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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매일 역사성과 새 좌표 세미나­주제발표 내용

    ◎국난때 정론 편 대표적 민족지 오는 11일 ‘대한매일’로 역사적인 새 출발을 하는 서울신문이 3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대한매일의 역사성과 새 좌표’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갖고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했다. 이날 발제자들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 당시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항일구국의 기치를 드높였던 민족정론지였다고 평가하고 오늘날 또 다른 국난기를 맞아 그 같은 정신의 부활은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새로운 천년,새 세기의 지평에서 공익언론·구국언론으로서 대한매일의 부활은 1세기 전 선각자들이 이루지 못했던 꿈과 도전을 실현시킬 계기가 될 것임을 전망했다. 이날 발표된 ‘대한매일신보 창간 당시의 민족운동과 시대적 상황’(신용하),‘대한매일신보의 논조와 민족 독립운동’(정진석), ‘대한매일의 정체성과 새 좌표’(김삼웅) 세 편을 요약 소개한다. ◎창간 당시 시대적 상황/애국세력 신민회 본부 사내에 설치/국채보상 일어나자 전국적 캠페인/愼鏞廈 서울대 교수·사회학 구한말 ‘을사5조약’의 늑결(勒結)로 외교권 등 국권을 상실한 뒤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한 신문이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이하 대한매일)였음은 학계의 연구에 의해 잘 알려졌다. 그 요인과 조건을,외국인 명의로 발행돼 일제의 탄압과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이런 외적 조건은 일면에 불과한 것이어서 대한매일이 과감한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할 수 있던 내적 조건을 밝힐 필요가 있다.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 전개 대한매일은 영국인 裵說을 사장으로 고용추대하고 梁起鐸은 총무가 되어 합작으로 1904년 7월18일 창간했다. 원래 대한제국 정부가 한국의 처지와 한국정부의 주장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어를 사용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궁내부 예식원 관리인 양기탁 등이 배설을 고용해 창간했다. 예식원 영어통역관인 양기탁은 고종의 내탕금과 李容翊·閔泳煥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 신문사 시설을 설치하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지 임시통신원 배설을 사장으로 고용해 신문을 창간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양기탁의 주도로 창간됐으며,양기탁은 ‘총무’로서 신문사의 편집과 업무를 총괄했다. 대한매일이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하게 된 내적 조건의 특징은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돼 그 본부를 대한매일 안에다 둔 사실과 직접 관련돼 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초 다섯가지 애국세력이 연합해 창립했는데 그 첫째가 대한매일 집단이다. 양기탁이 총무로,申采浩가 주필로,張道斌(일시 주필)玉觀彬 李章薰 梁寅鐸 金演昶 兪致兼 李晩稙 등이 기자로,林蚩正 姜文秀 등이 회계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신민회 창립 직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이밖에 서울 상동교회,구한국 무관 출신,민족자본가,미주(美洲)에 있는 공립협회(共立協會)등이 참여했다. 신민회에서는 특히 대한매일이 그 핵심세력이 되었다. 신민회 총감독(당수 또는 회장)이 양기탁이었고 본부를 대한매일 내에 두었다. 장도빈은 주도회원에 신민회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 간부였다. 신민회 조직을 발의한 것은 안창호 중심의 공립협회였으나 미주에서는 효과가없으니 본국에서 설립해야 한다고 판단해 안창호를 파견했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귀국 즉시 대한매일로 양기탁을 찾아갔고 두달 후 다시 만나 신민회를 비밀결사체로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신민회 창립 제의는 안창호가 냈으나 창립은 양기탁 중심으로 되었다. 당시 그는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국내 애국인사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졌을 뿐아니라 민중에게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아울러 양기탁이 신민회 총감독으로 추대된 것은 그가 대표하는 대한매일의 조직과 세력이 중시됐기 때문이다. 신민회는 전국에 지국을 가진 대한매일을 중핵으로 하여 단기간에 비교적 용이하게 지방지회를 설치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신민회 본부는 대한매일에 있었고 대한매일 영업국장인 임치정과 직원 김홍서가 비밀사무를 보았다. ○安昌浩 중심 신민회 조직 발의 1909년 대한매일의 지사 숫자는 51곳으로 일제가 후에 파악한 신민회 지회 세력과 분포가 거의 일치한다. 신민회는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의 실행방법으로 ‘신문·잡지·서적의 간행’을 최우선으로 설정했는데 창립 후 독자적으로 신문을 간행하지는 않았다. 대한매일이 신민회의 기관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는 장도빈,일제 관원,독립운동가의 자료들에서 확인된다. 대한매일이 신민회 기관지로 전화한 1907년 4월 이후 논설·편집·보도는 매우 열렬하고 전투적으로 되었다. 일제는 1908년 4월 ‘신문지법’을 개정해 외국인 명의 신문이 가진 특권을 모두 없앴으며 대한매일을 해체하려고 배설·양기탁을 고소·구속했다. 그럼에도 대한매일은 굴복함 없이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이는 대한매일 종사자들이 굳게 단결,신민회 노선에 따른 과감한 언론구국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의 민족운동에서의 애국적 전통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 한국 신문에서도 면면히 계승·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논조와 독립운동/李 침략 본격화 맞서 대항논리 제공/직필 논설 통해 항일의병투쟁 고무/鄭晋錫 한국외대 교수·정책과학대학원장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까지 나라 안팎의 정세가 몹시 복잡하던 시기에 발행된 대표적인 민족지였다. 일본과 영국은 대한매일이 창간된 때로부터 한일합방까지 대한매일을 외교적인 현안문제로 다루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언론사,독립운동사,한국문제에 관한 영·일 양국의 외교사,국제사법사 등의 핵심이 되는 연구과제이다. ○한일합방때까지 6년간 발행 대한매일의 항일 언론이 한국의 언론사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요약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주목할 것은 이 신문의 발행시기다. 이 신문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한일합방이 공포되던 날까지 약 6년 동안 발행되었다. 이 시기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한반도에서의 독점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던 때였다. 대한매일은 이와 같은 민족사적 전환기에 발간되면서 항일운동의 논리를 제공했고 항일운동을 확산시키는 동시에 한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둘째 대한매일의 외교사적인 중요성이다. 이 신문에는 한국 영국 일본 세나라의 각기 다른 입장이 한반도의정치적 문제와 연관되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이 신문은 소유주가 영국인이었으나 한국의 황실과 민족진영이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논조는 항일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신문이 침략정책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 일본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裵說을 한국으로부터 추방하거나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만들려 했고 그 교섭 상대국은 영국이었다. 영·일간 교섭 과정에서 외교정책,사법 절차상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되었음은 물론이다. 셋째 이 신문은 한반도문제에 있어 영국과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과 양측의 외교정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영국이 영일동맹으로 맺어진 우호관계라는 점을 내세워 일본의 대한정책을 방해하는 영국 시민 배설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제재를 가해달라고 요구했다. 때문에 영국 정부 자체에서도 이 문제의 처리에 고심했다. 처음에는 영국과 일본이 다같이 배설을 한국의 법률과 일본의 군율 등으로 간단히 처리해 보려 했지만 결국은 영국의 재판에 회부하게 되었다. 다섯째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본 대한매일의 중요성이다. 이 신문은 소유주가 영국인이었으므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았다. 이로 인해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한국 국민들의 저항운동을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다.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항일투쟁에 가담했으므로 이 신문은 한국 민족독립운동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여섯째 언론사에 있어서의 중요성이다. 이 신문은 발행되고 있던 기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의 민족지였다는 점만으로도 연구의 필요성은 크다. 발행부수도 당시로서는 최고였지만 국한문 한글 영문의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신문은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대한매일이 벌인 국권수호운동은 1차적으로는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다. 대한매일은 일본 침략을 규탄하고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서 한국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항일 언론의 역사를 기록했다. 대한매일은 항일의 필봉만으로 일제와 싸운 것이 아니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온나라에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때에 의연금을 수합하는 총본부격인 국채보상의연금총합소가 되었고 梁起鐸 朴殷植 申采浩 등은 논설로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한편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의병들의 무장항일투쟁도 대한매일의 논조에 고무된 바 컸다. 대한매일은 한국 언론사의 주류를 형성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신문이 세운 민족 언론의 전통은 일제 치하를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대한매일은 결국 한일합방 직전에 일본측으로 넘어가 합방 후에는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대한매일 발행 당시의 언론사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언론 연구에도 그 선행연구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정체성과 새 좌표/굴종과 오욕의 역사 치열하게 자성/원래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가 국난극복·21세기의 비전 제시 노력/金三雄 본사 주필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국민적 목소리가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거세게 일어났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구조화된 적폐들을 청산하자고 정권교체라는 시민혁명을 이룬 국민 절대다수의 요청에 따라 가장 추한 모습을 지닌 우리 언론을 바로잡자는 언론정화운동과 언론개혁시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는 역사의 기승전결 법칙을 교과서적으로 무섭게 반영한 결과라고 본다. 서울신문이 제호를 변경하면서 출생의 뿌리를 찾고 그 정신을 새로이 하면서 새 출발의 전기를 확립하려는 의지는 바로 기승전결의 역사법칙이라 할 것이다. 서울신문은 이러한 역사발전의 전기로,국운이 기로에 처한 1900년대 초의 절망적인 시대 상황에서 민족의 긍지를 일깨우고 자주의 주권회복 기치를 높이 들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 회복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국난을 이기고 새로운 천년의 21세기에 앞장서고자 한다. 제호 변경은 서울신문이 단순히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이었다는 인연만으로 막연히 옛이름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백색독재와 군사독재정권의 홍보지로서 본의 아니게 걸어왔던 갖가지 형태의 굴종과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원래의 출발점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계승함으로써 구국활동·개화운동·애국정신·민족사상·독립정신을 이어받는 제2창간의 역사적 동기를 부여코자 하는 것이다. 서울신문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대한매일신보는 당대의 대표급 애국지사들이 참여하여 만든 민족지였다. 신문 경영의 주체는 배설이지만 실질적 신문 제작은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등 민족사상이 투철한 항일 언론투사인 우리 선각자들이 맡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구국활동의 전위였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이 한반도의 영구 식민지화를 꾀하려는 책동임을 지적하면서 그 부당성을 널리 폭로하고,의병 항거를 대서특필했다. 일진회의 합병 주장을 사흘에 걸쳐 통박하고,황성신문과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민족지의 방향을 주도했다. 정간 2회,압수 45회라는 일제의 폭압적 상황 아래서 고종황제의 퇴위 기도를 폭로,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의 실질적 본부 역할을 한 것을 비롯,항일구국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했다.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격때는 이들이 반포한 격문을실었으며 군대해산 조치에 저항하여 일제를 통렬히 비난했다. 국권 상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도 그 정신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과 함께 눈엣가시와 같았던 대한매일신보를 탈취하여 ‘매일신보’라는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다. 강압에 의한 합병조약이나 을사조약이 원천적으로 불법이기 때문에 무효이듯이 대한매일신보의 강탈도 원천 무효인 것이다. 제작을 처음부터 도맡았던 총무 양기탁은 이 신문의 발행인 명의가 친일 인사로 바뀐 그날부터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광고를 게재하고 신문사를 떠났다는 사실에서도 대한매일신보사가 매일신보로 이어질 수 없음을 역사에 밝혀준다. 양기탁 선생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지사들이 매일신보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서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결코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새롭게 태어나는 대한매일에서 그 지령을 승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 대한매일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 1651호와 서울신문의 지령을 합산하여 승계하고,창간기념일은대한매일 재창간일인 11월11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서울신문의 제호 변경과 뿌리찾기는 서울신문이란 한 언론사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굴종과 오욕의 역사로 점철된 현대 한국 언론계가 반성,회개하며 거듭나고 기회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모든 언론이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되새겨 21세기 참언론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대한매일은 ‘대한매일의 다짐’을 통해 다음의 4가지를 지향하고자 한다. 첫째,공공이익을 앞세우는 신문. 둘째,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셋째,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넷째,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 대한매일은 1세기 전 대한매일신보가 실천하고자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한 꿈과 비전을 새로운 시대,변화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국가이성(國家理性)’으로 집약,표현하고자 한다.
  • 보건복지위/國監 하이라이트

    ◎‘국민연금 방만운용’ 집중추궁/“미숙한 관리로 손실 막대” 여야,한목소리로 질타/“금융전문가라도 영입해야” 보험료 인상 배경도 캐물어 3일 보건복지위의 국민연금관리공단에 대한 국감에서는 국민연금 및 기금의 방만한 운용실태가 쟁점이 됐다. 여야 의원들은 공단측의 주먹구구식 기금운영을 질타하면서 투자손실로 인한 ‘기금고갈’과 가입자들의 피해 방지책을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국민회의 金秉泰·李聖宰 의원은 “올들어 공공부문 투자손실 9,220억원,퇴출금융기관 투자손실 1,700억원,주식 투자손실 3,800여억원을 기록했다”고 지적한 뒤 효율적인 운용방안 마련을 촉구했다. 이들은 주식투자로 인한 손실을 미숙한 기금관리의 표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금융 전문가들을 영입해서라도 기금운용의 내실화를 기해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자민련 魚浚善 의원은 “직장인들 중 77.3%가 ‘연금관리 부실’을 인정했다”고 공단에 대한 불신(不信) 심화현상을 소개했다. 또 “국민연금 보험료가 지난해 6%에서 올해는 9%로 대폭 인상된 이유는 무엇이냐”고 배경을 따졌다. 한나라당 鄭義和,국민회의 金明燮 의원은 “전국 95개 사업장을 표본추출,전체 의료보험 가입자에 확대 적용시켜본 결과 29만7,000명이 국민연금에 누락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관리상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한나라당 黃圭宣 의원은 “총 33조7,500여억원에 달하는 국민연금 전체 사업액 가운데 복지사업 기금이 4%에 불과하다”며 1조원이나 책정된 실직자 생계자금 대부사업 실적이 절반도 안된 이유를 캐물었다. 이밖에 △엽서식 보험료 고지서 발부에 따른 개인정보 유출문제(한나라당 朴是均 의원) △국민연금복지타운 운영문제(국민회의 金仁坤 의원) 등도 집중 거론됐다.
  • 무기 비리의혹 집중 추궁/국정 감사

    ◎“주공아파트 6가구중 1가구 부실” 지적 국회는 2일 법사·정무·국방위 등 14개 상임위별로 서울 고·지법,공정거래위,국방부 조달본부 등 29개 기관을 상대로 국정감사를 벌였다. 여야의원들은 P­3C 해상초계기 등 무기와 군수물자 도입의 비리의혹,포철의 방만 투자와 경영문제 등을 집중 추궁했다. 국방위의 국방부 조달본부에 대한 감사에서 국민회의 金相賢 金元吉,한나라당 徐淸源 의원 등은 “경쟁기종에 비해 가격이 월등히 비싼데도 생산라인이 중단된 P­3C을 생산라인 복구비 1억달러까지 부담하면서 계약을 강행했다”고 강한 의혹을 제기하면서 해외무기 도입 전문가 확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국민회의 朴尙奎 의원은 국방부가 대잠수함 해상초계기 P­3C기 8대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미국 록히드사에 365억원을 날리고도 이듬해인 지난 96년 2억달러 규모의 영상정보수집용 금강사업 장비도입 계약을 다시 체결,의혹을 사고 있다고 지적했다. 朴의원은 “국방부가 P­3C구매사업과 관련,대우측이 록히드사와의 소송에서 패소한 95년 2월부터 록히드사와 중재협상에 들어갔는데도 조달본부는 95년 4월부터 12월까지 4차에 걸쳐 대금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포철에 대한 산업자원위의 국감에서 국민회의 朴光泰 의원 등 여당의원들은 “지난 97년 삼미특수강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당시 李錫采 전 청와대경제수석이 金滿堤 회장에게 압력을 가했다”고 주장하며 포철은 金전회장 재임시 발생한 비리의혹을 밝힐 것을 촉구했다. 반면 金浩一 의원 등 한나라당의원들은 “이미 경남 통영에 8,300억원을 투자,LNG기지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데 포철이 다시 전남 광양에 LNG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은 중복투자 아니냐”며 새정부출범 이후의 경영문제를 따졌다. 재경위의 조달청에 대한 국감에서 국민회의 丁世均,자민련 鄭宇澤 의원은 대기업의 담합 방지 대책 마련을 강조했다. 건교위의 대한주택공사에 대한 국감에서 한나라당 趙鎭衡 의원은 “지난 94년부터 올 9월말까지 공급된 주공아파트 6가구 중 1가구꼴로 하자가 발생하는 등 부실 시공되고 있다”며 대책을 촉구했다.
  • 국문판(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5)

    ◎국문교과서 편찬·문법 통일 주창/부녀자·중하류층 대상 사회참여 의식 고취/구국교육에 큰 역할 용기있는 대중지 ‘뿌리’ 대한매일신보는 발간 4년째인 1907년 5월23일부터 한글판을 내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은 국·영문판 합본 형식으로 창간했던 만큼 한글판 간행이 두번째였다. 한글판 재발간 당시 대한매일은 한자 위주의 국한문(國漢文)판을 519호까지 내고 있었다. 그러나 새 국문판은 뒤에 나왔지만 대한매일을 일으킨 ‘장자’(長子)라 할 국한문판을 그냥 한글로 옮겨 실은 ‘곁방’신문이 아니었다. 또 창간 때의 한글판을 답습하지도 않았다. 타블로이드 크기 4면을 온전히 한글로 채운 대한매일의 새 국문판 신문은 여러모로 새로웠다. 본래 대한매일은 국·영문으로 창간할 당시에는 독립신문의 정신에 입각해 대중을 상대로 서구적인 민권사상에 의거한 민중 교도와 내정 개혁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다 5개월 동안 휴간한 뒤 국한문판으로 중간하면서 한자에 익숙한 유림 등에게 반외세,국가와 왕실의 수호를 호소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항일의식의 논조는 변함이 없었지만 좀더 유생들에게 친근한 동양의 유교적 정치와 윤리,중국의 고사 등을 수시로 활용하였으며 유림에 기대를 걸고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의 논설을 자주 썼다. 그러나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나라의 위기상황은 유림 등 지식층에게만 기대를 걸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광범위한 대중 계몽을 모색하게 됐고 여기에서 국문판의 재발행이 기획됐다. 언론 탄압을 향한 통감부의 신문지법이 공포되기 직전에 발간된 국문판은 국한문판과 함께 한일합병 때까지 계속 발행됐다. 이 새 국문판 신문은 다듬어진 국한문판의 틀을 잘 활용해 창간 당시의 한글판보다 훨씬 짜임새가 있었다. 무엇보다 글을 띄어 쓰고 구어체에 가깝게 풀어서 써 읽기가 편했다. 이에 따라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부녀자 및 중하류층의 일반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이 국문판이 발간될 1907년 무렵에는 일반 대중이 읽을만한 항일논조의 국문지가 없었다. 기존의 그같은 신문들은 논조가 현저히 위축된 상태였다. 새로운 국문지의 출현을기대하는 일반 민중의 욕구와 국권 회복 측면에서 민중 계몽을 중시하던 지식층의 욕구가 합쳐져 대한매일의 국문판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국문판은 대상 독자층이 달랐기 때문에 국한문판과 차이점이 상당했다. 논설은 시사적이라기보다는 계몽적인 내용을 많이 싣고 있으며 경제관계,외국소식 등 딱딱한 기사는 생략하고 있다. 기서는 부녀자 및 일반 대중이 보내온것을 많이 게재했다. 특히 국문판은 역사전기류의 소설과 독자들이 보낸 우스갯소리 등 오락성 있는 연재물에 지면을 많이 할애했다. 학식이나 의식이 뒤지는 부녀자·하류층 등 대중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책이었다. 대한매일 국문판은 국채보상운동·구국교육운동 등에 영향을 끼쳤으며 각처의 의병활동을 자세히 보도하면서 그 타당성과 봉기의 필연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한글로 신문을 내는데 그치지 않고 한글 문법의 통일과 국문 교과서의 편찬을 주장하는 등 국어 보급에 힘썼다. 또 주 독자층이 여성이었던 관계로 여성교육의 필요성,과부 재가의 정당성,축첩의 부당성 등을강조하고 여성 자신의 자각과 사회참여 의식을 고취,여성 계몽에 앞장섰다. 또 국어학 측면에서 당시 사용되던 우리말을 연구하는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 무엇보다 일제의 언론 통제로 여타 민족지들이 침묵으로 비켜설 때 뚜렷한 항일 논조로 일반 민중에 다가간 마지막 용기 있는 대중지였다. ◎광고게제 어떻게/맨뒤 4면 전체 할애 1905년 3면 일부 내줘/행당 6전씩 받아 1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신문에 있어 광고는 매우 중요하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때부터 광고를 실었다. 월 30전 하는 구독료 못지 않게 행당 6전씩 받은 광고료가 신문사 주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국·영문 합쇄의 초창기는 미국 영국 일본 등 열강 광고뿐이었고 한국 광고주 것은 전무하다시피했다. 국한문판 등장과 함께 상황이 달라진다. 맨뒤 4면 전체를 차지한 광고에 한국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점유 비율이 높아지는 추세가 확연했다. 무엇보다 광고란 자체가 확장됐다. 국한문판은 발간 3개월까지는 대체로 3면을 기서,추가 잡보 및 연재물로 채웠으나 1905년 말부터 광고가 3면까지 거슬러 올라온다. 1906년 중반 쯤이면 광고가 고정적으로 3면 중간부터 나타났다. 그래서 대한매일 국한문판에는 연재소설이 드물었다. 1908년에는 4개 면중 2개 면 전체에 광고를 싣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으며 1909년이 되면 ‘신성한’ 1면까지 치고 올라오는 경우도 있었다. 학생모집,책 및 서점 그리고 약광고가 주류를 이루었다. 술,기숙관(하숙) 광고에 이어 제물포 권련연초회사의 원시표 거미표 태극표 및 일본정부 제조 연초인 스타 등 담배 광고가 윤곽 그림과 함께 매일 보였고 미국 수입 우유광고도 자주 나타났다. 약광고는 큰 활자로 국문으로 써 눈에 쉽게 띄었는데 미국에서 수입한 창병(성병)특효약 광고가 1907년에 벌써 나타나고 국문판에 한정됐지만 1909년엔 여성 생리대 광고가 나온다. 명월관 등 요리집도 국문 큰 글씨로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작은 활자의 개인 광고도 많는데 자신의 이름을 무엇으로 바꿨으니 이를 알린다는 광고도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은 아들 동생 등 가까운 식구가 자신의 명의를 도용해 재산관련 계약을했으나 이것은 무효라고 사전 포고하는 광고였다. 자신의 아들이 허랑방탕하고 사기성이 농후하니 조심하라는 광고도 흔했다. 1909년 3월31일자에 한 간판 광고업자가 대한매일에 실은 광고문구는 당시 이미 신문광고를 통해 활발한 영업활동이 이뤄졌음을 짐작케 한다.
  • “崔章集 교수 저술 이념 논란”/해외 한국학 학자 22명 성명

    ◎“한국 학문·지성자유 큰 위협” 【로스앤젤레스 연합】 해외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고려대 崔章集 교수(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의 저술을 둘러싼 ‘월간 조선’과 崔교수와의 이념논쟁과 관련,한국의 학문과 지성의 자유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나섰다. 미국 UCLA의 신기욱 교수(사회학)와 존 던컨 교수(동아시아 언어문화사)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캐나다,유럽,일본,호주 등의 한국학 학자 22명이 서명한 성명을 발표하고 월간 조선이 시작한 이념논쟁을 ‘학문의 자유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하고 하루빨리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성명은 ‘월간 조선’의 주장을 “공산권이 붕괴된 지 10년이 지난 오늘 냉전시대에나 통할 단순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진단하고 “권위주의적인 한국사 이해를 국민에게 주입시키려는 노력”이라고 비판했다. 교수들은 “崔교수의 저작 중에서 맥락을 무시한 채 몇몇 구절을 인용해 이를 좌익으로 규정한 조선일보의 주장은 부적절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이며 해외에서의 한국학 발전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성명을 발표한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崔교수는 영문 저작을 통해 미국 학계에 비교적 잘 알려진 편으로,이념적 성향은 약간 진보적인 중도파로 평가되고 있다”며 그를 좌익이나 용공,친북 학자로 보는 사람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성명에 서명한 교수는 다음과 같다. 로버트 버스웰(UCLA 한국학 연구소장),최정무(UC어바인대학),최경희(시카고대학),도널드 클라크(트리니티대학),알렌 델리센(네덜란드 EHESS대학),존던컨(UCLA),카터 에카트(하버드대학),로스 킹(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고병철(시카고 일리노이대학),이홍영(UC버클리),존 리(어바나­섐페인 일리노이대학),데이비드 매캔(하버드대학),데니스 맥나마라(조지타운대학),배형일(UC샌타바바라),제임스 팔레(워싱턴대학),박순원(일본 게이오대학),마크 피터슨(브리검영대학),마이클 로빈슨(인디애나대학),신기욱(UCLA),클라크 소렌슨(워싱턴대학),티모시 탱걸리니(UCLA),케네스 웰스(호주 국립대학)
  • 지면 구성(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4)

    ◎면별 특화 등 근대신문 편집틀 개척/국한문·국문·영문판 1만3,256부 발행/논설­투고란 등 특색있게 꾸며/雜報기사엔 ‘4字 한문제목’ 달아 창간 이후 영문,국한문,국문 등 발간 판형을 다양화해온 대한매일신보는 지면 구성에서도 날로 근대적 면모를 갖춰갔다. 대한매일은 기사 싣는 단수를 착실하게 늘려간 뒤 마침내는 신문지 크기자체를 키운다. 영문과 한글판을 합쇄한 초창기 때는 단수가 4단이었으나 1905년 8월 국한문판을 분리해 발간한 중간(重刊) 때 6단으로 늘렸다. 2년이 채 못 되는 1907년 4월부터 7단이 되었는데 이때 타블로이드 판인 신문이 1.4배 가량 큰 대판(大版) 크기로 확장됐다. 대한매일은 국내 독자와 관련하여 한글과 한문 중 ‘독립신문’처럼 한글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1년 후 국한문판 발행과 함께 튼튼한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대한매일은 독자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영·국문 합쇄의 한계를 깨닫고 분리 발행을 심각하게 고려한 중간 때 한글 아닌 한자 위주의 국한문을 선택했다. 언듯 후퇴처럼 보이는 이 결정은대한매일을 크게 전진시킨다. 대한매일은 1907년 4월 국한문 신문이 4,000여 독자를 확보해 국내 ‘最占多數’임을 알렸으며 며칠 뒤 국문판 추가 발간을 선언했다. 국한문판의 성공이 한글판을 부활시킨 셈이다. 이미 확고해진 명성은 판 추가 발행을 독자 및 사세 확장의 좋은 계기로 만들어 대한매일의 국한문판,국문판은 경쟁적으로 급성장했다. 1년 뒤인 1908년 5월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은 대한매일신보가 현재 1만3,256부 발행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국한문판이 8,200여부,국문판이 4,600여부,영문판이 400여부였다. 당시 국내 신문들의 판매부수가 1,000∼3,000부였던 사실과 크게 대조된다. 이렇듯 대한매일신보를 중흥시킨 국한문판은 지면 구성 등과 관련해서도 주목받는다. 고답적인 한문투라는 외형에도 불구하고 한국 신문발달사에서 편집체재에 근대적인 틀을 엮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매일은 제1면 제호 바로 밑에 매일 논설을 실었다. 여론 조성을 위한 신문의 주장을 담는 자리로서 대한매일의 배일,반침략,애국계몽 논조가 확연히드러나는 곳이었다. 대한매일 논설에는 익명의 필자를 보다 가깝게 느끼게 하는 “本記者”라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영국인인 본기자”란 구절로 배설의 의견임을 명확히 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대한매일은 가끔 국내외의 다른 신문에 난 한국관련 논설을 전재했으며 특히 보통 3면에 게재하는 ‘寄書’를 이 자리로 옮겨 논설 대신으로 삼기도 했다. 독자들이 신문사에 보내는 편지를 뜻하는 기서는 말이 현재의 독자 투고이지 논설 못지않게 중량감있는 내용이었다. 기서를 보낼 때 성명과 주소를 요구한 대한매일은 신문에 게재할 때는 필자의 호나 유학생이라는 등 비실명으로 내보내 보다 많은 참여를 유도했다. 논설 다음에 관리의 서임과 사령에 관한 관보를 실었고 외국에서 일어난 일을 외국 신문 등에서 번역 소개하는 외보가 이어졌다. 2면은 관청 동정과 시정잡사에 관한 단신보도인 잡보 차지였다. 지금의 사회면 성격이 강한 잡보는 모든 기사가 “하였다더라” “說이 있다더라”로 끝맺음되고 있으며 단신이지만 글을 잇대어 써 꽤 상세한 내용을 담기도 했다. 통감부의 움직임과 의병활동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는 대한매일의 잡보는 특히 모든 기사를 4자의 한문제목으로 압축한 뒤 소개한다. 잡보는 1면 하단과 3면 상단까지 펼쳐지곤 하지만 황실에 관한 기사는 언제나 2면 맨 첫 자리에 올라있다. 반면 신랄한 풍자의 시사만평이 2면 잡보란을 마감한다. 이 풍자만평은 칼처럼 날카로운 내용을 운문체로 경쾌하게 소화하고 있어 최고의 애독란이었다. ◎인기 있었던 2면 잡보란/친일파 행각 등 신랄하게 풍자/“日人고문 초빙후 형벌 혹독 이것이 개명국의 형벌” 대한매일의 2면 잡보란 하단은 시사만평란이란 이름은 붙이지 않았지만 부정,부패,만행 등을 신랄하게 풍자해 큰 인기를 모았다. 풍자의 주대상은 친일파와 한국에 온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풍자 기사를 몇개 골라본다. ▲어제 오후 서울 북서 누각동 뒷산 기슭에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 하기로 일 순사가 순검 십여인을 데리고 쫓아가 탐문한즉 모두 피서하는 사람이라 하니 요새는 일인이 무슨까닭으로 한층 의구하는지 한국 인민은 피서도 못하겠소. ▲관립 일어학교 한인 학도가 일인 교사 백정에게 구타를 당한 이후로 퇴학을 원하는 학생이 다수라고 하니 원래 학도가 교사에게 학술만 수업함이 아니라 교사에 품행을 모방하나니 백정 같은 교사에게 무슨 품행을 본받을 것이오 퇴학하는 것이 좋지. ▲근래 일본 인민이 미국 지방에 가서 백인의 구타나 능욕을 받은 것이 날로 심하다 하니 이는 일본 인민이 한국 지방에서 한인을 압제박해한 보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늘의 뜻은 무심치 않소. ▲경무청과 감옥서에서 일인 고문과 경부 경시를 초빙고용한 후로 죄인에게 형벌이 혹독하고 구금이 엄중하야 전일의 한국 형률보다 몇배 심하다 하니 이것이 개명국의 형률인지. ▲의주 등지에 일본군용지 내의 가옥과 분묘를 월내로 철거하라는 독촉이 심해 지역 인민이 서로 모여 호곡하는 소리가 도로에 끊이지 않다고 하니 인민은 어느 곳으로 이거하며 백골은 어느 곳에 옮겨 묻을 것이오 하늘의 땅에 오르는 수밖에 백계가 무책이로다. ▲일본 박람회장에 한인 남녀 2명을 2개 동물로 꾸며 넣어놓고 일반 유람자에게 완상케 하니 미주의 흑인은 노예로 팔리고 한국의 황인은 동물로 팔렸은즉 한인의 가격은 흑인 지위보다 한층 추락하였거니와 일인은 이웃나라의 동종인을 금수로 대하는구려.
  • 외화벌고 견문도 넓히고 해외취업문 두드려보자/전문알선기관 소개

    국내 취업이 여의치 않을 때는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 노동부는 지난 8월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등 5곳에 해외취업센터를 설치,운영하고 있다.해외취업 희망자에게서 구직등록을 받는 것은 물론 각종 해외취업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인터넷(http://www.molab.go.kr)을 통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해외취업센터 전화번호 △서울 (02)3271­9315 △부산 (051)620­1919 △광주 (062)527­1919 △대전 (042)632­9191 △대구 (053)585­1919 □유료 해외취업 알선회사 △세일인터내셔날 (02)3482­0158 △피엔에프리쿠르트 (02)585­8119 △피씨아이코리아 (02)591­9130. □해외 단기취업 안정된 직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졸 미취업자에게는 짧은 기간동안 경험을 쌓는 기회가 될 수 있다.보수는 적은 편이므로 돈을 번다는 생각 보다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하는 것이 좋다. △국제협력단=컴퓨터 자동차정비 봉제 축산 양봉 한국어교육 유아교육 여성복지 등 25개 직종(개발도상국에서 2년 체류,보수는 월 300∼500달러,주택제공,귀국 후 생활자금 800만원 지급),연락처 외교통상부 산하 국제협력단 (02)740­5237,5114. △이스라엘 집단농장=하루 6∼8시간 노동(과수원 목장 공장 세탁소 탁아소 식당 등),연락처 이스라엘키부츠연합 한국대표부 (02)727­6112,이스라엘 대사관 (02)564­3448. □근로자 해외취업 △해외건설업체=행정보조 중기운전 미장 제도 측량 철근 철골 목공 도장 비계 조경 기계설치 용접 냉동 배전 제관 계장 전공 송전배치 등 27개 직종. 대상직종 3년 이상 유경험자,외국어 가능자.취업기간은 1년.월 100∼150만원. 연락처 건설교통부,해외건설협회(02)274­1612,264­6284∼5) △해외원양어선=해외선원,취업기간은 1년.최저 월 1,200달러(월 평균 2,600달러),연락처 해양수산부연수원 산하 선원취업 알선창구(02)561­1119,(051)465­2151) □외국(유럽)기업 알선기관 주한 유럽연합(EU)상공회의소는 국내 구직자를 대상으로 유럽 회원업체에 취업을 알선하고 있다. 영문이력서와 사진을 우편으로 보내고 진행비 2만원을 송금하면 주한 EU상공회의소에서 내용을 요약해 책자를 만들어 각업체에 보낸다.(02)543­9665)
  • 高宗 밀서사건(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0)

    ◎을사조약 강제성 낱낱이 들춰/영지게재 6개 조항 1면 논설통해 소개/일제 정정요구 거부/밀서 사진으로 전재 “고종 진의 확인” 공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 발생한 ‘고종 밀서사건’은 언론을 통해 을사조약의 강제성과 대한제국의 주권을 세계에 알린 역사적인 것이다.한국침탈을 강행한 일제는 이 사건으로 이미지를 크게 손상받았고 한반도 정책에서 더욱 강경책을 시도하게 된다. 특히 이 사건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내에 대대적으로 알려지면서 반일감정을 급속히 확산시켰고 결국 일제가 대한매일 등 민족지를 탄압하고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진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이다. 고종 밀서사건은 대한제국 황실과 영국의 런던트리뷴 특파원인 더글러스 스토리 간에 극비리에 진행된 일종의 작전이었다.스토리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주한 미국공사 모건을 만나 을사조약 체결전말을 들은 뒤 고베에서 통감부 총무장관으로 새로 임명된 스루하라 일행과 함께 한국에 온 것은 1906년 초. 서울의 지인들과 두루 접촉한 끝에 고종을 만난 스토리는1906년 1월29일 고종의 밀서를 전달받는다.밀서는 모두 6개 조항으로 고종이 ▲조약에 조인·동의하지 않았고 ▲조약을 일본이 반포하는 데 반대했고 ▲독립권을 한치도 타국에 양여할 수 없고 ▲이 조약의 외교권도 근거가 없으므로 내치상 한건도 인준할 수 없고 ▲통감의 주둔을 허락하지 않는 동시에 황실권도 외국인에 허가하지 않고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보호통치하되 그 기한은 5년이 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고종의 붉은 옥쇄가 찍힌 이 밀서는 고종의 측근들이 일본측 정탐꾼들 눈을 피해 바짓가랑이 속에 감추고 나온 것이다. 스토리는 이 밀서를 대한매일 사주 裵說에게 보여준 뒤 일본군의 경계망을 뚫고 제물포에서 노르웨이 배에 올라 2월7일 중국 지부에 도착한다.영국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를 찾아가 고종의 밀서사실을 알리고 밀서내용 기사를 런던트리뷴 본사로 송고했다. 다음날 트리뷴 3면 머리에 이 기사가 실렸다.“을사조약은 고종의 재가를 받지 않았고 고종은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라는 내용이었다.을사조약 체결 경위와밀서 6개항이 영문으로 함께 번역 게재됐다. 일본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주영 일본대사관은 트리뷴의 보도가 전혀 사실무근임을 주장하고 나섰다.또 고종이 보호조약에 날인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외교관계로 오히려 고종이 이 조약에 동의했다고 억지를 부렸다.그러자 스토리는 2월10일자 또 다른 기사로 일본의 주장을 반박했다.일본이 한국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해 보호조약을 체결하게 된 상세한 전말을 고종 측근의 말을 인용해 썼다. 이 기사는 트리뷴에 실린 뒤 로이터 통신을 타고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대한매일은 2월28일자 1면 논설 ‘保護’에 트리뷴의 기사를 소개했고 코리아 리뷰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용,한국황제가 을사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고종 밀서사건은 영국·일본·중국·한국 신문에 계속 보도됐고 1907년 1월부터 한국의 분위기를 확 바꿔놓는다.스토리는 1906년 10월부터 트리뷴에 ‘동양의 장래’란 시리즈를 연재했는데 다섯번째로 12월1일자에 문제의 밀서를 크게 실었고 대한매일은 이 밀서 사진을 1907년 1월16일자에 그대로 올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통감부가 적극 나서기 시작한다.밀서가 근거없는 것이라는 주장이 무색해졌고 고종의 진의를 한국민들이 확실하게 알게 됐기 때문이다.통감부는 “고종이 밀서를 준 일이 없다”고 강력 부인한 뒤 대한매일에 제동을 걸었다.裵說 추방책을 영국정부와 타진하기 시작했다.먼저 “밀서는 불순한 자들이 한일 양국의 친의(親誼)를 해치려고 날조한 것”이라는 내용을 1월21일자 관보에 실었다.또 한국정부 외사국장 李建春을 시켜 “대한매일에 실린 밀서기사는 사실무근이니 이를 정정하라”는 공문을 裵說에게 보냈다. 몇몇 친일계열 신문이 관보에 실린 내용을 게재했지만 대한매일은 오히려 밀서가 진짜라는 주장으로 맞섰다.1907년 1월23일자에 “이 밀서가 거짓이 아님을 믿을 수 있는 증거까지 갖고 있으나 그 증거를 제시하면 관련 한국인들에게 보복이 떨어질 것이므로 이를 내놓을 수 없다”는 기사를 싣고 기사정정 요구를 무시했다. ◎고종 밀서 전말/한국의 중립화 목표/미·러 협조 실현안돼/외지에 일 음모 고발 고종의 밀서사건은 국내 반일감정 악화에 따른 통감부의 여론통제 방침을 더욱 강경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다.통감부는 밀서사건 뒤 곧바로 대한매일 등 항일 민족지의 논조를 희석시키고 통감부의 정책을 그대로 대변할 수 있는 친일지들을 만들어 갔다. 그러면 이처럼 일제를 자극한 고종의 친서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일까.외세 강점기 이 밀서가 나오기까지 고종의 생각은 한국이 시종일관 중립화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고종은 일제 강점을 막기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방향으로 열강의 협조를 구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세계 각국에 이를 알리기 위한 비밀문서까지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밀서사건 때까지 고종의 이같은 노력은 수차례에 걸쳐 추진됐었다.1900년 주일 한국공사 李夏榮이 처음 제기한 ‘한국의 중립화’안은 러일간에 고조된 긴장상태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 사실.그리고 4년 뒤인 1904년 1월21일 고종의 명을 받은 외부대신 李址鎔이 한국의 엄정중립을 명기한 성명을 냈다.각국 주재대표 11명이 각국 정부에 이 선언서를 알렸지만 결국 2월23일 한일의정서가 체결됐고 이같은 중립화 정책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고종은 열강의 힘을 본격적으로 빌리기 시작한다.1905년 2월 고종은 러시아 육군소장 데시노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밀서를 보냈다.이 밀서는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파블로프를 통해 러시아로 전달됐다.또 을사조약 직전인 그해 10월에는 헐버트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 프랑스 주재 한국공사 閔泳瓚을 미국에 보내 미국의 개입을 요청한 것도 유명한 사건이다.민영찬은 12월초 현지에 도착해 미 국무장관 루트에게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미국은 무심한 입장표명을 했다. 결국 고종은 이같은 노력들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내에 와있던 외국기자를 통해 만국에 알리는 방안으로 밀서를 쓰게 됐던 것이다.
  • 휴대폰과 노트북의 만남/‘무선 데이터’ 본격 서비스

    ◎LG·SK·한솔서 잇따라 상용화/연결잭 구입때 노트북 프로 제공/회선방식 팩스 등 다량전송 쉬워/패킷방식은 적게 자주 쓸때 유리 무선 데이터 서비스가 국내 이동전화 서비스 업체들에 의해 잇따라 제공되고 있다. 무선 데이터 서비스는 이동전화와 노트북PC(핸드PC도 가능),연결 잭만 있으면 장소에 구애 없이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고 효용가치도 높다. 해드폰과 필요한 프로그램이 입력된 노트북PC를 잭으로 연결해 인터넷 및 PC통신망에 접속,데이터나 화상을 무선으로 전송하는 것이 무선 데이터 서비스다. LG텔레콤이 지난 2월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으로는 세계 최초로 회선방식의 서비스 상용화를 시작한 이래 현재 SK텔레콤과 한솔PCS가 패킷방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노트북PC에 입력할 프로그램은 해당 서비스사의 대리점이나 서비스센터에서 연결잭을 구입할 때 함께 지급된다.연결잭 값은 업체마다 차이가 있으나 3만원 내외면 구입가능하다. 자동차안에서 오랫 동안 서비스를 이용하려는 사람은 1만원 가량의 충전용 시거잭을 따로구입해야 한다.그러나 단시간 사용은 핸드폰과 노트북PC의 자체 충전기만 쓰면 된다. 무선 데이터 서비스 방식은 크게 회선(LG텔레콤) 및 패킷방식(LG텔레콤,SK텔레콤,한솔PCS 제공) 두가지로 나뉜다. 회선 방식은 팩스 전송이 용이하다는 특징을 갖는다.핸드폰을 연결한 노트북PC를 통해 문서나 그래픽을 팩스로 송·수신할 수 있다.종이 문서로 팩스를 받거나 보내려면 노트북PC가 팩시밀리에 연결돼 있어야 한다. 회선방식은 또 대량의 테이터를 보낼때 유리하다. 지난 8월 SK텔레콤이 가장 먼저 상용화한 패킷방식은 적은 양의 데이터를 자주 보내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접속 속도도 회선방식보다 4∼5초 빠르다. 문의 02­3416­7000(LG텔레콤),02­680­9030(SK텔레콤),02­3488­0018(한솔PCS) ◎연결·이용 방법/회선방식­인터넷 접속번호 치면 연결/패킷방식­별도 ID 없어도 접속 가능 ◆핸드폰과 노트북PC 연결 방법 연결잭 양쪽 끝을 각각 노트북PC 뒤쪽과 핸드폰 아래쪽의 접속 부분에 연결한다.단 오래 전 출시된이동전화 영문 단말기에서는 데이터 서비스 사용이 불가능할 수 있다. ◆이용 방법 잭을 연결한 뒤,노트북PC에 설치돼 있는 프로그램(잭을 살때 받은 프로그램)을 열고 PC통신이나 인터넷 접속을 시도한다. 먼저 회선방식의 경우, PC통신이나 인터넷의 접속번호를 치면 PC통신과 인터넷망에 바로 접속된다. ID를 입력하고 PC통신이나 인터넷에 접속한 뒤,각각 ‘전자우편보내기’와 ‘전자우편’을 이용,내용을 작성해 전송한다.이 때 PC통신에서는 상대방 ID를,인터넷에서는 상대방 E­메일 주소를 입력해야 한다. 팩스 서비스를 받으려면 ‘새롬프로그램’이 깔린 노트북PC에서 상대방 팩스 번호를 입력한 뒤 전송한다. 패킷방식은 별도 ID가 없어도 바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이후에는 회선방식에서처럼 E­메일을 활용해 데이터를 전송한다.PC통신을 이용하려면 인터넷을 통해 PC통신으로 들어가야 한다.
  • 고종의 자금 지원(다시 태어난 ‘대한매일’:9)

    ◎창간부터 각별한 후원… 항일 필봉 독려/배설에 특허장 하사 등 감시속 유일하게 지원/통감부 보고서 등 기록/자금지급 사실 뒷받침/이토 ‘궁금령’으로 훼방/돈끊겨 힘겨운 싸움 대한제국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각별한 것이었다. 고종 황제는 대한매일 창간 때부터 裵說 등 그 주역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은밀한 후원을 통해 독려,신문 논조가 지속적으로 강한 항일 색채를 갖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일제 강점기 거센 언론탄압 속에서 유독 대한매일이 황실 지원을 받았음은 당시 그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고종은 발간 지원의 방편으로 배설에게 특허장을 써주기도 했으며,일제가 이같은 지원을 막고자 궁금령(宮禁令)까지 내린 것은 유명한 일화다. 황실이 창간 때부터 대한매일을 지원했음은 여러 기록에서 추측할 수 있다.토마스 코웬은 배설이 러일전쟁을 취재하려고 입국했을 때 동행한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동료기자였다.그와 배설이 함께 해임된 뒤 두 사람은 영자신문을 공동창간하려고 했다. 코웬이 대한매일 창간 며칠 전인 1904년 7월10일 일본 저팬타임스 사장인 즈모에게 보낸 편지는 고종의 지원의사를 보여주는 자료다.“코리아타임스라는 신문을 창간해달라는 중요한 주문을 받고 있다.이 신문은 한국 궁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을 것이고,반일적인 것이 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 대한매일 창간 후인 그해 10월3일 주한 영국공사 조단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는 “이 신문이 孫澤이라는 독일 여인을 통해서 황제의 지원금을 쓰고 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쇄시설조차 갖추지 못해 인쇄소에서 신문을 찍고,불과 200여호를 발행한 뒤 휴간한 사정을 보면 창간부터 1905년 초까지는 고종으로부터 거의 지원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배설이 외부 도움 없이 신문을 계속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특히 1905년 8월11일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각각 4면으로 별도 발행했는데,이같은 확장과 인쇄시설 마련이 고종에게서 보조금을 받았기 때문임을 보여주는 자료가 많다. 1905년 10월11일 주한 일본군 헌병대가 한국 주둔군 참모장에게 보낸 보고서는 “白時鏞이 고종과 배설 사이에 중개를 주선한다는 사실을 확실한 소식통에게서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백시용은 당시 예식원의 회계과장으로 황제의 신임이 두터웠다.또 1907년 1월18일 경무고문 마루야마가 통감대리인 하세가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대한매일이 한국 황실로부터 매월 500원을 지급받고 있다”고 액수까지 밝혔다. 1907년 8월27일 통감부의 경무 와타나베가 마루야마에게 보낸,궁내부 전무과 기사 沈雨澤에 대한 심문조서는 고종의 보조금지급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작년 손탁은 폐하에게 ‘대한매일은 유독 한국 및 황실에게 이익되는 것을 기재해 왔으나 유지곤란으로 이번에 일본에 매도한다는 소문이 있으니 폐하의 일고를 바란다’고 주상했다.폐하는 출판을 계속할 것을 희망하여 어느 정도의 금액을 지출하고 또 매월 1,000원 정도를 하사해왔다.” 대한매일 한글판이 재창간된 것은 이해 음력 4월이므로 고종은 대한매일 한글판 창간에 특별자금을 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또 신문발간에 편의를제공받도록 고종이 배설에게 특허장을 준 것이 1906년 2월10일자였으므로 고종이 재정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준 것도 이 무렵부터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고종이 끝까지 보조금을 지급하기는 어려웠다.이토 히로부미는 1906년 7월2일 고종을 만나 ‘궁중의 위엄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특별병력이 궁중에 주둔해야 한다’고 강요했고 7월6일자로 궁금령을 공포했다.당시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들이 고종에게서 내밀하게 고무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토가 고종을 고립시켜 두려는 속셈이었다.특히 반일적인 배설이 고종과 내통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결국 궁금령 공포와 엄격한 출입통제로 고종은 포로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1년 후 고종이 퇴위하고는 재량껏 쓸 수 있는 내탕금도 제한됐고,일본측 감시도 철저해졌다.이때부터 지원이 끊겨 대한매일은 더욱 힘겨운 싸움에 나서야 했다. ◎황실과 대한매일신보/극도보안속 재정지원 타언론 비해 자금난 덜해/헤이그·을사조약생생한 보도/강경한 항일노조 유지 큰 힘 고종 황제의 경제적 지원은 대한매일이 일관된 논조를 유지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당시 대부분의 민족지들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 탓에 경영난에 허덕였고 논조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이에 비해 대한매일은 황실 지원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재정 곤란을 덜 겪었다. 대한매일의 굽히지 않는 필봉의 원천은 물론 배설이라는 영국 발행인에게 있다.그가 치외법권을 인정받아 직접적인 탄압을 비켜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대한매일도 어려운 경영상태에 빠져 대중적인 지원을 호소하는 사태가 있었음을 감안하면 황실의 지원이 큰 힘이 됐음을 부인키 어렵다.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는 철저하게 베일에 쌓여 있었다.당시 일제가 정부 구석구석까지 완전히 장악한 사실을 볼 때 황실의 지원은 사적으로,극도의 비밀을 유지한 채 이루어졌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한매일의 고종 관련기사는 항상 강경하고 직접적인 상황을 여과없이 부각하는 생생한 것들이다.1905년 을사늑약(勒約)체결과이에 대한 고종의 완강한 거부를 공개한 1905년 11월18일자의 ‘칙어엄정(勅語嚴正)’,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만국에 알린 고종 친서를 전문게재하고 이와 관련해 쓴 1907년 1월23·24일자 논설,그해 6월 헤이그밀사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 등 끝이 없다. 이는 고종의 대한매일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다른 신문들이 보도한 기사와는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칙어엄정’만 하더라도 을사조약 체결 과정을 일반에게 알린 최초 보도였다.또 고종친서사건과 헤이그밀사사건은 각각 고종의 입지를 좁히고 결국 폐위로 연결된 직접적 사건이었다.초기부터 황실과 대한매일의 관계를 끈질기게 추적해온 일제 입장에선 양쪽 관계를 더 이상 유지케 할 수 없다고 결정하는 데 결정적인 단초로 작용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 산자부 등 홈페이지 엉망

    ◎환율 803원 이라구…/영문사이트에 한글… ‘원화의 대(對)달러 환율은 803.62원’‘영문 사이트에는 국문 자료가…’. 23일 산업자원부에 대한 국회 산업자원위 국정감사에서 자민련 金七煥 의원(대전 동갑)은 산자부와 유관기관들의 인터넷 홈페이지 운영실태를 신랄하게 꼬집었다. 몇년이 지난 통계자료가 허다하고,외국인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한 영문 사이트의 자료가 한글로 돼 있을 정도로 무성의하다는 게 요점. 金의원은 산자부의 영문사이트는 산자부 영문약자가 ‘MOCIE’가 아닌 ‘MOTIE’로 표기돼 혼동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한국전력과 한국가스안전공사의 영문사이트에는 한글 자료가 들어 있다고 질책했다. 오래전 통계수치를 갱신하지 않아 ‘역사’가 돼 버린 정보도 적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대한광업진흥공사의 경우 94년 수치를 그대로 두고 있고 한국가스공사 중소기업진흥공단 등의 홈페이지에도 96∼97년 자료들이 버젓이 수록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전화·위성삐삐 등 4가지 서비스

    ◎8816·8817·이리듐+·위성삐삐/8816→지구상 어디서나 통화/8817→국내에서만 사용 가능/이리듐→전화·삐삐 동시에 이용/위성삐삐→한글·영문 문자도 수신 국내에 공급될 이리듐 서비스는 크게 위성전화 8816,위성전화 8817,이리듐 플러스,위성 삐삐 4가지로 나뉜다. 8816+521(한국고유 번호)+6자리수(가입자 번호)로 된 전화번호를 부여받을 8816 전화가입자는 지구상 어디에서든 착신지에 관계 없이 통화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8817 가입자(국가번호와 가입자 번호는 8816과 동일)는 국내에서만 위성통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8816 전화가입자는 위성전화와 일반 휴대전화 서비스를 함께 받을 수 있지만 8817은 휴대전화 병행사용이 불가능하다. 역시 8816국이 부여될 이리듐 플러스는 이리듐 위성전화와 위성 삐삐의 동시 사용을 가능케 하는 서비스다. 위성삐삐(8816) 서비스만 따로 받을 수도 있다. 위성삐삐 단말기는 한글 100자,영문 200자까지 문자수신이 가능하다.
  • 裴說과 梁起鐸의 삶(다시 태어난 ‘대한매일’:3)

    ◎‘구국민족지’이끈 울타리­대들보/배설­1904년 들어와 넉달만에 창간.35세 짧은 삶 마감 때까지 이국땅서 일제와 목숨건 싸움 대한매일의 역사를 말하자면 裴說과 梁起鐸 두 사람을 첫머리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창간자이자 발행인인 배설이 대한매일의 울타리요 지붕이었다면 양기탁은 이를 떠받친 기둥이자 대들보였다. 두 사람 가운데 양기탁의 삶은 그 당시 애국지사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대한매일이 일제에 넘어간 뒤의 행적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평생을 국권수호와 광복에 바쳤다. 반면 영국인 배설(Ernest T.Bethell)이 한국사와 맺은 인연은 독특하다.그는 31살(앞으로 배설의 나이는 생일까지 따져 만으로 표기)때인 1904년 한반도 땅을 처음 밟아 넉달 만에 대한매일을 창간했다. 배설은 입국 전까지 16년 동안 일본에서 사업을 벌였다.더욱이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영·일동맹을 1902년 이미 체결했다.일본에서의 오랜 생활 경험이나 영국이 일본의 동맹국이란 사실에서 배설은 친일 성향 가능성이 높은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낯선 땅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일 수 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그의 삶에서 단초를 찾을 수밖에 없다. 배설은 1872년 11월3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당시 양조회사 경리사원이었으나 후에 극동을 상대로 한 무역회사를 차린다.배설은 고향에서 전문대 수준의 상업·기술학교를 마친 뒤 아버지 회사의 일본 사무소가 있는 고베로 건너간다.만으로 15살 때이다. 고베에서 골동품상을 하던 배설은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지자 영국 데일리 크로니클지로부터 특별통신원으로 종군취재를 해달라는 제의를 받는다.이에 앞선 기자 경력은 명확하지 않지만 그 자신은 1908년 6월 열린 재판에서 “일본에서도 신문에 관계한 일이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배설은 1904년 3월10일 한국땅에 들어와 크로니클지 4월16일자에 ‘경운궁 화재’를 특종 보도하기도 했다.그러나 곧 해임되는데 ‘친일적 기사를 싣는 신문사 방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이어 그는 대한매일 창간에 들어간다.중국·일본에서는 영자지가 여럿 나오는데 한반도에는 없었다는 사실이 가장 매력적인 요소였을 것이다.그의 성격도 창간에 한몫을 했으리라고 여겨진다.배설 사후 대한매일에 실린 ‘배설공의 약전(略傳)’에는 ‘공의 성질을 대강 의론할진대 의협강의(義俠剛毅) 네 글자에 지나지 않으니’라고 밝혔다.곧 정의를 위하는 뜻이나 기질이 굳세다는 의미다. 양기탁과의 만남도 큰 힘이 됐을 것이다.배설은 입국 직후 통역 겸 번역자로서 양기탁을 소개받았다.이후 신문사를 만들어 함께 일하면서 같은 또래(양기탁이 한살 많다)로서 우정과 신뢰를 쌓아갔다. 배설은 일제에 의해 1907년 10월과 이듬해 6월 두차례 법정에 선다.두번 다 영국인이 재판장이었지만 판결은 일본측 입김을 강하게 받는다.1908년 재판에서 배설은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또 이를 어길 경우 추방한다는 판결을 받는다.그럼에도 기는 꺾이지 않아 1909년 1월 영자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속간했다.이때 워싱턴 포스트지는 ‘배설을 중단시키는 방법이란 암살밖에 없을 것’이라는 서울발기사를 실을 정도였다. 배설은 그해 5월1일 35살의 길지 않은 삶을 이 땅에서 마감한다.일본은 물론 영국·미국 등 제국주의 열강은 그의 죽음이 ‘눈엣가시’를 뺀 듯 후련했겠으나 ‘한국인들은 투쟁으로 일관한 가장 믿었던 벗을 잃은’(후임 발행인 만함의 애도사 중에서)것이다. 우강(雩岡) 양기탁이 대한매일에 기여한 공은 어쩌면 배설을 훌쩍 뛰어넘을지도 모른다.배설이 일제 탄압을 가로막는 보호막을 대한매일에 제공했다면 그 안에서 실제 신문제작과 경영을 도맡다시피한 사람은 그이기 때문이다. 양기탁은 1871년 4월2일 평양에서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어려서 한학을 배워 10대 중반에 이미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우국지사,동학당과의 교류로 애국심을 키워나갔다.서울의 한성외국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일본 나가사키상업학교에서는 2년반 동안 한국어교사로 일해 영어 일어에도 능통했다. 그는 정부기관인 예식원에서 번역관보로 일하다 1904년 8월22일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다음날로 그만두고 대한매일 제작에 본격적으로 매달린다.창간호가 7월18일 나왔을 때도 이미 간여한 만큼 그는 신문사 일과 예식원을 한동안 같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양기탁은 대한매일에서 ‘총무(general manager)’로 통했다.공식 직함은 아니지만 편집과 업무일을 두루 책임지고 맡아해 모두들 그렇게 불렀다.지금 직제로는 전무쯤에 해당되는 셈이다. 대한매일이 1905년 영문과 국한문판을 분리하면서부터는 국한문판 제작이 중심이 되었고 그 제작은 전적으로 양기탁이 맡았다.배설 스스로도 “나는 한국말을 모르기 때문에 지면제작의 전권을 그에게 맡겼다”고 밝혔었다. 1908년 5월 일제 통감부의 기관지인 영자지 ‘서울 프레스(Seoul Press)’의 다음 기사는 양기탁의 지면제작 방향을 그대로 보여준다.이 신문은 대한매일 국한문판·한글판에 대해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고는 원본으로 보이는 영문판과 판이하게 다르다.한국어판들은 영문판에 비해 훨씬 나쁘고,있는 그대로 못된 신문’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양기탁은 한민족에게 직접 배포되는 국한문·한글판에서 더욱 강력하고 공격적으로일제를 비판한 것이다. 1910년 6월14일 대한매일의 발행인이 만함에서 李章薰으로 바뀌자 양기탁은 ‘대한매일에서 손을 뗀다’는 광고를 신문에 낸 뒤 단호히 물러났다.이후 대한매일을 기반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사건으로 6년 동안 옥고를 치렀으며 1923년 만주로 건너가 무장독립단체인 의성단·통의부·정의부 등을 만들어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다.1933∼35년에는 남경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으며 38년 그 땅에서 서거했다.그의 유해는 지난 5월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 풍전등화의 대한제국과 창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2)

    ◎‘排日護國’ 민족혼 일깨운 횃불/여론조작 친일紙 득세하던 1904년/치외법권 혜택 裴說 발행인 내세워/첫호부터 日 야욕 고발한 민족지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이하 대한매일)가 한국사 무대에 등장한 1904년은 일본의 한반도 병탄 야욕이 막바지에 달한 때였다.그해 2월8일 일제는 인천항에 정박한 러시아 군함 2척을 격침해 러일전쟁을 도발한다. 이를 빌미로 서울을 점령한 일본군은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한반도에 주둔하면서 자유롭게 군사활동을 하는 권한을 획득한다.이어 7월20일에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해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는 그 정지를 명령하고 관계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마련한다. 배일(排日)민족언론의 숨통을 죌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이같은 올가미가 드러나기 이틀 전인 7월18일 대한매일은 그 거대한 족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당시 국내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뒤섞여 있었다.한국인 신문(민족지)으로는 ‘황성신문’‘제국신문’이,일본인 신문(친일지)으로는 ‘한성신보’‘대한일보’‘대동신보’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민족지들은 일본군 주둔 이후 갖가지 탄압에 시달려 활기를 잃은 반면 수적으로도 우세한 친일지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일제는 19세기 말 한반도 침략을 시작하면서 여론 조작수단으로 일본인 경영의 신문을 많이 발간했다.1881년 이래 한반도 전역에서 발간한 한글·일본어·영자 신문이 총 30여종에 이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매일 창간은 한민족에게 한줄기 빛과도 같은 희망을 주었다.발행인인 배설(裴說)이 치외법권을 누리는 영국인이어서 일제의 검열을 피할수 있을 뿐더러 발간 즉시 ‘한민족과 대한제국의 편에 서서 일제침략에 맞서는’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매일의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는 당시 유일한 일간 영자지여서 한반도 정세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 지지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크게 작용했다. 대한매일 창간 무렵 한민족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였다.일본은 6월6일 ‘한국인이 명백하게이용·경작하는 토지를 제외한 전국토’를 개간해 50년 동안 경영하는 권리를 달라고 대한제국 정부에 요구했다.표면상 개간권을 요청한 자는 일본 각료 출신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郞)였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치밀한 ‘식민지화’ 계획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다. 이 일이 알려지자 한반도는 당연히 들끓었다.요구를 받아들이면 적어도 국토의 6분의 1(당시 일본 외상의 발언)에서 많게는 3분의 2(윤치호 주장)까지 일본에 넘어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아울러 황무지 개간을 내세워 일본인들이 떼지어 한반도로 몰려올 것도 불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민족지들은 일제히 일본의 야욕을 비난했고 농광회사(農鑛會社),보안회(保安會)등의 단체가 생겨나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시작했다.이같은 상황에 제동을 걸고자 일제는 ‘군사경찰 훈령’을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대한매일도 당연히 ‘황무지 개간’건 보도의 일선에 나섰다.현재 대한매일의 창간호부터 15호까지는 남아 있지 않고 제16호(1904년 8월4일자)가 가장 오래된 지면이다. 그 날짜 영문판 톱기사는일본의 영자지 ‘고베 크로니클’의 논설 ‘프로텍팅 코리아(Protecting Korea)’를 절반 가까이 전재했다.‘일본 정부는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코리아에는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기사를 자세히 소개한 뒤 대한매일은 ‘이같은 고발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무슨 말로 대답할 것인가’라고 비판했다.이어 16일자에도 ‘나가모리 어게인(Nagamori Again)’(18일자 한글판 제목 ‘장삼씨의 문제 갱론이라’)이란 톱기사로 이 문제를 계속 거론한다. 대한매일이 배일 논조를 뚜렷이 하자 친일지들은 즉각 대한매일과 배설(裴說)을 비방하는 기사를 실었다.대한일보 10월5일자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이 신문은 ‘영국인 배설이 경성에서 발행하는 대한매일신보는…번번이 일본이 패전한다는 설을 논하고,러시아의 제2군이 이미 일본군의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했으므로 머잖아 일본군이 대패하리라는 등의 거짓말을 싣고 있다’고 비난했다.이어 ‘이 영국인은 (일본)고베에서 장사꾼으로 생활하던 천인(賤人)이기로 전국(戰局)을 알 리가 없다’고 인신공격을 달았다. 이 신문은 이밖에도 11월10일자,12월23일자 등에서 대한매일을 ‘일본에게 공정하지 못하다’거나 심지어 ‘친러시아 기관지’라는 등의 악의에 찬 비난을 거듭 퍼부었다. 창간하자마자 민족지의 대표로 떠오른 대한매일신보.민족과 국가의 명운을 두 어깨에 짊어진 대한매일이 6년여 동안 일본제국주의를 상대로 벌인 대전쟁은 이처럼 막을 올렸다. ◎대한매일신보 발행 체제/영문·순한글 6면 합쇄/타블로이드판으로 출발 대한매일신보(1904.7.18∼1910.8.28)는 6년여 동안 4가지 체제로 발행됐다.창간시에는 영문판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4면과 순한글판인 대한매일신보 2면 등 모두 6면을 합쇄 형태로 냈다.지면 비율로는 2대1일이지만 영문판 4면 가운데 2면은 광고였으므로 처음부터 한글·영문 기사의 비중은 같게 출발했다.판형은 타블로이드판이다. 그즈음 영문으로 나온 정기간행물은 미국인 헐버트(Homer B.Hulbert)가 내는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뿐이어서 일간지인 코리아 데일리 뉴스는 처음부터 널리 주목받았다. 영문·한글판 합쇄 체제는 다음해 5월10까지 이어졌으나 인쇄시설에 문제가 생겨 다섯달 동안 휴간한다.1905년 8월11일 속간하면서는 영문판과 국한문혼용판을 분리해 발행했다.2년쯤 뒤인 1907년 5월23일에는 한글판을 부활해 영문판·국한문혼용판·한글판 세 가지가 동시에 나왔다.우리 언론 사상 유일한 사례다. 裴說이 영국인 만함(Alfred Weekly Marnham)에게 신문사를 넘긴 며칠 뒤 영문판 발행이 중단돼 1908년 6월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한글판 2종만을 내었다.영문판은 이듬해 복간되지만 곧 사라진다. 이같은 발행체제의 흐름을 살펴보면 초기에는 독자층이 넓어지면서 국한문판·한글판으로 점차 확대하다가 후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영문판이 사라짐을 알 수 있다.1900년대 초 시대요구에 부응해 다양한 독자층의 욕구를 수용한 대한매일의 발행체제는 진실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대한매일신보 연구 현황/韓末 담아낸 시대그릇/각 분야별 연구 활발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연구는 100여년 한국 언론사 연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첫째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언론의 소임을 다한,우리 언론사에 거의 유일한 신문이었다는 원론적 의미에서다.둘째는 한말 우리의 사회상과 국제정세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한매일에 대한 지금까지 연구는 우리 언론사 연구에서 항일과 관련,독립적으로 다뤄져온 부분도 많다.언론 자체 문제뿐 아니라 한말 우리의 시가(詩歌),한글,산업진흥,광고,자주의식,국제 외교사 등 다양한 분야로 연구 영역이 확대돼왔고 특히 80년대와 90년대 들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매일신보만을 독립적으로 다룬 단행본은 △‘제국주의와 언론­배설·대한매일신보 및 한·영·일 관계’(구대열·이화여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 연구’(이광린 유재천 김학동 공저·서강대출판부 1986)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정진석·나남 1987) 등이 있다. 한말 저항시가연구서는 가장 많아 ‘대한매일신보 가사연구’(조현경·전남대 석사논문 1995),‘대한매일신보소재 가사문학연구’(유정선·이화여대 〃 1990),‘개화기의 저항시가연구’(박을수·경희대 박사논문 1984),‘우국가사 연구­대한매일을 중심으로’(김준태·고려대 석사논문 1980) 등이 있다.한글 신문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 국문판 연구’(오선화·이화여대 〃 1988)가 있다. 한말 대한매일신보가 산업진흥을 역설한 논설들에 대한 연구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에 나타난 실업진흥론’(이윤정·서울시립대 〃 1997)이,당시의 신문광고에 대한 연구로는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난 광고에 관한 연구’(김영희·효성여대 〃)가 있다. 그밖에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자주의식연구’(김영애·성신여대 〃 1979),‘대한매일보에 나타난 의병 동향’(윤경숙·인하대 〃 1988),‘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권만용·건국대 〃 1993) 등이 있다. 또한 한말 국제관계를 다루는 논문들에는 특히 영국과 일본과의 관계에서 대한매일신보와 배설을 다루고 있다.
  • 大韓每日申報/任英淑 논설위원(外言內言)

    서울신문의 뿌리인 대한매일신보는 한국 민족운동사와 언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우선 한국언론사의 측면에서 이 신문은 몇가지 기록을 가지고 있다.1904년 7월18일 창간돼 1910년 5월21일 일본 통감부에 팔리기까지 대한제국 말기 6년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 민족지였다.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으로 총 6면에 4개면은 영문,2개 면은 한글전용의 2개국어 신문체제였으나 이듬해 8월 국한문 혼용판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뉴스’를 분리했고 1907년 5월에는 한글전용 신문을 새로 발간했다.국한문·영문·한글등 3종의 신문이 한꺼번에 발행되기는 한국 언론사상 초유의 일이었다.발행부수도 당시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부수를 합한 것의 2배가 넘는 1만부를 기록했다. 민족운동사의 측면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항일 구국의 선봉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을사조약의 강제체결,高宗의 헤이그 밀사 파견과 퇴위,구한국 군대해산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것은 물론 고정란을 두고 의병활동을 집중 보도하는 등기사와 사설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당시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 항일투쟁에 가담했음을 증언했을 정도다. 대한매일신보의 이같은 성격은 발행인 裴說(Ernest Thomas Bethell)이 영국인이어서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고 일본측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도 기인하지만 신문발간에 참여했던 梁起鐸 朴殷植 申采浩 등 우리 선각자들의 역할이 컸다. 裴說이 신보를 지킨 울타리였다면 梁起鐸은 전무·주필·편집국장을 겸한 위치의 총무로서 제작 및 운영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항일논조를 주도했다.부친과 함께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만든 한국 최초의 한영사전 편찬에도 관여했던 그는 한학의 바탕에 양학문을 접목하고 동학당과도 관련을 맺었던 우국지사였다.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의 총감독으로 활동했고 일제 강점이후 서간도로 망명,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앞장섰다. 한편 황성신문의 논설기자였던 朴殷植은 梁起鐸의 추천으로 대한매일신보로 자리를 옮겨 신교육 구국,사회관습 개혁,대동사상등 애국계몽사상을 고취하는데 앞장섰고 나중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 역사저술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과 독립투쟁정신을 심는데 크게 공헌했다.또 朴殷植의 뒤를 이어 주필이 된 丹齋 申采浩는 민중계몽을 위한 사설과 함께 ‘독사신론’등 역사관계 논문을 연재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다.그의 대표적 저서 ‘조선상고사’의 주체적 민족주의 사관은 이때 싹텄다.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이어받아 다시태어나는 서울신문의 일원으로서 민족과 언론자유를 위해 앞장섰던 선배들의 꿋꿋한 기상과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억하며 옷깃을 여민다.
  • 新구국운동 중심돼라/鄭晋錫 한국外大 교수·언론사(특별기고)

    ◎민족紙 ‘대한매일’ 재탄생에 부쳐 나라의 운명이 위급한 지경에 처했던 한말 구국의 필봉으로 일본의 침략에 대항했던 민족언론의 본산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였다.영국인 사장 배설(裵說:Ernest Thomas Bethell)과 총무 양기탁(梁起鐸)을 중심으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당대의 논객과 우국지사들이 모였던 이 신문은 민족진영의 마지막 보루였다.일본 헌병사령부는 러일전쟁 후 민족언론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었으나 대한매일에는 검열의 손길을 뻗칠 수가 없었다. 을사조약 체결의 비통한 소식을 들은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검열을 받지 않고 황성신문에 게재한 다음에 밤새 통음(痛飮)하며 목놓아 울다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고 신문은 정간당하는 상황이었다.그러나 대한매일은 바로 문제가 된 황성신문의 논설과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진상을 영어로 번역하여 전세계에 널리 알렸다. 헤이그에 갔던 이준 열사가 이국 땅에서 한을 품고 분사한 소식과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던 고종의 비극,구한국 군대의 해산 등 긴박한 역사의 현장에서 언론의 사명을 다했던 신문이 대한매일이었다.용기 있는 기사,피끓는 논설,시간을 다투어 발행한 호외 등을 보고 국민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한탄했다. ○‘직필정론’의 표본 일본의 한국 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은 대한매일이었다.통감부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의병들의 무력항쟁은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대한매일의 직필정론이 의병들을 더욱 격동케 한 것은 사실이었다.오죽하면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자신의 백마디 말보다도 대한매일의 기사 한줄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고 말했겠는가.국채보상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었던 것도 대한매일이었다.전국의 성금이 대한매일로 쏟아져 들어왔다.나라의 빚을 갚자는 뜨거운 정성을 담아 유생과 상류 지도층에서 이름 없는 필부필부(匹夫匹婦)에 이르기까지 앞다투어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탁했다. 대한매일은 국한문판,한글판,영문판(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3가지 신문을 동시에 발행했다.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일이었다.일본은 대한매일에 대항하기 위해 친일지에 자금을 지원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공보비서이자 영어신문 편집자인 즈모토(頭本元貞)를 불러다가 서울프레스를 직접 발행해 보았으나 대한매일을 당할 재간은 없었다.당시에 발행되던 모든 신문의 발행부수를 합쳐도 대한매일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배설과 양기탁을 협박하고 회유하면서 신문의 배포를 방해하는 수법도 써 보았다.그러나 국민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발행되는 신문의 붓을 꺾을 수는 없었다.수년간에 걸친 일본의 끈질긴 요구와 공작으로 마침내 배설은 3주일간의 금고형(禁錮刑)을 받고 상해까지 가서 복역하는 신세가 되었다.그러나 통감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이번에는 신문의 편집과 제작을 총괄하던 총무 양기탁을 체포하였다.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운 것이다.일제의 강점 후에는 105인 사건으로 양기탁과 대한매일에 근무했던 애국지사들을 또다시 투옥하는 철저한 보복을 가했다. ○빛나는 전통 계승을 대한매일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태풍권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힘겨운 투쟁을 벌였으나 기울대로 기운 국운을 만회할 수 없었다.나라가 망하니 민족언론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최대의 민족지였던 신문이 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한일합방 후 9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야 대한매일은 다시 살아났다.새로 태어나는 대한매일이여! 민족언론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위기에 처한 오늘의 난국을 헤쳐나가라.신 구국운동의 중심기관이 되어라.
  • 어떤 신문이었나(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

    ◎日帝 총칼에 맞선 ‘자유언론 표상’/애국지사 논객 총결집/日 침략­관료 무능 질타/국채보상운동 등 이끌어/항일투쟁·국권수호 선봉 ‘不允’(불윤).1905년 11월18일 아침.러일전쟁의 포연이 가시지 않은 서울 장안 거리의 화두는 “허락지 않으심”을 의미하는 이 한 마디였다. “韓皇陛下게옵셔 韓國獨立을 重念하시와 正大한 義理로 拒絶하신즉 伊藤 대사가 再三强請하되 强경 하신 勅語로 不允하셨다더라”(한국황제폐하께서는 한국의 독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어 정대한 도리로서 거절하시자,이토 대사가 재삼 강청하였으나 강경한 말씀으로 허락지 않으셨다 한다) 이날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된 ‘勅語嚴正’(칙어엄정) 제목하의 잡보(보도기사) 첫 기사 중에 있는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국민들은 일제 앞에서 “No”라고 당당히 말한 황제에 박수를 보냈다.전날 이토 일본대사가 고종 황제를 알현,소위 을사조약으로 알려진 외교권 박탈을 요청한 4가지 내용을 보도하고 이에 대한 황제의 강력한 반대를 전한 것이었다. 이는 일제의 총칼이번득이는 상황하에서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당시 신문중 대한매일신보만 유일하게 보도했다.특히 본문활자로 된 기사내용에서 유독 ‘不允’ 두 글자만 가장 큰 2호활자로 두드러지게 인쇄한 것은 고종의 반대 강도에 대한 표현이자 대한매일 입장의 대외적 천명이기도 했다. 1904년 7월18일 영국인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총무 양기탁(梁起鐸)등 우국지사들이 모여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던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던 상황에서 자유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으로 조국의 국권수호를 위해 태어났다. 이후 한일합방 다음날인 1910년 8월29일 종간될 때까지 6년 1개월여간 대한매일신보는 우리민족의 국운이 백척간두에 선 역사상 가장 위급한 시기에 굳건한 자세로 항일의지를 불태웠고 국민의 든든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이같이 민족정론지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발행인이 영국인 배설로 돼있어 치외법권적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총무 양기탁과 주필 박은식을 비롯,필진 신채호 장도빈 안창호 등의 투철한 애국심과 자주의식에 따른 것이었다.그들은 일제 침략과정의 부당성을 낱낱이 공개하고 당시 무능한 대신 및 관리들의 실정과 부패상을 질타했다. 반대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고 있던 의인들의 애국적 활동상에 대해서는 대서특필을 아끼지 않았다.국채 1,300만원을 갚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던 국채보상운동 캠페인을 주관했고,그 활동상 소개와 함께 매일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2∼3개 면에 걸쳐 상세히 게재함으로써 전국적인 참여의 불을 지폈다. 또 을사조약과 고종 퇴위 및 군대 해산 직후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산발적인 보도가 아니고 ‘처처의병’ 등 고정란을 만들어 매일 소개했고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격 때는 격문을 게재,의병지원자가 구름같이 모이게 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실업’‘동양척식회사 설립문제’등 논설로 일제의 경제적 침투 반대와 우리민족의 자주적 산업 건설의 필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교육의 중요성을 강조,민족교육자들의 학교설립취지서를 적극 지면에 게재,1907년 말 공사립 보통학교가 전국에 4,000개에 달하게 하는 등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밖에도 대한매일신보가 순한글판 발행을 통한 국어 발전,연재소설 게재를 통한 국문학 발전,또 여성교육 필요성 제기로 여권 신장 등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정부와 역적무리들의 매국은 대한매일신보의 노력을 미완(未完)에 그치게 하고 말았다.그러나 그 불굴의 자유언론 정신과 국난극복의 의지는 우리 언론사에 금자탑으로 남아있다.그리고 이제 그 숭고한 정신과 의지의 완성을 위해 ‘대한매일’의 첫걸음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대한매일신보 연표 ▲1904년 7월18일 창간.(영문판 4면,국문판 2면) ▲1905년 8월11일 영문판(The Korea Daily News) 분리 발행. ▲ 〃 11월18일 을사조약 다음날.고종의 조약거부 기사 ‘칙어엄정’게재. ▲1907년 1월16일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고종의 칙서공개.(영문판에도 번역 게재) ▲ 〃 2월21일 국채 1,300만원 보상운동 제창. ▲ 〃 5월23일 국문판 대한매일신보 별도 발간. ▲ 〃 11월말 전국 지사수 32곳. ▲1908년 3월6일 관보 전재 폐지. ▲ 〃 4월29일 신문지법 개정.외국인 발행 신문도 발매 금지 및 압수 가능. ▲ 〃 5월27일 발행인 만함(Alfred W. Marnham)으로 변경. ▲ 〃 5월말 현재 부수 1만3,400부. ▲ 〃 7월12일 통감부, 양기탁을 국채보상의연금 횡령으로 몰아 구속케 함 ▲1909년 5월 1일 배설 사망.영문판 중단. ▲1910년 5월21일 통감부,만함에게 7,000엔(700파운드) 주고 대한매일신보사 인수. ▲ 〃 8월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매일신보 종간. (국한문판 1,461호,국문판 938호)
  • 정치개혁 3개안 ‘도마’에/국민회의 대토론회 어떤 의견 오갔나

    ◎국회제도­의원 출석·입법 성적 공개 제안/정당제도­당내 민주화로 개혁 완결 주장/선거제도­비례대표제·의원수 축소 논란 국민회의 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13,14일 이틀동안 상공회의소 국제회의실에서 ‘정치개혁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국회,정당,선거제도 등 3개 분야 정치개혁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토론회는 일단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았다.金元吉 정책위의장은 토론회를 마친 뒤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지만 전체적으로 ‘진일보한 안’이라는 평을 받았다”며 흡족해했다.토론자들도 의견을 같이했다.그러나 일부 각론에서 토론자들은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보완을 요구,토론회 열기를 달궜다. ▷국회제도개혁◁ 韓相震 서울대 교수의 사회로 열린 국회제도개혁 토론회는 국회운영의 활성화와 국회의 기능활성화 및 효율화가 논의의 초점을 이뤘다.한국정당정치연구소 孫赫載 정치분석실장 등 토론자들은 의장의 당적 이탈은 의장을 사회자로 격하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그러나 鄭鍾燮 건국대 교수는 당적 이탈제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국회운영에 있어서는 문제점을 보완하는 쪽으로 토론이 진행됐다.특정 교섭단체의 국회 보이콧을 방지하기 위해 출석성적과 입법성적표를 선거 입후보 명부와 함께 공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국회기능의 강화에 대해선 토론자 사이에 이론이 없었다.예결위를 예산위와 결산위로 분리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이들 위원의 ‘임기 1년’은 혹독하게 비판했다.예결위를 ‘상설화’할 것이냐 ‘특위’로 할 것이냐 하는 대목에선 의견을 달리했다.안기부 국방부 지방교부금 등 예산 편성의 사각지대를 없애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주문도 있었다. 인사청문회의 범위를 놓고 한바탕 위헌 논쟁을 벌였다.鄭교수는 “헌법상 국회동의가 필요없는 국무위원 및 경찰청장·검찰총장·국세청장을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은 명백한 위헌으로,국민회의는 대선 공약의 실수를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행정부 견제를 위해 대통령 소속의 감사원을 국회로 가져오고,행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을 억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법제예산실과 입법조사관을 대폭 확충하고,특별검사제 도입을 촉구했다.국회제도개혁 분과위원장인 南宮鎭 의원은 “너무나 좋은 의견이 많이 나왔다”면서 “다시 검토할 기회를 갖겠다”고 다짐했다.그러나 감사원이 어디에 속하느냐는 것은 헌법개정사항임을 강조했다. ▷정당제도개혁◁ 金浩鎭 고려대 교수의 사회로 열린 정당제도개혁 토론회에서는 공천제도와 지구당 운영문제를 놓고 활발한 의견 개진이 있었다.토론자들은 국민회의 시안이 ‘진일보한 안’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면서 보완을 촉구했다.李南永 숙명여대 교수는 공천제도를 하향식에서 상향식으로 하고,미국의 예비선거제도를 장기적으로 도입할 것을 건의했다. 지구당 운영 문제도 도마 위에 올랐다.金국장은 “지구당 운영의 고비용 타파와 당내 민주화만 이루어지면 정당제도개혁은 다 이뤄지는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지구당을 합의제로 운영할 것을 주장했다. 黃台淵 동국대 교수는 우리의 정당을 보스정당 또는 명사정당이라고 규정한 뒤 비례대표 후보를 시·도지부와 협의,중앙당이임명하면 보스정당을 극대화할 우려가 있는 만큼 중앙당과 협의,시·도지부에서 임명하는 방식으로 임명 주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공무원 정당가입에 대한 보완 의견이 제시됐다.“줄서기 풍토가 만연한 공직풍토상 지방공무원의 정당가입은 유보해야 한다”와 “정당가입을 허용하되 당직만 금지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정당설립요건 완화와 관련,李교수는 “정당의 설립요건 완화에는 공감하지만 지구당을 정당설립요건으로 하는 것은 난센스”라고 지적했다.차제에 지역단체장을 노리는 순수지역당의 출현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토론자들은 선거자금법의 처벌 규정을 강화,대가성 유무에 관계없이 처벌하고 형평성 차원에서 지방자치단체장에게도 후원회를 통한 정치자금 모금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林采正 정당제도개혁 분과위원장은 “총론에 대한 비판보다는 각론에 대한 보완을 요구,감사하게 생각한다”면서 “법의 이상과 현실을 어떻게 조화롭게 하느냐가 최대의 숙제”라며 문제점의 보완을 약속했다. ▷선거제도개혁◁ 趙昌鉉 한양대 지방자치대학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선거제도개혁 토론회는 열기가 가득했다.국회의원 정수 축소와 권역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에 등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의원 정수를 줄이는 데 반대의견이 많았다.成洛寅 영남대 교수는 “통일을 대비해서라도 현재의 정수를 유지해야 한다”면서 “감축안이 과연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張錫權 단국대 부총장도 “민주정치는 원래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갖고 있다”면서 “비용을 줄이려면 의원세비와 보좌관 수를 줄여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千正培 의원은 그러나 “우리도 의원수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국민 여론이 줄이라고 한다”면서 “국회도 고통분담을 하는 차원에서 다시 늘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에는 줄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도입에 대해서도 양론이 있었다.원칙에는 찬성하면서도 도입취지가 지역감정 해소에 있다면 재고하라는 의견도 개진됐다.도리어 지역감정을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취지에서다.成교수는 대의주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비례대표 비율을 2대 1,張교수는 3대 1로 할 것을 주장하고 비례대표 명부 작성시 민주성과 객관성 보장에 한 목소리를 냈다. 金元吉 정책위의장은 종합평가에서 “토론회를 통해 ‘의장 당적이탈문제’‘예결위원 임기’‘지구당 존폐’‘인사청문회 대상’ 등에 대해 추가 보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 전공관련 시사 질문에 수험생 ‘쩔쩔’/서울대 교장추천전형 면접

    ◎“아들 손가락 자른 아버지 어떻게 생각하나”/유흥업소 선별단속 형평성 질의도/경제학부선 ‘삼성 자동차’ 문제 출제 9일 실시된 서울대 고교장 추천제 면접고사에서는 까다로운 질문들이 쏟아져 수험생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3명의 교수가 1명의 수험생에게 15∼20분동안 실시한 이날 면접에서는 전공과 관련된 시사적인 질문이 쏟아져 대답조차 못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사회복지학과에 지원한 安秉燦군(18·서울 광영고3)은 “생활고에 시달려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아버지에 대해 사회복지학과 지원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무척 당황했다고 말했다. 安군이 “아버지의 심정에 이해가 간다.극빈층에 대한 정부의 재정적인 지원이 있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다”고 대답하자 면접교수는 “극빈층이 한두명이 아닌데 수요조사는 어떻게 하고 사회복지 예산확보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문,곤혹스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법학과에 지원한 具賢眞군(18·경남 김해고3)은 “경찰이 유흥업소 단속에 나설 때 몇개 업소만 선정해서 실시하는데 법의 형평성 측면에서 어떻게 보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혔다. 경제학부에 지원한 李한범군(18·전북 순창제일고3)은 면접 10분 전에 A4지 한장 분량의 영문을 건네받고 당황했다.면접이 시작되자 원서의 내용을 요약해 말해 보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삼성의 자동차 진출문제’ 등의 질문이 쏟아졌다. ‘IMF 이후 현재의 소비패턴이 바람직한가’(소비자아동학과),‘복제양 돌리의 유전자 복제에 대한 윤리성 문제’(생물학부),‘한자 조기교육에 대한 생각’(국문과),‘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는 것이 바람직한가’(고고미술사학과),‘초중고 한반 학생수 40명이 적당한가’(지리교육과),‘고위층 탈세를 바라보는 봉급생활자의 불만과 법의 형평성’(법학과) 등의 질문도 나왔다.
  •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오늘 개막

    ◎지구촌 107국 1만여 출판사 참가/한국 38년만에 대규모 국가관 설치 세계 최대규모의 도서전인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개막된다.12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도서전에는 107개국 1만여개 출판사가 참가한다.6만여평의 전시장에는 36만9,000여종의 책과 CD롬 등이 선보인다. 우리나라는 이번 도서전에서 참가 38년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국가관을 설치,출판문화대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게 된다.우선 외형에서 지난해까지만 해도 ‘가로 4m,세로 8m’ 크기로 베트남 등 동남아국가에 비해서도 규모가 적어 세계 7대 출판대국의 이름이 무색했으나 이번에는 정부에서 8,500만원을 지원한데 힘입어 ‘가로 8m,세로 18m’의 한국관을 만들었다. 한국관에는 고려원과 문학동네,시공사,푸른숲,해냄,현암사 등 17개 출판사의 1,175종,1,572권의 도서가 전시된다.금성출판사는 별도의 아동관에 책을 전시한다.특히 영어,독일어,불어,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된 우리 문학작품 88종도 소개된다. 대한출판협회 정종진 사무국장은 “종전에는언어의 한계로 한국출판사들은 사진이나 그림이 많은 책을 전시하는데 그쳤으나 이번에는 모든 책에 대한 영문초록을 만들어 저작권 계약에도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하는 이 도서전은 출판의 ‘자유정신’과 ‘문화진흥’에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전시회 이외에 국제출판협회(IPA)분과회의와 국제저작권전문가회의,국제유통전문가회의,국제전자출판연구소 세미나 등도 다채롭게 열려 21세기 출판문화 발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모색한다. 또한 출판올림픽으로 불리는 IPA총회의 차차기 개최국 결정은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는 독일과 함께 유치신청을 했지만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독일이 2004년 IPA총회에 강한 의욕을 보이는 데다 이번 IPA국제위원회 개최국이기 때문이다. 1564년 시작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2차대전이 터지면서 일시 중단됐가 1949년 재개됐다.한국은 지난 61년부터 매년 참가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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