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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홀리데이’ CGV 재상영키로

    영화 ‘홀리데이’가 26일부터 CGV에서 다시 상영된다. 영화 상영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홀리데이’ 배급사 롯데엔터테인먼트와 제작사 현진씨네마는 24일 영화관 체인 CGV와 재상영에 합의,26일부터 CGV 20여 스크린에서 다시 상영한다고 밝혔다.
  • “대중성 갖춘 한국적 창작음악극 추구”

    “대중성을 갖춘 ‘한국적 창작음악극’을 추구하겠습니다.” 지난 1일 역대 최연소로 이사장에 취임한 서울예술단 정재왈(42) 이사장은 24일 기자간담회에서 올해 창단 20년을 맞은 서울예술단의 향후 정체성과 방향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정 이사장은 전임자인 신선희 국립극장장이 재임 7년간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가무악’ 대신 ‘한국적 창작음악극’의 개념을 제시했다.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기존의 원칙을 유지하면서 시대 조류에 맞는 현대적인 감각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뜻이다.연극 ‘이’를 뮤지컬로 제작해 9월 무대에 올리는 것을 비롯해 농악퍼포먼스 ‘소용돌이2’, 뮤지컬 ‘바람의 나라’와 ‘크리스마스 캐롤’ 등 4편을 연내 공연할 예정이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 당장 예산 충당이 시급하다. 연간 총 예산 61억 9200만원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방송발전기금(39억 7600만원)이 올해부터 일몰제가 적용돼 2009년이후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정 이사장은 “국립 단체로 전환하는 방안을 정부 당국과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조직의 슬림화와 구조 개편도 빠른 시일내에 손대야 할 부분이다.정 이사장은 “단체의 명칭을 변경하는 안을 포함해 서울예술단에 관한 모든 사안을 점검하는 심포지엄을 열어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밝혔다. 고려대 영문과를 나온 정 이사장은 한국일보,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LG아트센터 운영부장을 지냈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정희성씨

    정희성(61) 시인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새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정 시인은 지난 21일 서울 사간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9차 정기총회에서 문학평론가 염무웅 영남대 교수에 이어 제16대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부이사장에는 강형철 남송우 도종환 윤영수 최인석씨가 선출됐고, 김형수 사무총장은 연임됐다. 사무처장에는 시인 김해자씨가 선임됐다. 임기는 2년이다. 서울대 국문학과를 나온 시인은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 ‘답청’‘저문 강에 삽을 씻고’‘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등을 냈다. 김수영문학상, 만해문학상, 시와시학상 등을 받았다.1972년부터 숭문고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 화우·김신유 통합법인 출범

    법무법인 화우(대표변호사 변재승, 윤호일, 변동걸, 양삼승, 강보현)와 법무법인 김신유(대표변호사 김진억, 유록상, 이재기, 정해덕)는 23일 서울 강남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통합 및 특허 법인 출범식을 열었다. 두 로펌은 통합법인 한글 명칭을 ‘법무법인 화우’로, 영문 명칭을 ‘Yoon Yang Kim Shin & Yu’로, 특허법인의 명칭을 ‘특허법인 화우’로 각각 정했다. 통합법인은 변호사ㆍ변리사 수가 160여명에 이르며 신규 채용 인력을 합하면 다른 법인들과 치열한 2위권 로펌 경쟁을 벌이게 될 전망이라고 회사측은 설명했다. 현재 변호사업계의 로펌 규모 순위는 김&장, 광장, 세종, 태평양, 화우 등의 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우측은 “법률시장 개방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극 대응하고 보다 나은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전문화와 대형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합을 결정했다.”면서 “한국에 기반을 둔 세계적 로펌으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이효용기자 utility@seoul.co.kr
  • [독자의 소리] 설연휴 양심은 버리지 말자/김영문

    설 연휴를 맞아 주말부터는 귀향길 대행진이 이어진다. 특히 많은 차량이 대이동을 하기 때문에 귀성·귀경 객들이 차 밖으로 버리는 쓰레기가 여기저기 쌓여 있다. 특히 지·정체 현상이 발생하는 구간에서는 차안에서 음식이나 음료 등을 먹고 도로나 갓길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고속도로와 인접한 논밭에 던져 농민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일이 있다. 이 같은 고속도로에서 쓰레기 불법투기는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져 인적 물적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또한 쓰레기를 수거하고 처리하는 데 엄청난 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 고속도로 확장과 유지보수에 투자되어야 할 돈이 낭비되는 것이다. 이번 설 명절엔 차 밖으로 쓰레기를 불법 투기하는 행위가 없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 출발전 먹고 난 음식물 등 쓰레기를 담을 비닐봉투를 준비해 쓰레기를 되가져오거나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 모아 버렸으면 한다. 이번 설에는 선진 시민의식을 발휘하여 안전하고 쾌적한 여행길이 되었으면 한다. 김영문<경남 고성군 마암면 두호리>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성그룹-故 김수근 창업주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성그룹-故 김수근 창업주家

    대성그룹 고 김수근 회장가(家)의 혼맥은 매우 단출하지만 3남3녀 모두 경영에 참여할 만큼 2세들의 대외 활동은 왕성하다. 무엇보다 여느 재벌가(家)와 달리 딸들의 적극적인 경영 참여는 고 김 회장가(家)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징 중의 하나다. 독실한 기독교 가풍이 남녀 평등으로, 정략결혼에 대한 거부감으로 드러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또 통혼(通婚) 과정에서 ‘교회 인연’이 적지 않은 것도 눈에 띄는 점이며,2세들의 화려한 학벌도 이 집안의 자랑이다. 대성은 고 김 회장이 연탄사업을 기반으로 성장시킨 그룹이다. 한때는 대학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었던 기업으로 손꼽힐 만큼 재계에서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다. 1970년대 초엔 국내 10대 그룹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사세가 대단했었다. 그러나 연탄산업의 몰락과 이에 따른 변신이 늦어지면서 점차 뒤처지기 시작했으며,2000∼2001년 사이엔 연이은 계열 분리로 그룹 규모가 더욱 줄었다. ●에너지 산증인 김수근 창업주 “인생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영원해야 한다.” 김수근 대성 창업주가 운명하기 며칠 전 병상으로 그룹 임·직원을 불러 남긴 필담 유언의 한 토막이다. 그의 기업관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1916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 창업주는 가정 형편 때문에 대구상고를 중퇴하고, 삼국석탄 대구지점에서 연탄과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일본기업들은 일본인만을 채용하는 원칙이 있어 취직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 창업주는 회사에서 입사를 수차례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밀어붙여 취직한 뒤, 성실함과 정직으로 내부 업무는 물론 외판 업무도 맡았다. 당시 김 창업주는 일에 대한 집념과 노력 등으로 일본인으로부터 ‘가죽고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1940년 일본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47년엔 “연료 대책이 시급하고, 더 이상 산림이 황폐화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며 대구 칠성동에서 연탄회사인 대성산업공사를 설립했다. 김 창업주의 성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대성그룹이 보유한 경북 문경새재 주흘산 수백만평을 관광지역으로 개발하자는 권유가 많았었지만 그는 번번이 거절했다. 연탄사업을 벌인 것은 황폐화하는 삼림을 보호하자는 뜻이 컸다는 이유에서였다. 주흘산 입구엔 “대성그룹은 청정 산림지역을 후손들에게 영원히 물려주고자 한다.”는 내용의 푯말이 있다. 또 김 창업주는 출장을 갔다 오면 영수증 한 장까지도 빠짐없이 챙기고, 경비가 남으면 회사에 고스란히 넘겼다. 뿐만 아니라 외국 호텔 객실에서 쓰고 남은 일회용 비누를 “집에서 면도할 때 쓰면 좋겠다.”며 가방에 넣어 오기도 했다. 정치권 압력에도 초연했다고 한다. 대성이 정치적으로 스캔들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 창업주는 친구였던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의 정치헌금을 거절해 세무조사를 받았을 정도였다. 경영철학도 남달랐다. 그는 무엇보다 ‘번 만큼만 투자한다.’는 경영론을 일관되게 지켰다. 그래서 한 우물만 파는 경영이 가능했다.“하나라도 제대로 하자.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경영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그의 경영철학은 ‘대기만성’의 약자인 ‘대성’이라는 그룹의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아들 3형제에게 ‘투명 경영’을 유훈으로 남긴 일화는 유명하다.“기업이 내 소유란 생각을 버려라. 또한 이사회를 사장의 들러리로 만들지 마라. 기업이 이익을 못 내면 죄악이니 이익을 못낼 때는 과감히 전문경영인을 써라. 국민의 사랑을 못 받을망정 지탄받는 기업은 되지 마라.” 이런 김 창업주의 철학은 대성을 남의 돈을 안 쓰는 튼실한 기업으로 만들었다. ●조촐한 혼맥의 ‘교회 인연’ 김 창업주가(家)의 혼맥은 한때 내로라했던 재벌가(家)치고 매우 단출하다.2세들 가운데 중매 결혼이 적지 않았지만 정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방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김영훈 회장은 이와 관련, “지인들을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덕을 보지 않겠다.’는 것이 부친의 확고한 뜻이었다.”고 말했다. 김 창업주는 1942년 여귀옥(83)씨와 혼례를 치렀다. 이들의 인연은 대구 ‘남산교회’에서 맺어졌다. 김 창업주의 모친인 기묘임(작고) 여사와 여씨의 모친인 최성연(작고) 여사가 대구 남산교회의 신도였다. 그렇다고 결혼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김 창업주는 당시 대구상고를 중퇴해 가족 생계를 위해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던 반면 여씨는 당시 대구 신명여고를 졸업하고, 평양여자신학교를 수료한 ‘신 여성’이었다. 또 여씨 집안은 대구에서 유명한 기독교 집안이자, 명망가(家)였다. 그러나 여씨의 모친인 최 여사는 “내가 딸이 둘이면 하나는 부잣집에, 하나는 인격을 보고 하겠는데 단 하나밖에 없으니 인격을 보아야겠다.”면서 주변의 반대를 물리고 김 창업주를 사위로 맞았다고 했다. 김 창업주와 여씨는 슬하에 4남3녀를 뒀다. 이 가운데 4남 영철군이 73년 교통사고로 숨졌다. 장남 김영대(64) 회장은 모친의 친구 소개로 71년 법조인 차영조 변호사의 딸 정현(57)씨와 결혼했다. 정현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김 회장 부부는 정한(34)-인한(33)-신한(31) 등 3형제를 두고 있다. 장남인 정한씨는 현재 대성산업 기계사업·해외자원개발부 상무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97년 서울 덕수교회에서 대원외고 동창인 전성은(33)씨와 결혼했다. 성은씨의 부친인 전경호 서한모방 회장은 김 회장과 경북사대부고 동기동창이다. 차남 인한씨는 미국 버지니아주립대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같은 과 후배인 이내리(28)씨와 2002년 서울 덕수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막내 신한씨는 지난해 말 병역특례를 마치고, 현재 경영수업을 준비 중이다. 그는 미시간대 컴퓨터공학 석사 출신이다. 차남 김영민(61) SCG그룹 회장은 79년 친지의 소개로 서울대 음대(성악과)를 나온 민명옥(51)씨와 인연을 맺었다. 명옥씨의 부친은 전 유화증권 사장을 지낸 민유봉씨이다. 김 회장 부부는 은혜(26)-요한(24)-종한(17) 등 2남1녀를 두고 있다. 3남 김영훈 회장은 93년 박영창 목사의 소개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차녀인 김정윤(37)씨와 결혼했다. 슬하에 의한(12)-은진(9)-의진(6) 등이 있다. 장녀 김영주(58) 대성닷컴 부회장은 75년 서울대 의대 출신인 내과전문의 신현정(61)씨와 인연을 맺었다. 현정씨는 현재 도시가스서비스회사인 ㈜알파서비스를 경영하고 있다. 김 부회장은 기업인이자 화가로 유명하다. 이들 부부는 정희(30)-명철(29) 등 1남1녀를 두고 있다. 차녀 김정주(57) 대성닷컴 사장은 하버드대 신약학 박사 출신으로 연세대 교수를 겸직하고 있다. 독신이다.3녀 김성주(50) 성주인터내셔날 사장은 하버드 동창생인 딘 고달드와 결혼해 딸 지혜(17)씨를 두고 있다. 김 창업주의 동생인 김의근(작고) 회장가(家)와 김문근(작고) 회장가(家)도 정·관계와 그다지 인연이 없다. 굳이 꼽는다면 재계에서 중견 기업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고 김의근 모토닉(옛 창원기화기공업) 회장은 양제선(81)씨 사이에 3남2녀를 뒀다. 장남인 영준(작고)씨를 통해 대한모방 회장을 지낸 김성섭가(家)와 사돈지간이다.3남인 김영목(50) 모토닉 부사장은 산업은행 부총재를 지낸 홍대식의 딸 홍은주(43)씨를 배필로 맞았다. 차남인 김영봉(53) 모토닉 사장은 평범한 은행원의 딸인 김혜옥(46)씨와 혼례를 치렀다. 김문근(작고) 전 대성광업개발 회장은 김정희(작고)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영범-영돈-은주-영천-영석 등 4남1녀를 뒀다. 장남인 영범씨는 최근 대성광업개발 회장직에 올랐다. 형제 모두 대성광업개발에서 근무하고 있다. 대성그룹의 분가는 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매출 2조원을 넘는 대성은 고 김 창업주 생전에 동생인 김의근 회장이 2000년 7월 대성정기와 창원기화기공업의 경영권을 갖고 가장 먼저 ‘대성의 품’을 떠났다. 김의근 회장은 사실상 김 창업주와 동업 관계였다. 그는 김 창업주가 47년 연탄사업을 시작할 때 석탄 생산을 맡았고, 김 창업주는 제조와 판매를 책임졌다. 이어 2001년 4월에는 김 창업주의 막내 동생인 김문근(작고) 회장이 대성광업개발을 맡아 분가했다. 대구공고 출신인 김문근 전 회장은 대한중석 등에서 일하다 1950년대에 대성에 합류했다. 김 창업주 사후인 2001년 6월엔 영대·영민·영훈 등 아들 3형제가 다시 2차 세포분열을 통해 분가했다. 장남 김영대 회장이 모기업인 대성산업을, 차남인 김영민 회장이 서울도시가스 계열을,3남인 김영훈 회장이 대구도시가스 계열을 각각 맡았다. 그러나 분가 과정에서 적지 않은 진통도 있었다. 주식 평가를 놓고 형제간 잡음이 일면서 재계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김영대 회장은 이와 관련해 “자신의 덕이 부족한 탓”이라고 했다.8월엔 막내 김성주 사장이 이끄는 성주인터내셔날도 대성에서 떨어져 나갔다. 장남과 3남은 현재 ‘대성그룹´ 사명을 같이쓰고 있다. ●김영대 회장의 ‘인재론’ 김영대 회장은 대기업 회장답지 않게 사내에서도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잘 나서지 않고 매우 조용하다. 그는 또 학구파다. 환갑이 지난 나이지만 월·수·금요일은 일본어, 화·목·토요일은 중국어를 공부한다. 그의 경영 스타일은 안정과 보수로 대변된다. 이 때문에 간혹 김 회장 주변을 ‘경로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 회장의 비서인 전성희(63) 이사는 국내 비서계의 대모다. 김 회장을 모신 지 28년째다. 그의 비서 입문은 우연이었다고 한다.79년 미국 유학을 마친 남편과 함께 귀국했을 때 남편의 대학 친구였던 김 회장은 “미혼 비서를 뒀는데 모두 1년 정도하고 그만두더라. 어디 오래 근무할 아줌마 없느냐.”며 추천을 부탁했다. 결국 남편의 권유로 전 이사는 당시 세브란스 병원 약사모집 면접을 포기하고 대성에 들어가게 됐다. 전 이사는 이화여대 약대 출신이다. 김 회장의 운전기사인 정홍(64) 차량관리 과장도 40년 이상 김 회장을 모시고 있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환갑 기념 유럽여행을 같이 다녀오기도 했다. 사실상 신분을 넘어 지기(知己)인 셈이다. 또 대성 임직원들은 다른 그룹과 달리 60대 이상이 유난히 많다. 김 회장의 인재를 아끼는 스타일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샌님(?)같은 김 회장도 무서울 정도의 강한 집념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는 90년대 초 씨티은행으로부터 50억원을 불법 대출받아 가로챈 뒤 미국으로 도주한 직원을 직접 추적해 붙잡은 경험이 있다. 그가 쓴 ‘구름 속의 구만리’라는 추적기에서 “마치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당시 10개월 동안 출장 9차례, 미 체류기간 200일, 미대륙 종횡단 9000마일, 만난 사람만도 1000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는 50억원의 돈도 돈이지만 회사의 신용과 조직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 그 직원을 붙잡지 않으면 안된다는 절박감이 더 컸다고 했다. 더욱이 일개 직원에게 거액의 수표를 무책임하게 내준 은행측으로부터 음모론까지 흘러나오면서 ‘대추적’을 결심했다. 대성그룹은 현재 3세 경영이 닻을 올렸다. 장남인 김 상무가 2002년 연구개발실장으로 입사해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다. ●‘대성 부활’ 노래하는 3남 김영훈 회장 김영훈 회장은 조용한 말소리와 차분한 몸가짐, 설득조의 언어 구사 등에서 CEO보다 목사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어릴 적 꿈이 목사였다. 대학에서 신학공부를 했으며, 영락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늦장가를 갈 정도로 공부에 푹 빠져 살았다. 그가 받은 학위만도 법학, 경제, 경영, 신학 등이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에 이어 미국 미시간대에서 법학·경영학 석사를 마친 뒤 하버드에서 신학과 국제경제학 석사 학위를 땄다.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그는 늘 책과 씨름하는 것이 취미다. 김 회장은 1988년 부친의 갑작스러운 부름을 받고, 대성산업 기획조정실장으로 경영의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시 그는 경영인보다 목회자의 길을 걷기를 원했지만 부친의 ‘SOS’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계열분리 이후 대구도시가스를 주력으로 경북도시가스와 바이넥스창업투자 등 19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당시 에너지사업 일변도에서 지금은 문화사업을 차세대 ‘먹을 거리’로 마련해 대전환의 시기를 맞고 있다. 그는 창립 60주년을 한 해 앞둔 올해 2010년까지 매출 10조원, 순익 10억달러를 목표로 한 ’10·10·10’ 전략을 내놓았다. 옛 대성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한 김 회장의 야심찬 청사진이다. 2남 김영민 회장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스포츠 마니아이며 유머러스하다.ROTC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역사 교관으로 근무했다. 경북사대부고와 미국 댈러스대, 남가주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공주의 길’ 포기한 김성주 사장 막내딸 김성주 사장은 ‘별종’이다. 가문에서 그렇고, 사업에 있어서도 그렇다. 다른 형제들이 부모의 말씀이면 무조건 순응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반면 김 사장은 부모가 반대하는 일들을 줄기차게 밀어붙였다. 그 대가로 그는 혹독한 고생을 경험했다. 송금이 끊겨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 했으며, 직장 생활도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사업에서도 ‘봉투’와 ‘접대’라는 그간의 사업 상식을 깨고 투명경영으로 남성 세계를 하나씩 깼다. 김 사장은 자기 힘으로 사업을 일군 여성 CEO가 드문 국내에서 성공한 기업인으로 첫손에 꼽힌다. 그는 훗날 성주인터내셔날을 창업한 배경에 대해 “살찐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 탈출했다.”고 밝혔다. golders@seoul.co.kr ■ “우리집안은 아들보다 딸이 나아요” “우리 집안은 아들보다 딸이 나아요.” 대성가(家)의 2세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심지어 김영훈 회장은 대성의 차세대 캐시카우(현금 창출원)로 키우는 문화사업을 이른바 ‘효자 사업’이 아니라 ‘효녀 사업’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여성들의 실력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대성가(家)의 딸들은 하나같이 대단하다. 장녀 김영주 화백의 또다른 ‘명함’은 대성닷컴 부회장이며, 차녀 김정주 연세대 교수는 대성닷컴 사장직을 겸직하고 있다. 자매가 최고경영자(CEO)직을 맡은 것은 문화사업에 여성 특유의 세심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김 회장의 요청 때문. 김 부회장은 화가로서의 재능을 대성닷컴 출판사업에 톡톡히 쏟아내고 있다. 김 부회장이 책 표지 디자인을 혼자 다할 정도다. 김 사장은 그룹의 문화사업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김 화백은 서울대 미대를 수석으로 입학해 미국 크랜브룩 아카데미오브 아트 대학원을 나왔다. 김 교수는 미시간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했으며, 하버드대 신학대학원에서 신약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매는 모친에 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절제회’ 활동에도 열심이다.1983년부터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부회장을 번갈아가며 맡아오고 있을 정도다. 절제회는 종교를 초월해 각종 절제 운동을 펼치는 여성 단체. 국내에선 국산품 애용과 허례허식을 배격하는 운동을 벌였고, 최근엔 금연 운동과 임산부와 청소년 음주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다. 막내딸 김성주 사장은 자매 가운데 가장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성공한 여성 CEO로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김 사장은 1997년 세계경제포럼(WEF)의 차세대 지도자 100인, 세계여성지도자총회의 아시아 대표 연설자,2004년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의 ‘주목할 만 한 세계 여성 기업인 50명’에 선정되는 등 글로벌 CEO으로서 명성이 매우 높다. golders@seoul.co.kr ■ 2세들 ‘화려한 학벌’ 고 김수근 회장가(家)는 재계에서 ‘자식 농사’를 잘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3남3녀 모두 명문대 출신으로 2개 이상의 석사 학위 소지자들이다. 3남 김영훈 회장은 “모친 여귀옥 여사의 남다른 자식 교육이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과 절제 등을 몸으로 보여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모친은 ‘공부하라.’는 말을 꺼낸 적이 없으며, 제가 미국에 유학갈 때도 편안하게 ‘놀다 오라.’는 당부까지 하셨다.”면서 “그러나 우리 형제는 모친의 바른 생활과 이웃사랑 등을 보면서 공부를 안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여 여사는 임신 중엔 태교를 위해 잡지나 신문을 보지 않고, 오직 성경만 보고 지냈다고 한다. 또 자녀를 자신의 소유물이 아닌 독립된 인격체로 대했으며, 꾸지람보다 스스로 깨우치도록 유도했다. 대성가 2세들은 모두 대단한 학벌의 소유자이며,‘수석’을 곧잘 했다. 법학을 전공한 장남 김영대 회장은 서울대 경영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차남 김영민 회장과 3남 김영훈 회장, 장녀 김영주 화백도 모두 서울대 출신이다. 특히 김영훈 회장은 법학, 경제, 경영, 신학 등 석사 학위가 무려 4개다. 차녀 김정주 연세대 교수는 이화여대를 수석으로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막내 김성주 사장은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앰허스트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김영훈 회장은 “우리 형제는 어린 시절 학업에서 그다지 두각을 나타낸 편은 아니었다.”면서 “특히 정주 누나는 중학교 때 반에서 40등까지 했지만 우리 형제 가운데 공부를 가장 잘 했다.”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 아래 자녀를 키운 여 여사의 가르침은 자녀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3세들도 부모 못지 않은 학구파다. 한편 여 여사는 결혼 후에도 영락교회 권사로서 활동했으며,52년에는 초교파적 기독교 여성단체인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를 설립했다. 현재 35개국이 가입해 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커리어 우먼]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장

    [커리어 우먼] 김상경 한국국제금융연수원장

    ‘한국 최초의 외환딜러’,‘인간관계의 귀재’,‘인생을 베팅할 줄 아는 여자’, 금융계의 대모’…. 이름 앞에 온갖 찬란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이 여성의 첫인상은 어떨까?김상경(57) 한국국제금융연수원장을 찾아 가면서 그동안 만났던 성공한 ‘커리어 우먼’들을 떠올렸다. 열정이 넘치고, 자신감에 차 있고, 남자보다 대범하고, 다소 ‘오버’한다는 느낌까지 이어졌다. 찻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김 원장의 이미지는 예상과 달랐다. 차근차근 이어지는 말투에서는 ‘여장부’의 느낌보다는 푸근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눈빛도 온화해 “이런 여성이 어떻게 매일 수백억달러를 베팅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 말미에 “리더의 이미지가 아니네요.”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나선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라고 답했다. ●국내 최초 외환딜러 출신 김 원장이 외환딜러의 세계에 눈을 뜬 건 1979년 어느날이었다. 외환시장이 닫혀 있었던 당시 한국에는 외환딜러라는 직업 자체가 없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아멕스)은행 한국지점에서 비서로 일하던 그녀에게 상사가 “한국도 곧 외환시장을 개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딜러가 필요할 테니 미리 준비하라.”며 외환시장에 관한 영문서적을 건냈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에 들어갔고,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학비를 벌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던 교사직을 포기하고 외국계 기업에 취직했던 김 원장에게 이 책은 또 다른 ‘베팅’을 유혹했다.1년간 아멕스 은행의 홍콩, 싱가포르, 뉴욕 딜링룸을 돌며 딜링을 배웠고,1980년 1월에 국내 최초로 외환딜러가 됐다. 김 원장은 해외에서도 보기 드문 여성 수석딜러(Chief Dealer) 자리를 3년만에 꿰찼다. 딜러로서는 환갑을 훨씬 넘긴 마흔에 430만달러의 순익을 은행에 안겨주며 연봉 2억원을 받기도 했다. ●“거미줄같은 네크워크를 꾸미세요” 1995년 중국은행의 수석딜러를 마지막으로 15년간의 딜러 생활을 접은 김 원장은 “딜링과 인생은 비슷하다.”고 말한다.“보통 외환이나 주식을 거래할 때 오르면 팔고 싶어하고, 내리면 그냥 깔고 앉으려 합니다. 그러나 오를 때 더 기다릴 줄 알고, 내릴 때 과감하게 끊는 딜러가 돈을 법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여서 지금 상황보다 더 악화될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악순환을 빨리 끊어야 해요.” 김 원장이 1995년 뒤늦게 한국국제금융연수원을 차릴 때 주위 사람들은 성공 가능성이 없다며 극구 말렸다. 지금은 은행연합회 산하의 금융연수원과 김 원장의 연수원 두 개만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여러개의 연수원이 난립해 있었다. 김 원장은 외환위기라는 거친 파도와 싸워 홀로 살아 남았고, 연수원을 우리나라 최고의 국제금융 전문 교육기관으로 키워냈다. 김 원장은 성공의 가장 큰 이유로 인적 네크워크를 꼽았다. 그녀는 정부기관 산하 각종 위원회와 은행 사외이사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모임을 이끌고 있다. 딜러 시절 만들었던 모임은 벌써 20년이나 됐고, 일부 회원들은 행장(신한은행 신상훈)이 됐다. 업무상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문인들의 모임인 ‘무명 산악회’에서 활동하기도 하는 김 원장은 오는 3월에 히말라야 등정에 나선다. 산악회 회장인 신경림 시인은 김 원장이 지난 94년 펴낸 책 ‘나는 나를 베팅한다’ 출판 기념회에서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사람이 모인 것은 처음 봤다.”며 놀라기도 했다. ●“시장을 거스르지 마세요” 김 원장이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모임은 금융기관 지점장급 이상 여성들이 모이는 ’여성금융인네트워크’이다.4년째 이 조직을 이끌고 있는 김 원장은 “많은 여성들이 일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오직 일로만 승부를 보려고 한다.”면서 “그러나 인적 네트워크가 없으면 한계에 부딪힌다.”고 충고했다. 지연·학연에 얽매인 저질 네트워크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힐 수 있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확보하라는 것이다. 환율 전문가에게 최근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원·달러 환율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시장은 언제나 옳다.”고 잘라 말했다. 김 원장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에 비해 원화가 과도하게 절상되지 않는 한 정부 개입은 불필요하다.”면서 “달러화 약세라는 세계 시장의 흐름을 한국이 멈추게 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외환시장만의 일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다수의 바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도도한 흐름 속에 ‘부드럽게’ 베팅하는 자가 승리하지요.”지난 71년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 책을 쓰기 위해 일을 접었던 6개월이 유일한 휴식기간이었다는 김 원장이 보여줄 다음 베팅이 궁금해 진다. 글 이창구 사진 김명국기자 window2@seoul.co.kr ●김상경 연수원장 경력 1949년생 1971 성균관대 사학과 졸업 1975∼77 스탠다드차타드은행 1977∼94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은행 1981 한국 첫 외환딜러 1995∼현재 한국국제금융연수원 대표이사 1998∼2000 경기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2003∼현재 여성금융인 네트워크 회장 2004∼06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 위원 2004∼현재 기획예산처 연기금 투자풀 운영위원
  • 영남대생 50명 홍콩박람회서 수출역군 역할 톡톡

    대학생들이 수출역군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영남대 무역인력양성(Trade Incubator)사업단은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4일동안 홍콩 아시아 월드엑스포에서 열린 ‘홍콩 춘계소비재박람회’에 참가,8억여원의 수출 계약과 상담실적을 올렸다. TI사업단이 상담한 바이어는 72명에 달하며 아이스팩 등 출품제품 대부분이 1만원이하 저가인 점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성과라는 평가다. 특히 박람회참가를 위한 준비과정 일체를 학생들 스스로 해냈다.4개월여 준비과정동안 학생들은 주말마다 전국을 누비며 협력업체를 물색한 끝에 8개 중소기업으로부터 협찬제품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또 박람회장 전시부스를 계약한 후 부스디자인, 제품전시 및 홍보, 현장판매, 수출상담 등에 대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TI사업단 본부장 자격으로 이번 박람회에 참가했던 강헌우(27·영어영문학과 4년)씨는 “한류열풍이 한창인 홍콩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들이 부스 앞에서 홍보를 한 전략이 바이어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며 “e메일로 관심품목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바이어관리를 지속적으로 해 상담이 계약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2001년 9월 특성화사업단으로 선정된 영남대 TI사업단은 50명의 재학생들로 구성돼 있다. 지난 2002년 5월 중국 상하이 ‘한국상품 특별전시회’에 참가해 상담 700만달러, 계약 50만달러의 성과를 올리는 등 해마다 짭짤한 실적을 올리고 있다. TI사업단 1기 졸업생들이 100% 취업되는 등 고학력 취업난이 가중되는 가운데 매년 95%이상의 취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취업한 곳도 KORTA, 중소기업청, 삼성물산,LG마이크론 등 대기업과 공기업이 대부분이다. 이로 인해 지난해 산업자원부의 ‘무역전문인력 양성사업단’평가에서 TI사업단이 있는 전국 25개 대학 가운데 1위를 차지했다. 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길섶에서] 내공/오풍연 논설위원

    주변에서 내공 얘기를 많이 한다. 사람을 평할 때 특히 그렇다. 좋은 뜻이든, 나쁜 의미든 입에 자주 올린다.“내공이 대단한데.”“내공이 한 수 위다.”“내공 좀 쌓아라.”“내공이 그렇게 없어서야…” 등등. 무엇을 내공이라 할까. 그러나 대다수는 정확한 의미조차 모르면서 쓰는 것 같다. 속내(內)자를 떠올리며 마음(心)과의 연관성을 유추할 법하다. 기자역시 그랬다. 그래서 국어대사전을 찾아 봤다. 딱 맞는 설명이 없다. 한자어론 ‘내공(內功)’이 가까울 듯했다. 그런데 사전에는 무슨 영문인지 올라 있지 않다. 중국 무협지가 떠올라 자료를 뒤졌다.‘정(精), 기(氣), 신(神)을 단련하는 것을 내공이라 한다.’는 대목을 발견했다. 여기서 정은 음식 등으로 섭취한 에너지원, 기는 몸안의 에너지, 신은 정신(마음)을 뜻한다는 것. 다시 말해 기를 수련하고 사용하는 방법, 곧 무술적 기공이란 뜻으로 내공을 흔히 썼다. 이제 내공을 쌓지 않으면 살기 힘들어지게 됐다. 정이 메마르다 보니 귀에 거슬리는 얘기도 종종 듣게 된다.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에 벌컥 화를 낼 수도 없지 않은가.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다. 그 시간 내공을 더 쌓자. 오풍연 논설위원 poongynn@seoul.co.kr
  • 미스도 여대생도 거짓말

    미스도 여대생도 거짓말

    『아무도 모르는 외국에 가서 살고 싶어요』-「미스·코리어」진(眞)을 자퇴한 김지연양은 이마를 짚었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녀의 경우는 가인박복(佳人薄福)이라고나 할까. 거국적인 미녀뽑기에서 아무튼 제1위를 차지한 여자다. 진을 자퇴하고 주최자로부터 자격을 박탈당한 이유가 응모자격에서 결격사유가 있다는 것이지, 그 자태나 용모에 있어서 모자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 본명 김정혜(金正惠), 마감 이틀 전 미장원 마담 권유로 응모 세상을 놀라게 하고 이러쿵 저러쿵 풍문이 시끄럽게 나돈 것도 사실이다. 그녀는 요즘 자택(서울특별시 갈월동)에서 바깥 출입을 일절 금하고 사람도 만나지 않고 방 한구석에 박혀 산다. 일이 모두 수습이 되고 잠잠해질 때까지 얼굴을 내놓기가 싫은 심정이다. 자퇴한「미스·코리어」김지연양의 본명은 김정혜. 1949년 6월 30일 생이니까 만 20세.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 287의 1. 평소 자주 드나들던「센추리」미용실「마담」의 권유로「미스·코리어」서울 예선에 응모한 것이 대회 이틀 전인 4월 25일. 응모자「프로필」난에 소개된 金양은 - . 『 … 현재 숙대(淑大) 가정과에 재학 중인 金양은 서울 태생으로 올해 나이 20세 … . 결혼문제엔「아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면서 엉뚱하게도「40세가 되면 생각해 보겠다」고. 신장 166, 무게 51, 36-23-36』으로 되어 있다. 4월 27일 상오 10시 대한체육회관에서 열린 서울예선대회에서 金양은「미스·서울」9명 중에 뽑혔다. 전국 결선대회에 출전할 자격을 얻은 것이다. 운명의 5월 1일 밤 9시 35분. 장충체육관에서 1만여 관중들의 갈채를 받으며「미스·코리어」진으로 선발되는 순간 金양은 정신이 아찔했다. 당선의 감격은 벅찼는데 그날부터 소문나기 시작 『뜻밖의 영광에 뭐라 할 말을 잊었다』며 감격에 벅차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감격은 잠깐, 다음날부터『「미스·코리어」진은「미스」가 아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입이 빠른 미용실, 양장점 사이로 소문은 삽시간에 확산. 이렇게 되자 金양은 5월 7일자로「미스·코리어」진 사퇴서를 냈다. 심사위원회의 재심이 있고 5월 9일자로 주최측 지상을 통해『1969년「미스·코리어」진으로 당선된 김지연양은 본 대회 선발규정에 의하여 그 자격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으며, 이에 따라 본인이 자퇴하였으므로 당선을 취소합니다』로 정식 발표되었다. 金양은 감격 9일만에「미스·코리어」의 왕관을 되돌려 주어야 했던 것이다. 취소되자 숙대선 “그런 학생 없다” 공한(公翰) 이렇게 되자 金양의 출신교로 알려진 풍문(豊文)여고와 숙대측에서도 해명공한을 냈다. 金양이 학교를 졸업하거나 다닌 사실이 없다는 것. 먼저 숙대측이 재학한 사실이 없음을 10일자 공한으로 각 신문사에 밝혔다. 다음은 숙대측 공한 전문. 『1969년「미스·코리어」당선자에 대하여 금년「미스·코리어」진으로 당선되었다가 그 자격이 취소된 김지연양에 대하여 그가 자칭 숙명여자대학교 학생이라고 보도된 바 있으나 본 대학교에서는 그의 학적을 둔 사실이 전혀 없사옵기 이에 알려드리오니 보도에 정확을 기하는데 협조하여 주시기 바라며 선에서 진으로 당선된 임현정양은 본명이 임희선으로서 본 대학교 영문과 3학년에 재학 중임을 확인하는 바입니다. 1969년 5월 9일. 숙명여자대학교 학생처장』 당사자인 金양과 그 가족도 이 사실을 확인했다. 역시 공한 낸 풍문여고엔 고3까지 다닌 것은 사실 그러자 이번엔 金양이 다녔던 풍문여고측에서도 공한을 띄웠다. 다음은 공한 전문 - . 『「미스·코리어」진 김지연의 학력사항 정정의 일 - 금번「미스·코리어」진에 당선되었다 취소된 김지연이 본교 졸업생인양 보도된 바 있으나 본교 졸업한 사실이 없음을 통보하오니 학력사항을 정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969년 5월 10일. 풍문여자고등학교장』 알고 보면 金양이 풍문여고를 다닌 것은 사실. 그러다 고3 되던 해인 67년 5월 가발을 쓰고 어떤 군인과 극장에 갔다가 여선생에게 적발되어 자퇴형식으로 제적을 당한 것이다. 한편 金양은 여고시절부터 사귀어오던 김태문(23·무직)씨와 그 해(67년) 10월 31일 서울 동원예식장에서 화촉을 밝혔다. 金양이 정식으로 김태문씨의 호적에 결혼신고 된 것은 그 이듬해인 68년 10월 28일자. 이런 金양은 왜「미스·코리어」선발대회에 출전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9일만의 여왕」金양이 밝히는 그 전모는 다음과 같다. 요정 나간다는 건 뜬소문, 그 집 마담과 친한 사이뿐 - 추천자인「센추리」미용원의 유숙자「마담」과 알게 된 것은? 『제가 그곳을 단골로 다녔거든요. 「미스·코리어」이야기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그 집에 다니고 있었어요』 - 소문으로는 거의 매일 다녔다는데 그럴 필요가 있었나요? 『1주일에 한 번 아니면 두 번이었어요. 매일 나갈 돈도 없었구요』 - 듣기로는「바」에도 나갔다느니 혹은 한남동에 있는 간판 없는 고급요정에 나갔다는 말도 있는데.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취소가 되니깐 별의별 말이 다 나오는 거예요. 그 집「마담」과 개인적으로 친해서 잘 어울려 다녔어요. 그 소문이 난 것이겠죠. 저의 집은 그런 장소에 안 나가도 괜찮을 만큼은 삽니다. 무슨 필요가 있어서 술을 따르러 나가겠어요?』 그녀의 조부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있는 일간신문 C일보의 초대편집국장을 지냈다. 아버지 金씨는 현주소에 대지 280평의 4층짜리「빌딩」을 소유하고 있다. 땅값이 평당 10만원은 되는 곳. 그 부동산 값만 해도 2천 8백만원은 된다. 딸에게 충분한 용돈은 안 주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궁색하게 딸의 벌이로 살아나가야 하는 그런 가정은 아니다. -「콘테스트」에 나가는 것을 부모님들이 알고 있었어요? 『전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서울 예선에 당선된 뒤 신문을 보고 부모님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최자측은 제가 고아가 아닌가라고 몇 번이나 묻기도 했어요. 어머니는 결승날에 겨우 2백원짜리 표를 사서 입장했습니다』 막상 진으로 뽑히고 보니 미녀를 낳은 모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취소가 되었을 때의「쇼크」와 집안 체면 걱정이 컸을 것이다. 金양의 어머니는 지병인 고혈압이 도져 요즘 매일 병원에 다니고 있다. - 이미 기혼자이고 숙대에도 다니지 않았는데 어떻게「미스」로 둔갑하고 숙대 재학 중이라고 학력을 속였습니까? (응모요령 중의 자격규정에는「1951년 7월 1일 이전에 출생한 미혼여성」으로 되어 있다) 『처음부터 저는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서울 예선이 박두해서 미용원측에서 자꾸 나가라고 부채질 했어요. 저는 숙대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콘테스트」가 있기 훨씬 전에 미용원에서 직업이 뭐냐고 묻기에 어물어물 숙대에 다닌다고 했구요, 여자가 또 자기가 기혼여성이라고 미용원에서 밝힐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 딱 잘라 말하지 않은 것이 큰 잘못이었어요. 「마담」이 다 적당하게 적어 넣으면 된다기에 맡겨버렸죠』 - 학교관계는 결격이유가 안되겠지만 호적에 버젓이 기혼녀로 되어 있는 것을 몰랐나요? 『호적에까지 그렇게 되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결혼을 한 일은 있었죠. 그렇지만 입적은 하지 않았고 사실상 별거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법률적으로는 미혼일 줄로만 알고 있었어요』 - 그렇게 생각한 근거는? 『저는 67년 10월 31일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4개월 뒤에는 친정으로 돌아왔어요. 그 이후 계속 별거 중입니다. 그리고 저와 김태문씨와는 이혼하기로 서로 서약서까지 쓴 것이 있어요』 그 서약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1968년 10월 21일 이후에 본인 김태문은 김정혜와 해어질 것을 약속함. 21일까지 김정혜는 김태문과 같이 있어야 됨. 만약 이 약속을 이행치 않을 시는 모든 것이 무효임. 헤어지지 않을 시는 내 목숨을 끊음. 1968년 10월 18일. 본인 김태문(지장), 김정혜(지장)』 이러한 서약서를 교환한 뒤 10월 28일에 남자쪽이 멋대로 입적시켰다는 것이며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지냈다는 것이다. - 학력관계는 어떻든 결혼문제에서는 법률적으로「미스」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군요. 『네, 그런데 제가 호적상 기혼자로 되어 있다는 소문이 퍼져서 호적을 펴 보니 정말 그렇게 되어 있어요.』 -「미스·코리어」로 당선되면 외국에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고 했다는 소문인데. 『별의별 소문이 다 나죠. 세상사람들 마음대로 지껄이는 것이겠죠. 그렇지만 지금 심경은 외국에 나가고 싶습니다』 - 진으로 뽑혔다는 자부 같은 것은 있겠죠? 『네, 거기 나온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제가 진으로 뽑혀 이렇게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어요』 - 세상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과 배운 점이 있다면? 『저를 뽑아주신 주최자에게 감사드리고 싶구요. 그 다음에는 어린 제가 앞으로는 만사 행동을 신중히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찮은 저로 인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다는 점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 시아버지는 “며느리 잘못 둔 덕에 기막혀” ◇ 김태문씨 아버지의 말 창피해서 더 말하고 싶지 않다. 며느리 한번 잘못 둔 덕택에 얼굴도 제대로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둘이 서로 알기는 우리애(태문)가「카투사」로 미8군에 근무할 때부터다. 둘이 좋다는데 부모가 어쩔 도리가 있는가? 정혜가 학교를 그만두던 해인 67년 가을에 서울 동원예식장에서 식을 올려주었다. 혼인을 끝내곤「벌리」에 있는 우리 집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68년 2월) 둘이 따로 나가서 살아보겠다기에 다 큰 애들을 굳이 시부모 밑에 잡아둘 생각도 없었기에 살림을 내보냈다. 처음 저희들 말로는 신촌 어디다 전세방을 얻는다기에 그런 줄만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친정집에 가서 같이 산 모양이다. 「미스·코리어」로 뽑힌 다음 친정집 두 처남이 찾아와『제발 이혼을 해주어야 이번 일이 무사해진다』면서 이혼하자기에 너무 어이없는 일이 되어서 돌려보냈다. 그 다음날은 어떤 회사에서 찾아와 또 그런 이야길 하길래『며느리한테 속은 것도 괘씸한데 당신네 사업을 위해 이혼하라니 무슨 소리냐?』고 호통을 쳤다. 호적만 해도 그렇지 양가 부모가 다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까지 올려놓고서 시집에서 결혼신고한 게 뭐가 잘못이냐? 오히려 결혼식 직후에 호적에 안올린 것이 차라리 글렀지, 안그래요? 사람이 결혼하고 이혼하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 서로 마음잡고 잘 살기를 빌 뿐이다. 지금 우리 아들은 자살하기 직전의 상태이니 그 애를 만나야 더 충격을 줄 뿐이다. 제발 애비로서의 부탁이니 우리 아들을 만나는 것만은 그만둬 주시오. [ 선데이서울 69년 5/18 제2권 20호 통권 제34호 ]
  • [우리는 맞수 CEO] 최휘영 NHN 국내담당 대표 vs 석종훈 다음 미디어부문 대표

    올해는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본격적인 ‘미디어 전쟁’의 원년이 될 전망이다. 활자매체(신문)와 영상매체(방송)로 양분되던 미디어시장이 인터넷과 통신·방송의 컨버전스(융·복합)라는 다양한 구조로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에 시장 혼란도 뒤따를 전망이다. 인터넷 기업을 대표하는 NHN과 다음커뮤니케이션은 이같은 미디어 시장 변화의 중심에 있다. 다음은 올해로 설립 11년째를 맞은 토종 검색포털이고, 창립 7년째인 NHN의 네이버는 코스닥시장에서 시가총액 1위로 웬만한 대기업만큼 성장했다. 두 회사는 또한 한국이 IT 강국임을 자처할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양자는 방문자 수와 페이지뷰에서 치열한 수위 경쟁을 펼치고 있다. 네이버는 최휘영(43) 국내부문 대표가 이끌고 있고, 다음은 석종훈(44) 국내 미디어부문 대표가 진두지휘하고 있다. ●언론인 출신에 실리콘 밸리가 공통점 ‘네티즌 유혹전´의 사령관은 모두 기자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두 CEO는 “네티즌에게 맞는 뉴스를 제때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 포털의 성공 요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선임된 석 대표는 지난 86년 경향신문에 입사해 조선일보의 정보통신팀장 등을 거쳐 2002년 다음의 부사장으로 영입됐다.‘러브콜’을 받은 지 3년 만에 대표 자리에 올랐다. 커뮤니티(카페), 검색포털, 미디어본부 등을 총괄하고 있다. 네이버의 최 대표 역시 91년 연합뉴스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YTN 등에서 주로 정치부 기자를 지냈다. 야후코리아를 거쳐 2002년 네이버로 옮겨 기획실장 등을 맡은 지 2년 만에 대표 자리를 맡았다. 언론사 경력에선 최 대표가 후배지만 포털 입문은 선배다. 최 대표는 기자 시절 IT분야를 한번도 맡아보지 않았던 반면 석 대표는 정보통신 팀장을 지낸 것이 대조된다. 두 대표는 세계 IT의 흐름을 좌우하는 미국의 실리콘밸리 경험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최 대표는 야후코리아에서 근무할 때 본사가 위치한 실리콘 밸리를 오가면서 분위기를 익혔다. 다음의 석 대표 역시 2000∼2001년 미국에서 실리콘밸리뉴스 부사장을 지내며 미국 IT의 변화를 체험했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 국내에는 80년대 후반 알타비스타 등이 도입되면서 인터넷 서비스가 처음 소개됐다. 이후 야후가 들어왔고, 지난 95년 다음이 설립됐다. 초창기 다음이 검색에서 야후에 밀렸다가 2000년대 초반 네티즌들에게 이메일과 카페를 내주면서 단박에 포털 제왕 자리에 올랐다. 이것도 잠깐, 네이트닷컴이 1인 미니홈피로 돌풍을 일으켰다가 2003년 하반기부터는 지식검색을 들고 나온 네이버가 검색 왕좌에 올랐다. 이들의 선두 다툼은 여태껏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두 회사의 ‘포털 제왕전’은 역기능도 있지만 순기능이 많다. 최 대표는 “한국어 콘텐츠가 증가하고 고급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한 반면 석 대표는 “구글 같은 외국 검색업체가 국내에선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네이버의 최 대표는 지식검색을 들고나와 검색 매출을 160억원에서 800억원대로 4배 이상 신장시켰다. 최 대표는 “1일 방문자 수가 1700만명으로 우리가 진정한 포털 제왕”이라고 자랑했다. 반면 다음의 석 대표는 2003년 자체 취재기자를 채용, 독립 온라인 매체인 ‘미디어다음’을 만들면서 네티즌의 방문이 6배 이상 늘어났다. 석 대표는 “1일 페이지뷰는 8억 3000만건”이라고 맞받아쳤다. 국내에서 몸집을 키운 두 기업은 이제 국내 포털의 세계화를 강력히 추진 중이다. 다음은 라이코스를 인수해 미국으로 진출했고, 타온(Taon)으로 일본 포털시장에도 뛰어들었다. 네이버 역시 NHN재팬으로 일본을, 롄종으로 중국 공략에 나섰다. 국내시장 수위 쟁탈전에 이어 세계시장으로 눈을 돌린 두 기업의 CEO가 진정한 뉴미디어 시대의 제왕 자리를 가질지 시장의 궁금증은 더하고 있다. 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석종훈 대표 ▲1962년 서울 출생 ▲86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86년 경향신문사 입사 ▲99년 조선일보사 정보통신팀장 ▲2000년 실리콘밸리뉴스 부사장 ▲2001년 ComeToUSA부사장 ▲2002년 다음커뮤니케이션 부사장 ▲2005년 다음커뮤니케이션 국내 미디 어부문 CEO ■ 최휘영 대표 ▲1964년 서울 출생 ▲90년 서강대 영문학과 졸업 ▲91년 연합뉴스 기자 ▲95년 YTN 기자 ▲2000년 야후코리아 근무 ▲2002년 NHN㈜ 입사 네이버본부 기획 실장 ▲2004년 네이버 부문장 ▲2005년 NHN 국내담당 CEO
  • 보아·장영주, 옥스퍼드大 출판 中·高 교재에

    ‘아시아의 별’ 가수 보아(20)의 성공기가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펴낸 교재에 실려 눈길을 끈다. 10일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와의 독점 제휴로 서적을 수입, 공급하는 ‘이퍼블릭’(구 범문사)에 따르면 지난해 9월 옥스퍼드대 출판부가 첫 출간한 ‘토털리 트루(Totally True)’라는 책에 보아의 성공기가 실려 있다.이 책은 전세계에서 일어난 흥미로운 실화를 다룬 중·고등학생용 영어 읽기 교재. 책의 78쪽 `세계적인 스타 만들기(Making an International Star)´에는 가수 오디션을 보러간 오빠를 따라갔다가 우연히 가수의 길로 들어선 보아가 노래, 안무, 언어 등 훈련을 받으며 마침내 MTV가 인정한 아시아의 영향력 있는 가수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사진, 만화와 함께 실려 있다.`세계적인 스타 만들기´에는 보아 외에도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영문명 Sarah Chang)도 소개됐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박기철의 플레이볼] KBO 신상우 총재께

    새로운 KBO 총재로 추대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현재 한국 야구의 현안을 자세하게 파악하고 계신 것으로 알려져 야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KBO 사무처나 구단에 인재들이 있고 여기에 총재님의 추진력이 더해진다면 해결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 더욱 기대가 큽니다. 따라서 저는 일반적인 현안보다 야구팬들과 야구계 종사자들이 느끼는 정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KBO 총재의 공식 명칭은 한국야구위원회 총재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목의 지도자들의 영문 표기가 코치인데 비해 야구는 매니저로 불리는 차이처럼 프로야구의 수장은 회장이라는 명칭보다 커미셔너로 불립니다. 처음 커미셔너란 직책이 만들어진 것은 도박 등으로 얼룩진 메이저리그를 정화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런 목적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커미셔너에게는 야구 규약에 없는 조치까지도 가능한,‘황제적 권능’이 부여되면서 다른 스포츠 단체의 대표와는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프로야구가 스포츠보다는 산업으로서의 비중이 증가하면서 커미셔너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중 하나가 최고경영자(CEO)로서의 임무입니다. 성공한 CEO는 한결같이 현장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프로야구의 현장은 당연히 야구장이고, 그것도 귀빈석이 아니라 일반 관중석입니다. 야구장에서 팬들은 무엇을 먹는지, 좌석은 편안한지를 알려면 귀빈석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또 다른 현장은 덕아웃과 라커룸입니다. 경기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커미셔너를 선수나 감독은 기다립니다. 가야 할 곳은 또 있습니다. 기자실과 중계석입니다.‘프로야구는 매스컴과 하느님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제 경기의 신문 기사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야구 황제’를 기자들은 기다립니다.8월의 불볕더위 속에서 무거운 장비를 걸치고 샤워장도 없는 경기장에서 2군 경기를 대낮에 진행하는 심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낄 때까지 오랜 시간을 머물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현장에 머무르는 시간뿐만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느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커미셔너라는 자리도 오랜 기간이 필요합니다. 메이저리그 커미셔너는 보통 임기가 7년입니다. 성공한 커미셔너는 15년 이상을 재임하고 있습니다.‘스포츠투아이’ 전무이사 tycobb@sports2i.com
  • 새 5000원권 디자인 “말도 많네”

    “정관사 the를 빼면 ‘한국은행’이 아니라 ‘한국의 은행’이라는 뜻이 아닌가.” “지폐 뒷면에 왜 모기를 그려 넣었나.” “이이 선생이 20년은 더 늙어 보인다.” 지난 2일 첫선을 보인 새 5000원권의 디자인을 놓고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한국은행 홈페이지 등에는 연일 나름대로의 논리를 앞세운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가장 많은 의견은 왜 새 지폐에 영문으로 the를 빼고 ‘Bank of Korea’라고 표기했느냐는 것이다. 한은의 공식 영문명칭이 ‘THE BANK OF KOREA’이고 기존의 1000원,5000원,1만원권에도 모두 이렇게 쓰여 있다는 점을 들어 일관성이 결여됐다는 지적이다. 한은은 이에 대해 “지폐의 크기를 줄이면서 디자인을 간소화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영국, 뉴질랜드, 인도, 이스라엘, 홍콩 등도 모두 지폐에 중앙은행을 표기할 때 정관사를 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에 새로 나올 1000원권,1만원권에서도 ‘the’를 생략하기로 한 만큼 일관성도 있다는 것이다. 일부 네티즌은 또 “뒷면 배경인 신사임당의 초충도에 그려진 귀뚜라미가 일본 뇌염모기처럼 보인다.”며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한은은 이에 대해서도 댓글을 통해 “귀뚜라미가 아니라 여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련번호를 과거처럼 ‘가나다’가 아닌 영문 ‘ABC’로 왜 바꿨는지, 발행연도는 왜 뺐는지에 대한 질의도 이어지고 있다. 여기다 ‘오천원’이라는 글자에서 ‘오’자가 ‘천원’에 비해 너무 작다는 의견에서부터 심지어는 “이이 선생의 얼굴이 20년은 더 나이든 얼굴로 바뀌었다.”는 불만까지 쏟아지고 있다. 한은 발권정책팀 관계자는 “신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김성수기자 sskim@seoul.co.kr
  • 나는 투명인간? 사진 찍히지 않는 미스테리

    “왜 카메라에 사진에 찍히지 않을까? 아무래도 나는 투명 인간인가 보다.” 중국 대륙에 사진이 찍히지 않아 신분증을 만들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투명인간’이 등장했다. 중국 중부 지역의 후난(湖南)성 우강(舞鋼)시 양좡(楊庄)향 예러우(葉樓)촌에 살고 있는 예샹팅(葉相亭)씨는 얼마 전부터 사진에 찍히지 않아 신분증을 경신하지 못하는 바람에 고민에 빠졌다고 대하보(大河報)가 최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예씨는 며칠 전 마을의 다른 사람들과 두번째 신분증을 발급받으려고 파출소에 들렀다.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신분증에 필요한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아주 당황스런 일이 벌어졌다.몇 번에 걸쳐 카메라 앞에 서 있어도 카메라에 상(像)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여긴 파출소 사진 담당은 혹시 카메라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카메라의 이곳저곳을 세세하게 살펴봤으나 카메라의 기능은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사진 담당은 다시 예씨를 잡기 위해 여러 각도로 돌려가며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했지만,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고민에 빠진 사진 담당은 다른 방법으로 시도해보기로 했다.같은 일행 중 한 사람과 같이 서서 사진을 찍어 보려고 했다.하지만,이것 또한 허사였다.일행만 잡히고 예씨는 아예 흔적조차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다. 예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진이 모두 정상적으로 찍혀 나왔는데….”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양좡 파출소측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며 “아마 전문가들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온라인뉴스부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국제강-철인 3대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동국제강-철인 3대

    대궁(大弓)양행, 남선(南鮮)물산, 조선(朝鮮)선재, 동국(東國)제강…. 고 대원(大圓) 장경호 회장이 1929년 설립한 가마니 회사 대궁양행을 시초로 한 동국제강그룹의 사명 변천사에는 웅대한 포부가 담겨있다. 활을 숭상하는 민족사를 표방한 대궁이나 바다건너 남쪽으로 뻗어나가길 소망한 남선, 조선, 해뜨는 나라의 긍지를 담은 동국 등 장경호 회장이 강조한 민족사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1974년 락희(현 LG), 삼성, 현대, 한국화약에 이어 5대 그룹까지 올라섰던 동국제강그룹은 잇단 계열분리로 인해 지난해 4월 현재 자산 5조 8000억원으로 재계 26위에 랭크돼 있다. 하지만 가마니와 못을 팔며 시작한 이 전통의 그룹은 3세인 장세주(53) 회장대에 이르러 범양상선(현 STX팬오션) 인수전에 뛰어들고 IT사업에 진출하는 등 의욕을 보이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지남철로 수집한 철사 토막에서 연산 860만t체제로 장경호 창업주는 1899년 동래군 사중면 초량동에서 부농인 부친 장윤식씨와 모친 문염이씨 사이의 4남 2녀 가운데 3남으로 태어났다. 지금의 부산 초량동 중앙시장 주변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창업주는 1913년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보성학교에는 부산출신 유학생이 단 두명 있었는데 나머지 한명이 4·19직후 과도정부 수반이었던 허정씨다. 둘은 광복 이후 각각 정치인, 기업가로 재회했는데 허정씨가 정계 은퇴 후 어렵게 살 때 장 회장이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장 회장은 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맏형 장경택씨가 운영하던 목재소 일을 돕고 농사를 크게 짓고 있던 두 형에게 가마니를 공급하는 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30세 되던 해인 1929년 대궁양행을 설립, 본격적인 가마니 장사에 나서면서 사업인생을 시작했다.1935년에는 남선물산을 세워 수산물 도매업, 미곡사업, 창고업 등으로 발을 넓혔다. 장 회장과 철(鐵)과의 인연은 우연찮게 시작됐다. 남선물산 창고에서 신선기(伸線機)를 설치해 철사와 못을 생산하던 재일교포가 창고에 화재가 발행하자 장 회장에게 신선기를 넘긴 것이다. 동국제강의 모태가 된 조선선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당시 장 회장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보퉁이를 맨 채 지남철을 들고 다니며 고철을 수집해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동국제강의 연간 철강 생산량은 유니온스틸을 합쳐 무려 860만t에 이르지만 그 출발은 길거리에 굴러 다니는 쇠붙이였던 것이다. 한국전쟁 후 재건사업으로 못 수요가 폭발하자 조선선재는 큰 돈을 벌게 됐고 1954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동국제강을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민간 제철소 시대를 개막했다. 당산동 공장으로는 늘어나는 철강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장 회장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개 소금’으로 유명했던 부산시 남구 용호동 일대 갯벌을 매립해 20만평 규모의 부산제강소를 완공한다. 1965년에는 50t 규모의 국내 첫 ‘고로(高爐)’를 준공, 한국 철강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당시 동국제강의 위상은 박정희 대통령이 1964년 부산제강소를 방문, 종합제철소 건설을 맡아달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장경호 회장은 “종합제철소는 민간기업이 하기에는 역부족이므로 국책사업으로 추진돼야 한다.”며 완곡히 사양했다. 이후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을 설립, 오늘날 포스코를 탄생시켰으니 장 회장이 박 대통령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한국 철강사가 새로 씌어질 뻔했다. ●아내 반지를 빼서라도 투자하겠다, 강철왕 송원 장상태 장경호 창업회장이 동국제강그룹의 기틀을 닦았지만 장 회장은 워낙 불심(佛心)이 깊어 수시로 절에 들어가 100일간의 수행정진에 들어가는 등 현대적 의미의 경영자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 동국제강의 본격적인 역사는 195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당시 부흥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던 고 장상태 회장이 전무로 입사하면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큰 형(고 장상준씨)과 공직에 있던 둘째 형(고 장상문씨)과 함께 동국제강을 키워 온 장상태 회장은 1964년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2세경영’을 시작했다. 장 회장은 2000년 4월 지병으로 별세할 때까지 국내 첫 후판공장 설립, 부산신철(현 한국특수형강) 설립, 동일제강 인수, 한국철강·한국강업 인수, 연합철강·국제기계·국제통운 인수, 기업 상장, 직류전기로 도입, 포항 후판공장 준공, 국내 첫 항구적 무파업 선언, 부산제강소의 포항 이전, 일본 가와사키제철(현 JFE스틸)과의 포괄적 협력 체결 등 굵직굵직한 발자국을 남겼다. 64년 취임 당시 4만 8000t에 불과했던 동국제강의 철강 생산량은 2000년 705만t으로 147배 증가했다.5억 6000만원이던 매출은 1조 5442억원으로 불어났다. 장 회장은 약간의 여유만 생겨도 설비투자에 나섰는데 주변에서 자금 걱정을 하자 “내 아내의 반지를 빼서라도 투자금을 마련할 테니 설비만큼은 최고를 써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장 회장의 존재감은 JFE홀딩스 스도 후미오 사장이 동국제강 사보 편찬팀과의 인터뷰에서 “장 회장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 때문에 지금도 동국제강 본사에 있는 장 회장 흉상 앞에 설 때면 자연스럽게 차렷자세로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게 된다.”고 털어놓았을 정도다. 스도 사장은 2005년 4월 방한했을 때도 경기도 광주에 있는 장 회장 납골탑을 참배하는 등 존경심을 감추지 않았다. ●디지털경영 시도하는 3대 장세주 회장 동국제강은 장상태 회장 별세 직후 포항제철 사장을 역임한 김종진씨를 부회장으로 영입,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김 부회장은 취임 1년여만인 2001년 7월 헬기를 타고 경남 거제의 대우조선소를 방문하다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졸지에 수장을 잃은 동국제강 계열사 사장단은 ‘회장 주청의 글’을 통해 당시 장세주 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키로 하지만 장 사장은 본인의 미흡한 점을 이유로 몇번을 사양했다. 장 사장은 선친과 교분이 두터웠던 박태준(현 포스코 명예회장) 전 국무총리와 해외 철강업계 수장, 모친인 김숙자(74)여사 등에게 차기 회장감을 상의했고 10여일의 고민끝에 “이젠 자네가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박태준 회장의 권고를 받아들였다. 장세주 회장은 중앙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학사장교(ROTC)로 포병장교 근무를 마친 뒤 미국 타우슨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1978년 말단 사원으로 입사, 경리부·일본지사·인천제강소장·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98년부터 대표이사를 맡았다. 그가 사장으로 승진한 것은 입사 22년만인 2000년이다. 장 회장은 “동국제강에 입사해 부장때까지 다른 신입사원들과 똑같이 현장에서 일하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술도 마시곤 했다. 아버지는 늘 현장에 있으라고 강조하셨는데 현장에서 쇳가루를 마시고 커야 나중에 본사에 오더라도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회고했다. 귀공자풍의 장 회장은 골프, 스키 등 만능 스포츠맨이다. 쉰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이들이 즐기는 스노보드도 수준급이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스키를 즐겼던 선친과 많이 닮았다. 골프실력도 남다르다.74년 한국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정상에 오를 만큼 프로급인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과 ‘자웅’을 겨룰 정도다.2오버파 정도를 친다고 한다. 장 회장은 또 어린시절을 함께 보낸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과도 친분이 두텁다. 방 사장과 허광수 회장이 사돈이고, 장 회장 역시 범 LG가(家)와 사돈이어서 눈길을 끈다. 장 회장 취임 이후 동국제강은 매출이 2001년 1조 7852억원에서 2004년 3조 2674억원으로, 순이익은 149억원에서 4562억원으로 급성장했다. 장 회장은 2004년 7월 동국제강 창립 50주년을 맞아 새로운 CI(기업이미지)를 선포하면서 2008년 그룹 매출 7조원 달성 목표를 내걸었다.2005년 들어 휴대전화 부품 제조업체인 유일전자(현 DK유아이엘)와 시스템통합업체인 탑솔정보통신(현 DK유앤씨)을 인수하는 등 IT영역으로도 발을 뻗고 있다. 중앙기술연구소 설립,MBA급 인재 100명 육성, 경영혁신운동 가동 등 인재육성과 기술개발에 정성을 쏟고 있다. 장 회장이 2005년 7월 ‘그룹경영회의’에서 주문한 내용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동국제강의 ‘체질’을 바꾸고 싶어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영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 철강업, 물류업 등 우리 사업의 개념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선대 회장 시대의 경영패턴과 지금 시대에 해야 할 일이 바뀌었다는 점을 인식하자.” ●창업회장 시절의 수수한 혼맥 장경호 창업회장은 보성고보 2학년 때 같은 고향 출신의 추명순씨와 결혼, 슬하에 6남 5녀를 뒀다. 창업회장이 성사시킨 11번의 혼사 가운데 유력가문이라고는 동명목재뿐이다. 장남으로 동국제강 회장을 지낸 고 장상준씨는 부산에서 사업을 하던 박상선씨의 딸 명년씨와 결혼,4남 2녀를 낳았다. 장상준씨의 장녀 옥자씨는 부산세무서장을 지낸 송귀범씨와 결혼했고 장남인 세창씨는 타워호텔 회장이었던 고 남상옥씨의 딸 덕자씨와 결혼했다. 덕자씨는 남충우 타워호텔 회장의 누나로 남덕우 전 국무총리의 사촌동생이다. 차녀 옥빈씨는 태광그룹 이임룡 창업주의 둘째 아들인 고 이영진씨와 결혼했다. 장상준 회장의 자녀들은 동국제강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조선선재 경영을 맡았는데 선친에 이어 아들들도 일찌감치 유명을 달리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1978년 시집 ‘여(旅)’를 펴내는 등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장남 장세창 전 동일제강 사장은 2000년 지병으로 별세했고 차남인 장세명 전 조선선재 사장도 2005년 12월2일 59세로 사망했다. 조선선재는 곧바로 장세명 전 사장의 아들인 장원영씨를 대표이사로 추대해 새출발했다. 보스턴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원영씨는 불과 서른살이다. 3남인 장세승(57)씨는 조선선재 상무로 일하고 있다. ●불사를 이어받은 둘째 창업회장의 둘째 아들인 고 장상문씨는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공직자의 길을 걸었다. 장상문씨의 부인은 부산의 대표기업이었던 동명목재 창업주인 고 강석진 회장의 딸 강정자(76)씨다. 장경호 창업회장과 동향인 강 회장은 같은 불자로 친분이 두터웠다. 외무부 차관보, 스웨덴·멕시코 대사, 유엔대사 등을 역임한 장상문씨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1989년 사재 10억원을 출연해 전통문화 전문 출판사 ‘대원사’를 세웠다. 대원사는 현재 그의 아들인 장세우(57)대표가 맡고 있다. 장상문씨가 3대 이사장을 지낸 불교진흥원은 선친이 1975년 임종 직전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국불교의 중흥을 염원하는 서한과 함께 헌납한 31억 6000만원(현재가 2000억원)으로 설립됐다. 불교진흥원 초대 이사장은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동생인 구태회 당시 제2무임소장관이 맡았다. 동국제강과 LG그룹은 이후 사돈지간으로 발전하는 등 끈끈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2004년 동국제강 창사 50주년 기념식에 구본무 LG회장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었다. ●두 아들을 장교로 보낸 장상태 장남인 장상준씨가 일찍(1978년) 타계하고 차남은 회사 경영에 뜻이 없던 터라 동국제강은 3남인 고 장상태 회장 체제로 운영돼왔다. 부산 동래고와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장 회장은 미국 미시간주립대 석사를 마치고 귀국, 잠시 부흥부(경제기획원)에서 일하다 1956년 동국제강 전무로 회사에 발을 내디뎠다. 장 회장은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던 김영희씨의 외동딸인 김숙자씨와 결혼해 2남 3녀를 뒀다. 김숙자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미모의 재원이었다. 김숙자씨는 시부모, 시동생 등 대가족을 모시고 살았는데 워낙 검박한 시아버지가 생활비(당시돈 500원)를 매일 매일 나눠주는 바람에 살림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남편인 장상태 회장도 농림부 장학금으로 미국유학을 다녀오면서 부친이 용돈을 많이 주지 않아 고생을 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도 미국 유학시절 부친이 차를 사주지 않아 걸어다녀야 했다고 한다. ROTC 출신인 장남 장세주 회장은 상명여대 교수를 지낸 남희정(44)씨와 결혼했다. 두 아들은 아직 학생이다. 막내인 장세욱(44) 동국제강 전무는 육사 41기생으로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96년에야 동국제강에 입사했다. 이후 남가주대 MBA를 졸업했다. 장 전무는 소위시절 친구 소개로 경제기획원 차관, 산업은행 총재, 금호석유화학 회장 등을 역임한 김흥기씨의 딸 남연(42)씨와 연애 결혼했다. 장 전무의 처남도 육사를 졸업했다. 장 전무는 “원래는 신문기자가 되고 싶었는데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선친의 권유로 진로를 바꿨다.”고 말했다. 장상태 회장의 장녀인 영빈씨는 지병으로 이미 세상을 떴다. 차녀인 문경(48)씨는 울산대 의대 교수로 서울아산병원 정형외과 의사인 윤준오(52)씨와,3녀 윤희(45)씨는 부산지역 실업가이자 8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 이학만 화양실업 회장의 아들 철(47)씨와 결혼했다. 이철씨는 현재 철강유통회사인 세광스틸 사장이다. ●강철가문의 철 박물관 장상태 회장의 바로 아랫동생인 장상철씨는 부산제강소 공사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등 동국제강 경영에 활발히 참여하다 1991년 세상을 떴다. 장상철씨 사후 유족들은 세연문화재단을 설립해 고인의 뜻을 이어갔다. 세연문화재단은 2000년 충북 음성에 세연철박물관을 개관, 전통제철 복원실험, 대장간 조사 등 철강문화 발굴·보급에 힘쓰고 있다. 장녀 인경(47)씨가 관장을 맡고 있다. 장남인 세훈(44)씨는 동국제강 계열사인 국제기계 전무로 일하고 있고, 차남 세한(41)씨는 철강판매사인 ㈜동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차녀 은주(45)씨의 남편인 송봉헌(49)씨는 주 인도 공사다. ●불사와 사업을 동시에 장경호 창업회장의 5남인 장상건(71) 동국산업 회장은 부산지역 사업가인 김대성씨의 큰딸 명자(64)씨와 결혼,1남 3녀를 뒀다. 장 회장은 부산상고와 동국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동국제강 감사로 입사했다. 이후 동국제강 부사장, 동국건설 사장을 지낸 뒤 1977년부터 동국산업 경영을 맡아왔다. 장경호 창업회장이 1967년 설립한 대원사가 전신인 동국산업은 2001년 동국제강에서 계열분리됐고 현재 동국S&C, 대원스틸, 한려에너지개발, 동국내화, 신안풍력발전, 고덕풍력발전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장상건 회장의 형인 고 장상준 회장 자손들이 운영하고 있는 조선선재 지분도 16.6% 갖고 있다. 동국산업은 현재 장상건 회장의 외아들인 장세희(38) 전무(경영관리본부장)가 21.52% 지분으로 최대 주주다. 장 전무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96년 동국산업에 입사했다. 장 전무의 부인은 동방그룹 창업주인 김용대 회장의 차녀 유경(36)씨다. 장 회장의 차녀 혜경(42)씨는 김장&리 법률사무소 설립자인 고 김흥한 변호사의 아들 유동씨와 결혼했다. 아직 미혼인 막내 혜원(36)씨는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화려한 혼맥, 눈부신 성장 장경호 창업회장의 여섯 아들 가운데 현재 가장 주목받는 이는 막내인 장상돈(69) 한국철강 회장이다. 경복고와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 조선선재에 입사, 동국제강 상무·전무를 거쳐 82년 한국철강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85년부터 98년까지 동국제강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고 2001년 한국철강을 갖고 독립했다. 한국철강은 계열분리 뒤 환영철강, 영흥철강, 대흥산업을 인수하며 한국특수형강, 세화통운, 마산항5부두운영과 함께 6개 계열사를 거느린 철강 전문그룹으로 도약했다. 한국철강 자체만으로도 지난해 매출 6861억원, 순이익 1120억원을 거둔 알짜기업이다. 환영철강 역시 매출이 4000억원이 넘고 한국특수형강도 지난해 매출이 2500억원에 달한다. 장 회장은 동국대 재학시절 이화여대 미대생이던 신금순(66)씨와 연애결혼했다. 장인인 신종식씨는 한때 동국제강 계열사인 부산신철(현 한국특수형강) 사장으로도 일했었다. 장 회장은 3남 2녀를 뒀는데 혼맥이 가장 화려한 편이다. 장남인 장세현(42) 한국특수형강 대표이사 부사장은 뉴욕대 경영학과를 마치고 한국철강에 입사했고 환영철강 부사장을 거쳤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화학과와 일본 와세다대학원을 나온 차남 장세홍(40) 한국철강 전무는 고 박정구 전 금호그룹 회장의 차녀인 박은경(34)씨와 결혼했다. 박 전 회장은 재계혼맥이 두텁기로 유명한데 맏사위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아들인 김선협씨, 셋째 사위는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의 차남인 허재명 일진소재산업 대표이사다. 3남 세일(35)씨는 영흥철강 기획이사를 맡고 있다. 차녀인 인영(38)씨는 구두회 극동도시가스 명예회장의 장남 구자은(42) LS전선 상무와 결혼했다. 구 명예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동생이다.LG가와 동국제강의 남다른 인연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ukelvin@seoul.co.kr ■ 장씨일가 불교와 인연 동국제강 장씨 일가를 이야기하면서 불교와의 인연을 빼놓기 어렵다. 창업주인 고 장경호 회장의 묘비에는 ‘대원거사(大圓居士)’라고 새겨져 있다. 부인 고 추명순씨도 적선화라는 법명으로 통했다. 장 회장이 불교에 귀의한 계기는 17세 때 목격한 막내동생의 죽음이다.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갖게 된 장 회장은 양산 통도사 주지 구하 스님을 통해 처음 불교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1925년 통도사에서 첫 안거를 하면서 인생의 방향을 잡았고 수시로 금강산 마하연, 통도사, 청도 운문사, 부산 금정사, 금정산 무위암 등에서 안거와 정진을 거듭했다. 장 회장의 불사는 이후 불서보급사 설립, 대중포교당인 대원정사 설립 등으로 발전한다.1973년 대원불교대학까지 설립한 장 회장은 죽음을 예감한 1975년 스웨덴 대사로 있던 차남 장상문씨에게 불사를 부탁하고 사재 30억원을 불교사업에 희사, 대한불교진흥원을 탄생시킨 뒤 스스로 자리에 누워 입적했다. 그가 임종 직전 남긴 열반송은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이니 이를 믿고 깨달으라.’는 말로 끝난다. 창업 회장을 이어받은 장상태 회장도 부산제강소를 이전하면서 1996년 100억원을 출연해 대원복지재단(현 송원문화재단)을 설립, 장학사업·아동복지사업 등을 펼치며 선친의 유지를 이어갔다. 장 회장은 또 2000년 임종 직전 화장을 부탁해 장묘문화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는데 이 역시 그의 불심과 무관치 않다. 부인 김숙자씨, 아들인 장세주 회장, 장세욱 전무도 이미 화장을 약속했다. 창업회장이 생전에 불사를 부탁한 둘째 아들 장상문씨는 1981년 대원정사 이사장과 신행단체인 대원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선친이 못다이룬 사업에 속도를 냈다. 장상문씨는 1989년 불교진흥원 이사장에 취임한 뒤 불교계의 숙원이었던 불교방송을 개국하는데 성공했다.UN방송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초대 불교방송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장상건 동국산업 회장도 현재 대원정사 이사장직을 맡아 선친의 뜻을 받들고 있다. 동국산업은 1992년 재단법인 ‘불이원’을 설립, 소외된 이웃을 돕고 있다. 장 회장은 2004년 12월 부산에 대원정사 지원을 마련, 불교 포교에 힘을 쏟고 있다. 또 2005년에는 사재를 털어 부산 대원불교대학을 개교, 부산·경남지역 불교 인재 양성에 나섰다. 장상건 회장과 장상돈 한국철강 회장이 불교계열인 동국대를 졸업한 것도 이 집안과 불교와의 남다른 연을 짐작케 한다. ukelvi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지하철 타고 문화여행 떠나세요”

    “어디선가 본듯한 그림인데.” 서울 도시철도공사(지하철 5∼8호선)는 지하철 역사내 문화공간과 각종 예술작품 등을 소개한 ‘인트로 아트 스페이스(Intro Art Space)를 펴냈다. 작품들은 대부분 승강장이나 역 구내의 이동통로나 빈공간 등에 설치돼 있어 승객들에게 낯이 익었지만 정작 누구의 작품인지,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모르고 그냥 지나쳐왔던 것들이었다. ●땅밑에서 문화 향기 모락모락 책자에 따르면 5호선 김포공항역 에스컬레이터 옆에는 노랑색 벽면에 그려진 갖가지 조형들이 눈길을 끈다. 벽화가 겸 인하대 교수인 성완경씨가 민속 놀이인 칠교판 놀이를 응용해서 제작한 ‘직녀가 꿈에서 본 그림들’이다. 칠교판놀이는 정방형·삼각형·마름모꼴의 나무 조각을 짜맞춰 갖가지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7호선 태릉입구역 로비 바닥과 천장 사이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반구 두개가 놓여있다. 아래쪽 반구의 바닥에는 우리 전통의 시계가, 아래쪽 반구에는 별자리가 그려져 있다. 위쪽 반구는 아래쪽 반구와 바닥을 반사해 시간과 공간이 확장되는 느낌을 준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내는 우주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주제로 한 조각가 박풍흠씨의 ‘일월성신’이라는 작품이다. 이밖에 책자에는 공공미술가 임옥상씨의 ‘광화문의 역사’(5호선 광화문역), 민속작가 김정식씨의 ‘연’(6호선 동묘앞역) 등 지하철 5∼8호선 역사 내에 설치된 벽화, 조형물 등 예술작품 28점이 사진과 함께 설명이 곁들여져있다. ●주제별로 떠나는 지하철 여행 공사는 또 전체 노선도에 ▲서울을 가로지르는 역사 여행 ▲한강따라 떠나는 도심속 관광명소 ▲온가족이 함께 즐기는 문화여행 등 주제별로 서울의 명소를 소개한 ‘수도권 도시철도 노선도’를 한글과 영문으로 제작했다. 이들 예술작품 안내서와 노선도는 지하철 5∼8호선 역구내에서 무료로 나눠준다. 아울러 20일부터는 공사 홈페이지에서 기존의 국문, 영문 노선도 외에 일본어, 중국어 노선도를 추가로 서비스할 예정이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12월의 ‘맨U 맨’

    박지성(25·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2006년 팀 달력에 ‘12월의 모델’로 실렸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달력에는 팀의 ‘베스트 일레븐’이 모델로 나섰는데 박지성도 당당히 라인업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 달력의 12월 표지에는 박지성이 비스듬히 뒤쪽을 응시하고 있는 상반신 모습과 영문 이름 ‘JI SUNG PARK’ 자필 사인이 담겼다. 1월부터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 폴 스콜스, 로이 킨, 루드 반 니스텔루이, 앨런 스미스, 대런 플레처, 라이언 긱스, 리오 퍼디낸드, 웨인 루니, 가브리엘 에인세, 에드윈 반데르사르, 박지성이 차례로 실렸다. 달력 제작 시점이 지난해라 이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난 전 주장 킨도 모델로 나와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달력은 맨유 공식 상품 라이선스 계약권자인 ‘챔피언스클럽(www.championsclub.co.kr)에서 판매한다.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앤더슨은 미국적 쇼비니스트?

    ‘베네딕트 앤더슨은 쇼비니스트(국수주의자)?’ 앤더슨 하면 그의 책 ‘상상의 공동체’를 떠올린다. 민족국가가 역사와 형성된 오랜 산물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의 발명품이라고 단언해 큰 파장을 낳았던 인물이다. ‘반만년 단일민족국가’에 긍지를 느끼는 우리에게 이 책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2002년 번역본에 서평을 달았던 한양대 임지현 교수조차 “한국사회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했을 정도다. 그런데 쇼비니즘이라니. 부산대 김봉률 박사는 최근 ‘교수신문’에 ‘상상의 공동체’가 “제국의 자신감에서 나온 미국적 쇼비니즘의 하나”라고 주장, 눈길을 끌고 있다. 김 박사는 이 이론의 장점은 인정한다. 민족을 혈연, 지연같은 자연조건에서 해방시켜 종족에 사로잡힌 편협한 민족주의 개념의 틀을 깨는데는 일정한 역할은 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식민지배를 당해 근대국가를 만들지 못했던 우리에게는 차용해볼 만한 매력이 있다.그러나 앤더슨의 미덕은 거기까지라는 게 김 박사의 주장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김 박사의 관심사는 근대소설의 기원이다.이를 쫓다 보니 묘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19세기에는 영국이 근대소설의 발상지라더니,1950년대부터는 미국이 그 자리를 차고 앉더라는 것이다.이 때문에 김 박사는 ‘원조’를 따지는 작업 자체를 일종의 ‘쇼비니즘’으로 여긴다. 애초 그 이전부터 있었던 프랑스·스페인의 소설을 무시하고 근대소설이 영국에서 나왔다는 주장이나, 똑같은 논리로 미국이 기원이라 주장하는 것이나 그 배경에는 ‘세계 패권의 이동’이 놓여 있다는 게 김 박사의 분석이다.“이런 식으로 기원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시간의 앞뒤가 바뀌는 ‘시간적인 착각’이 일어납니다.” 김 박사는 이런 분석틀을 앤더슨의 저작에 적용한다.이 책의 요지는 “근대민족국가의 기원이 미국이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앤더슨은 개정판에서 민족국가가 신세계(아메리카)에서 시작됐다는 대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불평합니다.”우리의 상식과 달리 근대민족국가는 유럽이 아닌 미국에서 시작돼,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 역수출됐다는 것을 앤더슨은 말하고 싶었다는 것. 한마디로 앤더슨의 저작은 ‘미국의 신화 만들기’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앤더슨의 논리가 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를 김 박사는 우리의 ‘지적 식민주의 풍토’에서 찾는다.“특정한 이론을 펼 때는 다 이유가 있는데 그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다만 하나의 ‘준거’로만 쓰고 있는 것이죠.”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부고]

    ●최종인(전 두산그룹 사장)종석(자영업)종화(〃)종원(유레카특허사무소 변리사)종문(만영문화사 대표)씨 모친상 3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6일 오전 7시 (02)3410-6912●김선환(미림화원 대표)이환(윈라인시스템 〃)씨 부친상 가봉길(봉전사 대표)신영상(동신산업 전무)박병용(삼화산업 상무)문상열(스포츠서울 USA편집국장)씨 빙부상 4일 부여장례식장, 발인 6일 오전 9시 (041)835-9816●기청(서울학생교육원 원장)씨 모친상 4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6일 오전 8시30분 (02)590-2660 ●박영준(세계일보 편집부 차장)씨 형님상 4일 인천 연수장례식장, 발인 6일 오전 9시 (032)818-4073●김한주(세크론 대표)송(자영업)건(마포고 교사)씨 부친상 양현승(자영업)씨 빙부상 4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6일 오전 8시 (02)3410-6915●정종문(증권예탁결제원 전략기획부 과장)씨 빙부상 3일 전북 익산 둥지장례식장, 발인 5일 오후 2시 (063)833-4471●최대식(전 국민은행 지점장)흥식(자영업)연식(LG경영개발원 상무)씨 모친상 이대우(자영업)박수환(〃)씨 빙모상 4일 강남성모병원, 발인 6일 오전 10시 (02)590-2609●김용기(사업)훈기(공무원)호기(한아름정보기술 대표)운기(사업)정기(〃)씨 모친상 김광균(사업)씨 빙모상 4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6일 오전 8시 (02)3010-2292●백찬종(㈜차이나투어 계장)씨 부친상 4일 경희의료원, 발인 7일 오전 8시 (02)958-9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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