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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연줄의혹 청맥회 해산하라

    이치범 환경부 장관 내정을 둘러싼 코드인사 논란이 뜨겁다. 그가 청맥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라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청맥회는 알려진 대로 참여정부 집권에 기여한 공로로 공기업과 정부산하기관에 자리를 얻은 인사들의 모임이다.2003년 11월 20명으로 만들어져 2004년 60여명,2005년 91명으로 세를 불렸고, 올해엔 134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상당수가 노무현 대통령의 고교 동문이거나 선거대책위·대통령직인수위 구성원, 청와대 비서관 출신이다. 열린우리당 총선 낙선자 등 여권 주변인사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이들이 사장, 감사, 이사로 있는 공기업 및 산하기관만 해도 112개에 이른다. 청맥회 측은 참여정부의 국정철학을 전파하고 공기업 개혁을 도모하려는 친목모임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이는 허울로 비칠 뿐이다. 이 모임이 공기업 개혁을 위해 실제 한 일이 뭔지 따지기 전에, 낙하산 인사로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과연 공기업 개혁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부터가 의아스럽다.5대 강령 등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으나 집권 유공자끼리 어울리며 서로 뒤를 봐주려는 권력 기생집단으로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군사정권 시절 하나회가 연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정부의 거듭된 낙하산 인사도 비난받아야 하겠으나, 이를 바탕으로 정례모임을 만들어 권력내 이너서클을 자처해 온 청맥회의 행태 역시 지탄받아 마땅하다. 고질적 악폐인 연줄 문화를 끊으려 그토록 노력해 온 참여정부가 아닌가. 청맥회는 즉각 해산하는 게 옳다. 청와대 또한 더이상 정실인사 논란을 빚지 않도록 각료 인선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 ‘최연희 후폭풍’ 떨고있는 여의도

    ‘최연희 후폭풍’ 떨고있는 여의도

    여의도 국회에서는 지금 ‘최연희 후폭풍’이 거세다.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 이후 국회 주변에서는 성 추문과 관련된 각종 ‘카더라’식 통신이 난무하고 있다. 이는 입법부 등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사 여기자에게 성추행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의원실 내부에서 쉬쉬하는 ‘성추문 사건’들도 적지 않을 것이란 추론과도 무관치 않다. 이른바 ‘…카더라 통신’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제2의 최연희 파동’도 터질 수 있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A의원의 경우 여성 보좌진과 매일 출근 전 수영을 함께하며 건강을 관리한다는 괴소문에 시달리고 있다. B의원은 출근할 때마다 다른 보좌관 등을 제쳐두고 한 여성 보좌진과 독대한 뒤 회의를 갖거나 보고를 받는다는 입소문에 시달리도 있다. 이로 인해 “그 방엔 의원이 두 명”이라는 등 루머성 추측이 무성하다는 소문이다. C의원의 경우 과거부터 여직원과의 추문이 끊이지 않은 상황에서 여직원 교체가 잦아 구설수에 올랐다.D의원의 경우 지난 연말부터 의원회관 내부에서 ‘여직원과의 염문설’이 꼬리를 무는 바람에 결국 여직원이 사직했다는 후문이다. 특히 의원회관 주변의 삼삼오오 술자리에서는 최 의원 사건이 초특급 화제로 떠올랐고 ‘나도 몸조심’ 분위기가 확연하다. 이에 따라 국회의 ‘음주문화’에도 적잖이 변화가 일고 있다. 일부 의원실에서는 보좌진들의 회식 후 ‘노래방 출입 자제’ 분위기가 역력하다. 성 추문 가능성 자체를 사전에 예방하겠다는 의미다. 정치권에 유독 ‘성 괴담’이 난무하는 현실을 놓고 다양한 분석이 제기된다. 관공서나 일반회사와 달리 ‘권위주의 문화’가 팽배한 국회 특유의 구조에서 주 원인을 찾는 목소리도 높다. 10년 이상 활동하고 있는 한 보좌관은 “16대 국회보다 17대 의원들이 연소화됐고 보좌진들도 더욱 젊어진 구조적 변화에다 성개방 풍조까지 결합하면서 의원회관에 과거보다 성 괴담이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세대 정혜신 교수는 “비서진들의 생사여탈의 ‘칼자루’를 의원들이 쥔 상황에서 불미스러운 성적 추문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 힘든 구조”라고 진단했다. 의원 보좌진의 ‘인력수급 구조’에서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보좌관·비서진 대부분 일반 공채가 아닌 의원 개인의 ‘연줄’과 ‘외부 백’으로 들어오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 의원 보좌관은 “보좌진을 포함, 여비서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공론화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직급과 나이 등의 권위에 눌려 쉽사리 성 추문을 공론화하기 어려운 근로 조건”이라고 털어놓았다. 정치인들의 ‘이중성’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최 의원 추행 사건을 강력한 톤으로 지적했던 E의원은 지난 총선에서 ‘인척과의 부적절한 관계설’로 애를 먹었던 장본인이다.F의원은 지난해 겨울 서울 모 나이트클럽에서 수차례나 부킹을 ‘시도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다. DJ정권 때부터 시작된 국회 인턴사원 제도도 ‘문제’가 생길 소지를 제공하고 있다. 대부분 석·박사 출신의 여성 고급인력들이 각 의원실에서 저임금(100만원 안팎)으로 1년 계약으로 일하고 있다. 정책 인턴으로 일하고 있지만 아슬아슬한 ‘성적 농담’에 직면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포털 사이트에 국회 인턴들의 ‘카페’가 개설된 상황에서 지난해 인턴들 사이에서 대책 회의가 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성폭력상담소 원사 사무국장은 “최 의원의 ‘식당 아줌마’발언은 말로만 국민의 공복을 외치는 정치인 특유의 특권의식이 터져나온 것”이라고 비판했다.‘최의원 사건’은 당장 ‘5·31 지방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나라당은 성추문 전력자들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오일만 전광삼 구혜영기자 oilman@seoul.co.kr
  • [서울신문 탐사보도-‘브로커 천국’ 코리아] 음지서 양지로 끌어내 관리 필요

    [서울신문 탐사보도-‘브로커 천국’ 코리아] 음지서 양지로 끌어내 관리 필요

    탈주범 지강헌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친 것은 1988년이다. 거의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사람들은 이 말에 공감한다. 여전히 수사와 재판, 행정처리에 돈과 배경이 개입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부류가 브로커들이다. 브로커들이 우리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려면 돈과 연줄이 통하지 않는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선행조건이다. ●처벌해도 계속 생기는 브로커 브로커들은 어쩌면 가장 위험한 환경에서 기생하는 셈이다. 브로커들의 활동 무대는 어쩔 수 없이 잘못 접근했다가는 ‘큰코 다칠’ 수사기관 주변이다. 브로커 활동 자체가 불법인 줄 알면서도 브로커들은 불법을 단속하는 수사기관에 가까이 가려고 시도한다. 수사기관으로서도 브로커는 매우 피곤하고 척결해야 할 존재다. 수사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검찰은 ‘대물’ 브로커 윤상림씨를 ‘거악’으로 규정했다. 거물 브로커 사건이 터질 때마다 브로커가 개입될 여지를 줄이기 위해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 마련됐다. 최근에는 법원과 검찰이 구속기준을 공개하고 나섰다. 사건 당사자가 브로커를 주로 찾는 시점이 구속 여부가 판가름날 때쯤이기 때문에 브로커나 변호사의 영향이 구속에 미치지 못했음을 보여주기 위한 뚜렷한 기준을 공개하는 것이다. ‘브로커와의 전쟁’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현행법 체계에서는 전망도 밝지 않다. 검찰 수사단계에서 이목을 집중시켰던 브로커들이 단기형 또는 집행유예형을 선고받고 재기할 수 있는 것은 변호사법 등으로 이들을 옭아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산업연수생 송출로비 혐의로 기소된 브로커 홍모씨에게 최근 증거부족으로 무죄가 선고되는 등 입을 닫아버리는 브로커들의 혐의를 입증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로비 양성화·정보공개 추진 규제와 단속 위주의 브로커 정책은 최근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양성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무소속 정몽준 의원은 16·17대 국회에 ‘외국대리인 로비활동 공개에 관한 법률안’을, 민주당 이승희 의원은 ‘로비스트 등록 및 활동공개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했다. 이른바 로비스트법이다. 정 의원 법안은 외국 기업을 위해 활동하는 전문 브로커들의 활동을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다국적 기업이나 외국 단체를 위해 활동하는 브로커들이 국회 의원회관이나 정부기관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안 제정을 일궈내고 천문학적인 이득을 보지만 국내에서는 이들의 규모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7월 이 의원이 대표발의한 로비스트법은 활동공개 범위를 내국인에게까지 넓혔다. 이 법안의 특징은 브로커를 근절·규제하는 식의 네거티브 전략이 아니라는 데 있다. 브로커를 양성화하고 활동을 인정해 궁극적으로 양질의 로비문화를 만들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정책결정과 입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공무원에게 로비하려는 개인이나 법인 또는 단체는 10만원 이상 금품의 사용내역 등 그들의 로비활동을 공개하고 법무장관에게 6개월마다 보고하라는 것이다. 이 의원실은 국회에서 활동하는 입법 브로커만 200여명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법안은 이들을 정책결정 과정에 잡음을 남기는 불온세력으로 보지 않고 국민의 청원권을 행사하거나 대리하는 주체로 본다. 제3자가 아닌 스스로 로비스트 등록을 할 수 있도록 한 것 역시 청원권 보장이라는 측면을 고려해 나왔다. 이처럼 이 의원 법안은 불법 로비 근절과 함께 정책결정의 합리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실효성에는 의문 이같은 법안에 대해 브로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변협은 브로커를 양성화시켜 로비활동을 허용하는 것은 국민들의 건전한 법감정에 어긋난다며 반대입장을 밝혔다. 이 의원은 활동이 공개되는 것 자체가 부패를 없애고 청렴을 유도하는 장치로 작용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변협의 문제제기는 브로커의 활성화가 변호사 활동에 제약이 된다는 데서 출발한다. 윤씨 사건에서도 고검장 출신 변호사가 윤씨에게 사례비로 의심되는 돈을 건네는 등 변호사-브로커 간의 종속관계가 뒤집어진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법률사무 자격증을 가진 변호사와 ‘경험칙’으로 활동하는 브로커와의 영역 싸움이 한창인 마당에 법안에서 규정한 로비업무가 법률업무와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이다. 양성화 등에 대한 이견은 제도가 먼저냐, 의식이 먼저냐에 대한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각종 브로커 사건이 기승이던 2000년 로비스트 양성화 법안 논의가 처음으로 제기됐을 때 경실련은 “아직 뇌물수수 행위와 건전한 로비행위를 구분할 수 있는 사회적 의식이 길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자금 실명제 실시 등 선행대책이 마련된 뒤 논의해야 한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로비활동 양성화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제도를 먼저 만들면 의식이 따라올 것이라고 설명한다.‘로비의 제도화’라는 책을 쓴 고려대 평화연구소 조승민 연구원은 “발의된 로비스트법은 브로커가 득세하는 사법부분에 대한게 아니라 입법, 행정 부분에 치중한 것”이라면서 “음성적 브로커 활동을 없애는 시도의 첫걸음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브로커 근절을 위해서는 더 많은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법조팀 saloo@seoul.co.kr
  • [서울신문 탐사보도-‘브로커 천국’ 코리아] 등록후 공개활동… 연줄 로비 안통해

    로비라는 말은 미국 의회 본회의장 근처 로비에서 기자와 청원자들이 의원들을 기다리던 것에서 유래했다. 로비를 청원권의 표출로 보는 미국은 지금도 로비의 천국으로 불린다. 미국의 로비규제법인 ‘로비공개법’은 근무시간의 20% 이상을 고객의 의회 및 행정부 관련 업무에 사용하는 사람은 상·하원에 로비스트로 등록하도록 정했다. 이들은 1년에 두번 정기적으로 활동 내역을 신고하고, 로비 활동을 위해 1만달러 이상을 받았을 때도 신고해야 한다. 하지만 로비스트 등록과 활동 내역이 소상히 공개되지는 않고 있다. 언제라도 지난 1월 일어난 잭 아브라모프의 8000만 달러 불법로비 스캔들과 비슷한 사건이 재연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잭 아브라모프 사건을 계기로 미국 상원은 새로운 로비규제법인 ‘트렌트 로트 법안’을 두고 논의 중이다.법안이 통과되면 로비스트로부터 식사 대접을 받을 경우,15일 이내에 내역을 공개해야 하고, 관계 그룹 지원으로 여행을 가기 전 상원 윤리위원회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미국의 로비스트는 대부분 전직 국회의원이나 행정관료, 변호사들이다. 수도인 워싱턴DC에서 활동하는 로비스트는 지난해 2만 6000여명으로 10년 전에 비해 2배 정도 늘어났다. 공식적인 로비자금은 20억달러가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도 로비스트 활동을 공개적으로 혀용하지만, 고위공직자의 경우 직위에서 물러난 뒤 최소 2년간 로비스트 활동금지 규정을 두고 있다. 이슈가 있는 곳 어디든지 로비스트가 모인다는 말은 유럽에서도 통한다. 유럽 의회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활동하는 로비스트의 수는 최근 1만 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이 가운데 유럽 의회에 정식 등록된 사람은 지난해 말 현재 4435명이다.GM,MS 등 다국적 기업에 고용된 로비스트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는 우리처럼 연줄 등을 이용해 사건무마 등을 시도하는 브로커는 사실상 찾아보기 어렵다. 비합리적인 로비는 애당초 용인하지 않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법조팀 saloo@seoul.co.kr
  • [브로커 천국 코리아] (상) 만연하는 ‘사회악’

    [브로커 천국 코리아] (상) 만연하는 ‘사회악’

    브로커 윤상림씨 사건은 검찰과 경찰, 관가 주변에 기생하는 브로커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돈과 권력을 등에 업은 브로커들은 사건과 행정의 정당한 처리를 저해하고 건전한 사회 분위기를 해치는 독버섯 같은 존재다.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는 것은 돈과 권력, 연줄에 약한 사회의 그릇된 현실 때문이다. 불빛을 좇는 부나방같이 권력 주위를 맴도는 브로커들 세계를 파헤친다. 지난 21일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 근처의 한 커피숍. 오후 늦은 시간이었지만 20여명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인에게 “사건이 있는데 비용 때문에 변호사를 쓸 수는 없고, 상담할 사람이 없느냐.”고 묻자 구석에 앉아 있는 정장 차림의 50대 남성 두 명을 소개시켜 줬다. 자신들을 부동산중개업자라고 소개한 이들은 친지가 폭행사건으로 구속됐는데 나올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걱정하지 마라. 검찰에 아는 사람이 많다. 해결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은 “특별히 손을 쓰는 게 아니다.”면서도 “그래도 사람 사이에 정이라는 게 있지 않느냐.”고 은근히 돈을 요구해 왔다.“돈을 얼마나 준비해야 하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그는 “사건 내용을 정확히 알아보고 결정할 일”이라면서 명함을 건네고 다음 약속 날짜를 잡았다. ●서초동 주변, 법조브로커 점령 서초동 인근 커피숍에는 이같은 법조브로커들이 많다. 한 생활정보지에 서초동의 한 커피숍을 초특급 매물로 소개하면서 ‘브로커·상담민원인 등으로 항시 북적거림’이라는 문구를 집어넣을 정도다. 한 변호사는 “서초동에 브로커가 많은 것은 변호사 사무실이 많아 사건 얘기를 해도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받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시간, 인근의 또 다른 커피숍에서도 50대로 보이는 두 남자가 최근 있었던 검찰 인사를 화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명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얘기를 꺼내자 상대편은 “이미 얘기가 다 끝났다.”며 큰소리로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들의 대화는 채 30분이 넘지 않았고, 돈이 든 것으로 보이는 봉투를 은밀하게 주고받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특급호텔은 건설브로커 무대 서초동이 법조브로커들의 주 무대라면 서울 강남 유명 호텔들의 커피숍은 건설브로커들이 점령한 지 오래다. 한 건설업자는 “특히 Y호텔에서 거래하자고 하는 사람의 90%는 건설브로커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건설브로커들은 주로 토지의 용도를 변경해 주겠다거나 고도제한을 해제해 주겠다며 거액을 요구하며 접근한다. 지난 24일 오후,Y호텔 커피숍에는 토지 구매건으로 만나는 개발업자와 브로커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각각 40대와 50대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는 커피를 주문한 뒤 곧장 사업 얘기로 들어갔다. 한 사람이 “이 건은 높이가 좀 낮다. 원래 91가구에서 66가구로 줄었다. 그래도 걱정할 필요없다.5년 동안 끌었던 건인데 3,4월 안에는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다 손을 써놓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알겠다. 돈은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도와 달라.”고 대답했다. 반대편의 또 다른 남성 두 명은 관련 서류를 꺼내 놓고 서울 송파구 인근의 부지에 관한 얘기를 1시간 넘게 심각하게 이어갔다. 브로커로 보이는 한 명은 투자자로 보이는 남성을 상대로 “투자 이익만 860억원이 넘는다. 일단 선수금으로 360억원만 내면 알아서 해주겠다. 이미 작전이 다 짜져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다. 지방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운신의 폭이 좁아지니까 빨리 결정해 달라. 대가는 돈으로 받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지분을 땅으로 나눠 달라.”고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매년 2000여명 적발 추정 국내에서 활동하는 브로커의 숫자를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브로커들을 처벌하는 변호사법 위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알선수재 등의 혐의로 기소되는 범법자들의 숫자를 통해 추정해볼 뿐이다. 지난 2004년 발생한 변호사법 위반 사건은 801건으로 집계됐다. 공범을 포함한 변호사법 위반 사범은 1021명이었다. 알선수재 사범은 48명이 적발됐다. 물론 이들을 모두 브로커로 볼 수는 없지만 브로커 관련 범죄자 1000여명 정도가 적발된 셈이다. 윤상림씨처럼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되는 브로커까지 합치면 매년 2000명 이상의 브로커 사범이 처벌을 받는 것으로 수사기관은 추정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2004년 발생한 801건의 변호사법 위반 사건 중 272건이 서울에서 발생했고, 부산과 대구 대전 광주 순이었다. 서울에서는 서초구가 71건으로 10%대에 육박하고, 강남구가 24건으로 뒤를 이었다. 브로커들에게 서초구의 비중은 부산에서 발생한 77건과 맞먹는 점에서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종로·중구 등 관공서와 특급호텔이 밀집한 지역에서도 각각 12건씩이 발생, 이들 지역에서 브로커와 의뢰인의 돈거래가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브로커들이 근절되기는커녕 점점 더 활개를 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한 사회 구조 때문이다. 이런 불건전한 토양에서 “내가 누구와 친한데….” “청와대 ○○특보인데, 비밀리에 정치자금을 세탁하고 있다.”는 감언이설을 내세운 사기범들도 덩달아 설치고 있다. 상지대 사회학과 홍성태 교수는 우리 사회의 브로커 범람 현상에 대해 “진정한 법에 의한 법치가 이뤄지지 않고 투명하지 못한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사회 시스템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법조팀 newworld@seoul.co.kr
  • 여성(女性) 도와 천당가겠네

    여성(女性) 도와 천당가겠네

    성하(盛夏)를 맞은 한 남성이 내건「캐치·프레이즈」가『찌는 여름입니다. 피곤하시죠, 여성 여러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수퍼·페미니스트」는 무엇을 어떻게 도와준다는 것일까. 궁금하다. 알고보니 7월 1일부터 시작한「허니문·센터」의 신종(新種)사업「캐치·프레이즈」. 그리고 그 남성은 대표 김현(金炫)씨. 『저는 애처가로 자처하지만 워낙 우리 집안은 공처가 3代를 지내 오고 있읍니다』 소박하게 웃는 안경 너머의 안광(眼光)이 아니었던들 둥글한 동안(童顔)은 나이를 가름하기 힘든 생김이다. 31세-작달만한 키의 젊은 사장이다. 지리한 여름 하오 탁자위에 벌여놓은 낙서지를 흘끗보니『대한민국 제일의 부자(富者)가 되어…』『돈은 벌면서도 만인에게「서비스」하게 되니 돈벌고 천당 가고…』. 7월1일부터 여성을 위한 본격적인「서비스」에 나설 완전 채비를 끝내 놓고 잠깐 한가한 틈을타 낙서를 끄적이던 참이다. 『여성을 지치게 하는 것은 남성들의 책임입니다. 그들을 늘 아름다운 채 두기 위해 그들의 힘든 일을 대행하려는거죠』 어느집 맏며느리는 시부모 회갑연(回甲宴)을 맞아 장소 물색에서 헌주(獻酒)를 하고 놀아줄 기생을 부르는 일까지 도맡아 동분서주하다가 잔치가 끝나면 며칠 앓아누울 마련까지 해가며 애를 쓴다. 잔치가 끝나면 뭐가 빠졌다느니 뭐는 결례(缺禮)였다느니 타박을 받는 것도 며느리다. 이때 며느리는 잠깐 이「센터」에 들러 상담을 하면 그뿐. 일체를 대행해 준단다. 사회자, 국창(國唱), 가수,「밴드」를 지정하는 대로 불러주는 일에서 자가용을 빌려주고 촬영을 해주고, 녹음을 해주는 잔일까지 어떤「파티」건 도맡아 그 분위기까지를 책임지고 이끌어 주는 일에 자신을 갖게 됐고『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다』는 이 기발한「서비스」업의 착상은 우연한 연줄로 모 국영기업체의 이사회를 속리산에서 개최해준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닉슨」각료회의만큼은 호화롭지 않더라도 부부동반으로 명승지 찾아 벌인 이사회의「레벨」은「세단」은 전원 소유하고 있을 정도. 번저 최고의「딜럭스」한「버스」를 빌어 각자앞에 일체의 사무도구와 수건, 머리빗, 거울등을 세밀히 갖춘 간단한 사무용「백」을 놓아두었다. 「팀웍」조성을 위해 전원을 태우고「세단」은 빈차로 뒤따르는 여행에서부터 전원을「위밍·업」시켜 나갔다. 이사회가 진행되는 동안 조명,「백·뮤직」등을 적절하게 조절해오다 끝날때는「핑크·무드」를 조성하는 일까지「성공적인 연출」이었다고 흐뭇해한다. 『사실 5년동안 TV방송국 PD로 있으면서 배운 연출 솜씨 발휘였죠』 분위기에 약한 현대인의 약점을 파고든 연출법이 성공한 셈. 침실로 돌아 가기 직전에「핑크·무드」를 조성했다는 비결을 물었다. 『어느 노신사에게「선생님이 제일 처음 여성을 느낀 나이는 몇살때였읍니까」하고 묻습니다. 앞뒷집 단발머리 소녀, 같은 국민학교 여학생의 기억을 안가진 사람은 드물죠. 금방 노신사는 몇십년을 치올라가 소년인듯 얼굴이 붉어지죠. 그때「옆에 계신 부인을 돌아봐 주십시오」라고 얘기할 뿐이죠』 남성을 위한 모임이었더라도 끝에 가서는 여성 편에 서서 여성을 위하는 모임이 되게 하도록 매사를 매듭짓는다고 했다. 어느 회사의「파티」건 주최자는 집으로가서 그 부인과 한번쯤 의논하게 될 것은 뻔하다. 그렇다면 기막힌 상혼(商魂)에 안놀랄 수가 없다. 『그렇죠, 「서비스」를 파는 장중심으로 벌이는 장사가 잘된다는 것은 뻔하죠. 누구 만큼 돈을 벌 작정입니다』 이「바캉스」철을 맞아 내건 또다른「캐치·프레이즈」가 『여름휴가는 가족과 함께』. 남자들 끼리 가는 여행에 「가이드」를 하거나 「서비스」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장담도한다. 직원은 전부가 애처가여야 한다는 남다른 경영 방침도 쓰고있다. 전 직원이 도시락을 지참할 것도 솔선 수범하고 있는 사장이다. 도시락을 먹는 한낮의 한때 멀리서 아내의 정성을 음미하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연애 1년만에 결혼한지 1년이 지났지만 김(金)사장은 맞벌이 부인(조동현(趙東賢)·27)을 서울여상 영어교사로 내보내는 것도 경제적 뒷받침을 위해서가 아니라 흐트러지고 「루즈」해지기 쉬운 부인들의 행동에 미리 요(要)경계하기 위해서란다. 이 철저한「페미니스트」가 벌인 여성을 위한 사업이란 신부로서 신경을 써야 할 결혼준비 일체. 부인으로서 남편의 상담에 응할 수 있도록 직장 야유회「가이드」및 주관. 며느리나 부인이 주관할 각종「파티」대행. 그리고「패션·쇼」기획 및 진행이 그것. 여자가 준비해야할 일체를 자신이 애를쓰고 다녀도 못할 정도의 염가알선이 가능한 것은 직매처와 직접 손을 잡고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 외에 부정기적인 비상직원으로 「카메라·맨」, 녹음기술자들을 세사람씩 채용해놓았고 유명한 사회자, 일류 연예인 들과의 쉬운 「컨텍트」가 방송국 출신인 김(金)씨로서는 어렵지 않은일이라는 것. 2만원 짜리 옷한벌 보다는 20원어치 콩나물 값에 애착을 보이는 부인들의 심리를 이용해서 계산서에는 몇십원까지 정확하게 거스름을 붙이고 또 정확하게 거스름하는 계산방법도 쓰고있다. 고대(高大) 국문과 재학시에는 현역 연극인들과 연극을 했고 졸업후에는 KBS-TV, TBC-TV에서 사회교양「프로」PD로 일해오면서 익혀온 기막힌 연출 솜씨가「파티·디렉터」라는 국내 신종 직업에 눈을 돌리게 만든 것. 『한여름 큰일을 치러야하는 여성은 (75)3135로 전화「다이얼」을 돌리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거죠』 [ 선데이서울 69년 7/6 제2권 27호 통권 제41호 ]
  • [사설] 지방선거 겨냥 國調논란 치졸하다

    100일 남은 지방선거가 벌써 과열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중앙에선 여당의 ‘지방정부 심판론’과 야당의 ‘참여정부 심판론’이 한판 승부를 시작했다. 지방에선 ‘생계형’ 지방의원 희망자들이 난립해 갖은 연줄과 돈줄을 끌어대며 이전투구 양상이다. 도대체 누가 나라의 중심을 잡고 5·31지방선거를 깨끗하고 공명하게 치러낼지 걱정이다. 우리는 국정을 책임진 열린우리당부터 자제할 것을 촉구한다. 정동영 의장이 어제 취임 일성으로 “썩은 지방권력 10년을 심판하겠다.”고 했으나, 이는 적이 실망스러운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여당 대표의 책무는 지방선거 승리에만 있지 않다. 물론 이번 선거가 대선 전초전의 성격을 띠고 있고, 대권가도의 분수령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적어도 여당 대표라면 더 큰 틀에서 국정을 말하고 이끌어야 한다. 특히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된 듯한 언행은 당내의 박수는 몰라도 국민들의 박수를 받기는 어렵다. 국회에서 지자체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지방자치단체 비리 척결은 마땅한 일이나 국정을 논의해야 할 국회를 정쟁의 무대로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당의 지자체 공격이 지방선거용 대야(對野)공세임을 웬만한 국민들은 다 안다. 지자체가 썩었다면 이를 방치해 온 정부와 국회, 특히 여당부터 반성할 일인 것이다. 지난해 잇단 재·보선 때 지방차원의 선거임을 애써 강조하던 논리와도 배치되는 행보다. 한나라당의 윤상림·황우석 국정조사 요구도 치졸하긴 마찬가지다. 이들 사건은 아직 검찰 수사도 끝나지 않았고, 진상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정조사부터 하자고 드는 것은 여당 흠집내기에 불과하다. 역시 거둬들여야 한다. 지금 산업현장에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법안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비경제활동인구가 1500만명을 넘어선 가운데 비정규직조차 잡지 못한 청년실업자가 즐비하다. 여야는 국민을 호도하는 국정조사 공방을 접고, 민생현안에 눈을 돌려야 한다. 선거 과열을 부추기는 일체의 언행을 중단하고, 지방선거를 지방에 돌려줘야 한다.
  • [사설] 노인 돈 빼돌리며 기간당원 늘린 與

    서울 봉천동의 노인 156명이 자신도 모르게 열린우리당원으로 가입됐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의 통장에서 달마다 1000∼2000원씩 몇 달째 당비로 빠져나간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고 한다. 지방선거 공천 경쟁의 혼탁상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니 놀랍고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더욱이 공명선거를 선도해야 할 여당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그 책임을 더욱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사건은 당원 가입과 당비 납부가 본인 모르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선거법, 정당법을 위반한 명백한 범죄행위다. 보도된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피해자들의 신상기록과 계좌번호가 빼돌려졌다면 신용정보보호법 위반이기도 하다. 행정당국이 개인 신상정보를 어떻게 관리하는 것인지, 언제든 피해자가 될 처지의 국민들로서는 그저 불안하기만 하다. 피해자 대다수가 저소득층 노인들이라는 점에서 도덕적으로도 용납하기 힘들다. 마땅히 사법당국은 수사에 즉각 착수해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우리는 여야 정치권의 책임 또한 묻지 않을 수 없다. 열린우리당 비상집행위원인 유선호 의원은 어제 “미꾸라지 한마리가 50만 기간당원의 명예를 훼손한 사건”이라고 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는 발언이자, 기간당원제 뒤에 숨은 정치권의 인식을 단적으로 내보인 발언이다. 어떻게 이번 사건이 미꾸라지 한마리의 분탕질인가. 그렇다면 지난해 말 당비 대납 혐의로 대전지검에 구속된 열린우리당 소속 광역의원 출마희망자 2명은 또 누구인가. 기간당원 상당수가 출마희망자들의 금품과 연줄에 묶여 급조된 ‘종이당원’임은 그동안 여야의 경선과정에서 충분히 드러났다.2004년말 7만명이던 열린우리당 기간당원이 1년새 50만명으로,3800명에 불과하던 한나라당 책임당원이 35만명으로 늘어난 현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기간당원제를 국민들에게 점수나 따려는, 허울 뿐인 제도로 놔둬서는 안 된다. 지금대로라면 정치문화의 왜곡과 선거 혼탁만 가중시킬 뿐이다. 미꾸라지 운운하며 사태를 호도하지 말고 기간당원제의 올바른 착근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 악연을 끊어라

    파키스탄에선 내년 1월26일까지 연을 제작·판매하거나 날리다가 적발되면 최고 징역 6개월의 ‘엄벌’을 받게 된다. 파키스탄 대법원은 연의 제작·판매 및 연날리기를 금지한 지난 10월의 판결을 내년 1월26일까지 연장키로 10일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의 1차적 이유는 연날리기가 폭증하면서 사고가 잇따르자 이를 막기 위해 극단적인 대책을 강구하고 나선 것. 파키스탄 동펀자브지방의 수도 라호르에선 매년 ‘바산트’라는 봄맞이축제가 열린다. 축제가 열리면 이 지역에선 수만명이 지붕 위나 운동장에서 연날리기를 하는데, 연날리기 도중 금속 연줄에 다치거나 지붕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올해 2월 바산트기간에만 19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다쳤을 정도다. 하지만 그 이면엔 ‘종교분쟁’의 성격도 있다. 이슬람 강경론자들은 바산트를 돈낭비하는 힌두교 축제로 간주, 반대하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는 연날리기를 부분 또는 전면 금지하거나 연날리기를 들판이나 확트인 공간에서만 허용토록 제한하는 법 제정도 계획하고 있다. 라호르(파키스탄) AP 연합뉴스
  • [줄줄 새는 국가 R&D예산] 평가위원과 ‘연줄’이 연구과제 선정 좌우

    [줄줄 새는 국가 R&D예산] 평가위원과 ‘연줄’이 연구과제 선정 좌우

    “국가 R&D 연구비만한 ‘눈먼 돈’도 없죠.” 국가 R&D 사업에 대해 좀 안다는 관계기관 공무원들은 가장 쉬운 ‘눈먼 돈’으로 R&D 예산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대학연구비 횡령 또는 유용비리가 단순히 집행기관인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연구과제 선정과정에서부터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소관 부처에서 기획과정을 거쳐 연구과제 제안요청서 공고를 하게 되면, 접수된 계획서를 부처 산하의 관리기관에서 선정하게 되는데 과정에 있어서 투명성이나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국가청렴위원회 조사관 A씨는 12일 “국내 기술분야 권위자가 한정돼 있다 보니 관리기관 평가위원들과의 인맥이 상당히 작용한다.”면서 “연구과제를 따기 위해 대학 등에서 관리기관에 줄을 대려고 혈안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각 부처에서 R&D사업을 기획할 때 자문역으로 참여했던 담당자가 연구자로 선정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일례로 지난 2001년부터 3년간 산자부의 R&D 기획과정에 참여했던 연구자가 공모에 선정된 비율은 무려 96%에 달한다. 이미 개발된 기술과 비슷한 연구과제를 이름만 바꿔 내도 선정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중복개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그릇된 ‘온정주의’로 인해 관리시스템도 전무하다. 감사원의 감사관 B씨는 “각 관리기관에는 사후정산팀이 있어 연구개발비가 제대로 쓰였는지를 점검하도록 돼 있는데, 영수증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형식적인 조사만 하니 연구비 유용비리가 터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수증 내역만 확인해도 부당집행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단순조사조차 안 한다는 것이다. 사후평가도 유명무실하다. 국가예산이 지원된 만큼 연구결과를 평가해, 성과가 없을 경우 제재조치가 따라야 하는데 기관평가는 그야말로 형식적이다. 심할 경우 연구당사자가 자신의 연구결과를 평가하기도 한다.2003년 당시 국무조정실 소속이었던 기초기술연구회는 위탁연구를 맡고 있던 S대학의 H 교수를 평가위원으로 위촉했다가 감사에 적발되기도 했다.R&D 관리실태 감사를 담당했던 감사관 C씨는 “평가기관에서 이해관계자에게 평가를 맡기는 사례가 많고,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 보니 수치상으로는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R&D 성공률이 높게 나온다.”며 “하지만 정작 상용화되는 기술은 거의 전무하다.”고 꼬집었다. 강혜승기자 1fineday@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교보생명-故신용호 창립자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교보생명-故신용호 창립자家

    “이 사통팔달, 한국 제일의 목에 방황하는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줍시다. 와서 사람과 만나고,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합시다. 이곳에 와서 책을 서서 보려면 서서 보고, 기대서 보려면 기대서 보고, 앉아서 보려면 앉아서 보고, 베껴 가려면 베껴 가고, 반나절 보고 가려면 반나절 보고, 하루종일 보고 싶으면 하루종일 보고,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고 사지 않아도 되고, 사고 싶으면 사 들고 가도 좋습니다.”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대산(大山) 신용호’라는 평전에서 당시 세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싸라기 땅인 종로 1가 1번지 교보빌딩 지하에 교보문고를 세운 일에 대해 이같은 논리로 동의를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한국의 미래를 모토로 만든 교육보험에도 청소년들의 지적 수준과 나라의 성장은 비례한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창업 이념도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이다. ●독립운동 집안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 신 창립자는 1917년 8월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솔안 마을에서 부친 신예범 선생과 모친 유매순 여사의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며 잦은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가장 노릇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곱살 때는 폐병에 걸려 죽는다는 선고도 받았다. 열살 즈음 병이 나았지만 학교를 가진 못했다. 형편이 어려운 데다 형들이 각종 애국 운동으로 집안을 돌보지 않아 어린 마음에도 그가 살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는 대신 ‘책속에 길이 있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밤에는 책을 읽었다. 동생의 책은 물론 주변에 보이는 책은 닥치는 대로 가져다 보았다. 겨울엔 잠과 싸우기 위해 방에 불도 때지 않고 책을 읽다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당시 ‘천일독서’를 목표로 각종 위인전, 철학서, 고전, 사서를 섭렵했다. 비록 학교 문턱에는 가지 못했지만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독서철학으로 스스로 내실을 다졌다. 함께 교보생명 창업을 도운 막내 동생 신용희(83) 전 회장을 제외하고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애국운동에 몸담았다. 큰형인 고 신용국옹은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광복 후에는 청년 노동운동을 했다. 그 큰아들인 신동재씨가 2000년까지 교보의 부동산관리 전문 자회사인 교보리얼코의 회장을 지냈다. 둘째 형 고 신용율씨도 항일운동에 몸담았으며, 그의 둘째 아들 신평재(67)씨가 현재 교보생명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일은행 상무로 재직하다 1991년 제의를 받고 교보생명 사장 등을 역임했다. 셋째 형 신용원옹은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항일음악가로 활동하다 납북했다. 넷째 형 고 신용복옹은 일제 당시 조선생명지사장을 지냈다. 막내 동생 신용희 전 회장은 목포상고를 나와 산업은행에서 일하다 한국전쟁 이후 줄곧 신 창립자를 도와 함께 일했다.1967년 교보생명 창립 이후에는 30년간 교보에 몸담으며 부사장, 회장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인 신인재(39) 보드웰 인베스트먼트 사장(8%)과 함께 교보생명 지분을 13.25% 갖고 있다. 신 사장은 고 신 창립자로부터 경영권을 승계받은 큰아들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길을 고집했다. 신 사장은 최근 이동통신사에 솔루션을 공급하는 코스닥 상장업체 무선인터넷솔루션 회사인 필링크의 대표이사 직함도 얻게 됐다. ●교육열을 사업으로 연결한 기지…교육보험의 탄생 문학가를 꿈꿨지만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에 뜻을 세웠다. 약관이 되던 해에 서울로 갔고 이어 1936년 중국에서 양곡 수송 사업을 벌였지만 광복과 함께 10년간 닦은 기반을 버리고 빈손으로 귀국했다.1946년. 귀국후 첫 사업으로 전북 군산에 ‘민주문화사’란 출판사를 냈으나 외상 책값이 회수되지 않아 간판을 내렸다. 그렇게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한 뒤 문득 중국에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논 한 뙈기 없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강한 교육열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무형원자재인 것이다.‘생·로·병·사’중 유일하게 보험이 빠져 있는 ‘생’ 부문에 교육보험을 끼워넣어 상품화하기로 했다. 당시 보험에 대한 인식은 형편 없었다. 일제시대 보험은 수탈 방식이자 보신(保身) 방편이었다. 더욱이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도 미치지 못해 보험에 들 여유가 없었다.1954년 정부가 보험업을 재개시켰으나 기존 생명보험 회사들이 대부분 휴면상태에 있을 만큼 보험업은 쑥대밭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험난해서인지 국민의 80%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그의 재기가 번뜩였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찾아가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을 들면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설득한 것이다. 창업 당시에는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지 못했다.1958년 종로1가 60번지 2층짜리 건물에서 직원 46명과 함께 먼저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교육보험이란 업종상 생명보험으로 분류돼 상호에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을 수 없었다. 교육열을 자원으로 만든 상품이었고 당시 생명보험에 대한 인식도 열악해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1958년 1월 창업한 뒤 관계 공무원을 끊임없이 설득, 같은 해 7월 상호변경 승인을 얻어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을 출범시켰다. ●슬하 2남2녀의 혼맥 1943년. 중국에서 한창 양곡수송 사업을 크게 벌이던 신 창립자는 당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그를 맞아주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일 모레가 네 장가가는 날이다.”는 아버지의 한마디. 결혼을 시키려고 거짓 소식을 보낸 것이다. 당시 남자 26세는 혼기를 놓친 나이였지만 그는 벌인 사업 때문에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도망칠 마음까지 먹었다고 고백하며 배려를 바랐으나 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눕는 바람에 결혼식을 치렀다. 부인 유순이(81)씨는 당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전수학교까지 마친 명문가 출신 규수. 사업에 전력을 쏟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남편을 탓하지 않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묵묵히 2남2녀를 길러냈다. 자녀들의 혼사도 그와 비슷하다.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중매 결혼이다. 명문 대가와의 정략 결혼은 눈에 띄지 않는다. 큰딸 신영애(56)씨는 전 서울대학교 의과대 의학과 마취과학교실 교수 함병문(58)씨와의 사이에 현진(32), 지훈(31), 세훈(25) 등 2남 1녀를 두었다. 신영애씨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지분 평가로 지난 2004년부터 단번에 350억원대 자산을 보유, 연말마다 언론에서 선정하는 여성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둘째 딸 신경애(54)씨는 법조인에게 시집가 1남1녀를 낳았다. 남편 박용상(61)씨는 서울대 법대에서 박사까지 마친 뒤 사법시험에 합격,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로 활약한 뒤 방송위원회 위원,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국회 공직자윤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변호사박용상법률사무소를 운영중이다. 박용상씨의 큰형 용설씨는 내외빌딩관리㈜ 대표, 동생 용삼씨는 내외엔지니어링 대표다. 고 신 창립자의 자리를 이어받은 큰 아들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은 부인 정혜원(48) 봄빛여성재단 이사장과의 사이에 중하(24)·중현(22)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 출신인 신 회장은 불혹이던 지난 1993년 교보에 발을 들여놓은 뒤 현재 직계 중 유일하게 교보에서 일하고 있다. 정 이사장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왔다. 막내 신문재(44)씨는 이정숙(44)씨와의 사이에 딸 혜진(18)을 두고 있다. 형제들 중 유일한 연애 결혼이다. 미국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1991년부터 2005년 8월까지 광화문 교보문고내 문구 액세서리 음반 팬시용품 등을 판매하는 400여평 매장의 문보장을 비롯해 전국 6개 교보문보장을 운영해 왔다. 교보문고가 직접 문보장을 운영하기 위해 신씨로부터 지난 8월 문보장 사업권을 회수했다. 현재 새 사업을 구상중이다. ●지독한 완벽주의와 파격 인사 고 신용호 창립자는 지독하다 싶을 만큼 완벽하고 집요하다는 평을 받는다. 땅을 고를 때도 좋은 날, 궂은 날, 비온 다음날 등 두루 살피는 완벽주의자다.77년 명예회장,85년 창립자 등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1990년대 후반까지 신입사원 면접에 직접 들어왔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나도 실적이 저조해 본사 부장, 실장, 중역까지 나서 손을 들라고 권하자 그들을 나가게 한 뒤 ‘급료는 후불로 주겠다.’는 광고를 통해 간부 사원을 다시 구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창업 10년 만인 1967년 회장으로 물러난 뒤 2000년 아들 신창재씨가 교보생명 회장에 취임하기까지 33년간 무려 사장이 19번이나 바뀌었다. 평균 수명이 1.7년이었다. 경영 안정을 위해 최고경영진을 쉽게 바꾸지 않는 업계의 관행과는 다른 것이다. 교보의 임원 인사는 상식을 뛰어넘어 기발하고 파격적이란 평이 나오는 이유다. 신창재 회장의 인사 스타일도 재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2년 5월 취임한 장형덕 대표이사 사장의 경우 사장직을 폐지하는 형식으로 취임 10개월 만에 퇴임시켰다. 단일 지도체제가 더 효과적이라며 사장을 없애고 대신 부사장 3명을 임명해 집단경영체제로 개편했던 것. 그때부터 ‘대표이사 회장’ 밑에 ‘대표이사 사장’ 없이 ‘대표이사 부사장’ 체제로 가고 있다. 이어 지난 2004년 2월 박성규 부사장을 선임,‘집단경영체제’는 다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맨손으로 생나무를 뚫어라’ 고 신용호 창립자는 ‘죽고 나면 손해’란 보험에 대한 당시 인식을 바꾸는데 초점을 맞춰 교육보험 1호인 ‘진학보험’을 세계 처음 내놓았다. 죽어야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부모가 돈을 적립해 자녀가 초·중·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마다 학자금을 주는 상품이다. 먼저 단체들을 공략했다. 군인 단체 저축성 보험인 일명 ‘화랑계약’을 고안했다. 잦은 군의 이동에 탈락계약이 늘어 성과는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군 이동에도 추적·관리되는 시스템을 도입,1967년 육군과 170억원의 단체 계약을 맺었다. 파죽지세로 해군·한전 등 대형 단체들과 꾸준히 계약하는 개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판매 창구도 강화했다. 종로기독청년회관(YMCA)에서 대학생을 모아 보험강좌를 실시한 것을 계기로 대학지부를 설치, 대학생도 판매 채널로 끌어들였다. 지방유지를 직접 찾아다니며 기관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상품에도 그의 기지가 엿보인다. 암 상품은 그가 처음 개발했다.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성인병도 하나씩 보험상품으로 만들었다. 보험업계 전산화 발상을 추진한 최초의 인물도 바로 그였다.1974년 학자금 선지급 업무를 처음 전산화했고 “컴퓨터를 모르면 간부가 될 수 없다.”며 전 사원을 상대로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인증제’도 실시했다. 그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전반은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과정’이고 후반은 ‘생나무 뚫는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인 과정’이라 비유했다. 인생은 장애의 연속이지만 강한 정신력만 있다면 아무리 높고 힘든 목표라도 달성할 수 있다는 게 그만의 철학이다. 이같은 열성과 집념으로 1958년 당시 6대 생보사 중 막둥이로 태어난 교보생명은 창립 5년 만에 보유계약 56억원으로 업계 3위,1964년엔 보유계약 100억원 돌파로 업계 2위에 오른 뒤 1967년 설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섰다.‘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인생의 다른 한 축…교보문고 교육 보험은 대세가 아니었다.80년 들어 경제성장과 함께 늘어나는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절이 오면서 보험만으로 교육비를 해결할 수 없게 됐다. 변하는 고객 욕구에 따라 양로보험, 종합보장생활보험 등 일반 생명보험 상품의 비중이 커졌다. 교육보험만으로 경쟁력이 떨어지자 1995년 ‘교보생명’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삼성생명의 약진으로 교보는 1974년부터 업계 1위에서 2위로 밀려났다. 자산이 늘어나면서 관련 계열사도 속속 설립했으나 모두 보험으로 맡긴 고객의 돈을 운용하기 위한 금융 계열사였다. 부동산관리 전문회사인 교보리얼코(1979), 교보증권(1994) 등 총 9개 자회사를 세우면서 교보를 오늘날 35조원 규모의 금융 자본으로 성장시켰다. 그 중 금융과 동떨어진 업종이 하나 있다. 바로 교보문고(1980)다. 교육을 통한 민족부흥을 창업 이념으로 삼고 있는 만큼 따지고 보면 업종의 본질은 같다는 설명이다. 1980년 종로 1가 1번지에 사옥 교보빌딩이 세워지자 그는 지하에 서점 설립을 제안했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며 지하아케이드 자리 쟁탈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간부들은 채산성이 약하다며 서점이 들어서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냈고, 손해가 나면 보험회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당시 허가관청인 재무부도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 회사가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 자리에는 당연히 으리으리한 고급상가를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값진 땅에 책방을 크게 열어 청소년과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토록 한다면 그 효과가 어느 정도나 될지 상상해 보시오.” 손해가 나더라도 청소년의 정신역량을 키우는 일인 만큼 자신이 떠맡겠다고 설득했다.1985년에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학자들을 위해 80만종의 세계 논문도 공급했다. 지방사옥이 세워질 때마다 학생과 시민들이 교보문고 지점 설치를 요구했을 정도다. 대전, 성남, 대구, 부산, 부천, 강남 등에 속속 지점을 열었다.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찾는 고객 수는 일평균 4만 5000여명, 연간 1500만명에 달한다. 삶의 두 축이 교보생명과 교보문고라고 지적했을 정도로 애착도 컸다. 그러나 말년을 맞아 또다시 병마가 찾아 왔다.77세가 되던 1993년. 회사 정기건강 검진에서 간 기능에 석연치 않은 증후가 발견됐다. 담도암이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기운 있을 때 여행을 다녀오라는 처방을 내렸다. 사형 선고였던 셈이다. 그는 암과 싸우며 여생을 보내느니 살든 죽든 결판을 내겠다고 마음먹고 불가능하다는 담도암 수술을 감행했다. 수술후 그는 중환자실에서 목에 구멍을 뚫고 2개월이나 암흑 속에서 지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재활물리치료 반년 만에 골프장에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근력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90년대 후반까지 업무를 보고받는 등 경영에 관여했다. 그러나 8년 뒤 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몸이 약해졌다. 결국 2003년 9월 19일 오후 6시1분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86세였다. jhj@seoul.co.kr ■ 신창재회장과 정혜원 여사 “내조만 하며 살아온 탓에 사회공헌 사업은 꿈도 꿔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제의로 사회공헌 사업을 시작하게 됐지요. 내조와 아이들 뒷바라지에도 벅차지만 소명으로 여기며 열심히 하고 있어요.”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의 부인 정혜원(48)씨는 요즘 사회활동에 바쁘다.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해온 전업 주부였다. 남편 신 회장으로부터 사회공헌 사업을 해보라는 제의를 받고 2004년 4월 성매매 피해여성 보호단체를 지원하는 봄빛여성재단을 창립,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순전히 남편 신 회장의 사재로 시작한 사회공헌 사업이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 사무실로 매일 출근하면서도 아이들이 완전히 홀로서기할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걱정이 많다. 그는 한사코 취재를 거부했다. 사회 활동은 하고 있지만 언론 대응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인 그는 소탈하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으로 책임감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중매를 통해 남편을 만났다고 밝혔다. 평범한 집안에서 데려온 며느리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고 신용호 창립자의 수수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남편 신 회장이 양복도 맞추러 갈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고 했다. 실제로 신 회장은 아버지의 유업인 교보문고와 교보생명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아버지만큼 골프를 좋아하지만 교보로 옮긴 이후 거의 필드에 나가지 못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교보생명은 지난 2000년 5월 신 회장 취임과 함께 ‘질´경쟁을 선언하면서 업계 2위에서 3위로 밀려난 뒤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교보문고는 교보생명이 증자해 전자책 등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지식문화 전문회사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포부다. 출판업이 사양산업으로 전락하다 보니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교보문고는 현재 부채비율이 416%로 은행으로부터 신규 여신이 어려운 처지다. 교보생명은 기존 주주가 여력이 없어 제3자 배정 방식으로 5000억원을 증자할 계획이다. 다른 생보사보다 상대적으로 지급여력비율(160%)이 낮다. 자기자본 확대가 이유다. 그러나 2대 주주인 자산관리공사가 난색을 표명하고 있어 문제다. 자산관리공사 소유·관리지분(41.26%)의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 상태에서 잘 팔릴 수 있도록 협조해야 증자에 동의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업계는 신 회장이 과연 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교보생명의 한 임원은 신 회장에 대해 “아버지를 닮은 완벽주의자”라고 말했다. 경기고,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로 살아오다 불혹이던 지난 1993년 아버지 고 신용호 창립자의 뜻에 따라 그간 배운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대산문화재단 이사장으로 교보생명에 발을 들여놓았다.1996년 11월 교보생명 부회장,2000년 5월 교보생명 회장으로 취임한 뒤 변화와 혁신을 기치로 삼고 전력 질주 중이다. 박성규 교보생명 부사장은 “과연 의사 출신이 기업을 어떻게 경영할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를 보면 답이 나온다.”고 전했다. 의사 출신답게 깊은 통찰력과 분석력을 갖춘 데다 책을 많이 읽는 덕분에 멀리, 넓게 보는 안목이 있다고 평가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정조7년(1783) 1월15일, 인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정감록’을 되뇌이던 역적들을 일망타진하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국왕에게 축하인사를 올렸다. 난리가 토벌되면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이날 정조는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웬만한 죄인은 다 풀어주라는 것으로, 이 역시 뒤숭숭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상투적인 조치였다. 왕은 포고문에서 문제의 정감록 사건을 일으킨 문인방과 이경래 등 주범들의 죄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역모사건의 전모를 백성들에게 간단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실록, 정조 7년 1월15일 정미) 먼저 사건의 중심에 있던 문인방의 죄를 성토한다. 문인방은 삿된 술수를 써 백성들을 현혹하였다고 했다.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비슷하다고 했다. 매우 심한 과장이었다. 그 옛날 장각이 이끈 황건적은 중국 한나라를 기우뚱거리게 만들었다. 문인방 사건이 미수에 그친 것과는 천양지차다. 정조는 문인방이 각지를 떠돌며 힘센 장사를 모으려 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명종 때 유명한 도적 임꺽정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역시 과장된 표현이다. 문인방은 백천식, 김훈 등과 짜고 상주의 백학산 아래 만든 소굴에 머물렀다. 이 사건이 발각된 것은 그들과 한통속이던 박서집이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 체포된 문인방은 전주 감영에서 취조를 받았고, 곧이어 서울로 붙들려가 본격적인 신문을 받았다. 그는 역모 사실을 모두 실토했다. 군량을 담당할 사람, 난리를 일으킬 때 선봉장을 맡을 사람 등 가담자들의 역할은 이미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는 도원수도 있었고, 대선생(大先生)으로 불리는 선비까지 존재했다. 문인방 사건 때 도원수로 내정된 이는 이경래였다. 이 사건이 뒷날의 여러 정감록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송덕상(宋德相)이란 유학자를 ‘대선생’이라 떠받들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는 점이다. 정조 즉위 초 산림(山林·재야에 묻혀 있던 큰선비)의 중심인물로 천거돼 조정에서 크게 활약한 송덕상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각별히 주목된다. ●산림 송덕상과 권신 홍국영 문인방 사건으로 조정이 한 차례 홍역을 겪기 5년 전이었다. 대대로 충청도 회덕에 살고 있던 성리학자 송덕상은 산림으로 천거되었다. 정조는 송덕상의 학덕(學德)에 크게 감복한 듯, 그의 건의라면 무엇이든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산림이란 명목으로 향리에 묻혀 지내던 큰선비들이 일시에 높은 벼슬에 등용되곤 했다. 그런데 영조 이후로는 산림이란 카드가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정국수습용 임시방편으로 활용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마치 1970∼80년대 한국의 국무총리 자리가 그러했듯, 산림은 일종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가끔 예외도 있었다.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며 정국을 홀로 이끌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다. 그는 산림으로서 노론의 명실상부한 우두머리였다. 산림 송덕상은 바로 송시열의 자손이었으나 그 처지는 자기 조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송덕상은 정조 즉위에 공을 세운 홍국영 일파의 추천으로 조정에 등용된 만큼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했다. 정조 3년(1779), 이조참판 송덕상은 홍국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김구주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실록, 정조 3년 6월18일 경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었다. 그는 영조 말기 세손(世孫·정조)의 집권을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물리치고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홍국영은 수년간 반대파를 모두 내쫓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정조의 신변보호를 구실로 숙위소를 창설해 직접 그 책임을 도맡으면서 더욱더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국영의 권력은 날로 비대해졌고, 과거에 그의 정적이었던 정후겸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홍국영을 ‘대후겸(大厚謙)’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홍국영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자기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장차 외척으로 세력을 굳히려 했다. 하지만 일년 만에 누이 원빈이 병사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꾀를 내어 왕제(王弟) 은언군 인의 아들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훗날 세자로 정할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담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였다. 정조4년(1780)에는 왕비 김씨를 살해하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 일로 홍국영은 실각했고 그 여파는 송덕상에게도 미쳤다. 송덕상은 재빨리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자기의 사이가 별것 아님을 애써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홍문관 교리 서유성 등 홍국영의 반대파들은 송덕상이 겉으론 산림으로 행세하면서 실제는 홍국영에게 아부를 일삼아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왕세자 책봉 건에 관여하는 등 수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맹렬히 규탄했다.(실록, 정조 5년 4월28일 신미) 결국 송덕상 역시 조정에서 물러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로선 억울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이런 식의 정계 개편은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늘 되풀이되어 온 일이다. ●송덕상의 제자 문인방 뜻하지 않은 스승의 정치적 몰락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미래 역시 어두웠다. 보통 스승이 중벌을 받으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미래를 기약하게 된다. 일단 죽림으로 들어간 젊은 선비들은 시서(詩書)를 연마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운이 좋아 언젠가 관리로 등용되기만 하면 왕에게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복권과정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송덕상의 제자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문인방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정감록’을 빙자해 난리를 꾸몄다. 과연 제자들이 스승 송덕상을 위해 역모를 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송덕상과 역적들 사이에 사제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인지,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송덕상의 몇몇 제자들은 군사적 행동을 준비하다 발각돼 역적으로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송덕상 역시 옥에 갇힌 것이 사실이다. 노론들 사이에서 박학다식한 큰선비로 통했던 송덕상은 여러 달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통을 받다 드디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실록, 정조 7년 1월7일 기해) 다른 역모사건들도 그렇지만 이 사건 역시 피의자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변호하며 남긴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있다면 취조문서가 전부다. 사건을 수사한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완전히 왜곡하였을 가능성마저 적지 않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문인방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겠다. 송덕상의 제자 신형하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며 스승을 변호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로 부각되어 신형하는 마침내 전라도의 한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송덕상을 추종하던 황해도 해주의 선비 박서집은 시를 지어 신형하의 절의를 기렸다. 그 시가 또 문제되어 박서집도 섬으로 귀양을 갔다. 박서집은 유배지에서 우연히 문인방이란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다. 평안도 출신인 문인방은 놀랍게도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한 처지를 생각해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물론 박서집은 그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박서집은 겁이 났다. 그는 섬에 파견돼 유배자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인방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였다. 그 섬은 전라도 관할이어서 깜짝 놀란 전라관찰사는 급히 영을 내려 관련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전주와 서울에서 혹독한 신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인방은 자기가 역모를 꾸민 사실을 시인하였다. 함께 붙들려온 백천식도 반란혐의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밀고자 박서집과 함께 일의 성사를 기원하며 하늘에 축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평민지식인으로 술사이기도 했던 문인방은 ‘정감록’의 한 구절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때 ‘여섯 글자’의 흉악한 예언이 문제로 부각되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구절은 문인방이 소지했던 ‘경험록’이란 예언서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 현재 ‘경험록’이란 책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사건 당시 문인방은 모두 4종류나 되는 예언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이른바 비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당류 이경래는 강원도 양양 임천리에 살며, 도창국은 평안도 영원 내락림에 있고, 김정언과 오성현은 함경도 안변에 거주하고, 곽종대는 평안도 순안에 살며, 이밖에 김훈과 백천식이 또 있습니다. 만일 난이 성공하게 되면 대선생으로 청계 선생을 모시려 하는데, 이는 송덕상이며 그 손자 송계유는 지금 나이 28세로 저와 마음을 합해 역모를 꾀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문인방처럼 고향이 평안도인 사람도 있지만 함경도 출신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밖에 강원도 출신도 역모에 참여했다. 아울러 송덕상의 집안사람들도 일부 포섭돼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송덕상 일가가 역모사건에 참여하였을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회덕에 세거하던 송씨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손꼽히는 명문 양반이었다. 설사 그들이 송덕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사회에서 그들이 향유한 특권적인 지위는 이런 정도의 일로는 무너질 리가 없었다. 따라서 송덕상의 손자가 모의에 참여했다는 문인방의 진술은 신문과정에서 억지로 강요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송덕상의 제자는 주로 서울과 충청도에 거주했을 텐데, 하필 조선사회의 변경인 서북지방과 강원도 해안지방의 몇몇 제자들만 스승을 위해 난리를 꾸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의 역적모의 사건의 주모자로 분류된 문인방은 힘세고 날랜 평안도 출신의 장사 도창국과 함께 강원도 양양의 선비 이경래와 친했다. 이경래 역시 송덕상의 제자였는데 정조5년(1781) 9월 문인방 등이 이경래를 찾아갔을 때 이경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스승님 송덕상이 조정에 죄를 얻어 뜻밖에 멀리 귀양을 가 계시므로 지금 사태가 급해졌다. 빨리 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다. 문인방 그대가 인재를 잘만 모집하면 일이 성사된 다음 장수든 정승이든 여하튼 높이 등용하겠다.” 문인방 등은 그 말에 기뻐하며 이경래를 도원수로 삼고,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정했다. 이경래는 양양에 일가친척이 많은 데다가 노복도 숫자가 많으므로, 일단 유사시에 난을 일으켜 양양군수를 잡아 죽이고 무기와 병사를 확보하는 것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이웃 고을인 간성을 공격하고 강릉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뒤 반란군은 원주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서울로 진격해 동대문을 거쳐 대궐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성공한 다음 그들은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책봉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란을 일으킬 시기는 갑진년(1784) 7월과 9월 사이로 정해졌다. 이경래의 집안은 강원도 양양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이경래의 친척 공조참의 이택징은 우선적인 포섭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택징은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해 규장각 운영을 강도 높게 비난한 적이 있다.“규장각은 전하의 사적인 관서에 지나지 않고, 규장각의 관리들은 전하의 사사로운 신하일 뿐입니다.” 이처럼 정조의 정책적 고려에 날카롭게 맞선 인물이었다. 문인방 등은 이런 이택징을 서둘러 합류시키고, 그들을 지렛대 삼아 서울의 여러 양반들을 역모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몇 해 전에 거세된 홍국영 일파를 비롯해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하며 울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던 양반들이 많았다. 조선은 양반의 국가라, 양반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 초년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무신란(1728)을 비롯해 몰락한 양반들이 반란을 꾀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적(政敵)들에 의해 완전히 조작된 역모사건도 없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어난 인조반정(1622)은 양반들이 반란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 본보기였다. 그런 점에서 문인방과 이경래 등이 무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문인방 사건의 경우 역모사건이 새롭게 달라진 측면도 있다. 권좌에서 밀려난 제일급의 양반들이 서북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평민지식인들 또는 술객(術客)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모의과정에서 평민지식인들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볼 때 이경래나 이택징과 같은 일급 양반들보다 평민지식인 문인방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은 ‘정감록’을 포함한 각종 예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문인방은 양양과 서울은 일단 이경래에게 부탁해 놓고 자신은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힘이 센 장사들을 다수 모집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그가 관헌에 체포되기 직전 충청도 진천에 머물고 있던 것도 장사를 모으기 위해서였다.(실록, 정조 6년 11월20일 계축) ●평민지식인이 송덕상 같은 양반과 결탁하다니 억울하게 멸시받던 평민지식인들로서야 송덕상과 같은 명문가 출신의 양반과 사귀고 싶어도 도저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지만,18세기 조선사회의 실상과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는다. 문인방 사건 때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용케 법망을 빠져나간 평민지식인들 중에 이규운이란 사람이 있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훈장노릇을 하던 평민지식인이었다. 그런 이규운이 산림 송덕상과 서로 가까워진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 비롯되었다. 정조 초년 이규운은 강원도 통천에 있었다. 통천은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머물던 곳이라 송시열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로 이규운은 송덕상을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강원도 김화 수령으로 재임하던 송덕상의 아들까지도 사귀게 된다. 어렵게 대갓집과 연줄을 대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규운에게 돌아올 몫은 아무 것도 없었다. 쥐꼬리만 한 벼슬 한 개도 차지할 운이 아니었다. 이규운은 본래 평안도 선천 사람이었고 진짜 이름은 오도하라고 했다. 이규운은 고향을 떠나 강원도를 떠돌았다. 그는 서울 양반 이찬이란 사람을 대신해 과거시험 답안지를 써주었는데 그 덕에 이찬은 진사가 되었다. 제 이름을 걸면 아예 과거시험장 출입이 불가능한 이규운이었으나 그가 대필해준 글로 다른 사람은 진사가 되었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허탈과 공황 속에서 이규운은 ‘정감록’을 읽었고, 반란을 꿈꾸었다. 이규운은 송덕상 같은 양반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술객에게 송덕상의 명예회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부시 또 “김정일은 폭군”

    부시 또 “김정일은 폭군”

    |도쿄 이춘규특파원|조지 부시(얼굴) 미국 대통령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다시 ‘폭군’으로 지칭해 북한측과의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고 일본 언론이 7일 보도했다. 부시 대통령은 브라질을 방문 중이던 6일(현지시간)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젊은 기업인들과 면담하면서 일본의 민주주의를 평가하던 끝에 “일본은 미국에 있어 북한의 폭군에 대처하는 절친한 친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폭군’은 김 위원장을 지칭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언론은 전했다. 부시 대통령의 ‘폭군’ 발언은 자신의 부친이 일본군과 싸운 적이 있는데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현재 “친구 중의 한명”이고, 이는 일본이 ‘일본식 민주주의’를 확립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부시 대통령은 또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소수파들도 의견을 표명할 수 있으나 “전제국가에서는 폭군과의 연줄이 없는 한 소수파에 권리는 없다.”며 북한의 상황을 거듭 비판했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4월 기자회견에서 김 위원장을 ‘폭군’ ‘위험한 사람’ 등으로 비난했고 북한 외무성은 부시 대통령을 ‘불망나니’로 응수, 험악한 설전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부시 대통령의 이번 ‘폭군’ 발언이 9일 열리는 5차 6자회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고 일본 언론은 지적했다. taein@seoul.co.kr
  • [서울광장] ‘코드인사’ 오해 벗으려면/육철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코드인사’ 오해 벗으려면/육철수 논설위원

    인맥을 알아보는 데는 상호연결성을 연구한 스탠리 밀그램의 ‘6단계 분리이론’이 자주 등장한다. 이 이론을 보면 한 사람(1단계)이 친구 100명(2단계)을 사귄다고 가정할 때 단순 계산으로 3단계에서 1만명이 연결되고,4단계 100만명,5단계 1억명,6단계에서는 100억명으로 이어진다. 이 방식대로라면 세계인구 65억명도 본인 빼고 다섯 단계만 지나면 모두 연결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3.6명만 건너면 전 국민이 연결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세 다리 반만 거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면 온 나라가 가까운 인맥으로 형성된 셈이다. 그래서 혈연·지연·학연을 따지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싶다. 참여정부 들어 걸핏하면 ‘코드인사’라는 말이 나온다. 연줄닿고 마음맞는 사람만 요직에 앉힌다는, 일종의 비아냥이다. 역대 정권에서도 대통령의 출신 고교와 지역에 따른 인사가 심각했지만 그저 ‘특정지역(고교) 편중’ 정도였지 코드인사란 말은 들어 본 적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인재풀이 한정된 상황에서 코드인사를 꼭 백안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통령이 되면 정치적으로 임명할 수 있는 자리가 300개 정도라고 한다. 대통령이 명단을 확인하고 인사결재를 하는 3급 이상 중앙부처 공무원은 2000여명, 임명장에 대통령 직인이 찍히는 5급 이상 공무원은 6000∼7000명이라니 직·간접 인사 영향권은 1만명 안팎이다. 전체 공무원의 1%다.3급 이상 공무원이라고 해도 대통령이 몇몇 관심있는 사람을 빼고 능력이나 성향을 일일이 알 수 없을 뿐더러, 부처 장관들이 인사안을 올리면 죽 훑어보는 정도일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임명할 수 있는 300 자리에 누구를 앉히느냐다. 이 직책은 대통령이 직접 아는 인물, 즉 한두 다리 인맥이 아니면 발탁도 쉽지 않다. 당연히 대통령이 가까이서 지켜보아 직접 검증이 가능하거나, 사회적 명망이나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측면을 무시하고 인사 때마다 코드부터 거론되는 세태를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인사 평가에서 직무수행 능력이 코드의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문제다. 대통령의 사시동기든, 민변 출신이든, 부산상고 출신이든, 그게 능력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가시권에 들기까지 능력껏 올라온 사람을 코드로 깎아내리는 건 당치 않다.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라는 주문은 원칙적인 문제일 뿐이다. 생각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른 사람을 두루 기용하면 인사균형에는 맞을지 몰라도 ‘콩가루 정부’가 되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중구난방식 국정운영으로는 핵심 또는 주요 정책을 일사불란하게 밀고 나가기 어려운 탓이다. 능력이라곤 티끌만큼도 없는 사람이 코드만으로 등용됐다면 당연히 비난받을 일이다. 그런데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역사와 국민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 대통령이 능력 없는 사람을 그저 월급만 주려고 앉혀놓으면 금방 들통나게 마련이다. 인사를 제대로 평가하는 방법이 바뀌어야 하지만, 코드인사의 오해를 불식시키려면 인사 대상자가 더 중요하다. 자리를 차지했으면 우선 능력을 발휘해야 하며, 국민이 혈세로 주는 월급값 이상을 해내야 한다. 눈치 빠른 국민은 벌써 다 아는데, 권력 주변의 일부는 앞다퉈 대통령의 역성을 들고 코드인사를 굳이 재입증하려고 아등바등해 보기에 민망하다. 쓸데없는 말로 국민감정 건드리고 비난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코드도 코드 나름이다. 위쪽만 쳐다보지 말고 국민에게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코드인사란 말도 저절로 쑥 들어간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3) 眞人의 四柱가 만들어지기까지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3) 眞人의 四柱가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이유에선가 ‘정감록’은 말해와 양해에 아주 특별한 경사가 일어나리라고 예언한다. 보다 정확히는 ‘무학비결’에 “진사(辰巳)년에 그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오년과 미년엔 즐거움이 크리라.”고 했다. 이미 태종 14년(1414) 경상도 보천 출신의 파계승 김을수가 태종을 위해 조작한 예언서에도 “말해와 양해에 뜻을 이룬다(午未志上)”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따져 보면, 태종이 즉위한 해는 경진(1400)년이나 그때는 정세가 몹시 불안정했다. 왕위를 빼앗다시피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태종 2년 임오년 또는 그 다음해 계미년이 되면 왕권이 비로소 안정됐다고 평가될 만하다. 예언가 김을수는 바로 그 점에 착안해 말해와 양해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뱀이 자라서 용이 돼야 제격 이와 전혀 다른 풀이도 아마 가능할 것이다. 멀리 10세기 초부터 전해오는 한 가지 예언이 있다.‘고경참’에 “뱀해 중에 두 용이 나타날 것이다.”(於巳年中二龍見)라고 했다. 여기 언급된 두 용은 다름 아닌 태봉의 궁예 왕과 고려 태조 왕건으로 해석되는 것이 보통이다.‘용안(龍顔)’이니 ‘용상(龍床)’과 같은 표현에서 보듯 용은 임금을 위해 사용되는 특별한 상징이었다. 그런데 궁예와 왕건이란 두 영웅은 뱀해에 출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뱀해에 즉위하지도 않았다. 이 경우 뱀해에 성인이 등장한다는 예언은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런 상징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어, 다른 어떤 역사적 사실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뱀이 오래 묵으면 언젠가 용(龍)이 된다는 속설이 있다. 아무리 설화라도 모든 뱀이 다 용이 되지는 못한다. 용이 되려다 실패한 뱀을 고대 한국인들은 이무기라 불렀다. 상상의 동물인 이무기는 머리에 뿔이 나 있고, 몸통엔 4개의 발이 있다. 가슴은 붉고 등에는 푸른 무늬가 있다는데 그 옆구리와 배는 부드럽기가 비단 같다 한다. 이무기는 눈썹으로 교미하여 알을 낳는다고도 하는데, 때를 놓쳐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호걸에 비유된다. 뱀이 큰 뜻을 품은 영웅이라면, 용은 이미 그 뜻을 이룬 왕을 가리킨다. 고대로부터 한국에 널리 퍼져 있던 상징의 법칙에 따르면, 영웅은 모름지기 뱀해에 태어나야 했다. 아마 그와 유사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겠지만, 중국에선 큰 인물이 되려면 용띠라야 한다는 관념이 보편적이다.21세기를 맞이하는 서기 2000년은 마침 용해였다. 그 해에 중국에선 아들을 낳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국에서도 물론 용띠는 귀한 대접을 받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용띠보다 뱀띠를 더욱 선호한 흔적이 없지 않다. 용은 맨 처음부터 용이 아니라 뱀이 자라서 돼야 제격이라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왕은 뱀 또는 용해에 등극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1∼2년 뒤인 말해나 양해가 되면 완전히 제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일찍이 태종 때 김을수가 말해나 양해에 뜻을 이룬다고 한 예언이나,‘무학비결’에서 “진사(辰巳)년에 그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오년과 미년엔 즐거움이 크리라.”라고 한 것은 다 그런 한국의 문화적 나이테 위에 쓰인 것이다.17세기 말에 유행하던 제목 미상의 어느 예언서에도 비슷한 구절이 포함돼 있었다.“진년(辰年)과 사년(巳年)에 성인(聖人)이 나와 오년(午年)과 미년(未年)에는 즐거움이 대단하다.” 이미 살핀 것처럼 ‘무학비결’은 조선 말엽에 저술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미 그보다 200∼300년 전부터 그와 비슷한 구절이 각종 예언서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眞人의 四柱 조선 후기엔 이른바 진인(眞人)의 사주가 거론된 적도 있었다. 숙종 23년(1697) 이익화란 사람이 술사(術士) 이영창에게 다가올 세상의 참된 임금인 진인의 사주를 물었다. 그러자 이런 대답을 듣게 됐다.“진인은 기사년(己巳年) 무진월(戊辰月) 기사일(己巳日) 무진시(戊辰時)에 태어났다.” 이때 이영창은 진인의 등극을 도울 사람으로 운부라는 이가 있는데 정묘년에 출생했다고 덧붙였다. 당시 조선사회에 유행한 어느 예언서에 중국 사람으로 토끼해에 태어난 장수가 우리나라에 와서 팔도를 다 밟은 뒤에 진인이 등극한다고 돼 있었기 때문에 이영창의 발언은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문제의 예언서는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필 중국인 장수가 예언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뒤여서 그렇지 않나 짐작되기도 한다. 어쨌든 지금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진인의 사주에 기사와 무진이 번갈아가며 나타난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그의 사주엔 뱀이 자라나 용(龍)이 되는 과정이 두 번씩이나 되풀이됐다. 뱀이 용 되는 사주는 명나라의 숭정황제(崇禎皇帝)가 해당한다. 물론 두 번이나 같은 현상이 목격되지는 않았다. 뱀이 변해 용이 되는 꼴이 한 번만 사주에 나와도 드넓은 중국 천하를 다스릴 천자가 되는 형편인데, 그런 것이 두 번씩이나 연거푸 나온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현세에 이상세계를 건설할 진인 왕에게나 어울리는 사주다. 세상을 뒤바꿀 것으로 기대됐던 진인의 활동에 대해 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다. 진인의 활동은 3단계로 나뉜다는데 처음에는 민간에 숨어 지낸다. 사건 관련자들의 말에 따르면, 진인은 강원도 고성에 사는 용장(勇將) 정학의 집에 머문다 했다. 간혹 운부가 거처하는 옥정암이란 암자에 들르기도 한다. 진인이 정체를 숨기고 지내는 동안 운부는 정학 등에게 명령해 신변보호에 철저를 기한다. 제2단계는 거사를 일으켜 대궐에 쳐들어가는 것이다.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운부는 이미 30여명가량의 승려를 서울 및 각지의 주요 사찰에 파견해 놓았다. 묘정과 일여를 비롯한 승려들이 숙종 23년 3월21일이 되기를 기다려 대궐을 공격할 예정이었다. 강계부사 신건과 상토첨사(上土僉使) 신일 및 여러 무사들도 이 사건에 공모자로 등장했다. 거사자금을 댈 사람으로 김화의 부자 지대호 등도 합세했다. 아울러 함경도의 술사(術士) 주비, 용인의 거사(居士) 조종석, 금성의 강거사 등 여러 명의 예언 전문가들이 관여했다(실록·숙종 23년 1월10일 임술). 마지막 단계는 진인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지만, 이 모든 것은 한낱 미수에 그친 역모사건으로 막을 내렸다. ●진인의 탄생 진인의 사주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주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진인은 세상에 출현했다. 벌써 17세기 전반부터 진인 출생설이 유행했던 것이다. 사주에 앞서 진인이 탄생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희한한 이야기다. 내가 ‘실록’에서 살핀 바로 인조 6년(1628)이 그 방면에선 가장 오래다. 사건은 당시 전라도 남원에 살던 송광유가 밀고한 데서 비롯됐다. 전에 좌랑 벼슬을 지낸 적이 있는 윤운구가 지인인 송광유에게 진인(眞人)이 나왔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윤운구는 조선왕조가 망할 징조라며, 어떤 예언서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하늘이 사람을 내렸으니 그 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라는 대목이었다. 자기 말에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윤운구는 멀리 평안도 창성(昌城)에 내린 우박까지도 들먹였다. 그 우박 모양이 사람 얼굴을 닮았다는 소문도 전했다. 윤운구는 진인의 탄생을 기정사실로 못 박기 위해 천문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의 말이라며, 지금 푸른 구름이 남산을 감싸고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것은 성스러운 왕이 태어날 조짐이었다. 윤운구는 허의란 친구에게 관심의 눈길을 보냈다. 허의는 아명이 남산이라 남산의 푸른 구름과 뭔가 특수한 연관이 있어 보였다. 윤운구 등은 소문으로 들려온 여러 가지 이상한 사건을 이끌어다 허씨 집안에서 왕이 태어날 징조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의 눈에 비친 허의의 관상 또한 특별하긴 했다. 그는 양미간 사이에 콩알만 한 검은 점이 있었다. 마치 부처의 양미간에 있는 백호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허의는 몸집이 비대한 편이라 허리가 뚱뚱했고, 배가 불룩하니 튀어나왔다. 당시만 해도 살찐 사람들을 유복하게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허의의 복서골(伏犀骨·두 눈 사이에 있는 코뼈에서 이마까지 솟은 뼈 부위)이 반듯하게 서 있는 모양을 두고 영락없이 임금의 관상이라는 말이 있었다. 허의뿐만 아니라 그의 외삼촌도 외모가 남달라 귀티가 있었다. 더구나 그런 허의가 얼마 전에 천녀(天女)를 만나 신이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윤운구와 그의 동지들은 허의가 천녀와 낳았다는 아들을 진인으로 간주하고 진인왕으로 믿었다. 그들은 이를테면 역모를 꾀했다. 우선 허의와 그의 외삼촌 임게를 비롯한 여러 임씨들이 포섭됐다. 그들은 전라도 광주와 화순에서 난리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그밖에 이상온과 국사효 등은 담양에서 변을 일으킬 예정이었다. 거기서 가까운 남원에서는 이유가 반란을 주도하기로 했다. 남원의 경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당룡과 부용남 등 평민 이하의 사람들이 살인계(殺人契)를 조직해 놓고 있었는데, 그들도 반란에 합세하기로 했다. 한편 해안지방인 고부와 부안에선 유인창과 유선창 등이 반란에 가담했고, 충청도와 접경인 여산에선 송흥길과 소신생 등이 난리를 일으키기로 했다.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에서도 우전과 두기문 등이 들고 일어서기로 약속됐다. 때가 되면 허의는 진인인 아들과 함께 승려로 구성된 4000∼50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지리산을 거쳐 일단 경상도 진주로 진출해 근거지를 마련할 예정이었다. 윤운구와 전 주부(主簿) 원두추 등은 서울과 경기 지방의 반군을 이끌고 대궐을 공략하되, 만약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 충청, 전라 및 경상도를 확보해 놓고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한다고 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반일 감정을 감안할 때 일본에 원병을 청한다는 계획은 정말 뜻밖이다. 하여간 이 모든 진술은 사건을 조정에 밀고한 송광유의 입에서 나왔다. ●‘역적들’의 자기변명 전라도 양반들이 진인을 내세워 반역을 도모한다는 소식을 접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곧 내병조(內兵曹)에 국청이 설치됐고, 관련자들이 체포돼 엄한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윤운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우선 송광유와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고 잡아뗐다. 죽은 송광유의 아버지와는 교유관계가 있었지만, 정작 송광유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역모를 꾀할 처지가 아니란 것이었다. 송광유 일가는 이미 조정의 버림을 받은 처지였다. 송의 아버지는 광해군 말년 역모사건으로 죽은 허균과 무척 가까웠다. 정확히 말해 송광유의 서매(庶妹)는 유명한 문인이자 오늘날 한글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의 첩이었다. 허균이 역모사건으로 죽게 되자 송광유의 아버지도 전라도 진도에 유배됐다가 사망했다. 윤운구는 태인에 있는 송광유의 본가에 들러 문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송광유는 이웃 고을의 관비(官婢)를 훔쳤다. 그러고는 호랑이가 물어 갔다고 거짓으로 속이려 했으나, 비밀이 탄로됐다. 송광유는 이에 윤운구가 자기의 비밀을 퍼뜨린 것이라 생각해 윤운구를 모함하게 됐다. 이것이 윤운구의 설명이었다. 전 주부 원두추 역시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기 형 원두표가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 송광유를 잠시 사귀었지만 역적모의를 한 적은 없다고 발뺌을 했다. 당시 송광유는 남의 노비를 빼앗으려고 원두표에게 청탁했으나 거절당하자 송광유는 원씨 일가를 증오했다는 것이다. 그 뒤 송광유는 관비를 훔쳤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원두추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 때문에 송광유는 원두추를 해치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허의의 외삼촌 임게 역시 변명했다. 허의에게 특이한 아들이 있다거나, 그 어미가 천녀(天女)라고 하는 말은 억지라는 것이었다. 여러 해 전 허의는 경상도 개령을 지나다 행실이 단정하지 못한 어떤 여인과 동침을 했는데, 그 뒤 그 여인은 걸인이 되어 사방을 떠돌다 벼랑에서 실족해 죽었다. 허의는 그 소문을 듣고 불쌍히 여긴 나머지 시신을 거둬 장례를 치른 적은 있다고 했다. ●인조반정에 대한 불만 국왕 인조는 심문을 담당한 여러 신하들에게 사건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다들 머뭇거리기만 했다. 누구도 사건을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했다. 송광유가 밀고한 내용은 완전히 허구도 아니었지만, 모두 사실로 믿기도 어려웠다. 왕 역시 그 점에 동의했다. 다만 윤운구 등이 무언가 진인에 관한 말을 지어냈고, 새 세상의 도래를 이야기한 점만은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혼란은 인조반정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 점에서 원두추 같은 이가 끼여 있다는 점은 다소 생뚱맞았다. 그의 친형 원두표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 제2등 공신으로 책봉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은 그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양반들이 적지 않았다. 반정 뒤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관해서도 불평들이 많아 이괄 같은 이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조정 대신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진인 사건의 관련자들은 예언과 여러 징조를 빙자해 조정을 원망한 것이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죄는 역모에 해당해, 엄히 처벌돼야 마땅했다. 그러나 원두추처럼 집권층의 핵심과 가까운 인사들이 끼여 있어 함부로 처리하기가 어려웠다. 여러 경로를 통해 타협책이 마련됐다. 이 사건을 확대시키지 말고 최소한의 처벌로 마무리 짓는 것이었다. 만일 진실을 밝히겠다며 관련자들에게 고문 수사를 펼 경우, 조정의 실권자들에게까지도 불똥이 튈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전전긍긍했다. 그렇다고 관련자를 모두 무죄방면하기도 어려웠다. 인조는 이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식견이 어두워 사건의 전모를 다 알 수가 없도다. 경들이 공론에 따라 의논하여 아뢰라.” 꾀 많고 나약한 왕의 발언이었다. 대신들은 요망한 소문을 퍼뜨려 조정을 비방한 혐의가 뚜렷한 몇몇 사람만을 처벌하자고 제안했다. 윤운구, 유인창, 민안 등을 유배형에 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줄이 좋은 원두추의 경우는 딱히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으므로 풀어주자고 했다. 한편 송광유의 진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허의와 임게 등에 대해선 그 처리를 일단 왕의 의사에 맡겼다. 왕은 윤운구 등에 대해선 원안대로 유배를 명했다. 원두추 등 그 밖의 관련자들은 대부분 무죄 방면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왕이 이 사건의 밀고자인 송광유를 풀어주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왕은 송광유의 진술이 대체로 사실에 근거했다고 판단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들은 송광유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헌부와 사간원을 통해 연일 송광유의 처벌을 주장했고, 왕은 마지못해 그 의견을 수용했다(실록·인조 6년 12월18일 갑진). 크게 보아 윤운구 사건은 인조반정에 불만을 품은 양반들이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민간에 퍼져 있던 예언서와 진인출현설을 이용했다. 이 단계에서 상층문화와 하층문화는 혼연일체가 됐다. 민중이 만들어낸 진인은 양반들에 의해 역사의 무대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진인은 출몰을 거듭하더니, 뱀이 용으로 변하는 사주가 만들어졌다. 진인의 사주에는 역사 속에 오래 단련된 한국의 기층문화가 숨쉰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1명의 처녀와 68명의 이혼녀

    1명의 처녀와 68명의 이혼녀

    미용연구가 임형선(林亨善)씨와『이혼연구』로 얼마 전 석사학위(이화여대)를 받은 박상옥(朴商玉)씨는 친구 같은 모녀다. 그런데 이 친구 같은 모녀 사이에도 모녀다운 사연이 있었다는 뒤늦은 소식. 세상의 모든 어머니 얘기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는 일이 없을 것 같다. 다음은 그래서 수소문한 임형선씨의 어머니 노릇 1년의 얘기. 딸의 논문자료 수집 나서, 이혼의 사연을 듣다 보니 『미혼여성에게 누가 이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마구 털어 놓고 싶어 하나요. 보다 못해 나이 많은 내가 대신 나섰던 거죠. 그게 어떻게 소문이 났을까… 』 임형선씨는 딸을 돕던 일을 이렇게 핑계 댄다. 『도왔다고 만도 할 수 없어요. 한여름 내내 이혼한 여성들의 사연을 듣다 보니 이젠 가정불화 문제에는 권위가 된 기분이니까. 가정불화 상담역을 부업으로 하고 싶어졌어요. 딸의 논문치다꺼리 때문에 나 자신에게도 한 가지 자산(資産)이 생겼으니까요. 피장파장이죠』 딸 상옥씨의『이혼연구』는 처음부터 난관투성이였다. 우선 조사방법이「케이스·스터디」였던 탓도 있다. 면담자가 마음을 털어 놓고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으면 정확한 실태파악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대상을 잡는 일조차도 힘들었다. 68년 봄부터 1백여 개의 질문들을 만들고 1백명 쯤의 이혼녀를 찾아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가정법원, 서울시 부녀과를 다녀 보았지만 자료를 얻지 못했다. 사생활에 관한 비밀보장 때문도 있었지만 알고 보니 이런 자료원에도 신통한 자료는 없었다. 자료에 따라서 찾아낸 상대자들은 또 이혼경험 같은 것은 없다고 딱 잡아떼었다. 낙망한 딸을 보고 임형선씨가 모정에 발동을 건 것이 지난해 6월이었다. 좀 알려진 지면 여류(女流)인 것을 이용해서 서울시 부녀과며 다른 자료원을 뒤졌다. 기초자료를 얻은 다음에는 일일이 찾아가서 면담을 청했다. 딸 상옥씨 때보다는 약간 성과가 있었지만 십중팔구는 잡아떼었다. 『궁즉통(궁하면 통한다)이래죠. 거절을 자꾸 당하고 나니까 꾀가 생겨요. 어디 이혼녀가 있다는 소문을 캐서는 그 일가나 친지의 연줄을 잡고 늘어지기 시작했어요』 여심에 새겨진 깊은 상처, 슬픈 얘기에 함께 울기도 차나 식사를 대접하면서 그 연줄들에게 이혼녀들을 소개해 달랬다. 이러는 데는 이혼 사실 자체를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얽혔던 실뭉치가 한번 풀리니까 줄줄이 잘도 풀렸다. 『6, 7월을 줄곧 학교일도 버리고 딸 대신「인터뷰」하는 일에 보냈어요. 둑이 터지면 푸념이 시작되죠. 남편에게 상처받은 얘기들을 모두 합니다. 아주 구체적인 사소한 일을 울면서 들려줘요』 하루에 한 사람 이상은 만날 수가 없었다. 결혼부터 이혼에 이르는 그 많은 곡절을 다 듣는 데는 서너 시간도 모자랐다. 게다가 사연들이 너무 절실하고 극적이었다. 자기 자신의 얘기들이므로 더할 수 없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니 매일같이「슬픈 여인의 인생」한 가지씩을 살았던 셈이에요. 나도 상대방도 같이 실컷 울면서』 울다 울다 보니 골치가 아파서 상비약으로 진정제를 가지고 다녔다. 저녁에 지쳐서 들어오면 딸 상옥씨에게「브리핑」을 한다. 『딸은 이제 겨우 스물 여덟 살이지만 어엿한 사회학도거든요. 내가 감정에 치우쳐서 상대방의 말, 표정을 부실하게 파악하면 큰일 난다고 다짐이 대단했죠』 우선 1백여 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적어 넣고는 답변을 듣는 것이 면담의 순서. 『이상한 것이 설문에 대한 대답과 나중에 풀어놓은 사연이 모순투성이라는 거예요』 설문에 대한 답변에 나타난 것만 보면 하나같이『남편이 나쁘고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푸념에서는『그런데 내가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하면서 미련을 보인다. 면담조사에서는 이런 모순의「캐치」가 가장 중요하다. 이혼요인 첫째는 인텔리 아내의 자존심(自尊心) 그러니까, 『같이 울어주고 진정제를 먹어야 할 만큼 흥분을 해도 면담자의 말을 한 마디도 빼놓으면 안돼요. 그래서 팔이 떨어지도록 속기를 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한여름을 울면서 지내고 나니 가정불화 조정에는 자신이 생겼어요』 이혼 가능성이 많은 부부의 속성을 자기 나름대로 알게 됐다. 첫째,「인텔리」층에 이혼 가능성이 많다는 것. 아내가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가정은 결국 불화한다. 둘째, 싸움이 잦으면 결국 어느 세월에 가서는 이혼한다는 것. 셋째, 아내가 너무 애교 없고 이해심 없을 경우도 이혼 가능성이 많다는 것. 『또 아내를 울리고 결국은 이혼하기 쉬운 지경으로 몰고 가는 남성형도 대강 짐작이 가요』 첫째, 너무「젠틀」한 남성. 『자기도 배알이 있을 텐데 그처럼 지나치게「젠틀」할 때는 딴 속셈이 있는 법』이 보통. 둘째, 남편쪽에 열등의식이 있을 경우. 셋째, 너무 심하게 무뚝뚝할 경우. 68명의 조사대상자가 규탄하는 전(前)남편상(像)은 대개 그렇게 좁혀질 수 있다. 『가정불화 연구라면 우습지만 딸의 이혼연구를 거들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닌가봐요』 임여사가 예림여자고등기술학교를 세운 것이 1956년. 미용사에서 미용실업주가 되기까지 15년간 이미 손님들의 사연을 듣다 보니 아내들의 불행을 수없이 보았다. 『한 남자가 세 여자를 버리는 걸 목격한 일도 있어요. 세 여자가 다 신부화장을 내게 했답니다』 여자에게도 기술이 있으면 불행에서 진창으로 떨어지지는 않겠거니 하는 신념이 늘 있었다. 푼푼이 모은 돈으로 6·25 수복 후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학교를 세웠다. 기술학교니까 예상대로 학생 중에는 불행해진 여인들도 많았다. 한국 여인의 이혼은 아직, 불행한 결혼보다 불행해 『10여 년 동안 드문드문 학생들의 불화상담을 해온 것이 지난번 이혼녀「인터뷰」에 도움이 됐을까요. 68명째의「인터뷰」를 마치고 상옥이에게 보고서를 넘겨주면서 느낀 것은 우리나라에서 이혼은 아직도 불행한 결혼보다 불행하다는 것이었어요』 설문에는 이혼한 사실을 수치로 알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몹시들 숨기는 것이 그 증거다. 젊은층이 더 숨기는데, 재혼에 영향을 미칠까봐서 그런다고 공언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죽어도 총각 결혼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여성도 있다. 『지옥 같은 결혼은 깨뜨릴 용기가 있지만 주위의 눈초리를 견딜 용기까지는 없나 봐요. 불화요인을 철저하게 알았으니까 저 애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죠』 바로 2주일 전 3월 8일 딸 상옥양은 같은 사회학도 김영기씨와 결혼했다. 30년 미용사, 미용업주, 미용교사 노릇을 하느라고 돌보지 못하던 딸이었다.「이혼연구」의 조역(助役)이라는 선물을 준 것이 정말 흐뭇하다고 한다. [ 선데이서울 69년 3/23 제2권 12호 통권 제26호 ]
  • [마니아] 연싸움 동호회

    [마니아] 연싸움 동호회

    ‘꼬리를 흔들며 하늘을 날으는’ 지난 16일 오후 1시30분 인천시 연수구 송도유원지와 가까운 아암도 해양공원 하늘에 연(鳶)싸움이 벌어졌다. 연싸움을 즐기는 동호회원들이 서울에서 10여명, 경기도와 인천에서 20여명 모였다. 그다지 흔치 않은 연싸움 모임끼리 서로 친선을 다지는 시간을 갖자는 데 뜻을 모은 것이다. 서울 뚝섬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앙고 교사 김영주(61·성북구 정릉동) 회원은 “위에서 상대방을 찍어내리거나 아래에서 치고 올라가는 등 승부를 가르는 수십가지 상황이 재미를 더한다.”고 연싸움 자랑을 늘어놓았다. 뚝섬 동호회 말고도 20여명으로 이뤄진 반포 모임이 따로 있다. 휴일이면 뚝섬과 여의도, 반포지구 등 한강변 하늘에 하얗게 떠 있는 연들을 볼 수 있어 연은 아직도 우리에게 친근하다. 전국적으로는 20여개 모임에 600여명이 활동하고 있으며, 대회도 해마다 10여개씩 열리고 있다. 회원들의 연령은 30대에서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특히 뚝섬 동호회의 ‘지존’으로 받들어지는 우상욱(71·청계7가) 회원의 경우 검도로 말하자면 ‘후려치기’ 식의 공격법 등 기술을 개발해 전국대회를 8개나 휩쓸었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다. 회원들이 전통 스포츠라며 뽐내는 것은 연싸움에 숨겨진 아름다운 마음씨 때문이다.‘내기 다툼’이라고 할 스포츠에서는 경쟁에서 이긴 쪽이 상품을 타는데 연싸움은 반대이다. 우리 조상들의 생각은 달랐다. 진 쪽은 이긴 쪽을 위해 멀고 먼 하늘로 길보(吉報)를 전하려 연을 날려 보낸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긴 편이 진 편에게 한턱을 낸다. ●스포츠라 할 수 있을까. 이들은 매주 일요일이면 연싸움을 하기 위해 모여든다. 주로 한강 뚝섬지구로 달려가 점심을 먹어가며 쌓인 얘기도 나눈 뒤 즐기기 시작한다. 회원들은 저마다 골프가방과 ‘따블빽’(군대에서 짐을 넣는 데 쓰는 배낭), 또는 007가방을 두 손에 하나씩 들고 나타났다. 무게가 만만찮은 듯 약간 힘겨운 얼굴이었다. 가볍게 식사를 한 뒤 본격 연싸움에 들어가나 했더니 “야, 연 떨어졌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씨는 “카니발 근처”라고 손짓을 했다. 성진모(60·송파구 방이동·자영업) 회장은 “얼레(나무로 만들어 연실을 감는 데 쓰는 기구)만 해도 1㎏∼1.5㎏이나 된다.”고 설명했다. 회원들이 들고 나온 배낭에는 2∼3개의 얼레가, 다른 가방에는 10∼20개의 방패연들이 들었다. 얼레만 해도 3만원짜리를 시작으로 20만원이나 하는 값비싼 것까지 있다. 여느 동호회가 그런 것처럼 회원들은 좋은 품질의 장비를 갖는 데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 예로부터 흑단 나무로 만든 것을 가장 높게 쳐준다고 입을 모았다. 다른 회원은 “바람이 있고 떨어진 연을 주울 수 있는 장소가 좋다.”면서 “개인전의 경우 두사람씩 차례로 맞붙어 마지막에 남는 선수가 우승하는 녹다운 방식, 단체전의 경우엔 토너먼트로 승부를 가른다.”고 말했다. 성 회장은 “20여년 전 송파구 석촌호수 옆에서 대회를 구경했던 게 연싸움 동호회와의 첫 인연”이라면서 “이 때 떨어진 연을 운좋게 2개 주워 대회에 나가기 시작해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쌓았다.”고 말했다.“어릴 적 고향인 부산에서 자라며 연싸움을 신기하게 쳐다보고는 했는데,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고 환하게 웃었다. 회원들에게 “흔히 놀이로 여기지 스포츠라기에는 뭣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기다릴 필요도 없이 ‘천만에’라는 것이었다. ●연싸움 어떻게 할까. 보통 40∼50m 안팎의 상공에서 승부가 나지만, 바람이 셀 때에는 100m 넘게 날린다고 한다. 연줄을 당기고 방향을 조절하는 데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한지를 해보지 않고는 떠올리지도 못한다고 회원들은 하나같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언뜻 보기엔 싱거운 싸움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회원들이 경기에 쏟아붓는 열의는 대단하다. 싸움판이 벌어지기도 전에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끊어먹기로 결판이 나기 때문에 연실이 얼마나 질긴가에도 달렸다. 하지만 연을 조종하는 ‘비행술’이 더 중요하다. 기본적인 기술은 이렇다. 아래 감아치기, 찍어치기 등을 아우른 전술전략이 대대로 내려오고 있다. (1)마찰력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누가 먼저 상대방의 실을 쓸고 가는가가 대부분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다. 마찰을 주는 방법으로는 실을 감거나 풀어 주면서 빠른 속도로 되감다가 ‘튀김’(서양 스포츠의 스냅 비슷하게 순간적인 힘으로 톡 튀기는 것)을 주는 등 여러 가지가 있다. (2)상대편 연이 바람을 잘 타고 떠서 정지해 있을 때 될 수 있는 한 재빨리 상대편의 연실 위에 자기의 연줄을 올려 건다. 이때 실을 빨리 풀어주면 상대편 연줄을 끊을 수 있다. 이를 ‘실 주기’라고 부른다. (3)상대편의 연이 머리를 돌려서 물러갈 때 밑에서 감아 올리는 작전이 꼽힌다.‘감아 먹기’라고 부른다. (4)연이 서로 얽혀서 약 500m 이상 풀어줬다고 생각되면, 될 수 있는 한 연실이 땅에 닿지 않도록 조금씩 풀어서 조정하면서 상대방을 주시하다가 상대방이 실을 감기 시작하면 빠른 속도로 감아 올려야 한다. (5)상대방이 위에서 찍어 누르면 실을 느슨히 하다가 상대방 연이 바닥에 거의 다다를 때 연을 살며시 위로 올려주면 상대방 연이 바닥을 면하려고 연을 올릴 때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연을 살며시 올리는 시기가 빠르면 상대방의 튀김에 질 우려가 있다. 경기용 연줄로는 명주, 나일론, 게브라(방탄 조끼에 쓰는 재질) 등이 있다. 낚시에 쓰는 실이나 철사는 안된다. 길이는 보통 800m 안팎이다. 연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돈은 5000원에서 1만원이면 충분하다. 가오리연, 이순신 장군이 작전 때 활용한 신호연 등 모양에 따라 종류가 많지만 가로 40㎝, 세로 47.5㎝ 크기의 방패연을 주로 쓴다. 우현택(45) 회원은 “96년 뚝섬에 바람 쐬러 나갔다가 연싸움을 보고 가입했다.”면서 “뜻밖에 관록이 필요한 분야라 나이로 보나 ‘구력’으로 보나 어린 편”이라고 웃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월드이슈] 국가 이미지 바꾸기 사활

    [월드이슈] 국가 이미지 바꾸기 사활

    미국과 중국, 중동 국가 등 세계 각국이 너나 할 것 없이 국가 이미지 제고에 나섰다. 미국과 중동 국가들은 9·11테러 이후 국제사회에서 부정적으로 흐르고 있는 국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최고통치자의 최측근을 총책임자로 임명하는가 하면, 미국내 영향력 있는 홍보회사들을 앞다퉈 고용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공자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세계 제조업의 중심이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정보기술(IT)산업과 세계적인 브랜드 육성 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한번 고정된 국가 이미지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웬만한 경제적·외교적 노력으로는 바꾸기 힘든 ‘무형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 미국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미국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 이후 중동을 비롯한 세계 각 지역에서 국가 이미지 실추 현상이 각종 여론조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자 대외적인 홍보 외교(Public Diplomacy)를 적극 추진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미국인들과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조지 부시 대통령을 좀 봐라.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부시에 대한 신의 복수가 분명하다.” 워싱턴포스트가 25일자에서 전한 이집트의 택시운전사 파루 히켈의 이같은 말이 중동인들의 평균적인 정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라크전 이후 확산되는 중동의 반미·반 부시 정서를 차단하기 위해 부시 대통령은 올해초 2기 정부를 구성하면서 지난 2000년 및 2004년 대통령 선거 당시 선거본부의 홍보를 총괄했던 캐런 휴스를 대외적인 홍보업무를 담당하는 국무부 홍보담당 차관으로 임명했다. 이달 들어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간 휴스 차관은 우선 미국이 ‘긍정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세계에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에 따라 휴스는 세계 각국에서 미국에 대한 여론을 수시로 파악하고 대응까지 할 수 있도록 ‘신속대응팀’을 구성했다고 한다. 휴스는 또 각국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들의 발언도 그녀가 제시하는 ‘발언 요지’와 일치하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휴스 차관은 중동지역을 첫 출장지로 선택해 이번주부터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터키를 순방 중이다. 순방에는 미국과 중동지역 국가의 기자들이 대규모로 수행, 그녀와 미국의 홍보외교에 대한 관심도를 반영했다. 휴스 차관은 26일 아마드 나지프 이집트 총리와 회담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를 보장하려고 노력중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어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정책목표가 잘못 이해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휴스 차관은 이틀간의 카이로 체류 중 이슬람 교육기관 알 아즈하르를 대표하는 수니파 지도자 셰이크 탄타위와 콥틱교 교황인 셰누다 3세 등 종교계 지도자들도 만났다. 그러나 휴스 차관은 수행기자들에게 “중동인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쉽지는 않다.”면서 “우선 몇몇 사람들과 대화의 끈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현실적인 단기 목표치를 제시했다. 휴스 차관에게 최근 들어 새롭게 떨어진 임무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들춰낸 미국 사회의 인종, 빈곤 문제와 미 정부의 무기력한 재난대처 능력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비판적 보도에 대응하는 것이다. 휴스 차관은 일단 대외적으로는 “외국 언론이 미 정부의 노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공세적으로 반응했다. 아울러 대내적으로는 미 정부 기관과 군의 구호 지원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dawn@seoul.co.kr ■ 중국 |베이징 오일만특파원| 중화민족 부흥의 기치를 치켜든 중국이 국가 이미지 제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전세계에 각인된 ‘중국제는 싸구려’란 통념을 벗어던지는 한편 중화민족의 강렬한 이미지를 심기 위함이다. 장기적으로 ‘팍스 시니카(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재편을 실현하기 위한 중국의 야심찬 청사진의 일환이다. 세계적인 브랜드 보유를 위해 세계 유명 브랜드의 구매 전략을 선택했다. 최근 중국의 레노보 그룹이 IBM에서 개인컴퓨터 브랜드를 인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단시일 내 브랜드 인지도와 중국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최근 전세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중국의 ‘기업사냥’과도 맥이 닿는다. 주문자 생산방식(OEM) 위주의 세계 하청 생산기지에 머물지 않고 고부가가치 위주로 자국의 경제구조를 재편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감지된다. 동시에 중국은 자체 디자인과 마케팅 노력으로 ‘토종 브랜드’ 개발에 전력 질주 중이다. 장시간의 노력과 자금이 소요되고 성공도 장담할 수 없지만 ‘중국산은 고가품’이란 확실한 이미지를 심겠다는 자세다. 이를 위해 지난 3월 중국 상무부는 내년까지 집중 육성할 ‘국가 대표 브랜드’로 하이얼 칭다오(淸島)맥주, 전통제약기업인 둥런탕(東仁堂) 등 191개 토종 기업을 선정, 발표했다. 전기·전자가 71개로 가장 많고, 의류 경공업 화공 의료 등 모두 6개 부문에 걸쳐 있다. 토종 브랜드 자동차 수출 지원을 위해 독자 브랜드를 보유한 완성차 및 부품업체 가운데 100사 선정에 착수했다. 중국 정부는 이번에 선정된 중국 브랜드에 대해 내년까지 각종 지원혜택을 제공키로 했다. 중국 브랜드 육성책은 지난 2003년 당 16기 3중전회에서 통과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개선을 위한 결정’에서 비롯됐다. 중국 지도부가 독자 브랜드 육성을 통해 대외교역 성장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중국은 문화 브랜드로 ‘공자(孔子)학원’을 택했다. 중국 문화원의 별칭인 ‘공자학원’은 지난해 말 서울에서 문을 열었다. 프랑스, 이집트, 몰타에 이어 세계 4번째이자 아시아 최초의 개원이다. 목적은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자국 언어를 가르치고 중국 문화를 보급하는 것이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중국 제4세대 지도부는 국력 신장에 걸맞은 ‘중화사상’의 전세계 확산을 원하고 있다. 공자학원을 앞세워 평화적 부상을 강조하는 중국의 외교정책인 ‘화평굴기(和平 起)’의 문화 외교를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짙다. 이를 위해 전세계에 100개의 ‘공자학원’을 설립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공자학원은 현지인에게 자국 문화는 물론 정치 이념과 각종 정책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친중파(親中派)를 육성한다는 전략적 접근법이다. oilman@seoul.co.kr ■ 중동 중동 국가들이 ‘테러리즘’ 내지는 ‘과격주의’를 연상시키는 국가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오일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쿠웨이트와 사우디 아라비아 등 오일달러가 넘쳐나는 일부 중동 국가들은 수년전부터 미국의 홍보(PR)전문회사들과 계약을 맺고 미국 내에서의 자국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해 수백만∼수천만달러를 ‘투자’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한 시리아마저 재정 사정이 넉넉하지 않음에도 불구, 사장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돈독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내 홍보회사를 고용해 국가 이미지 홍보전략에 가세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동 국가들은 그동안 미 PR회사들을 고용, 미 의회에 대한 로비 활동을 강화하고 미국의 지도층 인사들과의 ‘연줄’을 돈독히 하는 데 주력해 왔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중동 국가들의 대미 홍보전략의 우선순위가 국가 이미지 제고로 바뀌었고, 쿠웨이트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대미 홍보를 한층 강화했다. 특히 9·11테러 이후 미국 주도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고 있으며, 테러리즘과 관련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쿠웨이트는 뉴욕의 PR회사인 페퍼컴을 고용해 국가 이미지 제고에 전력하고 있다. 쿠웨이트 정부는 쿠웨이트 출신 감독이 제작한 9·11테러 관련 다큐멘터리의 미국내 홍보를 이 회사에 전담케 했다. 쿠웨이트 정부는 미국과의 좋은 관계를 강조한 이 다큐멘터리의 미국내 상영을 직접 지원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9·11테러 직후인 2002년 한해 동안 대미 홍보전략에만 1500만달러를 쏟아부었다. 사우디는 미 버지니아주에 있는 PR회사인 코르비스 커뮤니케이션즈를 고용해 대미 홍보를 전담시켰다. 코르비스는 사우디가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고 있으며 중동 평화 정책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신문과 라디오 광고로 제작,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시리아의 행보다. 이라크 내 저항세력에 대한 지원 의혹과 이란과의 관계,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 확대 등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울 대로 껄끄러워진 시리아가 미국내 이미지 제고에 뒤늦게 가세했다. 최근 일부 언론들은 시리아가 미국의 PR회사인 뉴브리지 스트레티지스를 고용했다고 보도했다. 주미 시리아대사관은 구체적으로 확정된 것이 없으며 대미 홍보전략에 쓸 예산도 없다며 보도내용을 즉각 부인했다. 하지만 주미 시리아대사가 부시 대통령과 오랜 친분관계가 있는 조 올보 뉴브리지 스트레티지스 사장을 여러 차례 사적으로 만나 조언을 구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시리아 정부가 미국내 부정적 여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다. 미국의 언론감시단체인 미디어와 민주주의센터의 선임연구원 다이앤 파세타는 “사우디 등이 공격적으로 국가 홍보에 나섰지만 효과는 단언하기 어렵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김균미기자 kmkim@seoul.co.kr
  • 업무 뒷전…행사장 기웃

    내년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벌써부터 전국의 일부 자치단체 전·현직 고위공무원들이 ‘출마 러시’를 이뤄 행정공백이 우려된다. 일부는 출마지 기초자치단체에 주소를 옮겨놓고 출퇴근을 하거나 각종행사에 참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습이다. 특히 업무는 뒷전인 채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장만 찾아다니는가 하면 공천을 받으려고 ‘정치권 줄대기’ 행태를 보여 빈축을 사고 있다.●학연·지연·혈연 동원 줄대기 바빠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고위공무원들은 공천권을 쥔 국회의원의 지역구 행사에 일일이 찾아다니며 눈도장을 찍는가하면 학연·지연·혈연을 동원해 정치권 줄대기에 여념이 없다. 전남 모과장은 공천을 받기 위해 민주당 고위관계자와 접촉을 하고 있고, 경북 모간부도 한나라당 유력정치인에게 연줄을 대기 위해 애쓰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나라당 경북도당 관계자는 “최근 이런 저런 연줄을 이용해 줄대기를 시도해 오는 인사들이 부쩍 늘었다.”면서 “일부는 후원의사를 밝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재선을 준비중인 경북지역 모 자치단체 A군수는 B부군수가 행사장을 찾아다니며 얼굴을 알리는 등 선거준비에 매달리고 있다며 경북도에 인사조치를 요구, 부군수를 바꾸는 등 갈등을 빚기도 했다.경기 이천시의 경우 현직시장이 연임제한으로 출마하지 못하는 데다 특정 간부의 출마설이 나오자 이 인사에 대한 줄서기 양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경북도 관계자는 “마음이 이미 콩밭에 가 있는데 업무가 제대로 되겠느냐.”고 꼬집었다.●전북에선 6명이나 사퇴 고위공무원들은 한결같이 “다양하고 풍부한 행정경험을 살리겠다.”면서 기성 정치인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대구시는 김범일 정무부시장이 대구시장 선거에, 곽대훈 달서구청장 권한대행, 이진훈 수성구 부구청장, 이종진 달성 부군수 등의 출마가 예상된다. 경북의 경우 박승호 공무원교육원장이포항시장 출마를 위해 명예퇴직했고, 최윤섭 기획관리실장과 황진홍 환경산림수산국장이 경주시장 출마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광주의 경우 박철현 전 도시공사 사장과 정광훈 전 상수도사업본부장이 북구청장과 남구청장 출마를 선언했다.전북은 공직을 사퇴한 고위공직자만 최수 전 도환경보건국장과 김경선 전 완주부군수 등 6명이나 된다. 강원은 최명희 전 도기획관리실장, 백용덕 전 혁신분권단장, 채용생 전 스포츠지원단장 등이 명예퇴직을 했고 이광준 강원도의회 사무처장은 춘천시장 출마를 위해 퇴직할 것으로 알려졌다. 울산은 류효이 전 기획관리실장이 김해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명예퇴직을 했고, 경남은 김채용 행정부지사가 고향인 의령군수, 최수남 자치행정국장은 남해군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권문용 서울 강남구청장은 서울시장 출마를 검토 중이다.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이용섭 청와대 혁신관리수석에 듣는다

    이용섭 청와대 혁신관리수석에 듣는다

    참여정부는 ‘혁신 중´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틈만 나면 정부 혁신을 강조한다. 청와대에 혁신관리수석을 신설하고, 정부 부처에는 혁신리더 발굴과 혁신기획관 자리를 새로 만들면서 “정부 혁신의 목표는 세계 10위권의 경쟁력을 갖춘 ‘일 잘하는 정부’를 만드는 것”(5월24일 정부혁신세계포럼)이라고 혁신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때로는 장·차관급 고위 공무원들을 모아놓고 “정부혁신이 더디게 진행돼 답답한 느낌을 갖고 있다.”고 다그치기도 한다. 정부혁신이 공무원 사회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지만 혁신에 냉소적인 반응도 적지 않다. 이용섭 혁신관리수석은 17일 “참여정부는 혁신의 가속페달을 5년 내내 늦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수석으로부터 참여정부의 혁신의 방향과 정책, 문제점 해소방안 등을 들어본다. ▶노 대통령은 지난 9일 국무회의에서도 정부혁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언급했는데, 정부 혁신을 하자는 이유가 무엇인가. -국가발전의 핵심전략이고 대한민국의 희망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크게 두가지 점에서 정부혁신이 절실하다. 먼저 지금은 경제주체들이 국가를 선택하는 글로벌 시대다. 개인과 기업들이 자기들에게 유리한 국가를 찾아서 자유롭게 이동하는 국가 쇼핑시대가 열린 것이다. 정부를 혁신해 기업하기 좋고, 살기좋은 나라를 만들어 우리 국민이나 기업들이 국내에 머무르고 외국기업과 자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다. 둘째는 경쟁력의 개념이 바뀌었다. 과거에 우리끼리 경쟁하던 때에는 연고나 인간관계도 중요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기술이나 지식·정보가 중요하다. 지식정보화사회에서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레드오션’에서 벗어나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블루 오션’을 찾아야 한다.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던 ‘규모의 시대’에서 빠른 것이 느린 것을 잡아먹는 ‘속도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정부도 여기에 맞춰 의사결정이 빠르고 창의적이고 유연한 조직으로 바뀌어야 한다. 앞으로 발전하는 국가는 큰 나라, 자원이 많은 나라가 아니고 혁신하는 국가일 것이다. 혁신격차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지난 4월에 혁신관리수석으로 취임하면서 연줄에 의한 청탁문화를 근절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성과는 있는지. -혁신의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 사회에 뿌리박혀 있는 연고주의 문화다. 지연·학연·혈연 등의 연고나 인간관계에 의해 성공할 수 있고 자기 뜻을 이룰 수 있다면 아무도 어렵고 힘든 혁신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연고를 바탕으로 한 청탁문화가 사라지도록 혁신친화적인 실적주의 성과문화를 지속적으로 확산시켜 나가고 있다. 성과보상시스템도 자리잡아가고 있다. 내년부터 고위공무원단제가 시행되고 5급 이하 공무원의 평가가 실적과 능력 위주로 개편되면 연고주의에 의한 청탁문화는 사라질 것으로 믿는다. ▶최근에 노 대통령은 정부 혁신에 이어 지역주의 척결을 위한 정치 혁신을 강조했는데. -정부만 달라져서는 일류 혁신국가가 될 수 없다. 사회 전반, 특히 국민 생활을 규율하고 국가 정책을 입법하는 정치권이 함께 혁신되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그릇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가 혁신되지 않고 흔들리면 정부나 기업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여정부 이후 과거 고질적인 병폐였던 정경유착은 단절되었다. 이제 정치권의 시급한 혁신 과제는 지역주의와의 단절이라고 본다. 능력있고 혁신적인 분들이 지역주의 때문에 선거에서 낙선되고 지역정서의 덕을 입어 당선된 의원들이 국가 전체의 이익이나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입법활동을 하지 않고, 표를 의식해 지역연고에 따라 행동하는 후진적 정치관행이 지속되면 일류 혁신국가는 이룰 수가 없다. 이러한 망국적인 지역주의 폐해를 그대로 두고 정부만 혁신해서는 국가혁신이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문화도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참여정부에서 강조해온 혁신의 성과가 있다면. -짧은 기간에 많은 성과가 있었다. 많은 나라들이 우리의 혁신경험을 벤치마킹하고 있으며 수출되는 사례도 많다. 행정의 생산성과 효율성이 크게 높아지고, 정부가 투명해지고 깨끗해지고 있다. 유전개발 의혹이나 행담도 의혹등의 사건도 따지고 보면 사회시스템이 투명해지면서 노출된 측면도 크다. 시골 저수지가 탁하면 많은 오물이 있어도 보이지 않다가 저수지가 깨끗해지면 조그만 쓰레기까지도 다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본다. 이런 혁신에 힘입어 외부의 평가도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올해 우리나라 국가경쟁력을 지난해 35위에서 29위로 6단계 상승한 것으로 평가했고, 유엔이 지난해 발표한 전자정부 지수는 세계 5위로 전년보다 8단계나 상승했다.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한 부패지수도 낮아지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여전히 혁신을 피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어업에 비유한다면 그동안은 실제 고기 잡는 것보다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좋은 그물을 짜는 데 집중했기 때문에 고기 잡은 양을 갖고 평가하면 성과가 크지 않게 비칠 수도 있다.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혁신 동참이 이뤄지고 있고 성과관리시스템이 정착돼 가는 등 좋은 그물을 만드는 작업이 대부분 마무리됐다. 특히 올해부터 국민들과 직접 접촉하고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지방자치단체나 공기업까지 혁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성과들이 빠르게 나타날 것이다. ▶공무원들은 혁신 피로증을 얘기하고 있고 혁신에 대한 공무원들의 공감대 형성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혁신 진행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고속도로의 터널과 같이 반드시 지나가야 할 과정이다. 초기에는 혁신을 거부하는 문제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혁신에 적극 참여하면서 업무량증가에 따른 혁신피로감 등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해소하기 위해 혁신관리를 초기의 ‘지시·개입형 양적 관리방식’에서 벗어나 ‘자율·지원형 질적 관리방식’으로 바꾸고 있다.‘혁신 따로, 일 따로’가 되지 않도록 혁신이 일반업무에 체화되고 일반업무가 혁신시스템 속에서 이뤄지도록 혁신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보강하고 있다. 앞으로 혁신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혁신장관협의회를 개최해서 즉시 해결해 나갈 것이다. 혁신의 길이 어렵고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정부의 일류 경쟁력 확보는 보람과 가치를 추구하는 공직사회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공직자들이 반드시 이뤄낼 것이다. ▶초대 혁신관리수석으로서 중점을 둬서 할 계획은 무엇인가. -이제 혁신 없이는 더 나은 미래나 경쟁력을 얘기할 수 없다. 혁신은 정치적 이해관계나 지역간 갈등문제 없이 국가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정부혁신이 성공할 수 있도록 혁신적인 공직자들이 우대받는 혁신친화적 환경의 조성과 혁신문화정착에 주력하고 아울러 혁신의 발전을 저해하는 장애물들을 적극 발굴해 없애나갈 것이다. 혁신관리수석으로서 두가지 소망이 있다. 하나는 정부혁신을 국가혁신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께서 노력하신 만큼 ‘혁신대통령’으로 평가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이용섭 수석은이용섭(54) 청와대 혁신관리수석에게 따라붙는 단어는 ‘학다리’다. 전남 함평의 학다리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입지전적이면서 학교 이름이 특이해 어느 틈엔가 붙여진 별명이다. 명문고교와 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 즐비한 재정경제부에서 시골 고등학교·지방대학 출신이란 핸디캡을 실력과 성실만으로 이겨 낸 것이다. 그는 대학 4학년 때인 1973년 행정고시 14회로 공직에 들어와 대부분을 재정경제부(옛 재무부)에서 보낸 ‘세제통’이다. 세금 분야에서 4대 핵심보직으로 꼽히는 국세청장, 관세청장, 재경부 세제실장, 국세심판원장을 모두 맡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그가 처음이고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관료들은 얘기한다. 그래서 실무와 이론에 정통한 최고의 세금전문가로 꼽힌다. 2003년 3월 개혁성향을 인정받아 참여정부 최초의 국세청장으로 발탁되어 인사청문회를 거쳤다. 외부인사로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국세청장에 임명돼 개혁대상이던 국세청을 단기간에 혁신선도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는 평을 듣고 있다. 취임 초기에는 “국세청이 권력기관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는 골프부킹이나 골프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했던 발언이 언론에 보도됐고, 그는 청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실제로 골프를 치지 않았다. 국세청장 시절에 접대비실명제 시행, 현금영수증제 도입, 특별세무조사 폐지, 세금포인트제 시행 등 굵직굵직한 혁신 조치들을 시행해 2년 연속 혁신우수기관으로 선정됐다. 이런 성과들이 혁신관리수석 발탁 배경이라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내년 지방선거에 전남 지사나 광주시장으로 출마하라는 주변 요구에 대해 이 수석은 “지금의 내 바람은 훌륭한 혁신관리수석이 되는 것이다. 정부혁신만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고 말했다. 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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