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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흥 기폭제 ‘춘향전’ 멜로 이끈 ‘자유부인’… 장르의 신세계 열었다

    부흥 기폭제 ‘춘향전’ 멜로 이끈 ‘자유부인’… 장르의 신세계 열었다

    지금까지의 연재를 통해, 1900년대 초입 한국에 처음 영화가 들어온 시점부터 6·25 전쟁이 끝나고 재건을 시작한 1954년 시점까지 약 50년 동안의 영화사를 살펴봤다. 1901년 미국인 여행가 버턴 홈스 일행이 대한제국기 서울의 풍경을 촬영해 왕실에서 상영회를 개최한 것과 1903년 동대문활동사진소에서 표를 사고 입장한 대중 관객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상영한 것이 한국에 영화가 소개된 가장 앞선 기록이었다. 또한 1919년 단성사에서 조선인 신파극단의 제작으로 연극 무대와 영화가 결합한 연쇄극을 상연한 것은 한국영화 100년의 출발로 기록된다. 이후 일제강점하 조선영화계는 무성영화와 발성영화시기를 개척해 가며 조선인 관객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았고, 일제 말기에는 국책선전영화로 명맥을 이어가기도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영화 제작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의 열정은 1945년 8월 이후 해방 정국과 1950년 6·25 전쟁 시기에도 꾸준히 극영화를 만들고 관객들과 만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는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산업이 급격히 성장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이제부터의 연재는 1955년 이후 한국영화계가 어떻게 국가 정책 그리고 제작 자본과 협상하며 ‘한국’ 영화를 만들어갔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번 지면은 우선 1950년대 중후반까지의 상황을 알아볼 것이다.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 전후 한국 사람들의 깊은 상처를 위로한 것은 역시 영화였다. 전쟁 중에도 영화 만들기를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은 폐허나 다름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곧바로 상업영화 제작에 착수했다. 1954년 18편, 1955년 15편을 기록한 한국영화 제작 편수는 1956년 30편, 1957년 37편으로 늘어나더니, 1958년 74편으로 전 해보다 두 배가 증가했고, 1959년에는 111편으로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에 진입하게 된다. 한국영화산업이 휴전 후 불과 6년 만에 이 정도의 급성장을 이룩한 배경은 역시 인력이었다. 영화에 대한 한국영화인들의 열정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했던 것일까. 가장 대중적인 예술에 참가한다는 개인 창작자로서의 욕망, 자본을 투여한 것 이상으로 수익을 내야 하는 상업영화 셈법의 확고한 인식, 또 직업으로서 계속 영화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의지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국영화를 기다리고 지지하는 관객들의 존재가 가장 중요한 동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화 매체는 대중과 만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환도한 이승만 정부도 이러한 한국영화의 역할을 인식하고 영화계의 의견을 반영해,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 1959년 ‘국산영화 장려 및 영화오락 순화를 위한 보상특혜실시’라는 과감한 지원책으로 한국영화 진흥을 도모한다.전후 한국영화 부흥의 기폭제가 된 작품은 이규환이 연출하고 배우 조미령과 이민이 주연한 ‘춘향전’(1955)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전 소설 ‘춘향전’은 1923년 한국 최초의 상업영화, 1935년 최초의 발성영화로 만들어지는 등 이후 한국영화산업의 중요한 분기점마다 영화화되었다(임권택 감독의 ‘춘향뎐’(2000)까지 모두 17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1955년 벽두에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이규환의 ‘춘향전’ 역시 몰려드는 관객들로 대성황을 이뤘고, 2주간 상영에 10만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들며 제작사에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단 하나의 프린트로 전국 상영을 하던 시절, 서울 상영 이후 지방 각 도시의 상영관에서도 열띤 흥행은 계속되었고, 영화는 2년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관객들과 만났다. 춘향 역의 조미령과 이몽룡 역의 이민이 이 영화 한 편으로 일약 스타가 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롭게 출발한 한국영화계는 이 영화 덕분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한국영화로는 제작비 회수도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지만, 채산을 맞추는 것을 넘어 큰 수익도 올릴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잘 만든 한국영화라면 언제든 뜨거운 지지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들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영화의 효과였다. ‘춘향전’의 성공은 이후 사극영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1956년에 제작된 30편 중 무려 16편이 사극 혹은 시대극 장르일 정도로 인기를 구가한다.●사극에서 멜로드라마로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의 또 다른 축은 바로 현대극 장르였다. 관객들이 시대극 장르에 싫증을 내기도 전에 현대 도시를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가 흥행 전선에 나선 것이다. 이 경향을 주도한 것이 바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이다. 영화는 대학교수와 교수 부인 각각의 연애를 다뤄 전후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원작은 작가 정비석이 1954년 서울신문에 연재해 선풍적 인기를 모았던 소설로, 연재 당시에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며 중공군 50만명과 맞먹는 국가의 적이다”는 격렬한 비난을 받으며 화제가 되었다. 1950년대 중반 한국 사회를 휘몰아치던 계, 댄스, 사치라는 세 가지 바람을 시의성 있게 소설화한 원작이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한형모는 영화로까지 여세를 몰아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한편 영화에 등장한 “뭐든지 최고급품으로 주십시오, 최고급입니까”라는 극 중 백사장(주선태)의 대사는 당시 “최고급”이라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렇게 ‘자유부인’은 195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이자,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되었다. 이듬해 1957년에는 홍성기의 ‘애원의 고백’, ‘실락원의 별’, 김성민의 ‘처와 애인’, 김기영의 ‘여성전선’, ‘황혼열차’, 이용민의 ‘산유화’, 한형모의 ‘순애보’, 유현목의 ‘잃어버린 청춘’ 등의 멜로드라마가 전후 사회의 정서와 시대상을 반영하며, 여성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작가주의적 미장센(화면 구도)이 유려한 유현목 감독의 ‘그대와 영원히’(1958), 박종호의 감독 데뷔작이자 배우 김지미의 청초한 매력이 돋보이는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1959), 조긍하 감독의 대표작 ‘육체의 길’(1959)도 빼놓을 수 없다. 1950년대 후반의 멜로드라마 지형은 홍성기·김지미 콤비의 영화가 주도하는 가운데, 신상옥·최은희 콤비의 작품이 경쟁 구도를 그리며, 한국 대중영화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전자는 ‘별아 내 가슴에’(1958), ‘산 넘어 바다 건너’(1958), ‘별은 창 너머로’(1959), ‘자나깨 나’(1959)가 대표적이고, 후자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1959) ‘동심초’(1959) ‘자매의 화원’(1959) 등을 들 수 있다. 신상옥 감독이 이 영화들의 성공을 발판으로 ‘신필름’을 설립,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계를 주도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적 증가 넘어 영화 문화·산업 전반으로 성장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의 성장은 제작편수로 대변되는 양적 증가뿐만 아니라, 영화문화와 산업 전반이 확장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전후 사회적, 개인적 악조건 속에서 ‘미망인’(1955)을 연출한 박남옥은 한국영화사의 첫 번째 여성감독으로 기록되며, 이병일의 ‘시집가는 날’(1956)은 제4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특별희극상을 받으며 한국영화 최초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 되었다. 이 시기 한국영화의 중요한 특징은 다양한 장르가 시도된 점이다. 멜로드라마와 스릴러를 혼합한 ‘운명의 손’(1954)의 한형모는, 악극 요소를 가미한 코미디 ‘청춘쌍곡선’(1956), 탐정영화 ‘마인’(1957), 가요를 극 속으로 녹여낸 멜로드라마 ‘나 혼자만이’(1958) 등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는 야심 찬 행보를 보였다. 노필 감독 역시 극 중 등장인물의 노래 장면이 삽입된 멜로드라마 ‘꿈은 사라지고’(1959), ‘사랑은 흘러가도’(1959) 등을 연출했다. 이 영화들은 미리 녹음한 음악을 촬영현장에서 틀면서 입 모양을 맞추는 ‘플레이백’ 녹음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음악영화들이 시도된 이유는, 뮤지컬 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기재와 기술력이 부족했던 당시 한국영화계가 절충적 제작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영화기술에의 도전과 이를 뒷받침한 물적 기반도 검토해 봐야 한다. 해방기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서 도전했던 컬러영화 제작도 다시 시도되었다. ‘선화공주’(1957, 최성관)를 시작으로 ‘사랑의 길’(1958, 장황연), ‘춘향전’(1958, 안종화), ‘콩쥐팥쥐’(1958, 윤봉춘)가 컬러영화로 관객들을 만났다. 한편 홍콩과 합작한 ‘이국정원’(전창근·도광계·와카스기 미쓰오, 1957)은 해외 기술을 빌어 안정적인 컬러 색감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한홍 합작영화로 기록되는 ‘이국정원’은 임화수의 한국연예주식회사와 홍콩 쇼브라더스사가 공동 제작했고, 김화랑 감독의 ‘천지유정’(1957)이 그 뒤를 이었다. 두 영화는 1958년 한국 관객들과 만난다. 2.35:1의 시네마스코프 포맷을 통해 넓고 긴 화면 즉 와이드스크린도 선보였다. 그 첫 번째 작품은 수도영화사 대표 홍찬이 건설한 안양촬영소의 창립작 ‘생명’(이강천, 1958)이다. 영화는 미첼 카메라에 비스타라마 렌즈를 달아 촬영했고, 오프닝 크레디트와 포스터에는 수도영화와 시네마스코프를 합친 ‘수도스코프’라는 명칭을 내세웠다. ●정릉·삼성·안양 등 영화 전문 스튜디오 등장 컬러와 와이드스크린 등 1950년대 후반의 기술 시도는 영화촬영소라는 공간과 연동된 것이었다. 한국영화문화협회의 정릉촬영소, 삼성영화사의 삼성스튜디오, 수도영화사의 안양촬영소 등 본격적인 스튜디오 세 곳이 등장해 한국영화의 새로운 제작 기반이 되었다. 사실 스튜디오라는 공간은 선진 영화제작 시스템의 상징과도 같은 곳으로, 주먹구구식 수공업적 제작을 벗어나 할리우드식의 스튜디오 시스템을 갖추는 것은 한국영화인들의 오랜 꿈이었다. 스튜디오 시대의 첫 주자는 1957년 1월 개소한 정릉촬영소였다. 120평의 촬영장과 100평 규모의 현상소에 미국의 민간원조기구 아시아재단이 기증한 미첼 카메라, 휴스턴 자동현상기 등이 설비되었다. 촬영소를 건립한 한국영화문화협회는 아시아재단으로부터 기증받은 영화기자재를 관리하기 위해 1956년 7월 설립한 단체다. 한편 ‘자유부인’으로 큰 수익을 거둔 삼성영화사는 1957년 7월 군자동에 삼성스튜디오를 만들어 권영순의 ‘오해마세요’(1957), 유현목의 ‘그대와 영원히’, 한형모의 ‘나 혼자만이’(1958)를 제작했다. 규모나 내용에 있어 가장 주목할 곳은, 평화신문사와 수도영화사 사장 홍찬이 이승만 정권의 특혜를 받아 1958년 6월 개소한 안양촬영소이다. 그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본떠 본격적인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했고 자신은 총괄 프로듀서를 맡았다. 안양촬영소는 3만 3500평의 부지에 총건평 1975평으로 9개의 건물이 자리잡은 그야말로 ‘영화공장’이었다. 미첼 카메라 3대, 웨스트렉스 녹음 시설 등 미국의 최신 기재들도 들여왔다.하지만 수도영화사의 홍찬은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과 두 번째 작품 ‘낭만열차’(1959)의 흥행 실패로 수십억원의 부채를 졌고, 결국 촬영소는 1959년 10월 부도 처리되며 산업은행의 관리로 넘어갔다. 1966년 9월 박정희 정권의 지원하에 신필름에 인수될 때까지 애물단지로 방치되었던 안양촬영소는 영화산업의 근대화가 산업 내부의 동력 없이 국가의 정책적 지원만으로 완성될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1950년대의 다양한 시도와 노력들이 1960년대 한국영화가 중흥기를 맞고 본격적인 산업화의 길을 들어서는 기반이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류승범, 긴 머리+수염 ‘내가 아는 류승범 맞아?’

    류승범, 긴 머리+수염 ‘내가 아는 류승범 맞아?’

    류승범의 근황이 화제다. 배우 임지연은 과거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타짜3”란 글과 함께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 속 임지연은 타짜 3 출연진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특히 사진 속 반가운 얼굴인 류승범의 얼굴이 눈길을 끈다. 류승범은 긴 수염과 헤어스타일로 시선을 사로 잡았다. ‘타짜3’는 강렬한 연기 변신을 예고하고 있는 박정민과 반가운 스크린 컴백 소식을 알린 류승범은 물론 최유화, 우현, 윤제문, 이광수, 임지연, 권해효까지 대한민국 대세 배우들의 만남은 영화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타짜3’은 허영만 화백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타짜’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영화 ‘돌연변이’(2015)를 연출한 권오광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류승범, 박정민, 이광수, 임지연 등이 출연한다. 올해 개봉. 사진 = 서울신문DB 연예부 seoulen@seoul.co.kr
  • 주 52시간 노동 지킨 ‘기생충’ 제작진에 사회보험료 지원

    주 52시간 노동 지킨 ‘기생충’ 제작진에 사회보험료 지원

    영화계의 장시간·고강도 노동 관행을 깨고도 한국영화 사상 첫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제작진이 총 1150만원의 사회보험료를 받았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은 예술인 표준계약에따라 제작기간 중 주 52시간 노동을 지킨 기생충 제작사에 590만원, 스태프들에게 560만원을 지원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는 촬영 기간(2018년 2~9월)에 낸 사회보험료(국민연금·고용보험)의 50%에 해당한다.예술인복지재단은 예술계 표준계약서 보급 확대를 위해 2014년부터 ‘예술인 사회보험료 지원사업’을 시행 중이다. 예술활동증명을 완료한 예술인이 표준계약서로 계약하고 활동하면 해당 예술인과 예술단체, 기업에 이미 납부한 사회보험료의 50%를 지원한다. 앞서 ‘기생충’ 스태프는 모두 주 52시간 노동을 위한 표준계약서를 작성했고, 실제로 계약에 따라 촬영을 마쳤다. 표준계약서는 특정 분야에 필요한 전문적인 계약 내용을 정형화해 누구나 쉽게 참고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견본계약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현재까지 영화(9종), 대중문화예술(5종), 만화(6종), 방송(6종), 출판(7종), 공연예술(3종), 저작권(4종), 게임(5종), 미술(11종) 등 9개 분야에 총 56종의 표준계약서를 개발·보급했다. 상반기 중 애니메이션과 대중문화예술 분야에 5종이 추가될 예정이다. 예술인복지재단 관계자는 “사회보험료 지원사업은 표준계약서를 이용한 예술인뿐 아니라 표준계약서를 통해 예술인을 고용한 사업자에게도 50%의 지원 혜택을 줘 자발적으로 불공정한 관행들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라며 “‘기생충’을 계기로 영화계뿐 아니라 다른 장르의 예술 분야에서도 표준계약서 사용이 확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열린세상] 봉준호 장르와 ‘기생충’의 성공/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열린세상] 봉준호 장르와 ‘기생충’의 성공/이대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기생충’ 보고 “봉준호는 마침내 하나의 장르가 됐다”는 미국 영화매체 인디와이어의 말은 정확히 맞지 않다. ‘마침내’란 ‘이제 와서’란 뜻이고, 그의 이전 작품들은 그 과정이란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시작해 지금까지 변한 것이 없다. ‘기생충’이라고 특별히 새롭거나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더 주목을 받게 된 것뿐. 영화는 감독의 ‘얼굴’이다. 사람의 얼굴이 쉽게 바뀌지 않듯 그의 영화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감독을 알 수 있고, 감독을 보면 영화를 알 수 있다. 억지로 흥행을 위해, 아니면 “나도 예술 감독”이라는 말하고 싶어 자신의 얼굴과 다르게 그리면 어김없이 실패한다. 그런 감독을 여럿 봤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한국 영화 사상 처음 황금종려상을 받자 여기저기서 ‘봉테일’(봉준호의 디테일)에서 사회성 짙은 소재와 주제, 배우들에 대한 태도까지, 이전 작품들까지 모두 불러내 그의 영화 세계에 새삼 찬사를 쏟아 낸다. ‘봉준호 장르’도 그중 하나다. 봉준호 감독 역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가장 감동적인 찬사”라고 감사해한다. 봉준호 감독은 잊었는지 모르지만, 2017년 영화 ‘옥자’ 때도 이 말을 들었고, 그때 이미 “내 영화에 ‘봉준호 장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사실 우리가 잘 몰랐거나, 익숙하지 않아서 지나쳐 왔을 뿐 봉준호 장르는 오래전 처음부터 있었다. 2103년 8월에 제작한 것을 ‘기생충’ 수상에 맞춰 다시 편집, 보충해 최근 재방영한 ‘MBC 다큐스페셜-봉준호 감독’에 나온 ‘인터뷰’ 장면을 보면서 20년 전 일을 떠올렸다. 장편 데뷔작 ‘프란다스의 개’(2000년)의 시사회가 끝나자마자 봉준호 감독에게 대뜸 “장르가 뭐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코미디”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코미디라고 하기에는 어둡고, 스릴러라고 하기에는 싱겁고 느슨한, 이것저것 섞여 있어 딱 떠오르는 장르가 없는. 냉정하게 봉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할 것이다”라고. 대중영화는 반 걸음 앞서 가야 하는데, 이 영화는 한 걸음이나 앞서가 관객들이 낯설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오랜 기다림과 준비, 고생 끝에 내놓은 첫 영화에 너무나 잔인한 소리였으리라. 실제로 ‘플란다스의 개’는 흥행에 참패(서울 5만명)했다. 관객들은 어색해했고, 코미디로서 기대했던 장르적 ‘재미’와 서사를 만나지 못해 돌아섰다. 그날 그 말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 2년 뒤에 이 영화의 작품성과 독창성만은 인정받을 것”이란 예언 아닌 예언도 했다.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분명 그의 영화는 새로웠고, 독특했으며, 그 나름대로 섬세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일본, 홍콩, 유럽 등에서 줄줄이 초청을 받았고, 봉준호의 존재를 세계 영화계 알리는 계기가 됐다. ‘플란다스의 개’의 흥행 실패와 작품성에 대한 평가, ‘기생충’의 수상에 이은 흥행 성공은 ‘장르’와 무관하지 않다. 코미디면서 스릴러이고, 스릴러이면서 휴먼드라마이고, 공포물이면서 코미디인, 그의 말대로 뒤죽박죽인 ‘이상한’ 영화. 그것이 세상이고, 인간이고, 삶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은 할리우드가 만들어 우리에게 주입시킨 틀을 뛰어넘어 버리고, 상투적이고 전형적이며 평면적인 영화의 세상 구분을 따르지 않는다. 그에게 영화는 ‘현실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보는 창(窓)’이다. 그렇다고 영화의 상상력까지 깨지는 않는다. ‘기생충’처럼 세상의 보이는 선과 보이지 않는 선과 냄새의 경계를 날카롭고, 유쾌하고, 섬뜩하고, 우울하게 드러낸다. 어설픈 당의정이나 위로를 주지도 않는다. 누가 “그렇다면 ‘봉준호 장르’로서 최고 영화는 어느 것이냐”고 물었다. “아직 없다. 최고는 계속 나올 것이기 때문에”라고 했다. 봉준호 감독도 그런 비슷한 말을 했다. ‘봉준호 장르’도 이제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그는 또다시 그 익숙함에서 벗어나려 할지 모른다. 설령 처음의 ‘플란다스의 개’처럼 사람들이 낯설게 느끼더라도 독창성은 늘 변화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
  • 주진모♥민혜연, 제주도 결혼식 사진 공개 “김태희급” 신부 미모

    주진모♥민혜연, 제주도 결혼식 사진 공개 “김태희급” 신부 미모

    배우 주진모와 민혜연의 결혼식 사진이 공개됐다. 지난 1일 주진모와 민혜연이 제주도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린 가운데 결혼식 현장 사진이 SNS를 통해 공개됐다. 사진에는 배우 안성기, 박중훈, 송중기, 추자현, 우효광, 한재석, 황정민, 김현욱 아나운서,장동건, 이종혁, 지진희 등 영화계 스타들이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축복해주는 모습이 담겨 있다. 행복을 감추지 못하는 주진모의 표정과 아내 민혜연의 빼어난 미모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진모와 민혜연은 김현욱 아나운서의 소개로 처음 만난 뒤 낚시 등 취미생활을 함께 하며 1년 간 사랑을 키운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민혜연은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다양한 방송에 출연하며 ‘의사계 김태희’로 불리며 주목을 받았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열린세상] “밥때를 지킨” 영화 ‘기생충’과 표준근로계약서/박영기 한국공인노무사회장

    [열린세상] “밥때를 지킨” 영화 ‘기생충’과 표준근로계약서/박영기 한국공인노무사회장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연일 화제를 낳고 있다. 그중 작품 외적인 면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있는데, 바로 ‘표준근로계약서’의 작성 및 준수 등 영화 제작 과정에 관한 것이다. 배우 송강호는 칸국제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봉준호 감독에 대해 “밥때를 너무 잘 지킨다. 우리들이 행복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다”라고 했다. ‘밥때를 잘 지키는 감독’이라는 말을 통해 영화 ‘기생충’의 감독과 제작사가 배우들을 어떻게 인간적으로 대해 주었는지, 영화산업 노동자인 스태프들의 노동시간을 어떻게 준수하려고 했는지 미루어 짐작이 된다. ‘영화계 표준근로계약서’가 화제가 되자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만이 유별난 건 아니고 2~3년 전부터 영화 스태프의 급여 등은 정상적으로 정리돼 왔고, 영화인들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다른 영화들도 다 하고 있고, 우리도 동참했을 뿐이다. 민망해서 더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영화계 표준근로계약서’는 2012~2014년 사이에 세 번 체결된 ‘영화산업 발전을 위한 노사정이행협약’을 통해 사용이 권고됐고, 윤제문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 제작 때부터 적용하면서 영화계의 관행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후 대부분 상업영화는 현재 표준근로계약서를 체결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은 사용자가 임금, 근로시간 등 핵심적인 근로조건에 대해 서면으로 명시하여 노동자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고 있다. 이를 지키지 않을 경우 벌금 또는 과태료를 물어야 한다. 영화산업 현장에서의 ‘표준근로계약서’ 작성과 교부는 당연히 지켜야 할 법적 의무다. 봉준호 감독이 느낀 ‘민망함’이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과 다른 영화들도 대부분 준수하는데 유독 ‘기생충’이 부각되는 것에 대한 조심스러움일 것이다. ‘영화계 표준근로계약서’는 스태프의 장시간 노동과 임금 체불 등 부당한 처우를 방지하기 위해 임금액 및 지급 방법, 근로시간, 4대 보험, 시간외수당 등을 약정하고 있다. 표준근로계약서의 작성과 준수만으로도 그간 영화업계에 만연했던 임금 체불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부당함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칸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잘 준수했다는 사실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고 널리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좋은 일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영화도 근로기준법을 잘 지켜야 성공할 수 있고, 근로기준법을 잘 지킬수록 더욱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해 주었다는 점에서 영화 ‘기생충’의 성공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대개 부동산이나 금융 거래를 할 때 계약서 쓰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을 고용하고 일을 시킬 때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 경우가 제법 많다. 특히 중소사업주나 소상공인의 경우가 그러한데 단기간 쓰는 계약직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 경우 근로계약서 없이 일을 시키다 해당 직원 퇴사 후 주휴수당과 시간외수당 등 체불 임금과 근로계약서 미작성 등을 이유로 고용노동부에 진정당하는 경우가 많다. 사업주는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임금과 근로시간 등 주요 근로조건을 명시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교부하는 것은 법을 지키는 측면에서도 필요하지만 불필요한 분쟁을 사전에 방지하고 이미 발생한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근로계약서 작성과 교부는 ‘하면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꼭 해야 하는’ 필수사항이다. 한 취업 포털 회사의 설문조사 결과 2013년 22.3%에 불과했던 아르바이트생에 대한 근로계약서 작성률이 2018년에 80%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세상은 그렇게 바뀌고 있다. ‘기생충’을 관람했다. 영화가 끝난 뒤 불이 들어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평소에는 보지 않던,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치는 엔딩크레딧 한 줄이 눈에 띄었다. ‘노무자문 노무법인○○’. ‘기생충’이 세계가 인정하는 작품성 있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땀 흘린 사람들 중에 나와 같은 일을 하는 노무법인과 공인노무사가 있었음이 자랑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 6·25전쟁이 터졌다, 그래도 카메라는 돌아갔다…군·관 신분이지만 열정 하나로

    6·25전쟁이 터졌다, 그래도 카메라는 돌아갔다…군·관 신분이지만 열정 하나로

    해방 이후 열악한 제작 환경에도 불구하고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를 찾아가는 데 열중했다. 1948년 22편, 1949년 20편이라는 제작 편수는 영화계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게 됐음을 수치로 말해 준다.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와 영화 예술을 멈추지 않겠다는 영화인들의 의지, 한국영화를 기다리는 관객들의 열망이 서로 조우한 결과였다. 하지만 1950년 발발한 6·25전쟁으로 그나마 일궈낸 영화산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 10여편의 촬영 현장은 곧바로 중단됐고, 영화인들 역시 피란민들과 같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주목할 부분은 영화인들은 곧 다시 모였고, 영화 제작에 착수했다는 점이다. 영화인들은 1951년 1·4 후퇴 이후 진해, 대구, 부산 등 후방 도시의 군과 관으로 속속 집결해 뉴스영화와 기록영화 제작에 참가했다. 이른바 종군 활동을 통해 영화 작업을 이어 간 것이다. 또 피란 도시의 영화인들은 극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악야’(신상옥 감독·1952), ‘태양의 거리’(민경식 감독·1952) 같은 작품들이 리얼리즘 화법을 통해 전시의 공기를 담아냈다. 6·25전쟁 기간 영화인들이 보여 준 고군분투는 1954년 이후 한국영화계가 곧바로 가동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국방부·공군·육군본부 등 소속으로 촬영 1·4 후퇴 이후 영화인들은 국방부 촬영대, 공군 촬영대, 육군본부 촬영대, 해군 촬영대 등 군과 미 공보원, 대한민국 공보처 등의 관에 각각 소속돼 뉴스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영화 현장에 복귀한다. 진해에 자리잡은 미 공보원에는 촬영기사 임병호, 임진환, 배성학, 현상기사 김봉수, 김형근, 녹음기사 이경순, 최칠복, 양후보, 편집기사 유재원, 김흥만, 김영희 등이 소속돼 ‘전진대한보’와 ‘리버티 뉴스’를 제작했다. 1950년 8월 대구에서 발족한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는 1951년 1·4 후퇴 이후 부산 보수동에 자리를 잡고 ‘국방 뉴스’를 제작했다. 촬영기사 김덕진, 김강윤, 김종환, 김학성, 홍일명, 심재흥, 양보환, 이성춘, 변인집, 현상기사 김창수, 노희삼, 편집기사 양주남, 김희수 그리고 정창화 감독 등이 활동했다. 대구의 공군본부 정훈감실 공군촬영대에는 홍성기 감독, 정인엽 촬영기사, 신상옥 감독, 함완섭 조명기사, 전택이, 김일해, 노경희, 황남 등의 배우들이 소속돼 있었다. 한편 1950년 9·28 서울 수복 직후부터 군의 각 부대는 정훈공작대를 조직했는데, 연극과 영화배우들은 이곳에 소속돼 피란 도시와 일선을 오가며 국민과 군인들을 위로했다. 특히 육군은 극단 신협과 악극단, 무용단으로 구성한 문예중대를 창설해 1·4 후퇴 이후 대구 문화극장(이후 한일극장)을 거점으로 공연했다. 제1소대 신협이 연극 공연을 마치면 가요인이 중심이 된 제2소대가 ‘가협’이라는 단체명으로 음악극을 공연하는 식이었다. 특히 신협의 공연은 전쟁 기간 동안 큰 인기를 누렸다. 전시 중에도 불구하고 공연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초만원을 이루었다는 기록에서 그들의 공연이 전쟁에 지친 피란민들에게 잠시나마 현실을 잊는 순간이 됐음을 알 수 있다.●영화 ‘아름다운 서울’→ ‘아름다웠던 서울’로 전쟁 발발 후 극영화와 기록영화를 통틀어 처음 완성된 영화는 ‘아름다웠던 서울’(윤봉춘 감독·1950)이다. 대한민국 공보처의 의뢰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착수한 관광문화영화 ‘아름다운 서울’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기록을 추가해서 ‘아름다웠던 서울’로 마무리된 것이다. 극영화 감독들이 다큐멘터리 제작 현장에 투신하게 된 것도 6·25전쟁이 만든 특별한 모습이다. 물론 촬영기사들 역시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전선의 기록을 담당했다. 1951년에는 1사단의 후원을 받은 ‘서부전선’(윤봉춘 감독)과 육군본부의 후원으로 만든 ‘오랑캐의 발자취’(윤봉춘 감독)가 전황의 기록을 전했고, ‘육군포병학교’(방의석 감독)는 육군포병학교 생도들의 생활상과 교육 과정을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았다. 6·25전쟁 시기에 제작된 기록영화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작품은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가 만든 ‘정의의 진격’(1951·1952) 2부작이다. 3년에 걸친 ‘정의의 진격’ 제작기는 전쟁기 한국영화사의 집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출발점은 한형모 감독이 흰 광목천에 검은 글씨로 직접 ‘국방부 촬영대’라고 쓴 완장을 만들어 차고, 전장으로 촬영을 나간 것이다. 미 보병부대의 전투를 취재하던 촬영기사 김학성과 이성춘이 박격포탄에 맞아 부상을 입기도 하는 등 한국영화사에 다시 없을 열악한 상황에서도 영화인들의 역량을 여실히 드러낸 의미 있는 작품이다. 기록영화뿐만 아니라 극영화도 기적적으로 생명을 이어 갔다. 서울이 아닌 대구, 부산, 마산 등 피란 도시에서 영화가 만들어진 것 역시 6·25전쟁으로 인한 주목할 만한 특징이다. 배우 이민의 데뷔작인 ‘화랑도’(1951)는 전쟁으로 촬영이 중단됐다가 피란지 대구에서 완성됐고, 전쟁 발발 전에 서울에서 촬영을 시작했던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 역시 배우가 모이면 촬영을 이어 나가는 방식으로 대구에서 마무리됐다. 당시 신문 지면은 “한국의 할리우드”라는 아이러니한 표현으로 피란도시 대구의 영화 제작 열기를 주목하고, ‘공포의 밤’(1952), ‘태양의 거리’(1952), ‘베일부인’(1952), ‘청춘’(1953) 등의 제작 소식에 지면을 할애했다. ●극영화 중에서는 ‘태양의 거리’만 보존돼 피란 도시 대구를 배경으로 촬영된 ‘태양의 거리’는 전쟁 시기 만들어진 극영화 중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유일한 작품이다. 2013년 민경식 감독의 유가족으로부터 16㎜ 네거티브(원판) 필름을 입수한 덕분이다. 흥미롭게도 연출을 맡은 민경식은 1930년대 초반부터 대구 만경관에서 극장 간판을 그리고 있었다. 전쟁을 계기로 대구에 영화 제작 붐이 일자 꿈꿔 오던 감독으로 데뷔한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울에서 잘살던 돌이 가족은 대구로 피란을 내려와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노모(노재신)는 병이 위중하고, 형(전택이)은 무직의 불량배로 지내며, 누나 복희는 냉면집에서 일하고 있다. 돌이 가족과 친했던 문대식(박암)이 신임교사로 부임해 불량소년들을 선도하고, 돌이 가족도 돌보게 된다. 이 영화는 ‘악야’와 함께 ‘코리안 리얼리즘’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마치 1940년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처럼 극영화와 기록영화가 혼재되는 영화미학을 선보인 것이다. 즉 ‘태양의 거리’는 극영화이지만, 영화의 배경으로 당시 피란도시의 모습이 그대로 기록되는 등 사료적 가치 역시 뛰어나다. 한편 민경식 감독의 동생 민정식이 북한의 두 번째 극영화 ‘용광로’(1950)를 연출한 월북영화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지역에서의 영화 제작 열기는 부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낙동강’(전창근 감독·1952)과 ‘고향의 등불’(장황연 감독·1953) 등이 경남도 공보과의 후원으로 제작됐다. 한편 제2육군병원의 후원을 받은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감독·1951)은 마산을 거점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6·25전쟁기는 영화 제작의 중심이 잠시나마 서울에서 지역으로 이동했던 한국영화사의 유일한 시기로 기록된다.6·25전쟁 동안의 영화 제작은 기재보다는 사람 자체가 테크놀로지인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5㎜ 필름을 구할 수 없었기에 대부분의 극영화는 16㎜ 필름으로 제작됐고, 녹음은 현장에서의 동시녹음이 아니라 무조건 후시녹음이었다. 미공보원에는 자동현상기와 자기(磁氣)테이프식 녹음기 등이 갖춰져 있었지만, 영화인들은 목욕탕에 현상실을 만들어 손으로 직접 현상했고, 가뜩이나 필름 구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에 녹음 역시 사운드 필름에 바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라는 악조건과 수공업적 시설에도 불구하고 1950년에서 1953년까지 영화계는 뉴스영화와 기록영화뿐만 아니라 17편의 극영화를 제작해 한국영화의 맥을 이었다. 이는 무엇보다 군이나 각 기관에 소속돼 영화 제작을 뒷받침한 영화기술인들의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6·25전쟁 시기를 통해 구축된 인적 토대는 1954년 이후 한국영화가 성장하는 토대가 됐음을 기억해야 한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신으로 화제… 전후 대표작 ‘운명의 손’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신으로 화제… 전후 대표작 ‘운명의 손’

    남한 특무장교와의 묵직한 멜로스릴러 전쟁 중에도 식지 않았던 영화인의 열정‘운명의 손’(1954)은 여러 의미에서 전후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한형모 감독을 위시로 전쟁 중에도 영화 작업을 멈추지 않았던 영화인들의 역량을 보여 주면서, 휴전과 분단이 결정된 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 여간첩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통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다. 기록화면 질감으로 미군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에서도 이 영화가 전후의 상황을 직접적인 배경으로 삼고 있음을 말해 준다. 특히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형모 감독의 연출력이다. 마가렛(윤인자)과 영철(이향) 단 2명의 주연배우 위주로 이야기를 구성해 경제적인 제작 규모를 꾸렸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오명’(1946)을 참조한 미장센(화면 구성)으로 두 주인공에게 집중한 세련된 스릴러를 완성시켰다. 영화는 1954년 6월에 촬영에 착수, 10월부터 후반 작업에 들어갔고 1955년 1월 6일 수도극장에서 개봉했다. “한국영화 사상 획기적 야심작”(동아일보 1954년 12월 19일자)으로 평가받았지만, 같은 날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으로 관객이 몰리는 바람에 흥행 성적은 좋지 않았다.이 영화는 남북분단이라는 묵직한 주제,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간첩단 두목(주선태)으로 표현되는 스릴러 장르의 분위기, 서로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북한의 스파이 여성과 남한의 특무장교 남성이 빚어내는 멜로드라마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운명의 손’은 두 가지 점에서 한국영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영화이기도 하다. 첫째 여간첩을 다룬 첫 번째 영화로, 배우 윤인자는 마가렛과 정애라는 두 가지 이름의 스파이를 연기한다. 바로 ‘쉬리’(강제규·1999)의 원조 격인 셈이다. 둘째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신이 등장한 영화로 기록된다. 이 영화로 데뷔한 윤인자의 키스 연기는 당시 큰 화제가 됐다. 영화를 연출한 한형모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기를 거쳐 1950년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만주의 신경미술전문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집없는 천사’(1941)의 미술부로 처음 영화 작업에 참여했다. 이후 일본 도호 영화에 입사해 촬영을 배운 후, 일본에서 실시한 기능시험에 합격해 정식 촬영기사가 됐고, 일제 말기부터 해방기까지 주로 최인규 감독의 영화에서 촬영기사로 활동했다. 감독 데뷔는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한 ‘성벽을 뚫고’(1949)에서다. 그는 1950년 5월 다시 연출에 도전한 해군홍보영화 ‘사나이의 길’을 촬영하다 전쟁 발발로 멈춘 후,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 소속으로 ‘정의의 진격’ 1, 2부를 완성했다. 전후 ‘운명의 손’까지 이르는 그의 작품 행보가 극영화와 기록영화를 막론하고 강박적으로 반공과 결부돼 있음은 주목해 볼 지점일 것이다. 이후 그는 대학교수와 교수 부인 각각의 연애를 다뤄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자유부인’(1956)의 흥행 성공을 위시로 철저하게 흥행성을 의식하면서도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과감함을 선보이며 상업영화의 귀재로 평가받았다. 그는 1950년대 한국 대중영화의 격조를 높인 감독으로 평가된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퍼퓸’ 고원희, 뽀글머리+벤치 노숙 포착 “캐릭터 궁금증↑”

    ‘퍼퓸’ 고원희, 뽀글머리+벤치 노숙 포착 “캐릭터 궁금증↑”

    배우 고원희가 주연을 맡은 KBS 2TV 새 월화드라마 ‘퍼퓸’의 첫 방송을 앞두고 고원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3일 고원희 소속사 매니지먼트 구는 오늘 밤 첫 방송을 앞둔 KBS 2TV 월화드라마 ‘퍼퓸’의 스틸 사진을 공개했다. KBS 2TV 새 월화 드라마 ‘퍼퓸’(극본 최현옥, 연출 김상휘, 제작 호가 엔터테인먼트, 하루픽쳐스)은 창의적으로 병들어버린 천재 디자이너와 지옥에서 돌아온 수상한 패션모델, 내일 없이 살던 두 남녀에게 찾아온 인생 2회차 기적의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다. 극 중 고원희는 일생일대 기적을 정통으로 맞은 희대의 행운녀로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한 절박한 일생을 살아가다가 서이도(신성록 분)을 만나고, 자신의 꿈을 이뤄줄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라이징 모델 민예린 역을 맡아 극을 이끌어갈 예정이다. 공개된 스틸 속 고원희는 펑크펌 헤어스타일에도 빛나는 비주얼을 자랑하고 있다. 온몸으로 차를 막아서고 벤치에서 노숙을 하는 등 열연을 펼친 고원희가 맡은 민예린 캐릭터에 무슨 사연이 담겨 있을지 많은 궁금증과 기대감이 증폭되고 있다. 고원희는 KBS ‘당신의 하우스 헬퍼’, JTBC ‘으라차차 와이키키’ 등의 드라마에 출연해 다양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호평받았으며 영화 ‘죄 많은 소녀’를 통해 자연스럽고 실감 나는 연기를 선보여 방송계와 영화계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차세대 대세 배우로 등극했다. 매 작품마다 안정적인 연기력과 본인만의 매력으로 캐릭터를 소화했던 고원희가 첫 미니시리즈 주연을 맡은 ‘퍼퓸’에서는 어떤 연기와 매력으로 안방극장을 사로잡을지 시청자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한편 고원희의 새로운 모습이 기대되는 KBS 2TV 새 월화드라마 ‘퍼퓸’은 오늘 밤 10시 첫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근로계약 지킨 ‘봉준호 철학’…“주90시간 드라마 관행도 변해야”

    근로계약 지킨 ‘봉준호 철학’…“주90시간 드라마 관행도 변해야”

    봉 감독 “스태프들과 일일이 계약서 작성” 영화계와 달리 방송계 ‘살인적 노동’ 여전 표준계약서 경험, 기술 스태프는 18% 그쳐 “사전 제작 없이 생방급 촬영에 시간 허비 52시간 지켜도 기생충처럼 좋은 작품 가능”‘주 52시간제를 지켜 가며 제작해도 명작을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영화.’ 한국영화사 100년 만에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봉준호(50)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두고 각계의 찬사가 쏟아지는 가운데 영화 제작 환경도 주목받고 있다. 봉 감독이 “스태프들과 일일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현장 관계자들은 “기생충이 좋은 예를 만들어낸 만큼 이번 기회에 여전히 스태프들이 과로에 시달리는 드라마 제작 현장에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봉 감독은 27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취재진을 만나 “(표준근로계약서 준수가 화제가 됐는데) ‘기생충’만 유별난 건 아니고 2~3년 전부터 영화 스태프의 급여 등은 정상적으로 정리가 됐다”고 말했다. 실제 영화계에서는 2014년쯤부터 영화 스태프들의 표준근로계약서 작성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표준근로계약서에는 4대 보험 가입, 초과근무수당 지급 등이 명시돼 있다. 과거에는 제작사가 스태프와 근로계약 대신 도급계약만 맺었다. 영화계에서는 각본의 모든 장면을 그려 연기자와 스태프에게 정확한 촬영 정보를 주는 봉 감독 특유의 ‘디테일’ 덕분에 법정 노동시간을 지키는 게 쉬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불필요한 촬영 없이 효율적으로 작업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드라마 업계다. 오는 7월부터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을 앞두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디졸브 노동’이 여전히 일상적이다. 디졸브는 두 개의 화면이 겹치는 영상기법인데, 새벽까지 일하고도 쉬지 못한 채 아침부터 다시 일하는 악습을 일컫는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에 따르면 드라마 촬영장에서는 지금도 현장 집합부터 종료까지 하루 20시간 이상 일하는 팀이 대다수다. 문화체육관광부 등이 지난 1월 발간한 ‘2018년 방송 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드라마·예능 프로그램 제작 기간 스태프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주당 80~90시간이었다. 한 스태프는 “오전 7시에 방송국 앞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강원도까지 이동한 뒤 늦은 시간까지 촬영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 새벽 3~4시”라고 하소연했다. 김두영 방송스태프지부장은 “방송업계에서는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관행처럼 굳어져 영화계가 실시하는 기본적인 계약 준수조차 놀랍게 여긴다”고 꼬집었다.드라마 업계의 살인적 노동 관행이 바뀌지 않는 건 사전 제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 지부장은 “드라마는 연출, 작가, 제작사가 합의해 촬영대본을 사전에 다 짜지 않고 즉석에서 찍다 보니 촬영 시간이 무한대로 늘어난다”면서 “필요한 장면을 제대로 찍지 않아 한 장소를 두세 번씩 오가는 일도 많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제작사와 방송사는 노동시간을 줄이면 제작비가 많이 늘어난다고 걱정하지만, 봉 감독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철저하게 준비하면 시간과 비용을 오히려 아낄 수 있다”면서 “드라마, 예능에서도 사전 제작을 일상화하고, 방송 스태프를 위하는 현장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화 기자 clean@seoul.co.kr
  • [사설] 한국영화 100주년에 거둔 칸영화제 최고상 쾌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2006년 ‘괴물’로 칸영화제와 처음 인연을 맺은 이후 꾸준히 칸의 부름을 받아 온 봉 감독이 13년 만에 거머쥔 최고의 영예이자 한국 영화계의 쾌거다. 지난해 이창동 감독의 ‘버닝’ 수상 불발의 아쉬움을 단번에 만회한 낭보인 데다 특히 올해가 한국영화 100주년이란 점에서 경사가 아닐 수 없다. 할리우드 데뷔작 ‘설국열차’, 넷플릭스 진출작인 ‘옥자’ 등으로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세가 높지만 이번 수상으로 명실공히 글로벌 거장의 반열에 오른 봉 감독과 ‘기생충’을 위해 애쓴 모든 영화인에게 축하를 보낸다. 봉 감독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절묘하게 배합하는 뛰어난 균형감을 갖춘 영화인으로 꼽힌다. 2003년 ‘살인의 추억’으로 흥행과 호평을 동시에 얻고 난 뒤 3~4년에 한 편씩 발표하는 작품마다 소시민적 삶을 기반으로 사회 비판적 시각과 특유의 유머 감각을 버무려 자신만의 독보적인 영화 세계를 쌓아 왔다. ‘기생충’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가난한 가족과 부자 가족 이야기를 통해 인류의 보편적 주제인 빈부 격차 문제를 블랙코미디로 다룬 ‘기생충’의 수상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결정됐다고 한다. 시사회장에서도 기립박수가 끊이지 않았다는데 한국영화가 세계인의 정서를 파고들어 열렬한 공감을 얻었다니 반갑고 흥분되는 일이다. 세계 3대 영화제 중에서도 가장 권위 높은 칸영화제가 한국영화를 선택했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한 것이다. 1919년 ‘의리적 구토’로 시작된 한국영화는 1961년 강대진 감독의 ‘마부’가 베를린영화제 특별은곰상을 받은 이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2007년), 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2012년) 등 여럿 의미 있는 성과를 이룩했다. 이에 더해 이번 칸의 쾌거는 한국영화 100년의 저력이 마침내 정점을 찍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영화의 위상이 크게 발돋움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한국영화의 빛나는 성과를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게 현실이다. ‘기생충’의 주제인 빈부 격차는 영화계라고 다르지 않다. 1000만 영화가 지속적으로 나오는 한쪽에선 스크린 독과점으로 개봉하자마자 퇴출되거나 아예 세상에 나오지도 못하는 작은 영화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 흥행 코드에 맞춰 천편일률적인 영화만 만든다면 퇴보가 불가피하다. 가뜩이나 넷플릭스 등 미디어 다변화로 영화시장이 예전만 못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문화의 독창성과 풍부함은 다양성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영화계도 명심해야 한다.
  • 사회문제를 다양한 장르로 변주… “봉준호가 장르” 거장 반열에

    사회문제를 다양한 장르로 변주… “봉준호가 장르” 거장 반열에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평단의 주목 ‘살인의 추억’으로 스타 감독 대열 올라 ‘괴물’ 1091만 돌파… 통념 뒤엎은 ‘마더’ ‘설국열차’ ‘옥자’ 사회적 시스템 일침 7번째 장편 ‘기생충’으로 쾌거 이뤄“한국 최초의 황금종려상인데 마침 올해가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칸영화제가 한국영화계에 의미가 큰 선물을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25일(현지시간) 밤늦게 열린 현지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이번 수상은 봉 감독 개인의 성취를 넘어 대중상업영화와 작가주의영화의 절묘한 균형을 모색해 온 한국영화가 이룩한 독보적인 성과라는 평가를 받는다. 더욱이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한국영화계는 이번 수상을 계기로 한국영화만의 개성과 저력을 다시금 인정받는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한국영화 향후 100년사에 특별한 전기를 마련한 봉 감독은 번뜩이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여 왔다. 작품마다 인간애와 유머, 서스펜스를 아우르는 복합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동시에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을 놓치지 않은 그는 보기 드물게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두루 호평받았다. 특히 사회문제를 범죄·미스터리, 괴수 블록버스터,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로 변주한 그는 “봉준호 자체가 장르”라는 평가를 얻었다. 봉 감독은 지난 22일 ‘기생충’ 상영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장르 영화감독’이라고 강조하며 “한국 장르영화가 할리우드의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전형적인 규칙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그 틈바구니로 사회적 문제가 표현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이번 수상의 동력 가운데 송강호와의 ‘케미’도 빼놓을 수 없다. 둘은 ‘기생충’을 포함해 ‘살인의 추억’(2003), ‘괴물’(2006), ‘설국열차’(2013) 등 17년간 네 번의 작품을 함께했다. 봉 감독이 조연출이던 시절, 오디션에서 처음 만난 송강호에게 ‘이번 오디션엔 탈락했지만 다음 작품에 꼭 함께하자’고 위로했고, 그 후 ‘살인의 추억’ 감독이 돼 송강호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는 영화계에선 널리 알려진 일화다. 특히 봉 감독은 ‘기생충’ 시나리오를 쓸 때 이미 송강호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봉 감독이 수상대 높은 곳으로 송강호를 불러 올린 뒤 그에게 무릎 꿇고 트로피를 바치는 퍼포먼스를 벌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연세대 사회학과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연출부 생활을 거친 봉 감독은 2000년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 신인답지 않은 탄탄한 연출력을 선보이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2003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이 흥행성과 작품성에서 두루 인정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배우들의 대사와 동작, 세트, 소품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는 섬세한 연출을 통해 ‘봉준호+디테일’이란 뜻의 ‘봉테일’이란 별칭도 얻었다. 2006년 한국형 블록버스터 탄생을 알린 ‘괴물’은 최종 관객수 1091만명을 불러모으며 당시 흥행 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마더’(2009)에서는 아들을 지키려는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모성애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뒤엎었다.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 한 ‘설국열차’에서는 설원을 질주하는 기차를 배경으로 부와 권력에 따라 서열화된 이 시대의 계급 문제를, 넷플릭스 영화 ‘옥자’(2017)에서는 슈퍼 돼지와 산골소녀의 우정을 통해 자본주의 대량생산 시스템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봉 감독의 일곱 번째 장편인 ‘기생충’은 가족 전부가 백수인 기택(송강호)네 장남 기우(최우식)가 고액 과외 교사 면접을 보기 위해 글로벌 IT 기업 CEO인 박사장(이선균)네 집에 발을 들이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 도저히 만날 일이 없어 보이는 가난한 가족과 부유한 가족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빈부 격차 문제를 꼬집는 블랙코미디다. 전 세계인이 공감하는 문제를 한국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점이 이번 수상에 주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은 “한국적인 상황이면서도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 이야기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최근 한국영화가 2000년대 초·중반의 독창성과 개성을 잃어버리고 상업적으로 안전한 영화들만 만든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기생충’을 통해 한국영화가 과감한 도전과 미학적 활기를 되찾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 역시 “봉 감독은 자신의 대표작인 ‘살인의 추억’을 객관적으로 뛰어넘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현재이면서 미래”라는 말로 봉 감독을 치켜세웠다. 이어 “그간 칸에 의해 세계 영화 역사의 지형도가 그려져 왔다”면서 “서구영화 역사가들이 이번 영화제를 계기로 한국영화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게 될 텐데 이번 수상의 가장 큰 보람”이라고 분석했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예술가 집안’ 봉준호… 외할아버지는 소설가 박태원

    외조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 유명 부친도 국립영화제작소 미술실장 지내 30일 국내 개봉 앞두고 내일 언론시사회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을 통해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서면서 그의 가계도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봉 감독의 외할아버지는 1930~40년대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박태원(1910~1986)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과 ‘천변풍경’ 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1930년대 서울 청계천변 서민들의 생활을 묘사한 ‘천변풍경’은 플래시백(과거 회상 장면)과 교차편집 등 영화 기법을 소설에 차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역시 창작노트 자체를 소설화하는 실험적인 기법으로 성과를 인정받았다. 봉 감독의 아버지인 봉상균(1932~2017) 전 영남대 미대 교수 역시 옛 문화공보부 산하의 국립영화제작소 미술실장을 지낸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다. 당시 무대미술과 영화 자막 서체를 디자인으로 표현하는 등 초창기 영화계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편 영화 ‘기생충’은 오는 30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15세부터 관람 가능하다. 개봉에 앞서 28일 열리는 국내 언론시사회에 봉 감독을 비롯한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등 주요 배우들이 참석해 영화제 뒷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기생충’ 마지막 호명에 환호… 칸 72년 만에 주연이 된 한국영화

    ‘기생충’ 마지막 호명에 환호… 칸 72년 만에 주연이 된 한국영화

    당일 오전 ‘기생충’ 관계자 전원 참석 요청 마음 졸이며 본상서 어떤 수상할지 촉각 감격의 봉 감독 “12살 때 영화감독 다짐 황금종려상 트로피 만지게 될 줄 몰랐다” 시상식 전 192개국에 판매… 뜨거운 반응25일(현지시간) 저녁 7시 30분쯤. 프랑스 칸에서 열린 제72회 칸영화제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당일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 배급사 측은 영화제 집행위원회로부터 ‘기생충’ 관계자들은 모두 시상식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것은 사실상 본상 수상을 예고한 것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한국 기자단과 영화 관계자들은 마음을 졸이며 어떤 상을 수상하게 될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각본상부터 하나하나 수상작이 결정될 때마다 ‘기생충’이 보다 큰 상을 받을 거라는 기대는 커져 갔고, 마침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심사위원장이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기생충’을 외치자 프레스룸에 모여 있던 십여개 매체의 한국 기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외국 기자들은 한국인들에게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무대에 오른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 세계에 영감을 준 프랑스 감독들에 대한 헌사로 시작해 ‘기생충’ 스태프 및 관계자들, 가족들에게 감사를 전했으며, 마지막으로 “열두 살 때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했을 때는 이 트로피를 만지게 될 줄 몰랐다”고 감격 어린 소감을 밝혔다. 한국영화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칸영화제 72년 역사에, 한국영화제작 100주년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다. 좀 늦었다는 점만 빼면 참으로 상징적이고 시의적절한 수상이다. 미디어가 다변화되고 영화의 배급 및 관람 방식도 달라졌지만,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는 것의 의미를 폄하할 수 없을 것이다. 칸영화제는 그 역사만큼 오랫동안 숨어 있는 시네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전 세계에 소개해 왔으며 천편일률적인 상업영화의 범람 속에서 영화 매체의 예술성과 작가(auteur)로서 감독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다. 특히 영화제와 함께하는 필름 마켓은 전 세계 영화 수입·배급업자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으는 교류의 장으로서 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뛰어난 작품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데 중요한 행사다. ‘기생충’은 칸 현지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시상식 전에 벌써 전 세계 192개국에 판매된 바 있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타이틀은 영화 개봉 시 마케팅에 중요한 포인트로 활용될 것이며 전 세계 시네필뿐 아니라 대중까지도 한국영화를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지난해 칸영화제에서 ‘버닝’(감독 이창동)의 수상 불발에 이어 여름 이후 블록버스터들의 잇단 흥행 실패로 한국영화계는 다소 침체되어 있는 분위기였다. 프랑스에서 전해진 즐거운 소식이 영화인들과 업계에 다시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리라 기대해 본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 62층 빌딩 옥상서 아찔 영상 찍다 추락사한 남성…보상은?

    62층 빌딩 옥상서 아찔 영상 찍다 추락사한 남성…보상은?

    지난 2017년 11월 62층 짜리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아찔한 영상을 찍다가 추락사한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23일 홍콩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등 현지언론은 베이징 법원의 판결에 따라 숨진 우용닝의 유족이 총 3만 위안(약 515만원)의 보상금을 받게됐다고 보도했다. 과거 국내에서도 보도돼 화제가 된 이 사건은 인터넷에 올리는 ‘위험한 인증 영상’이 낳은 참사였다. 숨진 우씨는 1991년 생으로 원래 영화계 엑스트라로 활동했다. 그가 세상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직업 아닌 직업인 ‘루프토퍼’(Roof Topper)로 활동하면서다. 로프토퍼는 내려다보는 것만도 아찔한 높은 빌딩 끝에 올라 사진과 영상을 찍는 이들로 수많은 구독자들이 그의 수입원이다.중국 최초의 루프토퍼로 평가받던 그는 수많은 마천루에 오르며 100만명 이상의 구독자를 거느린 인터넷 스타가 됐다. 사고는 2017년 11월 후난성 창사에 있는 한 고층빌딩에 오르면서 일어났다. 위험하고 아찔한 사진을 찍을수록 수익도 늘어나는 구조 상 더욱 자극적인 영상을 촬영하려다 그만 아래로 떨어진 것. 특히 사고 당시 중국 라이브 스트리밍 플랫폼인 화쟈오(Huajiao)가 이같은 영상에 10만 위안(약 1700만원)에 달하는 상금까지 내걸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 책임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이에 우씨의 유족은 회사 측을 상대로 총 6만 위안(약 1030만원)의 보상과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소송을 벌였다. 이에대해 지난 21일 베이징 법원은 화쟈오가 안전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한 점을 들어 총 3만 위안을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특히 법원은 스스로 위험천만한 영상을 촬영한 숨진 우씨에 대한 책임도 같이 물었다. 보도에 따르면 중국 내의 라이브 스트리밍 플랫폼 이용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현재 약 4억 25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들 중 일부는 자극적인 영상으로 큰 인기를 얻고있는데 지난 2월에는 다롄시에 사는 29세 남성이 3개월 간 매일 음주 방송을 하다 사망하기도 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예정화 ♥’ 마동석의 이유 있는 선택 ‘악인전’ [종합]

    ‘예정화 ♥’ 마동석의 이유 있는 선택 ‘악인전’ [종합]

    영화 ‘악인전’(이원태 감독)이 개봉 9일만에 200만 관객수를 돌파하며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제72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 받아 현지 팬들과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 레드카펫을 밟았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가 확정되면서 더 열렬한 관심을 받은 ‘악인전’은 조폭과 형사가 손을 잡고 연쇄 살인마를 잡는다는 신선한 소재와 연출, 웰메이드 영화라는 점 등으로 칸을 사로잡았다. 그 관심의 중심에서는 단연 ‘마동석’이라는 배우를 찾아볼 수 있었다. ‘악인전’으로 스스로를 넘어선 새로운 연기와 캐릭터를 만들어낸 그는 110분만에 칸을 매료시켰다. 프랑스 배급사 메트로폴리탄은 “마동석의 액션은 세계 최고다. 특히 ‘악인전’에서 보여준 샌드백 액션과 치과 액션, 복싱 액션 등 오직 그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파워풀한 액션이다”라며 “프랑스 영화계에도 길이 남아 귀감이 될 장면”이라고 극찬했다. 세계 각국의 영화 관계자들과 관객들은 ‘악인전’ 상영이 끝난 후 우뢰와 같은 함성과 박수로 환호하는가 하면, 크리스티앙 쥰 부집행위원장이 직접 감독과 배우를 찾아와 축하의 말을 전했고, 다음날 이루어진 포토콜에서는 티에리 프리모 집행위원장이 방문해 ‘악인전’의 상영은 성공적이었으며 최고의 반응을 얻었다며 칸이 ‘악인전’에 가지는 폭발적 반응을 전하기도 했다. 다양한 액션으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 마동석에게 외신은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의 유일무이한 이미지와 섬세한 액션은 ‘악인전’을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호주, 중국, 대만 등 총 104개국에 수출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연기 자체의 힘과 영화에 집중하게 만드는 매력을 소유한 마동석. 액션 장르 영화를 고수하는 그에게는 여전히 우려와 같은 시선이 있다. 하지만 결국 마동석은 본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칸과 할리우드 진출으로 입증했다. 그는 독보적이고 신선한 캐릭터로 새로운 길을 열었고, 한국 영화계에서 비교적 비인기였던 액션 영화 부흥에 일조했다. 나아가 관객들에게 색다른 장르의 문화를 선사하며 ‘옳은 액션’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마동석은 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도전을 꾀하고 있다. 그가 가진 영향력으로 새로운 문화의 발전까지 이끌어내는 마동석의 옳은 액션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영화 ‘악인전’은 전국 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사진제공=빅펀치이엔티 임효진 기자 3a5a7a6a@seoul.co.kr
  • 독립투쟁 다룬 첫 영화 ‘자유만세’… 월북배우 편집된 ‘반 토막 필름‘

    독립투쟁 다룬 첫 영화 ‘자유만세’… 월북배우 편집된 ‘반 토막 필름‘

    해방을 맞이한 1945년 8월 15일부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기까지 5년간은 한국영화사에서 ‘해방기’로 부르는 시기다. 해방기 영화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일제 말기 국책영화사에 소속되어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만들던 영화인들과 그 영화사에 소속되지 않고 영화 작업을 쉬었던 영화인들이 다시 조우해 함께 영화를 만든 점이다. ‘조선영화가 계속 만들어질 수 있을까’라는 생존의 문제 앞에 친일부역 문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해방기 문화예술계의 상위 조직들이 좌우 진영의 논리로 이합집산을 거듭할 때 이에 따른 영화계 조직의 구성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좌익 진영의 주도로 우익까지 아우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소속으로 1945년 9월 24일 조선영화건설본부가 설립되었을 때, 그 구성원은 일제 말기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참가했던 영화인들이 대부분이었다. 11월 5일에는 좌익 강경파의 주도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이 설립되었는데, 최고 지도부를 제외하면 역시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참가한 기술 파트 영화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한 달여 만인 12월 6일 두 조직은 조선영화동맹으로 통합되는데 이 때 지도부 면면만 보더라도 친일부역과 이념 성향을 초월한 인선임을 알 수 있다. 영화 작업의 특성상 인적 관계나 기술적 전문성을 더 중요하게 고려한 결과였다. 어지러운 해방 정국 그리고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를 통해 ‘조선영화’가 어떻게 ‘한국영화’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미국영화의 범람과 열악한 제작 환경 해방기 영화계 상황은 미국영화의 장악과 조선영화의 위기로 요약된다. 1948년 4월 23일자 서울신문 기사에 의하면 1945년 11월부터 1948년 3월까지 미국 극영화가 422편, 미국의 뉴스영화는 289편이 수입되었는데 그중에서 극영화 400편, 뉴스 250편이 중앙영화배급사(CMPE)의 영화였다. 미국 9대 영화사의 배급 대행을 담당한 중앙영화배급사는 실질적으로 미군이 관장한 단체였다. 1946년 2월 일본에 도쿄사무소를 설립한 것에 이어 4월 조선사무소를 설치하고, 미국영화가 조선 영화시장을 장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처럼 미국영화가 극장가를 독식하는 가운데 같은 시기 조선 극영화는 17편이 제작되는 데 그쳤다. 해방 후 첫 극영화로 이규환의 ‘똘똘이의 모험’(1946)이 개봉하고, 최인규의 ‘자유만세’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해방영화’로 인정받으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당시 영화계는 영화 필름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아 극영화 제작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연극 무대에 영화 장면을 덧붙여 공연하는 연쇄극이 다시 만들어지는가 하면 일반적인 상업영화용 필름인 35㎜ 대신 16㎜ 영화가 만들어졌고, 변사를 써야 하는 무성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기술적으로도 퇴보했다. 현재 필름이 보존되어 있는 영화 중에서 16㎜ 무성으로 만들어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1948), 16㎜ 발성으로 제작된 ‘청춘행로’(장황연·1949)가 대표적인 예다. 미국영화에 비해 상영할 영화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니,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영화들도 다시 개봉했다. 1946년 2월 서울극장(해방 전 경성극장)에서 일제의 국책영화 ‘군용열차’(서광제·1938)가 ‘낙양의 젊은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 후 상영되어 물의를 빚었고, 3월에는 일제의 검열로 창고에 있던 ‘신개지’(윤봉춘·1942)가 빛을 보았다. 5월 우미관에서는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안종화·1934)가 다시 상영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앞둔 시점, 영화계는 건국이라는 절대적 과제와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경찰 영화’와 독립운동가들을 내세운 영화를 들 수 있다. 조선해양경비대의 지원을 받은 ‘바다의 정열’(서정규·1947)을 위시로, 경찰 조직의 후원을 받은 ‘수우’(안종화·1948) ‘밤의 태양’(박기채·1948)이 정부 수립 직전 속속 공개되었다. 가장 대중적인 범죄액션 장르를 통해 경찰의 기능과 밀수 근절을 선전하는 영화들이었다. 또한 계몽문화협회를 주축으로 ‘의사 안중근’(이구영·1946), ‘윤봉길 의사’(윤봉춘·1947) 등 일제치하 애국지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계몽과 건국을 키워드로 한 극영화의 등장은 새로운 국가·국민 만들기와 맥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물론 괴기물 ‘목단등기’(김소동·1947)처럼 순수한 오락영화도 만들어졌지만, 최은희의 영화배우 데뷔작 ‘새로운 맹서’(신경균·1947)처럼 대중이 좋아하는 멜로드라마 장르를 빌어 건국과 관련된 주제를 담아낸 영화들이 선보였다.●해방기 영화인들이 총출동한 ‘자유만세’ 해방 1주년을 기념해 ‘해방 경축 영화’로 기획된 ‘자유만세’는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던 영화인들이 모여 의기투합한 프로젝트였다. 전창근(‘복지만리’(1941) 감독)의 각본으로 최인규가 연출을 맡았고, 촬영은 한형모(‘태양의 아이들’(1944)로 촬영기사 데뷔), 조명은 김성춘(‘살수차’(1935)의 조명 기사), 편집은 양주남(‘미몽’(1936)의 감독)이 맡았다. 또한 고려영화주식회사의 배급으로 고려영화협회가 제작을 맡았고 사회사업 단체인 ‘향린원’(‘집 없는 천사’(1941년)의 배경)이 공동제작으로 참가했다. 1930년대 중후반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던 고려영화사의 인맥이 그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단 고려영화사의 대표였던 이창용이 빠지고, 최인규의 형인 최완규가 기획과 제작을 맡았다. 또한 감독 안종화, 안석영, 윤봉춘, 이규환도 ‘연출응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에서 당시 영화계를 대표하던 인물들이 모두 나선 것을 알 수 있다. ‘자유만세’는 어떤 내용으로 해방의 기쁨을 담아냈을까.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던 1945년 8월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다 친구 남부(일본어 발음으로 나베·독은기)의 배반으로 투옥되었던 최한중(전창근)은 동료(박학)와 함께 탈출을 감행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료는 사살되고, 그 혼자 탈출에 성공한다. 한중은 대학병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집으로 은신해 지하조직의 무장봉기를 다시 주도한다. 동료 박(김승호)이 다이너마이트를 운반하다 일본 헌병에 붙잡히자 한중은 그를 구출한 후, 우연히 남부의 애인인 미향(유계선)의 아파트로 피신한다. 한중을 숨겨준 미향은 그에 매료되어, 지하조직이 있는 지하실로 찾아가 정보와 자금을 전달한다. 그 뒤를 밟은 헌병대에 의해 미향은 사살되고 한중 역시 총상으로 대학병원으로 옮겨진다. 한중을 사모하던 혜자는 헌병이 잠든 틈을 타 그를 탈출시킨다. ‘자유만세’는 해방 이후 한국영화에서 일제치하의 무장독립운동을 묘사한 첫 번째 작품으로 기록된다. 제목처럼 해방의 감격을 활극·멜로드라마 장르에 잘 녹여내 해방기 극장가에서 최고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영화는 1947년까지 계속해서 상영되었고 “조선영화 최초 외국판으로 ‘자유만세’(고영 작품) 중국판이 만들어져 중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다(경향신문 1947년 6월 15일자). 흥미로운 대목은 1948년 이후에는 영화의 상영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이후 ‘자유만세’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 필름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한국영화’가 된다는 것의 문제 ‘자유만세’가 다시 공개된 공식적인 기록은 1975년 ‘흘러간 명화 감상회’에서였다(동아일보 1975년 7월 5일자). 영화진흥공사가 8·15 광복 30주년을 기념해 해방 이후 한국영화 12편을 선정하고 상영회를 개최한 것이다. 한편 당시 기사는 1940년대 작품으로 유일하게 ‘자유만세’가 포함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고려영화사 사장 최완규가 프린트 1벌을 지금까지 보관해 온 덕분이라고 설명하며 “월북한 연기자가 출연진에 들어 있어서 그 상영 당시 많은 장면이 가위질을 당했고 현재 남아 있는 프린트는 상영시간으로 50분밖에 되지 않는다”는 흥미로운 내용을 전한다(경향신문 1975년 6월 28일자). 즉 원래 개봉 버전인 100분의 러닝타임이 당시 삭제 검열 등을 거치며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 중인 51분 버전과 비슷한 분량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가 된 월북 배우는 바로 박학과 독은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보존된 버전에서 두 배우의 모습은 삭제되었지만 둘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먼저 영화의 시작부, 한중(전창근)과 그의 동료(박학)가 서대문 형무소를 탈출하는 장면이다. 박학의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는 빠른 편집으로 구성된 숏들의 경우 그대로 살리고 총에 맞아 죽은 그의 얼굴의 클로즈업은 당시 검열에서 삭제되었다. 이렇게 파악할 수 있는 이유는 현재 필름에는 나중에 촬영한 다른 배우의 얼굴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헌병대 형사 남부(독은기)의 경우 시나리오상 그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다른 인물의 클로즈업으로 완전히 교체되었다. 그런데 그가 애인 미향(유계선)의 집에서 그녀를 만나고 가는 장면에서는 삭제되지 않은 그의 뒷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배우들의 모습이 들어간 필름은 과연 언제 만들어졌을까.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하기 힘들지만, 현재 보존본의 오프닝 크레디트에 나오는 정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해설 자막이다. “29년을 경과하는 동안 6·25사변 등 역사의 격동을 겪으면서도 기적적으로 보존”되었다는 문구에서 이 영화의 재공개를 결정한 1975년 시점을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녹음은 특히 전반에 있어서 실패”(경향신문 1946년 10월 24일자)라는 당시 기사 내용에도 불구하고, 현재 보존된 ‘자유만세’ 프린트가 매우 선명한 녹음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인물들의 대사 중 시나리오상 자주 등장하는 ‘조선’이라는 말은 전부 ‘한국’으로 바뀐 것에서 새롭게 녹음한 버전임을 확신할 수 있다. 이는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현상, 인화를 ‘한국영화문화협회’에서 담당했다는 정보와 연결해 봐야 한다. 한국영화문화협회는 미국의 민간원조기구인 아시아재단으로부터 기증받은 영화기자재를 관리하기 위해 1956년 7월 설립된 단체인데, 카메라부터 녹음기까지 각 기재들은 1957년 1월 개소한 정릉스튜디오에 설비했다. 즉 다시 녹음한 프린트의 제작은 1957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이루어졌다는 말이 된다.정리하면 ‘자유만세’의 필름은 1948년 시점 검열을 받아 상당한 장면들이 삭제되었고, 1957년부터 1975년 재공개 사이 새로운 장면의 촬영과 편집, 재녹음 등 각 단계를 거쳐 새로운 프린트가 만들어졌다. 현재로서는 각 단계가 한 번에 이루어졌는지 별개로 진행되었는지 구체적인 과정과 시점을 특정하기 힘들지만, 새로운 ‘자유만세’의 프린트 제작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사회가 ‘한국영화’를 규정하려고 고민하던 시기와 맞닿아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자유만세’는 당국의 검열로 월북 영화인들의 출연 장면이 삭제된 후 다시 편집되고 녹음된 후에야 비로소 ‘한국영화’가 될 수 있었다.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아침부터 보타이 매고 힐 신고… 칸을 향한 리스펙트 줄을 섰다

    아침부터 보타이 매고 힐 신고… 칸을 향한 리스펙트 줄을 섰다

    타란티노·다르덴 형제 등 거장 작품 상영 정성껏 차려입고 “티켓 구해요” 팻말 더운 날도 비오는 날도 기다림 마다 안 해 넷플릭스 시대에 비현실적 ‘문화적 의례’ 그 중심에 진출한 한국 영화들 낭보 기대 5월 16일 오전 7시 30분. 프랑스 칸 뤼미에르 극장 앞은 벌써 경쟁부문 초청작인 ‘바쿠라’(클레버 멘도사 필로·줄리아노 도르넬리스 감독)를 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8시 30분 상영, 2300석 규모의 큰 극장이지만 더 좋은 자리에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이른 아침부터 영화제 참가자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10시 50분쯤, 영화를 보고 메인 행사장인 팔레 드 페스티벌(Palais des Festivals)을 나오자 건물 앞에서 영화제 상영작들의 티켓을 구한다는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칸영화제는 일반 관객들이 영화를 예매해서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이처럼 티켓은 있으나 다른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영화 관계자들의 ‘자비’를 구하는 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혹시라도 공식 상영회의 티켓을 얻어 레드 카펫을 밟는 행운을 누리게 될까 오전부터 보타이를 매거나 하이힐을 신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쩐지 감동적이다.그렇다. 영화가 뭐길래. 동시대의 크리에이터는 유튜버고, 데이트 신청은 ‘넷플릭스 같이 볼래?’ 아니던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동경도, 영화관 나들이에 대한 낭만도 거의 사라져버린 시대에, 고작 영화를 보려고 지중해의 뜨거운 햇빛을 마주하며 한 시간씩 줄을 선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려는 사람들이 모인 이 공간에서 그러한 행위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아침 8시 30분부터 밤 12시까지 밥도 거의 먹지 않고 많게는 대여섯 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감상하며 마냥 행복해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말초신경이 아닌 영혼의 중심부를 건드리는 영화와 그런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곳. 정성껏 옷을 차려입는 것으로 시작해 붉은 융단이 깔린 계단을 올라가 스태프들의 안내에 따라 착석을 하고, 저 신비스런 오프닝 시퀀스와 함께 스크린의 환영에 빠져드는 문화적 ‘제의’(ritual)로서의 영화 감상이 아직 유효한 곳. 5월 중순의 팔레 드 페스티벌 안팎은 사실상 이렇게 비현실적인 풍경으로 물든다.72회째를 맞는 올해는 개막작으로 선정된 짐 자무시의 ‘더 데드 돈트 다이’를 비롯해 쿠엔틴 타란티노, 페드로 알모도바르, 다르덴 형제, 켄 로치, 테런스 맬릭 등 거장들의 작품이 대거 경쟁부문 후보에 올라 있다. 영화를 향한 ‘리스펙트’를 가진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한 프로그래밍이다.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 감독들의 연출작이 초청된 점도 주목해 볼 만하다. 작년에는 11편이 여성 감독들의 작품이었지만, 올해는 스무 명의 여성 감독이 초청받았다. 그중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은 무려 8편이 여성 감독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세계적인 젠더 균형 이슈에 민감하게 대처한 결과다. 수작을 알아보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한국영화가 상영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은 큰 기쁨이다. 스크린독과점, 블록버스터들의 잇단 흥행부진, 참신한 각본 및 걸출한 신예의 부재 등 해결해야 할 사안들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 영화가 기본적으로 저력을 갖고 있고, 세계 영화라는 커다란 장(場) 안에서 주목받고 있으며, 영화사를 견인해 가는 주체임을 보여 주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올가을 100주년을 맞는 한국영화 제작의 역사가 서구에 비해 20여년이나 늦게 시작됐다는 점, 한국영화가 꽤나 늦게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점 등을 상기해 볼 때 이는 고무적인 일이다. 올해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경쟁 부문)과 이원태 감독의 ‘악인전’(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 연제광 감독의 ‘령희’(시네 파운데이션 부문)가 공식 초청됐다. 특히 경쟁 부문에 한국영화가 4년 연속 초청된 것은 의미가 크다. 수상작들은 심사위원들의 취향과 심사 당일 분위기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그 이전에 현장에서 전해지는 전문가들과 관객들의 평가는 그보다 더 정직하고 객관적이며, 그만큼 관계자들에게 긴 여운을 남기기 마련이다. 21일(현지시간) 밤 10시 공식 상영회를 갖는 ‘기생충’에는 어떤 말들이 피어오를까. 근래 많이 푸석해진 한국영화계를 촉촉하게 적셔 줄 반응들이 따라오기를 기대한다. 윤성은 영화평론가
  • 영화 ‘겟아웃’, 안방 상영 “상상도 못한 이야기..충격 공포”

    영화 ‘겟아웃’, 안방 상영 “상상도 못한 이야기..충격 공포”

    오늘(19일) 16시 30분부터 18시 40분까지 영화채널 OCN에서 영화 ‘겟아웃(Get Out)’이 방송된다. 지난 2017년 5월 개봉한 스릴러 공포영화 ‘겟아웃’은 흑인 남자 크리스(다니엘 칼루야)가 백인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엄스)의 집에 초대 받으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미국에서 코미디의 대부이자 에미상 수상자인 조던 필 감독의 데뷔작으로 알려져 더욱 눈길을 끈다. 관람객 평점 8.45, 네티즌 평점 8.26, 평론가 평점 7.14의 높은 평점을 받았으며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한국판 ‘곡성’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수많은 은유와 메타포가 곳곳에 숨어있다. 기존의 ‘깜짝 놀라게 하는’ 할리우드 공포영화와는 다른 신선한 접근법으로 사회적 문제와 스릴러를 적절히 조합하여 완성도 높은 공포를 만들어냈다. 제작사 블룸하우스는 “영화 ‘겟아웃’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색다른 공포를 예고하며,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서스펜스로 북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겟아웃’은 개봉 당시 ‘미국판 곡성’이라 불리우며 관심을 끌기도 했다. 남자 주인공을 맡은 대니얼 칼루야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로 국내에서는 ‘겟아웃’을 통해 인지도를 넓혔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칸 영화제에도 어린이집 생겨…영화계에 부는 워라벨 바람

    칸 영화제에도 어린이집 생겨…영화계에 부는 워라벨 바람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로 프랑스 남부 칸에서 개최 중인 칸 국제영화제에 어린이집이 생겨 관심이 쏠리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요트로 가득한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어린이집은 워킹맘 영화인 세 명의 아이디어에서 탄생했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밝고 통풍이 잘되는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바로 VIP 고객이다. 어린이집의 이름은 ‘빨간 풍선’(Le Ballon Rouge). 1956년 칸 국제영화제 단편 부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동명의 프랑스 단편영화(알베르 라모리스 감독)에서 착안했는데 영화에서처럼 아이들과 우정 어린 교감을 나누는 빨간 풍선이 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영화제에서는 화려한 셀러브리티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갈 뿐 아이가 있는 영화인들에게 배려가 거의 없어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올해 처음으로 이 영화제는 영화계의 부모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특별한 어린이집을 열었다. 이는 칸 영화제에 아이를 위한 시설의 부족에 격노했던 미국 맘스인필름 그룹이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에 마련한 비슷한 시설인 놀이방 및 낮잠방의 뒤를 이은 것이다. 올해 처음 칸 영화제에 참석한 미국 배우 게일 그리브스는 이번 영화제 동안 2살짜리 딸 아라벨라를 돌봐줄 돌보미를 고용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12일 동안 개인 돌보미를 쓰면 그 비용은 만만치 않지만, 인터넷에서 빨간 풍선을 발견하게 돼 즉시 예약했다고 이 배우는 설명했다.특히 공식 참가자는 특별 이용권을 받을 수 있으며 하루 50유로(약 6만7000원)에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8시간 동안 어린이집을 이용할 수 있다. 빨간 풍선을 만든 여성 영화인 3인은 서로 워라벨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다가 몇 달 전 이런 아이디어가 생각나 공동으로 ‘영화제에서 육아하기’(Parenting at Film Festivals)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 중 한 명인 호주 출신의 영화제프로그래머 미셸 케리는 영화제에서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참고로 영화제프로그래머는 영화제의 방향설정과 출품작 선정 그리고 각종 이벤트 계획 등 영화제 개최 전반에 대해 총괄한다. 그녀는 지난해 영화제에서는 어린 아들의 모우수유 탓에 회장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는 호텔 방으로 급히 돌아가야 했다. 그때 너무 힘들고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케리는 어린이집은 출산 뒤 직장에 복귀하는 젊은 어머니들에게 특히 도움이 된다고 지적했다. 케리에 따르면 현재 어린이집에 등록한 부모는 50명이며 머물고 있는 아이는 17명이다. 아이를 맡긴 부모들 중 1명은 수상자 중 한 명이다. 어린이집의 시설 비용은 영화 업계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며 보육 비용은 12개가 넘는 기업과 단체의 기부금과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마련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AFP 연합뉴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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