 무비’가 재난블록버스터와 슬랩스틱코미디를 합쳐놓은 내용일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5명의 심슨가족과 각양각색의 마을주민이 뒤통수 치는 유머와 좌충우돌 에피소드로 관람객들의 웃음보를 잠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 [‘2007 칸의 여왕’ 전도연] 10편 10색…“카멜레온 같은 배우”

    [‘2007 칸의 여왕’ 전도연] 10편 10색…“카멜레온 같은 배우”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은 사실 어느 정도 예정돼 있었다. 영화제 개막 전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녀는 ‘밀양’의 공식 시사회 이후 각국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아 수상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왔다. ●“감내못할 고통 완벽하게 표현” 시사회를 거듭할수록 영화에 대해서는 ‘당황스러운’ 반응들을 보였지만, 영화를 본 기자들은 전도연의 열연에 대해서 만큼은 의견일치를 봤다. 특히 미국 뉴욕타임스는 전도연에 대해 “이창동 감독의 세계 속에서 감내하지 못할 고통을 여배우 전도연이 여린 영혼의 소유자처럼 잘 그려냈다.”면서 “여우주연상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극찬했다. 로이터 통신도 “칸에서 가장 돋보이는 여배우 중 한 명”으로 꼽았고, 프랑스 무가지 메트로 역시 “여우주연상에 근접했다.”며 전도연의 여우주연상 수상을 기정사실화하는 보도를 내보내기도 했다. ●87년 ‘씨받이´ 강수연 이후 20년만에 쾌거 그동안 칸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이 ‘취화선’으로 감독상(2002년)을, 박찬욱 감독이 ‘올드보이’로 심사위원대상(2004년)을 받은 적이 있으나 여우주연상 수상은 처음이다. 또 한국 여배우가 세계 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1987년 강수연이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20년 만이다. ‘밀양’을 만난 전도연에게 올해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최고의 해다.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배우와 함께 작업한 기쁨에다 “전도연에게는 아직 보여줄 카드가 많이 있다.”는 찬사에 행복했다. 또 ‘밀양’으로 데뷔 16년 만에 처음 밟은 레드 카펫 위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까지 안았다.‘밀양’은 그녀가 평생의 배필을 찾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난생 처음 촬영을 중단할 정도로 힘들었던 터라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졌고, 지난 3월 신데렐라 같은 결혼식을 치러 부러움을 샀다. 이제 ‘칸의 여왕’으로 등극해 국제무대에서 명성까지 얻었으니 그녀는 ‘세 마리 토끼’를 움켜잡은 셈이다. ●97년 ‘접속´ 첫 영화… 신인상 휩쓸어 전도연은 16년전 CF모델로 연예계에 입문했다.1997년 영화 ‘접속’으로 대종상 신인여우상과 청룡영화제 신인여우상을 동시에 거머쥐며 화려하게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듬해 두번째 영화 ‘내마음의 풍금’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계를 짊어질 재목으로 떠올랐다. 이후 ‘해피엔드’‘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피도 눈물도 없이’‘인어공주’‘너는 내 운명’ 등 출연하는 영화마다 팔색조 같은 변신으로 감독과 관객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는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로 자리매김해왔다.10번째 작품 ‘밀양’은 그녀의 말대로 새로운 기회를 열어줬다. 이 영화로 다시 신인의 자세로 돌아가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었다고 했다. 국내 배우들의 해외 진출 소식이 속속 들려 오고 있는 요즘, 월드스타로 등극한 배우 전도연이 어떤 모습으로 관객 앞에 설지 자못 궁금해진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칸을 품은 ‘밀양 여우’

    |파리 이종수특파원|영화배우 전도연(36)이 ‘칸의 여우(女優)’로 떠올랐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에 출연한 전도연은 27일(현지 시간) 프랑스 칸에서 폐막한 제60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안았다. 전도연의 이날 수상은 1987년 ‘씨받이’의 강수연이 베니스영화제를 수상한 뒤 세계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니스)에서 20년 만의 쾌거다. 또 전도연은 동양 여자배우로는 칸 영화제에서 2004년 홍콩의 장만위 이후 두 번째 수상자가 됐다. 동양의 남녀 배우로는 5번째 주연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전도연은 이날 수상 뒤 “믿기지 않는다.”고 일성을 터뜨렸다. 이어 “열연한 여배우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제가 그 여배우들을 대신해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그 자격과 영광을 주신 칸과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밀양’은 1년 2개월 정도 문화부 장관직으로 외도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계 복귀작이다. 한편 22편의 작품이 경합한 장편 경쟁부문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에는 루마니아의 신예 크리스티안 문지우 감독의 ‘4개월,3주, 그리고 2일(4 Months,3 Weeks and 2 Days)’이 차지했다. 이 영화는 독재자 차우셰스쿠 정권 시절 루마니아를 배경으로 불법 낙태 시술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2위에 해당되는 심사위원 대상은 일본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모가리의 숲(Morning Forest)’이 받았다.3위인 심사위원상은 마르자네 사트라피(이란)-빈센트 파로노드(프랑스) 감독의 애니메이션 ‘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와 멕시코 카를a로스 레이가다스 감독의 ‘침묵의 빛(Silent Light)’이 공동 수상했다.‘빅3’를 모두 젊은 감독이 가져가 칸의 세대교체 바람을 예고했다. 감독상은 ‘잠수종과 나비(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를 연출한 미국의 줄리언 슈나벨에게 돌아갔다. 남우주연상은 러시아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추방(The Banishment)’에 출연한 콘스탄틴 라브로넨코가 수상했다. 또 60주년 기념 특별상의 영예는 ‘페러노이드 공원(Paranoid Park)’을 출품한 미국의 거장 구스 반 산트 감독이 영예를 안았다. 한국의 신예 홍성훈 감독도 단편영화 ‘만남’으로 단편영화 경쟁섹션인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서 3등에 올랐다. vielee@seoul.co.kr
  • [일요영화]

    ●천녀유혼(MBC 밤 12시30분)‘하얀 소복 긴 소매가 창공을 가른다. 시리고도 아름다운 슬픔이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천녀유혼’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건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1987년작 ‘천녀유혼(女幽魂)’은 귀신과 인간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렸다. 청샤오둥 감독의 화려한 연출, 장궈룽(張國榮)·왕쭈셴(王祖賢)이라는 매력적인 출연진,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가슴 저린 스토리로 명실상부 ‘홍콩 무협영화의 대표작´으로 자리잡았다. 귀신이 와이어를 이용해 하늘을 날아다니는 첨단 SFX 장면은 이후 수많은 영화에서 차용하기도 했다. ‘천녀유혼’은 중국 청나라 때 포송령의 ‘요제지이’라는 소설집에 실린 ‘섭소천’ 설화를 영화화한 것이다. 후진취안(胡金銓)·리한샹 감독에 이어 청샤오둥 감독의 손에 의해 거작으로 탄생했다. 때는 명나라. 순진한 서생 영채신(장궈룽 분)은 세금을 걷는 수금원으로 생계를 잇는다. 갑작스레 비가 내리자 숙박할 곳을 찾다 들어간 난약사라는 절에서 그는 하후형과 연적하라는 두 검객을 만난다. 그런데 난약사는 다름아닌 섭소천(왕쭈셴 분)이라는 귀신이 머무는 절. 섭소천은 간신들의 모함으로 일가족이 떼죽음을 당한 대가집의 딸로, 나무귀신이 그녀의 시신을 차지하는 바람에 환생하지 못하고 있다. 연적하는 귀신이 나오는 절이니 당장 떠나라고 충고하지만, 영채신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영채신은 아름다운 가야금 소리에 이끌려 섭소천을 만난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반해 있는 채신을 유혹하여 처치하려던 소천, 하지만 선량하고 순박하기 그지없는 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홍콩 개봉 이후 ‘천녀유혼’은 동남아시아·한국·일본 등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큰 성공은 1990,1991년에 속편과 3편을 낳기에 이르렀다. 제17회 파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4회 도쿄 국제판타스틱영화제 베스트 대상, 제12회 홍콩영화제 금상 등을 받았다. 상영 시간 88분.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내가 본 광주항쟁 영화에 생생히”

    5·18 광주 민주화항쟁을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제작 기획시대)’ 제작보고회가 9일 열렸다. 이 자리에는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외신기자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지훈 감독을 비롯해 안성기, 김상경, 이요원, 이준기, 박철민 등 배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압구정 CGV에서 열린 보고회에는 1980년 당시 미국의 유력지 시카고 트리뷴 서울특파원이었던 도널드 커크(69)씨가 참석, 당시 광주의 상황에 대해 증언했다. 현재 자유기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는 그는 지난 30년간 한국의 굴곡 많은 역사를 지켜본 산 증인. 커크씨는 광주 민주화항쟁에 대해 “2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죽음을 맞은 비극적인 사건일 뿐아니라 한국 민주화의 전환점이 된 대단한 사건”이라며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사실 그는 5월18일 항쟁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서울에서 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가 광주를 찾은 것은 소요가 일단 가라앉은 직후이다. “전남도청 옆에 수많은 나무관들이 쭉 도열해 있었는데 유족들이 관 뚜껑을 일일이 열어보며 자기 가족을 확인하는 장면이 눈에 생생하다.”며 “영화 속에 이 장면이 사실적으로 잘 묘사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 민주화항쟁은)개인적으로 슬픈 추억”이라고 덧붙였다. 전날 영화를 본 그는 크게 감명받았는지 함께 자리한 감독과 배우들을 보며 “영광” “감사”라는 말을 연이어 쏟아냈다. 또 “영화가 사건의 핵심을 잘 살린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작비 100억원 규모의 대작 ‘화려한 휴가’는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는 소시민의 삶을 통해 광주 민주화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으로, 오는 7월 중순 개봉을 앞두고 있다.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임권택 영화 ‘천년학’ 개봉

    임권택 영화 ‘천년학’ 개봉

    “나는 영화속에 리얼리티가 담겨야 한다고 고집하는 감독입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리얼리티란 내 개인적인 삶의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 좀더 넓은 의미의 것으로, 다양한 우리들 삶의 경험에서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영화는 단순한 오락물일 수 있어요. 그러나 나는 영화란 우리의 삶에 대한 창조와 지혜의 예술양식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삶 자체를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서 영화가 우리의 삶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장 임권택. 오는 12일 개봉하는 100번째 영화 ‘천년학’(오정해·조재현 주연)으로 한국 영화사에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임권택(71)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천년학은 어려서 소리를 위해 남매 아닌 남매가 된 동호(조재현)와 송화(오정해)가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임 감독은 젊은이들에게 우리 조상들의 ‘슬픔’의 정서를 보여주고 싶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천년학’은 남도소리를 입힌 사랑 이야기 ▶감독님! 만나서 영광입니다. 초등학교 때 ‘씨받이’(강수연 주연·1987년 개봉)를 보고 감독님의 작품세계를 처음 접했습니다. -초등학생 때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때인데 씨받이를 왜 보고 그러나. 허허. ▶100번째 작품으로 천년학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요? -천년학은 이청준의 연작소설 ‘남도사람’ 중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거야. 애초 ‘서편제’(1993년 개봉)때 시나리오로 쓰려던 것인데, 당시 기술로는 소설 속 배경인 바닷물이 드나드는 선학동(전라남도 장흥군 소재)을 만들 수가 없어서 무척 안타까웠어.(원래 이 지역은 바닷물이 드나들었지만 개간사업으로 농토로 바뀐 상태다.) 그러다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이 발전해 이 문제가 자연스레 해결된 거야. 그래서 100번째 작품으로 다시 한번 도전한 거야. ▶천년학을 ‘서편제’의 후일담으로 봐도 될까요? -영화의 기본구조는 비슷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남도소리의 역할이 서로 달라. 서편제가 ‘소리에 사랑 이야기를 입힌 영화’라면 ‘천년학’은 거꾸로 ‘사랑 이야기에 소리를 넣은 작품’이야. 서편제가 소리 자체를 중시했다면 천년학은 이야기 구조에 좀더 비중을 뒀어. ●100편의 영광,100번의 고뇌 ▶100편이나 영화를 만들었는데 기분이 어떠신지요? -한편 한편 찍을 때마다 정말 피가 마르는 심정이야. 지금도 마찬가지야.100편을 찍은 보람보다는 이제 간신히 영화를 끝냈다는 생각 뿐이야. ▶100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과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 있다면요? -부모가 어찌 예뻐하는 자식을 남들에게 대놓고 말하겠는가. 다른 자식들이 들으면 서운해할 것 아냐. 하지만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작품은 있어.‘태백산맥’(1994년 개봉)이 그래. 원래 노태우 정권 때 만들려던 것인데 주변에서 워낙 만류가 심해 문민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기다렸지. 영화를 만들 때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어. 하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바로 내 자신이 ‘내 사상의 검열관’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서야. 워낙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고 살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알아서 자신을 통제하던 거지. 만약 좀더 ‘열린시대’에 살았다면 태백산맥이 더 좋은 작품이 됐을 텐데…. ▶101번째 작품으로는 뭘 해보고 싶으세요? -솔직히 그동안은 작품을 고를 때 남들의 기대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하지만 이제는 내가 진짜 해보고 싶은 작품을 한번 해볼 테야. 그게 현대물일 수도 있고 애정물이 될 수도 있겠지. 이제부터는 남들에 대한 부담에서 좀 홀가분해지고 싶어. ●스크린쿼터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 ▶한·미 FTA가 타결돼 스크린쿼터가 73일로 완전히 확정됐는데요. -(담배를 꺼내 긴 연기를 내뿜으며)한국 영화산업이 이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사실 스크린쿼터가 없었다면 나처럼 흥행과 관계가 없는 감독은 생겨나지도 않았을 텐데 말야. ▶한국 영화들을 보면 조폭영화나 코미디 영화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그래도 스크린쿼터가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그런 상황을 부인하지는 않아. 하지만 스크린쿼터가 줄어들면 미래 한국영화는 그런 종류의 영화들만 남아 있게 될지도 몰라. 한국 영화가 더더욱 경제논리에 내몰릴 테니까 말야. ▶그렇다면 최근 본 한국영화 중 ‘제대로 된 한국영화답다.’고 느낀 작품이 있었는지요? -지난해 개봉한 김대승 감독의 ‘가을로’(유지태·김지수 주연)가 꽤 인상 깊었어. 감정의 절제를 통해 흥행보다 영화적 완성도를 택한 감독의 고집을 읽을 수 있었지. ▶위기의 한국 영화계에 한마디 하신다면요? -앞으로 우리 영화산업에 커다란 회오리가 몰아치겠지만 우리 영화계에도 재능과 잠재력을 가진 감독들이 여럿 있다는 것이 위안 거리지. 앞으로 상황이 어려워져도 지금까지 그랬듯 늘 최선을 다해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지. ▶앞으로도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 많은 노고 부탁드립니다. -류 기자는 자식 관리 잘해야겠어. 자네 아들도 아빠 닮아서 어려서부터 ‘씨받이’ 같은 거 보러 다니면 어쩌려고 그러나. 허허허.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쥐라기공원’ 현실화?

    강원 양양의 도로부지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7000년 전 수생식물의 구형뿌리에서 싹이 돋아난 것으로 보고돼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식물학자들은 “신석기시대 식물이라면 영화 ‘쥐라기공원´이 현실화될 가능성까지 제기되는 세계적 사건”이라면서도 “하지만 과연 신석기시대 것인지를 먼저 규명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예맥문화재연구원은 “지난 2월28일 지하 4.6m 지점의 회청색 사질점토층(뻘층)에서 지름 2㎝ 안팎의 구형뿌리 3개를 가진 수생식물을 수습했다.”면서 “이 수생식물을 상온에서 증류수에 담아 놓았더니 뿌리마다 2개씩 싹이 났다.”고 4일 밝혔다. 예맥연구원은 “같은 층에서 함께 출토된 토기조각 등으로 살펴볼 때 수생식물이 나온 뻘층은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쯤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원은 양양 여운포와 송전 사이의 도로 개설을 앞두고 2006년 12월18일부터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현장은 1981년부터 1987년까지 6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사적 제394호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 유적의 길 건너편이다.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은 “단단한 껍질에 싸여 있는 종자는 환경 등의 이유로 휴면상태에 들어갔다가 싹을 틔우는 사례는 있다.”면서 “2000년 전의 연꽃씨에서 싹이 났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구형뿌리가 7000년 동안 썩지 않고 조직이 살아 있었다는 것은 불가사의”라고 설명했다. 현 소장은 이 수생식물을 연못이나 늪지에 살면서 여름에 이삭모양의 꽃이 피고 녹색 열매를 맺는 한반도 자생식물인 매자기로 추정했다. 이 수생식물에 대한 분석을 의뢰받은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박태식 박사도 “휴면상태에서 깨어난 것으로 이해하기 힘든 신기한 일이지만 사실이라면 해외토픽감이며, 외부에서 섞여 들어갔는지 등을 조사해야 할 것”이라고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정연우 예맥문화재연구소장은 “구형뿌리가 나온 지점은 1.5m의 흙이 덮여 있는 옛날 지표에서도 3.1m나 더 들어간 곳이며, 뻘층도 1.2m나 쌓여 있을 만큼 매우 안정되어 있다.”며 토층이 최근에 교란됐을 가능성을 일축했다. 정 원장은 “이 뿌리는 지난달 16일 열린 발굴설명회장에서도 뿌리 형태로만 공개됐던 것으로, 우리도 발아한 것은 이틀 전에야 알았다.”면서 “선사시대 유적에서 나온 씨앗 등이 자연발아된 사례가 보고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형뿌리에서 싹이 나오니 당황스럽다.”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국내 최초 남성사중창단 블루벨즈(2)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 국내 최초 남성사중창단 블루벨즈(2)

    ‘사랑이 깊으면 얼마나 깊어/여섯 자 이내 몸이 헤어나지 못하나/하루의 품삯은 열두 냥 금/우리님 보는 데는 스무 냥이라 (에헤이 엥헤야 에헤이 엥헤야) 네가 좋으면 내가 싫고 내가 좋으면 네가 싫고/너 좋고 나 좋으면 에헤이 엥헤야 에헤이 엥헤야’-‘열두 냥짜리 인생’(김희창 채보, 개사. 블루벨즈 노래.1963년) 당시 60년대 서민들의 삶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 부문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내던 블루벨즈의 대표곡 중 하나 ‘열두 냥짜리 인생’. 이 드라마가 영화로도 만들어져 국민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그 당시는 속칭 ‘보릿고개’ 시절이었다. 나 역시 중학교 입시를 거친 세대라 집안 형편에 따라 한 교실 안에서도 ‘진학반’ ‘비진학반’으로 나눠 공부했던 서글픈 기억이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이러한 노래에 쉽게 공감하는지 모른다. 그렇듯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4·19혁명으로 막이 올라 5·16으로 이어지며 시작된 우리의 1960년대는 아직 ‘보릿고개’였다. 느닷없이 적극 장려된 해외 이민으로 ‘브라질 이민선’을 타는 사람도 늘어나고 전 국민의 환호 속에 월남 전선으로 떠나던 맹호·청룡·백마부대 용사, 그 젊은이들. 당시 유년시절을 보내던 이들은 ‘파월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되는 위문편지 숙제 속에 묻혀 있기도 했고,‘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며 아침저녁으로 스피커를 통해 학교 운동장마다, 동네마다 가득 울려 퍼지던 이 노래와 더불어 당시 구호,‘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다’가 어느새 ‘100만달러 수출 탑을 쌓아올린’ 건설한국을 자랑스러워했다. 이 때 들었던 새마을노래, 그 주인공 또한 블루벨즈였다. 우리나라 가요 최초의 쿼텟, 블루벨즈는 멤버들 개인이 군 입대 등으로 결원이 생기면 쇼무대 등을 위해 임시 멤버로 강수향, 곽규호씨 등으로 대체해 활동했지만 이들 대체멤버가 음반 취입에 직접 참여한 적은 없다. 그러나 1968년, 창단 멤버 현양씨가 정식으로 탈퇴하자 KBS전속가수 7기생인 장세용씨가 가세, 후기 블루벨즈를 이뤄 활동한다. 아울러 ‘블루벨즈’는 또한 스코틀랜드 지방에 서식하는 ‘젊음을 상징하는 꽃’ 이름이기도 하다. 이 꽃말처럼 이들의 노래는 당시 다른 노래들에 비해 비교적 젊다. 소월 시에 김광수씨가 곡을 붙인 ‘엄마야 누나야‘를 비롯,‘부두(장세용 작사, 곡)’ 등이 그렇듯. 아울러 당시에는 유행가 일부를 ‘소리의 공해’라 치부하기도 했고 때문에 건전가요 보급 역시 일종의 국가적 시책이기도 했는데, 특히 ‘싱어롱 Y’의 선구자 전석환씨에 의해 주도되었던 ‘건전가요 부르기 운동’의 최전방에 섰던 첨병 또한 블루벨즈로 ‘정든 그 노래’,‘그리운 고향’,‘냉면’ 등을 이때 발표한다. 블루벨즈, 이들의 노래엔 늘 생동감이 느껴진다. 네 명의 목소리가 합쳐져 같은 화음을 구사하고 있지만 매번 들을 때마다 약간씩 미묘한 차이도 감지되는 것이다. 완벽하고 정확한 멜로디로서가 아니라 절묘하게 이탈된 곡선이 이들 화음에 들어 있어 노래가 살아 있다고도 느껴진다. 특히 ‘잔치잔치 벌렸네, 무슨 잔치 벌렸나’로 시작되는 ‘즐거운 잔칫날(손석우 작사, 곡)’과 ‘고생도 달가와(최요안 작사, 손석우 작곡)’에서의 웃음소리를 표현한 부분 등에서 이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화음의 이탈이, 그 흐름을 이어가는 묘한 곡선에서 이들 넷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감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확한 멜로디 속에 함께하는 또 하나의 다른 흐름,‘부두’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에서 노래를 휘감는 멋진 휘파람소리 또한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1987년에 재결성, 기념 음반 ‘블루벨즈/내 인생 후회는 없지만’을 발표하는데, 이때는 오리지널 멤버인 박일호·서양훈·김천악·현양씨가 함께했다. 이들 멤버 모두 52세 때였다. 현재 리더 박일호씨는 한국연예협회 이사장을 거쳐 한국대중문화원장으로 활동 중이고, 서양훈씨는 미국 LA복음방송국의 본부장으로 재임 중이다. 장세용씨는 적십자 봉사활동을 그리고 대체 멤버 곽규호씨는 송파실버악단에서 각각 활동하고 있고, 김천악·현양·강수향씨는 타계했다. 1960∼70년대, 궁핍한 시대에 희망을 안겨준 ‘푸른빛의 종소리’ 블루벨즈, 이들의 멋진 하모니를 통해 노래는 지쳐있는 삶, 혹은 인생의 응원가이며, 그로부터 몇 십년이 지난 지금쯤엔 옛 노래가 바로 마음의 고향일 수 있음을 실감한다. 대중음악평론가 sachilo@empal.com
  • 모든 평범한 삶은 특별하다

    모든 평범한 삶은 특별하다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 애를 쓸수록 문은 굳게 닫힙니다. 돌아서서 일에 파묻혔더니 문득 세상 밖에 나와 있습니다.” 심재명 엠케이픽처스 영화제작부문 총괄 사장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공병호: 국문학을 전공하셨는데, 영화 일을 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심재명: 중학교 때부터 영화를 꿈꿨어요. 당시만 해도 청소년들에게 롤 모델이 될 만한 영화제작자가 드물었고, 또 한국영화라면 왠지 극장에 가서 보기 부끄러웠던 때였지만, 그래도 막연히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선망이 있었어요. 아무 이유 없이 영화 보는 게 좋았던 거죠. 좋아하는 것을 넘어서 감상을 끼적이거나 감독의 이름을 외운다거나 하는, 요즘 말로 하면 마니아 단계에까지 이르렀어요. 그렇게 그냥 좋아하다 보니까 꿈이 이뤄지더라고요. 혼자 있기 좋아하는 말수 적은 소녀, 영화사 사장 되다 공병호: 말씀은 쉽게 하셔도 그렇게 간단치는 않았을 테고, 과정을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시죠. 심재명: 대학을 졸업하고 두 군데 영화사에서 4년 반 정도 기획과 홍보 일을 했습니다. 이후 잠시 프리랜서 생활을 하다가 나이 서른하나에 창업을 했죠. 공병호: 요즘 표현으로는 ‘벤처’네요. 창업 이후에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재능을 발견하셨나요. 심재명: 아니, 그런 거창한 표현보다는…. 저는 직장생활이 참 힘들었어요. 회사에 동년배는 드물고 대부분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았는데 그분들과 원활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지 못했죠. 하도 신경을 써서 나중에는 위궤양에 시달리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독립을 하니까 싹 낫더라고요. 그때 아, 나는 생리적으로 조직에 맞지 않구나, 느꼈죠. 공병호: 자신의 길을 때맞춰 잘 수정해 오셨네요. 그나저나 그토록 좋아하는 영화 일을 하신 지 근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간의 시간들을 돌아보신다면…. 심재명: 모험정신이 넘치는 도전적 삶을 살았다, 뭐 이런 모범답안을 기대하는 분들이 많으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저는 수세적守勢的으로 살아요. 만약 이십대에 몸을 담았던 회사가 제게 더 많은 동기 부여를 했더라면 계속 그곳을 다녔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다행히 제 곁에 결단력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저는 영화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구체화시키지 못했는데, 이른바 운동권 영화를 만드는 운동권 출신의 독립영화 감독이었던 제 남편(이은, 현 ‘엠케이픽처스’ 대표)이 저를 이끌었어요. 그렇게 1995년에 만든 ‘명필름’을 10년가량 운영하다가 주식회사 상장을 계획하게 되었고, 제작만으로는 너무 리스크가 크다,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배급과 투자를 겸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4년 <강제규필름>과 합쳐 <엠케이픽처스>라는 상장사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10년도 안 돼 사라진 ‘21세기를 책임질 영화인’ 공병호: 일반인들은 영화 한 편의 제작 규모가 얼마나 될지 궁금해 합니다. 심재명: 편당 평균 제작 비용 30억, 마케팅 비용 20억 등 도합 50억 원 정도의 자금이 투입됩니다. 위험 부담이 크지만 그만큼 결실도 클 수 있으니 말 그대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high risk, high return’이죠. 공병호: 50억 프로젝트라, 중소기업 규모의 영화사로서는 말 그대로 엄청난 리스크네요. 심재명: 작년에 제작된 한국 영화가 총 108편인데, 그중 손익분기점을 넘어선 영화는 20편에 불과합니다. 이런 수치는 할리우드도 마찬가지라고 해요. 공병호: 올해는 몇 편 정도 제작을 하실 계획인가요. 심재명: 저희 회사 브랜드로 여섯 편쯤. 공병호: 작품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통상 제작기간은 얼마나 걸립니까. 심재명: 의외로 길어요. 아이템 발굴에서 극장 스크린을 통해 관객과 만나는 시점까지의 기간이 평균 2년쯤 되죠. 예를 들면 강제규 감독이 만든 <쉬리> 같은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까지 포함해서 4년 이상이 걸린 거예요. 공병호: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입니다. 그 사이 소비자의 취향이 달라지지 않나요? 심재명: 영화는 정서적인 장르인 데다 더욱이 작품 수가 한정되어서 어느 정도의 여유는 있어요.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108편인데, 그게 너무 많다는 거예요. 전문가들은 한국의 영화산업 규모에서 인구 대비 적정 편수를 7, 80편 정도로 보고 있어요. 한 편 만들면 주목받기 쉬운 거죠. 최근의 통계를 참조하면 한국 영화 1년 관객이 1억 7천만 명 정도 된답니다.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가 계속 늘어나고 있으니까 앞으로 2억 명까지는 갈 것 같고, 치솟는 제작, 마케팅 비용만 합리적으로 조정하면 우리 영화산업은 낙관적이지 않나 생각해요. 물론 해외 시장에서 더 많은 성과를 올려야겠지만…. 공병호: 집에서 비디오, DVD 등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심재명: 그것을 이른바 ‘2차 윈도우’라고 부르는데요. 이웃 일본은 그 시장이 굉장히 커요. 그러나 우리는 요즘 와이드 배급이라고 해서 영화 한 편이 개봉 첫날 수백 개의 스크린에 동시에 걸리는 까닭에 상영 기간의 호흡이 굉장히 짧아졌어요. 예전에 <공동경비구역 JSA>가 6개월 만에 6백만 명이 들었는데 지금은 3, 4개월 만에 천만 명이 들거든요. <괴물> 같은 영화를 전 국민이 알고, 보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는 거지요. 공병호: 우리는 뭐든 참 급하군요. 심재명: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2차, 3차적 방법으로 보지를 않아요. 그렇게 비디오나 DVD 시장이 완전히 죽었고, 방송이나 케이블 판권도 기대만큼 금액이 상승하지 않으니까 개봉 첫 주에 승부하지 못하면 큰 손실을 보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어요. 이런 것들이 한국영화산업의 현안懸案이고요, 한류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해외 시장에서 생각했던 것만큼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도 심각한 타격이지요…. 인간이 되기 전에 성공을 논하지 마라 공병호: 그간 영화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부침을 지켜보셨을 겁니다. 저도 되돌아보면 재기발랄한 사람들이 의외로 중도에 넘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이는 왜 쓰러지는 걸까, 그것을 통해 스스로를 살피는 것이지요. 심 대표께서 목격한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어떤 것입니까? 심재명: 성공하는 분들은 무엇보다도 ‘인간’ 자체가 좋아요. 반대로, 무언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눈앞의 이익을 쫓아 판단이 흐려지는 분들은 길게 가지 못하죠. 며칠 전 방을 정리하다가 1999년에 나온 한 영화 잡지를 다시 읽게 된 일이 있습니다. 그 안에 ‘21세기를 책임질 영화인 50인’이라는 설문조사가 실렸는데, 오늘 시점에서 그 면면을 살펴보니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분들이 많더라고요. 채 10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공병호: 퇴보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일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자, 그렇다면 좀 더 실질적으로, 과연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영화의 ‘키 석세스 팩트 Key Success Fact (성공요인)’는 무엇일까요. 심재명: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어요. 그중 첫 번째는 시나리오 즉, ‘이야기’입니다. 공병호: 결국은 컨텐츠라는 말씀이시군요. ‘이야기’를 판단하는 기준은. 심재명: 가장 먼저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인가’를 스스로 묻습니다. 그다음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할 것인가’를, 마지막으로는 ‘돈이 될 수 있는가’를 따져보죠. 공병호: 와, 제가 책을 쓰기 전에 고려하는 관점들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건 독자 여러분께 밑줄을 쳐서 보여줘야 합니다! 심재명: 두 번째 요인은 ‘탤런트talent’예요. 팀워크가 중요하지만, 그래도 우선 되는 것은 재능입니다. 공병호: 탤런트를 우리는 재능이라고 하지만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인재라는 뜻도 있어요. 그래서 인재 전쟁을 ‘워 포 탤런트War for Talent’라고 하죠. 그만큼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갈수록 흥미진진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심재명: 영화는 굉장히 과학적이지만 한편으로는 터무니없이 비과학적이기도 해요.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해요.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제때를 찾아야 하지요. 공병호: 아주 좋습니다. 제대로 된 인터뷰라면, 뭔가 ‘프로페셔널’한 것을 끄집어내서 소개해줘야 해요. 심재명이라는 사람이 영화라는 업業을 저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테마가 있어야 해요. 오늘은 이 세 가지만 전해드려도 되는 거예요! ’해피엔딩’이 행복할 수 없는 까닭 공병호: 영화제작자에게 이런 질문을 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영화, 많이 보시지요? 심재명: 사나흘에 한 편, 1년에 100편 정도 될까요. 공병호: 좋아하는 장르는? 심재명: 결혼하기 전에는 굉장히 잔혹한 영화, 개성 강한 영화를 좋아했는데, 아이를 낳고 나서는 따뜻한 영화가 좋아지더라고요. 요즘 들어서는 구분 않고 다양한 영화를 봅니다. 이 분야의 종사자로서 잘 만든 영화는 칭찬하고, 그렇지 못한 영화는 한 쪽으로 골라내고…. 공병호: 조폭 스타일의 영화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용감하지만 그건 또 질색이라서 항상 불만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크게 비난하지 못하는 것이 고객의 니즈needs 가 있으니까 그런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겠죠. 심재명: 저 역시 그런 영화를 싫어해요. 하지만 영화라는 것이 어둠 속에서 자기 혼자 스크린을 보는 거고, 그 안에는 보통 사람들의 일탈과 욕망을 담아야 하니까 불량식품 같은 요소도 들어 있어야죠. 폭력, 섹스 이런 것들은 동전의 양면같이 영화의 또 하나의 특징이에요. 공병호: 듣고 보니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들은 폭력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드문 것 같습니다. 그것도 결국은 제작자의 취향을 따라가는 것이겠지요. 심재명: 사실이에요. 감독도 그렇지만 제작자들도 나름의 성향이 있지요. 저희는 남성 취향의 컨텐츠는 거의 없고요. 그보다는 발을 땅에 디딘 현실적 내용에 관심이 많다고 할 수 있어요. 공병호: 말초적인 자극에 지친 관객들을 위해 좋은 영화 한 편 추천해주세요. 심재명: 최근에 본 〈리틀 미스 썬샤인Little Miss Sunshine〉(2006)이 괜찮을 듯하네요. 미국에서 만든 아담한 가족영화인데 소외되고 뒤처진 인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품어 안는 작품이에요. 공병호: ‘가족’이라, 그러고 보니 심 대표께서 요즘 가족영화에 대한 사업적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심재명: 극장들이 이제는 주거지역까지 파고들 만큼 양적으로 팽창하고 있잖아요. 영화관에 들르기가 그만큼 쉬워진 거죠. 가족 단위 관객들은, 저도 딸을 키우고 있지만, 주로 방학 때 할리우드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이나 교양물을 즐겨 봅니다. 이 점에 착안해서 이제쯤이면 우리 관객들도 우리가 만든 가족영화를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거예요. <안녕 형아>(2005), <아이스케키>(2006) 등이 그런 취지의 작품들인데, 앞의 것은 조금 성공했고 뒤의 것은 조금 실패했죠. 어쨌든 이런 과정에서 한국영화 컨텐츠의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요. 공병호: <조용한 가족> <바람난 가족> <구미호 가족> 같은 연작물도 제작하셨지요. 가족에 대해서 할 말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심재명: 제가 가족주의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가족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내포하고 있는 특별한 의미를 주목注目하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라는 말처럼 ‘가족’도 가끔은 강박으로 작용해서, 누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가족’에서 찾으려 하잖아요. 그리고 이들 영화는 앞서 말한 온 가족이 함께 보는 가족영화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아요. 저는, 예를 들어 가족을 다뤄도 어설픈 가족주의로 문제를 봉합하려는 태도를 혐오해요. 제가 얌전하게 보이고 또 실제로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기존의 체제와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물리력을 행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반발심이 커요. 그런 의미에서 이들 작품들은 오히려 가족의 해체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 기존의 관념을 깨는 새로운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거죠. 영화 같은 삶보다 삶을 꿈꾸는 영화가 좋다 공병호: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심재명: 10년 넘게 알고 지내는 분들이 저더러 너무 안 변한다고들 하더군요. 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 칭찬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보다도 시대 흐름에 민감해야 하고 좀 더 적극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할 텐데, 좀 아쉽죠. 삶을 대하는 태도도 비관적이고…. 이 일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게 되었지만, 그러나 저는 겉으로 드러난 사회적 이미지에 대한 환상이 없어요. 활발한 활동을 하시는 많은 여성 중에는 야심적인 전략가들도 계시죠. 물론 저는 ‘워커홀릭workaholic(일 중독자)이에요. 하지만 그런 분들하고는 완전히 반대편에 서 있어요. 공병호: 일에 파묻히겠다, 세평世評에 관심 두지 않겠다…. 심재명: 저를 힘센 페미니스트로 보는 분들이 있어요. 육아에 대한 책임도 남편과 평등하게 나누어 질 것 같다고 하는데, 그러나 사실은 그와 달라요. 아무리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주말에는 꼭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죠. 공병호: 오늘 답변이 제 예상을 많이 빗나갑니다. 얼핏 생각하면 도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적극적 성격을 지니셨을 것 같은데, 의외로 내부지향적 측면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얻고 싶은 답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를 해보지요. 인생의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심재명: 성공해야겠다, 이런 생각 전혀 안 했어요. 얼마 전 딸아이가 앨빈 토플러를 얘기하면서 금융, 경제 이런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얘기하던데…. 이전에 다른 매체에서도 인터뷰를 하면 꼭 성공을 화제로 삼더라고요. ‘성공한 여자’가 어떻고 하는 것들…. 저는 스스로 성공했다는 생각은 한 적 없고요. 굳이 성공이라는 말과 연관을 시키자면 제가 몸을 담고 있는 일에서 발전을 이루는 일이겠지요. 지금도 가끔 제 능력의 한계와 위기의식을 느끼는데, 어느 시점에선가 현명하게 나 자신을 변화시키거나 운신의 폭을 달리하면서 여전히 의미 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성공한 인생이라고 보는 거지요. 공병호: 음, 이 답도 굉장히 소박하네요. 내가 반성을 좀 해야겠어요. 아무튼 심 대표께서 꿈꾸시는 또 다른 방식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 심재명: 박사님도 늘 건승하세요. 공병호 어떻게 그렇게 많은, 좋은 글을 쓰십니까.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나온 그것들을,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잊어버렸습니다. 배를 타본 사람은 압니다. ‘이물’에 앉아 있으면 두 갈래로 물살이 갈라져 빠르게 ‘고물’ 쪽으로 달려갑니다. 화살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나간 일에는 아무런 기쁨이 없습니다. 실패하면 사람들로부터 잊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지만, 성공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재능이 있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다작多作을 합니다. 밥 먹고, 글 쓰고, 책을 냅니다. 그것이 나의 일상입니다. 1960년 경남 충무 생. 고려대학교 경제학과(1983), 미국 라이스대학교 박사(1987).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2001~). 저서 <공병호의 자기경영노트>, <10년 후, 한국> 등. 심재명 재테크요? 문외한이에요. 성격이요? 직관적이고 감성적이랄까, 지레짐작해서 일을 그르친다고 남편에게 늘 주의를 받아요. 화나는 일이요? 어떻게 하면 영화를 잘 만들까 고민하지 않고, 잘 살아남을까만 궁리하는 사람들을 볼때…. 어떻게 화를 내냐고요? 못 내요. 스트레스를 푸는 비법이요? 저는 비법이 없는 게 문제예요. 좌우명이요? 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말자. 성공이요? 그런 걸 꼭 생각해야 하나요? 저 참, 별로지요…. (아, 사람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기에 언어는 너무 가볍다. 침잠沈潛하지 못하고 부유浮游하는 나뭇잎처럼.) 1963년 서울 생. 동덕여대 국문과(1987), (주)명필름 창립(1995), 여성영화인모임 준비위원회 위원(2000), 추계예술대학교 문화산업대학원 겸임교수, (주)엠케이픽처스 이사. <조용한 가족, 1998> <해피엔드, 1998> <공동경비구역 JSA, 2000> <질투는 나의 힘, 2002> <바람난 가족, 2003> <그때 그사람들, 2004>.
  • [사회플러스] 배우 이미숙 20년만에 이혼

    영화배우 이미숙(47)이 결혼 20년 만에 이혼하게 됐다. 이미숙측은 19일 “1987년 성형외과 전문의 홍성호 박사와 결혼했던 이미숙은 최근 홍씨와 부부관계를 정리하기로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6년전 두 자녀를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유학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별거생활을 하게 됐고, 각자 일에 몰두하면서 애틋한 감정이 식은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현재 이혼절차를 밟고 있으며 이달 중 서류관계가 정리될 것으로 알려졌다.
  • [토요영화]

    ●호스티지(MBC 밤 1시) 뛰어난 언변의 협상가 브루스 윌리스가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났다. 이번에 그가 맞서 싸워야 할 상대는 최첨단 장비로 무장된 저택과 뛰어난 두뇌를 지닌 괴한. 철통보안을 자랑하는 집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30㎝ 간격으로 설치된 폐쇄회로 카메라를 통해 감시된다. 저택은 경보가 발동되면 모든 창문과 문을 차단하는 지름 10㎝의 티타늄 빗장으로 완전 무장된다. 그런데 이 저택 안에 주인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DVD가 숨겨져 있다. 이쯤 되면 대충 눈치를 챌 만도 하다. 조만간 이 집에 누군가가 찾아와 숨겨진 DVD를 노릴 것이며 괴한들은 저택의 숨겨진 기능들을 어떤 용도로든 활용하게 될 것이라는…. 쇄된 저택 안에 갇힌 인질들과 탈출로를 찾을 수 없는 인질범. 저택의 비밀통로에서 펼쳐지는 목숨을 건 도주와 추격이 스릴러 특유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인질 협상 성공률 100%를 자랑하는 LA경찰국 최고의 협상꾼 제프 탤리(브루스 윌리스). 그러나 자만심에 빠져 인질로 잡힌 어린 소년의 목숨을 구하지 못한 사건 이후, 탤리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과 죄책감에 빠져든다. 탤리는 결국 LA와 가족을 등지고 작은 시골 마을의 경찰 서장으로 떠나버리지만 또다시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스미스 가족이 살고 있는 마을의 저택에 10대 소년 3명이 침입, 가족을 인질로 잡아 버린 것. 탤리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사건에 관여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데…. 2005년 작품. 상영시간 113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플래툰(MGM 오후 11시)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 중 수작으로 손꼽히는 작품.‘7월 4일생’‘월드 트레이드 센터’ 등을 연출한 올리버 스톤 감독 영화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1987년 개봉했으며 당시 흥행 1위를 달리기도 했다.1987년 아카데미 작품·감독·편집·음향 부분 수상작. 골든 글로브 작품·감독·남우조연상까지 거머쥔 작품이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현대판 우륵’ 천익창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현대판 우륵’ 천익창씨

    아득히 깊은 전설의 밤, 말라 죽은 오동나무가 불쑥 일어나 명주실에 단단히 꼬여 ‘가얏고’로 변신한다. 기러기발에 의지하더니 중모리 자진모리 애끊는 장단을 뱉어낸다. 옆에서 자태 고운 여인네가 얇은 모시적삼 사이로 뽀얀 속살을 드러내며 버선발로 사뿐사뿐 춤을 춘다. 마음 또한 새벽녘 옹달샘처럼 청아해 열두줄의 심현(心絃)이 지나는 나그네의 발길을 칭칭 휘어 감는다. 문득 생각나는 대사가 있다.‘황진이’의 스승 백무가 읊조렸다.“단전에 네 슬픔을 두어라. 그리고 천천히 풀어내라. 억지로 잊으려 할 것 없다. 깊이 숨을 들이켜 단전에 두듯 네 사랑도 그저 거기에 두면 돼.” 지난 2일 오후. 경기도 부천시 원종동의 16평 작은 아파트 안. 아버지와 아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가야금 앞에 앉았다. 아버지가 흥얼흥얼 장단을 넣자 열아홉살 아들은 열손가락으로 학의 날갯짓처럼 48현(25현+23현) 가야금줄을 날렵하게 넘나든다. 빠르고 늘어짐이 절묘해 청산을 휘젓는 바람 같았다. 팔과 다리, 어깨가 저절로 들썩인다. 아버지가 직접 창작한 ‘오솔길’이다. 이윽고 아버지가 입식 가야금 앞에 선다. 기존의 좌식 가야금과는 사뭇 다른 개량 가야금이다. 왼손으로 현을 타고 오른 손으로 활을 켠다. 영화 ‘타이타닉’의 배경음악이 나온다. 뱃머리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즐릿의 멋진 사랑 장면이 새삼 그려진다. 이어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뮤직’을 연주하더니 간드러진 ‘오돌똘기’‘새타령’으로 넘어간다. ●설 전날 아들과 함께 ‘뼈피리´ 등 연주회 이쯤해서 아들의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이른바 ‘현대판 우륵’으로 불리는 천익창(55)씨. 아들 새빛군과 1994년부터 매년 이맘 때면 어김없이 특별한 무대를 갖는다. 설날을 앞두고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량 국악기 연주회를 가져왔던 것. 올해에도 설날 전날인 2월17일 오후 3시 같은 장소에서 관객들과 만난다. 특히 올해는 인류의 원초적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뼈피리’를 비롯, 그가 직접 복원한 신석기 현악기, 철기시대 현악기, 신라시대의 신라금 등 이른바 가야금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이색무대까지 마련했다. 아울러 세계에서 유일하게 열손가락으로 가야금을 연주하는 새빛군의 솜씨를 접할 수 있다. 천씨는 1973년부터 전통 가야금에 전자장치를 부착하면서 국악 개량화의 길을 걸어왔다.‘천익창 연구소’라고 부르는 그의 아파트에는 23현,25현 가야금을 비롯,1200년 전의 신라금(新羅琴), 신석기·철기 시대의 현악기,10현 아쟁 등 개량 국악기만 20여점이 전시돼 있다. 그가 ‘제2의 우륵’이라는 찬사를 듣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악계선 이단시… 박동진 명창에 욕먹어 하지만 전통 국악계에서는 ‘이단시’한다.1993년 KBS-TV ‘국악춘추’ 프로그램에 초청을 받았을 때 개량 가야금을 들고 나와 팝밴드와 협연을 가졌다. 그런데 녹화가 끝나자 명창 박동진 선생이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천씨의 귀를 아프게 잡아당기며 “야, 씨부랄 놈아, 니가 왜 국악계 욕먹이고 지랄이야.”를 시작으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육두문자를 퍼부어댔다. 천씨는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귀가 얼얼하다며 웃는다. 2002년 단국대 멀티미디어실에서 열린 ‘남북한 개량 국악기’ 세미나에 참석, 혼자서 개발해온 전자가야금,23현 가야금,10현 아쟁 등의 개량 국악기를 직접 연주하며 선보여 토론의 불을 붙이기도 했다. “전통 국악계에서는 저를 여전히 인정하려 들지 않아요. 변종으로 여기지요. 어릴 때부터 저와 함께 개량 국악을 연주해온 아들놈이 창작무대에서는 수십 차례 상을 받았지만 정작 대학입학에는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요.” 아들은 최근 모 대학 국악과에 응시했다. 아들 새빛군은 1999년 ‘국악 한마당’에서 가야금 연주로 데뷔했으며 2003년 남북한 개량 국악기 비교 연주를 했던 ‘제1회 서울 가야금 경연대회’에서 아버지의 23현 가야금을 들고 나와 창작곡 ‘오솔길’로 대상을 수상했다. 천씨가 잠시 생각하더니 아들을 다시 불러 2005년에 복원한 신석기 시대 현악기를 연주하란다. 아들은 원시인 의상을 그럴듯하게 차려 입더니 6현의 줄을 튕긴다. 아버지는 “원시 음악은 악보없이 음정과 박자가 즉흥적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을 곁들인다. 천씨는 “경주박물관에 가면 신석기인들이 악기를 가슴에 안고 연주했던 모습이 전시돼 있다.”면서 “여러 연구자료를 뒤진 끝에 당시의 악기를 복원할 수 있었다.”고 귀띔했다. 이어 “일부 역사서에 가야금이 당나라의 쟁을 보고 만든 것처럼 나오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 정창원(왕실 유물창고)에 가면 신라금이 보관돼 있는데 아직도 공개를 안 하고 있다.”면서 “조선시대 이전까지 가야금 연주는 남성 전용이었다.”고 덧붙인다. ●‘삼선보´ 등 음계 조율법도 창안 천씨는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안동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중학때 음악시간에 접한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에 매료돼 음악 선생에게 몰래 교습을 받는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년간 영남대 음대 교수에게 작곡 레슨을 받고는 서울대 음대에 원서를 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차녀 근영씨도 같이 응시했다. 텃세에다 운이 따르지 않아서인지 낙방했다. 서울 시내를 무작정 쏘다니던 그는 종로2가 YMCA 옆에 있는 세기음악학원에 들어가 홧김에 피아노를 마구 쳐댔다. 때마침 거기에 와 있던 미8군 클럽매니저가 이를 보고 즉석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이후 천씨는 미8군 클럽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전국 순회공연에 나선다. 몇 달 뒤에는 세운상가 극장식 레스토랑 ‘아마존’에서 20인조 악단의 전자오르간 연주자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는 한편 평소 관심 있었던 가야금과 아쟁을 배우기 시작했다. 결국 전자오르간과 가야금을 동시에 연주하게 되면서 천씨는 가야금의 현을 금속선으로 바꾸고 전자장치를 넣은 입식 가야금을 개발해내기에 이르렀다. 양악밴드에서 최초의 가야금 연주자가 된 셈이다. 이때가 1973년 8월 무렵. 이후 고음·명주·저음 등 3개의 창금(昌琴·천익창이 만든 가야금)을 개량발전시킨다. 고음창금의 경우 현이 금속이고 전통가야금의 밧줄 모양 부들을 제거하고 악기 뒤판 머리부분에 조율기를 장착, 음양증폭 장치를 내장했다. 연주방법 또한 튕겨서 내는 전통적 방법과 활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음계의 조율법도 창안해 냈다.1980년 초 서양 오선악보와 한자악보인 정감보’의 장점을 살린 ‘삼선보’를 발표했다.3옥타브 36개의 기본음과 미분음을 표현하며, 활 연주시 바이올린 음력을 능가하도록 했다. 이같은 개량작업은 철저히 현장성과 국악사랑 일념에서 이루어졌다. “개량 가야금은 모차르트, 슈베르트, 슈만 모든 클래식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국악기를 복원하고 개량하는 일이 외로웠지요. 다소나마 국악계에 활력소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3년 경북 예천 출생 ▲1972년 안동 경안고 졸업 ▲1973년 서울대 작곡과 응시 낙방후 미8군에서 음악활동, 전자오르간 및 가야금 연주.1987년까지 일반무대 협연 및 독주 300회 ▲1986년 천익창 3선보이론 발표 ▲1987년 KBS 송년 대음악회 KBS 팝스오케스트라와 협연(세종문화회관 대강당) ▲1989년 MBC-TV ‘음악이 있는곳에’ MBC 관현악단과 협연 ▲1994년 우리민속 한마당 초청연주 ‘제13회 천익창과 창금’(국립민속박물관) ▲1996년 충무공 탄신451주년. 광복 51주년 기념음악회(탑골공원) ▲2000년 국립중앙박물관 초청연주 ▲2002년 천익창, 천새빛 개량가야금 해설 겸한 연주회(국립민속박물관) ▲2004년 고대악기 신라금 복원 ▲2005년 신석기 한반도 현악기 복원 ▲2006년 철기시대 한반도 현악기 복원, 원시인류 뼈피리 복원 발표
  • [일요영화] 마오리족 소녀가 추장을 꿈꾸는데…

    #웨일 라이더(SBS 밤 1시05분) 웨일 라이더는 뉴질랜드 정부가 자국의 대규모 영화제작을 지원하기 위해 2000년에 설립한 ‘뉴질랜드 필름 프로덕션 파운드’의 투자를 받아 제작된 최초의 영화.1987년 출간된 베스트셀러 ‘웨일 라이더’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시네마’ 부문에 초청돼 국내에 소개되면서 당시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또 2003년 선댄스 영화제, 로테르담 영화제,2002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바 있다. 뉴질랜드의 작은 해변마을에 사는 아름다운 소녀, 파이키아는 마오리족 추장 혈통의 마지막 후손이다. 하지만 파이키아가 태어날 때 그녀의 어머니와 쌍둥이 남동생이 함께 숨을 거둔다. 파이키아의 할아버지는 사내아이가 태어나길 기대했지만 여자아이가 살아남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죽어버린 손자와 외국으로 가버린 아들에게 실망한 ‘코로’할아버지는 마을의 소년들을 모아 추장이 되는 훈련을 시키며 전설 속의 예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남자아이가 추장이 될 거라는 믿음에 따라 마을의 장남들을 모아다가 훈련을 시킨 것이다. 파이키아는 훈련에 동참하여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행동 자체가 부족을 망치는 짓이라고 꾸중할 뿐이다. 하지만 파이키아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코로’할아버지는 남자아이들을 뛰어넘는 그녀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반드시 남자아이가 추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운 자연과 신비한 전설을 느낄 수 있는 영화로 각박한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준다.2004년작.101분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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