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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일어나라” 독립 열망 불 지폈다

    “최후의 1인, 최후의 1각까지 일어나라” 독립 열망 불 지폈다

    재심(再審). 확정된 판결의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위법행위나 중대한 하자가 있었음이 확인되면 사건을 다시 심판할 수 있다. 군부독재 시절 불법 감금과 고문에 못 이겨 토해낸 거짓 자백과 거짓 증거로 유죄판결을 받은 국가보안법 관련 피고인들은 반세기에 이르러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가 만든 법으로 일제 사법부에 의해 내란범·치안방해범·강도 등으로 몰린 무수한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재심이 이뤄지길 바라며, 일제의 판결문에서조차 고스란히 드러난 투사들의 독립 의지를 재구성했다.#손병희 외 47명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 일본 형법상 소요죄 “피고인들은 조선이 제국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형성하는 것을 기도했다. 조선민족 대표자 손병희 등의 이름으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여 조선 전 도(道)에 배부했다. 민중을 선동하여 왕성하게 조선독립 시위를 일으켰다.”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 다치가와 판사가 쓴 판결문에 담긴 공소사실 일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해 초기에 ‘3·1운동’을 주도한 48명은 일제의 판결문에 ‘치안 방해를 선동한 자’로 비교적 가볍게 규정됐다. 독립선언을 주도한 천도교 3대 교주 손병희 선생은 “한때 친일파에 속했다가 병합(한일합병) 이후 자신에 대한 대우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불쾌감이 있던 자로,…(중략) 교당 신축 기부금을 반납하라는 명을 듣자 크게 불만을 품고”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폄하됐다. 그러나 일제는 판결문 속 “독립의 희망을 품은” 48명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불러온 힘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불온한 문서”로 지목된 독립선언문 한 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알았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 판사들은 사건 관할에 관한 결정서에서 “독립 사조가 조선에 널리 퍼져 인심이 동요했고, 100만 신도의 추앙을 받는 천도교 손병희의 이름을 거명한 독립선언서는 민중 선동의 커다란 효과로 나타났다”면서 “독립만세의 소리가 도시와 시골을 뒤덮었다”고 두려워했다.●결정·판결문 4건 모두 “최후의 1인” 대목 인용 천도교 인사들을 중심으로 기획된 독립운동은 순식간에 종교와 계층을 아울렀고, 전국에 만세운동을 촉발시켜 독립의 불씨를 키워냈다. 손병희, 보성고등보통학교장 최린, 도사 권동진·오세창 등 천도교 핵심 인사들은 1918년 말부터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논의했다. 그해 초 미국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이 제안한 ‘새로운 전후(戰後) 질서의 14개조 원칙’ 가운데 ‘민족자결주의’(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를 빌려 세계에 조선의 식민지배 상황과 독립 의지를 밝히고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독립운동 원칙은 손병희가 세웠고 구체적인 실행은 최린이 맡았다.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최남선은 “조선은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한다”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이승훈(판결문엔 본명 이인환)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기독교계도 천도교와 함께하기로 했다. 1919년 2월 21일 최린은 이승훈에게 “독립운동은 민족 전체의 문제로 종교가 다르고 같음에 관계없이 합동해야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사흘 뒤 기독교계가 합류하기로 했고, 장로교 길선주·양전백 목사, 감리교 신흥식 목사, YMCA 간사 박희도 등이 이승훈과 민족대표로 참여하기로 했다. 27일엔 강원 양양의 신흥사 승려 한용운과 경남 합천 해인사 승려 백상규(백용성) 등 불교계 인사들도 동참하기로 해 종교계 연합을 이뤘다. 별도로 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 등 학생 대표들도 종교계의 운동에 합류했다. 2월 27일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 1000장이 인쇄됐다. 48명 가운데 인쇄소 사장 이종일과 공장 감독인 김홍규도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헌법 문란의 문서를 인쇄(또는 방조)한 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인쇄가 끝나자마자 선언서는 서울은 물론 전남, 전북, 충북, 강원, 함경, 평안 등 전국으로 퍼졌다. 48명 중에는 독립선언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한 지 2~3일이 지나 일본 도쿄와 만주에서 체포된 교사들도 있었다.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은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음식점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겼다.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이들은 경찰에 자수해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일제는 독립선언서 가운데 “최후의 일각(一刻), 최후의 일인(一人)에 이르기까지 독립의 뜻을 밝혀 완성해야 한다”는 대목에 특히 주목했다. 48명에 대한 법원의 결정문과 판결문 4건에는 모두 이 대목이 인용됐다. 일제는 이 문장에서 조선의 독립 의지를 가늠했다.●일제, 3·1운동 초기 주도자들 극형 시도 일제는 독립운동에 불을 지핀 민족대표 등 3·1운동 초기 주도자들을 극형에 처하려 했다. 이들을 수사한 일제 검사는 보안법·출판법 위반 혐의로 1919년 3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 예심을 청구했고, 8월 1일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 나가시마는 일본 형법 77조 내란죄에 해당하므로 고등법원의 특별 권한에 속한다고 판단했다. 나가시마는 “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조선을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할 목적으로 전 조선인에게 교란을 선동하고 헌법을 문란하게 하는 불온한 문서를 공표함으로써 각지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게시하게 하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건을 심리한 고등법원 판사 와타나베, 요코다, 이시카와, 미즈노, 하라는 1920년 3월 22일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라는 표현으로 독립의사를 발표했으나, 폭동을 일으키거나 교사한 문구는 없다”며 내란죄가 되지 않는다고 봤고, 사건의 관할이 경성지법에 있다고 결정했다. 민족대표들을 강하게 처벌할 경우 조선인들의 반감을 키울 것을 우려해 일제 의회 등이 법원에 가벼운 형벌을 요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다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사건을 맡게 된 경성지방법원 다치가와 판사는 1920년 8월 9일 “공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고등법원의 결정문에서 이 사건이 경성지법 관할이라고만 했을 뿐 경성지법에 사건을 송치한다고 밝히지 않았다”는 허헌 변호사의 ‘관할 위배’ 주장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사의 불복으로 경성복심법원으로 다시 재판이 넘어갔고, 그해 10월 20일 48명 중 37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손병희·최린·권동진·오세창·이종일·이승훈·함태영·한용운은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인쇄, 배포에 주동적 역할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치안을 방해한 죄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보안법 위반 혐의의 최고 형량이 2년, 출판법 위반이 1년으로 이들은 혐의별 최고 형량을 선고받았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최남선은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카슈미르 영토 분쟁이 인파 갈등

    카슈미르 영토 분쟁이 인파 갈등

    지난 26~27일 사실상 ‘핵보유국’끼리 공습을 벌이며 갈등의 소용돌이속으로 빠져든 인도와 파키스탄의 70년 분쟁 중심에는 카슈미르 영토분쟁이 있다. 현재 카슈미르는 파키스탄령(아자드 카슈미르)과 인도령(잠무 카슈미르)으로 분단돼 있다. 당초 이 지역은 힌두교를 신봉하는 봉건 지배자와 대다수 무슬림을 다스려 왔다. 영국 식민지를 겪은 뒤 1947년 인도·파키스탄으로 분리됐다. 인도가 지배하고 있는 잠무 카슈미르 지역의 대다수 구성원도 무슬림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힌두교도가 대다수인 인도보다는 무슬림 국가인 파키스탄으로 귀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이 점이 끊이지 않는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 수립 이후 끊임없이 무슬림 과격세력들이 무력 봉기를 일으키면서, 인도에서 분리 독립을 시도했다. 인도는 이 때마다 파키스탄이 뒤에서 사주하고 이 같은 무력 봉기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고 비난하면서 파키스탄과 대립해 왔다. 이번 양국 충돌도 지난 14일 잠무 카슈미르에서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로 인도 경찰 40여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인도는 늘 그러하듯 파키스탄을 배후로 지목하고 보복을 선언했고, 파키스탄 정부는 자살폭탄 테러와는 무관하다며 “증거를 보여달라”고 반박하면서 대립했다. 종족 구성상 카슈미르가 파키스탄에 귀속되는 것이 순리라고 보는 시각이 크다. 그러나 인도라고 영토를 순순히 내놓을 리도 없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이 지역을 통치하던 봉건 지배층들은 힌두교도들이어서 인도도 양보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당초 독립 초기인 1947년 10월 카슈미르를 지배하던 힌두교 지배층은 인도에 붙으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무장세력들이 잠무 카슈미르의 핵심 도시인 스리나가르를 침공하면서 양국의 70년의 갈등의 불이 붙었다. 당시 카슈미르 봉건 지배자이던 마흐라자 하리 싱은 곧바로 인도에 지원을 요청했고, 분쟁은 이듬해 인도와 파키스탄 간 첫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그 뒤 두 나라는 유엔 중재로 한발 뒤로 물러났고, 카슈미르는 파키스탄령인 아자드 카슈미르와 인도령인 잠무 카슈미르로 분단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도는 주민투표를 통해 잠무 카슈미르의 미래를 결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미루다가 잠무 카슈미르를 인도 연방의 하나로 편입해버렸다. 그 뒤 파키스탄은 1965년 수천 명의 게릴라를 앞세워 2차 전쟁을 일으켰다. 카슈미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양측은 1947년의 휴전선을 사실상 국경인 정전 통제선(LoC)으로 교체해 유지해 오고 있다. 이번 갈등이 주목받은 것 중 하나는 양측이 48년 동안 지켜오던 LoC를 침범하면서 서로를 공격했다는 점이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현대글로비스, 전세계 64개 거점 운영… 글로벌 물류 영토 확대

    현대글로비스, 전세계 64개 거점 운영… 글로벌 물류 영토 확대

    현대글로비스가 적극적인 글로벌 물류 영토 확대에 나서고 있다. 신흥시장에 지속해서 신규 거점을 설립하며 현지 신흥 물류시장에 진출, 미래 성장을 담보하겠다는 전략이다. 현재 해외법인, 지사, 사무소 등 유기적으로 연결된 64개의 해외 거점을 운영하며 촘촘한 조직망을 구축하고 있다. 현대글로비스는 지난해 7월에 싱가포르 지사를, 올해 1월에는 중국 선전(深) 지사를 신규 거점으로 설립했다. 잠재력이 높은 아시아 국가에 주요 거점을 설립해 점차적으로 글로벌 물류 영토를 늘려나가겠다는 복안이다. 먼저 싱가포르 지사는 해운 벌크선 사업을 비롯해 육상 및 해상 물류와 연계한 트레이딩 사업을 수행한다. 현대글로비스는 싱가포르 지사를 통해 460억 달러(약 52조 원)에 이르는 아시아·태평양 이머징마켓 3자 물류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할 방침이다. 중국 광둥성의 무역 중심지인 선전시에 설립된 현대글로비스 선전 지사 또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러시아에도 신규 거점을 마련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무소를 설립하고 극동 교두보를 확보했다. TSR을 활용하는 기존 화물의 운송 안정성을 높이는 한편 동아시아 지역 영업을 강화해 새로운 화주를 발굴하는 역할을 할 예정이다. 김태곤 객원기자 kim@seoul.co.kr
  • 파키스탄, 하루 만에 인도 보복…전면전 치닫나

    파키스탄, 하루 만에 인도 보복…전면전 치닫나

    핵 보유국 간 공습은 처음…갈등 최고조 인도 ‘분쟁 핵심’ 카슈미르 지역에 비상령인도와 파키스탄이 분쟁지역 카슈미르에서 공군기를 동원한 공습을 주고받으면서 양국 갈등이 1971년 3차 전쟁 이후 최고조로 치달았다. 전면전 우려까지 제기되고 있다. 파키스탄 공군기는 27일 카슈미르 영토 분쟁지역에서 인도 공군기를 격추하고 지상에 폭탄을 투하했다. 인도 공군이 지난 26일 48년 만에 휴전선 격인 정전 통제선(LoC)을 넘어 파키스탄을 공습하자 바로 다음날 보복 공격을 가한 것이다. 사실상 ‘핵무기 보유국’끼리 공습을 주고받은 것은 역사상 처음이라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로이터통신은 “파키스탄군 대변인이 이날 트위터를 통해 파키스탄 공군이 정전 통제선을 넘어온 인도 항공기 두 대를 격추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파키스탄 측은 “공격이 파키스탄 영공에서 이뤄졌다”며 “인도 파일럿 한 명을 지상에서 체포했다”고 덧붙였다. 격추된 두 인도 항공기는 인도 공군 소속인 것으로 알려졌다.인도 측은 파키스탄 공군기가 오히려 인도 영공을 침범했다고 반발했다. 인도는 인도령 카슈미르(잠무 카슈미르주) 지역 4개 공항의 이착륙을 금지하는 등 비상 상황을 발령했다. 파키스탄도 영공 폐쇄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항공사들은 파키스탄 영공을 지나는 비행편을 취소하거나 우회하고 있다. 정전 통제선 부근 10여곳에서 26일 밤부터 총격전도 발생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앞서 인도는 지난 14일 잠무 카슈미르주에서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로 경찰 40여명이 사망하자 파키스탄을 배후로 지목하고 보복을 선언했다. 이어 인도 공군은 26일 1971년 이후 처음으로 사실상 국경인 정전 통제선을 넘어 파키스탄 내 바라코트 지역을 공습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1947년 영국에서 각각 독립한 뒤 지난 70년 동안 3차례의 전면전과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겪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갈라진 양국 분쟁의 핵심은 카슈미르였다. 다른 인도 지역과 달리 카슈미르 주민 대부분은 무슬림이었지만 지배층은 힌두교를 믿었다. 1947년 10월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무슬림 분리 세력의 무장 봉기가 이듬해 인도와 파키스탄 간 첫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인도령 잠무 카슈미르주는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의 무장 봉기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고, 인도는 그 배후로 파키스탄을 지목하면서 보복을 가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앞서 양국은 1999년 인도 카길 지역의 무슬림 무장봉기를 계기로 대규모 국지전을 벌였으나, 이번 충돌은 1971년 이후 처음으로 전면전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핵 앙숙’ 인도 공습에 파키스탄 ‘핵 지휘부’ 소집 맞대응

    ‘핵 앙숙’ 인도 공습에 파키스탄 ‘핵 지휘부’ 소집 맞대응

    인도령 카슈미르서 테러 인도 경찰 40여명 사망인도 전투기 동원…테러거점 파키스탄 영내 공습48년만의 인도 직접 공격에 파키스탄 보복 다짐인도 총선 앞두고 들끓는 보복 여론에 공습경제난 파키스탄 사기 진작 위해 보복할듯전문가 “양측 갈등 관리 실패시 확전” 경고 인도 공군이 테러 거점으로 지목한 파키스탄의 한 마을을 공습하자 파키스탄이 26일(현지시간) ‘핵 지휘부’를 소집하고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핵보유국이자 앙숙인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갈등이 높아지고 있다. 양측이 갈등의 통제하는 데 실패하면 예상치 못한 위기 상황으로 치들을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발단은 인도 공군이 지난 14일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에 대한 응징으로 전투기 12대를 동원해 파키스탄 영내 테러조직 캠프를 공습하면서 비롯됐다. 이 자살 폭탄 테러로 40여명이 사망했는데, 사망자 대다수가 인도 경찰이었다. 테러 배후로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카슈미르 반군 자이쉬-에-무함마드(JeM)가 자처했다.들끓는 보복 여론에 인도가 26일 새벽(현지시간) 테러 거점으로 지목된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 북쪽 약 190km 떨어진 발라콧 마을 부근의 무장 조직 캠프를 공습했다. 인도 정부 관계자는 “무장조직원 300여명이 숨졌다.”라고 말했다. 인도가 파키스탄을 직접 공습한 것은 1971년 이후 48년만이다. 인도가 파키스탄 영토를 공습하자 임란 칸 파키스탄 총리는 핵전력을 관할하는 ‘국가지휘국’을 소집한 직후 자국민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며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파키스탄군도 “시간과 장소를 정해 대응에 나서겠다.”라며 인도에 대한 압박 수위를 올렸다. 반면 선거 유세장으로 향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오는 4~5월 총선을 앞둔 모디 총리는 카슈미르 테러 공격에 대한 강경 대응 압박을 받아왔다.파키스탄 역시 경제난을 겪는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배출하기 위해 보복에 나서겠지만 본격적인 전쟁을 원하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런 이유로 현지에서는 파키스탄이 반격에 나서더라도 군사시설이나 민간인 거주지 등 민감한 지역은 피한 채 ‘안전한 곳’을 타격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인도 공습은 전쟁 전조라기보다는 가식적 행동”이라며 “지난해 7월 총선 승리로 막 정부를 출범시켰지만 경제난을 겪는 칸 총리나 총선을 수주일 앞둔 모디 총리 모두 전면전을 벌일 여력이 없다.”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양측이 워낙 첨예하게 맞선 예상치 못한 확전 가능성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 윌슨 센터의 마이클 쿠겔만은 더타임스에 “이번 공습으로 두 핵보유국 인도-파키스탄 간 대립이 새로운 불안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뉴욕타임스도 “양측이 상황을 통제하는데 실패하면 위기 상황이 심각해질 수도 있다.”라고 우려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글로벌 In&Out] 문희상 의장 발언과 한일 관계/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

    [글로벌 In&Out] 문희상 의장 발언과 한일 관계/기미야 다다시 도쿄대 교수

    2018년 10월 초순까지는 김대중·오부치 게이조의 파트너십 선언 20주년 덕분에 그리 나쁘지 않았던 한일 관계가 10월 30일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이후 레이더 문제, 화해치유재단 해산 등 ‘악재’가 겹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국면에 빠졌다. 새 ‘악재’로 문희상 국회의장의 ‘일왕 사과 발언’도 등장했다. 일본 정부는 문 의장에게 사과를 요구했으나 문 의장은 ‘적반하장’이라며 일본의 자세를 비난하고 거부했다. 최근 일본에선 한국에 대한 여론이 북한에 대한 여론보다 더 나쁜 것 같다. 일본 사회의 대한국 여론 악화를 한국 정부가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한국 사회도 둔감해진 듯하다. 우선 문 의장 발언에는 중대한 사실 오인이 있다. 쇼와 천황을 ‘전범’이라고 했지만, 쇼와 천황은 전범으로 지정되기는커녕 천황의 지위를 유지했다. 미·소 냉전이 격화하면서 일본의 정치적 안정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천황은 ‘전범의 아들’이 아니다. 한국 언론은 으레 일본을 ‘전범 국가’, 일본 기업을 ‘전범 기업’이라고 부른다. 이런 말은 중국에서조차 거의 쓰이지 않고 한국과 북한에서만 사용될 정도다. 그런 표현을 당연하게 사용하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다. 문 의장 발언에 대한 일본의 반응에도 이성을 결여한 측면이 있다. 일본 국민에게 천황은 ‘특별한 존재’다. 그러나 한국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일본 국민과 같은 시각을 한국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항일독립운동 영웅으로 존경받는 안중근, 김구가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취급되는 것을 한국이 비난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 의장 발언은 ‘일왕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피해자가 납득하고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 필요하다’는 일본의 진지함을 시험해 본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천황을 모욕했다’는 비판은 본질에서 빗나간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전에도 몇 차례 역사 문제 해결을 위해 ‘천황의 역할’을 기대하는 발언이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직후 ‘일왕이 방한하려면 항일독립운동가에게 사과하라’는 식의 발언이 있을 때마다 천황의 방한 가능성은 더욱 줄었다는 역설이 있다. 한국 내 지일파가 ‘천황 역할’을 기대하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역시 ‘천황은 정치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헌법의 기본 이념이다. 그 점은 한국이 이해해야 한다. 영토·역사를 놓고 한일 관계는 더욱 격랑에 휩싸일 것이다. 우선은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아 갈등을 고조시킬 게 아니라 발언의 진의를 간파하고 전달해야 한다. 정치인들도 오해를 사는 발언을 삼갔으면 한다. 문 의장의 발언을 둘러싼 한일 관계에서 새삼 그런 중요성을 절감했다. 동료로부터 한일 관계는 도대체 왜 이러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일 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적 힘을 키우는 데 노력해 온 필자로선 매우 아픈 말이었다. “서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관계가 나빠도 그다지 곤란한 것은 없다”면 어쩔 수 없다. 분명히 한반도 현상 인식이나 바람직스러운 모습에 대한 한일 간 괴리가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정말 그래도 좋은가. 2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정세가 크게 움직일 것이다. “한일 관계쯤이야” 혹은 “관계 악화 책임은 상대방에 있다”고 포기해도 되는가. 지금이야말로 ‘한국에 있어서 일본’, ‘일본에 있어서 한국’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때가 아닌가. 1945년 이후 한일 관계를 떠받쳐 온 선인들은 지혜를 짜내 고민해 왔다. 나 자신의 마음에서 나오는 통절한 외침이다.(일본인 필자의 요청으로 일왕을 ‘천황’으로 표기하니 양해 바랍니다.)
  • “구호품 달라”는 시민들에 총구 겨눈 베네수엘라 軍

    “구호품 달라”는 시민들에 총구 겨눈 베네수엘라 軍

    마두로, 美 이어 콜롬비아와 외교 단절 펜스, 콜롬비아 찾아 마두로 퇴진 압박베네수엘라 야권이 23일(현지시간)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에 맞서 미국이 제공하는 인도주의 구호물품 반입에 나서면서 콜롬비아와 브라질 접경지역에서 정부군과 야권, 시민들 간 충돌로 최소 4명이 숨지고 300여명이 다쳤다. 베네수엘라는 미국에 이어 콜롬비아와도 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하는 등 베네수엘라를 둘러싼 정국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으로 치닫고 있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브라질 국경과 접한 베네수엘라 남동부 산타엘레나데우아이렌에서 원조물품 반입을 두고 군과 주민들이 충돌해 열네 살 소년을 포함해 최소 2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최소 4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임시 대통령을 자처한 야권 지도자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은 이날 오전 콜롬비아 쿠쿠타 창고에서 보관하던 구호품을 실은 트럭을 베네수엘라 접경지역으로 보냈다. 야권은 브라질 북부 국경도시인 파카라이마에 보관하던 구호품도 트럭에 실어 베네수엘라 국경 검문소로 보냈다. 과이도 의장은 이미 200t에 달하는 구호물품을 이날 반입하겠다며 마두로 정권과 정면대결을 예고했었다. 과이도 의장은 트위터를 통해 구호품을 실은 일부 트럭이 브라질 국경을 통과했다고 밝혔지만 트럭은 베네수엘라 영토에 진입했어도 세관 검문소를 통과하지는 못했다. 마두로 대통령을 엄호하는 정부군은 콜롬비아 접경도시인 우레냐의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산탄데르 국경다리에 몰려들어 장애물을 치우려고 시도한 야당 의원들과 야권 지지자 등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최루탄과 고무총탄을 발포했다. 시위대는 구호품 반입이 원활치 않자 버스를 탈취해 불을 지르기도 했다. 베네수엘라 제2 국경 도시인 산안토니오델타치라에서도 구호품 운반을 도우려고 국경을 넘으려는 시위대를 군이 최루탄 등을 쏘며 해산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이날 야권의 원조물품 반입을 지원한다는 이유를 들어 콜롬비아와의 정치·외교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콜롬비아 외교관들에게 24시간 이내에 자국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이런 가운데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25일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에서 과이도 의장을 만나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압박할 예정이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독도 대포(大砲) 문화재 지정 안하나, 못하나

    독도 대포(大砲) 문화재 지정 안하나, 못하나

    일본의 독도 영유권 도발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독도 동쪽 섬 동도 정상에 자리 잡은 대포(大砲·사진)의 문화재 지정이 10년이 넘도록 표류하고 있다. 24일 문화재청과 경북도 등에 따르면 문화재청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8년 독도 대포(大砲)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으나 좌절됐다. 당시 국무총리와 외교통상부 장관이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으로 전해졌다. 이후 이건무 전 문화재청장과 엄승용 전 문화재청 사적명승국장, 독도단체 및 문화재계 관계자들이 독도 대포의 영토주권 수호 상징성과 보존가치를 고려해 문화재 지정 재추진을 주장(서울신문 2014년 8월 15일자 8면)했으나 지금까지 정부나 지자체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민족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등 독도 관련 민간단체들도 독도 대포의 문화재 지정을 위한 서명과 정부부처 항의 방문 등 범국민연대운동을 계획했으나 실제 추진되지는 않았다. 이런 가운데 독도 대포의 문화재 지정 사업이 정부 주도가 곤란하면 독도를 관할하는 경북도와 울릉군이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경북도가 2008년 독도의 동도 천장굴 주변에 자생하는 수령 100년 이상 된 사철나무를 보호수로 지정하고 2012년 10월 문화재청이 이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538호로 지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에 주목한다. 독도 대포는 1946년 미국에서 제작된 50인치 해상 방어용 함포로, 1978년 우리 해군이 인수해 사용하다 경찰청이 1981년 인계받아 독도 정상에 설치했다. 경찰은 이 대포로 1996년까지 정기 사격 연습을 벌이며 독도 방위의 한 축을 맡았으나 이후 별다른 보호대책 없이 사실상 방치하고 있다. 문화재계 관계자 등은 “독도 대포는 영토 수호의 상징성과 역사적 내력을 함께 갖춘 유산으로서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충분한 요건을 갖췄다”면서 “이제라도 경북도가 독도 대포의 문화재 지정에 적극 나서 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 독도를 일본 제국 시마네현으로 편입 고시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2005년 ‘다케시마의 날’(독도의 일본식 표기)을 제정하고, 2006년부터 매년 2월 22일에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울릉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1891년 일본 검정 교과서 지도…“독도, 일본 영토 아냐 인식”

    1891년 일본 검정 교과서 지도…“독도, 일본 영토 아냐 인식”

    동국대 한철호 교수, 1891년 검정한 ‘중등교육 대일본지지’ 분석 결과일본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직후에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 학교 지도에서는 독도가 일본 영토로 명시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890년 초판을 발행하고, 다음해 일본 정부의 검정을 받은 일본 지리교과서 ‘중등교육 대일본지지’(中等敎育 大日本地誌)를 분석한 결과 독도가 오키나와나 쿠릴열도의 지시마와는 달리 일본이 자국 영토로 표시하지 않았다. 19∼20세기 일본 교과서에 기술된 독도 양상을 연구하는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일본 내무성 지리국 직원을 지낸 하타 세이지로(秦政治郞)가 쓴 ‘중등교육 대일본지지’를 분석한 결과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독도 고유 영토론을 반박할 논거를 찾았다.”라고 24일 밝혔다. ‘중등교육 대일본지지’에는 전 지리국장, 중앙기상대장이 쓴 서문을 수록됐다. 1891년 문부성 검정 절차를 마쳤다. 1896년에는 개정 15판이 출간되기도 했다. 한 교수는 특히 교과서 내용과 지도에 표시된 독도 형태를 면밀히 검토했다. 그는 ‘다케시마(竹島)의 날’을 만든 시마네(島根)현이 속한 산인도(山陰道) 부분의 위치와 경역을 살펴 “오키(隱岐)는 북위 35도 58분에서 시작돼 36도 21분에 이른다. 4개 도서와 79개 소도(小島)로 성립된 일국(一國)이다.”라고 서술했음을 확인했다. 이에 대해 한 교수는 “독도의 위도는 북위 37도 14분”이라면서 “독도가 오키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고, 나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혔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한 교수는 하타의 이러한 시각이 교과서에 실린 지도 ‘대일본국전도’(大日本國全圖)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이 지도에는 일본을 비롯해 주변 국가 ‘조선’과 러시아 ‘가라후토’(樺太·사할린) 일부를 그렸다. 오늘날 오키나와인 류큐(琉球) 제도, 도쿄에서 남쪽으로 약 1000㎞ 떨어진 오가사와라(小笠原) 섬, 홋카이도 동북쪽 쿠릴 열도를 뜻하는 지시마(千島)는 삽도 형태로 표시해 자국 영토임을 표시했다.또 한국 섬으로는 제주도·거문도·우도와 거제도가 있는데, 이외에 한반도 동쪽에 죽도(竹島)와 송도(松島)를 각각 그렸다. 한 교수는 “지도에 국경선이 없어 죽도와 송도가 어느 나라 소속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라후토가 그려진 점을 고려하면 해양 경계를 드러내기 위해 그렸다고 판단된다.”라며 “죽도와 송도는 울릉도와 독도를 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하타가 1891년 펴낸 ‘심상소학교지리역사교과서 생도용’에 실린 동명 지도를 보면 일본 영토와 부속 섬들이 채색돼 있다. 하지만 죽도와 송도를 비롯한 외국 영토에는 색을 칠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연합뉴스에 “교과서 본문과 지도를 종합하면 하타는 죽도와 송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두 섬을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고 조선 영토로 간주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라며 “이 교과서가 많은 학교에서 사용됐다면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인식은 교육을 통해 널리 확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정부, 日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강력항의…“철폐해야”

    정부, 日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 강력항의…“철폐해야”

    정부는 22일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의 날’ 행사를 개최한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행사 철폐를 촉구했다. 정부는 이날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일본 지방 정부가 독도 도발 행사를 개최하고 동 행사에 일본 정부의 고위급 인사가 참석하는 등 일본 측이 독도에 대한 부당한 주장을 지속하고 있는 데 대해 강력히 항의하며 동 행사의 철폐를 다시 한번 엄중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어 “일본 정부는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우리 고유의 영토인 독도에 대한 일체의 도발을 즉각 중단하고, 역사를 겸허히 직시하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시마네현은 이날 오후 마쓰에시에서 제14회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열었고 일본 정부는 행사에 차관급인 안도 히로시 내각부 정무관을 파견했다. 시마네현은 1905년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행정 구역에 편입하는 고시를 했다. 이어 현측은 2005년 3월 들어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한 조례로 만들고 이듬해부터 기념행사를 열어왔다. 이근홍 기자 lkh2011@seoul.co.kr
  • “독도 공부 좀 하시죠. 이해 안 되면 연락 달라” 서경덕, 日의원에 항의서한

    “독도 공부 좀 하시죠. 이해 안 되면 연락 달라” 서경덕, 日의원에 항의서한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독도 망언을 일삼는 일본 신도 요시타카(新藤義孝·자민당) 의원에게 “독도 공부 좀 하시죠”라는 항의서한을 보냈다고 22일 밝혔다. 서경덕 교수는 “지난해 10월 한국 국회의원들의 독도 방문에 대해 신도 요시타카 의원은, ‘한국은 단지 독도를 우리 것이다’라고 말할 뿐, 일본의 영유권 주장 근거에 대해 정당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망언을 일삼아 항의 서한을 보내게 됐다”고 전했다. 서 교수는 서한에 “한국 영유권의 정당성을 정확히 알려 주고자, 독도가 한국땅인 이유에 대한 일본 자료를 함께 동봉했다. 잘 읽어 보고 독도에 관해 공부 좀 하라”며 “읽어봐도 잘 이해가 안 되면 연락 달라. 아주 쉽게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또한 서 교수는 “매년 2월 22일에는 일본에서만 주장하는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오래전부터 진행해 오고 있는데, 하루빨리 폐지하라”고도 일갈했다. 최근 도쿄 하비야 공원 내 시세이회관에 있는 ‘영토 주권 전시관’을 방문한 서 교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거짓 설명을 목격했다. 이에 대해 그는 서한 말미에 “독도에 관한 거짓 홍보관인 ‘영토 주권 전시관’을 어서 빨리 폐관하고, 더 이상의 독도 도발을 멈춰라”며 향후 현명한 처신을 당부했다. 한편 서 교수는 지난해 ‘독도의 날(10월 25일)’을 맞아 일본의 미야코시 미쓰히로 영토담당장관에게 “오키섬에선 독도가 절대 안 보인다”라는 항의 서한을 보냈고, 이는 국내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사설] 한·인도 정상회담, 신남방정책 교두보 돼야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청와대에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 단독 및 확대 정상회담을 갖고 한·인도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두 정상은 한국 정부의 신남방정책과 인도의 신동방정책을 조화롭게 접목해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더욱 내실화하기로 뜻을 모았다. 양 정상은 또 2030년까지 교역액 500억 달러 달성이라는 공동 목표에 협력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양국 간 무역증진을 위한 제도적 개선 등을 추진키로 했다. 모디 총리의 방한은 2015년 이후 4년 만이며, 지난해 7월 문 대통령의 인도 국빈방문에 대한 답방 차원이다. 정상회담 뒤에 이어진 오찬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 등 재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두 정상은 국빈 방한 첫날인 그제에는 서울 롯데월드타워에서 친교 만찬을 함께 했다. 청와대는 “모디 총리가 오래전부터 인도 모델 발전상으로 한국을 제시했다”면서 “문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롯데월드타워를 만찬장소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대통령이 외국 정상을 초청해 청와대 바깥에서 친교 만찬을 주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서 열린 ‘마하트마 간디 흉상 제막식’에도 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참석해 모디 총리와 우의를 다졌다. 문 대통령과 모리 총리의 잦은 교류는 양국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모델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인도는 지난해 11월 문 대통령이 천명한 신남방정책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 인도는 세계 2위의 인구 대국(13억 5000만명)으로 오는 2025년이면 중국을 제치고 인구 1위국으로 올라설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총생산(GDP)은 2조 6000억 달러로 세계 6위지만, 올해 5위가 될 것이 확실시된다. 인도의 시장가치는 계속 높아지고 있다. 특히 미중의 무역전쟁 격화로 G2리스크가 커지고 있어 인도와의 협력이 갈수록 중요하다. 따라서 인도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은 인도의 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면서, 한국의 경제영토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도 힘을 쏟아 한국경제의 새 활력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日에 수탈·학살당한 홋카이도 소수민족 ‘울분의 역사’

    日에 수탈·학살당한 홋카이도 소수민족 ‘울분의 역사’

    지난 15일, 일본 정부가 홋카이도의 소수민족인 ‘아이누 민족’을 ‘원주민’으로 인정하는 법률안을 발의했다. 아이누 문화를 활용한 지역진흥책을 위한 교부금 창설도 법률안에 포함됐다. 아이누 민족은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일본 북부와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는 쿠릴 4개 섬 등 러시아 극동에 거주해 온 소수민족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차별을 받아 왔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철광석을 중심으로 온갖 수탈의 대상이었다. 이번 조치가 아이누 민족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일본 정부의 숨은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다. 쿠릴 4도(일본명 북방영토)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영유권 분쟁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어느 아이누 이야기’는 아이누 민족의 불행한 역사와 되풀이되고 있는 슬픈 오늘을 조명한 책이다. 저자 오가와 류키치는 1935년 조선인 노동자와 아이누 민족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30년대 노동자 모집 광고를 보고 홋카이도로 갔지만, 자신의 역할이 강제 징용된 사람들을 감시, 구타하는 일임을 알고 집단 탈출을 시도한다. 탈출한 그가 은거한 곳이 바로 아이누 마을이었는데, 거기서 오가와 나쓰코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류키치의 아버지는 그를 찾아 한국에서 온 가족을 따라 떠났고, 모자는 아이누 마을에 남겨졌다. 홋카이도는 대대로 아이누 민족의 세거지였고, 윌터 등 서너 개 소수민족이 더불어 살았다. 이곳에 흔히 야마토라 불리는 일본 민족의 마수가 뻗치기 시작한 것은 1870년 이후다. 일본은 홋카이도를 개발해 각종 자원을 ‘개척’이라는 미명 아래 수탈했다. 1930년대 들어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광물 등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주요 기지가 됐고,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에게는 무덤과 같은 곳이 됐다. 자원만 수탈당한 것이 아니다. 숱한 아이누 민족이 전쟁 중에 목숨을 잃었다. 1983년 홋카이도 대학교 동물실험실에서 처음 아이누족의 유골이 발견됐고, 이후 1995년에는 무려 1000여 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대부분 아이누족이었고, 윌터를 포함한 소수민족과 조선 동학군 유골도 이곳에서 발견됐다. 홋카이도 대학이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열도 등에서 발굴해 모아둔 유골로 알려졌지만, 일본 정부는 지금도 함구하고 있다.어머니와 이부(異父) 형 슬하에서 자란 류키치는 아이누 민족의 정체성을 하나씩 몸에 익혔다. 아이누로서의 자각이 강한 사나에를 만나 1962년 결혼하면서부터는 민족에 대한 자부심도 갖게 됐다. 1970년대 초반부터 아이누 민족의 권리 찾기에 본격적으로 나선 그는 1983년 무렵에는 아이누 민족 운동가들과 더불어 홋카이도 대학과 일본 정부에 아이누 민족 유골 수습과 학살 경위를 밝힐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1997년에는 ‘홋카이도구 토인보호법에 기반한 공유재산재판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해 아이누 민족의 권리 보호를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아이누 민족은 일본의 일원이면서도 숱한 박해와 고난의 나날을 보냈다. 류키치는 소수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민족적 차별과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웠던 아이누 민족의 모멸감을 울분을 토하듯 써내려간다. ‘어느 아이누 이야기’는 일본의 소수민족 문제를 세계에 증명하는 하나의 좌표가 될 만한 책이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세계와 연결되는지 ‘어느 아이누 이야기’는 작지만 큰 울림을 전해 준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군사작전 5일 앞두고 日 패망…물거품 된 ‘자주독립의 꿈’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③ 미완의 ‘대한민국’ <끝>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7일 미국 첩보기관 전략사무국(OSS)과 한미 연합 군사작전을 최종 합의했다. 20일까지 한반도에 침투하기로 하고 출동 명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임정으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자주독립을 위해 쏟아부은 노력이 물거품이 돼 버렸다. ●임정에 너무나도 아쉬운 해방 김구(1876~1949)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키려고 했다.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던 프랑스 샤를 드골(1890~1970)이 레지스탕스 부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했듯 임정도 광복군을 모아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미국 OSS와 한반도 진공을 추진하는 동시에 중국 산시성 옌안에 있던 김두봉(1889~1961)의 조선의용군, 소련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일성(1912~1994)의 항일유격대 등과 손잡고 압록강을 넘어가려고도 했다. 임정이 실제로 미국, 중·소 한인부대와 연계해 대일전쟁을 수행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해방 뒤인 1948년 3월 김구가 안창호(1878~1938) 10주기 추도식 때 한 말이다.“선생이여, 우리 조국이 해방된 것을 10분(100%)으로 보면 7분(70%)은 우리 애국 선열들의 피와 땀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최후의 3분(30%)이 우리 힘으로 되지 못한 까닭에 해방에 기괴한 내용이 담기게 됐습니다.” ●대만, 국제사회 미아 임정 도운 유일한 우방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굳어져 가던 1943년 7월. 임정 수뇌부가 중국 국민당 정부 총통 장제스(1887~1975)를 만났다. 김구 등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 달라”고 호소했고, 장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해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회담에서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 미국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1874~1965) 영국 총리의 반대를 물리치고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했다.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훗날 총리가 되는 자와할랄 네루(1889~1964)는 한국을 “아시아 식민지 국가 가운데 열강에게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라고 부러워했다. 카이로 회담은 1914년 이후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고 모인 자리였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장제스가 예외 조항까지 만들어 도왔다. 1932년 4월 윤봉길(1908~1932)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를 보고 우리 민족의 항일 의지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현 대만)는 국제사회에서 ‘미아’가 될 뻔한 임정을 마지막까지 지켜준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중국의 노력에도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열강의 반응은 차가웠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임정을 한반도의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의 독립과 임정의 승인은 별개다. 한국 독립운동 단체들이 분열돼 임정의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 임정은 한반도와 연계가 없다. 중국이 임정을 승인하면 소련도 친소단체를 승인할텐데 이렇게 되면 연합국 내에서 마찰이 생겨날 수 있다.” 처칠도 임정을 인정하면 인도 등 영국 식민지들이 동요할 수 있다고 보고 반대했다. 실망스럽지만 임정 요인들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다.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임정 직원과 가족들이 차례로 귀국했다.●임정, 국제정세 못 읽고 선거불참…한독당 소멸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자 시민들은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김구의 거처이자 임정 청사 역할을 한 경교장(현 강북삼성병원)은 인파로 붐볐다. 1945년 12월 임정 인사들은 서울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환국 행사에 참석했다. 15만명이 몰려와 이들을 축하했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자신 이외의 어떠한 정부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임정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김구는 미 군정 규정을 어기고 임정을 사실상의 정부로 간주하려고 해 갈등을 빚었다. 직접적 도화선은 신탁통치 문제였다. 1945년 12월 소련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 외상이 만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의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임정은 즉각 국무회의를 열고 반탁운동에 나섰다.앞서 임정은 1943년 영국과 미국이 한국을 국제 공동관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뉴스가 나오자 중국 충칭에서 ‘재중자유한인대회’를 열어 반대운동을 펼쳤다. 임정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65)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해방 뒤 임정의 반탁운동은 충칭에서 국제 공동관리에 반대했던 연장선상에 있던 것”이라며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은 곧바로 독립해야 한다는 것이 임정의 확고부동한 믿음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용옥(71) 한신대 석좌교수는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논의한 신탁통치안은 (임정이) 반대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방안을 내놨다”며 “당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 신탁통치를 찬성했어야 했다. 그러면 분단도 일어나지 않았고 1948년 제주 4·3사건과 여순 민중항쟁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美군정, 비밀리에 임정 해체공작까지 임정은 1945년 12월 31일 ‘국자 1·2호’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신탁통치를 강행하려는 미 군정 대신 자신들이 정부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었다. 1946년 1월 1일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1893~1963)가 김구와 언성을 높여 싸운 끝에 상황을 수습했다. 이때부터 미 군정은 임정을 위험한 존재로 보고 협력 대상에서 배제했다. 비밀리에 임정 해체 공작도 개시했다.이후 김구의 여러 정치적 시도는 번번이 무산됐다.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돼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다.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38선을 경계로 국토와 민족이 둘로 나뉘었다. 임정 세력이 주축이던 한국독립당은 “남한만의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며 총선 참여를 거부했다. 제헌의회에서 정치권력을 얻지못한 한독당은 결국 세를 잃고 와해됐다. 당시 국제 정세와 한국사회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한 ‘패착’이었다는 평가가 많다.●주요 임정 지도자들 어두운 말로 주요 임정 지도자들의 말로도 불행했다. 1947년 7월 여운형(1886~1947)은 좌우 합작운동을 펼치다가 살해됐다. 김원봉(1898~1958)은 친일경찰 노덕술(1899~1968)에게 고문을 받은 뒤 월북했다. 그가 자신의 비서였던 중국인 학자 쓰마로(100·미국 거주)에게 보낸 편지에는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하지만 남한 정세가 너무 나쁘고 (일부 우익들이) 나를 (죽이려고) 위협해 살 수가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한국전쟁을 1년 앞둔 1949년 6월 김구도 안두희(1917~1996)의 총탄에 스러졌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과거시험에 번번히 떨어져 이른바 ‘과거 낭인’으로 살았다. 1919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임정 문지기라도 하겠다”고 상하이로 찾아가 명망가들이 떠난 이름 뿐인 정부를 끝까지 지켰다. 임정을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되살리는 데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꿈꾸던 민족단일국가의 염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렇게 대한민국은 ‘미완의 건국’으로 남았다.●‘1919년 임정이 대한민국의 시작’ 분명히 그렇다고 임정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1875~1965)은 취임 직후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썼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에 임정을 세운 1919년을 대한민국의 시작으로 보고 이를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뉴라이트 등은 “대한민국이 1948년 건국됐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아니라) 미국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속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이 ‘건국의 아버지’로 여기는 이승만조차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 16명 가운데 자신을 포함한 5명을 임정 요인으로 채웠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1868~1953), 국회의장 신익희(1892~1956), 국무총리·국방부장관 이범석(1900~1972), 무임소장관 이청천(1888~1957) 등이다. 당시 정부도 한국 독립을 위한 임정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음을 알 수 있다. 1987년 국회는 ‘6월 항쟁’으로 얻어낸 9차 개헌을 통해 대한민국의 법통이 임시정부에 있다는 사실을 재차 천명했다. 어떤 이들은 연합국이 해방을 가져다 줬다고 말한다. 한국이 독자적으로 일제를 이기지 못했고 국제사회도 임정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제패를 꿈꾸며 전 세계로 세를 넓혀가던 강대국 일본을 우리 혼자 막지 못했다고 해서 독립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또 연합국이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배경에는 일본 항복 뒤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그들의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해방은 거져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어느 나라보다도 오래 그리고 치열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 대한민국은 임정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세력의 길고 긴 투쟁의 산물임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베네수엘라 군부, 마두로에 충성

    베네수엘라 군부, 마두로에 충성

    “베네수엘라에서는 도널드 트럼프의 엄포가 통하지 않았다.” ‘한 나라 두 지도자’의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베네수엘라에서 방향타를 쥐고 있는 군부는 또다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정권에 충성을 확인했다. 자유주의적인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 편에 설 것을 종용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고에도 블라디미르 파드리노 베네수엘라 국방부 장관은 19일(현지시간) 국영 TV로 중계된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새 정부를 강요하려면 군부를 죽여야 한다”며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충성과 결사 항전을 재다짐했다. 한 술 더 떠 군부는 미국이 지원한 인도주의 원조의 반입을 저지하기 위해 콜롬비아 국경에 이어 카리브해 해상과 영공에 대한 봉쇄 조치까지 내렸다. 몇 몇 군사령관을 대동한 채 국영 TV에 모습을 드러낸 파드리노 장관은 “베네수엘라에서 대통령이 되려고 시도하는 이들은 우리의 시신을 넘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우리 군은 잠재적인 영토 침범을 막기 위해 국경을 따라 주둔하며 경계태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우리 장교들과 군인들은 마두로 대통령에게 무한한 순종과 복종,충성을 다짐하고 있다”며 “그들은 어떠한 외국 정부의 명령을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군사 개입에 대한 경고인 셈이다. 파드리노 장관은 과이도 의장의 임시 대통령 선언 이후 수차례 과이도가 미국의 지원 아래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정권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과이도 의장은 사면을 거론하며 줄기차게 군부의 정권 이탈을 회유하고 있지만 군부의 별다른 호응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도 전날 베네수엘라 군부의 정권 이탈과 ‘베네수엘라의 새로운 날’을 촉구한 트럼프 대통령의 통첩을 거부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 행태가 흡사 나치와 같다”고 비판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국영TV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은 거의 나치 스타일”이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군부에 명령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군부의 사령관은 누구냐? 마이애미에 있는 트럼프인가?”라고 반문한 뒤 “그들(미국)은 자신들이 우리나라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8일 미국 마이애미 플로리다국제대학에서 베네수엘라 출신 미국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베네수엘라 군부를 향해 “과이도 대통령의 사면 제안을 받아들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과이도 의장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한 트럼프 대통령은 아울러 ‘사회주의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베네수엘라를 포함한 남미 사회주의·공산주의 정권들을 통째로 겨냥하는 동시에 미국 내 진보 진영을 간접 압박하기도 했다. 미국은 과이도 의장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지난달 28일 자국 관할권이 미치는 지역에서 베네수엘라 국영석유기업 PDVSA의 자산을 동결하고 미국인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등 경제제재 조치를 단행하며 마두로 정권을 향한 압박 작전에 착수했다. 이어 마두로 측근 5명도 제재하는 등 그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 등이 제공하는 국제 인도주의 원조 물품의 반입을 두고 마두로 대통령과 대립해온 과이도 의장은 최근 열린 집회에서 오는 23일 구호 물품이 육로와 해상을 통해 반입될 것이라며 마두로 정권과 정면 대결을 예고했다. 원조 물품 반입 여부가 향후 정국 향방을 가르는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베네수엘라 여야는 지난 7일 이후 미국 등이 지원한 인도주의적 구호 물품을 두고 팽팽히 맞서고 있다. 베네수엘라 군은 야권의 인도주의 원조 물품 반입을 막기 위해 서부 팔콘 주와 카리브해 원조물품 저장지인 네덜란드령 쿠라사우·아루바·보네르 등 3개 섬과 통하는 해상과 상공을 봉쇄했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제공한 원조 물품은 베네수엘라 정부의 반입 차단으로 현재 베네수엘라와 국경이 접한 콜롬비아 쿠쿠타와 브라질 북부, 카리브해의 네덜란드령 쿠라사우 섬 등의 창고에 쌓여 있다. 베네수엘라의 블라디미르 킨테로 해군 중장은 “팔콘 주와 3개의 섬 사이를 오가는 선박과 항공기의 운항이 금지된다”며 봉쇄 사실을 강조했다. 과이도 의장을 비롯한 야권은 많은 국민이 식품과 의약품,기초 생필품 부족 등으로 고통받는 만큼 외국의 원조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날 여러 건의 트윗 글을 올려 국경 검문소를 지휘하는 군 간부들을 호명하며 마두로 대통령을 포기하라고 촉구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일부 남미 정상들이 이반 두케 콜롬비아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들여 야권이 제시한 구호물품 반입 시한을 하루 앞둔 22일에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국경 지역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브라질도 인도주의 원조가 베네수엘라인들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미국과 협력하겠다며 실제적인 구호물품 반입과 배포는 베네수엘라 야권에 맡길 방침이라고 밝혔다. 미국과 야권은 표면적으로 경제난에 따른 베네수엘라 국민의 고통을 덜기 위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원조를 통해 마두로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과 군부 이탈을 내심 바라고 있다. 반면 마두로 정권은 미국 등 외세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며 콜롬비아와의 국경 다리에 화물 컨테이너 등 장애물을 설치하고 구호 물품 반입을 막고 있다. 마두로 정권은 “미국이 각종 제재로 베네수엘라에 300억 달러(약 33조 8000억원)가 넘는 손실을 안겨놓고선 소량의 인도주의 원조를 보내는 것은 이중적이며 ‘정치적인 쇼’”라고 비판하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치러진 대선에서 68%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지만, 야권은 유력 후보들이 가택연금과 수감 등으로 선거에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 치러진 대선은 무효라며 마두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과이도 의장은 지난달 23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현장에서 자신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언, 베네수엘라에서는 사상 초유의 ‘두 대통령 사태’로 촉발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해 영국, 프랑스, 독일 등 50여 서방국은 과이도 의장을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 중국, 이란 등은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국제 대리전’ 양상도 띠고 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글로벌 In&Out] 쿠릴열도 분쟁과 러일 관계/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쿠릴열도 분쟁과 러일 관계/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동아시아 국가 중 러시아와 가장 특별한 관계가 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러시아와 일본은 2~3번이나 전쟁을 치렀다. 그로 인해 영토 문제를 비롯, 서로 아프고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이 생겼다. 그 문제 가운데 현재 러일 관계 개선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쿠릴열도 문제다. 캄차카반도와 홋카이도 사이에 걸쳐 있으며, 오호츠크해와 태평양을 가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56개의 섬으로 구성된 쿠릴열도에 러시아인들이 처음 들어간 것은 1640~1641년이다. 1708년 표트르 1세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찾는 탐험가에게 쿠릴열도의 원주민들을 러시아의 국적에 편입하라는 명령을 내려 쿠릴열도의 러시아 개척이 시작됐다. 이 작업은 18세기 중엽에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데, 18세기 후반 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에서 일본은 사할린섬을 러시아령으로 인정하고, 러시아는 쿠릴열도 전체가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패배 후 맺은 체결한 포츠머스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에 한국 식민화의 길을 열어 주었고, 사할린섬의 남부를 빼앗겼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3년 테헤란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유럽 공격을 약속했고, 소련은 대일 참전의 조건으로 일본이 빼앗은 사할린 남부와 추가로 쿠릴열도를 요구했다. 1945년에 열린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대일 참전을 재확인했고, 재차 사할린 남부와 쿠릴열도를 요구했다. 미영 양국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소련은 약속대로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쿠릴 상륙작전은 만주 공격, 한반도 해방과 남사할린 작전 다음으로 개시됐다. 1945년 8월 15일 캄차카 주둔 소련군은 슘슈를 비롯한 쿠릴열도 북쪽에 있는 여러 섬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8월 18일 슘슈섬에 상륙했다. 쿠릴열도 주둔 일본군 제91사단장인 쓰쓰미 중장은 8월 15일 일본 항복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 휘하에 있는 부대들에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상륙한 소련군 부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슘슈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큰 전투였다. 소련군은 약 1500명, 일본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슘슈를 점령하고 다음 섬인 파라무시르섬으로 넘어가려던 소련군은 상륙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기습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고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소련군 공격으로 일본군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8월 21일 쓰쓰미 중장으로부터 쿠릴열도 북부에 주둔한 일본 부대들이 투항한다는 연락이 왔다. 8월 22일 오후 2시부터 일본군은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고, 소련군은 8월 29일 쿠릴열도 북부를 점령했다. 이와 함께 홋카이도 상륙작전을 준비 중이었던 태평양함대사령부가 모스크바로부터 홋카이도 상륙작전을 취소하고 쿠릴열도 남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28일 소련군 부대들이 9월 5일까지 쿠릴열도 전체를 점령했다. 미국과 소련은 ‘일반 명령 제1호’의 내용에 합의했으며, 미국은 모든 섬들의 점령을 소련군에 맡겼다. 그 후 1951년 9월 8일 일본은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쿠릴열도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했다. 조약 체결 당시 일본 국회는 쿠릴열도의 남부도 쿠릴열도에 포함돼 있다고 주장했으나 1956년 2월 의견을 바꾸고, 쿠릴열도 남부에 있는 군도가 홋카이도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쿠릴열도 분쟁의 시작이다. 1956년 10월 19일 소일 양국이 공동선언을 선포함으로써 국교가 회복됐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일본은 다시 쿠릴열도 전부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소일 평화조약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 러·일관계의 미래와 쿠릴 열도 영토분쟁

    러·일관계의 미래와 쿠릴 열도 영토분쟁

    동아시아 국가 중에 러시아가 가장 특별한 관계를 가진 나라는 일본이다.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러시아와 일본은 2~3번이나 전쟁을 치렀고 그로 인해 영토 문제를 비롯한 서로 아프고 아직까지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많이 생겼다. 현재 러일관계 개선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있는 것은 쿠릴 열도 문제이다. 이번에는 그 문제의 역사를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쿠릴 열도는 캄차카 반도와 홋카이도 사이에 걸쳐 있으며 오호츠크해와 태평양을 가르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약 56개의 섬이다. 여기에 러시아인들이 처음에 들어온 시기는 1640~1641년이다. 러시아 기록에 따르면 1639년 이반 모스크비틴을 수장으로 한 카자흐 원정대가 오호츠크 해에 진출하였으며 쿠릴 열도에 상륙했고 원주민들과 교역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쿠릴 열도의 인구는 주로 아이누족을 비롯한 여러 원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국가가 따로 없었다. 1708년 표트르 1세가 일본으로 가는 길을 찾는 탐험가에게 쿠릴 열도의 원주민들을 러시아의 국적에 편입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쿠릴 열도의 러시아 개척이 시작되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18세기 후반, 일본인들도 홋카이도 북부와 쿠릴 열도 남부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해 러시아와 충돌하였다. 전쟁을 피하려던 러시아 외상 고르챠코프와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에노모토가 상트페테르부르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은 사할린 섬을 러시아령으로 인정하고, 러시아는 쿠릴 열도 전체가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하였다.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후 새로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에 의한 한국 식민화의 길을 열어주었다. 더불어 일본은 사할린 섬의 남부를 얻어 상트페테르부르그 조약을 사실상 파기되었다. 10월 혁명 발생으로 1918년 내전 중인 러시아의 상황을 이용해 일본은 1918년 4월 5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병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는데 붉은 군대와 한인(韓人)의 항일부대 등의 저항으로 1922년에 철수했다.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던 백위파 정권은 무너졌다. 또한 일본은 1920년 ‘노령 거주 일본인들의 생명과 그 재산의 보호’라는 구실을 내세워 사할린 섬의 북부를 점령했다가 1925년에 이르러 러시아에 반환하였다.1930년대부터 일본은 쿠릴 열도를 소련 캄차카나 미군 기지를 공격할 수 있는 거점으로 만들기 위하여 비행장과 해군 기지 등 시설을 건설했다. 1941년 12월 7일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일본 함대는 쿠릴 열도 남부에 위치한 이투루프 섬에서 출발했다. 진주만 공격 다음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소련 대사를 만나 대일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한 근거이기도 하다. 12월 11일, 소련은 2차 대전 참전을 검토하기 시작하였고 미국측도 그 요구를 계속 반복하였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간 독일도 1942년 7월 10일 일본 정부에 독소전쟁 참전을 요구했으나 태평양전쟁에서 피해를 당하는 일본은 이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소련 대일전쟁 참전은 결국 1943년 12월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약속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유럽에서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고 소련은 대일참전의 조건으로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빼앗은 사할린 남부, 그리고 쿠릴 열도를 요구하였다. 독일 패전 직전 1945년 2월 4일에 얄타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대일참전의 계획을 재확인하였고 독일 패전 2~3개월 이내 대일참전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소련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빼앗긴 영토 회복과 별도로 쿠릴 열도가 소련에 양도될 것을 요청하였다. 미영 양국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으며 독일을 패배시킨 소련은 유럽에서 부대를 극동지역으로 빨리 옮기고 약속대로 1945년 8월 9일 일본에 선전포고했다.쿠릴 상륙 작전은 만주 공격, 한반도 해방과 남사할린 작전 다음으로 개시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제2극동전선군 참모부가 캄차카 방어구 사령관에게 일본이 항복할 예정이기 때문에 슘슈를 비롯한 쿠릴 열도 북쪽에 있는 여러 섬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소련군이 쿠릴 열도 주둔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준비하고 8월 18일 소련군 부대들이 쿠릴 열도 북단에 위치한 슘슈 섬에 상륙했다. 쿠릴 열도 주둔 일본군 제91사단장인 츠츠미 후사키 중장은 8월 15일 항복 명령을 받았음에도 그 휘하에 있는 부대들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상륙한 소련군 부대들을 공격했다. 슘슈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큰 전투였으며 이에 소련군은 약 1500명, 일본은 약 1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8월 19일 ‘자위 행동이라도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은 츠츠미 중장은 시간을 벌기 위해 항복이 아닌 정전(停戰)을 제안하였으나 소련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츠츠미 중장은 결국 8월 20일에 항복하려고 했지만, 일본군이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슘슈를 점령하고 다음 섬인 파라무시르 섬으로 넘어가려던 소련군은 상륙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기습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소련군 공격으로 일본군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졌고 8월 21일 츠츠미 중장으로부터 쿠릴 열도 북부에 주둔한 일본 부대들이 투항한다는 연락이 왔다. 8월 22일 오후 2시부터 일본군이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하였다. 8월 29일 쿠릴 열도 북부가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와 함께 홋카이도 상륙 작전을 준비 중이었던 태평양함대 사령부가 모스크바로부터 홋카이도 상륙작전을 취소하고 쿠릴 열도 남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28일 오전 3시 15분 청진 상륙 작전에 참여한 레오노프 해군대좌가 이끄는 부대가 쿠릴 열도 남부에 있는 이투루프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 무장해제에 착수하였으며 9월 5일까지 쿠릴 열도 전체가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소련군의 이러한 전투 행동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 간에 ‘일반 명령 제1호’의 내용을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패배시키고 급속도로 남하하는 소련을 막고자 트루먼 미 대통령은 8월 15일 소련 최고사령관인 스탈린에게 일본 항복 절차를 규정한 ‘일반 명령 제1호’의 초안을 보냈다. 이 명령의 내용을 검토한 스탈린은 미국이 제안한 한반도 분할 점령 등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트루먼에게 소련군 책임 지대에 홋카이도 북부와 모든 쿠릴 열도를 추가할 것을 요청했다. 트루먼은 8월 18일에 보낸 답변에서 모든 쿠릴 열도를 소련군 책임 지대에 포함하는 것에 동의했으나 홋카이도를 비롯한 일본 본토에 속한 모든 섬들의 점령은 맥아더 장군이 담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미국 대답을 받은 스탈린은 미국측의 동의를 재확인한 후 8월 22일 홋카이도 상륙 작전 준비를 중단하고 쿠릴 열도 남부에 진출하라는 명령을 보냈다. 일반 명령 제1호는 항복문서에 서명한 일본 지도부에게 전달되었으며 대본영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951년 9월 8일 일본은 연합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쿠릴 열도에 대한 …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중국이 초대받지 못한 점, 일본 재군사화를 막을 장치가 없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어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회는 쿠릴 열도의 남부도 얄타 협정에 언급한 쿠릴 열도에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1956년 2월에 의견을 바꾸고 쿠릴 열도 남부에 있는 군도(群島)가 쿠릴 열도가 아니라 홋카이도의 일부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스탈린 사망 후 외교노선을 바꾼 소련은 일본과의 별도의 평화조약 협상에 들어갔으며 일본을 미국 영향권에서 부분적으로라도 탈피시키기 위해 조약의 대가로 시코탄 섬과 하보마이 섬을 양도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소일 양국은 1956년 10월 19일 공동선언을 선포함으로써 양국 국교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개입으로 일본은 다시 쿠릴 열도 전부를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소일 평화 조약의 협상이 결렬되고 말았다. 러시아와 일본은 현재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 러시아와 일본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2016년 푸틴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아베 총리와 만나서 쿠릴 열도 남부에서 공동경제활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일본 방문단이 2017년 6월에서 2018년 10월에 걸쳐 3번이나 쿠릴 열도를 방문하였으며 러일 무역 규모도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양국 정부는 2018~2019년을 ‘러시아에서 일본 해’, ‘일본에서 러시아 해’로 지정했으며 러일 간의 문화 교류가 전대미문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방영토’가 빨리 돌려받을 수 있다는 일본 매체가 조성한 일본 국내 분위기 속에서 아베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블라디미르 푸틴과 만났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러시아인에게 반일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러일 평화 조약을 협상하기 전에 일본은 반드시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를 인정해야 한다고 일본 측을 강하게 비판한 것도 일본인들로 하여금 큰 실망을 느끼게 하였다. 쿠릴 열도 남부를 포함한 쿠릴 열도의 전체가 러시아 영토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도 변한다는 것도 객관적 사실이다. 미국 경제 제재로 러시아의 경제가 발전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그 대책으로 연금을 받는 연령을 높이는 연금 제도 개혁 등 수단을 택한 것에 대해 국민의 불만이 높이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정부에서도 영토를 양도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함으로써 경제를 살리자는 목소리도 점차 커지고 있다. 러시아가 일본에 ‘북방열도’를 돌려줄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발전되고 러시아의 경제 발전 속도가 계속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러한 가능성이 전무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글 사진: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
  • [밀리터리 인사이드] 적자 1.6조…‘군인연금 개혁’은 왜 미완성인가

    [밀리터리 인사이드] 적자 1.6조…‘군인연금 개혁’은 왜 미완성인가

    2050년 군인연금 국가보전금 ‘3조 7000억원’국회 예산정책처, 더 내고 덜 받는 개혁안 제시軍 “짧은 정년 등 특수성 무시한 처사” 반발제대군인 취업대책 등 노후 보장 함께 논의해야 정부가 국민연금 개혁을 추진하면서 덩달아 ‘군인연금’ 개혁에 대한 국민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지난해 말 정부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40~50%, 보험료율 9~13%, 기초연금 인상 등을 조합한 4개 안을 국민연금 개혁안으로 제시했습니다. 국민연금 보험료 부담률을 높이는 방안이 포함되자, 국민들의 비판이 거세졌습니다. 그 시선 중 일부는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 등 직역연금으로 옮겨갔습니다. 2015년 공무원연금과 사학연금 등 다른 직역연금은 진통 끝에 ‘더 내고 덜 받는’ 형태의 구조 개혁을 했지만, 군인연금은 2013년 이후 아무런 개혁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비판이 군인연금에 집중됐습니다. 그렇지만 군 조직을 무작정 비판하기 전에 우리가 꼭 짚어봐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군인’이라는 특수성과 정년, 기금관리 전문성 부족 등 제도적인 문제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건설적인 결과를 도출하려면 기금운용 개혁뿐만 아니라 제대군인 지원제도 전반을 논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개선책을 고민해야 합니다. ●작년 군인연금 수급자 1인당 국가보전금 ‘1600만원’ 국회 예산정책처는 지난해 11월 ‘2018~2050년 군인연금 재정전망’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결론부터 간략히 말하자면 현 군인연금 지출구조를 유지할 경우 지난해 1조 5819억원이었던 적자 규모가 2050년 2배를 넘는 3조 7114억원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추산이 나왔습니다. 당장 재정 개혁을 하지 않으면 국민 부담이 크게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입니다.군인연금은 국가가 지급보장하도록 돼 있기 때문에 재정수지 적자는 전액 ‘세금’으로 보전해야 합니다. 군인연금 재정 적자는 내년 1조 7217억원에서 2025년쯤 2조원을 넘어선 뒤 2030년 2조 4560억원, 2040년 3조 1074억원 등으로 증가 추세를 보입니다. 군인연금 수급자 1인당 국가보전금은 지난해 평균 1758만원에서 연평균 1.6%씩 늘어 2050년에는 2940만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재정개혁을 한 공무원연금은 2017년 기준 8.25%인 기여금 부담률(보험료율)이 2020년까지 9%로 높아집니다. 공무원연금 보험료는 정부가 같은 금액을 더 부담합니다. 반면 연금 가산율(수익률)은 2015년 1.9%에서 2035년까지 1.7%로 낮아지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래서 공무원연금의 연간 적자 규모는 2015년 3조 727억원으로 고점을 찍은 뒤 지난해 2조 2820억원으로 크게 개선됐습니다. 사학연금도 공무원연금과 같은 구조입니다. 하지만 군인연금은 기여율 7%, 연금 가산율 1.9%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더 내고 덜 받는’개혁하면 13조 7000억 절감 예산정책처는 3가지 ‘개혁 시나리오’를 내놨습니다. 우선 군인연금 기여금 부담률을 2020년부터 2024년까지 9%로 인상하고 이후 2050년까지 9%를 유지하는 방안입니다. 두 번째는 수급자의 연금액을 2020~2024년 한시적으로 동결하고 이후부터는 물가상승률만큼 인상하는 방안입니다. 세 번째는 70% 수준인 유족연금 지급률(2013년 이후 임용자는 60%)을 2020년부터 임용시점과 관계 없이 60%로 낮추는 겁니다. 사실상 ‘더 내고 덜 받는’, 상당한 고통을 수반해야 하는 개혁안입니다. 시뮬레이션한 결과 모든 방안을 함께 사용하면 연평균 15.3%의 재정적자가 절감돼 효과가 가장 컸습니다. 2050년 재정적자 규모도 3조 2450억원으로, 현행 방식을 유지할 때보다 무려 3700억원이나 줄어듭니다. 또 2050년까지 누적 재정 절감액은 13조 7019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그러나 군이 이런 ‘더 내고 덜 받는’ 개혁에 동의할 리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국민들은 조금이라도 개혁시점을 앞당기자고 주장하지만, 대다수 장교와 부사관들은 ‘군의 특수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불만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선 우리나라의 ‘연령 정년’은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유독 짧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소령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연령 정년은 45세로 미국(60세), 프랑스(59세), 일본은(55세), 캐나다(55세 또는 60세 중 선택)에 비해 훨씬 빠릅니다. 외국의 소령 이하 장교는 대부분 50세 이후 정년이 설정돼 있지만 우리나라는 한창 돈을 벌어야 할 43~45세에 조기 전역하게 됩니다. 군인연금은 최소 가입기간이 19년 6개월입니다. 그 전에 제대하면 ‘일시불’을 선택해야 하는데다, 어렵게 연금 수급 자격을 얻어도 정년이 빠르면 연금액이 크지 않습니다. 참고로 계급별 연령 정년은 부사관의 경우 하사 40세, 중사 45세, 상사 53세, 원사·준위 55세입니다. 장교는 대위 43세, 소령 45세, 중령 53세, 대령 56세, 소장 59세, 중장 61세, 대장 63세입니다. ●강제 전역 한 해 6000명…연금이 유일한 희망 대부분 60세 정년을 채우는 일반 공무원과는 격차가 큰 것입니다. 여기에 ‘근속 정년’도 있습니다. 근속 정년은 위관급 15년, 소령 24년, 중령 32년, 대령 35년입니다. 이런 이유로 장교와 부사관 중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 해 군복을 벗는 인원이 6000명에 이릅니다. 군이 반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연금 수익에 기댈 수 밖에 없는 ‘불안한 미래‘ 때문입니다. 2016년 기준 장기복무 제대군인의 취업률은 54.4%에 그쳤습니다. 절반이 사회에 나오자마자 ‘실업자’로 전락한다는 겁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의 재취업률이 90%를 넘는 점을 감안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입니다. 어렵게 취업한 이들도 절반이 비정규직이고, 전체 취업자 평균 연봉은 2015년 기준 2700만원에 그쳤습니다. 군이 선뜻 연금개혁에 동의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겁니다. 낮은 재취업률과 짧은 정년 때문에 군의 반발이 커졌고 군인연금 개혁 논의는 ‘2013년 개혁안’을 마련한 2010년 이후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나라를 위해 일한 군인들의 호구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개혁 논의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따라서 제대군인 취업 지원 예산을 확대하고 인적 자원 활용 확대 방안을 서둘러 마련해야 합니다.●연금관리기구 마련 등 연금수익 제고방안 추진해야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힘든데 군인의 앞날까지 걱정해야 하느냐’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매도에 앞서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부임지가 늘 바뀌고, 수시로 이삿짐을 싸야 하며, 영토 경계를 위해 노동시간 단축은 꿈도 못 꾸는 이들의 노고도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정부의 관심도 필요합니다. 군인연금은 공무원연금, 사학연금과 달리 직역연금 중 유일하게 ‘연금관리공단’이 없습니다. 사학연금이 적립금으로 벌어들이는 수익률은 2017년 기준 9.2%였지만 군인연금은 3.0%에 그쳤습니다. 연금전문가들이 기금을 운용해야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데 지금은 국방부, 보훈처 등으로 운용·관리주체가 분산돼 있어 효율적인 관리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대책도 정부가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② 일본의 패망1910년 한반도를 차지한 일본은 1931년 중국 만주를, 1937년 중국 대륙을 침략하며 제국주의 팽창 야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까지 점령한 뒤 “독일과 중동에서 만나겠다”며 버마(현 미얀마)·인도 전선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지막 정착지인 중국 충칭에서 당·정·군 체제를 갖춘 뒤 ‘전쟁 괴물’이 된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해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찾아왔다.●임정, 1945년 2월 28일 독일에도 선전포고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이 선점한 중국 내 이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다.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이후 일본은 제조업 가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41년 12월 미국의 해군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석유금수 조치를 풀어 보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시 두 나라 간 군사력 차이를 감안할 때 진주만 공습은 무모한 결정이었다. 미국은 즉각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하며 ‘태평양전쟁’(1941~1945)에 나섰다. 이 전쟁은 임정이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광복군을 양성해 뒀다가 일본이 중국, 미국과의 전쟁에 나서면 이들을 도와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정은 일제가 진주만을 공격한 직후 주석 김구(1876~1949)와 외무부장 조소앙(1887~1958) 명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3000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해 중국과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기에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하한다.” 임정은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했다.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 회의에 참가하려면 3월 1일 이전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해 하루 전인 2월 28일 발표했다.●中 통제받은 광복군, 9개 조항 행동준승 논란 1940년 9월 태어난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지원하던 또 다른 한인 부대였던 조선의용대 대원 상당수가 1941년 3~5월 본진을 이탈해 화베이 지역으로 떠나자 국민당 정부는 당황했다. 같은 해 11월 중국은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을 전달했다. 중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 광복군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었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이현희(1937~2010) 전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 준승은 광복군이 사실상 중국의 고용군이 된다는 것으로 매우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다. 중국이 임정을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외국 군대를 통제하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당시 한인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으로부터 충분히 신뢰를 얻을 만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에 어느 정도 간섭이 불가피했다는 반론도 있다. 임정은 중국의 준승 명령에 분개해 청사를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1875~1965)과 협의하기도 했다. 결국 중국은 우리 측의 지속적인 요구로 1944년 8월 광복군 통제권을 임시정부에 돌려줬다.●광복군, 한지성·문응국 등 임팔전투 투입 일본은 1942년 1월 영국의 식민지 버마를 침공했다. 인도에 주둔해 있는 영국군이 즉각 대응에 나섰는데, 이를 버마 전투(1942~1945)라고 한다. 영국군은 영어와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광복군은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면전구공작대’를 꾸렸다. 인도와 버마 전선에서 활동하는 공작부대라는 뜻이다.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다. 한지성(1913~?)과 문응국(1921~1996) 등 9명이었다. 공작대는 영국군에게서 심리전 교육 등을 받고 1944년 초 임팔전선에 투입됐다. 임팔은 인도와 버마의 접경지역으로 열대밀림 산악 지대다. 광복군은 1945년 7월 일본군이 버마에서 완전히 패해 철수할 때까지 1년 넘게 영국군을 도왔다. 1945년 9월 이들은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로 무사히 복귀했다. 한지성의 증언이다. “우리 공작대는 언제고 전투할 수 있도록 무장한 뒤 적(일본군)과 가장 가까운 진지에서 일본어로 방송을 했다. 선전문을 제작해 살포하고 일본군 문건을 번역하며 포로를 심문했다.”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도 추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1942~1945)과 함께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 지하공작에 나서는 것이었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을 국내에 잠입시켜 여러 활동에 나서기로 했는데, 이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렀다. 1945년 4월 OSS 요인들이 충칭의 임정 청사로 찾아와 작전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고 김구는 이를 승인했다. 영화 ‘군함도’(2017)에서 독립운동 인사를 구출하고자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섬(군함도)에 잠입한 박무영(송중기 분)이 광복군 소속 OSS 요원이다.OSS는 같은 해 5월부터 광복군 내 엘리트들을 차출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대표적인 이들이 훗날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1920~ 2011)과 사회운동가로 활약한 장준하(1918~1975)다. 이들은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김준엽은 1987년 개헌 당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조문을 삽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준하는 박정희(1917~1979)의 독재에 반대하다가 1975년 의문사했다. ●승전국 지위 확보·강대국 간섭없이 독립 목표 임정은 미군의 지시로 국내에 진격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8월이 되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8일에는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국을 점령했다. 당시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보다 소련 참전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주변의 모든 나라가 적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은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도 결국 무산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당시 임정은 한반도에 잠입해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면 강대국의 간섭 없이 한반도 독립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며 “일본이 일주일만 늦게 항복해 광복군이 한반도에 참전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일부 학계에서는 광복군이 미군과 공동 작전에 참가했더라도 그 수가 워낙 적어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그래도 임정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일본과의 전쟁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외세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무의미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던 1944년. 임정은 좀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새 나라의 밑그림을 그려야 했다. 1943년 ‘카이로선언’(미·영·중이 일본 문제 논의)으로 조선 독립을 보장받은 시기였기에 이를 반영해 헌법을 개정했다. 주석(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되 의원내각제를 가미해 절충적 정부를 구성했다. 교육과 직장, 노약자 부양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고 파업권도 명시했다. 사회민주주의 형태의 국가다. 이는 1941년 임정이 조선민족혁명당과의 합작을 앞두고 좌우를 아우르기 위해 내놓은 ‘건국강령’의 영향이 컸다. 건국강령을 지은 이가 ‘사민주의자’ 조소앙(1887~1958)이다.●조소앙의 삼균주의, 건국 이념 기초로 작용 일본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19년 3·1운동 뒤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임정을 정식 국가로 승인해 줄 것을 호소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한독당은 1940년 5월 우파 통합정당의 이름으로 계승돼 임정의 여당이 됐다. 그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모두 균등해지려면 정치와 경제, 교육의 세 가지 조건이 동등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삼균주의인데, 훗날 건국강령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한국전쟁 때 납북 해방 뒤 김구와 함께 한독당을 이끌었고, 194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창당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고득표율로 당선됐지만 6·25전쟁 때 납북됐다. 만약 임정의 ‘1944년 헌법’대로 해방 정부가 꾸려졌다면 지금쯤 우리는 독일이나 스웨덴을 모델로 한 사민주의 국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조석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1948년 제헌헌법은 건국강령의 경제조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쳐 이룬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신장자치구 주민 250여만 명 움직임 낱낱이 추적하는 중국

    신장자치구 주민 250여만 명 움직임 낱낱이 추적하는 중국

    중국 서북부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주민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중국 정부의 감시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안면(얼굴)인식 관련 기술을 보유한 중국 정보기술(IT)업체가 분리 독립 움직임을 보이는 신장자치구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감시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이터베이스(DB)가 온라인 상에 노출됐기 때문이다.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시의 얼굴인식 기술 관련 IT업체인 센스네츠 테크놀로지가 자사의 기술을 활용해 위구르족 주민 250여만 명의 동선을 낱낱이 추적해 구축한 DB를 중국 당국과 공유했다고 로이터통신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이 17일(현지시간) 인터넷 보안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센스네츠 모기업인 넷포사 테크놀로지는 신장자치구를 포함해 중국 전국 성(城)·시(市)·자치구 대부분의 지역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네덜란드 인터넷 보안 비영리단체 GDI 재단의 빅터 게버스 연구원에 따르면 센스네츠는 24시간 동안 일정 범위의 위치추적 시스템(GPS) 좌표를 수집해 DB화했고 이 DB를 통해 포착된 위치정보는 다수의 위구르족 이름과 일치했다. 특히 DB에는 신장자치구 주민 250여만명의 이름, ID 주소, 생년월일, 위치정보 등이 포함돼 있고 신장자치구 내 670만 곳에 이르는 위치정보 체크 지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들 위치정보 체크 지점은 ‘모스크’ ‘호텔’ ‘인터넷 카페’를 비롯해 이슬람교도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며, 이곳에는 첨단 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게버스 연구원은 센스네츠가 지난해 7월 이후 6개월 동안 이 DB를 인터넷에 공개해왔다며 즉각 GDI재단 명의로 사태의 심각성을 센스네츠 측에 알렸다고 밝혔다. 그는 “센스네츠 DB가 중국 정부의 위구르족과 소수민족을 추적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DB가 인터넷 상에 아무런 제한 없이 노출돼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해당 DB 분석을 통해 이 회사가 중국 전역에 걸쳐 설치한 1039개의 기기들이 사람들을 추적해 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센트네츠 측은 답변을 하지 않은 채 DB에 대한 보안 조치를 취했다고 로이터가 전했다. 중국 정부는 지난 2009년 신장위구르의 성도(省都)인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일어난 위구르족 폭동사건과 2013년과 2014년 잇따라 발생한 이슬람교도 테러 사건 이후 이 지역에 대한 통제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 더군다나 2017에는 시진핑(習近平) 들슷 국가주석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프로젝트의 핵심 기점인 신장자치구 지역 내 분리 독립 세력들이 이슬람국가(IS) 등 이슬람 테러그룹과 연계되면 일대일로 사업이 위험해진다는 이유로 집단 수용소를 설치했다. 지난해 8월 유엔인권위원회가 제출한 수용소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이 곳에는 1000개가 넘는 강제 수용소가 있으며 100만여명의 위구르인들이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구금돼 있다. 이들은 수용소에서 부실한 식사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고문을 당했다. 중국 정부는 중국어와 유교경전, 반이슬람 종교사상, 사회주의를 가르치고 시 주석에 충성을 강요했다. 특히 중국 당국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인공지능(AI) 기술을 적용한 얼굴인식 카메라, ‘비둘기 드론’ 등 첨단 감시 장비를 동원해 신장자치구 이슬람교도들에 대한 감시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정부가 신장자치구 내 위구르족을 비롯한 소수민족 이슬람교도를 대상으로 재교육 수용소를 운영하고 엄격한 감시활동을 하는 등 인권 탄압을 하고 있다면서 국제인권단체들과 서방국가들은 강력히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터키 정부가 지난 9일 음악가 겸 시인 압둘라힘 헤이트가 수용소에 복역하던 중 사망했다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또다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하미 악소이 터키 외교부 대변인은 “100만명이 넘는 위구르족이 수용소에서 고문과 세뇌에 노출된 것은 더이상 비밀이 아니다”며 중국에 강제 수용소를 폐쇄하라고 촉구했다. 중국 당국은 이 시설이 테러리즘과 극단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며 인도적 직업교육센터라고 반박했다. 중국 전체 면적의 17%를 차지하는 신장자치구는 러시아를 비롯해 인도, 몽골,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석유·석탄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전략적 요충지다. 중국은 1949년 군대를 보내 이곳을 점령한 뒤 중국 영토로 편입한 이후 중국 한족을 대거 이주시켜 이 지역을 중국화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신장자치구 전체 인구의 45%에 해당하는 1100여만 명이 위구르족이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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