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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길섶에서] 脫 확성기

    “저는 앞으로 될 수 있으면 마이크를 잡지 않으려고 합니다.목소리를 열배 백배 키우는 마이크는 광장의 시대,웅변의 시대 산물이기 때문입니다.‘너희는 들어라’는 식의 웅변은 일방통행 언어입니다.거기에는 진실을 담을 수 없습니다.그것은 가슴을 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자후가 아닙니다.눈과 눈,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하는 말이라야 합니다.낮은 목소리가 영혼을 움직일수 있습니다.” ‘움직이는 학교’ 박성준(朴聖焌)씨의 탈(脫) 마이크론이다.움직이는 학교란 학교가 학생을 찾아간대서 붙인 이름. 말 그대로 그는 삶에 지친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쉬는 법,마음을 여는 법을 함께 이야기 한다.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각자 내면의 소리를 끌어 올리기 위한 ‘마중물’을 붓고다니는 것이다. 교통사고가 나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세상.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려니 얼마나 피곤한가? 한번쯤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김재성 논설위원
  • 대한매일 신춘문예 소설부문 당선작/ 강물의 대화-정다일(2)

    “지낼만 하다 안 하다 그런 구분을 버렸습니다.그저 내마지막 정처(定處)이려니 하는 거지요.한 십 년이 돼 가나요.처음엔 묵정밭에 흑염소를 치며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이젠 세상과 대화하는 방법을 잊었다하는 게 옳겠지요.그동안 내 대화상대라는 것이 강물이거나 그 물결이거나 그아래 조약돌이거나 그 사이 물고기들이었으니….” 나도 이곳에서 강물과 대화하던 시절이 있었다.어둑어둑산줄기와 물줄기를 덮어먹는 어둠이 밀려드는 저녁이면 나는 강으로 내려갔다.그곳에서 어린 나는 밤새 내 곁을 스치며 흘러가는 강물을,몇날 며칠 강물에 씻겨도 사라지지않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을,그리고 쿨럭쿨럭 마른기침에 몸을 뒤척이며 깨어나는 강의 새벽을,그것들에 홀로 사무쳐밤을 새워 울어야 하는 소쩍이의 서러움 따위를 생각했다. 매일 저녁 강에 나가 새롭게 흘러온 강물을 만났다.나는그 저녁 무렵을 좋아했다.저 강 양편의 산줄기 밑자락으로거뭇거뭇 이내가 밀려들고, 강 수면으로 하루살이가 발버둥을 치고,물고기가 뛰어오르는 시간.나는 그 시간이면늘어딘 가로 떠나고 싶어 강에 나가 종이배를 띄우고는 했다. 어떤 날은 내 고무신까지 띄워 보냈기에 어머니가 미탄 장에 가서 사온 신발을 내 발에 억지로 꿰어맞출 때까지나는 맨발이었다.그 무렵 나는 눈치챘다.이내가 곧 어둠이되어 강을 덮어먹는 먹장구름처럼 밀려들 때면 이 강의 저녁을 견디는 일이란 참으로 고단한 짓이라는 것을. 그 날,그러니까 어머니 곁에서 아예 사라지겠다고 처음으로 훌쩍강을 등지던 시간도 저녁쯤이었다. “나는 이 집에서 태어났고,어머니는 이 개자리집이 마지막 거처였습니다.” 술잔을 들다 우뚝 멈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는 개자리집에서 젊은 시절부터 강을 오르내리는뗏꾼들을 상대로 주막을 열었다. 뗏목은 아우라지를 지나조양강을 거쳐 밤이나 낮이나 떠내려왔다. 뗏꾼들은 험한황새여울을 지나가기 위해 무당소에 이르면 강변에 뗏목을 댔고, 개자리주막으로 올라와 술을 청했다.좋은 시절이었다. 강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고, 마루 밑의 개도 낮술에취해 어슬렁거리다 잠들었다 했을 정도로 흥청거렸다. 뗏목의 끝물이었다. 궁궐떼는 물론이고 서까래떼도 보기어려웠던 뗏목 막바지였다.하루종일 지켜봐야 겨우 부동떼나 화목떼 서너 바닥 내려가면 그만이었다. 그동안 나귀에봇짐을 싣고 부지런히 강마을을 찾아 강을 오르내리던 한남정네가 그 어름에 이 짓도 마지막이라며 개자리주막을스쳐갔다. 칠족령을 넘어 상류의 강마을 찾아간다는 그 남정네는 이튿날 믿지 못할 강바람 같은 기약 하나를 떨구고갔다.이번에는 기어코 이 강의 최상류 오대산 우통수까지다녀오겠다고 했다.그리고 한세월 개자리에서 등 붙이고살겠다고 했다.하지만,아무리 먼 길이라 해도 한 달포면우통수를 돌았을 터이고,또 한 달이면 강을 되짚어 내려왔을 시간이 흘렀건만 코끝도 보이지 않았다.남정네는 징용끌려가 감감무소식인 남정네들만큼이나 돌아올 줄 몰랐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2년이 지났다.강에는 날마다 남정네의 소식을 묻는 물푸레나무 나뭇잎배가 띄워졌다. 3년으로 접어들던 어느 보름달 밝은 밤이었다.마루 밑 누렁이가 달을 베어 물고 컹컹 짖어댔다.한 사내가 절퉁절퉁몸을 심하게 기우뚱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루에 털푸석 주저앉은 사내가 다짜고짜 청했던 물 한 대접을 들이붓고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문지방을 넘었다.사내야 그 남정네가 맞건만 그 좋던 풍채는 다 어디에 떼어먹히고,머리는 쑥대머리요,걸친 것이라곤 어느 집 똥수세미요,다리 한짝은 뒤틀린 싸릿가지 모양으로 배배 꼬였다. 반딧불에 글을 읽어도 좋았을 눈빛이었건만 꾸물꾸물 진물이 배어나는눈자위엔 쉬파리만 닝닝대며 꼬여들었다. 이 강의 시원이우통수가 아닌 검용소란 말이여? 밤낮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렸다.정성이 지극했음인지,남정네는 일년을 반 토막낸그 여름에 훠이훠이 강을 오르내릴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을회복했다.그런 그가 가을 무청을 엮어 뒤꼍 바람벽에 주렁주렁 시래기를 매달아놓고는 또 길을 나서겠다고 말했다. 고향 청풍에 다녀오겠다는 남정네의 말은 아직 색깔 하나변하지 않았던 무청처럼 시퍼렇게 당찬 것이 믿을 만했다. 내 맘에는 그래도 느이 아부지가 첨부텀 끝까정 애오라지내 남정네였다야.니는 느이 아부지를 그래 빼다박았으면서두 성정은 으째 그리두 다른지….어머니의 이야기는 늘 그사람을 내 아버지로 오금박아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남정네와의 언약을 무당소 깊은 강 밑에 갈무리해두었다.하지만 그뿐이었다.강바람을 타고 오르내린 소식몇 점이 무당소를 회오리쳐대다가는 떠내려갔을 뿐이다. 한 뗏꾼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무당소 앞에서 굿을 하던무당이 굿판에 도취되어 스스로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라져버렸다는 무당소.어머니는 밤을 낮 삼아 무당소 기슭에 넋을 놓고 주질러앉았고,속절없이 흘러가는 강물만 하염없었다.강물은 어머니의 돌팔매질로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한바탕 회오리바람 같은 푸념이 지나가고 나면 어머니는 뗏목아라리를 부르며 강을 쓰다듬었고 자신을 위로했다. 눈물로 사귄 정은 오래도록 가지만, 금전으로 사귄 정은잠시 잠깐이라네.우리 맺은 언약이 강물에 흘러갔나니. 구시월 막바지에 서리맞은 국화라.나를 보세요,함께 갑시다. 그믐 초승달이 뜨도록 놀다 가세요.무당소 황새여울에 떼를 띄워놓았네.무당소 개자리집아 술상 차려 놓게나. 내가 흥얼거리던 뗏목아라리를 따라 부르던 그의 눈빛이먹먹해져 있다. “충주댐 아랫마을에 살았던 때가 있었지요. 저녁이면 버릇처럼 충주호에 낚싯대를 담갔습니다.간혹 낚시를 따라온어머니가 이 아라리를 불렀지요.아버지가 부르던 소리라며.호수에 수장된 어머니와 나의 고향이 낚싯바늘을 물어줄리도 없었건만,우리는 낚싯대를 드리우고 흘러간 뗏목아라리를 부르곤 했습니다.그러던 어느 날,나는 끔찍한 선물을받았습니다.” 그의 낚싯대에 걸려 올라온 것은 뱀장어였다. 그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강에는 뱀장어가 많이 살았다. 하지만 고향남태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충주호에 갇힌 뱀장어는 사람 팔뚝만큼이나 살이 뒤룩뒤룩 올라 있었다. 그 날, 그는낚싯대를 꺾어버렸다.그 뒤부터 밤이면 지붕 위 허공 어디에선가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선 살찐 뱀장어가 뒤척였다. 강에서 살던 뱀장어는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무려 3,000㎞나 떨어진,자신이 태어났던 태평양 먼바다로 헤엄쳐 가야한다.뱀장어는 자신의 알이 다른 물고기에게 잡아먹히지않도록 하기 위해서 칠흑의 어두운 그믐날에 마지막 사랑을 나누고 최후를 맞이한다.다시 태어난 뱀장어 치어 댓닢뱀장어는 바다 물결에 실려 한반도까지 오며 실뱀장어로바뀌어 봄이면 서해와 남해로 흘러드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이것이 뱀장어가 가고 싶은 길이다.하지만 이땅의 강은 이미 뱀장어의 강이 아니다.하구둑이나 수중보가 가로막고 길을 터주지 않는 것이다. 나는 빈 주전자를 들어 그에게 흔들어 보인다. 술잔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던 그가 빈 주전자에 옥수수 막걸리를 가득 채워 들어온다. 오래도록 말없이 천장을바라보던 그가 입을 연다. “이 강물에 어머니를 잃고, 나는 정처 없는 떠돌이가 되었지요. 길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길을 잃는 일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길을 잃을 때 길의 본질을 만나게 됩니다.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백척간두의 순간에머무르고자 했습니다.잃어버린 길을 잇기 위해 동강으로들어왔다고 하면 그대의 궁금증이 조금 풀릴는지요.” 그에게 나는 묻고 싶었다.그 낭떠러지의 허공이 가난하게떠난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여백이 되는지를,그 여백은 정처를 정하면 충만해지는지를.하지만 나는 말로 만들어내지못한다. “내 어린 시절의 강에는 뱀장어보다 열목어(熱目魚)가많았습니다.” 눈에 열이 많아 그 열을 식히기 위해 물이 더 찬 상류로상류로 올라가야만 하는 물고기.어린 내 친구들은 그 물고기를 엿메기라 불렀다.우리는 싸리나무 낚싯대로 고등어만한 열목어를 낚아 올리고는 했다.그 엿메기를 잡는 날은최고의 낚시꾼이 되었다.개울 한가운데 바위 위에 앉아 열목어를 낚아채다 보면 낭창낭창한 싸리나무 낚싯대가 부러지기도 했고,물고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물 속으로 풍덩빠지기도 했다.그래서 물고기를 잡다가 열목어도 잡지 못하고 물에 빠지면 엿메기를 잡았냐며 놀려대기도 했다. 어린 내가 어찌 열목어의 열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살다보면 세상에는 열을 올려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다는 것을, 그래서 저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는 것을 어찌알았겠는가. 나는 이 강의 개자리집에 돌아와서야 내 눈에식혀야 할 열이 참으로 많이 박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대의 바짓가랑이에 휩쓸려온 바람에는 저 먼 북태평양 베링해의 냄새가 묻어 있습니다.연어를 만나기 위해 남대천에 가본 적이 있는지요. 10월의 남대천에는 베링해를떠나온 연어가 산란절식(産卵節食)으로 상류로 거슬러 오릅니다. 섬세한 지도를 그릴 줄 아는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강의 냄새를 떠올리고,밤하늘의 별을 보고 방향을 가늠해낸답니다.그대는 무엇을 나침반 삼아 이곳까지 왔는지,그대는 어느 시절 어느 세월을 휘돌아 여기까지 거슬러 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쩌면 내 대답을 듣기 위해 청한 물음이 아닐 수 있다.나는 길을 나서기 전, 나침반으로동서남북을 가늠해보고 지도를 펼쳐 길의 처음과 끝을 짚어보며 준비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어디서 휘어져 산모롱이를 돌아나가고 어디서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건너야 하는지를 살피지 못했다.길에 서 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다. 낯선 길에서 깃들 곳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힘겨운가를,얼마나 서러운가를…. 한강 하류에 사는 동안 나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출근을해 저녁이나 밤이면 집으로 돌아왔으며, 일요일이면 밀린빚을 청산하듯 하루종일 잠을 잤으며, 우리 가족은 살강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지낼 만한 사이였다. 그도시에서의 20여 년은 그렇게 짜지도 맵지도 않은 적당한즐거움과 적당한 상실감으로 흘려보낸 시간들이었다.그 시간이 얼마나 밍밍한 시간,아니 세월이었는지를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곳 개자리로부터 나는 철저히 도망치려했으며 깨끗이 잊고 싶어했다. 아내의 부탁을 나는 기꺼이받아들였다. 아내가 딸 나나의 교육을 위해 불현듯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겠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베링해의 물결은 지금이 아니라 이후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아내는 5년 전 캐나다로 떠난 처형네를 찾아갈 것이다. 처형네 세탁소에서 한 3년 다림질을 하다 보면 이 땅에서의 기억은 다 증발될 것이다.아내는 나의 옛날을 다 증발시키고 싶어한다.나나를 위해 내일만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잊고 살 수는 없는거야? 아내는 나의 정처를 모른다. 아내는 지금 나에게 연락할 수 없다.이곳은 핸드폰 불통지역이다. “어딜 가나 적응하려 애쓰는 건 정신보다 몸이 먼저지요. 하지만 상처를 만나 먼저 시름에 겨워하는 것은 정신이 아닐는지요.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그물에 걸리지 않는 강물처럼 소리소문 없이 빠져나가는 시간이더군요.” 어머니는 나이 마흔을 넘겨서야 얻은 자식 때문이었는지멍울은 조금씩 가시는 듯했다.뗏목이 사라지고,남정네가사라진 강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산자락 비탈밭을 일구기시작했다.이 일대 밭은 모두 어머니가 화전으로 일구어냈다.밤이면 산비탈에선 파란 도깨비불이 일었다.큰물이 지는 여름이면 무당소에서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밤새 꾸르릉꾸르릉 이무기 우는 소리가 강을 흔들어댔다. 한낮에도 산그늘이 지는 무당소 뼝대에서는 뻐꾸기가 무섭다며 뻐버꾸뻐꾹 울어댔다. 뻐꾸기가 우는 여름이면 어머니는 말했다. 세월처럼 무서븐 게 없다드니 참말이네. 내가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이곳을 떠나면서부터 어머니는허물어지기 시작했다.밭은 하나둘 묵정밭으로 변해갔고,개자리집에는 머리 풀어헤친 귀신이 산다는 소문으로 흉흉했다.아랫마을 사람들도 발길을 끊었다.밤이면 승냥이처럼울어대는 어머니의 곡성이 강을 타고 내려가 아랫마을을하얗게 흔들어 깨우곤 했다.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더먼 곳으로 떠났고, 어머니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무당소로걸어 들어갔다. “강이 꽝꽝 얼었어요. 누치도 잡고, 보고 싶다던 무당소밑바닥도 실컷 봐요.…,먼저 나갑니다.” 마당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밤새워 술 마신 티가묻어 있지 않다.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다시 이불 속으로묻는다.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다.아내는 내가 돌아가지않아도 나나의 손을 잡고 예정된 시간에 공항으로 나갈 것이다.나는 이불 속에서 머리를 흔들어본다.머릿속은 끊임없이 윙윙 울리고 있다.겨울 하늘 높이 날아올라 팽팽하게당겨진 연줄이 우는 소리 같다. 어젯밤 그는 말했다.밤새 강이 얼 것이며,날이 새면 누치를 잡으러 가자고.요즘도 1월이면 무당소는 물론이고 1㎞상류까지 얼어붙는다고 했다.이 강줄기를 타고 올라오는누치는 100마리쯤이 한꺼번에 떼를 지어 몰려올 때도 있다.지난 겨울엔 강바닥이 시커멓게 보일 정도로 엄청난 누치떼가 올라왔다.겨울이 되면 찬물에 산란하기 위해 상류로올라오는 것이다.얼음썰매를 타고 누치를 찾아 강을 오르내리며 이마에 땀이 배어날 시간이 흘러갈 즘이면 강바닥을 뒤집는 누치떼를 만날 수 있다.도끼와 작살을 움켜쥐고얼음 위를 질주하며 누치떼를 쫓다보면 놈들은 숨을 헐떡이며 꼼짝도 못하고 강바닥에 엎드려 있다.누치는 얼음장아래 찬물에서 쫌만 움직여도 곧바로 뼈 가운데로 얼음이생겨 오래 달릴 수가 없어요.누치가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서 있을 때 도끼로 얼음을 깨고, 작살로 단방에 찔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또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그렇다,북진나루. 나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힌다.그는 마당에 없다.저 아래 무당소에서 움직이는 그가 조약돌처럼 작게 보인다. 개자리에 앉은 내 몸도 이제는 보호색을 띠어 강변의 자갈밭을 닮아있지 않던가요.그의 말처럼 그는 개자리에 앉아 조약돌을 닮아가고 있다. 나는 어젯밤 그가 고향 이야기를 할 때,그도 어쩌면 슬픔하나를 갈무리해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그는 어머니를생각하면 먼저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고 말했다.충주댐이막히면서 청풍의 절반쯤은 물에 잠겼지요.하지만 남한강뱃길이 있던 시절엔 제천의 중심이었습니다.서울에서 올라온 돛단배들은 소금에 절인 바닷물고기며 온갖 물건들을그득그득 싣고 북진나루로 들어왔지요.배가 들어오는 날이면 봇짐장수였던 우리 아버지는 서울 물건들을 사서 나귀에 싣고 남한강 강마을을 찾아 길을 떠났습니다.그 강물에아버지를 빼앗겨버린 우리 어머니…, 어머니는 돌아가시기며칠 전에야 말했지요. 동강에 한번 가보자.느 아부지 여즉 거서 잘 살고 있는지? 강은 정말 꽝꽝 얼어붙었다.그는 누치를 찾아 상류로 더올라갔는지 보이지 않는다.군데군데 얼음구멍을 낸 흔적이보인다. 얼음은 유리처럼 맑아 무당소의 강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물고기의 비늘이 얼핏 물 밖의 햇살을 받아내며 반짝 물살을 뒤집는다.그 물고기는 어머니의 하얀 버선을 닮았다.그토록 보고싶었던 무당소의 강바닥.하지만 어제의 그 강물은 이미 떠나고,얼음장 밑으로는 오늘 지금의강물이 흐르고 있다. 나는 거울처럼 맑은 강물 위에 내 얼굴을 댔다.어머니의유품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나를 쫓아온 댓돌만한 거울이그랬듯 얼음거울 역시 나를 다 비추지 못한다.하지만 나는알고 있다. 아무리 비춰 보아도 내 안에는 내가 없다는 것을.어린 시절의 내 강물은 이미 다 빠져나가고,내 몸은 메말라 있다는 것을. 나는 몸을 뒤집어 무당소에 눕는다.하늘은 눈이 시리도록푸르다.그곳에서 깨알같던 점 하나가 점점 커지며 검은 불덩이로 변해 무당소로 떨어지고 있었다.내 이마를 향해 내리꽂히고 있다.내 몸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간다.곤두박질치던 그것은 무당소 바위벼랑에 다다른 순간,다시 파랗게 얼어붙은 하늘로 솟구친다.교미 중인 검독수리 한 쌍이다.어머니는 무당소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던 그 해 겨울,내게 말했다.언제 청풍 북진나루에 가보거라.느이 아부지 거서 여적 잘 살고 있는지? 나는 비틀걸음으로 상류로 오른다.
  • 보이지 않는 누군가 우릴 노린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혹시 망자(亡者)들의 영혼과 함께 사는 공간이 아닐까.” 이런 부질없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는 지.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근거로 스페인의 젊은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가 규모있는 심리공포물 한편을 만들었다. 내년 1월11일 개봉될 ‘디 아더스’(The Others)에서 감독은 대표작 ‘오픈 유어 아이즈’로 보여줬던 철학적 사색의 반경을 심령세계로까지 드넓혔다. 지난 8월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영화는 톰 크루즈와의 이혼 이후 주가 급상승세를 타고 있는 니콜 키드먼이 여주인공을 맡아 더욱 화제가 됐다. 키드먼의 둥글고 다부진 눈매는 서서히 엄습해오는 공포에휘둘리는 주인공의 캐릭터에 더없이 안성맞춤.지난 여름 연속 8주 동안 전미 박스오피스 5위권에 머문 저력의 절반은그의 공일 것같다. 실제로 키드먼은 줄거리의 중심인물일뿐만 아니라 화면의중심이다.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장면은 전부 합해도 다섯손가락에 꼽을 정도. ‘1인극’을 하듯 남편없이 어린 남매를 키우는 강인한 모성애 연기와 공포에 질린표정연기를 흠집없이 잘 소화해냈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가 시대적 배경.해안가 외딴 고택으로 카메라를 좁혀들어간 영화는 악몽을 꾸다 깨어난 여주인공그레이스(니콜 키드먼)의 불안한 얼굴로 초점을 모은다. 고색창연한 저택 곳곳을 바삐 오가는 그레이스의 발걸음은뭔가에 쫓기는 게 틀림없다.하지만 정작 영화속 인물도 관객도 공포의 실체를 눈치챌 길은 없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그레이스는 억척이면서도 단아한 여장부의 모습이다. 부리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떠나버린 집으로 세명의 새 하인들이 찾아온다.“전에 이 집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묘한말을 하는 이들이 들어온 뒤로 집안에는 이해못할 일들이 꼬리를 문다. 눈치빠른 관객이라면 막판 반전의 실마리를 일찌감치 발견할 수도 있다.대목대목에 수수께끼같은 ‘복선’이 던져져있다. 햇빛을 쐬면 생명이 위독해지는 남매의 희귀병,죽은 자들의마지막 모습이 찍힌 다락방의 흑백사진 등도 영화의 결말을점치게끔 도와주는 큼지막한 힌트들이다. 귀를 찢는 비명이나 서늘한 기계음 효과는 없다.감독은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키운 두려움이 진짜 공포”라고 연출의도를 밝혔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의 실체를 내세워 심리공포물을 만든 감독은 이런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걸까.“보이는 것,믿고 있던 것만이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식스 센스’에 버금가는 오싹한 막판 반전이 두번 있다.제작은 키드먼의 전 남편인 톰 크루즈가 맡았다.만약 이 세상에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산다 치자.그렇다면 어느 쪽이진짜 ‘타인’(The Others)일까. 황수정기자 sjh@
  • [우리고장 NGO]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당당한 손벌리기’ 몇달 전 대전지역의 거리와 사무실에서는 ‘세일즈맨’처럼 찾아오는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공동의장 閔明洙) 간부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자신의 월급봉투를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한 뒤 회원모집에 직접 나섰던 것이다.‘아름다운 손잡기’라는 이름으로 이 운동을 벌인 금홍섭(琴洪燮·34) 시민사업국장은 “시민단체의 재정을 거드는 일을 통해 시민들의 참여도를 높이고 지역사회에 건전한 기부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이 운동을 벌였다”고 말했다.이단체 홈페이지에 공개한 금 국장의 월급은 90만원.민주노총이 4인 가족을 기준으로 산정한 표준생계비 288만원의 31%에 불과하다. 회비로 운영되는 이 단체 간부의 떳떳한 회원모집운동 못지 않게 그들의 활동도 당당하다.지난해 국내 시민단체들가운데 지역의 전 행정기관에 대해 판공비를 공개토록 한것은 이 단체가 유일하다.지난 99년 대전·충남지역 34개기관장들의 판공비를 공개,‘판공비는 공개돼야 한다’는인식이 뿌리내린 결과다.이후 공개가 관례화됐다. 올해 일본 역사왜곡 교과서 파동 때는 일본 ‘평화헌법을 살리는 구마모토(熊本)현민의 회’와 함께 교과서 불채택 운동을 벌였다.양쪽 교사들이 오가며 역사에 대한 토론회를 벌여 공감대를 형성케 했다.직접 일본을 방문,100여개에 이르는 구마모토 시·정·촌(市町村)관계자들을 설득하거나 찾아가지 못한 곳은 불채택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보냈다.이런 활동은 교과서 불채택으로 이어지는 데 힘이 됐다.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다. 지난해에는 대전형무소 산내학살 진상규명 활동이 눈길을 끌었다.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민간인을 적게는 3,000명에서 7,000명까지 국군이 남하하면서 집단 학살한 이 사건을 진상조사와 함께 죽은 이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내 전국적 이슈로 부상시켰다.학살 후 집단매장된 대전시 동구 산내를 찾아 직접 현장조사를 했고 위령제를 지내 영혼을 달랬다. 올 3월 한전을 상대로 아파트 전기료 부당이익금 반환소송도 냈다.일반주택과 달리 500가구 이상 아파트단지의 경우 아파트 입구까지만 변전시설을 해주고 집안까지는 입주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낸 것이다.이에 따라 현재 한전은 이를 개선하기 위한 용역을 진행중이고 전국으로 이 운동이 퍼지는 성과로 이어졌다. 금 국장은 “시민생활에서 적절치 않게 이뤄지고 있는 공공기관의 일을 제지,개선시키는 것도 우리 단체에서 가장중요시하고 있는 권력기관에 대한 감시활동의 하나”라고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
  • 동양학의 진수 주역인생 반세기

    ▲스승의 길 주역의 길-김석진 지음/한길사 펴냄. 우리들 대부분의 인생은 소설이 되기엔 너무 평범하다.또소설아닌 다른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독서의 수고를 요구할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주역의 대가 대산 김석진의 주역인생 반세기’란 부제가붙은 ‘스승의 길 주역의 길’(한길사)은 소설처럼 앞길의전개가 궁금해지면서 동시에 소설보다 훨씬 자주 지은이와주인공의 영혼,독자인 우리들의 인생에 대한 진정성 등을 묻게 하는 책이다. 지은이(大山 金碩鎭)는 1928년생(83세)으로 50대 후반인 80년대부터 주역강의로 이름을 날려 지금은 책 부제처럼 ‘주역의 대가”로 받들어지고 있다.세상살다 보니 별일 다 있다싶게 십여년 전만 해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동양 고전·동양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그런 만큼 동양학의 정수라는 주역(周易) 최고 대가의 ‘주역인생 반세기’는 흥미있는 소재다. 십대 때 신학문 대신 ‘다른 사람이 버리는 것을 나는 취한다(人棄我取)’는 조부의 말씀과 함께 한학에 뜻을 세웠고,19세인 1946년부터 13년간 주역대가이자 기인인 야산 이달(也山 李達) 문하에서 스승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지제로서 스승과 생사고락을 같이한 인생역정은 흔한 것이 아니다. 흔하지 않는 인생에 대한 호기심으로,동양학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이 책을 시작한 독자는 20세기 한국에서 주역공부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건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으면서 호기심의 질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이 서양,신학문,근대화로 치달았던 그 시절에 1889년생의 스승 야산과 제자 대산은 왜 ‘다 떨어진’ 주역공부에 목을 맨 것일까. 우리는 거기서 우리 주위에서는 보기 어려운 순수와 열정의‘선택’을 본다.우리와 다른,우리보다 고귀한 선택의 인생은 아름답다.그 선택의 내용인 주역 또한 아름답게 다가온다.2만5,000원. 김재영기자kjykjy@
  • [허윤주기자의 교육일기] 장점부터 살려라

    지난번 교육일기에서 밝힌대로 나는 요즘 ‘부모교실’에다닌다.주1회 열리는 수업에 아줌마는 물론 아저씨까지 ‘부모 면허증’ 따기에 열심이다. 강사 K씨는 남자다(처음에는 ‘남자가 애키우는 걸 아나’하는듯한 아줌마들의 눈초리에 시달려야 했다).그가 수강생들에게 던진 첫번째 주문은 ‘아이의 장점을 보라’.아이들과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고,좋은 부모가 되기위해서는 아이들에 대한 시각부터 바꾸라는 말이다. 심리상담사인 그는 청소년 상담교실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자기소개서에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적어보라고 했더니 단점 10개를 꽉 채워쓴 아이들은 수두룩하더란다.하지만 대다수가 장점을 서너개 밖에 채우지 못했고 아예 한개도 못쓰는학생도 있었다.사람의 장·단점은 ‘80대 20’인데 많은 이들이 80의 장점을 북돋우기보다 20의 단점을 가슴아파하고방어하는 데 기운을 소진한다고 K씨는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그는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에 나오는 ‘동물 학교’라는 글을 소개했다. ‘옛날에 동물들이 모여서 학교를 만들었다.교과목은 달리기,나무 오르기,날기,수영.동물들은 예외없이 전과목을 공부해야만 했다. 오리는 수영선수였다.하지만 달리기가 형편없어 수영을 포기해야했다.오리는 달리기 연습을 너무 많이해 물갈퀴가 너덜너덜해졌고 수영에서도 평균점수 밖에 얻지 못했다. 토끼는 달리기에 탁월했지만 수영을 배우느라 너무 물속에많이 들어가 신경쇠약증에 걸리고 말았다. 독수리는 문제아였다.나무 오르기에서 꼭대기에 올라갈 때까지 큰 날개를 퍼덕여 다른 학생들을 방해했기 때문.독수리는 교사에게 자기 방식대로 날게 해달라고 주장했지만 묵살당했다. 학년이 끝날 무렵,수영도 잘하고 달리기,오르기,날기까지약간 할줄 아는 뱀장어가 가장 높은 점수를 얻어 졸업식장에서 답사를 읽는 학생으로 뽑혔다.(중략)’ 왠지 낯익은 장면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장점보다 단점만 부각시켜 ‘신경쇠약증 환자’로 만들어버리는 우리 학교와 사회의 자화상이다.이 대목에 이르면왜 한국인들의 행복지수가 바닥을 헤매고 있는지도 눈치챌수 있다.옥의 티만찾고,남과 비교하며 주눅부터 드니 왜 안그렇겠는가. 당신의 아이는 오리인가,토끼인가,독수리인가.장점을 바라보는 훈련을 당장 시작해야한다는 K씨의 얘기에 귀기울여볼일이다. 허윤주기자
  • 문턱닳는 ‘철학원’/ ‘족집게’45만명 복채 천차만별

    “진학 특별상담중-자녀의 장래를 전문가와 상의하세요.”대학 입시철인 요즘 철학관을 비롯한 점술집에 나붙은 문구다. 연말연시인 데다 사상 유례없는 취업한파,대학입시,지방선거 등을 앞두고 점집들이 밀려드는 운명 상담자들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역술인들은 더도 덜도 말고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다’며 들어오는 복채에 휘파람을 불고 있다. 그러나 전국 45만명을 헤아리는 이들은 고소득을 올리는 유명 역술인조차도 세금을 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공평한 세부담과 세원발굴을 외치는 국세청은 아직 그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여서 정도세정의 의지를 무색케 하고 있다. ■실태와 문제점. [점집·철학관 얼마나 되나] 공식적인 집계는 나와 있지 않다.다만 한국역술인협회나 무속인 조직인 대한승공경신연합회에 따르면 역술인은 정회원 10만명(정회원 5만,준회원 5만)에다 비회원수가 1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무속인 수도 전국적으로 25만명(정회원 14만2,000여명)을 헤아린다.역술인과 무속인을 합치면 45만명이 되는 셈이다. 역술인협회에서 공식적으로 배출되는 인원만도 한해 100∼200여명.사설학원과 일부 철학원에서는 ‘속성코스’까지 만들어 역술인을 양산하고 있다. 이런 상황임을 감안할 때 그 숫자는 부지기수다.요즘엔 역학서 한번 읽어본 사람이면 모두 도사님으로 불릴 정도로 역술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 사이버상 점집과 카페점집 등이 늘면서 ‘점술 전성시대’를 이룬다. [세금 없는 인기직종] 요즘 신문지상이나 주·월간지 광고에 빠지지 않는 게 있다면 역술인 광고다.전면을 할애하거나 5단 광고가 주류를 이룬다. 취직·입학·관운을 내세워 심기가 불안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이른바 ‘용하다’고 알려진 철학관은 ‘사주팔자·성명학 속성완성’이란 문구와 함께 수강생을 모집하는 광고도 흔히 볼 수 있다.문화센터에도 주역강좌가 인기를 끈다. 역술학원이나 주역풀이 전문학원 등 동양철학 전문 학원이나 학술단체에도 학생·직장인들의 수강신청이 늘고 있는 추세다. 문제는 학문적인 연구보다는 아예 ‘돗자리 깔고 전문 역술인 행세’를 해보자는속셈으로 학원을 찾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 수강생 모집요강에도 ‘사무실 없이도 돈버는 사업’등의 문구를 앞세워 돈벌이 수단으로 수강생들을 부추기고 있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함량미달인 역술인들도 많지만 이들을규제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서울 동작구 불교아카데미 대자원 임선정 원장(‘신의 땅’ 저자)은 “요즘 역학이나 명리학을 배워보겠다는 사람들의문의가 부쩍 늘었다”면서 “자기성찰을 위한 공부가 아니고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것 같아 정중히 거절하고 있다”고밝혔다. 점집에서 사주팔자·성명·취업 등의 운세를 봐주는 금액은 2만∼3만원에서 5만원까지 다양하다.물론 사이버상에서 무료상담을 해주는 사이트도 생겼지만 유명세에 따라 역술인들의 수입은 천차만별이다. 정치 지망생들의 점괘를 풀어준다는 이모씨(46·족상전문)는 때가 때인 만큼 복채는 ‘부르는 게 값’이라고 자랑한다.역술인이나 무당들의 수입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러나 소득에 대한 세금을 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피해사례] L보험사에 다니는 윤모씨(45·여·서울)는 둘째 아들의 대학입학 문제로 고민하다 주위의 추천으로 ‘족집게 도사’를 찾았다.도사는 조상신들이 방해하고 있어 아들의 진학운이 막혀 있다며 천도재(薦度齋:죽은 사람 영혼을극락으로 인도하는 것)를 올려야 한다고 주문했다. 윤씨는 5조상신을 달래지 않고는 집안에 액운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에 800만원을 들여 재를 올렸다.그러나 남편의 사업이 부도나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남편과 심한 다툼으로가정파탄에 이르게 됐다.아직 아들의 대입시 결과가 남았으나 속은 것만 같다고 하소연했다. 서울 영등포구 이모씨(48·여)는 취업 재수생인 큰아들을위해 점집을 찾았다. 점쟁이는 취직운이 막혀 운기를 높여준다는 부적을 살 것을주문했다.이씨는 200만원을 주고 부적을 사 아들의 베개 속에 집어넣고 취직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들은 벌써 기업체 시험에 여러 번 떨어졌다.이씨는 “괜한 짓을 한 것 같다”며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유진상기자 jsr@. ■어느 전직 도사님의 고백.지방대학 한문학과를 나온 장모씨(44).서울에서 17년동안통신제품 판매사업을 해오다 지난해 이를 청산하고 뒤늦게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신학대학에 입학했다.그는 본업보다는 부업으로 시작한 작명과 사주팔자를 봐주는 점쟁이로이름이 더 알려졌었다. 처음 심심풀이로 시작한 일이 입소문으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아예 주업이 바뀌었다.주역풀이에 관심이 많았던 그로서는 대학때 익힌 지식에다 상황에 맞는 그럴듯한입담으로 고객들을 휘어잡았다. 장씨는 “대개 점을 보러오는 사람의 심리는 불안한 상태이기 때문에 역술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나쁜 운세일수록 곱씹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이런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혹시나’하는 생각에 ‘액땜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다시 찾게 된단다. 이럴 경우 조금 무리한 웃돈을 요구하더라도 들어주더라는설명이다.장씨는 역술인들의 말솜씨에 매료되는 순간 무리한 복채를 요구하거나 지속적으로 방문을 요구할때는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10년동안 운세를 봐주는 과정에서 거짓말도 늘고 선량한 사람들을 농락한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되뇌었다.지금은 신학대학에 진학,성경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유진상기자. ■점보기 ‘신세대 신풍속.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워지면서 불안해진 20대 사이에도 점보기 문화가 성행하고 있다. 역술인들의 연령층도 20∼30대로 낮아진 데다 공간도 서울강남구 압구정 로데오거리 뒤편이나 신촌·이화여대앞·대학로 등 젊은이들이 즐겨찾는 지역에 세련된 카페 형태로 있다. 특히 닷컴 수난시대에도 인터넷 사이트로 영업하는 점집이100여 곳이 넘을 만큼 성업중이다.복채는 2,000원부터 2만원대로 전문철학관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7월에는 물가에 가지 말라’는 식의 아리송한 점괘는 지양한다. ‘미국 스탠퍼드대보다 하버드대로 가야 귀국후 교수가 되겠다’ ‘시집은 30세 이후에 가야 이혼당하지 않는다’ ‘올 1월 주식에 투자하면 깨진다’식으로 분명한 지침을 얘기하는게 특징이다. 인터넷 점집 에스크퓨처닷컴(askfuture.com) 소속 역술인 60명중 20∼30대가 40%이며,회원의 75%가 20∼30대다.사주풀이·진로·적성·궁합은 기본이다.증권투자 상담은 물론 내년 경제전망과 국운도 예측한다.영어로도 점괘를 볼 수 있다.고객의 상담내용을 사이트에 모두 공개하고 입금은 통장으로 받는다. 사주닷컴(Sazoo.com)이 지난 4월말부터 5개월간 상담내역을 분석한 결과 △이성문제(32.13%) △진로 및 시험운(16.33%) △사업방향 및 재물운(11.39%) 등으로 문의가 많았다. 이화여대 앞과 신촌역 부근에 자리잡은 100여곳의 역술원과 사주카페는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하다.이대앞 S사주카페에서 카운슬러로 일하는 A모씨는 “취업문제와 연애문제에 대한 문의가 주류를 이룬다”고 밝혔다.최근에는 대학주변 길거리에서 1,000∼2,000원을 받고 손금을 봐주는 IMF형 점집도 인기다.이대 앞에서 손금을 봐주는 B모씨는 “젊은이들이 점집을 찾는 것은 마음의 위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면서“상담시간은 5분을 넘기지 않지만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줘웃으면서 일어나도록 한다”고 말했다. 주현진기자 jhj@. ■조선시대 무당도 세금냈다. 역술인과 무속인들은 사업자 등록이 거의 안돼 있으며 일부 등록된 사람들도 ‘면세사업자’이다. 아무리 소득이 많아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국세청이나 세무서 관계자들은 유명 점쟁이·무속인들의 수입이 만만치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그러나 이들에게 과세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소득을 밝히지 않아 과세표준을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술인·무속인협회 관계자는 “복채나 굿판에서 내는 돈을 어떻게 일률적으로 정할 수 있겠느냐”면서 “개인간에 거래가 이뤄져 협회 차원에서도 제재를 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요즘 직장인들의 ‘연말정산’ 항목 가운데에는 사찰이나교회 등에 낸 헌금이나 성금도 포함돼 세금을 감면받는다.종교단체도 연말 정산용으로 서류를 떼어주는 것이 일반화돼있다. 이 때문에 봉급생활자들은 과세기준이 어려워 세금을 못 거둬들인다는 국세청의 변명을 군색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와관련,조선시대에 무속인이 세금을 냈다는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재정과 군정의 내역을 모아놓은 ‘만기요람(萬機要覽)’이그것이다. 조선은 개국초부터 함경도·강원도·삼남(三南)의 무녀들에게 신을 섬기는 세금으로 무세(巫稅)를 거둬들였다.무녀들을 낱낱이 조사해 장부에 기록하고 사람마다 세목(稅木:무명)이나 오승정포(五升正布:올이 굵은 베나 무명) 1필을 내도록 했다.이때 돈으로 대납하면 3냥5전(영조때 2냥5전)을 내야했다. 민속학자들은 19세기초(순조때) 거둬들인 세금을 근거로 추산할 때 무속인 수가 5,000명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유진상기자.
  • 뮤지컬 ‘틱, 틱… 붐’ 뉴욕인기 서울로

    국내 뮤지컬 전문극단이 한 작품을 세 개의 무대에 동시에올릴 예정이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신시뮤지컬컴퍼니가 12월1일 신촌 산울림소극장(12월30일까지) 연지동 연강홀(12월16일까지) 양재동 한전아츠풀센터(12월9일까지)에서 일제히 공연을 시작하는 뮤지컬 ‘틱,틱…붐’.레퍼토리 자체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한창 인기를끄는 화제작인 데다가 동시다발적인 공연형태와 연출자의면면 등에서 국내 공연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틱,틱…붐’은 지난해 국내 무대에도 올려져 큰 반향을일으킨 화제의 뮤지컬 ‘렌트’를 만든 조나단 라슨(96년사망)의 유작.지난 6월 브로드웨이 제인 스트리트 극장에서개막돼 전회 매진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록 뮤지컬이다. 예술에 대한 열정 속에서 불꽃처럼 살다가 요절한 조나단 라슨의 자전적 작품으로 안정된 일상의 삶과 예술 창작 사이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은 이름도 조나단일 뿐아니라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극에는 총 세명의 배우가 등장한다.주인공 조나단 역 외에 그의 여자친구 수잔,그리고 절친한 친구 마이클이다.두 사람은 본래의 역할 외에도 조나단의 갈등을 고조시키는 주변 인물 10인의 역할을 코믹하고능청스럽게 소화해낸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공연장도 만만치 않다.산울림소극장이탄탄한 레퍼토리 선정을 통해 고정 관객을 확보하고 있는공간이라면 연강홀은 주로 실험적인 작품을 올려 젊은 층의인기를 더해가고 있고 한전아츠풀센터는 수준높은 작품을통해 명성을 쌓고 있는 강남의 명소다. 세 개의 공연장에서 팀을 이끌 연출자는 김철리(산울림소극장),한진섭(연강홀),심재찬(한전아츠풀센터).동시 공연인만큼 경쟁을 의식한 이들의 출사표도 예사롭지가 않다.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의 미묘한 모습까지도 섬세하게 느낄수 있는 소극장의 이점을 살려 실험정신 넘치는 젊은 관객들에게 만족을 줄 것”(김철리)/“고뇌하며 예술혼을 지켜가는 젊은 영혼을 그린 작품이다.뉴욕의 분위기를 한국적인감동으로 재연시킬 것”(한진섭)/“넓은 무대의 이점을 살려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밀도있게 전할 것”(심재찬). 신시뮤지컬컴퍼니측은 공연과관련,“작품이 3명의 배우로만 구성되는 작은 규모라는 이점을 살려 틀에 박힌 형식에익숙해진 국내 관객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줌으로써 뮤지컬붐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란 바람에서 기획하게 됐다”고밝히고 있다. 그러나 번듯한 레퍼토리 한 작품만 갖고도 성공하기가 힘든 국내 공연풍토에서 해외 뮤지컬을 세 개의 공연장에서일제히 시도하는 파격이 얼마만큼 관객몰이에 성공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김성호기자 kimus@
  • 영혼이 깃든 광활한 자연

    미지의 세계와 광활한 자연을 독특한 기법으로 표현하는 작가 정연희(56)의 전시회가 8∼21일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다. ‘다섯번째 계절’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40여점으로 영원의 세계를 좀 더 깊이있고 심오하게 보여준다.소품부터 대작까지 철판화,유화,천장화 등을 선뵌다. 그의 작품은 빛을 찾아 바다를 항해하는 오디세이 전설을연상시킨다.작가는 “물고기는 생명,희망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물고기는 빛을 낸다.마치 물고기에영혼이 막 들어간 것처럼. 정연희는 어머니의 죽음 뒤 배를 그렸다.끝없이 방랑하는오디세이가 느껴지는 작품들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예외없이 빛이 보인다.왜 그럴까. 계기는 정연희의 인도여행이었다. 보는 사람마다 가난하거나 신체가 성하지 않았지만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몸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빛은 어둠속에서 나온다.그래서 정연희는 작업을 할 때 먼저 검은 색을 바르고 흰색을 문지르거나 뿌려 빛을 생성시킨다. 출품작가운데 가장 큰 유화(183×488㎝)인 ‘깨어있는 도시’에서 정연희는 작품전체에 걸쳐 ‘빛’을 보여준다.빛나는 점들이 저 멀리 사라지는 가운데 발광하는 물고기가 똑바로 선 채 화면 군데군데 나타난다. 그림을 보면 밤하늘의 은하수랄까,뭐 그런 것도 생각난다.(02)734-6111유상덕기자 youni@
  • [대한광장] 사형제는 살인위한 계약

    바로크 시대의 교회는 종종 ‘순교자’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물론 르네상스 시대에도 그런 그림은 있었지만,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영적 능력을 강조하다 보니 그리잔혹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바로크는 다르다. 그 안에는 드라마가 있고,파토스가 있고,세속적 사디즘과성스런 마조히즘이 어우러진 변태적 에로틱이 있다.바로크의 그림 속에서 말을 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다.그 그림에서흘러나오는 소리는 고통받는 몸의 절규,파괴되는 육체가 내지르는 신음과 소름끼치는 비명소리다. 껍질을 벗기고(성 바돌로메우스),혀를 뽑고(성 아폴로니아),젖가슴을 베고(성 바바라),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성에라스무스),큰 바퀴로 온 몸을 으깨고(성 카타리나),사람의 몸으로 바비큐를 하고(성 로렌시우스)…. 순교자의 얘기는 기독교가 공인된 AD 313년 이전의 일.바로크의 화가들이 천년 전의 순교를 목격했을 리 없다.그래서 ‘순교자’를 그릴 때 그들이 참고할 수 있었던 유일한시각자료는 당시에 실제로 행해졌던 처형장면이었다.그렇다면 그림 속에서 죽어가는 바로크의 순교자의 정체는 실은당시에 처형되었던 범죄자,사형수들인 셈이다.르네 지라르는 모든 문명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희생양을 요구한다고말했다. 그렇다면 사형수라는 희생양이야말로 이 사회를 유지시키는 성스런 존재가 아니겠는가? 예수가 인류의 죄를위해 희생양이 되었듯이,세속과 교회 권력의 질서를 신성하게 유지하기 위해 희생당한 것은 범죄자들.따라서 범죄자가성인의 모델이 될 법도 하지 않은가? 실제로 그 당시에 몇몇 처형은 ‘성인의 순교’를 방불케하는 감동을 주었다고한다. 바로크 시대의 사람들은 처형을 결코 잔인하게 느끼지 않았다.처형은 신과 공동체의 정의의 실현이었기에,그들은 이잔혹한 정의의 실현을 축제로 즐겼다. 오늘날 중국인들이잔혹한 바로크의 처형장면을 본다면 아마도 “잔인하다”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정작 자기 나라에서 벌어지는 공개처형은잔인하게 느끼지 못한다.우리에게 중국의 공개처형은 잔혹하게만 느껴진다.하지만 정작 우리 사회에서 비공개로 행하는 집단처형만큼은 별로 잔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하지만우리와 문명화의 정도를 달리하는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는 이 원시적 관습이 매우 야만적으로 느껴질 게다. 며칠 전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식사를 하는 사형수들의 사진을 보았다.이들은 법질서의 유지라는 미련한 관념의 존속을 위해 희생당할 예정이다.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이 세속의 신이 저지르는 살인행위에 당신도 가담할 것인가? 여야 의원이 서명한 사형제 폐지 법안이 지금 법사위의 비토에 걸려 좌초할 운명이라 한다.보수적인 사람일수록 사형에 찬성하는 경향을 보인다.이는 사형제도 존속론의 바탕에권력의지가 깔려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기들이 가진권력의 행사범위를 타인의 생명에까지 연장시키고 싶어한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었다가 다시 빼앗을 권리를 가진 존재,즉 신의 전능을 갖고 이 땅에서 누리고 싶어한다.사형제도는 신이 주재하는 ‘최후의 심판’의 패러디.그런데 누가이들에게 신이 될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사형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형수 없으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 본다.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사형제도 없이도 잘만 유지되는 사회들이 얼마든지 있다.우리헌법의 한 축을 이루는 자유주의의 원리는 사회를 ‘계약’의 산물로 설명하곤 한다.그런데 ‘생명’은 ‘사회계약’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국가가 제아무리 신성해도살인을 명할 권리는 없다.때문에 나는 사형이라는 살인행위를 ‘합법’으로 명시한 이 미련한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을단호히 거부한다. [진중권 문화평론가]
  • [워싱턴 엿보기] 테러전쟁과 할로윈 축제

    10월 31일은 미국 어린이들에게 특별한 날이다.우리의 ‘어린이 날’처럼 원하는 것을 마음껏 얻을 수 있고 가장무도회도 갖는 대표적 축제일인 ‘할로윈(halloween) 데이’다. 어린이들은 저녁에 집집을 다니며 ‘트릭-트릿(trick ortreat)’을 외친다.과자를 주지 않으면 혼내주겠다는 뜻이다.그러면 어른들은 초콜릿이나 사탕을 준다.문밖에는 호박으로 만든 ‘초롱(jack-o’-lantern)’을 내걸어 이들을환영한다는 표시를 한다. 할로윈 데이는 기원전 500년쯤 아일랜드에서 유래됐다.새해(11월 1일)가 시작되기 전 죽은 영혼들이 마을로 내려와사람들을 괴롭히자 마녀 분장 등을 하고 함께 어울린 데서기원됐다고 한다. 테러 참사에 이어 탄저병 공포가 휩쓸고 있는 워싱턴 지역의 한 초등학교에선 이날 예년과 다름없이 할로윈 행사가 열렸다. 어린이들은 대부분 만화영화의 주인공으로 분장,퍼레이드를 펼쳤다.교실에서는 장기자랑이 펼쳐졌고 학부모들도 손수 마련한 음식을 나누며 파티에 어울렸다. 테러를 감안,지난해보다 간소하게 치러졌다는 학교측설명이지만 전쟁의 흔적은 엿보이지 않는다.한 학부모는 “추가 테러나 탄저균을 왜 걱정하느냐”며 “조심하면 충분하다”고 말한다.다른 학부모는 정부가 지나치게 겁을 준다며 테러가 정말 위협적이라면 비행을 금지시킬 게 아니라 월드시리즈부터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전쟁의 그림자는 곳곳에서 감지된다.할로윈 상품전을 오래전부터 기획했던 쇼핑몰들은 매출이 크게 부진하자대폭할인에 나섰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등에선 예정대로 할로윈 퍼레이드를강행했으나 보안에 신경쓰는 경찰들의 모습이 더욱 두드러졌다.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어린이들이 포장하지 않은과자를 먹지 못하도록 부모들에게 철저한 주의를 촉구했다. 그러나 실제 할로윈 축제에 임하는 어린이나 부모들은 이같은 경고를 아랑곳하지 않는다.테러의 위협을 무시해서라기보다 공포감을 잊으려는 현실적 선택에서다. 미국이 아주 ‘색다른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미국의 가정도 테러의 위협 속에 이를 애써 망각하려는 이중생활을하고 있다. 워싱턴 백문일특파원
  • 영혼 울리는 어눌한 손짓·발짓

    ■오늘 개막 장애청소년 연극축제 참가 밀알학교팀. “노래 나오기 전에 일어나지 말라고 했지?” “불이 꺼지면 앉는거야.” 품청소년문화공동체가 22일부터 29일까지 서울 종로구 연강홀에서 개최하는 ‘2001년 서울시장애청소년연극축제’에참가할 예정인 밀알학교 학생 8명을 지도하는 김호경(26)선생님의 목소리가 크다.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동작은 아직 어색하다.30분짜리 연극을 지난 7월 말부터 약 석달동안 일주일에2번 2시간 30분씩 연습했지만 일반 학생들이었다면 한 달도연습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한 학생이 갑자기 “목이 아프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지도교사들은 “실제로 공연할 때는 목이 아파도 일어나면안돼”라고 타이른다. 학생들은 연습 도중 뛰어다니거나 돌연 자리를 뜨기도 한다. “저는 장애인입니다.사람들은 저보고 바보라고 합니다.그러나 순이 앞에 서면 정말 바보가 됩니다.” 밀알학교 학생들의 연극 ‘작은 사랑’은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된다.정신지체아들이 사춘기에 겪는 이성에 대한 사랑을 담았다. 주인공은 장애인이란 이유로 순수한 감정을 조롱받는다.누구나 아름다운 첫사랑을 할 권리가 있지만 사회는 “네가사랑이 뭔지나 알아?”라고 놀린다.결국 주인공의 첫사랑은이뤄지지 못한다. 일반학교에서 특수학교로 전학 온 학생이 ‘왕따’ 당하던일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특수학교에 아이를 맡기는 부모가“바쁘다”면서 도망치듯이 교무실을 빠져나가는 모습 등,연극 곳곳에는 뼈저리게 아픈 대사와 장면이 나온다. 극본은 서울대 총연극회에서 활동하는 김승주씨(22)가 썼다. 그는 “정신 연령이 어린 학생들이지만 ‘콩쥐팥쥐’류의 동화를 연기하는 것보다는 진정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후 4시 30분부터 6시까지 지칠 줄 모르고 하던 연습을잠시 쉬고 학생들은 자장면을 시켜먹었다. 주인공역을 맡은 학생은 “너무 재미있다”면서 “특히 마지막에 춤추고 노래부를 때가 제일 신난다”고 말했다.열심히 연습을 한 덕분에 팅팅 불은 자장면도 맛있다.어느 학생도 힘들다고 하질 않는다. 밀알학교 연극을 후원하고 있는 하트·하트 종합사회복지관의 장진아 과장은 “말을 안 들어서 ‘너 연극 안 시킨다집에가라’고 하면 정말 열심히 한다”면서 “다소 부족하지만 자신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장애청소년연극제에는 이 밖에도 인강학교의 ‘백설공주의 선택’,노들장애인야간학교 ‘피라카숑 하퐁출롤’,정문학교 ‘용궁으로 가는길’,충현복지관 ‘탈춤연극놀이’,봉화중학교 ‘꽃들에게 희망을’,번동2단지 종합사회복지관 ‘도깨비섬의 아이들’,송파공업고등학교 ‘날개’ 등총 8편이 무대에 오른다. 토론극부터 탈춤까지 다양한 공연이 펼쳐질 예정이다. 특히 마지막 공연 작품인 ‘날개’의 주제곡 ‘우리들은쪼다다’는 장애인들의 절망과 희망을 함께 노래한다. ‘우리들은 쪼다다/우리노래 들어라./내 영혼을 너와 느껴보는거야…(중략). 공부를 잘 못해도 아는 것이 없어도 우리는 해낼꺼야 우리의 꿈을 니가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이상하니.내가 보는 너의 모습이 더욱더 우스워. 우리들은 쪼다다/우리노래 들어라/내 영혼을 너와 느껴보는 거야’이송하기자 songha@. ■연극 연출 김호경교사. **“같이 연습하며 정 깊어져 모두 출연 못해 아쉬워요”. “학생들을 모두 출연 시킬 수 없는 것이 가장 안타까워요.” 이번 연극을 연출하는 김호경교사는 내내 목소리를 높혀연습을 시키고 있지만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일반학교 연극에서도 주연하고 조연이 있습니다.마찬가지로 여기도 주연하고 조연이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 점에대해 학부모들이 많이 민감해요.” 특히 정신지체아들은 같은 나이라도 정신연령 차이가 많이나기 때문에 같은 연기를 하기는 힘들다. 김 교사는 부모들이 그 점을 이해해 주지 않는 것이 서운하다.또 지나치게무관심한 부모들도 문제이다. “연습 때마다 대사를 읽어주고 위치를 잡아줘야 하지만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정이 드는 것 같아요.” 2,3분짜리 장면 하나도 계속 진행되는 법이 없다.오랜 연습 덕에 대사를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남 앞에 서 본적이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다.또 등을 보이면서 연기하기 일쑤이다. “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가족들부터장애인을 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받아 줬으면 좋겠습니다”이송하기자
  • 화랑미술제 18일 예술의전당서 개최

    화랑계의 큰 잔치인 ‘2001 화랑미술제’가 18∼24일 서울 예술의전당 미술관에서 열린다. 한국화랑협회(회장 임경식)가 주최하는 올해 미술제에는전국 69개 화랑이 참가해 각기 선정한 대표작가의 작품을내놓는다.200여명의 작가가 2,000여점을 출품한다. 국내유일의 미술 견본시장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국내외중량급 작가의 대표작을 미술의 모든 장르에 걸쳐 내놓는다. 갤러리 사비나는 이희중의 ‘달빛 아래는…’라는 제목의 유화 등을 내놓고 학고재는 강요배의 ‘접시꽃’을,청작화랑은 이왈종의 ‘생활속에서-중도’를,인사갤러리는 신호식의 ‘concave & convex’를,선화랑은 김희경의 ‘영혼의 나무’를 출품한다. 또 갤러리 현대는 서혜영의 ‘Gold Brick’을,카이스 갤러리는 ‘도흥록의 ‘퍼즐’을,박여숙 화랑은 김강용의 ‘Realty+Image 9802’를,가나아트 갤러리는 토마스 스트루스의 ‘나폴리 산 로렌조 마지오레의 복원원들’을,박영덕화랑은 김창영의 ‘모래 장난’을 내놓는다. 올해 미술제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특별전시장에 전시되는 1호짜리 소품전으로 50여 작가의 작품 150여점이 선뵌다.화랑협회는 이들 전시작의 가격을 100만원 미만으로 정해 미술품의 대중화를 꾀할 예정이다. 아울러 참가화랑에 대한 정보 및 전시 작품을 인터넷 온라인 전시(www.seoulartfair.net)로도 볼 수 있게 했다.전시본부 (02)586-3817,8유상덕기자
  • 트리니다드섬 출신 영국 작가 네이폴

    ■네이폴은 누구. “유럽 대륙에 뿌리내리고 살면서도 제3세계인의 감수성을 잃지않은 작가”“선진국의 식민지주의가 제3세계에 입힌 상처를 고발해온 역사의 증언자”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네이폴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다.이런 표현에 걸맞게 네이폴은 지난 40여년 동안의 작품활동을 통해 제3세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는데 주력했다. 이는 지난 95년 문학세계사가 번역한 ‘세계속의 길’(최인자 옮김)에 잘 드러난다. ‘세계 속의 길’은 식민지 유산이 남아있는 트리니다드에 발딛고 살면서 세계의 역사와 국가,그 속에서 살아가는개인의 삶에 대해 명상하는 과정을 담았다.이 작품에서 콜럼버스 이후 서구 식민지주의자들이 중남미를 어떻게 짓밟았는가,원주민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버렸는가 등을 증언한다. 이같은 경향은 그의 성장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그는 지난 32년 영국통치령인 서인도제도의 트리니다드 섬에서 태어났다.이곳에서 보낸 유년시절은 초기작 ‘미겔 스트리트’(이상옥 옮김,민음사)에 잘 드러난다.네이폴의 할아버지는영국의 또 다른 식민지인 인도에서 건너온 브라만 계급 출신이었다.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던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은 네이폴은 18세때인 1950년 옥스퍼드 대학 장학생으로영국에 간 이후 그곳에서 활동했다. 유색인이 백인사회에뿌리내리는 과정에서 맛본 어려운 체험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방황하는 고독한 이방인’이란 주제를 심화시키는계기였다. 네이폴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인종과 국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뿌리는 혼란스런 세계 속에서 고통받고 방황하는 인간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작품집 ‘자유국가에서’(오승아 옮김,문학세계사)가 이런 세계관을 전형적으로 그린 것이다.이 작품집은 영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부커 상’을 받았다. 실존을 파고드는 잇단 작품활동으로 네이폴은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고 영국 현존 최고의 작가에게 주는 ‘데이비드 코엔 상’을 받았다.이같은 명성에도 불구하고 네이폴은 언론에 나서길 꺼리며 조용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기는것으로 유명하다.시끌벅적하고 유행을 쫓는 런던문단과는접촉을 않고 영국 서부 시골 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있다.앤소니 파웰,안토니아 프레이지,폴 더루 등 극소수작가들과 만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0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40이 넘은 뒤에문학이란 것이 뭔지를 겨우 알기 시작했다”며 “좋은 각가가 되기 위해선 쓰고 또 쓰는 노력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작품세계- 픽션·넌픽션 넘나들며 문학적 실험. V.S 네이폴은 초기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문학적 실험과시도를 계속해온 작가였다.예술에서 번잡하고 다양한 시도의 끝이 항상 그렇듯 자기 자신,남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자기 목소리에서 비로소 진가를 발휘했으며 또 가장 여유로왔다.자기 방식에 이르자 네이폴은 고지식하리 만큼당대의 경향과 유행에 초연했다.기존의 장르를 통합해 자기 나름의 스타일을 창출해냈는데 그 스타일은 픽션과 넌픽션이 혼재되어 있었다.네이폴 소설에서 중요한 점은 픽션이나 아니냐의 구분이 중요치 않다는 점이다. 네이폴은 고향인 서인도 제도의트리니다드 섬에서 출발했으나 곧 이같은 한계를 벗어나 인도,아프리카,북미,남미,아시아의 이슬람 국가들 등을 포섭했다.물론 영국도 그의문학적 영토의 하나로 편입됐다.네이폴은 특정 개인의 거대한 윤리적 체재의 흥망사를 기록한다는 점에서 폴랜드출신이나 영어를 영국 작가보다 더 잘 구사한 조셉 콘래드의 후계자다.어두운 영혼의 이 주인공들의 일어섬과 무너짐은 인간 존재의 보편적 상황으로 연역되는 것이다.대다수 작가들이 소홀히 하는 운명에 정복당하는 자,인간 본성에 의해 스스로 무너지는 자에 대한 기억이 특출나다. 초기 유머리스트와 시정의 일상생활을 잘 묘파한 작가로평을 얻는 네이폴은 ‘비스바스씨를 위한 집’에서 문학적도약을 이룩했다. 영국 식민지배 하의 인도가 무대인데 네이폴은 이 작품에서 그의 문학의 특장인 한 우주인 냥 작품 내에서 모든 것이 완결되는 미학을 선보였다.주변적인인물을 문학 걸작의 중심 부우이로 끌어올리면서 네이폴은정상적인 원근법을 뒤집었는데 이때 독자들은 작품과의 편안감 거리감을 즐길 수 없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창작 원칙은 이후 작품이 갈수록 다큐멘타리 톤을띠워갔음에도 인물들에 대한 흥미가 감소되지 않도록 했다.또 소설적 서술,자서전적 요소,다큐멘타리가 절묘하게 화학적으로 혼효되었다. 노벨상 수상작인 ‘도착의 수수께끼’는영국의 리얼리티를천착하고 있다. 원시의 정글에서 여태껏 알려지지 않는 미지의 종족을 발견하고 그들을 연구하는 인류학자와 같은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고 비평가들은 말했다.그래서 언듯근시안적이고 무작위의 관찰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은 이야기를 통해 네이폴은 ‘과거 식민지 지배층 문화의 소리없는 붕괴와 상류 유럽 거주인들의 몰락을 냉혹하게 묘파했다”는 칭찬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종수기자 vielee@. △V.S. 네이폴 연보. ▲1932년 서인도제도 트리니다드 섬 출생▲1950년 영국으로 이주▲1953년 옥스퍼드대에서 영문학 전공▲1955년 결혼▲1957년 처녀작 ‘신비의 안마사’ 발표▲1960년 ‘미겔 스트리트’ 발표▲1961년 ‘비스워스씨를 위한 집’발표▲1967년 ‘흉내’ 발표▲1971년 ‘자유국가에서’로 영국 최고 권위의 ‘부커상’ 수상▲1979년 ‘거인의 도시’ 발표▲1987년 대표작 ‘도착의 수수께끼’ 발표▲1990년 엘리자베드2세로부터 기사작위 수여▲1994년 ‘세계 속의 길’ 발표▲2001년 노벨문학상 수상
  • 2001 길섶에서/ 민들레

    서울 무교동 뒷골목에 키 작은 민들레 하나 서 있다.휘발유 냄새,지글지글 삼겹살 굽는 냄새 속에 꽃 향기는 아예기대하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악착같이 꽃은 피었다.시멘트철갑 속의 흙에도 생명의 자양분이 있었던가. 우중충한 대기 속에 샛노란 꽃이 앙증맞다. 아마 작년 이맘 때쯤 이 근방 어디에서 날아온 씨앗이리라.그러고 보니 담벼락 틈에도 피었고 보도 블록 사이에도납작하게 엎드려 있다.사람 눈에 안 띄어서 그렇지 어디서든 민들레는 자라고 꽃을 피운다. 넓은 세상 놔두고 하필이면 사시사철 매캐한 무교동 곱창집,문지방 틈에 뿌리를 내린 민들레가 딱하다.딴에는 멀리멀리 날아가라고 2세를 ‘낙하산’에 매달아 날려보내지만무교동 뒷골목에서 태어난 씨앗이 날면 얼마나 날까. 민들레뿐이랴.사람도 더러는 ‘어디서 태어 났느냐’가팔자소관이 돼 버린다.테러사건 이후 아프간 국민들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미사일 공습보다 굶주림이 더무섭다는,영혼이 깊어 보이는 순한 눈들.그들이 무슨 죄인가?김재성 논설위원
  • ‘한 우물 인생’은 아름답다

    ■한길을 가야 인생이 보인다/한빛. 한 길을 걷는 것은 아름답다.그래서 ‘영원한 혁명가’ 체게바라의 평전이 지난 해 공전의 히트를 쳤고 칼 마르크스를 다룬 책들이 꾸준히 반응을 얻고 있을 것이다. 눈빛이 내놓은 ‘한 길을 가야 인생이 보인다’에 눈길이가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더구나 ‘외곬 인생’의등장 인물들이 우리와 동시대의 사람들인데다 대부분이 일반인에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 ‘눈빛’을 빛나게 하는 책이다. 책을 열면 다양한 직업의 인물들과 만날 수 있다.산악인,한학자,법학자,카메라 수리기사,고지도 연구가,웨이터 등.주인공들은 ‘한 우물 인생’으로 은은한 빛을 내고 있다. 몇가지 사연만 ?f어보자. ‘11시에 만납시다’라는 프로그램을 10여년 진행하면서 이 땅의 내로라 하는 인사 2,000여명을 만난 김동건 아나운서가 가장 인상 깊에 남은 사람을 질문받고는 한 할머니를 꼽았다고 한다.전라도 두메산골에서 삼베를 짜는 오배분 할머니였다.그가 들려주는 삶은 한편의 소설이고 그가 도달한곳은 “베가 나하고 말을 한다”는 ‘달인의 경지’다. 덧없는 인생을 의미있게 채운 인생은 또 있다. 열여덟살에 시계 수리를 시작하여 칠십여년 동안 외길을 걸어온 이원삼 할아버지.페이지를 계속 열면 ‘한국 시계수리의 역사’를 대변하는 그의 지난 날이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서당에서 소학을 배우고 찢어지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마친 소년이 집안의 밥줄을 잇기 위해 시계 기술을 배우게 되는 애틋한 이력이 굴비처럼 줄줄이 엮여 나온다.그 바닥엔 “시계 수리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라는 우직한새끼줄이 버티고 있다. 이렇듯 ‘한 길…’은 각 분야에서 한 눈 팔지 않고 자기길을 걸어온 전문가들을 취재한 기록이다.그 속에는 한국의자생식물 연구에 평생을 바친 ‘농부’,대학교수직을 떨쳐버리고 오로지 그릇만을 굽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 도예가 등이 들어 있다. 모두 돈이나 명예보다는 자신의 ‘애정’을 선택하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온 열정이 배어난다.그러기에 대개는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열정과 활력을 보여준다. 눈빛의‘외길 인생 탐구’는 이번에 20명의 ‘아름다운 고집’을 들려준 데 이어 다음 편에 20명의 ‘감동’을 준비하고 있다.7,500원. 이종수기자 vielee@. ■외길 걸어온 두 외국인 평전. 최근 나온 두 권의 외국인 평전도 외곬으로 파고든 삶이란공통점이 있다. 먼저 ‘나는 내가 아니다’(우물이 있는 집)는 정신분석학의사로서의 명성을 뒤로 한 채 알제리 독립투쟁에 온 몸을바친 프란츠 파농의 일대기를 다루었다.‘대지의 저주 받은자들’로 80년대 운동권의 정서를 촉촉하게 적셨던 파농은흑인해방운동의 선구자였다.25년 프랑스 식민지에서 태어났지만 기득권을 상징하는 프랑스 국적을 버리고 같은 피부색의 영혼을 해방시키려 했던 그의 ‘불꽃 삶’이 가족들의 생생한 증언에 힘입어 되살아 난다. 파농은 “나는 몸을 아끼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소”라는 신념을 실천하듯 36세의 나이에 세상을 달리했다.하지만 그삶을 기리려는 지은이 패트릭 엘렌의 5년 동안의 노력에 힘입어 현재형으로 살아났다.1만1,000원. ‘생명의 느낌’(양문)은 남성중심의 과학계에서 유전학의 발전에 헌신한 여성 과학자 바바라 매클린 톡의 전기다. 이 책은 1902년 태어나 여성이 과학을 한다는 사실만으로기이하게 여기던 풍조를 아랑곳 않고,최소한의 생계비를 걱정하면서도 생명이 깃든 과학을 찾아나간 그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나아가 과학 지상주의,지배 위주의 과학이 판을 치던 패러다임과 당당히 맞선데서 그의 향기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어떤 상을 받았고,무슨 특허로 돈을 얼만큼 벌었고,얼마짜리 프로젝트를 따낸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제도권과학계를 꼬집으며 ‘생명’자체에 의미를 두고 연구활동을지속했다. 그의 이런 일관된 삶은 83년 여성 단독으로는 처음인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으로 보답받았다.1만2,000원.
  • [대한광장] 자살과 생명

    지금으로부터 약 2,200여년 전, 방사(方士) 서시(徐市)가동남동녀를 데리고 신선의 영약(靈藥)을 구해오겠다고 청하자 진시황은 이를 쾌히 수락했다.진시황은 수천명의 동남동녀를 딸려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냈는데,신선의 영약이란바로 불사초(또는 불로초)를 뜻하는 것이었다.진시황은 이처럼 영원히 살기 위해 불사초를 찾았지만,그가 이 약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허황한 인물이었다면 중원을 통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진시황은 이승에서 영원히 살기위해 동남동녀를 보내는 한편 그 유명한 병마용 전차군단을만들어 사후세계에 대비했던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영원히 살고 싶지만 인생은 유한한 것이어서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마련이다.그런데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다른 세상에서 다시 산다는 교리를 확신하는 어떤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세계 종교 대부분이 이런 교리를 갖고 있어서 불교는 물론 세계의 3대 계시 종교인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도 모두 천국과 지옥의 교리를 갖고 있다. 이런 교리에일체 해석의 여지를 두지 않고 글자 그대로받아들이는 신자들이 원리주의자들로서,때로는 이들의 지나친 신심이 사회문제화된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민간항공기를 납치해 돌진한 주범모하메드 아타는 사건 전에는 독일 함부르크 공대에서 도시재건축을 전공한 예의바르고 근면한 시민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미국 보스턴 공항에서 발견된 그의 짐 속에는 “순교자로서 자살해 천국에 가고 싶다”는 내용의 자필 유서가들어 있었는데, 민간여객기와 빌딩 내의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고도 자신은 순교자로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 충격적이자 이슬람 원리주의가 가진 위험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신앙체계는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모하메드는 신이 보낸 사자다’라는 문구로 요약할 수 있는데,모든것을 불태우는 무시무시한 지옥과 바라는 모든 것을 얻을수 있는 천국을 갖고 있다.코란은 “그대들은 그대들의 아내와 함께 기뻐하며 낙원으로 들어가라”고 시적으로 노래하고 있는데,바로 이 낙원에 대한 확신이 ‘알라는 위대하다’고 외치며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여객기를 부딪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이슬람교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고 믿는 기독교와는 달리 일부 인간의 의사의자유가 인정되기 때문에 대다수 이슬람교도들은 선량하지만항상 문제는 소수 원리주의자들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정통 교리에도 맞지 않은 이런 그릇된 신앙이주는 가장 큰 문제는 생명의 경시다.자기 자신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이 타인의 생명을 경시할 것은 더 말할 나위가없다. 그러나 생명은 종교가 아니라 유학처럼 ‘몸의 터럭 하나도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기본적인 효도사상만 있어도 함부로 해할 수 없는 것이다.평생을 아프리카 오지에서봉사했던 뛰어난 철학자이자,음악가요,목사이자,의사였던슈바이처 박사의 다음 말은 이런 점에서 상징적이다. “만일 인간이 생명의 신비,그리고 세계에 가득차 있는 생명과 자신과의 신비로운 관계를 생각한다면,틀림없이 자신의 생명과 자기영역의 모든 생명에 생의 외경심을 갖게 될것이다.” 무고한사람을 죽이고 갈 수 있는 천국이 어디 있으며 설혹 있다한들 그곳이 어찌 천국이겠는가? 지옥이지. 이덕일 역사평론가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 비사(秘史)’ 연재를 마치고

    지난 8월 10일부터 지난 10일까지 매주 두차례씩 10회에 걸쳐 연재했던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 비사(秘史)’는 근대 한국문단을 주름잡은 문인들의 내밀한 사연을 구체적인자료를 통해 소개했다는 점에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이번 연재에서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부분이나 뒷얘기를‘후기’로 보충한다. 문인들의 편지란 영혼의 비원처럼 은밀한 ‘성역’이다.이금기의 화원에 무단 침입하여 ‘가택수색’을 하는 기분으로 까뒤집어 본 것이 이번 연재의 실상이었는데,엿보는 행위는 꼭 좋은 장면만이 아니라 오히려 숨기려는 것일수록 입맛을 돋구는지라,혹 본의 아니게 이 글로 마음 상한 관련자는 없었는지 염려스럽다.이 ‘금단의 정원’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다가 굳이 한번 검토해 보자고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문학인에게는 작품의 해석과 평가에 필요한 어떤 자료도 그것은이미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사회와 민족의 정신적인 공유재산이란 점 때문이었다.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신문연재이기 때문에 문학사적으로 작품과 관련지어 꼼꼼히따져보기 보다는 문단사적인비화를 중심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점이 그 중의 하나다.자료마다 충분한 소개와 해설을 하려면 더 많은 지면을 요하겠지만 이 정도면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데 지장은 없을 것 같다. 다만 8.15 이전 자료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6.25를 전후한시점까지만 다뤘고 그 뒤의 것은 아예 생략해 버린 게 송구스럽다.여기에도 많은 소중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일제식민지 시대의 편지 중에서는 ‘조선방공협회(防共協會)’원고용지에다 자신의 주소지를 ‘조선사상국방협회’ 스탬프로 밝힌 일본인 시인 노리다케 미쓰오(則武三雄)의 편지만언급하지 않았다. 6.25를 겪으면서 파인 김동환·신원혜·최정희 셋이 당면했던 현실적인 장벽은 상상 이상의 고난이었고,그건 우리민족모두의 고통이기도 했다.파인은 명백한 납북자가 되었고,그에 매달렸던 두 여인은 당장 가족을 책임져야 할 입장이었다.셋 다 북한 출신인지라 남한은 오히려 타향이었다.카프 제2차사건 때 함께 구속되어 재판 받던 기억과,중국집에서 탕수육만 두 그릇 시켜“훌러덩 훌러덩 혀를 굴려가며” 잘도먹던 백철과는 1.4후퇴 때 최정희와 동거중이란 풍문도 날정도로 가까웠는데,이유인즉 같은 북도 출신에다 백철의 부인이 최와 숙명여고 동창인 탓도 있었다. 자상한 안부와 문운을 비는 박종화의 예절 바른 편지,일본문우들과의 교유관계가 얽혀있는 김광균의 글,보낸 책을 받은 인사말에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채색한 유치환의 솜씨도볼만하다. 조지훈은 연회 초대에 처남 취직부탁까지 하는 글을 보냈고,김광주는 경향신문에 연재소설 청탁서를 편지 형식으로 썼다.송지영의 글은 그 뛰어난 붓글씨 자체가 예술이며,미국으로 이민 간 뒤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박남수의 편지도 시선을 끈다.겉으론 별로 가까울 것 같지 않았던 박봉우의 편지는 오히려 많은 사연을 상상케 만든다.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 조숙했던 화제의 시인이 최정희에게 정신적인 안식처를 찾았던 사실이 편지를 통해 고스란히 밝혀진다. 박화성,손소희 등 여류문인들의 정감어린 편지도 재미있지만 가장 내밀한 사연을 담은 건 이영도의글이다.최정희 자신이 이영도의 수필집 ‘춘근집(春芹集)’(1958)을 받은 감사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이를 계기로 이영도는 최정희에게 6통의 글을 보낸 것으로 미뤄 봐 꽤나 가까웠던 것 같다. 이밖에도 이헌구.오영수.설창수.마해송.한흑구.방기환.이윤수 제씨의 글과,이봉구가 문학청년에게 보낸 편지도 제각기사연과 내력을 지니고 있다.세월이 지난 오늘날 그걸 읽는이에게는 재미있는 추억담이지만 이 글들이 씌어졌을 현장은 얼마나 팍팍한 삶의 고뇌들이 스며 있었던가를 밝혀내는 작업은 문학사가들의 몫일 것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10.끝) 해방과 전쟁

    김동리(金東里)의 편지 중 주목할 점은 발신지가 ‘하얼빈역’으로 되어있는 봉투이다.하얼빈은 러시아가 1902년 개통한 동청(東淸)철도의 거점이었고 1934년 일본이 개칭한북만철도의 중심지다.안중근 의사의 총성이 울렸던 곳이고백계 러시아 여인들의 유혹과 국제 첩보전이 공존했던 사연 많은 이국 풍정의 관광도시가 바로 하얼빈이다.“불의에이곳까지 오게되었습니다”고 했는데,김동리 연구자들은 이 여행 시기가 광명학원이 폐쇄(1942년경)당한 뒤 울적한 기분에서 떠난 것으로 기록하기도 한다.하지만 만주 여행 증거가 없기에 이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이 편지로 김동리는 분명히 만주 여행을 했다는 사실과,단순히울적해서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용건이 있었음이 밝혀진다. 모처럼 원고청탁을 받고도 쓰지 못한 채 황황히 떠난 사연이 소략하게나마 적혀있다. “친절하신 편달과,아울러 분부에 못내 감사하오며 일면 송구하옵니다.즉시로 제대로 좋은 글을 써보려고 했더니 그날 오후로 불같이 이번 여정을 떠난 것이옵니다.차중에서와객사에서 두어 번 붓을 들어보았으나 이번 볼일이란 것이좀 절박한 것이 되어 좀처럼 저에게 그러한 마음의 여유를주지 않았습니다.” 울적함을 달래기 위한 여행을 고의로 절박한 척 하진 않은 것 같다.그는 귀국해서 “만주선 그곳 우표를 붙여야 한다는 걸 접땐 깜빡 잊고 참 실례했습니다”란 편지를 보낸다. 이 글에서 검열에 걸려 못 나오는 것 같다고 지레 넘겨짚었던 ‘소녀’(‘인문평론’,1940년 7월)가 발표된 걸 보면이 편지가 언제 씌어졌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두 통의 편지로 미뤄볼 때 김동리는 1940년경 광명학원에 나가고 있을때 절박한 일로 만주에 잠시 급히 다녀온 것으로 보인다.당시 만주 여행은 그리 쉽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대목은 김동리 연구의 새로운 과제로 남는다. 사천읍에서 양곡조합 촉탁으로 해방을 맞은 김동리는 발빠르게 인민위원회 결성을 반대하다가 몰매를 맞았지만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역사의 탁류 속에서 그는 기혼녀손소희(孫素熙·본명 貴淑·1917∼1987년)와 내연의 관계를 가졌다가 부산 피난지에서 특종기사가 될 정도로 소란을피웠으나,문단에서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다.최정희에게보낸 편지를 보노라면 자신의 글을 게재해 주기를 기다리던 자세에서 어느새 거꾸로 그녀의 원고 게재 여부를 결정하는 자세로 뒤바뀌어 버린 격세지감이 있다.글에 등장하는인물도 바뀌는데,바로 박목월(朴木月·본명 泳鍾·1917∼1978년)이 부각할 시기가 된 것이다.그리고 본격적으로 문단주역이 남도 출신으로 바뀌게 된다.“여행은 바로 죽음이이끄는 목소리에 젖어가는 길”이라든가,“바다가 있다는것이 아무런 위안을 가져오지 못합니다”는 등의 감각적인청록파풍 문장으로 채워져 있는 편지 수신인 최정희의 주소는 동숭동 5-1.그녀가 1949년부터 1957년까지 전쟁중 피난을 빼곤 줄곧 거처했던 곳이니 목월의 집필시기는 이 기간의 것이다. 수채화처럼 담백한 이 시인의 편지는 서정적 실용문의 전형이 됨직하다.계성학교를 나와 경주군 동부금융조합에 다니다가 맞은 해방은 박목월에게도 운명의 탄탄대로였다.모교 교직에서 이화여고로 초빙된 게 1949년.한국전쟁 때는공군 종군작가단이었지만 그 난리통에도 깔끔해서 별 요란한 일화를 만들진 않았다.작가 박영준(朴榮濬·1911∼1976년)에게 “연애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란 말을 남긴 게 파격이라면 파격일까.칙칙한 분위기로 유도해 내는 듯한 박영준의 편지는 피난시절 문인들의 삶이 점묘파식으로 채색되어 있다.급작스런 후퇴와 한강인도교 폭파로 서울에 잔류했던 문인들 중 일부는 북행 도중 탈주했는데,박영준도 여기에 속한다.1·4후퇴 때는 전원이 남하했는데,박영준은 육군 종군작가단 사무국장직을 맡았다.공군 종군작가단이었던최정희는 박영준에게 은근히 창공구락부 가입을 권유했으나 거절한 내용인데,이상한 것은 박의 발신지 주소가 육군과공군이 뒤섞여 있어 양다리 작전을 했던 것 같다. 두 단체가 다 대구에 머물면서 1952년 공군종군작가단과합동으로 ‘고향 사람들’(김영수 작)이란 연극을 공연했는데 이 때 대학을 마치고 귀향한 딸 역에 최정희,그녀가 여러 구혼자 중 선택한 애국적이며,성실한 상이군인 역을 박영준이 맡았다.그런데 문제가 생겼다.“정옥(딸)을 맡은최정희 여사가 맨 마지막 장면에서 만수(상이군인) 역을 맡은 나에게 안겨야 하는데,최여사가 그것을 반대했다.연극인데 어떠냐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극적인효과는 줄어들지만 서로 맞절로 대신키로 했다.“고집 부리는 최여사가 얄밉기도 했고 그래서 연습할 때는 맞절을 하다가 정작 무대에서는 내가 최여사를 그냥 껴안아 버렸다. 무대에서 껴안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꼼짝 못하고 당해버린 최여사도 그냥 웃고 말았다.”(박영준 ‘종군작가 시절’). 문인극은 인기를 끌어 그 뒤에도 계속해서 “세번의 연극으로 최 여사를 가깝게 사귈 수 있었다”고 박영준은 썼는데,이것 말고도 공군 소속이었던 최정희가 육군에 함께 종군하기도 했었기에 그들은 더욱 친밀해졌을 것이다.너무 비약할 필요는 없지만 편지 문맥을 따라 읽노라면 박영준은최정희에게 지나치게 자상할 뿐만 아니라 미리 상경한 그녀를 만나고자 그 먼 길을 오르내리기도 했었고,그녀 쪽에서도 적잖은 편지를 보낸 것으로 보이기에 예사롭진 않다.최정희가 장편 ‘녹색의 문’(편지에서는 ‘푸른 문’이라고도 쓴다)을 서울신문에 연재한 게 1953년 2월부터 7월까지이고,박영준이 기뻐하는 상은 바로 단편집 ‘그늘진 꽃밭’(1953)으로 받게된 제1회 아시아 자유문학상이다.제2회 수상자가 황순원,3회에 김동리·서정주·박목월이 수상한 것을 볼 때 약간은 파격적이었고,그런 분위기가 편지에 스며있음을 감안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거명된 여럿 중 서임수(徐壬壽)는 강신재(康信哉·1924∼2001년)의 부군으로 후기에 공군작가단을 통괄하는 정훈감이 되어 문인들에게 인심을 얻은 주인공이다. 박영준의 편지에는 최정희와 첫 남편 김유영과의 아들인익조와 아란(김지원의 아명) 항란(김채원의 아명)의 이름까지 두루 거론될 뿐만 아니라 자질구레한 일상사들이 다 언급되어 있어 다른 용건식 편지와는 격이 다름을 느끼게 한다.“지난 밤 처음으로 최선생의 복면 벗은 진정한 모습을볼 때 그것이 비록 말할 수 없이 슬픈 눈물이었다 해도 커다란 새것을 발견한 듯 즐거웠다는 것은 내가 잔인하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그러나 자신에 대한진실이 너무나 컸기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최선생의 진실을 옆에서보기만 하여야 하는 것이 나의 위치여서 인지는 몰라도 나는 복면 벗은 최선생의 모습에 도리어 알은 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문장은 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데,‘어제 저녁’이란 바로 최정희가 서울로 떠나기전날 밤이기에 이별의 만남이 있었던 것으로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이별의 아픔이 전해오는 편지다. 전혀 뜻밖의 인물이 보낸 편지로 시인 박기원(朴琦遠·1908∼1978년)의 것이 있다.강릉에서 태어나 니혼(日本)대학수학 후 언론계에서 활동하다가 예술원 사무국장을 지낸 바 있는 이 시인은 고전적인 그리움을 바탕색 삼아 노골적인연심을 고백한다.“그리운 마음이 죄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별이 한 점 깜빡 창가에 떨어져 옵니다.별마저 견딜 수없는 듯이 다시 은하로 돌아가 버린 자정입니다.…별이 돌아가고 먼데서 닭소리가 들려오는 이 자지러지도록 무서운고요 속에서 나는 환한 푸른 빛 속에 몸둥이를 적시고 있습니다.그것은 분명 당신의 뜻입니다.당신의 사랑입니다.그렇기에 메마른 영혼이 이토록 즐거운 것입니다.” 낭만주의풍 연가는 이렇게 계속된다.“꽃은 님의 고운 웃음 짓는 시간에만 피어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이제 님의웃음 대한지 오래이매 꽃마저 낙화되어 산산이 떨어져갑니다.그러나 푸른 잎새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복된 태양 아래아! 나는 님의 모습 보고싶어 그 마음 애달파 한 마리 꾀꼬리 되어 훌쩍 날아가고 싶은 마음이여.”아무리 미운 상대일지라도 이 정도의 정감 넘치는 편지라면 보관하지 않을 수 없는,현대 문학사의 막차에 가까운 연서(戀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 시대,식민지의 암울했던 고통과 해방의 환희,그리고 분단과 민족 상잔의 전쟁을 겪으면서 우정과 사랑이 역사의 소용돌이에 마모되어 갔다.편지의 주인공들은 이제 다 세상을 떠났으나 그들이 남긴 문학과 문단적인 우애는 전화와 전자통신의 등장으로 줄어든 친필·서간문 시대에 대한 추억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어느 방송 외화시리즈를 볼까?

    ‘레밍턴 스틸’‘블루문 특급’‘A특공대’‘전격Z작전’‘브이’‘천사들의 합창’….모두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끌었던 TV 외화시리즈들이다. 한때 전성기를 누렸던 공중파 방송의 외화시리즈가 ‘찬밥’ 시세로 밀려난 반면 케이블TV에서는 미국 등지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외화시리즈를 앞다투어 방송,대조를 이루고 있다. 동아TV는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를 방영하고 있으며 OCN액션은 ‘스타게이트’‘엔젤’‘절대쌍교’등 외화시리즈를 대거 편성,9월부터 방송에 들어갔다.‘스타게이트’(수·목 오후9시30분)는 94년작 SF영화 ‘스타게이트’이후의 이야기를 TV드라마로 만든 것.‘맥가이버’로 친숙한리차드 딘 앤더슨이 주연을 맡았다. ‘엔젤’(금 오후9시30분)은 MBC에서 ‘미녀와 뱀파이어’란 제목으로 잠깐 방영한 적 있는 TV시리즈 ‘뱀파이어해결사(버피)’의 후속편.버피의 남자친구였던 데이비드베레나즈가 주연을 맡은 미국 FOX TV의 인기작이다.인간과뱀파이어의 피를 반반씩 가진 엔젤이 영혼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컬트적 느낌이 강한액션물이다. ‘절대쌍교’(월·화 오후9시30분)는 홍콩의 ‘신사대천왕’ 린즈링(林志領),쑤유펑(蘇有朋)이 주연을 맡은 무협물.홍콩작가 구룽(古龍)의 원작소설이 87년에는 량차오웨이(梁朝偉) 주연의 10편짜리 시리즈물,92년에는 류더화(劉德華)·린칭샤(林靑霞) 주연의 영화로 제작됐던 작품이다. 한편 공중파 방송은 ‘프로파일러’(SBS),‘X파일’‘사브리나’(KBS),‘도망자’(MBC)등 각 방송사당 1편 정도의외화시리즈를 내보내고 있지만 모두 심야나 토요일 한낮에 편성돼 있다. 이에 대해 KBS 편성국 관계자는 “미국에서 인기를 끄는드라마도 문화적 기호가 다른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면서 “아시아지역에 수출할 정도로 우리 드라마의 제작역량과 여건이 좋아져 굳이 외화시리즈를 수입할필요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실제로 미국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아이러브루시’‘매쉬’가 국내에선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또 “방송위원회가 국산 영화와 만화영화의의무 편성비율을 책정해 놓은 것도 공중파 방송의외화시리즈가 밀려나는 큰 요인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윤창수기자 g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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