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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와이 경영하는 日처럼… 한국도 연해주 진출해야”

    “하와이 경영하는 日처럼… 한국도 연해주 진출해야”

    러 영토지만 과거 우리 민족 주활동지 남한의 1.7배 면적 사실상 버려져 있어 국내 에너지 공급처 다변화 전략 활용 통일 이후 북한 성장 동력으로 필요해“우리 민족에게 ‘남하(南下)의 역사’는 늘 국토를 축소시키고 국력을 쇠하게 했습니다. 고구려가 국내성(중국 지린성 지안현)을 버리고 평양으로 내려와 요동 지역을 잃었고,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해 한강 주도권을 상실했죠. 반면 더 물러설 곳이 없던 신라는 죽기 살기로 북으로 올라가 삼국을 통일했어요. 21세기 대한민국도 좁은 남한 땅에서 벗어나 북한과 중국(간도), 러시아(연해주)를 생활권역으로 삼는 ‘북상(北上)의 역사’를 창조해야 합니다.” 제11대(1981~1985) 국회의원 출신으로 해외동포 연구에 매진해 온 이윤기(87) 해외한민족연구소장은 22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진출을 시대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소장이 1989년 6월 세운 해외한민족연구소는 해외동포 연구·지원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로 설립 30주년을 맞았다.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던 연해주는 면적이 16만 5000㎢로 남한(10만㎢)의 1.7배나 된다. 하지만 인구가 200만명 정도에 불과해 러시아 입장에서는 버려진 땅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기자가 찾아간 연해주 지역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1937년) 전까지 농사를 지었지만 현재는 경작할 이가 없어 대부분 황무지나 갈대밭이 돼 있었다. 이 소장은 “국내 에너지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통일 이후 북한을 먹여살리려면 연해주 땅이 꼭 필요하다. 러시아도 중국 농산물 수입을 줄이고 연해주 경제권을 활성화하기 위해 한국의 진출을 원한다”고 전했다. 그는 “미국 하와이는 이제 일본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계가 주지사에 당선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두 나라 국민은 조화롭게 협력하며 산다. 우리도 연해주를 그런 방식으로 경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1999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 기념탑을 세운 이 소장은 “상당수 언론에서 이 탑의 유래를 잘못 소개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 수유동 4·19 혁명 기념탑 등을 참고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태인 러시아 대한국민의회(1919년) 수립 80주년에 맞춰 세웠다. 가로·세로 각 1m, 높이 6m의 돌 3개로 이뤄졌는데, 이는 3이 ‘3·1운동’, ‘삼세판’ 등 우리 민족과 친근한 숫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소장은 정부가 연해주 내 한인 유적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한촌 기념탑을 세울 때 정부 관계자들이 ‘러시아가 좋아하지 않는데 이 일을 왜 하느냐’고 비난했다. 정부의 이런 인식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며 “늘 그랬지만 한국 정부가 연해주 일대 유적에 별 관심이 없어 화가 난다. 이제라도 중국·러시아에 파견하는 외교관은 깊은 역사지식과 투철한 민족의식을 가진 이들로 선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우수리스크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양반·평민 나뉘어 기호·서북파 대립… 내분 중심엔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임정, 양반·평민 나뉘어 기호·서북파 대립… 내분 중심엔 이승만

    [2부] 통합과 갈등:상하이 시기 ② 해체위기 몰린 임시정부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생겨난 세 개의 임시정부는 9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됐다. 통합 임정은 행정력과 외교력을 갖춰 독립운동의 중추 구실을 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초심을 잃고 내부 갈등과 분열에 휩싸였다. 한줌도 안 되는 임정 권력을 두고 지역과 이념으로 갈라서 싸웠다. 몇몇은 갑오개혁(1894~1895) 때 사라진 양반·상민까지 거론하며 전근대적 계급의식을 보여줬다. 이 시기 임정은 ‘난파선’ 그 자체였다. ●통합정부 초기 비행대 운영 등 역량 총 동원 지난달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찾아간 상하이 번화가 화이하이중루. 과거 프랑스 조계(외국인 자치구역)답게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서양식 건물이 남아 있어 젊은 세대와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 일대는 재개발이 마무리돼 도로나 건물이 정비됐지만 여전히 100여년 전 모습을 간직한 골목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바로 우리 역사학계에서 ‘푸칭리(보경리) 청사’로 부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다. 임정이 상하이를 떠나기 전인 1926~1932년 사용하던 곳으로 상하이 임정 전시관이 자리잡고 있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보경리 청사가 있는 저 구역은 상하이 안에서도 지가가 비싸기로 유명하지만 중국 정부가 임정 청사 보전을 위해 개발을 막고 있다”며 “최근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을 두고 양국 관계가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이들이 여기를 지키는 것은 항일투쟁의 역사를 공유하는 우리나라를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러시아 노령정부와 중국 상하이정부, 서울의 한성정부가 모인 ‘통합 임정’은 설립 초기부터 독립운동 주도권을 쥐고자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국내 곳곳에 지하 행정조직을 갖추기 위해 연통제를 실시하고 비밀 통신망을 확보하려고 교통국도 운영했다. 이들 조직을 활용해 국민들에게 공문을 전달하고 독립전쟁 인력과 자금도 모았다. 파리강화회의(1919~1920)에 외교력을 집중해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고,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해 무장투쟁을 독려했다. 기관지 독립신문(1919~1925)을 발간하고 한인교육기관인 인성학교(1917~1975)도 육성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치해 비행대를 운영했다.김희곤(65)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은 “이 정도면 초기 통합 임정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했다고 볼 수 있다”며 “특히 국가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다른 나라에 임정을 세워 외교 활동을 펼친 것은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이승만, 행정부·의회 떨어져 미국서 혼자 활동 하지만 일제가 임정의 국내 연결망을 차단하면서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본토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내분도 시작됐다. 가장 큰 문제는 리더 이승만(1875~1965)에게 있었다. 원래 상하이정부는 국무총리제였고, 통합 임정의 법통이 된 한성정부 역시 집정관과 국무총리가 중심인 집단지도체제였다. 이들은 정치권력이 한 사람에게 모이면 조선의 왕처럼 국가를 사유화할 수 있다고 여겨 대통령제에 부정적이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자신을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임정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대미 외교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고 미국인에게 친근한 표현을 쓴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판 세력은 “늘 1인자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상 자신이 최고지도자라는 점을 알리고 싶어 의도적으로 오역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승만의 거처도 논란이 됐다. 그는 “대미외교에 주력하겠다”며 임정 대통령 재임 기간 내내 미국에 머물렀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난 뒤인 1919년 8월 25일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자격으로 워싱턴DC에 대미외교단체인 구미위원부를 세워 그곳에 기거했다. 행정부와 의회가 중국에 있는데 대통령이 혼자 미국에서 활동해 제대로 소통이 될 리 없었다. 임정은 각료 인선이나 주요 정책 시행 때마다 대통령 부재로 어려움이 컸다.이승만은 미국 교민에게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1919년 12월~1921년 8월 지출액은 8만 9321달러였는데, 이 가운데 상하이 임정에 보낸 돈은 1만 6732달러로 전체 지출의 20%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대부분은 구미위원부 운영비와 이승만 자신의 활동비로 썼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임정은 구미위원부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그가 강하게 반발해 무산됐다.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는 그를 “독립정신이 불철저한 썩은 대가리”로, 내무총장 안창호(1878~1938)는 “정신병자”라고 비난했다.●이르쿠츠크파, 러 적군 부추겨 상하이파 독립군 학살 임정은 기호파(경기·충청·호남)와 서북파(평안·함경)로 양분돼 있었다. 기호파는 양반계급 출신이 주를 이뤘고 이승만을 지지했다. 서북파는 평민 출신이 많았고 안창호를 밀었다. 이들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기호파는 ‘변방 상놈들에게 임정 주도권을 내 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서북파 역시 ‘한양 양반네’들의 텃세에 지역주의 논리로 맞섰다.임시정부의 핵심 전략인 외교독립론도 성과가 없었다. 임정은 국제사회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나마 임정에 우호적인 곳이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이끄는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와 쑨원(1866~1925)이 세운 중국 광둥성 호법정부였다. 하지만 이들도 임정의 내분이 심해지자 더 이상 지원에 나서지 않았다. 1919년 임정 통합 작업을 주도한 러시아 출신 문창범(1870~1938)은 상하이정부와의 갈등으로 통합 임정에 합류하지 않고 연해주로 돌아갔다. 그는 같은 러시아 출신임에도 새 임정에 합류한 이동휘를 비난하며 갈라섰다. 이때부터 문창범 세력은 ‘이르쿠츠크파’, 이동휘 계열은 ‘상하이파’라고 불렸다. 양측 간 감정의 골이 깊어진 1921년 6월 28일,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 적군을 부추겨 연해주 알렉셰프스크(자유시)에 머물던 상하이파 한인 독립군 부대를 대거 학살했다. 일본과 맞서기 위해 모인 고려인들이 의견 차이를 참지 못하고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다.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평가되는 ‘자유시 참변’이다. 이후 독립군은 연해주 일대에서 자취를 감췄다.●재정난·파벌싸움으로 재중동포 기반 상실 독립운동사 거두인 고 조동걸(1932~2017) 국민대 명예교수는 “이때라도 임정이 군무부를 만주로 옮기고 교통국(비밀통신망)을 다시 설치해 재만동포를 추스르고 조직 정비에도 나섰어야 했다. 하지만 재정난과 내부 파벌싸움 등으로 기회를 놓쳐 국민적 지지 기반을 잃었다”고 비판했다.임정은 이승만이 대미외교를 위해 워싱턴회의에 참석하려다가 개최국인 미국으로부터 문전박대당한 1922년 4월부터 ‘식물 정부’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은 1925년 3월 이승만이 대통령에서 탄핵될 때까지 이어졌다. 임정 지사들은 자신들이 표방한 민주공화정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남자들을 모성으로 품고 묵묵히 뒷바라지해준 이가 있었다. 바로 ‘임시정부의 어머니’로 불리는 정정화(1900~1991)다. 임정이 27년간이나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헌신 덕분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1살이던 1910년 김가진(1846~1922)의 3남 의한(1900~1964)과 혼인했다.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던 김가진은 아들을 데리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듬해 정정화도 “연로하신 시아버지와 남편을 챙기겠다”며 상하이로 따라갔다. 그는 여성이어서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하다는 점을 십분 활용해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10여년간 독립운동 자금을 운반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에 검거돼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김구는 그를 가리켜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칭송했다.●임정 가재도구마다 손때… 요인들 임종 다 지켜 정정화는 상하이에 온 뒤부터 1946년 귀국할 때까지 거의 대부분 시간을 임정 요인과 가족을 돌보며 보냈다. 임정 인사 가운데 그가 지어준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고, 임정 가재도구 가운데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임정 독립운동가들의 임종도 다 지켰다. 그가 26년간의 임정 생활을 구술한 ‘장강일기’는 당시 독립운동 진영의 사정을 가장 잘 알려주는 사료로 평가된다. 그의 일대기는 연극 등으로도 만들어져 공연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귀국 뒤 그의 인생 행로는 순탄치 않았다. 남편 김의한은 한국전쟁 중 안재홍(1891~1965), 조소앙(1887~1958) 등과 함께 납북됐다. 남한에 남은 정정화는 부역죄로 투옥돼 고초를 치렀다. 이때 ‘옥중소감’이란 시로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남겼다. 나라를 되찾고도 여전히 남과 북으로 갈라져 싸움질만 하던 남자들에 대한 힐난이었으리라. “혁명 위해 살아온 반평생 길인데/오늘날 이 굴욕이 과연 그 보답인가/국토는 두 쪽 나고 사상은 갈렸으니/옥과 돌이 서로 섞여 제가 옳다 나서는구나.” 상하이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하나로 뭉친 노령·상하이·한성정부…‘미완의 통합임정’ 세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하나로 뭉친 노령·상하이·한성정부…‘미완의 통합임정’ 세우다

    1919년 3·1운동 뒤로 국내외 곳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는 독립전쟁을 치르기 좋은 위치였지만 일본의 공세에 노출돼 있었다. 중국의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정부)는 정치 활동이 자유로웠지만 국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성임시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잘 지켜 정통성이 컸지만 조선총독부가 자리잡은 서울에 머문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세 정부는 각자의 처지를 인정하고 힘을 모으고자 통합에 나섰다.●상하이정부·노령정부 통합 앞서 갈등 표출 지난달 중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차 찾아간 상하이 상업지역 화이하이중루. 10·20세대가 주로 찾는 거리 한 모퉁이에 글로벌 의류 브랜드 매장이 입점한 6층짜리 건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 ‘하비로 청사’라고 부르는 곳으로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상하이정부가 그해 8∼10월 사용했다. 당시 임정이 청사로 쓰던 2층 양옥은 1920~1930년대 철거됐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수개월간의 논의 끝에 1919년 9월 11일 개헌을 통해 세 임시정부의 통합을 여기서 결정해 선언했을 것이다.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고 전했다. 상하이정부가 수립된 직후부터 국내외에서는 세 임정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한성·상하이정부는 정부 수립을 전후해 양측 인사들이 꾸준히 교류한 터라 통합에 거부감이 적었다. 한성정부 대표 자격으로 상하이정부 안창호(1878~1938)와 협상을 벌인 이규갑(1887~1970)의 증언을 보면 당시 양측의 우호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도산과 두 정부의 통합을 논의했다. 나는 상하이정부가 먼저 생겼으니 우리 한성정부가 합류하는 것이 맞다고 양보했다. 하지만 도산은 한성정부야말로 국내 13도 대표가 총의를 모아 만든 정부이니 당연히 자신들이 속한 상하이정부를 해체하고 한성정부의 법통에 순응해야 한다며 (내 제안을) 사양했다.”●안창호 “해산 후 한성 밑으로 모이자” 제안 사실상 상하이정부와 노령정부 간 통합 논의만 남았다. 노령정부가 먼저 나섰다. 1919년 4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의를 열어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상하이 임시의정원을 합치고 러시아에 행정부를 두자는 의견을 정했다. 노령정부는 5월 특사 원세훈(1887~1959)을 중국에 보내 이를 제안했다. 상하이정부에서도 안창호가 본격적인 통합 협상에 나섰다. 6월 17일 상하이정부 국무원(행정부)은 노령정부와의 협의 내용을 반영한 의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두되, 새 의회는 러시아로 이전이 가능하도록 여지를 뒀다. 하지만 의정원은 상하이에 계속 남고 싶었던 탓인지 안건을 거부하고 국무원에 돌려보냈다.●노령정부 불만 터져 불완전한 결합 이뤄 협상이 난항에 빠지자 안창호는 새 아이디어를 냈다. 상하이·노령정부를 모두 해산하고 한성정부 밑으로 다시 모이자는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제3지대 창당론’이 될 것 같다. 단, 통합 정부는 ‘한성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부르고, 상하이에 남기로 했다. ●상하이정부, 한성을 ‘우회 상장’ 통로로 여겨 노령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8월 30일 총회를 열고 의회를 해산했다. 그런데 상하이에서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애초 해산하기로 한 의회와 행정부를 그대로 둔 것이다. 정부 조직만 한성정부 형태로 바꿔놨다. 비유컨대 건설업자가 기존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기로 약속한 뒤, 실제로는 건물 도면에 맞춰 리모델링만 한 것이다. 당시 안창호는 “한성정부를 (실제가 아닌) 정신적으로 승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정통성은 있지만 실체가 없던 한성정부를 동등한 통합대상으로 보지 않고 서울에서 생겨난 정부라는 법통을 흡수하려는 ‘우회 상장’ 통로로 여긴 듯 하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상하이정부가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지키려다가 생겨난 일”이라고 분석했다. 통합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로 한 문창범(1870~1938)과 이동휘(1873~1935)는 “상하이가 우릴 속였다”며 취임을 거부했다. 문창범은 연해주로 돌아가 1920년 2월 대한국민의회 재건을 선언했다. 통합 임정으로서는 미래 정부 활동 자금줄이자 무장 투쟁 동력을 잃어버렸다. 여기에 신채호(1880~1936)와 박용만(1881~1928)도 새 내각 불참을 선언했다. 임정 통합 중심축 이동휘, 독립자금 좌파세력 유용으로 치명타이승만(1875~1965)이 1919년 2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에게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통치할 수 있게 주선해 달라”고 청원한 것을 문제 삼았다. 통합 임정이 시작도 전에 분열 위기를 맞았다. 다행히 이동휘는 안창호의 간곡한 설득으로 11월 3일 통합 임정 국무총리에 복귀했다. 내무총장 이동녕(1869~1940)과 재무총장 이시영(1868~1953), 법무총장 신규식(1880~1922) 등도 함께 취임식을 가졌다. 이렇게 세 임정은 불완전하게나마 통합정부로 다시 태어났다. 일각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을 상하이정부가 생겨난 4월 11일이 아니라 세 임정을 통합한 9월 11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상하이정부가 노령정부를 모두 끌어안아 완전체가 됐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통합 임정에 힘 실어 준 아전의 아들 이동휘 “그는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으며 가슴이 떡 벌어졌다. 군인답게 콧수염을 길러 마치 프랑스 원수 같았다. 민족운동의 거성인 동시에 저명한 혁명가였다. 열렬한 행동주의자였으며 불덩이 같은 신념을 지녔다. 천군만마를 노호할 듯한 기개와 위엄을 갖춘 당당한 거인이었다.” ‘아리랑’의 저자 헬렌 포스터 스노(1907~1997)가 이동휘에 대해 내린 평가다. 그는 ‘반쪽짜리’로 전락할 뻔한 통합 임정에 극적으로 합류해 독립운동 중심체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러시아 소비에트 최고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에게서 받은 통합 임정 운영자금을 자파(自派) 유지비로 돌려써 독립운동 분열도 초래했다. 187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아전 이승교의 아들로 태어나 18살 때 통인(군수의 시중을 드는 하급관리)이 됐다. 23살 때 탐관오리였던 단천군수 홍종후가 잔칫날 어린 기생을 무릎 위에 앉혀 추행하자 이를 참지 못하고 술상 옆에 놓인 화로를 군수에게 끼얹었다고 한다. 불의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에 나서는 그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이동휘는 서울로 도피했다가 함경도 명천 출신 관료 이용익의 도움으로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해 군 장교가 됐다. 이후 일제가 그의 애국심을 우려해 수차례 체포와 수감을 반복하자 1913년 북간도로 탈출했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해 1914년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했다.당시 일본은 러시아 영토를 탐내 시베리아에 주둔해 있었다. 이동휘는 러시아와 손잡고 일제와의 전면전을 벌여 단박에 조선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일본군과 맞서던 러시아 볼세비키(사회주의자)들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이 되는 바람에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그러자 북간도로 넘어가 중국과 연합해 대일 독립전쟁을 치르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중국도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중국에 제출한 권익 확대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고 한편이 돼 이 역시 무산됐다. 1918년 5월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세우고 기관지를 발행했다. 군사학교 설립과 한인적위대 조직에도 나섰다. 애초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3·1운동 민족대표들과 임시정부 설립자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국의 독립에 관심을 가질 리 없고 조선 지식인들이 기대를 건 파리강화회의 역시 식민지 해방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동휘는 “상하이 측과 정치 싸움을 벌여선 대국(일본)을 파괴할 수 없다”며 통합 임정에 뛰어들었다. 그의 결단 덕분에 통합 임정은 ‘이승만(한성)-안창호(상하이)-이동휘(노령)’라는 3대 축을 갖춰 대외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독립자금 전용 탓 신뢰 잃어… 국제사회도 외면 그는 씻기 힘든 과오도 남겼다. 1920년 1월 통합 임정은 이동휘의 측근 한형권(생몰연대 미상)을 러시아 모스크바에 보냈다. 레닌 정부와 접촉해 정식국가로 승인받고 독립 자금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결국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받기로 하고 1차분 60만 루블을 얻어냈다. 지폐의 양이 많아 20만 루블은 모스크바에 두고 일단 40만 루블을 김립(1880~1922)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그는 이 돈을 통합 임정에 전달하지 않고 한인사회당 등 좌파 운동세력에게 나눠줬다. 일부는 개인 용도로도 썼다. 이동휘는 소련 자금 배달사고의 배후로 지목돼 입지가 좁아졌다. 1921년 1월 총리에서 물러났다. 이 일로 사회주의 계열은 신뢰를 잃고 독립운동 주류에서 배제됐다. 통합 임정도 국제적으로 평판이 나빠져 운영 자금 마련이 더 힘들어졌다. 이후 이동휘는 연해주 일대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하다가 1935년 1월 31일 62세로 숨을 거뒀다. 서울·상하이·블라디보스토크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해방구 佛조계지서 태동한 상하이 정부… 대한민국 국호 첫 명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해방구 佛조계지서 태동한 상하이 정부… 대한민국 국호 첫 명시

    1부 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②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중국 상하이는 명나라 말기부터 성장해 1880년대에는 동북아시아의 최대 상업 도시가 됐다. 1910년 대한제국 국권을 빼앗긴 뒤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목받았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이 독자적 주권을 행사하는 ‘조계’(외국인 자치구역)를 설치해 일본을 비롯한 다른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간섭을 피할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는 외국인에게도 건국이념인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보장해 한국인에게는 말 그대로 ‘해방구’였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 민족의 두 번째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태동했다.●“첫 번째 ‘임정 터’ 못 찾아…대한민국의 숙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를 위해 지난달 중순 찾아간 상하이 최대 번화가 화이하이중루 일대. 사람과 차들로 거리가 넘쳐나고 전 세계 패션 브랜드가 건물마다 즐비했다. ‘자본주의 최전선’인 이곳이 정말 사회주의 국가의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기자와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고층빌딩이 가득 찬 서금이로(옛 김신부로) 지역을 바라보며 “100년 전 이곳 어딘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 정부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상하이 임정 기념관은 ‘보경리 청사’로 1926~1932년에 썼던 곳이다. 이 작가는 “최근 중국인 학자가 첫 번째 임정 터를 찾았다고 간략히 발표했지만 이에 대한 고증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시원(始原)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이곳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1919년 3월 17일 러시아 고려인들이 프리모르스키(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를 선포했다는 소식이 퍼졌다. 때마침 서울에서도 임정 수립을 논의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렸다. 상하이 독립운동가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같은 달 26일 프랑스 조계의 한 예배당에 모였다. “조선총독부에 맞서 서둘러 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의견과 “대표성을 갖기 위해서라도 국내 지도자들의 뜻을 들어 보고 정하자”는 반론이 맞섰다. 하지만 3·1운동 직후부터 중국과 러시아에서 거물급 인사들이 상하이로 모여들고 있어 정부 수립을 더는 늦추기 어려웠다. 앞선 노령정부에다가 서울에 임정(한성정부)이 또 생기면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놓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4월 10일 이동녕(1869~1940)과 이광수(1892~1950), 여운형(1886~1947) 등은 우리 역사 최초의 의회인 임시의정원을 꾸리고 첫 번째 회의를 가졌다. 밤을 새워 토의하던 중 신석우(1894∼1953)가 “임시정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고종 황제가 선포한 대한제국에서 ‘대한’을 따오고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에서 ‘민국’을 가져온 것이다. 여운형이 “이 나라가 ‘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망했는데 또다시 ‘대한’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묻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 보자”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 의원 다수가 이에 공감해 상하이정부의 이름이 정해졌다. 다음날 이들은 국무총리에 이승만(1875~1965)을 추대하고 내무 안창호(1878~1938), 재무 최재형(1860~1920) 등 6부 총장(장관)을 임명했다. 우리가 국가기념일로 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4월 11일)은 여기서 유래됐다.●왕 아닌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정 첫 공식화 그렇다면 두 번째 임정은 왜 상하이에 세워졌을까. 독립운동가 양우조(1897~1964)·최선화(1911~2003) 부부의 임정 기록을 외손녀 김현주씨가 정리한 ‘제시의 일기’(1999년)를 보면 여기가 왜 임정의 적지인지 잘 묘사돼 있다. “중일전쟁(1937~1945) 전 상하이는 서양 문물의 향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자기 나라와 똑같이 살 수 있도록 조계지로 분할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조계지가 시설이 가장 좋았다. 프랑스는 자유를 사랑하는 나라답게 망명객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조선에서 온 이들이 다른 조계지에 숨으면 곧 붙들려 갔지만 프랑스 조계지에서는 안전했다. 설사 끌려간다고 해도 프랑스 정부가 항의하면 다시 풀려나올 수 있었다.”(1946년 2월 21일) 상하이정부는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노령·한성정부와 달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명시하고 한국사 최초로 민주공화정 국가 건설을 공식화한 것이다. 새 나라가 대한제국(조선)을 계승하면서도 국가의 주인은 왕이 아니라 인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3·1운동 전까지 이어져 오던 복벽주의(나라를 되찾아 왕을 다시 세우겠다는 주장)를 완전히 단절시킨 것이다. 다만 상하이정부가 추구한 ‘외교독립론’은 훗날 임정이 끊임없이 갈등과 내분에 빠지는 단초가 됐다. 외교적 방법론은 당시 우리 민족의 현실적 역량을 반영한 전략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이기든 지든) 일본과의 전쟁을 수행하지 않고는 나라를 되찾을 수 없다고 믿는 무장투쟁론자들을 설득하진 못했다.●쑨원의 부인 추모 능원에 신규식 등 만국공묘 상하이지하철 10호선 쑹위안루역 2번 출구로 나오니 말끔하게 정돈된 공원이 있었다. ‘중화민국의 아버지’ 쑨원(1866~1925)의 두 번째 부인이자 ‘중국의 국모’로 불리는 쑹칭링(1893~1981)을 추모하는 곳이다. 공원 한쪽에 외국인 묘지를 모아 놓은 ‘만국공묘’가 나타났다. 묘비를 하나씩 더듬다가 낯선 한국인 이름 하나를 찾아냈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기획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계자’로 인정받는 신규식(1880~1922)이었다. 나라를 위해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만큼 불 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특히 한쪽 눈을 가린 채 카이저 수염을 기른 외모는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하지만 그가 초기 임정을 상하이에 뿌리내리게 하는데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충북 청원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신채호(1880~1936), 신석우와 함께 ‘산동삼재’(산동신씨 가문의 3대 수재)로 불렸다. 대한제국에서 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첫 번째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가족에게 발견돼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눈 시력을 잃었다. 지인들이 ‘애꾸눈’이라고 놀리자 신규식은 스스로를 ‘예관’(睨觀·한쪽 눈으로 흘겨봄)으로 불렀다.●신해혁명 경험삼아 민주공화정 개념 전파 1910년 8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두 번째로 집에서 독을 마셨다. 때마침 대종교 종사 나철(1863~1916)의 눈에 띄어 다시 한 번 구조됐다. 마음을 다잡은 그는 이듬해 상하이로 망명했다. 중국의 공화주의 노력을 한반도에 적용하겠다는 생각에 쑨원과 천두슈(1879~1942), 천치메이(1878~1916) 등 혁명가 그룹과 친분을 맺었다.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1905~1912·중국 국민당의 전신)에 가입하고 청 왕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에도 직접 참여했다. 1912년 국내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고자 ‘동제사’를 조직했다. 총재 박은식(1859~1925)을 비롯해 김규식(1881~1950), 신채호, 조소앙(1887~1958) 등 동제사 출신은 후일 임정의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다. 이들은 1917년 7월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당시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2년 뒤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촉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두 번째 임정이 상하이에 자리잡은 건 신규식의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김주용(53) 원광대 교수는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 국호를 제안한 신석우가 바로 신규식의 조카”라며 “신규식은 자신의 신해혁명 경험을 독립지사들에게 소개해 대한민국의 토대가 된 민주공화정 개념을 설파했다”고 설명했다. 1921년 11월 쑨원이 이끄는 중국국민당이 베이징 군벌정부에 대항해 광둥에 호법정부를 세웠다. 신규식은 국무총리·외무총장 자격으로 그를 찾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국가로 승인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쑨원은 혁명동지 신규식을 극진히 예우했다. 호법정부의 정치·재정 상황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그의 부탁을 일부 받아들였다. 이는 국제적으로 정식 주권기구로 인정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던 임정이 국민당의 후원을 받아 다소나마 활로를 찾는 계기가 됐다. ●해외서 문전박대 뒤 임정 외교독립론 도마에 1922년 대통령 이승만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워싱턴회의에 갔다가 개최국인 미국으로부터 문전박대 당해 쫓겨났다. 임정의 외교독립론이 논란이 됐다. 신규식은 이런 임정의 처지를 비관해 25일간 단식하다가 같은 해 9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일각에서는 그가 1921년 쑨원을 만났을 때 황제에게 예를 표하는 ‘만세’를 외친 것을 두고 사대적 자세를 지적한다. 하지만 대의명분을 누구보다 중시하던 신규식의 평소 성격에 비춰 볼 때 그런 굴욕을 참아내며 쑨원을 대한 건 오로지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으리라. 상하이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세계사 유례없는 민중 주도 임정… 3·1운동 뒤 연해주 첫 ‘깃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세계사 유례없는 민중 주도 임정… 3·1운동 뒤 연해주 첫 ‘깃발’

    <1부>새 역사 임시정부의 형성 ①러시아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우리는 헌법 전문을 통해 우리나라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배웠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과정을 통해 해방을 맞게 됐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대한민국 임정은 1919년 여러 정부가 하나로 합쳐져 세워진 뒤 끝없는 갈등과 내분으로 수차례 해체 위기를 맞았다. ‘식물정부’로 전락해 명맥만 유지하던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임정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국가 수립을 선포하고 27년간 외교 노력과 전쟁을 병행한 독립 운동의 총괄체였다. 왕족이나 정부 계승자도 아닌 이들이 민중의 뜻으로 임시정부를 세워 30년 가까이 제국주의 국가와 투쟁한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서울신문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에 있는 임시정부 이동 경로를 추적하며 임정의 역사와 인물, 이슈 등을 망라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을 12회에 걸쳐 싣는다. 이번 역사 탐구에는 김원봉(1898~1958년)과 김산(1905∼1938년), 조봉암(1898∼1959년) 평전을 쓴 이원규(72) 작가와 독립운동가 김연방(1881~1919년)의 증손자 김주용(53)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가 함께했다.●신한촌碑, 고려인 독립운동 중심지 일깨워 지난달 초 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강추위가 몰려왔다. 서울보다 기온이 10도 가까이 낮았다. 기자를 안내한 교포2세 권세라(27) 가이드는 “그래도 여기는 연해주 다른 도시보다는 따뜻한 편”이라며 “러시아에는 ‘40도 이하 술은 술이 아니다. (영하) 40도가 안 되는 추위는 추위가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며 웃었다. 공항에서 남부 루스키섬 쪽으로 50여분쯤 달리자 시내 외곽 라게르산 비탈에 도착했다. 검은색 철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에 직사각형 모양 5m짜리 기둥 3개와 네모난 돌 8개가 놓여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이 묶어 놓은 태극기와 노란 리본도 눈에 들어왔다. 신한촌 기념탑이었다. 3개의 기둥은 우리 민족과 친근한 숫자인 3을 형상화한 것이다. 8개의 돌은 조선 8도를 상징한다.1911년 러시아 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명분 삼아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있던 고려인 마을 구(舊)개척리를 철거했다. 한인들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한국’이라는 뜻의 신한촌을 세웠다. 1919년 3월 17일 우리 민족이 세운 첫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한때 1만명이 넘는 고려인이 여기에 살았지만 1937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8~1953년)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마을을 모두 파괴했다. 지금은 기념비만이 이곳이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의 구심지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3·1운동은 세계 각지에 임시정부 설립을 촉발했다. 독립선언서 첫 구절에 “이제 우리는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다”고 밝히면서 여기저기서 뜻있는 이들이 주권 기관을 세워 이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제대로 된 조직을 갖춘 곳은 러시아 대한국민의회(노령정부)와 중국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 정부), 서울의 한성 임시정부 등 세 곳이었다.●전로한족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1917년 3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정부 수립을 위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300년 넘게 러시아를 지배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다.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년)은 열강의 제국주의 책동을 비난하며 “약소 민족의 자결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1차 세계대전(1914~1918년)에서 일본이 패배하면 우리도 반제국주의 흐름에 힘입어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같은 해 5월 문창범(1870~1938년)과 최재형(1860~1920년)이 중심이 돼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 우수리스크)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를 열었다. 러시아 전역의 한인을 대표하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라는 의미다.이들은 1919년 3·1운동을 준비하면서 2월 25일 중국 간도 지역 동포들과 함께 총회를 열었다. 이때 이름을 ‘대한국민의회’로 바꾸고 연해주와 간도를 기반으로 한 임시정부를 선언했다. 의회 의장에 문창범을 선출하고 외교부장 최재형, 군무총장 리동휘(1873~1935년) 등을 임명했다. 공식 선포는 20일쯤 뒤인 3월 17일에 이뤄졌는데, 이는 3·1운동과 궤를 맞추려는 의도였다. 대한국민의회는 ‘노서아(러시아) 영토에 있던 임시정부’라는 뜻으로 ‘노령정부’라고도 한다.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국가 기능을 한 곳에 모아 집행하는 소비에트제를 채택했다. 단시일 내에 일본에 대한 무장투쟁에 나서고자 정부 조직 과정을 다수 생략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대한국민의회는 정부 선포 직후 각국 영사관에 전문을 보내 일본 제국주의와의 혈전(血戰)을 선언했다. 간도 뤄쯔거우(나자구)에 군사 훈련소도 마련했다. 신한촌 옛터에서 이원규 작가는 “전 세계 임시정부의 최종 목표는 독립 전쟁으로 영토를 되찾아 새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노령정부는 이런 임정의 본령을 구현할 최적지에 있었다”고 평했다.다만 이 정부는 상하이·한성 정부와 달리 별도의 헌법을 발표하지 않아 조직 구성이 체계적이지 못했다. 고려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유산계급인 원호인(러시아 귀화자)들이 무산계급인 여호인(미귀화자)들을 차별해 한인 사회가 둘로 쪼개지는 발단이 되기도 했다.●러·韓 어느 곳에도 최재형 추모비 하나 없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00㎞가량 떨어진 우수리스크. 발해성 등 2개의 성터가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쌍성자’로 부르던 곳이다. 민가가 즐비한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가자 단정히 정돈된 최재형 생가가 나타났다. 추운 날씨에도 러시아 인부들이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하느라 내부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집은 그가 1919년부터 이듬해 4월까지 살던 곳이다. 권 가이드는 “최재형을 빼놓고 러시아 한인 독립운동사를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존재감은 독보적이다. 그럼에도 아직 한국이나 러시아 어느 곳에도 추모비 하나 세워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전했다.노령정부 태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을 들자면 단연 ‘연해주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최재형이 꼽힌다. 안중근(1879~1910년)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1841~1909년)를 저격할 수 있게 8연발 브라우닝식 권총을 건넨 인물이다.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조선 최초의 근대인’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재조명될 가치가 충분하다.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였던 아버지 최형백과 기생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9살이던 1869년 가족들이 배고픔과 학정을 이기지 못하고 크라스키노(연추)의 한인마을 ‘지신허’로 이주했다. 11살 때 “밥만 축낸다”는 형수의 구박에 집을 뛰쳐나왔다가 포시에트라는 작은 항구에서 러시아 선장 부부를 만났다. 이들은 최재형을 친아들처럼 보살폈다. 그는 이 부부와 전 세계를 항해하며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서양문명을 체험했다.187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최재형은 군수업자로 변신해 성공을 거뒀다. 당시 이 지역 노동자 한 사람의 급여가 월 10~15루블 정도였는데, 그는 포시에트항을 근거지로 여러 사업을 벌여 매달 1만루블 이상을 벌었다. 거부가 되자 그는 자신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고국을 돕고자 발벗고 나섰다. 1909년 10월 안 의사의 하얼빈역 저격을 도운 것이 대표적이다. 최재형의 막내딸인 엘리자베트 표트로브나의 회고록에는 “안중근은 아버지와 함께 거사를 준비했고 실행 전 우리 집에 기거하며 사격 연습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연해주 한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페치카’(러시아식 난로)라는 애칭도 얻었다.●전 재산 독립에 쓰고… 日 헌병대에 총살당해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일본은 1920년 4월 러시아혁명 세력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상륙해 대대적인 체포·학살에 나섰다. 조선 독립에 전 재산을 쓰고 어렵게 살던 최재형은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의 자택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4월 5일 처형됐다. 63세였다. 당시 막내딸이 아버지에게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여러 차례 애원했지만 가족들이 고초를 겪을까봐 담담히 앞문으로 나갔다고 한다. 죽음을 맞으러 발걸음을 내딛던 그의 마음은 얼마나 무겁고 외로웠을까. 블라디보스토크·바라바시·우수리스크·크라스키노(러시아)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2018 SBS 연예대상’ 이승기 대상 “집사부일체 사부님들 담겨있는 상”

    ‘2018 SBS 연예대상’ 이승기 대상 “집사부일체 사부님들 담겨있는 상”

    ‘2018 SBS 연예대상’에서 가수 겸 배우 이승기(31)가 강력한 대상 후보로 거론됐던 외식사업가 백종원(52)을 꺾고 대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승기는 28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SBS 프리즘타워에서 열린 ‘2018 SBS 연예대상’에서 대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무대에 오른 이승기는 “굉장히 복잡한 감정이 지나가는 것 같다. 먼저, 이 상은 제 능력으로 받는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다”며 “정말 제 능력이 아니라 ‘집사부일체’에 출연해주셨던 최고의 사부님들, 그분들의 연륜, 삶의 철학, 신념 등 무게감이 담겨있는 상인 것 같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군 전역 후 2개월 만인 지난해 12월 31일 예능 프로그램 ‘집사부일체’로 에 복귀한 이승기는 전역 후 첫 프로그램으로 대상을 거머쥐었다. ‘집사부일체’ 멤버인 배우 이상윤(37), 그룹 비투비 육성재(23), 개그맨 양세형(33)은 이날 각각 신인상, 우수상, 최우수상을 받으며 전원이 수상의 기쁨을 누렸다. ‘집사부일체’ 제작진과 함께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동료들, 소속사, 팬들 등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 이승기는 마지막으로 “去去去中知(거거거중지) 行行行裏覺(행행행리각)라는 말이 떠오른다. 집사부일체를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우려가 있었다. 내년 2019년에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훌륭한 예능 선배님들이 도전했던 것처럼 저도 그 길을 따라서 안전한 길을 답습하지 않고 실패하더라도 뚜벅뚜벅 제 길을 가겠다”고 다짐을 전했다. <이하 2018 SBS 연예대상 수상 부문> ▶ 대상 : 이승기(집사부일체) ▶ 프로듀서상 : 김종국(런닝맨, 미운 우리 새끼) ▶ 최우수상(버라이어티) : 전소민(런닝맨) ▶ 최우수상(쇼·토크) : 양세형(가로채널 등) ▶ 우수상(버라이어티) : 조보아(골목식당), 육성재(집사부일체) ▶ 우수상(쇼·토크) : 소이현(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 이상민(더 팬, 미운 우리 새끼, 무확행) ▶ 인기상 : 이광수(런닝맨) ▶ 신 스틸러상 : 승리(가로채널, 미운 우리 새끼) ▶ 베스트 팀워크상 : 런닝맨 ▶ 베스트 커플상 : 김종국, 홍진영 ▶ 올해의 프로그램상 : 미운 우리 새끼 ▶ 베스트 패밀리상 : 인교진, 소이현(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 ▶ 베스트 챌린저상 : 전혜빈(정글의 법칙) ▶ 방송작가상 : 유현수(라디오-최화정의 파워타임), 이윤주(동물농장), 김명정(집사부일체) ▶ 올해의 핫 스타상 : 배정남(미운 우리 새끼) ▶ 베스트 MC상 : 김성주(백종원의 골목식당), 김숙(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 ▶ 베스트 엔터테이너상 : 임원희(미운 우리 새끼), 구본승(불타는 청춘) ▶ 모바일 아이콘상 : 제아, 치타(모비딕 쎈마이웨이) ▶ 라디오 DJ상 : 김창열(올드스쿨), 붐(붐붐파워) ▶ 신인상 : 이상윤(집사부일체), 강경헌(불타는 청춘)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이번 주말 전국 한파특보…“서울 체감온도 영하 20도”

    이번 주말 전국 한파특보…“서울 체감온도 영하 20도”

    한 해의 마지막 주말인 26일부터 30일 체감온도가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기상청은 26일 “강한 한기를 동반한 대륙고기압이 남하해 27일부터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져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겠다. 26일 밤 11시를 기해 중부지방과 일부 남부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한파특보가 발효돼 이번 주말까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예보했다. 28일에는 아침 최저기온이 서울 영하 13도, 철원 영하 19도 등 서울, 경기와 강원영서를 중심으로 기온이 매우 낮아지면서 체감온도는 영하 20도 이하로 낮아질 전망이다. 이번 추위는 연해주에 위치한 ‘절리 저기압’이 강하게 회전하면서 몽골 북쪽의 찬 공기(5㎞ 상공 기준 -30도 이하)가 남하하는 데 따른 것으로,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찬 공기가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고 강도도 강해지면서 30일 이후에도 한파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기상청은 전망했다. 기상청은 이날 오후 4시 강원도 산지·춘천·화천·철원, 경기도 가평·파주·양주 등에 한파경보를, 서울, 세종, 대전, 충북·충남·전북 일부 지역에 한파주의보를 발표했다. 한파주의보는 아침 최저기온이 전날보다 10도 이상 내려가 3도 이하이고 평년값(1981∼2010년 평균)보다 3도 이상 낮을 것으로 전망되거나 아침 최저기온이 이틀 이상 -12도 이하로 지속할 것으로 보일 때 발효된다. 한파경보는 아침 최저기온이 -15도 이상 내려가 3도 이하이고 평년값보다 3도 이상 낮을 것으로 보이거나 아침 최저기온이 이틀 이상 -15도 이하로 지속할 것으로 전망될 때 발효된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예멘 난민 뉴스 보면서 한국 사회가 우리 잊었나 해서 서운했습니다”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예멘 난민 뉴스 보면서 한국 사회가 우리 잊었나 해서 서운했습니다”

    노송달 초대 대한고려인협회장이 말하는 ‘한국과 난민’“한국에서 최근 난민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우리들은 기분이 묘했습니다. 한편으론 잊혔다는 억울함도 들고, 난민 문제를 이슈화시킨 단체들이 우리 문제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이 아니냐는 복잡한 심경입니다. 우리들 문제도 신경을 많이 써줬으면 합니다.” 지난 12일 발족한 ‘대한고려인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한 노 알렉산드르(46·한국 이름 노송달)는 지난 2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주도에서 예멘인 수백 명의 난민 문제를 뉴스로 볼 때 우리 입장은 착잡하다”고 말했다. 그가 대한고려인협회의 사무실로 사용하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있는 시민단체 ‘너머’로 찾아갔다. 고려인협회는 러시아를 비롯해 구소련에서 떨어져 나온 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의 나라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동포 8만여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대다수는 한국에서 소위 ‘3D업종’에 종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를 만나러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그가 ‘우리’와 약간 다르게 생겼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만나보니 길거리에서 마주친다면 그가 ‘고려인’이라고 알아챌 방도가 없었다. 한국말로도 인터뷰에 잘 응했다. 너무나 똑같은 ‘우리의 모습’에 놀랐다.“우리 할아버지들, 타국서 독립운동한 애국자우리는 그런 난민의 후손, 푸대접 착잡한 심경” “우리 할아버지들, 구한말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소련이나 중국에 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 조상은 그곳에 직접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시거나, 그렇지 못하면 생업에 종사하면서 적은 돈이지만 몰래몰래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애국자들입니다.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이중으로 경험한 것이지요. 우리는 그런 분들의 후손입니다. 말 그대로 할아버지의 나라 조국(祖國)에서는 우리들은 제쳐놓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나라 사람을 ‘받아들여야 하네’, ‘마네’ 하는 뉴스를 보면 좀 억울한 심정, 착잡한 심경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을 받아들이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가까이 있었던 우리 동포 문제가 더 시급한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노 회장은 비자 문제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 고려인들에게 나오는 F4비자(외국 국적 재외동포 비자)가 차별적이라고 느낍니다. 예컨대 러시아 국적의 동포는 F4비자는 신청만 하면 발급돼 나오는데, 중앙아시아 같은 경우 F4비자 신청 조건이 대졸입니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나 구소련 국가로 다 같잖아요. 또 있습니다. H2비자(취업비자)는 중국 동포에겐 5세대까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만, 고려인들에겐 3세대까지밖에 안 나옵니다. 고려인 3세대의 자녀들은 만 19세가 되면 외국인으로 분류되어서 출국해야 합니다. 생이별이지요. 이것도 차별이고, 조국이 우리를 서운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해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고려인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빨리 처리되어 이런 차별이 사라지길 바랄 뿐입니다.” ‘영주권은 어떠냐’ 하고 물었더니 노 회장은 영주권(F5비자)에는 ‘외국인 등록증’의 글귀도 거슬린다고 한다. “F4비자는 ‘외국국적 재외동포’라는 핏줄 인연이 있지만 영주권은 그냥 우리를 외국인 취급합니다. 지금 제주도에서 이슈화되고 있는 예멘 난민과 우리가 똑같은 거죠. 우리 대우를 잘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신분상 안정적으로 살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는 불만을 우회해서 토로했다.“고려인 비자 차별하는 조국에 서운특별 대우 아냐…안정적 생활 바람” 대한고려인협회 초대 회장으로서의 각오를 물었다. “한국에서 활동이 주요 목적입니다. 여기 안산의 고려인문화센터와 같이 고려인의 정착과 교육을 지원하는 센터를 청주와 화성 등에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또 하나는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을 추진할 작정입니다. 전해철 의원이 낸 특별법 처리에 힘을 보태겠다는 것, 이 세 가지가 제 목표입니다.” 그에게 한국 이름을 물으니 “노송달”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가슴 찡한 사연을 들려줬다. “제가 원래 태어날 때 성이 뭐로 기록됐느냐 하면 ‘노가이’였습니다. 성명은 ‘노가이 알렉산드르’. 옛날에 할아버지가 러시아 당국에 등록할 때 성을 물어보니 ‘노가입니다’로 답했는데, 러시아 직원이 ‘노가이’로 기록한 것이 성이 된거죠. 러시아 말을 몰랐던 할아버지는 알렉산드르가 발음하기 어려워 ‘송달이, 송달아’하고 불렀던 게 제 한국 이름이 된 거죠. 그때는 송달이 웃긴 이름인 줄 모르고 쓰게 된 것입니다.”가족은 다국적…한국 생활 노 회장은 러시아 국적모친은 우즈베키스탄, 부인·딸은 카자흐스탄 국적 그의 가족은 ‘다국적’이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노 회장은 러시아 국적, 어머니는 우즈베키스탄, 부인과 딸(7)은 카자흐스탄 국적이란다. 부인과 딸은 비행기로 7000km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다. 독립유공자 계봉우(1880~1959) 선생의 후손인 부인은 카자흐스탄에서 독립유공자 후손회 부회장으로 일하고 있단다. 1년에 한두 번 그가 카자흐스탄에 가거나, 부인이 한국에 와야 가족의 생이별을 달랠 수 있다. “민요 아라랑만 들어도 콧잔등이 시큰하다”는 노 회장은 한국 생활을 하면서도 뿌리를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단다. “1937년 강제이주를 당하면서 서류나 짐, 족보 같은 것은 아예 챙겨가지 못해 없어져 버렸습니다. 할아버지 정확한 고향은 모릅니다.” 그는 자신을 ‘장연 노씨’라고 이야기했다. 할아버지 함자를 알고 문중에 가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자 그는 “할아버지 함자가 노.태.경입니다. 그런데 문중이 북한에 있어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노 회장의 한국 생활은 20년이 넘었다. “1997년 한국에 들어와 막노동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고층건물 외벽 도장을 하는 작은 사업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직원은 30~40명 됩니다.” 돈을 잘 버느냐는 물음에 그는 “돈을 못 벌면 이런 조직을 맡을 수가 없겠죠”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면서 ‘고려인문화센터’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너머에 대해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죠”라고 몇 차례 말했다. “그동안 느낀 바로는 한국 사람들이 고려인에 대해 대체로 ‘모르겠다’는 입장인 것같았습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남아 있는 조상들의 독립운동을 알려주고 싶은데…, 한국 사람들이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고, ‘지금 내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 심한 것같더라고요.” 자신들을 왜 ‘고려인’이라고 부르는지 물어봤다. “원래는 중국처럼 조선인으로 부르다가 1988년 6월 ‘전소련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부터입니다. 그때 우리는 조선 사람도, 한국 사람도 아닌 러시아 사람이고, 남한이나 북한의 그 어디도 아니고 해서 고려인이라 한 것입니다. 고려인(Korean)은 러시아 어로 ‘카레이츠’라 합니다.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타·카자흐스탄 등등해서 50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고구려나 발해시대를 제외한다면 구한말인 1860년대에 한인들이 러시아에 연해주 일대에 가서 살던 게 고려인의 시초이다.“우즈베크는 고향이지만 이질감한국은 ‘여기가 우리 땅’ 자신감” 그에게 한국과 고향 우즈베키스탄을 비교해 달라고 했다. “우즈베크는 제가 나서 자란 곳입니다. 친구들도 많고, 말도 잘 되고 문화도 잘 알고 그렇지만 코리안은 주류가 되지 않습니다. 간혹 밖에서 ‘니들 나라, 코리아로 돌아가라’는 말도 들립니다. 그럴 땐 기분이 매우 안 좋지요. 자신감도 없어졌습니다. 같은 문화 속에서 이질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한국에선 그런 말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이나 외모가 똑같아서인지 …. 여기서 누군가가 ‘니들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하면 제가 자신감이 있습니다. ‘여기가 우리 땅’이라고.”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고려인 한 서린 땅… 정부는 왜 연해주 유적 방치하나”

    “고려인 한 서린 땅… 정부는 왜 연해주 유적 방치하나”

    박물관 사실상 버려져… 학계도 무관심 안중근·조명희 기념비 사후 관리 부실 “여행업계, 고증없이 사실화 안타까워… 한국 정부가 직접 유적 발굴·관리해야”“러시아 프리모르스키(연해주) 일대에는 아직도 고려인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어요. 1937년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1878~1953)이 고려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며 크라스키노(연추) 한인마을을 탱크로 파괴했지만 지금도 이곳에 가면 우리 선조들이 쓰던 물건이 발굴됩니다. 올해 5월에도 연자방아와 무너진 초가집을 새로 찾았으니까요. 3·1 운동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대한한국 정부에서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죠.” 고려인 3세로 러시아 내 한인 독립운동사의 최고 권위자인 송지나(67) 러시아 극동연방대 한국어과 교수는 16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연해주 고려인 유적에 대한 발굴과 관리에 더욱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860년 제정 러시아는 청과 베이징 조약을 맺고 연해주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매서운 추위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이곳에 1864년부터 조선인들이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후 “연해주에 오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한인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이렇게 러시아에 정착한 한인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른다. 고려인들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에도 공헌했지만 상대적으로 정부나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송 교수는 아쉬워했다. 실제로 서울신문이 ‘임시정부 100주년 기획 취재’를 위해 찾아간 연해주 포시에트(목허우)에는 러시아 학자가 평생 발굴한 고려인 기와와 벽돌, 맷돌 등을 모아놓은 박물관이 있지만 관리가 되지 않아 사실상 버려져 있었다.그는 책임지지 않는 우리의 기념비 관리 문화에도 일침을 가했다. 송 교수는 “독립운동가 기념비는 개인이 임의로 세우게 해서는 안 된다. 사후 관리가 부실해지면 되레 위인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라며 “우수리스크(쌍성자)에 있는 안중근(1879~1910) 의사 기념비나 지난 9월 문재인 대통령이 깜짝 방문해 화제가 된 조명희(894~1938) 작가의 블라디보스토크 기념비 모두 한동안 관리자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안 의사가 손가락을 끊어 독립 의지를 다진 것을 기리는 단지동맹 기념비(크라스키노 소재)가 두 개나 세워져 있는 것도 기념비 관리가 제대로 되고 않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또 “한국 여행업계가 연해주 이곳저곳에 ‘OOO 선생이 살던 집’이라는 식의 유적 표지판을 설치한다. 여행 상품을 만들려고 역사적 고증도 거치지 않은 내용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며 “한국관광공사나 주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영사관도 이런 현실을 애써 모르는 척해 화가 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송 교수는 “가능하다면 내가 그들에게 고려인 독립운동에 대한 정확한 역사 지식을 강의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서울·포시에트(러시아)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동해항을 남북교류협력 허브항으로”

    “동해항을 남북교류협력 허브항으로”

    평화·경제 선순환 구조 구축돼야 일회성 아닌 지속가능 사업 공감 광물자원 전용물류센터 조성 제안 남북경협 컨트롤타워 역할 기대도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교류협력 사업은 해운 물류 거점의 최적 입지 여건을 갖춘 강원 동해항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강원도와 동해시는 12일 동해현진관광호텔 컨벤션홀에서 시민·사회단체 등 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남북 교류협력과 강원도 동해안의 역할’을 주제로 ‘2018 동해포럼’을 열었다. 포럼은 강원도와 동해시가 주최하고 재단법인 북방물류연구지원센터가 주관한 행사로 한국광물자원공사 남북자원개발사업단,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항만물류연구본부, 통일연구원, 강원연구원, CJ대한통운 등이 참가했다. 이번 포럼에서는 남북 교류협력 사업을 위한 자치단체의 준비와 동해항 활용에 대해 집중 논의됐다. 특히 남북화해와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평화와 경제의 선순환 구조 구축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지속가능한 사업모델 발굴이 필수적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승환 남북교류협력지원협회장은 기조 강연에서 “남북 협력사업에서 창출된 수익이 단위 협력사업에 재투자되는 지속 가능하고 선순환되는 사업 모델 발굴이 중요하다”며 “일회성 사업에 대한 과도한 집중은 배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남북 교류협력은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할 뿐 아니라 평화·경제의 선순환 구조를 통해 북핵문제 해결에도 기여할 것”이라면서 “중앙정부가 교류협력의 토대를 만들지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업은 민간과 지방자치단체에서 맡아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주제발표에 나선 이인우 남북자원개발사업단장은 “북한의 주요 광물들이 집결하는 북한의 단천, 청진 등과 가까운 동해항은 북한 광물자원의 물류 거점이 되기에 최적지”라고 지적하며 “동해항을 북한 에너지·자원의 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해 민관이 참여하는 에너지·자원협의체를 구성하고 항만주변에 광물자원 전용물류센터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성우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항만물류연구본부장은 “북한의 열악한 육상물류 환경을 고려하면 남북한 물류망 연결에는 해운과 육운을 결합한 해상 복합물류 네트워크의 구축이 필요하다”며 “동해항이 북한의 항만을 활용할 경우 시베리아횡단열차(TSR)를 이용해 유럽까지 연결되는 물류네트워크 구축이 가능하고, 환동해권 물류망 구축과 별도로 남북한과 러시아 연해주,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을 연결하는 환동해권 사계절 크루즈 역시 매력적인 사업이다”고 말했다. 행사를 주최한 심규언 동해시장은 “1998년 금강산 관광의 첫발을 내디딘 곳이 동해항”이라며 “금강산 관광객을 싣고 갔던 그 배들보다 더 크고 더 많은 배들이 동해항에서 시멘트와 건설 기계들을 싣고 가 북한의 도로와 다리와 항구와 주택을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고, 북한의 광물자원과 수산물을 국내로 반입하며 높은 부가가치 제품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그런 일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지자체 차원에서 준비해갈 것”이라고 밝혔다. 엄광열 북방물류연구지원센터장(한국관세학회장)은 “강원도는 그동안 동북아지사성장회의, 환동해거점도시회의,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 회의 및 박람회 개최 등을 통해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가 풍부하다”며 “판문점회담과 북·미회담 등 남북 해빙 무드에 편승해 전국 17개 광역지자체가 남북 경협이라는 특수효과 정책 마련에 골몰하는 가운데 동해 묵호항과 동해항의 컨트롤타워 역할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동해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3·1운동 산파 역 신한청년당 100년 만에 ‘햇빛’

    3·1운동 산파 역 신한청년당 100년 만에 ‘햇빛’

    1918년 여운형 등이 상하이서 결성 ‘대한독립·사회개량·세계대동’ 기치 4년 활동하면서 임정수립에도 기여 ‘몽양 기념사업회’ 재조명 학술대회 3·1 독립운동의 산파 역할을 한 신한청년당이 올해로 결성 100주년을 맞았다. 여운형과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 등 20~30대 독립운동가가 1918년 8월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긴밀히 논의한 끝에 그해 11월 28일 창당한 신한청년당은 3·1 운동 전후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신한청년당은 1922년 12월에 4년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을 뒤로하고 자진 해산하면서 100년간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재조명 받고 있다. 사단법인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지난달 28일 개최한 신한청년당 결성 100주년 기념식에는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을 비롯해 정·관계 인사와 유족,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기념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재조명하는 학술대회도 열렸다. 신한청년당 결성을 기리는 기념식과 학술대회가 열린 것은 100년 만에 처음이다. 신한청년당은 ‘대한독립, 사회개량, 세계대동’이라는 강령을 기초로 활동했다. 1918년 11월 창당 직전 독립청원서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이듬해 1월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해 독립을 요구하는 등 외교 활동을 벌였다. 국내는 물론 만주와 연해주, 일본, 미국에 당원을 파견해 연락망을 조직하고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을 유도함으로써 도쿄에서는 2·8 독립선언, 국내에서는 3·1 운동이 전개되는 데 공헌했다. 이후 신한청년당 당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주도하고 임시정부에 대거 진입하며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장원석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신한청년당은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숨은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며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신한청년당의 역할과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짚어야 3·1 운동의 의미를 더욱 심도 있고 다면적으로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동해항, 남북 경협·철의 실크로드 전진기지… 북방경제 시대 연다

    동해항, 남북 경협·철의 실크로드 전진기지… 북방경제 시대 연다

    20년 전 금강산 관광의 첫 뱃고동을 울렸던 강원 동해항이 북방교역 중심항으로 떠오르고 있다. 1984년 북한산 시멘트 반입을 시작으로 경수로사업 해양 구조물 북한 반출, 북한산 모래 국내 반입, 남한 쌀 북한 청진항으로 반출 등 동해항은 우리나라 대북교역의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오고 있다. 1992년 경수로 착공식과 1997년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 한·미·일 대표단 왕래에 이어 올 2월 2018 평창동계올림픽 북한 공연단 입항 등 인적교류도 동해항 인근 묵호항을 통해 이어졌다. 이 같은 강점을 살려 동해시는 동해항과 묵호항을 남북 경협과 북방경제시대를 이끄는 환동해권 산업 교류와 동해안권 최고의 해양관광항으로 육성하고 나섰다. 28일 심규언 동해시장을 만나 북방교류 1번지에 대한 포부와 청사진을 들어봤다.동해항은 1998년 11월 현대금강호가 관광객 800여명 등 1365명을 싣고 금강산을 향해 처음 출항했던 곳이다. 금강산 관광은 한반도 분단 이후 민간인들이 관광 목적으로 북한에 처음 들어가면서 남북 교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했다. 꼭 20년 전 일이다. 이후 남북한 교류가 이어지고 최근에는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며 남북 경협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그 중심에 남북 경협 전진기지 역할을 한 동해항이 있다. ●‘북방루트 개척’ 청진~투먼 철로 개설 타진 심 시장은 “남북 분단 70년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동해항을 통한 금강산 관광을 비롯해 2018 평창동계올림픽 축하공연을 위한 북한 예술단원을 태운 만경봉호도 묵호항에 입항하며 동해시가 남북 교류 1번지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했다. 1984년부터 남북한이 수해물품을 교류하는 등 물자 교류를 통한 남북 해빙의 물꼬를 튼 전진기지도 동해항이었다. 1984년 당시 3만 5000t의 북한산 시멘트가 동해항을 통해 반입됐다. 2002년 경수로사업 당시 발전소나 해양 구조물에 주로 쓰이는 5종 내황산염 시멘트를 지원하는 출발지도 동해항이었다. 동해항에서 1994년 12월~1995년 3월 북한산 모래 10만 9000t이 반입됐고, 1995년 6월과 10월 남한 쌀 4600t이 북한 청진항으로 보내졌다.앞으로 북한 경제 개발의 최대 변수는 유엔 등 국제사회가 북한에 부과하는 다양한 형태의 경제제재 조치가 어떻게 거둬들여 지느냐에 달렸다. 그럼에도 남북 교역 초기 단계 항만의 역할은 더 커질 전망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북한경제동향 보고서에서 남북 경협이 재개되면 항만 투자가 가장 먼저 이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육상 인프라가 제 역할을 하기까지 항만도시 중심의 거점형 개발과 지역경제 협력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 북한 내 교역항은 9개가 있고, 이 가운데 남포·원산·나진항이 가장 많은 화물을 처리한다. 동해항에서 청진, 중국 투먼을 잇는 북방루트를 열기 위해 투먼에서 청진 간 철로를 이용한 물류 수송망 개척을 중앙정부에 지속적으로 타진하고 있다. 동해항은 희토류 등 북한 자원이 수입되는 항만이자 건설 자재 장비가 운송되는 남북 경협의 거점항으로 강점도 갖고 있다. 특히 동해항에는 컨테이너 화물선 취항을 추진하고, 동해항 3단계 개발사업 가운데 4, 5번 선석은 정부 재정사업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옛 항만은 복합물류항만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중앙 관련 부처와 협의도 추진 중이다. 묵호항은 재창조 1단계 사업으로 울릉도 여객선 터미널을 이전하고, 주차장과 공원 조성은 모두 끝냈다. 2, 3단계 사업에서는 동해·묵호항 기능을 재배치하고, 묵호항이 과거 어항 중심에서 동해안권 최고의 해양 관광항으로 거듭날 수 있는 청사진도 마련했다. 엄광열 북방물류연구지원센터장은 “동해·묵호항은 남북 경제협력 전초기지는 물론이고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북방경제시대를 선도하는 환동해권 산업관광물류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동해시는 남북 경제협력을 넘어 북방경제시대를 이끄는 환동해권 산업물류 중심지를 꿈꾼다. 항만과 철도, 고속도로 등 교통 인프라를 고루 갖추고 국토의 중심에 있는 장점을 살려 대륙과 해양루트를 개척해 나갈 계획이다. 사실 동해시는 북극항로,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중국의 일대일로와 연결되는 물류거점을 구축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조건을 갖췄다. ●北광물자원 활용 경제자유구역 활성화 추진 북한 광물자원을 활용한 동해안권 경제자유구역 활성화와 북한 수산물을 활용한 환동해권 콜드체인 구축, 미래첨단산업 희토류 거래소 설립, 동해항 3단계 개발사업을 통한 북한 광물자원 전용 선석 확보, 나진항~동해항 정기 물류 항로 개설 등을 꾸준히 추진해오는 것도 이런 이유다. 침체된 동해안권 경제자유구역(비철금속단지) 및 동해자유무역지역 등 배후 산업시설과의 연계 개발을 통해 철의 실크로드 전진기지 역할도 기대된다. 이는 동해시를 살리는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다. 동해항과 묵호항은 육상, 해상교역 항만으로 북방경제의 길목에 있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관문항이다. 러시아 연해주까지 거리는 부산항이 1470㎞, 포항항 1300㎞인데 반해 동해항은 1044㎞에 불과하다. 물류 경쟁에서 단연 앞선다. 심 시장은 “남북경협을 계기로 당초 목적대로 침체된 동해안권 경제자유구역과 동해자유무역지역이 활성화되도록 노력하고, 동해항과 묵호항이 우리나라 환동해권의 물류 중심항이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동해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조선업 제2의 부흥 꿈꾸며… 英·獨 글로벌 마케팅 닻 올린 울산

    조선업 제2의 부흥 꿈꾸며… 英·獨 글로벌 마케팅 닻 올린 울산

    울산시가 조선업 불황으로 침체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해외 투자 유치에 나섰다. 송철호 울산시장이 투자유치단을 이끌고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울산시는 해외 투자유치 및 선진기술 협력을 통해 지역경제 활성화와 울산형 부유식 해상풍력발전산업의 기반 구축,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15일 울산시에 따르면 송 시장을 대표로 한 울산 투자유치단은 지난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시를 시작으로 지난달과 이달에는 영국, 독일, 노르웨이, 일본 등을 잇달아 방문해 우호협력 도시 협약 체결, 석유화학 공장 증설 협약 체결, 부유식 해상풍력발전사업 활성화 등의 성과를 올리고 있다. ●남북 평화 분위기, 러시아와 신북방경제 주도 울산시는 문재인 정부의 남북 평화 분위기에 힘입어 신북방경제협력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신북방경협의 핵심은 에너지 및 관광 산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와의 경제 교류다. 이를 위해 송 시장은 지난 9월 블라디보스토크시에서 열린 ‘한·러 비즈니스 다이얼로그’에 참석, ▲원유 및 러시아 천연가스를 활용한 동북아 에너지 협력 ▲북극항로를 이용한 환동해 물류 활성화 ▲부유식 해상풍력단지 조성과 확산 ▲조선업 협력사업 추진 등 4개 분야의 한·러 협력 방안을 제안했다. 블라디보스토크시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이어 송 시장은 지난 8일 경북 포항에서 열린 ‘제1차 한·러 지방협력포럼’에 참가해 2020년 한국에서 열리는 ‘제3차 한·러 지방포럼’을 울산에 유치했다. 송 시장은 또 이날 포럼에 참석한 콘스탄틴 보그다넨코 러시아 연해주 부지사와 양자 회담을 하고, 경제·산업 분야 북방교류 협력 사업도 논의했다. 송 시장은 이 회담에서 항만과 에너지 정제·저장 시설을 갖춘 울산을 활용해 동북아 에너지 시장을 아우르는 ‘RUSSAN 마켓’ 조성을 제안했다. 블라디보스토크시의 반응도 적극적이다. 한·러 지방협력포럼에 참석했던 블라디보스토크시 대표단은 지난 9일 울산을 찾아 산업현장 등을 돌아봤다. 이들은 1박2일 동안 울산에 머물면서 현대중공업과 울산신항 등을 시찰했다. 이에 따라 양 도시 간 경제협력에 기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이와 함께 울산시는 신북방경협을 실현할 크루즈 관광사업에도 적극적이다. 크루즈항을 건설해 북한, 러시아 등과의 북방 관광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시는 내년에 크루즈 전용부두 건설 용역에 들어간다. ●BP그룹, 울산에 화학공장 증설 투자 울산시는 지난달 28일부터 6박8일 동안 나선 ‘글로벌 울산 세일즈 마케팅’을 통해 영국 국영석유회사인 BP그룹으로부터 2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송 시장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세계 2위 석유회사인 BP그룹의 영국 본사를 방문, 울산에 생산공장을 증설하겠다는 투자유치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이번 협약으로 BP그룹은 합작사 롯데비피화학을 통해 울산 울주군 청량 일원의 2만 8000㎡에 2020년까지 초산과 초산비닐을 생산하는 공장을 증설하게 된다. 투자 금액만 2000억원에 이른다. 시는 이번 증설 투자로 매년 6000억원대의 직간접 생산유발 효과를 비롯해 50명 직접고용과 공사 기간 동안 하루 3000명 간접고용 등 일자리 창출 및 경제적 효과를 기대한다. BP그룹은 영국 내 최대 기업이다. 지난해 매출액만 235조원에 이른다. 또 시는 독일 바스프사의 울산 투자 유치도 추진한다. 이를 위해 송 시장은 지난달 29일 독일 루트비히스하펜의 바스프 본사를 찾았다. 송 시장은 바스프사의 마틴 위드만 글로벌 전략 마케팅개발담당 수석부사장 등 경영진과 만나 “울산은 화학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우수한 인적 자원과 풍부한 산업 유틸리티, 최적의 물류 인프라, 연구개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며 투자를 요청했다. 그는 “바스프가 울산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바스프 경영진은 “앞으로 신제품 증설 투자 계획 때 울산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겠다”고 화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스프는 1865년 독일 만하임에서 설립된 뒤 현재 80개 국가에 732개의 자회사를 보유한 글로벌 화학기업이다. 세계적으로 석유, 천연가스, 화학제품, 비료, 플라스틱, 합성섬유 등 8000개 이상의 제품을 생산한다. 바스프는 울산에도 스판덱스와 보온재를 생산하는 화성공장과 특수단열재를 생산하는 석유화학공장을 운영하고 있어 공장 증설 투자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부유식 해상풍력단지에 선진 기술 접목 시는 제2의 조선산업 부흥을 이끌 ‘울산 부유식 해상풍력발전단지 조성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부유식 해상풍력발전사업은 조선업 불황으로 어려움을 겪는 울산에 큰 힘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미 실증화 사업도 시작됐다. 사업 성공을 위해서는 선진 기술과 운영 방안 등의 사례가 필요하다.송 시장을 비롯한 울산시 대표단이 지난 1일 스코틀랜드 하이윈드 부유식 해상풍력 현장을 찾은 이유다. 대표단은 이날 하이윈드 발전단지의 준비 단계에서부터 운영까지 설명을 들은 뒤 울산 부유식 해상풍력발전단지 조성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하이윈드는 세계 최초 상업용 부유식 해상풍력발전단지다. 30㎿ 규모로 조성돼 약 2만 가구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노르웨이 국영석유회사 에퀴노와 아랍에미리트(UAE)의 마스다가 투자해 설립했다. 2009년부터 노르웨이에서 2.3㎿ 규모 부유식 해상풍력으로 실증 운영을 거친 뒤 지난해 10월 스코틀랜드에서 가동했다.이어 송 시장 일행은 신재생에너지 전문기업인 이디피 리뉴어블과 부유식 해상풍력 1기를 운영하는 실증 현장을 살펴봤다. 이 회사로부터 해상풍력 발전 추진 현황에 관해 설명을 들었고, 울산 부유식 해상풍력 사업에 민간 투자를 끌어내기 위한 정책 지원 방향 등도 논의했다. 울산시는 이번 스코틀랜드 방문에서 해상풍력 발전을 확대하는 영국 풍력산업 현장을 둘러봤고, 이들의 경험과 사례를 바탕으로 울산 부유식 해상풍력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시와 정부는 조선산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2022년부터 동해가스전 인근에 1조 5000억원 규모의 부유식 해상풍력발전단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송 시장 일행은 스코틀랜드 방문을 마치고 지난 3일 일본 도쿄로 이동했다. 문화예술 인프라 확충과 운영 효율화 방안을 협의하려고 도쿄 우에노공원에 있는 국립 서양미술관과 국립 박물관을 찾았다. 4일에는 도쿄의 국립 신미술관과 모리디지털미술관을 찾아 울산시립미술관 건립 사업에 접목할 방안을 모색했다. 한편 울산시는 3D프린팅과 오일허브 등 신산업 육성을 위해 송병기 경제부시장을 단장으로 구성된 경제협력 실무대표단을 지난 1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미국 휴스턴 등에 보냈다. 대표단은 독일에서 메탈 3D프린터 제조와 레이저 기술을 벤치마킹하고 미국 휴스턴에서 바이오 벤처기업 육성과 오일허브 조성 방안을 알아본 뒤 오는 18일 돌아올 예정이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러시아의 ‘고래 감옥’…가두리에 가둬놓고 중국에 팔아

    러시아의 ‘고래 감옥’…가두리에 가둬놓고 중국에 팔아

    최근 러시아에서 법적으로 포획할 수 없는 고래들이 갇혀있다는 증거가 나오자 현지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 미국 CNN방송은 6일 현지언론을 인용해 현재 나홋카 인근 스레드냐야만에 있는 해상 가두리 속에는 고래 100여 마리가 갇혀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연해주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의 검찰은 스레드냐야만에 있는 가두리에 범고래 11마리와 흰돌고래 90마리가 있다고 보고 있지만, 아직까지 불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이들 고래가 교육이나 과학적인 연구 목적으로 포획됐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지 국영 프리모리예 TV가 드론으로 촬영해 고래감옥 등의 해시태그를 붙여 공개한 영상에는 가두리 안에 밀집한 고래들 중에는 어린 개체들의 모습도 보인다. 어린 고래를 잡는 행위는 전면 금지돼 있기에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보호단체와 활동가들은 스레드냐야만에서 사진과 영상을 찍으려고 했지만, 업체 측에 저지를 당해 경찰에 신고한 상황이라고 밝혔다.앞서 현지 언론들은 범고래들을 다른 탱크로 옮기는 모습을 촬영해 공개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들 고래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다. 환경보호단체들은 러시아에서는 해양생물을 포획해 중국의 수족관 등에 수출하는 등 거액의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범고래 한 마리당 우리 돈으로 67억 원이 넘는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져 이런 증거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현지신문 노바야 가제타는 일부 고래는 지난 7월부터 갇혀 있었다고 보도했다. 또 이 신문이 입수한 보고서에 따르면, 가두리를 임대한 현지 업체 4곳은 2013년부터 2016년 사이에 인근 국경을 통해 중국 측에 범고래 13마리를 판매했다.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서울 겪은 시행착오, 평양은 안 겪도록 교류”

    “서울 겪은 시행착오, 평양은 안 겪도록 교류”

    市 전담 부서 통해 경평축구 등 사업 추진 北 원하는 대동강 수질 개선 최우선 과제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이 그동안 경험했던 시행착오를 평양이 겪지 않도록 행정경험을 공유하고 교류를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 시장은 8일 서울 중구 롯데호텔에서 열린 서울신문 주최 광화문라운지 초청강연에서 서울·평양 교류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동북아 평화의 시대 서울의 역할’을 주제로 강연한 그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북측이 원하는 것을 먼저 하는 게 중요하다”면서 “지난 9·19 평양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언급한 대동강 수질 개선이 최우선 과제”라고 말했다. 그는 내년에 추진할 예정인 경평축구대회를 비롯해 학술교류와 문화재 발굴, 도시개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울·평양 교류를 실천하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박 시장은 “평양 방문 당시 조선노동당 간부에게 ‘북한도 개방하면 20년이면 중국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더니 ‘무슨 소리냐. 우린 10년이면 된다’고 답하더라”는 뒷얘기도 소개했다. 그는 “독일 통일경험에서도 보듯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이 통일의 삼두마차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서울시가 북한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려 한다. 이미 3대 분야 10대 과제를 선정했고 남북교류를 위한 전담부서도 만들었다”고 밝혔다. 박 시장은 2016년 11월 ‘서울-평양 도시 협력 3대 분야’로 남북합작 수도공사 설립, 평양 애니메이션 산업단지 조성, 평양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 등재 지원 사업을 제안한 바 있다. 박 시장은 “남북관계 복원은 곧 서울역을 유럽까지 연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과거 손기정 선수가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했던 것처럼 서울역이 다시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 되도록 하고 싶다”는 포부를 내놨다. 이어 “러시아 정부는 연해주 개발에 관심이 많다. 중국과 일본은 서로 경계하기 때문에 한국의 투자와 진출을 기대하고 있다”면서 “남북교류가 함경북도에 자리한 라선특별시 개발과 연해주 개발 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한국 경제의 활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울산시 2020년 제3차 한·러 지방협력포럼 유치

    울산시가 오는 2020년 열리는 ‘제3차 한·러 지방포럼’을 개최한다. 송철호 울산시장은 8일 경북 포항에서 열린 ‘제1차 한·러 지방협력포럼’에 참가해 ‘제3차 포럼’ 울산 유치를 수락할 예정이다. 송 시장은 또 이 자리에서 한·러 지방자치단체 간 협력 방안의 일환인 ‘원유·천연가스 활용한 동북아 에너지 협력’ 주제 발표도 한다. 송 시장은 1차 포럼에 참석한 보그단넨코 코스탄틴 러시아 연해주 부지사와 양자 회담을 갖고 경제·산업 분야 북방 교류 협력 사업도 논의한다. 송 시장은 양자 회담을 통해 항만과 에너지 정제·저장 시설을 갖춘 울산을 활용해 동북아 에너지 시장을 아우르는 ‘RUSSAN 마켓’ 조성을 제안한다. 이밖에 문화·체육·경제 분야에서의 활발한 교류와 상호 협력도 요청할 예정이다. 송 시장은 “한·러 지방협력포럼 유치를 계기로 울산이 북방 경제 중심 기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한국과 러시아는 지난해와 올해 2차례에 걸쳐 열린 한·러 정상회담을 통해 ‘한·러 지방협력포럼’을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7일부터 9일까지 경북 포항에서 열리는 제1차 포럼이 열리고 있다. 이번 포럼에는 러시아 9개 주와 국내 17개 광역 자치단체가 참석했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한·러 지방협력포럼 7~9일 포항서 개최

    경북도는 7일부터 9일까지 2박 3일간 경북 포항에서 역사적인 ‘제1차 한·러 지방협력포럼’을 개최한다고 5일 밝혔다. 이 포럼은 문재인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한·러 정상회담에서 창설에 합의했고, 지난 6월 2일 공동성명에서 포항 개최를 알렸다. ‘함께 하는 한·러, 함께 여는 미래’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포럼에는 우리 측에서 서울 등 17개 특별·광역지자체와 외교부 장관 등 정부 인사들이, 러시아 측에선 연해주 등 극동연방관구 소속 9개 주 대표와 극동개발부장관 등 러시아 정부 인사와 기업대표가 대거 참석해 대규모 국제행사로 치러진다.경북도와 포항시는 포럼에서 양국 간 경제·통상 및 문화·교육·관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포괄적인 교류 확대와 경제단체 간 비즈니스 네트워크 구축, 지역 기업의 극동 진출 방안 등을 모색할 계획이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이번 행사가 그동안 중국과 일본에 치중됐던 무역·통상과 교류협력을 거대 시장인 러시아와 유라시아로 확대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이에 본격 대비하기 위해 동해안 최북단 컨테이너항인 영일만항을 러시아·중국·일본 등과의 물류·관광객 교류 거점으로 육성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안동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의병 홍범도·시인 윤동주가 통탄할 너무 매끈히 덧입힌 ‘그날들의 흔적’

    의병 홍범도·시인 윤동주가 통탄할 너무 매끈히 덧입힌 ‘그날들의 흔적’

    러시아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훈춘시로 가려면 러시아, 중국 세관을 차례로 거쳐야 한다. 수백여m를 사이에 두고 두 곳은 극명히 비교된다. 낡고 허름한 러시아 세관에 비해 중국 세관은 최신 지문 인식 기계를 도입했고, 규모 역시 수십 배나 된다. 비포장도로도 중국으로 들어서면 매끈한 아스팔트로 바뀐다. 달라진 중국의 모습을 새삼 느낀다.지난 24일 훈춘시에서 하루를 보내고 투먼시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1시간 정도 더 가면 왕칭현 봉오동이다. ‘봉오저수지’라는 한글과 한자를 함께 적은 간판을 지나 10여분을 더 걸어가니 매끈한 화강암으로 만든 ‘봉오동 기념비´가 나온다. 2013년 투먼시 인민정부가 세운 것으로, 글씨 윗부분에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 별 문양이 붙었다. 그 뒤로 100m 정도 떨어진 흙바닥에 1993년 만든 낡은 기념비가 적벽돌 주춧돌을 그대로 드러낸 채 방치돼 있다.두 기념비는 문구가 조금 다르다. 새 기념비는 봉오동전투에 관해 “중국 조선족 반일무장이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하에 처음으로 일본 침략군과 맞서 싸워 중대한 승리를 거둔 규모가 비교적 큰 전투”라는 부분을 추가했다. 두 개의 기념비에서 중국의 역사관을 어렴풋이 느낄수 있다. 기념비 왼편 계단을 올라 비탈길을 10분 정도 더 가면 봉오동 전적지를 볼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에 댐을 만들며 많은 지역이 수몰됐지만, 그나마 저수지 너머로 당시 전투지가 남아 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연해주를 비롯해 간도와 만주에서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일어났다. 이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일본 정규군과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가 바로 봉오동 전투다. ‘나는 홍범도´로 불리는 의병장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와 난무의 대한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산에서 매복하다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한 야스가와 지로 소좌가 이끄는 일본군 19사단의 ‘월강 추격대대’를 격파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 157명, 중상 200여명 독립군 전사 4명, 부상 2명이라고 발표했다. 다만 이 숫자에 관해서는 의견이 여전히 갈린다. 버스를 타고 80㎞를 달려 옌지시로 향했다. 한 식당에서 옌볜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학자로 꼽히는 김성호(67·전 조선력사연구소장) 옌볜대 명예교수를 만났다. 그는 1980년대 평양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에서 근현대사를, 1990년대는 인하대에서 조선근현대사를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은 독특한 이력이 있다. 그에게 봉오동전투 일본군 사상자 수가 왜 불명확한지 묻자 “하나의 역사를 두고 조선, 미국, 중국, 일본이 다 다르게 말했다. 자기 나라에 맞게 부풀리거나 줄이는 사례가 당시에는 흔했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에 관해서도 “당시 독립신문이 일본군 2000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장소에 직접 가 봤나. 2000명이 누울 자리 있던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과거와 달리 지금도 정권이 앞장서서 그런 식으로 주장하면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남북이 갈라진 지금 역사 인식을 통해 분단 사관을 극복해야 한다”며 “안중근 의사, 일본군 위안부, 항일투쟁 등 남북 역사학계가 함께할 수 있는 주제부터 다뤄야 한다”고 충고했다.옌지시에서 룽징시를 향해 1시간 정도 더 달리면 명동학교가 나온다. 명동학교는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민족운동가 김약연이 세운 학교다. 그는 1908년 간도 명동으로 이주해 한인 집단 촌락을 건설하고, 명동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윤동주를 비롯해 문익환, 나운규, 송몽규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1929년까지 모두 1200여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졸업생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윤동주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쓰인 큰 안내돌을 돌아 마을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윤동주 생가와 마주한다. 1932년 윤동주가 용정 은진학교에 진학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팔려 허물어졌던 것을 1994년 복원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를 거쳐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해 공부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해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도쿄 릿쿄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교토 도시샤대 문학부로 전학했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했지만, 항일독립운동으로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옥사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게 살기를 바랐던 민족시인의 향취를 이곳에서 느끼긴 어려웠다. 명동촌은 봉오동 전적지와 마찬가지로 ‘연변조선족자치주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돼 관리 중이다. 집 인근에 윤동주의 시가 적힌 금색 조형물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이곳에서 200여m 정도 떨어진 명동학교는 너무 번듯하게 새로 지어놔 어색하기까지 했다. 명동학교에 들어가니 교실에 윤동주 인형을 만들어 사진 촬영용으로 쓰고 있었다. 준수한 얼굴의 인형을 바라보며 실소가 났다. 명동학교의 옛 모습은 간데없고 인공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값싼 관광지를 찾은 느낌만 들었다. 현지 가이드가 ‘중국은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 한다’며 농담을 건넸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명동학교를 나와 가곡 ‘선구자’의 배경이 된 룽징시 비암산의 일송정으로 향한다. 버스를 타고 산 정상까지 오르며 조잡한 관광물을 계속 마주쳐야 했다. 일송정 역시 울긋불긋한 정자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보며 울분을 달래고 마음을 다잡았던 해란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흔적만 남은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중국풍으로 바뀐 중국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돌아보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해를 등지고 산에서 내려오며 ‘우리는 그동안 무얼 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글 투먼·룽징(중국)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기념비만 남긴 항일기지 ‘신한촌’… 핏방울처럼 맺힌 광복의 혼

    기념비만 남긴 항일기지 ‘신한촌’… 핏방울처럼 맺힌 광복의 혼

    3·1절 100주년을 한 해 앞두고 항일독립운동에 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러나 발원지였던 러시아와 중국 지역은 사실상 잊힌 상태다. 통일을 바라보는 지금, 북한 접경 지역인 이곳을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서울신문은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새에덴교회가 주최한 ‘연해주·동북 3성 항일독립 유적지 한민족순례’에 동행해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좇았다지난 22일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40분을 날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 10월 중순을 넘겼지만 바람이 선선했다. 먼저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였던 ‘신한촌’으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루스키섬 방향으로 50여분 떨어진 라게르산 정상에 있다. 검은색 철 울타리에 둘러싸인 이곳에는 직사각형 모양 3.5m짜리 기둥 3개와 네모난 돌 8개가 자리한다. 3개의 기둥은 남북한과 재외동포를, 8개의 돌은 조선 8도를 각각 상징한다.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1999년 8월 15일 해외한민족 연구소가 한국에서 석재를 가져와 세웠다. 연해주 지역에는 1863년 한국에서 건너온 13가구가 지신허에 자리를 틀며 한인이 점차 늘기 시작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결집했다. 새로운 한국이란 이름의 ‘신한촌’은 1911년 5월 구개척리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와 건설했다.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이었던 권업회와 한민회, 한민학교 등이 생겨나며 항일독립운동의 전진기지가 됐다. 1937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강제이주 때까지 연해주에 한인들이 17만명이 넘게 있었고 신한촌에만 1만여명이 거주했다고 알려졌다.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와 치열하게 살며 항일운동을 펼쳤지만, 지금은 기둥 세 개짜리 탑만 흔적으로 서 있다. 철 울타리에 걸린 태극기 정도가 이곳에 한인촌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4㎞ 정도 떨어진 곳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이 있다. 모스크바까지 꼬박 1주일이 걸리는 전체 길이 9288㎞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시작 역이다. 강제로 낯선 곳으로 향하는 열차에 태워진 채 이주당한 고려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북쪽으로 100㎞ 떨어진 우수리스크로 향하는 밤 동안 머릿속에 당시 풍경이 그려졌다.다음날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를 찾았다. 이곳은 연해주 한인 동포들이 우리 문화를 지키고 친선을 도모하고자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을 기념해 2009년 건립한 박물관이다. 입구 오른쪽에 ‘인류의 행복과 미래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라는 글귀가 적힌 추모비가 서 있다. 현지 가이드는 “블라디보스토크 의과대 학장이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해 만들었는데, 학장이 바뀌면서 학교에서 버린 것을 7년 전쯤 가지고 왔다”고 설명했다.고려문화센터를 나와 볼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 들렀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살던 집이다. 고려문화센터에서 3㎞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한국 정부가 10년쯤 전 사들여 현재 기념관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1860년 함경북도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난 최재형 선생은 아홉 살 때 연해주 지신허로 와 정착했다. 이후 열한 살에 가출했다가 포시예트 항구에서 만난 러시아 선장의 배려로 세계 곳곳을 누비며 지식인으로 거듭났다. 많은 돈을 번 그는 크라스키노 연추 마을에 첫 한인 자치기관을 설립하고 한인들을 돕기 시작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에는 빨치산을 조직하기도 했다. 최재형 선생의 집에서 1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면 왕바실재 언덕에 다다른다. 최재형 선생은 1920년 4월 5일 일본군의 빨치산 토벌로 이곳에 끌려와 재판 없이 총살당했다. 한인과 러시아인 240여명이 이곳에서 잔혹하게 죽었다. 이른바 ‘4월 참변’이다. 10분 남짓 언덕을 올라 마을을 내려다봤다. 함께한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이 하모니카를 꺼내 아리랑을 연주했다. 동행한 고려인들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하게 젖었다. 소 이사장은 “한국 국회의원들에게 이곳을 유적지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별 반응이 없다”고 말했다. 최재형 선생 집에서 5㎞ 정도 떨어진 수이푼 강변에는 이상설 선생 유허지가 있다. 이상설 선생은 1907년 헤이그 특사, 1914년 결성된 대한광복군 정부 대통령으로 잘 알려졌다.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국권회복을 위해 파견됐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도 활발하게 항일운동을 하던 그는 1917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내가 죽거든 불태워 유해를 강에다 뿌려 달라’던 유언대로 그의 유해는 이곳 수이푼 강변에 뿌려졌다. 연해주에서 190㎞ 정도 떨어진 크라스키노에는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가 있다. 높이 4m 정도 큰 비석에 ‘1909년 3월 5일경 12인이 모이다’, 높이 1m 정도 작은 비석에는 ‘2001년 8월 4일 102년이 지난 오늘 12인을 기억하다’라고 쓰여 있다. 애초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10월 크라스키노 추카노프카 마을 강변에 기념비를 세웠지만 물에 잠기고 현지인들이 훼손하는 사례가 잦았다. 비석을 옮긴 지역이 국경지대로 편입되면서 러시아 당국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게 돼 지금 위치로 이전했다. 사방이 허허한 벌판에 핏방울 모양의 비석이 홀로 서 있다. 목숨 바쳐 항일운동을 펼친 그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잊힌 역사인가, 아니면 잊은 역사인가. 중국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차디찬 바람에 가슴이 시렸다. 글 사진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러시아)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한글 잃은 고려인 후손, 한국 언어정책 확대 기대”

    “한글 잃은 고려인 후손, 한국 언어정책 확대 기대”

    연해주는 기회의 땅이고, 좌절의 땅이었으며, 재건의 땅이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고려인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1937년에 스탈린 강제 이주가 있었다. -홍 안톤(81) 내가 그때 태어났다. 어른들에게 들으니 그때 모두가 갑자기 화차에 실렸다고 한다. 문도 없는 기차였고 죽으면 그냥 그 자리에 버리고 갔다. 카자흐스탄에 도착했을 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그곳을 고려인들이 일궜다. →강제 이주됐다가 다시 이곳에 온 이유는. -최 마르가리타(69) 부모님께서 이곳이 참 살기 좋았다고 항상 말씀하셨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1955년부터 거주이전 자유가 생기면서 이곳으로 많이 돌아왔다. 사실상 이곳에서 다시 시작한 셈이다. →타향 살이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최 나제즈다 알렉산드로브나(83) 부모님이 두 살 때 돌아가셨다.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 나는 학위가 두 개이고 중·고교에서 교사로 56년 동안 역사·사회·정치를 가르쳤다. (훈장을 보이며) 러시아 정부에서 주는 ‘특별 교사상’도 두 번이나 탔다. 저기 계신 강 레오니바실리비치 선생은 ‘러시아 공로인 100인’에도 선정됐다. →이 지역에 독립운동 하셨던 분들이 많다. -최 마르가리타 안중근 의사 조카, 홍범도 장군의 외손녀 등이 러시아에 살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유명하신 분들은 고려인들에게 큰 자긍심이다.→고려인으로서 대한민국에 바라는 것은. -김 엘라시나예브나(72) 일제강점기에 우리는 한글을 잃었다. 스탈린 시대에도 우리말을 쓸 수 없었다. 고려인 3·4세대는 한국말을 쓸 수 있게 됐지만 미흡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에서 언어 정책을 좀더 확대해야 한다. 남과 북, 러시아 동포 모두 같은 피를 받지 않았나. 통일에 대한 기대가 크다. 다 같이 잘사는 그날이 왔으면 한다. -최 나제즈다 알렉산드로브나 우리말을 못 쓰게 되면서 우리는 한국의 역사도 잘 모른다. 한국어로 된 역사책을 주면 우리가 보기 어렵다. 한국 정부가 러시아어로 역사책을 만들어 우리 후손에게 보급했으면 좋겠다. 글 사진 우수리스크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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