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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이 만난사람] 프로복서 출신 유럽 오페라 주역 테너 조용갑

    [김문이 만난사람] 프로복서 출신 유럽 오페라 주역 테너 조용갑

    태양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6월에 매우 정열적인 오페라 하나 잠시 감상해 본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별은 빛나건만’으로 유명한 푸치니의 ‘토스카’ 내용이다. 호색한 스카르피아는 국가의 주요 행사 때마다 무대에 서는 오페라 가수 토스카의 미모에 반해 어떻게든 그녀를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노린다. 하지만 토스카는 카바라도시와 열애 중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스카르피아는 카바라도시를 정치범으로 엮어 교수대로 보내고 토스카를 차지할 계략을 꾸민다. 토스카는 간교한 스카르피아의 덫에 걸리고 카바라도시는 스카르피아의 집무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 연인의 목숨을 구하려는 토스카는 극한의 고통과 갈등 속에서 ‘예술과 사랑을 위해 살았을 뿐 누구에게도 몹쓸짓을 한 적이 없는 저에게 왜 이런 가혹한 벌을 내리시나요?’라는 노래를 애절하게 부른다. 그러면서 토스카는 ‘스카르피아, 하느님 앞에서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안젤로 성벽 꼭대기에서 몸을 던진다.1900년 1월 14일 로마에서 초연된 ‘토스카’는 격정적인 내용으로 공포와 괴기극 기법을 도입, 관객들로 하여금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도록 한다. 1막의 성 안드레아 성당, 2막의 파르네제 궁, 3막의 성 안젤로 성채 등 로마의 명소이자 역사적인 장소들을 무대로 삼았다는 점도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호른의 음색이나 양치기의 서글픈 노랫가락, 성당의 종소리 등도 인상적이다.여기에서 토스카의 연인 카바라도시(테너)에 주목해 본다. 화가이자 자유주의자로 정치적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열정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유럽 무대에서 카바라도시 역할로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인 오페라 가수가 있다. 테너 조용갑(41)씨.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300여회 공연을 가져 ‘동양의 파바로티’로 불린다. 특이하게도 그는 프로복서 출신이다. 하여 ‘가장 드라마틱한 테너’로 유럽 무대에서는 꽤 유명하다. 이런 그가 처음으로 국내 무대에 선다. 다음 달 2~6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카바라도시 역할로 국내 팬들과 만나는 것. 유럽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약해 온 지 14년만의 일이다. 어부의 아들-신문배달원-자장면 배달부-복싱 선수-오페라 가수로 이어지는 그의 삶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그는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136㎞ 떨어진 가거도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거도는 인구가 400여명밖에 안 되고 흑산도에서도 65㎞를 더 가야 하는 말 그대로 적막한 절해고도(絶海孤島)이다. 여기에서 유럽 무대를 평정하는 오페라 가수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다. 지난 13일 오후 서울 방배동에 있는 ‘베세토 오페라단’(이사장 강화자) 연습실에서 조씨를 만났다. 상대역인 토스카 김지현씨와 한참 연습 중이었다. 음악에서 남성의 최고 영역답게 테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면서도 감미롭다. 사랑을 주고받는 정열적인 동작은 더욱 인상깊게 다가온다. 잠시 후 연습실 한쪽에서 조씨와 마주 앉았다. 국내 첫 공연을 갖는 소감이 어떠한지부터 물었다. “한국에는 가끔 옵니다. 어머님도 시골에 계시고…. 그동안 한국 무대를 늘 그리워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 왔다가 제2회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 무대가 열린다기에 공개 오디션에 응했고 기쁘게도 발탁이 됐지요. 14년 전 성악가의 꿈을 안고 이탈리아로 떠난 후 이제야 국내 무대에 비로소 서게 됐습니다. 저에게는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잘해야 한다는 긴장감도 있고요.” 유럽 무대에서는 어떤 활약을 했을까. “소프라노 조수미씨가 졸업한 산타 체칠리아 학교에서 음악공부를 하다가 캄포바소(Campobasso)라는 국립음악원을 졸업했습니다. 국제 콩쿠르에서 20여회 입상한 경력을 인정받아 그동안 오페라 주역으로 300회 정도 공연을 했지요. 2009년에는 현존하는 최고의 바리톤 레나토 브루손과 함께 ‘오셀로’ 주역을 맡아 이탈리아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기도 했습니다.” 이에 앞서 2006년 독일 레겐스부르크 국립극장에서 오페라에서 가장 어렵고 최고로 여기는 ‘오셀로’의 주역을 맡아 각종 신문과 잡지에서 ‘리틀 파바로티’라는 찬사를 받았다. 대개 성악가라고 하면 음악대학을 나와 성악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유학가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씨는 음대 출신이 아니다. 더구나 프로복싱에 몸담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프로복서가 됐을까. “고2 때였지요.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를 도와주다가 패거리들한테 엄청 맞은 적이 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친구와 청량리에 있는 권투도장에 갔지요. 복수를 해 줄 생각이었어요. 처음 3개월 동안은 잽만 가르치더라고요. 나중에 스파링을 1년 넘게 한 사람이 아마추어 시합을 앞두고 저 보고 스파링 상대를 하라고 하더군요. 별로 배운 것도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스파링 상대를 해주는데 맞아서 코피가 나잖아요. 화가 나서 막 공격을 했더니 관장님이 근성이 있다고 하면서 제대로 가르쳐 주더군요.” 이때 그는 서울기계기술고등학교 전자과에 다니면서 신문팔이, 자장면 배달, 호떡장사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해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곧바로 프로로 전향했다. 집이 워낙 가난해서 돈벌이를 위해 무작정 프로무대에 뛰어들었던 것. 22살때의 일이다. 이 무렵 남동생도 시골에서 올라와 권투를 시작했다. “저 때문에 동생도 프로복서가 됐지요. 원래 저는 군 제대 후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전철에서 물건을 팔면서 학비를 충당했는데 프로복서가 훨씬 돈벌이가 되더라고요. 시합을 하고 나면 돈이 일단 생기니까요. 그렇게 5년 정도 복서생활을 했습니다.” 전적이 궁금해졌다. 그는 “한국 챔피언 전초전까지 치렀다. 9전 5승정도, 그러니까 (승률)반타작은 한 것 같다.”며 웃는다. 동생은 동양챔피언 3차방어까지 치렀다고 귀띔했다. 복서에서 성악공부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공릉동에 있는 드림교회에 다녔습니다. 목사님이 ‘자네의 목소리는 조영남씨와 비슷하다. 성악을 공부해 보면 어떠냐.’고 권유하더군요. 그래서 금전적인 도움을 받아 1997년 1월에 이탈리아로 떠나게 됐습니다. 그 목사님은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지요. 그렇게 해서 페루자에서 1년 동안 어학공부를 한 뒤 산타 체칠리아 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악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하루 8시간 이상씩 하느라 목에 결절이 생겨 위험한 순간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에 유학한 지 2년 만인 1999년 오르비에토(Orvieto) 국제 콩쿠르 1위에 입상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이듬해 오페라 ‘라보엠’의 주역을 맡아 오페라 무대에 정식 데뷔했다. 한국에서 음대를 나와 같이 유학했던 동료들보다 일찍 무대가 열리기 시작했던 것. 이쯤 되면 천부적인 목소리를 타고났다고도 할 수 있겠다. 가거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버지는 어부 생활을 했고 어머니는 약초 캐러 다니시고…. 빚에 쪼들려 제대로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의 한 맺힌 노래를 들었고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드실 때마다 밤12시가 넘어도 저한테 노래를 시키곤 했습니다. 한을 달래려고 그러셨던 같아요. 저는 그런 것이 싫어서 집을 뛰쳐나오기도 했고 바닷가로 달려가 막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전기도 없이 호롱불을 켜는 열악한 환경에서 자랐지요.” 가거도에서 중학교(분교)를 나온 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성수동에서 용접기술을 배웠다. 그러던 중 누나가 서울로 올라와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유해 할 수 없이 포기했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이탈리아 로마. 프리랜서 오페라 가수로 1년에 50여회 공연을 소화하고 있다. 아울러 연주자 전문과정을 위한 아카데미를 운영하면서 실력 있는 후배 음악인을 키우고 있다. 이곳 출신 가운데 솔리스트 5명이 올해 국내 첫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그는 결혼한 지 10년째. 부인 최에스터씨는 소프라노 가수로 활약할 때 만났다. 장모가 이탈리아에 여행을 왔을 때 관광 가이드를 하는 조씨의 성실함에 반해 딸을 소개해 줬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며 여섯 살 된 딸이 노래를 제법 해 훌륭한 성악가로 키울 생각이다. 그에게 복서와 성악가의 공통점이 있느냐고 묻자 “폐활량과 호흡의 리듬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 국영방송에 4차례나 단독 출연했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과 이탈리아 축구경기에 앞서 파바로티가 평소 즐겨 불렀던 오페라 투란도트의 아리아 네순 도르마(Nessun Dorma·승리하리라)를 열창해 이탈리아 전 국민을 잠 못 이루게 했다. 그에게 꿈을 물었더니 “내년 한국과 이탈리아를 오가며 정명훈씨가 지휘하는 ‘오셀로’를 공연할 예정”이라면서 한국인으로 자랑스럽게 세계무대를 누비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토스카역의 김지현씨에게 조씨의 노래실력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소탈하고 아주 멋지다.”는 말로 대신했다. 편집위원 km@seoul.co.kr 새달 2일 ‘토스카’로 돌아온 그는… 1970년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학교(분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올라와 성수동에서 용접공 생활부터 시작해 신문팔이, 호떡장사 등 궂은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서울 기계기술고등학교 2학년때 권투도장에서 스파링 상대역을 했고 해군 제대 직후 프로복서 무대에 뛰어들었다. 전적은 9전 5승. 한국챔피언 전초전까지 치른 뒤 1997년 27살의 늦은 나이로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안정환 선수가 몸담았던 페루자에서 어학공부를 마친 뒤 조수미 등 세계적인 성악가를 배출한 산타 체칠리아(Santa Cecilia) 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성악공부를 시작했다. 테너의 거장 잔니 라이몬디(Gianni Raimondi) 등에게 사사를 받았고 2000년 ‘라보엠’에서 주역을 맡아 오페라 무대에 정식 데뷔했다. 이후 파르마에서 열린 베르디 콩쿠르(2005)에서 1위 등을 비롯해 20여회 국제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이탈리아의 국영방송(RAI)에 한국을 대표하는 성악가로 출연, 전 유럽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라 트라비아타’ ‘토스카’ ‘라보엠’ ‘가면무도회’ ‘아이다’ 등에서 주역을 맡았고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모두 300여회의 공연을 가졌다. 다음 달 2일 예술의전당에서 ‘토스카’의 테너 주인공 카바라도시 역으로 국내 첫 무대를 가진다.
  • [열린세상] 엔도르핀적 격정에서 세로토닌적 삶으로/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열린세상] 엔도르핀적 격정에서 세로토닌적 삶으로/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반값 등록금 투쟁을 하고 힘빠진 모습으로 학교에 돌아오는 학생들을 보면 교수로서 참 미안하고 안쓰럽다. 고액 연봉을 받는 노동자들도 불만에 가득찬 파업을 하는 요즘이다. 모두들 삶이 고달프다고 아우성이다. 이런 아우성에 편승해 이해득실을 따지는 정치인들의 계산법에는 말문이 막힌다. 그럼 도대체 누가 행복한가? 더 큰 걱정은 정치가 바뀌고 제도가 개선된다고 해서 근본적인 불균형과 불평등이 별로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인류의 역사가 그러했다. 끊임없이 진보를 외치고 발전을 내세웠지만 삶의 질과 만족도는 거의 제자리걸음이다. 문명론자들은 수렵채취시대에서 농경사회로, 다시 도시사회와 정보시대로 갈수록 진보고 발전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최근 연구들을 보면 수렵채취시대 사람들의 협동심과 영양상태가 현대인 못지않게 양호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농경시대 사람들의 노동강도는 그 이전 시대보다 더욱 가혹했으며, 삶의 스트레스가 훨씬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때부터 외형적 물질생산만 중시되고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뒷전이었다. 한 인문학자의 보고에 의하면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하드자족은 수렵을 해서 먹고 살아가는데, 위험을 뚫고 사냥감을 포획한 전사는 먹이의 분배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한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가 아니라 공동체 모두가 함께 일하고 함께 먹을 권리를 갖는 것이다. 더욱이 그 사냥꾼은 여성들이 최고로 선호하는 신랑감이 되었고, 이미 마을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 되었다. 엄청난 사회적 자본을 가진 셈인데, 사냥감 분배에조차 특권을 준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획득한 사회적 자본에 대한 사회적 세금을 내는 셈이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외치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보다 훨씬 차원 높은 삶이 아니겠는가. 물질적 성취가 곧바로 행복과 직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방식의 삶에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많이 생산하는 대신 적게 원하는 삶의 지혜가 대안이다. 꼭 필요한 만큼만 사냥하고 후손을 위해 지속가능한 자원을 남겨두는 아프리카 케냐 마사이족의 삶에서도 교훈을 얻는다. 나는 틈이 나면 강원도 어느 숙박시설에서 휴식을 취하곤 한다. 그곳에는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고 텔레비전은 물론 인터넷도 되지 않는다. 처음 얼마 동안은 첨단 정보로부터 고립된 금단현상으로 불편하지만 곧 익숙해진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세상도 변함없이 잘 돌아가고 어쩌면 나 때문에 고통받고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누군가가 가능성의 기회를 맞아 떠오를지 모른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생각이 다른 삶을 찾는 시작이 아닐까. 산업시대 앞만 보고 달려야 할 때는 우리 몸에 격정과 신기를 주는 엔도르핀과 노르아드레날린이 과다분비되었을 것이다. 그 덕분에 빨리빨리를 외치며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만했으면 숨고르기를 통해 한번쯤 뒤돌아보면서 아직 뒤처져 걷는 힘든 이웃에게 손을 내밀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볼 때다. 1인당 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서면 아무리 물질적 성장을 해도 삶의 질과 만족도는 더 이상 기대만큼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이 공통된 연구결과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무게중심이 주어져야 한다. 차분한 열정으로 행복과 창의력을 북돋아주는 세로토닌이 답이다. 세로토닌은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로 극단적 대결, 격정적 환호, 샘솟는 의욕보다는 적절한 조절기능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 도박 공화국이라는 자화상을 앞에 두고 더 빠르게, 더 자극적인 것을 양산해 내는 엔도르핀 문화와는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한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고 일하는 보람을 통해 존재감을 느끼는 세로토닌 문화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는 우리 삶의 새로운 방향이 아닐까? 보통의 일을 대를 이어 묵묵히 지켜가는 힘, 화려한 외피를 두르는 것보다는 자신의 색깔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바로 세로토닌적 삶이다.
  • ‘문화 오아시스’ 3청사 아카데미 공연·저명인사 강의 등 인기

    ‘문화 오아시스’ 3청사 아카데미 공연·저명인사 강의 등 인기

    정부 대전청사 7개 기관이 직원 정서 함양을 위해 함께 운영 중인 ‘3청사 아카데미’가 공무원들의 문화 갈증을 해소하는 오아시스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강좌도 주입식 강의에서 탈피해 보고 듣고 즐기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15일 오후 대전청사에서 열린 16회 아카데미에서는 발레 공연이 있었다. 국립발레단 50여명이 백조의 호수 하이라이트를 공연했다. 발레는 어렵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을 탈피하기 위해 솔리스트의 해설도 곁들여졌다. 이번 아카데미를 주관한 특허청 행정관리담당관실 정임숙 사무관은 “새롭고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고 싶어 발레를 선정했다.”면서 “지역 주민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청사 주변에 현수막을 설치하고 주변에 홍보도 부탁했다.”고 말했다. 3청사 아카데미는 2009년 8월 조달·산림·특허·중소기업·통계청 등 5개 기관으로 출발한 뒤 그해 10월 병무·문화재청이 합류했다. 사회, 경제, 리더십, 자기 계발 등 각 분야의 명사들을 초청해 시대 변화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듣고 있다. 홍수환 전 WBA 세계 챔피언, 시골 의사 박경철 원장, 세계적인 암 전문가인 이진수 국립암센터 원장, 마라토너 황영조씨 등이 초청됐다. 2009년 8월 6일 첫 강좌에서는 산악인 엄홍길씨가 ‘거침없는 도전, 열정과 꿈’을 주제로 특강했다. 지난해 9월 10일 오지 전문 탐험가 한비야씨 출연 때는 900석의 좌석도 모자라 바닥과 통로까지 관객들로 가득 찼다. 또 올 1월 27일에는 당시 병무청 홍보대사였던 조인성씨와 공군 군악대가 참가했는데 조씨의 팬들과 주변 아줌마 부대가 몰려 성황을 이뤘다. 3청사 아카데미는 각 기관이 1년에 1회씩 주관한다. 주제 및 강사 선정은 주관 기관이 맡고 기관 협의회가 초청 비용을 일부 지원한다. 청사 주변 지역 주민들도 참여할 수 있다. 각 기관들은 3청사 아카데미 참여를 교육 시간으로 인정해 많은 공무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김영란(46·여)씨는 “공무원 행사라 생각했는데 한비야씨 강의 때 와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면서 “강연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게시판 등이 설치됐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정부대전청사 박승기기자 skpark@seoul.co.kr
  •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 첫 내한 강연 “집안일 노하우는 돈 버는 아이디어”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 첫 내한 강연 “집안일 노하우는 돈 버는 아이디어”

    “마흔이나 쉰 살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결코 늦은 때가 아닙니다. 저는 마흔 살에 ‘엔터테이닝’이란 첫 책을 썼고, 쉰 살에 잡지 ‘마사 스튜어트 리빙’을 창간했습니다.” ‘살림의 여왕’이라 불리며 전 세계 주부들에게 꿈을 제시한 미국인 마사 스튜어트(70)가 14일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 본사에서 ‘슈퍼 토크-당신의 인생을 바꾸라’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폴란드계 이민자의 6남매 가운데 큰딸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요리와 바느질에 대한 열정은 어머니로부터, 정원 일은 아버지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스튜어트는 여러 직업을 거쳤다. 첫 번째 일은 대학 학비를 충당했던 모델 활동이었다. 모델 일로 자신감을 갖게 됐으며 대학을 졸업하고는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일했다. 육아를 위해 증권회사를 그만둔 스튜어트는 파이를 만들어 파는 출장 요리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가정살림에 대한 지혜와 비법을 집대성한 잡지 ‘마사 스튜어트 리빙’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에미상을 여섯 차례나 받은 TV쇼를 시작할 때는 많은 이들이 잡지가 더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고 한다. “기우와 달리 잡지 구독자와 TV 시청자는 서로 달랐고,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고 스튜어트는 당시를 회고했다. 잡지 ‘마사 스튜어트 리빙’은 아이패드로 읽는 전자잡지로도 발행된다. 스튜어트는 “디지털은 미디어 환경을 바꾸고 있다. 앞으로 5년 안에 전자잡지냐, 종이잡지냐가 결정될 것”이라며 “나는 하루에 단지 5분만 트위터에 투자한다. 디지털 기술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음료는 물론 페인트, 집까지 만들어내는 그는 ‘마사 스튜어트’라는 브랜드가 문화 차이에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는 이유에 대해 “이웃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어느 날 ‘마사, 당신은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집안일을 잡일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바꾸어 놓았소’라고 말했다.”고 소개했다. 사업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로는 주식 부당거래 때문에 5개월간 교도소에서 살았던 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마사 스튜어트 브랜드를 사랑하는 소비자들이 떠나지 않았기에 오히려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스튜어트는 강연회 청중의 대부분을 차지한 한국 여성들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믿는 것이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는 길”이라며 “나는 여전히 정원 일을 하고 매일 새로운 책을 읽고 배운다. 사람들이 어떻게 일과 가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느냐고 묻지만 나에겐 일이 곧 삶”이라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NBA] 31년 만의 창단 첫 챔프

    댈러스 매버릭스가 1980년 팀 창단 이후 31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프로농구(NBA) 챔피언에 올랐다. 댈러스는 13일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아메리칸에어라인 아레나에서 열린 2010~11시즌 NBA 챔피언결정전(7전4선승제) 6차전에서 27점을 쏟아낸 제이슨 테리와 더블더블을 달성한 ‘독일병정’ 더크 노비츠키(21점·11리바운드)의 활약을 앞세워 마이애미 히트를 105-95로 이겼다. 4승2패를 기록한 댈러스는 2005~06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마이애미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던 아쉬움을 한 번에 털어버렸다. 마이애미는 이번 시즌 자유계약선수(FA)로 풀렸던 르브론 제임스(203㎝)와 크리스 보시(211㎝)를 영입해 ‘득점 기계’ 드웨인 웨이드(193㎝)와 함께 ‘막강 삼각편대’를 구성했지만 우승 문턱을 넘지 못했다. 노비츠키는 챔피언결정 1차전에서 왼쪽 가운뎃손가락 인대가 끊어지고 4차전에선 체온이 39도 가까이 오르는 악재를 이겨내면서 챔피언결정 6경기 동안 경기당 평균 27득점에 리바운드 9.4개를 잡아내 최우수선수(MVP)에 선정, ‘무관의 제왕’에서도 벗어났다. 댈러스의 우승에는 괴짜 구단주 마크 큐번(53)의 역할도 컸다. 2000년 1월 구단주에 취임한 큐번은 1988년 댈러스 유니폼을 입은 노비츠키를 세 차례나 재계약해 붙잡았다. 가장 극성인 구단주로도 유명하다. 심판 판정에 직접 불만을 나타내거나 상대팀 선수와 말싸움을 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낸 벌금이 100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비츠키를 잡은 것처럼 구단과 팬을 위한 것이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열정이 넘친다. 큐번은 재산이 25억 달러로 올해 포브스 집계에 따르면 세계 469번째 부자다. 노비츠키를 세 번이나 잡은 것처럼 11년간 끊임없이 팀에 투자했다. 2005~06시즌에는 정규리그 최종전을 보러 온 2만여명의 관중에게 공짜 왕복 항공권을 선물하기도 했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 경기도 광주 토마토 축제 17일부터

    경기 광주시 퇴촌 토마토축제가 퇴촌면 정지리 행사장에서 오는 17일부터 사흘간 열린다. 올해로 9회째. ‘퇴촌! 토마토의 열정에 물들다’라는 주제로 토마토축제추진위원회가 주최하고 광주시를 비롯해 시의회, 퇴촌농협이 후원한다. 행사 첫날인 17일에는 토마토웰빙요리 시식회와 함께 올해 처음으로 시민품평단의 토마토 품평회가 열린다. 18~19일에는 전국 청소년 댄스 경연대회, 비보이 초청 공연 등이 이어지며 7080뮤직페스티벌과 불꽃놀이 등 특별 프로그램도 진행될 예정이다. 상설행사로는 토마토 웰빙음식 시식회와 전시회 및 토마토 풀장체험, 토마토 수확 체험 등 가족이 함께하며 즐길 수 있는 행사가 이어진다. 토마토 캐릭터 ‘토마 토토’를 컨셉트로 한 토마토 캐릭터 상품 판매관에서는 머그잔, 손수건, 문구류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축제 관계자는 “행사기간 중 토마토를 시중보다 30%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할 예정이어서 축제도 즐기고 싼 값에 토마토를 구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충식기자 jjang@seoul.co.kr
  • “가족 같은 이주여성 통역서비스 최고”

    “가족 같은 이주여성 통역서비스 최고”

    “결혼 실패로 자살하려던 동포를 보건소 정신보건센터에 소개했는데…. 그리고 전문치료를 받게 했더니 고맙다는 감사의 편지를 받아 뿌듯했어요.”(중국 결혼이주여성 통역상담사 천강미씨) 광진구 보건소에서 지난달 24일부터 실시하는 국제결혼 이주여성을 위한 통역 서비스가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한국에 5년 이상 살고 있어서 우리말과 글에 능통한 서비스 요원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광진구에는 중국, 베트남, 일본, 필리핀 등 다국적 이주여성 931명이 거주하고 있다. 중국 국적이 68%인 634명으로 가장 많고 베트남 국적이 14%인 132명으로 뒤를 잇는다. 구 보건소는 이주여성 비율에 따라 중국어와 베트남어가 가능한 통역요원 2명을 우선 채용해 제대로 된 한국어 사용법 등에 대해 사전교육을 마친 뒤 본격적인 통역 서비스를 시작했다. 매주 화·수·금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3시간 동안 동행하며 통역은 물론 보건의료사업 안내, 상담 서비스 업무를 맡고 있다. 하루 6~7명 정도 상담한다. 필요할 경우 의료기관 동행과 가정 방문을 통해 이주여성의 고민을 들어주고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중국 출신인 유펑윈(26·구의2동)씨는 “임신으로 우울증이 찾아와 힘들어하던 중 보건소 건강교육 프로그램을 소개받았다.”며 “통역 요원의 도움으로 아이들 양육방법도 배우고 또래 엄마들과 만나 이야기도 나누게 돼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이정남 보건소장은 “통역 요원들이 일일이 집까지 찾아가 상담하는 열정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할 때가 많다.”며 “앞으로도 다문화가정과 보건소 간의 높은 벽이었던 언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역할뿐 아니라 건강 지킴이 역할도 톡톡히 해내 이주여성들의 안정적인 정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고졸 창구직 공채’ 15년만에 부활

    기업은행이 1996년 이후 사라졌던 고졸 창구직원 공채를 부활시켰다. 상반기 채용 직원 130명 가운데 14%인 20명을 특성화고 학생으로 채웠다. 19명은 고3 재학생이고 1명은 올 2월 졸업생이다. 조준희 행장은 12일 “하반기 신입 창구직원 선발을 할 때에는 특성화고 출신 비율을 20% 이상으로 높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1998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시중은행 창구에서 고졸 채용이 사실상 폐지되고 4년제 대학 졸업생 중심 채용이 이뤄져왔다. 조 행장은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특성화고 출신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점을 알게 됐다.”면서 “청년실업과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특성화고 학생들의 중소기업 채용에 앞장서기 위해 먼저 은행이 고용을 실천했다.”고 밝혔다. 기업은행은 지난해부터 특성화고 270곳과 면접교육 등 업무협약(MOU)를 맺었다. 이번 공채에는 전국 80개 고교에서 302명이 응시했다. 이장섭 인사부 팀장은 “서울여상과 MOU를 맺고 지난해 말 창구직원 106명 가운데 2명을 이 학교 출신으로 선발했는데, 열정과 의욕이 남달랐다.”면서 “올해 상반기 본격적으로 특성화고 출신 채용 결정을 내리자 우수한 인재가 몰렸다.”고 소개했다. 선발된 직원들은 13일부터 3주간 직무연수를 마친 뒤 다음달 4일부터 영업점에서 근무하게 된다. 2년이 지나면 계약직에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돼 고용을 보장받는다. 이 팀장은 “평균 85% 정도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다.”면서 “이들은 임차보증금 지원과 학자금 대출을 제외하고 유치원·초·중·고교 학자금과 같은 복지혜택을 정규직 사원과 동등하게 적용 받는다.”고 설명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145년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 “대한민국 열정으로 돌아왔다” 韓의 환호

    [145년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 “대한민국 열정으로 돌아왔다” 韓의 환호

    145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를 연구할 특별 연구팀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꾸려진다. 조현종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12일 “외규장각 의궤를 실제로 어떻게 제작하고 어떻게 기록했는지는 알고 있지만, 외규장각 도서는 다른 분산용 의궤 등과 내용, 종이 질 등에서 비교할 수 없이 큰 가치가 있다.”면서 “다음달 중 박물관 학예연구실을 중심으로 서지학자, 외규장각 도서 전문가, 지류 전문가 등 외부 전문가들까지 포함한 연구팀을 구성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외규장각 귀환의 의미는 연구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 역시 직접 체감할 수 있게 된다. 일단 다음달 19일부터 두 달 동안 외규장각 의궤를 주제로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회가 열린다. 더불어 외규장각 도서의 상징성을 고려해 10월 강화역사박물관 특별전을 시작으로 전국 순회 전시도 계획하고 있다. 유일본 30권에 대한 디지털 작업도 마무리해 국민들이 직접 열람할 수 있게 된다. 이에 앞서 지난 11일 외규장각 도서 297권의 귀환을 환영하는 행사가 서울 경복궁 근정전에서 성대히 열렸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해 외규장각 도서 존재를 처음으로 알린 재프랑스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 이들 도서의 한국 반환을 주장한 자크 랑 전 프랑스 문화장관, 정병국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김영나 국립중앙박물관장 등과 1000여명의 시민들이 함께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서 “오늘을 시발점으로 흩어진, 빼앗긴 우리의 문화재를 다시 찾아오는 일에, 우리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에 함께 노력하자.”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145년 전인 1866년 힘에 의해 빼앗겼던 국가의 소중한 문화재, 세계적인 문화재가 오늘 평화스럽게 협상에 의해 돌아온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면서 “우리의 국력과 대한민국 국민의 열정에 의해 돌아오게 됐음을 깨닫고 국민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덧붙였다. 이날 환영행사는 세종로에서 경복궁 근정전까지 이어지는 이봉행렬(移奉行列)로 시작했다. 이봉행렬은 임금의 글씨나 책 등 중요한 의물(儀物)을 봉안한 가마를 모시는 행렬을 말한다. 이어 의궤의 귀환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중대한 일을 치른 뒤 그 까닭을 사당이나 신명에게 고하는 제사)가 열렸으며 뱃놀이 모습을 표현한 춤인 선유락 등 축하행사가 펼쳐졌다. 이날 오전 인천 강화군 외규장각 터에서도 강화산성 남문에서 출발해 외규장각까지 500여명의 기수대, 취타대 등이 1㎞가량 이봉행렬을 펼쳤다. 가마에는 상징적으로 의궤 사본 1권을 실었다. 1783년 규장각에서 어람용 의궤를 비롯한 도서를 외규장각으로 옮기는 과정을 기록한 ‘내각일력’의 내용을 재현했다. 김성수·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CEO 칼럼] 구두 닦는 아버지가 주는 교훈/석호익 KT 부회장

    [CEO 칼럼] 구두 닦는 아버지가 주는 교훈/석호익 KT 부회장

    서울의 대형 빌딩에서 구두를 닦는 50대 남성. 얼마 전 신문 기사에서 봤던 이분의 사연이 잔잔한 감동으로 내게 다가왔다. 사연은 이렇다. 빠듯한 살림에 네 형제를 키우면서, 애들 학원 보내기는 언감생심이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들은 모르는 문제를 아버지에게 묻기 시작해 난감해지기 일쑤였다. 고민을 거듭하던 아버지는 결국 묘안을 찾아냈다. 아이들이 아침마다 모르는 문제를 메모지에 적게 한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아버지의 손에는 어김없이 해답이 들려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비결은 본인이 직접 답을 찾는 게 아니라, 답을 아는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같은 빌딩에서 일하다 보니, 손님 중에 누가 무엇을 잘하는지 꿰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부탁을 받고 의아해하던 손님들도 부성애에 감동해 정답은 물론 조언까지 해 주는 과외 선생님이 되더란다. 이 같은 아버지의 수고를 느낀 아이들이 대기업에 입사하는 등 반듯하게 성장했음은 물론이다. 가슴을 울리는 중년 가장의 사연을 통해 나는 감동뿐 아니라 두 가지 영감을 받았다. 우선 그의 이야기는 누구보다 ‘노웨어’(know-where)의 중요성을 잘 보여 준 사례가 아닐까 한다. 1980~90년대에는 ‘무슨 지식을 알고 있는가’(know-what)가 중요했고 2000년대 들어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아는가’(know-how)로 관심이 모아졌다. 근래에 들어서는 ‘정보와 대안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가’(know-where)가 핵심 이슈로 뜨고 있다. 정보통신(IT) 기술이 발달하면서 정보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과 기업이 모든 것을 인지하고 해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필자는 노하우와 노웨어를 잘 결합시키는 것이 경쟁력을 제고하는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정보와 대안이 있는 곳을 탐색하고, 여기에서 확보한 정보와 대안을 회사의 기존 역량을 통해 분석하고 적용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식이다. 아직까지 국내 기업들은 노웨어를 개인의 역할 또는 부수적 활동으로 치부하고 노하우에 비해 홀대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반면, 최근 노웨어의 대상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전문가일 수도 있고 외부 연구기관, 고객 그룹,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일 수도 있다. 기업들이 노웨어의 대상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발굴해야 함은 물론이다. 다음으로 이 아버지는 겸허함으로 외부의 전문성을 십분 활용했다. 일단 노웨어가 파악되면, 여기에서 정보와 대안을 받아들이려는 겸손한 준비와 자세가 필요하다. 실제로 기업들이 노웨어를 파악하더라도 ‘그들이 실제 기업활동을 얼마나 알겠어?’ 하는 식으로 폄하하거나 방치하는 실패를 경험하곤 한다. 외부 전문가의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 내고 이를 기업 내부에 수용하고 체질화하기 위해서는 외부 전문가와 기업 내부 간의 자유로운 소통과 협업이 필수다. 일례로 내가 있는 KT도 세계적인 경영학계 석학인 게리 하멜 교수로부터 컨설팅과 조언을 받고 있다. 가감 없는 비판과 변화를 향한 아이디어는 KT가 창조적 혁신 기업으로 거듭나는 단초가 되고 있다. 특히 경영진뿐 아니라 신입사원 등 내부 구성원들과 하멜 교수의 격의 없는 토론은 KT 내부에 자극과 동기 부여의 촉매제가 되었다. 사연 속의 아버지를 통해 자식들을 학원에 보내고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지원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는다. 그 아들들에게 메모지에 빽빽하게 적힌 해답보다 그걸 얻어 내었던 아버지의 사랑이 더 큰 성장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기업과 경영진이 노웨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겸허하게 외부 전문가의 역량을 받아들인다면, 기업의 구성원들도 즐겁게 열정적으로 성장과 계발의 여정에 동참하리라 믿는다.
  • [‘세계 문화의 수도’ 佛 점령한 K팝] 佛의 눈물… 3시간 감동무대 ‘파리 녹인 K팝’

    [‘세계 문화의 수도’ 佛 점령한 K팝] 佛의 눈물… 3시간 감동무대 ‘파리 녹인 K팝’

    한국 아이돌그룹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젊은이들이 공연장 밖으로 몇백 미터나 되는 줄을 만들었다. 공연 시작 전에는 파도 타기 물결이 공연장을 몇 바퀴씩 돌았다. 관객들은 ‘SM타운’ ‘소녀시대’ 등을 연호했다. 한국 대중음악이 ‘세계 문화의 수도’를 자임하는 프랑스 파리의 밤을 달궜다. 10대부터 20대 초반이 주축이 된 젊은이들이 한국 가요를 따라 부르는 모습에 취재를 나온 프랑스 기자들조차 혀를 내둘렀다. “유럽에서 한류가 시작되는 게 몸으로 느껴진다.”고 말할 정도였다. K팝이 유럽에 진출하는 첫 무대로 공연 전부터 주목을 받았던 ‘SM타운 라이브 월드 투어’ 파리 공연이 10일(현지시간)과 11일 하루 6000여명씩 1만 3000여명의 열광적인 팬들의 환호 속에 대중문화공연장으로 유명한 르제니트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 동방신기와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샤이니, f(x) 등 5개 K팝 그룹이 유럽 데뷔에 성공하면서 프랑스에서 번지고 있는 한국 대중문화 인기에 탄력을 줄 것으로 보인다. ‘2012 한국 방문의 해 기념’으로 마련된 이번 공연은 이틀 전부터 밤을 새우며 진을 친 극성 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9일에는 밤을 꼬박 새운 청소년만 100명에 이르렀고 공연 다섯 시간 전에는 이미 1000명이 넘는 관객이 공연장 앞을 가득 메웠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스페인,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각국에서 팬들이 몰려들었다. 그만큼 유럽의 한류팬들이 학수고대하던 무대였다. 이들은 프랑스의 한류팬 클럽인 ‘코리안 커넥션’ 주도 아래 K팝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분위기를 돋웠다. 이번 공연을 지원한 ‘한국방문의 해 위원회’도 프랑스에 이미 잘 알려진 애니메이션 캐릭터 ‘뽀로로’ 인형을 분장시켜 한국 알리기에 주력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평소 좋아하던 가수들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자 관객들은 노래는 물론 안무까지 따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공연장이 무너지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은 3시간이 넘는 공연 내내 잠시도 멈출 줄 몰랐다. 공연에 참가한 5개 아이돌 그룹은 모두 44곡의 노래를 선보였다. 동방신기의 유노윤호가 공연 뒤 탈진 증세를 보일 정도로 열정적인 춤과 노래, 그리고 와이어를 이용해 무대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연출하는 등 화려한 안무, 실시간 동시 통역과 어색한 발음이나마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네는 정성까지. 무대 연출도 이날 공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성공적인 공연에 주최 측도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주최 측 관계자는 “오늘 공연은 팬과 가수 모두 하나가 돼 만들어낸 성공적인 데뷔 무대”라고 자축했다. 공연을 지켜본 최준호 프랑스 주재 한국문화원장도 “관객의 절반 이상은 아시아계 이민 가정 출신이 아니라 말 그대로 프랑스 현지 젊은이들”이라면서 “오늘은 프랑스에서 한국 대중문화 붐이 시작되는 밤”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공연장이 르제니트였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다. 파리 북부 지역 라빌레트에 위치한 르제니트는 1년 내내 쉬지 않고 프랑스와 외국의 유명 가수들이 공연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번에 145년 만의 외규장각 도서 국내 귀환에 기여한 자크 랑 전 문화부 장관이 현직에 있을 때인 1984년 건립한 르제니트는 좌석 5830석 등 총 수용 인원이 6400석에 이르는 대중음악 공연의 산실이다. 파리 강국진 순회특파원 betulo@seoul.co.kr
  • ‘나가수’에 이어 새 서바이벌 ‘댄싱위드’ 첫방송…꼴찌는 김장훈 팀

    MBC-TV가 ‘나는 가수다’에 이어 또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댄싱 위드 더 스타’를 첫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유명 인사들과 국가대표 댄스스포츠 선수들이 한 팀을 이뤄 시청자 문자투표와 심사위원 점수를 50%씩 반영한 결과에 따라 1개팀씩 탈락한다. 10일의 첫 방송에서는 스탠더드와 라틴을 주제로 11쌍의 커플이 화려한 댄스를 펼쳤다. 원조 아이돌가수인 문희준, 배우 김규리, 배우 김영철, 제시카 고메즈, 가수 김장훈, 그룹 포미닛의 현아, 성악가 김동규, 전 마라토너 이봉주, 아나운서 오상진, 바둑 국가대표 이슬아,기상캐스터 박은지 등이 댄스스포츠 선수들과 짝을 이뤘다. 1위는 왈츠를 춘 배우 김영철-이채원 팀이 차지했다. 이 팀은 “다정한 아빠와 사랑스러운 딸의 무대를 보는 것 같았다.”는 평을 받았다. 총점 30점 만점에 24점을 얻었다. 꼴찌는 가수 김장훈-정아름 팀이었다. 15점을 받는데 그쳤다. 심사위원 남경주는 “퀵스텝은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춤인데 연습을 좀 더 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고 심사했다. 김장훈은 “18번 연습했는데 이 모양이다.”고 아쉬워 했다.이봉주-최수정 팀은 2위를 했다. 한편 출연진들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연출과 무대 구성이 아쉬웠다는 평을 받았다. 댄서들의 동선을 카메라가 제대로 잡지 못했고 긴장감 없이 다소 지루했다는 평이 이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 BBC의 ‘스타와 함께 춤을(Dancing with the stars)’을 미국 ABC에서 리메이크해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은 셀러 브리티 댄스쇼를 본땄다. 12주 후에 최종 우승 커플에게는 폭스바겐 자동차 2대와 1억원 상당의 상금이 주어진다. 인터넷서울신문 event@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서울에 제2캠퍼스 설립 성신여대 심화진 총장

    [김문이 만난사람] 서울에 제2캠퍼스 설립 성신여대 심화진 총장

    타오르는 정열로 열정의 꽃을 피운다. 스스로의 개인적 욕심이 아닌 타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향기는 유다르다. 열렬한 애정으로 다가가면서 감동의 소통을 연출, 분위기를 친근하게 조성한다. 프랑스의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 후기에 신의 음성을 듣고 나라를 위한 열정으로 말을 내달리고 또 내달렸다. 작은 체구의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천사의 계시를 받은 성녀(聖女)라는 칭호를 받았다. 심화진(55) 성신여대 총장. 체구는 작은 소녀 같지만 간단없는 열정과 투철한 국가관으로 ‘교육계의 잔 다르크’, ‘소통 경영의 달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최근 서울 소재 대학으로는 최초로 서울 지역(도봉구 미아동)에 ‘운정그린 캠퍼스’라는 제2캠퍼스를 만들어 주목을 끌었다. 서울에 제1, 제2캠퍼스를 동시에 둔 유일한 대학이라는 점이 그러하다. 그는 성신여대 이사장을 거쳐 총장을 연임 중이다. 심 총장은 이사장 재직 때 국립의료원 간호대학을 인수해 대학의 경쟁력을 높였으며 2007년 총장 취임 후에는 삼성경제연구소의 컨설팅을 통해 ‘성신 2015 발전계획’을 수립, 대학 조직을 개편하는 혁신을 단행했다. 또한 대학 특성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해외 17개국의 70개 대학과 학술교류 협정을 맺기도 했다. 이처럼 교육 경영에 대한 특별한 열정으로 화제와 관심을 모으기도 하지만 세계대학교 총장 연맹 동북아시아 부회장, 세종문회회관 이사, 서울시 시정연구원 이사, 국립발레단 이사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왕성한 사회활동을 펼쳐 눈길을 끈다. ●때론 따뜻한 언니처럼…이웃처럼… 그는 평소 학생들에게는 따뜻한 언니처럼, 학부모들에게는 친근한 이웃처럼 다가서는 스타일이다. 신입생 환영회 때 학생들과 보컬 밴드를 만들어 원더걸스의 ‘노바디 댄스’를 추면서 노래를 불렀던 일은 대학가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가 신세대 총장이라는 말을 듣는 까닭이다. 성신여대는 올해 개교 75주년을 맞는다. 리숙종(1904~1985) 박사가 설립했으며 심 총장은 리 박사의 외손녀이다. 지난 7일 오후 성신여대 운정그린캠퍼스에서 심 총장을 만났다. 먼저 요즘에는 어떤 일로 바쁜지 물었다. ‘열정의 총장’이란 말처럼 답변이 지체없이 돌아온다. 그는 “학군단(ROTC) 유치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역설했다. 여자대학 학군단은 지난해 숙명여대가 제1호로 신설했으며 이달 중 제2호 여자대학이 나올 예정이다. 심 총장은 지난해에도 유치경쟁에 참여했으나 경쟁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욱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 하여 자연스럽게 학군단 얘기부터 나왔다. “단순히 (학군단 유치를 위한) 심사기준에 맞춘다는 것보다 임관 후 각 부대 현장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부하 병사들과 어떻게 소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국가관 등 정신무장을 위한 교육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우리 대학에는 안보학을 개설했으며, 지난해에는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155마일 휴전선을 걷는 14박 15일 안보체험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는 여자대학 최초의 일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선착순 100명을 뽑아 사단 병영체험 등의 안보행사를 갖고 있지요.” ●남편은 현역 장성…두 아들 군복무중 왜 이런 곳에 열정을 쏟을까. 그는 “남편이 현역 군 장성이고 두 아들이 군 복무를 하고 있다.”면서 “ROTC 출신 젊은 장교들이 임관 후 겪는 여러 가지 문제 등을 직·간접적으로 보면서 임관 전에 여러 단체생활과 봉사활동 등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비록 군에 가든 안 가든 대학생들이 졸업 후 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경험은 좋은 약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의 장남이 유엔 레바논 평화유지군 파병요원으로 자원 근무할 정도로 원래부터 남다른 국가관을 가지고 있는 집안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세요. 23살 젊은 나이에 낯선 산골부대에 적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임관 전 여러 봉사활동 등을 통해 미리 어려움을 겪어 보고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경험은 아주 중요한 일이지요.” 그는 이번 학군단 유치 준비를 하면서 학생들을 상대로 ‘학군단이 생기면 지원할 것이냐.’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40% 이상이 ‘지원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할 만큼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화제를 바꿨다. 어떻게 해서 서울에 제2캠퍼스를 두게 됐을까. “원래 도봉산 지역에 부지가 있어서 그곳을 제2캠퍼스로 만들려고 했지만 국립공원이라 제약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다른 부지를 물색하던 중 현재의 이곳으로 정하게 됐지요. 포천과 동두천 지역에도 생각을 했지만 돈암동 캠퍼스와 가까운 이곳이 가장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돈암동 캠퍼스와는 전철 역으로 불과 세 정거장밖에 안 떨어져 있습니다. 건강과 복지, 문화 관련 학과 등 특성화된 캠퍼스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제2캠퍼스 계획은 이사장 시절에 시작했고 2년 반 동안 공사를 거쳐 지난 4월에 준공·헌정식 행사를 치렀다. 설계는 건축가 김석철 명지대 석좌교수가 심혈을 기울였다. 김 교수는 예술의전당의 ‘곡선의 미학’을 설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연유인지 모르겠지만 캠퍼스에 들어서자 1층부터 7층까지 본관 복도를 따라 설계된 갤러리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여기에서는 인물화와 사실적 풍경화, 기하학적인 구도의 설치작품 등을 감상할 수 있다. 7층 식당에 올라가면 캠퍼스 주변을 둘러싼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 등 4대 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외국 학자나 손님들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아!’ 하고 절로 감탄할 만도 했다. 제2캠퍼스는 전체 부지 5만 4400㎡에 지하 3층, 지상 7층의 단과대 건물 3개동, 부속건물인 파빌리온 1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학부생 1만여명 가운데 3000여명이 제2캠퍼스로 옮겨 왔다. 그는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학이며 서울에 있는 대학 가운데 학생 1인당 가용면적이 가장 넓은 캠퍼스”라고 설명했다. 지상에는 주차장 대신 조경시설을 꾸몄으며 지역주민들을 위한 문화시설을 갖춘 것도 특징이다. 준공·헌정식 때 강북지역 주민들을 초청, 난타와 발레, 성신필하모닉오케스트라 등의 다채로운 축제무대를 가졌다. 녹지공간이 넓은 것은 친환경 캠퍼스를 표방했기 때문이다. 전체 면적의 40%가 녹지공간이며 건물의 냉난방은 지열(地熱) 시스템을 적용했다. “제2캠퍼스는 그린과 융합을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도심 속 최첨단 에코 캠퍼스의 장점을 살려 학생들에게 최적의 학습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생활과학대, 자연과학대, 간호대, 융합문화예술대의 4개 단과대학이 경계를 허물고 학문의 융합을 시도했지요. 이에 따라 교육과목, 강의실, 교수실, 학과사무실, 교직원실 등을 통합형으로 구성했습니다.” 예를 들어 문화예술경영, 미디어영상연기, 현대실용음악, 무용예술, 메이크업디자인 등의 학과 학생들은 본인이 원하는 강좌를 마음대로 선택, 융합형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했단다. ●올 개교 75주년…글로벌 융합인재 양성 심 총장은 새로 조성된 캠퍼스를 직접 안내하면서 “제2캠퍼스는 문화와 복지, 건강을 컨셉트로 하고 있다. 타인에게 정성과 믿음을 주는 융합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올해 개교 75주년을 맞고 있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글로벌 캠퍼스를 통해 새로운 도약을 할 것입니다. 우리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사회에 나갔을 때 ‘성신여대 출신들은 다르다. 인격적이고 따뜻하고 올바르다’는 평가를 받도록 타인을 배려하는 인물로 키우려고 합니다.” 그가 평소 갖고 있는 교육철학, 즉 통합적 사고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물씬 풍기는 대목이다. 편집위원 km@seoul.co.kr She is… 1956년 12월 24일 고 심용현 성신학원 이사장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975년 성신여고를 나와 1979년 건국대 의상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성신여대 대학원에서 의류학과 석사과정을 거쳐 1990년 의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때 성신여중 교사를 지냈고 1996년부터 2003년까지 성신여대 의류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2005년부터 2007년 8월까지 성신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2006년 국립의료원 간호대를 인수했다. 이후 성신여대 총장을 맡아 경영자의 실리를 추구하면서 유사학과를 통폐합하고 구조조정 등을 통해 대학의 개혁을 단행했다. 지난 4월부터 총장 연임을 하고 있다. 대학 교육경영 외에 세계대학교 총장연맹 동북아시아지역 부회장(2007)을 비롯해 국립발레단 이사(2009), 세종문화회관 이사(2009), 국립발레단 이사장(2010) 등으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9년 러시아 극동국립대에서 명예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10년 이탈리아 문화훈장을 받았다. 그의 남편은 전인범 육군 소장이며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 은사 故 차범석 선생 ‘산불’로 5년 만에 연극무대 돌아온 조민기

    은사 故 차범석 선생 ‘산불’로 5년 만에 연극무대 돌아온 조민기

    배우 조민기(46)가 5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지난 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 ‘산불’을 통해서다. ‘산불’은 그의 대학(청주대) 은사인 고(故) 차범석 선생의 대표작으로 사실주의 연극의 백미로 꼽힌다. 배경은 6·25 전쟁. 탈영한 빨치산 규복(조민기)을 점례(서은경)가 대밭에 숨겨주는데 사월(장영남)이 규복을 공유하려 들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스승의 작품에 배우로 도전하는 조민기를 서울 남산 근처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5년 만에 연극 무대에 배우로 서는 건데, 새롭다기보단 늘 무대에서 받는 비슷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극의 하이라이트인) 산불이 나는 장면에서 크게 호응해 주는 관객들을 보면 절로 힘이 나요.” 지난 6일은 차범석 선생 5주기였다. “선생님 수업을 들을 때는 잘 몰랐는데 배우가 되고 나서 연기를 하다 보니 정말 선생님이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선생님이 첫 수업 때 해 주셨던, ‘연극은 약속이다’라는 말씀을 지금도 종종 떠올려요. 연극은 정말 관객과의 약속이고 동료 배우와의 약속입니다.” 조민기는 우리에게 탤런트, 영화배우로 더 익숙한 배우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982년 극단 신협 단원으로 연극과 첫 인연을 맺었다. 연극 무대야말로 그의 연기 인생의 고향인 셈이다. “어릴 때부터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무대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올 초 국립극단의 ‘오이디푸스’, 재작년에 ‘연산’ 등을 관객 입장에서 봤는데, ‘아, 나도 저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연극 무대에 대한 갈증이 컸죠.” ‘산불’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의미가 큰 작품이다. 1500석 대극장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만한 규모의 연극은 2000년대 들어 처음이다. “대극장이라 배우에겐 부담이 커요. 연극만의 발성이나 호흡을 좋아하는 분들은 다소 마뜩잖아할 요소(예컨대 마이크)들이 개입되지만 배우 처지에서는 편안하게 소리가 전달돼 감정 연기에 더 몰입할 수 있어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대극장 연극, 나름 매력 있습니다.” 동그란 안경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수척했다. 얼마 전 종영한 MBC 드라마 ‘욕망의 불꽃’에 출연했을 때보다 살이 더 빠진 듯했다. 그는 전쟁 통에 산으로 내려온 ‘규복’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체중 감량에 나섰다고 했다. 그가 분석한 규복의 캐릭터는 어떨까. “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캐릭터는 아니에요. 그랬다면 규복은 조민기가 아니라 독고진(배우 차승원이 맡은 MBC 드라마 ‘최고의 사랑’ 주인공 이름)이 했겠죠. 하하. 남자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 마을에 남자 기능을 상실한 김 노인이 살아요. 그런 곳에 갑자기 규복이 나타나는 겁니다. 김 노인과 대칭되지만, 생식기능만 남자이지 이도저도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물이에요. 오히려 큰소리치는 김 노인이 더 남자답죠. 규복은 전쟁 당시의 무기력한 남자들을 대변하는 것 같아요.” 대중에게 얼굴이 꽤 알려진 유명 배우이지만 강부자 등 선후배와 함께하는 ‘산불’에서는 동료 배우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라며 너스레를 떠는 조민기. “극 중 성비가 압도적으로 여자들이 높아요. 저는 다섯 번 등장하는데 그나마 한 번은 죽는 장면이에요. 무대에서 만나는 사람이 점례 한 명뿐인데, 점례가 아낙들과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많아요. 점례 역의 서은경씨에게 나랑도 좀 맞춰 보자고 조심스레 눈치 보며 말하죠. 워낙 점례가 상대하는 배우들이 많아 줄 서서 기다린다니까요. 하하.” 1남 1녀를 둔 아버지로서의 조민기는 어떨까. 시쳇말로 ‘딸 바보’ 그 자체였다. 최근 그가 방송에서 공개해 화제가 된 고등학생 딸 사진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꿈이 아나운서인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찍은 사진이 잡지 화보처럼 아주 예쁘게 나와 방송에서 공개했다니까요.” 그는 스스로 “화면에 보이는 것과 다르게 참 재밌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정의했다. “지루한 걸 정말 싫어해요. 같이 다니는 매니저나 팀원들과도 늘 즐겁게 일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매니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코미디언이 따로 없다.”며 거들었다. 한때 트위터를 즐겨 했으나 몇 번의 마음고생을 겪은 뒤 지금은 거의 하지 않는다는 조민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문화와 관련해 할 말이 매우 많은 듯했으나 그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때로는 열정적으로, 때로는 장난스럽게 말을 쏟아 내는 조민기는 “분장 안 하고 무대에서 노인 역할을 자연스럽게 해낼 때까지 오랫동안 무대에 서는 게 꿈”이라고 했다. 26일까지. 1만~7만원. (02)2280-4115~6.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눈 앞에 등장한 진짜 ‘아이언맨’에 中 들썩

    영화와 만화로 큰 인기를 끈 ‘아이언맨’의 주인공이 내 앞에 등장했다? 최근 중국에서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한 채 길거리를 활보하는 등 일상생활을 하는 남성의 모습이 포착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아이언맨’으로 변신한 이 남성은 중국 산둥성에 사는 왕캉(25).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거대한 철 몸통과 헬멧을 쓰고 등장해 눈길을 모았다. 회사에서도 똑같은 복장으로 근무하고 거리를 걸어다니는 그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지자 사람들은 “진짜 아이언맨이 중국에 나타났다.”며 열광하고 있다. 왕캉은 “평소 영화 아이언맨의 열성 팬이다. 아이언맨처럼 입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런 코스프레를 시도했다.”고 동기를 밝혔다. 이어 “처음에는 회사 출입구의 경비가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출입을 막거나, 회사 동료들의 기이한 눈길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괜찮아졌다.”면서 “회사 사장님께서도 아이언맨을 향한 내 열정을 이해하고는 허락해주셨다.”고 덧붙였다. 한편 왕캉이 손수 제작한 아이언맨 복장은 무게가 50㎏정도며, 무게와 부피가 상당해서 주위의 도움이 있어야 입거나 벗을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김기덕 “한국 영화계는 도박판”

    김기덕 “한국 영화계는 도박판”

    3년 만의 신작 ‘아리랑’으로 영화계에 직격탄을 날렸던 김기덕(51) 감독이 “한국 영화계는 도박판”이라며 다시 한번 비판의 화살을 겨눴다. ‘아리랑’으로 제64회 프랑스 칸 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상’을 받은 뒤 해외에 머물고 있는 김 감독은 자신이 제작한 영화 ‘풍산개’ 개봉을 앞두고 배급사를 통해 8일 배포한 서면 인터뷰 자료에서 이같이 밝혔다. 김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 과연 더 이상 새로운 영화가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15년 동안 19편의 영화를 감독하고 각본과 제작을 맡아 왔다. 그동안 한국 영화계의 모순을 무수히 봤고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다. 영화판도 사람 사는 세상인데 나는 좀 더 순수하게 본 것 같다.”고 자조했다. 김 감독은 “‘풍산개’가 자본과 시스템을 대체할 첫 영화가 될 것”이라면서 “영화인의 열정과 영화의 주제, 그리고 진정한 영화의 가치를 통해 벽을 넘어서겠다.”고 장담했다. ‘풍산개’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무엇이든 3시간 만에 배달하는 정체불명의 주인공(윤계상)이 북한에서 망명한 고위층 간부의 여자(김규리)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받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오는 23일 개봉한다. 김 감독의 연출부 출신인 전재홍 감독의 장편데뷔작으로 윤계상, 김규리 등 배우와 스태프가 보수 없이 참여했다. 김 감독은 “남북을 오가는 캐릭터는 60년 분단의 한 맺힌 유령 같은 존재이자 상징”이라면서 “통일을 열망하는 많은 남북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폭약을 충분히 터트릴 수 없었고 흥행 배우도 없지만, 영화의 강한 주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재미를 담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조영남 “음악과 우정이 전부이던 시절… 치열하게 살았죠”

    조영남 “음악과 우정이 전부이던 시절… 치열하게 살았죠”

    “기타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우리 딸이 기타 학원을 다니고 있어요. 디지털 시대가 잊어버렸던 아날로그 시대의 정서를 다시 회생시킨 결과가 아니겠는가 생각하죠.” ‘세시봉 열풍’은 지난해 추석 한 방송에서 특집 프로그램을 방송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다. 1960~70년대 대중가요 팬들의 추억을 상기시킬 뿐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나는 가수다’ 유의 ‘진짜 음악’에 대한 열정을 환기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 가수 조영남(66)씨가 ‘쎄시봉 시대’(민음인 펴냄)를 직접 써서 그 시대 노래의 힘과 지금도 그 힘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배경을 풀어냈다. 책은 맏형인 조씨를 비롯해 이장희(64), 윤형주(64), 송창식(64), 김세환(63), 김민기(60), 윤여정(64) 등 세시봉(음악감상실) 멤버들과 얽혀 지내던 이야기를 담았다. ●“윤여정 얘기 빼면 앙꼬 없는 찐빵” 조씨가 7일 서울 정동 한 카페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윤형주, 김세환씨도 함께 참석해 그의 얘기를 거들었다. 조씨는 “세시봉 친구들의 음악과 우정, 이 얘기가 책의 전부”라면서 “우리의 삶에서 걸러 나오는 것이 음악이니 우리는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다.”고 말문을 뗐다. 그는 “트로트와 팝송밖에 없던 시절이던 당시 대학교 1~2학년이었던 우리는 포크에 자연스럽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고 포크송에 흠뻑 빠진 그 시절을 회고했다. 이어 “세시봉 음악의 가치를 논하려면 좋든 싫든 우리의 역사를 얘기 안할 수가 없다. 서양 음악을 먼저 노래했다는 점에서는 부끄러운 생각도 있다.”면서도 “팝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 중요한 가치가 있고 타이밍이 맞았다. 저와 이장희, 윤형주, 송창식은 번안곡이 기초가 돼 작곡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비틀스였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장 쓰기 힘들었던 대목으로 전처였던 배우 윤여정 편을 꼽았다. 책에서도 ‘세시봉 이야기에서 윤여정을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된다.’라고 표현한 그는 “윤여정이 TV 프로그램에 나와 제 얘길 하는 걸 보고 ‘이젠 써도 뭐라 안 하겠구나’ 하고 안도했다. 헤어진 뒤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데 얼마 전 윤여정과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이장희가 만났다더라. 그런데 이장희가 미국 가는 바람에 자세히 못 들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세시봉 자격은 공동체적 감성”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조씨가 강조하는 것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음악 아래 똘똘 뭉쳐 아무런 대가 없이 나눌 수 있는 우정이었다. 윤씨와 김씨의 ‘증언’ 또한 마찬가지다. 윤씨는 “얼마 전 자살한 후배 가수 채동하가 쓴 글을 보면 ‘세시봉 같은 우정을 닮았으면 좋겠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요즘 연예인들에게도 세시봉 속성이 새롭게 보이는 것 같다.”면서 “그때는 공동체 의식이 중요했다. 세시봉 시대는 내 것이지만 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도 “누구 한 사람이 곡을 취입하면 서로 기타도 쳐 주고 화음도 넣어 주고 그랬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나눠 주고 그런 것이 당연했다.”고 맞장구쳤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씨줄날줄] 잠 못 드는 밤/최광숙 논설위원

    “숲은 어둡고 깊고 아름답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자기 전에 몇십 리를 더 가야 한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시 ‘눈 내리는 밤 숲가에 서서’의 한 대목이다. 어둠은 문인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며 밤을 찬미하게 했다. 어디 시인뿐인가. 쇼팽은 ‘야상곡’(夜想曲·Nocturnes)에서 조용한 밤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아름다운 선율로 그려냈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유명한 아리아 ‘공주는 잠못 이루고’ 는 중국 공주 투란도트와 그녀를 얻고자 하는 칼리프 간의 기싸움이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밤을 노래하고 있다. 영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에서는 사랑에 빠진 이들이 밤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들이 로맨틱하게 그려졌다. 이렇듯 잠 못 이루는 밤은 일반인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예술가들에게는 문학과 음악, 영화 등 장르를 불문하고 중요한 테마가 된다. 예술가들은 쉬이 찾아오지 않는 잠을 청하기보다 오히려 창작의 세계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성공한 사람들 가운데 의외로 불면증에 시달린 이들이 적지 않다. 나폴레옹, 처칠, 대처 같은 정치인과 버지니아 울프, 마크 트웨인 등 문인들도 올빼미 생활을 했다고 한다. 다소 과장한다면 그들이 남긴 작품과 업적들이 다 불면증의 소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국의 처칠 총리는 두 개의 침대를 갖고 다니며 한 곳에서 잠들지 못하면 다른 하나로 옮겨가 잠을 청했을 정도다. 미국 정치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침대가 너무 더우면 잘 수 없어 침대가 서늘해질 때까지 창문을 열어 놓았다고 한다.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침대가 남북으로 놓여야 겨우 잘 수 있었다.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어디에서든 침실은 벽지까지 똑 같아야 했다. 수면 시간 부족으로 피곤에 찌든 현대의 샐러리맨들에게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일화들이다. 최근 숙면을 취하기 힘들어 병원을 찾는 수면장애 환자가 지난 5년 새 두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원인으로는 스트레스와 비만, 노령인구의 증가 등이 꼽힌다. 잠을 자고 싶어도 못 잔다면 그것보다 괴로운 일은 없다. 그러기에 수면장애 환자들은 잠자기 위한 ‘잠과의 전쟁’을 벌인다고 한다. 그들에겐 마음을 편안하게 내려놓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우리 앞에 역사의 교훈이 있지 않은가. 수많은 이들이 불면증으로 고통 받았지만 자신들의 열정과 능력만은 잠재우지 않고 인생의 불꽃을 태웠다는 사실을…. 최광숙 논설위원 bori@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아나키즘’ 운동가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아나키즘’ 운동가

    1200명이나 되는 농노와 드넓은 소작지를 소유한 러시아 귀족의 아들. 황제의 최측근이 될 수 있는 근위학교를 수석 졸업하고도 안락한 궁정 생활 대신 시베리아 장교 지원. 시베리아 지형 탐사를 통해 지리학자로 명성을 얻지만 ‘제국지리학회’ 사무관직 거절. 막대한 상속을 포기하고 혁명운동에 투신. 반체제 운동 주동자로 지목 돼 투옥. 2년 후 탈옥. 그리고 반세기 동안 이어지는 투옥과 추방.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귀국. 그러나 볼셰비키의 아나키즘 탄압. 심장질환과 폐렴으로 사망. 10월 혁명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장례식…. 이것이 아나키즘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1921)의 간략한 프로필이다. 이 정도면 그를 소재로 드라마 한 편을 찍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고뇌에 찬 지식인의 자의식을 보여준 적도 없고 혁명 투사의 화약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의 삶에는 골방 대신 시베리아의 벌판과 눈 덮인 스위스의 산들이 있다. 값싼 봉투를 붙이며 격론을 벌이는 이론가가 있다. 그는 비밀경찰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유럽을 누비고 다녔다. 유산을 포기할 때도, 되풀이되는 추방과 고된 망명 생활에 관해서도 괴로움을 토로하는 법이 없다. ●지식인 운동가의 교만함이 혁명을 왜곡한다 크로포트킨은 솔직 담백했다. 그의 삶의 모든 것은 공공연하게 말해지고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공공연함’, 이것이야말로 크로포트킨이 혁명가로서 보여준 최고의 미덕이었다. 크로포트킨이 보기에 사회주의 지식인 운동가들은 공공연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이 농민이나 노동자들보다 더 안다는 교만함. 민중들은 무식해서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판단할 수도,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오만함. 그런 운동가들은 현실을 계산하고 전술을 찾았다.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침묵하고, 해야 할 일을 미뤘다. 심지어 전술을 위해 황제와 귀족 편에 서서 농민과 노동자의 봉기를 탄압하기도 했다. 지식인 운동가들의 계몽적 태도와 이로 인한 지도부와 민중 사이의 괴리. 이 사이에서 혁명은 왜곡되고 비밀주의로 물들었다. 크로포트킨은 이런 괴리를 거부한다. 현실이 어려운가? 그럼 공공연히 말하라. 그럼 답은 온다. 해야 하는가? 그럼 공공연히 하라. 그럼 된다. 이 간단한 원칙이 그의 삶 전부다. ●아나키스트, 생각한 대로 행동하라 1878년 경 유럽 전역에서 왕에 대한 암살이 네 차례나 시도되었다. 유럽 정부들은 이 음모의 주동자들을 스위스가 숨겨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스위스는 아나키즘 운동의 중심인 쥐라연합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쥐라연합의 많은 지도자들이 추방당하고 망명 생활에 오르게 됐다. 결국 기관지 편집 일이 크로포트킨에게 맡겨졌다. 이제 막 러시아 감옥에서 탈출한 망명자 크로포트킨,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초등학교 중퇴가 학력의 전부인 듀마르트리, 제네바 출신의 내성적인 사나이 헤르치히. 이 세 사람은 1879년 제네바에서 ‘반란자’를 창간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스위스 정부의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정부는 인쇄소에 압력을 넣었다. “정부에서 일을 받지 못하면 살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반란자’를 인쇄해줄 수 없을 겁니다.” 나는 매우 실망하고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듀마르트리는 오히려 열정과 희망에 불타 있었다. “간단한 문제입니다. 3개월 동안 신용담보로 인쇄기를 사면 됩니다. 3개월이면 기계 값을 지불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돈이라곤 겨우 200~300프랑밖에 없지 않소?” 나는 반대했다. “돈이란 우스운 겁니다. 만들면 되지 않습니까? 우선 기계를 주문해서 다음 호를 내면 돈이 모일 겁니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우리는 기계를 주문했다. 그리고 다음 호를 우리의 ‘쥐라 인쇄소’에서 찍고 우리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팸플릿을 발행했다. 우리 모두가 직접 인쇄했다. 과연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동전과 소액의 은화였지만 어쨌든 돈이 모였다. 활동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돈이 없다. 이것이 크로포트킨이 좌절한 이유였다. 하지만 듀마르트리는 어땠는가. 그는 말한다. 활동을 해야 돈이 생긴다. 그러니 활동을 하자. ‘반란자’는 그렇게 21년간 발행되었다. ‘이론가’ 크로포트킨에게 ‘못 배운 노동자’들은 언제나 배움을 통해 삶의 길을 열어주는 동지였다. 어려움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어려움을 과도한 비장함으로 포장할 뿐아니라 너무도 쉽게 좌절했다. 노동자들은 달랐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판단했으며, 꾸밈없고 단순하게 문제를 받아들였다. 혁명가를 자청하는 지식인들이 문제를 분석하고 방법을 모색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문제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갔다. 머리와 가슴, 그리고 손 사이에 어떠한 간극도 없음! 크로포트킨은 이 간극을 없애는 것이 혁명의 출발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 그 길을 간다. 막대한 유산 상속, 위로부터의 개혁을 위한 관료로서의 삶, 학계의 권위 있는 지도자로서 얻게 될 명예와 힘. 그는 이 모든 것을 버린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가진 간극 없는 삶을 배우기 위해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을 바꾸려면 자신의 삶부터 바꿔라! 이것이 그가 살아낸 아나키즘이었다. ●레닌에게 물었다 “우리란 누굴 말하는 겁니까?” 러시아 2월 혁명. 크로포트킨은 40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온다. 이어진 10월 혁명.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는 이 혁명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이어간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그래도 호랑이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법. 레닌은 1919년 크로포트킨을 만난다. 레닌은 크로포트킨의 ‘프랑스혁명사’를 극찬하며, 이 책을 인쇄해 전국에 배포하고 싶다 말한다. 크로포트킨은 그 책을 정부인쇄소가 아닌 소비조합과 같은 곳에서 출판할 조건을 내건다. 레닌, “희망하신다면 그렇게 해드리지요. 우리는 전적으로 편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크로포트킨, “우리란 누굴 말하는 겁니까? 정부 말인가요?” 허를 찔린 레닌은 대답을 얼버무린다. 레닌은 여전히 혁명을 도달해야 할 무엇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혁명의 중간 단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크로포트킨의 생각은 달랐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상호부조·相互扶助)” 이것은 도달해야 할 이념이 아니라 자연 법칙이고,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을 일구는 현재적 조건이었다. 제도는 이런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그 의도가 아무리 민주적일지라도 지배 기구는 모두 악”이다. 국가를 위시한 온갖 사회적 제도들은 만인을 노예 상태로 묶어 둔다. 레닌이 말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도 결국은 하나의 제도로 새로운 노예 상태를 만들어 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제도로 인해 가려진 인간 본성, 그 상호부조의 본성을 되살려내는 것이다. 혁명의 지점은 여기에 있었다. 혁명의 지도자든 농민이든 노동자든 바로 그 자신의 삶에서 이 본성을 찾아내고 구현해야 한다. 때문에 크로포트킨에게 노동자를 ‘위한’ 활동은 없다. 혁명은 누가 누구를 구원하는 문제가 아니다. 구원의 주체와 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크로포트킨은 직접 노동자가 ‘되는’ 활동을 했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들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배운 만큼 글로 써 내려갔다. 배움을 실천하는 삶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실천. 이 과정을 통해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 사상의 이론가가 되었다. 크로포트킨이 최후에 쓰고자 했던 책은 ‘윤리학’이었다. 이것은 혁명에 관한 그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크로포트킨의 질문은 ‘노동자들을 위한 세상이 무엇인가?’가 아니었다. 그는 오로지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 노동자가 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자만이 혁명가였다. 폭약 냄새와 무질서, 혹은 대규모 시위로 혁명을 떠올리는 우리들 앞에, 크로포트킨은 이런 혁명가의 초상으로 우뚝 서 있다. 신근영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 한선교 의원 “나는 보통 놈 아니다…150만 관중 모을 것”

    한선교 의원 “나는 보통 놈 아니다…150만 관중 모을 것”

    “내가 보통 놈이 아닙니다. 두고 보십시오.” 한선교(52) 한나라당 의원이 새 한국프로농구연맹(KBL) 총재로 선출됐다. 한 의원은 3일 서울 논현동 KBL센터에서 열린 총재 경선에서 10개 구단 중 7개 구단의 지지를 얻어 전육(65) 현 총재를 누르고 제7대 KBL 총재에 취임하게 됐다. 한 의원은 오는 8월 말로 임기가 끝나는 전 총재의 뒤를 이어 9월 1일부터 3년간 KBL을 이끈다. 대일고와 성균관대를 졸업한 한 의원은 1984년 MBC 아나운서로 얼굴을 알렸다. 당시 농구대잔치 등을 중계하며 농구와 인연을 맺었고, 대우(현 전자랜드) 장내 아나운서를 맡기도 했다. 제17·18대 국회의원(경기 용인)에 뽑힌 뒤에도 농구장을 찾는 열정을 보였다. 상기된 얼굴의 한 의원은 “(어느 정도 당선을 확신했던) 국회의원 선거 때보다 KBL 총재 경선이 더 떨렸다.”면서 “3년 안에 관중 150만명 시대를 열겠다. 프로농구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열심히 뛰겠다.”고 말했다. 프로농구의 지상파TV중계를 늘리고, 외국·국내선수 신분 등에 관한 법·제도적 문제를 개선하겠다는 공약을 냈다. 3년 전에도 KBL 수장에 도전했던 한 의원은 “한국농구 역사에 지금 같은 위기는 없었다. 3년 임기에 무한한 책임감을 느낀다. 뛰는 만큼 결과는 나온다.”고 의욕을 보였다. 한 의원은 ‘뛰는’ 방법으로 팬, 구단, 언론과의 ‘세 가지 스킨십’을 강조했다. 한 의원은 “본부석을 차지하지 않고 관중석에서 팬들과 함께 호흡하겠다.”고 했고, “10개 구단이 반목·갈등하지 않고 동업자 의식을 가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시즌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는 언론과의 접촉을 통해 꾸준히 어필하겠다. 지상파 중계 없는 플레이오프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국회의원 겸직 문제에 대한 우려에도 “KBL의 발전을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드는 데 유리한 점이 있다. 내년 총선에 당선되면 국회 문방위원장을 맡아 KBL에 더 큰일을 하겠다.”고 말했다. 한 의원은 이날 국가대표팀 연습경기가 있던 안양체육관을 찾아 허재 대표팀(KCC) 감독과 선수들을 격려하며 ‘총재 당선자’로의 첫 행보를 시작했다. 조은지기자 zone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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