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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BS 다큐팀박수용PD 자연에 빠져,자연이 돼버린 남자

    그처럼 자연을 은근하고 끈기있게 응시하는 이가 또 있을까.EBS 다큐팀의 박수용PD(38)는 시간의 미학을 철저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도 상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박PD의 ‘시베리아 호랑이’.나무 위에 누울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서 대소변을 비닐봉지에 담아내며버텼다.나중엔 호랑이도 의심을 다 버린 건 아니었지만 그를 자연의 일부로받아들였다.그때 찍은 베타 테이프만 100여개. 시베리아에서 그렇게 1년6개월을 버티다 김포공항에 발을 내딛자 마자 그는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기도 했다.“그곳이 고향 같아서…”6년동안 틈틈이 관찰해 두었던 수리부엉이의 생태를 담은 ‘수리부엉이’를17일 내보낸 뒤 그동안 목격담과 흔적 발견 주장이 유행처럼 떠돌았던 한국호랑이의 실존 여부를 법정극처럼 캐물은 ‘한국 호랑이를 찾아서’를 18일오후8시 선보인다. “지금까지 제가 작업한 것이 17∼18편입니다.누가 억지로 시킨다면 그 일못하지요.나무위에 올라가 호랑이를 찍으라고 한다면 그곳이 감방이겠지요. 자연을 이해하려는 자세가무엇보다 중요합니다”그가 드러낸 다큐관은 어쩌면 너무 평범하다.사람의 손때 타는 걸 싫어하는동물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자연의 내밀한 부분으로 밀고 들어가는 미학이다.그는 “모험”이라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작업에 열중하다보니 혼자 모든 것을 하게 되더라고 했다.나무 위에서 그는 지나간 신문과 잡지,러시아어 사전을 통째로 외우고 헨리 쏘로우의 ‘월든’을 읽었다.두 아이와 아내가 기다리는 집은 물론 회사와도 전화 한번 해본 적이 없다.그렇게 일을 하다 돌아오면 사회와 영 친해지지가 않았다. 야간 촬영장비,열감지 카메라 등 혼자 힘으로 꾸리기 힘든 장비와 실랑이하고 빠듯한 예산과의 ‘전투’에 그는 이미 익숙해져 있다.오죽했으면 시베리아에서 귀국할 때 방한점퍼 등을 깨끗이 세탁해 팔아 비용을 마련하고 촬영장비도 귀국후 갚는다는 조건으로 비행기에 올랐을까. 그는 왜 그리도 자연에 몰두하는 걸까. “제 고향이 경남 거창인데요.체질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그냥 자연의 일부인 양 웅크리고 있는 게 편하고 재미있어요”이젠 가정도 돌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묻자 “아이들이 커가며 아빠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며 “자연관찰과 탐사의 노하우가 쌓여 이젠 시간을 많이 줄일 수있다”고 했다.어느 산자락 어느 비탈에 가면 ‘그놈’이 있을 것이라는 직관이 자연스레 붙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어떻게 하면 자연다큐를 배울 수 있느냐”고 조심스레 질문을 건네는 청소년 팬들의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하지만 정작 자연다큐를 하겠다는 PD들은갈수록 줄어들고 있어 그를 조바심나게 한다.다큐를 더 잘 찍기 위해 ‘돈때문에’ 다른 방송사로 간 적도 있지만 하루 출근한 뒤 다시 돌아왔다. “여건은 좀 미흡하지만 자연다큐에 대한 마인드가 EBS에는 있거든요”우리와 지형 등이 비슷한 러시아 연해주의 동물과 국내 포유류의 생태를 관찰하는 기획을 올렸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최근 신장이 좀 나쁘다는 진단을 받은 그는 삐쩍 마른 외모가 보여주 듯 그렇게 안식이란 것이자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임병선기자 bsnim@. * 한국호랑이가 있냐고요? 시청후판단해보세요. “한국호랑이가 있느냐 없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면 그런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은 없을 겁니다”박수용PD는 ‘한국호랑이를 찾아서’를 제작하며 5개월동안 민통선과 강원북부의 백두대간을 샅샅이 훑었다.주말에 이산 저산을 오르내려 호랑이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과는 격이 다르다.‘시베리아 호랑이’때 조언해주었던러시아인과 동행했다.러시아인은 20년동안 호랑이를 관찰했지만 딱 두번 야생의 그것과 마주쳤다고 한다. 그는 이번에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한국 호랑이의 흔적 발견 주장들이 결여하고 있는 과학적 분석을 해볼 요량이다.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의 선을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등 마치 법정드라마 공방처럼 꾸며 시청자들에게 판단을 내리도록 했다.당시의 목격담에는 수긍이 가는 대목도 없지 않지만 흔적 발견주장은 대부분 과학적인 분석없이 보도됐다는 게 그의 결론.호랑이보다는 삵(아무르 표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
  • 강제송환 직전 탈북7인 극적 인터뷰

    “북한에 돌아가면 우리는 전부 죽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북한으로 돌아가는 탈북자들의 생생한 인터뷰 모습이 23일 방송된다. KBS-1TV는 23일 저녁8시 ‘일요스페셜-탈북난민,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1부)’에서 지난 12일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북한탈출 난민 7인의 송환직전인터뷰를 방송한다.그동안 일부 언론에 이들의 사진이 실린 적은 있으나 인터뷰 장면이 방송되기는 처음이다. 북한을 탈출,중국에 머무르던 이들을 만난 사람은 지난 97년 한국방송대상을 탄 KBS ‘일요스페셜-지금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를 촬영한비디오저널리스트 조천현씨.조씨는 굶주림으로 북한을 탈출한 식량난민의 실태와 증언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중국에 머물면서 탈북난민들을 2년여에 걸쳐 밀착취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북한으로 송환된 7인을 만나 이들의 북한에서의 생활,탈북과정,중국에서의 유랑,러시아 국경을 향해 출발하는 모습 등을 생생히 담아냈다. 이들은 러시아행 바로 다음날인 지난해 11월7일 국경을 넘다가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됐다. 체포된 탈북난민 7명은 중국으로 인계되기 전,군부대에서 러시아 언론에 공개됐다.KBS는 이들이 강제송환 되기직전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한 연해주TV의 취재원본도 단독으로 입수·방송한다.중국 송환을 앞두고 공포에 질린 탈북자들의 생생한 표정이 공개된다. 이어 먹을 것이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11월 초겨울의 두만강을 건너기 위해팬티 차림으로 강물에 뛰어드는 북한 처녀의 생생한 모습 등 다양한 탈북 식량난민들을 만나 이들의 비참한 실상을 생생한 증언을 통해 공개한다. 이어 30일 방송될 2부는 ‘밀착취재 2년,중국 땅의 탈북 소년들’.지난 2년동안 조천현씨가 중국땅에서 만난 탈북 아이들에 관한 방송이다. 중국 동북3성을 돌며 숱한 탈북 아이들을 만났던 그는 한 아이와 두세번씩 다시 만나기도 했다.유랑생활에서 부쩍 커버린 소년들,이들은 다시 만난 조씨에게 마음을 열면서 많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KBS 관계자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 등지로 탈출하는 북한 주민의 행렬은 96년부터 시작,3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며 “우리가 해야 할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전경하기자 lark3@
  • [시베리아 대탐방](4)바쉬코르토스탄共의 수도 우파

    [우파 이도운 특파원] 99년 10월26일 새벽 러시아에서 ‘인종의 섬’으로불리는 바쉬코르토스탄 공화국의 수도 우파에 도착했다.우랄산맥 서편 기슭에 자리잡은 우파는 시베리아의 다른 도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했다.일단 우파역에서부터 만나기 시작한 주민들의 생김새가 독특했다.서양인이보면 동양인이고,동양인이 보면 서양인의 모습이었다.그들은 몽골의 피가 섞인 무슬림(회교도)인 바쉬키르인이다. 이날 오전 10시 무르따자 라히모프 공화국대통령의 공보수석비서관인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시묘노프를 만나기 위해 정부 청사에 도착했다.청사에 도착하자 ‘명당’이라는 말이 절로 입가에 맴돌았다. 평야지역인 도시 한가운데 해발 300미터쯤 되는 우파산이 솟아 있다.산 아래 북쪽편으로 폭 70미터의 아기델 강이 휘돌고 있다.공화국 정부는 산 정상에 자리잡아 시 전체를 바라다 본다.청사 서쪽 저편에 또하나의 작은 산이있고,거기에는 공화국 의회가 자리잡고 있다. 우파는 한마디로 석유 공화국이다.공화국 전체가 원유 위에 떠있다.1년에5,000만t의 원유를 생산하는 러시아의 첫번째,유럽의 두번째 석유생산지이다. 우파시와 주변지역 어딜가도 석유 펌프가 쉽게 눈에 띈다.그저 우리나라 시골에서 우물 물을 퍼내듯 이곳 사람들은 소규모 펌프로 쉽게 석유를 꺼내 쓴다.석유 1ℓ 값이 1루블(48원)이다. 석유가 많이 생산되다 보니 당연히 석유화학도 발달됐다. 우파는 쿠웨이트처럼 석유만 팔아도 먹고 놀 수 있는 나라다.그러나 생산량의 대부분은 러시아 연방정부가 가져간다.그것이 바쉬키르(바쉬코르토스탄의 별칭)의 불만이고,그 때문에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온다.그러나 공화국 정부의 관계자는 “결코 체첸과 같은 식의 독립은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바쉬키르는 러시아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금융이 튼튼한 지역이다.시묘노프공보수석은 “바쉬키르인들은 많이 벌고 적게 쓴다”면서 “러시아가 최근몇년간 경제위기를 겪었지만 공화국 내의 은행은 단 한군데도 문을 닫지 않았다”고 말했다.공화국의 대표적인 은행인 바쉬키레디트뱅크는 정부와 민간 합동 소유로 미국,독일의대형은행과 활발하게 업무협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시묘노프 수석은 “바쉬키르의 석유제품을 한국에 보내고,한국에서 전자제품을 들여오면 좋을 것 같다”면서 “한국이 모스크바를 통하지 않고 바쉬키르에 직접 회사를 만들면 세제 등 갖가지 지원을 하겠다”고 말했다. 바쉬키르인은 400만명 공화국 인구의 25%를 차지한다.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자리는 대부분 바쉬키르인이 맡고 있다.그러나 주민의 다수는 역시슬라브계 러시아인으로 40%이다.러시아는 소수민족의 자치와 문화를 존중하지만 이들의 독립은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지역이든 주민의 다수는 슬라브인이 차지하도록 만들고 있다. 인구의 나머지 35%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소수민족이다.우파에만 14개의소수민족 학교가 있고 7개 언어의 신문이 발행된다. 바쉬키르인들의 민족 정신은 남다른데가 있다.공화국 정부 청사에서 조금떨어진 언덕에 살라바트 율라이브 장군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제정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女帝) 시절 22세의 율라이브는 폭정에 항의하는 바쉬키르 반군을 이끌고 싸우다 잡혀 25년 동안 에스토니아에 유배됐다가 숨졌다. 바쉬키르인들은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기린다.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과 하키팀을 만들어 추앙하고 있다. 우파시의 남쪽으로 200㎞쯤 가면 바쉬키르의 민속마을이 있다.우리의 용인민속촌 같은 곳이지만 바쉬키르인들이 실제로 생활한다.유목민족인 바쉬키르인은 임시주택인 유르타를 만들어 살았다.유르타의 바깥쪽은 마름모와 막대기 문양이 새겨져 있다.바쉬키르인들은 늘 초원을 옮겨다녔기 때문에 마름모와 막대기의 모양과 수로 동서남북의 방향을 잡고,자신들의 위치를 표시했다고 한다. 우파의 자랑거리 가운데 하나는 전문적인 의료진과 풍부한 온천을 이용한종합치료휴양시설 세나토리이다.주정부 공보실 직원 살리모의 안내로 시내외곽의 ‘파란 숲속’이라는 이름의 세나토리를 방문했다.전문의 갈리모프리모비치는 치료·입원시설,운동·식당 등 부대시설을 일일이 안내하며 “온천과 투약,중국에서 배워온 침술 등을 통해 위와 폐 등 내장관련 질병과 관절염 등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설명하고 “로시야 호텔(취재진이 묵던 호텔)의 일주일 값이면 여기서 한달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부인과에서 만난 여의사 엘미라 레그카야 박사는 “최근 한국인들이 눈 수술(라식수술을 말하는 듯)을 받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면서 “한국에서 불임여성이 오면 원인을 밝혀내고 치료해보겠다”고 자신감을 보였다.그녀가환자를 앉혀놓고 치료하는 의료기에는 ‘중외메디칼’이라는 한국 상표가 붙어있었다. dawn@ *우파에서 만난 두 한국인 市長 바쉬코르토스탄은 소수민족의 공화국이다.석유대학을 졸업하고 석유회사를운영하다 92년 대선에서 당선된 무르따자 라히모프 대통령의 가장 큰 관심은 소수민족간의 화합과 협력이다. 그런 연유로 98년 재선된 라히모프 대통령은 공화국 50여개 주·시의 수장을 소수민족으로 채웠다. 놀랍게도 그 가운데 2곳은 한국인이 차지하고 있었다.지난해 10월 28일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두 도시를 방문했다.바쉬키르 정부는 살리모 공보관과기사가 딸린 승용차를 제공해줬다. 우파에서승용차를 타고 북쪽으로 5시간쯤 달려 굴곡이 약간 있는 평야지역에 자리잡은 인구 4만9,000의 소도시 이리셰브스키에 도착했다. 이 도시의 시장 김(金) 알렉산드르 알렉세예비치는 한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한국인 2세다.극동 아무르강 주변에 살던 김시장의 부친이 스탈린 시대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송된 뒤 그곳에서 러시아 여인과 결혼,김시장을 낳은 것이다. 김시장은 대학을 졸업한 뒤 이 지역 기계공장에서 일하다 공장장이 됐다.한국인답게 부지런하고 성실한 그를 주변에서 눈여겨 보기 시작했으며,그 사실이 공화국 정부까지 알려져 시장에 선임됐다.김시장은 “밀 농사와 축산업이 주요 산업이지만 석유도 생산한다”고 도시의 현황을 설명한 뒤 취재진을시볼레 지프에 태워 관할지를 한바퀴 돌았다.참으로 넓고도 비옥한 영토였다.지프는 돌연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갔고 한참을 달리니 숲속의 휴양지가 나왔다.그곳에서 김시장이 준비해 놓은 바쉬키르식의 ‘성대한’ 만찬을 함께했다.음식은 한국인 입맛에도 맞았다. 이리셰브스키에서 또다시 북서쪽으로 3시간쯤 달리니 인구 12만명의 공업도시 네프테캄스크가 나타났다. 이 도시의 시장 림(林) 이고르 테니콜라예비치는 부모가 모두 한국인이다. 림시장의 부친은 연해주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뒤 역시 스탈린 시절 이주해우파에서 비행기 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림시장은 17세가 되던해 패스포트(신분증)를 만들게 되면서 국적란에 뭐라고 쓸까를 망설였다.여러가지 불편하고 불이익도 많겠지만 한국이라고 썼다.림시장의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한다. 올해 47세인 림시장은 이 도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36년째 살고 있다.림시장은 요즘도 직접 김치를 담아 먹는다고 했다. 림시장은 “하느님이 세계를 돌며 한 지역에 선물 하나씩을 줬는데 이 도시에서는 주머니를 놓쳐버리고 말았다”고 말했다.석유와 온갖 종류의 광물등지하자원과 천연자원,강·호수 등 풍부하다는 얘기다.정유와 섬유,트랙터 생산 등이 주요 산업이다. 림시장은 라히모프 대통령이 자신을 시장으로 임명하면서 “인종이 무슨 상관이냐 함께 열심히일해보자”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나 스스로도 그런 태도로 주민들을 받들고 있다”고 말했다.
  • [의열 독립투쟁](17)박재혁 의사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민족지도자들은 중국 상해와 남·북만주,노령(露領)의 연해주,미주 등 해외로 이주 혹은 망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독립투쟁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이들은 자신들이 근거한 지역의 특성과 평소 신조에 따라 외교·의열투쟁·무장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 방략을모색,전개하였다. 이 가운데 의열투쟁은 일제의 침략기관이나 총독부의 일본인 고관,혹은 친일파에 대해 폭탄·총기 등으로 파괴와 암살을 통해 응징한 것으로 의열투쟁은 그 규모나 성패 여부를 떠나 독립운동 선상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이는 의열투쟁을 통해 잔혹한 일제 식민지 통치에 대한 전체 한민족의 항일의지의 표출임과 동시에 일제 관리 및 친일 주구배 등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1919년 11월 결성된 의열단(단장 김원봉)은 결성 직후 일제의 침략기관 파괴와 일본인 요인·친일주구배 처단을 위한 거사에 착수하였다.1920년 4월중순부터 진행된 제1차 암살파괴계획이 그것이다.그러나 이 계획은 실행직전에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돼 거사를 며칠 앞둔 6월 하순 관련자 20여명이검거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이로부터 3개월 뒤에 발생한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파의거’는 의열단에서 추진한 거사 가운데 최초로 성공한 거사였다. 박재혁(朴載赫·1895∼1921) 의사는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났다.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부산가스전기회사의 전차 종업원을 거쳐 한때 경상북도 왜관 소재 무역상점에서 직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1917년 6월에는 무역상 주인에게 부탁하여 700여원을 얻어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무역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큰 돈을 벌지 못한 채 1918년 6월 귀국한 박 의사는 3·1의거 직후다시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박 의사는 남양무역회사의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지사들과 교류를 시작하였다.1920년 3월 일시 귀국한 박 의사는 7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입단 권유를 받았다.그러나 당시 박 의사는 가정형편과 외아들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노년을지내고 있던 노모 때문에 고민하다가 끝내 김원봉의 권유를 거절하였다.그러나 8월 김원봉으로부터 재차 입단권유를 받자 박 의사는 결국 입단을 수락하였다. 1920년 8월 상해로 건너간 박 의사는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를 파괴하라는 밀명과 함께 거사자금 300원,폭탄 1개를 전달받았다.박 의사는 폭탄과거사자금을 중국 고서적으로 위장한채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9월 6일 부산으로 밀반입하는데 성공하였다. 나가사키를 떠나기 직전 박 의사가 상해의 동지들에게 보낸 엽서(1920년 9월 4일자)에는 상황(商況),상로(商路),수익 등의 용어가 보이는데 이는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암호였다.그리고 ‘다른 길이 있는데,이익이 전에 비해 좋다’는 글은 나가사키에서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부산으로 가려고 했던 당초의 계획을 변경,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가겠다는 내용을 알린 것이다.그러나 이 엽서에서 ‘많은 이익을 볼 수있으나 다시는 동지들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구절은 박 의사가부산경찰서 폭파의거를결행하면서 이미 죽음을 각오했음을 보여준 대목이라고 하겠다. 한편 부산에 도착한 박 의사는 먼저 부산상업학교 동창인 최천택(崔天澤)과 김영주(金永柱·부산진상업학교,25세),오재영(吳載泳·부산상업학교 중퇴,25세)등을 만나 자신의 임무에 대해 의논을 나누고 이들의 도움을 요청하였다.최천택 등의 도움을 받아 박 의사는 곧 거사를 준비하였다.마침내 9월 14일 오후 2시경 중국인 고서적상인으로 변장한 박 의사는 고서적 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짊어지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찾아갔다. 서장실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시모토에게 고서적을 구경시켜 주고 있던 박 의사는 고서적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하시모토에게 의열단의 전단,즉 하시모토를 처단해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적은 전단을 내보임과 동시에고서적 보따리에 감춘 폭탄을 터뜨렸다.순간 굉음과 함께 하시모토와 그의옆에 서있던 일경 두 명이 부상을 입고 쓰러 졌다.하시모토는 중상을 입고병원으로 긴급히 호송되었으나 이송중 절명하였다.인명피해는 물론 경찰서건물 역시 대파되었다. 박 의사는 폭탄을 터뜨린 직후 혼란을 틈타 탈출하려 하였으나 불행히도 부상을 입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박 의사는 응급치료만 받은 채 구금돼 온갖고문과 심문에 시달리며 재판을 받았다.부산지방법원은 폭발물단속벌칙위반및 살인미수 등의 죄목을 들어 박 의사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대구복심법원에서는 1921년 2월 박 의사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그러나 경성고등법원에서 최종 사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채 일제의 계속된 잔악한 고문에 시달리던 박 의사는의거 당시의 부상이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폐결핵까지 겹치게 되자,‘왜놈들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수모를 당하며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자’고 결심하고는 단식을 계속하였다.일제의 집요한 회유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단식을 계속하던 박 의사는 결국 1921년 5월 11일옥중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그때 박 의사의 나이 27세였다. 1962년 정부는 박 의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하였다. [조범래 독립기념관 연구원] ** 박재혁 의사, 유족 근황과 기념사업 27세로 순국한 박재혁 의사는 1남1녀를 두었는데 두 자녀 역시 모두 작고했다.장남 기동(基東·76년 작고)씨는 부산 부평동에서 상업을 하다가 30여년전 상경,말년에는 서울서 거주하였는데 생활은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기동씨의 장남 정평(正平·52)씨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현재 서울 미아3동 소재 신일중학교 경비원으로 21년째 근무하고 있다.정평씨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무석(務石·32)씨는 상업을 하고 있다. 박 의사의 기념사업은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박 의사 장녀의 후손들이 중심이 돼 의거현장인 부산서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박의사기념사업회는 지난해 롯데그룹과 3·1운동동지회측의 지원을 받아 부산 연지동 소재 성지곡수원지 내에 동상을 건립한 바 있다.박 의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애국지사 묘역(78번)에 있다. 장손 정평씨에 따르면 박 의사의 유품은 별로 전해오는 것은 없고 사진 한두장이 전부라고 한다.이는 박 의사가 독립투쟁에 참여한지 얼마 안돼 일경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시작했고 또 옥중에서 순국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운현기자 jwh59@
  • 러 총선 평균 10대1 경쟁

    [모스크바 연합] 러시아는 19일 오전 8시(한국시간 오전 5시)극동지방을 시작으로 3대 국가두마(하원) 의원을 뽑는 선거에 돌입했다. 총 유권자는 1억700만명이며 중앙 선거관리위원회는 투표율이 60%에 이를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알렉산드르 베쉬냐코프 중앙선관위원장은 20일 오전 9시(한국시간 20일 오후 3시)까지 90%가 개표돼 이날 오전 10시쯤이면 1차 결과가 나오게 될 것이라고 전하고 최종 결과는 오는 29∼30일 확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16일 현재 선거 참관을 신청한 외국인은 52개국 및 79개 국제기구에서 1,100명에 이르며 이 가운데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소속 참관인만 500명에 이른다. 제 31선거구인 체첸이 제외돼 모두 449명의 의원을 뽑는 이번 총선에는 5,000여명이 입후보했으며 지역구의 경우 2,300명 이상이 나서,평균 경쟁률이 10대 1을 넘고 있다. 총선과 함께 이날 모스크바시를 비롯한 33개 시장 선거와 모스크바주와 연해주 등 8개 주지사 선거,그리고 10여곳에서 시의회 선거가 동시에 치러진다. 유리 루즈코프 현 시장과 겐나디 셀레즈뇨프 현 하원의장이 각각 나서고 있는 모스크바 시장 및 모스크바 주지사 선거가 특히 관심을 모으고 있다.
  • KBS‘…아리랑 난장’새해 첫날 방영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작은 섬에 한국인 성을 딴 도로 ‘킴 로드’가 있다.이민온 지 30년만에 원목 수출업자로 큰 성취를 이룬 김영일씨가 지역사회에 끼친 공헌을 기리기 위한 것. 김씨는“특정 성씨가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성취를 상징하는 이정표”라며겸손해한다. 오는 31일 오후4시부터 32시간 생방송으로 진행될‘KBS 밀레니엄 대기획 코리아 2000’의 한 코너로,새해 첫날 오후3시50분부터 130분동안 방영될 ‘한민족 네트워크-아리랑 난장’(김성기 기획,이낙선 연출). 난장이란 제목이 시사하듯 다채롭게 꾸민다.우선 미 LA 산페드로공원 안의우정의 종각에서 새천년 남북평화통일 기원 타종식을 위성 생중계한다. KBS는 이 기획을 위해 지난달 22일부터 홈페이지에 ‘난장 캠페인’‘비즈니스 네트워크’‘이야기 한마당’코너를 만들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의 대화통로를 마련했다.62년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당했다가 이제 돌아와 군 막사에서 힘든 겨울나기를 하는 고려인들에게 살 집을 마련해주고,7만명의 고려인에게 모국어를 가르쳐줄 한국어학당 건립과 컴퓨터 제공을 위한성금접수 코너도 준비했다. 5대양6대주에서 활약하는 560만 한민족의 생활상도 현지취재를 통해 소개한다.지난 56년 단돈 56달러를 들고 미국에 건너가 현지 철골시장의 60%를 장악,올해 전미지역 기업인상을 수상한 백영중회장.그는 LA 한국어학당에 10만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이밖에도 뉴질랜드 농토를 개간해 닭과 화훼농장을꾸린 한국인을 소개한다. 중국 심양의 조선족을 활용해 현지인들과 융화를 이루어내는 중광전자의 현지화 전략도 화면을 탄다.아울러 베를린의 광원·간호원 파독 35주년 기념식과 시카고·하와이에서 각각 열린 해외 한인 무역인대회와 재외동포 차세대지도자회의를 취재했다. 임병선기자 bsnim@
  • 경남 동북아 기계산업벨트協 추진

    한국과 일본,중국,러시아 등 동북아 4개국의 기계산업 발전과 통상교류 증진을 위한 ‘동북아 기계산업벨트 협의체’가 결성된다. 경남도는 도내 기계산업을 지식집약형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내년 10월 동북아 4개국 14개 자치단체가 참여하는 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고있다고 8일 밝혔다. 협의체에 참여할 각국의 자치단체는 ▲한국의 경남도를 중심으로 울산시와전남·경북도 ▲중국의 헤이룽장(黑龍江)·지린(吉林)·랴오닝(遼寧)·산둥(山東)성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연해주 ▲일본의 후쿠오카(福剛)·야마구치(山口)·히로시마(廣島)·나가사키(長崎)현 등이다. 경남도는 내년 1월 협의체추진기획팀을 발족하고,3월에 유관기관단체장과산업체 대표 등이 참석하는 ‘환황해권시대 경남의 교류방향과 전략’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어 사업추진 방향을 논의할 방침이다.이어 4월부터 두달간참여대상 자치단체의 의견 수렴과 실무회의(9월)를 거쳐 국제기계박람회 기간인 10월초 협의체 결성을 위한 ‘창원선언문’을 채택할 계획이다. 경남도는 지식집약형 기계산업 육성을 위해 내년에 720억원을 투자하는 등5년간 4,215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소프트웨어 인프라 구축 ▲지식집약형기업창업 및 성장촉진 ▲지식 창출 및 환경기반 강화 등 3개 분야 14개 단위사업을 추진한다. 창원 이정규기자 jeong@
  • 러시아 이상원화백 초대전

    [상트 페테르부르크=김재영기자] 국내 화단에서 외롭게 자기 길을 걸어온 이상원(63)화백이 세계적 명망의 러시아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고있다.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국립러시아미술관은 지난달 26일 외국인 생존작가로는 처음으로 한국의 동양화가 이화백을 초대해 전시회를 개최했다.오는 21일까지 열리는 그의 초대전 개막식에는 600여명의 러시아 미술팬들이참가,국내 개인전 오프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발적인 열기를 뿜었다.이국립러시아미술관은 푸쉬킨,트레차코프,에르미타쥬와 함께 러시아 4대 미술관으로 꼽히며 러시아 미술품 37만점을 소장하고 있다. 장지에 수묵과 오일을 섞어 그린 그의 독특한 극사실주의 대작들이 5개 전시실을 가득 메웠다.70년대 후반부터 일관되게 그려온 구멍이 뚫린 마대 자루,마늘 더미,굵은 밧줄 무더기,눈 위에 새겨진 무한궤도의 대형트럭 바퀴자국 등의 ‘시간과 공간’ 시리즈와 함께 최근 시작한 어촌 사람들의 생생한 얼굴표정을 옮긴 ‘동해인’ 연작들이 나란히 걸렸다.먹과 오일을 교묘하게 배합하고사진같은 섬세한 붓질로 이루어진 극사실풍 그림들은 리얼리즘의 본고장인 러시아 사람들에게 ‘즐거운 충격’을 주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작가는 극장 간판장이로 출발해 초상화 전공의 상업화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마흔이 넘어 순수 미술로 전환했다.인맥이 없어 국내화단으로부터 무시당했으나 97년 러시아 연해주 주립미술관,98년 중국 베이징 중국미술관,올 여름 프랑스 파리 라 살페트리에르 개인전에서 하나같이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블라디미르 구세브 국립러시아미술관장은 “서구미술에 초점을 맞추었던 운영방식을 수정하면서 작가를 초대했다”고 밝히며 “작품에서 동양의 전통적 시선과 서양의 새로운 기술을 한꺼번에 볼수 있다.아방가르드로만 치닫는러시아 현대작가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작가와는 초면인 이인호 주러시아 한국대사도 개막식에 참석,축하했다.
  • [의열 독립투쟁] (10)田明雲·張仁煥 의사

    국권이 이미 기울 대로 기운 1908년 3월23일 이른 아침.미국 샌프란시스코페어몬트호텔 앞에서 한 한국 청년이 몸을 숨기고 호텔 안의 동정을 살피고있었다.이 시각 한 대의 승용차가 호텔 정문에 정차하자 일본인 관리로 보이는,실크 모자를 쓴 두 사나이가 호텔 안으로 들어가더니 트렁크 몇개를 들고나와 승용차에 싣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무언가를 직감한 이 한국인 청년은 급히 인근 페리 정거장으로 향하였다.그는 오전 9시30분 정각에 발차하는 미국 대륙횡단열차와 관련해 ‘볼 일’이 있는 듯했다.이윽고 9시 15분경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플랫폼으로 들어서자 역 구내 한 쪽에 모인 일본인 무리에서 ‘반자이(만세)’ ‘반자이’하는 함성소리가 터져나왔다.그들은 한 미국인의 전송차 나온 일행들이었다. 함성소리에 싸여 한 미국인이 탄 승용차가 정거장 앞에 멈추어서자 샌프란시스토 주재 일본총영사 고이게 조소(小池張造)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뒤따라 내린 미국인은 얼굴에 상처투성이였다.9시20분 개찰이 시작되자 승객들이역사를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미국인도 열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나서자 이때 철탑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한국인 청년이 품에서 권총을 빼들고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첫 발은 불발이었다.다시 두번째 방아쇠를 당겼으나 이 역시 ‘찰칵’소리만 날 뿐 불발이었다.자신의 권총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한국인 청년은 권총을 거꾸로 고쳐잡고 차에 오르려는 미국인을 맹타하기 시작했다. 급습을 당한 미국인이 몸을 피해 도망가려는 순간 어디선가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첫 발은 한국인 청년의 오른쪽 어깨를 빗맞고 지나갔고 두번째,세번째 탄환은 미국인의 등과 허리에 명중했다.두 사람은 땅바닥에 쓰러졌다.쓰러진 미국인은 친일파 스티븐스과 한국 청년 전명운(田明雲·1884∼1947)의사였다.총을 쏜 사람은 또다른 한국 청년 장인환(張仁煥·1876∼1930)의사였다.이른바 ‘스티븐스 처단의거’로 불리는 이 사건은 한국의 애국청년들이이국 땅에서 이룩한 쾌거였다. 전명운 의사는 서울 출신으로 일찍 양친을 여의고 불운한 청소년기를 보냈다.가업인 포목전을경영하던 장형의 도움을 받아 성장한 전 의사는 약관 20세인 1904년 2년제 신식학교인 한성학원을 수료하면서 시국과 개화에 눈뜨기 시작했다.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용맹투사로 소문나 있던 전 의사는노상에서 한국인 부녀자를 희롱·모욕하는 일본인들을 응징한 뒤 신변에 위협을 느껴 천주교 신부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 다시 신부의 주선으로 미국 화물선 스타피시호의 취사장 인부로 고용된 전 의사는 대만·일본 등을 거쳐 그해 9월 하와이에 도착했다.이곳에서 1년간 농장 인부로 일하던 전 의사는 이듬해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부두노동자,철로공사장 노동자,채소 행상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민노동자와 몇몇 유학생,우국 망명가들이 모여 1905년 4월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기관지 ‘공립신보’를 통해 교민들의 세력을 규합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전 의사 역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한편 1908년 3월 한국통감부의 외교고문이자 친일파인 미국인 스티븐스가워싱턴을 방문하는 길에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한다는 정보가 교민사회에 입수되었다.스티븐스의 귀국은 대외적으로는 일제가 다년간의 공로를 인정,특별휴가를 준 것으로 돼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밀명을 띤 귀국이었다.당시 미국 내에서 일본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격운동이격화돼 미 의회에서 관련 법 제정을 추진하자 일제가 그를 긴급 파견,미 국회의원과 유력자들을 만나 법안 제출·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3월3일 요코하마를 출발해 귀국 길에 오른 스티븐스는 선상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항구적인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국은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 아래 그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으며 3월20일 샌프란시스코 도착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는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리하다”는 등 친일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내용은 미국 신문에 보도돼 재미교포 독립운동가들의 격분을 샀다. 공립협회 회원들은 스티븐스가 머문 페어몬트호텔로 찾아가 발언내용 취소를 요구하며항의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응징했다.이날 저녁 샌프란시스코 교민들은 스티븐스 구타 경과보고를 겸한 모임을 갖고 대책을 숙의했는데 이자리에서 전 의사는 자신이 스티븐스를 처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장인환 의사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전·장 두 의사는 23일 아침 일찍 워싱턴으로 가는 대륙철도를 타려던 스티븐스에게 세 발의 탄환을 날렸다.피격 후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긴급 치료를 받았으나이틀 뒤인 25일 복부 탄환 제거 수술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3월27일 전 의사는 병상에 누운 채 살인미수 혐의로,장 의사는 계획에 의한 일급 모살 혐의로 각각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다.교민사회에서는 두 의사의 무죄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호소하는 한편 변호사 비용 등 경비 모금에 나섰다.공립협회 회원이자 두 의사 후원회 임시서기인 송종익(宋鍾翊)은 현지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 두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은 한국의 독립 쟁취를 위한 투쟁이라고 밝히고 재판 과정을 독립전쟁의과정으로 인식해줄 것을재판부에 호소하였다. 3차에 걸친 예심을 마치고 6월27일 전 의사는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으나장 의사는 8개월 동안의 재판 끝에 12월23일 ‘애국적인 발광(發狂) 환상에의한 2급 살인죄’로 판정,극형은 면하고 이듬해 1월2일 열린 언도공판에서금고 25년형을 선고받았다.장 의사는 1919년 1월17일 가출옥으로 석방됐으며1924년에는 자유의 몸이 됐다. 전 의사보다 8세 연상인 장인환 의사는 1876년 평양 출신으로 장 의사 역시 조실부모하고 청소년기를 불우하게 보냈다.각지를 전전하며 상점점원 노릇을 하기도 하고 잡화상을 경영하기도 했던 그는 평양에 살면서 청일전쟁을직접 체험하였다.1904년 하와이로 이민,사탕수수 농장에서 2년간 일하다 1906년 캘리포니아로 옮겨 노동자생활을 하던 장 의사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국권을 박탈하자 ‘대동보국회’ 가입을 계기로 항일 대열에동참하였다. 한편 전·장 두 의사의 의거는 항일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의미의 성과로기록되고 있다.우선 두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은 국내 민족진영에활기를 불어넣어 일시 수세에 있던 의병투쟁을 공세로 전환시켰다.또 두 의사의 의거·재판을 모두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국내외에 인식시켰다는 점이다. 의거 이후 전 의사는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현지에서 안중근(安重根)의사와 교유한 적이 있는데 전 의사의 의거 이듬해인 1909년 안 의사의 이토(伊藤博文) 처단은 전 의사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미국인 친일파를 처단,한국 청년의 기개를 세계 만방에 드날린 두 의사는 모두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의거 후 재판에서 무죄 석방된 전 의사는 일제의 감시와 암살 위협 등의 압박감에서 이름마저 ‘맥 필드’로 바꾸고 9월 연해주로 일시 망명했다가 1919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그때 부인과 양자로 입양한 조카를 만났으나 두 사람 모두 1927년 사망해 두 딸을 어렵게 길렀다.태평양전쟁이 일어난 후 한인국방군 편성계획을 미육군사령부에 제출,노년까지 항일활동을 하던 전 의사는 해방 이듬해인 1947년 11월18일 63세로 LA 노인아파트에서 타계해 갤버리 천주교묘지에묻혔다. 94년 전 의사의 유해는 봉환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장 의사는 전 의사보다 비극적인 노년을 보냈다.1919년 1월 가석방된 후 실의와 병고를 이기지 못한 장 의사는 1930년 5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샌프란시스코 공동묘지에 묻혔던 장 의사의 유해는 75년 국립묘지로 이장돼 사후 45년 만에 영원한 안식처를 갖게 됐다.두 의사는 모두 지난 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정운현기자 jwh59@ *田·張의사가 처단 스티븐스는... 전명운·장인환 두 한국 청년이 처단한 미국인 스티븐스는 어떤 인물인가. 처단될 당시 일제 한국통감부의 외교고문으로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는 1852년 미국 오하이오 태생으로 19세때 오버린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컬럼비아대학 법리과·외교학과를 졸업했다.처음 미 국무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1882년 주일 미국공사관에서 1년간 근무한 것이 인연이 돼 일본과 인연을맺게 됐다. 이듬해 이곳을 사직한 그는 주미 일본영사관의 서기관으로 변신하였고 이듬해 다시 일본 외무성고문으로 채용되어 본격적인 일제의 침략외교를 자문하기 시작했다.그가 한·일 외교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82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결과로 체결된 ‘한성조약’ 체결때이다.일본측 전권대사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따라 내한한 그는 이노우에를 뒤에서 자문한 공로로 욱일장(旭日章)을 받았다. 스티븐스는 이후에도 영·일동맹과 뒤이은 포츠머드 강화조약에서 일본이한국을 ‘병합’할 수 있는 길을 트는 데 크게 기여했다.이같은 공로로 그는 1904년 한·일간 체결된 ‘외국인 고문에 관한 규정’에 근거,대한제국 정부의 외교고문(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는 한국통감부 외교고문)으로 초빙됐다. 그는 ‘몸’은 미국인이었지만 ‘마음’은 일본을 위하는 자였다.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한 1905년 ‘을사조약’ 체결시는 물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 7조약’ 체결때도 그는 배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이후 그는 한국의 민족진영으로부터 처단 대상으로 지목됐고 전·장 두 의사에게 처단될당시 그의 나이 55세였다. 샌프란시스코 성프란시스병원에서 수술 도중 사망한 그의 사체는 4월2일 이 병원을 출발,6일 워싱턴에 도착됐다.장례는 8일 교회에서 기독교식으로 치러졌으며 워싱턴 온비루묘지에 묻혔다.이튿날 거행된 추도식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조화와 일황의 조전 및 조화,그리고 200여명의 조문객이 참여한가운데 거행됐다. 일본 정부는 장례식에서 스티븐스에게 훈1등 훈장을 추서했으며 유족에게조의금으로 15만원을 전달했다.사후 발견된 그의 예금통장에는 2만6,000여원의 거금이 입금돼 있었는데 이 돈은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친일 대가로 받은것이었다. [정운현기자]
  • ‘연해주 발해유적 - 페트로프섬 탐사보고회’

    고구려 멸망후 7세기경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大祚榮)이 세워 크게 번영을누렸던 발해.그러나 고려 이후 한민족의 무대가 한반도로 좁혀지면서 발해는 우리역사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은 고대의 한 국가 정도로 평가돼 왔다.그동안 국내 역사학계의 발해에 대한 연구는 미진했으나 80년대 후반이후 중국과의 교류가 이뤄지면서 현지답사 등 연구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갖가지 탐사보고서나 답사기,학술연구조사서 등이 나오고 있다. 지난 92년부터 연해주 지역의 발해유적 조사작업을 지원해온 고려학술문화재단(이사장 朴勇正)은 국내 역사학자들과 블라디보스토크 국립극동대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발해 문화유적조사단을 지원,지난 6월 ‘연해주에 남아있는발해’를 펴내기도 했다. 고려학술문화재단은 또 지난 8월 3일부터 13일까지 발해의 유적으로 추정되는 연해주 페트로프섬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탐사하고 돌아온 나선화(羅善華)이화여대 박물관 연구원의 ‘연해주 발해유적-페트로프섬 탐사보고회’를 29일 오후 서울 송현클럽 북한산룸에서 갖는다.페트로프섬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동쪽 ‘라졸’구역에 위치한 직경 380m의 작은 섬이다.이곳은 발해가 일본 및 한반도와 해상으로 교류한 요충지였다.발해는 이곳을 통해 동해안 해상권을 장악하고 일본과 교역을 했으며,외세침입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는 한반도와 일본으로 이주할 수 있는 탈출구로 활용했다. 이번에 발견한 유적은 ▲섬과 육지를 연결한 도로 ▲높이 300m에 이르는 성벽 ▲문지(門址·문을 세운 터),적석유구(積石遺構·돌로 쌓은 남아있는 구조물) ▲요철형 석축 구조물,석축 우물 2개,망루터 등이다. 성의 외형조건은 기암절벽을 방어벽으로 이용하고 낮은 부분은 돌을 쌓아보강한 우리의 삼국시대 및 발해의 산성과 유사해 이곳이 역사상 고구려 이후 발해의 지리적·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섬의 서북쪽에 위치한 문지는 지금도 윤곽이 뚜렷하며 육지를 살필 수 있는 망루(望樓)를 만든터도 남아 있다. 석축 구조물은 고구려의 방식으로 지어졌다.넒은 돌로 기단을 구축하고 경사면은 할석으로 쌓았으며 외면은 수직선을 그리며 모가 분명하게 구축돼 있다.집터 또는 분묘로 추정되는 적석유구가 2.5m 폭 1.5m 크기로 직각으로 배치돼있다.섬의 서북쪽과 서남쪽 2곳에 돌을 쌓아 만든 우물도 발견됐는데 크기는 직경 1m 정도로 당초 팔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석축도로는 60×70㎝ 크기의 큰 돌을 깔고 사이에 작은 돌을 끼워 넣었다.길이 250m,넓이 10∼20m로 지금은 30∼60㎝ 깊이의 물속에 잠겨있다.부분적으로 유실됐으나 충분히 알아볼수 있을 만큼 원형을 잘유지하고 있다. 나 연구원은 “이번 발굴조사는 고구려와 발해유적을 발굴한 것과 함께 발해의 융성한 해양문화를 엿볼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정기홍기자 hong@
  • 한·러 학술회의 주제발표 요지-러극동대 한국학대학장

    블라디미르 베르할략 러 극동대 한국학대학장?연해주지역 한인 언론의 역할 1910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 동방대학 출신인 듀코프가 편집을 맡은 ‘대동공보’는 재러,재중동포들이 무장항일투쟁을 하도록 호소했다.‘권업회’의 항일독립운동도 주목할만하다. 권업회는 연해주 군지사 마나킨 장군 등 러시아인 주요 인사들을 명예회원으로 가담시켰다.이는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한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려는러시아 당국의 이해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권업회는 정치,애국계몽운동과 함께 경제활동을 널리 전개했다.1912년 4월듀코프를 발행인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유가이 니콜라이 인쇄소에서 ‘권업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러시아 지역에서 발행된 유일한 한인신문이자민족지였던 점이 주목된다.이 신문의 주필은 신채호,이상설,김하구 등이 맡았다.신채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역임한 인물이다.1914년일본정부는 반일활동을 한다며 러시아 정부에 폐간을 요청했고 러시아 정부는 이 단체의 활동을 충분히 파악하지 않은채 폐쇄시켰다.
  • 한·러 학술회의 주제발표 요지-러 극동역사문서보관소장

    세메넨코 도로포프 러 극동역사문서보관소장?한인의 극동 독립투쟁 신한촌에는 일본인들의 수색을 피해 조국독립투쟁을 벌인 한국 애국자들이 살았다.러시아에서의 한인 첫 의병은 육류유통업자인 최재형이었다.러시아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러시아어를 완벽히 구사했다. 이범윤이 있었다.국경전권위원이었는데 민병대 지도자였다.1906년 내부무 요원이었던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반일운동은 우수리스크 전역을 덮었다.한인촌들에서는 빨치산부대의 전투교육을 위한 군사교육이 시작됐다.1908년까지 러시아 지역에서 한국으로 약 1,000명의 전투요원들이 들어갔다. 한국내에서 일본의 점령에 반대하는 적극적인 봉기를 목적으로 했다.모든지역에서 한국인들은 무기를 기부했다.반일투쟁이 러시아에서 거세지자 일본정부는 러시아에 유사행동을 금해달라고 요청했다.일본은 정규군을 빨치산에 대항해 투입했다.일부 빨치산부대가 러시아로 돌아왔다.연해주로 온 한국인들은 연해주가 반일본 투쟁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향후 독립활동의 도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리 블라디보스토크 유민특파원 rm0609@
  • 한·러 학술회의 주제발표 요지-鄭晉錫 한국외국어대 교수

    ?러시아 지역의 항일 한국어 신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신문에는 장지연,신채호 같은 당대 논객들이 참여했다.국내의 민족언론과 미국,연해주를 하나의 언론권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신문이 수행하였으며 신문이 독립의 의지와 정신을 심어주었음을 말한다. 해조신문,대동공보,권업신문은 국내에도 유입됐으며 만주와 미국에까지 보급됐다.국내의 신문으로는 독립신문에서부터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와 미국의 신한민보도 연해주에 보급됐다. 이들 신문은 서로 논설과 기사를 전재했는데 이는 국내,미국,연해주의 신문이 국민계몽과 국권의 수호라는 동일한 목적으로 발행됐기 때문이다.보급에있어서도 상호 대리점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신문에 참여한 언론인 가운데 유명한 분들은 역시 장지연과 신채호였다.개화사상가와 국학자이기도했지만 가장 큰 비중을차지한 분야는 언론이었다.정순만과 유진률,미국에서 건너온 이강과 정재관,대한매일신보 문선공이었던 박영진과 대한매일신보에 근무했던 이종운 등의언론활동은 더 연구되어야할 것 같다.
  • 한·러 학술회의 주제발표 요지-尹炳奭 인하대 명예교수

    구한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사설로 유명한 언론인이자 애국지사인 장지연(張志淵)선생 기념사업회(회장 朴權相)창립 10주년을기념하기위한 한-러 학술회의가 22일 열렸다.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립극동대학 한국학대학 강당에서 열린 학술회의에는 이 대학 교수와 학생, 국내사학자,러시아 한국학 관계자 등 300여명이 참석,성황을 이뤘다. 다음은 ‘연해주에서의 한국 민족운동’이란 대주제로 한·러 학자들이 발표한 주제발표문 요지. ?러시아 연해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 러시아 연해주는 1905년 을사조약이래 1907년 군대해산과 광무황제의 강제퇴위,1910년 국치에 이르는 동안 의병과 애국계몽운동자,민족운동자들의 총집결지였다. 연해주 의병은 한때 3,000∼4,000명에 달했을 만큼 규모도 컸다.연해주 민족운동자들은 성명회를 조직해 한일합병의 원천무효도 선언했다.‘성명회 선언서’는 합병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민족적 혈전을 선언했다.이 선언서에는8,000여명의 민족운동자들이 서명했다.1911∼1914년간의 권업회활동,특히독립군양성과 대한광복군정부 건립노력도 두드러졌다. 3·1운동이 나자 연해주지역의 한인들은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성립시켰고 윤해와 고창일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했다.3월 17일 니콜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선언축하식과 시위운동도 전개했다.연해주 한인의 민족운동내지 조국독립운동 등은 한국근대사의 중요한 일면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 美여행잡지 선정 일생에 꼭 가봐야할곳 50選

    [워싱턴 AP 연합] 미국의 여행잡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는 1일지난 2년 동안의 작업 끝에 ‘완벽한 여행자가 일생에 꼭 가봐야 할 50곳’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잡지는 50곳과 보너스 한곳등 모두 51곳을 선정했다.이중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현재는 가장 가보기 쉬운 장소인 ‘사이버 스페이스’가 포함됐고 보너스로 추가된 51번째 장소는 지구 밖의 ‘우주’다. 다음은 50곳의 명단. ■도시 바르셀로나,홍콩,이스탄불,런던,뉴욕,예루살렘,파리,리우데자네이루,샌프란시스코,베니스■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장소 아마존 밀림,남극,호주의 미개척지,록키산맥,파푸아뉴기니의 산호초,에콰도르 갈라파고스제도,그랜드캐년,사하라사막,아프리카 세렝게티평원,베네수엘라의 테푸이스고원■지상낙원 이탈리아 아말피해안,미국 미네소타주 바운더리 워터스,영국 버진아일랜드,그리크제도,하와이제도,인도양 셰이셸공화국,일본의 전통여관,인도 케랄라,태평양제도,칠레 토레스델 파이네 국립공원■문명과 자연이 조화된 곳 알프스산맥,캘리포니아의 빅서,캐나다의 연해주,노르웨이해안,베트남 다낭에서 위에까지,잉글랜드 호수지방,프랑스 루아르계곡,미국 뉴잉글랜드주 노스아일랜드,이탈리아 토스카나,미국 버몬트■문화유적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캄보디아 앙코르 와트,사이버 스페이스, 만리장성,페루 마추 피추,미국 콜로라도주 메사버드,요르단 페트라,피라미드,타지마할,바티칸시■미래의 여행지(보너스) 우주
  • [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19)동해를 건넌 발해인

    *동해를 건넌 모험가-발해인 1998년은 발해가 건국한지 1300주년이 되는 해였다.고구려가 멸망하자 만주는 무주공산이 됐다.그러나 대조영을 중심으로 다시 뭉친 고구려인들은 옛땅을 되찾고 발해를 세웠다.발해는 문화가 뛰어났으며,주변의 나라들과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영토가 한창 때에는 남은 대동강부터 원산,서로는 요동반도(한규철 설),북은 연해주와 하바로브스크일대까지 뻗쳤다.‘해동성국’이라는 칭송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발해의 국력을 국제적으로도 인정한 것이었다. 발해가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이어받은 고구려정신과 지정학적으로 만주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것,남북경쟁이라는 현실,뛰어난 해양력을 잘 활용했기때문이다.732년 발해는 육군으로 요서지방,수군으로 산동반도 등주와 래주를 공격했다.당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질서에 위협을 느낀 발해는 북방의 흑수말갈을 토벌하였다.이어 돌궐 거란 등과 연합해 당을 공격하기로 하였다.장문휴(張文休)는 수군을 거느리고 등주성을 습격하여 자사(刺史)인 위준(韋俊)을 죽이고 점령하였다.등주는 중국의 수군세력이 고구려를 공격할때 사용하였던 묘도군도 끝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이 공격은 발해가 수군을 이용해 당의 후방을 공격할수 있다는 경고성 행위였다.그후 당과 화친,황해북부 연근해항로를 이용해 교섭과 교역을 활발하게 했다.특히 산동지방의 고구려계 이정기세력과는 해로로 말 교역 등을 하였으며,심지어 발해 배들이 황해를 종단해 절강지역까지 내려갔다. 발해는 신라와는 적대적이었지만 일본과는 관계가 돈독했다.727년 첫 사신을 파견한 이후 926년 멸망할 때까지 200여년 동안 공식사절만 34번을 파견하였다.무왕(武王)은 국서에서 발해가 고구려의 후신임을 선언하였다.이는고구려의 국제적인 위상과 명분,실리를 계승하겠다는 대외적인 의지표방이었다.반면 일본은 13차로 발해보다는 소극적이었으나,정치적으로는 신라를 견제하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자국의 위치를 상승시켰다. 두 나라는 동맹을 맺어 신라를 남북에서 압박하였으며,8세기중반에는 신라에 공격을 시도해 국제전의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그러나9세기 들어 두나라 간의 교섭은 문화,경제적인 형태로 변화되었다.특히 중요한 것은 무역이었으며,발해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발해인들은 담비가죽,호랑이가죽,곰가죽,말가죽,꿀,인삼을 수출했고,일본에서는 면 비단 수은 석유 등을 수입하였다.한번에 몇 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이 동해를 건너와 곳곳에 세워진 객관이나 객원에 머무르면서 장사를 하였다.일본화폐를 수십만전씩 갖고 귀국하는 경우도 생겼다.그러나 심각한 무역역조 현상이 나타나자 일본 조정은 일본인들의 사무역을 금했으며,발해의 배가 들어오는 오는 횟수와 장소를 제한하고,어길 경우 추방까지 하였다. 발해 사신선에는 수령과 상인들이 타고 와서 중계무역도 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그리고 상인들을 태운 민간배들도 독자적으로 왔으며(746년에는 1,100여명이 일본으로 온 것으로 돼 있다) 기록되지 않은 민간 상인들간의비공식적 교역은 일본의 동해안 곳곳에서 수없이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내륙국가로 알려진 발해인들은 언제 어떻게 동해를 건너왔으며,어떤 배를 이용,항해를하였을까? 1998년 1월 24일 새벽,4명의 젊은이들을 태운 뗏목 ‘발해 1300호’가 일본 오키제도의 도고섬 앞에서 전복되면서 전원 희생됐다.사람들은 그들이 무모하게 왜 한 겨울에 그토록 험난한 동해를 건넜느냐고 비판했다.그들의 선배였던 필자는 그들 대신에 항변을 하면서 발해의 해양활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발해배가 일본열도에 닿으려면 한 겨울 북서풍을 받아야 한다.때문에 11월부터 2월 사이에 떠난다.돌아올 때는 반대로 봄철에 일본을 출발해야 한다. 그런데 겨울 동해바다는 수온이 매우 낮고,늘 바람이 거세며,파고는 보통 2∼3m다.폭풍이 몰아칠 때는 풍속이 20m/sec 이상 된다.악조건속에서 동해를건너던 발해선들은 무수히 표류하거나 침몰해 숱한 사람이 수중고혼이 됐다(776년에는 120여명이 죽었다).그러나 ‘발해 1300호’처럼 오키제도에 도착한 사절선도 3번이나 있었다. 발해인은 항해술과 조선술이 매우 뛰어났다.동해는 망망대해지만,신라 때문에 안전한 연근해 항로를 포기하고 동해북부 사단항로를 이용해야만 했다.때문에 발해배들은 원양항해를 해야 했으며,지문항법 뿐 아니라 천문항법에 능숙해야 한다.그래서 천문생(天文生)이라는 항법사가 타고 있었다. 한겨울 거친 파도와,강한 바람을 견뎌내려면 조선술이 발달해야 한다.평온한 계절에 내해에서 연근해 항해를 하는 신라나 당,일본배와는 구조나 강도에서 차이가 있다.발해배는 크기는 약간 적고,돛은 사각에 가까웠으며,평저선에 첨저선의 구조를 일부 보완한 형태였을 것이다.발해배들은 러시아의 크라스키노,두만강 하구,청진,북평 등에서 출발해 일본열도의 동북인 아키다(秋田) 니이가타(新潟) 노토(能登)반도,쓰루가(敦賀),이즈모(出雲) 타자이후(太宰府)등 여러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당시 항해조건과 연해주를 차지한 발해의 영토 등을 고려할 때 발해인들은 봄 여름에 남서 계절풍을 이용하여 짧은 거리인 동해북부와 타타르해협을 건너 홋카이도나 사할린에도 진출했을 것이다.일본열도로 항해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항해다.최근에 홋카이도 남부지역인 오타루(小樽),오가와(大川)유적에서 7세기대 고구려계 유물과 발해말혹은 여진초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됐다.이것은 고구려나 발해인들이 연해주 항로를 이용,북방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을 높혀주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처럼 대륙뿐 아니라 동해와 황해북부를 장악하여 동아지중해에서 중핵 조정역할을 잘 수행하였고 해동성국이 되었다.결국 8∼9세기는 발해와 신라가 동아지중해를 나누어 운영하면서 분단의 한계를 해양으로 일부나마 극복한 시대였다. 윤명철 동국대 겸임교수
  • 발해는 누구의 역사인가?‘발해를 다시본다’ 출간

    발해는 누구의 역사인가.중국과 러시아는 발해를 말갈족이 세운 나라로 규정한다.중국은 말갈족의 후예가 만주족으로,이제 중국민족의 일원이 된만큼발해가 자신의 역사라고 주장한다.러시아 역시 그 후예가 연해주 소수민족이라며 자기네 역사로 해석한다. 우리는 발해를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한 한국 역사로 본다.그러나 발해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만주에 있었던 대제국이고,대조영이 세웠다는 정도에 그친다. 이처럼 발해가 미지의 세계가 되어 있는 상황에서 송기호(宋基豪) 서울대교수가 일반독자들을 위한 최초의 발해사 종합안내서인 ‘발해를 다시본다’(주류성)를 펴냈다.값 8,000원. 그는 발해사가 부실해진 이유로 두가지를 든다.먼저 단편적인 자료만 남아있어 실체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그러나 우리가 발해연구를 본격적으로 하지 않은 데 더 큰 원인이 있다고 지적한다. 송교수는 56년생 소장학자다.그럼에도 발해사 연구에서 이미 중요한 위치를차지한다. 이 책은 자료 및 연구성과의 부족이라는 난관을 극복하고 희미한발해의 모습을 또렷하게 들춰낸다. 그는 “발해가 한국 역사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조급성은 일단 제쳐두어야한다”고 충고한다.먼저 발해사를 그 자체로 파악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접근,발해사의 객관적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거기서 마침내우리 역사에 속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어낼 때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다고말하고 있다. 서동철기자 dcsuh@
  • [義烈 독립투쟁](5) 안중근 의사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하자 일제는 이를 ‘암살’이라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안 의사는 공판정에서자신은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공격, 처단했다고설명했다. 안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의 향반(鄕班)집안에서 태어났다.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1906년 3월 안 의사는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에 있는 가문의 재산을 모두 팔아 진남포로 이사한 후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였다.두 학교의 교장이 된 안 의사는 애국교육과 신학문 교육을 통해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안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설치하여 자신이 지부장을 맡고 부인과제수의 패물까지 모두 헌납하는 모범을 보였다. 1907년 7월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한국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안 의사는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의병부대를 조직,국내 진공작전을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범윤(李範允)·최재형(崔在亨)등 연해주 유력자들의 지원을 받아 300여명의 동포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추(煙秋·노보키에프스크)에서 의병부대를편성한 안 의사는 당시 이 부대의 실질적 통솔자였다. 안중근부대는 모두 세차례의 전투를 치렀다.1908년 4월 초순 두만강 최하단인 함경북도 경흥군 일본군 수비대 진지를 공격한 안중근부대는 단 한 사람의 부상자도 없이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는 귀환하였다.이어 1908년 7월 제2차전투에서는 함경북도 신아산(新阿山) 부근의 일본군 수비대를 수 차례 기습공격,10여 명의 일본군 병사를 생포하였다.청년 휴머니스트였던 안 의사는 일본군 포로들을 ‘국제공법’에 의거,무기만 빼앗고 석방하였는데 이것이화근이 돼 제3차 전투에서는 참패를 하고 말았다.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이 안중근부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기습해온 때문이었다.겨우 목숨을 건진 안의사는 부하·동지 몇 명과 연추로 돌아왔다. 한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포신문 ‘대동공보’의 연추지국장으로 일하고있던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분할 협의차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거사를 도모하였다.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 사장실에서는 총무 유진율(兪鎭律),주필 정재관(鄭在寬),기자 윤일병(尹日炳)·이강(李剛)·정순만(鄭順萬),연추지국장 안중근,회계원 우덕순(禹德順) 등 7명이 모였다.이자리에서 안 의사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이토를 처단하겠다”고 자원하였고 우덕순도 자원하고 나섰다.특공대는 2개조로 나뉘어 안중근·유동하(劉東夏)조는 하얼빈에서,우덕순·조도선(曺道先)조는 채가구(蔡家溝)에서 거사키로 하였다.그러나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채가구에서 정차하지 않고 그냥 통과함으로써 결국 거사임무는 안중근조에게 넘어갔다. 거사당일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주위에는 삼엄한 경계가 펼쳐졌다.안 의사는 러시아 경비병에게 ‘취재차 나온 신문기자’라고 속이고는일본인 환영객 집단 구역까지 깊숙이 진입하였다.이날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자 안 의사는 여섯발의 총탄을 날렸는데 그 중 세 발이이토에게 적중하였다.거사에 성공한 안 의사는 그 자리에서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창하였다. 안 의사는 재판정에서 자신의 거사는 ‘암살’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특공작전을 전개한 결과라고 누차 밝혔다.안 의사의 의거로 일제의 만주침략은 장기간 지연되었다.중국인들이 만주·중국 관내에서의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임한 것은 바로 안 의사와 한국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안중근 의사 직계후손 근황 안중근 의사는 부인 김아려(金亞麗) 여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장남 분도(芬道)는 6세때 사망해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분도보다 3살 위인 장녀 현생(賢生)씨는 백범 김구 선생 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황일청(黃一淸·작고)씨와 결혼,은주(恩珠·71)·은실(恩實·68·미국 텍사스 거주) 자매를 두었다.은주씨는 남편 이용문(李容文·작고)씨와 미국으로 이민갔다가 남편 작고후 귀국,경기도 용인 수지에 살고 있다.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안 의사의 유일한 직계후손이다. 항주(杭州) 호강대학을 졸업한 차남 준생(俊生·1951년 45세로 작고)씨는 부인 정옥녀(鄭玉女·91년 작고)씨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현재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안 의사의 장손격인 준생씨의 장남 웅호(雄浩·67)씨는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은퇴,새크라멘토에 거주하고 있다. 간호대학 출신인 장녀 선호(善浩·70)씨는 한국인 2세와 결혼,4남매를 두었으며 현재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다.차녀 연호(蓮浩·65)씨는 시애틀에거주하고 있다.정운현기자*白凡과 안중근家의 인연 19세의 청년 김창수(金昌洙·김구의 아명)는 1894년 양반사회를 타도하고자 황해도 동학농민전쟁의 해주성 전투에 선봉장으로 참여한다.그런데 당시 황해도에서는 반농민군 세력으로 의병이 조직되는데,그 대표적 인물이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박영효(朴泳孝)가 모집한 해외파견 유학생 70명에 선발되었다.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출세의 길을 버리고,대가족을 이끌고 신천군 청계동(淸溪洞)으로 들어갔다.1894년 황해도 동학군이 일어나자 이에 맞서 안태훈은 안중근 등 그의 아들과처자들까지 편입시킨 의병을 일으켰다.그 위력과 명성이 자자하여 황해도 동학군은 안태훈 부대를 두려워하였고,김창수 부대 역시 청계동을 특별히 경계하였다. 그런 안태훈이 청년 김창수에게 밀사를 보냈다.그 결과 두 진영 사이에는서로 공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불행에 빠지면 서로 돕는다’는 공동원조까지 성립되었다.즉 안태훈은 비록 동학군을 토벌하는 입장이었지만 인재를 아끼고 있었고 개화에 뜻을 두고 있었지만 청일전쟁 전후의민족적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창수 부대는 점차 토호화하고 있던 같은 동학접주 이동엽(李東燁)부대에의해 해체되었다.얼마간의 잠적 이후 이듬해 김창수가 찾아 간 곳은 청계동의 적장 안태훈 집이었다.청계동에서 ‘적장(敵將)과의 동거’는 청년 김창수에게 중요한 인연과 계기들을 마련해 주었다.안태훈의 각별한 후원으로 김창수는 부모님과 더불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안태훈가(家)의 식객인 고능선(高能善)은 동학의 꿈이 깨진 청년 김창수에게 새로운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또다른 식객 김형진(金亨鎭)은 같이 의기투합해 청국원정을 떠나사선을 넘나드는 동지가 되었다. 김창수는 청계동에서 스승과 동지를 얻었을 뿐 아니라,안태훈가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안중근의 아우 공근(恭根),조카 우생(偶生)은 임시정부 시절 백범의 측근이 되었으며,질녀 미생(美生)은 백범의 맏며느리가 되었다.또한 안태훈과의 화해,고능선의 교도로 백범은 양반이냐,상놈이냐 하는 계급의식 이상의 차원,즉 조국·민족문제에 눈뜨게 되었다.都珍淳 창원대 사학과 교수*安의사 5촌조카 民生씨 편지 발굴 안중근 의사의 집안은 우리 나라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가문으로 꼽힌다.그러면 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은 해방후 어떻게 살았을까.지난 8월말 학술행사 참석차 중국을 방문한 본사 김삼웅(金三雄)주필이 연변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입수한 두 통의 편지에 따르면,안 의사 집안의 후손들 가운데 더러는 해방된 조국에서 대접은 커녕 분단과 독재권력에 맞서 싸우다 ‘한많은 일생’을 마친 것으로드러났다. 김 주필이 중국서 입수한 편지는 지난 88년 한국에 거주하던 안 의사의 5촌조카인 민생(民生·생사불명)씨가 중국 연길(延吉)에 있던 사촌여동생 경옥(京玉)씨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경옥씨는 70세였다. 88년 1월 27일자 첫 편지에서 민생씨는 “지난 (87년)11월 15일 독립기념관장 춘생(椿生)형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너의 소식을 들었다”며 연락이 닿은 경위를 밝혔다.두 사람은 안 의사의 삼촌인 태건(泰健)씨의 손자녀들로 46년 7월 민생씨가 귀국하면서 서로 소식이 끊겼었다. 민생씨는 편지 서두에서 “해방후 형제·자매들이 귀국하였으나 모두 전재민(戰災民)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어 더러는 눈물을 흘리며 미국으로 떠나버렸다”며 해방후 집안 인척들의 이산을 안타까워 했다. 특히 민생씨는 “1961년 5월(‘5·16’을 지칭함) 조국의 평화통일 이념을주장했다는 이유로 나는 반국가범죄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경근(敬根) 당숙도 7년형을 선고받아 일제때 명근(明根) 당숙이 옥고를 치르시던 서대문형무소 특감(特監)8사(舍)에서 감옥살이를 했다”며 “해방,독립된 내조국에 돌아와서 또 감옥살이를 치러야 함으로써 우리 안씨 가문은 이역과조국에서 선후대(代)에 걸쳐 50여 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고 통탄해 했다. 안 의사 집안 가운데 안 의사의 사촌동생 경근과 5촌 조카인 민생씨는 해방후 유달리 험난한 삶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두 사람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민주구국동지회를 결성,반독재 투쟁에 앞장섰으며,장면(張勉) 정권 하에서는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준비위원회(민자통)에 참여하기도 했었다.5·16후 군사정권의 혁신세력 탄압 때 두 사람은 반국가범죄 혐의로 투옥됐으며 경근은 출옥 직후 작고했다. 민생씨의 경우는 ‘최악’이었다.1933년 만주에서 만주군에 붙잡혀 혹독한고문을 당한 후 도주하다가 다시 붙잡혀 양쪽 발끝을 작두로 절단당한 민생씨는 그 몸으로 감옥살이를 한 데다 68년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나,업친데 덮친 격으로 교통사고까지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고 말년에는 지팡이와 의족에 의존해야 했다. 편지를 쓸 때 이미 70고개를 넘긴 민생씨는 “헤어진 동료들과 형제들이 그리울 때면 저 머-ㄴ 북녁(만주땅을 지칭한 듯)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가슴 쥐고 나무밑헤 쓸어진다 혁명군/가슴속에 솟는 피는 푸른 풀에 절벅해’… 이 노래를 부른다”고 적은 뒤 “가마귀도 우름을 멈추고 바람만 스치고지나갈 무덤없는 그들의 핏자죽 위에 한 송이 들꽃이라도 받쳐들고 가서 명복을 빌어드릴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며 눈물지었다.현재 민생씨는 생사가불명이다.광복회·국가보훈처·안중근의사기념관은 물론 사촌형인 안춘생씨마저 민생씨의 생사를 모르고 있다. 5월 28일자 두번째 편지에서 민생씨는 “과거 우리들은 안중근의 집안이라는 이유 때문에 왜놈들에게 죽어야 했고,징역을 살아야 했는데 해방후에는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들의 피해는 여전했다”며 역대 권력자 가운데 친일경력자들의 면면을 거론하였다. 정병학(鄭秉學·79)안중근기념관장은 “안 의사 집안의 인사 가운데 민생씨처럼 해방후 불우한 삶을 보낸 인사가 적지않다”며 “이는 해방후 친일·독재정권이 들어선 것이 주원인”이라고 말했다.정운현기자* 안중근家의 독립운동가들 안중근 의사의 가문은 안 의사를 포함,모두 9명이 독립유공 공적으로 건국훈장을 받았으며 현재도 몇 명이 포상 심사중이다. 1909년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처단한 안 의사는 독립유공훈장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인 대한민국장(1등급)을 받았으며,안 의사의 두 친동생 정근(定根)·공근(恭根)은 각각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로로 독립장(3등급)을 받았다.또 사촌동생 가운데 명근(明根)은 ‘105인사건’으로,경근(敬根)은 임시정부 활동으로 각각 독립장을 받았다. 안 의사의 조카뻘인 ‘생(生)’자 항렬에서도 여러 명이 훈장을 받았다.대표적으로는 광복군 제2지대 구대장 출신으로 해방후 육사교장·국회의원·독립기념관장 등을 역임한 춘생(椿生·87·독립장)을 비롯해 춘생과 친형제로신민부에서 활동한 봉생(鳳生·애국장),그리고 안 의사의 첫째 동생인 정근의 장남으로 임정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원생(原生·애족장)과 둘째 동생공근의 차남낙생(樂生·애족장) 등이 있다. 이밖에도 납북이나 공적서류 미비 등으로 서훈이 보류된 인사도 여럿 있다. 우선 공근의 장남 우생(偶生)은 중경 임시정부 시절 임정 편집부 과원으로활동했으며 해방후에는 백범의 대외담당비서로 활동했으나 그 후 납북돼 포상이 보류돼있다.또 안 의사의 사촌 봉근(奉根)의 자제인 민생(民生)과 그의형 호생(鎬生) 역시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후 ‘반정부활동’을 했다는 이유나 서류미비 등으로 아직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정운현기자
  • 우리의 전통가락·춤사위 우즈베키스탄에 알린다

    사물놀이,승무,판소리 등 우리 전통가락과 춤이 우즈베키스탄을 찾는다.국내유일의 시립국악단인 목포시립국악단은 민족화합운동연합(대표의장 박영하)주최,문화관광부·대한매일 후원으로 오는 15·17일 양일간 타슈켄트 사일고흐광장과 파노라마극장에서 각각 공연을 갖는다. 이번 공연은 주(駐)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관이 ‘99한국문화주간’(13∼18일)행사중 하나로 마련한 것.10월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앞둔 시점이라 민간 문화사절로서의 역할도 기대된다.이 지역에는 스탈린 집권시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당한 한인 후예 23만명이 살고 있다.‘한국문화주간’은이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양국간 문화교류를 원할히 하자는 취지에서 지난해첫 행사를 치뤘다.민족화합운동연합은 두차례 공연외에 15일 고려인 거리행진에 동참하며,이에 앞서 11일에는 현지 고려인문화협회와 함께 지부결성식을 갖는다. 이 행사에는 금호현악4중주단,현지 국립오케스트라 연주 등의 공연과 함께한국 영화상영,전통의상 전시 등이 볼거리로 마련된다. 이순녀기자
  • 한글‘3·1선언서’첫 확인

    1919년 3·1의거 직후 대한국민의회가 배포한 한글판 ‘3·1 선언서’를 비롯해 최초의 임시정부격인 대한국민의회 청사,안중근 의사가‘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한 마을터 등 러시아 연해주지역 항일유적지와 사료가다량 발굴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경빈(尹慶彬)광복회장,박유철(朴維徹)독립기념관장,장치혁(張致赫)고려학술문화재단 설립자,박환(朴桓)수원대 교수,베르홀략 러시아 국립극동대 한국학 대학장 등으로 구성된 연해주지역 항일 독립운동전적지 조사단(단장 윤경빈)은 지난 8월 28∼31일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 일대의 항일유적 조사과정에서 이같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7일 밝혔다.조사단이 공개한 자료 가운데는 1919년 3·1의거 직후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가 작성,배포한 ‘선언서’ 한글판이 포함돼 있는데 한글판 실물이 확인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운현기자 j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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