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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밀서 보도의 충격(대한매일 秘史:11)

    ◎이토 “밀서는 가짜” 억지주장/로이터통신 타고온 스토리기사/韓·中·日 신문들 뒤늦게 게재/대한매일 증거사진 싣자/통감부 ‘오보’ 정정요구 탄압 스토리가 중국에서 타전한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내용의 고종의 밀서가 런던의 일간지 ‘트리뷴’에 실리자 주영 일본 대사관은 스토리의 기사가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즉각적으로 부인하였다. 고종이 조약에 날인하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외교관례라는 주장이었다.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을 체결할 때에도 영국의 에드워드왕이나 일본의 천황이 직접 날인하지 않고 양국의 대표자들이 서명한 것을 보더라도 한국과 일본의 대표가 서명한 을사조약은 외교적인 관례에 따른 것임을 증명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 한국 정부가 외국에 주재하고 있던 공사와 영사를 모두 철수시킨 것은 황제가 이 조약에 동의했음을 뜻한다는 억지 주장도 폈다. 일본이 애써 부인하였지만 ‘트리뷴’지에 실린 고종의 밀서는 로이터통신을 타고 거꾸로 동양으로 되돌아와 한국,일본,중국의 신문들에 다시 실렸다. 서울에서는 대한매일과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1907년 2월28일자 논설란에 트리뷴의 기사를 보도했고,헐버트가 발행하는 영문 잡지 ‘코리아 리뷰’도 일본에서 발행된 신문을 인용하여 한국 황제가 을사조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되자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한 장본인이었고,한국에 통감으로 와있던 이등박문도 팔장을 끼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일단 고종의 밀서가 가짜라고 단언했다. 이등박문은 밀서에 대해 고종에게 자신이 직접 물어보았는데,황제는 즉석에서 부인하더라고 말하면서 이 문서가 아마 궁중 근처에서 나오기는 했겠지만 고종이 수교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등방문으로서는 자신이 이러한 변명을 해야 하는 사실 자체가 몹시 곤혹스러웠다. 을사조약은 결코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체결된 것이 아니고,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근거가 흔들렸던 것이다. 그런 논란이 1년 가까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는데 대한매일이 고종의 밀서를 사진판으로 실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한국의 독자들이 이러한 논쟁을 기사를 통해서 겨우 알 수 있었는데 대한매일은 고종의 밀서를 한 페이지의 좌우를 가로지르는 큰 사진판으로 실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미친 충격도 컸던 것이다. 당시의 신문은 사진을 거의 싣지 않는 때였다. 통감부는 하는 수 없이 한국 정부 외사국장(外事局長) 이건춘(李建春)을 시켜서 고종의 밀서 사진은 사실무근이니 이를 정정하라고 요구하는 공문을 대한매일에 보냈다. 그러나 대한매일은 밀서가 진짜라는 주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대한매일은 밀서가 거짓이 아님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으나 그 증거를 제시하면 관련된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보복이 떨어질 것이므로 이를 내놓을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이건춘의 명의로 온 기사 정정 요구를 일소에 부치고 묵살했다. 그러나 통감부로서는 대한매일을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고종의 밀서 사건은 이와같이 1년에 걸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영국을 비롯하여 한국과 일본의 신문과 통신에 실리면서 이등박문의 입장을 난처하게만들었다. 일본은 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 대한매일에 대한 근본적인 방안을 더욱 적극적으로 강구하였다. 일본의 대응방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하나는 대한매일에 더욱 강력한 탄압을 가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대한매일의 논조를 무력화하고 마침내는 폐간시키려는 작전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통감부는 친일적인 한국어 신문을 지원하면서 하지(Hodge)라는 영국인이 발행하던 서울 프레스를 매수하여 통감부의 기관지를 만들어 대외홍보를 강화하였다.
  • 고종밀서 보도의 충격:1(대한매일 秘史:10)

    ◎“日 내정간섭은 불법” 英紙기사 게재/1907년 1월16일字에… 심각한 정치문제 비화/한반도 日 진출 반대… 한국의 중립화 보장요구/고종측근 바지속에 밀서 숨겨 英 기자에 전달 1907년 1월16일자 대한매일에 실린 「고종의 밀서」는 통감 이등박문을 놀라게 하였고 심각한 정치문제로 비화되었다. 이 밀서는 고종이 영국 「트리뷴(Tribune)」지 기자 더글러스 스토리(Douglas Story)에게 수교했던 것으로 여섯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요지는 고종이 을사보호조약에 조인하거나 동의하지 않았다는 조항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고종은 세계 열강이 한국을 집단 보호 통치(신탁 통치)하되 그 기간을 5년이 넘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한매일 밀서 실물사진 실어 일본의 독점적인 한반도 진출을 반대하고,한국의 중립화를 열강이 공동으로 보장해 달라는 종래부터의 외교방침을 밝힌 내용이었다. 밀서는 1906년 1월29일 날짜로 되어 있었다. 밀서는 1년동안이나 한국,영국,일본 그리고 중국 등지에서 발행되는 신문에까지 보도되었을 정도로 장기간 동안 공개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킨 끝에 대한매일이 그 실물 사진을 게재한 것이다. 고종의 밀서가 사진판으로 보도되자 일본에 대한 국내의 여론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정책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일본은 한일 양국의 합의하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고 주장해 왔는데 고종이 이를 전적으로 부인한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고종의 밀서가 전달되고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킨 경위는 이렇다. 고종의 밀서를 받아 가지고 중국을 거쳐 영국으로 갔던 더글러스 스토리 기자는 10여 년을 홍콩과 북경에 사는 동안 종군기자 또는 특파원으로 근무한 경력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는 1903년에는 홍콩에서 창간된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South China Morning Post)지의 부편집장을 지냈고,러일전쟁에 관한 책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북경에서 상해를 거쳐 일본으로 갔다가 1906년 초에 한국에 왔다. 북경에서 상해로 오는 동안은 한국정부의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브라운(McLevry Brown)과 동행이었고,일본의 요꼬하마에서는 주한 미국공사였던 모건(Edwin V.Morgan)을 만나 을사보호조약 체결 전말을 들었다. 또 고베에서는 통감부 총무장관으로 새로 임명되어 한국으로 부임하고 있던 쓰루하라(鶴原定吉) 일행과 동행이 되어 한국에 왔다. 그는 이와 같이 당시 한국 정세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두루 접촉한 다음에 서울에서는 고종과 만날 수 있는 길을 트게 되었다. 고종은 이미 일본의 스파이들에게 포로가 된 신세나 마찬가지였다. 궁중에는 고종을 감시하는 일본측 정탐꾼들이 들끓고 있었으므로 고종과 스토리 사이에 연락을 맡았던 고종의 측근들은 한복 바지가랭이 속에다 편지를 감추어 가지고 나와서 스토리에게 전달했다. 스토리가 마침내 고종의 붉은 옥쇄가 찍힌 밀서를 전달받은 방법은 이렇게 은밀하고 힘들었다. 스토리는 일본군의 경계망을 뚫고 서울을 빠져나와 제물포에서 노르웨이 선적의 배를 타고 가까스로 중국 지푸(芝)까지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지푸에닿은 것은 2월7일. 스토리는 우선 고종의 밀서 내용과 함께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제 체결되었으나 고종의 승인을 받은 바 없다는 요지의 기사를 런던의 트리뷴에 송고했다. ○한국 정치상황도 함께 소개 트리뷴은 스토리 기자가 타전한 기사를 2월8일자 3면 머리에 실었다. ‘한국의 호소,트리뷴지에 보낸 황제의 성명서,일본의 강요,열강국의 간섭 요청’이라는 제목이었다. “한국의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다. 일본군은 궁중을 둘러싸고 있으며 궁중에는 스파이들이 가득차 있다. 을사조약은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라는 리드로 시작하여 을사조약 체결의 경위와 한국의 정치 실정을 소개한 다음에 고종이 스토리에게 준 밀서 6개항을 영문으로 번역,게재했다.
  • 시일야방성대곡 전재(대한매일 秘史:8)

    ◎‘시일야…’ 영문 번역 호외 발행/을사조약 전말도 폭로… 日 침략 서방에 알려/황성·제국신문 정간 횡포/일제 언론 탄압 날로 기승/장지연 구속·신문과정 보도/대한매일 항일 강도 더해 한국주차 일본군 사령관 하라구치(原口兼濟)가 ‘군사경찰훈령’을 공포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1904년 7월20일에 공포된 이 ‘훈령’은 “집회나 신문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할 때에는 그 정지를 명하고 관계자를 처벌”함은 물론 “신문은 발행 전에 미리 군사령부의 검열을 받게 하도록”(제2항) 하였다.8월20일에는 황성신문과 뎨국신문의 대표를 불러 검열을 통보하였고,10월9일에는 ‘군정시행에 관한 내훈(內訓)’을 시달하여 집회 신문 잡지 광고 등이 치안을 방해한다고 인정될 때에는 이를 해산·정지 또는 금지시킬 수 있도록 했다.바로 이튿날인 10월10일 헌병사령부는 뎨국신문에 무기정간 명령을 내렸다.이는 한국언론사상 처음 내려진 강제 정간이었고,일본군이 한국 신문에 정간을 명령한 첫 탄압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1월8일에는 한국주둔 사령관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고시군령(告示軍令)’19개항을 공포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집회 결사 신문 잡지 광고 등 언론에 관한 규제를 강력하게 실시하도록 돼있었다.또한 군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사형 구금 추방 과료(過料) 또는 태형에 처하도록 하는 엄격한 벌칙이 마련되어 있었다. 장지연은 이와같이 엄중한 일본의 군령을 어기고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한 황성신문을 검열받지 않은 채 아침 일찍 배포한 다음에 일본 순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아침 5시가 되자 일본 순시(巡視)와 순사가 신문사로 와서 장지연을 체포하고 신문은 정간시켰다.따라서 이제 그에 대한 후속기사는 대한매일신보가 알리게 되었다. 대한매일은 11월21일자 1면 머리에 ‘황성의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싣고 장지연의 용기를 극찬하였다.“실로 대한 전국 사회신민의 대표가 되어 광명정직한 의리를 세계에 발현(發顯)하리로다.오호라 황성기자의 붓은 가히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빛을 서로 다투리로다.”고 찬양했다.같은 날짜에 ‘사장피착(社長被捉)’이라는 기사를 실어 장지연의 구속과 황성신문의 정간 사실을 보도하였다. 22일자에 실린 논설 ‘위재한일관계(危哉韓日關係)’는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한국의 국권을 탈취하고 가옥과 토지를 강탈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인명을 참살하고 재정을 고갈케 하며 학무를 감축하여 교육이 날로 쇠퇴하도록 만든다고 비판하였다.을사조약의 체결도 황제를 비롯,정부관리들과 국민이 모두 반대하자 일본은 병사를 궁궐에 끌고 들어와서 이의 체결을 강요하였다고 논평했다.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인구가 2천만인데 2천만이 모두 이에 복종하지 않으면 군대를 가지고 국민을 모두 도륙할 것인가.이날부터 대한매일은 정간 당한 황성신문에 실렸던 「오건조약 청체전말」을 3회에 걸쳐 다시 전재했다. 23일자에는 장지연이 경무청에 구속된 후 일인 경무고문의 심문에 의연히 맞서서 항변한 내용을 게재하였다.일인 경무고문이 “무슨 이유로 검열을 받지 않고 멋대로 신문을 배포하여 치안을 방해하였는가.”라고 심문하니 장지연은 “이른바 치안방해는 내가 알 바 아니다.대저 나라가 있은후에야 치안 여부가 있는 것인데 지금 나라가 없으니 치안을 논할 수 있겠는가.내가 붓을 잡은지 7∼8년에 세상의 공론을 주장하다가 오늘 국가가 없어지게 된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린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이에 경무고문이 할 말을 잃었다고 보도했다.(1905.11.23,‘사장항변’) 대한매일은 25일자 논설 ‘황성긍린(皇城矜隣)’에서도 정간 당한 황성신문을 속간시키라고 촉구하였고,26일자에는 장지연은 무죄인데도 법률을 어겨가며 구류 중이라고 경무청을 비난했다.법률에 따르면 장지연을 24시간 이내에 평리원이나 한성재판소로 이송하도록 되어있는 데도 이와같이 여러날 동안 가두어 두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905.11.26,‘시하율법(是何法律)’,또 1906.1.12,‘탄(歎 ),황성구폐(皇城久閉)’에서도 황성신문의 복간을 촉구했다.) 대한매일의 반일 논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날카롭고 강도를 더해갔다.11월27일자에 순한문과 영문으로 된 호외를 발행하여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였다.이 호외는 한쪽 면에는 한문으로 ‘한일신조약청체전말(韓日新條約請締顚末)’을,다른 한 면은 영문으로 ‘시일야방성대곡’을 번역하고 이등박문의 강요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전말도 실었다. 이렇게되자 일본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던 재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가 영문으로 번역한 시일야방성대곡 전문을 게재,일본의 한국침략 사실을 일본에 거주하는 서양사람들과 서방 여러나라에 알렸다.
  • 배설의 상해 복역(대한매일 秘史:6)

    ◎더위·모기떼 시달리며 3주간 혹독한 옥고 치러/판사 “한국민 선동” 판결.英 군함으로 상해 이소/한국인들 연일 몰려오자 형무소 면회 아예 금지/영어 공판기록 번역 대한매일 한달반 연재 4일째인 6월18일(1908년) 판사 보온은 배설에게 3주일간의 금고(禁錮)형을 선고했다.또한 복역 후 6개월간 근신을 서약해야 하며 350파운드의 보증금(피고 200파운드,보증인 150파운드) 납부를 판결했다.판사는 문제된 논설 3건은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항한 봉기를 선동한 것이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단정했다.그러므로 앞으로 계속 반란을 선동한다면 추방령을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판결 결과가 알려지자 재판정 밖의 많은 한국인들은 실망하고 격분했다.어떤 사람은 돈 4천환을 가지고 와서 배설의 금고형을 돈으로 대신 면제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놓겠다고 말했고,변호인 크로스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를 제의하는 사람도 있었다.주일 영국대사 맥도날드는 한국인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는 배설의 처벌로 그들의 감정이 악화될 것을 우려,서울의 영국 총영사관이 습격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미국의 한국교포들이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을 보더라도 그런 위험성은 충분히 있다고 보고 영국 총영사관 부근에 경찰관을 순회시키는 등의 예방조치를 취해달라는 편지를 일본측에 보냈다. 배설을 어디에 수감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해결해야할 문제였다.서울에는 영국인을 구금할 수 있는 형무소 시설이 없었다.편법으로 호텔이나 집을 세내어서 감금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 당국이 불만을 제기할 것이다.그렇다고 일본인 관할 하의 형무소에서 복역케 한다면 영국이 배설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인상을 주게 될 것이었다.마지막으로는 배설을 상해로 호송,그곳의 형무소에서 복역케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었다.그러나 배설을 어떻게 상해까지 보내느냐 하는 것이 난관이었다.당시 인천­상해간 정기 배편이 없고 일본을 경유하도록 되어 있었다.그러나 배설이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가는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일본의 사법권 관할하에 놓이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코번은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배설을 인천에서 상해로 직접 싣고 갈수 있도록 요코하마에 정박중인 영국 군함을 보내달라고 본국 정부에 건의했다.외무성은 이를 받아들여 요코하마에 있던 영국 군함 클리오(Clio)호를 단 한 사람의 죄인 배설을 상해로 호송하기 위해 급히 인천으로 파견했다.배설에게는 6월18일 오후에 금고형을 언도하였으나 상해로 싣고 갈 군함이 올때까지 일단 석방,이틀 뒤인 6월20일에 출두하도록 명령하였다.이에 따라 배설은 20일 오후 4시 총영사관에 출두,곧장 서울역으로 가서 5시20분 발 인천행 기차를 타라는 지시를 받았다.배설이 서울역을 떠난다는 소문이 퍼지면 많은 군중들이 서울역에 몰려올 것이고 그러면 소란이 일어날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상해로 가는 낡은 군함을 탄 이후부터 배설의 고생은 시작되었다.배 안의 생활은 이미 복역 기간이었다.더욱이 상해 형무소에 들어간 후에는 밤이면 더위와 모기에 시달리느라 잠을 잘 수 없었다.팔다리를 격렬하에 휘저어대며 방안을 거니는 것으로 겨우 모기떼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배설은 자신을 「온정적으로 처리」한다면서 상해로 이송,복역하도록 결정한 판사가 원망스러웠다.판사가 감옥의 혹독한 상황을 직접 겪어보기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고 출옥 후 일본의 영국인 발행 영어신문 재팬 크로니클에 실은 옥중기에서 밝혔다. 배설의 상해도착 소식을 들은 상해거주 한국인들은 연일 면회를 왔다.형무소 당국은 면회를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재소자들의 면회마저 금지시켰다.감옥의 3주간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한없이 느리게 갔다.그가 출옥한 날은 7월11일이었다. 한편 서울의 대한매일은 국한문판과 한글판에 배설이 상해로 떠나던 바로 그날인 6월20일부터 공판의 상세한 내용을 연재하기 시작,무려 한 달 반이 넘도록 연재되어 배설이 돌아온 뒤인 8월7일까지 실렸다.영어로 진행된 공판 내용을 번역하여 거의 완벽하게 게재하였다.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일본이 한국을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피고의 주장과 변호인 크로스의 변론,증인들의 증언 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 사장 배설의 재판(대한매일 秘史:5)

    ◎변호사·검사 ‘무죄’·‘처벌’ 뜨거운 설전/증인들 “반일감정·의병봉기 일본침략때문” 증언 1908년 6월16일 열린 이틀째 공판에는 배설과 양기탁이 출두하였다.오전에는 배설에 대한 검사와 변호인 신문이 있었고,오후에는 양기탁이 나왔다.그밖에 피고 측에서 신청한 한국인 증인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재판정에 나타나기를 두려워했고 겨우 출두한 증인도 자유로이 증언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인 재판장이나 검사,변호사도 증인들의 이같은 사정은 모두 알고 있었다.재판장은 증인들이 후환을 두려워할 것 같은 질문은 삼가라고 검사에게 주의까지 할 정도였다.그런데도 증인들은 한결같이 반일감정과 의병봉기는 대한매일신보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한국 침략과 탄압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증언하면서 일본경찰의 고문 사실까지 폭로하였다.재판정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도 기지(機智)에 넘치는 질문과 답변이 나올 때면 청중들은 때로는 조소를,때로는 공감의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의병장 출두 소문에 방청객 몰려 3일째 재판은 6월17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다.증인으로는 의병장 민종식(閔宗植)과 궁내부 전무과 기사 김철영이 출석했다.의병장 출두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지 재판정 바깥에는 전날 보다 더 많은 한국인 방청객이 몰려들었다.어제처럼 극소수만이 법정 안에 들어왔고,대다수는 법정 문밖에 몰려 서서 재판을 지켜보았다. 귀족 출신으로 신수가 좋은 민종식은 갓쓰고 도포 입은 한복 차림으로 증언대에 섰다.그는 을사조약에 반대,1906년 3월17일 34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충남 정산(定山)에서 홍주로 진격했으나 일본 헌병대의 기습으로 일단 피신했다.5월14일 다시 봉기,19일에는 의병 250명을 지휘하여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했다.그러나 그의 휘하 의병이 500여명으로 늘어나자 일본군이 출동,30일 치열한 격전 끝에 일본군에 함락되었다.의병 82명이 전사하고 145명이 포로가 되는 큰 전투였다.민종식은 그해 11월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감형되어 전남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변호사는 민종식에게 왜 항일 의병의 주동인물이 되었는지를 물었다.의병활동과 대한매일과는 관련이 없음을 밝히기 위해서였다.민종식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황실의 위엄과 정부의 권리가 박탈당하고 있으므로 일인을 축출하고 빼앗긴 본국의 독립권을 회복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일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의병을 일으켰다고 대답했다.의병을 일으킨 것은 일본을 반대한 것이지 대한제국에 반대한 것은 아니라 함을 명확히 밝힌 것이다. 이어서 김철영(金澈榮)이 증인으로 나왔다.그는 1887년 조선전보총국의 위원으로 임명된 후 공무아문 주사,통신원 체신과장 등을 역임하면서 구한국 체신업무를 개척한 사람의 하나였다.그는 궁중과 의병들의 연락을 취해주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진도로 유배되었다고 증언했다. 또 하나의 증인으로 채택된 심우택(沈雨澤)은 피신해 끝내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그도 전무과 기사였는데 고종이 배설에게 하사한 신문사 운영경비를 전달하였다는 혐의로 김철영과 함께 체포되어 고문당했다.그는 배설에게 고종의 양위사실 등 궁중 동정을 알려준 혐의로 체포,진도로 귀양 경험이 있었다.심우택의 심문조서를 보면 고종은 손탁호텔을 경영하던 손탁의 권유로 매월 1천원 정도씩 대한매일에 운영자금을 대주었으나 주변의 감시가 심해서 전달이 어려웠다고 진술했었다. 그밖에도 김택훈(金澤薰:학생),김두해(金斗海:한문교사),김창한(金彰翰:전직 순검) 등 세사람이 차례로 나와서 자신들은 대한매일을 구독하고 있지만 폭동을 선동하는 내용은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이로써 증언은 모두 종결되었다. ○증인들 한결같이 ‘대한매일 무죄’ 주장 변호인 크로스는 의병봉기 책임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일본이 한국인을 학대하고 침략했기 때문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고 있는 것이며 대한매일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따라서 배설에게는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고 변론했다.그러나 검사는 배설에게 무죄를 선언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한국은 현재 치안이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는데 이는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므로 비록 “가혹한 것은 사실이지만” 배설은 처벌을 면할 수는 없다고 논고했다.이로써 3일간에 걸친 재판 절차는 모두 끝이 났다.
  • 상원 법사위 피노체트 면책특권 불인정 판결

    ◎英 블레어 ‘윤리외교’ 승리/아민 등 前 독재자 응징 움직임 활기띨듯/미국·칠레와 외교적 마찰 해결 과제로 토니 블레어 총리의 ‘윤리외교’가 마침내 승리했다. 영국 상원 법사위 5인 재판관은 25일 하오 2시(현지 시간) 칠레의 전 독재자 피노체트에 대한 상고심에서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엎고 피노체트에게 혹독한 재판과 감옥이 기다리고 있는 ‘스페인행’을 명령한 것이다. 영국은 국익을 우선하는 기존의 국제외교 관례를 탈피,‘인권외교’를 실행함으로써 외교사의 한 획을 그었다. 이날 83번째 생일을 맞은 노회한 독재자 피노체트는 평소‘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추겨세운 영국으로부터 쓰디 쓴 배신의 선물을 받은 셈이다. 지난달 28일 고등법원의 면책특권 인정 판결에 이은 검찰의 항고로 최종심의를 맡은 상원 5인 재판부가 그에게 우호적인 보수당 소속의 종신 귀족들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이번 결정은 영국인들로서도 이례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영국 정부는 칠레와 미국의 외교적 마찰을 해결해야할 과제를 안게됐다. 국내 보수파의 비판도 거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결정으로 재임중 30만명을 학살한 우간다의 이디 아민을 비롯,아이티의 장 클로드 듀바리에와 라울 세드라스 등 현재 세계 도처에 은신해 있는 전 독재자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응징 움직임이 한층 활기를 띨 전망이다. 영국 정부가 그를 체포한 것은 지난달 16일. 스페인 법원의 요청으로 잡아 들인뒤 지난 6주동안 국제사회는 전 독재자의 말로가 어떻게 전개될 지에 온 관심을 모았다. 최대의 관심사는 반 인류범죄가 국익 위주의 외교전통에서 과연 단죄될 수 있을 지 여부였다.
  • 英 상원,블레어 개혁 ‘발목’/유럽의회의원 선거법 또 부결

    ◎세습귀족들 자신들 입지 흔들/39차례에 걸쳐 ‘조직적 반란’ 영국 정가가 홍역을 치르고 있다. 제3의 길을 주창하는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에 보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원이 계획적으로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세습 귀족이 대다수인 영국 상원은 회기만료를 며칠 남기지 않은 지난 18일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의 유럽의회 의원 선거법 개정안을 부결했다. 5번째 거부다. 국민들이 뽑은 하원 우위의 원칙이 지배하는 영국 의회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일. 상원은 이번 회기에서 이 안 말고도 교육세 인상안 등에서 39차례나 부결시켜 블레어의 개혁 의지에 일격을 가했다. 영국인들은 아무런 노력없이 작위와 재산,정치권력을 물려받은 세습 귀족과 국민들을 대표하는 하원의 대결이야말로 현대판 계급전쟁이 아니냐며 사건의 추이를 주시하고 있다. 상원의 ‘조직적 반란’은 블레어 정부가 ‘상원개혁법’을 고삐를 늦추지 않고 추진,오는 12월 상정하려는 때문이다. 블레어의 개혁 칼날에 그대로 앉아서 목을 내놓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개혁법의골자는 상원의원 1,140명 가운데 세습 귀족의원 633명을 퇴진시키고 종신 귀족 중심으로 운영하자는 것이다. 제동이 걸린 유럽의회 선거법 개정안은 내년 6월 실시될 유럽의회 선거에서 후보자 없이 정당만 선택하도록 하는 정당별 비례 대표제 도입이 주내용이다. 여론은 토니 블레어편. 언론들은 지난 1세기동안 세습 귀족들은 자신들의 입지가 위태로울 때마다 거부권을 행사해온 작태의 하나라고 비난했다. ‘멸종을 앞둔 공룡의 마지막 한숨’,‘자살골을 차기전 축구선수의 결의에 찬 모습’ 등으로 상원을 비꼬았다.
  • 大英박물관/전문인력 300명… 자율경영 보장(외국의 공무원들은)

    ◎고부가 무공해 산업/경제자원화 큰 성과/꾸준한 투자마인드/경제위기 탈출 초석 박물관은 국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외화도 버는 일석이조의 고부가가치 무공해 산업이다.대영박물관은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될 것이다. 세계 유수의 박물관으로 꼽히는 대영박물관은 영국인의 문화적 긍지와 자존심의 상징으로 학술과 교육·연구의 중심지이며,세계적인 관광명소이다. 이곳에는 한해에 600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간다.한해 50여건의 각종 특별전시와 130건의 국내외 대여전시,50여건의 강연 및 세미나 등 다양한 사회교육활동이 이루어진다.여기서 이루어진 학술조사의 결과는 한해 50여권의 책으로 나오고 있다. 대영박물관이 이렇게 성공적일 수 있는 것은 박물관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와 충분한 전문인력의 확보,예산의 투자에 크게 힘입었다. 영국은 1970년대 중반 IMF 경제위기를 겪으며 일찍이 책임경영 행정기관제도(Agency)를 폭넓게 정부조직에 도입한 나라다.그러나 대영박물관은 그 특수성을 감안해 ‘대영박물관법’에 의해 별도로관리하고 있다.이 법은 이사회를 범사회적인 인물로 구성하고 박물관장은 이사회에서 선출하여 총리가 임명토록 하고,이사회가 박물관 운영의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대영박물관에는 10개 학예연구 부서에 전문가만 300명이 넘는다.특히 도자기와 회화,목기,금속기,유리,벽화,직물 등 재질에 따라 5∼6명씩 모두 100여명의 보존처리 전문가를 확보하고 있다. 분야별로 필요한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들을 실효성있게 관계부서에 배치하는 것은 대영박물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케임브리지셔 지방정부의 문화재 보호 관리를 위한 조직의 50% 이상은 전문가로 충원하고 있다. 또 기초 지방자치단체도 전문직원들로 하여금 관할구역의 문화유적지도를 만들도록 하고,그 정보를 토대로 개발허가 과정에서 문화유적의 보호를 위한 사전조치를 취하게 한다. 문화유산을 관광자원화하여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성공 뒤에는 이와 같이 문화 유산보호를 위한 인력운용과 투자가 있었던 셈이다. 영국 정부의 박물관과 문화유산에 대한 투자는 호황기뿐 아니라 1970년대 IMF 경제위기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도 지속적이고 실제적인 투자를 통해 문화산업자원 및 관광산업자원으로 박물관을 육성하여 경제자원화하고 많은 외화를 벌며 경제위기를 탈출한 영국의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 대한매일 재탄생은 경사/朴維徹 독립기념관 관장(특별기고)

    ◎우국지사 눈과 입 역할 의병활동 유일하게 고무/사회통합·번영·통일先導 국민사랑 받는 신문 되길 서울신문이 한말 민족언론의 정화(精華)‘대한매일신보’의 이름을 이어받아 ‘대한매일’로 새롭게 태어났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앞의 등불 같았던 1904년,러일전쟁의 소용돌이가 우리 강토를 휘몰아치던 그때,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언론검열을 뚫고 진실보도와 민족적 정론으로 다가오는 위기를 경고하고,국민의 애국심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국권회복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앞에 참언론으로서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그 신문의 총무로서 실질적인 발행인이었던 양기탁 선생과,주필로서 필봉을 휘두르던 박은식 선생이 필자의 처조부와 조부가 되는 까닭에 대한매일의 부활은 그분들의 부활을 보는 것같아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눈 감고 그분들의 환희를 생각해 본다. 그분들의 그토록 비참했던 생애와 희생이 헛됨이 아니었다는 외침을 느낀다.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된 시기는 일본이 러일전쟁 도발후 우리나라에 ‘한일의정서’를 강요,자국군대를우리 강토에 무단 진주시킬 때였다. 경향 각지에서 이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이 일어났고,일제는 우리 민간언론을 검열,통제하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베델(裵說)을 발행인으로 했으나,실제적인 운영은 양기탁,박은식,신채호,장도빈 선생 등이 맡았다. 또한 국한문,한글전용,영문의 3종류로 발행한,90년전 한문을 해독하지 못하는 백성을 고려한 ‘민중신문’이었으며 세계를 염두에 둔 ‘국제신문’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의병(義兵)을 ‘의병’이라 하지 못하고 비도(匪徒)나 폭도(暴徒)라고 하도록 강요당하였는데도 대한매일신보만은 이를 ‘의병’으로 당당히 표현하고 그 활동을 고무한 유일한 신문으로 우국지사들에게 눈과 귀와 입의 역할을 다했다. 일제 통감부는 수없는 협박과 회유를 가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았다. 참언론의 정신이 찬란히 빛을 발하였던 것이다.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과 더불어 서울신문시대를 끝내고 88년간 권력에 짓눌려 그 이름조차 죽어 있었던 대한매일의 부활을 보게됨은 우리 언론사의 경사일 뿐 아니라,우리 정신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벌써 찾았어야 할 자랑스러운 뿌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1998년은 양기탁선생의 해인 듯하다. 선생은 1938년 중국 강소성의 아주 낙후된 외지에서 일생을 마치셨다. 필자가 유해를 찾기 위해 그곳을 찾았을 때의 느낌은 “이분이 어떻게 이런 오지에 무슨 인연으로 오셨는가”하는 의아함이었다. 마치 말년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외로운 슬픔을 안고 찾았던 곳으로 느껴졌다. 10년 가까이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매립된 연못 속에서 유해를 찾아 금년 4월초 봉환,옛동지들이 영면하고 계신 동작동 현충원에 모셨다. 또 오늘의 대한매일 재탄생을 맞이하니 비록 저승에 계시지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으시리라 믿는다. 선생께서는 다시 태어나는 대한매일이 민족적이면서 국제적이고,선도적이면서 민주적이며,어떠한 압력에도 굴함이 없이 ‘사실’과 ‘정론’으로서 사회통합과 번영,민족통일과 세계속의 한국으로의 길을 밝히는 사명을 다하는,국민의 사랑을 받는 신문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후손들도 떨리는 두 손을 모아 무한한 발전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사장 裵說의 재판:2(대한매일 秘史:2)

    ◎日측 “대한매일이 의병봉기 선동” 주장/張仁煥 의사 의거 찬양 등 항일사설 3건 증거로 내놓아/“한국사태 왜 日서 문제삼나”/英 변호인 추궁에 원고 우물쭈물/초만원 방청객들 야유 폭소 재판은 3일 동안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 한국인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국민의 소리를 대변하는 민족지를 영국의 법정은 어떻게 판결할 것인가. 피고는 대한매일의 사장 배설이라는 영국인이지만 진정한 피고는 배설이 아니라 민족언론 대한매일신보였다. 배설이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대한매일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법정은 만원을 이루었다. 방청석에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복도와 재판정 바깥까지 모여서 재판을 지켜보았다. ○법정 복도·바깥서도 지켜봐 재판이 시작되자 일본 통감부와 변호인 사이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의 근본 원인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다. 검사 윌킨슨이 고소인 미우라를 먼저 신문하기 시작했다. 통감부의 제2인자로 이등박문을 대리하여 법정에 나온 미우라(三浦彌五郞)는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게 된 원인은 대한매일의 선동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대한매일이 소요와 무질서를 조장하고 한국 정부와 국민 사이에 적대감을 조장시키는 기사를 게재하였기 때문에 의병들이 궐기하여 전국의 치안이 불안하고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변호인 크로스는 의병의 봉기는 대한매일 때문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정책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을 들어 재판의 성격을 한국의 특수한 정치적인 상황에서 부각시키려 했다. 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한국은 독립국가다. 의병의 궐기는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것이다. 미우라,당신은 일본 관리인가? 한국 관리인가? 일본 관리라면서 왜 한국에서 일어나는 소요를 문제삼아 일본 통감부의 대표로 나서서 영국인 배설을 고소하는가.” 미우라가 궁색한 논리로 대답을 얼버무리자 방성석에서는 야유하는 폭소가 터졌다. ○英·日 외교협상끝에 재판 열려 재판장은 변호사에게 정치상의 의견은 묻지 말고 사실에 관해서만 국한해서 물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영국과 일본 사이에밀고 당기는 길고도 끈질긴 외교협상 끝에 이루어진 재판이었으므로 재판장은 변호사가 재판을 정치적으로 끌고가는 것을 막으려했던 것이다. 통감부가 배설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증거물로 제시한 대한매일의 논설은 3건이었다.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 암살을 찬양한 1908년 4월17일자 기사를 비롯하여 「일백 매특날(메테르니히)이가 능히 이태리를 압제치 못함」(1908.4.29)과 「학계의 꽃」(5.16)이라는 논설이었다. 통감부의 입장에서는 대한매일의 모든 지면이 항일적인 내용으로 가득 찼지만 구체적인 증거물로 3건을 제시한 것이다. ○美 교포신문에 처음 실려 문제가 된 4월17일자 대한매일의 기사는 친일외교 고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張仁煥)이 쏜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을 다룬 내용이었다.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는 1904년 12월27일 한제국의 외교고문으로 임명되었던 미국인이다. 그는 1882년부터 일본 정부를 위해 일했고 일본 정부의 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을 정도로 친일적인 인물이었다. 일본은 그를 내세워 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외교상의 중요 사항을 일본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스티븐스는 한국의 외교고문이라는 직책으로 한국 정부가 주는 고액의 월급을 받으면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스티븐스의 암살 기사는 원래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발행인 鄭在寬) 3월25일자에 실린 것이었다. 공립신보는 교포들의 조직인 한인공동회(共同會)에서 발행하는 신문이었다. 공립신보는 ‘한국의 공적(公敵)’인 스티븐스를 쏘아 죽인 두 애국지사 장인환과 전명운을 찬양하면서 체포된 두 사람의 변호를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대한매일이 장,전 양 의사의 의거를 찬양하는 기사를 싣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고 사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주한 영국 공사 헨리 코번(Henry Cockburn)은 이때의 상황을 영국 외무성에 보고하면서 “한국인들은 집권세력도 그들에게 불명예스러운 발행물을 금지시키거나 저지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고 있으며 이 기사를 읽고 통쾌감을 느끼고 있다.”고 평가했다. 여기서 코번이 지적한 ‘집권세력’은 통감부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의 스티븐스 암살이 국제적으로 주목을 끌 수 있는 사건이며,그들의 재판을 기회로 일본 침략하의 한국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가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는 것이다. 대한매일은 두 애국지사의 재판을 기회로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세계만국에 널리 알리자고 역설했다. “오호라 한국 독립은 곧 오늘이요,한국의 자유는 오늘이니 우리의 큰 뜻을 이룰 날이라”면서 “이 재판은 우리의 독립재판이니 우리가 이 재판에 이겨야 우리 2천만의 독립이 될 것”이라고 외쳤다.
  • 대한매일의 성과와 과제 좌담회

    ◎구국언론의 혼 이어 국난극복 선도 기대/을사조약 고종 거부 보도·국채보상 주도/‘삼국공영’ 부당 지적… 자주적 사관 펼쳐/순한글판 발행… 국문학·여성계몽 큰 기여/관제 구각 깨고 민족지 위상 되찾아야/권력·자본에 예속된 언론 병폐 개혁주도를/‘벌떼 언론’ 악습벗고 냉철한 시각 가져야 □토론자 金泰昊 서울대 정치학과 석사과정 高濟奎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金旻貞 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대한매일신보사는 11일 재창간을 맞아 참신한 시각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언론사적 의의와 현대 한국언론의 문제점 등을 진단하고 새롭게 태어난 ‘대한매일’의 바람직한 언론상을 제시해보기 위해 한국정치와 언론학 등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3명을 초청,좌담회를 가졌다. ‘대한매일신보의 역사적 의의와 한국 언론비판’을 주제로 열린 좌담회에는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金泰昊씨(28)와 고려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高濟奎씨(26),한국외국어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과정 金旻貞씨(24)가 참석했다. ▲金旻貞=대한매일신보는 영국인 배설(裵說)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梁起鐸 등 우국지사들에 의해 1905년 창간된 뒤 1910년 폐간될 때까지 항일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발행인이 영국인이어서 통감부의 탄압이나 검열 없이 자유로운 논조를 펼칠 수 있었다. 대한매일신보의 주요 활동을 보면 일본대사가 요청한 을사보호조약에 대한 고종의 조약거부 기사와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철폐요구 기사 등을 실었으며 국채보상운동 당시 의연금 모집의 중심 역할을 하기도 했다. ▲高濟奎=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최고의 발행 부수를 기록하는 등 민의(民意)를 가장 폭넓게 반영했던 신문이었다. 가장 독자가 많았던 것은 대한매일신보가 독립신문과 황성신문에 비해 세계사의 흐름을 자주적인 시각에서 정확하게 파악해 전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시 독립신문 등은 ‘동양 삼국 공영론’과 ‘중립 외교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대한매일신보는 ‘동양 삼국 공영론’은 일본의 동양 침탈을 합리화하기 위한 구실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간파해 알렸다. 또 ‘중립외교론’보다는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힘을 키워야 한다는 ‘무비강병’(武備强兵) 등 자주적인 민족사관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일제가 통감부를 통해 대한매일신보를 몰래 사들인 뒤 ‘매일신보’로 제호를 바꿔 친일 기관지로 만든 것은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신문에 대한 직접적이며 가장 강력한 탄압 조치였다. 이를 통해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쉽게 집작해볼 수 있다. ▲金泰昊=독립신문에 비해 연구 사료가 거의 없어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한매일신보는 항일투쟁과 반제국주의 입장에서 자유언론을 펼친 민족 정론지였다. 朴殷植 申采浩 張道斌 등 애국지사 논객들이 총결집해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침략과 관료의 무능 등에 맞선 자유언론의 표상이었다. 특히 다양한 독차층의 요구를 수용해 영문판,한글판,국한문 혼용판 등 다양한 형태의 신문을 펴냈다. 순한글판을 발행하며 국문학 발전과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등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도 부응한 신문이었다. ▲高濟奎=신문의 제호를 바꾼 것은 상징적인 의미 이상이어야 한다. 서울신문이 본래의 뿌리를 찾아 대한매일로 제호를 바꾼 것은 해방후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관제 언론으로 왜곡된 서울신문의 폐단을 극복하고 대한매일신보가 보여줬던 민족지로서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金泰昊=오늘의 한국언론은 대부분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또 신문마다 특징이 없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거의 같다. 비판의 논조와 대상도 비슷하다. 대한매일이 재창간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또 특징있는 신문이 돼야 한다. 독자들에게 대한매일의 강직하고 신선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는 너나없이 한 목소리로 외쳐대는 특색없는 비판에서 벗어나 나름대로 독특한 색채를 지녀야 한다. ▲金旻貞=한마디로 한국 언론은 ‘벌떼’근성을 지녔다. 모든 신문들은 자기만의 사고나 판단없이 사회적으로 부각된 이슈에 벌떼처럼 달려든다. 그리고 다른 언론의 비판 수위와 강도 등을 살피며 자기의 시각이나 기사의 밸류 등을 판단한다. 거듭나는 대한매일은 이같은 기존 언론의 행태를 떨쳐버려야 한다. 아울러 과거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토대로 기존의 틀을 깨치고 대한매일만의 눈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판단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과거 정권에 예속돼 언론으로서의 제 구실을 못했던 구태를 과감히 떨쳐내야 한다. ▲高濟奎=언론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문제점을 지적해도 개선이 되지 안는다는 점이다. 한국 언론의 문제를 다시 한번 지적하면 권력과 언론의 유착 문제다. 당근과 채찍 논리로 볼때 정권이 건네는 ‘당근’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 또 재벌과의 문제로 기업이 언론을 소유하고 언론은 기업을 보호하는 유착관계가 문제의 핵심이다. 대한매일신보는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국권수호에 나섰던 신문인 만큼 시대의 중심이 돼야 한다.IMF 사태라는 시대적인 어려움,지역감정,통일 등 여러 문제를 푸는데 선봉이 돼야 한다. ▲金泰昊=언론에 대한 시민의 감시가 언론을 건강하게 만든다. 잘못된 정치의 문제는 곧 언론의 문제이며 잘못된 언론의문제는 곧 한국 시민사회의 문제다. 신문이 건강해지려면 시민운동이 더욱 건강해지고 질적 수준도 높아져야 한다. 일제 치하 대한매일신보가 독자들의 지지를 받은 것은 당시 시대에 부응하는 항일운동과 교육계몽운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새롭게 창간되는 대한매일은 이처럼 목표를 확실히 표방해야 한다. 또 과거의 전통을 이어 현재의 국난극복을 사시로 정해 놓고 이를 실현하하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한다. ▲金旻貞=한국언론은 소외된 계층의 목소리 보다는 지배계층의 목소리 만을 대변해왔다. 이로 인해 기사의 중립성과 공정성은 크게 결여됐다.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나 87년 6.10 민주화운동 당시 모든 신문이 그러했듯 거의 모든 기사가 강자의 편에서 작성됐다. 또 언론의 상업성은 위험수위를 넘어 큰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일부 신문들은 광고가 지면의 50%를 넘어 광고지인지 신문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다. 신문별 발행 부수도 공개되어야 한다. ▲高濟奎=사실 보도와 의견은 구분되어야 한다. 자사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왜곡,의견을펴는 신문이 많다. 모 신문의 이승복 사건과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인 崔章集 고려대교수(정치학과)에 대한 음해 보도 등 사회여론을 무시하고 자사의 이익에 따라 보도하는 행태을 많이 보았다. ▲金旻貞=10개의 중앙 일간지는 모두가 ‘우리는 국민의 여론을 반영한다’는 애매한 사시를 가지고 있는데 사시를 구체적화할 필요가 있다. 특정 정당이나 단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당파성을 가져도 무방하다고 본다. ▲高濟奎=신문사간 비판도 허용되어야 한다. 최근 신문사간 서로 공방이 오가는 것도 오히려 언론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金泰昊=신문사 마다 뚜렷한 개성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어 서로 비판을 못하는 것 같다. 한 사건에 대해 각 신문이 서로 다른 시각과 입장을 갖고 다룰 수 있어야 한다. ▲高濟奎=50년만의 여야 정권교체후 서울신문은 ‘민주 열사에 대한 재조명’ 등 신선한 내용을 게재하는 등 많은 변화를 보였다. 변화를 위해 여기저기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제 대한매일로 새롭게 뿌리를 찾은 만큼 흔들림 없는 굳건한 위상을 가져야 할 것이다. ▲金旻貞=과거에서 배우라는 말을 하고 싶다. 대한매일이 과거의 대한매일신보에서 배울 점은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갖는 것이다. 과거의 대한매일신보가 반제국주의와 항일 등 뚜렷한 역사의식을 지녔던 것처럼 과거의 전통을 계승해 새로운 역사 의식을 가져야 한다.
  • 사장 裵說의 재판:1(대한매일 秘史:1)

    ◎韓·英·日 이목 집중시킨 ‘역사 드라마’/피고 대한매일사장 배설·원고 통감 이토/증인 편집책임자 양기탁·의병장 민종식/美 유학 마치고 돌아온 金奎植 통역맡아/당시 한국상황 상징적대표 총 등장 한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시기에 정론직필로 구국의 필봉을 휘둘렀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에는 현대사와 관련된 수많은 일화가 숨겨져 있다. 대한매일은 재창간을 기념하여 그 숨겨진 이야기들을 한국외대 鄭晉錫 교수(언론사)의 집필로 연재한다. 70년대 대한매일 영인본 제작 실무를 맡았던 鄭교수는 영국 공공기록보관소에서 방대한 외교문서를 찾아냈고 한·일 자료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등 대한매일 연구에 몰두해왔다. 대한매일신보사의 정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붙어 있었다는 말이 전한다. “개와 일본인은 출입금지.” 대한매일은 사장이 영국인 배설(裴說)이었으므로 사내에 일본경찰이 들어올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일본인(일본 순사)을 개에 비유한 경고문을 신문사 정문에 걸었을까.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한매일의 용기 있는 논설과 보도 태도로 보아 일본인 순사를 개로 빗댄 글을 써 붙였음직도 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대한매일은 일인들이 침범하지 못할 불가침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당시에 발간된 영국의 데일리 미러는 영국 국기가 한국인 편집장 양기탁을 보호하는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보도했다. 이와같이 대영제국의 치외법권이 허용된 신문이기는 하였으나 용기 있는 신문에 불어닥친 시련도 거세었다. ○용기있는 신문에 시련도 거세 1908년 6월15일 오전 10시. 서울 정동에 있는 주한 영국 총영사관에서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을 피고석에 앉힌채 재판이 열렸다. 배설에 대한 재판은 그 한해 전에 이어 두번째였다. 재판이 열린 영국 총영사관은 오늘의 대한매일­프레스센터 빌딩의 맞은편 덕수궁과 맞닿은 곳에 위치한 영국 대사관 건물이다. 재판이 열리던 무렵은 전국에서 의병들이 무력으로 항일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었으며 일본군 2만여명이 의병을 진압하려는 작전을 펼치고 있던 때였다.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책임을 물어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직후,군대를 해산하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여 의병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가 곳곳에서 전개되던 위급한 상황이었다. 서방 기자로는 유일하게 산속까지 들어가서 의병을 직접 취재했던 캐나다 출신 영국기자 맥켄지가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남루한 차림으로 싸우는 의병들의 처열한 투쟁에 감동되어 ‘한국의 독립운동’이라는 책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한 바로 그 시점이었다. 배설의 재판은 한국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과 일본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였던 한­영­일 3국이 관련된 특이한 국제재판이었다. 재판 진행과정은 역사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극적이고도 흥미로웠다. 등장인물만 보더라도 당시 한국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피고 배설을 비롯하여 상해에서 이 재판을 위해 한국에 왔던 판사 보온과 검사 윌킨슨,일본 고베(神戶)에서 온 변호사 크로스는 모두 영국인들이었지만,통감 이등박문을 대리하여 고소인의 자격으로 참석한 사람은 통감부의 제2인자 서기관 미우라(三浦彌五郞)였으며,증인으로는 대한매일의 실질적인 제작책임자인 총무 양기탁,의병장이었던 민종식을 비롯하여 궁내부 전무(電務)기사,그리고 평민도 있었다. 영어 통역을 맡았던 사람은 당시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규식(金奎植)이었다. 일­영어 통역은 히시다(菱田) 박사가 맡았고,한­영어 통역 마에마(前間恭作)는 한문에 조예가 깊었던 외교관으로 ‘조선의 판본(板本)’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다. 고베에서 발행되던 영어신문 재팬 크로니클이 “동양 역사상 처음” 열리는 재판이라고 보도한 것처럼 재판 광경은 기이하고도 이색적이었다. 법관과 변호사는 영국 법정의 격식대로 백색의 꼬불꼬불한 가발에 육중한 법복 차림이었고,통감부를 대표하여 나온 미우라는 금실로 수놓은 제복의 정장이었다. 나중에 증인으로 등장하는 한국인들은 흰 두루마기에 상투 틀고 갓 쓴 사람과 단발로 머리를 깎은 사람도 있었다. 통역 김규식은 서양 예복인 프록코트(연미복) 차림이었다. ○기이하고 이색적인 재판광경 연출 방청석에는 지방 거주 선교사도 상경하였고 각국의 주한 외교관과 서양 여자들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재팬 크로니클은 이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더글러스 영이라는 기자를 서울로 특파했고 AP통신도 특파원을 보내어 이를 취재할 정도로 이 사건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은 컸다.
  • 대한매일 재탄생 金 대통령 축사 전문

    ◎참여민주주의·지식사회 앞장/일류 경제국가 건설 횃불되길 우리는 오늘 뜻깊은 모임에 참석하고 있습니다.기독교에 부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대한매일이 93년 만에 부활한 것입니다.을사보호조약이 있었던 1905년 8월11일 대한매일은 일제 강점에 항거해 국권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습니다.朴殷植 申采浩 梁起鐸 선생 등 선각자들과 영국인 裵說을 사장으로 해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일제 손아귀로 들어간 이 나라 국권을 지키는 것이 이 신문의 유일한 최고 목표였습니다.1907년 임금께 드린다는 글을 써서 을사보호조약이 일제 강권에 의해 이뤄진 만큼 무효이니 세계여론에 호소해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글을 썼다가 裵說 사장은 잡혀가고 여러가지 곤욕을 치렀습니다.또한 일제에 대한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켜 우리 경제가 일제 지배에 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글을 썼다가 역시 裵說 사장이 잡혀가고 모진 탄압을 받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통감부의 농간에 의해 일제 손아귀에 떨어져 36년 치욕의 세월을 보내게 됐던 것입니다.우리는 오늘 대한매일 부활의 날에 그 정신을 살펴볼때 첫째로는 이미 말한 대로 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있는 그때에 국권을 지키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굳은 결의와 열망을 담아 대한매일이 이를 대변하고 일어섰던 것입니다. 둘째는 나라를 지키는 것은 말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경제를 지키는 것입니다.우리가 일본 경제에 매달려 있는 한 국가 독립은 없으므로 국채를 사서 이를 보상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또 그 당시 단순히 대한매일만 창간한 것이 아니라 코리아데일리뉴스를 같이 창간,영자신문까지 만들어 우리 주장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지금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로서는 놀라운 일을 선각자들은 했던 것입니다.그 때는 일본이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을 가장 어렵게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영국사람을 데려다 사장을 시켜 우리 국권을 지키는 데 활용했던 것입니다.또한 대한매일은 혼자서 한 것이 아니라 국민과 힘을 합쳐서 국채보상운동을 이룩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대한매일의 정신은 첫째는 국권을 지킨 것이고,둘째는 경제적 자립을 지킨 것이고,셋째는 세계와 더불어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는 세계주의 생각을 가졌던 것이고,넷째는 국민의 참여속에 국민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이러한 대한매일의 정신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것으로서 오늘 서울신문이 대한매일 이름을 다시 들고 나온 것은 결코 복고주의가 아니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고,과거의 탁월한 정신을 이어받아 21세기 속에서 이 나라 국운을 개척하는 길로 나가기 위해서 서울신문이 대한매일의 정신을 다시 계승하는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그러지 않고 만일 복고주 의로 간다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신문은 이제 대한매일로서 완전히 새로 태어나 21세기에는 산업사회에서 정보지식산업사회·문화관광사회로 나가는 선두에 서야할 것이고 민족주의 시대에서 열린 세계주의 시대로 나가는,그런 정신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민주주의,그것도 국민이 주인으로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데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 경제를 어려운 여건속에서 국민과 더불어 반드시 되살려 멀지않아 세계의 일류국가 대열에 설수 있는 경제국가를 세우는 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2건국,참여민주주의,시장경제,지식기반사회,건전한 정의사회,남북간 안보·화해·협력 추진,그리고 열린 세계주의로 가는 방향에 서울신문이 아닌 대한매일이 적극적으로 선두에 서 횃불이 되고 선구자가 될 것을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습니다.그것만이 지금부터 93년전 이 신문을 일으켜 민족 운명을 살리고자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한 우리 선열들,외국인이면서 이 땅을 사랑하고 이 국민에게 한없는 동정심과 친밀감을 갖고 우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이 땅에 생명을 바친 裵說 사장 등의 뜻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서울신문이 이름을 대한매일로 바꾸는 것으로 끝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21세기 내일을 위해 과거정신을 훌륭히 살려나가는 일이 꼭 이뤄져야 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 독립기념관 朴維徹 관장·梁俊子 교수 부부

    ◎“선조魂 담긴 ‘대한매일’ 부활 감회 새로워”/朴殷植·梁起鐸 선생 손자·손녀로 ‘인연’/“구국 항일정신 계승 국민 선도하는 신문 되길” “선조의 혼(魂)이 담긴 신문이 다시 부활한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독립기념관 朴維徹 관장(60)과 부인 梁俊子 교수(55·안양대 피아노학과)는 ‘대한매일’의 재창간을 보는 느낌이 남다르다. 朴관장 부부에게는 ‘대한매일신보사’와 남다른 인연의 끈이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朴관장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면서 항일 구국운동을 이끌었던 백암(白巖) 朴殷植 선생의 친손자이며 부인 梁교수는 1904년 영국인 배설(裵說)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우강(雩岡) 梁起鐸 선생의 친손녀다. 9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朴관장 부부는 어린시절 전해들은 친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하나 둘 꺼냈다. 광복군 사령관을 지낸 朴始昌 선생의 큰아들인 朴관장은 “할아버지는 중국 등에서 항일운동을 하면서도 항상 손에 책을 놓지 않으셨으며 논설과 역사 저술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취한 독립운동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말했다. 梁교수는 “무장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이셨던 할아버지는 고종의 영어통역관을 맡았던 증조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어에 능통하셨고 최초의 한영 사전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처음 만나 결혼한 것은 지난 67년.같은 시기에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이었지만 서로 알지 못했다. 朴관장은 “서울고 동창인 처 외사촌 오빠의 소개로 만났는데 교제를 하면서도 梁起鐸 선생의 후손인 줄 몰랐다”면서 “부모님께 소개하는 자리에서 梁起鐸 선생의 종손녀라는 것을 알게 됐고 부모님은 그 자리에서 결혼을 승락하셨다”고 말했다. 朴관장은 “특히 아버님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 梁起鐸 선생을 자주 만났었고 존경하는 분이었다며 크게 기뻐하셨다”면서 “두분 할아버지께서 우리의 인연을 점지해 주신 것 같다”고 덧붙였다. 朴관장은 미국 MIT와 영국 헐(HULL)대학에서 경영학 박사를 받았으며 지난 74년 국방과학연구소에 영어 요원으로 특채된뒤 건설부에서 20여년 동안 공무원생활을 했다. 지난 95년 독립유공자들의 추천으로 4대 독립기념관장으로 취임했으며 올해 5대 관장으로 재취임했다. 梁교수는 영국의 리딩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뒤 89년부터 안양대학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슬하에는 2남1녀.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막내딸은 독립운동을 공부하고 싶다며 이화여대 역사학과에 지원,특차에 합격했다. 朴관장 부부는 “뿌리를 찾은 ‘대한매일’은 항일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대한매일신보’의 정
  • 막바지 투쟁과 폐간(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8)

    ◎‘1910년 國恥’로 끝내 스러져/재판·옥고 등 일제 탄압 裵說 36살나이로 타계/꿋꿋이 필봉지킨 梁起鐸 소유권 통감부이전되자 통한의 광고 낸뒤 퇴사 1904년 창간이후 일제배척과 국권회복에 앞장선 대한매일도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6년여만에 결국 스러진다. 대한매일이 강제 폐간되기까지 일제는 사장인 裴說을 두차례 재판받게 하고,지면을 실질적으로 이끈 梁起鐸을 구속·기소했으며,배설의 후임사장에게서 신문을 매수하는 등 온갖 수단을 부렸다. 그럼에도 대한매일은 양기탁이 떠나는 그날까지 결코 붓을 휘거나 붓끝을 돌리지 않았다. 배설은 1907년 10월 서울주재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영사재판정에서 ‘대한매일의 논설이 공안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6개월간의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렇지만 대한매일의 논조는 강경해지기만 했다. 1908년 4월29일 일제가 신문지법을 개정,외국인 발행의 신문이라도 발매금지·압수할 수 있도록 하자 그날 ‘百梅特捏(백매특날)이 不足以壓(부족이압) 一伊太利(일이태리)’논설을 실었다. 민족주의운동을 탄압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매특날)가 100명 있더라도 이탈리아 하나를 억압하지 못한다는 이 논설은,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일제의 음모는 거듭됐다. 1908년 6월 배설을 두번째로 법정에 세웠다. 그 근거로 내세운 게 ‘스티븐스 포살사건’을 비롯한 반일 보도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설치한 영국 고등법원의 판검사가 서울에 와 열린 재판에서 배설은 ‘3주간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을 언도받았다. 배설은 상하이에서 복역하지 않을수 없었다. 논조를 주도하는 양기탁에게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혐의를 씌워 구속·기소했다. 이 재판은 양기탁의 무죄로 끝났다. 그는 대한매일에서 일한 뒤로 치외법권지역인 사옥에서 생활함으로써 일제의 검속을 피할 정도로 철저한 인물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의 의연금을 총괄처리하면서 일제에게 꼬투리 잡힐 일을 할 리 없었다. 또 배설­양기탁으로 이어지는 지나친 탄압에 대한 영국측 반발도 한몫을 했다. 그후 대한매일에는 어려움이 잇따랐다.창간이후 울타리 노릇을 한 배설이 1909년 5월1일 타계한 것이다. 일제에 맞서 싸우느라 심신을 소모했고 상하이에서 옥고까지 치른 그는 ‘심장확장’이 원인이 돼 서른여섯 나이로 눈을 감았다. 배설은 숨지기 전날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은 영원케 해 한국인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많은 한국인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그를 기렸다. 그 가운데 5월5일자 대한매일 1면에 실린 박은식의 추모시를 소개한다. ‘天遣公來又奪公(하늘이 보내 공이 오더니 다시 빼앗아갔네) 歐洲義血灑溟東(유럽의 의혈인이 조선의 어둠을 씻고자) 翩翩壹紙三千里(삼천리 곳곳에 신문을 뿌렸네) 留得芳名照不窮(꽃다운 이름 남아 끝없이 비추리)’ 배설은 가도 양기탁은 남았다. 대한매일의 필봉은 배설 사후에도 꿋꿋함을 지켰다. 1909년 10월26일 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포살해 이듬해 3월 순국할 때까지,대한매일은 거사·체포·재판·처형의 과정을 자세히 보도했다. 安의사가 밝힌 ‘저격 이유 15가지’를 그대로 실은 것은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배설 사후신문사 소유권은 영국인 萬咸(Alfred W. Marnham)에게 넘어갔다. 배설은 2차재판을 앞둔 1908년 5월27일자로 발행인 명의를 만함으로 바꾼 바 있다. 배설이 타계하자 그가 소유권을 승계했고 일제의 압력에 못견딘 그는 1910년 5월1일 통감부에 신문사를 넘겼다. 일제는 이를 비밀에 부쳤다가 6월14일 발행인과 편집인 명의를 李章薰으로 바꾸었다. 이날 양기탁은 대한매일에 광고를 싣고 퇴사했다. 기자들 대부분이 그 뒤를 따랐다. 대한매일은 두달여 연명하다가 1910년 8월29일 한일합병이라는 국치(國恥)를 맞아 종간한다.
  • 대한매일 역사성과 새 좌표 세미나­주제발표 내용

    ◎국난때 정론 편 대표적 민족지 오는 11일 ‘대한매일’로 역사적인 새 출발을 하는 서울신문이 3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대한매일의 역사성과 새 좌표’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갖고 그 역사적 의의를 재조명했다. 이날 발제자들은 대한매일신보가 창간 당시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항일구국의 기치를 드높였던 민족정론지였다고 평가하고 오늘날 또 다른 국난기를 맞아 그 같은 정신의 부활은 시의적절한 것이라고 역설했다. 특히 새로운 천년,새 세기의 지평에서 공익언론·구국언론으로서 대한매일의 부활은 1세기 전 선각자들이 이루지 못했던 꿈과 도전을 실현시킬 계기가 될 것임을 전망했다. 이날 발표된 ‘대한매일신보 창간 당시의 민족운동과 시대적 상황’(신용하),‘대한매일신보의 논조와 민족 독립운동’(정진석), ‘대한매일의 정체성과 새 좌표’(김삼웅) 세 편을 요약 소개한다. ◎창간 당시 시대적 상황/애국세력 신민회 본부 사내에 설치/국채보상 일어나자 전국적 캠페인/愼鏞廈 서울대 교수·사회학 구한말 ‘을사5조약’의 늑결(勒結)로 외교권 등 국권을 상실한 뒤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한 신문이 ‘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이하 대한매일)였음은 학계의 연구에 의해 잘 알려졌다. 그 요인과 조건을,외국인 명의로 발행돼 일제의 탄압과 검열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이런 외적 조건은 일면에 불과한 것이어서 대한매일이 과감한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할 수 있던 내적 조건을 밝힐 필요가 있다.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 전개 대한매일은 영국인 裵說을 사장으로 고용추대하고 梁起鐸은 총무가 되어 합작으로 1904년 7월18일 창간했다. 원래 대한제국 정부가 한국의 처지와 한국정부의 주장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영어를 사용한 신문의 필요성을 절감,궁내부 예식원 관리인 양기탁 등이 배설을 고용해 창간했다. 예식원 영어통역관인 양기탁은 고종의 내탕금과 李容翊·閔泳煥 등의 자금지원을 받아 신문사 시설을 설치하고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지 임시통신원 배설을 사장으로 고용해 신문을 창간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양기탁의 주도로 창간됐으며,양기탁은 ‘총무’로서 신문사의 편집과 업무를 총괄했다. 대한매일이 가장 과감하게 언론구국운동을 전개하게 된 내적 조건의 특징은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돼 그 본부를 대한매일 안에다 둔 사실과 직접 관련돼 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초 다섯가지 애국세력이 연합해 창립했는데 그 첫째가 대한매일 집단이다. 양기탁이 총무로,申采浩가 주필로,張道斌(일시 주필)玉觀彬 李章薰 梁寅鐸 金演昶 兪致兼 李晩稙 등이 기자로,林蚩正 姜文秀 등이 회계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신민회 창립 직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이밖에 서울 상동교회,구한국 무관 출신,민족자본가,미주(美洲)에 있는 공립협회(共立協會)등이 참여했다. 신민회에서는 특히 대한매일이 그 핵심세력이 되었다. 신민회 총감독(당수 또는 회장)이 양기탁이었고 본부를 대한매일 내에 두었다. 장도빈은 주도회원에 신민회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 간부였다. 신민회 조직을 발의한 것은 안창호 중심의 공립협회였으나 미주에서는 효과가없으니 본국에서 설립해야 한다고 판단해 안창호를 파견했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귀국 즉시 대한매일로 양기탁을 찾아갔고 두달 후 다시 만나 신민회를 비밀결사체로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신민회 창립 제의는 안창호가 냈으나 창립은 양기탁 중심으로 되었다. 당시 그는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로서 국내 애국인사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졌을 뿐아니라 민중에게서도 큰 존경을 받았다. 아울러 양기탁이 신민회 총감독으로 추대된 것은 그가 대표하는 대한매일의 조직과 세력이 중시됐기 때문이다. 신민회는 전국에 지국을 가진 대한매일을 중핵으로 하여 단기간에 비교적 용이하게 지방지회를 설치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신민회 본부는 대한매일에 있었고 대한매일 영업국장인 임치정과 직원 김홍서가 비밀사무를 보았다. ○安昌浩 중심 신민회 조직 발의 1909년 대한매일의 지사 숫자는 51곳으로 일제가 후에 파악한 신민회 지회 세력과 분포가 거의 일치한다. 신민회는 국권회복이라는 목적의 실행방법으로 ‘신문·잡지·서적의 간행’을 최우선으로 설정했는데 창립 후 독자적으로 신문을 간행하지는 않았다. 대한매일이 신민회의 기관지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는 장도빈,일제 관원,독립운동가의 자료들에서 확인된다. 대한매일이 신민회 기관지로 전화한 1907년 4월 이후 논설·편집·보도는 매우 열렬하고 전투적으로 되었다. 일제는 1908년 4월 ‘신문지법’을 개정해 외국인 명의 신문이 가진 특권을 모두 없앴으며 대한매일을 해체하려고 배설·양기탁을 고소·구속했다. 그럼에도 대한매일은 굴복함 없이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을 지원했다. 이는 대한매일 종사자들이 굳게 단결,신민회 노선에 따른 과감한 언론구국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의 민족운동에서의 애국적 전통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 한국 신문에서도 면면히 계승·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논조와 독립운동/李 침략 본격화 맞서 대항논리 제공/직필 논설 통해 항일의병투쟁 고무/鄭晋錫 한국외대 교수·정책과학대학원장 대한매일신보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까지 나라 안팎의 정세가 몹시 복잡하던 시기에 발행된 대표적인 민족지였다. 일본과 영국은 대한매일이 창간된 때로부터 한일합방까지 대한매일을 외교적인 현안문제로 다루었다. 따라서 대한매일은 언론사,독립운동사,한국문제에 관한 영·일 양국의 외교사,국제사법사 등의 핵심이 되는 연구과제이다. ○한일합방때까지 6년간 발행 대한매일의 항일 언론이 한국의 언론사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요약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주목할 것은 이 신문의 발행시기다. 이 신문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한일합방이 공포되던 날까지 약 6년 동안 발행되었다. 이 시기는 일본이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한반도에서의 독점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침략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던 때였다. 대한매일은 이와 같은 민족사적 전환기에 발간되면서 항일운동의 논리를 제공했고 항일운동을 확산시키는 동시에 한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이었다. 둘째 대한매일의 외교사적인 중요성이다. 이 신문에는 한국 영국 일본 세나라의 각기 다른 입장이 한반도의정치적 문제와 연관되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 이 신문은 소유주가 영국인이었으나 한국의 황실과 민족진영이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논조는 항일이었다. 일본 입장에서 볼 때는 이 신문이 침략정책에 가장 큰 장애요인이었다. 일본은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裵說을 한국으로부터 추방하거나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게 만들려 했고 그 교섭 상대국은 영국이었다. 영·일간 교섭 과정에서 외교정책,사법 절차상 미묘하고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되었음은 물론이다. 셋째 이 신문은 한반도문제에 있어 영국과 일본의 기본적인 입장과 양측의 외교정책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다. 일본은 영국이 영일동맹으로 맺어진 우호관계라는 점을 내세워 일본의 대한정책을 방해하는 영국 시민 배설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제재를 가해달라고 요구했다. 때문에 영국 정부 자체에서도 이 문제의 처리에 고심했다. 처음에는 영국과 일본이 다같이 배설을 한국의 법률과 일본의 군율 등으로 간단히 처리해 보려 했지만 결국은 영국의 재판에 회부하게 되었다. 다섯째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본 대한매일의 중요성이다. 이 신문은 소유주가 영국인이었으므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았다. 이로 인해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고 한국 국민들의 저항운동을 자유롭게 보도할 수 있었다. 많은 의병들이 이 신문의 영향을 받아 무장항일투쟁에 가담했으므로 이 신문은 한국 민족독립운동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여섯째 언론사에 있어서의 중요성이다. 이 신문은 발행되고 있던 기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최대의 민족지였다는 점만으로도 연구의 필요성은 크다. 발행부수도 당시로서는 최고였지만 국한문 한글 영문의 3종을 동시에 발행한 신문은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대한매일이 벌인 국권수호운동은 1차적으로는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다. 대한매일은 일본 침략을 규탄하고 항일무장 의병투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면서 한국 언론사에 가장 빛나는 항일 언론의 역사를 기록했다. 대한매일은 항일의 필봉만으로 일제와 싸운 것이 아니었다. 국채보상운동이 온나라에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던 때에 의연금을 수합하는 총본부격인 국채보상의연금총합소가 되었고 梁起鐸 朴殷植 申采浩 등은 논설로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한편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의병들의 무장항일투쟁도 대한매일의 논조에 고무된 바 컸다. 대한매일은 한국 언론사의 주류를 형성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이 신문이 세운 민족 언론의 전통은 일제 치하를 거쳐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 내려오고 있다. 대한매일은 결국 한일합방 직전에 일본측으로 넘어가 합방 후에는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대한매일 발행 당시의 언론사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언론 연구에도 그 선행연구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정체성과 새 좌표/굴종과 오욕의 역사 치열하게 자성/원래 출발선으로 다시 돌아가 국난극복·21세기의 비전 제시 노력/金三雄 본사 주필 그릇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국민적 목소리가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거세게 일어났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구조화된 적폐들을 청산하자고 정권교체라는 시민혁명을 이룬 국민 절대다수의 요청에 따라 가장 추한 모습을 지닌 우리 언론을 바로잡자는 언론정화운동과 언론개혁시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는 역사의 기승전결 법칙을 교과서적으로 무섭게 반영한 결과라고 본다. 서울신문이 제호를 변경하면서 출생의 뿌리를 찾고 그 정신을 새로이 하면서 새 출발의 전기를 확립하려는 의지는 바로 기승전결의 역사법칙이라 할 것이다. 서울신문은 이러한 역사발전의 전기로,국운이 기로에 처한 1900년대 초의 절망적인 시대 상황에서 민족의 긍지를 일깨우고 자주의 주권회복 기치를 높이 들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 회복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국난을 이기고 새로운 천년의 21세기에 앞장서고자 한다. 제호 변경은 서울신문이 단순히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이었다는 인연만으로 막연히 옛이름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백색독재와 군사독재정권의 홍보지로서 본의 아니게 걸어왔던 갖가지 형태의 굴종과 오욕의 역사를 청산하고 원래의 출발점이었던 대한매일신보의 제호를계승함으로써 구국활동·개화운동·애국정신·민족사상·독립정신을 이어받는 제2창간의 역사적 동기를 부여코자 하는 것이다. 서울신문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대한매일신보는 당대의 대표급 애국지사들이 참여하여 만든 민족지였다. 신문 경영의 주체는 배설이지만 실질적 신문 제작은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장도빈 등 민족사상이 투철한 항일 언론투사인 우리 선각자들이 맡았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구국활동의 전위였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이 한반도의 영구 식민지화를 꾀하려는 책동임을 지적하면서 그 부당성을 널리 폭로하고,의병 항거를 대서특필했다. 일진회의 합병 주장을 사흘에 걸쳐 통박하고,황성신문과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민족지의 방향을 주도했다. 정간 2회,압수 45회라는 일제의 폭압적 상황 아래서 고종황제의 퇴위 기도를 폭로,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의 실질적 본부 역할을 한 것을 비롯,항일구국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시대적 사명에 충실했다.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격때는 이들이 반포한 격문을실었으며 군대해산 조치에 저항하여 일제를 통렬히 비난했다. 국권 상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도 그 정신을 상실하게 되었다. 일제는 1910년 8월29일 한일병합과 함께 눈엣가시와 같았던 대한매일신보를 탈취하여 ‘매일신보’라는 총독부 기관지로 만들었다. 강압에 의한 합병조약이나 을사조약이 원천적으로 불법이기 때문에 무효이듯이 대한매일신보의 강탈도 원천 무효인 것이다. 제작을 처음부터 도맡았던 총무 양기탁은 이 신문의 발행인 명의가 친일 인사로 바뀐 그날부터 자신은 이 신문에서 손을 떼었다는 광고를 게재하고 신문사를 떠났다는 사실에서도 대한매일신보사가 매일신보로 이어질 수 없음을 역사에 밝혀준다. 양기탁 선생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지사들이 매일신보에 참여하지 않은 것에서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결코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새롭게 태어나는 대한매일에서 그 지령을 승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새 대한매일은 대한매일신보의 지령 1651호와 서울신문의 지령을 합산하여 승계하고,창간기념일은대한매일 재창간일인 11월11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서울신문의 제호 변경과 뿌리찾기는 서울신문이란 한 언론사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굴종과 오욕의 역사로 점철된 현대 한국 언론계가 반성,회개하며 거듭나고 기회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모든 언론이 대한매일신보의 정신을 되새겨 21세기 참언론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대한매일은 ‘대한매일의 다짐’을 통해 다음의 4가지를 지향하고자 한다. 첫째,공공이익을 앞세우는 신문. 둘째,국민복지에 앞장서는 신문. 셋째,민족화합을 앞당기는 신문. 넷째,2000년대에 앞서가는 신문. 대한매일은 1세기 전 대한매일신보가 실천하고자 했으나 미처 이루지 못한 꿈과 비전을 새로운 시대,변화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국가이성(國家理性)’으로 집약,표현하고자 한다.
  •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 출간/제호변경·뿌리찾기 배경

    ◎항일의 역사 등 정리 서울신문이 11일자로 제호를 ‘대한매일’,사명(社名)을 ‘대한매일신보사’로 바꾸면서 새로운 비상의 날개를 편다. 이에 때를 맞춰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항일언론사를 정리한 책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가 출간됐다. 엮은이는 현 서울신문 金三雄주필.251쪽,가격 8,000원. ‘구국언론 대한매일신보’는 한말 국난기에 태어나 국권수호를 외치다 일제의 강압으로 중절(中絶)된 대한매일신보의 항일 언론활동과 일제하 ‘매일신보(每日新報)’로 개제된 이후의 오욕의 역사도 담았다. 또 해방 후 미군정청에 의해 ‘서울신문’으로 재창간된 과정과 최근 ‘뿌리찾기’ 일환으로 ‘대한매일’로 다시 제호를 바꾸는 배경 등도 담고 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제1장에서 ‘대한매일신보’연구의 권위자인 외대 鄭晋錫 교수(언론학)의 기고를 싣고 있는데 鄭교수는 이 글에서 ‘대한매일신보는 민족 언론의 정신사적 원류’라고 강조하고 있다. 제2장은 대한매일신보를 빛낸 4명의 논객(梁起鐸·朴殷植·申采浩·張道斌)의 일제하 항일구국운동과 약력을 정리한 것. ‘부록’으로는 이들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논설기자)로 활동하면서 본지에 게재한 대표적 항일논설 몇편을 원문대로 싣고 있다. 제3장은 지난 93년 서울신문사가 ‘뿌리찾기’ 작업을 벌이면서 서울신문에 연재한 내용을 전재한 것. 이 연재는 초창기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과정,‘한일병합’ 이전까지의 항일 언론활동,영국인 사장 베델(한국명 裵說)의 행적 등을 보도했다. 제4장은 11월3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대한매일의 역사성과 새 좌표’란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내용의 전문을 수록한 것이다.
  • 지면 구성(다시 태어난 ‘대한매일’:14)

    ◎면별 특화 등 근대신문 편집틀 개척/국한문·국문·영문판 1만3,256부 발행/논설­투고란 등 특색있게 꾸며/雜報기사엔 ‘4字 한문제목’ 달아 창간 이후 영문,국한문,국문 등 발간 판형을 다양화해온 대한매일신보는 지면 구성에서도 날로 근대적 면모를 갖춰갔다. 대한매일은 기사 싣는 단수를 착실하게 늘려간 뒤 마침내는 신문지 크기자체를 키운다. 영문과 한글판을 합쇄한 초창기 때는 단수가 4단이었으나 1905년 8월 국한문판을 분리해 발간한 중간(重刊) 때 6단으로 늘렸다. 2년이 채 못 되는 1907년 4월부터 7단이 되었는데 이때 타블로이드 판인 신문이 1.4배 가량 큰 대판(大版) 크기로 확장됐다. 대한매일은 국내 독자와 관련하여 한글과 한문 중 ‘독립신문’처럼 한글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1년 후 국한문판 발행과 함께 튼튼한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대한매일은 독자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영·국문 합쇄의 한계를 깨닫고 분리 발행을 심각하게 고려한 중간 때 한글 아닌 한자 위주의 국한문을 선택했다. 언듯 후퇴처럼 보이는 이 결정은대한매일을 크게 전진시킨다. 대한매일은 1907년 4월 국한문 신문이 4,000여 독자를 확보해 국내 ‘最占多數’임을 알렸으며 며칠 뒤 국문판 추가 발간을 선언했다. 국한문판의 성공이 한글판을 부활시킨 셈이다. 이미 확고해진 명성은 판 추가 발행을 독자 및 사세 확장의 좋은 계기로 만들어 대한매일의 국한문판,국문판은 경쟁적으로 급성장했다. 1년 뒤인 1908년 5월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은 대한매일신보가 현재 1만3,256부 발행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국한문판이 8,200여부,국문판이 4,600여부,영문판이 400여부였다. 당시 국내 신문들의 판매부수가 1,000∼3,000부였던 사실과 크게 대조된다. 이렇듯 대한매일신보를 중흥시킨 국한문판은 지면 구성 등과 관련해서도 주목받는다. 고답적인 한문투라는 외형에도 불구하고 한국 신문발달사에서 편집체재에 근대적인 틀을 엮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한매일은 제1면 제호 바로 밑에 매일 논설을 실었다. 여론 조성을 위한 신문의 주장을 담는 자리로서 대한매일의 배일,반침략,애국계몽 논조가 확연히드러나는 곳이었다. 대한매일 논설에는 익명의 필자를 보다 가깝게 느끼게 하는 “本記者”라는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영국인인 본기자”란 구절로 배설의 의견임을 명확히 한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대한매일은 가끔 국내외의 다른 신문에 난 한국관련 논설을 전재했으며 특히 보통 3면에 게재하는 ‘寄書’를 이 자리로 옮겨 논설 대신으로 삼기도 했다. 독자들이 신문사에 보내는 편지를 뜻하는 기서는 말이 현재의 독자 투고이지 논설 못지않게 중량감있는 내용이었다. 기서를 보낼 때 성명과 주소를 요구한 대한매일은 신문에 게재할 때는 필자의 호나 유학생이라는 등 비실명으로 내보내 보다 많은 참여를 유도했다. 논설 다음에 관리의 서임과 사령에 관한 관보를 실었고 외국에서 일어난 일을 외국 신문 등에서 번역 소개하는 외보가 이어졌다. 2면은 관청 동정과 시정잡사에 관한 단신보도인 잡보 차지였다. 지금의 사회면 성격이 강한 잡보는 모든 기사가 “하였다더라” “說이 있다더라”로 끝맺음되고 있으며 단신이지만 글을 잇대어 써 꽤 상세한 내용을 담기도 했다. 통감부의 움직임과 의병활동을 동시에 소화하고 있는 대한매일의 잡보는 특히 모든 기사를 4자의 한문제목으로 압축한 뒤 소개한다. 잡보는 1면 하단과 3면 상단까지 펼쳐지곤 하지만 황실에 관한 기사는 언제나 2면 맨 첫 자리에 올라있다. 반면 신랄한 풍자의 시사만평이 2면 잡보란을 마감한다. 이 풍자만평은 칼처럼 날카로운 내용을 운문체로 경쾌하게 소화하고 있어 최고의 애독란이었다. ◎인기 있었던 2면 잡보란/친일파 행각 등 신랄하게 풍자/“日人고문 초빙후 형벌 혹독 이것이 개명국의 형벌” 대한매일의 2면 잡보란 하단은 시사만평란이란 이름은 붙이지 않았지만 부정,부패,만행 등을 신랄하게 풍자해 큰 인기를 모았다. 풍자의 주대상은 친일파와 한국에 온 일본인이었다. 일본인 풍자 기사를 몇개 골라본다. ▲어제 오후 서울 북서 누각동 뒷산 기슭에 사람들이 다수 모였다 하기로 일 순사가 순검 십여인을 데리고 쫓아가 탐문한즉 모두 피서하는 사람이라 하니 요새는 일인이 무슨까닭으로 한층 의구하는지 한국 인민은 피서도 못하겠소. ▲관립 일어학교 한인 학도가 일인 교사 백정에게 구타를 당한 이후로 퇴학을 원하는 학생이 다수라고 하니 원래 학도가 교사에게 학술만 수업함이 아니라 교사에 품행을 모방하나니 백정 같은 교사에게 무슨 품행을 본받을 것이오 퇴학하는 것이 좋지. ▲근래 일본 인민이 미국 지방에 가서 백인의 구타나 능욕을 받은 것이 날로 심하다 하니 이는 일본 인민이 한국 지방에서 한인을 압제박해한 보복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늘의 뜻은 무심치 않소. ▲경무청과 감옥서에서 일인 고문과 경부 경시를 초빙고용한 후로 죄인에게 형벌이 혹독하고 구금이 엄중하야 전일의 한국 형률보다 몇배 심하다 하니 이것이 개명국의 형률인지. ▲의주 등지에 일본군용지 내의 가옥과 분묘를 월내로 철거하라는 독촉이 심해 지역 인민이 서로 모여 호곡하는 소리가 도로에 끊이지 않다고 하니 인민은 어느 곳으로 이거하며 백골은 어느 곳에 옮겨 묻을 것이오 하늘의 땅에 오르는 수밖에 백계가 무책이로다. ▲일본 박람회장에 한인 남녀 2명을 2개 동물로 꾸며 넣어놓고 일반 유람자에게 완상케 하니 미주의 흑인은 노예로 팔리고 한국의 황인은 동물로 팔렸은즉 한인의 가격은 흑인 지위보다 한층 추락하였거니와 일인은 이웃나라의 동종인을 금수로 대하는구려.
  • 외국관광객의 체험담(숙박업소 실태:5·끝)

    ◎기본 서비스도 부탁없인 못받아/특급호텔 직원들도 영어마저 소통안돼/비즈니스센터 팩스·복사뿐… 이용도 불편/입에 안맞는 음식 억지로 권해 말다툼도 “특급호텔인데도 직원들과 말이 잘 안 통해서 쩔쩔맸어요.” “쫓아가서 부탁하기 전에 알아서 먼저 서비스하는 직원은 찾아볼 수 없더군요.” 국내 호텔에 묵었던 외국인들이 털어놓은 경험담이다. 사업차 한국에 온 미국인 브루스 판즈로(41·피아노 도매업)는 서울에 있는 1급 S호텔에 묵었던 며칠간의 기억이 씁쓰레하다. 첫날은 입에 맞지 않은 음식을 종업원의 권유로 억지로 먹다 끝내 말다툼까지 갔다.직원들이 영어를 잘 못해 답답하기도 했다. 호텔 비즈니스센터의 이용절차도 너무 까다로웠다.미리 요청을 해야 겨우 이용할 수 있었다.그것도 팩스를 쓰거나 복사만 할 수 있었을 뿐 업무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딸이 한국 남자와 결혼하게 돼 부인과 함께 한국을 찾은 프랑스인 마렉(58).1급 S호텔에 묵은 열흘 동안 하루하루가 불편한 나날이었다. “프랑스어는 커녕 영어로 된 여행안내 책자조차 없더군요.여러 나라 호텔에 다녀봤지만 모자란 점이 가장 많았습니다.” 미국인 스토니 갬블(29·회사원)은 이틀간 S호텔에 묵었다.그는 직원들이 영어를 잘 못하는 게 제일 불편했다고 말했다. 욕실 수건이나 화장지를 갈아주지 않아 번번이 룸서비스를 불렀던 것도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다. 한국에 10년째 60번 이상 출장을 왔다는 영국인 해리 스탬퍼 박사(56)는 이번 방한 기간에 2급 R호텔에 묵었다.그는 “카펫은 더럽고 로비의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도 치울 생각도 하지 않더라”면서 “화장실은 더 불결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호텔 직원들에게 친절교육을 철저하게 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손님에게 먼저 미소짓기,손님이 말하기 전에 먼저 서비스하기 등 외국 호텔 직원에게는 기본인 서비스가 한국 호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한 예로 “먼저 요청하지 않으면 도어맨이 가방도 옮겨다 주지 않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 통감부와 대결(다시 태어난 ‘대한매일’:8)

    ◎침탈·탄압에 맞대응/매국노·침략자 규탄/신문지법 등 공포 맞서 논설 통해 간담 서늘케/민족혼 고취·항일 주도 1906년 1월31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초대 통감으로 하는 통감부가 발족되면서 국내 언론은 이전과는 판이한 양상을 띠게 된다. 각국 공·영사관의 철수를 강행,열강의 모든 권익을 빼앗은 통감부는 매국내각을 구성한 뒤 본격적인 한국침탈에 걸림돌이 되는 언론에 대한 탄압에 돌입했다.1906년 4월부터 통감부령 제10호로 언론활동의 통제조항을 둔 보안규칙 시행에 들어간 것을 필두로 1907년 7월24일 李完用 내각으로 하여금 ‘광무신문지법’을 공포토록 해 본격적인 항일 민족지 죽이기에 들어간 것이다.대한매일신보도 1908년 4월 개정된 이 신문지법에 따라 결국 철퇴를 맞고 말았다. 이 시기 통감부는 대한매일에 대해 유달리 집중적인 압력을 가해왔다.대한매일이 을사조약 이후 항일의 필치를 높여간 만큼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상황에서도 대한매일은 ‘영국인 사주’(裵說)덕에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아 날카로운필봉을 어김없이 휘둘렀고 매국자들을 예외없이 고발했다.그러나 결국 신문지법을 대동한 일제의 탄압에 한껏 타오르던 항일 민족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1906년의 보안규칙 시행이나 1907년의 신문지법은 처음엔 국내에서 발행되는 민간신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그러나 통감부는 사사건건 물고늘어지는 명의의 대한매일을 그냥 놓아둘 수 없었다.따라서 1908년 4월29일 신문지법을 개정,대한매일의 기세를 꺾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신문지법은 일본의 통감정책에 저해되는 일체의 언론에 대해 발행정지권을 비롯해 벌금형과 체형,신문 인쇄기기 몰수 등 강력한 처벌조항을 담았다.더욱이 1907년 7월24일 신문지법을 발포한지 닷새만에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이 공포되고 31일 한국군대까지 해산된 것을 보면 대한매일을 비롯한 항일 민족지에 대한 통감부의 탄압이 얼마나 치밀한 것이었나를 알 수 있다. 이 법은 1910년 한일합병이 강행된 뒤에도 계속 발효됐고 해방후 1952년까지 존속한 식민지 악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장 날카로운 논봉을 들고 나선 것은 역시 대한매일이었다.정부가 허수아비로 전락한 마당에 숱한 애국지사들은 자유로운 필치를 유지하는 대한매일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통감부와 관련한 일련의 논설들은 이같은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통감부 설치 직후인 1906년 2월9일자 1면 논설 ‘통감(統監)’과 3월9일자 1면 논설 ‘이등후(伊藤侯)’는 통감부 설치의 불법성을 비난한 대표적인 예다.“일본이 이웃나라 안에 자기나라 대표를 파견해 권력을 장악함은 옳지 못한 일”(統監),“한국의 내정은 일인이 지휘하고 외무는 동경에서 관할하니 한국의 독립이란 어디 있느냐”(伊藤侯). 또 8월15일자 논설 ‘한국과 일본’에선 “이등박문은 현존 한국의 노예같은 정부 대신을 지휘해 모든 일을 자기가 집행함이 한국을 일본에 정복된 국민의 지위에 떨어뜨리는 제반 악계를 꾸몄다”고 폭로했다.1907년 1월16일자에는 “을사5조약을 승인하지 않으며 열국의 보호를 요청한다”는 고종의 칙서를 발표해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친일정부가 발행하는 관보 게재를 중단한 것도 획기적인 일이다.법령공포와 정부시책 홍보가 내용인 관보는 한일합병 때까지 발간된 대부분의 신문들이 중요 내용을 전재할만큼 큰 뉴스원이었고 신문보급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그러나 일본이 득세하면서 자주성과 독립성을 잃게 됐고 관보기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익어갔다.대한매일은 마침내 1908년 3월6일자 1면 논설 ‘관보정게(官報停揭)’에서 “관보의 내용이 과연 한국사람의 관보인가”라고 쓰고 이날부터 관보란을 폐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거듭되는 배일 논조에 격분한 통감부는 마침내 裵說 타도를 결의하고 나섰고 대한매일은 일제의 집요한 탄압에 강하게 맞선 裵說과 논진(論陣)이 추방 혹은 구속되면서 서서히 시들어갔다. ◎신문사들의 수난/주요 재원 신문대금 체납 ‘눈덩이’… 경영난/社告로 납부 독촉… 日帝 탄압에 곡필 보도도 통감부의 언론탄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국내 언론은 심각한 경영난을 겪게 된다. 사전검열에 따른 기사삭제,반포금지 및 정간이횡행하자 자연 독자들의 신뢰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따라서 당시의 신문,특히 민족지들은 광고수입이 적은데다 주요 재원인 신문대금의 체납이 많아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고 이에 따라 자유로운 논조를 펴지 못하는 지경에 빠졌다. 실제로 내부 경무국이 펴낸 ‘고문경찰소지’(1910년 간)에 따르면 통감정치 첫해인 1906년 한 해만 하더라도 황성신문은 7건,만세보는 6건,제국신문은 13건이나 기사를 삭제당했다.또 1909년 ‘경찰사무개요’와 ‘조선통감부 시정연감’은 발매반포금지 및 압수처분의 경우 1908년 64건,1909년은 137건으로 기록하고 있다.대한매일만 하더라도 1909년 한 해 동안 발매반포금지 14건에 모두 1만6,314부를 압수당했다. 이같은 탄압이 전개되자 신문 운영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민족지들은 대중적인 호소에 적극 나섰다.사고와 잡보를 통해 독지가의 성원과 신문대금 납부를 촉구하기에 이른 것인데 그 사정이 매우 급박했음을 알 수 있다. 황성신문은 “신문대금을 빨리 지불하는 사람은 문명인이라”는 이례적인 사고를 냈고 어떤 대신이 체납금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기사로 보도하기까지 했다.사설에서도 “독자가 신문대금을 지불치 않으므로 신문을 발행 못한다”고 쓰고 있다. 대한매일도 사고에 “본사가 이전하겠는데 수리 정돈에 경비가 매우 모자라니 대금을 송치해주기 바란다”는 글을 올렸다.심지어는 “각 지점에서 본사 대금 체납이 많은데 평양지점은 미납급이 300여원에 달했으니 본사경비를 어떻게 충당할 수 있겠는가”라며 재촉하는 사고를 내기도 했다.한 잡보에는 “재정난으로 휴간한 제국신문의 복간을 위해 각 부인회에서 보조금을 모집하기로 했다”는 글까지 올린 것을 보면 당시 언론이 얼마만큼 극심한 경영난을 겪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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