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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공회大서 첫 명예 신학박사 학위 받은 박형규 목사

    성공회大서 첫 명예 신학박사 학위 받은 박형규 목사

    지난달 30일 성공회대학교가 문을 연 지 98년 만에 처음으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신학과 창립 30주년을 겸해 이 대학이 기획한 명예 신학박사 학위의 수여자는 다름 아닌 박형규(89·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목사. 그는 군사독재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민주화운동에 몸담아 영혼을 살랐던 ‘길 위의 신학자’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통한다. 현대사는 물론 한국 개신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목회자. 지난해 부인과 사별한 뒤 거처를 옮겨 살고 있는 경기 용인의 자택을 1일 오전 찾아 그간의 소회를 들었다. “내가 성공회 시설과 공간을 남달리 많이 활용했기 때문이겠지요.” 전날 학위를 받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웃음 섞어 돌려준 대답. 덤덤한 반응과는 다르게 박 목사와 대한성공회의 관계는 골이 깊다. 그 유명한 서울 중구 오장동 서울제일교회 담임목사 시절, 학생이며 노동자들과 밤을 세워 민주화를 놓고 토론했던 곳이 성공회 수양관이고, 독재 권력의 손을 들게 한 1987년 6월항쟁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차린 곳이 성공회 주교좌성당이다. 그래서 성공회대는 그에게 학위를 준 배경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불의와 폭력을 이겨낸 참 신앙인’ ●길위의 신학자, 실천하는 신앙인 “사실 처음부터 목사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고 몸도 약할 뿐만 아니라 성정도 온순해 그 험한 목회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박 목사가 가시밭 같은 ‘목회의 길’을 택한 건 4·19혁명 때였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근처 궁정동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학생들을 보고 결심한 게 바로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 결심과 다짐답게 박 목사는 문민정부가 탄생할 때까지 군사정권 시절 무려 6차례나 감옥에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다. ●교회라면 구원의 말씀 가르쳐야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그의 회고록 제목은 남달랐던 ‘목회의 길’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실천하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요즘 신학생들은 어떻게 보일까. “신학생이라면 세상과 사회의 여러 문제를 신학적인 입장에서 판단하고 때로는 저항도 할 수 있어야지요. 하나님의 축복만 받고 편안하게 살 생각을 할 게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자의 편에 서는 게 당연합니다.” 예수님과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불의에 무관심하지 않는다는 박 목사. 그래서 교회가 대형화되면 될수록 타락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고 ‘제 복’만을 찾아 교회를 드나드는 일그러진 신앙은 예수를 배반하는 으뜸의 지름길이란다. “근본적으로 구원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됐다고 자각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지요. 교회라면 응당 사람들에게 그런 메시지를 하나님 말씀을 통해 가르쳐야 할 텐데….” 1950년대 서울 공덕교회 담임 시절 교인이 불어나자 “내 뜻대로 목회를 하지 못하겠다.”며 가족에게 거처도 알리지 않은 채 불쑥 속리산으로 떠났던 그다. 결국 4·19혁명 때 꽃다운 청춘들의 아까운 희생을 보고 돌아와 뼈에 새긴 ‘교회다운 교회’. 그는 1992년 은퇴할 때까지 그 원칙에서 조금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도시산업선교회며 사회선교협의회를 설립해 약하고 가난한 자의 편에 늘상 섰던 ‘개혁과 실천의 목자’다. 그래서일까 함석헌 선생은 그에게 이런 별명을 붙여줬고 박 목사는 그 별명을 아주 좋아했단다. ‘하나님의 발길에 차인 사람’ ●하나님의 종 노릇 제대로 한 것인지… “글쎄요 돌이켜보면 원치 않았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결국 하나님이 정해 밀었던 까닭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종 노릇을 제대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자신과 함께했던 모든 양심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험한 목회활동에 반발해 울면서 살다가 나중엔 자신보다 더한 투사가 됐던 아내에게 감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헛된 목회의 삶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생명의 窓] 아름다운 것들의 힘/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생명의 窓] 아름다운 것들의 힘/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방송을 하는 나는 매주 서울에 간다. 서울에 있다가 이곳에 내려오면 온몸에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코끝을 스치는 맑은 공기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꽃들의 미소와 연둣빛 산색. 그렇지, 바로 저것들이었어. 내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고 가슴에 행복을 남기는 것들이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밤이면 쏟아질 것 같은 별들과 아침이면 투명한 햇살들과 새들의 울음소리. 이 모든 것들을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의 빛들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모든 생명이 빛을 의지해 크듯이 나의 마음에도 빛들이 찾아오고 그 속에서 평화롭게 성장해 가는 나를 느낀다. 내가 사는 곳은 남쪽 끝에 자리한 섬, 남해다. 이 섬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가깝다. 이들은 다 친구고 친척이다. 이방인이 별로 없는 섬에서 나는 이방인이다. 나는 이들의 친척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7년을 살고 있다. 100년을 살지 못하는 인생에서 7년은 긴 시간이다. 7년 동안 이곳 사람들과도 친숙해졌지만 이곳의 산하와 더욱 가까워졌다. 남해의 바다와 산을 보면 이제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낀다. 내가 어딘가 가 있으면 이곳의 바다와 바람과 햇살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한다. 내게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일으키는 곳이 남해가 되어버렸다. 본시 구름처럼 물처럼 떠돌기를 좋아하는 우리네 삶에 고향처럼 타향이 다가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 수채화 같은 남녘의 섬이 내 마음속으로 나도 모르게 들어와 향수를 일깨우는 것이다. 화전. 이곳의 옛 이름은 화전이었고, 그 옛 이름을 통해 이곳이 얼마나 꽃이 많았던 곳인가를 상상할 수 있다. 두모 마을에는 유채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다정 저수지 앞에는 해마다 오월이면 튤립이 한창이다. 군에서 관리하는 튤립 군락지는 자그마한 저수지를 앞에 두고 있어 꽃들이 더욱 예쁘게 보인다. 물빛 머금은 튤립의 그 신선함. 튤립이 한창일 때면 나는 이른 아침에도 나가서 꽃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일몰 시간이면 다시 꽃들을 찾아가고는 한다. 그때마다 나는 꽃구경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꽃들과 만나고 있다. 이들이 어디서 그토록 환한 미소를 지어 보았겠는가. 지치고 두려운 세상 속에서 이들이 짓는 이토록 환한 미소는 꽃들이 보내는 선물인 것이다. 사랑도 잠시인 것이 되고 정직도 지키기 어려워진 세상에서 그들은 튤립이 건네는 정직과 영원한 사랑의 언어를 듣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꽃처럼 행복하게 미소짓는 곳. 이제 그곳이 과거로 사라져 갈 형편이 되었다. 내년이나 후년이 되면 그 아름다운 꽃밭을 4차선 도로가 관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아름다운 꽃대를 짓밟으며 아스콘 도로가 깔리게 되고 차들이 고속으로 달리는 그 길 위에서 사람들의 행복한 미소와 꽃들의 영원한 사랑의 말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야 말 터이다. 남해는 그 옛 이름이 화전이었듯 사람들이 꽃처럼 모여 살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도로보다는 꽃길 하나 더 내는 것이 현명하고, 자동차들의 질주보다는 사람들의 환한 미소가 머물게 하는 것이 더 남해에 맞는 일이다. 법정 스님은 남해를 수채화 같은 섬이라고 했다. 언젠가 불일암에서 뵈었을 때 제주도보다도 더 친근감이 간다고 했다. 남해는 수채화 같은 서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그것을 아름다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꽃이 있고 별이 돋는 곳에서 사람들은 영혼의 힘을 얻는다. 삶에 지친 자, 마음의 화를 다스리지 못한 사람들이 자연 속에서 다시 평화롭게 일어서는 것을 보라. 아름다움이 얼마나 큰 힘인가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아름다움을 잃는 것은 곧 생기를 잃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가 산사에서 만난 별들과 다정에서 만난 튤립들. 그들은 모두 내게 영혼의 힘을 선물한다. 그것이 어디 나에게만 국한된 일이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이 아름다운 것들을 통해 맑은 생명의 힘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 청도에서 만난 세 가지 추억…산과 물, 인심 맑은 三淸의 땅

    청도에서 만난 세 가지 추억…산과 물, 인심 맑은 三淸의 땅

    파릇한 잎, 울긋불긋한 꽃. 산과 들이 색색으로 물듭니다. 그야말로 화양연화(花樣年華)입니다. 내 나라 안 구석구석이 가장 화사해지는 이때, 경북 청도를 찾아 나섰습니다. 산과 물, 그리고 인심이 맑아 ‘삼청(三淸)의 땅’이라고도 불리지요. 어디 맑기만 한가요. 산마루 곳곳에 살구꽃, 벚꽃이 흐드러지고, 마을 어귀의 연분홍 복사꽃은 한없이 객의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혹시 가을철 ‘청도 반시’의 고장으로만 기억하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당신은 청도의 절반밖에 보지 못한 것입니다. 시인의 연정, 그리고 편지 파란 하늘. 눈이 부시다. 시골마을 내호리를 찾아가는 길이다. 청마 유치환(1908~1967)에게서 5000여 통의 연서를 받았다던 여류 시인의 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어렵게 찾아간 이호우·이영도 시조시인 생가(등록문화재 제293호)의 대문은 그러나 굳게 잠겼다. 시인과 외사촌 사이라는 옆집 노부부의 양해를 얻어 2층 베란다에서 생가 안쪽을 살핀다. 천리향의 그윽한 향기가 코를 간질이고, 뜨락엔 키 작은 풀들이 뾰족뾰족 자라고 있다. ‘ㄱ’자 모양의 담벼락 옆엔 허우대만 컸지, 도무지 튼실해 뵈지 않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필경 시인 오누이도 저 나무 아래서 술래잡기, 소꿉놀이를 하며 놀았을 게다. 정운 이영도(1916~1976)와 유치환, 두 시인의 사랑이야기는 애틋하기 짝이 없다. 이종기 청도군청 문화관광해설사 등에 따르면 경남 통영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던 청마는 같은 학교 가사교사 정운에게 마음을 빼앗겨 거의 매일같이 연서를 보내 구애했다. 1947년부터 1967년 청마가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년 세월이다. 그동안 보낸 편지가 5000통을 넘는다. 청마가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임은 물같이 까딱않는데//날 어쩌란 말이냐”라고 절규하면 정운은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라고 화답했다. 하지만 청마는 이미 결혼한 몸. 정운 또한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을 키우는 형편이니 그 사랑이 온전하게 결실을 맺을 리 없다. 결국, 청마는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란 시를 남기고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고, 이영도 시인은 그에게 받은 편지 중 200여 통을 추려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낸다. 시인의 생가 앞쪽 길은 꼭 영화 세트장 같다. 흙으로 쌓은 담과 여닫이 나무문이 달린 ‘영신정미소’,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사료판매소’, LP판에서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올 듯한 ‘중앙소리사’ 등 낡은 풍경들이 이어져 있다. 시인의 집 바로 앞은 오래된 극장 건물이다. 영사기를 거꾸로 돌릴 수 있다면, 영화를 보려고 줄 섰던 사람들 틈에서 시인 남매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가에서 50m쯤 떨어진 강변에 오누이 공원이 조성돼 있다. 동창천과 청도천의 함수머리로, 강물은 이웃한 밀양시에 접어들면서 밀양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공원은 단출하다. 남매를 기리는 시비 두 개와 몇 그루의 벚나무, 정자 한 채가 고작이다.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 정감이 간다.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화양연화(花樣年華)라 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시인의 생가가 있는 청도의 끝자락에서 안쪽으로 되짚어 가는 길이 그렇다. 살구꽃, 자두꽃이 흐드러지고, 복사꽃도 연분홍으로 물들었다. 특히 청도는 복숭아 산지로 명성이 자자한 곳. 보이느니 복숭아밭이요, 즈려 밟고 가는 땅 위는 죄다 복사꽃잎이다. ‘새마을 운동 발상지’인 신도마을 앞 능수버들의 실핏줄 같은 가지엔 초록의 기운이 완연하다. 청도는 날개 펼친 나비를 닮았다. 도시가 옆으로 펼쳐진 형국이다. 이종기 해설사에 따르면 곰티재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산동, 왼쪽은 산서 지역으로 갈린다. 각 지역의 정서도 조금씩 다르단다. 평탄한 산서 쪽과 달리 산동 쪽은 상대적으로 험하다. 초야에 묻혀 살길 원했던 양반들의 고택이 즐비하고, 운문사 등 대가람도 산동 쪽에 몰려 있다. 매전면 동산리의 처진 소나무(천연기념물 295호)와 하평리 은행나무(도 기념물 109호) 등을 줄줄이 지나면 금곡리 삼거리다. 동창천 맑은 물이 흐르는 삼거리 가운데엔 삼족대(三足臺)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대유가 후학양성의 근거지로 삼았던 정자다. ‘요족하지 않아도 먹을 게 떨어지지 않고, 나이 60세 넘게 산 데다, 벼슬도 할 만큼 했으니 이만하면 족하지 않으냐.’고 길손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갈래길 어느 쪽으로 가도 운문사에 가 닿지만, 다리 건너 오른쪽 길을 ‘강추’한다. 여든여덟 칸짜리 운강고택과 만화정 등 청도를 대표하는 고택과 정자가 죄다 이 길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선암서원도 잊지 말고 돌아봐야 한다. 길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 지나치기 십상이다.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박하담의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크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건물마다 세월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신지리와 이웃한 임당리 마을의 김씨 고택도 독특하다. 임진왜란 직전부터 16대에 걸쳐 내시(內侍)들이 살았던 고택이다. 성이 다른 내시를 양자로 들이다가 18대 이후부터 자식을 통해 대를 이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세상 모든 존재에게 진리를 발걸음을 채근해 신라 고찰 운문사로 향한다. 국내의 대표적인 비구니 사찰이다. 가람 초입, 수백m 늘어선 솔숲이 객을 맞고 있다. 자태 단아하고 공기는 청량하다. 소나무 사이사이 진달래가 활짝 피어 화사함을 더하고 있다. 운문사에 들기 전, 꼭 찾아야 할 곳이 북대암이다. 솔숲 진입로를 지나면 왼편에 북대암 오르는 길이 나온다. 산자락 8부 능선까지 차로 오를 수 있으나, 그 뒤로도 가파른 산길이 이어진다. 북대암에 서면 운문사 대가람의 전경이 발아래 펼쳐진다. 운문사는 비구니 사찰인 동시에 수백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4년제 승가대학이다. 여승들의 수도 도량답게 깔끔하면서도 화사하다. 하지만 객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은 여느 사찰에 견줘 매우 적다. 운문사에선 ‘사물’소리를 꼭 들어야 한다. 가죽 있는 축생에게 진리를 전한다는 ‘법고’, 물속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목어’, 하늘을 나는 새와 허공을 헤매는 영혼을 천도하는 쇠로 된 ‘운판’, 지옥의 중생까지 제도한다는 ‘범종’을 통틀어 ‘사물’이라고 부른다. 새벽예불 직전과 저녁 공양 이후(오후 5시 45분경) 사찰 입구의 2층 종각에서 울려 퍼지는 사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운문사는 법보의 보고이기도 하다. 비로전(보물 제835호), 삼층석탑(678호) 등 보물이 7개다. 만세루 옆 처진 소나무는 천연기념물(180호)이다. 이 나무는 해마다 음력 삼월삼짇날 막걸리 12말을 받아먹고 기를 보충한다. 글 사진 청도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가는 길:중부내륙고속도로나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동대구JC에서 신대구~부산간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청도나들목으로 나온다. 조금 더 내려가 매화로 유명한 삼랑진 나들목에서 되짚어 올라오는 것도 좋다. ▶맛집:청도읍 한재미나리마을은 평일에도 식도락가들로 북적댄다. 방문객이 돼지, 오리고기를 사와 농가 미나리밭에서 구워 먹는다. 미나리 한 접시에 1만원 안팎이다. 마을 초입에 미나리와 고기 일체를 파는 일반 식당도 즐비하다. 청도역 앞은 추어탕 거리다. 원조 청도추어탕(371-5510) 등이 알려졌다. 금천면 동곡리의 강남반점(373-1569)은 ‘스님짜장·짬뽕’으로 입소문이 났다. ▶잘 곳:비슬리조트관광농원(372-0900)은 한국관광공사 지정 ‘굿스테이’ 업소다. 각북면에 있다. 선암서원(070-4150-8445)은 한옥체험관을 운영하고 있다.
  • ‘봄비’ 가수 박인수의 새로운 삶의 노래

    ‘봄비’ 가수 박인수의 새로운 삶의 노래

    ‘봄비/나를 울려주는 봄비/언제까지 내리려나/마음마저 울려주네/봄비’ 쥐어짜는 듯한 독특한 창법으로 애절함을 배가시킨 노래 ‘봄비’는 1970년대 히트곡이다. 신중현씨가 작곡하고 박인수(65)가 불렀다. 그는 이 노래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한국 최초의 솔(흑인음악) 가수’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노래 가사를 잊거나 무대에서 쓰러지는 일이 생기면서 그는 가요계에서 사라졌다. 그를 다시 만난 곳은 경기도 일산의 한 노인요양원. 이곳에서 11년째 투병 중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KBS 1TV 인간극장은 23~27일 오전 7시 50분에 7080세대에 익숙한 이름, 박인수를 조명한다. 그는 6·25전쟁 당시 아버지와 형을 평북 길주에 남겨두고 어머니와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피란길에 기차 안에서 어머니와 헤어진 그는 고아원과 미군 부대를 전전하다가 미국 어느 가정에 입양됐다. 그때가 12살이었다. 미국생활에 익숙해졌지만, 외로움과 향수는 여전했던 그는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채 한국에 돌아왔다. 미군 부대를 무대로, 뉴욕 할렘에서 접한 솔 창법을 선보이며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 사단에 합류하고 ‘봄비’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지금 그 남자의 ‘봄비’는 음정과 박자가 어긋나 있다. 11년 전 췌장암 제거 수술을 받은 후 저혈당 쇼크가 잦아지면서 생긴 뇌손상은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덩달아 겪은 단기기억상실증으로 하루에 약을 몇 번 먹었는지 기억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그는 홀로 병마와 싸웠다. 가수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1970년, 부산에서 만난 복화씨와 사랑을 싹틔우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홀로 살아온 그에게 가족은 소중했지만, 늘 음악이 먼저였다. 결국 결혼생활은 5년 만에 끝났고, 복화씨는 아들과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된 것이다. 쓸쓸하게 투병하고 있는 그의 앞에 20여년 만에 아들이 나타났다. 아들이 수소문 끝에 아버지를 찾은 덕에 가족은 다시 모였다. 영혼을 노래하던 모습은 간 데 없이 기억을 잃은 초로가 됐지만, 보고 싶은 아내와 아들만은 생생히 기억해내는 희망을 보였다. 희망은 이제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3개월 전 그에게 가스펠(복음성가)을 주제로 한 기독교 음악영화 출연제의가 들어왔다. 영화 하이라이트인 뉴욕 할렘가의 ‘할렘 스테이지’ 공연에 참여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복화씨는 투병 중인 그를 위해 동행을 결심했다. 30여년 전에 헤어진 가족을 만나고, 노래를 할 수 없어 떠나야 했던 무대를 다시 찾은 그는 과연 어떤 새로운 삶의 노래를 불러줄까.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사랑의 기도/이정우

    [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사랑의 기도/이정우

    사랑의 기도/이정우 1 오오 내 사랑아 오오 내 사랑아 그 어느 날 너를 떠나보낸 후 비로소 너는 나와 영원으로 함께 산다 너는 향기로운 꽃으로 내 마음속에 피어 해마다 이제껏 되살아 있느니 나는 마냥 눈물로 너를 꿈꾸면서 오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너를 위해 기도를, 기도를 드린다 2 오오 내사랑아 오오 내 사랑아 그 먼 옛날 너를 잃어버린 후 비로소 너는 나와 영혼으로 함께 산다 너는 푸르른 나무로 내 마음속에 서서 날마다 아직도 되살아 있느니 나는 오로지 하늘로 너를 부르면서 오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너를 위해 촛불을, 촛불을 밝힌다
  • 김용민 “완주해서 정권 심판” 새누리 “국민과 싸우자는 것”

    ‘성희롱·막말’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던 김용민 민주통합당 서울 노원갑 후보가 9일 “정권심판 선거로 만들겠다.”며 4·11 총선 완주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 새누리당은 “국민과 싸우자는 것이냐.”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김 후보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사퇴보다는 완주가 야권연대를 복원하고 (이번 총선을) 정권심판 선거로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한명숙 민주당 대표의 사퇴 권고를 거절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한 대표가 “당의 상황이 어렵다. 결단을 고민할 때가 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며 “정권심판이 사라진 건 제 책임이고 반성한다. 그러나 사퇴 촉구에 앞장서는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은 심판의 주체가 아니라 심판의 대상이다.”라고 강조했다. 새누리당은 거듭 사퇴를 촉구하며 김 후보와 민주당을 압박했다. 이혜훈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종합상황실장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 후보를 (출당, 후보 사퇴 등) 정리하지 않는 건 국민들과 싸우자는 것으로 보는 국민들이 많다.”면서 “민주당이 나꼼수의 눈치를 본다는 보도는 일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여의도 당사에서 가진 브리핑에서도 “저질·패륜·언어 성폭력을 일삼는 후보는 국민을 비웃고 있고, 민주당은 이 후보를 감싸고 있다.”고 말했다. 공교육살리기교수연합, 공교육살리기학부모연합 등 보수 교육시민단체 회원들도 이날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 후보의 막말·저질 욕설 파문을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좀먹는 미치광이 사건으로 규정한다.”며 김 후보의 사퇴를 거듭 촉구했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마야의 숨결 살아있는 땅 과테말라

    마야의 숨결 살아있는 땅 과테말라

    중미의 중심 과테말라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진 나라이다. 밀림 곳곳에 과거의 화려했던 마야 문명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어 고대 문화유산의 찬란한 보고로 꼽힌다. 우리나라만큼이나 산세가 수려하고, 파카야 화산이 심장처럼 꿈틀대는 곳이기도 하다. 9일부터 12일까지 밤 8시 50분에 총 4부에 걸쳐 방송되는 EBS ‘세계테마기행’에서는 과테말라로 떠난다. 9일 방송되는 1부 ‘마야 정글 탐험’ 편에서는 찬란한 고대 마야 문명의 흔적을 품은 과테말라 페텐 지방으로 2박 3일간 정글 탐험을 떠난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견디며 온갖 야생동물과 함께 정글을 헤치고 나가면 마야 문명의 융성한 과거를 간직한 소츠 유적을 마주한다. 이 유적은 마야 문명의 고분이 양호한 상태로 발견돼 놀라움을 주었던 곳이다. 소츠 유적을 지나 하루 6시간의 강행군을 이어 가면, 마야 문명의 중심지이자 최대 규모의 도시였던 티칼 유적이 신기루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2부 ‘성스러운 물의 나라’(10일)에서는 과테말라 절경으로 손꼽히는 세묵 참페이를 소개한다. 마야어로 ‘성스러운 물’을 뜻하는 이곳은 천혜의 계단형 계곡이다. 옥빛 계곡물과 풍광이 아름답고 신비로워 영화 ‘푸른 산호초’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계곡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전망대에 서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에 말을 잃고 만다. 3부 ‘중미 여행의 출발지 안티구아’(11일)에서는 중미 원주민이 가장 많이 사는 과테말라에서 서는 최대의 원주민 시장과 배낭 여행자들이 여행을 시작하는 안티구아를 소개한다. 과테말라 북서쪽 치치카스테낭고에는 매주 일요일과 목요일에 장이 서는데, 이때가 되면 물건을 사고팔러 나온 현지인들과 그 풍경을 감상하려는 여행자들로 붐빈다. 역사를 안고 살아가는 도시 안티구아에서는 식민지 시대 과테말라 왕국의 영화를 만나게 된다. ‘지상의 천국’이라 불리는 영혼의 호수 아티틀란. 인디오들은 이 호수가 마음을 맑게 비워내는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여행자들에게도 여행의 분주함과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곳이다. 과테말라는 지진과 화산의 나라이기도 하다. 곳곳에 38개에 달하는 화산이 분포해 있고, 그중 몇몇은 여전히 활동하는 활화산이다. ‘화산의 땅, 파카야’(12일)에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활발한 화산 중 하나인 파카야 화산을 찾는다. 이 화산을 따라 오르는 길에는 지난 2010년 폭발 당시의 아찔한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잔잔한 아티틀란 호수를 감싸 안은 풍경과 금방이라도 붉은 용암을 뿜어낼 듯한 역동적인 모습, 이 두 얼굴을 모두 가진 과테말라의 화산을 만나러 간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거칠어진 예삐공주 ‘완전 조으다’

    거칠어진 예삐공주 ‘완전 조으다’

    ‘완전 조으다’, ‘완전 시르다’ 올 상반기 최고의 유행어가 아닐까 싶다. tvN 코미디 빅리그(이하 코빅) 시즌 2의 우승팀 ‘라이또’의 예삐공주 이용진(27)의 고정 레퍼토리 멘트다. ‘완전 조으다’, ‘완전 시르다’를 비롯해 매회 물품을 바꿔가며 ‘오빠, 예삐공주 OOO 사주세효우~’ 등 그가 코빅 ‘게임코너’에서 즐겨 쓰는 대사는 시대의 유행어가 돼 버렸다. SBS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 웅이 아버지 등 히트 코너를 내놓으며 승승장구하던 그가 군대에 가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지는 듯했다. 하지만 제대 이후 코빅에서 예삐공주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며 그는 지금 제2의 전성기를 걷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 개그맨 이용진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다음은 일문일답. →예삐공주 캐릭터는 어떻게 나오게 됐나. -여자캐릭터를 해보면 어떨까 싶었어요. 멤버들과 함께 고민하다 자연스럽게 탄생했죠. 사실 저는 아직도 예삐공주 하면서 닭살 돋고 그러거든요. 원래 여성스러움이 잘 안 맞아요. 최근에 예삐공주 캐릭터가 다소 거칠거나 망가진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딱 저랑 맞죠. 하하. →“조으다, 시르다”, “사주세효우” 등 여러 유행어를 낳았다. 국민 유행어가 된 듯하다. -진짜 많이 쓰시는 거 같긴 해요. SBS ‘웃찾사’에서 웅이아버지 할 때보다 더 많이 사랑해 주시는 거 같아요. 얼마 전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휴대전화 가게의 벽면에서 제 유행어를 패러디한 광고 문구를 봤어요. 신기했죠. 유행어의 힘이 센 거 같아요. →라이또 멤버 중에 가장 4차원적이라던데. -하하. 4차원적이라기보다 저는 자유로운 걸 좋아해요. 그래서 멤버 가운데 저만 소속사가 없죠. →제대 후 원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여행가이드 하려고 했었다던데. -맞아요. 전역한 그날 바로 차를 빌려서 한 달 반 동안 혼자 국내 여행을 했어요. 전라도 강진, 제주도 등 안 다닌 데가 없어요. 그러다 제주도에서 낚시하고 있을 때 라이또 멤버 세형이랑 규선이가 연락을 해왔어요. 같이 하고 싶다고 말이죠. 프랑스 가서 언어를 배운 뒤 여행 가이드 할 거라는 말에 세형이가 그러더라고요. ‘한 학기만 입학 미루고, 함께 코빅에 참여하자. 출연료도 유학생활에 큰 힘이 될 거다’라고요. 그 말에 솔깃했죠. 하하. 그러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 시즌 3까지 참여하게 됐죠. →왜 전역 후 여행가이드를 하려고 했나. -같은 직업을 갖고 평생을 사는 게 참 지겹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워낙 여행을 좋아하고요. 지금껏 33개국을 여행했어요.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많은 나라가 있는데 그걸 다 못 보고 죽으면 억울해서 못 살아요. 하하. 군대도 특수보직 맡으면 외국여행을 할 수 있다는 말에 해군에 지원해 다녀왔고요. 해군 생활을 하면서 캐나다 등 11개국을 다녀온걸요. →어릴 때부터 개그맨이 되고 싶었나. -개그맨이 되고 싶다기보다 원래 여행작가를 하고 싶었어요. 꿈이 탐험가였어요. 하하.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회사생활을 하면서 1년 동안 지게차 운전을 했어요. 돈을 벌면 그 돈으로 해외를 나가고, 자주 그랬죠. →어떻게 개그맨의 길을 걷게 됐나. -어릴 때부터 반에서 오락부장 같은 걸 도맡아 하면서 일명 웃기는 애로 통했어요. 하도 사고를 치고 다니니까 선생님들이 늘 제게 ‘넌 잘돼 봤자 개그맨이야’라고 하시기도 했고요. 말이 씨가 됐죠. 세계일주를 준비하던 중에 후배 개그맨 진호가 이끌어 대학로의 개그 극장을 찾게 됐죠. 그때 무대의 맛을 알고, 개그를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개그맨의 길을 걷게 됐어요. →예삐공주의 분장이 인상적이다. 기억에 남는 분장이 있나. -저 진짜 예전에 피부가 백옥 같았어요. 군대에서도 안 상했던 피부인데, 예삐공주 분장하면서 망가지더라고요. 하하. 근데 저는 분장으로 망가지는 수위가 셀수록 라이또 성적이 좋고요. 재미있는 분장을 하고 무대에 서면 뭘 해도 웃으시더라고요. 하하. 통아저씨 분장 했을 때 얼굴 전체적으로 분장했거든요. 그때가 좀 힘들었고, 제일 저랑 잘 맞았던 건 메이크업 아티스트라고 해놓고, 얼굴에 가부키 화장했던 거 같아요. 그 외에도 심슨, 모나리자 분장 등이 마음에 들었죠. →라이또 팀 분위기는 어떤가. -너무 좋아요.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어요. 저랑 규선이 사이에 세형이가 중간에서 역할을 잘해 주거든요. 규선이는 동생인 데다 어차피 군대갈 놈이라 제가 많이 져 주는 편이에요 하하. →라이또 시즌 3는 어떻게 꾸려 나갈 건가. -일단 세형이 동생 시찬이가 군대에서 곧 제대해요. 제가 참 많이 아끼는 동생이죠. 함께할 것 같아요.(양세찬은 라이또 양세형의 친동생으로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웅이아버지’ 코너에서 왕눈이로 많은 인기를 누린 바 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불안·그리움 담은 섬세한 마음의 풍경화

    웬만해선 문장 하나가 두 줄을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간결하다. 그렇게 촘촘히 문장들을 써내려 가면서 만든 문단을 모아 아이들이 복작거리는 피아노학원을 만들고, 어정쩡한 상태로 함께 살고 있는 옛 연인을 그리고, 다소 기이한 성장담을 들려준다. ‘여름’(문학과지성사 펴냄)은 단편소설 ‘늑대의 문장’으로 2004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은 작가 김유진(31)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문학지에 발표한 단편소설 8편이 각각, 단정한 문장들을 쏟아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리듬감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편의 구성 역시 큰 틀에서 묘하게 연결고리를 갖는 듯하다. 과거와 현재의 교차, 흔하지 않은 관계, 섬세하게 도드라지는 풍경 같은. 그중에서도 작가는 ‘풍경’에 더 많은 애정을 부여했다. 첫 번째로 실린 ‘바다 아래서, Tenuto(테누토·악보에서 음을 충분히 지속시키라는 음악 용어)’부터 확연히 느껴진다. 인물 K의 일상이 단편영화 한 편 보는 듯 세세하다. 눈을 떠 “밤새 떠나 있던 영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침대에 앉아 있다가 “원룸 발코니에 트렁크 차림에 양말만 신고 양치질을 하는” 아침, 까만 얼굴에 분홍색 옷을 입는 소녀를 응시하는 오후, 오밤중에 고기를 구워 대는 이웃에게 투서를 날린 밤이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이어지는 ‘희미한 빛’에서도 작가의 성향은 이어진다. 전 남자친구가 사귀는 여성의 외모와 행동을 표현하는 것이나, 고용센터의 분위기나, 과거 B와 만든 추억 등이 그렇다. ‘대체 왜 이렇게 풍경에 집중할까.’라는 의문이 생길 즈음 세 번째로 실린 표제작 ‘여름’에서 얼핏 답을 엿본다. ‘…상자는 모두 손으로 만들어야 해요. 지름이 5센티미터건, 1센티미터건. 그래야 각각의 상자마다 크기나 형태에서 미묘한 차이가 생겨나니까요. 그 차이는 나중에 수백 개의 상자를 일정한 패턴으로 캔버스에 옮겨 붙였을 때, 작은 틈을 만들어 줍니다. 그 공간이 변화와 균형감을 만들어 주지요. …큰 그림을 봅니다. 수백 수천 개의 모서리가 만들어 내는 질감, 경계가 희미한 형태들이 주는 모호한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감정을 가진 형태들을 풍경이라 부릅니다.’(76~77쪽) 전화로 만난 작가는 그 풍경을 “글을 쓸 때 가진 소박한 목적”이라고 했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그런 것에서 발견하는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는 “그 안에 인물이 있지만 앞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단출하면서 미묘한 상황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 ‘드러나지 않는’ 인물은 바로 단편 대부분에서 화자인 ‘나’, 하지만 관계 속에서 그 존재는 투명에 가까운 ‘나’이다. ‘희미한 빛’에서 전 남자친구와 어정쩡한 동거를 하는 ‘나’와 ‘물보라’에서 L과 어딘가로 가고 있는 ‘나’, ‘우기’에서 다른 나라로 여행을 떠난 ‘나’가 있다. ‘나’는 한 발짝 물러나 있지만, 그려내는 풍경에서 거북함, 불편, 불안, 외로움, 그리움 등 감정을 담아낸다. 평론가 조연정이 해설에서 말한 “김유진이 그려낸 섬세한 마음의 풍경화”가, 그래서 이 소설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확한 말이지 싶다. 하나 더. 마지막 단편 ‘나뭇잎 아래, 물고기의 뼈’를 제외하고 인물 이름이 죄다 영어 이니셜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물들에게 엄청난 운명과 성격을 부여하는 느낌이라 부담스러웠다.”는 게 이유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기고] 제주 복합미항에 관한 냉정한 인식/이병오 해군 고등검찰부장

    [기고] 제주 복합미항에 관한 냉정한 인식/이병오 해군 고등검찰부장

    이맘때면 만물에 회생의 기운이 맴돌지만, 해군 전 장병은 천안함 46용사와 한주호 준위의 희생으로 새겨진 멍으로 더욱 가슴이 저린다. 영혼으로라도 차디찬 북방한계선(NLL) 앞바다를 지키고 있을 것만 같은 그들의 희생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맞서 싸워야 할 적이 우리 앞에 있으며, 죽음으로라도 우리 조국을 사수해야 한다는 다짐을 되새기게 한다. 또한 국가안보의 문제야말로 어떠한 국론보다도 우선시해야 하며, 정세에 얽힌 소모적인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최근에는 한반도 안보의 불안 요인이 북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얼마 전 이어도 문제가 다시 한·중 간에 논란을 일으킨 것과 같이 주변 강대국 간 갈등이 태평양을 넘어 우리 앞바다인 제주 남방 해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해양경계 획정 등 지리적 분쟁의 외형을 띤 이런 대립의 이면에는 경제·군사력의 경쟁적 확대와 첨예한 자원경쟁이 깔려 있다.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하는 이유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현실에서 보이는 우리 사회의 대응은 우려스럽기만 하다. 제주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건설에 관한 찬반 논란만 봐도 그렇다. 제주 복합미항 건설에 대한 국가적·지역적 전망은 뒤로하고 일부 시민운동가들의 반대 목소리가 SNS와 인터넷매체 등을 통해 여과 없이 실시간으로 양산되고 퍼지고 있다. 여기에는 제주 복합미항에 내재된 전략적 가치에 두려움을 느끼고 원색적인 비난을 가하는 북한과 이에 동조하는 종북세력도 한몫을 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선거를 겨냥한 정치인뿐만 아니라 과거 찬성했던 사람들도 현재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비생산적인 논쟁을 증폭하는 데 합세하고 있다. 제주 복합미항을 반대하는 논리도 대부분 선동적인 구호만 난무할 뿐 논리 비약이나 억측에 해당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MD)의 요격 목표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최단 항로인 북극항로를 거치므로 제주도에서 요격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미국의 MD를 위한 전초기지라는 가설이 기정사실처럼 퍼져 나갔다. 또한 지난 5년간 어느 다른 국책사업보다도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가지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추진한 건설 사업임에도 문화재 및 환경보호상의 각종 절차를 무시한 사업인 양 왜곡하고 있다. 우리 남방 해역의 해상교통로를 확보하는 데 필수적인 해군력을 축소 평가하면서 현재 해경의 임무수행으로도 충분하다는 억지 주장도 나돌고 있다. 결국 근거 없는 이러한 주장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성숙한 국민은 진정한 평화가 튼튼한 국방력에서 오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강정마을에서 제주 복합미항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세계문화유산인 제주도를 진정한 평화의 섬으로 만들려면 오히려 제주해역을 비롯한 한반도 전체를 굳건히 지켜 낼 제주 복합미항을 조속히 건설하는 데 전 국민의 힘을 모아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국가안보라는 큰 틀에서 제주 복합미항에 대한 냉정한 인식을 갖고 현실적인 태도를 지향하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 해군의 일원으로서 간절히 바란다.
  • [씨줄날줄] 논문표절/최용규 논설위원

    사전적 의미로 표절(剽竊)은 ‘시나 글, 음악 따위를 지을 때, 남의 작품의 일부를 자기 것인 양 몰래 따서 쓰는 것’을 말한다. 명백한 도둑질이다. 하지만 그 어원을 따져 보면 단순히 양상군자(梁上君子)의 행위로만 치부되지 않는다. 표절(plagiarism)은 플라지아리우스(plagiarius)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어린이 납치범’, 즉 유괴범이라는 뜻이니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라는 의미다. 영혼을 훔치는 범죄로, 도덕성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문제다. 논문을 표절한 정치인들의 말로가 비참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박사학위 논문 표절로 사임 압력을 받아 오던 슈미트 팔 헝가리 대통령이 엊그제 불명예 퇴진했다. 젊은 시절엔 헝가리 남자펜싱의 영웅이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란 화려한 경력을 밑천으로 국회의장까지 역임한 그였으나 논문 표절로 모든 것을 잃었다. 제멜와이스 대학도 그의 박사학위를 박탈했다. 그의 사임 소식에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인 만큼 당연하다.”는 싸늘한 반응 이외에 동정의 빛조차 보내지 않았다. 앙겔라 메르켈 내각에서 가장 인기 있고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받던 칼테오도르 구텐베르크 국방장관 역시 지난해 논문 표절로 물러났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며 메르켈 총리까지 나서 사퇴 압력 진화에 나섰지만 인기 절정의 이 젊은 정치인은 독일의 지성 파워에 결국 손을 들었다. 그는 ‘학문적 불문율’을 지키지 않은 ‘심각한 실수’가 있었음을 뼈저리게 인정했다. “정치인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잘못을 하면 용서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그의 퇴임사는 의미심장하다. 아시아에서도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1996년 태국 의회는 반한 총리의 학위논문 표절을 조사했다. 반한 총리가 모교인 방콕 람캄행 대학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았으나 이 논문이 정부 부처의 연구보고서와 제목과 내용이 비슷해 표절 의혹을 산 것이다. 강하게 버티던 반한 총리는 집권 14개월 만에 석사학위논문 표절 등으로 권좌에서 물러나는 운명에 놓였다. 문대성 새누리당 총선 후보의 논문 표절 논란이 뜨겁다. 학술단체협의회가 문 후보의 논문을 표절논문이라고 결론냈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인용을 밝히지 않고 6개 단어가 동일하게 나열되면 표절로 인정하는 것이 교과부 기준”이라며 “이에 따르면 (문 후보의 논문은) 표절 수준을 넘어 거의 베꼈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답했다. 어찌해야 하나. 출처 없는 인용은 범죄인 것을…. 최용규 논설위원 ykchoi@seoul.co.kr
  • “無學의 빈민여성 그 지혜와 용기 어떤 지식인도 갖지 못했습니다”

    “無學의 빈민여성 그 지혜와 용기 어떤 지식인도 갖지 못했습니다”

    소설가 공지영(49)과 다큐멘터리 감독 태준식(41). 언뜻 교집합이 없어 보이는 둘을 엮는 유일한 고리는 전태일 열사의 모친인 고 이소선 여사(“누가 여사라고 부르면 난 여사가 아니라 전태일 엄마라고 성을 냈다.”고 할 만큼 고인은 ‘여사’라는 말을 싫어했다)와 의 인연이다. 노동 다큐에 천착해 온 태 감독은 영화 ‘어머니’를 통해 지난해 9월 고인의 소천(召天)까지 마지막 2년을 담았다. 인물 다큐는 뉴스화면과 지인들의 회고를 붙이는 게 일반적인 형식일 터. 그런데 태 감독은 달랐다. 함께 고스톱을 치고, 손톱을 깎아 드리고, 담배 심부름을 하면서 ‘노동자의 어머니’의 소소한 일상을 담아 냈다. 공 작가 또한 인연이 남다르다. 등단 이전인 1980년대 중반, 고인의 평전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고, 구술원고를 비롯한 각종 자료를 모았다(여러 사정으로 평전 발간은 불발됐다). 집회에서 먼발치로 보던 고인을 만난 건 열사의 40주기이던 2010년 11월. 한 언론사의 요청으로 인터뷰를 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공지영과 태준식을 만났다. 약속이라도 한 듯 가슴 속에 품은 ‘이소선’을 꺼내 놓았다. →시사회에서 눈시울을 붉히던데, ‘어머니’를 본 느낌은. -공지영(이하 공) 가슴이 아리고 뒷부분은 우느라고 정신 없었다(금세 눈가가 촉촉해졌다). 분신 뒤 병원으로 실려 온 전태일이 기도에서 피거품을 쏟아내며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의 내용을 영화에서 처음 들었는데 깜짝 놀랐다. →극장 개봉을 하는 심정도 남다를 텐데. -태준식(이하 태) 제작과정에서 그분의 존재를 새삼 느꼈다. 영화를 찍고, 극장에 걸리는 건 수많은 시민의 십시일반 덕이다. 상업영화 중심의 배급체계를 어떻게 돌파할지는 과제이지만, 여기까지로도 의미가 있다. 전태일에 관한 다큐와 극영화, 평전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시작으로 어머니가 방송 다큐나 소설, 극영화로도 조명되리라 믿는다. →인상 깊은 장면을 꼽는다면. -공 장례식 장면에서 눈물이 흘렀던 건 이제 그만 가셔도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삶이 너무 고단했다. 아드님을 만나러 가셔도 되겠다 싶더라. 어머니의 화법도 인상적이다.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 가서 “(크레인 위에 있으니) 땅바닥이 아니라서 건드리는 놈은 없겄제.”라고 한 부분을 보라. -태 복사뼈에서 물을 빼러 병원에 갔는데 너무 고통스러웠던 모양이다. (카메라) 찍지 말고 팔 좀 붙들어 달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친해지기 전이라 범접하기 어려웠는데 순간 짠한 마음이 들었다. 다큐의 콘셉트를 어머니의 일상에 맞춰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 순간이다. →두 분 모두 특별한 인연이 있다. 고인과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면. -공 전태일의 40주기이던 2010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25~26년 전 평전을 준비할 당시에는 짧은 인사를 건넨 게 전부다). 종로구 창신동의 비좁은 집에 갔다. 방 한 칸에 부엌 겸 거실이 딸린 12평 남짓한 집이었다. 30평짜리에 살아도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은 없는데… 가슴이 먹먹했다. -태 2009년 2월쯤인가. 금융위기, 용산참사 등으로 피로와 불안감이 극에 달했던 시점에 문득 뵙고 싶었다. (다큐 얘기를 꺼내니)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하냐며 나무랐다. 워낙 겸손한 분인 데다 늘 담배를 피우고 (당뇨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짜증도 냈는데 무시하고 1년쯤 드나들었다. 어느 순간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더라. 안 오면 외려 심심해하고, 전화해서 심부름을 시켰다(웃음). 마지막 1년은 2~3일에 한 번꼴로 들렀다. →2년여 동안 재밌는 일화도 많이 들었겠다. -태 1987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숨졌다. 장례식장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당시 인권변호사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옆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대뜸 택시비 1만원을 빼앗다시피 해서 몸을 피했다. 훗날 청와대에서 만난 노 전 대통령이 “어머니, 빌려 가신 돈 갚으셔야죠.”라고 하니까, “옜다.”라며 쌈짓돈을 꺼내 웃음바다가 됐다고 하더라. →무학의 40대 여성이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40여년 동안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다. 네 차례 옥고를 치르고 200여 차례 연행되면서도 꺾이지 않은 힘은 어디서 나온 걸까. -공 1970년 당시 친척들은 이소선이 전태일을 죽게 만들었다고들 했다. 기질적으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란 얘기다. 평전을 보면 전태일이 ‘나 떠나면 엄마가 해줘야 해.’라며 노동자 권리를 가르치는 대목이 나온다. 둘은 영혼의 쌍둥이이거나 동지다. 한 사람이 ‘이벤트’를 하고 떠나면 남은 사람이 뒷일을 책임지는 환상의 복식조라고나 할까. 고인의 배포를 말해 주는 일화는 많다. 전태일의 죽음 이후 김현옥 서울시장이 7000만원을 들고 와서 장례를 치러 주겠다고 제안했다. 고인은 두 딸과 아들에게 얘기했다. ‘우리가 오빠 시체를 내주면 너희는 공장을 안 다녀도 된다. 아니라면 너희는 공부를 안 시켜 줬다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 선택해라.’라고 했단다. 당시 7000만원이면 아파트 두 채 값이다. 돈도 돈이지만 경황 없는 상황에서 어린 자식들을 모아 놓고 그런 얘기를 했다는 게 나도 대가 센 편이지만 상상도 못할 일이다. →평전을 써보고 싶다고 했는데. -공 다음 대선에서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관심이 없을 소재인데(웃음)…. 일본 식민지와 6·25전쟁, 봉건 소작농의 딸, 무능력한 남편, 무학 등 한국 빈민여성이 놓일 수 있는 질곡의 밑바닥에서 살아온 분이다. 그런데 어떤 지식인도 갖지 못한 지혜와 용기를 가졌다. 그를 통해 대한민국의 또 다른 역사를 쓰고 싶다. 전태일 기념사업회와 수익은 반씩 나눠야겠다. 하하하. →영화를 누구에게 권하고 싶나. -공 ‘노동자의 어머니’가 머리띠 두르고 연설하는 것만 봤지 고스톱도 치고 우스갯소리도 하는 평범한 할머니란 건 모르지 않나. 누가 보든 친근하게 감정이입을 할 것 같다. -태 20대들이 봤으면 좋겠다. 검색창에 이소선 석 자를 쳐보게 한다면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인생의 멘토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에서 죽음마저 극복하는 고인의 삶을 통해 삶을 돌아보고 위로받을 수 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생명의 窓] 항우울제에 대한 편견/오동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생명의 窓] 항우울제에 대한 편견/오동재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요즘 진료를 하다 보면 이틀에 한명꼴로 새로운 우울증 환자가 찾아온다. 이들에게 항우울제를 쓰자고 권유하면 열명 중 2~3명은 약물치료를 거부한다. 이렇게 거부한 환자 중 절반은 다음 진료시간에 오지 않는다. 의사가 마치 독약이라도 권한 듯 항우울제 치료에 두려움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울증 환자들이 정신건강과에서 쓰는 약물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낄 때마다 안타깝다. 정신건강과에서 쓰는 약물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약물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설득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장 흔한 편견은 정신건강과 약을 한번 복용하면 평생 먹어야 된다는 생각이다. 물론 평생 약을 복용해야 하는 정신 질환이 있다. 조현증(과거 정신분열증)과 같이 뇌의 기능이 잘못되어 약물치료를 중단하면 다시 재발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등 대부분의 정신건강과 병은 완치가 가능하다. 두번째로 걱정하는 것은 중독성에 대한 우려이다. 정신건강과 약은 무조건 중독이 된다고 생각한다. 정신건강과 약물 중 항불안제 등은 중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항불안제의 습관성은 알코올과 비슷한 수준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성인들은 자유롭게 술을 마신다. 그렇게 술을 마신다고 모두 알코올 중독이 되지는 않는다. 일부 중독에 취약한(특히 유전적으로 취약한) 사람들만 중독된다. 항불안제를 복용하는 환자도 일부 중독에 취약한 사람들만 중독이 된다. 우울증 환자가 불안을 견딜 수 있는 경우에는 항불안제를 처방하지 않고, 항우울제만을 처방한다. 항우울제는 습관성이 전혀 없는데도 정신건강과 약은 모두 습관성이 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마치 한국인 한명이 미국에서 총기 난사를 했다고 해서 한국인은 모두 난폭하고 무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혹시 우울증 환자에게 항불안제를 투약하더라도 불안이 가라앉을 때까지만 처방한 후 서서히 중단한다. 정신건강과 약물치료를 꺼리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의 정신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약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이 아플 때 약을 복용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저항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우울해졌을 때 약을 복용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정신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약으로 정신 상태를 바꿀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정신은 뇌 활동의 산물이다. 우리의 뇌도 분명하게 우리 몸의 일부이다. 생각을 하는 정신활동도 호르몬과 전기 등 뇌의 물질적 활동이다. 거꾸로 신체의 각 부위도 뇌처럼 스스로 감정을 느낀다는 증거들이 많다. 위장은 마치 스스로 감정을 느끼는 것 같다.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바로 소화가 안 된다. 실제 소화기관에는 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의 수용체가 있다. 피부에는 스트레스 때 나오는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렇듯 정신과 육체는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정신과 육체를 별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신은 육체와 다르게 고귀하고,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다. 일부 종교인들은 우울증이 생겨도 약물 치료를 받지 않는다. 이들은 안수를 받거나 기도를 하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믿는다. 우울증 등 정신적인 문제는 영혼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종교적 소관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증가 속도도 매우 빠르고,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정신건강 치료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이런 거부감 때문에 아무리 우울증이 심해져도 치료를 받지 못한다. 유능한 사람들이 일시적인 우울증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프다. 적절한 치료를 받았으면 벌써 회복하여 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 “우리사회는 너무 리더만 강조, 반박자 빠른 팔로어십도 중요”

    김정태 하나금융 회장 “우리사회는 너무 리더만 강조, 반박자 빠른 팔로어십도 중요”

    김정태(60) 하나금융지주 회장은 스스로를 마무리 투수라고 불렀다. “제법 적임”이라는 자평도 곁들였다. 취임 사흘째인 28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다. “모든 전략을 노출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살살 얘기하겠다.”고 말문을 뗀 그는 인수전이 달아오르고 있는 ING생명보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분명하게 잘라 말했다. →김승유 전 회장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빈자리를 어떻게 메워나갈 생각인가. -(김) 회장님이 떠나면서 30년 동안 간직한 액자라며 물려주셨는데 이렇게 써 있더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장 및 제품환경은 그 변화에 준비되어 있지 않은 어떠한 조직이라도 파괴할 수 있다’(미국 GM의 전설적 경영자로 불리는 앨프리드 슬론의 말). 리더는 변화에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는 조언이었다. 워낙 (전임) 회장님이 방향을 잘 잡아놓아 저는 그 방향으로 잘 가면 될 것 같다. ●“ING생명 인수 관심 없다” →리더십이 약한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아무리 리더가 방향을 잘 잡아도 조직 구성원이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조직이든 리더가 있으면 팔로어(따르는 사람)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너무 리더만 강조한다. 밑에 사람들이 반박자 앞서 반응하는 팔로어십도 중요하다. 리더는 모든 사람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매력적이 돼 사람들이 끌려오도록 해야 한다. 그게 제가 늘 강조하는 ‘헬퍼 리더십’이다. →보험사 등 추가 인수합병(M&A) 계획은. -우리에게 가장 취약한 부문이 보험이다. 좋은 기회가 오면 할 것이다. →ING생명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는가. -ING는 짝사랑하는 분(인수 희망자)이 너무 많아 우리까지 가세할 생각은 없다. ●“국내시장 포화… 해외 공략할 것” →해외진출 전략은. -중국, 동남아, 미국 등 모든 시장에 관심 있다. 국내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다.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런데 (어디에) 관심 있다고 하면 가격이 올라간다. 돈과 관련된 얘기는 원래 자세히 하면 안 된다(웃음). →외환은행과의 화학적 결합을 불안하게 보는 시선도 많다. -일단 친해져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게 되면 밑에서부터 전산 등 PMI(인수후 통합작업) 필요성 얘기가 절로 나오게 돼 있다. 친해지면 그 속도가 빨라진다. 내 전공이 또 친화력 아닌가. 두고 봐라. 마무리 투수로 제법 괜찮을 것이다. ●“문재인 고문과 친구지만 난 무당파” →농협지주사 출범 등 앞으로 지주사 간 경쟁도 치열해질 것 같은데. -스마트뱅킹 등 온라인 시장을 적극 공략할 생각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게 은퇴 시장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장을 행복 디자인 시장이라고 부른다. 은퇴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 않나. 앞으로 온라인 시장과 은퇴 후 시장이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유력 대선주자인 문재인 민주통합당 고문과 절친한 고교(부산 경남고) 친구 사이인데. -영업을 오래 한 사람은 영혼이 없다. 무당파, 무종교다(웃음). 은행 영업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하나를 “무서운 조직”이라고 표현했다. “나를 봐라. 서울은행에서 출발해 신한은행을 거쳐 하나금융 회장을 하고 있다. 그만큼 조직이 열려 있다. 지금은 하이브리드가 대세 아닌가. 하나의 경쟁력은 여기에 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어린이 책꽂이]

    ●캡슐 마녀의 수리수리 약국(김소민 글, 소윤경 그림, 비룡소 펴냄) 허약한 동동은 튼튼한 여동생 묘묘와 영혼을 바꾸려고 캡슐 마녀의 알약을 하나씩 나눠 먹을 작전을 몰래 짰다. 아뿔싸! 그 약을 아빠가 먹어버렸다. 재혼해야 할 아빠 대신 맞선 자리에 나간 동동은 어떻게 할까? 7500원. ●왜 띄어 써야 돼?(박규빈 글·그림, 책과콩나물 펴냄) 한글 띄어쓰기는 어렵고 짜증 난다. 그런데 띄어 씌기를 하지 않아 ‘엄마 가방에 들어가신다.’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1만 1000원. ●장바구니는 왜 엄마를 울렸을까?(석혜원 글, 김진이 그림, 풀빛 펴냄) 어린 시절부터 경제공부시킨다고 책이 많은데… 왜 엄마는 비싼 멜론 대신 참외만 먹으라고 하는지 잘 알게 된다. 1만원.
  • 아픔이 아픔을 위로하다

    군더더기 없다는 게 이런 것일 듯 싶다. 미사여구 없이 상황을 섬세하게 풀어내고 무리해서 자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내지 않고도 이야기를 흥미롭게 끌어간다. 지난해 제5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자인 기준영의 첫 장편소설 ‘와일드 펀치’(창비 펴냄)는 그렇게 읽힌다. 1부와 2부로 나뉜 소설에서 네 번 나오는 인트로와 아우트로는 이층집 주인 ‘현자‘의 시점으로 풀었다. 현자는 “내게 중요한 사람은 남편 강수와 아들 완주”라고, “더 값진 것을 갖기엔 역량부족”이라고 못 박았지만, 이내 “내 팔자엔 손님이 끓나 봐.”라고 인정해버린다. 그렇게 불쑥 ‘남편의 손님’ 태경과 ‘내 손님’ 미라가 현자의 이층집에 찾아온 것이다. 부부가 결혼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홍콩으로 떠나고, 빈집이 오롯이 손님들의 것이 된 사이,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했다. 이들이 갖는 유대감은 가족사다. 아내와 딸에게 버림받은 태경은 ‘밀고 당기기 하기에 지친 영혼’이고, 미라는 사랑하는 남자의 폭력에 시달렸다. 강수는 물놀이하다가 동생을 잃은 아픈 기억을 태경과 공유하고 있고, 현자 역시 미라네 여관에서 묵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와 사고사의 고통을 품고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인물이 끼어든다. 불안한 심리상태를 보이는 어머니와 사는 열여덟살 우영이다. 우영은 1년 전 시점부터 차근차근 현재로 다가오면서 이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 태경과 미라는 ‘시들한 부부’ 강수와 현자에게, 소년 우영은 강수와 태경에게, 또 어른 넷은 외로운 우영에게 위로를 드리우고, 든든한 울타리가 된다. 기준영 작가는 “제목은 중의적 표현이다. 여러 가지 원액이 섞이는 칵테일처럼 감성이 충돌하는 의미도 있고, 거친 한 방이라는 의미도 품는다.”고 설명한다. “담담하게 써내려갔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은 거칠고 강하기 때문에 와일드 펀치를 떠올렸다.”고 덧붙였다.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재미가 있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상업사진 중단 후 ‘한국의 재발견’ 나선 사진가 김중만

    [김문이 만난사람] 상업사진 중단 후 ‘한국의 재발견’ 나선 사진가 김중만

    아주 먼 공간을 현재로 확 끌어당긴다. 좁혔다 늘였다, 모든 것이 보는 방향과 각도에 따라 변한다. 과학과 예술, 그리고 영혼이 버무려진 걸작이 탄생하기도 한다. 뭘까. 바로 사진이다. 하여 누구나 사진을 감상하고 싶어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 사진작가 김중만(58)씨. 요즘에는 어떤 앵글로 감동을 만들어 가고 있을까. 5년 전, 더 이상 상업사진 촬영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새로운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기에 카메라를 든 그의 행보가 궁금해진다. 우선 최근의 몇 가지 사례부터 들여다보자. 첫 번째, 서울대병원 본관 1층에 가면 ‘우리 모두에겐 희망에 대한 절대적 소망이 있다’는 주제의 흔치 않은 사진전을 감상할 수 있다. 김씨가 직접 병원 곳곳을 누비며 삶에 도전하는 환자와 가족, 그리고 진료 현장을 뛰는 의료진의 숨김 없는 모습을 담은 사진 30점이 전시되고 있다. 김씨가 꼬박 3일 동안 병원에 기거하며 찍은 작품들이다. 이 전시는 ‘희망 기부, 나눔의 문화’에서 출발했으며 23일까지 계속된다. 두 번째, 병영문화 월간잡지 ‘HIM’을 통해 ‘그대들이 지키는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는 제목으로 병사들을 위한 헌정 사진전을 시작했다. 그가 직접 몸으로 찍은 아름다운 국토강산의 사진들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최근호에는 ‘강원도 영월 요선암’ 등 새로운 사진 8점이 포토 에세이 형식으로 지상 전시되고 있다. 세 번째, 지난 20일 동북아역사재단 등과 협약을 맺고 다음 달 1일부터 1년 동안 독도 전역을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시작한다. 생활과 동식물 등 기록적, 예술적 가치가 있는 사진을 총망라하게 돼 또 다른 차원의 독도 수호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가 터치하는 독도의 사계는 어떤 모습일까. ●레게 머리 알아볼까봐 헤어스타일 바꿔 지난 19일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김씨를 만났다. 바쁜 촬영 일정 때문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잠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김씨 특유의 레게머리 스타일이 아니어서 의외였다. 헤어스타일을 왜 바꿨느냐고 물었다. “이렇게 하면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아서요.”라며 웃는다. 먼저 병원 전시 얘기를 꺼냈다. “아시다시피 병마와 싸우는 환자들은 희망을 가져야 하거든요. 또 병원에는 좋은 의사들이 많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건강한 삶, 건강한 세상 만들기에 동참하자는 취지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환자들, 나눔을 통해 값진 삶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했습니다.” 병사들을 위한 헌정 사진전도 이 같은 ‘나눔’에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아는 분의 권유도 있었지만 나라를 지키는 60만 병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하겠다고 했지요. 그들에게 ‘아름다운 강산’, ‘국토사랑’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했습니다. 너희들이 있어 편하게 살고 있으니 뭔가 해 줘야 한다는 ‘나눔의 생각’에서 말입니다.” 이어 독도 얘기를 꺼냈다. “사실 제가 ‘한국의 재발견’이라는 이미지 작업을 한 지 5년 차가 됩니다. 첫 번째는 관광공사와, 두 번째는 문화재청과 협약을 맺어 한국적인 것을 찾는 작업을 했지요. 그런 연장선상에서 독도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독도는 그동안 개인적으로 두 번 정도 다녀왔는데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요. 좋은 작업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사진작가들은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보물 같은 곳이지요” 그는 또한 “우리의 땅 독도에서 우리의 정서를 반영한 작품을 만들어 독도를 세계에 알리고, 미래세대를 위한 영유권의 근거를 기록물로 남길 것”이라면서 “그들(일본)이 뭐라고 하든 말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꾸준히 준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독도 프로젝트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전시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사진 관람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독도 다음은 어디냐는 질문에 “제주도로 향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를 위해 틈틈이 제주도에 다녀온다고 귀띔했다. ●한국 전통·깊이 간과했던 지난날 반성 “그동안 한국의 전통과 한국적 깊이를 간과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작업을 하면서 반성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상업사진을 하면서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지요. 뒤늦게나마 우리나라 이미지에 빠지면서 정체성을 생각했고 ‘너는 누구냐’ 하는 물음에 조금 (답을)찾아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 사진가가 해야 할 일은 무궁무진합니다.”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상업사진 시절에 대한 반성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1988년 한국인으로 귀화한 그는 패션작가로 유명 연예인들과 사진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전도연, 비, 원빈, 정우성, 배용준, 이병헌, 강수연, 손예진 등 1000여명에 이르는 스타와 패션사진, 광고, 영화, 포스터 등 다양한 분야의 사진을 찍었다. 연간 17억원을 벌어들일 정도였다. 그러던 2007년 11월 어느 날 둑길을 걸으면서 문득 자신에 대해 물음표를 던졌고 상업 사진을 확 접었다. 연간 수입이 8000만원으로 뚝 떨어졌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좀 더 일찍 고민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안의 영혼과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한다는 어떤 절실함이 다가왔습니다. 중랑천 둑길을 걷다가 문득 수양버들을 보고 ‘너를 찍어도 되겠니’라고 몇 번 물었고 비로소 대답을 들었을 때 방향전환을 하게 됐지요.” ●阿 봉사한 부친 유언 따라 26곳에 골대 세워 이후 수양버들을 찍으면서 둑길에 있는 나무들과 친구가 됐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을 법한 외로운 나무들과도 가까워졌다. 어쩌면 소외된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찍은 둑길 사진만 무려 4만 5000여 장이다. “저는 사진작가로 생각 안 합니다. 그저 사진가일 뿐입니다. 사진가의 인생으로 반절 정도 왔습니다. 앞으로 5년 차의 사진가로서 우리나라를 정성으로 담아내려 합니다.” 화제를 아프리카로 돌렸다. 지난달에도 아프리카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그동안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 걸린 아이 등 불우한 아이들과도 자주 만났는데 이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무엇을 해 줄 것인가 고민을 많이 해 왔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종단 축구 골대 세우기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과 요하네스버그, 보츠와나, 나미비아, 잠비아, 짐바브웨, 케냐, 에티오피아 등 희망의 축구 골대로 아프리카의 남부에서 북부로 올라가는 것이지요.” 이 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26개의 축구 골대를 세웠다. 이는 아버지가 생전에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정신과 맥락을 같이한다. 1960년대 말 가족을 이끌고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이주해 평생을 진료에 바친 의사 아버지는 생전에 “아프리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아들에게 자주 강조했고 ‘아프리카 사진’ 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찍기 시작했다. 그가 목숨 걸고 찍은 아프리카 사진들은 현재 제주도에 있는 아프리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사진 인생 37년… 75만장 찍어내 1975년 개인전을 통해 데뷔했으니 그의 사진 인생은 올해로 37년째. 그동안 찍은 사진만 무려 75만장이다. 내친김에 100만장까지는 찍어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이런 그에게 사진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전쟁입니다. 카메라를 들고 치열한 전선으로 뛰어들어가 이기는 것입니다. 200년 사진 역사에 한국인으로 뛰어들어야 합니다. 우리 것이 좋은데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열정과 한국의 혼을 가진 후배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앞으로 그 전쟁터는 더 치열해질 테니까요. 우리나라는 디지털카메라 보급 1위 국가입니다. 모든 국민들이 사진가다운 DNA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아름다운 것을 열망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거듭 강조하는 그는 “일반 국민들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찍고 사진가인 저는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찍어나가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 김중만 1954년 철원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로 이주했다.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중 사진작가로 방향을 틀었다. 1975년 니스 ‘장피에르 소아르니’에서 데뷔 개인전을 가지면서 본격적인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77년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23살 때 프랑스 ‘오늘의 사진작가 80인’에 최연소 작가로 선정됐다. 1988년 한국으로 귀화한 뒤 패션작가와 유명 연예인들 사진 작업을 하던 중 2007년 상업사진 중단을 선언했다. 이후 기아와 질병으로 고생하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후원하면서 세계 오지와 극지를 오가며 예술 사진을 찍었다. 최근에는 ‘한국의 재발견 프로젝트’에 전념하고 있다. 주요 저서와 사진집으로는 ‘동물의 왕국(1999), ‘아프리카 여정’(2005), ‘김중만 사진집’(2005), ‘섹슈얼리 이노선트’(2006) 등이 있다. 아울러 패션사진가상(2000), 모델라인 2002 베스트 드레서 백조상(2002), 제5회 마크 오브 리스펙트상(2010) 등을 수상했다. 현재 스튜디오 ‘벨벳 언더그라운드’ 대표로 있다.
  • [저자와 차 한 잔] 문화재 환수운동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혜문 스님

    [저자와 차 한 잔] 문화재 환수운동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 혜문 스님

    2012년 2월 13일 창덕궁 앞 석등이 사라졌다. 멀쩡하던 석등이 왜 없어졌을까. 창덕궁에 달려 있는 우리 문화재로 착각했던 그 석등이 실은 일본풍 장식물이었다. 그렇다면 일제가 설치한 것일까. “1970년대 궁궐 주변 정비를 위해 설치한 펜스의 일부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문화재청의 기가 막힌 대답. 석등의 오류를 지적하고 철거를 이끌어 낸 ‘문화재 제자리 찾기’의 대표 혜문 스님이 얼마 전 ‘빼앗긴 문화재를 말하다’(작은숲 펴냄)를 출간했다. 강탈당한 우리 문화재의 환수를 주도하는 활동가답게 책은 시종 우리의 신물(神物)인 문화재에 대한 무관심, 문화재를 지켜 내야 할 당국의 무신경을 콕콕 집어낸다. 창덕궁 석등과 비슷한 사례가 일본식 석등을 어깨에 인 청와대 정문(사진①)이란 게 혜문 스님의 주장이다. 그는 “석등은 조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자(死者)의 영혼을 위로하거나 부처님께 공양을 하기 위한 법구(法具)로 우리나라에선 사찰이나 능묘에서만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 신사에서나 있을 법한 석등은 남산에 있던 조선총독부의 그것(②)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고 분개한다. 청와대에는 지난 2월 하순 석등 철거에 관한 요청이 접수됐다고 한다. “어떻게 처리할지는 모르지만 돌아오는 광복절 전까지 청와대가 철거하지 않으면 행정소송을 내겠다.”고 밝혔다. 2004년 ‘문화재 제자리 찾기’ 운동에 뛰어든 혜문 스님은 평생 50가지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환수를 포함해 16가지는 이뤘다.”는 그는 남은 34가지 중 우선적으로 해결할 ‘4대 목표’를 소개했다. 조선 왕실에서 전래되던 제왕의 투구,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석탑, 고려시대의 사리와 사리구, 금강산 종이다. 제왕의 투구는 일본 도쿄의 국립박물관, 두 석탑은 도쿄의 오쿠라호텔 정원, 사리구 등은 미국 보스턴 미술관, 금강산 종은 중국 다롄에 있다. “남의 나라 왕실의 투구나 석탑, 사리를 그들이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 우리 것이 제자리를 잡도록 찾아와야 한다는, 듣다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지금까지 왜 아무런 자각이 없었을까 슬그머니 부끄러워진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게 없거나 엉뚱한 자리에 있는 것들이 유난하게 잘 보이는 신묘한 눈을 가졌냐고 물었더니 “이 일을 하다 보면 법력이 생겨 절로 보인다.”며 웃는다. 끊임없이 공부하고, 눈을 부릅뜨고, 발로 뛰어 확인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의 일본식 배열을 한 석등, 환구단의 일본풍 석등, 비틀어진 광화문 등 그가 지적하는 문화재 오류는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다. 그렇다 보니 우리 것을 찾아내고 갈고 닦아 제대로 후손에 전해 줘야 할 문화재청을 비롯한 전문가 집단의 권위적이고, 한편으론 태평한 태도에 화가 날 수밖에 없다고. “보통 사람이 알기 힘든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아닌 것을 그렇다고 하는 고집이 우리 문화재의 오류, 오해를 낳는다.”고 쓴소리도 잊지 않는다. “과연 가능할까 했던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의궤의 환국이 현실이 된 것처럼 다른 나라에 있어서는 안 될 우리의 문화 유산은 찾아와야 하고 찾아올 수 있습니다.”는 혜문 스님. 제자리를 찾는다는 환지본처(還至本處)의 뜻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글 황성기기자 marry04@seoul.co.kr 사진 이호정기자 hojeong@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1) 경북 예천 천향리 석송령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1) 경북 예천 천향리 석송령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사람과 똑같은 자격과 지위를 가지고 600년을 살아온 나무다. 명백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지위를 증명하는 호적번호를 가졌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된 토지까지 소유했다. 물론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부여된 납세의 의무로 재산세, 즉 토지세도 꼬박꼬박 물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토지에서 끊임없이 재산을 증식할 줄도 안다. 더 기특한 것은 재산의 용처다. 수굿하게 사람살이에 끼어들어 한푼 두푼 모은 재산을 마을 살림살이를 위해 흔쾌히 내놓는다. 이른바 장학금이다. 장학금을 주는 나무라니! ●홍수에 떠내려와 새생명… 마을에 보은 경북 예천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 동구 밖에 서 있는 석송령이 그런 나무다. 서 있다고 했지만 ‘누워 있다’고 해야할지 모른다.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의 폭이 위로 자란 키의 세 배 정도 되기에 하는 이야기다. “해마다 장학금을 줬어요. 마을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 학자금을 지원하는 거죠. 그런데 마을에 아이들이 없어서 올해는 장학금을 주지 못했어요.” 이동섭(59) 이장은 그동안 석송령이 꾸준히 마을 아이들을 키워 온 훌륭한 나무라며 장학금을 준 이야기부터 들려준다. 이야기 끝에는 아이들이 줄어드는 시골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있다. 토지를 소유하고 재산세를 납부하며 세상살이에 꼭 필요한 곳에 재산을 내놓는 나무는 예천 천향리 석송령 외에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자연유산이 아닐 수 없다. 석송령이 마을에 자리 잡은 건 600년 전이다. 당시 풍기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앞 개울로 온갖 잡동사니가 떠내려 왔다. 그 가운데 뿌리째 뽑힌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를 본 나그네가 나무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건져내 개울 옆에 심은 게 시작이라고 한다. 나무는 그때부터 석평마을의 수호목이 되어 마을로 들어오는 온갖 불길한 잡귀를 막았고, 마을 사람들은 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올렸다. 사람에 의해 얻은 생명을 사람의 생명을 지켜주는 데에 바친 격이다. “마을 당산제는 예천군에서도 유명해서 예천군수가 종종 참석해 축원문을 읽기도 하죠.” 해마다 정월 대보름 자정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정성껏 올리는 석송령 당산제는 오늘날까지도 어김없이 이어진다며 이 이장은 석송령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털어놓는다. ●주민 이수목 호적에 올려 재산 물려줘 나무가 사람과 똑같이 ‘석송령’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등기되고 재산을 갖게 된 것은 1928년의 일이다. 당시 이 마을에는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재산은 넉넉했으나 아들이 없어 근심이 많았다. 그가 어느날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서 ‘걱정하지 마라.’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게 바로 이 나무였다. 그는 문득 나무에 재산을 물려준다면 오랫동안 잘 지켜지리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고 곧바로 군청으로 달려갔다. 그는 마치 아기의 출생신고를 하듯 나무의 호적을 만들었다. 석평마을에서 생명을 얻은 나무여서 석씨 성을 붙이고, 영혼이 있는 소나무라는 뜻에서 영혼 영(靈)과 소나무 송(松)을 써서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적 등기를 마치고 이어서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인 토지 6611㎡(2000평)를 나무에 등기 이전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석송령이 가진 땅에는 지금 세 채의 살림집이 들어가서 살면서 이용료를 내지요. 석송령 통장에 그 이용료를 잘 갈무리합니다. 지금은 약 3000만원 정도 들어있어요. 그걸로 장학금도 주고 토지세도 냅니다.” ●올해 재산세 4만2530원 납부 석송령은 자신의 토지 이용료로 세 집으로부터 가구당 60㎏(100근)의 쌀을 받는다. 성실하게 재산을 늘려가면서 자신도 꼬박꼬박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인 재산세 납부 의무를 실천한다. 올해 석송령이 납부한 재산세는 4만 2530원이다. 국민 자격으로 재산권을 행사한다는 내력만으로도 세계적인 나무임에 틀림없지만 석송령은 생김새도 매우 아름다운 나무다. 나무는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개로 나뉘며 옆으로 펼쳐지는 반송(盤松) 종류다. ●나무그늘 1071㎡… 군민들이 보호 앞장 600년을 살아온 석송령은 키가 10m 정도 된다. 키로 보아서는 그리 크다 할 수 없으나 가지 펼침은 상상을 초월한다. 동서로 24m, 남북으로 30m나 된다. 넓게 펼친 나뭇가지로 그가 지어내는 그늘은 무려 1071㎡(약 324평)에 이른다.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지키지만 군 차원에서도 나무를 정성껏 관리한다. “병해충 방제 등 상시 관리를 합니다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마을분들이 워낙 잘 보호하고 있어서 나무의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예천군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어릴 때부터 이 나무를 지방의 자랑으로 여기거든요.” 예천군청 문화재 담당 최재수(43)씨는 석송령에 신경을 쓰긴 하지만 굳이 군청에서 신경 쓰지 않아도 예천군민 모두가 잘 지키는 나무라고 강조한다. 한 그루의 나무를 마치 사람처럼 여기며 긴 세월을 살아온 우리 조상들의 자연주의 정신, 혹은 더불어 살아가는 문화에 대한 자존심을 느끼게 하는 크고 아름다운 나무다. 글 사진 예천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북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804. 중앙고속국도의 풍기나들목으로 나가서 예천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지방도로 931호선을 이용해 12㎞ 남쪽으로 직진하면 진평교차로에 닿는다. 이 부근에서부터는 석송령을 알리는 교통 안내판이 자주 나온다. 진평교차로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인 ‘석송로’로 들어서서 2.7㎞ 더 가면 오른쪽으로 석송령 공원에 이른다. 석송령 곁으로 너른 주차장이 있어서 자동차를 이용해 찾아보기가 매우 편리하다. 석송령 옆으로 난 도로 맞은편으로 흐르는 개울이 600년 전 석송령이 뿌리째 뽑혀 떠내려오던 석관천이다.
  • [김문이 만난 사람] ‘합창지휘계의 대부’ 윤학원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김문이 만난 사람] ‘합창지휘계의 대부’ 윤학원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나는 환상 속에서 모두 정직하고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봅니다. 나는 떠다니는 구름처럼 항상 자유로운 영혼을 꿈꿉니다.’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는 이탈리아어로 ‘내 환상 속으로’란 뜻이다. 1986년 영화 ‘미션’의 주제곡으로 유명하며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했다. 합창곡으로 널리 불리기도 한다. 합창은 말 그대로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른다. 제각기 목소리가 다르지만 아름다운 화음을 내기에 가히 환상적이다. ‘천상의 하모니’라고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14일 오후 2시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는 보기 드문 합창 무대가 열렸다. 합창 지휘계의 대부로 알려진 윤학원(73)씨가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한 스승 최영섭씨를 무대로 초청, ‘이야기가 있는 커피 콘서트’를 가져 주목을 끌었던 것. 이 시대의 걸출한 음악인으로 자리 잡은 두 사람이 숨겨 둔 이야기와 깊이 있는 음악 얘기를 곁들여 가며 훈훈한 추억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특히 최씨가 작곡한 ‘그리운 금강산’과 ‘사랑의 날개’ ‘아리랑 환상곡’ 등을 합창할 때는 다들 기립 박수로 감동의 무대를 함께했다. 윤 씨는 현재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겸 지휘자를 맡고 있으면서 합창을 대중화하는 한편 합창의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 등에서 순회 연주 등을 통해 우리의 합창 예술의 수준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특히 그는 ‘남자의 자격-청춘합창단’의 멘토 역할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지난 9일 오후 서울 강서구 발산동에 위치한 연습실에서 올해로 ‘합창지휘 인생 50년’을 맞는 윤 감독과 만났다. 백발이었지만 청춘 같은 목소리가 ‘열정의 50년’을 단박에 느끼게 한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지금 막 커피를 직접 내리고 온 것이라 일반 커피와 맛이 좀 다를 것”이라며 커피를 한 잔 권했다. 먼저 스승 최씨와의 인연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그래요. 당시 아버지 말씀에 따라 인천공고에 진학했지만 음악에 대한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지요. 작곡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있던 중 그분이 우리 동네와 가까운 곳(인천)에 살고 있다는 걸 알고 무작정 찾아가 몇 달 동안 집중적으로 작곡 공부를 했습니다.” 이후 둘은 연주회 장소에서 서로 만나면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깊이 쌓아 갔다. 그럴 때마다 최씨는 훌륭한 지휘자가 된 윤 감독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다가 이번 무대에서 소중한 만남의 기회를 갖게 됐던 것이다. 윤 감독 또한 후배 제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매주 토요일이면 연습실에서 이들과 만남의 시간을 어김없이 갖는다. 애제자 우효원, 오병희, 이현철, 안효영씨 등이 주축이 된 젊은 작곡가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은 한국 합창 음악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 만들어진 곡으로 2010년 2~3월 미국합창지휘자협회(ACDA)의 초청을 받아 전국 순회 공연 가진 일은 지금도 음악계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순회 공연 이후 미국 대학 교수들과 각종 대학 합창단이 ‘합창클리닉’을 받겠다고 몰려왔습니다. 작년에는 컨커디어 대학 합창단이 70명의 단원을 이끌고 한국에서 합창 클리닉을 받고 돌아갔지요. 메나리, 아리랑 등 우리가 직접 작곡한 곡으로 말입니다. 컨커디어 대학 합창단은 영국 BBC 방송 및 각종 언론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이 있기까지에는 윤 감독의 열정과 실험 정신이 많은 역할을 했다. 다음은 윤 감독이 술회하는 3년 전 상황을 재구성한 것이다. ‘2009년 3월 7일 오클라호마시티 중심가에 있는 시빅센터 뮤직홀 3000여석을 세계 각국에서 온 합창 지휘자들이 가득 메웠다. 윤 감독은 인천시립합창단원들을 세 군대로 나누었다. 한 팀은 무대에, 또 한 팀은 객석 왼쪽, 그리고 다른 한 팀은 객석 오른쪽에 배치했다. 이윽고 객석의 불이 꺼졌다. 윤 감독은 서서히 손짓을 했다. 화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무대와 객석 양쪽에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룬 노래가 흘러나오자 관객들이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미국 사람들로서는 이런 형태의 연주가 처음 접하는 광경이었다. 마침내 세 군데서 나오던 소리가 한 군데로 모이고 특이한 한국적 화음과 울림을 이루었다. 객석에서 노래하던 단원들이 무대를 향해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올라가는 장면은 전율 그 자체였다.’ “첫 곡이 공간 음악으로 만든 ‘메나리’였는데 이 곡이 끝나자마자 3000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며 기립 박수를 치더군요. 두 번째 곡은 미국 사람들도 어려워하는 ‘다윗이 그 소리를 들었을 때’였습니다. 18성부나 되는 현대 화성의 어려운 곡을 거침없이 연주해 내자 다들 놀라워하더군요. ACDA 메코이 회장이 무대 뒤로 달려와 ‘미국 ACDA 컨벤션 50년 사상 첫 곡부터 기립 박수가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며 흥분하던 일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한 국의 합창 수준과 강렬한 인상을 미국 합창계에 남긴 계기가 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는 한국적인 것으로 승부하겠다는 열정의 결과였다. 윤 감독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적일 것’, ‘세계화할 수 있을 것’, ‘현대적일 것’ 등 세 가지를 늘 강조한다. 이 가운데 ‘팔소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팔소성은 8가지 웃음소리로 표현한 곡으로 ‘아리랑’, ‘메나리’와 함께 공간 음악의 으뜸으로 평가받는다. 여기에다 세계에서는 드물게 18성부까지 만들어 내는 창조성이 보태진다. “16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의 합창 음악은 외국에 비해 200년 정도 뒤져 있었습니다. 지금은 세계가 인정합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적인 것으로 공간 음악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지요. 합창을 하면서 8가지 웃음을 소리로 내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들 박수 칠 수밖에 없습니다.(웃음)” 청춘합창단의 김태원씨와는 어떻게 해서 인연을 맺었을까. “방송국에서 저에게 멘토를 맡아 달라고 해서 승낙했지요. 얼마 뒤 경희대에서 청춘합창단 멤버 오디션이 있던 날 김태원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그런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더군요. 지휘자는 단원들과 눈을 마주치며 지휘를 해야 하는데 걱정이 되더라구요. 뭐 불량스러운(?) 지휘자라고나 할까요.(웃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그의 겸손한 태도와 따뜻한 말투가 보기와는 달라 아주 친근감이 생겼습니다. 특히 참가자들의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합창 정신은 곧 열정과 배려이거든요.” 이 대목에 이르러 윤 감독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합창의 요체는 하모니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뛰어난 목소리를 가진 사람도 주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합창단원으로는 실격이라는 것이다. 자기 소리를 책임 있게 내면서도 다른 사람의 소리를 잘 듣고 융화하는 것이 합창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요즘 문제가 되는 학교폭력이 왜 생겨났는지 아십니까. 바로 예체능을 없애고 입시 위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학교 내에서의 합창반이나 반 대항 합창이 많았는데 거의 없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같이 화음을 내는 경험을 한다고 해 보십시오. 적어도 동료 아이들을 때리거나 왕따시키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윤 감독은 이런 현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일을 하나 벌이고 있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어린이합창단을 만들 것을 엄명했다. 윤 감독 자신도 최근 모 방송사와 이 같은 사업을 함께 하기로 계약을 맺었고, 이미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 수원 등에서 24개의 어린이합창단을 만들었다. 이에 대한 그의 의욕은 대단하다. “올해 최소 30개의 어린이합창단을 만들 예정이며 3~4년 내에 수백개의 합창단을 만들어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합창의 매력과 정신을 심어 줄 생각입니다. 제자들도 이 뜻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곡으로 합창단을 이끌어 나가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를 계기로 아마추어 합창 운동이 펼쳐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윤 감독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음악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손풍금을 든 선생님한테 노래를 잘 부른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이후 비록 음악의 천재는 아니었지만 끊임없는 노력과 특유의 열정으로 차근차근 감동을 연출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의중씨는 서울대 음대를 나와 창원시립합창단에서 지휘를 하고 있으며, 딸 혜경씨도 서울대 음대를 나와 외국인학교에서 합창 지휘를 하고 있다. 부인도 성악을 전공했다. 이런 분위기여서 그런지 손자 또한 지휘 공부를 하는 중이다. 식구끼리 만나면 항상 음악으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합창을 하면 삶의 만족도가 올라갑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가 얼른 가까워집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윤학원 예술감독은 황해도 옹진 출신이다. 인천공고와 연세대 작곡과를 졸업했다. 이후 인천문화원어린이합창단(1962~67), 극동방송소년소녀합창단(1965~68), 한국마드리갈합창단(1969~83), 선명회어린이합창단(1970~2003), 대우합창단(1983~88), 서울레이디스싱어즈(1989~2000) 등에서 지휘자를 역임했다. 또한 중앙대 음대교수(1979~2004), 세계합창경연대회 심사위원(1997~2010), 세계합창연합회 이사(1989~97), 한국합창총연합회 이사장(1988~92) 등을 지냈다. 현재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겸 지휘자, 한국합창지휘자아카데미 원장, 윤학원코랄 단장 겸 지휘자를 맡고 있다. 주요 수상은 월간음악상(1973), 세계합창경연대회 최우수상 및 지휘자상(1978), 한국음악평론가협회 음악상(1999), 옥조근정훈장(2004) 등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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