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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이애나비 “외간남자와 간통” 첫 시인/BBC­TV 회견

    ◎“친구인 기병장교와 한때 깊은 사랑/찰스 영 왕세자와 이혼 원치않는다”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34)가 20일 다른 사내와 간통한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파문이 일고 있다.다이애나는 이날 BBC TV의 시사 프로그램인 「파노라마」에 출연,자신의 친구이자 승마선생이었던 제임스 휴잇과의 관계에 대해 『당신은 친한 친구이상의 선을 넘었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그렇다』고 대답해 통정사실을 최초로 공개 시인했다.그녀는 또 『그렇다면 당신은 그와 성적인 관계를 가졌느냐』는 확인질문에 대해 『그렇다.나는 그를 흠모했고 그와 사랑에 빠졌었다』고 말해 기병장교 휴잇과 간통한 사실을 명백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2년전 휴잇이 발간한 「왕세자비와의 사랑」이라는 책은 사실보다는 허구가 더 많다면서 신뢰했던 친구가 돈 때문에 나를 팔았다는 생각으로 몹시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남편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그와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어했다.우리는 진정으로 좋은 한쌍의 부부라고 생각했다』 찰스 왕세자도 18개월전 다이애나와 비슷한 TV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부정을 시인한 바 있는데 다이애나는 이번 인터뷰에서 찰스와 그의 연인 카밀라 파커 볼스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그녀는 어떻게 알게 됐느냐는 질문에 찰스의 행동이 분명하게 그것을 말해주었다며 『여자의 직감은 매우 정확하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혼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또 자신이 왕비가 될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지만 영국인들의 마음 속에 왕비로 자리잡고 싶다고 대답했다. ◎영 왕실,세자비에 대화 제의 【런던 AFP 로이터 연합】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34)의 인터뷰가 20일 BBC­TV에 방송된데 이어 영국왕실은 왕세자비에게 앞으로 왕실내에서 그녀의 역할에 대해 의논할 것을 제의했다고 21일 밝혔다.
  • 특별정담 오늘의 서울신문을 말한다(서울신문 50돌 특집)

    ◎증면경쟁 탁류속 「소신의 질경쟁」 호감/정보 홍수시대의 「알짜정보지」로 “우뚝”/상업성­선정성 배격… 「건강한 신문」 특화/“연재소설 등 작가 창작정신 존중” 정평/1950년대부터 한글신문­가로짜기 실험 선도 서울신문은 창간 50주년을 맞아 지난 2월 세계화를 선도하는 초일류 고급정론지로의 제2창간을 선언,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오직 독자를 주인으로 일체의 상업주의와 선정주의를 배격한채 언론의 정도를 걸어온 서울신문의 50년 역사는 그대로 현대사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시대의 영욕을 국민과 함께 나누며 성장해온 서울신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21세기에의 비전을 그려보기 위한 특별좌담회를 마련했다.정진석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이연숙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소설가 김주영씨가 자리를 같이 했다. ▲정진석 교수=서울신문은 구한말인 1904년 러일전쟁 특파원으로 와 있던 영국인 베델이 만든 대한매일신보가 그 전신입니다.대한매일신보는 한글과 영문판으로 제작돼 당시 최대의 독자층을 향유한 대표적인항일민족지였고 일본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지요.그러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총독부는 이 신문을 매입해 「대한」이라는 제호를 떼고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습니다.1910년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논조가 1백80도 달라졌지만 지령만큼은 계속 잇게 했습니다. 또 서울신문은 일제 전 기간동안 한글로 발행된 유일한 신문이었습니다.해방직후 명칭을 서울신문으로 변경했는데 정부·여당을 대변하는 쪽이었어요.물론 신문이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일방적인 비판 또한 경계해야될 일이죠. ○항일민족지가 전신 ▲김주영씨=서울신문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며 시대를 앞서간 신문이었습니다.지난 54년부터 7개월여 연재된 정비석씨의 「자유부인」은 장안의 화제가 됐었지요.또 60년에는 현상공모 사상 처음으로 5백만환이라는 파격적 고료를 내걸고 장편소설을 공모해 문단 안팎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죠.저의 대표작 「객주」를 탄생케한 신문도 바로 서울신문입니다.79년 6월부터 84년 2월까지 1천4백65회에 걸쳐 연재했는데 그당시 서울신문은 작가들의 창작정신을 최대한 존중해 「작품」이 잉태될 토양을 마련해주는 신문으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하나의 예로 저는 「객주」를 쓰면서 『신문사쪽에서 언제쯤 주문이나 간섭을 해올까』했지만 5년동안 단 한번도 클레임을 받은 적이 없었어요.경영진의 판단보다 담당 데스크의 재량에 맡기는 문화풍토였죠.독자의 말초적 구미에 맞춰 일회용 흥미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매회 간섭을 일삼았던 타 신문에 비해 서울신문은 「작품」을 쓸 수 있는 곳이란 인식이 우리 작가들에겐 강했습니다.이는 여타 상업지들이 따라올 수 없는 서울신문만의 독보적인 영역이었다고 봅니다. ▲이연숙 회장=우리 여성단체협의회의 경우 넉넉치않은 재정형편에도 불구,지금까지 서울신문을 한번도 끊지않고 구독해오고 있습니다.소비자문제나 여성문제를 일관성 있고 성의있게 다루어주는 신문이기 때문이죠. ○서울만의 독보영역 ▲정교수=서울신문은 56년부터 4·19때까지 한글판 신문을 따로 낸 적이 있습니다.68년엔 한글전용으로 하고 글씨체와 편집방법에도 변화를 주는 등 선도적인 신문의 모습을 보였습니다.최근 한글전용이나 가로짜기를 시도하고 있는 신문들의 실험적 모델이었던 셈이죠. ▲이회장=저도 어릴때 서울신문이 한글신문이어서 굉장히 친근감을 가졌던 기억이 납니다.또 미국대사관에 근무할때 보니까 외국인들이 서울신문으로 우리말을 공부하기도 하더군요. ▲김씨=잃어버린 우리말 찾기운동을 지면을 통해 벌이기도 했습니다.지금도 박갑천씨의 컬럼은 시사문제에 대한 안목을 넓혀줄뿐 아니라 우리말의 맛깔스러움을 느끼게 해주는 독특한 컬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교수=사실 서울신문은 해방직후까지만 해도 인적 자원과 시설등의 면에서 가장 뛰어난 언론사였습니다.또 김진섭,김동리,장만영씨 등 유명문인들이 편집책임자로 있던 종합잡지「신천지」는 50년 「사상계」가 나올때까지 당시 지식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교양지였지요.「자유부인」같은 연재소설로 문학계에 더할나위없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4·19이전까지는 정치적인 영향력도 막강했습니다.그동안 역사적 격랑에 따라 시련을 겪으며 때로 침체되기도 했지만요. ▲김씨=역사도 역사이지만 우리의 의식과 감정도 지나치게 흑백논리에 감염되어 있는게 오늘의 현실입니다.요즘은 상업주의를 지향하는 신문들이 정부의 대변지 역할을 하는 측면이 더 강해요.서울신문은 오히려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회장=서울신문은 산간벽지 등 어느 지역 가지않는 곳이 없다는 점이 장점이지요.또 요즘 신문들 가운데 면수가 가장 적습니다.증면경쟁으로 페이지가 늘어난 신문들을 보면 광고일색이에요.정보홍수시대에 알짜배기 정보를 섭렵하는데 편한 신문이 바로 서울신문입니다. ▲정교수=손주환 서울신문 사장은 올해 제2창간을 선언하면서 『물량경쟁을 지양하고 오로지 질적인 경쟁만을 벌이겠다』고 선언하고 증면경쟁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젊은 기자나 언론학교수가 아닌 신문사의 최고 책임자가 이같은 한국신문의 「반사회성」을 과감하게 지적한 것을 두고 학계에서는 커다란 화제가 됐습니다. ▲김씨=굳이 신문종사자가 아니더라도 최근 신문들의 증면경쟁과 부수경쟁에 따라 지국으로 배달되는 신문이 곧바로 폐기장으로 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국내 용지값을 기준으로해 1년에 무려 1천1백억원 이상의 돈이 낭비되는 이같은 폐단에 모두 비분강개하고 있지만 우리 언론은 스스로에 대해 비판을 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회장=그런 점에서 서울신문이 신문을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희망입니다.민간단체들은 비판을 하려고 해도 언론의 막강한 힘앞에 지레 겁을 먹고 독자들에겐 조직된 힘이 없고하니 이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정교수=반세기에 걸친 기나긴 역사를 통해 민족사의 험난한 굽이마다 이정표 역할을 해온 서울신문이 문민시대를 맞아 무한 물량경쟁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김씨=잘 알다시피 다른 신문은 모두 상업지입니다.그 틀에서 과감하게 탈피할 수 있다는 것은 서울신문만이 가질 수 있는 크나큰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 한글 교과서 ▲이회장=저는 서울신문이 정부만 의식하지 말고 정부의 주인인 국민의 입장을 보다 많이 생각하는 신문이 되었으면 합니다.이제까지는 다분히 오해받을 만한 역사도 없지 않았습니다.그런만큼 창간 50돌을 맞은 이 시점에서 대대적인 환골탈태의 노력은 한층 절실한 것이라고 봐요. ▲김씨=요즘 신문사간의 보도경쟁의식은 뉴스가치 여부를 떠나 거짓정보를 양산하는데까지 이르게 만들었습니다.일례로 최근 미국흑인남성대회를 주도한 인물이 유태인과 한국사람은 돈만 아는 민족이라고 말한 것으로 우리 각 신문이 보도했는데 실제로는 미국에 이민온 모든 이민족들을 향해 한 소리였어요.정확한 사실확인없이 일단 신문을 팔고 보겠다는 상업지들의 선정적 보도태도가 낳은 해프닝이었죠.상업주의를 배제하는 서울신문만은 이같은 폐해에서 벗어나 제대로된 정보를 취사선택해 독자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이회장=신문들이 국민의 세계관을 오도하는 경우도 많아요.언론인이 올바른 시각과 균형감각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교수=한국언론은 한미관계나 한일관계 특히 대일문제에 있어서는 이성적이고 진지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맹목적인 애국심에 호소하려는 성숙되지 못한 보도자세를 보이고 있어요.이 역시 국익과 공익을 앞서 생각하는 서울신문이 주도적으로 개선해 나가야할 것입니다. ▲이회장=언론사간의 무분별한 보도경쟁에서 탈피,서울신문만이라도 반듯한 생각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할 것입니다. ▲김씨=요사이 신문은 여배우의 아슬아슬한 사진을 실어대는 등 선정적이고 충동적으로 흘러 「읽는 신문」이 아니라 「보는 신문」이라는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그런 맥락에서 볼때 서울신문은 어느 신문보다 「정독하는 신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예를 들어 「두만강 7백리」「압록강 2천리」같은 기획시리즈를 들 수 있습니다.특히 이 기사는 그동안 접했던 단편적인 주마간산식 리포트가 아니라 현지 연변 조선족 작가의 눈을 통해 그려진 한폭의 세밀화라고도 할 수 있어요.저는 스크랩까지 해가며 읽고 있습니다. ▲정교수=「보는 신문」의 역할은 TV로 족합니다.신문성이 강화되어야해요.언젠가부터 각 신문들이 해외토픽란을 통해 지나치게 노출된 여성의 사진을 크게 다룸으로써 여성을 상품화하고 있는데 서울신문은 그렇지 않더군요.특별히 재미있고 눈길을 끌진 않지만 비교적 건강한 신문으로 온 가족이 함께 돌려 볼 수 있는 신문이라는 느낌이에요. ○딱한 이웃에 애정을 ▲이회장=요즘 신문들은 하지말아야할 일들은 하고 정작 해야할 일은 하지않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민간단체들이 주최하고 언론이 소개·지원해야 마땅할 행사를 신문사가 직접 나서서 벌이고 있어요.사세과시적 행사보다는 애정어린 보도정신이 중요합니다.AIDS문제나 가족파괴 등 절실한 현안을 유야무야 지나쳐선 안되죠.여성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언론이 좀더 충실히 보도해주었으면 합니다.서울신문은 반세기의 연륜이 있으니 타 신문보다 한발 앞서 갈 수 있으리라 여겨져요. ▲정교수=그렇습니다.영국의 「더 타임스」가 보수 대변지이고 그 독자가 따로 있듯이 서울신문도 그 색깔을 살리면서 타 신문과의 차별화를 이루어 나가야할 것입니다. ▲이회장=서울신문이 위치한 프레스센터는 모든 다양한 여론이 모아지는 자리입니다.그같은 의견들을 걸러 독자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해주었으면 합니다.특히 서울신문의 「입법예고」라든가 「법령공포」같은 란은 정부와 국민의 가교역할을 자임하는 서울신문만의 특화지면이라고 할만해요.좀 더 알기쉽고 상세한 설명을 곁들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해외 여행비 한국인 세계 3위/WTO 집계

    ◎1회 평균 1천6백60불 지출/일인 2천2백달러로 1위 【카이로 AFP 연합】 세계에서 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국민은 독일인이지만 해외여행 중 돈을 가장 많이 쓰는 국민은 일본인이라고 세계관광기구(WTO)가 22일 발표했다. WTO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지난해 7천7백만건 이상의 해외여행을 해 최고기록을 세웠으며 이어 미국인 4천4백30만건,영국인 3천8백80만건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씀씀이는 일본인이 단연 최고여서 한번 여행에 평균 2천2백61달러를 사용했으며 호주인이 1천8백43달러로 2위,한국인과 노르웨이인이 각각 1천6백60달러로 공동 3위를 기록했다. 반면 스페인 사람은 불과 3백50달러,멕시코인은 4백54달러,영국인은 4백70달러 정도를 쓴 것으로 나타났다.한편 관광수입에서는 미국이 6백억달러로 2백40억달러를 거두어 들인 프랑스를 크게 앞섰다.
  • 노벨상 상금 환율따라 들쭉날쭉

    ◎파운드 환산땐 1.6%·마르크 6% 늘어/달러화 하락따라 미국인 가장 큰 혜택 10일 노벨상중 세번째인 경제학상이 발표됐다.수상자가 누구인가는 물론이고 얼마만큼의 상금을 손에 쥘 수 있을지에도 관심이 지대하다. 올해 수상자들은 공통적으로 노벨재단의 독특한 투자덕에 지난해 상금보다 약 3%가 늘어난 7백20만 스웨덴 크로네(한화 약 8억원,1크로네는 한화 1백10원)를 챙기게 됐다.그러나 국적에 따라 「환율」이 요술을 부리면 상금 액수는 들쭉날쭉해진다. 수상자가 영국인일 경우 인플레를 무시한채 현재의 환율을 적용,파운드화로 바꾼다면 노벨상 상금은 약 1.6%가 는 65만4천5백파운드가 된다는 계산이다.독일 마르크화로는 상금 규모가 6%가 는 1백46만5천 마르크에 이른다. 그러나 가장 많은 액수는 미국인에게 돌아간다는 분석이다.현재의 달러화 환율로 계산하면 상금총액은 지난해보다 약 9%가 많은 1백3만5천달러. 달러화 하락이 원인이다.미 달러화는 지난해 이후 유럽 통화에 대해 큰 폭으로 하락했고 문제많은 스웨덴의 크로네화에 대해서조차도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37명중 23명이 미국인이었다. 이들은 수상의 영광과 함께 순전히 미국 달러화의 「작용」덕분에 앉아서 적지않은 「이득」도 챙기게 됐다.
  • 자랑스런 밀리언셀러카 「엑셀」/채영석(자동차 이야기)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인 자동차는 고트리프 다이믈러와 칼 벤츠의 가솔린 엔진 발명 이후 본격적으로 대중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 대중화를 재촉하는 최다생산 모델을 탄생시킨 것은 미국의 포드사가 만든 T형 포드 모델이었다.이 모델은 1908년 10월1일 첫 차가 출고된 이후 1927년까지 무려 1천5백만7천33대가 생산되는 대기록을 남겼다. 히틀러가 포르쉐 박사에게 의뢰해서 만든 폴크스바겐의 비틀(일명 딱정벌레)은 1939년부터 지난 78년까지 무려 39년 동안이나 디자인과 기술적인 큰 변화없이 생산을 계속했다.모두 1천9백만대를 생산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영국의 미니 자동차는 지난 58년에 발표된 이래 지금까지 영국인의 사랑을 받아오며 지금도 월 1천여대가 생산되고 있다.올해로 36주년을 맞이해 멀지 않아 비틀을 제치고 최장수 모델 기록을 갖게 될 것이다. 프랑스의 르노 4CV도 지난 81년에 밀리언셀러카의 자리에 올랐다.일본 도요타의 카롤라 모델은 지난 87년부터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다.지난 해까지 모두 1천7백92만여대를 생산해 큰 이변이 없는 한 멀지않아 최다 생산모델과,최초로 2천만대를 돌파하는 모델로 될 것 같다. 우리는 자동차의 도입이 비교적 늦어 이들만큼의 대기록은 없지만 그런 짧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밀리언셀러카가 있다. 현대자동차의 엑셀은 이미 지난 88년 7월7일 1백만대 생산을 돌파해 당시 자동차인들에게 커다란 희망이 되었다.우리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우리의 자동차 산업도 그만큼의 안정된 판로가 있고 대량생산에 의한 사업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얘기다. 엑셀은 지난 75년 12월에 등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인 포니의 발전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몸체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이탈 디자인」이 했고,엔진과 섀시는 일본 미쓰비시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고유모델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포니로 시작해 엑셀로 마감한 이 차는 78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수출은 2백9만3천여대,내수판매는 1백28만1천여대였다.3백37만4천여대를 생산한 뒤 엑센트에게 자리를 넘겨줬다.
  • 사제 현금인출기로 사기극

    ◎영국인 2명 판독기 내장후 설치,ID번호 빼내/위조카드 만들어 고객 계좌서 12만파운드 인출 2명의 영국인이 14일 런던의 번화가에 세계 최초의 사제 현금자동인출기를 만들어 사기행각을 벌인 혐의로 기소됐다. 범인들이 설치한 핼리팩스 빌딩 소사이어티의 엉터리 현금자동인출기는 런던 남쪽 교외의 사우스워크 쇼핑가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했다. 고객들은 현금인출을 위해 현금카드를 이 엉터리 기계에 집어넣는 동안 계좌의 세부내용과 개인ID번호가 비밀리에 판독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며 범인은 이 정보를 이용,위조카드를 만들어 12만파운드(약1억4천만원) 이상을 인출했다. 런던경찰국 범죄대책반의 개리 사우스게이트 형사는 사우스워크 왕립법원에서 『이 사건은 영국에서만 처음 발생한 범죄가 아니라 세계최초의 범죄였다』고 말하고 『미국에서 도난당한 현금자동인출기(ATM)가 쇼핑몰에서 사용된 적은 있지만 이 기계는 완전히 집에서 만든 사제품』이라고 덧붙였다. 가장 정교한 부품은 마그네틱 카드판독기였으며 이 판독기는 고객의 카드정보를 입수해 감춰진 컴퓨터에 저장할 수 있었다.
  • 달러 1백엔 돌파/어제 100.85엔

    【도쿄 UPI 로이터 연합】 최근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미국달러화가 12일 도쿄외환시장에서 심리적 저지선인 달러당 1백엔선을 넘어 지난 1월이후 최고치인 100.85엔을 기록했다. 달러화는 개장초부터 해외자금들이 몰려들어 달러를 매입하면서 급등,하오 늦게 100.85엔까지 올랐다. 도쿄의 한 영국인 딜러는 『해외자금의 달러 매입 및 엔화 매도가 달러화 급등의 주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도쿄 외환시장 딜러들은 일본 수출업자들에 의한 매도 압력이 줄고 있어 달러화는 조만간 101엔까지 오를 것이며 지난 1월4일의 최고기록인 101.40엔을 돌파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지난 8일 일본은행이 할인금리를 절반 수준인 0.5%로 낮춘 이후 달러화가 1백엔선을 쉽게 넘을 것으로 예상돼왔다. 할인금리 인하 발표로 달러화 매입이 적극적으로 시작됐으며 일부 딜러들은 이날 하룻동안 50억달러가 매입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베어링 은행 파산주범 닉 리슨/“파산은행 늘어날것”

    ◎독 감옥서 영 BBC와 회담/딜러들 자금운영 중지 촉구 지난 2월 아시아시장에서의 무리한 투자로 베어링은행을 파산케해 현재 독일에 수감돼 있는 영국인 딜러 닉 리슨이 수감후 처음으로 언론에 등장,다른 은행들의 추가 파산가능성을 경고했다. 리슨은 독일 감옥에서 녹화돼 11일 방송예정인 영국 BBC TV의 「은행을 망하게 한 남자」라는 프로에서 자신이 한 일은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면서 『나는 분명히 사람들을 오도했지만 그 일로 2백32년 된 베어링은행이 문을 닫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리슨은 은행들의 추가파산을 막기 위해 그의 은행파산 전문지식을 이용,당국을 도울 의향도 있다고 말했다. 리슨은 다른 딜러의 실수를 벌충키 위해 지난 92년9월 중국에서 행운의 숫자인 계좌번호 88888번의 비밀 계좌를 만들었던 것이며 이 계좌를 사용해 돈을 번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딜러들의 자금운영에도 자신의 경우와 같은 위험이 존재하고 있다고 경고하고 당국이 이같은 행위를 중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한국은 유망한 위스키 시장”/영 위스키협 전망

    ◎작년 소비량 2.241만ℓ… 세계 6위/2003년엔 44% 늘어 5위로 도약 우리나라가 전세계 위스키시장에서 성장성이 매우 유망한 나라인 것으로 나타났다. 4일 영국의 스카치위스키협회가 분석한 국제 위스키시장 현황 및 전망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인들은 모두 9천만ℓ의 위스키를 마셔 세계에서 위스키 소비량이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됐다.한국의 경우 미국·프랑스·스페인·일본 다음인 2천2백41만ℓ로 6위를 기록했으며 그리스·호주·독일·이탈리아 등이 10위권에 들었다.그러나 한국의 2003년 위스키 소비량은 3천2백31만ℓ로 무려 44.2%가 늘어나며 세계 5위에 오를 것으로 추정됐다. 미국·영국·프랑스 등 서구 선진국의 경우 2004년에도 국가별 순위에서는 상위권을 지키지만 소비량 자체는 지난해보다 16.9∼29.9%가 줄어들고 일본은 무려 49.7%가 감소,14위로 밀려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반면에 한국과 남아공을 비롯해 브라질·러시아·베네수엘라·태국·멕시코 등의 소비량은 급증할 것이란 전망. 이에 따라 94년의 경우 상위 4개국의 소비량이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4%였으나 2003년에는 36%로 낮아질 것으로 예측됐다. 한편 프리미엄급 위스키의 경우 우리나라가 전세계에서 소비성장률이 가장 빠른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프리미엄급 위스키는 임페리얼,퀸 앤 두종류가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고 외국산으로는 시바스리갈,조니워커 블랙등이 있다.
  • 포카혼타스는 실존 인물인가/백인남성과 최초로 결혼한 전설의 인디언

    ◎만화영화 주인공으로 맹활약… 재조명 활발 디즈니 만화영화 「포카혼타스」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가운데 실존인물 포카혼타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다. 포카혼타스는 이미 미국사회에서 2백년동안 화제가 된 인물.인디언 가운데 최초로 세례를 받고 백인남성과 결혼했기 때문이다.그러나 현대 사람들의 머릿속에 포카혼타스는 버지니아에 도착한 영국인 개척자 존 스미스라는 청년을 구해주고 그와 사랑에 빠졌다는 달콤한 연애담으로만 남아있다.물론 만화영화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포카혼타스가 스미스를 구해준 것은 사실이나 애틋한 사랑에 관한 얘기는 어디에고 찾아볼 수 없다.그녀는 담배재배자인 존 롤페와 결혼,1616년 영국으로 문명을 구경하러 갔다가 결핵에 걸려 22세의 나이에 숨졌다.포카혼타스는 자신의 어떤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으나 그녀의 삶은 호사가들에 의해 이리저리 부풀려졌다. 신대륙으로 이주한 영국인들이 토착 영웅을 찾아헤맬 때 포카혼타스의 얘기가 그들의 의도에 들어맞았던 것.이때부터 그녀의 이야기는 아름다운전설이 돼 웨브스터사전에 실렸으며 포카혼타스의 조각품도 만들어져 한 성당에 영구전시됐다. 포카혼타스는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했다.남부사람들은 그를 귀족가정의 시초로 숭앙했으며 북부인들은 노예제도 철폐주의자의 상징으로 여겼다.독립전쟁이 끝난뒤 버지니아주는 백인과 다른 인종간의 결혼을 금지하고 1백%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권한도 주지 않는 법을 제정했다.그들이 영웅으로 삼는 포카혼타스가 20세기에 살았다면 롤페와의 결혼으로 감옥행을 하게 되는 모순을 스스로 만들어낸 꼴이다. 몸을 사리지 않는 구조,영국왕실의 연회,비극적인 단명 등 포카혼타스 실제의 삶도 마치 소설같다.그러나 포카혼타스 전설을 소재로 삼은 시인이나 극작가들은 단 한가지 구조적 결함을 발견했다.바로 포카혼타스와 스미스 사이에 로맨스가 부족하다는 것.따라서 존 데이비스라는 소설가는 1798년 롤페라는 재미 없는 인물을 버리고 스미스를 주요 인물로 꾸몄다. 포카혼타스는 이후 미국의 「뮤즈」로,순결한 영혼의 처녀 등으로 탈바꿈하다가 마침내 95년에 「흥행의 마술사」 디즈니사를 만나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을 본뜬 멋쟁이 여성으로 변모했다.게다가 시공을 초월해 헌신적으로 스미스를 사랑하는 착한 마음씨에 평화·환경보호주의자이기도 하다.포카혼타스는 숨진지 3백여년만에 17세기판 원더우먼으로 거듭나게 됐다.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이 세기의 인물탐구:81)

    ◎박진감 넘치는 심혼의 선율… 청중 사로잡아/5세에 입문… 미 줄리아드서 혹독한 레슨 거쳐/연 100회 이상 공연 스케줄 잡힌 세계10대 연주자/67년 레벤트리트경연서 주커만과의 공동우승은 세계음악사에 기록 정경화(바이올리니스트) 영국 선데이 타임스는 83년 「최근 20년간 가장 위대한 기악연주자」로 정경화를 선정한 적이 있다.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다이내믹과 이모션은 한번 활을 잡기만하면 폭풍같은 절조로 청중을 일시에 혼도시키고야 만다.흡사 「마야의 박사가 조각조각 찢어져 신비에 가득찬 근원자의 무릎앞에 펄럭이 듯이 그의 몸속에선 마혹과 초자연이 흘러나온다」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더구나 자기비판에 엄격하여 「열광적 도취를 알지 못하는 정관(정관)은 참으로 조용히 바라보는 정관이 되지 못한다」는 차원에서 최근에는 진주빛 화염을 가라앉힌 「진한 포도주의 바다같은 심혼의 선율을 빚어낸다」는 평을 듣는다. 정경화의 일사불란하게 화려한 연주경력을 일일이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그는 데뷔이래 「톱」의 자리에 우뚝 선 채 자신의 위상을 도도하게 지켜왔고 지금도 그렇다.그중에서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지난 70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심포니와의 차이코프스키 협연을 들지 않을 수 없다.이 한번의 연주로 그는 미국의 9대 교향악단을 비롯하여 영국에서 30회를 연주할 수 있는 계약을 맺었고 연 1백회이상의 연주스케줄을 갖는 가장 위대한 연주가의 한사람이 되었다. ○데뷔이래 정상에 우뚝 이보다 앞서 67년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레벤트리트 경연대회에서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우승을 차지한 일은 세계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기도 한다.평론가 위데 콤베는 이날 정경화연주에 대해 「하이페츠나 오이스트라흐나 스턴이 이보다 더 출중한 연주를 했다할지라도 그것은 다 지나간 일이며 그녀만이 갖는 강한 호소력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최상의 연주」라고 호평한바있다. 음악평론가 한상우씨도 『실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잭 스턴을 대부로 하는 막강한 유태계 세력이 주커만을 에워싼 가운데 고독한 싸움에서 이긴 정경화는 지금 주커만 펄만과 어깨를나란히 하면서 명실공히 세계10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돌아본다.70년대와 80년대 일본에서 여신처럼 떠받들려진 그는 75년 샤를르 뒤트와 시벨리우스를 연주했을 때는 일본의 평론가 우노 호이모로부터 「예리한 칼로 살을 베었을 때 푹 솟아오르는 선혈처럼 신선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는 등의 극찬 등 황홀한 찬사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일찍이 레코드 재킷에서나 볼 수 있는 로린마젤 게오르그 솔티 리카르토 무티 앙드레 프레빈 루돌프 켐페 등이 지휘하는 세계적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물론 영국의 데카를 통해 20여장의 레코드를 내놨고 언제부턴가 한국의 정경화만이 아닌 세계적 「대가」로 군림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그는 천재이며 타고난 재능으로 자연스럽게 오늘에 이른 것일까.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단호하게 「노!」다. 「정상에 이르는 길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는 그는 「음악에서 기적은 일어날 수 없으며 연주할때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연주에 임하고 있고 단 한번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말한다.지난번 광복 50주년 기념연주차 귀국했을 때도 그가 묵고있는 신라호텔 미팅룸에서 하루종일 바이올린을 어깨에 메고 연습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머리가 숙여지게 했다. 청중을 사로잡는 마력 때문에 만사에 적극적이고 어딘지 여걸스러우리라고 짐작되지만 정경화의 진짜 성격은 낯가림이 심하고 「말도 못하게 내성적」이며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서 친구도 별반 없는 편이다.다만 첼리스트인 언니 명화씨와 지휘자인 동생 명훈씨와의 트리오는 혈육다운 최상의 절창을 이루고 그리고 그를 생명처럼 키워낸 어머니 이원숙여사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용모 또한 화사하고 순수하여 무대에서의 관록이나 권위따윈 찾아볼 수 없다. ○타고난 재능보다 노력 널리 알려지다시피 그는 5살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해서 9세때 서울시향과 협연,61년 가족이 미국에 이주하면서 줄리아드음악원에서 일류 바이올리니스트만을 키워낸 이반 갈라미언교수와 조지프 시게티의혹독한 레슨을 거쳐 「자기만의 표현능력과 음악적 언어로써 감정을 총괄하고 통제」하는 연주자로 성장했다.이는 「정말 바이올린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열정이 몸속에서 꿈틀거린 때문」이며 「수많은 장애를 극복한 일은 경이롭다고 밖에 표현할길이 없다」는 음악계의 평은 옳다.그런 점에서 「때로는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듯 때로는 귀기가 서린 박진감으로 인해 그의 연주를 듣고난 다음 다른 연주를 들으면 어딘지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남아있는 듯 성에 차지 않는다」는 이순열씨(음악평론가)의 말은 음악애호가들의 공감을 사고 있다. 『위대한 음악가들은 자연과 함께 살면서 그 속에서 작품을 썼기 때문에 그들의 음악속에는 자연의 모든 색깔들이 칠해져 있다는 걸 나는 일찍이 스승들로부터 배웠어요』 따라서 「지금까지의 연주활동은 앞으로 10년을 위한 준비과정에 불과」하며 「음악이 지닌 색채감과 이디엄에 집중하여 자신감을 성취한 지예에 다다르고 싶다」는게 그의 꿈이다. 바이올린의 화신인듯 그래서 음악과 결혼한 것처럼 보이던 그가지난 84년 케임브리지대 출신의 영국인 사업가 제프리 리게티씨와의 결혼을 발표했을 때 이로인해 그의 들끓는 정열과 현란한 선율이 한치라도 사그라들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그러나 결혼후 피아니스트 필립 몰과 레코딩한 「정경화 콘 아모레」는 『살바도르 달리가 「피는 꿀보다 달다」는 그림을 그렸지만 이젠 「정경화의 바이올린은 꿀보다도 달다」란 그림을 그려야 할때』라는 평을 받을 만큼 신기의 솜씨로 청중을 도취시켰다.영국의 평론가 에드워드 그린필드는 「정경화가 온세계를 향해 바이올린의 활로 쏜 화살은 에로스의 황금화살보다 더 감미로운 사랑의 기쁨을 느끼게 할뿐 아니라 우리들을 음악의 유토피아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쓸 정도였다.지난 봄 그의 귀국 연주에 대해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강숙교장도 「음악을 끝까지 지킨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가 활을 긋는 그 순간부터 정경화는 아직도 우리의 희망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고 일깨운다.부군인 리게티씨(49)는 「성격이 온화한 정경화 음악팬」으로서 그의 음악생활에 대한 모든 것을 협조하고 외조한다고 전한다.두아들은 엄마를 따라 재곤(프레데릭·10)은 첼로와 피아노,유진(7)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고 방학을 이용해 광복50년기념행사에 다녀갔다. ○두 아들도 음악공부 실제로 결혼후 정경화만큼 눈에 띄는 변모를 보인 예술가는 별로 흔치 않다.한국에서 태어나 무수한 장애를 넘어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끈질긴 집념과 강한 개성 때문에 「때때로 발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앙칼져 보이기도 했던」 오기는 이젠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패기와 자존심과 싱싱함과 날카롭게 찔러오는 그 전율」은 한층 침후해지고 그의 손과 머리와 마음은 움직일 때마다 아름다움을 캐면서 달빛이 녹아 강물을 이루듯 흘러넘치는 광채로 청중의 온몸을 적신다. 지금 「세계가 기억하는 연주가 정경화」는 「자연의 심장인 명작의 숲」속에 서서 인간의 심장이 아닌 영혼을 깨우고 흔드는 절기의 선율로 하늘을 꿰뚫고 싶을지도 모른다. □연보 ▲1948년 서울에서 출생.정준채씨와 이원숙여사의 4남3녀중 넷째 ▲53년서울시향과 협연 ▲61년 이화여중 재학중 도미­줄리아드음대서 갈라미언및 시게티사사 ▲64년 카네기홀 독주 ▲66년 메리웨더 포스트청소년 국제 콩쿠르 수상 ▲67년 레벤트리트 국제바이올린콩쿠르에서 주커만과 공동1위­줄리아드 음악원 졸업­제네바 국제음악콩쿠르입상 ▲70∼84년 런던심포니(지휘 앙드레 프레빈)뉴욕필(지휘 레너드 번스타인)을 비롯,필라델피아·클리블랜드오케스트라,몬트리올·보스턴심포니,로스앤젤레스·이스라엘·로열필,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빈·프랑스 국립교향악단 등과 연 1백회연주,데카 EMI전속 ▲73년 「스트라빈스키 왈튼협주곡」레코드로 에디슨상,독일평론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스타상」수상 ▲80년 퀸 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 심사위원 ▲84년 결혼이후 런던필(지휘 리카르도 무티)·프랑스국립교향악단(피아노 필립 몰)·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오케스트라·프랑스국립관현악단·베를린필협연등 연 70회연주,유럽 캐나다 일본 오스트레일리아지역 순회연주 ▲92년 미국의 92 엑설런스 20 00상 수상 ▲94년바르토크 협주곡으로 그라모폰상,차이코프스키 협주곡 「빈티지 레코드」선정 ▲95년 정트리오 시향협연및 부산 청주 마산 독주회,광복50주년 축전음악회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대향연(잠실주경기장) 피아노 필립 몰·라두루프 등과 데카·EMI에서 레코드 20여장및 CD LD출반
  • 영 경제 하강국면/올 성장 3% 전망

    【런던 로이터 연합】 영국인들은 기록적인 무더위로 땀을 흘리고 있으나 경제의 기온은 날마다 떨어지고 있다. 16일 발표된 7월중 실업통계를 보면 23개월동안 하락을 거듭했던 실업자수가 1천7백명이 늘어 2백32만명에 이르렀다. 이제 전문가들은 지난해 근 4%의 성장을 기록했던 영국경제가 올해엔 겨우 3%로 낮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 「유처리제」 생태계 파괴 심화 우려/효율적 기름제거 방안 없나

    ◎화학물 독생으로 해저생물 장피해/「광양만사고」때 입증… 흡착포·볏짚 써야 기름띠를 제거하기 위해 요즘 남해 해상에 대량으로 뿌리는 유 처리제는 과연 안전한가. 어민들은 유처리제에 의한 2차 오염으로 해양 생태계가 파괴된다고 입을 모은다.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흡착포나 볏짚 등으로 걷어내거나 유회수기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방제 작업 1주일째인 29일까지 방제용으로 뿌려진 유처리제는 자그마치 15만2천7백40ℓ나 된다. 유처리제는 계면 활성제와 베이스오일,방향족 탄화수소 등 7가지의 화학성분을 섞어 만들어졌다.색깔이 투명하며 점도가 낮은 액체이다.기름 방울의 흡착력을 약화시켜 분산을 촉진,미세 입자로 쪼갬으로써 표면적을 넓게 해 생분해를 가속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러나 방향족 탄화수소는 독성을 지니고 있어 많은 양을 한꺼번에 사용할 경우 바지락과 굴 등 패류의 생장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등 2차 오염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유처리제는 물에 섞어 고압 소방호스로 뿌리는데,그 혼합비율(8∼12대 1)과 살포량(ha당 60∼1백ℓ)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전남 여수수협과 경남 하동수협은 지난 93년 9월 말 광양만 앞 바다에서 1천여t의 유류가 누출됐을 때 피해액이 1천억원대에 이른 것은 유처리제의 과다사용으로 인한 2차 오염 때문이라는 보고서를 제시했다. 어민들의 요청으로 당시 한달간 조사한 영국인 해양생물학자 D 클로스박사는 당시 국제유류피해배상기금(IOPC기금)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수심 15m 이하에서 서식하는 전복이 기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그 원인은 유처리제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광양만 사고는 다른 사고에 비해 유류의 오염량이 많지 않았음에도 피해 금액은 엄청났다』며 『간만의 차이로 자연산 굴·고막·바지락 등은 기름의 직접 피해를 입었으나 전복은 유처리제에 의해 간접 피해를 입었다』고 지적했다. 클로스 박사는 앞으로는 유처리제의 사용을 규제하고 기름을 먹는 박테리아를 생성하는 비료성분이 포함된 처리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27일사고현장에 들른 환경부 김중위 장관도 전문가와 대책회의를 갖고 『유처리제를 다량 사용할 경우 2차 오염의 우려가 있다』며 가능한 한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광양만 유류오염시 피해를 입었던 광양시 중마동 길호마을 강선옥(여·40)씨는 『93년 유류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매년 봄마다 자연산 바지락과 굴 종패가 엄청나게 많이 잡혔다』며 『작년부터는 아예 종패를 볼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기름피해 어민 보상 어떻게/피해입증 근거자료 확보 해야/보험사 요구때 제출 못하면 금액 산정어려워/무허 양식작업자들 보상 받을 길없어 반발 예상 씨 프린스호 사고로 피해를 입은 어민들은 어떻게 보상을 받나. 사고 발생 7일째인 29일 대책본부는 여천군청 호유해운 협성검정 여수수협 여수어촌지도소 등 9개단체 12명으로 공동조사단을 구성,앞으로 한달동안 피해 상황 실사를 벌이기로 했다. 이들은 여천군내 1백30여명의 어촌계장이 현지에서 접수한 피해어종,피해량,피해액 등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현재로서는 사고 선박사인 호유해운이 유류 오염사고가 발생했을 때 최대 5억달러(4천5백억원)까지 보상받을 수 있는 영국 P&I보험에 가입해 있어 재원은 충분하다.그러나 해상 오염사고는 피해 지역이 광범위한데다 피해 액수를 산정하기가 쉽지 않아 어민들과 보험회사측의 마찰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어민들이 피해를 어떻게 입증하느냐는 것이다. 일부 어민들이 2차 해양오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부패하기 시작한 물고기 떼를 가두리 양식장 망안에 가둬두고 있는 것도 보험사 조사단에게 직접 피해 규모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보험사는 피해산정을 위해 세금납부문서,양식어종 구입 및 판매 명세서,생산량 기록 등 명확한 근거자료를 요구하겠지만 영세어민들이 그런 자료를 모두 갖췄을리 없어 피해액 산정이 어려운 형편이다.또 피해어종이 치어인지 성어인지에 따라 보상액이 달라지지만 그것도 입증이 쉽지 않다. 지난 93년 9월 광양만 기름유출 사고 때도 어민들은 벙커C유 1천2백80t이 바다를 오염시키자 9백31억원의 보상금을 요구했지만 영국의 국제유류 오염보상기금(IOPC Fund)은 한국의 감정기관인 한국코머스를 대리인으로 조사한 결과 피해액이 30억원에 불과하다고 주장,아직까지 한푼의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 다른 쟁점은 무허가 양식업자들에 대한 보상문제.여천군이 잠정 집계한 허가 어민의 피해 사례는 7백50건,9천ha이다.이와 함께 무면허 양식업자의 피해도 허가 업자의 20% 수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그러나 법적으로만 본다면 보험사로서는 그같은 피해를 보상할 책임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호유해운측에서 자기 주머니를 털어 보상을 해줄 수는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입장은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지난 27일 정해철(58)사장이 기자회견에서 『피해 어민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겠지만 무허가 양식업자에 대한 피해보상은 관행을 따르겠다』고 밝혔을 뿐이다.때문에 사실상 보상을 받기가 어려운 무허가 양식업자들이 벌써부터 집단적으로 반발할 조짐을 보이는 등 앞으로 보상문제를 둘러싸고 상당한 진통이 따를 것이라는게 관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 영 옥스퍼스대 한국어·한국사 교수 지영해·제임스 루이스씨 인터뷰

    ◎“유럽 명문대에 한국학 연구기반 마련” 지난해 1월 영국 옥스퍼드대학에는 한국어 강좌가 처음으로 개설됐다.그후 10개월만에 한국사 강좌가 또 설치됐다.이 한국학 관련 강좌는 모두 국제교류재단(당시 이사장 손주환)이 한국학 지원의 필요성을 인식,성사를 본 것으로 현지의 큰 관심을 모았었다.현재 이 한국학 강좌를 맡고 있는 교수는 지영해(38)씨와 제임스 루이스(38)씨.지교수는 한국어를 비롯해 한국문화,한국어독본을 맡고 있고 루이스교수는 한일관계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근대사를 강의하고 있다.이들에게 한국어와 한국사를 배우는 영국 학생은 모두 24명.아직 초창기여서 종합적인 과정으론 미흡하지만 일단 유럽의 명문 옥스퍼드대학에서 한국학 연구의 기반은 마련된 셈이다.최근 옥스퍼드 한국학의 파이어니어인 두 교수가 국내 한국학 관련 연구소를 둘러보기 위해 한국에 왔다.두 교수를 통해 옥스퍼드를 비롯한 영국의 한국학 연구현황을 알아본다. ▷지영해 교수◁ 『중국 일본등 다른 동양국가에 비해 한국학 강좌 개설이늦긴 했지만 이제 기반이 마련된만큼 한국정부와 기업들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 내실을 다져가야 합니다』 지영해교수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중국학과 일본학은 독립된 학사과정으로 자리잡았지만 한국학은 아직까지 동양학과의 부분 강좌로 개설돼 있는 실정 이어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옥스퍼드에 1백년전부터 중국학이 연구됐고,30년전 일본학 강좌가 개설됐음을 볼 때 영국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갈 길이 멉니다.다각적인 지원이 절실합니다』 지교수는 특히 일본 니산그룹이 영국 진출에 앞서 지난 81년 옥스퍼드대에 일본학 연구소를 설립하고 일본학 석좌교수자리를 만들어 영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유발한 성공사례를 들어 우리 기업들의 노력을 촉구했다. 『그동안 미국에 편중됐던 한국의 관심을 이제는 유럽쪽으로 돌려야 할 때라고 봅니다』 지교수는 옥스퍼드 대학측에서도 한국학을 부흥시키기 위해 영국과 한국의 기업을 대상으로 한국학 기금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우선 교수확보가 가장 시급하다고 말했다.현재 옥스퍼드대에만도 중국학의 경우 10명,일본학의 경우 30여명의 교수가 강의중이다. 『한국학과 관련해 영국에서 가장 강세를 띠고 있는 옥스퍼드대에도 한국학 교수가 불과 2명밖에 없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입니다.학사학위 수여를 위해선 최소한 4명이 필요합니다.안정적인 교수직 확보가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지요』 지교수는 국제교류재단의 노력으로 옥스퍼드에 한국학 강좌가 설립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업적이라고 말했다. ▷제임스 루이스교수◁ 『영국이 유럽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한국은 더 이상 영국의 한국학 육성에 안이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특히 옥스퍼드대 출신들이 영국과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이 대학에서의 한국에 관한 총체적 연구랄 수 있는 한국학 지원 필요성은 절대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루이스교수는 현재 유럽 각지에 한국학을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학자들이 적지않게 흩어져 있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들이 역량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은런던대학내 단과대학인 소와즈와 셰필드,리즈,뉴카슬어폰타임대학 정도를 들 수 있지만 옥스퍼드는 학문적 깊이에 있어서 다른 대학과 차별화되고 있습니다.개인적인 욕심으론 옥스퍼드에서 한국학을 배운 졸업생들이 한국인처럼 신문을 읽을 수 있고 특히 한국사를 배운 학생의 경우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대해 자연스럽게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가르치고 싶습니다』 유럽에선 20년전부터 유럽한국학회(AKSE)가 결성돼 정기적인 모임을 열어 유럽내 한국학 연구 활성화에 나서고 있고 영국에서도 80년대 중반부터 영국한국학회(BAKS)를 통해 연구모임을 가져오고 있다.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이 한국학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한국학 연구센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루이스교수의 생각.그 준비작업으로 루이스교수는 지난 1월부터 매월 영국내 한국학 연구자들을 초빙해 세미나를 열어오고 있다. 루이스교수는 특히 『우선 시급한 문제는 교수요원 확보』라면서 한국학 관련도서 확충과 장학금 증대등도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 넬슨 만델라와 아웅산 수지(임춘웅 칼럼)

    우리는 지난 1주일동안 「20세기 최후의 영웅」 두사람을 만날수 있었다. 한 사람은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고 다른 한 사람은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여사다.만델라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직접 찾아와 우리와 만나게 됐고 아웅산 수지여사는 미얀마 정부가 세계여론의 압력에 밀려 6년간이나 끌어온 그에 대한 가택연금을 해제함에 따라 이를 계기로 전세계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웅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참으로 큰 기쁨이다.사람들은 그들이 보여준 진정한 용기를 통해 인간의 위대함을 배우고 그들의 초인적인 인내와 빛나는 투쟁을 통해 정의의 힘을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우리의 정치현실이 너무나 혼탁하고 지나치게 추악한 터여서 이들과의 만남이 더욱 빛나고 고귀해지는지도 모른다. 지난달 30일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는 럭비월드컵대회에서 남아공이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축하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었다.백인선수들로 이뤄진 남아공대표팀을 흑인들이 국기를 흔들며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감격적인 순간이 벌어졌다.이런 장면은 흑인차별통치가 지속된 지난 3백42년동안 한번도 없었던 일이다.백인들이 주로하는 남아공럭비팀이 다른 나라와 싸우게 되면 남아공의 흑인들은 으레 다른 나라팀을 응원해왔던 것이다. 감동적인 이 순간이 실현되는 데는 한사람의 결연한 자기희생이 따랐던 것이다.넬슨 만델라의 생애에 걸친 인종차별정책 철폐투쟁의 결실이었다.그는 27년간이나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타협하지 않았고 끝까지 싸워 이겨냈다. 아웅산 수지여사는 키 1m55㎝의 전형적인 동남아의 가녀린 여인이다.미얀마의 전설적인 건국의 아버지 아웅산장군의 딸이긴 해도 그는 영국에서 공부를 하고 영국인과 결혼해 영국에서 사는 평범한 주부였다.아웅산 여사가 정치에 뛰어들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88년 위독해진 어머니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반독재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이 군사정권의 총부리에쓰러져가는 것을 보고 그는 「민주화가 미얀마의 제2의 독립」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그는 곧 1백여개의 지리멸렬한 야당세력들을 결집해 정치투쟁을 전개했다.그리고 그는 이듬해 가택연금되는 상태에서 고독한 투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됐다.아웅산 여사는 6년동안의 연금기간동안 단 한번밖에 허용되지 않은 가족면회,군사정권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투옥에 대한 두려움,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게 되리란 불안,고독의 공포가 항상 주변을 어슬렁 거리고 있다』 『냉혹하면서도 무제한적인 압력 앞에서도 품위를 유지할수 있는 용기야말로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이라고 그는 그의 저서 「공포로 부터의 자유」에서 쓰고 있다.아웅산 수지여사는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끝내 지켰다.
  • 볼가강(시베리아 대탐방:18)

    ◎3,530㎞ 굽이마다 러시아제국 정취가…/유람선·주변 성벽 어울려 한폭의 그림/8∼9월 2주간 뱃놀이 코스는 환상적/섬유도시 이바노바시는 “남소여다” 문제점 노출 모스크바를 출발한지 4시간25분만에 야로슬라블역에 도착했다.모스크바에서 2백90㎞ 떨어진 도시다.블라디보스토크 도착 때까지 오른쪽 철로변에 작은 말뚝에다가 매 ㎞마다 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표시가 돼있다. 주민 63만명의 비교적 큰 도시인 야로슬라블은 1010년 당시 키예프에 있던 러시아왕국의 왕 야로슬라블 무드리히(현명한 야로슬라블)가 건설했다.그뒤 러시아가 여러 왕국으로 갈라지면서 1280년 야로슬라블왕국이 세워졌다가 이후 1463년에 다시 모스크바왕국에 합쳐져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 도시가 러시아인들에게 유명한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보다도 이곳에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 있기 때문이다.물론 페테르부르그,모스크바에도 당시 극장이 있었지만 야로슬라블극장은 유독 클래식만 무대에 올린 극장이었기 때문에 이를 제일 오래된 것으로 꼽는다. ○옛러시아의 왕도 혁명 뒤 볼셰비키들은 오랜 종교전통을 가진 야로슬라블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영국의 맨체스터 같이 순수 섬유노동자 도시인 남동쪽 2백50㎞ 지점의 이바노바시를 집중육성했다.재정러시아 때 유명한 섬유공장이 건설됐던 야로슬라블과 이바노보는 이렇게 해서 한때 경쟁관계에 놓였으나 이바노보가 판정승을 거두었다.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섬유도시로 볼셰비키의 총애를 받은 이바노보는 섬유노동자들인 여자들의 도시가 되다보니 요즈음 많은 사회문제에 직면하고 있다고 한다.여자가 많고 남자 수가 적음에 따라 생길 수 있는 갖가지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야로슬라블부터 모스크바와 1시간의 시차가 벌어진다.야로슬라블역을 출발한지 꼭 5분만에 한강 정도의 강폭을 가진 푸른 볼가강이 차창밖으로 펼쳐졌다.모스크바에서 2백93㎞ 떨어진 지점이다.강 한쪽에는 요트 수대가 매어 있고 그뒤로 휴양지가 꾸며져 있다.볼가강.볼가강의 뱃놀이를 해보지 않고는 러시아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북부 트베르스카야주와 노보고르드스카야주 경계 지점에서 발원해 트베르,야로슬라블,카스트로마,니주니노브고로트,카잔,사마라,사라토프,볼고그라드 등 혁명전 러시아제국의 심장부를 두루거쳐 카스피해의 아스트라한으로 흘러들어가는 길이 3천5백30㎞의 장강이다. 8월 말에서 9월 초사이 모스크바에서 증기유람선을 타고 아스트라한까지 2주간의 볼가강 뱃놀이를 떠나는 것을 러시아인들은 최고의 여행으로 꼽는다.도중에 각기 다양한 크렘린(성벽),교회를 갖고 있는 도시들을 구경하며 내려가 마지막 아스트라한에서 9월이 최고 적기인 아스트라한 수박을 맛본 뒤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이다.아스트라한 수박 5덩이만 먹으면 신장병은 깨끗이 낫는다는 속설도 있다. 야로슬라블의 볼가강 다리가 건설된 해는 1903년도인데 이 지역의 철도건설연도는 1873년이다.30년동안 열차 승객들은 볼가강까지 와서는 페리로 강을 건넌 다음 기다리고 있는 다른 열차를 타고 여행을 계속해야 했다. ○8∼9월이 여행 적기 볼가강을 건너자 사스나,옐 등 드디어 침엽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타이가의 전조인 것이다.비슷하게 생겼지만 사스나는 모래땅에서 자라고 옐은 진흙땅에서 자란다.볼가강을 넘으면서 열차는 진짜 러시아의 품으로 들어간다.모스크바는 여러 잡다한 문화,사람이 뒤섞인 메트로폴리탄일 뿐 러시아가 아니다.모스크바에서 멀어질 수록 진짜 러시아인 것이다.볼가강을 넘어 계속 북으로 올라가면 철로는 다닐로프역에서 양쪽으로 갈라진다.북으로 곧장 가 볼로그다를 거쳐 아르항겔스크로 가는 선과 동으로 돌아 시베리아로 진행하는 선등 2개 노선이 갈라지는 것이다.다닐로프시는 16세기에 건설된 버터,치즈의 주산지이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시베리아행 열차의 전동차를 교환하는 일이다. 시베리아행 열차는 매 3백∼4백㎞마다 전동차를 바꾸고 전동차 운전사를 교대해주는데 다닐로프는 모스크바에서 3백50㎞ 떨어져 있어 그 첫번째 순번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20분을 정차하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달고온 국방색 전동차는 날씬한 붉은색의 체코제 전동차로 바뀌었다.객차는 몸체와 내부의 시설들이 모두 동독제,화물전동차는그루지아의 트빌리시에서 만든다고 한다. 우리가 탄 객차의 복도 한쪽 끝에는 「티탄」이라고 부르는 물 끓이는 대형티포티가 마련돼 있는데 컵을 들고가서 꼭지를 틀면 항상 뜨거운 물이 나온다.한켠에 온도표시가 돼있는데 보니까 90도∼1백도 사이를 가리키고 있다.우랄에서 생산되는 티탄으로 만든 용기인데 그 이름이 그냥 용기의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식성이 까다로운 승객이라면 컵라면을 준비해가서 언제든지 뜨거운 물을 부어먹을 수 있다. ○전동차 새로 교체 오랜 기차여행중 맛볼 수 있는 작은 즐거움중 하나는 이렇게 장시간 기차가 정차할 때 플랫폼으로 내려가 걸으며 맑은 공기를 듬뿍 마시는 것이다.기차의 스팀 내뿜는 소리가 「슉슉」 나고,식당칸의 물 쏟아내는 소리,쇠망치를 들고 기차 아래쪽을 툭툭 치며 지나가는 나이든 노동자,저녁 요깃거리를 준비하라고 외치며 지나가는 상인들…하나 같이 여행의 맛을 더해주는 소중한 장면들이다. 다닐로프를 지나며 기차는 북진을 끝내고 동으로 방향을 틀어 드디어 본격적인 시베리아행을 시작한다.저녁을 들기 위해 식당칸을 찾았다.옛날 소련 시절에는 음식값도 싸고 사람도 많았다는데 너무 비싼 탓인지 사람들도 별로 없다.다만 한쪽켠에 우리 옆칸 손님들인 덴마크인,영국인,독일인 승객들이 언제 친구가 됐는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벌써 술이 거나해 있다.덴마크 사람들이 이렇게 술을 잘 마시는 줄은 처음 알았다.밤늦게 보드카를 마시는 것을 분명히 봤는데도 이튿날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 하면 어김없이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방에서 뛰어나오는 사람들이었다.
  • 30일 정년퇴임하는 대한성공회 김성수 주교

    ◎“한국교회 베푸는 교회로 거듭나야”/“정신박약아들 돌보며 여생 보낼터”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를 맞아 우리교회도 앞으로는 일상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의 편에 서서 이들이 사는데 불편이 없도록 도와주고 베푸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1년간의 신부생활을 통해 성공회 초대 관구장,서울교구장 등을 역임하며 대한성공회를 이끌어온 김성수 주교(65)는 오는 30일 교구장 퇴임을 앞두고 한국교회의 역할을 이렇게 말했다. 김주교는 이런 소신으로 『퇴직후에는 서울 오류동에 있는 정신박약아 학교인 성베드로 학교에서 3백60여명의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고 퇴직후의 계획을 밝혔다.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나 교동국민학교와 배재고를 졸업한 김주교는 20대에 폐결핵에 걸려 10년간 요양하면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성공회 신학원에 입학,64년 청주교회 보좌사제로 성직자의 길에 들어섰다. 김주교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은 누가복음 22장 27절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이곳에 와있다』는 구절로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심부름하는 자세로 기도하고 헌신하는 목회를 이끌어 교세를 확장했다. 71년 서울 대성당사제가 된 김주교는 성당에서의 목회을 하면서 70∼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가,빈민·장애인·근로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끊임없는 보살핌으로 당국으로부터는 「진보 사제」말을 듣으며 감시를 받기도 했다. 84년부터 서울교구장을 맡으면서 항상 바쁘게 살아온 탓으로 자녀들로부터는 『우리집이 여관이냐』라는 핀잔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주교는 그동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성서공회 이사장,바른언론을 위한 시민연합 공동대표,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종교적인 사회 운동을 펼쳤다. 그는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도운 것은 『좋은 신부,좋은 목사들을 만나 의로운 일을 하다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뒷바라지를 한 것뿐』이라고 밝혔다. 그가 빈민과 장애인 등에 관심을 가진 것은 『10년간의 폐결핵투병 생활을 한 경험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주교는 그동안 ▲성공회대학을 정식 대학으로 만든 것 ▲대한성공회를 관구로 격상시킨 것 ▲선교 1백주년 기념 선교행사를 무사히 마친 것 ▲서울 교회를 확장 증축한 것 등을 보람있는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주교는 당초에 결혼을 하지않는 수사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39살의 노총각때 일본을 방문하면서 당시 일본에 선교사로 와있던 영국인 부인 후리다 여사(63)를 만나 만혼,1남 1녀를 두었다. 김주교는 『다시 신부가 된다면 광산이나 어촌·농촌으로 들어가서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주교는 성당에서 퇴직금은 받지만 액수는 아주 적어 『묻지 말아달라』 며 『아내 후리다 여사가 장애인 들을 위한 봉사를 하면서 월급을 받고 있으니 생활에는 불편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성직자들은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자기 회개를 거듭하는 경건한 삶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마약과의 전쟁(외언내언)

    해방 직후에는 마약상용자를 「아편쟁이」라고 불렀다.퀭한 눈에 피골이 상접한 아편쟁이는 그야말로 폐인의 몰골,가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 길에서 객사하는 말로를 걸었다.본인과 가문을 함께 파멸시키는 패가망신의 본보기다.나아가 사회를 병들게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마약이다.그래서 「망국병」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백색의 공포」라 해서 온 세계가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1840년 중국 광주에서 일어난 아편전쟁은 중국인에게 아편을 풀어 엄청난 국부를 챙겼던 영국인에 대한 중국민족주의의 저항이었다.아편전쟁은 역사책에만 있는게 아니라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다. 유엔이 마약퇴치를 위해 힘쓰고 있을뿐 아니라 마약왕국인 남미 콜롬비아는 수년전에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마약조직 소탕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미국도 마약의 심각한 폐해를 우려,레이건 행정부때 마약에 대한 선전포고를 한 바 있다. 우리나라도 마약사범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추세여서 최근에는 마약밀수 중계국에서 최종소비국으로 바뀌고 있다.통계로 봐도 93년 마약사범 적발이 3천명이었으나 94년엔 배가 넘는 6천7백여명.올해들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80%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난다. 연예인들의 고질적인 대마초·히로뽕 복용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지만 요즘에는 농촌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대마초흡연의 42%가 청소년이라는 통계도 나와 있다.순진하고 감수성 강한 농민과 청소년을 표적으로 삼고있는 것이다. 어제 올림픽공원에서는 서울신문사와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공동 주최로 마약퇴치국민대회가 열렸다.마약퇴치 유공자에 대한 시상식과 포스터 공모전도 열려 일반의 관심을 끌었다.「마약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참석자들의 열망이 뜨겁게 분출된 현장이었다.국민들이 외치는 마약에 대한 선전포고인 셈이다.
  • 남아공의 뿌리 흑백인의 만남(아프리카 기행:12)

    ◎남아공 원래 주인은 “산족 부시맨”/2천여년전 북부서 이주… 17C부터 유럽인 통치/흑인대통령 탄생 불구 경제권 등 백인들이 장악 우리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 지역의 원래 주인은 영화를 통해 잘 알려진 부시맨들이었다.산족이라고도 부르는 이 유목민들은 2000년전쯤 지금의 수단 땅 아프리카 북부에서 양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차차 남아프리카의 서부해안으로 이주해 이곳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다.그리고 나서 16세기에 비로소 이곳을 찾아온 백인들과 조우했다.다른 한편으로는 부시맨들과 아주 다른 언어인 반투어를 쓰는 코이코이족(네덜란드인들은 이들을 호텐토트족이라 부른다)이 있었는데 이들은 짐바브웨 지역에 살면서 철기를 다루고 소를 길러 양식으로 삼았다.이들 코이코이족은 남아프리카의 동부해안으로 내려와 자리잡았다.현재의 이스턴케이프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았던 이들은 17세기에 백인들과 만나면서 서부해안의 부시맨들과는 달리 백인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16세기 백인과 첫 충돌 유럽에서 남아프리카에 최초로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은 포르투갈인이었다.이들은 1487년부터 1488년 사이에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해내기 위한 항해도중에 남아프리카에 닿았다.그러나 영구적인 정착지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네덜란드인들이었다.1652년 얀반 뢰빅(JANVAN RIEBEECK)은 일단의 네덜란드인들을 이끌고 오늘의 케이프타운에 해당하는 테이블마운틴 아래 해안가에 상륙했다.이 해안선을 지나가는 네덜란드의 선박들을 위한 중간기착기지로 삼기위한 것이었다.그러나 자신들의 식량자급이 힘들어지게 되자 뢰빅은 함께 온 부하들중 일부를 해방시켜 주변의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그는 또한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과 극동지방들로부터 노예들을 사들이기도하여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렇게 해서 네덜란드인들은 해안지방에서 부터 내륙으로 야금야금 침투해 들어가면서 남아프리카를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갔다.네덜란드에서 온 이주자들은 처음엔 보어인으로 불렀으나 나중엔 본토어에서 파생된 언어인 아프리칸스어를 쓰게 되면서 그 이름을 따 「아프리카너」라고불리게 되었다.그 뒤 부시맨 그리고 코이코이족과 아프리카너들 사이에서는 케이프컬러드(Cape Colored)라는 혼혈인종이 생겨나게 되었다.아프리카너들은 희망봉 일대에서 내륙쪽으로 이동하여 반유목생활을 하는 농민이 되었는데 주로 피시강 부근에 안정된 농경생활을 하던 이들은 비교적 인구가 많았던 코사족과 충돌하기 시작했다.1775년에는 사소한 소떼의 약탈이 원인이 되어 아프리카너와 코사족의 국경전쟁이 일어나 100년동안이나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1백여년간 국경 싸움 한편 처음 아프리카너들과 충돌하였던 코이코이족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쫓겨나 아프리카너들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노동을 강요당하는 완전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부시맨들은 불모지나 산악지대로 쫓겨나 굶주렸는데 굶주리다 못한 이들이 가축을 도적질하다가 수천명이 살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아프리카의 영토싸움과 인종차별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1795년에 영국군은 당시 케이프식민지였던 지금의 케이프주를 점령했다가 1802년 그 지배권을양보했었고 1806년 다시 점령지를 되찾는다.영국인들은 국경을 따라 코이코이족을 비롯한 반투어를 쓰는 종족들을 하나하나 정복하기 시작했다.그로써 18 30년대에 이르러 아프리카너들이 노예들을 데리고 오렌지강과 발강을 건너 북상하는 대이주가 시작되었다.바로 이 시기에 아프리카너(보어인)들은 오렌지자유국(1854)과 남아프리카공화국(1838,후에 트랜스발공화국이 됨)을 세운다.두 공화국은 1850년대 모두 영국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되었다.그러나 보어공화국들은 영국인들이 자신들을 남아프리카연방에 포함시키려 하자 이에 맞서 저항하였고 그 결과 1899년 드디어 두 공화국과 영국 사이에 이른바 보어전쟁이 발발한다.그러나 1902년 보어인들의 저항은 진압되었다.두 공화국은 결국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포함되고 말았다. 남아공화국의 형성과정은 이토록 복잡한 역사적 질곡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그 나라가 겪고 있는 인종차별도 그런 역사 속에서 명료하게 찾아볼 수 있게 된다.그러한 질곡과 투쟁 끝에 흑인인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트랜스발주에 있는 요하네스버그의 중심시가지에는 흑인노동자들과 노점상,그리고 실업자들이 분주하게 오갔지만 공기 좋고 그늘지고 경관 좋은 곳에 벌어진 벼룩시장의 난전에서는 흑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수도 요하네스버그는 남아공의 수도이고 상업의 중심지로 금광회사의 본사가 대부분 이곳에 있기도 하다.이 나라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기도 한데 유색인종은 이 수도의 서부와 남서부의 특정지역에서만 주로 거주한다.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가 백인이었고 걸어다니는 사람은 흑인들이었다. ○흑인은 거의 걸어다녀 우리를 시내의 언덕 위에 있는 대통령궁으로 안내하였던 백인 운전사는 불과 한달 전에 자신의 아내가 흑인들의 습격으로 숨졌다는 사실을 토로하였는데 운전기사의 표정이 시종 굳어 있긴 하였지만 도대체 불과 한달 전에 아내를 잃은 사람치고는 침울하다든가 슬프다든가 하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어 반신반의하게 만들었다.그는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로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고 있지만 흑인에 의한 백인들의 피해가 뚜렷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하지만 얼른 지나가는 관광객들의 시선에는 이 나라는 정치와 경제에 있어 아직도 백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증거와 조짐들이 너무나 뚜렷하였다.남아공화국의 법률은 백인,그리고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컬러드인,인도인을 주축으로 한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흑인),4대 인종집단을 인정한다.이중에서 아프리카흑인은 전인구의 3분의 2이상이고 컬러드는 10분의 1,백인은 전인구의 5분의 1이다.이 백인들이 대통령직을 제외한 남아공화국의 모든 것을 쥐고 있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그러나 남아공의 출입국관리소 백인 직원은 멀리서 온 이 동양인에게 너무나 친절하고 싹싹해서 황송할 지경이었다.
  • 독 건설업체/외국인 노동자로 “몸살”

    ◎「저임 무기」일자리 33% 차지… 독인실업 유발/외국 하청업체도 “밀물”… 부도율 20% 늘어 최근 베를린 중심가 프리드리히 슈트라세의 선술집인 「오스카 와일드」 매상은 부쩍 늘어났다.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아일랜드와 영국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몇시간이고 「풋볼」을 시청하면서 맥주를 마셔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와 상업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는 베를린의 어디에서나 감지되고 있는 건설붐을 타고 등장한 외국인 노동자를 보는 독일인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이들의 값싼 노임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 독일인이 늘고 있어서다. 독일의 건설투자는 지난해 구서독 지역에서 4.1%,구동독지역에서 15.2%나 증가하는등 독일전역에서 활황세를 보여 극심한 인력난을 보이기 시작했다.그러나 묘하게도 이같은 「번영」의 혜택이 독일 건설업체와 독일 노동자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오히려 저임 외국인 노동자와 하청업체의 수입으로 국내업체가 도산해 실업자가 속출해 선술집 오스카 와일드에 북적대는 외국인들을 달갑게 생각하는 독일인은 얼마되지 않는다.지난해 독일에 합법적으로 취업한 외국인 건설노동자는 유럽연합(EU)출신 합법취업자 10만명과 특별할당제에 의해 취업한 폴란드,체코 공화국등 비유럽연합 출신 3만명이다.그러나 불법입국자 40만명 및 독일업체에서 독일인과 같은 조건 아래서 취업한 15만명등을 포함해 외국인 노동자는 독일의 건설부문 총 노동력의 3분의 1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그만큼 독일인들은 일자리를 잃었다는 말이 된다. 건설부문 실업률은 동·서 양독에서 각각 10%선에 육박하고 있으며 지난해 도산한 업체만 1천9백개에 이른다.이같은 도산율은 한해전에 비하면 20%나 늘어난 수치다.이는 외국건설업체가 저임노동력을 무기로 독일업체의 하청업체로 진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에 빚어졌다. 독일이 요구하는 자격증을 갖춘 외국인 기능공의 임금은 영국인이 시간당 15마르크(약 8천원)를 받는데 이는 독일노동자 임금의 3분의 2가 못된다.주로 하청업체로 진출한 포르투갈 회사에 고용된 포르투갈 노동자는 영국인의 절반 수준인 7마르크쯤 받는다. 때문에 하청업체를 이용하기에는 규모가 작고 그렇다고 「틈새시장」에 숨어들기에는 덩치가 좀 큰 중소기업들의 도산행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이 문제의 해결은 곧 기업도산 및 실업증가,그리고 특유의 외국인 혐오증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독일은 이 문제를 취업당일부터 독일 임금기준을 적용함으로써 해결한다는 입장이다.이는 EU국가 노동자를 채용한 건설업체에게 현지임금 적용을 의무화한 EU의결 사항과 프랑스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인력수출국들은 법적용시기를 외국근로자들의 체류 4∼6개월 이후로 미뤄야 한다고 강력히 맞서고 있는데다 다음달 29일로 예정된 29차 유럽사회장관회의에서 적용시기를 취업 한달 뒤로 정한 유럽집행위의 타협안이 논의될 예정이어서 독일은 절망반 희망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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