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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연녹지 10만평에 발전소라니…”

    강원도가 춘천시 의암호 붕어섬에 태양광발전소 설치 계획을 발표하자 춘천시 환경단체, 시민들의 반발이 잇따르고 있다. 춘천시는 6일 도가 지난달 송암동 붕어섬 10만평에 10㎿ 규모의 태양광 발전단지를 조성, 연간 1만 4600㎿h의 전력을 생산하겠다고 발표하자 환경단체들과 네티즌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다고 밝혔다. 춘천환경운동연합은 “세계적인 태양광발전소 입지는 주차장이나 대형 운동장 옥상, 사막 등 폐허나 폐염전 부지 등 경제성장에 별다른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을 활용하고 있다.”며 “관광산업을 육성하려는 춘천에서 붕어섬은 활용가치가 높기 때문에 대규모 비닐하우스 단지와 같은 태양광발전소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시 홈페이지에 글을 올린 네티즌 김진경씨는 “연 고용인원이 1만 9000명이라고 하지만 실질 고용자는 52명밖에 되지 않으며 그것도 비숙련 일용 고용자만이 춘천시민의 몫이 될 것이다.”며 “강원도는 관광객 유치를 연 10만명에 경제효과가 52억원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검증되지 않는 추정치로 시민을 현혹하는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네티즌 진희석씨는 “도지사의 태양광 발전소 설치계획은 얻는 것에 비해 잃는 것이 너무 크다. 자연녹지 10만평에 태양광 발전소를 설치한 곳은 없기 때문에 그런 곳에 지었다가는 전 세계의 자랑거리보다 웃음거리가 된다.”고 지적했다.춘천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팔리지 않는 소금·사라져가는 염전 이중고에 한숨 영종도 염전 르포

    팔리지 않는 소금·사라져가는 염전 이중고에 한숨 영종도 염전 르포

    연간 소비량의 절반 가량이 김장철에 팔린다는 소금. 계절적으로 염부(鹽夫)들은 신명이 날만도 하련만 축 처진 어깨가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지난 2001년 소금시장 완전개방 이후 값싼 수입산 소금에 밀리더니 급기야 생산한 소금을 창고에 고스란히 쌓아둘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는 한때 ‘잘 나가는’ 소금 생산지였다. 지난 70∼80년대 이곳 염전은 300정보(1정보=3000평)에 달했다. 하지만 공항 활주로와 신도시, 골프장에 자리를 내주면서 지금은 절반을 밑도는 150정보도 되지 않는다. 소금이 팔리지 않는 데다, 사라져 가는 염전 때문에 ‘이중고(二重苦)’를 겪으며 시름에 젖어 있는 영종도 염부들을 만나봤다. ●8000가마 생산 6000가마 창고에 박병기(76) 금단염전 염부장(염전 관리자)은 “올 한해 동안 30㎏짜리 소금 8000가마를 생산했지만 6000가마가 창고에 쌓여 있다.”면서 “지난해까지만 해도 11월 중순이면 창고가 텅 비었는데, 창고에 소금이 남아 있는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털어놨다. 영종도는 일제시대 당시 금광이 많아 이북을 비롯한 외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광산이 폐광되자 정부는 지난 1954년 ‘피란민 정착사업’의 일환으로 영종도에 제방을 쌓아 염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영종도 토박이인 박 염부장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51년째 염전으로 출퇴근하는 ‘영종도산 소금’의 산증인이다. 다른 염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50정보로 영종도 염전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금홍염전의 경우 올해 생산한 소금 5만가마 중 3만가마가 창고에 남아 있다. 소금 가격도 예년의 절반 수준이다. 지난 2003년까지 1가마당 1만 2000∼1만 3000원을 유지했으나 지난해에는 8000원대, 올해는 7000원대까지 떨어졌다. 강종진(59) 금홍염전 소장은 “12가구 가족들이 매달리다시피 해서 생산한 소금을 다 팔아봐야 떨어지는 돈은 가구당 3000만원 정도”라면서 “이마저도 소작료, 기름값, 마대값 등을 빼고 나면 절반밖에 남지 않는데 팔리지를 않으니 소작료조차 못 내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김주연(66) 금홍염전 염부장도 “서울 사람들이 직접 찾아와서 사가는 게 고작”이라면서 “쌀 추곡수매하듯이 정부가 비축염을 사들이기도 했는데 올해는 이런 것도 없어 도통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해 했다. 염부들에게는 팔리지 않는 소금 외에 더 큰 걱정이 있다. 염전이 폐쇄돼 일거리 자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벌써부터 내년에는 ‘어느어느 염전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박 염부장은 “땅도 논도 없고, 다른 곳에 가봤자 나이가 많다고 써주지도 않는다.”면서 “외국에서 수입하는 소금을 팔지 못하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국산으로 속여 파는 행위만이라도 철저히 단속해 줬으면 좋겠다.”며 한숨지었다. ●“배운 도둑질이 이 것뿐인데…” 그나마 ‘옛날 얘기’가 염부들의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을 걷어냈다. 황해도 웅진이 고향인 김 염부장은 “1951년 ‘1·4 후퇴’ 때 이곳으로 건너왔어.”라면서 “1958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밀가루, 강냉이 먹어가며 염전을 만들었는데 벌써 48년이나 지났네.”라고 회상했다. 이곳 염부들은 70∼80년대만 해도 남부럽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소금을 만드는 순서는 바닷물을 저수지에 가둔 뒤 난치·늦태지역에서 바닷물을 증발시켜 염도를 높이고, 염판에서 결정이 만들어지면 창고에 저장한다. 당시만 해도 반장(염도 측정 및 감독)과 부반장(염판 관리),‘대빠또’라는 은어로 더 잘 불린다는 난치반장(바닷물을 염판까지 내려주는 역할), 경험에 따라 구분되는 상염부 및 하염부(고무래로 염판에 쌓인 퇴적물 제거) 등 5명이 한 조를 이뤄 이같은 작업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인건비가 올라가면서 소작 형태로 바뀌었다. 부족한 일손은 소작 염부들의 가족이 메웠지만, 전문성이 떨어지다 보니 1정보당 소금 생산량은 70∼80년대 연간 10t에서 3∼4t으로 줄었다. 강 소장은 “우리야 배운 도둑질이 이것밖에 없지만 젊은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없어.”라면서 “남아 있는 염부들은 50∼60대가 대부분이고, 영종도에서 가장 나이가 적은 염부도 43살이야.”라고 말했다. 이렇게 힘든 염전 일을 그만 둘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에 박 염부장의 답변은 단호했다.“잠만 따로 자지 평생을 같이 한 게 이 사람들이야. 염전에 둘러앉아 소주 한 잔 걸치는 게 유일한 낙인데, 그걸 버리라고?” 헤어질 무렵, 점심 때를 놓친 터라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기자의 말에 염부들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손사래를 치며 황급히 돌아섰다. 염전 일은 3월초에 시작돼 10월말이면 끝난다. 농부로 치면 지금은 농한기다.3시간 남짓 얘기를 나누는 사이 꾸깃꾸깃해진 염부들의 담뱃갑이 자꾸 눈에 밟혔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국산천일염 ‘미네랄 덩어리’ 국내 소금산업이 외국산 저가 소금에 밀려 ‘고사’ 위기에 처했지만,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산업자원부와 대한염업조합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소금 소비량은 320만t으로 추정된다. 비누와 폴리염화비닐(PVC) 등을 생산하는 화학공업용이 260만t, 식용이 60만t 정도다. 그러나 국내에서 생산되는 천일염과 기계염은 각각 35만t,15만t에 불과해 소비량의 85% 이상을 중국 등지에서 수입하고 있다. 소금은 지난 60∼70년대까지만해도 자급자족했다. 그러나 지난 2001년 소금시장 완전개방으로 국산 소금의 30∼50% 수준인 외국산 소금이 국내 소금시장을 점령했다. 이 때문에 국내 염전도 80년대 1만 2000정보(1정보=3000평)에서 지금은 4000정보로 대폭 감소했다. 소금은 바닷물을 증발시킨 천일염, 바위처럼 딱딱한 암염, 바닷물을 전기분해한 기계염, 소금을 재처리·가공한 제재염 등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국산 천일염은 농도가 80% 안팎이며 미네랄이 풍부해 김치, 젓갈, 장류 등을 담그는 데 적합하다. 반면 수입산은 국산보다 농도가 10% 이상 높아 김치의 경우 쉽게 물러질 수 있다. 이처럼 국산 천일염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식품’이지만 지난 63년 제정된 염관리법에 따라 ‘광물’로 규정돼 있다. 바닷물 증발 과정에서 불순물이 들어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소금을 다루는 정부 부처로 보건복지부가 아닌 산업자원부가 지정된 것도 이 때문이다. 산자부 관계자는 “소금은 수입자유화 조치 이후 시장기능에 맡기고 있다.”면서 “현재는 염전 폐쇄와 종사자 전직 등만을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정부는 지난 2003년 소금이 과잉생산돼 가격이 떨어질 경우 사들인 뒤 가격이 올랐을 때 되파는 ‘수매비축제도’를 폐지, 국내 소금업계를 지원할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마저 사라졌다. 염업조합이 이와 유사한 ‘자가비축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유명무실한 실정이다. 염업조합은 지난해 고품질 고가격의 ‘하얀금’ 브랜드 사업을 추진했으나 가격경쟁에 밀려 110억원어치,3만t의 소금이 그대로 쌓여 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염부들의 ‘족집게’ 일기예측 좋은 소금을 만들기 위한 염부들의 노력은 날씨를 예견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드는 데는 꼬박 2∼3주가 걸리는데 도중에 비를 맞으면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일기예보가 정확하지만, 과거에는 어떻게 족집게처럼 날씨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 40∼50년 경력의 염부들은 우선 일몰 무렵, 구름의 위치와 모양을 살피는 것을 중요한 일과로 꼽는다. 해가 넘어갈 때 구름이 해 주변에 끼어 있으면 2∼3일 뒤 비가 온다는 것이다. 염부들은 이를 ‘해가 집 짓고 들어간다.’고 표현한다. 또 동남풍이나 남서풍이 불면 하루나 이틀 후 비가 내리기 때문에 염판에서 소금을 걷어냈다고 한다. 아울러 개미가 줄을 지어 이동하고, 굳은 땅에서 지렁이가 올라오고, 밀물의 양이 많아지는 ‘물이 산 날’에는 틀림없이 비가 내린다고 강조했다. 박병기(76) 영종도 금단염전 염부장은 “날이 궂으면 온몸에 신경통이 도진다는 사실은 기본”이라면서 “일기예보를 몰라도 70∼80% 정도는 날씨를 맞힐 수 있다.”며 웃음지었다. 흔한 게 소금이지만, 로마시대에는 군인들에게 급여를 소금으로 지급해 샐러리(salary)의 어원이 될 만큼 귀한 존재였다. 지금도 좋은 소금을 고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좋은 소금은 맛부터 다르다고 한다. 좋은 소금은 부드럽고 단맛이 나며 뒷맛도 깨끗한 반면 나쁜 소금은 쓴맛이 난다. 또 국내산과 수입산 소금을 구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입자의 크기와 경도를 살펴 보는 것이다. 국내산 천일염은 입자가 고르고 뚜렷하나 외국산 소금은 여러 유통 단계를 거치기 때문에 마모도가 심하고 입자도 고르지 않다. 특히 국내산은 수분 함유량이 많아 손바닥에 잘 들어붙고 손으로 비비면 잘 부스러진다. 반면 외국산은 경도가 높아 손바닥에 잘 붙지 않고 비벼도 덩어리가 남게 된다. 김주연(66) 금홍염전 염부장은 “소금은 바닷물의 청정도, 일조량, 바람의 세기 등에 따라 차이가 나게 마련”이라면서 “소금 하나만 잘 먹어도 웬만한 성인병은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2)-대잇는 가족경영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2)-대잇는 가족경영

    “재계 랭킹 몇 위 어쩌구 하는 언어의 마술에 홀려 방만한 기업경영을 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도리어 나라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그런 기업은 되지 않았다.” 김상홍 삼양그룹 명예회장의 자서전 ‘늘 한결 같은 마음으로’에 나오는 글이다. 김 명예회장의 심정은 삼양그룹 경영의 핵심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올해로 81년째를 맞는 삼양그룹은 흔히 ‘돌다리도 수없이 두드려 본 뒤 건너가는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우보(牛步)경영’ ‘내실경영’ ‘보수경영’ ‘정도경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세계적으로 기업 평균 수명이 30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저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수식어의 이면에는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지 못해 성장동력을 놓쳐 재계 50위권으로 처져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함께 담겨져 있다. ●역대 정권과 긴장관계, 성장경영 꿈도 못 꿔 삼성석유화학 허태학 사장은 강연때마다 삼양사의 사례를 들곤 한다. 허 사장은 “삼양사가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국내 최고의 기업 중에 하나였지만 적극적인 경영을 하지 못해 중견기업으로 뒤처졌다.”며 삼양식의 경영방식에 부정적 평가를 내린다는 게 주위의 전언이다. 그러나 삼양그룹의 시각은 이와는 다르다. 삼양사는 역대 정권과 갈등 관계를 유지하느라 회사를 크게 키울 수 없었다고 반박한다. 실제로 삼양사는 이승만 대통령 재직시 창업주 김연수 회장의 형인 ‘인촌’ 김성수씨가 부통령까지 지내며 이 대통령의 라이벌로 활동해 집중 견제를 받았다. 김 창업주는 1951년 제당공장을 짓기 위해 울산에 부지를 확보했지만 정부가 공장 공사대금으로 활용할 외화 사용 승인을 3년이나 늦게 내줘 고초를 겪기도 했다.3공화국때도 인촌이 창간한 ‘야당지’ 동아일보를 지원하느라 정부의 눈 밖에 나 있었다. 정부의 금융지원 같은 특혜는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게 삼양그룹측의 주장이다. 삼양사 문성환 부사장은 “60∼70년대 급성장한 기업들의 성장동력은 정치권과 야합해 무차별적인 차입경영에 있었다.”며 “그러나 삼양사는 역대 정권과 긴장관계를 유지해 정경유착에 나설 형편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전통기업을 묵묵히 지켜온 2세 기업인 이런 안정 지향적인 기업 경영은 외환위기(IMF)때 빛을 발했다. 부채비율이 높았던 대부분의 기업은 무너졌지만 삼양그룹은 그때나 지금이나 탄탄한 재무구조를 유지하고 있다.2004년 12월 현재 삼양그룹의 매출액은 2조 7180억원에 머물러 있지만 부채는 8537억원으로 부채비율 60%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기간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삼양사는 매출 8902억원, 부채 2799억원, 부채비율 40%다. 이런 이유로 삼양그룹은 지난 9월 재정경제부와 신산업경영원이 주최하는 재무경영종합대상을 수상했다. 삼양그룹이 튼실한 경영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데는 김상홍(83) 명예회장의 공이 크다. 김 명예회장은 1956년 34세에 삼양사 사장에 취임했다. 부친 김연수 회장으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은 것이지만 80년이나 넘게 기업을 온전히 지켜온 ‘수성’(守城)이 그의 최대 업적이다. 김 명예회장이 우리나라 대표 기업을 지켜온 데는 어렸을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철저하게 받은 경영수업 덕이 컸다. 창업주는 1944년 일본 와세다대에 재학 중이던 김 명예회장을 만주로 불러 삼양사가 운영하던 매하구 농장에서 일을 시켰다. 사장 아들이라고 특혜를 베풀지 않고 농장 직원들과 똑같이 숙식하고 생활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호텔 경영인의 꿈을 꾸기도 했다. 이때 창업주는 “무슨 일이든 성공해 맨 윗사람이 되려면 우선 그 분야의 제일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하면서 기초를 익혀야 된다.”며 조선호텔에서 접시닦기와 객실담당(벨보이)부터 맡도록 권했다. 이후 1947년 제헌의원이던 나용균씨의 추천으로 수도경찰청(내무부 치안국) 경위로 특채돼 경찰에 입문했다. 그는 4년간 경찰관으로 복무하다 1952년 큰아버지인 김성수씨가 부통령직에서 사임하자 총경직에서 퇴직했다. 이때부터 김 명예회장은 경영인으로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창업주는 장남 상준씨를 비롯해 둘째 상엽, 넷째 상돈씨에게는 해리염전을 포함한 ‘삼양염업사’를 맡겼다. 김 창업주가 직접 경영하는 삼양사는 셋째인 김 명예회장과 다섯째 상하씨가 일을 하도록 교통정리를 했다. ●밑바닥부터 배워라 김 명예회장은 부친에게 받았던 경영수업이 혹독하리만큼 철저했다고 회고한다. 회사의 맨 밑바닥 일부터 배우라고 지시했는데 주산, 부기, 기장은 물론 고용노무작업, 구매자금조달 등 실무 업무부터 맡아야 했다. 김 명예회장은 일본 와세다대, 상하 회장은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상업고교 출신처럼 주산을 열심해 배워야 했다. 이런 전통으로 인해 삼양그룹은 사무직 신입사원이 입사하면 우선 공장에서 현장 연수를 하는 것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한다. 김 명예회장은 50세가 넘어서도 창업주 앞에서는 의자에 마주 앉는 일조차 삼갔다고 한다. 부친을 지근 거리에서 모셨지만 “아버지 그림자도 안 밟겠다.”며 어려워했다. 지금도 사무실에 부친의 흉상을 두고 ‘무언의 조언’을 듣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이처럼 혹독한 ‘문하생’ 생활을 보낸 김 명예회장은 1950년대 제당사업을 전개할 때는 부친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설탕 영업의 골간을 만들었다.70년대 제당업이 정상에 오르자 경영 다각화의 일환으로 금융업에 진출, 삼양종합금융을 인수했다. 그러나 그는 삼양종합금융은 물론 1대 주주였던 전북은행에도 삼양사 직원을 단 한명도 파견하지 않는 등 자율과 원칙을 지킨 경영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삼양그룹의 장수비결에 대해 “욕심내지 않고 우리가 잘하는 것만, 그것도 능력이 닿는 범위내에서만 사업을 해왔다.”며 “정말 힘든 일이긴 했지만 우리가 잘하는 제조업체에만 집중하면서 넘치지도 않고 부족함도 없는 중용정신을 지켜왔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의 경영철학은 ‘제조업을 통해 건전하게 돈을 벌어야 하고, 수익성이 좋다고 아무 사업이나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던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부회장을 함께 맡았던 김 명예회장에 대해 “과묵 침착하며 절제를 아는 선비, 중용의 참뜻을 실천해온 외유내강형의 단아한 신사”라고 평가했다. 김 명예회장은 1996년 동생인 상하씨에게 그룹회장직을 넘겨주고 자신은 명예회장으로 물러 났다. ●삼양의 제2탄생을 마무리 김상하(80) 그룹회장은 상홍 명예회장과 함께 창업주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를 성장 궤도에 정착시킨 주역이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김 그룹회장은 1949년 삼양사에 몸 담은 뒤 줄곧 부친과 상홍 회장을 도왔다.1952년 일본 도쿄사무소 첫 주재원으로 파견돼 삼양사 공장설계와 전문가 채용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경영일선에 뛰어들었다. 상홍 명예회장과 상하 회장은 형제간이긴 해도 서로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았다. 상홍 회장이 조용히 지내기를 좋아하는 반면 상하 회장은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했다. 상홍 회장이 사람을 가려서 만난다면 상하 회장은 이런저런 사람을 폭넓게 사귀는 성격이다. 취미도 상홍 회장은 단조로움을 즐겼던 반면 상하 회장은 스포츠와 여행을 좋아했다. 때문에 그룹 경영에 있어서는 꼼꼼한 상홍 명예회장이 관리를 맡고, 활동적인 상하 그룹회장이 영업전선에 나서는 등 형제간 역할분담을 이뤘다. 실제로 상하 회장은 유창한 일어 실력과 깨끗한 인품으로 재계에서는 국제 감각이 뛰어난 대표적인 일본통으로 꼽혔다. 특히 1988년부터 12년간 최장수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많게는 100여개의 대외 직함을 수행할 정도로 전방위 활동을 벌였다. 상하 회장은 이런 왕성한 대외활동을 바탕으로 제조업 중심으로 삼양의 성장을 진두지휘했다. 폴리에스테르 사업의 경우 10년에 걸친 증설을 이끌어 국내 최대 폴리에스테르 업체로 위상을 높였다.1980년대에 집중된 화학, 의약 등의 사업 다변화에도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폭넓은 대외 교분을 토대로 미쓰이, 미쓰비시화학과의 각종 기술제휴 및 합작이 추진돼 삼양화성, 삼남석유화학을 설립했다. ●외유내강의 기업인 상하 그룹회장은 소탈하면서 모가 없는 성품이지만 그룹경영에 있어서는 진퇴를 명확히 제시하는 ‘외유내강형’의 기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90년대 국내 폴리에스테르 업체들이 신·증설을 활발하게 진행했지만 그는 화학섬유 사업의 한계를 감안해 대규모 증설 프로젝트를 중단했다. 또한 섬유본부에서 신사업으로 오랫동안 검토해 샘플 제작까지 끝낸 폴리에스테르 필름 사업도 사업의 구조적인 경쟁력과 취약성을 들어 사업을 중단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상홍 명예회장을 모시는 데도 깍듯했다. 상홍 회장이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수시로 의견을 구했다. 상하 회장은 서울 성북동에 형집과 담장 하나 사이를 두고 함께 살고 있다. 담장 중간에 쪽문을 해놓고 수시로 오갈 수 있는 ‘핫라인’까지 설치해 놓고 있다. 상홍 명예회장은 자서전에서 “동생과 집을 나란히 짓고 살게 된 것은 동생이 스스로 땅을 함께 사고 집도 순서대로 나란히 짓고 살아온 덕”이라며 “아우는 본래 2층집을 짓고 싶었는데 순전히 나 때문에 일조권을 염두에 두고 단층집을 짓고 산다.”며 돈독한 형제애를 소개했다. 상하 회장은 2004년 3월 상홍 회장의 장남이자 조카인 김윤 삼양그룹 부회장에게 ‘대권’을 물려줬다. 아들인 원씨는 삼양사 사장에 나란히 취임했다. 이로써 1975년부터 30년간 지속된 2세 형제경영에 이어 3세 사촌 형제간 공동경영 시대의 막이 올랐다. ●숨은 주역들 김 명예회장과 그룹회장은 삼양그룹이 81년의 전통을 이어온 데는 동생들과 매제의 역할히 컸다고 회고한다. 김 명예회장은 “나는 아우들과 함께 회사를 경영하면서 크고 작은 일에 신중을 거듭했다. 아우들과 수시로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선친께서 잡아놓은 틀을 잡는 데 힘썼다.”고 말했다. 김 명예회장은 회사 발전에 공을 세운 일등공신으로 지난 2002년 작고한 김상응 막내 동생을 손꼽는다. 서울대 외교학과와 미국 유타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상응씨는 96년부터 삼양사 회장으로 재직하며 외환위기 등 창업 이래 최고의 시련기를 뚝심으로 돌파하는 경영 수완을 발휘했다고 떠올린다. 부인 권명자(53)씨와 4남 1녀인 자식들은 남편이 죽은 뒤 미국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또 막내 여동생 희경(66)씨의 남편 김성완(66)씨의 공헌도 높이 평가했다. 김씨는 미국 유타대 교수로 생체고분자 및 약물전달시스템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김 교수는 김 명예회장에게 “기업이 발전하려면 연구개발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데 장래성이 좋은 분야는 의약계통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수차례 강조했다. 결국 김 명예회장은 김 교수의 의견에 따라 1993년 충남 대덕 연구단지에 ‘삼양그룹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삼양그룹이 중점사업으로 키우고 있는 화학, 식품, 의약부문의 성장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제는 공격경영 김윤(53) 회장은 부친 상홍 명예회장, 상하 그룹회장과 같이 바닥부터 경영수업을 받았다.1979년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LG그룹 계열인 반도상사에 취직했다. 자신의 회사를 경영하기에 앞서 다른 회사 직원으로 영업전선을 두루 체험해 보라는 부친의 의도였다. 이를 두고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김상홍 회장님의 큰자제가 2년간 반도상사에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내게는 그런 사실을 전혀 귀띔도 해주지 않았다.”며 “나는 훗날에야 그 사실을 알고 한쪽으로는 좀 서운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상홍 회장님의 인품을 새삼 느꼈다.”고 회고했다. 김 회장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MIIS(Monterey Institute of International Studies)에서 MBA 석사를 취득한 뒤 곡물회사인 루이스 드레푸스에서 2년간 근무하며 국제적인 경영감각을 익혔다. 또 삼촌인 상하 그룹회장처럼 도쿄지점에서 2년간 주재하며 삼양그룹의 해외진출 사업을 손수 챙기며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다져 나갔다. 고국에 귀국한 뒤에는 울산공장 기술수출팀을 시작으로 이사(90년)-상무(91년)-대표이사 전무(93년), 대표이사 사장(96년)-대표이사 부회장(2000년) 등을 거치며 착실히 경영수업을 쌓았다. 2004년 삼양사 회장에 취임한 김 회장은 차분하고 안정적인 경영 스타일로 삼양의 전통을 중시하는 한편 보수적인 관행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회장은 취임 일성으로 “삼양그룹은 보수적이고 안정 위주의 경영전략을 구사해 성장이 정체돼 있었다.”며 “앞으론 사고방식을 진취적으로 전환해 그룹의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포부를 밝혀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2010년까지 2조원을 투자해 매출액 6조원을 달성하고 자본수익률 2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이를 위해 화학, 식품, 의약, 신사업 등 4대 부문을 핵심 성장 사업군으로 설정했다. ●다시 세계로 진출 2004년에는 중국 상하이에 전기전자, 부품소재 등을 생산하는 삼양공정소료 유한공사를 설립, 창업주인 할아버지가 만주에 진출한 데 이어 68년 만에 중국에 현지법인 형태로 재진출했다. 향후 중국을 기점으로 인도, 중남미 등 생산기지를 다각화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 세계적인 전문 화학회사로 육성한다는 복안이다. 또한 식품부문을 총괄하는 통합 브랜드로 ‘큐원’(Qulity No.1)을 출범시켰다.47년간 사용해 오던 대표 브랜드 ‘삼양설탕’을 과감히 버리고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식품소재기업으로 성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김윤 회장의 이런 자신감은 1996년부터 삼양사 사장과 부회장을 거치며 길러졌다. 과감한 추진력은 외환위기를 거치며 발휘됐다. 사장 시절이던 1998년 사업실적이 저조한 금융업과 무선통신사업을 포기하고 계열사를 섬유·식품·화학 등을 핵심 사업군으로 재편했다. 특히 삼양사의 주축이었던 폴리에스테르 사업부문을 과감히 정리,2000년 SK케미칼과 통합법인 휴비스를 설립했다. 이후 삼양그룹 직원들은 단 한명의 구조조정과 한 푼의 임금삭감 없이 경영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이런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지난 19일 서울대 산학협력재단이 주최한 ‘제1회 한국을 빛낸 CEO’에 이명박 서울시장, 정운찬 서울대 총장,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이지송 현대건설 사장 등과 함께 뽑혔다. 또 2001년 전경련 부회장에 선임됐고 한·일경제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3세에도 공동경영 상하 그룹회장의 장남인 김원(48) 사장은 선대 회장들처럼 사촌 형인 김윤 회장을 도와 삼양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러나 3대 경영의 주역들은 선대 회장들과는 달리 서로 상반된 성격을 지녔다. 윤 회장은 부친인 상홍 명예회장이 내성적인데 반해 활발한 활동으로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반면 원 사장은 전방위 대외활동을 펼친 부친 상하 그룹 회장과는 달리 묵묵히 사촌형을 챙기고 있다. 원 사장은 연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유타대에서 재료공학과 산업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윤 회장처럼 도쿄지점 부장을 거쳐 삼양이 의약부문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1993년 개발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의약사업의 기초를 닦았다. 이후 연구개발 부문을 관장하면서 이사, 상무로 승진한 뒤 1997년 연구개발본부장(전무)에 오르는 등 ‘테크노 경영인’으로 각인되고 있다.1999년 부사장 승진에 이어,2000년 8월 대표이사 사장에 선임됐다. 이공계 출신으로 매사에 치밀하며 경영분석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외 영업에 치중했던 부친과 달리 관리쪽에 무게가 실리는 경영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결혼도 자식 뜻대로 상홍 명예회장과 상하 그룹회장은 창업주처럼 자식들의 결혼과 관련해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보다는 본인들의 의사를 최대한 들어주는 스타일을 지켰다. 상홍 명예회장의 장남 김윤 회장은 친구들 모임에서 부인 김유희(46)씨를 처음 만났다. 김 회장은 이화여대를 졸업한 김씨를 보고 첫눈에 반해 데이트를 신청했다고 한다. 김 회장은 김씨가 상당한 미모를 갖추고 있는데다 집안 대대로 친척들이 이대 출신이 많다는 점도 맘에 들었다고 고백한다. 김 회장은 부인을 웬만한 행사에는 동행할 정도로 ‘부인사랑’이 남다르다. 지금도 사석에서 김 회장의 18번인 ‘만남’을 두 부부가 함께 부른다고 한다. 김원 사장도 친구들끼리의 모임에서 부인 배주연(41)씨를 만나 열애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반면 김량(51) 삼양제넥스 사장과 김정(46) 삼남석유화학부사장은 중매로 배필을 만났다. 김량 사장은 김정렬 전 국방부 장관의 중매로 부인 장영은(46)씨와 혼인했다. 상홍 명예회장과 김 전 장관의 집안이 오래전부터 친해 자연스레 연결됐다. 김 전 장관은 영은씨의 부친인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과 막역한 사이어서 혼인을 주선했다. 김정 부사장은 어머니 박상례(75)씨가 자영업을 하는 친구의 소개로 안혜원(39)씨를 만났다. 안씨 부친이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어서 흔쾌히 혼담이 오갔다. jrlee@seoul.co.kr ■ 막강한 손녀사위들 김연수 삼양사 창업주는 부인 박하진씨와의 사이에 7남6녀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김 창업주는 2세들보다 3세들의 혼사를 통해 혼맥을 이뤘다. 재계, 정계, 언론계, 법조계 등 매우 다양하다. 이 가운데 손녀사위들은 대학교수, 의사, 경영인 등의 전문 직업군을 이루며 삼양가(家)의 명망을 잇고 있다. 둘째아들인 김상협 전 국무총리는 1남3녀를 두었는데 3명의 사위가 모두 교수인 것이 이채롭다. 김 전 총리는 형제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다고 한다.5년제였던 경복중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대(당시는 도쿄제대) 법학부 정치학과를 나올 정도의 수재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김 전 총리는 학자 사위들을 좋아했다. 김 전 총리의 장녀 명신(58)씨 남편 송상현(65)씨는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송씨는 송진우 전 동아일보 사장의 손자다. 둘째딸 영신(56)씨는 정성진(58) 서울대 공대 교수와 결혼했다. 정씨는 정태섭 전 변호사의 아들이다. 막내딸 양순(52)씨의 부군 이양팔(59)씨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다. 또 상홍(83) 명예회장의 장녀 유주(56)씨도 윤영섭(59)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와 혼인했다. 창업주의 넷째딸인 정유(73)씨는 외동딸인 원경(43)씨를 한정수(48) 전 충남대 교수와 결혼시켰다. 손녀사위들의 ‘의사 파워’도 만만치 않다. 김 창업주의 둘째딸 상민(78)씨는 둘째딸인 이정현(41)씨를 백완기(47) 인하대병원 흉부외과 의사와 인연을 맺어 줬다. 김 창업주의 셋째딸 정애(75)씨 장녀 조경미(47)씨의 부군 주춘희(47)씨도 캐나다에서 병원을 운영 중이다. 그러나 삼양가가 전문 경영인 집안이어서인지 손녀사위들도 전문 경영인이 많다. 김 창업주의 장남 상준씨의 장녀 정원(62)씨의 남편 김선휘(68)씨는 삼양염업사 부회장으로 재직하며 처가의 가업을 잇고 있다. 둘째딸 정희(58)씨는 김준기(62) 동부그룹 회장과 결혼했다. 또 셋째딸 정림(57)씨도 윤대근(59)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이자 동부그룹 소재분야 부회장과 결혼해 유달리 ‘동부그룹’과 인연이 많다. 창업주의 둘째 김상협 전 총리가 교육자 집안으로 꾸렸던 것에 비해 장남 상준씨는 전형적인 경영인 가족을 형성한 셈이다. 넷째 상돈(81) 삼양염업사회장은 외동딸 희진(45)씨를 오광희(49) 전 나이스 정보통신 전무와 결혼시켰다. 다섯째 상하(80) 그룹회장도 외동딸 영난(44)씨를 송하철(45) ㈜ 항소 사장과 혼인시켰다. 송씨는 송삼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다. jrlee@seoul.co.kr ■ 계열사 사장들 ‘전문적 경험’ 풍부 삼양그룹의 현 계열사 사장들은 경영전면에 나선 창업주의 3세들을 지원하는 것에 역할이 주로 맞춰져 있다. 분야별로 전문적 경험이 풍부해 경영 승계가 무리없이 이뤄지도록 돕고 있다. 박종헌(66) 삼양사 사장은 40년동안 영업, 해외업무, 인사, 재무, 기획분야를 두루 거쳤다.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박 사장은 법학도답게 매사 논리적이고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다. 이영훈 대법원장과 서울법대 동기동창이다. 김량(51) 삼양제넥스 사장은 김상홍 명예회장의 차남으로 경방유통에서 16년간 재직하며 사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유통부문의 핵심 역량을 쌓아왔다.2002년 삼양제넥스에 입사해 제조업 유통부문의 경영 노하우를 성공적으로 접목시키고 있다. 김 사장은 창업주의 손자이지만 직원들과 자주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즐기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다. 김경원(62) 삼남석유화학 사장은 전주 폴리에스테르 공장 설립때부터 중앙연구소 소장, 화성본부장, 삼양화성 사장 등 화학, 섬유, 폴리카보네이트 등을 두루 지낸 전문 경영인이다. 폴리에스테르 부문의 대가로 ‘폴리머 김’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김 사장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연구통’이다. 송창기(63) 삼양중기 사장은 인사관리분야에서 15년간 일해온 ‘인사통’이다. 총무부장, 인사부장, 관리본부장을 지냈다. 송 사장은 삼양중기에서 기계부문 4개사로의 분사와 주물사업부문 합작사 설립을 성공리에 추진했다. 박호진(59) 삼양화성 대표는 도쿄지점을 거쳐 전주공장에서 20년 동안 현장 경험을 쌓았다. 지난 3월 대표로 선임돼 사원간에 가족적인 유대감을 높이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규한(58) ㈜삼양밀맥스 대표는 판매와 현장을 두루 거친 식품부문 전문가다. 경영과 마케팅 감각을 두루 갖췄고 비전팀을 만들어 내부 혁신활동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변수식(55) 삼양데이타시스템 대표는 전사적자원관리(ERP)팀장,IT전략팀장, 경영혁신(PI)팀장 등 프로세스 이노베이션 업무를 주로 맡았다. 변 대표는 IT부문의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IT통’이다. 김상익(59) 삼양웰푸드 대표는 경리부, 삼양제넥스 경영지원팀장을 거치는 등 25년 동안 경리와 관리를 맡았다.2004년 대표로 선임돼 원칙과 현장을 중시하는 현장 밀착형 경영을 중시한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고침 서울신문 17일자 15면에 게재된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편에서‘송진우 전 동아일보사장의 아들인 상현 서울대 법대교수’는 ‘송 전 사장의 손자’이기에 바로잡습니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일반인들에게 ‘삼양설탕’(현 ‘큐원설탕’)으로 익숙한 삼양사는 한국 근대경제사를 주도한 명문 기업이다. 호남 거부의 후예인 김연수(金秊洙) 창업주는 일제하인 1924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기업을 설립, 한국기업의 명맥을 이었다. 김 창업주는 형인 인촌(仁村) 김성수씨가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꾸려가도록 뒷받침했고, 여러 차례 재산을 털어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뒤에서 도왔다. 그러나 김 창업주는 일제하에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친일인사로 선정하는 등 사후에 ‘친일’ 시비에 휘말리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근대 한국경제의 산증인인 김 창업주의 삶은 굴곡 많은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김 창업주는 1896년 10월1일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부친 김경중씨와 모친 장흥 고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형의 호인 인촌은 바로 두 형제가 태어난 동네 이름을 따온 것이다. 김 창업주의 부친은 1만 5000석 지기의 호남 최대 거부였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부친은 일제하에서 나라가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당시 저명한 사학자들을 몰래 불러 ‘조선사’를 17권이나 엮을 정도로 민족애가 투철했다는 게 삼양그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창업주는 어린 시절 외롭게 지냈다. 김 창업주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일찍 잃었다. 여기에다 한 명뿐인 형인 인촌이 큰아버지인 김기중씨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양자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어릴 적 김 창업주는 몸이 허약했다. 폐가 약했으며 위도 튼튼하지 못해 일찍이 폐와 소화기 계통의 질병으로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는 부모의 애를 끓게 했다. 이런 이유로 개구쟁이처럼 장난이 심하고 활발했던 인촌과는 달리 김 창업주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고,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품을 지녔다. ●27세에 경영인으로 출발 김 창업주는 15세 되던 1910년 12월8일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박하진씨와 혼인을 맺었다. 결혼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인 최초로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922년 형의 권유로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전무와 상무에 취임, 경영인의 삶을 시작했다. 김 창업주는 고무신과 ‘태극성표’ 광목을 대히트시킴으로써 일본자본과 맞서는 최대의 민족회사를 일궜다. 집안 내력을 잘 아는 김재억 삼양사 상임감사는 “30년대 경성방직은 우리나라 금융거래 절반을 담당할 정도의 민족 최대 기업이었다.”고 말했다. 김 창업주는 또한 농촌재건을 위해 소작농을 협동농업 형태로 결합한 근대영농을 시작했다. 이를 발판으로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해 호남 일대의 소유농토에 대한 근대화 작업에 나섰다. 장성, 줄포, 고창, 명고, 신태인, 법성, 영광농장을 차례로 개설해 기업형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간척사업에도 눈을 돌려 손불농장과 해리농장의 2개 지역에 1070정보의 농토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상호가 삼양사(三養社)로 바뀌었다. 어느 날 한 작명가가 찾아와 ‘물 수’(水)를 ‘만인의 양식’이라는 뜻인 ‘기를 양’(養)으로 바꿀 것을 권했다고 한다. 김 창업주는 만주벌 개척에도 나섰다.5개 협동농장을 개설한 데 이어 봉천에 남만방적을 설립했다. 남만방적은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생산법인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으로 만주의 사업장들을 고스란히 놓고 철수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제당업으로 재기에 나서 해방공간을 겪으면서 반민특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 창업주는 한국 전쟁 이후 해체상태에 놓였던 삼양사 재건에 나섰다. 그는 재기의 발판으로 제당업과 한천제조업을 선택했다. 당시 설탕은 수입에 의존해온 대표적인 외화소비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울산 바닷가를 메워 그곳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건설했다. 그는 1956년 삼양을 제당으로 키우면서 주식회사 삼양사를 출범시켰다. 자신이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고, 사장에 3남인 상홍(83), 상무에 5남 상하(80)를 앉혔다.3남과 5남이 삼양사를 맡는 전통은 3세에도 그대로 이어져 삼양그룹은 현재 상홍씨의 장남 윤(53)씨와 상하씨의 장남 원(48)씨가 삼양사 회장과 사장을 맡고 있다. 둘째 아들들인 량(51)씨와 정(46)씨도 각각 삼양제넥스 사장과 삼남석유화학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당시 삼양사보다 수익률이 높았던 해리염전을 삼양염업사라는 별개의 회사로 독립시키고 맏아들 상준(작고)을 사장에 임명해 경영을 맡겼다.3공화국때 문교부장관과 5공화국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차남 상협(작고)에게도 삼양염전의 지분 25%를 떼어주어 형제간 경영권을 일찌감치 교통정리했다. ●재계의 거목으로 김 창업주는 1962년 설립한 삼양수산을 통해 다양한 어종을 가공, 수출하는 등 한때 냉동선만 21척을 보유할 정도로 수산업에도 주력했다. 이처럼 제당과 수산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한국경제협의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 한국 재계의 얼굴이 되었다. 경영이 본 궤도에 오르자 김 창업주는 전주방직을 인수, 삼양모방(주)을 설립했다. 이어 1969년 전주에 대단위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건설했다. 이로써 70년대 들어 삼양은 국내 초창기 산업의 중심이었던 제당으로 확고한 제조업체로의 변신을 이룩했다. 이 당시 삼양은 매출액에서나 기업선호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국내 정상급 기업으로 우뚝 섰다. 김 창업주는 사업에 투신한 지 만 53년이 되던 1975년 회장을 상홍에게, 사장에 상하를 임명하는 등 ‘2세경영’을 출범시키고 은퇴했다. 그의 나이 80세일 때였다. 그는 은퇴 후 농촌으로 돌아가 마지막 열정을 쏟다가 1979년 84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교육사업도 아낌없는 지원 그는 기업경영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운영기금을 출연한 것을 비롯해 양영회와 수당장학회를 설립,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문성환 삼양사 부사장은 “창업주는 두 재단을 통해 대학생 2만여명에게 대학등록금을 비롯해 하숙비, 책값, 소정의 용돈까지 장학금으로 대줬다.”고 회고했다. 이런 김 창업주의 혜택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덕수 경제부총리, 오세철 연세대 교수 등이 꼽힌다. 경성방직의 회계를 맡아 김 창업주를 도왔던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는 “수당(秀堂·김 창업주의 호)은 돈 쓰는 데도 일가견을 가진 사람으로 만금을 쓰면서도 기업경영에는 한 푼을 아꼈다.”고 그의 용전(用錢)철학을 전했다. 김 창업주는 경쟁회사에도 관대했던 묵묵한 성격의 경영인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1966년 삼양의 경쟁회사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던 한국비료가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곤혹을 치렀다. 임원들이 ‘사카린 없는 삼양설탕’이라는 문구로 대대적인 광고전을 벌이자고 수차례 건의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은 사례는 그의 성품을 읽는 일화로 경영인들에게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방대한 혼맥…사회 각 분야와 사통팔달 김 창업주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7남6녀 13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아들로는 장남 상준(작고), 차남 상협(작고),3남 상홍(83),4남 상돈(81),5남 상하(80),6남 상철(70),7남 상응(작고) 등 7남과 장녀 상경(79), 차녀 상민(78),3녀 정애(75),4녀 정유(73),5녀 영숙(72), 막내 희경(66) 등 6녀를 두었다. 김 창업주 가문의 혼맥은 정계·관계·학계·언론계·재계·교육계 등과 거미줄처럼 얽힌 방대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김 창업주의 성격이 소탈해 자식들에게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보다는 평범하고 무난한 결혼을 시켰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김재억 감사는 “창업주의 생활철학이 권세를 배격하는 것이어서 자식들이나 3세들의 결혼에도 사돈 될 집안의 내력과 상대방의 성실성을 먼저 봤다.”고 회고했다. 김 창업주는 특히 자녀들의 대부분은 중매결혼으로 짝지웠지만 사위와 며느리를 맞는 데서는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사위를 고를 때는 가문을 따지지 않고 사람됨됨이와 능력을 위주로 보았고, 며느리는 후덕한 집안 출신으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기를 원했다. 특히 사돈가의 위치를 보고 정혼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해 그의 직접 사돈 가운데는 정관재계의 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김 창업주의 며느리들 가운데 위로 세 명은 이화여전 출신 등으로 당시의 김 창업주가 원했던 신여성들의 표본이 많았다. 반면 창업주의 형인 인촌 성수씨도 9남4녀를 두어 대가를 이뤘는데 장남인 상만(작고)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직계 자손들은 화려한 혼맥을 자랑하고 있다. 고려대 이사장이자 동아일보 전 회장인 장손 병관씨는 장남 재호(41·동아일보 대표이사 전무)씨를 이한동 전 총리의 차녀인 정원(38)씨와 결혼시켰고,2남 재열(37·제일모직 상무)씨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녀인 서현(32·제일모직 상무보)씨와 결혼했다. 김연수 창업주 자녀들의 혼맥을 살펴보면 장남 상준씨는 당시 집안과 각별하게 지내던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의 소개로 이뤄져 1943년 구영숙씨의 맏딸 연성(85)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상준씨는 보성전문 상과를 나와 조흥은행에 근무할 때였고 연성씨는 이화여전 음대를 졸업한 직후였다. 상준씨는 3명의 딸을 출가시켜 정·관·재계 인맥을 형성했다. 장녀 정원(62)씨의 부군은 고려대와 국가대표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김선휘(68·삼양염업사부회장)씨다. 축구를 좋아하던 상준씨는 모교인 고려대 축구팀을 지원했는데, 이 일로 선휘씨가 상준씨 집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혼사가 맺어졌다. 차녀 정희(58)씨는 5공시절 당시 거물 정치인이었던 김진만씨의 맏며느리로 보내 동부그룹 회장인 김준기(64)씨를 사위로 맞았다.3녀 정림(57)씨는 전 문교장관 윤천주씨의 장남 대근(59)씨와 결혼했다. 대근씨는 현재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과 동부그룹 소재분야 부회장을 맡고 있다. 상준씨의 장남 병휘(60)씨는 한양대 자연과학대 자연과학부 수학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차남 범(52)씨는 독신으로 지내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차남 상협씨는 해방 직후 고려대 부교수 시절, 의사 김준형씨의 2남3녀 가운데 맏딸 인숙(82)씨와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인숙씨도 니혼조시 대학을 나온 당시 보기 드문 일본 유학 신여성이었는데 상협씨의 도쿄제대 동창 부인의 소개로 만나 연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녀 명신(58)씨를 송진우 전 동아일보사장의 아들인 상현(65) 서울대 법대교수와 혼인시켰다.2녀 영신(56)씨는 정태섭 전 변호사의 아들 성진(58)씨와 결혼했다. 외아들 한(52)씨는 메리츠증권 부회장으로 있다. 3남 상홍(83)씨는 구 치안본부 재직시절 수원갑부 차준담씨의 2남2녀 가운데 맏딸 부영(79)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영씨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재원이었다. 상홍씨는 2남2녀 가운데 장남 윤씨를 전 서울신문사 김종규 사장의 딸 유희(46)씨와 혼인시켜 벽산그룹 김인득 회장과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됐다. 또 차남 량씨는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막내딸 영은(46)씨와 백년 가약을 맺었다. 영은씨의 오빠 장대환씨는 매일경제 신문 창업주 정진기씨의 사위로, 현재 매일경제신문 대표이사회장 인쇄인 겸 발행인과 현 매일경제TV 대표이사 회장이다. 장녀인 유주(56)씨를 사업가 윤주탁씨의 2남 영섭(59·고려대 상대교수)씨에게 시집 보내 윤주탁씨와 직접 사돈간인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과 연결되고 있다. 영섭씨의 남동생인 영식씨가 박 전 위원의 장녀 진아(48)씨와 결혼했다. 4남 상돈씨는 6·25 직후 김유황 전 광장㈜ 부사장의 딸 용옥(73)씨와 결혼했다. 상돈씨는 맏형인 상준씨의 중매로 장남 병진(52)씨를 축구협회 부회장과 축구대표팀 감독을 지낸 한흥기씨의 딸인 혜승(45)씨와 맺어줬다. 차남 영로(50)씨는 사업을 하던 정형식씨의 딸 은미(46)씨와 혼인했다. 외동딸 희진(45)씨는 전 대한항공 이사 오명석씨의 외아들 광희(49)씨에게 시집갔다. 광희씨는 전 나이스정보통신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5남 상하씨는 삼양사 설탕공장 설립관계로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1953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귀국, 바로 박상례(75)씨와 혼인을 맺었다. 상례씨는 공무원 출신인 박규원씨의 딸로 김 창업주의 친구가 중매를 섰다. 외동딸인 영난(44)씨를 송하철(45·주식회사 항소 사장)씨와 결혼시켜 송남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며느리로 보냈다. 장남 원씨를 배영화 경희어망 회장 딸인 주연(45)씨와 맺어 줬다. 차남 정씨는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딸인 혜원(39)씨와 결혼했다. 6남 상철(70)씨는 사업을 하던 우근호 씨의 딸 정명(63)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7남 상응(작고)씨는 공무원 생활을 했던 권오경씨의 5녀중 셋째딸 명자(53)씨와 결혼했다. 장녀 상경(79)씨는 아폴로박사 조경철씨와 결혼 후 이혼해 조서봉(필립), 조서만(조지) 등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차녀 상민(78)씨의 남편은 이두종(작고)씨로 활발하게 삼양사의 경영에 참여했다. 온양 지주의 아들로 자란 두종씨는 1956년 삼양사 과장으로 입사해 이 회사의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올랐다.1984년 회사를 떠난 뒤에도 삼양그룹이 운영하는 재단법인 양영회와 수당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3녀 정애(75)씨는 교육계에 몸담았던 조종립씨의 아들 석(작고)씨와 결혼했다. 석씨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결혼 후인 57년 삼양사에 사원으로 입사, 총무부장·경리부장·이사·상무·대표이사 부사장을 거쳐 전 삼양제넥스 상임고문까지 역임했다. 4녀 정유(73)씨의 남편은 전 서울대 부총장인 김영국(작고)씨다. 그는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김덕창씨의 8남매 가운데 3남으로 인천이 낳은 천재로 불리었다. 이들은 김 창업주 친구의 소개로 결혼했다. 영국씨는 서울대 정치학과 총동창회장을 지낸 상하씨의 후배이자 매제인 셈이다. 5녀 영숙(72)씨는 미국인 스테푸친과 결혼, 딸 페기, 아들 프랭크를 두고 미국에서 살고 있다. 막내딸 희경(66)씨도 교육자였던 김종규씨의 아들 성완(68·삼양사 의약사업 고문)씨와 결혼,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성완씨는 미국 유타대학 석좌교수로 인공심장 분야의 권위자다. jrlee@seoul.co.kr ■ 창업주의 친일논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8월29일 친일인사인명사전 편찬을 앞두고 수록예정자 명단 3090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삼양사의 창업주 김연수씨도 포함됐다. 김씨는 전쟁협력 분야에서 ▲1939년 만주국 명예 총영사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조선방적 이사장 ▲1940∼1945년 중추원 참의(자문위원)를 지냈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이에 대해 삼양그룹측은 대응을 일절 자제한 채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다만 그룹의 한 관계자는 “창업주가 일제의 압제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등 깜짝 놀랄 만하게 대항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일제의 폭거에 맞서 민족자본을 형성했다.”며 “후세에 역사가들이 올바른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보다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도 창업주는 무죄를 받았다.”고 해명했다. 또 창업주는 창씨 개명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 창업주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는 일제시대 그의 행적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6부로 구성된 전기에는 4부 ‘고난의 시절’ 편에 일제에 협조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었던 고심의 일단들이 실려 있다. 김씨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통렬한 자기반성의 글을 실었다. 김 창업주는 반민특위에 검거돼 7개월간 수감됐지만 이런 반성의 자세가 참작됐는지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경성방직을 경영함에 강력히 일본자본과 싸웠고, 항상 한민족을 위한 경제적 기반확립에 노력했고, 경성방직의 상표를 태극기에서 모방한 것으로 보아 피고의 행위는 많이 참작할 곳이 있으며, 그 외의 관직 및 명예직은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피동적으로 맡은 것이라고 증명되며, 또 피고는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학생에게 원조를 해 그의 혜택을 본 자의 수는 현재 수백명에 달하는 것이니 이 점으로 피고가 남긴 공적은 크다고 할 것이며, 기타 증인의 증언을 통해 볼 때 피고를 단순히 친일 및 반민족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jrlee@seoul.co.kr ■ 형 김성수와 동생 김연수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인촌(仁村) 김성수와 수당(秀堂) 김연수를 아는 주위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인촌과 수당은 호남갑부 김경중씨의 두 아들이었지만 성격은 딴판이었다. 수당은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침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반면 형 인촌은 활달하고 외향적이었다. 여기에 형제는 다섯살이나 터울이 져 어린 시절엔 서로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평생을 친한 형제로 지냈다. 인촌은 수당이 근대적 교육을 받도록 인도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일본으로 가게 해 중·고등학교와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도록 도왔다. 수당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일찍이 ‘기업인’이 될 것을 결심했다. 오사카의 공장지대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결단의 계기였다. 이처럼 수당의 행적은 형 인촌의 행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수당이 기업가로서 길을 걷는 데는 인촌이 설립하고 인수한 기업의 경영을 맡음으로써 시작됐다. 수당이 경영인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도 1922년 형이 운영하던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인을 맡고부터다. 이후 수당은 경영인으로서 성공하자 인촌을 적극 도왔다. 생전에 인촌은 수당이 없었으면 교육사업을 비롯한 자신의 활동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곧잘 술회했다. 수당은 언제나 인촌에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껏 뜻을 펼치라고 말했다. 인촌이 설립한 고려중앙학원이나 고려대,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등 모두 동생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수당은 1940년대까지 고려중앙학원과 고려대에 기부한 재산이 연 평균 250만원에 이르렀는데, 이를 현 시가로 어림잡아 환산하면 1000억원(쌀값 기준)을 훨씬 넘는 액수다. 그러면서도 동생은 형이 하는 일을 뒤에서 묵묵히 돕기만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형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나는 재정적인 지원만 하면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형을 만날 때마다 “형님은 교육과 문화사업을 하세요. 저는 뒤에서 돈을 대리다.”라며 든든한 후원자를 자임했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지금 대구에선] 東西 29㎞ 안전망 촘촘히… ‘安全鐵’ 달린다

    [지금 대구에선] 東西 29㎞ 안전망 촘촘히… ‘安全鐵’ 달린다

    대구지하철 2호선이 오는 18일 개통된다. 서울 부산에 이어 전국에서 3번째다. 대구도 복수 지하철시대를 맞이한 것이다.2호선은 지난 1997년 1월 첫삽을 뜬 이후 8년9개월의 긴 공사기간동안 사업비 2조 3330억원, 연인원 692만명이 투입된 대공사의 결실이다. 달성군 다사(문양역)에서 수성구 고산(사월역)까지 29㎞구간을 동서로 잇는 대구 지하철 2호선은 앞으로 대구 시민들의 발이 될 전망이다.2호선은 최상의 안전시스템을 갖춘 최첨단 지하철로 1호선에 비해 안전성을 높이고, 이용객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대폭 확충했다. ●안전 강화 200여명이 숨진 1호선 중앙로역 화재 참사를 계기로 2호선은 무엇보다 안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전동차 차체는 스테인리스 스틸 강재로 제작했고 전동차내 바닥재와 단열재, 차량연결 통로막 등은 모두 불연성 또는 극난연성 재질로 바꾸었다. 또 전동차 1량에 2개의 화재감지기를 갖춰 화재 발생시 자동으로 비상방송과 함께 운전실, 종합사령실에 경보를 울려 즉각 대응토록 했다. 특히 1호선 중앙로역 화재 참사 당시 화재발생후 반대편에서 나중에 들어온 전동차로 인해 인명피해가 컸다는 지적에 따라 기관사가 승강장 진입 300m 앞에서 승강장 상황을 볼수 있는 폐쇄회로 TV(CCTV)가 역사마다 설치됐다. 또 서울지하철 7호선 화재시 기관사와 역무원, 종합사령실간의 다자간 통화시스템이 미비, 신속대처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에 따라 사령실-기관사, 기관사-역무원, 기관사-기관사, 사령실-역무원간 통화가 가능하도록 무선통신장치를 대폭 보완했다. 승강장 선로에 승객이 추락 또는 위험물이 떨어지는 사고발생에 대비, 승강장당 10개의 비상정지 버튼을 설치, 승객과 역무원이 승강장으로 진입하는 전동차를 비상 정지시킬 수도 있다. 승강장내 벽, 바닥, 천장 등 마감재료도 불연재로 모두 바꾸었고 전 구간 승강장에 추락방지 안전펜스를, 다사와 대실역에는 전국 최초로 스크린도어를 각각 설치했다. ●편의시설 확충 2호선은 1호선에 비해 장애인과 노약자를 위한 편의시설이 대폭 확충됐다.26개 모든 역사에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외부 인도에서부터 설치, 장애인과 노약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해 역사 출입구에 음향유도기가 설치됐고, 장애인용 승차권 발매기도 선을 보인다. 여성들을 위해 역사마다 여성용 화장실을 남성화장실과 동일하거나 더 많이 설치했고, 모든 여성화장실에는 에티켓 벨(물 흐르는 소리 음향장치)과 비상호출 버튼을 갖추었다. 용산·두류·범어·대공원역에는 전시장과 공연장을 갖추고 공모를 통해 선정된 대형 조형예술품을 설치, 문화공간으로 활용토록 했다. 또 두류·반월당·봉산역에는 민자유치를 통해 상가와 휴게시설, 주차장 등이 들어서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쇼핑까지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문양·용산·신매역에는 승객용 주차장이, 전 역사에는 자전거보관소가 설치돼 있다. ●개통 효과 2호선의 개통으로 현재 하루 14만명선인 대구 지하철 이용객수는 43만여명으로 늘어나고 수송분담률도 3.4%에서 9.7%로 높아진다. 우선 시민들의 출·퇴근시 이동시간도 크게 줄게 된다. 수성구 신매역에서 도심인 중구 반월당까지 승용차로 31분이 걸리지만 지하철을 이용하면 18분이면 된다. 또 달서구 계명대에서 반월당까지도 승용차로 34분이 걸리던 것이 2호선을 이용하면 17분으로 단축된다. 대학이 밀집한 경북 경산지역으로 등·하교하는 학생들의 교통편의와 함께 경북 성주지역 주민들의 대구시 접근도 한결 수월해질 것으로 보인다. 대구시는 2호선 개통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만도 연간 3036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더구나 2호선이 지나는 수성구 시지지역과 달서구 용산, 달성군 다사지역은 2호선 개통으로 역세권 개발에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일부 ‘미흡´ 지적도 지하철 2호선은 당초 9월말 개통 예정이었으나 시험운전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나 대구시가 개통시기를 늦췄다. 실제 개통후 운행과 같은 방식을 통한 ‘영업시 운전’ 과정에서 전동차 출입문을 모두 8012회 여닫는 과정에서 10여차례나 열리지 않았다. 또 전동차가 역에서 25초 정차토록 돼 있지만 일부는 4∼5초 일찍 출발하는가 하면 출발시 안내방송이 제때 나오지 않아 시스템 오류를 바로잡는 막바지 작업을 진행중이다. 또 영업시 운전이 한창이던 최근에는 2호선 대실역 부근 터널안 배전반에서 화재가 발생해 대구시가 부랴부랴 터널내 CCTV와 연기감지기 설치 등의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한동수 대구지하철건설본부 본부장은 “영업시 운전은 기관사가 필요없는 ‘자동’방식을 기준으로 운행하고 있으나 실제 운행 때는 기관사가 수동으로 문을 열고 정차시간도 맞추기 때문에 안전상 문제는 없다.”고 강조했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한동수 지하철건설 본부장 “국내에서 가장 안전한 지하철이 될 것입니다.” 한동수 대구지하철건설본부 본부장은 “대구 지하철 2호선은 2003년 1호선 중앙로역 화재사고 이후 건설교통부가 수립한 ‘도시철도 종합안전대책’을 100% 반영한 가장 안전한 지하철로 운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1호선 중앙로 화재참사 당시 문제가 됐던 전동차의 바닥재와 차량 연결통로막, 의자 등은 모두 불연성 또는 극난연성 재질로 개선했다.”면서 “시험기준도 연기밀도, 화염전파, 연소가스 유해성 등의 항목을 추가해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선진국 규격을 엄격히 적용했다.”고 말했다. 개통시기 연기와 관련, 한 본부장은 “영업시 운전 과정에서 드러난 전동차 출입문 개폐와 정차시간 등의 문제는 시설물의 결함이 아닌 프로그램상의 기술적인 문제”라며 “시스템 안정화 작업이 막바지 단계에 있어 개통시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터널구간에서도 화재 등 사고발생시 승객들의 신속한 대피를 위해 40m 간격으로 비상조명등을 설치했고 승강장내 유도등도 비상시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켜지도록 개선했다고 덧붙였다. 한 본부장은 “지하철 2호선은 교통수단으로서의 기능 외에도 시민들의 문화, 쇼핑 공간으로 꾸몄다.”면서 “반월당·두류·봉산역의 지하 문화쇼핑 시설은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등 새로운 지하철 문화를 창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3호선 조기건설에 대해서는 “3호선은 침체된 지역경기 활성화와도 관련이 있다.”면서 “3호선이 조기에 건설돼야만 건설경기 회복 등 대구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3호선 2008년 첫 삽 대구 지하철 2호선 개통으로 3호선 조기건설과 2호선 연장사업 등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3호선은 북구 칠곡에서 수성구 범물간 23.95㎞을 잇게 되며 사업비는 1조 2000여억원이 소요될 전망이다. 대구시는 올 2월 3호선 기본계획 타당성 조사용역을 마치고 기본설계비 30억원을 내년에 국비 지원해줄 것을 중앙정부에 요청해 둔 상태다. 시는 2007년까지 기본설계를 실시하고 2008년 공사에 착공, 북구 칠곡∼중구 건들바위 구간을 2013년 개통할 예정이다. 이어 건들바위 네거리∼수성구 범물구간은 2018년까지 나눠 시공해서 2019년 완전 개통한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3호선이 개통되면 수송분담률이 현재 3.2%에서 16%로 높아지는 등 지하철이 대구 대중교통의 중심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한동수 대구시 지하철건설본부 본부장은 “칠곡∼범물 구간의 3호선이 조기 건설돼야만 기존 1,2호선과 연계한 도시철도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2호선의 종점인 수성구 사월동에서 경북 경산시 대동(영남대)까지 3개역 3.32㎞ 연장사업은 2007년 상반기 착공,2012년 완공될 전망이다. 2호선 경산 연장사업은 최근 KDI에서 예비타당성 조사결과 사업성을 인정받아 실시설계를 앞두고 있다. 사업비 2054억원은 중앙정부 60%와 대구시와 경북도 등 지자체 부담 40%로 조달될 예정이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청계천다리에 얽힌 이별·사랑

    새로 태어난 청계천에는 맑은 물만 흐르는 게 아니다. 그 물결따라 이야기도 함께 흐른다. 청계천 복원을 기념해 서울시가 기획한 ‘맑은내 소설선’ 11권이 완간됐다.‘맑은내 소설선’은 30∼40대 작가 11명이 저마다 청계천 다리를 하나씩 택해 소재로 삼은 작품들. 지난 8월 청계천 영도교를 배경으로 조선시대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절한 이별을 그린 김별아의 역사소설 ‘영영 이별 영이별’이 첫 테이프를 끊은 데 이어 두달여만에 전권이 완간됐다. 그간 서하진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오간수교)와 김용범의 ‘달콤한 죽음’(맑은내다리), 이승우의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황학교), 이수광의 ‘두물다리’(두물다리), 박상우의 ‘칼’(수표교)이 차례로 나왔고, 지난 주말 청계천 개통에 맞춰 나머지 5권이 한꺼번에 출간됐다. 전성태의 ‘여자 이발사’(세운교)는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청계천변에 흘러든 일본인 여성의 이야기다.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따라 일본에서 조선으로, 또 전라도 간척지 염전과 청계천변을 떠돌았던 한 일본인 여자 이발사의 모진 삶을 좇는다. 청계천에서 태어난 김용운은 가난했던 유년의 기억과 청계천 변천사를 ‘청계천 민들레’(비우당교)에 담아냈다. 그런가 하면 고은주의 ‘시간의 다리’는 청계천 다리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대로 복원된 광교가 소재다. 광통교의 다리받침으로 사용된 신장석에 얽힌 태조 이성계와 계비 신덕왕후의 사연을 현대적 이야기로 형상화했다. 이순원의 ‘유리의 노래’(장통교)에는 특수부대 출신으로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는 남자와 대기업 엘리베이터 안내원의 사랑을 그렸다. 김용우의 ‘모전교에는 물총새가 산다’는 구한말 조국을 되찾으려는 민초들의 활약상을 담았다. 각권 8000원.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외로운 섬 하나 (3)개펄의 고향 증도

    외로운 섬 하나 (3)개펄의 고향 증도

    한반도 최서남단에 위치한 전라남도 신안군은 섬만으로 이뤄진 ‘섬 왕국’이다. 유인도 76개에 무인도 753개, 모두 829개의 섬이 신안군에 속한다. 점점이 깔린 섬들은 하나같이 특색 있고 수려하지만 신안 하면 사람들은 으레 홍도나 흑산도만 떠올린다. 신안에는 일반엔 덜 알려져 있지만 보석 같은 섬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는 것이다. 글 사진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서울 용산역에서 고속철 KTX로 3시간 25분을 가면 목포역.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50분 달리면 지도읍 버스터미널에 닿는다. 군내(郡內)버스로 다시 10분쯤 지나면 지신개 선착장. 이곳서 다시 증도행 철부도선(하루 8번 운행, 어른 1500원·어린이 800원)을 타면 15분만에 증도 버지 선착장에 도착한다. 교통이 좀 불편한 게 흠. 하지만 2007년에는 지신개 선착장과 증도를 잇는 연륙교(350m)가 개통될 예정이어서 관광객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증도는 인구 2400여 명의 조그만 섬이다. 증도 버지 선착장 바로 앞엔 단일규모론 국내 최대인 태평염전(260㏊)이 들어서 있다. 이곳의 연간 소금 생산량은 1만 6000톤. 신안군의 여러 섬들은 대부분 천일염을 생산하지만 그중에서도 태평염전은 그 질과 양에서 단연 앞선다. 증도에선 매년 3월 ‘소금장인’을 선정해 장인정신을 기린다. 앞으로 소금축제도 벌이고 염전체험관광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광활한 태평염전 샛길로 20분쯤 걷다보면 남동쪽 바닷가에 우전해수욕장이 보인다. 백사장 길이 4㎞, 폭 100m인 우전해수욕장에는 90여개의 무인도들이 알알이 떠 있어 환상의 수평선을 만들어낸다. 맑은 물과 명사십리 은빛 백사장, 주변의 울창한 송림이 어우러져 여름 피서지로 안성맞춤이다. 신안군 해역은 대륙붕으로 수심이 15m 내외로 얕아 천연 개펄이 잘 발달돼 있다. 신안군은 전국 개펄 면적의 44%인 1054㎢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이곳 개펄에는 게르마늄 성분이 많이 들어 있어 더욱 귀중한 자원이 되고 있다. 신안군은 개펄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이를 상품화하기 위해 1997년부터 최근까지 ‘게르마늄 개펄축제’를 열어 왔다.7월말 우전해수욕장에서 열리는 개펄축제는 전남 5대 축제 가운데 하나로, 신안군은 2003년 중단된 행사를 내년부터 재개할 계획이다. 개펄분장 퍼레이드, 개펄아가씨 선발대회 등 다채로운 이벤트와 함께 개펄마사지탕, 개펄풀, 소금찜질방 등 머드하우스도 운영한다. 문의 신안군청 문화관광과(061-240-8355). 증도의 숙소 사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현대장(061-271-7528)등 여관과 민박집(우전민박,275-7010)이 몇 군데 있다. 그러나 증도의 빼어난 경관을 배경으로 한 우전해수욕장 근처에 대규모 펜션단지가 연내 완공될 예정이어서 형편은 한결 나아질 전망이다. 증도 현지에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음식점은 별로 없다. 증동리의 갯마을식당(061-271-7528)에 가면 이곳서 특히 많이 나는 싱싱한 병어회(대 3만원, 소 2만원)를 맛볼 수 있다. 별미인 밴댕이무침과 풀갈치젓, 황석어젓 등은 서비스. 소박한 인정이 담긴 남도 음식의 감칠맛이 오랜 여운을 남긴다. 증도 면사무소가 있는 증동리와 우전해수욕장은 나무다리로 이어져 있다. 짱뚱어가 많이 잡혀 ‘짱뚱어다리’라 이름 붙여진 이 목교는 폭이 2m, 길이가 470m가 넘는다. 짱뚱어 외에 문저리(망둥어), 백합, 대롱(조개의 일종), 화랑게, 꽃게 등 다양한 어종이 잡히는 이곳 갯벌에서는 그물로 물고기를 가둬 잡는 ‘개매기’ 체험도 할 수 있다. 유심히 들여다보니 겨울철새인 황새의 발자국도 드문드문 나 있다. 바로 생태낙원이다. 증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바다는 600여년간 바다 속에 잠들어 있던 수많은 송·원대 해저유물이 발굴된 곳이다.1976년부터 1984년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침몰된 배 조각 445편을 비롯해 2만점이 넘는 도자기,29t에 이르는 동전과 자단목(紫檀木) 등이 인양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유물은 목포에 있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과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해저유물 인양으로 유명세를 탄 이곳 방축리 도덕도 검산(劍山)마을은 예전엔 ‘만(滿)들’이라 불렸던 곳. 해적과 도둑이 들끓어 마을이 피해를 겪자 한 스님의 의견에 따라 검산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마을에는 해변 모래땅에서 자라는 향기로운 갯방풍을 비롯해 개나팔꽃, 해당화 등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일망무제의 신안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해저유물 인양 당시 감시원으로도 활동했던 이곳 터줏대감 김정석(54·어부)씨는 “검산마을은 참숭어 어란의 산지로도 유명한 곳”이라며 “신안군은 전국에서 재정자립도가 최하위권이지만 육지와 똑같이 소득을 올릴 수 있는 복된 땅”이라고 말했다.이곳은 독살 체험 장소로도 제격이다. 석방렴(石防簾)·석전(石箭)·독장·독발 등으로도 불리는 독살은 만조 때 들어온 물고기가 물이 빠질 때 나가지 못하도록 돌담을 쌓아 물고기를 잡는 사뭇 원시적인 장치다. 이곳에서 많이 잡히는 민어, 농어 등은 즉석에서 회를 쳐 먹을 수 있어 여행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신안군은 앞으로 상수도 시설을 갖추고 6월 말부터는 숙박용 몽골 텐트도 30여개 정도 설치하는 등 ‘1급 관광명소’로 가꿔나간다는 방침이다. 텐트 숙박은 하루에 1만 5000원(4인기준)으로 예정돼 있다.
  • 섭씨 100도! 극한 미생물 “딱 살기좋네”

    끓는 물보다 뜨겁거나 냉장고처럼 차가운 곳을 선호하고, 인체에 치명적인 양잿물을 좋아하는 생명체가 있다. 바로 극한의 생존자 미생물이다. 도저히 생명체가 살지 못할 것 같은 극한 환경 속에서 발견되는 미생물은 외계 생명체의 존재 여부를 밝히는데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또 이들이 보유한 ‘극한 효소’ 등은 다양한 산업분야에 응용될 수 있어 세계 각국은 심해(深海)에 잠수정을 내려보내고, 남극의 빙산 속을 뒤지고 있다. ●극한의 생존자, 미생물 대부분의 생명체는 물이 끓는 온도인 100℃ 안팎에서 단백질이 변형돼 죽는다. 하지만 최적 성장온도가 55℃ 이상인 고온성 미생물과 80℃ 이상인 초고온성 미생물은 예외다. 초고온성 미생물로는 ‘파이롤로부스 퓨마리’를 꼽을 수 있다. 독일 레겐스베르크대학 연구팀이 대서양 밑 3650m에 위치한 열수구에서 이 미생물을 발견, 지상으로 가져와 배양에 성공했다. 이 미생물은 끓는 물보다 높은 113℃의 온도에서 활발히 자라고, 사람이 화상을 입을 수 있는 90℃에서는 추위를 느낀 나머지 생장을 멈춘다. 또 지난 2002년에는 한국해양연구원 이정현 박사팀이 남서태평양 파푸아뉴기니의 수심 1700m 열수구에서 시료를 채취한 후 배양실험과 DNA분석을 통해 90∼100℃에서 잘 자라는 미생물 2종을 확인했다. 이 박사는 “최적 성장온도가 멸균온도(121℃)인 미생물도 있다.”면서 “일본 연구팀은 온도가 400℃에 이르는 해저 열수구에서 미생물을 발견했지만, 이 온도가 최적 성장온도인지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고온성 미생물과 정반대로 평균 1∼2℃인 차가운 바닷물뿐만 아니라 빙산 속에서 사는 저온성 미생물도 있다. 미국 워싱턴대 연구팀이 남극의 빙산에서 발견한 ‘폴라로모나스 바큐올라타’라는 미생물은 4℃에서 가장 활발하게 생장하며,12℃가 넘으면 생장을 중단한다. 즉 4∼5℃를 유지해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는 냉장고의 냉장실이 이 미생물에게는 살기 좋은 공간이 되는 셈이다. 서울대 생명과학부 천종식 교수도 해양연구원 극지탐사팀과 함께 남극 세종기지 근처에서 여러 종의 저온성 미생물을 발견하기도 했다. ●양잿물이 보약? 미생물은 강한 산성 또는 알칼리성의 환경에서도 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pH 농도가 11∼12에 달하는 양잿물을 좋아하는 극한 미생물이 발견됐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윤정훈 박사팀은 지난 2003년 서해안 대천 근처의 한 석면광산에서 강알칼리를 견디는 미생물 5종을 찾아냈다. 이 미생물들은 독극물인 양잿물을 소화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강한 알칼리성 폐수를 처리하는 데 유용하다. 염분이 포화 상태인 염전에서도 많은 미생물들이 살고 있다. 전북 군산 지역의 염전에서 발견된 ‘노카르디옵시스 군산엔시스’도 이에 해당한다. 또 지표면에 있는 한 주먹의 흙 속에는 약 1억∼10억의 미생물이 있지만 어두운 땅밑으로 내려가면 온도와 압력이 높아져 그 수가 줄어들게 된다. 미국의 과학자들은 남캐롤라이나주 사바나강 주위에서 무려 500m를 파내려가서 미생물을 확인했다. 또 지금까지 이뤄진 연구에 따르면 미생물은 지표면 2800m 아래에서도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생물이 이처럼 다른 생명체에 비해 다양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비결은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극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생존능력을 획득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정현 박사는 “미생물은 유전자 변이가 쉽게 이뤄지고 생식주기가 짧아 적응력이 뛰어나다.”면서 “미생물의 이같은 특성이 다양성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유전자(리보솜 RNA 유전자)를 예로 들면, 사람과 생쥐의 유전자 변이도가 0.7%에 불과하지만 미생물의 경우 같은 종에 속한 두 개체간의 변이도가 3%나 된다. 이렇게 높은 유전자 변이도가 미생물의 천부적인 환경 적응력과 직결되는 것이다. ●각종 산업분야 응용 가능성 극한 미생물을 연구하면 우주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생물이 극한 환경에서도 생명을 유지하는 만큼 우주에서도 적당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형태나 종류는 달라도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또 극한 미생물에 포함된 효소나 단백질은 각종 산업분야에 응용될 수 있다. 예컨대 저온성 미생물에서 나온 지방 분해효소를 쓰면 찬물에서도 때가 잘 빠지고 환경오염이 전혀 없는 세제를 만들 수 있다. 또 폐수의 독성물질을 먹어치우는 해가 없는 물질을 내놓는 미생물에서는 폐수처리용 화학약품을 개발할 수 있다. 이처럼 극한 미생물은 산업용 효소산업, 화학산업, 제지 및 펄프, 식품 및 사료, 섬유 및 피혁, 금속 및 광산, 에너지 산업 등에 폭넓게 활용될 수 있어 생명과학산업의 한 축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극한 미생물이란 생명체가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극한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미생물이다. 극한 미생물은 온도를 기준으로 55℃ 이상에서 생육하는 고온성 미생물,80℃ 이상에서 성장하는 초고온성 미생물,4℃ 이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저온성 미생물 등으로 나뉜다. 또 500기압(해저 5000m 상당) 이상의 고압에도 견딜 수 있는 고압성 미생물, 수분을 찾기 어려운 사막에서 생활하는 건조내성 미생물도 있다. 이와 함께 pH 1∼2의 산성 환경을 좋아하는 호산성 미생물,pH 10∼12의 알칼리성 환경을 선호하는 호알칼리성 미생물, 염분 농도가 20∼30%나 되는 환경에서만 볼 수 있는 호염성 미생물 등으로 분류된다.
  • 해양관광 전진기지 전곡항

    해양관광 전진기지 전곡항

    주 5일제 확대 실시 이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항이 수도권 수상레저의 전진기지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에서 1시간 거리로 교통여건이 좋은 데다 서해안에 위치하면서도 24시간 물이 빠지지 않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입하도 국화도 육도 풍도 제부도 등 풍광이 빼어난 섬들이 즐비해 주말이면 세일링(돗과 바람을 이용한 항해)을 즐기려는 요트 마니아와 낚시꾼들로 붐비고 있다. 경기도와 화성시는 이곳을 오는 2008년까지 마리나 시설을 갖춘 테마어항으로 개발할 계획이어서 앞으로 전곡항의 주가는 한층 더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서해안에서 요트를 즐기자 국내에서 요트 타기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적은 남해안이나 제주도 등지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해안의 경우 썰물때 물이 빠지면서 갯벌이 드러나 먼 바다에 나가지 않고선 항해나 정박을 할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요트는 선체 밑에, 바람을 거슬러 올라갈 때 옆으로 밀리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주는 1∼1.5m 길이의 센터보드(center board)가 있어 수심이 최소한 1.5m 이상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곡항 만큼은 예외다. 화성시 서신면과 안산시 대부도를 잇는 방파제가 항 바로 옆에 생긴 이후 밀물과 썰물에 관계없이 24시간 배가 드나들수 있다. 전곡리 어촌계 황대웅(43) 총무는 “전곡항은 수심이 깊고 육지에서부터 갯벌 길이가 짧아 물이 빠져도 접안이 가능하기 때문에 물때를 맞출 필요 없이 언제든지 요트를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년전부터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일부 요트 마니아들이 찾기 시작하더니 3년전부터는 그 수가 급격히 늘고 있다. 전곡항과 인접한 탄도항을 중심으로한 요트 모임까지 만들어졌다. 현재 전곡·탄도항 앞바다에는 요트 19척이 항시 정박해 있으며 주말에는 요트나 레저보트를 트레일러 등에 싣고 수상레저를 즐기려는 마니아들로 북적거린다. 주말에는 50여척의 요트나 보트가 수상레저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곳을 통해 바다로 나가는 낚시꾼들을 포함하면 연간 10만명정도가 전곡항을 찾는 것으로 화성시는 파악하고 있다. ●주말 50여척 세일링나서 요트는 먼 바다 세일링이 가능하도록 주방과 침실·화장실 등 선실과 입출항 또는 비상시에 쓸수 있는 소형 보조 엔진을 장착하고 있는 크루저(Cruiser)와 가까운 바다나 강에서 이용할수 있는 딩기(Dingy)로 나뉜다. TV나 영화에 나오는 호화 요트는 대부분 크루저인데 전곡항에 정박해 있는 요트들도 같은 종류이다. 이곳에 정박해 있는 요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30여명이 승선할수 있는데 가격이 10억원을 호가한다. 또 7척은 중급(10명승선), 나머지 11척은 소형(5명승선) 요트이다. 이 가운데 2척은 이미 제주도와 대마도로 머나먼 항해를 떠났다. 요트 선주들은 대부분 개인 사업을 하지만 직장인들도 더러 있다. 크루저 요트의 경우 보통 2000만∼7000만원 정도로 가격이 비싼 편이지만 동력을 사용하지 않고 바람을 이용해 세일링을 하기 때문에 기름값 등 관리 비용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 순풍을 받으면 15노트(시속 약 28㎞) 이상 나아갈 수 있다. 전곡항 요트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천영우(60·안산시 대부동)씨는 “요트가 일반인들에게는 ‘귀족 스포츠’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바람만 있으면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든지 즐길 수 있어 실제로는 경제적인 레포츠”라고 말했다. 요트가 없어도 모임에 가입하면 선주들과 함께 세일링을 즐길 수 있다. 현재 70여명이 회원에 가입해 있다. 선주들은 평소에는 전곡항 앞바다에 요트를 정박해 놓고 있다 주말을 이용해 당일코스로 풍광이 뛰어난 섬주변을 항해한다. 제부도 앞바다를 지나 ‘화성8경’ 중 하나인 입파도의 홍암(紅岩·붉은바위)을 돌아오는 데 2시간가량 소요된다. 광활한 서해바다를 항진하면서 시원한 바다 내음과 무인도의 깎아지른 기암괴석 등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요트를 이용해 세계일주를 계획하는 회원들도 적지 않다고 천씨는 귀띔했다. 회원들은 오는 9월에는 중국 칭다오 요트협회 초청으로 2대의 요트를 이용해 중국 항해에 나설 계획이다. 전곡항에서 출발해 제부도∼도리도∼입파도∼국화도를 돌아오는 2시간 코스의 유람선도 운항되고 있다. ●낚시꾼들도 몰려들어 전곡항은 요트 마니아 외에도 우럭과 노래미 등을 낚으려는 낚시꾼들도 많이 찾는다. 바다낚시는 미꾸라지나 지렁이 등 미끼를 끼워 낚싯줄을 바다에 던지고 바닥에 닿을 듯 움직이면 되므로 초보자들도 손맛을 볼 수 있어 가족 레저로도 인기다. 재수 좋으면 펄펄 뛰는 광어도 걸려 올라온다. 잡은 고기는 갑판에서 바로 회를 쳐주고 매운탕까지 끓여준다. 자연산 회를 즐기고 남은 것은 얼음에 채워 가져갈 수 있다. 전곡항에서는 매일 20척, 탄도항에서는 27척의 낚싯배가 출항, 바다 낚시꾼들을 태우고 있다. 이들 바다낚시선은 일반 낚시배와는 달리 어군탐지기, 냉장고를 갖춘 주방, 휴게실, 수세식 화장실 등 각종 부대시설을 잘 갖추고 있어 편리하다. 낚시선 하루 대여료는 20만∼30만원(10t급 기준)으로 20명까지 승선이 가능하다. 주말에는 가족은 물론 회사·각종 모임 등 단체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해양레저 테마공원개발 전곡항은 오는 2008년까지 해양레저 테마공원으로 개발된다. 화성시는 경기도와 해양수산부의 지원을 받아 전곡항을 자연경관과 해양레저를 즐길 수 있는 마리나(Marina) 항구로 개발하기 위한 ‘테마해양공원조성 기본계획(Blue Marina Port)’을 마련했다. 총 사업비 154억원이 투입된다. 시는 94억원을 들여 요트 56척이 정박할 수 있는 해양(36척)ㆍ육상(20척)계류장과 방파제, 보트장, 물양장 등 해상기반시설을 조성하게 된다. 시는 이어 60억원을 추가로 투자, 서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데크를 비롯해 클럽하우스와 해상공원 등을 갖춘 육상테마파크를 조성할 예정이다. ●인근 부동산 크게 올라 전곡항 주변 땅값은 관광·수상레저 붐과 함께 이같은 테마어항 개발 소식이 전해지면서 크게 올랐다. 전곡항 배후지에는 한국수자원공사에서 시화지구 간척사업에 따른 이주택지단지를 조성(233필지)했다. 이중 22%가 미분양상태로 남아 있는데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은 평당 300만∼500만원, 바다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은 200만원선에 거래되고 있다. 주변 폐염전 부지도 평당 80만원을 호가하고 있다. 화성시 서신면 S부동산 관계자는 “지난해 전반적으로 땅값이 오른데다 테마어항으로 개발한다는 발표 이후 평당 100만원 이상 올랐다.”고 말했다. 서해안 고속도로 비봉 나들목(IC)에서 승용차로 30분쯤 가면 화성시 서신면과 안산 대부도 경계에 위치한 전곡항이 나온다. 화성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年 30만명 방문·파급효과 530억 기대 “전곡항 테마해양공원 사업이 완료되면 연간 530억원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기대됩니다.” 최영근 화성시장은 “주 5일제 확대로 수상레저 인구가 급속히 늘고 있는 데다 요즘 ‘관광패러다임’이 눈으로 보는 정적인 관광에서 직접 체험하고 즐기는 동적인 관광으로 변화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고 착수 배경을 밝혔다. 또 인근 시화호 남측 간석지 개발에 따른 관광인프라 확충을 위해서도 전곡항을 관광어항으로 육성하는 방안이 요구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수도권은 서해안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요트를 즐길 수 있는 마리나 시설 등 해양레저 기반 시설이 전무한 곳입니다.” 최시장은 그러나 전곡항은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다 지금도 임해해상 관광을 위한 전진기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어 어항기능과 관광기능을 겸비한 다목적 어항개발에 나서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는 2008년 전곡항에 대한 마리나 포트 개발사업이 완료돼 바다낚시, 해양레저, 요트타기 등 고급형 해양레저를 테마로 즐길 수 있는 해양테마파크로 변신하게 되면 연간 30만명이 방문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또 어민소득 증대를 비롯한 생산 및 고용효과·부가가치효과 등 530억원의 경제적 파급효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한몫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시장은 전곡항 배후부지에 시화지구 간척사업관련 이주택지 단지가 조성돼 있어 테마어항 개발 등 집중적인 개발로 사업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환경영향평가와 실시설계 등 관련 절차를 거쳐 내년 3월쯤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최시장은 “전곡항외에 인근 제부항과 궁평항에도 어촌 체험을 테마로한 어촌 관광마을이 조성돼 있으며 앞으로 51억원을 투입해 궁평항에 산지 수산물 판매장을 건립하면 이 일대가 수도권 해양관광도시의 메카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강조했다. 화성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7억원 어치 황금의 배를 몰고 온 사나이

    7억원 어치 황금의 배를 몰고 온 사나이

    자유를 보상 받은 방진호(方震昊)「총좌(總佐)」의 현주소는 전쟁이 한창 막바지에 이른 1950년 10월 14일 새벽 - 인천 앞바다에는 자욱한 아내를 헤치면서 북괴기가 펄럭이는 50「톤」급 발동선 한 척이 소리없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갑판 위에는 괴뢰군 총좌(대령급) 한 사람을 둘러싸고 20명의 북괴장교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대한민국 만세」를 목청이 터져라 소리쳐 부르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남하한 조그마한 발동선. 그러나 이 발동선에는 시가 7억원 상당의 금괴 1「톤」반이 실려 있는 황금의 배였다. 18년 전 영웅, 오늘은 왕초(王草) 거부(巨富)의 꿈 대신「평애원장(平愛院長)」 괴뢰군 방진호 총좌. 부하장교 20명과 황금덩어리를 싣고 자유를 찾았던 이 영웅은 자기와 자기 부하가 자유를 찾은 대신 황금은 몽땅 대한민국 정부에 바쳤다. 그러나 정부는 이 영웅의 값진 행위에 보답하기 위해 1억 3천만환(현화 1천 3백만원)을 보상금으로 지급했다. 1억 3천만환의 거액을 쥐고 거부의 꿈을 지닌 채 한때 군에서 문관으로 있다가 53년 가을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지난 날의 영웅 방진호 총좌는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오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신장(新場)리 경부선철도 연변에 30채의 집이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있는 평애원. 고아원겸 양로원인 이곳에서 넝마주이 왕초라는 별명을 가진 50대의 허수룩한 한 사나이가 조용히 과거를 되씹으며 살아가고 있다. 평애원 원장인 이 사나이 - 이 사람이 바로 황금의 배와 부하장교 20명을 데리고 자유를 찾았던 지난 날의 영웅 방진호씨(49)이다. 1억 3천만환의 보상금 태풍 사라호로 일장춘몽 한때 거부의 꿈을 지니고 전남 목포 근해에서 간석지를 막아 염전을 만들었지만 예기치 않았던 「사라」호 태풍으로 방대한 염전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린 채 알거지가 되어버린 방씨. 그 후 이곳에서 넝마주이들을 모아 스스로 넝마주이 왕초로 전락(?)해버린 이 사나이의 기구한 운명은 글자 그대로 파란만장의 연속이다. 평안북도 신의주가 고향인 방씨는 해방 전 만주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측량학원을 수료한 뒤 집안현(輯安縣)의 건설국 기사로 취직, 기구한 운명의 첫발을 내디뎠다.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방씨는 그곳 요릿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요릿집 종업원「요리명」이라는 중국 사나이와 친히 사귀기 시작했다. 타향에서의 고독도 풀 겸「요리명」과 술자리도 같이하여 손님과 종업원의 관계가 아닌 서로의 심금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이국땅에서 해방을 맞은 방씨에게는「요리명」을 사귄 덕분으로 하루 아침에 큼직한 감투가 굴러들어왔다. 며칠 전까지 요릿집 종업원 행세를 하던 중국 공산당의 거물「요리명」이 집안현 수석(首席)의 자리에 있으면서 방씨를 집안현 평양변사처장(平壤辯事處長:영사)으로 임명한 것이다. 벼락감투를 뒤집어 쓴 방씨는 46년 2월 평양에 부임했다가 그 해 11월에는 소위 북조선인민위원회 조직에 관여, 평양철도경비사령부 총책 유경수(柳慶洙)중장(김일성의 매부)의 부책(副責)으로 중용되었다. 그 후 괴뢰정권의 내무성 정치보위부 직속기관인 진남포(鎭南浦)제련소 총책으로 영전한 방씨는 6·25 동란을 이 자리에서 맞았다. 원래부터 투철한 공산주의 사상자가 아닌 방씨는 차차 자유에의 향수를 느끼기 시작, 기회만 있으면 남하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뜻이 같은 부하장교 20명을 포섭한 방씨는 이왕이면 당시 진남포제련소에 보관되어 있던 백금 3「톤」, 금 1「톤」반, 수은 70「톤」까지 같이 싣고 자유를 찾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50년 10월 한창 패주에 정신 없던 괴뢰정권은 방총좌에게 진남포제련소의 금과 수은을 만주 여순(旅順)으로 운반하라는 긴급지시문을 띄웠다. 이 지시문을 받은 방총좌는 때가 왔다고 느꼈다. 3개월 전부터 탈출 모의를 진행해오던 부하 20명과 비밀회의를 거듭한 끝에 D「데이」를 10월 10일 밤 11시로 정했다. 10월 10일 밤 11시. 칠흑같이 어두운 진남포 부두에는 50「톤」급 발동선 2척이「엔진」소리마저 죽여가며 조용히 와 닿았다. 북괴 경비병 10여 명의 엄중한 감시 아래 한 척에는 황금 1「톤」반이 실려지고는 또 한 척에는 백금 3「톤」과 수은 70「톤」이 실려졌다. 방총좌와 부하장교 20명은 황금이 실린 앞배에 탔다. 배 두 척이 진남포항을 벗어나 망망한 서해에 들어서서 한 시간쯤. 선수를 중공방면으로 막 돌리려는 찰나. 방총좌는 선장의 뒷머리에 권총을 갖다 대고 조용히 그러나 엄숙하게 명령했다. 『선수를 남쪽으로 돌려라!』 이 때 경비병 10여명이 반항, 조그마한 발동선에선 교전이 벌어졌다. 20분만에 싸움은 방총좌의 승리로 끝나고 10여명의 경비병은 서해에 수장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해전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총격 소리를 들은 북괴경비정 한 척이 추격, 또다시 해상총격전이 벌어졌다. 간신히 경비정의 추격을 벗어나 연평도 앞바다에 도달했을 때 수은과 백금을 실었던 뒷배가 총탄에 구멍이 뚫려 애쓴 보람도 없이 바다 깊숙이 수장되어 버렸다. 진남포를 떠난 지 나흘 만에 방총좌는 수은과 백금은 바다에 수장되었지만 부하장교 20명과 황금 1「톤」반을 이끌고 무사히 목마르게 그리던 자유를 찾은 것이다. 53년 봄 1억 3천만환의 거액을 쥔 북괴총좌가 아닌 민간인 방진호씨는 거부의 꿈을 안은 채 전남 목포 근해에서 간석지를 막아 염전을 만들었지만 4년간의 피땀나는 노력도「사라」호 태풍으로 일장춘몽 빈털터리가 되어버렸다. 수장(水葬)한 백금 3톤 수은 70톤 꼭 찾고 말겠다는 게 소원 돈하고는 인연이 없는 방씨. 이때부터 인생을 덤으로 생각한 방씨는 남을 위해 살기로 작정했다. 57년 가을 무작정 찾아온 것이 지금 그가 살고 있는 경기도 평택군 송탄읍 신장리 일명「쑥고개」라는 미(美)기지촌 주변이었다. 방씨는 우선 손수 흙벽돌을 찍어 경부선 철도연변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걸인 20명을 수용했다. 1개월이 지난 뒤 평애원이라는 간판이 내걸리고 식구도 1백여 명으로 불어났다. 11년이 지난 오늘날 평애원은 30채의 집이 들어섰고 식구도 372명으로 불어났으며, 평택과 방성(彭城) 두 곳에는 분원도 마련됐다. 그 동안 이곳을 거쳐간 원생 중에는 현역 육군대위가 있는가 하면 수백만원을 치부한 어엿한 실업가도 10여명이나 된다는 것. 원장으로 보다는 넝마주이 왕초로 더 알려진 방씨. 방씨의 유일한 소원은 자유를 찾아 남하하던 당시 연평도 앞바다에 아깝게 수장되어버린 백금 3「톤」을 꼭 찾고 말겠다는 것이다. <수원 = 한의교(韓義敎)씨> [ 선데이서울 68년 10/13 제1권 제4호 ]
  • 인천가정지구 국민임대단지로 건교부 40만평 지정

    건설교통부는 개발제한구역 해제예정지역인 인천 가정지구 40만 2000평을 국민임대주택단지 예정지구로 30일 지정한다고 26일 밝혔다. 건교부는 올 하반기에 개발계획 승인, 내년 실시계획 승인을 거쳐 2008년 하반기부터 국민임대주택 4100가구를 포함, 모두 8200가구의 주택이 건립된다. 일반분양은 2008년말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인천 가정지구는 인천시청으로부터 북서쪽으로 8㎞ 거리에 있고 기존 시가지 및 청라경제자유구역과 인접해 있다. 또 인근에 부평공단 등이 있어 무주택 서민의 관심을 끌 전망이다. 건교부는 “인천 가정지구는 공원·녹지율을 30% 이상으로 하고 폐염전과 저수지를 공원화, 친환경적 주거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1)고군산군도의 경관적 가치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71)고군산군도의 경관적 가치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 신지도 곶리도 말도 횡경도 방축도 야미도 등이 별처럼 모여 있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앉은 이 섬들 때문에 고군산군도는 ‘호수에 뜬 섬들’로 불렸다.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중국 사신들이 서해를 건너오면 고려군사들이 고군산까지 영접을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중국과 한반도가 뱃길로 연결되는 길목이었음은 물론이고 서남해안 쪽에서는 개경이나 한양으로 가는 중간 허리였다. 조운선과 상선, 군선이 상존했으며, 이순신이 이곳에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도 난중일기에 보인다. 사람과 배만 그러한가. 물고기에게도 필수 코스였으니, 유명한 칠산어장의 북단이 바로 고군산이다.1906년 군도 끝자락 말도에 등대를 세워 올해로 99년째 불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이곳은 일찍부터 서해 항로의 요충지였다. 때맞춰 북상하는 조기같은 회유어종의 통로라 함은 역으로 남하하는 홍어나 대구 같은 한류어종의 통로라는 말도 된다. 그래서 군산 수협조차도 애초에는 육지가 아니라 장자도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군산진을 설치하고 서해를 경영하다가 옥구로 옮기게 된다. 왜구의 노략질이 워낙 심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황당선의 ‘황당한’ 일도 자주 벌어졌다. 군산진만 육지로 떠난 것이 아니다.20세기 후반에는 물고기들이 떠나가는 일도 벌어졌다. 황금어장 칠산이 고갈되면서 섬사람들은 서울이나 군산 등지의 저잣거리로 떠나갔다. 모진 세월은 이 천혜의 섬들을 가만 두질 않았다. 새만금 간척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공사용 차량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분진을 일으키더니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야미도와 신지도가 방조제로 이어졌고, 그 바람에 승용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고군산 수천년 역사 속에서 ‘단군 이래 최대의 변화’가 밀어닥친 것. 약삭빠른 업자들은 관광유람선을 띄웠고 부동산업자들은 ‘새만금 새땅‘식으로 서부 개척시대를 방불케하는 거품경쟁에 나선다. 물고기가 사라진 바다에 땅장사들이 대신 몰려든 셈이다. 수산과학원 산하 갯벌연구소의 전용 조사선에 몸을 실었다. 분기별로 행하는 정기 탐사 일정이었다. 연구원들은 항해 내내 포자망으로 해파리 유체를 채취하고, 멸치 난어를 조사했다. 예전에 없던 아열대성 해파리떼가 한반도를 휩쓸어 그물 가득 해파리만 든다.20세기 초반 시인 김억이 ‘해파리의 노래’를 상재했으나 이런 ‘괴물’은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남방 해파리의 알이 고군산 근역에서 보임은 수온 상승의 반증 아니겠는가. 바다 물고기들의 동향도 수상쩍다. 조기 갈치는 물론이고 여타 고급 어종들이 대거 사라진 자리를 멸치떼가 채우고 있다. 고급 어종 비율이 1967∼69년도 39%에서 36년 만인 1999년 23%로 줄었으니 엄청난 감소다. 멸치는 1992년 군산수협 위탁량이 88t이던 것이 2002년에는 2359t으로 급증했다. 먹이사슬 상층부를 차지하는 큰물고기들이 사라지자 아래쪽 개체인 멸치떼가 극성을 부리는 것. 생태계의 적신호가 울리고 있다. 이러다가 고기가 아예 없어지는 것 아니냐며 진반농반의 걱정을 전하자 동행한 김수관 군산대 교수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동의한다. 상하이를 비롯한 중국 동해안의 엄청난 인구증가와 산업화로 서해에 쏟아부어지는 오염총량을 계산할 때 서해가 죽음의 바다로 바뀌는 것은 시간 문제란다. 일제시대에 고군산 근역에서 미역 김 해삼 상어 가오리 넙치 고등어 멸치 조기 삼치 대구 도미 청어 전광어 새우 숭어 참장어 가사리 병어 민어 홍어 오징어 뱅어 갈치 등이 잡혔다니, 종다원성이 해체된 비극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바다의 젖줄인 동진강, 만경강을 끊어 놓으니 바깥 생태계에 엄청난 부담이 가해지고 있다.”는 갯벌연구소 조영조 소장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새만금간척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반대해 온 환경운동가를 비롯, 뜻있는 많은 이들이 잠시 반성할 지점이 있다면, 바로 고군산 같은 방조제 바깥 섬들의 안위를 도외시했다는 점일 것이다. 막는 쪽이나 반대하는 쪽이나 바깥 바다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환경운동조차 언제나 육지 중심이었던 것이다. 현재 군산쪽이 완전히 막힌 상태에서 남쪽 일부만 트여 좁은 수로로 조류가 엄청난 속도로 드나든다. 그래서 신시도 아래쪽 무녀도와 비안도 사이는 거대한 물골이 패였으며, 이곳에서는 어떤 어업도 불가능하다. 무녀도 어민 김용문(55)씨는 “조류가 빨라 그물 설치가 불가능한 것은 물론 양식이나 조개 채취도 다 지난 얘기”라며 “방조제 안쪽은 그래도 보상이나 넉넉히 받았지만 바깥쪽은 단돈 1000만원이 고작이었다.”고 말꼬리를 흐린다. 어류가 산란을 위해 새만금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거대한 장애물이 가로막으니 애당초 어업은 결단난 것이다. 무녀도를 둘러보니 물고기 못지 않게 자연 경관의 훼손도 심하다. 왕왕 경제적 가치만으로 간척의 폐해를 계산하느라 대개 경관가치는 무시되기 일쑤다. 무녀산 중봉의 ‘삼각형’이란 곳까지 올랐다. 왼쪽으로 선유팔경이 펼쳐지고 무녀도 서두리 마을과 염전, 닭섬을 비롯한 자잘한 섬들, 그리고 비안도, 신시도 같은 섬까지 한 눈에 들어와 가히 관해의 요처답다. 선유도와 무녀도를 이어주는 현수교가 멋스럽다. 섬들은 아득한데 저 멀리 한 눈에 들어오는 방조제가 철책처럼 흉물스럽게 방벽을 두르고 있다. 무녀도가 한창 ‘잘 나갈 때’, 삼월 삼짇날이면 선남선녀들이 밥솥을 짊어지고 산정에 올라 진달래꽃 향기에 취해 놀다 갔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다. 고군산은 예로부터 ‘신들의 본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춤추는 무녀의 형상에서 따왔다는 무녀도란 섬 이름이 말해 주듯 섬마다 신들이 좌정하고 있었다. 선유도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 망주봉이 기암괴석으로 솟아있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 절경만 보고 돌아올 뿐 거기에 오룡묘 신당이 있는 것은 모른다. 다섯 용을 모신 곳인 만큼 기와집이 화려한 폼새로 지어졌고, 산신각도 따로 세워져 신당의 위용을 자랑한다. 해마다 당제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음은 물론 수년에 한번씩 별신제를 올릴 때면 내로라는 굿쟁이들이 몰려들어 삼현육각을 잡고 남사당패까지 몰려와 신명의 굿판으로 바다를 달구었던 서해안 최대 신당의 하나였다. 신당 형체는 여전하나 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지붕에는 잡초가 무성할 정도로 쇠락했다. 군의관으로 고군산에 근무하면서 이 일대의 신당을 조사, 세상에 알린 서홍관씨가 80년대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섬마다 있던 신당이 주민들의 기독교 개종으로 멸시와 박해를 당해 심지어는 불태워지기도 했단다. 여기서도 종교적 극단주의의 한 정형을 본다. 고군산 신당의 파괴는 문화적 반달리즘의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장자도에도 어사대란 당집과 할머니바위가 있다. 비승비속의 당할머니가 모셨던 신당이다. 건너 횡경도에는 할아버지바위가 있어 양자간의 애틋한 전설이 전해진다. 고군산의 12섬에서 모두 신당 및 당숲이 확인되지만 당제가 남아 있는 곳은 없다. 당집이나마 문화유산으로 지정·보호하겠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즉, 오룡묘같이 역사문화적 전통이 분명한 문화유산을 방치하는 군산시의 안목이 불안하기만 하다. 고군산에는 그동안 말로만 들어온 초분도 전해진다. 분묘 대신 짚으로 엮은 초분에 시신을 안치하는 초분 전통은 진도를 비롯한 남해안의 전통으로 알려졌다. 그 초분이 고군산에도 남아 있어 남해안뿐 아니라 서해안까지도 초분문화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녀도 초입에는 아예 궁금해 하는 외지인을 위해 ‘관광용 초분’까지 만들어 두었다. 무녀도에는 고군산 유일의 초분이 남아 해마다 짚을 갈아주면서 정성스레 보존해 오고 있다. 이처럼 신들이 잠을 청한 안식처이자, 초분 같은 고풍스런 유산까지 전해지는 것, 난초와 모감주나무군락을 비롯한 자연유산의 보고인 고군산의 경관가치에 관해서는 아무런 고려나 계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관광객들은 선유도에 잠시 들러 회를 먹고는 휘∼ 해수욕장을 한번 둘러보고 떠난다. 연육된 무녀도나 장자도는 그 관광객들이 떨구고 간 몇 푼의 푼돈 수혜도 받지 못하고 있다. 같은 고군산이지만 이곳에도 ‘남북의 문제’가 빚어지고 있다. 선유도는 관광형 어촌으로 변신하면서 인심이 살벌해졌다. 멀리 떠있는 말도처럼 불과 15호 밖에 안되는 섬에서도 어제까지 ‘형님, 아우’하던 공동체가 깡그리 해체되는 중이다. 이웃 섬 주민들이 조개를 캐가도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으나 지금은 어림도 없다. 대책없는 개발이 떠안긴 ‘인간성 파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서 고군산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게 고군산의 예스러움이 완벽하게 소멸되는 중이니 새만금 간척지가 가져다준 반갑지 않은 ‘보너스’ 아니겠는가. 다행스러운 일은 이곳 청년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3년전부터 고군산청년연합회를 조직한 이들은 해마다 체육대회를 열어 공동체의 연대감을 지속시키고 있다. 번갈아 12섬을 돌아가면서 여는데 박영구(43) 부회장은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다. 모처럼 12섬 젊은이들이 모여 단합도 꾀하고, 훗날을 생각하는 지혜도 모은다.”고 말한다. 대횟날이면 아침부터 각 섬에서 배를 끌고 집결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부녀회에서는 음식을 장만하여 술추렴도 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여 ‘섬들의 바다축제’를 연출한다. 청년들은 김양식을 하며 어렵사리 버티고 있으나 김값이 폭락하면서 하나, 둘 이곳을 떠나고 있다. 무녀도에만 청년들이 20명을 넘었으나 지금은 고작 8명만이 남아 있다. 살기 힘들어 떠나는 청년들을 나무랄 일도 아니다. 다음 세대가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섬, 그런 섬을 만들지 않고서야 우리 바다의 미래가 어디에 있겠는가. 새만금의 거대 장벽은 안쪽의 갇힌 생물은 물론 이렇듯 바깥쪽 사람들의 삶까지 옥죄고 있다. 미래 세대와 해양의 종다원성을 위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 “사두면 돈” 매향리 투기 광풍

    “사두면 돈” 매향리 투기 광풍

    수십년간 소음과 오폭 피해를 불러온 경기 화성시 매향리 일대가 미군 사격장 폐쇄를 5개월여 앞두고 투기바람에 들썩거리고 있다. 한·미 당국이 전북 군산 직도를 대체 사격장으로 전환키로 의견을 모으며 오는 8월 매향리 쿠니(KOO-NI)사격장의 폐쇄가 구체화된 이달초부터 외지인의 막판 투기행렬이 과열 양상마저 빚고 있다. 그러나 화성시와 경기도, 사격장 부지를 소유하고 있는 국방부 등 해당 지자체, 정부기관이 폐쇄이후의 활용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는데다 근거없는 개발소문까지 난무하면서 매향리 일대가 투기자본에 의해 난개발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6일 서울신문이 매향리 주민과 지역 공무원, 부동산업체를 집중취재한 결과, 매향리 일대 전용농지를 뺀 관리지역의 80%정도를 외지인이 사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전망이 좋은 매향리 바닷가와 도로를 낀 사격장 주변 땅값은 2년전에 비해 최고 4배까지 치솟았다. 현지 부동산업자들은 지난해 4월 국방부의 ‘2005년 8월 사격장 폐쇄’발표를 전후해 투기꾼이 몰리기 시작했으며 사격장 대체 보도가 나온 직후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전했다. 투기 열풍은 그동안 폭격으로 인한 소음과 오폭 피해에 시달렸던 매향 1∼5리, 이화 1∼3리, 석천 3∼4리 등 인근 마을 10여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우정면 인근 지역에만 300여곳의 부동산업체가 난립해 있고, 수원 등 외곽 부동산업체가 ‘원정 중개’에 나서고 있다. 이들은 “사두면 무조건 돈이 된다.”며 외지인의 돈을 끌어들이고 있다. 매향리에서 부동산업체를 운영하는 김모씨는 “지난해 국방부 발표 이후 투자가 활발해졌으며, 최근 대체부지까지 거론되자 막판 투기가 꿈틀거리고 있다.”면서 “3∼4년전 까지만 해도 인근지역 대부분이 원주민 소유로 농토나 집터, 염전 등으로 사용됐지만, 투기자본이 들어오면서 외지인이 차지하는 땅의 비율이 급속히 늘었다.”고 귀띔했다. 우정읍사무소 박종운 주민담당 계장은 “덩어리가 크고 용도변경이 쉬운, 쓸 만한 땅들은 거의 외지인들 소유라고 보면 된다.”고 밝혔다. 지역 주민들은 국방부가 발표한 폐쇄 시점이 5개월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정부 차원의 부지 사용계획을 내놓지 않아 투기바람이 수그러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주민과 환경단체들은 난개발과 무분별한 투기를 막기 위해 친환경적인 생태공원과 평화박물관을 조성, 운영하거나 생태·문화적으로 보전가치가 큰 지역을 민간차원에서 매입·보전·관리하는 ‘트러스트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관할 지자체와 해당 기관 어느 곳도 뚜렷한 계획을 세우지 않은 채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답변할 입장이 아니다.”라는 의견만 밝히고 있다. 화성시 관계자는 “시 차원에서 구체적인 계획은 없으며, 생태공원 조성 등이 전체 주민의 의결 사항도 아니다.”고 말했다. 녹색연합 환경소송센터 김타균 부소장은 “매향리는 분단과 전쟁 등 역사의 아픔을 지니고 있는 무형의 자산인 만큼 트러스트 운동을 통해 국민의 자산으로 지켜 나가야 한다.”면서 “여러 이권이 개입해 난개발이 이뤄지지 않도록 지역주민과 국민들이 함께 감시·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성 유영규 이효용기자 whoami@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7) 수라상에 진상한 영덕대게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 (57) 수라상에 진상한 영덕대게

    서울에서 가장 먼 바닷가를 손꼽는다면 영덕도 빠질 수 없는 곳이다. 가까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먼 길. 이필제가 ‘영해작변’을 통해 조선 후기 변혁운동의 엄중한 파고를 예고했던 곳, 그리고 상놈 출신 신돌석이 의병장으로 나서 신출귀몰 왜군을 무찔렀던 일 등 민중의 역사가 강하게 요동쳤던 옛 예주(禮州)의 땅. 오늘날은 역사의 진실과 무관하게 그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대구·부산은 물론이고 수도권에서도 차량들이 몰려드는 명소가 되었다. 오로지 영덕대게를 현장에서 먹겠다는 집념 때문에. 채식주의자들에게는 민망한 소리겠지만 사실 ‘남의 살’처럼 맛있는 것이 있을까. 더군다나 딱딱한 껍질 속에 연한 살을 감추어둔 갑각류는 전반적으로 맛이 특별하다. 게나 바다가재가 고급요리인 까닭은 그럴 만 한 이유가 있다. 명태나 기타 잡어로 만드는 게맛살도 기실 대게맛의 복사판이다. 봄철에 서해안의 꽃게가 진미라면 겨울철 동해안에는 대게가 단연 상석이다. 대게는 울진, 영덕, 포항, 울산 등에서 두루 잡히는데 영덕대게가 브랜드를 선점했다. 흑산도 홍어처럼 수산물에서 브랜드로 성공한 대표적 사례이리라. ●길거리서 파는 붉은 게는 영락없는 홍게 길거리에서 붉은 게를 영덕대게라며 팔고 있다. 영락없이 홍게다. 홍게는 수심 600∼1000m의 동해 심해에서 잡힌다. 껍데기가 두껍고 살이 적어 다리를 뜯어 보면 그야말로 ‘꽝’이다. 이 게는 사계절 잡히며 껍질에서 키토산 등을 채취하는 데 이용된다. 가격은 대게와 비교도 할 수 없다. 그러니 이런 홍게를 대게로 잘못 알고 사먹거나 속여파는 일은 없어야겠다. 홍게가 심해저 생물이라면 대게는 울진의 왕돌짬으로부터 영덕의 무아짬에 이르는 짬(바위)에서 주로 자란다. 약 120m 이하의 바위밭이 동해변에 이어지고 있으며, 무아짬 안쪽은 고운 자갈과 모래밭이다. 영덕대게는 무아짬 안쪽, 즉 강구와 축산 사이의 3마일 근역이 집중적인 서식지다. 덕분에 게의 내장이 펄을 먹고 자라서 검은 빛을 내는 여타 지방의 대게와 달리 푸른빛이 감돈다. 12월부터 5월까지 5개월여를 조업한다고 하지만 집중적인 어획 시기는 2∼3월이다.11월은 산란이 끝나서 살이 빠져 있고 또 탈피를 하기 때문에 맛이 없다. 게들은 매미처럼 생태적으로 허물을 벗기 때문에 한자로 ‘벗을 해’(蟹)라고 쓴다. 풀어 보면 ‘解+蟲’이다. 김려는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에서 당대 조선 후기의 속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이곳 사람들은 큰 게는 천년에 한번 껍질을 벗는다고 말한다.’그러나 김려는 ‘천년에 한번 껍질을 벗는다는 말은 너무 신비롭게 꾸며진 것 같다.’고 정확히 인식하였다. 당시에 영남지방의 어촌에서는 ‘게 껍질로 염전집과 밭의 원두막, 주점의 지붕을 덮었다.’고들 했다. 큰 게가 엄청나게 잡혔다는 증거다. ●큰 게 껍질로 지붕 덮어 대게는 2월 초부터 3월 말까지 살이 바짝 오르면서 알도 꽉찬다. 봄빛이 무르익어 가는 4월부터는 산란을 위해 모래나 펄로 기어들기 때문에 맛이 덜하고 잡히는 숫자도 준다. 대게잡이는 강구, 축산, 대진 세 포구가 중심이다. 보통 1∼2t, 크다고 해야 5t 미만의 작은 배들로 2∼3인이 조를 짜서 출어한다. 현재 법적으로 9㎝ 이하는 못 잡도록 규제하고 있다. 작은 놈은 잡혀도 무조건 방류해야 한다. 일명 ‘빵게’라 부르는 암컷도 방류하기는 마찬가지다. 폭 70m짜리 그물을 15∼16폭이나 놓으니 1㎞에 이르는 그물이 바다에 드리워진다. 수많은 배들이 저마다 이 정도씩 그물을 놓을 터이니 바다밑은 가히 그물밭이라고 할 만하다. 이렇게 잡아댄다면 대게의 앞날도 어둡기만 하다. 척당 어림잡아 150여마리씩을 잡는데 9㎝짜리는 6000∼9000원,10㎝짜리는 3만원을 호가한다. 뚜껑 크기가 1~2㎝ 차이가 남에 따라서 값이 천양지차다. 실제로 시식해 보니 맛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작은 놈을 선택하여 싸게 먹는 것도 경제적이겠다는 생각이 든다.3인 기준 9마리를 먹으면 7만∼8만원이 들어가니 웬만한 회값보다 세지만 턱없는 값은 아니니 비싸다고 미리 주눅들 일은 아닌 듯싶다. ●영덕대게 으뜸은 검은빛 띤 박달게 영덕대게의 으뜸은 박달게다. 수심이 조금 깊은 곳에서 약간 검은빛이 도는 딱딱한 박달게가 잡힌다. 오랜 경험을 지닌 어부들은 이구동성으로 박달게야말로 ‘진짜 영덕게’라고들 말한다. 마리당 최소 5만∼6만원은 주어야 먹을 수 있으니 웬만한 용기가 아니면 맛보기 어렵다. 강구로 모든 게들이 집산되면서 어느 결에 영덕대게란 브랜드가 탄생했다. 대게는 관행적으로 영덕의 강구항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고, 산물이 집중화된다. 다른 수산물과 달리 이 자그마한 시장에 수요와 공급의 집중이 이루어진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달려 수도권까지 나갈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강구항에서 거래되는 대게가 반드시 영덕에서 잡히는 게만은 아니다. 울진이나 울산에서 잡힌 게도 일단 강구로 들어오면 영덕대게가 된다. 업자들은 단번에 알아내지만 일반인들이 이를 무슨 재주로 구분하랴. 수요가 부족하다 보니 러시아산 킹크랩, 일본산, 북한산 등이 동해의 수족관을 그득 채운다. 북한산이나 일본산도 일반인이 보기에는 영덕대게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다. 북한산은 전반적으로 박(껍질)이 크다. 동해안 묵호항으로 직접 들어와서 그대로 서울로 직항한다. 서울에서 큰 게를 만나면 십중 팔구 러시아산이거나 북한산일 것이다. 영덕대게는 껍질이 얇고 노란 분홍빛이 돈다. 그래서 단연 다른 게들과 구분된다. 게 껍질에는 아스타산틴이 단백질과 결합되어 있다. 단백질과 아스타산틴의 결합도는 그다지 강하지 않아 섭씨 70도만 가열해도 쉽게 끊어진다. 삶은 게의 색조가 붉게 변하는 것은 이 아스타산틴이 단백질과 분리되면서 본디 자기 색깔을 되찾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게가 인기를 모으면서 대게를 둘러싼 지자체 간의 싸움도 치열하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울진대게를 임금에게 진상한 것으로 방영되자 영덕 주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대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관광 수입이 영덕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울진에서도 대게가 많이 잡히고, 포항 구룡포는 물론 울산의 정자에서도 다량 포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사람들은 영덕대게라고 부르고 있다. 수산물도 브랜드를 선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여기에서도 실감하게 된다. ●차유마을앞 죽도 근역서 많이 잡혀 영덕군은 축산면 경정리의 차유마을을 ‘영덕대게 원조마을’로 지정하고 원조 싸움의 기선을 선점했다. 오랫동안 어촌계장을 해온 김수동씨는 차유마을의 경우 배 한척으로 벌어들이는 연간 어획고가 1억여원에 이른다고 말한다. 출어비를 포함한 제반 경비를 제하면 5∼6개월 동안 5000만∼6000만원을 버는 셈이니 상당한 고수입이다. 봄이 오면 자연산 미역이 출하되므로 그야말로 자본을 별로 들이지 않고 그대로 바다에서 건져서 내다팔면 돈이 되는 일이다. 가을에는 연안 오징어가 대량으로 잡히며, 다시 겨울이 오면 대게잡이에 나선다. 즉 미역, 오징어, 대게가 삼박자로 돌면서 차유 사람들의 생계를 이끄는 것이다. 차유마을에서 바라보자면 축산항 쪽으로 돌출된 죽도가 보인다. 대나무가 빼곡하게 우거진 가파른 섬이다. 죽도같이 연륙된 동해의 섬들이 숱하게 존재함을 볼 때, 동해안에 섬이 없다고 함부로 단언할 일이 아니다. 죽도 주변으로부터 차유마을 근역까지는 같은 영덕에서도 대게의 으뜸 서식지. 그래서 죽도에서 비롯됐다는 의미에서 대게(竹蟹)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그런데 김려는 대게의 붉은빛을 보고 조선 후기에 이를 자해(紫蟹)라고 이름 붙였다며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대게의 껍질 속에는 능히 7∼8말이 들어간다. 게의 넓적다리와 집게발은 살지고 맛이 좋아 이곳 사람들은 포를 만들어 먹는다. 색깔이 선홍빛이어서 보기 좋으며, 맛도 달콤하고 부드러워 정말로 진귀한 음식이다.’고 했으니 당시에도 게는 진귀하고 값진 고급음식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고관대작들의 술안주로도 단연 인기일밖에.‘진해 남문 밖에 있는 두 군데 화류거리, 거리 입구 초가집에는 집집마다 술집 간판, 새로 온 예쁜 아가씨 고운 흰 손으로 검은 소반에 대게 살 담아 내온다.’고 우산잡곡(牛山雜曲)에 적혀 있다. 오늘의 영덕만이 아니라 저 멀리 진해에서까지 두루 잡혔다는 점이 주목된다. 그만큼 대게 분포가 좁아졌다는 뜻이다. 영덕을 찾는 이들이 반드시 들렀다 가는 영해장은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거래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멀리 영천은 물론 울진·영양·진보·안동에서까지 상인들이 찾아들었다. 조선 후기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도 주거래 품목에 해산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말하자면 동해 남부의 유력한 수산물 거점이 영덕이었다는 증거다. ●영덕대게와 쌍벽 이루는 털게도 멸종위기 대게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잊을 수 없는 게가 있으니 영덕대게와 쌍벽을 겨눌 만한 털게다. 한류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통이며 다리가 온통 털로 뒤덮인 주먹만한 털게를 쪄서 먹는 맛이란 그야말로 식도락의 으뜸이다. 그런데 겨울철 털게는 휴전선 근역 고성 근처에서나 어쩌다 볼 수 있을 뿐 서울 같은 도회의 저자거리 시장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조선의 수산’(1930·조선수산회 발간)을 보면 1928년 1년간 수출 수산물의 6할이 털게와 대게 통조림이라고 했다.1910년 겨울에 이미 함경남도 북청군 신포에서 처음으로 털게 통조림공장이 설립되었다. 이렇듯 흔하던 털게들이 남쪽에서는 희귀종이 되었고, 북한쪽에서 겨우 잊지 않을 정도로 잡힐 뿐이다. 적절하게 보호·통제하지 않으면 쉽게 멸종한다는 섭리를 털게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덕대게의 미래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대게의 원조인 박달게가 거의 잡히지 않음은 자원고갈을 방증한다. 그러니 알이 꽉찬 ‘빵게’를 먹으면서 “역시 대게는 맛있다.”고 즐거워할 일이 아니다. 빵게잡이 자체가 불법이니 판매도 불법이고, 먹는 것 또한 불법이다. 맛있다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빵게 어획을 신고하는 정신’도 함께 기를 일이다.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7)시흥 소래염전과 소래포구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47)시흥 소래염전과 소래포구

    겨울의 을씨년스러움이 폐허의 소금밭을 뒤덮고 있다. 수인선 철길이 끊긴 지 오래 되어 잡초만 무성하다. 염부들이 떠난 폐염전이 고즈넉하다 못해 음산하기까지 하다. 무너져 내린 소금창고만이 얼마 전까지 소금을 만들었던 노동의 역사를 말해줄 뿐이다. 소금밭에는 갈대가 우거져 있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고라니 한 마리가 갈대 속으로 몸을 낮춘다. 염판에 깔던 옹기편만이 햇빛에 반짝거리며 화려했던 옛 시절을 말하고 있다. 누군가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고….’라고 했듯 오랜만에 둘러본 소래 풍경도 수상하다. 옛 염전을 둘러싼 외곽에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해 머잖아 마지막 남은 이 소금밭으로 침공을 개시할 태세다.2004년 겨울. 소래는 이렇듯 불안정한 풍경으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싸고 싱싱한 새우젓으로 소래포구 ‘북적북적’ 경인지역에서 자란 사람들은 누구나 기억하리라. 수원∼인천을 오가는 협궤열차를 타고 가자면 끝없이 펼쳐지던 군자와 소래의 염전을. 조개나 새우젓 따위를 광주리에 얹은 아낙들이 오르면 기차는 순식간에 어물전으로 돌변했다. 화성의 야목 같은 정거장에서도 맛, 굴 등을 준비한 아낙들이 올라타 ‘어물전’풍경에 또 다른 색을 덧칠하곤 했다. 사람들은 김장철이 되면 으레 소래포구로 나가 새우젓 등속을 준비했다. 마포새우젓이 명성을 다해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이후 소래포구가 그 역할을 이어 경인지방의 새우젓 물량을 감당해 오고 있다. 소래까지 오고가는 차비가 더 들 수도 있지만 싸고 싱싱한 맛에 멀다 않고 소래포구를 찾곤 한다. 수인선 열차는 낭만의 표상처럼 인식돼 연인들의 단골 데이트코스가 되기도 했다. 드넓은 염전지대를 거친 뒤, 왁자지껄한 포구를 지나서 갯냄새 물씬한 인천항에 당도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열차의 낭만성을 보증하고 남았다. 그러나 이제 염전도 사라지고, 기차도 없고 남은 것은 추억뿐이다. 시흥시 군자동에 있던 군자염전 터는 아파트단지로 바뀌었고 군자역만 남아 옛날을 말하고 있다. 남동염전 터는 인천시 남동구 남동공단에 편입돼 공장지대로 변했다. 시흥의 소래염전만이 어정쩡한 ‘대기발령’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소래염전터에서는 포동, 일명 새우개라 부르는 마을을 주목해야 한다. 큰 당나무들이 동산 위에 서 있고 당집도 남아 있어 예부터 마을신을 크게 모셨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해마다 배치기 신명에 고기잡이 풍어를 만끽하던 포동 당제는 끊긴 지 오래이고, 신성 공간이었던 당집 주변엔 온갖 영세 공장과 너저분한 쓰레기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다. 당집 바로 옆 컨테이너박스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가롭게 라면을 끓이고 있다. 소래포구가 각광을 받기 전에는 모든 배들이 새우개포구로 몰려들었다.1930년대까지만 해도 잘나갔던 새우개포구는 염전이 생기면서 막을 내렸고, 그 임무를 소래포구에 넘겨주었다. 즉, 포리포구는 소래철교의 부설과 더불어 그 명맥이 끊기게 된 것. ●소래염전터 서해안 ‘마지막 남은 허파’ 노인정에서 만난 이 마을 토박이 황구인옹은 “포동 사람들도 지금은 소래포구로 나가 장사들을 하는데, 그때는 소래에 집이나 있었나. 포동이 훨씬 컸지. 소래에 배 닿기 시작하면서 저렇게 커졌는데, 그게 불과 30년도 안돼. 월곶은 10년도 안됐고…. 포동에 배 없어진 건 소래다리를 놔서 염전다리 놓는 바람에 배가 못들어와 그렇게 됐어.”라며 이곳의 역사를 소개했다. 유흥가로 변한 월곶이나, 번화한 저잣거리 같은 소래포구나 모두 근래 생겨난 곳임이 황옹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시흥시 향토자료실 김낙기 위원은 “경기 서해안은 워낙 민감하게 변화를 거듭해 세심하게 보지 않으면 그 역사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침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20세기 민중생활사연구단(단장 박현수)에서 이들 지역을 집중 조사하고 있어 조만간 지난 100년의 사라질 뻔한 역사가 복원돼 전모를 드러낼 전망이다. 소래염전은 경기 서해안의 ‘마지막 남은 허파’이다. 면적도 엄청나게 넓다. 생태환경공원을 꾸미자는 주장에서부터 토지분양으로 수익을 올리려는 소유주의 집요한 주장까지 가세, 이 땅의 용도가 쉬 정리되지 않고 있다. 시골포구였던 월곶도 번쩍이는 관광지로 변한 지 오래다. 소래염전마저 아파트용지로 내주고 만다면, 이곳 서해안은 얼마다 더 황량하고 복잡해질 것인가. 천만 다행인 것은 시흥시가 생태용도로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는 점이다. 경기 서해안에 이만한 땅은 이곳뿐이므로 소래염전의 운명에 관해 모두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들 폐염전은 불과 70여년 전만 해도 갯벌이었다. 소래염전이 1930년대, 군자염전은 그보다 조금 이른 1920년대 초반에 생겼다. 군자·소래염전은 한반도 최대의 염전이었다. 우리나라의 천일염 역사는 1907년 일본인이 중국인 기술자를 고용, 주안에 1정보 규모의 시험용 염전을 만든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규모면에서는 이곳 염전들이 가히 압도적이다. 조용하던 이곳의 지역적 정체성과 단일성이 흔들리는 최초의 사건이 염전에서 시작됐다. 그때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들어왔으며, 그 바람에 일본 대신 중국의 천일염 기술이 전파되었다.3·1운동이 났던 해, 중국 산둥성에서 중국노동자들이 몰려와 염전 공사를 도맡았고, 자본은 일본인이 댔다. 재미있는 것은 그 무렵 남한보다 일찍 염전 기술을 익힌 평안도 사람들이 집단으로 남하해 이곳에 ‘평안도촌’을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평안도촌은 군자역 주변 마을로,1922년 군자염전 축조사업 때 평안도 용강 등지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 오면서 취락으로 발전했으며,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피양촌’이라고 불렀다. 군자역 서북쪽 지역은 ‘웃피양촌’, 북쪽 지역은 ‘아래피양촌’으로 불렸다. 또 군자역 뒤는 군자염전 염부들이 이사와 사는 곳이라 하여 염전이민사나 염전사택으로 불리곤 했다. 오늘날 전철 4호선 군자역이 바로 이 지역으로, 평안아파트에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일제는 소금을 실어나르기 위해 이곳에 협궤열차를 부설했다. 민간이 부설한 철도로, 순전히 경제적 목적의 철도였다. 처음에는 경동철도라 불리다가 후대에 수인선으로 바뀌었으며, 소래포구의 철교도 경동철교에서 나중에 소래철교로 바뀌었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수인선은 기억하지만 수려선은 까마득히 잊고 있다. 당시에는 수원과 여주 사이에도 경제철도가 있어 이곳의 소금이 인천·수원뿐 아니라 멀리 여주까지 공급되었고, 여주에서 좀 더 내륙까지 전해지는 파급효과를 보여 주었다. ●협궤열차도 소금 실어나르기 위해 생겨 이 철교 명칭을 둘러싸고 아직까지 인천시와 시흥시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인천시 남동구는 소래철교를 인근 소래포구와 연계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철도청에 철교매각 요청서를 제출했다. 인천시가 문화재청에 근대문화유산 지정신청을 내고 지정예고를 공고하는 과정에서도 논란이 불거졌다. 인천시는 ‘인천 소래철교’, 시흥시는 그대로 ‘소래철교’를 주장한 것이다. 지자체 간의 문화관광수입 증대를 노린 어처구니없는 싸움이다. 이 철교는 남동구 논현동 소래포구와 시흥시 월곶동을 잇는 총연장 126.5m, 폭 2.4m 규모로, 전체 길이의 49%는 남동구,51%는 시흥시에 속한다. 이러니 철교를 두토막으로 잘라내지 않을 바에야 양측이 타협하여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보듬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소래·군자 일대는 천혜의 갯벌이 펼쳐졌던 곳으로 최고의 염전 적지였다. 일제는 눈치 빠르게도 이곳을 주목했다. 소금은 생필품으로만 중요한 게 아니라 화약제조용 군수품으로도 소중했기 때문이다. 소래와 군자의 소금은 인천으로 옮겨져 국내는 물론 일본과 멀리 만주로도 실려 나갔다. 일본인들은 오늘날 시흥시 옥구공원이 있는 옛 옥구도에 취락을 형성, 집단적으로 모여 살면서 신사까지 지었다. 그 후, 포동에 신촌이 형성되면서 충청도의 노동력들이 염전을 찾아 대거 몰려들었다. 시흥의 한적할 것 같던 바닷가가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국내 외지인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근대의 시작’은 이처럼 바닷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에는 다시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었다. 시흥의 평안도촌과 인연을 맺은 다수의 평안도 사람들이 인맥을 따라 오이도 인근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월남 이전부터 이곳 평안도촌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런 인연으로 전쟁통에 무리지어 이곳으로 흘러들어 온 것이다. 여기에다가 1980년대에는 호남인들이 다수 유입되기도 했다. 경기 서해안의 복잡다단한 인구 구성은 이런 단계를 거쳐서 중층적으로 이뤄졌다. ●인천·시흥시, 소래철교 명칭싸고 갈등 군자염전 터 남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오이도가 있어 이곳 바다풍경의 끝자락을 펼쳐보이고 있다. 말이 오이도지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신석기 패총이 무더기로 발굴된 곳이니, 선사시대 이래 인간이 터를 일구고 살아온 곳이다. 오이도 역시 새롭게 탄생했다. 예전의 오이도는 시화호 개발로 사라졌고, 갯벌을 매립한 곳에 계획도시가 들어섰다. 조개구이집 등 횟집이 즐비한 지금의 오이도에서 수인선의 정취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시화호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방조제가 오이도에서 대부도 방아머리까지 연결되어 차량이 쉴새없이 오간다. 갯벌 가운에 말없이 졸고 있던 오이도는 간데없고 그 자리는 나들목 같은 분주함뿐이다. 수인선 협궤열차에 몸을 싣고 군자역쯤에서 하차하여 오이도로 걸어나가면서 굴을 따먹던 그때의 연인들은 모두 장년이 되어 버렸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사라졌어도 그렇듯 풍성한 추억거리를 남겨 이 겨울을 좀 더 따스하게 감싸는 것이리라.
  • 수능 끝! 훌훌 털고 떠나자

    수능 끝! 훌훌 털고 떠나자

    수능 잘 보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세요. 그런데 뭘 할지 결정하셨나요? 목적도 없이 어두컴컴한 밤거리를 헤매기만 한다면 사실, 자유도 별로 향기롭지 않답니다. 고3 스트레스를 확 날려버리고, 귀한 자유를 느끼고 싶다면 여행을 떠나세요. 적은 용돈에 차도 없어서 멀리 갈 수 없다고요? 꼭 멀리 가야만 여행은 아니지요.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까운 바다로 떠나세요. 기차여행도 얼마나 멋스러운가요. 또 우리를 위해 시내 곳곳에서 각종 이벤트도 한창입니다. 마음맞는 친구와 함께 수능 애프터데이를 한껏 즐기자고요. ■영종도 강화 석모도·영종도·무의도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고, 경비가 저렴하게 들면서도 마음껏 바다의 아름다움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서울에서 1시간이면 닿을 수 있고 철지난 바닷가를 산책한 후 친구들과 함께 해수온천에서 물놀이도 할 수 있는 영종도는 여러모로 매력적인 곳이다. 서울에서 갈 때는 1호선 지하철을 타고, 인천역에서 내려 버스로 인천 월미도까지 가야 한다. 월미도선착장에서 영종선착장(구읍배터)까지는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좋다. 이렇게 가면 전철이긴 하지만 기차도 타고 배도 타며 여행의 기분을 한껏 만끽할 수 있다. 영종도는 가깝지만 큰 섬이다. 체력에 자신 있으면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녀도 되고 아니면 버스를 타고 을왕리 해수욕장이나 무의도중에 한 곳을 다녀 오는 것도 좋다. 일단 자전거를 빌리고 싶다면 월미도에서 배를 이용하는 편이 좋다. 영종도에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영종선착장 앞에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신나게 달려보자.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용궁사가 있다. 흥선 대원군이 아들을 임금이 되게 하기 위해 10년 동안 기도를 올린 곳이다. 대원군이 직접 쓴 현판과 둘레 5.63m, 수령 1000년이 넘는 느티나무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1시간 달리면 영종도 서쪽의 바닷가에 도착한다. 철지난 해수욕장은 을씨년스럽지만 더욱 멋있다. 을왕리해수욕장이 있는 용유도 해변이다. 해변을 따라 을왕리 해수욕장, 선녀바위 해변, 왕산유원지, 마시란 유원지가 잇따라 붙어 있다. 을왕리 해수욕장에선 선녀가 목욕을 하고 갔다가 바위로 변했다는 선녀바위와 기암괴석의 아름다움은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더욱이 썰물시간은 환상적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갯벌이 펼쳐지며 수평선은 어느새 바다와 하늘이 하나돼 보이지 않는다.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 그 전에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영종도 해수피아(032-886-5800)다. 바다속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를 이용하는 대형 온천이다. 친구의 등도 밀어주고 같이 몸을 씻으며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보자. 입장료 6000원. 월미도 선착장(032-762-8880)에서 영종선착장(032-746-0740)까지 가는 배는 오전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학생 1500원, 어른 2000원. 영종선착장에서 나오는 배도 같다. 인천공항에서 영종선착장까지 가는 버스 203번는 매시 10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해 선착장으로 온다.45분 정도 걸린다. 학생 700원, 어른 1200원. 자전거 대여료는 시간당 3000원. 을왕리쪽으로 가는 버스는 영종선착장에 있고 약 50분 걸린다. 인천공항에서는 301,306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10분 간격. ■석모도 가까워서 더욱 아름다운 곳이 석모도다.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눈앞에 보일 만큼 가까워 섬이 주는 외로움은 덜하지만 정취만큼은 어느 곳에 비해도 빠지지 않는다. 이정재·전지현 주연의 영화 ‘시월애’,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의 무대이기도 했던 이곳은 서해에서도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또 도로가 잘 나 있고 차량통행이 드물어 자전거를 대여하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석모도 여행은 보통 신촌로터리 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한다. 강화 외포리행 버스를 타고 평균 2시간이면 석모도가 눈앞에 보이는 강화 외포리 선착장에 도착한다. 여기서 배를 타는 시간은 10분 남짓. 짧지만 섬 여행의 기분만큼은 느낄 수 있다. 새우깡에 길들여진 갈매기들의 묘기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석모도 역시 걸어다니기에는 무리다. 자전거를 빌리자. 인라인을 신고 달려보는 것도 재미있다. 친구와 장난쳐도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 석모도 일주도로를 자전거로 한바퀴 도는데는 3시간이면 족하다. 석포선착장 앞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50분정도 가면 삼랑염전과 민머루해수욕장이다. 약 30만평에 달하는 염전은 이국적인 분위를 느끼게 한다. 길을 따라 염전을 구경하고 김장을 앞둔 어머니를 위해 천일염(1만원 정도)도 살 수 있다. 검은 갯벌이 속살을 드러내는 썰물에는 조개나 게를 잡을 수도 있고, 밀물 때면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놀 수도 있다. 바닷가에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면 다시 자전거에 올라 천년고찰 보문사로 가자.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진 것으로 전해지는 보문사는 바다와 육지의 아름다움이 조화된 절. 석굴법당과 절뒤 암벽에 새겨진 높이 6.9m의 마애석불이 일품이다. 그윽한 향냄새와 장엄한 불상 앞에서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기회를 갖는 것도 좋다. 이번엔 서쪽 끝 하리저수지로 가보자. 영화 ‘시월애’ 촬영지는 이미 철거됐지만, 영화 속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정식했던 아카시아 나무는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화 속의 세트는 사라졌지만 자연풍경과 황홀한 낙조는 여전히 아름답다. 서울 신촌 버스터미널(02-324-0611)에서 평일 1시간, 주말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외포리 행 버스를 이용한다. 학생 3900원. 일반 5900원. 외포리 선착장(032-932-6007)에서 평일 30분, 주말 5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카페리호를 타고 석포리 선착장까지 가면 된다. 첫 배는 오전 7시30분, 마지막 배는 오후 6시30분. 석모도에서 나오는 배 시간도 같다. 승선료는 왕복 1200원. 차량은 1만 4000원. 자전거는 하루 빌리는 데 1인용 8000원,2인용 1만 4000원. 자전거를 원하는 곳까지 배달 해주고 수거도 한다(011-9774-0091). ■무의도 드라마 ‘천국의 계단’과 영화 ‘실미도’의 무대가 되어 단번에 유명해진 곳이다. 무의도에서 볼 만한 곳은 하나개해수욕장과 큰무리(실미)해수욕장, 호룡곡산 등이다 일단 영종도 잠진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무의도로 향한다. 소요시간은 5분. 무의도 큰무리선착장에 도착하면 마을버스로 해수욕장으로 이동한다. 그중 제일 먼저 찾는 곳이 하나개해수욕장이다. 선착장에서 섬을 한 바퀴 도는 마을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로 이동하면 된다. ‘하나밖에 없는 큰 갯벌’이라는 뜻의 하나개해수욕장은 폭 100m에 달하는 백사장이 1㎞ 넘게 펼쳐져 놀기에 그만이다. 또한 남쪽 언덕 위에 예쁜 집이 하나 있다. 그 집이 ‘천국의 계단’에서 최지우가 어린시절 살던 곳이다. 별로 볼 것은 없지만 그래도 디카에 추억을 담는 것은 필수.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실미도로 가보자. 실미도는 무의도 실미해수욕장과 마주하고 있다. 썰물 때 해수욕장과 실미도 사이에 거대한 갯벌과 모래톱이 드러나 2시간가량 길을 내준다. ‘실미도’ 촬영 세트장은 없어졌지만 고된 훈련을 받은 부대원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서둘러 길을 되짚어 무의도로 향하자. 시간을 지체하면 자칫 혼자 섬에 갇혀서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지는 석양은 역시 아름답다. 잠진도선착장에서 무의도로 가는 배는 아침 7시30분부터 30분 간격으로 있다. 물때에 따라 하루 2∼3시간씩 결항되므로 미리 결항시간을 알아보는 게 좋다. 뱃삯은 왕복 2000원. 학생할인은 없다. 무의도해운(032-751-3354). 무의도에서는 마을버스를 이용하자.30분에 한번씩 다니며 섬을 일주하기 때문에 어디든지 갈 수 있다.1000원. 또 인천 연안부두 여객터미널(032-887-2893)에는 무의도행 배가 오전 9시30분에 한번 있으며 뱃삯은 어른 8900원, 학생 8150원.50분 걸린다. 글 사진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제3경인고속도로 건설 난항

    민간자본으로 추진중인 제3 경인고속도로 건설사업이 주민들의 반발로 난항을 겪고 있다.16일 시흥시에 따르면 한화건설 등 6개 건설회사 컨소시엄인 제3경인고속도로㈜는 최근 고속도로 건설에 따른 교통영향평가 주민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도로관통 예정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이 회사는 또 19일 시청에서 환경영향평가와 관련된 주민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나 이 또한 불투명하다. 도로관통 예정지역인 시흥시 월곶·연성·매화·하상·목감동 주민들은 도로가 개설되면 소음과 매연 등으로 심각한 환경피해가 일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하상동 태평아파트 일대 주민들은 “고속도로와 아파트단지, 시흥고교 등과의 거리가 50∼100m에 불과해 주민과 학생들이 극심한 소음공해에 시달릴 것”이라며 적극 반대입장을 보이고 있다. 주민대책위 관계자는 “제3 경인고속도로는 폐염전을 가로질러 시흥을 남북으로 양분하고 기존 제2 경인고속도로와 불과 100∼200m 떨어진 곳에 위치, 중복건설되는 부작용이 있다.”고 지적했다. 제3 경인고속도로는 민자 4357억원(보상비 제외)을 들여 내년부터 2009년까지 인천시 남동구 고잔동∼시흥시 논곡동 도리를 연결하는 총연장 14.3㎞, 편도 4∼6차선 도로로 건설된다. 시흥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서울신문 제정 24회 농어촌 청소년대상

    올해로 24회를 맞는 농어촌청소년대상 농업부문 대상 수상자에 노형수(28·전남 장흥군 관산읍)씨가 선정됐다. 수산부문 대상은 이대우(30·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씨에게 돌아갔다. 농어촌청소년대상 심사위원회(위원장 김성수 서울대 교수)는 10일 농업·수산부문 대상을 비롯한 특별상 및 본상, 공로상 수상자 19명을 선정, 발표했다. 농어촌청소년대상은 농어촌 후계자를 발굴, 육성하기 위해 서울신문사가 1980년 제정한 상으로 농림부, 해양수산부, 농촌진흥청, 농협중앙회, 한국마사회가 후원하고 있다. 수상자는 현장 실사를 통해 엄선됐다. 수상자에게는 대통령, 국무총리, 농림·해양수산부 장관, 농촌진흥청장, 농협중앙회장의 표창과 한국마사회가 협찬한 상금이 수여된다. 시상식은 12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태평로 서울신문사·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수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농업부문 ▲대상 노형수 ▲특별상 이인섭(28·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본상 김영규(26·충북 보은군 삼승면) 안상기(34·경남 김해시 장유면) 서기석(26·전북 김제시 성덕면) 송승현(30·제주 북제주군 조천읍) 임은영(24·경북 영덕군 창수면) 원영수(29·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안보경(34·제주 북제주군 조천읍) 이윤교(35·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김원삼(28·광주시 남구 구소동) ▲공로상 조정주(37·경기도 농업기술원) ●수산부문 ▲대상 이대우 ▲특별상 김현철(30·전남 여수시 화정면) ▲본상 곽영기(35·경남 사천시 마도동) 정병철(28·울산시 동구 주전동) 황재덕(30·전남 신안군 장산면) 김경택(33·제주 북제주군 애월읍) ▲공로상 오몽룡(57·전남 목포수산청) ■ 대상 ●수산 이대우씨 “동해안 일대에 첨단 어류 양식장 벨트를 만드는 것이 꿈입니다.” 동해안은 서해나 남해와 달리 조류가 세고 파도가 높은 편이라 양식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다. 그러나 이씨는 특허 양식법을 개발해 주문진 앞바다에서 성공적으로 전복, 가리비, 다시마 양식을 하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운영하는 양식장의 연간 수입이 10억원에 이른다. 육지에서만 가능한 전복 양식이 이씨가 개발한 ‘수심조절식 양식기’를 이용하면 바다에서도 할 수 있다. 바다에서 하면 양식장 부지매입비와 전기료 등이 들지 않으면서도 신선한 상품 전복을 양식할 수 있다. 가리비의 폐사율을 획기적으로 낮춘 ‘중간양성기’도 그의 작품이다. 다시마 양식법도 개선해 질좋은 다시마를 전복의 먹이로 활용하고 있다. 공학도도 아닌 이씨가 특허기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적극성 때문이다. 그는 양식장 근처에 있는 수산연구소를 찾아가 시험양식장을 돌봐주면서 박사급 연구원들과 안면을 익혔다. 이씨는 “연구원들에게 궁금한 점을 수시로 물어보고 그들이 하는 일을 유심히 관찰하니까 어려운 문제도 술술 풀렸다.”면서 웃었다. 이씨는 “어업이 3D업종이어서 모두들 피하고 있으나 조금만 연구하면 손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동해안의 양식법을 개발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그는 양식에 관해선 벤처기업인이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농업 노형수씨“깨끗한 환경에서 소가 잘 먹도록 돌보면 누구나 건강한 한우를 키울 수 있습니다.” 노씨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우량 한우 100여마리를 키우는 농장 주인. 그는 번식우 위주의 축산경영을 통해 연간 2억 2000만원의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지붕이 열리고 닫히는 대규모 현대식 사육장과 왕겨를 활용한 분뇨처리 시설, 자동 온도조절 장치, 혈통우 컴퓨터 관리 등을 통해 친환경 번식우 사육을 실천한다. 겸손하지만 배짱도 있는 젊은이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축산농인 아버지로부터 쌈짓돈을 받아 독립했다. 별탈 없이 작은 농장을 운영하다 외환위기를 맞았다. 축산농들이 잇따라 쓰러지면서 소시장에는 송아지들이 한마리에 35만원씩 헐값에 쏟아져 나왔다. 남들은 축사를 줄이느라 허둥댈 때 그는 3000만원의 농협대출을 받아 송아지 60마리를 사들였다. 불과 2년뒤 소값은 다시 폭등했고, 그는 축사를 개선할 수 있는 거금을 쥘 수가 있었다. 노씨는 “요즘 고유가 때문에 사료값이 두배나 뛰었고, 불경기로 인해 쇠고기 소비도 늘지 않아 걱정이지만 이럴 때가 기회라는 믿음을 다시 한번 갖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7년째 무연고 묘와 보훈대상자 묘를 1000여기나 돌보고 있다. 장흥군 4-H 농악단도 이끈다. 봉사활동은 좋은 환경에서 소를 돌보는 일처럼 실천할수록 힘이 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경운기자 kkwoon@seoul.co.kr ■ 특별상 ●수산 김현철씨 어류 양식에 대한 신기술과 지식을 익혀 이를 주변에 전파, 어촌계의 소득증대에 기여했다. 철저한 시장조사와 양식법 연구를 통해 농어와 참돔 가두리 양식에 몰두, 연간 2억∼3억원의 소득을 올린다. 어촌계의 소득도 23억원에 이르고 있다. 바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생사료(잡어 찌꺼기, 동물 분뇨 등)는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정부가 권장하는 친환경 배합사료를 사용하고, 이를 이웃에도 권유해 배합사료 직불제 혜택을 받도록 했다.‘119명예 구급선’을 운영하면서 해난 환자 구조에도 기여했다. 마을 노인회관의 운영책임도 맡고 있다. ●농업 이인섭씨 수탁(受託)영농과 특용작물 재배 등 정부의 영농 방침을 잘 실천해 고소득을 올리는 쌀 전업농. 한국농업전문학교를 나와 수탁농지를 포함, 논 4만평을 경작하면서 농한기에는 영지·느타리 등 버섯 300평을 재배해 연간 1억 500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건조기 2대를 갖추고 벼 육묘장 300평을 운영하며 브랜드 쌀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고철·농약병 모으기, 꽃길 조성, 독거노인 밑반찬 전달, 낙산해수욕장 청소 등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한다. 이같은 성실함에 반한 아테네올림픽 핸드볼 국가대표 이공주 선수가 그의 약혼녀다. ■ 공로상 ●수산 오몽룡씨 목포수산청 어촌지도관으로 수산물 품종개량과 보급에 앞장섰다. 김, 톳, 다시마, 매생이, 전복, 굴, 숭어 등의 양식법을 개선해 어업인의 소득증대에 기여했다. 특히 신안군 해안에 방치된 폐염전 1000㏊를 대하 양식장으로 개발, 연간 1400여t의 대하를 생산하고 있다. 어촌계 어업인들은 이를 통해 연간 170억원의 소득을 올렸다. 주 소득원인 김의 소비촉진을 위해 ‘완도김 옛 명성 되찾기’운동을 펼치고 해남 김을 브랜화했다. 해남, 완도, 장흥 등 어촌지도소 3곳을 개설했다. 어병진료센터를 이동식으로 운영, 어업활동에 보탬을 주고 있다. ●농업 조정주씨 경기도 농업기술원 지방농촌지도사로 미래농촌의 주역인 청소년 육성에 기여했다.4-H조직 308개,9812명을 지원했다. 신지식 4-H대상 제도를 신설해 특작, 채소, 화훼·과수, 축산, 학생 등 5개 분야의 우수 회원들을 포상했다. 농촌청소년 정보화사랑방 사업도 적극 추진,3억 60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해 22개소를 개설했다.‘우리도의 자기모습 만들기’ 운동을 추진, 청소년들에게 전통민속 문화의식을 일깨웠다. 세계시장에서 인정받는 농산물을 생산한다는 취지에서 연간 30명씩,150여명의 농업인을 외국에 연수하도록 했다. ■ 본상 ●수산 곽영기씨 경남 사천시 저도의 어촌계 총무를 맡아 어촌계의 소득증대에 도움을 준 어업인 후계자. 낚시터 조성, 관리선 운영, 바지락 종패 살포, 어장기반 조성 등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2001년 5억 4000만원에 불과했던 어촌계 소득을 17억원으로 끌어 올렸다. 본인도 근해어업을 통해 연간 1억 500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농업 임은영씨 아이디어 재배법으로 고소득을 올리는 미혼여성 과수농. 맥반석 광맥을 활용한 고품질 복숭아 농장 9000평, 사과된장 특허제조법을 사용하는 사과 농장 1500평, 배 농장 4500평을 운영해 연간 1억원의 소득을 올린다. 경사지인 과수원의 과수 생산물과 퇴비를 운반하기 위해 모노레일도 갖췄다. 태풍 루사의 피해 복구가 끝나지 않았으나 헌혈봉사 등에도 적극적이다. ●농업 안보경씨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복합영농으로 성공했다. 한우 130마리, 녹용사슴 35마리를 기른다.7000평 규모의 농장에서 감귤 및 콩을 재배, 연간 1억 4000만원의 수익을 올린다. 겨울에도 방목을 해 사료값을 절감한다. 지육우 작목반에서 최신 축산기술을 공유하고 있다. ●농업 이윤교씨 도심에서 측량 보조기사로 일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유기농으로 성공했다. 상추, 치커리 등을 유기농 재배법으로 재배한다. 재배 면적은 4000평으로, 연간 520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유기농을 하는 아버지도 이씨의 도움으로 연간 1억 3200만원을 번다.2002년 유기재배에 대한 정부 인증을 받아 상추 등을 할인점에 직접 납품하고 있다. ●농업 김원삼씨 홀몸인 노모의 농사를 도와 자립기반을 일군 시설채소 전문가. 풋고추, 애호박, 양채류 등 시설채소 2000평과 논·밭 5000평을 경작, 연간 700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윤작을 통해 채소류 가격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도로 주변에 무궁화와 코스모스 등을 심었고, 폐비닐 수거에도 앞장섰다. 고령농업인 일손 돕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수산 정병철씨 성실한 어업경영으로 소득을 높이고, 솔선수범으로 주변의 신망이 두터운 어업인 후계자. 울산 주전 어촌계로부터 정치어업 지인망 2㏊와 건망 1㏊를 지원받아 연간 1억원의 소득을 올린다. 해마다 적조가 발생하면 본인 소유 어선을 이용, 황토를 살포하고 주변의 적조예찰도 돕는다. 매월 해안가 청소를 주도하며, 수시로 경로잔치를 열고 있다. ●수산 황재덕씨 어업인 정보화교육(36일)을 이수한 뒤 어촌계에 정보사랑방을 개설했다. 김 양식을 하면서 무기산을 사용하지 않고 고품질의 김을 생산해 연간 3억 200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전복 가두리양식 면허도 취득, 주변 어업인들에게 새로운 소득품종의 보급에도 앞장섰다. 중국동포 여성과 어촌 남성 맛선보기 등을 주관,10쌍의 국제결혼을 성사시켰다. ●수산 김경택씨 넙치 양식을 하면서 성장이 부진한 것은 과감하게 도태시키는 방법으로 고품질의 어류생산을 실천했다. 어시장에서 넙치 가격이 떨어졌음에도 연간 소득을 2억 2000만원으로 끌어올렸다. 양식법을 주변 양식장에 전파하는 등 이웃의 소득증대를 위해서도 힘썼다. 양식장 홈페이지를 제작, 도시 소비자에게 신선한 어류를 공급한다. ●농업 원영수씨 땅값 상승으로 토지를 구입하는데 어려움을 겪자 수탁경영으로 규모화를 실천한 쌀 전업농. 논 3만평과 밭 2000평에서 기계화 경작을 해 연간 1억 200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포클레인, 트랙터, 콤바인 등을 동원, 영농회원을 위해 일손돕기를 하면서 영농기계화 교육도 한다. 동네 배수로와 논둑, 도로 정비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농업 송승현씨 감귤을 친환경 유기농법을 통해 성공적으로 재배했다. 그린그라스 초생재배, 저농약 시험생산과 함께 오갈피 실생묘도 생산한다. 한우 사육에서 발생한 퇴비를 감귤원에 순환농법으로 활용했다. 감귤농사(4800평)와 한우사육(25마리)으로 연간 700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요양원과 아가방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독거노인의 방도배 등을 도왔다. ●농업 안상기씨 액체종균배양기 등을 활용, 팽이버섯과 새송이버섯을 재배한다. 버섯 재배 면적은 210평이다. 종자관리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바이오필름 포장재를 이용해 상품성을 높이는 등 연간 1억 300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종균생산 기술을 이웃에 보급하고, 상품성이 낮은 버섯은 노인들에게 제공했다. 당산나무 공원을 앞장서 조성했다. ●농업 서기석씨 영농의 기계화와 규모화를 실천해 2만 5000평 규모의 벼농사를 하는 쌀 전업농. 경쟁력 확보 노력을 통해 쌀 가격이 80㎏ 한 가마에 15만원까지 떨어져도 연간 소득 8000만원을 유지할 수 있다. 전북도 4-H연합회 회장인 그는 노약자 농가에 농기계 봉사활동도 한다. ●농업 김영규씨 부부 농업인으로 둘 다 한국농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학교에서 배운 농토 배양과 어린 모 재배 기술을 실천해 논 4만평에서 벼를 재배한다.1000평 규모의 밭에서 더덕도 경작, 연간 8000만원의 소득을 올린다. 보은군 4-H연합회 수석부회장을 맡으며 찰옥수수 종자보급, 보훈농가 일손돕기, 우리 농산물 직거래 등을 한다.
  • “다같은 소금이라 생각하셨나요”

    “원산지 표시가 안 된 중국산 소금이 국산으로 둔갑해 우리 식탁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부들이 이제라도 소금에 대한 이해를 높여 중국산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공기·물과 마찬가지로 소금 없이는 살 수 없다. 하지만 소금은 물·공기와는 달리 사실상 관심 밖에 놓여 있다.80년대에는 염전지대가 전국 1만 2000여㏊였으나 지금은 4000여㏊로 크게 줄어들었다. 박세준(43) 대한염업조합 이사장은 전국 1만여명의 염업 종사자들을 대표해 ‘우리 소금’을 전도하고 있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사무실 입구에는 ‘소금은 생명이다.’는 글귀가 걸려 있다. 그의 첫마디는 “소금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지만, 소홀히 취급되는 현실이 안타깝다.”였다. 그는 주부들의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올 김장철에 맞춰 특급작전을 펼친다. 순수 토종의 웰빙소금인 ‘하얀소금’을 국내 처음 선보이는 것. 이달 말 첨단 세척시스템을 갖춘 대불 국산소금조합센터가 완공되면 ‘하얀소금’을 각 가정에 보급할 수 있게 된다. 이 소금은 기존의 색깔보다 몇십배 하얗고 알칼리성이며 천연 미네랄 등 영양가도 풍부하다는 것이 박 이사장의 설명이다. 그는 현재까지 유통되는 천일염에는 대부분 세척되지 않은 소금, 즉 개흙과 같은 이물질이 끼어 있다고 했다. 특히 중국산이 국산으로 둔갑돼 위생적 여과장치 없이 유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는 소금을 직접 먹기 때문에 염도가 85%로 낮고 알칼리성인 반면 중국산 소금은 염도가 95%이며 대부분 산성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연간 천일염 소비량은 320만t. 이 가운데 260만t은 공장용이고,60만t이 가정용이다. 그러나 가정용 소금 생산량이 30만t에 불과해 나머지는 중국에서 수입해 쓰고 있다.2가구 중 1가구가 중국산을 쓰고 있는 셈이다. “사람의 원초적 에너지는 양수이며, 양수는 곧 소금물입니다. 또 오랜 세월 시간이 흘러도 중량이 변하지 않는 금과 같다고 해 소금이라 하지요.” 김문기자 km@seoul.co.kr
  • [문학이 머문 풍경] 상록수의 충남 당진

    [문학이 머문 풍경] 상록수의 충남 당진

    독자들 중에 이미 다녀온 이들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인천∼목포간 서해안 고속도로의 최고 명물인 서해대교를 건너자마자 충남 당진 송악IC를 빠져 왜목마을쪽으로 조금만 가면 ‘한진리’라는 작은 갯마을이 먼저 나타난다. 이 마을은 부곡국가공단을 사이에 두고 ‘부곡리’란 마을과 잇닿아 있다. 무심코 지나쳤을지 모르지만 두 마을이 농촌소설의 백미 ‘상록수’의 무대다. ●농촌에서 산업화 중심지로 탈바꿈 소설의 주인공 박동혁이 농촌계몽운동을 편 ‘한곡리’는 한진리와 부곡리를 합쳐 만든 마을 이름이다. 농촌인 부곡리와 어촌인 한진리는 당초 신작로로 연결돼 있었고 길옆에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펼쳐져 있었다. 소설에서 ‘해변에서 새우를 잡아 말리고, 준치나 숭어 잡는 철이 되면‘이라고 표현된 한진리에선 준치나 새우가 안 나온지가 오래 됐고 숭어는 봄철에만 조금 잡히고 있다. 지금은 여름이면 바지락, 겨울이면 굴을 주로 채취한다. 겨울철을 빼면 우럭과 놀래미를 잡으려고 배를 빌린 낚시꾼들이 선창에서 북적대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띈다. 소설은 또 ‘큰덕미’라는 실제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공단이 조성돼 없어졌지만 한진리 뒤 바다쪽으로 볼록 튀어나온 산이었다. 한 신문사의 학생계몽운동 상을 받는 자리에서 만나 사랑을 키우며 농촌운동을 함께 벌이는 채영신을 동혁이 맞은 곳이다. 영신이 조그만 발동선을 타고온 이곳은 ‘하루 한번 똑딱이(석유발동선)가 와닿는 조그만 포구로 주막 몇 집과 미류나무만 엉성하게 선 나루터’라고 묘사된다. 하지만 큰덕미는 이런 것이 없었고 한진이 그랬다. 한진은 1970년대 초반까지 인천을 왕래하는 여객선이 드나들었고,80년대 초까지 경기도 평택을 오가는 배가 운행됐다. 서해안고속도로가 난 지금은 서울이 가깝지만 그 때만 해도 당진이나 서산에서는 여객선 때문에 인천이 가까웠다. 지금까지 인천에 서산·당진 출신이 많이 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큰덕미가 있던 곳에는 지난 98년 67만여평의 고대공단이 들어서 있고, 신작로와 염전이 있었던 공간은 2000년 94만평의 부곡공단이 입주, 소설의 무대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됐다. ●박동혁의 모델은 큰조카 여주인공 채영신은 경기도 안산에서 농촌운동을 하다 숨진 ‘최용신’이 모델이지만 남자 주인공인 박동혁은 심훈 선생(1901∼36)의 큰조카 심재영씨가 모델이다. 심씨는 작고하기 전 저술한 수필집에서 “나는 숙부보다 11살이 어렸지만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냈고 나를 사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서울 흑석동에서 태어난 심씨는 1930년 진외가가 있는 부곡리로 내려온다. 그는 이곳에서 ‘민중속으로’란 뜻을 지닌 러시아의 브나로드 운동을 본따 마을 청년들과 공동경작회를 조직, 농촌운동을 벌였다. 그는 “일제의 감시와 가난 속에 방황하던 숙부가 나의 권유로 2년 후에 부곡리로 내려왔다.”고 말한다.1년간 심씨의 자택 사랑방에 머물면서 소설 ‘영원의 미소’ 등을 쓴 심훈은 인근에 집을 짓고 ‘필경사(筆耕舍)’란 이름을 붙였다. 식솔과 함께 정착한 이 집에서 심훈은 큰조카 심씨와 최용신을 모델로 해 ‘상록수’를 집필했고, 이 소설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현상모집에 당선된다. 진외가 조카인 안승환(60)씨는 “심훈 선생의 둘째·막내 아들이 이 집에서 태어났고, 이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면서 “두 아들은 현재 어머니와 함께 미국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장남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안씨는 “10년전 선생의 부인이 북한으로 들어가 큰아들을 만났었는데 지금까지 그 아들이 살아있는지는 잘 모른다.”고 가족사를 전했다. 심씨는 자기 집과 필경사 사이에 있는 곳에 야학당을 짓고 학생을 가르쳤다. 그는 심훈이 상록수 당선금 500원 가운데 100원을 들여 야학 문을 고치고 책상 등을 바꿔줬다고 했다. 이 야학이 발전해 지금의 상록초등학교가 됐다. 심씨는 지난 95년 작고하기 몇해 전까지 이 학교 육성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 열정을 불태웠다. ●상록수의 고향 남편이 작고한 뒤에도 줄곧 부곡리 집에 살고 있는 심씨의 부인 김옥순(83)씨는 “남편이 살아있을 때 ‘숙부가 술을 좋아하고 생각이 자유분방했다.’고 얘기했다.”며 자신이 시집오기 전, 상록수를 간행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 원고를 교열하던 중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난 심훈을 전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심씨와 농촌계몽운동을 벌이던 공동경작회의 회원 가운데 김덕영(93)씨만이 생존해 있고 거대한 공단이 마을 일부를 삼켰지만 당진에선 심훈의 문학을 기리는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다. 1977년부터 시·백일장 등을 곁들인 상록문화제가 펼쳐지고, 이 기간중에는 필경사에서 심훈 선생 추모제도 열린다. 또 시와 장·단편 소설을 공모해 시상하는 심훈문학상도 개최된다. 필경사 옆에는 심훈의 육필원고와 유품 등이 전시된 ‘상록수문화관’이 지어져 있어 해마다 1만여명의 관광객과 문학청년, 학생들이 찾아오고 있다. 당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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