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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류(風流), 바람과 물이 전하는 말

    풍류(風流), 바람과 물이 전하는 말

    설이 다가온다. 우리 민족은 또 다시 대이동을 시작한다. 길 위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먼 길이지만 부모님이 계시는 내 고향집에 들어설 때, 그리고 반가운 고향의 친구들을 만날 때 우리는 더없이 행복하다. 우선 들판에 들어서면 들을 지난 바람이 마치 여인네가 귓속말하듯 속삭인다. 어서와. 왜 이제 오는 거야?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우리가 어린 시절 뛰어놀던 동네 어귀의 당나무도 그윽한 표정으로 반가워하며 말한다. 잘 왔어. 보고 싶고 그리웠어…. 마치 우리가 찾아주지 않아 외로움의 나날을 보냈다는 듯이. 어디 그뿐인가. 얼어붙은 시내 역시 어서 와 얼음을 지치지 않겠냐고 끌어당긴다.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도, 까치밥으로 남겨둔 감나무의 감들도 신난다, 신난다 하고 외친다. 마을 어귀에 장승과 솟대라도 서 있다면 그 반가움은 절정에 이른다. 도시의 삶에 찌들은 우리의 꿈을 정화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쯤 하늘의 구름도 미소 짓고, 동네 뒷산도 응석 부리듯 달려나온다. 그렇게 고향을 찾는 우리를 모두 반갑게 맞는다. 어머니가 달려나와 포옹해주듯이. 그때 우리의 마음은 더없이 행복하다. 그리고 축복을 느낀다. 축복! 그렇다, 우리는 귀향에서 더없는 신의 은총을 느끼는 것이다. 축복을 한자로 풀면 신에게 복을 빈다는 말이다. 영어로는 흔히 blessing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blessing은 생명의 피를 묻히거나 흘려 신성하게 한다는 말이다. 고대에 동물을 희생제물로 바쳐 제단을 신성하게 한 데서 유래한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양의 어휘 중에 축복과 관계된 또 다른 단어로 celebration이 있다. 이 말은 오늘날에는 주로 찬양, 칭찬, 축제의식 등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그것의 어원인 라틴어 celebratus은 ‘자주 가다, 빈번히 가다, 종종 방문하다, ~에 늘 출입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말하자면 celebration에는 우리가 어떤 장소에 자주 가거나 방문할 때, 그 장소는 물론 거기에 속한 사람, 동물, 식물 등과의 관계가 더욱더 깊어진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축복은 먼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깝고 친밀한 관계, 길들여진 관계에서 온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맛난 음식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건 그 때문이다. 같은 보름달이라도 고향에서 보는 것이 더 정겨운 건 그 때문이다. 어렸을 적에 자주 가던 집과 동네와 숲들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건 그 때문이다. 어릴 적 동무들이 그리도 반가운 건 그 때문이다. 따라서 바쁜 도시생활 속에서도 우리가 굳이 시골의 고향을 찾는 것은 단순히 부모님을 뵙기 위해, 동네 친척들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 맡던 고향의 산과 들과 하늘과 냇가의 냄새와 향기를 맡기 위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외치는 그리움의 소리를 듣기 위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고향의 산과 들과 하늘과 강이 바로 나의 젖줄이었음을, 나를 키운 어머니였음을, 내 마음을 자라게 한 스승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곳이야말로 내가 나서 자란 곳임을, 그리고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임을, 아니 영원히 그 숨결에 잠들고 싶은 곳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널뛰기 ㅣ김준근ㅣ 기산풍속도첩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서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는 세상을 두루 여행하고 싶어 집을 떠난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금화 세 닢을 주며 말한다. “이걸로 양들을 사거라. 그리고 양을 몰고 다니며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니거라. 우리가 사는 성이 가장 소중하고, 우리 마을 여자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걸 알게 될 때까지….” 그 길로 산티아고는 세상의 보물을 찾아 집을 떠난다. 그리고 평생을 떠돌며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그는 깨닫는다. 자기 고향 마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물이라는 것을, 축복이라는 것을, 신의 은총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난 곳에 가서 죽기를 원한다. 원주민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여우도 죽을 때는 제가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고 하지 않던가. 나바호족 여인 매 윌슨 초는 강제 이주를 당해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애절한 시를 남겼다. 내가 사는 곳은 나의 희망과 염원이 있는 곳이다 내가 사는 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다 내가 사는 곳은 사후 나의 모든 것이 남아 있는 곳이다 내가 사는 곳은 내가 땅을 알 듯, 땅이 나를 아는 곳이다 하지만 새로운 땅은 내가 그를 알지 못하듯, 그 또한 나를 알지 못할 것이다 고향을 떠나는 순간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살 수밖에 없음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축복의 근원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에게 축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의 고향과 가족만이 아니다. 우리가 쓰는 고향의 구수한 말과 사투리 또한 우리를 더없이 행복하게 한다. 아코마족 시인인 시몬 오르티즈는 인디언들이 그들의 언어를 잃어버리면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마을에서 자라면서 비가 축복이고, 선물이고, 상징이라는 것을 배웠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땅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나의 부족의 삶에 대해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서 배웠다. 또 계절의 변화와 식물이 나고, 성장하고, 결실을 맺는 과정을 옥수수밭에서 배웠다. 자라면서 나는 땅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했고,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돌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삶이 계속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저녁식사 후 아버지는 북을 치며 노래를 하셨고, 우리 아이들은 비와 사냥과 땅과 사람에 대한 주제에 맞춰 춤을 추었다. 우리의 언어에는 이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언어를 버리고 우리의 영혼을 노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모국어―아코마족의 언어―에 그의 삶과 영혼이 담겨 있음을, 그것을 잃어버리고서는 삶은 더없이 공허한 것임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어머니 품에서 배운 우리의 말 속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우리의 꿈과 희망, 그리고 고향의 흙내음과 새소리, 바람소리가 담겨 있음을. 밤하늘의 별빛과 조상들의 뭇 이야기들이 우리 몸의 세포처럼 숨 쉬고 있음을.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말한다.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전체성이 결핍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오직 영혼을 통해서만 전체성을 획득할 수 있는데, 그 영혼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성이란 나와 네가 결합된 것이다.” 나의 전체성에는 나의 고향 마을과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그곳의 하늘과 땅과 식물과 동물, 산과 강, 해와 달과 별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 전체성을 회복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신의 은총이요, 축복인 것이다. 명절은 바로 그 축복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의례이다. 설에 고향에 가면 그 축복을 느껴보라. 부드러운 숨결로, 다정한 눈길로, 따스한 손길로, 무엇보다 갈급한 영혼으로 냄새를 맡아보라. 그리고 그 축복을 노래하라. 서정록_ 검은호수라는 인디언 이름을 가진 고대사 연구자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 김지하 시인 등을 따라 한살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현재는 동북아를 중심으로 한 고대의 샤마니즘, 인디언의 문화와 정신세계 등에 심취해 있습니다. 듣기에 관한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담은 책 <잃어버린 지혜, 듣기>를 펴냈습니다. 2008년 1월
  • [열린세상] 영혼없는 나라,실용기회주의 나라/이해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열린세상] 영혼없는 나라,실용기회주의 나라/이해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공무원에게는 영혼이 없다.”대통령직 인수위 업무보고에서 고위공무원이 한 말이다. 해서 ‘영혼없는 공무원’이 항간에 회자되고 있다. 정권이 바뀐 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고위공무원의 자기변명 같이 들려,‘정신없는’ 공무원의 넋두리 정도로 보는 분위기다. 본디 이 말은 현대 사회학의 태두격인 독일의 막스 베버가 현대 관료제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데서 비롯된다. 그 뜻도 ‘영혼없는 공무원’식의 표현에 내포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 특정 직업집단, 예컨대 ‘공무원’ 등이 영혼이 있니, 없니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처럼 현대 사회를 옥죄는 ‘관료화’라는 거대한 흐름에 대한 시대 비판 내지 문명 비판의 열쇠말로 제시된 개념이다. 흔히 베버를 논할 때 오해하는 것처럼, 그 말은 다만 국가행정에 한정된 개념도 아니다. 관료화라는 말은 국가행정뿐 아니라 사기업 경영까지도 포함한다. 베버가 말하는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쾌락주의자’로서 현대의 관료는 공무원일 수도 있고, 그저 샐러리맨일 수도 있다. 베버가 그려내는 현대 관료제는 영혼이 없는 기계다. 영혼도 가슴도 없는 터라 일단 스위치가 켜지면 무한작동한다. 선악도 미추도 다 소용없다. 누가 스위치를 내릴 때까지 그냥 그렇게 움직인다. 그래서 베버는 관료제를 ‘쇠창살로 둘러싸인 감옥’(iron cage)이라 불렀다. 일반이 이해하기 결코 만만찮은 베버의 관료화론이 창졸간에 참여정부 고위관료의 자기변명 구실로 쓰이니 무자년 대한민국 출발이 심상치 않다. 사실 그렇잖은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거치면서 대한민국 관료가 언제 한번 ‘을(乙)’이었던 적이 있었나. 아니 그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군부정권 때는 맹종했고, 민주화 때는 편승했고, 이른바 ‘좌파’정권에는 기생했다. 지난 10년 한국의 관료집단은 꾸준히 몸집을 불려왔고, 시중 여론이 ‘386’을 비난하는 틈을 타고 어느새 청와대까지 장악해 버렸다. 민주화 이전이나 이후나 한국의 관료집단은 영원한 ‘갑(甲)’이었다. 그들 스스로 말하지 않는가.‘공화국은 바뀌어도 관료는 영원하다!’ 참여정부에서 종종 이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정권이 바뀌어도 끄떡없을 ‘국정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실제로 그랬다. 대선국면이 들어서기 전까지 온 나라를 들썩였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보자. 말단 관료까지 나서 온갖 선전 매체들을 동원해 궤변을 들이대고, 또 혈세를 축내면서 홍보에 열을 올리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 혈세를 가지고 반대하는 언론을 통제하고자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당시 시중에서는 ‘조중동’에다 하나를 얹어 ‘청(靑)’ 곧 청와대를 말하곤 했다. 그 중심에는 국정홍보처가 있었고, 이번에 폐지된다고 한다. 당시 시민사회 일각에서도 국정홍보처 폐지를 주장하곤 했으니, 그렇게 보자면 전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셈이다. 지금은 잠시 모면하고자 ‘영혼’이 없다고 말할지 몰라도, 사실 그러했는지 다른 문제다. 한번이라도 우리 관료들의 ‘영혼’에 국민이 자리잡고, 그 ‘가슴’에 저들의 고단한 삶이 자리잡았던 적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차라리 지난 시절 관료들의 영혼은 신자유주의였고, 가슴은 ‘눈먼 시장’아니었던가. 특히 사회적 논란이 극심한 쟁점에서 관료집단은 여지 없이 권력자의 눈치만 살피면서 정파적, 이념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곤 했다. 관료집단에 지조론을 들이대는 것은 온당치 않다. 주어진 역할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때 금과옥조인 양 외워대던 각종 정책들을 정권이 바뀌자마자 ‘반성문’ 한장 달랑 내놓고 표변하는 것은 지켜보기에 참으로 민망하다. 그것도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관료의 ‘영혼’이 실용이라는 기회주의에 줄설 때 국민 다수는 도대체 누구 밑에 줄 서야 하나. 이해영 한신대 경제학 교수
  • [책꽂이]

    ●탐라문견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정운경 지음, 정민 옮김, 휴머니스트 펴냄) 18세기 우연히 제주에 머물렀던 지식인 정운경이 낯선 땅 제주의 문화와 그곳 사람들의 삶을 관찰한 기록. 바다 밖의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돌아온 표류민들의 기록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1만 3000원.●사랑에 빠진 세계사(치우커핑 지음, 유수경 옮김, 두리미디어 펴냄)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 인물과 예술가들의 사랑, 고대에서 근·현대까지 세계 각국의 사랑과 성 풍속을 에피소드별로 모았다.1만 2000원.●조선이 버린 여인들(손경희 지음, 글항아리 펴냄)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세종에서 성종까지의 기록에 등장한 하층민 여성 33인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왕비, 후궁, 기생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조선사회 하층민 여성 이야기란 점이 새롭다.1만 3000원.●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일리야 레핀 외 지음, 이현숙 옮김, 써네스트 펴냄) 19세기 러시아 회화의 거장 일리야 레핀의 걸작 100여편에 대한 해설. 작가의 생애, 창작활동, 예술관을 담았다.2만원.●차티스트 운동, 좌절한 혁명에서 실현된 역사로(김택현 지음, 책세상 펴냄) 선거법 개정 운동으로 인식되고 있는 차티스트 운동의 역사적 진행과정과 배경을 조명했다. 대표적 차티스트 지도자인 퍼거스 오코너, 윌리엄 러벳의 활동도 되짚었다.1만 2000원.●보헤미안의 파리(에릭 메이슬 지음, 노지양 옮김, 북노마드 펴냄) 예술의 도시 파리를 단순한 관광지로서가 아닌, 창조적 작업을 하는 장소로 활용하라고 제안하는 여행기. 파리의 어디에서 어떤 생각을 하면 창조적일지 친절히 귀띔한다.1만 2000원.●그래도 희망입니다(문규현 글, 홍성담 그림, 현암사 펴냄) 문규현 신부가 이해와 용서, 사랑을 주제로 쓴 25편의 짧은 글 모음. 홍성담 화백이 글에 걸맞은 따뜻한 그림을 그렸다.8500원.●문화재청 사람들의 문화유산 이야기(강신태 등 지음, 눌와 펴냄) 현직 문화재청 직원 23명이 알려지지 않은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들을 엮었다. 업무나 개성에 따라 문화재를 바라보는 현장의 시각들도 다양하다.1만 5000원.●마음 사전(김소연 지음, 마음산책 펴냄)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과 연관된 낱말 300여개로 복잡한 감정의 실체를 더듬었다. 행복과 기쁨은 어떻게 다를까. 시인이 간추린 다양한 마음의 빛깔들에 무릎을 치게 된다.1만 2000원.●동네에너지가 희망이다(이유진 지음, 이매진 펴냄) 태양광, 풍력, 바이오가스, 유채기름 등으로 에너지 자립을 실현해가는 국내외 현장들을 방문했다. 녹색연합 에너지·기후변화 팀장인 저자가 석유고갈 시대의 대안을 모색했다.1만원.
  • [하재봉의 영화읽기] 비커밍 제인

    [하재봉의 영화읽기] 비커밍 제인

    사랑에 빠진 남녀의 마음을 섬세하게 표현해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을 불러일으킨 여류작가 그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랑을 했을까? 혹시 허구적 소설 속에 등장한 이야기나 인물들은 자신의 연애담에 상상력이라는 질료를 불어넣어 조금 변형한 것은 아닐까? 18세기 영문학사에 중요한 작가로 기록되는 여류작가 제인 오스틴은 평생 6편의 소설만을 남겼지만, 그 소설들은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고 또 6편 전부 영화나 TV영화 혹은 미니시리즈로 여러 차례 만들어져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제인 오스틴의 감성은 시대를 뛰어 넘어 2백년이 훨씬 지난 지금의 관객들에게도 통하고 있는 것이다. <와호장룡> <브로크백 마운틴>을 만든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이 <센스 앤 센서빌리티>로 제인 오스틴의 섬세한 감성을 화면에 옮기는데 성공했고, <오만과 편견> <엠마> 등 제인 오스틴의 작품 6편들은 지금까지 수십 차례 영화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두었다. <비커밍 제인>은 알려지지 않은 제인 오스틴의 사랑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물론 당시의 정확한 기록이 남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상당 부분은 허구로 재구성한 것들이다. 제인 오스틴은 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 스티븐톤 교구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형제는 모두 8명. 그 중에서 제인은 일곱 번째였다. 그녀가 받은 공식적인 교육은 11살 생일 직전 애비 스쿨에서 1년 반 동안 읽기를 배운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혼자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기성교육을 받지 않은 그녀는 지금까지의 소설들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글을 시도했다. 그녀의 첫번째 소설은 《엘리노와 마리안느》로서 19살 때 쓴 작품이다. <비커밍 제인>은 제인이 첫번째 소설을 막 쓰고 난 직후부터 시작된다. 제인이 스무 살 때인 1795년 크리스마스 시즌, 그녀는 운명적인 남자를 만나는데 그는 제인의 오빠의 친구인 톰 리프로이다. 휴가차 햄프셔를 방문한 톰은 1월 중순 런던으로 돌아가 법률공부를 시작한다. 제인은 그 해 8월 런던에 가서 톰을 만나지만 1798년 8월 그들의 로맨스는 끝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의 짧은 일생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을 이 무렵의 제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제인이 런던에서 톰을 만나고 돌아온 직후인 1796년 9월 18일부터 로맨스가 끝난 직후인 1798년 10월까지 2년 동안 쓴 제인의 편지를 제이의 언니가 모두 불태워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인의 언니 카산드라가 실수로 혹은 고의로 태우지 않은 두 사람 사이의 첫번째 편지는 아직 남아 있다. 제인 오스틴의 전기작가 존 스펜스는 이 편지를 바탕으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끄집어내서 제인이 사랑한 톰 리프로이라는 인물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 제인이 톰과 사랑에 빠져 있던 그 시기, 제인 오스틴의 주요 걸작들이 탄생되었다. 그 2년 동안 제인은 《오만과 편견》《센스 앤 센서빌리티》《엠마》 등을 집필했고 사랑이 끝난 직후인 1979년 그녀의 마지막 작품 《노싱거 사원》을 완성했다. 하지만 제인은 1799년 이후 1817년, 4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깊은 사랑의 상처로 인해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제인 오스틴의 연애 이야기를 그린 줄리아 제롤드 감독의 영화 <비커밍 제인>은, 존 스펜스의 전기 《비커밍 제인 오스틴》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줄리아 제롤드 감독은 10년 넘게 TV 시리즈를 연출하면서 인정받은 후 2005년 영화계에 대뷔했다. <비커밍 제인>은, 기존의 자료를 바탕으로,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에 나오는 여러 가지 상황이나 인물을 효과적으로 결합하여 상상적으로 재구성했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사랑이냐 돈이냐 라는 선택의 문제다. 조금 더 고급스럽게 말한다면 정신적인 영혼의 사랑을 갈구할 것인가, 아니면 현실적인 물질적 풍족을 따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제인(앤 해서웨이 분)이 사랑한 톰 리프로이(제임스 맥어보이 분)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외삼촌의 후원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더구나 그는 법대생인데 대법관인 외삼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출세할 수 없다. 즉, 외삼촌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아무리 제인을 사랑해도 현실적으로 결혼이 불가능하다. 톰이 외삼촌의 반대로 제인과의 결혼을 망설이고 있는 사이, 제인 앞에는 부와 명예를 갖춘 귀족 집안의 위슬리(로렌스 폭스 분)가 청혼한다. 제인의 어머니(줄리아 월터스 분)는 사랑만 가지고 가난한 목사(제임스 크롬웰 분)와 결혼했기 때문에 지금도 감자를 캐고 있는 신세라면서 제인에게 위슬리의 청혼을 받아들일 것을 강력하게 권고한다. 결혼이 여성들의 신분상승을 위한 중요한 기회로 인식되는 것은 현대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빈부격차가 심했던 18세기 당시에는 훨씬 더 심했다. “어떻게 사랑 없는 결혼을 할 수 있지? 가족, 집, 모두 다 잃고 얻는 건 가난과 고역뿐이라도 난 이 행복을 놓칠 수 없어!” 사랑에 빠졌지만 현실적인 장벽 앞에서 절망하는 제인이나 톰은 물론 제인 주변의 위슬리나 위슬리의 후원자인 그래샴 부인(매기 스미스 분)과 제인의 언니인 카산드라 오스틴 등 <비커밍 제인>에 등장하는 많은 캐릭터들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인물들에서 뼈대를 가져와 살을 붙인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사랑에 빠진 남녀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깊은 관찰력으로 획득된 입체적인 캐릭터의 구축,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다. 그것이 그녀가 창조한 인물들로 하여금 시대를 초월해서도 살아있는 생명력으로 가득차 있게 하는 것이다. 평생동안 독신으로 소설만 쓰며 살다간 제인 오스틴은 실연의 깊은 상처로 10년 넘게 절필하다가 1811년 《센스 앤 센서빌리티》가 출판되면서 활력을 되찾는다. 이미 오래 전에 탈고한 소설이었지만 출판은 되지 못하다가 《센스 앤 센서빌리티》의 좋은 반응으로 그녀의 다른 소설들 《오만과 편견》(1813년), 《맨스필드 파크》(1814년) 《엠마》(1815년)가 출판되었고 《설득》과 《노싱거 사원》은 1817년 7월 18일 에디슨 병으로 그녀가 사망한 후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항상 결혼 직전의 남녀가 주인공이며, 매력적이지만 믿을 수 없는 남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것은 그녀 자신의 사랑의 상처에서 오는 경험 때문이다. 톰 리프로이는 훗날 아일랜드의 수석변호사로 성공했으며 그는 자신의 첫 딸 이름을 제인이라고 지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제인 오스틴의 사랑 이야기가 섬세하게 만들어진 <비커밍 제인>은 시대가 흘러도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남녀 관계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화두로,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 스타가 된 앤 해서웨이의 연기도 좋지만 조연들의 빼어난 연기도 영화의 격을 높이는데 일조하고 있다. 특히 제인의 어머니 줄리아 월터스나 그래샴 부인 역의 매기 스미스 등 당대를 풍미하는 노 여배우들의 출연은 <비커밍 제인>의 완성도를 높여주고 있다. 앤 헤서웨이는 지적 호기심이 강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강렬한 반어적 통찰력을 갖고 있었던 제인 오스틴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글 하재봉 시인, 영화평론가, 동서대 교수 월간 <삶과꿈> 2007년 11월호 구독문의:02-319-3791
  • [길섶에서] 낮술/최태환 수석논설위원

    친하게 지냈던 화백을 오랜만에 만났다. 개인전 준비가 한창이다. 고흐전에 함께 가자며 시내로 나왔다. 점심을 같이했다. 소주잔을 받더니,“입에 착착 감긴다.”고 했다. 낮술은 정말 오랜만이라 했다. 그녀는 오지서 교편 잡던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 점심때면 동네 식당 아주머니가 음식을 배달했다. 소주 2병과 함께였단다. 나이 지긋한 선생님들이 병아리 여교사에게 낮술을 가르쳤다. 오후 수업은 늘 약간의 취기 속에 진행됐다.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했다.‘영혼의 흔적’을 확인하던 시절이었다. 해질녘 느티나무 그림자를 따라 미술실로 흘러들던 은은했던 빛의 화음을 잊을 수 없다 했다. 지금 열심히 작업하고, 생활도 안정됐다. 하지만 왠지 허전하다고 했다. 그리움일까, 아쉬움일까. 떠나버린 시간에 마음이 ‘허천난’ 듯하다고 했다. 소주 2병과 맥주 1병을 이내 비웠다. 오늘 낮술은 그 시절을 되살리게 해 기분이 좋단다. 덕수궁옆 미술관 풍경이 흔들린다. 보들레르의 말처럼 ‘가슴을 찢는 지독한 갈증’이 바람결에 날린다.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나나 무스꾸리 자서전-박쥐의 딸/나나 무스꾸리 지음

    열 살 소녀가 처음으로 극장에서 공연을 본 날. 소녀는 눈이 퉁퉁 부어서 집으로 왔다. 어머니가 놀라 묻자 소녀는 답한다.“이렇게는 살기 싫어. 난 관객 속에 있고 싶지 않아. 무대에 있고 싶어.” 그리고 15년여가 지난 1959년 소녀는 ‘그리스 음악제’에서 대상과 차상을 휩쓸며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마이크를 잡은 소녀, 아니 여인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온 세계가 자신의 무대가 됐기 때문이다. ‘나나 무스꾸리 자서전-박쥐의 딸’(나나 무스꾸리 지음, 양진아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에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세상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그리스 출신 ‘뮤즈’ 나나 무스쿠리(74)의 고백으로 가득하다. 1950년대 후반부터 발라드 샹송 가스펠 등의 장르에 걸쳐 450여장의 앨범 발매,4억장 이상의 음반 판매,‘오버 앤드 오버’‘트라이 투 리멤버’‘사랑의 기쁨’ 등 수많은 히트곡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했던 스타. 숱한 기록과 수사에 빛나는 여가수가 마침내 노래 속에 감춰뒀던 내밀한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놓았다. 의외의 면모들이 적지 않다. 영사 기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많이 접했으며 그 때문에 시력이 나빠져 ‘안경 쓴 뚱뚱한 가수’라는 외모 콤플렉스를 갖게 된 기억, 실제로 외모 때문에 냉대를 당했던 경험 등이 흥미롭다. 또 ‘박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도박에 빠져 돌아다녔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클래식과 대중음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고민 등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도 털어놓았다. 유명세로 가정을 소홀히 해 남편 조지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시도한 부분에 이르면 팬들은 숨이 막힌다. 하지만 이 모두를 극복하고 가정과 일 모두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은 여정에 새삼 ‘나나 무스꾸리의 힘’이 느껴진다.20일부터 그의 내한공연이 잡혀 있어 더욱 친숙하게 다가오는 책이다.1만 3000원.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사설] ‘영혼 없는 공무원’은 필요 없다

    국정홍보처의 한 공무원이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고 했다 한다. 그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보고하는 자리에서였다. 이날 보고는 국정홍보처 존폐 여부와 언론정책 등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였다. 정권홍보, 기자실 폐쇄 등 언론자유에 역행하는 언론정책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뜻이었던 모양이다. 코드홍보로 일관하다 부처 해체의 위기에 몰렸는데도, 공무원들 책임은 없다는 발상이다. 한심하고 어안이 벙벙하다. 공무원들이 지금의 국정홍보처 직원처럼 철저하게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한 적이 있었던가. 민주화시대 이후 처음이다. 정권 내내 국정홍보는 뒷전이고, 언론 편가르기, 언론 길들이기를 하는 데 충실한 역할을 했던 이들이 아닌가. 공무원들이 국민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기본원칙을 지켜려는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오늘처럼 참담한 평가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정권이 바뀔 때가 되니, 영혼없는 공무원 운운이다. 무책임, 면피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관료는 영혼이 없다.’라는 말은 원래 정치학자 막스 베버가 한 이야기이다. 관료는 정부의 철학에 따라 일한다는 의미다. 정권주구 노릇을 한다는 뜻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국정홍보처뿐이 아니다. 정부 조직 곳곳에 똬리를 틀고, 정권의 눈치를 보는 무책임, 무소신의 영혼없는 공무원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국민들은 이런 공무원을 원하지 않는다. 직위를 떠나 이들은 공무원 조직을 피폐하고, 병들게 할 뿐이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혈세가 아깝다. 물론 줄세우기, 코드맞추기를 강요한 정권의 책임이 더 크다. 하의상달의 통로를 열어놨더라면, 국민과 정부의 간격이 이렇게 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 정권은 반면교사로 삼길 바란다.
  • 인수위 “간보기식 보고후 반응 살피더라” 홍보처 “관료는 영혼이 없다” 선처 호소

    “투명한 정보 공개 등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취재 시스템 마련은….”(국정홍보처 당국자) “5년 동안 사실상 언론을 통제해 국정의 부담만 주지 않았느냐.”(인수위원) 3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대한 국정홍보처의 업무보고 석상에서 인수위원들은 국정홍보처의 퇴행적인 ‘취재선진화 방안’에 대해 통렬히 질타했다.“군기잡기식의 고압적 자세를 지양하라.”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지시에 따라 시종 낮은 어조를 유지했지만 지적만큼은 예리하고 정확했다. 인수위 관계자는 “마치 ‘간보기’ 식으로 보고한 뒤 인수위 반응을 떠보는 것 같더라.”라고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배째라로 나오는 것 같다.”고도 했다. 홍보처는 보고에서 취재 선진화 방안과 관련,“언론의 반발에 따른 대립으로 취지가 퇴색됐지만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한 취재 시스템 마련은 시대적 요청”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언론과 적대적 관계 형성으로 정책 집행 동력과 홍보 효과가 반감됐다.”고 덧붙였다. 이에 인수위는 “취재 선진화 방안을 한다며 언론의 취재원 접근권을 막는 것은 사실상 언로를 차단하는 언론 자유에 역행하는 조치”라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한 홍보처 당국자는 “관료는 영혼이 없다.”면서 ‘선처’를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총리실의 보고 태도와 관련해서도 인수위 쪽에서는 “슬쩍 분위기를 보는 것 같았다.”는 얘기가 나왔다. 인수위는 이날 총리실 당국자들에게 “총리실이 본연의 업무에 충실하지 못했고 부처 군림에 업무 중복도 심각하다.”고 질타했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와 관련,“위기관리 매뉴얼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금감위 당국자들도 이날 인수위에서 관심이 많은 ‘금산분리 완화’를 주요 보고내용에 끼워넣지 않았다가 인수위원들이 이 부분에 대한 질의에 집중하는 바람에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이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평론당선작] ‘여수’에서 식물성의 세계로, 그 타자 찾기 - 한강론/주지영

    1. 잃어버린 타자를 찾아서 우리네 일상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경계의 반복적인 명멸과 대면하는 자리에 인간을 위치시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들에 의해 일상의 공간은 구획되고 짜여진다. 주어진 공간의 구획을 넘어서는 순간에도 경계 짓기는 끝없이 지속된다. 안주와 일탈의 길항은 일상의 작은 균열들 속에서 내파되고, 일탈의 가능성을 지속시키는 새로움을 향한 갈망조차 이미 기획된 미시적인 욕망의 파편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기에 ‘가지 않은 길’을 향한 욕망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하다.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한다면 일상을 전복시킬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 위험을 고스란히 떠맡은 것, 그것이 소설의 운명이 아닐까? ‘길이 시작되자 여행은 끝났다.’는 루카치의 명제는 소설의 발생론적 배경을 논하는 자리에서 도출된 것이지만, 그것은 현대의 소설이 처한 위상을 거론할 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 소설의 문법 속에는 고향으로 가는 길을 비추는 작가의 ‘별빛’이 있어야 하고, 또한 현실사회의 고해를 건너는 ‘모험’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모험을 통한 별빛 찾기, 이를 달리 잃어버린 타자 찾기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인식이 현실을 지배하기 시작한 후, 인간은 이가 빠진 동그라미 같은 불구자로 전락해 버렸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자신의 반쪽을 찾아 끊임없이 벌판을 방황한다. 그 벌판은 근대자본주의로 인해 황폐화된 불모지이다. 그곳은 산업사회일 수도 있고, 후기산업사회일 수도 있다. 동그라미는 그런 삭막한 곳에서 자신의 반쪽인 타자(the other)를 찾아 온전한 존재가 되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반쪽을 찾지 못하는 한 동그라미는 영원한 불구자일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타자를 찾아나서는 고독한 탐험가, 그가 작가이다. 잃어버린 타자는 인간이 황폐화시킨 자연일 수도, 남성에 의해 도구화되어 억압받는 여성일 수도, 도시에 의해 황폐화된 농촌일 수도, 자본가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자일 수도, 이성에 의해 감금된 비이성일 수도 있다. 소설은 잃어버린 타자를 되찾고 타자와의 합일을 이뤄내고자 하지만, 당연히 그러한 지향은 실패한다. 그러나 실패할 줄 알면서도 그 세계를 강렬하게 지향한다. 그래서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이 얼마나 황폐한가, 또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하고, 어떠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를 뼈저리게 깨우쳐 주는 것, 그것이 소설이 짊어져야 할 비극적 운명이다. 어떤 타자를, 어떻게 지향하는가, 바로 그 점에서 소설의 색채와 작가가 이뤄내고자 하는 세계는 다른 빛깔을 띠게 된다. 소설사적 흐름에서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는 이들은 바로 이 잃어버린 타자를 찾기 위해 모험을 시도했고, 그 모험의 결과로 산출된 별빛들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 앞에 빛을 밝혀준다. 인간에게 불을 내어 준 프로메테우스가 그 대가로 자신의 심장을 독수리에게 내맡기듯 그들은 우리에게 ‘지금, 여기’를 밝혀 줄 소설을 쓰기 위해 벌판을 고독하게 방황한다. 그렇다면 최근 소설에서 프로메테우스처럼 소설의 비극적 운명을 천형으로 짊어지고 가는 작가는 얼마나 되는가.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소설의 운명을 포기하는 경우를 더 많이 보고 있지는 않은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매스미디어적 메시지들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소설의 고독한 운명을 방기하고 현상적이고 피상적이며 찰나적인 것에 쉽게 자리를 내어주는 작품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결여한 채 일상에 안주하여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쾌락들을 경탄해마지 않는 그런 소설들을 대하는 일은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프로메테우스의 천형처럼 소설의 비극적 운명을 짊어지고 고독한 방랑의 길을 떠나는 작가가 더욱 고귀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강은 ‘모험을 통한 타자 찾기’에 충실한 작가이다. 한강의 ‘모험’은 현실사회 모순의 해부보다는 그 현실사회에서 불구자로 전락한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조건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작품은 죽음과 광기, 소통의 법칙을 뒤집는 침묵이나 몸짓, 욕망의 금기를 위반하는 근친상간, 동물성에 대비되는 식물성 같은 언표들을 공적인 영역 속에서 가시화한다. 뼛속부터 밝음의 영역에 속해있던 기획된 욕망들을 삭제하려는 충동질로 가득한 그의 소설에서 인위적인 모든 것들은 부정된다. 제도나 관습 일반에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하고, 획일화된 것들을 거부한다. 먹고 마시는, 삶을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들조차 깡그리 부정하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인간존재의 진정한 의미들을 힘겹게 터득해 나간다. 폭력적인 일상에 휘둘릴수록 본래의 육체에 깃들이고 있었을 법한 영혼에 대한 갈급이 더욱 증폭되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가라앉았던 감정의 앙금들을 분출하고, 토해낼 때 비로소 영혼의 정화는 일단락된다. 의식(儀式)과도 같은 파토스가 지나가고 난 빈 자리에 ‘타자’를 향한 존재의 갈망이 채워진다. 그렇다면 한강 작품에 나타나는 ‘모험’은 무엇이며, 그 모험을 통해 찾고자 하는 ‘타자’는 무엇인가. 초기 작품에서는 죽음의 기억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여수’로 상징되는 타자가 설정된다. 타자의 자리가 설정된 이후 그 타자와의 합일 방법을 탐구하는 쪽으로 나아가는데, 그것이 ‘가면벗기와 맨얼굴 찾기’에서부터 출발하여 ‘언외언과 관의 사유’를 거쳐 ‘식물성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이 첫 창작집 ‘여수의 사랑’(문학과지성사,1995)에서부터 ‘내 여자의 열매’(창작과비평사,2000)를 거쳐,‘채식주의자’(창비,2007)로 전개되는 바, 이에 대한 검토를 통해 한강 작품의 의의를 탐색하고, 나아가 ‘지금 여기’에 대해 고민하는 소설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지평이 무엇인지를 점검하고자 한다. 2. 관념으로서의 여수(旅愁), 행(行) 일곱 편의 단편이 실린 첫 창작집 ‘여수의 사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일상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병적 징후에 시달리거나 심지어 자살 같은 극단적 행위를 통해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한강 소설에서 다루어지는 죽음은 인간의 육체에서 숨이 빠져나가는 생물학적 의미의 죽음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죽음은 그 기억 속에 유폐된 인물들이 좌절하고 절망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인물들이 삶의 영역으로 나오도록 이끄는 통로이다. 그 통로의 끝에서 인물은 좌절과 절망 같은 심리의 장막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타자와 조우한다. 그런데 여기서 작중 인물의 병적 증후나 자살 등을 유발하는 가족의 죽음을 두고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물음으로써 현실에 내재한 모순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일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죽음의 기억은 인물의 내면에 일상에 적응할 수 없을 만큼의 정신적 상흔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어린 시절 농약을 먹고 자살한 아버지와 동네 아이들에게 매맞아 죽은 동생 진규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질주’의 인규, 생모의 죽음에 대한 기억으로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저녁빛’의 제헌,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동반 자살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심각한 결벽증을 앓는 ‘여수의 사랑’의 정선 등을 보면 그렇다. 누군가의 죽음이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부적응이라는 요인을 촉발하는 정신적 상흔으로서 작동한다면, 그것은 작가의 인식이 현실의 모순에 대한 인식이 아닌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조건을 문제 삼는 쪽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한강의 관심은 불행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드러내는 측면에 놓인다. 따라서 작가는 가족의 죽음을 인물의 기억 속에 저장해 두고,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용서와 증오 등과 같은 보편적 주제와 연결시킴으로써 특정 시대, 특정한 상황을 뛰어넘어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조건을 탐색하려 한다. 어린 시절 가족의 죽음과 관련된 기억, 그러한 정신적 상흔으로 인한 병적 징후, 죽음과 같은 음울한 기운이 만연한 일상에의 부적응, 기억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 등으로 구성된 서사가 ‘여수의 사랑’ 전편을 관통한다. 이러한 서사구조를 깔고 작가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다. 어둡고 침울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작품에 설정된 타자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공간으로 한 폭의 아름다운 수묵화 안에 오롯이 담긴다. 가령,‘여수의 사랑’을 보자. 이 작품에서는 정선과 자흔이라는 두 명의 인물이 서사를 이끌어 나간다. 먼저, 정선의 경우. 여수에서 보낸 어린 시절,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술에 찌들어 살다가 결국 정선과 어린 동생과 함께 바다로 뛰어들어 동반자살을 꾀한다. 혼자 살아남은 정선은 서울에 살면서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일상에 적응하지 못한다. 정선은 서울을 죽음과 같은 음험한 기운이 만연하고, 온갖 병균이 득실한 곳으로 여긴다. 그곳에서 정선은 ‘결벽증’과 같은 병적 증세에 시달린다. 다음 자흔의 경우. 그녀는 두 살 때 서울역에 버려져 고아가 된 뒤 보육원 생활을 거쳐 입양이 된다. 돈에 대한 욕심도, 행동거지에 조심성도 없다.‘모든 것을 생각 없이’ 다루는 그녀는 아무 희망도 없이 도시를 옮겨 다닌다. 자흔은 일상의 ‘나’와 또 다른 ‘나’의 두 가지 모습으로 존재한다.‘핏기가 없는 데다가 입가와 뺨에 온통 하얗게 버짐이 피어 흡사 분가루를 뒤집어쓴 광대 인형’ 같은 것이 일상의 ‘나’이고, 늘 떠돌아다니면서 세상사에 무관한 채 ‘견고한 평화가 어른거리는 얼굴’,‘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천진한 영혼’을 가진 것이 또 다른 ‘나’이다. 또 다른 ‘나’는 여수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고향도 모르는 자흔은 성인이 되어 문득 찾게 된 여수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여수를 고향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상의 ‘나’를 버리고 또 다른 ‘나’로 거듭 태어나고자 한다. 그녀에게 여수는 풍경이 아름다운 공간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품은 공간으로 인식된다. 죽음과 같은 음험한 기운, 온갖 병균으로 득실한 ‘서울’에 대비되는 여수란 과연 어떤 곳인가. 길 여기저기에 소들이 쟁반만 한 똥을 갈겨놓은 진짜 시골이었어요.(중략) 그냥 ‘아름답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다시 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마을 앞 버려진 부두에는 누더기 같은 천막이며 더러운 판자때기들이 뒹굴고, 검푸른 물결은 갯벌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가 밀려가고……염소 울음 소리, 새소리, 바람, 두엄 냄새, 일하는 아낙네들……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낯익은 것이 없었는데도 마치 내가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 품속에 돌아와 있는 것 같았어요.(‘여수의 사랑’,50∼51쪽) 따뜻한 산수화 한 폭을 보고 있는 듯한 여수의 풍경은 자흔에게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곳으로 각인된다.‘푸른 실 하나하나를 촘촘히 엮어 놓은 것같이 잔잔한 만’에 염소 울음소리와 새소리가 있고, 바람이 불고, 두엄 냄새가 나며, 그런 자연적인 것들과 어우러져 백발 성성한 노인과 머릿수건을 쓴 아낙네, 상고머리 소년들이 일을 하는 곳,‘무덤’마저 ‘착하고 둥글둥글’하게 생긴 곳, 그곳이 바로 자흔의 기억 속에 자리한 ‘여수’이다. 고향도 모른 채 고아로 자란 그녀에게 여수는 ‘어머니 품속’처럼 아늑하고,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의 고향으로 살아 숨쉰다. 여수로 표상되는 이 세계야말로 자흔에게 인간다운 삶을 가능토록 하는 타자이다. 그녀가 여수를 갈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는 도시의 삶을 견디기 위해 어항에 물고기를 키우기 시작한다. 그녀가 물고기 키우는 일에 정성을 들이는 까닭은 자신이 물고기가 되고 싶어서이다.“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에게서 물고기가 되고자 하는 일이란 어머니의 품속 같은 여수로 흘러들어 가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일상의 ‘나’를 거부하고 아름다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여수’와 일체가 되고자 하는 또 다른 ‘나’를 지향하는 자흔을 통해, 정선은 어린 시절의 정신적 상흔으로부터 힘겹게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정선에게 죽음의 기억이 서린 여수는 병적 증세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자흔은 그런 정선에게 여수를 이야기하고, 그럴 때마다 정선의 결벽증은 심해진다. 그러다가 정선은 차츰 자흔을 통해 환기되는 여수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되고, 결국 자흔이 그녀의 곁을 떠나자 정선 역시 여수행 기차를 탄다. 정선의 여수행은 자흔처럼 일상의 ‘나’로부터 벗어나 아름다운 여수를 사랑하는 ‘나’로 거듭 태어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여행이다. ‘여수의 사랑’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품속’ 같은 타자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 작가가 천착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인간은 불행한 존재다.’라는 관념의 영역에서 설정된 것이어서 이 작품은 삶에 대한 리얼리티가 충분히 확보되어 있지 않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여수’라는 타자가 실현가능한 것으로서의 몸피를 얻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천착이 심화되어야 하며, 더불어 그렇게 얻어진 타자와 합일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도 탐구해 들어가야 한다. 3. 맨얼굴에 담긴 관(觀)의 사유 실현가능한 것으로서의 ‘타자’가 되기 위해 작가의 인식이 구체적인 현실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타자와 합일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탐구하는 것, 그것이 ‘어둠의 사육제’와 ‘아기부처’에서 이뤄진다. 이들 작품에서 ‘여수’로 상징되는 타자에 대한 직접적인 지향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대신 타자와의 합일이 가능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 데 주력한다. 그 방법은 ‘가면 벗기를 통한 맨얼굴 찾기’와, 용서라는 마음이 우러나오도록 하는 ‘관’의 사유로 구체화된다. ‘어둠의 사육제’를 보자. 먼저 주목할 것은 ‘서울’을 바라보는 작가의 인식이다. 작가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여전히 ‘어둠’이자,‘인간들의 더러운 그림자’가 지배하는 ‘무덤’으로 인식한다. 죽음의 기억이 이러한 인식을 이끌어내었던 초기작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서울의 구체적 현실에 천착하여 그 속에 내재된 동물적 폭력성을 감지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의 인식이 현실에 밀착해 있음을 보여준다. 얼마나 세상에 밟히고 뒤둥그러지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동물적인 분노와 보복을, 번들거리는 눈과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를, 그 이상 철면피할 수 없을 되바라진 억양을 묵묵히 관찰하며 나는 연민이나 환멸이라고만은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슬픔에 사로잡히고 있었다.(‘여수의 사랑’,230쪽) 중년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실수로 때린 여대생에게 ‘동물적인 분노와 보복’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전철에서 뻔뻔스럽게 자리 양보를 요구한다. 비단 중년 여자뿐만이 아닌 이 작품의 여러 인물들에게서 모두 감지되는 동물적 폭력성은 이후 전개되는 한강의 소설에서 현실 인식의 한 증좌가 된다. 나(영진)와 인숙 언니는 같은 고향 사람으로 둘 다 서울로 상경한다. 영진은 ‘세상에 대해 좋은 것만 생각’하고 ‘착하게’ 살아왔다. 그리고 인숙 언니는 ‘커다랗고 감정이 풍부했던 눈이며 부드럽기만 했던 입매’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울로 올라와 변화한다. 여직공이던 인숙은 ‘거친’ 말씨를 내뱉고 ‘나쁜 쪽만 생각’하는 ‘독한 사람’으로 변한다. 무역회사 경리를 하면서 돈을 모아 대학 영문과에 진학할 생각을 하던 영진은 인숙이 전세금을 빼들고 도망가자,‘악하게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품고 ‘인간에게 살의를 느끼는 사람’으로 변한다. 명환 역시 ‘본래 선한 사람’이었으나, 교통사고로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잃고 ‘모든 인간들에게 살의’를 품는다. 간암을 치료하기 위해 전세금을 갖고 도망간 인숙이나, 그 인숙으로 인해 ‘독기’를 품은 ‘나’나, 돈으로 용서를 구해온 가해자에게 복수를 꾀하는 명환이나, 모두 중년 여인처럼 동물적 분노와 보복심으로 폭력을 휘두른다. 어둠 속에 꼿꼿이 네 발을 세운 채로, 경련하는 암고양이의 모습을 소리없이 주시하고 있는 검은 수고양이의 모습은 흡사 악령 같았다.(‘여수의 사랑’,223쪽) 쥐약을 먹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암고양이를 냉혹하게 주시하는 악령 같은 수고양이는 동물적 폭력성이 난무하는 현실을 환유하는 장치이다. 영진과 인숙, 명환 등은 바로 이 동물적 폭력성에 길들여진다. 이러한 동물적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가면을 벗음으로써 맨얼굴을 찾는 것이 그 첫 번째 방법이다. 동물적 복수심으로 남을 괴롭혀 온 명환이 결국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고통스러워하다가 ‘빈손’,‘완전한 빈 몸뚱이’가 되기 위해 자살하는 모습을 보고, 영진 역시 그런 복수심을 버리고 간암 치료를 받는 인숙 언니의 행동을 이해하고 용서한다. 바로 이 과정에서 가면 벗기와 맨얼굴 찾기가 이뤄진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객실의 음산한 풍경 속에 내 얼굴은 어딘가 낯설어 보였다. 나는 그 가면 같은 얼굴을 뒤집어쓴 사람이 더 이상 눈물 따위를 흘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여수의 사랑’,231쪽) 폭력적이고 비인간적인 일상에 길들여진 자들의 뻔뻔스러운 얼굴을 표상하는 ‘가면 같은 얼굴’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은폐한다. 그 얼굴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폭력적인 동물성을 표상하는 수고양이의 것에 가깝다. 작가는 가면을 쓴 비정한 일상의 인간들에게서 발견한 물질만능주의, 출세지향주의, 가족이기주의와 같은 현실의 모순을 비판의 목록에 등재한다. 동물적 폭력과 복수심에 길들여진 일상의 가면을 벗고 또 다른 ‘나’의 맨얼굴을 획득할 때 비로소 용서와 화해를 품을 수 있고, 또한 타자와의 합일이 가능하다. 요컨대, 맨얼굴 찾기가 타자와의 합일을 가능케 하는 일차적 방법인 셈이다. 맨얼굴로 도심의 일상에 나서는 영진에게서 현실을 향한 적극적인 대응 의지가 엿보인다. ‘어둠의 사육제´가 동물적 폭력성이 길들여진 가면을 벗고 그것에 오염되지 않는 맨얼굴을 되찾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면,‘아기부처´는 그 맨얼굴이 어떤 마음을 지녀야 하는지를 ‘언외언(言外言)´과 ‘관(觀)´의 사유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타자와의 합일을 가능케 하는 두 번째 방법이다. 주인공 선희는 프라임타임의 앵커인 남편과 소원한 관계를 유지한다. 남편은 어릴 적에 입은 화상 흉터를 감추려고 철저하게 긴 옷을 입는다. 선희가 감기에 들자 자신에게 감기를 옮길까봐 병원에 가보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그는 말실수 하나 용납하지 못하는 완벽주의자이고, 독단적인 인물로서 출세를 위해 자기관리를 철저히 한다. 선희는 처음엔 남편의 흉터를 보고 고됐을 그의 삶을 연상하지만, 결혼 후 이기적이고 권위적이고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남편의 실체를 알고부터는 남편의 화상 흉터를 싫어하게 된다. 자신의 흉터를 보듬어 줄 사랑을 찾아 남편은 외도를 하고 선희는 남편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나는 한갓 짐승이었다. 땀에 젖어 산비탈에 엎드린, 누더기 같은 한겹 가죽만 남은 병약한 짐승이었다. 그 가죽 안에서 악취나는 거품처럼 부글거리고 있는 것은 오래 묵은 분노와 후회와 증오, 억울함과 자책감과 부끄러움이었다. 그것들이 내 살을 속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부식시켜 왔다(‘내 여자의 열매’,111쪽) 현실의 동물적인 폭력성에 선희는 철저히 희생당한다. 그 결과 남편과 세상을 향해 분노와 증오를 쌓아간다. 그렇지만 분노와 증오는 앞서 ‘어둠의 사육제’의 인물들처럼 스스로를 동물적 존재로 만들 뿐이다. 그런 동물적 삶으로 인해 선희는 황폐해져 간다. 그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선희의 모습은 꿈 속 아기부처의 얼굴에 비춰진다. 아기부처가 짓는 표정들은, 음흉한 입꼬리와 날카로운 눈초리를 하거나, 차갑게 빈정대는 눈꼬리를 한 그녀의 내면과, 진흙이 끈적이며 달라붙기도 하고, 모래가 되어 부서지기도 하는 남편과의 현재 관계를 거울처럼 되비친다. 아기부처의 얼굴은 선희가 병약해가는 것이 “마음속에 맺힌 악취 나는 감정들” 때문임을 깨닫게 하는 경고의 스크린인 셈이다. 그렇다면 아기부처로부터, 동물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가? 먼저 그것은 ‘말’이 아니라 ‘침묵이나 몸짓’ 속에 현현하는 ‘언외언’에 있다.‘몸짓’으로서의 ‘언외언’은 ‘말’이 야기하는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남편, 어머니, 아기부처와 선희는 ‘말’이 아니라 ‘몸짓’으로 소통함으로써 화해한다. 어머니의 불화 그리기, 아기부처의 얼굴 빚기, 혹은 언어 장애 아동을 위한 삽화 그리기 등이 ‘언외언’의 도정에 가로놓인다. 아이, 까르르 웃는다. 처음으로 입을 열어 외친다. ‘가자!’ (중략) 아이의 손을 번쩍 들게 하고 엉덩이도 약간 띄워서 아이가 펄쩍 날아오르는 것처럼 해야겠다. 아빠의 몸까지 함께 날아오르려는 것처럼 해야겠다.(‘내 여자의 열매’,102쪽) 언어장애아동처럼 언어를 거부하는 것은 말의 논리와 체계, 즉 말을 배우면서 사회로 편입되는 사회화과정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동물적 폭력이 난무하는 일상 현실의 ‘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가 아버지의 노력에 힘입어 자기 안의 성벽을 허물고 드디어 입을 연다. 선희는 그들이 느꼈을 법한 기쁜 감정을 몸짓에 담아 삽화로 그려내야 한다. 아이와 아버지의 “날아오르는” 듯한 몸짓에 ‘기쁘다’는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마음이 담긴다. 삽화를 그리며 깨닫게 된 ‘언외언’은 남편의 흉터를 어루만지는 몸짓에 담긴다. 남편이 다른 여자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고 머리를 짓찧을 때 선희가 남편의 머리를 감싸안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몸짓’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말’ 그 자체에는 은폐된 ‘무엇’이며,‘침묵’의 빈 공간에, 말없이 이루어지는 ‘몸짓’ 속에 실재한다. 결국 언표화 되지 않는 마음을 환기시키는 방법은 ‘언외언’에 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인가. 이 작품에서 ‘언외언’의 심층을 ‘관(觀)’의 사유가 가로지른다.‘말’의 폭력성 때문에 갇혀 있던 용서와 화해의 마음은 ‘관’의 사유에서 풀려난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나누는 구분 자체를 초월한 곳에, 그리고 속물적인 욕망을 넘어선 자리에 “관”의 사유가 존재한다. 일상을 지배하는 논리규범에는 담길 수 없는 진정한 마음이 “관”의 사유 속에서 우러나온다. (i) “그 스님이 그러더라. 관세음보살은 내 속에 있다고. 내 몸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득해지면 그게 바로 관세음보살이라더라.” (‘내 여자의 열매’,104쪽) (ii) 관음의 입술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귀가 퍽이나 예민한 이인가 보았다. 빗소리를 듣다가 깨달음을 얻었고, 늘 세상사람들의 소리를 관(觀)하고 있어 괴로이 부르는 음성을 듣는 즉시 곧 구제해 준다고 어머니는 말했다.(‘내 여자의 열매’,105쪽) 삶의 고통을 인내하고, 마음속에 관세음보살을 잉태하듯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마음을 잉태하는 것, 그럼으로써 일종의 해탈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관’의 사유이다. 선희는 남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부부 관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깨닫는다. 자신이 그동안 봐왔던 남편의 모습은 실은 화상을 입은 그의 껍질에 지나지 않음을, 정작 남편의 마음은 화상으로 일그러진 피부 밑에 고통스럽게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마음을 가질 때,“목련은 나무에 핀 연꽃이라 목련(木蓮)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올려다보자, 하오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그 봉오리들은 마치 꽃잎 안에 흰 등불들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았다.”(117쪽)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나아가 겨울 나무에서 봄의 생명력을 감지할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 겨울부터 저 날카로운 솔잎들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같은 푸른색이지만 분명히 달랐다. 방금 나온 어린 싹 같은 연푸른빛이 생생하게 차올라 있었다./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내 여자의 열매’,125쪽) ‘아기부처’의 마지막 장면이다. 겨울 지나 봄으로 가는 문턱에서 자연을 보고 느낀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리 단순하지 않다.‘같은’ 푸름에서 ‘다른’을 간취하고, 겨울부터 ‘지속’되는 것들 가운데 ‘방금 나온’ 생명의 시작을 발견한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에는 낙엽이 떨어진다는 획일적인 공식이 아닌, 한 나무 안에서도 서로 다른 색의 잎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긍정하는 사유, 앙상한 겨울나무에서도 미세한 생명의 떨림과 그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사유, 그것이 바로 ‘관’의 사유이다. 이 관의 사유를 마음속에 지닐 때, 동물적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의 삶을 극복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보다 인간다운 삶을 지향할 수 있다.‘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라는 잠언과 같은 감탄은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4. 식물성을 향한 욕망의 존재론 타자와의 합일을 이루는 방법으로서의 맨얼굴과 ‘관’의 사유는 작가가 죽음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구체적 현실의 삶에 뿌리내리면서 발견한 중간 경유지이다. 이 방식들은 의식의 층위, 마음의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층위는 평면의 동심원에서, 외원을 이루는 동물적 폭력성이 강렬한 외파로 밀고 들어올 때 위태롭게 흔들리는 내원과도 같다. 그 어떤 외파도 견딜 수 있기 위해서는 의식과 마음이라는 동심원의 평면 저 아래 깊은 심연에 자리한 무의식의 영역으로 그것을 심화시켜야 한다. 요컨대 타자와의 합일을 향한 무의식의 강렬한 욕망이 있다면, 그래서 의식의 수면을 꿰뚫을 정도로 강렬하다면, 그럴 때 현실의 외파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한강은 ‘내 여자의 열매’를 거쳐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 연작에 이르는 도정에서 욕망의 영역으로 작가 인식을 심화시킨다. 식물성의 세계에 대한 욕망이 그것이다. 이 순간 타자와의 합일을 이루는 방법으로 무의식의 심연에 자리한 욕망의 영역이 설정되고, 그 결과 관념에 지나지 않았던 ‘여수’ 대신 ‘식물성’의 세계가 새로운 타자의 자리에 위치한다. 이 타자는 여수처럼 현실과는 동떨어진, 현실 저 너머의 또 다른 공간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 속에 살아 꿈틀거리는 것이자,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타자이다. ‘내 여자의 열매’는 식물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식물적 상상력이 길어내는 삶의 진실은 그 힘이 아직 미약하다. 현실도피의 차원에서 기획된 것이기 때문이다. 획일화된 일상이 싫어서, 도심의 똑같은 아파트가 싫어서, 지긋지긋한 피를 갈고 싶어서, 어머니처럼 되기 싫어서, 어디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없어서 결국 식물이 된다는 가정이 단순한 현실도피를 방증한다. 그리고 식물성의 세계에 대한 인물의 욕망 역시 미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식물성의 세계를 강렬히 욕망하는 인물에 의해 식물성의 세계가 온전히 개화하는 작품은 ‘몽고반점’이다. 이 작품은 비디오아티스트인 그와, 몽고반점을 가진 처제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근친상간을 예술적 시선과 현실 윤리의 시선 속에서 포착해낸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처제의 욕망과 그의 욕망이다. 우선 처제의 욕망을 보자. 그 욕망은 그의 눈에 포착된 몽고반점 속에서 엿볼 수 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인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채식주의자’,101쪽) 처제의 몽고반점은 ‘순수성’ 혹은 ‘순수한 영혼’을 표상한다. 곧 ‘어린아이’처럼 처제는 일상의 폭력성에 물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의 붓칠에 의해 ‘순수한 영혼’이 육체에 새겨진 ‘몽고반점’으로 가시화된다. 꽃을 그려 넣는 행위는 폭력적인 일상에 의해 상처받은 인간의 몸에 ‘순수한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식물성을 부여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처제는 “뱃속의 얼굴”에 대한 무서움을 이겨낸다.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은 그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었던 진정한 욕망을 의미한다. 뱃속의 얼굴이 낯설고 무섭게 느껴진 까닭은 일상의 질서에 자신이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질서로부터 벗어날 때 그 얼굴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처제는 자신의 “순수한 영혼”을 가시화한 꽃 그림에 힘입고, 그녀 자신에게 내재해 있던 진정한 욕망을 발견함으로써,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로 풍겨 나오는 처제의 “배냇내”는 타자와의 합일이 뿜어내는 식물성의 ‘향기’인 셈이다. 몽고반점, 즉 꽃잎 그림자로서의 순수한 영혼과, 몸 혹은 꽃으로서의 진정한 욕망이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는 세계, 그것이 ‘색채의 세계’로서의 식물성의 세계이다.“색채의 세계”는 “격렬한 세계”이자,“마술적” 세계이고,“전혀 다른 세계”이다. 식물성에 대비되는 동물성의 세계는 일상에 만연해 있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성을 함축한다. 그것은 육식성,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으로 점철된 일상이자 문명의 세계를 표상한다. 반면에 식물성은 순수성과 공존의 세계이자, 가족의 윤리마저 붕괴되는 탈일상이자 탈문명의 세계로 압축된다. 인간의 몸과 꽃, 그리고 짐승이 뒤섞인 교합에서도 드러나듯, 식물성의 세계는 “추악하면서도 아름답고” 동시에 “삶의 시작이자 끝”이기도 하고,“모든 것이 담겨 있는” 동시에 “모든 것이 비워진 곳”이기도 한, 차별상을 가진 일체의 것이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인 것이다. 하기에 처제가 욕망하는 식물성의 세계는 처제와 형부의 불륜관계처럼 제도의 금기마저 초월한 곳에 있다. 현실 제도의 금기를 위반하는 욕망이 존재할 수 있는 방식은 오로지 ‘죽음’과 ‘광기’의 영역 안에서이다. 곧 식물성의 세계에 대한 욕망은 금기의 위반에서 맛본 죽음과도 같은 향유(jouissance)를 안은 채 죽음을 향해 돌진할 것인가, 아니면 ‘광기’로 내몰려 사회로부터 배제당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 그것이 어떤 선택이건 모두 일상에서의 ‘죽음’과도 같은 귀결로 치닫는다. 처제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치열하게 표출한다. 그렇다면 그의 욕망은 어떠한가. 그의 욕망은 육체적 욕망과 예술적 욕망 사이의 긴장 속에서 유동한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그’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모되고 찢긴 인간의 일상”을 담아내는 작업을 통해,“강직한 성직자”로 불릴 정도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강도 높게 비판해 왔다. 그러다가 처제의 자해사건을 겪으면서 그가 작업했던 것들 역시 일상에서 자행되는 폭력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처제의 ‘몽고반점’은 그가 찾았던 “더 고요한 것, 더 은밀한 것, 더 매혹적이며 깊은 것”으로서의 실재를 현현하고 있었다. 처제의 ‘몽고반점’은 비디오아티스트인 그에게 이미지가 갖는 재현의 한계를 깨닫게 한다. 그는 지금까지 작업해 온 일상의 폭력성을 담은 이미지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재현했든 간에 상관없이, 실재의 고통과 감정을 사라지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한계는 삶의 여러 국면에서 용솟음치는 욕망과 대면할 때마다 현실과 욕망의 경계 선상에서 그가 느꼈을 법한 환멸과도 같다. 그는 근친상간이라는, 현실의 금기를 위반하며 욕망의 극단에 잠시 도취된 결과, 잡으려 했던 욕망의 실재가 허망하게 스크린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의 욕망은 처제가 보여주었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온 욕망의 시선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욕망은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하다 결국 자신의 육체적 쾌락 앞에 예술적 욕망을 무릎 꿇린 결과를 낳고 만다. 여기서 ‘그’의 욕망을 작가 한강의 글쓰기의 욕망과 연결시킬 수 있다. 처제와의 근친상간을 통한 식물성의 세계를 전면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것이 작가의 애초의 글쓰기의 의도이다. 이 의도대로라면, 작중 인물은 ‘그’와 처제만으로 충분하다. 두 인물의 근친상간을 담은 캠코더의 화면처럼, 근친상간 그 자체만을 다루면서 식물성의 세계를 오롯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 그것이 작가의 본래 기획이고, 작가가 생각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그것은 밀실에서나 가능하다. 그것이 공적인 장으로 나올 때(발표될 때), 현실로부터 포르노그래피 혹은 외설로 집중 공격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비난을 피하고, 작가가 생각한 본래의 의도를 어느 정도 형상화하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아내’이다.‘아내’는 현실 사회의 제도적이고 관습적인 윤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아내’의 등장에 의해 ‘그’와 ‘처제’의 근친상간은 작품 속에서 불륜으로 비판된다. 작가는 ‘아내’를 작품 결말 부분에 등장시켜 이 작품이 포르노그래피 혹은 외설이라는 비판을 비껴나가게 하고, 그러면서 자신이 본래 지향하는 예술(식물성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의 측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은 한편으로는 작가 한강의 영민한 균형 감각에 기인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식물성의 세계를 전면화한 예술을 공적 영역으로 드러내기에는 아직도 현실의 억압과 금기가 완강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작가의 비판 의식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의 본래적 욕망과 안전장치가 균형을 이루면서, 식물성의 세계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으로 이어지는 연작이다. 이들 소설에서 영혜라는 인물은 그녀의 남편, 형부, 언니의 시선 속에서 포착된다. 세 인물은 각각 독특한 인물형을 표상하며, 그 인물형이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드러낸다.‘채식주의자’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녀의 남편(나)은 속물을,‘몽고반점’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형부(그)는 예술가를, 그리고 ‘나무불꽃’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언니(그녀)는 일상에 함몰되어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을 표상한다. 그들은 모두 길들여진 욕망에 사로잡힌 채 진정한 욕망을 추구하려는 영혜를 경계 밖으로 일탈한 인물로 취급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광인으로 내몰리는 가운데 영혜는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라도 자신의 욕망을 지켜내려 한다. 연작에서 교직된 인물들이 그려내는 삶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들은 어떠한 삶이 진정한 삶이라고 인식하는가. 혹시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욕망이란 ‘광기’와도 같은 것, 정상의 영역을 벗어난 것, 그래서 죽음과도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영혜는 죽음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간다. 그런 영혜에게 작가 한강의 깊고 고통스러운 숨결이 느껴지는데, 그것은 한강의 고민이 바로 진정한 욕망의 탐구 위에 있음을 방증한다. 5. 텍스트의 독법, 타자를 향하여 한강의 소설은 탄탄한 서사구성으로 인정받는다. 거기에 더해 텍스트 간의 긴장관계까지도 탄탄하게 조여 낸다. 그런 까닭에 한강의 소설 전체를 하나의 텍스트로서 파악하는 독법이 필요하다. 일종의 텍스트 간 소통의 재구성 방식이다. 그 하나로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내밀하게 파헤치는 방식.‘여수의 사랑’에서 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둘, 둘 이상의 고통스러워하는 인물들이 서로의 고통을 마주 보기.‘저녁빛’이나 ‘진달래능선’,‘어둠의 사육제’에서는 서로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보듬어주는 중층적인 시선들이 교직된다.‘내 여자의 열매’에서는 식물 되기를 꿈꾸는 인물의 내면을 편지 형식으로 삽입하고 지켜보는 시선에 남편을 배치한다. 셋, 동일한 사건을 겪는 인물들의 다중초점화.‘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이 만드는 연작 형식. 영혜라는 인물을 중심에 두고 ‘채식주의자’는 그녀의 남편의 시선에,‘몽고반점’은 형부의 시선에,‘나무불꽃’은 언니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고, 영혜를 바라보는 중층적인 시선들을 세 작품에 나누어 배치한다. 그럼으로써 식물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영혜의 욕망을 보여주고, 그녀의 욕망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인식되는가를 부각시킨다. 더불어 텍스트마다 화자를 바꾸어 조명함으로써 각 인물의 내면을 포착하고 그 인물이 다른 인물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 결과 각 인물들은 세 텍스트 안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시선에 의해 입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면서 ‘지금, 이곳’의 리얼리티를 무수히 직조한다. ‘여수의 사랑’에서 자흔이 꿈꾸는 ‘여수’에서부터 출발하여 ‘채식주의자’ 연작에서 영혜가 꿈꾸는 ‘나무 인간의 세계’로 나아가는 한강의 소설들은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에게 결여된 빈 공간이자 잃어버린 ‘타자’를 찾아가는 지난한 행보를 보인다. 한강은 그러한 타자와의 합일을 지향함으로써 폭력적인 일상 속에서 위협당하는 나약한 인간 존재를 보듬고자 한다. 작가 한강이 어두움의 세계, 즉 은밀하고도 사적인 영역들에 은폐되어 있는 죽음, 성, 욕망 등을 공론화의 장으로 내어 놓고, 그럼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마련하려는 시도는 그래서 더욱 값진 의미를 갖는다.
  • 가족들 눈물속 작별인사… 온라인엔 ▶◀ 물결

    최요삼이 6명에게 새 삶을 나눠 주기 위해 장기 적출 수술을 받기 직전인 2일 저녁 8시 30분.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은 차마 터뜨릴 수 없는 슬픔과 눈물로 범벅이 됐다. 챔피언이자 아들, 삼촌으로 아직은 살아 있는 최요삼과의 마지막 면회 시간. 퉁퉁 부어오른 얼굴, 코와 입에 호스를 끼고는 있었지만 목 아래까지 덮여 있는 이불이 오르내리는 게 보일 정도로 그는 분명히 숨을 쉬고 있었다. 어머니 오순이씨를 비롯해 큰 누나 요연씨 등 형제들과 조카들이 방에 들어섰지만 동생 경호씨는 “마지막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며 형과의 마지막 대면을 피했다. 떠나 보내는 이들은 오열 대신 어깨만 들썩이는 조용한 슬픔으로 최요삼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인터넷을 통해 최요삼의 뇌사와 장기 적출 소식을 전해 들은 누리꾼들도 눈물바다를 이뤘다.“전문의사가 결정했겠지만 너무 빠른 판단 아닌가.”,“벌써 뇌사판정인가.”라는 불만의 목소리도 컸지만 “마지막 가는 길을 장기 기증으로 아름답게 장식하고 가는 당신은 진정한 복서이고 진정한 챔피언입니다.”라며 하늘에서 행복하기를 비는 글들도 올라 왔다. 최요삼의 장례식은 5일 권투인장(葬)으로 치러질 예정. 빈소는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에 따라 송파구 서울아산병원이 유족 측에 무료 제공하기로 했다. 장례식이 끝난 뒤 시신은 5일 오전 10시 경기도 성남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하게 된다. 35년의 지친 영혼을 내려 놓을 곳은 경기도 안성시 유토피아추모관. 임원으로 있는 전 챔피언 박찬희씨의 요청으로 추모관 측이 특별실 자리를 마련했다. 최요삼이 영원히 잠들 자리는 지난해 2월 세상을 뜬 탤런트 정다빈씨의 유택 맞은편인 것으로 알려졌다. 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러시아 미술사/민음인 펴냄

    한치 앞도 모른다는데,10년 후의 일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1996년 처음으로 러시아에 갔을 때, 문학 공부를 하던 내가 러시아 미술사에 관한 책을 쓰게 되리라고, 그리고 미술 현장에서 아트 디렉터로 일하게 될줄 어찌 알았겠느냐 말이다. 모스크바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작품들은 말 그대로 ‘스탕달 신드롬’(뛰어난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정신적·육체적 충격)을 일으켰다. 이렇게 시작된 러시아 미술 공부는 아마 알지 못했으면, 평생 후회했을 그런 아름다운 세계를 내게 보여주었다. 이 책은 러시아 본토에서 러시아 미술을 공부한 사람으로 러시아 미술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다는 사명감과 공부하면서 느꼈던 행복함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 위해서 쓴 책이다. 러시아 미술은 격렬하고 열정적인 러시아인들의 삶 자체와 그것의 예술적인 승화를 보여준다. 19세기까지 존속했던 농노제와 억압적인 차르 통치, 공산주의 혁명과 개혁 등 남다른 역사는 이 나라의 예술 문화에 독특한 특성을 각인했다. 현실이 남루하고 비참할수록, 그것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정신적으로 뛰어넘으려는 열망이 러시아 문화 전반의 특징이다. 나는 이러한 열망을 ‘위대한 유토피아의 꿈’이라고 요약했다.19세기의 이동파의 그림, 칸딘스키, 말레비치, 타틀린 같은 20세기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품들은 이러한 유토피아적 열망과 좌절의 과정을 눈앞에서 그림으로 직접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러시아 미술을 소개하되, 딱딱한 연표 외우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야기의 구조를 택했다. 한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인들의 삶과 역사, 문화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더불어 샤갈의 환상적인 푸른색의 비밀, 심수봉이 불러서 유명해진 노래 ‘백만송이 장미’와 관련된 에피소드들도 이야기의 구조를 빌렸기 때문에 책에 넣을 수 있었다. 또한 독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푸슈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생생한 초상화가 그려졌던 상황도 이 책에서는 전한다. 러시아 미술이라는 특정한 나라의 미술로 시작했으나, 종국에 가서는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면서 만들어낸 위대한 결과물로서의 예술이 창조되는 과정을 드러내고 싶은 욕심은 이 책을 끝까지 쓰게 만든 힘이었다.‘일상을 잘 영위하는 것(well-being)´이라는, 다소간 미적지근한 화두가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듯한 요즘, 뜨거운 삶의 흔적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었다.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의 현실은 불우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풍요로웠다.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7) 성남 노숙인급식소 안나의집 김하종 신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7) 성남 노숙인급식소 안나의집 김하종 신부

    경기도 성남시 안나의집(중원구 하대원동 102)은 성남과 서울 지역 노숙인들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다. 의지할 곳 없는 노숙인들이 밥 한 끼를 무료로 제공받는 ‘공짜 밥집´을 넘어 어려운 사람들끼리 정을 나눌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1998년 이 안나의집을 세워 9년째 운영하고 있는 김하종(50·본명 빈첸시오 보르도·이탈리아) 신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노숙인들에게 한결같이 따뜻한 손을 내밀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신부. 소외된 이웃을 위한 사목에 뜻을 두고 18년간 한국에서 몸을 낮춰 어려운 이들에게 온정을 쏟고있는 유별난 현장 사제이다. ● 10년째 안나의집 운영… 하느님보다 더 고마운 ‘밥퍼 신부´로 통해 제17대 대통령 당선자가 확정된 지난 20일 오후 4시 성남시 성남동성당 바로 옆 안나의집 주변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처없는 노숙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밥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 허름한 양철 가건물 1층 식당 안에선 김하종 신부와 자원봉사자 10여명이 손을 맞잡고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일하자.”는 기도와 함께 노숙인들을 맞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었다. 식당 문이 열리자 줄을 서 기다리던 노숙인들이 차례로 밥을 타서는 20여개 남짓한 길따란 식탁에 앉아 허기를 달랜다. 앞치마를 두른 김하종 신부가 식탁을 돌며 “맛있게 드세요.”라며 인사를 건네자 노숙인들이 연신 “고맙습니다.”라며 답례를 한다. 앞치마를 두른 채 노숙인 맞으랴 밥 푸랴 정신없이 바쁜 김하종 신부의 소중한 시간을 잠시 축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연신 노숙인들을 살피는 신부를 괴롭히는 것 같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신부는 그냥 웃는다. 이곳에선 하루 평균 400여명의 노숙인이 찾아와 저녁 식사를 한다. 토·일요일을 뺀 주 5일 동안 매일 오후 4시30분부터 3시간여 김하종 신부와 1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식사를 챙기느라 진땀을 뺀다. 찾아오는 이들은 대부분 성남지역과 서울의 노숙인들. 이 노숙인들에게 김하종 신부는 ‘하느님보다 더 고마운 밥퍼 신부’로 통한다. ● 난독증 딛고 신학대 입학… 동양철학 공부하며 한국에 관심 이탈리아 로마 근교, 인구 5만여명의 작은 도시 비데르보에서 태어난 김하종 신부는 어릴 때부터 난독증을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난독증이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단어들을 조합해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형편없이 낮은, 일종의 학습장애이다. 세계 각국 인구의 5% 정도가 중·경증의 난독증을 갖고 있으며 한국도 예외는 아니라고 한다. 김 신부는 암기는 물론 집중력과 이해력이 너무 떨어져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심한 열등감에 빠져 살았다.“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열등감과 자괴감에의 반사였을까. 남에 대한 배려와 희생에 관심을 갖게 됐고 “봉사하며 살겠다.”는 뜻을 세워 비데르보 교구 신학대에 들어갔다.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주말이면 장애인과 독거노인, 교도소 재소자들을 찾아 봉사활동에 몸을 바쳤다고 한다.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곧바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알린다.’는 오블라티 선교수도회에 몸을 담았고 5년 만인 1987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런데 김 신부 역시 한국과는 어쩔 수 없는 인연의 업(業)이 있었던 것 같다. 고교시절부터 유독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고 결국 로마대학교에 진학, 동양철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수도회 생활을 하면서 5년간 공부끝에 ‘라오스의 역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아프리카 세네갈에서 1년간의 봉사를 마친 뒤 이탈리아에서 2년째 사제활동을 하던 중 ‘한국에서 하느님의 종으로 살겠다.’는 서원을 수도회에 냈고 한국에 온 게 1990년. 서강대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울 무렵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와 함께 지은 이름이 김하종이다.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성을 택하고 ‘하느님의 종’을 줄인 ‘하종’을 이름으로 삼았다. “내가 원해서 한국에 온 바에야 초심 그대로 철저하게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를 다졌고 서강대 어학당 시절 1년여에 걸쳐 어려운 이웃이 많이 사는 곳을 물색해 1992년 정착한 게 성남이다. 이후 성남 신흥동성당 보좌신부로 2년여 일한 게 교구 성당 사목의 전부. 보좌신부로 일하면서 한국의 수녀들과 당시 상대원동, 은행동 지역의 어려운 가정을 돌며 동사무소나 구청, 병원 관련 일들을 해결해 주면서 “내가 갈 길은 역시 어려운 이웃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것”이라는 현장사목을 택한 것이다. ● 어려운 이웃 많이 사는 성남에 정착 현장사목의 길 걸어 성남시 수정구의 위탁을 받아 ‘평화의집’에서 독거노인들에게 급식을 시작한 게 지금 안나의집의 시초이다.93년부터 오전엔 평화의집에서 급식을 하고 오후엔 어려운 가정을 돌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가 97년 무렵엔 아예 분당에 공부방을 내었다. 그러던 중 IMF사태가 터져 실직 노숙인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자 공부방을 사회복지사에게 맡기고 모란역 옆 뷔페 건물 한층을 빌려 노숙인 식당을 시작한 것이다. 1년여간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다 보니 노숙인들이 감당할 수 없이 늘었다. 그래서 성남동성당 주임 신부에게 지금의 공간을 무상으로 얻어 안나의집을 시작했다. 안나의집은 처음 노숙인 식당을 하던 뷔페 건물 주인의 어머니 세례명을 딴 것이라고 한다. 말이 급식소이지 안나의집은 아주 허름한 2층의 양철 조립식 건물이다.1층에 주방과 식당이 있고 2층은 이런저런 용도로 쓰이는 공간이다. 왼쪽 비슷한 형태의 단층 조립식 건물에는 자원봉사자며 후원자들의 발길이 분주하게 닿는 곳이다. 이렇다할 지원 없이 매일 400여명에게 식사를 제공하려니 도움을 받을 만한 후원자들을 찾아다니며 궁색한 손을 내밀어야 한다. 번갈아가며 김 신부를 돕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김 신부도 식사준비며 설거지 같은 허드렛일을 닥치는 대로 한다. “흔히 노숙자를 일자리를 잃어 사회에서 도태된 사람쯤으로 쳐다보지만 이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 어려운 환경에서 비롯된 성격과 심리, 정신 장애를 겪은 사람들입니다.” 똑같은 인간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인데 남다른 고생길을 걸어야 하는 노숙인들에게 그래서 사랑과 온정이 더 절실하단다.“알량한 밥 한끼를 대접하기보다는 꺼져가는 영혼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매일 매일 밥주걱을 듭니다.” ● ‘난독증 알리기 본부´ 만들어 어려운 청소년돕기 앞장 내년이면 안나의집도 10년째. 그동안 일이 많이 늘었다. 가출 청소년을 수용하는 쉼터와 청소년 자립관 세 곳을 마련했고 특히 한국인들에게 난독증의 실체를 알리는 일은 빼놓을 수 없는 큰 일이 되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번민과 자괴감의 뿌리가 난독증이었음을 알게 된 것은 한국에 온 지 7년이 지난 1997년. 우연히 ‘타임’지의 기사를 읽다가 자신과 똑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 이야기를 접하곤 삼성의료원을 찾아 난독증 장애 판정을 받은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보다 남을 더 먼저 생각하고 주저없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바탕은 바로 난독증이었던 것 같아요.” 2003년 마침내 교사와 대학교수, 의사 7명과 함께 ‘난독증 알리기 본부’를 만들었다. “내가 암기식 교육에 치우친 한국에 태어났으면 아마 도태된 채 아무 직업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에 시달리는 청소년 돕기에 발벗고 나서 지난해 11월 처음 연세대 의대 음성언어연구소와 주한 이탈리아 문화원의 도움을 받아 국제 난독증 세미나를 열었고 올해 들어선 매월 대학 교수들을 모셔 난독증 자녀들의 부모를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가난한 농민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역만리 한국 땅을 택해 험한 길을 걷고 있는 푸른 눈의 사제. 사제 서품 20년차의 보통 신부라면 이제 번듯한 자리에 올랐을 법한데 후회는 없을까. 인터뷰를 마치면서 던진 기자의 분별없는 물음에 오블라띠 선교수도회를 설립한 성 에우제니오 드 마제노의 임종사를 말없이 보여준다.“너희들 안에서 사랑, 사랑, 사랑하라.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해서 열정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라.” 성남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김하종 신부는 ●1957년 이탈리아 비데르보 출생 ●1981년 비데르보 교구신학교 졸업 ●1982년 로마 오블라티 수도회 입회. 로마대학교 진학 동양철학 공부 ●1987년 사제서품, 로마대학교 졸업 ●1988∼1990년 세네갈 봉사, 이탈리아 사목 ●1990년 한국으로 이주, 서강대 어학당서 한국어 공부 ●1992년 성남 신흥동성당 보좌신부 ●1993년 독거노인 급식 시작, 어린이 영어 교육 ●1998년 모란에서 노숙인 급식, 노숙인급식소 ‘안나의집’운영 ●2003년 ‘난독증 알리기 본부’ 결성
  • [열린세상] 2007년의 처용가/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

    [열린세상] 2007년의 처용가/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

    오늘날까지 전하는 신라 향가 14수 중 하나인 ‘처용가’는 대체로 역신(疫神)이 자신의 아내를 범하는 것을 보고도 너그럽게 용서한 마음씨 넉넉한 한량이 부른 노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처용가는 매우 깊은 노래이다. 파고 들어갈수록 이 노래는 우리를 아득히 먼 인류의 근원적 정신 세계로까지 데리고 간다. 그렇게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이 노래는 단순히 너그러운 남편이 부른 노래가 결코 아니다. 그런 이유만으로 이 노래의 끈질긴 생명력은 설명되지 않는다. 신라 향가들 중에서 유독 이 노래만이 고려 시대를 지나, 조선 시대까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노래로, 춤으로, 연희로 계속 확장되었고, 민중의 사랑뿐 아니라 귀족들의 사랑까지 받았다. 처용과 처용가가 그렇게 오래 살아남았던 데는 분명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처용가는 ‘비장한’ 노래이다. 오늘날 우리는 처용가를 통해 비장한 정서를 느낄 수 없지만,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그 정서는 생생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나라 안팎에 문명(文名)을 떨쳤던 고려말 문인 이숭인은 ‘도은집(陶隱集)’에서 신라 처용가를 듣고 ‘비장함’을 느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처용가가 그 표면적 의미에 머물러 있었다면, 당대의 뛰어난 한 문인이 그 노래를 듣고 비장함의 느낌을 받았을 리는 없다. 이숭인은 처용가를 듣고 ‘슬픈 바람은 나무 끝에서 우네/끝없이 일어나는 회포 견디기 어렵구나/부귀공명이 다 무엇일까’라고 쓴다. 처용가는 분명히 훨씬 더 진지한 어떤 것에 관계된 노래였을 것이다. 처용가는 유난히 많은 해석 상의 이견이 존재하는 노래이다. 대체적으로 설화와 노래만을 따로 떼어 연구하던 방향에서 최근에는 처용가가 수록되어 있는 삼국유사의 ‘처용랑 망해사’조의 기록 안에서 전체 맥락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연구 기조가 바뀌고 있다. ‘처용랑 망해사’조는 신라말기 헌강왕대의 물질적 풍요와 그에 따른 타락을 신들이 등장하여 계속 경고하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신들은 계속 왕 앞에 등장하여 신라의 멸망을 예고했지만, 왕과 신라인들은 그 경고를 오히려 상서로운 징조로 이해하여, 계속 향락에 몰두한 결과,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용가와 처용설화는 그 이야기들 안에 액자처럼 끼워 넣어져 있다. 이 맥락을 따라 처용설화를 이해하면, 처용 아내를 범한 역신(疫神)은 전혀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는 신라의 타락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그 맥락 안에서 처용의 존재는 신들의 경고를 알아듣지 못한 헌강왕과는 달리, 그 메시지를 알아듣고, 문제를 해결한 현자로 자리매김된다. 그 때문에 그는 이후에 역신을 쫓아내는 문신(門神)으로서 좌정하게 되는 것이다. 2007년, 한국 사회는 다시 역신의 습격을 받고 있다. 물질의 풍요가 망가뜨린 어떤 근원적 가치체계의 몰락. 물질의 풍요만이 보장된다면, 부패와 거짓말쯤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다는 역신의 도래.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 거짓말의 난무. 지난 12월19일 대한민국의 유권자들은 매우 의미심장한 선택을 했다. 그들은 거짓과 술수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미 한국사회에는 수많은 신들이 나타나 경고한 바 있다. 경고는 이미 수없이 발해졌다. 징조는 흘러넘친다.12월19일, 우리는 헌강왕과 그 시대의 신라인들처럼 그 수많은 경고를 지레 ‘상서로움’으로 오해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선택의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운명이 우리 나라를 어디로 이끌어갈지 나는 모른다. 다만,2007년 다시 처용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시인의 직관으로 느낄 뿐이다. 헌강왕에게 전해진 최종적 메시지는 ‘지리다도파도파(智理多都波都波)’라는 밀어(密語)로 전해졌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그것을 “지혜로운 자들이 위난을 깨닫고 파도처럼 도피했다.”라고 해석한다. 이제 지혜가 입을 다물어 버리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상은 거짓과 술수의 왕국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새로운 처용은 올까? 김정란 상지대 교수·시인
  • “남편 살아 있다면 보약 맘껏 달여줄텐데…”

    “남편 살아 있다면 보약 맘껏 달여줄텐데…”

    “남편이 지금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좋아하던 한약 맘껏 달여 줄 텐데.” 시종 밝은 표정이던 박춘(74)씨 얼굴에 잠시 그늘이 졌다. 최근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한의사 자격시험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 최고령 합격이다.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언론인(합동통신 조사부장)으론 유일하게 체포·구속됐던 남편 정도영(1999년 작고)씨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8년 만이다. 유독 한약을 좋아했던 남편 생각에 박춘씨는 종종 말을 끊었다.21일 오후 그를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만났다. ●군홧발에 짓밟힌 인생 “저와 제 가족은 박정희 정권 군홧발에 짓밟힌 인생을 살았어요.” ‘군홧발에 짓밟힌 인생’은 남편에겐 억울한 옥살이와 잔인한 고문 흔적을, 아들 3명에겐 연좌제의 설움을, 박춘씨 자신에겐 모진 생활고를 안겼고 공부에의 열망마저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의 최고령 한의사 자격 획득은 가족의 삶에 들러붙어 지워지지 않던 군홧발 자국, 그 마지막 흔적까지 털어낸 ‘멋들어진 복수’인 셈이다. 남편은 현대사의 격랑에 온통 휘감겨 살았다. 남편의 두 형님은 6·25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사망했고, 아버지는 화병으로 피를 토하고 눈을 감았다. 남편은 출소해서도 자신과 무관한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여관을 전전해야 했다. 그의 집은 도예종(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 시인 김지하 등이 몸을 피하는 도피처였고, 리영희·안병직(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찾아와 시대를 논하는 사랑방이었다. 박춘씨는 “아버지대로 족한 시대의 멍에가 아들들에게까지 물려질까봐 북적이는 집안 분위기가 늘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박춘씨가 한의사 시험에 도전한 건 남편 사망 직후 미국으로 건너가면서부터다. 각각 한국전력과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하고도 아버지 ‘과거’ 때문에 불합격처리된 큰아들과 막내아들이 절망하고 떠나간 곳이 미국이었다. 최근 고 박현채 교수의 ‘민족경제론’을 현 시점에 맞게 재조명하는 작업에 고심하고 있는 둘째아들 정건화 한신대 교수가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며 미국행을 권했다. ●마지막 소원은 ‘고전 의학서적 대중화´ 그는 원래부터 공부에 욕심이 많았다. 인혁당 사건이 일어나기 전 세 아이를 키우며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쳤고, 한학의 대가 임창순 선생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서울대 규장각에서 고문서 번역일을 하기도 했다.2000년 사우스 베일로 대학 한의학과에 최고령 학생으로 입학한 그는 80년대생 학생들과 공부하며 생소한 약 이름과 혈자리를 익히느라 씨름했다. “한문만 잘 하면 한의학을 쉽게 할 줄 알았는데 오판이었어요. 들어 보지도 못한 23개 서양의학 과목을 공부하며 오기로 버텼어요. 그동안 폐렴만 세 번 걸렸습니다.” 고령의 나이지만 오전 8시부터 밤 11시까지 도서관을 지켰고,2003년 졸업 후 두 차례의 낙방 끝에 올 10월 최종 합격했다. 그는 “남편 영혼이 훨훨 날아와 시험을 도와 주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얼마 남지 않은 삶, 박춘씨의 마지막 소망은 ‘고전 의학서적 대중화’다.“오랜 옛날부터 축적돼온 한의학 고전 문헌을 번역해 후배들이 좀더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며 그는 활짝 웃었다.70대 중반의 나이라곤 믿기지 않는 에너지를 뿜어내며, 그는 현재 박사 논문을 집필중이다. 글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인류문명에서 심장은 어떤 의미일까

    기원전 3000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씌어진 ‘길가메시 서사시’는 심장(heart)이야기가 등장한 인류 최초의 기록물이다. 신에게 심장을 제물로 바친 주인공 길가메시를 통해 심장은 인간내면의 고통을 상징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파라오를 미라로 만드는 과정에서도 심장은 각별한 상징이었다. 파라오의 심장만큼은 썩지 않도록 방부처리해 다시 시신 안에 집어 넣었다. 생전에 행한 선과 악의 기억을 담은 블랙박스로 심장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어느 교리를 막론하고 심장이 유의미한 상징으로 이해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에서는 심장을 영혼의 이미지로 인식했고, 이슬람교에서는 신의 계시가 심장에 새겨진다고 믿었다. 불교에서는 또 지혜의 마음을 얻는 것이 곧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하트’를 주제어로 사방팔방으로 논의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과정에 방대한 인문학적 정보들이 실렸다.‘마음과 심장의 문화사’란 부제가 붙은 책은 한국독자들을 특별히 배려하기도 했다. 저자는 8장 ‘아시아의 심장과 마음’편을 따로 써서 한국어판에 추가했다.‘마음’이 동양문명을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 추적했다.2만 2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러시아 영혼의 상징, 모스크바

    도시는 현대문명의 꽃이다. 도시는 지나간 역사의 모든 흔적을 집적해 놓은 살아 있는 박물관이며, 물질과 정신문화가 촘촘하게 교직되어 있는 거대한 집합 공간이다. 그래서 유서 깊은 도시를 세밀히 들여다보면 그 지역의 역사, 인간, 문화를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고대유럽을 접하기 위해서는 아테네와 로마를 가봐야 하고, 근대유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런던과 파리를 경험해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모스크바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러시아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는 인류의 문화적 지형도에서 가장 북방에 위치한 나라다. 러시아인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면서 광활하고 황량한 벌판에 세계 최고수준의 독특한 정신문화를 창조했다.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준 높은 정신문화 유산을 연대기적으로 응축시켜 놓은 상징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는 86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러시아의 고도(古都)다. 모스크바가 최초로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1147년 4월4일이다. 역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러시아인들은 바로 이 날을 모스크바의 생일로 정하고 있다.12세기 당시에 모스크바는 당시 300여개에 달했던 고대 러시아의 도시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모스크바는 인구 1000만이 넘게 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중 하나가 되었고, 수많은 역사 유적지와 자연 경관을 보전하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책은 필자가 모스크바에 살면서 읽은 것, 본 것, 들은 것, 느낀 것, 대화한 것, 깨달은 것, 생각한 것 등을 기행형식으로 써본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통해서 러시아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모스크바의 유서 깊은 거리, 광장, 박물관, 극장, 미술관, 대학가, 수도원, 공원, 공동묘지, 호텔, 레스토랑과 모스크바 주변의 유적지 등을 기행하면서 러시아의 정신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코드들을 오버랩시켜 보았다. 그것은 절대 권력과 자유로운 영혼, 아름다움과 죽음, 러시아의 팜므 파탈, 보드카와 광기 등의 주제와 연결된다. 러시아는 겨울에 가야 제 맛이 난다고들 한다. 러시아의 겨울을 체험해본 사람들은 그 순간들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 그것은 아마도 러시아의 겨울 체험이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게다. 필자는 독자들께 이 책을 통해서 모스크바의 겨울을 체험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러시아 대자연의 혹독함과 풍요로움 사이에서 어느덧 겸손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병훈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기획실장
  • 당신의 페르소나/ 최인호

    한 달 전쯤일까. 어느 날 나는 케이블 TV에서 방영되는 오프라 윈프리 쇼를 보고 있었다. 오프라 윈프리는 십수 년간 시청률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토크쇼의 여왕. ‘인생의 성공 여부는 온전히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오프라이즘을 낳은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내가 오프라 윈프리를 좋아하는 것은 그녀가 가진 진정성 때문이다. 그녀의 질문이나 대답에는 꾸밈이나 가식이 없다. 상대방이 누구든 혼신의 힘을 다해 듣는 자세라든가, 인간의 심성을 파고드는 예리한 통찰력은 찬탄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나는 시간 있을 때마다 그녀의 쇼를 즐겨 보는 편인데, 그날은 요즘 한창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그레이 아나토미>의 주인공인 흑인배우가 초대 손님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레이 아나토미>는 시애틀의 한 병원에서 일어나는 다양하고 복잡한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 연속극이다. 나는 한 번도 그 시리즈를 본 적이 없으므로 주인공을 맡고 있는 그 흑인배우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보통 실력 있는 의사 역할은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는데,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흑인배우가 의사 역할을 맡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사회현상은 미국에서도 보기 드문 것으로, 아마 그런 연유로 오프라 윈프리 쇼에 초대되었던 모양이다. 이때 그 흑인배우는 오프라에게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이제껏 악역을 도맡아 했다는 것이었다. 마약 밀매업자, 총 맞아 죽거나 고층빌딩에서 떨어져 죽는 범죄인이나 남을 협박하고 폭행하는 폭력배 등 대부분 비참하게 최후를 마감하는 악역전문배우였는데, 이제부터 다시는 악역을 맡지 않겠다고 공언하는 것이었다. 오프라가 이유를 묻자 그 배우는 이렇게 대답한다.“내 영혼이 병드는 것을 느꼈으니까요. 악역을 하면 할수록 제 마음에 악의 기운이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자 오프라는 이렇게 대답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맞아요. 악역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악의 기운이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지요. 그래서 나는 언젠가 앤서니 홉킨스에게 더 이상 악역을 맡지 말라고 충고까지 했었어요.” 오프라가 말한 앤서니 홉킨스, 그는 1991년 제작된 <양들의 침묵>이란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은 미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이다. <양들의 침묵>은 환자를 살해한 다음 그 살을 뜯어먹는 엽기적인 정신과 의사의 얘기를 다룬 컬트영화로 광기어린 홉킨스의 무시무시한 연기는 그를 할리우드 사상 최고의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한 이후 한동안 악몽에 시달리면서 정체성의 혼란으로 큰 고통을 겪었던 것이다. 물론 뛰어난 배우가 되려면 단역이든 악역이든 엑스트라이든 주인공이든 어떤 역할이라도 자신의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집중해야 할 것이다. ‘페르소나’란 말은 고대 그리스의 배우들이 연극을 할 때 쓰던 가면을 일컫는 말로 영화에서는 한 감독이 영화에 고정 출연하며 의중을 잘 표현하는 단짝 배우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자아와 외부세계가 관계를 맺는 사회적 얼굴을 의미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배우가 악역을 할 때에는 악마의 페르소나를 쓰는 것이며, 배우가 의사 역할을 할 때에는 의사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비단 배우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자아와는 다른 별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 근엄한 성직자의 페르소나를 쓴 악인이 있는가 하면, 교사의 페르소나를 쓴 성추행범들도 있다. 이러한 다면적 인성이야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공통된 모순이겠지만 오프라 윈프리의 말은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악의 탈, 악의 가면을 쓸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오프라 윈프리처럼 파란만장하고, 어둡고, 불행한 과거를 보낸 여인은 없다. 그녀는 미시시피의 작은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9세 때 사촌에게 강간당하였다. 그 후 줄곧 몇 명의 친척들과 주변인들에게 계속 성학대와 성폭행을 당했으며, 14세의 나이에 아이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태어난 지 2주일 만에 죽어버린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친할머니에게까지 매일 얻어맞으며 성장한 그녀는 그 고통을 잊기 위해서 마약중독자가 되었으며, 이후 감옥에 드나들기 시작한다. 한때는 107킬로그램이 넘는 초대형 뚱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프라는 <오즈의 마법사>란 영화에 나오는 착한 마녀가 도로시에게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크게 깨닫는다. “그것은 늘 거기에 있었단다. 너는 그 힘을 항상 네 안에 가지고 있었어.” 그 순간 오프라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잠재된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한다. 2년 동안 달리기를 통해 68킬로그램으로 줄인 그녀는 보그지 패션모델이 되었으며, 흑인 최초로 앵커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프라가 발견한 것은 어두운 과거와 상처받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라는 페르소나였던 것이다. 성폭행과 사생아, 흑인, 성희롱, 아이의 죽음, 끊임없이 감옥을 드나드는 전과, 마약중독, 100킬로그램이 넘는 악역을 하면서도 오프라는 끝내 그 악역의 가면, 즉 악마의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는 진보하는 인생의 가면’을 선택함으로써 기적과 부활의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생의 승리자가 되려면 책임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머물러서 그 과거가 지금 당신을 지배하도록 놔둔다면 절대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흑인 남자배우에게 충고하는 오프라의 말을 들으며 나는 문득 20여 년 전 어느 날 밤 나를 찾아왔던 안성기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무렵 안성기는 깊은 고뇌에 가득 차 있었다. 내게 배우를 계속 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를 의논하러 왔는데, 그 심각한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아내가 자신의 정사신을 싫어한다. <깊고 푸른 밤>이후 그러한 요구가 더 강해지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주연배우는 작품이나 감독이 요구하면 어쩔 수 없이 베드신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인데 그것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다. 아내뿐 아니라 자신도 그런 연기에 혐오감을 느낀다. 키스신이야 모르지만 그 이상의 정사신은 도저히 못 할 것 같다. 그러니 어쩌면 좋겠는가. 평소 호형호제하며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는 안성기가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무렵 나는 영화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으므로 젊은 감독들이 정사신을 엄격하게 거부하고 있는 안성기에 대해서 불평을 하고 있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제작자들이나 감독들은 영화예술을 위해서는 배우는 마땅히 옷을 벗고 작품성을 위해서는 과감한 정사신일지라도 감수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린 여배우들도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전라의 촬영도 마지 않는데, 하물며 당대 최고의 배우가 어떻게 베드신을 거부할 수 있겠느냐고 집단 성토까지 하고 있었던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베드신을 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영화의 예술에 성性이라는 주제가 중요한 테마임을 나는 물론 잘 알고 있지만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적 영상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적 아름다움이라든가, 성적 욕망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재능 없는 감독들은 흥행적인 요소로 예술성을 빙자하여 성을 노리개로 팔고 있으니,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과감하게 이를 거절하라고 충고하였으며 그 이후 안성기는 과감하게 성의 페르소나를 벗어던졌다. 얼핏 보면 배우로서는 큰 모험을 선택한 위험한 순간일지는 몰라도 성의 페르소나를 벗어던짐으로써 안성기는 오히려 국민배우로서의 페르소나를 획득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는 수천수백의 가면이 있다. 어차피 다중인격의 자아를 가진 인간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마땅히 오프라 윈프리처럼 희망의 가면과 안성기처럼 도덕의 가면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겁한 일이 아니라 용기 있는 일이다. 우리가 악역의 가면을 선택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 악의 독소에 중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인호 작가는 1975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째 샘터에 <가족>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최근 산문집 <꽃밭>을 펴냈습니다. 2007년 12월
  • [길섶에서] 간으로 쓰는 소설/최태환 수석논설위원

    소설은 가슴이나 머리가 아니라, 간으로 쓴단다. 튼튼한 간만이 문제작을 만들 수 있다 했다. 작가 이기호의 주장이다. 글쓰는 이들이 히말라야를 오르고, 자전거를 타고, 마라톤을 하는 것, 애오라지 건강한 간을 위해서란다. 그는 간 수치가 높으면 시를 쓰고, 덜하면 소설을 쓰라고 권한다. 간 수치가 높은데도 소설을 쓰고 싶으면 우루사를 먹으라고 했다. 재치와 강변이 상큼하다. 몸과 영혼을 갉아가며 씨름하는 작가들의 아픔이 찌릿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소설 창작은 곡괭이를 들고 콘크리트 벽을 부수는 것과 같다 했다. 간으로 쓴다는 말과 통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간으로 쓴 소설은 그 맛이 너무 쓰다. 깊고 진하다. 처절한 경험과 현장학습, 탐구가 토해낸 아픔 때문이다. 조정래의 아리랑, 최명희의 혼불, 최인호의 잃어버린 왕국, 모두 간으로 쓴 소설이 아닐까. 작고한 이문구는 문장 하나 하나를 피를 찍어 쓴다고 했다. 이들의 고통이 깊을수록 우리는 억병으로 취해들어 간다. 새해에도 간이 건강한 작가를 자주 만나고 싶다. 최태환 수석논설위원 yunjae@seoul.co.kr
  • [8일 TV 하이라이트]

    ●콘서트 7080(KBS1 밤 12시30분) 오랜만에 ‘콘서트 7080’을 통해 다시 무대에 서는 김종서.‘플라스틱 신드롬’‘겨울비’‘아름다운 구속’등 히트곡들을 열창하는 이번 무대는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폭발적인 관객의 호응으로 뜨겁게 달궈졌다. 노래방 기계에 얽힌 에피소드와 홈쇼핑 예찬론 등 유쾌한 이야기들도 들어본다. ●드라마시티(KBS2 오후 11시35분) 반촌의 늙은 양아치 달구는 젊은 시절의 화려함은 오간 데 없이 비루한 인생으로 전락한 신세이다. 여기저기 싸움판에 따라 다니고 늘 얻어맞는 쪽은 달구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단골식당에서 일하는 미숙을 보고는 맘에 들어 그만의 방식으로 구애를 해보지만 미숙은 쉽게 맘을 열지 않는데…. ●겨울새(MBC 오후 9시40분) 영은과 도현이 사이 좋게 찍은 사진을 보게 된 경우는 영은에게 슬그머니 도현에 대해 묻는다. 도현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경우의 갑작스런 질문에 영은은 무슨 뜻이냐고 되물어본다. 한편 일하던 정순을 갑자기 쉬게 하던 경우 엄마는 살며시 영은의 침실로 들어가 서랍을 뒤지며 통장을 찾는다. ●조강지처 클럽(SBS 오후 10시15분) 원수는 지란이 보는 앞에서 화신에게 이혼을 투표로 결정하자고 한다. 기가 막힌 화신은 지란이 양보를 해달라고 매달리자 이혼은 절대 해줄 수 없다며 정신 차리고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한다. 기적이 복수와 이혼하고 재산까지 빼돌리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양순은 기적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병원으로 간다. ●스페이스 공감〈이상은의 ‘영원을 향한 여행’〉(EBS 오후 10시) 보헤미안의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싱어 송 라이터 이상은이 13번째 앨범 ‘The 3rd Place’를 발표했다. 새 앨범의 수록곡들로 꾸며질 이번 무대를 통해, 이상은이 노래하는 유토피아적 메시지를 공유하며 마음의 휴식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생생웰빙테크(YTN 오전 7시25분) 우리나라 음식의 기본이자 조상들의 장수비법인 장.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밥상에서 결코 빠지지 않으며 전통의 맛을 내는 중요한 감초역할을 한다. 발효·숙성과정을 거쳐 완성된 전통 장에 함유된 각종 성분이 건강에 좋다는 연구결과가 속속 발표되면서 웰빙 식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것이 알고싶다(SBS 오후 11시25분) 국과수의 감정을 근거로 강기훈씨가 대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던 사건을 재조사, 유서가 분신한 김기설씨 본인의 필적임을 밝힌다. 많은 간첩사건과 조작사건들이 재조명되길 기다리고 있는 시점에서 이 사건을 통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그런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걸어서 세계속으로(KBS1 오전 10시) 미국 샌타페이는 해발 2135m의 고원에 위치한 사막도시이다. 오래전 인디언들은 이 땅을 ‘햇살이 춤추는 땅’이라 불렀다. 도시적 감성에 길들여져 있던 백인 예술가들은 샌타페이의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풍경에 큰 충격과 예술적 영감을 얻어 줄줄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 [선택 2007 D-16] 문, 권, 이, 심 주말 표정

    2일 수도권 공략에 이틀째 나선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는 서울시민들이 많이 찾는 수락산과 북한산 일원에서 등산객들을 상대로 ‘믿을 수 있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적극 세일즈했다. 문 후보는 즉석 연설을 통해 “젊은이들이 영혼을 팔아서라도 일자리를 갖고 싶다고 절규하는 상황을 기존 정치인에게 맡겨서는 희망이 없다.”며 자신의 공약인 ‘일자리 500만개’를 거듭 약속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이날 하루종일 삼성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며 자신의 진보 색깔을 부각시키는 데 집중했다. 권 후보는 여의도 캠프 사무실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삼성비자금 사건 특검 수사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불개입을 촉구하고 나선 데 이어 오후에는 태평로 삼성 본관 앞에서 종로 삼성생명 빌딩 앞까지 가두 행진을 하며 삼성 비자금 사건의 명확한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전북을 찾은 민주당 이인제 후보는 유세에서 전북 발전 공약을 제시했다. 이 후보는 유세에서 ▲새만금에 신경제대특구 건설 ▲새만금 신항만과 김제 국제공항 건설 ▲영상관광 메카 조성 ▲환황해권 서해안 해양관광벨트 구축 ▲2012년 지속가능발전 세계정상회의의 전주 유치 등을 내세웠다. 심대평 국민중심당 후보는 이날 충남지역 유세에 앞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자신이 최근 후보 단일화의 큰 틀에 합의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를 일단 부인했다. 그는 또 이날 ‘국민중심당 정진석 의원이 심 후보의 이명박 후보 지지를 촉구하며 선거대책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이는 보수연대를 꾀하려는 정 의원 개인의 입장인 것 같다. 이 문제를 놓고 저와 협의한 적이 없다.”며 거리를 뒀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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