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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교향악단·서울시향/‘닮은 꼴’ 팝스 콘서트 나란히

    ◎KBS 교향악단­20∼21일/서울시향­21∼23일/외국 유명지휘자 초청… 영화음악·팝송 선사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팝 음악의 독특한 맛을 즐길수 있는 두 개의 무대가 나란히 마련된다. KBS교향악단과 서울시립교향악단이 동시에 펼치는 팝 음악 경쟁무대 ‘97 팝스 콘서트’.음악회 이름도 똑같고 시기도 각각 20∼21일과 21∼23일 하오 7시30분으로 거의 겹친다.외국초청 유명 지휘자에게 지휘봉을 맡긴 점이나 영화음악이 주가 된다는 것도 닮았다.장소만 달라서 서울 KBS홀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KBS교향악단은 이번 콘서트에서 미국 럽복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 앨버트 쉬람의 지휘로 추억의 명화와 만화영화,히트 팝송 등 3가지 음악을 연주한다. 제1부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인디아나 존스’ ‘대부’ ‘에비타’ ‘스타워즈’ ‘록키’ 등 일반에 잘 알려진 5개의 영화음악으로 꾸며지며 2부는 ‘미녀와 야수’ ‘포카혼타스’ ‘알라딘’ ‘라이온 킹’ 등 화제의 만화영화 주제곡으로 이어간다.이어 3부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글로리아 에스테판의 히트곡 및 ‘예스터 데이’ ‘러브 이스 블루’ ‘코코모’ 등 추억속의 유명 팝들을 들려준다. 특히 큐 프로젝트라는 영상장비를 이용,무대 뒤편 대형스크린에 해당 영화나 만화의 장면을 비추어 음악과 영상을 함께 즐길수 있게 해주며 만화영화 주제곡 연주때는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활약중인 소프라노 최주희와 가수 유열이 특별출연,직접 노래도 부른다. 세종문화회관이 올해로 15번째 마련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콘서트는 21일 ‘베스트 팝과 영화음악’,22일 ‘뮤지컬 그리고 팝’,23일 ‘화려한 영화음악과 울림소리’ 등 날짜별로 주제를 달리한 연주와 가창의 음악회. 미국의 여류지휘자 조이스 해밀턴이 지휘와 트럼펫 협연을 맡아 ‘스타 워즈’와 ‘주라기공원’ ‘배트맨’ ‘사랑과 영혼’ 등 익숙한 영화음악들을 연주하며 쿨의 ‘운명’과 김돈규의 ‘나만의 슬픔’ 등 한국가요도 들려준다.특히 최경환등 4명의 서울시향 타악주자가 만드는 ‘키친 포크션 마치’는 주방기구들이 엮어내는 리듬의 역동성을 선사해준다.가수 박진영과 윤복희,소리꾼 장사익이 순서대로 하루씩 특별출연,열정의 무대도 마련한다. 문의 KBS홀(781­1571),세종문화회관(3991­626∼8).
  • 민음사,탄생 120주년맞아 헤르만 헤세선집 12권 발간

    ◎‘추억의 책장’에서 다시 만난 헤세/독 주어캄프사와 한국어판 독점출판 계약/‘데미안’ 등 윤문 피하고 원문에 최대한 충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알은 세계이다.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왠지 모를 공허와 고립감,쓸쓸함속에 홀로 침잠하던 젊은 시절,우리는 한번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읽으며 청춘의 통과의례를 치룬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동양의 신비주의와도 맞닿아 있는 그의 정신세계에서 어떤 마음의 위안이라도 찾기 위해서 였을까.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젊은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헤르만 헤세(1877∼1962).올해는 독일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헤세가 태어난지 120년이 되는 해다. 도서출판 민음사는 이에 맞춰 모두 12권의 헤르만 헤세 선집을 발간한다.독일 주어캄프사와 저작권 계약을 체결,헤세 작품의 한국어판을 독점 출판하는 것.현재 유통되고 있는 헤세 작품의 번역본들은 대부분 십수년전에 번역된 것이거나 심지어 역자가 누구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 판본을 그대로 옮겨 출간했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다.이에 비해 민음사의 헤세 선집은 지나친 윤문을 피했으며 좀 건조하더라도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번역,헤세 문학의 새로운 번역 정본으로 평가할 만하다.이번에 1차분으로 선보인 작품은 ‘데미안’‘페터 카멘친트’‘수레바퀴 아래서’‘크눌프’ 등 4권이다. 헤세는 젊음의 언어로 말한다.헤세가 창조해낸 인물들은 과거의 유산이나 권위 따위는 무덤으로 보낸다.대신 스스로의 한계를 부수고 성숙해간다.“젊은 세대가 있는 곳이면 그 어디서나 헤세의 작품이 읽힌다”는 명제는 그런 점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데미안’은 순진무구한 한 젊은이의 성장기다.어느날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 주인공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상징적인 수법과 신화적인 모티프로 그린다.작품의 화자인 싱클레어의 친구 데미안은 당대의 문화와 문명비판적인 사고가 구현된 인물.헤세는 이 데미안을 통해 삶의 근원과 고유한 자아로 돌아갈 것을 역설한다.다시 말해 고정된 세계의 통념과 낡은 권위를 깨뜨려야 한다는 것이다.헤세 자신의 마울브론 신학교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자서전 같은 작품.한스 기벤라트라는 투명한 영혼의 주인공이 학교와 사회가 빚어내는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서서히 질식되어 가는 이야기다.이 작품 역시 인간집단의 불합리한 권위와 그것이 초래하는 비극을 다룬다.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이 어두운 유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리게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페터 카멘친트’는 헤세에게 작가적 명성을 안겨준 첫 장편소설.처녀작답게 ‘페터 카멘친트’에는 신선함이 배어 있다.알프스 고지대에 사는 주인공 카멘친트는 미지의 세계를 동경한 나머지 고향을 등지고 ‘세상’으로 나간다.작가가 되어 얼마간의 세속적 명예를 얻고 예술가들과 교류도 갖지만 그는 체질화된 고독을 버리지 못한다.그러던 중 곱추 보피와 친구가 되고,그는 마침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온다.이 소설은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그렇듯이 자연·신·인간의 관계,나아가 그 조화와 합일을주제로 삼는다.‘크눌프’는 타인에 대한 신뢰를 배반당한 한 방랑자의 자유로운 영혼을 다룬다.헤세가 ‘크눌프’를 통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다. 불확실성과 자아상실이 극점에 이른 이 시대,인간에 대한 진실한 믿음으로 한층 감동적인 울림을 주는 헤세.그의 문학에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유로우면서도 세계와 조화를 이루는 개체의 창조’가 아닐까.이번에 소개되는 헤세 선집을 통해 독자들은 헤세의 이같은 도저한 문학정신이 얼마나 굵은 물줄기로 흐르고 있는가를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한편 민음사는 2차분으로 ‘황야의 이리’‘나르치스와 골드문트’‘싯다르타’를 10월 중순경 내놓는데 이어 ‘유리알 유희’‘시집’‘동방순례’‘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동화’를 내년초까지 펴내 헤세 선집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 파라켈수스/에른스트 카이저 지음(화제의 책)

    ◎‘의학계의 루터’ 파라케수스 평전 스위스 태생의 의사이자 화학자,철학자인 파라켈수스에 대한 평전.‘의학계의 루터’라고 불렸던 파라켈수스는 쿠자누스·브루노와 함께 중세말∼르네상스 시대 초기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꼽힌다.중세철학은 신의 존재,영혼불멸,신의 섭리,부활 등 초월적인 것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반면 르네상스 철학은 세계의 무한성,정신과 자연의 통일,개체의 해방에 관한 사상이 핵심을 이룬다.이 책은 의학자이기에 앞서 전형적인 인문과학자요 시인이었던 파라켈수스의 다채로운 사유세계의 전경을 살핀다. 파라켈수스의 세계상과 세계관은 그노시스(gnosis),곧 영지와 중세 유대교의 신비주의인 카발라(kabbala) 식의 신플라톤적인 사상이 주류를 이룬다.나아가 그의 사상은 종말신학에서 출발해 성사론을 거쳐 구세론,그리스도의 속죄설에까지 이어진다.이와 관련,스위스의 심리학자인 융은 “파라켈수스는 완전한 의미의 연금술 철학자였다.그의 종교적 세계관은 그 당시의 기독교적 사유 및 신앙과 날카롭게 대립했다”고 지적한다.“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하인이 아니다”라는게 파라켈수스의 좌우명.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파라켈수스 평전으로 ‘한길 로로로’시리즈 17번째 권으로 나왔다.강영계 옮김 한길사 8천원.
  • 도예가 윤광조(이세기의 인물탐구:139)

    ◎분청사기만을 고집하는 영원한 ‘도공’/전통양식에 자기 특유의 ‘작품 혼’ 담아/삶의 규칙·구속 배제하는 ‘자유주의자’ 질끈 동여맨 동자머리에 광목으로 만든 바지 저고리,운동화나 짚신을 신고 윤광조는 전혀 예기치 않은 자리에 바람처럼 나타난다.나이를 비껴가는 해사한 용모탓에 대부분은 그를 여자인줄로 착각하는 예가 흔하다.그림을 그린다든가 시를 쓴다든가 절에서 도를 닦는 현대화된 여승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러나 전 국립박물관장이던 최순우씨가 그렇게도 아끼고 자랑해 마지않던 ‘분청사기의 명인’, 바로 그 윤광조인 것이다.도예가는 많지만 분청사기만을 고집하는 희소성으로 인해 그는 지금도 평자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다. ○해사한 용모 여증 착각 경기도 광주에 머물다가 그가 가마를 경주로 옮긴 것은 지금부터 3년전이다.경주시내에서 한 시간이상 골짜기로 꺾어지르는 안강에 칩거해 있다가 전시가 있을때만 서울에 올라와서는 대낮부터 술독에 빠져버린다.그리고 그를 구속하려는 모든 규칙이나 구속을 배제한채 ‘나는어디 한군데 걸릴 것 없는 바람’임을 스스로 자랑삼는다.심지어는 가족에게 얽매이지도 않고 그에게 배우러 오는 제자들마저 그의 고독에 지쳐 오래 머무는 법이 없다.작품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뜻에서 가족은 서울에 남겨두고 그는 주로 경주에 파묻혀 오로지 도공으로만 살고 있다.반면 정감이 넘치고 친구를 좋아하되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는 고집에서 대선배 최순우씨와 원로 화가 장욱진씨만을 스승으로 손꼽고 뉴욕에서 활동하던 화가 정찬승과의 우정을 소중히 간직한다.그러나 그들마저 모두 타계한 지금 그는 극도로 외로울 수 밖에 없다. 그는 처음부터 도예가의 꿈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자유롭고 낙천적인 성격탓에 백색 세라복을 입는 해군이나 태평양을 누비는 마도로스,정치가나 사업가를 꿈꾸기도 했다.공무원이던 윤득호씨와 대한부인회 초대조직부장을 지낸 박채련씨의 4남2녀중 아들로 막내.부친은 6·25때 작고하고 홀어머니밑에서 자랐으나 활동적인 어머니는 아들이 정치가가 되기를 바랐고 그는 해군사관학교와 연세대 경제과 낙방후 홍대미대에 진학했다.도자기로 돈 것은 홍대에 강의를 나오던 최순우씨가 도자기만의 깊고 푸른맛, 특히 분장청회사기의 남성적인 소박한 매력을 끊임없이 권유해주었기 때문이다.또 도예를 하기 위해서는 도자기와 관련된 문학 철학 미술 역사를 두루 공부할 것을 충고했다.이른바 과묵하고 심도있게 지도하면서 정성껏 만든 작품을 보여드리면 스승은 ‘좋으네’ 한마디 뿐이었다. 74년에는 문공부가 주관하는 도자기수업을 위해 도일,그때도 임진왜란때 건너간 도공의 후예들이 어떻게 도자기를 이어가고 있는가,개인공방에서 작가들이 작업에 임하는 태도와 가마를 운영하는 방법을 배우기로 했었다.수업기간은 3년예정이었으나 그들의 도자기가 하나같이 일본화된 것을 보고 그는 ‘내가 자란 땅에서 우리의 흙으로 나의 것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1년만에 귀국해버렸다. 윤광조의 분청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수반 항아리 문방구 제기 합과 화분을 통해 분청사기의 여러 기법을 다양하게 선보이게 되면서부터다.형태나 문양에서 전통적인 분청사기의 형식을 갖추되 연적이나 합,지통같은 원통형과 발의 형태를 절충하고 문양에서도 상감문과 귀얄문,조화와 인화를 고루 사용하면서 조선조 분청의 질서에 지나치게 맹종하지 않았다.76년 개인전 팸플릿에서 최순우씨는 ‘그의 표현애속에 깃든 아첨없는 양감과 장식은 한국인다운 소탈의 아름다움을 넘치도록 길어올리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의 삶과 예술을 지속적으로 지배해온 것은 자유로움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다.그러다가 78년 현대화랑 박명자대표가 기획한 장욱진과의 합작전에서 그의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기면이 마르기 전에 작은 태토를 덧붙여 화장토를 바르거나 튀어나온 부분을 긁어내고 흙띠를 두르는 방법,또 기면을 무작위로 찔러 큰 붓질로 화장토를 입히고 그릇 전면에다 백토를 분장한 분청사기에다 장욱진 화백의 꾸미지 않은 동화는 절묘하게 어울렸다.평론가 이구열은 이때의 전시를 가리켜 ‘윤광조의 무심과 장욱진의 소박한 동심이 절로 맞아떨어져 마치 한 작가의 작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고 평했다. ○어릴땐 마도로스 선망 이무렵 그는 스승 장욱진씨의 손에 끌려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화신뒤 옹달샘에서 두주불사로 언제나 명정을 면치 못했다.‘술이 취해야만 모든 구태한 생각을 떨궈버리고 새로운 창의력을 얻는다’는 술철학으로 ‘술없이는 예술도 못하고 살맛도 없다’는 태도다.다만 아무리 취해도 ‘종횡무진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 그의 특기이자 남들이 놀라는 점이다.장욱진합작전에서 전람회개막 30분만에 작품이 모두 팔려나가자 비로소 가난에서 벗어나 경기도 광주에다 가마를 마련했고 그때 최순우씨가 집앞에 흐르는 맑은 곤지암천에 뜬 달을 보면서 ‘급월당’이란 당호를 지어내렸다. 이후 분청예술과 선종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깨달은 그는 83년 겨울 송광사에 입산,목탁을 두들기고 단소를 부는 좌선내관으로 도예의 형상에 무념무상의 자율성을 결합시킬수 있었다.형태는 더욱 명상적으로 되었고 ‘정’과 ‘화음’‘관’ 등의 화두로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방하착’의 상태에서 무늬를 자유롭게 그려 나갔다.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아무렇게나 빚은듯한 편안한 경지와 나무와 바람의 이미지를 속도감있게 긁어낸 추상적 조화의 성취가 그것이다. ○“술없이는 살맛도 없다” 도자기는 다른 예술과는 달리 단한번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흙과의 끝임없는 대화와 실험과 도전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으며 과도한 장식이나 세련된 묘사보다 ‘무작위의 작위’에 이르기 위해 그는 피와 살과 영혼까지도 자연의 일부가 되기를 일념으로 추구해 나갔다.윤광조의 모습은 최순우씨의 표현대로 ‘물위에 뜬달’처럼 허심탄회하다.그래서 늘 자유롭게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인위와 조작이 없는 자연그대로의 ‘무하유지향’에서 그는 고매하고 순수한 예술가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연보 ▲1946년 함남 함흥 출생 ▲1970년 홍대 미대 공예학과 졸업 ▲1973년 동아공예대전 대상수상 ▲1976년 서울신세계미술관 개인전 ▲1978년 경기도 광주 초월면에 급월요개설,서울현대화랑 개인전 ▲1979년 공간도예대전 우수상 수상 ▲1984년 서울예화랑 개인전 ▲1986년 일본 교토크래프트센터 갤러리및 서울 한국미술관 개인전 ▲1987년 서울현대화랑 개인전 ▲1991년 호주시드니 맥쿼리갤러리 및 부산지니스화랑,서울선화랑 개인전 ▲1994년 경북 경주 안강읍이주 ▲1997년 서울 다도화랑 및 통인화랑 ‘윤광조 그릇전’,독일 프랑크푸르트(10월) 및 삼성갤러리 오픈기념전(11월) ▷작품소장◁ 국립현대미술관,호암미술관,워커힐미술관,런던 대영박물관,호주시드니 NSW아트갤러리외 간송 전형필 선생 동상도판제작
  • 악마주의(외언내언)

    아이언 메이든,헬로윈,로지오스본의 재킷은 사람의 머리가 거리에 홀로 나뒹굴거나 뼈만 앙상하게 남은 회색빛 악마가 시뻘건 눈알을 부라리며 이빨을 드러낸채 침을 뚝뚝 흘리기도 한다.70년대엔 보이조지처럼 얼굴을 반으로 딱 잘라서 한쪽은 남장,다른 한쪽은 짙은 여장을 했다든가,그룹 ‘키스’의 눈가에 바른 시뻘건 별그림과 산 동물을 잡아먹은 듯한 입술분장에서 혐오감을 금할수 없었다.이후 마이클 잭슨이 살아있는 시체인 좀비가 되어 수많은 유령,넘치는 시체들과 춤을 추는 장면을 보였고 바지의 지퍼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으로 전국민의 지탄을 사기도 했다. 날이 갈수록 폭력성과 선정성 퇴폐성이 극을 이루더니 이번엔 미국 악마주의 계열 그룹의 음반이 ‘너를 죽이고 싶어’ ‘잠재웠던 분노가 되살아나고 나의 피가 차가워지네’등 죽음찬미와 악마의 부활을 극도로 경배하는 내용을 담은 음반유통으로 충격을 주고 있다.더구나 ‘VILE(사오)’‘DEADLY TRACKS(죽음의 흔적)’로 타이틀을 달고 망치로 짓이겨 핏줄기가 낭자한 얼굴,성폭행후목졸려 숨진 시체등 보기만 해도 오싹해지는 그림을 재킷에 버젓이 담고 있다. 악마주의란 19세기 서유럽에서 인생의 추악·퇴폐·괴이·전율·공포등의 암흑면을 그려 시미와 화미를 찾아낸다는 차원에서 보들레르 등 시인 화가들이 시도한 문예상의 한 경향이다.그러나 지금의 악마주의란 순수한 동심을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졸렬한 상혼에 불과하다. 악에서 생긴 악은 파문을 그려 악의 모습이 번지고 확장된다고 보들레르는 지적한다.따라서 니체의 ‘악이란 연약한 것에서 유래하는 모든것’이란 말은 우리에게 지금 어떤 허점과 약점이 있느냐,왜 스스로 연약함을 자초하느냐는 자문을 하게 한다.가뜩이나 폭력만화니 음란비디오 등으로 해악이 넘치는 마당에 이를 틈타서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자들의 죄질은 더욱 악질일 수밖에 없다.어떤 악도 꽃봉오리일때는 쉽게 뭉갤수 있지만 그것이 성장함에 따라서는 한층 강하게 된다.움트기 전에 싹을 자른다는 차원에서 이와 관련된 범죄자들을 일벌백계로 가차없이 다스려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 박재삼 추모시집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병상서 노래한 시와 눈물 〈어쩌다가 땅 위에 태어나서/기껏해야 한 칠십년/결국은 울다가 웃다가 가네/이 기간 동안에 내가 만난 사람은 헤아릴수 없이 많지만/그중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점지해준/빛나고 선택받은 인연을/물방울 어리는 거미줄로 이승에 그어 놓고/그것을 지울수 없는 낙인으로 보태며/나는 꺼져갈까 하네〉(박재삼의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 전문).미당 서정주는 박재삼 시인을 서러움을 가장 아름답게 성취한 자유인이라고 불렀다.극심한 투병생활중에도 맑은 눈빛으로 영혼의 순수를 노래했던 박 시인은 지난 6월 지병인 신부전증으로 그의 시구처럼 지울수 없는 자취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우리 문학사에 ‘슬픔의 시인’‘서러움의 시인’으로 각인될 박재삼 시인을 추모하는 서정시선집 ‘사랑하는 사람을 남기고’(오상)가 나왔다.이번 시선집에는 ‘울음이 타는 가을강’‘천년의 바람’‘찬란한 미지수’‘바람의 인연’‘빛나는 부활’‘천지의 교향악’‘허무의 큰 괄호 안에서’‘사르트르사원 부근’‘바라나시 구경’등70여편의 시가 실렸다.시인은 ‘시작노트를 대신해서’라는 글을 통해 ‘시와 눈물이 있어야 생활에 물기가 있다’는 자신의 지론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 중 천재시인 고성 시집 ‘나는 제멋대로야’

    ◎문혁시대 어둠을 딛고… 시구마다 서린 순수한 영혼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시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으로 꼽히는 고성.그의 대표시 모음집 ‘나는 제멋대로야’(김태성 옮김)가 실천문학사에서 나왔다.아내를 도끼로 살해하고 자신은 목매 자살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천재시인.그는 한국 독자들에게 자전적 소설 ‘잉얼’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세간에 알려진 끔찍한 사건의 주인공이라는 피상적인 생각만으로 고성의 시를 대하는 독자라면 그의 시에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시인의 더없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 시구 마디마디에 서려 있기 때문이다.표제작인 ‘나는 제멋대로야’를 읽다보면 그가 얼마나 영롱한 영혼의 소유자였던가를 알 수 있다. 〈어쩌면/나는 엄마가 응석받이로 키운 아이인지 몰라/나는 제멋대로야/나는 매 순간이/색색깔의 크레용처럼 그렇게 아름답기를/바래…〉.37세로 지상의 삶을 마감한 고성은 세상과 섞여 들어가지 못한 채 세상 밖에서 겉돌며 신음하던 동화같은 인물이다.그의 시 역시 그런 동화적인 순수성과 몽상적인 이미지들로 가득차 있다. 중국 현대 ‘몽롱시’군단의 선두주자로 손꼽히는 그는 문화대혁명을 겪은 세대의 어둠과 상처를 생생하게 그려낸다.‘몽롱시’군단은 문혁이 끝나고 자유의 물결이 밀려든 80년대,난해한 은유와 회삽한 시어로 현실을 풍자하고 새 시대의 도래를 노래한 일군의 젊은 시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고성의 대표적인 시로는 ‘한 세대 사람’을 들수 있다.단 두줄로 된 이 시는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하나의 잠언으로 통한다.〈어둔 밤은 내게 검은 눈동자를 주었으나/나는 오히려 그것으로 세상의 빛을 찾는다〉.그의 시 이면에는 중국 현대사의 양지와 음지가 상징적으로 각인돼 있다.
  • 페루 쿠스코(세계 문화유산 순례:36)

    ◎잉카제국의 수도… 해발 3,650m에 거대한 요새가…/둘레 1,300m… 중앙엔 대형 해시계/하루 2만명 동원 83년 걸쳐 완성 쿠스코(Cuzco)는 잉카제국의 수도였다.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수목이 드문 안데스 산맥의 줄기 사이에 고고하게 자리한 고대도시.하늘에서 내려다본 쿠스코에는 신비가 가득했다.흡사 한마리의 푸마가 먹이를 막 덮치기라도 하듯 웅크린 형상을 한 쿠스코는 아직도 잉카의 웅혼한 정기를 뿜어내고 있었다.그것은 곧 하늘은 독수리가,땅은 푸마가,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던 잉카인들의 정신세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비행기로 수도 리마를 떠나 남동쪽으로 1천㎞쯤 날았을까.만년설의 장관을 구경하는 것도 잠깐,따갑게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해발 3천248m 고지에 덩그러니 깔린 공항 활주로에 닿았다.트랩을 내려서는 순간부터 숨이 가빠지면서 어지럼증을 느꼈다.여장을 풀기 위해 호텔에 들어서자 지배인이 마테 데 코카라는 차를 한잔 내놓았다.코카인의 원료로도 쓰이는 코카나무 잎사귀로 만든 차다.과거 잉카인들이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했던 것이라고 했다. ○아마존강 시작되는 곳 쿠스코는 잉카의 본래 말인 케초아어로 ‘배꼽’이라는 뜻이다.우주의 중심을 쿠스코라고 생각했던 잉카인의 의식이 깔린 이름이다.또 이곳이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관통하는 아마존강이 시작되는 곳이고 보면,잉카인들은 “모든 길은 쿠스코로 통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공항에서 시내 중심가로 이르는 ‘태양의 길’어귀에는 잉카제국 아홉번째 왕인 파차쿠텍 잉카 유판키의 동상이 우뚝했다.잉카문명의 최번성기를 이룩했던 인물이었다.유판키왕의 동상을 지나면 잉카인의 정신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형상이 나타난다.푸마의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위치한 파차 데 푸마르 추팡이라는 석조물이 그것이다.투유마요와 사피라는 두 강을 끼고 발전했던 잉카문명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는듯 했다.태양을 의미하는 둥근 돌을 중심으로 양쪽에 세워진 돌기둥 사이로 물이 흘렀다. 잉카인들은 뛰어난 도로건설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잉카의 도로는 크게 해안도로와 산악도로로 구분됐다.해안도로는 지금의 에콰도르 북쪽에서 페루해안을 따라 아르헨티나 북쪽까지 이어졌다.산악도로는 에콰도르 북쪽을 출발해 안데스 산맥을 뚫고 쿠스코∼볼리비아∼아르헨티나로 통했다.그런데 도로를 따라 4㎞마다 역참마을을 만들었다.차스키라는 파발꾼도 두어 쿠스코에서 내린 잉카왕의 명령이 3일만에 3천㎞가 넘는 에콰도르 북쪽까지 닿았다고 한다.특히 250m를 뻗어있는 가장 잉카적인 길 카예 로레토(Calle Loreto)를 걷다보면,잉카인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반듯하게 도로를 건설했는지 쉽게 알수 있다. 그러나 잉카의 도로는 잉카제국이 허무하게 무너지는데 큰 몫을 했다.1533년 11월15일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단지 163명의 군사를 이끌고 쿠스코를 공략했을때 잉카 도로는 활짝 열린 대통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태양의 신전도 웅장 시내에서 차를 타고 20여분쯤 코리칸차 언덕을 올랐다.무수한 신전 터가 눈에 들어왔다.그중에서도 한가운데 위치한 태양의 신전은 너무 웅장했다.스페인 정복자들이 쿠스코를 점령했을때 높이가 60m에 달했던 이 신전은 외벽이 모두 금판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그러나 정복당한 문명 앞에는 가혹한 시련이 기다렸다.정복자들은 기초만 남긴채 신전을 헐어버렸다.그리고 나서 신전의 기초위에 식민시대 건축물과 성당을 세웠다.잉카의 신이 노한 것일까.몇차례의 지진으로 식민시대 건물들은 대부분 무너졌다.반면 잉카인들이 세운 건물의 기초나 벽면은 끄덕없이 남아있다.정교하게 돌을 깎아 벽돌을 쌓듯 만든 벽면은 지금도 면도날이 들어갈 틈새조차 없을 만큼 견고했다. 잉카의 신전은 어딜가나 문이 3개씩 나있었다.잉카인들이 믿었던 세가지 영혼을 위한 것이었다.즉 땅위에 있는 영혼과 사후태양신에게로 간 영혼,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영혼이 이들 3개의 문을 드나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말하자면 잉카의 신전들은 신만을 위한 것이었다기 보다는 신과 인간을 잇는 성소였던 셈이다. ○매년 6월24일 태양제 쿠스코에 남아있는 잉카유적의 압권은 ‘독수리여 날개를 펄럭이라’는 뜻을 가진 3천650m 고지대 유적 삭사이와만(Sacsayhuaman)이다.푸마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삭사이와만은 유판키왕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하루 2만여명씩 인원을 동원한 끝에 83년에 걸쳐 완성한 거대한 요새다.높이 7m에 무게가 126톤이 나가는 엄청나게 큰 돌들로 쌓은 성벽은 1천300m에 이른다.또 정상에는 거대한 해시계를 설치했다.당시 주요 농작물이었던 감자·옥수수의 재배나 수확시기를 가늠하기 위한 시계라는 것이다. 삭사이와만은 잉카제국 멸망후 잉카재건운동을 이끌었던 마지막 왕 망코의 근거지로도 활용됐다.그러나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스페인군에 패배한 망코는 결국 삭사이와만을 버리고 잉카 최후의 유적지로 알려진 전설속의 도시 빌르카밤바(Vilcabamba)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삭사이와만 앞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6월24일이면 인티 라이미(Inti Raymi)라는 태양제가 열린다.태양제와 관련해서는 전설 하나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잉카의 11대 왕 와이나 카파크가 태양제를 지내던중 갑자기 하늘을 날던 독수리가 떨어졌다.당시 독수리는 왕을 상징했기에 잉카사회가 발칵 뒤집혔다.그때가 1523년인데,그로부터 정확히 10년후 잉카제국은 허망하게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독수리의 추락은 잉카의 멸망을 암시한 신의 예언이었을까. 잉카의 흔적은 곳곳에 널려있다.삭사이와만이 쿠스코의 동쪽을 지키는 요새였다면,서쪽 언덕의 켄코(Quenco)유적은 땅속을 지배하는 뱀을 제사한 정신적 요새다.또 언덕 중간에 잉카왕을 알현하러온 각 지역의 족장들이 몸을 씻던 목욕탕 탐보 마차이,숙박시설인 푸카 푸카라 등이 황금제국 잉카의 영화를 증거하고 있다.
  • 샤갈/75년만에 교향 ‘방문’

    ◎22년 35세때 러 혁명후 탈출… 생애 마감때까지 불서 활동/스위스 손녀가 작품71점 벨로루시의 민스크서 전시회 마르크 샤갈이 고향인 벨로루시에서 쫓겨난지 75년만에 고향을 찾았다.유태인이면서 옛소련공화국인 벨로루시 태생인 그는 35세때인 1922년 러시아혁명후 소련을 탈출한다.당시 공산주의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피하려 외국으로 나가려는 지성인의 물결에 합류,이후 프랑스에 정착한다.그가 고향을 등지자 소련당국은 고향인 벨로루시는 물론 소련 전지역에서 그의 작품이 전시되는 것을 영구금지시켰다.물론 소련은 샤갈이 미처 갖고 나가지 못한 작품을 반출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샤갈의 작품이 고향을 다시 찾게 된 것은 스위스에 사는 손녀 메이어 그라버씨(55)의 주선때문이다.그녀는 『샤갈 작품의 정신세계는 알게 모르게 그의 고향이 표현돼 있어 고향을 찾지 않고는 그의 영혼을 달래주기 힘들었다』며 전시회의 의미를 설명한다. 6월 초부터 민스크박물관에서 시작된 전시회의 또 다른 의미는 이를 계기로 옛소련때문에 ‘문화 황무지’로 남을수 밖에 없었던 벨로루시 공화국에 국가자존심을 회복시켜줄 것이라는 점이다.아직도 상당수의 예술인들은 샤갈이 벨로루시에서 청소년기와 중년을 보냈다는 사실을 모른다.당시 소련당국은 그가 유럽으로 탈출하면서 모든 백과사전과 예술관련사전에서 그의 이름을 지웠거나 벨로루시태생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못하게 한 때문이다. 샤갈이 고향 벨로루시에서 얼마나 탄압을 받았는가는 샤갈탄생100주년 기념을 즈음한 옛소련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1987년 이스라엘이 탄생100주년 기념전을 화려하게 열자,소련의 지방정부였던 벨로루시는 일부 백과사전편집진들에게 압력을 넣어 반유태인 논조로 글을 싣도록 강요했다.한 편집인이 법적소송을 걸다 강제사직 당했고 한 영화인은 샤갈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제작했으나 벨로루시정부는 시사회조차 갖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의 미술인들은 『우리가 알기론 샤갈이 레닌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오히려 레닌이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림을 그려 당국에서 추방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가 반공산주의자의 선봉이었음을 지적했다. 그라버씨가 가져올 작품은 구아슈 수채화물 8점,샤갈작품모음집에서의 수채화 4점,파리 현대미술관과 그의 생애 대부분을 보냈던 프랑스 니스의 샤갈미술관에서 빌려온 석판화 59점이다.샤갈이 해금돼 그의 기념관이 벨로루시 수도 민스크에서 동쪽으로 250킬로미터 떨어진 비테브스크 포크로브스카야거리 한 구석에 세워진 것은 1992년이었다.
  • 신작시집 「그 여자,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낸 김정란씨

    ◎“내 시의 난해함은 절박한 구원의 외침”/상투적인 감상·자기연민 절제/격렬한 자기부정 거쳐 「나」 발견 〈내 가슴속엔 어떤 비규정성의 경사가 있어/그건 지독히 강력하게 자기 원칙을 주장하지/날이면 날마다 자기 논리 안에서 강화되기만 하는/어느날 뒤돌아보니 이미 늦은 거야/돌아갈 길이 지워졌어…〉(「모래사면」).중견 여성시인 김정란씨(45·상지대 교수)가 신작 시집 「그 여자,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세계사)를 냈다.「다시 시작하는 나비」「매혹,혹은 겹침」에 이어 세번째.그의 시의 고유상표가 되다시피한 「난해함」은 이번 시집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그는 왜 「딱딱한 고기」같은 시들을 쓰는 것일까. 『제 시가 전통정서와 가깝지 않다는 점에서 쉽게 읽히지 않을수 있습니다.하지만 저에게 있어 형이상학은 관념의 사치가 아니라 절박한 구원의 전략이에요.고통스런 영혼의 해방을 위한 강렬한 내적 자아의 표백,그것을 시라고 부를수 있겠지요』 「영적 가상공간」을 오가는 김씨의 시는 다분히 초현실주의적이다.그러나 그의 시는 상투적인 감상의 과잉이나 달콤한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민들레 홀씨처럼 가녀린 모습이지만 그는 적어도 모가지만 길고 관만 향기로운 「사슴 시인」은 아니다.그가 시로써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 혹은 세상을 읽는 방법은 더없이 방정하고 견고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나를 보듬지 않는다/나는 기꺼이 나를 버린다〉(「내면의 천사」)라고 말하는 시인은 내친 김에 〈당당하라,너를 죽여라,그리고 너 자신이 되라〉(「침묵,바닷가에서 주운 칼날」)는 신탁에까지 나아간다.첫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에서의 격렬한 자아부정의 정신은 두번째 시집 「매혹,혹은 겹침」에서의 숙성을 거쳐 「그 여자,…」에서 극점에 이른다.그의 시편들에는 영혼의 연단을 통해 자아의 완성에 이르려는 시인의 견인주의적 세계관이 짙게 배어 있다. 『어쩌면 시는 「병든 언술」이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지도 모릅니다.병든 말들을 사랑하고 「언어의 옹이」를 풀어주는 것이 시인의 몫이구요.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쓸쓸한 영혼에 따뜻한 거처를 마련해주고 싶어요』 김씨가 시적 지성의 도구로 삼는 것은 영성주의.이번 시집은 가톨릭 성인이면서도 당대에는 이단으로 몰렸던 13세기의 영성신비가 성 요한의 영혼성숙의 길을 그대로 답습한다.주변과의 상상적인 결별상태에서 신에 대한 감각적 확신에 이르고,좌절과 자기희생의 국면을 거쳐 결국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전과정을 시화한다. 자신의 시정신의 핵심은 영적 유물론이라고 말하는 김씨는 『20세기에는 영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학적 화두로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을 보았을때 「영혼의 오라비」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작품에 대한 평단의 반응도 무척 좋았지요.제가 길어 올리는 영혼의 언어도 언젠가는 정당한 평가를 받을 날이 있겠지요』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에서 이브 본느프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불문학자이기도 한 그는 올안으로 「프랑스 현대시인 연구」(세계사)란 학술서도 펴낼 계획이다.
  • 인도 함피:상(세계 문화유산 순례:34)

    ◎찬란한 힌두문명의 잔해가 숨쉰다/50만 인구 북적이던 제국의 영화 간곳없고 황량한 폐허… 부서진 사원…/성소 비루팍샤 사원 줄잇는 참배객은 맨발로 해탈의 고행/사자머리에 인간의 몸체 흉몰스런 나라심하상에 머리7개 뱀신 「나가」가… 인도 남부의 거대한 유적도시 함피.14세기 중반 힌두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던 비자야나가르제국의 수도가 함피다.그 도시의 옛 영화를 찾아가는 길은 힌두교의 방랑승려 사두의 고행만큼이나 험난했다. ○비자야나가르제국의 수도 남인도 카르나타카주 호스펫에서 북동쪽으로 13㎞ 거리다.소형 3륜차 뒷부분에 2인용 좌석을 단 오토 릭샤를 타고 어둑 새벽길을 40분 남짓 달렸다.탈탈거리는 오토 릭샤의 운전사 어깨 너머로 황토빛 바위마을이 시야에 들어왔다.1336년 텔루구 부족의 두 왕자 하리하라와 북카가 세운 힌두왕국 비자야나가르가 남긴 「환상의 도시」 함피다.한때 르네상스기의 로마 인구에 버금가는 50만명의 사람들이 살았던 함피는 중세 델리의 전성기에 필적할만큼 번성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역사상 유례없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비자야나가르제국은 1565년 이슬람세력의 침공으로 멸망하고,함피의 영광은 역사의 어둠속에 묻히고 말았다. ○16세기 이슬람침공에 멸망 함피는 지금은 고작 8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한적한 시골마을로 변했다.그 전경을 보기 위해 함피에서 제일 높은 마탕가 언덕에 올랐다.비자야나가르제국의 젖줄인 퉁가바드라강이 한가운데로 흘렀다.강 유역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40여개의 부서진 사원과 바위무더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더없이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무려 26㎢에 걸쳐 있는 이 유적군은 지난 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 전까지만 해도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함피의 폐허」를 더듬는 기자의 발걸음은 역사의 무게 만큼이나 경건했다. 먼저 함피에서 가장 중요하고 성스러운 사원으로 꼽히는 비루팍샤 사원으로 향했다.제국시절 화려하게 장식한 마차들이 달렸던 함피의 옛시장 바자르 길을 따라 한동안 걷자 높이가 52m나 되는 거대한 9층 고푸람(gopuram)이 나그네를 반겼다.고푸람은 도시나 궁궐 또는 사원의 입구에 세우는 층이 있는 힌두교식 탑이다.온갖 형상의 조각들로 뒤덮힌 고푸람을 뒤로 하고 비루팍샤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사원 안에서는 모두 맨발로 다녀야 했다.발을 내디딜 때마다 인두로 지지듯 뜨거운 땅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팜파파티 사원으로도 불리는 비루팍샤 사원은 비자야나가르 왕조 이전 호이살라 시대 말기에 처음 세워졌다.그리고 나서 1510년 툴루바 왕조의 크리슈나 데바 라야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개조됐다.비루팍샤 사원은 전형적인 비자야나가르 건축양식에 따라 널찍한 안뜰을 뒀다.장방형의 경내에는 현란한 만다파(mandapa,홀)와 묘당들이 즐비했다.그중에서 창조의 신인 브라마의 딸 팜파의 결혼을 선포하는 만다파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퉁가바드라강의 가느다란 물줄기가 사원의 노천 베란다를 타고 흘러 들어 부엌을 통해 안마당으로 새나가도록 한 설계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비루팍샤 경내엔 묘당 즐비 「비루팍샤」는 파괴의 신인 시바신의 또 다른 이름이다.시바는 브라만교의 경전 「리그 베다」에서는폭풍의 신 루드라의 존칭으로,길상을 뜻하는 형용사였다.그러나 시바는 훗날 토착적 요소와 결합해 대중적 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예배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비루팍샤 사원 안의 지성소에는 시바 링가(Shiva linga)라는 시바신의 남근상을 신주처럼 모셨다.그 주위는 신상에 예배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댔다.그들은 저마다 준비해온 야자를 그 자리에서 내리쳐 쪼갠뒤 야자 물을 머리에 바르거나 입술에 슬쩍 댔다가 신상앞에 흘렸다.그리고 무언가 간절히 빌고 있었다.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일까.그들을 보니 문득 『해탈의 길은 맨발로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는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수직으로 솟은 시바 링가와 신의 불꽃을 담은 신성한 불판,버터기름 타는듯한 누릿한 냄새….남인도 어느 힌두사원에서나 볼 수 있는 물신숭배 의식이다.하지만 마지막 힌두왕조의 옛 터전에서 베풀고 있는 그 의식은 보는 이들을 한껏 주술적인 신비감의 늪으로 빠뜨렸다.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에서도 신의 현현을느낄수 있는 영혼의 나라 인도.인도는 정녕 신들의 고향이다.인도의 모든 마을에는 사원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10억 인도 인구의 80% 이상이 힌두교를 믿는다.아니 믿는다기 보다는 힌두신에 취해 산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3억이 넘는다는 힌두신들의 어지러운 형상을 머리속에 그리며 햇볕 쏟아지는 광야를 끝없이 걸었다. 광야를 지나 물살 빠르기로 소문난 투루투 수로를 만났다.수로를 지나서 바나나밭을 끼고 돌자 사자 머리에 인간 몸통을 한 흉물스런 나라심하상이 유령처럼 나타났다.나라심하는 보존의 신인 비시누의 네번째 화신이다.1528년 크리슈나 데바 라야의 통치 후반기에 세워진 나라심하상은 높이가 6.7m로 함피에서 가장 큰 조각상이라 했다.마치 연화좌에 올라 요가를 수행하는 요기(yogi)처럼 앉아있는 나라심하의 꼭대기에는 머리가 7개 달린 뱀신 나가(naga)가 버티고 있다.기괴하기 짝이 없었다.나라심하의 왼쪽 무릎위에는 원래 비시누신의 배우자이자 행운과 미의 여신인 락슈미상이 있었다.그러나 무슬림의 약탈로 지금은 여신의 오른쪽 팔 흔적만 남아 있다. □여행 가이드 함피 유적지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교통의 요충지」 호스펫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제일 편하다.호스펫에서 함피의 중심지인 함피 바자르까지 가는 버스가 상오 6시30분부터 하오 8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된다.요금은 2.50루피(1루피는 우리 돈으로 30원 정도). 오토 릭샤를 이용하려면 50루피의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자전거를 빌리는 것도 경제적이다.호스펫,카말라푸람 등에 있는 자전거 대여점에서 10루피를 주면 하루동안 사용할 수 있다. 함피의 숙소 사정은 여의찮다.세면시설 정도를 갖춘 게스트하우스가 고작이다.그러나 호스펫에는 냉방장치가 된 초보적 단계의 호텔들이 몇군데 있다.호스펫의 숙소들은 모두 24시간제다.
  • 서양 중세철학의 백미 아퀴나스 명저/신학대전 번역본 본격 출간

    ◎정의채 신부 14년만에 30권중 4권째 내놔/신의 존재와 본질·인간의 덕목 등 두루 다뤄 서양의 중세사상을 완성한 인물로 꼽히는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의 「신학대전」.전30권을 목표로 번역에 착수한 이 방대한 저술이 4권째 간행되었다.그의 이름과 「신학대전」은 우리 종교계와 학계에도 널리 알려졌지만 내용을 대한 사람들은 흔치 않다.원전이 라틴어라는 언어문제와 독특한 내용 때문에 쉽사리 소개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저술의 번역은 원로 철학자이자 가톨릭의 사제인 정의채 신부(72)손에 이루어졌다.가톨릭대 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서강대 석좌교수로 봉직중인 그가 「신학대전」 번역에 손을 댄 것은 지난 1983년.두 해 뒤인 1985년 9월 제1권을 내놓고 나서 이번에 제4권을 출간하기까지 꼬박 12년이 걸렸다.제5권은 현재 담당 출판사인 바오로딸이 인쇄에 들어갔다.그리고 제6권은 우리말로 절반쯤 옮겨놓았다. 「신학대전」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1272부터 2년에 걸쳐쓴 대표적 저술로 원전은 3부로 되어있다.제1부에서는 신의 존재와본질·창조·천사·인간을 다루었다.제2부는 1,2편으로 나누어 인간의 목적과 행위·죄와 법을 골자로 한 도덕의 근본문제와 더불어 신앙과 사랑·정의와 용기·절제 따위의 덕에 관한 문제를 말했다.제3부는 그리스도론을 비롯한 신학문제를 들추어 냈다. 그러니까 신학 뿐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과 목적을 밝혀주면서 인간의 실재를 다룬 「신학대전」은 고전중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이 저술에 담긴 사상은 오늘날 유럽문화의 원천이 되었거니와 인류의 지적 유산으로 평가받는다.더구나 「신학대전」속에는 당시 유럽과 접촉한 그리스­로마와 아랍사상까지도 융화되었다.그의 사상에 세계성을 부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나온 번역본 제4권은 원전 제2부 1편에 해당한다.믿음을 비롯,희망·사랑·지혜와 정의의 덕,불의 등 8항목이 들어있다.각 항목의 테마에 반론과 본문을 제시하고,반론에 응답을 주는 형식으로 꾸몄다.믿음을 다룬 항목 한 절에서는 「홀로 또는 오직이라는 배타사가 하느님안에서 적합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그러나대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니라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의 궤변론에 따르면 홀로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지 않는 사람이다.그런데 하느님은 천사들과 거룩한 영혼들과 함께 하는 터라,홀로라 할 수 없다」.이 대목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되풀이만 한 것은 아니다.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흔적이 「신학대전」곳곳에 나타났다.「신학대전」번역과 완간을 필생의 과제로 삼은 정의채신부는 『서구사상이 여러 손을 거쳐 전수되어서는 학문을 제대로 연구할 수 없다』고 말했다.그래서 원전에 충실하면서 이번 제4권은 라틴어와 우리말 대역본으로 내놓았다.중세철학연구로 유명한 로마 우르바노대와 그레고리안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연구한 그는 우르바노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북경대 진고응 교수의 「노장신론」/도서출판 소나무간

    ◎“중 철학사상 중심은 노장의 도가”/최초의 철학서 「노자」로 개념·범주·체계 완성/「독존유술」 기존 「유가」의 철학사 서술을 비판 『유학을 중국 철학의 중심으로 보는 것은 한무제이후 오직 유가학설만을 존중하는 이른바 독존유술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이같은 입장은 역사적·학파적인 편견에 불과하다』 중국 철학사상의 중심은 유가가 아니라 도가라는 주장이 담긴 색다른 철학서가 국내에 번역·소개됐다.노장철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북경대학의 진고응 교수가 쓴 「노장신론」(최진석 옮김,도서출판 소나무).지은이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형이상학적 지식론이나 방법론 등을 무시하고 철학적 의미를 축소시킨 기존의 유학중심의 철학사 서술을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중국의 「철학적 혁명」은 노자에서 시작됐다는게 지은이의 견해.중국철학은 노자에 의해 비로소 개념과 범주 및 체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문헌자료에 따르면 노자는 중국 최초의 철학자이며,노자 자신이 편찬한 「노자」는 완정된 이론체계를 갖춘 중국 최초의 철학서다.「학문이 개인 차원으로 내려온 것」 역시 노자 당시에 이미 유행하던 일로,「개인의 저술」로서도 노자가 공자보다 빠르다. 이 책은 노학이 공학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두 사람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비교해 살핀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공자를 도덕철학자로,노자를 사변철학자로 규정했다.물론 강단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두 사람의 사상은 성격이 너무 달라 단순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노자와 공자는 철학의 주요 영역들,이를테면 형이상학이나 인식론 혹은 사유방법 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노자는 상당히 완벽한 형이상학체계를 세웠지만 공자는 우주론과 본체론 방면에 있어서는 공백이었다.또 노자는 「정관」이나 「현람」 등의 인식방법을 창도했지만,인식론 방면에 있어서 공자는 빈곤하다. 중국철학은 장자에 이르러 한층 학적 정밀함과 깊이를 더하게 됐다.이 책은 「장자」 내편의 해설을 통해 장자의 「경지의 철학」에 접근한다.특히 어느 것에도 구속됨이 없는 마음을 그린 「소요유」,만물의 평등과 자아중심의 타파를 역설한 「제물론」,정신적 생명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양생주」 등은 수양의 경지와 방법적 차서를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된다.지은이는 『노장의 철학사상은 중국문화의 심층구조에 삼투되어 있을뿐 아니라 중국철학의 영혼을 이루는 존재』라고 말한다.
  • 영 노동당 자기개혁이 이겼다(사설)

    1일 실시된 영국총선에서 노동당이 압승을 거둔데 대해 세계는 「블레어 혁명」이라고 말한다.만성적인 영국병을 치유하고 경제성장률 3%,실업률 7%로 영국을 선진국의 「모범」으로 끌어 올린 보수당을 깨뜨린 이번 노동당의 쾌거는 분명히 하나의 「혁명」이라 할만하다. 총선전 영국의 더 타임스지는 오늘의 보수당을 『육신과 영혼이 함께 썩었다』고 논평했다.보수당은 병든 영국을 구제했으나 보수당은 병들고 있었고 18년이나 계속된 장기집권에 국민들은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 총선에서 가장 눈여겨 볼만한 대목은 올해 43세의 젊은 당수가 이끈 노동당이 과감한 자기개혁을 통해 승리를 쟁취했다는 점이다.노동당은 95년 대대적인 당헌손질을 통해 당 정책의 보수화를 시도했고 영국의 중산층은 보다 온건해진 노동당에 지지표를 던졌다.토니 블레어노동당 당수는 이번 선거유세에서 집권하면 보수당의 「대처주의」 틀을 깨뜨리지 않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노동당 집권으로 영국에서 한동안 사라진듯 보였던 의회주의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됐다.상원 세습귀족들의 투표권 제한등 상당한 정치개혁도 예상되고 있다.영국내 유럽연합(EU) 지지세력도 보다 힘을 얻을 것이다.노동당은 보수당보다 EU에 전향적이다. 이번 영국총선에서 후보 1인당 선거비용이 우리돈 약 5백80만원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참으로 부끄럽게 한다.천문학적인 정치자금 문제로 온나라가 열병을 앓고 있는 우리에게 영국의 선거는 실로 교훈적이다. 노동당의 통상정책은 보수당과 큰 차이가 없다.따라서 한국과 영국간 통상관계에는 변화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영국에 진출해 있는 우리기업들에도 별다른 타격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변화는 항상 새로운 활력을 제공한다.영국의 변화는 영국에 새 도약을 약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러 문학과 예술은 소중한 유산(해외사설)

    안톤체홉의 「이바노프」를 공연하기위해 모스크바에 온 영국의 최고 연극배우 랄프 피엔은 러시아인들에게 좋은 선물이었다.앵글로 색슨계통의 한 극장이 꼭 모스크바에 와 러시아연극을 해야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어오긴 했다.영국인이 체홉을 훌륭한 극작가로 보느냐는 러시아인이 해석하기 나름일지 모른다.하지만 러시아인들이 고전작품을 좋하하든 그렇지않든 영국인들이 러시아문화의 깊이에 대해 매혹감에 빠져드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수 없다.매료되는 사람들은 극작가,음악가의 천재성에 매료되는 것만은 아니다. 체홉은 아마 전세계의 가장 훌륭한 극작가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도 세계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차이코프스키에서 쇼스타코비치에 이르는 음악가들은 세계음악사에서 낭만주의,현대음악의 거장에서 빠질수 없는 인물이다. 최근 중국의 강택민 국가 주석이 러시아를 방문했다.그는 러시아와의 무역관계 뿐만아니라 러시아 문화유산에 대해서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다.그는 젊은 공산주의시절 빠져든 소설가 톨스토이의 생가인 야스나야 뽈랴냐를 방문하기도 했다.강택민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많은 외국인에 귀감이 되었음직 하다.그가 여기까지 온데는 러시아문학과 음악의 매력이 크게 작용했을 터이다. 스탈린시대의 전제정권,브레즈네프시대의 정체감,그리고 최근까지 혼돈속에 빠져든 러시아는 고작해야 전세계인에 실망감만을 주어왔다.하지만 러시아 예술의 평판은 러시아인들 혹은 러시아문학에 존경심을 가진 외국인들을 일깨우지 않았느냐는 것이다.러시아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포함한 일반인들이 그들의 삶을 예술적 업적에 투영하고 특별한 결과를 가져온 나라다.러시아 예술인들이 돈에 유혹을 받기는 하지만 러시아 문학과 예술은 소중한 유산이다. 러시아는 옛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 예술에 대해 자리매김을 새로 해야 한다.부분적으로는 계속적인 재정지원이 필요하다.또 러시아 영혼의 본질적인 탐구 또한 영원한 숙제이기도 하다.외국인들은 러시아 문화유산의 위대함에 대해 배울것이 많다고 말하고 싶다.
  • 한 일/양국 연극인 새달2일부터 「어미 Ⅰ Ⅱ」 잇달아 공연

    ◎한 일 어머니상… 그 삶의 정규/어미Ⅰ­일 작가 극본·연출… 김금지씨 신파극 여단장역/어미Ⅱ­교포 이려선씨의 무대… 오태석씨와 손잡아 불러도 한없이 그리운 존재.생명을 낳음으로써 상상을 초월하는 무한의 가치가 있는 존재. 한·일 두 연극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굳히고 있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어머니」의 절규가 5월의 연극무대 첫 장을 꾸민다. 공연명 「어미ⅠⅡ」(5월2∼31일,예술의 전당 토월극장).무대를 탄생시키는 주역은 명동 국립극장 시절 우리 연극계의 히로인 김금지(56)와 최고의 연출가 오태석(57),일본의 연극·영화계 주요배우로 자리잡은 재일교포 이려선(55)과 현존하는 일본 최고 연출가 기무라 고오이치(66). 「한·일 연극인이 빚어낼 문화적 충돌」이란 부제가 시사하듯 이들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예술로부터 영감을 얻어 자기화하는 도전에 나섰다. 김금지는 일본의 극작가(이오누에 히사시)가 쓰고 기무라 고오이치가 연출하는 일본의 어머니가 된다.「어미Ⅰ」(원제 화장)에서 그녀는 현실의 무게때문에 속죄로 씻어야 할 과거에 애써 눈감는 신파극의 여단장으로 눈물을 뿌린다.반생을 반추하는 모노드라마에서 특유의 강렬한 에너지와 광대색 짙은 연극적 표현으로 모처럼의 공연을 펼칠 김금지는 일본 거장 기무라의 연출진수(진수)를 충분히 뽑아낼만한 인물이다. 한국 연극계의 거장 오태석과 손을 잡고 「어미Ⅱ」(원제 어미)에 나서는 이려선은 자맥질로 평생 미역이며 전복을 따고 살아온 어미가 된다.실연으로 자살한 아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몸과 영혼을 쏟는 이 어미의 무대는 우리 전통 연희와 굿의 형식을 빌어 우리 어머니의 모습을 각인한다. 일본 연극계를 비롯 세계의 방송·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인정받고 있는 이려선이 고국에서 그 가치를 확인시키는 첫 무대에 나서는 셈이며 독특한 연극어법으로 자기 소리를 확실히하고 있는 한국의 오태석과 호흡을 맞춘다는 점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무대가 된다. 이 공연을 기획한 시네텔 서울의 서영수씨는 『연극적 어법,문화적 지평을 넓히기 위해 여러 방법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직접적인 방법의 하나로 상이한 문화토대를 지닌 예술세계에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것으로 보고 이 무대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 CIS장래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알렉산더 바자노프(지구촌칼럼)

    지난 4월 2일 러시아와 벨라루시아는 옛소련 부활의 전조로 보이는듯한 협정을 맺었다.다음달에는 두나라가 각각 통합에 대한 국민여론을 수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토론과정을 거쳐 여론수렴 후 5월3일 두 정상은 공식적으로 협정을 체결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협정 막판에 옐친 대통령이 협정초안의 대폭수정을 요구했고 이 때문에 루카센코 대통령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점이다.이는 바로 옛소련국가들의 모임인 독립국가연합(CIS)의 통합과정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하는 전조에 다름아니다.기본적으로 러시아는 옛소련국가들과 통합하는 쪽을 선호한다.옛소련이 무너지면서 많은 경제난관이 시작됐고 러시아의 35 인종이 분열돼 나갔다.이산가족이나 친구들과의 해후도 어렵게 됐다.관세와 무역장벽,에너지문제 등도 파생됐다.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에 속하는 많은 러시아인들은 초강국의 지위를 상실하고 러시아가 2등국가로 전락한 사실에 무척 애석해 한다.초강국에 대한 미련이 통합을 재촉하는 변수다. ○러­벨로루시 통합 옐친 대통령과 주변사람들은 CIS국가와의 통합을 가속화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옐친은 1991년 소련을 해체시킨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장본인이다.영토가 축소되고 초강국 지위를 상실시킨 연유로 옐친 대통령은 괴로워해왔다.체첸전쟁을 일으킨 것은 애국자로서 자신의 지위를 다시 세우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그렇지만 그는 전쟁에서 졌다.옐친은 이제 전쟁이 아니라 옛 소련국가와의 통합을 시도하면서 러시아를 강국의 지위로 복원시키기를 원한다.가장 쉬운 목표가 벨라루시아와의 통합이다.벨라루시아는 인종·언어·문화적으로 러시아와 비슷하기 때문이다.벨라루시아인들은 「통합=삶의 질의 향상」으로 보며 미래복지의 상징으로 본다. 통합과정은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초안협정」을 맺은 날 러시아의 모든 언론은 통합에 반대한다는 입장에 섰다.옐친의 상대가 루카센코같은 독재자의 초상이라면 반대해야 한다는 소리가 더욱 높았다.옐친쪽에서 보면 초안에 따라 구성될 지도자들이 대부분 반개혁적·친공산주의적 인물이어서 이대로 통합했다간 옐친 자신이 밀려날 수 있는 소지도 있다. 향후 최종문안을 정리할 때 크렘린당국은 CIS의 운명을 배려해야 한다.자칫 설득력이 없는 통합을 추진하면 CIS국가들은 오히려 러시아로부터 이탈할 소지가 많다.벨라루시를 제외한 다른 CIS국가들은 어렵사리 찾은 자신의 주권을 한결같이 강조한다.러시아가 옛소련을 닮는듯한 지도력을 내보이면 매우 민감해지며 러시아가 행여 내정간섭을 할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당분간 갈등 되풀이 실제로 러시아와 CIS국들간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있다.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에 넘겨준 크리미아반도를 다시 요구한다.크렘린당국은 흑해함대문제와 무역관계규정,에너지공급문제를 놓고 우크라이나와 실없는 협의만 펼친다.러시아는 카자흐스탄정부가 인구의 36%를 차지하는 러시아인을 박해하는데 못마땅해 한다.역으로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인들이 인종갈등을 일으키며 CIS정책에서 차별당한다고 비난한다.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 카라바흐같은 큰 땅을 놓고 대립을 계속중이며 그루지아는 러시아가 분리주의자운동을 부추기고 있다고 불평한다. CIS국가들 사이에는 당분간 경제·사상·인종·종교·문화·역사적 갈등이 되풀이될 것으로 보인다.CIS 모든 국가를 휩쓰는 현재의 위기 역시 통합에 별로 도움이 안된다.일단 독립한 CIS국가들은 CIS국경 밖에서 그들 나라에 번영을 갖다주는 파트너를 찾는다.우크라이나와 아르메니아 그리고 그루지아는 미국 등 서방국가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카자흐스탄,아제르바이잔,우즈베키스탄은 터키나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같은 「성공적인」 회교국에 눈길을 돌린다.한국과 일본 중국은 CIS국가가 가장 관계를 가지고 싶어하는 국가군에 속한다.CIS국가간 무역거래가 뜸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러시아의 대외무역에서 CIS국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20% 정도다.때문에 서방분석가들은 CIS를 가리켜 「영혼이 없는 육체」에 비유하기도 한다. ○상호협조 통해 해결 하지만 나는 CIS의 장래가 비관적이라는데는 동감하지 않는다.많은 문제가 있지만 이 공동체는 미래가 있다고 보여진다.실제로 옛소련국가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또 통합을 필요로 한다.그들은 수세기 동안 한지붕 아래서 살았다.인구구성도 서로 복잡하게 섞여 있다.우크라이나 고위관리의 반이 러시아인이며 그 반대도 그렇다는 예가 있다.매우 유사한 문화적 전통이 계속됐다.지정학적으로도 가깝다.경제도 상호의존적이었다.자원이나 기반시설을 공유했었다.이는 서로 잘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라는 것이다.이들 사이의 군사·정치적인 문제들은 상호협조와 노력을 통해 해결될 것으로 본다.이들의 운명은 상호의존적이며 세계 다른 어느 나라들도 CIS 자신만큼 CIS국가들을 돌볼수 없다.미래의 통합환경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시간과 러시아의 경제부흥이라고 본다.새 국가들이 주권을 공고히 하고 이들의 경제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통합에 대한 무게도 분명히 실릴 것이다.
  • 플라톤의 「국가」 전10권 출간/서광사,9년만에 희랍어 원전번역

    ◎소크라테스 중심 변증론에 의한 대화편/형이상학·인식론·윤리·정치사상 등 망라 「서양철학의 진수」인 플라톤의 대화편이 국내 학계에서는 처음으로 희랍어 원전을 토대로 번역됐다.철학전문 출판사인 서광사가 지난 88년 기획,해당분야 전공자들에게 작업을 맡긴지 9년만에 플라톤의 「국가(Politeia)」(박종현 옮김)가 첫 선을 보인것.플라톤(기원전 427∼347?)의 사상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저서 또한 모두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한 변증론에 의한 대화편이어서 두 사람의 학설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국가」는 전체가 1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1권은 초기 대화편들의 무리에 속하나 2권부터 10권까지는 중기 대화편들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플라톤이 50대에 완성한 것이다.대화편의 전체 분량은 플라톤 전집의 약 18%를 차지하며 그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내용도 다양하다.형이상학·인식론·윤리학·정치사상·혼에 관한 이론(심리학)·교육론·예술론 등을 망라한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은 순수한 이성으로 되어 있다고 본다.그런데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으로서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지선의 실체계인 이데아를 직관할 수 없다는 것.이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떠올려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는 지적이다. 한편 지혜와 절제,용기와 어우러진 덕론을 주장하는 플라톤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만으로는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말한다.바로 이 지점에서 사회전체의 윤리설이 제기된다.이것이 「국가」에 나와있는 철인정치론이다.통치자는 「철인 치자로서 세상의 명예나 물욕에서 벗어나 있는 자」이며 「지성의 화신」이다.그러나 현실적으로 이같은 사람의 출현도,또 이런 사람을 수용하기도 어려운 일이다.때문에 최고 지성들의 중지를 모아 모든 법조문속에 지성을 최대한 반영,법치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앞머리에 「논의 전개」에 대한 개요 형태의 짧막한 글을 덧붙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뿐 아니라 뒷부분에는 본문과 주석에서다룬 장소나 유물,당시의 생활상 등을 담은 사진자료를 실어 자료가치를 더해준다.출판사측은 「국가」에 이어 「테아이테토스」「파르메니데스」「소피스테스」「티마이오스」「고르기아스」「정치가(Politikos)」 등 플라톤의 대화편 원전 역주서들을 잇따라 펴낼 계획이다.
  • 죽음 앞에 선 인간/필리프 아리에스(화제의 책)

    ◎서구 종교·미술속 죽음의 이미지 인간이 죽음과 어떻게 마주 대해 왔는가를 다양한 도상을 통해 추적한 역사교양서.프랑스 역사학계 특히 아날학파에서 「집단 정신사」의 개척자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아리에스는 그동안 철학이나 문학의 주된 주제가 되어온 죽음을 역사의 주제로 정면에서 다룬다. 묘비와 묘비명,비문과 횡와상,기도상 등 400여점의 도상을 매개로 서구의 종교·미술속에 드러난 죽음의 이미지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 특징.하나의 예로 연옥에 대한 도상은 15세기까지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17세기 이후에 폭발적으로 나타나는 데,그 속의 인간들의 모습은 바로 연옥의 영혼이 가톨릭 국가에서는 가장 친근한 저승의 주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는 것이다.유선자 옮김 동문선 전2권 각권 8천원.
  • 이집트 피라미드:상(세계 문화유산 순례:29)

    ◎영생을 기다리는 파라오의 안식처/50층 건물 맞먹는 거대한 돌무덤/5천년 풍상에도 초기모습 그대로/죽음은 탄생을 향한 또다른 출발점/미이라옆에 영원으로 타고갈 목선이… 카이로 서쪽 기자에 있는 3기의 피라미드는 5천년 고대 이집트 문명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보여주는 거대한 상징물들이다.이 피라미드들과 피라미드를 지키는 반인반수의 장대한 스핑크스상은 바로 고대 이집트인들이 삶과 죽음에 대한 그들의 믿음,즉 그들의 생사관을 표현한 건축물이다. 그러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도 첫번째로 꼽히는 이 피라미드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불가사의한 의문과 의미는 다른 문명의 유물들과는 분명히 특별한 데가 있다.카이로 시내에서 서쪽으로 25㎞에 위치한 기자고원 사막의 돌언덕 위에 이 거대 돌유물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BC) 2680년이라는게 다수설이다.지금으로부터 4천6백여년 전이고 우리나라의 단군 건국이 있기 수백년 전의 일이다.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웅장함과 정교함,치밀함을 보노라면 사막의 정적속을 지나온 5천여년의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 기자언덕에서 남으로 멤피스를 거쳐 다흐슈르까지 이르는 30여㎞에 걸친 나일강 서안을 따라 모두 90여기의 크고작은 피라미드가 서있다.이중에서도 이 기자의 3대 피라미드가 가장 규모도 크고 완벽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나지막한 돌언덕을 오르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대피라미드로 불리는 쿠프왕의 피라미드이다.가장 크고 대표적인 것이다. 여행객들은 먼저 피라미드의 규모에 압도당한다.정확히 정사각뿔 모양을 한 이 석조 건축물은 정사각형 밑변의 한변 길이가 230m,높이는 146m에 달한다.원래 50층 건물에 맞먹는 높이였으나 꼭대기 일부가 풍화돼 현재의 높이로 줄어든 것이다.4개의 삼각형 옆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는데 이 방향이 현재의 방위각과 0.1도의 오차도 없다고 한다.4밑변의 길이도 서로 한뼘의 오차도 없다.6면체로 다듬은 석조 블록들을 하나하나 쌓아 올렸는데 대피라미드 하나를 만드는데 자그마치 2천3백만개의 블록이 들어갔다.사람 키 높이의 이 돌 블록들은 큰 것은 1개무게가 30t에 달하는 것도 있고 전체 t수가 6백30여만t에 이른다고 한다.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보다도,밀라노의 성플로렌스 대성당보다도 더 큰 건축물인 셈이다.뒤편으로 서있는 케프론왕과 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는 규모는 쿠푸왕의 것보다 다소 작지만 하나같이 정교하고 웅장한 석조건축물들이다. 케프론왕의 피라미드는 쿠푸왕의 피라미드보다 3m가량 낮지만 약간 높은 지면에 서있어서 더 높아 보인다.가장 작은 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는 앞의 두 피라미드의 10분의 1크기에 불과하고 사용된 돌도 덜 다듬어져 졸속으로 완성한 흔적을 엿보게 한다.불가사의한 의문의 핵심은 왜,어떻게 5천여년 전에 이런 거대 석조물들을 만들었을까 하는 것이다.하나의 해답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졌던 태양신에 대한 숭배에서 얻을수 있다.그래서 피라미드가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태양광선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파라오(왕)들은 태양과 동일시됐고 바로 태양의 아들이었다.그들은 죽은뒤 태양과 다시 합쳐지는 살아있는 신들이었다. 해가 동에서 떠서 서로지면 이튿날 어김없이 다시 뜨듯이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은 죽으면 반드시 다시 살아난다고 믿었다.동쪽은 탄생의 장소였고 서쪽은 죽음의 장소였다.그래서 무덤은 반드시 나일강의 서안에다 만들었다. 그러나 이 죽음은 죽음으로서 끝나는게 아니라 탄생을 향한 또다른 출발점이었다.그래서 신과 같은 파라오의 무덤을 힘닿는데로 크고 웅장하게 지었던 것이고 피라미드는 무덤이 아니라 요람이었던 셈이다.죽은 파라오는 목관에 넣어져 피라미드 아래편 돌언덕을 파고 세운 신전에서 장례의식을 치렀다.그 장례의식은 다름 아닌 「영원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출발 채비였고 거대한 목선이 준비됐다.대피라미드 남쪽면 바위굴 속에서 발굴된 이 목선은 길이 43m,폭 6m를 한 전형적인 나일강의 목선이었다.일명 「태양의 배」로 불리는 이 목선을 타고 파라오의 죽은 몸은 암흑을 뚫고 영원으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고대 이집트인들은 영혼이 몸체 없이 혼자서 이 긴 여행을 감당할수 없다고 믿었다.그래서 미이라를 만들었다.제일 먼저 내장을 들어내고 다음 머리의 골을 빼냈다.가장 중요한 것은 심장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미이라에 남겨두었다.시신은 마른 소금에 담가 절여서 탈수를 계속한 뒤 시원한 바람을 쐬며 계속 말렸다.그리고 수지같은 방부제를 피하에 채워넣고는 성형수술을 하듯 얼굴 밑에 패드를 집어넣었다.그위에 다시 수지를 입힌 린넨천을 감싸서 외기와 차단했다. 미이라 작업이 끝나면 그것을 사람 모양의 금관 혹은 나무관에 넣어서 다시 석관에 넣고 그것을 다시 여러 겹의 나무상자로 쌌다. 그 다음 이들은 태양의 아들이 영원으로의 여행을 하도록 영원히 지탱할수있는 무덤을 지을 궁리를 했다.고대 이집트인들은 일찍이 4각뿔이 가장 안정된 구조라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여기다 천혜의 조건들이 피라미드들이 수천년을 견딜수있게 도왔다.카이로 일대는 지진 안전지대이다.수천년 동안 한번도 큰지진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사철 내내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기후도 도움이 됐다.바위에 스민 수분이 얼어 동파가 되풀이됐다면 이렇게 온전히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대피라미드의 석재를 공급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인들은 3곳의 채석장에서 돌을 날랐다.본바닥인 기자지역에서 나는 사막의 거친 사암은 몸체 재료로 삼았고 외벽장식으로 쌓은 매끄러운 석회암은 카이로 남쪽 650㎞에 위치한 투라의 채석장에서 운반해왔다.그리고 내부의 특별히 힘을 받는 부분과 회랑,묘실,내부장식용으로 사용된 화강암은 남쪽 1천㎞ 떨어진 아스완의 암벽에서 운반해 왔다고 한다.평균 중량이 2.5t,더러는 30t까지 나가는 거대한 돌덩이들을 운반하는 작업은 나일강이 범람하던 시기에 맞춰 거대한 거룻배를 이용해 날랐다.바퀴와 도르래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이들은 날라온 돌을 쌓기 위해 자갈로 보도를 만들고 그위에 굴림대를 깐 다음 돌덩이들을 실은 나무썰매를 그위로 굴려서 옮겼을 것이라는게 정설이다.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만드는데는 연인원 10만여명이 동원돼 20여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파라오들은 재위하면 곧바로 자신의 피라미드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음이 분명하다.그것은 절체절명의 가장 힘겨운 과제,즉 「죽음을 정복하기 위한 싸움」의 준비였다.그들이 이루고자했던 것은 바로 인간의 불멸에 대한 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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