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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ime in Luther 루터도시 순례기

    Time in Luther 루터도시 순례기

    마틴 루터 Martin Luther 독일의 성직자, 교수. 르네상스와 모더니즘의 방아쇠를 당겼다. 학자들은 그를 두고 마지막 중세를 살았던 인물로 평가한다. 당시 그는 절대 권력을 가졌던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스타 종교인이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지 500년이 되는 2017년까지 루터도시 곳곳에서는 그의 정신을 기리는 축제를 만날 수 있다. 신에서 인간으로 관점의 변화를 가져온 루터의 자취를 좇는 루터도시 순례에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루터도시 순례기 Time in Luther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시공간을 찾아갔다. 중세와 근대의 경계를 고스란히 간직한 독일 소도시 여행에서 구도자의 삶을 엿본다. 내가 찾아간 독일은 다시 마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의 시대였다. 루터가 살았던, 죽었던, 설교했던, 공부했던, 결혼했던, 세례를 받았던 독일의 튀링겐주와 작센안할트주 일대는 아예 루터도시Lutherstadt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2017년이면 루터가 그 유명한 95개조 반박문을 성당에 못 박은 지 500년이 된다. 독일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한창이다. 500년이 흐른 지금도 루터가 부지런히 상기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여정의 끝에서 그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루터로의 시간여행은 시작됐다. 비텐베르크 루터하우스. 각 나라 언어로 제작된 박물관 안내서가 구비돼 있다 ●아이슬레벤Eisleben 루터의 시작과 끝이 만나는 도시 본격적으로 루터의 자취를 좇는 여행은 그가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시작됐다. 인구 2만5,000명이 사는 아이슬레벤은 우리나라 폐광촌과 분위기가 흡사했다. 구리 채굴로 번성했던 도시의 과거 영화는 시민 계급의 주택으로만 남아 있을 뿐, 지금은 한적하기만한 시골마을이다. 하지만 이 도시는 매년 찾아오는 50만명의 관광객으로 그리 외롭진 않다. 루터가 태어난,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 프로테스탄트의 성지라는 점이 그들의 발길을 이끈다. 걸어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작은 도시 곳곳에서 루터를 만날 수 있다. 루터는 티셔츠에 머그컵에 부지런히 등장하는 체 게바라처럼 인기 있는 혁명가 아이콘이다. 루터는 갤러리에 걸린 팝아트에도 등장하고 아이들이 갖고 노는 종이 인형의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루터 시대 먹었던 음식을 재연한 이색적인 레스토랑도 인기다. 도시 광장 한복판에 성서를 들고 있는 루터 동상은 빼놓을 수 없는 관광객의 사진 포인트.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았던 소수의 전유물이던 성서를 독일어로 최초 번역한 그의 업적을 기렸다. ‘소수자’로 태어난 루터는 대중의 언어인 독일어를 일부러 배우고 익힌 후에야 번역을 할 수 있었다고 하니 그 시대 계층간의 단절이 새삼 놀랍다. 그가 번역한 성서는 당시 1,000만권 정도 복사된 최고의 밀리언셀러였다. 지식을 독점하면서 우위를 누렸던 성직자들이 루터를 고운 눈으로 봤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루터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깊어 갔다. 화답이라도 하듯 루터는 현 루터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설교를 한다. 그가 마지막 설교를 했던 상트 안드레아스 키르헤 교회도 예전 그대로다. 부축을 받으며 절뚝절뚝 단상에 올랐을 노성직자가 아른거린다. 교회를 나와 세상에서 첫 번째 박물관으로 탄생한 루터의 생가로 향한다. 루터의 가족이 살았던 집이 복원돼 있다. 방명록에는 심심치 않게 한글이 눈에 띈다. 한국인 성지 순례자가 꼭 들르는 관광지다. 생가 이층에서 창문을 열면 루터가 세례를 받은 상트 페트리 바울리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가톨릭 세계관에서 세상에 태어난 생일은 중요치 않았다. 세례를 받은 후에야 그 삶에 비로소 의미가 있었다. 종교인으로서 시발점이자 종결점이 된 이 도시가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유이기도 했다. 교회에는 아기 루터의 머리를 적신 성수가 담겼던 세례 그릇이 복원돼 있다. 새겨진 문구는 마태복음 28장 19절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말씀을 실행한 루터는 그 당시 가장 유명한 독일인이 되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아이슬레벤 루터 생가에서 만난 루터 동상. 이곳은 세계 최초의 박물관으로 지정됐다 2 루터를 종이인형으로 형상화한 그림. 루터는 아이슬레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콘이다 3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한 교회에서 결혼식을 치른 신랑, 신부 ●비텐베르크Wittenberg 근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되다 루터의 본류를 좇으려면 비텐베르크가 빠질 수 없다. 이곳은 500여 년 전 지구상에서 가장 사상적으로 치열했던 땅이다. 중세 학문의 중심지였던 비텐베르크로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여들었고 수준 높은 학문이 교류됐다. 루터는 이곳에서 생애 가장 많은 시간, 가장 치열한 한때를 보냈다.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광장으로 향했다. 시청에 내걸린 거대한 루터 현수막 아래로 진짜 루터가 등장했다. 은발의 노신사가 루터와 같은 수도복을 입고 추종자들을 구름떼처럼 몰고 다닌다. 독일식 코스튬플레이인가 싶어 절로 웃음이 났는데 분위기가 사뭇 진지하다. 비텐베르크 시민들도 이제는 그냥 그를 루터라고 부른다는 말에 뒤집어졌다. 당시 루터는 중세의 아이돌이었다. 동경하고 추종하는 자도 많았으니 내가 루터라고 주장하는 가짜 루터들도 출몰할 법했다. 루터가 1511년부터 거주한 수도원은 지금까지 원형이 보존돼 ‘루터하우스’라는 이름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곳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다량의 루터 초상화다. 젊은 루터, 늙은 루터, 박사모를 쓴 루터, 수도복을 입은 루터 등등 화가들은 쉴 새 없이 화폭에 루터를 담았다. 그를 스타로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다름 아닌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를 조목조목 따지고 든 95개 조의 반박문을 1517년 성교회Castle Church에 못 박은 일이었다. 루터는 거침없었다. 교회의 처사에 부글부글 끓던 사람들에게는 통쾌한 대자보였던 것이다. 가장 강력한 권력 대한 반박문은 종교개혁에 소중한 첫걸음이 됐다. 루터하우스에서 성교회까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길은 도보로 20여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중세의 매듭이 묶이고 근대라는 시간이 스멀스멀 탄생한 것이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루터는 근대의 불을 인간에게 안긴 프로메테우스가 됐다. 그리고 그는 설교로 계속 그 불의 온기를 유지해 나갔다. 그가 최초로 또 2,000회 이상 독일어로 미사를 올렸던 성 마리아 교회의 첨탑이 광장 동쪽으로 삐죽이 솟아 있다. 거칠게 생각해 보면 루터는 역사책 안의 인물에 불과할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와는 상관도 인연도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요일엔 교회 대신 백화점으로 향하는 내게도 크리스마스는 가장 신나는 ‘빨간 날’일 뿐이다. 그럼에도 종교를 개혁한 마틴 루터에게 우리는 분명 빚을 지고 있다. 그가 우리의 관심사를 신에서부터 인간으로 되돌린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건 거창하다. 다만 구시대의 모순에 하나둘 반기를 들었던 행동들이 모여 역사가 흘러갔다는 것.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의 용기 덕분에 근대의 수혜를 입었다는 것. 그게 제일 크겠다. 이제 세상은 신의 계시가 아니라 과학적인 합리성에 의해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과학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새 질서를 꿈꾸는 이때 독일인은 부지런히 루터를 소환하고 있었다. 다시 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루터도시는 희망의 증거를 내준다. 4 비텐베르크 광장.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걸개가 걸려 있다 5 맥주는 빠질 수 없는 독일인의 문화.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라고 말했을 정도로 루터 역시 맥주를 즐겼다 6 비텐베르크는 루터로 꽉 찬 도시 같다 ●밤베르크Bamberg 천년의 낙차를 여행하다 루터가 살았던 중세를 오감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밤베르크만한 곳이 없다. 이름도 생경한 이 도시에 들어서려면 다소 긴 관문을 통과한다. 뮌헨 공항에 내려 세 시간여 기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이 도시에 다다르면 여독보다 더 강렬한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이동의 피로감은 뒷전이 된다. 밤베르크는 수로를 따라 발달한 도시다. 볕에 대기가 달궈지기 전 찬 공기와 만난 수면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니 그 운치는 몇 곱절로 늘어난다. 시간이 흐르자 밤베르크에는 볕이 가득하다. 조도가 높았다. 워낙 일조량이 적은지라 아이가 태어나면 항우울성 예방주사부터 맞힌다는 독일에서 운 좋은 시작이었다. 골목골목 독일 특유의 목조건물이 즐비하고 알록달록한 색색의 담장을 넝쿨이 따라간다. 약속이나 한 듯 건물 위에 얹은 빨간 지붕 옆으로 너른 포도밭이 펼쳐져 있어 건물과 자연의 보색대비가 도드라진다. 느릿한 걸음으로도 두 시간 남짓이면 도시를 크게 한 바퀴 휘감을 수 있다. 세계대전의 폭격을 피해 간 덕분에 옛 모습을 간직한 도시는 1993년 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인리히 2세 황제가 신성로마제국 중심지로 가꾼 밤베르크는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지어진 도시. 때문에 언덕을 오르내리는 수고쯤은 감내해야 한다. 황홀한 낙차를 즐기며 걸음걸음을 옮기다 보면 밤베르크가 살아있는 고도古都라는 데 공감이 간다. 레그니츠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업을 잇던 어부들의 집 주변으로 상가가 조성돼 있다. 지금도 그곳에는 카페가 들어서 있고 아기자기한 기념품점이 늘어섰다. 꽤나 낡아 보이는 집들도 아직 짱짱한 현역이다. 밤베르크 사람들은 고작 몇백년 된 건물이라고 받아친다. 우리 같았으면 당장 ‘진입금지’를 뜻하는 펜스부터 둘렀을 법한데 10세기에 조성된 이 도시는 현대적인 기능까지 돋보인다. 겹겹이 쌓인 지층처럼 천년의 시간 위에 현재의 삶이 덧입혀진 모습이 아름답다. 과거를 기억하는 건 비단 도시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선조의 문화를 고집스럽게 이어가는 이들이 밤베르크 여행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가장 유명한 곳은 슈렝케를라Schlenkerla로 불리는 양조장. 밤베르크에 있는 8개의 맥주 양조장 중에 가장 오래된 곳이다. 얼큰하게 취해서 비틀비틀 걷는 모양이라는 뜻의 의태어가 가게 이름이 됐다. 지금도 아버지의 아버지가 마시던 맥주를 마시려는 애주가들로 슈렝케를라 앞은 북적거린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맥주 맛은 한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훈증을 거친 몰트로 맥주를 빚기 때문에 ‘훈제맥주’로 불리는 맥주는 구운 치즈와 같은 향을 가졌다. 짙은 훈제맥주로 목을 축일 수 있는 건 밤베르크 여행의 색다른 묘미다. 6대째 가업을 이어가는 현 주인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쳤다. 훈제맥주는 ‘적어도 세 잔은 마셔야 진가를 알 수 있다’며 완벽한 궁합을 이루는 안주를 공수한다. 맥주는 인류가 천년을 이어온 고급문화의 정수라며 문명이 있는 곳에 술이 있다고 한다. 옛 맛을 기억한 손님이 다시 찾아와 줄 때 가장 행복한 것은 물론이다. 그의 말처럼 이곳의 맥주는 마시자마자 기억을 환기시키는 ‘리퀴드 타임머신’이라고 불러도 좋을 법했다. 덕분인지 밤베르크 성인의 맥주 섭취량은 독일 내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성인 한 명이 연중 288L의 맥주를 마신다고 하니까. 중세부터 지금까지 밤베르크 사람들은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다”라고 외쳤던 루터의 ‘명언’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밤베르크의 맥주로 미각을 깨웠다면 이제 영혼을 깨울 차례다. 밤베르크의 역사는 건축물로 상징된다. 구시가지 중심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는 노란빛 구시청사가 위태롭게 자리했다. 반면 도시 어디에서나 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 황제의 대성당Imperial Cathedral과 성미카엘교회St.Michael’s Church는 위풍당당하다. 이 건축물들의 대비가 정치와 종교의 투쟁을 겪어 온 유럽의 역사를 드러낸다고 하면 오산일까. 지금도 밤베르크 시민의 90%는 가톨릭을 믿고 있을 만큼 구교의 위세는 예부터 대단했다. 언제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시선이 맞닿는 곳에 대성당과 교회를 지었고 교회 내부 또한 화려하게 꾸몄다. 성경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이 천국임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금은보화로 교회를 치장하는 것이었다. 밤베르크 교회는 더 나아가 그 당시 가장 희귀했던 식물 578가지를 천장에 수놓았다. 중세 유럽에 처음 전파된 토마토도 보인다. 값지고 아름다운 모든 것은 교회에 있었다. 종교는 교회만큼 아름다운 사후세계를 사람들에게 보장했다. 하지만 교회의 절대적인 권력에 슬슬 금이 가는 현상이 벌어졌다. 시청사 부지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주교는 한뼘의 땅도 허락하지 않았던 탓에 시민들은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 한복판에 인공섬을 만들었다. 주교의 소유권이 강을 경계로 끝난다는 데 착안한 묘수였다. 조금씩 눈뜨기 시작한 시민의식이 한데 모아져 보란 듯이 인공섬 위에 시청을 세웠던 것이다. 그제야 강 위에 지어진 밤베르크의 구시청사를 아끼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함께 싸워서 얻어낸 성지와도 같았다. 그래서 지금껏 밤베르크의 랜드마크는 교회와 성당이 아니라 낡은 시청사다. 절대적이었던 명령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이라…. 중세와 근대의 경계에 있는 도시 어디에서든 루터의 흔적이 보였다. 껑충 시간을 뛰어넘은 여행자에게 밤베르크는 루터 여행을 매듭짓기에 완벽했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1 모던 아트와 결합된 황제의 대성당 2 실제로 운행되는 증기기차. 밤베르크와 쌍둥이 도시인 퀘들린부르크에서 탑승할 수 있다 3 7개의 언덕 위에 지어진 밤베르크. 천천히 골목골목을 걷기 좋다 4 슈렝케클라에서 훈제 맥주와 맛보는 전통음식 글·사진 양보라 기자 취재협조 독일관광청 www.germany.travel/kr 02-773-6430 ▶travie info 밤베르크 비어 투어 맥주가 없는 밤베르크는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 비어 투어는 가이드와 함께 도시 내 양조장을 돌며 밤베르크의 맥주를 마음껏 맛볼 수 있는 프로그램. 2013년 12월까지 운영된다. 밤베르크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출발한다. 비용 1인당 20유로 문의 0951-2976-200 홈페이지 www.bamberg.info ●Travel to Lutherstadt 루터 도시 기행 루터를 더 깊숙이 체험할 수 있는 루터의 도시들 아이제나흐Eisenach 루터가 학생 시절 머물렀던 아이제나흐에는 1483년부터 1501년까지 루터가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 루터의 집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하나. 멋진 담장이 인상적이다. 학창시절을 보여 주는 전시품을 통해 루터의 과거를 엿볼 수 있을 뿐더러 현대적인 전시관에는 멀티미디어 기술로 종교개혁을 재현해 놨다. 에어푸르트Erfurt 독일의 중부지방에 위치한 에어푸르트는 오늘날 튀링겐주의 주도다. 중세 도심 가운데 독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구시가가 인상적. 구불구불한 골목과 광장이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마리아 성당과 세베루스 교회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이 돋보인다. 중세시대 종 중에서 가장 크기가 큰 ‘글로리사’도 볼 수 있다. 매년 11월10일 수천명의 에어푸르트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대성당 광장에서 마틴 루터의 생일을 축하한다. 슈말칼덴Schmalkalden 섬세하게 복구된 중세 목조 건물들과 뾰족한 계단 모양 지붕이 있는 석조 건물들, 후기 고딕 양식의 성게오르그교회, 르네상스 시대의 빌헬름스부르크성이 도시의 역사를 전해 준다. 슈말칼덴의 군주였던 필립 폰 헤센은 최초의 개신교 선제후 중의 한 사람으로, 카를 5세에 맞서던 인물. 16세기 독일 및 유럽 역사에서 쟁점이 됐던 도시다. 토어가우Torgau 마틴 루터는 “토어가우의 건축물들은 그 아름다움에서 모든 고대 건축물들을 능가한다”고 평했다. 토어가우에는 르네상스와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옛 건물들이 500여 곳 정도 남아 있는데, 이 수많은 문화유산 건축물들은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며 세계적인 수준의 건축술을 보여 주고 있다.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의 무덤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루터 도시로 Rail & Fly 밤베르크에서 가장 가까운 국제공항은 뮌헨공항, 아이슬레벤과 비텐베르크에서는 베를린공항이다. 루프트한자가 뮌헨과 프랑크푸르트에 각각 주 6일, 주 7일 운항하고 있다. 베를린까지는 루프트한자 국내선을 이용할 수 있다. 루프트한자 국제선과 독일철도를 연계해 사용할 수 있는 Rail & Fly 티켓 서비스도 편리하다. 독일 내 모든 기차역에서 독일 국제 공항까지 이동하는 티켓이 편도 25유로, 왕복 50유로부터 제공된다. 루프트한자 한국어 사이트에서 예약할 수 있다. www.lufthansa.com 1 밤베르크에 있는 어부들의 집. 중세 목조 건축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2 성당에 현대적인 조각을 함께 설치한 독일인들의 부러운 감각 3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중세 독일 기행. 골목길마다 작은 탄성이 이어진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씨줄날줄] 형량 인플레/임태순 논설위원

    서울중앙지법 형사부 법관들이 최근 살인죄의 양형기준을 상향조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성범죄 형량이 살인죄보다 높아지는 ‘형량 인플레’(?) 현상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김길태·오원춘 등 각종 흉악 성범죄가 잇따르면서 성폭력범 형량은 강간의 경우 5년 이상 징역에서 무기 또는 10년 이상 징역으로, 유사강간은 3년 이상 징역에서 7년 이상으로 대폭 강화됐다. 이러다 보니 살인죄보다 성범죄 형량이 더 무거워지는 기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일례로 포클레인으로 공사 책임자를 살해한 50대 남자는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내연녀의 딸(16)을 성폭행한 50대 남자는 이보다 높은 징역 15년이 선고되기도 했다. 성범죄와 남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가는 살인죄 중 어떤 것을 더 무겁게 처벌해야 할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살인이 영육을 죽이는 죄악이지만, 성범죄도 여성들의 영혼을 말살하는 중대 범죄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지법 판사들은 설문조사를 통해 생명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입장에서 살인죄 양형기준을 높이기로 한 것 같다. 성범죄 피해자나 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성폭력범을 아무리 엄벌해도 부족함이 없겠지만 처벌 강화가 반드시 범죄 억제효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경찰청에 따르면 10만명당 성폭력 범죄 발생건수는 2007년 27.6건에서 2011년 39.2건으로 늘어나고 아동대상 성폭력 범죄도 같은 기간 6.4%에서 10.5%로 4.1% 포인트 증가해 처벌 강화 추세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범죄는 늘었다. 처벌 강화는 또 성범죄자들에게 자포자기의 심리를 심어줘 오히려 욕심을 채우고 살인 등 잔혹한 범죄로 이어지게 한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엔클로저 운동으로 토지에서 배제된 농민들이 도둑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 도둑질을 저질렀다고 사형에 처하는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을 어긴 것으로, 정의가 아니라고 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충격을 준 성범죄자들을 보면 초등학교 졸업, 가난 등 ‘사회적 한계인’들로 범죄 유혹에 취약한 계층들이다. 그러나 성범죄는 일시적 성 충동을 억제하는 예방교육, 재발방지 치료 프로그램 등 다양한 처방책이 내려져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격리하고 돌팔매질한 뒤 할 일을 다했다고 하는 것은 가장 무책임한 처사일 수도 있다. 성범죄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좀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박태준 정신 재무장… 최고 철강회사 확고히”

    “박태준 정신 재무장… 최고 철강회사 확고히”

    “사랑하는 직원 여러분, 우리의 추억이 포스코의 역사 속에, 조국의 현대사 속에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부심과 긍지로 간직합시다.” 13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1주기 추모식에서 박 명예회장이 눈을 감기 3개월 전의 모습과 음성이 영상을 통해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지만 억양은 그답게 또렷했다. 유가족의 부축을 받고 있는 부인 장옥자씨가 흰손수건을 꺼내 살며시 눈물을 닦았다. 추모식에는 정준양 포스코 회장과 전·현직 임직원, 강창희 국회의장 등 내외빈 50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정 회장은 추모사에서 “당신의 추억과 당신의 정신은 뒤에 남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면서 “박태준 정신, 창업 세대의 불굴 정신으로 재무장하고 혁신과 창의로써 오늘의 위기와 난관을 돌파해 세계 최고 철강회사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고 했다. 이어 고인을 존경하고 따랐다는 강무림 연세대 성악과 교수가 ‘내 영혼 바람 되어’와 ‘내 마음은 강물’을 추모곡으로 불러 숙연한 분위기를 이끌었다. 추모위원회는 이날 오후 강남구 포스코센터 1층 로비에서 고인의 생전 모습과 어록이 담긴 높이 4m의 전신상 부조를 제막했다. 이용덕 서울대 교수가 제작한 전신상은 양각과 음각을 뒤바꿔 독특한 입체감을 보이며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느낌을 준다. 부조 왼쪽에는 ‘조상의 피의 대가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투신해야 합니다.’ 등 고인의 어록이 새겨졌다. 이어 ‘청암(고인의 호) 사상’ 관련 학술 연구논문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박태준 사상, 미래를 열다’의 출판기념회도 열렸다. 이 책은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와 최진덕, 전상인, 김왕배, 백기복 등 5명이 공동 집필하고 이대환 작가가 엮었다. 한편 KBS는 이번 대선이 끝나면 박 명예회장의 뜨거웠던 생애를 담은 TV 드라마 ‘철강왕’을 제작하기로 했다. 지난여름 제작을 계획하는 단계에서 잠시 논란을 불렀으나, 고인의 업적은 국가적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정상 제작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因緣 죽음은 門일 뿐…시공을 뛰어넘어 500년간 반복된 운명

    因緣 죽음은 門일 뿐…시공을 뛰어넘어 500년간 반복된 운명

    영화팬을 설레게 한 1억 2000만 달러(약 1288억원)짜리 프로젝트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국작가 데이비드 미첼의 동명 원작 소설을 ‘매트릭스’ 시리즈를 만들어 낸 래리·앤디 워쇼스키 남매(최근 형 래리가 성전환 수술을 받아 라나로 개명. 이하 워쇼스키 남매)와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의 톰 티크베어 감독이 어떻게 요리할지 궁금했다. 톰 행크스·핼리 베리·짐 스터게스·짐 브로드벤트·벤 위쇼·휴 그랜트 등 눈이 휘둥그레질 법한 캐스팅에 배두나가 주연급인 손미-451역을 맡아 더 관심을 끌었다. 13일 서울 쉐라톤그랜드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라나 감독은 “아내가 집에서 김치를 담가 먹을 만큼 한국 음식을 좋아해 (서울이) 너무 친숙하다. 예전부터 놀러 가자고 했는데 미리 와 보면 영화 속 미래의 서울을 상상하는 데 제약이 있을 것 같아 참았다.”고 말했다. 이어 “데뷔작 ‘고양이를 부탁해’부터 배두나의 모든 작품을 봤다. 처음부터 손미는 한국 배우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고 두나를 떠올렸다. 복제인간이지만 인간적인 순수함을 간직한 동시에 혁명을 이끄는 강인한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기적같은 배우”라고 밝혔다. 동생인 앤디도 “배두나는 국보급 배우”라며 거들었다. 배두나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 감독들 이름을 보고 어떻게 내게 왔을까 신기했다. 한국어로 번역된 소설을 먼저 읽고 시나리오를 봤는데 왠지 잘할 수 있겠더라.”면서 “계약 조건에 캐스팅과 영화 내용에 대한 함구령이 있었다. 일찌감치 캐스팅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다.”며 웃었다. 배두나의 상대역을 연기한 스터게스는 “영국·스페인 촬영 때는 내가 이곳저곳을 안내했으니 서울에선 두나가 구경시켜 줄 걸로 믿는다. 특히 소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500년 동안 반복된 인연과 운명을 다룬 영화의 얼개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여섯 개의 시공간 속 인물과 사건은 보이지 않는 끈을 통해 연결돼 있다. 1849년 태평양을 항해하는 상선에 탄 변호사 어윙(스터게스)과 그의 목숨을 노리는 의사 헨리 구스(행크스)가 먼저 나온다. 1936년 영국에는 영화 제목이자 모티브로 쓰이는 ‘클라우드 아틀라스 6중주’를 쓴 천재 작곡가 프로비셔(위쇼)와 동성 연인 식스미스(제임스 다아시), 프로비셔의 재능을 탐하는 노회한 작곡가 비비안 에어스(브로드벤트)가 등장한다. 1973년 미국에서는 핵발전소를 둘러싼 음모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 버린 여기자 루리자 레이(핼리 베리)를 쫓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2012년 런던에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았다가 갱단에게 쫓기게 된 출판편집자 캐번디시(브로드벤트)가 있다. 2144년의 서울에서는 복제인간 손미(배두나)와 반군장교 장혜주(스터게스)가, 문명이 사라진 2321년의 빅아일랜드에서는 메로(베리)와 자크리(행크스)가 수백 년을 뛰어넘어 운명적으로 만난다. 원작은 여섯 개의 이야기를 병렬적 구성으로 보여 주다 마지막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서 멈춘 뒤 하나씩 갈등이 해소되는 형식을 취했다. 하지만 워쇼스키 남매와 티크베어는 원작을 분해·재조립했다. 여섯 개의 이야기를 쪼갠 뒤 등장인물들이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순간을 찾아내 그때마다 장면 전환의 고리로 활용했다. 여섯 개의 이야기가 모여 메타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모자이크식 구성인 셈. 앤디 감독은 “각색 과정이 게임을 하듯 재밌었다. 주요 인물의 관계를 전생과 후생에 걸쳐 분석했다. 시나리오와 촬영은 물론 편집까지 연결 고리를 찾는 작업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배우들은 하나의 역할만 맡는 것이 아니라 최대 여섯 개의 이야기(톰 행크스·휴고 위빙)에 다른 캐릭터로 등장시킨 대목도 영화를 관통하는 ‘윤회’(輪廻)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우리 인생은 우리 각자의 것이 아닙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타인과 연결돼 있죠. 과거와 현재도요. 우리의 모든 악행과 선행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는 거죠.” “죽음은 하나의 문일 뿐 그 뒤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등의 대사 또한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여섯 개의 이야기에 각각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 배우와 입체적인 캐릭터를 직조한 감독들의 능력은 아카데미 각색상을 줘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머릿속에 가상의 관계도를 만들어 영화를 보지 않는다면 뒤죽박죽 엉킬 가능성도 있다. 2시간 52분의 상영시간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다. 북미에서 지난 10월에 개봉, 2647만 달러(약 284억원)의 수익에 그쳤다. 이에 대해 앤디는 “오늘의 미국은 엉망(mess)이다. 그러니까 롬니(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그렇게 지지를 얻은 것이다. 미국 관객은 처음 10분 동안 이해하지 못하면 영화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시아는 다르다. 영화에 영혼과 철학을 담는다. 같은 뱀파이어 소재의 ‘트와일라잇’과 박찬욱의 ‘박쥐’가 다르지 않나.”라고 덧붙였다. 티크베어 또한 “할리우드 영화는 맥도날드 같다. 식당에 가기 전 메뉴를 알고,뭘 먹을지 결정한다. 반면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여섯 개의 요리가 나오는 심오한 코스 요리”라고 덧붙였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한국에서 내년 1월 10일 개봉한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서울광장] 대동단결, 그 저주의 메타포/진경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대동단결, 그 저주의 메타포/진경호 논설위원

    18대 대선에선 의미 있는 진동(振動)이 하나 있다. 야권 후보 단일화라는 매머드 이벤트에 가린 탓에 별 이목을 끌진 못했으나 동교동과 상도동이 굴곡진 한국 정치사의 또 한 능선을 넘은 것이다. 한화갑, 한광옥, 김경재, 안동선. 1960~1970년대 ‘타도 박정희’를 외치며 김대중을 좇아 싸웠고 국민의 정부에서 영욕을 맛봤던 그들이 박정희의 딸 곁에 섰다. 한 손으론 군부독재, 또 다른 손으론 동교동과 맞서 싸웠던 김영삼의 수족 김덕룡은 김대중을 승계했다는 노무현의 비서실장 문재인에게로 갔다. 이젠 내리막 어느 중턱에서 낙조를 바라보며 쉴 법도 하건만, 대체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그들은 그렇게 또 비탈에 섰다. 역사의 화해라고도 하고, 늦깎이 철새들의 때 잊은 노욕이라고도 한다. 조건 없는 화해이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들 숱한 정치놀음에 익숙해진 처지로 크게 마음 상할 일도 없다. 그들이 박근혜, 문재인에게 요구한 게 있는지, 약속을 받았다면 그게 뭔지, 다가올 시간이 말해줄 그 답을 지금 알 길도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동교동과 상도동의 크로스오버가 상징하는 화해와 연대의 메타포(은유·隱喩), 배척이다. 박정희와의 화해보다 노무현·친노에 대한 배격이고, 문재인과의 연대보다 박근혜·친박에 대한 거부다. 누가 좋아서가 아니라 누가 싫어서 그들은 힘겹게 걸음을 뗐다. 이번 대선에 담긴 부정과 배격의 진정한 메타포는 그러나 이들이 아니다. 대선정국 1년을 관통한 ‘안철수’다. 낡은 질서, 앙시앵레짐에 대한 거부, 기성 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배격이 ‘안철수 현상’을 낳았고, 집권세력에 대한 실권세력의 부정이 안철수를 키웠다. 그리고 갖은 수사로 띄웠지만 결국은 밟고 올라설 발판으로 상대를 삼으려 했을 뿐인 배타의 정치공학이 문재인-안철수 단일화를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강자와 연대하면 결국 이용만 당할 뿐’이라는 마키아벨리의 잠언을 몰랐던 듯하다. 문재인은 안철수를 몰랐고, 안철수는 문재인과 민주통합당은 물론 제 자신과 ‘안철수 현상’ 자체를 몰랐던 듯하다. 그리고 세상은, “영혼을 팔지 않았다.”고 했다가 불과 사흘 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자처하고는 문재인 지원 행보에 나서고도 “문재인을 지지한다.”는 말을 더는 하지 않는, 형용모순의 안철수를 아주 몰랐던 듯하다. 누구는 절대 안 된다는 부정과 배격의 메타포에 가려, 누가 왜 돼야 하는지를 우리는 까맣게 잊었다. 박근혜는 절대 안 되기에 비(非)박근혜는 문재인-안철수의 플레이오프를 마다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돼도 ‘노무현과 그들’은 결코 안 되기에 정파와 지역을 뛰어넘는 월경과 전향을 주저하지 않았다. 민주화 25년에 유례가 없이 보수와 진보가 제각각 타도를 외치며 대동단결하는 사이, 18대 대선은 이제 정치에 관심 없거나 안철수에 실망한 약간의 소수를 빼고는 제3의 완충지대가 실종된 채 단 하나의 대치전선만 남게 됐다. “아무개를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는 군소후보의 핏빛 발언에 섬뜩한 분노를 느끼는 자와 대리만족의 쾌감을 느끼는 자만 존재하는 극한 대치의 진영 대결만이 남았다. 아마도 새 대통령은 득표율 50%를 넘길 것이다. 1987년 개헌 이후 5명의 대통령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전인미답의 출발선이다. 축복이다. 그러나 또한 저주다. 그저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을 뿐인 게 아니라 똘똘 뭉쳐 결사적으로 거부한 절반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 ‘100% 대한민국’이나 ‘새정치 국민연대’ 같은 레토릭만으론 헤쳐갈 수 없는 도전이다. 노태우는 12%, 김영삼은 6%, 김대중은 27%, 그리고 노무현은 24%의 지지율(한국갤럽 조사)로 임기를 끝냈다. 현재 지지율 23%인 현 대통령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하다. 일주일 뒤 축복과 저주를 한데 거머쥐고 탄생할 새 대통령에게 미리 묻는다. 당신은 이 전례 없는 대동단결에 담긴 분열을 이겨낼 수 있는가. 5년 뒤 퇴임 때 더 큰 박수를 받을 자신이 있는가. 그 무거운 통합의 책무를 아는가. jade@seoul.co.kr
  • “피해자에 화해 강요 그것은 또 다른 고문”

    “피해자에 화해 강요 그것은 또 다른 고문”

    “감히 영화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아요. 영상만 봐도 다시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라…” 강용주(50) 광주 트라우마 센터장은 지난 3일 서울신문과 인터뷰에서 “최근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를 차마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강 센터장은 1985년 구미 유학생 간첩단사건 연루자로 몰려 남산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서 고문을 당했고 이 과정에서 거짓 자백을 해야 했다. 영화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민군 출신이기도 한 그는 대신 5·18 영화 ‘26년’의 광주 시사회를 주관해 당시 생존자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화제작 ‘남영동 1985’와 ‘26년’의 교집합에 서 있는 그는 지난달 광주 서구 치평동에 문을 연 트라우마 센터의 운영을 맡아 국가폭력에 상처 입은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 공권력 피해자를 위한 국내 첫 치유기관인 트라우마센터는 5·18 생존자와 가족 등에게 상담치료를 하는 곳이다. 보건복지부와 광주광역시가 7억 8000만원의 예산을 절반씩 지원해 운영 중이다. 개원 뒤 한 달동안 상담자 50여명을 만난 강 센터장은 “국가폭력을 경험한 이들의 영혼은 여전히 야만의 현장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광주항쟁 참가자들은 여전히 총을 든 군인에 쫓기던 기억에 고통스러워하고, 전기고문 피해자들은 고문받던 때가 떠올라 병원에서 심전도검사조차 받지 못한다고 한다. 강 원장은 “술에 취하거나 울분이 차 ‘내가 5·18 때 이렇게 싸웠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배설 행위 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내면의 고통과 아픔을 전문가와 상담하고 잘 짜여진 이야기로 풀어낼 때 치유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강 센터장은 “일부 정치권이나 사회가 ‘이젠 과거와 화해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라고 말했다. 역사적 진실규명 등도 없이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마치 깨진 손톱 위에 매니큐어 바르기를 바라는 것처럼 기만적 행위라고 꼬집었다. 피해자의 근본적 치유와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국가폭력 가해자의 사과와 이들에 대한 처벌 등이 우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 정부는 유엔의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했지만 정작 협약 조항인 피해자 재활의무는 다하지 않는다.”면서 “국가가 공권력 피해자에 대한 치유와 명예회복 등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朴 “민생 최우선”… 盧·MB정부 차별화

    朴 “민생 최우선”… 盧·MB정부 차별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2일 자신을 15년 동안 보좌해 온 이춘상(47) 보좌관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통곡을 터뜨릴 만큼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박 후보가 이 보좌관의 사망 사실을 보고받은 것은 강원도 춘천 풍물시장에서의 일정을 마친 뒤였다. 앞서 오전까지 강릉시청에서 검찰 개혁안 발표를 시작으로 강릉, 속초, 인제, 춘천 등지에서 예정됐던 유세를 차례로 소화했다. 박 후보는 이 보좌관과 교통사고 부상자들이 이송된 홍천 아산병원을 방문한 뒤 곧장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오후 7시 50분쯤 박 후보는 서울 여의도 성모병원에 마련된 이 보좌관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심경을 밝혔다. 유가족에게는 “죄송하고 드릴 말씀이 없다. 갑자기 떠나니 가슴이 답답하고 멍하다.”고 했다. 조문을 마친 박 후보는 기자들과 만나 “(이 보좌관은) 15년 전부터 사심 없이 헌신적으로 도와줬던 보좌관이었다.”면서 “어려울 때 함께 극복해 왔는데 한순간 불의의 사고로 이렇게 떠나게 되니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이어 떨리는 목소리로 “어린 중학생 아들이 있어 걱정되고 유가족들에게 참 죄송하다.”면서 “주변에서 가족들이 힘을 내실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박 후보는 조문을 마친 뒤 트위터에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게 돼 가슴이 너무 아프다.”면서 “그 깨끗하고 맑은 영혼이 하늘에서 축복을 누리기를 바라며 영전에 그동안 감사했던 마음을 전한다.”고 남기기도 했다. 박 후보의 유세도 잠정 중단됐다. 당초 3일 서울 시내에서 유세를 하는 방안이 검토됐지만 취소됐다. 선대위는 오후 긴급회의를 열어 향후 유세 일정을 논의했으나 확정 짓지 못했다. 앞으로의 유세 일정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박 후보는 4일 예정된 TV토론에는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박 후보는 강원 지역 유세에서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를 강조했다. 지난주 선거운동 초반에 초점을 맞춘 ‘참여정부 실정론’에 이은 과거 정부와의 선 긋기 전략이다. 야권이 이른바 ‘이명박근혜’(이명박+박근혜)라는 공세 속에 공동 책임론을 제기하는 데 대한 맞대응으로 해석된다. 박 후보는 “노무현 정부든 이명박 정부든 약속한 일들만 다 실천하고 국민의 삶을 최고의 가치로 뒀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오직 국민만 바라보고 민생 문제 해결을 국정의 최우선순위에 두고 제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민생 정부론’을 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희망을 전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연세대 교수

    [김문이 만난사람] 희망을 전도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연세대 교수

    영화와 뮤지컬로 유명한 ‘지붕위의 바이올린’이 있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불기 시작한 우크라이나 작은 지방의 유대인 부락. 우유 가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테비에 부부에겐 5명의 딸이 있다. 그 중 큰딸이 부잣집 홀아비한테 시집가느냐, 아니면 가난한 재단사한테 시집가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집안과 동네가 떠들썩해지고 아버지의 시름은 깊어만 간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키 작은 바이올리니스트다. 지붕 위에 서서 ‘노을지는 풍경’을 배경으로 읊어대는 바이올린 연주는 많은 감동을 전해준다. 특히 라스트 신에서 흘러 나왔던 이 영화의 주제곡 ‘선라이즈 선셋’(Sunrise, Sunset)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명곡 중 하나였다. 지붕 위에서, 그리고 때로는 지붕 아래에서도 연주되는 바이올린은 생존에 대한 은유이며 미래에 대한 상징이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들 앞에는 희망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시사했다. ●13년째 희망콘서트… “내겐 보람이자 도전”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58) 연세대 교수. 그에게는 여러 수식어가 있지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은 ‘희망 콘서트’가 아닐까 싶다. 매년 이맘때면 항상 자선 음악회를 열어 불우한 이웃이나 환자들에게 희망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 곧 음악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13년째 희망 콘서트와 6년째 실내악 자선 음악회를 열고 있다.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대구 광주 등 지역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단어가 있다. 국내 남성 클래식 연주자도 섹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클래식계의 영원한 미소년으로 불리며 여성팬들 또한 많다. 소년같은 헤어스타일과 옷차림, 해맑은 미소가 그렇다. 알고 보니 그는 8살때 첫 독주회를 가졌다. 벌써 50년 연주인생이다. 하여 지난 26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강 교수를 만났다. 하하하, 털털한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58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보였다. 다만 그의 목 왼쪽편에 있는 검은 자국이 바이올린으로 살아온 50년 세월을 상징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바이올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이미 오래전부터 세계적인 연주자 반열에 올라 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발행된 저명한 음악인 사전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마주 앉자 먼저 희망 콘서트 얘기부터 나왔다. “처음에는 10년 정도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13년이 됐습니다. 간염 퇴치 콘서트에서 3년 전부터는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들을 위한 콘서트로 집중하고 있지요. 예상보다는 반응이 좋습니다. 처음에는 한국 사회에서 클래식 연주로 콘서트를 장기간 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오게 됐네요.” 그는 지난달 기아대책을 위한 희망 콘서트를 가졌고 27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자선음악회를 열었다. 30일에도 포항에서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다. 이렇듯 그는 매년 ‘힐링음악회’를 통해 불우 이웃을 돕는다. 맨 처음, 그러니까 2000년 대한간학회로부터 B형 간염퇴치 명예대사에 위촉된 후 간염환자들을 위한 희망콘서트를 이끌어오다가 3년 전부터 기아대책 음악회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이 이 무대에 섰고 국내 초연곡들도 적지 않다. 그러는 한편 ‘서울 스프링 실내악’ 감독을 맡아 자선 음악회를 열고 있는 것. “음악의 힘은 큽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위기들이 있잖아요. 그런 위기에 도달했을 때 음악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요. 영혼을 위로한다는 것은 무척 소중한 일입니다. 대중가요는 반짝 다가왔다가 사라지지만 클래식은 아주 오랫동안 함께 갈 수 있지요. 대중적인 곡도 많이 연주했지만 알려지지 않은 곡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시벨리우스의 소품을 연주했고, 오보에나 클라리넷 협주곡과 기타 협연 등도 했지요.” 10주년을 기념해서는 첼리스트 조영창과 프랑스 출신의 피아니스트 파스칼 드봐이용이 함께해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연주자로 살다보면 자기 음악 세계에 빠져 이런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은데 환우들과 함께 하면서 얻은 소중한 무대가 됐다고 표현한다. 이 희망 콘서트는 대한간학회 주최, 글로벌 제약회사 글락소 스미스클라인 후원으로 이루어진다. 세계 3대 바이올린 콩쿠르를 석권한 뒤 영국과 벨기에 왕실 초청 연주를 비롯해 세계의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연주무대에 서고 있는 그에게 ‘희망 콘서트’는 또다른 보람이자 도전이다. 그는 국내뿐만 아니라 매년 여름 알프스산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프랑스의 대표적 음악축제인 ‘뮤직알프’를 키워낸 음악감독이기도 하다. “그 음악회도 벌써 13년 됐네요. 해발 1800m 알프산 중턱에서 한달 넘게 연주회를 갖습니다. 세계 각국의 학생과 선생님들이 참석하는데 실내악 연주를 주로 합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즐기는 일종의 자원봉사 형식이지요. 그래서 항상 여름방학때면 서울을 떠나 프랑스에서 지냅니다.” 다시 말해 그가 국내외적으로 주도하는 음악회는 ‘희망 콘서트’ ‘서울 스프링 실내악 무대’ ‘뮤직알프’ 등 세 가지인 셈이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다. 뭐든지 음악적 해석으로 접근하고 도전한다. 하지만 외로움 또한 적지 않다. 얼핏 보기에 솔리스트가 화려해보일 법도 하지만 그 삶은 쉽지 않다며 웃는다. 외국에서 연주를 할 때 호텔에 머물기 싫어 프랑스에 있는 집으로 가는 경우도 종종 있단다. 파리에는 부인과 딸이, 서울에는 아들이 산다. 그가 서울에서 학생들과 같이 있을 때는 항상 실내악을 강조한다. 바이올린 레슨만 받으면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실내악을 하면서 큰 그림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음악을 들으며 한 호흡으로 연주하는 걸 익히다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한국 학생들은 레슨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고 또 시험과 콩쿠르에 집착하다 보니 넓게 보는 시야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가 되려면 자기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야 하며 좋은 연주자란 타고난 개성에 더해 깊이 있게 음악 속으로 파고들 수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화제를 어린 시절로 돌렸다. 어떻게 해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됐을까. “8살때였지요. 아버지가 대전에서 근무하셨을 때 첫 독주회가 열렸습니다. 누나가 피아노 반주를 했고 제가 바이올린 연주를 했지요. 저도 원래는 피아노를 했는데 피아노보다는 바이올린이 낫다는 가족의 권유도 있고 해서 그 길로 나갔는데 벌써 바이올린 50년 인생이 됐네요(웃음)” ●“내 음악적 끼는 기타 잘치시던 아버지께 물려받아” 신동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은 그렇게 일찍부터 재능을 발휘했다. 12살 되던 해에는 성인들과 함께 경쟁하는 동아콩쿠르에서 1등을 하자 미국행을 결심했다. 1967년 음악 영재들만 다니는 줄리어드음대 예비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바이올린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커티스 음악원에서 스승 갈라미안을 만났다. 1971년 17세 나이로 미국 음악계가 가장 주목하는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재단 콩쿠르와 워싱턴의 메리워더 포스트 콩쿠르에서 연달아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이어 카네기센터 등에서 연주회를 가지면서 세계적 음악가로 기반을 다졌다. 특히 세계 3대 콩쿠르인 몬트리올 콩쿠르, 런던 칼 플레시 콩쿠르, 브뤼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차례로 석권하면서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무대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이때부터 세계의 저명한 오케스트라들과 함께 연주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 클리블랜드,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등을 비롯 유럽의 런던 필하모닉, 뮌헨 필하모닉, 슈투트가르트 필하모닉 등과 협연하면서 섬세하고 이지적인 연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1981년에는 롱 티보 국제 콩쿠르 최연소 심사위원을 위촉받기도 했다. 그의 음악적 끼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하는 질문에 “아버지가 기타를 잘 쳤다.”고 대답한다. 음악인생을 살면서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외로움이 많았다고 하면서 “예술은 평생 씨름하는 것과 마친가지”라고 말한다. 좋아하는 곡에 대해서는 “모차르트, 베토벤, 시벨리우스, 쇼스타코비치, 브람스, 헨델, 프랑스와 스페인 음악 등이다.”고 대답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는 1975년 뮌헨 무대와 1983년 16년만에 귀국했을 당시의 연주였다고 술회했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강동석 교수는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줄이어드음대와 커티스 음악원을 나왔다. 8살때 첫 독주회를 가지면서 바이올리니스트의 길을 걸었다. 12살때 동아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이듬해 줄리어드음대 예비학교에 진학했다. 1971년 17세의 나이로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재단 콩쿠르와 워싱턴의 메리워더 포스트 콩쿠르에서 연이어 우승했다. 이후 몬트리올 콩쿠르, 런던 칼 플레시 콩쿠르, 브뤼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등 세계 3대 콩쿠르에서 차례로 우승했다. 1981년에는 롱 티보 국제 콩쿠르 최연소 심사위원이 됐다. 1983년 16년만에 귀국한 뒤 한국과 유럽무대를 오가면 연주회를 가졌다. 영국과 벨기에 왕실, 미국 백악관 초청 연주회를 비롯, 세계의 유명 오케스트라와 많은 협연을 가졌다. 2000년 간염퇴치 명예대사로 위촉된 뒤 매년 ‘희망 콘서트’를 열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 교수와 서울 스프링 실내악 감독을 맡고 있다. 주요 수상으로는 대원음악대상(2009), 프랑스문화예술공로훈장(2012) 등이 있다.
  • “文, 실패한 정권의 핵심…서민정권이 서민 외면”

    “文, 실패한 정권의 핵심…서민정권이 서민 외면”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27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이번 선거를 ‘준비된 미래’와 ‘실패한 과거’의 대결 구도로 규정하고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향해 공격 수위를 더욱 높였다. 박 후보는 대전을 시작으로 세종시, 충남 공주·논산·부여·보령, 전북 군산·익산·전주 등 모두 9곳에서 유세를 펼치며 중원을 집중 공략했다. 특히 충청은 역대 대선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해 온 만큼 야당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며 비전을 부각시켰다. 박 후보는 대전역 광장과 공주 구터미널에서 가진 유세에서 “지금 대한민국은 준비된 미래로 가느냐, 아니면 실패한 과거로 되돌아가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며 문 후보를 두고 “스스로 폐족이라고 불렀던 실패한 정권의 최고 핵심 실세였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정권을 잡자마자 이념투쟁으로 날밤을 지새웠고, 입으로는 서민정권을 주장했지만 지난 정권에서 서민을 위했던 정책 하나라도 기억나는 게 있느냐.”며 문 후보를 몰아세웠다. 박 후보는 연설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참여정부의 실정을 조목조목 따졌다. “대학등록금, 부동산 가격이 역대 최고로 폭등했고 양극화가 심해졌고 비정규직이 양산됐다.”고 지적했다. “실패한 정권이 부활해선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하는 동시에 새누리당이 이 문제를 모두 해결하겠다고 주장했다. 박 후보는 “국민을 네 편 내 편 가르지 않고 지역과 세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도 가르지 않을 것이고 국민대통합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모든 힘을 함께 모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전북 유세에서는 국민대통합을 내세워 인사대탕평을 약속했다. 민주당이 박 후보와 새누리당을 공격하면서 사용한 ‘낡은 정치’, ‘과거세력’의 단어를 박 후보도 그대로 사용하며 역공했다. 지난 정권에서 추진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제주 해군기지 등을 민주당이 백지화하려는 점을 언급하며 “말을 뒤집고 약속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있다.”면서 “이것이야말로 낡은 정치”라고 비판했다. 박 후보는 전주 일정을 마친 뒤 다시 세종시로 이동해 숙박했다. “박 후보의 정치신념인 원칙과 신뢰, 약속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지역이어서 박 후보가 애착을 보인 것”이라고 당 관계자는 전했다. 충청지역 연설에서도 “세종시를 정치생명을 걸고 지켰다. 약속을 지키는 새 정치의 미래를 열겠다.”며 표심을 자극했다. 28일에도 충남 일대를 방문한다. 새누리당 유세현장에서는 문 후보에 대한 공세가 멈추지 않았다.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는 문 후보를 두고 “순진한 안철수 전 무소속 후보를 슬슬 구슬리다 결국 정치적으로 자살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신뢰받는 국가지도자라고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어 “괴테의 작품 속 파우스트 박사가 청춘을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듯 영혼을 팔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면서 안 전 후보에게 민주당 지원에 나서지 말 것을 촉구했다. 이인제 공동선대위원장도 “야비한 야당 후보에게 미래를 맡길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전·공주·전주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픽션·논픽션의 벽 허물어뜨려 김근태의 순정한 영혼 그려내”

    “픽션·논픽션의 벽 허물어뜨려 김근태의 순정한 영혼 그려내”

    영화 ‘남영동 1985’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소설가 방현석(오른쪽·51·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의 신간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이야기공작소 펴냄)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지난해 12월 13일 고문 후유증과 합병증으로 작고한 김근태(1947~2011)를 소재로 한 영화와 소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한 쌍이다. 소설은 김근태의 성장기에서 출발해 1985년 서울 남영동에 끌려가 고문이 시작되면서 끝나고, 영화는 남영동 고문부터 전개된다. ●백범 이후 품격·긍지 지킨 드문 사람 방현석은 26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 음식점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김근태의 부인 인재근(왼쪽·59) 민주통합당 국회의원과 함께 참석해 ‘소설 김근태’에 대해 설명했다. 방현석은 “김구 선생 이후로, 품격과 긍지를 지킨 아주 드문 사람이었다.”면서 “순정한 한 사람의 영혼을 얼마나 그려낼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그의 인생을 기꺼이 정리했다.”고 말했다. 자서전 형식의 이 소설은 김근태가 지난해 딸의 결혼식을 앞두고 악화되고 있는 건강을 추스르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을 때 기획됐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방현석은 198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해 2003년 황순원 문학상을 받은 작가로 ‘랍스터를 먹는 시간’ 이후 9년 만에 이 소설을 내놓았다. 그는 소설가로서 자신의 오랜 침묵이 “특정 유형과 스타일의 작품들이 범람하고 있는 상황에서 독자들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면서 “픽션과 논픽션의 벽을 허물어뜨려 역사적 진실을 최대로 드러내기 위해 허구의 힘을 극대화했다.”고 말했다. 이번 소설도 역시 98%의 사실과 2%의 허구로 구성됐지만, 2%의 허구가 98% 논픽션의 힘을 미학적으로 완성했다는 것이다. 김근태는 일관성을 소중히 생각했다. 관련된 일화도 소개했다. 1990년 중반 야당에 입당했을 때다. 민주노총이 주선한 방현석의 출판기념회에 김근태가 참석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때 한 여성 노동자가 벌떡 일어나 타락한 운동권이라는 식으로 그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다. 김근태는 좀 더 앉아 있다가 자리를 떴다. 그 여성 노동자가 지난해 부산에서 크레인 농성을 벌였다. 김근태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는데 그해 8월 30일 부인 인재근 의원과 함께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가 격려를 했다. ●젊은 세대들 대선 전에 읽어봤으면 방현석은 “이 소설을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젊은 세대들이 선거 전에 읽어봤으면 좋겠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어떤 인물의 피와 희생을 통해 왔는지 돌아봤으면 좋겠다. 대통령 선거는 게임이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역사적 짐을 너무 많이 지웠다면, 이제는 각자의 몫만큼 나눠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서울광장] 안철수 새 정치 실험의 불확실한 미래/김종면 수석논설위원

    [서울광장] 안철수 새 정치 실험의 불확실한 미래/김종면 수석논설위원

    “마음으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니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한 대목이 문득 떠오른다. 어른들은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구렁이를 모자로 보았지만 어린 왕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티없이 맑은 눈을 지녔기 때문이다. 정치인 안철수는 환생한 어린 왕자인가. 아니 어린 왕자보다도 더 영롱한 눈을 지닌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가. 어제 대선 후보직을 전격 사퇴한 무소속 안철수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철 없음인가 철 있음인가. 오만인가 순수인가. 이기인가 이타인가. 바둑을 두다가 돌을 던지는 것도, 권투를 하다가 타월을 던지는 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패배를 인정할 만한 적시에 네 편 내 편을 떠나 최대한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무대를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의 대선 후보직 사퇴는 아무리 선의로 해석해도 지나치게 자의적인 것으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대마의 사활보다 더 어려운 것이 ‘반집 승부’라는 것을 안다. 안철수는 분명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선 후보와 야권 단일 후보가 되기 위해 마지막 초읽기에 몰리며 피를 말리는 반집 끝내기 승부를 펼쳤다. 그런 형세라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 집수를 헤아리는 계가바둑을 두는 것이 정석이다. 돌을 던져서는 안 될 때 던진다면 무책임하다는 소리밖에 들을 게 없다. 안철수의 정치 행태가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안철수는 앞으로 정치인으로 살겠다고 분명히 선언했다. 그렇다면 정치인으로서의 책임윤리에 따라 행동해야 마땅하다. 막스 베버도 지적했듯 책임윤리는 행위의 동기와 의도를 중시하는 신념윤리와는 다르다. 행위의 결과와 그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는 게 바로 책임윤리의 특성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안철수는 정치 세계에 들어오자마자 ‘무책임 정치인’의 멍에를 뒤집어쓰게 된 셈이니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안철수는 정치 현실 앞에 보다 겸손하고 숙연해야 한다. 한 편의 각본 없는 감동 드라마를 기대했던 이들에게 결코 아름답지 못한 문·안 후보 단일화 과정은 트라우마에 가까운 상처를 안겨줬다. 정치판이란 역시 상식과 합리가 발 붙이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불모의 땅임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새 정치를 갈망한 이들은 비록 만만치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원만히 합의하고 아름다운 단일화의 역사를 써 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 단일화 허무주의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정치적 타산을 앞세워 벼랑 끝 담력 싸움을 벌이다 이처럼 이상한 억지춘향식 단일화에 이르렀으니 국민을 실망시켰다는 말을 들어도 항변할 말이 궁할 듯하다. 새 정치의 희망으로 시대가 불러낸 안철수는 어쩌면 이번의 정치 선택으로 시대의 엄중한 퇴출명령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대선은 오늘로 꼭 25일 남았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 안철수가 단일 후보는 문재인임을 천명한 이상 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밖에 없다. 동주공제(同舟共濟)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호흡을 맞춰야 한다. 그것만이 단일화 허무극에 맥 빠진 국민의 분노를 숙지게 하는 일이다. ‘단일화 정치’는 이미 우리 정치권의 ‘관행 아닌 관행’이 됐다. 지금이야말로 그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볼 때다. 단일화는 정상적인 정치행위는 아닐지 모르지만 일거에 내쳐도 좋을 ‘나쁜 정치’라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착한 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유용한 플랫폼은 될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착한 단일화’마저 정치공학의 잣대로 재단해 눈을 흘기는 것은 온당치 않다. 자칫 ‘녹색 눈의 괴물’로 비치기 십상이다. 단일화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단일화 정치는 진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단일화는 더 이상 목적 달성을 위한 임기응변의 ‘권도(權道) 정치’ 수단이 돼선 안 된다. 단일화 정치의 함정을 잊지 말자. 단일화 선진화 방안을 두 후보가 그토록 강조하는 정치 쇄신의 제1과제로 삼아야 할 상황이다. 아이러니 아닌가. jmkim@seoul.co.kr
  • 이별통보에 불륜 상대 살해 농약 먹인 후 동반자살 위장

    내연남을 개 목줄로 졸라 살해한 뒤 동반 자살로 꾸민 40대 여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20일 헤어지자는 애인을 목졸라 살해한 혐의로 박모(42·여)씨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박씨는 지난달 30일 오후 8시 45분쯤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있는 한 모텔에서 술에 취해 잠든 내연남 김모(49)씨의 양손과 다리를 청테이프로 묶은 뒤 개 목줄로 졸라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는 동반 자살을 시도한 것처럼 김씨 입에 농약(제초제)을 부었고 자신도 머금었다가 뱉은 뒤 모텔 카운터에 “119를 불러 달라.”고 전화한 것으로 드러났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유서도 준비했다. 박씨는 17년 전 같은 직장에 다니던 유부남 김씨와 연인관계로 발전했고 최근까지 사귀었다. 지난 8월 김씨가 실직한 뒤에는 아예 함께 살며 대출까지 받아 태국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그러나 김씨가 집에 전화를 하거나 딸과 통화하는 걸 보고 심한 질투심을 느껴 갈등이 커졌다. 결국 김씨가 가정으로 돌아가려 하자 범행 결심을 굳힌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전날 박씨가 농약, 개 목줄, 청테이프 등 범행 도구를 준비하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찍혔다. 경찰 조사에서 박씨는 “무속인의 영혼이 김씨 몸에 들어가 ‘그 사람을 죽이고 너도 약을 먹고 와라’고 애원해 죽였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박씨는 정신질환 전력이 없으며 최근까지 간호조무사로 근무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남보라 “성폭행 피해 소녀의 처참함 촬영 끝나도 눈물이 안 멈춰”

    남보라 “성폭행 피해 소녀의 처참함 촬영 끝나도 눈물이 안 멈춰”

    쏟아지는 성폭력 대책을 비웃기라도 하듯 성폭력 범죄는 날로 흉포화하고 있다. 성범죄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성폭력 가해자가 미성년자인 경우 대부분 무죄 또는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법적 현실을 고발한 영화가 나왔다. 22일 개봉을 앞둔 ‘돈 크라이 마미’다. 지난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장애 아동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던 ‘도가니’와 비견되면서 주목받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은아 역을 맡은 남보라(23)를 지난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첼리스트를 꿈꾸는 밝고 명랑한 여고생 은아는 이혼한 엄마 유림(유선)을 먼저 걱정하는 속 깊고 든든한 딸이다. 하지만 새 출발을 하려는 모녀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진다. 전학 온 학교에 적응하던 은아는 1년 유급한 같은 반 오빠 조한(동호)에게 고백하러 갔다가 조한과 어울려 다니던 동급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이후 해맑던 은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엄마 유림은 딸이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도 가해자들에 대한 법적 처벌이 미약한 것을 보고 직접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남보라는 왜 이처럼 쉽지 않은 역할에 도전했을까. “제 이미지에 대한 고민은 거의 하지 않았고 오히려 저를 선택해 주기를 바랐어요. 지금은 저에게 투자하는 단계이니까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은아의 행복했던 시절부터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고 결국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분노하는 장면까지 여러 모습이 담겨 있었고, 은아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남보라는 개봉 전부터 성폭행 장면에만 관심을 갖는 일각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으냐는 질문에 “워낙 민감한 소재이다 보니까 그런 면도 있지만, 이 영화는 청소년 성폭력이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고 그 가족을 처참하게 붕괴시키는 과정을 보여 준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폭행 장면도 노골적으로 보여 주기보다 상상에 맡기는 부분이 더 많다.”고 설명했다. 이 영화는 선정성·폭력성 등의 이유로 19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지만, 수위를 재조정한 뒤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확정해 청소년들도 관람할 수 있게 됐다. 대신 남보라는 은아의 감정선을 연기하기가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대본을 읽을 때 은아가 불쌍했고 모녀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어요. 가해자 학생들에 대한 분노도 치밀었구요. 한 사람의 소중한 인생이 무너지고 평생 안고 가야 할 상처가 너무 깊고 무거워 정말 속상했어요. 촬영 때도 계속 눈물이 나고 끝나고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제가 힘들수록 은아와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죠.” 은아가 무너져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잘 표현하고 싶었다는 남보라는 일상이 워낙 힘들어 오히려 현장에서 연기할 때 후련했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부산영화제 때 관객과의 대화에서 눈물을 쏟은 것도 촬영할 때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아를 연기하는 것은 제 감정을 소모하는 외로운 싸움이었어요. 그동안 홀로 받아들이고 꾹꾹 참아 온 감정이 울컥했던 것 같아요. 은아의 처참한 모습을 연기하면서 제 자신이 어디까지 힘들고 무너질 수 있는지 실험했던 것 같아요.” 남보라는 성폭력 가해자가 미성년자일 경우 처벌이 미약한 데 대해서도 “미성년자라고 처벌이 가벼워지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그 학생들이 미성숙한 단계에서 사건을 저지른 것은 어느 정도 고려해야겠지만, 저지른 범죄에 합당한 처벌이 가해져야 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본질적인 개선이 필요하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밀양 성폭행 사건 이후 피해자 학생이 서울로 전학을 갔지만, 여러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아 결국 행방불명됐다는 기사를 읽고 안타까웠습니다.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사회적 시각도 아쉽구요. 성폭력은 특성상 정확한 피해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피해자의 육체뿐 아니라 마음에도 큰 상처를 주는 만큼 절대로 가볍게 다뤄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쉽지 않은 연기 이후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감정이 연기 인생에 큰 자산이 된 것 같다고 했다. 13남매의 둘째로 장녀인 남보라는 나이에 비해 어른스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는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키우다 보니 육아에서는 달인 수준”이라면서 웃었다. 남보라는 2005년 당시 11남매의 일상을 다룬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당시 촬영 날 집에 잘 안 들어갈 정도로 연예인이 될 생각이 없었어요. 원래 성격이 조용한 편이거든요.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데뷔했지만 대학 수시 모집에서 7개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지망했다가 다 떨어져 대학 진학을 포기할 뻔한 적도 있었죠.” 결국 수능을 다시 치른 뒤 동덕여대 방송연예학과에 입학한 남보라는 소속사를 나오면서 연기보다 대학 생활에 매진했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 신중하게 고민하던 남보라는 결국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연기라는 것을 확인하고 연극 극단에서 표 파는 아르바이트부터 다시 시작했다. 연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뒤 독하게 준비했지만, 오디션에 줄줄이 낙방했다. 우여곡절 끝에 2010년 MBC ‘로드 넘버 원’에 캐스팅됐다. 소지섭·김하늘 등이 주연을 맡은 드라마에 출연할 기회를 얻었지만 주목받지 못하다가 올해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서 민화공주 역으로 인지도를 높였다. ‘해품달’ 이후 한동안 음식점에서 ‘공주님’ 대접을 받아 좋았다는 남보라의 고민은 동글동글한 얼굴과 다소 어려 보이는 외모. 그 덕에 아직도 누군가의 여동생, 학생, 딸 역할의 캐스팅이 많단다.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조연을 맡았던 그는 이제 여주인공에 대한 욕심을 조심스레 품어 본다. “그동안 힘든 역할을 많이 했으니까 정통 멜로물의 여주인공을 해 보고 싶어요. 비련의 여주인공보다는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있는 작품요. 앞으로는 외모보다 연기 잘하고 단단한 여배우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스토리는 도전·투쟁·해법 담아야 감동

    요즘 ‘스토리텔링’이란 말을 자주 한다. 엔터테인먼트 분야뿐만 아니라 여러 비즈니스에 중요하게 적용되고 있다.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나 감동, 줄거리 등을 전달하지 못한 영화나 소설은 금세 외면받기 마련이다. 숫자의 정확성보다 훨씬 강렬한 이야기 상대방의 심장에 꽂아야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스토리’란 과연 무엇일까. 신간 ‘성공하는 사람은 스토리로 말한다’(피터 구버 지음, 김원호 옮김, 청림출판 펴냄)의 본문 38쪽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야기는 도전과 투쟁과 해답을 담고 있어야 한다. 상대방을 사로잡는 이야기를 만들고자 한다면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기억해 두자. 첫째, 상대방이 예상하지 못했을 법한 도전이나 의문을 통해 상대방의 주의를 사로잡는다. 둘째, 도전을 극복하거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투쟁이나 노력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상대방의 감성에 경험을 제공한다. 셋째, 놀라운 해법을 제시함으로써 상대방의 적극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그를 통해 상대방의 행동변화를 유도한다….’ 이 책은 비즈니스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관한 성공 사례집이다. 그동안 비즈니스계는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의 힘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해왔다고 말한다.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사실 관계, 숫자, 데이터 같은 영혼이 없는 자료에 의존해왔다는 것이다. 경제 불확실성이 높고 기술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요즘에는 0과 1로 이루어지는 디지털 혁명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 피터 구버는 소니픽쳐스 경영자(CEO)였고 ‘레인맨’ ‘배트맨’ ‘컬러 퍼플’ ‘플래시 댄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등의 작품을 제작해 명성을 얻었다. 지금은 자신의 회사인 만델레이 엔터테인먼트 그룹의 CEO이자 회장으로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동안 여러 분야에서 만난 유명한 인사들을 통해, 그들만의 설득방법과 자신이 40여 년 동안 설득해온 다양한 경험들을 소개하고 있다. 1만 5000원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자연과 단절 도시폭력과 무관하지 않아”

    “자연과 단절 도시폭력과 무관하지 않아”

    “자연과의 단절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연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침팬지의 대모’로 널리 알려진 동물연구가 제인 구달(78·여) 박사가 이번에는 도심 속 식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구달 박사는 “기본적으로 우리는 모두 식물을 필요로 하고 식물 없이는 살 수 없다.”면서 환경 보호와 생태계 복원에 있어 식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구달 박사는 15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강연을 열어 “녹색 식물은 인간의 정신을 치유하고 도시의 폭력성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면서 “식물은 산소를 만들어내 탄소발자국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그늘과 영혼의 휴식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구달 박사는 또 “녹지대가 군데군데 섬처럼 존재하는 도시에는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매개 생물이 꼭 필요하다.”면서 “수정을 도와주고 씨를 퍼뜨리는 꿀벌이 바로 생명의 매개체”라고 덧붙였다. 도심에 녹지를 확대하고 도시 농업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도시 구석구석에 녹지가 늘어나면서 인간뿐만 아니라 원래 녹지에 살았던 곤충, 동물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교수도 강연자로 나서 진화생물학자의 눈으로 본 꿀벌의 실종에 대해 이야기했다. 최 교수는 “생명은 모두 연결돼 있으며 꿀벌이 사라지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문제가 될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구달 박사는 16일 최 교수와 함께 만든 생명다양성재단 창립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140년 징역·가석방 없는 7차례 종신형… 美, 기퍼즈 前의원 저격범 천문학적 처벌

    지난해 1월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에서 개브리엘 기퍼즈 연방 하원의원을 살해할 목적으로 총기를 난사해 6명을 숨지게 하고 13명에게 부상을 입힌 제러드 리 러프너(24)에게 미 법원이 140년 징역형과 가석방 없는 7차례의 종신형을 선고했다고 8일(현지시간) USA투데이가 보도했다. 애리조나주 연방법원의 래리 번스 판사는 판결문에서 “러프너가 총격 당시 정신이 멀쩡한 상태였으며,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7차례의 종신형을 선고한 것은 영원히 총을 잡을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의미”라면서 ‘천문학’적인 중형을 내린 이유를 설명했다. 앞서 지난 8월 애리조나주 법원은 러프너의 6건 살인 혐의에 대해 종신형을 선고했으나, 이날 기퍼즈 전 의원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에 대해서도 추가로 종신형을 적용했다. 당초 정신 분열증 등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던 러프너는 8월 재판에서 검찰이 기소한 50건의 혐의 중 살인 등 일부 혐의를 인정, 유죄협상(플리바게닝)을 통해 사형을 피했다. 재판에는 유가족을 포함한 피해자들이 모두 나와 당시의 악몽 같은 피해 상황을 상세하게 진술했다. 기퍼즈 전 의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재판에 직접 나와 사건 직후 처음으로 러프너를 대면했다. 그러나 러프너는 시종일관 팔짱을 끼고 앉아있을 뿐 사과 한마디 없이 무표정으로 일관해 피해자들이 치를 떨었다. 기퍼즈 전 의원의 남편이자 미 항공우주국(NASA) 조종사인 마크 켈리는 “비록 당신은 아내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을 상처 내는 것은 실패했다.”면서 “오늘 이후 나와 아내는 머릿속에서 당신을 지워버리겠다.”고 말했다. 최재헌기자 goseoul@seoul.co.kr
  • 박원상 “용서는 구하는 것이다 하는게 아니라”

    박원상 “용서는 구하는 것이다 하는게 아니라”

    실존 인물, 특히 유명인 캐릭터는 배우에게 짐이다. 대중의 뇌리에 남은 이미지를 깨뜨리기란 쉽지 않다.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쯤 되면 부담은 상상 이상일 터. 고인이 1985년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22일 동안 겪은 비인간적인 고문을 고발한 자전 수기 ‘남영동’을 정지영 감독이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고개를 내저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소재 탓에 투자를 받기도 힘들 뿐더러 고문 장면에 응할 배우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부러진 화살’의 박준 변호사 역을 했던 박원상(42)이 거론됐을 때 제작진은 고문 기술자 이두한 역(이근안)을 떠올렸다. 하지만 정 감독은 처음부터 그를 민주화 운동가 김종태 역(김근태 고문)에 점찍었다. 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남영동 1985’(작은 22일 개봉)를 본 관객들은 감독의 선구안에 탄복했다. 고문에 의해 육신이 파괴되고 영혼까지 부서지는 김종태의 모습에서 고인의 생전 모습을 떠올린 이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박원상=김종태’일 뿐. “처음 얘기를 듣고서 ‘네!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부러진 화살’에서 인연을 맺은 것도 믿기지 않는데 또 하자고 하니까 너무 감사했다. 곧 서점에 가서 ‘남영동’을 샀다. 막막하더라. 고문 장면은 어차피 영화니까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평생 민주화의 신념을 생명보다 우선했던 고인의 삶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다. 대학 시절 연극 한답시고 (집회에서) 돌멩이 한 번 던져 본 적 없는 나였다. 피해 보려고도 했는데 결국 정 감독과 이경영 선배를 믿고 마음을 굳혔다.” 10회차에 이르는 물고문 장면은 연기인데도 끔찍했다. 하필 첫 촬영 분량이 김종태가 이두한에게 물고문당하는 장면이었다. 박원상은 “리허설 때 느슨하게 하다가 막상 촬영에 돌입하자 칠성판(고문기구)에 손발을 꽁꽁 묶은 채 눈을 가리고 얼굴에 수건 덮고 물까지 뿌리니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 까짓것 이를 악물고 버티면 되겠지 했는데 결박당하는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며 몸서리를 쳤다. 이어 “물고문 장면이 이어질수록 ‘내가 왜 이 작품을 한다고 했지’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동료들과 스태프도 미워지고 짜증도 늘었다.”고 털어놓았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박원상이 상체를 완전히 제압당한 상태로 세찬 물줄기를 견뎌 내는 장면에서 그가 연기를 하는 것인지, 정말 고통스러워하는 것인지 감독이나 동료들도 헷갈린 탓이다. “도저히 못 참겠으면 완력으로 온몸을 흔들기로 약속하고 촬영에 돌입했다.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어깨를 들썩이려던 찰나에 약속에 없던 손길이 내 어깨를 꽉 눌렀다. 고문 경찰 역을 맡은 선배 중 한명도 고문하는 연기에 몰입해 버린 거다. 정말 미안하다고 하더라.” 극 중 박 전무(명계남)가 김종태의 입에 고춧가루를 통째로 들이붓는 장면도 끔찍했다. 그는 “소품팀이 정말 힘들었다. 덜 매운 고춧가루를 구해서 오미자와 섞었다. 처음 고문 장면을 찍을 때 너무 힘들어한 게 스태프나 동료들에게 미안해서 ‘난 매운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며 웃었다. “고문의 공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관객들이 ‘저런 시절이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구나’라고 느끼게 하려면 최선을 다해 고문을 하고 당해야 했다.”고 했다. 장관이 된 김종태가 구치소에 수감된 이두한을 만나는 마지막 장면은 생각을 곱씹게 한다. ‘용서해 달라’며 무릎을 꿇는 이두한의 어깨를 두드리려 했지만 김종태는 차마 용서하지 못한다. “영화를 찍으면서 흉내만 냈지만 내 몸은 아직도 물고문의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실제 고문당한 분들은 어떻겠나. 피해자 분들에겐 현재진행형이다. 용서는 하는 게 아니고 구하는 것이다. 역사를 잘 모르지만 그런 상식들이 잘 지켜지지 않는 시대 같다.” 대중은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1985’로 비로소 배우 박원상을 재발견했다. 하지만 그는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배우다. 숭실대 독문학과(88학번)에 소속만 걸어놓고 연극반에서 살았다. 남들이 취업 원서를 쓸 때 그는 영화 잡지에 난 영화 ‘세 친구’의 조단역 모집 공고에 응시했다(임순례 감독과의 인연은 2001년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이어진다). 1996년에 졸업한 뒤 연극반 선배가 연출한 이창동 원작의 ‘운명에 관하여’에서 1인 7역을 한 게 운명을 바꿔놓았다. 훗날 박원상의 “영원한 연기 스승”이 된 이상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극단 차이무 대표의 눈에 띈 것이다. 이 대표의 권유로 ‘운명에 관하여’를 본 연출자 고(故) 박광정이 배우 송강호, 이대연, 오지혜 등과 더불어 박원상을 연극 ‘비언소’에 캐스팅했다. 대학로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범죄의 재구성’(2004), ‘화려한 휴가’(2007) 등 충무로 명품 조연으로 자리매김하고서도 그는 여전히 차이무 단원으로 남았다. 박원상은 “요즘 충실하지 못한 단원이지만 차이무는 내 처음이자 마지막 극단이다. 주제를 직접 전달하기보다는 관객과 질펀하게 놀고 재밌어야 한다는 게 이상우 선생님과 차이무의 연극관이다. 연극을 한답시고 쓸데없이 무거워지는 걸 버릴 수 있는 훈련이 돼 있던 셈이다. 그래서 차이무 출신이 영화나 드라마에 적응을 잘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느덧 데뷔 16년차. 불혹을 넘긴 지도 오래다. 그가 그리는 미래가 궁금했다. “스타가 되고 싶지도, 인지도가 높아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누가 알아보기 시작하면 생활이 불편해진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연극할 때부터 ‘가늘고 길게 가자’가 신조였다. 진심이다. 가장으로서 가족들이 곤궁해지지 않도록 책무를 다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연기가 즐겁고 행복하고 설레지 않으면 다른 직업을 알아볼 때가 된 거다. 다행히 아직은 즐겁다. 하하하.”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김문이 만난 사람] 세계무대 데뷔 10년 앞두고 단독공연 갖는 팝페라테너 임형주

    [김문이 만난 사람] 세계무대 데뷔 10년 앞두고 단독공연 갖는 팝페라테너 임형주

    어느 날 그에게 정결한 여신이 다가왔다. ‘은색으로 빛나는 정결한 여신이여. 이 신성한, 이 신성한 태고의 나무들, 우리에게 향하소서,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아~ 구름에 끼지 않고 안개에 가려지지 않은 아~ 지상에 평화를 뿌리소서, 당신이 천국을 만드소서~’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에 나오는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의 일부 대목이다. 마리아 칼라스(1923~1977)가 불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칼라스의 노르마냐 노르마의 칼라스냐’고 할 정도였다. 비록 마리아 칼라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불멸의 디바 소프라노의 전설로 남아 있다. 1998년의 일이다. 겨우 12살 나이에 공개방송 프로그램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나가 ‘마법의 성’과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요’를 불러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클래식 오버 앨범(클래식, 뮤지컬, 팝 등)을 내는 등 한국 음악계의 ‘신동’이 탄생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부모의 반대가 컸다. 아버지는 장차 기업의 최고경영자(CEO)가 되기를, 어머니는 외교관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남자가 음악을 하면 안 된다는 부모의 고집 또한 셌다. 할 수 없이 신동은 음악을 접기로 했다. 방황이 시작됐다. 그렇게 3~4개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마리아 칼라스의 ‘정결한 여신이여’라는 영혼의 소리를 듣게 됐다. 단박에 매료됐다. 이때부터 성악가로 방향을 틀었으며 ‘정결한 여신이여’는 단골 레퍼토리가 됐다. 이후 신동은 예원학교, 줄리아드 예비학교(영재교육) 입학은 물론 하는 공연마다 ‘최연소’라는 수식어를 만들어 내며 세계 무대에 우뚝 섰다. 세계적인 팝페라테너 임형주(27)씨. 벌써 세계 무대에 데뷔한 지 10년이 된다. 국내 데뷔는 15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는 18일 오후 6시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아주 특별한 공연을 한다. 대관 심사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국내 모든 아티스트를 통틀어 조수미, 조용필, 조영남 이후 네 번째 단독 콘서트를 펼친다. 특히 1988년 개관 이후 역대 최연소인 27살의 나이로 가지는 공연이어서 더욱 주목된다. 1부는 ‘클래식 스타일’로 이탈리아·독일·한국의 가곡들로 꾸며진다. 2부는 ‘팝페라 스타일’로 뮤지컬·팝·재즈·가요 등의 장르를 넘나든다. 그의 대표곡들뿐만 아니라 팝페라 히트곡, 드라마 OST 주제가 등도 함께 꾸며져 깊어 가는 가을을 아름다운 선율로 수놓을 예정이다. 오페라 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인 만큼 50인조의 코리안 내셔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6인조 댄서팀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지난 5일 오후 서울 염곡동에 있는 ‘아트원문화재단’에서 임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앞두고 머리 손질과 간단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약간 긴 머리에 깨끗한 동안(童顔)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무슨 얘기부터 꺼낼까 생각하다 최근 그가 일본에 다녀왔다는 것이 떠올라 먼저 일본 공연이 어땠는지 물었다. “도쿄 시나가와 큐리안 대극장 무대였습니다. 일본에서 데뷔한 것도 10년이 됩니다. 그래서 제 이름 석 자를 내걸고 독창회를 하게 돼 감회가 남다르더군요. 특히 요즘 한·일 관계가 조금 경색돼 있잖아요. 120분 넘게 공연을 가졌는데 앙코르 곡으로는 우리의 가곡 ‘임진강’을 불렀습니다. 이때 두루마기 한복을 입었습니다. 일부에서 한복 입는 것을 만류했지만 당당히 한복 차림으로 다시 무대에 섰지요. 공연이 끝나고 일본 기자들이 ‘역시 임형주의 음악은 위대하다’는 찬사를 보냈고 일부 팬은 ‘한복을 입은 모습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국내 팬들은 주로 30~40대인데 반해 일본에서는 50~60대까지 폭이 넓어졌다는 것을 실감했다며 웃는다. 특히 국내 팬클럽 회원 30여명이 자비를 들여 가며 비행기 타고 원정을 와 너무 고마웠단다. 일본에서는 ‘형주 오우지(왕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 다음에는 ‘아트원문화재단’이 궁금해졌다. 그는 달변 수준이었다. 어떤 질문에도 지체 없이 답이 줄줄 나온다. “2008년에 설립된 비영리 재단입니다. 국내 데뷔 10년, 세계 데뷔 5년을 맞이하면서 어머니께서 ‘그동안 네가 번 돈을 다 모아 놨으니 어디에 쓰고 싶으냐’고 하시더군요. 저는 얼른 좋은 일에 쓰고 싶다고 했지요. 재능은 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음악 공부를 못 하는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비록 20대이지만 좋은 일 하는 데는 나이가 필요 없잖아요. 그래서 서울시에 100억원을 기부채납해서 이 위치에 재단을 설립하게 됐지요.” 현재 ‘멘토&멘티’ 프로그램을 통해 4기째 17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개인 레슨비도 재단에서 대납한다. 아트원 홀, 갤러리 등을 두어 다양한 예술공간도 마련했다. 특히 재단 산하에 유치부를 두어 어린이교육사업에도 정열을 쏟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사재를 털어 운영해야 할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으나 올해 들어 조금 나아졌다고 귀띔한다. 유치부 어린이들에게는 7세까지 재단에서 지원해 주고 있다. 어린이 얘기가 나오자 얼른 그의 어린 시절로 화제를 돌렸다. “유치원이나 초등학생 때에는 미술대회와 웅변대회에 자주 나갔는데 특히 미술인 경우 대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는 방과후 특활반이라는 것이 있었죠. 동요 부르기반에 들어갔더니 선생님이 저에게 ‘너는 참 잘 부른다. 장차 성악가로 대성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때 전국 동요대회에 나가 1등을 여러 번 했습니다.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은 셈이지요. 기분이 우쭐해지면서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가수 신승훈이나 조성모씨 같은 발라드 가수가 돼야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삼성영상사업단 관계자를 만나게 됐다. 저녁 자리였는데 즉석에서 노래를 하게 됐다. 감탄한 그 관계자는 임씨에게 “너는 프로로 데뷔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당장 계약하자고 제의를 했다. 그래서 그의 첫 앨범이 나오게 됐고 언론과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공개방송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로 음악을 중단했다가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곧바로 성악을 두 달가량 공부하고 예원학교에 입학했으며 매번 실기 1등을 차지하면서 수석 졸업을 하게 된다. 이때 청소년 음악대회에 나가 웬만한 상은 거의 휩쓸 정도로 진가를 발휘했다. 국내에서는 경쟁자가 없다는 생각에 시야를 세상 밖으로 넓혔다. 영재들만 가르친다는 줄리아드 예비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이때에도 부모의 반대가 있어 임씨는 잠시 미국 여행을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실 그날 이후 미국에서 승부를 걸기 전까지는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부모님을 속인 셈이지요. 곰팡이가 나는 반지하 방에서 혼자 살면서 인터넷 등 수소문 끝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메조 소프라노인 웬디 호프먼의 집을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때마침 그의 남편이자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수석 반주자를 만나게 됐고 여러 번 설득 끝에 오디션을 보게 됐습니다. 그 자리에서 웬디 호프먼은 ‘내가 너를 기꺼이 받아줄 테니 집으로 자주 오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정통 성악보다는 팝페라 뮤지션의 대가가 되라고 했습니다. 이후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게 됐습니다.” 타고난 노래 솜씨는 미국에서도 통했다. 줄리아드 예비학교 입학 때 보기 드물게 심사위원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으며 만장일치로 합격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 자리에서 다음 해 열릴 오페라 주역까지 제의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과장이 곱고 맑은 높은 소리는 훌륭하지만 파바로티나 도밍고 같은 큰 성량을 내기 위해선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에 오페라의 본고장인 피렌체 음악원에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웅장하고 육감적인 바로크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선뜻 받아들였다. 이 무렵 그는 한국에 잠시 들러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때 최연소 애국가 독창자로 등장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것이 인연이 돼 2003년 6월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를 하게 되면서 세계 무대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마리아 칼라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대중가수가 됐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음악 외적으로 어떤 일에 관심이 있느냐고 하자 “어릴 적에는 화가나 뉴스 앵커,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다.”면서 지금도 보는 신문이 10여 종류가 되며 꼭 소리 내어 읽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신문을 보면 논리정연해지고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단다. 지난해 ‘올해의 신문 읽기 스타상’(신문협회)을 받기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여자 친구에 대해 묻자 “없어요. 이상형은 강수연, 이영애, 심은하 같은 스타일”이라고 대답했다. 공연 때 단골 앙코르 곡은 무반주 ‘어메이징 그레이스’이며, “조수미 선배는 롤모델이고 나중에 마리아 칼라스 같은 불멸의 음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면서 해맑게 웃는다. 선임기자 km@seoul.co.kr ◆27세 임형주는 누구 독집앨범만 12장… 한국인 최초·최연소 ‘유엔 평화메달’ 수상도 1986년 5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예원학교 성악과를 수석 졸업했으며 뉴욕 줄리아드 음대 예비학교 성악과를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합격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산펠리체 음악원을 졸업(학사)했다. 현재 오스트리아 빈 슈베르트 음대 성악과 ‘초청학생’으로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1998년 국내 무대에 데뷔했고 2003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세계 데뷔 독창회(세계 남성 성악가 중 최연소)를 시작으로 뉴욕 링컨센터,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볼과 월트디즈니콘서트홀, 파리 살 가보, 네델란드 콘서트 헤보, 잘츠부르크 미라벨궁전, 빈 콘체르트 하우스, 일본 국제포럼, 타이완 국부기념관 등에서 공연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때 역대 최연소로 애국가를 선창했다. 베를린교향악단 및 빈교향악단, 도쿄 필하모닉, 체코 심포니 등과 협연했다. 주요 음반으로는 40만장이 팔린 1집 ‘샐리 가든’을 비롯해 2집 ‘실버 레인’, 3집 ‘미스티 문’, 4집 ‘더 로터스’까지 4장의 정규 앨범을 포함해 최근까지 총 12장의 독집 앨범을 내놓았다. 2003 미국 USO협회 ‘명예 기여훈장’ (역대 최연소), 2005 일본 NHK ‘홍백가합전’ 트로피(한국 클래식 음악가 중 최초), 2010 유엔본부 ‘유엔 평화메달’을 각각 수상했다. 유엔 평화메달은 한국인 최초이며 역대 전 세계 수상자 중 최연소다.
  • 건축, 땅 위에 새겨진 수많은 영혼의 기록들…

    건축가가 여행을 하고 책을 냈다. 그런데 여행에 관한 얘기는 한 줄도 없다. 오로지 여행지의 건축물에 담긴 건축가의 뜻과 철학을 헤아리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다. 건축물 순례 에세이,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승효상 지음, 컬처그라퍼 펴냄)이다. 그런데 건축가는 왜 여행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건축이 땅에 새기는 삶의 기록임을 아는 한 이 땅에 새겨진 수많은 기록들을 봐야만 한다. 건축 설계라는 것은 우리 삶을 조직하는 일이며 건축은 어디까지나 삶에 관한 이야기다. 삶의 실체를 그려야 하는 건축가에게 가장 유효한 건축 공부 방법이 바로 여행”이라고. 책을 열면 맨 먼저 가톨릭 사제로 보이는 이가 너른 복도를 혼자 걸어가는 사진이 나온다. 그런데 그곳이 어딘지, 걷는 이는 누구이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아무 설명이 없다. 대체 사진에서 뭘 찾아야 하는 건지 독자는 고민스럽다. 이는 이후 전개될 책의 복선처럼 보인다. 저자가 첫 여행지이자 건축물로 소개한 곳은 서울 종묘다. 그는 ‘동양의 파르테논’ 운운하며 외관의 장중함에만 함몰되려는 독자들의 등줄기에 매서운 죽비를 내리꽂는다. 그보다는 정전 앞의 빈 공간이 주는 비물질(非物質)의 아름다움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물신의 망령들이 어른대는 서울에서 우리의 전통 공간 개념인 ‘비움의 미학’을 잃지 않고 있는 곳이 종묘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그가 말하려는 게 뭔지 조금씩 윤곽이 잡힌다. 물신에 억류된, 영혼 없는 건축물로 가득 찬 세계가 그는 싫은 거다. 저자는 어렸을 때 일곱 가구가 마당을 공유하는 집에서 살았다. 당연히 “마당의 아침은 매일 북새통이었고 해 질 녘엔 저녁 짓는 냄새와 웃음이 늘 마당을 메웠”다. 그런데 그 마당이 늘 붐볐던 건 아니다. 곧잘 비워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마당은 “햇살과 빗줄기를 시시때때로 받았”다. 비웠으되 되레 충만한 세계, 마당이란 공간이 그의 건축 여정에 똬리를 틀게 된 건 필경 이때부터였을 거다. 그의 사유는 국내외를 넘나든다. 삶의 향기를 품은 창덕궁 기오헌을 지나 공간의 지혜를 보여준 금호동 달동네를 거쳐 성서적 풍경의 스웨덴 우드랜드 공동묘지까지, 수없이 많은 건축물 사이를 오간다. 그 와중에 그가 줄곧 강조하는 게 마당이다. 마당이야말로 삶과 우리가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책은 박노해 시인이 쓴 동명의 시와 제목이 같다.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오래 묵어야 한다.’는 정서도 공유한다. 단, 전제는 있다. 박 시인의 시구처럼 “오랜 시간을 순명하며 살아 나온 것,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이어야 한다. 1만 3800원.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커리어우먼에게 필요한건 [남자語]다

    카피 한번 끝내준다. “2535 커리어우먼에게 필요한 건 영어가 아니라 비즈니스 공용어다.” 영어보다 더 중요한 비즈니스 공용어? ‘남자어’다. 책 제목도 그렇다. ‘남자어로 말하라’(김범준 지음, 비즈니스북스 펴냄). 여자라도 회사원이라면 회사원답게 조직의 위계질서에 맞춰 말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남자어 입장에서 ‘양성평등’ ‘페미니즘’ 같은 단어는 안드로메다 외계어다. 어머, 이게 뭐야? 가드 올리기도 전에 펀치가 막 쏟아진다. 커피? 까짓 거 팍팍 타줘 버리란다. 아예 ‘영혼을 담아’ 타주란다. 파스타 집에서 와인잔 들고 하는 회식? 우아한 건 네 친구들하고 수다 떨 때나 하란다. 삼겹살과 소주에 온몸을 불살라야 한단다. 숱한 펀치들의 결론은? 까라면 까라다. 그것도 아주 ‘잘’ 까야 한단다. 남자어는 이렇게 구성된다. ‘생존어’ ‘충성어’ ‘접대어’ ‘근태어’ ‘객관어’ ‘인정어’ ‘희생어’. 아이고 난 그런 고리타분한 사람 아니래도, 하면서도 슬그머니 웃는 부장님들의 얼굴과 뻣뻣하게 굳어 버린 채 눈알만 굴리고 있는 여직원들의 얼굴이 눈앞에 교차한다. 물론 저자도 안다. 대한민국의 환경, 남성 중심의 기업 문화, 수량화되지 않는 가사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사회를 마음껏 원망하란다. 그런데 원망한 다음엔? 저자의 출발점이다. 차별에 서러워 눈물 흘리는 가련한 피해자 코스프레나 하다 말 건가? 그럴 바에야 사장 자리 차지해서 비즈니스 공용어를 남자어에서 여자어로 바꾸라고 제안한다. 회전의자에 앉아 남자 직원한테서 “이사님, 오늘 회식은 이태원에 있는 벨기에식 홍합 요리 먹으러 가요.”라는 얘기를 들어보란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자어를 배워야 한다. 1만 3000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男, 남자어를 말하다 대학문 나선 지 10여년째. 자취방에 몰려 앉아 새우깡에 소주 까놓고 첫사랑이 어쩌고 질질 짜던 놈들, 이젠 앞서거니 뒤서거니 ‘초짜’ 관리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책임, 선임, 주니어, 과장, 팀장…. 요즘은 워낙 직급 이름이 다양해서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지경이지만 어쨌든 교복 다시 꺼내 입은 것처럼 어색하던 녀석들이 이젠 양복에 걸맞은 풍채를 하나둘씩 갖춰 가고 있다. 만나서 하는 얘기의 초점은 거의 비슷하다. 높으신 분들 비위 맞춰 가며 아랫사람 다독이며 성과를 내야 하는 데 대한 스트레스다. 뒷담화 좀 세게 하고 시시덕대던 시절은 가 버린 것이다. 스트레스 가운데 하나는 이거다. 여자 선후배들이 와서 말을 건네면 긴장된단다. 떨려서? 그럴 턱은 없다. 이야기는 무척 긴데 정작 알맹이가 없거나 알맹이가 뭔지 잘 이해가 안 될 경우가 많다는 거다. 개인적인 얘기야 뭐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데 일 얘기라면 답답해진다. 얘기하면 뭔가 해결되고 정리되는 게 아니라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을 때가 더 많단다.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이렇게 하라는 건지 저렇게 하라는 건지. 몇 번을 그러고 나서 되물었단다. 그래서 이건 이렇게 하라는 얘기냐, 이러저러하게 해주길 원한다는 뜻이냐고 그때 나오는 반응은 대개 두 가지란다. 하나는 그렇게 길게 말했는데 아직도 못 알아들었어? 다른 하나는 이렇게 친절한 나에게 왜 화를 내? 그래서 결론은 둘 중 하나다. 남자는 바보이거나 좀팽이인 거다. 물론 장점도 있단다. 요즘 여직원들은 똑똑한 데다 승부욕도 있다. 특히 마케팅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여성들의 이런 능력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도 이런 일에 몇 번 부딪치고 나면 파도처럼 밀려드는 궁금증은 어쩔 수 없단다. 나를 간 보는 건가? 아니면 자기는 일 하나 처리하는 데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니까 기특하고 대단하게 여겨 달란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자기처럼 소중하고 귀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이 이런 쓸데없는 부분까지 신경 쓰니까 불쌍하지 않으냐고 하소연하는 건가? 그런데 우리만 그랬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책에 나오는, 유리천장을 뚫은 한 대기업 여성 임원의 얘기다. “여자들은 상황을 A부터 Z까지 설명해 공감을 얻으면 잘 따라오지만 남자에게 그렇게 하면 무능하게 비칠 수 있더라. 남자들은 경상도식으로 용건만 말하는 걸 선호하더라. 책임자 직급에 오르는 여자 후배들은 꼭 불러서 얘기한다. 경상도식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라고.” 맞다. 끼리끼리 논다고, ‘경상도 보리문둥이’들끼리 둘러앉아 그간 자책만 하고 살았다. 바보도 좀팽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여자 선후배들도 출발점은 선의였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女, 남자어를 말하다 회사에 갓 들어와서 얻은 별명이 ‘다나까’였다. 무슨 말을 하든 말미는 “~입니다.” 아니면 “~입니까?”로 끝냈다. 여중-여고-여대를 나왔다는 아이가 막 자대 배치를 받은 이등병이나 쓸 법한 말투를 입에 달고 돌아다니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급기야 “쟤는 여대 ROTC 출신”이라는 농담 섞인 루머까지 나돌았다. 6년 전 입에 붙지도 않는 ‘다나까’를 불경처럼 외우고 다녔던 건 여대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보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총합-나약하다, 이기적이다 등-을 상징하는 ‘여대’와 나를 동일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오기가 그때의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대학 동창들 중에는 ‘다나까’가 많다. 당시 학교에서 여대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티셔츠에 운동화 신고 다니는 애들과 곱게 화장을 하고 하이힐 신고 등교하던 애들. 페미니스트에게 혼날 만한 이분법이지만 실제로 그랬다. 돌이켜 보면 주로 전자는 ‘남자어’를, 후자는 ‘여자어’를 썼던 것 같다. 과제 때문에 조모임을 할 때면 “어머, 어떡하지? 나 오늘 중요한 약속 있는데…뒷일은 너희한테 맡길게.” 하며 바람처럼 사라지던 친구들은 분명 곱게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은 아이들이었다. 그러면 티셔츠에 운동화 신은 아이들이 꾸역꾸역 과제를 마무리하느라 밤을 지새우곤 했다. 바람처럼 사라졌던 그때 ‘하이힐’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내 주변의 많고 많은 ‘다나까’들은 지금까지 휴가 한번 제대로 못 가고 꿋꿋하게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아잉, 부장님 이건 힘들어서 못 하겠어요.”라는 콧소리가 나오지 않아 속으로 악 소리 내며 미련스럽게 야근을 하는 친구가 부지기수다. 회식 자리에서 “술 못 마셔요.”라고 손사래를 치면 혹시나 폭탄주 건네는 부장님 손이 ‘무안’해질까 봐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2차로 간 술집 화장실에서 기절한 친구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 이렇게 눈물겹게 버티던 내 주위의 ‘다나까’들은 똑같은 의문을 갖고 있다. 남자 세계에서 남자어를 구사하며 아등바등 버틴다고 뭐가 남지? 여성들이 여성성을 인정받으며 일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지기는커녕 남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금 체제만 강화시켜 주는 거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저자는 “남자어 잘 써서 성공하라.”는데 그렇게 성공해 봤자 지금 체제가 계속된다면 여성을 짓누르는 유리천장은 깨질 리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아무리 남자어로 말하고 남자처럼 행동하려 해도 몇몇 남자들은 여성 동료를 그저 여성으로만 보고 있지 않나? 맞잖아요, 저기저기 여자 부하 직원에게 치근덕대는 김 부장님!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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